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5-3
14장 용의 죽음
마을 정자나무 밑에 봉기노인과 윗마을의 늙은이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놈이 우리네가 못 시키는 공부를 제 새끼한테 시켜? 아 세월이 얼매나 좋으믄 섈인 죄인 손이 상급 핵교로 다 가노 말이다."
"뒷북 치는 소리 하네. 꽤깡스럽게 그 말은 와 끄내노."
피워 물었던 곰방대를 내저으며 봉기노인은
"아까 그놈의 손, 가방 들고 나릿선 타는 거를 봤인께 하는 말 앙이가. 심술이 나서 하는 말은 아인 기라."
"심술이 안 나는데 와 그런 말을 하는고?"
윗마을 강노인은 실실 웃는다. 봉기노인은 이빨 사이로 침을 칙 뱉는다.
"세상이 꺼꾸로 될라꼬."
"이미 꺼꾸로 된 거는 우짜꼬?"
"그새 세월이 많이 지났고 옛사람들도 거반 저세상으로 갔이니 네 활개치고 댕기는 것꺼지는 좋다 카자, 그래 제놈이 무슨 염치로?"
"백정놈 새끼들도 공부시키는 세상인데 머 어떻노? 성시가 되믄 하는 기지. 만판 그래봐야 입술만 타제."
"이보래?"
"와. 무신 말 할라꼬 눈이 쪼맨해지노?"
"염치도 없기사 없지마는 그놈이 무신 수로? 돈이 어이서 나노 말이다."
"지 성이 잘됐다 카데? 만주 가서,"
"그럴 리가 없다. 나무 될 거는 떡잎 적부터 알더라고 그놈은 어릴적부터 손톱이 길었네라. 도둑질하다가 까막소에서 뒤졌음 뒤졌지, 아무튼 무신 곡절이 있일 기구마. 한복이놈, 그놈 사정을 뉘 몰라서?"
"내사 머리빡이 허옇기 돼가지고 말소도레기 이는 것 달갑잖구마. 누구맨치로 타작 마당에서 몰매 맞는 건 싫은께. 자식들 보기 부끄러버 우찌 사노."
"그 소리는 와 하노!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분 두분이다."
"그런께 귀한 음식 묵고 남우 말 하지 마라 그 말이다. 황천길이 가까운데 남 잘되는 기이 머가 그리 배아프노. 지고 갈 기가, 이고 갈 기가, 눈 한분 감으믄 고만이고,"
"그때 일을 생각하믄 요새도 잠이 안 온다. 석이 그놈, 목을 쳐직일 놈! 주제넘기 지놈이 뭔데? 식자가 들었이믄 얼매나 들었이꼬? 진주서 물지게 지든 놈이, 왜놈 종살이하다 왜말깨나 배웠는지는 모리지마는 건방진 놈!"
"그만해라. 그런 말 해봐야,"
"모리거든 말 마라! 나잇살 처묵은 용이 그놈까지,"
"용이가 어쨌다고,"
"간에 간 붙고 실개가 가 붙고,"
"못 알아듣겠네."
강노인은 지겨운 듯 외면을 한다.
"다 그놈들 샐인 죄인 손들하고 한통속인께. 한복이놈 새끼도 석이 그놈 연줄로 공부 갔다 하더구마. 옛날에는 나를 은공 모리는 금수 치부를 하더마는 제놈들은? 시적 최참판네 덕을 봄시로 최참판댁네 원수 한복이놈하고 배가 맞아서 성이요 아우요 아제요 조카요, 우째 낯이 간지러바서 그리 하노 말이다."
한복에 대한 심술도 심술이지만 타작 마당에서 마을 사람들한테 돌을 맞은 사건으로 하여 석이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봉기는 그들 사이가 가깝다는 데서 감정이 더욱 좋잖은 것 같았다.
"거 이문가문하는 사람 두고 그러는 거 앙이다."
"와, 다돼간다 카더나?"
"아들까지 와 있는 거를 보믄 갈잖을 모앵이라."
"진주서 넘어졌을 때 가는 줄 알았더마는 한 십 년 더 살았이믄 됐제 뭐,"
"우리한테도 곧 닥치올 긴데 남우 일가?"
"아아, 제 멩대로 사는 긴데 남우 일이제 우애 내 일일꼬?"
"흔히들 하나 자식 소자 없다 하더라마는 용이가 아들 하나는 잘 두었제."
"흥, 그만 안 하는 자식이 어디 있어서?"
"그나저나, 금년 농사는 그럭저럭 펭작은 될 모양인데, 적기 묵고 가는 똥 싸는 기이,"
"거기도 들뜬 놈이 하나 있는가배?"
"손자놈이 모집에 가겄다고 생지랄 앙이가. 이놈아 할애비 죽는거나 보고 가라 하고 호통을 쳐놨지마는 전딜까 싶잖어."
"갈 만하믄 가지 머, 얼매나 갈 긴고 그거사 두고봐야겠지마는. 야무에미 요랑거리샀는 꼴 눈이 씨어서 못 보겄더라마는 아들놈 일본 가서 돈벌어 보내는 덕에."
"그것도 운이 좋아야, 대개는 돈도 못 벌고 몸만 망친다 하기도하고 그뿐이믄 좋게? 누가 잡아직이도 모린다 카이."
"하기사 몇 해 전에 일본 간 조선 사람 몰살시?다는 말도 있긴 있었제."
"지 애비는 밤낮 그런 일이 있을 긴가, 밤낮 농사지어봐야 그 태롱이고 젊었일 때 한분 나부대보는 것도 괜찮다 하더라마는 없는 놈이야 오나가나 무신 뾰족한 일이 있겄나. 내 땅에 살아도 왜놈들이 들어가라 나가라 임우로 하는데 그놈들 땅에 가서 부모 형제 기리믄서 그 서름을 어찌 받을꼬? 아이고오 설설 올라가보까?"
강노인이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봉기는 목을 쑥 뺀 시늉으로 앉아 있다.
"아침 저녁이 제법 선선해졌제?"
"출출하구마. 초상집 술이라도 얻어묵었이믄 좋겄네."
"지랄 같은 소리 그만 하고, 한분 딜이다보았나?"
"눈도 못 뜬다 카든데 가보믄 머하노. 개밥에 도토리제."
강노인은 윗마을을 향해 가고 봉기는 그냥 앉은 채다.
"개밥에 도토리제."
혼자서 한번 더 중얼거려보다. 욕을 하고 험담을 했지만 이미 독기는 빠져 없었고 봉기노인의 모습은 외롭게 보인다.
"이평이는 떼부자가 됐고 영팔이도 살림이 따시다 카고 멩이 다돼 그렇지 용이도 아들이 잘 벌어서, 한복이 그놈까지, 거지 중의 상거지든 그놈까지 그런데 와 나는 이리 헹펜이 안 풀리는고 모리겄다. 식구는 많고 앞으로 우애 살 긴고, 입이 많아서 내 죽고 나믄 생이 뒤는 걸겄다마는,"
"혼자서 무신 얘기를 하고 기시오?"
봉기가 돌아본다. 서노인의 양손 복동이다.
"어디 갔다오노?"
한결 다정스러워진 목소리였다.
"읍내 볼일이 있어서,"
"좀 쉬었다 가라모."
"야."
복동이 땀을 닦으며 봉기 노인 옆에 앉는다. 복동네 장례날 상제라 하여 매 맞는 것만은 면했으나 그럴 수 없이 곤욕을 치른 복동이와 그 안사람은 그 후 마을에서 소외당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자연 함께 당했던 봉기와 심정적으로 가까워질밖에 없었다. 당하기로는 그날, 봉기가 훨씬 가혹하게 당했으나 노인이며 비윗살이 좋아서 그런대로 마을 사람들과 쉬이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복동이 내외는 계속 백안시당해왔던 것이다.
"마을을 떤다는 말이 있든데 그기이 정말가?"
"떠고 저븐 맴이사 시시각각이지마는 비비댈 언덕막이 있어야제요. 저분 때는 항구로 나가서 고깃배나 탈까 싶어... 그래서 떤다는 소문이 났던가배요."
"그런데 와 고깃배는 안 탔노?"
"얘기를 들어본께 이력이 나기꺼지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다 카고 사시사철 하는 일도 앙이라 카이 할 수 없이 자파했심다. 그라고 부산에 나가믄 부둣가에서 짐 푸는 일꾼이 있다 하더마는... 그것도 이자는 꽉 째어서 들어가기가 어럽다 카고,"
골이 파인 듯 울퉁불퉁한 손톱을 들여다보며 복동이는 우울하게 말했다.
"읍내에는 머하로 갔다오노?"
픽 웃는다.
"핵교 소사 자리를 처삼촌이 말해주겄다 해서 갔더마는 그것도 발덩거지한 놈이 있더마요."
"아아니, 말해준다 해놓고 다른 사람을 갖다 붙이놔?"
"처삼촌도 연비 연비로 말했인께, 한발 늦었던 기지요."
"핵교 소사라 카믄, 그기이 됐이믄 좋았제. 첫째 집을 준께로. 마할 수 없다. 여기서 구박받고 살라 카는 팔자라믄 그렇기 살 수밖에 더 있겄나?"
"그러시오."
"사램이 살라 카믄 그보다 더한 일도 겪는다. 미련한 듯기, 밥 들어가는 볼때기다가 주먹질하는 사람 없이믄 견디보는 기다. 흥 세상 꼴 더럽다. 샐인 죄인의 자존심도 상급 핵교로 가고, 아 그래, 샐인 죄인 자손이 고사가 되믄 아아들한테 머를 가르칠꼬? 한복이 그놈 어이서 금댕이를 줏어왔나? 살묵살묵 금댕이 짤라다 팔아 사는가? 집도 곱돌겉이 손질해놓고오, 새끼들도 많은데 죽 묵는 일이 없다 카이 구신 곡할 일 앙이가?"
"말이 났인께, 지도 들은 말이 있십니다."
"무신 말?"
올빼미 같은 눈을 꿈벅거리며 다잡듯 묻는다.
"읍내 우편국에서 돈포 바꾸는 거를 처삼촌이 한분 보았다 하더마요."
"돈포? 돈포라 카믄,"
"와 그 야무어매,"
"아, 알겄다. 그 빌어묵을 제집년!"
가래를 돋우어 칵! 뱉는다.
"아들놈한테서 돈포 왔다고 반치해샀던 그거 앙이가."
"야 맞십니다. 누가 돈을 보내주까요?"
"그, 그렇다믄 거복이놈이 참말로 잘된 길까?"
순간 봉기 눈에 겁이 실린다. 한복의 경우는 마음놓고 욕을 할 수 있었는데, 거복이 잘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몰고 왔다.
'영악한 놈인데 앙갚음할까 무섭네. 동생놈한테까지 돈을 부치는 거를 보믄 잘돼도 아주 잘됐는갑다.'
함안댁이 목을 맨 살구나무에 맨 먼저 기어올라가서 목맨 줄을 차지한 봉기였다. 한복이 달구지를 타고 평사리에 올 때면 봉기는 반드시 살인 죄인의 자식이란 말을 들먹였다. 원망에 가득 찬 한복의 눈을 봉기는 기억한다. 그러나 언제나 말이 없었던 한복이, 한복은 견디었고 봉기의 독설은 습성이 되어 방금, 조금 전까지 욕을 했었다. 맺힌 원한도 없건만 석이 그를 두둔한다고 해서, 뭐 석이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샐인 죄인의 자식 놈이 우째서 그리 잘사노! 한복이 들으란 듯 서슴없이 말했을 것이긴 했다.
복동이도 가야겠다며 가버리고 봉기는 여전히 장자나무 밑에서 떠날 줄 모른다. 늙은 부엉이 같았다. 발톱과 주둥이는 날카로움을 잃었고 윤기 없고 엉성한 털, 가지 위에서 간신히 옆걸음질하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시위하는 늙은 부엉이. 봉기는 늙은 부엉이 같았다.
'애비 에미 없이도, 거복이 한복이뿐이건데? 석이놈도 그렇고 홍이놈도 그렇고 사람 구실 못할 기라 여깄든 것들이 내봐란 듯 잘됐는데 명천의 하느님요? 우째 내 자식들은 황이 안 풀립니까?'
높은 하늘에 철새들이 날아간다. 들판의 벼는 영글기 시작했고 그렇게 햇볕이 내리쬐던 고추밭에도 설렁한 바람이 지나간다. 마을을 들끓게 했던 봉순의 죽음, 그 숱한 뒷이야기가 길상에 관한 얘기며, 그런 것들도 삼베옷을 땀이 가신 것처럼 사라졌다.
"덕수할배, 여름도 지나갔는데 여기서 머합니까?"
끝물의 호박이랑 호박순을 따 넣은 광주리를 겨들랑이에 끼고 지나가던 마을 아낙이 말을 걸었다.
"여름 지나가믄 나무 밑에 못 있는가?"
"덕수네 조밭에는 온갖 뭇새가 다 있십니다. 허세비나 하나 세우지요."
"별 걱증을 다 하네. 남이사 하든지 말든지 흥! 남 먼저 나부대사아도 부신 별수가 있던고? 천지개벽이나 했이믄 속이 씨원하겄구마는,"
하다 말고
"남의 걱정은 와 하노!"
역정을 벌컥 낸다.
"아이고 얄궂어라. 이웃간에서 그런 말 하기 예사 아니겄소?"
"늙은 사람보고 젊은 기이 하라 말라! 그기이 무신 버르장머리고오! 내가 니 동무가!"
그래도 심이 차지 않았던지 눈알이 시뻘개지며
"네년도 나한테 돌멩이질 안 했나! 내가 안다! 내가 와 모릴 기고오!"
곰처럼 일어서서 두 팔을 번쩍 올린다. 아낙을 칠 듯이. 아낙은 광주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달아난다. 달아나면서
"이자는 노망꺼지 들었구마."
"네이 이년! 내가 안다! 알고말고!"
그러나 노망도, 정말 화를 낸 것도 아니었다. 봉기 노인은 그냥 그래본 것이다. 노망이라도 든 것처럼 그래보았을 뿐이다.
해질 무렵, 새들이 잠자리를 찾아 날아가는데 용이네 집에서 곡성이 울렸다.
"초상났구나."
마을 사람들이 용이 집을 향해 달려간다. 상가에는 홍의 사무치는 울음 소리, 보연의 호들갑스런 곡성말고는 모든 절차가 정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장지도 마련돼 있었고 영팔이, 연학이, 그리고 뜻밖에 두만아비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돈뻘인 한경이가 의관을 차려 입고 나타났으며 최참판댁 언년이 부부도 와 있었다. 보연이가 시아버지 병간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평사리에 온 것은 석 달 전의 일이었다. 홍이는 진주에 있으면서 이따금 평사리를 다녀가곤 했는데 보름 전부터 휴직을 하고 아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와 있었다.
"마 언제 가도 가기사 가겄지만 어이구 용아!"
영팔이 흐느껴 울었다. 울면서 염을 한다. 한마디 한마디 시신을 묶을 때마다
"용아, 이자 저승 가거든 월선이 만내서 살아라."
다시 한마디를 묶어놓고
"좋은 때 갔다. 우리도 간도에 있을 때 우찌 살았노? 어이구 이만 하믄 갈 긴데 그리 대쪽겉이 살 기이 머 있든고?"
염이 끝나고 입관이 끝나고 빈소가 차려졌다. 분향하고 나오는 사람, 분향하러 들어가는 사람, 멍석을 깔아놓은 마당에는 문상객들이 모여앉아 술상을 벌인다. 머리빡이 하얀 야무네는 부엌 밥솥에 불을 지피며 눈물을 짜고 있었다.
"나이를 봐서는 좀 더 살아야겄지마는 마 그래도 호상이라 할 수 있일 기거마는."
"아암 그렇지. 아들이 잘돼서 할 짓 다 했고 양반댁 딸을 데리와서, 원 없이 시중도 받았겄다, 손주도 보고 용이성님은 편키 가신기라."
"그거 다 심덕 탓 앙이가. 사람마다 그렇기 살믄 법 없이도 될 기고, 그라고 또 이런 좋은 철기에 자식을 앞에 놓고, 남은 식구 걱정없이 간다믄 그것도 대복 아니겄나.
하는가 하면 한편에는
"이평이 성님, 고맙십니다. 참말로 어러분 걸음 했구마요."
아첨 떠는 사람도 있었고
"어러불 기이 머 있노. 나이든께 할 일도 없고, 옛나 생각도 나고 오고 저버서 왔구마."
"소문 들은께 큰부자가 됐다 카든데 이평이성님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별로 안 달라졌십니다."
"자식놈이 부자지 내가 부자가."
"자식이 부자믄, 마찬가지 아니겄소. 주머니 돈이나 삼지 돈이나,"
"밥 두 그릇 묵는 사람은 없인께, 근근히 포전 쫓는 그 시절이 좋았지."
"있인께 하시는 말심 아니겄소?"
"그러씨."
밤에는 차일을 친 마당에까지 밤샘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기둥마다 등이 내걸렸고 뿌연 밤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술잔을 나누며 지난 얘기들을 학 있었다. 상청에서는 홍이도 지쳤는가 조용했다.
"사람의 일이란 관 뚜껑에 못질을 해놔야, 그래야 말할 수 있는거 아니겄소? 칠십 팔십이 되고 다 살았다 다 살았다 함시도 험한꼴 볼라카믄 얼매드지 본께. 관 뚜껑에 못질하기까지는 장담 못하제요."
"우떻게 생각하믄 용이아제는 남보다 별나게 살은 것 겉소. 생시에는 한이 많고 액운도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세상을 떠고 본께, 어느 농사꾼이 그러고 살았겄소? 하기사 농사꾼 되기 아까분 인물이라, 우리네하고 다르지마는 부모가 만나준 계집, 살다보믄 곰보라도 그만, 째보라도 그만, 정분 난 일도 없고오, 한 여자를 그렇기 못 잊어서 그 당시는 숭도 보고 했지마는, 하 참 우리는 그냥 돼지맹크로 묵고 자고 자식 내지르고, 그라고 늙은 거 아니겄소? 한이 많은 거는 우린가 그리 싶으그마는."
"아따야, 한이 되거든 다시 환생해서 죽자 살자 은앙새를 찾으라모."
"흥 임우로 될 일 겉으믄 누가 안 그러고 저버서? 그거 다 타고난 팔자라."
"용이성님이 돌아가遠棺?그런 말들을 하지, 당하는 당자야... 따지고 보믄 다 그만큼, 그만큼 공펭하게 사는 긴지 모리겄다. 사람을 기리고 만내고 그러고 보면 안 기리고 못 만내는 우리보다 가심 저리는 일도 따라서 많은께, 불경서도 안 그러든가배? 애착을 못 끊어서 괴롭다고, 애착을 끊으믄 맴이 편안한 거라고,"
"그라믄 우리는 부처님 될 기다 그 말 앙이가, 애착이사 사람마다 있는 건께."
"아따 시시한 소리들 하네. 병고를 안고 십 년을 살았는데 정분 얘기가 머 말라 죽은 기고. 본인은 얼매나 고생스러웠겄노. 부귀영화도 소용 없고 애착도 제 몸 성할 적의 일이제."
사람들은 밤을 보내기 위하여 이런저런, 깊은 생각 없이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나이를 봐서는 더 살아야겠지만 호상이라 할 수 있는 상가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오랜 병고 때문에 용이 머지않아 죽을 거라는 사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병고 말고는 용이 만년이 비교적 풍파 없이 조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 가슴에 못질을 한 일도 없었으며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어딘지 도인같이 표표했던 그의 일상은 사람들에게 병고로 빚은 음산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날이 밝아왔다. 늙은 부엉이, 늙은 부엉이같이 봉기가 꾸부정하게 등을 꾸부리며 상가에 들어섰다. 그의 등뒤에 뿌연 아침 안개가 서려 있었다.
"아따 일직이 등장 가나!"
누군가 빈정거렸다.
"지랄하네."
봉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왔으면 들어올 일이지 수문장겉이 거기 와 그라고 서 있노."
두만아비의 말이었다.
"나는 베린 놈가? 여기 와 있음서,"
"죽어감시도 지 생각만 한다. 아픈 사람이 있음 니가 찾아오는 게 순서 앙이가."
"세 따라가는 인심이 야박해서 안 왔다 와."
"늦기 온 무안수세가."
"빈소는 어디 있노?"
대청에 마련된 빈소를 보면서 묻는다.
"부엉이는 낮에 눈이 안 뵌다 카더라마는,"
젊은 축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날 발기 전에 상가에 와서 거들던 야무네와 마당쇠댁네가 부엌에서
"음훙스럽기는, 상가에까지 와서 트집 부릴 거는 뭐 있노."
"그래도 이자는 기가 폭삭 죽었소. 소리질러도 뒷심이 있어야제요."
흉을 본다. 빈청으로 올라간 봉기는 분향하고 재배에 반절을 올린 뒤 상제인 홍이와 맞절을 한다.
"마 철기도 좋고, 하낫도 아심찮아할 거 없다. 죽음치고 한이 안남는 경우는 없인께."
평소같이 한마디 한다. 그리고 부조를 내놨다.
작은방으로 들어간 봉기는 갑자기 활기를 찾은 것처럼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뭐니뭐니 해도 죽음을 보믄 늙은 사람 맴이 젤 안 좋네라. 젊은 것들이사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겉이, 저거들도 늙을 긴데,"
젓가락으로 안주부터 집어먹으며
"나는 술 한 잔 안 주나?"
연학이 술을 부어준다.
"우떻게 했노. 며칠 장을 할 기고?"
"오일장으로 결정 났소."
연학이 대답했다.
15장 만주행
들일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범석은 말끔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땅거미질 무렵이었다. 여름도 지났는데 멀리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저녁을 짓는가 한두 집, 피어나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마루에 나앉아서 남포 등피를 닦고 있던 보연이
"오라버니 어서 오시오."
반긴다. 범석은 잠자코 마루에 걸터앉는다. 등피를 끼운 남포로 한곁에 밀어놓고 마루에 걸레질을 한 보연이, 각별하게 할 말이 있는 듯 저고리 앞섶을 잡아당기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짚베로 만든 상복의 모습이 밀려오는 저녁빛이 아련하다.
"내일 진주 간다며?"
보연이보다 범석이 먼저 물었다.
"네."
"며칠 있으면 추석인데, 추석이나 쇠고 가지."
"추석에는 잠시 다녀가겠답니다. 진주서 기별은 발발이 오고, 남의 월급 받고 사는 처지니까 가기는 가야 하는데 나 혼자 걱정이오."
"그럼 매제는 계속 왔다갔다해야겠구나."
"그럴밖에 없지요. 그보다,"
망설인다.
"아무튼 일은 끝났으니까, 그 동안 손님 치송하노라 너도 욕봤다."
"아닌 게 아니라,"
"큰일 뒤에는 으레 말들이 많은 법인데 그만하기 다행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라버니, 정말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만 같고 자리에 한번 눕기만 하면 영영 못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뭡니까."
힐끗 쳐다본 범석은 다소 못마땅했든지
"누구나 다 치르는 일인 게야. 농사지어가면서 거상을 감당하는 농촌의 아낙들 생각을 하면 넌 편한 백성이다."
보연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발명 대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따지자면 이들은 남남이다. 처음 만난 것도 보연이 홍이와 혼인하여 마을에 왔을 그때였다. 그러나 범석은 양자 소생이지만 김훈장의 엄연한 장손이며 보연은 외손녀다. 그러니까 고종사촌인 셈인데 아무래도 서로가 다소 생소하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연이보다 두 살 위였고 혼인 전부터 평사리에 오면 홍이가 찾아가곤 하여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 처남 매부는, 홍이가 두 살 연장이다. 집안은 조용했다. 삼우제도 지났고 상가에 왔던 손님들도 다 떠났다. 영팔이만 추석을 쇠고 가겠다며 남았을 뿐이다.
"어째 집안이 조용하군. 아이들은 벌써 자나?"
"상근이는 자고 상의 는 최참판댁에 갔어요."
"요즘, 상의는 최참판댁에서 사는구나."
"진주할배랑 갔는데 집이 넓어 놀기 좋으니까요."
"매제는 어디 갔나?"
보연은 작은방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대낮부터 한잠이 들어서 저녁도 마다하네요."
"그 사람도 큰일 치르노라 애썼다. 마음을 놓으면 잠이 오는 법이야."
"입술이 부르트고 얼굴이 반쪽이요. 큰일을 당하니까 독신이 얼마나 외로운 지 알겠대요. 이런 때를 두고 집안이 넓어야 한다 했던가 봐요. 게다가 이서방은 늦게 둔 자식 아닙니까. 겨우 세살백이 손주 하나, 머릴 풀겠어요, 상복을 입겠어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생시 인심을 안 잃었으니 망정이지, 먼 곳에서도 일부러 문상 오는 사람도 많았고. 거기 비하면 친정 식구들이 소홀했던 것 같아서 이서방 보기가,"
"이젠 할일 다한 셈이니까, 그런 일이야 뭐,"
사방은 아주 어두워졌다. 보연은 남포에 불을 켜고 마루 시렁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식들 일은 어쩌구 오라버닌 할 일 다했다 하시오."
"그렇게 따지자면 죽는 날까지 할 일은 남겠지."
낮게 웃으며 범석은 담배를 붙여 문다.
"오라버니,"
아까처럼 저고리 앞섶을 잡아당기며 보연은 자세를 가다듬는다.
"실은 오라버니한테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외가집에 갈려고 했지만 틈이 있어야지요. 마침 오셨으니까,"
"의논을 해?"
"네. 누구보고 이런 얘기 할 수도 없고 외숙모님께 말씀드릴까 했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부탁한 것이 들날 거구요. 처남 매부 사이지만 오라버닌 이서방하고 친구간 아닙니까?"
"무슨 얘긴데 그리 뜸을 들이나."
"이서방이 그냥 진주에 눌러앉아 있을는지 그게 걱정이 돼서,"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가 한번, 넌지시 한번 마음을 떠봐주시오. 이서방은 늘 아버님 땜에 아무곳에도 갈 수 없다, 그런 말을 입버릇같이 했거든요."
"그야, 직업 따라서 갈 수도 있지. 사장께서 세상 버렸으니까 고향 변두리만 서성거릴 필요가 있겠나?"
"아이 참 오라버니도, 직업 따라 떠난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조선에서 뜬다 그 말입니다."
"설마, 조선서 뜬다 하더라도 상을 벗은 뒤, 삼 년 후의 일을 미리 조바심할 건 뭐람."
보연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지요. 어차피 탈상까지 전 여기 남을 건데 이서방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버리면 어떡허지요?"
"만주로,"
하다가 비로소 범석도 짐작이 갔던지 침묵해버린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어쩔 요량인지 한번 넌지시 떠보시오."
"..."
"네? 오라버니,"
"떠보고 자시고, 그 사람 생각했으면 생각한 대로 할 테지. 집안사람은 밖에서 하자는 대로 할밖에 없지 않느냐."
범석은 그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정녕 가버리면 아이들 데리고 저는 어떻게 살랍니까?"
울먹인다.
"허참, 누가 내일이라도 떠난다는 건가?"
다소 빈정거리듯, 오누이간에 주고받는 대화이나 툭 터놓지 못하는 생소함은 여전하다. 보연이보다 범석이 쪽에, 범석이 보연을 좀 경망하다고 생각하는 탓도 있었다.
"근심이 되니까 그렇지요."
"매제가 어린애도 아니겠고 풍상도 겪을 만큼 겪었으니 경거망동 할 사람은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이지."
"하지만 전사가 있어서,"
"전사라니,"
"여자, 여자 말입니다. 통영서, 친정 식구들한테 얼굴을 못 쳐들게 된 것도,"
그 말에는 범석이 당황한다.
"아버님 생시엔 뜻대로 못했지만, 차라리 아버님 생전엔 아버님 말씀대로 만주로 가버렸던 편이 나을 뻔했어요. 그때는 식구들 데리고 가라 하셨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두 아이의 애빈데 그런 추태가 또 있을까?"
"오라버닌 세상 버린 시아버님의 이력을 모리시오?"
"시시한 소리 그만두어."
"혼인 전의 여자를 못 잊어서, 그 무당 딸을 평생 데리고 살았다는 얘기, 마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그 얘긴 이서방 앞에선 비치지도 못한답니다. 천길 만길 뛰면서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아 말입니다. 한밤중에도 부자가 닮았다, 그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와요."
"그만두어. 아무리 오라버니기로 듣기 거북한 얘기다. 거 쓸데없는 걱정은 관두고 매제나 깨워라. 만나보고 가야지."
그러나 보연은 매달린다.
"부탁이오 오라버니, 무관한 사이 아닙니까? 한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봐주시오."
무안쩍기도 했겠지만 아첨하듯 웃는다. 범석은 순간 아내 생각을 한다. 메주콩을 삶으려고 수수깡 옥수숫대로 부를 지피던 아내의 옆모습, 수건을 쓰고 땀을 흘리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에게는 물론 시집 식구 남에게도 수줍음이 가하여 말을 제대로 못하는 아내, 아이를 낳은 뒤에도 여전한 그 성질이 때때론 답답했었다.
'보연이가 처녀 적보담은 사람이 됐지. 어지간한 남정네를 만났으면 여간 요망하지 않았을 게다.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나 당돌하고, 그런가 하면 턱없이 어리석거든.'
흉을 보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모자간에 허물없이 한 어머니의 말이었다.
'어질어서 어리석은 것하고 사리 판단을 못하는 어리석음하고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이서방을 하늘같이 생각하니 시부모한테도 자연 잘하게 되는 거고 가장 앞에선 설설 기는 거를 보면 호랑이 잡아먹는 담보가 있다든가? 혼사 때는 지체가 어떠니 하고 말도 많더니 너의 고모님이 단을 잘 내리신 거다. 여자는 남자하기 탓이지. 부모가 못 고친 버릇도 잡게 되니 말이다.'
모친이 그런 말을 할 때 범석은 소문이 파다했던 통영에서 유부녀와의 사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이 이상했다. 자신도 홍이의 그 행적을 깊이 마음에 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여인네 처지에서 어머니가 남자 편의 비행에 과대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들의 경우라면? 며느리의 경우라면 어머니는 어쩌실까?'
그 순간 범석은 며느리에 대하여 한번도 칭찬한 일이 없는 평소의 어머니를 상기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각이 미친 것이다. 불효하다는 자의식과 더불어 그는 아내의 강한 수줍음은 수줍음만이 아닌 억제인 것을 깨달았다.
"오라버니, 어째 말씀이 없으시오."
"음, 아. 알았다."
작은방 앞에 간 보연은
"상의아버지."
남편을 부른다. 다시
"상의아버지,"
하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등잔에 불부터 견 모양이다. 어둡던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홍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다. 열려진 미닫이 사이로 눈을 비비며 홍이 내다본다.
"정시 없이 잔 모양인데 어서 들어오게."
범석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밤도 수울찮이 길어졌는데 대낮부터 무슨 잠인가?"
보연은 잽싸게 이부자리를 개켜서 머릿장 위에 올려놓는다.
"냉수 한 그릇 가져와요."
"네."
범석에게 담배를 권한 홍이는 자신도 담배를 붙여문다.
"내일 진주 간다며?"
그 말대답은 없이
"처남은 어쩔래?"
느닷없이 묻는다.
"뭘?"
범석이 반문하는데 홍이는 애매하게 웃을 뿐이다.
"어쩌기는 뭘 어째?"
다잡듯 다시 물었지만
"그냥 해본 말이고..."
한숨을 쉬며
"마음이 허전해서 갈 바를 못 잡겠다."
"그럴 게야."
처남은 어쩔 거냐 한 말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범석은 직감적으로 처남도 어디 안 가겠느냐 하는 저의를 느꼈다. 하여 추궁한다면 보연의 부탁대로 홍이의 마음을 떠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장부터 그 문제에 덤벼들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범석은 고삐를 늦춘 것이다.
"불시에 당한 일도 아니었고 오래 전부터 각오를 했었는데,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한데 사람이란 죽을 때가 되면 모두 죽는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보연의 말대로 등잔불 밑의 홍이 얼굴은 반쪽이었다. 입술은 부르트고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보연이 냉수 한 대접을 떠왔다. 냉수를 마시고 빈 그릇을 내민다. 보연이 묻는다.
"저녁은 어쩌시겠어요?"
"술이나 내와요."
술상은 마주한 홍이와 범석은 술부터 한 잔씩 마시고 나서
"요즘엔 세상 돌아가는 게 어떤지 모르겠네."
범석이 말을 꺼내었다. 그런 얘기를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운전대 잡는 놈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찌 알겠나. 순사 앞이라면 불쌍한 조선놈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것밖에 모르네."
"그렇게 말한다면 땅 파먹는 두더지가 세상 돌아가는 것 알아도 별 수 없는 노릇이지만 허허헛..."
술잔을 놓고 새 담배를 붙여문다.
"그는 그렇고 최참판댁의 일은 어떻게 되는 건가."
"환국이 아버지 말인가?"
"음."
"어떻게 되긴, 이미 판결은 났고 재판장이 매긴 것만큼 콩밥 먹을 수밖에 더 있겠나? 술이나 마셔."
"판결 난 걸 몰라서 물었나?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하게 생각는다기보다 실은 궁굼해서 물어본 게야. 알기론 계명회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일본 유학생이거나 유학을 끝낸 사람들인데 유독 만주에 있었던 그분이 국내 단체에 가입했다는 것은...그 점이 늘 궁금했다."
"나도 뭐 자세한 건 알 턱이 없고 다만 들은 말에 의하면 주모자 서의돈이라는 사람이 간도 할아버지하고 아는 사이였다는 게야."
"그러니까 공노인이라던,"
"음. 그 어른이 최참판댁 재산을 조준구로부터 거둬들이는 데 앞장선 것은 사실인데 그 무렵 간도 할아버지는 이상현 선생님을 통해서,"
"하동의 이부사댁,"
홍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선생님을 통해서 서의돈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여러 가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더군. 그런 처지인 만큼 용정촌을 드나들면서 자연 할아버지댁에 머물게 됐을 것 아니겠나? 그러다 보면 환국이 아버지하고 접촉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조금도 무리한 얘기는 아닐 거란 말이다."
"그렇겠군."
"뭐 이런 얘기는 되도록 안 하는 편이 좋겠지만 자네 속에 들어간 것은 내 속에 든 것보다 튼튼하니까."
"흥,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든가?"
담배를 손에 낀 채 술을 마신다.
"그래도 그렇지. 신문에는 불온한 비밀 결사라 했는데, 하기야 독립운동하는 사람은 모두 불온한 사람이요 민족주의자는 불온한 사상가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결지어서 무리할 것 없지만 변호사 쪽에서는 일분 유학생들이 모여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순수한 단체라 했으니,"
"그러니까 환국이 아버지 땜에 사건이 커진 것 아니겠나."
"사건이 크고 작은 것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말을 끓고 담배를 연달아 피운다. 범석의 표정은 시골 농사꾼의 평범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지만 지적으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보통학교를 나온 뒤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그 이상 진학을 못했는데, 한편 연학이 인재를 아끼는 뜻에서, 하며 서희에게 범석의 일을 꺼낸 일이 있었지만 웬일인지 김훈장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을 턱도 없겠는데 서희는 묵살했던 것이다. 무론 그런 사실을 범석이는 모른다. 아무튼 보통 학교만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면 계속하여 꾸준히 독학을 했으므로 웬만한 중학교 출신보다 학식이 깊다고들 했다. 게다가 사람됨이 진중하고 착실하여 홍이는 처남이라는 인척 관계 이상으로 친구로서 신뢰하고 존중해왔던 것이다.
"최참판댁 그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까놓고 얘기하자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뻔하지. 다른 여자를 얻어서 사느니 어쩌니, 내가 용정서 떠나올 때도 그런 얘기가 파다했지. 그러나 그거는 왜놈들 눈을 가리느라 그랬을 거고,"
"그런 정도야 나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분이 공산주의잔가 아니면 무정부주의잔가 그게 궁금하다, 그 얘기지."
"뭐?"
"사회과학을 연구하기 위한 모임이 계명회라면 말일세."
"그런 것 나는 모른다. 유식한 자네나 알지. 사화과학은 뭐고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그런 것 알 턱이 있나."
홍이는 갑자기 야유조로 나온다. 그런 것이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사화과학이라는 말이 생소했고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란 글자 그대로 평등하게 소유하자는 것이며 무정부주의는 억압하는 권력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현시점에서 일본과 대항하는 것이며 일본은 또 혈안이 되어 그것을 쳐부수려 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간도 시절 보고 듣고 했었던 독립투사들의 행동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막연한 인식이었다. 관수나 석이나 그런 사람들을 통해 느끼는 것도 대개 그러했다. 두 번의 경험, 헌병대에 잡혀갔었던 일과 장이하고 함께 당했던 통영, 그 차고에서의 능멸은 홍이를 개인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회에의 관여나 관심을 저지했는지 모른다.
"유식하고 무식하고 그런 얘기보다 각기 처지 따라서 할 일은 있을 것 아닌가. 촌구석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망정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아야 하고 정신만이라도 똑바로 세워놔야 앞으로 대처해 나갈 것 아니겠나. 그러니까 칠 년 전인가? 동격에 지진이 나던 그해, 일분의 홀실과 대관들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된 박열이 말이야."
"그 얘기는 나도 들은 것 같다."
"그 사람이 무정부주의자거든. 한데 그 마누라도 같은 사상을 가진 일본 여자였고 상당히 많은 일본인이 그런 사상 단체를 만들어서 그 단체 안에는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활약을 하고 판을 치고 있다는 게야. 물론 무정부주의자뿐만 아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비슷한 모양인데, 내가 왜 얘기를 하는고 하니 일분이과 손잡고 하는 그런 운동이 우리나라 독립하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가 그 의문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식민주의를 배격하고는 있지만, 또 과격하게 일본에 저항하고 있지만, 일분의 자본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투쟁인지 침략자인 일분을 조선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인지, 말하기로는 그 두 가지 목적이 도달하는 곳은 한군데다, 그러나 확실하게 그렇다 할 수 없는 의분이 생기거든. 그러고 무슨 일이든 일사분란하기론 어려운 일이겠으나 또 파벌을 없앨 수도 없는 일이지만, 듣자니까 일본서 운동하는 조선 청년들 사이에 충돌이 보통 아니라는군. 작년에도 수차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서 사상자를 냈다 하니, 이론으로 볼 때 서로 부리가 다른 만큼, 그것도 그렇지만 내 역시 농민치고도 빈농이요 사회 계층에서는 밑바닥이며 또 책을 읽어보면 그 사상의 이론이 각기 정당하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어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나라가 있은 뒤의 개혁이 아닐까 싶어. 우선 나라 찾는 그 목적에다가 맨 먼저 말뚝을 박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나. 그런 책들은 또 어디서 구해 읽었으며. 하 참, 금매고 논갈이하면서 도시 놈들 뺨치겠네."
농담 반 진담 반 놀라움을 나타낸다.
"다 듣는 곳이 있고 책도 빌려보는 곳이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린고?"
"실은 보통학교 때 친구가 하나 있었지. 지금은 중도지폐했으나 동경 유학을 한 친군데, 하기는 그 친구 중학 때부터 방학이면 찾아가서 외지 소식도 듣고, 알다시피 내 처지가 책 사볼 형편도 아닌지라 그 친구한테 구하기 어려운 것 값나가는 책을 줄곧 빌려봤지. 그 친구도 독서인이라 장서가 많았고,"
"독학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학교 과장도 안 밟고 서양 학문까지 했다면 놀라운데?"
"서양 학문이라? 일본말로 번역된 걸 읽었을 뿐이다. 거창하게 학문이랄 것까지는 업고 내 생각에 한학을 한 덕분에 다소 수월했지 않았나, 학문이란 그 근본에 있어서는 동과 서의 차이가 그리 큰 것은 아닌 성싶더군. 인종이 다르다 해서 사람의 기본이 다른 것은 아니니까."
"흥, 하라 하라, 제발 하라 해도 안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 다 팔자소관인지. 어렸을 적부터 공부라면 담을 쌓고 어디든 훨훨 날아만 가고 싶었다."
홍이는 소리를 죽이며 웃는다.
"그는 그렇고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취한 목소리다. 처음부터 대화에 열중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최참판댁 그분 얘길 했지."
"그런데 일본서 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어떻고 했는데 그 얘기하고 환국이 아버지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분 생각이 궁금하다."
"뭣 땜에 궁금하나. 하인 신분이던 사람이 일본 대학 나온 도도한 사람들하고 어울렸기 때문인가?"
"유치한 소리 말아. 계명회가 어떤 건지 대강 짐작이 가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얘기 하고 싶은 거야? 환국이 아버지, 길상이아제, 옳지 못한 일 할 사람 아니다. 남자 중의 남자다! 곰팡내 나는 족보 때문에... 으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아버지, 나를 가슴 저리게 한 아버지한테 딱 한 가지 잘못이 있네. 처남, 그 곰팡내 나는 족보에 눈이 멀어서 음, 하기야 장가는 내가 갔으니, 하지마는 나는 그렇고 그런 놈이 아닌가. 족보에 허리 굽힌 내 아버지는 그러니까 별수없이 상놈의 피가 흐르고 있었더라 그 말일세."
"허허어 그만 술에 주정인가."
"어째서 자넨 길상아제 생각이 궁금하나? 어째서?"
"그거는 다름이 아니라, 그분은 지식보다 경험에서 판단했을 테니 그분의 생각이 궁금한 게야. 공연히 트집 잡지 말어."
"그렇다면, 그렇지만 알 만한 애기군. 자네 만주 가고 싶은 게로군. 그렇지?"
"속단하지 말게. 나보다 매제 쪽의 속마음이 그런 거 아닐까?"
드디어 홍이 쪽에서 기회를 준 것이다. 홍이는 눈을 내리깔며 술잔을 들었다.
"만주 갈 건가?"
"가야지."
의외로 쉽게 대답이 나왔다.
"가족은 어떡허구."
"탈상하면 데려가야지."
"벌어먹고 사는 데는 자네 직업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 아닐까? 달리 생각하는 일이라도 있는 겐가?"
"자네 말대로 속단하지 말게. 내 쪼에 무슨 운동가나 될 것 같은가?"
"하면은,"
"그건 내 개인의 일이다 왜놈 밑에 고공살이하는 것도 싫지만,"
"때놈 고공살이는 괜찮고?"
"고공살이를 할지 장사를 할지 그것을 가봐야 알 일이고 그곳은 내 고향이니까 가야 한다."
"삼 년 동안이나 안사람한테만 맡길 수 있는 일일까?"
"그곳에 안 가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외지에 나가 있기론,"
"진주로 빈소를 옮겨가면 어떨까?"
"빈소를 옮긴다는 것도 말이 안되겠지만 진주로 옮길려면 만주로 옮긴들 무슨 상관이겠나."
"그러나 생각을 깊이 해보게."
"하루 이틀의 생각일까."
범석은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방문 옆에 보연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좀 당황해했으나 보연은 얘기를 엿듣고 울었던지 눈을 훔치며 큰방으로 건너간다.
"어째 아이가 저 모양일까."
범석은 혀를 차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사립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이를 안은 영팔이와 또 한 사내가 함께 들어온다. 시렁 위에서 비쳐주는 희미한 남폿불, 영팔이와 함께 들어온 사내는 관수였다.
"홍이 있나아!"
관수가 고함을 질렀고 영팔이는 마루 앞에서
"아아 좀 받아주었이믄 좋겄거마는,"
엉거주춤 말했다.
"오셨습니까."
범석이 뒤에서 인사를 한다.
"누군고 하니 이거 훈장 어른 장손이구마."
관수가 손을 잡으며 여전히 큰 목청으로 말했다. 홍이 방에서 나오고 보연이도 나와서 잠이 든 채 안겨 있는 상의를 영팔로부터 받아 안는다.
"잠이 들어서, 거기서 좀 재웠구마. 가자 캐도 노는데 잠차져서 올라 캐야제. 그러더니마 나가떨어지데."
"저는 뭐 걱정도 안 했습니다."
"잠이 들어 그런가 와 그리 무겁노."
영팔이 팔은 흔든다.
"홍아 니 대기 섭섭하제?"
관수는 홍이에게 위로를 하고 있었다.
"내 거치가 확실찮으이 기별할 수 없었일 기고 쌍계사에 왔다가 소식을 안 들었나."
"올라오십시오."
"음."
영팔은 범석이랑 함께 방으로 들어가고 관수는 상막에 분향을 한다.
"하나 둘 다 떠나고 아제요, 적막강산입니다."
울먹이듯 하다가 분향을 끝내고 상주의 맞절을 한다.
눌은 영팔이와 젊은 사람 셋이 방에 들앉으리 방안이 그득해진 것 같다.
"초상 치르니라고 욕봤다."
"산 사람이야 욕이라도 봤겄지마는 한분 간 사람은 다시 안 온께."
영팔이 콧물을 마신다. 한동안 방안은 조용해졌다.
"한 사람 두 사람 다가고 훈장 어른 장송을 여기서 만나보이 지난 일이 생각나누마요. 그땐 혈기가 왕성해서 그 양반 속을 뒤집어 놓곤 했는데,"
"와 아니라. 훈장 어른께서는 고집이 애단하시고 니는 또 얼매나 성미가 팔팔했기,"
"젊은 사람들은 우리 하는 얘기 모를 기구마는."
"그런께 그 해가 정미년인가 이십년도 훨씬 전이구마. 우리 군대를 왜놈들이 해산시킨 그 해제."
"산으로 들어가신 일 말입니까."
범석이 웃으며 말했다. 영팔은
"바로 그 일이구마. 산에서 게울을 나는데 식략은 떨어지고 왜병들한테 쫓기믄서 어째 내땅 내 나라서 섬나라 도적놈한테 산짐승모앵으로 쫓기는가 훈장 으른께서 우셨지. 그래도 윤보성님이 살았일 적에는 그고함 소리에 희맹이라도 가졌지마는 윤보형님이 죽음므로 해서 삼지사방 잽히가고 총맞아 죽고 도망치고, 피를 쏟을 일은 머니머니 해도 내 동포가 우리를 화적떼로 몰믄서 왜병정한테 고자질하는 그 일이었다. 아마 무지한 백성이로고 함서 너거 할아버님께서는 하늘을 치다보고 한탄하嫄만? 그래 우리는 간도로 갔고 관수 이 사람은 이곳에 처졌는데 생각해보믄 그런 일들이 모두 꿈길 겉다. 어짜믄 넘어야 할 고개가 그리 많았던고. 이만하믄 세상하고 하직할 것을."
"그래도 아제씨, 옛날이 좋았을 깁니다. 그때는 젊었인께."
"그거는 그래. 이자는 산에 갔던 우리 또래는 다 없고 내가 아마 마지막이 앙인가 싶네. 그러고 보이 활국이아부지는 그렇고 관수니 혼잔갑다."
"가끔 아버지는 윤보 그 어른 말씀을 하더마요."
홍이 말이었다.
"뼈라도 찾아서 무덤을 맨들겄다고 입버릇이더니, 지 몸이 성해야 그 일을 했제? 아기사 뭐 자식이 있나 무덤 만들어봐야 우묵장성 풀 배줄 사람이 있어야제. 죽으믄 그만이고 흙이 되는 기라. 산 사람이 서분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지. 고관대작, 명문거족, 명당 찾아서 묏자리 크게 잡고 비석 세우고, 그래봐야 죽은 사람이 뭐 알기고. 핼로에서 죽은 구신이나 뻐도 찾을 길 없는 구신이나 다 마찬가지제. 홍이 니도 털털 털 어부리고 이자는 날개를 펴봐라. 조선 땅에서는 젊은 사람 못 산다. 니 아부지도 소원했고 하니,"
그새 말할 기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수가 온 김에 영팔은 말을 꺼낸 것 같다.
"식구들은 어떡허구요."
범석은 아까 홍이에게 한 말을 되풀이 했다. 홍이 명백하게 의사를 표했는데,
"어럽기 생각하믄 한없이 어러분 기고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믄 그렇기 되는 거 앙이겄나? 너거들은 상막을 생각하겄지. 그러나 아까도 내가 말한 거맨치로 산 사람이 서분해서 그렇지 죽은 사람이 밥묵고 술마시겄나. 마 거산해가지고 식구들 데리고 가는 기라. 가서 제반사 할 짓 하믄 된다. 다른 사람 겉으믄 모리겄다마는 그곳에는 홍이 니가 설 기반이 있인께, 할매는 돌아가愿?카더라마는 공노인은 아직 살아 기시고, 간도서 죽은 니 어매 전정을 생각해서라도 공노인 죽음은 니가 봐야 안 하겄나. 그기이 또 니 아부지 평소 생각이었인께."
"아저씨 말씀이 옳으신 것 같네 매제도 그렇게 방향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범석이 구부렸던 등을 펴며 영팔이 말에 동조하고 나왔다.
"홍이 니는 이런 말 하믄 도리어 엇길로 나갈라 할 기다마는, 재물이란 없어서 못 쓰지 있으믄 얼매든지 좋은 일에 쓸 수 있고오 공노인이 니 오기를 소원하는 것도 물리줄 재산이 있인께, 앞으로 그 노인이 살믄 얼매나 살겄노. 그 노인이 다지놓은 기반이 어디 재물만으로 되는 기반이가. 너만 똑똑하믄 월급쟁이 같은 거사 유도 아니고 아 그런 데다가 생판 모리는 땅가? 철들기까지 니가 거기서 컸는데. 니 아부지 생전에는 니 아부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그라고 여기 있는 관수 이 사람도 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인께 그러나 병든 아비 두고 못 떠나는 니를 우리가 뭐라카겄노. 또 그런 니 맴이 고맙기도 했고,"
"생각해보지요."
"생각해볼 것 머 있노! 사내자석이 단을 내릴라 카믄 주저없이 내리야지!"
갑자기 관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피시시 웃는다. 홍이도 픽 웃는다. 범석과 영팔이 마음을 놓은 듯 서로 쳐다본다. 홍이는 관수 얼굴에 초조한 빛이 있는 것을 간파한다.
"그런데 석이형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관수로부터 눈을 떼며 홍이 물었다. 석이는 초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석이네가 다녀갔을 뿐이다. 출가했던 막내딸이 함께 들어와 살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겨놓고 왔다면서 장례가 끝나자 총총히 진주로 돌아갔다.
"나두 그눔아아 소식은 못 듣네."
우울하게 말했다. 그리고 순고나 관수의 한쪽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천하에, 죽일 년 같으니라구. 사내가 기집 한분 만내믄 패가망신이라. 홍이 니도 거울 삼아서 처자는 꼭 달고 댕기야 한다.
16장 지시
범석이 가겠다고 일어섰을 때 관수도 따라 일어섰다.
"아니 어디 가실려고요."
홍이 말에
"나하고 오늘 밤 여기서 자지 어디 갈라 카노?"
영팔이도 거들었다.
"함께 주무시지요."
범석이도 말했다.
"안 할라누마. 한복이 집에서 편키 자야겄고 아제씨도 편키 자야제요."
"흠, 눍은 사램이 옛날 이바구함서 잠 못 자게 하까바서? 좋을 대로 하라모. 새는 날에는 또 볼 긴께."
"야아. 새는 날에 또 보입시다."
집을 나와 마을길에 나섰을 때 추석이 가까워오는 하늘에는 좀 이지러지기는 했으나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을길도 훤했다. 정자나무는 시커먼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일 모레면 추석인데 이놈의 신세도 더럽다."
침을 뱉으며 관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범석은 관수에 대하여 잘 모른다. 조부 김훈장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도 처음 듣는 얘기다. 관수가 자기를 김훈장의 장손인 줄 아는 만큼 범석도 관수가 옛날에는 이 마을 사람이었다는 정도, 그리고 연학과 어울리는 것을 보았고 현학이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았기에 다소 각별한 사람이란 인식는 했었다. 그리고 뉘한테서 들었는지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진주서 시끄러웠던 형평사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금년 농사는 어떤가."
뭔지는 모르지만 내부의 홀란에다 기둥을 세웠는가, 자포자기한 것 같은 아까 독백과는 달리 무겁고 침착해진 어조로 물었다.
"평작은 안 되겠습니까?"
정중하게 대답한다.
"그러씨. 나는 어릴 적부터 장돌뱅이라 농사일은 잘 모른께."
뭘 하는가 어디 있는가 그런 말을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에 범석은 화제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왜 물어볼 수 없는지 막연한 판단이었다.
"아저시는 서울 형무소에 계시는 그분을 아십니까?
범석이 자신도 뜻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아저씨라..."
관수는 사십이 넘었고 범석은 스물여섯, 아저씨라 물러서 잘못된 것은 없다. 지금은 김훈장이 살아 있던 시절도 아니다 그러나 관수는 약간 저항을 느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범석의 질문에서 잠시 비켜섰던 것이다.
"알지이. 어릴 직에 한마을에 살았는데 모릴 기라?"
"네."
"와 묻노."
"그런 분에 대해선 누구나 관심 안 가지겠습니까? 아저씨가 옛날엔 산에도 들어가셨다, 그러니까요."
"그 시절이야 어중이떠중이 훈장 어른만 치다보고 따라간 기지."
곁눈질을 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도 길상이는 지금이야 최참판댁 사위지만, 그 사람은 출중했제 면판에서부터 우리네들하고는 달랐인게, 훈장 어른의 훈도도 받았고오,"
누구나 다 아는 얘기, 그것이다.
"요새 촌사람들 사는 기이 우떤지 모리겄네."
"형편없습니다."
"연학이가 원성 많이 듣겄네."
"근동에서는 젤 괜찮다는 우리 마을에서도 근로자 모집에 들먹거리고 있으니까요."
"입에 풀칠을 못해서 들먹거리는 거하도 돈푼 모아서 좀 잘살아보겄다고 들먹거리는 거하고는 성질이 다르지러."
"두 가지 경우가 다 안 있겠습니까."
"일본 간다고 떼돈 버나? 실정을 모리니깨 그렇지."
"푸건이어매,"
"야무어매 말가?"
"네 그 댁 형편 피는 것 보고 마음들이 달뜨기는 했을 겁니다."
"그 겡우는 모집에 간 기이 앙이고 좀 괜찮은 왜놈을 만내서 따라갔인께, 그런 요행이 어디 흔하든가? 운수 나쁘믄 뼈도 추리지 못할긴데,"
"시골이지만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지요. 결국 발버둥치다가 지치겠지요."
"흠, 그나마 발버둥치는 것은 드문 일이고 지치기는 항상 지쳐 있었닌께. 옛날 옛적, 구릿적부터 지쳐 있었닌께."
껄껄걸 웃는다.
"지주놈들 배때기에 기름 올릴라 카믄 지치고 또 지쳐서 뒤질바께 없는 일이제. 흥."
범석과 헤어진 관수는 김훈장 집 앞을 지나서 외떨어진 한복의 집을 향해 간다. 한북이 집에 들어선다. 얼굴을 한번 쓸어보고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형님입니까."
방문을 열고 나오며 한북이 말했다.
"음."
"들어오이소."
"그래."
"영팔이아제는 만났습니까."
"자는 아이를 안고 최참판댁에서 내리오시는 걸 만냈지."
"홍이가 대기 허전해하지요?"
"머, 삼십이 다 돼가는 놈이, 졸지간에 생긴 일도 아니겄고, 무보 죽음도 못 보고 기일도 모리는 자식도 있는데 그런 사람한테 비하믄 한 될 것도 없고 원 돌 것도 없다."
그말에는 한북이도 동감이다. 서로 경우는 다르지만 부모 죽음에 대해서는 피맺힌 한을 가진 두 사람이었으니까.
"밤새가 우는데 흥, 우리 어매 죽은 넋인가 우리 아매 죽은 넋인가. 이 한을 자식대까지 내리보내야 하니 기가 차구마."
울타리 위에 머문 달을 바라본다.
"들어가입시다."
"술 있나?"
"있지요."
관수는 신발을 벗는다. 홍이 집에서는 쌍계사에서 소문을 듣고 왔다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쌍계사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어두워진 뒤 한복이 집에 찾아들었던 것이다. 한복으로부터 용의 죽음을 듣고 선걸음에 홍이 집으로 갔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복이 따른 술잔을 들고 관수는 한동안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이 땜에 큰일이다."
뇌었다. 석이의 그간의 사정은 한복이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초상 때도 석이어머니만 오愿矗뗄?"
"그 노친네,"
하다 말고 관수는 술을 들이켠다.
"돋으면 그 계집년 배때기를 푹 찔러 직일 기다!"
술잔을 거칠게 놓으며 뱉아냈다.
"노친네도 노친네지마는 일 그르쳤다."
"무신 일이 또 있십니까?"
"무신 일이 또 있을 정도가 앙이다."
"그라믄 잽히갔단 말입니까?"
한복이 얼굴빛이 달라진다.
"부산서 튀기는 ?는데 일이 난감하게 됐재. 하마 지금쯤 진주서는 그 노친네가 닦달을 받을 거로?"
"우짜다가,"
그 말 대답은 하지 않는다. 표면으로 들나지는 않았으나 사건은 두 곳에서 추적당한 것에서 발단되었다. 그 하나는 관수를 쫓던 진주의 나형사가 풍문을 잡았고 그 풍문에 근거하여 이혼 상태에 놓여 있는 양을례를 거슬렀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또 남편 하는 일을 명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막연한 느낌은 나형사에게 전달이 되었고 나형사는 관수와 석이는 관련이 있다, 그 심증을 걷혔던 것이다. 그것은 가정의 불화가 빚은 결과였지만 부산서 강쇠와는 별도로, 석이는 다소 의식 분자라 할 수 있는 계층에 파고 들어 항일 투쟁이라는 뚜렷한 명재를 내걸고 비밀조직에 착수했었는데 동지 한 사람이 배신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석이의 실책이었고 가정 형편과 기화의 죽음이 안겨준 정신적 해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지 몇 사람이 잡혀갔고 석이는 튀었지만 사태는 위급했다. 서울서 그 소식에 접한 관수는 황황히 내려와서 우선 석이를 통영의 병수 집에다 은신하게 한 것이다. 병수하고의 관련은 관수가 기식하고 있는 서울의 소지감이 생래의 방랑벽도 있어서 이곳저곳 다니다가 우연히 통영에 들렀었고 도자기에 대한 관심은 또한 목공예에 대한 관심으로도 통하는 만큼 명장으로 소문이 난 병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교우는 시작된 것인데 알고 보니 관수로서는 병수가 초면이 아니었다. 병수가 그의 아비와 다른 점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병수 역시 서로 모른다 할 수 없는 석이, 아비 업보를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생각도 있어서 쾌히 은신처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길게 있을 곳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그 중은 와 안 오는지 모르겄다."
"혜관스님 말입니까?"
"하도 답답해서 행여 소식이라도 있었는가 하고 절에 갔더마는 깜깜 소식이기는 매일반이라. 아무래도 만주 바닥에서 죽었는갑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더란다. 그자도 이자는 다 늙어빠져서 일하기도 어렵게 된 모양이고 죽을 자리 찾을 만도 하다마는,"
말로는 그랬다. 그러나 관수는 이런 시기, 혜관이 없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고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절망을 몰고 었다. 절 문을 나섰을 때, 그때의 심정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었다
"어디 깊숙한 곳에 들앉아 자식들 크는 거나 보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복이를 찾아온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그것은 아들 때문에 한복이가 석이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적인 이유에서보다 이미 한 배를 탄 동지로서 임무를 부과하러 온 것이다.
"손발은 있지마는 대가리 없는 형편이라 내가 줄을 지겡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에서 손 떨고 나오겄나? 중도지폐가 있일 수 있겄나?"
그 말은 지신을 두고 한 말이긴 했으나 한복이한테도 해당이 되는 말이며 어떤 면에선 협박 같은 것이기도 했다. 한복은 뒷걸음쳐지는 마음이었지만 그러나 관수의 의도가 한없이 섭섭했다.
"죽으나 사나 지도 등 돌리지는 않을 깁니다."
성난 목소리였고 관수는 자신의 의도를 간파한 한복이에게 미안하다는, 엷은 웃음을 보낸다.
"처음부터 나는 자네한테 미안하다 생각했네. 처음 자넬 만주로 보낼 적부터, 용서해주게. 일을 할라믄은 늑대겉이 흉악한 마음을 안 가지믄 안 된께. 정에 쏠리믄 십중팔구 일 그르치네. 이번 석이겡우만 해도 그렇제. 그눔아아가 쇠뭉치겉이 단단하더마는 가정사에다가 또... 하여간 맴 한구석에 열리 있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일이 벌어진 거다."
"석이는 지금 어디 있십니까."
"음, 거기도 오래 있일 곳이 못 되제."
어디 있느냐는 말의 대답이 그렇다.
"그라믄 지가 할 일이 멉니까?"
"만주 한번 다녀와야겄다."
"혜관스님 뫼시고 오라 그 말입니까."
관수는 고개를 저었다.
"석이를 데려다주었으면 좋겄다."
"석이를요?"
"음. 석이는 나하고 다르다. 나는 흔적이 없인께. 그러나 석이는 진주에 가족들이 있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가족은 움직일 수 없을 기고 또 그아아 심정이 이곳에서는 일 저지르게 돼 있거든. 어차피 당분간은 숨 죽이고 있이얄 기니, 만일에 그아아가 우떻기 된다믄 다칠 사램이 많은께. 뭐 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잽히지만 안 하믄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것도 앙이거마는, 시초 가정 불화가 여자 때문이라,"
그것은 한복이도 안다. 그의 둘째가 석이 집에 기거했던 만큼, 기화 때문에 분쟁이 시작된 것을 안다.
"계집 문제로 몰아붙일 수도 있지마는, 어이구 참 술맛 없내."
하면서 관수는 술을 마신다.
"아까 홍이 집에 갔더마는, 영팔이아제가 홍이더러 만주로 가라하든데 아마 쉬이 가게 될 거로. 가족을 데리가느냐 혼자 가느냐 작정을 못한 모앵이더라만."
한복의 해답은 들을 생각을 않고 석이 문제에서 비켜서듯 화재를 돌린다.
"그곳 형편이야 자네도 잘 알고 안 있나?"
"예. 가야지요 홍이아부지가 그래 그랬었지, 늦었담 늦은 거지요"
한복이도 간도 가는 결정은 당연하다는 듯
"가믄 기반이 튼튼하고 머를 하든지간에 낯설지 않고 홍이 장래를 봐서."
"장래? 독립운동하라 카믄 우짤기고? 편키 살기는 어러불 긴데?"
"그거야 홍이 생각하기 탓이겄지요. 안 하믄 안 할 수도 있는 기고, 공노인이 홍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순전히 개인으로 바라는 기니께요. 먼저 갔다온 사람들도 길상이 형님말고는 다 제가끔 생업하고 살았인께."
"하기는 그렇다. 누가 하라 해서 하고 마라 해서 안 하는 거는 아닌께. 그는 그렇고 자네 성한테는 무신 연락이라도 있더나?"
"지난여름에 일본 갔다옴서, 부산서 한분 만내자, 그래 만나기는 만났소."
별반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아무튼 거복이 은덕이 크다."
비꼬듯 했으나 반드시 비꼰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 살아가는 기이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검정과 흰빛으로 구벨 지을 수 없는 거이 인간사라 길상이도 하인 신세에서 만석꾼의 바깥주인이 됐는가 싶더마는 타국 땅에서 설한풍 맞으며 편한 사람 눈으로 볼 적에는 지랄 겉은 짓을 하고, 니는 반역자 성을 둔 덕분에 애국을 하게 됐이니 기기묘묘한 세상이지 머겠나. 옛날의 선비들은 악산을 안볼라꼬 부채로 얼굴을 가리믄서 지나갔다 하더라마는 그런 생각 때문에 나라가 망한 기라. 안 본다고 해서 악산이 거기 없는 거는 아닌께. 악산도 이용하기 나름이제. 또 군자 대로행이라 하기도 하더라만 법이 마르고 늑대가 없는 세상이라야제? 늑대한테 안 잽히묵힐라 카믄 두더지맨크로 땅속을 갈 수도 있는 기고 스스로 늑대 노릇도 해야, 끝끝내 해야, 석이 맘도 내 알지러. 그놈의 성정은 군자 대로 행이거든. 허허헛...허허헛...조상과 자손과, 상놈과 양반과 부자와 빈자 그리고 또 인종들이 얽히고 설키서,"
빈 술잔에 한복이는 술을 채운다. 그는 관수보다 길상이를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연충서 길상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 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란 말이야?"
그때 차가웠던 밤바람 생각도 난다. 생소하고 기이한 그곳 풍경도 눈앞에 떠올랐다. 고맙소, 힘든 일을 해주어서, 하고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던 사나이, 왼편 귀 근처에서 입술 가까운 곳까지 푸른 반점이 퍼져 있던 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도 죽었다고 했다.
"아까 홍이 집에서 김훈장 양손자를 만났는데 젊은 아이가 착실해 뵈더구마."
관수는 석이 문제를 팽개쳐놓고 화제를 다시 범석이에게로 돌렸다.
"착실하지요. 성품이 진중하고 부친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보통핵교밖엔 안 나왔어도 식자가 놓다더마요. 양자지마는 문장가 집안이라 그런지 모리겄소. 아래윗사람 알아보고,"
문장간지 우떤지 나 겉은 무식꾼이 알까마는, 오리 새끼는 물로 가더라고 김훈장 냄새가 나더구만."
"그거는 형님 잘못 생각이오. 반상을 구벨한다거나 그런 일도 없거니와 젊은 사람이 관이 트여서 글 모리는 사람 편지도 대신 써주고 대소사를 의논하면 대신 읍에도 가주고 면소에도 가서 대신 일을 봐주고 그렇건만 싫은 기색 하나 없으니, 그해서 동네 사람들 말이 김훈장댁 손주가 면서기를 하믄 좋겄다, 식자를 봐서는 면서기 아니라 군청서기도 하고 남는다 하더마요. 아버지는 마음만 착했지 사람들이 불출이라 하는데 아들을 잘 두었다고 칭송이 자자하지요.
"김훈장은 안 그랬나? 농사짓고 글 가르치고 동네 축문은 도맡아 썼고 대소사를 그분한테 의논했고 그래도 상반 사이를 지른 울타리가 하늘 꼭대기에 닿을 만큼 높았지."
"글쎄요."
하다가 한복이는
"그쪽도 그러했지만 형님이라고 억지가 없는 거는 아니제요."
"뭐?"
"양반이라 카믄 불문곡직 씹어묵을 듯이 미워했으니께요. 그렇다믄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관수는 웃는다.
"부모가 물려주어서 반갑잖을 거야 없겠으나 해 안 끼치고 산 사람한텐 억울하지 않겠소? 뭐 상사람이라고 다 착하고 억울한 것만도 아닌데 말이오."
"허허헛 그거는 니 말이 맞다. 그러나 해를 안 끼치도 김훈장 같은 사람은 마음의 해를 끼친 사램이다. 지조가 높고 청빈한 거는 좋지마는 종자가 다르다는 생각은 때에 따라서 배고픈 설움보다 더한 설움을 안겨주니 말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이 깊어져서 두 사람은 자리에 들었는데 피자 간도행에 대하여 해담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해답을 주지도 않은채 다음날 아쳄늘 맞이하였다. 잠이 깬 것도 밖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때문이다.
"세상에 제삿밥을 아쳄에 나르는 사램이 어 있겄노? 그렇다고 숭보지마라."
야무네 음성이다.
"하기사 여기는 외떨어져서 맨 나중인께 더 늦기사 했다마는, 내 깐에는 아침 전에 갈라묵을라꼬 한창 바빳네라."
"형편대로 하는 기지 머를 그리 마음을 써샀십니까."
"아 그러시 제사를 뫼시고 막 제삿밥을 나를라 카는데 며눌아아가 딩구는 기라. 가심을 치믄서,"
"급체든가배요."
"일한 끝이라서 얼매나 놀랬는지, 정신이 부실해서 추굴을 받았는가 생각했다 카이. 그도 그럴 것이 사지가 싸늘해지고 입에서 개버큼을 뿜고 시적 숨이 넘어갈라 안카나. 사람 하나 놓친 가심이라 환장하겄더마는. 딱쇠가 지 사람 뺨을 치고, 그러는데 뱃속에서 꼬그르르 소리가 나더란 말이다. 사지를 주물렀제. 자꾸 주물렸더마는 손에 온기가 돌아오데 딱쇠는 웃마을 도식이 어른을 데물러 가고 나는 연방 수족을 주무르고 십년감수했네라."
"이자 좀 괜찮십니까."
"그만한 거를 보고 왔인께. 밤새도록 그 싱갱이를 하니라고 제삿 밥이 어 있더노?"
"아무튼지 만분 다행입니다."
"어이구 참말이제 근심 떠날 날이 없구나."
야무네는 마지막 제삿밥을 나른 집이어서 그랬는지 떠나지 않고 마루에 걸터 앉은 채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너거 집에는 금년에 미영 많이 땄제?"
"예년하고 같십니다."
"이자는 깃구들도 많아지고 큰아이는 시적 장개를 보내야 할긴께 너거 집도 면포는 못내겼제?"
"야. 찍어붙일 등이 많아서 장에 나갈 기이 없으십니다. 와요"
"그러씨... 맨날 베틀 위에 앉아서 짜니라고 짜도 내솜씨 열다섯 열여섯 새는 어림도 없제. 열석 새 짜믄 대금산이고, 시어미 닮아서 며눌아이도 선일이나 잘하지 이새는 볼 기이 없다."
"다 고를 수가 었겄십니까."
"우리네사 열석 새라도 황감하제. 그런데 어디 선사를 좀 했이믄 싶어서,"
"그러니께"
"음 장에 가믄 만수로 있겄지마는 같은 거라도 니가 짠 것만 못하더라. 어짤래? 한 필만 팔아라."
"꼭 소용된다믄 그렇기 하지요 머 지 꺼라고 더 나을 기이 없일성 싶은데,"
"그라믄 한 필 주는 기다?"
"야. 요새는 아지매 집은 재미가 납디다."
"너거 집은 우떻고?"
"우리사 머."
"아들은 상급 핵교에 보냈고 또 너거 서방님겉이 엄전하고,"
"아지매도 아들 잘 낳아서,"
"그거는 그렇다마는, 우리 푸건이가 지금까지 살았으믄 얼매나 좋았겄노. 물물이 생각이 난다. 그기이 애척을 남기고 갈라꼬,"
"사우는 새장개 들었는가요?"
"새 장개를 들었는지 그거를 누가 알겄노. 어디 있는지도 모리는데"
"그라믄 복가에 안 가있다 그 말입니까?"
"푸건이 따라 나오믄서부터 그쪽에서는 자석 앙이다, 동기간도 앙이다, 했는갑더마. 종적이 있어야 알제. 그 사람도 세상을 자파하고... 내 딸 못 잊어하는 거사 얼매나 고마분 일고? 그렇다고 해서젊은 사램이 장개도 들고 자식도 보고 해얄 긴데 어디 가서 멋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믄 푸건이 그놈의 가씨나가 못할 짓 안했나."
"아이구 참, 죽고 저버서 죽었겄소? 아무리 살라꼬 해도 못 살고간 사램이 불쌍채요."
"에미사 그당장에는 너무 불쌍해서 관 속에 함께 들어갔이믄 싶더라마는 세월이 가이 며느리 보고 손자 보고, 하기사 손자는 말만 들었제 일본 있는 놈을 우찌 보겄노. 그래도 낙 붙이서 사는데 남정네가 더 불쌍타."
"누가 압니까. 새 장가 들어서 자식 낳고 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기는 안 했을 성싶으이. 피나게 벌어서 지제집 약값 대노라고, 그렇기 살리볼라꼬 애를 쓰더마는 죽고 나이 무신 보램이 있노. 이자는 지 오래비도 살 만하다 카고 우리도 살ㅣㄻ이 피지니께 처가라고 우죽우죽 찾아오믄 손목 잡고 장개가라 하겄다. 성시가 못 돼서 장개를 못 산다믄 내똥 묻은 중우를 팔아 서라도 우리가 장개 보내겄다. 세상에 어느 남정네가 병든 가숙을 그리 섬길꼬? 다 푸건이 그 가씨나 복이 없어서 갔제."
"와 아니라요."
"가을이 되믄 찹쌀 두 되 담가서 떡을 하고 밤 두 되랑 싸들고 아 파누운 푸건이 보로 오리섬에 간 생각이 난다. 그때는 얼매나 기찹 았든지 딸네 집에 갈라꼬 조가비 속에 일전 이전 여비를 모았네라. 그래 사돈댁이라고 간께 딸 준 죄인이라 그 냉대를 머라 캤이 믄 좋을꼬? 돌아올 직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안 보이더마. 내가 기찹고 못난 죄로 그런 괄시 받고 돌아간다마는 아파 누운 내 자식 조석이나 챙기주까? 시퍼런 바닷물에 빠져 죽었이믄 싶더마. 그것도 다 옛말이 됐는데 가을이 오믄 생각이 안 나나."
"우리라고, 그 기맥힌 말은 책으로도 다못 모울 깁니다."
"그거사 내가 어디 모리나. 너거 산 역사는 잘 알지, 알고말고, 이자는 밥술 두고 묵은께, 이 보래, 내 말 좀 들어봐라. 그러씨 사램우 맴들이 와 그러꼬? 이거는 우리만 보고 그러는 기이 앙이고 너거 집 우리 집을 두고,"
"와요?"
"오라니? 니는 모리나?"
"뭐 말입니까."
"아 그러씨 우리가 못살 직에 천대를 복 받듯기 안 받았나? 그런데 이제는 우떻노? 니나 너거 서방님이나, 또 나하고 우리 딱쇠도 마찬가지제. 우리가 천성으로 잘산다꼬 갈롱을 피울 사람들가? 잘 산다꼬 빈치를 했다 말가? 또 잘 살았이믄 얼매나 잘 살았겄노. 게우 어리 필만하다 그건데 세상에 이자는 밥술 묵는다꼬 눈에 까시 앙이가 말이다. 너거는 머심아를 상급 핵교에 보냈다고 얼매나 말들을 하노. 또 우리보고는 최참판댁에 가서 알랑방구를 뀌어서 땅을얻었느니 우리 얀무가 일본서 도둑질을 햇느니, 세상에 그런 벼락맞일 소리가 어 있겄노 북동네가 억울키 죽은 지 얼매나 됐다고그 지랄들을 하노 말이다. 필시 그놈의 봉기 늙은 것하고 복동이놈 그제집하고 작당이 돼서 말들을 꾸미는 모앵인데,"
흥분하여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이 될 모양이다. 어쩌면 그 얘기를 하려고 제삿밥을 맨 마지막에 가져왔는지 모른다. 다른 때 같으면 내다보며 인사라도 할 것을, 한복이는 바깥 얘기를 귓가에 흘려 들으면서 반듯이 누운 채 천정만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수는 가슴에 베개를 안고 엎드린 채 궐련을 피우며 역시 말이 없다. 아직 햇살은 퍼지지 않았고 장지문엔 옥색 아침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소나아에 그 제집이라, 그러씨 아침에도 제삿밥을 가지고 안 갔더나? 봉기 그 늙은올빼미 겉은 눈을 회 뜨고 말 한마디 없이 뒷간을 가더마. 복동네 글 일 따문에 나를 안 좋아라 하는 거는 알지. 그래도 이웃 간에 그집만 쏙 빼놓겄더나? 사람이 우찌 그리 하노 말이다. 그런데 할망구는 머라 칸 줄 아나? 이리저리 해서 제삿밥이 늦었다 한께 야무네 니는 우찌 그리 박복하노, 딸 하나 잃었이믄 될 긴데 며느리꺼지 잡아묵으믄 안돼제, 세상에 안 그라더나? 분해서 살이 떨리더마는 성님 무신 말을 그리키 합니까, 우찌사램이 안 아프고 사요, 이자는 괜찮은께 섭섭히 생각 마소, 했더니 누가 제삿밥 갖다 돌라 캤나 와 아침부터 재수 없게 제집이큰 소리고, 하참 갈지도 못하고,"
"말해봐야 소앵이 없이께 야무어매가 참으소 우리도 속 틀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마는 아아 아배가 참아라, 서천 쇠가 우는 갑다 그리 생각해라 하고 하기사 요새 당하는 거는 아무것도 아닌 기라요 우리 아아 아배 어릴 직에는 참말로 그럴 수 없이 천대를 하고 말말이,"
하는데 한복이댁네 목이 잠긴다.
"인간 악종은 새로 환생을 해도 못 고치는 갑더라. 저거들은 갈불라 카믄 나도 그 문전에 얼씬도 안할 기다마는 빌어묵을, 못살믄 못산다고 천대, 밥묵으믄 저것들이 와 죽 안 묵고 밥 묵는가 하고 심술이고, 참말이제 아들 자식이라도 없었이믄 칼을 물고 안 죽겄나? 그러이 복동네가 죽었제."
"참, 이자 그만들 하소."
관수가 방문을 열고 나간다.
"하마나 하마나, 방안에서 똥싸겄거마는,"
"아이고 나는 또 누구라고?"
야무네는 마루에서일어서며 웃는다.
"초상에는 못오고 이제 왔는가배?"
"야. 볼일이 있어 어디 갔더마는, 기별을 못 받았소."
"그래도 늦기나마 왔인께 고맙다. 어디 오고가는 일이 그리 쉬버야제. 홍이아배가 세상을 버리고 난께 죽지 뿌러진 새맨크로 홍이 가안됐더마. 어느 형제가 있나 일가친척이 있단 말가"
"그래서 안 왔십니까."
"온 김에 추석이나 새고 가지?"
"여기서 추석 샐건덕지가 있어야제요. 남과 겉이 부모 산소가 있는 것도 아니겄고,"
"그, 그거는 그렇지마는, 아이구 나도 모리게 말이 길어졌네. 집을 얼산겉이 해놓고,"
관수와 얘기하는 동안 한복이댁네는 부엌에 가고 없었다.
"나 간다아!"
부엌을 향해 소리지흔다.
"야. 잘 묵겄소."
한복이댁네가 내다보며 인사한다. 야무네는 삽짝을 나서다 말고돌아본다.
"우리집에서 밥 한끼 안 묵고 갈래?"
한탄하고 흥분하고 억울해하며 부산스럽게 말하던 야무네, 그러나 함지를 이고 종종걸음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은 과히 불행해 보 이지는 않았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석이어매가 이만하믄 살거로, 했일 때 야무어매는 지지리 가난했는데 야무어매가 이만하믄 살거로, 그 참석이어매를 어쨌이믄 좋을꼬.'
뒷간에 갔다가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한복이는 없었다. 관수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할일 없이 또 담배를 붙여문다. 어젯밤 한복의 대답은 못 들었으나 관수는 그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복의 간도행은 석이를 무사히 넘겨주는 데 목적이 있지만 혜관의 소식도 알아야 했고 가장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혜관의 소식도 알아야 했고 가장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데 종전까지 이어지고 있던 길상을 대신하는 다른 줄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만큼 석이가 만주로 가는 데도 피신과 함께 그곳과의 연결을 짓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급히 필요로 하는 자금문제도 있었다. 무사히 석이로 하여금 국경을 넘게 하는 것과 여러 가지 주선, 그 것은 그곳을 두 번이나 다녀온 한복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석이하고 함께 가는 것은 한복이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지. 한복이 그 점을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위험하니까.'
절문을 나섰을 그 때처럼 형용할 수 없는 와로움, 절망이 치민다. 획획 돌아가던 생각도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주변 사정도 그러했으나 갑자기 자기 자신이 쓸모없는 일간이 돼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위구심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솥발은 세 개요 상다리는 네 개다. 세 개나 네 개는 능히 무게를 지탱한다. 그러나 두 개라면? 한 개라면? 두개, 한 개가 버텨야 하는 위태로움이 관수로 하여금 갈팡질팡, 이러기는 처음이었다. 김환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서울 소지감의 집에 피신해 있을 적에도 여유는 있었다.
한복이 들어왔다. 책상다리를 하고 담배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눈을 치뜨며 쳐다본다.
"어이 갔더노"
"뒷산에 갔다가,"
"너 어매 산소에 갔더나?"
대답이 없다. 한참 있다가
"형님은 어디로 가실랍니다."
"행방이야 니가 정해야제."
"제가요?"
"니가 결정지우는 대로 해야 한 하겄나."
"야. 그라믄 형님이 지시하이소."
17장 사랑
기예여학교, 그것도 야간이어서 보통학교를 나온 학생도 있었지만 중퇴했거나 교회에서 설립한 야학을 다녔던 아이들도 많았다. 뱃속의 아이가 팔 개월쯤은 됐을까 얼굴에 기미가 슨 정귀애라는 여선생이 을씨년스런 동작으로 책보를 싸고 있었다. 그는 수예 선생이다. 발가숭이 전구지만 촉수가 높아서 교무실 안은 환했다.
"우선생은 안 가시겠어요?"
"가야지요."
인실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어떠세요? 해볼 만한가요?"
"글쎄..."
"오래 견디는 사람이 없는데 우선생은 어떨는지,"
"정선생님은 오래 하시지 않았어여?"
"나야 뭐 생홀 땜에 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들은 나은 직장을 찾아가는 거지요. 알고 보면 보통학교보다 못하거든요. 실습을 할래야 시설이 안 돼 있구,"
"그저, 시집갈 동안을 메꾸어주는 거지요."
"하지만 대개 어려운 아이들일 텐데 앞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그거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야간학교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또 남학생의 경우가 그러니까요. 아직 조선에선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집에서 가사를 돕다가 밤에 나오는 학생이고 어떤 사정에서 보통학교를 중퇴했다가 나이 차서 갈 수 갈수 없으니까 야간에 오는 수가 있지요. 반드시 가난한 가정 애들만 오는 건 아니에요. 기초가 안 돼 있어서 정규학교를 못 가고 오는, 대개 그래요."
기미가 잔뜩 슨 정귀애 얼굴에는 이 철없는 아가씨야 하는 조롱의 빛이 있었다.
"하긴 그럴 거예요. 여자애들한테 일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겠고 고무 공장이나 방직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하는 애들도 시적 먹어야 하고 가족들 부양해야 하고 공부 같은 건 꿈도 꾸어보지 못한 무지갠지 모르지요. 일전에 남선 일대를 여행하면서 보았는데요, 해변소도시에서 어업이 성하니까 그물 짜는 공장이 있었어요. 경영은 일본인이 하구요. 한데 품살ㅅ이란 생활비의 절반이나 될까요? 그것도 기술이 좋은 사람들인데 점심 싸와서 먹는 사람은 드물었어요. 영양 부족으로 얼굴들이 샛파래요."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냉담한 반응이다. 인실은 빤히정귀애를 쳐다본다. 생활에 지친 얼굴, 그도 생활의 노예였던 것이다.
"그런 데 비하면 이곳 아이들은 귀족인 것 같아요."
"네. 돈 푼 있는 장사꾼 딸도 있고 시골서 곡식섬이나 하는 집의 딸도, 딴에는 공부해보겠다고 올라온 모양인데 자격 부족이니 어쩝니까? 이런 학교라도 안 다니는 것보다, 그래도 시골 가면 뻐기겠지요?"
심술궂기조차 한 어조다. 인실은 회미하게 웃는다.
"다갔는데 우선생은? 나 그럼 먼저 갑니다."
인실은 자신도 일어서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 움츠러들듯 양 어깨를 좁힌다. 인실의 생각은 비약한다. 왜 명희가 최서희의 막내딸 -인실이는 기화의 아들 양현을 서희 소생으로 오해했다-에 대하여 민망할 만큼 그리 꼬치꼬치 캐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명희의 인품을 보아 석연찮은 일이었다. 꼬치꼬치 물었을 뿐만 아니라 인실이 자신도 불안해질 만큼 명희의 태도는 균형을 잃은 것이었다. 허둥지둥 서두는가 하면 암울한 눈이 창밖으로 향해지곤 했다.
'아이가 없어서 그랬을 테지.'
그날 돌아오면서 내렸던 결론을 인실은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며 되풀이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서로가 다 언동에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다. 그런 관계에서 명희를 대해왔기 때문에 명희의 그런 일면을 몰랐는지도 모른다고 인실은 생각한다. 명희에게 느끼는 실망은 그러나 이상하게 친근미를 갖게 한다. 귀족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을 인실은 한 일이 없다. 여자다운 샘이나 집착을 볼 수 없었던 명희는 그런 만큼 만사에 무관심한 것 같았고 거리를 느끼게 하였고 그 거리 때문에 인실은 옛날 명희를 동경했었다. 이미 그때 인실은 명희를 귀족적인 여성으로 생각했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늦겠다!`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엉성한 목조 건물,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질러서 나오며 인실은 춥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명희를 생각한 것은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가리마를 똑바로 낸 여학생 얼굴이 명희를 조금 닮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도 해본다. 근본 문제란 무엇인가.
꽤 저물었기 때문에 골목은 아니었지만 희미해진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전봇대가 우뚝하니 시야를 가리곤 한다.
'남들이 뭐라든가? 집안 좋고 먹고 살만하고 그래서 계집아이를 동경 유학까지 시켜놓으니 별 희한한 짓을 다 한다, 독립운동인지 뭔지 그런 것은 사내들이나 할 일이지, 아아 이건 남의 말이 아니었지. 바로 외할머니가 하신 말씀이었구나.'
땅을 내려다본다. 사방에서 부딪쳐오는 것은 닿아서 아픈 것뿐이었다. 조금 전의 정귀애의 언동도 아픈 것이었다. 내 살기도 바빠요, 얼굴이 샛파랗다는 여공 걱정이야 당신같이 책임이 없고 먹을 것 걱정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예요, 정귀애는 언외에 그런 말을 담고 있었다,
'참된 삶이란 반드시 사회의 요구와 부합되는 건 아니야.'
인실은 가장 가혹하고 금욕적인 것, 그것이 종교의 형태든 자연현상에 부딪침으로써 겪는 일이든 그런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디까지 인간은 그런 것에서 견딜 수 있는가. 그리고 고독한 그런 고난의 길로 도피한다면, 그렇다면 버리고 혹은 도망쳐버린 현실보다 견딜만한 것이더란 말인가.
"히토미상"
인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걸음을 멈춘다.
"히토미상"
오가다 지로, 그는 남의 집 담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 아까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라구요, 저를 말예요?"
뻔한 애기를 인실은 나직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여기 나온다는 애기 듣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기에 혹 길이 엇갈리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꾸중들을 각오를 한 아이같이 양복 윗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저녁때 서울에 닿았습니다."
"왜 오셨어요?"
나란히 걷는다.
"히토미상 데리러 왔지요."
"우리 애기, 다 끝나지 않았어요.?"
"나는 한 번도 애기 끝낸 일 없었습니다."
"한쪽에서 끝내면 끝난 거예요."
화를 내면서 그러나 인실은 울음을 참는 것 같다.
"하여간 어디든 갑시다. 조용한 데로 가서 얘기합시다."
"너무 늦었어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인실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는다. 그 말은 들은 척만 척 오가다는
"어디로 갈까?"
"내일, 내일 만나면 어때요?"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이대로 헤어지면 히토미는 도망치고 말겁니다."
"그럼 어디로 가지요?"
인실은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증오했던 민족, 대일본제국에 국적을 둔 사나이, 순수한 일본 남자를 헤어져 있는 절대로 합칠수 없습니다. 친구도 될 수 없어요."
체포되기 전에 인실이 오가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허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여간 날 따라와요."
모래 위에 다리를 뻗으며 인실이 뇌었다. 물결 소리, 모래의 촉감, 오가다와 헤어지면 그때부터 지옥을 느끼겠지만 순간 인실은 가장 편한 곳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이 와 있는 것 같은 안도를 느낀다.
"맞아요. 나는 유령입니다. 동경에 있을 때도 나는 유령이 되어 바다를 넘어 히토미 옆에 있었으니까."
웃는다. 그러나 오가다의 웃음에는 초조와 불안이 있었다.
"나는 유령이지만 히토미는 허영 덩어리야."
오가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인실은 알고 있었다.
"동경서는 어떻게들 지내고 있어요?"
한숨을 내쉬며 오가다는
"시끄럽지요."
담배를 붙여 문다.
"낮에 신상(선우신)을 만났어요"
"그분한테 제가 나가는 곳 들으셨어요?"
"아니,"
"..."
"신상하고 있던 사람,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여자군요."
오가다는 시인하듯 대답을 안했다.
"많이 놀림을 받았나 부지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조선 사람도 편견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히토미상을 비롯해서, 울분 느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한다는 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내가 일본의 위정잡니까? 조선 총독부의 관립니까? 남의 사랑을 욕되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이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벌떡 일어선다. 동멩이를 주워서 힘껏 강물을 향해 던진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오가다 당신만큼 당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둘이 다 이단자예요. 반역자예요 용서받지 못할 여자예요. 민족반역자, 뿐인가요? 매춘부보다 더러운 여자, 우리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지요? 그래도 나를 갈보, 왜갈보라 한답니다.'
"히토미도 나빠요! 비겁하고 겁쟁이! 사회주의에 공명하면서 가장 보수적 거짓말쟁이요! 그래 거짓말쟁이야! 일본인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라구요? 그건 변명에 불과한 거요. 히토미는 세상의 요설이 무서운 거구 민족을 배반했다는 그 거창한 소리가 듣기 싫은 게요. 용기가 없어. 그건 신념이 아니오. 허영이며 체면치레요. 그리고 당신이 당신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도 허영이오. 처음에 히토미는 일본인을 다 싫어했소. 원수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에게도 가슴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나도 일본인이었으니까요. 그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이전의 감정이며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히토미는 나에게 대한 애정을 감추려 했어요. 그것까지도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음 히토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사랑했지요. 사랑했다면 일본인이라 하여 거짓 증오를 할수 있습니까?"
"오가다상을 증오한 일 없었어요. 친구일 때도."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원수가 아닌데 만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결혼을 어째서 못합니까?"
"..."
"세인의 입이 무섭지요? 나는 무섭지 않습니다. 불쾌할 뿐입니다. 그야말로 불결하게 상상하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정말 미칠 지경으로 미웠습니다."
나중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러한 오가다를 인실은 사랑하게 됐는지 모른다. 소년 같은 사내, 집 잃은 고아 같은 사내, 한국의 남자들한테서는 좀체 없는, 나니 어리지도 않은데 어린애 같고 신중하면서도 솔직하고 소심한 것 같으면서 엉뚱하고.
담배를 붙여 물면서 오가다는 인실이 옆에 와서 앉았다.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일본 가서 북해도나 가서 살아요."
"당신 사촌누이는 어떡허구요?"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 아니잖소."
"..."
"일본이 싫으면 중국에 갑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해주시겠어요?"
"그건 졸렬한 얘깁니다. 그 일은 두 사람 밖의 일이지요."
껴안았으나 인실의 얼굴만 쳐다본다.
"사랑은, 남녀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이상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요."
인실은 오가다를 두 팔로 떠밀어낸다
"오가다상."
"말하지 말아요."
오가다의 목소리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나 약속하겠어요."
"무슨 약속!"
"나, 오가다상을 위해 결혼 안 할 거예요. 당신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인실이는 울어버린다.
"용기가 없어요. 나는 겁쟁이예요. 부모 형제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에요. 허영도 아니에요 남의 이목도 아니에요. 내가, 내가 나를 또 난 내가 당신에게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어요. 남에게는 이미 낙인이 찍혔어요. 더 이상 무슨 말을 듣겠어요? 이해하고 옹호해주는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하구요."
열두시가 다되어 이들은 헤어졌다. 집에 갔을 때 유인성은 자지 않고 인실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
"피곤해요. 내일 아침이면 안 될까요?
"여태 아가씨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 데요"
"알았어요."
인실은 밖에 나가 세수를 한뒤 울었던 흔적이 남았는가 잠시 거울을 들여다본다.
"오빠, 부르셨어요?"
사랑 앞에서 인실이 말했다.
"오냐! 들어오너라."
인성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퍽 유순한 얼굴이다.
"학교는 어때? 나갈 만하냐?"
"기대한 것보다는,"
"그럴 테지, 아직 여자애들한템 암흑기다. 더 세월이 흘러야겠지."
"할 말씀이란,"
"음, 대단한 거는 아니고 천천히 하지."
"..."
"며칠 전에 외가에 갔다가 이제는 말씀을 안 하시려니 했는데 왠걸, 할머니 앞에 한 시간이나 꿇어앉아서 야단을 맞았다. 인실이 네 잘못이 아니라 시는 게야. 모두 오라비 잘못으로, 내가 기운이 있다면 몽둥이로 종아릴 치겠다 하시더구나."
"어디 오빠 잘못이겠어요?"
"내가 성급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보수적이다, 뭐 그런 일은 그렇고, 너 결혼해라."
"네?"
"결혼하는 거야. 내 그 말할려고 시회를 보아왔다마는,"
인실은 고개를 떨어뜨린다.
"사람이 똑똑하고 생각도 건전하니까 너만 결심하면 별문제가 없을 거다."
"세상에 떠도는 얘기 같은 것 불문에 부치겠다 그러든가요?"
"넌 지나치게 명확한 것 그게 탈이다. 처녀애가 수치심도 좀 가져보아."
농담으로 돌리며 인성은 웃었다. 물론 헛웃음이었다.
"제발 부탁이야. 외할머님 앞에 꿇어앉지 않게 해다오."
"오빠."
"음."
"저 결혼 안 할 거예요."
인상은 당황해지는 것을 감추며
"그건 어릴 때 하는 얘기야."
"결혼 안할 거예요, 평생."
인성은 허둥지둥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너 오늘 오가다를 만났냐?"
"..."
"왜 만나!"
소리를 팩 지른다.
"저는 결혼 안 할 거예요."
인실은 화를 내는 오빠에게 되풀이하며 나직이 말했다.
결혼할 것을 강압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인실은 단호하고 강경하게 선언하듯 말했던 것이다. 인성은 순간 의아해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고가다가 왔다는 얘기는 저녁때 찾아온 선우신에게 들었다. 일말의 불안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또 오가다가 서울에 왔다면 곧장 자기를 찾아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그런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도 마음에 걸리었다. 게다가 인실은 평소와 달리 귀가가 늦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성은 설마 했다. 누이동생이지만 여자로서는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격이 강인하여 근심했을 정도였으니까 믿었던 것이다.
'왜 저렇게 강경한 어조로 말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인실이는 오가다에 대한 감정을 저런 식으로 내게 고백하는 걸까?'
그러나 인성은 의혹을 털어버리듯 종전과 같은 어조로
"혹 오가다하고 어쩌니, 하는 세평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건가?"
".."
"네가 그따위 뜬소문 때문에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짐작은 했고 나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면"
"..."
"결혼 안 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
"네가 남다른 아이라는 것 오래비도 안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결혼은 아니 하겠다 그 말이냐?"
인실은 입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다물고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 내리깐 눈은 긴 꼬리를 물고, 소위 범눈썹이라 하던가, 흩어지고 알맞게 짙은 눈썹, 소녀라기보다 소년 같은 모습이ㄹ다. 나이도 적잖은 스물일곱인데, 인성은 주이동생이 그런 모습일 때 말을 안 하는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안 하려 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성은 이성을 잃었다.
"너, 너 설마,"
하다 말고 담배를 붙여 문다. 성급히 빨아 당긴다. 그래도 인성은 냉정을 되찾지 못한다.
"오가다 때문에 결혼 안 한다는,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
"..."
"왜 대답을 못하는 게야. 대답을 해!"
인실은 더욱더 고개를 숙인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안 될 말이야!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야!"
"네. 알아요. 절대로 안 되지요."
비로소 인실의 입에서 말이 튕겨져 나왔다. 안 되는 일이라고 시인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오가다에 대한 마음, 사랑의 고백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그래서 겨, 결혼 안 하겠다,"
말끝을 잇지 못하는 인설의 얼굴은 주황빛이었다. 야밤에 고함을 쳐선 안 된다는, 가족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인성을 간신히 휘어잡는다. 항간에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았다. 불쾌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입을 찢어놓고 싶을 만큼 인성은 분노했다. 그러나 인성은 인실일 믿었다. 그의 치열한 배일사상을 믿었고 강인한 성격을 믿었다. 일말의 불안, 오가다가 왔다는 소식과 귀가가 늦는 인실이, 해서 인성은 자리에 들지 못하고 인실이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런 사태는 상상하지 않았으며 전혀 대비도 없었다. 상상만 해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어찌 너같은 애가, 너 같은 애가 그, 그럴 수 있나. 너 같은 애가,"
신음하듯 뇌인다.
'그놈은 누구냐! 오가다 그놈은 어떤 놈이냐!'
민족의식 없이, 거의 동족같이 상종해온 오가다 지로, 그의 결점까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보아왔다. 더 솔지기 말하자면 동생같이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했던 오가다가 갑자기 흉물같이 압도해온다. 송충이같이 징그러운 존재로 의식을 점령해온다. 이민족, 정복자, 거대한 발바닥으로 강산을 깡그리 밟아 뭉개는 괴물. 인성은 머리를 흔든다. 그런 악몽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듯이. 누이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맺어질 수없지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결혼을 아니 하겠다는 감정 그 자체 때문에 오가다는 돌연 괴물로 변신한 것이다. 판단이나 이해나 가려가 끼여들 여지없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가 조차 떠오르지 않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만이 아우성이다. 남자들은 더러 일본 여자와 관계를 맺었고 인성도 그런 사내들을 몇 보아왔다. 물론 바람직한 일로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격렬한 치욕과 혐오감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저 북만주 땅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병에게 능욕 당한 조선의 여인들이 자결로써 생을 결산한 사건들은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는데.
한동안 오누이는 대좌한 채 침묵을 지킨다.
18장 결혼
"골벵도 예사 골벵이 앙이다. 정 니가 이럴 것 겉으믄 내 지금이 라도 가서 돈 돌리줄란다."
어미한테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숙회는 대꾸를 안 한다. 팔짱을 끼고 쭈그려 앉은 숙회네는 달비를 물린 머리를 곱게 얹었고 나들이 차림이다.
"하루 이틀도 앙이고 이기이 어디 할 짓인가? 니때문에 식구들 모두가 지레 말라 죽겄다. 니가 가심이 아프믄 이 에미는 가심이 안 아프겄나? 그만 털털 털어부리고 나랑 함께 예배당에 나가자. 믿을 곳은 주님밖에 더 있겄나? 예배 디리고 나믄 한결 맴이 깨운할 기거마는, 자아 옷 갈아입고 나랑 함께 가자."
"남사스러바서 못 가겠소."
주일마다 되풀이되는 대화다.
"그라믄 펭생 방구석에서 햇볕도 안 보고 이리 살 기가! 가씨나가 아이를 배도 할말이 있 카는데 니가 남 못할 짓을 했다 말가? 죄를 져도 그놈이 졌고 몹쓸 짓을 해도 그놈이 했제."
"알면서 엄마는 와 자꾸 그런 소릴 하요!"
"어나마나, 아나마나 이치가 그렇다 그말 앙이가. 내가 지금 와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자 하는 거는 앙이다. 이제는 쏟아진 물이고 깨진 그릇인데 생각하늠 머하겄노 니가 곯지 . 제발 맘 잡고 어디 보자아 하고, 사람의 일은 모리네라, 짧고 긴 거는 대 봐야 안다고 어디 다 살았나? 앞길이 구만리 겉은데, 그라고 성심으로 살믄 은 설마 주님이 니를 버리시겄나. 원망 말고 그러믄 은혜를 주실기다. 자아 자아, 숙회야. 설사 니가 그런 놈하고 혼인을 했다 하더라도 니를 눈밑으로 보는데 버릴라 카믄 사정 보겄나? 그리 생각한다믄,"
"결혼을 했더라면 더 많은 돈을 떳떳하게 받을 수 있었겄지요."
등을 돌린 채 목만 비틀듯 어미를 쳐다보며 비웃는다. 숙회네는 목줄기에서 부터 벌개진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러니까 그저께 밤에 숙회네는 양교리댁에서 일금 오백 원을 받아온 것이다. 조촐한 가와집 한채 값은 되는 급액이다. 처음 그들은 사람을 기켜 그돈을 보내왔었다.
"우리가 양교리댁한테 돈 받을 이유가 없느데 우쨋 그 댁에서 돈을 보냈는가 만내보아야겄소. 그렇지 않다믄 허정윤이가 지 발로가지오라카소."
숙희네는 치마끈으로 허리를 묶으면서 새파란 얼굴에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던 것이다. 허정윤이 거져오라는 말이 주효했던지 양교리댁에서 그러면 만나자는 제의가 왔다. 양재문과 숙희네가만나는 자리에 소림의 어머니 홍씨도 함께 있었다. 집을 나설 때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는데 숙희네는 으리으리한 양고리댁, 사는 풍도가 상상 이상으로 거창한 데 풀이 죽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소이다 우선 사과부터 드리지요."
양재문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숙희네는 또 한 번 훌이 죽었다.
"나도 자식자진 사람이니 댁의 억울한 심정을 왜 모르겠도. 우리가 파혼을 해서 정윤이 그 사람이 댁의 아이랑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오."
그것은 노회한 얘기다.
"향학열이 불타는 젊은 사람이 상대방에서 도와 주겠다 한는데 거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상대가 여자니까 문제가 생긴 거지. 얘기 들으니까 책임 질 일은 아니하였더구면."
홍끼가 아니꼽다는 듯 말했다.
"실은 우리도 혼담이 오고간 뒤 알았던 일이었소. 정윤이 그 사람도 맘이 약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은 확실히 하더구면요. 파혼을 한다 해서 댁의 아이한테 돌아갈 사람도 아니고 학업을 중도지폐하여 유능한 인재가 폐인이 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잘하는 일은 아닐 것이오."
자신들을 합리화시킨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른 말은 아니었다.
"정윤이도 학생의 신분이라 마음은 있겠으나 무슨 돈이 있겠소. 하여 본인도 몰래 우리가 대신 하려 했던 것이오. 댁의 딸아이도 희망 없는 사람 언제까지나 연연해하는 것보다,"
"연연해하기는 누가 연연해합니까. 소위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고 없이 산다고 버르지맨치로 밟아뭉개는 그 인사, 잘되기를 바랄 사램이 어디 있겄소."
숙희네는 울먹였다.
"그것은 그쪽 생각 아닌가. 한쪽에서 작정한 대로 다 될 일이라면 왕빈들 아니 될까? 손바닥도 맞아야 소리가 나지, 안 그런가?"
양재문은 정중했으나 홍씨는 말씨부터 소위 상것 취급이다.
"허허허,"
양재문이 눈살을 찌푸렸고 숙희네는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그거사 당자들이 알 일이제요. 그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실 기고요."
"육례를 갖추고 만난 사람도 안 살려 하면 못 사는 게지. 남자란 그러기 예사, 잘되길 안 바란다는 악담까지 할 것 없고요, 딸자식 간수 잘못하여 그리 되었는데 명천의 하느님까지 불러댈 것 있겠나?"
조소를 띤다.
"예애, 천하고 없는 것들이 딸 덕에 쌍가마 탈 긴가 싶어서 간수를 안 했십니다."
숙희네는 홍씨를 노려본다.
"아무리 세상이 막돼먹었기로 뉘 앞에서 눈을 부릅뜨나!"
"예애, 강약이 부동이고 지체가 하늘 땅맨치로 다르다는 것을 와 모르겄십니까. 하지마는 한 가지 같은 기이 있십니다."
"뭐라구?"
"마님도 한 딸의 어머님이고 지도 딸자식의 에밉니다. 어느 부모치고 제 자식이 안 귀엽은 사램이 있겄십니까?"
홍씨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귀여우면, 그래 귀여우면!"
홍씨 얼굴이 험악해졌다. 대등한 사이처럼 대어드는 것은 심히 모욕적인 것이었으며 더군다나 딸 소림을 동렬에 세워놓고 겨루는 것 같은 느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것이 더듬지도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것도 화가 났다.
"감히 내 집 문전에 서지도 못할 것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허허어, 부인은 잠자코 계시라니까!"
결국 양재문이 달래고 어르고 해서 숙희네는 오백 원을 받아 쥐었던 것이다. 어미가 돈을 받아 돌아온 그날 밤엔 정작 숙희는 말이 없었다. 넋 빠진 사람같이 어미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난 뒤 숙희는 노골적인 적의를 어미에게 나타내었다. 위로하는 동생댁에게
"올케는 신이 나겠소. 오래비 장사 밑천 두둑하게 생겼으니, 호호홋, 잔치라도 한판 벌여야겠소."
동생댁은 어떻게 할 바를 몰라했고 그 말은 숙희네도 들었다.
"장사 밑천이라니!"
하다 말고 숙희네는 주춤했다. 숙희 눈에 푸른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입술을 비틀며 웃는 얼굴이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
'이게 미치차 카나!'
그런데 오늘 또 돈에 대하여 숙희는 비튼 것이다. 숙희네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내가 오기로만 하라 카믄 그놈의 돈 그 집구석에 가서 메어치고 접다마는, 자식 하나 없는 셈치고 니사 혼삿날에 가서 굿을 치든 매구를 치든 우찌 그리 에미 맘을 모리는고."
숙희는 아까처럼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래도 더러운 기 정이고 간에 붙었던 기라... 내가 참을밖에 더 있겄나. 지도 얼매나 억울하믄 그러까, 에미보고 악정을 내지 뉘보고 하겄나 싶어서... 아무리 돈이 좋기로 자식하고 바꿀 그런 오살할 에미가 세상에 어 있겄노. 나도 그 돈 받아 나올 직에 그만 그 문전에서 칼을 물고 죽어버리까 싶었다. 우리 살림이 하다못해 백석꾼만 됐더라도 그 돈 안 받았일 기다. 우떻기 하든 공부를 할라 카믄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울라 카믄 기술을 배우고 흐흐흣흣... 우리가 그, 그럴 행펜이 되나?"
흐느낀다.
"진주 바닥이 뒤비지도록 소문은 났고 나이나 어리다 말가. 그 목이 뿌러질 놈 기다리니라고 좋은 세월 다 보내고 어디 눈까리 똘박한 사램이 니 데리고 가겄나? 그러이 니 앞길 생각해서 논박을 받아감서 돈을 받아온 긴데 우째 그리 에미 맘을 모리노."
"논박을 받아감서 누가 돈 받으라 하든가요?"
돌아앉은 채 지껄인다.
"자꾸 억으로 나가거라. 어디 내가 자작으로 혼자 한 짓가! 그라믄 니 아배 니 오래비 하자는 대로 했으믄 니 신세는 우찌 되든 좋을 뻔했다 그 말가!"
"좋을 기 뭐가 있어서, 이러나 저러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런께 내가 혼자 자작으로 한 기이 앙이고 의사 선상님을 찾아가서,"
"박의사는 뭣하러 찾아갔습디까! 아무렴 가재는 게 편이지,"
"그래도 의사 선상님은 니 편이든데?"
"돈 받으라 하든가요?"
숙희는 바람을 일으키듯 돌아앉는다. 숙희네 눈이 둥그레진다.
"선상님은 그런 말김 안 하시고, 숙희를 위해 심이 돼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심서 정윤이는 양교리댁하고 혼사 안 해도 결과는 마찬가진께 단념하는 기이 좋겄다, 그런 말심이고 돈을 받으라는 말심은 목사님이 하시더마. 당연히 받아야 한다, 미련을 갖지 마라, 그라고 또 교회 일을 보겄다믄 서울 가는 일을 주선하겄고 그러지 않겄다믄 일본 가서 양복이라 카든가 뭐 그런 핵교가 있다 카데?그란하믄 간호부 공부를 더 해서 큰 벵원에 취직을 해도 좋고 아무튼 다 같이 하시는 말심이 잊어부리라, 아 니도 생각해보아라, 양교리댁에서 돈을 내놓는 판국에 혼사가 깨지겄나? 니 오래비는 그깟 돈 받으믄 머하노, 혼삿날 치고 들어가서 깽판을 부리겄다, 하지마는 강약이 부동이고 그 사람들 머가 답답노. 범의 장다리 겉은 하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냉큼 들어낼 긴데, 양교리댁에서도 그러더마. 당신네들이 끝내 시끄럽게 할라 카믄 우리는 구태여 진주서 결혼식을 안 해도 된다, 서울 가서 신식으로 결혼식 못할 것도 없다,"
숙희네는 열심히 설득했으나 비꼬는 ?마디 한 뒤론, 돈을 받아왔던 그날 밤처럼 넋이 빠진 듯 숙희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숙희네는 말을 끊고 끝내 통곡을 하고 말았다. 며느리가 달려왔다.
"어무이 와 이라십니까."
"아이구우 주여! 아이구우 가심이야!"
가슴에 주먹질을 한다.
"어무이 이러시믄 안 됩니다. 참으이소. 시일이 가믄은 설마 애씨도 잊어부리고,"
통콕을 그치고 콧물을 닦으며
"야아야, 자아가 저래가지고 온전한 사람 되겄나? 어이구우, 차라리 앙조가리고 에미한테 달라드는 편이 낫지, 쯩범겉이 저러고 앉아 있어이 내가 그만 환장을 하겄고나."
사연도 복잡하고 항간에 숱한 화제를 뿌렸던 허정윤과 양소림의 혼레는 시월 마지막날에 거행되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신랑의 얼굴에는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으며 신부는 시종 무표정이었다.
"신랑은 일가친척도 없는가, 상객 따라온 사람들 꼴이라니,"
"상객은 형인가 분데 순 농사꾼인가 부지?"
"상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만, 보기 민망스럽군. 양교리댁 사돈이 저래 되겠나? 볼품이 없어도 어느 정도."
"그래 그런가? 신랑이 풀이 죽어 있구만."
"인물은 거의방하다만,"
"장차 의사가 될 거라고 사위를 삼는 모양인데 병원에서 조수질하든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어째 체면 깎이는 일 아닐까?"
"연분이면 할 수 없지."
으레 따르는 신랑에 대한 품평들이다. 결혼식은 성대했다. 문중이 넓은 양교리댁에는 행세하는 면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축하객들도 이 지방 상층에서 노는 얼굴들이었으며 서울서는 홍씨의 친정 식구들이 대거 출동했으니 차림새며 행동거지가 세련되어 냉담하였고 위선이 난무하는 화려함 속에 장터에 나온 수탉처럼 상객 온 정윤의 형은 전혀 이질적 존재였다. 정윤은 그런대로 깨끗한 용모에 의전 학생이란 자부심도 있어서 손색은 없다.
"아까워. 무슨 꽃이 저리 예쁠까?"
"왜 아니래? 그러니 소림이어머니가 가심을 치지."
지난봄에 환국이는 오년제 중학을 졸업하였고 양소림은 사년제 여학교를 졸업했다. 환국은 동경으로 유학길을 떠났고 양소림은 의견이 분분한 혼담을 귓가에 흘리며 진주 집안에 칩거해 있었다. 혼사가 결정되기론 여름이었다. 소림은 일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초가들에 이모 집을 다녀오겠다면서 훌쩍 떠났던 것이다. 서울로 간 소림은 이모의 생활이 난맥인 것을 목격하였다. 빌다시피 애원하는 이모에게 일말의 동정이 없던 것도 아니어서 그는 조용하의 본가까지 심부름을 갔었다. 불론 그런 심부름은 안 하겠다고 우겼었지만, 조용하를 만나고 돌아올 때 느낀 불쾌감, 싸늘한 아집 같은 것이 타고 있는 것만 같았던 가운 입은 사내에 대한 불쾌감을 소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날 세검정에서 돌아온 이모의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림은 그들의 관계가 파탄에 빠진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그 일보다 평소 선량하고 줏대가 약한 남편에게 방자했던 이모가 갑자기 정숙한 아내로 변모한 데 대하여 소림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밀회의 연락을 취하게 한 것도 조카에게 보인 치부였지만 전에 없이 남편에게 아양을 떨며
"얼마나 말 많은 세상인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이건 생사람을 잡으려 든단 말예요. 남다른 일을 하니까 나야 무슨 소릴 들어도 상관없지만, 당신에게 누가 될까 그게 걱정이에요."
천연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나 이모 두 번 다시 보기 싫어! 구역질이 나아!"
소림은 여행 가방을 들고 나서면서 말했다.
"이 애가? 네가 뭘 안다구 그러니?"
송숙은 애매하게 웃으며 소림을 애 취급하듯 넘겨버렸다. 진주로 돌아온 소림은 주변에서 쉬쉬 했지만 정윤과 숙희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이다. 약도 발라주고 주사도 놔주던 그들, 다만 직업인들로 대해왔으며 한편 신체적 결함 때문에 신체를 보여야 하는 병원이 달갑지 않았고 그들에게도 늘 어색하긴 했었다. 여하튼 소림은 그들의 관계며 경위 애기를 들었지만 평정한 외양이었다. 소림은 자기 손등 위에 있는 추물같이 인간은 추악한 것이며 인생은 오욕에 가득 차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모 홍성숙이 허영심이 강한 여자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는 일이었다. 늘 예술가를 코에 걸고 교만스럽게 사람을 대할 때 소림은 혐오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이며 예술은 어떤 것인지 뚜렷하게 인식한 일은 없었지만 예술을 위하여 진실을 팔아야 하고 남을 기만해야 하고 목적을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감행해야 하고,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고뇌가 없다면, 예솔이라는 것 역시 추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서울을 떠나는 차창 밖의 충경을 바라보면서, 소림은 그 생각을 내내 했었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던 이모, 거의 결함까지 소림은 육친의 정으로써 받아들였건만, 어째서 돈과 명성의 도움 없이 예술이 발전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이모한테서 받은 충격은 정윤의 과거로 하여 되풀이되지는 않았다. 물론 배신당하였다는 분노도 일지 않았다. 누가 상대이건 자신과의 인연을 맺을 사내라면 불순한 계산 없이 덤비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자의 아닌 타의로 살아가야 할 처지임을 깨닫고 있었다. 부딪쳐서 불꽃을 일게 할 자신의 진실이나 영혼은 마음 깊은 곳에 가두어놓고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봄바람같이 감미로웠던 먼 곳의 그 사람, 그 모습은 시초부터 먼 곳의 것이었고 자기 역시 그러했었다. 먼 곳을 지나가던 여자로 환국이 기억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치부를 발견한다는 것, 자신의 진실과는 상관이 없는, 자신의 잘못과도 상관이 없는, 다만 조물주의 저주를 그의 기억 속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 간절한 소망도 부서지고 말았다. 병원 앞에서 공포에 가득 찼던 환국의 눈, 그 눈은 영원한 고독의 형벌을 받으라는 무서운 질타였던 것이다.
축하객들은 많았고 절차도 성대하였건만 묘하게 냉랭한 혼례는 끝이 났다. 사람들은 거의 돌아갔고 가까운 문중 사람들, 먼 곳에서온 손님들이 남은 듯한데 넓은 집안의 어느 곳으로 다 들어갔는지 집안은 별안간 정적에 묻히는 듯, 해는 이미 떨어졌고 쾌청했던 저녁 하늘은 무겁게 내리덮이는 것 같았다. 피곤하다면서 안방으로 물러간 홍씨와, 형제들과 함께 사랑으로 든 양재문은 다 같이 기분이 저조해 있었다, 밑진 장사를 한 것 같은, 그런가 하면 이제 칼을 이쪽에서 쥐었다는 심리적인 냉담으로 볼 수도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허정윤의 말썽 많은 여자문제까지도 감수하며 간신히 넘은 결혼이란 고개, 성깔깨나 있어 뵈는 허정윤에게 깊이 따져볼 수 없었던 분노, 그러나 그것은 혼인을 하기까지의 시름이었다. 더 이상 오냐 오냐 해서도 안 될 것이며 베푸는 처지의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분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고삐를 바싹 잡아당겨요. 처음길을 잘 들여놔야지. 없는 것들 대개가 염치없이 구니까 말예요. 처가 것은 그저 얻는 줄 알거든요. 뿐인가요? 의도는 안 하게? 꼼짝 못하게 기를 콱 죽여놔야지."
홍성숙의 말이었고 사랑에서는 또
"그 사람 근본이야 있다지만 조실부모하고 남의 집 고공살일 했으니 뭐 배운 게 있겠나. 예의범절부터 가르쳐야 하고... 양씨 가문의 체면이 있으니까."
양재문의 오촌의 말이었다.
밤이 저물어서 정윤은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신방으로 들어갔다.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 자리에 앉은 정윤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가 마음 밑바닥을 씹는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가슴을 조여 온다. 한마디로 비참했던 것이다. 숙희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소림의 손등은 의식 밖의 일이었다. 장자 집에 비럭질하러 온 거지처럼 오두마니 혼자 앉아 있을 형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갈고리 같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끔 천장을 오려다보곤 할 것이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늦가을의 빗소리는 다소곳이, 조심스럽게 내린다. 소림은 그림같이 병풍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족두리를 벗겨주어야지'
슬픔이 와락 치민다. 자기 자신을 위한 그것은 울분이 아니고 슬픔이다. 철저하게 짓밟힌 결혼이었다는 것, 소림이 쪽에도 그러했겠지만 정윤은 자신의 결혼도 마구 짓밟혔다는 생각을 한다. 양교리댁에서 숙희 집에 돈을 보냈다는 애기에서 정윤의 심장은 난도질을 당한 것이다. 오늘의 결혼식은 또 어떠했던가. 백로들이 노니는 곳에 까마귀가 섞인 듯, 자신과 상객 온 형의 존재는 바로 까마귀 두 마리였던 것이다. 미소 짓는 얼굴 뒤의 차가운 눈, 경멸의 눈, 야유의 눈, 그 수많은 눈들에서 마치 가시밭에 홀로 선 느낌을 받았다. 정윤은 자신이 출세를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한 야심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소림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외시하기는커녕 자신의 처지로선 과남하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소림의 손등을 보았을 때 다소 놀라기는 했으나 정윤은 소림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늘 행운을 꿈꾸었지만 소림이 행운을 갖다 주리라는 상상을 한 적이 없었다. 행운이 이같이 비참한 수모 위에 쌓여지는 성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앉아 있어야 하나.'
소림은 피곤했다. 비녀랑 족두리가 무거웠다. 철저하게 자신이 관심 밖에 밀려난 여자인 것을 절감한다.
'저 남자는 이용하고 버린 숙희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 손이 징그러운 걸까?'
순간 소림은 저도 모르게 흑 하고 흐느끼다 눈물을 마셔버린다. 정윤이 당황했다. 급히 다가앉으며 족두리를 벗겨주고 미녀를 뽑아준다. 그러는 동안 말이 없다. 대례복은 소림이 스스로 벗었다. 조심스럽게 손등을 감추고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홍치마에 반회장 유록 저고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주홍 및 감댕기를 물린 쪽의 금빛 봉채가 찬란했다. 정윤은 황홀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입이 붙은 듯 말을 할 수가 없다. 잠자코 물러나 앉은 정윤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련돼 있는 주안상을 끌어당겨 자작으로 술을 마신다. 다시 한 잔, 또 한 잔, 그럴 때마다 들리지는 않았으나 소림은 남자의 한숨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경멸하겠지요"
술잔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뇌었다. 소림이 꿈적 하고 놀란다. 의외였던 것이다.
"양교리댁 문중에서는 한빈한 무명 청년을 경멸했을 테지만 소림씨는 이 집에 장가 온 나를 경멸했을 거요."
소림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여러 번 파혼하고... 어디든 떠나려 했었소. 믿고 안 믿고는 소림씨 자유겠지만, 네, 자유지요."
"그, 그런데요?"
"고집, 빗발치듯하던 비난과 과장된 화제, 조롱, 그런 것들과 싸우는 심정으로 이겨보려 했지요."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다. 정윤은 당황하며 소림을 쳐다본다.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애초엔 무, 물론 그렇지 않았지요. 그럴 이유도 없었고, 양교리댁이나 소림씨가 다 함께 다시없는 좋은 혼처라 생각했을 뿐이었소. 다만 내 자신이 실수한 일이 있어서 그것만 맘에 걸렸지요. 양교리댁과 소림씨가 그 일을 알게 되면 안 되는 혼사라구 말입니다."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 그만둡시다. 애기한다면 변명밖에 더 되겠소? 나는 오늘 밤에 이렇게 신방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소. 이렇게는,"
목소리가 떨리었다. 정윤은 다시 아까처럼 술을 마신다. 별안간 창백했던 얼굴에 피가 모인다.
"나는 내 진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양소림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오!"
정윤의 어세는 내려갔다. 술잔을 부서져라 꽉 잡는다.
"양교리댁 가풍이 나를 못난 놈으로 만들든지 나쁜 놈으로 만들든지, 다 참아야겠지요, 참아야 할 거요. 내 심정을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내 심정을 나는 전할 수도 없소. 어떻게 설명을 해도 그건 배신자, 출세에 눈이 어두운 놈, 그런 말을 뒷받침해줄 뿐이니까."
말을 끊었으나 정윤은 마음속으로 외쳐댄다.
'나는 숙희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 도움을 달라고 간청한 일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가난하고 불우한 나를 감싸주고 격려해주는 마음을 고맙게 생각했다. 숙희의 애정이 애처로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짐스럽고 귀찮을 때가 더 많았다. 명백하게 내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것은 나빴어. 비겁하고 교활했지. 의전에는 합격이 되었고, 저축한 돈과 원장의 도움만으론 어려웠다. 도저히 해낼 수 없었다! 도둑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 결혼이라는 사슬을 목에 거는줄 알면서 안 쓸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숙희는 혼기를 놓치고 을씨년스럽게 나만 기다리고, 아아 몸서리쳐지던 그 고통, 양교리댁 혼담은 내게 구원이었다. 구원이었고 말고!'
이 무렵, 숙희 집에서는 숙희가 없어졌다 하여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락가락 내리던 비는 멎었고, 그러나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아, 가씨나가 그만 물에 빠지 죽었는갑다!"
숙희네는 울음을 터뜨렸다.
"별 사스러운 소리를 다 하누마."
숙희 아버지 김서방이 나무라면서도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들 영태도 신발을 찾아 신으며 마당에 내려섰다.
"어디 동무 집에라도 갔겄지요. 벵원에 갔나?"
"이 한밤중에 미쳤다고 가아. 더군다나 그놈 혼삿날에 가기는 어디 갈 기고. 그기이 실성이나 안 하까 시피어 애간장이 타더마는, 내 기도가 모자라서 그렇다는 생각도 했더마는,"
숙희네는 마당에 끓어 앉는다.
"주여! 굽어살피시오서."
손을 깍지끼고 기도한다.
"강가에 나가보자."
김서방이 말했다. 영태는
"넓은 강가, 설령 나갔다 해도 어이서 찾겄십니까."
"하야간 찾기는 찾아야제. 아가 초롱 내오너라."
오돌오돌 떨고 있는 며느리보고 말했다.
"예."
"빌어묵을, 자기가 저지르놓고 식구들을 말려 직일라 칸다. 차라리 죽어부리는 편이 낫겄소."
영태가 내뱉았다.
"시끄럽다. 니 어매 죽기 됐다."
"지가 뭐라 캤십니까. 그깟 돈 메치고 휘휘 저어부리자 안 했십니까."
"지금 그런 소리 하믄 머하노. 어 나가보자. 인생이 불쌍해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캤는데, 할마이 너무 걱정 마소. 인명재천, 하느님 뜻인께."
며느리한테 초롱을 받아 든 김서방이 앞서 나간다.
두 부자는 새벽이 다 되어 돌아왔다. 물에 흠뻑 젖은 숙희를 앞세우고. 숙희는 촉석루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가기론 달래듯 젖은 옷을 벗기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힌다. 죽지 않았던 것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듯.
"감기 들믄 우짜겄노. 미음 좀 쑤라 칼까?"
숙희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운냐."
"이제 다 소영 없는 일이지요?"
"하모. 잊어부리라. 꿈을 잘못 꾸었다. 생각해라."
"나 말이요,"
"그래 말해라. 니 하고 저븐 대로,"
"목사님하고 의논해서, 나 외지로 가겄소."
"잘 생각했다! 하모 그래야지. 니 맘묵기 달린 기다."
"맘에 없는 소리 많이 했지요? 끼지 마소."
19장 햇병아리
연학이 찾아와서 말을 하지 않았어도 초상 때 온 석이네를 보고 그런 생각을 퍼뜩 했었다.
'성환이할머니가 와 계시면 어떨까?'
연학이는 허두를 꺼내기를
"최참판댁에서는 물론이고 나도 나설 수 없는 형편이라 이분에는 자네가 좀 수고해주어야겄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정선생 집 헹편이 말이 아닌 기라."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 못 가봤습니다마는."
"가볼 필여는 없고오, 그 계집 따문에 일이 크게 벌어졌어이 정선생이 돌아올 수 없게 됐거든. 한두 달에 끝날 일이라믄 어덕하든지 뭉개보겄지마는 몇 년이 걸릴지 그거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몇 년?"
홍이 놀란다.
"사실 식구들이 할 짓이 앙이지. 그는 그렇고 자네가 간도로 가게 되는 날에는 어차피 평사리 그 집은 처분을 하든지 뉘한테 맽길 거 앙이가?"
"그렇지요."
"해서 하는 말인데, 설령 안 간다 하더라도 상막을 진주로 옮기믄되느 기고,"
"올해나 넘기고 가야지요."
홍이는 다음 말을 듣기 위해 석이네 식구들에게 집을 맡길 생각을 했다는 말은 안 한다.
"날이 갈수록 일이 어렵기 돼간다. 자네도 어물적거리지 말고 서둘러보는 기이 좋을 기다."
"지야 뭐 밝은 일이지만 석이형님이 큰일이지요."
정선생이 자취를 감춘 것은 양현어무니 때문이라, 소문은 그렇기 퍼뜨리놨지마는 나형사 그놈 끈덕지거든. 정선생을 찾이믄 관수형님도 찾게 된다 믿는 모앵이라. 게다가 실성한 놈이든가 되지 못한 고자질을 해놨으니 수습하기도 난감하게 돼 있다. 어떠헥 매수라도 할까 싶었으나 약도 잘못 쓰믄 사약이 될 수도 있이니 마, 그는 그렇고 자네가 설득해서 성환이 할무니를 평사리에 가 계시도록, 다행히 지금 들어와서 함께 사는 사우가 힘이 좋고, 날품팔이보담이야 농사짓는 일이 월등 나을 긴께, 평사리에 가 있으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줄 수 있지."
"집이라면 어려운 일 아니지요."
"집도 집이고 자네가 나서서 일처리를 하라 그 말인데, 노친네 팍싹 늙었더마. 손자들 따문에 끼니를 챙긴다는 말을 들은께 영 맴이 안 좋고 배를 찔러 직일 놈들의 업을 와 우리 가난뱅이들이 갚아야하는가 생각하니 눈에서 불덩이가 떨어질 것 같다."
항상 무심상하고 온건했던 연학이 입에서 격렬한 말이 나오는데 대해 홍이는 다소 놀란다.
"일전에 영팔이 아제를 만났더니 성환이 할머니가 경찰서에 불려갔다 하시면서 그 계집 만나기만 함녀 귀싸대길 때리겠다, 벼르더군요. 아무리 갈라섰기로 남정네가 잘못되면 지가 내지른 자식새끼들 앞길이 뭐 좋을 거라고, 하시믄서 노발대발,"
"그런 말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겄노. 친정에미가 더 나쁘제. 옆에서 축축거린께 속아지 못된 계집이, 소문을 들은께 나형산가 그놈이 들락거린다 하니, 그러다가 형사 놈 첩이나 안 될란가. 약아도 헛약았다. 배가 다르기는 하지마는 오래비 신 벗어놓은 데라도 갔이믄 그 짓을 했이까. 그러고 보이 홍이 자네는 장개 잘 들었네. 삼이웃이 시쓰러분 외도를 했건만 꾸린 입이나 한분 떼었든가? 그 여자 걸었이믄 칼부림 안 났이가?"
홍이 쓰게 웃는다.
"지난 애기 나오게 됐제. 아무튼 그런 짓까지는 안 하더라 캐도, 자식새끼 내부리고 보따리 싸는, 그것만도 보통 일은 아니라. 우리도 이자 가숙 귀한 줄 알아야 안 하겄나?"
"석이형님이 용해서 그랬을 거요. 처음부터 버릇을,"
"앙무리 해도, 개터러기 굴뚝 속에 삼 년 묵어도 제 빛이라. 타고난 천성이 어디로 갈꼬?"
"글쎄요. 식구들은 평사리로 가면 그럭저럭 지내겠지만 석이형님이, 언제꺼지 도망만 댕길수 없는 일 아니겠소?"
"아따, 언제는 호강하고 살았더나. 사람의 일은 모리는 기라. 누가 아나? 자네가 간도에 가서 우연찮기 정선생을 길에서 만낼 긴지."
그 말은 암시 이상이었다. 홍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납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그 여자 무슨 심뽀로 그랬을까요?"
화제를 돌린다.
"살기 싫으니까 그랬겄지."
"살기 싫어서 갔다면 석이형이 어디 못 가게 붙잡았습니까?"
"지 묵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는 말이 있제. 뭐 처음부터 정선생을 엉구렁에 밀어부릴라고 한 짓은 아닐기다. 안 살고 나갔이니 욕을 해야 자신이 옳다는 주장이 될 것이고, 살기 싫으면서도 정선생을 찾아와서 손이야 발이야 빌지 않는 것이 괘씸했을 것이고, 욕을 하다 보니 이상한 말이 나갔을 테고, 그 풍문이 나형사 귀에 들어갔고, 결국 접시 바닥만한 계집이 나형사 유도에 걸린 기지. 그러나 막상 애기는 막연한 것이었으니 근거가 있는 거는 양현어무니 일뿐이고. 하여간에 그런 여자 데꼬 살다가는 큰일나제. 아이들이 불쌍해 그렇지 막설한 거는 잘한 일이구마. 이런 말 성환이 할무이가 들으믄 섭하겄지마는,"
"봉순이 누님..."
언젠가, 밤이었던가, 술을 함께 마시면서 홍이 넌지시 물었을 때, 석이는 봉순에 대한 감정을 부인 안 했던 생각이 난다.
연학이와 그런 대화가 있은 며칠 후 홍이는 영팔이 집을 찾아갔다. 부산을 떠나 새벽녘에 도착하여 차고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나온 것이다. 수염이 자라 텁수룩한 모습, 얼굴은 피곤해 버였다. 아이들이 많아서 늘 시끄러웠던 영팔이 집이 빈집같이 조용하다.
"아무도 없나?"
아랫방 문이 열렸다.
"아저씹니까?"
한복의 아들 영호가 급히 나온다.
"음."
"식구들 다 나가고 없십니다."
"다 나가고? 어디 갔는데?"
"제술이아제 집에, 아아 돌이라고 모두 갔십니다."
"그래?"
"지 혼자서 집 봅니다."
영호는 빙그레 웃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구나."
"네. 아저씨는 일요일에도 안 노십니까?"
"일요일이 어디 있어, 밤낮도 없는데. 화주 형편 따라서..."
담배를 붙여문 홍이는 담배 연기를 날리며 뜰안을 왔다갔다한다. 담장도 없이, 야트막한 축대 아래 내려앉은 앞집을 기웃이 내려다보는 홍이.
"하마 오실 거로요."
영호는 어거주춤 홍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집에 갔는데 쉬이 오시겠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마 오실 겁니다. 세 집 식구들이 다 모이니까 집이 비좁아서 오래 못 계십니다."
"하긴 그렇겠다."
"아저씨."
"왜?"
"천일이형은 언제 운전수 됩니까?"
"글쎄...답대비, 시험을 치면 떨어지니까 그게 탈이지. 면허를 따야 운전대를 잡게 되는데,"
떨떠름해하는 목소리다.
"집에서는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든데,"
"차라리 농사나 지을 걸 그랬는지..."
"날씨가 좀 쌀쌀하지요?"
"응. 이제 겨울이 멀지 않았다. 산이 허퉁한 것 같구먼."
"지 방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럴까? 좀체 틈을 낼 수가 없어서, 좀 기다리기로 하지."
담배를 버리고 영호 방으로 들어간다. 방안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 말고도 다른 책이 몇 권 눈에 뛴다.
"공부 방해한 것 아닌가?"
"아, 아닙니다."
당황하듯 손을 저었다. 영호는 홍이와 애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다.
"나른하다."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홍이 기지개를 커며 하품을 깨문다.
"정작 자동차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멀미는 땅 위에서 나려는가? 골이 띵하구먼. 여러 날째 수염도 못 깎고,"
턱을 만진다. 영호는 남자답게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밤에도 많이 운전하십니까?"
"밤에도 하지."
"그러다가 졸음이라도 오면?"
"깜박했다가는 황천길이지. 강을 낀 절벽 낭떠러지를 돌 때 깜박했다가는 영락없을 게야. 하하핫..."
"하지만, 그래서 남자다운 일 같고 지도 상급학교에 안 왔으면,"
"뭐?"
하다말고
"너 정말 그새 많이 컸구나. 아버지보다 키가 더 크지?"
"네 조금,"
머리를 긁적인다.
"아부지는 작은 편이니가 지는 더 커야지요."
"처음 진주 왔을 때는 밤송이 같더니만 땟물을 벗고 의젓해졌다. 널 보면 아버지가 공부시킨 보람을 느끼겠구나."
수줍고 풀이 죽었던 촌머슴애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활기에차 있는 것 같았고 척박한 땅에서 모질게 영근 것 같은 한복이와는 다르게 넉넉함이 엿보인다. 영호에게는 할머니 함안댁의 모습이 있다. 할아버지 김평산과 큰아버지 거복의 그 독특한 돼지상하고는 거리가 먼 얼굴이다. 솔밋하게 얼굴이 좁을 것도 함안댁의 느낌을 준다. 물론 홍이나 영호나 다 같이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 김두수는 생존해 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죽은 사람들이다.
"올해 몇 학년이지?"
"삼학년인데 곡 사학년이 될 겁니다."
"절업하자면 앞으로 이 년이 남았구나. 공부 열심히 해라. 나같이 후회하지 말고,"
"아저씨가 어때서요?"
홍이는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피곤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치다.
"하기는 식자 든 사람들 살아가기가 더 어려운 모양이더라만... 너도 공부해서 혁명투사 되겠어?"
영호를 올려다본다.
"그런 것 생각 안 하는 아이들, 우리 친구들 중엔 별로 없을 겁니다."
"그것도 팔자에 있어야 되는갑더만. 이십, 삼십이 넘으면 글세, 그런 생각 안 하려고 도망치게 되고, 비법하다고 자부한 자신이 초라한 사람으로 뵈게 된다. 너 평사리 김훈장댁의 범석일 더러 만나지?"
"네."
"그런 성싶더라. 법석이 그자가 너 머리빡에 뭔가 자꾸 넣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훌륭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공부도 굉장히 많이 하셨고요."
영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방학에는 그 선생님이 계셔서 평사리로 돌아가는 일이 즐겁습니다. 저는 앞으로 농민운동을 할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진중하니까 잘못 가르치지는 않겠지. 어쩌면 대학에 가고 전문학교에 가고 한 사람보다 범석이가 진짜 공부를 했는지 모르지."
"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지만, 진주서는 정선생님이 지를 이끌어주시고..."
얼굴이 흐려진다.
"앞으로 어찌 될까요."
"..."
"정선생님은 어찌 될까요. 걱정입니다."
"어른들이 걱정할 일이고 너는 공부나 해!"
하며 홍이는 별안간 영호를 노려본다. 이들은 꽤 친밀하게 애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수일 전에 만주로 떠난 한복에 대해선 의식적으로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 한복이가 만주로 갔다는 것은 형을 만나러 갔다는 애기가 되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막연한 일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홍이나 영호 의식 속에는 김거복, 그러니깐 김두수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있었다. 영호는 평사리에서 자랄 때 마을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봉기노인으로부터 받은 갖가지 모욕적 언사에서 집안의 부끄러운 내력을 알았고 큰아버지에 대한 평이 가장 가혹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놈은 손톱이 길었다. 그러니까 도벽이 있었다는 애기였었다.
"만주서 돈을 벌었다 하지마는 옳은 짓을 해서 벌었이까? 도적질 강도질 앙이믄 아편장사 해서 벌었겄지. 지가 옳게 성공했다믄 떳다바라 하고 고향을 돌아올 긴데,"
봉기노인도 그러했지만 아버지의 태도도 석연치가 않았다. 만주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우울해 보였고 형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않았다. 어머니가 물어보면
"그저 그렇지 머,"
하며 회피하듯 바짓말을 치키며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었다. 홍이는 한복의 집안 내력보다, 그 집안의 내력과 자기 생모의 내력은 무관하지 않았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지만 하여간 그보다 거복이라는 그 인물에 대한 느낌은 훨씬 구체적이었다. 그는 밀정일 것이다. 왜놈의 앞잡일 것이다. 어릴 적에, 간도에 살았을 적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뉘한테 애기를 들었는지 모른다. 공노인한테 들었을까? 어른들 하는 애기를 들었을까? 아무튼 한복의 만주행을 화제로 삼지 않는 것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공부도 물론 해야겠지만 학생들이라고 편하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은밀한 조직을 갖고 있습니다."
영호의 말은 부자연스런 것이었다. 자신을 의식해 달라, 그리고 신뢰해 달라, 그런 바람, 기대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을 말하는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너 뭐라 했지?"
홍이는 몸을 일으켰다. 담배와 성냥을 꺼내었다. 담배를 붙여 물고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담뱃재를 떤다.
"우리 학생도 뭔가 해야잖겠습니까."
"영호야."
똑바로 쳐다본다. 쌀쌀한 표정이다. 영호는 겁먹은 얼굴이 된다.
"나도 그런 일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
"그러나 만일에 내가 경찰의 끄나풀이라면 너 지금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겠지?"
"그, 그거는."
당황한다.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자랑하려고 그 짓을 하는 줄 알았나?"
영호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독립운동이 그리 식은 죽 먹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나? 혁명투사는 이마빡에다 나는 혁명투사요, 써 붙여놓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나? 나는 운전대나 잡고 집안 걱정이나 하고 사는 놈이다만 그런 정도의 상식은 안다. 사내자식이 일을 하려면 부모 형제, 처자도 타인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정도의 상식 말이다. 너는 내 어디를 믿고 그런 말을 하느냐 말이다. 내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이가! 너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운동을 한다면 독립이 되기는커녕 빗자루로 쓸듯이 일하는 사람 말짱 감옥행이다."
영호는 고개를 꺾었다.
"그러니 공부나 하라 했다. 아까같이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댕긴다면 공부는 말짱 헛공부고 장바닥에 앉아서 구멍 난 솥이나 때워주는 땜쟁이보다 나을 것이 한 푼 없다!"
영호는 더욱더 고개를 수그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그런 말을 쉽게 하는 놈치고 밀정 아닌 놈은 거의 없을 게야. 상대방 속을 빼내자면 그것도 술수 중의 하나니까, 네가 내 속을 빼낼려고 그런 말 지껄인다는 의심을 받아도 별수 없는 일 아니겠나?"
영호는 얼굴을 들고 홍이를 쳐다본다.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저씨 잘못했습니다."
"앞으론 조심해! 무슨 일을 하든, 너가 생각는 세상하고 세상은 다르다."
홍이는 성이 난 것처럼 담배와 성냥갑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꽁초를 버린 종이를 꾸겨 쥐었다 놓고 일어섰다.
"더 기다릴 수 없어 간다. 할아버지 오시거든, 저녁에 차고로 오시라 하더라 전해."
밖으로 나온 홍이는 이내 후회한다. 종아리를 한두 대 때렸어도 됐을 것을 발질을 하고 소금을 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의 말은 더욱 영호에게는 아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상처받기 쉬운 나이, 아직 소년기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용정 상의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일인이 주관하는 학교에 다닌다 하여 책보를 빼앗아 강물에 던지던 일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면서 그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소년기는 위험한 것이다. 살인자의 후손 김영호, 다 같은 아픔도 그에게는 몇 갑절 더 아프게 갔으리라. 그의 잘못이 아니면서 햇볕이 눈부시고 두려운 것은 가혹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허전함이 마음 바닥을 쓸며 지나간다. 바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다가 운전대를 놓고 할 일 없이 거리를 헤맬 때면 갑자기 거리는 낯선 거리로 변하고 주체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죽은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어딜 가나.`
차고로 돌아가서 영팔이를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홍이는 당황하기까지 한다. 번화한 거리로 나왔다. 한 무리의 기생 아씨들이 지나간다. 돌돌돌 웃음을 굴리며 지분 내음을 풍기며 지나간다.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부잣집에 환갑잔치가 있었는지 한곳에서 몰려나온 것 같다. 늦가을이지만 봄같이 화사한 빛깔, 형형색색의 모습, 다만 눈부시게 하얀 버선발만은 똑같다. 그 하얀 버선발의 꽃신들이 화려하다.
'외씨 같은 발, 참말 간들어지게 말도 만들었다.'
돌아보는 기생들 눈길을 느낀 홍이는 슬며시 외면을 한다. 가슴이 떨리지는 않았다. 녹슨 기계처럼, 그러나 깐깐하리만큼 틀이 잡혀가는 가정에 대하여 염증 비슷한 것이 스쳐간다.
'퉁포슬까지 가던 들판, 그때는 조춘이었던가. 봉순이 누님은 옥색 두루마기를 입었었다. 하얀 비단 목도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슨 빛깔의 옷을 입었던가? 보따리를 이고 걷던 것은 기억에 뚜렷한데 어머니는 흰 당목 치마에 옥색 명주 저고리를 즐겨 입었으니까 아마 그때도 그랬을 거야. 지금은 다 가고 없는 사람이다. 옥색과 흰 빛깔, 그러고 또 한 어머닌 무슨 빛깔일까?'
보따리를 이고 간 어머니는 윌선이며 또 한 어머니는 임이네다. 홍이 눈앞에 월선이, 봉순이는 다 걷고 있는데 임이네만은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모습만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죽음의 모습은 살았을 때보다 흉하지는 않았다. 피골이 상접했으나 살겠다는 의지로 형형히 불타던 눈동자, 끊임없이 저주를 내뱉던 입모습, 그러한 삶의 추악한 찌꺼기를 걸러낸 듯 피부는 투명하였고 영혼이 나간 뒤의 눈동자는 다만 유리알 같았다.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
아비의 상을 당한지 얼마가 안 되었는데 홍이는 임이네를 위한 슬픔을 느낀다.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고. 가을바람같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순수한 슬픔이다.
홍이는 시장기를 느낀다. 쪼깐이 비빔밥집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곳으로 들어간다. 대부분 차부 가까운 식당에서 매식을 했으며 거의 오지 않는 집이다. 이따금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만의 불쾌한 태도 때문이며 또 차부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새 비빔밥집은 크게 확장되고 안은 휭하니 넓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두만이는 미곡 도매를 하는 거상 하대완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대완은 두만이보다 연소했으며 석이 또래였으나 두만이는 동년배같이 존중하는 태도다. 화주로서 홍이하고는 자주 대하는 처지였으며 동생처럼 무관하게 대하기도 했었다. 생기기론 뒷골목의 왕초 같았고 차림새 언동은 상인으로서 틀에 박힌 듯했지만 그의 외모와는 달리 상당한 학식이 있다는 중평이었다. 배짱 좋고 상소리 잘하기로도 유명했다. 들어선 홍이를 두만이 먼저 보았다. 술맛 떨어진다는 표정이었다. 홍이 그들을 피해 다른 자리에 등을 보이고 앉으려는데,
"홍이 앙이가아! 홍아!"
하대완이 큰 목청으로 불러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앉으려던 엉덩이를 들고 그들 옆으로 간 홍이는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가 뭣고! 형님, 해도 아직 남았는데 무슨 술입니까, 그래라. 내가 핵교 선생가? 여기 있는 두만이 형같이 핵교 학부형 회장도 아닌께."
뒤에 한 말은 언중유골이다. 홍이는 픽 웃는다. 두만이는 못 들은 척
"임마, 손님 기다린다. 부지런히 날라라!"
음식을 나르는 머슴아이에게 신경질 비슷하게 말했다. 하동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이제 김두만에게는 병적인 것이 되었다. 날로 앙진해가기만 하는,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병이 된 것이다.
"장석같이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아니 저는,"
홍이가 사양하는데 두만이 얼굴을 획 돌리며
"젊은 아이들하고 무신 술인고?"
어세가 날카로웠다.
"젊은 아이들이라니 두아이 애빈데 젊나? 기껏 아제비뻘, 형뻘인데 함께 술 마시는 거 험 될 거 없다. 맞담배질은 못해도 술은 노소가 없는 벱이라."
하며 홍을 잡아 끌어 자기 옆에 앉힌다.
"노소는 없더라도 푼수가 있지이."
두만이 홍이를 노려본다. 홍이는 눈은 깜박깜박하며 어색하게 웃을 뿐 발끈하지 않는다.
"치우소. 푼수라는 말도 낡아부지마는 그것도 족보 있는 사람들이나 쓰지이, 형님이나 나나 장사꾼이 할 말이었소? 쌀장사 술장사 사람 가리가믄서 쌀 팔고 술 파는 겁니까. 홍이를 말할 것 겉으믄 일등 운전수, 기생들이 목을 빼는데, 허허헛... 나이만 어리고 장가만 안 들었다믄 사윗감으로 춤이 꿀떡꿀떡 넘어갔을 기요. 하하하핫..."
두만은 아무말 못한다.
"홍아 자아 내 술 한잔 받아라."
하며 술잔은 내민다.
"아닙니다. 제가 올리지요."
홍이 공손하게 주전자를 들고 술을 붓는다. 쭉 들이켠 하대완은 홍이에게 술을 부으며 마시기를 권했다. 홍이 외면하듯 술을 마시는데
"이봐라! 야들아! 여기 술잔 하나 더 갖고오고오, 술, 안주도 더 가지오너라!"
하대완이 고함을 친다. 두만이는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하대완을 무시 못할 사정이 있어서 꾹 참는다.
"그런데 홍아,"
"네."
"니 월급 얼매 받노? 그놈의 노랑이가 월급 많이 주겄나. 뻔하지. 나하고 일 안 해볼라나?"
"화물차 한 대 사시겠습니까?"
"그거사 머 어러불 것도 없제."
"저는 그만 진주를 뜰까 싶습니다."
"와?"
"이번에 부친도 세상 뜨셨고 넓은 바닷물을 먹어야 고기도 크겠지요."
"그는 옳은 말이다. 가믄 어디로 갈라카노?"
"일본이나 서울이나 생각해봐서,"
홍이는 두만이를 의식하며 간도로 간다는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
"자알 생각해서 해라. 아즉 나이 젊은께 나부대보는 것도 괜찮을기다."
술을 마시고 하대완은 화제를 돌리다.
"두만형님, 소문을 들은께 한고향 사람들하고는 앙숙이라 카든데 와 그랍니까?"
슬쩍 약을 올리듯 말한다.
"앙숙일 까닭이 없제. 내가 성공을 했이니 배가 아파서 짛고 볶고 헐뜯는 기지. 내가 저거 몫을 뺏아왔나, 못되라고 축수를 했나, 와 그리들 지랄인지 모르겄다. 사촌이 논 사믄 배 아프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일 기고 그러이 조선 놈들 망해서 싸지."
으르렁거린다. 얼굴까지 시뻘개진다.
"홍이 니도 배 아픈 사람 중의 한 사람가?"
하대완이 웃는다.
"아닙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만 내 땅 까마귀도 반갑다는 말도 있지요."
홍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또 하동 사람 인심이 고약해서 상종 못할 긴가 싶더마는 니가 그러이 다행이다. 허허헛... 허허헛... 아무래도 두만형님이 잘못하는 것 겉소. 못사는 것도 어럽지마는 잘사는 것도 어러분께 내치지만 말고 좀 품어보소. 없는 사램이 설지 있는 사람이 답답겄소?"
"그런 소리 마라. 관수, 그 백정이 사위 놈이 농청에 술 팠았다고 와서 야료를 부리고, 내 그놈이 눈앞에 있이믄 잡아다가 경찰서에 디밀겄다."
"설마 술 팔았다고 그랬겄소. 술장사가 술 안 팔믄 우떡해? 형님이 농청 사람들한테 공술 먹였다는 소문이야 다 아는 일인데,"
"아아니 이 사람이 뭐라 카노? 얘기가 삐딱한 거를 본께 자네는 백정네 편역이다 그 말가?"
"나는 백정네 편역도 아니고 농청 사람 편역도 아니요. 예수쟁이도 아니고 중놈 편도 아니요. 장사꾼은 돈 버는 일이 제일이고 실데없이 남우 일에 어성 높일 필요가 없다 그 말이오."
"하여간에 평사리에서 홍 패거리들 사람놈 하나 없인께 무신 대역죄를 졌는지 모르지마는 그놈들 와 항상 쨋기댕기는지, 아야간에 관수, 석이놈, 그놈들 눈앞에서 얼찐거리지 않은께 그것만이라도 묵는 기이 잘 삭는 것 겉다. 평사리의 누구네 아들인지 모리겄다마는 저 아아도 진줄 떠난다 카이,"
용이 아들이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두만이는 긁는다.
"아무래도 최부자댁 그 집도 떠나게 되는 거 앙일까?"
"손가락에 불을 켜보지."
하대완은 입맛을 다신다. 비윗살 좋고 능청스럽게 얼렁뚱땅 잘하는 하대완도 두만의 옹졸함에 정이 떨어진 것 같다. 홍이는 하대완이 권하는 술은 마다하고 비빔밥을 시켜서 먹는 데만 열중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속으로 콧사배기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못들은 척 내버려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만석꾼도 망할라 카믄 하루아침이다. 남정네가 까막소에 있으니 그 집구석 기둥뿌리가 흔들흔들 안 한다 할 수 있이까?"
"사촌이 논 사믄 배가 아프다, 그 말은 형님을 두고 한말 앙이까요?"
두만이는 용케 길상에 관한 말은 하지 않는다. 종이니 하인이니, 홍이가 없었더라면 곤란하다.
"하야간에 관수 그놈이 진주 바닥이 다 아는 백정놈, 못된 짓은 찾아가믄서 꾸미고 댕긴다고 호가 나 있는 놈이지마는, 그놈은 그렇다 치고 정석인가 그놈 노는 꼴이라니, 석이 그놈을 말할 것 겉으믄 물지게 지던 놈 앙이가. 그러던 놈이 뭣을 우떻게 재주를 부든지 그 미련한 놈한테도 팔랑개비 재주가 있었든지 지가 선생이라? 서천 쇠가 웃일 일이제. 양복을 입고 교단에 서? 내가 벌써부터 알쪼다 싶었더마는 아니나 다를까, 기생년하고 이러고 저러고, 그것만으로도 남우 자석들 가리키는 선생이 할 행토든가? 그러나 그보다도 경찰서에서 잡을라꼬 눈이 벌개져 찾아댕기는 거를 보믄, 그놈이 기생년 따문에 개망신을 당하고 도망간 것만은 아닌 기라."
"형님, 실데없이 와 그러요? 참말이제 제절꾼이 아니거마는. 거 몸도 많이 불어났는데 핏데 세우믄 해롭을 거로요."
제물에 흥분한 두만이는 팽이가 제 혼자 도는 것처럼 멈추질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 말마따나 친일파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니다마는, 장사를 하다보이 더러 일본 사람들하고 술도 마시게 되는데, 지깟놈이 머를 안다고? 그럴 자겍이나 있건데? 양복입고 교편을 잡은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기라. 가소러버서. 아 그러씨 제놈이 그런 운동하겄이믄 대국에나 가서 할 일이제. 늙은 에매 경찰서에 불리가고 불리오고, 그러니 반풍수 집안 망해묵고 돌팔이가 사람 직인다 하지."
더러 일본 사람들과 술은 마신다는 말은 홍이에게 위협, 그러니까 심약한 위협에 불과한 것이었고 늙은 어매가 경찰서에 불려 다닌다는 얘기는 독골 모친한테서 들은 말이었다.
"아따 실이 노이 되겄소. 남의 일에 그렇기 용 쓰다가는 똥 싸겄소."
하대완이 째려보며 쏘아준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듯, 그리고 똥 싸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움찔하고 놀란다.
홍이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밥값을 제가 내고 가면 화를 내실 거고 해서, 그만 가볼랍니다."
"오냐. 가봐라,"
하대완은 손을 흔들었다.
20장 젊은 매
뒤뜰 은행나무 밑에서 계집아이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줍고 있었다. 새로 주운 잎을 먼저 주운 잎하고 비교를 한다. 비교하다가 하나는 버린다. 그리고 다시 새것을 줍는다. 유록색 모슬린 치마에 연분홍 모슬린 저고리, 짤막하게 머리를 땋아서 나비같이 자줏빛 댕기를 물렸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아이는 새것을 주우면 다시 비교해보곤 하나를 버리는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잎이 떨어지고 있는 은행나무 위엔 남빛 하늘이 빛깔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아이는 평화스럽고 축복받은 존재 같기만 하다.
'저 아이는 최상의 은행잎 하나를 찾고 있다. 아마 윤국이가 돌아올 때까지 저러고 있을게야.'
대청의 뒷문을 열어놓고 후원을 바라보며 서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양현은 삭막한 이 집의 한 떨기 꽃과 같은 존재였다. 피폐하고 황막한 서희의 요즘 일상에 양현은 큰 위안이었다. 아비가 누구이든 내로라 하고 나서지 않는 이상 양현에게 아비는 없다. 어미는 보다 확실하게 없는 것이다. 양현은 그것을 안다. 생과 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없다는 것은 안다. 조용한 아이였지만 남의 눈치를 보거나 청승스럽지가 않았다. 뛰어가다 넘어지면 앙! 하고 울었으니 울음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거의 울지 않았다. 그는 서희를 어머님이라 불렀고 윤국이와 환국이를 오빠라 불렀다. 환국이는 양현을 미소로써 바라보았으나 윤국이는 그와 더불어 뒹굴며 무척 사랑했다. 서희는 집안 어느 누구에게도 양현에 대한 환국이 윤국이 이하의 대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봉순의 정의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양현이 어떤 인연으로 서희에게 왔건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양현의 존재 자체가 위로였다면 그것은 사랑인 것이다.
"양현아."
아이는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서편의 해가 아이 얼굴 위에 가득 실린다.
"은행잎은 다 같은데 버리고 또 새로 줍고 왜 그러느냐?"
"더 예쁘고 빛깔도 고운 걸로 줍는 겁니다, 어머니."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
"아닙니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걸 주워 뭘 할려구?"
"동경의 오빠한테 부쳐줄까, 어머님이 서울 가실 적에 드릴까 생각는 중이에요."
서희는 웃는다.
"너는 윤국이 오빨 좋아하지 않았드냐?"
"오빤 여기서 저랑 함께 노는 걸요?"
"아아 참 그렇지."
서희는 또 웃는다.
"좀 있으면 해가 진다. 바람이 차질 테니 그만 들어오는 게 어떨까?"
"네."
양현은 은행잎을 든 채 치마를 떨고 타둑타둑 뛰어온다. 그는 혼자서 곧잘 놀았다. 소꿉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서희가 서울서 사다준 그림책을 보기도 했다.
"마님, 방에 드십시오."
유모가 뒤에서 말했다. 며칠 전에 서울서 내려온 뒤 서희는 계속 앓았다. 서희는 몸살이라 우겼지만 박의사는 빈혈증이라 했다. 얼굴이 창백했고 빈번하게 현기증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여름에 맹장염으로 받은 수술의 결과는 뒤탈이 없었으나 아직 보행할 땐 뱃가죽이 당기는 듯했으며 궂은 날에는 신열이 나고 뼈가 쑤시는 것이다. 결국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채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고 보약 같은 것은 마다했으니 주변 사람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방으로 들어온 서희는 자리에 눕는다.
"뭐 마실 거라도 올릴까요?"
"그만두시오."
유모는 물러났다.
서희는 방안이 휭하게 넓다는 생각을 한다. 계절 탓이려니 하며 반지가 헐거워진 손을 올려다 본다. 분홍빛이던 손톱이 히여끄름하다. 서희는 손을 내리고 돌아 눕는다. 방의 넓이만큼 아마도 그 비슷하게 외로움이 스며온다. 서희는 결코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두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난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이 자기 곁에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건만 왜 떠났다는 생각을 하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어제 박의사는 왕진을 왔었다. 그는 간호부를 대동하지 않고 오는 버릇이 있었다.
"부인답지 않으십니다. 어머님의 몸이 튼튼해야 환국이 윤국이가 불안을 느끼지 않지요."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별로 대단치도 않는 걸 가지고..."
"건강을 스스로 포기하면 의사도 속수무책이지요."
"포기하다니요?"
"포기 안 하셨습니까? 옆에서 보기엔 포기한 듯 생각이 드는군요."
서희는 애매하게 웃었다.
"서울 계시는 분도 창백한 부인의 얼굴을 보시면 고통스러울 텐데요."
그 말을 할 때 박의사 안경 속의 눈동자엔 절망적인 빛이 보였다. 다음 순간 자조의 웃음이 입가에 감돌았다.
"병원에 조수로 있던 그 학생 결혼했다지요?"
자조의 웃음을 흐트려버리듯 서희는 말했다.
"했지요."
"부조라도 할 걸, 몰랐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빈한한 청년이 부잣집에 장가 들었으니까요. 행운압니다."
그 목소리는 잔인했다.
"아주 큰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졸장부가 되겠어요?"
응수였는데 박의사의 말보다 더 잔인했다.
"네. 아마도,"
"양교리댁이라지요."
"그렇지요 환국이를 무던히 탐냈습니다만,"
서희는 그 말대꾸는 하지 않는다. 박의사도 중매 서달라고 부탁하더라는 얘기는 안 한다.
"선생님."
"네."
"물론 결정적인 질병일 경우는 별 문제겠습니다만 웬만한 병이라든가 쇠약 같은 것은 정신력에 따라 치유될 수도 있는 일 아닐까요?"
"서울에 계시는 분을 위해 물으시는 건가요?"
"아니 일반적으로... 나는 내 체질에서 그런 것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무시할 수 없지요. 생명력은 신비스런 것이니까요. 의사로서도 간혹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반대로 정신력이 허약해지면 없는 병도 불러들이는 경우가 있을 테지요. 삼년고개의 얘기도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서희는 앳되게 웃는다. 어릴 적에 듣던 얘기였기 때문일까.
"삼년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산다. 결국 삼 년밖에 못 사는데 그것은 자기의식이 자신을 죽인 것 아닐까요? 그 치유법이라는 게 두 번 넘어지면 육 년, 세 번 넘어지면 구 년, 하는 식인데, 해서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생겨나는 거구요."
박의사는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 청진기를 말아 가방에 넣고 주사기도 소독해서 넣으면서
"나도 장가 들게 됐는데, 부잣집에 장가 드는 게 아니니까 부인께서는 부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환자에게 진찰 결과를 일러주듯 평이하게, 그러나 웃음 위에선 괴이한 느낌이 온다.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한다.
"놀라셨습니까?"
"네. 결혼 못하실 줄,"
서희로서는 대단한 오발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그, 그건,"
박의사는 일어섰다. 방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본다. 박의사 뒤통수를 바라보던 서희의 눈과 부딪친다. 서희는 묘하게 사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환자와 의사, 우리는 끝내 환자와 의사... 진실로 원했는데 말입니다. 그럼 안녕히, 몸조리 잘하십시오."
박의사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면 같았다. 안경이 희번덕였다. 서희의 낯빛도 변했다. 박의사의 감정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정을 그런 식으로 쏟아버릴 줄은 상상조차 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제, 지나가버린 일이다. 그 일은 아직 서희 마음속에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다시 반듯하게 누우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성으로서 호감이나 호기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의사로서 존경하고 신뢰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거의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서희에게는 완벽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부산서 맹장염 수술을 하고 난 뒤 연락을 받고 진주서 달려왔을 때 그 완벽하지 못했던 것은 여지없이 노정되고 말았다. 박의사는 자신의 직업을 망각했을 정도였다. 낯선 곳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외로웠던 환국이와 서희는 직업을 망각한 의사 박효영을 친척같이 친애의 감정으로 의지한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런 일이었다. 서희를 자동차에 싣고 진주로 들어섰을 때 그때 비로서 박의사의 얼굴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수술이란 예측키 어려운 것이지만 맹장염이란 그리 중대한 병이 아니다. 환자들 쪽에서는 배를 짼다는 사실만으로 겁을 먹게 되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그도 수술이 끝난 후였었는데 이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스운 얘기다. 그는 서희의 창백한 얼굴, 고통을 참는 모습에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서희는 박의사가 자기를 짝사랑하여 결혼을 안 한다는 항간의 소문도 알고 있다. 어쩌면 환국이도 박의사의 감정을 아는지 모른다. 예민한 환국이, 특히 부산서의 박의사 거동에서 그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바보다. 그리고 어쩌면 환국이도 서희와 같은 마음인지 모른다. 그는 시종 신뢰로써 박의사를 대하였고 박의사가 오면 맘을 놓는 것 같았으니까. 한 인간의 진실,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불쾌해할 이유가 없고 경계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어제 일에 연쇄된 것처럼 보름 전의 일이 생각난다. 아무 예고도 없이 뜻밖에, 참으로 뜻밖에 임명희가 시중꾼을 하나 데리고 서희를 찾아왔던 것이다.
"부산에 왔다가, 만나 뵙고 싶어서,"
했으나 그렇지는 않고 일부러 진주에 온 것 같았다. 그는 수수한 한복 차림이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서희는 반갑게 인사를 했으나 명희가 찾아온 목적이 궁금했다. 만나고 싶어 왔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오신 김에 여독도 풀고 구경도 하시고,"
서희 말에 명희는
"내일 떠나야 합니다."
묘하게 긴장을 나타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빨리?"
"서울을 비울 수가 없어서, 그보다 아이들은,"
마침 저녁때였기에 윤국이는 귀가해 있었다.
"유모, 아이들 손님께 인사드리라 이르시오."
윤국이와 양현이 들어왔다. 명희의 눈은 마치 직선처럼 양현에게 쏠렸다.
"인사드려라. 서울 임교장님 매씨 되시는 분이다."
"안녕하십니까. 형님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윤국은 어른스럽게, 그러나 수줍음을 감춘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나도 환국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부드럽고 점잖은 환국에 비하여 윤국은 용모에서나 표정에서 패기를 느낄 수 있다고 명희는 생각하며 이내 시선을 양현에게로 옮긴다.
"양현아, 인사 올리지 않느냐? 아주머님께 인사드려라."
양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 대신 활짝 웃었다.
"이리 온?"
양현이 다가가자 명희는 안아준다. 그러나 이내 명희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려앉는다.
"아주머니가 양현에게 주려고 선물을 사왔다. 아 참, 윤국에게도 줄 선물이 있어."
명희는 흥분한 것 같았다. 허둥지둥 시중꾼을 불러 꾸러미를 가져오게 했다. 서희는 미소지은 채 풍경을 바라보듯, 그러나 얼굴에는 일말의 의혹이 있었다. 양현이란 이름이 어째서 명희 입으로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왔는지, 서울서는 양현의 존재는 잘 모를 터인데, 선물까지 사오다니, 서희는 궁금했으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윤국에게의 선물은 스케이트였고 양 현에게는 커다란 인형이었다.
"고맙습니다."
윤국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흉내 내듯
"고맙습니다."
양현도 큰 소리로 말했다. 명희와 서희는 웃었다.
"어머니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양현이는 따라오지 마. 공부 방해야."
눈을 부릅뜨는 시늉을 하고 윤국은 명희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든든하시겠습니다. 환국이 못지않게 잘생겼군요."
"성질이 거칠어서 걱정이지요."
"남자는 그래야,"
명희의 목소리는 계속 허공에 뜬 것처럼 들렸다.
"양현아."
"네, 어머니."
어머니라는 호칭에 명희는 움찔한다.
"좋으냐?"
"예뻐요. 안고 자도 되지요, 어머니?"
"그럼, 되구말구."
"아주머니?"
양현은 명희를 올려다보며 불렀다.
"우리 큰오빠 알아요?"
"알구말구,"
"우리 큰오빠 한 달만 있으면 오신대요."
"그래? 양현이는 학교에 다닌다지?"
"네 일학년이에요. 나 큰오빠한테 편지 쓴걸요?"
"그랬었니? 참 장하구나."
"하지만요,"
"음?"
"우리 큰오빠도 참 좋지만 난 작은오빠가 더 좋은걸요."
"큰오빠 샘 나겠네?"
저녁을 함께 먹고 저물어서, 양현은 유모가 데리고 가서 재운 모양이다. 서희와 명희는 마주보고 앉았다. 명희는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명희의 긴장은 서희에게 전달이 되었다.
"양현에 대해서는 인실이한테 얘기를 들었지요."
"아아 그러셨어요."
납득이 간다. 그러나 명희가 양현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셔지지는 않았다.
"인실이는 부인의 친딸인 줄 알고 있더군요."
서희는 뭔가 아연해지는 기분이다.
"친딸 아닌 것을, 명희씨는 환국이한테서 들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명희는 짜르듯, 단호한 것같이 말했다.
"이상현 씨가 편지를 보내왔더구먼요."
"이상현 씨가!"
"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저도,"
서희는 생각에 잠긴다. 깨달아지는 일이 있다. 만주를 향해 떠난 혜관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혜관스님은 양현이 그분 딸인 줄은 모르신다. 이상한 일이야. 그렇다면 그분은 조선을 떠나기 전에 봉순이가 자기 딸을 낳은 것을 알았더란 말이냐?`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명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진주로 왔다. 솔직하게 사무적으로 양현의 일을 상의하리라 생각하고 왔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에 차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실은, 이선생께서 소설 한 편을 부쳐 보내셨어요. 지난달에 그것이 발표되어 반향이 좋았습니다. 그 원고를 부쳐 보내면서 편지가 함께 왔더군요."
"..."
"앞으로 가능한 한 소설을 쓰실 모양이더군요. 그리고 그 원고료를 양현을 위해 썼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군요."
서희는 나직이 말했다. 예기치 못했던 감정이었다. 적요한 바람 같은 것, 상현이 지난날의 거역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혀 놓은 것이 별안간 일어서며 결별을 고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지요. 아마 이곳서 떠난 스님이 그분을 만난 모양이지요? 스님은 그런 일 모르시지만 양현의 어미가 죽은 얘기는 했을 것입니다."
서희는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들은...사랑했구나.'
"제가 여길 내려올 때, 남편하고 상의를 했습니다만, 부인도 아시다시피 소생이 없어서..."
더듬거리다.
"명희씨가 양현을 양녀로 삼겠다 그 말인가요?"
"네. 가능하다면,"
"이상현 씨의 의사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어렵겠습니다. 내게는 양현어미에 대한 의무가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와서 찾아간다면 모르지만."
"허행한 것 같습니다."
명희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하긴 아까 보니까 양현에게는 이곳에 있는 것이 행복하겠구나 생각했지요."
서희 얼굴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 애는 이 집의 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남의 자식으론 생각지 않지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면, 부모 밑에 자라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일그러지게 자라지는 않을 겝니다."
"그, 그런 것 같았습니다."
실망에서 절망으로 옮아가듯, 명희는 뇌었다. 그리고 명희는 양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다가 진주를 떠나갔다. 서희는 양현과 이상현을 결부시켜 양현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양현이 집안의 꽃이며 위안이기 때문에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명희가 살고 있는 그 집보다 이곳이 양현을 위해 보다 낫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떳떳하게 거절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육신에는 불가사의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정신력인지, 그것만도 아닌 것만 같다. 며칠을 굶고 며칠 밤을 잠자지 않아도 끄떡없이, 쇳덩이같이, 그게 이상하다. 그 쇳덩이 같은 것이 자자부레한 일로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데 몸이 허약해지면 잠결에 뭘 자꾸 먹어댄다. 콩, 어포, 소화가 안 되는 것을 잠결에 먹었는데 체하지도 않는다. 의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육신은 스스로 삶의 의지를 가진 것일까? 내가 지금 허약해져 있는 것은 서울의 환국이 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이 허약은 나를 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지금 어지럽고 잠들고 싶다. 그러나 잠들 수 없다. 잠들 수 없다, 잠들 수 없...'
하다가 서희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꿈결에 윤국의 음성이 들려왔다. 환국의 음성 같기도 했다. 절규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양현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양현이 아니었고 봉순이었다.
"봉순아 안 되지 응? 안 되지 안 되지 응? 양현이 보내면 안 되지? 안 되는 거지? 봉순아, 봉순아!"
몸을 흔드는 바람에 서희는 눈을 떴다.
"헛소리를 막 하세요. 선생님 뫼셔올까요?"
윤국이 내려다보며 묻는다.
"아니야. 꿈을 꾸었어. 난 아무렇지도 않다. 피곤할 뿐이니까."
"미음 좀 드십시오."
아무리 식욕이 없어도 윤국이가 권하면 먹기 때문에 앓아 누웠을 때는 윤국이가 먹을 것을 가져온다.
"음, 양현이 있느냐."
양현이 있는 것은 당연하데 왜 그런 말을 물을까, 윤국은 의아해한다.
"인형 갖고 노는데 왜 그러세요?"
"음, 꿈자리가 좀,"
일어나 앉아 미음을 마신다. 미음 그릇을 비우며
"이제 한결 나아진 것 같다. 보약도 먹고 기운을 차려야겠지?"
"그럼요 어머님,"
윤국이 기뻐서 얼른 말했다. 그러자 발소리가 타둑타둑 난다. 양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머님 미음 다 잡수셨어요?"
미음 그릇을 들여다본다.
"오냐, 다 먹었다."
서희는 양현을 안아준다.
"양현아."
"네."
"넌 윤국이 오빠가 젤 좋고 다음이 환국이 오빠라 했지?"
"네. 그렇지만 환국이 오빠도 이뻐요."
"그럼 어머니는 몇 째 번이나 예뻐?"
"첫째 둘째, 그런 거 아니고 이뻐요."
"그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머님."
윤국이 다소 심각해져서 불렀다.
"왜 그러느냐?"
"광주학생사건 아시지요?"
"음. 일본 학생하고 조선 학생하고 기차 속에서 패싸움이 붙었다는 얘기 말이냐?"
"네."
"크게 일이 벌어질 모양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가만 안 있을 것 같습니다. 연일 학생들이 잡혀간다는 소식이고,"
"설마 네가 주동하는 건 아니겠지?"
"상급생이 있으니까 그렇진 않지만 주동이 되면 안 됩니까?"
모자는 서로 쳐다본다.
"안 된다 할 순 없지만 너는 아버님이 서대문에 계시니까 신중히 처신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리고 만용은 금물이니라. 보다 큰일을 위해서 너희들은 자라야 한다."
서희 얼굴에는 애원하고 달래는 빛은 없었다.
"이번엔 어른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들 문제 아닙니까?"
윤국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상대는 어른이다. 어른이다 뿐이겠느냐? 너희들이 사슴이면 그들은 사냥꾼인 게야."
"사자가 되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모두 사자가 되면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학생의 신분을 잃고 정당치 못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근본에서부터 지엽에 이르기까지 정당하지 않았으니까요!"
윤국은 공박으로 나왔다. 눈이 빛난다. 이제 윤국이도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어미 품에서 떠날 차비를 하는 다 자란 한 마리의 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