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4-4-1
토지 4부 제4편 인실의 자리
1장 휘의 갈등
"봄아 봄아, 우찌 그리 더디 오노. 고봉준령 넘니라고, 허리 아파 쉬니라고 더디 오나. 산밑에는 명춘화 산수유도 피었을 기고 까치는 안짱걸음 걸음시로 고개 넘어 손 온다고 까까거릴 긴데 첩첩산중 이 골짝은 우찌 이리도 적막강산인고."
납독이 올라 얼굴과 입술, 잇몸까지 푸르딩딩했던 춘매는 봄이 더디 온다고 푸념하곤 했었다. 그러던 춘매도 이른 어느 봄날, 꽃바람에 할미 죽는다는 말을 뇌면서 세상을 떴는데 그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지리산 산록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에 봄은 분명히 와 있었다. 휘는 돌소금 한줌을 들고 개울가로 나왔다. 높은 계곡에는 낙수가 하얗게 얼어붙은 채 있었지만 개울은 녹아서 맑은 물이 구슬처럼 구르고 있었다.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서 이를 닦는데 휘는 발소리를 들었고 돌아보지 않았지만 순일 거라고 직감했다. 순이였다. 그는 이를 닦는 휘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서 이고 온 사기를 내렸다. 소매를 걷고, 팔뚝이 터서 빨갛다. 사기에 물을 붓고 휘휘 젓다가 물을 쏟은 뒤 보리쌀을 씻는다. 휘는 멈출 수 없는 듯 계속해 이를 닦고, 순이 역시 계속해 보리쌀을 씻는다. 두 사람의 침묵은 터질 듯 팽팽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터질 듯 팽팽했다.
"오빠는 좋겄소."
드디어 순이 비양거리듯 말했다.
"머가?"
순이 입에서 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양치질을 멈추고 두 손으로 물을 모아 입속을 헹군 휘는 퉁명스러게 말했다.
"내일 장개가는데 그라모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 말이요?"
휘는 대답 대신 개울에 얼굴을 처박듯 하며 세수를 한다.
"오빠!"
보리쌀을 씻던 동작을 멈추고 순이는 악쓰듯 불렀다.
"응, 응?"
얼굴을 씻다 말고 눈을 치뜨고 고개를 비틀며 휘는 순이를 본다.
"사람우 가심에 못을 박고도 아무렇지 않소?"
"내가 언제?"
"이제 와서...... 오빠가 장개가고나믄 나는 우찌 살겄소."
순이 눈에서 눈물이 후덕후덕 떨어진다. 휘는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씻는다. 그 동안 순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휘는 신경을 써왔다. 순이는 반대로 휘와 단둘이 만날 기회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지금도 휘가 개울로 가는 것을 보고 순이는 서둘러서 뒤쫓아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휘와 단둘이 만난다고 해서 내일 있을 혼사가 무너지리라는 희망을 순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물을 연신 닦으면서,
"모두 다 나를, 나를 오빠하고 혼인할 기라고 그리 생각했는데, 이기 무신 꼴이요."
개울가에서 물러서며 휘는 허리춤에 찔러둔 수건을 뽑아 얼굴을 닦는다.
"나는, 나는, 참말이제 이렇기 될 줄은 몰랐십니더."
"......"
"사람우 맴이 우찌 그리, 오빠! 와 말이 없십니꺼."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나는 순이를 동생같이 생각했구마는,"
"거짓말 마이소! 그 말이믄 다 된 겁니꺼, 야? 우짜믄 그리도 쉽소!"
"......"
"내 신세는 우떻기 하고, 으흐흐흐."
두 손으로 얼굴을 싸며 흐느낀다.
"죽고 싶소. 그만 죽어부맀으믄 싶소."
"언약한 것도 아닌데 이라믄 우짤 기고!"
휘는 화를 낸다.
"언약한 거 아니라고요? 언약이 따로 있소? 이제 와서, 사람들은 모두 그렇기 될 기라고, 으흐흐흐...... 내가 남 부끄러버서 우찌 살겄소."
"남의 일 가지고 객담하기 예사지."
휘는 얼굴을 찡그리며 괴로워한다. 그 자신이 말한 대로 휘는 순이를 동생같이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선이가 산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혼사가 이루어졌을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었다.
"하루 아침에 우찌 그리 맴이 싹 변했일꼬, 오빠 뿐이겄소. 아제 아지매도 안 그랬십니꺼? 나를 며누리감으로 생각 안 했다 할 수는 없일 깁니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참말이제 나는 우찌 살겄소."
"세상에 남자가 나 하나뿐이가."
"머라꼬요?"
울다가 얼굴을 쳐들고 휘를 본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머리칼이 엉겨붙은 순이 얼굴을 외면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휘는,
"좋은 데 시집가믄 될 거 아니가."
"그렇기 말할 수 있소? 정말 그렇기 말할 수 있십니꺼? 작년 가을에,가, 가을에 송이 따러 갔일 직에 오, 오빠는."
으흥! 소리를 내며 순이는 운다. 먼 산을 바라보는 휘의 관자놀이가 부르르 떤다. 목에서부터 양볼이 시뻘겋게 물든다.
"무신 소리 하노!"
소리를 지른다.
"그러이 내가 우, 우찌 살겄소. 내 신세가 우찌 되는 깁니꺼."
"그런다고 머가 달라질 기가! 나는 애시부터 니하고 혼인할 생각 터럭만큼도 없었다!"
몸을 날리듯 돌아선 휘는 언덕을 향해 쏜살같이 달린다.
'빌어묵을 가시나! 그런 소리는 와 하노!'
피리바위까지 간 휘는 걸음을 멈추고,
'빌어묵을 가시나!"
씩씩거린다. 숨이 차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휘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괴로움보다 살벌해진 눈, 달려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울던 순이 모습, 세수를 했던 개울도 보이지 않고 마치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뱀처럼 산줄기들이 흐르고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그는 바위에 가서 걸터앉는다. 피리바위, 이곳에 와서 피리를 불곤 했기 때문에 휘가 지은 바위 이름이다. 바위는 언덕에서 밀려나와 평평한 바닥을 이루었고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옆에 바싹 붙어서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와 이리 답답하노. 가심이 터질 것 겉다."
중얼거린다. 어제 한나절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계곡은 으르렁거렸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가랑잎들이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그 바람 속을 헤치듯 깡마르고 작은 눈에 핏기를 실은 송관수사 나타났다.
"아부지!"
영선은 땅바닥에 주저앉을 듯, 눈물을 흘렸다.
"와 이리 청승을 떠노. 죽은 사램이 살아왔다 말가?"
딸을 나무라던 송관수는 어줍잖게 인사하는 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강쇠에게 시선을 옮겼다.
"입 하나 늘어서 양식이 딸리지는 않았는가."
"사람을 우찌 보고 하는 말고. 여식아아 배 골리실까 봐 그라나? 그나저나 이 바람 속에 우찌 왔노?"
"겸사겸사...... 오늘 안 오믄 내 딸 그냥 데꼬 살 것 겉애서 왔제."
"한다는 소리가 점점, 자식들 앞에 밑천 들나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는 기이 좋겄다."
강쇠는 송관수의 등을 밀었다.
"빌어묵을 가시나......"
휘는 손등을 깨문다. 지난 가을이었다. 그러니까 영선이 산에 오기 전의 일이다. 휘는 순이와 그의 동생 길륭을 데리고 송이를 따러 갔었다. 어차피 산속으로 들어가면 일행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길륭이 먼저 휘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고 졸졸 따라다니던 순이 모습도 어느새 안 보이게 되었다. 가을이라지만 숲속의 녹음은 아직 짙었다. 녹음 사이로 만개나무의 붉은 열매, 말채나무의 검은 열매가 이따금 알른발른 비치곤 했다. 인기척 때문이지 풍성한 산속의 열매 탓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뭇 새들의 지저귐은 요란하고 수다스러웠다. 휘는 묵은 나무둥치의 언저리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송이를 따고, 송이를 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오빠, 오빠! 날 좀 내려주소."
땅을 살피며 가다 말고 휘는 얼굴을 들었다. 지난여름 장마에 흙더미가 무너져서 들난 바위 위에 순이는 광주리를 들고 서 있었다. 휘는 망태를 놔두고 바위 쪽으로 간다.
"오빠!"
순이는 등을 꾸부리며 아래쪽으로 손을 뻗쳤다. 휘는 흙더미를 밟고 올라가며 순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끌어내리는데 순이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몸이 쏠려서 휘에게 안겨버린 꼴이 되었다. 강한 여자 머리 냄새, 가슴에 닿은 유방의 감촉, 눈앞에 불이 튀었다. 그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휘는 어느새 순이를 포옹한 채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왜 이래요, 오빠!"
놀란 순이는 팔에서 몸을 비틀 듯 하며 빠져나가서 땅바닥에 주질러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읍하듯 그는 엎드렸다. 망연자실한 듯 서 있는 휘는 망태도 내버린 채 혼자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는 길륭이 부근에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더라면 더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바위를 번쩍 들어올려 메치고 거목을 송두리째 뽑아젖힐 것만 같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힘, 미쳐 날뛸 것 같은 힘, 알 수 없는 흉악한 힘에 시달리며,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전신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날 이후 휘는 순이를 되도록 피해 다녔고 순이는 휘를 쫓아다녔다. 피해 다녔을 뿐만 아니라 휘는 두 번 다시 순이에 대하여 이상한 욕정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순이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달막한 다리, 치마끈으로 질끈 동여맨 허리, 쌍까풀이 굵게 진 눈매, 건강한 혈색, 누구든 순이를 보면 복스럽게 생겼다고 했다. 휘의 어미도 순이는 밥 붙은 얼굴이라 했다. 그러나 휘는 그 일이 있고부터 자기 주변을 맴도는 순이의 분위기를 느낄 때마다 한 마리 암짐승이 연상되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강한 거부의 몸짓이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을 나무라고 잘못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누누이 자신을 향해 타이르지만 소용이 없었다. 첩첩으로 연이어진 산봉우리, 축지의 술법이라도 익혔더라면 단숨에 저 첩첩연봉을 건너뛰어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저잣거리, 세상 구경이나 실컷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다녔으면, 광대패거리와 어울리어 피리를 불며 산산골골을 누비고 다녔으면, 그런 생각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돌팔매같이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면서 울부짖는다. 순간 산속의 뭇 새들이 우는 소리가 휘의 귀청을 찢는 것 같다. 그 동안 산의 새들은 계속해 그리 울었을 터인데 휘는 듣질 못했다.
"빌어묵을!"
개울 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갑자기 산은 용트림을 하고 온갖 소리를 내지르며 휘에게 육박해오는 것만 같다. 그런데 다음 순간 산의 움직임, 온갖 소리들은 얼어 붙어버린 듯 적막하고 쓸쓸하고 소리 죽인 울음과도 같이 휘의 눈에 비치는 것이었다. 땅 위에 사는 뭇 짐승들, 헐벗고 메마른 초목, 땅속에 엎드린 헬 수 없는 목숨들, 겨울 하늘을 나는 굶주린 새들, 모든 일체의 생명들이 지나간 겨울을 견디며 꺼질 듯 잦아질 듯 생명의 불길을 사르며 이제 봄은 산자락에까지 왔는데 아직 산속은 하늘이 풀리고 땅이 열리지 아니하였는가. 적막은 철벽같이 사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억조창생에게 참혹한 것은 절망이 아닌지도 모른다. 체념도 참혹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기다림, 치열한 기다림, 그것은 시간이다. 사람들은 화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세월이라 하였고 인생을 초로 같은 것이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각이 천추이며 끝간 데 없는 들판에 씨를 뿌리며 곡식을 거두어들이는가. 저 망망대해를 건너 불모의 땅을 질러서 때론 낙엽같이 떨어지고 때론 석벽에 부딪치며 수만리 장천을 나는 철새, 오히려 그들의 여로는 세월보다 길 것만 같지 아니한가. 그 치열한 삶은 왜인가? 그 치열한 생명은 왜 오고 또 가는가. 화살 같은 세월과 천추 같은 일각, 이 양켠 골짜기, 생과 사의 골짜기를 지나는 억조창생, 장엄한 비극이다. 겹겹이 싸인 산봉우리는 어느덧 뚜렷이 선을 그었다. 부옇던 하늘은 영롱한 푸른빛으로, 실구름이 떠 있었다.
"참말이지, 넓은 대처로 나가부릴까? 와 이렇기 산중에서 살아햐 하노 말이다."
아무도 산중에서 숯이나 굽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아비 강쇠만 하더라도,
"어른이 되믄 니도 자연고로 도방에 나가게 될 기다. 나가서 사람구겡도 하고 사람들 제제금 사는 꼬라지도 보게 될 기다. 니 어매 생각은 우떨지 모리겄다마는, 나는 니가 하나 자식이라꼬 해서 산중에 붙들어두고 부모 봉양이나 하라 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그 말에 대해서 휘는,
"그라믄 엄니 아부지는 우찌 됩니까?"
하고 물었다.
"우찌 되기는,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 없고 살다가 눈감으믄 그만인 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혼자 가게 매련 아니가. 춘매할망구도 혼자 살다 혼자 죽었이까? 환이성님도 혼자 살다 혼자 죽었이까?"
"하필이믄 와 거기 비합니까?"
"비할 기이 머 있노? 죽음은 구중궁궐 상감이나 집 없는 거렁뱅이나 다 마찬가지 아니가. 죽으믄 그만인 기라. 춥고 더분 거를 아아 걱정이가, 배부르고 배고픈 거를 알아 걱정이가. 그런 걱정이사 할 필요가 없고오, 뜻이 있이믄 날개를 훨훨 피고 넓은 천지를 날아보는 것도 사나아가 세상에 나온 보람 아니겄나."
하고 말했다.
"그러나아 도방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기라. 인심이 야박하고 가진 기이 없이믄 죽는 곳이제. 묵고 살 기이 없고 보이 도방으로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많고 보이 사람우 값이 없어지는 긴데 있는 놈 없는 놈 그 칭아가 하늘하고 땅이라. 그라믄 나는 하늘이고 땅 사이 어디만큼 있는가 생각도 하게 되고 와 그런가 이치도 깨닫게 되고, 하기사 머 저저이 다 그런 생각하게 되는 거는 아니제. 사람 못된 거는 도방에 나갔다 하믄은 불량배되기 십상이고 하늘이 돈짝만하게 간이 부풀어 신셀 조지고 어리석고 미련한 놈은 바가지 차기 일쑤, 다 지 되기에 매인 일이다마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 하기사 신세 조진 놈이나 밥 빌어묵는 놈이나 지가 되고 싶어서 그리 됐겄나. 우리 조선은 자고로 염치를 중하게 여기고 옛적에는 상것들이라 해서, 천민이라 해서 허랑방탕, 우리걸식이 흔치 않았건마는 지금은, 말도 마라. 주막이라 카믄 오고가는 나그네들이 술 한잔에 목을 축이고 국밥 한그릇에 허기를 달래듯, 그런데 지금은 우떻노. 사람들 발씨가 조맨치라도 잦다 카므는 색주가 데리고 영업하는 집이라. 벌건 대낮부터 술판 치문서 육자배기 노랫가락, 이래가지고는 땅만 뺏기나? 맘도 뺏기지. 그런가 하믄 거리거리마다 바가지 치키든 거렁뱅이가 우굴거리고. 만주 땅에 가고 저버도 여비 없어 못 가고 개천가 다리 밑에 움막치고 사는 가련한 백성이 부지기수라. 이기이 다 누구 때문이고? 목을 쳐서 소금에 저려도 씨원찮을 원수의 왜놈들! 참말이제 하늘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겄다!"
그럼 말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휘가 대처에 나갈 것을 반대 안 하는 광쇠. 은근히 나갈 것을 부추기조차 한 강쇠는 그러나 일 년의 절반 이상 집을 비우면서 부산이다 마산이다 진주다 하며 광주리를 메고 떠돌아다녔으나 한 번도 휘와 동행하려 했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화개장, 하동장에도 아들과 함께 가는 것을 회피하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기 처지를 생각한 때문이리라. 아들을 아끼는 마음과 동시에 아들일지라도 아직은 미성인인 만큼 비밀을 털어놔서는 안 된다는 의무였을 것이다. 다만 휘는 숯을 팔기 위해 안서방과 함께 하동장에는 더러 갔었고 일용품을 구하기 위해 화개장 서는 날이면 내려가곤 했었다. 내성적인 성질의 휘는 장에 갈 때마다 기대와 곤혹스러움을 늘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 산중에서 살아야 하는가 의문을 가진 일은 없었다. 축지법을 써서 첩첩연봉을 건너뛰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도, 광대패거리와 어울려 피리를 불며 산산골골을 누비고 다니는 자유분방을 꿈꾼 적도 없었다. 내일 치르게 될 혼례를 앞두고 전에 없이 하필이면 그런 생각을 왜 하는지, 순이의 원망과 울음이 마음을 산란하게 했고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순이는 마음이 변했다 했지만 휘의 형편에서 보면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부분 부모가 맺어주는 대로 순응하는 것이 혼례의 관습이기는 하나 그보다 이웃을 갖지 못한 산속에서는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영선의 경우도 그렇고 설령 영선이 나타니지 않았다 치고 순이와의 혼사가 성사된다 하더라도 휘의 선택은 아닌 것이다. 두 처녀아이를 두고 만일 휘가 선택을 한다면 영선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비를 따라 영선이 왔을 때 휘는 난생 처음으로 감미롭고 슬픔 같은 이상한 설레임을 느꼈다. 그러니까 본인의 동의 없는 부모의 결정은 휘에게는 매우 행복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순이의 원망과 울음이 마음을 산란하게 했기로 산중에서 탈출, 당장 떠나고 싶은 충동은 무엇 때문인가. 장에 갈 때마다 기대와 곤혹스러움을 늘 동시에 느낀 것처럼 결혼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모른다. 의 나이 십팔 세, 혼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삼십에도 장가를 못가는 처지라든지 더러는 과부, 소박데기를 보쌈해와서 육례는 커녕 정화수 한 그릇의 예도 갖추지 못하고서 야합하는 데 비하면 휘의 경우는 순조로웠고 이르게 드는 장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십이삼 세가 남아의 적령기로 풍습이 되어 있었고 어지간하면 십오 세를 넘기지 않는 관례에서 보면 휘의 결혼은 이른 편도 아니다. 휘의 신체 발육은 거의 완성돼 있었다. 체격은 보기 좋게 균형이 잡혔고 키는 중키보다 좀 높았는데 앞으로 더 클 소지는 있었다. 골격은 가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아비의 살성을 닮아 얼굴빛이 희어서 어느 반가의 도련님이었더라면 유약하다는 말을 들을 법도 했다. 그러나 산에서 자란 그의 근육은 차돌같이 단단했고 탄력이 있었으며 강인한 심지를 풍겼다. 미소년이라 할 수는 없고 호남이라 할 만한 용모는 아니었으나 청초하다 할까 깨끗하다 할까, 인상이 그러했다. 특히 눈동자가 맑았다.
"산놈이 귀골로 생겼으니 어찌 앞날이 평탕할꼬. 뼈대가 저래 힘이나 쓰겠는가."
언젠가 해도사가 한 말이었는데,
"그런 말 마이소. 저래 뵈도 심이 장사요. 용의 새끼는 용이지 구렁이 되겄소."
안서방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용의 새끼라?"
"아부지가 장사니께 하는 말 아니겄소. 자식은 부모 정기를 타고 나는 기고, 저 아아는 이 산의 정기도 타고났일 기요. 내 생각은 그렇거마는, 범상치 않은께요."
짝쇠댁네도 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한 적이 있었다.
"우짠지 저 아아 눈을 보고 있이믄 실픈 생각이 드요. 너무 저리 맑아도 안 좋다 카든데... 멩이나 질란가."
"무신 소리를 하노! 입도 도꾸날 겉다. 저놈의 방정맞인 주eld이를 그만, 이이."
짝쇠는 화를 냈다.
"내만 그라요? 남들도 다 그라데요. 눈이 저렇기 옥수겉이 맑으므는 절살이를 해야, 그래야 멩을 때운다. 넘들도 다 그랍디다."
"절살이라니, 중 되라 그 말가!"
"넘들이 그러이 하는 말 아니겄소."
"이 산중에 넘들이 어디 있노!"
"산중이라꼬 오고가는 사람도 없이까?"
"처묵고 할 일이 없인께 별 지랄 겉은 입방아들 찧고 있네. 하필이면 와 중이 되노. 될라 카믄 신성이나 되지."
무심곁에 한 말이었으나 짝쇠로서는 중을 뭐 각별히 모멸하여 한 말은 아니었고 일반 통념이 중을 존경하든 하시하든 어느쪽이든 간에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휘는 외아들이라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선이나 되지, 속세를 떠나기로는 피장파장인데 결국 짝쇠도 휘가 남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며 막역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내사 마, 그놈의 피리도 안 불었이믄 좋겄더마는, 그 아아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들으믄 와 그런지 심란하고 한스러운 생각이 들고,"
그 말에는 동감이었던지 짝쇠는 대꾸하지 않았다.
"바우에 혼자 않아서 피리 부는 거를 멀리서 바라보믄 그냥 구름 타고 날아가부릴 것 같고, 그 어른이 와 하필이믄 그 아한테 피리를 주고 가셨는지 예사일 겉지가 않소."
짝쇠는 그 말에도 대꾸가 없었다. 그 어른이란 죽은 김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김환을 본 일은 없지만 산속에서 전설같이 되어버린 김환에 대하여 짝쇠댁네도 얼마간 들은 얘기는 있었다. 그가 주고 갔다는 피리에 관한 것도 휘의 어미, 그러니까 사촌동서한테 들어 알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았던 휘는 일어섰다. 바위 위로 올라가서 엉덩이가 바닥에 닿지 않게 쭈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찬바람에 까칠까칠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빡빡 문질러본다. 여전히 뭔가 개운치가 않았고 걷잡을 수 없는 안개구름 같은 생각이 피어오른다. 겨울 산바람에 빨개진 순이의 손목과 터질 듯 통통한 얼굴, 쌍까풀이 굵은 눈매가 지나가고, 낭창한 어깨의 영선 모습이 지나간다. 스스로 와서 멈칫 멈칫하던 영선, 두고 온 어미를 못 잊어서인지, 종적을 감춘 오빠 생각이 나서 그랬던지 뒤안의 나뭇단을 짚고 울던 영선의 둣모습이 안개구름같이 피어오르는 생각 사이로 지나간다.
"만사 다 뿌리치고,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릴까."
떠나고 싶은 충동은 점점 강해진다. 우연히 신체 어느 부위가 가려워서 긁었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가려움은 전신에 퍼지고 격렬한 소양감에 견딜 수가 없는 것처럼. 실은 휘 자신 자기 마음이 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감미롭고 슬픈 것 같고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은 설레임을 난생 처음 느낀 여자와의 혼례 하룻밤만 자고 나면 그 찬란한 날이 오는데 왜 떠나고 싶은가 말이다. 왜 그 찬란한 날이 오는데 왜 떠나고 싶은가 말이다. 왜 그 찬란한 날이 두려운가 말이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망상으로, 혼례의 그 빛깔 이상으로 현란한 망상으로 치닫는다. 현란한 빛깔 이상으로 현란한 망상으로 치닫는다. 현란한 빛깔, 광대들의 펄럭이는 옷자락이었다. 부잣집 상여 행렬의 나부끼는 만장이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가르고 길게길게 꼬리를 끄는 상두가, 요령 소리, 농악꾼의 꽃갓이며 진흥빛 쾌자 입은 무당이었다. 구례 장터에서 보았고 하동장가는 길에서 보았던 광경이다. 현란한 빛깔들은 마음 바닥에서 차츰 울려 퍼지는 꽹과리, 징, 북소리, 피리 소리에 따라 흔들렸다. 장단이 빨라지면서 빛깔들은 눈부시게 어지럽게 소용돌이친다. 숨이 가쁘게 선회하고 반전한다. 그러나 갑자기 꽹과리, 북, 피리가 멎고 징이 드음응- 하고 울리면서 여운이 길게 꼬리를 끌 때 휘의 코에 송진 냄새가 풍겨왔고 하얀 관이 눈앞에 떠올랐다. 상여도 없이 상두꾼도 없이 짝쇠와 안서방이 어깨에 메고 가던 할머니의 관이었다. 그것은 또 춘매의 관이기도 했다.
"이 몹쓸 가시나야! 에미 가심에 못을 박고 니가 가나!"
거적에 말려 땅속에 묻히는 누이, 울부짖던 어미,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던 아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란한 빛깔은 차츰 암울하고 칙칙하게 변해간다. 휘는 눈을 감는다. 장바닥을 누비는 수없이 많은 짚세기, 짚세기 신은 발들이 어지럽게 눈에 밟힌다. 옹기전의 옹기에 눈부신 햇살이 번뜩이며 반사한다. 새까만 옹기, 망대 속에서 대가리를 내민 수탉의 시뻘건 벼슬이 흔들린다. 각설이떼들의 누더기가 줄래줄래 흔들린다. 붐파! 붐파! 침을 튀기며, 바가지를 뚜드리며, 엿장수 가위 소리, 하늘을, 강물을 가르듯 사공의 노래 소리- 옹기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수박덩이처럼 옹기는 공중에서 자맥질한다. 공중에서 난무한다. 그것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떨어지며 박살나는 소리를 듣는다. 휘는 소스라치듯 눈을 떴다.
"꿈도 아니고..."
고개를 흔든다.
"뜬금없이 와... 병 나겄네."
고개를 흔든다. 언덕을 내려간다. 개울가에 순이는 없었다. 순이는 여기서 얼마나 울었을까 하고 휘는 생각한다. 보리쌀이 개울가에 흩어져 있었다. 또 생각했다. 훈장어른한테 가야겠다고. 그는 해도사와 마주앉고 싶었다. 조반 전이면 조반을 차려서 함께 먹고 싶었다. 내리막의 오솔길을 내려가는데 먼발치로 어미가 짝쇠네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일이 우찌 돼가노."
짝쇠네 마당으로 들어선 휘의 어미의 말이었다.
"해나잘쯤이믄 그반 다 되겄지요."
기명물을 버리며 짝쇠댁네가 말했다.
"밥은 묵었나?"
"야, 설거지도 끝나갑니더."
몸집이 크고 뼈대가 굵은 짝쇠댁네는 휘의 어미보다 훨씬 나이가 처지는데도 거의 같은 또래로 늙어 보였다.
"하는 일도 없이 맴이 바빠 죽겄다."
"들어가보이소."
"어이구 다리야."
휘의 어미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성님 오십니까."
안서방댁이 이불을 꾸미다가 얼굴을 들었다.
"운야."
휘의 어미는 당황하듯 어색하게,
"일찍부터 왔고나. 밥은 묵고 하나."
"야."
방이 좁아서 이불은 삼분의 일을 접어놓고 꾸미고 있었는데 그래도
일하기가 매우 옹색해보였다.
"헹펜이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라, 참 말하기가 머엇한데, 여러 가지로 순이네 식구들한테는 면목이 없다. 우짜겄노."
바늘에 실을 꿰고 벽에다 한껏 몸을 밀어붙이며 휘의 어미는 이불 호청 한 귀퉁이에 바늘을 꽂는다.
"그런 말 마이소. 인연을 임우로 합니까?"
그러나 목멘 소리다.
"아야! 내 정신 봐라 골미도 안 끼고."
휘의 어미는 골무를 찾아 낀다.
"신부집에서 할 일을 여기서 할라 카이."
마음속에는 불평 같은 것 하나도 없으면서 순이네 앞이어서 일부러 그래보는 것이다.
"그것뿐인가. 불각처 들어닥쳐서 모레로 날 받았다 하이 참말이제 정신 차릴 새도 없다."
"그래도 신부감이 좋으니께요."
눈을 내리깔고 실을 물어끊으면서 순이네가 말했다. 다시,
"우리 순이사 부산 처니한테 비하믄 꽁지 빠진 새 꼬라지, 천양지간이제요."
"섭하게 생각지 마라."
"섭하게 생각한들 우짤 것입니까. 다 소앵이 없는 일이제요."
그 말을 할 때 살이 찐 순이네는 여위고 조만한 휘의 어미를 압도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니 말마따나 인연이 따로 있는갑다. 너거하고 우리 사이 혼사하자는 말이사 없었다마는 맘으로는 그렇기 될 기라고... 나도 실상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성님, 억울하고 원통한 맴이사 우찌 다 말하겄소.
태산겉이 믿었는데, 하기사 우리 복에 가남하기는 가남했제요. 자다가도 생각하믄 억장이 무너지고."
"원망해라. 그래서 너거들 맴이 조맨치라도 편해진다믄."
"성님을 원망한다믄 우리가 벌받제요. 우리 길륭이아배도 섭섭하기로는 똑 손바닥의 여의주를 잃은 맴이라 캅디다. 하지마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모리믄 사람이 아이고 복 받기 어렵다 캄시로, 우리가 뉘 덕에 이만큼이나 목심을 보존하고 사는가. 그놈들한테 붙잽힜이믄 순이가 온전하겄는가, 버얼서 청루에 팔리갔일 기고, 우리 식구는 바가지 차고 빌어묵으로 댕깄일 거 아이가, 말이사 길륭이 아배 말이 하낫도 틀린 거는 아니제요."
"너거들이 그리 생각하이 얼매나 고맙노 고맙다."
"아무리 애리고 싸리더라 캐도 뉘 내지 말고 혼삿일 잘 봐주라꼬 길륭이아배가 신신당부함시로 신새벽부터 나를 후둣가 보내서 아침도 이 집에서 얻어묵고."
"고맙다. 사람이란 전사 생각하기 쉽지 않네라. 내 가심이, 그 말 듣고 보이 내 가심 위의 돌덩어리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 욕심이제요. 성님 잘못한 것 하나 없십니더. 다 된 혼사도 깨지는데 하도 아깝고 하도 탐이 난께로."
호청을 접어 넣는 손등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이 사람아, 산중에서 보느니 우리 아만 본께 그렇지. 세상에는 얼매든지 좋은 신랑감이 있네라. 순이는 밥 붙은 얼굴이라 좋은 사람 만내서 옛말 하고 살 기다."
"조선팔도 다 댕기도 그런 신랑감을 구하겄소. 짚신도 짝이 있는데 시집 못보내기야 할까마는, 야, 처니로 늙기야 하겄십니까. 그런데 그 철없는 가시나가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놓으니 이구석 저구석 뎅기믄서 찔끔거리는 꼬라지 딱 보기가 싫습니다. 우세스럽고."
"나도 안다."
"빌어묵을 년, 문딩이 겉은 년, 지가 이새로 제대로 배웠다 말가, 본 바가 있단 말가, 지 주제에 청루 기생 면한 것만도 감지덕지해얄 긴데 문딩이 겉은 년! 지가 머 천하절색 양귀비든가? 갈 데 없는 나무 가시나, 앉은뱅이 용써봐야 무신 별 수 있일 기라고."
휘의 어미 낯빛이 달라진다. 순이네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이었다. 화가 나면 아이를 때린다든가, 울적한 심정을 끝내 누르지 못하겠는지 딸을 마구 짓이긴다.
"그러지 마라. 그라믄 우리 휘는 뭐꼬? 숯이나 굽고 강주리나 젖는 산놈아니가. 무슨 별수가 있노."
"천양지간이제요. 빌어묵을 년, 아무 놈이나 기영머리 풀어주믄 그것만으로도 잘 풀리는 긴데 지가 지 주제를 모리고 오로지 못할 나무는 치다보지도 말라 캤는데, 그 빌어묵을 년이 울기는 와 우는지."
울기는 와 우느냐 하면서 순이네는 운다.
"다 살았나. 앞길이 구만리 겉은 아아를 두고 무신 그런 말을 하노. 사람우 일은 모리네라. 질고 짧은 것은 대봐야제. 아아가 부실해서 퇴혼한 것도 아니고 사정이 그리 된 거를."
하는데 짝쇠댁네가 물 묻은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길륭어매 또 와이라요? 엎지러진 물인데 그래싸으믄 된정만 나고, 서로 안 보고 살라꼬 이러요?"
무심히 한 말이었으나 짝쇠댁네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 사람아. 자네 무신 말을 그렇게 하노."
휘의 어미 어조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렇잖아도 순이네 비아냥 거리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끊었던 참이다.
"언제 우리가 대접에 물 담았더나. 엎지러진 물이라니."
언제 혼사할 것을 언약했더냐는 뜻인데 휘의 어미도 동서를 통해 순이네에게 응수한 것이다. 짝쇠댁네는 당황히고 순이네는 긴장한다. 서로 안 보고 살려느냐 하는 짝쇠댁네 말에서 찔끔했는데 휘의 어미의 따지듯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아무리 속이 쓰려도 순이네 식구들이 이러고저러고 할 계제도 아니거니와 전적으로 강쇠댁네 비호 아래 사는 처지고 보면 이만 저만 실수가 아니다.
"서, 성님, 지가 잘못했소, 좋은 일에 눈물을 빼고 길륭아배가 알믄 굿이 날 깁니더. 사람이 욕심을 내다 보믄 경우없는 짓을 하는 갑 십니더. 지가 잘못했소."
"셈난 아제비가 참더라고, 하기사 서운한 사람은 너더들이니께."
"방이 좁아서 지가 앉아 일할 자리도 없네요ㅣ"
했다.
"집에도 일이 태산 같은데."
하고 휘의 어미는 일어섰다.
"참 옷은 우찌 됐노?"
"밤새워서 길륭어매하고 해놨십니더. 바느질이 말이 앙입더."
"급한데 우짤 기고. 그나마 휘의 옷은 해놨으니 망정이지."
휘의 어미는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일이 태산 같다고 했으나 장 보아올 새도 없이 치러야 할 혼사, 냉수 떠놓고 할 판인데 일이 태산 같을 까닭도 없고 다만 마음이 태산 같았을 것이다. 강쇠는 방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굴러들어온 호박덩이 같은 혼사, 순이네는 천양지간이라 했지만, 비아냥거려서 한 말이기는 했지만 영선은 순이에 비하여 월등한 것만은 사실이다. 보통학교를 나왔대서가 아니라 어느 모로 보나 몸가짐이 조신스러웠고 몸매나 용모에도 귀티가 있었다. 휘의 어미는 과남하다는 생각에서 마음이 설레었고 드디어 아들이 장가 들게 된다는 황홀감에 젖어 있으면서도 때때로 왠지 불안하다. 순이네가 울고 불고 원망 섞어 하는 말씀이야 예기치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과 관계없이 야릇하게 신경질 비슷한 것이 뻗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행복을 많이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 호사다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좋은 일에 익숙해지지 못한 혼란 같은 것, 그것은 인생을 겸허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주고서 빼앗아가는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날짜를 보름만 물리도 찬물 떠놓고 혼사는 안 할 긴데."
불안과 함께 서운함도 있었다. 종이로 바른 싸구리 농짝 문을 열면서 위의 어미는 또 중얼거렸다.
"농짝 하나도 매련하지 못하고 날씨 풀릴 것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각처에 들이닥치니."
"몇 분 말해야 하노. 헹펜 닿는대로 하는 기라고, 자식 낳고 해로하믄 그만이지 무신 잔소리가 그리 많을꼬."
강쇠는 곰방대로 재떨이를 뚜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어디 그렇소?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 인륜지대사 아니요. 저녁거리가 없는 처지라믄 모리까."
"그라믄 우리가 볏섬 윗목을 재놓고 산다 그 말가?"
"생각해보소. 가실 내내 싸리 꺾고 겨울 내내 강주리 젖고 숯 굽고, 우리 휘, 장개 밑천 장만 못했다 허겄소?"
"허허어."
휘의 어미는 농짝에서 꺼낸 옷감을 펴보고 만져보고 다시 접는다. 아들을 위해 장차 어떤 며느리가 입을지 모를 옷감을 큰마음 먹고 장만한 것들이다.
"내사 마, 누가 이렇게 졸지간에 들이닥칠 줄 알았이야제. 조금만 기다리믄 꽃삼월 좋은 날에."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와 그라노? 노망들라 카나."
"아아 이녁도 그리 생각 안 했다 그 말입니까! 해동하믄 혼사할 기라는 말 몇 분 했십니까?"
"봄이야 온 셈이제."
"시상에 어제 와가지고 그것도 저문 연에 와가지고 모래로 날 잡았다, 온 세상에 납비네는커녕 나무 깎아 비네 맨들 새도 없겄소."
"허허 참, 날 풀리거든 하동장에 가서 은비네 은가락지, 내 똥 묻은 중우를 팔아서라도 장만하믄 될 거 아니가."
"아이구우, 말만 가지고 할라 카믄 금비네 금가락진들 못하겄소?
말만이라도 그리 하는 거를 보이 떠맡았다, 떠맡았다 함서도 그 아이가 속으로는 기여븐 갑소. 빈말로라도 은비네 은가락지 해쌌는거를 보이."
"임자는 안 그렇다 그 말이가?"
"안 그러믄 와 내가 이래싸겄소. 우리 성시에 은비네 은가락지는 못하더라 캐도."
"말이야 바로 하지. 영선이는 우리한테 가남한 며누리라. 숯 굽고 강주리 젖는 놈이 백정보다 나을 기이 없고 억울하다믄 관수 쪽이제."
"우리 휘가 우때서요."
"휘가 우떻다는 기이 아리나, 영선이 가아가 똑똑하고 인물도 그만하이 더 나은 데 갈 수도 있었다 그 말이제. 보통핵교까지 나와서 이런 산중에 시집오기 쉬운 일은 아닌께, 고생할 거를 뻔히 알믄서 애비 된 관수 맴이 어디 좋겄나. 부모 맴이사 매일반이제."
"그거사 그렇소만."
"클 때부터 보아왔인께 내가 잘 알지러. 아아야 참하고 심성도 좋지."
"부모 안 닮은 자식이 없다 카이."
"어질기로야 어머니 편이제. 백정이란 이름이 더러바서 그렇지 요조숙녀라. 하기야 백정이란, 갖바치라는 이름이 더럽나, 세상이 더럽지,"
"지도 마 흡족하기사, 자다가도 좋고, 한 가지 걱정은 도방서 편키 살다가,"
"도방이라고 해서 편키 산 아이도 아니거마는, 밤낮 그놈들, 왜놈들한테 쫄대기를 치고 수풀에 앉은 새맨크로 이사 댕기기 바빴인께."
"보통핵교 나왔다고 서방을 눈 아래로 보믄 우짜겄소."
"우리 그놈도 고학을 하고 있인께 꿀릴 기이 없고 두고봐라. 기울지 않을 긴께. 나는 임자가 걱정이다."
"와요?"
"외아들이 외며누리, 잘 보는 씨에미 없다 안 카든가."
"그런 소리 마이소. 우떤 며누리라꼬."
"첫날 묵었던 맴이 끝까지 가야 하는 기라. 며누리라 생각할 기이 아이라 딸이거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나가다가 또 와 이라노."
"영선아부지가 야속해서 안 그러요. 미리 기별이라도 하든가, 자식이 있단 말가, 예를 갖추고 싶었던 것이 소원이었는데, 우리네 사는 낙이 머 있었십니꺼."
"헹편이 그런 거를."
"그쪽 헹펜이지 우리 헹펜이요?"
"관수 헹펜이 내 헹펜이고 내헹펜이 관수 헹펜 아니가! 그거를 몰라서 자꾸 이러나? 실삼시럽게 자꾸 또 내뱉었단 봐라!"
강쇠는 소리를 팩 지른다.
2장 초야
혼례는 치렀다. 신방에 신랑도 들어갔다. 산은 끝없는 정적에 묻혀 있었고 이따금 밤새 우는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짝쇠네 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합석했던 짝쇠는 술이 몇 순배 돌자 일어섰다. 연소하여 그랬던지, 의기소침한 안서방 보기가 딱하여 그랬던지 안서방을 이끌고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하기는 방이 협소해서 여섯 사람이 앉아 술 마시기는 매우 옹색했다. 사돈지간이 된 김강쇠와 송관수, 그리고 혼례랄 것도 없는 초라한 의식을 흉내나마 절차를 밟아준 해도사, 일진도 없는 빈 절간에 상좌와 함께 머물러 있던 소지감, 네 사람이 남았다.
"그 댁에서는 이장을 해왔소?"
해도사가 관수에게 물었다.
"얼음이 풀리야 이장이고 머고."
관수가 대답했다.
"하면은 송형 혼자만 왔다, 그 말씀이오?"
"질수가 다른께 함께 와야 할 까닭도 없고."
"조카딸이 있다니께 유하는 데는 걱정이 없일 기고 느긋하게 구겡이나 하고 오믄 되겄네."
강쇠 말이었다.
"구겡이 다 뭐꼬? 일각이 여삼추라 얼음 녹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거를 보고 왔구마."
"하기는."
해도사가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뿐이건대? 이거는 석고대죄라도 하는 꼴이라. 울기는 와 그리 찔찔 우는지, 핏줄도 아닌 양분데 머가 그리 맺히고 설분지 알다가도 모리겄더마."
"그게 법이라."
해도사의 말에 강쇠가 덧붙인다.
"양반네 법이제요."
"양반이라고 저저이 다 그러지는 않소이다. 아무튼 매우 지순한 사람이군요."
소지감이 한마디 했다.
"그 양부에 그 양자라, 할 만은 하지요. 내 어릴 적에 이웃에서 보아왔지마는 김훈장 그 양반 추수가 끝났다 하믄 노자 맨들어서 양자 찾니라고 사방을 쏘다녔구마는. 가문을 닫고 내가 무신 면목으로 조상을 대할까부냐, 그게 그 양반 입버릇이었제요. 꼬장꼬장한 늙은이, 고집이 평양땅 고집이고 나도 산에서 많이 대들고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 양반만한 어른도 세상에는 드물더만요. 말이 양반이지 농사꾼으로 살았고 글을 빌릴라 카믄 동네 사람들 그 양반 찾아갔인께. 그래도 비단가리 하나 바라는 게 없었고, 답대비, 그 골수에 박힌 양반이라는 생각이 병이었제요."
"..."
"한경이 그 사람도 좀 모자라서 그렇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오. 그러니 효성이 지극하고 남부럽지 않는 아들을 두었고."
그 말을 할 때 관수의 얼굴은 쓸쓸해 뵀다. 소지감은 모르지만 강쇠와 해도사는 영광이 집 나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진다.
"그러면 그때는 산에 들어갔으니 의병이었고 다음에는 동학군이었고, 다음에는 뭔고? 형평 운동 하는, 시쳇말로 무정부주읜가, 사회주읜가 뭐 그런 것인가? 아니면 독립 투사인가? 송형, 알쏭달쏭 하오이다. 어쨌거나 장돌뱅이 아들치고는 경력이 출중하니 개천에서 용 났다 할 수도 있겠구먼."
해도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지나간 얘기는 와 하는고. 된 일이 머 하나 있어서, 젠장."
"하는 짓짓마다 남 안 하는 걸 했으니 하는 말이지."
"앗따! 사내장부가 된장 담고 꼬치장 담고 산속에서 멀거니 해 쳐다봄시로 개대가리 죽써묵고 옴대가리 찜쪄묵는 소리나 중얼중얼, 그거는 남 하는 짓이던가?"
"하하핫핫핫... 시비 나겠소. 면대하여 칭찬하기 면구스러워 그러는 거 아니겠소. 해도사 속으로 부러울 게고 부끄러워 그러는 거요."
소지감 말에 해도사는
"아아니 물구비가 왜 그렇게 돌아가지요? 은근슬쩍 사람을 화살판으로 내밀어놓으면서 뒤에서 두 손 싹싹 부비는 꼴이구먼."
소지감은 껄껄걸 웃었다.
"자알들 노네. 오늘이 우떤 날이라꼬 송관수만 날개를 다노 말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오?"
짐짓 놀란 척하며 해도사가 묻는다.
"내 아들 장개간 날, 몰랐소? 말을 하자 카믄 내가 상객인데 뒷방 안늙은이맨크로 푸대접을 하니."
"가만히 있자아, 여기가 그러면 지리산이 아니고 부산 항구란 말인가?"
해도사는 능청을 떤다. 강쇠는 피식 웃었다. 소지감도 웃고, 그러나 관수는 웃지 않았다.
"저놈의 인사 때문에 상객 노릇도 못하고 제에기랄!"
강쇠는 농치면서 관수를 겉눈질해본다. 신부집에서 초례를 치러야 말 타고 따라간 신랑집 어른이 상객이 되는 때문에 해도사가 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강쇠는 상객이 아닌 주인의 처지인 것이다.
"그나저나, 용케 무덤을 찾았구먼요."
소지감은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소. 뫼 쓴 사람이 있었인께요. 무슨 핵교 선생이라 카든지 용정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데, 또 최참판댁 환국이아부지가 소상하게 알으키주었고 흥이가, 그러니까 조카사윈데, 발 벗고 나서주었제요."
"그 참 다행이구먼. 옛날에는 호지에서 부모 뼈 추려올려면 수천 냥을 짊어지고 가야 했다는데 왜놈들 때문에 그렇지 돈은 안들어서 좋았겠소. 그는 그렇고, 어떻든가요? 희망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어 뵈든가요?"
해도사의 말이었다.
"머가요?"
"아, 뭐긴 뭐겠소. 그곳 형편 말이오."
관수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무식한 내가 머를 알겄소. 잘난 사람들 만나본께 희망이 있다 카고 헹펜 돌아가는 거를 보니 하자세월, 이곳이나 그곳이나 다를 기이 머 있겄소. 왜놈한테 쫴고 되놈한테 쫴고, 오나가나 그 신세가 가련키는 매일반이지. 옛날에는 조선 사람들이 되놈으로 민적을 옮기기만 하믄 얼매든지 땅을 부치묵을 수도 있고 개간 할 수 있었다 카는데, 그래도 오만 고생 다 하믄서 민적 옮기는 것을 마다했다, 흥, 그 시절이 좋았다는 거요. 지금은 묵고살 수가 없고 왜놈 등쌀에 이도저도 할 수가 없으니 되놈으로 민적을 옮기고 머리도 깎고 하지마는 또 그기이 아이라는구마. 왜놈이 민적을 파주지 않은께 되놈 민적에 왜놈 민적 두 개를 달고 댕긴께 그 고달픔이 오죽하겄는가. 생각해보소."
"어째 그럴 수가 있을꼬."
해도사가 말했다.
"결국에는 왜놈 되놈 사이에 끼어서, 따지고 보믄 중국 사람이 그럴 만도 하지. 육실한 왜놈들이 조선땅 묵고 또 야금야금 중국땅 묵을라 카이 그 사람들 와 안 그러겄소. 왜놈은 조선 사람이 땅 가지는 거는 언제든지 저거 꺼로 할 수 있인께, 때에 따라서는 조선 사람 앞세워 땅을 살라고도 한께. 또 한 가지는 조선 사람이 중국 민적으로 옮겨가믄 왜놈들이 잡아들일 권한이 없어지는 거라. 그러니 독립운동하는 사람 잡기도 어려버지는 기고. 중국 사람들은 또 일본놈 손에 움직이는 일부 조선 사람들이 있인께 조선 사람들을 경계하고 발 못 붙이게 하고,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조선 사람들 아니겄소. 먼저 가서 자리잡은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뒤늦기간 사람들은 그 고생을 입으로는 다 말 못하는 거요. 풍찬노숙, 북풍이 쐥쐥! 부는, 죽어도 누가 알기나 하나. 돌아오자니 땅이 있어, 집이 있어, 생각해보믄 목이 터질 일이제. 땅 뺏기고 만주로 쫴끼간 사람치고 힘 있는 백성 한 사람이나 있었나? 의병이다 독립 투사다 하는 사람들말고는 땅 파믄서 게우 멩줄 잇든 불쌍한 사람들뿐이었제. 죽지 못해 간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더한 핍박을 받으니, 그 놈들이 땅 뺏고 이 땅에서 몰아냈이믄 그곳에서나 살게 내비리두지... 우리는 한사코 싸워야 하요, 싸우는 것밖에 없소. 그 길밖에 없단 말이요. 사람우 한 세상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겄소."
목소리는 낮았지만 절규하듯 응혈이 터질 듯 관수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그러했다. 관수가 이 지점까지 온 것은 우연도 작심에서도 아니다. 동학당으로 죽음을 당한 장돌뱅이였던 아비, 김훈장을 따라 산에 들어간 사이 행방을 모르게 된 어미, 그리고 은신처에서 만나 부부로 맺어진 백정의 딸인 아내, 그 응어리가 여기까지 오게 했으며 또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아들 영광의 한이 짙게 서릴 것이다. 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설움과 고통을 넘어온 송관수, 해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다. 딸을 남겨두고 아들의 행방은 모른 채 떠나야 할 자신, 그는 마음속으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쇠는 너무나 잘 안다.
"잘 처묵고 잘 살믄서 유세부리고 살던 사람들, 그 잘난 사람들 때문에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야 했는데, 이 강산에서 젤 덕을 많이 본 그 잘난 사람들이 내 강산 팔아묵고 연명을 하는데 백성들은 설 땅조차 없으니 이자는 그 잘난 사람들 처분만 기다리서는 안 되는기라, 내 살길 내가 찾더라고 언제꺼지 백성들은 이렇기만 살아야 하노 말이다."
"그래 아까 듣자니까 그쪽 잘난 사람들 얘기는 어떻던가요."
해도사가 말했다. 관수는 해도사를 빤히 쳐다본다. 해도사는 그 눈을 여유있게 받는다. 한참 후,
"세상 버리고 구찮은 짓 안 하고 태펭으로 삼서 세상일 머가 그리알고 접어 앙달복달하요."
관수도 조금은 여유를 찾은 듯 말했다.
"내가 언제 세상을 버렸든고? 여기는 세상 아니란 말이요? 내가 세상을 버렸다면 옛날옛적에 삭발했지. 그러지 말고 귀동냥 좀 합시다."
"잘난 사람들 한둘이 아니고 제제각금 얘기의 질수가 다른께 나겉은 무식쟁이가 우찌 옳게 듣고 제대로 얘기할 수 있겄소. 그러나 대충 잡아서, 우떤 사람은 내다보기로 멀잖아 왜놈하고 중국이 붙을 긴께 장개석이하고 손을 잡아서 함께 싸워야 한다 카고, 우떤 사람은 장개석은 좀체로 일본하고 싸울라 카지 않은께,"
"와 그렇노? 와 안 싸울라 카노?"
뚝배기 깨지는 소리로 강쇠는 관수의 말을 잘랐다.
"대국이 쥐새끼 겉은 왜놈 무서바서 안 싸울라 카나!"
"제발 철늦은 소리는 그만 해라."
"얼씨구? 잘난 소리 하네."
"꿈에도 못 잊는 그 성님 말할 직에 니는 귓구멍에다 소캐를 박았더나? 몰라도 한참 모린다."
"부작대기 갖고 와서 귀 좀 후비야겄구마는. 그래 한찬 모리는 이바구 해봐라."
"청국이 일본하고 싸워서 진 것도 모리나."
"지금이 어디 청국가?"
"아라사하고 싸워서 일본이 이긴 것도 모리나."
"그런께 간단하게 말해서 일본이 대국보다 세다 그 말이구마."
"방천에서 풀 뜯는 소새끼를 붙잡고 얘기를 하는 기이 낫겄다."
"허허어, 사돈지간에 왜들 이러시오."
소지감이 중재에 나섰다.
"자중지난이 망쪼라. 자중지난이 없었던들 일본이 득세했을까. 거 김장사, 말에 뉘 넣지 말고, 늦은 밥 먹고 파장에 가는 말은 두었다 하시오."
해도사의 면박이다. 물론 수작에 불과한 것, 아무도 진지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묵사발이네. 제에기랄! 아들 장개가는 날에도 유세 한분 못하고 접시물에 빠져죽든지 해야지 어디 살겄나. 설어서 못살겄다."
한바탕 웃는다.
"송형 하던 얘기나 이어보시오."
혼자 웃지 않고 있던 관수는 해도사 재촉에,
"어지간히 보채쌌는다. 그렇기 알고 저브믄 찰떡 해 짊어지고 내일이라도 떠나는 기이 우떻겄소?"
"아닌 게 아니라 한번 그래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소이다. 그는 그렇고 하던 얘기나 끝내시오."
"내가 어디까지 얘기를 하다 말았는고? 그렇지, 장개석이는 일본하고 싸우는 동안 공산당이 뒤통수 칠까바서 일본이 별의별 짓으로 유인을 해도 꼼짝 않은께 공산당하고 손을 잡고 싸운다믄 아라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기니, 또 앞으로의 세상은 공산당 천하가 될 기고 핍박받는 백성이 사람 대우 받고 살 것인즉 그쪽 편에 서서 뛰어야 머가 돼도 될기라, 그런 말을 하는가 하믄 또 우떤 사람은 이를 갈믄서 그놈들을 믿느니 시베리아 벌판의 늑대들을 믿겄다, 지난날 피맺힌 원한을 몰라 하는 소린가, 우리 독립군을 모조리 제 땅으로 불러딜이놓고 박살을 냈던 전사를 몰라 하는 소린가, 그 아무도 믿을 기이 없고 마적질을 하든 우리 힘으로 무장을 해서 왜놈들 뒷구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왜놈 앞잡이들을 모조리 암살해야 한다, 그리고 나라 안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남에게 얹혀서 일하다가는 죽쑤어 개 주는 꼴이 될 기라 캄서, 나는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더마."
"아무리 일리가 있어도 힘을 도외시해서는 움직일 수 없지요. 주먹으로 바위를 친다고 끄덕이나 하겠소."
소지감이 말했다.
"그거야 머 주먹 대신 지릿대를 쓸 수도 있고 바위 깨는 화약을 쓸 수도 있고,"
"지렛대, 화약을 쓰자면은 역시 빌려와야지 우리에겐 주먹밖에 없질 않소. 약게 그들 힘을 이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소이다."
그 말대답은 없이 있다가, 관수는 딴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하던 말을 계속한다.
"전쟁이 나야 하는가 하는 것도 생각들이 구구하더마. 전쟁이 나믄 조선 사람들 씨가 마릴 기라 걱정하는 사람도 많고 전쟁 없이는 끝도 없고 우리나라 독립의 기회는 영영 없어진다 하는데 내 생각도 그렇고. 소선생이 아까 말심했듯이 큰놈끼리 붙어서 부서지는 사이에 우리가 살아남을 기라는. 전쟁이 안 난다 캐도 왜놈은 우리를 말리직일 기요. 우쨌든 꽝! 터져부리고 보아야 한다."
"그래 쾅! 터져부리야, 하늘하고 땅하고 하루 한시에 붙어부리라! 시시로 나는 생각이제."
강쇠는 내뱉듯 말해다.
"동문서답하네."
해도사의 핀잔이었다.
"와 이라요? 나도 그런 뜻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말이요. 서당개 삼 년이믄 풍월을 읊는다고 했고 도방 출입 수삼 년, 제에기럴! 이런 날에도 그런 얘기 해야 하나?"
"누가 말려. 며누리 해주는 밥이나 먹고 구둘막이나 지키시오."
핀잔은 또 날아왔다. 사실 강쇠는 심사가 좀 뒤틀리어 있었다. 술은 별로 하지 않고 줄담배만 피고 있는 관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 아들이 우때서? 그렇기 앵하믄 누가 지 딸 데꼬오라 캤나.'
패주고 싶기도 했다. 패주고 싶다는 것은 강쇠 자신이나 휘의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산에 두고 가는 딸에 대한 연민은 지금 송관수에게서는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전후좌우의 역사와 상황에서 보면 영선은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관수에게 개인적인 그런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위험하고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관수는 자신의 개인적인 갖가지 비극을 지금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김질이 잘 된 것을 해야 할 일터로 넘겨주면서 해야 할 일에 튼튼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강쇠가 간수를 패주고 싶다는 것은 연민의 감정 때문이다. 소지감 때문에 뚜드려 패주었던 그때의 미묘한 배신감하고는 전혀 다르다.
'제기랄! 잘난 놈들이나 할 일이제. 잘난 놈들 새이고 새있는데 와 우릴 겉은 놈들이 맨 앞자리에 나서야 하노 말이다. 이런다고 백정이, 갖바치가 영웅호걸 될 기가. 흥, 우리 생전에 회포할 것 겉지도 않는 일을.‘
슬픔과 분노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강쇠는 관수를 패주고 싶은 것이다.
"식자우환이라."
지금까지의 화제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방안의 사람들은 생소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처음부터 이 술자리는 경사를 치른 뒤의 느긋하게 즐기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안서방과 짝쇠는 순이 때문에 강쇠나 해도사의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술자리에 어울릴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물러났지만, 그러나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소지감도 너털웃음을 웃곤 했으나 일만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도사의 말이 맞긴 맞소.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제아무리 뛰어봤자 승천은 못할 기니 말이요. 내 아들놈의 경우도 공부 대신 칼을 쥐여 주었더라면 저잣거리서 쇠고기나 팔고 살았을 긴데, 가심 쥐어뜯는 일도 없었일 기고,"
관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새벽녘에 그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하나. 하기야 용이 될지 이무기가 될지 그건 세월이 말해줄 것이고."
하다가 해도사는 관수를 곁눈질하며,
"백정의 자식이,"
말을 끊고 다시 관수를 곁눈질하며 본다. 전같이 관수 얼굴에 살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애비가 백정 아닌데 아들이 어째 백정이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리라. 하기는 여태 관수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백정의 자식이 칼 놔두고 붓을 들었다면 까시밭길로 들어선 거지. 식자 주워 담아서 잘난 사람, 험집 없는 사람, 그들 속으로 엉덩이 부비며 들어가 보아야 눈총에 송곡방석, 못 견딜 것이고 옛 둥지에 돌아와 본들 반쯤 양반이 되어 왔으니 그들에게는 낯선 나그네라. 혹 백정의 지도자로 떠받쳐 뫼실 경우가 있을 시에도 그건 깃발인 게요. 높이 쳐든 깃발이 바람을 타는 것은 정한 이치, 앞으로 몇 번 그 깃발이 찢기고 쓰러져야 백정의 흔적이 없어질런고 그런 불가지라. 해서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까시밭길이라 그 말이오."
"이래도 저래도 죽은 판이다 그 말이구마."
강쇠의 말이었다.
"아암."
"그라믄 송관수 사위도 공부 때리치워야겄네."
강쇠는 또 말했다.
"귀가 꽉 막혀버렸군. 눈은 옆과 앞을 동시에 보면서."
"뭐라 캤소?"
"고학하고 신학도 구별 못하오? 이제는 상놈들 고학쯤 해두어얄게요. 시체 양반들 고학 하는 것 보았소?"
"그런가?"
"자고로 양반 쓰다 버린 것 상놈이 주워 하게 돼 있고."
"더러바서."
소지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화제에서는 물러나 앉은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더럽다 할 것 없소이다. 입다 버린 누더기도 아니겠고 먹다 버린 밥찌꺼기도 아니겠고, 때에 따라서는 보화를 버리고 유리구슬을 줍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으니까. 생각해보시우? 지금 일본으로 유학 가는 사람들 말이오. 말짱 다 버리고 가지 않던가요? 말짱 다 버리고 알몸으로 건너갔으니, 가서 걸음마부터 배워야 할 판이오. 일본 구경도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소선생은 배우는 데 편견 갖지 말라 할 것이며, 하나라도 더 배워서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할 것이오마는, 그것이 그렇지 않소이다. 또 나는 남의 것 배우지 말라 고집하는 것도 아니오. 배우기는 배우되 우리 것을 내동댕이치고 박살을 내지 마라 그 얘기요. 그러나 형편을 보아하니 배우는 것보다는 버리고 박살내는 것을 더 주장하고 있으니 상놈들이라도 버리는 것 박살내기 전에 주워서 간수하라 그 말이오. 내가 세월을 보아하니 한동안 벽에 부딪치기까지는 소위 신학문이라는 것을 가지고 용천지랄들 할 모양인데 생각해보시오? 세월은 그냥 세월이 아니외다. 세월은 만들어 놓고 가는 거요. 다듬어놓고 가는 거요. 갈아놓고 가는 거요. 왜 만들며 다듬으며 갈아놓는가. 삼라만상 생명 있는 것이 그 생명을 부지하기 위함이요, 부지하더라도 좀더 편안하게 부지하기 위함이 아니겠소이까. 하면은 우리의 수천 년이 그라 헐값은 아니라는 게요. 생각해보시오. 자고로 상층에서는 변화무쌍하여도 하층의 외곬이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전해준 거요."
"꿈보다 해몽이 좋구려."
겨우 소지감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해도사는 입술을 오무리며 끼룩끼룩 웃는다. 웃다가.
"소선생, 사람 사는 이치는 안팎을 뒤져도 뻔한 거 아니외까?"
"아니라고 내가 말할 것 같소?"
"삼라만상의 이치도 뻔한 것 아니던가요?"
"글쎄, 모르는 게 많아서 이치가 뻔하다 할 수 있는지, 하하핫핫..."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솟고 해가 지고 그 얘기지, 왜 달이 지고 뜨는가 왜 해가 솟고 지는가 이유가 아니지 않소."
"그렇다면은 뻔한 얘기지요."
"신학문이라고 뻔한 이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시오? 양인들의 귓구멍이 셋은 아니지 않소? 눈알이 한 개도 아니지 않소? 서양서는 물고기가 산에서 살고 들짐승이 물속에서 사는 거는 아니지 않소? 그들도 비상을 먹으면 죽을 것이요 동삼을 먹으면 힘이 솟을 것이오. 연장이 좀 다르다 하여 근본이 다르지 않을 것이며 수많은 목숨들이 각각 흩어져서 살다 보니 사는 곳마다 산과 내가 조금씩 다르고 바다와 들판이 조금씩 다르고 사계절 기후가 조금씩 다르고."
"염불하는구마."
"허허어, 김장사, 끝까지 들으시오. 해서 목숨 있는 그 모든 것의 사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인데 그쪽이 서방정토는 아닐 터인즉 또 천당도 아닌 터에, 천당이라면 천당 가려고 예배당에 나가겠소? 하는 짓들을 보아하니 해놓은 밥 놔두고 쟁피 훑어서 죽 쑤어 먹겠다고 들판으로 내달리는 꼬라지라. 굳이 내가 옛것 우리 것을 고집하자는 게 아니외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겠소이까. 남의 것을 가져와서 접목을 하더라도 뿌리는 있어야 아니하겠소오? 하기는 우주 근본의 얘기를 하자면 이것들은. 지엽이요, 또 지엽이란 뿌리에 이어지는 것,"
"점입가경이오. 하여간 그 얘긴 한참, 한참 두었다 하시오. 나뭇가지를 말짱 잘리어 몽당나무가 되어 숨이 갈락말락, 이 판국에 엿가락 늘이듯, 하기야 뭐 길게 내다보고 하는 얘기 나쁠 것도 없겠소만, 그새 숨 넘어가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는데 돌팔매로 새 잡자, 하하핫핫..."
심각한 논쟁도 아니었고, 열을 올리는 것도 아니었다. 죽이 맞아서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흘리는 것이었다.
"허허어, 이럴 수가 있나. 소선생도 내가 말한 큰 뜻을 몰라준다면 이거 이제 세상 다된 거요. 그래도 내 딴에는 속이 꽉 찬 선비로 알았는데 영 사람 잘못 보았어. 실버들 한 가지 꺾어들고 태산을 자질해도 유분수, 그래 내 말하리다. 제아무리 비행기가 잘 난들 제비를 당할 손가, 벼락 한번 번뜩하면 콩가루가 될 터인데, 그래 그게 대수란 말씀이오? 만물에서 인간이 가장 영악하다고들 하지마는 나고 죽는 것을 어찌 관장할 것이며 봄은 제발로 오는 것이지 사람이 끌고 오는 것이 아닐진대 만물의 소생이 어찌 그쪽 사람들의 능사이겠는가."
"내사 귀신 운감하는 소리맨크로 머가 먼지 하낫도 못 알아듣겄소."
해도사는 강쇠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조화를 깨뜨려서는 아니 되고 인간이 영악하게 조화를 한사코 깨뜨리려 들면은 끝에 가서 재앙을 받을 것이라. 재앙을 받기 전에 증산의 말을 빌리자면 천지공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오. 서양 그들의 문물은 헛되고 헛된 것이 될 것이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장육부도 그래야 헛된 것이 될 것이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장육부도 그래야 보존이 되는 법, 많이 먹어서 배 터져 죽고 적게 먹어서 부황에 죽고, 이치에는 한치 어긋남이 없나니, 총, 대포 끌고 와서 남의 땅 거먼거먼 주워 먹듯 어찌 그들인들 배가 터지지 않을 것이오. 당장에는 강대국이라 하겠지만 과다한 섭취는 병들기 마련, 갖가지 처방은 하겠으나 혈맥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고 여기저기 막히니 여기저기 뚫어보나 뚫기보다 막히는 게 더 많아 그래 말기에는 광증으로 박살이 나는 게요. 우주만물이 막힘이 없이 돌아가야 그래야만 모든 생명들 거하는 곳이 극락이 되고 천국도 되고."
"하하하핫 하핫핫핫... 그거 그럴싸한 얘기로군. 한데 도사님, 그때가 언제쯤 되겠소?"
"어찌 천기를 누설할손가."
해도사는 씩 웃었다.
"그라믄 그때꺼지 감나무 밑에서 잠을 자야겄네."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들을 자정이 지났을 때 밀담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맞대고 소리를 죽이며, 바닥에 자락을 깔았던 긴장이 노골화되었다. 이 무렵, 밖에서도 횃불을 켜든 안서방과 짝쇠는 산속을 뒤지고 있었다.
"경사에 소란스럽기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지가 갔이믄 어디로 갔일꼬? 이 근처 어디에 있겄지."
안서방이 당부하고 나갔으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순이네는 집 뒤란을 쏘다니며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짝쇠 집은 다소 거리가 있어 바깥 기척을 모르고 있었지만 휘의 어미는 눈치를 채고 나왔다.
'그 무심한 가시나가 일 저지른 거 아니까?'
신방에 신경을 쓰며, 울고불고하는 순이네에게 말도 걸지 못한 채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빌어묵을 가시나 뒤질라꼬 나갔나. 오밤중에 어디로 갔다 말고. 어이구 내 팔자야!"
순이네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혼사 끝에 이것저것 배불리 먹고 깊이 잠들었던 길륭이 방에서 기어 나왔으나 정신이 몰롱한 상태로 땅바닥에 주질러앉아 있었다.
"어이구 이눔의 가시나를 우짜믄 좋노. 쇠 빠져 죽을 년 그만 범이나 물어가지. 부모 속썩이는 년은 자식도 아니다. 차라리 죽어부리는 기이 나을 기다! 어이구우, 이 일을 우짜노!"
순이네는 어둠 속을 뛰어나갔다가는 자빠지고 미끄러지고 하면서 돌아왔고 뒤란을 돌다가는 울곤 한다.
"참말이제 기도 안 찬다. 일이 우찌 이리 돼가노. 오늘겉이 좋은 날에."
팔짱을 끼고 떨면서 휘의 어미는 중얼거렸다. 신방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열여덟 동갑나기 신랑과 신부, 휘는 진솔의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영선은 친정서 보내온 옷감으로 짝쇠댁네와 순이네가 밤새워 지은 다홍치마 유록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짝쇠가 마을까지 내려가서 겨우 빌려온 족두리는 벗겨져 있었으나 그들은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다. 철은 다 들었지만 암된 성질의 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참에 밖에서 술렁대는 기척을 이들은 들었다. 휘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관자놀이가 흔들렸고 무릎 위에 놓은 두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꽃잎이라도 떨어지듯 그렇게 들려왔다. 순이네의 우는 소리도 아슴푸레 들려왔다. 신방에 차려놓은 술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영선은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 같이 앉아 있었다. 산에 온 후 이상한 순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바깥 기척에 영선이 예민해진 것도 마음에 쌓였던 의혹 때문이다.
"빌어묵을 년! 덩신 겉은 년! 내보란 듯 살 생각은 안 하고 지가 죽기는 와 죽노! 그래 이년아, 잘 생각했다! 죽을라 카믄 진작 죽어라! 어이구 이 일을 우짜믄 좋노. 어이구."
넋두리하는 순이네 목소리가 바람 방향 탓인지 꽤 가까이서 들려왔다. 세상에 이런 난감한 일이 흔할 것인가. 휘는 무거운 맷돌이 가슴을 짓눌러오는 것을 느낀다.
"저기."
고개를 숙인 채 영선이 입을 떼었다.
"저기, 저어... 혹 남 못할 짓 한 거는 아닌지."
대답이 없었다. 밤새 우는 소리, 바람이 이는가 문풍지가 조금 흔들렸다.
"저기."
영선이 다시 말하려 했을 때
"우리 부모님 남 못할 짓 해감서 아들 장개들일 사람들은 아니거마는,"
한참 있다가,
"나도... 나도 남 못할 짓 해감서 자, 장개들 그런 인간도 아니고, 실 실데없는 걱정 안 하는 기이 좋을 기고,"
하면서 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송이 따러 갔을 때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일이 큰 죄가 되는지, 그냥 있을 수 있는 실수 일 뿐인지 휘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기 때문에 한 여자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몰고 갔다.
'순이가 죽으믄 나는 우찌 해야 하노. 왜 순이가 죽어야 하노 말이다. 왜, 왜!'
휘는 술상을 끌어당겼다. 술잔에 술을 부어 마신다. 술은 쓰고 술이 타고 내려가는 가슴이 뜨거웠다.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다시 술을 붓고 연거푸 마신다.
'내가 지한테 우쨌다고 죽노 말이다! 열 사람 백사람, 그라믄 다 안 받아주믄 죽어야 하나 말이다!'
그러나 입맞춤에 생각이 미치면 휘의 분노에 힘이 빠지고 부끄럽고 두려움이 앞선다.
"저어어 저기, 아무래도. 지가 산에 잘못 온 것 겉십니더."
참다못해 영선이 말했다.
"무신 소리!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눈앞이 몽롱해진다. 소리를 질러놓고 휘는 영선을 보는데 반쯤 고개를 든 영선의 얼굴이 눈앞에서 흔들린다. 다홍빛 유록빛이 흔들린다. 얼굴이 두 개가 되고 세 개도 된다. 촛불도 두 개가 됐다가 세 개도 됐다가, 휘는 팔을 들어 휘저어본다.
"나, 나도 처음 보았일 직에 거, 거기가 좋았소. 난생 처음 그런 생각을 해보았소. 음...으음."
휘는 몸을 뒤틀 듯 했다. 캄캄한 절벽이 왔다 갔다 했다.
"으음...음."
못 마시는 술을 계속해 마셨기 때문에 휘는 도저히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영선이나 촛불뿐만 아니다. 방안이,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 그렇지마는 거기가 안 왔이믄 수, 순이하고 혼사하게 됐을지 그, 그거는 모릴 일이구마. 모, 모릴 일, 언약한 것도 아, 아니었인께, 거 거기서 걱정할 일은 아니고."
정신이 몽롱한 속에서도 휘는 순이와 입맞춤한 일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날이 영선이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되고 순이에게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 거기서 걱정할,"
하다 말고 휘는 꿍 하고 모로 넘어졌다. 횃불을 켜들고 짝쇠와 함께 순이를 부르며 찾아다니던 안서방은 거의 새벽녘이 다 되어 기진해 돌아왔다.
"못 찾았소!"
남정네에게 달려가 순이네는 거머리같이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길륭이는 마당에 퍼질러 앉아서 아비를 쳐다보았다.
"와 이라노!"
거머리같이 달라붙는 순이네를 안서방은 떠밀어낸다. 휘의 어미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짝쇠는 말없이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인다. 짝쇠네 집에서는 불빛이 없었다. 술 마시던 사람들은 모두 잠든 것 같았고 온종일 혼삿일에 바빴고 저녁 늦게까지 술시중을 든 짝쇠댁네도 곤해서 곯아떨어진 눈치였다.
"이기이 무슨 날베락이고! 아이구우 청천의 하느님!"
"야밤에 제집이 요망시럽기, 울음 잡힐라 카나!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가!"
안서방이 나무란다. 멈칫멈칫하는 휘의 어미가,
"안서방, 우짜믄 좋겄소."
하고 한마디 했다.
"걱정 마이소."
"우찌 걱정이 안 되겄소."
"집 나갔다고 꼭 죽어라는 법은 없인께요."
"그래도 그렇지, 이 산중에서 갈 만한 곳이 어디 있겄소."
"저 계집이 끝내 그럴기가!"
자기 가슴을 치며 우는 순이네에게 야단을 쳐놓고
"날새기를 기다리보아야제요. 걱정한다고 머가 우찌 되겄십니꺼. 아짐씨는 그만 들어가보이소."
"천하태평이고나! 딸자식은 사람 아이가! 우리 순이가 와 죽노! 누구 땜에 죽노!"
"이렇기 아구성을 칠 기가!"
안서방은 순이네 양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세운 뒤 질질 끌고 가서 방문을 열고 엎어버리듯 방안으로 냅다 던지고 방문을 닫는다.
"만일에 무신 일이 있다 카믄 자식 하나 안 낳은 셈치지요. 일이 이렇기 되니 면목이 없십니더."
방안에서는,
"아이고, 미치고 기 들겄네! 아이구우 아우구우 불쌍한 내 새끼!"
방바닥을 치며 순이네는 운다.
날이 밝았다. 짝쇠네의 손님들은 언제 빠져나갔는지 다 가고 없었다. 딸에게 잘살아라는 말 한마디 남기지 떠나고 송관수도 떠나고 없었다. 강쇠 혼자만 아침을 헤치고 짝쇠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순이는, 일이 싱겁게 끝났다. 밤 사이의 그 소동은 아랑곳없이 그는 숯가마 속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길륭이가 행여나 하고 가보았더니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누구 골탕먹이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었고 죽으려고 그랬던 것도 물론 아니었다. 숨어서 울 곳을 찾다 보니 거기 가게 되었고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기에 그는 까맣게 밤의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이년, 그만 뒤이지지 머할라꼬 살아왔나. 십 년 감수, 그보다 남부끄러 우짜노, 이놈의 가시나!"
순이네는 딸을 쥐어박았다. 순이가 죽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러나 없느니만 못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휘나 영선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3장 강도 사건
도솔암에서 실컷 낮잠을 자고 저녁밥을 얻어먹은 뒤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관수는 절문을 나섰다.
"그러면 거기서 만납시다."
소지감의 말에 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아주 낮았지만 관수는 뒤통수에서 쫓아오는 소지감의 긴장된 목소리를 들었다. 산밑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그믐이어서 그랬겠지만 사방은 아주 새까만 어둠이었다. 주막에 들어간 관수.
"여기 술 한 잔 주소."
술손과 수작을 부리고 있던 주모가
"아이구 내 신세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손이 술 달라 카는데 신세타령은 와 하노."
"입버릇을 그라믄 우짤 기요."
시비조다.
"기왕이믄 아이고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기이 우떨고?"
주모는 킬킬 웃었다.
"내가 염불 모시게 됐소? 나무관세음보살 했다가는 사나이들이 다 달아날 긴데 주막 문 닫으믄 나는 머 묵고 살 기요."
"포전이나 쫓지."
"누구 닮았나?"
"내 뭣 땜에 자네 서방을 닮을 기고."
"서방은 무신 서방. 사팔뜨기 산놈, 오다가다 술잔이나 마시제요."
"그라믄 기둥서방인가?"
관수는 강쇠 얼굴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기둥서방이라도 됨사? 그런 주제도 아니믄서 젊은 기이 뭐 할 짓이 없어 술장사냐, 산에 가서 나무뿌리 캔들 입에 거미줄 치겄느냐, 흥! 가다오다 해보는 말이겄지요 머."
언제였는지 강쇠와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일이 있어서 관수는 주모의 얼굴을 알고 글의 내력도 좀 안다. 춘매의 조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주모는 관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관수는 시간을 재듯 천천히 술을 마신다.
"말로라도 그런 삶이 있이니 쪼그랑 팔지지마는 마 괴않네."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술손이 한마디 빈정거렸다. "
"아이고오, 쪼그랑 팔자라 했소? 그라믄 거기는 대리미로 싹 펴놓은 팔자다 그 말이요? 그런데 백결선생맨크로 옷은 와 그모양이요? 염낭에 술값이나 들었는지 모리겄네."
"내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구나."
사나이는 할 수 없다는 듯 껄껄 웃는다.
"입으로는 못 당할 기요"
관수가 한마디 거든다.
"심 없는 제집이 입으로라도 갚아야제요. 누구 말마따나 기둥서방이라도 있었이믄 술값 떼묵고 달아나는 놈 정갱이 뿌질러 앉히것지만는. 서며 앉으며 내 팔자야, 하게도 됐지 머. 나도 좋은 부모 만냈이믄 기영머리 마주 풀고 백년해로 했일 긴데, 세상 인심 오동지 설한풍이요."
"……"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고,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소. 보고 듣고, 복 많은 년놈들, 앞 못 본다고 속이묵고 뺏아묵고, 말 못한다고 속이묵고 뻿아묵고, 세상이 그런 거라요. 심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엎어놓고 등짝 밟는 기이 예사, 흥! 절에 가봐도 그렇대요. 불쌍한 중생을 건진다 캄시로 어디 말과 같애야지. 부자가 오믄 맨발로 뛰어나오고 기차븐 사람이 가믄 문전박대나 안함사?"
"절에서 문전박대했다는 것은 처음 듣겄네."
관수가 말했다. 그 말대꾸는 없이,
"언젠가 예수쟁이들 와가지고 하는 말이, 예수 믿고 회개하라 하드마. 회개할라 카믄 나는 굶어죽게? 그 사람들이사 빼딱구두 신고 말똥머리 하고 얼마나 유식한지 몰라도 책도 들고. 다 묵고 살 만 한께 그러고 댕기는 거 아니겄소?"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술손이 말했다. 관수는 주모의 넋두리를 듣다 말고 술판에 술값을 내놓고 일어섰다. 몇 잔 술에 얼근해진 관수의 얼굴을 강바람이 쓸고 간다.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나,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나. 흥! 맞기는 맞는 말이네."
하는데 별안간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린다. 다홍치마 유록 저고리를 입은 딸 영선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간다온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칠흑 같은 밤길을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서운하기는 와 이리 서운하노.'
관수는 걷다 말고 강변 둑에 주질러앉는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빨갛게 타는 담뱃불, 담뱃불이 빨갛다는 것을 처음 발견이라도 한 듯 눈앞에 담뱃개비를 세우며 쳐다본다. 바람이 불 때는 불꽃이 튄다. 한 모금 가슴 깊이 빨아당겨 연기를 뿜는다.
'그놈이 있었던들 내 맘이 이렇게 서운하고 허전하까. 딸자식이야 언제 가믄 안 갈 기가.'
사방은 칠흑 같아도 강물은 희번덕이고 있었다. 강 건너 쪽에서 깜박이는 불빛, 세상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희맹이 있어야제. 희맹이 없다."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것이 있다면 시부모로 모시게 될 상쇠 내외의 변함없는 마음씨 때문에 영선의 시집살이가 편할 것은 없어도 마음 고생은 안 할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학식이 없어 그렇지 사위 된 휘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 복이 그것뿐이라믄 그렇기 살아야지 우짜겄노. 흥! 지가 되고 접어서 백정의 외손녀가 되었더나. 흥!"
관수는 담배를 버리고 일어섰다. 평사리 마을에 못 미쳐서 관수는 강변길을 버리고 숲속길로 접어들었다. 옛날 김평산이 귀녀를 만나기 위해 삼신당으로 가던 그 길이다. 길이라기보다 숲을 헤치고 가는 것이다. 삼신당이 가까워졌을 때,
"이자 오요."
소리가 들렸다.
"음."
관수가 대답했다. 연학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누각과 초당이 있는 방향과는 다르게 다시 숲을 헤쳐 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숲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숲을 끼고 한참을 가서 상당 앞에 당도하였다. 사당은 깜깜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연학이 사당 문을 열었을 때 불빛이 사당 뜨락에 쫓아 나왔다.
"들어가소. 그런 일이야 없겄지마는 내가 기침하믄은 아시겄지요?"
"알겄네."
관수는 재빨리 사당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사당문이 닫히면서 사방은 어둠에 묻힌다. 사당문에 검정 휘장을 쳐서 불빛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을 켜놓고 길상이 앉아 있었다.
"이제 몸은 추스릴 만한가?"
관수가 물었다.
"괜찮네."
길상이 대답했다. 지금은 최참판댁 당주나 다름없는 길상이었지만 소년기를 한마을에서 지냈고 밤이면 관수 집에 모여앉아 짚세기를 삼고 삼태기도 만들면서 그들 나름대고 시국 얘기며 동학 얘기며, 길상은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윤보와 김훈장을 따라 의병으로 산에 들어 갔던 것이다. 이들 서로간의 추억에는 욕됨이 없었다. 현재의 처지가 달라졌다 하여 길상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은 관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아니하였고, 길상이 역시 옛날과 달라진 관수의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앞에서는 환국이아부지라 하며 길상을 대접했으나 최참판댁이라는 배경 때문에 관수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앞으로 환이를 대신하여 제반사를 지휘하게 될 그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혼사는 잘 치르었는가?"
"그럭저럭."
다른 사람이었다면 관수는 없는 놈이 혼사고 뭐고 찬물 한 그릇이믄 끝나는 거 아닌가, 필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성질을 아는 만틈 길상은 관례적인 선에서 축의금을 보냈을 뿐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드세고 반항적인 송관수, 그러나 사려가 깊은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다 인정한다. 해서 그는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길상의 물음에 없는 놈이, 하질 않고 그럭저럭…… 꽤나 섬세한 사내다.
"서운하겠군."
"서운하지 않다 하믄 그거는 거짓말이고오, 하지마는 딸자식이란 언제 떠나도 떠나보내야 하니께. "
"그건 그렇지."
서로 마주본다. 촛불이 앉은뱅이 춤을 추고 두 사나이 얼굴이 명암이 흔들린다. 이들하고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당, 남의 사당, 그것도 어쩌면 모독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침입을 이들은 이 순간 같이 느낀 것 같다. 최씨 가문 누대의 선조들 영신이 정좌한 곳, 아무리 나랏일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순간적인 위축감을 느낀다. 천민들에게도 신주는 매우 소중하고 두려운 것이다. 서로 바라보던 두 사내는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서로를 외면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길상에게 조상이 있을 리 없고 부모가 있을 리 없다. 부모는 있었지만 아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어미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관수, 기일이 있을 리 없다. 칠월 백중날이면 영광이네가 절로 찾아가서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어미는 어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한가닥 희망 때문에 백중 불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일은 우떻게 되었는고?"
관수가 물었다.
"빈틈없이 다지기는 다져놨는데."
"삼월 삼짇날 변동 없겄제?"
"음."
"그라믄 됐네. 나도 전부터 손은 다 써놨고 마무리만 남았인께."
"전에 말한 대로, 계획에 변한 사항은 없으나 그래도 장서방한테 한 번 더 자세한 얘길 들어야 할 거다."
"그래야겄지…… 그라믄 나는 이 길로 떠나야겄는데,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될지 우떨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는 꼭 만나게 된다."
"아니 머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구마. 내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하는 말이네."
"……"
"저기."
하다가 관수는 앞가슴을 더듬어 봉투를 꺼내었다. 순간 길상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그 봉투는 길상이 축의금을 넣어 보낸 것이며 봉투는 봉해진 채 뜯어본 흔적이 있었다.
"자네, 생각보다 훨씬 졸장부군 그래."
"말이나 다 들어보고 그러라고. 하기는 내가 대장부 아닌 것은 틀림이 없일 것 겉다."
관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품속을 만지다가 사진 한 장을 꺼내어 길상에게 내밀었다. 길상은 사진을 받아 들여다본다.
"내 아들놈이네.“
사진은 고보의 교복과 교모를 쓴, 관수를 전혀 닮지 않은 소년, 아니 청년이었다.
"갈 길이 바빠서 긴말 할 새는 없고, 그놈이 집 나가서 일본 동경에 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죽일 놈 살릴 놈 해봐야 별 수 없제. 자네 큰아들이 유학을 가 있이니, 무리한 청인줄은 알지마는 사진을 보고 찾아서 이 봉투를 전해주었이믄 싶어서."
"미친 사람."
길상이 웃었다.
"역시 졸장부구면. 강도질한 놈이 새색시 같은 이런 짓 왜 하나, 정말 자네답지 않군 그래."
길상은 사진만 조끼 주머니 속에 놓고 봉투는 밀어 낸다.
"패거리들 술값이나 하게. 함께 술 마시고 있을 내 처지도 아니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럼 그렇기 하지. 그런데 환국이가 좀 쉽기 찾을라 카믄 그놈 핵교 졸업생을 찾이믄 될 성싶구마. 그 핵교에서도 몇 사람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일 긴께."
"걱정 말게."
"그라믄 나는 가야겄다. 오래 머물라 캐도 최씨네 신주들이 내 이노옴! 무엄하구나! 할 것 겉애서 답대비."
처음으로 관수는 농담을 했다. 밖으로 나온 관수는 홀가분했다. 발도 가벼웠다. 관수가 오던 길을 되잡아서 가는데 연학은 말없이 뒤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것을 기대하고 길상에게 사진과 봉투를 내밀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아들을 봐 달라, 못할 것도 없었다. 여러 가지 인연을 생각하면 최씨 집에서 영광이 하나 돌보아주는 것은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관수는 지금까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분서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는 다만 영광이에게 돈을 부쳐주어야겠다는 것은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길상이 걱정 말게, 하고 말했을 때 관수는 자기 부탁 이상의 일을 길상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삼신당 앞에까지 와서 관수는 걸음을 멈추며 연학을 기다린다.
"그믐밤이라 어둡기는 참 어둡네. 코를 베가도 모리겄구마."
연학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저기에 뭐꼬?"
관수가 물었다. 두 개의 불빛이 어둠 속에 있었다.
"살쾡이지 머겄소. 동네 닭 잡아묵을라꼬 내리온 모양이요."
불빛은 이내 사라졌다.
"삼월 삼짇날…… 좋은 절기다. 그믐밤은 좀 비키선 셈인데."
"그러씨…… 그러믄 이 길로 남원 갈 깁니까?"
"그래야지. 게다가 구례에서 자고, 구례까지 못 가믄 화개서 자든지."
"산의 사람들은 길 떠났십니까?"
"떠났다."
"괜찮겄십니까?"
"뭐가?"
"그 사람들."
관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 나서,
"그래서 두 갈래로 나누은 거 아이가. 하나가 끊어지더라 캐도 되게 시리."
"지는 그것보다 사람을 믿어도 되는가, 이제 와서 걱정해도 달리 도리는 없겄지마는."
"그 사람들 못 믿는다믄 세상사람 하낫도 믿을 사램이 없다. 하기는 영악하지를 못해서 나도 맴이 안 씨이는 것는 아니다마는, 때에 따라서는 뿌러지게 나오는 사람보다 히죽히죽거리는 사람이 오래 견디네라. 그라고 자네 보기보담은 만고풍상 다 겪은 사람들이다."
"실은 그 사람들도 그렇지마는 앞에 나서는 기이 아닌께 그런 대로 넘어갈 성싶으나 젤 맘에 걸리는 거는 손태산입니다."
손태산은 남원 길서방의 생신 잔치 때 처음 연학이 만나본 인물이다. 그러나 만나기 전부터 연학은 그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어다. 소상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연학의 임무였고 한 번 보았으면 그만,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 연학의 위치였다. 그런데 그때 연학은 손태산을 좋게 보지 않았다.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경망했던 것이다.
"좁쌀 양식 오지랍에 싸고 댕기겄다. 전에 없이 와 그리 잔걱정이 많노."
연학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을 움직일라 카이, 여기서 터지까 저기서 터지까, 나도 모리게 근심이 되누마요."
"터지는 데는 터지고 뚫고 나가는 데는 나가고, 하루 이틀 해온 일도 아니겄고…… 손태산이는 나도 여러모로 그물을 쳐놨다. 당분간은 다른 손이 안 닿으믄 쓸모가 있제. 해서 윤필구를 조져놓은 거 아이가."
"진주 일은 물샐틈없이 짜놨인께 그 일은 아마 맘을 놓아도 될 깁니다."
"마음을 놓아? 걱정해도 소앵이 없는 일이지마는 마음 놓을 일이 따로 있지."
나무라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머 또 할 말이 있나?"
"지는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호옥 형님은 다른, 머 하실 말심은 없습니까?"
"벌로 변동한 기이 없인께 나도 더 할말은 없다. 저물고 했이니 가봐라."
"뚝길까지만 함께 가지요."
말없이 두 사람은 어둠을 해치고 걷는다. 부엉이가 울고 이따금 산짐승이 풀숲을 부시럭거리며 지나는 소리도 들렸다.
"영만이는 괜찮기 살더나?"
관수가 물었다.
"괜찮기 살지요."
"아아가 몇이나 되든고?"
"하나 잃어부리고 셋이라 카든지."
"세월 참 빠르다. 언제 이리 되었는고 꿈 겉네."
"사십을 넘기니께 세월이 막 달아나는 것 같더마요."
"그렇지이, 막 달아나지. 그래 자네 형수는 어마니를 닮았는지 모리겄네."
"그만 하믄 맏며누리로 잘 하시는 편이고 살림 이루노라고 고생도 했지마는 지금은 만고에 편합니다."
"그런께 우리 어릴 적의 두만어매맨큼 됐겄다."
"형님보다 두세 살 윌 겁니다."
"그럴 기다. 두만이가 내 동갑나기고 두만이누분께, 시집가던 때가 생각난다."
"……"
"그거는 그렇고, 너거 집이 여수서는 소리치는 부자 아니가. 그런데 와 이 짓을 하노. 니도 참 별난 놈이다."
"지만 별납니까. 형님은 안 별나고요? 참."
관수는 껄껄 웃는다.
"지가 이 집 일을 볼 때만 해도 여수서는 그냥 묵을 만했지요. 형님 말대로 소리칠 정도는 아니었고, 지금 부자가 됐다고 해서, 부자라 캐도 큰집이고 조카자식인데 머 얻어묵겄다고 가겄십니까. 다 이렇기 사는 것도 팔자소관 아니겄소."
"좀 보태주기는 하나?"
"보태주는 거 없십니다. 우리 식구 굶는 처지도 아니고…… 돌아오라, 그거지요. 돌아오믄 봐주겄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한가한 얘기 할 처지도 심경도 아니었다. 더욱이 관수의 입장에서는, 다같이 긴장돼 있으면서 얘기는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한동안 말은 끓어졌다. 둑길이 가까워졌을 때,
"영광이한테서 소식 못 듣지요?"
하고 연학이 물었다.
"듣기야 들었제. 들으나마나……."
"환국이 아버지가 환국이한테 이르더마요. 동경 가거든 영광이 어디서 뭘 하는지 수소문해보라고."
"영광이 동경에 있는 거를 우찌 알꼬?"
"지가 말했십니다."
아까 사진을 내밀었을 때 길상은 그런 말은 내비치지도 않았다.
"환국이도 신실한 사람이니께 힘 닿는 대로 애 쓸 깁니다. 있는 곳만 알믄 다 요량이 안 있겄십니까?"
"안 그래도 아까 그 사람 만냈일 적에 부탁을 했거마는."
"형님이요?"
"우짤 기고, 내가 애비 노릇이나 제대로 했나? 그놈만 나무랄 수도 없고, 자식 떄문에 상두꾼에 든다는 말도 안 있더나."
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둑길까지 와서 이들은 헤어졌다. 이들이 헤어져서 열흘 남짓. 살월 삼짇날 진주서는 씨름 대회가 있었다. 이 씨름 대회에 손태산이 출전한 것이다. 함양 대표로 나온 손태산은 비록 황소는 따지 못하였지만 고성의 이장사와 최후까지 겨루어 실력이 막상막하였으므로 구경꾼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기술은 이장사가 한수 위라 황소 차지를 했지만 힘으로 볼 때 손태산이 세다고들 했다. 구경꾼 속에 끼여들어 씨름 구경을 하고 있던 연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흩어지는 구경꾼에 휩쓸려 걸음을 옮기면서
'저래가지고 되까?'
연학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요량껏 해두라꼬 조세질을 했일 긴데.'
물론 손태산은 주의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막상 모래판에 서고 보니 주의 따위는 쉽게 잊어버렸고 승부욕에만 불탔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진 그는 틀림없이,
"요량껏 하라는 말만 안 들었이믄 황소 따는 것쯤이야 여반장이었제. 제이기럴!"
했을 것이다.
'형님이 아무래도 일을 잘못 꾸민 거는 아닌지 모르겄다.'
연학이 돌아왔을 때 최부자댁은 집이 비어 있는 듯 썰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크나큰 집에 안자 부부만 있었다.
"양현이는 어디 갔소?"
안자의 남정네 박서방에게 물었다.
"작은 도련님이 데리고 강가로 갔소."
안자 부부만 남겨놓고, 연학이는 왔다 갔다 했지만 식구들은 서울 손님이 다녀간 후 모조리 평사리로 떠났고 개학이 되면서 윤국이와 양현이 진주로 돌아왔으며 나머지는 아직 그곳에 체류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환국이는 일본으로 갔다. 음력설을 전후하여 제사를 모시기 위해 해마다 식구들이 평사리로 가는 것은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옥고를 치른 길상의 정양을 위해 오래 머무는 듯했고 절에 불공을 드린다는 말도 있었다.
"누가 이깄십니까?"
박서방이 물었다.
"고성 사람."
"구겡꾼이 많았십니까?"
"응"
연학이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자 박서방은 뒤켠으로 돌아가고 연학은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만일에 뭐가 잘못되믄 풍지박산이다.'
처음부터 연학은 손태산을 끌어들이는데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간물이 될 그럴 위인은 아니었지만 자기 능력보다 야심이 컸고 저돌적인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사리에 의해 나섰다기 보다 그는 조막손이 손가, 아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그리고 그의 밑천이란 힘뿐이었다. 연학이 남위 길서방 집에서 모임을 가진 후 관수에게,
"사람이 신중하지 못한 것 겉소."
자기 의견을 말했을 때
"쓰기 나름이제. 앞으로 나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뒤로 돌아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다 쓸모가 있네라. 저저이 다 할라꼬 나서는 일도 아니지 않나."
"하긴 그렇소."
"답대비, 간뎅이가 부어서 그기이 탈이제.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닌께."
하며 관수는 개의치 않았다.
연학은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오늘 밤 실행에 옮기게 될 일을 계획하기론 꽤 오래 전이다. 길상이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관수가 제안했던 것이다.
"몇몇 관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것 이상으로 효율이 있는 일이네.“
길상은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찬성이었다.
"응징과 실리, 그리고 인심, 세 가지를 거둘 수 있지. 암살이나 폭탄 투척은 총기, 폭탄의 확보가불가능하고 거의가 잡힐 것이니 인원을 아끼는 뜻에서도 그렇고,"
해서 세부 사항까지 면밀히 검토가 된 후 계획은 짜였고 관수가 간도를 다녀오면서 일은 결정이 되었던 것이다. 길상을 국내에 잡아두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오백 섬지기 땅을 내놓은 서희는 물론 이러한 계획은 알지 못했지만 길상으로서는 지시하는 입장에서 그 땅 오백섬지기는 명분을 세워준 것이기도 했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쫑알쫑알 쫑알대던 소리가 들리더니 양현이도 안자 곁에서 잠이 들었는지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육국의 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연학은 집에 가지 않았다. 행랑채 맨 끝방에 목침을 베고 누워서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최씨네 집에서 자기도 했었기 때문에. 박서방이 군불을 지핀 모양이다. 방은 따뜻했다. 정적을 깨고 대청의 기둥시계가 육중한 추를 흔들며 둔중한 소리를 낸다. 행랑에서도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연학은 귀를 세우며 시계 치는 소리를 센다. 열두 번이었다. 연학은 열한 번 칠 때도 세었고 열 번 칠 때도 세었다. 다시 사방은 정적에 묻혀버린다. 연학은 일어나 앉으며 담배를 붙여 문다.
이 무렵, 김두만의 집 담을 두 명의 괴한이 넘어가고 있었다. 두만은 그 동안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을 구입하여 생활의 규모를 넓히면서 술 도매상도 처분하고 양조장 사업에만 진력해왔으며 서울네도 비빔밥집에서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굳혀왔던 것이다. 오늘 밤 김두만의 집에는 서울네와 침모, 일하는 어멈 세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일꾼들은 모두 양조장에 가 있었고 부친이 위중하다 하여 둘째인 기동과 함께 두만은 독골에 가고 없었다.
"둘째부인, 일어나시오."
서울네는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아아, 아이구!"
"천천히, 소리를 지르면 상할 것이오."
서울네는 비로소 가슴을 겨누고 있는 써늘한 것을 느꼈다.
"웨, 웬 사람이오?"
서울네는 사시나무 떨 듯 떤다. 방안도 어두웠고 문밖도 어두웠다. 새까맣게 어두웠다. 공포에 떠는 서울네에게는 지옥 구렁창에서 소리만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상해 가정부에서 왔소이다. 이런 방법말고는 군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었소, 양해하시오."
"도, 돈, 무 무슨 돈이, 집에는 도, 돈이 없습니다."
"긴말 하면 시간만 가지. 양조장 자금으로 쓰려고 시장의 점포 두 개를 팔지 않았소. 알고 왔으니 자아 금고 문 여시오. 우리가 죽음을 불사하고 여기 들어온 만큼 사불여의하면 부인은 죽을 것이오."
칼끝이 앞가슴에 바싹 와서 닿았다. 서울네는 본능적으로 더듬더듬 자리걸음으로 금고 있는 곳에 다가간다. 칼은 등뒤에서 따라 왔다.
"저 저 어, 어두워서 어이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성냥을 그었다. 금고 문이 열렸고 성냥불은 꺼졌다. 사내는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놓고 다시 성냥을 그었다.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몸은 마른 편이었다. 칼을 들이댄 서울 말씨의 사내는 몸이 건장한 것 같았으며 음성으로 미루어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침묵의 사나이는 금고 속의 현찰을 확인한 뒤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돈을 꺼내어 양쪽 호주머니 속에 나누어 넣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사히 갈 수 있게 부인께서는 고생을 좀 해주셔야겠소."
준비해온 끈으로 서울네를 묶은 뒤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이들은 바람같이 담을 넘어 사라진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이상한 일은 또 벌어지고 있었다. 이순청릐 집 담벽에 붙어선 두 사나이.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이 집 주인 거처방이다."
한 사내가 소근겨렸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내를 담 위로 밀어 올려주는 것이었다. 담을 넘은 사내, 손태산은 사방을 살펴보다가 불이 켜져 있는 방을 향해 곧장 간다. 신돌 위에는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손태산은 주저 없이 방문을 쑤욱 연다. 한복을 입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순철의 부인 이도영이 얼굴을 돌렸다.
"억!"
몹시 놀란 듯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는다. 아랫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나는 가정부에서 온 사람이오. 알아듣소?"
손태산은 여차하면 맨주먹으로 이도영의 면상을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도영은 말없이 손태산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두말 하믄 잔소리고오, 이런 부잣집에서 나랏일로 돈 빌리돌라 카는데 못하겄다 하지는 못할 기요.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나라 없는 백성이 없이니. 내 하는 말이 틀리자 않다 생각하무는 순순히 내놓으소."
"..."
"이거 귀가 먹었나, 입이 붙었나, 재미없기 나오믄."
하다가 강도질하러 간 거는 아닌께, 통사정하는 입장인꺼로 말조심을 하고 시간을 끌지 않게끔, 하던 관수의 말이 생각났다.
"주인어른, 불학무식해서 예법을 모리니 용서하이소. 그러나 장수의 자손으로 부끄러븐 짓은 안 했인께,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긴 타령 할 수 없고 어서! 가부간,"
하자,
"저기,"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눈으로 가리켰다.
"와 이랍니까 주인장, 내가 얼라요? 철은 다 들었인께 주인장이 내놓으소."
"참말 불학무식하네. 이런 일 할라 카믄 까막눈은 면해야지."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열고 부피가 얇은 것과 부피가 많은 돈다발 두 개를 꺼내온다.
"하여간에 고맙소. 미안시럽지마는 좀 묶여 있어야겄는데."
손태산은 준비해온 끈을로 이도영을 묶으면서,
"까막눈은 면할라 카이 날 새부렀고, 까막눈이라꼬 나랏일 못라겄소. 내 주먹 하나로 왜놈 열 명은 때리잡을 기요."
손태산은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이도영을 묶은 뒤 재갈을 물린다. 돈은 챙기고 전등을 껐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장, 점잖은 사람한테 실례가 많았소."
손태산은 유유히 나온다. 밖에 나왔을 때,
"사나이 배짱이 이만은 해야지."
그는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동행이 그를 잡아 끌었다. 열두시가 넘은 시각, 큰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술집·기생집은 주흥이 무르익어 여자들의 웃음소리 남자들의 술 취한 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열두시에서 새벽까지 길고도 짧은 시간, 일은 계획대로 진행이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걷히고 뿌연 아침 안게가 거리에 깔렸을 때, 시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서울네는 침모가 발견했고, 이도영 씨는 그보다 훨씬 늦게 마누라가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서울네는 비교적 정확하게 어젯밤에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였고 강탈당한 돈은 삼천 원이라 했다. 기별을 받고 독골에서 달려온 김두만은 사색이 되어.
"그놈들 반드시, 틀림없이 잡으시오! 내 그 돈을 찾아서 경찰서에 기부하겠소! 그놈들만 잡아주시오!"
서투른 일본말로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돈 삼천 원이 적은 돈인가. 면소 서기가 십 년을 고스란히 모은 월급도 그만한 돈엔 못 미친다. 아깝고 원통한 것을 생각하면 눈알이 빠질 지경이다. 그러나 김두만은 돈 아까운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칼 들고 야밤에 들어온 괴한들, 가정부에서 왔다는 그들에 대한 공포는 결코 아니었다. 일본 경찰에 대한 것이다. 상해 가정부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돈을 털러 들어온 강도였었더라면 김두만의 입에서 기부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의 하나 가정부와 내통하지 않았는가 의심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돈 삼천 원이 문제인가. 파멸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들에 대한 증오심도 물론 대단해서 김두만은 진심으로 글들의 체포를 원하였다. 한편 탈진이 되어 자리에 쓰러진 이도영을 찾아온 두 명의 형사는 사건의 경위를 묻고 있었다.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도영은,
"키는 중키쯤 돼 보였고 몸은 마른 편이었소."
몹시 땀을 흘리며 말했다.
"말씨는 어떻든가요?"
"서울 말씨였소/"
실로 해괴한 일이다. 손태산은 중키도 아니었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이도영 자신이 불학무식하다는 말까지 한 손태산이 서울 말씨는커녕 사투리치고도 심한 편이었으며 상스러웠던 것이다.
"김두만 씨 댁에 침입한 자들과 인상착의가 비슷하군요. 흉기는?"
"칼이었소."
"시간은?"
"그러시... 그기이 그러께 한시는 지났을 성싶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소이다."
이도영은 계속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 손태산은 칼 같은 것 가져오지 않았고 침입한 시간도 열두 시가 조금 지났을까.
"그자들이 김두만 씨 댁을 습격하고 나서 이곳에 왔군. 몇 사람이었소?“
"두 사람이었소."
계속 이도영은 땀을 흘렸다. 얼굴은 창백했다.
"운수불길하여, 기왕지사 돈은 뺏깄지마는 이러다가 영감 병 나겄소. 꿈 한번 잘못 꾸었다 그렇기 생각하시이소."
순철의 모친이 참다못해 말했다.
"임자는 가만있소."
무너지려는 허리를 세우며 이도영은 마누라를 나무란다. 어투가 매우 엄격했다. 듣기론 내세울 만한 문벌도 아니며 겨우 편지 정도 쓰고 읽는 학식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깡말라 보여 그랬던지, 테가 가는 안경을 쓰고 가지런히 다듬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 그의 풍모는 돈에 무서운 상인으론 보이지 않았다. 이도영의 기를 수첩에 적고 있던 형사는 순철 모친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우리도 당신네들 손해 본 돈이 문제가 아니오. 서장 목이 오락가락하는 대사건이오.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인 것이 문제란 말이요. 하룻밤에 한 곳도 아니요 두 곳이나 습격을 당했다는 것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돼."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선인 형사였다.
"임자는 안에 들어가소. 남자들 하는 얘기에 끼여들어 요망하다는 말 듣기 전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도영은 마누라에게 다시 말했다.
"끼여들기는 누가 끼여들었십니까. 영감이 갱신을 못하신께 그랬지요."
"허허어!"
"알았십니다."
순철이 모친은 남편 영에 못 이겨 물러난다.
"제놈들이 달아나면 어딜 가. 독안에 든 쥐새끼지. 이 기회에 이곳 불온도배들 뿌릴 뽑아야 해."
함께 온 일본인 형사의 말이었다. 신속하기가 번개 같은 일본 경찰은 신고를 받는 즉시 진주서 빠져나가는 길목을 일제히 차단했고 불온하다고 점찍어놓은 사람들 집에 경찰관이 쫙 깔리면서 수색에 나서고 있었다. 물론 최씨네 집에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도영 씨,"
하고 형사는 날카롭게 불렀다.
"오천 원이라면 흔히 만져볼 수 없는 큰 돈 아닙니까?"
"..."
"그런 현금을 마치 가져가 달라는 듯 집에 두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소?"
제일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다, 하듯 형사는 이도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슨 말심을 그렇기 하시오! 불난 집에 와서 부채질을 해도 유분수지, 도둑에게 가져가라고 집에 돈 놔두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오!"
"도둑이 아니지 않소."
"아니면!"
"가정부에서 군자금으로 가져갔다 그 얘기 아니오."
"들어온 놈이 누구이든 남의 돈 강탈해갔으면 도둑이지, 도둑 아니라니!"
얼굴이 벌개지면서 이도영은 화를 냈다.
"아아, 아 역정 내시지 말고 현금이 있었던 경위를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한참 있다가 이도영은 화를 가라앉히며 본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원래 성미가 은행 같은 곳에 예금은 잘 하지 않소."
"그래서요, 그래서 금고도 아닌 문갑 속에 아무렇게나 간수한다? 이해 못하겠는데요."
"금고는 백화점에 있고오, 집에는 본시부터 금고가 없소, 이거는 내 판단이지마는 금고란 여기 돈 있소, 하고 도둑에게 가르쳐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 내가 현금을 관리하는 것은 당신네들한테도 말 못하오. 그거는 내 비밀인께. 그러나 오천 원이 어찌 문갑 속에 있었는가, 그것은 쉽게 이야기해줄 수 있소."
"말씀해보시오."
형사의 어세가 한결 누그러진다. 지방의 유지인 만큼, 경제권을 쥐고 있는 강자인 만큼 그도 날씨 보아가며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내 사업이 사업인 만큼 항산 자본이 넉넉해야 하는 관계상 땅을 장만하질 못하였소. 한데 지난 가실에 마치 맞는 땅이 있다 말을 듣고, 두 차례 가보기도 했고 계약을 한 거는 달포 전이었소. 오늘이 잔금을 치를 날인데 어젯밤 그 꼴을 당했던 거요. 잔금 받을 사람이 이 소동을 보고 돌아갔거나 아니믄 근처에 있일 성싶소. 이만 하믄 알아듣겄소? 문서도 있인께."
"그럼 그 돈 있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거는 나도 궁금하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의 소행인 듯한데."
"아까 당신네들은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이거는 내 이도영의 치욕이오. 내가 친일파라는 것은 세상이 더러 아는 일이지마는, 이제는 세상 사람 놀림감이 되지 않았소? 진주 사람들이 드세다는 것은 당신네들이 더 잘 알 거요. 나도 돈의 문제보다 이아무개가 친일을 해서 돈냉이나 벌더니 가정부 사람들이 와서 칼 딜이대고 털어 갔다, 속이 씨원하다, 그렇기들 입방아를 찧어싸면 내 장사는 어찌 되겠소. 당신네들 치안이 물샐틈없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소? 적반하장이라더니 피해자를 보고 머 어째요?"
"아아, 아 고정하시오. 우리도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언짢은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시오."
계속 땀을 흘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돼 있던 이도영은 성질을 내다가 자리에 픽 쓰러졌다. 혼절을 했던 것이다.
"아이구 영감! 이러다가 큰일 나겄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순철의 모친이 뛰어왔다. 그리고 의사 불러 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도영은 극도의 긴장 때문에 혼절한 것이다. 그는 형사의 눈이 독사 같아서 몸서리치고 떨었던 것이다.
4장 장례식 날 밤
사건이 난 뒤 열흘이 지났으나 경찰은 범인의 흔적조차 찾아내질 못하였다. 온통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마 어디서 쾅! 하고 터질지 모르는 소리를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이 사람들은 즐거움에 가슴이 뿌듯해져갔다. 어디서나 그 사건을 화제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끼리 눈과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이야기하였고 귓속말과 몸짓으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들리지 않는 함성은 차츰차츰 도시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추상적이던 가정부, 상해에 있다는 우리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 존재를 실감하년서 무기력해진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희망의 빛을 보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조국. 그 조국이 내게로 올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남녀노소 빈부와 계급이 차이 없이 누구나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적보다 더 가증스러운 배신자, 반역자, 한겨레의 뿌리에서 나온 친일파 앞잡이들에 대한 응징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만일에 어느 누가 거리에 군자금 모금함을 내놓았다면 이 순간만은 사람들 마음이 가락지 비녀 다뽑아넣었을 것이며, 지게꾼 노점상 죽 팔던 노파까지 하루벌이를다 털어 넣었을 것이다. 윤곡이도 걸핏하면 남강 모래밭으로 달려나가 데굴데굴 굴렀다. 몸이 가려운 강아지처럼 굴렀다. 구르면서
'아버지다! 아버지가 다 꾸미신 일이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모든 것 다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아서 피가 끊었다. 그 자신도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진주의 집을 수색한 것은 물론 평사리까지 형사대가 파견되어 집안을 뒤졌고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했다. 평사가 넌지시 관련되지 않았는가 말했을 때 길상은 물끄러미 형사를 바라보며
"그만한 돈 만들려면 우리도 어려운 처지는 아닌데 뭐가 답답하여 남의 집에 가서 강도질을 했겠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어쨌다는 거요. 나는 석 달 가까이 이곳에 와서 정양하고 있었는데 내 혼백이 가서 그 짓을 했단 말씀이오?"
" 댁은 피해가 없질 않소. 그들보다 댁의 재력이 월등한데 이상하지 않느냐 그 말이오."
"글쎄올시다. 왜 우리 집은 털지 않았는가, 이상하군요. 감옥살일 했다고 봐준겐가?“
"이보시오! 혁명지사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정말 왜 이러시오? 현금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졌을 터이고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온들 뭐가 나오겠소"
"......" "누가 압니까? 요 다음엔 우리 집에 화살이 꽂힐지. 하룻밤에 두 집 털기도 벅찬 일, 세 집이나 털 수는 없었을 게요."
"당신은 재미있어 하는 군. 뭐가 그리 신이 나오!“
"그러면 악을 쓰리까? 그것 다 해본 짓이오. 무고하다고 악을 써본들 생떼 쓰고 나오면 별 수 없더군. 사람의 기만 넘고 명대로 살지도 못하겠더군."
그러고도 듣기 거북한 얘기가 한동안 서로 간에 오고갔으나 형사는 꼬리를 잡지 못한 채 떠났다. 혐의가 있고 없고 간에 범인을 잡지 못하여 노심초사,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경찰이 길사의 전력을 감안하면 그를 진주까지 구인하여 조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분히 친일적으로 보여지는 서희의 존재, 평소 음으로 양으로 돈을 뿌려놨던 것이 이럴 경우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애꿎은 두 서기, 그러니까 이도영 집의 서기와 김두만 집의 서기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거의 병신이 되다시피 고문을 당하였고 다급한 나머지 덮어놓고 이름들을 입에 올려 무관한 사람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었다. 아무튼 두 명의 서기는 파멸이었다. 전쟁에 부상한 병사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그것은 비참한 희생이었다. 그 동안 김두만은 만나는 사람마다 내 돈 강탈해간 놈들 잽히기만 해봐라! 칼로 배애지를 푹 짤러 직이지 그냥 두나 하고 욕을 했다. 어느 놈이든 턱아리를 놀렸기 때문에 돈 있는 줄 알고 들어오지 않았겄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운수불길하여 손해가 크다는 정도의 위로를 하던 사람들도 차츰 그를 피하게 되었고, 흥분하는 김두만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발길을 돌리곤 했다. 별 수 없이 그도 욕을 안 하게 되었지만 경찰이 내통했다는 의심을 그에게 전혀 갖지 않는 것을 알고는 빼앗긴 돈이 아까워 혼자 꿍꿍 앓았다.
"우떻게 해서 번 돈고. 내 피땀으로 번 돈, 돈 잃고 인심 잃고, 어이구 내 가심이야!"
자기 가슴을 치곤했다. 서울네는 서울네대로 뽀로통해서 말했다.
"왜 하필이면 그날 독골로 가셨소?"
"내가 가고 저버서 갔나! 아부지가 오늘만 내일만 하는데 그라믄 자식된 도리에 안 가고 우짤 기고!"
"초상이 난 것도 아니지 않아요. 가신 건 그렇다 하더라도 저녁에는 왜 못 돌아오셨소! 돌아오셨으면 빼앗기진 않았을 거예요."
본댁이 잇는 곳에서 잤다는 것이 서울네는 더 괘씸했던 것 같다.
"약한 여자 혼자 놔두고 두 부자가 한꺼번에 집을 비운 것이 잘못이에요. 나를 무시하니까 그랬지. 그놈들도 업신여겨 둘째부인 일어나시오, 그러더라구요."
"칼 들고 두 놈이나 들어왔는데 설사 내가 있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당했지 별수 있을 기든가."
"나는 지금 돈 애길 하는 건 아니예요! 당신네들 마음 쓰는 것이 틀렸다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어버지가 못 올 형편이며 저라도 와야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이예요! 낳아놓기만 하면 그만인가요? 두 아이한테 내 정성 쏟은 걸 생각하면 분하고 서러워. 주야로 공부하게 뒷바라지한 사람은 누구죠? 연장 망태 짊어지고 남의 집 품일이나 할 주제에 양조장 주인은 뉘 덕이며, 동경 유학은 뉘 덕이며, 중학교는 웬 중학교,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조강지처? 대체 조강지처가 누구지요? 사람 구실도 못하는 걸 두고 조강지처? 생모? 흥! 내가 칼에 맞아 죽었으면 속 시원했겠지요? 속 시원했을 거예요!"
서울네는 히스테리를 부렸다. 열심히 돈을 벌 때와는 달리 큰 집에 이사 온 후 안방마님으로 행세하면서 서울네는 옛날같이 고분고분하다가도 성질을 부리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기성이와 기동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이 서울 여자는 앞날을 생각하여 맏딸이한테서 남편을 빼앗은 것과 같이 두 아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식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해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편뿐만 아니라 두 형제가 독골로 가는 일이었다. 그날 부자가 집을 비운 것은 우연이었다. 이평노인의 병이 위중하여 가기는 갔으되, 병세가 오늘 내일 한다는 것도 벌써 여러 날 전부터의 일이었고 특별히 화급하게 기별이 온 것도 아닌 터에, 또 평소 부모에게 데면데면했었던 두만이었던지라 굳이 그날 가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 날이 삼월 삼짇날이어서 양조장은 쉬었고 일꾼들은 모두 씨름 구경에 가고 없었기에 그 틈을 이용하여 두만은 아들을 데리고 독골로 갔던 것인데 언제나 그랬듯이 모친이 놓아주질 않았다. 누워 있던 이평노인의 눈빛도 매우 강경하여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밤을 보낸 것이다.
시일은 지체 없이 흘러갔다. 양력으로 오월에 접어든 진주 시가에 녹음은 싱그러웠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가고 여름으로 접어들었을 때, 오늘 내일 하던 이평노인은 것 달을 넘게 견디다 드디어 타계하였다. 독골 상가에는 꽤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영팔노인 내외의 모습이 보였고, 사돈지간인 장연학이 있었다. 그러나 존문객의 주류를 이룬 것은 시장 상인들롸 주류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대중이란 끝없이 인내하면서 변화에 대하여 성급하고 가슴에 맺혀 있으면서도 쉬이 체념하며 망각한다. 신출귀몰이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고 인심이 소용돌이치던 도시에 여름이 찾아왔을 때 신출귀몰이라는 말은 퇴색해가고 있었으며 인심의 소용돌이는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몸조심 말조심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주판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상가에 모여든 상인들은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가정부를 칭하고 군자금을 털어갔다고 해서, 경찰이 그들을 잡지 못하고 이를 간다고 해서 당장 족립이 죄는 것도 아니었는데, 독립만 된다면 이까짓 점방 하나 팔아 올린들 뭐가 대순가! 했었던 그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썰물같이 격앙된 감정이 밀려가 버리고 나면 그들은 독립이 요원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두만이를 슬름슬름 피하던 사람들, 욕을 하는 두만에게 눈총을 주던 사람들, 그들은 본시 잇던 자리오 돌아와서, 돌아온 모습으로 두만이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한분 가믄 못 보는데 얼매나 허전하겄소. 그래도 복 많은 어른이요. 자식들 잘된 것 보고 눈을 감았으니, 효자가 따로 있소?"
하며 손을 굳게 잡는 사람도 있었다. 적잖은 부의금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손상된 감정을 복구하기 위하여. 그러나 상가를 하직하고 둑길을 지나면서
"묵고 살라 카이 우짜노. 입이 포도청이제. 제에기랄! 돈 좋다, 참말로 돈 좋구나!"
하고 자조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오일장으로 장례는 끝났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 오복을 갖추었다고들 하는 딸, 여수의 선이가 젤 섧게 울었다.
"불쌍한 울 아부지, 아들 사우 잘 두었다 넘들은 그라지마는 하루도 편키 못 산 울 아부지. 식구들 일이라 카믄 살을 깎고 뻬를 깎고, 다 소앵이 없는 기라요. 나부텀도 믿거라 하고 출가외인이라 하고 편키 아부지 한분 모신 일이 없고 잘살믄 저거들 잘 살았제, 평생을 깡보리밥에 일만 하시고 어이구 불쌍한 울 아부지! 사람 하나 인연이 잘못되어 울 아부지 골수에 병들었제. 화목하기로 소문난 우리 집이 와 이 지경 되었는고."
"청승이 늘어지는구마."
못마땅해서 두만이 혀를 찼다.
"내비나두게. 이럴 때 안 울곤 언제 울 기고."
매형 종학이 말했다. 마을 아낙들도 뒤꼍에서 일을 하며 입이 놀고 있지는 않았다.
"잘산께 큰소리하네."
"하모. 잘산께, 없이 살았이믄 저런 말 못할 기고 쬐끼갔을 기다."
"큰소리하게 돼 있제. 사돈노인이 다니감서 초상 비용 하라고 큰 돈 내놨더 카더마."
"그뿐아가, 짚배도 필필이 가지오고, 초상에 쓰는 개기는 말장 여수서 가져왔다 카데. 얼음에 채워가지고 자동차로 실어왔다 안 카나."
"그러기, 동기간도 잘살고 봐야. 불쌍한 거는 기성이네 아니가. 울음 한분 크게 못 울고 친정 식구라고는 개미 한 마리 없이니."
"친정에 누가 있었다믄 그냥 두기나 했일 기든가? 시도 때도 없이 가서 탕탕 뽀사부릿지."
"그거는 헹펜 모리는 이야기고 그 여자 때문에 오늘 이렇기 됐인께."
"아따! 그라믄 금송아지 갖고 왔든가? 과분지 소박데긴지 아니믄 덤짜인지 그 여자 내력이사 우리가 우찌 알까마는 혼자 잇는 젊은 것이 돈이 많았이믄 얼매나 많았겄노, 또 그랬다믄 머가 답답해서 기성아배 같은 목수를 따라왔겄노. 다 협심해서 벌었기애 오늘이 있는 기지."
"하기사 여자가 제아무리 나부대봐도 별수가 없기는 없지. 불쌍한 거는 기성이네, 친정이 있어 어리등대 했이믄 법으로 만냈겄다, 아들 형제 낳았겄다, 와 큰소리 못하겄노."
"이분에 초상에 와서 하는 행사 봤제?"
"와 아니라. 보통내기가 아니더마. 눈앞에 사람이 없는 기라."
"노리깨깨하고 입술은 포리쪽쪽하고 비상이라도 타겄더라."
시누이가 섧게섧게 울었지마는 사무치게 서러운 사람은 막딸이었다. 그러나 막딸이는 울어보질 못했다. 일이 태산 같았기 때문도 아니요 딸 아닌 며느리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저기이 계집이가, 저 꼬라지 하고서 에미라꼬? 남자 우세시키지 말고 자식 우세시키지 말고 제발 뒷구석에 콱 처박히 못있겄나!"
남편 입버릇 때문이었다. 게다가 함께 머리를 푼 서울네가 한 소동을 벌여놓고 진주로 가버린 탓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나치게 서울네는 소외되기는 했었다. 그러나 어느 집안이든 대사를 치를 때는 서열을 엄히 따지게 돼있었고 서울네는 그것을 감수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적진에 날아든 한 마리 작은 새같이 자신을 느꼈던지
"난 머리 풀 자격이 없어요. 어중이떠중이 잘 놀아보세요. 난 진주로 돌아가겠어요."
눈을 희뜨고 두만에게 앙칼진 소리로 대들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옥신각신, 서울네는 미친 듯 악을 썼고 울부짖고 하다가 가버린 것이다.
"만고에 저런 요망한 것이 어디 있노. 서울년은 법도 모리나. 이 자리가 우떤 자리고!"
두만네는 노발대발했다.
"어무이 시끄럽소. 예사 굴러온 돌이 본돌 치는 거 아닙니까. 행실이 기러믄 딱 무시해부리는 기이 젤이요. 내사 가고 나이 앓든 이 빠진 것맨크로 씨원하거마는, 불쌍한 우리 올케 그 꼬라지 안 보이좋고."
두만이 들으란 듯이 선이는 큰소리로 말했다. 사방에서 비난이 분분했다. 화가 난 두만은 죄 없는 막딸이를 볶았고 마주치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태산같이 믿고 의지했던 시아버지 죽음 앞에 막딸이는 울지도 못했다.
장지까지 따라갔던 사람들을 위해 마당에 쳐놓은 차일 밑에는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백수가 된 영팔노인은 근력이 좋은 편이어서 장지까지 갔다왔고 연학이도 따라갔었다. 대개는 장지에서 돌아가고 마을 사람 몇몇과 영팔노인, 두만과 종학이 술상에 둘러앉았다.
"날씨도 좋고 호상이라 뒤끝이 깨끗하고."
"남의 나이 (팔십 이상)도 아닌데 호상은 무슨 호상."
"오십 넘기기도 어러븐데 칠십을 넘깃이믄 호상이지 머. 자손들 무탈하고, 벼룩박에 똥칠하며 사는 것도 죄라."
동네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다가 영팔노인은,
"이 사람들아 그만해라, 늙은 사람 옆에 두고 욕하는 기가.“
하고 말했다.
"아이고 어르신 무신 말심 입니까. 젊은놈들 빰치게 짱짱하신데, 제 술 한잔 받으시소."
영팔노인은 따라주는 술잔을 비우고 수염에 묻은 술을 손바닥으로 닦으면서
"청춘이 잠간이네라. 눈 깜짝라 사이제. 늙은 것이 남의 일 같더마는 어느새 하나씩 가부리고……말할 수 없이 허전쿠나."
"하기야 머, 죽음에 노소가 있겄십니까. 타고난 명대로 사는 기지요."
"평사리서 용이가 죽었일 직에는 원통해서 땅을 치고 울었다마는, 오늘 이평이 성님을 묻고 나이 샛바람 속에 혼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의 평생이 일장춘몽 같지마는 다시 생각해보믄 세월은 긴 기라. 한동네서 나가지고 함께 큼시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제. 그 겪은 일들 하나하나가 우찌 그리 생생한고. 젊은 시절에는 이평이 성님이 좀 돌리는 편이었다. 죽으라고 일만 하고 술사는 일이 있나 제 앞만 가린다고 밉으라 했제. 두만이모친이 후덕해서……이평이 성님은 젊었일 때나 늙었일 때나 몸이 줄도 늘도 않고 뽀뽀하게 생기어 오래 살 줄 알았더마는."
"듣고보니 자기 앞만 가맀다는 것은 부전자전이구마요."
선이 남편이자 연학의 사촌형인 종학의 말이었다. 몰론 농담이었다.
"아이가, 아이가, 어림 없제. 두만이가 돈은 좀 벌었는지는 모리겄다마는 아부지 따라갈라 카믄 한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평생 농산 부린 일 없고 남 못할 짓 한 일 없고, 얼랑 누굴랑이 없어 그렇지."
"아제씨도 참, 그라믄 지느 농간을 부리고 남 못할 짓 했다 그 말심입니까?"
발끈해거 두만이 말했다.
"농간 안 부리고 우찌 장사를 하노. 농간 안 부리고 우찌 부자가 되노. 그러자 카이 남 못할 짓도 하게 되는 거 아니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아무도 손을 못 된 자갈땅을 밭 맨들어보겄다고 죽자 사자, 명태겉이 예비서 일하든 이평이성님, 눈에 선하다. 얼매나 땅에 포은이 졌으믄 그랬겄나, 다 그래가지고 너거들 안 키웠나."
그 말대꾸는 두만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년에는 더러 후회도 했네라."
"머를 후회했단 말입니까?"
종학이 물었다.
"그럴 일이 있었네. 다 지나간 일 아니가."
"산에 같이 안 간 그 일 말입니까?"
종학이 물었다.
두만이 말했다. 영팔노인은 잠자코 있었다.
"후회할 일이 따로 있지. 그리 됐이믄 명대로 살기나 했겄소. 식구들은 삼지사방으로 흩어져서 거지가 됐일 기고, 아부지가 그거를 후회했을 리가 없소."
"명은 하늘이 주신 거고, 사람이 잘 묶어야 하루 밥 세 끼, 저승길에 이고 지고 갈 기가. 나이 들어봐라. 재물 그거 별거 아니네라.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 돌아보고 하믄은 잘못한 거만 짐이 되제. 그저 푼수껏 사는 기이 젤이다. 그러고보믄 이평이 성님이 잘못 살았다 할 수는 없일 기구마."
한편 안방에서는 영판노인의 마누라 판술네와 마주앉은 두만의 모친은 눈물을 흘리고 있았다. 오일장을 치르는 동안 두만의 모친은 통곡한 적이 없었다. 마지막 무덤 앞에서 무덤을 어루만지며
"보소. 나도 돋 갈 긴게 마음 편히 기시이소. 썩는 꼴 안 보고 잘 갔십니다. 야 나도 곧 갈 기요.“
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만 내리 가입시다."
영만이 와서 팔을 잡고 일으켰다.
"놔라. 내 혼자 갈 수 있다.“
하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왔던 것이다.
"시아부지가 살아 있었으믄 그 계집이 그랬겄나. 어림도 없지. 제 년이 우찌 감히 그라겠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두만의 모친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판술네도 눈물을 닦았다.
"아닌 게 아니라 기가 찹니다. 어디서 배운 버릇인고, 풀었던 머리 걷어 올리고 나가는 꼴을 보이 눈에 불이 나더마요. 그럴 거라믄 애씨당초 오지를 말든가."
"무서븐 시아부지 세상 버맀이니 겁날 것 없다, 그 봇장이제. 우리네하고는 사람이 다르다. 마음 묵으믄 묵은 대로 말하고, 정월 초하루 묵은 맴이 섣달그믐까지 가지마는, 그 제집은 속 다르고 겉 다르고, 얼매나 수단이 좋은지 머시마들까지 손아귀에 넣어서 기성이 기동이 그놈들도 지 에미를 대수로 안 여긴다. 남정네를 틀어쥐고 이자는 자식들까지 싹 뺏아갔다. 그년이 우리도 호락호락했이믄 벌써 옛날 옛적에 기성에미 내쫓았일 기구마. 참말로 무서븐 제집이다. 참말이제 우리 기성에미를 우찌 할꼬."
"걱정 마이소, 성님. 영만이가 안 있십니까."
"가아들이라도 있인께……내가 살믄 얼매나 더 살겄노. 세상만사다 보지 말고 지금이라도 눈 암았이믄 싶다. 그놈 말말이 부모가 해준 기이 머 있는가, 해준 거사 없제."
"놔두고 안 해주었겄소."
"그기이 그놈 말이건데? 제집이 귀에 못이 백히도록 한께 그런 말이 나왔겄지. 자식 말이 나왔겄지.자식 말 해봐야 내 얼굴에 똥칠하기, 입에 다물고 있일라 카이 복장이 터지고."
"참으소 고만."
"우리 영만이도 성 덕본 것 없다. 지가 근한께로 땅마지기나 갖고 살지."
"은앙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엎더라고 그래도 형제가 아니요."
"우리 모두, 죽은 늙은이도 병들어 줍기까지 뼈 빠지게 농사 지었다. 말말이 자식 덕에 잘산다, 그것도 어디 그놈 말이건데? 제집말이고, 그 제집 덕에 잘산다 그 말 아니겄나."
"그래봐야 다 소용 없십니다. 자식을 낳았소, 법으로 만낸 제집이 겄소, 늙으믄 지 불쌍치."
"그기이 안 그렇다. 안 그러이 내가 이러제. 오십 년 넘기 자식 낳고 같이 살던 늙은이를 내다버리고 내가 무슨 정에 자식을 험담이나 하고 있겄노. 그거이 아닌 기라. 기성할배 눈 감은께 사정이 싹 달라졌다. 이자는 내 영이 통하지도 않을 기고. 기성애비가 늙은이 살았일 직에 마음대로 못한 일이 하나 있었거마는……"
"……"
"이분에 제집이 하는 행실만 봐도 틀림없이 그 말을 끄낼 기다."
"머가 말이요?"
"기성에미보고 미적 파자, 그럴 기라 말이다."
"민적을 파다니?"
"한분 그런 일이 있었네라. 에미 꼬라지가 그렇다고."
"에미 꼬라지가 우때서요? 살림 사는 지어미가 기생도 아니겄고, 핵교 선생도 아니겄고 가축 안 하믄 다 그렇지요. 도방에서 조석만 끓이묵는 것도 아니겄고 일이 좀 세야지, 농사를 아무나 지을 기든가."
"내 말이 그 말 아니가. 그래 에미 꼬라지가 그러이 자식 앞길 막고 이자는 지도 진주서는 윗자리에 앉는 몸이니 남사스럽다 안 그카나? 그 말이사 늘 하는 입버릇인께 그렇다 치고, 그러이 민적 파고 남 되자, 돈을 좀 줄 것이니 절로 가든 제 갈 길을 가라."
"시상에 그런 경우가 어디 있소. 시적 며누리 보게 됐는데 두만이가 환장했네."
"그 일이사 한참 전의 일이었제. 그래서 기성할배가 몽둥이 뜰고 아들 직인다고 야단이 안 났더나."
"시상에, 그런 일이 다 있었고나."
"이자는 내가 와 이라는지 알것제? 틀림없이 미적 파자고 나올기다. 불쌍한 우리 기성에미를 우짜믄 좋노"
"걱정 마이소. 자식들이 가만 있겄소? 다 컸는데"
"니도 참 답답하다. 여태 멋을 들었더노. 자식들이 에미 생각한다믄 무신 걱정할 기고."
"그래도 성님. 말이 그렇지 우찌 조강지처를 내쫓것소. 진주 바닥에 얼굴 치키들고 댕길라 카믄 그렇키는 못할 깁니다.!"
"모리는 소리 마라. 괘씸키는 손주 놈들이 더 괘씸타. 장개갈 나이가 됐이믄서, 그놈들이 에밀 감싼다믄 애빈들 우짜것노. 그러나 그기이 아닌 기라"
언제였던지 에미 생각 안하고 서울네 편든다고 나무란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괄시하고 미워하니까 오히려 동정이 갑니다. 사람이란 감정의 동물이거든요. 우리 눈에도 집에서 너무 심한 것 같소"
기성은 냉담하게 말했다.
"자식도 서방도 독골에는 얼씬 못하게 하는 그 제집 소행이 그라믄 니는 옳다 그 말가?"
"옳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해야합니다. 남녀간에 뜻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을 어떻게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는 무리지요. 있을 스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틀린 일입니다. 서양에서는 서로 좋아서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는 것 보통이지요. 축첩하는 것보다 휠씬 깨끗하지 않습니까?
기성은 건방지게 유식한 척 말했다.
"이놈아! 우리는 서양사람 아니고 조선 사람이다!"
"글쎄요. 나쁜 풍습을 고쳐나가야지요. 그래야 우리도 문명국이 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독골 어머니는 너무 무식하고, 누가보아도 진주어머니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요."
"진주어머니라니!"
"왜요?"
"이놈아! 작은 에미다, 진주 어머니라니!"
"하, 참 할머니도 머리 좀 쓰십시오. 말에 밑천 들었습니까? 자꾸 그렇게 나오니까 집안이 시끄럽지요.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주고 그 분의 공로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그 노래이겉이 생긴 년!"
"그만하면 미인이지요."
약을 올리듯 말했다.
"식자 있고 머리는 놓고, 진조어머닐 만나지 못했으면 아버진 목수밖에 더 했겠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공평치가 못합니다. 좀 신식으로 이해해보십시오."
기성은 실실 웃기까지 했다.
"니가 머를 아노!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모르기로는 할아버지 할머니지요."
"우리가 이 정도라고 했이니 니 에미가 쫓기나지 않았다. 그 백여기 겉은 년! 천륜을 우찌 끊노!"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잡안은 더 많이 달라졌고여. 할머니는 옛날 식으로 하실 생각 아예 마십시오. 자식이라 해서 부모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식이 평생 함께 살아야 할 여자를 어째서 부모가 택하지요? 그런 구습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버려야지 서로가 다 비극 아닙니까. 아버지도 괴롭고 진주어머니도 괴롭고 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우리 역시 고통스러우니까요."
"그래서?"
"네?"
"그서 니는 우짜믄 좋겄노?"
"제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자인 세 사람이 해결해야 겠지요."
"그라믄 니는 어이서 낳노? 누구 뱃속에서 나왔노? 하늘에서 떨어졌나? 짐승도 지 에미는 아는 법인데 니 말대로 하자믄, 일본까지 가서 배운 니 말대로 하자믄 다음 세상은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살아가겄고나."
그때 두만의 모친은 절망을 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 카든가. 옛말 하나 그른 기이 없다. 자식 그거다 소앵이 없네라.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기성이할배가 이녁 죽은 뒤 우떻게 될 긴가를 알고 땅을 모두 기성에미 앞으로 넘겨놨는데, 문서는 영만이가 간수하기로 하고."
"야? 땅을 며누리 앞으로 다 했다 그기이 정말입니까?"
"운냐. 정말이다. 그래서 한 소동 벌어졌제. 그것도 생각해보믄 걱정이다. 돈을 뺏깄니 우찌니 하고 또 늙은이가 세상 버리고 없이니, 영만이가 우찌 견딜란고 모리겄다. 사업 자금으로 문서 내놔라 할 기이 뻔하다, 이리저리 더듬어도 내 눈 하나 없이믄 우리 기성이 에미 앞날이 걱정이다. 울고 갈 친정이 있다 말가, 지 몫 챙길 성질도 아니고."
밖에서는 삼월 삼짇날의 얘기를 누군가가 꺼내었다. 그 사건 이래 피해를 본 당사자 두만이를 처음 대하는 사람도 있어서 당연히 궁금했을 것이다. 장례가 끝나자 곧장 진주로 내달리고 싶었던 두만은 차마 남의 눈 때문에 그러질 못하고 울적해 있었던 참인데 그 얘기가 나온 것이다.
"조선 놈들 망해야 싸지 싸아. 남 잘되는 거를 보믄 밤에 잠이 안 오는 기이 조선 놈들 심뽀 아니든가. 어느놈이든 턱아리를 놀리도 놀맀길래 현금 있는 줄 알고 내 집을 덮친 거 아니겄소."
"서기가 벵신이 됐다믄? 풀리난 거를 보니 죄가 없었던 모앵인데."
종학이 말했다. 연학과 영만은 술자리에 끼여들지 못하고 멍석 끝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 말이 없었다.
"그 속을 누가 알겄소."
"그라믄 자네는 서기를 위심한다 그 말가?"
"하기사 머, 시자의 점방을 판 거를 아는 사램이야 많겄지요. 여하간에 내막을 세세히 알리주고 배가 맞아서 한 짓 아니겄소. 잽히기만 하믄 배애지를 칼로 푹 찔러직일 기요."
"아직도 못 잡았이믄 이자 잡기는 영영 그른 기다."
영팔노인의 말이었다.
"죄지은 놈, 어느 때 잽히도 잽힐 기요. 피땀으로 모은 남의 돈, 그 것 묵고 얼매나 하늘 보고 살겄소."
"니 말을 들으니 가정부 사람들 아니고 그냥 강도다."
"아제씨, 와 이러십니까?"
"와, 내가 머를 잘못했나?"
영팔노인은 심술궂게 웃으며 눈을 꿈벅꿈벅한다.
"내가 놈 짜 붙이고 배애지 찔러 직인다 카고 도적놈이라 카이 그라믄 가정부 놈 아니다, 얘기가 그렇기 되는 겁니까? 가정부 놈들 겉으믄 가정부 나으리, 배를 찔러 직이기는커냥 찔린 배 싸안아주고 방바닥에 이마빡 찧어감서 돈을 상납해야 하고 머 그런 얘깁니까?"
영팔노인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종학이가
"세상인심이 다르리 돌아가는데 자네도 풀세게 너무 그러지 마라."
"야아, 잘 알구마요. 세상 인심 잘 압니다. 바늘 하나 축간 것이 없는 놈들이야 무신 말인들 못하겄소. 입 가지고 만고충신도 되고, 입 가지고 나라 독립도 하고, 닳아지는 기이 아닌께."
"바늘 하나 축간 것이 없는 놈들, 그 속에는 나도 끼인께, 나보고도 두만이 니가 놈짜 놓은 기가?"
영팔노인 말에 두만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오늘겉이 좋잖은 날에는 좋은 얘기나 하는 거요. 자아 술이나 마시고, 아무리 호상이라고는 하지마는 한분 간 부모는 다시 못 본께."
마을 사람의 그 말도 두만에게는 가시였다.
"여기 술 떨어졌구마."
하자 영만이 화드득 일어섰다.
"인 주이소."
주전자를 받아들고 영만은 부엌 쪽으로 가서 술을 내온다. 그리고 아까처럼 연학이와 나란히 멍석 끝에 걸터앉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해는 서편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시뻘건 하늘을 갈가마귀 떼가 울며 날아간다. 몇몇 사람이 일어서서 하직을 하고 떠났다. 초상집의 일을 도와주던 마을 아낙들도 음식을 나누어가지고 다 돌아갔다. 사람 하나 비어버린 자리, 사람들이 하나 둘 상가를 떠나자 그 비어버린 자리가 남은 사람들 마음에 허무하게 스며든다. 올이 굵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색이 바래진 여름 모자를 쓴 이평노인이,
"기성아!"
하고 문간에서 방금 들어올 것 같기도 했다. 기성아, 손자 이름이지만 때론 며느리를 부르는 것이기도 했고, 때론 마누라를 부르는 것이기도 했었다.
영만의 아이들이 큰집에 오다 말고 차일 밑에 어른들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되돌아간다. 막딸이는 부엌 부뚜막에 앉아서 행주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영만이댁네가 울고 있는 동서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초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곡을 했던 선이는 지쳐버렸던지 작은방에 들어간 채 기척이 없었다.
"조선팔도 다 댕기고 우리 시아부지 겉은 어른이 어디 기실꼬. 지나가시다가도 내가 밭을 매믄 아가 니는 들어가서 보리방아나 찧으라. 내가 밭은 매줄 긴께……어디서 그 어른을 또 만낼꼬. 한시 반시 쉬시는 법이 없고, 아들 잘 두었다 캐도 남 가는 데 한분 못가보시고."
영만이댁네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팔짱을 끼고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믿고 의지하고 큰 나무의 그늘 같았던 시아버지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막딸이는 우는 것이었지만 맏손자이자 자신이 낳은 큰아들 기성은 분명히 전보를 받았을 터인데 장례가 끝난 지금까지 일본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둘째 기동이도 장지에서 곧장 진주로 가버리고 말았다. 어미한테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린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이 없어도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만으로도 방안은 가득 찬 듯 막딸은 행복했었다.
사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논에서는 개구리 우는 소리,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었다. 영만이댁네가 기둥에 등을 내건다. 동시에 안방에서도 등잔에 불을 밝혔는지 장지문이 환해졌다.
"아까 산에서 피뚝 생각한 일인데......"
두만이 다소 신중해진 어투로 말을 꺼내었다.
"그 일에 송관수가 관련되지 않았이까 그런 생각이 들더마요."
빈자리를 채운 듯 연학과 영만이 술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연학이 두만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일구월심이다. 이자 그만 잊어부리라. 그러다가 세상 사람이 다도적으로 안 뵈겄나. 해서 잃어부린 사람이 죄를 짓는다 카이."
장종학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생사람 잡겄고나."
영팔노인은 곰방대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두만을 노려본다.
"대관절 송관순가 하는 사램이 누고?"
종학이 물었다.
"백정 놈인데, 전에 농청하고 백정들이 한판 붙었일 직에 내가 농청에다 돈 안 받고 공짜술 주었다 함서 그놈이 나한데 찍짜를 붙은 일이 있었소. 아주 영악한 놈이지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했다. 우째서 관수가 백정이고."
비로소 연학이 일어섰다.
"그래, 그러시야겄다."
종학도 엉거주춤 일었섰다. 비틀거리는 영팔노인의 겨드랑 밑으로 연학이 팔을 찔러 넣으며 부축한다.
"이노오음! 내 이 늙은 모가지에 썩은 새끼줄 감아서 왜놈한테 끌고 가라 카는데 와 말이 없노!"
"이이구 참, 늙어감서 이기이 무신 짓이요."
"모리거든 임자는 입 다물어, 저놈은 저, 저놈은, 돈이라 카믄 지애비 묏자리도 팔아묵을......"
영만이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댁네가 달려 나왔다. 영만이 말했다.
"두 분 뫼시고 가서 자리 봐드리라."
"야."
판술네와 영만이댁네가 영팔노인을 부축하는 바람에 연학은 물러섰고 그들이 문밖으로 나간 뒤 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이래야겄나? 세상에 뵈는 기이 없나? 니가 누고? 니가 멋꼬?"
두만의 모친은 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만이는 이리저리 모친의 눈길에서 도망을 치다가,
"와 나만 가지고 이러요. 내가 잘못한 기이 머 있다고 모두 나만보믄 덤비드는가 말이요! 억울하고 분한 거는 나 혼자밖에 없다 그 말이요! 내 밥 묵고 내 돈 쓰고, 부모 형제까지 이러이 서글퍼서 우찌 살겄소!"
울먹였다.
"우리는 니 밥 안 묵고 니 돈 안 썼다. 니 아부지 벵들어 눕던 그날꺼지 뼈빠지게 일하고 살았다. 이놈아 니 아부지 숨 걷을 때 머라 카싰는지 벌써 잊었나 남의 가심에 못박지 마라. 그 말을 벌써 잊었나? 별말할 거 없다. 판술아배, 판술어매, 그리고 니 에미꺼지 모두 끌고 가거라. 독립군 했다고 끌고 가서 까바치라. 그라믄 상금 많이 줄 기고 축간 돈 아귀가 맞일 거 아니가."
"기가 차서."
"기가 차는 거는 나다. 아무리 돈이 좋기고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 기가? 니 아부지 땅에 묻고 날도 안 밝았다. 피알 하나 안 속이고 살아온 아부지 같은 노인을 모함해?"
"모함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기고."
확 달려들어 아들의 멱살을 잡는다.
"장모님 참으이소. 지도 울화가 치민께 그러는 기지요. 부모 자식간엔 질기 이러믄 정만 떨어지고……"
종학이 나서서 뜯어말린다.
"나도 이러고 접지 않다. 컬 때는 안 그렇더마는, 부모 안 닮은 자식이 어디 있겄나 하고 생각했더마는 틀린 기라. 사람 아주 베맀다. 돈 있이믄 머하노. 집안이 풍지박산인데."
하다가 사위 보기가 민망했던지 두만의 모친은
"기성아, 나 작은집에 가서 잘 긴께 찾지 마라."
며느리에게 말하고 휭하니 나가버린다. 초상 뒤끝이 엉망이 되었다. 두만이는 쥐어 박힌 사람같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멱살을 잡아도 어머니는 어머닌 것이다. 끈덕지고 가장 강한 공격수가 어머니였는데 두만은 모친이 나가버리자 갑자기 추위를 타는 것 같은 이상한 고독감에 빠진다. 매형과 그의 동생 연학에게 계면쩍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시일관 말이 없는 동생 영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하니나 다를까.
"성."
하고 영만이 형을 불렀다.
"성은 자기 한 대 만 살고 말 생각이요?"
……?"
"자기 한 대만 살고 말라 카믄 마음대로 하소."
"무신 말고?"
"나는 내 자식 내 손자 대꺼지 살아주기를 바래는 맴이니께 이렇기 되믄 성하고 남이 되든지 해야겄소."
"좀 더 알기 쉽기 말해봐라."
"그라믄 내가 묻겄소. 성은 왜놈이 천년만년 우리 백성을 누르고살 기라 믿소?"
"……"
"우리 백성들이 천년만년 왜놈의 종으로 살 기라 성은 그렇기 믿고 있소?"
"나중 일을 누가 알꼬."
"모리지요. 나도 모리요. 하지마는 한 가지 틀림이 없는 일은 만일에 나라가 독립한다믄 성이 역적이 된다, 그것만은 틀림이 없을 기고, 삼족을 멸한다믄 조카 두 놈에 우리 새끼들은 우찌 될 기요."
"야가 무슨 소리를 하노.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이 개명천지에 삼족을 멸할 기라꼬? 자다가 꿈 겉은 소리하네. 하하핫핫핫……하하하핫……"
그러나 웃음소리는 공허했고 한풀 꺾인 느낌이다. 모친한테 멱살을 잡혔을 때 한풀 꺾이긴 했었지만, 종학이 연학을 힐끗 쳐다본다. 형제의 눈이 부딪쳤다. 잠자코 술이나 마시라는 듯 연학은 형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덩신이요."
"머?"
"장사 눈이 밝아서 돈을 좀 벌었는지 모리지마는 번 돈 간수하기는 영 어렵겄소."
"건방진 소리 하네."
"진주의 그 머라 카는, 이 머라 카는 사람 따라갈라 카믄 아득하요. 뿔따구 난 황소맨크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봤자 뿔따구만 뿌러지지 얻는 기이 머 있일 기라고 그러요."
"니가 진주 일을 우찌 아노. 시건방진 소리 마라."
"와요? 나는 귀도 눈도 없다 캅디까? 이 아무개라는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인께 소문이 나기로 가정부힌테 돈을 뺏긴 기 아니고 내어주었다, 그러이 우리는 바늘 하나라도 그 집에 가서 사자, 사실은 여하간에 인심이 기렇다는 긴데."
두만이 깜짝 놀란다.
"누가 그러더노."
자신도 그 비슷한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 집 물건을 사자, 하는 민심의 동향은 모르고 있었다.
"방물장사 할망구가 그럽디다. 기와지사 돈은 잃은 거고, 찾으믄 다행, 더 말할 것도 없겄지마는 성이 악담을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죄 없는 사람을 찍어 넣는다꼬 돈이 돌아오겄소? 원수만 사지. 가만히 있어도 돌아올 돈이믄 돌아올 기고 못 돌아올 돈이믄 못 돌아오는 거 아니겄소. 집도 터도 없이 다 뺏긴 것도 아닌데 제빌 그러지마소."
차근차근 말하는 영만은 여러모로 그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본 것 같았다. 아까 김두만의 입에서 송관수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사실 연학은 등골이 오싹했다. 연학이 진주로 돌아가지 않고 미적거리며 앉아 있는 것은 오래간만에 형제가 만나서 할 얘기도 있을 것이고, 남 보기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김두만의 심경이라든가 돌아가는 형편을 살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고, 거기다 송관수가 거론되고 보니 연학은 더더구나 자리를 뜰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이따금 덩치가 크고 나이 들면서 비계살이 붙은 형을 바라보곤 한다. 처남인 김두만보다는 여유가 있고 너그러운 편이지만 그도 실리에는 밝은 사람이다. 연학의 신중한 눈이 영만에게 옮겨진다. 술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만은 연학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앗다. 미끈하게 때가 빠지고 제법 뭐하는 사람같이 된 형에 비하여 영만은 갈 데 없는 농사꾼이었다. 손은 갈구리 같았고 얼굴은 검둥이었으며 햇볕에 탄 머리칼도 누릿누릿했다.
"성의 말대로 삼족을 멸하는 그런 일은 없을 기라 하드라도 칭찬 받을 일은 아니제요. 넘한테 손가락질 받으믄서 자식들 공부 시키 모았자 사람 구실 하겄십니까 내 생각은 그렇거마는, 나야 독립군 될 인야도 못 되고 언애 꼬꾸랭이 조금 끄적이는 식자고 보이 면서기 할 자격도 없고 평생 삽자루나 잡고 땅파고 살 기요마는 앞 뒤 재보는 감양은 있소."
이런 기회에, 모처럼 두만과 마주앉은 기회에다 부친의 장례는 끝났고, 매형도 있는 자리니만큼 가정 일까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영만은 작정한 것 같다. 어떤 책임감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상채기는 아물게 가만히 내버리두고, 휘젓어봐야 덧나기밖에 더 하겄소? 무식한 놈 말이라꼬 덮어놓고 물리치지만 말고 잘 생각해보소. 그라고 좋으니 궂으니 해도 궂은 이리에는 부모 형제고 좋은 일에는 남이라 안 카요? 남이야 떡이나 묵고 굿이나 보고 안 그렇소? 이 분 일도 일이지마는 집안일도 그렇소. 남자 할 일 따로 있고 여자 할 일 따로 있고, 소견머리 좁은 여자 말만 들을 기이 아니라 다른 식구 말에도 좀 귀 기울소. 자식 낳고 사는 조강지처라믄 모리까, 여자란 좋을 때 좋은 기지 돌아서믄 남이고 해악을 끼치는 것도 흔히 있는 일 아니요, 언제 내가 성보고 이런 말 합디까? 아부지도 이자는 안 기시고 하이 식구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안 하겄소. 남한테 척지는 짓 해도 안 되고 가숙한테 모질기 해도 안 될 기요. 그라고 믿는다 하믄서 남자가 세세히 여자한테 이야기 다 하는 것도 못난 짓이라요."
영만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했다. 종학의 술을 부었다.
"목 좀 추기감서 얘기해라."
"오늘은 술 안 할랍니다."
매형의 손을 밀어내고,
"그라고 머, 더 할 말도 없십니다."
순간 영만의 얼굴에는 스스러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작은처남이 자네보다 국량은 넓네. 듣고 보이 하낫도 틀린 말은 아니다. 집안끼리니, 남 없으니 하는 말이다만 왜놈들한테 잽히가지 않을 마큼 처신하고, 작은처남 말마따나 독립군 할 형편은 못 되지 마는 중뿔나게 원성 사고 살아서는 안 되겄다. 말이야 바로 하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 안 하든가? 강약이 부동이라 지금은 우쩔 수도 없지마는."
종학의 말에 두만은 침묵을 지켰다.
"지 생각에는."
연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본의 경비가 어디 보통입니까? 물샐 틈 없는 것이 일본의 졍비고, 또 사건이 사건인만큼 이 잡듯 할긴 게 조만간에 잽히기는 잽힐 성싶습니다."
"그렇까?"
종학이 의문을 나타내었다. 두만이, 영만은 좀 뜻밖이란 표정이다.
"그런 일로 안 잽힌 경우가 별로 없지요. 그것이 또 가정부서 정말 그랬는지 의심스럽기고 하고, 차라리 강도한테 당했으믄 후환이나 없일 긴데."
"후환이라니?"
튕기듯 두만이 되물었다.
"첫째는 경찰에서 시끄럽고 혹시 내통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한께."
"그, 그 점은 나도 생각했고, 이도영이 그 사람도 그것 때문에 오라가라 했던 모앵인데……"
두만의 눈빛이 불안해진다.
"두 번째는 반대로, 그 사람들이 잽히는 날이믄, 또 친일파로 지목을 하고 그랬다믄은 믈귀신맨크로 끌고들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니겄소."
연학은 무표정이었지만 그러난 무서운 말이었다.
"내, 내가 순사 형사도 아니겄고 돈 좀 번 것이 치, 친일이라 할 수는 없는 일.“
하다가 두만은 헝클어진 머릿속을 가다듬기나 하듯 생각에 잠긴다. 한동안 긴장이 흘렀다. 연학의 말은 두만뿐만 아니라 종학과 영만에게도 공포감을 갖게 했다.
"하기는 친일파한테 폭탄을 던지고 칼부림도 한다 카이……이래저래 참 어러븐 세상이다."
종학이 중얼거렸다. 관수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더라면 연학은 그런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심사가 편한 것도 아니었다. 상당히 위험이 따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만은 강한 의혹을 느낀다. 길상의 존재가 크게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의혹이 짙어지면 질수록 공포심도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