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5-1-1
토지 5부 제1편 혼백(魂魄)의 귀향
1장 신경의 달
아이들은 초저녁에 잠이 들었고 덥다. 덥다, 흐느적거리듯 중얼거리며 저녁 늦게까지 설거지를 하던 보연이도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잠에 떨어진 모양이다. 상의 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홍이는 식당을 겸한 거실에 앉아 연거푸 담배를 피우다가 사무실에서 들고 온 신문을 펴든다. 신경서 발행하는 1940년 8월 1일자 "낙토일보"다. 전에 없이 신문을 들고 온 것도 그렇고 이미 사무실에서 대강 훑어보았는데 새삼스럽게 왜 다시 펴드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짤막한 기사가 있었다. 한구석으로 밀어붙여 놨지만 호열자에 관한 기사가 실리기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며 그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상당히 확산되어 인심은 흉흉했다. 뿐만 아니라 호열자가 와전되어 그랬는지 아니면 그럴 만한 꼬투리가 있었는지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풍문도 끈질기게 나돌고 있었다. 금줄을 치고 발생 지역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떼죽음이 있었으니, 심지어는 발생지역에 불을 놓아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태워 죽였다는 끔찍한 소문도 있었다. 호열자에 관한 기사 윗단에는 스파이 혐의로 취조받던 '로이터' 통신사 동경 지국장 '코쿠스'가 투신자살한 사건을 다루었는데 병원으로 실어가고 어쩌고 했다 해서 제목을 뽑기를 일본 무사도의 정화라,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아예 염치라는 것이 없는 종자들이다. 아이들까지 난도질해서 죽여놓고, 남경에는 아직 그 피 냄새가 남아 있을 건데 영국 놈 시체 하나 병원에 떠메다 놨다 해서 뭐? 일본 무사도의 정화라고? 뱃가죽 터지게 웃을 일이다. 개새끼들!"
시원할 것도 없는 욕설을 퍼붓는데 별안간 아이들 방에서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신문을 팽개치고 홍이는 급히 방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외마디 소리는 보연의 잠꼬대였다. 맨바닥에 배게도 없이 누운 보연은 흠씬 땀에 젖었고 전등 이래 얼굴을 백랍같이 희었다. 땀을 닦아주고 홍이는 보연을 안았다. 몸뚱이가 여름날 엿가락같이 팔 위에서 축 늘어졌다. 그 가벼워진 체중에 홍이는 내심 놀라고 당황한다.
"다, 당신 왜 이러요? 제가 뭘 어쨌기에..."
실눈을 뜨고 중얼거리던 보연은 어리광스럽게 홍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안방으로 안고 가서 침상에 누이는데 보연은 이내 잠에 떨어지고 만다. 아이들 방으로 되돌아온 홍이는 잠든 두 아들의 모습은 한 동안 내려다보다가 거실로 나온다. 지난 봄, 조선으로 나갔던 보연은 두 달 가량 친정에서 정양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썩 좋아 뵈질 않았고 피곤해야하는 것도 전과 다름없었다.
"아들 딸, 일월 겉은 자식들 두었겠다, 살림은 일고 서방은 제집을 하늘겉이 우다아쌌는데 머가 모지라서 그러노. 복에 겨워 밤낮 골골거리는 기가. 나겉은 년이사 죽고 저버도 그놈의 저승차사가 잡아가야 말이제. 아이고오 시장스럽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강은 건널수록 넓고, 내 팔자는 와 이렇노. 넘들이 복타로 갈 적에 이년은 살강 밑에서 자불고 있었든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도 있습디까? 답답한 사람은 누님이 아니라 접니다."
뾰르둥해서 보연이 대꾸하면
"그러이 하는 말 아니가. 이 좋은 집에서, 하기는 너거들 나보고 샛집이라 하더라마는 내가 없이 사이께로 그러는 모앵인데 집 사돌라 안 칼 긴께 비밀로 할 것 없다. 너거 성시에 이만한 집 못 산다믄 넘들이 믿겄나?"
"뭐가 무서워서 내 집을 샛집이라 하겠습니까. 못 믿우면 관청에 가서 알아보시오."
"하여간 비단가리 하나 없는 나한테 비하믄 아프다, 아프다 해사아도 올케 니사 청충당석에서 하품하는 꼴이제. 사람이란 예사 팔자가 늘어지믄 아픈 데가 많아지네라."
공장 근처에 허술한 집에서 홍이 가족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작년 봄의 일이다. 상의는 제 방이 필요할 만큼 과년해졌고 보연의 건강도 문제였으며 한편 홍이 벌여놓은 사업의 규모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누추한 집에 산다는 것이 이상하게 비쳐질 수도 있는 일, 해서 그 점도 고려하여 이사를 결정했던 것이다. 집은 햇볕 바르고 넉넉했으며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셋집인 것만은 사실이다. 임이 말대로 집을 살 능력은 있었다. 다만 뿌리박고 살 수 없는 형편,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뜨내기 생활 방식을 청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식구들을 조선으로 보내버릴까? 저 사람 건강도 그렇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만 보연이 동으할 것 같지 않았다. 지난봄만 해도 안 가려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보내면서 홍이는 신신당부를 했다.
"몸이 온전해질 때까지 돌아올 생각 말어. 장모님께 송금할 테니 돈 아끼지 말고 보약 먹도록, 알아들었나?"
"예. 하지마는 무슨 죽을 병도 아닌데 아이들 두고."
"아이들 다 컸어. 여기 걱정할 것 없다."
그러나 보연은 아이들과의 이별도 어려웠겠지만 남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 장이의 존재, 장이와의 사건이 있은 후 보연은 늘 그런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 두 달 만에 서둘러 돌아왔다. 그는 홍이와 함께 아니면 결코 귀국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담배를 붙여 물고 홍이는 피어나는 연기를 막연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방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내리쬐던 뙤약볕과 열풍이 일렁이던 한낮의 거리를 생각하면 기온은 많이 떨어졌는지 창밖에서 스며드는 외기가 제법 서늘하다. 이미 자정은 지나갔다. 홍이는 정수리를 가르며다가오는 한밤의 정저이 전혀 새로운 경험처럼 불 것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거대한 도시 신경의 깊은 밤, 요란하게 울리는 심벌즈와 달콤한 클라리넷의 선율과 휘황한 불빛 아래 난무하는 군상, 완숙한 과실 냄새가 감도는 환락가에도 하마 불은 꺼졌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찾아들어 황주를 마시는 뒷골목 목로는가. 어둠 속의 사악한 음모 때문에 도시는 지금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군마와 일장기와 부의의 종언을 기다리는 숨 막힌 병실인지 모른다. 덧없는 집념의 망령들이 떼지어 거리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도시는 편안한 잠, 꿈을 꾸지도 않는다. 휘고 일그러지고 비틀거리는 도시, 일본인은 말하기를 왕도낙토라, 왕도낙토의 수도는 낙토 중에서 낙원일진대 그러면 그것은 부의의 왕도인가 히로히토의 왕도인가. 만주인의 낙토인가 일본인의 낙토인가, 하 참, 사변의 허황함이야말로 칼을 능가하는 살육이요 유린이며 강탈의 무기인지 모른다.
홍이는 손끝 가까이 타들어오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다. 필요 이상 힘을 주어 누르고 문지르는데 별안간 몸이 붕 뜨면서 눈앞이 캄캄해졌고 어지러웠다. 뿌옇게 뭔가 보였다가는 먹물같이 새까맣게 닫혀지는 의식의 바닥에서는 그네를 타는 듯도 했고 배를 탄 듯 흔들리는데 그 배는 도시였다. 신경 전체가 떠오르고 있었다. 떠올라서 기구처럼 하늘을 떠돌며 흐르는 것이다. 신경의 인구에 갇혀 있으며 자신과 아내와 아이들도 그 속에 같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지상을 떠나가고 있다, 가고 있다, 하고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눈앞이 환해지며 섬광이 교차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뭔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숱한 건물들이었다. 한없이 넓고 하얀 가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카키빛 군용차, 마차, 인럭거, 바람에 서걱거리던 가로수, 무리지어 가는 사람들, 꽃잎 같은 아이들이 있고 행진하는 일본 병정, 그 모든 것이 소리 죽인 채 땅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질러서
"그만 하늘하고 땅하고 딱 붙어서 한날한시에 세상 끝내부맀이믄 좋겄다! 이래가지고는 못 산다!"
생모 임이네의 새된 고함이 귀청을 찢듯 들려왔다. 홍이는 진저리를 치며 가위 놀림 것처럼 몸을 흔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 속의 행동이었을 뿐이다. 비몽사몽이었는가. 잠시 넋이 나갔던 것이었을까. 멀쩡하게 두 눈 뜨고 앉아서 무슨 그런 해괴한 것을 보았는지,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가 비로소 홍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몇 번 고개를 흔든다.
'도대체 무슨 징조일까?'
기분이 좋을 리 없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밤이 오싹오싹 심장을 쬐듯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자정이 넘었는데 잠 이루지 못하는 일이며 상상해본 일조차 없는 그 따위 환각에 빠진 것은 무슨 까닭인지 참으로 희귀한 체험이었다. 홍이는 애써 그것을 털어버리려 했다. 특별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피곤하여 그렸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강조했다. 자신도 보연이 못지않게 지쳐 있었던 것이라고. 어쩌면 얼마 전에 만난 송장환과의 대화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어서 그런 환각에 빠졌는지도 모른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것은 이유가 될 만했다.
달포 전에 홍이는 용정촌을 다녀왔다. 송장환의 형, 영환의 부고를 받고 갔던 것이다.
장례에 참석하기에 앞서 홍이가 찾은 곳은 월선의 묘소였다. 공노인 부부의 묘도 그 부근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산재해 있는 산속의 무덤 세 곳을 차례차례 돌며 술을 부어 놓고 절을 한 뒤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 말이나 감회가 없었다기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 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넋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산새울음, 그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온 홍이는 상가로 향했다. 송영환의 후실 염씨가 흐느껴 울곤 했지만 장례는 쓸쓸하고 조용했다. 장례가 끝난 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동성반점의 진씨와 매갈잇간 박서방이 남아서 술상 앞에 앉았다. 송장환은 그들에게 술을 권했고 홍이는 오래간만에 송장환 술잔에다 술을 따랐다.
"유섭이어마임으 소식 상기도 모릅매까?"
술잔을 비우고 나서 박서방이 느닷없이 물었다.
"모르지요."
했으나 송장환은 깊은 주름으로 팬 박서방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집안 사정에 소상한 그가 왜 새삼스럽게 그 일을 묻는가. 그 물음에 기분도 과히 좋질 않아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믄 이 세상사람 앙임매. 어디매든 살아 있다문 흔적으 없을리 없지비. 그렇잲은가?"
"십중팔구... 세상 떠났겠지요."
송장환은 시선을 떨구었다.
"설사 살았대두 부부라는 거느 돌아누우문 남이라 합두구만. 맞는 말입매. 그렁이 왈가왈부할 것 없습매. 하지마느 아들 유섭이느 어째 오잽매? 어째 앙이 오느냐 말이. 상주 빠진 초상 되우 섭섭했슴둥. 송씨 가문 초상으 꼬락지 그래 되겠능가. 남보기 우세스럽고 한심하지 안았음?"
올곧잖게 따지듯 말했다. 진씨와 홍이는 잠자코 있었다.
용정촌의 명망가 송병문 씨, 그가 생존했던 전성 시대 박서방은 송씨댁 마갈잇간을 맡아 일해왔다. 송병문 씨가 세상을 뜬 뒤 집안은 풍비박산, 사업에 실패를 거듭한 송영환이 아편과 방탕으로 몰락이 가속화되었을 때, 팔기만 해봐라 그날로 불 싸질러버리겠다 한 사람이 박서방이었다. 덕분에 송영환은 유리걸식을 면했고 매갈잇간 수입으로 여명을 잇다가 간 것이다. 동성반점의 진씨 역시 청인이지만 송씨 일문과는 선대 때부터 인연이 깊었고 송씨 집안의 파산을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용정촌의 순수한 토박이였었다.
"송씨 집안의 우세라... 옛날 옛적에 고랫적 얘기겠지요. 우세할 송씨 집안이 남아 있기나 합니까? 누가 기억하겠어요. 한심스러울 것도, 우세스러울 것도 없소이다."
"그런 말씀 마시오."
하다가 진씨는 눈에 티가 들어갔는지 눈을 비비면서 말을 이었다.
"재물로 가문에 빛나는 것은 아니오. 재물은 없어졌으나 인물로 가문이 남는 거요. 송병문 선생의 뜻도 용정에 남아 있구요."
중국어로 정중하게 말했다.
"글쎄올시다... 과연 그럴까요?"
"돌아가신 분의 뜻을 받들어서 열혈적 애국심으로 행동한 송선생도 물론 조선인의 모범이지만 절세가인을 닮아서 자태 용모가 수려하고, 듣기로는 재능 또한 발군이라 하니, 송유섭은 과히 송씨 가문의 주옥이오. 반드시 큰 인물이 되어 지하에 계시는 조부님을 기쁘게 할 것이오."
진씨는 옛날부터 유섭의 모친 장씨를 말할 적에는 절세가인이라 했다.
"절세가인이문 무시래? 집안으 쑥밭 만든 안깐이 뉘기관디?"
한방 쏘듯 박서방은 불만을 터뜨렸다.
"절세가인에게 무슨 죄 있소? 가인으로 태어난 죄밖에는."
"흥! 양귀비 같은 말으 합매다."
티격태격하는 것을 말리듯 송장환이 말해다.
"실을 유섭이 그 아이, 형이 세상 떠난 것을 모르고 있어요."
"무시기라?"
"연락할 길도 없지만 지금 어디매 있지비? 그 아이가 북경으 대학교 댕긴다 하잖앴습둥?"
박서방은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다.
"대학 졸업은 벌써 전의 얘기구요. 학교에 남아서 학문의 길로 가려 했었는데... 유섭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나도 확실하게 모릅니다. 확실하게 모르는 게 요즘 세월 아닙니까? 다만 풍문으로 들은 얘깁니다만 연안으로 갔다는."
"그러문 유섭이느 공산당이라 말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박서방은 공산당이 싫습니까?"
우물쭈물하다가 박서방은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습매. 뉘기든 왜놈우새끼들만 몰아내주므느 그거 다 우리 편 아님둥? 앙이 그렇습매?"
동의를 구하듯이 진씨를 쳐다본다.
"그럼, 그럼, 하하핫하... 옳은 말이오. 국공이 합작해서 왜귀를 치는데 싫고 좋고 따질 것 없어요. 모두 동지, 당신들과 나같이 친구지요. 아암 친구구말구."
진씨는 비대한 몸을 흔들며 확 트인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높이 쳐들며
"건배합시다. 국공합작을 위하여! 동지들을 위하여,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술 몇 잔 마시고서리 주정임둥? 초상집으 와서 우스거 건배? 진대인도 한물 갔소꼬망."
타박을 준다.
"하, 참 그렇군."
진씨는 높이 쳐들었던 술잔을 내리며 슬그머니 웃는다. 홍이도 웃었다. 송장환만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의 죽음이 그를 울적하게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의 죽음이 그를 울적하게 한 것이지만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안을 결딴내고 무능한 삶을 마친 고인에 대하여 아무래도 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연해주 형편은 도통 알 수 없습니까, 선생님."
처음으로 홍이 입을 열었다.
"주갑노인이 걱정되어 그러나?"
"네."
"지금으로선 알 갈이 없다."
"하얼빈의 운회약국에서도 그쪽 소식 전혀 모를까요?"
"운회약국에서 아는 일을 옆에 사는 내가 어찌 모르겠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댁 윤선생께서는 사업상 국경 지대 출입도 잦고 해서 더러 듣는 얘기도 있을 텐데..."
미련을 남기며 홍이는 말끝을 맺지 못한다.
"국경이 삼엄해서 모피 장사는 벌써 그만두었다. 지금은 약국만 경영하고 있어."
"..."
"삼강 방면의 독립군이 가끔 월경하여 소련으로 넘어간다고들 하는데 확실치 않고, 윤광호 씨 부처도 연추의 부모님 걱정을 하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심운구 노인도 노심초사, 연로하여 그럴 테지만 조석으로 연추는 들먹이며 심란해하신다. 하더군. 그분들 형제지간의 우애가 보통이 아니거든."
진씨가 말을 받았다.
"그분들 우애가 깊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아는데 동생 심운회 씨가 연추에다 집을 지을 적에 심운구 씨가 중국인 벽돌공까지 보냈다 하더구먼."
"혁명전의 일이었지요."
"생각해보면 그분들 이력도 남다르고 기구하지. 형은 청국에 귀화하여 하얼빈서 약종상을 시작으로 거상이 되었고 동생은 아라사에 귀화하여 군납업자로 자산을 모았고 그러면서도 조국을 위하여 재물을 쓰고 그 많은 독립지사들 뒷바라지, 쉬운 일 아니지요. 아라사의 혁명으로 어떤 풍랑을 겪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앞일은 더욱더 캄캄하오. 작은 섬나라 야만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명운이 그야말로 풍전등화라."
진씨는 탄식하듯 말하면서 굵은 목덜미를 두툼한 손바닥으로 쓸고 있었다. 팔자눈썹에 작은 눈, 눈동자에는 지혜로운 빛이 있었다.
"역시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요지부동이군요."
홍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랑이? 무스그 말잉야?"
산소에서도 술을 마셨고 해서 취기가 쉬이 도는지 박서방은 공연스리 홍이를 노려보며 따지듯 말했다.
"네, 저기, 재남재북으로 모두가 갈리어 만날 수 없게 됐다 싶어서 한 말입니다."
"음... 그렇기는 합지. 이제느 아는 사람 보기도 쉽잲쿠. 모두 떠나고 죽구 세상이 얼매나 변했능가."
"..."
"연해주 말이 났으이 가스댁, 옥이어망이 말입매. 딸으 따라 가덩이 굶잲쿠 사는가 모릅지. 하기느 낯선 땅 그 고생으 말해 무실하겠습꽝이. 지난날 용정이 불타고 재만 남았을 때 재봉소 일자리 잃고서리 어린 간나아 옥이를 끌구 회령으루 가든 가스댁이 되새 불쌍하덩이. 생각으 해보랑이, 상기도 어제 일 같잲이요? 삼십년이 지난 옛일인데 말입매."
모두 말이 없다. 무시무시했던 화재, 용정이 전소하다시피 생활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린 그 재난을 이들은 함께 겪었다. 덧없이 날아가 버린 삼십 년의 세월이 새삼 놀랍기도 했던 것이다.
"그 고생으 했이문 말년으 낙이라도 있어야 옳잴까? 박복하답매. 팔자가 기박하다 말이."
팔자가 기박하다는 것은 길상과의 그늘졌던 인연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그러나 크게 고생은 안 할 겁니다. 심운회 씨가 돌봐주고 정호 식구들도 그곳에 자릴 잡고 사니까 외롭잖을 거구요."
했으나 자신이 없어하는 표정의 송장환은 담배를 찾는다.
"잘못한 기야. 연해주로 앙이 가는 긴데."
"두매가 한사코 보냈지요."
"어째서? 옥이느 교사질해서 살았잖았능가. 생활비 달라 했다 말이? 책임지라 했능가?"
"사사건건 답답한 말만 하는군요. 강두매가 주색잡기, 노름하면서 가족들 내몰라라 했으요?"
송장환은 역정을 내고 박서방은 머쓱해진다.
"경찰에서 강두매 잡겠다고 혈안이 돼 있는데 가족들 신변인들 안전하겠어요? 두매가 깊이 생각해 한 일이니 염려 마시오."
"그거르 뉘가 모르관디?"
하다가
"소련이 그냥 단숨에 밀어붙여야 했음. 무시레 중도지폐했능가!"
별안간 어성을 높이며 이번에는 박서방이 역정을 냈다. 장고봉, 노몬한 두 사건을 두고 억울해하는 말이었다. 이별하고 고생하며 불행해진 조선인의 처지는 모두 일본으로 인한 것인 만큼 일본을 섬멸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억울하다는 박서방의 심정 토로, 항의였던 것이다. 두만강 하류, 장고봉에서 발생한 재작년의 사건도 그랬었지만 만몽국경 하루하 강에서 지난해 소련과 일본이 충돌한 노몬한 사건도 국경 분쟁이 발단이었으며 장고봉에서보다 훨씬 규모가 큰 전투였었다. 소련의 막강한 화력과 최신식 무기는 가공할 만한 것으로서 초장부터 일본은 참패의 연속이었고 전세 만회의 비장한 희망을 걸었던 고마쓰하라 중장 지휘 23사단조차 전멸하여 일본을 경악하게 했던 것이다.
"노몬한에서는 왜눔우 군대가 몰살으 했다 하재능가. 그랬이문 밀구 나가얍지 무시레 협상으 하내야. 머저리 새끼들!"
"독일이 뒤통수 칠까봐서 그랬겠지요. 그리고 소련이 요구한 대로 일본이 다 수용한 만큼, 전투를 계속할 명분도 없었고."
"독일이구 나발이구 달 일없습매. 왜눔우새끼들으 먼저 쳐얍지. 마우제새끼구 되놈으새끼구 덩치만 컸지 맹탕이당이. 쥐새끼 한 마리에 쬐끼는 곰 같은 머저리. 생각으 해보라우! 송선생 내 말으 틀렸슴둥?"
송장환의 잘못이기나 한 듯 삿대질까지 하며 박서방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더디어 주기가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그래."
진씨는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다음 순서는 술상 엎어버리기, 자아, 자아 박서방 이제 하직합시다. 상가에서 그 못된 버릇 나오기 전에."
놀려대면서 진씨는 박서방의 팔을 잡아끌었다.
"말으 해봐야 무스그 소앵이 있겠음. 가기요. 가, 가잔 말이. 되놈우 욕으 막재느 심보 내가 압지."
박서방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떠났다.
밤은 깊어 있었다. 스승과 제자 어질러진 술상머리에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상의학교 교주의 둘째아들이자 청년 교사였던 송장환과 단정하고 명석했던 박정호, 비범한 강두매와 늘 붙어 다니던 이홍, 그들 중에서 젤 공부는 못했으나 순진했던 소년이 초로와 장년의 모습으로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 이들은 물론 일 년에 몇 번은 만난다. 그러나 두 사람만 만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내일 떠나는 거지?"
"네. 선생님은 어쩌시렵니까."
"뒤처리를 좀 해드리고, 그러자면 아무래도 이삼 일 후에나."
"하얼빈에는 별일 없지요."
"아직은."
"석이형님, 두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정석씨는 일진스님하고 상해로 갔고 두매는 삼강 방면에 있는 모양인데, 중공군에 합류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정을 빤히 알면서, 선생님 만나뵈면 혹 주갑아저씨 소식이라도 들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술을 들었으나 취해지지 않았다. 초상이 끝난 뒤의 공허함과는 별도로 두 사람의 공통된 느낌은 고립감이었다. 홍이 신경서 용정까지 일부러 오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송장환이 섭섭히 생각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홍이는 만사 제쳐놓고 왔다. 주갑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송장환을 불현듯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뭣 때문에 만나야 하는가, 이유는 홍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홍이는 좀처럼 자신에 관한 얘기를 남에게 안 하는 성미였다. 그런 태도는 보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해줄 국량도 없는 여자지만 자신의 역정이나 심정 같은 것을 그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주갑이, 그가 가까이 있었을 때 늘 임의롭게 얘기를 했던 것 같았다. 실제는 별로 말한 적이 없었지만 기분이 그랬었다.
"아저씨는 내가 죽거든 홍이 니가 묻어달라,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저는 지금 그분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연로하시지만 단련이 되고 워낙 건강한 분이니 염려 말게."
"저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지요."
술을 마신다.
"핏줄이 안 닿은 어머니, 핏줄이 안 닿은 아버지, 그리고 공씨 할아버지 할머니 그분들 때문에 그나마 제가 오늘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선생님도 대강 아시겠지만 저의 생모는 억새풀같이 강한 생명력과 물욕으로 자기 자신만의 성을 가진 분이며 부친은... 존경했지요. 깊은 애정도 느꼈구요. 그러나 그분 역시 그분만의 고통에서 떠밀려 나온 존재가 제 자신이었습니다."
하고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월선의 얘기가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말을 하게 된다면 감정에 복받쳐서 횡설수설이 될 것 같았다. 묘소에서는 그렇게 냉담하게 돌아섰으면서.
"월선옥 아주머닐 처음엔 자네 친어머님인 줄 알았지. 착하고 아름답고 그같이 천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위로 삼아 한 말이었으나 감정에 북받치는 홍이 분위기에서는 어설프기만 했다. 송장환은 당황했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적잖이 개구쟁이였던 홍이가 조선으로 나간 뒤 가정을 이루고 다시 용정촌으로 돌아왔을 때 점잖고, 여간하여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신중한 사내로 변모된 것을 보았으며 그 후에도 자질구레한 가정사나 자기 개인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무너지듯 나약하고 섬세한 자기 내면을 들내보인 적은 처음이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생각해보면 나쁜 조건에서 태어난 제가 평생 쓰고도 남을 선물을 받은 거지요. 피도 살도 닿지 않는 분들께서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꾸밈없고 우러나는 그분들 애정은 시궁창에 떨어질 수도 있었던 저를 건져주셨지요. 아주 어릴 적의 일입니다만 보따리 하나를 든 아저씨를 따라 해란강엘 간 일이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사주는 사탕을 손에 쥐고서, 강가에 갔을 때 아저씨는 절 보고 돌아서라 하더군요. 입은 옷을 빨리구 새 옷으로 갈아입을 참이던가 봐요. 하얀 광목옷이었던 것 같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아저씨는 신선같이 보였습니다. 씨꺼멓게 담배진에 절은 들쑥날쑥한 이빨에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어린 눈에 아주 고귀한 사람같이 보이더군요. 그분은 학이 날개를 펴듯이 두 팔을 활짝 들어 올리고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해란강을 향해 새타령을 불렀습니다.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명창 뺨치게 좋은 소리꾼 아닙니까. 그 소리가 해란강 물결을 타고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광경을 저는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합니다. 순진무구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뼈에 사무치는 한을 느끼게 됩니다. 아저씨의 의로움은 늘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잘 웃고 만사를 익살로 넘기든 그분이 왜 그렇게 서러워 보이든지요. 다만 수집어할 때만 우서웠습니다."
"..."
"왜 그런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같았고 형님 같았고 친구 같이 임우럽고 언제나 감싸주는 고향 같았습니다. 내가 죽거든 홍이 니가 묻어라, 하시더니 살아나 계신지, 소식을 끊기라도 한 것처럼 배신감을 느낄 때도,"
홍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송장환은 말없이 바라본다. 그 말들은 모두 홍이 자신의 외로움 때문일 거라고 송장환은 생각한다.
"전에는 더러 건방진 생각을 하며 우쭐대기도 했지요. 오가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제가 한다구요."
"그건 사실이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의 울타리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안하구 긴장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거든요. 요즘은 고립무원, 외토리가 된 것 같고 길을 가다가도 목덜미가 설렁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기분은 알 만하다. 나도 요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거든."
송장환은 담배를 붙여 문다.
"마치 쏘아버린 화살같이 떠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도 자신도 없어지구요."
"희망은 있다. 자신을 가져도 돼. 다만 일본이 어떤 식으로 망하느냐 그게 문제다."
쏟아놓다시피 한 마음을 추스르듯 홍이는 송장환 술잔에 술을 부었다. 몹시 계면쩍고 후회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스승이 아니었다면, 친구지간이라 해도 그런 내면적, 감성적 얘기를 홍이로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입지는 지금 절망과 희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으로 볼 수 있는데, 자넨 근심도 그런 것에 대한 예감일 게다."
"..."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우선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나 돌아와도 이미 활동 구역이 달라졌을 경우를 생각할 수 있고 또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일본군의 전선 확대 때문일 수도 있고, 보기에 따라 점령 지역이 넓어지면서 밀리어 달아나거나 잡혀서 죽는 확률도 높아진다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속사정은 딴판이다. 점령 지역의 확대가 이번의 경우, 이기고 있는 전쟁이라 할 수 없거든. 일본 정부나 군부는 점령, 전과를 내세우며 군민을 교묘히 오도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의 내부적 고민이야말로 각일각, 목을 죄는 느낌일 게다. 일본은 여태까지 전면전 장기전을 치른 일이 없었다. 역사상 한번, 임진왜란을 들 수 있지만 전면전 장기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한 게야.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속정속결, 국지전으로 결과가 날 것으로 믿으려 했지. 장개석이든 모택동에 의해서든 중국이 통일되기 전에, 사실 서안사건 후 장재석이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고 항일로 돌아선 것과 중국 국민의 여론이 한결같이 항일로 굳게 뭉친 것은 일본에게 더 기다릴 수 없는 초조감을 안겨 주었고, 과거에는 물론 근자에 있는 만주사변 역시 속전속결, 국지전으로 계속 재미를 본 그 단꿈도 버릴 수 없었고, 때에 따라서 불안이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결단력을 부추기고 자신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지. 결국 일본은 시기상조를 주장하는 신중파를 누르고 전쟁으로 건너뛴 건데, 돌아가신 권필응 선생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소위 대학살은 속전속결, 전략의 일환이었던 거야. 중국인에게 극단적 공포심을 심어서 전의를 잃게 하는 것, 자국 병사에게는 추악한 본능의 짐승으로 만들어 구원을 잃은 절망적, 발광적 용기로 내몰려는 것, 그게 모두 단기전 전략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일본이 그 얼마나 속전속결을 원했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어. 지구전론을 발표한 모택동은 물론이고 전쟁의 시작부터 장개석은 장기전을 각오했으니까, 일본은 거대한 공룡에 물리 격이고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거다. 그들은 이미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했고 인원과 물자를 모두 전쟁에 투입한다는 것인데 인원과 물자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에서 물리적으로 일본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야. 시간은 힘을 소모하고 자리는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인원과 물자에 엷게 깔릴 수밖에 없고 성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결국 녹아버리게 돼 있어. 엷어지고 성글어지고 힘이 바진 곳을 지금 팔로군이 뚫고 있는 게야. 장개석은 오히려 일본은 도외시하고 전쟁 후 중공에 대비하여 군사력 소모를 견제하고 있는 형편이며 국민당에서 이당활동제한변법을 내놓은 것만 보더라도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지. 그러나 일본은 끝없는 늪인 줄만 알면서도 고통스런 행군을 아니 할 수 없게 돼 있다. 일본을 위해 중재에 나설 나라도 없고 전쟁 물자를 대주기는커녕 팔아주는 곳도 없어. 작년에는 미국에서 미일통상조약을 폐기했고 영일회담 결렬, 국제연맹이사회에서는 중국원조 결의안을 가결했고 뿐인가, 여태까지 소련은 무제한으로 중국을 원조해왔거든. 중국에서 손털고 철군하는 것 이외 일본은 달리 방법이 없다. 그것은 패전을, 항복을 의미하는 거니까 늪이든 지옥이든 갈 데까지 가보자, 한가닥 희망은 지금 구라파에서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과 국공이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그러나 일본은 너무 깊이 물려 버렸고 바닥이 나버렸어. 문제는 우리다. 우리민족의 운명이다."
송장환은 술을 마셨다. 홍이는 묵묵히 비어버린 술잔에 술을 채운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깊은 이 밤에 멀리서 아슴푸레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벌써 수많은 우리 동포가 각처로 끌려 나가 고혈을 짜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지원이지만 머지않아 징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몰아낼 것이며 남경 학살 때도 그랬지만 여자들은 성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지옥까지 동반할 거야. 참으로 무슨 힘의 가호 없이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볼모가 된 조선 민족이 저들의 패망 과정에서 어떠한 환난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도 먹물 들고 의식 있는 사람이면 대개 해보는 걱정도 그날 밤의 얘기가 고약같이 눅진눅진 머릿속에 들어붙어 기분이 좋잖았고 송장환의 우울한 얼굴이 때때로 떠오르곤 했다. 벽에 걸린 괘종이 덩! 하고 울렸다. 세 번 울린다. 줄담배를 피워 혀끝이 얼얼했지만 홍이는 무의식적으로 또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쓰디쓴 담배,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담배. 보연의 잠꼬대 때문에 팽개쳤던 신문을 집어 든다. 8면의 광고를 홍이는 골똘히 들여다본다. 사무실에서 신문을 들고 온 것은 바로 이 광고 때문이었다. 큰 활자와 함께 신경 공연은 주야 이 회, 팔월 삼사일 양일간으로 돼 있었고 극장은 풍락이었다.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팔단짜리 큰 광고다.
'틀림없이 영광이도 왔을 거다'
홍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관수는 지금 신경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광고를 보았을 순간에도 홍이는 송관수가 신경에 없다는 것을 맨 먼저 생각했다. 열흘 전에 목단강에 간다면서 송관수는 떠났는데 여태 목단강에 머물러 있는지, 정확하게 그의 소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홍이는 초조했다. 이번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부자가 상봉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홍이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 년 전이라던가, 송영광이 공연차 신경에 왔을 때, 서로 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기는 했겠지만 영광이 공연장 입장권을 들고 홍이를 찾아왔을 때는 부친을 만나게 해달라는 의사 표시였을 것이고 아들 만나기를 마다할 송관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치 않았다고 판단한 영광은 그냥 떠나버리고 말았다. 홍이는 그때, 자신의 중간 역할이 미숙해서 그리 된 것으로 생각했으며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그러나 그보다 그 이로 인하여 사람이 달라진 송관수를 볼 때 느끼는 책임감 같은 것은 홍이에게 적잖은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처음 송관수는 자식 하나 없는 셈 치겠다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차차 엉뚱한 방향으로 사람이 달라져갔다. 불효막심의 아들을 원망하기보다 아들에게 지워진 백정이라는 신분에 병적인 혐오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술만 들어가면
"내가 와 백정고? 나는 백정 아니다. 영광이도 백정 아니다. 우째 그아가 백정이란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아니지, 아니고말고. 그놈은 내 아들인께, 동학당, 등짐장수 울아부지 손자니께, 말이 무슨 소앵이 있노. 씨가 젤 아니가."
실성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분명하게 마누라 영선네를 부정했던 것이다. 평생을 그림자같이, 구석지에서 남몰래 피는 꽃같이, 남의 앞에 나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살아온 영광의 모친, 그 여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지난날 송관수는 진주에서 형평사운동에 가담했으며 그 연민은 그의 투쟁의 의지로 나타났고 불꽃이 되기도 했었다. 가족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것도 백정으로 낙인찍힌 신분을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백정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 언제였던지, 구례 길노인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던 그 날, 김강쇠가 부아를 돋우노라 이 백정놈아! 했다 해서 혈투를 벌인 일도 있었다. 그러던 송관수가 그렇게 오래도록 금기되어왔던 백정을 들먹이며 흰머리가 돋아난 영선네 앞에서 크게 비웃기 일쑤였고 때론 그 일로 인하여 분탕질도 서슴지 않게 되었으며 죽은 장인까지 끌고 나와
"이녁 당대로 끝낼 일이지 멋 땜에 딸년을 내질러 여러 사람 신셀 망치느냐 말이다."
가당치도 않은 욕설과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얼마 전에 홍이는 의논을 좀 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땅바닥으로 된 복도 옆에 문을 활짝 열어젖혀 놓은 방에서 땅콩이 든 접시 하나를 무릎 앞에 놔두고 헐렁한 광목 적삼을 입은 송관수는 빼주를 병째 마시고 있었다. 학생복을 입은 막내 영구가 두 무릎을 모으고 부친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홍이 들어서자 몹시 당황하고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선네는 옆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눈치였다. 등을 보이고 앉은 관수는 인기척을 들었을 텐데 돌보지 않았다. 부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거북하여 홍이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 꼴로 문지방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여 물었다. 복도 바닥에는 빼주 빈병이 몇 개 굴러 있었다.
"제집 잘못 얻은 기이 천추에 한이 된다. 정은 정이고오 은혜는 은혜다. 와 내가 그때 그거를 몰랐일꼬. 경찰에 쬐기는 몸이고 보이, 숨기주고 믹이주고오 하하핫하 하하하핫, 의지가지할 곳 없는 젊은놈이 꼼짝없이 옭아매인 기지."
술을 얼마나 했는지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뭣합니까. 어머니 가슴에 못박는 말씀을 꼭 해야겠습니까. 아버지답지 않습니다."
영구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는 신경의 동방대학 학생이었다.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돼 있는 교칙에 따라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모처럼 외출 허가를 받아 집에 들른 것 같았다.
"아부지다운 기이 멋꼬?"
"..."
"그래. 전에는 아부지다워서 니 성이 집 나간 기가? 혈육의 정을 끊고 말이다."
아들을 비웃는다.
"그, 그건 형의 의지가 약한 탓이지요. 누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정이면 눈이 한 갭니까 코가 둘입니까? 똑같은 사람입니다. 모두 다 편견 탓이지요."
"니 말 잘했다. 하모, 똑같은 사람이고말고. 하지마는 내가 두고 볼 기다. 가시나하고 눈이 맞아서 혼인 말이 나와도 그런 소리 할긴가 두고볼 기구마. 하기는 만주 땅은 넓어서 근본 감추고 못살 것도 없지. 그러이 네놈도 큰소리치는 모양이다마는."
"큰소리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치를 말했을 뿐입니다."
"이치? 내가 여기 이러고 앉아 있는 게 이치대로 된 기가?"
"이치대로 되게 해야지요. 그래서 공부도 하고 투쟁도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따우 시건방진 소리는 두었다가 후제 선생질할 때나 써묵어라. 흥! 입 열었다 하믄 모두 배우고 투쟁하고, 신물이 난다. 니 누부 영선이를 와 산놈한테 떠넘기고 왔노? 니도 그거는 알제? 똑똑하고 인물 좋고 보통핵교까지 나온 제집여아를... 섬진강 칼날은 바람 마시믄서 염소새끼 몰듯기 그 제집아이를 데리고, 지리산 골짜기 산놈한테 주어부리고 돌아선 애비 맘을 니가 아나? 내 가슴에는 피멍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시끄럽소 그만, 아이들 데리고 삼대 구년 묵은 얘기는 왜 합니까?"
내뱉듯 말하며 홍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영구는 비실거리다가 아이를 피해 방에서 나갔다.
"머하로 왔노. 니가 안 와도 나 할 짓은 다 하고 사는 사람이다. 내일은 떠날 긴께 걱정 마라."
관수는 병을 입에 물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땅콩을 입속에 집어넣고 오도독 씹는다.
"도대체 왜 이럽니까. 참말로 보기 안 좋습니다."
"몰라서 묻는 기가?"
"알지요."
"알믄 와 묻노."
노려본다.
"그까짓 자식 하난 없는 셈치자,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
"형님 보고 있으면 봄에 싹이 돋아서 조금씩 자라다가 오뉴월이 되면 미친 듯이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왕성해지는 일도 잊기 마련인데, 날이 갈수록 이래가지고는 식구들이 배겨내겠습니까?"
"잊을 일이 따로 있지. 니는 자식 안 키우나?"
"니는 내 맘 모린다. 니가 우찌 내 맘을 알 기고. 애시당초 뿌리부터 잘못 박은 기라. 잘난 것 한푼 없는 놈이, 어디라고 이 바닥에 끼여들어... 머를 했제? 해놓은 기이 멋꼬? 강가에서 쇠가죽을 쓰든지 장돌뱅이가 돼서 이장 저장 돌아댕기야 할 팔자를 어긴 죄 아니겄나."
슬며시 비켜버린다.
"형님."
"..."
"왜놈한테 잡혀가고 싶지요?"
"머, 머라카노!"
펄쩍 뛴다.
"헌병한테 붙잡혀서 총살이라도 당했으면, 생각하는 거지요?"
"미친놈 다 보겄네. 말도 가이방해야 대꾸를 하지."
"집에 들면 분탕질이고 밖에 나가면 겁없이 행동하고 그 힘이 어디서 나오지요? 만약에 폭탄 안고 관동군 사령부에 돌진할 사람 누구냐 묻는다면 맨 먼저 형님이 손들고 나가지 않을까요? 대체 무엇을 작심했습니까."
관수는 동요를 나타내었다.
"대체 무엇을 작심했습니까."
홍이는 재차 물었다.
"집어 치아라! 내가 무신 애국지사 독립투사라고, 무지랭이 촌놈이 넓은 만주 바닥에 와서 심부름하는 것도 과남한데, 사람을 이리 놀리도 되는 기가!"
"..."
"유식한 놈, 똑똑한 놈, 이론인가 먼가 무장이 됐다는 놈, 날고 기고 젊어서 펄펄 뛰는 놈, 쌔이고 쌔있는데, 나는 이자 헌 생이틀이 되었고 신다 버린 짚신짝 꼴이 되었는데 무신 놈의 씨도 안 묵은 말을 하노."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나 결국 관수는 어물쩍 넘기려 한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홍이는 비꼬듯 농치듯 묘하게 웃었다.
"형님은 제발 날 잡아가 달라, 잡아가서 죽여 달라, 그것도 처참하게 시끌버끌 요란하게,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합니다. 첫째는 순국지사가 되고 싶은 거지요. 영광이한테 명예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그거 아닙니까? 그래야 백정의 신분도 상쇄가 될 테니까요. 둘째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배신감 때문에 영광이 가슴에다 한을 남기고 싶다, 또 있지요. 형은 원래 강쇠형님과는 달라서 야심이 있는 편이고 그 형보다 듣고 보고, 훨씬 유식하니까. 한데 만주는 형에게 안 맞아요. 산적질을 해도 조선의 산골짝이 좋지."
관수는 홍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낯빛은 달라져 있었다. 한참 만에 신음하듯
"머이라?"
"면상을 내리치고 다리 몽댕이를 뿐지르고, 그러고 싶겠지만 헌 생이틀이 무슨 힘이 있겠소. 하하핫 하하하..."
"니 질기 이럴 기가! 누구 기넘어가는 꼴 볼라 카나!"
소리를 지른다.
"그런 말 안 들을려면 몸 좀 아끼시오. 위태로워서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아질하던 것과는 달리 홍이 어투는 냉정했다. 관수는 대답 대신 술병을 들어 술을 마신다.
"형수씨도 그만 볶으시오. 보기 딱합니다. 세상 버린 우리 아버지... 참다가 참다가 못 견디면 얼굴이 새파래져서 어머니를 두딜겨팼지요. 그러나 단 한 번도 어머니 전력을 들먹인 일은 없었어요. 그 험한 전력을 말이니다. 형님도 잘 아시는 일 아닙니까. 어질고 말 없으시고 평생을 든구름 같은 형님 따라 살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늙어가면서 왜 이래야 합니까."
"억울해서 그런다 와!"
했으나 관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니지요. 측은해서, 내 죽고 나면 어쩌나, 그게 지나치니까 역으로 나가는 겁니다."
"이놈아! 니가 묻고 니가 대답하고 함서 더 무신 말, 필요 없는 거 아니가. 이리 찌르고 저리 쑤시고 니가 형사가! 헌병가! 대체 무신 말 듣고 저버 이러노!"
"같잖고 가소러워 그러요."
"머 어쩌고 우째?"
"서천 소가 웃을 일이니 그러지요."
"건방진 놈! 허 참, 살다보이 별 휘안한 꼴을 다 본다. 니가 언제 그리 컸다고 까부노."
"저는요, 형님한테 말할 자격 있습니다. 형님이 지금 앓고 있는 병을 저는 스물 살 안짝에 치루었으니까요."
"..."
"백정하고 살인자하고 어느 쪽이 험합니까?"
관수는 입맛을 다셨다.
"제 아버진 아니지만 생모의 전남편이 살인자라는 것,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도에서 진주로 왔을 그때, 기억하실 겁니다. 빗나가서 갈 바를 못 찾는 저에게 충고한 사람이 형님 아니든가요? 누구든 절룸바리 언챙이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어요? 죄 없이 핍박받고, 그런 게 세상 아닙니까. 우리 조선 사람이 무엇을 잘못해서 왜놈들한테 시달림을 당하는 겁니까? 그래도 형님은 자신의 의지로 택한 일이니 덜 억울하겠소. 하기는 요즘 백정이라는 말을 자주 입 밖에 내는 것을 보면 차츰 관이 트이는 모양이고 형수님을 볶아대는 것도 그만큼 임우러워진 탓인가요?"
꽈배기처럼 말을 꼬았으나 홍이는 아까처럼 실실 웃지는 않았다. 듣는지 마는지 대꾸가 없던 관수는 손에 들고 있던, 비어버린 빼주 병을 복도 바닥에 휙 내던진다.
두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가 다 한심스럽고 멋쩍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틀렸어!"
별안간 관수는 팔을 들어 허공에다 곱셈표를 그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앉으며 한 다리는 뻗고 한 다리는 세운다.
"틀렸단 말이다. 니놈이나 내나 다 틀렸어."
뭐가 틀렸다는 건지.
"니는 여전히 이홍이 그놈이고 나는 여전히 송관수다. 내 살아온 대로, 누구 말마따나 독사겉이 내 타고난 태성대로 변한 거 없다! 골백년이 지나봐라. 세상이 변하는가. 내가 안 변하듯이 세상도 안 변하고 이자는 자식이고 여편네고 그게 다 걸거적거린다. 나도 늙었거든. 늙은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의 하나다."
틀렸다는 것은 잘못 살았다는 것인가 희망이 없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는 그렇고 날 찾아온 용건이 멋꼬?"
뻗었던 한 다리를 끌어들여 자세를 고쳐서 앉은 관수는 물었다. 어느덧 그는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고 감정을 정리한 것처럼 보였다. 맺고 끊고 전환이 빠른 송관수의 특성, 그것은 중첩된 험로에서 이루어진 습관이었다. 새까맣게 쪼그라든 얼굴에 눈만 붉게 타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어디 의논이나 하겠습니까."
뒷걸음질 치듯한 홍의 목소리였다.
"언제 기분 따라 우리가 일했고 날 받아서 의논을 했더나."
"급한 일도 아니고... 좀 짬이 나길래 왔더니만."
"말해봐라."
"실은... 공장일인데요, 공장을 처분하는 게 좋잖을까 해서."
홍이는 굼뜨게 말을 꺼내었다. 꺼내놓고도 다시 생각해보는 표정이다. 관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더 이상 뻗쳐볼 힘도 없고."
하다가 홍이는 갑자기 허둥대며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홍이를 바라본 관수는 쓴웃음을 머금는다.
"나는 술고래가 됐고 홍이 니는 골초가 되었구나. 결국 올 데까지 온 거 아니겄나."
그러니까 공장 처분에 송관수도 찬성이라는 의사 표시였으며 그간의 홍의 고초를 잘 알고 있다는 뜻도 있었다.
"삼사 년을 견디다보니 이제 피가 마를 지경입니다."
삼사 년이란 홍이 운영하는 서비스 공장에 김두수가 나타나고부터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 군부의 폐차를 불하받게 해줄 터이니 동업하자고 제의 해왔던 김두수, 말을 붙여온 이상 무슨 수를 쓰든지 관철하고야 말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어떤 해악을 끼칠지, 해서 고육지책으로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되 동업은 할 수 없고 폐차 불하에서 얻은 이득만 가르자 하며 성립이 된 김두수와의 관계였다. 불하받은 폐차를 재조립하여 검사를 받고 군부에 납품을 하고 일반에게도 팔아서 그 동안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사실 그 점을 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은 엄청난 곡예였던 것이다. 김두수가 위험인물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되어온 내막을 안고서 일본 군부를 상대하여 거래를 지속해나간다는 자체가 화약을 안은 꼴이었다. 송관수가 한 말대로 홍이 골초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헌병대 앞잡이로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엮어 들여 악명을 드높였으며 한때는 회령에서 경찰 간부직에 있었던 김두수의 전력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돈 버는 일에서도 그의 악행은 전율을 느끼게 했고 이득이 있는 곳이면 쇠나막신에 쇠지팡이 짚고서라도 지옥까지 찾아갈 그런 위인인데 표면상으론 첩보기관에서 밀려난 듯했으나 기실 그가 현재 무엇을 하며 어떤 임무를 띠고 있는지 그 정체는 모른다. 그리고 군과 거래를 하는 만큼 사찰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정확하게 만 삼 년 동안 홍이는 이 일에 종사하면서 차라리 총 들고 싸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처음에는 김두수가 나타나면 마음속으론 이 매국노 반역자! 하면서도 겉으로 천역덕스럽게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차차 자신을 엄폐하기가 어려워졌다. 요즘에 와서는 뱀과도 같은 김두수의 눈을 바라볼 땐 소름이 쫙 끼치곤 했다. 살인자의 눈, 말로만 들었지만 그의 아비 김평산의 눈이 저랬으리라 홍이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두수 는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박정호의 아버지를 죽인 놈! 정호삼촌이 비수를 품고 찾아다녔으나 용케 빠져나와 아직도 살아 있는 놈!'
홍이는 어진 한복이 두수의 동생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처분하고 나면 다음은 어쩌고."
관수가 물었다.
"아직 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고 하얼빈으로 가서 송선생님하고 의논해서 다른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하구요."
"들통이 나기 전에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수라, 이쯤 해서 걷어버리는 것이 내 생각에도 좋을 듯하긴 한데."
"앞으로 물자도 어려워질 겁니다. 따라서 부속품 구하기도 힘들 것이고 규모가 작으니까 그럴 염려는 없겠지만 군수공장으로 징발 될 경우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놈들 똥줄이 땡기믄 크고 작고를 가리겠나?"
"그럴까요?"
"그것보다 처분하는 데 합당한 구실이 있어야 안 하겄나? 거복이(김두수) 그놈이 믿을 만한 이유 말이다."
"그것을 저도 생각해봤습니다. 연강루하고 상의를 해야지요."
김두수하고 관계를 맺기 직전, 만일의 경우를 염려하여 요리점 연강루에서 공장 세울 때 빚을 얻은 것으로, 그때 공장을 담보를 넣은 형식을 취해놨던 것이다. 연강루를 말할 것 같으면 소유주의 성씨는 진이다. 그러니까 용정 동성반점의 진씨와는 인척간이며 또 하얼빈에 있는 심운구의 맏아들 재용의 처가 연강루 진씨의 딸이니까 양가는 사돈지간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권필응과의 관계다. 재작년에 작고한 권필응과 진씨는 항일에 뜻을 같이해온 동지로서 진작부터 이들은 한중공동전선을 역설해온 터이라 의기투합하여 많은 일에 서로 관여해왔었다. 심씨 집안과 진씨 집안의 통혼만 하더라도 권필응의 존재로 인하여 양가간 친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정도의 설명이면 연강루와 홍의 예사롭지 않은 연결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강루는 사업 중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진씨는 다른 사업체도 상당수 가지고 있는 자산가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었다. 만주국 정부 요로에 지면도 많았으며 일본 군부에서도 환영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정체는 철저하게 엄폐돼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고령인 탓으로 사업에서 손을 뗐고 아들들이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점에서는 하얼빈의 심운구와 비슷하다.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항일의 투철한 투사 이며 황야의 영웅 마점산과의 관계다. 마점산, 북만주를 무대로 싸우는 사람 중에서도 마점산은 특출하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치치하얼에서 패한 마점산은 만주 건국에 참여했었다. 군정부총장과 흑룡강성 성장으로 취임하면서 일본과 타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탈출했고 소련에 피신해 있다가 돌아온 뒤 결사 항쟁을 전개하여 황야의 영웅이 된 것이다. 내몽고, 황하 북변 강기슭에 있는 포두 방면에서 그는 일군과 싸웠으며 테러와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몇 해 전에 관동군 사령관, 만주국 총리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자도 마점산의 휘하였었다. 특히 게릴라전은 끈질기고 치열했는데 일본은 그것을 모두 비적의 소행으로 호도하면서 그들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북만주 일대에는 입식 못한 곳이 많았다. 물론 이같은 저항에는 마점산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직이 있었는데 조선인들과의 혼성 부대, 혹은 공동 작전과 행동이 특색이다, 특히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거사가 있고부터 재만 조선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의 합동작전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예를 들자면 조선혁명당과 중국의 요령 구국회와 합작, 항일 전선을 결성한 일, 재만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이 사도하자에서 일본군을 공격한 일, 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이 동경성을 점령, 대전자령 대첩도 한중연합군이 일본의 나남 72연대를 쳐부쉈던 것이다. 여하튼 그와 같은 항일전을 지원하는 것이 진씨 일문의 숨은 사업이었지만 특히 진씨의 아들 형제는 마점산과는 맥이 닿아 있었고 그를 열렬히 지지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이는 진씨나 그의 아들 인원과 접촉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용정 동성반점의 진씨 소개로 연강루와 친교를 맺고 있다는 정도를 내세우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연강루는 조직이 위장해놓은 접선 장소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날, 홍이는 공장 처분 문제를 상의한 뒤 집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관수는 목단강 방면으로 떠났던 것이다.
홍이 잠자리에 든 것은 세시가 훨씬 지난 뒤였다.
"상의 아버지, 상의 아버지, 저넹 없이 웬 늦잠일까?"
조반 준비를 벌써 끝내놓고 보연은 남편을 흔들었다.
"상의 아버지, 일어나요."
겨우 홍이 눈을 떴다.
"당신도 늦잠 자는 일이 있네요. 술도 안 했는데 여덟시가 넘었어요."
"뭐?"
했으나 홍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보연은 분홍빛 은조사적삼을 입고 있었다. 평소보다 차림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홍이는 누운 채 머리맡으로 팔을 뻗어 담배를 찾다가 신문이 손에 닿았다. 간밤에 신문을 들고 방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홍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영광이 악단을 따라 반드시 신경에 와 있으리란 법은 없다. 어제는 왜 그렇게 와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었는지, 홍이는 담배를 찾아 피워 물었다.
"눈 뜨자마자 또 담뱁니까. 좀 줄였으면 좋겠거마는."
"음."
홍이는 코대답만 한다.
"상의 아버지."
"..."
"당신이 어젯밤에 절 보듬고 왔습니까?"
'뭐라구? 보듬고 왔다... 데리고 왔느냐 할 것이지, 가정부인이 술집 작부도 아니겠고, 천박하구나.'
홍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도 모자랐고 여러 가지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러나 미묘한 그런 거부 반응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보듬고 왔느냐는 보연의 말은 육감적이기보다 무신경에 가까운 것이었다. 무신경이든 육감적이든, 홍이는 그게 어느 쪽이든 비위에 거슬렸다. 그러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역시 마음 어딘가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홍이는 어쩌다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여자를 보면 외면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생모 임이네가 연상되어 그랬을 것이다. 도발적이거나 교태를 부리는 여자의 경우에도 홍이는 신경질적인 혐오감을 나타낸다. 일본에서 차부조수 노릇을 했을 무렵,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온 일본 계집에게 느낀 강한 모멸감이 되살아나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보연은 야한 여자가 아니다. 법도를 중히 여기는 소위 반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남편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으나 교태를 부리고 보비위를 맞춰 남편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작위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십 수 년, 자식을 셋이나 낳고 살아온 부부간인데 사소한 언동을, 비록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나마 용납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벽증이며 보수적 성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출생과 신분에서 오는 열등감은 아닐 것이며, 허튼 말 허튼 행동이 없었고 해란강 맑은 물 같은 월선의 사랑으로 자란 옛 기억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십 문턱을 바라보면서 투명하고 섬세한 감성에 대한 그리움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임이는 사내가 계집을 하늘같이 섬긴다 하며 곧잘 비아냥거렸지만 실상 홍이는 다정한 남편은 아니었다. 보연에게는 늘 무뚝뚝했고 아이들에게는 과묵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보아도 자상한 남편이요 아버지였다. 공장 근처 허름한 집에 살았을 적에 아무리 귀가가 늦어도 부엌에 석탄 날라다놓는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에 띄면 빨래도 걷어주고 어질러진 집안 청소도 했으며 보연에게 힘든 일은 시키지 않았다. 몸이 약하고 험한 겨울을 보내야 하는 타국살이를 고려했겠지만 여자를 종 부리듯, 그것은 사내장부가 할 짓 아니라는 그의 생각이었으며 여자에게 짐을 잔뜩 들려놓고 자신은 빈손인 채 뒤로 나자빠지듯 걷고 있는 사내를 꼴불견으로 치부하는 홍이였다. 그 점에서는 부친을 많이 닮았다. 초취였던 강청댁이 월선을 투기하여 패악을 부리는 것을 보고 동네 남정네들이 탕탕 두들겨패서 버르장머릴 고쳐라 했을 때 용이는
"조막만한 걸, 때릴 구석이 어디 있어서,"
쓰게 웃었는데 사랑이 아니어도 여자에 대한 연민에는 확실히 부자간에 공통점이 있었다. 살림을 못해도 잔소리가 없고 돈의 쓰임새에도 무관심, 그것도 부자가 닮은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연이나 아이들까지 홍이를 어려워했다. 어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보연은 남편이 먼 곳에 서 있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보연은 장이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었다.
가족이 조반상에 둘러앉았을 때
"아버지 우린 어떻게 해요?"
어여쁘게 자라서 지난 봄 여학생이 된 상의가 말했다.
"학교에서 창씨 개명하라고들 하는데."
"..."
"우린 안 할 거예요?"
"하라면 해야지."
"제 이름은 말에요, 상짜를 따서 나오꼬라 하고 싶어요."
"그대로도 괜찮다."
"그대로요? 그럼 나오요시, 남자 이름이잖아요."
"나라없는 백성이 남자 이름 여자 이름 가려서 뭣하나."
상의는 멈칫하며 홍이를 쳐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했지만 아버지 모습에서 비애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거 봐. 구둣방 할아버지도 말했어. 성을 바꾸는 것이 젤 나쁘다구. 부모 조상을 팔아먹는 일이래."
상근이 씩씩하게 말했다.
"복 나가게 밥 먹으면서 왜들 이래. 어서 먹어."
보연이 나무란다. 뜨는 둥 마는 둥, 조반을 끝낸 홍이는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양복 어디 있지?"
"양복은 왜요?"
보연이 말하며 따라 들어간다. 공장에는 늘 작업복 차림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어디 갑니까."
"음."
"어디루요."
대답이 없다. 챙겨둔 양복으로 갈아입는 홍이를 보연은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분홍색 은조사 적삼 탓인지 얼굴에는 다소 생기가 있어 보였다.
"어젯밤 당신이 날 보듬고 왔어요?"
아까 대답을 듣지 못해 아쉬웠던지 보연은 다시 물었다.
"알면서 왜 물어."
"글세 꿈을 꾼 것 같기도 해서요."
하얀 노타이셔츠에 연회색의 마직 여름 양복을 입은 홍이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 공장 사무실에 나온 홍이는 작업장에 있는 천일이를 불렀다. 걸레로 기름 묻은 손을 닦으며 사무실로 들어온 천일이도 어디 가느냐 하고 물었다. 홍의 신사복 차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훤합니다. 새신랑 같소. 어떤 사람은 인물이 좋아서 청요리집에 가는데 이 못생긴 이내 신세는."
노랫가락처럼 뽑다 말고 천일은
"제기랄! 그래 무슨 일이오."
대강 할 일을 지시한 홍이는 서류철을 꺼내어 넘긴다.
"형님."
"음.'
"조선서 악극단이 왔다데요. 여편네가 쫄라쌌는데 형님은 안 가볼 랍니까."
홍이는 들은 척도 안 한다. 그새 천일이는 진주 있던 처자를 신경으로 데려왔다. 공장 뒤편에다 가건물을 지어 살림을 차린 것이다. 버릇이 없고 좀 우둔한 것이 탈이었지 홍이 밑에서 착실히 기술을 배운 천일은 비교적 공원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며 홍이 왼팔 노릇을 해왔는데 그런 만큼 월급도 많았고 돈도 알뜰히 모았다.
"가타부타, 말이 있어야지 형님도 참 속 터지는 사람이오."
매번 당하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천일은 불평이다.
"극장에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사람이 살믄 몇 백 년을 살기라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놈의 세상, 어젯밤에는 잠도 못 잤어요."
"왜."
"한밤중에 자동차 끌고 와서 문을 뚜디리고 지랄하는 바람에."
"그래서."
"충전해달라고 말입니다. 낮에는 시간 두었다 멀 했는지."
"그럴 경우도 있지. 불평 그만해."
"제에기랄, 죽어나 사나, 고향 가서 사는 건데 형님 땜에 못 가요!"
하며 천일은 나간다. 서류철을 덮은 홍이는 극장에 전화를 걸어서 반도 악극단 단원들이 묵은 여관을 확인한다.
'하늘이 두 쪼가리가 나는 한이 있어도 이 자식을 붙잡아야지.'
공장을 나선 홍이는 차를 잡아타고 극장에서 알려준 산월여관으로 찾아갔다. 들어서자마자 들떠 있는 내부 분위기가 성큼 다가왔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여기저기 지분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들락거리는 남자들, 심부름꾼들은 왁자지껄 공연히 신바람이 나 있었다.
"송영광이라구요? 그런 사람 없는데요?"
러닝 바람에 수건을 들고 나오던, 뺀질뺀질하게 생긴 사내가 홍이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왔습니까?"
눈에 띄게 홍이는 실망을 나타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그런 사람은 본시부터 없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몇 해 전에도 와서 공연하고 갔어요. 색소폰인가 불고, 얼굴에는 엷은 흉터가 있어요. 다리도 좀 불편하구, 그러니까 송영광은 본명이오."
홍이는 저도 모르게 서둘렀다.
"아아 나일성 씨 말이군요. 왔어요."
"왔어요?"
"어떤 사인데 찾으시지요?"
비로소 사내는 홍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친척이오."
일부러 친척이라 한다. 그간의 내력으로 보아 친척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봐 우식아! 나일성 씬 어디 들었지?"
저만큼 얼쩡거리고 서 있는 청년에게 사내는 큰소리로 묻는다.
"저쪽에요."
하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청년은 가버린다.
"경성여관에 가보십시오. 나일성 씨는 거기 들었다는군요."
노타이에 연회색 양복을 입은 홍이는 신사로서 손색이 없었고 다소 거칠었으나 얼굴은 준수했으며 게다가 나일성의 친척이라 하니까 그랬는지 사내는 매우 공손하게 가르쳐 주었다. 경성여관으로 찾아갔다. 산월여관보다 훨씬 차분하고 극단 패거리가 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산월여관에 수용 못한 나머지 몇 사람이 투숙한 것 같았다. 나일성을 찾으니 청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일성은 지금 외출중이라 했다.
"언제 오면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네댓 시쯤이면 안 올까요?"
대답이 애매하다.
"네시쯤 다시 오지요."
여관을 나서는데 홍이는 맥이 쑥 빠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혹 공장으로 날 찾아갔는지요,'
부랴부랴 공장으로 돌아왔으나 아무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송영광은 신경에 와 있고 만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 그러니 홍이는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망할 놈의 자식, 이번에도 그냥 갔다만 봐라. 죽여버릴 거다."
네시, 홍이는 경성여관에 다시 갔다. 영광은 면도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꼴을 하고서 여관방에 혼자 있었다. 어쩌면 아침나절에 찾아왔었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홍이를 보는 순간 영광은 숨이 막히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 년 전에 비하여 많이 피폐한 것 같았다.
"앉으시지요."
마주보고 앉는다. 홍이는 담배를 붙여 물고 성냥개비를 재떨이에 던지며
"어제 왔나?"
하고 물었다. 나이는 많이 처지지만 사 년 전에 한번 보았을 뿐인데 홍이는 반말로 허두를 뗐다.
"어제, 네."
"얼마 동안 머물 건가?"
"신경서 이틀 공연하고 길림으로 갈 겁니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도 사람인데 마음이 편했을 리 없지."
영광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고 홍이는 담배연기 가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안의 침묵 사이사이에 저녁상을 나르는지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 여자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가지."
담배를 눌러 끄고 홍이 일어섰다.
"어디로 말입니까?"
영광의 목소리는 왜 그랬는지 도발적으로 퉁겨나왔다.
"저녁 먹으며, 이야기 좀 해야 안 하겠나? 자네 부친은 지금 여기 안 계신다."
일어서려다 말고 영광의 낯빛이 변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짐승 같이, 그런 눈으로 홍이를 쳐다본다.
"그, 그건 무슨 뜻입니까."
"걱정되나?
"..."
"잡혀갔을까봐? 세상 하직했을 것 같은가?"
윽박지르듯 그러나 홍이는 엷은 웃음을 띠고
"목단강 방면으로 장사 가셨다."
무표정으로 돌아간 영광은 셔츠 하나만 갈아입고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뒤 홍이를 따라 나왔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다. 아스팔트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는 거리, 오고가고 사람은 많았다. 그럴 시각이다. 한쪽 다리를 끌 듯이 걷고 있는 영광은 키가 컸다. 홍이도 부친을 닮아 키가 컸다. 단단한 홍이 체구에 비해 영광은 다소 메말라 보였다. 구겨진 회색 바지에 수박색 남방셔츠를 입은 영광은 방안에서 그 부스스했던 모습과는 달리 거리에서는 아주 세련돼 보였다. 직업상 그랬을 테지만 그러나 직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불편한 걸음걸이 때문만은 아닌 듯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마차를 타고 이들이 간 곳은 연강루였다.
"술 좀 하지."
"간밤에 과음해서."
"서로가 다 마음 안 편한 처지, 술로나 풀어야지."
홍이는 안주와 맥주부터 가져오라 하며 종업원에게 이른다.
"지난 얘기 해봐야 소용없지믄 그때 형님을 만나지 않고 자네가 가버렸을 때, 다음 만나면 뚜딜겨 패주겠다, 생각했지."
"안 올려고 했지요."
"어째서."
"하지만 오고 말았습니다."
술을 따르고 술을 마신다. 영광은 술잔을 비운 뒤에도 어머니와 동생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입밖에 그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색소폰인가 그걸 아직도 부나?"
"네, 작곡도 조금 하구,"
"장차 작곡가로 나갈 건가?"
"내일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냥 해보는 거지요."
"시국 땜에 그러나?"
"글쎄요. 시국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러고는 화제가 끊어지고 말았다. 영광은 화제를 잇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고 홍이는 원했던 물건을 손에 넣기라도 한 듯 느긋해 있었다. 장본인인 송관수가 신경에 없다는 사실이 홍이를 막연하게 하기도 했다.
"요즘 국내 사정은 어떤가."
"그저 그렇지요.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더 어려워질 거라고들 하더군요."
"글세... 그럴 게야. 지원병에는 많이들 나가나?"
"도시에서는 그렇지도 않지만 지방, 시굴에서는 관원 유지들 감언이설에 속고 혹은 강제 협박하는 등살에 심약한 청년들은 못 견디어 나가는 모양이더군요. 더러는 출세의 길로 착각한 무지랭이들이 자진해 나간다는 말도 있고."
"자네는."
질문의 뜻이 무엇인가 한동안 망설이다가
"머지않아 조선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되겠지요. 벌써부터 학교에서는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었고 창씨 개명하라고 성화가 이만저만 아닌데 노래라고 부르게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럼 뭘 하고 사나."
말을 해놓고 보니 맥 빠진 것이기도 했지만 우문이었다. 홍이는 멋쩍게 웃었다.
"군가 나부랭이나 부르게 되겠지요. 그리고 전선의 위문단으로 추럭 타고 다녀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럴 거야... 이곳에서도 남 먼저 창씨개명인가 뭔가 하고서 날뛰는 친일파, 그놈들이 안 한 사람을 역적 대하듯 하니, 참말로 역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도처 마찬가집니다. 왜놈이 못 되어 환장하든 새끼들이 창씨개명에 감읍하는가 하면 어떤 시골 무지랭이는 밭 갈다 말고 덴노헤이까 반자이를 외치며 두팔 치켜들고 지원병으로 나갔다 하고, 한마디로 만화지요."
술잔을 거듭 들면서부터 영광은 좀 적극적으로 얘기를 했다. 어쩌면 당장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자신의 처신 문제를 잊고 싶어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조선은 그 자체가 감옥입니다. 아무도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어요. 죽어서 도망치지 않는 이상 그놈들 구령에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의 말을 들으면서 홍이는 송장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선 민족을 볼모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선생님,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볼모에게는 고국이 있고 백성이 있고, 또 임자도 따로 있지만 우리에게 그것이 있습니까? 문서가 있습니까? 약속이 있습니까? 풀려날 기약이 있습니까? 고립무원입니다. 우리에게는 비벼대볼 언덕 하나 없습니다.'
총칼과 교지로써 우리 속에 가두어진 조선 민족, 성질 사나운 놈 있으면 잡아먹고 지혜로운 놈 하나 있으면 잡아먹고 먹음직스러우면 잡아먹고 허약한 놈 잡아먹고 나머지는 부려먹으면서 필요할 때 조금씩, 유사시에는 비상용이고, 분명 볼모는 아니다. 일본이 강탈한 강산에 노닐던 짐승들이다. 그들 재산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같이 하늘과 땅 사이에 법이 없는가. 그러나 법을 바라는 자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는 죄인이 되어 가둠을 당하며 모든 것, 생명까지 박탈당해야 한다. 이 무법의 벌판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걸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군가 죽으면 서럽게 울면서 장사 지내고 만나고 이별하고, 무법의 벌판에서 그들은 어떤 앞날을 꿈꾸는 걸까. 조선에서 숱하게 만주로 팔려오는 처녀들에게도 앞날은 있는 걸까. 칼의 문화, 유곽문화, 그것도 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여하튼 일본 군화가 지나간 곳이면 맨 먼저 어김없이 서는 게 유곽이다. 그러고 보면 칼과 섹스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고 생과 사의 윤회인 것 같고, 이 미망의 유전은 진정 끝남이 없는 것인가. 유곽으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 그것은 죽음인가 삶인가. 죽음도 아니며 삶도 아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땅도 빼앗기고 삶의 터전도 다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딸을 팔아넘긴 부모의 그 죄업의 생애를 전율 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 공장 월급의 몇 달치 선불이라 속이고 얼마간 금액을 떨어뜨린 사내들은 딸을 끌고 간다. 가난과 생명의 존재는 이토록 처절한 것인가. 참 그렇다! 이 길에서 김두수를 빼놓을 수 없지. 김두수의 돈줄이 본시 그 길이었으니까. 소싯적부터 만주로 흘러 들어와서 한 손에 검을 쥐듯 밀정으로 출발했고 한 손에는 황금을 쥐듯 아편과 여자를 팔았다. 특히 여자 장사에는 이골이 난 사내다. 그는 지금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전선이 넓어지면 질수록 사냥감의 수요는 늘어날 테니까.
'그놈은 일본 놈 개라기보다 지옥에서 도망 나온 야차 같은 놈이다. 지 애비가 그리 됐다 해서, 지놈이 설움을 좀 받았다 해서 조선 사람 다 잡아먹기로 작정한 놈이다. 기막힌 일이지. 그 놈 애비 손에 죽은 사람의 자손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작두에 목 짤라 죽이고 일시키다 병나면 늑대먹이로 던져서 죽이고 그런 왜놈한테 죽은 자의 자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김두수 그놈이야말로 작두에 걸어서 목을 짤라 죽일 놈 아니고 뭐겠나. 제 살을 무는 놈, 천하에 악종이지.'
언젠가 정석은 그런 말을 했다. 홍이는 고개를 흔든다. 김두수 생각만 하면 진저리가 쳐진다. 웬 까닭인지 요즘 김두수가 의식 속에 기어드는 일이 종종 있다. 어젯밤에도 김두수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영광은 요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맥주 말고 다른 술을 달라고 해서 주문한 빼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돌아온 홍이는 갑자기 영광에게 짙은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혈육 같은 것을 느낀다. 그도 몰린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무수히 상처받고 승복과 부정의 가름길에서 방황하며 갈등에서 허우적거렸을 그의 세월은 홍이가 떠나보낸 세월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외가를 닮은 모양이다.'
하얗고 반듯한 영광의 수그린 이마를 바라보며 홍이는 맘속으로 뇌었다. 영광의 얼굴은 좀 독특했다. 관골에 그어진 흉터 때문인지, 그러나 그것은 과히 흉 없지 않을 만큼 엷었으며 창백한 낯빛에 굴곡이 깊고 음영이 짙었다. 소위 범눈썹이라고들 하는데 부드럽게 퍼지면 모양을 이룬 눈썹은 특히 보기 좋았다. 청춘의 표상같이 싱그러웠다.
산수화 한 폭이 걸려 있는 요리집 방안은 깨끗했다. 조황빛 수술이 늘어진 화려한 등은 창밖의 바람 따라 조금씩 흔들리곤 했는데 창밖 그곳에는 황혼에 물든 하늘이 있었다.
"최참판댁 소식은 더러 듣나?"
침묵을 깨듯 홍이 물었다.
"그 양반들 소식을 어찌 알겠습니까."
통기듯 말하다가
"환국이는 가끔 만납니다."
환국이라 말할 적에 영광의 표정은 흔들렸다. 고뇌스럽다 할까 감미롭다 해야 할까, 그가 보인 최초의 순수한 정감의 표현이었다.
"교사로 있다는 말을 나도 듣기는 했는데."
"서울서 사립 중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있지요. 황태수라고 방직공장하는 사람의 막내딸과 결혼도 했구요."
"자네는?"
"결혼 말입니까."
"그래."
"가정 갖는 것은 단념했습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일에서부터 집을 뛰쳐나가게 된 것은 어느 여학생과의 연애 사건이 원인이라는 것, 사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백정의 신분이 발각되어 여학생 집에서 들고 일어난 때문이라 했는데, 여하튼 문제의 여학생이 영광을 뒤쫓아 동경까지 갔고, 두 사람은 동서 생활을 한다. 그것까지는 홍이도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송관수도 그렇고 홍이도 아는 바 없었다. 홍이는 섣불리 그 여자와의 현재 사정을 묻지 않는다.
"단념을 해?"
"저는 결혼 안 할겁니다."
"어째서? 집안 내력 땜에 그러는 건가?"
"..."
"딱하구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곰팡내 나는 그 따위 생각을 하나. 그도 젊은 사람이."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 개인, 내면에 관한 문젭니다."
영광은 여전히 가족에 관한 것, 안부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홍이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한 상태였다.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자칫 잘못하다가는 부자 상면도 틀어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자니 화제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상당량의 술을 마셨고 술을 절제하기 위해서도 무엇이든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국이 동생은 뭘 하나."
겨우 말을 이었다.
"윤국이 그 애는 대학 농과를 졸업하고 다시 경제과로 들어갔다든가요? 사회에 나오기 싫어 그랬을 겁니다. 나와 봐야 조선인들 하는 일이란 뻔하지요. 그 애는 성질이 팔팔해서 형하고는 딴판입니다."
"형이 어때서."
"나약한 편이지요. 너무 맑아서 저 사람이 왜 사바세계에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상당히 부럽지요. 하기는 뭐 아무나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거, 천성일 겁니다."
나약하다는 것은 허두였을 뿐 영광은 환국을 깊이 경애하듯 말했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인 성싶었다. 그리고 앞서 말하기를 그 양반들 소식을 어찌 알겠느냐, 그때는 분명히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결국 최참판댁이라는 틀 속에다 환국을 집어넣고 생각하는 것이 영광은 싫었던 모양이다.
"어릴 적에 네댓 살쯤 됐을까? 그러니까 용정에 있을 땐데 그 사람을 어린 공자라 했었지. 생각이 나는군."
"그런 말이야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요?"
그렇게 발끈할 필요도 없었는데 영광은 화를 내듯 말했다.
"도덕적이라는 말처럼 환국이를 그릇되게 표현하는 것은 달리 없을 겁니다. 만약 도덕적으로 무장이 되었더라면 환국이는 훨씬 강해졌겠지요. 그리고 정치적으로 변신했을 겁니다. 그 사람은 순수합니다."
홍이는 내심 놀란다.
"정치적이라 하면 독립운동을 말하는 건가?"
영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환국의 부친을 두고 정치적으로 변신했다 그 뜻이야?"
"그분에 대해선 모릅니다."
일단 그 질문은 회피해놓고 그 자신 지나쳤다 생각했는지 얘기의 방향을 돌렸다.
"사상범에게 예비 검속령이 내리지 않을까 환국이 걱정하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근화방적에서 그분을 국외로 나가게 할려고 궁리를 한 모양인데 뜻대로 되지 않는가 봅니다. 환국이 어머니께서 그 일은 서두셨다 했고 시기를 놓쳤다는 말도 있구요."
근화방적은 황태수가 경영하는 업체인데 몇 해 전부터 만주 방면으로 진출했으며 방직공장뿐만 아니라 적잖은 황무지를 매입하여 개간 사업도 아울러 진행하고 있었다. 사돈간이 된 길상을 이곳 사업체의 무슨 직함이라도 붙여서 내보내려고 공작을 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간의 사정을 홍이도 다소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길상이 국외 탈출의 시기를 놓쳤다고들 했다. 그러나 송관수의 견해는 달랐다.
"시기를 놓친 기이 아니고 아예 조선을 떠날 생각은 안 했다, 그렇게 봐야 할 기구마. 여기 온다 해서 소련이나 저쪽으로 빠지지 않는 이상 발걸음이 사납기로는 다를 기이 없고 말이 남의 땅이지 만주가 조선하고 머가 다르노. 왜놈이 숨통 막고 있기로는 매일반,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나 중경 쪽으로 가는 일이 쉬운가? 그 사람이야 왜놈 총칼 위에 서 있는 형국인데 자칫 잘못, 꼬타리가 잽히는 날에는 사돈 사업 망하는 거는 둘째 치고 여기 일에 화근이 안 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기라. 그래서 한분 찍힌 사람 운신하기도 어렵지마는 쓸모없다고들 하지. 또 길상이 그 사람 이곳 사정 꿰뚫어보고 있을 긴데 자기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도망을 성질도 아니고 그럴 바에야 죽든 살든 앉아서 뭉개자 그런 심산일 기다."
얼마 전에 정석이 왔을 때 관수가 한 말이었다.
"그 양반들 소식을 어찌 알겠느냐 하더니, 꽤 소상하게 알고 있네."
빈정거리는 듯한 홍의 말에 영광은 거칠게 술잔을 들었다. 솔직하지 못했고 비겁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영광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추럭 타고 전선 위문단으로 댕기느니 차라리 이곳에 오면 어떨까?"
"독립 운동하라 그 말씀입니까?"
비웃었다.
"그런 뜻은 물론 아니다. 내 자신 운동하고는 무관한 사람이고, 북만주 그쪽이면 모를까 이곳이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것도 옛말이다."
"형님, 아 그게 아니지."
영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호칭이 마땅하지 않았고 헷갈리기도 했지만 진심을 털어놓기가 어려웠으며 홍이에게 대항하기도 어려웠다. 주량은 많았으나 도무지 취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것도 이상하구 이홍 씨!"
영광은 냅다 던지듯 소리를 질렀다.
"이거 참 촌수가 어찌 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촌수 없는 서로간의 사저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상관없다. 편한 대로 하게. 하하핫핫..."
홍의 웃음소리도 턱없이 컸다. 서로가 서로를 느꼈는데, 동질감을 느꼈는데 하여간 뭔가가 어려웠던 것이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처지에다 가로놓인 문제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지, 그러나 그보다 지극히 예민하고 섬세한 공통점이 이들을 어렵게 하는 것 같았다.
"저는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저는 별 볼일 없는 놈입니다. 하지만 종기에 손을 댈까 말까 망설이듯 그렇게 대하지 마십시오. 들겨들어서 짜든지 아니면 외면해버리든지, 어릴 때부터 그런 것에는 딱 질려버렸습니다. 물론 성질이 못돼서 그랬겠지만 저는 종기도 화약도 아닙니다. 한때 일본서 난동을 부리고 죽을 둥 살 둥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다가 이 지경 몸을 망가뜨렸지만 계속 그랬다면 살아 있기나 했겠습니까? 백정이란 말만 나와도 상대를 들고패는 아버지를 닮은 것도 아니구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솔직하게 말입니다. 저는요, 송관수 김길상 그분들을 우러러 받들 만큼 어리지도 않고 자신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도 꾸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애족, 독립을 논하지 않으면 순 날건달로 치부하지만요. 소위 운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그 실체 이상으로 침소봉대해서 감격하고 찬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자기만족 같은 것 아닐까요? 그것은 환상, 일종의 환상이며 기만입니다. 마른 자리에 앉아서 손뼉만 치고, 그러고는 말없는 사람을 비난합니다.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어째 얘기가 그리로 빠지나 응? 그리고 날 들으라고 하는 얘기야?"
"손뼉만 치는 사람인지 투쟁하는 사람인지 어찌 알고서 형님 들으라고 말을 했겠습니까."
어느덧 호칭은 형님으로 돼 있었다. 홍이 소리 내어 웃고 영광은 그러는 홍이를 삐딱하니 쳐다보면서
"과연 영웅호걸이란 있습니까?"
묻는다.
"영웅 호걸, 위대한 애국자, 신출귀몰하는 의인, 사실 그런 게 있습니까?"
재차 묻는다.
"있었으니까 역사책에도 나와 있겠지."
농치듯 말하고 홍이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영광은 바닥 깊이까지 들이키듯 술을 마셨다.
"그건 말입니다, 그건 사람들이 치장을 해서 내놓은 것들입니다."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되잖은 소리, 치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어. 자네는 자네 부친도 모르고 있잖은가."
"왜 모릅니까. 압니다."
"안다면 이럴 수가 없지."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사람이 뭐 그리 대단하고 독특하겠습니까."
"복잡하군. 뭐이 그리 설명이 필요해."
그러나 영광은 무가내로 계속한다. 그러나 이야기 내용 따로, 균형 잃은 마음 따로, 지리멸렬이었다. 목말라하는 고통 같기도 했다.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귀신을 만들어내고 영웅을 만들어내고 왜들 그러지요? 사람답게 못 사는 한풀입니까? 왜 사람들은 남들에게 이런저런 옷을 입히기를 좋아하는 거지요? 아름다우면 추하게 입히려 하고 추하면 아름답게 입히려 하고, 반대로 아름다우면 더욱더 천상적으로 꾸미려 하고 추하면 더욱도 지옥으로 만들려 하고, 진실은 어디 있습니까? 온통 빈껍데기, 빈껍데기만...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화려한 무대에서 연주할 때 관객들은 환호합니다. 영광합니다. 껍데기만 보구요. 껍데기를 벗어버린 무대 뒤가 얼마나 살벌한지 아십니까? 추악한 일들, 더러운 몰골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습니다. 지분으로 떡을 쳐서 청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가수가 무대 뒤에선 임자 없는 추녀라든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가 기둥서방한테 머리채를 잡힌 채 지갑 바닥까지 털어야 했다든가,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본시 그런 모습,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럽고 과히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게 삶의 현실 아닐까요? 대체 신성한 곳은 어디 있습니까?"
"자네 말대로 하자면 담요 한 장 둘러메고 얼음판을 뛰다가 얼어 죽은 사람, 굶주리며 행군하는 사람,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사살되는 사람, 그들도 치장하고 무대에 선 가수나 배우와 같다, 정말 그런 거야?"
"독립이라는 헛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지요."
처음으로 홍이 얼굴이 노기가 떠올랐다.
"젖비린내 나는 소리 짝짝 해! 자네 아까 뭐라 했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같은 것 꾸지 않는다 했지? 자네만 그런 줄 알어? 그들에게도 꿈같은 것 없다!"
"그럼 왜지요?"
"달콤한 꿈이 없어서 인정 안 하려는 자네와 달콤한 꿈을 꾸지는 않으나 목숨을 거는 사람, 그 차이점 때문이다."
"차이점이 뭡니까."
"구제불능이군."
"맞습니다. 구제불능! 하하핫... 하하 도시 누가 구제하고 누가 구제를 받지요? 구제한다, 구제받았다, 참 우습군요. 정말 엉터리군요. 교활하고 어리석은 영웅과 교활하고 어리석은 대중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관계 속에서 적당하게 만들어낸 것이 그놈의 구제니 구원이니, 해방, 자유 따위의 말 아닙니까? 김길상! 송관수! 네에 그분들 애국자지요. 소위 독립투사 아닙니까. 하지만 어쩌다가 그분들이 그 판에 뛰어들었을까요. 자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동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어느 쪽이지요? 한풀이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자기 신분에 대한 한풀이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되나? 한풀이하면 안 되느냐 말이다."
"된다 안 된다는 문제가 아니지요. 과연 한풀이가 되겠느냐 그겁니다. 언제 세상이 변하지요? 어느 천 년에 변하느냐 말입니다."
"세상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부자간 의견이 일치하는구먼."
홍이는 시답잖다는 듯 술을 마신다.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영광은 계속한다. 집요하게 그야말로 집요하게 신작로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같이.
"내 처지나 지 처지나 다를 것이 없는데, 비오는 날이면 빗줄기 바라보고 노가다 죽이는 데 아이꾸찌 필요 없다, 비가 와서 일 못하면 굶어죽는다, 그 말인데요, 그렇게 한탄하는 밑바닥 인생인데 말입니다. 조선을 지배하는 왜놈의 종자랍시고 그놈들, 왜놈 노가다 패가 조선인 노가다를 떡치듯 패고 망가뜨리고 병신으로 만들고."
잠시 동안 말을 끊었는데 다음 순간 허겁지겁 누가 뒤쫓기라도 하듯 목쉰 듯한 음성은 이어졌다.
"그거는 예를 들어서 한 말이지만 계층 따라서 그 방법은 물론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맞는 놈 때리는 놈, 도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없어지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밥그릇 크기를 따져서 생긴 일입니까? 진주서 농청과 백정이 싸웠을 때도 이해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짓밟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의 본성."
"그만해 그만."
홍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영광의 몰골을 애원이었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술주정을 한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 본성, 본성 말입니다. 밥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위냐 너가 위냐, 그것 때문에 더 많이 때리고 맞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구요. 재물이나 권력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등이면 굶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다 많은 재물, 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는 것은 실상 배고픈 것하고 절실하게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나고 호령하고 지배하고, 그런 걸 위해 권력과 재물을 가지려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얻은 것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다, 대체 그건 무엇일까요. 호령하고 뽐내고 남을 짓누르는 것 말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일까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 잘난 사라들 걸핏하면 흔들어대는 깃발이지만요, 그것은 거의가 불순합니다. 우월감이 딱 자릴 잡고 있거든요. 지배를 예비하고 있단 말입니다. 깃발처럼 높이 솟으려는 의지가 있단 말입니다. 사실 그것으로 권력을 잡았구요. 정의니 팔굉일우니, 공영이니, 침략자 왜놈들이 즐겨 쓰는 말 아닙니까? 과연 정의가 있습니까? 자유가 있습니까? 평등이 있습니까? 있어 본 일이나 있습니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있어. 왜놈 군화 밑에 우리가 지금 있는 걸 몰라? 태평세월 같은 말 하고 있네."
"왜 모르겠습니까. 독립투사의 아들이 그걸 모를 리 없지요. 해서 하는 얘깁니다. 눈구덕에서 얼어죽고, 왜놈한테 총 맞아 죽고, 감옥에서 목매달아 죽고, 네, 그것으로 한 인생 땡 치는 거지 뭐 달라진 것 있겠느냐 말입니다. 제 한목숨 끝난 것 이왼 달라지는 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 말입니다."
"친일파 찜쪄먹겠다. 왜놈들이 들으면 상 주겠구나."
"뭐라 해도 좋습니다. 살아 있는게 제일이지요."
"마른자리에서 손뼉 친다 하더니 네놈이야 말로 마른자리에 편히 앉아서 욕설을 일삼는 거짓말쟁이다. 말로써 못할 일이 어디 있어. 누군 입이 없어 가만히 있는 줄 아나? 횡설수설, 야 이 자식아!"
"네, 아 네 그렇지요."
영광은 갑자기 초점을 잃은 듯 멍한 눈으로 화가 나 있는 홍이를 쳐다본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어디서부터 시작했더라? 하고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딴전만 펴고 있을꺼야!"
홍이 소릴 질렀고 영광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갔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조각처럼 다듬어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만일 이번에도 그냥 도망가는 날엔 각오해. 나머지 다리는 내가 뿐질러놓을 테니."
"..."
"어쩔 거야!"
"만나지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버지가 절 잡아 죽이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만나보고 가겠습니다."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순순히 나오는 영광의 태도에 오히려 홍이 쪽이 당황한 것이다. 사설을 늘어놓는 꼴을 보아 애먹이겠다 싶었던 것이다.
"잘 생각했다."
"..."
"그럼 일어서라. 가자."
"어디루요?"
여관방에서 홍이 나가자 했을 때 어디로 말입니까 하던 그때와 흡사했다. 도발적으로 튕겨져 나온 목소리가 흡사했다.
"어디긴 자네 집이지."
"그렇게는 못합니다."
단호했다.
'...?"
"아버진 목단강인가 그곳에 가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아버지만 만나고 어머니 동생은 만나지 않겠다 그 말인가?"
"아버지 오신 뒤 함께 만나지요."
역시 단호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엔 달이 댕그머니 떠 있었다.
"아버지 오신 뒤에 집으로 가겠습니다."
걸음을 옮기지 않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영광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공연이 끝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돌아오실 때까지 신경에 남아 있겠습니다. 약속하지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그리고 제가 왔다는 것, 집에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 이유가 뭣인가."
"어머니가 두렵습니다."
"어머니가 두려워?"
"네."
영광은 눈을 들어 달을 본다."
"그 어진 분이 어째 두렵나."
한동안 말이 없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긁듯이 쓸어 넘기고 나서
"배신했지요... 어머니를 말입니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홍이는 큰 바위를 안고 넘어진 것 같았다. 진득진득 발이 빠지는 갯벌, 해질 무렵에 부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심장을 휩쓸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로, 그것은 복병의 습격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그때 가족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때 홍이는 영광을 망나니가 아니면 옹졸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부자간의 문제이기보다 기실, 가장 강하게 의식했던 사람이 어머니 영선네였다는 것을 홍이는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사실 홍이는 지나치게 백정에 대하여 과민했던 송관수가 못마땅했고 그 때문에 때론 관수가 몹시 왜소한 사내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이 맞았을 때 홍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모든 형편을 여실하게 파악한 것이다. 낮추고 또 낮추고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듯 영선네의 그같은 모습이 새삼스럽게 홍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핏줄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어머니, 그 속에서 생명이 생겨났고 그 속에 머물렀던 모태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해서 부정의 그 깊이만큼 넓이만큼, 또 농도만큼 배신했다는 회한도 깊어지고 넓어지며 짙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상승 작용하는 것이며 끝없는 평행선인 것이다. 홍이는 뼈저리게 그 갈등을 겪었고 임이네가 세상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되살아나면 용납할 수 없었던 생모에 대한 죄의식과 회한에 사로잡히곤 한다. 영광의 경우, 백정을 부정한 것은 어머니를 부정한 것이며 가정과 가족을 버린 것도 결국은 어머니를 버린 것이 된다. 인연을 끊었다면 그것도 어머니와 인연을 끊은 것이다. 홍이는 그 따위 곰팡내 나는 생각, 더군다나 젊은 사람이, 하고 나무랐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 자식을 백정의 자식과 함께 공부시킬 수 없다. 벌떼같이 학부형들이 몰려오면 백정의 자식은 학교를 떠나야 했다. 사춘기에 흔히 있는 여학생과의 편지질도 신분을 감춘 백정의 혈통이기 때문에 보무가 들고 일어나 문제 삼는 것이다. 송관수가 비밀 조직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관헌의 눈을 피하여 전전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신분의 노출을 꺼려 보초같이 일가가 떠돌아야만 했던 청소년 시절 부딪치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으며 스스로도 정신적 울타리를 치지 않고는 안주할 수 없었다. 의식이나 생활면에서도 그것은 가둠을 당한 상태, 동굴 속과도 같이 외부와 차단된 세계였다. 영광은 자기 존엄에 상처를 받은 분노 때문에,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은 어머니를 부정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행동이었다. 최참판댁의 길상으로부터 학자금 지급의 제의를 받았을 때, 완곡하게 마지막까지 환국이 설득하려 했을 때도 대학 진학을 마다하고 학원을 전전하며 경음악의 길로 들어선 것은 물론 재능이 있었고 취미도 있어 그랬지만 영광으로서는 최소한도 그러한 자신의 처지에서 해방되기를 원한 때문이다. 그는 높은 교육을 받아도 그들 계층에 들어설 수 없으며 설령 들어섰다 하더라도 더욱더 자신을 옥죄는 존재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홍이와 그가 다르다면 영광이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점일 것이다. 미움과 사랑의 격차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의 회한과 자괴심은 같은 것이다.
일교차가 심하여 밤거리에 부는 바람은 선선했다. 어디서 전쟁을 하고 있는지, 도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카키 빛을 지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승객을 기다리는 마차가 머문 곳을 이들은 지나치며 걷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지 않겠나?"
'아닙니다."
"내일 한 시에 공연이 있지."
"네."
"우리 집에서 자고 아침에 가도 되겠는데, 여관 보담이야 낫겠지."
"아닙니다. 가야지요."
그러면서도 영광은 발길을 돌려놓지 않았다.
"서울서 거처는 어떻게 하고 있나."
"일정하지 않습니다."
내키지 않는 대답이었다.
"생활은 할 만한가?"
"네. 그럭저럭."
한 다리를 끄는 소리, 때론 휘청거리며 영광의 몸이 홍이 쪽으로 쏠리곤 한다.
"얼마 전에 서울서 악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
"아꼬디온을 연주하는 사람인데 전부터 안면은 있었지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신경의 달을 얘기했습니다."
영광은 댕그머니 떠 있는 달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신경 어느 카바레서 아꼬디온 연주로 밥벌이를 했다는데 얼마 전에 아주 조선으로 나와버렸다 하더군요. 왜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달 땜에 그리 됐다 하고 웃어요."
"달 땜에?"
"네. 그가 하는 말이, 어느 날 카바레를 찾은 손님 중에서 우연히 고향친구와 마주치게 됐는데 반가움보다 왠지 마음이 울적하여 친구가 권하는 대로 술을 마셨다는 겁니다. 원래 술을 못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어디 견딜 수 있었겠어요? 너무 고통스러워 옥상으로 기어 올라갔더랍니다. 뿌연 하늘에 달이 댕그랗게 떠 있었는데 그의 말이 신경 와서 처음 보는 달이었다나요? 달이야 보름 전후에서 노상 떠 있는 것이지만 밤에 밥벌이를 하다 보니 그의 눈에 띄지 않았겠지요. 그 달을 보는 순간 그 친구,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랍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달보고 물어보았지만 만주 벌판을 부는 바람 소리뿐, 그 친구 술 취한 것을 핑계 삼아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그 길로 카바레를 때리치우고 조선으로 나왔다, 그런 얘기였습니다."
달을 보았기 때문에 그 얘기가 생각나서 한 말인지, 아니면 그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안 가려고 마음먹었던 공연에 따라오게 됐다는 것인지 영광의 그 속마음은 알 길이 없으나 여하간 타국살이 어려움을 잘 나타낸 이야기 한 토막이었다.
신경에서 이틀간의 공연을 끝내고 길림으로 떠났다. 그때까지 송관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길림에서의 공연은 5일서부터 8일까지 주야 이 회, 그러니까 사일간 팔 회인데 악극단으로는 제법 장기 공연이라 할 수 있고 출연진도 다소 지루해지는 기간이기도 했다. 공연장은 시공회관이었다. 낮 공연을 끝내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영광은 술렁거리는 무대 뒤 분위기를 해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려는데 복도 끝에 무용수 배용자와 마주쳤다. 감색 스커트에 진홍빛 블라우스를 입은 용자는 영광을 보는 순간 고개를 홱 돌리고 바람을 가르며 거친 몸짓을 하며 옆을 지나갔다.
"병신 주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용자 목소리였다. 영광은 한 대 갈겨줄까 생각하다가 못 들은 척 밖으로 나온다. 뭐 그리 화가 났던 것도 아니었다. 병신이니까 병신이라 하는 거다, 그쯤 생각했던 것이다. 높은 산을 넘어온 사람은 낮은 산을 수월하게 넘는다. 영광이 넘어온 인생 산하도 어지간히 험하고 고달팠던 터여서 병신이라는 야유쯤 별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편에서 용자에게 가해한 일이 있었기에 야유든 수모든 간에 마음에 꽂히지는 않았다. 영광은 배용자와 결혼할 마음도 사랑을 나눌 마음도 없었다. 책임질 언행을 취한 바도 없었다. 책임이 있다면 완곡하게, 여자 마음을 다치지 않게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 그만큼 집요하게 성가시게 용자는 구애를 표시해왔던 것이다.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지방공연에 갔었을 때다. 영광이 든 여관방에 느닷없이 용자가 나타났다. 놀라기도 했지만 성가시게 구는데 화가 난 영광은 그를 방 밖으로 떠밀어냈다. 그 순간 복도에 발랑 나자빠진 용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을 꽝! 닫아버리고 숫제 방문을 잠가 버렸다. 그 후 벌어진 것이 자살 소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늘 동료들과 티격태격 사이들이 나빴던 용자에게 단원들 동정이 쏠린 일이었다. 용자를 몹시 미워하는 여자들조차 너무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눈초리로 은근히 영광은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자를 편 들어 그랬다기보다 가까이 가면 사람을 떠밀어내는 듯한 영광의 묘한 분위기,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한 경험들이 있고 자연 까끄럽게 생각한 탓일 것이다. 자살 미수로 끝난 용자는 동정에 힘입었는지 풀이 죽기는커녕 복수 하겠다 하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비윗살 좋고 거침없이 말하며 떠벌리는 성격의 배용자,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왈, 나는 상해 본바닥에서 무용을 격식 있게 배웠다. 상해는 망명한 부모를 따라갔다, 본시 우리 집은 상당한 문벌이었고 수많은 종을 부리는 처지였는데 아버지가 반일인사로 주목받아 풍비박산이 되었고 결국 망명길을 떠나게 됐다, 으리으리하게 잘 사는 친척도 있지만 너무 어릴 적에 부모가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줄을 찾을 근거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말보다 용자는 자신을 대단한 미인으로 자부하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안하무인으로 놀았기 때문에 살결이 희고 눈이 크고 콧날도 오뚝해서 얼핏 보기에 때깔을 좋았다. 어떤 옷을 걸쳐도 세련돼 보이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특별히 미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일성 씨, 거 큰 업덩이를 만났구려."
자살 소동이 있은 후, 술자리에서 꽹꽹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바이얼린 주자 유인배가 걸어온 말이었다. 다른 또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떠벌리고 다니는 모양인데 실상 뒷심도 없고 단순한 여자요. 그러다가 제풀에 주저앉을 테니 염려할 것 없어요."
악단의 섭외 일을 보고 회계도 관장하며 제일 바쁘고 실권도 있는 한민수였다.
"제깐에는 그래도 첫사랑이었을 거야. 눈이 천왕산같이 높아서 누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양 볼이 홀쭉한 유인배는 입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듣고 보니 이거, 나형에 대한 찬송가군 그래."
"사실 매혹적인 사내지. 불완전의 비애까지 곁들여서 말씀이야."
"바이런처럼?"
이들의 이십대 시절, 젊은 층을 풍미했던 낭만파 시인 바이런, 다리를 절었고 수많은 여자가 염문을 뿌렸던 사내를 어디서 귀동냥 했는지 한민수는 매우 적절하게 써먹는다.
"왜들 이러십니까."
영광은 쓰게 웃는다.
"수수께기의 사내고."
"하 참."
"또 있지. 얼음장같이 차디찬 사내, 시인같이 홀로 방황하는 사내, 그게 다 여자들 죽여주는 거지."
"..."
"아무튼 부럽소이다. 연예인으로서 삼박자를 고루 갖추었으니 한량없이 부럽소."
빈정거리는 투가 없지 않았으나 진실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술자리였지만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색소폰에는 일인자라는 게 중평이었고 작곡의 수준도 만만치가 않아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인 것 같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광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울하게 술잔을 들며 영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광의 내력을 모른다. 알고 있다 한들 명문대가 자제들이 노는 무대도 아니겠고 사당패 창극패를 천시하던 구습이 뿌리 깊게 남아서 신파나 경음악을 딴따라라 하며 시답잖게 보는 형편이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영광이 전혀 동하지 않고 어우러지려고 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별수없이 두 사람의 화제는 용자에게로 되돌아갔다.
"배용자한테 무용하는 언니가 하나 있다 하데."
"있지이."
자신 있는 유인배의 어조였다.
"대단한 여자라며?"
"대단한 그런 정도가 아닐세. 배용자를 거기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야. 피래미지, 피래미."
"기량 말인가, 성깔 말인가."
"춤추는 실력이야 뭐 피장파장일걸? 그러나아, 소위 가짜가 붙은 무용가다 그 말씀이야. 무용가 배설자."
"이름이, 일본 냄새 하네."
"용자는 요오꼬, 설자는 유끼꼬, 본시 일본 이름이지. 하여간 무용가, 가짜가 배설자에게 붙은 것은 실력으로 된 것도 아니구 인정을 받아서 된 것도 아니구, 행세를 그렇게 하고 다닌다 그 말슴인데, 발표회도 한 번인가 가졌을 걸? 누구를 구워삶았는지 알 수 없지만."
유인배는 꽤 소상히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인인가 부지?"
"미인?"
낄낄 웃었다.
"배용자를 살짝 그슬러놨다, 그렇게 상상해봐. 조형도 약간 못한 편인가?"
"이 사람아 배용자한테서 흰 살결을 빼고 나면 뭐가 남나. 게다가 조형까지 못한다면 그건 추녀 아닌가."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보아서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고, 음산해. 그러나 체격 하나는 그만이야. 마치 무용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완벽해."
"결혼은 했나?"
"그게 분명치 않아. 그들 자매의 과거는 오리무중인 셈이야. 왜? 딴생각 있어서 묻는 거야? 아서라 아서."
팔을 휘휘 내저었다.
"흥, 처자 있는 몸, 절세가인인들 어쩔 것인가."
"외도 안 하는 사람 같은 말 하네."
"중상모략 말게."
"자네 같은 사람, 배설자 안중에도 없겠지만 잘못 건드렸다간 골로 가네. 쫄딱 망하는 거야."
"그리 말하니 호기심이 생기는군."
"사교술의 천재, 권모술수에 능하고 마타하리, 한마디로 가까이 안하는 게 상책인 그런 여자야."
마타하리는 유명한 여자 스파이의 이름이다.
"떠벌이 배용자가 언니 얘기는 도통 안 하던데?"
"이복자매라고도 하구 아버지가 다른 자매라고도 하구, 모르지 확실히는. 사이가 나쁜 건 사실이다. 서로가 시기해서 그런 것 아닐까?"
귓가에 흘러들은 그저 그런 얘기였다. 물론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고 배설자라는 여자의 이미지는 험했다.
밖으로 나온 영광은 잠시 동안 머물러 서서 광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낮 공연이 끝나면 거리로 나와 혼자 배회하는데 길림에 와서 오늘이 사흘째다. 낯선 고장에 가게 되면 언제가 거리를 헤매는 것이 영광의 오랜 습관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이러쿵저러쿵, 마음에 없는 말, 헐뜯는 말을 듣는 것도 지껄이는 것도 싫었고 감정 품은 눈빛도 불편하여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지만 낯선 고장이 그는 좋았다. 낯설다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자유였고 해방이었던 것이다.
길림은 조용하고 은은한 도시였다. 마치 여기저기 청태 낀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듯, 그러나 암울하고 음습하지는 않았다. 비오신 뒤 햇빛 받는 순간처럼 싱그러웠다. 아마 송화강과 곳곳에 늘어진 버들의 그 영롱한 푸름 때문이 아닐까. 이랑을 지은 기와의 처마가 가지런히 연이어진 주택가 역시 청태와 같은 고풍이 감돌았고 모든 빛깔이 풍우에 어우러져 차분하게 관조하듯, 그러나 세월과 인생에 쓸쓸한 미소를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뛰노는 어린 것들에게, 당나귀를 몰고 가는 소년에게 쓸쓸한 미소를 던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얗게, 넓게, 곧게 그리고 유장하게 드러누운 가로 양편에는 여진족의 꽃으로 핀 청조의 자취를 머금은 웅장한 건물들이 역사의 부피와 숱한 사연을 견디고 있어 예사롭게 볼 수 없었다. 훤하게 트인 길 위에 오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차가 달리고 이따금 자동차 트럭이 지나가곤 했다. 길림은 신경에 비하여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유곽문화의 침투가 적은 것같이 보였다.
영광은 송화강 강가에까지 갔다. 강은 도시를 휘감으며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길림은 수향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물은 만주 땅 광활한 들판 거반을 적신다. 하얼빈을 지나 멀리멀리 우수리강과 합류, 노령 하바로프스크까지, 송화강은 가히 만주의 젖줄이며 대지의 생명선,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다. 땅문서가 없었던 땅, 땅임자도 없었던 땅, 흑룡강 우수리강에는 어족이 지천이며 사계절 유목과 수렵, 나무열매의 채집으로 굳이 땅을 일구지 않아도 넉넉했던 삶의 터전, 기름진 망망 대륙인 만주 땅, 대궁을 사용했었다는 동이족이 송화강 따라, 우수리강 흑룡강을 건너 시베리아 벌판인들 아니 넘나들었다고 어찌 단언하리. 강물은 청록빛, 청자를 빚은 물빛인가, 고구려의 남정네가 이 강물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아낙이 이 강가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지난날은 모두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날이 설사 질곡의 하늘 밑이라 한들 어찌 오늘만 할 것인가. 그 옛날 나라의 기틀을 잡아주고, 무지 몽매하여 고구려에서 보낸 국서도 오직 읽는 이가 왕인의 자손 한 사람뿐이었다든지, 그런 그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주고, 죽통에 밥 담아먹는 그들에게 도예를 가르치고 불상을 바다에 띄워 보내주고 그렇게 예술을 전해주었는데 우리는 지금 저들에게 야만족으로 매도되고 있다. 금치산자로 선고받은 것이다. 어느 나라 지도에도 조선은 없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는 것이다.
멀리 야트막한 산들이 보인다. 신경은 물론 길림 오는 동안에도 산은커녕 언덕 하나 볼 수 없었는데 영산 백두를 옹위하여 중첩되는 산맥들은 이곳에서부터 시작인지. 영광은 강가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강변에도 묵직한 중량으로 버들은 늘어져 있었다. 버들 그림자가 드리워진 강물 위로 배가 가고 오고 강 언덕을 의지하여 선체를 붙인 작은 배달, 언제부터 사람들은 저토록 지혜롭고 안쓰럽게 살아왔을까. 영광은 담배를 붙여 물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속되고 천박했던 자신의 언행은 술 탓이다, 술이 과했던 거야, 하며 그 일을 외면하려 하지만 대가리만 숨기고 몸뚱이는 드러낸 채 숨었다고 생각하는 꿩과 같은 것이었다. 연강루에서 행한 그 장광설, 그날 밤을 생각하면 영광은 손바닥에서 땀이 질적질적 솟아나듯 불쾌하고 자신을 경멸하는 마음이 치솟는다. 뭐가 그리 잘났다고, 뭘 안다고, 뭘 잘했다고, 그것은 요즘 며칠 동안 자기 자신에게 던져온 자기 경멸의 반복되는 말이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같은 장광설을 홍이 앞에서 늘어놓게 되었는지, 영광은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의사 표시를 할 적에도 어눌했고 때론 앞 뒤 잘라먹고 몇 마디로 해치우는 경우가 있어 듣는 사람이 얼른 이해 못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성미가 급하다고 생각했고 사실 충분히 성질이 급하여 그 예로 동경서 난동부린 일이며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에 흠집이 남은 것을 들 수 있다. 오직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놓은 환국에게도 영광은 그같은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지껄였는지, 전혀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후반에는 매달리다시피, 숨이 넘어갈 듯이 지껄이게 된 그 목마름, 부끄럽고 창피했다.
'미친놈, 누가 목을 조르려고 덤비기라도 했나? 펄적펄적, 용수철 튀듯이, 왜 그랬지? 뭐? 마른자리에 앉아 박수 친다 했던가? 그 형은 날 보고 마른자리에 앉아 욕설을 일삼는다 했었지. 친일파 찜쪄먹을 놈이라고도 했고.'
영광은 마음속으로 끼룩끼룩 웃는다. 그때 그 광경, 내 말 좀 더 들어보라 하며 매달리듯 애원하듯, 그 광경은 자신이 되새겨보아도 가관이었다. 왜 그렇게 지껄여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강언덕에 아랫도리가 숲에 가려진 채 하늘로 치솟은 고딕식 성당이 서 있었다. 첨탑 위에 눈빛같이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어디로 가나 성당은 가장 좋은 장소에 세워지는 모양이다.
'칼 든 도적을 힘센 놈이라 인정치 말라. 보따리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은 골생원을 너무 비웃지 말라. 칼 든 도적과 대적치 못한 것은 치욕이 아니며 다만 칼을 멀리한 도덕군자의 어리석음이니라. 세상에 칼 든 도적만 있다면 어디 사람 사는 곳이라 하겠느냐. 금수보다 못한 아비규환의 지옥과 무엇이 다를꼬. 저 계몽주의의 탈을 쓴 친일분자들이 민족을 개조한답시고 내 것을 깡그리 내다 버리고 내 것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내 모든 것을 부정하며 애국, 우국의 지사로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내니 사람들은 그를 선각자로 섬기더라. 연이나 내 가진 것 다 버리고 풍찬 노숙, 그 가여운 신세가 거지와 무엇이 다르리. 빚도 내 것이 있어야 주는 법, 이미 도적질 당한 강산인데 이제 와서 내 세월까지, 모조리 부정하니 그것은 육신과 더불어 혼령까지 팔아먹는 것이니 이 어찌 이보다 더한 반역이 있을 손가. 우중들아! 칼 든 도적을 인정치 말라. 영원한 것은 없나니, 칼 든 도적은 칼로 인하여 가고, 어리석은 자는 그 순직함으로 하여 오게 될 것이니라. 만고의 진리는 무상함이요, 윤회 유전은 인과응보를 이름이라. 우주의 질서는 사람의 질서보다 더디게 오느니라.'
어디서 들었는지 말한 사람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디서 읽었는지 그 책의 이름이 기억에 없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알지 못할 목소리였는지, 스스로 의식 밑바닥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영광은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담배연기와 함께 흩날려버리려 한다. 민족이니 독립이니 그런 것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적 동류의식도 부담스러웠다.
'어디든 떠났으면 좋겠다.'
가족을 만나게 될 괴로움 때문에 그는 지금 떠나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실 그는 항상 떠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조숙했고 독서광이었던 영광은 책 속에서 어느 사막이며 호수며 바닷가 고원지대 벌판 또는 어떤 도시를 만나게 되면 그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원시림을 헤매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고 낯선 어느 고장 누추한 방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어가는 자신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젊은 날에 흔히 있는 감상이지만 영광의 경우는 감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깊이 뿌리박혀버린 방랑에의 동경 때문에 그는 늘 우울했다. 언제였던지 외할아버지를 보고 영광은 말했다.
"왜 그럴까요? 할아버지, 어디로 떠나는 꿈을 자꾸 꾸어요. 늘 어딘가 떠나고 싶기도 하구요."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영광의 얼굴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역마살이 들었나부다,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담뱃대를 찾는 것이었다. 책만 산다고 하면 언제든지 쌈지를 풀어 돈을 꺼내어주던 외할아버지는 골수에서부터 백정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시퍼런 칼도 피 냄새도 그에게서 느끼지 못했다. 집을 비우기 일쑤인 아버지 자리를 외할아버지는 채워주었다. 그가 눈물을 보인 적이 한번 있었다. 보통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영광이 때문에 재산을 모조리 정리하고 진주를 떠날 때 외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린다. 그 후 그는 소를 잡지 않았고 푸줏간도 그만두었다. 여하튼 중학교 오학년, 졸업반에서 쫓겨나기까지 영광은 문학 서적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책을 상당히 광범위하게 섭렵했다. 책은 그에게 구원이었고 숨 쉴 통로였으며 외롭지 않았다. 동굴 속과도 같이 차단 된 세계 속에 책은 유일한 벗이었다.
"또 책 살 기가? 책 가지고 집 지을라 카나. 이사 갈 때마다 니 책 때문에 골이 아프다."
영선네는 노인이 쌈지를 풀 때 아들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곤 했다. 늙은 아버지에게 경제 문제를 의존해왔기 때문에 영선네는 죄송했고 진주서 정리해온 재산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곶감 빼먹듯, 불안했을 것이다.
"시끄럽다. 머릿속에 넣어둔 것만큼 확실한 재산은 없다."
강혜숙과의 만남은 등굣길에서였다. 여학생들은 올라오고 중학생들은 내려가는 완만한 언덕길, 봄이면 벚꽃이 억수로 피는 길이었다. 갈래머리 소녀는 열여덟이었고 곧은 체격, 청년기에 들어선 영광은 스무 살이었다. 여학교는 사년제이며 중학교는 오년제인데 영광은 한 해를 쉬었기 때문에 두 살 나이차가 났다. 상급 학교에 가지 않는 일반 처녀애들의 결혼 적령이 십육 세 전후인 데 비추어 혜숙이나 영광의 나이는 꽉 찼다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역시 성숙한 사랑을 하기에는 어렸다. 다가오기로는 혜숙이 먼저였다. 혜숙은 혼신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신분에 대한 자의식 때문에 피동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영광에게 혜숙은 문학적인 어떤 풍경같이 눈에 비쳐졌고 순결한 한 송이 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이 그리움이었는지, 막연했다. 영광은 편지를 받으면 읽고 나서 한 장 한 장 불을 붙여서 소지를 올리듯 살랐다. 타서 흐트러지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혜숙은 늘 푸른빛의 반지처럼 얇은 편지지에 깨알 같은 작은 글을 써서 보내왔다. 왜 편지를 태우며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지 영광이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시를 쓰듯 소설을 쓰듯 영광은 열렬한 답장을 띄웠다. 등굣길에 마주치는 것과 편지 내용뿐인 사랑이었지만 혜숙에게는 필사적인 일이었고 영광에게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혜숙의 부모나 오라버니가 경악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거의살인적 분노로 일을 크게 벌인 것은 사회적 습관상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상처 입은 맹수같이 동경바닥을 헤매 다닐 때 혜숙이 뒤쫓아왔다. 그러나 영광은 결코 위로받지 못했다. 몇 해 동안 그들은 동거했지만 영광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운명적인 여자로, 혜숙을 깊이 사랑했더라면 극복될 수 있었던 일이었고 영광의 생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가온 것도 헤숙이 먼저였고 떠난 것도 혜숙이었다. 마음이 얼어붙은 남자 곁에 타인으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영광에게 혜숙은 타인이었다.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혜숙은 지금 서울에 있다. 혜화동 길모퉁이, 자그마한 양재점을 하며 살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영광은 그 길모퉁이 양재점을 찾아간다.
"잘 있었어?"
"잘 있어요. 요즘에도 술 많이 해요?"
미싱을 밟다가 일어서며 혜숙이 하는 말이었고 어렵지 않으냐고 영광이 물어볼라치면
"엄마가 아버지 몰래 도와주시니까 괜찮아요. 나도 일이 있어야잖겠어요?"
하곤 했다.
그리움도 죄책감도 없었지만 신세를 망친 여자, 전력 때문에 당한 재출발도 하기 어려운 여자, 그 현실이 영광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나이도 생각도 모습도 성숙해진 혜숙이, 세파에도 시달린 혜숙은 오히려 누님같이 침착하게 영광을 대해주었다. 그러나 영광은 거의 혜숙을 잊고 살았다. 금욕주의자가 아닌 그는 이따금 여자를 만나 미래가 없고 인색한 풋사랑을 나누기도 했지만 상대는 대개 화류계의 여자들이었다.
강가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영광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면서 지팡이를 곁에 놓고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웃었다. 영광이도 웃었다. 잡상인들도 더러 있어서 과일이며 조롱에 든 새, 자잘부레한 골동품 엽전 따위를 펴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한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영광은 시가를 헤매다가 어느 반점에 들어가서 요기를 하고 공연장으로 돌아왔다. 연주를 끝내고 무대에서 나왔을 때 악극단의 단원 한 사람이 급히 영광에게 달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영광은 무심하게 들었다. 극성스런 팬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서 오셨답니다."
"신경서?"
놀란다. 처음에는 목단강에 갔다는 아버지가 돌아와서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에는 미덥지가 못해서 동행하려고 이홍이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급한 일이랍니다."
"급한 일?"
영광의 안색이 확 변한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뛰게 했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복도로 갔을 때 촉수가 낮은 어두컴컴한 전등 아래 낯선 사내가 몹시 초조한 모습으로 연신 땀을 닦고 있었다.
"제가 송영광입니다. 뉘시지요?"
서둔 나머지 셔츠 하나만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즈봉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마천일이었다. 그는 대뜸
"어서 신경으로 가야겄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이 목단강으로 떠나믄서 급히 댁을 데려오라 했십니다."
"무슨 일루요."
"저기, 저어, 송씨아저씨가 세상 버맀십니다."
"..."
"호열자로 별안간."
2장 춤추는 박쥐들
"원장 계시냐?"
한복 차림의 강선혜가 들어서며 물었다. 서른 안팎으로 뵈는 여자가 마당에 물을 뿌리다 말고 곁눈질을 한다.
"계십니다."
강선혜는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여자의 눈길이 마음에 안 들었다.
"명희야 나 왔어!"
하는데 여자도
"원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쌍나발을 불 듯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 이렇게 일찍 웬일이우?"
방에서 나오는 명희는 의아해 하는 표정이다.
"웬일이나마나, 사람 사는 게 이래 되겠니? 같은 서울에 살면서 너 본 지가 일 년은 넘은 것 같다."
"홍천댁, 나 냉수 한 그릇 줄래?"
"방으로 올라오세요. 곧 가실 거 아니지요?"
홍천댁이 내미는 물사발을 받으며 선혜는
"물이나 마시구, 아이구 덥다."
"방이 더 씨원한데."
물 한 그릇을 벌덕벌덕 들이켠 선혜는 마루로 올라왔다.
"너 조반은 먹었지?"
"그럼요. 언닌 식전이에요? 조반 차릴까?"
"아니야. 먹었어. 친정에서."
두 중년의 여자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뒷벽을 트고 쪽마루를 붙였으며 유리 덧문에 활짝 열려 있었다. 목련 한그루가 있는 뒤뜰 돌담 너머, 양옥 건물의 빨간 지붕이 보였다. 목련의 그늘이 짙어서 좀 어두웠지만 꽤 시원한 바람이 그곳에서 스며들었다.
"몸이 더 난 것 같아요."
"왜 아니라니. 이러다가 대마도 씨름꾼 되겠다. 너는 더 마른 것 같구나. 조물주도 어지간히 심술궂으셔. 반반씩 나누면 어때서, 세상일 참으로 맘대로 안 되는구나. 권선생은 핀잔이구 아이들까지 밥 덜 먹어라 구박이니."
방안은 시원했는데 강선혜는 부채를 집어 들고 부산스럽게 부쳐댄다. 동경 유학을 했던 신여성 강선혜, 첨단을 가면서 열정적으로 멋 부리기를 즐겼던 그도 오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담청색 숙고사 치마에 흰 모시적삼을 입은 그의 모습은 이제 평범한 중년 아낙에 불과했다. 명희도 얼굴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청초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권선생님하구 쌈했어요?"
"쌈했느냐구?"
"이렇게 일찍 찾아온 일은 없었지 않아요?"
"지금 권선생 집에 없어."
명희는 농치듯 말하고 웃었다.
"조선 팔도 어디메 살기가 좋은가, 죽장 짚고 집 나간 지 사흘이나 됐어."
"그럼 정말 가출이네."
"강우너도 정선인가, 철원인가 거길 갔는데 글쎄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어제 친정에 갔다가 하룻밤 자고 집에 가는 길에 들른 거야."
말투로 보아 문제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권선생님 안 계시니까 천천히 놀다 가도 되겠네요. 나도 방학이구."
"언제 내가 그 사람 눈치 보아가며 살았었니?"
"말로는 그러지만 안 그랬어요? 하여간 저심 먹구 저녁도 잡숫고 가세요. 그러는 거지요?"
"앳다, 모르겠다, 그렇게 하자꾸나."
명희는 홍천댁을 불러 뭐 시원한 거를 내오라고 이른다. 강선혜는 부채질을 하다 말고
"그 블라우스 빛깔 참 예쁘다."
"관심은 여전하군요."
"관심까지 없어지면 나는 뭐야. 그러잖아도 억울해 죽겠는데."
"억울하긴? 그런 말 말아요."
"하여간 빛깔 예쁘다. 살구빛이네. 하기는 아무나 입어 좋은 색은 아니지. 너만 하니까, 내가 입었다간 갈데없는 광대꼴,"
하다가
"명희야."
새삼스럽게 이름을 부른다.
"넌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니?"
"그 말 나올 줄 알았어요. 언닌 무슨 재미로 살지요?"
"나야 권선생하고 쌈하는 재미로 살지. 하기는 뭐, 요즘 같아서는 홀가분한 너가 부럽기도 하지만."
"부러워요? 그렇담 자부심을 좀 가져도 되겠네."
"누가 말려서 못 그랬니? 이런 꼴로 사는 것도 자업자득, 너 자신이 원한 길, 별수없지."
"내가 뭘 원했기에..."
"관두자. 말해보아야 소귀에 경읽기, 너만 보면 답답해서 같은 말 자꾸 하게 된다."
변함없는 그 말가락에 명희는 피식 웃는다.
임명희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조용하의 자살이 있은 지 오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남쪽 바닷가, 통영 읍에서도 서편으로 빠져나간 곳에 해저 터널은 있었다. 저승길 같은 그곳을 지나갈 때 노인들은 소리 내어 염불을 했다. 해조음 이었는지 억겁 피안에서 업을 전하는 사자의 목소리였는지 임진왜란 때 그 목에서 몰살을 당했다는 왜병들 원혼의 신음이었는지, 바다 밑의 울림소리를 헤치고 밖으로 나오면 한간의 가장 좁은 수로를 볼 수 있었다. 수로 맞은편 완만한 언덕은 파아란 보리밭,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물결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해안 길을 따라서 돌아가면 쓸쓸한 그곳에 외딴 분교 하나, 넓어지고 확 트인 수로는 잠긴 호수 같았고 물 위에는 섬이 둥둥 떠 있었다. 분교에서 정식 교사도 아닌 촉탁으로 예닐곱 여자아이들에게 재봉과 수예를 가르쳤던 임명희, 신분을 감추고 두드러진 모습을 낮추고 호기심과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피하며 또 학교에 소개해준 바 있는 읍내의 젊은 교사 엄기섭의 오뇌에 젖은 시선을 침묵으로 방어하면서 육년 같을 견디어낸 명희는 별안간 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와서 유치원을 개설했던 것이다. 뒤뜰 돌담 너머, 붉은 지붕의 건물이 바로 그가 경영하는 모란유치원이다.
법적으로 조용하의 아내로 남아 있던 명희는 상당한 유산을 분배받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조찬하가 형의 재산을 정리하려 했을 때 집안에서는 임명희의 가출을 문제 삼아 유산 분배를 반대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임명희가 최우선이었다. 조용하는 폐암이라는 치명적 병을 숨겨왔고 따라서 양자에 관한 일은 거론되지 않았으며 재산을 정리하는 조처가 일체 없었기 때문에 사후 처리에 임하면서 사실 조씨 일문은 두 번 머리를 푼 꼴이 되었던 것이다. 임명희는 물론 임명빈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만약 법적으로 문제가 제기된다면 조씨 집안에서는 대항할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하여간 조찬하의 끈질긴 노력으로 상당한 재산이 임명희에게 돌아왔고 나머지는 양친과 가까운 친지들에게 나누어졌으며 회사는 당분간 제문식이 맡아 하기로 결말이 났다. 그러나 결말이 나기까지 고비는 많았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조찬하의 늙은 부모였다. 임명희에게 재산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에게 분배되는 것조차 한사코 반대했다. 그것은 조씨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게 때문이다. 모든 재산은 찬하가 관리해야 하고 양자 문제는 찬하에게 아들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는 주장이었고 명희 쪽에서 소송을 제기한다면 끝까지 싸우겠다, 감정이 격해진 양친은 명희와 불륜의 관계가 있기에 명희 편에 서는 것 아니냐 극언까지 하며 찬하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구구하게 말한다는 자체가 치욕스럽습니다. 더군다나 형님이 안 계시는 이 마당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님 어머님께서 그토록 저를 면박하시니 지난 허물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시다시피 형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형님은 기혼이었고 저는 미혼이었습니다. 미혼인 청년이 규수를 보고 청혼할 마음이 생겼다면 그게 어째서 잘못이겠습니까. 형님은 저의 마음을 알고,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이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규수댁에 매파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주저앉았습니다. 형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을 했고 이유고 모르고 시달렸습니다. 집 나간 것도 그렇습니다. 형님이 이혼을 선언했고, 그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임교장도 계셨구요. 후에 형님은 이혼의 의사를 철회하고 형수님을 찾기는 했습니다만, 도대체 그분 잘못이 뭣이지요? 돌아가신 분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다만 저는 차남으로서 이미 분배받은 재산이 따로 있고 그것으로도 자식을 양육하기에 충분하니 형님 유산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형님에 대한 저의 감정일 수도 있고 오기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형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분은 지금 유일한 상속잡니다. 그럼에도 유산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절제하며 한 말이었으나 찬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고 명희에 관한 일 역시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한 오라기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인실과 오가다와 함께 바닷가 분교를 찬하가 찾아갔을 때 얼굴이 진홍빛으로 변하면서 눈은 증오심에 타듯 희번득이던 명희의 모습은 완전무결한 타인이었다.
"상관 마세요. 제발 상관 말아주세요."
하던 명희, 내 불행은 모두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이야! 하고 외쳐대는 것만 같았던 눈동자, 인간과 인간 사이가 얼마나 비정해 질 수 있는가를 전신으로 느꼈던 그 순간, 찬하의 가슴을 얼어붙게 한 것은 명희의 이기심이었다. 마지막 자기 존립을 위한 방어, 적대감이었다. 화약과도 같은 인실과 오가다를 그 항구에 남겨놓고 황황히 떠난 찬하는 뱃길에서 환상을 버렸고 인간의 영원한 외로움을 인정했다. 그러나 찬하가 오해한 부분도 있었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 친 것은 본 그대로였고 방어의 굳은 몸짓, 참혹하리만큼의 증오심을 담은 눈빛도 찬하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러나 명희는 다른 사람의 경우에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그때 조용하에게 납치되어 산장에서 심한 성적 학대를 받은 뒤 자신은 도살당한 짐승, 육체를 통해서 영혼의 도살을 당했다고 생각한 그때부터 명희는 자신이 만신창이가 됐다는 자의식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드려내는 것은 치욕이었다. 초라하고 남루하며 바위에 들러붙어 바닷물에 이리저리 쏠리는 작은 고동같이, 미물같이, 투신했다가 어부에 의해 건져 올려져서 죽지도 못한 여자,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광기에 가까웠던 그런 시기였다. 어쨌거나 재산 처리에 마무리를 짓게 된 것은 혜택을 받게 될 친척들이 단결하여 찬하의 방안을 밀었기 때문이며 형의 유산은 받지 않겠다는 찬하의 결심이 확고부동했기 때문인데 그 후 부친은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어떤 뜻에선 찬하야말로 비정하고도 이기적인 인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의식 속에는 조씨 가문을 묻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형, 그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은 혈통에 대한 증오감으로, 나라를 강탈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씨 가문의 치욕스러움은 혈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찬하는 가문을 묻어버리고 말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는 집안을 매장하고 만 것이다.
얼음을 띄운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데 점심상이 들어왔다. 맛깔스럽게 차려진 점심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선혜는 홍천댁의 곁눈질이 마음에 안 들었고 반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홍천댁 팔뚝에 털이 많은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맛나게 점심을 먹은 강선혜는 식상하다 하며 치마끈을 풀고 누울 자리를 찾는다. 명희는 옥색 누비 베갯잇의 베개를 벽장에서 꺼내주었다.
"늙었다, 별 수 없이 늙었어. 누울 자리부터 찾으니 말이야."
편안하게 누운 강선혜는 이따금 느슨한 부채질을 하곤 한다.
"언니 대단해요."
"뭐가?"
"이 더운 날씨에 버선 신고 배기는 것 말예요."
말도 말어. 집에서는 잘 때말고는 버선 못 벗어. 권선생이 맨발엔 질색이야. 하기는 그래, 남자들도 맨발은 숭업더라 이애."
"그러면서도 권선생님한테 복종 안 하고 산다 하겠어요?"
"복종이 아니구 자존심 때문이야. 마포 강서방 딸이라 그렇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 요즘에야 습관이 돼서 괜찮지만 처음엔 발이 아프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양말 신으면 될 텐데."
"조선 옷에 양말이 될 말이냐? 기본은 지켜야지.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아까부터 나는데."
"냄새라니요?"
"향수는 아닌 것 같고."
"아아, 옥잠화예요."
"옥잠화라니."
"뒤뜰에 피었어요. 지금이 한창이라 향기가 짙어요."
"어디."
강선혜는 일어나서 뒤뜰 쪽으로 다가가 내다본다. 하얀 옥잠화가 꽃대를 따라 맺어가며 시작 부분에서는 활짝 꽃이 피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꽤 여러 포기 옥잠화는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순백이라는 말은 아마도 옥잠화를 두고 표현했을 거야. 저런 흰빛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눈도 저 빛은 아니야. 어떤 꽃도 저 같은 흰빛으론 피지 않아. 백합 따위는 옥잠화에 비하면 지저분하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에 취한 듯, 선혜는 침이 마르게 옥잠화를 찬송하다가 풀어진 치마끈을 여미고 다리를 쭉 뻗는다.
"옛날의 임명희가 저 옥잠화 같았지."
"무슨 말 할려고 또 그래요? 전주곡은 늘 그렇게 시작하니까 겁나요."
명희는 강선혜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듯 웃으며 쳐다본다.
"변했어. 변해도 아주 많이 변했어."
"변할 수밖에요."
"변한 김에 아주 변해버려. 좋은 사람 만나 연애도 하구 결혼도 하는 거야."
"언니 벌써부터 노망 들었수? 나이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에요?"
"넌 아직 아름답고 매력이 있어."
"우린 좀 있으면 오십이에요."
"그런가? 하하핫핫..."
선혜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웃다가
"세월이 무섭. 늙은 것보다 사람이 변하는 게 무서워."
"..."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늙었다는 것보다 맑은 샘이 없어진 듯 생각이 말라버린 느낌이 들 때 슬퍼."
"언닐 슬프게 해서 미안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넌 생각이 말랐다기보다 현실적인 여자로 변한 게 아쉬워."
명희는 잠자코 있었다.
"별난 성미였는데, 한없이 약하고 얼띠고 길 가다가도 뒤에서 웃음소리가 나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색다른 옷을 입고 나갔다가 놀림을 당하기라도 하면 두 번 다시 넌 그 옷 입지 않았다. 조그마한 변화에도 엄마 잃은 고아같이 얼굴이 오소소해지고 신경이 거미줄 같았어. 그나마 신경이 강철 같은 강선혜가 끌고 다녔으니 사람도 만나고 했지."
"알아요. 나 자신도 힘들었으니까요. 우리 유치원에도 수집음을 많이 타고 심약해서 말을 못하는 아이가 더러 있는데 내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어떤 땐 쥐어박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해요. 화초같이 살든지 그렇잖으면 짓밟혀 갈가리 찢어지게 마련이에요."
"이젠 너, 갈가리 찢겨지지는 않겠다. 무슨 말을 해도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고 삭이노라 애쓰는 애처러운 모습도 아니구, 너 대하기가 편해졌다. 그러나 옛날 임명희가 그립다. 강하게 딱 뻗치고 서 있는 여자는 징그러워. 아시겠어요? 원장님."
"난 이제 죽을 수 없어요."
그 말에는 관심 없었고 선혜는 다시 말했다.
"옛날 조용하 씨 어부인으로 세상 여자들이 부러워 몸살 앓는 지경인 그때도 나는 너가 애처러웠다. 죽지 부러진 작은 새, 고개 떨군 한 떨기 꽃."
"뭐하는 거예요? 언니 시 읊으시는 건가요?"
낄낄 웃는다.
"그런데 요즘엔 이 궁상으로 혼자 살고 있지만 애처럽지가 않으니 웬일일까?"
"얼굴 가죽이 두꺼워져서 그래요."
"뭐?"
"도망갔던 여자가 자살한 남자 유산 받아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그게 보통 심장이겠어요? 그만한 배짱이면 종로통에 나가서 고리대금인들 못 하겠어요?"
무표정해지면서 명희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선혜는 놀라고 당황한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냐?"
"아니오."
"그럼 왜 당치도 않은 그 따위 말을 하니? 바람나서 남자 따라 집 나간 것도 아니구 남편 학대에 못 견디어 나갔는데 당연히 받을 걸 받았을 뿐, 어째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 아니 오히려 많이 양보한 셈이지."
"양보?"
"가만있자... 그러니까 그게, 넌 여기 없었고 조용하 씨 유산 문제가 풍문으로 나돌았을 때 일이구먼. 명희야 너 정상조 그 사람 생각나니?"
"누군데요?"
"동경 있을 때 너에게 관심이 있어서 접근해오던 남자, 왜 그 이찌마루, 스시집에서 장장, 여성론을 거나하고 입정 사납게 논하든 법학도, 생각 안 나?"
"아아 생각나요."
"생각나지? 그 치가 고문 패스를 하고 검사까지 해먹었는데, 우리 권선생이 잡혀갔을 때 고약하게 굴었다 하더구나."
"그 얘긴 왜 해요?"
"그때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단 말이야. 검사는 때리치우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하면서 너에 관한 얘길 묻더군."
"언니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하는 거지요?"
"내 얘기 더 들어봐. 법률가니까 의당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지. 그의 말에 소송을 하게 되면 너가 이긴대."
"그 따위 얘기 관두세요."
언짢은 기분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나도 뭐 그것에 관심이 있었던 거는 아니지만 답답해서 그런다. 당연한 일 가지고 얼굴가죽이 두껍네 어쩌네 하니까 해보는 말이잖니?"
"정말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사랑하는 남자, 조찬하 씨가 베푼 호의 때문에 그나마 한몫을 얻은 거 아닐까요?"
서슴없이 내뱉는 말에 강선혜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점점 한다는 말이, 무슨 그런 흉칙한 말을 하니? 너 나한테 좋잖은 감정이라도 있어 그러는 게야?"
"뒤에서 모두 그런다든데요?"
"먹고 할 일 없는 것들이 배가 아파서 하는 마리지. 아직도 널 부러워하는 모양이다. 샘이 안 나면 그런 입방아 찧지도 않아."
"부러울 게 뭐 있수."
"미모와 재산이지 뭐겠나."
"..."
"사실 너에게 무슨 죄 있니. 죄 없다. 조찬하 씨도 죄 없다. 잘못은 조용하 씨의 욕심이었지. 그보다는 어쩔 수 없는 운명, 비극이야."
"죄가 있어 벌 받나요? 불운이지요. 아무리 도망가도 불운이 따라오면 도리 없어요. 뛰든 멈추든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멈추어서 불운과 친해질 밖에요."
"맞는 말이야. 맞어. 요즘 내 심정하고 꼭 같은 말을 하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래. 어쩌면 우리 시굴로 내려갈지도 몰라."
"시골? 왜요?"
놀란다.
"글세 그게 권선생 결심이라지 뭐니. 권선생은 애들 모두 시집 장가 가서 분가를 했고 내 아들 혁이는 중학생이니 외가에 맡기면 된다는 거고, 서울 생활 끝장내자는 거야."
"그럼 권선생님 고향에라도 내려간다 그 말이에요?
"권선생 고향이 어딨어. 서울토박인데."
"하면은."
"강원도 산골에나 갈까, 갈까가 아니지. 이미 갈 곳 찾아나섰다."
"뜻밖이네요. 뭘 하구 사시자는 건가요."
"농사 짓재, 기가 막혀서. 그 사람이나 나, 호미 한번 잡아본 일도 없는데 농사를 어떻게 하니."
"말이 그렇지, 농사 안 지으면 먹고살 수 없는 처지도 아니구, 부잣집 상속녀가, 그야말로 돈키호테 같은 얘기군요."
"얘가, 농담 아니야."
"권선생니이 어째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미심쩍어한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모양이야. 너도 알다시피 그 사람 야심은 좀 큰 편이지만 경거망동하는 성미도 아니구 매사를 분명하게 처리하려는 편이잖니."
"그렇지요."
"나도 권선생 계획을 옳다고 생각해. 그 동안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결심 한 것이 무리는 아니다, 너도 그랬지만 우리도 좀 풍랑을 겪었니? 권선생은 어떻하든 살아남아야지, 죽어서도 안 되고 협력을 해서도 안 된다, 협력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말을 여러 번 했어."
"시국 얘기군요."
비로소 명희는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친정에서는 남들도 다 사는데 하필 권서방만 유별을 떨 거 뭐 있느냐, 남 하는 대로 하고 살아라, 하지만 우리 속사정을 몰라 하는 말이지."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기분 나쁜 징조가 나타나니까 하기야 우리 오빠도 불안한가 봐요."
"표면적 변화도 그렇지만 권선생의 경우는 훨씬 복잡하고 위험해. 차라리 나 같은 것하고 결혼 안 했더라면... 권선생 결혼 잘못했어."
강선혜의 얼굴은 심각했다.
"시국하고 언니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 있기에?"
강선혜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감정을 억제하는 그런 모습이다.
"이야길 할려면 길어... 참 사건이 많았다. 너가 모르는 사건들이 많았어. 넌 시굴에 내려가 있었으니까 잘 모를 거야."
"예맹검거 때, 권선생님도 들어가셨든 그 일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 일 하지만 권선생의 경우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입술을 깨물다.
"내막이 추악해. 몇 사람이 뭉치면 매국노를 만들 수 있고 미치광이도 만들 수 있고 살인자도."
"그게 언니 결혼한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명희야, 조선 사람들 의식 구조가 어떤 건지 너 아니?"
가라앉은 눈빛으로 명희를 바라본다.
"아직은 지독한 봉건주의 아닌가요?"
"이중 구조야. 이를테면 수구와 개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 함께 있는 거야. 너도 그렇구 나도 그 이중 구조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어. 신여성이라 일컫는 교육받은 여성들, 그 대부분이 완상품이며 고가품일 뿐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없다. 좋은 혼처에서 주문하는 고가품이요 돈푼 있는 것들이 제이제삼의 부인으로 주문하는 완상품이다 그 말이야. 그러면 진보적인 쪽에선 어떤가. 그들 역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여자에게 주려고 안 해. 이론 따로 실제 따로, 남자의 종속물이란 생각을 결코 포기 하지 않아. 여자가 인간으로서 있고자 할 때 인형처럼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야. 신여성이 걸어간 길은 완상품이 되느냐 망가지느냐 두 길뿐이었다."
"지금 언니가 겪는 일이 그것도 상관이 있나요?"
그 말대꾸는 없이
"같은 부르좌라도 마포강 장배로 시작해서 부자가 된 강서방과 권문세가의 후예로서 유산이든 당대에 번 것이든 간에 그런 자산가와 다르다는 것, 몰랐지. 부르좌는 무슨 계급의 적이요 탐욕은 인민의 적, 그렇게만 들어왔으니까 말이야. 나라 팔아먹는 데 나설 자격도 없었고 백성에게 호령하며 수탈하는 처지도 아니었고 장사해서 돈 벌었다, 그게 멸시와 야유로 나타나고 그런가 하면 조상의 이름 석 자 알려진 부르좌에 대해선 공연히 켕겨서 입을 헤벌리고 말 못하는 남아장부, 나라를 팔았건 백성의 고혈을 빨았건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사회풍토."
"언니 다 그런 건 아니지 않아요. 어디든지 변두리 클럽은 있게 마련이구, 일부의 그같은 모순 때문에 전부를 매도할 순 없어요."
"나는 당하는 당사자니까, 그 피해가 권선생한테까지, 사실 우리에겐 심각한 문제야."
옛날에 비하면 침착해졌고 무게를 갖게 되었으며 아내와 어머니로서 평균점은 얻고 있는 강선혜, 본시 성격이야 소탈했으나 물정 몰랐던 그가 비교적 신중하게 사물을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권오송의 영향이겠으나 오늘은 감정의 노출이 심한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사정이 심각한 모양이다.
"이런다고 우리 아버지 두둔한다 생각지 마. 잘한 것도 없으니까. 나 역시 잘한 거 없지. 천방지축, 계집애가 집안에서 왕 노릇 하니까 밖에서도 통할 줄 알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미꾸라지 용춤 춘 꼴이지 뭐니? 여자도 사람이 되자! 하하핫핫 하핫핫핫."
갑자기 선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언니이."
"그래, 그래, 하하핫핫핫... 나 안 미쳤다. 생각하니까 우습지 뭐냐? 여자도 사람이 되자! 그 따위 평등론을 쓴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지 않니? 명희야. 설익은 밥해서 손님상에 올린 밥장수같이 말이야. 생쌀이 목에 넘어가겠어? 꼬타리는 거기 있어.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부모 죽인 원수같이, 일이 어찌 그렇게 꼬여들었는지... 애당초 마포강 강서방의 딸이 일본 유학 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거야."
"그런 말이 어딨수? 그럼 역관 딸이 동경 가서 공부한 것도 잘못이겠네. 언닌 말말이 마포강 강서방, 아버님을 그래도 되는 거유?"
핀잔을 주었으나 오래전 그때 일은 명희도 잘 알고 있었다. 웃음거리 놀림감 사면초가였던 당시의 강선혜를 기억하고 있었다. 치졸한 글이었지만 내용이 그렇게 심히 지탄받아야 할 만큼 엉터리는 아니었다. 화젯거리로 삼은 쪽이 지나쳤고 악랄했던 것이다. 글의 내용보다 그것을 빌미로 강선혜를 조롱하는 쾌감이 있었기에 집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미운 놈, 그러나 약한 것 (거침없이 행동했지만 선혜는 독하지도 못했고 깡다구도 없었다) 하나 골라서 떡치고 분풀이하는 군중심리라고나 할까. 강선혜의 말대로 마포강의 뱃사공 강서방이 장배를 부리며 돈을 벌었고 중국과 피혁을 무역해서 거부가 되었으니 대조적으로 보잘 것 없는 출신을 들추는 것이 인심이요 일자무식 아비의 딸이 최고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꼽고 약 오르는 일이었을 것이며 이혼까지 한 주제에 콧대를 높이고 다니는 꼴도 심기 사나워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문예지 청조사를 맴도는 지식인 예술가로 자부하는 고만고만한 무리 속에는 선혜만한 학벌 가진 사내들도 흔치 않았으니까. 사실 문벌 좋고 벌족 넓은 집안의 규수였더라면 그토록 마음 놓고 갖고 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권오송 씨에게 접근하고 청조지에 후원금을 내고 한 것은 괄시받고 능멸당한 분풀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것을 발판 삼아 글도 쓰고, 그땐 젊었지. 젊었다기보다 철부지였었다. 내소박하고 뛰쳐나온 것부터가 그래. 아무튼, 청조 주변에 모여든 떨거지들이 젤 나한테 심하게 굴었거든. 권오송 씨에게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결혼이나 연애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다. 그도 아이가 딸린 홀아비요 나도 결혼에 한번 실패한 여자, 불가능할 것도 없지만 권오송 씨는 좀더 좋은 여자를 고를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 계산 빠른 사내는 내가 단순하고 악의 없는 여자라는 점에 주목한 거야. 자기 아이들을 위해 괜찮은 계모가 되겠다, 하긴 틀린 것은 아니었지. 애들은 잘 커주었고 친엄마보담이야 못했겠지만 정도 들었고, 다음은 어차피 쓸 사람 없는 마포 강서방 재산 아니니? 사용하자는 것도 아니고 공익을 위해 쓰자, 청조도 늘리고 극단 산호주도 살리자, 결국 우리의 결혼은 그런 거였어. 야심은 크지만 권오송은 그러나 괜찮은 남자야. 결혼 생활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거기까지는 명희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날 괄시하고 능멸했던 그들이 당황했지. 그들이 권선생보고 뭐라고들 했던 모양이야. 전해들은 얘긴데, 사내자식이 사생활까지 자네들하고 의논을 해야 했는가, 일언지하 입을 막아버렸다 하더군. 그들은 내가 잡지며 극단을 휘두를 거라 속단한 거야. 권오송이 휘두르게 내버려둘 사내냐? 처음 그들은 멋쩍고 민망하여 멀어지기 시작했고 권선생한테서 일체 반응이 없으니까 돌아오기도 어려워졌고 그냥 있자니 약이 올랐겠지. 결국 권선생을 성토하기 시작했는데 돈에 팔려간 비루한 인간이라느니, 부르좌와 결탁한 변절자라느니 별의별 험담을 일삼았지만 권선생은 개의치 않더군. 부화뇌동하는 분자들, 사회주의 겉옷만 걸치고 속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구름모양 보아가며 입방아나 찧고 별난 재주도 없이 별난 작품도 내놓지 못한 것들이, 하고 말이야. 그럴 무렵에 예맹검거 선풍이 불었어. 권선생 말처럼 사회주의 겉옷만 걸친 소위 성토 부대에서는 검거된 사람이 없었고 조사받은 사람도 없었는데 불똥이 권선생한테 튄 거야. 어이구 속에 불나야."
선혜는 부채를 집어들고 부산하게 부치다가 홍천댁을 불렀다.
"나 물 좀 주어."
홍천댁이 물을 가져왔다. 선혜는 물그릇을 받아 몇 모금 마시고 나서
"그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가 치밀어."
"언니도 참, 고정하세요."
"아니야. 넌 몰라서 그래. 하여간 내 얘기를 들어보아. 권선생이 느닷없이 잡혀갔는데 글쎄 알고 보니 예맹하곤 상관없이 끌려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다만 한 가지 짚이는 것은 청조사 아래층에 있는 다실에서 밤늦게 했든 고리키의 <밑바닥> 이었어. 동호인들만 모여 비공개로, 말하자면 실험 삼아 해본 연극이었는데 말이야. 이상한 것은 비공개로 한 거시었고 그것도 시일이 한참 지난 뒤에 문제 삼는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더군.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됐지만 어쨌거나 권선생은 불기소로 풀려나왔는데, 끔찍스런 일이 벌어진 것은 석방 후의 일이었다. 흉칙한 소문, 그 일만 생각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것 같다."
선혜는 말을 끊고 숨이 찬 듯 숨을 내쉬었다.
"냉정한 권선생도 이성을 잃더군. 그 흉칙한 소문의 내용이라는 게, 경찰과 사전에 양해가 있은 뒤 잡혀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풀려나온 것을 보면 사정은 자명해진 것 아니겠는가, 극단 산호주에 정체불명의 전주가 붙었다. 앞으로 극단 산호주는 일본제국주의의 선전장이 될 것이다 등등, 친일파는 약과요 숫제 첩자로 모는 거야. 연기처럼 소문은 퍼지고, 그때 난 죽고 싶었고 권선생이 나하고 결혼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어. 권선생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혼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더군. 세상에 그런 가혹한 형벌이 어디 있니? 살인 죄인은 경우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겨레를 팔아먹겠다는 것만은 용서될 수 없는 일 아니겠니? 오명을 무엇으로 씻겠어. 다행히 선우신 씨가 분개하여 나서주었고 서의돈 유인성 두 분이 권오송을 옹호하여 그 일은 그런대로 슬그머니 사라졌지만 권선생이 예맹하고 상관없이 왜 잡혀갔느냐, 잡혀간 원인은 중상모략의 근원지 그곳, 바로 그 곳에 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기가 막혀. 나는 전혀 몰랐어요."
"모를밖에, 서울에 없었으니 알 턱이 없지. 그땐 너 자신의 문제만도 감당하기 어려웠잖았니."
"오빠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게 뭐이 좋은 일이라구, 얘기할 겨를이나 있었겠니?"
"그럼 지금부터의 문제는 뭐예요?"
"성토부대야. 성토 부대에 문제가 있어. 그 박쥐들! 그들은 지금 일본과 독일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야. 그래서 추위를 타고 재채기를 시작한 건데 결국 일본에 추파를 던질 수밖에 없었겠지. 살 구멍 찾을려니까. 그들은 그쪽에서 힘을 얻어낸 거야. 무슨 잡지도 하나 내게 돼 있다 하며 사람들을 긁어모으는 모양인데 앞으로 물귀신처럼 권선생을 끌어들이든지 아니면 첩자, 친일파로 몰아댄 것과는 다르게 반일분자로 낙인찍어 장례식을 치르든지."
"왜 그래야 할까요? 저이들이 친일했음 했지."
"모르는군."
"뭘요?"
"인간의 심리를 모른다 그 말이야. 집요한 것은 언제나 가해자다. 보복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상대를 뿌리째 뽑아서 후환을 없이하려는 집념, 너 생각해보아. 도둑놈 경우를 생각해보아. 남몰래 도둑질하다가 들키면은 칼을 들이대는 것이 그들 본능이야. 배은망덕한의 경우도 그래. 은혜 베푼 상대를 모략하고 중상하고 이간질하며 씹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 합리화 배은망덕을 덮으려는 심리 아니겠어?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삭막하고 살아가기가 힘든 거지. 그러나 권선생은 이런 말을 했어.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은혜하기 위하여 또 죄를 짓는다, 그 죄를 또 은폐하기 위해 죄를 계속 짓게 되는데 그게 바로 형벌이라는 거야. 결국 기가 쇠하고 무게 때문에 파멸하여, 후회나 회개가 구원이 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거지. 나 그 말 듣고 많이 위로 받았다. 속수무책이라도 덜 억울하더구나."
"하면은 권선생님이 낙향하신다고 뭐가 해결이 되겠어요? 어떻게 보면 도피주의 비겁하다고 욕먹을 수도 있잖겠어요?"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종로통에 나가서 목에 칼 꽂고 자결하는 이외 저항해볼 수 없는 게 지금 현실이다. 사실 국내에서는 어떤 형식이든 일해 온 사람들은 모두 지하에 숨어버렸어. 이미 감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권선생도 시골 가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론 생각지 않아. 다만 잠시 동안이라도 비를 피하자, 멀지 않아 일본이 망할 거라 그는 확신하고 있거든. 어떻거든 그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한데."
"정말 그럴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일본이 이기고 있다는 생각들 하든데, 이젠 글렀다, 희망 없다 하면서 체념하는 것 같든데 정말 일본이 망할까..."
"지금 독일이 구라파를 휩쓸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관적으로 생각 하는 거야. 나도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불안해져. 과연 일본이 망할까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권선생은 모든 조짐이 그렇다는 거야. 뭣보다 물자가 바닥나고 있다는 거고 오죽하면 놋그릇 공출에다 소학교 생도들까지 동원하여 송진을 채집하겠느냐."
명희는 몸을 기울여 발을 쳐놓은 방 밖을 내다보고 나서
"언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우."
"그럼, 너니까 하는 말 아니니."
"철없는 사람들, 들었다고 아무데나 가서 얘기하면."
"말조심은 해야지."
서로 마주보는데 두 여자의 기분은 어쩔 수 없이 가라앉는다.
"오빠도 걱정하더군요. 머잖아 사상범들 잡아들일 거라 하면서."
"권선생도 그랬어. 임선생님은 삼일운동 때 들어가셨지?"
"네. 그때 아버진 대구에서 돌아가시구요."
"맞어. 대구서 시위하시다가 군중 속에서 총 맞으시구, 그때 넌 명화여학교 교사였다. 이십 연도 더 된 일이구나."
"이십 연도 더 된 일."
"명희는 나직이 뇌어본다.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서 여학교에 취직했던 그때, 명희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이상했다. 그리고 그 세월이 별안간 되살아난 것이 놀라웠다.
"임선생님은 괜찮으실 거야. 범위를 그렇게 잡는다면 형무소 하나 더 지어야 할 걸."
"그건 모르지요. 아무튼 주변의 사람들 많이 다칠 것 같아요. 사상범들 예방구금령인가 뭔가 실시하게 되면 서의돈 유인성 두 분과 최씨댁 바깥 분, 계명회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여지없을 거라 하는데 참 큰일이지요."
"살벌해.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간되고 모두 전전긍긍이야. 날 새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
"계명회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데 유인실은 어떻게 됐을까?"
"저도 방금 그애 생각을 했어요."
"인경이도, 그애 올케도 일체 인실에 관한 얘기는 안 해."
"그게 십 년쯤 될는지, 인실이 한번 찾아온 일이 있었어요."
"어디로? 시골말이니?"
"네, 그때 보고는."
그 말 많았던 오가다와 함께 왔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난 일을 다 털어버린 듯 변하여 서울로 돌아온 명희였으나 바닷가 외딴 분교를 찾아왔던 인실과 오가다 조찬하 그 기억을 되살린 것은 역시 고통이었다.
"죽었을까?"
"글쎄요. 죽었을까요."
"총명한 아이였는데 아까워. 너무나 아까워."
"어떻게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환경의 동물 같기도 해요."
"얘, 그런 절망적인 얘낀 하지 말어."
하는데 밖에서
"원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홍천댁이 마당에서 말하는 목소리와 거의 동시 발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저예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아 네. 들어오세용."
발을 걷고 들어선 여자는 삼십쯤 됐을까. 검정 무명실로, 아마 손뜨개인 듯 엉성하게 짠 반소매 상의에 연한 녹색 주름치마를 입고 베이지색 핸드백을 팔에 걸고 있었다. 단발머리, 아주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는 강선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컸고 눈 가장자리가 꺼무꺼무했으며 턱은 짧고 낯빛은 검었다.
"웬일이에요? 배설자 씨."
명희가 말했고 강선혜는
"뭐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내뱉었다. 배설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사모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허리를 한번 굽혔는데 말투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강선혜는 발끈하다가 성질을 삭이는 눈치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더니 손님이 계시는군요."
하고 긴 다리를 꺾듯 앉는다. 참으로 천연스럽게 뱀처럼 유연하게 소리 없이 몸을 자리에 놓았다 해야 할지, 유인배의 말과 같이 체격은 그만이었고 완벽했다. 괴기와 사악함이 보일락 말락 떠도는 얼굴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몸매, 하여간 매우 인상적이다.
"아는 사인가 본데."
명희 말에
"알아도 이만저만."
외면을 하며 선혜가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 이유를 묻듯 명희는 배설자를 바라본다.
"뭐 제가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미소를 머금은 배설자는 점잖게 말했다.
"알긴 아는군."
명희는 심히 난처했고 선혜는 말을 해놓고는 감정을 꿀컥꿀컥 삼키는데
"분명희 잘못이 있어 사모님께서 노여워하시나 분데 사실 전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뭐라구?"
선혜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이러저러한 잘못이다, 하고 지적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서 배설자는 역습을 했던 것이다. 명희는 유치원 일로 두 번인가 배설자를 만난 일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내키지 않는 여자라는 생각은 했지만, 매우 사악하다는 것을 지금 분위기에서 확실하게 느낀다.
"사과를 하든지 잘못을 고치든지 저도 알아야 행할 것 아닙니까?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래? 그 정도의 악행은 다반사다, 그러니 각별하게 기억에 남아 있겠느냐, 그런 얘긴 모양인데 어느 정도의 악행이라야 기억하겠니? 배설자!"
"언니 왜 이러세요?"
명희는 말리려 든다. 그러나 강선혜는 만만하게 주저앉을 성미는 아니다. 다만 명희 앞이어서 자제하는 눈치였다.
"사모님 흥분이 지나치십니다. 피차가 다 손님인데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도 교양 있다 그 말이군. 남의 등 치고 간 내먹는 교양 말이냐?"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우리 아버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독립지사인 아버님께서? 거 참 좋은 교훈이시다. 배은망덕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시더냐?"
"베풀고 공투세는 하지 말라 하시더군요."
배설자는 공투세,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
"거룩하신 말씀이다. 한데 배설자 씨."
"..."
"거 멋진 핸드백은 가죽 제품인 모양인데 그렇지?"
이야기의 줄기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배설자는 저도 모르게 핸드백을 내려다본다.
"거룩하신 집안의 따님께서 백정의 핏줄과 관련이 있을까마는, 내 듣자하니 마포 강서방네가 중국하고 피혁 무역을 했다 해서 전신이 백정일 것이다, 그런 말이 떠도는 살벌한 거리에 가죽가방 들고 다니다가 배설자도 모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야. 가죽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전신이 백정일 것이다, 피혁 무역보담은 리얼리티가 부족하지만 말이야. 하기는 인심이 험하다 한들 세상에 배설자가 두 명 세 명 있는 것도 아니니 염려 놔도 되겠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귀담아 들어두어."
"언니 그만하세요."
명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배배 꼬아대는 선혜는 말투가 싫었고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배설자는 소리 내어 웃는다. 웃다가 손수건을 꺼내어 눈언저리를 닦으며
"그래서 사모님께서 노여움을 타신 모양이네요. 하지만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단호했다.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아마 전한 사람의 말이 아닐까요?"
'구미호 같은 계집, 사람을 잡아도 여럿 잡겠다.'
선혜는 배설자를 노려보다가
"그래? 그럼 괜찮다. 그런 말쯤은 연회장의 술안주 같은 거니 대수로울 것도 없지. 생사람을 잡아 가죽도 벗기는데, 그는 그렇고 요즘엔 어디서 살지?"
"삼청동에 살아요."
"아니 멀군."
"..."
"이곳에서 아니 멀다는 얘기야. 목표를 정하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댕겨야 하는데 가까워 다행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뜻대로 안 될걸."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설자는 조금도 기죽은 구석이 없었다. 여전히 여유만만 선혜를 얕잡는 눈빛이었다.
"알게 될 거야. 너 홍석숙이하고 단짝이라며?"
"네?"
설자는 처음으로 동요를 나타냈다.
"배설자에게 비하면 어린애, 속이 여물지는 않았다만 서로 비슷한 데는 있지."
"왜 이러세요. 여기가 경찰서 위조실인가요?"
"설자의 눈꼬리가 치올라갔다.
"으음 이제야 흥분하는군. 먹잇감을 놓쳐 분통이 터졌다, 그러지? 천하에 못된 것! 홍성숙하고 찧고 볶고 까불고 했으면서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내 다른 곳에서 널 만났다면 귀싸대기를 갈겨버릴 것이나 명희 앞에선 차마 그 짓 못하겠다. 운수 좋은 줄 알고 썩 물러가아. 이 집에 다시 나타나면 그땐 내 가만 두지 않을 거다."
배설자는 맹수 같은 눈을 하고서 선혜를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정신 온전한 사람으론 볼 수 없어. 사내 단속 잘못하구서 이런 식으로 분풀일 하는 거야? 기가 막혀."
하다가 나갈 때는 명희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명희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선혜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배설자가 마지막 던져놓고 간 말은 아무래도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안해."
"그런 말 듣자는 게 아니예요. 정말 험하네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을 들춘 것이 되고 말았어. 속상하고 기분 나쁘지?"
선혜는 풀이 팍 죽어 있었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그런 말 하고 싶은 표정이기도 했다.
"언니, 나 홍성숙이 땜에 이러는 거 아니예요."
그러나 선혜는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홍성숙이도 행실이 나빠서 한 물 갔고, 나이도 들었지만 음악계에서 밀려난 모양인데 그걸 데리고 사는 남편을 병신이라고들 하더구나."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다 조용하 그 사람이 그렇게 만든 거 아니겠어요?
"하긴 조용하한테 보기 좋게 당한 거지. 본시 부박경조 그런 여자였어."
"관두세요. 언니나 나나 남의 입질에 좀 올랐수? 우리는 그러지 말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어쨌거나 배설자의 경우는 너의 집에 드나들어서는 안 돼. 고래심줄같이 질긴 계집이야."
"내가 뭐 어린애유."
"몇 사람이 당했는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수."
"너는 어떻게 된 거니? 배설자하고 어떻게 알게 됐지? 금전 거래는 없었고?"
되묻는다.
"유치원 보모들한테 무용을 좀 가르쳤어요.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만났는데, 금전거래 같은 것도 없었구요."
"천만다행이다. 접근 방법치고는 제법 그럴듯했구나."
"그 여자의 얘기, 언니의 얘기는 또 뭐예요?"
"이런 경우를 두고 날벼락이라 하는 거야."
"..."
"배설자를 알게 된 것은 삼 년 전인가 그렇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았는고 하니, 유인경일 알지?"
"인실이 언니 아니예요?"
"그래, 그 애가 내 여학교 동창이거든. 그 애네 집엘 갔더니 배설자가 있더구나. 이웃에 산다나? 인경의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집안이 적적하니까 드나들었던 모양이야. 인경의 말이 배설자의 양친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고 배설자는 대련에서 백계 러시아인한테서 발레를 배웠다는 거야. 한때는 최승희의 제자였었다나? 그러니 소위 다이렌가에리 (대련에서 오다)지. 대련서 온 것만은 사실인 모양인데 나머지는 거반 거짓이고 인경이 고지식한 데다 남의 말 믿는 데 뭐 있는 애니까 깜박 속은 거야. 나 역시 속은 거지.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배설자는 그야말로 입안의 혀같이 굴어. 인상이 안 좋다, 안 좋다, 생각하면서도 끌려 들어가는 거야. 무용발표회를 갖겠다 해서 내가 적잖은 돈을 대주었다. 그 방면의 일을 잘 아는 권선생한테 내가 부탁도 하구, 권선생은 쓸데없는 짓 한다고 타박을 주었지만 부모가 독립 운동하다 죽었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진 거지. 그랬는데 어느 날 권선생이 집에 돌아와서는 화를 내는 거야. 강선혜도 별 볼 일없는 여자라 하면서. 왜 그러느냐 했더니 이 맹추야 앞으론 그 낮 도깨비같은 계집 일체 상대하지 말라 그러질 않겠어? 또 왜 그러느냐 하고 물었지만 이유는 말하지 않더란 말이야. 한데 권선생 후배가 와서 귀띔을 해주더군. 배설자가 권선생을 유혹하려다 혼났다구, 만일 그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형님 뼈도 못 추렸을 거라 하며 웃더군."
"정말 무섭네요."
"한데 아까 말하는 것 보아. 너도 들었지? 사내 단속 잘못하구서 분풀이 한다구."
"전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그 말 들었을 때 정말 기넘어가겠더군. 그런 일이 있은 후 배설자는 앉은 자리 선 자리 가는 곳마다 권선생은 물론 나를 헐뜯는다는 거야."
"누가 믿겠어요."
"안 믿으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구나 하는 게 인심이거든. 권선생이 바람쟁이가 된 거지. 운수가 나빴던 거야. 아니 마누라를 잘못 만난 거야. 아무튼 한번 붙었다 하면 찰거머리같이 떨어지질 않는다는구나. 인경이도 혼났지."
"어째 그런 일이 통할까. 한두 번이면 몰라도."
"통하니까 그런 것들도 생존하는 거야. 어디서, 누굴 구워삶았는지 무용 강습소도 차렸다 하고 요지경이야."
유인배가 한 말은 대체로 정확한 편이었다. 실은 바이얼리니스트를 꿈꾸다가 경음악으로 빠져버린 유인배는 유인경의 육촌 동생뻘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용자는 상해에서 무용을 배웠다 했고 배설자는 대련서 배웠다는 것이다.
해거름에 선혜는 돌아갔다. 가면서
"하여간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야. 혈압만 올려놓고 간다."
이튿날 아침나절.
"아주머니."
하고 부르면서 양현이가 왔다.
"웬일이니? 이따 갈 텐데."
명희는 양현을 반기면서 물었다.
"맡겨놓은 블라우스 찾으러 가는 길이에요."
양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명희가 이따 갈 텐데 하고 말한 것은 환국의 아들 돌잔치에 간다는 얘기다. 환국의 집에서는 오늘 첫아들 재영의 돌잔치를 한다. 모란유치원에서 오륙 분쯤 걸어 올라가면 환국이 사는 집이 있었다. 정원이 넓고 칸수도 많은 하옥이었다. 가족은 젊은 내외와 아들, 양현이와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길상이 서울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으며 서희도 서울 출입이 잦았다. 돌잔치에는 친가와 처가의 부모들과 서울서 학교 다닐 때 환국이를 맡았던 임명빈 부부 그리고 명희가 초대된 것이다.
"양현아 올라와. 차 한 잔 안 마시겠니?"
"네."
양현은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명희는 그런 양현에게서 가끔 이상현의 자취를 더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때는 본정통에서 이상현과 함께 있던 기생 기화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조용하와 비교적 원만했던 시절, 명희는 양현을 양녀로 성장하여 여의전의 학생으로 명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 양재점, 옷 잘 만드니?"
"잘해요. 일본서 양재학원을 나왔다나 봐요."
"나도 거기다 옷 맡길까?"
"그러세요. 솜씨도 좋지만 참 좋은 분이에요."
"네 눈에야 모든 사람이 다 좋은 분이지."
"어머, 철이 없다 그 말씀이에요?"
"그럴 리가 있나. 좀 있으면 의사선생님 될 건데."
"또 놀리시네요. 아직, 아직 멀었어요."
"네, 아씨 이제 안 놀릴 께요."
"몰라요."
"나도 함께 갈까?"
"어디루요."
"양재점."
"그래요. 든든한 부자 단골 하나 생겨서 그 언니 좋겠다."
"친하니?"
"네 친해요. 우수에 젖은 얼굴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샘나는데?"
"그러지 마세요. 참 안됐어요."
"왜?"
"혼자니까요."
"나도 혼잔데."
"아주머니 나이 드셨잖아요. 그 언닌 아직 젊은데."
"그럼 시집 가지."
"시집은 갔었다나 봐요."
"그럼 어째 혼자래?"
"죽었대요."
"음."
"한데 아주머니 저 내일 시굴로 가요."
"아버님 어머님 다 올라와 계시니까 안 간다 했잖아."
"아버지가 내려가래요."
"왜 무슨 일이 있니."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큰오빠도 함께 가요."
"윤국이는 서울 안 왔잖아."
"바로 시굴로 갔어요."
"하긴 방학 아니면 못 가는데 양현이 너도 큰집에 가봐야 할 거다."
"알아요."
하는데 얼굴에 그늘이 진다. 아버지도 없는 큰집, 아버지 얼굴도 본적이 없는 큰집, 두 오빠가 잘해주지만 환국이 윤국이보다는 서먹하고 큰어머니는 더욱더 서먹하고.
"가기는 가야 하는 거예요. 섬진강을 보아야 하니까요."
양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왜 섬진강을 보아야 한다고 표현하는 걸까. 명희는 생각한다. 섬진강에 투신하여 죽은 어머니 때문이라면 양현의 섬진강에 대한 감정은 무슨 빛깔일까. 강물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어미 넋을 불러보려는 애절한 마음일까. 그는 분명히 어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전혀 그늘 없이 서희는 양현을 키웠고 또 양현은 그렇게 커주었다. 함에도 명희는 가끔 양현의 안개와 같은 비애의 또 다른 분신을 느끼게 된다. 양현은 서희를 한없이 사랑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일면이 명희 앞에서는 언뜻 지나갈 때가 있었다.
"자아 가세요 양현아씨."
멀지 않는 곳에 양재점이 있었기 때문에 명희는 입은 옷에 머리만 매만지고 나섰다. 거리는 호젓했다. 물을 뿌려놓은 길 위에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주머니."
"음."
"의과 잘못 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양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명희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다리의 연한 줄기같이 섬약하고 눈이 맑은 양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너무나 삭막해요. 사람을 부분으로 가라놓고 생물로... 물체로 들여다보고 있는 저 자신이, 더럭 겁이 날 때가 있어요. 과연 내가 사람일까 의심이 들고, 차라리 보육학교에나 갈 것을, 후회스럽고, 졸업하면 모란유치원에서 아주머니랑 함께 일할 수도 있을 텐데."
"..."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고 박애정신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이 저의 꿈이었고 지성적인 그런 여성을 선망했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오고 보니 하루하루가 사막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실제 우리는 사막을 걷고 있는 거야. 매일, 매일."
"그럼 사막을 걷기 위해 사람은 사는 걸까요."
"너에게 그 대답을 하기엔 내가 너무 어리석고 모자라게 살아온 것 같다."
"그런 말씀을."
"얘기는 다르지만 어떤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에게 가장 강한 거는 생존 본능이라는 거야.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 그러나 때에 따라서 그보다 강한 것은 생명에 대한 연민이래. 말하자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 생명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라는 거야.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 그런 거겠지.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뛰어 들었다가 함께 죽은 경우,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에서 노는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치여 죽는 겨우,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건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자기 생존의 본능을 앞지른 것 아니겠니?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심약한 사람은 의학을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들 하지.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야. 냉정하고 결단력과 기술이 의사의 첫째 조건이지만 사람이 물체가 아닌 생명인 이상 이성의 토대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라야, 그래서 의학을 인술이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아무리 심약한 사람도 그 생명에 대한 연민이 크면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고 결단하는 용기도 생기고 기술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그 말에 비추어본다면 사막을 걷는 인내와 용기도 절로 생기는 거 아닐까? 내 생각에는 인술이야말로 양현이같이 무구한 마음이 가야 할 길인 것 같다."
"저, 저는 그렇지가 못해요. 아주머니께서 과대평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출세하고 돈 벌고 그게 목적이었니?"
"그거는 아니지만."
"하긴 너 나이에 무슨 확신이 있겠니. 너보다 배는 더 산 내게도 확신이 없는데."
명희는 쾌활하게 웃는다.
"벌써 다 왔네."
쇼윈도우에는 갈색 원피스를 입은 마네킹이 있었다. 아동복도 내걸려 있었다. 혜화 양재점, 두 사람은 문을 밀고 들어간다. 양현이 또래의 여자가 재단대 앞에 앉아서 홈질을 하고 있었다.
"어머! 양현이 학생."
반색을 했다.
"선생님 양현이 학생 왔어요."
양재점 뒤편에 살림방이 있는 모양이다. 쪽문을 열고 강혜숙이 나왔다. 동경 간다 부근에 있는 병원에서 부들부들 떨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 소녀, 소녀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세월이 흘러갔는데 모습인들 어찌 머물 것인가. 강혜숙의 얼굴에는 가을빛이 깃들여 있었다. 쓸쓸해 보였다.
"일찍 왔네."
미소 짓던 혜숙은 명희를 보자 멈칫했다.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양재점 앞길을 오가던 명희 모습은 눈에 익었고 모란유치원의 원장인 것도 알고 있었다.
"언니 우리 아주머니세요."
자랑스럽게 양현이 말했다.
"앞으로 아주머니께서 옷도 맞출 거예요."
다시 못을 박듯 말했다. 명희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손님을 대하는 양재점 주인 같지 않은 혜숙과, 유치원 원장의 티도 없고 옷 맞추러 온 손님의 본새도 아닌 명희는 서로 엇비슷하게 얼떨떨해한다. 나이의 차이는 많았으나 두 여자에게는 다같이 다부진 구석이라곤 도무지 없었다.
"양현이 성화 땜에 옷 하나 맞춰야겠는데 뭘 할까..."
걸려 있는 옷감을 만져보다가 좀 망설인다.
"요즘 전시라 쓸 만한 감이 없습니다."
혜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명희는 회색 혼방 사지를 가리키며
"이걸로 하지요."
"투피스로 하시겠습니까."
"그러지요."
해서 치수를 재고 혜숙은 스타일북을 내놓으며 어떤 형을 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냥 기본으로 해주세요."
두 사람이 양재점을 나서려 했을 때 양현이 당황하며 돌아섰다.
"참 언니 내 옷은요."
"아, 그래 내가 깜박했구나."
모두들 웃었다. 혜숙은 진열장에서 포장한 것을 두 개 꺼내었다.
"입어보겠니?"
"아니오, 그냥 가져갈래."
"그리고 이것은 재영이 옷이다. 오늘이 돌이지?"
"언니도 참, 재영인 옷이 많은데 뭣하러 이런 수골 했어요? 오빠 걱정 들을려구."
"그냥 지나기가 섭섭해서 그래. 최선생님도 안녕하시고?"
"네."
양재점을 나와서 한참 가다가
"집안끼리 아는 사이니?"
명희는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단순한 친분 같지는 않는데?"
"큰오빠가 동경 있을 때 절친하게 지낸 친구의 미망인이래요."
"음."
비로소 납득이 된 얼굴이다.
"지금 가게도 오빠가 물색해주었구요. 새언니랑 저에게도 오빤 엄명을 내렸어요. 다른 데 가서 옷 해 입으면 안 된다구 말예요. 새언닌 우리 옷을 주로 입으니까 양재점엔 잘 안가지만."
양현은 혜숙을 미망인으로 믿고 있었다. 하기는 혜숙에게 송영광은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었다.
모란유치원 앞에서
"양현이는 먼저 가아. 효자동 언니가 오시면 함께 갈게."
명희하고 헤어진 양현이 집 가까이 갔을 때 초로의 신사 두 사람이 대문 앞에 있었다.
"양현이 아니냐."
말한 사람은 임명빈이었다. 본래 두상이 컸고 몸집도 큰 편인데 살이 빠져서 그런지 늙은 탓인지 사람이 영 헐거워진 것처럼 보였다. 깨끗한 양복을 차려 입었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궁색하고 초조해 있는 낯빛이다. 여러 가지 일로 심간이 편치 못하여 그런 것 같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양현은 절을 했다.
임명빈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작았다. 별명이 대추씨였던 서의돈이었다. 반소매 노타이셔츠를 입고 합죽선을 들고 있었다. 일본을, 중국을 방랑했으며 짧지 않는 기간 옥고를 견디기도 했고, 그러나 의외로 그는 단단해 보였다. 다만 돋아나기 시작한 턱수염과 머리칼이 희끗희끗하여 늙음에는 그도 예외가 아닌 것을 말해준다. 서의돈은 어둡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양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나기로는 처음이지만 말을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아이, 기화의 딸이자 이상현이 아비인 아이, 기화의 면모가 역력했으며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생장한 양현을 보고 어찌 감회가 없고 회한이 없을 것인가. 화류계에 몸담은 여자였지만 아편쟁이로 전락했고 섬진강에 투신하여 생을 마친 기화의 비극이 잘났다는 사내들 풍류가 빚은 것이라면 기화를 사랑했고 사랑하다가 버린 서의돈의 가슴이들 애상에 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행랑아범 손서방이 문을 열었다.
"어서 드십시오."
그러나 임명빈은 멈춘 채
"공부하기 어렵지?"
하고 양현에게 물었다.
"네, 어렵습니다."
"의사가 되기가 쉬운 일 아니다. 열심히 해야 돼."
"네."
"참 양현아 인사드려라. 아버님하고 각별한 분이시다."
이 겨우 아버님이란 무론 길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양현은 서의돈에게 깊이 머리 숙여 절을 했고 서의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으로 안내되어갔으며 양현은 서희가 있는 안방으로 갔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음."
서희는 단정한 모습으로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환국의 처 덕희는 시어머니와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옷이 맘에 들더냐?"
웃는 모습으로 양현을 건너다보며 서희는 물었다.
"아직 안 입어봤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형제에 대해서조차 절도를 잃지 않는 서희였으나 양현에 대해서만은 그 자상함이 각별했다. 언젠가 서희는 양현을 보고 말했다. 너하고 나하고 전생의 무슨 인연이었을까 하고. 양현의 처지 때문에 다소 소홀히 대할 경우 서희는 그가 누구이든 결코 용서치 않았다.
"아가씨는 뭘 입어도 어울립니다, 어머님."
덕희가 말했다. 시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한 말이었으나 내심으론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깍듯하게 양현을 시누이 대접하는 것이 덕희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핏줄도 아닌 군식구 아니냐는 반발심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시샘이었다. 덕희는 깔끔하고 기품은 있었으나 남의 눈을 끌 만큼의 미모는 아니었다.
"새언니도 양장하면 좋을 텐데."
"저는 다리 모양이 숭해서요."
"참 또 잊을 뻔했네. 새언니 이거."
양현은 재영의 옷이 든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거 뭡니까?"
"돌 선물이에요. 양재점 언니가 주셨는데 재영이 옷이래요."
덕희는 떨떠름해하는 표정이다.
"그냥 지나기가 섭섭해서 그런다고 했어요."
"초대도 안 했는데 이런 걸... 받기 민망하네요."
민망하다는 어투에는 미안하다는 뜻보다 곤란하다는 감정이 강하게 풍겼다.
서희는 말없이,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영광이와 관련이 있는 양재점 여자는 서희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송관수의 권속이라면, 권속이래야 조선에는 영광이 혼자였지만 그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 길사을 비롯하여 서희나 환국의 입장이다. 길상에게는 영광을 돌보아줄 의무가 있었고 송관수하고 약속한 바도 있었다. 송영광과 동거했던 여자, 의당 결혼했어야 했던 강혜숙에 대해서도 그 같은 맥락에서 그 존재를 인식한 것이다. 환국의 경우, 아버지의 의무를 대행한다 할 수도 있었다. 애초 영광을 찾은 것이며 접근한 것부터가 아버지 분부에 따른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환국은 그들 상처에 깊이 동정했고 철저하게 모든 것, 희망을 잃은 혜숙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가진 것을 부인 못한다. 그러저러한 내막을 덕희나 양현에게 설명할 수도, 설명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친구의 미망인으로 어물쩍거렸던 것이 이들 두 여자에게 기정사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서희는 혜숙에 대하여 덕희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알고 있지만 환국의 슬기로움과 깨끗한 천성을 믿었다. 덕희 역시 남편의 그런 면을 믿고 있으리란 생각이었고 미묘한 갈등도 시일이 지나면 해소될 것이며 섣불리 충고 따위를 한다면 그것은 환국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이니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서희는 판단하고 있었다. 양현에 대한 덕희의 시샘도 서희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덕희 심사를 헤아려서 여태까지의 애정 표시나 관습, 그 밖의 것을 조절할 생각은 없었다. 덕희가 황태수의 막내딸로 귀엽게 응석받이로 자랐기 때문에 애정을 독점하려는 성향이 강하기는 하나 본성이 착하고 교양이 있으니까 상식 밖의 해동은 안 할 것이며 만일에 양현을 격하한다면 오히려 갈등이 커질 것으로 서희는 생각했다. 양현의 심리가 위축되어 가족들 마음을 어둡게 할 것이며 덕희는 교만해져서 집안의 수평이 무너질 것이다. 또 그것을 길상은 물론 환국이나 윤국이 바라지 않은 것이니 덕희를 위해서도 적절한 처방이 못 된다. 결국 덕희 쪽에서 집안 분위기에 따라 줄 수밖에 없다. 서희의 그같은 세밀한 생각은 그러나 양현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다.
"임선생댁에 들렀었니?"
서희가 물었다.
"네. 함께 양재점에 갔었습니다. 아주머니도 양복 한벌 맞췄어요."
"그럼 함께 오지 않고서."
"효자동 사모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방금 임교장님 오셨으니까."
"사랑에 드셨느냐?"
"네."
집안은 조용했다. 아주 조용했다. 돌상은 일찌감치 차렸고 우는 아이를 달래어가며 돌 사진도 찍었으며 아이는 유모가 데려가서 잠을 재우는 모양이었다. 사랑손님이 서너 명, 안방의 안손님이 서너 명, 그들의 점심상만 차려서 내면 되게 돼 있었다. 돌잔치를 차린 혜화동의 이 가옥은 진작부터 서희가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이재에 밝은 서희가 근화방직의 주를 상당히 가지고 있어서 성루 출입이 잦은 탓도 있었지만 장차 아들 형제가 서울서 운신하게 될 것을 고려하여 근거지로 장만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행랑아범을 두어 집을 관리하게 했으나 환국이 일본서 돌아와 사립중학의 미술교사로 취직이 되면서부터 살림 규모가 잡히기 시작했는데 결혼 후에는 덕희가 친정에서 유모와 심부름아이를 데리고 왔고 양현이 여의전에 입학하여 합류하게 된 것이다. 꽤 넓은 사랑은 연못이 있는 후원에 있었다. 몸채 안방은 서희가 서울 오면 사용했고 건넌방과 그 방에 잇달린 또 하나의 방은 덕희가 거처했으며 몸채에서 ㄱ자로 꺾인 곳의 방은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그 옆이 양현의 방이었다. 행랑채는 행랑아범의 부부가, 찬 방 옆의 널찍한 방에는 찬모와 심부름아이가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규모가 큰 집이었고 식솔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
사랑에는 벌써 술상이 들어갔다. 안방에도 점심상이 들어갔다. 덕희 친정어머니는 불가피한 일이 있어 못 온다는 전갈이 있어서 서희, 명희, 명희의 올케 백씨 그리고 덕희와 양현이 교자상 앞에 앉았다.
"임교장댁하고 우리 최씨 집안의 인연도 이십 년이 훨씬 넘었나 봅니다."
음식 들기를 권하면서 서희가 한 말이었다.
"삼십 년이 가까워지지요. 삼일운동 훨씬 이전이니까요."
국을 뜨다 말고 백씨는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가 조선으로 나온 뒤 삼일운동이 일어났으니까. 세월도 빠르고 생각해보면 돌아가신 임역관께서 공노인에게 협조를 아니 하셨든들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고마운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저희들이 너무 한 일이 없었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그 동안 입은 은덕이 얼만데 그러십니까."
"아니지요. 여러 가지 고초를 겪다보니, 미치지 못한 점이 많았습니다. 재영애비가 서울서 오 년 간 공부하는 동안에도 임교장의 보살핌, 훈도가 없었다면 오늘 저와 같이 심지 깊은 사람으로 자라겠습니까. 더구나 그때는 재영할아버지가 옥고를 치를 때였고 오며가며 걱정도 많이 끼쳤습니다."
능란한 거야 옛적부터지만 서희는 많이 소탈해졌고 말도 전보다 많아진 것 같다.
"천부당한 말씀을, 환국이 학생, 이 아니, 최선생이야말로 저의 자식들한테 큰 모범이 되었지요. 늘 부러웠습니다. 마음이 공평하고 인물은 관옥 같고 자식 잘 둔 것 이상으로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씨는 그저 황송해한다.
"임선생께도 그렇습니다. 어려웠을 때 도움이 되지 못했던 일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편 야속하기도 했구요. 글쎄, 진주에서 아니 먼 곳에 와 계시다면서 오시기는커녕 서신 한 장 없었고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전혀 사정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명희는 입안의 음식을 삼키며
"부끄럽습니다. 그땐 세상 끝에 선 것같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몰골을 하구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가르친다는 말을 한다. 서희는 모가 깎이어 부드럽고 포근했으나 역시 노희의 술수의 흔적이 있었고 명희는 여기저기 흐트러진 신경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뭉쳐놨는지 의젓하고 제법 관록이 있어 보였다. 나이가 가르친 것일까. 늙는다는 것은 뻔뻔스러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젊었을 그 시절, 조용하의 초대를 받아 서희가 그 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을 적에 두 여인의 아름다움은 실로 백중지세였었다. 서희에게는 아직 서릿발 같은 성깔이 남아 있었고 명희에게는 청초함이 남아 있었지만 마흔여덟과 마흔여섯의 나이가 되어 영롱한 두 젊음 앞에 그 잔영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늙음은 이들에게 한층 잔혹한 것 같고 인생무상을 절감케 한다.
안방에서 다분히 격식적인 대화가 오고가는데 사랑에서는 길상과 서의돈 임명빈이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싯적부터 술에 약한 임명빈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돼 있었다.
"어디 가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길상의 말에 서의돈이
"한동안 대구에 가 있었지요."
"잔치랄 것도 없고 실은 마음이 울적하여 술이나 마시자고, 임교장을 오시라 했는데 마침 서형께서 계시다 하기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늙은 것 이외 별탈은 없는 것 같소. 앞으로 잡혀가고 어쩌고 하면 그럭저럭 한세상 끝날 거요."
"잡혀갈 때는 가더라도 미리 작정할 필요는 없고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합시다. 자 술 드시오."
"그럼 그럼 오늘 생각만도 벅찬데 앞날까지, 그랬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 거요."
임명빈의 말이었다.
"울적하다 했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서의돈이 물었다.
"친구가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았는데 영 마음이 안 잡히는군요. 고생만 죽도록 하고, 내가 죄인이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인 것 같소."
길상의 표정은 비통했다. 좀처럼 그런 면을 보이지 않는 길상이었기에 임명빈은 긴장했고 서의돈은 생각을 굴린다. 임명빈은 몰라도 서의돈은 송관수를 몇 번 만났을 것으로 길상은 기억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송관수라는 것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이 죽었군.'
서의돈은 짐작한다.
"자네 신수가 어째 그 모양인가?"
별안간 서의돈은 화제를 확 꺾었다. 임명빈은 움찔하고 놀란다.
"근심걱정 없을 건데 늙기는 남 먼저 늙는구먼."
"근심걱정이 왜 없겠나."
"조용하의 엄청난 유산이 굴러 들어왔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꼬? 자식도 없는 누이 그 돈이 어디 가겠나. 허 참 내게도 미인 누이가 하나 있었더라면 동가식서가숙은 아니 했을 터인데."
"밥도 단밥이 있고 쓴 밥이 있다네. 번연히 사정을 알면서 쑤시기는 왜 쑤시나."
임명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릴 용기도 줏을 욕심도 없는 위인 같으니라구, 그 따위로 노니까 죽도 밥도 아닌 게야."
"죽도 밥도 아니지. 하니 세상에 나와 무엇을 했겠나. 나 같은 무능한 인간이야말로 형무소에 들어가서 푹 썩어야 한다구."
"무능하기야 했지. 그러나 형무소는 무능한 작자들이 가는 곳 아니야. 도둑놈도 능력이 있어야, 안 그런가?"
보통 약을 올리는 게 아니다.
"접시 물에 빠져 죽어야겠군."
"딱해서 그런다. 나 같으면 그 따위 공돈, 맨날 기생집에 다니겠다."
"돈도 돈 나름 내가 무슨 권리로."
전에도 술자리에선, 더구나 입정 사나운 서의돈이 끼어들 때는 늘 그래온 풍경이었지만 길상은 오늘 따라 왠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화제를 돌려보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길상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것이었다.
'저래도 서의돈이 옛날에 비하면 아주 점잖아진 거지요. 젊었을 때는 개차반도 이만저만, 아는 게 많고 곧은 소릴 하니까 승복은 했지만 그 독설에 걸려 들었다간 모두 묵사발이 되었지요.'
황태수의 말이 생각났다간 이내 사라진다. 술을 들이켠 임명빈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무능 인사에게도 좋은 게 하나 있지. 친일파 되라고 성가시게 구는 놈도 없고 숫제 끼워주지도 않아. 그곳 역시 유능 인사들이 노니는 곳이거든."
"얼씨구, 늙은 곰이 재롱 떠는구나."
"나는 옛날 옛적, 내 누이 시집 보내면서 어느 개골차에다 자존심을 내동댕이쳤지."
"자알했다. 장한 일 했군 그래."
"그래서 교장 노릇도 해보구 내 누이 몸값으로 남긴 재산, 그것으로 자식 공부... 생활 다아 했지. 본시부터 이 무능 박재는, 자네가 그랬든가? 곧잘 놀려먹지 않았나. 덕구 덕구 덩더구, 덩더엉 덩덕구 하면서 말이야, 지하의 내 부친 임덕구 여관이 입놀려서 얼마간 모은 재산 다 발가먹구, 누이가 없었다면 아마 다리 밑 신세 면하기 어려웠을 게야."
"알기는 아는군."
"알다마다."
"허허어 임교장 왜 이러시오? 벌써 취했소?"
길상이 겨우 말을 내밀었다.
"저게 요즘 저자의 십팔번이니 개의치 마시오. 입으로나마 발산을 해야 견디지."
하고 서의돈이 어울리지 않게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다가 덧붙여 말하기를
"꼴같지도 않게 죽어지내다 보니 저 꼴이 된 거요. 재물이 생기면 모두들 신수가 훤해지고 거드름을 부리기도 하는데 저 화상 보시오. 팍싹 늙지 안았소?"
"늙을 때도 됐지요. 서형하고 달라서 체구가 크니까 그래뵈는 거지요. 술이나 듭시다. 그리고 잊어야지요. 우리 다 잊읍시다."
서의돈의 언동은 역설적인 위로라 할까 우정이라 할까, 어릴 적부터 앞뒷집에 살아서 늘 쥐어박고 쥐어박힌 습관 때문일까, 답답하고 딱해 뵈는 것도 사실이었고. 임명빈은 부친의 유산을 다 발가먹었다 했지만 방탕해서 가산을 날린 것은 아니었다. 게을러서 놀고먹었기 때문에 가산을 털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젊었을 때는 문학을 하네, 잡지를 하네 하며 동분서주 돈도 적잖게 쏟아부었으나 허송세월이었고 교장직을 그만둔 뒤 기와공장을 하다가 실패했다. 무능 박재의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운을 해치고 나가려고 누이를 조용하에게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명희의 자유의사에 의해 성립된 결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희가 불행해졌을 때 임명빈은 자기 강압에 못 이겨 결혼을 했을 것이란 착각에 빠졌으며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재산을 탐내어 누이를 주었다는 항간의 소문 역시 어느덧 명빈 자신의 생각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신이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명희가 유산으로 분배받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한편 또 명희의 재산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면서 임명빈의 부끄럽다는 생각은 병적으로 발전하여 뭔가 불안하고 초조하며 안정할 수 없게 되었고 남들이 욕한다는 강박관념피해망상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명희는 친정에 잘 가지 않았다. 명희를 보면 그 증세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다소 그런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명희가 지금 이 집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는 양심... 오늘날 우리 조신인들, 특히 지식분자들이 앓는 병 아닐까요?"
서의돈은 새삼스럽게, 또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말을 꺼내었다.
"아무것도 되는 일 없고 이룩하는 일도 업소 자기 자신만 갉아먹는 병, 사실 총독부에 폭탄하나 던진다고 독립이 되겠소? 길가에서 독립만세 부른다 독립이 되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용기 있는 양심이지요."
늘 이죽거리는 투로 말해왔으며 맨 정신으로 얘기하는 일이 드문 서의돈이 정색을 하며 그것도 지극히 형식화된 상식적 얘기를 꺼낸 것은 의외였다.
"우리는 매사를 비극적으로만 받아들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소.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도 비극적 색조를 깔아서 그것으로 통합하려는 경향, 무론 우리 민족의 현실은 비극임이 틀림없고 국내에서는 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입지에서 그런 감정의 유도가 화약이나 무기의 역할을 안 한다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정서적 면만 부각이 되면 튀겨서 부푼 옥수수 같은 소영웅들의 목소리만 요란해지고 실질적으로 거둬들이는 실은 보잘 것이 없이 될 수도 있을 거시오. 쉽사리 비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 없는 양심 때문에 자기 자신만 갉아먹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게 비관주의의 주범이지요."
하다가 서의돈은 씩 웃는다. 그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웃음 뒤에 나타난 것은 맨 정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저 두상 큰 사내도 행할 수 없는 양심을 안고 자기 자신을 평생 갉아먹고 온 좋은 예인데, 오십을 넘기고 육십이 다가오는데도 어찌 감상의 허울을 못 벗는지 모르겠소."
서의돈은 허허하고 웃었다. 머리만 상둥 잘라내어 놓고 다음 말은 생략해버렸는지, 또다시 임명빈을 안주로 삼는다.
"마음대로 하라구. 내키는 대로 지껄여, 모두 사실이니까. 형무소 가기 전에 한껏 마시고 두들기고."
임명빈도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서의돈은 임명빈에 대한 처방법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저 두상 큰 사내뿐인 줄 아시오? 누이 명희도 마찬가지요. 오누이가 똑같소. 자기 자신을 갉아먹으며 사는 사고방식이."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살았기에 서의돈은 아직도 명희 이름을 그냥 불렀다.
"김형 안주가 모자라는 것 같소. 원래 짜게 먹는 서가 입맛을 내가 알거든. 소금으로 아예 절여놓든지 해야지."
임명빈 말에 모두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서의돈은 울적해 있는 길상의 기분도 고려하여 지껄인 것 같기도 했다. 또 어쩌면 양현을 만나 소위 정서적으로 기운 자신을 다스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고 어찌 여태 안 오나?"
서의돈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 늦을 거란 전갈은 받았소."
길상의 말에
"황태수의 행차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
임명빈이 말하자
"뭐가 안 쉬워? 친일파가 이런 자리에 불려온 것만도 영광인데, 옛날 옛적 개골창에다 자존심을 내동댕이쳤다 하기는 하더라만 제발 기지는 말어. 제발 명희한테도 기지는 말어. 이 화상아."
타박이다.
"아무리 그래봐야 열 손가락으로 물 튀기는 꼴이지. 황태수 아니면 서의돈이 동가식서가숙도 못할걸? 집구석에 엉덩이 붙이고 굶어죽었지."
오래간만에 임명빈은 반격을 했다.
"아, 이 임가야, 거지는 형무소에도 못 가아. 나 정도 사기꾼이라야, 내 이르노니 얻어먹더라도 등뼈는 꼿꼿이 세워야 하느니라. 약은 황태수가 어찌 양다리 걸치는가. 좀더 약기 때문에 양다리 걸치는 게야. 김형 안 그렇소. 김형하고 사돈 맺은 그 계산속 내가 모를까봐서? 김형도 마찬가지, 그렇지요?"
"상상에 맡기지요. 허나 양가 젊은 사람들이 정략을 수긍했을까요?"
"알쏭달쏭이네. 술 드시오."
서의돈은 길상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김형, 정신차려야 하오. 한번 문 열어놓으면 심장까지 파먹으려는 위인이니. 독사의 환생인지 저놈의 입에 걸렸다가는 피 보게 마련, 소싯적부터 전후좌우 구별 없이 마구 뚜딜기는 것이 특기요. 집에서는 날갯짓도 못하는 햇병아리같이 지지리 궁상인데, 밖에만 나왔다 하면."
하는데 밖에서
"아버님."
환국이가 불렀다.
"장인께서 오셨습니다."
길상이 일어서서 마루로 나갔다.
"어서 오시오."
"이거 늦어서 미안합니다."
방문이 열려진 방에서 머리를 들내보인 서의돈
"거 환국이 자네 손 좀 봐야 알겠나?"
삐딱하게 말했다. 환국은 얼른 마루로 올라와 절을 한다.
"엄연히 우리는 손님이고 저 늙은 여우는 자네 빙부에 틀림없으렷다!"
"네."
"하면은 손님 대접이 어찌 이러한가. 빙부는 모시러 가면서 손님은 제 발로 걸어오게 해?"
"광증 또 쏟는군 그래."
황태수는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옵고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 앞에서 우연히."
환국은 고지식하게 해명한다. 길상은 환국이하고 마룻가에 서서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부골스럽게 늙은 황태수는 미소를 머금으며
"오랜간만이다. 그간 별 일 없었지?"
임명빈에게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겠나. 괜찮아."
자리에 앉은 황태수는 잔기침을 하다가 서의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네 옛사랑 생각이 나서 조 흥분한 것 같네그려."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뭐라구? 흥! 거울이나 들여다보고 나서 그딴 소리해라."
말로는 그랬으나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서의돈은 당황한다.
"사돈 앞에서 내 체면 깎는 말만 했다 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홀랑 벗겨버릴 거야."
"뭐 어쩌고 어째?"
"기화 딸내미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보았어."
"아까 대문 앞에서 마주쳤거든."
임명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가슴이 처렁했겠구나. 아니면 회한의 눈물이라도 쬐꼼 나든가?"
서의돈은 술잔을 들었다.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으며
"어리석은 위인 같으니라구."
하는데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기화를 쏙 빼닮았지?"
목을 죄듯 황태수는 늦추지 않는다.
"그만두게. 아린 가슴에 소금 뿌리는 것."
역성은 드는 척하면서도 황태수에게 합세하여 임명빈이 말했다. 서의돈은
"내가 지랄발광 네굽질하면 어떡할 테야."
하고 배짱으로 나왔다.
"곤란해질걸?"
"여기가 어디메냐?"
"어디긴? 혜화동 사돈댁이지."
서의돈은 낄낄 웃었다.
"맹세하겠나?"
"뭘 맹세해?"
황태수는 어리둥절 한다.
"발설하는 일말이야."
"뭐!"
"만일에 발설을 아니 한다면 내 앞에서 물구나무 서겠다고 맹세해라."
"이크! 내가 또 당하는구나."
황태수는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탁 쳤다 서의돈은 의기양양했고 황태수는 낭패한 얼굴이다.
최씨 집안에서 금지옥엽으로 기른 양현이다. 생모인 기화를 들먹이는 것도 뭣한데 서의돈과 이러저러한 관계였었다는 과거지사를 얘기한다는 것은 사돈댁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것은 모욕적 언동으로 보아야 한다. 해서 서의돈은 황태수의 그 점을 노려 반격을 했던 것이다.
"영약하고 교활한 푼수가 그대로군. 변하지 않았어."
"본성이 변할 때는 죽는 법이야. 죽으려고 환장했다는 말도 못 들어봤나?"
"그래, 그래, 서의돈이 잡아갈 귀신은 늘어지게 낮잠 자고 있는 모양이다."
"건드려봐야 선불 맞은 멧돼지, 이로울 것 한 푼 없다구, 내버려두게.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겪었나?"
임명빈이 말했고 초로의 세 사내는 소리 내어 웃는다. 뭣 때문에 웃는지도 모르고 웃는다.
모시 고의적삼을 입은 길상이 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실례가 많소. 뭐 재미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길상은 자리에 앉았다.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하하하..."
웃으며 황태수는 양복 윗도리를 벗는다. 손서방이 술과 술안주를 새롭게 들여다 놨다.
"자 술들 드십시오."
술은 몇 순배 돌았으나 방금 떠들썩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 말이 없다.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창자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 마치 시간이 멎어버린 것처럼 묘한 침묵이다. 사랑에서 남자들이, 그것도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돌잔치 운운하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겠지만 도시 뭣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는지, 모여서 술상머리에 앉았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듯한 그런 분위기다. 어느 순간에 찾아온 우울증, 불안 같은 것, 정체 모를 공포 같은 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 찾아왔던 것일까. 하기는 비단 이 세 사람뿐이랴. 조선인들은 모두 순간 순간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 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 제도, 민족 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 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인 카키빛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 하에 군사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농민, 고기 잡는 사람, 하급관리, 월급쟁이들 할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 이놈의 세상이 우애 될라꼬 이러노. 젊은 놈들 다 직이겄네."
담뱃대를 두드리는 촌로에게도 달겨드는 공포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되었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서형께서 한번 점쳐보시오."
수렁 속에서 솟구쳐 오르듯 길상은 힘들게 말했다. 서의돈은 놀란 듯한 눈초리로 길상을 쳐다본다. 정말 길상은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수렁 속에서 솟구쳐 오르듯 침묵을 깨기 위하여 겨우 골라 낸 말, 그것은 종이 조각처럼 메마르고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즐거운 일, 고통스러운 일, 평범한 일상,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길상은 할 말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하다가 황태수는 술을 마셨다.
"다음에는 글쎄... 어떤 사람이 한 말이지만."
"..."
"그 사람의 추측인지 아니면 어디서 얻어낸 정보인지 모를 일이나 기독교인들을 소탕할 거다, 그런 말을 하다구먼요. 반전 운동하는 교도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 모조리 옭아 넣을 거라는 얘기였소."
"정말 그럴까?"
임명빈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고 서의돈은
"신빙성 있는 얘기다."
"그러나 손을 대기엔 광범위하고 벌집 쑤신 꼴이 될 텐데도?"
"왜놈들에겐 식은죽 먹기지 뭐. 시마바라의 난을 보더라도 제 민족이건만 불을 싸질러 천주교도들을 몰살했거든. 조만간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은 시작될 게야. 영미에 원한이 사무쳐 이를 갈고 있는 일본이고 보면 감정적으로도 그렇고 실제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니 부숴버릴 필요도 있고, 삼일운동 때 그 조직력이 두드러진 것을 일본은 경험했거든. 그리고 이제는 일본에게 회유할 여유가 없어. 얼마만큼,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찬바람 같은 세태다. 하여가 그 얘기는 결코 추측은 아닐 게야."
"그럼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한순간이었지만 그 말을 할 때 임명빈 얼굴에는 치매 같은 표정이 스쳤다.
"우릴 잡아들이겠지. 다음은 자원병 제도를 징병제로 전환할 거구 징용으로 조선의 노동력을 바닥까지 훑을 거야."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서의돈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불원간 일본은 물자 확보를 위해 동남아를 침공할 거구 미국과의 충돌도 시간문제, 미국과 붙게 되면 중일전쟁과는 양상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물량의 싸움이 되는데 그때에 대비하여 저이들 인원을 비축할 필요가 있겠지, 한다면 병력과 노동력을 어디서 구하겠니? 조선인이지. 그놈들은 한 방울의 기름을 얻기 위해서도 조선인 생체를 능히 압축기에 집어넣을 그런 인종이야."
"그러면 누가 살아남지?"
술에 약한 임명빈의 목소리는 나사가 빠진 것 같았고 길상과 황태수는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미국이 서둘러주어야지. 초장부터 와장창!"
"소련은 어쩌고."
"소련도 와장창! 하고 나오면 오죽이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독일이 등을 찌를 테니."
하다가 서의돈은
"왜 갑자기 소대가리가 됐나? 그것도 몰라!"
화를 벌컥 낸다.
"또 병 도지네."
하다가 속이 뒤틀렸던지
"지껄여봐야 이불 밑의 활갯짓, 원래부터 별 볼 일 없었다구."
애들 쌈같이 된다.
"날이 갈수록 사람이 미련퉁이 돼가니 딱해서 그런다. 보약 먹고 정신 좀 차려."
"성미 하고는."
황태수는 혀를 찼다.
"김형 미안하오. 술취해 그런 거는 아니었소."
서의돈은 드물게 사과를 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간인데 서로 맘에 낄 것 있습니까. 술자리에선 다 그렇지요 뭐."
"실은 얘기를 하다가 부아가 났소.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소이다."
"무슨 일인데?"
황태수가 서의돈에게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술잔을 받아든 서의돈은
"얼마 전에 대구에서 이원진의 강연회가 있었다."
"대구는 뭣하러 갔어."
"남천택이 내려오라 해서 갔지."
"뭐? 남천택이 내려오라 해서 갔다구? 피장파장 잘도 어울렸겠다. 그자는 뭘 하나."
"뭘 하긴? 뭘 하는 그게 바로 싫어서 전문학교 교수 때려치웠잖아. 세상 편한 인간이라구. 영원한 자유인."
마신 술을 이기지 못해 애를 쓰며 임명빈이 화제 속에 끼어들었다.
"미친놈, 그래 전주의 전윤경이 아직도 뒷배 봐준대?"
"봐주기도 하지만 지금은 대구의 갑부 염씨 집에서 귀빈으로 좌정하구 있네."
"그 차주에 자네까지 합류했다 그 말인가?"
"아암. 환영하는 데야 낸들 어쩌누. 어차피 김삿갓 신세 아닌가."
"기가 막혀서, 쌍나발을 불어댔을 터인데 그 염씨라는 사람 귀머거리였던 모양이지?"
"천만에, 두 귀가 자알 뚫린 사람이지."
"남천택이 그자가 남의 호주머니 털어먹는 데는 천하 명수라 하든가?"
"천하 명수지. 얻어먹어도 허리 안 굽히고 주는 사람 마음 또한 편안하니 그게 어디 보통 재주겠어? 그 자식이 후배이긴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선 나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라."
얘기는 사뭇 딴 곳으로 흘러가고 길상은 단정하게 앉아서 경청하는 모습이다.
"오래 전에 남척택이 전윤경하고 날 찾아온 일이 있었지. 꼬라지는 극단 패거리처럼 요상하게 하고 왔더라만 역시 천재는 천재야. 능변인 데다가 사통팔방 두루 꿰더라구."
"자넨 잠자코 있어, 이기지 못하는 술도 그만하구."
임명빈의 입을 막은 황태수는
"남천택이 그자가 공산당이라는 말이 있든데 그게 사실인가?"
"그건 나도 모르는 사항이다."
"서의돈도 양의 탈을 쓴 이리지 뭐."
"서의돈도 공산당이다 그 말이야?"
"아닌가?"
서의돈의 얼굴이 차갑게 변한다.
"공산주의는 사상이며 이론이다. 평등주의 박애주의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이리도 아니구 양도 아니다. 순수한 사랑일 뿐이지. 다만 그 사상을 실천하는 공산당이 실천하는 데 따라 양이 될 수도 이리가 될 수도 있어.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양면을 지니고 있는데 부정적 면에 치우치면 이리가 되고 긍정적 면을 부추기면 양이 되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공산주의 이론에 투철하지만 공산당이 아닐 경우가 있고 이론에 어둡지만 공산당일 경우가 있어."
"알쏭달쏭, 그 궤변이야말로 서의돈의 특기지."
"자네는 자네의 처지를 떠나서 공평해야 하네. 나는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했지만 당원도 주의자도 아니야. 다만 이론 자체를 순수하게 보고 싶어. 오늘 우리 조선의 현실 앞에서 순수하게 생각하고 싶단 말이야. 물론 나는 자네를 신뢰하고 있고 욕심이 똥창까지 차있는 그 따위 자본가가 아니며 민족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서로 공평해지자. 자신들의 위치를 떠나서."
오리무중, 핵을 비치는가 하면 안개 속으로 잠적해버리고 휘두르는가 하면 꼬리를 감추어버리고 직설보다 은유로서, 거의 진지한 적이 없었던 서의돈 화법에 익숙해져 있던 황태수는 어이없다는 듯 서의돈을 바라본다.
"나는 남천택을 두둔할 생각이 없다. 남천택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 그런 것은 참으로 값싼 것이며 때에 따라서 두둔하는 자체가 편견이요 불공평하며 불순할 때도 있으니까 그런 것은 두었다가 태평세월에나 가서 티가태각할 일이지. 그런데 편견이 없고 원만한 자네가 유독 남천택에게만은 날을 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아. 불공평하다 그 말이야.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앞으로 자네를 또 언제 만나겠나."
"이거 참. 서의돈이 왜 이러지? 유언하는 건가?"
"유언이 될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남천택의 경우, 그의 달변, 그의 박식, 천재적인 어학 능력, 경박한 언동과 남다르게 사는 방법 등, 그 모든 것은 몸에 걸친 의상이며 속은 단단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황태수 자네와 마찬가지로 그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란 점이다."
"..."
"우리가 이 순간 바보같이, 미치광이가 되어 술을 마시고 있지만, 또 손 하나 발 하나 내밀 수 없는 철저하게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항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결국 자아에 대한 방어요 민족적 존엄은 결국 내 자신의 존엄이기 때문이다.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 되어도 우리는 항복하면 안 돼,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고 하니, 얼마 전에."
들창을 지르며 지나가는 새 그림자에 눈이 끌려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아까 하다 말았는데 이원진의 강연회 말이야, 천택이하고 장난삼아서 그 강연장엘 가지 않았겠나. 귀빈석에는 유지들 관가 사람들이 앉아 있더구먼. 예상한 대로 문학 강연은 아니었고 소위 시국 강연회라는 건데 연제는 '조선 민족의 살 길', 어떻게 동원을 했는지 아니면 이원진의 이름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온 건지 꽤 넓은 회당에 청중이 꽉 차 있더구먼. 한데 내가 놀란 것은 이원진을 수행해온 몇몇 문인들 얼굴을 보았을 때였어. 이원진을 열렬히 성토하고 민족반역자로 규정하며 끝가지 타도하자고 선봉에서 외치든 바로 그자들이었단 말이야."
"그걸 이제 알았어? 한물 간 얘길세."
"얘기로야 들었지. 그러나 마주치고 보니 무섭더군. 그러나 그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찬조 연사로 나온 성삼대였다."
"성삼대가 찬조 연사로 나와?"
임명빈이 되물었고 듣기만 하고 있던 길상도 서의돈을 쳐다보았다. 서의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정말 뭐가 뭔지 앞이 캄캄해지더군."
"뭐 놀라운 일도 아니지."
황태수는 비운 술잔을 길상에게 내밀었다.
"사장께서 지루하시겠습니다."
하며 술을 따랐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가라앉아서 죄송합니다."
결국 모두 우울해지고 만다. 성삼대는 황태수의 사랑방을 거점으로 하여 서의돈이 대장 노릇을 했던 젊었을 그 시절부터, 이상현과 더불어 한 수 아래의 멤버로 그들 무리에 끼여 있었으며 계명회 사건 때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인물이다.
"술이나 마시자고.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다 살라고 그러는 게지. 잊어버려."
황태수는 비어 있는 술잔에 일일이 술을 채운다. 그새 손서방은 곰쥐처럼 드나들며 꽤 여러 번 술을 날랐다. 그러니까 이들은 상당량의 술을 마신 셈이다. 다만 임명빈은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술잔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삼대가 원래 가정적으로 불행했지. 그래서 사람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는데 만나는 여자마다 고약해서... 한마디로 여자 복이 없는 놈이야."
"하여간에 그 새끼 연설을 들었으면 자네도 기절초풍했을 게야. 그 비굴한 꼴이라니, 목불인견이라."
"이젠 그 얘기는 관두지. 오늘은, 사장께서는 첫손자요 내게는 외손자 돌이 아닌가. 기분 좋은 얘기, 기분 좋게 술 마시자구. 내일은 내일 생가하기로 하고,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느새 해거름에 서 있네그려. 하하핫..."
"환갑이 멀었는데 무슨 놈의 나이타령, 그는 그렇고 사업은 잘 나가고 있나?"
"근화에서 한솥밥 먹는 식구가 자네 집에 있는데 더 할 말이 뭐 있겠나."
"집에 붙어 있어야 말이지. 일 년 가야 설 명절에 얼굴 한번 볼까말까, 원래부터 내가 뜨내긴 것을 몰라 하는 소리야?"
한솥밥 먹는 식구란 근화방직의 간부사원으로 있는 서의돈의 아우 서영돈을 두고 한 말이다. 형 대신 가사를 책임지고 있던 서영돈이 계명회 사건으로 형이 구속되면서 은행을 그만두었을 때 황태수는 영돈을 근화방직에 데려갔던 것이다.
"그나저나 저 화상 아무래도 병원에 한번 데리고 가야겠는걸."
서의돈 말에
"나도 그 생각을 했네."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임명빈을 바라보며 황태수도 동의를 표했다.
이들이 비틀거리는 임명빈을 끌어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밖은 황혼이 깔려 있었다. 여자 손님은 이미 귀가했고 서희는 양현과 아이를 안은 덕희를 거느리고 길상과 함께 중문까지 손님들을 전송했다. 환국은 어디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떠난 뒤 길상은 손자 재영을 한번 안아주고 나서 곧장 사랑으로 들어갔다. 손서방이 그새 술상을 내어가고 방안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들창 밖에서도 노을진 하늘이 붉게 타고 있었다.
길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몇 시간 동안의 주연이 악몽 같았고 그 시간은 기나긴 통로와도 같아서 길상을 지치게 했다. 그들과 함께 처음 술을 마신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도 아니었으며 꽤 오랫동안 서로를 보아온 처지다. 그럼에도 오늘은 왜 그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말을 할 수 없었을까. 물론 송관수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지만 길상은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착오, 의문에 부딪혔던 것이다.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전적인 부정 그것이었다. 지리산 골짜기든 만주 벌판이든 자신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는 뼈저린 통한, 사명감도 양심의 소리도 아니었다. 길상은 다만 자신의 삶의 진실한 의미를 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