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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4-3

Bollnow 2024. 3. 13. 07:17

10장 조용하의 자살

"오줌 마려운 얼굴이군 그래. 왜 그리 안절부절이야."

조용하가 말했다. 제문식은 대꾸 없이 앉아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은 조용하 자신이었다. 탄탄하고 네모가 반듯한 그 닫혀진 궤짝과도 같이 육중한 침묵이 방안 가득히 들어차 있었는데 조용하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제문식을 방에서 내쫓고 싶었다. 소리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쫓아내고 싶었다.

"저놈은 지금 내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게야. 내가 죽으면 저자는 무슨 이득을 얻나. 무슨 이득이 생기지?"

그러나 조용하는 제문식을 자석같이 빨아 당겨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상대하여 끝까지 버티어줄 사람은 제문식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

'이놈아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실토해! 네놈은 뭘 바라고 내 곁에 붙어 있는 거지? 내 껍데기를 훌렁 벗기고 싶은 게야?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게야?"

제문식과 마주앉으면 매번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건강이 조금 나쁘다. 과로한 모양이야. 과음한 탓이겠지. 수면 부족으로, 그런 등의 말로 자신의 병을 엄폐해온 조용하, 잠시 회사에 나가는 일과 사업상 피지 못할 자리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로 거의 산장에 칩거하다시피, 집안사람이나 친지들에게까지 명희의 가출로 상심하고 있다는 위장술을 쓰면서 그들과의 내왕까지 차단하고 지내는 조용하, 완전무장한 철옹성 같은 산장에 다만 제문식만의 통로는 있었다. 어쨌거나 제문식은 오랜 친구였으며 그만큼 대소사를 막론하고 조용하에게 밀착돼 있는 사람은 없다. 조용하는 그에게 기대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기대어보고 싶었다, 간절하게. 그러나 함께 슬퍼하고 아파해줄 우정이 제문식에게 있으리라는 걸 믿지 않았다. 그리고 제문식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몰골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쫓아내버리고 싶은 충동과 옆에 꼭 잡아놓고 싶은 욕망, 그것은 같은 인력으로 조용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혼란이며 목마름이었다. 순명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벌레,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조용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라는 구둣발로 짓이겨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서늘해진다.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얼씬거리지 않는 산장은 공포, 그것은 공포의 밤이요. 공포의 낮이었다. 일각 일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시간은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조용하는 혼자 이를 갈았다. 눈물을 흘렸고 애소도 해보았다. 정맥이 내비친 자기 팔에 입맞춤도 해 보았다. 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저주하고, 제문식을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으로 매도하다가 결국에는 산장지기를 보내어 제문식을 불러오게 했다.

'알고 있다 하자. 그럼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의외로 심각한 것까지는 모르고 있는지, 물어볼까? 물어본다? , 아니야. 덮어두는 거다. 네놈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상관없어. 내 꼴을 곁눈질하며 악마같이 즐긴다 해도 내가 입을 열어 너를 더 즐겁게, 만족하게 하지는 않을 테다!'

붕괴되어가는 육체를 두 손으로 꽉 틀어쥐듯, 틀어쥐어 주먹 속에 감추려는 듯, 조용하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지 못하게 눈치 채지 못하게, 그래서 제문식이 옆에 없으면 불안해진다. 시간과의 싸움도 무서웠지만 어디선가,

"얼마는 살까? 아마 조용하게는 시간문제만 남았을 게야."

라든가

"온갖 특혜가 땅속으로 들어가다니 아깝다, 아까워."

하며 나불거리고 있을 것만 같아 속이 들끓었다. 증오감은 전신을 활활 불태우는 것 같았고 고독감은 전신을 싸늘한 얼음장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찬하를 불러오게."

제문식의 목소리가 육중한 침묵을 뚫고 나왔다. 조용하는 반문했다.

"뭣 땜에?"

"글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나온다면 나로선 할 말이 없네만, 내 말뜻을 모르고서 되묻는 건 아니지 않은가."

"..."

"천하는, 천하에 관한 자네 처사는 처음부터 억지춘향이었다구. 계속 그런다면 내가 이유를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조용하는 비웃을 듯했으나 침묵으로 가라앉는가.

"병이야. 자넨 본시부터 병자야."

제문식 말에 조용하 얼굴이 험악해진다. 그러나 제문식은 개의치 않는다.

"내 자신도 꽤 집요한 편이지만 그래도 목적이나 이유는 있어. 자넨 뭐야? 병 아니라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아. 연산이나 네로 같은 위인이 제왕 아니었더라면 병자가 됐을 리가 없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문벌에 재력, 그게 없었다면 정상인이었겠지. 하고 보면 세사이란 공평한지도 몰라. 천하를 불러오지 않는 이유가 뭐야? 이유가 없지 않아. 의처증도 아니면서 의처증 환자가 되고, 싫은 것도 아니면서 의심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나. 자네 어부인에 관한 얘길세. 없는 사실, 멋대로 가상해놓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 맞어, 그건 집착할 그 아무것도 없는 데서 집착한 거야. 세상이 재미없고 핏줄에 애착도 없고 원하면 무엇이든 있지만 실상 아무것도 없고."

"잠꼬대하는 겐가?"

"하지만 이젠 집착할 기운 없을 거야. 혼자 씨름해나갈 기운이 있느냐구. 명희부인 얘길 해도 가만있는 걸 보면, 어때? 기운 있어? 고집 피워보아야, 아무리 그래보아야 자넨 외로운 허수아비 아닌가."

"뭣이 어쩌고 어째?"

"내친 길이니 뛰고 있다, 그런 셈인가? 조금만 방향을 꺾어보아. 종이 한 장 차이야. 그러면 찬하를 불러올 수 있을 게야. 이대로 파선할 건가."

"늑대 같은 놈, 누구 속 떠보노라 그러는 겐가?"

"..."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나, 미안하지만 자네 마음을 흡족하게 할 그런 말 따위 없다. 제문식과 내 관계는 한 치의 후퇴도 전진도 없어. 하하핫 하하핫..."

갑자기 웃었다.

"오란다고 올 놈도 아니지만 부르고 싶은 생각, 천만에. 의무나 책임 같은 것 내겐 없어. 난 그런 것 몰라! 내가 관련 안 된 일에 내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나. 자네 같은 작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문식이 시시하게 복고조로 나오긴가? 혈육 따위, 내겐 애당초 그런 것 없어. 찬하 그놈은 물론 난 부모한테도 정 같은 것 없다. 병아리 오줌만큼도 없다! 자네 잘 알 텐데 그래?"

지리멸렬이었다. 저도 모르게 뭔가를 시인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용하는 당황할 기력도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자네다운 얘기야. 한데 복고조라니? 나보고 복고조라, 제발 그런 말은 말아주게. 천신만고하여 배울 권리나마 얻어낸 나 같은 놈이 설마한들 하정배하고서 네, 나으리 마님 하고 싶겠나."

제문식은 말하고서 팔을 들어 시계를 본다.

"왜 그래?"

조용하가 물었다. 제문식은 일어섰다.

"시간 약속이 있었어. 가봐야겠네."

조용하가 제문식을 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디 가는데?"

목소리는 약했다.

"누가 좀 보자고 해서."

코트를 걸치며 도어까지 걸어간 제문식은 돌아본다.

"만나보고 다시 오겠네."

조용하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제문식이 찾아간 곳은 남천택의 하숙이었다. 이미 선객이 있어 한참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판이었다. 말이 하숙이지 누구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호화판 양옥의 거실이었다. 하기는 H전문학교의 명색이 교수인지라 그럴 법도 했다. 남천택은 재작년 동경서 나온 뒤 서울에 눌러앉아, 얼마나 갈지 그것은 의문이지만 하여간 현재까지는 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선객은 제문식도 알 만한 얼굴의 김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두리뭉실한 분위기에 우둔하면서 비굴한 느낌을 주는 사내다. 수박색 엷은 스웨터에 연회색 후란넬 바지를 입은 남천택은 재미없어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검정 두루마기의 김모는 제문식의 출현으로 끊어졌던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중간층을 위시하여 하부층에까지 침투해오고 있는 것은 왜놈의 식민 정책이 몰고 온 계몽의 양상, 즉 낯선 문화를 이 땅에 심고 있는 형편을 보건대, 이런 말을 한다고 해 나를 복고주의자로 공격할지 모르지만,"

김모 입에서 복고주의자라는 말이 나오자 제문식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방금 조용하로부터 복고주라는 말을 듣고 왔기 때문이다.

"그 치졸함, 경박함이 과연 재랫것과 견줄 만한지 의문이야."

"낯선 옷도 자주 입어 버릇하면 맵시가 나는 법이지. 일본은 꽤 그 맵시를 내고 있어. 실리적으로 이용도 하고 있지. 우리보다 그들은 템포가 빠르거던."

남천택은 시답잖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것은 인정하지만 조선에선 자네가 말하는 템포가 문제 아니지. 의식의 문제야. 초입인 만큼 신파가 치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두루마기처럼 조선의 겉가죽만 걸치고 다니는 자네가 설마 무속을 두둔하여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

"하여간 내 생각으론 개화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늘까지 걸작을 들라 한다면 첫째가 동학 봉기요, 둘째는 삼일운동, 셋째가 광주학생사건, 그밖에 뭐 뾰족한 게 있어? 다 바람의 벙거지 같은 것이라,"

남천택이 웃었다.

"얘기가 엇길로 빠졌지만,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개화파의 박규수, 수구파의 최익현. 그들의 언행이 최선은 아니었을지라도 한 그루의 나무, 한 그릇의 밥은 되더라, 그렇게 말할 수는 있고, 그들에겐 뿌리가 있었거던 그들이 전후하여 가고난 뒤 나무는 잔가지만 무성하여 열매를 아니 맺고 밥그릇 속엔 밥이 없고, 그나마 이제 나무는 찍어내어 아궁이 군블감이 되었네. 밥그릇은 엿장수 엿판 속으로 들어가고... 종교다 철학이다 예술이다, 무슨 사조다, 나발 같은 소리야. 적어도 밑등은 두어서 접복이나 해야지, 뿌리 없는 꽃 시들면 안 되니까 숫제 종이꽃 아닌가 말이야. 그것도 간지러운 왜놈의 먹고 남은 찌꺼기에, 세계 도처에선 침략의 앞잽이로 설치다가 뒤늦게 이곳으로 상특한 기독교, 이래 되겠어? 이게 오늘의 식자들이요 문화의 양상이라, 내 자신을 포함하여 매도하는 거지만."

그럴싸한 것도 있었지만 김 모의 말은 잘지 자였다.

"복고주의든 신파든 낭만주의일 때 뭔가 근사하고 진짜처럼 보이긴 하지. 지금 국내에서 뭐 한다 말만한 사람들, 바이런이 아니면 하이네다,"

남천택은 또다시 웃었다.

"그나마 그들에겐 밟을 땅이 있지. 보리밥에 ƒE지 않을 정도의 소시민은 낭만인지 감상인지 알쏭달쏭한 껍질을 핥으면서 신식으로 자위하고, 바야흐로 서구 문물이 계몽을 앞장세우면서 그들 외래인들이 주장하듯 우매한 이 땅에 들어오는데 선봉장은 기독교요 동경 유학생, 후원자는 일본으로서 그들은 깨쳐라! 깨달아라! 눈을 떠라! 해서 낭만주의는 애국주의도 뒤고 감상으로도 변신하며 선동적으로 하부에까지 침투하는 장점을 갖고 있는데, 해서 아주 대중적이기도 하고, 허나 그건 착각일세, 착각. 검과 우애를 각각 한 손에 쥔 그들의 역사, 그것을 환상화하고 교묘히 합리적으로 써먹는 낭만인지 감상인지 알쏭달쏭한 그것, 밟을 땅도 없는 만주벌판 설한풍을 가는 망국인, 임금 노예가 된 일본 땅의 우리 조선인 노동자들, 한이 있을 뿐이야. 짙고 짙은 삶에서, 목숨에서 우러난 그 한 말이세. 자부심 따위, 자네들 그 출중한 대갈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구. 여름 한철을 사는 나방에 불과한 거야. 오직 불변한 것이 있다면 내가 살아 있다는 자각과 죽을 것이란 그것뿐이지. 하지만 나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결코 허무주의는 아니다."

"이제다 했어?"

남천택이 모멸하듯 말했다.

"?"

"연설,"

"주눅 들게 그러지 말게."

"어디서 동냥했어? 많이 듣던 소린데,"

"동냥을 하다니?"

"여기서 하는 말 다르고 기생방에서 하는 말 다르고 친일파 안방에서 하는 말 다르고 왜놈들 앞에서 하는 말 다르고 왜 그리 사람이 미욱해."

"무슨 소리야, 날 밟는 겐가?"

"타이르는 거다. 밑천이 짧아서 툭툭 터져 실밥이 보여."

"오만불손,"

"아암 오만불손해야지 비굴해선 못쓴다."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한 말인 것 같았으나 말치고는 심했고 별안간 터뜨린 신경질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 모는 꿈쩍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말없이 담배만 피고 있던 제문식이 물었다. 그 말대꾸는 없이

"조용하가 다 죽게 됐다며?"

"어디서 그런 말을 하던가?"

"어디긴 회사 쪽에서 나온 말이겠지."

"조사장 건강 회복해서 나오면 몇 놈 모가지 날리겠군."

"그럼 별 탈 없다 그 말인가?"

"사람이 어찌 무병으로 사나. 아플 때도 있지."

제문식의 말투로는 아주 온건하다.

"한데 왜 그리 우울해 뵈나. 원판이 그 모양인데 얼굴판 좀 피라구."

"좋은 일도 없고 누구 말마따나 바람의 벙거지 같은 꼴이지 뭐."

성이 나서 앉아 있던 김모가 실쭉 웃었다.

"자네 학교에 나와 볼 생각 없나?"

"그것 땜에 날 보자 했어?"

"."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 년 후에나..."

하는데

선생님!"

하며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왔다.

"선생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하숙집 아들이었다.

"무슨 소식?"

"굉장한 테러가 있었답니다, 왜놈의 대장 시라가와, 그리고 시게미츠 공사 등이 폭탄 세례를 받고 십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는군요."

"어디서?"

남천택이 물었다.

"상해에서요. 홍구공원 천장절 축하식전에서 그랬답니다."

"누가?"

"물론 조선이지요"

앉아 있던 김모가 일어서며

"만세다!"

하고 외쳤다.

"큰일 했군."

남천택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었다. 제문식은 코트를 입고 모자를 머리에 올려놓으면서

"나는 가네."

"밤새워 술 마시는 거다. 가기는 어딜 가아."

남천택은 팔을 벌리며 막고 나섰다.

"냄 몫까지 마시고 내 몫까지 축하하게."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제문식은 거리로 나왔다. 그래 그런지 거리는 술렁대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되놈들 무색해졌을 게야.'

그러나 제문식은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혼자 있고 싶었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큰길로 나간 제문식은 다시 골목길로 되잡아들었다. 그 골목길에 주점이 하나 있었던 것이 기억났던 것이다. 뒷골목 술집에서 제문식은 비로소 일종의 안온감을 느낀다. 대낮부터 술손님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떠드는 소리도 없고 물속에 가라앉듯 술을 마신다. 조용하를 위해 슬픈 것도 가슴 아픈 것도 아니었다. 암울할 뿐이었다. 조용하 옆에 있으면 침묵한 채 있을 때도 펄펄 끓는 솥바닥에서 생선이 튀어 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이 된다. 어차피 죽음이란 고독한 것이지만 조용하의 고독은 처참했다. 죽음 그 자체보다 처참했다. 시간을 재듯 술을 마시는 제문식의 마음은 산장으로 가야 한다 하고 서둘러지는가 하면 궁둥이가 자리에 눌어붙은 듯 일어서기 싫어지기도 했다. 제문식이 산장으로 간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조용하는 방을 나섰을 때 그 모습 그 자세로 앉었는데 흐릿한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조용하가 물었다.

"애인 좀 만나고 왔지."

제문식은 조용하가 등지고 앉은 창문에 눈을 던지며 말했다. 석양이 진홍빛으로 타고 있었다. 상해 홍구공원에서 고위 장성, 공사든, 십수 명의 일본인을 조선인이 투탄하여 살상했다네, 그 말을 제문식은 보류했다.

"술이나 마시자."

"그러지."

"자넨 한 번도 말린 일이 없었어."

"술 말인가?"

"내 건강이 나빠질수록 제문식은 기분이 좋을 테니까."

사십을 넘긴 사내가 갑자기 소년으로 변한 듯, 조용하 얼굴에 나타난 분노조차 단순해 보였다.

"그럼 관두자꾸나."

"아니야."

제문식은 웃는다.

"악마같이 웃는군."

"추남이 악마같이 웃어야 제격 아닌가. 달콤하게 웃어보아야 별수 없지."

석양은 꽤 오랫동안 창가에 머물러 있었다.

"밖에서 마셨어?"

술잔을 들었으나 늦추듯하며 조용하는 물었다.

"."

"무쇠 덩어리군."

"찬하를 불러들여."

아침나절에 한 말을 제문식은 되풀이했다.

"듣기 실어!"

"들어야 해."

"거머리 같은 놈! 저의가 빤하지 빤해!"

"..."

"그놈을 들먹여 날 자극하자는 게야? 그럼 자네가 맡아 하게, 그럴 것 같은가? 그걸 노리는 게야?"

"..."

"아니면 미리부터 그놈의 공신으로 잘릴 펴놓자 그건가?"

제문식이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왜 웃어!"

조용하는 악을 썼다.

"그럴 수도 있겠지."

말하면서 제문식은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푼다.

", 솔직해서 좋구나."

"나 돌대가리 아닐세."

"누가 그럴 모르나 . 날고 기지."

"조용하라는 인물을 내가 아닐세. 그런 것도 모른다면 자네가 내 머리통 빌려 썼겠나? 공신 운운, 그것도 많이 빗나가 있어. 찬하는 나를 두고 조용하의 충견이라 하지. 찬하는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나를 대한다. 조용하의 심리 분석이랄까 투시력 같은 것은 귀하신, 비단 포대기 출신치고는 상당히 정확하고 날카롭지. 그러나 자넨 나르시스트, 애정 결핍증, 바로 그것 때문에 백발백중이 안 되는 게야. 오산이 있었다 그 말일세. 실은 정확하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맹목적이다 할 수도 있어. 진실보다는 말씀이야. 숫자 놀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인생이거던. 하나 예를 들자면 명희부인의 경운데 그 공작은 졸작이었고 실패했지. 자네 자신이 뼈저리게 느꼈을 게야. 가고 싶어하는 사람 사슬 풀어준 꼴이었다. 안 가겠다고 기둥 잡고 도는 사람 엉덩이 차서 내쫓은 결과는 아니지 않았는가. 세상엔 예외란 것이 있어. 문벌에다 학벌, 재벌, 외보 반듯하고 고루 갖춘 조용하, 천하의 모든 계집들 손만 뻗으면 잡히는 걸로 알았겠지."

조용하는 으르렁 거렸다.

"득의에 찬 자네를 하나님같이 우러러볼 여자들은 물론 많았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여자도 더러 있을 것이란 사실을 자네는 몰랐던 게야. 이렇게 우리는 마주하여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글쎄... 자넨 달라졌을까? 달라졌겠느냐 하고 생각해보는데. 아니야. 자네 눈에 비치는 것, 판단은 여전히 변하고 있질 않아. 본성은 냉혹한데 자기 자신에게는 어찌 늘 그렇게 달콤하냐. 쇠약해지고 희미해진 자네 눈에 비치는 제문식, 그리고 자신에고 소속된 사람들, 여전히 개새끼처럼 고깃덩이를 보고 침을 흘린다, 물론 그렇지, 그렇고말고, 본능이니까. 그러나 억누르는 자의 힘이 쇠약해지면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한몫을 얻어내기 위하여 고깃덩이 보고 침을 흘리며 꼬리가 부러져라 흔들어대는 개새끼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쌓였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작은 몫이고 큰 몫이고 그건 안중에 없이 덤벼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 부류도 있는데 그것 또한 본능 아니겠나."

"그렇다면 자네 가능할지도 모르는 큰 몫을 포기하고 내 목덜미를 물어뜯겠다, 설마 그런 부류는 아니겠지? 꼬리를 흔드는 축인데 그것도 좀 기발하게 말이야, 하하핫핫핫..."

"내가 억눌림을 당했던 처지였다면 물론 자네 말대로 배같이 사악하고 여우같이 교활하게 먹이 쪽을 택했을 것이 분명해. 그러나 제문식은 조용하의 분신이었지. 안 그런가?"

"뭐라구?"

"내가 만일 자네에게 빌붙어서 비위나 맞추고 지냈으면 제법 긴 세월인데 쫓겨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점에서 조용하가 여느 귀하신 서방님과는 딴판이었지. 냉철하고 계산 빠른 사업가였거던. 자타가 공인하는 내 이 머리통, 두둑하게 생겨먹은 배짱, 필요했지. 필요로 한 건 이쪽보다 그쪽, 지금 이 자리도 마찬가지야. 자네가 어찌 생각하든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지 종속은 아니었다."

너털웃음을 웃는다.

"사실은 나 기분이 나쁘다. 계속해서 우울하고, 잠자코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고... 내가 한숨이나 쉬고 있다면 자넨 더 못 견딜 게야."

"우리 명월관에 갈까?"

느닷없이 조용하가 말했다. 제문식은 빤히 쳐다보다가

"요즘 듣자니까, 자네 말을 빌리자면 되잖은 계집들이데, 그것들을 채신머리없이 불러다놓고 넋두리를 한다는 소문이던데 왜 그러나."

"."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호색가도 아니요, 풍류남아도 아닌 자네, 화류계 계집이라면 먼지 털 듯 탈탈 털든 결벽증인 자네는 취향이 신여성 인테리 여성인데 누구 하나 꼬셔다놓고 넋두리를 하는 신세타령을 하든, 마땅찮아."

술잔을 놓고 담배를 붙여 문다. 반사적으로 조용하도 담배에 손이 가다가 그만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계집들, 세상 보는 눈 무시 못 하지. 비록 귀부인에 신사는 아닐지라도 기생과, 내로라 거들먹거리는 득세층이 들고나는 그곳을 이른바 사교계라 해도 무방한데, 해서 장안에 이름난 사내들, 그 사내들 사람됨의 치수를 재는 데 있어서 그곳이 본산임을 명심하게. 자네가 아무리 업신여겨도 그들의 복장은 두 개야. 수모를 감수하는 복장하고 비웃는 복장, 그것들 매눈이야. 하필이면 그곳 계집들 불러다놓고 발가벗어?"

"발가벗다니!"

"그들이 자네 말이면 무조건 희희낙락할 줄 생각하니까 추태가 나온 게야. 소위 죽음의 문답 같은 얘기도 나온 모양인체 자네가 냉혹했다면 상대도 냉혹한 게야. 자네의 인생 관리가 설사 달랐다 하더라도 불행한 사람은 냉혹한 거야. 조씨 문중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씨네 집에서도 촛병마개같이 입들을 틀어막고 있으니 마누라 달아난 소문은 그리 넓게 나지는 않았겠지만 설사 소문이 넓게 퍼졌다 하더라도 달아난 어부인 때문에 노심초사, 자네가 여위고 초췌해졌다, 생각할 그 바닥의 여자들은 아니야. 냉혈한이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

"누가 눈물을 흘렸어! 듣자 듣자니까, 나가아!"

"눈물이야 아니 흘렸겠지만, 뭐 그런 꼴이었겠지. 그 양반 파김치가 됐더군, 그래가지곤 멀잖은 것 같던데? 허깨비를 본 것 같애, 넋이 반쯤 나갔더구나, 강산이 내 것이면 뭘 해, 그런 뒷공론,"

"이 돼지 같은 놈아!"

술잔을 냅다 던진다.

"이렇게 나와야 제격이지. 하하핫핫."

술잔을 피했으나 술에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제문식은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딸꾹질을 하면서 연신 웃는다. 조용하가 이상한 것은 당연하지만 제문식의 숨막힐 것 같은 웃음소리는 납득이 안 되는 일이다. 신경이 굵어 그랬지 제문식도 조용하 성미에 넌더리친 일이 있었고 경멸을 하고 미워도 했으며 다만 정확한 판단과 일 처리에 죽이 맞아온 두 사람의 관계다. 현재 심정도 그를 위해 슬퍼하고 아파하는 제문식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답답하고 우울했고 뭔가 들어 올려 와장창 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하는데 제문식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손수건을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고 제문식은

"자네 나보고 나가라 했나?"

조용하는 노려보기만 한다.

"내심으론 갈까봐 겁나지? 안 그래?"

"갈려거든 가아!"

"나야 해방되는 게 좋지. 저놈이 내 고통을 즐기고 있다, 저놈을 어떻게 잡아먹으면 속이 시원할까 하면서 자신의 무력함에 이를 갈겠지만 자네 의식 속에는 내게 대한 신뢰 같은 것 있을 게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말씀이야."

"차라리 미쳐버리는 편이 낫겠다. 제문식을 믿느니 독사를 믿지."

"인간이란,"

담배를 눌러 끄고 새 것으로 피워 문 제문식은

"인간이란 묘한 거야. 참말 묘하고도 신비스러워."

늦추듯, 삼가듯 하던 술을 조용하는 퍼마시기 시작했다.

"묘해, 인간이라는 것 말씀이야. 어디까지 측은하고 어디까지 악독한 건지 측량할 수가 없어. 제아무리 크다 한들 기껏 팔 척 장신, 이 괴물이 전후좌우 어찌 그리도 방자한지, 복잡한지, 그런 생각해본 일 있어? 없을 게야. 소위 그 민중이라는 것, 시쳇말로 민중인데 그들은 특수층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과소평가가 되는데, 이것이 역사가 시작되면서 오늘까지 속성이라, 그러나 그들 양켠 다 가까이 가보면 일정한 공약수가 나오긴 나오지. 그게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중간층에 속하는 족속들이 아닌가 싶어. 물론 상··하 어느 곳이든 개성에 따라 그런 부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으흠흠 내가 왜 이러지? 아프기는 조용하 쪽인데 내 대가리가 왜 이 지경으로 터질 것 같나. 으흠, 그래서 말인데, 그들 나름대로 신산을 맛보았다 할 수 있으니 심리 구조가 이중으로 삼중으로 될밖에 없지. 그러나 말씀이야, 권력 근처에 가질 못했거나 혹은 참여의 기회가 없었던 패거리, 문벌·재벌·학벌을 두루 뭉쳐서, 벌족 부호들 말씀이야, 그것도 한가하게 의식을 즐기는 계층, 이를테면 자네 같은 부류인데 비교적 그들에게선 공약수가 나오는 것 같애. 그러니까 양지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늘이 없었다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인생의 신산을 맛본 일이 없거던. 대체로 신분이란 그 높이에 따라 신비감이 조성된다고들 하지. 그러나 그건 틀린 것이야. 잘 보이지 않고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요란한 가문, 요란한 인물을 상상 속에 가두어버린단 말씀이야. 그 속에서 메치고 바로 치고 반죽하거던, 상상엔 제한이 없는 게야. 얼마든지 색칠이 가능하고 모양새도 뜯어고치고 해서 신비스럽게 부각도 되고 황당무계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색칠도 하고, 그건 관점이 아니라 망상이야. 소문이야. 그러나 거리가 좁혀져서 실재를 인식했을 때 떡장수·엿장수·처세가·예술가 할 것 없이 그 파악이 거의반 일치한단 말씀이야. 조용하를 냉혈·독선·오만불손, 숫자에 능하고 편집광에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완상하는 이외 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 마찬가지로 운상거인에 속하는 조찬하는 어떤가? 내성적이며 방관자 같고 순수한 열정파, 하면서도 만만찮은 고집, 숫자에는 무관심한 듯하면서 사물을 보는 눈은 정확하고, 물론 모두가 다 나같이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어내는 것은 비슷할 게야. 나 같은 인간은 엿장수 눈에 비친 것 다르고 기생 눈에 비친 것 다르고 양반 눈에 비친 것 다르고 식자 눈에 비친 것 다르고, 의식하건 아니 하건 끊임없이 변신한다고나 할까. 왜 그럴까? , 아마 강력한 상부층과 대다수인 하부층 사이에 끼여든 박쥐같은 존재라서 그럴까? 아무튼 자네들 계층의 속성, 아 아니야, 그 말이 아니고 아무튼 자네들 계층은 창자 속가지 들여다뵈는데, 그런데 말씀이야 하부층, 소위 그 대다수인 민중 말일세. 이건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과는 달라, 솔직히 말해서 민중이라는 큰 무리 그 자체, 난 모르겠어. 모르겠거던.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대다수인 그들 민중 그 큰 무리를 통하여 나는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시 그들을 알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오리무중이야. 그건 크나큰 절망, 절망이지. 어쩌면 그 절망은 역사의 본질 같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 완전한 지배, 완전한 복종, 한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는 거 아니겠나? 그런 뜻에선 절망의 본질이란, 억지 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명멸의 이 끝없는 되풀이 그 자체인 것 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명멸의 이 끝없는 되풀이 그 자체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복종의 존재인 저 거대한 무리는 그러나 결코 복종 아니 하면서 목적에 이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며 또 사라져가고, 결코 그들은 그 아무에게도 지배된 적이 없고, 어떤 힘도 그들을 완벽하게 지배한 적은 없었다. 물질의 결핍이란 순간 순간 혹은 어느 기간에 있어서의 고통이며 굶주림과 헐벗음이 생명을 파괴하는 만큼 의식주야말로 가장 초미한 문제임엔 틀림이 없겠으나 그러나 존재만으로 인간은 설명이 되지 않아. 도시 인간을 모르겠다 한 것은 그 때문일까? 노예나 노비들의 끊임없는 탈출에의 정열, 그 치열함이 헐벗음과 굶주림과 더불어 역사의 본질일까. 그리고 그네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진실을 희구하며 종교나 예술, 사랑을 혹은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소망하고 갈망하며 이것들이 상극하고 상승하고 상쇄하며 엄청나게 준동하는데 상층과 중간층이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은 과연 옳은 말일까? 상층과 중간층은 중심에서 퉁겨나간 한낱 비말에 불과한 거 아닐까. 대다수 민중이야말로 거대한 여울이다, 여울. 내가 또 그들을 모르겠다 한다면 중언부언이겠으나 거대한 그 집단, 꿈틀거리는 그 집단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그 행방은 늘 불가사의하면서도 불길해."

"행방? 다 죽었겠지. 하하핫핫..."

다음 순간 조용하의 웃음은 갑자기 멎었다. 얼굴이 새파래졌다. 의자 모서리를 누른 손이 덜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제문식은 미동도하지 않고 쳐다본다. 너무나 기묘한 광경이다. 조용하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제문식은 우울증 환자의 눈빛이었다.

"엄지손가락 하나로 문질러 죽일 수 있는 개미가 무리를 지어 아프리카의 정글을 메우며 진군할 때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럼 그 거대한 무리는 어디로 갔나. 그것을 생각할 때 나는 동학의 김개남을 연상한다. 김개남은 무엇을 했고 어디로 갔으며 그 무리 또한 어디로 갔는가. 죽었다 하겠지. 물론 죽었지. 자네도 죽었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좌절했다 하고 싶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였을까?"

제문식의 목소리는 늪으로 가라앉는, 깊이 모를 곳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자신을 추스리듯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일세, [독일농민전쟁]에서 엥겔스는 말하기를 각 주방의 농민들은 단독 행위를 고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웃 농민의 구원을 거부함으로써 그 결과 개개의 투쟁 결과는 반란의 대중의 십분지 일에도 못 미치는 군대에 의해 차례차례 섬멸되고 말았다... 진주의 농청과 백정과의 싸움은 어떠한가. 그게 이해 상관의 충돌이었나?"

제문식은 머리를 흔들었다. 창자 속에 흘러들어간 술의 양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조용하의 함께 자신도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의식했다. 지껄이고 지껄이고 또 지껄이고 왜 지껄여야 하는지 그 자신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용하는 제문식의 얘기 따위는 이미 듣고 있지도 않았다. 미친 여자 물 마시듯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짐승이나 초목도 제 영역을 침범하면, 초목도... 초목 그, 그건, 아무튼 격렬하게 싸우는 것 그거 다 생존의 본능 아니겠어? 백정과 농청의 싸움도 본능인가? 그건 인간의 싸움이야. 인간 말이지? 소위 계급투쟁이다 이거야. 농청은 상하를 그어놓자! 백정은 아니다 상하를 지워버리자! 그게 먹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뿌리 깊은 인습, 그것도 있지. 하지만 그건 민중에게 내포되어 있는 분파 작용인 게야. 그래서 그 거대한 무리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게야. 모이고 흩어지는 것, 운동은 운동이지. 만물이 모두 모이고 흩어지고 그게 운동인 게야. 조용하 알겠느냐고. 죽는 것도 운동이고 사는 것도 운동 아니겠어? 홍수전의 막하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내, 숯 굽던 사내, 나 그 사내를 참 좋아하는데 말씀이야, 양수청 있지 않아? 태평천국의 그 양수청 말일세. 그 양수청이가 전당포 아들인 동료 위창휘에게 암살당하면서 태평천국은 일시에 무너지는데 아까 내가 운동이라 했던가? 계급투쟁이라 했던가? 아니야 아니야 에고이즘, 이게 환상이거든. 측은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수오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사양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시비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그 사단설, 아암 훌륭하지, 군대의 사열만큼이나 반듯하지. 난세 시달리는 백성에게선 실효가 없어도 패왕들의 구실도 둔갑하고 보면 지팡이 지휘봉이 되기도 하고 몽둥이가 되어 부러지기도 하고,"

", 그만 그만,"

조용하가 손을 내저었다. 비실비실 일어나다 말고 픽 쓰러진다.

거의 소파에 등은 묻고 조용하는 앉아 있었다. 바둑판무늬의 헐거운 회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커튼은 드리워진 채로, 그러나 커튼을 통하여 산장에는 아침이 활짝 열려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어멈이 끓여온 녹차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흑단 탁자에 백자 찻잔은 눈이 시리게 대조적이다. 조용하는 등을 세우며 녹차 한 모금을 마신 뒤 궐련을 뽑으려다 말고 한숨을 쉰다.

"늑대 같은 놈."

팔을 들어 깍지 낀 손에 뒤통수를 받친다.

"야수 같은 놈."

해질 무렵부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악몽과 같이 술을 마셨다. 제문식의 번들거리던 눈빛이 다가오고 너털웃음이 귓가에서 울린다. 누구 사형 선고 받았느냐고 악을 쓴 자신의 목소리도 되살아났다. 어제 온종일 죽은 듯 누워 있었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다. 깍지낀 손을 풀고 시선을 찻잔에 떨어뜨린다. 녹차는 투명했지만 액체가 아닌 고체로 느껴진다. 흐물흐물한 푸딩을 조용하는 연상한다. 일본에 있을 때 가끔 먹었던 꼬냑이 생각나기도 했다.

'해파리, 낙지, 해삼, 문어 또, 또오 으음 홍성희 같은 계집? 명희는 홍차 같은 계집인가... 유인실은 냉수, 냉수.'

조용하는 저도 모르게 피전 갑에서 궐련을 한 개비 뽑는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고 담배개비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면서 골똘히 그것을 쳐다본다.

'그자의 말이 옳기는 옳아. 내 앞에서 한숨이나 푹푹 쉬었다면 그 입을 찢어주고 싶었을 거야.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면 눈알을 뽑아내고 싶었을 거야.'

천천히 담뱃불을 붙인다. 연기를 뿜어내다가 심한 기침을 한다. 기침을 하면서 창가로 걸어간다. 커튼을 걷는다. 산장의 뜰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차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신록은 미친 것처럼 연둣빛 진초록이 서로 얽히고설켜 일렁이고 있었다. 타고 있었다. 녹색도 탄다. 진홍의 단풍만 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생명이 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환희, 인고의 겨울은 이 환희를 예비하고 있었기에 설원은 그렇게 청정하였는가. 햇빛은 황금가루같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산장에서 바라다뵈는 앞산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짙고 옅은 빛깔, 분홍 같은 연보라 같은 빛깔들이 얼룩처럼 구름처럼 흐드러지게도 피어 있다.

'여자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내 곁에는 햇빛과 신록과 꽃빛만이 있구나'

가면 같았던 손의사의 얼굴이 지나간다. 소독 냄새 하얀 시트.

'나는 다시 저 신록을, 꽃을 볼 수 있을까? 명년에...'

조용하는 유인실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냉담해도 상관없었다. 비난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경멸을 당하더라도, 하여간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였다. 이 세상 누구에겐가 한 사람에게만은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고 싶을 것이다. 제문식이 알든 모르든, 알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지만 이제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제문식이 안다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요하게 그토록 자기 신병을 감추기 위해 벽을 쌓고 또 쌓았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으로 제문식에 대하여 조용하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시원하다거나 해방감 같은 것이 있을 리는 없지만 제문식과의 관계에서 결박을 풀어버린 듯한 느낌은 드는 것이다. 다만 쫓기는 기분, 갈길이 바쁘다는 생각, 서둘러지는 마음이 유인실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인실의 행방은 묘연했다. 사방에 수소문해봤으나 찾을 길은 없었다. 찾지 못한다는 초조함 때문에 기생을 불러들였는지 모른다. 고백한 것은 아니었으나 제문식의 말대로 추태를 부린 결과가 됐는지 모른다. 그런데 고백의 대상이 유인실이라야 한다. 그것도 상식 밖의 집요한 생각이지만 한편 여자라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희망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여자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희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조용하가 유인실을 마지막 본 것은 작년 봄, 그러니까 새 학년, 아니 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마지막이라 했으나 두 번째라 해야 옳다. 그날 요정에서 제문식과 함께 술을 마시던 조용하는 별안간 쏜살같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리소리 지르며 운전수를 불렀다. 밤도 어지간히 깊어 있었는데 빨리 가자고 운전수를 내몰아 찾아간 곳이 야간부 기예학교였던 것이다. 그는 곧장 교무실로 들어갔고, 술에 잔뜩 취해 있었기 때문에 염려한 운전수는 그를 뒤따른 것이다. 교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시에 방문한 취객의 신분을 몰랐던 교직원들은 어리둥절했고 운전수가,

"조용하 사장님이십니다."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실감할 수 없는 듯 직원들은 입만 벌리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용수철 같이 화다닥 일어났고 나머지도 덩달아 일어섰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유인실만은 약간 놀란 표정이기는 했으나 침착하게 일어섰다. 조용하가 야학교에 술 냄새를 풍기며 찾아오다니, 술 냄새를 풍기며 왔다는 사실이 그의 체면을 말이 아니게 했지만 명목상 교주이긴 해도, 기예학교 야간부의 존재 따위는 조용하에게는 호주머니 속에 든 영국제 담배 케이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팔을 부러뜨린 이곳 학생이자 방직 공장 여공의 건으로 유인실이 서한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조씨 가문의 학교 재단속에 기예학교, 그것도 야간부가 있으리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교무실 함석 지붕에서 모래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가숭이 전등이 댕그랗게 매달린 교무실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선생."

조용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곧장 유인실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인실은 짤막하게 말했다.

"얼굴이 안 좋으시군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인실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실은 인실은 처음에는 조용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삼사 개월인가,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한 번 만났으나 그때는 대단히 단정해 뵈던 신사였었다. 몸가짐이 흐트러져서도 그랬지만 조용하 역시 건강이 좋아 보였던 것이다. 얼른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인실은 삼사 개월 동안 꽤 많이 조용하를 생각한 셈이다. 여공 아이에 대하여 감감 소식이 괘씸하여 그의 생각을 했고 낯선 항구로 명희를 찾아갔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일본서 오가다와 함께 나온 조찬하가 그의 동생이었고 그의 동생과 함께 여행을 했기 때문에 조용하를 자주 떠올렸을 것이다.

'그새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여행하셨다지요? 겨울방학 동안,"

"..."

"왜 놀라시지요?"

'어떻게 알았을까? 어째서 이 사람은 내 행적에 대하여 알아야만 했나?'

인실은 불쾌감을 나타냈다.

"명희여사를 만났다지요?"

'아하 그랬었구나.'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는군요.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조용하는 비로소 교무실 안을 둘러본다.

"이 기예학교 교장을 하라 해도 마다 할 사람이 벽촌 코흘리개한테 자수를 가르치는 처지로 전학했다 하니 사람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사정없이 조용하는 자신의 치부를 펼쳐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안하무인의 처사이기도 했다. 조용하가 돌진해간 목표물은 유인실이기 때문에 명희를 거론한 것은 말을 잇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렇고 지나가는 길에, 언제였지요? 유선생께서 부탁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해서 들렀소이다."

"직접 안 오셔도 될 일인데요."

"그렇습니까?"

"..."

"어쨌거나 여기 생도이자 우리 공장 여공 아이에 관한 얘기였지요?"

"그렇습니다."

하고는 인실이 의자를 내밀었다.

"앉으시지요."

"아니 괜찮소."

조용하는 스프링이 망가져서 푹 꺼진 의자를 내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다시 고개를 들고 인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교직원들은 발가숭이 전등 밑에 실루엣처럼 서 있었다.

"생활이 복잡하다보니, 유선생과의 약속을 이행 못했습니다."

"심려를 드려 죄송합니다."

", 아니오.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실태도 볼 겸."

"유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시다시피 경영주의 무관심이 역력하지요."

실루엣같이 서 있는 교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내가 적지에 들어왔구나 생각했습니다."

"..."

"그보다 유선생은 몹시 수척해졌군요. 나처럼 건강이 나빠진 것 아닙니까?"

아까 한 말을 잊었는가 조용하는 되풀이했다. 인실은 건강에 대하여 두 번이나 묻는 조용하의 의도를 잠시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것은 또 고통스러움을 참는 표정이기도 했다.

"아아 참 비좁고 답답하군. 이래가지고 학교 구실을 할까? 으음, 내가 이곳의 임자라니 민망하고 창피스럽군."

이때 조선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 그렇습니다만, , 그렇겠습니다만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이층 큰 교사보다 소중하고 보람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선생의 말을 묵살한 채

"어떤 얼빠진 놈이 진언을 했는지, 사회주의자? 독립투사? 부친의 콤플렉스를 이용한 모양인체 기왕이면,"

또다시 조용하는 인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기왕이면 유선생이 다니던 그런 여자대학이나 설립하실 일이지, 했으면 춥고 배고픈 밤에 이런 수고는 아니 했을 것을, 하하하핫... 유선생을 이런 곳에 썩게 하다니 하하하핫..."

인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례하십니다."

"제가 유선생 심기를 건드렸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사회주의 하는 것도 좋지요. 식자들 사이의 유행병이니까. 하지만 이곳이 무슨 근거가 되겠소? 안 그렇습니까?"

방약무인이야 그의 본령이지만 이런 경우는 추태다.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양반이 백정과 다투는 꼴이요, 술을 마시고 나타났다는 것부터 추태였던 것이다. 왜 이래야 했을까? 머리칼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유인실, 그 여자의 영혼 때문이었을까? 머지않아 붕괴될 자기 자신 때문이었을까? 방범은 없다. 아무런 방범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소망은 치열하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인실은 몇 개월 전의 조용하와 지금 눈앞에 있는 조용하, 엄청난 변화에 의문과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의 말은 다만 언어일 뿐 심정이 아닌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아까 말을 꺼내었다가 묵살당한 조선어 선생의 얼굴은 벌개져 있었다.

"춥고 배고파서 독립투수가 됐다, 춥고 배고파서 사회주의자가 됐다, 뭐 그런 겁니까? 등 따습고 배부르면 친일파요, 민족반역자라, 사고방식이 좀 완곡해도 될 텐데 왜 그럴까요? 너무 성급하다 생각지 않습니까? 인실씨. 식자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식자들 식자 자랑이 문제는 문제요. 선생들 콧대 높은 것도 따지고 보면 식자 자랑,"

횡설수설하다가 트림을 한다.

"하루 열두 끼 먹는 사람 있습니까? 식자 자랑하려고 교단에 섰다면 그거 때리치워야지요."

별안간 조선어 선생이 발악하듯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가방을 나꿔챘다.

"내일부터 나 안 나올 거요. 여러 선생들 잘해보시오!"

문을 쾅! 닫고 그는 나가버렸다. 교무실 안이 술렁거렸다.

'성격 파탄이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술버릇이 고약해서 이러는 걸까?'

그러나 인실은 쏘아붙인다.

"조사장께서는 이곳이 마땅찮은 모양이지요? 모멸스러운 곳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취중이나 목적 없이 왔겠소?"

조용하는 고개를 푹 속이고 끼들끼들 웃었다.

"자부심이 도도하신데 그런 객담, 자존심이 용납하나요?"

"역겨웠을 게요. 이곳 사람들은 저어 만주벌판, 설한풍을 뚫고 말달리는 투사들은 숭배하고 동경하고, 투사들 몸에 들끓는 이조차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들 아니오? 왜 청사에 폭탄을 투탄하고 역두에서 원수의 원흉을 저격하고, 여기 사람들 그것을 꿈꾸며, 그런데 친일파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반대로 나의 부친께서는 정치적 정열을 획득했다 하여, 무산 계급이 여름날 메뚜기 모양으로 날뛴다 하여, 상대가 유인석도 아니겠고 안중근도 아니겠고 베풀면서 허리 꺾이는 짓을 왜 하느냐, 그야 뭐 원죄지요, 원죄, 진실, 좋지요. 사랑? 숭고한 겁니까? 아아 참 내가 이런 말 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니었는데, 주정 아닙니다. 인실씨, 뒤죽박죽이오. 아아 참 장광설은 조용하 스타일이 아닌데 말씀이오. 나 주정하는 거 아닙니다. 하하핫핫..."

교직원들은, 교직원들이라 해야 몇몇 되지도 않았지만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넋이 빠져 있었다. 술에 취해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용하는 친일파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히 그 말을 했는데 직원들은 그냥 서 있는 상태였다.

'나는 왜 이 사람을 동정하나. 등이 휘도록 일하여도 늘 굶주려야 하는 사람들, 길을 헤매며 행인에게 손을 벌리는 어린것들, 만주로 팔려가는 젊은 여자들, 그들이 이 배부른,'

하다가 인실은 뭣에 놀랐는지 소스라친다. 다시 생각을 잇는다.

'돼지같이 미친 지랄하는 것을 증오 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느 편이며 무엇을 하려는 거지? 나는, 이제 아무 일도 못하게 될까?'

인실은 암울한 눈을 들었다.

"그는 그렇고 유선생 마침 퇴근길인 모양인데 내 차로 댁까지 모셔다드리지요. 춥고 배고픈 이 장소에서 한시 바삐 탈출하시지 않겠소?"

"술 취한 남자하고 동행할 어리석은 여자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가십시오. 아까 그 선생님처럼 조사장께서도 용감하게 나가 보십시오."

조용하는 물끄러미 인실을 바라보았다. 인실은 그 눈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지요. 용감하게 하하핫핫..."

웃다가 순순히 물러갔다.

조용하는 야학에 가서 추태를 부린 후에도 인실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단념하지 않았다 하여 인실을 소유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인실은 학교를 그만두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확실치 않은 얘기를 들었을 뿐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급전직하, 조용하는 계속 급전직하 나락으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명희의 가출에서 시작하여, 유인실과의 만남, 그리고 불치의 병 암의 선고, 모든 것은 갑자기 예기치 않게 달려들었다. 명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은 유인실 때문이지 후퇴는 아니었다. 유인실, 조용하는 가장 귀한 보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퇴하고 또 후퇴하고 백기를 천번 만번 흔들어도 유인실은 너무나 멀리 있는 여자였다. 자신의 병을 알았을 때 한 가닥 희미한 희망까지 그는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새까맣게 조용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새까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인실에게 고백해야겠다는 이상한 집념을 그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도 마지막의 빛, 생애에서 가장 진실된 빛을 잡아 보고자 하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남자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어일까? 지배한다는 말은 적절하지가 않아. 서러움 서러움... 모르겠다, 모르겠다. 아아, 모르겠다. 왜 그 여자는 보석인가.'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조용하는 창가에서 떠난다. 휘청거리며 소파 곁에까지 와서 소파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지며 오열한다.

'내 주먹에서 피가 흐른다. 두드려도 내리쳐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미쳐서 거리를 헤매면서 이 고통을 잊을까. 그 여자만... 나는 평화스럽게 체념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이렇게 나는 남몰래 죽어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나를 태워왔는가! 과연 내 생애에 불꽃은 있었던가? 캄캄한 밤...'

울음을 끊고 조용하는 술을 찾았다. 술병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돼지 같은 놈! 악마 같은 놈!"

제문식이 술병을 치워버린 게 분명했다.

"술을 치울 성의가 있었다면, 음 그런 성의가 있었다면 날 혼자 내버려두어? 돼지, 거머리, 박쥐! 이러고 있어선 안 되겠다. 나가야지, 나가 술을 마시든 회사 내 방에 가서 웅크리고 있든 나가야지 나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그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면도를 해야지, 면도를 하고 나가야지. 나는 병자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난 병자일 수 없어. 젤 마음에 드는 옷 입고, 젤 마음에 드는 넥타이를 매고 음 음,"

서둘러 얼굴에 비눗물을 칠한다. 면도를 들었다. 날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얼굴을 밀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털이 밀려나는 소리가 들린다.

"젤 좋은 옷을 입고 호주머니 가득히 지폐를 넣고... 바닷가로 나가볼까? 제문식이 끌고서 바다로 나가볼까? 기생 몇 데리고 말이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거울 속에 나타난 자신의 얼굴을 조용하는 바라본다. 부승부승 부어오른 얼굴, 눈꺼풀이 아래로 쳐져있다. 눈은 빛을 잃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려 자세히 들여다본다. 뼈마디뿐이었고, 정맥이 나돋았던 손이 여자 손같이 도톰하다. 역시 손도 부어 있었다.

"제문식이 말이 옳아."

중얼거렸다.

"제문식이 말이 옳아."

한 손엔 면도칼을 들고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본다.

"나 생긴 대로, 조용하로서 죽어라! 그 말이렷다아? 조용하는 달콤한 사내가 아니지 않는가. 허허 헛헛 허허, 맞는 얘기야."

조용하가 화장실에 들어간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제문식은 산장에 왔다.

"이 사람 잠 좀 잤나?"

도어를 밀고 들어왔다.

"어어 없네?"

침실을 들여다본다. 제문식은 산장지기를 불렀다.

"사장님 나가셨소?"

"안 나가셨는데요."

"없는데?"

"아침에 차를 끓여다드리고, 조반 내오라는 말씀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 참입니다."

"이상하군. 그럼 어딜 갔지? 창밖으로 날아갔나?"

하다가 제문식의 안색이 싹 변한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다음 순간 제문식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하 신문에 조용하의 자살은 일제히 보도되었다. 남 몰래 불치의 병을 비관해오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는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어떤 신문에는 그 불치의 병은 폐암이었다고 씌어져 있었다.

 

 

11장 양자 얘기

조용하가 죽기 전, 그러니까 제문식과 함께 미친 듯 술을 퍼마시다가 쓰러진 그 이튿날, 온종일을 인사불성이다시피 잠들어 있었을 무렵, 동경 조후에 있는 조찬하 집에는 방문객이 있었다. 외출 준비를 하고 오이치의 전송을 받으며 막 나서려던 찬하의 처 노리코는 깜짝 놀란다.

"오가다상!"

문 앞에 서 있던 오가다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하는 시늉을 하며, "모양 잔뜩 내고 외출이군요."

했다. 노리코는 정장을 하고 있었다. 굽이 높은 조리(일본 신발)에 다비(버선)가 눈이 시도록 회었다. 연한 감색 바탕에 짙은 감색 무늬가 있는 기모노에 황갈색 오비를 둘렀는데 크고 영롱한 비취의 오비 도매(허리띠 고리)가 눈에 확 띄었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참 잘 오셨습니다."

노리코는 진심으로 환영했다. 찬하가 오가다를 알게 된 것은 처가 식구들을 통해서다. 그러니까 오가다와 노리코의 친분은 훨씬 이전부터가 할 수 있었다.

"우기코 아주머님께서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씀을 하시던데, 많이 수척해지셨어요."

오가다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본다.

"자아, 들어가시지요. 산카가 기뻐할 거예요. 오이치, 반가운 손님 오셨다고 서방님한테 여쭈어."

오이치는 게다짝을 굴리며 급히 들어갔고 두 사람은 자갈길을 밟으며 현관은 향해 걷는다.

"건강은 이제 괜찮으세요?"

"."

그들이 거실로 들어갔을 때 찬하는 서재에서 나와 가다리고 있었다. 두 사나이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오래간만이군."

찬하 쪽에서 손을 먼저 내밀었고 악수를 했다. 노리코는 시계를 보며

"시간약속이 돼 있어서, 어떡하지요? 반가운 분이 오셨는데 나가야 하다니."

"개의치 말아요."

오가다가 말했고 찬하도

"걱정 말고 나가시오."

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꼭 계셔야 합니다. 저녁을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러지요."

"내가 꼭 잡아두리다."

찬하 말에도 노리코는 안심이 안 된다는 듯 되풀이하여 자기 올 때까지 가지 말라는 말을 했다. 오자마자 외출하는 것이 미안하여 더욱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가는 아이처럼 말하고 노리고는 나갔다. 두 사람은 거실소파에 마주보고 앉는다. 오이치가 재빠르게 홍차를 끓여 내왔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소?"

담배를 붙여 물며 찬하는 물었다.

"괜찮아요."

"학교는?"

"휴직을 했는데 다시 돌아갈 것 같지가 않아요."

"룸펜으로 있겠다 그 말이오?"

찬하는 애써 가볍게 넘기려는 투로 말했다.

"글세... 내가 생각해도 딱한 인간이지요"

찬하가 오가다를 만난 것은 작년 여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조선에 갔다오는 길이라 했다. 인실은 만나지 못하였고 그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조차 모른 채 돌아오는 길이라 했다.

"죽었는지도 모르지요."

오가다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았다.

"죽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건 모두 내 탓입니다. 이 내가, 내가 다 잘못한 때문이지요."

목멘 소리로, 오가다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면 끝장난다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사내자식이, , 이러면 안 되는 것도 아는데 말입니다."

참지 못하고 오가다는 흐느껴 울었다. 그때 하마터면 인실씨는 지금 동경에 있소 하고 찬하는 토설할 뻔했다. 그러다 오가다의 말, 그러면 끝장난다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그 말이 찬하의 입을 간신히 막았다. 그날 밤 오가다는 술을 많이 마셨고. 휘청거리며 밤길을 돌아갔다. 그 후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찬하는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

"산카상."

"..."

"당신 나한테 화내고 있지요?"

찬하의 기색을 살피며 오가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찬하는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본다.

"화내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래서 나를 한 번도 찾아주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쓸쓸해 하는 음성이다.

"뻔한 병인데 뭐. 찾아가면 뭘 해. 상사병 걸린 사람한테 할 말도 없고."

했으나 찬하의 표정은 착잡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화내지 있지 않소. 화낼 염치도 없고."

한참 후 찬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가다는 의아해한다.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아이는,"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찬하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오가다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이라면..."

"당신 딸, 이름이 뭐더라? 아아 후미짱, 그 아이는 잘 큽니까?"

"아아, 그 아이, 그 애는 지금 유모 따라 외가에 갔어요."

당황하여 찬하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얼굴빛이 변하길래 난 또 무슨 일이..."

하다 만다.

"가끔 현기증이 나서, 그래 그랬을 게요."

대뜸 아이는, 하는 바람에 착각을 했던 것이다. 오가다는 아이에 관한 일을 알고서 그런다는 착각이었다. 지금 사도코 주어서 크고 있는 오가다의 아들, 벙긋벙긋 웃는 아이의 얼굴이 시야 가득히 들어온다. 인실은 떠났다. 자년 가을, 병원에서 몸을 푼 뒤 가버렸다. 오가다는 조선을 다녀와서 인실이 죽었는지 모르겠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인실이 동경을 떠난 뒤 찬하도 가끔 인실이 죽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정신적인 고통 못지않게 그의 건강은 망가져서 엉망이었던 것이다.

"술 하시겠소?"

찬하가 물었다.

"주십시오."

찬하는 양주를 꺼내었다. 글라스도 꺼내었고 마른안주, 새우랑 콩 따위를 장식품 접시에 쏟았다.

"어떻게 할까요?"

오가다가 술잔을 들고 말했다.

"세 끼 밥 먹고 할 일 없는 두 마리의 돼지, 아니지, 오늘 은 상해 홍구공원의 그 열사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오가다는 말하고서 술잔을 부딪쳤다.

"감상이 어떠시오? 산카상."

"무슨 말을 듣고 싶소?"

찬하 얼굴에서 눈길을 거둔 오가다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그러고 말하기를

"하기야 뭐, 착잡하겠지요. 물어보나마나, 내 생각하고는 같을 테니까요."

"..."

"하지만 나 감동했습니다. 대장 한 사람 죽이는 게 쉬운 일이오?"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 식전에 우리의 열사 윤봉길의 투탄으로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이 죽고, 가와바다 거류민단 회장이 즉사했으며, 제삼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한쪽 눈을 잃었고, 시게미츠 공사는 한쪽 다리가 날아갔다. 제구사단장인 우에다, 무라이 총영사도 부상을 했다.

"싹 뽑았지요. 그렇게 신묘하게 핵심을 뽑을 수 있었다니.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의 몇 개 사단으로도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치운 겁니다. 난 사실 그들 유족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신이 난단 말입니다. 원래 일본인은 테러를 좋아하거든."

그러나 오가다의 들떠 있는 감정 속에는 불균형과 허무감과 절망이 있었다.

"나는 조선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내 개인의 삶이 참말 하잘 것 없다는 것도 느꼈구요."

"당신 일본인인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어느 모퉁이에서 단칼에 나가떨어지려고 그러시오? 따지고 보면 그런 흥분도 지극히 일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 거요. 언젠가 말한 마쓰시다야의 소마 부부처럼."

찬하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적어도 나는 양심에서 하는 얘깁니다. 죽은 그들이 누굽니까?"

"..."

"군국주의, 팽창주의 최전방 아닙니까? 그들은 시체더미를 밟고,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죽어야 하는가. 나는 반역자가 아니오. 그들 때문에 일본은 망할 것입니다. 삼월사건, 시월사건, 그 미친 놈들을 몰라 그러시오?"

"미친 놈들이라니, 일본의 영웅들 아닙니까?"

찬하는 비웃듯 말했다.

삼월사건이란 법학박사 오가와, 기다를 위시한 소위 혁신파의 건달들, 또는 사회주의 우파와 어중이떠중이들이 육군 참모부의 쥬토 대좌, 하시모도 대좌 등 군부의 장교들과 결탁하여 무산대중을 동원, 단숨에 의회를 때려 부수고 당시 육상이던 우가키에게 대권을 몰아줌으로써 군부 독재, 이른바 소화유신을 꾀하자는 것이었는데 군부의 후퇴로 불발했다. 이어 시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의 시월사건은 만주사변과 관련이 있었다. 관동군이 만주에서 마구 밀어붙이고 있는 판국인데 군 수뇌와 정부측에서 관동군의 행동을 일일이 억제하고 간섭한다 하여, 삼월사건의 주모자였던 하시모도가 만든 사쿠라카이의 청년 장교 삼백 명이 집결하여 쿠데타를 기도했던 것이다. 23연대를 동원하고 기관총, 폭탄은 물론, 비행기에 독가스까지 준비한 그들은 군 수뇌, 정부 요인, 천황을 보좌하는 중신, 그리고 재벌을 살해 또는 감금하고 무엇보다 먼저 궁중을 장악하여 혁명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 또한 결행 직전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되는데 삼월사건 때도 동기순진론을 내세우고 우국충정 따위의 미사로 가볍게 넘긴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계획이 보다 과격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 얼버무린 것은 대일본제국으로부터 관동군을 분리하여 만주에서 독립하겠다는 소위 관동군 독립선언으로 육상과 참모총장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상황의 경로는 어찌 되었든 하여간 그들은 역적이 아닌 반란군이 아닌, 영웅 애국자로서 하극상은 불문에 부쳐졌고, 며칠간 보호 검속된 장교들은 기생들을 불러들여 유흥을 즐겼다는 말도 있었다.

"악동들."

오가다가 중얼거렸다.

"악령이지."

찬하의 말이었다.

"악령의 수준도 아니지요. 골목대장의 푼수를 넘지 못했어요. 그런 몇몇 악동들에 의해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은, 참말이지 인간이란 형편없는 족속이지 뭐겠소."

"칼 가지고 나서면 못할 일 없지. 도마 위의 생선 자르듯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면 그보다 더 강한 무기는 없을 게요."

"그야말로 악령이지."

"문화란 한없이 무력하고 무방비 상태요. 어쩌면 능욕당한 처녀 같은 것인지 모르겠소."

"능욕당한 처녀..."

"글세... 문화라 하니까 어째 좀 어폐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소망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것은 창조적 행위인데 도덕이나 윤리, 종교까지 포함하여 높은 곳에 이르고저 선을 전제로 하고 신이나 불가사의하며 오묘한 질서를 닮으려 하는 총체적인 것, 사실 총체적이라 하면 대단히 그것은 명료하지 못함 것인데, 또 이것의 구심점이 높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 명료하지 못하지요. 명료하지 못하다는 것은 공격적이거나 도전적일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고, 도전하고 공격하고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얘기도 되겠는데 합리주의자들은 반격하면 될 게 아니냐, 못하는 건 병신일 뿐이다, 하겠지요. 그러나 흰 것에 빨간 물이 침투해오면 흰 것은 그것을 어떻게 막아? 면역이 안 된 육체에 병균이 들어오면 그것을 어떻게 막느냐 말이오."

"그건 패배주의요."

"성의 없는 말이군."

오가다는 픽 웃었다.

"그러나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끝내는 다 잡아먹을 순 없다는 것,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죽음을 들 수 있는데 도전자도 죽는다는 얘기며 사람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분명하지 않은 것, 영원히 분명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명료하지 않은 총체적인 것 역시 영원히 존속된다 할 수 있고, 그러나 항상 야수의 이빨 밑에 놓인 처녀라. 하하핫 핫핫핫..."

"유물사관에는 안 먹혀 들어가는 얘기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질량의 수치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의미, 아 아니지 의미가 아니라 가치가 없는 거니까, 그래서 과학적인 건데 바로 가치와 의미의 차인데 과학에 의미가 무슨 소용이오? 가치만 따지면 되는 거 아니겠소?"

"그렇게 말하면 절망밖에 남는 게 없고 사실 질서란 명확한 건데, 불가사의한 질서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요? 그러면 편의상 문화와 문명으로 갈라놓고 얘기합시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생각의 구체적 표현은 말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구체적인 것은 만든다는 행위 아니겠소."

"그렇지요."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만들지 않아도 모든 생명은 능히 생존하는데 유독 사람만이 부여받은 능력, 압축하여 창조의 능력, 창조 그 자체는 하나의 탄생으로 내 아닌 남을 멸하는 행위는 아니지 않소? 좀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나, 해서 순수하고 태어난 아기같이 무구하면 청정하다, 적어도 그것을 지향하고 있지요. 그것이 문화의 본질이라면 문명은 능욕을 당한 여인네 같은 거라고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오. 문화가 능욕을 다하여 나타난 것이 문명이다."

"그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했으나 오가다는 찬하의 말에 동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변화무쌍한 문명은 성녀와 창녀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문화의 한 측면과 야수의 한 측면."

"야수의 일변도로 나갈 수 있지요. 물론 우리가 목도한 현실에서 얼마든지 예를 들 수도 있어요."

"일변도라면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얘긴데,"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문명은 야만의 반어인데, 그렇게 되는군."

말하는 편이나 되묻는 편이나, 얼굴에, 목소리에 낡고 퇴색한 듯한 권태가 실려 있다.

"조선을 먹어치우고 중국을 공격한 것은 누굽니까? 물론 일본이지요. 허나 보다 실질적으로 구미 각국이 침략에 있어서 원흉이지요. 그들 구미 각국을 두고 원시적이다, 야만인이다 한다면 웃겠지요? 웃는 사람들, 내 얘기를 엉덩이 걷어차인 개새끼가 짖어대는 소리로 들을 사람들, 대부분이 안 그러겠소? 오십년 백 년을 앞서 갔다는 그들을 보고, 그러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 인디언사냥을 하는 미국인, 야만적이라 안 할 수 있겠소? 식민지를 경영하는 모든 국가에 다 해당이 되는 얘기지만 하늘에서 폭탄을 쏟아 붓고 독가스를 사용하고, 수렵 시대를 상상해보시오. 덫을 놔서 짐승을 잡고 창을 던져서 짐승을 잡는 광경을 말이오. 문제는 그것이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는 점이지. 짐승은 동류를 잡아먹지 않는데 인간은 어째서 제 동류를 살육하느냐, 철저하게 반문화적이지요. 문화가 아벨이라면 문명은 카인인가.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엄존해 있는 문화란 도시 어떤 것일까? 고통스럽고 미로와도 같은 역사의 숲이라고나 할까..."

"산카상,"

"..."

"생존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있습니까? 당신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래도 석연찮은 것은 남아요. 문제를 한쪽으로만 몰고 가는 것 같애."

"원시인이나 야만인을 부정적으로 말할 건 아니지요. 생존의 문제를 도외시한 것도 아니구요. 문명이 야만의 반어로 쓰여지는 모순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오. 문명은 생존 문제를 훨씬 넘어서서 자행되는 야성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생존이라는 명분을 내어 걸어놓고 생존을 저해하는 것, 어쩌면 인류는, 인간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동물인지 모르겠소. 왜 일본은 세계를 정복해야 하지요?"

"..."

", 괴로운 이 따위 얘기는 또 어째서 계속해야 하는지 그것도 모르겠구려. 누가 해답을 주나? 손도 발도 내밀 수 없으면서, 동가식 서가숙, 창부와도 같은 지식인들! 우리처럼 마주앉아서 나발이나 부는 놈들! 바로 우리 자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찬하는 마치 수렁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난처해서 우두커니 앉아 있던 오가다는 한참 후,

"모두가 그런 거는 아니지 않아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을 탄압했을 리도 없고 소외할 까닭도 없지요. 어쨌거나 이끌어주고 뒷감당하는 것은 지식인의 소임 아니었소. 그나저나, 이제부터 지식인에 대한 탄압은 심해질 것입니다. 군부가 밀고 나갈 테니까요."

"일본이 칼 가지고 밀어붙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소? 탄압보다 전향이 먼저겠지."

"그 점에선 나도 동감이오. 삼월사건에 가담했던 혁신파, 사회주의자들이 전향의 길을 터놓았는지 모르지요."

"그들한테 주의주장이나 있었겠소? 스케다치나 했던 낭인들이지."

스케다치란 싸움에서 칼 들고 나와 도와준다는 뜻이다.

"삼월사건에 다소의 관련이 있는 아카마쓰는 만몽의 권익을 사회주의적으로 관리한다, 그런 식으로 침략을 얼버무렸고, 마세이는 천황과 무산 계급이 합작하고 협동하여 정치 개혁을 하자, 그런 식이었으며 미다무라는 공판정에서 공산당의 혁명목표는 국체 변혁이 아니라 정체 변혁이다, 하고 당대표로서 진술했어요. 1928년의 그 폭풍을 잊을 수 있겠어요? 또다시 군주제 철폐를 들고 나왔다가는 공산당 씨도 남지 않을 테니까."

"그런다고 공산당 씨가 남을 것 같소?"

"맞아요. 그러지 않았어도 씨를 말리겠지요. 앞으로 군부는 자유주의자의 씨도 말리려 들 거요. 아무튼 군주제를 인정함으로써 후퇴한 것이 법정 전술에 의한 것인지, 항복이 아닌 전술 전략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시작에서부터 일본의 사회주의자 공산당이 엉성했던 것은 부인 못할 겁니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받아들이는 바탕이 미숙했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령 조선의 경우를 본다면 사상 면이나 행동 면에 있어서 동학혁명은 상당히 구체적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일본의 침략이 있었고 중국의 경우 역시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민중들은 자각했을 것이며 강유위의 대동서그게 또 굉장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청에서 벗어나려는 한족의 열망 같은 것도 축적된 민중의 에너지로 볼 수 있겠지요. 이어 신해혁명, 게다가 조선하고 중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혁명을 하나의 상황으로 아주 가깝게 피부로 느꼈을 겁니다. 일본은 달라요. 판이 달라요. 어쨌거나 국력이 상승하는 시기였고 국위선양 깃발 밑에 국민들을 끌어다놓고 흥청거린 시기였으니까요. 경제 공황이 시작되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의가 서구에서 끌어오는 실정인데 새로운 사상이 오는 루트도 그래요. 심하게 말하자면 박래품인 화장품을 상류 사회에서 애용하듯 외래 사상을 받아들인 것도 쁘띠 부르주아의 인텔리였거든요. 하기야 뭐 어느 나라든 인텔리들이 먼저 받아들이게 돼 있는 거지만요. 그러나 깡그리 남의 것으로만 치장한 일본 형편에 줍기도 쉽고 버리기도 쉬운 속에서 단련된 지식인을 기대하기란 어렵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뛰어넘을 수 없었던 건, 천황의 존재였습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지식인들 스스로,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관념을 도려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러한 사령탑 밑에서 뛰어야 하는 당원이라는 것도 말하자면 일종의 규격품이라고나 할까요? 상황적으로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며 특고의 건수를 올려주는 존재였거든. 얼핏 보기에 일본 전토에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만연하여 그것으로 쓸려 넘어갈 것같이 착각들 하는데 입으로 지껄이고 냄새를 피운다 해서 무슨 실속이 있습니까. 우익에서도 당장 뭐가 어떻게 될 것같이 야단법석을 피우는데 그것도 좌익을 때려잡기 위한 엄살입니다."

"방편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방편일 뿐이오. 유형무형 모두가,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어? 일본엔 종교도 발 못 붙이는데."

"그나마 왕시에는 고도쿠가 있었고 오스기도 있었건만 이제는 그만한 인물도 없어요. 생경하여 굳어버리거나 물러서 아예 퍼져버리거나 뭐 다 그런 꼴이지요. 고도쿠난 오스기는 그래도 강성이 풍부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맑은 물을 대줄 곳이 없소."

"일전에 길을 지나오는데 아이들이 시나진 쨘꼬로, 미나미나 고로세(중국인 쨘꼬로, 모두모두 죽여라.)! 하더군요. 고도쿠나 오스가가 수만 명 있으면 뭘 해. 일본은 미나미나 고로세! 였을 거요."

오가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러갔다.

"듣자니까."

하고 오가다가 입을 떼었다.

"육군 참본에는 비밀 참본이 따로 있었다더군요."

"..."

"하시모도 긴고로가 참본 안에다 비밀 참본을 조직했다는군요. 그자가 삼월사건, 더욱이 시월사건의 장본인이라는 건데 이들이 관동군의 이다가키, 이시하라하고 짜고서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하시모도는 토이기(터키) 대사관의 무관으로 있었고 그곳에서 쿠데타를 체험했던 모양입니다."

찬하는 오가다를 쳐다만 본다. 오가다는 묘하게 풀이 죽어서 말을 이었다.

"유조구에서 일을 저질러놓고 관동군이 만주 진격을 개시했다는 보고는 정부의 고위층을 아연실색케 하고 정부는 즉각 사변 불확대를 결정했으며 육군성 참본에 의해 번복되어 관동군에게 타전이 되었다, 그런 얘깁니다. 해서 비밀 참본이 주동이 되어 시월사건을 계획하고 관동군의 행동을 막는 정부와 군 고위층을 뒤집어엎으려 했다는 거지요."

"그런 변명을 나한테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

오가다는 당황하다가 머쓱해진다. 변명, 사실이 그러했다. 일본아이들이 중국인들은 모두 죽여라! 하더라는 찬하의 말을 들었을 때 오가다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하며 전쟁놀이를 하는 것을 그 자신이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만주사변이 군의 몇몇 미친놈들의 독주였었다는 것을 일본인인 오가다는 심정적으로 변명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심약한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관동군의 단독 행위건 정부는 무관했건 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어디 조선

인이오? 일본이 뼛속까지 젖어들어 나는 이 동경에 있질 않소. 하하핫..."

"미안합니다."

찬하의 쌀쌀한 태도가 오가다에게는 섭섭했다. 너무 무안을 주는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지 마시오. 정말 그러지 말아요."

이번에는 찬하가 애원하듯 말했다.

"나도 당신도 다같이 민족 반역자 아니오? 그야말로 산송장이지. 하하핫."

찬하는 빈 그릇 굴러가듯 웃는다.

"그렇군."

"오가다상, 술이나 합시다."

그들은 술잔을 든 채 거의 술은 마시지 않고 얘기만 했다.

"그러지요. 술이나 마시지요. 네 마십시다."

앓고 난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오가다는 몇 잔 술에 취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벌개지는가 하면 이내 창백해지곤 한다. 얼굴빛의 그런 변화는 충격적인 생각의 연속인 그의 심중을 짐작하게 하였다. 찬하 역시 그와 마주앉아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균형을 잃었으며 당황했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따금 벙긋벙긋 웃는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저귀를 차고 기어 다니는 아이의 모습이 밝히는 것이었다. 오가다가 술잔을 들고 눈을 내리깔 때, 여윈 손목을 볼 때 찬하는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서, 자지러져서 낙엽과도 같았던 인실이 가을 찬바람 속으로 사라지던, 그날 생각이 났다.

'약속이니까, 약속.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니까.'

"참 조용해. 세상에는 숨소리도 없는 것 같군."

오가다가 중얼거렸다.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것 같고,"

"썩은 연못 속이지요."

"산카상."

"..."

"왜 그래요? 심술궂은 노파 같아요."

"하하핫 하하."

"나한테 감정... 좋지 않겠지요. 물론 좋지 않을 게요. 하지만 나는 말할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오가다상."

"."

"결혼, 해야지."

찬하 자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혼 말입니까?"

되묻는다.

"언제까지 혼자 살 거요? 언제까지 외로워만 할 건가요?"

"결혼해버렸어요."

"누가? 당신이?"

"지에코."

오가다는 허허 하고 웃는다.

"사촌누이라는 사람?"

"."

"무슨 장군의 딸이라든가, 그 사람?"

"결혼하게 되면 그 애하고 하려고 했지요. 집안에서도 원했고, 시집가버렸어요. 노처녀로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겠지요. 큰아버지 나이도 나이였고."

"그래서?"

"홀가분해졌지요. 짐은 벗은 것 같아."

"시집을 가버렸기 때문에 병이 난 것 아니구?"

오가다는 웃기만 한다. 다시 대화는 끊여졌다. 오가다가 상해 홍구공원 사건의 보도를 보고 흥분하여 찬하를 찾아온 것은 틀림이 없다. 그 일이 없었다면 찬하를 찾아오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국주의를 증오하고 만주사변, 상해사변을 두고 더러운 도둑 까마귀라 매도하는 심정은 오가다의 진실이다. 일보의 돌아가는 형편에 불안과 분노를 느끼는 것도 모두 유인실과 조찬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뇌하는 것뿐이다.

"산카상."

"많이 취한 것 같군. 내가 뭐 어쩔까봐 겁이 나요?"

갑자기 오가다의 어투가 달라졌다. 자포자기, 그리고 노여움도 있었다.

"산카상은 나를 미워하고 있소. 화를 내고 있는 거지요?"

"아까부터 왜 자꾸 그래요."

"묻는 말, 피하지 말아요."

"피할 까닭도 없고,"

술을 마시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묻겠는데요. 히토미의 소식은 알아요?"

"..."

"물에 빠지는 놈 지푸라기라도 잡듯, 그냥 물어본 거요. 산카상이 히토미의 소식을 알 턱이 없지. 그 여자 죽었는지도 몰라. 죽었다면 그건 순전히 내 탓이오. 내 탓...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

"..."

"왜 혼자 달아났지요? 조선 사내가 왜 혼자 달아났느냐 말이오. 안 그래요? 그때 어디 갔다 왔느냐 하면서 날 노려보던 당신의 눈, 나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소. 늑대한테 토끼 한 마리 내던져놓고 달아난 사나이, 미사여구를 늘어놔도 필경 인간이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동물이지."

폐부를 푹 찌르듯, 찬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찬하는 깨닫는다. 작년 초여름부터 자기 자신에게 쏠려온 정신적인 짐을 불평하고 짜증내면서도 지금까지 혼자 지탱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휴머니티나 의리라기보다 비겁한 자기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을, 사실을 깨달았다기보다 그런 심리에서 도망치고 있었는데 오가다에게 덜미를 잡혔다 하는 것이 옳았는지 모른다.

"그러면 인실씨가 토끼였나?"

중얼거렸다. 찬하는 아무튼 숨이 막히는 순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지요. 조선 호랑이, 암 호랑이지요. 당당하게 가는 여자, 인생을 가득히 끌어안고 군더더기 없이...그런 여자를 나는 범하였소, 끝장이라 생각했지요. 얻는 게 아니라 잃는다고 생각했지요."

"나한테 그런 얘기 할 필요 없어! 그건 당신네들 문제야!"

찬하는 화를 내면서 소리 지르듯 말했다. 놀라며 오가다는 찬하를 본다. 술이 깨는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합니다 산카상, 아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

"나 가겠어요. 노리코상이 올 텐데 추태를 부릴까 두렵소."

오가다는 일어섰다. 찬하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따라서 나왔다. 집 밖에까지 나왔는데 계속 찬하는 오가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한길로 나왔을 때 전차 탈 생각을 않고 오가다는 걸었으며 찬하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걷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전차, 움직이는 모든 것에 비스듬히 석양이 걸려 그림자는 동쪽으로 늘어져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그림자를 쫓아가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그림자에 쫓기며 간다. 도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무성영화같이 움직이는 것만 보인다. 두 사나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쫓기고 쫓는 차이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석양 탓일까. 두 사내는 길을 건넜다. 서구풍의 건물, 끽다점 앞에서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커피나 한잔 마시고 헤어집시다."

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끽다점 안에는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병대였다. 하얀 에이프런에 하얀 모자를 쓴 웨이트리스는 그런대로 신선해 보기가 좋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이들에게 사실 말이란 별 필요가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묘하지만 이들에게는 화해 비슷한 것이었고 보다는 신뢰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이튿날 점심을 끝내고 차 한 잔을 마신 찬하는 곧바로 서재에 들어가지 않았다. 거실 창가에 서서 뜰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리고는 소파에 앉아서 레이스를 뜨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방은 조용했다. 조차하의 집은 건평이 오십 평 가량, 화양 절충의 단층 건물이었다. 정원은 넓은 편이지만 나무가 너무 많아 다소 빡빡했다. 수령이 꽤 되는 소나무가 네댓 그루, 서상목인 매화와 남천촉도 오래된 나무 같았다. 단풍나무, 향나무, 주목 등 정원수는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놓여 있는 정원석에 공간은 대부분 자갈을 깐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단층집이 푹 묻혀버린 듯 누에 띄질 않았다. 수목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중류에서 상류층이 대부분인 이 동네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당당한 저택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찬하의 처 노리고는 결혼할 때 적잖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집은 서울서 보내온 돈으로 마련한 것이다. 노리코가 적잖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친정 혼다게가 부유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동시에 이들의 결혼을 축복했다는 뜻도 된다. 찬하가 노리코를 처음 만난 것은 혼다 교수의 연구실에서다. 그 때 찬하는 연구실의 조수로, 장래가 보장된 것도 희망도 없이 막연한 상태로 그냥 머문다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닌 암담한 시기였다. 형과 명희의 결혼으로 입은 상처도 생생할 무렵이었다. 혼다 교수의 질녀였던 노리고는 이 근처까지 왔다가 인사차 들렀다고 했다. 연록색 원피스에 갈색의 모자, 구두를 신고 지갑보다 조금 큰 황금색 백을 들고 있었다. 체격도 늘씬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혼다 교수는 두 사람을 소개했고 그 후 이들은 가끔 기자 끽다점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영화도 함께 보았으며 음악회, 그림전람회 같은 곳에도 가곤 하여 교제는 꽤 깊어졌던 것이다. 좋은 땅에서 한껏 햇볕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란 식물처럼 노리고는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독특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오차노미즈 여학교를 거쳐 여자대학 국문과를 나온 그는 수준급의 교양과 지식을 구비했으며 자발적이거나 개성이라기보다 주위 환경이 그를 개방적 여성으로 만들었으며, 다분히 외향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서구식 물결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사촌 자매들이 권하는 대로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골프를 치러 다니기도 했고 화려한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며 더러는 새로운 여성을 표방하는 강연회 같은 곳에 가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일본의 종래 여자처럼 꿇어앉아서 바닥에 손을 짚고 절을 하며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셨습니까, 하고 남편을 대하지는 않았다. 결혼 전과 다름없는 생활 태도였는데 그것은 노리코의 의사였다기보다 찬하가 전적으로 그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구김살이 없고 천착하고 집요한 성미가 아닌 노리고는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남편도 자유롭게 놔두는 것에 대하여 일말의 의혹도 없었다. 상황이 복잡하고 상황에 대응하는 내적인 것이 섬세한 데다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찬하에게 노리고는 편안한 존재였으며 구김살 없는 그의 성품을 사랑했다. 노리고는 물론 찬하를 사랑했다. 대단히 깊이 사랑했다. 언젠가 노리고는 말했다.

"친정에서 당신을 천진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바보다 그 말인 게로군."

찬하는 쓰게 웃었던 것이다.

"아니예요. 바카도노사마는 아니래요. 명석한 사람은 편협한 일면을 가지게 마련인데 산카상은 너그럽다, 어머님 말씀입니다. 사촌 언니들도 모두 당신 팬이에요."

바카도노사마란, 바보 영주님이란 뜻인데 일본의 귀족들은 거의가 과거 번주들이어서 번주들의 존칭이 도노사마였고 똑똑하지 못한 귀족을 가리켜, 혹은 애칭으로도 바카도노사마라 하는데 찬하에게 도노사마의 칭호를 붙여준 것은 어쨌거나 조씨 집안이 귀족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들의 결혼을 축복한 것도 귀족이라는 후광이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찬하의 인품이 그들을 만족하게 한 것도 부인 못한다.

"여보!"

레이스를 뜨면서 노리코가 불렀다.

"."

뜰을 바라본 채 찬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오가다상 왜 결혼 안 하지요?"

"글세..."

"지에코상, 그이 참 괜찮은 여잔데,"

"..."

"오가다 그분, 로맨틱한 사람인데 연애도 안 하고...혹시 어제 그분하고 다투기라도 하셨어요?"

"다투다니?"

"얘기하지 않았소. 많이 취했었다고. 당신한테 추태 보이지 않겠다면서 갔다고 말하지 않았소."

"하지만 어쩐지,"

"..."

"상해의 그 사건 때문에 당신하고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같이 생각이 되네요."

"그런 일 없었소."

침묵이 흐르다가

"여보!"

다시 불렀다.

"앞으로 어찌 될까요?"

"?"

"전쟁 말예요."

"끝난 일 아니오? 무혈점령인데 전쟁이랄 것도 없지."

"그건 아는데요. 국제연맹에서 조사단이 간다고도 하고 몽고 방면에선 아직 군사 행동이 계속되고 있다는데, 본격적인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전쟁이 확대되면 따라서 영토도 확장될 터인데 무슨 걱정이오."

찬하는 비꼬듯 말했다.

"얘기들 하는 것 들었는데, 만주는 본시부터 중국 땅은 아니었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가 이미 정벌했던 땅이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들 하는데, 국제연맹의 처사를 기다렸다가 중국이 결정하는 것 아닐까요?"

"공산당 토벌에 정신이 없는데 장개석은 좀체 움직이지 않을 거요."

"참 딱한 사람들이네요. 남의 군대가 밀고 들어가는데 저희들끼리 싸우다니, 어쨌든 저는 전쟁이 싫고 무섭습니다."

"일본이 전쟁을 안 했으면 노리코부인께서 실크 양말 신을 수 있었을까요?"

"실크 양말 대신 면 양말 신으면 되지 않습니까?"

노리고는 찬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바른 가리마에 웨이브를 넣어 귀를 감추고 뒤로 넘겨 빗은 노리코의 새로운 머리모양은 썩 잘 어울리었다.

"당신 날 믿지요?"

찬하가 갑자기 물었다.

"?"

어리둥절하며 노리고는 찬하의 등을 바라보고 손가락에 실을 감는다.

"나를 믿느냐고 물었소."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믿습니다. 물론."

찬하는 돌아섰다. 노리코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천천히 담배를 붙여 물었다.

"당신은 친절하고 관대합니다. 저는 당신을 존경해요."

뭔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노리고는 다소 당황하며 말하였고 덧붙여서

"하지만 갑자기 왜 물으시지요?"

"글쎄..."

오는 철새인지 돌아가는 철새인지 하늘에는 한 무리의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이층 난간에 걸려 있던 하얀 손수건과 푸른 하늘이 찬하 눈앞에 떠올랐다. 화첩 한 페이지의 그림 같이, 그것에 서린 감정과 상황은 배제된 채. 찬하는 거실로 들어와 노리코의 맞은 편 소파에 앉는다. 재떨이에 담뱃재를 떤다.

"참 빠르지요? 벌써 봄은 가고 있습니다."

하얀 실을 금속의 바늘로 감아올리며 노리코가 말했다. 금속 바늘은 때때로 광선 같이 희번덕였다.

"그 폭탄을 던진 조선 청년, 죽겠지요?"

찬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여름이 될 거예요."

"... 후미는?"

"유모가 재우려고 데려갔습니다."

"..."

"봄이 오면 나무를 베어버리고 후미 놀이터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냥 지나가버렸어요."

"그랬군."

찬하는 건성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다같이 생활 면에서는 의타적이다. 겨울에 두 사람은 말했던 것이다. 봄이

오면 나무를 베어내고 아이의 놀이터를 만들고 정원도 좀 밝게 해야겠다고. 그러나 그들은 봄을 그냥 보내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유모가 길렀고 집안의 전반적인 살림은 시집올 때 친정서 데리고 온 오이치가 도맡아서하고, 정원은 정원사가 와서 손질해준다. 이런 부부가 사는 가정이 황폐하지 않은 것은 물론 물질적으로 생활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노리코나 찬하가 낭비하는 것은 아니었고 게으르다는 것과도 달라서 그런대로 질서는 잡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 사람의 심성이 맑았고 욕심이나 욕망이 없는 때문이 아닐까.

"부인."

"."

"우리 아이 하나 데려다 기릅시다."

찬하는 지금도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그런 투로 말을 꺼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갓난 애기요."

"갓난 애기?"

눈을 커다랗게 뜨고 노리고는 찬하를 쳐다본다.

"왜 놀라는 거요."

"별안간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데려다 길러야 해!"

노리코의 콧잔등이 불그레했다. 얘기의 내용보다 전에 없이 찬하의 태도가 고압적인데 놀란 것 같다.

"부인은 나를 믿는다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무조건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요. 생후 팔 개월쯤 되는 사내아이요."

어리벙벙해 있던 노리고는

"제가 믿는 것하고 어린애하고 왜 그렇게 연결해야 하는 거지요?"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리고는 긴장한다.

"당신 잘 들어요."

"..."

"추호도 내가 하는 말에 의심을 가지면 안 돼. 그 아이는 친구의 아이요. 친구들의 아이라 해야겠지."

"우리가 그 아이를 길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설명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당신보고 나를 믿느냐고 거듭 물었겠소? 일본 여성인 당신과 조선 남자인 내가."

하다 말고 찬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얘기는 필요 없지.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어."

노리코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찬하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했다.

", 결혼생활 하면서 다른 곳에서 아이 낳는 그 따위 짓은 안 해! 그렇게 될 경우엔 당신하고 이혼 할 거요!"

순간 노리코의 상체가 부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결혼 후 한번도 느낀 적이 없는 남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틀림없이 찬하는 그럴 것이란 생각을 했다.

"내 말이 고했으면 용서하시오."

", 아닙니다. 애기는 어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시골에, 사도코로 주었소."

"애기엄마가 혹 죽었습니까?"

"아니, 그러나 죽은 거나 다름없소."

"애기아버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소. 임신한 사실까지."

"어쩌면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서는...도덕의 차원을 넘어서는 진실도 있을 게요."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그것을 향해 있지만 실체를 파악할 순 없어. 어느 누구도. 진리다 진실이다 그 흔한 말들, 그러나 진실은 결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발견되는 것도 아닌 게야. 그게 바로 인간의 불행인지 모르지.'

찬하는 한순간 노리코의 존재도 잊은 듯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럼 그분들은,"

"그 사람들은 벌판에 서 있소. 철저하게, 둘이 함께 나갈 문도 없고 들어올 문도 없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처지는 더욱 아니오. 그건 절벽이지."

조찬하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이 캄캄해오는 것을 느낀다. 찬하는 탁자 위에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오이치를 불러

"커피, 서재로 갖다주어."

노리고는 무릎에 뜨갯거리를 놔둔 채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있었다. 서재로 들어온 찬하도 의자에 파묻히듯, 그리고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창문과 마주하고 신문을 펴든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활자가 요란했다. 주먹만한 활자들, 찬하는 그것을 읽을 기분이 아니었다. 생각을 해야 할 때 신문은 단순한 엄폐의 수단이 되는데 이런 습관은 노리코와 결혼한 후 생긴 것이다.

'돌아갈 수가 없다...'

너무 먼 곳으로 혼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자신을 느낀다.

'뭘 해야 하나.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구나. 지루하고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처음 느껴보는 것은 아니었다. 무리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것도 처음 느껴보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때 나는 구라파나 미국 같은 곳에 갈 생각을 안 했을까? 보다 멀리 뛰어서 소외도 철저히 당했어야 했다. 도노사마니 귀족이니 그 따위 찌꺼기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곳.'

바닷가의 바라크 같았던 교사 앞에서 명희를 만났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오는 연락선 선상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파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던 말, 구라파나 미국 같은 곳에 갈 생각을 왜 안 했을 까? 지금 그 말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노리코와의 결혼을 후회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구라파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던 것도 실상 깊이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든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역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형벌인가, 반역자가 밟을 땅은 없다. 상해 홍구공원의 사건, 내게는 기뻐할 자격도 없다. 슬플 뿐이다. 맞어. 인실씨의 그 결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어디로 갔지? 대륙으로 갔나? 그는 또 하나의 죄와 벌의 자락을 끌고 갔다.'

찬하는 아이를 반드시 데려다 기를 것을 다짐했다. 오가다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도 다짐한다.

저녁 식사 때 이들 부부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제각기 자신의 생각에 매몰된 사람 같았다. 이따금 노리코 눈에 의혹이 떠오르다가 사라지곤 한다. 엽차를 마시면서

"당신이 다른 곳에서 아일 낳은 처지라면 저도 당신하고 살 수가 없을 거예요."

노리코가 말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나."

"..."

"그래, 만일 내가 저지른 일이라면, 나는 이런 방법은 취하지 않았을 게요. 당신도 알다시피 서울에는 아이가 없질 않소? 서울에 안아다주면 그만, 당신에게 알릴 필요도 없고."

하는데 전보가 왔다는 것이었다. 엽차 잔을 놓고 전보를 펴든 찬하의 얼굴이 한순간 백지장으로 변한다.

"무슨 일입니까?"

"형이 죽었소.“

 

 

12장 오누이의 재회

절을 하고 나서 모두 자리에 앉았다. 아침나절 한줄기 소나기를 뿌리더니 하늘은 씻긴 듯 맑았다. 사랑 마당의 파초에는 아직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양현이는 어때? 공부는 잘했느냐?"

길상이 물었다.

"못했습니다. 아버님."

모시 적삼에 짙은 남빛 통치마를 입은 양현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길상은 양현을 볼 때마다 잘 자라준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만하면 괜찮지 뭐."

윤국이 말했다.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아버지, 양현이 삼등 했습니다. 그만하면 괜찮지요?"

"괜찮고말고."

"오빠! 언제 그걸,"

"감추어봤자 어디겠어? 통신표는 책갈피 속에 있더군."

"난 몰라!"

양현은 울상을 짓고 길상과 환국이, 윤국이 삼부자는 소리를 내어 웃는다.

"난 몰라. 두고보아요."

"어어, 으스스하군. 복수한다 그 말이겠다?"

윤국은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양현이도 명년엔 여학생이 될 텐데 함부로 숙년 소지품을 뒤져 되겠어.

환국이 말에

"맞아요. 큰오빠, 작은오빠는 신사가 아니예요."

그 말에 삼부자는 또다시 웃음을 떠뜨린다. 한가한 정오의 풍경이었다.

"그러면 너희들 씻고 점심해야지."

모두 일어서 나갔다. 여름방학, 이들은 진주서 합류하여 방금 형사리로 온 것이다. 윤국이는 지난봄에 일본으로 건너가 무슨 심산이지 농과를 택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길상은 이들이 온다고 해서 어제 쌍계사에서 돌아온 것이다. 고인 물같이 조용했던 평사리의 집은 갑자기 활기에 넘쳤다. 그중에서도 양현은 꽃이었다. 지저귀는 한 마리 작은 새였다. 그의 성격은 어릴 적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길상은 양현을 볼 때마다 세월이 되돌아가는 것을 느낀다. 봉순네의 얼굴이 떠올랐고 재잘거리며 무당 흉내 내던 봉순의 모습, 그리고 발버둥 치며 울다가 기절하던 어린 서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양현은 봉순을 닮은 편은 아니었고 오히려 상현의 모습을 짙게 간직한 듯했으나 이따금 어느 서슬엔가 그의 표정에서 봉순을 발견하곤 했다.

윤국과 상현은 안에서 점심을 먹는 눈치였고 길상은 환국이와 함께 오이냉국이 시원해 뵈는 점심상을 받는다. 냉국을 뜨려고 고개를 조금 내미는 길상의 옆 이마 쪽에 흰 머리칼이 한두 개 나 있는 것을 보다가 환국은 숟가락을 들었다.

"영광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환국은 아버지가 그 말부터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광이를 병원에서 만난 뒤 꼭 일 년, 일 년이 지나갔다.

"뭐가 잘 안 되는 모양이군."

"."

"희망이 없단 말이냐?"

"희망이 없습니다."

"..."

"저도 할 만큼 노력을 해봤는데, 그럴 때마다 반발이 심해서 어떻게 해볼 수 없더군요."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다가

"강한 성미는 부친을 닮아 그럴 게다."

"마치, 성미가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밀림 같았습니다."

"그런 성질이 잘 풀리면 좋은 건데...영 사람 구실 못하겠던가?"

"? 무슨 말씀을,"

환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상을 본다. 길상도 밥을 먹다 말고 의아하게 아들을 본다.

"아버님이 제 말을 곡해하신 것 같습니다."

"..."

"성질이 강하지만, 거칠고 하지만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공부는 안 하겠다, 그 결심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

"남의 도움으로 한다. 그것이 자존심에 용납 안 되는 것도 있었겠지만 신분에 대한 절망이 더 컸던 것 같았습니다."

"못난 놈."

"아버님에 대한 불만도 있고,"

길상은 얼굴을 들고 너도 그러냐, 물어보듯 아들을 쳐다본다.

'아버님 왜 그리 심약하십니까?'

'그래, 심약해질 때가 있지, 내가 뭐 그리 별난 사람이겠냐.'

'아버님께서는 오히려 불만이시지요? 패기 없는 젊은놈이라고.'

부자간에 서로 눈으로 이야기하다가 피식 웃는다.

"영광이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런 말을 하더군요."

"어떻게 그리 사나. 갈고 싶다고 살아지는 건가? 신분에 대한 절망도 극복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유로워지나."

환국은 뜸을 들이듯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음악을 하겠다 하는데."

"음악?"

"."

"그러면 공부를 하겠다는 얘기 아니냐. 음악도 학교에 안 가고 어떻게 하나. 부친이 들었으면 펄쩍 뛰겠지만."

"정통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경음악인데 강습소 같은 곳도 있고,"

"경음악이라면,"

"말하자면 풍각쟁이지요."

"유랑극단 같은 데서 노래 부르는 것, 그거야?"

길상은 눈이 커다래져서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노래 부르는 게 아니구 색소폰이라고,"

"그게 뭔데?"

"나팔 같은 거지요."

"허참."

길상은 그러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하얼빈의 큰 술집에서 연주하던 악사들 모습이 생각났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무뢰배가 되는 것보담은 낫겠지.'

점심을 끝내고 숭늉으로 입가심을 한 길상은

"내일 모두 하동으로 가야겠다."

"하동, 읍내 말입니까?"

"그래 모두 함께, 양현이도 함께 간다. 이동진 어르신네..."

하다말고

"그 동안 집안이 시끄럽고 해서, 행여 누가 될까 싶어 삼가했는데, 너희들도 오고했으니 찾아가 뵈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늦은 감은 있으나."

"저희들도 방학 때는 오고가며 시우하고 만나곤 했는데 대학 들어가고부터 못 만났습니다. 양현이도 데려간다 하셨습니까, 아버님."

"."

대답이 떨떠름했다. 사정을 모르는 환국이 무심하게 한 말이었지만 길상은 왜 양현을 하동 이상현 집에 데리고 가려 하는지, 서희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반대를 했을 것이다.

"오빠 나도 갈 거예요."

안채 대청에서 점심을 끝낸 윤국이 낚시 도구를 챙기는 것을 본 양현은 흰 모자를 찾아 쓰면서 먼저 나서는 것이었다.

"고기 안 잡혀. 따라 오지마."

"갈 거예요. 나 낚싯대 옆에 안 가면 될 거 아니예요?"

윤국은 양현을 노려보다가 웃는다. 이들은 언덕길을 내려와 마을길로 들어섰다. 농부들 아낙들이 지나가다가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양현과 윤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남선녀 같다. 우짜믄 인물도 저리 좋을꼬."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양현아."

"."

"너 요즘 무슨 책 읽고 있지?"

"아아 무정."

"재미있어?"

"슬퍼요."

"어디가 슬퍼?"

"고젯드가 불쌍하구, 나중에는 쟌비르장일 불쌍하구."

"불쌍하구, 불쌍하구, 그래 나중에 커서 넌 뭐가 될래?"

"몰라요. 어머닌 공부 열심히 해서 여의사가 되라 하시지만."

"그거 괜찮지. 불쌍하구 불쌍한 사람들 병 고쳐주는 거니까."

이들은 마을 우물가에까지 왔다. 우물가에서 숙이 물을 긷고 있었다. 윤국은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춘다. 무심히 고개를 든 숙이는 윤국을 보고 당황한다. 쪽진 머리, 붉은 감댕기를 감은 쪽의 은비녀가 은은하였다. 인조견 미색 치마에 흰 모시적삼을 입은 숙이 자태는 아직 새색시였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숙이는 옷매무새를 고치는 듯한 태도로 공손히 인사를 했다. 윤국의 낯빛이 달라졌다. 지난 가을에 혼인을 했다는 얘기는 겨울방학 때 들었다. 그때 윤국은 묘하게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으나 대학에 진학하는 등, 환경과 생활의 변화에서 그 일은 잊고 있었다.

"아아 참,"

윤국은 또 한 번 배신감 같은 것, 아픔을 느낀다.

"결혼했다는 말은 들었지만...잘 살아요."

간신히 평정을 찾아 걸음을 옮기는데 언제 왔는지 길가에 영호가 서 있었다. 논을 매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흙이 묻은 맨발이었다. 그는 강한 눈초리로 윤국을 쳐다보았다. 윤국이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멀 굼재기고 있노!"

멀어져가는 윤국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영호는 우물가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숙이에게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기,"

"잔소리 말고 어서 가기나 해!"

숙이는 허둥지둥 물동이를 이고 앞서간다. 그 뒤를 따라 영호가 간다.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가야, 어서 점심 채리라. 배고프겠다."

열무를 다듬고 있던 영호네는 물동이를 이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숙이를 향해 말했다.

"점심 안 묵을라요."

"? 배고플 긴데, 애기가 점심 가지갈라 카는 거를 들어올 기라고 내가 말›. 무신 일이 있었나?"

"아무 일도 없었소."

영호는 손발을 씻고 얼굴도 씻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방문을 거칠게 닫았다.

"이상해라, 와 저럴꼬?"

영호네는 열무를 다듬다 말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숙이는 똬리를 손에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가아, 니 남편이 와 저라노? 무슨 일이 있었더나?"

"아닙니다."

"둘이 다투었나?"

"아닙니다."

"그라모 와 저라노. 영 기분이 안 좋네."

"..."

"니가 들어가보아라."

"..."

"머가 잘못 됐이믄 빌고, 잘하나 못하나 여자는 빌고 살아야 하네라."

영호네는 숙이 등을 밀듯 했다. 장가 안 가겠다는 영호를 우격다짐하듯, 이루어진 혼사였고 혼인 뒤에도 썩 금슬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다 숙이에게 아직 태기가 없으니 마음이 놓이질 않는 것이다. 숙이는 시어머니가 떠미는 바람에 방으로 들어갔다. 영호는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서 두 손으로 턱을 감싸고 있었다.

"점심 차려올까요.?"

대답이 없다.

"지가 머를 잘못했습니까."

역시 대답이 없다. 윤국이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숙이로서는 먼저 그 일을 꺼내 말할 수 없었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저 막막했다.

"잘못한 것이 있으믄 말해주이소."

순간 영호는 숙의 한 팔을 확 잡아당겼다. 그리고 뺨을 찰싹 때린다.

"아이고!"

"나가아. 보기 싫다!"

숙이는 허둥지둥 방에서 나간다. 영호네는 근심스럽게 숙이를 바라본다.

"무슨 일고."

"아무 것도 아입니다."

숙이는 빨랫감을 모아 빨래통에 넣어서 이고

"어무이 빨래하러 갈랍니다."

하고는 삽짝 밖으로 나간다. 영호네는 아들이 있는 방으로 급히 들어간다.

"영호야, 니 와 그라노."

"머 말입니까?"

"니 댁네하고 와 그라노 말이다."

"누가 장개갈라 캤습니까."

외면을 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라믄 장개 안 가고 중 될라 캤더나."

"서둘러서 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지요."

"니 나이가 적나?"

"많은 나이도 아니지요."

"그거를 와 이제 와서 따지노. 복에 과해서 하는 소리제."

"복이 과해요?"

"나는 볼수록 이쁘고 하는 행신이 맘에 든다. 어이서 그만한 신부감을 대꼬 올 기든고? 공부 조깬 했다고, 니가 머 그리 잘났다고 가숙을 내리다보노."

영호는 쓴웃음을 띤다.

"오만 사램이 다 치사를 한다. 며누리 잘 봤다고."

"예 맞소! 누가 이런 집에 딸 주겠소!"

영호는 어미에게 등을 보이고 누워버린다.

"잘하는 짓이다. 버리장머리 참 좋구나. 오냐오냐 함서 키웠더마는 영 못씨겄다."

"..."

"부모 처지를 생각해야제. 니가 그러는 거는 다 에미 애비를 대수로 안 여기는 탓이다. 세상에 나무랄 데가 어디 있어서, 내가 눈치를 보이 한 분도 며눌아이한테 살갑게 대하는 법 없고,"

하다가 꿈쩍도 않는 아들 등짝을 쳐다본다.

"제발 그러지 마라. 니가 장잔데 묏상 들 사람 아니가. 우리가 우떻기 해서 이만큼이나 살게 됐는지 니도 알 기다. 우리가 설움받고 살았이믄, 설움이 우떤 건지 니도 알 거 아니가. 그 아아를 박대하믄 남이 머라 카겄노."

끝내 말이 없자 영호네는 한숨을 쉬며 방에서 나간다. 더운 날씨에 방문까지 닫아놓고 누워 있던 영호는

'빨래하러 간다꼬?'

일어나 앉는다.

'빨래, 빨래? 빨래터!'

고무신을 끌고 영호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설마 그러랴 싶었지만 영호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숨쉬는 소리도 거칠어졌다. 빨래터에서 만나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을 상기한 때문이다. 둑 위로 올라간다. 바로 둑 밑 강가에서 숙이는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손등으로 눈을 씻곤 한다. 주막 근처의 빨래터하곤 상당히 먼 거리였고 윤국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영호는 둑길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걸어 올라간다. 소나무 두 그루 있는 곳까지 가서 앉는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러왔다. 강물은 햇빛에 희번덕이고 있었다. 평소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숙이, 그런데 왜 마음속에 지금 불이 나고 있는지 영호는 알 수 없었다. 숙이를 사실 사랑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윤국에 대한 강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현재 어느 모로 보나 그가 황새라면 자신은 뱁새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과거 최참판댁에 끼친 크나큰 죄업을 생각하면, 그래서 죽어지내는 부모를 생각하면 영호의 가슴이 들끓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나마 윤국이 좋아했으나 결혼하지 않았던 여자가 바로 자신의 아내인 것이다. 질투이건 울분이건 상처받은 자존심이건 영호가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가지고는 안 된다. 이래가지고는 안 돼! 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가 여기서 잠을 자고 있어? 그거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

영호가 강가로 내려와 집에서 씻었는데 다시 얼굴을 씻는다.

저녁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워졌다. 호롱불 밑에서 버선을 기우며 이 생각 저 생각 하던 영호네는 곰방대를 물고 앉은 남편에게 물었다.

"장에 갔던 일은 우찌 됐십니까?"

", 다음 장에 보자 카더마."

"당신도 참 턱없이 무르요."

"떼이도 할 수 없고."

"떼일 생각을 하믄서 와 빌려주었십니까?"

"내가 이자 받아묵을라꼬 빌려주었나. 전에, 어릴 직에 소달구지 타고 댕깄일 직에 밥술이나 얻어묵은 은공 때문에 그랬제. 돈으로 따지자믄 논 한 마지기 값이다마는 행편이 그런 거를 할 수 없제."

"이자는 함부로 돈 빌리주지 마소. 돈 잃고 인심 잃는다는 말도 안 있십디까."

"빌리줄 돈이나 머 있던가?"

곰방대를 털고 자리에 들려 하는데 문밖에서

"아부지."

하고 영호가 불렀다.

"?"

"말심 좀 디릴 일이 있어서요."

영호네는 당황하며 막듯이

"저물었다. 할말이 있이믄 새는 날에 하라모."

"잠깐이믄 됩니다."

영호는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꿇어앉은 영호는

"지는 그만 서울 갈랍니다."

"머라꼬?"

"아무래도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서울, 머하러?"

"공부하겠습니다."

"퇴학을 당했는데 어디 가서 공부할 기고?"

"사립학교에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동생들도 있고 농사만 지어서 되겠습니까. 공부한다고 해서 다 친일파 되는 것도 아니겠고, 큰아부지 신세진다고 해서 친일파 되는 거는 아닌 께요."

"지금 생각이 그렇지. 통시 갈 때 맘 다르고 나올 때 맘 다르다. 니가 몰라 그렇지 형님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아부지가 무슨 말씀을 하셔도 이제 제 결심은 굳어졌습니다."

", 그라믄 니 댁네는 우짤 기고?"

영호네가 서둘며 물었다.

"어무니 아버지 뫼시고 있어야지요. 우짜기는요."

한참 있다가 한복은 말했다.

"내가 니를 공부시킬라 했을 때는 면 서기나 군청 서기나 하믄 안되겄나 생각했제. 그러나 내 생각이 변했고 니도 학생운동인가 먼가 했이니 면 서기 군청 서기 할 생각은 없을 기다. 그래 니 말대로 공부하겠다면 머가 될라꼬 그러나?"

"우선 중학 과정부터 끝내고, 일 년이면 되니까요. 다음에는 일본 가서 고학이라도 할랍니다. 무엇을 하든 배워야지요. 선생질을 하더라 캐도."

"니 이름이 경찰에 올라 있을 긴데 선생질을 해?"

"만주에라도 가지요 뭐."

"그거는 안 된다.!"

영호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식구 모두가 솔가를 해서 간다믄 모리까, 니가 누고오? 니는 이 집의 장자 아니가."

"장자나 차자나, 이래 가지고는 못 삽니다."

"니 아부지가 살아시끼,"

"..."

"니 아부지가 우떻게 크고 우떻게 살았는지 넘들이 다 아는데 자식인 니가 모린다 하지는 않겄제? 거기다가 비하믄 너거들이사 누워서 호시 탔다."

"지나간 일 말하면 뭐하겠소."

짜증스헙게 어미를 외면한다.

"불칙하게 부모 말에 악다구니 하는 기가."

한복이 담뱃대로 재떨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형편을 얘기하는 거지요. 생각해보시면 알겠습니다. 인호누부가 왜 그리 됐는가를. 진작부터 털고 일어났으면 누부도 그런 신세가 됐겠습니까."

인호 얘기는 두 내외에게 비수와도 같은 것이다.

"하여간 지는 결심을 했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방안에는 뿌연 담배 연기, 그리고 호롱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개구리, 이따금 뻐꾸기도 울었다.

"좀 두고 생각해보자."

담뱃대에 담배를 채워서 붙여문 한복이 한발 물러서듯 말했다.

"내 말은 듣지도 안 할라 카더마는 자식이 상전인갑소."

영호네는 반짇고리를 챙겨 한구석으로 밀어놓으면서 핀잔같이 말했다. 그 말대꾸는 없이 영호에게 말했다.

"불쑥 말을 하이, 그기이 어디 당장에 결정할 일가."

"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셔도 저는 서울 갑니다."

아들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라믄 니는 핵교 댕길 직에 남의 앞장을 서서, 방면이야 되었다마는, 까막소에도 가고 했는데 그때는 무신 심산이더노?"

"그거는 뻔한 일 아닙니까.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일본에 대한 반항이지 뭐겠습니까."

"그래? 무식한 내 생각에도 그거는 옳은 일이고 남한테도 치사받을 만한 일인데, 니 큰아부지는 우떤 사람고?"

"..."

"너도 대강을 알고 있일 기니 묻는 말이다."

"..."

"만주서 니 말마따나 내 민족을 위해서 항거하는 사람이믄은 내 땅때기 팔아서라도 니를 보내주겠다. 우찌 니는 애비 뜻을 모리노. 내 한은 옷으로도 못 풀고 밥으로도 못 푼다.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다. 나라에 대한 충절심이 남달라 그러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식놈이 또 한을 냄길까봐 그기이 무서븐 기다. 자자손손 얼굴 치키들고 살 수 없게 될까 싶어서 두려븐기라. 형이 그러는 것도 부끄러버서 시시로 가심이 철렁철렁하는데, 니 할무이가 우떻게 돌아가셨노. 자식을 놔두고... 세상에 얼굴 들 수 없어이."

한복의 목이 메인다.

"아버지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다만 좋지 않게 얻은 돈이라 할지라도 유용하게 이용하는 것이,"

"이용을 해?"

". 남자로 태어나서 뜻을 펴볼라면 중단한 학업을 계속하자 생각한 것뿐입니다."

"남자의 뜻이 멋꼬?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남자의 뜻이란 대로를 걷는 기지 잔재주 부리감서 지름길로 가는 거 아니라 하싰다. 길이 아니믄 가지 마라, 그런 말도 하싰다."

영호는 신경질 나서 못 견디겠다는 시늉을 하며

"그러면 가정부에서 친일파 돈을 왜 탈취해갑니까?"

한복은 잠시 동안 머뭇거리듯 하다가

"그기 어디 사사로운 일가!"

바락 소리를 지른다.

"그라고 또오, 있다. 아무리 형이 막대묵고 해독을 끼치는 사람이라 캐도 니한테는 큰아부지다. 안팎이 다르게 두 가지 맘을 묵고, 그거는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다. 이용을 하다니 그기이 어디 될 말가. 그라믄 니는 이 애비도 이용을 해묵을 기가?"

"..."

"밤도 늦었고, 긴말 할 시간도 없고 하여간에 이자 니는 가숙을 거나린 몸인께 만사를 쉽기 생각해서는 안 될 기다. 좀더 두고 생각을 해보자. 그리 알고, 그라믄 건너 가봐라."

영호는 하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건너온다. 시아버지의 떨어진 삼베 잠방이를 깁고 있는 숙이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안방에서 있은 얘기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영호가 시부모에게 무엇인지 제안을 한 것 같았고 그것도 자신에 관한 일이라 생각했다. 방문을 등지고 서서 영호는 숙이 얼굴을 내려다본다. 시선을 느끼면서도 숙이는 얼굴을 숙인 채 잠방이만 깁고 있었다. 그것은 영호를 향한 항의의 표시였다. 한참 후 숙이는 얼굴을 들고 영호를 쳐다보았다. 호롱불에 흔들리는 숙이 얼굴은 아름다웠다. 요염하기까지 했다. 영호는 다짜고짜 호롱불을 확 불어 끈다. 달빛이 방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영호는 숙이를 끌어당겼다. 두 팔로 가슴을 꽉 조이면서

"빨래터에 가서 누굴 만났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묻는다. 순간 숙이는 영호를 떠밀고 강한 힘으로 화다닥 물러나 앉았다.

"무슨 소리를 합니까?"

꺼무꺼무한 눈이 총알같이 영호 얼굴에 박힌다.

"? 억울한가?"

"그런 소리 온정신으로 합니까?"

"그러면 내가 미쳤다 그 말이구나."

"말도 가이방해야제요."

"그러면 소문은 헛소문이다, 그거로구나."

"사람이 사람보고 우찌 말도 못합니까. 아무리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캐도 그렇지. 천양지간인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숙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 최윤국은 하늘이고 김영호는 땅이다 그 말가?"

잠시 말이 없다가

"처지가 다르기는 다르지요, 누가 봐도."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당돌하고. 어머니가 나를 보고 가숙을 내려다본다 하셨는데 그게 아니네. 계집이 남자를 내려다보는 거 아니가."

"..."

"최윤국이 마음에 둔 계집이라 다르긴 다르구나. 하기야 주막에서 사내 꼴을 많이 봤을 거고 당연하지, 똑똑하고 당돌한 것은 당연하다."

숙이는 흑! 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두 손으로 막는다.

"마 좋다. 니 꼴 내 꼴 오래 볼 처지도 아니니, 자기나 하자."

말씨는 누그러졌으나 영호는 숙이를 거칠게 다루었고 숙이는 그의 행동에 반항했다. 그런 거부의 몸짓을 영호는 윤국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상한 것은 숙이의 거부는 영호의 의식밑바닥에서 잠자는 어떤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이튿날 한복의 식구들이 마루에서 조반을 막 끝내려 하고 있을 때였다. 보살할미 차림의 늙은 여자가 삽짝을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영산댁이었다. 부엌에서 숭늉을 가지고 나오다 말고

"할무이!"

숙이는 소리를 질렀다.

"오냐. 내가 왔지라."

영산댁은 숙이 얼굴을 살펴보면서 웃었다. 숙이를 시집보낸 뒤 영산댁은 수십 년 종사해온 주막을 정리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돈을 절에 내어놓고 그 자신은 암자의 방 한 칸을 얻어 여생을 절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숙이는 시집온 뒤 영산댁을 처음 만나보는 것이다.

"아이고 우짠 일입니까."

영호네가 놀라며 일어섰고 식구들이 모두 마루에서 내려왔다. 엉겁결에 식구랑 함께 마당으로 내려온 영호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이렇기 별안간 무신 일로,"

영호네는 영산댁 손을 덥석 잡았다.

"사돈댁에 못 올 사람이 왔는가?"

영산댁은 우스갯소리를 했다.

"기별도 없이,"

한복이 말이었다. 사돈이라면 사돈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돈이기 이전에 한복에게는 영산댁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설움도 많이 받았고 배고픈 때도 많았을 적에 영산댁은

"이눔 자석아, 너 밥이나 먹고 댕기는 기여?"

지나가는 한복을 불러들여 따끈한 국에 밥을 말아주곤 했었다.

"장석같이 와 그리 서 있노. 할무이한테 인사 안 하나."

한복은 눈살을 찌푸리며 영호를 나무랐고 영호네도

"할무이한테 인사 디리라."

하고 채촉을 했다. 간신히

"안녕하십니까?"

영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려. 신랑이 우리 요조숙녀를 어여삐 보아주는감? 나 헐 일이 조껜 있어서 왔는디."

하다가 영산댁은 삽짝 쪽으로 되돌아갔다. 밖을 내다보며

"안 들어오고 머허는 겨? 싸게 들어오더라고."

했다. 이윽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소년, 그는 다름 아닌 몽치였다. 본명은 이재수, 몇 해 전에 숙이와 헤어진 몽치, 몽매간에 잊지 못하였던 동생이다.

"숙아, 알 만헌가?"

영산댁이 말했다.

"니 동생 몽치란 말씨."

마당 한가운데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오누이, 숙이 얼굴은 샛파랬고 몽치 얼굴은 싯벌갰다. 숙이 말했다.

", 아부지는,"

"죽었다."

"어이구!"

숙이 몸을 던지듯 몽치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 어디서 돌아가싰노?"

"산에서."

몽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다가 별안간 소 울음과도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졸지에 벌어진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 있던 식구들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란다.

"어제 올까 혔는디, 아아 금매, 머슴아이 꼴이 간데없는 짐승 새끼더란께. 사돈댁에 그 꼴로 올 수 있을 것이오? 혀서 몸도 씻기고오 옷을 빨아 입히고 허다본께로 좀 늦었지라. 마음은 한시각이 여삼추라. 저놈인들 왜 안 그렇겠는감? 어찌나 걸음이 빠르던지, 이 탕숫국 묵을 나이에 따라오니라 목에서 단내가 나들 않겄어? 어이구 냉수나 한 그릇 주더라고."

영호네가 부엌으로 뛰어갔다. 잽싸게 냉수 한 그릇을 떠왔다. 마루에 걸터앉아 냉수를 마신 영산댁은

"아 금매, 언제꺼정 그러고 있을 것이요? 숙아! 눈물 싸게 걷우고오 시어른헌티 인사를 시키야제."

"야아 하, 할무이, 고맙십니다."

무두 마루로 올라갔다.

"몽치야. 사돈 내외헌티 절을 허는 기여. , 옳지, 그려. 다음에는 매형헌티 허는 기여."

절 하나는 잘했다. 절에 가면 부처님에게 절을 했고 해도사한테 글을 배울 때 휘가 하는 대로 따라서 절을 했었다.

"그려 잘 혔다."

몽치는 영호의 눈치를 핼끔핼끔 살피다가 굵은 눈망울을 굴리며 제 또래나 돼 보이는 막내 성호를 스스럼없이 쳐다본다. 다음에도 역시 스스럼없이 저보다 나이 서너 살은 위인 광호를 쳐다본다.

"임자, 머하고 있소?"

한복이 댁내한테 주의를 준다.

". 내 정신 좀 봐라. 넋을 놓고 있었네. 아가아 니는 찹쌀부터 담가라. 나는 여치네 집에 가서 콩지름 좀 얻어오께."

"야 어무이."

어느덧 성호와 광호는 몽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영호는 슬그머니 제 방으로 물러가더니 한참 후 지게를 지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마루에는 한복이와 영산댁만 남았다.

"어디서 우떻게 며눌아이 동생을 찾았십니까?"

한복이 물었다.

"그거 다 부처님 은공 아니더라고? 숙이 처지가 하도 애잔혀서 부처님이 돌보아주신 게라."

영산댁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고 눈물을 닦고 코도 푼다. 마음이 놓이는 한편 영산댁은 엉거주춤한 영호 태도가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몽치를 대하는 태도도 냉정한 것 같았다.

"내가 도솔암에는 가끔 가는디, 설마 그아가 산에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겄어? 숙이가 구멍구멍 댕기면서 동생 아비 생각을 허고 울었지만 찾으리라는 생각은 못혔어. 헌디 그 아아를 도솔암에서 만났다 말씨. 오래된 일이고오, 하룻밤 자고 갔는디, 기억도 설풋허고, 김서방 눈에도 아아가 못생기지 않았남? 누가 숙이 동생이다 할 것이여?"

"왜요. 생김새가 굵직굵직하고 사내자석이 땟물만 빼믄 잘생긴 편이제요."

"아니여. 누가 보아도 못생겼어야. 땟물 빼보아도 별 수 없을 것이여."

"큰믄 인물날 얼굴입니다."

"그러까? 하야간에 그 왜 피섯이라는 거이 있질 않남? 도솔암에서 처음 만났는디 금매, 어디서 보았일 거라는 생각이 들더란 말씨. 짐승새끼겉이 꼴이 매련 없는디그려, 한 뱃속에서 나왔다는 거이 그것이 예삿일 아니여. 숙이 피섯이 있더라 그 말인 게라. 그래 이말저말 물어보았제. 그놈 아아도 눈썰미가 있었던지, 어디서 나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떠나지를 안 허고 맴도는 거야."

"아까 듣자니까 아버지가 별세를 한 모양이던데."

"그려. 그랬다는겨. 그 어린 것을 남겨놓고 까마귀밥이 될 거이 뻘헌디, 아아가 입이 굼떠서 지 입으로는 암말 허들 않으나 도솔암 공양주가 소상허게 이약을 하더랑께. 무슨 도사라든가 그런 양반이 아이를 거두어주었다 허는디 명이 질겨 살았는지 산신령이 돌보아서 살았는지, 하야간에 범상치 않는 일이여."

"이래저래 할무이는 큰 은인입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맡아서."

"그거는 안 될 것이여. 한자리에 처박혀서 있일 놈도 아니지만 돌보게 된다면 내가 돌볼 것이요, 거두어준 도사라는 사람도 있질 않는가?"

점심상은 떡 벌어지게 차려졌다. 팥을 넣은 찰밥에다 콩나물, 고사리, 미역의 세 가지 나물, 계란부침, 북어찜, 간고등어는 파, 마늘, 풋고추를 푸짐히 넣어서 지지고 오이생채에 솎은 배추로 방금 담근 김치, 멸치볶음, 아이들은 군침을 삼켰다.

"곰배상을 차렸네잉."

상을 받은 영산댁은 만족해했다.

"불각처 오시니께, 장날에 갚을 요량으로 여기저기서 좀 빌리왔십니다."

영호네는 시죽이 웃으며 말했다. 영호는 밖에서 자신에게 타이르고 돌아왔는지 아침나절과는 다르게

"할무이 많이 드십시오."

하고 권하기도 했다.

"어구라고 묵던 놈이 사돈댁이라 체면을 차리는 기여?"

아닌게아니라 몽치는 영호의 눈치를 핼끔핼끔 살피며 입으로 가져가는 밥술의 속도가 늦었다.

"사돈총각 많이 잡수소."

영호네가 웃으며 말했다. 숙이는 숟가락을 든 채 몽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호가 그런 숙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점심을 끝내고 숙이는 혼자 설거지를 하면서 앞치마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곤 했다. 그러다가는 마당에서 시동생과 어울리어 놀고 있는 몽치를 내다보곤 한다.

'불쌍한 울 아부지...'

"니도 핵교 댕기나?"

성호가 몽치에게 물었다.

"핵교가 멋꼬?"

"핵교도 모리나? 공부 배우는 데 아니가."

"그라믄 나도 핵교 당깄제."

"핵교도 모름시로 핵교를 댕깄다 말가."

"글공부 했인께."

"아항, 그라믄 그거는 아마도 서당인갑다. 우리 읍내에 있는 핵교는 집채가 산만하고 생도들이 백, 이백, 오백도 넘는다. 우리 동네서 공부 젤 잘하는 거는 성환이다. 언제든지 일등한다."

"우리 휘야 성만큼은 못할 기다."

"휘야 성이 누고?"

"..."

"그라믄 니 글씨 한분 써봐라."

"누가 못 씰가 봐서."

몽치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쓴다.

"이기이 무신 자고?"

"풍 아니가."

"무슨 풍이라고?"

"이거는 바람 풍 자다."

"."

몽치는 또 땅바닥에 글을 쓴다.

"이거는 무신 자고?"

성호는 머뭇머뭇 대답을 못하다가

"! !"

하고 광호를 부른다. 광호가 뛰어왔다. 몽치는 광호를 거만스럽게 올려다보며

"니는 아나?"

하고 물었다.

"뭐를?"

"성 니는 이 글자 알제?"

성호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러나 광호는 대답을 못했다.

"이것은 작이다. 까치 작."

자존심이 상한 광호는 몽치가 들고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까짓 것, 그라믄 니는 산술 할 줄 아나? 그거는 모릴 기다."

몽치는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광호 면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악크!"

주먹을 맞는 순간 광호 코에서 코피가 쏟아졌다.

"옴마!"

성호가 소리를 질렀다.

"몽치야!"

숙이 부엌에서 쫓아 나왔다. 마루에서 얘기하던 어른들이 돌아보았고 영호가 마당에 내려섰다. 그러나 몽치는 태연자약, 영호를 째려본다. 마치 네가 어찌 나를 괄시하는가 하며 따지듯.

 

 

13장 양현과 이부사댁

날씨가 쾌청했다. 강바람은 시원했다. 모시 두루마기에 흰 모자를 쓴 길상이 나룻배에 올랐다. 검정 치마, 분홍색 생명주 적삼을 입은 양현과 환국이 함께 배에 윤국이 함께 배에 오른다. 강심으로 나간 나룻배는 순풍을 타고 하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장날이 아니어서 그러는지 나룻배는 조용했다. 뱃전을 치는 물살, 가끔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뿐이었다. 장꾼들이 아닌 행인들은 어쩐지 모두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느껴진다.

'저만했을까? 아니다. 양현이보다 어렸을 게야."

길상은 윤국이와 함께 뱃전에 서 있는 양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삼십 년도 더 되는 옛일을 길상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용이를 따라 읍내에 오광대 구경을 가던 그때 일을, 봉순이는 지금 양현이보다 나이 어렸다. 날밤을 오두둑 오두둑 깨물던 모습이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다.

"참 좋았던 시절이었지."

좋았던 시절일 수가 없는데 길상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심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짊어진 무거운 짐, 거추장스런 현재의 위치, 남들은 말할 것이다, 하인이 주인으로 변신하였고, 뿐인가 최참판댁 만석 살림에 절색인 여자를 배필로 하였으니 양손에 떡이요,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고. 그것이 길상을 서글프게 하였다. 긴장과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 스스로 택한 길을 후회한 적은 없으나 고통과 인내와, 실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갈고 닦고 다지고 또 다져도 어느 구석이 허술하여 구멍이 날 것 같은 불안과 책임감, 분노에 떨었던 일도 몇 번이던지. 그러나 만주 일대, 연해주를 내왕할 때, 빙판과 설원과 삭풍은 다른 혁명가, 독립투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서희와 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삭막하고 격렬함이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샘이 되었고 청량수가 되어주었다. 뜻을 아니 굽히는 한 평사리의 현실도 빙판이요, 설원이며 삭풍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그리움은 산천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흐른다. 산천 곳곳에 묻혀 있는 어린 시절 자신의 자취를 향해, 격렬하게 살다간 김환을 향해, 윤보, 김훈장, 한조며 용이, 그보다 우관대사와 혜관스님, 윤씨부인, 봉순네, 원선이, 그들 옛 모습을 향해 그리움이 흐른다.

'어찌 일개 필부로 살지 못하였나!'

출옥하여 진주로 내려왔고 평사리로 다시 옮겨오는 동안 햇수로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북쪽에서 품에 넣고 다녔던 것만 같았던 서희와 두 아들, 그 서희와 두 아들에게까지 어떤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장벽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들은 길상을 존중하고 깊은 사랑으로 대하는데, 거리를 느낄 적에 길상은 자기 운명을 한탄하는 흔적을 본다. 일개 필부로 왜 살지 못하였는가, 그것은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는 의식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아비로서, 아비로서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과는 성질이 다른 구속 말이다. 신분의 차이, 생활의 빛깔이 다르다는 것, 그것은 도처에서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것이다. 물론 길상은 그것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김환의 생애, 김환의 부친인 김개주의 생애가 길상의 가슴을 뜨겁게 하곤 했다. 얼마만큼 세월이 흘러야 인간은 그런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진실로 동등하고 뜨거운 가슴과 가슴만으로 함께 가는 세월, 그 세월은 언제쯤일까. 환국이 송영광에 관한 말을 했을 때, 신분에 대한 절망도 극복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유로워지느냐고 길상은 말했었다. 그러나 길상은 영광의 말을 들은 적도, 만나본 일도 없었지만 환국이보다 훨씬 진하게 그의 갈등을 느꼈었다. 말로는 그랬지만 영광이 혼자 극복한다고 될 일 아니며 끝내 혼자서 극복이 되는 일도 아니다. 사람 모두가, 역사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김개주도 김환도, 역사의 산물이며 그 오랜 역사를 극복하려다 간 사람이다.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다. 강자는 극복되어야 한다. 약자의 눈물을 거두기 위하여 평등하기 위하여. 강국도 극복되어야 한다. 약소국의 참상을 씻기 위하여, 국가와 국가가 평등하기 위하여. 일본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 길상에게 서희와 두 아들은 끝없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또랑이 있고 장벽이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극복되지 않는 대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목마름이요 적요함이지만 그가 가는 길에 그들은 길상의 약점이기도 했다. 길상은 궐련 하나를 뽑아서 입에 물고 강바람을 막으며 성냥을 그었다. 담배 연기가 뿌옇게 날린다. 이른 봄, 보리밭에 무리를 지어 날아 앉던 까마귀들이 눈앞에 보인다. 놀이 마당, 시꺼먼 어둠 속에서 타던 장작불이 보인다. 한여름인데 눈앞에의 광경은 으스스한 추위 그것은 봉순에 대한 연상이었다. 용정에 나타났던 기생 기화도 하얀 명주 수건을 쓰고 왔었다. 놀이마당의 월선이도 하얀 명주 수건을 봉순이 목에 감아주었다. 침모의 딸 봉순이, 기생 기화로 변신하였던 봉순이, 그 딸 양현이 윤국이와 나란히 뱃전에 서서 새가 지저귀듯 웃고 말하고 있다. 양현을 이부사댁에 데리고 가는 것은 어차피 알아질 일이라면 미리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길상의 고려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찾아가서 이 아이가 이 집의 딸이오,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서희는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양현에게 비밀로 하고 싶을 것이다. 양현에 대한 서희의 각별한 애착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지만 양현이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는 것을 서희는 우선 원치 않았다. 그러나 길상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이 모르고 양현이 모르는 일이라면 최씨집의 딸로 덮어버리는 것이 양현을 위해 가장 좋다. 그러나 봉순의 딸인 것을 이웃이 알고 무엇보다 양현이 자신이 어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한다면 아비 없는 자식보다 아비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그것도 시정잡배가 아닌 이상현이 생부라는 것이 양현을 위해, 장차 열리게 될 혼인길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길상은 자연스럽게,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양현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버님,"

환국이 불렀다. 담배를 눌러 끄고

"."

"이시우도 혼난 것 아십니까?"

"이시우가 누구냐?"

"이부사댁의,"

"아아 이선생 큰 자제, 거 뭐 의전에 다닌다는 그 청년 말이냐."

", 학생사건 때 잡혀서 고생했지요. 매우 준수한 청년입니다."

환국은 사전에 아버지가 뭘 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일부로 화제를 꺼낸 것 같다.

"부친을 닮았을 테지... 할아부님을 닮았는지도 모르고, 그 어른은 만 사람의 귀감이셨다."

"그 어른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습니다만 청백리로 소문난 집안이어서 그런지 가풍이 엄하고 딱딱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환국은 바로 그 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민한 환국은 시우 어머니가 반가워하다가도 때론 쌀쌀했고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듯한 기색을 나타내곤 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최참판댁의 도움을 받는 열등감의 반작용으로 생각할 만큼 환국은 순진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신분 때문이란 것을 직감했다. 환국이 말하지 않더라도 길상은 능히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깥어른이 안 계시고 관헌의 주목을 받는 처지니까 안에서 엄히 했을 것이다."

"..."

"이동진 그 어른께서는 선비로서 규범에 투철한 분이었지만, 개혁을 해야 한다는 신념은 어느 개화파보다 확고했지. 동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시고 일찍이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노비를 모두 풀어준 어른이시다."

길상은 환국이 받은 상처를 오히려 쓰다듬어주듯 담담히 말하는 것이었다.

"연해주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지만, 너의 외할아버님하고는 영 딴판이셨지. 그러나 외할아버님께서 스승인 장암선생말고는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 그분이 이동진 그 어른이시다."

까다롭고 무서웠던 상전, 최치수의 얼굴을 길상은 눈앞에 떠올린다.

"아버님."

"."

"연민의 정도 애정입니까?"

엉뚱한 말을 물어온다. 길상은 빙긋이 웃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

"아마 너는 연민과 동정을 혼동하여 물어보는 것 같구나."

"역시 애정이군요."

"대자대비를 한번 생각해보아라."

"대승불교, 아니 종교적인 입장에서 여쭈어본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애정 말이로구나."

"..."

"연민은 순순한 애정의 출발 아니겠느냐?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을 것이다. 사별의 슬픔도 다시 못 보는 슬픔보다 연민의 슬픔일 때 그것은 훨씬 도 진한 것일 것 같구나."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요."

공격해오듯 환국은 말했다.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가고, 이십이 못 된 천애고아의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환국은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아버님, 저의 이 연민의 감정도 사랑입니까. 저는 일 년 동안 한 여자 때문에 계속 아팠습니다. 그 여자의 불행이 저의 가슴을 찢는 듯 했습니다. 그 여자는 상처받은 한 마리의 새였고 길 잃은 아이였습니다.'

하동 포구에서 일행 네 사람은 나룻배에서 내렸다. 장날은 아니었지만 포구 근처 주막에는 오가는 나그네들이 술을 마시고 요기도 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양현이만 아니면 두 아들을 데리고 주막에 들어갔을 걸 하고 길상은 생각했다. 이부사댁의 눈에 익은 감나무가 나타났다. 상현이 감나무 위에서 풋감을 길상의 머리 위에 던지던 일이 엊그제만 같은데 그새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간 것이다. 감나무도 늙었는가 옛날 같지 않게 후주레해 뵈었다. 백발의 상투, 새우같이 작은 눈을 깜박거리며 억쇠는 길상을 쳐다보았다. 믿지 못하겠는지 눈을 부빈다.

"아이구 이, 이 일이."

하마터면 길상이 니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나! 할 뻔했다.

"안녕하십니까 할아부지.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길상입니다."

"아아 아 하모요. 알아보겄십니다."

"많이 늙으셨습니다. 아주머니는 돌아가셨다지요."

", , 먼저 갔십니다. , 이러고 있일 일이 아니제. 마님한테, , 잠깐만 기다려주시이소."

굽은 허리를 펴며 펴며 달려간다.

"마님, 마님."

"왜 그러는가 할아범."

방안에서 시우어머니가 말했다.

"저기, 저어 평사리에서 환국이 도련님의 아버님이 오셨습니다."

"뭐라?"

"아드님이랑, 그 왜 딸아이도 하, 함께."

"환국이 아버님이?"

". 지금 밖에 기십니다."

"알았다. 어서 사랑에 뫼시어라."

억쇠는 또 굽은 허리를 펴며 달려왔다.

"어서 사랑에 드시지요."

"할아범,"

윤국이 불렀다.

", 작은 도련님,"

"시우형이랑 모두 어디 갔어요?"

". 그기, 시우도련님은 남해 작은댁에 가셨고 민우도련님은 방금 가싰는데 어디 가싰는가? 소인이 찾아보겄십니다."

길상은 환국이 들고 있는 꾸러미를 받아서 억쇠에게 내밀었다.

"삼인데 부인께 전해주십시오."

", , 어서 오르시지요."

반가우면서도 억쇠는 거북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모두 사랑에 올랐다. 양현이만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양현이도 올라와."

윤국이 말했다.

"좀 앉았다가."

양현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환국은 우울했으며 다소 긴장되어 있었다. 시우어머니가 아버지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 윤국이형!"

부르며 민우가 뛰어왔다. 지난봄에 민우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뛰어오다가 민우는 마루에 걸터앉은 양현을 보고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때

"민우야."

시우어머니가 다가오며 불렀다. 민우는 돌아보았고 마루 끝에 앉은 양현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시우어머니를 바라본다.

", 아니,"

시우어머니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빈다. 그러고 나서 아들 민우와 양현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두 개의 얼굴, 쌍둥이가 아닌가 싶으리 만큼 닮은 두 개의 얼굴, 시우어머니의 낯빛이 차츰 변해간다.

"너는 누구냐?"

시우어머니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기 평사리에서 왔습니다."

"그래, 어째 올라가지 앉느냐"

양현은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사랑으로 올라갔고 시우어머니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며 마루로 올라갔다. 민우가 뒤따랐다. 길상과 그들 형제가 일어서며 시우어머니를 맞이했다. 그리고 길상과 시우어머니는 선 채 맞절을 하였고 민우는 길상에게 절을 하였다.

"양현아, 부인께 절을 하여라."

길상은 좀 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 아버님." 하고 양현은 나비같이 나붓이 절을 했다.

"더운 날씨에 오시노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시우어머니는 침착하게 말하였다.

"진작 와서 뵈어야 했는데 집안이 시끄럽고 보니,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이야말로 찾아가 뵙는 것이 예의인 줄 알면서도 밖에서 아니 계시니, 집안은 모두 무고하신지요?"

". 내자는 진주에 머물고 있어 동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번번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한번 다녀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옥고까지 치르시고 하니 그쪽을 떠나오신 지 몇 해 되겠습니다."

시우어머니의 그 말에는 그곳 소식을 알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다.

". 한 오 년쯤 되나 봅니다. 이선생께서는 소식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잠시 말을 끓고 있다가

"듣자니까 환국이 아버님께서는 저의 시아버님 가까이 계셨다 하는데."

", 뫼시고 있었습니다. 저희들 성의가 부족하여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시우어머니는 눈물을 머금었다.

"고국산천에 묻히시지도 못하고, 자식들이 불초하여,"

"아니올시다. 어르신께서도 차라리 그곳에 계실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일본 손아귀에 있는 고국에 돌아오셔서 묻히는 것을 욕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유해나마 모시고 오려면 하루라도 빨리 이 나라가 독립을 해야지요."

"언제 어느 세월에 그리 되겠습니까."

"우리 생전에 그날을 꼭 보아야지요."

"평사리의 김훈장께서는 돌아오셨다 하더군요. 효성스런 양자를 두어서... 참으로 부끄럽고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남편 이상현에 대한 비난이요 양자 간 시동생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면 소찬이나마 지어서, 그럼 편히 쉬십시오."

시우어머니로서는 시간을 어렵게, 그러나 원만하게 넘긴 셈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혼란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냐? 쌍둥이같이 민우를 닮은 저 아이는. 그리구 어찌하여 저 아이를 데려왔는가.'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그것은 짙은 의혹이었다. 다른 하나의 혼란은, 그 의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관습상 길상을 어떻게 예우해야 하는지 그것도 혼란임엔 틀림이 없었다. 곡식 실은 소달구지를 몰고 오던 아이, 감나무 밑에서 요기를 하던 아이, 그것은 얘기로만 들은 것이었지만, 간도로 떠날 적에 이십 세를 훨씬 넘겼던 그는 더벅머리의 하인, 서희가 머물던 방에 군불을 지피던 사람이었다. 그 모습은 시우어머니는 보았고 그들 일행을 따라나섰던 젊은 서방님 상현은 일차 귀국 때 시우를 배태 해놓고 떠났으며 3.1운동이 끝날 무렵 잠시 왔다가 민우를 심어놓고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집 떠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리란 생각은 없다. 본시 금술이 좋지 않았던 부부였으니까. 그러나 아비를 빼박듯 닮은 민우, 그 민우와 꼭같이 생긴 계집아이, 그는 누구인가. 시우어머니한테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억쇠댁네 유월이 죽은 뒤 친정에서 보내준 무실네를 불러서 점심 준비를 하라 이른 뒤, 시우어머니는 억쇠를 찾아 뒤켠으로 돌아간다. 억쇠는 가난한 상전댁 살림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그는 손님상에 오를 찬으로, 미리부터 도라지를 캐고 있었다.

"할아범."

", 마님."

시우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온 여식아이 말인데,"

"."

"그 애가 그 댁 침모의 딸,"

". 봉순이라 하지요."

"그 사람이 낳은 딸이라 했던가?"

"예 그렇십니다. 봉순이는 본래는 침모의 딸이었습니다마는 나중에 기생이 되었습지요. 그때 낳은 딸이라."

"."

"에미가 죽은 후 최참판댁 마님께서 전정을 생각하시어 거두어 길렀다 그러더마요. 출생이야 어찌 되었던 그 댁에서는 도련님들하고 꼭같이, 그런께 친딸같이 길렀다 하고."

"그래..."

"하인들도 모두 그렇게 뫼신다 하더마요."

"그런데 할아범."

"."

"할아범은 그 아이를 보고 생각한 일이 없는가?"

"무슨 생각을 말심하시는지, 지는 졸지에 그 댁 분들이 오시는 바람에 어마지두해서 그 아이 얼굴을 잘 보지 못했십니다."

하는데 민우가 윤국이와 양현을 데리고 뒤켠 곁으로 돌아 나왔다.

"어머니,"

민우는 썩 기분이 좋았다.

"어디 가느냐?"

", 뒷산에 가보려구요."

시우어머니는 양현을 참참이 바라본다. 억쇠도 들은 말이 있어 양현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시선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다가 얼굴이 빨개진 양현은 공연히 윤국오빠! 하고 부르며 앞서가는 두 사람의 뒤를 쫓는다.

"할아범."

"."

"보았는가?"

"."

"어떤가?"

억쇠는 대답을 못한다.

"민우하고 쌍둥이같이 닮지 않았소?"

". 어딘지 좀,"

"좀이 아니오. 그렇게 닮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럴 리라니?"

"저어 그런께,"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짐작만 하고 있는 게요."

"그거야 뭐 말심 안 하시도,"

"나보다 할아범이 그 양반을 더 잘 알 것이오."

"..."

"한데 그 사람이 어째서 그 아이를 데리고 왔을까? 무슨 까닭일까..."

시우어머니는 지붕 한 곁에 후줄하게 뻗어난 감나무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발밑으로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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