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4-3-1
토지 4부 제3편 명희(明姬)의 사막(沙漠)
1장 자매
"어매, 불쌍한 울 어매야! 아이고 아이고오!"
성환할매(석이네)의 작은딸 복연은 친정에 들어서자마자 이고 들고 온 보따리를 내동댕이치고 퍼질러 앉아 통곡부터 시작했다.
"아가야, 복연아 이기이 우인 일이고!"
멍석에 펴 말리던 고추를 걷어 들이려고 한 곁으로 몰아붙이고 있던 성환할매가 일어서며 소리쳤다. 장독을 가시던 귀남매(순연)도
"복연이 아니가!"
반가워서 달려오다 말고 주춤한다.
"어매, 불쌍한 울 어매, 우찌 그리 복도 없소! 아이고 아이고오! 자식 그거 머할라꼬 키았십디까. 그만 개곡창에 콱 처박아부리고 한 나이나 젊어서 신이나 돌리놓지, 이런 영화 볼라꼬 오동지 설한 풍에 으흐흐흣..."
"머가 우애 됐다고 이라노. 초상난 집맨크로,"
왜 작은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통곡부터 하는지 짐작은 간다. 큰딸 마음을 생각하면 울어서는 안 되는데 성환할매는 쌓인 설움이 복받쳐 감당을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다 들었소. 나릿선에서도 들었고 동네 들어서자마자 입 있는 사람은 다 말합디다. 내 짐작 안 한 일은 아니지마는, 불쌍한 울 어매! 이런 영화 볼라꼬 오동지 설한풍에 빨래품 들어 감싸고 우리를 키았는가! 조상도 무심하고 하느님도 무심하지, 부치 겉은 울 어매, 눈이 등장 겉은 아들자식 어디 가고 늙으막에 눈칫밥이 웬말이고오!"
복연의 눈에선 샘 솟듯 눈물이 솟아나온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나도 속상한다는 듯 울타리 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귀남네
"나만 직일 년 됐다."
"어지간히 했이믄 남들이 그럴까, 아이고오 아이고."
"넘들이 머라캤는지 모리겄다마는 하기 좋은 기이 넘의 말 아니더나. 시끄럽다, 넘의 말
믿지 마라."
울다가 복연은 어미 얼굴을 쳐다본다.
"개도 무는 개를 돌아본다요. 어매가 그리 아홉폭 치마로 감싸니께 만만키 생각하고 사우도 장모를 대수로 안 여기는 거 아니것소. 어매가 사우 번 밥 얻어묵고 삽니까. 따지고 보믄 처가살이하는 건데 어매가 기죽어 지낼 턱이 없는 기라요."
귀남네 얼굴이 벌개진다.
"그만 해라. 이웃 사람 듣겄다. 그런 소리 자꾸 해싸으믄 동기간에 의이만 끊어지고, 자아 방에 들어가자."
성환할매는 딸의 팔을 잡아끈다. 끌려 일어난 복연은 땅바닥에 국려놓은 보따리를 들어 마루 끝에 올려놓고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닦으면서
"만고에, 자식 그거 다 소앵이 없는 거라요."
"젊은 기이 에미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고나. 누가 늘이 볼라꼬 너거들 키었더나."
"나부터 직일 년이제. 시집이 멋인고, 서방이 멋인고, 늙은 어매가 묵는지 굶는지 모리고 산께. 우찌 울 어매 한평생이 이런고, 넘들이 복탈 직에 어매는 쇠 먹이러 서천에 가 있었던가. 불쌍한 어매."
"불쌍하기는 머가 불쌍노. 내가 밥을 굶나, 옷을 벗었나. 니 오래비 일만 아니믄 무신 걱정이 있일 기고."
작은딸처럼 아들도 우쭐우쭐 걸어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성환할매는 삽짝을 멍하니 바라본다.
"말같이만 함사아, 집안에 무신 분란이 있일 기든고."
순연이 말했다. 성환할매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 간장에 못 박는 저 말을 또 한다.'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복연이 돌아선다.
"생이 니가 사람가?"
귀남네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래 나는 사람 아니다. 귀남아배는 소새끼 겉은 놈이고 나는 여시 겉은 년이라 하더라. 동네 사람한테 다 들었다 캄시로 와 나보고 따지노."
"생이 니도 니 자석이 귓체? 부모 중한 줄 모리더 사람도 껌은똥 누고 나믄 부모 은공을 알게 된다 카는데, 생이 니는 우찌된 사람고."
"니는 한 기이 머 있어서 큰소리고!"
"와들 이라노. 오래간만에 만낸 동기간에 남 부끄럽다. 어서 방에 들어가자."
성환할매는 딸의 등을 민다.
"하여간에 나도 이분에는 쫀쫀히 말 좀 하고 갈 기요."
마음 같아서는 악을 쓰고 싶었지만 남정네가 돌아오면 일 크게 벌어질 것을 염려한 순연은 간신히 성질을 누르며 함께 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도사리듯 윗목에 앉는다.
"우인 일로 온다는 소식도 없이 이리 왔노."
성환할매는 행여 자매간에 큰 시비가 붙을까 전전긍긍하며 물었다.
"진작 한분 올라 캤더마는 앞세우고 올 것도 없고, 추수하고 나믄 쌀말이나 담가서."
"우리도 농사 짓는데 그런 거사."
"오래간만에 친정 옴써 우애 그냥 옵니까. 찰떡하고 시루떡을 좀 해 왔는데, 그거는 이웃간에 갈라묵고, 찰수수 찰조하고 찹쌀 그라고 녹두 조맨 가져왔는데 아아들 떡해주고, 어매 얌얌할 직에 밥해놓고 잡수이소."
"머할라꼬 그런 거는 가지오노. 시부모 눈 밖에 날라꼬."
"아입니다. 시어무이도 가지가라고 권하데요."
"그래 집안은 두루 편나. 너거 씨어른들도."
"씨어무이가 다리를 좀 삐었지마는 다 괜찮십니다. 그런데 형부하고 아이들은 어디 갔소?"
"귀남아배는 나무하로 가고 아이들은 굴밤 줏으러 갔다."
순연이 대답했다.
"배서방도 함께 올라 캤더마는 씨어무이가 다리를 삐는 바람에, 이러다가 나도 못 가는 기이 아니까 싶어 좀 볶았지요. 그래 이녁은 남으라 해놓고 부랴부랴 나온 길입니다."
복연은 처음으로 웃는다.
"아아는 우짜고."
"시누도 있고 다 컸인께, 데리고 올라 카믄 짐도 많이 못 가지 오겄고 해서 떼놓고 왔십니다. 지 밥그릇이사 챙기겄지요.“
"배서방도 별일 없겄제."
"야. 무신 일이 있겄소. 말로는 사람 노릇 못한다 해쌌더마는, 허리 좀 피게 되믄 사우도 자식인데 한 분 기시는 장모 내 몰라라 하겄느냐, 하기사 말 가지고 못할 일이 어디 있겄소. 서천서역의 약물인들 못 질어 오겄십니까."
처가에 무관심한 남편을 변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망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말만이라도 고맙다."
"니내 할 것 없이 사우는 고내기 새끼, 다 마찬가지 아니겄소."
"사람 되기에 매인기지. 안 그런 사람도 흔히 있네라. 야무네 사우만 해도 세상에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푸건이 신랑말이지요?"
"운냐, 푸건이가 죽은 뒤 장개도 안 가고 몇몇 해를 처가에 들면 날면 그렇기 못 잊어 안 했나."
"병들었다고 시가에서 쫓기나서 종내 그렇기 죽었인께 가심에 못을 박아놓고 간 기지요."
"그래서 저거 집에는 등을 돌리고 안 간단다. 야무네 말이 정처 없이 돌아댕기다가 처가라고 한분 나타나믄 눈에 심이 찌어 못 보겄다 하더마는 이자는 맘 잡고 과부 하나 얻어서 살림을 차렸는데 그래도 가끔 온다 안 카나. 망처 생각이 나서 그러겄지. 설 명절, 추석에도 내우간이 술병 들고 찾아오는 거를 보이 남의 눈에도 보기 좋더마. 야무네도 이자는 사우라기보다 아들 겉애서 새로운 여자도 며누리같이 한시름 놨다 하데."
"그런 사램이 어디 쉽겄소. 다 전생의 인연이겄지요."
"딸 없는 사우 아무리 그래싸아도 끝난 기고 남우 사우 들먹이믄서 비양치는 것 그만 하소."
더 못 참겠다는 듯 귀남네는 화를 냈다.
"말을 하다 보이, 비양은 무신 비양."
"귀남이아배를 좋기 봤이믄 그런 말 하겄소?"
"생이 니도 참 이상하다. 너거들이 잘못한 기이 없이믄 남우 일에 심장 상할 기이 머 있노. 한 가지를 보믄 열 가지를 안다고 매사에 니는 니 신랑 편에 서서 그러이 어매 설 자리가 어디 있일 기고, 내사 부러번이믄 부러벘지 언짢은 생각 안 든다."
"제발 이러니저러니 하지 마라."
성환할매는 손을 내저었다. 귀남네도 동생의 조리 있는 말에 끽소리도 못한다. 한참 있다 복연은,
"야무어매는 그래도 고생 끝에 보람을 찾았는데..."
"멀리 있는 니가 나보다 더 잘 아네."
귀남네가 역시 좋잖은 어투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한께 알았지."
"야무어매를 만났더나."
도대체 누가 복연에게 세세한 얘기를 하였나 천착한 듯
"야무어매는 못 보았고 나릿선에서 동네 사람이 그러더마."
"그게 누군데."
"알아서 머할래. 찾아가 시비할라나."
"묵고 할일이 없인께. 말 좋아하는 것들."
"농사꾼들이 우애 묵고 할일이 없겄노. 예사 옳은 말은 소태겉이 쓴 법이다."
"흥, 동네 사람 모두가 훈장이제."
"그만 못 두겄나? 많찮은 동기간에 며칠이나 볼 기라고 짜작바작, 너거들이 이라믄 내 맘이 편컸나."
성환할매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어매도 참, 짜작바작 싸우는 거 아니요. 동기간인께 하는 말 아니겄소. 넘 겉음사. 그나저나 서로 본께 듣기 싫은 소리도 하게 되는데, 오래비는 우찌 됐십니까. 소식은 듣십니까."
"소식이사 머."
하는데 의외로 성환할매는 태연했다.
"확실한 거는 모리지마는 만주에 가 있는 모앵이라. 잽히지만 않으믄."
마음까지 태연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같이 자신의 몸을 가르고 나온 자식이건만 하나는 멀리 남의 집 며느리가 되었으니 출가외인이요, 하나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출가외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딸들로 인한 외로움, 내게도 아들은 있다. 그런 대항 의식이었을까, 딸들 앞에서 아들을 위해 울지 않았던 것은. 제 자식만큼 조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한 그 이치 때문에 틈은 생기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딸이란 타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성환할매는 뼈저리게 느낀다. 아비 어미 없는 손자와 손녀 때문에 수없이 흘린 눈물, 그러나 아들을 위해서는 마음속으로만 운다. 하기는 처지가 바뀌어 딸이 그런 경우였었다면 아들 며느리한테서 타인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설마 어느 때고 돌아오겄지요. 어매가 맘을 단단히 가져야, 어매가 성해야 아아들도 크지."
"와 아니라. 새끼들 땜에 나도 큰맘 묵는다. 니 오래비 올 때꺼지 우떤 일이 있어도 내가 살아야 안 하겄나."
"하모요. 한 다리가 천리라꼬 고모도 남이제, 아무리 맘이 있어도."
"최참판댁의 바깥주인 돌아온 거를 본께 설마 우리라꼬... 걱정말라꼬 몇 분이나 말해쌌더라마는."
"바깥주인이라 카믄."
"와 그 심부름꾼 길상이, 모리나?"
귀남네가 말했다.
"말 함부러 하지 마라. 길상이라니."
성환할매는 귀남네를 나무란다.
"누가 듣는다고 그랍니까."
"누가 들으나마나, 지금은 훌륭하게 됐인께, 만주서는 독립당의 우두머리라 카이."
길상을 두고 독립당 우두머리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어느덧 독립당이라는 말이 나돌았고 성환할매는 서슴없이 우두머리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성환할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다. 사실 왜정에서 불온사상이라 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것을 두고 이름이요, 대다수 조선 민족은 그것을 독립운동으로 보았으며 그 모든 것이 지하 조직이었으므로 실체가 드러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압제 하의 민중심리는 그들 활동을 과대하게, 인물들은 미화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부인 못한다. 독립당이라 함은 동학을 동학당이라 했던 것처럼 서민들 사이에 있어서 쉽게 넘어가는 어휘에 연유한 것이나 아니었을지.
"잽히믄 우짤라고 돌아왔이까요."
복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아가? 영 초저녁이네. 잽히가지고 까막소에서 콩밥 묵다가 풀리났는데 무신 소리 하노."
순연의 말이었다.
"아아 그랬구나, 아아 잽히갔다가... 촌구석에 처박히 있인께 머를 알아야제. 내가 어릴 직에 보기는 봤일 긴데 그 사람 얼굴은 생각 안 나누마. 참말이제 참판님댁의 사우가 됐이믄편키 앉아서 살아도 되는데 그런 큰일까지 한다 카이 정말로 훌륭한 사램인갑다."
복연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며 감탄한다.
"우리 성환애비보다 칠팔 세는 더 묵었을 기다마는 어릴 직에도 남다른 데가 있더마는, 사람 될 거는 떡잎부터 안다 안 하더나. 그새 세월이 이십 년 넘기 흘러서 만나 보이 참판님댁 아씨하고 지운 데가 한 푼 없고 참말로 하늘이 맷어준 부배라. 까막소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우짜믄 그리 잘도 생깄는지."
길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 석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통한다. 어쨌던 길상의 귀향은 성환할매에게 큰 희망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이 하인 신세를 면하고 상전 아씨랑 혼인을 했겄지요."
귀남네의 생각은 성환할매하고는 다르다.
'덕 좀 본다고 언간히 그래쌌는다.'
세를 따라 저런다 말하고 싶은 귀남네의 심정이었으나 설사 성환할매가 그랬기로서니 신세지기론 귀남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귀남네는 성환할매를 동정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일수록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보낼 것이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의 터전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했다. 어쩌다 나타나는 연학이 쌀쌀하게 자신을 대할 때
'내가 머를 우떻게 잘못했다고 저러는고. 참말이제 속이 상해 못살겄다.'
귀남애비보고 죽을 먹는 한이 있어도 대처에 가서 품팔이하며 마음 편하게 살자는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무신 소리 하노? 부자 밥 묵듯 굶을 긴데 맘이 우찌 편할 기고."
딴은 그렇다.
'길상이 그 사람 말만 하믄 어매는 저리 기가 펄펄하이.'
친정에 들어서자마자 통곡부터 하는 복연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항 못한 까닭도 실은 길상이 지금 평사리에 돌아와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땅을 내준 집의 바로 당주가 길상이기 때문이다.
"니 배 안 고프나?"
성환할매가 물었다.
"어매 얼굴을 보이 배고픈 줄도 모리겄소."
복연이 말했다.
"일직이 저녁해라. 오는 길에 요기나 했는지."
이번에는 순연을 보고 말했다. 순연은 자신만 소외된 듯 심정이 편안하지 못했고 어미는 미웠으며 동생은 원망스러웠으나 잠자코 일어섰다.
"어매, 저고리 있이믄 하나 주소."
"와, 갈아입을 옷을 안 가지왔나."
"야, 곡식 한 톨이라도 더 물고 올라꼬 단벌로 왔소."
"무신 청승고. 밥이사 어디 굶나. 그나저나 내 저고리가 컬 긴데 입겄나. 니 성보고 하나 돌라 칼까?"
"집에서 입는데 커믄 우떻소."
복연은 인조견에 반회장인 저고리를 벗고 어미가 내주는 무명저고리를 입는다.
"치매도 주까?"
"괜찮소. 치매사 무명인께 더러부믄 빨아서 입고 가지."
"며칠이나 있일 기고."
그 말대답은 없이
"이분에는 그냥 안 갈 기요. 버르장머리 좀 고치놓고 갈라요. 귀남아배는 본시 곰인께 그렇다 치고 생이는 남도 아닌 자식인데 그럴수는 없소. 너거 어매 불쌍다 불쌍다 해싸은께 내 맘이 머가 좋겄소. 형부하고 금슬이 좋은께 생이 하기에 딸린 거 아니겄소."
"시끄럽다. 입 다물어라. 좋은 기이 좋더라고. 동네 사람들이 이러고저러고 해쌌는 것도 내사 듣기가 싫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노. 니 생이는 내 자식 아니가. 내가 못 가리킨 죄지."
"우찌 그리도 모리는고. 남 하는 거 보지도 못했는가."
"동네 사람이나 니가 자꾸 이래싸으믄 얼은 나한테 떨어진다. 그란해도 동네방네 댕기믄서 자식 헌해한다꼬, 그럴 때마다 인병이 든다. 아아들 땜에 부애가 나서 좀 머라 카믄 서방하고 갈라져서 친정 일만 볼까 부냐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안 하나. 친정 에미가 들어서 안 살고 간 성환에미 생각을 하믄 누둔증이 생기는 나를 보소 말이다.”
치맛자락으로 입을 막고 소리를 죽이며 성환할매는 운다.
“귀남애비 하는 짓이 하 괴씸해서 자식이라고 설은 은정하믄 누가 그런 사람한테 시집보내라 했는가 날 보고 우짜라는고 얼굴이 벌게지믄서...으흐흐흐...어매 참으소 날 봐서 참으소, 그 말 한마디믄 될 긴데 어 디 한분 그런 말 하까.”
성환할매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속으로만 쌓였던 설움이 복연한테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설움이야 어디 그것뿐일까. 높은 곳에걸어놓은 바구니, 삶은 보리가 든 바구니 속에 삶은 고구마를 넣어두었다가 귀남이만 따로 불러 먹이는 일이며 간조기는 사위 상에만 오르고, 남희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며 귀남의 밥그릇엔 겉만 보리밥이며 쌀밥을 속에 파묻었기에 귀남이는 늘 밥을 파먹었다.
“내가 동네방네 댕기믄서 자식들 헌해를 한다...으흐흐흐... 저거들은 아무리 그래도 에미 맘은 안 그렇다. 저거들이 여기서 나가믄 집도 절도 없는 처지 아니가. 품팔아서 입에 풀칠이나 하겄나? 속이 썩고 썩어도 말 못한다. 볕바르게 땅을 남 주어서 양도나 받아묵으라는 둥, 그기이 말이나 되나. 저거들 고생하는 거를 바래는 어느 에미가 세상천지에 있일 기고, 참말이제 말이라도 하고 살믄 내 복장이 이리 터지겄나. 으흐흐흐으으... ”
순연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을 때, 그러니까 진주서 물지게를 지던 석이가 서울로 올라간 뒤, 부모 형제도 없이 남의 집 머슴으로 전전하던 현재의 귀남아비한테 시집을 보내었다. 시집 안 갈려고 우는 것을 등을 떠밀다시피. 성환할매는 그때 일이 늘 마음에 걸리곤 했었다. 복연은 석이가 돌아온 뒤 학교 교사직에 있을 때, 오라비가 교사다 할 것 같으면 혼담에 있어서 그것은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해서 복연은 제대로 시집을 간 것이다. 경남에서는 봉건적 유습이 완고하게 남아 있는 고성(固城)으로, 시가는 땅마지기나 있는 자작농이었다.
“어매는 모리는 척 가만 기시이소, 내가 알아서 할 긴께.”
“제발 시끄럽기 하지 마라. 귀남애비 주사가 심하고 뿔뚝성이 있인께.”
방에서 나온 복연은 치맛말을 올리면서 부엌으로 들어간다. 귀남네는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성아, 부석에 불 땔까?”
복연의 말에 귀남네는 코를 훌쩍거리며
“밥 안 안쳤다.”
“내가 안치까? 쌀은 씻어놨다.”
“바가지에.”
하면서 일어섰다. 부엌 서까래로부터 늘어뜨린 갈고리, 그 갈고리에 걸려있는 바구니를 내려준다. 복연은 덮여 있는 삼베 수건을 걷고 바구니 속의 삶은 보리를 솥바닥에 깐다.
“추수도 했는데 밥 좀 보더랍게 해묵지. 웃쌀이 너무 적다. 이도 없는 어매, 불근거리싸아서 잡숫기가 상그럽겄다.”
“너거 형편하고 같나.”
그러나 한풀 꺽인 목소리다. 복연은 밥을 안친 뒤 솥뚜껑을 닫고 솔가지를 뿐질러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귀남네는 껍질을 벗긴 감자를 썬다.
“내 헌해하니라고 실이 노이 됐겄다.”
성환할매가 방안에서 작은딸한테 무슨 말을 했을까 따보듯 말했다.
“어매도 할말이야 많겄지마는 나라고 할말이 없겄나. 외손자는 손자 아닌가. 성환이 남희 일이라 카믄 떨떨 떠믄서 우리 귀남이는 길가에 굴러있는 개똥맨크로, 낳는 쪽쪽 내다버리고 그거 하나 가까스로 붙들어서 키우는데, 말이야 바로 하지 내 자식보다 조카 자식이 더 귀엽을 텍이 없지. 귀남이한테 내 좀 마음을 쓰는 것을 어매는 못 본다. 나도 미련한 남정네하고 양새 낀 나무맨크로 참말이제 못 견디겄다.”
“방에 가믄 방의 말이 옳고 정지에 가믄 정지의 말이 옳단다.”
부지깽이로 불을 헤집으며 아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했다. 귀남네는 솥뚜껑을 열고 썬 감자를 뿌리듯 밥 위에 놓은 귀 뚜껑을 닫는다. 그러고 나서 작은 솥에 불을 지핀다.
“국가.”
“응.”
자매는 솥 밑으로 빨려들어가는 불꽃을 말없이 바라본다.
“본시 보고 배운 기이 있이야지. 천성은 곰겉이 미련하고 그런 거를 낸들 우짜겄노. 안살고 말 것 같으믄 모리까 따라 살라 카믄 하늘 울 때마다 벼락 때리겄나.”
“...”
“생각해보믄 귀남아배도 그렇지. 남자 오기, 이녁이 잘 살아서 장모를 모신다믄.”
“형부가 장모를 뫼시? 실없는 소리 치아라. 우리집 남정네나 형부는 장모 뫼실 그런 사람들 아니다.”
“이럴테믄 그렇다. 그 말이제. 형편이 되기로 어쨌거나 처가살이 아니가. 일은 쇠빠지게 함서 처가 신세진다는 말을 들으이, 우떤 때는 부애도 안 나것나. 내가 머 서방이라고 편역들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기다. 생이가 들어오는 거 아니었다고. 남 주어서 양도나 받나묵는 긴데,”
귀남네는 움찔한다.
“서로가 이 편찮고 나, 의가 상할 줄 알았다. 어매 생각에는 너거들이 하도 못산께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지마는 그기이 그리 뜻대로 되야지.”
복연은 곁눈질 하며 귀남네 기색을 살핀다.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못산께.”
밥이 끓기 시작한다. 국솥에서도 김이 오른다. 복연은 신중히 생각하고 있는 얼굴이다.
“귀남아!”
귀남아비가 돌아온 것 같다.
“형부요?”
복연이 부엌에서 내다본다. 지게를 받쳐놓고 나뭇단을 울타리 옆으로 옮겨가던 귀남아비,
“처제구마. 우인 일이요.”
반가워한다.
“걱정 안 됩니까, 형부.”
나뭇단을 옮겨놓고 옷을 털면서 이마빡이 까진 조그마한 몸매의 목연을 바라 본 귀남아비
“무신 말인고?”
“양식 굴믄 걱정 아니요.”
“참 내, 내 살림이라 걱정이까.”
“인자 말도 할 줄 아네요.”
놀려댄다. 이들 처제 형부는 비교적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처음 장가온 귀남아비가 조그마한 처제에게 반말을 했을 때
“씨동생보고 반말하는 형수 없고 처제보고 반말하는 법 없소.”
당돌하게 무안을 주었던 복연이었다.
“귀남에미는 어디 갔나?”
부엌을 들여다보려 하는데 막아서듯
“멋생긴 마누라 누가 업어갔이까 봐 찾아쌌십니까.”
“허 참 그런 말 안 하거마는. 밥대기가 없이믄 누가 내 배를 채워 줄 기든고.”
하면서도 은근히 집안 공기를 살피듯 귀남네 얼굴을 보아야 사태를 알겠다는 그런 표정이다. 그랬는데 귀남네가 얼굴을 보아야 사태를 알겠다는 그런 표정이다. 그랬는데 귀남네가 뚝배기를 들고 고추장을 뜨러고 장독가로 나온다. 이녁 왔소, 하는 말도 없이 남편은 본 체 만 체 고추장을 뜬다. 그때 벌써 귀남아비 이마빡에 줄이 하나 서 있었다.
“밥은 우찌 됐노!”
“와 그리 갑쳐쌌는 기요. 객식구가 기세도 좋다.“
귀남네는 그릇물을 부뚜막에 옮겨놓고 마른 행주로 닦은 뒤 솥뚜껑을 연다. 김이 물씬 서려 오른다. 주걱에 물을 묻히고,
"된장 뚝배기 좀 들어내라."
복연은 된장 뚝배기를 행주에 싸서 들어낸다. 귀남네는 젤 큰 밥사발을 들었다. 보리를 조금씩 썩어가며 밥은 푼다. 사발 위로 올라간 밥은 사발 밑의 밥만큼 높다.
"무신 밥을 그리 많이 담노."
복연이 음흉스럽게 말했다. 뻔히 알면서 눈빛이 뭔가를 노리는 매같으다.
"장골이 온종일 일하고 이것도 안 묵으믄 우찌 전딜 기고."
귀남네는 무심히 말했다.
‘오냐, 이 버릇부터 내가 고치놓고 가야제.’
"그러믄 그기이, 형부 밥이다 그 말가? 우짠지 그릇이 크다 싶었다."
주걱을 든 채 귀남네는 돌아본다.
"생이 니 그래 가지고 안 되겄다."
"와."
"상하 구별도 못하나. 만고에 이런 법은 없다. 잔말 말고 그 밥 어매 밥그릇에 옮기라. 그러이 동네 사람한테 욕을 묵지, 욕 들어서 싸다, 싸아."
"남자 밥을 먼저 퍼지 그라믄."
"니는 남자만 알았지 어른은 모리나. 어매도 젊었을 때 말이지. 우리 씨어무이가 주개를 들믄 아들 밥 먼저 퍼지마는 내가 주개를 들믄 남정네 밥 먼저 못 펀다."
귀남네의 얼굴이 벌개진다. 화도 났고 다소 부끄럽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자 밥을 먼저 푼다는 것은 그리 허물되는 일은 아니었다. 복연은 알면서 일부러 그래 본 것이다. 귀남네는 성환할매 밥그릇에 밥을 옮기는데 반쯤 옮겼을 때 그릇은 찼다. 밥이 남은 그릇에 보리가 많이 섞인 것을 다시 고봉으로 올린다.
"상은 우째 하나고, 어매 상은 안 차리나?"
"..."
복연은 선반 위의 상을 내려서 재빨리 닦아내고 간장 종지 김치 보시기, 수저를 챙겨놓는다.
"머리칼이 허옇기 돼서도 상 못 받는 신세라니, 독사 겉은 며누리도 시모 조석은 상 위에 올라서 준다."
"아이들하고 함께 잡술라 카이 그러지."
아이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우리 새끼들 오나. 야들아, 고성 고모가 왔다."
사위가 왔을 때는 숨죽이듯 기척이 없었는데 성환할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모 어디 있소!"
성환이 큰소리로 묻는다.
"나 여기 있다아!"
복연이 소리를 지른다. 성환이 남희가 튀어왔다.
"고모!"
그들 뒤에서 귀남이 기웃거린다.
"아가야."
복연은 아이들을 감싸 안는다.
"어서 밥 묵으로 가자. 마리로 올라가거라. 배고프제?"
아이들은 마루로 우를 몰려간다. 밥상을 들고 나오면서
"굴밤은 얼매나 줏었노."
"다 줏어가고 얼마 없데요."
성환이 대답했다.
"어매, 상 받으이소."
"야아가, 상은 무신 상고."
"아이들 뽄 보요. 와 다 늙어감서 허리 꾸부리고, 청승시럽게."
"내가 머, 니 형부 상부터 안 가지오고."
"장유유서라 했소 이래가지고 아이들이 머를 배우겄소. 아무리 상사람 집구석이라 캐도."
귀남아비 들으란 듯 큰소리로 말하고 나서, 복연은 혀를 찬다. 성환할매는 얼떨떨해하고 아이들도 놀라는 것 같다. 다음 상을 들고 온 복연은
"형부! 밥 안 자실 기요?"
귀남아비는 방문을 열고 슬렁 나왔다.
"오늘은 처제한테 상 한분 받아보소."
상을 놓으며 말한다.
"이거 황감해서 우짜꼬."
감정을 목구명 속으로 꾹꾹 밀어 넣으며 그래도 비트는 말을 했다.
"할매 밥보다 아부지 밥에 보리가 더 많다!"
귀남이 눈치 없이 말했다. 성환이와 남희는 송연히 우쭐하는 것 같고, 사실 아이들에게는 보리가 많고 적은 것은 상당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아아니, 그라믄 다른 때는 이도 없는 할매 밥에 보리가 더 많다 그 말가."
성환할매는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귀남아비는 송충이를 깨문 듯 상을 찡그리며 숟가락을 들고 된장국부터 떠서 입에 확 밀어 붙인다.
"노인네 보고 들라는 말도 없이 혼자만 잡숫는 가요. 형부도 참."
농담 반 진담 반, 참다못해 성환할매
"용망시럽기 남자 밥상머리서 무신 말고."
그러나 복연은 모친 말은 들은 척 만 척이다. 귀남아비는 눈알을 굴리다가
"조석으로 보는데, 손님도 아니겄고 입에 발린 말 하믄 머하는고."
"우리 곳에서는 그라믄 숭보요."
"정 이럴 기가, 밥이고 머고."
성환할매는 거의 울상이었다.
"얄궂어라. 그리 면구하믄 마당에 가마때기 깔아놓고 거기서 잡술라요?"
복연은 언니 부부의 목을 조르듯, 처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우리한테 잘못이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를 할 것이며, 하면 될 터인데 그런 말을 할 줄 모르는 귀남아비, 밥숟가락 밀어넣듯 꾸역꾸역 감정을 밀어 넣는다. 자칫 잘못하면 대판 싸움이 날 것 같아서였다. 결코 복연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식구들은 모두 음식 앞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귀남네는 풀죽은 듯 말이 없다.
"야들아, 밥은 조맨만 묵어라. 배부르믄 떡 못 묵을 기다."
"고모 떡 해왔십니까?"
성환이 신이 나서 물었다.
"운냐, 너거들 새 주둥이 겉은 입 생각함시로 고모가 딱을 안 했나."
"우신 떡이요."
귀남이도 덩달아 신을 내며 물었다.
"찰떡도 하고 시루떡도 하고."
"나는 찰떡이 맛있더라."
귀남의 말에 남희가
"나는 시루떡이 맛있더라."
"시루떡이 머 맛있노."
좋은 나머지 아이들은 입씨름을 벌인다.
"너거들 늘 이렇게 싸우냐?"
"귀남이는 욕심꾸러기요."
"니는 야시다."
"싸우지 마라. 밥 묵을 때 싸우믄 복 나간다. 그라고 형제끼리 커믄 서로 도와감시로 살아얄 긴데 싸우믄 되나."
성환할매, 귀남아비, 귀남네는 다같이 말이 없다.
"사촌은 형제 아니건데? 더군다나 귀남이 니는 혼자 아니가. 후제 커서 남허고 싸울 때 누가 편들어줄 기고, 살아갈라 카믄 오만 일이 다 있는데 외로브믄 안 된다."
그 말에 대해서는 귀남아비 귀남네 다같이 표정이 달라진다.
2장 야무의 귀향
우서방을 살해하고 지금 부산에 있는 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오서방의 댁네는 김훈장댁 문전까지 와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춤주춤하고 있었다.
"내 팔자야, 내 신세가 와 이리 되었는고 내 신세야."
입속으로 중얼중얼한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아무 근심 걱정이 없었는데 우짜다가... 이기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나는 모리겠네."
추석을 보내고 추수가 끝나자 계절은 갑자기 달음박질이었다. 달은 섬진강 쪽에서 올라오는데, 그리고 바람도 없는데 초저녘의 기운은 몹시 차다.
"자다가도 모리겄고, 길을 가다가도 모리겄고 와 이 지경이 왰이꼬."
뒤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오서방댁은 소스라치듯 돌아선다.
"뉘십니까."
"아이고, 나는 또 집에 기시는 줄 알고."
오서방댁은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데 허리를 굽히며 인산를 한다.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가."
"예."
"그럼 돌아가시지 않고."
범석이었다.
"자아 들어가십시오."
"어디 갔다오십니까."
"네. 읍내까지."
"그라믄 고단하실 긴데, 나는 내일이라도 다시 오겄십니다."
"괜찮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바쁜 일도 아닌데."
"바쁜 일 아니면 어떻습니까."
"저녁도 드시야 할 기고."
오서방댁은 거듭 사양을 한다.
"저녁은 읍내서 먹고 오는 길입니다."
"아이구 참, 이거 미안시러바서 우짜고."
오서방댁과 함깨 집안으로 들어간 범석은
"어머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달빛은 마당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안방 문을 열고 산청댁이 내다본다.
"이제 오나."
"네."
부엌에서는 범석의 처가 뒷설거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빛이 새어나왔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가, 아범 왔다. 저녁 차리지."
"네."
부엌에서 범처의 처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읍내서 저녁 먹고 오는 길입니다."
"읍내서?"
"네. 친구 집에서 먹었습니다.."
산청댁은 범석의 뒤에 엉거주춤 어 있는 오서방댁은 미쳐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님, 별고 없십니까."
오서방댁이 모자간의 말이 끊어지는 사이를 틈타 인사를 한다.
"아니 오서방댁 아닌가."
"예. 저녁에, 이거 예가 아닙니다."
"별소리를 자아, 올라오게."
하는데 범석이
"아버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묻는다.
"음"
산청댁은 어정쩡하게 대답하였다. 그저께 한경은 지리산의 해도 사를 아간 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추석날의 일이었다. 차례를 지낸 뒤 한경은 아들 범석에게 느닷없이 이야기 좀 하자 하며 뜻밖의 말을 했다.
"산소를 하나 잡아야겠는데."
"산소라니요."
범석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던 것이다. 설마, 아버지 자신이 묻힐 산소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싶었던 것이다.
"너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보았느냐?"
마을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리고 다소 모자라는 사람으로 치부된 한경이었다. 집안에서도 농사를 열심히 짓고 조상을 공경하는 이외,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일체 자신의 주장을 세우려 하지 안던 한경이었는데 아들에게 물어보는 그의 눈은 이상하게도 엄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아버님 산소 말씀입니까?"
"너는 그렇지 않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변하기는 변한 모양이구나."
한숨을 내쉬며 섭섭해하는 듯 한경은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무라자고 한 얘기는 아니네."
이번에는 오히려 한경이 쪽에서 미안해하는 것처럼, 남의 집 아들보고 말하듯 했다. 한경은 부인인 산청댁이나 며느리, 그리고 아들인 범석에게도 평소 자신이 못나서 미안하다,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나도 저에는 그 생각을 못해봤는데 홍이 그 아이가 민주로 떠나면서부터 그 생각이 나더구만."
비로서 범석은 깨달았다.
"아버님의 유해가 이역 땅 만주에 묻힌 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이 이같이 각박하다고는 하나 자식된 도리를 잊은, 불효막심한."
목소리가 꽉 잠기어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옛적에 우리 조상들은 호지에 묻힌 부모형제의 뼈를 막대한 돈으로 보속하고 찾아와서 내 땅에 옮겼다 하지 않더냐? 그 보속금을 위해 가산을 팔고 피땀을 팔고, 오늘겉이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기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생각해보면 내가 참으로 금수보다 못한 위인이었구나."
조실부모하고 집안은 영락하여 떠돌던 김한경이 글을 읽었을 리도 없고 김훈장에게 양자로 온 뒤 다소의 훈도는 받았다 하지만 양부 김훈장이나 양가의 조상을 지순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의 생래적인 인품의 탓인 듯, 그리고 그 어리석음과 유순함이 남의 눈에 모자라는 사람, 그러나 지금 한 말에는 조리가 있다. 김범석은 입을 닫은 채 말이 없었다.
"내 본시 배운 것이 없고 사람됨이 미달하여, 또 아버님께서 김씨 가문을 보존하라는 엄명이 계신지라, 아버님께서 의병장으로 산에가셨을 때나 만주로 떠나실 적에도 이 불초, 아버님을 뫼시고 동행하지 못했음이 한이거늘 하물며 아버님 세상 버리신 지가 이십 성상이 다 되어가건만 이장은커녕 그 묘소에 벌초 한 번 못하였으니 어찌 금수보다 낫다 할 것이냐."
한경은 드디어 오열하는 것이었다. 범석은 그러한 부친을 멀끄러미 바라본다. 새로운 발견이라 해야 했을까. 범석은 부친이 조리 있게 긴 말을 하는 것을 세상에 나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 생전에 그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게야. 다행히 홍이가 그곳에 가 있고 최참판댁 바깥어른이 지금 그 댁에 계시니 그분이야말로 아버님 유해가 묻힌 곳을 소상히 아실 터인즉 엄두도 못 내었던 일을 이제 착수하여도 무방할 듯."
일도 크게 벌어질 것이지만 그런 형식의 조상 숭배나 효도를 옳다 생각지 않게 된 김범석은 그러나 반대할 수는 없었다.
"아버님 뜻대로 하십기오. 소자도 힘자라는 데까지."
했던 것이다. 한경은 만주에 가 있는 홍이를 태산같이 믿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홍이에게 김훈장은 처조부가 도니다. 김훈장의 유일한 핏줄 점아기의 사위가 아닌가. 한경에게는 조카사위다.
"어머님의 산소가 뒷산에 있지마는 불품이 없고 자리도 마땅찮아 기왕이면 지관에게 새로운 묘소를 부탈학까 하네, 통영의 너 고모도 이제 살 만하니 다소는 도와줄 것이고."
그 일을 위해 몇 밤을 지새며 생각하였는가 범석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일에 어두운 부친이 홍이를 생각하고 최참판댁 윤국의 부친을 생각하고 비용을 위해 통영 고모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일을 두고 부친이 노심했는가 집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범석은 오서방댁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등잔의 심지를 올리면서
"이쪽으로, 아랫묵으로 내려오게."
방문 옆에 쭈구리고 앉은 오서방댁에게 상청댁이 권하였다.
"괘안십니다. 지 일로 온 것만도 미안시럽는데."
"별말을 다하네. 우리 아범은 늘 그래오지 않았는가."
예날 김훈장이 그러했듯 범석도 마을 사람들의 의논 상대였다. 면소의일이라든지, 농민들이 모르는 일을 대신해주었다고 편지 대필에서 대소사 의논에 응해온 터이다.
"그래 안에 있는 사람은 몸 성한가."
"그거를 우찌 알겠십니까. 재판받을 적에 보고는 못 봤인께."
눈물도 말랐는가 오서방댁은 담당하게 말했다.
"하기는, 그렇다고 해서 맘 잘못 먹으면 못쓰네."
"모진 목숨, 못 꿈을 꾸는 기이 아닌가, 앉아 생각하고 서서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인데."
"왜 안 그렇겠나. 졸지 간에 당한 일이니."
"이 자는 아아들 다 베리놨고, 호적에 붉은 줄 한분 그었이믄 자손 대대로... 기가 맥히서 이자는 눈물도 안 나니께요."
"운수불길도 푼수가 있지. 우리도 거짓말겉이 생각되는데... 그래도 세월만 기다리면 만나게 될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그저 다 전생에 무슨 척이 져서."
범석은 돌아오지 않는 부친 생각을 하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기 말입니다. 우리집 남정네가 우서방한테 전생에 못할 짓을 하지 않고서는 우찌 일이 이러크름 됐겄십니까. 서로간에 이해 상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서방 땜에 우리 승구아배가 그라믄 쓰나, 딱 그 말 한마디 한 것뿐인 기라요. 사갈 사램이 그거를 알고 안 사겄다 한께 무담시 우리 승구아배가 축축거리서 그랬다고 운수가 나쁠라 카이, 그기이 꼬타리가 돼서 뜬금없이 의병질이 멉니까? 근가죽에 가본 일도 없는 사람을 의병질했다고 관에다가 고해바치서 졍찰서까지 붙들리 안 갔십니까. 그기이 오래된 일이라요. 다행히 징거를 댈 사람들이 많앴고 읍내의 무슨 주사라 하든가? 그 사람이 심을 써서 나왔는데 그때부터 앙숙이 도니 기라요. 승구아배도 그렇지요. 동네 사람들이 사람 독한 거는 범보다 무서브니 갈지 말라고 그렇기 타일렀는데 욱하는 성미를 못 참고."
역시 울지는 않았다. 한숨만 내쉬는 것이었다.
"그러기 사람 영악한 거는."
"오늘 지가 여기 온 거는 아무래도 이 돈네에서는 못 살 것 같에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처음으로 범석이 입을 떼었다.
"당하는 것도 하로 이틀이지, 그 집 식구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마주치기만 하믄 달겨들어서 폭행을 한께, 대항하는 것도 하로 이틀, 지는 머 그렇다 카더라도 우리 승구 나이도 아직 어린 것을 오늘 낮에도 막 패서 이혈이 낭자해가지고 집에 왔는데, 정말 이래 가지고는 동네에 살겄십니까. 위로 누부들은 다 시집가부리고 남은 거라고는 그거 한 놈인데 이러다가는 또 샐인 날 판이요. 하루에도 동네를 떠고 싶은 생각이 열두 분도 더 납니다. 바가지를 들고 빌어묵는 한이 있어도."
"나도 그 얘기는 들었다마는."
산청댁은 딱해하며 말하였고 범석은 입맛을 다신다.
"본시 우서방인가 그 사람들 이곳 사람 아니었제?"
"예. 떠들어온 사람입니다. 근존도 모리고, 그때 조씨네가 참판님댁을 들어묵고 의병이 났일 적에 집들이 많이 비지 않았십니까. 석이아배는 총 맞아 죽고, 상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많이 상하고 이댁 훈장어른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떠나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세상 참 많이 흘렀네."
산청댁이 말하였다. 자신도 산청에서 이곳으로 시집온 사람, 아직 남편이 살아 있으니 해로한 셈이며 손자들도 보았다. 그런데 초로에 들어선 오서방댁이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말이 쉽지 가기는 어디로 가나. 비록 중죄인이기는 하지만 오서방 사람됨을 알고 일이 그리 된 것을 마을 사람들은 다 동정하고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자네들 식구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객지에 나가보아, 남정네가 있어도 막막한데 우서방네 식구들이야 잘했든 잘못했든 사람을 잃었으니 발악하게 되는 거고 세월이 약이라고 한 해 두 해 지나면 다정하게 지낼 수야 없겠으나 지금겉이는 않을 것이네. 맞서려 하지 말고 어떻거든 피하는 게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도방에 나간 사람들, 뭐 나가고 싶어 나갔겠나. 혹독한 지주한테 쫒겨난 게지만 남정네는 지게꾼, 아낙네들은 바가지 들고 문전 걸식, 딸은 청루에 팔아먹고 아들은 일본 모집에 가고, 그기이 땅 밑의 수십 수백 자 밑에 들어가서 석탄을 캐낸다 하니 몸 성해서,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일 아니겠나. 오서방이 살인했다고 동네서 쫒겨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나 그러지 않는 이상 떠날 생각이랑 말게. 다같이 농사를 지어도 평사리만 한 곳이 없네. 더군다나 이번에는 그 댁 바깥어른도 돌아오고 했으니 그분이야 고생도 하고 동네 사정도 소상할 것인즉."
"그렇습니다.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승구도 한몫을 하게 될 거구. 오서방도 나오면 돌아올 곳이 있어야지요."
"그걸 누가 모리겄십니까. 하도 기가 맥히니."
"최참판댁 장서방이 오면 우서방댁네 타이르도록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 사람들도 땅에만 명줄을 걸고 있는데 장서방 말이면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서방댁네의 얼굴이 다소 퍼졌다.
"하기사 평사리 겉은 곳은 없다 하더마요."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처지도 다르고 하지만 한복이를 보게. 그런 기맥힌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 사람들은 타곳에 가도 살 만한 것인데 자식들은 모르지만 내 당대에는 이곳을 떠지 않겠다 그런다지 않든가. 한복이야말로 그 천재, 이로 말할 수 없었지."
"예. 지도 한복이 생각을 함시로 맘을 달래고 했십니다."
"아무리 영악하다 하지만 기둥뿌리가 무너졌는데 길게 그러지는 못할 것이야."
"알겄십니다."
"아무리 억울하다 하여도 사람 잃은 것보다는, 하니 자네가 참께. 참아야 하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오서방댁은 몇 번이나 절을 하고 김훈장댁 대문을 나섰다.
‘하기사 그렇다. 내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갈 기고. 설마 죽은 듯이 있이믄’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오서방댁은 형무소에 가 있는 남편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않는다.
‘참말이제 자다가도 모리겄고 와 이리 됐노. 작년 이만때는 추수해놓고 안 뭇어도 배부르다 해싸았는데.’
달이 환하게 비치는 마을길을 팔장을 낀 오서방댁 지척지척 걸어간다. 살림도 쪼들리기 시작했다. 재판 때문에 부산을 오고가고, 변호사 비용이다 하여 빚을 내기도 했었다.
‘남이사 좋은 말 하지마는 우찌 살꼬, 빚은 우찌 갚으며, 동네 사람도 하루 이틀이제. 하도 영악한께 집에 불이라도 지를까 싶어서 요새는 모두 쉬쉬 안 하나. 머니해도 오서방은 살았인께 죽은 사람이사 아무리 곤두박질을 쳐봐도 사람이 돌아올 기가, 함시로 인심도 차차 변해간께, 김훈장댁 마님도 그란하든가.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사람 잃은 것보다, 자네가 참께, 어이구 우짜다가 이리 되었노. 차라리 죽는 편이 낫제. 자자손손 험한 소린 듣고, 저것들은 천지간에 무서븐 것 없이 날뛰는데 우리는 죄인이라, 어이구우 누가 먼저 낫 들고 시작했던고. 길 가다가 날벼락을 맞인 거는 우린데, 분하고 원통하고 우리만 참으라 카이. 우리 승구 적이놔도 가만히 있이까. 게울은 오는데 까막소에서 그 생고생은 우찌 할 긴고. 승구만 아니믄 그만 목을 매고 죽고 접다. 남의 위로도 그때뿐이지 아무래도 못 믿겠다. 꿈읹 생신가.’
오서방댁은 장님이 된 것같이 밤길을 더듬거리며 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꽉 차 있던 들판이 휑뎅그레 비어 있고 바람 없는 밤은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우리 승구 장개 보내야겄다고 걱정을 했는데 이자는 며누리 손에 밥 얻어묵는 일 꿈도 못 꾸겄고 어느 누가 딸 줄라 하겄노. 보소 승구아배, 우짜믄 좋소. 고만 저 강물에 풍덩 빠지 죽어뿌리까요. 이곳에서 참 사람도 많이 죽었네. 함안댁이 목 매달아 죽고 삼월이 봉순이도 물에 빠지 죽고 복동어매는 양잿물 묵고 죽었제. 최참판댁 사랑양반이 그리 되고부터는 평산이 칠성이 귀녀, 또출네는 불에 타 죽고, 동네의 원귀들이 우굴우굴한께, 어이구, 이자는 다 되어부린 일, 신기한 방어가 있다 한들 다 소앵이 없제. 집에 가봐야 밤새도록 나오는 것은 한숨이라, 미친년겉이 모래밭이나 싸돌아댕기다가 가까.’
오서방댁은 끝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방향도 모르고 걷는다.
‘아이구우 외로바서 못살겄네. 애비가 샐인 죄인 됐다꼬, 재판 때 와서 울고 간 뒤 가씨나들은 소식도 없네. 질이 멀고 시부모 눈이 무서바 그렇지마는 비싸리 겉은 승구 하나 데리고 외로바서 우찌 살꼬. 성환할매 불쌍타고 동정한 기이 엊그제만 겉은데 이자는 성환할매가 부럽네. 이고 들고, 곡식 한 틀이라도 더 가지고 울라꼬 고개가 파묻히게 작은딸이 찾아오더마는, 내 신세가 이리 될 줄 누가 알았겄노. 늙은 젊도 않은 나이에.’
오서방댁은 저도 모르게 모래밭 쪽으로 가고 있었다. 모래밭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마르고 울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시집을 적에 신랑 허위대 좋다고들 해쌌더마는, 시집와서는 집안이 두루 편안해서 받을 복 있다고 해쌌더마는, 신랑이 나무하로 산에 갔다오믄 머루도 따다주고 달래도 따다주고, 씨어무이는 그런 것 따니라고 나무 적게 해왔다 하심서 웃어쌌더마는.’
이때 오서방잭에 귀에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저러재."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모래밭만 펼쳐져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타.’
그러나 다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서방댁은 뒤돌아본다. 둑길 쪽에서 들려온다. 순간 들공이 얼어붙는 것 같다. 생각이 오서방댁 머릿속을 번개같이 지나간다. 그것은 남편이 파옥을 하고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계속하여 신음 소리는 들려왔다. 오서방댁은 발길을 돌려 둑길 쪽으로 기다시피 다가간다. 둑길의 마른풀 그 뒤쪽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 같다.
"보소, 누구요."
하는데 누가 목을 죄는 듯 입 밖에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보, 보소, 누구요."
오서방댁은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사내가 엎드러진 채 있었다.
"누, 누구요!"
"사, 살려주소. 날 좀 데, 데리다주소."
오서방은 아니었다.
"우, 우리 집에."
"누구요. 우리 집이라니."
"딱쇠, 내 도, 동생이요. 좀 불러다주소."
"그, 그렇담 야, 야무라 말가!"
"야,야무, 야무... 야무요."
"니, 니가 야, 야무가? 정말 야무가."
"야 야."
하다가 사내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오서방댁은 다음 순간 뛴다. 정신없이 뛴다.
"따, 딱쇠야! 야, 야무어매!"
방에서 웃음소리가 새어왔다.
"사람이 다 죽기 생깄는데 멋들 하노!"
운을 열고 딱쇠가 내다본다. 방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승구어매 아입니까? 무신 일이요."
"야, 야무가 왔다."
"야?"
딱쇠가 후다닥 일어서고
"머라 카노!"
야무네가 치맛말을 끌러 올리며 쫓아 나왔다.
"야무가 왔소."
"어, 어디 있노!"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승구어매, 우리 성 어디 있십니까?"
"뚝길로 가자. 어서 가자."
"와 와요. 거기는 와요?"
"따라오니라. 날 따라오라 캐도."
"야."
영문 모르고 딱쇠는 뛴다. 오서방댁도 뛴다.
"승구어매! 와 그랍니까!"
앞서 뛰어가면서 딱쇠가 큰소리로 묻는다.
"사람이 다 죽게 됐다!"
"머라 카요!"
나머지 사람들은 한참 뒤떨어져서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푸건의 남편도 있었다. 그들이 미처 둑길에까지 이르기도 전에 딱쇠는 사람 하나를 업고 급히 걸어오는 것이었다.
"무신 일고!"
했으나 딱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네는 사람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집 앞에서 헤매고 있었다. 야무는 안방에 뉘어졌다. 아무도 소리 내거나 말하지 않았다. 야무의 의식이 아주 간 것은 아니었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야무네는 넋이 나간 것처럼, 그러다가는 고개를 흔들곤 했다. 뼈만 남아있는 야무, 수염에 묻혀버린 얼굴, 그런데 그는 첫마디가
"이제 살 것 같다."
이 몇 해 동안 야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원래부터 까막눈이어서 편지를 자주 보내지는 않았지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소식을 보내왔었다.
"니가 와 이리 됐노."
그때 비로소 야무네는 아들의 팔을 잡았다.
"차차 말하지요."
"와 이 꼴이 됐노! 땅 있고 집 있는데 와 이 골 되도록 객지에 있었노!"
야무네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남편이 오랜 신병 끝에 죽었고 딸 푸건이가 역시 아비와 같은 신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요즘 말로는 폐병이라 했다. 야무네는 아들을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이 자식도 잃을 것이란 공포는 한순간 그를 망실케 했던 것이다.
"하동에는 늦게 당도해가지고 나릿선이 끊어졌더마요. 급한 김에 걸어왔더니만 뚝길에서 쓰러진 기라요."
딱쇠댁네는 허겁지겁 부엌에서 사기에다 쌀을 갈고 있었다. 죽을 쑤기 위해서였다. 오서방댁은 보이지 않았다.
"어매, 울지 마소. 아부지, 푸건이맨치로 내가 죽을까바서 그러제요?"
"어이구 이 자석아, 이 성상이 되도록 에미 있고 형제 있는 고향 두고 어디서 머를 하고 살았더노."
"나 폐병장이 아닌께 제발 걱정 마이소. 딱쇠야, 나 물 좀 도고."
딱쇠는 주먹으로 눈을 씻으며 오자마자 마시다 둔 물사발을 야무 입에 갖다대면서 한 팔로 야무 머리를 떠받쳐준다.
"후우― 이자 살 것 겉다. 잠만 자고 나믄 세상이 훤하게 보일 것 겉다."
하면서 야무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나 제발 잠 좀 자게 해주소."
하며 허공을 향애 손을 흔든다.
"다 나갑시다."
딱쇠가 방안의 사람들을 몰아내듯, 적은 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야무네는 소리를 죽이며 운다.
"걱정 마이소. 처남 말이... 새는 날이믄 자세한 소식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라고 새북에 읍내 나가서 지가 의원 데리고 오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야무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가심이 철렁 내리앉았일 기다. 나도 그랬는데 어매 맘치고 와 안 그랬겠노. 하지마는 본인이 깨놓고 말하는 거를 보이, 어매 걱정 덜라꼬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네."
천일네 말에 봉기마누라 두리네도
"나도 처음에는 억장이 무너지더마. 산 사람이라 할 수 없제, 그런데 보이 정신이 맑아. 하야간에의원이 와야 알 일이고 천일에, 우리는 가지."
하며 일어섰다.
"그러입시다. 야무어매, 우리는 그만 갈라요. 너무 걱정 마소. 죽을 중병을 앓아도 남 보기 멀쩡한 사램이 있고 방금 죽을 것겉이 뵈는 사람도 뽀시락뽀시락 일어나는 수가 있인께, 야무가 장담 안 하요?"
그러나 야무네, 딱쇠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집을 나서면서
"승구네는 간다온다 말도 없이 가버맀는가배."
두리네가 말했다.
"그 집도 편해야 말이지요. 오늘도 큰 난리를 겪었인께."
"와 무신 일이 또 있었더나?"
"우서방 아들 두 놈이 달라들어서 승구를 반죽음이나 시키놨으니
승구어매도 지금 제 정신이 아닐 길요. 이혈이 낭자하고."
"참말이제 그것도 할 짓 아니고나."
"그런 재앙이 또 어디 있겄소."
"아까 야무네보고 말로는 그렇기 했다마는 사람우 형상이 그래 가지고 회생하겄나."
"그러씨... 나느 꼭, 벵이 들었다기보다, 저어 까막소서 나온 사람."
하다가 천일네는 손으로 제 입을 막는다.
"머라 캤노."
"아이고 마 그럴 리가 있겄소."
"까막소, 그렇지마는 최참판댁의 길상이 그 사람이사 멀쩡하던데?"
"진주서 몸조리 다 해가지고 왔인께 아무튼지 아까 한 말 그거 내가 잘못했소."
천일네는 여간 당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별안간 왜 야무를 까막소에서 나온 사람으로 보았는지, 그것이 상당한 강렬한 느낌이었다 하더라도 분별 있고 남의 얘기라면 항상 신중했던 천일네가 아무런 근거 없이 함부로 입 밖에 말을 냈다는 것은 실책임에 틀림이 없다.
까막소, 음산하고 공포감 없이 사람들은 그곳을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끝이요 살아 있는 무덤, 그러나 식민지의 까막소는 쥐틀속의 쥐새끼처럼 범죄자만 갇혀 있는 곳은 아니다. 애국자, 사상가들이 노한 사자같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곳, 부당한 침해에 방어하려다 무고하게 투옥된 양들도 있으며 재판소의 서기는 억울하다는 말이 왜말로 번역이 안 되어 고심하다든가. 우쨌거나 그런 것은 천일네가 해아렸던 것은 아니었겄지만 폐병쟁이보다는 낫다, 그런 무의식 중의 생각은 있었는지 모른다.
"어째 찬물을 뿌린 듯 등이 으씩으씩하네."
"제발이요, 내가 그런 말 하더라고 이 밖에 내지 마소. 나이 든께 입을 잠군 쇠통이 풀어지는지, 실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을 안하나... 야무어매가 그거를 알믄."
"이라나저라니 다 좋은 일은 아니제. 초정월부터 사람이 죽고 생대겉은 사람이 까막소로 안 가나, 동네가 이리 궂어서 제를 올리든가 해야지.“
"그러기."
"자식이란 무엇인지, 애간장이 녹는 기이 그기이 자식이라."
"..."
"야무네 애간장이 녹겄다. 애간장이 녹아. 살 만한가 싶더마는."
두리네는 아득한 엿일이 되어버린 수수밭의 사건을 생각한다. 항상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일.
‘그거는 마목겉이 내 맘에 남아 있다.’
삼수에게 난핸을 장했던 두리의 참상은 세월이 가고 또 갔건만 두리네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악몽 같은 일이라는 것보다 잊지 못하는 것이 두리네에게는 고문이었다. 조준구에 의해 삼수는 죽었지만, 시집가서 자식 낳고 비밀은 누설되지 않은 채 두리는 지금 잘 살고 있지만, 두리 그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도 그 일은 남아 있을 것이다. 흔히들 하는 말에 남편은 죽어도 하늘의 별이 보이지만 자식은 죽으면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느나고 했다. 천일네와 야무네의 책동 때문에 봉기노인은 마을에서 돌판매질을 당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에 잊혀져서 야무네, 천일네하고는 오고가며 지낸다.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 그놈도 죽어서 이제 살이 다 썩었을 신데 와 이렇기 원한이 풀리지 않는고.’
돌팔매질을 당한 봉기노인에게는 상처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두리에게는 죽는 날까지 그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상이 그 모양으로 되서 돌아왔인께... 하지만 성해서 돌아왔다 캐도 못 알아봤일 기다."
두리네는 아픈 기억에서 도망치듯 말머리를 돌렸다.
"와요?"
"야무가 집 나간 지 수울찮아 됐을 기다. 일본 사람을 따라서 일본 들어간 지가 십수 년이 더 되제."
"십수 년이 더 될 기요. 딱쇠가 코 흘릴 적에 나갔인께."
"클 때는 성지간 중에서 인물이 괜찮았는데."
"인물이사, 몸이나 성해서 왔으믄 땅마지기나 있인께 우떡하든 살긴데"
"그러기, 이제 걱정 없일라 싶었는데 살아갈수록 태산이고, 눈감기 전에는 마음 편할 날이 없제.“
3장 대면
인실이는 젊은 사내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갔다. 뒤통수가 납작하고 머리털이 노릿노릿했으나 와이셔츠의 칼러가 눈부시게 흰 청년이 사장실을 물러나며 도어를 조심스럽게 닫아준 뒤 인실은 책상 저편, 의자에 푹 파묻이듯 앉아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제가 일전에 편지를 드린 유인실입니다만."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데 그간 수차례 일본 관헌에 의해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었던 유인실은 이미 그런 시련 속에서 조선 민족으로서의 존엄,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고 지켰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영역을 엿보게 했다. 남자는, 아니 조용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을 응접하는 소파 쪽으로 간 그는
"자아, 앉으시지요."
인실을 팔에 걸고 있었던 외투를 소파 한곁에 놓고 앉았다.
‘이 남자가 어째서 나를 보자 하는 걸까?’
기예학교의 학생이자 방직 공장 여공인 아이에게 불미스럽고 잔혹했던 사건이 있어서 분개한 인실이 방직회사 사장이요 학교의 교주인 조용하에게 편지를 낸 것은 수일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장이 직접 면담을 요청해 오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이 여자는 보석 중에서 다이아몬드다! 가장 경도가 높아.’
마음속으로 장난스럽게 지껄였으나 조용하는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검정 새틴 치마, 감색 세루 저고리를 입고 가만히 응시하는 여자의 눈은 상대가 남자라는 것, 지적으로 세련돼 뵌다느 것, 그리고 귀족이며 막대한 재산가라는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있었다. 은사 임명회의 남편이었던 사내라는 것도.
"우리 집사람, 임명회의 제자라지요?"
"..."
"놀라실 것 없습니다. 우연이지요."
"네..."
"서신은 대개 비서가 알아서 처리하는데, 아마 여성이고 해서 사장실까지 온 모양입니다."
조용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이 사람이 날 만나자는 이유는 뭘까? 성의가 있다면 공장장한테 하달라면 될 일 아닌가. 혹 명희선생님 행방을 알려고 이러는 걸까...’
인실은 달포 가량 전에 여옥을 만났다. 서울레 올 일이 있으면 여옥은 인실을 만나보고 간다. 그때 여옥은 명희의 얘기를 했었다.
‘명희선생님 때문에...아마 그런 것 같다.’
조용하가 표면상 교주이기는 했지만 임명빈이 교장으로 있었던 그 학교와 인실이 현재 나가고 있는 기예학교, 그것도 주간은 폐지되었고 야간만 존속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본시부터 조용하는 육영 사업에 관심이 없었다. 부친이 설립했기 때문에 그냥 두어둔다는 태도,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예학교의 여선생이 항의 편지를 냈다 하여 만나자 한 것은 조용하의 경우 파격적인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불미스럽고 참혹한 사건, 그것은 인실이 담임하고 있는 반에는 방직공장 여공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그 중의 박차순이라는 아이가 방직공장 창고에 끌려가서 감독으로부터 추행을 당하려다 심히 반항을 하여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추행은 미수에 그쳤으나 수치감과 또 그럴 만한 여우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고 방치하였기에 박찬순은 팔을 못 쓰게 된 것이다.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이 된 것이다.
"그는 그렇고 요즘 유형은 어떻게 지내시지요?"
조용하는 박차순에 관한 일, 명희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저의 오빠를,"
어찌 아느냐는 반문이다.
"면식 정도는 있지요."
"..."
"동경 가서 공부한 사람이면 수재 유인성을 재개 알지요. 몇 명 안 되는 아카몬[동경제대의 별칭] 출신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유선생도 여성으로선 최고의 학벌이구, 대단한 집안입니다."
인실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띤다.
"계명회사건 때는 유형도 연루가 되었지요, 아마."
침묵으로 인실은 시인한다. 그리고 하마 오가다의 이야기가 나올 거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즈음하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유형은 요즘 뭘 하지요?"
"별로, 집에서 하는 목재소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거 참, 딱하군요. 아까운 인재가 그렇게 썩다니."
하다가 조용하는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흥분해 있는 것을 깨닫는다.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그것도 깨닫는다. 십 년 전에 임명회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의 자기 자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명희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 같았다. 높은 학식, 아름다움을 지였음에도 의식은 고풍의 순결을 그냥 지니고 있었다. 자기 자신도 조혼의 아내가 있었지만 젊은 나이, 냉담한 외모, 자신 있는 침묵, 그러나 발랄한 감성이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민첩하게 명희의 감정을 서서히 사로잡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그래서 전격적인 결혼이었으나 명희의 마음을 휘어잡을 자신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는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냉단한 외모, 자신 있는 침묵, 그런 것들이 고삐를 잡아도 잡아도 무너지고 만다. 젊음이 간다는 것은 가산이 기우는 것보다 냉혹하다. 명희가 가버렸다는 것도 그에게는 놀라운 현실이요, 따라서 그 일로인한 충격은 좀처럼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조용하는 허공을 향해 이를 간다. 의기소침, 육체도 전과 같은 약동이 없다.
‘이 여자는 나를 압도하고 있다!’
순간 조용하는 자신이 지닌 그 모든 것이 한날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느낌의 나락, 깊은 나락으로 자신이 빠져가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명희가 간 뒤에도 그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이렇게 절망적으로 실감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유인실, 임명회하고는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여자하고도 다르다. 새로운 여자는 언제나 신선했었다 허영과 속물근성에 뭉쳐진 듯했던 홍성숙도 처음엔 신선했었다. 이 땅에서는 드문 존재인 성악가라는 그점 때문에. 지금 역시, 인실이 지닌 여러 가지 외적인 사실에 전혀 현혹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일본인 그 사내하고 이 여자의 관계, 그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조용하는 담배를 내어 붙여 문다. 연기를 뿜어내는데 옛날 찬하라는 라이벌 대문에 명희를 원했듯이 일본인, 유인실 그들은 애인사이라는 뜬소문이 심정을 자극한다. 명희를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수중에 넣었다가 자신이 장처 입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상처를 입혀서 메이치라는 집념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함에도 유인실은 그에게 있어서 희귀하였다. 호기심에서 만나자고 한 여자가 가장 경도 높은 보석이었다는 것은 의외요, 기쁘기보다 어떤 고통을 느끼기까지, 그것은 명희가 자신의 뜻을 거역했듯이 이 여자도 자신의 뜻을 거역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집념에 불타면서 명희를 다시 수중에 넣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고통스런,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귀한 것은 갖고야 말겠다는 편집광적 욕구, 인실에 대한 강한 욕구는 그 출구조차 찾아볼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그를 못 견디게 한다. 담뱃재를 떨었다. 냉정을 찾으면서 조용하는 말했다.
"그러면 편지에 대한 그 건에 대하여 얘기할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것은 모두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사실이라면 감독이라는 자의 목일 달아나야겠군요."
"..."
"그리고 또 팔이 뿌러졌다는 그 여공 아이한테 적당한 보상을 해주어야겠지요."
"..."
"유선생의 요구 사항은 그 두 가지 아닙니까. 그렇지요?"
"어째 그것이 저의 요구 사항이겠습니까. 피해자의 요구이며 의당 그렇게 해야 되는 일 아닐까요."
"의당 ... 그러나 그게 현실적으로 통용이 돼 있지 않아요."
인실은 조용하를 빤히 쳐다본다. 그렇다면 이런 자리는 무엇 때문에 마련하였나, 힐난의 눈빛이다.
"뭐 이런 말 한다고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요. 지시는 내릴 것입니다. 유선생의 성의와 정의감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도."
인실은 슬그머니 웃는다.
"그는 그렇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유선생께서는 교육자의 입장에서 편지를 썼습니까?"
"네?"
"아니면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노동자 편에 서서 편지를 썼습니까? 어느 쪽이지요?"
"양쪽 다겠지요."
인실은 태연히 말했다.
"양쪽 다아... 교육자의 입장에서 그러셨다면 나는 무조건 승복하겠습니다만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그러셨다면 그 편지는 나에게 보내는 도전장입니다. 그렇지요?"
"저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 것은 대일본제국의 경찰이었습니다."
희미하게 조용하는 웃었다.
"그러면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그 말씀이십니까,"
"일본이 우리 당을 강점하여 내 민족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데 대하여 반대하는 것을 사회주의라 한다면 저는 사회주의자겠지요. 조선은 지금 정권 운운할 처지도 아니며 국토는 잃고 민족이 말살되어가는 형편인데 반일이면 되는 거지, 기치를 선명히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우가 비단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에만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업과 노동자의 경우에도 생존을 외치고 권리를 주장하면 이런 경우 사회주의자라는 못을 박기도 하더군요."
유인실은 조롱하듯 말했으나 적개심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조용하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습니다. 생각보다 유선생은 훨씬,"
하다가 조용하는
"여자들이 빽빽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내일 당장 독립이 온다 하더라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유선생은 목구멍이 찢어지는 소리 대신 주먹으로 툭툭 치는군요. 그런데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을, 유선생께선 초지일관하실 작정입니까?"
비에 씻겨서 흐르는 도랑물같이 상쾌해 보인다. 인실을 조용하를 쳐다보았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게, 뭣인지 모르지만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것, 그리고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눈빛이다. 마음에, 육신에 숨죽이고 있을 치부를 엄폐할 여유를 주지 않는 눈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또 주량이 늘었기 때문인지 조용하의 안색은 병적으로 창백하였고 피부는 탄력을 잃었으며 최상급 박래품으로 여전하게 세련된 차림새였으나 양복에 감싸인 육체는 초라해져가고 있었다. 금력과 세력과 명예?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한말의 명문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고 오늘날에는 비록 대일본제국의 귀족으로 탈바꿈을 했을망정 어쨌든 조용하가 간진 것, 누리고 있는 것인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으뜸에 속해 있건만 요즘 들어서 찬바람 같은 비애에 침식되어가고 있는 그의 울울한 영혼을 인실의 눈은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힐난도 동정도 아니다. 타인의 눈이다. 하기야 조금 전까지만 해고 이들은 서로의 존재, 피차간의 처지를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타인! 사람을 대할 적에 조용하는 늘 타인임을 과시하는 것으로 강자인 자신을 확신해온 사내였다. 그랬는데 조용하는 지금 타인임을 웅변하는 인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데, 분노할 여유도 주지 않는다. 명희는 거의 조용하를 정시하는 일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정시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실이라 하더라도 명희의 그것은 좀 철저하였다. 마음을 감추는 행위로 볼 수 있겠고 상대를 거부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때 명희는 그것은 좀 철저하였다. 마음을 감추는 행위로 볼 수 있겠고 상대를 거부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때 명희는 조용하에게 결코 타인은 아니었었다.
"초지일관이면은..."
되뇌듯 인실이 중얼거리는데 조용하는 뒤늦게 자신의 치부에다 휘장을 치듯 사람을 불러 차를 가져오게 일렀다.
"초지일관이라 하시니까 왠지 과장에 나간 소년 선비라도 된 듯한 그런 기분이네요."
"그렇습니까? 첨단을 가는 신여성 입에서 구태의연하다 할까, 이제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말을 들을 줄이야, 뜻밖입니다."
했으나 조용하는 자기 귀에도 자신의 말이 어설프고 경박하게 느껴진다.
"구태의연하기론 초지일관, 그 말씀부터지요. 뜻을 세워볼 한 치의 땅, 뜻을 관철할 장소조차 없는 조선인에게는 말입니다."
"그건 지나친 결벽증입니다. 땅은 없어도 운동은 하지 있지 않습니까."
"네, 아직까지 방직공장은 돌아가고 있지요."
야유다.
"이거 참, 나를 겨냥해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온 모양이군요. 하기는 일본의 작위를 받은 가문이라 민족주의자들이 사갈시하는 것은 당연하고 많은 노동자를 혹사하는 기업주인만큼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요."
'너는 그 어느 쪽이냐,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런 문제라면 나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소 성가시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런 일이라면 ... 옛날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앞에 앉은 너 같은 존재도. 요즘에 와서 뭣이 나를 산란하게 하는 걸까. 일 대 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어째서 불가능이 내 앞을 막아서느냐 그것이지. 사실은 유인실이라는 너가 내게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을 게야. 불가능을 너가 몰고 왔기 때문인지 몰라. 이 도도하고 건방진 계집애야.'
마음속으로 뇌면서도 명희로 말미암아 깊은 좌절의 수렁으로 빠진 것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 설사 명희를 끌고 온다 하더라도 복수는 되겠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며 그 굴욕은 잊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심신을 쇠퇴하게 한 주범은 물론 세월이겠으나 남자로서의 황금기가 순식간에 지나간 것은 명희 탓이다. 처음 만난 인실에게 소유의 강한 충동과 동시에 비참한 절망을 느끼게 하는 것도 명희 탓인지 모른다.
"남자의 주먹은 여자보다 크겠지요. 일본은 조선인들 주먹보다 크고 미국 영국 같은 나라, 그들의 주먹은 더 클 겁니다."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 한 데 대하여 이제 겨우 인실의 답변이 나온 것이다.
"힘을 말하는 겁니까?"
"야만적이란 뜻도 됩니다."
"그것 참 묘한 관점이군요."
조용하는 가져다놓은 커피 잔을 들며 인실에게도 손짓으로 권한다.
"힘이 세면 뺏으려는 생각부터 하니까 동물적이라는 거예요."
"인간도 동물임에 틀림이 없고 그건 본능이니까."
인실은 커피 잔을 들면서
"본능이겠지요."
"하면은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조물주를 탓할밖에."
빙그레 웃는다.
"힘이 약해서 굶어죽는 것도 못났지만 힘이 세다 하여 마구 빼앗아 처먹고 배가 터져서 죽는 것도 바보 아닐까요."
서슴없이 내뱉는다. 이야기의 내용은 일관된 것이지만 표현은 갈지 자로 여기 풀쑥 저기 풀쑥 듣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조용하는
"글쎄요."
한결 여유를 보인다. 그도 예민한 사내다.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가 하는 말도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인실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니했다. 어쨌거나 침묵하는 것보다, 가만히 쳐다보는 것보다 인실이 지껄여주는 편이 한결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편했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 같은 것을 느낀다. 묘령의 처녀가, 실제 나이론 노처녀였지만 그것도 최고 학부까지 밟은 교양 있는 여성이 처먹고, 배가 터져서 죽고 하는 따위의 원색적인 언사를 쓰는, 그것은 굉장한 매력이었다. 생동감, 정열 같은 것은 명희에게선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다. 명희뿐인가. 그가 아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체험한 일이 없는 것이다. 미인이거나 교양이 있거나 정숙하거나 혹은 교태, 수다 ····· 원래 호색가는 아니었던 조용하는 교태나 수다스런 것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을 했었지만
"앞으로, 현재도 그렇습니다만 일제가 조선에 부려놓은 일감을 생각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인실은 이야기를 이었다.
"하루 임금이 얼마라는 꼬리표가 붙은 일감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고, 사막이 되어버린 땅덩어리에 부려진 일감, 그거야말로 보석일 거예요. 횡재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미친 듯 달려가는 건 당연하겠지요. 노예의 낙인보다 확실하고 종의 문서보다 무서운 것이 그 임금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문서가 없고 낙인이 없어도 사람들은 결코 달아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쫓겨날까 봐서 고혈이라도 짜 바치고 싶은 심정일 거예요. 힘 가진 사람들에게는 참 쓰기 좋고 편안한 세월이 돼가는 것 같아요. 사장님께서도 누가 알겠습니까, 장차 임금 노예로 전락이 될지.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민족주의잔지 모르겠네요. 우리 다 공동 운명이니까요."
열중하여 하는 말도 아니었으나 선명하게 그어놓은 듯한 인실의 귀밑에선 턱에 이르는 선은 압축하여 다가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게는 아직 자손이 없고 그 점에 있어서는, 설마 내 당대에야, 하하핫핫 ... 하하하 하하하아."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허나 유선생의 말씀은 극단적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피해망상이라 할 수도 있고, 멀지 않아 조선 땅이 그리 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소. 물론 나도 조선 사람으로서 결코 일본의 임금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 역사란 항상 기복, 운동이랑 해도 좋겠습니다만 어떤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는데요. 소단위의 부족 사회도 아니겠고 물론 강한 민족에 의해 사라진 국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국가나 민족에 의해서 깡그리 국토가 사막이 된다거나 민족 전체가 노예로 떨어진다, 그건 좀 지나친 얘깁니다."
"미 대륙의 인디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국가는 멸망했으나 민족은 흡수된 거지요."
"흡수보다 멸종돼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번에는 조용하가 인실을 빤히 쳐다본다. 대화의 상대가 여자인 것을 비로소 깨닫기라도 한 듯,
'대담하고 당당하고 뭣 이런 여자가, 헛 참.'
"조선 사람 전부가 임금 노예로 떨어진다 할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조선 사람 전부가 결사대로 들어가자 그런 말도 나옴직한데 정복자나 피정복자 쌍방의 방향이 화살 가듯 그렇게 곧게 나 있는 것은 아니며 제아무리 욱일승천한다는 일본의 기세이기로, 또 한편 한 사람의 친일파도 없는 조선 민족이라 가정하더라도 말입니다. 역서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절망적이군요.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 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생각이란 늘 이상에 기울기 쉬운 겁니다. 길과 같이 생각도 우회할 때는 해야 하고 지름길도 가야 합니다. 들판에서 식량을 생산해내는 농부가 싸움터에 병사를 보내어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는 군주보다 훌륭하다, 이론으론 그렇지요. 또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가치관이 힘을 쓴 적이 있습니까? 지배자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까?"
하다가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린다.
"아무튼 정의나 진실이란 망망대해를 흘러가는 박덩이 같은 것이오. 물결 따라 솟았다가 잠겼다가... 그런 것보다 내 듣자니까 유선생께서는 경찰에 자주 불려 다니시고 또 구속까지 된 일이 있다하던데 그런 일 겪을 때 여성으로서 두려운 생각은 없었던가요?"
"여자뿐이겠습니까. 남자로서도 두려운 일이지요."
"남자의 경우도 그렇긴 하겠지요. 하면은 두렵다, 그게 바로 현실인데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지요. 그런 험난한 길은 남자들 영분으로 밀어버리세요."
"남자들 영분... 그러면 사장님한테 기대를 걸어야겠네요."
인실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답은 하지 않고,
"유선생께서는 여성으로서 행복한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보셨습니까?"
"행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서 과연 행복할는지. 유다가 행복했더라면 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겠습니까."
조용하는 눈살을 다시 찌푸렸다.
"유선생을 간접적으론,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만나뵙는 것은 오늘 처음인데 이야길 하다 보니 꽤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대화는 남자끼리도 별로 없었는데 말입니다. 흔히들 진실 진실 하지만 진실이란 환상이지요. 때에 따라서 위선일 수도 있구요. 본능을 억압한다는 것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라 생각지는 않습니까?"
처음으로 조용하가 입가에 냉소가 감돌았다. 네가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일본 가서 공부 좀 했기로 필경엔 계집 아니겠나. 좀 색다르긴 해도 요즘 유학하고 온 여자들 범주에서 벗어났으면 얼마나 벗어났을꼬, 오백보 백보, 강선혜도 입으론 꽤 똑똑했었지 ·····.
"본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신부 수녀도 밥 먹고 잠자니까요. 하지만 본능이 추악해지면 그건 삶에 있어서 악몽일 거예요. 초지일관하리라 다짐을 했는지 그건 기억할 수 없지만, 나의 삶이 악몽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긴 합니다. 의지가 굳은 남성께서도 고문을 감내하지 못하고 변절하는 경우를 보았으니까요?"
"유선생은 남녀 동등주의자입니까?"
"사장님께서는? 동조자신가요?"
얄밉기 그지없다.
"나야 본시 페미니스트지요. 하하하핫...."
조용하가 페미니스트인 것만은 사실이다. 형식적이요 외형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조용하 생활의 스타일이라고 할까?
"페미니스트, 그러신 것 같네요. 참, 늦었지만 명희선생님은 안녕하신가요?"
"여행 중이오."
짤막한 대답이다. 인실은 심술꾸러기처럼 마음속으로 낄낄 웃는다.
"그러세요... 그런데 전 남녀동등주의는 아니에요."
인실은 아까처럼 조용하를 쳐다본다. 관동진재가 있은 후, 집으로 돌아와 있는 인실을 보려고 인경이 강선혜와 함께 친정으로 왔었던 일이 있었다.
"특히 인실이는 눈이 좋다. 이지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어릴 적에도 눈이 좋다 싶었는데 눈 하나가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단 말이야.“
강선혜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칠팔 년 전의 일이다. 지금 조용하도 공부 좀 했기로 필경엔 계집 아니겠나, 오백보 백보, 강선혜도 입으론 꽤 똑똑했었지, 방금 마음속으로 뇌었던 말을 까맣게 잊었는가.
'눈 하나가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강선혜가 한 말과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뇌는 것이었다.
'얼굴뿐일까, 몸, 전체, 이 여자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다! 남까지 지배하는 저 눈, 설사 신체가 불구라 하더라도 저 눈은 그것을 상쇄하고 말 게야. 도시 이 여자는 어떤 인간인가.'
인실이 남녀동등주의자건, 또 그 밖의 무슨 주의를 신봉하건 말건, 그것은 별 관심거리가 못 된다.
"어떤 선배 언니가 한 얘긴데요, 남녀동등주의의 여자들 꼴불견이라는 거예요. 물 빠진 나무막대기 같은 여자라 혹평하면서 그들 주의나 사상에는 인간에 대한 휴머니티의 뒷받침이 없고 에고이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 처지에 대한 불만, 원망, 열등감 그런 것 때문에 핏대를 세우거나 아니면 시류를 쫓아가는 의식화되지 못한 경박함, 해서 자칫하면 여서의 특성이 향상되기보단 말살되는 결과가 된다, 남녀는 다같이 서로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동시에 남자제일주의, 뿜내는 남자들은 여자를 소유물로, 종으로, 아이 낳는 존재로 생각하면 사사건건 여자가, 여자 주제에, 그런 남자치고 잘난 사람 없다 그런 말도 했어요. 남녀동등을 부르짖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로선 자신이 없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그런 남성에게 있어서 여자의 존재야말로 자부심의 마지막 보루 같은 거래요. 해서 그거나마 허물어질까 봐서 전전긍긍 필사적이며 관에서 매 맞고 집에 와서 아내 치는 사내가 옛날에도 못난 사내의 대명사 같은 것은 아니었나, 독설이 심하지요? 저도 얼마간 그 말에는 동감입니다. 그건 남성 여성의 구별에서 제기되는 것이기 보다 인간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약자니까 나보다 약한자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리, 일종의 잔인성이라 할까요? 부당한 독재나 암우한 군주가 살생을 일삼는 것도 바로 그 심리 때문일 거예요. 비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사이에도, 일본을 보세요. 그 나라 유산이라곤 칼 쓰는 것밖에 없지 않아요? 참으로 열등감이 치열한 민족이에요. 그네들은 일등 국민 일등 국민 하기 위해, 일등 국민이 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살육을 계속할 거예요. 나는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순간 인실의 맑은 눈에 살기가 지나갔다. 그런 그것은 이내 비애로 변하여 인실의 전신을 휩싸는 것이다. 동천 아래 빈 벌판, 외로운 새 한 마리처럼, 왜 갑자기 인실에게 그런 변화가 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남성 때문에 배를 잡고 웃은 일이 있었지요."
인실의 음성이 별안간 높아졌다. 그의 내부에서 뭔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분은 남성제일주의인데 여성들 눈에 칼날이 설까 봐 겁이 났던 모양이에요. 여성 열성에 관하여 누가 이러 저렇게 말하더라, 어느 학자의 설을 인용한다면 하는 식으로 가장 극력한 논자들 주장을 수없이 나열한 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여성이여 자신을 개발하라, 항아리에 된장을 가득 채워놓고 콩잎으로 살짝 덮어버리는 거예요. 소심하고 상대방 눈빛에 따라 이야기의 메뉴가 달라지는 그런 남자, 동경 가서 공부했다는 사람 속에 흔히 있더군요."
말을 하면서 인실은 내가 왜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걸까, 황금으로 권위로 치장되어 가면 같은 저 사내에게 난 왜 이렇게 많은 말을 해야 했던가, 그것을 인실이 깨달은 것은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똑똑히 보았다는 그 말을 했을 때다. 오가다 지로가 지금 서울에 와 있는 것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고, 집에 돌아가면 그가 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의식했다 하더라도 인실은 그런, 오가다에 관한 생각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실은 별로 달갑지 않은 조용하 사무실에서 늑장을 피웠다. 물론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목적이 뚜렷하였고 오가다를 피하기 위해 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실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실례한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배려도 고마웠습니다."
인실은 고개를 숙이고 황황히, 조용하가 미처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도어를 밀고 나가버렸다. 도어를 밀던 뒷모습, 닫혀진 도어, 별안간 실내는 텅 비어버린, 그리고 거대한 가람가 같이...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조용하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으로 돌아와서 의자에 파묻힌다. 얼마 동안이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놈의 계집애, 할 말 다하고 갔군!"
내뱉는다. 신경질적으로 책상 서랍을 열고 손톱깎이를 찾아낸다. 책상 위에 휴지를 펴놓고 조용하는 손톱을 깎기 시작한다. 을씨년스런 모습인데 손톱 자르는 소리가 탁! 탁! 들린다. 다 깎은 뒤 그는 줄로 깎은 자리를 다듬는다.
'자네는 항상 흐트러짐이 없고 소리 없는 웃음만 다양한데, 허둥지둥하는 사람을 보면 우습게 생각할 게야. 자네뿐만 아니라 대개가 그런 사람들을 만만하게 얕잡아보기 일쑤지. 그러나 그것은 사람에 대한 온당한 관찰은 못 돼. 물론 전부가 전부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나, 감수성이 많은 것을 일시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홍수 현상이라고 할까? 통제의 능력은 약할지 모르나 그만큼 예민한 거지. 순간적으로 그것들을 감당치 못하고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것이 겁에 질린 듯,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해서 내가 그를 압도하고 있다, 착각하기 쉬워. 그러나 그런 성향의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자신과 타인의 상황을 전후좌우 세밀하게 분석하는 버릇이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까지 추적해가는 끈기도 있고. 자네같이 생래적으로 냉담한 사람은 별도로 하고 그릇이 크기 때문에 대범한 사람도 그만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으로 냉정과 침착함을 체득한 사람의 경운데, 냉정이나 침착함이란 침묵으로 때우는 것 아니겠나? 특히 집단이나 조직 속으로 들어가면 냉정과 침착은 수단이 되는 만큼 익히기에 고심하게 되는 모양이더군. 그런데 득실 면에서 본다면 글쎄 어떨까. 일률적으로 말할 성질은 아니나 또 집단이나 조직 속에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있긴 있지. 집단이란 대충대충 정비하여 굴리지 않으면, 일 대 일, 개인과 개인의 관계처럼 델리키트하진 않으니 말씀이야.'
'서론이 길군요. 이야기의 골자가 뭡니까?'
'충돌의 이야기, 상합되기 않는 이야긴가? 아무튼 기회만 있으면 인간은 상대를 억압하려는 것이 본성인데.'
'해서요.'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 앞에선 심리적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하게 되는가 본데, 상대적으로 자기 방어도 하게 마련이거든. 방어란 자신을 되도록 드러내놓지 않으려는 그것이야. 따라서 이쪽에선 파악이 미흡해진다. 대체적으로 성향이 냉정하거나 그것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앞서 말한 사람보다 사후 분석, 자기 성찰이 부족해. 해서 득을 말하면은 일시적이나마 휘어잡고 일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것이고 실은 파악이 미흡한 채 넘어가기 때문에 어떤 지속적인 것, 완벽함이 없다. 방편이란 늘 그렇게 유리하지만 뜻하지 않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게지. 사실 경계를 해야 할 사람은 앞에 말한 그런 부류, 약점을 드러내면서 휘지 않아. 또 상대적으로 그들 앞에서 이쪽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실을 말하자면 대접을 못 받는 데 있고 득은 반복되는 사이 어떤 지속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 새김질하면서 판단의 정확성에 접근해간다는 점, 항시 자기 내부를 둘러보며 또 남의 심부에 칼을 꽃기도 하고, 남 보기엔 위태로우면서도 결코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을 팔아넘기는 짓을 아니 한다. 내 왜 이런 얘기를 하는고 하니, 휘어잡았다 생각하는 사람은 휘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든. 그게 바로 함정인 게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우를 범하는데 사람 많이 쓰는 사람, 사람 많이 대하는 사람은 방편도 고수가 돼야 한다 그얘기네.'
자기변명, 자기선전이라고 일소에 부쳐버렸던 옛날 어느 선배와의 묵은 대화를 조용하는 저도 모르게 되씹고 있었다. 인실은 그가 말하는 두 가지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다. 현재 조용하의 심정과도 관련이 없었다. 하기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찾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교활, 그것도 인간의 방어 본능에 속하는 것인지.
"그 계집애 할말 다 하고 갔군!"
손톱깎이를 동대잉치고 짤린 손톱이 흩어진 휴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던진다. 턱을 고이고 창을 바라보는데 저선 세 줄이 가로지른 창밖의 뿌연 하늘, 우중충한 겨울 하늘. 손톱 빛깔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식욕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병원에는 가기 싫다는 생각도 해본다.
'지겹다. 못 견디게 지겹구나. 계집도 자식도 없는 사내 ... 아직은 오십이 까마득한데 늙은 금리업자, 지팡이 짚고 공원에서 산책하는 노 신사, 색 바랜 모자, 색 바랜 양복.'
별안간 조용하는
"오디 그런 게 다 있어! 마귀 같은 계집애!"
정지 상태에 있던 분노가 차츰 잠을 깨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맞아! 유인실은 명희 간 곳을 알고 있는 게야. 그간의 사정도 다 알고 있어.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러나 조용하는 그 일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명희는 넘겨진 책장 속의 그림 같은 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혼란, 혼란, 또 혼란, 비애와 절망 그리고 분노, 눈만 흘겨도 무엇이든 뜻대로 움직여주던 것이 언제부터 그리 안 되었는가, 완강하게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오는 것이 아니라 가서 조작을 하여도 끄떡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돌변이다!"
고장 난 기계를 박살내듯 파괴의 충동이 불기둥같이 솟아오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조용하는 사방을 둘러본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있었을 뿐이다.
"거기 누구 없어!"
소리를 지른다.
"네!"
머리털이 성글고 노오란 아까 그 청년이 우뢰탕 같은 조용하 고함에 혼비백산하며 뛰어 들어왔다.
"제문식이 오라고 해!"
"저기,"
"제전무 말이야!"
"네, 네!"
청년은 메뚜기처럼 뛰어간다. 이윽고 비대한 몸집에 입술이 두텁고 매눈 같은 눈을 가진 사내가 왔다.
"무슨 일이습니까?"
얼굴이 새파래져서 우뚝 서 있는 조용하에게, 그다지 고분고분하지 않는 태도로 사내는 물었다.
"지금 바쁜가?"
아까와 달리 잠긴 음성이었다.
"벌로 바쁜 일은 없습니다만."
"하면은 오늘 시간은 모조리 나한테 내어주."
"그러지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요즘 건강이."
"오늘은 나한테 시간 내놓으라 했다, 자네 말씨 환원하게!"
사내는 씩 웃었다. 제문식, 이들은 대학 시절의 친구지간이다. 현재는 제전무, 조용하의 오른팔 노릇을 하는 수완 있고 배짱 좋은 사내였다. 어느 누구보다 제문식은 조용하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겨울해가 짧기는 하지만 아직은."
제문식은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기생집에 가자 했나?"
"그럼 어딜 가누?"
"하여간 술을 마셔야겠다."
"천하의 조용하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모양이지?"
두 사내는 얼마 후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산장으로."
조용하가 말했다.
4장 흥미로운 인물
찬하와 오가다는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들은 그저께 밤 동경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하룻밤을 함께 묵고 어제 아침 찬하는 본가에 들렀던 것이다. 용하는 부재중이었다. 명희가 집을 나간 일은 동경서 이미 알고 왔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거북해 하면서 환국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나이보다 늙어서 치매 같은 느낌을 풍기는 양친에게 인사를 올리면 찬하는 명희에 대하여 침묵을 지켰다. 집안은 썰렁하고 황폐한 것 같았다. 양친은 왜 손녀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그 말만 했다.
"아직 어려서."
끝내 노인들은 며느리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는 열등 의식, 일본 며느리라는 현실이, 부나 명예를 마다하고 떠난 명희, 그것도 상대가 아니던가. 모두가 다 조씨 가문의 상처다.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쓸쓸한 노후가 더욱더 쓸쓸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양친을 만난 후 찬하는 곧장 산장으로 왔다. 산장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낸 찬하는 늦은 조반을 마치고 시내로 나와 무장정 거리를 헤매다가 오가다를 찾았다. 오가다는 여관방에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앉아 있었다.
"못 만나려니 하고 왔는데 계셨군."
"당신도 어지간히 갈 곳이 없었던 모양이지요?"
오가다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민망한 듯 말했다.
"서울에 오면 난 언제나 갈 곳이 없어요."
앉지도 않고 선 채 말했다.
"고아처럼?"
"고아처럼."
"나는 그렇지 않소. 갈 곳은 많은데 이러고 있지요. 만날 사람도 있는데 못 만나는 거요."
"왜 그럴까?"
"글세, 나도 지금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오."
두 사람은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럼 날 따라오시오."
찬하는 오가다를 산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말을 하면은 그것은 헛소리뿐일 것이란 생각이었고 두 사람이 다 헛소리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인 것이다. 오나가나 조선의 얘기, 일본에 관한 얘기, 사상의 동향, 세계정세, 이제 신물이 났고 심각해지는 애정 문제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쓸쓸했다. 외톨이 같았고 외딴 섬에 유배당한 느낌이었지만 한편 신물 나는 얘기, 그 신물 나는 얘기에 열중하는 각계각층의 군상, 그 군상 속에서 쓸쓸해하고 있는 자신들이기 때문에 더욱 외톨이 같고 유배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천천히 마시는 술이었지만 두 사람은 다 취해오지 않았다.
'히토미를 어떻기 만나는 것이 좋을까.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오가다는 인실을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실의 오빠 유인성이나 여러 친구들이 인실과의 만남을 저지하겠지만, 오가다는 그 저지하는 힘을 겁내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쉽게 만나느냐 어렵게 만나느냐 그 차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가다는 자신이 서울에 온 것이 이미 선우신을 통해 유신성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제 본정통의 끽다점 나미끼에서 선우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선우 형제와 유인성,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오가다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좀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사정이 있어서 지체가 되었는데 방학 전에 왔더라면 야학교로 인실을 곧장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가다가 조선으로 나온 목적의 70%는 인실에게 있었다.
'우리는 어찌 될까... 만나서 얼굴 한번 보고 돌아간다. 그리고 몇 년을 견디어야 한다. 왜 왜! 왜 그래야 하나. 늙어서 죽을 때까지 바다 이쪽과 저쪽에서 그리워하다가 목말라하다가... 단념을 하라 한다. 단념을 하라고 모든 사람이, 히토미까지도 단념을 하라 한다. 결혼을 하라 한다. 여자를 몰라 그렇다는 거다. 남녀는 사랑이 없어도 결합이 된다. 내 잎에 있는 저 사내도 내게 단념을 하라 했다. 불가능할 때 그 사랑은 기억에만 남는다. 기억에 남아 있다해서 현재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진실인지 모른다. 사람의 생이란 길어야 칠십이다. 그것은 순간과도 같다. 얼마나 소중한 삶이냐. 플잎에 맞힌 영롱한 이슬 같은 것, 히토미가 보석이라면 인생 자체도 보석이다. 하나밖에 없는 보석이다. 어떤 놈은 나를 보고 계집 섞은 것 같은 자식이라 한다. 어떤 놈은 나를 보고 미숙아라 한다. 삼십이 넘었는데 지능 검사를 해야 한다고 웃는 놈도 있었다. 많이 봐주는 작자까지 감상파라, 이 나를 감상파라, 사내가 삼십을 넘으면.'하다가 오가다는 술잔을 기울인다.
"쥬유무소오노 오가헤이와"
느닷없는 노랫소리에 찬하는 오가다를 쳐다본다.
"하며 총 메고 사람 죽이러 만주로 떠나는 놈들, 날 보고 계집 섞은 것 같은 놈이라 하지."
"덴니 가와리데 후기오 우쯔(하늘에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 그건 어떻고?"
"그 정도면 작사한 놈이 미쳤지."
"작사자 뿐일까요? 시나징 고로세 하는 아이들까지 전쟁광이 돼가고 있지."
'흠, 쥬유무소오노 와가헤이를, 강도질하러 보내는 놈들, 생명을 난도질하러 보내는 놈들! 민족제일주의, 그놈들이 한 짓은 무엇이냐, 제 민족까지 덫에 쓰는 고기로 삼지 않았더냐? 참본 그 기라성 천재들, 충용무쌍한 미치광이들, 용광로에라도 떨어질 놈들, 만주뿐인가? 중국 뿐인가? 세계가 눈앞에 왔다 갔다 하니 미치지 미쳐, 관나두자 관두어, 나는 히토미 때문에 너희들에게 화내는 것은 아니다. 짧은 생애,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영롱하고 고귀하고 찰나 같은 생명 때문에 분통이 터지는 거다. 나는 내 손에 피 묻힐 수는 없다. 공범자가 될 수는 없다. 결코 나는 나를 버리진 않아. 그렇게 함부로 생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 말씀이야. 내 목소리가 설사 모기 소리라 하더라도 나는 내 목소리를 지닐 것이며...아아 참으로 고달프도다.'
제 민족까지 덫에 쓰는 고기로 삼았다는 얘기는 제남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 민족까지 덫의 고기로 쓰는 수법이 어디 제남사건에만 한했을까마는, 아무튼 조선은 먹었고 만주를 수중에 넣는 것이 숙원이던 대일본제국, 그것은 또한 시간문제이기도 했었는데 재작년 삼월 남경 정부가 북벌 재개의 성명과 더불어 일본은 재산과 인명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천진 주둔군의 일부, 육사단에서 오천 명을 뽑아 제남에 파견하였는데 정작 남경 정부의 혁명군은 장작림 군대와는 교전이 없었고 평화적으로 입성했던 것인데 일본군이 도발하여 중국 정부의 직원을 사살하고 마약 밀매자인 일본인 십여 명을 참살, 그 시체들을 전쟁으로 가는 덫에 다 장치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본 거류민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유포되었고 신문도 덩달아 그것을 과대 보도, 전쟁 열기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으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장작림을 괴뢰로 하여 서서히 만주와 몽고를 먹어치우려던 일본의 정부 측 복안이나 가와모토 다이사쿠 현역 대좌로 하여금 장작림을 실은 열차를 폭파케 하고 그 혼란을 틈타서 만주를 점령하려던 관동군의 계책도 다 실패하고 도리어 폭사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에 의해 국민 정부는 만주의 군벌과 합작하여 어쨌거나 중국은 통일이 된 셈이다. 일본으로선 이가 갈리게 분통터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공산당 하던 놈들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놈들이 자본주의의 부패를 막는답시고 군보와 결탁하여 만주를, 더 나아가서는 중국을 집어 삼키는 계획에 동조하고 있다. 이제는 대륙 낭인가 지고는 일 안 된다구? 총부리 가지고 전쟁으로, 전쟁으로만 몰려가려는 군부, 전쟁이 부패를 막아? 막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그냥 부수는 건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게요?"
찬하가 물었다. 그도 혼자 생각을 하다 문득 그래본 말인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생각."
"..."
"넌더리가 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생각이오."
"그럼 어서 취하시오, 자아."
술을 부어준다.
"이상해. 예감이 이상하거든. 한밤중 텅 비어버린 창고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란 말이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오."
오가다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내 자신이 썩은 씨앗 같단 말이오."
찬하는 술잔을 놓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생각하면 뭘해. 우린 지금 세상을 주유하고 있는 거 아니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당신이나 나나."
"...."
"우린 물어볼 곳이 없어요. 한 가지 길이 없는 건 아니오만."
"그게 뭔데."
"티벳에 가서 라마승이 되는 일이오."
"당신 처자는 어떡하구?"
"허헛 허허어."
"모든 것에 승복할 수 없으면서 나는 나에게도 승복할 수가 없으니, 그것은 승복할 수 없는 그것에 내가 속해 있기 때문일까?"
"바로 그렇지요."
찬하는 또다시 허허헛 하고 웃었다. 웃다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고, 하고 싶은 생각도 따로 있는 거 아니오?"
"그걸 어찌 알어? 음, 우린 참 많이 닮은 것 같애."
"여러 가지로."
우울해 있던 오가다는 처음으로 웃었다.
"우리 같은 인간들이 많으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세상이 발전은 안 하겠지만 도둑놈 강도는 적어지겠지요."
"그건 모를 일이오. 발전을 안 하면 배가 고플 건데."
말을 하면은 헛소리뿐일 거라 했는데 역시 그랬다. 지금 심정으론 이들 사이에선 헛소리밖에 할말이 없었다.
"진주엔 언제 가실 겁니까?"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모래쯤 갈까요?"
"나도 가자 그 말이오?"
"그럼."
"내가 갈 명목이 없지 않소?"
"그렇게 따진다면 나 역시 명목은 없지요."
"하지만 당신네들은 동창 아니요, 형무소의."
"억지로 엮은 사건인데 그분하곤 면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최환국이, 그분 아들의 초대라고 나는 생각하고 가는 거요. 두루 남선을 구경할 겸."
"그건 좀 생각해봅시다."
"최환국이 그 청년하고 약속하지 않았소? 연장자가 약속을 안 지키면 안 되지요."
오가다는 강인하게 끈다.
"내가 약속했다기보다는 그때 좀 애매했어."
찬하는 찜찜해하는 것 같았다.
"나하고 사귀면서 그분은 회피하는 겁니까? 나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좀 심하군. 아무리 용기 없는 골샌님이기로 겁나서 피하는 줄 아시오? 친일파 아무아무개 둘째가 무슨 주의의 동조자라 한다면 우선 총독부 경찰이 난처해지지 않겠소? 내가 겁낼 이유는 없지."
하는데 좀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오?"
찬하가 목을 뽑듯 하면 말했다. 문이 열렸고 산장지기 노인이
"저기,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찬하의 얼굴이 구겨진다.
"혼자요?"
"아닙니다. 손님하고 함께 오셨습니다."
산장지기 노인의 표정에는 난처해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그럼 우리가 방을 옮기면 되잖소."
찬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럴 것 없다. 합석하자."
산장지기 노인을 젖히고 조용하가 나서며 말하였다. 조용하가 방안으로 들어왔고 뒤따라 제문식이 들어왔다.
"이거 오래간만이군. 왜 그리 보기 힘이 드나."
제문식은 찬하에게 악수를 청하며 소탈하게 말을 걸었다.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달가워하지 않는 찬하의 태도였다.
"객지 생활을 한다는 게,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야. 돌아와야지."
"돌아오면 전무 자리 내주시겠소?"
"그야 어렵잖지. 형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로 옮기면 되니까, 허허헛헛."
"네에, 그렇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초면인 분이 계시니 소개는 해야지요. 오가다 씨, 이쪽은 저의 형 되는 사람이고 저쪽은 제문식 씨."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오가다는 꾸벅 절을 했다.
"이분은 친굽니다. 오가다 지로 씨."
조용하와 제문식은 미소를 띠며 반갑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언제 왔어?"
조용하가 물었다.
"그저께 저녁, 집에 갔더니 형님이 안 계시더군요."
"없는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이던가?"
태연히 말했다. 찬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노여운 눈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제문식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나간다.
"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야?"
조선말로 물었기 때문에 오가다는 못 듣는다. 찬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신문기자요."
해버린다. 한때 오가다가 신문 기자로 있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하는 더 이상 묻지 않있다. 조선말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는 것을 상대를 불쾌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사람은 넷이고 술잔은 둘이니."
이번에는 일본말로 조용하는 중얼거렸다.
"가만있게."
제문식이 일어서 나갔다.
"여전히 충견이군요."
찬하가 내뱉았다.
"비열하게 없는 데서 그런 말 하는 것 아니다."
"형도 비열하다는 단어를 아시오? 새로운 발견이군요."
"손님 앞에선 이러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조용하는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가다상."
"네."
"네가 형 얘기 했던가요?"
오가다는 눈만 꿈벅꿈벅 했다.
"굉장한 일본통입니다."
"그렇습니끼?"
"그 대신 우익이오."
"그야 물론, 당신 찬하도 우익이지."
씁쓰레 웃으며 조용하는
"그렇다면 당신은 좌익이다 그 말씀이오?"
오가다에게 말하는데 찬하는 형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 목소리에서 느낀다. 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은 일말의 연민 같은 것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습도 달라진 것 같았다. 아느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듯, 없는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이던가? 했을 때도 그 말 속에는 치열한 것, 꼬아서 잡아 비트는 것이 없었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그저 등속의 사람을 총독부 경찰이 좌익으로 잡아 가두었으니 누명 벗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오가다의 목소리였다. 조용하의 안색이 변했다. 찬하도 오가다도 느낄 만큼, 두 사람은 조용하의 낯빛이 변한 것을 계명회 사건 탓으로 오해한다. 인실로 인한 감정의 변화인 것을 이들은 일 턱이 없다. 조금 전에 인실을 조용하가 만났다는 사실을 상상인들 했겠는가. 사람이란 감추는 것이 없고 툭 까놓고 보면 대담해진다. 상대가 환영하지 않는 것을 확신했을 때도 배짱이 생기는 수가 있다. 순진하고 선량하였던 오가다도 그새 세월이 흘렀고 세파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소 체득한 셈이다. 조용하의 변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환영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열기 같은 것, 불꽃같은 것. 조용하는 조용하대로 착각에 빠진다. 쳐다보는 오가다의 눈을 인실의 눈으로 착각한다.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무심한 눈이 안경알 속에서 골똘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고생했군요."
잠긴 음성이었다.
'이상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우연치고도 소름이 끼치는 우연 아닌가.'
마침 제문식이 들어왔다.
"이보게 제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오가다 씨야."
별안간 조용하의 음성은 한 옥타브 올라갔다.
"...?"
"자네도 계명회 사건 알고 있지?"
"글세... 신문에서 보기는 했는데."
오가다에게 곁눈질을 하며 어정쩡 대답했다.
"단 한 사람의 일본인이야. 경의를 표해도 좋을 것이네."
제문식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경의를 표하더라도 방향이나 알아야지, 안 그런가?"
"방향이나마나 조선인의 동지 아닌가. 그것도 적 속의 우리 동지 아닌가."
"조선인의 동지일지는 몰라도 두 분의 동지는 아니지."
농담 반 진담 반,
"대일본제국의 작위까지 받은 조씨 가문, 그 가문의 형제들, 더군다나 찬하를 말할 것 같으면 일본인의 사위 아닌가."
"맞습니다. 동지는 아니지요. 친구일 뿐입니다."
"자네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내 형편은 달라."
"이거 참, 오가다 씨의 시세가 폭등이군."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동상이몽과도 같은 웃음소리는 산장의 정적을 깬다.
새로운 술상이 들어왔다.
"눈 깜짝할 사인데 성찬이군요. 장자 숭배의 국풍 알 만합니다."
화합될 수 없는, 괴기하다 할 만큼 이상해진 분위기 속에서 지껄이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오가다가 말했다.
"국풍이 어디 있어, 나라 망한 지가 언제인데. 자아, 술이나 듭시다. 술이란 진담을 할 수 있어 좋고 행패 부릴 용기가 나기에 좋고 또 잊을 수 있어서 좋은 게요."
제문식은 묘한 말을 했다.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 오늘, 이곳에서 이 사내와 마주치다니. 내 목줄기를 밟아 누르려고 이들은 같은 날 처음으로 내 앞에 나타났더란 말인가. 아니다, 아니야. 전신투구 해보아? 이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각본 아니냐 말이다. 저 적수가 지금 내 앞에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저 일본 놈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다. 여자들은 이들 손아귀 속에 있는 게 아니야. 여자들은 지금 날아다니며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총으론 못 잡으란 법도 그물로 생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총은 명희에게 그물은 인실에게, 조용하는 병적인 가위눌린 것 같은 의지에 따라와 주지 않는 찌그러진 미소를 흘렸다.
"오가다 씨."
제문식이 불렀다.
"네."
"이런 기회에 나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많는데, 그리고 국토의 크기나 규모 그것도 각양각색 아니겠소? 헌데 일본은 섬나라, 세계에서 젤 작은 섬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섬나라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그렇습니다."
"대륙, 육대주든가? 하여간 큼직큼직한 땅덩어리 한 귀퉁이에 쥐 똥만한 섬나라가 일본 아니오? 그 일본이라는 섬나라의 소위 만세일계, 면면하게 이어온 통치자가 칭호 말이오. 그 칭호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었소."
오가다는 술잔을 들면서 쓴웃음을 머금는다. 전개될 이야기의 내용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다. 제문식은 다분히 의식적인 듯 촌스럽고, 빈 공간을 억지로 메우듯 말을 계속한다.
"세계 속에는 나라도 많고 따라서 통치자도 기라성같이 많은데, 나를 말할 것 같으면 가본 곳이라곤 일본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라, 도처에 흩어진 그 우두머리들의 칭호를 다 안다 할 수는 없겠으나 하여간 손쉬운 대로 열거해본다면 황제가 있고 왕에서 대왕, 천자, 종교계든 뭣이든 다스리는 처지니까 법왕이 있고, 추장이다 족장이다, 요즘같이 민주주의가 유행하는 시국에는 대통령, 총통, 주석,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서기장이든가? 그리고 세계의 거반을 정복했던 알렉산더는 대왕 테무진은 칸, 나폴레옹은 황제였었소. 한데 일본은 천황이오. 비교할 수도 없게 넓은 국토와 국민을 가진 중국도 겨우 천자, 그것도 잘못하면 하늘의 뜻을 어겼다 하여 쫓겨나는 판국인데, 하늘을 다스린다는 옥황상제도 천과 황이 함께 있지 않으니 일본의 천황보다는 자리가 낮다 아니 할 수 없소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개미가 우산 쓰고 가는 격이지 도시 황당무계하단 말씀이야.“
"이 친구가, 허파에 바람 들어갔나? 대역 죄인으로 모가지 날려 버리려고 이러는 게야?"
조용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하기는, 네 사람이 산장에서 모의를 했다, 그렇게 되나?"
"물귀신처럼 남의 왜 끌어들이누."
"같이 죽자, 그게 야마도다마시이 아닌가요? 오가다상."
"조선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한다는 말이 있다더군요."
오가다의 응수였다.
"나는 찬하를 믿지요. 발등 찍히는 일은 없을 게요. 원수라 해서 밀고나 고발 같은 건 죽어도 못하는 나약한 사내니까요."
"나는 조찬하 씨가 아닌데."
"동류지 뭐, 하하하하핫핫... 남들이 이 제문식의 눈을 매눈 이라 하거든."
"제군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천황이라는 칭호는 다이가 가이신, 그 무렵부터 시작된 걸로 아는데."
조용하는 오가다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이가 가이신, 그때부터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은 대단히 용감무쌍하오."
"용감무쌍하기보다 왜구니 왜놈이니 하니까 발돋움한 거겠지요."
스스로 비웃듯 오가다는 말했다.
"아니면 소가나 후지하라 같은 권신이 왕이나 다름없는 실권을 쥐고 있어서, 그 이상의 칭호를 필요로 했는지 모르지요. 땅은 우리가 다스릴 터이니 당신은 하나님으로 있으라, 이전에는 오기미로 칭했거든요."
"글세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해서 헤이게나 겐지도 그랬고 도쿠가와는 아예 황실 알기를 쌀섬이나 보내주는 고아원 양로원쯤으로, 부처가 있어야 불공이 들어오고 시주도 받아 중놈이 먹고 실 듯 부처야 늘 말이 없고 메밥을 드시는 것도 아니니까 신불같이 요긴한 것도 달리 없을 게야. 해서 아라히도가미다. 일본인들의 합리성을 설명해주는 거지. 해서 일본엔 사상이 없어."
제문식 말에 오가다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사나 깡패의 경우에도 삼 대 일이면 구경꾼은 어느 쪽을 응원할까? 문식 형은 늘 다수 속에 속한 것이 특징이오. 해서 박수를 못 받지.“
찬하는 마치 희롱의 대상이 된 것 같은 오가다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제문식을 비꼰다.
"박수 같은 게 무슨 소용이야. 실속 없는 박수 좋아하다간 광대 되기 십상이지. 그것도 고상한 광대 말씀이야. 광대란 본시 고상해 서는 안 되거든. 요즘 일 좀 한다는 작자들 고상해서 탈이야. 관중도 없는 혼자 연극이고, 나는 어떤 경우도 하나뿐인 자리엔 안 서둘 셋, 항상 많은 편에 설 거야. 인생은 소요가 아닌 게야. 승산을 위한 싸움이지.“
제문식의 말은 심장을 찍어내는 그 무엇이 있었다. 특히 오가다나 찬하에게는.
"왜들 흥분하고 이래. 술이나 마시자구."
용하는 술을 들이켜며 오가다에게 곁눈질을 한다.
'그렇지, 이놈들이 내 적순데, 하나는 묵은 놈, 하나는 진솔이고 내 경우는 이 대 일 아닌가. 허나 내게는 박수쳐주고 응원하는 놈 하나 없다. 저기 저 매눈 가진 놈도 내 표정에 기복이 심해지는 날 달겨들어 껍데기를 벗기려 할 게고 어쨌거나 실속이고 나발이고 나하곤 상관이 없다! 경매장에서 최고 가격을 때렸는데 그 계집들은 왜 낙찰이 되지 않느냐 그거지.'
조용하는 의식이 해롱해롱,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주기가 전신에 쫙 깔린다.
"아라히도가미 얘기는 이제 그만인가? 재미나는 논제인데 왜 그만두나. 그러니까 지금 현재를 말할 것 같으면 아라히도가미를 치켜든 실력자는 누구인고? 그 유형은 소가, 후지하라도 아닐 게고 겐페이도 아닐 게고 도쿠가와."
"그야 세계를 제패코자 하는 알렉산더, 나폴레옹 같은 과대망상의 뭐 그런 환자들이겠지."
용하 말에 제문식이 대답했다.
"그러면 군부인데 천황 못지않게 신조어를 만들어낸 관파구, 도요도미 히데요시구먼. 오가다상은 어찌 생각하시오."
흥미도 관심도 없으면서 대단히 열중해 있는 것처럼 조용하는 물었다.
"그것저것 다 아닐 거요. 실력자라기보다 실력군이라 해얄 겁니다. 오기미노 헤니코소 사나메에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참본 중에서도 알짜, 비밀 참본, 뭐가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를 그들 일군, 그리고 관동군일 게요."
오가다 역시 내키지 않으나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이것 보게? 당신 정말 일본 사람이오? 정말로 참말 하네."
제문식 역시 건성으로 감탄하는 몸짓이다. 찬하 홀로 생각에 잠기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런 말 마시오. 일본에도 히로히도군 하고 호칭하는 소셜리스트가 있고 군주제 철폐를 외치는 볼셰비키도 있소이다."
농쳐버리려 하는데 제문식이
"그러나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천황과 전쟁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나 의견이 일치되거든."
"지나치게 사시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의 핵심을 놓칠 경우가 많지요. 나도 전쟁 미치광이들을 두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만 일본인 전제가 그렇다는 얘기는 수긍하기 어렵군. 어떤 면에선 당신네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체도 피해자라 할 수는 없을까요? 강요와 기만 술수에 생명을 내놔야 하니까. 이렇게 지탄을 받는 것도 그렇고, 안 그래요?"
"역시 당신도 민족주의자요."
조용하가 휘저어버리듯 말했다.
"죄 없는 사람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것도 비열한 짓일 게요. 이상으론 세계인일 테지만 같은 추억, 같은 습관 속에 몸담은 사람끼리 정다운 거야 당연하지 않을까요?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이지요. 그게 민족주의, 그렇게도 생각 할 수 있겠네요."
"아니지, 아니오. 문제를 그렇게 보아서는 안 돼. 물론 나도 유전 인자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의 일본은 역사의 산물이며 또 누적된 시간과 상황의 결과로 봐야 해요. 일본만 그렇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며 모든 민족은 그 특성이 개인과는 달라서 말하자면 사회 삼리인데.“
제문식의 말을 가로막듯
"역사의 산물이며 누적된 시간과 상황의 결과라구? 그거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상통하는 거 아니야?“
했으나 조용하는 취가가 덤벼드는지 고개를 흔들곤 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찬하는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문식은 말을 계속한다.
"일본에는 민족주의 같은 것 없어. 있다 하더라도 그건 희박해. 그곳엔 군국주의와 황도주의가 대종이다. 민족주의란 외적인 침입을 끊임없이 받으며 싸워서 제 나라를 지키는 데서 싹트고 자라는 것, 일본은 거의 외적인 침입이 없었던 나라 아닌가. 국세가 융성해서 그랬다기보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인방에서는 잊혀진 곳, 관심 밖의 나라, 그러니까 세계사 속에선 뒷길을 걸어온 셈이지. 침략이란 반드시 강한 편에서 약한 편을 정벌하는 것만은 아니며 없는 쪽에서 있는 쪽을 사생결단하며 생존의 신장책으로 감행할 경우가 있는데 일본은 후자에 속하는 거고, 전쟁이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균형의 법칙에 의한 필요악으로서, 그러니까 일본이란 섬나라는 역사상 근해에 나가서 노략질이야 했겠으나,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남을 침범하고 내가 침범당하는 일이 별반 없었던 관계상 제 나라 안에서 끊임없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닥은 좁지만 균형의 법칙에 의한 필요악과 인간 본성의 호진성이 제 동족끼리, 상호간에 행해졌던 겨야. 민족주의가 없다, 민족주의 사상이 희박하다, 그렇게 보는 내 견해의 이유가 바로 거기있네. 이들이 명치유신을 꾀하여 그야말로 천우신조, 천재일우라, 열강의 뒤꽁무니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노쇠한 청국, 국내 사정이 엉망으로 돼 있는 러시아를 물어뜯은 것은 전통적인 그 칼과 황도사상, 그러니까 칼은 힘으로, 황도사상은 명분으로 둔갑한 거지.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공범자끼리의 굳은 악수, 털어 먹으러 가자, 털어서 갈라먹자, 음흉스럽지. 국민이나 실력자나 서로의 자분을 생각하면서 멀쩡한 얼굴로 천황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거든. 저희들끼리 싸우다가도 공동 이해에 처하면 칼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눈 깜짝할 새 선회하는 일본의 특성이야말로 황당무계한 것도 진실이 되며 진실에 대한 고뇌가 없기 때문에 참다운 뜻에서 사상과 종교도 부재야. 차원 높은 문화 예술이 없는 것도, 그들의 음악이나 춤을 보아. 단조로운 몸부림, 힘의 폭발이 없는데 칼면 잘 싸우거든. 한마디로 천황을 아라히도가미로 모시는 황당무계한 것도 방편에 불과한 건데, 충성의 대상이 다양하다.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천황에서 장군, 번주, 잘게잘게 썰어 내려오면 새까만 말석의 무사, 그들 밑에 따른 자에게는 그들이 각각 충의의 대상이라, 충의의 그 곁에는 언제나 칼날이 번득이는데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민족주의의 희박함을 감지할 수 있지. 아녀자도 가슴에 비수를 품고 주군이나 부모의 원수를 찾아 방랑하는 기풍이 성행하고, 그러니 그들의 적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 자신의 동족이었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찬하에게는 안됐네만 일본 여자들이 쉽게 타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도 틔여 있던 나라가 아니었고 닫혀 있었던 나라인데 말씀이야, 그 의식 구주가 조선 여자들하고는 판이해. 그것은 사회가 조성한 일종의 반영인데 도진오키치나 오쵸오후진이 아름다운 비극으로 무대에 상연되는 것만 보더라도, 그런 것이 조선에서 가능할까? 어림없지."
마지막 부분은 찬하의 심기를 비벼대는 것과 동시에 오가다를 괴롭히는 내용의 얘기였다. 오가다와 유인실 풍문을, 신문 지상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유인성과는 면식이 없을 수 없는 왕시 동경 유학생군의 한 사람인 제문식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당신 얘기를 듣고 보니 수긍할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 짐작이 많이 틀리군."
오가다는 침울해서 말했다.
"틀리다니?"
"당신은 누구보다 반일의 골수파로군요."
제문식은 껄껄걸 웃었다.
"나는 언제나 리얼리스트요. 현실은 분명 꿈이 아니거든. 군국주의든 민족주의든 사탕같이 달콤하게 제조하는 애국심에는 바판적이다 그 말이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오가다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거 기분이 안 좋아서 자릴 뜬다는 오해 받기 십상인데 나는 가봐야 할 약속이 있어서."
하며 시계를 들여다본다. 약속이라는 말에 졸 듯, 그러나 가차 없이 자신을 우롱하는 인실의 언동을 되새기고 있었던 조용하가 눈을 떴다. 찬하도 오가다를 따라 일어섰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옛날같이, 여러 해 만에 찬하는 예절 바르게 형을 향해 말하였다.
"나가는 곳까지 함께 갔다 오겠소."
밖으로 나온 찬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운전수를 불렀다. 두 사람은 차에 오르고 자동차는 떠난다. 까마귀가 무리를 지어 날아오르고 날아 내리는 해거름의 언덕과 들판이 차창 밖에서 달아난다. 일몰은 끝났는데 저 겨울 들판에 까마귀 떼들이 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려고 잠자리로 떠나지 않는 건가, 찬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불행한 사내야."
오가다가 불쑥 말했다.
"무슨 뜻이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불행한 사내... 그러나 항상 불행한 사람은 없고 항상 행복한 사람도 없고 ... 남이 나보다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며 내가 남보다 항상 블행한 것도 아니며."
"당신 형은 뱀같이 교활해 뵈고 그 입술 두꺼운 사내는 굶주린 이리같이, 바닥 모르게 무서워."
운전수가 듣거나 말거나 오가다는 서슴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 독기가 다 빠져버렸어. 왜 그럴까? 형한테서 독기가 빠져버렸다는 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줄 알았는데."
하다가 멈추었던 노를 다시 젓듯
"제문식이, 그 작자는 어쨌거나 천재요. 바닥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본 얘기고, 형과 그와의 관계는 수재가 천재에게 잡혔다. 송충이 같이 싫은 놈!"
찬하가 흩어지다.
"아무튼 흥미 있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소."
"바닥 모를 인물... 하는 얘기는 늘 빙산의 일각이고 표변무쌍,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능력에 견주어 한 치 일 푼도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철저하지. 그자 말대로 리얼리스트요. 경계를 하다가도 그 배짱 속에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의문이 생길 때도 있고, 어릴 때부터 보아왔지만 모르겠어. 이십 년 넘게 늘 보아온 사내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건 약한 힘에 틀림이 없어."
찬하도 운전수에게는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건, 논리를 어떻게 전개하든 궁극은 멀고, 결국 사상이나 종교란 인생에 있어서 무장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인생자체는 아니다. 인생이란 비애에 가득 찬 것, 왜 해가 지고 까마귀가 저리 날으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지 않느냐 말이오."
오가다는 담배를 꺼내 붙여 물었다.
5장 사랑
"오빠, 다녀오겠어요."
했으나 인성은 돌아보지 않았다. 알맞게 넓은 등이 강한 거부를 나타낸다. 인실은 그 등을 우두커니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오빠의 허락을 받으러 온 걸까? 그냥 가도 되는 건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양말 신은 자신의 발을 내려 본다. 인실은 자기 발이 작다는 생각을 한다. 오빠의 고통스러움이나 오가다의 절실함이 자기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발이 작고 빈약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는 게야."
말하면서 인성은 돌아보았다. 인실이도 눈을 들었다. 오누이의 눈과 눈이 마주친다. 아니 날카롭게 부딪친다. 인성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만다. 그리고 노여움으로 빛나던 눈은 애원의 빛으로 달라졌다.
'오빠, 우리 좀 당당해집시다. 부끄러움, 가책 같은 건 갖지 말기로 합시다. 의지가 거짓으로 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의지가 거짓하고 통할 때, 그것은 승리가 아닐 거예요. 이런다고 나 감정에 빠져서 무모하게 허우적거리진 않을 거예요. 순수한 것과 무모한 건 달라요.'
'넌, 인실이 넌 오가다를 방패삼아서 결혼을 안 하려는 거다. 너가 결혼을 하지 않고 외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내 탓이고 실은 이 내 탓이란 말이다!'
'알아요, 하지만 지금 오빠가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닐 거예요. 인실아 창피스럽다, 인실아 제발 도 이상 망신을 당하지 않게 해다오, 가지 말아다오 이겠지요.'
'오냐, 너의 말이 맞아. 난 수치스럽다!'
"그럼 오빠, 갔다오겠어요."
인성은 외면을 했다. 인실은 그 방 앞에서 물러났다. 마루 끝에 놔둔 외투를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푹 싸면서 뜰을 질러나가는데
"작은아씨, 가시는 거예요."
오라범댁 양순이 쫓아 나왔다.
"정말 가시는 거예요?"
인실의 팔을 잡는다.
"작은아씨, 그 마음 어째 내가 모르겠어요? 알아요. 너무나 잘 알아요. 하지만 한 번 더 생각을 해보세요. 오빠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인실은 양순의 팔을 풀었다.
'가나 안 가나, 최대의 관심사였을 거야. 호기심 때문에 잠도 못 잤을라? 아무튼 오빠는 신사다.'
"작은아씨, 정말 그러심 안 돼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내가 가야 당신 마음이 흡족할 텐데, 종일 발라놓은 것 같은 여자.'
대문 밖으로 나온다. 대문이 열리고 닫힐 때 나무와 나무가 마찰하며 내는 독특한 음향이 몇 발자국을 걸어 나온 뒤에도 인실의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뇌수를 뽑아내는 것만 같은 그 음향, 인실은 비로소 심장의 피가 소용돌이치며 아우성치며 아픔과 괴로움이 달겨드는 것을 느낀다.
'오빠는 신사다.'
올케에 대하여 불만이 있거나 경멸할 때 인실은 곧잘 마음속으로 오빠는 신사다, 하고 뇌곤 한다. 호기심이 강하고 감정을 종잇장처럼 발라대는 여자, 어쩌다 하나를 알면 세상의 몯느 일을 다 알아버린 듯 난 체하는 여자, 어려운 단어 하나로 유식함을 자처하고, 하긴 단순하여 악랄함은 없다. 그런 모든 단점을 감싸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유인성의 커다란 품, 인실은 오빠의 그런 남자다움을 존경하면서도 올케를 싫어하였다. 양순의 최대의 관심사는 인실이 오늘 나갈 것이냐 안 나갈 것이냐, 그럴 만한 일이긴 했다. 어젯밤을 생각하면은 인실은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선우 형제 집 주연에 간 오빠가 하마 돌아올까 귀를 기울이며 책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들쑹날쑹이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가는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기를 두 번, 겨울밤은 길었다. 바람은 스산하게 들창을 흔들었다. 경찰간의 사벨 소리를 연상케 하는 한밤의 바람 소리, 기분 나쁜 그 소리, 오렌지 빛 안개 같은 빛을 발하는 발가숭이 전등이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던 유치장 밖에서는 늘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었다. 어찌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유치장의 문은 육중하였고 열쇠 꾸러미의 소리도 육중하였다. 몇밤을 잠자지 못하게 하며 취조하던 일인 형사의 얼굴, 십 리 가다한 오라기 오리 가다 한 오라기, 며칠을 면도하지 못했을 때 유황같이 누리끼한 안면에 돋아났었던 수염, 그 얼굴은 공포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피를 느낄 수 없는, 벼랑과 같은 절망적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떤 순간, 그것은 꼭 한 번이었었지만 그 얼굴을 불행의 표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인실에게 매우 중요한 심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의 학살을 목도하였던 유인실은 피해자가 갖는, 한치의 여유도 없는 저항 의식을 불태웠다. 그것은 부러질 것만 같은 가파로움이었다.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다. 피해자의 패배로써 그들의 승리와는 관계없이 패배할 뿐이라는 사실, 적이 누구이든, 설령 적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인실은 책에다 마음을 집중하려 했다. 꽁꽁 얼어붙은 길이, 그 길이 걸어와 마음 바닥에 깔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외로움
'그 사람, 나왔을까?'
오가다를 생각했다. 오가다의 얼굴은 결코 불행의 표상은 아니었다. 열두시가 지나고 한시가 다 돼갔을 때 인성이 귀가한 것 같았다. 대문 앞에서 슬렁거리는 기척이 있었다.
"작은아씨, 작은아씨! 나와 보세요!"
별안간 숨이 넘어가듯 오라범댁이 방문을 열고 얼굴을 디밀었다. 눈이 번쩍번쩍했다.
"무슨 일이예요?"
"큰일 났어요."
"오빠가 오신 것 아닌가요?"
양순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그러나 목소리는 다급하게
"그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 일본 사람 말이예요."
"그런데요?"
"옥신각신 야단났어요."
"...."
"어서 나가보시라니까요. 작은아씨 보고 가겠다고 때를 쓰고 있어요.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아요."
인실은 일어섰다. 양순은 인실을 바짝 뒤따랐다.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오가다의 모습은 바로 인실의 시야로 들어왔다. 단추도 잠그지 않고 걸친 오버, 안경이 휘번득였다. 그러나 오가다는 인실을 쳐다보았을 뿐, 다음 순간 잡아끄는 선우신의 팔을 뿌리친다.
"나 할 말만 하고 갈 거요. 이러지 마시오. 정말 이러지들 말라 그 말이오. 나 할 말만 하고."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인실씨를 위한다면 이럼 안 돼요."
선우신도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차원이 달라.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인성은 대문 기둥을 등지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상황으로 판단하건데 주연이 끝나자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오는 인성을 오가다가 따라잡은 것 같았고 그런 오가다를 뒤쫓아 선우 형제가 허둥지둥 달려온 것 같다.
"잘 알면서 왜 이래? 때려줄까!"
선우일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양순이 호들갑스럽게 인실을 붙잡았다. 인실은 그를 떠밀어냈다.
"정말 왜들 이러는 거지요? 복잡하게 불순하게, 당신들이야말로 왜들 이러는 거요?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충실한 친구일 뿐이오. 나를 깡패 대하듯, 일본 놈의 개 취급하듯, 나는 당신들의 신뢰했는데."
목이 메는 것 같다.
"나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소. 히토미[仁實]를 불러내지도 않았소. 담장을 뛰어넘지도 않았소. 히토미의 오빠를 따라온 거요. 이래도 내 의도를 오해하는 겁니까?"
선우 형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히토미상, 나 내일 열두시부터 창경원 앞에서 기다리겠소. 나오고 안 나오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요. 우정도 사랑도 결별도 모두 당신의 자유, 당신의 의사요, 당신 자신이 선택하는 거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는 등을 돌리고 헤매듯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어둠에 사라져갔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늦게 선우 형제는 작별 인사도 없이 당황하며 오가다의 뒤를 좇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실은 깡패 대하듯, 일본 놈의 개 취급하듯, 나는 당신들을 신뢰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오빠나 선우 형제는 괴로웠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오가다의 말에는 한 오리의 실도 감겨져 있지 않았다. 한 오리의 실도 감겨 있지 않았던 오가다의 말, 오가다는 그것 이상의 이하의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사람, 위대하지도 저속하지도 않는, 꾸미지 않고도 할 말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창경원 정문 앞에 오버의 깃을 세우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오가다는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어쩌면 다 가버린 자리에 혼자 남은 가장 초라한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인실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많이 기다렸어요?"
말을 걸었다. 인실은 정확하게 열두시에 도착했지만.
"아니."
했으나 실상 그는 열한시부터 와 있었다.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그는 근처에 있는 주점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왔다. 인실은 매표구로 다가가 표 두 장을 사 들었다.
"들어가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하다가 오가다는 따랐다.
"우리는 겨울에만 이곳에 오는군요."
넓은 뜨락에 들어섰을 때 오가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실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나란히 걸어서 양지바른 전각, 돌층계까지 왔을 때 오가다는 털썩 주저앉았다. 밤새 뜬눈으로 보낸 듯 눈은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뜬눈으로 새기론 인실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도 붉었다. 인실은 오가다를 바라본 채 서 있었다. 휘어진 잔가지 위에서 그네를 타며 까치는 생각이 난다는 듯 이따금 한두 번씩 우짖었다. 오가다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푸른 연기가 겨울바람에 흩어져서 날린다. 인실이더러 춥지 않느냐, 여기 와서 앉으라 할 여유도 오가다에게는 없는 것같이 보였다.
"어젯밤엔 괴로웠지요?"
오가다가 물었다. 그 말대답은 하지 않고
"얼굴이 엉망이네요. 수염도 안 깎고."
오가다는 밀 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입에서는 연신 담배연기가 새나오고 있었다.
"겨울 하늘이 어찌나 높고 맑은지 찬바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소."
"어디 따끈한 것 먹으러 가시겠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난처하지 않겠소? 히토미는 언제나 그런 곳에 가기 싫어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오가다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변한다.
"당신이 그러나까 이변엔 내 쪽에서 겁나는군."
"어째서요?"
"나 역시 누굴 만날까 봐서, 팔매질을 히토미 혼자서만 당하고 난 그것을 막아주지 못했으니까."
인실이 웃는다.
"그런 말 말아요. 돌 맞은 상처 같은 것 저한테 없으니까. 앞으로도 그런 건 상처가 되진 않을 거예요."
서로 오랫동안 바라본다. 불꽃같이 뜨거운 것, 그것은 밀착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넘치듯 메운 것이다.
"실감할 수가 없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 내가 지금 이곳에, 서울 땅에, 창경원에 앉아 있다는 것이. 히토미, 이리 와서 내 곁에 앉아요."
인실은 그의 곁에 가서 앉는다. 잎을 다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르릉 떤다. 얼마 진까지만 해도 포플러의 높은 꼭대기에 검정 종이를 찢어놓은 듯 잎새들이 더러 남아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잿빛 나무줄기에 검정 점이 하늘에 찍힌 듯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새 까치는 어디 갔는지 없어졌다. 스케이트를 맨 중학생들이 연못을 향해 가고 있었다. 땅콩을 입 속으로 털어 넣으며 아이들도 스케이트를 메고 지나간다. 멀리 전차에서 땡땡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가 좋은 거야. 무엇을 더 생각할 필요가 있어? 이대로, 이 순간만은 목이 타지 않는다. 부드러운 양털같이 따뜻해. 겨울의 저 빛줄처럼 따뜻하다. 거짓말쟁이, 체면치레하는 놈들아! 너희들은 항상 목이 탈 게다. 너희들의 그 타는 목을 적셔줄 물은 이 세상에 한 방울도 없다. 끝없는 싸움, 끝없는 피비린내, 업화(業火)로서도 태울 수 없는 더러운 오장, 그것은 영원한 저주다! 나는 이 순간을 사랑하리. 이 여인을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떼를 쓰지 않겠다. 함께 도망가자고 하지도 않겠다! 소유하자는 생각도 않겠다! 나를 계집 섞은 것 같은 자식이라 비웃던 놈들! 이놈들아, 너희들 입에 물고 있는 것이 한 알의 열매가 아닌 똥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는냐!'
오가다는 목도리 사이로 비어져 나온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창백한 안색이다. 추위에 소름이 돋아난 얼굴이다. 그러나 무심하고 마을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오가다는 벌떡 일어났다. 외투를 벗어 인실의 머리에서부터 푹 싸매어 준다.
"여장부!"
오가다는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인실이 얼굴을 쳐들었다.
"그래보고 싶었어요. 무슨 말이든 외쳐보고 싶었어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안경 속의 눈이 물결같이 흔들린다.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핏줄이 터질 것만 같은 충일감이, 이 여인을 사랑하기보다 이 순간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기쁨이 그를 겸손하게 하였고 양보하게 했을 뿐이다. 소유하자는 생각도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가다는 이미 소유했다는 확신 속에 있었다. 인생의 비밀을 두 손 안에 꽉 쥐고 있었다.
"오가다상?"
"말해요."
"지금 당신 마음 알아맞혀 볼까요?"
껄껄껄 소리 내어 웃어제낀다.
"히토미, 그런데 당신은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지요?"
"피부로, 어린아이들은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어요. 공기로 느끼구, 마음이 맑아지면 느끼는 것도 정확할 것 같아요.“
"전혀 정확하지 않는데? 그럼 지금 히토미는 마음이 흐려 있나보지."
"거짓말 말아요."
"하하하핫...... 그럼 당신은 지금 어린애 같은 마음인가?"
"조금은요."
"히토미는 항상 그랬었어 나를 잘 알고 있었던 여성이었어."
오가다는 새 담배를 꺼내 붙여 문다.
"기뻐서 눈물이 난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기쁨이란 슬픔인지 몰라. 많이 슬플 때, 지독하게 슬플 때, 그런 때는 마음 바닥에 좁쌀알만한 내 실체를 잡을 수가 있어서 역설적인 얘긴지 몰라도 평화랄까 그런 비슷한 것이 있을 수도 있더군. 유치하다고 웃지 말아요. 나 어떤 때는 형편없는 인간이거든. 어릴 적에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얘야, 넌 어른이 되고 늙어서 노인이 되어도 도무지 철이 들 것 같지가 않다. 사내자식의 마음이 그렇게 연해서 어떡하느냐, 하시곤 했지요. 난 동경에서 우울했소. 날마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지겨웠소. 지금 그것 사장을 보면 희망이 없어요. 상황이 전쟁으로 치닫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총리가 암살당한 그자체가 중요하기보다 그것이 어두운 앞날을 예시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 관둡시다. 아무튼 우울한 나날이었소. 인간들이 모두 연민스러웠소. 뻘밭을 밀고 다니는 눈먼 도마뱀 같았고 메뚜기 떼 같았고 찬바람에 죽어 가는 메뚜기의 무리가 눈앞을 어지럽게 하는 거요. 어떤 때는 도둑질을 해보고 싶었고 어떤 때는 살인을 해보고 싶었고 어떤 때는 여자에게 폭행을 하고 싶은 충동, 심지어 눈 멀고 문둥병에나 걸려라! 하고 외치기도 했었소. 무서운 자학, 당신에 대한 추억과 바늘 끝만한 가냘픈 희망이 없었다면 난 아주 망가져 버렸을 거요. 어느 한 곳 몸을 실어볼 곳이 없었소. 아아, 그만둡시다. 이런 말 왜 하는 걸까. 지금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
인실은 오가다의 외투를 벗어 도로 오가다 등으로 해서 걸쳐준다.
"추워요."
"히토미는 춥지 않아?"
"견딜 만해요. 한데 눈이 왜 안 오실까. 올 겨울엔 아직 눈이 안았어요."
"눈 얘기는 왜?"
"눈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도둑질 살인 얘기할 때, 얼굴을 푹 싸버리는 털모자와 우장같이 큰 털옷 생각도 하구요."
"그래요? 탄띠 두르고 총대 메고 북만줄 누비는 생각 말이오?"
'알면서 괜히 저런다.'
인실은 집을 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다. 역시 작은 발이었다. 꼭 맞는 검정 구두를 신은 발은 집에서처럼 초라하지는 않았다.
"우리 걸어요."
인실이 일어섰다. 두 사람은 길을 따라 걷는다.
"실은 나 아까 이곳에 들어오지 않으려 했소."
오가다가 말했다.
"왜 그랬어요?"
"히토미를 데리고 갈 곳이 있어서."
"어딘데요?"
"그걸 미리 말할 수는 없어요. 말하면 안 갈 거구, 가보면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그런 곳이거든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곳이오."
"짐작이 안 가네요."
"히토미는 날 믿지요?"
"믿어요."
"그럼 날 따라와요."
오가다의 어투에는 다소 격렬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다짐 두지 않아도 따라갈 건데, 나 당신 무서워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창경원에서 나왔다.
"걸어갈까,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갈까."
"먼 곳이에요?"
"상당히."
결국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시내를 벗어났는데 인실은 어디 가느냐 묻지 않았다. 택시가 간 곳은 조용한 산장이었다. 인실은 그곳이 조용하의 산장인 것을 알지는 못했으나 산장이라는 그 자체에 긴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인실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산장지기 노인이 나왔다. 오가다에게 인사를 했으나 인실에게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찬하가 나타났다. 그는 인실에게 스스로 인사를 했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소, 하듯. 인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그에게 답례를 한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세 사람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뒤 비로소 오가다는
"조찬하 씨. 이분은 조찬하 씨요. 나하고 함께 나왔어요."
"앉으세요. 이름 같은 거 모르면 어때요."
세 사람은 마주앉는다. 인실은 어디서 보았던 것 같은 생각에서 조찬하를 쳐다본다. 예의 그 맑고 가차 없는 눈빛으로 남자와 함께, 그것도 일본 남자와 함께 외딴 곳을 왔는데, 추호도 어색해하는 것 없이 쳐다본다.
'대단한 여자로구나."
"나는 죄인입니다."
순간 찬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인실 씨께서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지요."
"무슨 소리 하는 게요."
오가다가 나무라듯 말했다.
"이 친구 아버지가 일본서 작위를 받았다 하며 저러는 거요. 소심한 것도 일종의 병이지."
인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제 그의 형을 만났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언제였던가 강선혜로부터 들은 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명희선생님의,"
이번에는 찬하의 낯빛이 변했다.
"어떻게 아십니까?"
"전 명희선생님의 제자예요."
"그, 그렇습니까?"
흐트러진 찬하 모습을 오가다는 유심히 쳐다본다. 이 사내의 상처, 그것은 오랫동안 오가다에게는 의문이었다. 상처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은 없지만 오가다는 항상 찬하로부터 그것을 느꼈다. 찬하는 인실의 눈빛에서 모든 것을 깨닫는다. 이 여자는 내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명희선생님, 지금 고생하고 계세요."
인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찬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렇게 흩어진 찬하를 오가다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이렇게 흩어지리라 상상해본 일도 없다.
"꼭 아시고 싶다면 말씀드리겠어요."
인실은 형 조용하라고는 전혀 다른 찬하에게 믿음을 가지며 말하였다. 명희의 의사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고 싶습니다. 꼭 알고 싶습니다."
"시골에서 교편을 잡고 계세요. 보통학교에서, 그것도 촉탁으로요."
인실은 자기 자신이 야학의 선생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항상 그 자신이 여자 대학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야학교의 선생이라는 사실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째서 명희에 대해서는 아픔을 느껴가며 말을 했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찬하는 오가다의 존재, 말을 전해주는 인실의 존재까지 까맣게 잊은 듯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형수님은 결백합니다!"
별안간 그이 입에서 밀려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잘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손님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창가에 가서 등을 돌리고 선 채 밖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오가다와 인실은 석상같이 굳어져 탁자의 한 곳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6장 깨끗한 애국자
"남이 부끄러버서 우예 얼굴을 치키들고 댕기겄노. 억장이 무너지는 이 일을 우야믄 좋노. 아이구 내가심이야!"
진자줏빛 모본단 처네를 쓴 채, 회색 공단을 입힌 털토시도 낀 채 여자는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구식이지만 누가 보아도 부잣집 마나님, 차림새가 호화스러웠다. 얼굴은 살짝 얽었으나 살빛이 박속같이 희었다. 금이빨 하나가 말을 할 때마다 아른아른 드러나곤 했으며 몸집은 비대한 편이었다. 이 중년 여자는 강혜숙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거동이 수상하다 했더니 어제 저녁 때 찾지 말라는 편지 한 통을 남겨놓고 혜숙이 집을 나갔다하며 쳐들어오다시피 그는 관수 집에 나타난 것이다.
"가시나 하나라꼬 금이야 옥이야 키아놨더마는 그 쇠 빠질 년이, 세상에 이럴 수없는 기라. 가시나 머시마 눈이 맞은 것만 해도 남사스런 일인데 이거는 골라도 우야믄 그렇기, 아 하필이믄 소 잡는 백정놈 자식이란 말고! 그년이 미쳐도 한두 분 미친 기이 아니라 카이. 내 이년을 잡기만 해봐라. 자식 하나 없는 셈치고 직이부리든지 지캉 내캉 함께 죽든지. 집안 망하는 꼴을 우예 보노 말이다! 어이구 가심이야, 속에서 막 천불이 난다!"
혜숙어머니는 털토시를 벗어 팽개치듯 방바닥에 놓는다. 처네도 풀어서 벗는다. 이마가 짧고 약간 곱슬머리다. 새까만 머리 새까만 눈동자, 큼지막한 손이다. 나긋나긋하고 하얀 손, 한 냥쭝 가량의 쌍가락지는 황금이었다. 손가락 끝이 뭉실뭉실하여 언짢은 감을 준다.
"지 자식 놈 따문에 일이 이리 됐으니 지도 주, 죽고 접은 맘밖에 없십니더, 다 부모 잘못 만난 죄로,"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던 영광네는 울기 시작한다. 부골스런 여자 앞이어서 영광네는 더욱더 초라하고 바람에 허리 꺾여서 날리는 마른 갈대처럼 가련해 뵌다.
"당신들이사 죽든 살든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예. 내 딸만 내놓으믄 그만 아닌교."
"간 곳을 알기만 함사 이리 속이 타겄십니까. 그 일이 있은 후 집을 나가부리고 여러 달이 되는데 그놈이 죽었는가 살았는가, 어이 구우."
관수는 마누라에게 영광이 일본에 가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친구 평으로 돈을 부쳐준 얘기도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당신네 아들 걱정하게 됐는교? 내 딸을 숨기놓지 않았다믄 간 곳이라도 대주소. 그라믄 나도 긴말 안 할 기요."
"간 곳을 지가 우예 알겄십니까. 참말이지 이 일을 우야믄 좋노. 내사 마, 그놈이 남우 집 귀한 딸한테 펜지질 하는 것도 몰랐는 기라요. 아, 알았다믄, 알기만 했다믄 오르지 못할 나무 치다보지도 말라꼬 조세질을 했을 깁니더."
혜숙어머니 짐작에도 영광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삐를 놔서는 안 되겠다 생각을 했던지,
"실은 우리 주인양반이 올라고 한기라예. 하도 성미가 무서븐 사람이라서 무신 일 터질까 봐서 한사코 내가 말리고, 피차가 안 그렇소? 일 잘못되믄 좋을 기이 없지."
은근히 협박한다.
"그년 오래비가 올라는 것도, 젊은 혈기에 무신 짓 할지 몰라서 내가 온 기라예. 당신네들도 양심이 있으믄 생각해보소. 계집자식이란 생물 아닌교. 험이 났다 하믄 그것으로 끝장 보는 것, 혼인길이 맥히는 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꼬라지를 눈감는 날꺼지 우예 볼기요. 직일 년 살릴 년 해도 부모 맘은 매일반인데, 기왕지사 이리 됐인께, 하고 생각해보는 것도 가이방해야지, 가이방해야 말이지. 도중섬의 뱃놈이라 캐도 우리가 이리 천길 만길 뛰지는 않았일 기요. 내 말 알아듣겄지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소."
"아, 알아듣것십니더. 알아듣고말고요."
영광네는 계속해서 운다.
"내가 우예 그런 화냥년을 낳아는고, 세상 사람들이 에미보다 인물 좋고 행신이 요조해서 크믄 중신애비 맞니라고 개가 목이 쉬겠다 해쌌더마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참말로 남의 예기가 아니네. 금이야 옥이야 키아놨더마는 에미를 속이고 애비를 속이고 그찢어직일 녕이."
한탄을 하다가 욕을 하다가, 그러나 고약한 성미는 아닌 듯싶었고 유족한 살림인 것 같지만 언동으로 보아 행세하는 집안 같지는 않다. 손톱을 짧게 깎은 결벽증도 신체에 한한 것이 성, 일상에서는 데면데면하여 몸을 저미듯 울고 있는 영광네에 비하면 감정의 농도는 훨씬 떨어진다.
" 오늘은 이만 하고 갈라요. 다른 데 가서 수소문을 해보아야겠고, 혹 그 가시나를 보거든 방학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라 카소, 방학 전에 오믄 없었던 일로 할 기라고, 지 아부지가 그러더라 그리 전해주소. 앞으로 두 달이믄 졸업 아닌교. 졸업이나 하고 나서 보자고 살살 꼬아보소. 아이구, 세상에 무신 이런 일이 다 있겄노. 지 아부지는 죽든 살든 내부리드라 다시 안 볼 거라 하지마는 참말이지 인병 들고 골병 드네."
남편이 오겠다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한 지신의 말을 잊었는지 혜숙어머니는 실토를 하고서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지 못한다. 처네를 다시 쓰고 털토시를 끼고 일어섰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만의 일이라도 무신 일이 있다믄 그 성미, 그년의 다리 몽댕이를 쟁강 뿌라아서 앉은뱅이를 맨들었음 맨들었지, 나 역시나 그렇고오, 천량개비 재주를 지닜다 캐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기고."
백정네한테 딸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태산만큼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가 떠난 뒤 작은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영선이
"옴마!"
하며 쫓아 들어왔다.
"이 일을 우야노. 우야믄 좋을꼬. 아이구우, 그 처녀는 와 또 집을 나갔노 말이다."
"그기이 어디 우리 잘못입니까. 우리가 꼬아서 나오게 한 것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나갔는데 우린들 우얄 깁니까. 별도리 있겠소."
"그런 말 마라. 니 오래비로 인해서 그리 됐는데 우리 잘못이 없다 하겄나.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인체 남자하고 여자하고 같나. 그 무상한 놈이 오르지 못할 나무를 머할라꼬 치다보았는고. 이기다 부모 잘못 만난 죄지. 아니다, 아니다. 다 이 에미, 에미 죄 아니겄나."
"울지 마소. 옴마 죄도 아니고 오래비 죄도 아닙니더. 세상이 잘못된 죄 아니겄소."
"해도 소용없는 말 하믄 머하노. 내 좋은 아들, 내 좋은 자식들, 쭉지 부러진 새 아니가. 돌아가신 니 할아부지가 백정의 자식 인물 좋으믄 머하노, 인물 좋은 것이 화근이라, 하시더마는. 부모 말이 문서(文書)라, 참말이지 그 말심이 문서고나. 아이구우 으흐흐흣....."
모녀는 서로 끌어안고 운다. 해도 소용이 없는 말, 해도 소용이 없는 말이었다. 잘못된 세상의 탓이라고 골백번을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언감생심, 수백 년 천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던가. 이이들의 수모도 감수해야 했으며 의복도 백정의 표지가 있어야 했던 세월, 세상이 달라져가고 있다고는 하나 마음속에 찍혀 있는 피차간의 숱한 낙인들이 일조일석에 없어질 것인가. 혜숙의 부모를 탓하기는커녕 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들이 가해자요 죄인으로 생각하는 영광네, 속죄할 길조차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내만 없었이믄 너거들도 없었을 기고 니 아부지 가심에 한도 심지 않았일 긴데, 어느 강변의 소 잡는 사람 만냈이믄 그러려니 하고 살았일 긴데, 어이구 내 좋은 아들, 내 좋은 자식들 쭉지 뿌러진 새로 맹글어놓고, 인물이나 남만 못함사? 공부나 남만 못함사? 슬겁고 사리 깊은 내 아들, 불쌍해 우얄꼬. 어이구우 흐흐흐으으."
"옴마 그만 하소! 그만."
겨울해가 서산을 향해 뉘엿거리고 있을 무렵 관수는 얼굴이 노오래진 한복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이 퉁퉁 부은 마누라 영선의 얼굴을 본 관수는
"와 또 울었노! 그놈의 인자 내 자식 아니거니 생각하라꼬 말했느데 질기 이럴 기가."
화를 벌컥 낸다.
"아부지, 그기이 아니라예."
영선의 말에
"그라믄 멋꼬!"
마누라를 노려본다.
"나중에 말하겄십니더. 손님도 기시고 한께 들어가시이소."
영광네는 한복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부엌 쪽으로 급히 가버린다.
"술상 채리라."
관수는 영선에게 말하고 마누라가 사라진 부엌 쪽을 힐끗 쳐다 본 뒤 한복과 함께 큰방으로 들어간다.
"가나오나 와 이리 뒤숭숭하노. 요새 같아서는 그만 세상 하직했이믄 좋겄다. 앉아라."
"야."
하고 자리에 앉은 한복은
"아이들한테 무신 일이 있었십니까?"
하고 묻는다. 관수 집에 와보기는 처음이다. 장인이 백정이었다는 것 이외 한복은 관수 집의 내막은 전혀 모른다. 그러나 울적해하는 얼굴을 보고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집집마다 남모르는 사정이야 다 있제."
튕겨버리듯 관수는 말했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선지 담배를 붙여 문다.
"사람이 와 그 모양고. 선창가에서 갯바람 쐬믄서 얼매나 기다맀는지 아나?"
한복은 무안쩍게 웃었다.
"그기이 그만 배를 놓치고."
"세 살 묵은 아아도 아니고."
"형님이 기다릴 것 같아서 엉겁결에 마신을 돌아오는 통통배를 타지 않았것소? 그랬더마는 도중에 샛바람이 불어서 어찌나 배가 놀던지, 가덕에 왔을 직에는 창자까지 토하겄십디다. 난생 그런 뱃멀미는 처음이요."
"나도 혹시나 싶어서 기선 회상에 물어보니 마산을 돌아오는 배가 하나 있다 카길래 기다맀이니 망정이지 안 그랬이믄 우짤라 캤더노."
"주소 보고 찾아갈라 캤습니다."
며칠 전에 관수는 한복으로부터 송영선 앞으로 온 편지 한 장을 받았는데 간단한 인사말과 부산에 도착할 날짜와 통영서 떠나는 배 시간이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강쇠도 집만 알았지 주소까지는 몰랐고 주소를 아는 사람이라곤 장용학뿐이었다. 하여 한복이 장용학의 심부름으로 온다고 짐작을 했던 만큼 한복이 명시한 시각의 그 배에서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길상이 나오고부터 한층 경계를 강화하여 장용학도 직접으론 관수에게 편지를 내는 일도 없게 되었고 모두가 민감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기야 만주 바닥을 몇 분씩이나 내왕했으니 주소 가지고 집 찾는 데는 이골이 나 있겄제. 그거는 그렇고 배는 와 놓칬노?"
"그기이 그런께......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와."
"임이를 통영서 만낸 기라요."
"임이? 임이가 누구?"
"임이를 모립니까? 흥이누부 말이요. 임이어매 딸 안 있습니까."
"아아, 참, 그렇지 그 아아."
"그 아아가 뭡니까. 사십이 훨씬 넘어선 할매가 다 됐는데, 처음 지는 임이어맨가 싶어서 깜짝 놀랬십니다. 늙으이 꼭같더마요."
"그러니까 그때 정미년에 산으로 들어간 후호는 못 보았인께 보자아, 이십오륙 년이나 되는구마."
관수는 감회가 새로운 듯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임이는 여직 어디 어디 있었는고? 어매 아배가 세상 떴일 직에도..... 그러고 보이 홍이아부지나 홍이가 임이 얘기 하는 거를 한분도 못 들었고나. 바쁘다 보이 임이라는 아아는 까매기겉이 잊어부맀네."
"지도 용정 갔일 때 들은 얘깁니다마는 그곳에서 시집을 보냈던 모양인체 머시매를 하나 낳았다 카든지, 하여간에 바램이 나서 남정넬 버리고 도망을 갔다, 그런 얘기더마요. 그러이 용이아제랑 함께 못 나왔지요."
"......"
"나는 용정서 임이를 한 분 봤십니다. 그쪽에서는 몰랐겄지마는, 그곳 얘기로는 해를 많이 본 모앵이라요."
"어떻게?"
"식구들이 조선으로 나온 뒤 그곳 공노인을 찾아와서 신세를 많이 졌다 카든데 알고 이 왜놈의 끄나풀이 되어."
"왜놈의 끄나풀?"
"야, 끄나풀인 사내하고 삼시로."
그 끄나풀인 사내가 형 김두수와 손이 닿아 있다는 것까지는 한복이 모른다.
"길상형님 잽힌 것도 임이 소행이라 카더마요. 그래서 임이를 통영서 만냈일 때 가심이 철렁 하고 예사롭지가 앉아서 뒤를 종구다가 배를 놓친 기라요."
길상이 잡힌 것도 임이 탓이란 말을 듣자 관수도 긴장한다.
"종구었다믄 어디 사는지 알고 왔다 그 말가?"
"야, 집은 알아놨습니다."
"그것도 잘한 일이네."
"까마귀 날아가자 배 떨어진다고 길상형님이 나오시자마자."
"그거는 머 깊이 생각할 것 없고, 앞으로 조심이야 해야것지. 통영에는 조병수 씨가 있인께."
"와 아니라요."
뱃멀미 때문에 얼굴은 노오랗게 돼 있었지만 한복은 전과 달리 명랑했고 어조에도 매우 적극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큰 변화였으며 확실한 것이었다. 원인의 그 첫째는 마을 사람들과의 진정한 화해에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 부친의 죄업은 부친으로 끝난 것 하며 인간의 존엄과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게 해주었던 길상이 마을로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렇고 자네는 무신 일로 날 보러 왔노."
"형님하고 용정 가라 카데요."
"..."
"말하믄 알 기라 캄서."
"엿장수 마음대로? 누가 그러더노, 연학이가 그러더나?"
"장서방보다 길상형님이 그러시더마요."
관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엿장수 마음대로, 하기는 했으나 거의 양해가 돼 있었던 일이었다. 한복이 동행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으나 처음 관수의 용정행 얘기가 나오기론 범석의 부친 김한경이 김춘정의 유해를 거두기 위해 만주행의 결심한 후부터다. 한경이 쪽에서는 범석과을 동행을 계획했던 것이나 길상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관수가 가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범석은 일의 전말을 모른다. 한경은 더더구나 새까맣게 모른다. 한마을에 살았기에 관수라는 인물은 알고 있었으며 김훈장을 따라 입산을 했다는 사실도 있어 그냥 신뢰하는 정도였을 뿐. 그러나 한경이 모든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다. 길상이 관수와의 동행을 제의했을 때 범석은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면서 범석은 그러는 것이 좋겠단 찬의를 표했던 것이다.
"그래 떠날 날짜는 잡았나?"
한참 후 관수는 물었다.
"그거는 형님이 작정을 하시야지요."
"아직 겨울이 많이 남았는데 해동이나 되야 안 하겄나."
"그런 말이 있었지요. 그러나 김훈장댁에서 서두는 기라요. 더욱이 범석이 아부지가 십리 이십리 길이냐, 하루 이틀에 될 일이냐 함시로."
"옛날 생각을 하니 그렇지."
"길도 길이지마는 김훈장의 묘소도 확실히는 모르는 형편이고 보니 그것에 가서 사람을 찾아야 하고, 그라고 길상형님 말심도 만주는 얼음이 얼어 있을 때가 길 가기 좋다, 또 흥이 있으니까 유할 곳은 걱정한 것 없다"
"음 ...... 범석아부지는?"
"떠날 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고 기시요."
하는데 영선이 술상을 가지고 왔다.
"나중에 말하겄다 했는데 그기이 멋꼬."
역시 궁금했던지 관수는 따에게 물었다.
"그 여학생 어무이가 오신 기라예."
"뭐?"
관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 어매 어디 있노?"
"작은 방에 기십니더."
"잠시만."
한복에게 말하고 관수는 급히 나간다. 불안한 몸짓을 하며 영선도 뒤따라 나간다.
'참하게도 생깄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복은 무심결에 아들 영호의 얼굴을 떠올린다. 평소에는 여자아이들을 보아도 영호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세상은 개명에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이십미만에 장가가는 풍습이 성행하고 있었으니 영호의 혼인을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복에게는 영호의 혼인이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괴로운 일은 생각 안하는 편이 낫다는 오랜 습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딱 한 번 주막의 숙이를 보았을 때
'애비 에미도 없는 고아라 카이, 저 아아 같으믄 데리올 수 있겄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형님의 딸 같으믄 못 주것다 하시지는 않을 기다.'
한복은 술상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한다.
'보통핵교는 나왔다 하던데 주막집 처자보담이사... 퇴학을 당해도 그놈이 아직은 기 안 죽고 있이니 다행이다마는, 범석이 붙들어 주어서, 얼매나 고마운지 모리겄다. 어매 닮고 내 닮았이믄 넘한체 해악은 안 끼칠 기구마는. 그런데 이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 길까? 아들아아한체 좋잖은 일이 있었일까?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겉은 관수형님이 와 저리 서두는지 아무래도 좀 이상타.'
한참 후 돌아온 관수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술잔에 술을 부어 놓고 술잔을 내려다보던 관수는
"술 들게"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자아 어서 들자고."
두 사람은 술을 마신다. 들창이 환했다. 해가 서산에 걸린 모양이다. 들창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선명한, 묵화같이 선명한 그림자다. 고리짝 하나에 이불밖에 없는 방이었다. 가을에 도배를 했는지 장지문을 뚫고 들친 햇빛에 방안은 온기와는 관계없이 차갑고 쓸쓸하지만, 생활의 군더더기를 느낄 수 없다. 뜨내기와 같은 관수의 생활, 진주에서 떠나온 후 영광의 학업 때문에 부산에서 뜨지는 않았으나 이 동네 저 동네로 전전해온 세월도 그간 수월찮이 흘렀다. 김환이 죽고 혜관은 만주로 떠난 채 생사조차 알 길 없었던, 그리고 관수 자신은 항상 왜경에게 쫓겨야만 했던 절벽과도 같은 세월, 그러나 관수는 절망하지 않았다. 강쇠로부터 너는 김환이 아니라는 빈정거림을 받으면서까지 관수 자신은 허공에 떠 있었지만 그 동안 가로 세로 날과 올을 엮듯 조직의 폭을 상당히 넓혀놓은 것은 사실이다. 강쇠가 김환의 초기 모습이라면 관수는 김환의 후기 모습이라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관순는 김환을 극복해야 했었다. 형평사운동에서부터 소지감을 기점으로 한 서울 소위 지식분자들과 줄을 긋고 석이와 강쇠와 더불어 부산 바닥, 부둣가와 장바닥을 두더지처럼 그 밑창을 파놨으며 용정과 연해주 방면과도 끊임없는 연락망을 구축해왔다. 장용학은 혜관 없는 자리에서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 하면서 진 일 마른 일 대소사를 감당해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리산이 비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김환도 죽기 전에 말했었다.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고, 산의 시대는 당분간 끝난 거라고. 관수는 그러나 반전을 꾀하였다. 계기는 서희가 땅 오백 섬지기를 내놓았다는 데 있었고 길상이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초점을 맞추었다 할 수도 있지만 산을 중심하여 사방에 거미줄을 쳐놓았던 조직은 잠들어 있을 뿐 흔들면은 언제나 깨어날 수 있었다. 흔들어 깨우는 손이 바로 그 자금이었던 것이다. 그 한 예가 길노인 부자의 경우다. 한편 지심만의 이탈, 그의 죽음으로 저해분자는 소탕된 셈이요, 해도사와 일진, 그들과 관계가 깊은 소지감, 조막손이 손가의 아들 손태산도 그렇고 그들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은 상당히 희망적인 것이었다. 관수로서는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이 길상이든 누구든 그것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결국 관수는 그 나름대로 현실을 파악했던 것이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그런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으나 모두가 모두 머리통이 큰 대신 몸뚱이가 빈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학생들 속으로 맹렬하게 침투해가고 있는 추세이지만 그 학생 자체는 여전히 머리 부분을 구성할 뿐이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다고 하지만 크게 폭발할 힘이 못 되었다. 관수는 혁신 세력이 지원한 형평사원동이 그나마 성공하지 않았나 판단하는 것이었다. 신화와 같은 동학항쟁의 그 크나큰 불기둥을 관수는 상기하였다. 대가리도 컸었지만 몸뚱이가 좀 튼튼하였던가. 물론 종전과 같이 동학교보다 동학당으로 투쟁의 지렛대를 삼아야 한다고.
'따지고 보믄 다 엇비슷한 긴데 낯설은 남의 것보담이야, 말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세월만 간다. 핍박 없는 세상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거 아닌가 결국에는.'
그런 생각을 관수는 말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자리를 다져본 뒤 가능성이 떠오를 때 구체적으로 상의하리라. 해서 강쇠로부터 오해도 받았던 것이다. 영광이 집 나간 뒤에는 더욱더 숨가쁘게 관수는 뛰었다. 그야말로 동분서주, 윤필구도 수차례 만났고 손태산, 길상과도 끊임없이 연락을 취해왔었다. 영광의 가출을 응어리처럼 가슴에 안고
"무신 어러분 일이 있는 모앵인데 그렇다믄 범석이아부지를 지 혼자 모시고 가도 되는데요."
침묵한 채 술잔만 거듭하는 관수에게 한복이 말했다.
"가고 안 가고 그런 일하고는 상관없다."
"야......"
"사람우 일생이란."
"......"
"살아가는 동안 마다기 하나씩 하나씩 생기다가 그라고 나믄 가는 기라 마 혜관시님 겉은 사람이 젤 속 편했을 기다. 무자식 상팔자라...... 몇 년을 소식이 없는 거를 보이 얼음 구덕에서 곱기 잠들어부린 모앵인데."
"마디라 카믄,"
"부산 생활도 이자 끝장이 났이니."
"부산 생활이 끝났다고요? 와요?"
"그럴 일 있네."
"......"
"자아, 그러면 자네는 오늘 밤 여기서 자고요...... 내일 아침 집으로 가는 기이 좋겄다. 가서,"
"......?"
"내일 모레 글피, 아니지, 오늘이 며칠이고?"
"양력으로 정월 초여더레 아니요."
"그라믄 보자, 넉넉히 잡아서 열나흘 날까지 범석 아부지하고 통영 조씨댁에 가 있도록, 거기서 기다리믄 내 볼일 보고 갈 기니."
"부산으로 바로 오믄 안 되겄소? 너무 폐스러버서, 이분에도 거기 들맀다가 왔인께요."
"사정이 달라졌으이."
"......"
"내 살림이야 간단하지. 이불보퉁이 하나 짊어지믄 그만이다. 노인네들은 다 세상 버맀고 자식 놈은 집 나가고 허허허 허헛......"
헛웃음을 웃는다.
"설마 만주로 솔가해 가시는 거는 아니겄지요?"
"솔가? 하하핫 하하핫핫 솔가라, 그럴 수야 없제. 하하핫 핫하하 솔가해 간다꼬? 하기는 소리도 매도 없이 달라빼고 접은 생각이야 꿀떡 같다마는 그럴 수야 없제. 술이나 들어라. 세상 뜻대로 되는 일이 어이 있더노. 하하핫핫‥‥‥‥"
관수는 자꾸 헛웃음을 웃었다. 이날 밤 한복은 만취된 관수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우찌 이리 날이 안 새는고 우찌 이리 맨날 밤이가 말이다. 캄캄한 밤만 있노 말이다. 으흐흐흐‥‥‥‥"
"헝님? 와 이랍니까."
"내가 머 잘났다고, 주는 밥이나 처묵고 살다 죽지, 강쇠 말마따나 내가 머한다꼬 이 지랄을 하는지 모리겄다. "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어느 연놈이든? 걸거치기만 해봐라, 배애지를 푹푹 찔러 직일 것이니. 소 잡는 백정, 사람 배애지 못 찌르겄나. 세상 참 가소롭다, 세상이 가소롭다 !"
당장 살인이라도 하러 나갈 듯 눈에 불을 켠다.
"형님이 이래싸으은 지는 우짤 깁니까. 처음 만주로 가라 한 것도 형님이고 그래서 나도 발을 적신는데 참말이지 와 이랍니까."
"그래 내 꼬라지를 본께 자네도 겁나제? 겁이 날 기다! 집안은 풍지박산이고오, 수풀에 앉은 새맨크로 바씨락거리기만 해도 자리를 옮기야 한다. 온갖 수모를 복 받듯이 받아감씨로, 지금도 늦잖아. 자네야 이제 게우 발 담갔는데 늦잖다 그 말이다. 사람우 한평 쳐이 잠깐인데 인병할 놈의 이기이 무신 꼬라지고."
"형님이 우때서요."
"이놈아! 몰라서 하는 말가! 하기사 머 속에 젓국 담는 거를 남이 우찌 알 기고, 음 흠‥‥‥ 알은 또 머할 기고! 나한테 어느 놈이 상 줄기가! 다아 일없다, 없단 말이다! 자식놈도 부모를 헌신짝같이 버리는데 누가 머를 우, 우떻게 한단 말고, 이놈의 세상 하로 아침에 그만 와장창 내리앉았으은, 도끼로 부실 수 있다은 그만 탕탕 때리뿌사아서."
몸도 가누지 못하게 취한 관수는 술을 엎지르면서 또 마신다.
"다른 사램이은 모리까 저 앞에서 형님이 그런 말 못할 깁니다. "
한복이도 어지간히 술을 마시었다.
"못해? 와 못하노! 넘찐 소리 하네, 니가 먼데, 니가 멋꼬?"
삿대질을 한다.
"형님은 백정의 사우고 지는 살인자의 아들 아닙니까.'
"참 그렇고나, 그렇지."
하다가 관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한복이도 함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두 사내는 자신들이 왜 웃는지, 웃어야 하는지 분별도 없이, 우는 대신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형님, 지는 말입니다, 지는요, 지는 말입니다. 후회 안 할깁니다. 겁이사 나겄지마는요, 발 빼지는 않을 겁니다. 영호하고 약조를 했인께요. 살인 죄인으로 세상 끝내긴 보담이야 애국자로 세상 끝내는 편이 안 낫겄십니까."
애국자라 했을 때 한목의 얼굴에는 수줍음이 지나갔다. 그리고 술 안 마시고는 못할 말들이었다.
"그라고 그래야만 나는 빚을 갚는 기이 안 되겄십니까? 빚 안지고 살겄다 그기이 지 평생의 소원인께요. 관수형님이 처음 지보고 만주 가라 했을 직에는 원망스럽기도 했제요. 하지마는 만주 가서 길상형님을 만나보고 그곳 사정을 보이, 야, 길상형님이 나를 깨우쳐준 기라요. 니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라 벗어라 그것은 니 잘못이 아니다‥‥‥ 남이사 머라 카든지 서러버도 억울해도 이자 나는 기대고 떠받칠 기등 하나를 잡은 기라요. 사람답게 살자‥‥‥ 나는 발 못 뺍니다. 나도 이 강산에 태어나서 소리칠 곤리가 있인께요. 형님이 훌륭하고 그 발밑에도 못 가는 거는 지도 압니다. 하지마는 형님 ! 지 앞에서 울믄 안 됩니다. 형님 우는 거를 보이 조금은 같잖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요, 지 말이 틀린십니까?"
"야, 한복아 고기이 정말로 니 말가? 니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나? 못 믿겄네 ?"
"와요, 거복이 동생이라꼬요?"
"하하핫 하하핫 니야말로 젤 깨끗한 애국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