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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3-1

Bollnow 2024. 3. 13. 07:36

토지 5

 

3 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1장 소식

2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는데 날씨는 몹시 추웠고 서울 거리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외투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르고 등을 구부리며 걷고 있는 행인의 모습도 그러했으나 얼어붙은 길, 엉성하게 늘어선 건물은 살벌했다. 그곳을 양철 단면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내리꽂혔다가는 맴돌아 나오곤 한다. 봄은 아직,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았다.

청량리에서 나온 전차가 멎고 검정색 외투를 입은 명희가 내렸다. 돈암동 행 전차를 갈아타기 위해서다. 한동안 전차를 기다리고 있던 명희는 발길을 돌린다.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전차 종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았을 때 그것은 돈암동 행이었다.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거리에 명희는 서 있었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멍청이 서 있는데 전차는 종을 울리며 종로 4정목을 돌아 창경원 쪽으로 향해 떠났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집에 갈 수 있었을 텐데......'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명희는 늘 이런 식으로 자기 인생도 우회해왔던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종로 입구와 달라서, 동대문 시장을 끼고 있는 4정목에서 5정목에 이르는 길가 점포는 땅에 엎드린 듯 낮은데다가 구건물이 뒤섞이어 초라하고 을시년스러웠다. 게다가 진열된 상품도 별로 없어 휑뎅그렁했다. 유리창 안에 시커멓게 칠을 한 관과 백골의 관이 포개어진 광경이 명희 눈에 띄었다. 삼베 피륙이며 향로 촛대 따위도 눈에 들어왔다. 장의에 소용되는 물품을 파는 장의사 같은 점포였다. 명희는 그 앞을 서둘러 지나쳤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낀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뭘 사겠다는 생각도 아니 했고 살 만한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와글와글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꿈속 같았고 실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사람들은 붕어같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실상 명희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시장을 빠져나왔을 때 '우동'이라 써 붙여놓은 작은 식당이 있었다. 명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난롯가에 남자 두세 명이 불을 쬐고 서 있었다.

"시간 지났어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

"다 팔았어요."

또 말했다. 명희는 몽유병자같이 그곳을 나왔다. 얼마만큼 걸었을 때 또 식당 하나가 나타났다.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지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명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식당 안에는 서너 명의 손님들이 우동을 먹고 있었다. 명희는 구석진 곳에 가서 앉았다. 여자가 말없이 우동 한 그릇과 단무지가 서너 쪽 들어 있는 작은 접시를 갖다놓고 간다. 배가 고팠던 것은 아니었으며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우동을 명희는 꾸역꾸역 먹는다. 식당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 힐끔힐끔 쳐다본다. 아무리 식량이 배급제라 하지만 이런 서민 상대의 식당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명희는 본시의 거리로 돌아갔다. 종로 4정목, 전차 기다리는 곳으로. 그리고 그는 돈암동 행 전차에 올랐다. 전차가 멎었다. 창경원 높은 문이 눈앞에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명희는 뒤늦게 허둥지둥 내린다. 매표구에서 입장권을 산 명희는 마치 빨려 들어가듯 창경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완전히 격리된 세계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 명희는 막연하게 서 있다가 외투 깃을 세우며 벤치에 가서 웅크리고 앉는다. 한줌의 온기 같은 햇볕이 창백한 얼굴에 와서 걸렸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나뭇가지에는 마치 명희의 웅크린 모습과도 같이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명희는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막으며 흐느껴 운다.

"우리 집에 가자. 나하고 살아."

했을 때 여옥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여옥아 나하고 살아."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여옥의 모습은 해골이었다. 명희는 청량리, 여옥의 친정으로 가서 해골이 된 여옥을 보고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재작년 9. 반전 공작 운동을 한다 하여 기독교도들의 검거 선풍이 불었을 때 여옥은 체포되었고 어저께 병보석으로 서울에 왔으니까 만 일 년하고 4개월을 형무소에서 보냈던 것이다. 명희는 그 동안 두 번이나 목포로 내려가서 형무소의 여옥을 만나려고 면회 신청을 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여옥이 왔다는 연락을 아침에 받고 부랴부랴 달려갔을 때 여옥의 올케가 울면서 명희를 맞이하였다. 친정의 양친은 이미 사망하였고 집안도 영락하여 문밖 청량리로 옮겨갔는데 집은 그럭저럭 체면을 유지할 만큼의 규모였다.

"살 것 같지 않아요. 불쌍한 우리 아씨."

여옥의 올케 신씨는 명희 손을 잡으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명희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여옥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명희를 보고 미소했으나 여옥은 일어나 앉질 못했다. 믿을 수 없었다. 명희는 참혹한 광경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원에 입원시켜요."

명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생각도 그랬는데 본인이 한사코 반대했어요. 그리고 함께 오신 최선생님도 반대하셨구요."

"최선생?"

"최상길 씨, 너도 만났지 않아. 여수서."

여옥이 간신히 말했다.

"......?"

"그렇게 고마울 데가, 그분의 힘이 컸어요. 애아버지 혼자 힘으로는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최선생님께서 함께 오셔서 데려다주고 어제 밤차로 내려갔어요."

명희는 겨우 생각이 났다. 통영으로 갈 때 여수서 한배를 탔던 사람, 오빠가 교장으로 있었을 때 같은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했다는 사람,

"뿐이겠어요? 최선생님께서 용한 한의를 목포까지 데려와서 진맥도 하고 약도 지어 가져왔어요. 고모가 나온다는 기별도 그분이 해주셨구요."

여수 갑부의 둘째아들이라 했고 아내의 부정 때문에 좌절했으며 미모의 기생을 후실로 맞이했다든지, 명희는 하나하나, 그 괴로웠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세상에 그런 분이 어디 있겠어요?"

"언니 이제 그만해요. 나 괜찮아요."

여옥은 힘겹게 팔을 내저었다.

"무모한 놈들, 사람을 어찌 이 지경으로 만들었누."

명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여옥의 모습은 명희의 이성을 잃게 했으며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옥아 죽지 마!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명희는 흐느껴 울면서 울부짖었다. 유리창 안의 검정 칠을 한 관과 백골의 관을 보았을 때 명희의 공포감은 여옥만을 생각한 때문은 아니었다. 효자동의 오라비 임명빈도 병중이었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임명빈은 짚불처럼 생명의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여옥이 해골이 되어 돌아왔다면 임명빈은 몸이 짚둥같이 부어서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서의돈과 유인성, 김길상과 선우신이 예비검속령에 의해 수감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작년 128일 일본은 드디어 영미를 상대하여 선전포고를 했고 진주만을 기습했다. 해서 유인성 등, 사상이 불온한 인사들의 수감은 놀라운 일도 예상 밖의 일도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서 임명빈이 제외되고 무풍지대에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병든 몸을 끌고 가서 여러 가지 조사를 했고 상당한 시달림도 받았던 것이다. 겨우겨우 거동하던 임명빈은 그러저러한 일로 이제는 자리에 누운 채 운신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소심한 편이기는 했으나 병세가 극도로 악화한 것은 일신의 보신 때문에 받은 충격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패배감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으로 감옥 속에서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는 명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별 쓸모가 없는 인간이다. 젊은 시절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의지대로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자기 의지대로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명희는 명빈의 말을 막으려 했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과는 다르다. 남에 의해서 내 의지를 굽혔다는 뜻은 아닌 게야. 내가 나를 배반했지. 내 의지에는 능력이 따르지 못했다. 해서 내가 나를 배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오빠. 왜 그리 자학을 하세요? 우리에게는 설자리가 없지 않아요? 자신이 자신을 배반하는, 그건 오빠만의 경우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명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유인성이 서의돈이 환국이 아버지 그들은 자신을 배반하지 않고 가고 있어. 그들은 신념대로 가고 있어. 내 인생은 쓰레기야."

"저는 오빠가 비겁한 사람이 아닌 것을 믿고 있어요."

명빈은 헛웃음을 웃었다.

"비겁하지 않았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내 존재는 무의미한 것이었어. 나는 청년 시절 시인이 되려고 결심했지. 그러나 나는 시인이 못 되었다. 작가가 되려고도 했고 평론가가 되려고 결심도 해보았다. 나중에는 문예부흥을 위해 잡지를 하기로 했지. 그러나 그것은 무참한 실패였다. 왜 그런지 아나? 내가 나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의지에 능력이 따라주지 못한 때문이야.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독립투쟁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어. 내 의지에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단 한 군데 쓸모가 있었다면 일회용 폭탄, 그것이야."

"지금 연세가 몇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야말로 영원한 문청이시군요."

명희는 결국 짜증을 내고 말았다. 임명빈이 말하지 않아도 명희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자신을 바라보듯 명희 역시 명빈과 같은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주어진 여건에 비하여 늘 명빈의 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명희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위로를 하다가 결국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임명빈을 보고 호인이며 순하다 했다. 그것에는 둔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희는 그가 얼마나 예민한지, 얼마나 사소한 일에 상처를 잘 받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어."

명빈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니야, 네 말이 맞다. 나는 제문식이, 서의돈을 늘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다."

"......"

"상처가 나도 쓰윽 닦아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그 얼굴 말이다. 내가 너를 조용하한테 시집보내고 그 덕에 교장질을 하던 시기, 그 기간 동안 나는 무의식 속을 헤맸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병이 시작되었는지 몰라. 명예와 돈의 노예, 아아 나는 진정 그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을 잘라버리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래, 지금도."

"자학하지 마세요. 저 역시 그렇지 않아요? 오빠가 이러심 저는 서 있을 수가 없어요."

하고 그때 명희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해골과 산송장.

'난 정말 서 있을 수가 없다. 여옥이는 어째 그리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여옥아 살아라! 죽지 말고 살아. 나를 위해서도 살아줘.'

집으로 돌아온 명희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보모 염경순에게

"만신창이야."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경순은 놀란 듯 명희를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날 기다리고 있었어?"

"저기,"

머뭇거렸다.

"말해보아."

경순은 눈이 빨개져 있는 명희 얼굴을 보며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만신창이라 한 말도 그랬고, 분명히 울었을 것 같은 얼굴을 보고서,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상해서 그러니?"

"."

"자칫 잘못 되면 초상이 두 곳에서 날 것 같아 내가 좀 울었어."

경순은 또 한 번 놀란다. 초상이 난다는 말보다 그런 말을 내던지듯 하는 명희 태도가 전혀 딴 사람 같았던 것이다.

"재작년에 기독교 교인들이 잡혀갔을 때, 그때 들어갔던 내 친구가 어제 서울로 왔어. 눈동자만 살아 있고 나머지는 죽은 몸이었어."

경순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는 순교자 같았다. 왜 사람은 순교자가 되어야 하지?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야 그건 일본인, 일본의 뜻이다. 일본은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 위에 서 있는 거야."

"원장님,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니?"

경순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은 듯 대답을 못한다. 한동안 침묵이 지나갔다.

"염선생, 결혼하는 거지?"

명희가 말했다.

", 어떻게 아셨어요? 원장님."

"그 동안 얘기가 있었잖아. 그래 그만두는 거야?"

"저기, ."

"유치원에 나오는 걸 반대해서 그러니?"

"그게 아니구요. 시골로 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하긴 뭐, 유치원도 멀잖아 못하게 될 것 같다."

"......"

경순이 돌아갔고 명희는 서랍 속에서 예금통장을 꺼내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도장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도장이?"

여기저기 찾았으나 역시 도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명희는 우두커니 방 한가운데 앉았다. 그새 도장을 어디다 썼는지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으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듯 생각해 낼 수 없었고 여옥의 뼈만 남은 얼굴만 눈앞에 떠올랐다.

"원장님."

홍천댁이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점심은 하셨는지요?"

동대문 시장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꾸역꾸역 먹어댄 우동이 위장 속에 그냥 쌓여 있는 것만 같은데, 새삼스럽게 그것을 먹어댄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세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 점심을 했느냐고 묻는 홍천댁 태도도 좀 엉뚱했다.

"먹었어요."

"어디서 잡수셨습니까?"

"어디서 먹었느냐고?"

명희는 방문을 연 채 서 있는 홍천댁을 바라본다. 의아해하는 눈초리로. 그는 따뜻해 뵈는 푸른색 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늘 굳어있는 것 같았던 홍천댁은 무신경하리만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희의 대답이 없자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이번에는 전에 없이 아주 친근감을 나타내며 말했다.

"좀 속상하는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인데 속이 상하셨어요?"

명희는 집요한 것을 느끼며 홍천댁을 쳐다본다. 여전히 그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랬으니까 이상할 뿐이지, 그러고 보면 홍천댁은 요즘 명랑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남편과의 사이도 다정해진 것 같았다. 그의 남편 차서방은 유치원의 소사였다. 그러니까 부부가 함께 명희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처는 집 뒤편, 유치원을 향해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보다, 홍천댁, 혹시 내 도장 못 보았어요?"

하고 명희가 물었다.

"! ."

하다가

"부엌 선반에 놔두고선 깜박 잊었습니다."

"부엌 선반에? 도장이 어째 부엌 선반에 가 있을꼬?"

"일전에 영월에서 등기 우편이 왔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편배달부가 도장 달라 하기에 내가 찍고는 도장은 깜박 잊고 우편물만 드렸던 거예요."

생각이 났다. 영월에 가 있는 선혜로부터 편지 받았던 일이.

"그게 등기 우편이었어요?"

". 그럼 도장 가져오겠습니다."

홍천댁은 급히 나가서 도장을 가져왔다. 홍천댁이 나간 뒤 명희는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랍까지 열어보았다는 사실이 당돌하고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등기 우편에 도장이 필요한 것은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홍천댁 자신의 도장을 찍어도 되는 일이요, 홍천댁의 도장이 없다면 남편 차서방의 도장을 써도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돈 삼백 원을 찾은 명희는 효자동으로 갔다.

"언니,"

얼어서 강정같이 서걱거리는 빨래를 걷고 있던 오라범댁이 돌아보았다.

"아이그, 날씨가 추운데 웬일이세요? 어서 들어가세요."

"희재 안 들어왔어요?"

희재란 명빈의 막내아들이다.

"좀 있으면 들어올 거예요. 들어가세요."

하다가

"희재는 왜요?"

하고 물었다.

"심부름 시킬 일이 좀 있어서요."

"나 이거 아랫방에 놔두고 들어갈 테니까 고모 먼저 들어가세요. 날씨가 웬 고추 같네."

"오빠는요?"

"항상 그렇지요, . 하지만 오늘은 좀 기분이 나은가 봐요. 거동을 했어요."

수년 동안 시름시름 앓아왔기 때문에 그랬는지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저 담담한 오라범댁의 표정이었다.

"그럼 오빠한테 가보구요."

명희는 사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들어서며 말을 건다.

"늘 그렇지 뭐."

임명빈은 앉아 있었다.

"부기가 좀 빠진 것 같아요."

"빠졌다가 부었다가."

"접때 지은 약은 잡숫고 계시지요?"

"먹는다. 이젠 약 먹는 것도 지겨워."

"상당히 알려진 의원이래요. 의원도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약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한다구요."

"늘 하는 말이지 뭐, 한데 웬일이냐?"

"유치원도 아직 놀고, 친정 오면 안 되나요? 오빤 제가 부담스러운가요?"

"앉아라."

명희는 자리에 앉는다.

"내가 부담스럽다기보다 너가 부담스럽지, 한데 좋은 일로 온 것 같지 않군 그래."

명빈은 명희 얼굴을 쳐다본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언짢은 일이나 없음 그게 다행이지요."

"그래 좋은 일이 있을 리 없지. 간밤에는 꿈을 꾸었다."

"......"

"서의돈의 꿈을 꾸었어."

"......"

"검정 옷을 입고 보따리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나에게 손을 흔들지 않겠어? 깨었다가 다시 잠들면 그 꿈으로 이어지는 거야. 그자가 나보다 먼저 가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이다."

"몸이 허해서 그런 꿈을 꾸시는 거예요."

"글쎄다."

"서선생님은 원래 튼튼하시고, 그런 걱정은 마세요. 오빠도 그렇지요. 희망을 가지셔야 해요. 저보다 나약해서 되겠어요?"

저보다 나약해 되겠느냐, 명희의 그 말은 명빈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였다. 명희로서는 여옥으로부터 받은 충격이 말할 수 없이 컸고 날로 좁혀지고 깊어져가는 고립감, 세상에 단 하나 혈육인 명빈이마저 기대어 설 기둥이기는 커녕 명보전의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지만 명빈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다. 너보다 나약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야. 만신창이가 되어 외딴 바닷가로 쫓기듯 내려갔던 너, 죽으려고 바다에 투신도 했고 시골 코흘리개한테 수예를 가르치며 하루하루 시간을 저미듯 수년간을 보내었던 너, 너는 너 자신에게 이기고 돌아왔다. 그런 너의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우리 식구들은 살 수 있었다. 아이들 공부도 시켰고 시집 장가도 보냈고 무능한 나는 기와공장을 때려 엎으면서도 양복때기 걸치고 하늘 밑에서 거닐고 다녔다. 너무 뻔뻔했지. 낯가죽이 두꺼워도 이만저만? 명희 네가 피 흘릴 적에 이 오래비는 무얼 했나. 물속에서 너를 건져준 어부만큼의 할 짓도 못한 내가 아니더냐? 그러고서 뭣 땜에 병이 났지? 서의돈 유인성도 병이 안 나는데 왜 내가 앓느냐 말이다. 감옥에 있는 그들은 지금 화등잔같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을 건데 뭘 했다고 임명빈은 병명도 없는 병을 앓고 있느냐 말이다. 약이다, 의원이다, 호강에 받혀서 요강에 똥 싼다는 말이 있긴 있지. 허허허어, 허허어.'

"기운 내세요."

"......"

"마음먹기에 달린 거 아니에요? 오빠 병은. 고통스럽고 병이 난다면 어디 성한 사람이 있겠어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주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어요?"

어쩔 수 없이, 명희는 저도 모르게 하는 말이 삐딱했다. 실은 해골같이 된 여옥의 모습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자기 자신을 타이른 말이었지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푸념한 것이 부끄럽구나. 고통스럽다고 병이 난다면 성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맞는 말이야.'

"며칠 전에, 영월에 있는 선혜 언니한테서 편지를 받았어요."

"잘 있다든가?"

", 보기 싫은 꼴 안 보고 듣기 싫은 말 안 듣고, 그게 젤 속 편하대요."

"그럴 게야."

"다만 도피주의자라는 비난의 편지를 받으면 권선생이 몹시 괴로워한다, 그런 말도 씌어 있었어요. 이번에 서의돈 선생님, 그분들 수감된 소식을 듣고 권선생은 밤에 잠을 못 자더래요."

"그랬을 게야."

"권선생 적도, 동지도 다 같이 비난한다는 거예요. 혼자 살려고 도망갔다, 비겁하다, 그러고들 하는 모양이예요."

"원래 말이 많은 판이지."

"이건 얘기가 좀 다르지만요, 오빠도 좀 추슬러서 권선생 계시는 곳에 당분간 내려가 계시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왜?"

명빈은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명희는 쓰게 웃는다.

"도피하시란 얘긴 아니에요. 어쩌면 그런 곳에 가 계시면 몸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 거예요."

"......"

"진작 그런 생각을 왜 못했나, 싶어요. 거기가 싫으시면 지리산으로 가시든가. 환국이 아버님께서 가신다던 절, 있잖아요? 그 절 주지는 오빠하고도 안면이 있다면서요?"

명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눈 가장자리가 꺼무스름했고 얼굴 근육은 극도로 이완되어 모조리 아래로 훑어져 내려온 듯, 나이에 비하여 너무나도 늙은 모습이다. 적이든 고난이든 대결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그 대결 이상의 불행이라는 것을 명희는 불현 듯 깨닫는다. 삶의 의욕을 철저하게 잃어버린 사람, 삶이 의지가 마모되어 없어진 사람, 그것은 시계바늘이 없어진 시계판과도 같은 것이다. 명희는 명빈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을 눈앞에 본다. 가는 시간의 슬픔보다 멈춰진 무의미한 시간이야말로 그것은 삶이 아닌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삶 자체지만 영원한 생명은 이미 나락이 아니겠는가. 명희는 바닷가 그곳 학교에 있던 일본인 젊은 교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허무하여 못 살겠다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고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며 살았는데 밤이 되면 창녀를 찾아 술집에 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 날 그는 출석부로 책상을 치면서

"시간은 공폽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시간과 내가 마주보고 있을 때, 아아 무섭지요. 그럴 때는 도박이라도 해야 하고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심정입니다. 타락한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악마 때문이지요. 사랑이라는 것도 바로 그 시간의 악마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두고도 또 두려고 하지요? 그것도 바로 시간의 악마 때문입니다. 그 악마를 잊고 싶은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임선생!"

명희는 대답 없이 웃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자살은 그들 국민성의 깊은 허무주의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을 바라기보다 끝장을 먼저 내려고 덤빈다. 그들은 어쩌면 구원 같은 건 믿지 않는지 모른다. 지극히 합리적으로, 신도 종교도 그들은 합리적으로 끌어들이지, 신비적으로 귀의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그건 강점이지만 저렇게 골치 아픈 허무주의자도 생기게 마련일 거야.'

그때 명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젊은 일본인 교사가 말한 시간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는 면도 있었다.

명희는 명빈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창경원 벤치에 앉아 흐느껴 울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직은 명희 자신에게 슬픔이나 분노, 절망감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명빈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여옥의 모습, 동대문 시장을 헤매었던 일, 우동을 꾸역꾸역 먹은 일, 창경원에서 울었던 일, 그 반나절이 아주 옛날, 오래 전에 있었던 일같이 회상이 된다. 어떻게 보면 여옥의 존재는 다정한 친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쓰라렸던 기억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의 현장을 끌고 오는 괴로운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옥은 처참한 모습으로 가슴 저리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 와중에서도 명희의 잊고 싶은 과거를, 그림자를 그는 끌고 왔던 것이다. 명희가 여옥을 만나기 위하여 목포를 갔을 때도 그러했다. 목포에 도착하기까지, 아니 도착한 후에도 남쪽 그곳에서 보낸 기억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옥의 존재와 명희가 벗어버린 지난날 허물은 늘 일치된 것으로 명희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창경원에서 흐느껴 울었던 일, 정신없이 시장을 헤매었으며 무의식적으로 우동을 먹은 것도 여옥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실은 여옥이가 나왔어요."

여옥의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조카 희재에게 심부름을 시켜야 했으니 어차피 알게 될 일이며 다소 비딱하게 말을 하여 명빈의 기분이 상했을 것 같기도 해서, 변명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해서 명희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알아듣지도 못했는지 명빈은 물끄러미 명희를 쳐다만 보았다.

"여옥이가 어제 나왔어요, 오빠."

"여옥이가, 나왔다구?"

"."

"어떻게?"

"건강이 나빠졌어요."

"그래도 나왔으니 다행이다."

"아침에 거기 갔다 왔는데 너무 심란해서요. 우리가 도무지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분간이 안돼요. 가슴이 몹시 아팠어요."

"......"

"그런데 오빠, 최상길이라는 사람 아시지요?"

"최상길? 글쎄다."

"전에 음악선생으로 있었다 하던데요? 집에서 와본 일이 있다고 했어요."

"아아, 그 여수의 갑부 아들?"

"맞아요."

"학교에 있은 적이 있지."

"그분이 여옥이를 위해 많이 힘을 썼나 봐요. 어제 서울까지 데려다주고 곧장 내려갔다 하더군요."

"여옥이를 어떻게 알구?"

"여옥이가 여수에 있었거든요. 같은 교인이구, 여옥이하구 이혼한 그 남자 있잖아요? 친구였다지요 아마. 저도 여수에서 그분 만난 적이 있어요."

"고맙군.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일인데 고맙군. 그때 무슨 일로 학교 그만두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군."

그 이유는 명희도 알고 있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그래 여옥이 친정 형편은 어떤가?"

"옹색하지요."

"그래서는 마음 놓고 정양하기도 어렵겠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어려운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청량리로 나갔겠어요? 참 오빠, 오래 앉아 있는데 괜찮겠어요?"

"모처럼 너가 왔는데, 괜찮다. 오늘은 몸이 좀 가벼운 것 같다."

"잘 생각해보세요. 영월이든 지리산이든, 가시겠다면 제가 손을 써놓겠어요."

명희는 일어서려 하면서 말했다.

"생각해보지."

하는데 오라범댁이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언니 나 갈 건데."

"그런 말씀 마세요. 그냥 가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럼 안에 들어가서 하지요."

밥상을 놓은 뒤 오라범댁은 허리를 펴며

"오빠 좀 드시라구 일부러 함께 차려왔어요."

지금껏 오누이가 겸상해서 밥먹은 일이 없어 명희는 당황한다. 전에는 조용하가 살아 있었고, 별문제가 없었을 때는 여러 사람이 초대되어 그 자리에 명빈도 나타났고 함께 식사를 했지만.

"함께 얘기하시면서 좀 권하세요."

오라범댁은 부탁하듯 말했다.

저녁을 먹은 뒤 사랑으로 건너온 조카 희재에게 명희는 약도, 집주소를 적은 쪽지를 주며 말했다.

"지금 가야 해."

"청량리군요."

희재는 쪽지를 펴보며 말했다. 그는 Y전문학교 학생이다.

"찾기 쉬운 집이야."

"설마 집이야 못 찾겠습니까?"

명희는 따로 봉투 하나를 꺼내어주며

"내일 내가 간다고 말해."

"내일 가신다면 고모님이 전해도 될 텐데 그러세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나는 그런 것 내미는 게 서툴러서 말이야."

하는데 명빈이

"아무 말 말고 가라면 가는 게야."

하고 거들었다.

목도리로 얼굴을 감아싸고 명희는 친정을 나왔다. 밖은 어두웠다. 바람은 멎은 듯했으나 기온은 더 떨어진 것 같았다. 골목을 빠져나온 명희는 넓은 길을 한동안 걸어서 더욱더 넓어진 충독부 청사 앞길로 나왔다. 마른 나뭇잎조차 하나 없이 헐벗은 가로수가 가로등 사이에 띄엄띄엄 서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여명과도 같이, 간신히 밝음이 남아 있는 하늘가에 묵시하듯 뻗어 있었다. 명희는 또각또각 언땅에 구둣발 소리를 새기듯 걷는다. 냉기가 입을 통하여 가슴을 내지르며 발끝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시각각이 절망이다. 시시각각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달래야지. 타일러야지. 우리는 이렇게밖에 갈 수 없고 모두가 다 그렇게 갔다. 일이 보배라 했던가? 돌보아주고 보살펴주고, 그래 일이 보배다. 그런데 여옥이는 어째 그리 평화스럽게 웃을 수 있을까?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처참한 그 몰골을 하구서.'

거대한 총독부 청사, 그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을 등 뒤로 하고 걸어 내려온 명희는 서대문 쪽에서 나타난 전차에 올랐다. 불빛은 환했으나 전차 안에는 드문드문 승객들이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앉을 자리는 있었지만 명희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차창 밖 서울의 겨울밤을 내다본다.

'그 몰골을 하구서, 살아 있는 것이 기적만 같은 그 몰골을 하구서 평화스럽고 밝은 웃음이, 이상하다, 이상하다.'

건물에서 기어 나온 불빛이 보도 위에 깔려 있었다. 건물에서 기어 나온 불빛에 따라, 오렌지색 연갈색 진회색 등으로 보도는 얼룩져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빛은 어둠 같았고 어둠은 빛 같았다. 그리곤 골짜기에 등불 하나가 가고 있었다. 명희는 혼돈하면서 흐려져 가는 의식을 곧추세우둣 매달린 손잡이를 얼굴 중심에 놓고 발돋움하며 몸의 균형을 잡아본다. 그래도 눈앞에는 골짜기에 등불 하나가 가고 있었다. 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많지 않았다. 화신백화점 앞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화점의 임자가 친일파든 아니든 간에 조선의 소시민들의 자존심 같은 화신백화점에서 새나오는 불빛은 황황했으나 어떤 적요감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시, 구매력이 감소된 것도 사실이며 그보다 현저히 나타난 것은 물품의 기근이다. 사람들은 어디 어느 상점에서 생필품인 무엇을 팔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곳으로 왕창 몰려갔고 그러고 나면 그 상점은 잠잠해진다.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은 암시장을 찾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맬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인 관공리, 권력 있는 자들은 모든 귀한 물품, 생선이며 버터 치즈에 이르기까지 배급을 받으니 그들만은 전시 밖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암시장에 가면 값이 비싸 그렇지 대개의 것은 다 구할 수 있었다.

'여옥에게 뭘 사다 먹일까?'

내리는 사람에게 떠밀리듯 명희는 손잡이를 놨다. 비틀거리다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건강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구해다 먹이고 싶어.'

퍼덕퍼덕 뛰노는 잉어 생각도 해보고 쇠꼬리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의원의 지시에 따라야겠지만, 명희는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 활기찬 장바닥을 몸 가까이 느낀다. 그러나 그럴수록 여옥은 꺼져드는 등불 같아 명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살 것 같지 않다면서 울던 여옥의 오라범댁과 같이 명희도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평화스런 여옥의 미소마저 이제 생각하니 불길한 느낌이 든다. 떠날 사람의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이나 아닐까 하고.

전차는 종로 3정목에서 멎었다. 몇 사람이 내리고 보도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던 몇 사람이 전차를 향해 걸어온다.

'......?'

젊은 여자와 남자, 남자는 다소 휘청거리며 걷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뭔가 얘기를 하는 듯, 그리고 그들은 전차에 올랐다. 다름 아닌 그들은 양현과 영광이였다. 명희는 긴장이 되어 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명희가 있는 반대쪽 입구 가까이, 나란히 손잡이를 잡고, 그러니까 사선의 위치에서 명희와는 서로 등을 보인 자세로 서 있었다.

'누굴까?'

명희는 몹시 신경이 쓰였다. 저물지는 않았지만 밤에 젊은 남녀가 함께 다닌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희가 양보만 해주었다면 명희 자신이 길렀을 아이, 이상현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돌보아주고 싶었고 사랑했던 아이, 지금은 성인이 되었으나 양현에 대해서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처구니없게도 생각된다. 쓸쓸함, 배신감 같은 것도 있었다. 명희는 마치 뭘 훔치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돌아본다. 양현은 회색과 검정색의 체크무늬 외투를 입고 있었다. 갈색머플러로 양볼을 싸매듯, 머플러를 묶은 매듭 위에 둥근 턱이 얹혀 있는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올리브색 짧은 코트에 검정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관골 가까이에 나 있는, 매우 희미했으나 흉터가 명희 눈에 먼저 들어왔다. 굴곡이 깊은 옆모습, 조각같이 아름다운 콧날, 싱그럽고 보기 좋은 눈썹은 한참 후, 명희는 인식할 수 있었다.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흉터처럼 명희에게는 수용될 수 없는 분위기가 그에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두 남녀는 다같이 우울해 뵀다. 양현이 우울한 것은 집안 어른이 감옥에 수감된 탓이겠으나,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을 것만 같았다. 양현은 한 달 넘게, 하기는 그 동안 방학이었고 진주에 내려가 있기도 했지만 아무튼 명희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일까?'

명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위기감 같은 것도 엄습해 왔다. 양현의 행복과 관계되는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혜화동에서 명희는 내렸다. 보도에 올라와서 뒤돌아보았을 때 뒤따라오던 양현이 그 역시 뒤돌아보고 있었다. 전차에 남은 남자를 보기 위하여. 그러나 남자는 뒷모습만 보인 채 굳은 자세로 서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전차는 떠났다. 길을 질러오면서, 명희 옆을 스쳐가면서도 양현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에 빠져서 명희를 알아보지 못했다. 혜화동 입구로 접어들었다.

"양현아."

양현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주머니!"

"무슨 생각을 하느라 사람도 몰라보고 가니?"

양현은 좀 당황했다.

"어디 갔다 오세요?"

"효자동에."

양현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교장선생님 병환은 좀 어떠신지요."

"늘 그러시지 뭐. 춥지?"

". 날씨 굉장하네요."

"여기 좀 기다려."

명희는 말하고서 군밤을 구워 파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군밤 한 봉지를 안고 왔다.

"너 집에 들렀다 갈 거지?"

". 그보다 저희들은 교장선생님 한번 뵈러 가지도 못하고, 그러잖아도 오빠가 말은 하던데."

"그럴 경황이나 있겠니? 어머님은 좀 어떠시냐?"

"진주 내려가셨어요. 이미 다 각오는 하고 있었으니까요."

"기막히는 세상이다."

"왜들,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

"저 자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얼마 안 남았는데 졸업해야지."

"졸업하면 뭐하겠어요? 앞이 캄캄할 뿐이에요."

일이 년 사이, 양현이 많이 변한 것을 명희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근래에 와서, 집안의 근심이 있기 전에도 양현은 옛날같이 화사하게 웃질 않았다.

집으로 두 사람은 들어갔고 따뜻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양현은 무너지듯 방바닥에 앉았다.

"아아 추워. 얼굴이 남의 얼굴 같아요."

장갑을 벗고 양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싹싹 비빈다. 명희는 외투를 벗어 걸고 물주전자를 풍로 위에 올려놓는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 추위가 풀릴 거야."

그러나 양현에게는 마음의 추위가 더 큰 것 같아 보였다. 얼마 되지 않아 양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찬 손으로 얼굴의 열기를 식히듯 볼을 감싸곤 한다.

"차 마시자. 군밤도 먹구."

명희는 목기에 군밤을 쏟아 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그럼."

전에도 몇 번인가 양현은 명희 집에서 자고 간 일이 있었다. 양현은 외투를 벗고 편안하게 앉았다.

"저녁은 어떻게 했니?"

"먹었어요."

"밖에서?"

"밖에서 먹었어요."

하마터면 그 사람하고 함께 먹었느냐고 물을 뻔했다. 명희는 스스로 놀란다. 그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좀 어이가 없었다.

"저는 왜 생겨났을까요?"

"무슨 소리야?"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사랑을 해서 제가 태어났고, 그러고 그만 아니에요?"

"부모의 책임은 안 졌다 그 말이니?"

"비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왜 생겨났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어요."

"어떤 때 그런 생각을 하니?"

"글쎄요......"

"너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니오. 아무 일도 없어요."

양현은 완강하다 싶으리만큼 강하게 부정했다.

"아주머니, 이 방은 참 따뜻하네요."

"양현이 방은 추워?"

"춥지는 않지만."

양현은 등을 구부리고 무릎 위에 얼굴을 얹는다. 왠지 애처롭고 상처받은 것 같은 그 모습을 명희는 쳐다본다.

'이 아이가 불행한 연애를 하는 거 아닐까?'

"아주머니,"

"."

"저 말이에요, 이런 말 해도 될는지,"

". 무슨 얘긴데?"

"저를 낳아준 사람, 이상현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예기치 않았던 물음이었다. 명희의 표정이 몹시 흔들렸다.

"왜 그걸 묻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

"또 어머니 아버지한테 죄송해서 물어볼 수 없었어요."

"지금은 죄송하지 않다 그 말이니?"

"죄송하지만...... 그래도 알구 싶어요. 그분을 제가 사랑하구 존경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않아요? 다만 모를 뿐이지요."

"나한테 물어보면 알 거라 생각했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언제였는지, 강선혜 아주머니께서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

명희는 궁리하듯 한동안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뭐라 했기에?"

하고 묻는다.

"저한테 하신 말씀은 아니었어요. 아주머니보구 농담하시면서 흘리신 거예요. 애인이라 하셨어요."

명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 너한테서 들으니까 기분이 묘해진다. 내 나이가 몇인지 돌아보게도 되구, 하지만 그건 잘못 전해진 얘기다. 이선생님이 효자동 우리 집엔 자주 들르셨지만 그건 오빠하구 선후배, 아니 일본어 교습생이었으니까 사제 관계라 할까, 자연스런 일이었어. 서의돈 황태수, 그분들과 모두 함께 어울렸던 시절이니까."

"하여간 그분을 아시기는 아시네요."

양현은 고개를 들고 명희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야."

하고는 눈물에 젖은 양현의 얼굴은 외면한다.

"한데도 어째 저에게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일부러 비밀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 할 내 처지도 아니었고 너의 말대로 너의 아버님 어머님께 죄송한 일이며 예의가 아니지 않아?"

"하지만 최양현은 이양현으로 호적이 옮겨졌어요."

"그건 나도 안다. 이선생님을 젤 많이 아시는 분은 바로 너 아버님이시다. 얘기할 필요가 있었다면 그분이 하셨겠지. 그야말로 나는 문외한이거든."

"얘기해주세요."

떼를 쓴다.

"어머님께서 아시면 오리새끼 물로 간다고, 많이 섭섭해 하실 거야."

"이미 오리새끼를 물가로 보내셨어요."

명희와 양현은 우두커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양현이가 생부 이선생 때문에 이러는 거는 아닐 거야. 무언가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뭘까? 아까 그 남자? 양현은 왜 울었을까? 무슨 상처를 받았을까?'

명희는 입술이 타는 것 같아서 비어 있는 찻잔에 물을 부어 마신다. 군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머쓱해져서 명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기는 양현이가 양가의 부모나 형제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양가란 최참판댁과 이부사댁을 가리킨 말이다.

"이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 혼인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의 어머님이 간도로 가실 적에 이선생이 동행한 것은 아버님이신 이동진 선생께서 당시 연해주에 망명해 계셨기 때문에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했고 그 후 조선으로 나온 이선생은 아까 말했듯이 서의돈 황태수 그분들과 어울리어 우리 오빠한테 일본어 강습을 받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말하기가 힘들었던지 명희는 또 물을 마셨다.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의 그분은 한때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셨고 소설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평가도 받으셨는데, 그분이 좌절한 것은 3.1운동 이후가 아니었나 싶어. 가정의 사정, 나라의 형편, 아버님의 큰 존재, 그런 것에 눌리어 갈등하고 방황하고, 원래 혁명가나 행동가라기보다 예술적 기질이 농후한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웠을 거야."

양현은 눈을 떼지 않고 명희를 쳐다보았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하고 그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긴 양현이 너도 이미 성인인데 이해 못할 것도 없겠지. 이선생님하고 나하고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선생님을 생각했던 거야. 어느 날 무턱대고 그분 하숙을 찾아간 일이 있었어. 있을 법이나 한 일이니? 처녀가 남자 하숙을 찾아가다니. 그때 이선생님은 굉장히 화를 내셨어. 생각해보아. 처자 있는 분을, 그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자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기생하고 연애를 했군요. 그래서 제가 생겨나구."

"그렇게 말하지 말어."

"......"

"그렇게 말하지 말어. 여자를 희롱할 그런 분은 아니었어. 날카롭고 냉소적이었지만 문란한 분은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어떨는지...... 그분은 운명적으로 매우 불운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으로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겪어야 했던 일이지만."

명희는 말하면서 최서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갈피가 조금만 달랐더라도 이상현과 최서희는 맺어져야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이상현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을 명희는 쓸쓸하게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선생님의 모든 것을 물론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그분도 이 시대의 희생자라는 점, 그리고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이 기회에 너한테 말해둘 것이 있다. 그분이 다시 만주로 가신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측은 할 수 있지만 결국은 그분만이 아시는 일이며,"

하고 명희는 일단 말을 끊었다. 기생 기화가 아이를 낳은 사실을 알고 두려워한 나머지 떠났다는 말은 차마 할 수도 없었지만 해서도 안 되고, 명희 말대로 그때 심정은 상현이만이 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주에서 이선생은 어떤 스님으로부터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들었다는 거고 나에게 원고 뭉치와 편지가 온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작품은 발표되었고 원고료도 받았지. 그때 이선생은 작품을 발표한다는 의의보다 그 원고료가 양현을 위해 쓰여지기를 바라셨다. 가능한 한 작품은 계속 써서 보내겠다 하셨어. 그것은 양현이 너에게보다 세상 버린 네 어머님에 대한 한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저러한 사정 때문이지만 내게는 소생이 없었고 그래 널 데려오려 했으나 지금 어머니의 너에 대한 사랑이 나보다 더 깊었던 모양이다. 원고는 그 후 또 한 번 왔지만 결국 두절되고 그분의 소식조차 끊어지고 말았다. 원고료는 저금한 채 지금 내가 가지고 있어.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야."

양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무런 감동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분을 사랑하고 계세요?"

마치 기습과도 같이 양현이 물었다. 명희는 몹시 당황했다. 그 물음에 당황했다기보다 그 물음으로 하여 자기 자신이 들여다본 자기감정 때문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대답하기가 난처하군. 그런 일은 좀체 잊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직하게 말해서."

양현은 군밤을 집었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 그 행위는 먹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 성싶었다.

"양현아."

"."

"무슨 생각을 하니?"

"이 생각 저 생각요."

"이선생님 만나고 싶으냐?"

"아아니오."

"?"

"실감할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왜 알고 싶어 했지?"

"그건, 그건, 글쎄요. 저 자신을 비천하게 느꼈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정당한 대답이 아니었다.

"기가 막히는군, 어머니가 들으셨다면 어쩌실까?"

비로소 양현은 생동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안돼요! 어머니가 이런 말 하는 걸 아신다면 큰일 나요. 나 하나 때문에, , 그럴 수는 없어요."

"너 나한테 감추는 것 있지?"

"......"

"말해. 혼자 괴로워하지 말구. 나도 너만 할 때가 있었어. 지내놓고 보니 가슴에 밀어 넣고, 그것 좋은 일 아니다."

양현은 입을 국 다물고 있었다. 여간해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명희는 저 아이한테 저런 면이 있었던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고집스런 모습이었다.

"이성에 관한 일이니?"

"아니오! 아주머니 그렇지 않아요."

순간 양현은 펄쩍 뛰듯 말했다. 이성에 관한 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아까 그 남자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말해봐. 무슨 일 있지?"

"......"

"분명히 너, 무엇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제가 고통 받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

"오늘같이 추운 날, 형무소에 계시는 아버지 생각을 하면 괴롭고 어쩌고, 너무 뻔뻔스런 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괴로운 일이 있긴 있구나."

"......"

"말하고 싶지 않으면, 됐다, 그만두어."

명희는 단념을 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양현의 얼굴에 원망스러운 빛, 쓸쓸하고 외로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아무한테도 말씀 안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얘기하겠어요."

"그건 쉬운 일이지."

"누군가, 위로받고 싶어서 오늘도 나갔는데...... 위로 받지 못했어요. 아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양현은 흐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주머니, 저 집을 나오고 싶어요."

"뭐라 했니?"

믿을 수 없는 듯 명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참아야 한다는 것 알아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래선 안 된다는 것 알아요."

양현은 으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한 것 못 참겠어요? 참을 수 있어요. 가족들 생각하면 참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없어져야 새언니 마음이 편해질 거고, 그러나 어머니 성질에 무사할 수 없을 거고, 저는 어떻게 하면 좋지요? 흐흐흣......"

명희가 다가앉으며 양현의 두 어깨를 흔든다.

"자세히 얘기해보아."

"새언니가, 새언니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다시 말해보아."

"새언니하고 저하고 마, 맞지가 않나 봐요."

", 그랬구나."

명희는 물러나 앉으며 팔짱을 끼었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양현이는 울고 명희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양현이, 가족들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양현이, 의전학생인 양현이, 시샘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기생의 딸인 양현이,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핏줄도 없는 양현이, 그런 그가 장중의 구슬 같은 존재라는 것은 분노를 살 만한 일이 아닌가. 집안의 큰며느리로, 그 역시 귀하게 당당하게 자란 처지고 보면, 덕희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약자인 양현이 주인처럼 행세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아도 일목요연하게 명희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양현의 고통을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의 불화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 때문이겠는데 양현의 고통은 참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덕희의 악의를 견디어내기 힘들어서도 아니며 서희나 환국이를 기만해야 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명희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춘 양현은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구겨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고 보니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그저께는 아버지 면회 가는 날이었어요. 어머니는 올라오시지 못했고, 제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렸는지 아주머니는 모르실 거예요."

양현은 얘기를 계속했다. 내용인즉, 그날 환국이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저 가고 양현은 부지런히 면회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덕희는 재영을 유모에 딸려 친정으로 보내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다 보내더라는 것이다.

"새언니 집은 누가 보구요?"

"양현씨가 봐야지요."

덕희는 식구들이 없을 때는 아가씨 대신 양현씨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덕희는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이 집 식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했을 것이다. 면회를 끝내고 돌아온 환국이는 좀 화가 난 얼굴이었으며 대뜸

"몸이 좀 아프기로 면회를 안 와?"

하며 힐난하더라는 것이다.

"아버님이 양현이는 왜 안 왔느냐 물으시지 않아. 공연히 걱정 끼쳐드리고."

그 말을 할 때 덕희는 돌아서 있더라는 것이다.

"새언니 감정 이해해요. 문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처지예요."

양현은 비로소 명희를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

명희는 몸을 일으켰다.

"양현아, 가만히 있어."

의아해하며 무슨 말이냐, 양현은 눈으로 물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스웨터를 걸치고 밖으로 나온 명희는 담장에 박힌 쪽문을 열었다. 유치원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망루같이 솟아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총 든 감시병이 서 있는 것 같은, 명희는 순간적인 착각에 빠진다. 달이 댕그머니 떠 있었다. 나무의 잔가지들 그림자가 망 모양으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유치원 쪽으로 향해 있는 홍천댁 거처까지 간 명희는

"홍천댁."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방문에 그림자가 흔들리면서

"네 원장님."

하고 홍천댁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기웃이 내다보던 남정네가 자라목같이 문틈에서 얼굴이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홍천댁을 뒤따라 나오면서

"밤에 웬일이십니까?"

굽신거리듯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홍천댁."

"."

"최참판댁에 가서 양현아가씨가 오늘밤 여기서 잔다고, 그렇게 전하고 와요."

"그러지요."

"임자 어서 가라고, 원장님 날씨가 춥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차서방은 아첨하듯 말했다. 쪽문을 열고 되돌아온 명희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놓고 아궁이 속을 들여다본다. 군불을 지핀 불씨가 남아 있었다. 명희는 부삽에 불씨를 꺼내어 담고 그것을 풍로에 부은 뒤 숯을 몇 쪽 올려 불을 피운다. 냄비에 물을 붓고 멸치 한줌을 넣고 풍로에 올려놓는다. 군불솥의 물은 따뜻했다. 명희는 부뚜막에 걸터앉아 밀가루 반죽을 한다. 통영 바닷가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처음에는 하숙을 했으나 나중에는 방을 하나 얻어서 자취를 했던 세월, 그때 명희는 곧잘 수제비를 만들어 먹곤 했다. 여옥이 찾아왔을 때도 수제비를 끓여주곤 했다. 한밤의 바다 울음소리는 무섭고 외로왔다.

"이제 그만 서울로 가아, 여기 이러고 있다간 정신병자 되겠다."

여옥이 한 말이었고 여옥이 왔다는 말을 듣고 인사차 찾아온 엄기섭은

"하지만 씩씩하게 견디시는데요 뭐."

명희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듯 말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했어. 엄선생한테 부탁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명희는 서울에 가 있을지도 모르지."

여옥은 엄기섭을 통해 명희에게 이곳 학교 촉탁교사로 직업을 구해준 것을 후회하며 말했다. 그때 명희는 마음속으로

'서울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죽었을지도 모르지.'

중얼거렸던 것이다. 엄기섭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여옥은 그때 엄기섭의 명희에 대한 감정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찬하와의 후유증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명희는 누구든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데 대하여 공포감을 가지고 있어서 엄기섭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이외의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명희는 끓고 있는 냄비에서 멸치를 건져내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뒤 반죽한 밀가루를 빚어서 뜯어 넣는다.

"여자대학을 나온 여자가 코흘리개 아이들한테 수예나 재봉을 가르치고, 말이나 되니? 진주에만 나가도 여학교 선생은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의지할 곳도 있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여옥은 올 때마다 그런 말을 했었다. 금니박이에 콧수염을 기른 얼굴이 떠올랐다. 어장을 하며 마을에서 밥술이나 먹는다는 사내. 거만하게 나자빠지듯 걷던 사내, 학부형으로서 인사한답시고 찾아와서는, 함께 살고 있으나 마누라하고는 정이 없으니 어장배가 금은 두 척이지만 앞으로 몇 척 더 사서 크게 해볼 요량이라느니, 마치 내 소실로 들어온다며 호강을 시켜주겠다는 투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깨춤 추듯 하던 사내, 명희는 거칠게 반죽한 것을 찢어 넣는다. 왜 그따위 일들이 계기도 없이 생각나는지, 수제비 탓이었는지 모른다. 수제비 두 그릇을 올려놓은 상을 놓고 방문을 열었을 때 양현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아주머니!"

"너 저녁 먹었다는 것 거짓말이지?"

"저기,"

"요즘 밖에서 저녁 먹을 만한 곳이 어디 있니?"

"......"

"자아 먹어. 나도 효자동에서 저녁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배고프다. 이 수제비 시골서 혼자 있을 때 곧잘 끓여먹었어. 어쩌면 이건 한 없이 한 없이 내려앉았던 시절에 익힌, 그래 나한테는 젤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야."

양현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먹는다.

"맛있지?"

", 맛이 있어요."

양현은 인사말이 아닌 듯 정말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명희의 따뜻한 애정에 감사하듯 수굿한 모습이었다.

"저녁 안 먹었지?"

"실은...... 안 먹었어요."

"이 추운 날에, 그러면 거리를 걸어만 다녔어?"

수제비가 올려진 숟가락을 든 채 말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하는 듯 긴장된 얼굴로 양현은 명희를 쳐다본다.

"그 청년은 누구니?"

늦추지 않고 명희가 말했다. 한순간 양현의 몸이 휘청하는 것 같았다.

"보셨어요?"

"그래 전차에서."

"그러고선 어째 모르는 척하셨어요?"

당혹감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것을 역력하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사실 놀라기도 했고."

이번에는 명희 쪽에서 당혹해한다. 수재비를 입에 넣고 씹다가, 또 한 숟가락 입에 떠 넣고 씹다가 양현은

"아주머니도 참, 영광오빠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아주 복잡해요."

"영광 오빠라니?"

"큰오빠 친구거든요."

",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아니에요."

대답은 확실했으나 양현은 고개를 숙였다.

"오빠 친구라 해서 다 오빠라 부르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그러니까 그 오빠 아버님하고 우리 집하고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또 그 오빠를 우리 집에서 돌보아주게 돼 있나 봐요."

"그렇다면 꽤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구나."

양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저는 그 오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작년, 아니 재작년에 평사리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오빠 아버님께서 세상을 버리고 그 유해를 만주서 가져온 영광오빠는 지리산에서 행사를 끝낸 뒤 평사리 집에 들른 거예요. 그때 처음 봤어요."

명희는 담박 알아차린다. 만주서 유해를 가져왔다는 말에서, 양현이 그때 처음 만났다는 말에서 최씨 일가와 그들 부자와의 관계가 심상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최참판댁에서 그 청년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다. 오히려 양현이 쪽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은 겄 같았다.

"큰오빠하고는 동경서 친하게 지냈다 하는데 집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나타난 일이 없었어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예요. 도움을 받는다는 데 대한 굴욕감 때문인가 봐요."

"얼핏 보기에도 개성이 강해 뵈더구나."

"큰오빠가 몹시 아끼는 사람이지요. 동경서 일본 노가다패한테 맞아 죽을 뻔했대요. 그래서 얼굴에 흠집이 나고 다리도 한쪽이 약간 이상해요. 그때 큰오빠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라 하더군요."

양현은 백정의 핏줄이라는 것, 생모 봉순이와 영광의 부친이 한마을에서 자랐다는 것, 지금 악극단의 색소폰 주자이며 유행가 작곡도 한다는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울적하고 괴로워서 그 오빠 만나 좀 울고 싶었어요."

그 어감 속에는 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양현은 명희 앞에서 정직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한테 와서 울어선 안될 일이었니? 어째 섭섭하구나."

"결국 아주머니한테 얘기했잖아요. 울기도 하구."

"그 청년 만나 울려고 했다 하지 않았니?"

"새언니 일이라서 가까운 분들께 얘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오빠는 저와 처지가 비슷하고......"

"......"

"울지도 못했어요. 말해지도 못했어요. 만나기 전에는 흉허물 없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구 이해해 줄 것 같구, 하지만 만나면 벽을 느껴요. 냉철하구, 저에게는 감정을 상당히 많이 절제하는 것 같아요."

'절제를 한다구? 이 애는 모르고 있는 걸까? 절제를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양현이는 그걸 모르고 말하는 걸까?"

"아주 불우하고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들은 다같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 혜화동 모퉁이에서 양장점을 했던 혜숙이와 영광이 동거 생활을 했던 사이라는 것을. 이들은 헤숙이가 환국의 친구 미망인으로, 그리고 재혼을 축하해주었지만 죽었다는 남자가 영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다. 이부자리를 깔고 불을 끄고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같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양현은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춥고 몹시 괴로웠으며 명희가 끓여준 수제비가 따뜻했으며 바람도 없었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걸려 있었다. 대지는 봄을 맞기 위하여 서두르는 것 같았고 까치 소리가 유난히 울려오곤 했다. 덕희는 안방에 재영이랑 함께 있는 기색이었다. 묘하게 집안은 가라앉아서 절간과 같이 고즈넉했다. 양현은 제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숨 돌리듯 신문을 집어 든다. 올해 한해만 죽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한다면 내년 봄에는 졸업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간에 양현은 자연스럽게 최씨네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양현은 자유로운 천지를 꿈꾼 적이 없었지만 하여간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문제는 양현에게 초미의 현실이었다.

'일 년만 참으면 돼. 일 년만 꾸욱 참자.'

양현은 형무소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만나지 못한 기간을 따진다면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만나려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해서 더욱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 그리움 때문에 자기만을 따돌린 덕희의 처사가 그토록 깊이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덕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지나쳤다 싶었는지 요즘 많이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양현이 명희 집에서 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사실 덕희는 전전긍긍했다. 명희가 진상을 알게 되고 어른들이나 남편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여간한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문에는 온통 전쟁에 대한 기사뿐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신문은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었지만 전선이 달라지고 적애국이 달라지면서부터 일종의 히스테리처럼 신문 지면은 요란해진 것이다. 식량 중산, 저축 장려, 국방 헌금, 유기·기타 금속류의 헌납, 지원병 독려와 아울러 동태 상황에 대한 선전, 각종 단체들은 영일 없이 영미를 성토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연일 진충보국과 성전완수를 외쳐대고 있었다. 특히 지식 층, 그 중에서도 글 서서 행세해왔던 문인들 문학 단체들은 남 먼저, 열렬하게 일왕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마치 총 든 놈이 뒤에서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오늘 신문에도 저명한 여류 시인의 시 "전승부"가 실려 있었다.

"괜찮을까?"

양현이 중얼거렸다. 시골로 내려간 강선혜와 그의 남편 권오송을 생각했던 것이다. 실은 양현이는 극작가 권오송을 만난 적은 없었다. 명희로부터 얘기를 들었고 명희 집에서 강선혜를 만나게 되면 합석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상당히 많이 들었다. 해서 자연 그들이 처한 형편이며 동태에 대해서 양현은 아는 바 적지 않았다. 신문에서 이성 잃은 무리들이 마치 야만인과도 같이 원수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또 맹세하는 그 비참한 몰골을 볼 때마다 양현은 낙향한 권오성 부부가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었다.

'영광오빠는 왜 전과 같이 조선에 나오지 않는 걸까? 작은오빠는 영 사람이 달라졌어. 무슨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는 거 아닐까?'

길상이 수감된 후 윤국은 잠시 다녀갔다. 그는 시종 말이 없었고 서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 눈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윤국은 동경에 머무르면서 방학이 되어도 조선에는 좀체 나오지 않았고 나왔을 때도 며칠 묵고는 서둘러 동경으로 가곤 했다. 윤국이 말로는 공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공부 잘 되나?"

윤국이 물었다.

"어떻게 잘 되겠어? 오빤 일본 안 가면 안돼?"

"여기 있으면 뭐하니? 너도 정신 차리고 공부나 열심히 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거다. 내일 지구가 끝나더라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 말 몰라?"

그렇게 얘기하던 윤국이, 양현은 그의 얼굴이 몹시 쓸쓸해 뵌다고 생각했다. 신문을 한 곁에 밀어놓고 양현은 책상에 놔둔 가족사진의 액자를 들여다본다.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작은오빠, 그리고 나.'

환국이 결혼하기 전의 사진이었다. 양현이가 최씨네 호적에서 제적되기 이전의 사진이었다. 양현은 단발머리였고 윤국의 대학생 제복은 어설퍼 보였다.

'어머닌 어떡하고 계실까? 큰오빠 내려갈 때 나도 함께 갈 걸 그랬나?'

내려올 생각 말고 공부하라는 서희의 엄명이 잇은 때문이기도 했으나. 죽은 셈치고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공부하면 뭘 해? 의사가 되면 뭐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거야. 모든 게 피곤하고 괴롭기만 해.'

"양현아가씨."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쉰 듯한 유모의 목소리다.

"?"

"새아씨가 오시랍니다."

"알았어요."

양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기탄없이 말을 해야겠어. 아주머니 말씀이 옳아. 침묵은 상대를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다소 다투는 한이 있어도 솔직하게 말하라......'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을 때 명희는 어둠 속에서 충고를 했다.

양현은 몸을 일으켰다. 덕희 방 앞에서

"새언니, 절 불렀어요?"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덕희 무릎에 앉아 있던 재영이가

"고모!"

하며 일어나려 했으나 덕희는 잡아 앉힌다.

"고모한테 갈 테야."

아이가 버둥거렸다.

"가만있어. 재영인 착하지?"

덕희는 말하며 아이를 놓아주지 않는다.

"고모 공부 안 해?"

", 할 거야."

덕희는 유모를 불렀다.

"재영이 데리고 가요."

유모를 따라 나가다 말고

"고모도 함께 놀자."

하며 양현의 팔을 잡았다.

"고몬 어머니하고 얘기해야 해."

"치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다가 나간다.

어느새 재영이는 네 살이었다.

"앉아요."

썩 기분 좋은 어투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신경의 날이 서 잇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양현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마주앉는다. 방안은 밝고 아늑했다. 최고급의 의걸이며 장롱의 백동 겹첩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양현씨 아직 기분 안 풀린 거예요?"

덕희가 물었다.

한참 만에 양현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하면은,"

"반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새언니 앞에서 언제까지 제 자신을 속여야 하나요?"

"그렇담 여태까지 날 속여 왔다, 그 말이에요?"

덕희는 다소 밀리는 듯한 기색으로 되잡았다.

"말하자면 참는 것도 감정을 속이는 일 아니겠어요?"

"이제는 안 참겠다, 대어들겠다. 집안에 불화가 있어도 상관없다, 그런 뜻인가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 기분 다 풀렸다고 언니한테 거짓말 할 수는 없다, 그런 뜻이지요."

덕희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양단 검정 치마에 법단 흰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아주 화사한 분홍빛 털 재킷을 입은 덕희는 여전히 기품이 있어 보였다. 세상 어려움 없이 자란 그에게는 오로지 양현으로 인하여 겪는 갈등이 가장 큰 시련이었는지 모른다.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피부 빛이 옥같이 희고 아름다워 분홍색 털 재킷이 참 잘 어울렸다.

"나도 내 행동을 생각지는 않아요. 기분 좋은 일도 아니구요."

"......"

"하지만 이건 내 권리예요. 어른들이 계시니까 참아왔을 뿐, 어머님이 안 계신 동안 집안의 기강은 내가 잡아야 하고 각기 푼수에 따라 처신하게 하는 건 내 권한이에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오빠한테 왜 거짓말 하셨어요? 권한이란 당당한 거 아닌가요? 오빠한테 꾸중 듣는 한이 있어도 집이 비어 집 보라 했다고 하시면 됐을 텐데."

"양현씨! 날 훈계하는 거요?"

옥같이 흰 얼굴에 피가 모여들었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 이 집 형편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

"나는 가족 아닌 남의 식구 공경할려고 이 집안에 온 사람 아니에요."

"저도 원해서 이 집에 온 거 아니에요. 날 길러달라고 부탁해서 온 것도 아니구요."

덕희는 기절초풍할 듯 놀란다. 여태까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양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겠어요, 언제까지나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처신할 수는 없어요."

말하는 양현의 얼굴은 긴장돼 있었다. 너무나 급변한 양현의 태도에 크게 충격을 받는 덕희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첫째로 생각하는 집안의 화목이 깨어지면 안 된다는 일이에요. 더욱이 아버님까지 저리 되셨는데...... 집안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그건 저의 의무이며 보은하는 도리이며 저의 사랑이에요."

"도대체 양현씨가 집안일을 걱정한다는 그 자세가 불쾌해요."

"그래도 그건 우리의 현실이에요. 냉정하게, 보다 적합한 방도를 찾는 일말이에요. 전 언니한테 부탁하고 싶어요. 일 년만, 제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설사 부당한 일이 있더라도 언니가 참아주세요. 자연스럽게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제가 이 집을 나갈 수 있게, 그건 언니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해요."

"......"

"졸업만 하게 되면 직업을 핑계 삼아 지방이든 아니면 만주 방면이든 떠나겠어요. 어딜 가든 취직은 쉬울 테니까요."

"그럼 양현씨는 결혼 안할 작정인가요?"

덕희는 양현의 의중을 의심하듯 물었다.

"안할 작정 해본 일 없어요. 하지만 그 문제는 제가 의사로서 직업을 갖는 것만큼 확실한 일은 아니잖아요?"

"이미 혼기는 놓쳤어요."

덕희는 여전히 양현의 결혼에 집착해 있는 것 같았다.

"알아요. 이젠 노처녀지요."

양현은 며칠 동안 심사숙고했다. 명희의 충고도 여러 번 되새겨 보았다. 결론은 이렇게라도, 말하자면 덕희와 합정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어느 구석에서 터져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양현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명희에게 토설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확실히 위험 신호였다.

"양현씨가 그렇게 말 잘하는 걸 여태 난 몰랐네. 의사말고 변호사가 될 걸 그랬어요?"

비꼬기는 했으나 양현의 제안을 수긍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이때

"새아씨 손님 오십니다요."

행랑아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야, 덕희야."

둘째언니 욱희였다.

"언니!"

덕희가 일어서는데 양현도 따라 일어섰다.

"양현씨는 앉아 있어요."

하며 떼미는데 덕희는 의사나 힘이 양현에게는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난 인사하고 가겠어요."

"가만히 있으래두."

그러나 욱희가

"뭘 하니?"

하며 마루를 올라왔고 방문을 열었다. 행랑아범이 장충동마님이라는 칭호 대신 손님이라 한 이유가 있었다. 욱희에게 동행이 있었고 그는 배설자였다.

"안녕하세요?"

양현이 인사를 했다.

"아 참, 오랜간만이군요."

욱희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덕희는

"배선생 어서 오세요."

덕희와 배설자는 친면이 있는 눈치였다.

"언니 전 실례하겠습니다."

덕희는 무슨 까닭인지 아까처럼 강하게 양현을 잡았다.

"너무 아름답다. 얘기론 많이 들었지만. 가지 말고 우리 합석해요."

팔을 잡는 매끄럽고 긴 배설자 손길이 어쩐지 양현은 섬뜩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본능적인 경계심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자기를 평소부터 달가워하지 않는 욱희보다 훨씬 그 거부감은 컸다.

"앉아요."

덕희는 양현을 눌러 앉힌다. 세 여자에게 둘러싸인 양현은 마치 세 마리 늑대에게 둘러싸인 양과도 같은 꼴이었다. 욱희는 여우 목도리를 끌러놓고 두루마기를 벗어놓는다. 벽돌색 아래위가 같은 저고리 치마다. 배설자도 외투를 벗었다. 수박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벽돌색과 수박색, 화사한 방안의 그 빛깔은 모두 죽은 색 같았다. 욱희는 마흔은 안 된 것 같았고 서른네댓? 덕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살결은 약간 누른빛이 돌았다.

"어떻게 두 분이 만났어요?"

덕희가 물었다.

"실은 너희네 집에 오다가 사례비 드리려고 배선생을 찾아갔었지. 너희네 집에 간다 했더니 함께 오시겠다고 해서."

"그래요? 마침 잘 됐네."

뭐가 마침 잘 됐다는 건지 아리송했다.

사례비를 가져갔다는 얘기는 욱희의 딸 민정이가 국민학교 5학년인데 무용을 잘해서 학예회 때 뽑히곤 했는데 보다 더 잘하게 하기 위해 배설자 무용강습소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 기회를 놓칠 배설자인가. 그 능숙한 사교의 솜씨를 발휘하여 욱희의 마음을 잡았고 배설자는 깊이 욱희의 생활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양현의 혼담 정보를 덕희가 얻은 것도 바로 배설자의 선이었던 것이다.

"새언니 제가 차 끓여 오겠어요."

견디다 못해 양현이 일어서며 말했다. 덕희는 양현의 치맛자락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혜산댁이 다 해올 거예요. 걱정 말고 앉으세요."

덕희는 명령하듯 말했고 놓칠세라, 배설자가 재빠르게 말을 걸었다.

"양현씨 거기 앉으세요. 아름다운 여인은 바라만 보아도 즐거워요. 안 그렇습니까? 덕희씨."

덕희는 잠자코 있었다. 욱희는 쓴 것을 마신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 진주 본댁에 갔다 온 일이 한 번 있었어요."

양현은 의아해하며 배설자를 쳐다본다.

"홍성숙 여사하고 함께 갔었어요."

"......"

"진주 양교리댁 아시지요?"

"......"

"그때 양교리댁에서 내려와 쉬었다 가라하며 초청을 해주어서 바람도 쏘일 겸 홍여사랑 함께 진주로 내려갔던 거예요. 양교리댁은 진주서 수대에 걸친 부호고 가문도 좋고 굉장히 명망 있는 집안이라 하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가서 보니 법도가 있고 한편 개명도 했고."

그것은 욱희와 덕희에게 들으라 한 말이었다. 초청은커녕 쫓겨나다시피, 말할 수 없이 필시를 받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냉대 받은 것을 가슴에 접어 넣고 있을 배설자가 침이 마르게 양교리댁을 추켜세우는 것은 욱희나 덕희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여간 천연스럽다. 그것도 배설자가 존재하기 위한 정열일 것이다.

"그댁 사위가 병원 하는 거는 알지요? 지방이 좁으니까."

"압니다."

"그 병원 집에서도 초청을 해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잤어요,"

하다가 배설자가 갑자기 킬킬거리며 웃었다.

"왜 그래?"

욱희가 말했다.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무슨 일인데?"

"자꾸 그리 물으면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더욱 궁금해지는군."

감질이 난다는 욱희의 말투다.

"그 병원 집, 양교리댁 의사사위, 행동거지가 생각나서 말예요."

또 킬킬거리며 웃는다. 욱희는 감이 잡힌 눈치였다.

"사람도 싱겁기는, 그 남자 상당한 꾼인가 봐요."

운을 떼어놓고

"사실 요즘 홍여사는 여러 가지 일로 심기가 불편하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거든요.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예요."

"그래, 술을 좀 하는데."

이번에는 홍성숙을 치고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평판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욱희와 배설자는 죽이 맞는 것 같았다. 중년으로 들어선 욱희는 큰 산과도 같은 친정 배경에다가, 친정 덕을 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가 역시 그런대로 괜찮은 형편이어서 생활은 윤택했고 할 일은 없는 그런, 일상이 무료하고 답답할밖에 없었다. 고약하고 질이 좋잖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유한마담이라 할 수 있고 시간 메꾸기 말상대로는 배설자 같은 인물이야말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었다. 사귄 지도 일 년 남짓, 느물느물해지는 중년이고 보면 배설자가 변죽만 쳐도 욱희에게 울려오게 왜 있었다. 얘기는 진짜 내용을 모르는 덕희는 그냥 웃으면 앉아 있었고 양현은 일어설 궁리만 하고 있었다. 마침 혜산댁이 따끈한 홍차와 요즘 구하기 힘든 생과자 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모두 찻잔을 들었다. 양현이도 할 수 없이 찻잔을 든다.

"그날 그러니까 저녁을 먹은 뒤 홍여사가 조카사위를 상대로 횡설수설하다가 술을 마시게 됐지 뭐예요? 홍여사가 칭얼거리는 아이 때문에 진작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고."

"그래서?"

욱희는 또 감질이 난다는 듯 말했다.

"어어? 어찌 얘기가 이렇게 빠졌지?"

배설자는 웃으면 모두의 얼굴을 둘러본다.

"배선생 버릇 하나 고약하지. 얘길 하다가 꼬리를 감추는 것 말이야. 칼을 뽑아가지고 그냥 집어넣는 법이 어딨어?"

"아이구 이거 참, 별일 아니에요. 홍여사는 술이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구 그 의사사위는 난처해 하구 그러다 보니 늑대 같은 남자 본성 있잖아요?"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럼 당했다는 얘기야?"

"그럴 리가 있나요? 분위기가 그랬다는 얘기지."

욱희와 배설자는 함께 소리를 내어 웃는다. 하여간 가관이다. 덕희는 얼굴을 붉혔다. 양현은 오히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날 허정윤은 배설자의 전화를 받고 밤에 촉석루로 나가지 않았다.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윤은 지금 복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복수이니 천만다행이지, 그날 밤 정윤이 촉석루로 나가서 배설자 유혹에 빠졌더라면 어쩔 뻔했겠는가. 배설자에게 물리어 허정윤에게 끔찍스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며 그야말로 패가망신을 했을 것이다. 양현은 비로소 배설자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왜 섬뜩한 느낌을 받았는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본능적인 경계심을 자아내게 했고 평소 자기를 달가워하지 욱희보다 더한 거부감을 느꼈는지 양현은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배설자가 형편없는 놈팽이로 꾸겨놓은 허정윤을 양현은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효영의원에 정윤이가 조수로 있었을 그때부터 집안사람 모두는 그를 알고 있었으며 박의사가 죽은 뒤, 허정윤은 최씨 일가와 주치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허정윤에 대해서는 처럭만큼의 의심도 일지 않았다. 양현은 다만 배설자가 무섭고 아주 불결해 보였을 뿐이다. 그와 같은 사정을 몰랐던 것이 배설자의 허점이었다. 정도로 가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허점을 드러내게 돼 있는 것이다.

탐탁해하지 않는 양현의 표정을 곁눈질해서 본 배설자는

"어이구,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네. 어짜믄 좋지? 사바의 일을 티끌만치도 모르는 그야말로 청순한 처녀 앞에서."

하며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다.

"상관없어요. 어른이 다 됐는데 뭘 그래? 알거는 다 안다구, 내숭을 떨어 그렇지."

욱희는 내뱉듯 말했다. 양현이 서희의 딸이었다면 감히 사돈댁 따님한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네까짓 게 깨끗한 체 그래 보아야 기생 딸 아니라 하겠느냐, 그런 저의를 품은 모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또 멀잖은 장래의 동업자구, 양현씨 용서하세요."

자기보다 아름다운 양현이, 집안 식구들 모두가 장중의 구슬같이 생각하는 양현이, 덕희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 하찮은 출신의 그로 인하여 자신은 빛을 잃어야 하는가, 왜 아무 핏줄도 닿지 않은 그가 식구들 사랑을 독점하고 있는가, 생각할수록 분하고 얄밉고 눈엣가시만 같은 양현이, 덕희의 감정이 그렇게 치닫고 있기는 했으나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여자였다. 순결성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감정적으로 배설자의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덕희도 양현과 마찬가지로 배설자를 불결하게 느꼈다.

"그 양반 어디 말하는 사람인가? 아무 말 안 해."

"아무 말 안하시는 건 반대 안한다는 뜻이겠지요 뭐."

"하여간 재미없어. 관심이 없는 거겠지."

"그 일에 관심이 없다는 건가요?"

배설자가 물었다.

"아니 얼굴에 잔주름이 모이기 시작한 이 마누라쟁이한테 관심이 없다 그 말이오. 하여가 일을 떠맡기는 했으나 성가시러워."

"그런 말 마세요."

배설자가 펄쩍 뛰듯 말했다.

"아무나가 하는 줄 아세요?"

욱희와 덕희가 배설자를 동시에 쳐다본다.

"위대한 근화방직회사 황태수 사장님 후광이 있어서 그런 일도 맡게 된 거 아니에요?"

"하긴...... 그렇기는 한 모양이더군."

감투란 다름 아닌 애국부인회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지부이긴 하지만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거주하는 구역이어서 배설자의 말대로 아무나가 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정어머니는 그런 걸 시답잖게 생각하지만 이런 시국에는 그게 여간한 울타리가 아니에요. 모두 무풍지대에 살아놔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 그래요. 해 될 것 하나 없으니까 열성족으로 한번 해보세요. 그래야 아버님한테도 이로울 거예요."

"하라는 데야 안할 수 없지."

시무룩하게 말하기는 했으나 시국이 어쩌고, 아버님한테도 이로울 거라느니 하는 바람에 욱희는 좀 긴장했다. 덕희도 마찬가지였다. 수감된 시아버지 생각도 났고, 그러나 배설자는 한결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이 집이 누구네 집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할 수 없어요. 우리 조선 사람들 아무리 억울해도 뾰족한 수 없어요. 풀잎같이 엎드려서 태풍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야 해요. 일본이 진주만을 그같이 처참하게 때려 부수리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인들 했겠어요? 그렇게 생각한 사람 많았지요. 내심 미국하고 일본이 붙을 것을 바라던 사람들도 적잖았고, 한데 현실은 어떻지요? 그야말로 파죽지세 아닙니까? 이제 일본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를 석권하고 있어요. 불과 몇 개월 안 되는데 홍콩이 떨어졌고 마닐라 싱가포르 다 떨어지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시간문제지요. 어쨌거나 백인들이 지배하던 동양에 같은 황색인이 백인을 몰아냈다,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그것만은 속 시원한 일이었을 거예요."

일장 연설이다.

"그건 그렇지."

욱희는 신나하지도 않고 맞장구를 치기는 했다.

"그 동안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어쩔까 하던 사람들도 정체가 급변하게 되니까 모두 발 벗고 나서더군요."

'저건 일본의 끄나풀이다. 틀림없이 스파이일 거야.'

양현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행여 자기 표정 속에 적의가 나타날까 봐서 고개를 숙인다. 배설자는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난국을 지혜롭게 뚫고 나가야지, 이 댁에서는 바깥어른이 그리되셨지만 대신 시어머니께서 매우 현명하게 처신을 하시니까 그나마 이런 정도로 유지가 되는 거지요. 참 슬기로운 어른이세요. 모습도 아름다우시지만. 그런데 앞으로가 문제이긴 해요. 일본을 반대하는, 빛깔이 확실한 사람들은 일단 수감이 되고 했으나 이제는 비협조적인 사람들에게 바람이 불지 않을까요?"

비협조적인 사람들에게 바람이 불지 않겠느냐는 말은 황태수의 두 딸과 양현에게 상당히 자극적으로 들렸다. 특히 양현에게는 그러했다. 맨 먼저 그의 뇌리에 떠오른 사람은 권오송 부부였다. 권오송 부부와 배설자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양현이었지만 이들이 찾아오기 전에도 공교롭게 신문을 보면서 권오송 부부를 생각했고 영광을 생각했으며 길상과 환국이 윤국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을 한 순서는 가까운 사람의 순이 아니었으며 어떤 위험도라 할까, 그것에 따라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니까 그날 밤, 명희 집에서 자던 날 밤 자리에 든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명희 역시 잠을 못 자고 다시 이들은 어둠 속에서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때 명희 말이 양현에게는 너무 강렬했다. 그것은 목포감옥에서 풀려난 여옥의 얘기였다.

"사람이 어찌 그 지경까지 될 수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어. 하나님께서 목숨을 주시고서 어찌 그 지경 되도록 내버려두시는 지 납득이 안 돼. 산다는 것이 너무나 참혹하다."

그리고 또 명희는 영월에 가 있는 권오송 부부에 대해서도 몹시 걱정을 했다. 여옥의 출옥이나 길상의 수감, 그리고 권오송이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예상 같은 것은 모두 한 고리에 묶여 있는 일들이며 일본에 의한 감옥이 강렬하게 인식되고 그들의 운명이 그곳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공통점, 송장처럼 되어서 나오거나 그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고 그곳으로 끌리어갈지도 모르는 그들의 운명이야말로 일본의 손아귀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 일본인들은 일본을 신국이라 하고 왕을 현인신이라 하며 부사산을 지구의 정신이라 했는데 그러면 신은 악인가, 신은 모든 것을 탐내는 욕망의 덩어린가, 신은 목숨들을 참혹하게 베어 죽이는 잔혹성 그 자체인가? 양현이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협조라면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인가요."

덕희가 물었다.

"그야 뭐 그것에 해당되는 일이 한두 가지겠어요? 나라가 정하고 나라에서 요구하는 일에 열심히 아니면 그게 다 비협조겠지요. 그러나 특히 지식인들 예술가들의 방관적 태도를 중하게 보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문학이든 학문이든 무용이든 뭐 회화 음악 연극 그 모든 것은 싸우는 병사, 생산하는 노동자 그들을 고무하는 것이 되어야 밥값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위도식, 나아가서는 그것도 항일로 보는 거지요. 전쟁 수행의 걸림돌로 본다 그 말이에요."

"하지만 요즘 신문을 보면 학자들 예술가들 모두 굉장히 협조하는 것 같던데? 알 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궐기하고 나서지 않았어요?"

욱희의 말이었다.

"그럼요. 인간이란 끝없이 약한 거예요. 하지만 살기 위해선 끝없이 질긴 거예요."

배설자는 한순간 냉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더러는 시골로 도피해 간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에 대해서는 당국도 벼르고 있겠지만 협력하고 나선 사람들이 더한층 미워들 하고 있지요."

양현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총독부에서 그러는 거는 알 만하지만 협조하는 사람들은 뭣 땜에 그럴까?"

욱희 말에 배설자 얼굴에는 또 한 번 냉소가 지나갔다.

"너만 청풍당석에 앉아 있겠느냐? 그게 인간 심리예요. 못생긴 사람은 미인을 보면 증오하고 병신은 성한 사람을 증오하고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증오한다기보다 부러워하는 거지."

"부러움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예요. 힘이 없을 때는 부러워하고 힘이 있고 무리를 지을 때는 증오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부수고 뭉개려 드는 거예요."

"세상 무섭네."

"새삼스럽게 무섭긴요. 언제나 그래 오지 않았든가요? 그게 사람의 본성인데."

", 그야 그렇지만 다 그런 거는 아니지 않아요?"

"하이야 뭐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지만, 거기 있지 말고 내려와서 우리랑 함께 손에 피 묻히자는 사람도 있을 거고 지난날의 원한 때문에 도리어 밀어내어 일본 손에 의해 처리되기를 바라는 심리, 또 하나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무리가 많아야지, 만일에 정세가 바뀌게 되면 손 더럽힌 사람들 수효가 많을수록 좋고 심판하는 깨끗한 손이 적을수록 좋고, 그게 사회심리 아니겠어요? 친일하는 사람이나 반일하는 사람, 방관하는 사람, 그들도 각기 개인에 따라 사정은 다르지요. 친일도 열광하는 사람, 열광하는 척하는 사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그게 어찌 다 일색이라 할 수 있겠어요? 하여튼 지금은 비상시국 아니에요? 방관자나 비협조자를 그냥 놔둘 여유가 없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어떤 형식으로든 바람은 불거예요."

스스로 달변에 취하여 배설자의 얼굴 근육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안에는 무시무시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사람의 마음을 전율하게 하는 협박이었다. 일본 편에서 얘기하는가 하면 조선민족 편에서 얘기하는 듯도 했고 알쏭알쏭, 두 가지 색깔로 현란하고 그로테스크한 피륙을 짜내듯, 배설자의 변설은 순풍에 돛 단 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검거하기도 하겠지만 징용을 뽑아간다든지 그밖에도 합법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지금 예술계에서도 전적인 개편이 있었고 국민문학 국민연극 등 전환을 부르짖고 있잖아요? 그게 다 정비 작업의 전초 아니겠어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새로운 잡지들이 나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까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피 한 방울까지 성전을 위해 바쳐라, 그렇게 떠들라는 거지 뭐겠어요?"

"배선생님은 어, 어찌 그리 꿰뚫고 있어요?"

말 잘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욱희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하며 말했다.

"제 자신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으니까요. 그 방면에 대해선 예민해질 수밖에 없잖겠어요?"

"하긴... 그런데 참 모레 글핀가? 최승희 무용발표회가 있지요? 배선생도 갈 거지요? 제자인데 물론 가겠지만."

욱희는 가까스로 화제를 돌렸다.

"당연히 가야지요. 만사 제쳐놓고 가야 해요. 선생님 만나뵙기도 하구요."

쇠가죽같이 질긴 심장이지만 그러나 배설자 얼굴에서 동요의 빛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 얘기를 하니까 얼핏 생각이 드는 데요. 무용을 총후보국이라는 그 기사가 나온 같은 날짜의 신문인데요, 박춘금씨 질문에 대하여 도조 수상이 답변하기를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하여 실시 여하를 연구중이라, 그랬어요. 앞으로 조선 청년들도 모조리 전쟁에 나가는 거 아닐까요?"

덕희의 말이었다.

"그건 이미 예상된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연구 중이라 한 말은 곧 실시하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점심을 함께 먹고 욱희와 배설자는 떠났다. 그들을 보내고 양현이 제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덕희가 드물게 양현을 따라 양현의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위기의식은 같았고 불안도 같은 것이었다.

"그 여자 무섭지요?"

덕희가 입을 열었다.

"무서워요."

양현이 대답했다.

"우리 집을 탐지하러 온 것 아닐까요?"

"설마"

"경계를 해야 할까 봐요. 언니 집에서 몇 번인가 만났지만 그땐 그걸 못 느꼈는데 앞으론 경계를 해야겠어요."

"가까이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섬뜩해요."

"품위도 없고 천해요."

하다가 덕희는

"징병제도가 실시되면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요?"

"......"

"재영 아버지도 그렇고 동경에 계시는 도련님도 그렇고."

"나이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일본인들은 삼십대들도 많이 나간다지 않아요? 사십대 초반도 나간다 하구, 정말 무서워 죽겠네."

"그렇게 되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 모두 죽는 거지요 뭐, 누가 살아남겠어요?"

서로 멀거니 쳐다본다. 그리고 두 여자는 동시에 외로움을 느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느낀다.

"정말 친일 안할 수 없네요. 그지요. 아가씨."

"..."

"실은 이번에 재영 아버지가 진주로 내려간 것도 국방헌금 때문인가 봐요."

"국방헌금요?"

"확실하게 얘긴 안했지만 어머님께서 그 일 때문에 의논하시려고 내려오라 하신 것 같아요."

"내라고 강요한대요?"

"강요하나마나 날이면 날마다 신문에서 떠드는 게 그 얘기 아니에요? 우리 친정에서도 이미 수월찮은 금액을 내놓은 모양이에요, 우리 집도 상당한 액수가 나가야 할 거예요. 아버님도 그렇고 재산의 규모를 보더라도, 정말 돈으로나마 언짢은 일들이 무마됐으면 좋으련만..."

"새언니, 우리 각오는 해야겠지만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해요. 악이 언제까지 유지가 되겠어요?"

"그래요. 일본이 망하기를 빌 수밖에 없어요. 신명을 믿을 밖에요. 하도 무서운 얘기들이 많아서, 누가 그러던데 전선에 처녀애들을 막 실어 나른다 하잖아요? 아가씨도 명념해두세요. 의사라고 전선에 끌려 나갈지 모르니까요. 졸업 전에 약혼이라도 해두어야."

그 말은 자신을 생각해서라기보다 양현을 염려하여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뒤 양현은 명희한테 내려갔다. 명희는 전과는 영 다른 표정으로 양현을 맞이했다. 상당히 문제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양현이 역시 그날 밤과는 사뭇 달라진 얼굴이었다.

"청량리의 그 아주머니는 좀 어떠세요?"

"글쎄다. 며칠이나 지탱할까 싶었는데 아주 조금이지만 좋아지는 것 같다."

"정말 다행이에요. 아주머니, 제발 좋아지셔야지요."

"가느다란 희망은 보이는데 뉘 알겠니? 꺼지기 전의 밝아지는 촛불 같은 건지......"

"하필 안 좋은 편으로 생각하세요?"

"너무 험악해서 생각이 자꾸 불길한 쪽으로만 가는구나. 양현아."

"."

"넌 의학을 공부했으니까 묻는 말인데 생명에 기적이 있니? 없는 거야?"

"제가 뭘 알겠어요. 학생이고 경험이 있어야지요. 하지만 기적은 있을 것 같아요. 있을 거예요."

"그래 있을 거다."

"그 아주머니, 너무 가여워요. 일본은 악마의 섬이에요. 물속에 가라앉아 버렸음 좋겠어요."

"가엾지, 가여워, 하지만 여옥이만 가엾겠니? 우리 모두가 다 가엾다."

명희 눈에는 짙은 연민의 빛이 돌았다. 여옥만을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유심히 양현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디 거창한 환갑잔치나 화려한 결혼식 같은 곳에라도 가보고 싶다. 우울하고 요즘 같아서는."

"한겨울에 잔치요?"

"날씬 춥지만 이내 봄은 올 거야. 한데 오늘밤도 여기 잘려고 내려왔니?"

"아니에요. 갈 거예요."

"이제는 졸업반으로 올라갈 건데 공부는 안하고 이렇게 마실이나 다녀서 되겠니?"

농치듯 말했으나 명희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공부는 하고 있어요. 그보다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요."

"무슨?"

"낮에 이상한 여자 손님이 왔다 갔어요."

"이상한 여자 손님이라면...... 양현이 혼담 가져왔어?"

"아주머니도 참, 아니에요!"

"그럼?"

"그 여자가 와서 막 겁주는 얘기만 하고 갔지 뭐예요?"

"......"

"무슨 무용을 한다든지, 아주 기분 나쁜 사람이었어요."

"아아"

"아주머니 아세요?"

양현이는 놀란다.

"그 여자 배설자라 하든?"

"네 맞아요! 배설자라 했어요."

"그 여자가? 너희 집엔 뭣하러 왔을까?"

얼굴을 찌푸린다.

"사돈댁의, 새언니 둘째언니 되시는 분."

"황욱희 말이냐?"

". 그분하고 함께 왔어요. 그 댁 따님의 무용선생이라 하든데."

"안 가는 곳이 없구나. 서울 장안이 좁겠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아세요?"

양현은 몹시 궁금해 하며 물었다.

"전에 우리 유치원 보모들한테 자진해서 무용 강습을 한 일이 있었고 선혜 언니하고도 잘 아는 사이였다는데 몹쓸 짓을 하고 지금은 앙숙인가 부더라. 아주 질이 좋잖은 여자야."

"그랬군요. 역시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니?"

"앞으로 비협조적인 사람들한테 큰바람이 불거라 했어요. 그 말 땜에 걱정이 되고, 알고 계시는가 싶기도 해서요."

"비협조적인 사람? 그건 무슨 뜻이니?"

"일본에 대해서 말예요. 선혜 아주머니 권오송 그분들처럼 시골로 도피한 사람들을 두고 그랬을 거예요."

"그 여자가?"

긴장한다.

"."

"권오송 부처에 대해서 얘기하더란 말이니?"

"이름은 들먹이지 않았어요."

"알 만하다."

"뿐만 아니예요. 진주가지 가서 어머니를 찾아갔다지 뭐예요."

"거긴 또 왜?"

명희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건, 그건요 진주 양교리댁 처제라든가요? 성악가라는데 그 사람 따라서 갔다지 뭐예요."

"하여간 대단한 여자다."

명희는 양현을 상대하여 홍성숙의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양현이 아니라도 홍성숙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양현이 역시 혼담 때문에 왔다는 얘기는 하기가 싫었다. 수치심도 있었지만 결혼에 대해서 저항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여간 좋은 여자는 아니니까 멀리하는 게 좋을 거다."

"새언니하고도 그런 얘기했어요. 경계해야 한다고."

명희는 웃었다.

"어느 분의 며느리 딸이라구, 어련하겠니?"

"그보다 아주머니 권오송 씨 어찌 될까요?"

"글세...... 그 여자 빈말할 건 아닐 거야. 권선생도 사태를 주시하고 계실 거고 각오도 돼 있겠지. 그 양반 서울 계셨을 때도 여간 어려운 입장이 아니었거든. 누명도 썼고 시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같은 시대야말로 배운 것이 한탄스럽지. 배운 것이 무거운 짐이 되는 세상이다."

"우리 오빠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요."

"양현아."

"."

"넌 아버지를 사랑하니?"

새삼스럽게 묻는다.

"그럼요. 아버지가 그리워요."

"그래? 그리워..."

양현은 다른 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는 집에 있니?"

나가려는 양현에게 명희가 물었다.

"진주에 내려갔어요."

"어제쯤 오는데?"

"낼모레쯤 오겠지요."

"오거든 나한테 한번 들르라고 전해주겠니?"

"."

양현이 가고 난 뒤 명희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감정적으론 양현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구나.'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씨 일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명희는 일단 환국이를 불러서 전하는 것이 순서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명희는 낮에 효자동에 다녀왔다. 오라는 기별을 받고 갔던 것이다. 명빈은 약간 흥분돼 있는 것 같았다.

"어제 남천택이 다녀갔다."

"남천택이 누구예요. 오빠."

"너 모르니?"

"몰라요."

"...... 그런가? 나한테 후배 격인데 천재지. 미친 놈으로도 보이고,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박식이지."

"그런데 그분 얘기는 어째 하시는 거지요?"

"음 얘기를 들어보아. 작년 봄인가? 하여간 행방을 감추었는데, 말들이 많았다. 소련으로 들어갔느니 어쩌니 하고. 하도 위인이 황당해서 그런 소문이 나돈 모양인데 실은 중국에 갔었다는구나. 그가 모습을 감추기 전에는 서의돈과 죽이 맞아서 한동안 어울려 다녔지. 해서 서의돈이 그리 되고 보니 제 딴에는 들여다본답시고 의돈의 집을 찾은 모양이다. 그 길에 여기 들른 거야."

"......"

"그가 소식을 가져왔어. 일부러 전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의돈이 집에 오고 보니, 전하고 가자, 그랬다는 거고, 그건 다름 아닌 이상현의 소식이다. 듣고 있나?"

"."

"상해에서 만났다는구나. 함께 술도 마시고 몰골이 초라하긴 한데 뭔가 일을 하고 있는 눈치더라 그러더군. 뭐 전할 얘기는 없느냐 하고 물었더니 모두 죽은 줄 알고 있을 텐에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편하지 않겠느냐 그러더라는 게야. 그래도 어디 그러냐고 했더니 픽 웃으면서 그렇게 소식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거든 임명빈 씨한테나 가서 본 대로 말하라 하더라는 게야."

"......"

"특별히 상현이가 나한테 소식 전할 이유가 뭐 있겠나. 명희 너한테 전하라는 뜻이 아니겠나?"

"그런 것 같군요. 이선생님은 양현이 걱정을 하신 거예요."

"그럴까......"

명빈은 똑 떨어지게 말하는 명희를 바라보며 묘하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런 구체적인 일도 없었는데 누이와 이상현을 안쓰러워했으며 깊이 이해하려 했던 임명빈, 그는 아직도 로맨티시스트인가.

"상현이가 살아 있을 줄은, 뜻밖이었다. 살아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헌데 이 소식을 넌 어쩔 셈이냐?"

"가족들에게는 알려야겠지요."

"너가?"

"환국이한테 효자동에 손님이 와서 그러더라 한다면 자연히 본가에서도 알게 될 거예요. 이제는 입장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아들이 성공했고 어느 모로 보나 그분들이 우위에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선생님은 그런 소식을 듣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양현에게는?"

"그건 환국이가 알아서 할 일이구요."

명희는 책상 앞에 앉아서 읽다 만 책을 펼쳤다. 아버지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럼요, 아버지가 그리워요, 하던 양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서 명희는 쓸쓸해진다. 그 아버지는 이상현이 아닌 김길상이었기 때문이다.

 

 

2장 산행

봄이 가고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여옥은 비로소 병자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병자였지만 미이라는 아니었다. 해골도 아니었다. 이 병자를 두고 그의 오빠 내외와 명희는 기뻐했다. 또 한 사람이 기뻐했다. 그는 여수에 있는 최길상이었다. 며칠 전에 그는 서울에 다녀갔고 서울 온 김에 들렀다고 말은 그렇게 했다.

여옥이 벽을 대고 앉아 있는데 방문을 열고 오라범댁이 들여다본다. 순인 치마에 생명주 깨끼저고리의 외출 차림이었다. 코가 오똑한 버선이 눈이 시리도록 희었다.

"괜찮겠어?"

불안해하는 얼굴로 오라범댁이 말했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소영이 보고 빨리 오라 했어요. 토요일이라서, 마음이 영 안 놓이네요."

"걱정 말라니까요. 이젠 운신도 하는데."

"그럼 갔다 오겠어요."

오라범댁은 친정동생네 아이 돌잔치에 가는 길이다. 며칠 전부터 어쩔가, 걱정을 하는 것을, 여옥이 우겨서 가도록 한 것이다. 여옥이 혼자 남은 집안은 조용했고 이따금 거리에서 냄비와 양은솥 때우라며 외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고물장수의 가위 소리도 들려왔다. 문밖 청량리는 옛집이 있던 동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집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줄곧 방에서만 몇 달간을 누워서 지내왔지만 여옥은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뭐랄까. 헐벗은 것 같았고 한데에 나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집밖은 모두 한데겠지만 혜화동이나 명륜동같이 규모가 짜여진 부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철 따라 대비하고 단속하며 제 집 앞은 늘 청결하며 적잖게 쌀쌀한 데 비하여 계절에는 무저항으로 서 있는 마을, 정결하고 쌀쌀하지 않으나 움츠러들고, 그러면서도 타인을 거부하지 않는 분위기, 그것은 감출 것도 벽을 쌓을 필요도 없는 가난의 분위기였다. 여옥은 누워 있었지만 피부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들고나는 사람들이 몰고 오는 바람에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 친정의 살림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죽은 남동생과 오빠, 사위까지 동경 유학을 보냈고 진작부터 개명한 부친은 여자인 자신에게도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런 정도의 살림 규모, 일하는 사람도 늘 두셋은 부렸고 오라범댁이 새색시 시절에는 부엌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깨끗하게 차려입고 방에서 바느질만 했다. 여옥은 친정의 몰락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의 문이 열렸다고나 할까, 감각이 살아났다고나 할까. 육체보다 훨씬 앞질러서 감각은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소리에서, 빛깔에서, 코끝에 감도는 냄새에서도 어떤 형태가 나타나고 내용이 전개되고 그것은 마치 길잡이처럼 숨어 있는 영상을 불러내고 끝없이 물러나게 하곤 했다. 여수에서의 내용이, 군산에서의 사건이, 좀 더 들어가는 벽촌에서의 전도생활 그 현장이 나타나곤 했다. 형무소의 생활, 고문당하는 일, 목말라서 몸부림치던 일, 어떤 때는 어둡고 희미하게, 어떤 때는 밝고 선명하게, 그 단시 현장보다 한층 선명하고 현란하게 구두 축이 넓적한 무거운 구두를 신고 검정 새틴 통치마에 모시 적삼을 입고 서울역 대합실에서 서성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변신자식 하나 돌보며 사는 할머니를 도와서 풀을 매던, 자신의 흙 묻은 손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선권과의 결혼 생활, 오선권의 배신으로 저주의 날을 보낸 그 시기는 마치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화인같이 찍혀 있던 그 분노의 세월은 어디 가고 없어진 것일까.

여옥은 앙상한 손을 들여다본다. 뼈만 남은 손등 위로 지나가는 푸른 정맥, 여옥은 그 푸른 정맥을 볼 때 자신이 진정 살아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취조관이 목을 비틀 때, 옷을 벗겼을 때 울부짖었다.

'주여! 저를 죽게 하소서! 주여! 저를 데려가주소서!'

여옥이 해골의 몰골이 된 것은 고문과 형무소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이 죽어가는 데 앞질러 육신이 망가졌던 것이다. 여옥을 그나마 있게 한 것은 최상길의 존재였다. 오빠하고는 중학교 선후배였으며 오선권과는 친구 사이였던 최상길이 여수에 전도부인으로 나타난 여옥에게 동정을 품고 여러 가지 힘이 되어주려고 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최상길은 오선권을 두고 그 친구 상종할 놈이 못됩니다. 하고 말했다. 최상길, 그리고 그의 처 금홍이, 여옥은 그들의 근황을 알지 못한다. 옥바라지를 해주었으며 팔방으로 손을 써서 여옥을 옥에서 나오게 했으며 서울까지 데려다주었던 최상길 옆에 금홍이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를 여옥은 알지 못한다. 남편을 의심하여 여옥의 집 근처를 배회하던 여옥의 명기 출신이며 극도의 의부증 환자였던 금홍이. 그때 여옥은 그런 상황을 희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말똥머리에다가 구두 뒤축이 널찍한 무거운 구두를 신고 검정 치마, 사시사철 흰 적삼 아니면 검정 저고리를 입고 전도 사업을 위해 말 갈 데 소 갈 데 가리지 않고 찾아야 했으며 거칠 대로 거칠어졌고 섬세한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기, 세수만 하면 그만, 그 흔한 크림 한번 바르지 않았다. 여자로서의 매력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조차 없는 자기 자신을 두고 비록 기생 출신이기는 하지만 눈에 번쩍 띄게 아름다운 금홍이가 최상길 때문에 자기를 경계한다는 사실은 납득할 수 없었고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여옥을 의지하여 여수로 찾아온 명희하고 수예점에 들렀다가 노상에서 최상길을 만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말을 여옥이 했다.

"지나놓고 보면 웃음도 나오는데 당할 때는 병이 나겠더라니까,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 그것 참 어려운 일이야. 도처에서 다리를 걸어 나자빠지게 하는데 참말 미치겠더군. 전도부인이란 직책을 앞에 걸고 다녀도 말이야. 명희 너도 앞으로 많이 당할 거야. 특히 넌 그 미모 때문에,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여자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 도둑으로 의심받는 일 말이야!"

그때 여옥은 산 넘어갔던 부아가 되돌아왔는지 벌컥 화를 냈다.

"나 원래는 신경질이구 결벽증, 성질이 그랬었잖니? 그런 것들이 세월 따라 마모되고 좋은 뜻에서도 그렇지만 나쁜 뜻에서도... 결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었던 그런 것들이 다 망가져버렸다... 이따금 나는 내가 나무토막인가, 아무 곳에나 굴러 있는 돌덩어린가 하고 혼자 뇔 때가 있어."

여옥은 말하고 나서 웃긴 웃었다.

"나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지만 결코 남자를 도둑맞았다는 생각은 안해. 또 그런 처지의 여자로서 동정 받는 것도 싫어! 오선권이 내게 준 것이 그게 어디 사랑이었니? 오선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건 때문에, 그 여자에게 가기 위해 나와의 부부 관계를 취소한 거 아니니? 그건 인간의 본질의 문제지 질투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어. 그러나 내가 그 절망의 늪에서 일어나 세상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느낀 것은 이방인이구나, 그거였어. 명희 너도 이제부터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시골에 가도 도시에 가도, 교회당 안이나 밖에서도... 여자들은 나를 침입자로, 결코 과장이라 생각지 말어. 농가에 들어서도 농가 아낙은 제 남정네 어느 한 부분, 눈 및 하나라도 도둑맞을까 봐 경계하고, 물론 내가 임자 없는 홀몸이라는 것을 전제해서 말이야. 아찔하고 눈이 멀 것 같은 충격을 헬 수 없이 받았다. 해서 남자라면은 벽을 쌓고 또 벽을 쌓아놓고 여자들과 친해볼려구, 그야말로 쓸개 다 빼어놓구서, 그럴수록 오히려 그게 약점이 되는 거야. 그 방자함이란... 아니면 위세 당당하게 동정이나 베풀고, 인간을 어떻게 포기해? 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 아니니? 도시인간이란 무엇이냐, 수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주여 나는 어찌해야만 하옵니까? 논둑길을 가면서 물어보고 산길을 가면서 물어보고... 이제는 그런 갈등은 극복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니 사람이 억척스러워지고 미련해지고 물기 빠진 고목이 된 것 같고... 신앙까지도 형식화 해 가는 것 같고, 아무튼 최상길이 그 사람만 하더라도 어느 곳에나 있는 남자 이상으로 생각한 일이 없었지만, 그 사람 역시 옛날 친구의 여자로서 오선권이 걸어간 길을 너무나 빤히 아는 처지, 게다가 선배의 누이로서 그 이상의 관심이나 그런 것 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어. 본시 그 사람은 교인이었거든. 도중에 타락하여 교회와 멀어졌다가 지금 여자 만나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됐는데 이 여자가 내게 준 횡포는 상당했다. 그야말로 남의 인생 때문에 혼나 거지. 어떤 때는 남편이 외출하면 행여나 싶었는지 내가 있는 집 근처를 배회하기도 하구, 무슨 일이 있느냐 집으로 들어오라 하면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오 하면서 휭하니 등을 돌리고 가는 거야. 어이구, 하며 난 그럴 때 땅바닥에 주저앉지. 그 칼날 같은 눈빛은 교회에서도 내 전신을 찌르는 거야. 까닭 없이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둥지둥하다가 오냐, 나도 칼을 빼들고 마음으로 그를 대항하리 할 때 여자는 풀이 죽은 거야. 그러다가 언제까지 이런 무위한 짓을 해야만 하는가 혼자 쓴웃음을 띠곤 했다. 그 여자가 풀이 죽으면 참 인간이란 쓸쓸한 거구나, 그 여자도 나와 같이 이방인일까? 그럴 요소는 있지."

여옥은 금홍이 생각을 계속해 한다. 최상길이 여옥에게 쏟는 정성에 대하여 금홍이는 어떻게 대항하고 있는 걸까? 하고. 같은 기독교도로서 바로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수난을 겪게 된 교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을 의무로 양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남편을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된 금홍의 신앙이 깊어졌다면.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여옥은 어딘지 미심쩍고 의문이 남았다.

'아직은, 아직은 그런 것 생각하지 말자. 이대로 고맙고 따뜻하고 진실된 삶이 소중하다.'

집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집안에 있는 쥐새끼들조차 어디론가 이사를 다 가버렸는지 바늘 하나 떨어뜨려도 소리가 날 것처럼 그렇게 조용했다. 여옥은 거울을 찾아 자기 얼굴을 비춰본다. 눈동자가 허공같이 검고 커 보였다. 솟아오른 관골, 홀쪽한 두 볼, 입술에는 핏기라곤 없다. 얼굴은 백지같이 희었다. 가느다란 목은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숭업다.'

거울을 놓는다. 그러나 거울을 놓는 순간 여옥은 옛날의 이십대, 그 시절의 모습이 언뜻 지나간 것같이 느낀다. 말랐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활동하고 노동할 때 드세고 질겨 보였던 그런 것들이 다 탈락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전도사 생활을 하는 동안 여옥의 얼굴은 항상 빨갛고 땀을 흘렸다. 특히 여름철에는 그랬다. 농가에 들렀을 때 혼자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업어서 재워주기도 했고 노인네들이 풀을 매고 있으면 주질러 앉아서 함께 풀을 매어주었고 돌보는 이 없는 병든 사람의 간호도 했으며 상가에서는 허드렛 일도 했다. 야학교에서는 수예 재봉을 가르치고 글도 가르쳤다. 항상 그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유별나게 횐 얼굴은 검게 타지 않고 붉게 타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와 같이 힘들게 동분서주했는지. 그것은 신앙의 힘이었겠지만 여옥에게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 끝없는 물음의 수행일 수도 있다. 그는 전도사가 되어 활동하면서 깊이 기도하면서도 오선권을 쉽사리 용서하지 못했다. 따져보면 여옥은 사랑을 배반한 오선권에 분노를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배반하고 진실을 배반한 그것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그는 명희에게 말했다. 사랑을 잃어서, 자신의 운명이 망가졌기 때문에, 버림받은 여자라서, 여옥은 그래서 절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식으면 이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도덕에 묶이어 피차 불행하게 사는 것을 여옥은 원치 않았다. 다만 진실을 입신출세에 이용하는 그 비정에 절망했던 것이다. 여옥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젊었을 때는 신경질적이며 몹시 심한 결벽증이었다. 화인같이 남아 있던 비정이 용서가 되지 않았던 오선권이, 그런데 어찌 그 기억이 끊어진 필름처럼 여옥의 마음에서 사라졌을까.

"아무도 없어요?"

명희 목소리였다.

"여옥아!"

"응 나 여기 있어."

명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어디 갔니?"

"모두라니?"

"너희 올케 말이다."

"외출했다."

"아픈 사람 혼자 두고?"

"내가 돌잔치에 가라 했어."

"놀랬다. 무슨 일 있었는가 싶어서."

"좀 있으면 학교에서 소영이가 올 거야."

소영이는 여옥의 조카딸이다.

"괜찮니? ."

명희는 앉으며 말했다.

"."

"참 더디게 회복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갑자기 좋아지는 것도 비정상이지. 너 나왔을 때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스러워."

"아직도 끔찍스럽지 뭐."

여옥은 까닭 없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명희는 웃으면서

"이제 살았지 뭐."

"넌 유치원 어떡하고 밤낮 오니?"

"시국이 말이야, 유치원도 문 닫지 않을까 싶어."

"?"

"영미하고 전쟁이 시작되면서 정부 시책도 달라졌지만 인심이 확 바뀌었다. 부모들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데 관심이 없어진 거야. 심리적으로 한가한 마음으로 살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이를 곁에서 떼어놓는 데 불안을 느끼나 봐."

"그렇게 심각하니?"

"신문 보도를 모면 일본이 계속 밀어붙이고 있지만 집안의 밥그릇까지 내놔야 하고 시골서는 국민하교 아이들을 동원하고 송진까지 수집한다니까. 날이 갈수록 상점은 텅텅 비고 생활필수품은 구하기가 어렵고 그야말로 비상시국이지. 당국에서는 식량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발표했지만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 아니겠니? 젊은 사람 있는 집안은 전전긍긍이구."

"나 누울래."

그런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는지 여옥이 말했다.

"그래, 그래 누워라."

명희는 여옥이 눕는 것을 도와준다. 여옥의 체중은 새털같이 가벼웠다. 그러나 마치 피노키오처럼 뼈와 뼈만 이어져서 덜거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반듯하게 누운 여옥은 무심하게 명희를 쳐다보았다. 푸르게 느껴지도록 맑고 큰 눈이었다. 잔잔한 호수 같아서 새 그림자라도 드리워질 것만 같았다. 여학교 시절부터 긴 세월 동안, 참으로 긴 세월 서로 흉허물 없이 사귀어온 친구였지만 명희는 이같이 맑고 영적인 눈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너의 올케 참 괜찮은 분이다."

"무던하지."

"어쩌면 이부자리가 이렇게 늘 깨끗하니? 오래 누워 있는 병자에게 이러긴 정말 쉽지 않다.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명희야."

"?"

"내가 병자니?"

"병자 아니니?"

"글세, 못 쓰게 망가지고 고장난 기계 같은 것, 아닐까? 병이란 살아 있는 것에 달려드는 것 아니겠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명희는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그 동안 겪으면서 내가 사람이란 생각을 못했어. 자전거나 달구지나 불 피우는 풍로, 맷돌...... 그런 물건 같았거든.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면 아마 자살을 했을 거야."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명희도 침묵으로 대하면서 여옥을 외면했다. 한참 후에 여옥은 다시 말했다.

"우리 올케, 우리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한다. 나 같은 시누이 꼴도 보아야 하고, 명희 너같이 친정을 도와준 일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염친지 나도 모르겠다."

"도우긴, 그런 말 말어. 걱정 끼치기론 너와 다를 게 뭐 있니?"

"오라버니는 좀 어떠시니?"

"어어? 이제 제법이네. 남의 걱정까지 다 하구."

여옥은 웃었다.

"실은 가을쯤 산에 가기로 나하고 약속했어. 처음에는 떨떠름해 하더니, 요즘엔 오히려 오빠 쪽에서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것 같아."

"산으로...... 거긴 왜?"

"지리산인데 그곳에 훌륭한 분들이 몇분 계신가 봐. 절에 계시는 스님 한분은 오빠하고 안면도 있구, 또 최참판댁하고 인연이 깊은 절이라 하더구나."

"그러니까 정양하러 절에 가신다 그 말이니?"

"말하자면 그런 새인데 오빠 생각은 다른가 봐. 처음엔 무심히, 그러다가 차츰 그곳 스님한테 가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애. 하기는 서의돈 선생이랑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그리 됐으니 오빠로서는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인지 몰라...... 그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서울서도 식자들 간에 꽤 알려진 사람이래. 신학문도 동경 가서 했고 본시 서울분인데 집안 어른이 일본과 합방 당시 자결을 했다는 그런 말도 있어. 아무든 좀 특별한 사람인가봐."

이들은 모두 화제에 오른 스님이 여수에서 만남 적이 있는 소지감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한번은 명희와 여옥이 수예점을 나서다가 노상에서 최상길과 소지감이 함께 오는 것을, 또 한 번은 명희가 통영으로 가기 위해 여옥이하고 부두로 나갔을 때 마침 부산으로 가려는 최상길 소지감,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금홍이, 그들 일행과 만났으며 두 여자에게 최상길은 소지감을 소개까지 해주었다. 그때 소지감은 스님이 아니었다.

"오빠의 병은 순전히 마음에서 난 병이야. 살려는 의지가 없으면 백약이 무슨 소용이겠니?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같이,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 역시도 한땐 오빨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왜 그렇게 되셨을까? 원인이 있을 거 아니야?"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 그 중에서도 내가 오빨 심리적으로 괴롭혔나봐. 어려웠을 때는 그놈의 유산인지 뭔지...... 그때부터 나는 우둔하게 눈감고 살려 했고 오빠는, 그래, 그랬을 거야. 나는 얻어먹는 거지, 완전히 임명빈이라는 인간은 무너지고 말았다. 눈치보고 풀이 죽고 그러고 나면 심한 우울증에 빠지는 거야. 그런 심리적 갈등을 되풀이하다가 저리 됐지 뭐니? 어떤 땐 올케하고 자식들까지 남 대하듯,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일부같이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의식적으로 친정을 멀리하곤 했는데."

"알 만하다, 그 심정 알 만해. 돌아가신 너의 아버님도 좀 깔끔하셨니? 대쪽 같은 어른이셨지. 어머님도 여간 꼿꼿하셨니?"

"사는 게 지겹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여옥은 명희 말을 가로막았다.

"만사에 눈을 감고 살다가도 문득문득 사는 게 뭔지...... 고통시러워. 사실 오빨 비난할 자격도 없지."

"산다는 것은 아름다워. 생명이란 참으로 놀라운 거야. 어떤 경우든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축복으로 느끼는 한 죽음도 원망스러운 거는 아닐 것 같다."

"그런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죽고 싶은 생각 안 해봤니?"

"했지. 수없이 했다. 그랬기 때문에 삶이 소중한 것은 지금 느끼는 거야.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구."

"그런 너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신앙에서 오는 거니?"

여옥은 잠자코 있었다. 대답하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그거는, 그거는, 글세...... 그거는 아마도 사람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닐까? 믿음의 회복 같은 것."

명희는 여옥이 묘한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신뢰라는 것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웬 까닭인지 신앙에서 오는 거냐는 물음에 대하여 답변이 없었다.

"고모 나 왔어요."

조카 소영이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어머, 아주머니 오셨네요."

갈래머리의 소녀, 소영은 활짝 웃었다.

"잘 있었니?"

명희도 웃었다.

"고모 나 뭐 해드릴 일 없어요?"

"가서 공부나 해. 어머니 늦게 오시면 저녁 준비하구."

"알았습니다."

하고 소영은 방문을 닫았다.

"명희야 나도 산에 가고 싶어."

"전도부인이 절에 가서 되겠니?"

"산에 가고 싶다고 했어."

"몸이 회복되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러고 또 당장은 책을 읽고 싶어."

"책 읽을 기력 있니?"

"천천히 읽지 뭐. 너 요다음 올 때 책 좀 골라서 가져와."

"그래 그럴게."

어쨌든 명희는 여옥과 명빈에 대하여 한시름 놓은 셈이다.

늦겨울에 목포 감옥에서 실려 나온 여옥은 서울서 초가을을 맞이했다. 마치 저울의 금처럼 한 땀 한 땀 나가는 실의 흔적처럼 여옥의 건강은 몹시 더디게 회복되어왔다. 그는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일요일도 그랬었지만 평일에도 학교 가는 길에 소영이 부축하여 혜화동 명희집에 데려다주곤 했다. 명희는 여록이 올 때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곤 했다. 혼자서 너무 쓸쓸하니까 함께 있자고도 했다.

"싫다 이애, 너 인생 내 인생이 뒤섞여서 죽도 밥도 아니게 된단 말이야."

그럴 때마다 여옥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때 명희 네가 여수에 왔을 때 나 힘들었어."

"그때 얘기는 왜 하누. 그때하고 지금하고 같애? 너무 절박했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그 시절, 생각만 해도 끔찍해. 이제는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아니니?"

"이제는 내가 널 힘들게 할 거야. 그보다 홀몸의 여자 둘이 함께 사는 것도 너무 청승스러워."

"언제까지 친정에 있을 거니? 그 착한 올케 골만 썩일 작정이야?"

"앞으론 날아야지."

"어디로?"

"어디긴? 저 높은 자유의 하늘로."

"얘두 참. 꿈같은 얘기하네. 누가 너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내버려둔 대니?"

"내 마음까지야 붙잡아매 두겠니?"

여옥은 혜화동에 오면 힘든 일은 못해도 부엌에 나가 반찬 장만하는 것을 즐겨했고 유치원에 나가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을 좋아하고 했다. 이날도 아침나절 소영은 여옥을 데려다주고 갔다. 청량리에 여옥을 데려다주는 것은 명희의 소임이었다.

"벌써 가을이네."

하늘 높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를 보며 여옥이 말했다.

"가을이야. 엊그제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곤 했는데."

사과를 깎으며 명희는 맞장구를 쳤다.

"너희 오빠는 언제 산에 가시니."

"너도 가고 싶어?"

"아직이야 뭐, 못 가지."

"수일 내로 가게 될 거야. 그쪽에서도 아마 기다리고 계실걸? 여름방학 때 환국이가 내려가서 거처할 곳도 마련해놨고."

"그 댁의 바깥어른은 참 어떻게 지내실까?"

"그 얘기는 그만두자. 모두가 다 괴로워.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니니 그 댁 부인도 잘 견디시는 모양이야."

"서선생님 댁은?"

"사정이야 다 같지. 다만 유인성 선생 그 댁이 참 어려운 모양이다."

"인실이 오라버니 말이지?"

", 그 댁 부인이 좀, 외아들이 결핵이야. 그래서 마산 요양소에 가 있는데 어머니가 내 몰라라, 그럴 수도 있는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어떻게 되니? 어머니가 몰라라 한다면 그건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니?"

"있고서야 설마 몰라라 하겠니. 여기저기 사정이 막히고 딱하게 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문은 아주 고약해."

"어떻게?"

"황태수 씨가 요양원에 보내라고 상당한 금액을 전했다는데 알고 보니 아들한테 한 푼도 가지 않았다는 거야. 그뿐이면 좋겠는데 아들을 핑계 삼아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 돈을 얻어다가 쓴다는, 좀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

"세상에 그런 기막힌 어머니도 다 있니? 하기는 딸을 청루에 팔고 그 돈으로 노름하는 아비도 있긴 있더군."

"유선생님이 수감되기 전에도 아들 땜에 몹시 가슴 아파했다 하더군."

"참 인실이한테 언니가 한분 있었지 않아?"

", 인경언니, 그러잖아도 인경언니가 대강 뒷바라지를 하는 모양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하루 이틀도 아니구."

하다 말고 명희는 한순간 망설인다.

"너도 알 거야."

"?"

"인실이 소문."

"일본인하고 어쩌고 하는 소문 말이니?"

"그래."

"그게 어쨌는데?"

"이상한 것은 그 일본인이 요양소에다 가끔 송금을 한다는 거야."

여옥은 깜짝 놀란다.

"그렇담 인실이가 그 일본인하고 함께 있다 그 말이니?"

이번에는 명희가 펄쩍 뛰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건 아니야. 선우신이라고 넌 잘 모르겠지만 유선생님한테는 둘도 없는 제자인 셈인데 그 사람은 유선생 집안 사정에도 소상하구 그 일본인도 만난다고 했어.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일본인 역시 인실의 행방을 알고자 아주 결사적이라 하더군. 오빠 집에도 가끔 오는데 이번에 모두 함께 수감이 되었지."

"그렇다면 인실이는?"

"인실이 행방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대. 죽었다는 말도 있고 독립군에 들어갔다고도 하고."

"그러면 그 일본인은 어찌 알고 요양소에 송금을 하는 걸까?"

"작년에도 유선생집에 왔더라는 거야. 그리고 수감되었다는 소식은 동경의 찬하씨로부터 들었겠지. 그들은 아주 절친한 사이거든."

했을 때 명희는 그 바닷가, 분교에 찾아왔던 조찬하와 오가다, 인실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날 때마다 날카로운 비수에 심장이 찔리는 것 같은, 그 괴로운 기억.

"하기야 뭐 인실이 아니래두 유선생하고는 선후배 사이, 계명회 사건 때도 함께 검거된 처지니까 그럴 수는 있는 일이지만 예사로운 일은 아니지."

그러나 명희와 여옥은 진상을 모르는 만큼 그 추측은 상당히 겉도는 것이었다. 오가다가 만주에서 가끔 요양소에 송금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가다의 심정은 의리라든지 동지애라든지 인실에 대한 사랑의 표시라든지 그런 것과는 사뭇 성질이 달랐다. 보다 진한 것이었다. 보다 절실한 것이었다. 유씨 집안은 아들의 외가요, 유인성은 아들의 외삼촌이며 요양소에 있는 아이는 아들과 사촌지간이다. 아들의 반쪽 핏줄에 대한 절실함 애틋함이 그로 하여금 요양소에다 송금을 하게끔 했던 것이다. 작년 봄에 산장에서 조찬하와 함께 제문식과 선우신을 만나 술을 마셨을 때 유인성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되었고 유인성이 수감된 일은 명희의 추측대로 조

찬하가 오가다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사람이 외골수인 모양이지?"

"나도 그 일본인 한번 보기는 했어."

"어디서?"

"그건, 하여간 오빠도 들은 얘기가 있어서 칭찬을 하고 환국이 역시 잘 아는 사인지 그 일본인을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 하더구먼."

"인실이가 어떤 앤데?"

"?"

"헛소문이든 사실이든 그 얘가 아무나 상종할 성질인가? 그래도 그만했으니까 화제가 됐겠지. 어쨌거나 아름다운 얘기야. 인종은 달라도 사람은 다 마찬가지 아니겠니? 극악무도한 흉물이 있는가 하면 빛나는 사람도 있고 가끔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거 아니겠어?"

"글세,"

명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천하에 대하여 얼마나 자신이 이기적이었나 생각하는 것이었고 지난봄에 들은 상현의 소식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인실은 혼신을 바쳐서 팽팽하게 유감없이 살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어 어떤 선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했던 제자 유인실.

'그는 죽었을까? 아니다. 그는 살아 있을 거야.'

명희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여옥과 명희가 점심을 끝내고 막 상을 물렸을 때였다. 뜻밖에도 최상길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명희는 몹시 당황한다. 그동안 몇 번인가 서울을 다녀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여수에서 대면이 있고는 처음 그를 만나게 된 때문이다.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 올라오세요."

명희는 마루 끝에 두 손을 깍지 끼고 서서 말했다.

"최선생이 웬일이세요? 여길.“

아연해하던 여옥이도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여긴 금남의 집인가요?“

"별안간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아요?"

"좀 놀라보시오. 길선생이 날 놀라게 한 것만큼 앞으로 놀랄 일이 자꾸 생길 거요.“

"아이 참 겁나네.“

"실은 청량리에 갔더니 여기 있다고 해서요. 저녁 차로 내려가야겠기에 염치 무릅쓰고 왔습니다.“

최상길은 명희가 내미는 방서겡 앉으며 말했다.

"유치원이라 해서 찾기도 쉬울 것 같고 전혀 안면이 없는 처지도 아니고 해서 오기는 왔는데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교적 소탈하게 최상길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옛날 보았던 모습에 비하여 그는 많이 마른 것 같았다. 연회색의 양복이 헐거워 보였고 수수하여 옛날의 멋쟁이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실례라니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 뵙고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명희로서는 익숙하지 않는 남성에게 그나마 최대의 마음표시를 했던 것이다.

"고마운 인사는 제 편에서 해야지요. 해골바가지 같은 우리 길선생을 저만큼이나 사람 꼴을 만들어놨으니 이게 다 뉘 덕이겠습니까?“

최상길은 하하할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거 좀 헷갈리는데? 어느 쪽 촌수가 가까운지 원.“

여옥이 말에

"말하나마나 애인과 친구, 말할 필요도 없지 않소.“

세 사람은 모두 함께 웃었다. 그리고 명희가 내온 홍차를 마신다. 최상길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여옥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요, 길선생.“

최상길의 말에

"감질나게 조금씩 조금씩.“

여옥이 자못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죽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저 하는 말, 욕심이 조금씩 조금씩 생긴다 그 말이구먼.“

"공탓이 하는 거예요?“

"아암 공탓이 해야지.“

명희는 흉허물없이 대하는 그들이 보기가 좋았다.

"공탓이가 머예요?“

명희가 물었다.

"공탓이란 남쪽에서 쓰는 말인데 은공을 베풀었다고 자꾸 들추어내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여옥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건 그렇고 임교장께서는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좀 어떠신지요. 한번 가 뵙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 건강이 좀......"

명희는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유치원은 잘돼갑니까?"

"아마 길게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요. 지방에도 유치원은 거의 폐쇄됐으니까요. 대부분이 교회에서 운영해온 까닭도 있지만 결국 불요불급하다는 거지요. 이런 비상시국에는."

최상길은 담배를 붙여 물었다. 재떨이가 없는 집안이어서 명희는 얼른 접시 하나를 가져왔다.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저녁에는 저 큰아기를 임선생님께서 청량리까지 데려다주신다면서요?"

"누가 그랬어요?"

여옥이 물었다.

"언니 되시는 분이 그러시더군요. 명희씨가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혼자 갈 수도 있는데 공연히 모두들, 어찌나 감시가 심하든지 밖에 나와서도 감옥살이지 뭐예요."

여옥은 공연히 엄살을 떤다.

"기왕 이렇게 왔으니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기로 하지요. 여옥씨 안 가시겠어요?"

"해가 아직인데?"

"오늘은 얘기할 것도 있고 저녁 차 타려면 시간도 빠듯해서."

"뭐가 빠듯해요? 아직은 한낮 아니에요?"

"여옥아,"

"왜 그러니?"

"최선생님 말씀대로 해. 여긴 내일도 올 수 있잖아?"

한동안 가만히 있던 여옥은

"그럼 그러지 뭐."

슬그머니 말했다.

"오매불망, 반쪽 같은 친구를 납치해 가니 죄송합니다, 임선생."

최상길은 어릿광대 같은 몸짓을 하며 명희에게 꾸벅 절을 했다. 어색함, 수줍음, 그런 것들이 위장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제가 남의 애인을 잡아두어서 죄송합니다."

스스럼없이 한 말대꾸는, 이번 여옥의 일을 통하여 최상길 인간성에 전폭적으로 명희가 신뢰하며 마음을 열어버린 때문이긴 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기도 했다.

"길여옥 값어치가 왜 이리 자꾸만 올라가는 거지? 진작 내 값이 이런 줄 알았다면."

여옥도 한마디 했다.

"알았다면."

실실 웃으며 최상길이 되물었다.

"먼 길, 돌아서 여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무튼 내 생애, 젤 행복한 시절인 것은 틀림이 없네."

말의 내용에는 알쏭달쏭 것도 있었으나 여옥이 들떠 있는 것도 확실했다.

"허 참, 아무나가 비싼 값 매겨주는 줄 아시오?"

최상길 말에 여옥은 웃으며

"무슨 말이에요?"

짐짓 모르는 척 되묻는다.

"임선생이나 이 최상길 정도라도 되니까 길여옥을 위하여 눈물 몇 방울 흘려준 거지. 공연히 우쭐하다가 황혼에 늦바람날까 두렵네."

"애걔걔."

웃음이 남은 얼굴을 최상길은 명희에게 돌렸다.

"임선생, 여옥씨 건강이 완전하게 회복이 되면 두 분이 함께 한번 다녀가십시오."

"..."

"여수에 말입니다. 도처에서 비상시국이라고 쾅쾅 울림장을 놓고 있지만 기죽을 필요 없고 아직은 그곳 해물 맛을 그대로며 인심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한번 오십시오."

"거긴, 난 싫어요."

명희는 저도 모르게 거부의 몸짓을 강하게 했다. 의부증 환자하고 여옥이 말하던 그의 마누라, 부두에서 만나 명희 자신도 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은 금홍이 생각이 나기도 했던 것이다.

"불에 덴 아이같이 왜 그러십니까?"

"그쪽으론 가기 싫어요."

"입정 험한 뱃사람들한테 히야카시 좀 받았기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파르르 하는 겁니까."

어느덧 최상길은 여옥에게 하는 말투로 명회에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구요?"

하다가 명희는 언뜻 생각이 나서 여옥을 노려본다.

"내가 언제 그런 얘길 했던가?"

여옥은 능청을 떨었다. 여수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아마 무슨 얘기 끝에 여옥이 최상길에게 말한 것 같다.

"지나간 일에 집착 너무 하지 마시오. 훌훌 털어버리고,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게 마련이니까."

말투도 달라졌지만 얘기의 내용도 오랜 친구처럼 임의로운 표현이었다.

"우린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곳이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고 하늘에서 폭탄이 쏟아지게 될지도 모르고...... 세계는 지금 미쳐버렸어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걸 아셔야 합니다. 괴로웠던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모두 다 털어버리고, , 홀가분하게 사십시오 임선생."

"그건 그래. 최선생 말이 맞아."

여옥이 동의를 했다. 최상길이 여옥에게 들었든,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든지 간에 자신에 관하여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명희는 깨달았다. 그러나 과히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그럼 갈까요?"

여옥을 앞세우고 거리에 나온 최상길은 아까 명희 집에서 너스레를 떨 때와는 달리 진지하게

"피곤하지는 않소?"

하고 물었다.

"아니오."

"정말 괜찮겠소?"

"나다니는 것도 이제는 좀 이력이 난 것 같아요."

"피곤하면 그렇다 하시오. 업고 갈 테니까."

농담 같지도 않게 말했다.

"별 희한한 소릴 다 하네요."

"여옥씬 건망증이오?"

"..."

"목포에서 나한테 업혀서 나온 것 벌써 잊었소?"

"정말 그때 그랬어요?"

여옥은 뭔가 북받쳐 오르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아주 나으면 전도 사업 또 할 거요?"

하다가 맞은편에서 자전거 오는 것을 본 최상길은 얼른 여옥의 두 어깨를 잡고 한곁으로 비켜 세운다. 자전거는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들이 활동하게 내버려두기나 하겠어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여옥이 말했다.

"내버려두지 않아요."

"한데 왜 묻지요?"

"길선생 신앙이 아직도 그리 지극한 건가 싶어서."

"..."

"괜한 걸 물었어요?"

"내 신앙이 그리 지극했나요?"

"아니면 뭣 땜에 그 고생을 했겠소."

"심각한 얘기는 두었다 하지요."

여옥은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럽시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그저께 왔소"

"무슨 이루요."

"재산 문제 때문에 좀,"

하다가 전차를 기다리고 서 있던 이들은 마치 전차가 왔기에 오른다. 여옥을 자리에 앉혀놓고 자신은 여옥을 막아서듯 최상길은 손잡이를 잡았다. 최상길의 몸에서 체취가 여옥에게로 풍겨왔다. 여옥은 비스듬히 옆으로 몸을 돌이며 고개를 비틀어서 거리를 내다본다. 가로수가 누릿누릿 물들고 있었다. 여름에는 늘 그 언저리를 오가며, 또는 진을 치고 있던 아이스케이크 통을 멘 아이들, 청년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창경원의 돌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무력해진 창경원 돌담은 마치 바보처럼 여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 저기 한 번도 가보 적이 없어요."

혼잣말처럼 뇌는데

"창경원 말입니까?"

최상길이 물었다.

"."

"그럼 지금 가봅시다."

"지금요?"

전차가 창경원 앞에 멎기가 무섭게 최상길은 여옥을 끌다시피 내렸다. 창경원 문 앞에다 여옥을 세워놓고 최상길은 입장표 두 장을 끓어 왔다.

"들어갑시다."

창경원 안은 그야말로 초가을이 싱그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빛깔로 나타나 있었다.

"동물원 쪽으로 갈까요?"

"아니, 역시 좀 피곤하네요. 어디 벤치에 앉아서 쉬고 싶어요."

최상길은 벗나무 밑에 놓인 벤치로 여옥을 데리고 가서 앉힌다.

"나 여기 처음이에요."

"강원도 산골에 살았나 부지?"

하다가 최상길도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어 물고 불을 붙인다. 여옥은 옛날과 달리 쑥색 한복 차림에 버선을 신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어서 이들은 남 보기에 중년 부부 같았다.

"전에, 내가 서울 있을 적의 하숙이 명륜동이었어요. 그래서 곧장 여기 오곤 했어요."

"애인하구요?"

여옥이 장난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 무렵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최상길은 서울서 음악 교사로 있었으며 한때는 임명빈이 교장으로 있었던, 조용하가 설립한, 아니 그의 부친이 설립한 중학교에도 있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주변은 꽤나 화려했던 것으로 여옥은 듣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최상길에게는 교사직이 생계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식민지의 매우 빈약한 음악계이긴 했으나, 그나마 서울이 아니고서는 설 자리가 없었던 당시, 음악 교사를 하면서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이 상례였었다. 그 점에서는 환국이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그 무렵, 그는 젊었고 소쇄한 음악도였다. 성악이 전공이었지만 최상길은 결국 낙향하게 되었고 빛을 못 본 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가 쑥스럽게 이런 데를 애인하고 옵니까."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예요."

"..."

"어째서 그랬는지 저는 지금까지 최선생 부인의 안부를 묻질 않았어요. 고의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 의식 속에서 묻고 싶지 않은 기분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

"최선생도 부인 얘기는 도통 하지 않았어요."

"..."

"늦었지만 부인은 안녕하신가요?"

"네 안녕합니다."

"그 동안 최선생은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부인께서 저항이 없었는지 역시 신경이 쓰이네요."

최상길은 말없이 담뱃재를 털고 마서 여옥을 빤히 쳐다본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래요?"

머쓱해지다가 여옥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혹 자신이 한 말에 잘 못이 있지 않았는가, 한편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여옥은 여태 본 일이 없는 최상길의 차디찬 눈을 간신히 받아낸다. 한참 후 최상길은 얼굴을 돌렸다. 미간을 좁히며 담배를 빨아 당기고 연기를 뿜어낸다.

"길여옥도 여자구먼."

내뱉듯 최상길이 말했다.

"그럼 남잔 줄 아셨어요?"

"여자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오."

"남자의 특성은 어떻고요? 그렇게 모욕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모욕적으로 들렸다면 미안하오."

"여자의 어떤 특성을 두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난 다만 걱정이 되어 말한 거예요. 왜 걱정이 되는지 최선생도 알지 않아요."

"그 어부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요. 신경 쓸 것도 없고 아주 자알 있습니다."

까칠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이었다.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두 다리를 넓게 잡아서 벌린 최상길은 등을 구부리고 고개를 떨구어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가끔 사람들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까치가 그야말로 까치걸음을 걸으며 다가오다간 날아가곤 했다.

'저것들이 겨울엔 뭘 먹고 살까?'

최상길의 심상찮은 태도에 대한 관심에서 떨어져 나오듯 여옥은 날아가는 까치를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병신자식 하나를 돌보면서 가난하게 지내던 할머니, 함께 풀을 매면서 일이 보배라 하던 그 할머니에게 새들은 겨울에 뭘 먹고 살지요? 조그마한, 저기 날아가는 철새는 어떻게 강남까지 가는 걸까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천지조화가 살게 허는 것이요. 가게 허고 오게 허는 것도 천지조화지 뭣이겄어? 사람은 몰러, 모른단 말씨."

"할머니가 이 고생을 해오신 것도 아드님이 불편한 몸이 된 것도 그러면 천지조화의 탓인가요?"

"그것은 아니지라. 사램이 천지조화를 어긴 때문이여."

"어떻게요?"

"천지조화는 공평하들 않는감?"

"아드님 불편한 몸도 사람이 불공평해서 그런가요?"

"공평하다믄 병신이라도 다 살아가는 길이 어찌 없을 것이요? 손 발 없는 배암도 묵고 살고 물 속의 개기도 묵고 사는디, 일찍이 가고 더디게 가는 거사 천지조화,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닌께로."

'할머니 말씀이 옳아요. 가두는 자가 없으면 갇히는 자도 없을 것이며 들판의 곡식이며 열매며, 많이 갖는 자가 없으면 굶어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이는 자 없으면 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주인이 있으니 하인도 있는 것, 부리 하나, 작은 밥통 하나 몸속에 달고서 수만 리 창공을 날아 먹이를 찾고 번식하는 새, 겨울 한철 나무뿌리 갉아먹으며 연명하는 작은 짐승들, 그들은 자유롭다! 해방된 존재들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사로잡혀 있는 걸까? , ,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구원의 연장이기도 했지만 피로 물든 흉기는 아니었든가?'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지요?"

최상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이십 년, 그보다 더 되나?"

중얼거렸다. 그 말대꾸는 없이 여옥은

"저한테 할 말이 있다 하셨지요? 무슨 말인가요."

"할 말 없습니다."

"하지만 아까 명희 집에서."

"그냥 해본 말이지요.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자꾸만 이렇게 무안을 주실 건가요?"

최상길은 등을 펴고 고개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껄껄걸 소리를 내어 웃었다.

"사실 말같이 허황한 건 없어요. 안타깝고 감질나게 하고 안 하니만 못한 게 말인 것 같지 않소?"

"글쎄요. 그렇군요."

"생각을 해보면 여태 살아온 것도 그놈의 말과 같은 것이어서 허황하고 안타깝고 감질나게 하고 안 사니만 못하게 살아왔고... 허허헛헛 하하핫하, 젊은 시절의 연인들은 도대체 이런 곳에 와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사랑의 고백을 했겠지요."

"고백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맹서했겠지요."

"유행가처럼 말이지요? 꽃반지도 끼워주고."

"비웃는 건가요?"

"아니 천만에,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그렇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방편 아닌가요? 진실 그 자체는 아니지 않소?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도,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방편을 쓰고도 진실한 것은 젊음의 아름다움 신선함 때문일 거요 존재하는 것만도 진실해 뵈는 생명의 신비 같은 거지요. 해서 실상은 부럽고 샘이 나고, 비웃다니 천만의 말씀, 이쯤 나이가 되면 그런 방편을 가능하게 하는 엄폐물도 없어지고 눈 멀게 할 현란함도 없어지고, 한심스러워지는 거지. 안 그래요? 길 선생."

"그거야 뭐 남이 보았을 때, 보인다는 얘기죠. . 방평이라는 것도 안에 실린 내용은 각기 다르니까 그런 것 말할 가치가 없어요."

"한방 신나게 맞았군."

최상길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한번 딱 쳤다.

"말을 해놓고 보니까 내가 뭐나 된 것 같네요. 여자 푼수에 제법이다, 하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최선생."

"이거 또 치네. 너무 그러지 마슈. 나도 알고보면 페미니스트랍니다."

두 사람은 소리를 합쳐서 웃는다.

"아아 날씨 참 좋다. 이런 날에는 바다가 제격인데."

"그저께 오셨다면서 벌써 바다가 그리운가요?"

"아니, 그게 아니구."

출입문이 다르다는 듯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면서

"끝없는 하늘과 끝없는 바다가 맞닿아 있는 걸 보면, 그땐 우리 사는 것이 동화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꿈도 있을 것 같고, 길선생."

여옥이 쳐다본다.

"우리 좀 있다가 바다에 안 가보시겠어요?"

"아주 회복이 되면 명희하고 오라고 초대했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우리 둘이서 동해안 쪽으론 가보는 거요. 거긴 햇볕에 녹지 않는 바다가 있을 것 같단 말이오. 희뿌옇질 않고 짙푸른 하늘, 지푸른 바다, 그리고 쿵쿵 소리가 울릴 것 같은 그런 바닷가 말이오."

"임시 애인 하는 거지 뭐. 쿵쿵 바윌 치는 파도를 보다가 풍덩 빠져죽어도 좋고."

최상길이 그 말을 했을 때 여옥의 귀밑에서부터 목 부분에 엷은 소름 같은 것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을 것이면 업고 나오긴 왜 그랬을까?"

"농담이고요. 나 어제 오선권을 만났어요."

"무슨 일로 만났어요?"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한잔 했지요."

"..."

"아직도 미워하고 있어요?"

"아주 가벼워졌어요."

"어떻게?"

"믿지 않겠지만 다 털어버린 것 같아요. 새처럼 가벼워졌어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오. 그 친구 굉장히 불우해진 것 같더군요."

했으나 불우해진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상길의 이야기는 들쑹날쑹이었다. 길선생이라 불렀다가 여옥씨, 존대를 하는가 하면 반말 비슷하게 했고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까지 다가오듯 말했다가는 훌쩍 멀어져갔고 질문을 했다가는 대답이 없으면 그냥 떠내려 보냈고, 그 어느 것에도 깊이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말을 신뢰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허황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기는 옛날부터 그러한 말버릇이 다소 있기는 있었다. 최상길은 지금 산뜻한 가을에 묻혀 있는 고궁인지 공원인지 이곳에 여옥과 함께 머물면서 심심파적으로 변죽이나 치고 있는 기분인지 모른다. 그의 마음은 사실 그러저러한 얘기와 상관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참 아까 임교장 건강을 물었을 때 임선생의 떨떠름해하던데 상태가 안 좋은 거요?"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안 좋았지요. 초상이 두 곳에서 날 뻔했거든요. 명희가 한 말이에요. 하지만 요즘 많이 좋아지셨는데 산에 가시려고 임교장 스스로 굉장히 노력을 하셨다는 거예요."

"병이란 병자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않소?"

"그분 병이, 그러니까 그분 뜻에서 난 병이니까요. 마음만 고쳐 잡수시면."

"산이라니, 어느 산에 가시는데?"

"지리산요. 그곳 절로 가실 모양인데 아마 며칠지간에 가신다나 봐요. 절의 주지하고 안면이 있고 뭐 상당한 인텔리라니요? 서울 사람이래요."

"아아 소지감 형님 말이군."

"? 최선생도 알아요?"

"길선생은 알아요?"

"...?"

"언젠가 만난 것으론 기억하는데? 임선생 와 계실 때, 그러니까 뱃머리에서 인사하지 않았어요?"

"아아, , 그렇지만 스님은 아니었잖아요?"

"그 후에 출가했지요."

"그래요?"

어리둥절하던 여옥은 놀란다.

"세상이 좁네요."

"그보다 임교장은 며칠지간에 산으로 떠난다 했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창경원에서 나와 전차를 탔다. 그리고 여옥을 집까지 데려다준 최상길은

"나 이제부터 임교장댁에 가는 거요."

서두르며 말했다.

"저녁도 안하구요?"

오라범댁이 서운해 하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녁은 그 댁에 가서 얻어먹지요."

왜 갑자기 서두르며 허둥대는지, 여옥은 어리둥절해한다. 최상길의 그 같은 모습은 소년 같기도 했다.

"오빠도 안 만나고 가시려구요?"

겨우 말을 골라낸 것처럼 마루 끝에 우두커니 걸터앉은 여옥이 말했다. 아주 피곤해하는 낯빛이기도 했다.

"다음에, 다음에요."

하고 최상길은 대문을 향해 나가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한 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곧장 가서, 전에 한번 온 적이 있는 효자동 임명빈집으로 찾아 들어간 최상길은

"교장 선생님!"

크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무도 안 계신가?"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넌방 방문이 열리면서 막내 희재가 나왔다.

"뉘신지요."

하고 물었다.

"나 최상길이란 사람인데 교장선생님 계신가?"

"."

희재는 마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최상길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돋보기를 끼고 드러누워서 책을 보고 있던 임명빈이 몸을 일으켰다.

"이게 누군가?"

깜짝 놀란다.

"오래간만입니다. 교장선생님."

제자도 아니었고 후배도 아니었으며 교장과 교사의 관계였으므로 임명빈은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의아해하고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허허, 이거 참 이게 몇 해 만이지요?"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아닙니다."

최상길은 허리를 꺾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절을 했고 임명빈은 자세를 바로하며 절을 받는다.

"전에, 학교를 있을 적에 한번 와본 일이 있습니다만 집은 옛날 그대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하긴, 사람만 속절없이 변했지요. 하하핫..."

"오락가락하더니, 보시는 대로 구차스럽게 살아 있질 않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러시면 저희들은 어디서 쥐구멍을 찾습니까."

"지난봄부터 산으로 갈려고 작심한 뒤 무진 애를 썼지요. 산에는 꼭 가야겠다 싶어서, 산에 갈 계획이 없었다면 아마 초상 치르지 않았을까? 하하하..."

임병빈 얼굴에서 부기는 많이 빠져 있었다. 손도 통통하게 부어 있었는데 이제는 손등에 힘줄이 나타나 있었다.

"산에는 언제 가시려구요."

"이삼 일 뒤에나 떠날까 하는데 맘이 설레는구먼.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오.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거리귀신이 되는 거야 상관없으나 데리고 가는 사람들한테 그 무슨 몹쓸 짓이냐 말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심약한 말씀 마십시오."

"그는 그렇고 최선생이 이번에는 좋은 일 했더구먼."

"..."

"고맙소. 여옥이는 어릴 적부터 내 누이하고는 단짝이어서 그 아이를 잘 아는데 그 아이를 살려낸 것은 순전히 최선생 혼자 힘이었다 그러더구먼."

"..."

"이런 칼날 같은 세상에 누가 나서서 그러겠소."

최상길은 그 얘기가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실은 길선생댁에 들렀다가 급히 오는 길입니다만."

하며 말을 꺼내었다.

"...? 무슨 일로?"

"교장선생님께서 산에 가실 거라는 얘긴 거기서 들었습니다. 지감형님이 계시는 절로 가신다기에."

", 그럼 그 소지감이라는 분을 최선생은 아시오?"

"알다마다요. 잘 알지요."

"이거 참, 우연치고는, 하여간,"

하다가 말이 막혔는지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나서 임명빈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분하고 안면이 있을 뿐이오. 그분에 관한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은, 내 친구들 중에는 그분하고 교분이 깊은 사람도 더러 있고 해서, 그분의 집안 내력이나 학력이며 평생을 방랑인으로 산다는 것도 알지요. 출가했다는 사실만은 근자에 와서 알았으나 하여간 내가 산행을 결심한 것도 그분 때문인데 뭐랄까,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강남으로 벗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그런 의욕 때문에 칠팔 개월 동안 그나마 이 정도로 기력이 회복된 셈이오."

임명빈은 어눌한 말씨로 지루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 그러시다면 내일 밤차로 서울을 떠나지요. 그렇게 하신다면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최선생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임명빈은 입을 함박같이 벌리며 웃었다.

"그거 조옿지. 아주 잘됐구먼. 내일 밤차라 했소? 그럼 그럼, 서울을 떠나지, 떠나고말고."

여간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떠날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다.

효자동 명빈이 집은 밤에도 그랬었지만 이튿날 낮에는 더욱더 술렁거렸다. 명빈과 밤을 함께 보낸 최상길은 조반을 먹은 뒤 볼일이 있다하며 나갔는데 나갈 때 기차표는 자기가 끊어오겠다 하고 말했다. 기별을 받은 명희가 왔고 분가한 장남 성재 내외, 출가한 딸 옥재 내외도 왔다. 명빈이나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물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던 집 전체가 물속에서 떠오른 듯, 근심과 무기력에서 일어서는 듯 활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명빈은 모처럼 지팡이를 짚고 바로 뒤켠에 있는 서의돈집을 방문하여 근황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산으로 간다는 작별 인사를 했다.

"이번에 가거들랑 탈병하고 돌아오게."

백발이 성성한 서의돈의 늙은 부친이 말했다. 대쪽같이 곧았던 노인, 아들은 형무소에 갇힌 몸이 되었으나 그는 아주 기강해 보였다. 애당초의 계획은 막내 희재와 장남 성재가 임명빈을 산까지 데려다주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마침 최상길이 동행한다는 것이어서 직장을 가진 성재는 빠지게 된 것이다. 역에는 명희와 성재 그리고 환국이가 전송하러 나왔다. 임명빈의 집에 기거하면서 중학교를 마친 환국은 성재와 희재, 그들과 형제같이 지냈으므로 서로 반가워하며 근간의 소식을 묻곤 했다.

"희재야, 진주서 하루 쉬어가는 것, 알지?"

"."

환국은 그래도 이들 일행이 폐 끼칠까 보아 여행을 강행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다짐하듯

"진주서 꼭 하루는 쉬어가셔야 합니다. 당일로는 무리니까요."

임명빈을 보고 말했다. 임명빈은 대합실 의자에 지팡이를 세우고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수화물로 부쳤고 희재는 가방 하나만 들고 있었다. 최상길은 개찰구 근처에서 오락가락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높이 매달린 전등 아래 이등대합실은 붐비고 있지는 않았지만 개찰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며 창밖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꼭 나아서 돌아오셔야 해요, 오빠."

명희의 말이었다.

"나 그만 안 돌아올란다."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것을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명빈은 누이에게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죽겠노라, 그런 뜻도 있는 것 같았다.

"좋아요."

명희는 명쾌하고 활발하게 말했다. 호각을 불며 유치원 원아들 행진에 앞장섰을 때처럼.

"안 돌아오셔도 좋고 머리를 깎으셔도 상관 안하겠어요. 건강만 회복하세요, 제발."

좋아요, 했을 때와는 다르게 명희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젖는다. 산으로 떠나는 명빈의 병든 몰골을 보면서 명희는 이들 세대의 종언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감옥에 유폐되었거나, 친일파로 전락되었거나 해외로 탈출했거나 혹은 낙향하여 숨어버렸거나 아니면 칼끝 같은 정세를 관망하여 불안하게 사업체를 붙들고 있거나, 어쨌거나 뿔뿔이 흩어지고만 이들의 세대, 젊었던 한철 의기양양했으며 비분강개하고 3.1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이들의 세대, 무너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을 명희는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것이었다. 개찰구 근처에서 서성대고 최상길, 동경까지 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왔건만 그도 갈 곳이 없는 사람이다. 보통학교를 나와 어느 부서에 소사로 어렵게 들어가서 천신만고 서기가 된 사람보다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바로 저와 같은 인텔리다. 명희는 상해에서 남천택이 만났다는 이상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임명빈이 그를 아꼈던가. 누이와의 로맨스를 은근히 기대하기까지 했던 철없이 낭만적이던 문청 시절의 임명빈, 늙고 병든 그의 모습에서, 그의 모습을 통하여 명희는 피폐했을 이상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상해 뒷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이상현, 이들의 세월은 모두 무위한 것이었으며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기는 무위하게 보낸 세월이 임명빈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

. 무능했던 것도 어디 임명빈만의 몫이겠는가. 조선의 세월 그 자체가 무위했으며 무능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소리 지를 땅은 어디 있었으며 주장할 연단은 어디 있었으며 터전에다 말뚝 박고 줄 쳐서 내 것 만들 권리는 없었다.

명희는 서울역에 나와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명빈이 찾아가는 그 절의 스님이 여수에서 여옥이랑 함께 부둣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명희는 뚜렷이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임명빈이 마치 마지막 희망의 줄인 양 찾아가는 그 절 그곳의 스님, 말할 수 없이 안쓰러우면서도 어느덧 명희 자신조차 소지감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안 돌아와도 좋고 머리를 깎아도 상관 아니하겠으니 제발 건강만 회복해달라, 그 말은 진정이었다. 불안해하는 눈들을 남겨놓고 기차는 서울을 떠났다. 밤기차 침대칸에서 희재가 내미는 수면제를 먹고 임명빈은 비교적 숙수하는 것 같았다. 최상길도 잠이 들고, 희재만은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삼랑진에서 진주행으로 열차를 갈아탄 뒤에는 임명빈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희재는 여러 번 괜찮겠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최상길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임명빈은 시트에 머리를 얹은 채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그는 심한 두통을 참고 있었다. 안색이 아주 나빴다. 최상길은 차창 밖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넋 잃은 사람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겠습니까?"

희재는 겁에 질린 듯 최상길에게 물었다.

"?"

하며 얼굴을 돌린 최상길은

"걱정 말게. 성한 사람도 기찰 오래 타면 지치는 게야."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허허허, 걱정 말래도. 해골이 되어 목포 감옥에서 나온 길선생도 서울까지 왔어."

"."

희재는 우물쭈물, 공포심을 가라앉히려고 애썼지만 달리는 열차 속에서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까? 나이 어린 그는 전전긍긍이었다. 최상길의 말은 임명빈에게 돌팔매를 친 것처럼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런 말이기도 했다.

'당신은 잉여물이오. 없어도 되는 인간이오, 도대체 뭘 했다고, 가냘픈 여자도 옥고를 치르고 끈질기게 일어서는데, 줄줄이 나와서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멀쩡한 장정 두 사람이 박달나무같이 양편에서 껴붙들고 가는데 어리광 부리는 거요? 마음의 병이 왜 나지요? 그 따위 맘의 병은 북만주 얼음판에서 한 바퀴 뛰면 싹 없어지는 병 아닌가요?'

누군가가 귓가에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호사하는 겁니다. 산으로, 절로 정양하러 가는 사람이 뭐 그리 흔한 줄 아시오?'

임명빈은 눈을 번쩍 떴다.

"아버님."

희재가 불렀다.

"목 마르시면 물 드릴까요?"

"오냐."

희재는 준비해 온 물통에서 보리차를 컵에 부어 내 밀었다. 그것을 몇 모금 마신 뒤 임명 빈은

"최선생."

"."

"진주서 하루 묵는 일 말씀이오."

"."

"아침나절 진주에 도착할 것인데 온종일 쉬고 밤에까지 묵는 일은 좀."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느니 차라리 잠시 쉬었다가 하동 평사리에 가서 하룻밤 묵는 것이 어떻겠소?"

"글쎄올시다. 교장선생님께서 몸이, 지탱될는지요."

"아버님, 그건 안 됩니다. 환국이 형도 당부 당부하던데요."

"아니다. 내 생각에는 하동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

"어째 그러십니까 아버님."

"내 말하는대로 하자꾸나."

"날 받아놓은 것도 아니고 내일이면 어떻고 모레면 어때서 그러십니까."

반대하는 아들은 내버려두고

"최선생."

"네 말씀하십시오."

"최선생은 진주 최참판댁을 아시오?"

"모릅니다. 그런 부자가 있다는 것밖에는 모르지요."

"그 댁과 우리 집의 인연은 삼십 년 넘게 각별한 사이였소. 내가 그 댁을 찾아가서 며칠을 묵기로 허물될 것도 없소만, 그러나 요즘 그 댁 형편이, 병자가 가서 하루라도 묵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말씀이오."

"아버님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명빈은 아들을 제지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댁 바깥주인이 지금 감옥에 계시오. 계명회 사건 때 주모자로 징역살이를 했는데 이번에 사상범 예방구금에 걸린 거요."

"계명회 사건이라면 꽤 오래된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부인 혼자 노심초사 고통을 받으시는데 무슨 낯으로 한가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렇기도 하군요."

최상길은 좀 생각을 해보는 듯 한참 후에 말을 했다.

"아버님,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일을 따질 만큼 양가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희재가 말했다.

"소원하고 안하고가 문제냐? 사람의 도리, 예절이라는 게 있느니라."

"오히려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도리에 어긋나지요."

"그러면 너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를 묵고 가자 그거냐?"

"...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거 보아라. 사람이 방편으로 살면 못쓰는 법이다. 그것은 왜놈의 사고방식이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신의지 방편으로는 길게 못 가느니, 요즘 풍조가 너에게도 미쳐 있다니 한심스럽구나."

희재가 풀이 팍 죽는다.

"그것은 아버님을 위한 충정 때문이지요.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최상길이 희재의 입장을 세워준다.

진주에 도착한 일행은 결국 명빈의 고집대로 버스 차부 근처에 있는 여관에 들었고 조반을 먹은 뒤 명빈은 휴식을 취했으며 그러는 동안 희재는 버스표를 사러 나갔다. 하동행 버스 속에서는 임명빈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상당히 그는 견디기 힘들어했다. 해서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나룻가 주막에서 오랫동안 명빈은 누워 있다가 해거름에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강바람이 싱그러워 그랬던지 명빈은 기차와 버스에서처럼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뱃전을 안고 비스듬히 앉아서 해가 떨어지는 산마루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굽이굽이, 어려운 여행을 절반쯤 강행한 셈이다. 희재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돌았다. 그러나 나머지 산행이 문제였다.

해가 아주 떨어지고 박모가 사방에서 묻어왔다. 떠나가는 밝음의 날갯짓이라도 있었는가, 바람에 강물이 거슬거슬 잔물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이오. 이런 곳에 와보는 것이. 그러고 보니 나는 서울 우물의 개구리였구먼."

명빈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감형님은 서울내기였지만 팔도강산 안 댕겨본 곳이 없습니다. 교장선생님한테는 좋은 말벗이 되겠군요."

"말벗이라니요?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어느 모로 보나 그분은 나보다 한수 위가 아니오."

"그러시다가 실망하시면 어쩌시게요? 그 형님한테도 뚫려 있는 구멍은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상길은 임명빈의 지나친 기대에 제동을 걸 듯 말했다.

"그러나 그분은 평생을 방황하며 대처도 아니하시고,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지 않겠소?"

"그건 그렇습니다."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들어간 일행은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퍽 다행으로 생각하며 긴장을 풀었다. 본시부터 장연학은 임명빈과 희재하고는 익히 아는 사이였다. 환국이가 오 년 동안 서울에서 공부했고 길상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내왕한 사람이 장연학이었으며 대소사에 관하여 서로 양해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로가 편안한 사이였기 때문에 처음 와보는 집이었건만 조금도 낯설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음속으로 이들 부자는 놀라고 있었다. 유서 깊은 대가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집의 규모가 웅장한 데 놀란 것이다.

"여독이 풀릴 때까지 쉬십시오. 떠날 준비는 언제든지 돼 있인께요."

내려올 날짜는 정한 바 없으나 명빈이 산으로 간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연학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이 말했다. 밤에는 명빈이 누워 있는 방에서 최상길과 장연학은 술잔을 기울였다. 신분의 차이 같은 것 개의치 않고 그들은 왠지 모르게 의기투합하여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명빈은 술자리에 끼어들지 못하는 것도 억울했으나 소탈한 최상길의 태도가 몹시 부러웠다. 그것은 자기처럼 서울내기가 아니고 모두 남도 태생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져서 모두 잠들었다. 소쩍새가 울고 뻐꾸기도 울었다. 이름 모를 밤새도 호호호 ..... 하고 울었다. 몸은 천근만근같이 내려앉는데 명빈은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꿈만 같았다.

'어쩌면 서울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생각하는데 명희의 말이 떠올랐다.

"안 돌아오셔도 좋고 머리를 깎으셔도 상관 안하겠어요. 건강만 회복하세요, 제발."

새 울음소리는 자꾸자꾸 들려왔다.

이튿날 장연학은 며칠 더 묵었다가 떠나라고 권했으나 과히 안색도 좋아 뵈질 않은데 명빈은 기어이 떠나겠다고 했다. 그를 위해 산 밑까지 갈 수 있게 소달구지가 준비돼 있었다. 소달구지 위에는 들것도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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