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4-5-1
토지 4부 제5편 악령(惡靈)
1장 서비스 공장
"형님 밖에서 누가 찾는데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천일이 말했다.
"음."
장부를 챙기고 있던 홍이는 건성으로 대꾸한다.
"누가 찾는단 말입니다."
천일은 난로 옆으로 다가가면서 두 손을 싹싹 부비고 얼굴도 부빈다.
"나를 찾는다구?"
홍이 얼굴을 들었다.
"여자 아닌 께 겁내지 마소."
난로에 손을 쬐면서 천일은 신둥지게 말했다.
"누군데?"
"모리겄소. 중늙은인데 신사같이 차려 입었습니다."
"그러면 사무실로 모셔올 일이지."
"와 안 그랬겄소. 하지마는 형님을 나오라 하누만요."
"나오라 하더라고? 어째 으스스하구먼." 했으나 일어섰다.
"조선 사람이던가?"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며 홍이 물었다.
"야."
밖에는 바람이 좀 일고 있었다. 고철 더미가 쌓여 있고 낡은 차체가 여기저기 굴러 있는 공터는 을씨년스러웠다. 본격적인 추위는 아직 멀었으나 그래도 신경의 초겨울 바람은 살갗에 매웠다. 공장 부지를 지나 홍이는 철조망이 쳐진 밖으로 나갔다. 철조망을 등지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물개털의 깃이 붙은 고급 외투를 입고, 털모자로 깊숙이 얼굴을 가린 사나이, 몸은 비대했다. 발소리를 들은 그는 고개를 비틀어 돌아보았다. 작은 눈이 홍이를 빤히 쳐다본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홍이 엉거주춤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쳐다볼 뿐이었다. 콧수염에 가려질 듯 말듯 입술은 두툼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홍이 다시 물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들어갈 것 없고, 니가 바로 홍이, 이홍이라 그 말이제?"
대뜸 반말로 나오는데 고향 사투리다. 그것도 심한 경상도 억양이다.
"네. 제가 이홍이올시다.
"그래? 하기는 많이 닮았고나. 첫눈에 알았다."
"..."
"자네 부친 말일세."
이번에는 사투리가 아니었다.
"하면은 뉘신지요?"
홍이는 대개 짐작을 하며 물었다.
"음, 여기서 보아하니 엉성하기는 하나 공장의 규모가 그리 형편 없는 것은 아니군 그래."
"저기."
"내가 누구냐 궁금할 테지. 그러나 서둘 것 없네. 자네한테 해 끼치려고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할 것도 없고, 수천리 밖 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나는 것 역시 예삿일은 아니니 하여간 조용한 주루에 가서 자세한 얘길 하는 게 어떨꼬?"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공장일 때문에,"
"허허어 이 딱한 사람아. 한나절 공장일 때문에 기회를 놓친다면 자넨 사업할 자격이 없네."
홍이 표정이 달라진다. 그러나 신중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좋습니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무실로 돌아온 홍이는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눌러쓴 뒤 얼마간의 돈을 챙겨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는다.
"누굽니까?"
천일이 물었다.
"뭐라구?"
"찾아온 사람이 누굽니까?"
그 말대답은 없이
"여태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었어?"
신경질이다.
"궁금하니께요."
"가서 공장일이나 해!"
"손 벌리로 온 사람인가배요. 나보고 성내믄 우짤 기요."
"무슨 일 있으면 연강루로 연락해."
홍이는 사무실을 나섰다.
'틀림없는 그자일 것이다. 필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사내가 고향 사투리로 부친의 말을 했을 때 홍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 그것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일도 아닐 거고 부딪쳐보는 거다. 무슨 일로 만나자 하는지 하여간에 내용을 알아야 대비책을 세울 것 아닌가.'
단골로 다니는 연강루로 간 홍이는 조용한 방에서 사내와 마주 앉았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홍이는 사내에게
"안주는 뭐가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알아서 하게."
중국말로 술과 요리 몇 접시를 주문한다. 홍이는 소년기를 용정에서 보냈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팔구 년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아쉽잖게 중국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연강루는 단순한 단골 주루만은 아니었다.
"니도 대강 짐작은 하는 모앵인데, 우리가 상면하기로는 오늘이 처음 아닌가 싶다."
사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며 말머리를 텄다. 모자를 벚고 외투도 벚은 사내는 여전히 뚱뚱해 뵜고 좁은 이마는 반들반들했다.
"니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평사리를 떠났고 용정촌에 있을 때만해도 간혹 그곳에 갔었지마는 내 처지가 처지인지라 니를 보지 못했이니,"
김두수였다.
"그러나 내가 우찌 생각하든 사람이라는 것은 많이 들어서 잘 알 기다. 아마 천하의 악당으로 돼 있을 거로?
나도 홍이 니를 보기로는 오늘이 처음이다마는 잘 알고는 있었다."
"..."
"마, 남이야 우찌 생각하든, 내 평생 마이동풍으로 살아왔다마는 홍이 니한테는 좀 억울타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내력을 찾아보믄 다같은 처지라. 뿐이겄나? 니 아부지는 내한테 고마분 사램이었고, 아무튼 구박받고 천대받든 어린 시절의 사정이야 나도 비슷했을 기다."
"저는 구박받고 천대받은 일 없었습니다."
다소 발끈하는 투로 말했다.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홍의 모습은 부스스했다. 초겨울 바람에 입술은 꺼칠꺼칠했고 기름때 묻은 옷하며 몹시 피곤해 보였다.
"하기는, 우리형제에 비하면 그렇지. 자네 부친 면을 보아서 그랬을 게야. 하지만 자네 모친이나 씨가 다른 누이, 임이 경우는 자네 같지 않았을 게다. 설움을 복받듯, 뭐 내가 지나간 얘기를 하자는 거는 아니네."
사투리는 다시 표준말로 돌아왔다. 발끈해서 말로는 부정했으나 홍이라고 쓰라린 기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수의 말대로 아버지의 면을 보아 자신의 유년 시절이 보호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따뜻한 날개 밑에서 그리움과 행복의 기억을 안겨준 사람은 월선이었다. 그 모습은 영원한 어머니, 갈증과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는,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 개척해가는 용기와 의지는 월선의 육신이 묻혀 있고 입김이 서려 있는 땅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생모 임이네에 대한 회한은 그것이 회한이었기에 훨씬 짙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해서 김두수의 말은 홍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월선이 그리운 어머니라면 임이네는 불쌍한 어머니, 어느 것에도 비길 수 없는 연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홍이는 하마터면 임이누이를 만났느냐고 김두수에게 물을 뻔했다. 지난 봄, 임이가 공장으로 홍이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오십이 넘은 여자, 나이보다 더 늙었고 그 형상의 초라함은 목불인견이었다. 남자를 만나 조선에 나가 살았으나 홀로 되어, 자식이 없고 살길이 막막하여 옛 터전으로 돌아왔다는 뭐 그런 얘기를 했었다. 계명회 사건에서 왜경의 끄나풀로 지목된 임이였던 만큼 홍이는 경계와 증오심을 나타내었으나 일말의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핏줄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도 부정 할 수는 없었다. 홍이는 꽤 큰돈을 쥐여서 그를 돌려보낸 것이다. 봄에는 임이가 나타났고 초겨울에 김두수가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심상한 일 같지가 않았다. 술과 몇가지 요리가 들어왔다. 홍이는 곰곰이 생각을 다져가며 술잔에 술을 부었다.
"드십시오."
"음."
술잔을 기울이고 나서 안주를 잡으며 김두수는 말했다.
"나도 나이가 들고 보니 세월이 서글퍼서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남들이 다 가는 고향을 나는 왜 못 가나. 나도 한이 많은 사람이다."
표정으로 보아 진정인 것 같았다. 하기는 인생무상을 느낀 나이가 되긴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허허어, 누구 숨 넘어가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은행 창구도 아니겠고 왜 그리 용건만 가지고 따지나. 정 그러면 나 섭섭하네. 한복이를 봐서라도 그러지 말게."
"죄송합니다. 졸지간에 찾아오셨기에 저도 영문을 몰라서,"
"사람을 송충이 보듯, 사람 오기 돋우는 거, 그것 좋잖아. 그러면은 하찮은 일로도 크게 낭패를 보는 수가 있으니 홍이 자네도 사업에 성공하려면... 이런 말이 있지. 도둑놈도 사귀라, 사귀어두면 그것도 생광스리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정의를 내세우며 협박이 숨어 있고 본심과 작심이 교차하는 김두수의 말을 들으면서, 그러나 홍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홍이 나름대로 김두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기준을 세워놨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옛날, 한창 혈기 왕성했을 때 헌병대에 잡혀가서 반항하다가 겪은 고통을 홍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오는 동안, 분노를 자제하는 힘은 그 고통스런 기억에서 온다. 바보짓하지 마라! 해서 홍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겸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내가 환영받을 인물이 못 된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 나 자신이 알고 있지. 하하핫 핫핫핫핫."
두터운 입을 쩍 벌리고 김두수는 갑자기 게걸스럽게 웃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보아도 참 험하게 살아왔다. 계집 잡아다 팔아먹은 것은 다반사요, 무법천지 이 만주 대륙에서 악심만 먹으면 안되는 일이 없었지. 끝이 없는 빙판, 가도가도 인가라곤 없는 눈의 벌판, 늑대 밥 되는 것 말고는 겁나는 것 하나 없었다고. 날 죽이겠다고 칼 품고서 댕기는 놈이 있었으나 그까짓 것, 그게 두려웠으면 이 김두수, 내 어머니처럼 목을 매어 죽었지 죽어. 하하핫하 하하핫! 나는 한복이 그놈하고는 달라, 다르다."
독한 빼주를 쭈욱 들이켠다. 김두수의 얼굴은 몇 잔 술에 싯벌개져 있었다. 홍이도 술잔을 비우고 김두수 술잔에 술을 채워준다.
"너는 모를 게야. 네가 어찌 알 것인가. 응달진 뒷산에 울 어머니를 묻고 소나무 굉이에 대가리를 짓찧이며 피를 흘리던 그때, 어린 내 한을 어찌 알 것인가. 최참판댁 눈이 무서워 모두 쉬쉬할 적에 서금돌할배, 영팔이, 윤보, 한돌이아제 그리고 자네 부친이 지게송장이나마 울 어머니 장사지내준 일, 자네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지금 나이 몇인가?"
"서른여섯입니다."
"그렇게 됐을 기다."
김두수는 연거푸 술 두 잔을 마셨다.
"그 후 동네에서 쫓겨난 우리 형제는 함안의 외갓집으로 갔는데, 흠, 이제는 늙어 꼬부라져서 아마 뒈졌겠지. 흠, 외삼촌 외숙모라는 인간, 그 자심한 구박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굶기를 밥 먹듯, 그래 외가를 뛰쳐나와 떠돌아다니다가 흘러들어온 곳이 이 만주 땅이었다. 그런 내가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뭐 있겠나. 수치심, 자긍심? 그게 밥 먹여 주나? 이 세상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고 내가 나를 위해 할 일 밖에 없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만, 그래, 달라진 것이 있지. 늙는다는 것하고 조선 땅으로 돌아가서 내 봐란 듯 살아보겠다는 생각이지."
"아저씨가 어떻게 조선 땅으로 돌아가서 내 봐란 듯 살겠습니까?"
힐난하듯, 그러나 조금은 마음을 열어주듯 홍이는 자연스럽게 아저씨란 말을 했다.
"어째서? 왜 내가 그렇게 못 살아!"
화를 벌컥 내다가 김두수는 아까처럼 게걸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자넨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게 눈에 뵈질 않는 모양이군 그래. 응? 왜놈의 앞잡이라 해서 그런 말을 하는가분데 군 수사기관에 있었으니 앞잡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그래 조선이 독립할 거라고 자네는 믿는 겐가?"
"그런 확신이 있다면 이 바닥에서 철판이나 뚜디리고 있겠습니까."
재빠르게 꼬리를 감추듯 홍이 말했다.
"하하핫 하하하핫, 그래, 그래 자네 말이 맞어. 도둑놈들은 어둠을 끼고 자네 하는 사업은 왜놈을 낄 수밖에 없는 일이고 보면, 하하핫핫 하하하 손끝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조선이 독립을 해? 그 희망은 죽은 나무에 꽃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허망한 게야. 왜놈 밑에서 못살겠다 한다면 모를까 독립을 쟁취하자, 그건 잠꼬대나 매한가지. 지금 남경함락은 시간문제 아닌가. 장개석이는 벌써 천도를 선언하고 있어. 장학량이가 작년에 공산당하고 결탁해서 장개석이를 납치한 서안사건, 그게 멸망의 징조 였던 게야. 서안사건은 노구교사건의 원인이지. 일본을 상대해서 중국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이제는 만주가 문제 아니야. 멀잖아 일본은 중국을 손아귀에 넣을 거다. 이런 판국에 조선이 독립을 해?"
"중국을 손아귀에 넣는다구...그게 쉬울까요? 소련이 있고 미국, 다른 나라들이 보고만 있겠습니까?"
"만주를 보아라. 군말 몇마디 듣고 끝나지 않았나. 그나마 그 귀찮은 소리 안 듣겠다고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를 했거든. 아무튼 일본은 지금 욱일승천이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장개석이 군대가 허약하기도 하지만 공산당을 경계해서 힘을 다 쓰지 않는 것도 일본의 전과가 오르는 이유의 하나고, 공산당이 아주 숨이 끊어져서 장개석이 강화되어도 안 될거고 물론 공산당이 국민당을 아주 내몰아도 일본은 난감할 거고 말하자면 시기를 잡는 데 일본은 묘수를 쓴 셈이지. 만주사변하고 꼭같은 길을 가는게야. 참말로 세상은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 만주만 하더라도 기가 막히게 변했지. 내가 만주 땅에 온 것이 삼십 년 꽉 차고 넘었는데 변해온 꼴을 보니 마치 처음에는 엉금엉금 얼음판을 기듯, 다음에는 간신히 걷고 그리고 뛰는데 지금은 날고 있어. 허허벌판, 신경의 저 대동광장은 몇 해 전만 해도 허허벌판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은 어때? 샤오 층의 어마어마한 건물이 가득 들어차서 장관이지. 오랑캐의 땅이 그리 번창할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덕택에 이홍이도 목재상을 해서 톡톡히 재미를 보지 않았나 말이다. 안 그런가?"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홍이는 짐짓 놀라는 시늉을 한다.
"어떻게 알았느냐구? 내가 누구냐! 나 김두수다. 만주 땅에 온 지 삼십 년이 꽉 차고 넘었는데, 이 김두수 발이 안 닿는 곳 있을 성싶어? 만주에 관한 것이라면 훤하지 훤해. 더군다나 조선 놈들 일이라면 손금 들여다보듯, 내가 모를 일이 어디 있어?"
술이 돌아서 김두수는 균형을 잃어가는 듯했으나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늙은 놈아! 그럴 테지. 제 동포를 잡아먹는 밀정 놈이 몰라서도 안 될 거다. 그러나 네놈이 모르는 일도 얼마든지 있어!.'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홍이는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듣자니까 공노인이 죽고 그 유산으로 목재상을 시작했다든가?"
"네, 그랬습니다."
처자를 데리고 홍이 용정촌에 온 후 마치 이들을 기다리기 위해 연명을 하기라도 한 듯 공노인은 세상을 버렸다. 공노인의 별세를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은 주갑이었다. 홍이 용정촌에 나타난 것을 누구보다 기뻐한 것도 주갑이었다.
'주갑이아제...'
그 주갑의 행방이 묘연하여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란 말을 했다. 그러나 홍이는 주갑이 다시 나타날 것을 믿고 있었다. 사 개월 전에 용정촌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람이 여태 돌아오지 않았고 용정촌에 사람을 보내어보았으나 주갑은 그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것은 그렇고, 공노인이 죽은 뒤 홍이 사의학교 시절의 은사였던 송장환과 용정촌에 와서 활동하고 있는 정석이, 그 밖의 몇몇 중요한 인물들과 상의한 끝에 공노인이 남긴 재산을 정리하여 장춘에다 목재상을 차린 것은 만주사변 이전의 일이었다. 일본에 의해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장춘은 신경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수도가 되었으며 수도 건설의 바람을 타고 홍이는 목재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데, 공노인이 어찌 자네한테 유산을 물렸는고?"
알면서 능청이다. 물론 홍이도 그의 능청을 안다.
"어머니의 작은아버지, 그러니까 저에게는 할아부지뻘이지요. 핏줄은 닿지 않았지만."
"가만있자아. 공노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아아 알 만하군. 월선인가 그 무당 딸이,"
"아저씨!"
홍의 낯빛이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러나?"
"제 앞에서 그래도 되는 겁니까?"
"뭘?"
"명색이 자식인데 자식 앞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이웃 아이 이름 부르듯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거야,"
"김두수 씨 어머니하고 나이 차이도 많지 않을 건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김두수를 노려본다.
"그것 참 듣고 보니 내가 실수를 한 것 같군. 어릴 적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하하하핫."
'아니꼽고 더러운 인간, 저러니 살인자 자손이란 말이 절로 나오지. 저 주제에 양반 가문 치켜들고 나와?'
"그러면은 작은어머니라,"
"작은어머니도 큰어머니도 아니오."
"하기는 그래. 자네 생모도 법으로 만난 처지가 아니니 큰어미 작은어미 분간키도 어렵고 그러면 생모, 양모라 해야겠군."
뒤늦게 홍이는 김두수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쓰디쓴 웃음을 띠며 술잔을 들었다. 종시일관 침착한 홍이를 김두수는 흔들어본 것이다.
"하여간에 그 일은 그렇고 한동안은 더 재미를 볼 텐데 목재상은 왜 때리치웠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던 게야?"
"왜 이러십니까?"
"응?"
"제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르기라도 했습니까?"
"잘못한 일이라니,"
"취조하는 겁니까."
"취조? 그게 무슨 말인가."
"미주알고주알 왜 묻지요?"
"하항, 그 섭섭한 말을 하는군. 그래 취조 받은 경험은 있나?"
"있지요."
"무슨 일로?"
"무슨 일인지 알기나 했으면 답답하지는 않았게요. 장가 들기 전에 탈춤 구경 갔다가 헌병한테 잡혀갔는데 말도 마시오."
"무슨 일로?"
"아아 몰랐다 하지 않았소. 구경꾼 속에 뭣이 끼여들었는지 구경하던 젊은 놈들 모조리 잡아갔으니 영문 모르고 당했지요."
홍이는 의식적으로 흐트러놓는다.
"하하핫 하하핫... 그 흔히 있는 일이지. 하하핫 하하하, 흔히 있는 일이라, 한번 그러고 나면 애국자가 되는지 제 명에 못 죽든지,"
하다가
"여기 술 가져와야겠군. 이봐! 이 되놈의 새끼들아!"
고함을 친다. 다시 능숙한 중국말로 김두수는 술을 왜 가져오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술을 가져온 종업원은 홍이와 눈을 맞추고 나서
"손님 조용히 해주시오."
힐난하듯 말했다.
"뭣이!"
김두수가 눈을 희뜨는데
"아저씨!"
홍이 감아 죄듯 불렀다.
"이눔우 새끼들! 조용히 하라! 지금이 누구 세상이고? 으으응!"
짐승같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나가시오."
홍이 종업원에게 손짓했다. 종업원이 나가니까 김두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히쭉히쭉 웃으며 술을 부어 마시는 것이었다. 홍이도 조심성 같은 것 훌훌 벗어던지듯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가나오나, 제 버릇 개 못 준다 하더니,“
하며 아주 터버린다.
"하하하핫... 마 좋다. 피차 버르장머리 챙겨서 뭘 하겠나. 망치로 탕탕 부셔서 버릴 것도 못 되고, 살인자 계집의 아들, 살인자의 아들 피장파장, 들추어본들 별 수 없지. 그보다 지금 공장의 형편이나 말해주게."
"다 안다면서요?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일을 왜 묻소."
"모르지는 않지. 해서 내가 자넬 찾아온 것 아닌가?"
"법 어긴 일 있으면 잡아가슈."
"왜 이래?"
"공연히 성질 돋우지 말구요."
"옛날 옛적에 손 씻었다. 지레 짐작하지 마라. 오금이 저려서 하는 말이라도 이제 난 상관없어."
"하면은 뭐 하구 사시오?"
"장사하지."
"여자 장사요? 아편 장사?"
"모피 장사도 하구."
"돈 벌었겠수."
빈정거리는 말에 김두수는 무관심이었다.
"돈이야 있을수록 좋은 것, 돈이 판을 치는 세상인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함께 돈 좀 벌자. 이제 객담일랑 관두고 어때? 나하고 동업 안 하겠나?"
김두수는 진지해졌다. 홍이도 긴장하는 듯
"아편 장사 말입니까?"
"객담을 관두자 했어. 자네 싸비스 공장을 두고 하는 말일세."
"왜 그래야 합니까? 빚 없이 내 자본으로 기반 닦아놨는데 뭐가 답답하여 동업을 합니까?"
"수리만 해서 큰돈 잡겠나?"
"수리만 하는 게 아니지요."
"알어. 폐차 사다가 조립해가지고 검사받고 파는 것."
"..."
"결국은 그 폐차를 얼마나 확보하느냐, 거기 따라서 사업이 좌우되는 거 아니겠나."
"좌우된다기보다... 그는 그렇지요."
"자네가 목재상을 때리치우고 싸비스 공장을 차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감탄했네. 머리가 잘 돌아간다 싶었지."
"머리가 잘 돌아간다기보다 원래 차 만지는 걸 좋아했으니까 배운 것도 그 일이었고."
"하여간에 물결 자알 탄 게야."
김두수는 목을 졸라맨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양복 윗도리도 벗어버린다.
"자넨 변두리의 사람들, 그리고 자네 역시도 그렇지만 나 이 김두수를 지나치게 의심하고 경계를 하는데 허물이 내게 있는 것은 물론, 그래서 할 말이야 없네만 그렇다고 해서 기와지사를 후회하고 잘못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아. 아까도 말했듯이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고 내가 나를 위해 할 일밖에 없다. 내가 허기져서 다 죽게 되어도 누구 밥 한술 주는 사람이 없다면 굶어죽거나 아니면 밥을 훔쳐 먹을 밖에 더 있겠나? 한때 젊었을 시절에는 세운 공적도 있고 해서 장차 어디 경찰서장이나 하고 꿈꾼 일도 있었지. 그러나 조선 놈이라는 것과 학력이 없다는 것, 자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늙었고 무슨 쓸모가 있겠나. 안 믿어도 별 수 없지만 실정이 그러하다."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세상에 나서 딱 한번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지. 용정촌에 불이 났던 그해였을 게다. 그 불을 자네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때 자네 아버지를 우연히 만나네. 만나는 순간 달아나고 싶었고 울컥 부끄러운 생각이 치밀더구나."
김두수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이 죽은 내 부친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는지 내 걸어온 길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옛날 은공을 생각하여 술을 사드렸지. 그래 자네 부친이 말씀하시더군. 야무지게 해서 고향 돌아가야 안 하겄나, 그때 나는 말했지. 이곳에서 아저씨를 만난 것도 한탄스러운데, 죽어 송장이 되어도 고향에는 안 갈 겁니다."
담배를 붙여 물고 연거푸 피우다가 김두수는 상머리에 담뱃재를 떤다.
"가끔 생각이 난다. 어머니를 묻어놓고 솔굉이에 머리를 짓찧든 일, 어머니를 묻어준 사람들, 그분들은 다 세상을 뜨고 한 사람도 남아 있질 않아. 목에 걸린 까시같이, 내 맘을 멍들게 하는 것은 한복이, 내 동생 놈뿐이다. 계집들은 욕심으로 좇았고 자식 놈들도 애틋하지가 않다. 애비 덕에 호의호식했고 재주가 없어 들어간 대학도 중도이폐, 누구 탓할 것도 없고... 송장이 되어도 안 간다던 고향, 고향에야 못 가더라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고 살지 안 그런가? 거두절미하고 군대에서 나오는 폐차를 내가 불하받을 길이 있다. 그래도 나하고 동업 안 하겠나?"
김두수 눈은 교활하게 빛났고 홍이 얼굴에 동요하는 빛이 있었다. 오랜 침묵이 지나갔다.
"동업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봐. 자네한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올 거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동업 안 하는 것은 저의 방침이니까요"
홍이는 고집 세게 말했다.
"수량에 따라 내가 와리먹는 거라면 되겠군."
"그건 생각해 보지요. 저도 자본이 많은 편은 아니니까요."
김두수는 희미하게, 경멸하듯 노하듯 그러다가 실쭉 웃었다.
"얼음판을 기는구나."
"기어야지요. 이곳이 어떤 곳인데."
태연하게 홍이는 응수했다.
김두수와 헤어져 공장으로 돌아온 홍이는 뒤숭숭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사무실 창가에 가서 황량한 밖을 내다본다. 해체한 차체만큼 홍이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속셈이 무엇일까? 그의 말대로 그렇게 단순한 걸까.'
유혹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군의 폐차를 불하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이권이다. 다른 저의가 없다면 홍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업은 사업이며 항일은 항일인 것이다. 신경 도시 건설에 홍이 목재를 팔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두수는 역시 기분 나쁜 존재였다. 대화 중에 이따금 숨김없는 그의 얼굴이 나타나곤 했지만 여전히 그는 악당임에 틀림이 없고 독립투사들을 엮어간 그의 손에서 피냄새가 난다. 그리고 일단 접근해온 이상 집요하게 감돌 것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임이 이름이 나온 것도 의혹을 짙게 했다. 아버지에 대한 의리일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가곤 한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
혼잣말같이 하며 천일이 들어왔다. 홍이 창가에 서 있을 때는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천일은 그 중늙은이가 누구냐고 물으려다 그만둔다. 지난 봄 누이가 찾아왔다가 돌아간 뒤 홍이는 창가에 오래 머물고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것을 천일은 기억한다. 그라고 또 한 여자, 겨울이었다. 입술이 먹빛이 되어 여자는 찾아왔다. 그때 여자를 돌려보내 놓고 담배를 붙여 문 홍이는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천일은 진주에서 화물차를 몰았는데 서비스 공장을 차리면서 홍이 불러올린 것이다.
"나 일찍 들어가야겠다."
돌아보지도 않고 홍이 말했다.
"어디 아파요?"
천일이 물었다.
"응, 골치가 좀 아파."
홍의 살림집은 공장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빈민가라할 수는 없지만 볼품없는 집들이 밀집해 있는 변두리 지대였다. 공장 가까운 곳을 찾다보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한편 집들이 밀집해 있는 것이 필요한 홍이의 처지이기도 했다.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이 셋이 한꺼번에 달려왔다. 막내는 신경 와서 낳았고 아들이었다. 주방에서 마늘을 다지고 있던 보연이가 빠끔히 얼굴만 내밀고 막내를 안아올리는 남편을 바라본다. 머리는 흐트러졌고 옷 매무새도 형편없는 보연이, 아이 셋은 그에게 과중한 일거리를 안겨준 것 같았다.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다.
"오늘은 일찍 오셨어요."
"음."
"저녁, 좀 기다려요."
"저녁은 관두지. 아이들하고 당신이나 먹어."
"왜요?"
"나가봐야 하니까."
"또 나가요?"
"볼일이 있어."
남들은 보연이를 살림 못한다고들 했다. 자식 서넛 안 되는 집이 있느냐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이는 보연에게 관대했고 잘하네 못하네 일체 말이 없었다. 여자 옷매무새가 그게 뭐냐고 할 법도 했지만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관심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만주에 오면서부터 포근히 감싸주는 심정으로 아내를 대하였고 보연도, 남편을 태산같이 믿고 의지했다.
"상의아버지,"
"응."
보연은 손을 닦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송씨 아저씨가 오셨데요."
"그래서?"
"틈이 나면 당신 들르라 하던데요."
"그렇잖아도 거기 가려고 해."
보연은 체면치레라도 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저고리 위에 걸친 자켓의 단추도 잠그곤 한다.
"당신 술 마셨어요?"
"손님이 와서."
홍이는 뒤꼍으로 나갔다. 석탄과 장작응ㄹ 난롯가에 날라다놓고
"그럼 나 나갔다 올게."
"송씨 아저씨하고 또 술 마실 거지요?"
보연이 뒤쫓아 오며 말했다.
"마시게 되면 마셔야지. 늦더라도 기다리지 말고 자아."
송씨 아저씨란 송관수였다. 그는 삼 년 전에 조선으로 나가서 마누라와 막내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용정촌에 자리를 잡았다가 최근에 신경으로 옮겼다. 시골을 돌면서 행상을 하지만 그밖의 임무도 있었다. 홍이 들어갔을 때 송관수는 멍청한 모습으로 낮아 있었다.
"형님"
"니 왔나."
송관수는 벽 쪽으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방이 비좁았다.
"낮에 내가 갔더니라."
"상의 에미한테 들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오려고 생각했는데,"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더니 깝깝하고, 그래서,"
송관수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새 늙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으나 홍이는 송관수의 심정을, 깝깝하다고 표현하는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무신 일이 있기는... 무신 일이 있을꼬."
"..."
"그나저나 주갑이 그 늙은이는 우찌 되었는고, 설마 얼음판에 미끄러져 죽지는 않았겠지."
"형님도 참, 주갑아저씨 떠날 때는 여름이었소. 그보다 혹 잡혀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여름이고 겨울이고 간에 우짠지 요새는 일이 자꾸 틀어지는 것같은 생각이 들고, 남경이 떨어질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들 하니 앞으로 우찌 될랑고, 우리들이 연해주로 옮겨가는 꼴이나 안 될는지 무르겄다."
"형님 마음이 편찮아서 더 그렇습니다. 내 생각에는 마음에 낄 것 없일 성싶은데."
"내가 멋 땜에 마음에 끼노. 그깐 놈 무신 희망이 있다고."
관수는 심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에미 애비도 모리는 놈! 벌써 옛날에 나는 그놈을 자식으로 치부하지 않았고 사람되기 글렀다 생각했제."
그깐 놈, 에미 애비도 모리는 놈! 아들 영광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송영광이 극단 패거리가 되었다는 소식은 삼 년 전 식구를 데리고 조선에 나갔을 때 관수는 들었다. 그보다 앞서 인편이 전하는 말에 의할 것 같으면 환국이 갖은 노력을 다해보았으나 영광은 결국 제 갈길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듣기 좋게 음악이라 했으나 관수는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랬는데 그 송영광이 지난달 신경에 나타났다. 극단을 따라 공연차 온 것이다. 조선에서 주소를 얻어온 모양이다. 해거름에 영광은 공장으로 홍이를 찾아왔다.
"뉘신지요?"
"제가 송관수의 아들 영광이올시다."
홍이는 깜짝 놀랐다. 그는 약간 다리를 절었고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관골에 흉터가 있었다. 연예인답게 야한 구석이라곤 없었고 검정 양복에 기름기 없는 머리는 더부룩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세련돼 있었고 분위기는 우울하며 무거워서 홍이는 연소자로 대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말씀 낮추십시오. 공연차 왔습니다."
"그, 그럼 갑시다. 날 따라와요."
"아, 아닙니다."
영광이는 뒷걸음질 쳤다.
"아버진 절 보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 말씀 마시고 아버지하고 함께 오십시오."
하며 극장표 두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차마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 눈치였다. 홍이는 몇 번이나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영광이는 그냥 돌아갔다. 이튿날 저녁때, 마침 송관수는 시골서 돌아와 집에 있었기 때문에 홍이는 얼렁뚱땅 밖으로 데려나와 극장까지 간 것이다. 영문 모르고 따라온 송관수는 악단 속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영광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끌듯 무대에 나와 영광이는 색소폰의 독주를 했을 때 관수는 악! 하고 비명처럼, 그러나 간신히 소리를 죽였던 것이다. 영광은 어느 가수보다 돋보였다. 흐느끼듯, 뭔지 모르지만 가슴이 저려오는 듯한 색소폰의 음률도 음률이지만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과 자연스럽고 보기 좋은 몸놀림, 젊은 여자들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쪽 다리를 끌듯이 걸음걸이는 애잔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한마디로 강한 매력, 휘어잡는 힘을 그는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관수는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러나 색소폰의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관수는 허둥지둥 일어섰다. 간다온다 말없이 그는 극장을 나갔고 홍이도 그를 뒤쫓아 극장에서 뛰어나갔다.
"이놈아!"
어두운 거리에서 관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홍이를 노려보았다.
"나를 농락한 기가! 이 죽일 놈."
"허허어 참으시오. 실토를 했으면 형님이 극장에 오셨겠습니까?"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형님도 참 별난 성질이오. 어때서 그럽니까. 그 정도면은 우리 상근이 상조가 그 길로 나간다 해도 나는 반대 안 하겠습니다. 여자들 한숨 쉬는 소리 못 들었습니까?"
홍이는 역시 얼렁뚱땅 넘기려 했으나 관수의 격한 감정에 변화가 없었다.
"니는 우떻게 알았노. 그넘 오는 거를?"
분노에 떨며 관수를 물었다.
"지가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은,"
"영광이가 찾아와서 알았지요."
"머라고?"
관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찾아왔다고?"
"네, 공장에 왔더군요. 표 두 장을 주면서 아버지는 나를 보려 안할 거니까 아무 말 말고 함께 오라, 그럽디다."
"표 두 장을 주어..."
그러고는 집에 닿기까지 관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관수는 홍이 어디서 애기를 듣고 자신을 끌고 갔다,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영광이가 홍이를 찾아갔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관수는 사흘 동안 영광이 나타날 것을 기다렸다. 혼자서 안전부절, 마누라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짐나 대답을 못하고 아들을 기다렸다. 한편 영광이는 부친이 자기를 용서하고 찾아줄 것으로 고대했다. 그러나 한 정거장에 정차했던 기차가 하나는 북으로 가고 하나는 남으로 가듯 부자간은 멀어진 것이다. 영광은 용서 없는 부친에게 사무치는 원망을 안고 떠났으면 관수는 끝내 부모를 찾지 않은 아들에게는 원망을 안고 떠났으며 관수는 끝내 부모를 찾지 않은 아들에게 잊을 수 없는 배신감을 맛보았다. 그 심적 충격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무기력의 수렁에 빠진 듯 관수는 그 다부지던 성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상 헛살았다. 헛살았어."
궐련을 꺼내 붙여 무는데, 관수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홍이를 찾아갔고 홍이를 오라 했는데 막상 마주대하고 보니 용무도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자식에게 버림받은 한 사내가 알몸으로 홍이에게 그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는 비애와 비참함을 스스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식이란 마목이다. 내가 죽어버린 것만 같구나. 나 자신이 나로부터 떠나부린 것만 같구나. 그게 정말 내 자식이었더란 말인가.'
목이 메었다.
"어떻노? 오새 일은 잘 되어가나?"
"그렇지요, 뭐."
홍이는 곁눈질로 관수를 살핀다.
"형님,"
"응."
"아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는데, 낮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형님 또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이라 하지 않고 아저씨라 했거던요. 형님을 만나 형님이라 부르니까 그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야 뱃속에 든 할아배도 있다 안 하더나."
그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관수는 덧붙여 말했다.
"하기는 너이 아부지를 우리가 아제라 불렀으니 그렇지 나이로 따지자면 아제비뻘 되제."
"네, 그 촌수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도 우리 아버지를 아저씨라 불렀거던요. 아버지를 아저씨라 했으면 형님이라 해야 옳은 것 아닙니까."
"무신 소린지 모르겄다."
"그 살마이 누군지 짐작이 안 갑니까?"
"누군고?"
"김두수, 김거복이었습니다."
"뭐라구!"
"김두수는 형님 또래지요?"
"내하고는 동갑이다. 그래 그자가 니를 찾아왔더란 말이가."
"네."
"뭐하러!"
관수의 표정이 싹 변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보였다. 홍이는 김두수가 한 말을 대강 들려준 뒤,
"그분이 영 고약합니다. 천장에 뱀이 들앉은 듯 기분이 나빠요, 뒤숭숭하고. 그런 제안을 하는 진의가 뭣일까요?"
"가만있거라. 좀 생각해보자."
관수는 홍이를 저지하듯 팔을 흔들었다.
"동업 하자고? 그게 싫으면 와리를 묵겄다아?"
관수는 곰곰이 오랫동안 생각을 한다.
"아무튼지 이것은 시일을 두고 생각해봐야 될 일이지마는, 경우에 따라서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겄다."
"어떻게요?"
"작심을 하고 왔다면 그놈이 쉬이 물러나겄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거절을 하고 그놈은 하자하고 또 거절을 하고 하다보면 도망 다니는 꼴밖에 안 된다."
"그렇지요."
"도망친다는 것은 벌써 약점이거던, 약점을 내보이는 결과가 되는기라. 그라고 본시 그놈은 원한이 짙어서 어떤 보복으로 나올지 모르겄고, 상대를 아니까 오히려 써먹을 수도 있을 기다. 그라고 우리 형편에 그 기회는 놓치기 아깝고,"
"욕심은 나지요, 그러니까 더욱더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겁니다."
"우짜면 빈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믿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마는 다 아부지에 대한 마음은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 일은 나도 아니께. 그 가련한 형상은 눈 뜨고는 못 볼 일이었제. 아비는 샐인 죄인으로 잽히가고 어마니는 살구나무에 목매어 죽고,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윤보아제랑 니 아부지랑 해서 어매 시신을 묻어 주었인께 세상에 극악무도한 놈이라도 그걸 잊겄나?"
"..."
"그라고 또 오십이 넘은 늙은 것, 이용할 대로 했이니 쓸모가 없는 것도 틀림이 없다. 그런 일이란 딱지가 붙고 하면 효험을 봇 보는 직업 아니가. 이자는 잡아들이기보다 광고나 해서 지 잇속 차리게 돼 있고 하니 니 앞에 나타났을지도 모르지."
"..."
"그라고 우리도 방법이 없는 거는 아니다. 반대로 옭아맬 수도 있고 한복이를 넣을 수도 있인께."
"한복이형님을 넣다니요?"
홍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누가 잡아넣는다 캣나? 한복이 말을 젤 잘 듣고, 아니 할 말로 한복이도 몇 차례 심부름을 했으니 김두수 꼼짝 못하게 돼 있다, 그 말이다."
어느덧 관수의 눈은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뜻밖에도 김두수의 출현은 관수의 무기력한 병에 약이 되어준 셈이다.
"형님 나갑시다!"
"그러지."
"시내로 나가서 호기 좀 부립시다.!"
"누가 마다하나?"
관수는 웃었다. 그러나 그는 매듭 짓듯 다시 말했다.
"이 일은 다른 사람들하고 의논을 해서 신중히 해야 된다."
"물론입니다."
2장 동성반점에서
"엉망이 어디르 갑매까?"
옷을 갈아입으면서 난우가 물었다. 옥이는 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용을 쓰며 버선을 신고 있었다.
"잠자쿠 입성이나 입쟁쿠 무시기 잔말르 하는 기야."
언니 연우가 나무라듯 말했다. 연우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는 눈치였다.
"빨리 입어얍지. 안 갈 작쟁임둥?"
이들의 외출 준비를 도와주면서 옥이네도 난우를 보고 재촉했다. 미국인 선교사 집에서 일하며 옥이를 길렀고 공부도 시켰던 옥이네. 이제는 두 손녀의 할머니가 된 것이다. 그의 모습에는 고왔던 옛날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그러나 초로의 쓸쓸한 그늘은 어쩔 수 없었다.
"어망이이!"
투정부리듯 난우는 또 어미를 불렀다.
"어째 그럽매?"
"어디르 가는지 물었소꼬망."
"이 간나아 몇 번을 말해야 알지비? 큰아배(할아버지)가 청요리 사주신다 하잽매. 빨리 입성으 입쟁쿠, 시간 없슴."
난우 역시 짚이는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청요리 먹으러 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며 왜 청요리를 먹으러 가는가, 무슨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옥이는 서두르면서도 긴장한 낯빛이었고 옥이네 역시 허둥대고 있었다. 지금은 해를 넘긴 초정이니까 올해가 1938년인데 돌이켜보면 용정촌에 큰 화재가 난 것은 1911년, 이십팔 년 전의 일이 된다. 그때 재봉소에서 일하던 젊은 과수댁 옥이네가 폐허로 변해버린 용정에서 살길을 찾아 회령으로 가던 길, 그 마차 속에는 목재를 구하기 위해 역시 회령으로 가는 길상도 있었다. 험난한 노정, 화룡 골짜기를 앞두고 신흥평에서 말도 쉬고 사람들도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며, 더러는 길가 주막에 들어 요기를 하고 있었을 때 과수댁의 어린 딸이 길상을 보고 배고프다면서 울고 있었다. 당황한 길상은 엉겁결에 파적을 아이 손에 쥐어주었는데 젊은 과수댁이 달려왔던 것이다.
"이 간나아! 비렁뱅임둥! 어째 에미 우세시키는 기야!"
하며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파적을 베어 먹으며 어미에게 끌려가던 계집아이,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길상과 옥이네는 미래가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하여 강포수와 귀녀 사이에서 생겨난 두메, 기구한 운명의 아들 강두메와 옥이 혼인하게도 된 것인데 그들의 딸들이 연우와 난우다. 열네 살과 열두 살의 금싸라기같이 자란 자매였다. 같은 천에 색상도 같은 남치마 분홍 저고리를 자매는 입는다.
"연추 아즈방이는 어째 오잴까? 무시기 일으 잘못 된 거 앙입매?"
난우의 옷고름을 매어주면서 옥이네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옥이와 아이들도 방금 그 생각을 했었다. 남치마 분홍 저고리를 해준 사람이 주갑이었기 때문이다. 홍이 주는 용돈을 모았다 하며 작년 설빔으로 주갑이 옷감을 끊어주었던 것이다.
'어째 안 오지비? 마적단이 연추 큰아배를 잡아갔단 마링?'
난우는 생각하며 외투를 입고 가죽 반장화를 신는다. 허리에 벨트가 붙은 고급 외투는 하얼빈의 러시아인 상점에서 샀다. 하며 재작년 겨울 홍이가 갖다주었고 구두도 지난 연말 신경에서 홍이가 부쳐준 것이었다. 꼭같은 외투, 같은 구두를 신은 자매는 쌍둥이같이 예뻤다.
"그럼 조심으 하구 다녀옵세."
아이들을 내보내면서 옥이네가 말했다. 외투에 딸린 털모자를 쓰고 아이들은 어미의 뒤를 쫓아 거리에 나왔다. 감색 솜두루마기를 입은 옥이는 넓은 털목도리를 푹 뒤집어쓰고 초조한 발걸음으로 앞서간다. 초정월의 용정촌 거리는 조용했다. 혹독한 추위 탓인지 행인은 드물었다. 움츠린 모습의 청인들이 팔짱을 끼고 지나갔으며 아이 업은 여자가 급히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국경 수비대기마가 요란스럽게 지나간 뒤 거리는 황량한 겨울 속에 꽁꽁 얼어붙는다. 납십자로 장터에서 왼편으로 꺾인 길켠에 송장환이 서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는 옥이네 식구들을 발견하자 손을 들었다.
"큰아배!"
연우와 난우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큰아배, 그간 안녕하셨습매까."
나란히 서서 아이들은 절을 했다.
"오냐, 너희들도 그래 공부는 잘했느냐?"
"언니는 일등 해소꼬망."
난우 말에
"거짓부레."
연우는 수줍어하면서 동생의 등짝을 때린다.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옥이 아이들을 가르고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음, 고생이 많았지?"
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송장환은 안쓰러워하는 눈길로 옥이를 바라본다.
"저희들 고생 같은 것, 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버이를 대하듯 존경과 친애하는 태도다. 그도 그럴 만했다. 아이들이 큰아배라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귀녀가 관가에서 처형된 뒤 옥중에서 출생한 핏덩이를 안고 모습을 감추었던 강포수가 소년을 앞세우고 용정촌에 나타난 것도 기억할 것이다. 울창한 원시림, 인적부도의 노야령산맥에서 흐르는 가야하의 상류, 소삼차구를 근거지로 삼고 엽사로서 생계를 잇던 강포수는 아들 두메의 취학을 위해 용정촌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평사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낭패한 강포수는 두메를 공노인에게 맡겨둔 채 황황히 사라졌는데 훗날 상의 학교 교사이던 송장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거금 삼백 원을 학자금으로 내어놓고 두메의 장래를 당부하며 떠난 그는 두메의 출생 비밀을 묻어버리기 위하여 오발로 가장하면서 자살했던 것이다. 두메의 출생 비밀, 두메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 비밀은 강포수의 죽음으로 흔적까지 지워져버렸지만, 그러나 한 사람, 공노인으로부터 두메 부친에 관한 애기를 들은 길상이 있었다. 무심히 하는 공노인 말에서 인상착의라든지 강가 성씨, 경상도 사투리, 그리고 무엇보다 산포수라는 점, 그 인물이 강포수에 틀림없을 것이란 것을 길상은 짐작하였다. 오발 사고도 오발이 아닌 자살일 거라고 짐작했다. 여하튼 그는 그렇고, 천애 고아가 된 두메를 스승이자 어버이를 대신하여 돌봐준 사람이 송장환이었고 삼백 우너의 학자금을 관리하여 학업을 마치게 한 사람은 공노인이었다. 옥이가 송장환을 어버이 대하듯, 아이들이 큰아배라 부르는 것은 긴 세월 쌓인 이들의 정리 때문이다.
"그럼 가볼까?"
"예꼬망."
난우가 송장환의 손을 잡았다. 이들이 간 곳은 중심가에 있는 동성반점이었다. 용정촌에서는 가장 오래된 청요리집이다.
"어서 오시오, 송선생."
송장환보다 연장인 듯한 주인 진씨가 반갑게 인사했다. 몸집이 뚱뚱했다. 다부잔스에 비단 마꿸을 입고 있었다. 웃는 얼굴은 선량해 보였으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빈틈이 없는 것을 느끼게 했다.
"장사는 잘 됩니까?"
난로에 손을 쬐며 송장환도 친근하게 물었다.
"괜찮은 편이오."
이들은 오랜 지기였다. 선대부터, 그러니까 진씨의 부친과 송병문씨는 토지 거래로 관계가 깊었고 한때는 합자하여 대두 수출, 벌목 사업도 한 바 있어서 서로의 내력을 잘 아는 터였다.
"꼬마 아가씨들, 그새 많이 컸소, 공부도 잘하게 생겼고."
물론 중국말이었다. 아이들도 웬만한 말은 알아듣고 사용하기도 한다.
"전선생도 편안하시고요."
진씨는 옥이한테도 인사를 했다.
"네, 다렌도 안녕하세요?"
진씨는 그을음이 올라 새까맣게 된 찬장에서 월병을 꺼내어 아이들 손에 하나씩 쥐어준다. 아이들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진시가 옥이를 선생이라 칭호한 것은 옥이 직업이 교사였기 때문이다. 두메와 혼인하기 이전부터 교직에 있었던 옥이는 현재까지 교사로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자아 그럼 어서 들어가 보시오."
안으로 내몰듯하고 진씨는 난롯가에 뻗대고 섰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일행은 구석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길가로 향한 작은 창문에서 겨울의 초라한 햇빛이 겨우 기어들어 왔으나 방안 역시 어두컴컴했다. 난우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방안에는 그들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 세 모녀가 두메를 만난 것은 작년 봄이었다. 여관에서 잠시 만나본 뒤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전에는 밤중에 두메가 집을 찾아오기도 했고 혹은 음식점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그런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대에 부푼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연우 역시 풀은 죽은 모습이었다.
"큰아배."
참다못해 난우가 송장환의 무릎을 짚으며 불렀다.
"음."
"우리 마바지는 앙이 옵매까?"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고? 우리는 청요리 먹으러 오지 않았어."
송장환은 난처해서 눈을 꿈벅꿈벅했다.
"아버지 오잽메."
옥이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문 나 청요리 앙이 먹겠음."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얼라같이 어째 이럼둥."
"그만두어라. 애비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걸."
송장환이 말했다. 철이 난 연우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 청요리 앙이 먹겠음."
난우는 하마 울음보를 터뜨릴 것 같았다.
"그만두랑이."
연우가 나무란다. 그러나 강두메는 동성반점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두 딸을 보았다. 그새 많이 자란 아이들을, 숨어서 본 것이다. 반점 입구에 있는 작은방 문틈으로 전씨한테 월병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 이윽고 종업원이 요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옥이에게 눈짓을 했다.
"연우야, 어망이 변소."
소곤거리는 옥이 얼굴이 파리해지고 있었다.
"선생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송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 밖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돌아서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옥이 사내를 따라간 방에 두메는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었다. 그들 부부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옥이 눈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얼굴은 더욱 창백했다.
"앉아요."
두메가 말했다. 어제 만나고 그저께도 만났던 것처럼 평소의 그 잠긴 듯한, 동요되지 않는 목소리였다. 항상 그랬었다. 두메는 결혼 당초부터 옥이에게 다정한 남편이 아니었다. 아이들에 대해서는 애잔하리만큼 정이 지극하고 절절한 아버지였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무심상한 남편, 애정 표시가 없는 사내였다. 으레 그러려니, 옥이는 그것을 예사롭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미안하오."
"아이들은 보셨어요?"
"보았소. 장모님은 별일 없소?"
"네."
두메는 일꾼 차림이었다. 솜을 둔 검정색 바지와 소매가 긴 윗도리, 꾀죄죄하고 때가 절은 듯, 막일하는 청인의 모습이었다. 빗질도 안 한 부스스한 머리, 얼굴은 아침에 밀고 나왔는지 깨끗했다. 면도 자국이 파아란 것으로 보아 두메도 아비 강포수를 닮아 털이 짙은 모양이었다. 곧은 콧날에 군살이라곤 없는 깡마른 얼굴인데 몸집은 장대한 편이었다.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은 옥이는 코 먹은 소리로
"집에 들렀다 가실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없소."
"아이들... 풀이 죽었어요. 난우는 청요리 안 먹겠다고 떼를 쓰고, 당신 만날 거라고 기대하고 왔을 거예요."
순간 두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웬만하면... 아이들 만나보기라도 했으면 싶어요."
"..."
"당신 생각을 얼마나 하는지 꿈에 보았다는 얘길 가끔 해요."
"그만두오."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끈다. 옥이는 콧물을 닦다가 눈자위를 누른다. 결혼하고 십여 년, 아이 둘을 낳았으나 이들이 함께 산 일수는 이 년이나 될까. 마음을 굳게 먹고 일상에 불평없이 살아온 옥이였지만 아이들이 옆에 없으니 그의 마음도 약해지는 것이다.
'잠시 동안 아이들과 만날 수도 없는 처지,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히 얘기하리다."
두메는 사무적으로 시작했다.
"용정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거요."
"뭐라구요! 어디루요!"
"연추로 가야 해."
"당신도 가시는 거예요."
"아니, 나는 못 가아."
"그러면 우리만 가는 거예요."
"..."
"영영, 더 멀리 가는 건가요?"
옥이 얼굴이 벌개진다.
"당신도 알지 않소. 지금 정세가 어떻게 급변해가고 있는가를,"
두메는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용정은 안전하질 못해. 아이들, 당신 안전한 곳이 아니오."
"그러면 당신한테는 안전한 곳인가요?"
따지듯 노기를 띠며 말했다.
"아이들이나 당신은 무방비가 아니오. 왜놈들 촉각이 조금만 움직여도 당신하고 아이들은 위험해."
"그럼 송선생님이랑 그밖에 일하는 분들의 가족도 모두 연추로 가나요?"
"그렇지는 않소. 그분들은 완전히 엄폐돼 있으니까 아직은 서둘 필요가 없고... 내 경우하곤."
"어째 당신의 경우는 달라야 합니까."
"나는 군관학교 출신이오. 당신 그것도 모르고 내게 시집온 건 아니지 않소."
"어째 그런 말을."
"시간 없으니까, 내 말 잘 들어요. 연추에는 정호가 있고 또 심운외 씨도 도와줄 것을 약속했소. 주갑이 아저씨가 일을 다 마무리해 놓고 어셨으니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요."
"연추아즈방이가."
하다 만다. 주갑이 무사하다는 것을 기뻐할 만큼 옥이에게 여유가 없었다. 연추행이 현실로서 눈앞에 다가왔다.
"당신이 연추로 가는 데 정 반대를 한다면 다른 방안이 하나 있긴 있소."
"그게 뭡니까."
"연우는 송선생님이 하얼빈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 난우는 신경의 홍이가 맡고 당신은 날 따라가는 거요."
"그건 안 돼요!"
옥이는 울부짖듯 말했다.
"나 역시 그것은 안 된다는 생각이오. 당신이 연추로 기어이 안가겠다 할 적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본 거요."
"..."
"나는 당신하고 아이들을 생각할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솟을 것처럼 견딜 수가 없었소.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거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 죽어 .주갑이 아저씨가 가시거든 의논하여 서두르는 거요. 늦어질수록 연추로 가는 일은 어려워지니까."
두메는 봉투를 하나 꺼내어 옥이 앞에 밀었다.
"넣어요. 어서!"
옥이는 두메의 어세가 강했기 때문에 엉겁결에 그것을 품속에 넣는다.
"돈이오. 많지는 않지만 그런 데로 요긴하게 쓰시오."
"하지만 연추에 쉽게 갈 수 있을까요?"
하다가 깨닫는다, 좋은 방패가 생긴 것을.
"옛날하고는 다르지 않아요?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을 거예요."
옥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주갑이 아저씨가 나선 거 아니오. 연만하신 분을, 왜 그 고생을 시켰겠소."
두메의 어세는 쇳덩이처럼 강경했고 위압적이었다. 옥이는 절망에 빠진다.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도 한다.
'도대체 이 사람하고 내가 살았던가? 언제 어디서 살았지? 아득하다. 남을 기억조차 없을 것만 같다. 우리는 부부였을까? 저 사람은 바람 같아서 흔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두서없이 중얼거리는데 옥이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자기 자신만이 겪는 일이 아닌 것을 안다. 이러한 이별은 주변에서 다반사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런 날이 올 것도 늘 생각하며 살았었다. 아니 그 이상의 상상도 했었다. 아이들 기르고 직장에 나가고, 날카로워지면 무디게 한층 더 무디게 자신의 심정을 갈고 또 갈며 세월을 질러왔는데... 이래서는 안 돼, 옥이는 자신을 추스른다.
두메가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옥이도 일어섰다. 나가려다 말고 두메는 돌아보았다. 아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지혜롭게 살아야 해."
손을 잡는다. 마치 양 새끼가 바위를 떠맏듯 옥이는 두메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내 걱정은 말고, 우리 아이들 잘 키워요."
등을 어루만지다가 옥이를 떠밀어낸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옥이도 허우적거리듯 따라 나간다. 두메는 주방 쪽으로 갔다. 주방 한구석에 엉거주춤 서 있던 사내가 자신이 입고 있던 윗도리를 벗어 두메에게 건네준다. 두메는 그것을 받아 껴입는다. 사내는 털모자도 벗어준다. 털모자를 쓴 두메는 주방에서 나갔다. 옥이도 따라 나갔다. 못 쓰는 궤짝이며 석탄이며 쓰레기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뒤꼍에 빈 광주리를 실은 자전거가 한 대 있었다. 윗도리 털모자를 벗어준 사내가 동성반점 주방에서 쓰일 물건들을 싣고 온 자전거인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있던 옥이는 느릿느릿 발길을 돌린다.
"어망이 어디매 갔다 오는 거야."
음식을 먹다 말고 들어오는 어미를 본 난우가 물었다.
"연우가 말으 하잲능가?"
"그렇기 오래 있었다 말이?"
"무시기. 나오다 그 뉘긴가 학부형으 만내 가지고서리,"
우물쭈물 얼버무리는데 송장환은 말없이 술만 마신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청요리 안 먹겠다고 떼를 쓰던 난우, 풀이 죽어 있던 연우, 그들은 기대가 산산조각 난 것을 벌써 잊었는가, 맛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송장환이 달래고 구슬리고 했을 테지만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언제까지 안 먹고 배기 것이던가.
"어망이도 얼피덩 잡숫세."
그래도 철이 난 연우가 권했다.
"그래."
송장환에게는 신경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아이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도 옥이는 감당키 어려웠다. 아이들이 휘적거리다 남긴 음식을 걷어서 옥이는 먹기 시작했다. 입이 미어지게 음식을 입속으로 끌어넣는다. 어쩌면 그것은 무아몽중의 행위였는지 모른다. 흐느껴 우는 것보다, 목구멍에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있는 것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송장환의 눈에는 그 모습이 비참해 보였고 가엾었다. 옥이를 만나나 두메가 무슨 말을 했는지 송장환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서 의논이 끝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느낌은 있으나 보기 좋은 옥이 턱을 바라보는 송장환에게 불현 듯 삼십년 가까운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과수댁 옥이엄마, 지금 옥이보다 훨씬 젊은 여자였다. 회령의 한양여관이었다.
"앙이! 이 불한당 놈으! 놓지 못하겠니야!"
울부짖던 여자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계집은 그렇다 치고, 어디 순 불한당놈들이 장유유서도 모른다, 그 말인고?"
여관에 든 오십 가까운 치한의 목소리도 또렷이 되살아난다.
"젊은 놈들이 당을 지어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한테 행패라니!"
옥이네를 덮치려던 치한은 말리려던 길상과 송장환에게 적반하장으로 덤벼들었다.
"아니 할 말로 손님이 손목 한번 잡았음 어때? 닳아지는 것도 그러구러 너도 돈푼이나 얻어 쓸 게 아니냐? 물정 모르는 계집애도 아니겠고 손님이 등을 긁어 달래면 긁는 시늉이라고 해야 하는 게야."
여관집 안주인의 새된 목소리도 귓가에 울린다. 신홍평에서 만나고 그때 길상은 두 번째 옥이네를 항양여관에서 만났던 것이다. 사업사아 회령 나들이가 잦았던 길상은 동정심에서, 갈등과 고뇌에서의 탈출, 그런 심정에서, 그러나 옥이네에게는 길상의 존재가 구원이자 절망이었을 것이다. 송장환은 길상의 젊음, 그의 아픔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머지않아 올 것이다 와야 한다.!"
"큰아배,"
난우가 무릎을 쳤다.
"음, 음,"
"아이들으 그러잲이요?"
"뭘?"
"우리 모두 죽는다아 합두망."
"어째서?"
"전쟁이 크게 불어서리 청국 사람을 다 직인답매. 그러이 다음은 우리 조선 사람 다 직일 거다, 하더란 말이. 큰아배 그거이 참말임둥?"
"무시기, 그런 말으 하는 거 앵이다."
연우가 말참견을 했다.
"하문 어때서리,"
"되세 혼이 날 깁매,"
"뉘한테 혼이 난다 말이,"
"뉘긴 뉘기라, 왜놈우 순사 헌병임둥. 그것도 모르는 기야?"
"여기는 헌병 순사 없잲능가."
"허허 그만 해라."
송장환은 팔을 내저었다.
"말으 조심으 해얍지. 큰아배 안 그렇습매까?"
"그런 연우 말이 맞다. 말 조심은 해야지. 말 얘기가 났으니 큰아배가 한마디 하겠는데 너이들 말이다."
"..."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말씨 섰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자라같이 목을 움츠리며 혓바닥을 내민다.
"그럼 이제 나가볼까?"
동성반점에서 나온 일행은 이들이 만났던 남십자로 장터 어귀에까지 왔다.
"선생님, 여러 가지로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옥이 인사를 했다. 딱딱하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큰아배 고맙습매다."
아이들도 인사를 했다.
"그래 이제 가보아라."
아이들은 앞서가고 옥이 뒤따라간다. 송장환은 옥이에게 무슨 말이고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옥이는 두메를 다시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럴는지도 모르지. 그럴는지도 몰라. 누가 내일을 알 수 있으리. 수풀에 앉은 새 같은 내 민족의 앞날을 그 누가 알겠는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같이 멀어져가는 세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송장환은 견딜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발길을 돌린 송장환은 남십자로 장터에서 왼편으로 꺾인 길을 곧장 올라간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조용한 주택가다. 왕시 용정촌을 주름잡던 자산가 송명문 씨 저택, 송장환이 태어난 터전이며 청춘의 꿈과 이상, 망국의 젊은 분노가 서려 있는 곳, 그 앞을 지나친다.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간 지 오래된 집이었다. 그 옛집에서 한참을 더 올라간 그는 낡고 볼품없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본다. 집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된 일이었다. 그것은 한숨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하얼빈에서 살고 있는 송장환은 일 년에 몇 차례 용정을 찾아온다. 형 영환이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과 부모의 기일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올해는 설에 대오지 못하고 삼 일이나 늦은 어젯밤, 본가에 온 것이다. 반이나 탄 담배를 버리고 송장환은 문을 흔들었다.
"형수씨."
집안에서 이내 기척이 났다.
"뉘기요?"
"접니다."
"아지방입매까?"
"네."
문을 열고 두리넓적하게 생긴 사십대의 여자가 내다본다.
"얼피덩 들어옵세. 춥잲잉요?"
여자는 영환의 후실로 들어온 염씨였다. 남자같이 뼈대가 굵고 체격이 컸다.
"점심으 어찌 했슴둥?"
"먹었습니다."
"집에 와서 잡숩젠코서리 어째 그랬습매까."
"아는 사람을 만나, 밖에서 했습니다."
"그랬음?"
"형님 계시지요."
"있재문, 어디매 갔겠습매까? 노상 방에서 저러구 있소꼬망."
불미한 소문과 남편의 학대, 그리고 아편을 했던 장씨는 집 나간채 소식 모르게 된 지도 오래였다. 양귀비같이 아름다웠던 장씨에 비하면, 그보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염씨는 막일꾼 같은 아낙이었다. 영환의 시중들 사람은 있어야 했고 가세가 기울었으니 어쩌겠는가. 아무 일도 못하고 폐인이다시피 돼버린 송영환, 나이도 육십을 넘겼으니 어떤 여자이든 살아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빚에 다 떠내려가는 것을 겨우 매갈잇간만을 건져내어 생계는 그것으로 이어가고 있는데 그나마 남의 손에 맡겨둔 채 송영환은 일체 돌보지 않았으므로 생활은 항상 쪼들리는 것이었다. 영환은 화롯불을 쬐고 앉아 있었다. 육십을 갓 넘겼는데 그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었다. 칠십의 상노인같이 늙어 보였다. 초정이라고 입은 공단 마고자는 깨끗했으나 여러 번 빨아서 다듬은 것이었고 마고자의 호박 단추만이 옛날 영화의 흔적이었다. 그도 한때는 아편을 했다는 애기며 장씨보다 그가 먼저 아편을 했다는 말도 있었다.
"나갔던 일은 되었는가?"
영환이 물었다.
"네."
정환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앉아라? 왜 그리 서 있는가."
또다시 나갈까봐, 혹은 하직하고 떠날까봐 두려워하듯 영환이 말했다. 장환은 회투를 벗고 무릎을 굻으며 앉는다.
"어째 계수씨랑 아이들은 못 왔는고?"
어젯밤 도착했을 때 물어본 말을 되풀이한다. 어제 한 말을 잊었다기보다 서운해서 또 묻는 것 같았다.
"서둘러서 오느라고 그랬습니다."
"그래? 함께 오자면 비용도 그렇지... 아이들 데리고 생활이 고달프지는 않고? 공부시키고 하자면 씀씀이가 수월찮은 건데,"
한숨쉬듯 말했다.
"아이들 공부는 뭐 형편 되는 대로 하는 거지요. 머리가 출중한 것도 아니고."
"그놈은 대학에까지 보냈으면서 지 자식은 공부를 못다 시키다니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놈이란 자신의 외아들 송유섭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유섭은 삼촌 송장환의 노력으로 북경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던 학자에의 길을 버리고 그는 공산주의에 투신하여 풍문에 의할 것 같으면 지금은 연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놈을 공부시킨 것은... 허사였네 허사,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부젓가락으로 화로의 불씨를 집어 담뱃불을 붙이는 영환의 손이 덜덜 떤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 그리고 팔.
"남아장부, 세상에 태어나서 신념대로 산다면 우리가 한 일이 허사라 할 수는 없지요. 주색잡기에 빠진 것도 아니겠고 내 나라 내 민족을 배반하여 왜놈 쪽에 붙어 사는 것도 아니고,"
"주색잡기, 친일하는 것만 잘못이란 말인가? 애비 노릇 못한 내게 무슨 할 말이 있겠나마는 그놈은 삼촌한테 배은망덕했지. 그럴 수는 없다. 공부를 마쳤으면 사촌들을 지놈이 책임져야, 그래야 사람이고, 배웠으면 배운 값을 해야지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은 다 사사로운 일 아닙니까."
"그러면 그놈이 조선 독립을 위해서 일한다 말인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공산당 하는 거는 마우제 놈들 앞잡이 하는 거다. 제 나라를 위해 싸워? 아라사 놈들을 위해 싸우는 거지. 친일파다만은, 용정 제일의 부자 송병문 씨의 장손이 아닌가. 송병문 씨의 장손이 공산당을 해?"
젊은 시절, 옹졸하고 그릇은 작았지만 영환은 말이 많은 사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젊었을 때 술에 취하면 장환이 말이 많았고 의논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 영환은 동생만 보면 한없이 끝없이 말을 늘어놓으려 한다. 마치 허기든 사람처럼.
"소련의 앞잡이든 중국의 앞잡이든 일본하고 현재 싸우는 것은 그들이니 어쩌겠습니까."
송장환은 길게 설명하고 싶지가 않았다. 설명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사가 일본하고 싸워?"
"전쟁이 붙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중국을 도우고 있으니까요."
"그럴 리가 있나. 장개석은 공산당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아는데 아라사의 도움을 받아?"
"그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또 하나의 현실은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의 싸움으로 장개석을 몰고 갔고 전쟁에 앞장선 곳도 중국 공산군이지요. 유섭이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고생하고 있을 테니까요. 유섭이가 그쪽으로, 설사 몸을 던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경까지 일본에 내어준 지금, 유섭이 무사했겠습니까? 벌목꾼 탄광의 광무가 아닌 이상, 왜놈한테 협력하지 않는 이상."
바지에 담뱃재를 떨어뜨린 영환은 아무렇게나 재를 털어내고 한동안 침묵한다.
"하기야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지. 내가 무슨 형 노릇을 했다고 애비 노릇을 했다고, 나는 몹쓸 사람이다. 십분의 일이라도 너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던들 송씨 집안 꼴이 이 지경 되었겠나. 계집 하나 잘못 두어 패가망신... 그러나 내가 좀 너그럽고 수양이 되었더라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지. 다 자업자득 뉘를 보고 원망하겠나."
"형수씨한테는 형님이 잘못하셨습니다. 그분도 피해자일 뿐 무슨 큰 허물이 있었겠습니까."
"시끄럽다!"
"..."
"그 계집을 두고 후회하는 건 아닌 게야!"
"..."
"어치피,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없는 살림 꾸려갈 여자도 아니고."
담뱃재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영환은 바지를 턴다. 그리고 콧등을 문지른다. 옛 아내에 대한 그의 말은 심정과 다른 것을 장환은 안다. 유섭에 대한 비난도 심정과는 다른 것을 안다. 후회하는 것도 진실이며 과거를 참회하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은 사무치게 외로운 노년기의 자기 초상, 그 조상을 바라보는 데서 우러난 것이다.
"술상으 채리소꼬마. 들어가기요?"
방앞에서 염씨가 말했다.
"음."
하고 영환이 대답했다. 장환은 일어서서 방문을 열어준다. 염씨는 일 년에 서너 번 오는 장환을 위해 꽤 음식을 장만한 것 같았다. 튼튼하게 생긴 소반에 올려진 음식 가짓수가 많았건만 체격 좋은 염씨는 가뿐하게 상을 두 사람 사이에 놓는다.
"듭세. 음석의 솜씨가 없으이 술로나 들기요."
염씨는 비죽 웃었다. 상을 내올 때마다 염씨가 하는 말이었다.
"폐스럽게 뭘 이렇게 많이 차렸습니까."
"애잉요. 무시기, 채린 것도 없소꼬마. 그보다 아아들으 오재내 섭섭합매다."
"여름방학 때 보내지요."
염씨는 나갔다. 음식 솜씨가 없다. 장환 앞에 상을 놓을 때마다 하는 그 말은 그러나 음식 솜씨가 있다는, 다분히 자랑스런 기분에서 하는 말이었다. 염씨는 전력은 경성 어느 부잣집의 찬모였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음식에 가탈이 심하던 영환도 후실댁이 만득 음식에는 불만이 없었다. 장환은 형의 술잔에 술을 붓는다. 형제는 함께 술을 든다.
"그래 언제 가겠나?"
영환이 물었다.
"내일 가야겠습니다."
"애기할 새도 없겠구나."
"밤이 길지 않습니까."
장환은 슬그머니 웃었다. 해마다 올 때마다 그 얘기가 그 얘기였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장환은 짜증스럽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육친의 따듯함에 젖는 것이다. 자식한테 아내한테 자신은 언덕이지만 그들은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은 아니었다. 험한 세파, 눈부시게 달라지는 세상 그런데 심정적으로 형은 언덕이 되어주었다. 산송장이나 진배없이 된 형이건만, 재산 한 푼 나누어주지 않았고 손자 탕진해버린 형이건만 만나면 살붙이의 따뜻함을 느꼈고 부친을 보듯, 송장환이 본시 선량하여 그랬겠지만 그 자신도 외롭고 쓸쓸해진 탓은 아니었을까.
"밤이 길지. 늙으면 더욱더 밤이 길고, 이제는 술도 많이 못한다."
"많이 드셔도 안 되지요."
"네 머리에도 흰 것이 생기는 걸 보니 참말 세월이 덧없구나."
"오십이 넘었으니 흰 머린들 안 생기겠습니까."
"그래 여식애들은 잘 사는가?"
"네. 넉넉하지는 못해도 화목하게 살지요."
여식애들이란 출가한 장환의 두 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셋째인 아들은 지금 중학의 졸업반이었고 늦게 본 막내아들은 보통학교의 이학년이다.
"매갈잇간에서는 꼬박꼬박 보내옵니까?"
"어김없다."
"사람이 신실하여 저도 걱정은 안 합니다만,"
매갈잇간은 옛날 송씨 집에서 부리던 박서방이 맡아 하고 있었다.
"많은 액수는 아니나 우리들 살기에는 충분하다. 늙은 사람이 돈쓸 데나 있는가? 너이들을 도와주지 못해 그게 한스럽지."
"제 걱정은 마십시오."
"그나저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가?"
"어렵지요."
"왜놈들이 저리 기승을 부리는데 장차 어찌 될꼬."
"험악하지요. 점점 더 험해질 것입니다."
"전쟁이 오래 갈 거다 그 말인가?"
"오래 가야 일본이 안 망하겠습니까?"
"중국이 손을 드는데요?"
"남경을 내어주었다 해서 일본이 다 지배한 것도 아니고 중국인 전부가 항복한 것도 아니지요, 이미 장기전으로 들어갔고."
"그러나 상해 남경에서 말도 못하게 사람이 많이 죽었다 하던데,"
"많이 죽었다 하더군요. 그러나 일본군 한 사람에 중국군 다섯 사람이 죽는 비율로 쳐도 사람의 씨는 일본이 먼저 마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신식 무기에 기동력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전쟁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그럴까? 모두 일본이 이길 거라고들 하던데..."
"장기전으로 나가면 일본은 감당 못합니다. 만주의 경우처럼 흐지부지 되리라 생각한 일본은 큰 오산을 한 셈이지요. 일본군 전부를 중국 땅에 풀어놔봤자 성글은 그물, 큰 고기 몇 마리 낚을지 몰라도 잔 고기는 다 빠져나가지요. 해서 시작부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학살하는 거 아닙니까. 광대한 중국 땅에서 그놈들이 미치지 않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네 말을 들으니 또 그럴 듯도 하고, 장차 조선 사람들은 어찌 될 것인지."
"전쟁에 내몰겠지요."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 씨가 안 마르겠냐?"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 사람에게 무장을 시킨다는 것은 일본으로서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요. 또 그런 만큼 일본은 다급해진 것이고 약화되었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다. 하여간 이래도 저래도 우리 백성들은 죽을 노릇이다. 너도 각별히 조심해야,"
"젊은 사람들이 걱정이지요."
3장 인실의 변신
하얼빈의 중심가 허공로에 운회약국은 있었다. 러시아에 귀화하여 연추에 살고 있는 쎄리판 심의 본명을 딴 상호다. 약국 왼편에는 화룡의원이었고 오른편은 춘융상회, 고급 양품점이었다. 허공로에 불빛이 나돌기 시작한다. 하늘은 너을이 방금 사라지고 뿌옇게 연푸른 상태를 지탱하고 있었다. 거리엔 여전히 마차 인력거가 지나가고 자동차도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수처럼 전주가 연이어진 인도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가고 여열이 감도는 거리, 약간은 썰렁했으나 하얼빈에도 봄은 와있었다.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자리 잡은 운회약국, 규모가 상당하다. 약사도 있고 점원도 두 사람이나 있고 하얼빈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의 군소 약국에도 약품을 공급하는데, 그러니까 심운회 씨, 쎄리판 심이 사위 윤광오, 정확하게 말하여 둘째딸 수앵을 위해 차려준 약국이다. 만주사변 이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쎄리판 심은
"내가 왜 하필 약국을 차려주는지 아느냐?"
새로운 생활, 새로운 일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걱정스러워하는 수앵에게 물었다.
"어차피 독립을 해야 하니까 그러셨겠지요."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약국이라는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여자도 활동을 해야 하고, 나는 한때 우리 수앵이가 여의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너무 연약했고 어리광이 심한 아이라 단념을 했다마는, 이제는 세정 모르는 여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 단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은 세상의 변화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섭게 세상이 변하고 있어. 어느 물줄기를 향해 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니 남자가 가정을 책임지고 개인 생활에 주저앉을 수 없는 시대인 게야. 더군다나 연해주나 만주 땅은 남의 땅이 아니냐. 우리가 아무리 노령 땅에 귀화를 했다 하더라도 조선 민족인 것만은 틀림이 없고 윤군의 경우는 또 다르지 않은가. 나라 잃은 젊은 남자가 어디에 뿌리를 박겠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게야. 윤군이 농사를 짓는 농부이거나 나무를 찍는 벌목꾼이라면 모를까. 식자 든 남자들 처신이 얼마나 어려운 시대인가 너도 알 게야. 하고 보면 수앵이 너도 어리광이나 부리고 몸단장이나 하고 태평스럽게 살 수 있겠나? 여자도 강해져야 한다. 딸 둘을 꽃같이 기른 나도 실은 안쓰럽고 걱정이 된다."
노파심에서 장장 한 시간이나 넘게 쎄리판 심은 타일렀던 것이다. 다행히 약국은 번창하여 또 하나의 점포를 매입했고 그곳은 모피상이었다. 수앵이도 이제는 삼십이 넘어가 나이였고 어리광스런, 세정 모르는 여자는 아니었다. 약국은 수앵이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피 구입을 위해 윤광오는 흑하애훈 방면으로 출타가 찾았기 때문에 모피상의 일도 많이 관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수완가가 된 것이다. 노령 연추에서 출생했고 그곳에서 자랐으며 학교도 그곳에서 마친 수앵이 노어가 유창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어도 능통하여 중국인 러시아인을 위시하여 국제 도시라 할 수 있는 하얼빈인 만큼 사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뭐니 뭐니 해도 수앵의 사촌오빠 두 사람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물론 형이나 조카가 하얼빈에 없었다면 쎄리판 심이 이곳에 약국을 내어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지만 일찍이 세리판 심의 형 심운구는 청국으로 귀화하여 하얼빈에서 약종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형제가 서로 국적을 달리 했으나 그들은 매우 정의가 두터웠다. 발코니가 있는 러시아풍의 아름다운 저택, 연추에 있는 쎄리판 심의 그 아름다운 집을 지을 무렵 심운구는 동생을 위해 적잖은 돈을 보태어주었고 중국인 벽돌공까지 보내주었다. 장사에는 도를 튼 사람, 조선인의 흔적까지 털어버린 중국인 심운구, 지금은 노쇠하여 사업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두 아들이 부친의 기반을 이어받아 착실하게 사업 규모를 넓혀왔으며 허공로 일대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거리의 불빛은 어슬막으로 접어들면서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수앵은 종업원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해놓고 의자에 걸터앉으며 콤팩트를 꺼내어 얼굴을 들여다본다. 무르익은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요염하다고나 할까, 백계 러시아 여인처럼 얼굴이 희다. 결혼 당시만 해도 수앵은 가냘픈 소녀였었다. 지금은 알맞게 체중이 늘었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많은 사람과 접촉하고 종업원들을 다루어서 그랬는지 위엄도 만만찮게 몸에 배어 있었다. 수앵의 그와 같은 변신을 보고 옛날을 아는 사람들은 피를 속일 수 없다, 그런 말들을 했다. 큰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청부업자로 연추에서 성공한 부친이나 현재 이곳 상가에서 자리를 굳힌 사촌오빠들, 모두 삼재에 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여보오 수앵이,"
윤광오는 다소 서두르는 듯 들뜬 듯했다. 결혼하여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들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탓이다. 수앵이 정열적으로 사업에 열중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때문일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수앵의 크나큰 고민이기도 했다.
"나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콤팩트를 닫고 핸드백 속에 넣으며 수앵은 남편을 쳐다본다. 중년으로 접어든 윤광오는 여전히 건강해 보였고 점잖은 신사였다.
"실은 말이요,"
"...?"
"둘째처남이 우릴 초대했어."
"네? 무슨 일루요?"
"무슨 일이라기보다 저녁이나 함께 먹자는 거요."
"집에서?"
"아니 밖에서."
"그렇담 집에 가서 나 옷 갈아입어야 해요."
말씨나 동작에 수앵의 옛모습이 나타났다.
"그 옷이 어때서? 썩 좋은데 그래."
약국에서 입는 가운을 벗어버린 수앵의 차림새는 윤광오의 말대로 썩 좋았다. 그가 즐겨 입는 검자줏빛, 검자줏빛의 빌로드 드레스는 얄밉도록 잘 어울렸다. 가느다란 사슬의 백금 목걸이도 매우 심플해서 옷에 맞았다.
"온종일 입던 옷인데, 시간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약속 시간에 너무 늦어진단 말이오."
"하지만,"
"안 돼."
"이이가?"
"허허어 어서,"
윤광오는 떼쓰듯 말했고 수앵이는 웃는다.
"그래요, 그럼."
옷걸이에 걸린 엷은 회색 코트를 걸친 수앵은 가느다란 담비 목도리를 두른다.
"가세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수앵은 경쾌하게 걸어간다. 사촌들과 저녁을 밖에서 먹는 일은 흔히 있었다. 남편과 둘이 고급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 일도 꽤 잦은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바레에 가서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럴 때면 수앵은 잔뜩 멋을 부리고 나간다. 그것은 수앵에게 생활의 변화였고 낙이었고 바쁜 일상에서 쌓인 피곤을 푸는 것이기도 했다. 수앵은 남편과 팔짱을 끼고 봄 내음이라도 맡듯 코를 실룩거리며 걷는다. 거리의 불빛은 한 층 찬란하고 밤은 매혹적이다.
"여보?"
"음."
"당신 연추 있을 때 생각 안 나요?"
"글세,"
"요즘 그때 생각이 가끔 나요. 손님들을 초대하고 하던 일이, 모두 애국지사들이었고 격조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여기는 격조가 떨어진다 그 말이오?"
"그럼요. 우선 오빠들, 돈은 많지만 무식하지 않아요?"
"무식하긴? 교육받을 만큼 받았는데."
"장사꾼이지, 뭐."
"우리는?"
"우리도 그렇구요."
"돈이 많다고 해서 처남들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소."
"그건 그래요. 오빠지만 동족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묘하게 서글퍼요."
"나도 당신 남편이지만 동족은 아니지 않소?"
윤광오는 농담으로 말했다. 수앵의 국적은 러시아였고 자신의 국적은 조선이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이가?"
"남편을 떠밀다가 수앵은
"우리도 그만 거기 있을 걸 그랬나봐요."
"무슨 소리요?"
"당신 모스크바에 갈 수도 있었잖아요.:
"언니 땜에 샘이 나는 모양이군."
"네 그래요. 샘이 나요. 우린 장사꾼이지만 형부는 상당한 지위에 있는 모양이니까."
"실정을 누가 알겠소. 쓸데없는 소리는 그쯤 해두고."
윤광오는 수생의 마음을 잘 안다. 하바르스크에 있던 언니 수련이가 모스크바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샘이 나서 하는 말도 아니요. 모스크바 대학을 나왔고 머리가 비상한 형부가 상당한 지위에 있다는 데 자극을 받아 하는 말도 아닌 것을 안다. 다만 열심히 해온 일에 약간 권태를 느낀 것이며 아이가 없어 쓸쓸하고 광오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그런다는 것을.
이들이 간 곳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흑룡이었다. 러시아인들 고객이 많은 곳이다. 두 사람은 코트를 벗어주고 홀로 들어간다. 홀은 넓었다. 장치도 고급이었고, 하얼빈에서는 일류 레스토랑이다. 피아니스트가 조용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많은데 조용하다.
"언니도 왔어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를 재빠르게 발견한 수앵이 물었다.
"아아니, 아주머니가 오신다는 말은 못 들었어."
윤광오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빠 옆에 앉은 저 여잔 누구예요?"
"글쎄에, 누굴까? 가보면 알겠지, 뭐."
그들이 다가갔을 때 한 쌍의 남녀는 동시에 돌아보았다.
"아니!"
수앵이 깜짝 놀란다. 여자는 미소지으며 일어섰다.
"언니이!"
여자는 수앵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면서
"오래간만이구나. 그간 수앵인 잘 있었어?"
낮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유인실이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자리에 앉은 수앵이는 옆에 앉는 남편의 팔을 흔들며
"당신 알고서 얘기 안 한 거지요?"
힐난한다.
"놀라는 얼굴 보고 싶어 그랬소."
윤광오는 계속 실실 웃었다.
"어쩌면 감쪽같이 사람을 속여요?"
사촌오빠 심재용과 윤광오가 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날 속이는 데 이력이 나 있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선 그리 능청스러울까?"
"속이긴 누굴 속여? 말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방금 말하지 않았어요? 글쎄에, 누굴까? 가보면 알겠지 뭐, 누가 그랬지요?"
"이제 그만. 배고픈데 저녁 먹고 기운 차린 뒤 싸우라고."
심재용 말이 신호이기나 하듯 나머지 세 사람의 용어가 중국말로 바뀐다. 심재용은 윤광오보다 두세 살쯤 위로 보였다. 체격은 늘씬하게 빠졌지만 용모는 그저 그런 정도, 옷차림은 멋쟁이다. 심재용은 철두철미 중국인이었다. 교육은 물론, 결혼도 중국 여자하고 했다. 그가 귀화한 조선인 이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게는 몇 가지 사업체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영사라는 영화관이었다. 웨이터를 부른 심재용은 특별히 유인실의 의사를 물어본 뒤 식사를 주문했다. 수앵과 윤광오 뿐만 아니라 심재용도 유인실과는 매우 밀접한 사이인 것 같다.
"언제 오셨어요? 언니."
수앵이 물었다.
"이삼 일 됐을 거야."
"너무해."
인실은 웃기만 한다.
"이삼 일 지났는데, 그래 겨우 오늘 이에요?"
"바쁜 일이 좀 있었거던."
"그래도 그렇지."
인실은 연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옷은 중국옷, 잔무늬가 있는 은회색 다브잔스, 어깨에 하얀 조젯 목수건이 걸려 있어서 화사했다. 세련된 상류 사회의 중국 여성, 누구의 눈에도 의심치 않을 그런 모습으로 비쳤다. 그린 듯 짙은 눈썹에 눈이 빛났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 눈 가장자리에 잔주름이 모여 있었다. 그간 동경을 떠나온 지 팔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모두들 나만 따돌려 놓구서,"
수앵의 투정은 계속되었다.
"삼십에서 사십 중간까지 온 여자가 왜 저 모양인고?"
심재용의 핀잔이다.
"엄마 젖 먹고 싶어서 저래요. 옛날 버릇이 나온 겁니다."
윤광오도 맞장구를 쳤다.
"애게게?"
"그새 받아줄 사람이 없더니 얼씨구나 하고,"
"윤선생님이 받아주시지 그랬어요? 눈물도 닦아주고."
"그렇지요 언니? 남자들이 얼마나 나를 구박했는지 알 만하죠? 스스로 마각을 드러낸 거예요."
"모략입니다."
윤광오 말에 따라 심재용도
"중상입니다."
하고 웃었다. 식탁 위에 식사가 나왔다. 네 사람은 화기애애한 속에서 서로의 건강을 빌며 샴페인을 든다. 그러나 네 사람의 심정이 화기애애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로의 가슴으로부터 긴장감은 전달되고 있었다. 유인실은 어떤 경로를 밟고 이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처지에 이르렀는가.
팔 년 전에 인실이 용정촌에 나타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뜻을 품고 망명하는 조선인들에게 간도 용정촌은 지역적으로 심정적으로 중계소였었기 때문이다. 용정촌에 머물면서 인실이 더듬어 나간 것은 김길상과의 연고였다. 김길상으로부터 소개를 받아왔으면 물론 쉽게 선이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유가 있고 없고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과 절벽 앞에 인실은 한 마리 눈먼 짐승이었다. 자살에의 유혹도 수차례 받았다. 모성애나 연민 같은 것, 그런 것은 인실에게 너무나 염치없는 감정이었다. 나락과도 같은 죄의식, 뿌리쳐도 뿌리쳐도 달겨드는, 덮치고 누르는 바위같은 죄의식이 그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용정에 도착한 인실은 며칠을 여관에 묵고 있다가 셋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탈출과 해방을 뿜뿌던 그 긴 동경에서의 몇 개월의 시간이 용정에서 되풀이되었다. 하나의 생명을 떠밀어내고, 용정에서의 시간은 탈출도 해방도 아니었다. 인실은 한없이 쏘다녔다. 산이고, 강변이고 어디고 간에 길거리를 헤매다 밤이면 셋방에 와서 쓰러지곤 했다. 그리고 기느 참으로 긴 겨울 동면과도 같이 방 한 칸에 갇히며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동경의 그 몇 개월과 같은 악몽의 나날이었다. 집요한 자신과의 작별은 이듬해 봄 해란강 강가 사소한 풍경에서 시작되었다. 강이 풀리어 뗏목이 흘러가던 해란강, 새 풀이 돋아나 싱그러웠고 햇볕이 따스했다. "무슨 샐까? 북쪽으로 가는 걸까, 남쪽으로 가는 걸까."
강변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는 새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어디선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선구자, 노래는 선구자였다. 고개를 돌렸을 때 네댓 명의 중학생이 모래밭에 앉아서 선구자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년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교복의 모습으로 보아 방금 중학교에 입학한 듯 모두 햇병아리였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아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어었나아
오래간만에 인실은 울었다. 그리고 인실은 자기 갈 길을 찾기 위해 김길상과의 연고를 더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침 이웃에 안면이 있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방을 얻으려고 거간을 찾아갔을 때 멍청히 앉아 있던 노인이었다. 그가 바로 옛날의 거간꾼 권서방이었던 것이다. 칠십이 가까워진 그는 오래 전에 상배를 했으나 그나마 자식들이 자라 제몫을 하는 덕분에 노년이 한가하였고 소일삼아 거간꾼을 찾아가서 장기도 두고 술잔이나 얻어먹곤 했던 것이다. 처음 골목에서 만났을 때 권서방은
"어째 가족이 없소?"
하고 물었다. 인실은 가족이 있다고 대답했다.
"아직 젊은 댁네가 그러면 어찌 혼자 있소?"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 당분간,"
"사람을 찾소?"
"..."
"음... 혼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소."
"고맙습니다."
"우리집에 댁네 같은 며눌아이도 있으니 말벗도 하고 놀러 오소. 알고보면 이곳은 모두 고행 떤난 처지니. 그리고 우리집은 바로 뒷집이오."
그리하여 권노인 일가와 알게 되었다. 인실을 가끔 권노인을 찾아가서 용정 형편에 관한 얘기를 묻곤 했는데 권노인은 인실을 어떻게 보았는지 매우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그리고 소상히 말해주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갖바치 박서방과 뜨내기 엿장수 홍서방 셋이 보이면 죽이 맞아서 안 할 소리 할 소리 다 하는, 입심은 걸찍했고 공노인과 공노인댁네 방씨에게까지 버릇없이 굴던 권서방이 나이 들어서 점잖아지기도 했겠지만 인실의 인품에 대한 존중이기도 했던 것이다. 셋방을 얻으려고 찾아왔을 때나 가끔 골목을 오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권노인은 여느 여자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구구한 입성에 화장기라곤 없고 여위어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옛날 길서상회 안주인(서희)의 그 고귀함, 강인함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아무튼 권노인은 용정촌 형편 얘기에서 공노인을 빠뜨릴 수 없었고 공노인 얘기를 하다 보니 그것에 물려서 따라 나오는 것이 김길상 일가였다. 큰 화재 얘기며 토지 거래의 얘기며 그리고 송씨 일가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인실은 권노인의 말에서 공노인과 김길상의 불가분의 깊은 인연을 알게 되었고 공노인과 권노인의 친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얘기를 짚어나가는 동안 인실은 송장환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송선생은 애국자요."
권노인은 송장환을 그렇게 잘라 말했다.
"그분을 만나뵐 수 없겠습니까?"
인실이 말했다. 권노인은 인실의 눈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러고 보더니
"송선생은 하얼빈에 기시지요. 거기까지 찾아가겠다면 내 주소를 알아다 드리겠소. 매갈잇간에 가면은 알 수 있을 게요."
왜 그랬는지 모른다. 인실의 가슴이 뭉클했다. 신중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오는 노인의 보습, 순간의 이심전심이 그토록 감동을 주었는지. 고행을 버리고 남의 땅에서 긴 성상을 보낸 조선의 늙은 백성의 강렬한 소망을 인실은 느꼈다. 늙고 무식하고 가난한 동포, 강가에서는 목이 터져라 선구자의 노래를 부르던 소년들을 보았고, 짙푸른 두만강의 강물과 같이, 설원을 달리는 한 마리 사슴같이, 감동이기보다 아픔이었을 것이다. 인실은 진정으로 이제야말로 서울에서 입이나 나불거리고 있는 지식인들과 작별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얼빈에서 인실은 송장환을 만났다. 단도직입으로,
"저는 계명회 사건에 연루되어 김길상 선생님, 그 밖의 여러분들과 함께 감옥살이를 한 유인실입니다."
인실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순간 송장환은 놀라는 것 같았다. 인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데 그 말 이외 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렇습니까. 김형은 형기 마치고 나왔지요?"
송장환은 침착하게 물었다.
"작년 정원에 진주로 내려가서 만나 뵈었습니다."
"건강은 어떻든가요."
"괜찮으신 것 같았습니다."
"집안은 모두 무고했는지요,"
"네."
"한데 무슨 일로 오시었소?"
침착할 뿐만 아니라 송장환의 목소리는 쌀쌀하기까지 했다. 인실의 말문이 막혀버린다. 도시 뭐라 답변을 해야 할지 한순간 막연했던 것이다.
"달리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뭐라구요?"
"저는 취직이나 하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뭣하러 오셨지요?"
송장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인실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소개장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참 ...막연하네요."
중얼거리듯 인실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그냥 떠났어요. 용정에 와서, 작년 가을에 와서 겨울을 나고, 권노인을 만났습니다. 김선생님하고 교분이 두텁다는 송선생님 얘기를 들었지요."
"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렸으면 좋겠습니까?"
누그러져서 말했으나 인실은 그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김선생님은 사건이 나기까지 전혀 몰랐습니다. 용정에 계시다가 잡혀 오신 서의돈 선생님은 저를 잘 아시지만,"
해놓고 인실은 멈칫한다. 서로의 얘기가 꼬이다보니, 인실은 핵심을 찔러 말할 수가 없었다. 솜방망이로 명태 두드리듯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처음 단도직입으로 계명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면은 넘어갈 줄 알았다.
"서선생께서 계명회의 주모자로 돼 있으니까 물론 잘 아시겠지요."
"그런 뜻에서보다 그냥 전부터,"
하다가
"그분이 계셨더라면 아마 저는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이유는 개인적 사정 때문에."
인실은 고개를 흔든다.
'내가 바보가 되었나?'
일 년 넘게 인실의 사고력은 자기 내부 속에 깊이 잠적하여 주변과는 연을 끊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갇혔다가 갑자기 햇빛 속에 나온 듯 눈부시어 사물의 파악이 서툴고 더더구나 자기표현에 위축되어 있는 것은 그의 개인 사정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무심중에 서의돈의 얘기를 꺼낸 것 역시 개인적 사정에 저촉이 되었다. 서의돈의 이름은 인실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였다. 서의돈은 오빠 유인성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의돈 선생하고는 전부터 잘 아시는 사이란 말씀이군요."
송장환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인실은
"저는 조직 속에서 일하려고 왔을 뿐입니다. 그것도 취직은 취직이군요."
성이 잔뜩 나서 인실은 말했다. 송장환은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어떤 경로로 나를 찾아왔건 그건 상관없습니다."
담뱃불을 붙였다.
"김형이나 서선생 두 분하고는 친교가 있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댁은 뭔지 모르지만 오해를 하고 오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사고력이 녹슬었다는 생각에 겹쳐서 비로소 인실은 이 바닥에서는 자신이 초년병도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굴을 붉힌다. 낯선 여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기소개를 하고 조직 속에서 일하려고 왔다 한다고 해서, 의용군 모집도 아니겠고 네 잘 왔소, 참 잘 오셨습니다,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저돌적 행동은 영기라기보다 무지인 것을 인실은 깨닫는다.
"유인실? 그러셨든가요? 그러면 혹 유선생께서 이상현 씨를 아십니까? 서선생하고는 조선에 있을 때부터 막연한 사이였다고 글었는데,"
"알지요. 그 분이 이곳에 계신가요?"
"얼마 전까지 계셨지요. 어쨌든 좋습니다. 일단 절 따라오십시오. 여성이 낯선 곳에서 혼자 여관에 계신다는 것도 그렇고, 나가실까요."
찻집에서 나와 인실을 데려간 곳이 윤광오의 집이었다. 윤광오, 3.1운동 전에 동경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수앵과 혼인하여 눌러앉았으며 구년 전 방황하다가 쎄리판 심의 집을 방문한 이상현에게 끈덕진 질문, 특히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들고 나와 맹렬히 공박했던 사내, 하여간 인실과 윤광오의 만남을 두고 기연이라 해야 하는지.
"이게 누구야!"
윤광오가 먼저 말했고,
"어머!"
인실도 깜짝 놀랐다.
"유인실 씨 아니오!"
"네, 윤선배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윤광오는 송장환을 보고 급히 물었다. 어리둥절한 송장환은,
"글쎄, 나도 모르겠네. 어떻게 된 일이야? 아는 사이란 말이지?"
"알다 뿐이겠습니까. 여보 수앵이,"
역시 어리둥절해 있는 수앵의 팔을 잡아끌고 흔들면서
"이 여성이 누군 줄 알아요?"
"네?"
수앵은 인실을 보며 멋모르고 웃기만 했다.
"관동진재 때 오가다라는 일본 청년하고 조선인 유학생 구출 작전에 나섰던 용감한 여성이야. 나도 구출을 받은 사람 중에 드는데, 그때 내가 하숙했던 집, 그놈의 주인 놈이 아주 고약했거든. 인실씨가 그때 나를 오가다 집에 데려다 주었지. 기억하지요, 인실씨?"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인실은 윤광오 집에 얼마간 머물다가 심재용의 집에 가서 한동안 가정교사로 있었다.
"자아 우리 저녁도 먹었고, 모처럼 유선생도 어셨으니 춤이나 추러 가자."
레스토랑 흑룡에서 식사를 끝낸 심재용은 느긋하고 넉넉해진 표정으로 일행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수앵이 일행이 식사를 하고 카바레에 가고 하는 동안 윤광오 집 객실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오랫동안 밀담을 하다가 한 사람 두 사람 빠져나갔고 네 사람이 남았다. 그러니까 밖에서 식사를 하고 카바레로 가고 한 일은 말하자면 일종의 양동 작전이었다 할 수 있겠다. 왜경의 촉수가 아직 미쳐 있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행동반경의 유동은 불가피했으며 항상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객실에는 권필응과 송장환, 정석,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남았다. 술살이 들어왔고 그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권필응, 그는 일 년 전부터 들어왔고 그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권필응, 그는 일 년 전부터 윤광오 집에 체류해 있었다. 칠십의 문턱을 눈앞에 보고 있는 나이, 그러나 그는 아직 정정했다. 이따금 희미하게 내리깐 눈시울을 들어올리곤 했는데, 그럴 때 무섭게 빛나는 눈빛, 피부 전체가 방향감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도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작년에는 묵당 손유진이 연추에서 세상을 버렸으며, 권필응 또래의 투사들은 대개 세상을 뜨거나 흔적이 없거나 혹은 옥사했거나, 그의 오른팔로 믿었던 장인걸이 죽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김두수를 죽이려고 칼을 품고 다니던 박재연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지 오래였고 그새 얼마나 많은 애국투사 지도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투옥되고 살해되었는가. 실로 헤일 수가 없다. 지금 술상머리에 둘러앉은 사내들, 권필응을 위시하여 송장환은 오십대요, 정석은 사십대의 중반으로 접어들었으며 상해서 온 사내는 사십이 채 못 된 듯하다. 어쨌거나 살아남은 이들, 이들 역시 그렇다. 어찌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만주사변 직전의 만보산 사건과 만주 건국 성언 직후,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사건, 그러니까 1931년에서 32년에 걸쳐 일 년이 채 못 되는 기간 중에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은 반전을 위한 클라이맥스라고나 할까, 역사 진행의 절묘함을 느끼게 한다. 그 사건을 통해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감정, 정치적 상황, 전략, 전술, 그런 것들의 변화는 만주에서 현저히 나타났다. 한말에 국경 분쟁으로 대치했던 땅이, 일본의 통치로 조선이 넘어가면서 항일하는 조선 민족의 거점이 되었으며, 그러나 그 거점에서 견디어낸 세월은 파란만장이었고 풍설에 단애 같은 긴박의 연속이었다. 도도히 밀고 오는 일본 침략 앞에 두 민족은 한 배를 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 했다. 두 민족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요, 암암리에 상호 협조가 없었다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중국의 국내 사정이, 만주 군벌의 복잡한 내용이 조선 독립군의 발부리에다 낫질을 했던 것이다. 일본과 결탁하여 북벌을 저지하면서 오히려 본토 석권을 꿈꾸던 만주 군벌은 일본에 협조하여 독립군을 소탕하려 앴고 조선 독립군은 일본 침략의 구실이 된다 하여 내어 쫓으려 했고, 폭풍 같은 민중들의 반일 감정의 흐름을 돌려놓기 위해 중국 정권은 조선인 배척운동에 부채질을 했으면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온다 하여 조선인을 핍박했으며. 일본은 치기 위한 간접의 수단으로 조선인을 못살게 굴었다. 그 나쁜 조건과 부정적 시계를 고조한 것이 만보산 사건이며 그것을 뒤집어버린 것이 홍구공원의 사건이다. 역사의 드라마는 사방에 있고 하나의 작은 불씨는 천지를 태울 수도 있는 것, 한 사람 기자의 오보 때문에 수백 명이 죽어야 했고 만주의 수십만 동포들이 궁지에 몰려애 했던 것처럼 무명의 열사,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세계의 이목을 모았소 일본을 진감케 했으며 중국과의 갈등은 일시에 불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만주를 잃고 중국 본토까지 위협받는 형편이고 보면 공통된 피해자, 당연한 귀추라 하겠지만 홍구사건 이후 조선 혁명당이 중국 요녕 구국회와 합작하여 항일 전선을 구성함으로써 양 민족 간의 공동보조는 구체화되었고 조선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이 합세하여 쌍성현을 점령한 것을 위시하여 사도하자에서 일만 연합군을 격파했고 동경성을 점령, 동만의 대전자령에서 일본의 나남 72연대를 대파하는 등 행동으로 나타났다. 권필응은 시초부터 중국과의 합동투쟁을 열렬히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끈질기게 줄기차게 그것을 위해 동분서주했었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 사정은 일제가 날로 목을 죄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곳은 보다 험난하고 보다 살벌했지만 확실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상해에서 남경까지 그 동안 일본군은 비전투원 삼십만을 죽였다하는데 그보다 더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만의 군대가 삼십만의 양민을 학살한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노약자와 아녀자들, 필설로써는 도저히 전할 수 없는 거대한 지옥을 누가 믿겠습니까. 차마 사람의 탈을 쓰고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짐승들의 추악한 만행을 도저히 도저히 상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해에서 온 이건이 남경학살사건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열 살에서 칠십까지 명색이 여자라면 모두 욕보인 뒤 죽였습니다. 백주이든 대로상이든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야수같이 그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드러내놓고,"
하다가 이건은 잠시 말을 끊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어린 것의 목을 짜른 뒤 어미를 범하고, 어린 것을 공중 높이 던져 놓고 총검 끝으로 받아서 죽이고, 아들과 어미를,"
다시 말을 끊는다.
"네, 그렇습니다. 총검술의 연습용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었지요. 인류 역사상 어느 야만족이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저는 울부짖었습니다. 하늘이여! 하고, 내 나라를 빼앗은 원수 놈이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놈의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구 말입니다. 일본 놈의 씨를 말리지 않는다면 하늘이 없는 거라구 울부짖었습니다. 어느 지옥에 그 같은 광경이 있겠습니까. 어떤 악마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일본 놈의 씨를 말리지 않고서는 인류가 존속할 수 없습니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모두 침묵한 채, 목이 타는지 송장환이 술을 마셨다. 술을 삼키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묵은 연못 속에 개구리가 뛰어드는 소리같이.
"추도분은 말했습니다. 천하에 주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무저항주의 같은 수치스런 행위에 주의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하고 말했습니다. 삼십만의 학살은 잔혹무도한 일본 놈 국민성의 산물인 동시 장개석이 견지해왔던 바로 그 무저항주의의 산물입니다. 도시 국민의 당이 어디 있습니까? 국민당은 장개석의 사당이지 그게 어디 국민의 당이겠습니까?"
추도분은 중국의 항일 저널리스트다.
"그래도 지금 장개석은 항일의 영웅일세, 구심점이고,"
권필응은 자신의 뒤통수를 슬슬 만지면서 말했다.
"보따리 싸서 달아나고 남은 사람들, 삼십만의 인민이 학살되었는데도 그렇습니까?"
"이군!"
"네."
"자네는 남경학살을 일본의 잔혹무도한 국민성과 장개석의 무저항, 그것에 원인이 있다고 했는데. 그 밖의 이유 같은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그 밖의 이유라면?"
"일본의 민족성과 장개석이 종전까지 취해온 무저항, 원인은 그것뿐이겠는가 말이네."
이건은 대답을 못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 밖의 이유 말일세."
송장환과 정석도 묵묵부답이다. 질문이 갑작스러워서도 그랬겠지만, 사실 그 무엇을 어떻게 생각한다는 여유가 없었다. 이건은 물론 두 사람도 분노와 흥분된 상태였으므로 냉정히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모두 그리 착해빠져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권필응은 탄식하듯 말했다. 세 사람은 얼굴을 붉히면 쩔쩔맨다. 권필응은 술을 마시고 잔을 돌리며
"아무리 일본 인종이 극악무도하다 하더라도 일본인 전부가 악귀일 수는 없는 일. 군에 끌려나온 사내 모두가 짐승일 수는 없는 일. 한데 어찌하여 모두 악귀가 되고 짐승이 외었는가. 그런 만행은 다소간 정복자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오만의 군대가 삼십만의 비전투원을 학살하다니. 자네들은 일본 군부의 작전이라는 생각은 아니했다 그 말인가?"
"그, 글쎄올시다."
"중국 땅이 일본 땅의 몇 배인가? 중국의 인구는 일본 인구의 몇 배인가? 그래도 생각이 안 나는가?"
"..."
"대저, 잔인성이란 용기 있는 자보다 용기 없는 자의 속성인데, 일본 민족은 매우 소심하고 겁이 많은 민족인 게야. 자고로 칼로써 다스려지는 백성이 그런 것은 당연지사, 한데 그들의 용감무쌍은 어디서 왔는가. 그 나라는 변혁이 없었고 섬나라, 가두어진 실태, 그 속에서 칼로 길들여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어코 선택이 없는 용기란 오로지 복종하는 그것인 게야. 그런 틀 속에 있다가 틀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되겠나? 갈팡질팡 소심하고 왜소하고 가련한 모습, 마치 가둬 길렀던 새가 새장 밖에 나가도 날지 못하는 것처럼. 청일전쟁. 노일전쟁, 그리고 만주사변하고는 다르거든. 그건 국지 전쟁의 성격으로 틀 안에서 싸운 거고... 대륙에다 개미같이 풀어놓은 군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지 않으면 악귀로 만들지 않으면 어쩌겠나."
정석은 무엇 때문인지 싱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병사들의 양심이나 공포심을 마비시키기 위한 작전의 하나였다는 그 말씀이군요."
송장환의 말에, 그 바보스러운 것 같은 말에 권필응은 대꾸하지 않았다.
"풍신수길이 명나라에 칙서를 보낼 때 해 뜨는 나라에서 해지는 나라로, 하고 썼거든. 키 작은 사람은 발돋움을 하는 법인 게야. 무변한 땅덩어리, 수없이 많은 인구, 수천 년을 두고 쌓은 문화, 위축 아니 되고 어쩌겠나. 삼십만의 학살은 그 위축에 대한 군부의 처방일세."
"하기는 그렇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군율인데 자발적일 수 없는 일이지요."
송장환이 말했다. 그러나 이건은 거의 권필응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 속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전속결, 그것도 이유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석이 말했다. 순간 권필응은 웃었다.
"그렇지. 일본은 장기전의 늪에 빠질 것을 겁낸 게야. 비전투원도 전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중국인을 좌절시킨다. 의도적이라면 그건 작전 계획에 든 것이지."
"..."
"어떤 경우에도 일하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사물을 보아도 안 되고 판단해도 안 되는 게야."
권필응은 일어섰다.
"피곤해서 나는 먼저 자야겠네. 자네들은 술을 마시게, 곧 윤군이 올 걸세."
세 사람도 따라 일어서며
"선생님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권필응은 나갔다.
항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감정을 무시합니까."
이건이 울분을 터뜨리듯 술을 부어 마신다.
"잔소리 말어. 우린 부끄러워해야 한다."
송장환의 말에 이건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의 분노를 어째서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그건 의지가 약하다는 뜻이다. 선생님이 칠십 평생, 꺾일 나이도 되셨는데 아직 저렇게 꿋꿋하시다. 선생님의 냉철하심은 감정을 다지고 수없이 다지신 보다 큰 아픔이시니까. 우리는 아직 철없어. 하하하 하하핫..."
송장환은 허황하게 웃었다.
"나이 오십인데도 말씀이야. 하하핫 하하하."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정군."
"네."
"주노인을 만났나?"
"만났습니다."
"어떻게 된다 하던가?"
"며칠지간에 떠나겠다 하더군요."
"며칠지간에..."
"그는 그렇고,"
"뭘?"
"에이! 뭘 어쩌자는 건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둔다. 그게 또 어색했던지 석이는,
"서주도 떨어지고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우린 어디로 갑니까?"
냅다 던지듯 말했다.
"자네 금년에는 아무래도 장가를 가야 하겠네."
"왜 또 그러십니까? 서주 떨어진 것하고 지가 장가가야 하는 것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석이 쓰게 웃었다.
"오랫동안 홀아비로 있다 보니, 성미가 점점 더 조급해지니 하는 말이야."
"궁할 때는 곧잘 쓰시는 문자지요. 장가 보내주시지도 않으시면서,"
"서주가 떨어지건,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건 어차피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게야. 화를 내요 소용없고 울부짖어도 도움이 안 돼."
그런 식으로나마 분위기를 건져 올리려 하는데,
"너무 썩었습니다."
이건이 말했다.
"썩기는 또 뭐가 썩었나. 하기야 썩은 것 많지. 일본이 이겼다고 만세 부르고 일장기 흔들며 거리를 누비는 조선 놈들 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있어."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이건은
"너무 썩었단 말입니다. 장개석이, 그의 사당, 탐욕에 찬 사대가족,"
사대가족이란 장개석과 송자문, 공상회, 진과부, 진입부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쨌거나 장개석과 국민당은 중국의 간판인 걸 어쩌겠나. 과거지사야 어떻든 정면에 나선 마당에 가타부타해서는 아니 되네."
송장환은 타이르듯 말한다.
"한마디로 혼란스럽습니다. 도무지 우리는 어디 붙어서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치밀어 배앓이를 할 판입니다. 이곳에는 여유가 있는 듯하지만요."
불만을 토로하면서 비꼰다.
"여유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각박하기로 말하자면 이곳이 더하지."
"하지만 지금은 그곳이 현장이란 알입니다. 소비에트 유학생 왕명을 하나 더 보태볼까요?"
이건은 술을 들이켰다. 관자놀이가 불룩불룩 움직였다. 왕명은 코민테른, 즉 소련의 막강한 힘을 업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거의 모택동과 비견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소위 소비에트 유학파다. 그가 내거는 슬로건은 통일된 정부, 통일된 행동, 통일된 지휘, 통일된 무기였는데 중국 공산당의 독립성을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내용은 항일 전선의 통일된 지휘권을 장개석에게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노일전쟁 이래 일본의 침략을 염려해온 소련의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장개석이한테는 정권이 있고 돈이 있고 무기가 있지만, 군대도 있지요. 월급 받는 군대 말입니다. 네 또 있지요. CC단이 있고 남의사도 있습니다. 없는 것은 인민입니다. 그는 손문을 배신했고, 지금 인민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이군. 흥분 말게."
"장개석이하고 원세개의 차이점이 뭐지요? 그가 말하는 적비만 소탕해버리고 나면 황제 자리에 떡 먹듯 오를 테니까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무리 썩고 낡아도 갈라지는 날 중국은 일본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석이는 말이 없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해서 소련도 장개석이 뒷배 봐주느라 용을 쓰는데 더부살이 마굿간 차지도 못하는 조선 놈들 입 봉하고 있으라 그 말입니까? 지가 이런 말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분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는 판은 어찌 돼 있습니까."
"새삼스럽게 어제 오늘의 일인가?"
"정말 비극입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옳은 거는 옳다 해야지요. 모택동이가 옳아요! 장개석이는 일구월심 모택동이를 어떻게 잡아먹을까, 전쟁에 전력투굴 하고 있습니까? 왜 서주가 또 떨어집니까. 소련의 군사 원조는 다 장개석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데 팔로군은 맨발로 싸우고 있단 말입니다."
"삼발이네."
"삼발?"
"그래."
"삼발이 뭡니까?"
"삼발도 몰라? 솥이나 남비 같은 것 올려놓는 것, 쇠로 만든 그것 말이다. 하하핫핫."
송장환은 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형님께서 오늘은 왜 이리 웃음이 헤픕니까?"
정석이 몸을 일으키듯 말했다.
"나이 들어서, 웃음으로나 때워야지. 안 그런가?"
"삼발은 어찌 되었습니까?"
이건은 물러나듯 하며 물었다.
"소련이 기를 쓰고 도우는 것은 삼발을 유지하기 위해서, 뭐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얘기나 하지, 자아. 술이나 들자구. 윤군이 와서 합세하면 요란해질 테니까 술 비우고 나는 가야겠네."
"형님,"
석이 불렀다.
"자넨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국내에 사상범 보호관찰인지 뭔지를 공포했다는데."
"김형 땜에 그러나?"
"그렇지요."
"..."
"자칫 잘못되면 못 보게 되는 거 아닐까요?"
"그보다 더 이상한 거는 지원병 제도... 올 것이 오고 있어."
지난 이월 조선에서는 조선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가 창설된 것이다.
"조선 청년들 다 죽겠군."
석이는 아들 성환이를 생각한다.
4장 노파가 된 임이
"상의야."
함께 걷던 인혜가 바싹 다가서며 불렀다.
"응."
"뒤에 말이야, 아까부터 어떤 할머니가 우릴 따라와."
"나도 알어. 교문 앞에 서 있던 할머니야."
"괜히 무섭다, 이애."
"뭐가 무섭니."
"도깨비 아닐까?"
"기집애두, 한낮에 무슨 도깨비가 나오니."
"낮도깨비도 있잖아."
순간 상의와 인혜는 손을 잡고 동시에 뛴다. 한참 뛰다가 뒤돌아본다. 고동색 치마에 회색 저고리, 흰 목수건을 날리며 보따리 하나를 든 노파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신경의 변두리 지대지만 조선옷 입은 사람은 좀체 보기 힘들다. 조선옷 입은 노파는 허둥지둥 따라온다.
"저봐 우릴 따라오고 있어!"
"인혜야, 뛰자!"
두 아이는 책가방을 들고 다시 뛴다. 책가방 속에서 필통이 달랑 달랑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얼마 동안 뛰다가 걷다가, 한적한 곳을 지나 복닥거리는 거리로 접어든 아이들은
"그럼 잘 가아."
"응, 그래."
각각 저네들 집을 향해 헤어졌다.
'저 할머니 날 따라온다아?'
상의는 인혜 말대로 괜히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꼬불꼬불 골목을 누비며 한참을 돌아 집 앞까지 왔을 때, 그때까지 노파는 따라왔다.
"엄마! 엄마!"
상의는 문을 탕탕 치면서 큰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보래,"
상의는 소스라쳐 돌아본다. 노파는 웃고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금이빨이 하나 있었다.
"니가 상의제?"
"..."
"상의 앙이가?"
"왜 그래요?"
상의는 뾰로통해 되묻는다.
"내가 니 고모다."
"...?"
"내가 니 고모라 말이다. 니 아부지를 업어서 키운 고모 앙이가? 인물 집안이라 니도 참 이쁘게 생깄구나."
손을 덥석 잡는다. 얼굴이 시뻘개진 상의는 잡힌 손을 뽑으려고 애를 쓴다. 이모들은 알지만 상의는 고모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주름투성이 기름때가 묻은 것 같은 얼굴이며 뀅하니 뚫린 것 같은 눈동자, 상의는 기분이 나빴다. 간신히 손을 뽑고 뒷걸음질 친다. 마침 상근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이고, 저거는 누고? 우리 홍이 큰아들인가배? 우짜믄 애비를 그리 쏙 뺐노."
상의는 재빨리, 다람쥐처럼 문안으로 들어간다. 뒤질세라 노파, 그러니까 임이도 문을 비집고 들어간다.
"서천에 갖다놔도 알겄다. 니 애비 어릴 적 그대로구나. 그러기 옛말에도 씨도둑질은 못한다 했제."
"누나 이 할머니 누고?"
"나도 모른다."
"고모라 안 카더나. 모리기는 와 모리노."
"..."
"니 이름은 멋꼬?"
상근이를 보고 묻는다.
"상근이요."
"에미는 어디 갔노. 없나?"
"장에 갔어요."
임이는 사방을 둘러본다.
"돈을 많이 벌었다 카든데, 공장도 있고 한데 집이 와 이 모양고."
아이 둘은 우두커니 임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이구 얄궂어라. 집꼬라지 보면 어디 노동이나 해묵고 사는 사람이라 안 카겄나."
칠팔 평쯤 되는 뒷마당이었다. 겨울에는 석탄이 쌓여 있던 곳, 조그마한 광이 하나 있었지만 사방에 허섭쓰레기가 널려 있다. 벽돌로 지은 낡은 집의 정식 출입문은 뒷마당의 반대편에 있었다. 길에서 문만 열면 바닥에 벽돌을 깐 홀리었고 칸막이를 한 일부가 주방이며 방 두 개가 옆에 붙어 있었다. 뒷마당에서는 부엌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임이는 부엌문을 열고 안을 기웃이 들여다본다. 형을 찾아 졸랑졸랑 나오던 상조하고 임이의 눈이 부딪친다. 다섯 살 난 상조, 상근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상조를 맡겨놓고 보연은 장에 간 모양이다.
"아아 그러니께 나는 우리 홍이 작은 아들이가배. 그런데 그 얼굴이 멋꼬? 밤새도록 쥐가 밟고 지나갔더나? 어디 이 고모가 조카 놈 얼굴 한분 씻기볼까"
대야를 찾아 물을 붓는다.
"뭐해요!"
상의가 다가서며 항의하듯 말했다.
"니는 가만있거라. 이놈아야 그 얼굴이 멋꼬?"
아이의 팔을 잡아끌고 대야의 물을 아이 얼굴에 끼얹는다. 상조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면 운다. 낯선 사람이라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이었다.
"그러지 말아요!"
상의는 상조를 끌어내려 한다.
"씨끄럽다 마! 고모가 씻기줄라 카는데 머가 우떻노."
상의 손을 뿌리친다.
"우리 동생이 울지 않아요! 생전 모르는 할머니가 남의 집에 와서,"
"머라? 생전 모리는 할매라 캤나?"
임이는 낄낄 웃는다.
"할매라꼬? 촌수가 한 가닥 올라갔고나."
임이는 치마를 걷어 물이 묻은 아이의 얼굴을 빡빡 닦는다. 아이는 더 요란스럽게 울었다. 상의는 가까스로 아이를 낚아채어 등 뒤에 세운다.
"울 엄마 오면 혼나요!"
상근이 발을 탕! 구른다. 상조는 계속해서 울었다.
"머라꼬? 너거 엄마가 오믄 혼이 날 기라꼬? 이눔 새끼들아 니 에미가 오믄 이 고모한테 혼이 날 기다. 집안 꼬라지하며 애새끼들 꼬라지하며,"
하는데 장바구니를 든 보연이 들어왔다.
"엄마!"
두 아이는 동시에 불렀고 상조는 한층 울음소리를 높였다.
"애를 왜 울리나."
중국 여자들이 입는 바지에 블라우스를 입은 보연은 지친 듯 기운 없이 말했다.
"엄마! 저 할머니가 상조를 울렸어!"
상근이 일러바친다.
"뭐라고?"
어리둥절하다가 보연은 임이를 본다.
"댁은 뉘시오?"
빨끈해서 묻는다. 아이들 말을 귀담아 들었다기보다 보연은 지치고 피곤하여 신경질이 났던 것이다. 임이는 주춤하다가
"그런께 자네가 내 올케라 말이제?"
"네?"
"내가 자네 시누다, 그 말 앙이가."
"네..."
보연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누이가 한 사람 있다는 얘길 듣긴 들었던 것 같았다.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우찌 장석겉이 사람을 세워 놓노."
"아, 네 들어가시지요."
아이들은 핼끔핼끔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상의야,"
"응."
"너 빨리 공장에 가서 아버지보고 손님 오셨다 해라."
"그럴게."
방으로 들어온 임이는 밖에서처럼 방안을 휘둘러본다.
"돈도 많이 벌었다 카는데."
보연은 마지못해 대꾸한다.
"무슨 돈을... 벌기는요."
"공장도 있고 넘들한테 인심도 잘 쓴다 카더마는 와 이걸이 하나 벤벤한 기이 없노, 내사 돈이 없어서 그렇지마는,"
임이는 홍이한테 돈을 얻어간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슬금슬금, 어느 구석에 값진 것이 없을까, 살피듯이 여전히 방안을 둘러본다. 막내 상조는 어미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겁이 잔뜩 실린 눈으로 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노파가,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팔을 낚아채어 끌려간 것이며 전혀 감각이 다른 손이 얼굴을 문지르는데 다섯 살짜리 상조로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보통학교 사학년인 상근은 어미와 좀 떨어져 경계와 반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고모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없었고 친척이나 친지라는 기분이 들지도 않았으며 침입자 같은 느낌밖에 없었다.
"객지에 와서 돈을 벌었으면 얼마나 벌었겠습니까?"
마디가 굵고 거칠은 손가락에 낀 임이의 반지를 바라보며 보연이 말했다. 늙은이답지 않게 검자줏빛 가짜 보석을 끼운 싸구려 반지, 그러고 보니 머리도 물을 들였는지 보기 흉칙스럽게 새까맣다.
"아따, 누가 빛 받으로 왔나. 엔간히 울어쌌는다. 돈 벌었다 카믄 좋지 머가 나빠서 그라노."
"글쎄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돈을 벌었는지 어쨌는지, 밖의 일은, 상의아버지가 말 안 하니까요."
"하모 그래야지. 사나아가 제집한테 쥐여서 일일이 다 고해 바치믄 되겄나? 그러는 집구석치고 안 망하는 거 못 봤다."
갑자기 임이는 득의에 차서 말했다. 홍이가 자신에게 준 돈에 대해서 보연은 모르는 눈치였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것 같았으며 설 자리가 있다는 느낌마저 들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보연은 사나아가 제집한테 쥐여서, 그 말에 비윗장이 뒤틀린다.
'어디로 굴러다니다가 이제 얼굴을 내밀면서 별 희한한 소리를 다하네.'
보연이 그나마 시누이랍시고 상대를 해준 것도 남편을 하늘같이 생각한 때문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어디 천한 것이! 하고 거들떠보기나 했을 것인가.
"그보다 시집와서 오늘까지 자식 낳고 살았지만 상의아버지 입에서 누님이 계시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냉랭한 목소리에 임이 당황한다.
"뭐라꼬? 그 그럴 리가,"
하다가
"그라믄 아아들 고모도 아닌 사램이 여기 와서 앉아 있다 그말가!"
패악하게 소리를 지른다.
"상의아버지한테서 못 들었다 그 말이지요. 돌아가신 시어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기는 하신 것 같은데 그것도 기억이 아슴푸레합니다."
"그, 그거는,"
"전의 일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째 딸자식이 있다 카는데 부모 생전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가, 생각했지요. 돌아가실 때도 그렇고."
그 말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살았기에 그랬느냐는 추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거사 머, 올케는 아무것도 모리는 모양인데, 자네도 이자는 이씨 집 사람이니 무신 흉허물이 있겠노. 아무것도 모른다 카이 내 말하지러. 아부지사 나한테는 이붓아베니께 그렇고 어매는 생시에 나한테 몹시 했이니 정이 없었다. 하지마는 니 서방은 내가 업어서 키웠제. 씨는 달라도 한배 속에서 난 형제라 말이다. 나도 부모를 잘못 만내서 내 팔자가 이리 되었고 팔자가 기박하다 보니 형제라고 찾아오지도 못했다마는, 그래 업어서 키운 동생 집에 팔자치레 못한 누부가 찾아오믄 안 되는 기가, 어이? 찾아오믄 안 되는 기가?"
"그런 게 아니고,"
"아니기는 머가 아니고."
"내력을 모르니까 한 말 아니겠습니까."
"흥! 내력을 몰라서 그랬다고? 그래 내력을 알았으니 어짤라노! 내어 쫓을라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지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오."
보연도 씨 다른 누이라는 것을 알자 국으로 숙어들려 하지 않는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명색이 손위 시누를 과객 취급한 거는 잘한 일가? 손의 시누를 박대한 거는 잘한 일가?"
"박대하니요? 누가 박대를 했습니까?"
"말씨 씨는 거를 보이 행세깨나 하는 집구석 손인가분데 그라믄 너거 집에서는 시가 식구 대하는 법도 안 가르컸다 그 말가? 꼬박꼬박 말대꾸함서 머가 우째? 내력을 모리니까 그랬다고? 내력을 알믄 니가 우짤 기고! 응? 나무에 매달아서 몽딩이질 할라 캤더나!"
"기가 막혀서 참."
"기가 막히다니, 기가 막히다니!"
임이는 마구 생떼를 썼고 상조는 울먹울먹한다.
"애새끼들까지 사람을 업수이여기서 고모라 카는데도 모리는 할매라? 새끼나 에미나 할 것 없이 장석맨쿠로 사람을 맹송맹송 치다만 보고, 아이구, 가나오나 내 신세가 와 이리 됐는지, 참말로 가련쿠나."
목소리가 누그러지면서 손수건을 꺼내어 임이는 나지도 않는 눈물을 찍어낸다. 작년 봄 홍이로부터 상당한 돈을 얻은 임이는 봉천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그는 봉천에 있었고 봉천에서 홍이를 찾아왔던 것이다. 옛날 길상을 짝사랑했던 공노인의 양녀 송애가 전락에 전락을 거듭하다가 정착한 곳이 봉천이었다. 그곳에서 술집을 차린 송애를 찾아가서 임이는 술집 일을 거들며 덧붙어 살았는데 김두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송애는 김두수를 두고
"쿠사레앤(썩은 인연)이지 뭐."
하며 곧잘 말하곤 했다. 송애의 처녀성을 빼앗고 신세를 망친 사나이, 산전수전 다 겪는 동안 송애는 원수 같은 김두수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기도 했고 일본 기관원과 동거했을 때는 김두수가 저자세일 때도 있었다. 어쨌거나 임이는 김두수를 송애 집에서 만나게 된 덕분에 홍이 소식을 알았고 돈도 얻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임이는 그 돈을 밑천삼아 무엇이든 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 년 넘게 빈둥거리고 놀면서 탕진했던 것이다. 옷도 해 입고, 술도 마시고, 구경도 하고, 노름도 하고, 그러다 보면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현재 입고 있는 고동색 치마 회색 저고리는 겨우 전당포 신세를 면한 단벌이다. 그러나 경기가 좋았을 때 만든 옷이어서 모두 본견이었다. 옷 보따리가 전당포에 가기 바빠지면서 임이와 송애의 쌈질도 빈번해졌다.
"니나 내나 머가 다르노. 니 팔자 내 팔자 다 그렇고 그런 거 앙이가."
"팔자타령이 왜 나와요!"
"니나 내나 별 수 없다 그 말이다. 그러이 잘난 체하지 마라 그 말이구마."
"흥! 별수없다고? 그 주제에 나하고 키재기할라 하네."
서너 살 아래인 송애는 코웃음 쳤다. 그럴 만도 했다. 임이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고 송애는 치장에 공을 들이기도 했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돈 있을 때는 언니, 언니 해쌌더마는 돈 떨어지니 날 괄시하는기가?"
"괄시할 것도 없고 공대할 것도 없어요. 신세진 것도 없고오."
"사람이 의리를 모리믄 짐슴만도 못한 기라. 니가 어이서 컸노?"
"하하핫 하하하... 사람 웃기지 말아요. 또 그놈의 공노인인가 뭔가 치켜들고 나오는 거요? 내가 그 집에서 컸다는 것은 일단 제쳐놓고 물어봅시다. 공노인이 당신한테 뭐요? 사돈의 팔촌이오?"
"사돈의 팔촌만 될까? 우리 홍이가 공노인 상속을 받았이니 그만하믄 알쪼 아니가!"
"하, 참 재밌네. 의붓아버지하고 살든 여자의 큰아버지라, 하하하... 핫! 하긴 그렇네요. 사돈의 팔촌보다 가깝구려. 그래서 날더러 의리를 지켜 당신 꼴을 보라 그 말이오."
"그라믄 내가 공밥을 묵었단 말가! 처음에는 너거 집의 일 해줌서 밥 얻어 묵었고 다음은 금쪽 같은 내 동생 돈 가지고 와서 쓰고 살았다!"
"일해 달라 하지도 않았고 금쪽같은 돈 쓰라 하지도 않았어요."
싸움은 대강 그런 식으로 되풀이되었으나 송애는 결정적으로 임이를 나가라 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나타난 김두수는
"임이 니 팔자도 참 어지간하다. 나이 몇인데 이라고 있노."
하며 혀를 찼다.
"그라믄 우짤 기고,"
김두수에게 담배 한 개를 얻어 불을 붙이며 임이 말했다.
"조선에 나갔이믄 그냥 살 일이지 뭐 얻어묵겄다고 또 오노 말이다."
"몰라서 하는 말가? 조선에서 내 발붙일 곳이 어디 있더노?"
임이와 김두수는 동갑이었다. 한마을에서 자랄 때 물동이를 이고 가는 임이 머리꽁지를 두수가 잡아당기면
"이 쇠빠질 놈아!"
하고 임이는 욕설을 하곤 했다. 이들이 만주 땅에 있게 된 운명은 다같이 이들 아비들의 죄과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병상련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는 임이도 김두수의 끄나풀 노릇을 했고 그 덕으로 입에 풀칠한 일도 있었으나 동병상련의 심적 위안을 받기에는 너무나 두 사람의 역정이 험악하였다.
"그만 홍이한테 가지."
무슨 생각을 했던지 김두수가 말했다. 임이의 두 귀가 쫑긋했다.
"우찌, 저분 때 돈도 받아오고... 홍이가 다시는 오지 말라 카든데."
"길을 두고 뫼를 가나. 말이사 그러지마는, 이분에는 공장에 가지말고 집으로 가서 눌러앉는 기라. 일도 해주고, 남의 집에 있는 것 보담은 나을 기구마."
"홍이가 그러라 카겄나?"
"등 밀어서 쫓아내기야 할라고."
"집도 모르고, 올케도 생전 만나보지 못했이니."
"집이야 알라 카믄, 서울 가서 김서방도 찾는다 카는데... 홍이 그눔아아 딸이 공장에서 멀잖은 보통핵교에 댕긴다 카지?"
"그것도 이름을 알아야 찾아도 찾일 것 앙이가."
"내가 이름은 알지러. 어째 아는고 하니 용정에 있는 상위핵교, 니도 알알지?"
"송장환인가 있던."
"그래. 그 상의학교를 댕깄거든. 해서 딸한테 그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런 말이더마. 그런께 이상의, 육학년이라 하든지."
그리저리 해서 말하자면 임이는 용기를 내어 온 것이다.
"어짜피 이 꼴 이 모양이 됐으니 나는 갈 데도 없고 붙일 곳도 없는 몸이다. 염치 체모 겉은 기이 없다. 괄시를 하든 구박을 하든 형젠께 우짜겄노."
보연의 낯빛이 싹 변한다. 다니러 온 것이 아니며 아주 들앉을 양이로 왔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이때 상의가 돌아왔다.
"엄마."
"아버진 어쩌구 혼자 왔나?"
보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하든 일 해놓고 오시겠다 했어."
"하든 일이 다 뭐야! 어서 가서 오시라고 해!"
거의 히스테리다. 눈치를 보던 임이는 갑자기 풀이 죽는다.
"참 엄마도, 나 다리 아파."
"가라면 가아!"
보연은 소리를 크게 질렀으나 전신에는 힘이 없었다. 피곤하여 쓰러질 것만 같았다. 쌓이고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폭발할 것만 같았다. 어미 기세에 놀라 상의는 쫓아 나갔다.
"아이구, 올케 몸이 실치 않는갑다. 하기사 아아들 데리고 심은 들었일 기구마. 이래봬도 나는 몸 하나는 튼튼한께."
백팔십 도로 회전한 임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치마를 고쳐입은 뒤
"뒤안이 얼산 겉은데,"
보연은 새파랗게 된 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임우럽어서, 올케라고 이말 저말 시부맀다마는 맘에 끼지 마라. 자아 이눔아들아 어매가 아픈 모앵이니 나가자. 고모하고 나가자."
팔을 벌렸으나 아이들은 몸을 피한다.
'어이구 무서바라. 성질 보통 아니네. 까딱 잘못하다가는 다된 밥도 못 얻어 묵겄다.'
밖으로 나온 임이는 어지럽게 어질러진 뒤꼍을 치우기 시작한다.
보연의 기색에 놀라기도 했지만 홍이 나타날 것을 계산에 넣고 하는 일이다. 대강 치워놓고 비질을 하려다 말고 임이는 치마를 걷어 올려 바지 주머니 속에서 그새 참았던 담배를 꺼내 문다.
"거기 그만두고 들어오소."
홍이가 부엌문을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고 니 운제 왔노."
"..."
"얼산 같애서 좀 치웠다. 니 댁네도 몸이 약한갑네. 아이 셋에다가 일하는 사람도 없이니, 살림이란 일한 흔적도 없임서 심은 심대로 드네라."
"다 그만두고 들어오시나 하소."
"운냐. 들어가께."
임이는 치마를 털고 손도 털고 나서 안으로 들어간다. 홍이는 누이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그래도, 니가 이리 산께로 기가 난다. 천지간에 누가 있노. 니가 안 좋아할 기다. 생각함서도 왔다. 형제간에 우짤 기고."
"앉기나 하소."
"운냐."
방바닥에 엉덩이를 부비듯 하며 임이는 앉았다.
"작년 봄에 나를 찾아갔일 적에는 내 동생 우세시킬까봐서 다시 안 오겄다 결심을 단단히 했는데."
"그랬지요. 다시 안 오겠다 했지요."
"어디 사람이 인력으로 하겄더나."
"삼십 년 동안이나 안 보고 살지 않았소."
"그, 그랬지."
"그때처럼 사시오."
낮은 목소리, 억양도 없었지만 여지가 없는 준열한 말이었다.
"그렇기 말하지 마라."
임이는 운다. 이번에는 진짜 눈물을 흘린다.
"내 나이 오십이다. 젊은 때하고 우찌 같을 기고."
"아들 찾아서 사시오."
"머, 머라꼬!"
"아들을 찾아서 사시라 했소. 그러면 나도 얼마간 도와주겠지만."
"그거는 그, 그거는 말도 안 된다. 이제 와서... 에미를 에미라 하기는 할 기든가. 그라고 어디 있는지 알기나 해야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는지."
"그래서 벌 받느라 형상이 그 모양 아니겠소. 벌 받으려면 아직도 멀었지."
딱딱히 굳어졌던 홍이 얼굴이 풀리면서 노기를 띤다.
"하기사 니 말대로 벌 받아야 싸지 싸아. 하지마는 모진 목심 죽지 못하고, 천천무리가 돼서 살고 안 있나."
흐느낀다.
"다 내가 뿌린 일이고 누구보고 원망하겄노. 내가 어디 사람가. 나는 한 짓이 하낫도 없다."
"그래 어쩌자는 거요?"
"어쩌자는 생각도 없다. 뿌리박을 곳이 없는데 앞날 생각을 우찌 하겄노. 너거 집에서 일이라도 하고 있이라 카믄 더 바랄 것이 없겄다마는, 니 댁네가 몸도 안 좋고 한 모양인데 내가 그래도 남보담이야 안 났겄나."
홍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이자는 예날 같지가 않다. 젊었을 직에는 남정네가 심에 차지 않아서 세상 밖으로 나가믄 내 뜻대로 다 될 줄 알았제. 참말이지 촌구석에서 농사 짓고 못 살겄더라. 이웃에서 어매라도 나를 잡아주었으믄 내가 이리 되었겄나. 우찌 그리 울어대는 자식보다 돈이 중하든고."
"남 원망 안 한다면서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짖는다 하더니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요."
홍이 얼굴에 혐오감이 나타났다.
"말을 하다 보이 그렇다는 기지. 내가 부모 덕 못 본 거는, 그거는 세상이 다 아는 일 앙이가. 죽은 아배도 그렇고 어매도 그렇고 우찌 내가 온당하게 풀리겄노."
비윗살 좋은 타령을 늘어놓을 모양이다. 홍이는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보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성질을 꾹꾹 밀어 넣고 있는 눈치였다.
"작년 봄에 가져간 돈은 우찌 뒤었소?"
"그, 그기이."
임이는 말문이 막혀 잇지 못한다.
"얼마나 쓰고 남았소?"
"그, 그기이 그런께."
"..."
"그 잡은 년이, 소, 송애 말이다. 니도 알제? 그 쇠가 오만발이나 빠져 죽을 년이 나를 속이가지고 돈을 몽땅 가리단죽을 해서, 그, 그 돈만 있었이믄 니를 찾아왔겄나."
홍이는 한숨을 내쉰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홍이였다.
5장 남경 학살
무라가미 쇼지의 객실은 몇몇 사람들을 위해 늘 개방이 돼 있었다. 특히 토요일 오후에는 그 몇몇 사람이 대개 다 모인다. 후우라이보즈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대륙낭이에 속하는 무라가미는 그러나 그것은 옛이야기, 지금은 바람처럼 오가는 뜨내기는 아니었다. 으리으리하다 할 것까지는 없지만 꽤 큰 저택을 장만하고 게이샤 출신의 나미에와 함께 신경에 엉덩이를 붙이고 사는 지 삼 년이나 된다. 처음에는 군 고위층의 숙소로 징발되었던 청인 부호의 집이, 몇 사람을 거쳐서 무라가미 손으로 넘어온 것을 개조하여 들었는데 객실로 쓰는 홀은 댄스파티를 열어도 무방하리만큼 넓었다. 이 넓은 객실에 모이는 사람들은 직업이 각각이나,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대륙으로 건너온 무라가미와 비슷비슷한 처지, 그러니까 그만그만한 인텔리라 할 수 있었고 젊은 층은 독신자, 중년층은 일본에 처자식을 두고 온 홀아비들, 대개 그런 부류의 사내들이었다. 이력이 복잡하고 겉멋 든 여자도 두셋, 이따금 나타나곤 했다. 주로 모여서 마작을 하고 술을 마시며 잡담도 하는데 모임에 별다른 뜻이나 목적 같은 것은 없었다. 심심한 사람들, 휴일을 앞둔 토요일 오후에도 갈 곳이 없는 나른함 사람들, 그들은 학연이나 지연관계, 연줄 연줄로 해서 알게 된 사람이었으며 별다른 부담, 특징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나미에는 방문객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여자였다. 식구라고는 무라가미와 단둘, 집이 넓은 데다 급료가 싼 만주인 하녀는 남아 돌았다. 무라가미는 속이 트인 사내였다. 인색하지 않았으며 넓은 집 많은 하인을 활용한다는 기분도 없지 않았겠지만 늘 주변이 득실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는 나미에와 같았다. 오가다 지로도 이 집을 드나드는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오 년 전에 지망없이 만주에 나타난 오다가 이 년 남짓 사방을 싸돌아다녔다. 우수리강 청국간의 국경 분쟁의 자취를 더듬었고 애훈서는 한때 만주 건국에 참여했다가 항일로 되돌아간 마점산, 그 외로운 영웅이 얼마간 숨어 살았다는 초라한 농가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기도 했었다. 치치 하루에서 하이라루, 만주리까지, 금주에서 조양, 적봉, 그리고 열하, 몽고에까지 갔었다. 가는 곳마다 일장기는 나부끼고 있었다. 카키색의 군복, 각반을 치고 전투모를 쓴 일본 병정들을 볼 수 있었다. 병정들이 가는 곳이면 지옥이 하도 불사할 계집들, 언제나 포연 뒤에 나타나는 계집들, 일본 옷 입은 작부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끝없는 설원이었다. 빙하였다. 끝내는 현기를 느끼게 하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 늪이었다. 황사 바람이 이는 사막, 수천 년을 두고 아니 수만 년을 두고 풍화된 자연과 사물과 뭇 생명들, 사람의 얼굴이며 무리지은 양떼며, 그것들은 상당한 부피로 육중하게 엮어져서, 러시아 특유의, 청나라 특유의 장중한 건물 아닌, 비록 우분 마분으로 벽을 치고 우분 마분이 땔감이요, 유목의 방황일지라도, 열매를 따고 물고기를 말리며 초록 피리로 발정한 사슴을 유인하여 포획하고, 모피를 둘러친 일시적 주거 '유루다'에서 잠드는 흑룡강 유역의 그들의 삶, 그들에게는 세월에 다져진 견고함과 존엄이 있었다. 사유의 핏발 선 눈동자는 아니었다. 대지는 지나가는 곳, 말뚝 박아놓고 문서 작성하는 토지는 아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일장기, 무거운 스피옷의 자락을 끌고 가는 그들에게 일장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그게 어느 때 전쟁이었던지 열강의 중국 털어먹기 투전판에 교목꾼 가마 한켠 치켜들고 나서듯 전쟁에 참가한 일분이 어느 고지서 병사가 손수건을 꺼내어 손가락을 자르고 동그라미를 그려 총검에 여매어 흔들었다는 일화, 그러나 그것은 대륙의 빛깔은 아니었다. 모양새도 아니었다. 서양 칼 사브르를 차고 서양식 망토를 걸친 장교나 총대 들고 털모자 쓰고 일직선으로 다리 치켜들고 가는 왜소한 일본 병정들은 치졸하고, 메뚜기처럼 방정맞았다. 오가다는 와서 안 될 사람들이 왔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입만 벌리면 상대를 야만적이다, 미개인이다. 하며 모멸했지만, 그들의 하늘 밑에서 오가다는 진정으로 와서는 안 될 일본인을 느꼈던 것이다. 일본은 승리했고 정복했는데 왜 엉덩이가 가벼운가. 그들 하늘 밑의 사람들은 정복당하고 주권을 빼앗겼는데 엉덩이를 지긋이 땅에 붙이고 있었다. 오가다는 또 생각했다. 일본은 결코 대륙에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일본인을 위해 아시아의 이 대륙은 좋은 땅이 아니며, 이 대륙에 일본인은 좋은 씨앗이 아니라고, 실로 문화의 격차는 자연의 조건만큼 멀고도 먼 것, 시베리아를 질러서 알래스카로 건너 남미까지 뻗어간 이종들, 아슴푸레 느껴지는 아시아 대륙과의 동질성, 오가다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였다. 일본은 어찌하여 동떨어졌고 비어져나갔고, 그토록 이질적인가, 수수께끼였다.
패잔병같이 신경으로 온 오가다는 신경에 주질러앉고 말았다. 무라가미와 비슷한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국도건설의 일로는 친척이었고 육군 소장 계급에서 퇴역한 백부하고도 막역한 사이였기에 오가다는 그 토건회사에 취직을 하여 밥줄을 잡은 셈인데 하기는 뭐, 그런 연줄이 없었다 하더라도 대학 나온 일본인 사내가 만주바닥에 와서 직업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길가에서 풀을 뜯는 염소도 웃을 일이었지만. 오가다와 무라가미의 관계는 중학교의 선후배였다. 그리고 고마다 토건과 무라가미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사실 내용적으로 만주가 관동군의 군정하에 있는 만큼, 무라가미 같은 후라이보즈가 일확천금하고 신경 복판에 저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군부를 젖혀놓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인 누구나 만주에 오면 일확천금하고 신경에 저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만주 땅이 일본인 모두에게 왕도낙토도 아니었으니까. 원래가 식민에는 다소 기민의 경향이 없지 않다. 오늘 현실을 바라보건대, 대련 항구를 거쳐 안동은 거쳐 수륙 양면에서 물밀 듯 이주해오고 있는 일본인들, 개척의 전사니 의용군이니하며 마구 쏟아 붓는 일본인들, 그들은 일본에서 어떤 계칭인가. 노동력이 유일한 밑천인 사람들인 것 같다. 살 만한 사람들이 고급 인력으로 온다면 모를까, 뭐가 답답하여 정든 고향 산천 버리면서까지 낯설고 물설은 고장으로 이주해갈 까닭이 있겠는가. 어렵게 때문에 신천지를 찾아오는 것이요 어려운 백성은 나라에서도 반갑잖은 존재다. 반갑잖은 존재는 밀어내기 마련, 해서 기민의 경향이 같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국책이 기만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이주민들은 꿈에 부풀이 있을지라도 바로 허황한 꿈에 부풀어 있다는 사실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으며 기만한다는 그 자체는 강제의 첫걸음인 것이다. 만주 건국이 있던 그 해, 일본 국내서는 5.15사건이 있었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그 전해에는 2.26사건이 있었는데 두 사건은 모두 삼월사건, 시월사건을 이은 군인들의 자행으로 정국은 극도로 혼란 속에 빠져 있었으나 만주 개척은 일사불란 관민이 합세하여 국책을 수행했다. 군가 유행가는 감각적 가사에 애조 띤 가락으로 사람들 마음에 만주를 스며들게 하여 피리 역할을 했고 저널리스트는 웅지를 설파하며 꽹과리를 쳐댔고 국책 문학은 왕도낙토의 이상을 선동하여 북을 두드렸다. 영화며 만화까지, 도처에 만주는 살찐 암퇘지로 선전이 되었다. 우스운 것은 일본에 남은 사람들이 굿을 쳤고 열광을 하였다. 개척의 전사! 의용군! 가라! 만주로, 대일본제국의 남아여!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리, 농민들 영세민들은 어렵잖게 영웅들이 되어 훈련소로 떼 지어 들어갔고 황도주의를 깊이깊이 새겨 용약 고국을 떠났으며 일본서는 소작이지만 만주 가면 지주 된다, 풍선만큼 꿈에 부푼 그들은 과연 빈손 들고 가서 지주가 되긴 되었다. 남의 것을 약탈하여 나누어준 땅은, 그러나 앉아서 연공을 받아먹는 지주는 아니었고 소작인을 거느리는 지주도 아니었다. 막한 벌판, 영하 삼십 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그들이 비적이라 부르는 항일 게릴라의 준동, 약속된 왕도낙토의 현실은 바로 그것이었다. 오족협화, 공존공영이라는 새빨간 거짓말과 아시아의 맹주, 웅대한 민족의 비상, 그런 우쭐해지는 용어의 팻말이 희미해가는 황도주의 야마도다미시이를 일깨울 뿐. 그런데 내어 쫓다시피한 그들 백성은 그러나 해방된 것도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시 주워다 쓰는 야적된 화물이라고나 할까. 잡아다 먹을 수 있는 놔 먹이는 도야지라고나 할까. 세계 제패의 황당한 꿈을 꾸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만주 자체가 하나의 병참기지인 만큼 언제든지 그 인력을 전용할 수 있는 것이다. 생산력으로, 전투력으로 어느 편이든 본국에 비하여 그들은 최전방이며 일선이 될 것이다. 확대일로의 중국 전선도 전선이려니와 소련이 언제 어떻게 도발해올지, 전쟁의 가능성은 매우 짙다. 약탈의 악령들은 남의 땅 남의 백성뿐만 아니라. 제 나라 백성도 가난하고 무력하 자들을 맨 먼저 침략의 도구로 앞장 세워 사지로 몰고 가기 마련이다. 애국이라는 충성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유가다(편안하게 입는 남자의 집안 옷)을 입은 무라가미는 한 구석에 스낵 바같이 차려놓은 곳이 있었지만, 털이 부실부실한 정강이를 드러낸 채 홀 바닥, 방석을 깔고 앉아서 오이와 함께 챠부다이(일본 상. 무릎 높이의 정사각의 작은 것)를 마주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넓적한 얼굴 짙은 눈썹, 죤마개(남자의 머리 모양, 앞은 밀어버리고 상투를 쓴 것)가 어울릴 전형적 사무라이(술잔)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한켠에서는 여자 둘이 나미에와 함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트럼프를 하고 있었으며 또 한 구석 소파에는 사내 세 명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부패해가는 듯 허무주의에 빠져 들어가는 듯, 어딘지 뒤죽박죽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자유롭고 속편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실내였다. 토요일의 해거름, 창밖은 일본인이 건설한 도시, 도시는 황혼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무라가미상."
사십 세 전후, 중학교 교사인 오이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양복 차림의 어딘지 허약해 뵈는 사내였다.
"지금 엄청난 요새를 만들고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무라가미상은 뭐 좀 아는 것이 없습니까?"
"요새 만드는 거야 어제 그제 일인가?"
내키지 않은 듯 무라가미는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요. 관동군이 하이라루, 수분하 등 여러 곳에 요새를 구축한 것은 아는데, 그런 규모하고는 다른 어마어마한 것을..."
"호두 요새 말이군."
호두란 우수리 강가, 소련의 이만 시가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굉장하다며요?"
"아직 공사는 끝나지 않은 모양인데 동양의 마지노선이라."
"그러면 소련과의 싸움이 박두했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요새란 지키는 거지 치고 들어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 얘기는 그게 아니고 소련이 공격해 올 것이다,"
"언젠가는 그러겠지."
"아무리 관동군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중국 본토에 분산돼 있는 상태에서, 이건 참 불안한 얘기요."
"일본군이 누구냐!"
"네?"
"신병 아닌가."
오이는 무라가미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위기에 처하면 신풍이 불어올 거고 으하핫 핫핫핫..."
엄청나게 큰소리로 웃어 제낀다. 나미에가 돌아보았다. 그는 메이센의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검은 화살 무늬에 진갈색 기모노는 살결이 흰 얼굴에 잘 맞았다. 몸집은 가날퍼 보였으나 짙은 눈시울, 도톰한 입술은 매우 육감적이다.
"어쨌든 중국에서 빨리 끝이 나야, 만주가 허술해지면,"
"끝이 나아?"
사카즈끼의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무라가미는 비스듬히 오리는 쳐다보며 반문했다.
"오래 끌 거다, 무라가미상은 그렇게 봅니까?"
"나한테 물어볼 것도 없지. 전선의 확대는 이미 기정 사실, 장기전으로 간다는 걸 의미하는 거고, 국가 총동원령이 바로 그거 아니겠어? 그리고 중국 자체가 지구전으로 방침을 굳혔고, 발목이 잡힌 게야. 철없는 것들, 이겼다고 박수치고 춤추고 하지마는 이제는 빼도 막도 못하게 됐으니 비극이지 비극이야, 마치 귀신에 흘린 것 같다 말이야."
"결국 확대파가 승리한 때문이겠지요. 불확대를 그러게 떠들어댔으면서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뭐 국내에서 확대, 불확대를 떠들어보아야 그거 다 소용없는 일이었지. 관동군이 들어먹어야, 목에 힘주고 하면 된다! 전쟁 미치광이를 귀에 무슨 말이 들어가겠나. 육군 팜플렛의 첫 구절 몰라?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는 말."
오이는 낄낄 웃는다. 몇 해 전에 총합국책입안 때 육군에서 발표한 소위 육군 팜플렛의 시작이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는 문구였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확정에 대해 펄쩍펄쩍 뛰었다든데요?"
"그거 어디서 들었나?"
"다 듣는 데가 있지요."
"흥! 펼쩍 펄쩍 뛰었다구? 원인을 만들어놓고 지금 와서 뛰면 뭘 해. 다 그의 제자들 아니었던가?“
"이시하라는 확전의 시기가 아니라 보는 거겠지요."
"나를 두고 사람들은 후라이보즈니 대륙낭인이니 하지만, 그래 난 사실 대륙낭인이야. 군부에 붙어먹는 이권우
익인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나는, 나는 말이다, 사이고가 싫어."
무라가미는 엉뚱한 말을 내뱉았다. 사이고는 명치유신의 공신이요 정한론자였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어쩐지 돌대가리 생각이 난단 말이야. 중대가리로 서 있는 동상 때문에 연상되어 그런지 모르지만... 돌대가리 관동군 놈!"
"얘기가 그리 묶이는군요."
오이는 웃었다.
"방법이 요지부동이야. 하니 내가 돌대가리라 할밖에. 명치 대정 소화, 삼대에 걸쳐 변한 게 뭐 있어? 한결같이 공갈에다 협박에다 공작, 하긴 재미는 보았지. 불로소득이었고, 그러나 노름꾼의 속임수도 한 두 번이지 매양 뜻대로 되어주는 건 아니지 않아? 상대가 변하는데 안 변한다면 그건 되잡히기 마련인 게야. 복지에서 밀면 장개석이 타협하자 할 거다. 상해를 점령하면 그들인들 어쩔 것인가, 남경을 밟아 뭉개버리면 손들 수밖에 없겠지. 흥, 그것 다 희망으로 끝나버리고 이제 어쩔 것인가. 중국 사백여 주 일본의 병마가 달려야 할 판인가?"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죽어야 그게 가능할까요?"
무라가미는 그 말대답은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자네 요즘 중국에서 유행되고 있는 두 가지 말이 있는데 그거 아나?"
하고 물었다.
"모릅니다. 여긴 만주 아닙니까?"
"그런가? 나도 일전에 상해 갔을 때 들은 얘기다만 하나는 마간 아타낭."
"그게 뭡니까?"
"삼 마, 몽둥인 줄 알고 달아나지만 몽둥이가 아닌 삼대인 것을 깨닫고 사람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삼대 든 사람은 일본이요 이리는 중국, 중국은 일본을 강하다 착각을 했고 일본은 강한 것같이 기만술을 썼다."
"그러니까 삼대를 든 사람은 어리가 공격하는 것은 문제없다 그 말이군요."
"그렇지. 사실 그 동안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저항다운 저항을 한일이 없었고, 저항을 받지 않고서 관동군이 천하무적이라, 그건 환상이었어. 우린 상해 공략에서 그것 보았지 않았나. 막강한 일본의 십오만 육해군을 열세인 중국군이 석 달을 저항하여 지탱했거든. 초토 작전으로 나오고 있으니, 싸우지 않고 끌어들여서 말려죽이겠다. 그거 아니고 뭐겠나."
"그러면 또 하나 유행되고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조식경탄, 벼룩 조, 먹을 식, 고래 경, 삼킬 탄, 말하자면 벼룩을 잡아먹듯 했을 때는 두려워했으되 고래를 삼키려는 데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은 고래를 삼킬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국지전보다 전면 전쟁이 저들한테 유리하다 그 얘깁니까?"
"누가 보더라도 안 그렇겠나? 게다가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야."
"국가 총동원령도 그렇지만 조선에서 자원병 제도까지 창설했다더군요."
"내지에서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은 모르고 옛날 같은 단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지만."
두 사내가 한참 우울해져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오가다가 들어왔다.
"그 동안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 갔다 왔습니까?"
오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출장 갔다 왔어요."
오가다는 쾌활하게 말했다.
"지로상, 오래간만이네요."
트럼프를 하고 있던 고가 세츠코가 나미에보다 먼저 말을 걸었다.
"오가다상 어서 오세요."
나미에가 이어 인사를 했고, 또 한 여자 츠다 다해코는 눈인사를 했다. 세츠코는 상당한 연배, 회색 스커트에 연한 오렌지색 블라우스를 입었고 머리는 짧은 단발이었다. 신경서 발간되는 S신문사 문화부의 기자다. 그리고 다해코는 옛날 나미에가 나가던 마치아이의 여주인 동생으로 스물여덟 살의 이혼녀이며 나미에를 언니라 부르고 드나드는 여자였다. 오가다는 잡담하는 남자들 속에 끼어들었다.
"그 동안 안 나오길래 나는 내지에 간 줄 알았어요."
한 사내가 말했다. 오가다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그래, 출장은 어디였습니까?"
다른 사내가 물었다.
"대련이었소."
"대련, 지금 참 좋을 때지요."
"좋더군요."
"아카시아가 한창일 게요. 꽃 냄새가 진동하지요."
"그래요."
"달콤하고 취할 것 같은, 차라리 괴로운 그 냄새, 온통 가로수가 아카시아 아니요. 그리고 정기 기선의 도라(뱃고동)가 길게 울려 퍼지는 정오, 권태로우면서 달콤하고... 푸른 바다 푸른 하늘, 대련에 비하면 신경은 똥이야."
"하긴 그래. 봉천도 좋고 하얼빈도 당당한데 일본이 건설한 신경이 젤 볼품없는 건 사실이야."
"그거야 세월의 이끼가 껴야지. 전통이란 게 있지 않소. 신흥 도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생소함일 게요."
변호하듯 말했다.
"그건 너무 평면적인 발상이야. 신구의 차이로 보는 것은. 나는 문화의 차이로 보는 거요. 만주인이 건설한 심양이나 금주, 러시아가 건설한 하얼빈, 대련, 확실히 만주적인 것 러시아적인 것 그 차이는 뚜렷하지만 모두 대륙적인 공통점은 있어요. 그리고 북방인 점도 있고, 그러고보면 일본 문화, 이건 전혀 이질이거든. 물론 신경을 만주의 도시로 건설하긴 했으나 전혀 이질적인 감각으로 만주에다 만주적인 도시를 건설했다... 볼품없는 도시가 될밖에, 정통이나 세월의 이끼가 꼈다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야, 소위 죽도 밥도 아니라는 거지. 좋고 나쁘다는 것보다 밖에 나와 보면 특수하게 일본이 이질적이란 것을 느끼는데 그게 무슨 까닭인지 영 모르겠어. 영 융합이 안 돼."
"그야 뭐 우리가 섬나라니까 그렇지."
"영국은 섬나라지만 일본 같지는 않거든."
도시 문제로 왈가왈부하다가 얘기는 다시 대련으로 돌아갔다.
"하여간에 대련은 뿌리를 박고 살아보고 싶은 고장이야.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뜻대로만 할 수 있다면 대련에다 집을 짓고 바다를 보며 아카시아의 꽃향기를 맡으며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세상만사 다 잊고 비둘기같이 살고 싶어."
모두 웃는다.
"사랑하는 여자하고..."
"그래요. 사랑하는 여자하고, 인생이란 별 것 아니야. 남아장부 어쩌고 저쩌고 큰소리 탕탕 쳐봐도 그것 모두 착각이라구."
"그러면 데려우지 왜 혼자 살어."
"사랑하는 여자라면 놔두고 왔겠어? 유감스럽게도 내 인생의 비극은 결혼에서 시작된 거요."
앓는 소리.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고, 나이가 몇인데."
"왜 아니래. 돌이킬 수 없으니 한탄 아니겠소. 후회스럽지 후회스러워. 말라빠진 박오가리 같은 내 인생,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이렇게는 안 살아."
"하긴 말라빠진 박오가리 같은 인생인 것은 누구나 매일반이야. 일하고 밥 먹고 똥 싸고... 재미없어. 뭔가 있을 것 같고 있을 것 같아서, 있긴 뭐가 있어. 벽에 이마빡이 탁 부딪는 순간 속았구나! 세월은 저만큼 달아나고 없는데 속았구나! 해봤자 소용없지. 쟌쟌 바라바라 칼쌈이라도 해서 콱 죽고 싶은 심정, 아아 인생은 무엇이냐! 착각이로다! 끝없는 권태로다! 바닷가에 가서 사시미다 실컷 먹었으면."
실없는 얘기를 웃기만 하고 듣고 있던 오가다가 말했다.
"나 같으면 사랑하는 여자하고 만주리나 가서 살겠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게요? 그건 악취미다."
"왜?"
"아니면 자학인가?"
"어째서?"
"차라리 땅끝에나 가서 살지."
"땅 끝이 문젠가? 사랑하는 여자가 문제지."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가다상이야말로 진짜 로맨티스트다. 대련에서 집 짓고 사는 사 내 그건 속물이지."
하는데 트럼프를 잽싸게 섞고 있던 세츠코가
"지로상, 난 땅 끝까지는 안 가아."
한마디 던진다.
"누가 가자 했나?"
튕기듯 하는 오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끝까지는 안 가도 남호에 가서 보트 놀이는 한다."
대련 가서 집 짓고 살고 싶다든 사내가 놀리듯 말했다. 남호는 신경 교외에 있는 황룡공원의 호수다. 오가다는 세츠코하고 두서너 번 그곳에 가서 보트를 탄 일이 있었다. 그래서 놀렸던 것이다. 세츠코는 행실이 단정하다 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음탕하거나 부패한 여자는 아니었다. 실연은 하고 만주로 왔다는 얘기, 그래서 결혼도 안 했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성격은 직업 탓인지 활달했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등 거침이 없었다. 오가다도 그와 잠자리를 같이한 일이 몇 번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생리적 욕구였을 뿐 애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세츠코는 여러 남자와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가다에게는 특별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가다가 독신이었기 때문에 내심 부평초 같은 자신을 고정시키고 처리하고 싶은 계산이 있었는지도 모르다.
"오가다."
무라가미가 불렀다.
"네, 선배."
"술 안 하겠나?"
"나중에 하지요. 그보다 오쿠상(부인) 커피나 한잔 주십시오."
나미에한테 말했다.
"어머! 내가 잊고 있었네요."
나미에는 서둘러 하녀를 불렀다.
"나도 하도 한잔."
세츠코가 말했다.
소파에 앉아 잡담하던 사내들은 자리에 옮겨 마작을 시작했고 오가다에게 로맨티스트라 하던 사내, 만철에서 만드는 홍보 영화에 관계하는 하야시 노부오하고 오가다가 남았는데 무사가미와 오이가 합석을 했다. 무라가미를 제외하고 세 사람은 향기가 짙은 커피를 마신다.
"대련의 공기를 어떻든가?"
궐련을 꼬나들고 무라가미가 오가다에게 물었다.
"그렇지요 뭐. 별다른 게 있겠습니까?"
오가다는 관심 없다는 듯 대꾸한다.
"얼마 전에 상해를 다녀왔는데 굉장해."
"학살 말입니까?"
하야시가 얼른 물었다. 무라가미를 고개를 끄덕인다.
"오가다 자네처럼 모두 코스모폴리탄이 되든지 해야지,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어."
"엄청난 숫자라 하더군요."
오이의 말이었다.
"몇 십만이라 하기도 하고, 그 어마어마한 숫자를... 아마 중국군 전사자도 포함이 된 걸 꺼야."
"모두 민간인이라는 말도 있어요."
오이가 말했다.
"아무튼 얼마나 시체를 묻었는지 자동차가 가는데 땅이 흐물흐물 떠가는 듯 하더라는 게야."
"필요악이라 할밖에 없지요, 전쟁이니까. 인류가 가끔 미치는 것 그게 전쟁이며 학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귀결 지을 수밖에 도리 없지요."
오리가 말했다.
"그런 소리 말게.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 미치기는 왜 미쳐."
무라가미의 비꼬는 말을 들으며 모두 쓰게 웃는다.
"정당함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부당한 것이 정당하다, 오늘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시작했으니 전쟁에는 이겨야 하고... 모든 것이 칼인데 어쩝니까. 말도 칼, 예술 모두가 칼로 집결되는 그 속에 우리가 존재해 있으니까 어쩝니까?"
하야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어지간히 배짱은 있고 상당히 일본의 무사도를 미화하고 싶은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지만 이번에 내가 느낀 것은 학살의 숫자가 아니고 바로 그 내용이야. 칼까지는, 나 얼마든지 동반할 용의가 있어. 인간이란 궁극적으론 이기주의니까 남보다 내가 잘 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정할 수 없어. 그러니까 충용무쌍한, 천황의 적자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국가의 이익,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약탈과 살상,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니 찬양을 한다 하더라도, 아니지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자고로 전쟁이란 영웅들을 창출해낸 것만큼은 틀림이 없고오."
"아니 뭐하는 겁니까? 연설인가요?"
오가다 말에 모두 슬그머니 웃는다.
"허허허 참, 나도 스고이모노(끔찍한 것)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야, 꽤 취미가 있는 편인데."
"뭐 누가 그것 모릅니까? 우리도 다 압니다. 그들의 만행을, 소년같이 부끄러워 말 못하는 건가요."
하야시가 말했다.
"자네들이 안다고 해도 거기까지는 모를 게야. 얘기하지. 용약 출정한 병사들이 가족에게 자신의 전공을 알리는 것. 그것 역시 본래 인간의 허영이니 자연스런 일인즉슨 가족에게 자신의 전공을 증명하는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것 그것 역시 누가 나쁘다 할 것인가. 흔히 야만인들은 촉루에 술을 부어 마신다 하기는 하더라만 가족에게 부치는 사진의 내용에."
"참 숨 가쁩니다."
"중국인의 목을 짤라 수십 개를 쌓아놓고 피 묻은 칼을 든 자신의 모습을 찍어 가족에게 보낸다. 한데 말이야. 중국인의 남근을 짤라 마치 시가처럼, 목 짤린 중국인 입에 물린 사진, 상상을 해보아."
순간 세 사람의 낯빛이 확 달라진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슨 얘깁니까?"
얘기의 내용이 다소 스치고 갔는지 마작 하던 패거리가 물었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진을 받은 암 짐승은 도시 어떤 얼굴인지 한번 보고 싶군요."
신음하듯 오가다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언제인가 일본인은 천벌을 받을 것이오."
오이가 말했다. 그렇다! 일본인은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후일 세계에서 최초로 그들은 원자탄 세례를 받지 아니했는가.
"그만둡시다. 술이나 주십시오."
하야시가 말했다. 무라가미는 어디로 갔는지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세 사람은 스낵 바같이 된 곳으로 와서 그들 스스로 잔을 꺼내어 양주를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사시미나 실컷 먹고 싶다던 사내, 오가와도 합세하여 술을 마신다. 여자들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가면 뭘 하니? 더 놀다 가아."
나미에가 말했다.
"누구 애인이라도 만나는 거야?"
세츠코가 말했다.
"나 애인 같은 것 없어."
"지겨울 텐데?"
"그거야 뭐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니야?"
"나 다해코상 마음 알아."
"..."
"다해코상은 씩씩한 남자 칼찬 남자가 좋지? 그렇지?"
"그야 뭐 여자들은 다 사내다운 사내를 좋아하기 마련 아닐까?"
"이를테면 무라가미상 같은 호골형의 사나이, 맞지? 내말이 맞지 않아?"
세츠코는 다해코를 몰고가듯 생글생글 웃으며 쳐다본다. 다해코의 얼굴이 빨개진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언니 앞에서."
"괜찮아. 걱정 말어. 나 질투 같은 것 안 해. 그야말로 지겨운 판에 네게 들어와 날 해방시켜주면 얼마나 좋겠니."
나미에는 깔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해코가 무라가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나미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또 지겨운 판에 해방시켜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말도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세츠코는 그러저러한 사정을 알고서 한 말이었다.
"무라가미상이 들으면 칼바람이 불어."
세츠코는 단발머리를 흔들듯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 무라가미는 보기보다 양순하고 점잖은 신사야. 그보다 세트코상 결혼 안 할 거예요?"
트럼프를 엎어놓은 채 여자들은 주스를 마시며 잡담이 주다.
"상대가 있어야 하지."
"이젠 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하는 거요?"
다해코는 앙갚음하듯 말했다.
"그런 셈이지."
"당신 사상은 어떡허구?"
"결혼해도 사상 가져가면 될 거 아니야?"
"성의 자유도?"
"그거 하나는 버려야겠지, 하하핫핫."
세츠코는 사내같이 웃었다.
"오가다상은 결혼 안 한다는 거요?"
나미에가 물었다.
"저 사람은 데꾸노보오야. 결혼하기 다 틀린 사람이지."
"왜? 사내구실 못하나?"
"천만에, 훌륭해."
여자들은 낄낄거리며 웃는다.
"하면은 왜 못하는 거야?"
"그야말로 못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지. 난 호걸보다 저리 나약해 뵈는 사내가 좋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어?"
"있겠지. 실연했나부지. 나미에상도 저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오?"
"요조숙녀도 아니겠고 감출 필요도 없지. 나 저 남자가 좋아. 하지만 남녀의 관계란 연대가 맺어지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난 지카마츠의 신주모노(동반자살) 따윈 질색이야. 죽네 사네 그것 다 이십대 얘기라구. 사는 게 피곤해서 말이야. 무라가미가 미워질 때도 있지만 내가 떠나도 무라가미 같은 사내 다시 만나진 못할 꺼야."
지카마츠는 에도 시대의 죠루리 작가(극작가)로서 애욕물, 남녀 동반 자살의 작품이 많다.
"대단히 현실적이야. 나 그래서 나미에상이 좋아. 젖는 여자는 손바닥에 솟는 땀처럼 끈적끈적해서 싫어."
겉멋이 들었다고 하나 대륙에 와서 대륙의 풍상을 겪고 대륙적이 된 여자들의 거침없는 대화다. 그새 오가다는 속이 좋지 않았던지 소파로 돌아와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었다. 세츠코가 다가간다.
"지로상 속이 안 좋아요?"
"그래."
얼굴을 찡그렸다.
"뭐 약이라도 가져올까?"
세츠코는 오가다 가까이 얼굴을 바싹 대며 묻는다.
"일없어. 저리 가아! 혼자 있고 싶어."
"알았어. 도련님께선 뭐가 그리 심난하실까?"
"뭐라구?"
하다가 오가다는 도련님이란 말에 기가 차는지 쓰게 웃는다.
"그래도 얼굴을 좋아졌는데?"
세츠코의 손이 선뜻 다가왔다. 오가다의 수염 자국이 까실까실한 턱을 만진다.
"뭐하는 거야!"
오가다는 노하여 세츠코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사랑스러워 그러는데 왜 그래?"
"건방진 소리 말어! 누가 누굴 보구."
"애인을 보구."
"너도 딱한 여자다 교태를 부려 어쩌자는 거야. 징그러워!"
평상시와 달리 오가다의 말투에는 혐오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순간 세츠코의 낯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는다.
"오가다상!"
"..."
"말 수정해요. 교태라는 말을 유혹으로 수정하시오."
"뭐?"
"난 당신을 유혹했을지언정 교태는 안 부려. 사내자식들이 여자를 유혹하면 여자도 사내새끼 유혹할 수 있는일 아니야? 그래 유혹하는 사내보고 교태부린다 해야겠어? 졸장부 같으니라구, 남자가 뭐 그리 대단히! 남자라는 망상 때문에 사내들이 작아지는 게야! 알다시피 난 남녀 평등주의니까 여자라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질 않아! 취소해요 교태라는 말."
세츠코의 기세는 맹렬했다.
"내가, 내가 토할 것만 같았어..."
오가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6장 일본인의 시국관
오가다가 여행을 결심하고 회사에 휴직계를 낸 것은 장고봉사건이 발생한 후 말경의 일이었다. 장고봉사건이란 조선, 소련 그리고 만주의 국경이 마주치는 두만강 하류, 장고봉에 소련군이 진격해온 사건이다. 사소한 일이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은 순수한 여행일 때 즉흥적이거나 사소한 일이 동기가 되는 수가 많다. 이번 오가다의 경우가 그러했다. 무라가미의 객실에서 농담도 버린 말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하고 만주리에 가서 살고 싶다, 오가다는 그 말을 하는 순간부터 여행에의 유혹을 느꼈던 것이다. 몇 해 전에 만주리, 그 황막한 고장에서 오가다는 인실을 생각했다. 하기는 어찌 만주리에서만 인실을 생각했겠는가, 어느 때보다 인실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그러는 편이 옳은 표현이다. 만주리는 북만의 끄트머리, 겨울에는 수은주를 영하 오십 도까지 끌어내리는 국경 도시였다. 낙타가 썰매를 끌고 지나갔으며 끝없는 빙원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끼와 같은 각기 다른 인종이 무겁고 긴 옷자락 끌며 실루엣처럼 움직였고 인도인의 터번 같은 러시아 정교 교회당의 돔은 짧은 한나절, 햇볕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마지막 지점까지, 사람이 올 수 있는 땅 끝까지 왔다는 쓰라림, 뼈에 스미는 고독감이 오가다의 발목을 휘어 감았고 휘청거리게 했다. 그 만주리에 대한 기억, 여행을 다시 하리라 결단을 내리게 한 것은 장고봉사건이었다. 머지않아 세상은 온통 전화에 뒤덮일 것이란 생각, 이번에 떠나지 않는다면 다시 떠날 수 없으리란 예감, 어쩌면 자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러한 오가다의 생각은 망상이 아니었다. 장고봉사건은 6월 11일에 소련군 침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도 기관은 그 사건에 대하여 일주일을 침묵했다. 지면 한 구석에 작은 활자로 보도된 것이 17일, 소련의 불법 월경이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기사였다. 그렇게 시작해서 차츰 신문은 사건을 크게 다뤄나갔다. 19일에서부터 장고봉사건은 단연 톱기사로 연일 계속되었고, 외교적 해결책에 광분하는 일본의 실상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왜 일주일 동안 그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는가. 손톱만한 사건, 없는 것도 만들어서 대서특필 침략의 구실로 삼던 일본으로서는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가 약하다 싶으면 사악하기가 뱀 같고 늑대같이 포악해지지만 상대가 강하다 싶으면 순식간에 쥐새끼로 표현하는 습성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 할 수 있겠으나 여하튼 일본의 고민이 얼마나 심대하였나 단적으로 설명이 된다.
오가다가 떠나기 전날, 무라가미의 집에서는 송별회, 그것은 편의상 그랬을 테지만 실을 불평분자들의 불평을 토로하는 불평회라 하는 것이 옳았는지 모른다. 만주에서 일본 군부의 덕을 보고 사는 차지이긴 하지만 이들 무라가미나 하야시, 오가다, 교사직에 있는 오이는 별도로 하고 일본 본토에 뿌리를 내리며 살기에는 하자가 있는 인물들인 것만은 사실이다. 사회주의다 무정부주의다 하며 떠들고 다녔던 젊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사내는 대낮부터 다다미가 깔린 내실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나미에는 홀로 있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갈 때 나미에는 츠다 다해코를 불러 사용인들의 감독과 무라가미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달리 적합한 여자가 없었긴 했지만 하필 무라가미를 사모하는 다해코를 데려다놓고 간 나미에의 심사를 선의로 보아야 할지 악으로 보아야 할지, 화류계를 누비면서 남녀 문제에 간이 트인 나미에는 다해코의 정열에 동정한 나머지 기회를 주었다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다해코에 대한 능멸의 의도로도 볼 수 있었다. 여하튼 다해코는 잔뜩 모양을 내고 며칠간의 주부 역할에 설레이고 있었다.
"다해코상."
술을 마시던 무라가미가 불렀다.
"네."
따뜻하게 데워진 술병과 술안주를 탁자에 놓고 빈 병과 빈 접시를 걷어 차판에 옮기며 다해코는 무라가미를 그윽이 쳐다본다.
"아이코한테 시키시오. 그애도 잘해요."
잠시 동안 원망스러워하는 표정이더니
"네. 그러겠습니다."
하며 그림자같이 나가버린다.
"이제는 궁덩이 처박고 사는 데도 신물이 났다. 나도 그만 훌훌 벗어버리고 떠났으면 좋겠다."
무라가미가 말했다.
"그게 어디 쉽겠어요?"
하야시 말에
"하긴 그래. 발목이 꽉 잡혔어. 나이에도 자신 없고."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나이지요. 만년 소년 오가다상이 부럽소. 사학도니까 여행의 명분도 있고, 목적 없는 것 보담은."
말하는 오이를 보고 오가다는 쓰게 웃었다.
"거창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그냥 떠나보는 겁니다."
"혼자 여행이란 사무치게 외로우면서 한편 달콤하거든. 그건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게야"
"무라가미상 당신, 꽤 로맨틱하더군요."
오이가 의외란 듯 말했다. 순간 무라가미는 수줍은 듯 양어깨를 좁혀보다가
"여태 그걸 몰랐어? 아라무샤(거친무사) 같은 내 상판 때문에 별명도 후라이보즈지만 실상 나는 사스라이모노라구."
모두 낄낄거리며 웃는다.
"왜 웃어?"
"사스라이모노라... 그 큰 덩치가 웃겠어요."
하야시 핀잔에
"그건 모르는 소리야. 사람이란 현실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스라이모노가 될 수 없어. 그 현실적 욕망에 끝까지 매달리는 사내들을 보면 대개 덩치가 작아. 예를 들자면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같은 인물인데 집념이 강하고 독한 거지. 덩치 큰 놈치고 뒷심좋은 경우는 드물어. 어딘지 모르게 느슨하고 뒤통수 얻어맞기 일쑤고."
"그건 편견이오. 그런 말이 어딨어. 누가 보아도 무라가미상은 실속파고 나 같은 훈장이야 빈껍데기, 그렇게 말하면 억울해. 골목대장은 무라가미상 같은 사람이 항상 도맡아 하는 거 아니오?"
몸집이 작은 오이가 분개하듯 응수했다. 무라가미는 호걸같이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하긴 그래. 그간 일본을 지배해온 것은 골목대장이었어. 그리고 오늘도 골목대장의 시대야. 사방이 흐렁흐렁 망가져가고 있는데 도쾅! 도쾅! 돌격! 돌격! 하면 다 되는 거로 알고 있지."
"돌격 시대도 이젠 끝났어요. 깐죽깐죽, 계집애처럼 징징거리고 있어요."
하야시가 씹어뱉듯 말했다. 오이가 반문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즘 신문 보면 그렇게 돼가고 있더군. 주먹질이 아니라 손톱을 세워 할퀴고들 있어. 예를 하나 들자면 이제 장개석이 갈 곳은 어디매냐! 장개석이 갈 곳 걱정하게 돼 있어요? 잡아 죽여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뱃속이 훤히 들여다뵈는 수작."
"그거야 신문이란 통속적인 거니까."
"저도 통속적인 탓으로 돌리고 싶소. 통속적이다 할 때는 여유가 있으니까, 말하자면 독자들 구미에 맞추는 거니까, 지금 그런 여유가 있는 겁니까? 장개석은 용공주의, 방공국가에 대한 적대 감정 노골화 따위도 있었지요.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하고 일본이 교전중이라는 사실, 빨갱이라서 싸운 것도, 흰둥이라서 싸운 것도 아니지 않아요? 싸우면서 네 옷이 희다 붉다 한들 싸움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아요? 그거 다 손톱 세워 할퀴는 작태고 그 작태 자체가 요아내에 지나지 않아요."
"그거야 영미를 의식한 때문이지. 영미와 중국을 이간하기 위한 의도 아니겠어?"
"참 딱한 소릴 하는군요. 확실히 무라가미상은 느슨해."
"들이판다고 뭐가 나오겠어. 부질없는 일이다."
"영미를 의식하고 이간질을 하고, 그런 얘기 세 살 먹은 애들한테도 안 통해요. 소련에 대해서도 내부 사정이 어떻고 숙청이 어떻고 붕괴되느니 어쩌니, 그게 걱정을 분석하는 그런 단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이 아니지요. 다만 일본의 희망 사항일 뿐이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장개석이 갈 속이 없어지고 소련이 내부에서 붕괴되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야말로 가미가제를 기다리는 애절한 심정, 그 용감무쌍한 골목대장들이 말입니다."
하야시는 얼음같이 차갑게 비웃었다.
"하야시상 말엔 나도 동감입니다. 한마디로 치졸하고 비겁해요. 전쟁이란, 그중에서도 침략전쟁에 정당성이 있을 수 없고 이성적이며 세련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야만성에 있어서는 주먹질이 할퀴고 꼬집는 지경으로 갔다면 그건 약세를 그러낸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지요. 장개석이가 이탈리아 선교사에게 철퇴 명령을 내린 것은 이탈리아가 방공국가이기 때문은 아니지요. 일본과 독일과 이탈리아가 방공 협정한 때문인데 방공이건 친공이건 그건 의미없어요. 협정 자체가 장재석은 싫었던 겁니다. 그거야 자연스런 감정 아니겠어요? 내 원수와 친하게 지내는 상대를 배척하는 건 조금도 무리가 아니지요. 이탈리아가 일본하고 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방공. 친공 어느 쪽이든 장개석한테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기사가 군부의 지시건 기자가 자의로 했건 하여간 치사스럽지요."
팔짱을 끼고서 오가다가 한 말이었다.
"신문이란 으레 그런 거 아닌가. 사회주의가 일본 전국에 만연했을 때 평신저두, 젊은놈들한테 온갖 아양 다 떨던 신문이 요즘은 어떤가? 천황과 황실과 황군을 빼고 나면 볼 게 없어. 위문품, 국방 현금, 긴축 생활, 폐품 이용, 국민정신 총동원, 그리고 뭐가 있어? 날이면 날마다 충용무쌍한 황군을 찬양하고, 기념행사, 신사 참배, 그런 것 말고 뭐가 있어?"
"있지요. 또 있습니다."
물고 늘어지듯 하야시가 말했다.
"있긴 뭐가 있어! 새삼스럽게 그래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라구. 일본인은 모두 이골이 났고 중독이 돼버렸는데 자네 혼자 결벽증 부린들 뭐가 달라지나? 하기야 지금 우리가 지껄이고 있는 말 자체가 아무 소용없는 겁쟁이들의 속삭임에 불과한 거지만... 생각 안 하는 게 젤 좋다. 내일 죽을지라도 오늘 사는 것만 생각하면 되는 게야."
무라가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하야시는 마치 강행군이라도 하듯 말을 계속했다.
"군사 고문 간청을 프랑스는 필경 거절, 장의 읍소 애원도 허사라, 극동에 대한 관심 상실, 영국 외교에 추종, 내우외환에 직면한 프랑스는 극동 분쟁 개입을 엄중히 경계, 역시 이것도 일본의 희망 사항인데 도대체 프랑스의 역할이 뭐지요? 일본하고 중국이 싸우는데 프랑스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뭐냐 말입니다. 흔히들 변죽을 친다고들 하는데 변죽치고는 구만리 밖입니다. 프랑스는 제 코가 닷자 오치나 빠졌으니 극동엔 관심없어 얼마나 다행이냐, 역성을 들어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가타부타 말 없는 것만도 감지덕지지."
"그쯤 해두게나. 지금 와서 자존심 따위는 논할 처지도 아닌 게야. 자네도 꽤나 집요하군. 근본도 돼 있질 않은데 지엽을 따져 어쩌겠다는 게야."
"아닙니다. 나는 일본의 드러난 모습을 똑똑히 보아야겠어요. 처량하면 한 대로, 갈팡질팡하면 하는 대로 실체를 보아야겠어요.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그래서는 안 되겠어요. 국민 전체가 처지도 아니라 했지만 나도 자존심 따위 논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애당초 자존심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자만심이었지요. 그 강국이라는 환상의 자만심이 우리들 생존을 위협하고 국가 민족을 존폐의 기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째서 지엽적인 문제겠습니까.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 하며 노닥거리던 그들이 이제는 전쟁은 장기의 건설, 중국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 하고 노닥거리고 있어요. 이 엄청난 비리에 허우적거리면서 한편으론 영국 대사 한구행으로 영국의 일지조정설 농후, 하며 처참한 비럭질을 하고 있고 오개국 공동으로 화평 알선에 진출설 하며 기사가 나인데 결국 그것은 모두 일본의 희망 사항일 뿐, 거기다가 비 맞은 강아지 엉덩이 걷어 채이듯 영미와 중국 간에 차관 문제가 거론되고 있으니 아무리 국제간의 일이란 몰염치하다 하더라도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런 얘기 자꾸 하면 목에 백 개 있어도 모자라."
"압니다. 중국인들이야 모가지 땡강땡강 잘라버리면 그만이지만 일본인은 모두 철조망에 매달린 박쥐 신세지요."
"화평 얘기는 이미 끝난 거야. 세계에서 누구 하나 중재해줄 사람도 없거니와 마차는 이미 내리막길을 굴러가고 있어. 이제 전쟁은 사람들 의지 밖에서 진행이 되고 있어."
무라가미는 우울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화평의 기회는 지난 정월, 제국정부 성명으로 영원히 잃은 거야. 후회한들 아니 한들 그건 일본이 묶어버린 매듭인 게야. 말하자면 운명 같은 것 아니겠나."
하야시는 술잔을 들었고 나머지 사내들도 분노 같은 것을 삼키며 술을 마신다. 지난 정월 16일 일본이 발표한 제국정부 성명이란 확대파, 그러니까 중일전쟁에서 응징을 주장하는 강경파의 승리로 내민 것이라기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기분, 하야시의 말대로 자만심에 밀리어 이도저도 할 수 없이 내던져진 주사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남경 함락 후 전선의 확대가 불가피해진 일본은 내심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띄운 것이 화평이라는 기구였고 미국과 영국에 중재 해줄 것을 은근히 요망했다. 물론 화평 교섭을 마다할 나라는 없을 테지만,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시카고 연설에서 일본을 전염병 환자로 규정짓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을 격리하여야 한다. 그런 극언을 한 바 있었으며 비연맹국이라는 이유로 일본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는 중국의 일본 침략 제소를 받아들여 구개국 조약체결국회의에 안건을 내놓는 등, 소련처럼 직접적인 군사 원조는 아니 했으나 분명히 중국 편에서 방자한 일본에 치를 떠는 영미를 믿을 수 없었던 일본은 중재 역할을 독일에게 가져가는데 문제는 상대, 장개석이 응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것은 원상 복귀 이외는 없었다. 갖은 지랄을 다한 일본의 모든 행동이 도로로 끝나는 그 조건이나마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의 사정, 그러나 그들이 첫째 봉착한 것은 정부나 군부 이상으로 전쟁열에 들떠 있는 국민에게 뭐라 할 것인가, 총동원하여 전쟁의 열기로 몰아붙여 놓은 국민들을 납득시킬 방법이 있는가. 남경 함락 후 전승에 취한 국민들은 날이면 날마다 일장기 행렬, 등불 행렬로 법석을 떨고 있었으니, 그러는 동안 각 파의 반목과 대립은 오기를 자극하고 고조시키면서 화평 조건은 차츰 강경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단이나 의지도 없이, 일관된 작전이나 대비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밀어붙이자, 일본 권익 침해에 대한 배상은 전비 배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중국이 체결한 군사 협정의 파기 요구, 게다가 중국측에서 강화사절을 일본으로 보내라는 등 그 밖의 경위 없는 제반 요구를 첨가하면서 화평이기보다 항복 요구나 다름없는, 되지도 않을 일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성을 잃은 일본이 현실적인 정세를 도외시하고, 아니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애써 판단하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다분히 자포자기적인 흐름이었다. 비둘기보다 매가 강하다는, 뼛속까지 스며든 일본인의 생각, 사야아데(지나가던 무사들의 칼자루가 서로 부딪는 것을 시비하는 일) 때문에 칼을 뽑고 싸우는 그들 일본인, 걸국 제국정부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들 스스로 내놓은 화평안을 그들 자신이 막았고 일본은 비극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데 그 후안무치한 제국정부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국정부는 남경 공략 후 계속 중국 국민정부의 반성에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민 정부는 제국의 진의를 모르고 함부로 항쟁을 책동했으며 안으로는 도탄에 빠진 안민의 괴로움을 무시하고 밖으로는 동아전국의 화평을 원치 않았다. 하여 제국정부는 이후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며 제국과 진실로 제휴하기에 족한 신흥 지나 정권의 성립 발전을 기대하며 이들과 양국 국교를 조정하여 갱생 신지나 건설에 협력하기로 한다. 물론 제국은 지나의 영토와 주권을 위시하여 재지 열국의 권익을 존중하는 방침에는 추호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동아 화평에 대한 제국의 책임은 보다 무겁다. 정부는 국민이 이 중대한 임무 수행을 위해 한층 더 분발해 줄 것을 기망하여 미지 않는다.
남경 거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수십만의 원혼이 통곡하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일 듯도 한데 심장에 철판을 깐 일본 정부는 도탄에 빠진 인민의 괴로움을 국민정부가 무시한다 하며 전가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남경 함락이 있은 지 한 달가량이 지난 1938년 정월 16일, 실은 성명이 발표되는 그 시각에도 남경에서는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군부를 누른다고 들어간 고노에가 도리어 군의 볼모가 되어 전쟁까지 일으키고... 도시 일본이란 어떻게 돼 먹은 나라인지 도통 모르겠어."
오이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군부를 누른다고? 폭지응징의 목소리는 고노에 쪽이 더 컸다구 평생 응징만 했지 고개 숙여 사과 따위는 한 적이 없는 누대의 귀족이라 녹는 것은 국민뿐이야."
하야시의 말을 받아서 무라가미는
"고노에가 나가소대(긴 소매)의 면면한 구교오 출신이라고는 하나 세계 속에선 어쩔 수 없는 이나카사무라이(시골 무사)야, 제아무리 권모술수로 살아남은 가문이라 하더라도 기분이 앞섰지 실리에는 어두워. 기분 내는 놈치고 바보 아닌 건 없지. 한마디로 인내와 저력 같은 것이 없는 인물이야. 화려한 문벌로 군부를 누른다, 하기는 일본 놈들 문벌에는 약하니까 말이야. 그러나 늑대 같은 군부를 고노에를 통해 천황을 싸안아가지고 제멋대로 놀아난 거고, 그게 또 일본의 전통이며 역사였으니까."
"웃기는 것은 전쟁 선포도 없이, 지금까지 사변으로 밀고 나가면서 대본영은 또 뭐지요?"
하야시가 내밭았다. 오가다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지난 런던 군축회의 때 시끄러웠으니까 그랬겠지요. 내각이 군축조약에 조인한 것은 천황의 통수권의 간범이라 하며 좀 떠들었습니까? 쿠사가리 소좌가 자살을 안 하나, 하마구치가 테러를 당하지 않았나, 골치깨나 썩인 사건이었으니까."
"다 겉치레지 뭐. 코사가리도 미친 놈이고 유서에 뭐랬던가? 신국 일본은 그대의 충사를 필요로 한다. 옛날 와캐노기 요마로, 구스노기 마사시개가 있었고, 그대 쿠사가리 쇼지를 세삼신으로 함... 소좌쯤이면 젊지도 않았을 텐데 유치하기가 짝이 없어. 일본 놈들 의식 수준은 아무리 밖에서 뭐가 들어와도 자랄 줄 모르거든. 선전 포고 없는 대본영이라는 것도 그래, 낯가리고 아웅, 천황을 떠받드는 착하면서 천황 둘레에 울타리 친 건데, 그런 모든 세공이 결국 국민들을 환상적 충사로 몰고 간단 말이야."
무라가미는 유가다 깃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앞가슴을 극적 극적 긁는다.
"그럼 참본은 어찌 되지요? 지금까지 참본은 다데야코쿠샤(가부키에서 협객이 되는 배우)였는데 밀려나는 건가요?"
오리가 물었다.
"밀려난다... 글세, 그보다 나는 분파 작용으로 보고 싶어. 우익도 여러 갈래, 강경파의 갈래도 좀 많아? 그런가 하면 화평파의 목적이 다른 것도 아니지 않는가. 군국주의로 가는 목전에 한푼의 차이도 없거든. 예를 들어 통제파의 나가다가 참살을 당하고, 2.26사건으로 황도파가 무너지고, 그들이 그렇게 대립하고 상쟁했지만 목적은 같은 것 아니었느냐 말이다. 안 그래? 그렇다면 대본영이건 참본이건 육군성이건, 또 하나이건 열 개이건 다를 것이 없다. 무의미한 거지. 누구 보증하는 사람도 없는데 세삼신이 되겠다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버리는 놈의 무의미와 통하는 거지."
통제파란 재벌과 관료와 제휴하여 군부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시체제를 수립하는 데 목적을 두고, 군부 내의 통제를 주장하는, 육군성의 좌관급 장교들이 주체가 된 파벌로서, 사 년 전에 통제파의 리더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다 중장이 황도파의 아이자와 중좌에게 참살 당하였고, 황도파는 아라키 사다오, 마자키 진사부로 두 대장을 수령으로, 육군부 내의 위관급 청년 장교들로서 형성된 파벌이며 천황 중심의 국체지상주의를 선봉하고 통제파와 항쟁했으며 직접적 행동으로 국가 개조를 꾀하여 2.26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침몰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원인이야 훨씬 더 멀리 올라가서 규명되어야겠지만 일본을 오늘로 몰로 온 가장 중요한 인물을 나는 다나카 기이치로 보고 있어. 또 그런 유의 사람이 일본을 움직여왔다는 것이 일본의 역사를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이유이고. 다나카는 일로전쟁을 일으킨 육열차사건의 모략, 그 장본인인 것을 모를 사람이 없지만 천우신조라 할까 일로전쟁에 일본이 이긴 덕분에 다나카는 국민의 영웅이 되었고 출세가도를 달려 육상에서 정우회 총재, 드디어 수상에다 외상까지 겸한 다나카 내각, 그의 출범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만주를 먹고 중국을 먹겠다는 구체적 방침을 의미하는 거고, 통수권 간범에다 긴축 정책 등으로 나가떨어진 하마구치나 또 시데하라 외상의 내정 불간섭의 협조 외교를 강하게 밀고 와카즈키 내각이 좀더 오래 버텨주었다면 일본이 오늘과 같이 가파롭지는 않았을 게야. 시데하라라고 해서 만주 중국을 바라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위인이었겠나? 중국의 분열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시간을 재는, 말하자면 이성적이라고나 할까? 전후좌우를 잰다고나 할까, 적어도 그들은 군 출신이 아닌 까닭이로 당장 칼 들고 ?아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거든. 물론 하마구치나 와카즈키가 쓰러진 것은 경제 공황이지만 경제 공황은 대지 강경파가 연약외교를 부숴버리는 도구로 쓴 것이야. 아무튼 그렇게 해서 밀고 들어간 다나카의 첫 논리가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 산동 출병이 세 차례, 결국 가와모토의 열차 폭파로 장작림을 살해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무라가미의 말에 끼어든 오이는
"다나카의 상소문이란, 그게 과연 사실일까요?"
물었다.
"사실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문서든 문서 아니든 내용에 있어선 사실일 게야. 어디 다나카뿐이겠나? 일본 국민 전부가 대개 그 생각을 하는데, 바로 그게 일본인의 애국심 아닌가."
상소문이란, 그 내용이, 지나를 정복하기를 원한다면 첫째 만몽을 정복하지 않을 수 없고, 세계를 정복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첫째 지나를 정복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가미의 말대로 문서의 진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의 진위가 그랬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세계에서 떠들썩했던 그 문서는 일본인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이 일이었다."
"사실을 신문 한 귀퉁이 기살 가지고 뭘 그러나 싶기도 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은 너무 염치가 없는 쥐새끼야. 칼을 들고 나갔으면 적을 베고 이기든지 아니면 우치지니를 하든지 또 아니면 사과하고 화핼 하든지 할 일이지, 칼을 휘두르면서 이거 큰일났구나 누구 와서 말려주는 사람 없을까? 형편없는 졸장부들이야."
"어떤 젊은 장교는 중구과 싸움이 있기 전에, 일본이 삼 개 사단에 동원령만 내려도 장개석은 고시가 노캐루(허리가 빠진다), 그랬다더군요."
오이 말에 하야시가
"남진론 북진론의 싸움은 어떻고? 참으로 대단히 호기스럽지. 가슴에 주렁주렁 훈장을 매달은 육군, 해군의 장군들 모습처럼."
육군과 해군의 세력 다툼에서 시작된 대립과 반목에 관한 것인데 남진론은 영미와의 일전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해군의 우선론이며, 북진론은 소련을 겨냥하여 싸울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육군의 우선론이다. 그러니까 소련을 먼저 부숴야 한다, 아니 영미를 먼저 박살내야 한다는 논쟁으로 하야시 말대로 참으로 대단히 호기스러운 얘기다.
"중국과의 싸움만으로도 혀가 쑥 빠져 있는데 결국 전쟁만 하다가 우리 모두 죽자, 흥!"
오이 말에
"이미 모두가 양해 사항 아니오? 세계를 정복한다! 국민들이 모두 신나하는 말 아니오? 헌데 난감한 것은 무기 수입은 어디서 하누. 세계 정복의무기는 어디 있느냐 말이오."
하야시 말에 오이는
"해서 참본에서는 펄펄 뛰며 확대를 반대한 거 아닌가."
"뛰어도 소용없고 날아도 소용없어. 일본 전체가 본능의 동물인 게야. 판단이고 자시고 있나? 눈앞에 번쩍번쩍 금덩이만 보였지 발밑에 낭떠러지 있는 것은 생각지도 않아. 펄펄 끓고 있어. 전쟁으로! 일로, 오로지 전쟁으로! 승리는 따 놓은 당상, 최대한의 저항이란 것이 침묵과 몸조심, 입이나 뻥긋하게 생겼어? 지금 고도쿠처럼 반전이라도 외쳤다가는 길거리에서 모가지가 잘려 죽어. 하기는 고도쿠도 죽였지만 말이야."
무라가미는 술잔을 기울였다.
"고도쿠 얘기가 났으니 하는 말인데요. 작년에 만영이 설립되지 않았습니까."
무라가미는 하야시 얼굴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오스기를 죽인 아마카스 대위가 만영의 이사장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째 으스스해지는 얘기 아닙니까, 참으로 묘한 세상입니다."
"모략, 음모, 살인한 놈치고 출세 안 한 놈 어디 있어? 그러고 보면 만주사면의 주역 이시하라는 불우한 편이지."
역시 만주사변의 주역, 이다가키는 만주에서의 영화는 국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라 만주국과 만철이 자본금 오백만 원을 절반씩 출자하여 작년에 창립을 본 것이 만영, 즉 만주영화협회였다. 거기 아마카스가 이사장으로 온다는 소문이라는 하야시의 얘기다. 아마카스 대위, 그는 십오 년 전 관동대지진이 있었을 때, 조선인 학살이 진행되던 아비규환 속에서 사회주의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오스기와 그의 처, 그리고 조카를 함께 학살했던 바로 그 헌병대장이다.
"국영 영화라면 뻔한 거고, 국책 영화 아니면 선무용 영화일 터인 즉, 그렇다고 보면 아마카스가 적임자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가다가 말했다.
"와장창 모두 부서져나간다. 남을 게 없어. 일본이 텅텅 빌 거야."
오이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본래 뭐가 있기나 했나? 빼앗아오고 비럭질해오고 묻혀서 오고, 일본도와 후지산밖에 더 있어?"
하야시의 약간 고슬어진 머리칼이 이마에 쏟아져서 땀에 젖어있다.
"그건 너무 극단적으로 하는 말이고 하여간 큰일이야, 큰일. 지난봄에는 도대 교수를 위시하여 학자 클럽을 무더기로 검거했다 하고...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라.
오이말을 받아서 오가다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지. 천황기관설 때문에 미노베 박사가 호되게 당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유물론 이론가인 교수들 그냥 놔두겠어요? 기관설 때문에 그 야단법석한 것을 보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요."
무라가미는 하품을 깨물고 있었다.
"오가다상."
"네."
"당신은 미노베 박사의 천황기관설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날카롭게 물었다.
"그만하면 천황을 최고로 대접해드린 것 아닙니까? 역사적으로 천황이 최고 기관이기는커녕 비가 새는 궁정에 사시 일도 있었으니까요."
하야시는 씩 웃었다.
"한마디로 만화지요."
"네? 만화라구요? 그, 그렇군요. 만화군요. 국체명징론이라는 것도 그렇고, 평화나 자유라는 제목의 책들이 판금되는 것도 그렇고, 하하핫..."
오가다는 웃으니 하야시도 따라서 소리 내어 웃고 오이도 슬그머니 웃는다.
"신문도 그렇고 천황주권설을 들고 나와 미노베 박사에게 시비를 건 어용 학자 우에스기라는 작자도 그렇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그렇다 치고 자유주의 자본주의도 통과가 안 되는, 오로지 군도와 황도뿐인 세상, 군신이 대신 위로 올라갈까 무섭네."
하야시가 목을 움츠리고 오이는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 군신이 대신 위로 올라간 것이 뭐 새삼스런 일이던가."
평화와 자유라는 제목의 책들이란, 동대 교수 가와아이의 저서 "시국과 자유주의", 그리고 역시 동대 교수인 야나하라의 저서 "민족과 평화"인데 저서는 절판 처분을 받았고 두 교수는 모두 학교에서 쫓겨났다. 한편 천황기관설은 1953년 일본 조야가 발끈 뒤집어지는 대사건이었다. 천황에 관한 한, 일본의 속담대로 고양이도 국자도, 그러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다 나와서 설치는 것이 특히 요즘의 특색인데, 동대의 교수이자 법학자인 미노베의 청황기관설이란, 천황은 법인으로서 국가의 최고 기관이지만 통치권은 국가에 있는 것으로 해석한 데 대하여 천황주권설을 들고 나온 우에스기가 시비를 걸어왔고 국체명징에 위배되는 학설이라 하여 우익의 총공격을 받으면서 저서는 절판, 혹은 개정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서양 그쪽 어느 나라 황제가 국가 즉 짐이라, 했다는 말이 없지도 않으나 천황이 국가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아마 세계에 유래가 없을 걸."
오이 말에 무라가미가
"그래서 현인신 아닌가. 신은 국토도 만드니까 말씀이야."
"하면은 일본해나 태평양이나 어디 넓직한 곳에 국토를 만들면 될 텐데 어째서 전쟁 같은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왜 아니래?"
모두 한바탕 웃어제낀다. 웃음이 끝난 좌석은 무섭게 가라앉는다. 서둘러 사내들은 술잔을 든다.
"제어기랄! 이놈의 만화는 언제 끝나지? 전향, 추종 함몰, 도주, 감옥... 노동조합은 산업보국을 외쳐대야 하고 농민조합은 또 농업보국을 외쳐대야 할 판이니 침묵 침묵 또 침묵, 끝없는 침묵이다!"
"모가지 보존하려니까 어쩌누. 하야시 자네 국책 영화 제작에서 손 뗄 용기 있어? 없지? 안 그런가? 술이나 마시라구."
무라가미는 하야시 술잔에 술을 쳐준다. 하야시는 술잔을 들고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모가지 보존... 초라한 인생이다. 하기는 고바야시 다키지가 그렇게 무참하게 고문치사를 했건만 그것 때문에
볍씨 하나 굴러 떨어지지 않았어. 우리 같은 속인이 뭘 어쩌겠어. 이웃 동네 돼지새끼 한 마리 죽는 것보다 못해. 돼지는 고기나 먹지만 말이야. 특고에서는 고바야시의 무참한 고문치사를 의도적으로 소문을 냈다는 말이 있어. 이놈들아! 끽 소리 내었다만 봐라. 너도 그 꼴 될 터이니 알아서 하라고, 그거지 뭐겠나."
오이 말에 오가다는
"효과가 충분했지요. 사실 그 일 땜에 기가 콱 죽었거든.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야말로 좌익 작가들에게는 장송곡이었을 게요."
"그나저나 이래도 저래도 죽을 판인데 장고봉사건은 어찌 될까?"
"오이 걱정 말아라."
"무라가미상 무슨 좋은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무라가미상 무슨 좋은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독일에서 요리해줄 건데 무슨 걱정이야? 그래서 방공협정이란 게 있는 것 아닌가. 신문 못 봤어?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서는 세계 대전도 불사할 것이다! 무솔리니가 피력한 결의도 몰라?"
"왜 이러십니까. 독일. 이탈리아는 청맹과니란 말입니까? 소련은 일본이 요리해주겠지, 그래서 맺은 것이 방공협정 아니겠습니까? 그들도 코앞에 영국이 있고 프랑스가 있는데, 일본을 떡이나 먹고 구경하라 하겠어요?"
"하하핫하하... 그렇게 되나?"
"제가 궁금한 것은 소련과 영미의 관곕니다. 일본이 애태우는 것도 그것 아니겠어요? 소련과 영미가 적대하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일본은 천우신조지요. 과연 그들은 총을 겨눌 것인가 악수를 할 것인가."
"나는 절대로 적대 관계로는 안 가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보다 강한 것은 생존이니까요."
오가다의 조심스런 말이었다. 하야시가 이어서 말했다.
"중간에서 휘두르고 날뛰는 독일이 있는 한, 지금 독일은 고삐를 풀린 망아지 아닙니까? 그를 두고 소련과 영미는 싸우지 않을 거로 나도 보고 있어요. 일본이 그 일에다 희망을 건다면 그건 누워서 똥 싸겠다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미국의 경우도 그래요. 일본은 미국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요. 되도록 나쁜 방향에서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심정, 불쌍한 신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게 그 짓거리 아닙니까? 하지만 미국은 지금 공공연히 군비 확장을 하고 있으니까요. 중국에 군사 원조하는 것도 시간문젤 겁니다. 지금 가장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문제는 독일과 일본 사이에 있는 소련이 아닐까요? 일본이나 독일의 사정이 그야말로 오르내림이 없는 수평이거든요. 사정이 꼭 같아요. 소련이 장고봉을 공격했다 해서 그들 염두에 독일이 없겠어요? 공격할 때야말로 가장 강하게 독일을 의심할 겁니다. 소련도 극동과 구라파 양쪽에서 싸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소련은 조만간에 택일해야 할 거구, 그럴려면 어느 한쪽이 침공 안 한다는 확신이 서야. 어쩌면 소련은 국경 분쟁을 일으켜 일본을 자극하고 중국에 발목이 잡힌 일본은 휘몰아서 불가침 조약을 얻어내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일본이 총대 멘 군인을 누르면서 외교관이 뻔질나게 모스크바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면.“
"자네 말을 들으면 일본도 한시름 놓겠다 싶지만 그렇게 될까? 중국에 노골적인 군사 원조를 하고 있는 소련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어느 기간 동안일 겁니다."
"소련은 그러게 된다면 그것은 어느 기간 동안일 겁니다.."
"소련은 반드시 일본과 싸울 게야."
무라가미 말에 하야시도 동의를 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기 문제만 남겨놓고."
아홉시가 넘어서 오가다는 무라가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흐물흐물, 오가다는 흐물흐물한 땅속으로 자신의 발목이 빠져 들어가는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대낮부터 네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 계속 주고받은 얘기들이 마치 진창길처럼 질벅질벅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집에 남았을 무라가미나 제각기 숙소로 돌아갈 오이, 하야시도 아마 기분이 이럴 거라고 오가다는 생각한다. 형편없이 내리깎고 두들겨 패고 했지만 그 상대가 바로 자신들의 골육이라는 것, 자신들도 공범자라는 것, 오가다느 한 숨을 내쉬었다.
'내일,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하숙으로 돌아갔을 때, 문을 열어준 하숙집 여자가
"손님 오셨어요."
하고 말했다.
"손님?"
"여자 분이에요.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층으로 올라간 오가다는 자신의 거처방 방문을 열었다. 전등 밑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고가 세츠코가 돌아보았다. 수박색 마지의, 소매 없는 원피스를 입은 세츠코는 루즈가 짙어서 그랬던지 얼굴이 신선해 보였다. 보기 좋은 양 팔도 눈부시게 희었다.
"웬일이야?"
"응."
"하숙까지 찾아오고, 곤란해."
오가다는 힐란하듯 말했다.
"내일 떠난다며?"
세츠코와 마주보고 앉으며 오가다는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낸다.
"나한테 떠난다는 말도 없이 갈 작정이었어?"
"누가 그랬나."
"다해코상이 그러던걸. 오늘 그 집에서 송별연이 있을 거라구, 거기 갈까 생각했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오가다는 몸을 뒤로 물리면서 무릎 하나를 세우고 벽에 들을 기댄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로상, 당신 왜 그리 허황하지?"
"그런 것 물어서 뭘 해."
"허황한가 하면 마음을 꼭 닫아놓고 결코 열려고 하질 않아. 왜 그래요?"
"..."
"나 떼쓰는 것 아니예요."
"알아."
"결혼하자 할까봐 겁나서 그러는 거예요?"
오가다는 희미하게 웃는다.
"나하고 결혼하면 어떤 여자라도 의로워서 못 살 거야."
"왜지요?"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 그건 내 사정이야. 세츠코도 웬만한 사람 나타나면 결혼해."
"그거 연민인가요?"
"아니야. 차라리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일 거야."
하다가 퍼뜩 무라가미의 말이 생각났다.
'혼자 여행이란 사무치게 외로우면서 한편 달콤하지는 않거든. 그건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게야.'
저도 모르게 오가다는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내린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결혼하라, 그건 잔인한 거야."
그러나 세츠코는 분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열려진 창문에서 들어왔는지 나방이 한 마리가 전등을 맴돈다.
"지로상."
"응."
"산다는 것, 그거 대단한 거야?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아."
"산다는 것은 위대해. 아무리 평범하게 살아도 삶 자체는 대단한 거야."
"이기적으로 사는 게 훨씬 인간적이며 정직한 거 아닐까? 인생에 뭐 그리 거창한 의미가 필요해? 사랑의 순결 같은 것도 하나의 의식 과잉, 그건 자연이 아니야. 정직하다 보면 인간의 차부 같은 것 뭐 그리, 대단하게 죄악이라 할 수도 없잖아."
하면서도 세츠코의 표정은 몹시 쓸쓸해 보였다. 오가다는 세츠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츠코야말로 일본 여자군."
"...?"
"바로 일본인이고."
"그럼 당신은 일본인 아니라는 얘기야?"
그 말대답은 하지 않고
"일본인은 늘 그런 식으로 정직했지. 그런 식이라면 도시 정직이 뭐에 필요해?"
세츠코는 오가다의 심각한 표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목욕을 좋아하는 일본인, 그래서 깨끗하다, 목욕을 해서 깨끗해지면 그 이상의 여러 가지 깨끗한 것을 다 무시하고 자신은 깨끗하다, 깨끗하다, 하는 게 일본인이야. 속은 든 더러운 창자 생각은 안 하지."
조금은 이해한 듯한 세츠코의 표정이었으나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나방이 미친 것처럼 그림자를 통해 벽에 뿌리면서 난다.
"지로상 옷이나 갈아입어요."
뻔뻔스러워서 한 말은 아니었다. 세츠코는 무거운 침묵이 견딜 수 없었다. 오가다는 새로운 담배를 붙여 문다.
"지로상."
"..."
"나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되나?"
"안 돼."
"왜?"
"내 기분이 세츠코를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런 뜻 아닌데..."
순간 세츠코 눈에 눈물 같은 것이 번득였다. 세츠코는 코를 홀짝거리며 얼른 눈물을 삼켜버린다. 풀이 죽은 세츠코의 모습은 이상하고 어울리지가 않았다.
"이제 가아."
"우리는 다시 못 만나는 거야?"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그걸 누가 알겠어. 지금 전쟁 중이라는 것."
하다 말고 오가다는 자신이 먼저 일어서며
"바래다줄 테니, 자아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주택가의 사잇길은 어두웠다. 오가다는 세츠코의 팔을 잡아준다. 이상하게 그 팔에서 세츠코의 심장 뛰는 수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츠코는 떨고 있었다. 날씨가 흐려 있었는가, 하늘에 나돋은 별들이 가물가물, 그리고 희미했다. 큰길로 나왔을 때 오가다는 자연스럽게 세츠코의 팔을 놔주었다.
"지로상."
"음."
"차나 한잔 사주어. 이대로 가면 자살이라도 할 것만 같애. 너무 비참하지 않아?"
"저녁은 먹었어?"
"먹고 싶지도 않아."
"노도 술만 마셨다. 어디 가서 우동이나 먹자."
우동을 먹고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7장 떠나는 마차
북쪽으로 떠나기 전에 오가다는 금주에 가보고 싶었다. 금주로 다시 북상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금주는 이번에 가면 세 번째다. 왜 금주에 가보고 싶었는지 오가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때문이 아닌가 하고 오가다는 생각하였다. 끝없이 맑게 트인 하늘과 하늘은 따라 융단을 펴나간 듯한 시가, 다정하고 달콤한 도시도 아니었지만 생소하고 쌀쌀하며 거부를 나타내는 곳도 아니었다. 사람과 도시의 온갖 구조물은 왠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인 것 같았고, 감추거나 은밀하지 않았으며 도시 자체가 자연인 양, 세월은 한가하게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오가다에게 금주는 그런 일상적이었다.
열차 안에서 오가다는 편지를 썼다. 어디든 내리는 곳에서 편지를 띄우리라 생각하며 그는 서울에 있는 조찬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편지 첫머리에 "참으로 떠난다는 것은 홀가분한 일입니다." 하고 적은 뒤 안부와 자기 자신의 심경을 쓰고 끝맺음한 뒤 편지를 봉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오가다는 홀가분했다. 풍족하다 할 수는 없지만 일이 년 실컷 돌아다닐 수 있는 여비가 마련돼 있는 것에 우선 안심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삼 년 동안의 직장 생활은 이 여행을 위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혼자 쓸 만큼 써도 상당한 액수의 저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자신이 일본이었다는 것, 그 조건 때문인데 어쨌거나 출발은 매우 만족스런 것이었다. 신경을 떠난 열차는 달리고 또 달려서 사평가를 지나고 개원도 지나고 차츰 심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순에 가볼까?'
오가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순에 가려면 금주로 가는 방향과 달라져야 한다. 심양에서 대련 노선으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가둔에서 내려 무순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오가다는 수차 대련을 내왕했으나 차를 갈아타고 하는 일이 번거로워 무순에는 들르지 못하였다. 지금은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고 계획을 짠 여행도 아니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테지만 그보다 무라가미가 한 말이 생각난 때문인지 모른다. 호두 요새 얘기가 나왔을 때
"그곳은 끝없는 늪지대, 우수리강 건너편에 이만 시가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이동 상황도 살필 수 있는 지점이지. 중국인 노무자, 만주인 근로 봉사대, 말이 봉사대지 강제 징용인데 그들을 수천 명씩 끌고 가서 일을 시키지만 겨울에는 일을 할 수 없으니까 봄에 실어온 노무자는 가을이면 돌려보내게 돼 있어. 글세, 얼마나 돌아 갈 수 있었을까? 지하 요새는 물론 군용 도로, 포진지 구축, 그들 노무자는 사람이 아니야. 소도 말도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기계? 아니 연장이지. 하면은 얼마나 살아서 돌아가고 봄에는 다시 오겠는가. 늪지대에 내다버린 수없는 시체는 굶주린 늑대들 배를 채우는 게야. 공사가 끝나면 그들은 살아서 돌아갈까? 달 죽일 거라는 소문이네. 죽이고 죽기 위해 하는 공사에 인간을 끌고 와서 다시 죽이고... 어째서 인간에게 만리장성이 필요한지 모르겠어. 모르겠단 말이야."
한탄하듯 말했다.
'무순에 가서 나는 뭘 보려는 걸까?'
오가다는 가느냐, 그냥 지나치느냐 마음을 정하지 못한 데서 자문해본 것이다. 간다면 그는 뭘 보기 위해 가는가. 탄광에서 일하는 그 수많은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오가다는 그들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가서 보아야 할 이유가 애매하였다. 석탄뿐만 아니라, 철, 석유, 알루미늄, 그런 광석 매장이 세계 굴지인 무순 탄광, 보고라고들 하는 무순 탄광, 크면 클수록 매장량이 방대하면 할수록 그곳에서 소모되는 생명은 확대되고 삶의 권리는 보다 많이 박탈되고 유린되기 마련이다. 그들에 대한 아픔으로 그들 앞에 서서 바라보는 행위는 과연 정당한가. 오가다는 자신을 준열하게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가방을 팽개치고 그들, 가장 밑바닥 인생 속으로 뛰어들어 어깨를 비비며 땀을 흘린다, 그러나 역시 오가다는 자기 자신의 위선과 기마나을 준열하게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가와의 시,
"일하여도 일하여도 나의 생활 넉넉해지지 않네, 가만히 손을 본다,"
그 시처럼 오가다는 자신의 두 손은 내려다본다.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손.
'이 손을 나는 부끄럽게 여기는가? 부끄럽게 여기지만 나는 마음 바닥에서부터 순수하지는 않다. 위선과 기만 없이 뛰어들 수는 없다. 이시가와 다쿠보쿠의 손은 어떠했을까? 그의 손은 노동으로 못이 박혔을까? 그의 손도 나와 같이 부드러웠을 것이다. 하면은 왜 나는 부끄러운가.'
오가다 마음속에서 회답은 좀체 나오질 않았다. 사람이란 본시 이기적인 거야, 세츠코의 말대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이며,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의 제기는 번잡일 뿐이라고 의문을 절단해버릴 수도 없었다. 어느 쪽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 없고 결박을 당한 것처럼 이상한 분노가 치민다. 있는 놈이, 권력을 쥔 자가, 야망에 불타는 놈이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기본 권리인 육체와 생명까지 약탈하는 것은 이미 수천 년을 있어온 일이거니와 형제여 누이여 동지여! 몇 년 간의 투옥 기록을 훈장같이 가슴에 달고 명성의 고개를 기어 올라가는 무리에게 근로 대중은 무엇이며 농민 대중은 무엇이냐. 양주 꺼내어 마시며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무리들에게 농민 대중은 무엇이며 근로 대중은 무엇이냐. 여전히 핍박받는 대중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들 보스를 꿈꾸는 자, 선택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자, 수많은 시체와 피비린내 속에서 빛나는 훈장, 영광된 자리, 그것은 한 사람이거나 소수가 차지한다. 사기꾼들! 사형당한 고도쿠, 학살당한 오스기, 칼이 찔려죽은 야마모도 센지, 구문 치사한 고바야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진정한 뜻에서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제삼신이 되기 위해 자살한 쿠사가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 권리인 육체와 생각을 약탈하고 지금은 말이 없다. 투옥 훈장도 없고 있어도 쓸모가 없다. 하하핫..."
오가다는 차창 밖을 바라본다. 노변의 땅이며 나무들이 만고부동인 양, 그러나 사라져가고 있었다.
'향가 높은 애급의 담배를 피우면서 삼사 일 사이를 두고 무루젠에서 부쳐오는 신간을 보며 식사를 기다리는 꿈, 그런 꿈을 가꾸던 다쿠보쿠, 가난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쿠보쿠나 나는 가난을 슬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이 슬픔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사람이 아니라, 우마도 아닌 연장이며, 못쓰게 되면 내다버리는 존재, 배고픈 늑대 밥이나 되는 그러한 그들은 인간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수천 년을 그랬어야 하는가.'
오가다는 심양에서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금주로 곧장 갔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오가다는 아침부터 거리로 나와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시가지 한켠을 흐르는 소능하 강가에 가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햇빛에 희번덕이는 강물, 고기비늘같이 잘게 주름 잡히는 강물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는 강변 넓은 들판에 큰대 자로 드러눕는다. 짙은 땅 냄새 풀 냄새, 하늘에는 뜬구름.
"아아 좋다!"
오가다는 사람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으로 돌아오고 순수한 생명으로 돌아온 희열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참으로는 공기는 무한하게 맑았으며 햇빛은 영롱하였다. 해가 중천으로 가까워졌을 무렵 오가다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안경알을 닦고 그리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시내로 되돌아왔다. 마차가 가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아이들이 노는 거리, 심양은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도시, 만주 문화가 집결된 곳이지만 금주 역시 수천 년 세월이 잘 보전된 도시다. 라마의 탑을 중심으로 하여 별로 높낮음이 없이 펼쳐져 있는 시가, 약간 퇴색이 되었다고나 할까, 세월의 이끼가 보다 짙게 끼었다고나 할까, 돌담이 약간 허물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이빨이 빠진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눈알이 빠진 듯도 한 동문, 남문, 중문, 삼층으로 올라간 성문은 퍽 유머러스했다. 축제의 날이면 영웅 미녀의 가장을 하고 고각 춤을 추는 그들 모습같이, 성장을 하고 저잣거리에 나온 순진한 촌부 모습 같기도 했고 이 빠진 입술을 열고 소박하게 웃는 촌부의 모습 같기도 했다. 사천 년이 넘는다는 라마의 탑도 그러했다. 시가에서 가장 높이 솟았건만 권위를 자랑함이 없었다. 누굴 가르치려 하는 것도 아니요 이끌어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산천이나 하나의 구릉처럼 서기에 있었다. 사천 년 세월에 분명 그는 늙었을 터인데 초라하거나 갈 길이 바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곳을 지나가는 마차나 사람, 모든 구조물과 꼭같은 질량으로 라마의 고탑은 시가 중심에 서 있었다. 저잣거리로 접어든 오가다는 길가에서 번철을 올려놓고 밀떡을 구워 파는 사내 옆에, 쉬어갈 겸 주질러앉았다. 중년 사내는 오가다를 한번 쳐다보았으나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손톱이 길었다. 손톱 사이에 시커멓게 때가 끼어 있었다. 기름이 흐르고 땟국이 흐르는 손, 사내는 그 손으로 발밑에 노다지로 쌓아둔 파 뭉치에서 파를 하나씩 들어올려 손톱으로 파뿌리를 잘라내고 흙 묻은 껍질을 벗긴 뒤 적당한 길이로 부러뜨려 번철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밀떡 위에 얹곤 한다. 그러고는 밀떡을 둘둘 말아 번철에서 꺼낸다. 오가다는 오랫동안 사나이의 반복되는 동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긴 손톱 밑의 때가 마음에 걸렸으나 오가다는 서툰 중국말로 밀떡을 하나 달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배도 고팠다. 사내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밀떡 하나를 손바닥만큼 잘라놓은 신문지 위에 올려서 내밀었다. 오가다는 호주머니 속의 휴지를 꺼내어 밀떡을 말아 쥐고 파리를 쫓으며 베어먹는다. 맛이 좋았다. 반쯤 익은 파는 달콤했고 상긋한 향기를 혀끝에 남겼다.
"맛이 있어요."
오가다는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내는 또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과연 이들은 불결하다. 그러나 기름과 열에 달구어진 이 밀떡을 먹고 병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대로 세균 처리는 하고 있는 거야. 누가 그랬던가? 하야시였나? 오가와? 그랬었지, 쨘쨘바라바라, 칼쌈이라도 해서 그만 콱 죽고 싶은 심정이라 했던가? 그리고 바닷가에 가서 사시미나 실컷 먹고 싶다 했던가? 사시미라, 사시미. 사시미와 밀떡, 사시미와 밀떡, 사시미와 밀떡, 밀떡.'
마음속에서 갑자기 꼬리를 흔들었다. 휘젖고 뒤엉켰다. 사시미와 밀떡의 두 개의 어휘가 아니 두 가지의 음식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같이 오가다 마음속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사시미와 밀떡, 그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오가다에게 육박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두 개의 진지를 구성했다. 삶의 모양, 기나긴 시간의 자리, 그러나 오가다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수가 없었다. 당나귀를 이끌고 아이가 지나간다. 말고삐를 잡고 나귀에 바싹 붙어서 가는 아이 복장이 넉넉해 뵌다. 그리고 또 한 낯선 사내가 지나간다. 첫째 눈에 띈 것은 그가 쓴 헬멧이었다. 다음은 팔에 건 하얀 완장이었다. 카키색 각반에 검정 구두였다. 그리고 뒤꽁무니에 수통을 차고 있었다.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군인은 아니었다. 군속이거나, 군부의 후원을 받은 여행자였을까. 오가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본다. 회색 셔츠에 회색 즈봉, 가방은 여관에 맡겨두고 나왔기 때문에 빈손이었고, 얼마간 돈이 든 지갑만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모조리 남의 것을 빌려입고 나타난 사람들, 하기는 게다짝 신고 허벅지가 드러나는 왜복을 입고 대륙을 활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가다 자신도. 금주에서 하룻밤을 더 묵고, 산해관으로 갈까, 오가다는 망설였다. 산해관을 넘으면 중국 땅이었다. 만리성의 시발점인 산해관, 동북쪽은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산세요, 서남쪽은 비옥한 평야, 한달음에 북경이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자."
그는 그 옛날, 고구려인과 여진족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금주를 뒤로 하고 다시 심양으로, 심양에서 하룻밤, 그리고 신경으로 향하였다. 하얼빈으로 직행할까 하고 생각을 했으나 서둘 이유도 없는 여행이었고 거주지가 아닌 나그네의 입장에서 잠시 신경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던 것이다. 신경에 도착하여 우선 요기나 할 양으로 그는 역 구내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절반이상이나 했을 때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오가다상 아니오?"
놀라며 말을 건 사람은 오가와였다.
"아아."
"여행 떠났다는 얘길 들었는데 어째 여기 있소?"
"금주 갔다가, 또 떠나야지요 오가와상은 웬일이오?"
"손님 전송 나왔어요. 시간이 있어서 차나 마시려고 들렀소."
오가와와 함께 들러온 일행은 저만큼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오가다상 소식 모르지요?"
"무슨 소식?"
"무라가미상이 부상을 당했어요."
"부상을 당하다니!"
오가와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술에 취해서 자살하려 했던 모양이오."
"그럴 리가?"
"부부 사이가 순탄치 못했던 것 같아요. 마누라가 일본에 가고 없지 않소."
그것은 가히 놀라운 소식이었다. 오가다는 식사도 그만두고 오가와가 가르쳐준 대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과연 무라가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은 다리는 움직이지 못하게 공중에 매달려 있었고 팔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으며 얼굴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의 심각함이 조금도 없었다. 옆에 하야시가 서 있었다.
"자네는 어떻게 된 거야? 송별회까지 하고 떠난 놈이 어떻게 된 영문이야?"
"저야 금주 갔다가, 역에서 오가와상을 만났어요. 대관절 왜 이런 짓을 했습니까?"
무라가미는 낄낄 웃었다. 하야시도 싱긋 웃었다.
"...?"
"해비희매 때문이지 뭐."
하야시가 말했다.
"해비희매하니요?"
신라의 중 의상을 사모한 당나라의 선묘가 이별을 슬퍼하여 떠나는 배를 떠나는 배를 바라보다 바다에 몸을 던졌고 그 후 용으로 화신하여 부석사를 창건하는 의상을 돕는다는 설화, 그 설화가 건너간 일본에서는 용이 아닌 뱀으로, 그것도 짝사랑한 여인의 원령이 뱀으로 변신하여 사내를 괴롭힌다는, 물론 조선에도 그와 같은 설화가 많지만, 의상과 선묘의 설화에서 나온 것은 아닌 듯싶고 그러나 일본의 그것은 내용이나 규모에서 선묘 설화의 변화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해비희매는 짝사랑이란 집념에 사로잡힌 여자를 가리켜 하야시가 한 말이었다.
"해비희매도 몰라요?"
"..."
"짝사랑하는 동물 말이오."
"그렇다면..."
"왜 그리 눈치가 없소. 츠다 다해코의 짓이오."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마. 아, 아야!"
움직이려다 말고 무라가미는 신음했다.
"자살이란, 그럼 그 말은요?"
"으음 그건 소문이고, 어쩌겠소? 서로 빤히 아는 처지, 여자를 경찰에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럴 수가."
"사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무라가미상도 죄가 많아요. 그까짓 여자의 소원 한 번 풀어주지 못할 건 뭐람? 청교도도 아니면서, 뭐 그렇고 그런 바람둥이면서."
하야시가 비난을 했다.
"난 말이야, 마음에 없는 여자하곤 그 짓 못해. 쫓아오면 싫고 겁이 나거든."
변명했다.
"앞으로 또 봉변당하게 생겼수. 얼마나 무안하고 분했으면 부엌칼 들고 덤볐겠어요. 정말 조심을 해야지. 오가다상은 다구나 독신이니 교훈으로 삼아 조심하시오."
"명심하지요. 한데 츠다상은 어떻게 됐어요?"
"부랴부랴 내지로 보냈지 뭐, 제정신이 들고 보면 본인도 여기 있기 거북할 거 아니겠소?"
"오쿠상은?"
하자 무라가미가 말했다.
"그게 또 오야지(부친)가 죽었다니까 초상은 치러야..."
하다가 무라가미는 변명이라도 하듯
"계집이란 사내를 쫓아가는 게 아니야."
"고가 세츠코가 들었다간 펄펄 뛸 껄요. 어째서 남자에게만 그런 특권이 있느냐고 달겨들 게요."
하야시가 말했다.
"그건 자연의 섭리야 강한 자가 좇게 돼 있어 좇는 계집이나 잡히는 사내, 모두 매력이 없다. 그래서 쿠사레엔이 생기는 거구 인생이 애매해지는 거야."
"그건 변명일 게요. 나미에상 때문이지요?"
"무슨 소리, 날 죽으로 만드는 게야?"
무라가미는 화를 벌컥 낸다.
"하면은 잔인했군요."
"내가?"
"아니오, 무라가미상말구."
"..."
"나미에상 말입니다."
"그 사람이 왜?"
"무라가미상 그 기질을 알고서 츠다를 데려다놓고 갔다면 그건 심한 일 아닙니까?"
"그 점이 없지도 않았겠지만 그건 본인이 책임질 일이야."
한동안 잡담을 하다가 하야시는 가고 오가다는 달리 할 일도 없었으므로 병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한편 우습기도 하지만 기분이 나빠. 누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나. 사내 꼴이 이게 뭐야."
무라가미는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오가다에게 푸념을 했다.
"며칠이나 있어야 합니까?"
"병원에?"
"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모양이야. 술주정꾼에 자살 미수라, 창피스러워서, 길 가다 날벼락을 맞아도 유분수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여잔데 있어서 귀잖은 것도 여자라, 그래 자넨 어쩔 거야?"
"저녁 차 타지요 뭐."
"호열자가 돈다는 얘기가 있는데 조심하라구."
"호열자가요?"
"음."
"큰일이군요."
"나도 본의 아니게 병원 신셀 지고 보니 이일 저일 생각이 많아지는데 후퇴해볼까 궁리중이야."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내지로 돌아갈까 싶어."
"다 오고 있는데 갑니까?"
"글세..."
"가선 뭘 하게요?"
"구체적인 것까지는 생각 안 했다만 안 올 때 오고 모두 오고 있을 때 가고 그것도 살아가는 데 한 방편 아닐까? 욕심을 내다간 본전도 잃어."
"그건 일본이 패망할 거다 그 얘긴가요?"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일본인이 있을까? 나도 일본인이야. 하지만 만주 바닥이 일본인에게 언제까지나 태평천국일 수는 없지."
"..."
"군대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것도 한심하고 이젠 진력이 났다."
"내지로 간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질 리가 없지. 그러나 자네도 그렇지 나 역시, 어차피 외곽에서 맴만 도는 인생인데 그럭저럭 살아보는 거지 뭐."
"그럭저럭 살아본다..."
"이제는 산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걸 느낄 수 없다. 사는 목표도 없어. 뒤늦게 천황폐하 만세! 만세! 소리지르고 핏대 세우기에는 너무 눈이 말뚱말뚱해서 말이야. 반역을 할 용기가 있나. 젊음이 있나, 설사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이런 시국, 지푸라기 들고 선불 맞은 멧돼지 앞에 나가는 꼴, 돈키호테지 뭐."
"선배가 돈키호테로 출전한다면 나는 산초 판자로 따라가지요."
농담으로 받는다.
"이래도 저래도 어릿광대이긴 매일반인데, 하야시가 만화라 했던가?"
"어릿광대가 되려면 그것도 처절한 게 있어야지 안 그렇습니까?"
"그게 없어. 나에겐 그게 없단 말이야. 불질러줄 성냥개비 하나 없어. 하다못해 자식새끼 하나 없거든. 완전 의욕 상실이야. 여자라는 것도 한때의 정열이지 필경엔 타인 아닌가. 전당포나 고리대금, 전당포, 그래!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돈을 세는, 그게 차라리 속 편할지 몰라."
"내지에 가서 전당포나 차릴 작정입니까?"
오가다는 웃으며 말했다.
"심경이 그렇다는 얘기지. 자네가 여행 떠나는 바람에, 내 마음에도 허무의 바람이 불었을까? 목표가 없어. 사는 의미를 모르겠어."
"반생반사, 그런 시대니까 목표가 없기론 다 마찬가집니다. 어디 오늘뿐이겠습니까. 옛날에도 또 옛날에도 그래왔을 겁니다."
"나도 젊은 한 시절 문학이나 철학이니 그런 나부랭이도 읽고 했다마는, 그래 생각이 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말이야. 고리대금 얘길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
"젊었을 때 고리대금하는 그 노파를 낡아서 둘둘 말아 쑤셔 박아놓은 헌 옷가지, 말라서 먹을 수 없게 된 떡 쪼가리쯤으로 느꼈어. 생명이 있는 것이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다른 소설 속에 나오는 수전노도 그래. 소설 속의 소도구나 구색같이 생각했거든.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건 습관이 되어버린 사고? 관념? 그것은 편견이야."
"어째서요?"
"생각해보게나. 초인사상은 무엇이냐?"
"하하핫핫..."
"웃지 말게, 고리대금의 노파는 기껏해야 남의 호주머니 푼돈이나 털어먹는 좀도둑 아니냐 말이다."
"이가 아니고 좀도둑입니까?"
"권력의지의 화신인 초인은 한계가 없는 강도다."
"누워서 별생각을 다 하는군요."
"절대 권력 절대 도덕 그게 아니고 뭐겠나. 니체는 기독교를 대신하여 초인이 세상을 지배하고 민중은 복종한다 했지만 도덕으로? 어떤 도덕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윤리 도덕으로 더 나가서 종교도 인간을 통일하지 못했어. 방편으로야 물론 쓰였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전부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야."
"그 윤리 도덕은 완전했을까요?"
"하면은 초인이 만들어낼 것은 완전할까?"
"그렇군요. 그렇지는 못할 겁니다."
"내 얘기가 그거야. 초인은 어떤 도덕을 만들어낼 것인가. 말할 것도 없지. 권력의지에 걸맞는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기간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실효를 가두지 못하면 초인이 아니니까, 그러고 그들은 말하겠지. 피안에는 낙원이 있다 하고 말이야. 도륙도 압제도 침략도 미래의 낙원 때문에 모두 합법적, 제에기랄! 권력 잡은 놈치고 그 말 안 하고 그 짓 안 한 놈이 어디 있어? 목마른 군졸에게 살구의 환상이라도 심어주어야 진군을 하든 퇴각을 하든 할 게 아닌가 말이다. 기만이야. 초인? 초인사상? 동굴 속의 아홉 개 대가리 붙은 용을 믿는 편이 낫지, 초인이 불사신인가? 기껏해야 칠팔십의 생애, 혼자 누리고 가는 거지 낙원이 어디 있어? 한 자락의 땅을 갈고 나무 찍어서 오두막 한 채 짓는 것보다 확실성이 없는,"
"별놈의 것을 다 기억하고 있군요. 다 낡아버린 얘기, 많이 써먹은 얘기지요."
"흥!"
"..."
"흥! 나도 젊은 한 시절 겉핥기지만 초인이 되고 싶었다구."
무라가미는 씩 웃었다.
"해서 대륙으로 왔다 그겁니까?"
"아암 그랬지. 그렇고말고. 그래서 대륙으로 왔지."
"초인이 못 되어서 지금 신음하는 겁니까?"
"천만에, 그런 말 말게. 나는 지금 희극을 연출하고 있는 게 아니야. 비극을 연출하고 있어."
"비극 말입니까."
"나 이거는 진정한 고백인데 말이야. 믿고 안 믿고는 자네 자유다만, 내가 대륙을 떠돌아다니다가 신경에 자리를 잡았는데 자네도 보다시피 내 푼수로는 호화주택이요 하인들도 많고 반한 계집을 옆에 두어, 그만하면 제후의 축소판쯤은 안 되겠나?"
"제후의 축소판입니까, 하하핫 하하."
"웃지 말게. 떠돌아다닌 때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야. 하여간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자리를 잡는 순간,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이 딱 정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더란 말이다."
"만주제국의 황제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여전히 빈정대듯 말한다.
"치매가 되었거나 자살했을 거야. 하하핫 하하하, 아, 아야!"
"선배는 말입니다, 좀 일찍 태어나서 신센구미 대장이면 그게 제격이었을 게요."
"맞어. 내 생각이 바로 그래."
신센구미란 일본 막말 때 무예에 능한 낭사들을 선발하여 반막부 세력을 치게 했던 단체다.
"어설프게 서양 나라 지식을 좀 배운 탓으로, 일본인 머리통에는 결코 정착할 수도 없는 것들이 날 어지럽힌단 말이야. 제에기랄! 어디 금광이라도 있어서 찾아 나선다면 한 번 더 미칠까? 마적단이라도 달겨든다면 정신이 번쩍 들지 모르지."
"이제 엄살을 그만 떨고 좀 쉬십시오."
가방을 늘어뜨리고 병원을 나선 오가다는 가로수 밑에서 새빨갛게 타고 있는 석양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도대체 전쟁은 어디쯤에서 하고 있는 것일까. 도시는 평화스럽게 보였고 여열은 아직 단단했지만 한낮보다 기온이 내려간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한결 많았다. 지나가는 마차의 말굽 소리도 가볍게 들린다. 지금 전쟁은 어디서, 살육은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머지않아 이 도시에도 어둠의 장막은 드리워질 것이며 도시의 사람들도 잠들 것이다. 만주인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몽고인 그리고 일본인, 유랑 걸식, 집시 같은 사람들, 모두 잠들 것이다. 아니 밤새워 카바레서 춤을 출 사람들도 있겠지. 어느 지하 감방에서 처참한 고문이 진행될지 모른다. 마작을 하고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 지하 조직의 어느 밀사가 거미같이 담벽을 타고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까, 팔려온 계집아이가 난간을 잡고 우는 밤, 그렇다 청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는, 그 오뇌와 영광과, 아니 치욕의 부의는 어떤 모습으로 깨어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잠들 것인가.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모양으로 잠들거나 깨어 있을 밤은 서산에 태양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다가올 것이다. 해가 차츰차츰 가라앉고 있다. 동굴 깊은 곳의 눈먼 귀뚜라미처럼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가고 온다. 전쟁은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눈먼 귀뚜라미처럼 도시라는 크나큰 동굴 속을 끊임없이 오고 간다.
'내가 가는 곳은 무엇이냐. 히토미를 그리고 진실을 찾아 헤매는 길인가. 도피와 망각의 길인가. 무라가미 선배는 삶의 목표가 없어 졌다 하고 말했다. 나는 뭐라 말했나? 목표가 없기론 다 마찬가지라 했다. 옛날에도 또 옛날에도 그래왔을 거라 했다. 옛날에도 또 옛날에도, 해서 옛날의 사람들은 그렇게들 돌을 많이 쌓았는가. 엄살이지 엄살, 나도 엄살이긴 매일반이다. 눈먼 귀뚜라미는 생존을 위해 오고 간다. 호두의 그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죽어갔다. 생존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끌려간 그들의 생존을 말살한 채찍과 총구는 무엇이냐! 운명도 아니요 신도 아니다. 채찍을 휘두를 때 총구에서 불을 뿜을 때 그들, 또 다른 눈먼 귀뚜라미의 무리는 생존을 구가하고 미래를 약속한다. 인간이여! 그대들은 초인을 기다리고 있는가? 인간의 최고 목표는 과연 무엇이냐? 초인을 만나는 것이냐, 초인이 되는 것이냐.'
오가다는 고개를 흔들면서 늪에서 빠져나오듯 걸음을 옮긴다. 해는 떨어지고, 사방에 황혼이 깔려 있었다. 오가다가 들어간 곳은 영화관이었다. 이미 영화는 시작이 되었고 소위 쨘쨘바라바라의 일본 활극이었다.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오가다는 어둠 속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사도거리에 나서서 갈바람 잡는 듯, 심장 한복판이 뚫리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듯, 심양에 못 미쳐서 오가다는 무순으로 갈까 말까 망설였고 금주에서는 또 산해관으로 가볼까 망설였다. 돌아올 때는 하얼빈으로 직행해야 했을 것을 심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신경에서 하차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하얼빈에서 북만주 일대를 더듬어나가려 했었는데 이런저런 구실을 붙이고 이곳저곳 머뭇거리다가 왜 신경으로 돌아왔을까. 오가다는 시간에 쫓기는 여행이 아니어서 그렇다 했고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틀림이 없는 일이다. 사실 그는 기차 속에서 떠나온 홀가분한 마음을 적어 조찬하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순간순간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라가미는 신경에 자리를 잡는 순간 그의 인생이 딱 정지해버린 것 같더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오가다의 경우는 삼 년 동안 어느 옥상에 매달려 있던 풍선의 줄이 끊어져서 허공에 둥 떠버렸다고나 할까. 그의 눈앞에 펼쳐진 무한한 공간, 끝없는 기찻길 같은 시간, 어쩌면 오가다는 방향 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했는지 모른다.
'무라가미 선배의 말은 모두 진실이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는 말엔 추호 거짓이 없었으나 그는 결코 현재의 위치를 변경하지 않을 것이며,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의 지식인의 진실이란 거의 그런 상태가 아닌가. 논리와 행동의 도랑은 넓고 깊어서 결국 지식인들은 가랑이가 찢어지고 마는 잉여물에 불과한 거야.'
무라가미는 중학 때부터 돈키호테 같은 사내였다. 덩치에, 또 용모에 걸맞지 않게 기다무라 도고쿠의 시집 "봉래곡"을 들고 다니던 것을 오가다는 기억한다. 합리적이면서도 모순 투성이의 일본에서 자아 확립의 괴로운 투쟁으로 피폐해진 도고쿠는 자기 집 뜰에서 목을 매 죽었는데 오가다는 무라가미가 도고쿠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돈키호테 같은 사내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라가미의 일면이었을 뿐, 때론 담백하고 때론 교활하게 타협하면서 물결을 타고온 것만은 사실이다. 단순한가 때에 찌든 듯하면서도 니힐리스트, 호걸같이 웃는가 하면 소년같이 수줍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나미에 이외의 여자와 관계가 없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닌데 다해코를 거절하여 칼부림을 당하는 사내, 모순되고 복잡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이상하게 친화력 같은 것이 있었다. 그의 앞에선, 누구든 거침없이 말을 한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결코 말이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이라곤 없었다. 오가다는 흑백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크린의 영상을 바라본 채 계속하여 무라가미라는 한 인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기다무라 도고쿠에 대하여 말한 것이 있었다.
"젊어서 죽었으니까 그의 문학이나 사상은 무르익지 못했지만 싹치고는 아주 큰 싹이었다구. 영탄조의 다카야마 죠규나 호라우키(내용 없는 큰소리)의 츠치이 반수이, 그것 다 껍데기야. 도고쿠 같은 사람이 그나마 일본의 심지라 할 수 있고 인간과 자유를 주장하며 고뇌한 그를, 낭만파 영역에 머물렀지만 높이 평가돼야 해."
그 말에는 오가다도 동의했다. 다카야마 죠규, 츠치이 반수이는 다 같이 널리 회자된 명치 시대의 문인이다. 그들은 다같이 낭만파라기보다 감상파에 속하는 미문가로서 니체에 심취한 죠규나 설익은 관념의 나열을 즐기는 반수이, 그들은 의기상투한 일본주의, 국가지상주의자로서 당시 지배 계급의 대변가라 할 수 없었다. 무라가미에 대한 오가다의 무의식적인 추적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에 대한 추적이기도 했다. 일본인은 어떤 자인가! 그것은 오가다의 괴로운 과제였는지 모른다. 철저한 자유주의, 연애의 신성, 개성의 자각과 확립을 주장했던 도고쿠 같은 사람, 청교도적이며 심한 결벽증에 섬세한 미의식, 사이교의 유랑, 그런 소수의 정신 주의자들이 가늘고 가냘프지만 일본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심지가 되어주었다. 오가다는 몹시 그것을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면 무라가미는? 선의의 관객이라고나 할까... 마땅치가 않으면 한조(배우의 연기가 시원찮으면 깔고 앉은 반장짜리 다다미를 무대에 던지는 행위)를 하는 의기쯤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희박한 비판 세력이다. 대다수가 의리와 인정, 고지식함과 정직, 부지런하고 정확한 그 군단에 속하는 거의 모든 일본인은 그들의 특질을 비판 없는 복종으로, 맹목적인 애국심 즉 전의로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집단적이고 에고이즘으로 굳어져버렸다. 특히 명치유신 이후 급속도로 강요되고 정착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여 그 모든 긍정적인 것은 저희들끼리의 것으로서 일단 외부로 돌려지면 면은 싹 바뀌어지고 손바닥 뒤집듯 본능적 동물이 된다. 야만성이 드러나고 만화가 되는 것이다. 그들을 끌고 가는 것이 소위 칼잡이들, 오가다는 일어섰다. 극장을 나서면서 그는 침을 뱉는다. 일본인에 대하여 침을 뱉은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침을 뱉은 것이다. 가로등을 따라 가로수를 따라 오가다는 밤길을 걷는다. 상쾌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차가 지나간다. 바람이 제법 신선했다. 무덥고 숨 막히는 한낮의 열기에 시달리던 가로수도 생기를 찾은 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뿌연 하늘 밑에 까만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나는 내 동족을, 내 조국을 헐뜯어야 하는가! 세계주의 자, 코스모폴리탄? 좋아. 그게 내 도망갈 구멍이란 말이지? 인류, 인간, 아아 징그럽고 지겨운 인간! 이건 내 공분인가? 징그럽고 지겨운 인간, 공분이야? 아니지, 아니야. 그건 내 취향, 개인적 감정일 뿐이다. 세계주의 염세주의 아, 아니야."
오가다는 걸어가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종이 한 장 차이라구. 인간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구. 모두가 그래! 잔혹 행위, 침략, 도륙, 세계사는 그런 것들로 하여 피에 물들여져 있는 거라구. 방어와 공격은 숙명, 그건 인간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수렁이라구. 집단 의식과 자유주의는 영원히 승부 없는 줄 당기기란 말이야. 흥, 소속감도 본능이요 자유 지향도 본능이다! 그래 다아 본능이다! 본능! 인간이라고 뽐낼 것 하나 없다구. 그래 맞어. 바로 뽐내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이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은 죄악의 진구렁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술 취한 사람같이 마음속으로 소리소리 지르며 오가다는 깊은 패배감에 빠져서 밤늦게 호텔로 찾아들어갔다. 복도는 길고 어두컴컴했다. 냉기가 전해져오는 손잡이를 비틀고 방문을 연다. 불 꺼진 방이 허공같이, 검은 안개같이 오가다를 맞이했다. 오가다는 손잡이를 잡은 채 눈을 감는다. 살아 있다는 인식, 살아있다는 인식이 이렇게 서러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도어를 닫고 더듬어서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다. 환하게 드러난 공간과 물체, 침대며 탁자며 의자, 커튼, 재떨이, 슬리퍼, 그것들은 모두 죽어 자빠진 송장이었다. 죽음이었다. 관이었다. 오가다는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달무리 같은 오렌지 빛 전등불, 그것은 모두가 다 체념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저녁때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얼빈은 비에 젖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역두로 나온 오가다는 인력거, 마차가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몇 대의 자동차로 눈에 띄었다. 바 탓인지 마차, 인력거가 있는 곳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오가다는 무심히 떠나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차림새는 중국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인실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마차는 저만큼 달리고 있었다.
'히토미! 히, 히토미!'
오가다는 허공으로 두 팔을 뻗으며 인실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으나 그것은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히토미! 히토미! 아아 히토미!'
오가다는 땅에 쓰러졌다. 그가 마차를 잡아타고 기자고 소리 질렀을 때 그러나 인실을 태운 마차는 이미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오가다는 미친 듯 소리 질렀다.
"빨리 가아!"
인실을 태운 마차, 유인실, 그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빨리 가아! 빨리 가아!"
외치는 오가다를 마부다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채찍으로 말을 갈겼다. 보도는 빗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