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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5-2

Bollnow 2024. 3. 13. 06:52

7장 하얀 새 한 마리

방학을 며칠 앞두고 동경서 서울로 간 환국이는 어머니와 합류하여 서대문 형무소의 아버지 길상과 면회를 했다. 동대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법과를 지망하여 조도전 예과에 입학한 환국이는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아보3지와 첫 면회를 했었고 여름 방학 귀국길에, 그러니까 두 번째 면회를 한 셈이다. 삭막한 그 거리, 붉은 담벽에 여름 태양이 튀고 걸레처럼 후줄근해진 사람들이 오가던 그곳, 옥중에 있는 사람도 물론 그러했겠지만 어머니와는 또 다르게 환국은 형무소의 철문을 나서면서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절대적인 존재, 환국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독립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환국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핏줄의 부름이며 어릴 적에 뇌리에 박셔버린 그 모습, 그 음성이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한층 강하게, 굳게 각인된 것처럼 마음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체취 같은 것을 환국은 느낀다.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 바람 부는 음지에서 환국이는 오돌오돌 떨 듯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 손 한번 마주잡아볼 수 없던 그 짧은 시간, 갈증이 난다. 혀끝이 굳어진 듯 할말을 못하고 오열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던 그 짧은 시간, 아버지의 눈동자만이 심장을 태우는 것 같았던 짧은 시간이었다.

"사내자식이 눈물 같은 것 흘려서는 못써."

", 아버님."

철문을 나서면서부터, 임교장댁에 하룻밤을 묵고 기차를 타고 지금은 레일을 구르는 기차 바퀴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데 줄곧 환국은 갈증을 느낀다. 차창 밖에는 싱그럽고 짙푸른 수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논둑에 휜 새 한 마리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림같이 서 있다. 순간 환국이는 그 휜 새 한 마리가 어머니의 모습같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전에 머문 흰 새 한 마리.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는, 그때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환국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두 손 위에 눈을 떨어뜨린다. 창백한 손이다. 창백한 손에, 푸른 정맥이 내비치는 투명한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샛파란 비취 반지에 눈이 머문다. 물방울 같은 짙은 녹색의 보석이 흰 모시 치마 위에서 어머니의 성품같이 고귀하게 보인다고 환국은 생각한다. 푸른 수전과 흰 새 한 마리, 눈물의 응결 같은 푸른 보석과 어머니의 하얀 모시옷, 환국은 눈길을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손 안에 물이 흘러버리듯 만남의 그 격렬한 시간은 가고 없다. 차창 밖의 시시각각 날아가버리는 연변 풍경 같은 것인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다시 맞이하는 풍경, 처로 양켠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듯 석축이 계속된다. 청회색의 그 돌 빛깔에서 어찌 갑자기 아버지의 가슴팍을 느끼는 걸까. 레일을 구르는 가차 바퀴 소리는 간단없이 정확하게 울린다. 그 바퀴 소리를 한꺼번에 잡아젖힐 수는 없는 것일까. 세월이 그냥 주렁주렁 끌려와서 당장에라도 옥문이 활짝 열려질 수는 없을까.

"환국아."

"."

"시장하지?"

"아니요, 어머니."

"시장하면 식당차에 가자꾸나."

"그럴까요?"

환국은 어머니를 위해 일어섰다. 서희는 아들을 위해 일어섰다. 식당차에 마주앉은 모자는 모래알 같은 밥알을 씹는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었기 때문에 식당은 조용했다.

"그래 하숙은 지낼 만하더냐?"

처음으로 묻는다.

". 과분하지요."

"풍습이 달라서 불편한 점이 있을 텐데,"

"처음에는 좀 그랬었지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인보다는 다소 점잖은 것 같구요."

"순철이는 아직 안 왔겠구나."

". 공부하겠다면서 귀성 안 할 모양이더군요."

"너는 방학 동안 공부할 생각 말아라. 건강이 좋잖은 것 같구나."

"보기에 비해 괜찮습니다. 저보다 어머님이 여위셨어요."

그 말대답은 하지 않는다. 절반도 못 먹은 채 탁자의 접시를 물리고 모자는 날라온 커피잔을 든다.

"여름이 빨리 갔으면 좋겠구나."

여름이 빨리 가기를 원하는 것은 형무소의 아버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환국이는 안다. 지난 겨울에는

"겨울이 빨리 갔으면 좋겠구나."

하고 말했었다.

"기운 내세요, 어머니."

"그래."

모자는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이 년만 기다리면,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오실 테니까요."

"쉬이 못 돌아오시더라도 그런 곳에만 안 계셨으면 좋겠다."

"만주 연해주에선 고생 안 하셨겠습니까?"

"..."

"양현이는 학교 잘 다니겠지요?"

". 윤국이가 귀여워하니 다행이다."

"엄마... 찾지 않습니까?"

"글쎄다. 마음속으로 찾겠지."

이때 푸른 블라우스에 흰 마직 슈트를 입은 여자가 식당 칸으로 들어섰다. 환국이와 마주보이는 위치에서 다가온다. 새까만 에나멜 핸드백을 팔에 걸고 걸어오는 여자는 홍성숙이었다. 환국의 눈과 부딪친 홍성숙은

"아니, 최참판댁 도련님이지요?"

하며 반색을 한다. 환국이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안녕하십니까."

"몰라보게 되셨네? 동경으로 갔다는 얘긴 들었어요. 명희 언니한테서,"

"."

"커피 한잔 마시러 왔는데 앉아도 될까?"

". 앉으시지요."

환국이 옆에 앉으려다 말고 빤히 쳐다보는 맞은편 자리의 서희 눈과 마주친다.

'바로, 최서희라는 여자구먼.'

처음부터 그러려니 의식을 했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눈동자, 의아해하는 빛도 없다. 흔들리지 않는 호수 같다.

"저기, 어머님, 그렇지요?"

". 어머님이세요."

환국이 어쩔까 망설이는데 홍성숙은 스스럼없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네?"

"진주 양교리댁 아시지요?"

서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희 언니예요."

"그러세요? 앉으시지요."

희미한 미소를 띤다. 높은 교양을 가졌을 텐데 어딘지 모르게 천기가 엿보이는 홍성숙을 어머니가 어떻게 대할까 근심이 된 환국이

"어머니? 성악가, 성악을 하시는 분입니다."

소개를 한다.

"홍성숙입니다. 부인 말씀은 진작부터 들었습니다만 이제 뵈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특수한 분야에서, 힘이 드시겠습니다."

연장자로서의 태도만을 취한다.

". 고충이 많습니다. 예술가를 이해 못하는 풍토가 가장 고통스럽지요. 그보다 걱정되시겠어요."

"..."

"얼마나 괴로우실까. 하지만 나라를 위해 겪는 곤욕이니까 영광으로 아셔야지요."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족구에 이바지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성숙은 날라온 커피 잔을 든다. 한 모금 마셔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커피 맛이 형편없군요."

서희는 아까처럼 희미하게 웃는다.

"진주의 언닐 통해서도 그렇지만 임교장댁 명희언닌 저희 선배예요. 서울역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때 아드님을 보았지요."

성숙은 조병모 남작댁 며느님이라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임교장댁 명희언니라 하는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하고 잘생긴 아드님을 두셨으니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어요? 나서면 동경, 은좌 거리가 훤해질 거예요. 호호호..."

"..."

"하기야 어머님이 아름다우시니 당연하겠지만 정말 듣기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다우세요."

노골적인 찬사에 서희는 머쓱해진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서희에게 접근해오는 사람은 없었다. 기질적으로 친밀하게 접근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도 예닐곱 위였으나 어릴 적부터 남을 이끌고 오늘에 이른 서희는 연령보다 정신이 훨씬 노숙해 있었기 때문에 사실 멋모르게 솔직하고 다변하고 여자를 넘지 못하는 감성을 상대하는 것이 거북하다. 불쾌해하는 빛이 스쳐간다.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지만 서희도 이젠 어른이 된 아들의 어머니인 것이다. 남편을 옥중에 두고 사는 여자인 것이다. 성숙은 자신이 가난해서도 아니요, 지체가 형편없는 처지여서 그런 것도 아닌데 명성이나 재력에 약한 여자다. 실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든지 경쟁자로서 출현했다면 모를까, 그럴 요인이 없는 상대에게는 단연 경의를 표하고 환심을 사려하고 친하게 교제하며 자신을 빛내려는 경향이 짙은 여자다. 그러니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은 버리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취하는 성향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숙은 지금 서희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최서희의 아름다움에는 자신이 미치지 못하나 서희보다 젊다는 자신이 있었다. 지체는 그쪽이 다소 높다 하더라도 하인과 혼인하였다는 하자로써 상쇄가 되었으며 막대한 재력에는 자신의 학벌, 예술가로서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혼자 여행이란 아주 지루한 거예요. 심심해서 어쩌나 했더니 마침 귀한 분을 만나 얼마나 다행이니 몰라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행선지까지 함께 얘기하며 가겠다는 것인데 서희는 마음속으로 딱하게 됐다는 생각을 한다.

"진주까지 가세요?"

". 하지만 부산서 며칠 볼일 본 뒤 진주로 갈 거예요."

환국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어머니 심정을 생각하여 초조해진다.

"독창회 관계로 부산서 협의할 일이 있어요. 부산의 청중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모르지만 간곡하게 권하는 바람에, 사실 서울도 아직 형편없어요. 결국 우리 세대는 희생되고 지반 닦아주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여자가 무슨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다는 것, 그건 우리 조선에서는 백 년 후에나 가능할까요? 서양보다 뒤떨어진 일본만 하더라도 예술은 신성시되고 예술인들은 동경과 존경을 받는데, 여기선 한숨밖에 나오는 게 없으니 용기를 잃을 때가 많지요. 백로가 까마귀 속에서 비웃음을 받는 격이지요. 창가 들으러 가자, , 창가 들으러 가자예요."

서희는 쓰게 웃는다.

"나도 창간 줄 알고 있어요."

순간 성숙은 당황한다. 환국은 창가를 내다본 채 혼자 생각에 잠겨버린 것 같고.

"부인께서는 가정에만 계시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일본서 유학했다는 남자 중에도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마 일본서 인력거나 끌며 공부한 사람일 테지만."

서희가 일어설 기색을 보이자 성숙은 화제를 바꾼다.

"실은 저희 조카에가 쉬이 약혼할 것 같아서 진주 가는데 진주 가면 다시 뵐 기회가 있을 거예요. 일이 거의 결정 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깔깔깔 웃으며 환국의 옆모습을 살펴본다. 환국의 귀뿌리가 빨개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환국은 비로소 양소림을 상기했고 오랫동안 괴롭혀온 망상과도 같은 혐오감이 되살아난 것을 느꼈다. 홍성숙을 보는 순간 양소림을 생각했을 터이데 어째서 까마득하게 그것을 잊고 있었는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망상과 같은 혐오감은 아버지의 투옥 사건이 있은 후 사라졌다. 아버지의 투옥 사건뿐만 아니라 일 변 동안 자기 자신의 진로에 대한 번민, 학교 진학 문제, 낯선 동경에서의 새로운 생활, 그런 것들이 소림을 깡그리 잊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홍성숙을 보고도, 마치 홍성숙과 양소림이 아무 관계없는 사람같이 착각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양소림이 약혼을 한다...'

깔깔대는 성숙의 웃음은 물결같이 양소림의 그 징그러운 손등을 싣고 온다.

"언니하고 형부가 이 도련님을 두고 얼마나 침을 삼켰는지 아마 부인은 모르실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서희는 좀 놀란다. 환국의 귀뿌리는 더욱더 붉어진다. 수치와 노여움이다.

"박의사한테,"

하다가 성숙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린다. 반사적으로 서희는 불쾌하고 모멸하듯 성숙을 눈을 주목한다.

". 박의사한테 중매 드시라고 형부랑 언니가 몹시 조르기도 했나봐요. 그뿐인 줄 아세요? 저도 명희언니한테 여러 번 얘기를 했었지요. 우리 소림이, 조카 이름이지요, 그애도 남에게 뒤떨어지는 인물은 아니예요.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그렇지만 아무도 중매에 나서려 하지 않는 거예요. 집안에 불행한 일이 있으니 말 꺼내는 것은 실례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집안이 엇비슷하고, 본인끼리도 서울서 공불 했으니까 면식이 있었을 거구. 전혀 걸맞지 않는 혼담도 아닌데 말입니다."

성숙은 양소림의 그 치명적인 손등에 대해선 일체 비추지 않았으나 망설임 없이 쏟아놓는다. 환국의 어색한 처지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쓰게 웃는다.

"어떻습니까? 아드님 혼인 문제는 생각하고 계시나요?"

"아직은, 어린데 공부해야지요."

"아드님이니까 그렇지요. 딸애 같으면 적령기 아닙니까? 적령기를 넘기면 여자로선 큰일이지요. 그래서 형부가 서두셨는데 언닌 아직도 분해서 울고불고."

"..."

"상대가 불만이라 그런 거예요. 언닌 아무래도 좀 고루하니까요. 결단은 형부가 내렸고 저는 형부를 응원했지요."

","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조카애한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많이 부족하지요. 누군고 하니 부인께서도 이실 거예요. 지금은 의전 학생이지만 박외과병원에 있던 청년인데요, 언닌 병원의 조수였다는 게 남부끄럽다고,"

"환국아?"

", 어머님."

"너 피곤한 얼굴인데 자리에 가서 쉬어라."

"."

구원을 받은 듯 성숙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긴 환국은 급히 식당차를 떠나간다. 말을 중단당한 성숙은

"아드님 앞에서 그런 말 안 할 걸 그랬나요?"

좀 탈선했다 싶었던지 풀이 죽어서 사과 비슷하게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 쉬라 했어요."

"너무 말씀이 없어서 제 혼자 지껄인 것 같군요."

냉정하고 무관심한 서희 앞에서 냉정을 잃은 것은 틀림이 없다. 그것을 깨달은 성숙은 뒤늦게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한 행동에 화가 난 것이다. 비하는 갑자기 존대로 튀어 오른다.

"간도에 계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곳에선 사업을 하셨다지요? 여자의 몸으로 대담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노래는 아무나가 부를 수 없지만 장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럴까요? 조용하 씨 말씀이, 조용하 씨 아시지요?"

이때도 성숙은 명희언니의 남편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 뵌 일은 있지만 모릅니다."

"음악 애호가지요. 저도 그분의 후원을 받고 있지만 귀공자답게 취미가 좋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깊은데 그분 말씀이 앞으론 주먹구구식의 무식꾼들은 장사 못한다 그러더군요."

조용하를 내세워 자신은 솟아오르고 서희를 무식한 장사꾼으로 차 던지려 한다.

"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자본을 한곳에 모아야 일본 자본과 싸울 수 있고 따라서 지식과 두뇌가 없인,"

"만들어서 파는 것은 그럴 테지요. 나는 쌀장수였으니까, 무식꾼이 하는 장사를 했으니 실패가 없었지요."

언제까지나 졸렬한 실랑이를 하고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서희는

"자리로 돌아가시지 않겠습니까?"

성숙은 머쓱해져서 일어섰다. 그도 이등 차칸이었다. 좌석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성숙은 미련 없이 서희는 어색하지 않게 갈라졌다. 시트에 기대어 잠을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던 환국은 성숙이 지나간 뒤

"피곤하시지요."

등을 일으키며 묻는다.

". 언변 좋은 사람도 어렵고 말 안 하는 것도 어렵고."

모자는 함께 쓴웃음을 띤다.

"너 양교리댁 따님을 아느냐?"

귀뿌리가 빨개졌던 일을 생각하여 서희는 아들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기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서울 아주머님하고 역에서 우연히, 아까 그분을 만났지요. 그때 여학생이 옆에 있었습니다."

화가 난 것같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양교리댁에서 따님을 허군한테 보내다니, 의외구나."

환국이 어색해하지 않게 한 말이었는데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럴 이유라니?"

"글쎄요."

얼굴이 흐려진다. 그의 외조부 최치수와 같이 이마빼기에 신경질적인 정맥이 나돋는다. 서희는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환국의 표정이 마음에 거리고 허전한 생각이 든다. 아들은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모자 사이에 대화는 끊어졌다. 홍성숙을 만나기 전의 상태로, 그때 생각으로 돌아간 듯, 그러나 서희는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해가 서편에 떨어지려는데 부산에 도착한 서희와 환국은 유모의 마중을 받아 여관으로 직행한다. 기차를 내릴 때 서희 모자는 홍성숙을 보지 못했다.

"친척은 만나보았소?"

여관의 조용한 방에서 여장을 풀었을 때 서희는 유모에게 물었다.

"."

유모는 서희와 함께 서울까지 갔다가 환국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본 뒤 그 자신의 일신상 문제로 한 발 먼저 부산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서희는 등을 구부리듯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어쩐지, 유모."

"."

"자리 좀 깔아주겠소?"

"어디 편찮으세요. 아이구, 마님 안색이,"

환국의 시선이 펄쩍 뛴다.

"어머니 어디 불편하십니까?"

서희의 얼굴은 창백했다. 유모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깐다.

"괜찮을 거야. 배가 좀, 기차간에서 먹은 게 체했나 부지?"

태연하려 하는데 몹시 아픈 눈치다. 그 도안 혼자 참아보려고 애쓴 것 같다.

"안되겠습니다. 제가 의살 불러오지요."

"무슨 소리, 유모?"

", 마님,"

"등뼈 좀 주물러 주겠소?"

등을 구부리듯 하며 입술을 꼭 다문다.

", . 하지만 도련님 말씀대로 의사 선생님이 오셔야겠습니다."

"아니오. 여관에서 수선떨 것 없소. 등뼈나 눌러보시오."

유모는 환국에게 눈짓을 하고 나서 서희 등뒤에 쭈그리고 앉으며 손가락 끝으로 등뼈마디를 더듬어가며 누른다.

"더윌 마신 것은 아닐까요?"

유모는 서희 목덜미를 향해 부채질을 한다.

현관 옆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간 환국은 고수머리의 낯익은 사무원에게

"수고스럽지만 의사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누가 편찮십니꺼?"

"어머님이 복통을 일으켰어요."

"많이 아프십니꺼?"

"웬만해서는 내색을 안 하시는 분인데, 밤중에 악화되면 의사 부르기도 어렵군요."

겉보기에 환국은 침착했다.

", 알겄십니다.."

"부탁합니다."

"부탁이고 뭐고 있겄십니꺼? 손님 심부름하는 거사 당연하지요. 이봐라! 승구야!"

심부름꾼이 달려온다.

"니 말이다, 지금 후지이벵원에 가서 말이다, 의사 선생님 좀 모시오너라. 퍼떡 갔다와."

"알았소."

"그라믄 올라가 가시이소. 의사는 우리가 안내해 갈 긴께요."

"아니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환국은 창가에 가서 머문다. 여관은 왜식으로 지은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도심지하고도 멀었고 깨끗하고 조용했다. 서울을 오며가며 서희가 묵고 가는 곳이며 환국이도 일본으로 건너갈 때, 돌아왔을 때도 이 여관에서 묵는다. 창 밖의 정원이 넓었다. 수목도 종류가 다양했으며 여름 햇볕에 탄 것처럼 짙푸르게 보인다. 넓은 복도, 천장에 매달린 전등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고 현관으로 이르는, 자갈 깔린 길가의 가등에도 불이 켜져 있었지만 수목 사이에 찢어진 듯 보이는 하늘은 아직 박명이다. 환국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왠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복통이 심상치 않을 것만 같았다. 갈증과는 다른 어떤 공포 같은 것이 엄습해온다.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누가 그런 말을 옆에서 지껄이는 것만 같다.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갈증과 공포, 공포는 갈증을 잊게 하지 않는다. 갈증은 공포를 감소시켜주지 않는다. 서로가 보강하듯,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환국을 몰고 간다. 방대한 최참판댁 땅과 막대한 재산이 마치 허섭쓰레기같이, 그 허섭쓰레기 위에 윤국이가 동그마니 쭈그리고 앉아 있다. 환국은 저도 모르게 넓은 복도를 둘레둘레 살핀다. 휭하니 비어 있다. 전등만 높은 천장에 동그마니 매달려 있다. 병원 복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붉은 벽돌의 철문, 병원의 복도, 윤국의 심술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관에 들지 않고 진주로 직행했을 것을.'

박의사가 옆에 있었으면, 한결 마음이 놓였을 것 같았다.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환국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러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느껴야 했던 공포였으며 반드시 윤국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곤 했었다. 서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던 그였으나 자신이 병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공포에 떠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죽을 수 없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외쳐대는 것 같았다. 서희와 환국이는 필사적으로 그런 공포를 엄폐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들은 어머니에게 태연했다. 그러나 다같이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방대한 땅, 막대한 재산, 허섭쓰레기 같은 재산 위에 사람은 없고 윤국이 혼자 쭈그리고 앉은 모습만 있었다.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이었다. 아들을 위한 외로움이었고 어머니를 위한 외로움이었다.

환국은 골똘히 뜰을 바라본다.

'좀 체하신 거야. 주사 한 대 맞으면 나을 거야. 내일 아침엔 진주로 가게 돼. 아버님만 오시면 나는 이런 고통에서 해방이 된다. 아버님만 오시면.'

일꾼이 나와 뜰에 물을 뿌린다. 가등과 집안에서 비쳐나가는 불빛과, 하늘은 한결 짙어져 있었다. 후텁지근했던 바람이 시원하게 피부에 느껴진다. 물방울이 나무에서 떨어진다. 일꾼이 호스를 치켜들었던 것이다. 나무에 쌓인 먼지가 말끔히 씻겨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버님만 오시면 나는 순철이처럼 신나게 놀 거야. 여행도 할 거야. 술도 마시고... 의사는 왜 여태 안 오지?'

어머니의 복통이 가라앉았는지 환국이는 방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신음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님만 오시면 고성방가, 등산도 하고, 아니야, 나는 그림을 그릴 거다. 반드시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나약한가? 나약하다. 말할 수 없이 나약하다! 아버님은 계시고 내가 갈까? 시베리아로 내가 간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서야 한다. 결국엔 모두 내 곁을 떠나고 아무리 그리워도 사람은 혼자 가는 거야. 그래, 어떤 사태도 조용하게 받아들이자. 어머니는 다만 조금 체했을 뿐이다.'

일이 년 동안 서희는 앓지 않았다. 많이 여위었으나 몸져누운 일은 별로 없었으며 강건하게 버텨왔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할까?'

환국이 양미간을 모으며 눈을 꼭 감는다. 양소림의 손등 위에 있던 그 징그러운 이물에 대한 혐오감을 품었던 데 대해 벌 받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무식하고, 간섭하고, 난 딱 질색이야. 부모도 자식이 크면 놓아주어야지. 자식을 소유물이라 생각하는 그 사상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까 젊은 놈들이 나약하고 자신 없고 병신이 되는 거 아니겠어? 이제나 저제나, 나이들어 담뱃대 두드리며 큰기침할 날만 학수고대, 그래가지고 뭐가 되겠어?"

거침없는 순철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내 경우하곤 다르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그런 처지에 처해 있다면 그 껍질을 찢어발기고.'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환국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간다. 두 남녀가 바싹 몸을 가까이하고 여관의 현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남녀는 홍성숙과 조용하였던 것이다. 낮에 기차 속에서 만났던 바로 그 홍성숙이며 명희의 남편 조용하. 환국은 어리둥절하다. 현관으로 들어온 그들은 사무실 쪽을 향해 뭔가 얘기를 주고받다가 여관 종업원에게 안내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이 어찌하여 함께 여관으로 들어왔을까, 이유는 명확한데 환국은 아직 연소하고 그보다 남의 일에 사로잡힐 여유가 없다. 고대하던 의사가 왔다. 의사와 함께 환국이 방으로 돌아갔을 때 유모는 허둥지둥 밖으로 쫓아나올 기색이었고 서희는 눈을 감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진단은 쉽게 내려졌다. 맹장염. 의사는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환국의 낯빛은 하얗게, 흡사 가면같이 굳어진다.

 

 

8장 배신자

집안에는 손아래 올케와 숙희, 둘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수박 한 트럭을 식도 부산으로 떠났으며 어머니와 사내동생은 시장 과일 가게에 나가 있었다. 숙희가 병원을 그만둔 것은 정윤이 양교리댁 양소림과 혼담이 있다는 뜬소문이 한창 돌았는데 그것이 헛소문이 아닌 거의 확정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박의사도 그것을 시인했다. 환자가 뜸한 저녁때 약제사와 조수가 안으로 들어가 식사하는 동안, 숙희는 울고 박의사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웠다.

"선생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항간에는 박의사가 중매를 섰다고 했다.

"그 일을 알고 있었으나 쌍방간 어느편에도 권한 일은 없다."

"선생님이 막을 수도 있었던 일 아닙니까?"

악에 바친 숙희는 박의사에 대한 평소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당돌하게 말했다.

"숙희, 나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혼전의 여자가 그렇게 나보고 얘기할 수 있는 겐가?"

"지가 망신을 생각하겠습니까?"

더욱더 흐느꼈다.

"숙희가 내 밑에서 일해온 간호원이라면 정윤이도 내 밑에서 일해 온 사람이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나는 어느편에 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박의사로서는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본인들끼리 해결할 문제..."

하다가 박의사는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서서 창가에, 숙희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말했다.

"허군 생각에 달렸던 거야. 허군도 야망에 불타는 보통 청년의 한사람이었을 뿐이야. 숙희는 현명하게 처신할밖에 없다."

"어떻게 처신하는 게 현명한 거지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

아랫방의 들창만 열어놓고 장지문을 닫아 건 숙희는 차가운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다. 동생댁은 장독가에 김칫거리를 절이고 있었다. 아무리 몸을 뒤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진주의 갑부 양교리댁, 거목처럼 진주 일대에 뿌리를 박고 있는 집안, 권속은 얼마며 그들 밑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은 또 얼마인가. 숙희는 양소림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손등의

혹도 알고 있다. 바로 그 혹 때문에 정윤을 빼앗긴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결함이 정윤을 되찾을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도, 결함을 가산하더라도 양소림은 자신의 적수가 아니다. 어느 모로나 양소림은 높은 곳에 앉아 있고 자신은 다만 올려다볼 뿐이다. 부모와 동생은 벼르고 있으나, 일이 작정될 때를 기다려 벼르고 있으나 거목이 흔들릴까?

"이놈이 오기만 해봐라. 다리몽댕이 뿌질러 앉혀서 못 묵는 밥에 재라도 뿌려야지."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러믄 머하겄소. 다 소앵이 없는 일이요."

"아 그라믄 알겄십니다 하고 나앉으란 말가!"

"나앉기는 와 나앉아? 숙희 평생 묵고 살 거를 물리야제요. 다리 몽댕이 뿌질러 앉힌다고 내 딸 신세가 고치지겄소?"

의사 사위 볼 날을 꿈꾸던 내외, 그러나 입으로만 큰소리였지 초장부터 기죽고 들어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아 양교리댁이 무신 상관이겄소? 허가 그놈을 족쳐야지, 허가 그놈 맘 묵기에 달린 기니 매가지를 잡고라도 끌고 와야지요."

동생의 말이었다.

"그것도 세가 있어야 하지 아무나 하나? 육례를 갖추어도 버릴라 카믄 버리는데."

어머니가 제일 소극적이며 또 현실적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분함이 앞섰고 어머니는 보다 딸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숙희는 가족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방학이면 돌아올 정윤에게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다만 저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아."

박의사의 말이 마치 무당의 푸닥거리처럼 따라다녔다. 이 엄청난 짐을 어떻게 풀 것인가. 죽어버릴까, 목숨을 걸고 행패를 부려볼까? 미쳐버릴까? 먼 곳으로 달아날까?

"누님, 정신차리이소. 엎질러진 물이라요."

동생댁은 그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세상없이도 이 혼사는 되는 깁니다. 하니께 누님도 곯거 없고 내 봐란 듯 살아보는 기라요. 밥 잡숫고, 위자료 받는 거는 누님 경우에는 하낫도 수치가 아닌 깁니다. 어무이 말씀이 맞십니다. 아 누님이 학비를 댔는데 당당하게 받아낼 돈 아니겄십니까? 그 돈 받아가지고 누님도 공부하이소. 요새 세상은 여자도 남자겉이 의사도 되고 선생님도 되고 한께, 그라믄 더 훌륭한 사람 만낼지 누가 알겄소?"

한결같이 식구들은 숙희를 나무라지 않았다. 혼전의 계집아이가 사내아이하고 눈이 맞아 신세 망쳤다는 꾸지람이 없는 것은, 물론 결혼을 전제하고 숙희가 정윤의 학비 일부를 부담한 그 일이 이미 양해된 것이기 때문이지만 장사꾼으로 조촐하게 살아온 이 집 식구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나 아닐는지. 상당히 큰 위자료가 나오리라는 기대 말이다.

'죽어버릴까? 달아날까? 행패를 부릴까? 차라리 미쳐버렸음 좋겠다!'

베개를 안고 얼굴을 문지른다. 눈물도 말라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정윤의 얼굴이 떠나지 않고 눈앞에 있었다.

'왜 내가 혼자 죽어? 함께 죽자! 어떻게? 독약을 타서 함께 마실까? 자는 데 들어가서 목에 칼을 꽂을까? 그라고 나도.'

숙희는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는다. 자기 자신이 무서워진 것이다.

"누님, 누님요."

방문 밖에서 동생댁이 불렀다.

"왜 그래?"

"부연이생이가 왔십니다."

아무도 만나기 싫었다. 그러나 친구 부연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학교를 함께 나왔고 이미 시집가서 아이 엄마가 된 친구다. 입술이 튀튀하게 나왔고 쌍꺼풀이 굵었으며 몸도 뚱뚱하다.

"이라고 있이믄 일이 되나? 일어나라. 내 소식 가지왔단 말이다."

사내같이 발끝으로, 누워 있는 숙희를 툭툭 찬다.

"가만히 두어."

그러면서 숙희는 머리를 걷어넘기며 일어나 앉는다.

"어이구 얼굴이 퐅쪽만해졌구나. 영 반쪽이네?"

"..."

"덩신겉이 이리 누워 있이믄 우쩔 기고? 직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 그것가?"

"..."

"그러니 만만하게 보고, 세상에 어디 시집갈 데가 없어서 총각 학비까지 대주었노 말이다. 니는 실개도 간도 없는 가시나가?"

"얼마든지 비웃어."

"그래애! 다 니를 비웃는다. 미친년이라 카더라. 니가 기생가? 기생이라서 남자 뒷돈 대주었나? 세상에 그런 망신이 어디 있노?"

"망신이 무서울까? 그런 할려면 가아!"

"얼시구! 가라 칸다고 내가 갈 기든가? 누가 오라 캐서 왔건데?"

"참견 말어. 아무 참견 말란 말이다! 구경거리 났나?"

"나도 분하고 답답한께 왔지. 쥐어박아주고 싶을 만치 니가 밉다."

그새 말라버렸던 숙희 눈에서 눈물 방울이 떨어진다.

"운다고 떠난 님이 돌아오나? 그래 사내자석이 매꼬름하게 생깄이믄 횡토가 있는 기라. , 시집을 간다 캐도 니를 데리고 살 놈이 아니다.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내가 왜 왔는고 하니, 올 때도 하도 분해서 가심이 벌렁벌렁 하더라마는 니 꼴을 본께 이거는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드누마. 그래 어쩔래? 내가 방금 만냈는데."

"누굴?"

"누구긴? 정윤일 만났지."

"뭐라고!"

"가방 들고 가는 거를, 신수가 훤하데! 그거를 본께 쫓아가서 얼굴을 깔헤비주고 접더라. 나쁜 자식!"

"어딜 갔어?"

"박외과병원으로 들어가더마. 방금 오는 길인 갑더라."

"혼자서?"

"그라믄 누구하고? 양교리댁 딸하고 함께 왔일 성싶더나?"

"..."

"아이고이이, 그래도 태산겉이 미련이 남아서, 둘이 함께 왔이믄 새보로 쫓아갈라 캤나?"

부연이는 방문을 드르르 열고

"야야야! 나 냉수 한 그릇 안 줄래?"

"야아."

동생댁이 냉수 한 대접을 떠왔다. 그릇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사람 왔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다.

"오믄 머하겄노."

대접을 내준다.

"온다고 해겔이 되겄나. 우리집 아아 아배도 가만 두믄 안 된다 카더라마는, 정윤이하고 친구간 앙이가."

"그라믄 장에 가서 어무이한테 알리야겄소."

대접을 툇마루 끝에 놓고 나가려는데

"올케!"

날카롭게 숙희가 불러세운다.

", 누님."

"올케는 참견 말어. 제발 날 좀 내버려두어."

숙희는 동생댁 코앞에다 대고 방문을 닫아버린다.

"오뉴월에 한정할라 카나?"

했으나 부연은 방문을 도로 열어젖히지는 않았다.

"숙희야."

"..."

"이 일을 양교리댁에서 알고 있나?"

소리를 낮추었다.

"그걸 누가 알어? 그런 것 무슨 상관 있어."

"우리 아아 아배 말이 양교리댁에서 그 일을 알믄 혹 혼사가 안 될지도 모른다 하데."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무슨 얘기 들었나?"

"..."

"그렇다믄 니가 약점인데? 정윤이가 활갯짓하고 장개 가겄고나. 참 돈 좋다아, 돈 좋아."

"이제 가아. 나 기운 없다."

흐느낀다.

"하기야 돈만 있나. 손에 벵신이라 카기는 카더라만 절색에다 공부 많이 하고 참말이제 강약이 부동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가?"

시뻘개진 눈이 부연이를 노려본다.

"그 자석 온 거를 보고 속이 부굴부굴 끓어서 안 왔나. 오늘 밤에라도 찾아가서 실컷 분풀이를 하든지, 타협을 보든지, 나쁜 자식!"

"어서 가라니까!"

"나도 젖이 불어서 있이라 캐도 더 못 있겄다. 우리 아아 아배보고 좀 때리주라 카까?"

"듣기 싫다! 다 듣기 싫어?"

부연이 가고 난 뒤 숙희는 계속 운다. 당장 정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한낮이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햇빛이 싫고 햇빛이 무서웠다. 그 동안 정윤이가 있는 대구로 찾아갈 생각도 여러 번 했으나 실행할 용기가 없었다. 동생이 찾아가서 다지겠다 했으나

"내가 만나보기 전에는 아무도 나서지 마라, 그거 한 가지만 내 부탁이다."

숙희는 한사코 그것을 말리었다.

"누님."

죽그릇을 들고 동생댁이 들어왔다.

"죽 좀 마시고 정신차리이소. 기운이 있이야 사생결단을 내도 내겄지요."

"..."

"자 좀 마시보이소.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이럴수록 숭한 꼴로 나타나믄 안 될 깁니다. 나도 가만히 생각해본께 어무이 아부이가 나서는 것보다 당자가 나서야 꼼짝 못할 것 겉소. 넘이 가믄 반감만 사고 만의 일, 될 일도 안 될 성싶십니더."

"만의 일..."

중얼거리며 숙희는 순순히 죽을 먹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램이 그리 모질고 독하지는 않을 긴데, 나는 나쁜 사람으로 안보았는데 워낙 상대가 그렁이... 누님도 잘 생각해보이소. 물불 안 가리고 나가는 기이 좋은가 애원하는 기이 좋은가."

듣는지 안 듣는지, 숙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죽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누님,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십니더. 찬물로 찜질을 하믄 저녁까지 부기가 좀 안 빠지겄십니까?"

동생댁을 쳐다본다. 희미했으나 감사의 빛을 담은 눈이다. 어쩌면 집안 식구들 중에서 순수하게 숙희를 이해하는 사람은 동생댁인지 모른다. 아버지와 동생은 숙희 심정보다 자신들의 분노 때문에 펄펄 뛰었고 어머니는 보다 딸의 장래를 근심하는 편이어서... 어느 편에서도 숙희는 위로받질 못했다. 그러나 손아래 사람이요 나이도 어리고 야학을 좀 다녔을 뿐인데 동생댁은 아픔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죽 한 그릇을 비운 숙희는 한동안 들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댁이 죽그릇을 들고 나간 뒤 숙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포동포동하고 혈색이 좋았던 얼굴이 누우렇게 뜨고 귀염성스러웠던 눈매는 퉁퉁 부어올라 음산하고 흉했다.

사회적으로 간호부라는 지위가 그리 존경받을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서민층의 여자로서는 출세한 것이며 소학교를 나왔다는 것도 서민층의 여자치고는 상당한 학벌이다. 하여 집안에서 위함을 받아왔던 숙희, 장차 의사 사위를 본다는 꿈 때문에, 그리고 과일 가게를 하며 아버지와 동생이 번갈아서 여름 한철은 진주의 유명한 백도, 수박, 참외 등을 외지로 실어가서 팔고 겨울 한철은 대구에 가서 사과를 실어다 진주서 도매를 하고, 부자가 부지런히 뛰었기 때문에 살림은 넉넉한 편이어서 정윤의 뒷바라지를 반대하지 않았었다. 정윤을 잃는다는 큰 충격, 다음으로 숙희를 괴롭히는 것이 집안에서의 열등감이다.

소금에 절여진 김칫거리를 동생댁이 씻고 있는데 방문을 열고 숙희가 나왔다.

"누님 머리 감으실랍니꺼? 아짐태서 물 데우놨십니더. 찬물에 감으믄 머리서 신내가 난께요."

"고맙다."

동생댁은 장독가에서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뚜껑 여는 소리, 더운 물을 한 통 퍼내온다. 그리고 놋대야를 가져다 놔준다. 숙희는 오래오래 머리를 감는다. 몸이 쇠약해진 탓이겠지만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머리를 감는 것 같았다.

"올케?"

머리를 감고 나서 불렀다.

"."

"어머니나 너이 남편이 들어와도 왔다는 얘기는 말어."

"그렇지마는 호욕 밖에서 듣고 올 수도 안 있습니까?"

"아무튼... 올케는 암말 말어주어."

"."

머리를 감고 난 숙희의 마음은 서둘러진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들창에 수없이 눈을 보낸다. 밤이 되어도 깊어져야 갈 수 있는데 초조한 마음에 해는 그냥 한 곳에 머물고만 있는 것 같았다. 다 말려진 머리를 땋아본다. 처녀들은 모두 엉덩이까지 머리를 기르고 땋아서 자줏빛이나 주홍빛 댕기를 물리고 다니는데 숙희는 직업여성이었기에 짤랐었다. 짤라서 등까지 내린 머리를 두 번, 세 번 정도 땋아서 검정 고무줄로 묶는다. 스물세 살의 노처녀, 수물세 살까지 머리를 땋고 다니는 여자는 거의 없다. 결혼 적령기가 십육 세, 열여덟도 늦은 편이며 스물을 넘긴 딸을 가진 집안에선 우환덩어리로 생각하는 세풍에 머리를 땋고 있어야 하는 숙희, 머리를 땋을 때마다 우울했으나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이제는 캄캄한 절벽이다. 살을 꼬집어보아도 꿈이 아닌 현실인 것이다.

'머릴 깎고 절로 갈까?'

그러나 숙희는 일어서서 남빛 순인 치마를 꺼내어 입는다. 옥색 깨끼적삼도 꺼내어 입어본다. 뭐가 미진한지 숙희는 농 문을 열고 한참 휘젓다가 다시 서랍을 열어젖힌다. 검자줏빛 짧은 댕기를 찾아 등에서 흔들리는 머리꼬리에 댕기를 물린다. 그러나 희망을 벗어버리듯 댕기를 풀고 저고리를 벗고 치마도 벗는다. 지옥같이 길고 답답한 시간이다. 악을 쓰고 싶을 만치 시간은 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걱정이 되어 들여다본 동생댁이 벗어 던져놓은 옷을 얼른 주워들고 나간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불을 피우고 말끔하게 다려서 아랫방으로 가져왔을 때 숙희는 지쳐빠져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밤이 깊어서, 열한시쯤 됐을 때 숙희는 몰래 집을 빠져나온다. 밤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조용했다. 땅은 식었고 바람은 서늘한데 숙희 콧등에 땀이 솟는다. 불빛이 밝은 한길에 나갔을 때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갔다. 숙희는 얼굴을 숙이고 병원 앞에까지 갔다. 외등이 켜져 있고 박외과의원이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띈다. 낯설고 쌀쌀하게 느껴지는 박효영이라는 이름 석 자도 선명하게 보인다. 병원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약제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숙희는 울부짖는 것 같은 마음으로 문을 꽝! !

친다. 약제실에서 강남이 쫓아 나온다.

"아니!"

응급 환잔 줄 알았던 강남이 맥빠진 듯 숙희를 쳐다보다가 슬며시 외면을 한다.

"정윤씨 왔지요?"

", 왔지."

"있어요?"

"없어."

"거짓말 말아요!"

숙희는 어깨로 떠밀 듯 병원 안으로 들어간다. 대합실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숙희는

"나오라고 해요."

"없다 하는데 왜 이래?"

"강남씨도 한통속인가요?"

입술을 떨며 노려본다.

"기다려. 기다리면 올 거다."

"어디 갔기에?"

"술 마시러 간다더군. 저녁에는 오겠다 했어."

강남은 곁눈질하며 숙희를 본다.

'아주 몰라보게 예뻐 뵈는군.'

흰 간호원복을 입었던 모습에 익혀진 강남의 눈에는 수척해진 숙희 한복 차림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다.

"약제실로 들어가 기다려."

강남은 대합실의 전기를 끈다. 약제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은 강남은

"안됐지만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

"나쁜 놈이라고 나도 욕은 했지만... 정윤이한텐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지. 마음 돌리긴 어려워."

"선생님은 안에 계세요?"

"부산 가셨어."

"왜요?"

"최참판댁 부인이 부산서 맹장 수술을 받았거든. 아마 오늘 퇴원하는가 본데 오는 도중 돌봐드리려고."

"부자라면 사죽을 못 쓰는군."

강남은 묘하게 웃는다.

"부자라면 중매쟁이도 되고."

"그건 오해야. 숙희가 몰라 그렇지."

"모르긴 뭘 몰라요? 누구 바보 덩신인 줄 알아요? 거기말고 누가 말 건네줄 사람이 있어서."

원한에 눈이 탄다.

"내가 누구 변명이나 해줄 사람이야? 사실이 그렇다는 게지. 모르긴 몰라도 선생님 오시면 정윤이 병원에 못 있게 할걸?"

"약아빠져서, 남한테 욕 안 먹으려고 그러겠지."

"정윤이한테 물어보면 될 거 아니야. 중매를 부탁받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선생님은 정윤이한테 그런 말 비추기 않았다는 거야. 몸이 달아서 양교리댁 그 양반이 대구까지 찾아갔다는군. 일은 그렇게 된거라구."

"하지만 선생님이 막을려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이지."

눈물을 참으려고 얼굴을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그건 숙희 욕심이야. 어떻게 선생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칫거리였을 거야. 이래도 저래도 욕을 먹게 돼 있으니."

얘기를 하면서 강남은 힐끔힐끔 숙희를 쳐다본다. 평범했던 여자가 갑자기 평범하지 않은 여자로 보여져서 강남의 마음이 시끄러워진 것이다. 동정하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어쩐지 숨이 가빠온다.

"단념하고 마음잡아."

"..."

"그냥 넘기기야 하겠어? 결혼 문제 말고는 선생님도 너를 위한 방도를 생각하실 거야. 정윤이 그 새끼도 빚은 갚아야지."

"누가 빚 줬어요?"

기어 숙희는 울음을 터뜨린다. 입맛을 다시며 강남은 담배를 붙여문다.

"그거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곳에서 뜨는 거다. 일본에나 가아. 가서 정식으로 간호원 공불 한다든지, 너는 예수쟁이니까 공부해서 그쪽 일을 본다든지, 깨어진 그릇이야. 단념을 하면 오히려 속이 편할 게다."

강남은 담배를 붙여 물었지만 숨결은 여전히 거칠어진다. 참다못해 그는 일어섰다.

"나 안에 들어가 자야겠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정윤일 만나."

하고 허둥지둥 나가 버린다.

열두시가 지나고 한시가 가까워졌을 때다. 시계 초침 소리가 심장을 찌르며 지나가는데 약제실 창문 밖에 발소리, 말소리가 들려 온다. 숙희는 창문 커튼 사이로 거리를 내다본다. 정윤이 비틀거리며 오고 있었다. 정윤의 팔을 낀 사람은 양소림의 친척 오빠였다.

"매부, 걱정 말라니까! 나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구. 진주 바닥에서 그걸 누가 몰라? , 양교리댁 사위 된다니까 그 계집애말고도 우는 가시나들 많았다 카대. 짝사랑한 계집들이 많았다면 그건 내 누이를 위해서도 다행이면 다행이지 불행은 아니라구. 그만큼 잘났다아 그 얘기 아니겠어?"

정윤의 팔을 끼고 앞으로 넘어졌다 뒤로 목을 젖혔다 하며 양소림의 친척 오빠는 떠들었다.

"어이구 취한다! 나 기분 나쁘지 않다구요! 못생긴 부잣집 놀량패한테, 내 누이가 시집가는 것보다 열 배 낫지이. 자신을 가지란 그 말이야! 사내자식이 배짱부려보라 그 말이야. 쥐어살 것 없어! 그 서울내기 오촌 아지매, 소림이엄마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술수는 장가간 뒤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아아 아아 걱정할 것 없어!"

소림의 친척 오빠는 정윤이를 병원 앞에 밀어붙이고 나서 내를 부르며 밤길을 돌아간다.

숙희는 병원 문을 열었다. 정윤은 놀라지도 않고 숙희를 빤히 쳐다본다.

", 숙희 올 줄 알았어."

전등 밑에 숙희는 유령같이 서 있었다.

"피한다 생각할까 봐 온 거야."

술 취한 사람 같지 않고 말씨는 똑똑했다.

"곧이 듣고 안 듣고는 숙희 자유다. 나는 이번 혼담이 있기 훨씬 이전에도 너랑 결혼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 배신자!"

입술이 찢어질 만큼, 악을 쓰고 이빨을 악문다.

"문제는, 좀 치사하지만 내 학비를 보내준 사람이 진주 유지가 아닌 여자였다는 데 있어. 그것뿐이야."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번쩍 든 숙희가 정윤에게 달려든다.

 

 

9장 동승

자기 자신에게 타일러본 일은 없었지만 이미 단념을 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최서희로부터 뼈에 사무치는 모멸과 함께 거금 오천 원을 받은 후 십 년 세월은 조준구에게 완전히 미친 세월이었는지 모른다. 미친 세월, 무엇을 어떻게 하기 위하여? 그것은 조준구에게 일생일대의 모험이기도 했을 것이요, 옳건 그르건 의지의 시기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성이 비천하고 간교하다 해서, 강자에겐 강아지, 약자에겐 늑대가 된다 해서,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뒷거리 전당포 주인이며 고리대금업자로 전락했다는 것은 조준구의 최대한도의 인내를 의미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아니었으나 탐욕보다 강한 허영을 조준구는 회생시켰으니 말이다. 명문의 후예로 남 먼저 깬 개명의 지식 분자로 자부하던 조준구가. 재물을 딛고 일어설 야망, 과연 그 야망이 무엇이었는지 실상 조준구 자신도 뚜렷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날 품었던 야망의 연속으로 생각했을까. 애초에는 염치 좋게 최서희에게 보복의 칼을 갈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주점에서 자신을 도둑으로 몰려 했던 무리들의 잊을 수 없는 수모에 대하여 반드시 보복을, 그러나 보복이란 물거품같이 허망한 일이었다. 재물보다 강한 무기는 그들이 젊다는 것이다. 조준구 자신보다 절반이나 젊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뛰어가고 자신은 걸어가도 숨이 찬 형편이다. 육십대 중반기에 들어선 나이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지 않더라도 단념할밖에 없는 일이다. 오천 원을 밑천 삼아 시작한 전당포, 고리대금으로 사오만의 재산을 모은 것은 사실이다. 그 재산 관리만으로도 이제는 힘에 벅차다.

정실이었던 홍씨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연전의 일이다. 홍씨 친정 쪽에서 흘러나온 얘기에 의할 것 같으면 홍씨가 죽은 뒤 그 많은 패물이 흔적 없이 됐다는 것이었다. 생전에 생계를 위해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해 팔아버렸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시중을 들고 병간호를 했던 사람이 가로채었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라 했다.

'패물일 얼마나 됐을꼬? 수울찮았을 텐데... 그걸 다 팔아버렸을 리가 없다! 필시 누가 가로챈 거야.'

조준구는 목털을 곤두세우는 투계같이 그게 다 누구 돈으로 산건데, 누구 돈으로 산 건데! 하며 흥분을 했고 달려갈 기세를 보였으나,

"나도 상가에는 가보지 못했고, 알뜰히 기별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래 일 끝난 뒤 얘기만 들었지요. , 사람이 그리 살다 갈 게 아니더군요. 방안의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로 못했다 하질 않겠소? 살았을 때보다 죽은 형상이 더 무서웠다 했으니 짐작할 만한 얘기지요."

홍씨의 몇 촌간 동생이라던 사내를 우연히 만나 들은 얘기는 조준구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병석에 일 년 넘기 있었으니... 기와는 얹었다 해도 오막살이나 다름없는 작은 집을, 뭐 옛날의 몸종이라든가요? 그 계집한테 죽고 나면 그 집을 주기로 하고 시중을 들게 했다든가, 그러니 오죽했겠습니까?"

"그 좋은 집은 어떡허구!"

"줄였겠지요. 줄이다보니 그리 된 거 아니겠습니까? 생활비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늙어가는데 재물을 누가 탈취해갈까 봐서, 그런 면에서도 남의 눈에 뛰지 않게."

"아무것도 남긴 게 없었다는게 무슨 놈의 재물?"

"글쎄올시다. 집안에서 상종한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그 내막이야 알 수 없지요. 추측만 해보는 거지요. 패물만은 없애지 않았을 텐데, 패물말고도 돈이 있었을 터인데 하구. 해서 몸종이었다는 계집을 닦달했다는 겁니다."

"닦달을 해도 내가 하지 무슨 권리로?"

"자형 거처를 모르니 그야,"

"그랬더니 어찌 됐다는 겐고?"

"생래가 천치였다니까 몸종 계집이 가로챘을 거라는 것도 신빙성이 없는 일이라 의견을 모았다더구먼요. 초상이 나자 자형이 어디계신지 연락할 길도 없고 친정붙이들이 겨우 초상은 치러주었는데 십여 년 동안 사람을 내버린 채 돌보지 않았던 자형을 원망하는 친정붙이가 없었다 하니,"

"내버린 채 돌보지 않았다구?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 계집이 내 재산을 탈취하고오, 내가 망할 적에,"

팔을 휘둘렀으나 흥분 때문에 숨이 막힌 모양이다.

"허허어, 그러니까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질 않소. 이미 세상 떠난 사람, 이런 말 해서 안 되겠지만 악독해도 여간했어야지, 벌 받은 게지요, 벌 받았어요.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도 못했다니, 임종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사람치고 욕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것도 어느 정도."

"네 그 계집이 그리 죽을 줄 알았다. 죽었다는 말 들어도 터럭만의 연민도 없네. 천벌을 받아 마땅한 계집이야. 가장 알기를 옷고름의 패물만큼도."

"기왕에 죽은 사람은 그렇고 자형도 생각은 고쳐야 할 겝니다."

"내가 어째서!"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까?"

"..."

"나 역시 잘살아본 일이 없고 남한테 잘해본 일이 없고 일개 필부로서 명 보존한 것에 불과하지만 다행히 아들 손자를 거느리고 있으니."

조준구에게는 비로서 아픈 말이었다. 오 년 전만 해도 그까짓 것, 했을 것이다. 아니 홍씨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까짓 것 했을지 모른다. 그 사내를 만난 뒤 조준구는 여전히 패물의 행방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게 다 누구 돈으로 산 건데!"

혼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달려가서 계집종의 머리끄덩이 끄덕이며 자복시킬 용기도, 집 어느 구석에 숨겼을지 모를 일이라 벽을 뜨고 구들을 파헤쳐볼 용기도 없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홍씨의 악령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고 조준구는 홍씨가 죽은 뒤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왕시 그를 본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비 오는 날 강아지 꼴을 하고 쏘다니더라, 그것은 다소 과장이지만,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꼴을 하고 다닌 것만은 사실이었다. 변화는 옷에서부터 서서히 왔다. 회중 금시계를 꺼내어 사용했고 스틱을 짚었으며 고급 이발관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양복은 구식이라 하여 일류 양복점에 가서 최고의 천으로 맞춰 입었다. 미친 것 같던 십 년 세월의 초라한 옷을 벗고 옛날같이 미식미복에 탐닉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그것 이외 변화할 징조는 없었으나 미식을 즐기면서부터 식모 겸 마누라 역할을 해온 무식하고 못생긴 파주댁을 못살게 들볶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심의 뭉게구름이 일면 덮어놓고 욕설과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년! 상년 같으니라구! 내 죽기를 바라는 게야? 내가 죽으면 이 재물이 네 것 될 것 같으냐?"

", 그런 일 없어요."

"황당한 그 따위 생각을 한달 것 같으면, 추호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은 동전 한 닢 어림없다! 어림없어! 계집치고 구미호 아닌 계집이 어디 있어!"

", 지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듣기 싫어! 도둑년 아닌 계집이 어디 있어!"

"손텁만큼도."

"천하고 박복한 계집! 누구 은덕으로 밥 쳐먹는가, 국으로 있어야, 그래야 떨어진 밥풀이라도 주워 먹게 된다. 왜 그걸 몰라!"

", 지는 아무말도 안 했어요."

가난뱅이 아낙같이 악센 삼베옷 아니면 굵은 세 베옷 이외 인조견도 걸쳐보지 못한 파주댁은 안 했다는 대꾸밖에 할 줄 몰랐다.

"호박같이 못생긴 게 꿍꿍잇속은 있어서."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안 혀요."

"! 바라지 않는다구? 그것부터 거짓이야, 어리석고 못난 것!"

어리석은 여자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겼으니까. 보잘것없고 재주 없는 여자가 홀로 된 후 배고픔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다만 소망이 있다면 내쫓기지 않는 것, 어떻게 하면 야단을 덜 맞고 하루를 보낼까, 재산에 대한 야심은커녕 조준구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이 파주댁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팔월이 거의 끝날 무렵, 조준구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며칠 걸릴 거라는 말을 남기며 인력거를 타고 서울역을 향하였다. 파주댁과 전당포 종업원이 좋아한 것은 물론이다. 하기는 여름 한철 전당초 영업이 안 되기도 했었지만, 손가방 하나를 들고 스틱을 팔에 걸고 서울역에 내려선 조준구는 새로운 천지가 눈앞에 전개된 것처럼 숨을 크게 내쉰다. 고리대금업자, 전당포 주인, 치욕스런 허울을 벗어던지고 중추원 의원이나 작위를 받은 친일 거두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걷기 시작한다. 수행원이 없다는 것만 유감이었다. 놀아본 풍월이 있어서, 십 년 간의 공백이야 어떻든 차리고 나선 품은 어디로 보나 근사한 노신사다. 회색빛이 도는 푸른색 나비 넥타이가 세련돼 보였고 연하디 연한 회색 마직 여름 양복이며, 흰 구두와 흰 캉캉모자, 회색으로 변한 머리털하며 어디에 명함을 내놔도 손색이 없을 그런 차림이다. 키가 작고 두상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등 차칸으로 들어간 조준구는 손가방을 짐칸에 올려놓고 스틱은 좌석 한 켠에, 모자와 윗도리를 벗어 건 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맞은편에는 사십대의 사내가 존대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조준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 저게 누구야!`

조준구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사내는 먹이를 노리듯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묘하게 웃는 듯 마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럴 리가 없지.`

조준구는 불안하게 다시 사내를 훔쳐본다. 김평산이 그곳에 앉아 있다는 착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김두수, 그는 김두수였다.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이마가 좁고 입술이 나왔으며 비대한 몸집이, 김평산 생시 그대로의 모습이다.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흔히 있다고들 하지만 허어 참...'

조준구는 부채를 쫙 펴서 손끝으로 와이셔츠를 집어 올리며 부채질을 한다. 그러면서 연신 김두수를 숨어 본다. 김평산과 다른 것은 도포 대신 양복을, 그것도 값진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것뿐이다.

'가만있자아. ? 평산이 그자의 아들놈인가! 허나 그럴 리가 없지이. 이등 차칸에 앉아 있을 리도 없고, 살인자의 아들놈이 저렇게 버젓이,'

웃는 듯 마는 듯 시선을 거두었던 김두수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역습하듯 숨어 보는 조준구의 시선을 잡아챈다. 만주 중국 일대를 누비며 눈빛 강한 사내들의 목을 엮어낸 김두수다. 조준구 따위, 일별로써 내리누를 김두수의 안력인 것이다. 조준구는 허둥지둥 눈을 피해 달아난다.

'늙은 게 뭐 먹을 것 있다고 내 얼굴을 훑어?'

'도대체 이놈은 조선놈일까? 일본놈일까? 만만치 않군 그래. 뭐하는 놈일까? 김평산의 아들놈이라면 나이는 이쯤 됐겠다. 삼십 년이나 지난 옛날, 평사리에서 그놈의 아들놈을 보았던가? 아들 형제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고 어미는 목매달아 죽었다 했고... 그 자식놈들이 제대로 살아 있을까 싶지도 않은데... , 아니다. 생각나는군. 분명히 작은놈은 평사리에 살고 있다 했어. 살고 있어봐야 머슴 아니면... 이놈은 왜놈임에 틀림이 없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는데 김두수 역시 어디서 본 것 같다 얼굴이라 생각한다.

'어디서 보았을까?'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그리고 김두수는 조준구처럼 호기심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작정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두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한복이를 만나고 가느냐, 만난다면 어디서 만날 것인가. 서울은 몇 번 다녀간 일이 있었다. 부산행 열차, 고향길 가까이 가는 기차를 타보기는 처음이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타기는 했었지만 김두수의 심경이 한복이를 만나는 문제말고도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차는 영등포를 지났다. 기차안은 한결 선선해졌다. 부채질을 하던 조준구는

'통성명을 해봐도 원수진 사이는 아니겠고, 설령 평산의 아들이라하더라도, 마주앉았으니 여행길에 말 걸어보기 예사 아닌가.' 해서 부채를 접고

"어디까지 가십니까."

왜말로 정중히 묻는다. 서울 억양의, 조선인이라는 것이 확실한 일본어다.

"동경이오."

돌아온 말은 유창했다.

'왜놈이군.'

"나는 부산까지 가는데, 날씨가 몹시 덥군요."

"여름이니까요."

당연하지 않느냐 하듯 대꾸한다.

", 서로가 몸이 비대한 편이라서 하하핫..."

김두수도 쓰게 웃는다.

"한데 조선에는 볼일이 있어 오신 모양이죠?"

"조선에 볼일이 있어 온 게 아니오. 일본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오."

"아아 그러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군요."

"조선이 아니고 중국이오."

"아아, 중국에선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무슨 일을 할 것같이 보이오?"

"글쎄올시다. 물론 사업이겠지요."

"사업? 사업은 사업이겠지요."

김두수는 낄낄 웃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

"? 노인장 편안한 대로 생각하십시오."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린 김두수는

"조선이란 변함없이 가난하게 게으르기 짝이 없는 백성들의 땅이 구먼."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 희망이 없지요. 희망 없는 백성이오."

"어째서 희망이 없소? 대일본제국의 식민지라 그러는 게요?"

"아 아니지요. 희망 없는 백성이니까 일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 말이외다."

", 조선에 나오니까 한결 공기가 다른걸?"

"다르고말구요. 만주 중국은 아직 시끄럽지요? 일본이 밀고 들어 갈 때도 됐는데."

"밀고 들어갔지. 일본이 손가락 물고 구경하고 있을 성싶소?"

"내 말뜻은 그게 아니오. 아주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조선처럼. 그래야 동양이 평화를 얻을 것 아니겠소?"

"노인장은 뭣 하는 사람이요?"

친일파인 것을 상당히 풍겼는데 김두수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나는 말할 것 같으면 한말에는 개화당이었지요."

조준구는 약간 상체를 비틀듯, 뽐내듯 여음을 두며 말했다.

"그러면 양반이겠군요."

"가문이야 빠지는 편은 아니지요. 양주 조씨니까, 합방 후에는 일본인과 손을 잡고 광산을 하다가 만석 살림을 털어넣었지만."

이때 김두수 머릿속에 번개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조준구를 빤히 쳐다본다.

'맞아! 바로 이 자가 조준구다!'

어릴 적에 말을 타고 서울서 오던 모습이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세상이란 참, 넓고도 좁다.'

조준구가 생각했던 것처럼 원수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동지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상한 얘기지만 최참판댁의 가해자라는 입장에서. 그러나 김두수는 마음을 열어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조준구를 본 것은 삼십 년 전쯤, 어릴 때의 일이지만 서희가 간도에 있을 때 공노인의 서울 출입을 조사한 바 있는 김두수였으므로 조준구가 광산을 한 사실은 소상히 알고 있었다. 회령서 순사부장 할 때였던가. 공노인을 협박했을 때 공노인은 그런 말을 했었다.

"누구네 부친은 그놈을 손바닥에 올려놓질 못해서 이용만 당했다하긴 하더라만,"

"누구네 부친?"

김두수는 반문했었다. 그러고 다시

"그게 누구지요? 최서희의 부친 말씀이오?"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구,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돈은 중국놈이 먹었다 하기도 하더구먼."

그 말은 두고두고 김두수의 동감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놈이 중국놈이었고 내 부친은 곰이었다 그 말이겠다?'

별안간 김두수는 허허헛... 하고 웃는다.

"...?"

"세상 참 우습구먼."

여전히 조선말은 아니었다.

"아니 뭐가 우습다는 게요?"

어리둥절하기도 했으나 따지고 보면 굽신거릴 이유도 없을 것 같아 조준구는 못마땅한 눈으로 두수를 쳐다본다.

"잡아온 쟝고로 생각이 나서 말이오."

"...?"

"총검으로 애목을 찔렀는데 웃고 있더란 말이오."

세상이 우습다는 말과는 맥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감을 주는 말이었다.

"담이 큰 놈이던가 부지요?"

"허허헛... 허헛 담이 큰 게 아니지요. 웃으면서 아첨을 떠는 놈을 쿡 찔렀으니까요."

"..."

"비천한 놈들, 돼지 같은 놈이지요. 그런 놈들은 우리 일본군의 끄나풀 노릇을 하다가도 여차 하면 등뒤에서 덤빈단 말이오."

"하아,"

"친일파라 해서 믿었다간 일본도 큰코다친다 그 얘기 아니겠소? 조선에 나와보니 친일파도 많고 친일파 되려는 놈도 많은데 등뒤에서 언제 덤빌지, 하하핫핫 노인장이야 진짜 친일파겠지만 하하핫핫..."

조롱이며 협박이다. 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겠나? 하며 육박해오는 말이기도 했다.

"한데 동경에는 무슨 일로,"

조준구는 자리가 나빴다 생각하며 화제를 돌려놓으려 한다.

"아들놈이 지난 봄에 고등학교에 갔지요. 그 아일 보러 가는 길이오. 다른 공무도 있지만."

김두수는 쓴 입맛을 다신다. 아들놈이 지난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아들 때문에 동경으로 가는 것이기는 했다. 일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그러니까 두수에게는 장남인데 생모인 일본 여자와 헤어진 것은 오래 전 일이며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어 중학에 넣으면서부터 어미 감독 하에 두었었다. 그랬는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불량 소년으로 풀리어, 미성년인데 불구하고 계집아이 때문에 싸움을 벌려 상대에게 칼질을 하고 상해를 입힌 사건, 그 일 때문에 김두수는 지금 동경으로 건너가는 길이다. 자식에게는 각별한 김두수, 그는 여러 번 중국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축재도 상당했으므로 조선에 나와 서울서 자리를 잡을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나온다면 물 없는 고기 신세가 될 것을 두수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경찰서장 자리라도 하나 준다면 모를까, 재산이 평생 놀고먹을 만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한 시정인이 될 때 자신의 보호 문제 같은 것도 상당히 심각했으니까, 결국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자기 직업에 후회한 일은 없었고 아니 오히려 만족해하며 언제나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조선에 돌아와 모은 재산으로 내보란 듯 살아보고 싶은 유혹은 늘 있어왔다.

"나도 실은 아들 손자들을 보러 가는 길이지만,"

"아들 손자?"

김두수는 반문했다. 조준구가 가족을 데려오기 이전에 두수는 평사리를 떠났기 때문에 가족 상황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 반문은 내버려둔 채

"지금도 광산을 하시오?"

홀랑 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조준구가 아직 잘 차려입은 것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내 나이 몇인데 그 짓을 하고 있겠소."

차창 밖의 풍경은 좁혀졌다. 기차는 산과 산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김두수는 안동서부터 줄곧 기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진력이 났고 따분했다. 두 다리를 조준구 쪽으로 쭉 뻗으며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버릇없는 놈, 개상놈이라니, 이놈이 중국 바닥에서 사람깨나 잡아족친 눈친데.'

"조준구 씨!"

별안간 들려온 소리, 벼락이 떨어진 것만큼 놀라웠다. 백주에 유령과 부딪친 기분이었다.

"으허허헛... 으하하하핫핫..."

김두수는 입을 쩍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 호탕한 웃음 소리만은 김평산이 아니었다.

"놀랐소?"

조선말이었다.

", 누구요? , 당신은."

"알 만하실 텐데요?"

", 김평산..."

"내 부친이지요."

", 역시."

"장난이 지나쳤는가요?"

존중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었고 놀려대듯, 상대가 연로하다는 것쯤 도외시하듯 두수는 웃는다.

"감쪽같이 왜놈으로 속으셨군."

조준구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감히, 가 감히 알고서 희롱했더란 말이냐?"

"알았으니까 속인 게지요."

"뭣이 어째? 노소는 고사하고 지난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가 있나? 허허어 참 기가 차서,"

"지난 일들 말입니까? 그건 나보다 조준구 씨께서 더 많이 생각 해야 할 거요. 안 그렇습니까?"

"뻔뻔스런 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 아시오?"

"살인자의 자식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바로 네놈을 두고 한 말이야!"

"어허어. 목소리가 크시오. 나보다 조준구 씨께서 곤란하실 테니하는 말인데, 그 말 나오길 기다렸소. 생각보다는 성급했소이다. 여하튼 통성명도 상대 보아가며 하는 게 내 오랜 버릇인데 하하하핫하핫핫..."

몹시 유쾌한 듯 꺽쉰 소리로 웃는다. 방약무인이다.

'이놈이 뭘 믿고, 마적질을 했나, 강도질을 했나? 이렇게 나오는건 무슨 까닭인고?'

기세가 꺾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도 있고, 조참판, 아니 실례했소, 조준구 씨가 나를 만나면은 만석 살림의 십분지 일은 사례로 주실 줄 알았는데,"

", 뭐라구?"

조준구는 자리에서 일어날 자세다.

"가만히 계시오."

팔목을 꽉 잡는다. 잡아 앉혀놓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는데 그 침묵은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순간같이 잔인했다.

"어떤 노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그 늙은이는 눈꼽만치도 나라의 혜택을 받은 일이 없는데, 내 부친이나 나처럼 말이오. 헌데 애국자로 겁적거리는 위인이었소. 누군지 아시겠소? 하하핫... 하하핫... 조준구 씨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려먹던 사람인데 아실 만하지요?"

조준구는 신음 소리를 낸다. 공노인을 두고 하는 말인 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노인의 말입니다. 누구네 부친은 그놈, 그놈이란 조준구 씨를 이름이고, 그러니까 조준구 씨를 손바닥에 올려놓질 못해서 이용만 당했다 그러질 않았겠소? 누구네 부친이란 말할 것도 없이 내 부친을 가리킨 거지요. 그리고 또 말했지요.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돈은 중국 놈이 먹었다, 곰은 내 부친이요 중국놈은 조준구 씨지요. 알아들으시겠소?"

"..."

"어째서 통성명을 했는가 아실 만합니까?"

"네놈은 어디서 뭘 해먹고 굴러다녔어!"

"어허어 큰 소리 내지 마슈. 개화당도 하구 광산도 하구, 살인을 사주하여 만석 살림도 횡령한 그런 화려한 이력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자들을 똥을 싸게 하는 짓을 해먹고 살았지요."

"강도 같은 놈! 무슨 증거로! 살인을 사주해? , 무슨 증거로,"

"조용히 하시오. 그리고 용기도 내시고, 삼십 년 전의 일이니 증거 운운할 필요가 있겠소? 내가 십여 년 전에 회령서 순사부장을 할 때 당신 같은 좀도둑을 수없이 보았는데 그네들은 많아야 기십 원, 그러니가 당신 같은 좀도둑이 만석 살림을 삼켰다면은 그것은 운이 좋았던 게요. 그 운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부친이 갖다준 게고, 그래도 날보고 뻔뻔스럽다 하시겠소?"

조준구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아 참 아까 어디서 뭘 하고 굴러먹었느냐 하셨는데 아까 말했듯이 십여 년 전에 회령서 순사부장을 했으니 지금은 무엇일까요?"

"..."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동지가 됐으면 됐지 적이 될 이유는 없는것 아닙니까? 이거 독립운동한다는 놈들의 말투지만요."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나야말로 대일본제국의 훈장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조준구는 두수를 노려본다. 두수는 일어섰다. 혁대를 풀어 구멍을 하나 줄여서 다시 졸라맨다.

"점심 하러 안 가시겠습니까?"

"..."

두수는 등을 구부리고 조준구 귓가에 입을 가져온다. 조준구가 놀라며 몸을 흔드는 바람에 옆 좌석에서 졸고 있던 일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조준구 씨, 다시 한 번 최서희를 결단낼 생각은 없으신지요."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리고 껄걸 웃으며 여전히 안하무인, 거칠 것 없다는 듯 식당 칸을 향해 간다. 일본 여자는 불쾌한 듯 혀를 찬다. 조준구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서둘며 손가방을 짐칸에서 꺼내 들고 모자는 머리 위에, 그리고 윗도리, 스틱을 챙겨 든다. 허둥지둥 두수가 간 곳과는 반대쪽을 향해간다. 삼등칸으로 도망쳐가는 것이다. 좌석도 없는 삼등칸에 엉거주춤 서 있던 조준구는 천안에서 내렸다. 역을 빠져나온 조준구는 다음 역을 향해 떠나는 기적 소리를 들으며, 그늘진 가로수 밑에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독사 같은 놈, 애비는 유도 아니다. 무서운 놈이다.'

조준구는 호구를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조준구 씨, 다시 한 번 최서희를 결단낼 생각은 없으신지요.'

두수의 음성이 주술같이 귓가에 쟁쟁 울린다. 호기도래, 펄쩍 뛰며 좋아할 그 말이 어째서 조준구를 떨게 했으며 도망을 치게 했을까.

'그놈은 나를 곰으로 만들려 했다, 그놈이. 거기 넘어갈 내가 아니다!'

십 년 전 진주에서 정석을 만났었고 자신이 폭도로 몰아 죽게 했던 정한조의 아들임을 석이가 밝히고 나섰을 때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오늘같이 진주로 도망쳐 나왔었다. 그러나 오늘같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놈이 나를 곰으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지 애비 꼴을 만들려 한다. 제놈은 중국놈이 되겠다는 게야. 지 애비의 복수를 할려는 게야. 석이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나를 망하게 했다. 그러나 그놈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당장에서 피 묻은 칼을 내게 내밀었다!'

두수가 계획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은 조준구도 안다. 만난 것은 전혀 우연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조준구는 무서웠다. 아무도 모르리라 믿고 있던 비밀, 살인을 교사한 사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이며 두수는 살인자의 피를 받은 사내다. 뿐인가, 길거리에서 굶어죽거나 거지가 될밖에 없었던 김평산의 아들이, 십여 년 전에 회령서 순사부장을 했노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등칸에서 군림하듯, 그 변모는 가공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가. 유창한 일본말, 거칠 것 없이 내어뿜던 독침과도 같은 말이며 호탕한 웃음, 그는 완전히 강자였었다. 붙잡히면 놓여날 것 같지 않았던 질기고 거센 분위기, 숨도 쉬지 않고 나락으로 몰아붙일 것 같은 집요함.

'잘했다! 천안서 내리기를, 아암 잘한 일이고말고.'

김두수는 세상 참 우습구먼, 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 참 우습다. 악당과 악당이, 묵은 인연이 얽힌 악당과 악당이 하필이면 기차 속 마주보는 좌석에서 해후를 했다는 것은 신기하기보다 우스운 일이다. 조준구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실상 두 사내는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 미칠 필요도 없는 범위에 있는 인간들이다. 다만 그들은 스치고 갔을 뿐이며 부산까지 동행했다 하더라도 스치는 관계에서 끝날 인간들인 것이다. 유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위에 긴 여행이요, 여행의 목적도 좋았던 것이 아니어서 김두수는 짜증을 달래보았을 뿐이며 언동의 잔인함은 그의 일상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길 없는 이들은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10장 명장

배는 하얗게 물살을 가르며 쾌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점철된 섬 사이로 들어서면서부터 굼실거리던 배는 안정을 찾은 듯, 멀미하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갑판 쪽으로 나가는 사람, 여객선에서 파는 점심을 청해 먹는 사람도 있었다.

"이만하면 날씨 조오치. 가덕만 지나고 보믄 여름 뱃길은 신선놀음 앙이가."

"내사 기름 냄새, 기계 돌아가는 소리, 앵이꼬바서 죽겠는데, 신선놀음은 무신 신선놀음이요."

"이 오뉴월 얼매나 씨원노?"

어떤 부부의 대화다. 기차나 여객선이나, 호화스런 외항 여객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빛깔부터 다른 것이 이등과 삼등의 손님이다. 더욱이 여객선의 선창과 선창 위의 선실은, 지옥과 천당? 그것은 과장이겠으나 그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조준구는 배를 타본 일이 거의 없었지만 몸보신을 잘해 그랬던지 뱃멀미도 않고 가덕 바다를 지나왔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여학생이 토할듯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을 때 등을 두드려주곤 했었다. 얼굴이 하얗고 쌍꺼풀이 굵게 진 여학생의 얼굴은 희다 못해 새파랗게 보였다. 가덕을 지난 뒤 그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여학생은 바람을 쐬어야겠다면서 이등 선실에서 나갔다.

'고것 참 예쁘게 생겼는걸?'

이등 선실에서는 조준구가 최고의 신사로 보였다. 지방의 유지들이 적잖게 있었으나 시골 신사에 불과했고 양복 입은 역사도 길거니와 유행의 첨단을 걸었고 값진 것들이어서, 육십이 넘었어도 조준구는 단연 빛이 났다. 기차에서 겪었던 쓰고 기막힌 일은 까맣게 잊은 듯 만족한 얼굴이다. 여학생이 선생님이라 하던 호칭에도 대만족이었다.

'세상은 넓다. 십 년 동안 나는 돼지우리 속에 있었던 게야. 옛날 같은면 내 집의 종년도 못 될 계집을 데리고 살았으니 빌어먹을!'

신여성이라 하여 몇 해 데리고 살았던 여자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다. 돈을 물 쓰듯, 결국엔 조준구를 버리고 달아나고 말았지만. 삼월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종이었기 때문이요, 향심이를 빈 몸으로 내어쫓은 것은 기생이기 때문이요, 그러나 정실인 홍씨에게 약탈당한 것은 그가 정실일 뿐만 아니라 양반 출신이기 때문이다. 신여성에게 물 쓰듯 돈을 쓰게 한 것은 학식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한 탓은 아니다. 의복처럼 조준구는 고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꾼의 여편네 같은 파주댁을 지금 선실에 앉아 생각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오욕인 것이다. 돼지우리 속에선 돼지로 살았으나 돼지우리 밖에선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하는가. 그의 눈앞에는 여학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손녀뻘밖에 안 되는 여학생을 어쩌자는 것인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벗어놓은 윗도리를 걸치고 왕족이나 귀족이 된 것처럼 거룩하게 걸음을 옮긴다. 여학생은 갑판 난간에 기대어 지나가는 섬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짤막하게 묶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감색 치마, 반소매 하얀 블라우스가 바람에 나부낀다. 눈이 부시게 흰 종아리다. 미끈하게 빠진 종아리다.

"이제 좀 나은가?"

다가가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

대답은 했으나 코 먹은 소리다.

". 바다란 언제 보아도 넓어서 속이 시원하다. 처음 현해탄을 넘을 때는, 젊은 시절이어서 가슴이 마구 뛰더군. 망망대해, 연락선이 일엽편주 같았지."

"젊으셨을 때 일본 가셨어요?"

", 유학차."

모두 거짓말이다.

"그러셨어요?"

"경응대학엘 다녔지."

여학생은 경의를 표하며 조준구를 바라본다.

"아니 울고 있지 않나."

", 아니에요."

조준구는 여학생과 나란히 난간에 기대 선다.

"왜 우는지 얘기해보아."

할아버지 같은 노신사, 일찍이 경응대학을 나왔다는 지식인, 소녀가 신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은,"

"."

"학교는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

"집이 망했거든요."

"뭘 했는데?"

"어장이 망했어요. 빚더미 위에... 서울에 남아서 고학이라도...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아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에요."

"졸업은 언젠데?"

"내년 봄에 졸업이에요."

"학교는 어딘가."

"근화여고예요."

"나이는?"

"열아홉이에요."

"좀 늦게 들었구만."

"아부지도 작년에, 사업 실패 땜에 심화병으로 돌아가시구요."

"허허어 참 그거 안됐구먼. 그러나 학비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

소녀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거 어려운 일 아니야."

", 정말이세요!"

"향학열에 불타는 젊은 사람들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게 내병이라."

"선생님!"

"여학교뿐인가? 하겠다면 전문학교 가는 것도 불가능한 얘긴 아니야."

", 그럴 수가!"

"여자도 할 수 있으면 공부를 해야, 옷은 해어지면 내버리지만 속에 든 학식이란 죽는 날까지 크나큰 재산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두뇌를 썩여서는 아니 되느니,"

여학생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행운을 믿을 수 없는 듯 조준구를 쳐다보기도 한다.

"이름은?"

"석난화예요."

", 이름 좋구먼."

"선생님은 어디로 가세요?"

"통영에 볼일이 있어서. 석난희, 그래 난희도 통영인가?"

"저는 여수예요."

"그러면 어떻게 한다? 늦어도 사오 일이면 나는 서울로 가게 되는데 난희가 서울 올 때, 음 그러면은... , 그렇게 하지. 주소를 적어줄 터이니 오는 날짜와 시간을 편지로 알려주어. 그러면 내 사람을 시켜 마중하러 보낼 테니까."

", 아니에요. 제가 찾아가지요, ."

"집 찾는다는 것도 번거롭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조준구는 주소를 적어준다.

"뭐라구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댁에서 심부름이나 하겠어요."

"허허 그건 두었다 생각할 일이야."

조준구는 통영 부두에 내리고 난희는 배 위에서 무한한 감사의 뜻을 싣고 손을 흔들었다. 그야말로 즉흥적인 것이었다. 갖은 친절과 감언을 베풀었으나 나중 일은 난희가 서울에 나타난 후 흐를 대로 흘러갈 것이다. 아무튼 조준구는 매우 기분이 좋다. 옛날보다 규모는 작지만 사치한 의식주를 누릴 여지는 있었고 첨화격으로 의식주에 어울리는 여자도 있어야 한다. 난희를 반드시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로 단정하지 않아도 좋다.

'자아 그러면 무슨 일부터 한다아? 우선 좋은 여관을 찾아야 하고 한숨 자고 나서.'

짐꾼이 가르쳐준 여관으로 들어섰을 때 여관에서는 그글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였다.

"좀 더 나은 방이 없느냐?"

"이 방이 젤 좋은 방입니더. 그리고 통영서는 우리 집이 젤 좋은 여관이고요."

특별히 준구를 안내해준 여관 안주인이 말했다.

"좁은 지방이라 할 수 없군. 좀 씻어야겠는데."

", 씨원한 새미물 떠다드리라 하겠습니더."

잠옷으로 갈아입은 조준구는 마루 끝에 세숫물을 떠온 계집아이에게

"여기 세탁소가 있느냐?"

". 있습니더."

"그러면,"

벗어놓은 옷과 손가방 속의 양복, 와이셔츠를 꺼낸다.

"이것은 세탁하라 이르고 이것은 다려서 가지고 와."

"."

세수를 끝낸 조준구는 화문석을 깔아놓은 요 위에 벌렁 자빠진다.

"어이 씨원타."

모시 베갯잇을 씌운 베개가 목덜미에 시원하게 닿는다.

"기분 좋다. 진작 나설 것을."

한참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조준구는 정종 몇 잔을 곁들인 생선회 한 접시를 먹어치웠다.

"얘야."

"."

"이곳은 나전칠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는 데에."

"나전칠기가 머입니까?"

"허허어, 그것을 모르다니. 조개껍질 아, 아니 소라껍질 박아서,"

"아아 예, 자개 박은 농이나 밥상 말입니꺼?"

"오냐,"

"그거라믄 통영이 젤입니더. 제일이라 카데예."

"그걸 젤 잘 만드는 사람은 누구냐?"

"젤 잘 만든다 카믄... 지가 그거를 우찌 알겄십니꺼. 그렇지만 소목일은 곱새가 젤 잘한다 카데예."

"곱새..."

"하지마는 일을 많이 못한다 카든데,"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명절골에 산다 카더마는, 지는 잘 모르겄십니더. 우리 집 안주인이 알 깁니더."

"그러면 안주인을 불러라."

"."

이윽고

"손님, 지를 찾았십니꺼."

"그렇다네."

"아이 말을 들은께 곱새 소목장이를 찾으신다고요."

". 이곳에 들른 기념으로 의걸이나 한 짝 맡겨볼까 싶어서,"

"그 사람 워낙 일손이 더디서 쉽기 안 될 깁니더. 우리도 농 한 벌을 부탁해서 일 년 만에,"

"일 년이면 어떻고 이 년이면 어떤가, 상관없네. 물건이 되면 기차 편에 탁송하면 되는 거구."

"지금 가보실랍니꺼."

"이따 저녁 후, 그보다 그자가 만들었다는 장롱 한번 볼 수 있겠나?"

안주인은 사십대쯤, 조준구가 노인인 만큼 저항 없이 반말을 받아들인다.

"그거는 어렵잖은 일입니더."

안주인은 조준구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이거는, 나전칠기가 아니군 그래."

"감나무장입니더. 통영 사람들은 자개장은 별로."

박쥐 모양의 백동 장식을 물린 장롱은 정교하고 매우 견고해 보였다.

"거 좋군 그래. 서울서는 이런 장식이 없지. 특이하구먼."

"탄탄하지요. 빈틈이 없어서 약 한 분 넣어놓으면 몇 년이 지나도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십니더."

"."

"말이 소목꾼이지, 병신이고, 그렇지마는 양반입니더. 손님이 가시더라도 마구잡이로 대하시믄 물건 안 맨들라 칼 깁니더."

"뭐가 그리 도도한고? 일개 소목장이가,"

"소목장이도 나름이지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장롱 짜는 소목꾼은 식자도 있어야 한다 카든데요. 곱새 소목은 웬만한 사람 가봐야 밑천도 못 찾는다는 말이 있십니더."

"그건 왜?"

"고학을 많이 해서, 통영서는 내로라 하는 옛적 선비들도 그 사람을 받든다 합니더. 본인은 말이 없지마는 양반도, 보통 진사나 생원 정도가 아닌, 그런 집안이라 하기도 하고, 그래 그런지 자식들이 모두 관옥 겉고 공부도 보통 잘하는 게 아니라 카더마요."

"..."

방으로 돌아온 조준구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천장을 멀둥멀둥 쳐다본다.

'관옥 같고 공부도 보통 잘하는 게 아니라구?'

입맛을 다신다.

'관옥 같고... 공부도... 그중에 한 놈만 데려다가 공부를 시켜볼까? 그중에서 똑똑한 놈 하나를 골라서...'

여객선에서 난희에게 한 약속을 생각한다.

'그까짓 것,'

조준구는 천정을 쳐다본 채 자신의 재산을 계산해본다. 자신이 누려야 할 몫을 최대한도로 잡아놓고 만일 손자를 데려다 공부시킬 경우 그 비용을 줄이고 또 줄여가며 계산을 해본다. 그러고 보니 전당포를 때려치우는 일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난희와의 약속 따위는 술 마시다가 기생에게 한 약속과 다를 것이 없었고 자신의 노후 문제와 관련이 있는 손자에 관한 것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번 길을 터놓고 보면 앞으로 복잡해지지 않을까? 일도 많이는 못한다 하는데 식구는 많고 자꾸 손을 벌린다면 그것도 골치다. 다른 자식까지 공부시키라 한대도 곤란하구, 공연히 여기 온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게야. 그놈이, 그 병신놈이 오기가 있어서 나를 상면 안 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고 자식을 내놓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 그놈이 병신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심하기는 좀 심하게 했나? 그러나 지 에미보다야, 병신이라 해서 눈앞에 얼른거리지도 못하게 한 지 에미보다야. 독선생 데려다 글도 가르쳤고 짝도 지어주었으며 망하기 전에는 종들 거느리고 평사리서 편하게 산 것은 다 누구 덕인데? 병신을 그 이상 어떻게 해. 일본 유학하여 판검사 될 처지던가? 육신만 성했다면, 그놈이 가문을 무시하고 소목장이가 된 것부터, 그래도 애비니까 찾아볼려는 거지. 다른 자식들 같으면 나이 사십, 부모 공양... 아비 덕 볼 처진가?'

서울을 떠날 때와는 달리 생각이 차츰 불투명해진다. 아들과 손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앞으로 과중한 부담이 되지 않을까 주저되는가 하면 아들과 자부가 상면을 거절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이 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십 년 동안 자기 나름대로, 물론 대단히 불만스런 것이기는 했지만 쌓아 올려놓은 형태를 허문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의혹이 솟는 것이다. 허물다 보면 옛날같이 일시에 허물어지는 것은 아닐까? 어느 구석에서 구멍이 뚫릴지, 재물이란 물과 같아서 뚫리기만 하면 계속하여 흘러나가고 바닥이 나게 마련이다. 조준구는 기와를 올렸다 뿐이지 오막살이나 다름없었다는 홍씨의 집, 그간의 사정을 전해주던 사내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물에 대해서는 거머리 같은 여자, 그 여자도 재산을 유지하지 못했었다.

'가만있자아, 대강 줄잡아서 오만 원을 전 재산으로 생각하고, 한 달에 사오백을 써도 십 년은 간다. 곶감 빼먹듯 쓰는 것도 아니겠고 돈이 어디 잠자듯 가만히 있을 겐가? 아무리 저리로 늘린다 하여도 돈은 불게 마련이야. 그까짓 전당포는 때려치우더라도 말씀이야. 또 그렇지. 한 달에 사오백을 뭣에다 다 쓰누. 백 원으로도 넉넉할 것이요, 고급 관리 월급인데? 이백 원이면 쓰고도 남는 금액인 게야.'

대충 주먹구구를 하고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마음이 놓이니까 십 년 인고가 억울하고 전당포 영감쟁이, 고리 대금업자라는 명칭이 치욕스럽게 가슴을 찌른다. 커다란 감투 아니면 적어도 회사의 사장이나 광주라도 됐어야 할 사람이 어쩌다 뒷골목에서 썩어야 했던가. 그러나 남은 세월을 십 년으로 잡고 주먹구구로 해본 것이 동티였다.

"십 년? 십 년!"

충격적인 공포다. 앞으로 십 년이라니, 죽음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방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공포, 새까만 죽음의 심연, 죽음이라는 것,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결부 되어 되살아난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홍씨의 악령 때문에 무서웠지만 지금은 자신의 죽음 자체와 밀착되어 몸이 떨려오는 것이다. 조준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가슴이 뛰고 끈적끈적한 땀이 전신에 흐른다.

어두워지면 가리라 생각했는데 조준구는 곱새 소목의 집을 안다는 여관의 심부름꾼을 앞세우고 나섰다. 열일고여덟쯤 보이는 사내아이는 양복바지도 고의바지도 아닌 어중간한 삼베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뒤통수가 예쁘게 생긴 아이다. 해는 떨어졌지만 여열 탓으로 소금기 머금은 바람은 후텁지근했다. 갈매기가 무수히 날고 항구 쪽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거리는 조용하고 서두는 행인은 없다. 그러나 특이하게 차려입은 노신사를 신기한 듯 사람들은 바라본다. 골목으로 접어든다.

"한참 더 가느냐?"

". 서문 고개를 넘으믄 있십니더."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돌다리를 지나고 석류꽃이 핀 울타리를 따라 꽤 넓었던 골목길이 차츰 좁아진다. 잿물과 숯과 등유를 파는 구멍가게는 지키는 사람도 없다.

"아직 멀었느냐?"

"조금만 더 가믄 됩니더."

하수구 같은 개천과 나란히 뻗어간 골목은 더욱더 좁아져서 지렁이 같은데 가파롭게 변해간다. 집들의 지붕은 한결 낮아지고 풍경은 삭막해진다. 부스럼이 나서 밤송이 같은 머리와 벌거벗은 알몸의 어린것들이 눈에 띈다.

"왜 이렇게 멀리 가느냐?"

조준구는 숨찬 소리로 말했다.

"처음 가는 길인께 그럴 깁니다. 우리는 지척 겉은데요."

"지지리 궁상이고나."

"?"

"집들이 돼지우리 같구먼."

"기와집도 많이 있십니더. 여기는 기찹은 사람들이 사니께요."

"기찹다? 그게 무슨 말인고?"

"가난하다는 말입니더."

"가난한데 뭘 처먹였기 아이새끼들 배가 저 모양이냐?"

"횟배겄지요 머."

사내아이는 기분이 나쁜 것 같다. 대답이 퉁명스럽다.

", 아무거나 퍼먹이니까 그렇지. 전염병이라도 돌면 싹 쓸겠군."

"손님은 부잔가배요?"

"?"

"금줄 시계도 하고, 그런 사람이사 이런 길 안 다닙니더."

비꼬듯 말한다.

"못 배워먹은 것들, 말버릇 고약하다. 상하 구별도 모르는 촌것들이라니,"

"우리 곳에서는 다 이렇기 달을 하는데요?"

"갯바닥이라 더한 겐가?"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 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 춘다 안 캅니까?"

"대통으로 하늘 보기다. 왜놈, 왜놈 하고 함부로 지껄이다가 혼날줄 알아라."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기 말해왔십니더. 손님은 부잔데 와 그리 벌벌 떨어샀십니꺼?"

"이놈 봐라? 못하는 말이 없구나."

"서울은 우떤지 모리겄십니다마는 우리 곳에서는 왜놈들이라 카믄 업신여긴께요. 통영은 왜놈들이 와서 박살난 곳이라요. 그런 놈들이 다시 와가지고 우리 동언 터를 헐어서 신사를 안 지었습니꺼? 그때 추굴을 받아서 왜놈들이 직사했다 카데요. 충렬사에도 이순신 장군의 큰 칼을 모시놨는데 그놈들이 몇 명이나 달기들어서 용을 썼지만 그 칼들 못 들어냈다 안 캅니꺼? 그라고 또 아까 판데목 이야기는 했지요? 와 판데목이라 카는지 압니꺼? 임진왜란 때 그놈들이 도망갈라꼬 엉겁결에 손으로 팠답니더. 그래서 판데목이라,"

"주둥이는 닫아두고 어서 가기나 해."

"손님이 숭을 본께, 통영을 찾아오는 다른 손님들도 경치 좋고 인심이 좋고 해물이 좋다고 칭찬인데, 손님은 아마도 신선 노는 곳에서 오š?"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눈치다. 사내아이는 당돌하게 일침을 놓았다.

"허허어, 이놈이 겁 없네?"

조준구는 아들을 만나게 되는 일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 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 숨이 차기도 했었다.

"우리 통영에서는요, 손님 겉은 노인치고 양복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십니더. 그래도요, 통영 갓 통영 소반이라 카믄 외지의 양반들은 다 안다 캅니더. 하다못해 전북도 통영 거라 카믄 돈을 더 받는다 하데요."

"잔말 말고 가기나 해!"

"!"

사내아이는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듯 날 듯이 빨리 걷는다.

"이놈아!"

"?"

"숨차다, 천천히 가자."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겉푸른 수목, 연두빛 대숲이 눈에 뛴다. 큼직한 기와집도 더러 보인다. 가파롭던 고갯길 주변보다 한결 유복해 뵈는 마을이다.

"아직 멀었느냐?"

"아니요. 저기 저 집입니더."

사내아이는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낙들, 처녀아이들이 물 길러 가면서 양복장이 노신사를 신기한 듯 숨어 본다.

"그러면 너는 돌아가거라."

십 전짜리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나

"언지요."

고개를 저으며 횡하니 오던 길을 돌아간다.

'저 집이라...'

사내아이가 가리킨 집은 생각한 것보다 말끔했다. 아래 위 두 채는 초가였고 울타리는 판자였다. 마을에서 종류는 되는 것 같다.

"이리 오너라!"

하고 조준구는 큰기침을 한다.

"뉘시오?"

자부의 음성이다.

"으흠!"

대문 밖을 내다보다 말고

"아이구머니!"

놀라서 낯빛까지 달라졌다.

", 어서 드십시오."

자세를 고치고 냉정해지면서 자부는 고개를 숙였다.

"으흠, 애비 있느냐?"

부채를 펴 들며 비스듬히 자부를 내려다보고 묻는다.

"."

예닐곱 된 사내아이가 마루에 걸터앉은 채 조준구를 빤히 쳐다본다. 자부는 급히 아래채 쪽으로 걸어간다. 이윽고 헐렁한 삼베옷을 입은 병수의 꼽추 모습이 나타났다. 병수는 자부보다 훨씬 침착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난처한 듯 외면을 하면서 조준구는

"볼일이 있어 이 근처까지 왔다가, 그래 별일은 없었느냐?"

". 드시지요."

사랑 겸 안방 겸인 듯 아래채로 안내한다. 방안은 별로 놓인 것이 없고 문갑과 사방탁자, 서책과 벼루집 붓 같은 것이 있을 뿐 소목장이와 관련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루 옆에 헛간이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일방인 것 같다.

"절 받으십시오."

자부는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병수 혼자 조준구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마주보며 앉는다.

"아이들은?"

우선 마음을 놓으며 묻는다.

"밖에 나갔나 봅니다."

창백한 병수 얼굴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길었고 푹 꺼진 눈은 지친 듯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십여 년 만에 만나는 부자였다. 준구는 어딘지 어색해했고 병수는 흥분하는 기색이 없었다. 냉담한 것인지 침착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옛날과 같은 청순한 분위기가 남아있긴 했으나 나이보다 늙은 것 같다.

"서울의 소식은 들었느냐?"

"무슨 소식 말씀입니까?"

"너 어미 죽은 것 말이다."

넓게 퍼진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못 들었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실은 나도 장사를 지낸 뒤 들은 얘기다만 그 계집 죽은 일은 너나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고."

병수는 묵묵부답이다.

"지난날 사업에 실패하여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워졌기 너이들을 벽촌에 둔 채 거두지 못하였네만 네 어미를 말할 것 같으면 내게서 탈취한 재산이 적지 아니했고 채귀에 쫓기는 신세도 아니었건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일이나 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 피차를 위해 잊는 것이 상술 게야."

자신의 잘못까지 홍씨에게 떠다 넘기듯 말한다.

"거두지 않았다 하여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몸은 성치 못하였으나 성년 후의 일이오니 사람 구실 못한 일만 송구할 따름입니다. 허나 남에게 가혹하였던 처사는 잊기 어렵겠습니다. 기일이 언제인지, 자식된 도리로서 멧상은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일?"

조준구는 팔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니라. 기일 따위, 알지도 못하거니와 조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게야. 너의 어미도 아닌 게야."

타인보다 가혹했던 생모, 자식을 우리 속의 동물로 취급하던 생모, 그들의 악행이 더하고 덜하고가 없었지만 병수에게는 어미보다 아비가 다소 나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뼈에 사무친 숱한 그 고통들을 지금 병수가 못 잊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잊으려 했고 잊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용서한 것이 아니며 병수는 용서를 받은 것이다.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 당기지 아니했던가.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그를 구원할 것이 바로 이 소목일이었다. 이제 병수는 용서를 받은 것이다. 자학은 일(예술)에서 승화되었다. 일은 그에게 만남이었다.

"네가 정히 생모의 기일을 챙기고 싶거든 그 계집의 재산을 찾아라."

하며 시작하여 조준구는 집이며 패물이며 돈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병수는 그냥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걸 네가 서둘러서 찾는다면 나도 너 어미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 안 하겠다."

반대 안 하겠다는 것도 비윗살 좋은 얘기지만 홍씨의 악령이 달라붙을까봐 자신은 접근 못하였던 곳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몸도 온전찮은 아들을 밀어 넣으려는 조준구, 인면수심의 정도가 아니다.

"그 일도 그 일이려니와, 나도 얼마간 기반을 잡았고 너는 세상에 나올 몸이 아니니 기왕지사, 손자 놈 하나쯤은 하는 데까지 학문을 하게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우리 조씨 가문을 공고히하는 일이니,"

"애들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야 다니겠지.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 장차 어느 학교까지 갈 것인가, 똑똑한 놈 하나 서울로 데려가서 장차 일본에 유학하게 하고,"

"늙으신 아버님께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저만 좀더 애쓰면 자식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 정도의 얘기라면 병수 인품으로 보아서는 명확한 거절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도 아니었는데 거절을 당하니까 갑자기 뭔가 강하게 엮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렇기야 하겠지. 그러나 나도 이제는 늙었고 자식 하나쯤은 옆에 있어주어야. 너 에미 경우도 옆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남이 들어먹었지."

병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저녁은 어찌 하셨습니까?"

"여관에 가서 먹지."

"여관이라니요?"

"이곳은 협소하고 잠자리가 편치 않을 것 같아서,"

"아버님!"

조준구는 아들을 힐끗 쳐다본다.

"앞으로 저희들이 아버님이 원하신다면 모시겠습니다."

"..."

"그러나 아버님께 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

조준구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옛날 아들에게 군림하던 그 모습, 그 노여움, 그리고 다음에는 조롱의 웃음으로 얼굴이 변한다.

"나일 사십이나 처먹어도 그 따위 소릴 해? ! 이놈아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야! 세상에 태어났을 그때 그러지 왜 못 그랬나? 응 고얀 놈!"

병수의 얼굴이 샛파래진다. 억설이지만 그 말은 가장 아픈 말이었다. 조준구는 삿대질을 하며

"부정한 재물이다 그 말이겠다! 그 말이겠다! 오오냐 이노움! 그렇게 결벽하고 그렇게 도도한 놈이 스스로는 왜 태어나질 못했나? 오려거든 오라! 가지는 않을 것이다? , 그래 그런 잘난 소리 하는 놈이 부모의 몸은 왜 빌렸나? 병신이면 병신답게 주는 밥이나 처먹고 국으로 있을 것이지 가문에 똥칠하는 놈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짓는다더니, 고얀 놈 같으니라구! 야 이놈아!"

조준구의 노성은 돌발적이었다. 병수가 한 말이 아비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더라도 저자세로 나온 처음 태도를 생각하면 심정의 얼룩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머님, 저 노인은 뉘시오?"

집안에서 큰 소리 난 일이 없는 만큼 마루에 앉아 있던 막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할아버지시다."

"네에?"

병수댁네는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노여움 거두시거든 가서 인사드려라."

"아버님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

병수댁네는 어둠이 묻어오는 안산을 바라본다.

 

 

11장 젊은이들

"환국아."

모래밭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환국이 살며시 돌아본다.

"아니, 순철이 너,"

흰 셔츠를 입은 순철이 피식 웃는다. 건강한 체구, 거무스름한 낯빛,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뵌다. 그리고 젊음이 싱그럽다.

"집에 널 찾아갔더니 윤국이가 남강에 갔을 거라 하더마. 한참 찾아다녔다."

"앉어."

"."

순철이 모래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는다.

"안 오겠다 하더니 언제 왔어?"

"그저께. 날마다 편지가 날아오니까, 우리 어머니도 어지간하거든. 내가 졌지 뭐."

환국은 세웠던 무릎을 뻗는다. 순철이처럼 근육형은 아니지만 환국의 체격도 발달은 잘 되었다.

"어머니 수술 결과는 어때?"

"좋아지셨어."

"설상가상이었구나."

"그런 셈이지. 앞으로도 뭔가 자꾸 겪을 것 같다."

"미리 생각할 것까진 없지. 해가 지는구나. 아이들도 다 돌아가고 강변은 쓸쓸해졌다."

"..."

"여기는 뭣하러 나왔어."

"답답하니까."

"답답하지."

순철이 한숨을 내쉰다.

"사실은 나 어머니 편지보다 동경서 도망쳐왔다는 게 정직한 고백일 게야."

"그런 왜?"

"유혹당할 것 같아서."

환국이 웃는다. 여자 문제라 생각한 것이다.

"비겁하다 하겠지만 난 순탄하게 가고 싶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글세."

"나도 혈기는 있는 놈이고 영웅심도 남 못지 않다. 그러나 순탄하게, 대학을 나올 때까지만이 아니라도 정상적으로, 어떤 영향 같은 것 받고 싶지 않아."

"모를 얘기야."

"환국이 너는 아버지의 경우가 그렇고 분위기적으로 익숙해져 있겠지만 내 경우는,"

"너 사회주의에 흥밀 느낀 거로구나."

"호기심 정도는 있지. 그러나 기질적으로 난 바닥이 다르다. 우리 집이 부자라는 것 과히 기분 나쁜 일 아니거든."

"그럼 왜 도망 왔나?"

"이상한 놈이 있지. 왜놈인데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 새끼가 자꾸 끌어들이려 하거든."

"알 만하다."

"싫건 좋건 알 건 알아야 하는데 머리 좋고 똑똑한 놈들이 그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걸 보면 어쩐지 내 다리도 건들건들하는 것 같거든."

"아까 뭐랬나? 미리 생각할 것까지 없다 그러지 않았어?"

"넌 그 방면의 책 많이 읽었겠지?"

"더러."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너한테 도움이 안 될 거야. 나는 그림을 그릴 작정이다.'

"제에기랄!"

순철이는 벌떡 일어서서 역기 운동을 하듯 두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도로 주저앉는다.

"환국이 너 양소림이 약혼한 것 알지?"

"그 얘기는 왜 해."

순철의 얼굴이 구겨진다.

"박외과의 허정윤이 그 사람이라며?"

"박외과의 허정윤이 아니지. 의전 학생이야."

"누가 모르나. 개새끼!"

"..."

"지저분한 자식!"

증오의 빛이 눈에 이글거린다.

"나도 가난하면 그런 짓 할까?"

"신부감은... 얼굴도 예쁘니까,"

"얼굴이 예쁘고 돈이 있고 그런 얘기가 아니다. 캄캄 소식인가 부지."

"허정윤이 그 사람도 잘생기고 의전 학생인데 뭐."

"소식 불통이구나. 결혼을 약속하고 학비까지 보조받은 여자를 버렸다 그 얘길 하는 거다. 박외과의 그 간호부 말이다.

"?"

"여자가 실성실성 미쳤다든가, 양소림이 집에서 돈을 주겠다 했다든가, 그래도 온전한 사내자식가? 불쌍한 양소림이."

순철의 눈알이 빨개진다.

"난 양소림을 사랑했어. 좀처럼 잊을 수 없을 게다. 어저께 그 말듣고 분한 생각에서,"

환국이 놀란다. 순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나 이 혼사 깨버릴까?"

", 어떻게?"

"내가, 우리 집에서 청혼하면?"

환국의 낯빛이 변한다.

", 환국이 너! 너도 양소림이 생각한 거지?"

"그건 전혀 다르다."

"아무리 손이 그렇기로, 그건 더러운 혼사다! 양소림이 불쌍해. 그런 치욕이다! 돈 때문에 애인을 버린 사내, 파렴치한, 그런 놈은 장차 양소림도 버릴 수 있어. , 소림이가 정상적으로 결혼한다면 이런 말 안 할 거다."

"..."

"얘기를 들으니까 우리 집에 대한 원한도 상당히 작용했다, 그러더구만. 어떻게 해서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갔는지. 양소림에게 청혼하려다 그 손 땜에 우리 어머니가 반대했다는 얘기 말이다. 나는 이렇게 빨리 소림의 혼담이 결정될 거를 몰랐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흥분하고 괴로워하는 순철의 얼굴은 역시 나이가 반영되어 소년같이 갈팡질팡이며 자신의 감정을 통어할 수도 없거니와 표현도 못하는 혼란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환국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움을 남긴 순철과는 다르게 혐오감에 대한 깊은 자책이었지만.

"혼담을 깰 자신이 있거든 한번 그래보아."

순철은 흥분한 동작을 멈추고 환국이를 쳐다본다.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안 될 거다. 못할 거란 말이다!"

두 어깨가 처진다.

"먼저보다 어렵게, 더 어렵게 됐다."

"나는 속이 시원하다."

"어째서!"

"나는 이제 그 손 생각을 안 하게 될 테니까."

환국이는 모래밭에 침을 뱉으며 잠재적인 것을 강조하듯 말했다. 순철의 커다란 손이 환국의 뺨을 갈긴다.

"도도하고 유아독존! 네가 뭐야!"

서슴지 않고 환국이도 순철의 가슴팍을 잡으며 일어섰다.

"말만 가지고 동정하는 너 역시 나하고 뭐가 달라!"

"약은 놈! 소학교 때도 네놈은 선생만 찾아다녔다! 네 자신만 존엄하고 남들은 버리지가!"

주먹으로 얼굴을 친다. 그들이 함께 뒹굴며 싸울 때 어둠이 찾아오는 강가 모래밭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동안 치고 박고 뒹굴다가 어느 서슬에 떨어진 이들은 모래밭에 무릎을 박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 자식아! 좀 유치해져라!"

순철이 악을 썼다.

"어른이 다 된 자식이 누굴 보고 하는 말이야."

입술이 터진 환국은 손등으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씨원하지 이 자식아!"

순철이 또 악을 썼다.

"씨원하다."

"모범생 집어치워."

"출세할 생각도 말구."

"출세 안 할려면 뭣 땜에 고생스럽게 공불 하노. 이제 일어나 가자."

둘이 모래밭을 걷다가

"아이구 답답해 못 살겠다!"

순철이 주먹을 휘두르며 강을 향해 소리 지른다.

"어른도 애숭이도 아닌 것이 답답해서 못 살겠다."

"넌 폭군형이다."

"넌 햄릿형이고?"

"그런 건 언제 주워 읽었지?"

"읽기는 누가 읽어. 귀동냥한 거지."

"술 좀 마셨으면."

"너 썩 잘 생각했다."

"어디서 마시지?"

"우리 집에 가자."

"거긴 싫다."

"그럼 좋은 데가 있다!"

"어딘데?"

"중학교 동창 놈, 넌 모를 거다. 사천 아이였으니까 단살림에 꺼리낄 것 거이 없다."

"단살림?"

"장가를 들었거든. 나보다 두 살 위니까. 여기 조합에 취직해서 사천 사는 부모가 살림을 내주었거든. 가면 대환영일걸?"

"그래도 좋은지 모르겠다."

"염치 차릴려면 술 배울 생각 말아야지."

봉산동으로 간 순철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떤 자그마한 집 앞에서

"용칠이 없나!"

소리를 지른다. 하얀 행주치마를 두른 앳된 새댁이 쫓아 나왔다.

"용칠이 있습니까?"

"아아, 있다."

마루에서 몸을 일으키며, 목을 뽑듯 용칠이 말했다. 서슴지 않고 문을 들어선 순철이는

"뭐해? 들어오지 않고,"

환국의 손목을 잡고 끌어들인다.

"귀한 손님이 왔는데, 마루에서 좀 내리서는 게 어떻노?"

고의적삼을 입은 용칠이

"누군데?"

하며 신발을 찾아 신는다. 전등 빛이 비친 마루엔 먹다 말았는지 참외 접시가 놓여 있었다.

"보면 모르나. 여기는 윤용칠이, 이쪽은 최환국이."

환국이는 초면이라 생각했지만 용칠이는 환국이를 알고 있었던 눈치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웃었다.

"자아 자아, 작은방으로 들어가자."

책상과 책장이 놓인 방안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얼른 발을 내려놓고 용칠이는 부엌 쪽으로 달려간다.

"얼른 가서 정종 한 병 사오고 안주감도 장만해야겠는데, 어서 어서!"

"모두 부잣집 도련님인데 우짜요? 내 솜씨 부끄러바서 우짜요?"

"술상 차리라 했지, 밥상 차리라 했나? 어서 어서, 서둘러."

이르고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온다.

"얘기는 많이 들었지마는 반갑습니다."

용칠은 새삼스럽게 환국일 향해 인사를 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폐가 안 될는지,"

얼굴을 붉히며 환국이 말했다.

"치워라 치워! 사돈 맺으러 온 사람같이 샛파랗게 젊은 것들이 무슨 놈의 수인산고? 그래 용칠이 넌 조합 서기질 해먹을 만해?"

"해먹을 만 안 하면 집어치울 처진가?"

"정 못해먹겠거든 우리 술도가에 와서 일하면 된다."

"지랄하네. 내가 왜 거기 가나."

"조합 서기나 술도가 서기나 서기는 마찬가지 앙이가."

"굶어죽을 지경이면 가지. 그래 동경서 유학하는 기분은 어때?"

"파랑새가 어디 있노? 찾아가보면 실망이지."

"이 자식아, 덩치에 어울리게 말해라."

"그라면 넌 쥐새끼 얘기만 하고 나는 호랭이 얘기만 하자."

쥐새끼로 비유할 만큼 용칠의 몸집이 작은 것은 아니었으나 순철이 환국이보다 작기는 했다.

"저 자식이 저래봬도 주먹은 세다구. 주먹은 작은데 차돌 같거든."

순철은 환국이를 보고 말했다.

"마당에 나가서 한판 벌여볼래?"

"아서라, 깨진 상판대기 쳐들고 출근하겠나."

"보아하니 두 사람도 어디서 뒹굴어본 모양인데,"

"연습 한번 해봤지, 옛날 대갈통에 구멍 뚫렸던 생각이 나서 사나흘쯤 자빠져 있게, 그러려다가 그만두었다. 수술한 이 자식 어머니가 쳐들어오시면 어쩌나 싶어서."

환국이 쓴웃음을 띤다.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부잣집 아들치고는 잘 풀린 셈인가?"

"주둥이 매워졌네?"

"언제는 안 그랬고?"

"벤또밥 옆구리에 끼고 한 삼 년 다니고 나면 주둥이도 풀리고 주먹도 풀린대더라."

"그럴거야, 후우."

"그러다가 자식 서너 생기면 허리 굽고 죽는 거라."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어. 허리 안 굽어도 죽고 젖먹이도 죽더군. 그보다,"

용칠이는 환국에게 얼굴을 돌린다.

"정석이라는 분, 잘 아시지요?"

하고 묻는다.

"압니다."

"허허어, 입맛 없게 그놈의 존대 그만둘 수 없나?"

"존대하고 뺨 맞는 일 없다 하더마."

"인생 입문이 끝났구나."

"윤형은 전선생을 어찌 아시오?"

환국이 묻는다.

"갈수록 산이구나. 양반끼리 잘해봐."

어떻게 안다는 설명도 없이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고생이 심한 모양이던데..."

홀리듯 말했다.

"정선생 누이동생이 함께 와서 산다는 얘길 들었는데,"

연학이로부터 대강 얘기를 들었기에 환국이도 석이 형편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훌륭한 사람 같았습니다. 최형 아버님께서도 고생하시는 것 알고 있지만,"

"동경서 도망 왔는데 여기에 사회주의자 또 한 놈 있군."

"미친 소리 말어. 나는 독립주의자다. 독립주의자 아닌 사람 몇이나 될꼬? 몇 중의 한 사람이 이순철인지 모르겠네."

"뭣 같은 소리 한다. 장차 판검사 되는 날 네놈부터 잡아들이야지."

"동경서 카페 출입이나 하면서 어느 세월에 판검사 되나 응?"

"누가 그런 소릴 해!"

"다 듣는 구멍이 있어. 술도가 아들이 남의 술 팔아주면 파산한다."

"자알 논다. 그런 소리 아무리 한들 내가 독립주의? , 투사는 안 된다."

"누가 투사 되라 했어? 술도가나 자알 지키라 했지."

"이거 주먹이 떠는데 어짤꼬?"

"대숲에 가서 대 한 까치 꺾어올까?"

몸집이 큰 편도 아니고 다부진 인상도 아닌데 용칠의 입심은 좋았다. 그러나 순철은 개의치 않았고 기분 나빠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술상이 왜 이리 늦노? 새댁이 거북이 타고 술 사러 갔나?"

"너거 술도가에서 배달이 늦는가 부지."

하는데 마침 술상이 들어온다. 계란부침에 풋고추 졸인 것, 마른 명태를 뜯어놓고 초고추장, 보기에 맛깔진 술상이다.

"임자는 친정에 가 있으라구. 이 친구들 술 심부름 하자면 밤새야 하니까."

새댁이 고개를 숙이고 나간다.

"의처증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무난하지."

"장가도 안 간 놈이 어른 다 된 소리 하네, 자아 잔 받으시오."

술잔을 환국에게 내민다.

"배우기는 잘 배웠다. 시골 가면 이장 하고 서울 가면 소사 하고, 제법 기분 내는군."

"내 할아버님은 일곱 살 때 술독에 빠졌고 아홉 살에 상투 올렸다하시더군. 우린 중년이야."

"환국이 너 잘 들어. 우린 중년이란 말이다. 자네 어머님한테 가서 그리 여쭈어라."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용칠이는 환국의 굳은 자세를 풀기 위해선지

"최형은 인감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겠지만 순철아 너, 너는 총각 아니지?"

"무슨 소리 하노!"

순철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거봐, 너도 얼굴 붉힐 때가 있긴 있구나. 최형까지 덩달아 얼굴 붉히는 걸 보니 하하핫 핫핫..."

"죽을라고 저 자식이 환장했나?"

"총각인가 총각 아닌가 고백이나 해."

"윤형도 짓궂게,"

웃었지만 벌개진 환국의 얼굴은 차라리 울상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총각 아니다 왜! 어쩔래!"

술상에 술잔을 치면서 순철이는 소리쳤다.

"최형 들었지요? 지가 무슨 수로 여태까지 동정을 지켰겠소? 저눔 자식 동경 가기 전부터 총각 아니었을 거요."

"그건 아니다. 그것만은 절대 아니다. 남 장가도 못 가게, 질게 그러면 너 죽인다!"

"장가?"

"돋아서 내일이라도 장가가야겠다. 제에기랄!"

"양교리댁 딸 땜에 그러나? 민적거리더니 빈털터리한테 빼앗겼으니 돋을 만도 하지. 밤잠 못 자고 보고 싶어하던 그 시절이 좋았지."

"그 말은 끄내지도 마라!"

"알기는 아는구나. 하기야 진주 바닥에서 그 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하여간 그 집에선 대단한 모험을 했더군."

"별수 있어? 자기 딸이 모자라는 데야 도리 없지."

모래밭에서 하던 말과는 사뭇 다른 말을 한다.

"손이 그래 그렇지 양소림 그 아인 괜찮지. 그 어머니에다 고몬가 이몬가 하는 여자들이 교만해서 구역질이 나지만."

"너의 집, 그 사람들 작인 아니었던가 몰라?"

"이거 왜 이래? 지체 얘기한다면 순철이 너 알아듣겠나?"

절제 없이, 거북한 김에 술을 여러 잔 마신 환국이

"순철이는 지금 사회주의자 될려고 생각하는 중이라 아마 못 알아 들을 거요."

하고 한마디 거든다.

다 실없는 일이었다. 밤길을 순철이와 함께 돌아오는 환국의 마음은 황막했다. 겉돌았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었다. 순철이 역시 뭉글뭉글한 감정을 폭발 못 시킨 채 나온 때문인지 우울해 보였다. 가문이다 양반이다, 총각이다 아니다, 그런 것쯤은 신경 밖의 일인 것 같다.

"그 계집애가 말이다, 간다 안 간다 말도 없이 간다는 게야. ,"

술 냄새를 풍기며 순철이 또다시 지껄였다.

"아이새끼들 풀어서 그놈의 새끼 실컷 뚜딜겨줄까?"

환국이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정신은 말짱한데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이 병신아, 안 좋으면 토해! 토하란 말이다!"

등을 꾸부리고 순철이 등을 두드린다. 헛구역질을 하다가

"괜찮다."

일어선다.

"뱃멀미하는 것 같을 게다."

"이리 괴로운데 술은 왜 마실까?"

"이열치열, 괴로우니까 괴로움으로 상쇄하는 거다. 환국아."

"말 시키지 마."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 소림이가 시집간다 하니까... 불이 붙는다. 그까짓 손등, 붕대 감고 살면 될 거 아니가?"

"동경으로 가면 잊겠지."

", 아니다. 첫사랑은 못 잊는다 하더라."

환국이는 또다시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헛구역질이 아니다. 토하기 시작한다. 토하면서 술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환국인 깨닫는다. 소림의 손등이 눈앞에 크게 떠올랐던 것이다. 꾸물꾸물 움직이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것을 잊을 수 없을까. 환국인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훔친다. 뭐라고 지껄이며 앞서가던 순철이 되돌아온다.

"환국아, 나 말이다, 낮에 널 찾은 거는 말이다, 그까짓 사회주의, 그깟 것 얘기하려던 거 아니었다. 소림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거다. 니도 소림일 좋아했지? 알어, 안다! 우리 둘이서 허가놈 찾아갈까? 찾아가서 뚜딜겨주자. 나쁜 놈의 새끼, 비루하고 더러운 새끼! 사내 기생인가?"

"그만두지 못하겠나!"

별안간 환국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구역질을 시작한다.

순철이와 헤어져 간신히 집앞까지 왔을 때 연학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술 마싰구나. 어머니가 아시믄 걱정하실라."

"아저씨는 왜 여기 서 계세요?"

"손님이 오시서 밖을 좀 내다봤다."

"손님?"

"여자 손님인데,"

"그런데 왜 밖은 내다봅니까?"

"그러씨 그기이, 아무 말 말고 들어가거라."

"아저씨."

"."

"술 마신 것 나쁩니까?"

"마시는 것도 나름이지."

"공부하는 학생은 안 된다 그 말씀입니까?"

"지장 없으면 무방한 기지."

"그렇담 어머니도 나무라지 않겠군요. 답답해서,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나도 뭔가 때려 부수고 싶단 말입니다. 왜 이렇지요? 아저씨들이 희망 없다면 우리도 희망 없는 거 아닙니까?"

"자아 자아, 들어가자."

환국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끌어들인다. 신돌 위에서 환국은 나자빠졌다.

"윤국아."

윤국이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형님 팔 좀 잡아라."

윤국이는 두 팔을 잡고 연학이는 두 다리를 잡고 방으로 들어가 눕힌다.

연학이 나간 뒤

", 손님 왔어."

윤국은 쓰러질 만큼 술에 취해 있는 형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여자 손님이요. 아주 미인이든데?"

"서울 아주머니야?"

"젊어 뵈든걸? 처년가봐?"

", 나 냉수 좀, 네가 떠와. 식구들 술 마신 것 알면,"

윤국이 냉수를 떠왔다.

"마셔요 형."

냉수를 들이켠 환국은

"박선생님 오셨더랬나?"

"."

"뭐라 하셔?"

"이제 괜찮은데 뭐라 하시겠어?"

"손님은 어머님 방에 계시냐?"

"얘기하고 있나 봐요."

"어머님이 아시는 분이라든?"

"그렇지 않나 봐요."

"꼭 배 탄 것 같다.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다."

"기분이 좋은 거요?"

"이제 기분이 좀 좋다. 아까는 죽을 것 같더군."

"형도 이제 술 좀 해요. 쌈도 하고, 나는 순철이형 같은 사람이 좋아."

"미안하다. 너나 크거든 그래라."

"물론이지. 난 꼼샌님은 안 될 거요."

환국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쉰다.

 

 

12장 잘못된 계산

처서, 말복이 지나자 한증막 같은 더위도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조용하 부부가 거처하는 별관은 숲이 짙어 아침저녁이 한결 선선해졌다. 한더위 때는 모시 고의적삼을 입던 조용하가 침실에서 나올 때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매미가 운다. 집안은 무인지경처럼 조용하다. 거실에 마주앉아 아침 커피를 마시는 부부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다. 매일 아침 되풀이 되는 풍경이다. 커피를 마신 뒤 조용하는 탁자 위의 신문을 들었다. 명희와의 사이에다 병풍을 치듯 신문으로 얼굴을 가려버린다. 신문을 든 창백한 손의 표정, 어째서 손에까지 그 사람이 지닌 성격이 나타날까 하고 명희는 매일 아침 생각하던 의문을 머릿속에 스쳐 보내며 권태롭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명희라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를 리 없다. 귀를 막고 싶지만 놓칠세라 소문들을 물어 나르는 강선혜.

"제발 언니, 알고 있는 얘긴데 왜 하시는 거예요? 그런 얘기 자꾸 하려거든 오시지 말아요."

"그래 알았다. 하지만 유부녀가 그럴 수 있니? 아니 할 말로 홍성숙이가 독신녀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건 언어도단이야. 명희 너를 위해서만 하는 얘긴 아니다?"

"나를 위하는 게 아니지요. 상처를 주는 일이에요."

"뭐라구?"

"그렇지 않아요, 언니? 하지만 상처를 받을 만큼 인간적이지 않으니 그게 문젤 거예요."

"명희야!"

"언니 얘기나 하세요."

", 그래."

"순선데 뭐."

선혜는 무안한 듯 웃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래 결정은 했수?"

"거의, 너도 생각해보아. 내 나이 몇이니?"

"사십을 바라보지요."

"참 세월도 빨라. 너하고 동경서 지내던 일이 엊그제만 같은데, 이나이 해가지고서 전도부인이 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런 풍토에서 여자가 독신을 고수하면 괴물 취급이니 말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잘하셨수."

"잘해?"

"왜 또 그래요?"

"넌 결혼 후회 안 한다 그 말이야?"

"언니 자신의 문제 아니겠어요? 남의 사정 보아가며 결혼하실 건가요?"

", 그야 그렇지. 내 인생 내가 사는 거구. 또 내 상대는 귀족도 부자도 아니니까 말이야."

"언니한텐 과분해요."

"이애가? 날 무시하는 거니?"

"상대가 훌륭하니까요."

"훌륭하긴? 가난뱅이 예술가를,"

했으나 선혜는 만족한 듯 눈꼬리에 주름을 모으며 웃는다. 아직은 젊었다. 쪽머리에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다른 조선 여자들에 비하여. 선혜 나이면 며느리 본 사람도 허다한데 화장은 옛날같이 짙지 않았으나 꽃무늬의 푸른 원피스의 모습은 아직 풍만했다.

"하기야 뭐, 경제적인 거는 나한테 문제가 안 되지만,"

"뭐가 문제예요?"

"그것 따지게 생겼니? 아이들 기르고 살림에만 전념할 각오 없이는 결혼은 생각 안 하는게 좋을 거다, 그런 배짱 좋은 말을 하지 않겠니? 설사 내가 그런 생각, 각오를 한다 해도 그렇게 못 박는 말은 듣기 싫거든. 사내들 이기심이 밉단 말이야. 자존심도 상하고, 내가 뭐 보모, 식모로 취직하는 거니?"

"권선생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남자들은 다아,"

"안 그런 사람도 있더라 이애.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음에도 집에선 보수적이란 그거, 이중인격 아니니?"

"권선생님보고 그러시지 그랬어요?"

그 말대꾸는 없다가 한참 만에

"이번 기횔 놓치면 난 아마 결혼 못하고 말 거야."

"알기는 아네요."

"어떻게 보면 사내답기도 하지만 말이야. 나도 많이 생각해봤지만 너 알지? 그 자금 문제 말이야."

"몇 번 얘기했수."

그러나 선혜는 되풀이한다.

"글세 다른 사내 같으면 자금부터 받아놓고 이러니저러니 하고 나왔을 거야. 헌데 그 사낸, 기부라면 받겠으나 [청조]에는 관여 말아라, 사람을 앉혀놓고 코빼기를 치더란 말이야, 증인까지 앉혀놓고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분해서 이가 드걱드걱 갈려. 좋다! 비록 나는 치마를 두른 여자지만 째째한 사내한테 본때를 보여주마, 오기였지 오기였어. 그게 인연이 되어, 하하핫... 하하핫..."

"언니도 참,"

"권오성이 그때 날 다시 본 게야. 그러고 나한테 한방 맞은 거지. 누가 그랬다더라? 그런 여자를 들앉혀놓으면 살림이 엉망진창이 될 거라구, 했더니 권오송이 말이 그 점은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엉망진창이 될 살림이나 있는가, 애들한테 잘하면 그거로 족하고 강선혜 그 여자 이중성격은 아니니까 애들한텐 잘할 거다, 그런 답변을 했다는군. , 누굴 애보개로 생각했나 부지?"

"매사에 명확하다는 건 좋은 것 아니에요?"

"그렇지만 명확한 것도 표현은 완곡해야지."

"그런 충고는 언니한테 드리고 싶어요."

"하하핫... 하하핫, 나도 좀, 그런 편이지."

"좀 정도가 아니에요. 쓸데없는 남의 일에도,"

"관두어, 관두어라. 내 성질 내가 알고 있어. 웃는 낯으로 송곳 찌르는 그 따위 짓은 나 못해. 그런 인간들 많지. 앞에선 온갖 아첨 다 떨다가 돌아서면 침 뱉고, 일 대 일일 때는 가장 친밀한 친구같이 대하다가 제삼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갑자기 잘난 체 사람을 무시하려 드는, 그 따위 인간을 난 믿지 않아. 오히려 일 대 일일 때는 심한 말로 충고도 하고 하는 사람이 남과 합석했을 때 따뜻하게 옹호해주는 태도로 나오더구만. 여자도 그렇지만 사내새끼들, 네 네, 강여사, 하다가 누구든 하나 끼어들면 강선혜라는 여자가 어쩌고 저쩌고, 마치 내가 유혹이라도 한 것처럼. 화가 난다기보다 불쌍해지더군. 그런저런 생각하면은 시집가기는 가야 해."

"..."

"또 누가 그랬다나? 부잣집에 양자 간다며?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권오송이, 오라는 말도 없었고, 내가 데려오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처가에서 자금을 보태주겠다면 그걸 사양할 생각은 없다. 하고 응수했다는 게야. 날 보고는 또 뭐라 했기? 기가 막혀서. 아 글쎄 어떤 노총각한테 중매 들려다 실팰 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떠맡게 됐다면서 그 작자 실실 놀리지 않겠어? 자릴 박차고 일어서려다 그 사내한테 기죽어보기란 처음이야. 감언이설보다 신뢰감이 가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아무 말 말고 언니 시집가서 잘 살아요. 잘살 거야. 언니 말마따나 귀족도 부자도 아니니까."

"그래, 나도 뭔지 운명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애들 있는 것도 싫지 않고 말이야. 이제 시집가서 아일 낳겠니? 공짜로 생긴 내 아이다, 생각하기 탓이지. 집에서 할일 없으면 아이들 사랑하고 함께 놀아주고 그런 일밖에 더 있겠어? 고 약은 생쥐 같은 사내가 그 점을 노렸던 것 같애. 그걸 생각하면 약이 오리지만, 빌어먹을! 그는 그렇고, 지금 내 형편이 이렇지 않다면. 여자란 별 수 없어, 사내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다른 때 같아보아, 내가 가만 있나? 홍성숙 고걸 만천하가 다 알게 난도질을 쳐놓을 텐데 말이야. 하기야 뭐 나 아니라도 일은 터지게 생겼더군. 홍성숙은 물론이지만 욕은 네 남편보다 홍성숙이 남편이 더 먹는갑더라. 쓸개 없는 놈이니, 병신 같은 놈이니,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냐는 둥, 아 그래 명희야,"

"..."

"넌 아무렇지도 않니? 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처지 아니냐? 어째 꿀 먹은 벙어리같이 말이 없느냐 말이야. 널 보고 있으면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까짓 홍성숙쯤, 그러는 게냐? 자신이 있어 그래?"

"희망도 없는데 무슨 자신이 있겠수 참,"

명희는 서글프게 웃는다.

'그까짓 홍성숙쯤...'

선혜 말을 생각한다.

'그까짓 홍성숙쯤,'

홍성숙의 존재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명희는 경쟁상대로 혐오감 같은 것은 거의 느끼질 않았다. 홍성숙이가 조용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건 오해일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만일 오늘날의 남편이 조용하 아닌 조찬하였었다면, 조찬하였다면, 상대가 어떤 여자이건 그것은 틀림없는 사랑일 거라고, 그런 생각을 문득 하다간 주여, 하며 명희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죄의식에 빠지는 것이었다. 성실한 인간성, 나이가 들어도 이십대 그 시절같이 순정적인 사나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명희가 남편으로부터 받는 고통은 홍성숙의 문제보다 조찬하의 존재로 인한 고통이 훨씬 컸었다. 오랜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 한 뒤 조찬하는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제반 행사 때면 아내를 동반하고 큰집으로 오는데 그런 기회이야말로 조용하가 가장 환영하는 것이었다.

"제수씨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들뜬 목소리로 찬하의 아내 노리코를 제 옆에 앉히고 찬하와 명희를 나란히 앉히는 것이었다.

'자아 어떻습니까? 당신과 나는 공동의 피해자인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노리코에게는 그런 몸짓이요, 명희와 찬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양을 노리는 이리같이 잔인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명희와 찬하가 불륜을 저지를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형의 눈빛을 비난으로 응수하는 찬하의 강한 몸짓을 명희는 느낄 수 있었다.

"형수씨, 형님 성지이 까다로워서 힘드시지요."

하면, 명희 대신 용하가

"힘드는 것은 시간이야. 그래서 이 사람은 사시사철 머릿속에서 여행하고 방랑하는 게야. 상상에 골몰하면 임신도 한다지, 아마?"

냉혹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노리코는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가 없어 그런가 보다, 그러나 찬하는 그 말이 얼마나 지독한 악의 인가를 안다. 물론 명희도.

'너희들은 정신적 간음을 하고 있다!'

형의 의도, 남편의 말뜻이 그렇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희는 그런 말뜻은 남편의 진실이 아닌 것을 안다. 조용하는 결코 명희가 정신적인 간음을 한다고 믿지 않았으니 말이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한둘 더 낳으면 될 거 아닙니까?"

명희를 보고 한 말인데 이번에는 용하가 말했다.

"허어, 너의 형수가 잠 못 자겠군."

"형수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리코, 고생 좀 해야겠소."

찬하는 한술 더 뜨듯 말했던 것이다.

"아이 참 당신도, 그걸 어떻게 마음대로,"

"책임이 무거워.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니까."

노리코는 얼굴을 붉혔다.

지난 봄 조찬하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나올 때는 조선서 뿌리를 박으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결심을 바꾸고 돌아간 것이다. 찬하의 심정은 아무도 짚어볼 수 없었다. 명희를 잊었는가, 노리코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떠날 때 형에게 말하기를

"나는 결국 국적 없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왜요? 모르셔서 묻는 겁니까? 형님한텐 자손이 없다는 건 다행한 일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이상한 아이로 성장할 테니까요. 말하자면 문제아가 될 거란 말이지요. 인간적으로 형수님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노리코를 사랑하니까 죄 없는 사람 괴롭히지 마십시오. 괴로움을 받는 사람보다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니까요."

"그래?"

했으나 조용하의 얼굴은 일그러졌던 것이다. 난생 처음 조용하는 동생에게 패배감을 느꼈고 압도당하였던 것이다. 홍성숙과의 밀회도 어쩌면 찬하에 대한 증오와 패배감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부녀와 유부남의 정사는 남의 이목도 두려워하지 않는 난맥 상태였으니 말이다.

"서방님."

문밖에서 하인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저기,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

"어떤 몰상식한 작자가 아침부터 방문이야!"

"여학생입니다."

"여학생?"

". 여학생입니다."

"여학생이면 방문객 아니란 말이냐? 찾아올 여학생도 없어! 고학생이라면 윤군보고 돈푼이나 주어 쫓아보내라고 해!"

"그게 아니옵고, 저기, 심부름 왔다, 그 그러는뎁쇼. 저기,"

무척 거북해하는 하인의 음성이다.

"누구 심부름 왔다더냐."

", 저기 말씀드리기가,"

한동안의 침묵이 지난 뒤

"들여보네."

신문을 탁자 위에 놓으며 혀를 찬다. 나갔던 하인이 돌아온다.

"저기,"

"뭐가 저기야!"

보이지 않는 하인에게 주먹질이라도 하듯 조용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저 학생이 안 오겠다고,"

"?"

"별관 아, 앞까지 와, 왔습니다만 드, 들어오지는 않겠다고 고, 고집이 여간 아닙니다."

"그럼 관두라 해!"

", 서방님께 주, 중대한 일이라,"

종시 침묵을 지키던 명희가

"나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자릴 비울까요."

"그런 걱정 말아요."

조용하가 별관을 나섰을 때 거목이 된 오동나무 밑에 양소림이 서 있었다. 양소림은 가운 차림으로 걸어 나오는 조용하를 보자 당황하며 고개를 숙인다. 한편 손은 습관적으로 치마폭을 감추듯,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솟아 있었다.

"학생은 누군데 날 만나러 왔지?"

"홍성숙 씨 심부름 왔습니다."

누구라는 물음에는 대답 않고 성난 듯 소림이 말했다. 조용하도 짐작은 했던지 놀라는 표정은 아니다.

"음 그래서?"

"지금 곧, 세검정 그곳으로 오시란 말 전하라 하더군요."

"지금 곧?"

"중대하고 급한 일이라구요."

"알았다. 학생은 누구지?"

다시 묻는다.

"조카예요."

눈길을 피한 채 불쾌감을 완연하게 나타내며, 그러나 고개를 한번 숙이고 나서 발기를 돌려놓는다.

'조카라? 조카... 으음 진주에 있다는 언니 딸이구먼. 이모보다 월등하구나.'

조용하는 이빨에 이물이라도 낀 것처럼 이빨 사이에다 바람을 넣으면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별관으로 들어간다. 명희는 난에 물을 주고 있었다. 소파에 걸터앉은 조용하는 명희를 힐끗 쳐다본다.

"찾아온 여학생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소?"

"누구지요?"

"홍성숙이 조카라 하는구먼."

"..."

"이모보다 월등한 미인이오. 아주 싱싱하든 걸."

"그 소녀 본 일이 있어요."

명희는 지금부터 전개될 조용하의 작전이 단축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동감했겠구려."

"예쁘게 생겼더군요."

"."

담배를 붙여 문다.

"무슨 일로 왔는지 그건 왜 묻지 않는 게요?"

"말씀하실 테니까요."

"이혼을 바라는 게요?"

"..."

"임명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조용하의 부인을 고수하려 하는지 난 모르겠소."

"전 고수하겠다는 말 한 적 없어요."

"그랬던가?"

"뜻대로 하세요."

"무저항주의구먼."

"그건 제 자신의 책임일에요."

난에 물을 주고 나서 창가에 머문 채 명희는 대꾸한다.

"그건 무슨 뜻이오?"

"타고난 성미니까요."

"그 말뜻은 따로 있을 듯 싶은데?"

명희는 돌아본다. 그렇다는 대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찬하 그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여자가 신학문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명희의 침묵은 시인하는 것이었다. 조용하는 홍성숙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명희와의 대화를 그 정도로 해두고 싶은 눈치였다. 옷을 갈아입고 그는 집을 나섰다. 홍성숙과 두 번 밀회한 일이 있는 세검정 별장까지 가 조용하는 자동차를 돌려보내지 않고 기다리라 이른 뒤 별장 안으로 들어간다. 별장지기는 상전 쳐다보기가 민망하였던지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네놈이 상전을 어줍잖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냉소를 이마빡에 쏘아붙이며 지나간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홍성숙은 긴장된 얼굴을 쳐들었다.

"약속한 날까지 닷새나 있는데 왜들 이 야단이오?"

무슨 일이 필시 있으리란 생각을 하면서 조용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흣,"

홍성숙은 울음 먼저 터뜨린다.

"으흐흐흣... 제가 오죽했으면 소림이 앞에서 손까지 비벼가며, 죽어도 안 가려는 애를 으흣흣흣... 으흣... , 그애를 그곳까지 보냈을까요. , 혼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었단 말예요."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이젠 파멸이에요."

조용하는 담배를 붙여 물고 방바닥에 성냥갑에 던진다.

"왜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거예요?"

"글세."

"글쎄라니요?"

"우리에게 이제 종말이 온 것 같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악을 쓴다.

"파멸이라 하지 않았소, 방금?"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성숙은 입술을 깨물고 눈무를 흘리며

"남은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어쩜 그렇게 태평하세요."

"그럼 우리 함께 죽기로 할까?"

처음으로 다정스런 목소리로 여자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그런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 아니에요."

"남편한테 혼이 났군. 매라도 맞았소?"

"모욕적인 말씀 삼가세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매를 맞다니요?"

화를 내면서도 성숙은 정답게 몸을 기대어온다.

"하긴 그 사내, 신사라는 말은 들었지, 동서고금을 통해 사랑이란 괴로운 거 아니겠소? 자아, 울지 말고 얘기해요."

그러나 조용하의 말은 어설펐고 여자 어깨 너머, 드리워진 발을 뚫고 가는 시선은 차가웠다.

"차라리 그 사람하고의 일이라면 해결이 쉬웠을 거예요. 실은 시, 신문에 나갈 모양이에요. , 우리들 일이."

"신문에?"

"성악가 아무개하고 어쩌고, 우리들 관계가 만천하에... 어떡허면 좋지요? , 어떻게 되는 거지요? 으흐흣흣,"

순간 조용하의 낯빛이 변했다.

"어떻게 되긴? 보다 더 유명해지겠구먼."

여자를 떠밀어내고 담배를 피운다. 성숙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여유만만이군요."

"안 그럴 까닭이 뭐 있겠소."

"막을 자신 있으세요?"

성숙의 눈에 생기가 돈다.

"막는 거야 당자가 할 일 아니겠소?"

냉정하게 내뱉으며 담배를 눌러 끈다. 성숙은 순간 당황하다가

"저는 각오가 돼 있어요. 이혼할 각오가 돼 있단 말예요."

'이 계집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조용하는 여자의 접근을 막듯 담배를 꺼내 붙여 문다.

"이혼하는 혼자서 하는 거요?"

조용하 심중에 불안을 느낀 성숙은

"그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에요. 선생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사람 신사예요. 예술가의 입장도 이해하구요. 아직까지는, 여성이 가정 밖에서 활동하면 오해받는 일이 많고 구설에도 오를 수 있다 하며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는 형편이거든요."

"그거 다행이오. 그럴 때 홍성숙 씨 표정은 어떠했을까?"

낄낄낄 웃는다. 성숙은 얼굴이 빨개진다.

"제발, 제발 좀 그러시지 말구 진지하게 제 말 들어주세요. 어젯밤엔 한잠도 못 잤어요. 날 새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오죽하면 조카애를, 이모의 위신 따위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어요 아무튼 밤새도록 생각하여 얻은 결론은 이혼을 하면 된다 그거예요. 아무튼 이혼은 혼자서 하는 거냐 하셨지만 그인 응할 거예요. 법률에 호소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음 어떻게 되지? 파멸을 구하는 게 이혼이다. 그 말이오?"

"자유의 몸이 되는 거예요."

"자유?"

"그것도 되도록이면 빠르게요."

"그러고 보니 나도 상당히 구식 사내로군. 여자의 파멸은 이혼하는 그 자체로 알고 있었는데 이혼이 파멸을 구한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홍성숙 씨?"

홍성숙 씨, 그 호칭에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 같은 혐오가 있었다. 성숙은 머쓱해진다. 그러나 결코 불리한 방향으로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다. 뭉게뭉게 피는 불안을 두고.

"외국에선 얼마든지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례가 있지 않나요? 유명한 사람치고, 우린 평범한 사람들 아니에요. 낡은 인습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된고 사실 애정 없는 부부 생활이란 죄악이니까요."

조용하는 아까처럼 낄낄낄 웃는다.

"파멸을 막기 위해 이혼하는 것도 좋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좋고 재혼하는 것도 하기는 나쁠 것 없지요."

"설사 신문에 대서특필한다 하더라도 그건 시일이 지나면... 그 동안은 괴로울 거예요. 하지만 무대에 다시 서지 말란 법 있어요? 선생님 후원이 있고 따뜻한 이해, 사랑만 있다면 전 언제든지 재기 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완전히 바보다. 제 마음만 결정되면 다 되는 겐가? 성악가, 그걸 여의봉으로 아는 모양이지만 어디 혼 좀 나봐라.'

"그렇지요? 선생님, 안 그래요?"

"하하핫 하하핫핫, 그거 어려운 일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또 이혼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그런 농담하실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남은 속상해서 죽겠는데,"

몸을 던지려 하는데 한 손으로 막은 조용하.

"내가 농담하고 있는 것 같소?"

갑자기 얼굴은 무섭게 변했다.

"홍성숙 씨,"

"말씀하세요."

했으나 성숙의 얼굴빛도 달라졌다.

"만일 재혼의 상대자를 조용하, 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오."

"?"

"새삼스럽게, 놀라기는 왜 놀라는 게요? 분명히 나는 당신한테 결혼 약속 같은 것 한 일 없어."

", 뭐라 하시는 거예요!"

"당신 선배하고의 이혼을 생각한 일이 없었고 이혼하지도 않을 게요."

", 그렇다면!"

"...."

", 이 사태 수, 수습은,"

입술이 새하얗게 된다.

"수습하는 길은 한 가지뿐이오."

",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부정하시오.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시오."

",부정,"

숨이 차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부정하라구요?"

"그렇소. 소문만 가지고는 얘기가 안돼."

", 그럴 수가, 안 하겠다면?"

"당신은 영리한 여자니까 그럴 수 있을 게요. 나하고의 문제만은 크게 오산을 한 모양인데,"

"그래요? 오산을 해요? 오산을 저만 했나요? 조용하 씨 불편이 없게 그, 그렇게 시키는 대로 부정이나 할 그런 여자로 아셨나요? 그야말로 오산이군요."

드디어 홍성숙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역습으로 나왔다. 그 얼굴은 보기 민망했다.

"그런 여자 아닌 줄 대강 짐작은 했으나 그러나 승산이 있어야 덤빌 것 아니겠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면?"

"저만 잃게 되나요? 피장파장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는 무대에 서는 가수가 아니오. 당신은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모양이지만 남자가 바람피우는 것 그게 뭐 대단한가. 조강지처를 거금을 주어 이혼하고서 중인집 딸을 모셔온 내 전력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달콤한 꿈을 꾼 모양인데. 아니면 미인계라는 것이 있다더군. 사내를 협박하여 끝없이 돈을 뜯어내는 사기단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명예와 재물이 있고 보니, 하하핫핫 하하핫... 남의 이목 생각할 양이면 애초 조강지처를 쫓아냈을까. 하하핫..."

"이 악마!"

"당신은 악마를 상대할 요녀도 못 되니 불행한 일이구려. 하하핫..."

", , 파멸을 각오할 거예요! 그리고 조용하를 망쳐놓을 테에요!"

"뜻대로 하시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매력 없는 일편단심, 사랑을 위한 순교자, 그것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아시오. 홍성숙 씨는 그러니까 행복한 여자도 불행한 여자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후원하는 뜻에서 기부금이란 명목이라면 만족할 만한 금액을 내놓겠소. 옛날 양반은 약탈만 했다지만 오늘날 귀족은 베푸는 거요."

조용하는 일어섰다.

"이대로는 못 가요!"

성숙은 발딱 일어서며 두 팔을 벌린다.

"요망스럽게, 뉘 앞에서,"

떠밀어내고 방을 나섰다. 홍성숙의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하는 침을 뱉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끝내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침착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기분이 좋을 건 없었다. 묘하게 외로움 같은 것이 엄습해오는 것이었다. 솔나무에 덮힌 산허리, 그 위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멀고 먼 곳에 있는 여자 마음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홍성숙이 그리 쉽게 본심을 노골적으로 내보이지 않고 비에 젖는 갈대같이 울고 있었다 하더라도 조용하는 틀림없이 짜증을 냈을 것이요 헤어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놈은 어쨌든 행복한 놈이다. 그놈은 늘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이렇게 메마른 인간일까.'

동생 찬하를 두고 조용하는 쓰디쓴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항상 장자로서 우선이요 이겨야만 했으나 기실 양보하고 져야만 했던 찬하 쪽이 승자 아니었던가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충족된 일이 없었던 이상, 조용하는 차디찬 이성으로 이유 모를 결핍감을 감내해왔었는지 모른다.

"회사로 가게."

자동차에 몸을 싣고 우울하게 뇌었다.

회사로 나온 조용하는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든다. 조용하라는 이름자와 마찬가지로 듬뿍 찍힌 먹 글씨, 임명빈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윤군,"

", 사장님."

얼굴이 기다란 사내가 얼굴을 내민다.

"이거 언제 왔나."

봉투를 가리킨다.

"조금 전에 임교장께서 기다리시다가 두고 가셨습니다."

"알았다."

사내가 나가버린 뒤 내용을 꺼내어 본다. 사직원이었다. 일신상 사정으로 사임하겠다는 것이다.

"무슨 뚱땅지 같은 소린고?"

혀를 차며 꾸겨 휴지통에 집어던진다.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창문과 마주보고 앉으며 담배를 붙여 문다.

'임명빈 씨가 소위, 자유... 명희의 자유를 위해, 길을 터놓는 뜻으로 이 따위 짓을 한 걸까?‘

 

 

13장 편지

"아이고 작은아씨 어쩐 일이세요?"

올케가 반색을 한다. 명희는

"오라버니 계세요?"

"."

하는데 올케 백씨 얼굴에 심약한 표정이 지나간다.

"사랑에 계세요?"

".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오라버니 뵙고 들어가겠어요."

백씨는 마당에 엉거주춤 섰고 명희는 사랑을 돌아가는데 두 여자는 동시에

'언니도 많이 늙으셨어.'

'그 곱던 얼굴이, 수심이 가득 차서,'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것이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들어서는 명희를 힐끗 올려다보며 임명빈은 말했다. 명희는 자리에 앉으며

"저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이 왜 그러셨어요?"

"그 일이라면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손을 내저으며 물러나 앉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왜 그러셨는지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이유가 뭐 새삼스런 거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 원체 무능력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겠나."

하고 임명빈이 멋쩍은 웃는다. 명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저 땜에 그러시지 않았어요?"

"이유야 어디 한두 가지냐?"

쓰거운 표정인데 명희 눈길에서 허둥지둥 달아난다.

"한마디로 내가 못난 탓으로... 고용된 교장으로 소신껏 뭘 했겠나. 하기는 못난 덕분에 오랫동안 뭉개고 있었지만,"

"소신껏 못하실 것도 없었지요. 공연히 자격지심에서 오라버니는 그러셨던 거예요."

"..."

"아무 말씀 마시고 없었던 일로 돌리십시오. 그이도 그러시길 희망하고있습니다."

"그이? ,"

헛웃음을 웃다가 명빈은 무엇을 찾는 것처럼 방바닥을 더듬었다.

"언니랑 아이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더 이상 설득해볼 의사도 없으면서 명희는 물었다. 실은 친정으로 올 때부터 명희는 설득한다 하여 굽힐 오라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만했으면 긴 세월을 잘 견디었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조용하가 뭐래서도 아니요 사돈댁에서 이러쿵저러쿵 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뜻에서 사돈은 아니었다. 마음 바닥에서 뿜어내는 찬바람, 그것은 신분에서 오는 장벽이요 조씨 가문의 얼음장 같은 기질은 무언의 모멸로써 임명빈은 가슴을 찔러왔던 것이다. 물론 임명빈은 의식에 궁하여 그 교장 자리를 지켜왔던 것은 아니다. 3.1만세로 말미암아 임역관이 사망하고 임명빈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쑥밭이 된 집에 세정 모르는 여자들만 남았으니 최서희의 도움을 아니 받을 수 없었지만 임명빈이 출옥한 후 가산 정리를 한 결과 의식 문제, 자식들 학자, 그런 것에 궁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보았지. 별로 걱정할 것 없더군. 몸만 건강하면,"

"저 알아요."

"."

"그 동안 그만두지 않으셨던 것도 저 때문이었고 이번에 사표 내신 것도 저 때문이라는 것 알아요."

연분홍빛 은조사 깨끼적삼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명희는 눈물을 닦는다. 명빈은 누이와 함께 울먹일 듯하다가

"그때는 할 만한 일이 없어서... 이번에는 그만두어도 밥은 먹을 만하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일은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는 없었는데,"

", 하기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

혼잣말처럼 뇌이는데 명빈의 눈에는 회환이 가득 실린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남자가 바람피우기 예사라지만, 바람 정돈가? 피를 말리는 그자 성품을 내가 모를까? 그쪽에서 이혼을 요구할지 모르겠다만 지금 내 심정으로는 너를 데려오고 싶다."

명희는 희미하게 웃는다.

"오라버니가 그런 생각 하실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이상해요."

"뭐가,"

"이혼하겠다 안 하겠다, 이혼당할 건가 안 당할 건가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으니 말예요."

명빈은 외면을 한다. 명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가 공부 같은 것 하지 않고 무식한 아낙이었다면, 남편 성미가 까다롭다, 세 끼 밥 챙기고 빨래하고... 오만한 얘긴지 모르지만 그런 아낙들의 체념과 비슷한 것 아닐까 하구요."

명희는 자신 속에 어딘가 있을 생각을 찾아내듯 어물적거리며 말했다.

"생각을 묻어버린 뒤의 억지 생각이겠지."

하다 말고 명빈은 스스로 놀란다. 얼른 화제를 바꾼다.

"하여간에 어중간한 고개에서 너나 내가 이 무슨 꼴이냐? 아버님 뵐 낯이 없고 모두가 다 어리석은 내 잘못 아니겠나."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저는 익숙해져 있는데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오히려 저 땜에 오라버니가 당하신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잘못은 저한테 있을 거예요."

눈살을 찌푸린다. 명희는 좀 여위었다. 젊음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이가 가지는 아름다움은 지니고 있었다. 연분홍 깨끼적삼에 검정 숙고사 치마를 입은 모습은 역시 청초했다. 하얀 손, 갸름한 손가락, 무명지의 초록색 쌍가락지도 아름다웠다. 일상의 균형을 변함 없이 유지하고 있다.

'바로 저것이 병인이다.'

명빈은 눈앞에서 누이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십 년 가까운 세월, 명희가 조병모 남작댁에 출가하고 자신은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때부터 명희와 자신은 일종의 박제된 인간으로 존재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친다. 앙혼이 빚는 관습적인 알력이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었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숨막힐 것만 같았던 세월을 임명빈은 새삼스럽게 통감한다. 행위의 언어도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부이면서 매부가 아니요 사돈이면서 사돈이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권위 의식이 다른 양반님네보다 훨씬 세련되었고 고차원적이라는 느낌뿐이었다. 결코 임명빈은 자유 분방한 사내는 아니다. 자존심이 하늘 높게 솟은 사내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굴한 사내는 아니었다. 비굴하지 않는 사내가 비굴하게 살았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명희에게 아이라도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명빈은 아이가 태어났다 해서 조용하나 그 집 자체의 세련되고 고차원의 권위 의식, 비인간적인 권위 의식과 기질적인 것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식한 아낙들의 체념과 같은 것이라구? 아니다. 코흘리개 아이를 안고 있다면, 살림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면, 저기 저렇게 유연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귀부인보다는 나았을 게야. 와글바글 살아있는 소리들이 들렸을 게야.'

홍성숙과 조용하에 관한 추문은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다. 임명빈도 그 일에 관해서는 알고 있다. 마누라는 근심했으나 임명빈의 심정은 근심이 아니었고 다만 착찹했다. 남들은 마치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명희의 둥우리가 태풍을 앞두고 있는 듯 그렇게들 수군거렸다. 명희가 추락할 것인가 태풍은 그냥 지나갈 것인가 호기심에 가득 차서 떠도는 소문에 귀들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성숙과 임명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품평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서로의 지체를 들고 나왔고 그럴 때 홍성숙의 남편은 잊혀진 존재였다. 어째 그리 요란했을까. 유명한 사람이라서? 미인이기 때문에? 성악가? 그러나 그런 모든 것보다 조용하는 조선의 희귀한 귀족이요 조선에서는 대실업가, 비중은 거기 있었다. 임명희는 신데렐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며칠 새 소문의 방향에 변화가 왔다. 명희의 위치는 반석 같다는 둥 홍성숙이 발밑에나 가겠느냐 하는가 하면 홍성숙이 성악가로서 자질을 뻗치기 위해 조용하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막상 잡으려 했을 때 달아났으니, 그들 부부의 금슬에 금 갈 짓은 아니 했으니, 어쨌거나 그것은 모두 피상적인 데 불과했다. 명희가 뼈에 사무치게 고통스러울 때 그들은 명희만큼 행복한 여자는 없다고들 생각했고 그들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명희를 상상했을 때 명희의 마음은 명경지수였다는 것, 그러하기 때문에 너도나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명희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명빈의 경우도 비슷했다. 누이동생 덕분에 행운을 잡은 사내, 중학교 교장직은 아무데나 굴러 있는 건가? 그것도 재단이 튼튼한 학교고 보면 행운이 아니라 할 수 엇다. 대우받을 만한 자리, 존경받는 것은 당연한데, 뿐인가 조병모 남작의 사돈이면 그것만으로도 행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장 아닐 때보다 자신이 비천하고 작아져간다고만 생각했다. 타협하고 비굴하게 안주한 자리였으니 말이다. 가족에 대한 애정을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능력과 그 한계를 자인했기 때문에 택하였다 한다면 임명빈에게는 구실이 될지 모른다. 변명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라면 치욕감이 그렇게 끈덕지게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부산스러웠던 친구들, 후배들, 그들이 대개 망명하거나 도피하거나 철창 신세가 됐을 시절, 홀로 교육자라는 방패 뒤에서 그것도 침략자의 두호를 받는 계층이 설립한 학교에서 풍설을 피하며 있었다는 치욕감과 소외된 것만 같은 외로움, 민족의식이나 반일사상이 잠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이 없는 생각뿐이었고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을 외면한 채, 그것은 또 조로를 재촉한 것이기도 했으며 만주 중국 땅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방랑한다던 이상현의 소식을 열등감 없이 들을 수 없었던 임명빈이었다. 그래도 상현이 그놈은 나보담 낫다, 무기력한 이 늪 속보다 자학의 아픔으로 아프다는 그 자체가 생동의 증거가 아니냐, 명빈은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수없이 뇌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현으로부터 편지와 원고 뭉치를 받은 것이다. 십여 일 전의 일이었다. 명빈이 교장직을 때려치운 것은 어쩌면 직접적 동기가 상현의 원고 뭉치에 있었는지 모른다.

명빈은 명희와 마주앉았으면서도 아직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한 통의 수취인은 임명희다.

"며칠 동안 생각해보았는데,"

명빈은 끊어진 얘기를 이었다.

"변두리로 나가서 기와 공장이나 차리면 어떨까 하고,"

"기와 공장이라구요?"

". 학부형한테 얘길 들었지. 자본도 적게 들고 일도 복잡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라 하더군."

"기와 공장이 없을라구요? 많이 있을 텐데 경험이 없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실려고 그러세요?"

"조선 기와말구 양기완데, 뭐 작정한 건 아니다.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란 얘기지."

"글쎄요. 경험이 많은 사람하고 함께 하신다면,"

"황태수도 있고 월급 자리라면... 생활 문제보다 일을 놔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남의 밑에 가시는 건 반대예요. 오라버니 연세가 몇인데 그러세요?"

"오십이 될려면 아직 멀었어. 그놈의 교장질 하는 바람에 늙은이 취급 받은 게야."

오누이는 기쁠 것도 없는데 웃었다.

"지겨운 세월이 왜 날아가는 것만 같을까요? 모순이지요?"

"왜 아니냐."

"서참봉댁은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요."

"둘째가 이럭저럭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황태수도 도와주고,"

"은행에 그냥 다니나요?"

"동생?"

"."

"아니지이. 황태수 회사로 옮겼다."

"고맙네요."

"의돈이 그자가 아무리 지랄 발광이 나도 황태수를 괄시하진 못할걸. 친척들도 외면하는 마당에서,"

"본시 가까웠지요?"

"마음속으론 가까웠지. 친구란 그런 거 아닐까? 나야 뭐 일 터져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만 별 수 있나? 어릿광대,"

하다 말고 쓰디쓴 웃음을 띤다.

"며칠 동안 생각을 해보았는데,"

"기와 공장 얘기예요?"

", 아니다. 저어,"

"거북한 말씀이세요?"

", 거북한 말이다."

"오라버니 얘긴가요?"

고개를 저었다.

"저에 관한 얘기라면 말씀 마세요."

", 글쎄 그걸 안 할 수도 없고 며칠을 두고 생각해보는 일인데,"

그쯤 운을 뗀 임명빈은 갑자기 당황한다. 그리고 훌쩍 일어서서 마루로 나간다.

"여기 뭐 마실 거라도 좀 갖다 주시오!"

안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른다.

"오래 있는 기색이면 뭐 마실 거라도 가져와야지 맹해가지고 왜들 그 모양이야."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발을 걷고 방으로 돌아온다. 모시 고의적삼이 설렁해 보이고 곱슬머리 두상은 큰데 설렁한 모시옷처럼 명빈은 계절의 마지막 사람처럼 초라하게 느껴진다.

"후우-"

한숨을 내쉰다.

"명희야."

"."

"실은 상현이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

명희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다."

"..."

"너한테 주어야 하는지... 네가 달라 하면 주지."

"오라버니한테 온 편진가요?"

"나한테도 왔고,"

"내용을 보셨나요?"

"아니."

명희는 발 너머, 사랑 마당을 바라본다.

"제가 그 편지 본다고 해서 뭐가 어찌 달라지겠어요? 달라졌을 것 같으면 옛날에 달라졌겠지요 그분 역시,"

"..."

"오라버니한테 온 편지는, 인사 편지였어요?"

"인사 편지는 아니었고 부탁을 해왔더군."

"부탁이라면?"

천천히 얼굴을 돌려 임명빈의 얼굴을 바라본다. 실제 그랬었는지 명빈의 눈에 비친 누이의 얼굴은 갑자기 늙어버린 것같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힘에 겨운 권태가 그 양 어깨에 실린 것같이 보였다. 붕괴되는 찰나, 이미 명희에게는 새로이 생성될 세포 하나 남아 있지 않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원고를 부쳐왔어. 아무데나 잡지에 주선해달라고,"

"소설을 썼군요."

"."

"읽어보셨어요?"

"좋더군."

"성공하셨네요."

명희는 기운 없이 웃었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너에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 있긴있어."

애써 누이를 보지 않고 말한다.

"고료를 받으면 너에게 전달하라는 편지 내용이었어."

"고료를 저에게 전달하라구요? , 왜요?"

"그 이유는, 아마 너에게 쓴 편지 속에 있을 것 같다."

"이상하군요."

그 말까지는 평정했다. 지극히 평정했다. 그런데 별안간 명희는 울기 시작한 것이다.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었다. 소리를 깨물어가며 두 손에 얼굴을 받쳐 들고 우는 것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방울이 무릎에 떨어진다. 명빈은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철늦은 부채를 들고 부치다 말고 그만둔다.

"그쳐!"

"오라버니,"

"그치라니까."

"그분하고 저 사이엔 배신도 신의도 없었어요. 한데 뭣 땜에 편지를 보냈지요?"

"울음을 그쳐. 편지는 주랴?"

"오라버니가 읽어주세요."

"내가? 그럴 수 있나?"

"아무 비밀 없어요."

눈물을 닦는다.

"줄 테니 네가 읽는 게 좋겠다."

"아니에요, 읽으세요."

투정을 부리듯 하던 명희는 편지를 서랍 속에서 꺼내자

"인 주세요. 생각해보구요, 버리든지 읽든지."

받아서 한곁에 놔둔 비즈백 속에 집어넣는다. 넣으면서

"집에 있는 양반, 이혼 안 해줄 거예요."

뜻밖의 말을 한다.

"뭐라구?"

"지금 생각해본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울음이 터지네요."

"..."

"이쪽에서 할려면 더욱, 놓아주질 않을 거예요."

옷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거머리 같은 놈이다!"

사무쳐서 힘껏 하는 욕설이다. 이때

"작은아씨."

백씨가 마루 끝에 와서 불렀다.

", 언니."

"여기 손님이 오셨어요."

"저한테요."

"오빠한테 오신 손님인데 작은아씨 제자라고, 어서 들어가세요."

백씨가 권한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아니, 인실이 아니냐? 네가 웬일로?"

놀란다.

"교장선생님 뵈러 왔는데 마침,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인실은 임명빈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다.

"앉어."

명빈이 앉기를 권한다.

"."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무릎을 끓고 앉는다.

"오빠는 별고 없으시지?"

임명빈이 묻는다.

"."

"모두들 고생했는데 몸이나 건강해야지."

인실이는 명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우셨구나. 내가 잘못 온 것 같네.'

그러나 자연스럽게

"선생님 한번 뵙고 싶어도, 너무 문턱이 높은 것 같아서 망설여졌습니다."

하고 미소한다. 명희도 웃는다.

"그보다 처녀가 안 갈 곳에 갔다왔으니 어떡하지?"

"선생님도 가보시고서 그러세요?"

"아아 참, 그랬었지. 그때는 도매금으로 넘어간 거구. 얼마나 욕을 봤니?"

"저희들이야 뭐, 남아 계시는 선생님들 고생이 많으시지요."

"죽일 놈들, 나는 욕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명희는 자신의 눈이 새빨갛게 부풀어 있는 데 대해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조선 사람이면 욕할 자격은 다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암, 그렇지."

명빈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결혼하신 것만은 의외였습니다."

"투신자살한 셈 치려므나."

명랑하고 밝은 음성으로 농친다. 위태스러운 것이었지만. 계집아이가 비로소 모과차 석 잔을 날라왔다.

"들어."

명빈이 권한다.

"들겠습니다."

명희가 찻잔을 드는 것을 본 뒤 인실은 예의바르게 말하고 차를 한모금 마신다.

"학교 다닐 때부터, 오라버니, 이애가 보통 아니었어요."

일러바치듯 말했고 명빈은

"보통 아닐 정도가 아니지. 그야말로 투산데."

"아니 선생님도."

인실이 얼굴을 약간 붉힌다.

"얼굴 생긴 것 보세요. 그래 집에서는 걱정 많이 하시지?"

"오빠가 안 계셨음 ?겨났을 거예요."

"오빠야 동진데 상부상조 안 할 수 없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인실이

"저 얼마 전 진주 다녀왔습니다."

"진주는 왜?"

명희가 묻는다.

"남선 일대를 바람 쏘일 겸 다녀왔습니다. 전도부인 언닐 따라서요. 그 언니랑 헤어진 뒤 진주에 갔었습니다. 김선생님댁에,"

"김선생님댁이라면?"

"저기 최참판댁 말예요."

"아아."

"아직 형무소에 계시고 해서 얼마나 가족이 상심하고 계실까, 뭐 위로가 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냥 지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마 서울 올라오실 때가 됐는데."

명빈의 말에

"곧 올라오실 모양이예요. 함께 가자 하셨지만 그 부인께서는 맹장염 수술을 하시고 정양중이더군요."

"맹장염 수술을!"

". 그것도 지난달 서울서 내려가실 때 부산서 발병하여,"

"경과는 어때?"

명희가 서둘며 묻는다.

"좋으시다 하시더군요."

"다행이군."

"심약한 환국이가 혼났겠군."

임명빈이 눈살을 찌푸린다.

"심약하질 않아 보이던데요, 교장선생님?"

"심지야 굳지."

"그 댁은 모두 미남 미녀, 놀랬습니다."

인실이 킥 하고 웃는다.

"아 인실이 미녀 아닌가?"

명빈도 슬그머니 웃는다. 나잇살이나 먹은 처지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한 교장선생님이던 명빈으로선, 누이는 그렇다 치고 나이 젊은 인실을 대하고 있기가, 어색하다.

"공판 받으면서 김선생님도 몇 번 뵜지만 참 잘 어울리는 내외분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투사라도 필경 여자는 여자로구나."

"오라버니도 참, 남자들고 그런 말 하든걸요?"

"남자 나름이지. 여자들이야 거의가, 인실이 같은 처녀애도 이러지 않나?"

인실과 명희는 함께 웃는다.

"저는 집안에서 여자답질 못하다고 하도 꾸중을 하셔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그래? 그는 그렇고 무슨 할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 부탁 좀 드리려구요."

"명희선생은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까 내쫓을까?"

명빈이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명희 심정을 생각하여 안으로 들여보낼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선생님. 애제자를 위해서 도와주실 것 같은데요?"

"그런가?"

"인실이 너 말재간이 여간 아니구나. 언제 그렇게 어른이 됐니?"

"선생님 저 이제 노처녀예요. 선생님들은, 대개 모든 분들이 옛날 생각만 하시는 것 같아요."

"하긴 그래. 나도 이제 중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인실인 당당한 성인이지. 그럼 말해보아. 내가 도와줄게. 무슨 얘기지?"

순간 인실 얼굴에 긴장이 나타났다. 건중건중 말하고 싶어서 인실이 그랬던 것은 아닌 성싶다. 운 자국이 역력한 명희 얼굴 때문에 의식적으로 화제를 가볍게 이어온 눈치다. 여자 대학을 이미 졸업했고 나이도 많았지만 그간의 풍파가 그로 하여금 한층 성숙한 여자로, 사려 깊은 여자로 성장케 한 것인가.

'이 애를 예뻐했을 때 그때 내 나이는 지금 인실이보다 어렸을 거야. 나는 그 무렵 형편없는 정신 연령이었다. 인실인 당당하구나. 정말 당당해. 눈빛이 살아있다, 살아 있다는 것 이상 소중한 것은 없다.'

"인실아."

"."

"어려운 청이냐?"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은 교장선생님께 취직을 부탁하러 왔습니다."

또박또박 사무적으로 말한다.

"취직? 어디에?"

"학교에, 안 될까요?"

"내가 있던 곳은 중학교, 그걸 몰랐었나?"

"압니다. 같은 재단의 여학교가 있다는 말 들었습니다."

", 그건 여학교가 아니고 수예 학교인데 일본 여자 대학 나와서, 그런 학교에 가겠나?"

"교장선생님, 제가 전과자라는 걸 모르십니까?"

"집행유옌데 뭐."

"저는 오히려,"

"허허어, 그나마 학생들이 모이질 않아서 주간은 폐지할 모양이고 결국 야간 학교로 남게 될 텐데 그래도 하겠나?"

"하겠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하고."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인실이 집 형편은 어렵잖을 텐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

"그렇다면, 허 참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저 같은 선생은 안 쓰게 돼 있습니까?"

"쓰고 안 쓰고 나는 이제 교장이 아닌데,"

"아니,"

"그만두었다. 명희선생보고 졸라보아."

세 사람은 함께 웃는다.

아무튼 이렇게 돼서 인실의 일은 명희가 떠맡게 되었다.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조용하에게 말할 필요도 없고 집사를 시키면 될 일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인실이 하필이면 그런 학교에 가려하는지,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명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인실의 사정이 궁금할 뿐 학교나 재단 쪽에 끼칠 결과에 대하여 터럭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처지가 다르고 오랫동안 만난 일이 없어서 서로 대하기가 꺼끄러웠으나 사제지간이라는 특수한 감정은 아무래도 서로를 아끼게 되는 모양이다.

인실과 함께 친정에서 나온 명희는 아쉬워하는 듯 할 말이 남아있는 듯 그런 표정인 인실에게 서둘 듯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별관 앞까지 왔을 때, 따라오는 하인을 손짓하여 가라 하고 명희는 도어를 민다. 손잡이의 싸늘한 감촉과 형태가 뇌수를 꿰뚫는 전기처럼 감각된다. 소파에 가서 두 다리를 모으고 앉는다. 방금 걸어 온 곳은 땅 아닌 허공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인실의 살아 있는 눈동자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것 같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얘기하던 오라비의 얼굴도 줄 끊어진 연과 같이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다. 명희는 마룻바닥을 한번 굴러본다. 이상현의 편지가 손끝에 느껴진다. 도어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처럼 날카롭고 아픈 것이 전신을 꿰뚫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명희는 비즈백 속에 든 편지를 꺼내 들지 못한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거야."

중얼거린다.

"왜 그렇게 오빠는 초라하게 보였을까, 기와 공장은 잘 생각하신 일인지 모르겠다."

끊어진 연줄을 찾아 끌어당기듯 명희는 중얼거린다. 일어서서 창가로 간다.

'돌개바람아! 불어라! 내 형체가 바스라지고 없어질 때까지 불어!'

외친다.

'누가 나를 묶었나, 내가 나를 묶었지! 풀어라! 풀어버리는 거야!'

아우성이다. 부서지는 파도다. 격렬한 감정이 출구를 찾듯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상현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조용하에 대한 증오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 생명의 불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기나긴 숨결, 부패의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사는 게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중독이야. 이 집안에는 사방이 독버섯이다!'

출구를 찾는 격렬한 감정의 아우성은 그러나 분출되지 못하고 명희 입에선

"오빠, 잘 생각하셨어요. 기와 공장, 그거 썩 잘 생각하신 일이에요."

그런 말이 나왔다. 되돌아와 소파에 앉은 명희는 편지를 꺼낸다. 서슴지 않고 봉투를 찢는다.

'명희씨 보십시오,'

그 글자에 머물러 있던 눈이 다음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겐가, 특히 명희씨에게 밝혀두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뚜렷이는 알지 못하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 것 같소. 사실 여러 가지 사랑이 있소. 남녀 간의 사랑, 육친에 대한 사랑, 우정,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여러 가지 성질의 사랑이 있소이다. 불타는 사랑, 연민도 사랑일 것이며 때론 미움이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오. 지금까지 내 몸속에 우글거리던, 중요하지 않았던 것을 모조리 ?아내고 생각한 것은 그 중요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얼마나 얽매여 살아왔던가 그 일이었소. 얽매여 살아왔다, 하면은 사람들은 옷을 입을 것이오. 이상현이 언제 얽매여 산 일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얽매여 살아왔다 할밖에 없소이다. 일견 얽매여 사는 것 같은 그런 사람 이상으로. 나는 그것을 풀려고 끝없는 도피의 길을 찾아다녔던 것이오. 그러나 나를 얽어맨 그것들이 사람 사는 데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자유인 것을 깨달았고 정적해지는 것을 느꼈소이다. 앞서 사랑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다고 했지요? 그것도 나로서는 깨달음이었소. 나는 지난달 어떤 기생을 사랑했소이다. 기생이기 이전에는 최참판댁 침모의 딸이었지요. 나는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을 동정이라 생각했소. 나중에는 바람기라 생각했소. 더 나중에는 수치로 생각했소. 그는 남몰래 내 딸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곳으로 도망온 뒤 그 여자는 비참하게 세상을 떴고 내 딸은 지금 최참판댁 부인이 거두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그 아이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소.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정이 필요할 것이오. 나는 어느 시기가 오면 조선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간 명희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도 부쳐 보낼 예정인 원고, 물론 잡지사에서 소화해주어야겠으나 그 원고에서 받게 될 원고료를 아이 양육비로 도움되게 선처하여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말미에 인사말이 있었고 편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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