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2-3
12장 강물에 띄워 보내고
교회지기 큰오라비는 교회에서 잘 것이다. 두만이 경영하는 술 도매상을 그만둔다 하더니 눌러앉게 된 둘째오라비 역시 가게에서 잘 것인즉, 집에는 늙은 아비와 장이만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궁이며 방구들을 손불 적기여서, 메뚜기 한철 만난 듯 바빠진 장이아비 염서방은 하마 코가 비틀어지게 잠들었을 것이고, 홍이는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부채를 들고 다릿거리를 서성대던 사람은 이제 없다. 행인이 별로 없다. 제법 밤바람은 썰렁했고 밤도 어지간히 깊었으니까. 부산서 떠나 진주에는 날이 저물어 도착했다. 홍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강가를 헤매 다니다가 이 다리까지 왔다. 한낮에 진주거리를 버젓이 나다닐 수 없는 것은 삼석이 때문이지만, 홍이는 그래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진주에 발목이 잡히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 생겨 안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주에는 뭣 하러 왔어.'
'장이를 만나러 왔지.'
그러나 홍이는 그 밖에도 볼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열흘 남짓 지나면 추석이다. 추석은 평사리에 있는 아비 곁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만은 확실하다. 부산을 떠나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평사리로 직행하지 않고 진주로 돌아온 이유는 막연하다. 아마 장이를 만나고 싶어 그랬겠지. 그렇다면 저만큼 보이는 장이 집으로 왜 달려가지 않고 민적거리는 걸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흥이는 죄의식 때문에 진주로 왔다. 장이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죄의식이다. 다른 또 하나의 죄의식, 밟아 뭉개고 싶지만 훨씬 더 쓰라리고 괴로운 감정, 그것 때문에 진주로 왔다 하는 편이 옳을 성싶다. 어미에 대한 감정이다. 설령 어미가 바위 같은 강자요 자신은 모래알 같은 약자일지라도 자신이 거부하는 심정이라면 어미에게는 엄연한 가해자가 아니겠는가. 상대로부터 어떤 고통을 받든 피해를 받든 가해자는 거부하는 쪽이다. 하물며 상대는 생모인 것이다. 그러한 가해의식은 어미와 멀리 떠나 있을 때 홍이를 더욱더 괴롭혔다. 멀리 떨어져 있을 적에는 임이네의 사람됨을 생각하기보다 그의 이력, 그의 주변 사정을 더 많이 생각하게 한다. 비참하다는 느낌, 연민의 정도 느끼는 것이다.
개천을 끼고 한쪽에는 임이네가 잠들었을 집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장이네 집이 있는 것이다.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홍이는 임이네와 장이가 동일한 여자라는 착각을 한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걸려 있었다. 날카롭고 기분 나쁜 초생달이다. 희미한 하늘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은 비봉산의 과히 높지 않은 봉우리가, 하마 일어서서 밤을 헤치며 다가올 것만 같다. 뭔지 모르지만 웅크리고 지켜보는, 하마 일어서서 밤을 헤치고 다가올 것만 같은 괴물에게 사로잡힌 듯한 자기 자신의 운명을 문득 예감한 흥이 등골에 차가운 것이 타고 내려간다.
'저놈의 초생달!'
비수를 휘두르면 최참판댁 안방으로 뛰어드는 광경이 떠오른다. 비수를 들고-전율을 느끼면서 땀이 배나는 것을 느낀다. 부산서도 퍼뜩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맥락도 없는 생각이 왜 또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자신에게는 원수도 상전도 아닌 아름다운 최서희의 모습이 눈앞에 지나간다. 임이네와 장이와 최서희와, 그것도 동일한 여자 같은 생각이 든다.
'왜 나는 여자를 이렇게 미워할까?'
숨을 돌리듯 천천히 발길을 옮겨놓는다. 장이네 집으로 발길을 옮겨놓는 것이다. 개천가의 좁은 길을 지나서 장이네 판자문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내왕하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골목 쪽으로 난 들창에는 불빛이 없고 문살만 꺼뭇하게 떠 있다. 홍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초생달을 올려다보다. 장이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이 괘씸하다. 묘하게 배신당한 느낌이다.
'식충이같이 잠만 처자빠져 자는 구나.'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빚어진 일이면 그것을 수습할 능력도 없는 터에, 자신이 안겨준 고민을 고민하지 않고 잠을 자는 장이가 미운 것이다.
'밥 먹고 잠자고, 여자들은 돼지같이 그것밖에 모를까?'
어릴 적에 곧잘 보아온 광경이다. 아비와 싸운 어미는 방바닥을 치고 제 가슴에 주먹질을 하면 대성통곡을 하다가도 이내 코를 골면 잠이 들곤 했다. 그 코고는 소리가 얼마나 징그러웠는지 모른다.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다져가면서 산더미만큼 밥을 떠가지고 입 속 깊숙이 밀어 넣던 모습.
"내사 아파도 밥이 묵고 저버서 못 누워 있겄더라."
김치 가닥을 손가락으로 찢어서 먹으며 황홀하게 웃던 얼굴, 잠 잘 때와 밥 먹을 때만은 아무 숨김이 없었던 어미의 얼굴이었다. 흥이 들창을 톡톡 친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자지는 않았던가. 들창문이 이내 열렸다.
"누구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 두 개가 홍이를 쏘아본다.
"나다."
"..."
"좀 나오너라."
"..."
"비봉산 그 나무 밑에 있을게."
홍이는 들창 밑에서 물러섰다. 싸구려 무명 양복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골목을 빠져나온다.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할 일이다.'
넓은 길을 곧장 걸어간다. 어둠이 김같이 서리며 골목을 지나가는 것 같다. 걸음을 빨리한다. 비봉산의 산자락, 장이와 밀회하던 나무 밑에까지 간 홍이는 엉덩방아를 찧듯 앉는다. 얼마간 앉아 있노라니 한기가 스민다. 양복깃을 세우고 팔짱을 끼고
'자식이란 뭘까?'
수수께끼만 같다.
'부모란 뭣일까? 왜 못 떠나는 걸까.'
알 수가 없다.
'조상은 무엇이며 백정 상놈 양반 임금... 족보도 부모형제 아무도 없었던 길상이아제는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길상이아제...'
길모퉁이를 돌다가 갑자기 마주친 그리운 사람처럼 길상의 얼굴이 크게 떠오른다.
'아제씨!'
언제였던지, 어렸을 때 용정촌에 살았을 무렵, 아비 심부름을 갔던 일이 생각난다. 들창문에 구멍을 뚫어놓고 길상이 구부정한 자세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일이. 그러니까 서희하고 혼인하기 전 총각 시절이다.
"아제."
홍이 의아하여 부르니까 길상은 손을 흔들며 가만히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홍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제."
"가만히 있어. 가만히 내다보는 거다."
뚫어진 문구멍에다 눈을 갖다대주는 것이었다. 들창문 밖 뜨락에는 참새 떼들이 모여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참새들이었다. 뜨락에는 수수알이 뿌려져 있었다.
"신기하지?"
길상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참새들은 미친 듯이 모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어미 새들이 제가끔 대여섯 마리의 새끼들을 거느리고서 새끼들 주둥이에 모이를 넣어주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제 새끼한테 먹이려고 에미끼리 싸우기도 했다. 새끼들은 이리 날고 저리 뛰고 하며 주둥이를 있는 대로 벌리며 아우성이었다. 길상은 홍이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뒷짐을 쥔 채
"홍아."
"야?"
"어째 참새란 놈은 사람을 안 믿을까? 문을 열고 내다보면 다 달아나버리거든. 지금도 쫑긋쫑긋 사방에다 정신 파느라고 어미는 제대로 먹지 못한다 말이야. 벌써 여러 날째 수수알을 뿌려주는데 도무지 나하고 친하려 안 하는 거야."
길상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아제, 어미 새가 불쌍하요."
"음, 날짐승이지만 거룩하다. 사람도 저만 못한 것이 있지. 자식을 낳아 버리는 부모도 있으니 말이야."
길상의 얼굴은 더욱더 슬퍼 보였다.
'아제씨!'
울음이, 소리도 낼 수 없는 울음이 밀려나온다. 언제나 다정한 아저씨였다. 조선 사람으로서 왜놈학교에 다닌다 하여 그애 책보를 뺏아 강물에 던진 사건 때도 길상과 송선생이 나서서 무마했었고 죽은 월선을 누님같이 대하던 길상이 홍이는 외삼촌이기나 한 듯 자랑스러웠는데, 멀리 떨어져서 생각을 하니 더욱더 그리운 것이다. 주갑이는 좋은 아저씨, 길상이는 그리운 혈육, 자랑스럽고 동경하면 사모하는 사람이다. 방금 비수를 들고 최참판댁에 뛰어드는 광경을 상상했었던 홍이는 길상이 최서희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실감할 수 없는 것이다.
"아제씨! 으흐흐흐..."
잡목이 맣은 비봉산 숲을 바람이 지나간다. 습기 없는 바람이 물기를 잃어가고 있을 잡목 잎새를 흔들며 지나간다.
"나, 왔거마는,"
양 무릎에 묻었던 얼굴을 치켜든다. 장이가 장승같이 서 있었다.
"앉아라."
잠긴 목소리를 음미하듯 그냥 서 있다가 장이 옆에 와 앉는다. 장이에게선 쌉쓰름한 녹두가루 냄새가 났다. 세수를 하고 나온 것 같다.
"와 그라요."
"뭘?"
"우니께..."
"..."
"나도... 그만,"
하다가 이번에는 장이가 운다. 부엉이도 운다. 왜 부엉이는 울며 장이는 왜 우는가. 나는 또 왜 울었는가. 사람은 왜 울어야 하고 금수는 무엇 때문에 우는가. 초생달은 하늘에서 심장을 꿰는 갈고리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혼사는 결정됐나?"
"알면서 와 묻소! 인지 와서 우쩔 기라고, 으흐훗훗..."
"그렇게 됐고나. 마, 잘됐다."
"머라꼬요?"
"잘됐다고 했다."
"끝끝내, 아이구 옴마!"
장이는 소리를 내며 운다.
"시집은 갈 작정을 한 모양인데 그럼 잘못됐다 할까?"
홍이는 다시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믄 내가 작정을 해서 가게 됐다 그 말이요?"
울음을 그치고 홍이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하고 함께 죽겠다는 생각은 해보았나?"
"..."
"내가 니를 데리고 달아나지 못하면 할 수 없다. 시집갈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틀림이 없지?"
"우짜믄, 우짜믄, 모, 모두 그쪽 맘대로, 그라믄 내가 우짤 기요! 흔적도 없이 떠날 때 떠난다는 말 한마디 했소?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 했던가요? 날 버리고 달아난 줄, 달아난 줄, 얼매나 우, 울었다고 이자 와서, 그때는 분하고 원통해서 보란 듯 살라고 했소!"
홍이는,
"그러면 혼삿날은 며칠인고?"
"혼사고 머고... 사람이 오믄 그냥 데리간다고,"
"왜 그런데?"
"우리 형편이 그러이까,"
"봉채는 받은 모양이군."
장이는 대꾸를 안 한다.
"사람은 언제 오는데?"
"며칠 안 남았소."
"하기는... 뻔하지. 나 같은 놈하고 살아봐야 평생 고생일 거다. 나는 아무데도 발붙이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지금이라도 가자 카믄 가겄는데,"
"가겠는데?"
"오래비 장개 비용으로, 거기서 온 돈은,"
"작살을 냈다 그 말이구먼."
"..."
"동생 팔아서 장가드는 놈 불알이나 있으까?"
"내가 가고 나믄 조석 끓이줄 사람도 없는데 우짤 기요! 속 편한 소리마소!"
"핑계다, 핑계. 돈푼 있다니까 가서 편하게 살 궁리를 한 거지. 나는 여자 말은 안 믿어. 입술에서 나오는 말과 복장 속에 있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뼈가 아리도록 보아왔단 말이다."
"그라믄 내가 잘못이다 그 말이요?"
홍이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장이 앞가슴을 잡고 일으켜세운다.
"니 시집가믄 어쩔래? 니 서방보고 첫날밤에 나는 처녀 아니요 하고 말하겠나? 아마 안 할 거로?"
홍이는 한 손으로 장이 앞가슴을 움켜쥔 채 웃는다.
"그래 거짓말로 너는 평생 살아갈 거다."
"그기이 뉘 때문인데, 아무렇게 살믄 무신 상관이요! 핑계는, 핑계는 그쪽에, 아이고 옴마! 으흐흐흣."
장이는 몸을 흔든다. 홍이는 와락 떠밀어버린다.
"데리고 도망갈 생각도 없임서!"
"그래 그렇다! 너 잘 아는고나."
"장난 삼아서, 천하 바람쟁이!"
"그래 갖고 놀았다! 이 가시나!"
"옴마 옴마아! 나는 우쩌믄 좋소!"
"시집가서 잘살아라. 못살거든 날 찾아와."
홍이는 뛰어서 산길을 내려온다. 한길가로 나서자,
"아아리랑 아아리랑 아아라리요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아!"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다릿거리까지 오는 동안 홍이는 계속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아리랑을 불러대는 것이었다.
"문 열어주소!"
집 앞에까지 온 홍이는 만취한 것처럼 발길로 문을 걷어찬다. 사립문을 열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야무네다.
"아니,"
"니 어매 잠이 깊이 들었다."
"야. 웬일입니까?"
"볼 일이 좀 있어서 왔더마는 니 어매가 하도 자고 가라 캐서..."
"야아."
홍이는 야무네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다. 그때야 비로소 임이네가 일어나 앉는다.
"아주 간 줄 알았더마는 그거는 아니든가배?"
빈정거린다.
"그간 별일 없었어요?"
립문에 발길질할 때와는 달리 평정한 음성이다.
"별일이 없었느냐고? 멀쩡한 정신이가?"
홍이는 어미를 빤히 쳐다본다.
"진주바닥을 시끄럽게 해놓고, 이놈아!"
임이네는 비녀를 뽑아 쪽을 단단하게 돌려 다시 비녀를 찌르며, 그 행동으로 단단히 따질 심산을 나타낸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아이를 보고 머를 그러노. 할말이 있이믄 새는 날에 하라모. 밤이 깊었다."
야무네는 말했다.
"모리거든 아무 말 말아라. 내 간장에 피가 진다. 자식놈 하나 있는 기이,"
"나 시끄럽게 해놓고 간 일은 없소. 추석이나 샐라고 왔는데 무슨 말이요."
홍이는 시침을 딱 뗀다.
"허허 참, 니 에미가 당한 수모, 한분 들어볼라나?"
"..."
"자식 덕에 호강은 못할망정 자식놈 따문에 더러운 연놈들한테 퍼붓기고 죄인 다루듯이, 지금 생각해도 이가 뽀독뽀독 갈린다. 와 남으 자식은 달고 갔노?"
"달고 가다니요?"
"삼석인가 오석인가 그놈아아를 니가 꼬아서 돈까지 들고 갔다는 말이 그라믄 헛말이라 그거가?"
"삼석이, 나는 모르는 일이요. 만난 일도 없고,"
"그 말 믿을 사람이 있일 성싶나? 한날에 없어진 두 놈이 함께 안 갔다고 누가 믿을 것꼬!"
"믿고 안믿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요? 나는 부산서 취직해 있다가 왔는데,"
"취직을 해?"
갑자기 어세가 누그러진다. 그 말대꾸는 없이,
"내일은 평사리로 가볼려구요."
임이네 얼굴이 순간 험악해진다. 홍이는 못 본 척 호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어 삼십 원은 호주머니 속에 도로 넣고 이십 원을 내놓는다.
"추석이나 새도록 하소."
"그 동안 번 돈이 그것가?"
"기술이나 배울까 싶어 있었기 땜에,"
"객리에 가서 묵고 입고 무신 돈이 모였겄나. 그거라도 가지왔인께 얼매나 고맙노."
야무네 말에,
"니는 모리거든 가만있거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리는 촌구석 무지랭이하고 같을 순 없인께."
너 아들하고 비교하니 아니꼽다는 투다.
"중학까지 나온 놈이, 보통학교만 나와도 면서기다 군서기다 하고 집에는 귀한 것 없이 싸가지고들 찾아가는 판국인데 피땀 흘려서 부모가 가르키놓으이께 머? 기술을 배운다고? 품에 넣은 거는 머꼬?"
"어머니는 이십 원 있으면 추석에 옷벌이나 장만할 거고 쌀가마나 들여놓을 겁니다. 나머지 삼십 원은 아부지 갖다드릴라고요. 제사도 지내고 성묘도 해야 안 하겠소?"
"하모 그래야지."
야무네는 그냥 기특하다는 생각만 한다. 임이네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 돈, 좋기 있일 때 내놔! 남우 집에서 제사 모실 것가?"
"..."
"니 애비가 공부 시킷더나?"
"죽은 엄마가 시킷지요."
홍이는 흥분하지 않고 말했다.
"이 목을 쳐죽일 놈이, 그 화냥년 애기는 와 하노!"
홍이 침을 삼키며 아랫배에 힘주며 참는다. 임이네도 월선의 얘기가 길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 눈치다.
"진주서 취직을 해도 한 달에 이십 원 벌이는 할 긴데 객리까지 가서 거반 일 년 만에 돈 이십 원이라? 내가 묵고 입고 쓸라고 그러나? 장개는 언제 들래? 좋기 있일 때 돈 인내놔. 에미한테 있는 돈 어디 안 가네라. 딴 자식이 있어 줄 기가 어느 못사는 친정이 있어 줄 기가. 뼈빠지게 허리끈 조아가믄서 사는 것도 다 니 때문이다. 니 아배는 언제 죽을지 모리는데 니 아배 죽고 난 뒤를 생각해봐라. 최참판댁에서 땡전 한 푼 나오겄나?"
달랜다.
"내 걱정은 하지 마소."
"그러니 니는 에미 걱정도 안 하겄다 그 말가?"
"..."
"전생에 무신 원수가 져서 니 겉은 것이 생깄노."
시작하는 것을,
"내일 아침에 얘기합시다. 자야겠소."
홍이는 불기 없는 작은방으로 들어와 불 켤 생각도 않고 웅크리고 앉는다. 큰방에서는 여전히 떠들어대는 임이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홍이는 야무어매가 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마 평사리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야무어매를 붙들었으리라는 짐작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같이 어미의 그 속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이나 욕심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홍이는 우는 자이를 내버리고 온 것이 맘에 걸렸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서 상대를 괴롭힌 일이, 그러나 그보다 진득이 눌어붙는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그를 외롭게 한다. 왜 장이는 좀 더 자기에게 매달리지 않았는가, 정말 그렇게 했을는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장이 한사코 매달렸다면 오십 원을 앞세워 어디든 달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잘됐다. 장이를 위해서도 그렇고 내 자신을 위해서도, 정 떠러지게 한 짓은 잘한 일이다. 나는 갈 거니까, 언제든 다 떨쳐버리고 어디를 가든 가버릴 테니까.'
"방이 추울 긴데, 이불 가지고 았다."
야무네가 방문을 열었다.L
"불도 안키고,"
야무네는 더듬거렸다. 홍이가 호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불을 켠다. 야무네는 마루에 놔둔 이불을 끌어들인다.
"니 내일 평사리 갈라나?"
"야."
"그라믄 나랑 함께 가믄 되겄네."
"그렇게 할까요?"
"홍아."
"야."
"머한다고 죽은 옴마 얘기는 들먹이노. 임이네 아니라도 누가 좋아라 하겄나? 앞으로는 어매 앞에서는 월선이 얘기는 하지 마라."
"진주는 무신 일로 오셨습니까?"
"딱쇠 따문에 왔더마는,"
"일은 잘됐십니까?"
"석이를 만내서... 일이 될 성싶은데 핵교 소사로,"
"석이형님이 그랬다면 될 깁니다."
"그것도 니 아부지가 가보라 캐서 왔다. 처음에는 땅이 될 성싶었는데 부치던 사람이 안 내놓은께, 나도 넘한테 적악함서까지 땅 얻느니보다... 이자는 살 길이 좀 트이는가 싶기는 하다마는, 그라믄 자거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웬일인지 임이네는 성이 잔뜩 난 얼굴이기는 했지만, 분명 할말이 남았을 텐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옛 친구 야무네한테는 몹시 올곧잖게 대하는 것이었다. 야무네는 임이네 눈치를 살피면서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만일에 여기 일자리가 생기믄 야무네 니도 따라올 기가?"
임이네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부르튼 얼굴을 펴고 물었다.
"오기는, 비사리 겉은 그거 버는 것 치다보고 살겄나. 밭때기는 하나 있인께, 사우가 좀 돌봐준께,"
"언제꺼지 그러까?"
"사우가 착하고 그것들 금슬이 좋아서,"
"소나아 맴이사 변할라 카믄 하루아침이더라."
야무네는 입술을 물다가,
"그거는 나도 생각하고 있다. 젊은 사람이 언제까지 병든 가숙만 돌보겄나. 그것도 친정에 와 있는,"
"정이란 떨어져 있일수록 멀어지게 매련이거든."
아픈 곳을 찌르며 약을 올린다.
"내사 사우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도 고맙기 생각한다. 푸건이도 그렇고, 발걸음 끊어도 원망은 안 할 기다. 지 말로는 섬에서 나와가지고 일자리 구해서 지 가숙 데리간다 해쌌지마는 무슨 대복으로 그걸 바래겄노."
"잘 생각한다. 나을 가망 없는 제집 믿고 소나아 앞길을 막으믄 안 되제. 남이 욕할 일이고오, 시가 식구들도 가만있을라 안 칼 기구마."
야무네는 입을 다물었고 홍이는 숟가락을 놨다.
"해도 짧은데 일찍 떠날까요?"
홍이 어미를 가로막듯 야무네에게 말했다.
"얼씨구, 거기 못 가서 미치고 기든는고나. 그 알량스런 애비, 하기는 일찍 떠나는 기이 좋기는 좋을 기다. 삼석인가 오석인가 그눔아아 에미가 알믄 그냥 안 둘 낀께, 경찰에 처넣겄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판인데,“
위협하듯 말했다. 야무네가 움찔하며 쳐다본다. 홍이 눈에 칼날이 서다가 만다.
"흥, 우짜믄 애비 자식이 그리 천상 요절로 닮았이꼬? 하는 짓짓이 꼭 같거든. 이날 이적지 어디 한분 가숙 대우를 하까, 자식 놈은 자식 놈대로 에미를 발싸개만큼도 안 여기니, 내가 이가놈 집구석에 무신 빚을 많이 졌길래 괄시받고 악문을 당하는고. 이분에 갔다만 봐라, 다시는 이 문전에 못 올 긴께. 나는 서방도 자식도 없는 년인께 죽어도 니손에 송장 맽기지는 않을 기다! 길가다 만내도 에미라 부르지 말아라!"
하다가 넋이 오른 무당같이 두 다리를 뻗고 슬픈 울음을 운다.
"시끄럽다. 머를 그래쌌노. 오리새끼는 물로 가더라고 남이 낳은 자식가. 함께 낳은 자식, 아배 찾아가는 기이 머가 우때서,"
임이네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모리거든 말 말라 안 카더나! 저 목이 뿌러질 놈이 에미를 에미로 생각는 줄 아나? 애비 자식 똑같이 나를 못 면해서 환장인 거를, 무신 철천지원수가 졌는고, 원통하고, 아이고오- 내 가슴에 맺힌 한을 어디 가서 풀어볼꼬. 아이구 내 팔자야! 이런 팔자가 어느 세상에 또 있겄노. 아이고오! 아이고오! 내 팔자야!"
홍이는 우두커니 쳐다보고만 있다. 울면서도 곁눈질로 홍이 표정을 살핀 임이네, 다른 때처럼 빨끈하지 않는 홍이가 이상하고 조금은 불안해지는 눈치다.
"허허어, 참 공연스리 이러네. 나 겉은 사람도 산다. 일본 간 지두 해가 넘도록 펜지 한 장 없는 자식도 있다. 추석이라고 돈 매련 하여 어매 보로 오는 기이 얼매나 대견하노. 내사 마 똑 부러바서 죽겄거마는,“
자식 칭찬만큼 부모에게 듣기 좋은 말은 없다. 야무네의 넋두리는 무당같이 슬프게 우는 임이네를 위로하기 위 한 말이다. 그러나 임이네가 바라는 것은 위로도 아니요 자식 칭찬은 더욱더 아니다. 집게손가락을 하고서 코를 행! 푼 임이네, 코맹맹이 소리로
"뱁새가 황새 따라갈라믄 가랭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예사 쇠 짧은 놈이 침은 길게 뱉을라 카거든. 자식한테 무신 공이 들었다고 내가 부러운고?“
언제 슬프게 울었던가, 임이네는 울음을 거두고 평소의 어투로 빈정거렸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남들겉이 공부를 시?단 말가, 개새끼 키우듯, 낳은 공도 가지가지라, 면판 바르게 낳아놓은 것도 에미 덕 아니든가?"
젊을 때부터 남의 비윗장 긁는 데 이골이 난 임이네 성미를 잘 알고 있는 야무네는 화가 나기보다 어이구 저 성미, 저 방정맞은 주둥이, 하며 마음속으로 혀를 찬다.
"별소릴 다 듣겄다. 인력으로 함사 선관선녀인들 못 낳았을라구? 하는 말도 참,"
하며 웃어버린다. 언제 나갔던지 마당에서,
"안 가실랍니까?"
홍이 음성이 들려왔다.
반백 머리에 초라한 몰골, 작은 보따리를 든 야무네를 앞세우고 거리에 나온 홍이는 문득 야무네에게 뭔가 추석 선물 같은 것을 사주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홍이는 장이를 위해서 수건 한 장을 사준 적이 없었던 일을 상기한다.
'왜 그랬을까. 왜 그리 몹시 굴었을까.'
그러나 홍이는 수건 한 장 분 한통 따위로는 마른 논에 물 한 방울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만큼 장이의 존재가 자신에게 큰 것이었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홍이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본다. 돈이 없다! 없어져버렸다. 통곡으로 한판 벌이기는 했으나 여느 때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지 않았던 어미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된다. 홍이는 쓰디쓰게 혼자서 웃는다.
"아지매."
"와?"
야무네가 돌아본다. 얼굴이 파리하다. 아침바람이 좀 썰렁하기는 했지만 철 먼저 떨어진 가랑잎 같다. 나이는 한또래건만 어미는 유월의 신록 같은데, 그러나 가랑잎이 어디 추한가, 슬플 뿐이지.
"저기,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요."
"볼일이?"
"지는 볼일 보고 내일 갈까 싶은데 먼저 가실랍니까?"
"같이 갔이믄 좋았일 긴데 할 수 없제. 그라믄 니는 나중에 오니라."
몹시 아쉬워하는 얼굴이다. 야무네와 헤어진 홍이는 곧장 영팔이 집으로 갔다.
"아이고, 홍이 앙이가? 보소, 보소! 홍이가 왔소."
판술네가 소리를 질렀고 까대기에 들앉아 연장을 고치고 있던 영팔이 얼굴을 내밀었다.
"니 어디 있었더노."
묻는다.
"부산에 좀,"
"여관집 아아하고 함께 갔다고 시끄럽더마는 정말로 그 아아하고 갔더나?"
"아니요"
홍이는 또 잡아뗀다.
"일찍은데 벌써 일갔는가 부지요?"
삼형제는 다 나가고 없었다.
"홍아, 아침은 묵었나? 안 묵었거든 채리주께."
판술네가 홍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먹고 왔소."
"방에 들어가자."
영팔이 일손을 놓고 일어섰다. 홍이는 뒤따라가며 몸은 여전하게 건장하지만 영팔이아제 머리는 아버지보다 더 희다는 생각을 한다. 방에 따라 들어온 판술네는,
"그래, 객리바람 쐬니께 어떻더노?"
웃으며 묻는다. 홍이도 웃기만 한다.
"실은 평사리에 갈라고 야무네 아지매하고 함께 나섰다가 돈을 잃어버려서..."
"야무네가 너거 집에서 잤던가배? 디다보로 간다더니, 나는 석이네 집에서 자는가 싶었다."
판술네 말은 제쳐놓고
"돈이 얼맨데?"
하고 영팔이 묻는다.
"삼십 원쯤, 부산서 월급 받았는데,"
영팔이는 당장 눈치를 챈다.
"얼매나 주꼬?"
"이십 원만 있으면,"
"그래라. 지금 갈래?"
"내일 아침 일찍 떠날랍니다."
"그라믄 석이 한분 찾아보고 가거라. 우리는 추석에 평사리서 만낼 기다마는,"
"그러까요? 보나마나 야단치겠지요."
"그것도 니를 믿기 때문이다. 니는 우찌 생각는지 모르것다마는 석이는 니를 친동기간겉이 생각는갑더라."
판술네는 맞장구를 친다.
"아제."
"와."
"길상이아제는 영 안 오까요?"
"뜬금없이 와 그런 말은 하노."
영팔이는 눈을 끔벅끔벅한다.
"어쩌다 생각이 날 때가 있지요."
"어디 쉽기 오겄나."
"오기만 하믄 세상에 부러울 거 없이 편할 긴데, 게울이믄 고추겉이 매운 그곳에서 와 고생을 하는지 모리겄구마."
판술네 말에 영팔이,
"임자는 가만있는 기이 좋겄네. 머를 안다고,"
"그러니께 모리것다 안 합디까?"
"답대비, 여자란 소견머리가 넓어서 자꾸 얼라가 돼가요? 자석들 덕분에 편한께로,"
"임자는 나가아, 나가라고."
영팔이는 마누라를 쫓아낸다. 그리고 신중한 표정이 되며
"니는 앞으로 우짤 기고?"
"글쎄요."
"니 나이 이제 스물 앙이가. 니 또래에 아아 애비 된 사람도 많을기다. 장개는 니 아부지 생각이 있어서 늦잡는겁더라마는, 그라고 니가 간도로 갔이믄 하고 생각하는갑더라."
"..."
"내 생각 역시 그 편이 낫일 성싶다. 거기 간다고 저저이 독립운동만 하는 것도 아니것고, 공노인이 기신께 니를 옳게 안 끌어주겄나."
"..."
"이곳에 살기로는 차라리 우리 판술이 제술이겉이 식자가 시원찮은 아이들이 나은 기라. 머든지 벗어제치놓고 해묵으이께. 왜놈들 등쌀에 식자나 좀 들었다 하는 젊은놈 부지하기 심들어 그놈들 앞잡이가 되거나 하다못해 면 서기질이나 한다믄 모리까, 자작으로는 아무 할 일이 없지. 자게 재산이나 있다믄 장시나 하지마는, 결국은 어정개비가 되고 세상일에 뜻이 없어지고 사람 베린다."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거는 아니지마는, 아직은 용정에는 가고 싶지가 않소. 아버지도 그렇고 어디 오래 사시겠습니까."
"니 맴이야 그렇겄제, 그럴 기다. 그러나 니 아부지는 생전에 니를 떠나보내고 싶어한다. 그 심정은 니도 잘 알 기구마, 니 아부지가 와 그리 생각는지."
"실은 지난번에 일본으로 떠나려 했지만,"
"하필이면 와 일본고."
영팔이는 펄쩍 뛰듯 말했다. 홍이는 잠자코 있었다.
"잔말 말고 공노인 살아 기실 적에 가는 기이 좋다. 그 노인들도 자식 없이 외로불 기고 반드시 니 앞길을 열어줄 어른인께, 혈육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제. 넓은 천지에 가서 머를 하든, 좋은 세상이 오믄은 아배 무덤이라도 찾는 기라."
"..."
"요새는 나도 우짠지 그곳 생각이 자꾸 난다. 고생도 할 만큼 했는데, 아마도 이곳 인심이 옛과 같이 않애서 그런지 모리겄다마는,"
해거름에 장으로 나간 홍이는 예쁜 당혜 한 켤레를 골라서 샀다. 신발을 살 때 홍이는 용정의 갖바치 박서방을 생각했다. 그리고 박서방이 짓던 신발보다 진주의 신발이 훨씬 세련되고 아름답다고 홍이는 생각했다.
홍이는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땅거미 지는 거리를 거닐었다. 장이를 만나 신발을 주리니, 거리를 헤매고 강변을 헤매고 밤이 깊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절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리라는 욕망도 목적도 없이, 그러나 홍이는 강물에 신발을 던져버리고, 옛날 용정서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책보를 뺏아 강물에 던져 버렸듯 던져버리고 밤길을 돌아가는 것이었다.
13장 혼담
"푸건이가 나앉았고나."
서서방의 자부 복동네가 들어서며 말했다. 고추를 펴놓은 멍석 한귀퉁이에 팔짱을 끼고 쭈그려앉았던 푸건이 비시시 웃는다.
"좀 우떻노? 기동할 만하나?"
보리방아를 찧고 있던 아무네가
"기동은 무신, 오솔오솔 칩다 캐서 볕바른 데 나 앉으라 캤지."
"그래도 업히 올 때 생각을 하믄 대금산이요. 뼈만 남아서 참혹해 못 보것더마는 지금이사 볼때기가 제법 볼고데데 안 하요."
"얻어묵은 것도 시원찮거마는,"
"죽이라도 어매가 조신부리 먹인께 자식한테는 어미밖에 없소."
"앙이다, 품안에 있을 때지. 저 아아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은 지임자가 왔다갔기 때문이다."
"어매도 참,"
푸건이 얼굴을 붉힌다. 다시,
"내가 머 빈말 했나?"
빈정거리듯 말했으나 야무네는 한시름 놓은 듯, 그도 그럴 것이 푸건의 병이 하루 이틀 새 나을 병이 아니며 완쾌될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그럭저럭 여름을 넘긴데다가, 위험한 고비를 겪고 병이 나은 사위 소식에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인연을 끊을 줄 생각했던 사위가 이따금 찾아와 딸을 보고 가는 것이 고마워 야무네는 한결 느긋해진 터였다. 복동네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치마를 털면서
"이불솜을 좀 갈았더마는 온 전신에,"
"복동네는 올해 미영 많이 땄제?"
"예년하고 갔지요 머."
"올 게울에도 눈이 짓무르게 베를 짜것구나."
"놀고 묵을 팔자라야제요."
"하기는 그렇다. 일을 해도 끼니 잇기 어러분 사람이 많은께."
"성님"
"와."
"동네서 뜰 끼라 카더마는 우서방은 도로 주질러앉았다믄서요?"
"그랬다더마."
"성님만 허탕쳤소."
"그렇기 그 땅을 바래고, 이자는 그렁저렁 살랑가 했더니, 내 복에?"
"최참판 댁에서도 무르게 나왔지마는 우서방 그 사람들 좀 독종이요?"
"그래서 나도 어기야버기야 그 땅 얻을라고는 안 했다. 좋기 내놓으믄 모리까,"
"참말이제 우서방하고 마당쇠만 쫓아내믄 동네가 얼매나 잠잠하겄소. 건디리믄 시끄러분께 모두 쉬쉬하는 바람에 더욱더 기고만장 못된 짓은 독으로 안 하요? 때쟁이 봉기노인도 못 당하더마요."
"그래도 이자는 전겉이 그리는 못할 기다."
"성님, 이자 고만 찧으소. 좀 까끄러바도 너무 때기믄 반실이요."
"그러까?"
방아를 도구통에 걸쳐놓다 말고 딸을 힐끗 쳐다본다.
"푸건이 땜에 그러는가배요? 웃쌀만 걷어서 주믄 안 됩니까."
"웃쌀을 얹어야 말이제."
"보리곱삶이를 아픈 사람이 묵다니, 애닮기도 하지. 내가 한줄금 찧어주께요."
복동네는 절굿공이를 든다.
"복동네, 오늘이 니 생일가?"
"와요?"
"오늘은 편한 모앵이니,"
복동네는 공닥공닥 방아질을 하고 야무네는 딸 옆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땀을 닦는다.
"무서리 나는 사림, 이자 딱 집어치S으믄 싶소."
"복동이는 얻어온 아들이며 복동네는 청상과부, 딸 주는 것을 꺼리는 것은 사실이다.
"복동이가 올해 몇고오?"
"열여섯 아닙니까."
"벌써 그리 됐나? 그아아를 안고 오던 것이 엊그제만 겉은데,"
"성님 머리가 반백 된 거는 모리고요?"
"하기사, 니도 오십이 낼모레니께."
"세월이 한도 없이 길고 밤도 길더마는 지나고 본께 잠시오."
"니 팔자도 기박하다. 주모가 있어서 이날 이적지 살았제."
"친정을 의지하고 안 살았소."
"생각이 나구마. 이십 년은 됐는갑다. 와 그 해 숭년 들었던 해가,"
"꼭 십구 년이요."
"니가 곡식 자리를 이고 허불며떠불며 오는데 그 곡식 자리가 어찌나 부러뎬平? 와락 달기들어서 뺏고 싶더마. 숭년 들어 사람 잡아묵는다는 말도 빈말은 아닐 기라."
"어매도 참, 그런 숭측스런 말 머할라꼬 하요."
푸건이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 해 중년에 시어무니가 돌아가시고 시아부니도 실성하싰고 말도 마이소. 친정서 곡식 말이나 얻어가지고 미친 듯이 온께, 세상에 어무니는 송장이 되어 계시고 아부니는 이문가문, 엉겁질에 삼베치마에다가 보릿가루를 싸가지고 개울가로 쫓아가지 않았겄소? 보릿가루를 물에 적시어 아부니 입에 짜 넣었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소."
"그때 윤보목수 아니더믄 온 동네에 송장 많이 났일 기다."
복동네는 방아질을 멈추고 보리쌀을 한주먹 집어서 문질러보더니 옆에 있는 사기에 퍼담는다.
"그랬을 기요. 우리집에 쌀 한 말을 가지고 왔는데 악이 받쳐서 막 퍼붓지 않았겄소? 사람을 굶기직이는 인심이 어디 있느냐고,"
"금년 추석에는 최참판댁에서 전곡이 많이 나올 거란 말이 있더마."
복동네는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나도 그 말을 들었소. 애기씨도 오시고,"
"애기씨가 멋꼬? 마님이지."
"육손이가 쫓기날 끼라고 울어쌌더랍니다."
"우는 거사 제 맘이 아닌께."
"멀쩡할 때도 있십니다."
"실성한 사람을 쫓아내기야 하겄나."
야무네는 보리쌀이 든 사기를 인다.
"아가, 내 보리쌀 씻거 오꺼마."
우물로 가는데 복동이가 따라온다.
"성님요."
"응"
"이서방 아들 참 좋데요."
"좋구말구"
"학식도 많이 들었다 카데요."
"보통핵교만 나와도 뭐한데 그 우엣핵교까지 나왔다 카이, 그 아아는 어릴 적부터 인물이 좋았네라. 아바니를 닮아서,"
"인물이야 임이네도 좋았지요."
"에미 얘기는 안 하는 기이 좋을 기다."
복동네는 우물가까지 따라왔다.
"복동네, 니 나한테 무신 할말이라도 있나?"
비로소 야무네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묻는다. 복동네는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주면서
"장개 보낼 나이가 넘었는데 와 이서방은 서둘지 않는지,"
그 말이 대답이다.
"누가 니보고 말 건네달라 카더나?"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머가 그리 미저지근하노."
"실은 말하기가 좀 어렵소. 혼사란 가이방해야 하는데,"
"대관절 말하는 사램이 누고?"
사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묻는다. 복동네는 두레박을 든 채,
"성님이 들으믄 놀랠 깁니다. 누군고 하니 김훈장 외손녀를 두고,"
"머라 카노?"
역시 놀란다.
"설마, 그쪽에서 그랬을 리는 없일 기고 이서방이 그러더란 말가?"
"아아니요."
복동네는 고개를 흔든다.
"그라믄,"
"그쪽에서 비치는 말이요."
"김훈장의 외손녀라믄 점아기, 산청으로 시집간 그 사람 딸 말가?"
"야. 지금 친정에 다리러 와 있소."
"그거는 나도 안다마는 그럴리 없다."
"그러니 내가 머라 캅디까? 혼사란 가이방 해야 한다고,"
"만일에 그기이 참말이믄 땅밑의 김훈장이 벌떡 일어날 기다."
"최참판댁 아기씨는 하인하고 혼인하지 않았소? 그러고 보면 될 얘기도 아닌 성싶은데,"
"그건 그렇다마는 어째서 얘기가 나왔이까?"
"홍이 가아가 요새 김훈장 댁을 자주 드다들다 하더마요. 만주서 김훈장이랑 함께 지낸 정리, 그라고 보통핵교를 나온 그 댁 아들이 말 친구가 되는갑더마요. 그래서 점아기 그 사람이 홍이를 유심히 본 모양이라요. 딸 가진 사람이사 다 안 그렇겄소?"
"그러믄 니보고 중매를 서라 그러더나?"
"체면에 그렇기까지 말하지는 않지마는, 청혼을 하믄 하겄다 그런 말이더마요. 맏딸이 열여섯이라 카든지,"
이런 얘기가 오가는 것을 알 턱이 없는 홍이는 오늘도 범석이네 평사리에 올 때마다 용이는 아들에게 인사갈 것을 명령했고 홍이 역시 김훈장에 대한 정리를 생각하여 순순히 아비 의사를 따랐다. 그러니까 범석이네 집과는 상당히 구면인 셈이다. 이번에는 추석까지 꽤 오랫동안 평사리에 체류하게 되어 무료하기도 했었지만 범석이는 좋은 친구였기에 종종 놀러가곤 하는 것이다. 김훈장의 장손 그러니까 양자로 데려온 한경이의 큰아들 범석이는 올해 열여덟, 홍이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외모로는 홍이보다 숙성했다. 다소 모자라지만 마음씨 착한 아비를 닮아 유순한 성품인 데다가 아비보다는 월등하게 총명했고 읍내 보통학교는 마친 뒤 집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범석이 있어?"
사랑으로 돌아간 홍이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들어와."
범석이는 싱긋이 웃으며 방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범석이네 식구들은 김훈장 신변에서 함께 지낸 용이 부자를 늘 존중하였고 특히 범석이는 그곳 얘기 듣기를 즐겨했으므로 언제든지 홍이가 나타나면 반가워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상대가 양반이어서 반말 쓰기에 저항을 느꼈던 홍이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동생 대하듯 했다. 범석이도 인습상 홍이에게 공대는 하지 못했으나 꼭 형이라는 칭호만은 붙여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부님은 어디 가셨나?"
"출타중이야."
"오늘은 한가하군 그래, 방구석에 있는걸 보니."
"추석 쇠고 나면 바빠지겠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응, 읍내 선생님이 빌려주신 건데, 후꾸자와 유끼자라는 사람이 쓴 가꾸몽노스스메(학문을 권한다). 좀 어려운 것 같애."
"열심이구나. 나는 책하고는 담쌌다."
"그래도 중학교는 나왔으니 나 같기야 할라구."
"용정서는 중학이었지만 진주의 협성학교 그게 어디 중학인가? 똥통 학교지."
홍이는 경멸하듯 웃는다.
"학교야 어떻든 공부만 하면 되는 거지."
"넌 서당 공부 했나?"
"학교 가기 전에,"
"한문에는 능통하겠구나."
"그렇지는 않지만,"
범석이는 겸손했으나 한문 공부는 꽤 했고 그것이 밑천이 되었던지 읍내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홍이는 범석이를 볼 때마다 용정의 정호 생각을 한다. 범석이 정호같이 수재형으로 생기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외모는 둔재같이 보였지만, 속이 깊고 아주 순박했다. 홍이는 정호를 숭배하듯 범석을 숭배하진 않았으나 그의 향학열을 존중하기는 했다.
"후꾸자와는 뭐하는 사람이야?"
"글세, 교육자라 할 수 있겠지.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일본을 부강하게 하는 데 큰 공이 있다 하더군, 선생님이. 또 사회개혁가라 할 수도 있고. 갑신정변도 후꾸자와 영향이 있었다 하기도 하고,"
"반가운 인물은 아니군 그래."
"우리 조선으로선, 일본놈치고 반가운 인물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책은 읽어야 하니까."
"네가 그리 공부하고 싶으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전 같으면 쉬웠겠는데... 요즘엔 사람들이 깨서 공부하겠다는 축들이 많고 보니, 집의 보조 없인 어려운가 봐. 나로선 왜놈들 도움은 받고 싶진 않아."
"그건 그렇지만 너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완고하면 안 돼."
"그래도 나는 할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홍이는 순간 범석으로부터 벽을 느낀다. 어릴 때 상현에게서 느낀 강한 거부의 벽을, 그것처럼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문 밖에서
"범석아"
"네, 고모님."
"누구 왔느냐?"
"네."
점아기가 방문을 연다.
"아아, 홍이로구나. 고구마 삶았는데 먹어보아."
"안녕하십니까?" 홍이 일어서서 인사를 한다. 점아기는 여느 농가의 아낙과 다름이 없는 차림이다.
"응"
점아기는 찬찬히 홍이를 살펴본다.
"몸은 건강한가?"
"별로 병 같은 것은,"
하다가 홍이는 당황한다. 너무 자세하게 살펴보는 눈초리 때문에 당황한 것이다.
"너이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점아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놀다 가거라."
점아기는 방문을 닫아주고 안으로 들어온다. 안방으로 들어온 점아기는,
"올케."
"예."
범석의 모친 산청댁은 추석에 입을 옷을 짓고 있었다. 그 역시 양반댁 마님이기보다 농가 아낙과 다를 것이 없는 차림이요, 일에 이골이 난 몸집이다.
"아무래도 아이가 맘에 들어요."
"글쎄 당자는 나무랄 데가 없더군요. 행동거지도 수말스럽고,"
"이서방을 닮았으면 마음도 착하련만,"
아무래도 임이네 때문에 꺼려진다. 점아기에게는 딸이 삼형제, 막내가 아들이었다. 큰딸 보연이는 괜찮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이기적이고 성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사주를 보아도 팔자가 세다는 것이다. 점아기는 늘 큰딸 때문에 근심이었다. 나머지 두 딸은 얼굴이 보연보다는 못했지만 온순하고 마음이 넓어 어미 속을 썩이는 일이 없었다.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만 보연이가 걱정이요."
"뭐 커서 셈나면 괜찮겠지요. 아이들은 열두 번 변성한다 안 합니까?"
"지체로 말한다면 혼인할 처지는 못되나 학식이 있어서 처신이나 예의범절은 되어 있을 것이요, 남자가 잘났으면 자연 안사람도 쑥어들 성싶고,“
"사랑에서 뭐라 하실지,"
"그 양반은 그런 데는 퍽 대범하지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아이 어민데 심성도 좋지 않지만 이력이 하도 험해서요. 전남편이 최참판댁 사랑양반 살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이,"
"그것은 그 아이하고 상관이 없는 일 아니겠소?"
시누올케는 함께 바느질을 하며 얘기를 계속한다. 산청의 가난한 선비의 집으로 시집간 김훈장 외딸 점아기는 시집간 몇 해는 무척 고생을 했었다. 조석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런데 마침 남편의 외가에서 도움의 손을 뻗쳤던 것이다. 고성의 토박이던 외가가 무슨 연유에선지 어항인 통영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림을 이룩한 것이다. 그런 연고로 현재 점아기네 식구들은 통영으로 옮겨가서 살고 있었으며 외가에서 지어준 위채 세 칸 아래채 두 칸의 초가집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새집 양반, 새집 처녀라는 호칭으로 대하였다. 넉넉하다 하기는 어려우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은 면하게 된 것이다. 오래간만에 친정으로 온 점아기는 이번 추석 서희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귀가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동네가 좀 시끄럽겠소."
"어째서요?"
"광대라든지, 사당패를 부른다 하더군요. 시누님은 오광대 구경하신 일이 있소?"
"구경한 일 없어요."
"이번엔 한분 구경 안 하시겠소?"
"글쎄."
"이젠 나이도 들었고 세상도 개명 많이 했으니까요."
"빤히 모두 아는 얼굴인데 상사람들 앞에 체면이 서겠소?"
"참 시누님도. 아 상사람하고 사돈할라 하시면서도?"
"그러니 작정하기가 어렵지요."
"작정 아니 하셨소? 그렇다면 말썽 사납게 복동네보곤 왜 발설을 하셨소."
"..."
"사람의 인연이란 모를 일이긴 하지만,"
"혼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사댁이니 생원이니 하고 가져오는 혼담을 보면 당자가 형편없고, 그렇다고 뭐 우리 지첸들 별 것 아니지 않소? 지체 있고 당자가 쓸 만하면 처갓집 살림 따지거든요."
하면서 점아기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저울질을 해보는 것이다. 인물 잘생기고 중학 과정을 밟았다는 것은 다른 혼처에 비하면 월등한 조건이었다. 미관말직의 쥐뿔도 아닌 문벌을 내세우며 건네는 혼담에는 서당공부도 변변치 못한 무식꾼이 있었고 상민 출신이 친일 하여 돈푼 모은, 그러니까 양반과의 혼인으로 자신들 지체를 높이려는 그런 사람도 있었다. 하나하나 꼽아보면 옛날과 달리 상민이 큰 장해는 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조건에서 홍이 만한 사윗감은 없다. 그러나 임이네가 치명적인 것이다. 처녀 시절 한마을에서 시종하여 임이네 행적을 보아온 점아기로서는 그런 여러 가지 사연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불미스러운 가지가지 풍문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아버님은 그애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올케는 못 들으셨소?"
"글쎄요. 홍이 그 아이 말로는 돌아가신 어린 생각이 난다는 뭐 그런 얘기였소. 아버님께서 그 아이를 마땅찮게 생각하셨다면 찾아오기나 하겠어요?"
"그건 그래요."
"범석이가 더 잘 알지 모르겠군요. 그곳에서 지내신 할아버님 형편을 몹시 알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렇겠군요."
"하지만,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만 괴정에 두 청상이 함께 돌아가신 김진사 댁 말입니다."
"아버님의 재종이었소. 이제는 집터마저 없어졌지만."
"누가 씨는 양반이니 한복이를 김진사 댁 양자로 삼으면 어떻겠느냐 그렇게 말했다면서요?"
"음... 그런 일이 있었지요. 이십 연도 훨씬 넘은 옛일이오. 죽은 윤보라는 목수가 그런 말을 했지요.“
"아버님께선 노발대발하셨구요."
산청댁은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킬 심산인 모양이다.
"우셨어요. 가세가 기우니 상놈들마저 우습게 본다고, 백정놈의 씨를 양자 삼았음 삼았지 살인 죄인의 씨를 어찌 양자 삼을까 보냐 하시면서, 아버님은 이십 세에 등제한 진사어른을 당신 몸보다 더 위하셨고 문중의 영광으로 생각하셨지요. 아주 영명한 어른이던가 봐요. 제가 어릴 적에도 두 청상이 계시는 집은 우리집보다 먼저 손질을 하셨어요. 여인네만 사시는 집이라 하여 늘 단속도 하였고."
산청댁은 인두질을 하고 나서 저고리를 뒤집는다.
"시누님."
"예."
"이번에는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오신 김에 절에 안 가시겠소?"
"절에?"
"예."
"불공드리러 가잔 말입니까?"
"실은 해마다 내는 무명 중에 두 필 몫만 따로 모았어요. 그리해서 모은 돈이 십오 원 가량 됐더구먼요. 금년에는 어쩔까 생각했던 참인데 시누님 오신 김에,"
"...?"
"철없이 시집와서 대소사가 분분한 중에 정성껏 아버님을 한번 모셔보지도 못하고 그것만으로도 자식된 도리가 아니거늘 무덤 한번 찾아보지 못하고 원통한 고혼이 얼마나 자식들을 원망하겠습니까. 지난 백중날에는 어짜까 생각했다가 명년으로 미루었지요. 자식들 정성이니 아무 날이면 상관 있겠소? 망령의 천도나 빌어봅시다."
"올케, 고맙소. 딸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보오."
점아기는 눈물을 찍어낸다.
"자식 노릇 한번 못하고 아버님 은덕으로 사는 우리야말로 주제넘지요. 재를 하는 것도 아니겠고 불공이면 십오 원으로 족할 게요."
"족하구말구요. 선영봉사, 짐도 무거운데, 나는 참말 면목이 없소."
시누이와 올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바느질을 하고 있는 동안 사랑의 범석이와 홍이는 낚시대를 들고 강가로 나갔고 읍내까지 볼일을 보러 갔던 한경이 나룻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온다. 풀을 베 오던 마을 젊은이들은 지게를 진 채
"김훈장댁 어른 읍내 갔다 오십니까?"
인사를 한다. 마누라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한경이는 지난날 김훈장이 그러했듯이 나이보다 늙어 보였고.
"요즘엔 매일 풀 베는구나."
"그래야 마음 놓고 추석을 쇠지요."
"그렇기는 해."
집으로 들어간 한경이는
"방에 없소?"
산청댁과 점아기가 나온다.
"오라버니, 이제 오시오."
"으음."
하다가
"임자, 생선 좀 사왔는데 누이한테 대접하구려."
어떻게든 성의를 표시하려고 애쓴 나머지 안 해도 좋은 말을 하고서는 쑥스러워서 웃는다.
"오라버니도 참, 대접이라니요? 제가 뭐 손님인가요?"
"쉽게 못 오니까 그렇지. 참, 내 오늘 읍내서 이부사댁 이공을 만났구먼."
"추석이라서 내려오셨는가 부지요."
"내 범석이놈 얘기를 했지."
"범석이 얘기는 무엇 땜에 하셨습니까?"
"공불 안 할라 해도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데, 하고 싶어서... 그러는 놈을 집구석에 들어앉혔으니,"
"염치없이 무슨 그런 말씀까지 하시었소."
산청댁은 눈살을 찌푸린다. 남편이 못난 짓을 하여 웃음거리나 되자 않았을까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염치가 없기는, 인재를 촌구석에 썩이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옳잖은 일이요. 그 양반도 나라일을 하는 마당에,"
"그래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점아기가 묻는다.
"친구한테 부탁해보겠노라 하시더군."
"그 양반한테도 우리는 빚을 지고 있는 처진데,"
"임자는 어찌 그렇게 말하시오? 아버님도 나라를 위해 가신 것은 마찬가진데 신세졌다, 어이구 참,"
"올케, 그건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요."
점아기는 웃으면서 말한다. 한경이도 아까처럼 피식 웃는다. 누이라지만 실은 남남이었고, 출가 전에 잠시 얼굴을 익혔을 뿐이어서 몇 년 만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쑥스러운 것이다.
"참 시누님, 제가 깜박 잊고 있었소.“
"뭘 말입니까?"
한경이도 뭐 말이냐는 듯 입을 반쯤 벌리고 아내를 쳐다본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인편으로 보내온 기록 말입니다. 아버님이 기록하신 것,"
"예, 그건 알아요."
"읽어보시지는 않으셨는지요?"
"한문이 짧아서,"
한경이는 슬그머니 하늘을 본다. 그 자신도 학식이 부족하여 읽진 못했다.
"걸핏하면 범석이가 꺼내 읽곤 한답니다. 하니 범석이더러 읽어서 알기 쉽게 말해달라 하십시오."
"새삼스럽게 그거는 왜요?"
"아버님께서 그애를 어찌 생각하셨는지 아까 궁금해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아."
"그곳에서의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하셨으니 그애에 관한 구절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임자, 그건 무슨 말이오?"
산청댁은 장난스럽게 웃는다.
"일이 시원찮을 것 같으면 모르시는 편이 낫고 성사가 된달 것 같으면 자연 아시게 될 것이오."
"모를 말을 하는구먼."
한경이는 중얼거리며 사랑으로 돌아나간다. 돌아가는데 나룻배에서 들은 이상한 얘기가 생각난다. 지리산 속에 수백 명의 의병이 모여 들었다는 것이며 한번 치고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한경이 옆에 웅크리고 앉은 두 사내가 소곤거리듯 낮게 하는 말을 한경은 무심결에 들었던 것이다.
"관에 가서 고하기만 한다믄 큰돈 한분 손에 쥐어보는 것은 따놓은 당상인데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제."
"말이 의병이지 실상은 도둑떼 아니까? 도둑떼라믄 고한 것도 잘한 짓이고 게다가 상금 타고."
"허허어, 의병이라든데? 그깟 놈의 수백 명, 수천 명이라도 별수 없는 기라. 왜놈이 알기만 하믄 하리아침에 박살이다. 공연한 짓해서 삼이웃이 시끄럽기만 할 기고, 나도 이 나라 백성인데 아무리 돈이 좋기로 고해바칠 수는 없지."
두 사내는 한경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펴가며 소곤거렸다. 사랑으로 들어간 한경은 갓을 벗어걸고 도포도 벗어 놓고 자리에 눕는다.
'미친놈들 공연한 소리지. 의병이 어디 있을 거라구. 왜놈이 이 잡듯이 다 잡았는데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지. 우리 대에는 선영 모시고 가만히 엎드려 있을밖에.'
도로 일어나 앉은 한경은 목침을 밀어버리고 담뱃대를 찾아든다.
14장 탈 속에는
거의 이십 년 만에, 평사리의 추석은 풍성하였다.
올벼를 베었을 뿐 논에는 황금물결이 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평작은 넘은 농사여서 떡쌀을 담그는 마을 아낙들의 손길은 떨리지 않았고 옛 지주요 오늘날의 지주인 최서희가 모처럼 행차 선물인 듯 적잖은 전곡을 풀었으며 밤에는 오광대까지 부른다는 얘기였다. 홍이는 추석놀이를 위해 이틀 동안 아비에게 장고 치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했다. 차례 성묘가 끝날 무렵, 반공중에서 서편으로 해가 약간 기울 무렵 타작마당에 징이 울리면서 놀이는 시작되었다. 놀이꾼들 속에서 용이는 장고를 짊어졌고, 봉기와 성묘차 온 영팔이도 고깔을 쓰고 나섰다. 1903년, 보리흉년으로 거리마다 아사자가 굴러 있던 비참했던 그해, 마누라를 굶겨죽이고 그 자신도 실성하여 걸식하던 서금돌 노인은 없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던 구성진 그 목청은 없지만 놀이는 옛적과 다름없이 가슴 설레이고 흥에 겨운 것이었다. 느릿느릿 징을 치던 두만아비도 없고 북을 치던 칠성이, 팔팔거리던 윤보, 한조는 모두 세월에 쓸려서 가고 없지만 놀이는 변함없이 흥겹고 가슴 설레이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무색옷이며 풀발 선 아낙들의 치마 스치는 소리며, 그러나 하얀 베수건 어깨에 걸고 싱긋이 웃으며 맴을 돌며 장고채를 잡던 인물 잘난 사나이, 이제는 늙고 병든 몸이, 장고도 어깨에 무겁고 맴을 돌 때마다 눈앞은 캄캄하다. 용이는 아들에게 장고를 넘겨주며 눈물 짓는다. 영팔이와 봉기도 고깔을 흔들어보다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고, 젊은 청춘들만이 아득한 갈 길을 오늘 하루나마 잊고, 내일은 보리죽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타악기에 말려들어 땅을 구르며 난무한다. 꽹과리는 경풍든 것처럼 빠르게, 드높게 울리고 징은 여음을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장고와 북이 어울린다. 홍이는 자기 장단이 없다. 꽹과리를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저절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타악도 사람도 함성도 한덩이가 되어 울리고 움직인다. 구경꾼도 산천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울리고 움직인다. 깨갱 깨애깽! 더으으음- 깨깽 깨애깽! 더으으음- 날카롭고 둔중한 소리에 하늘과 산과 강물이 돌고 사람이 돌고 땅이 돌고 단풍든 나무들도 우쭐우쭐 춤을 춘다.
"아바이하고 영상이다. 젊었을 때 이서방이 꼭 저랬네라, 우짜믄 인물이 저렇기도 좋겄노."
상기된 홍이 맴을 돌면 장고채가 휘청거린다.
"참말로 세월은 눈 깜짝하는 새,"
"심 좋다든 영팔이도 나이는 못 속이는개비여."
"전에는 두리아배도 헤죽헤죽 잘 웃어쌌더마는,"
야무네와 복동네와 파파할멈이 다 된 영산댁의 말이다.
"다 늙어감서 싱겁거로 춤은 무신 놈의 춤고,"
봉기 마누라는 혀를 찬다.
"복동네야, 니 시아부지 생각나제?"
"야."
"목청도 좋더마는 가고 나니 못 듣는다."
"역발산 진시왕도 죽으먼 소용 있간디?"
"진시왕인가? 항우장사지."
구경꾼 속에는 범석이가 있었다. 한복이도 웃고 서 있었다. 산청댁과 점아기도 나란히 서 있다. 점아기의 눈은 홍이만 따라다닌다. 구경 나온 것도 홍이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선지 모른다. 처녀아이들의 화제는 강변 모래밭에서 밤에 벌어질 오광대에 관한 것이었고 며칠 동안이나마 홍이와 한집에 있는 언년을 부러워하며 놀려대는 그런 것이었다. 아이들과 강아지가 먼저 뛰어간다. 놀이꾼들은 타작마당에서 마을길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타악 소리는 어느덧 늘어졌고.
하늘에는 잔별도 많다.
쾌지나칭칭 나아네!
노래를 선창하는 사내는 사십대에 들어선 바우, 놀음을 좋아해서 자작농으로부터 소작농으로 떨어진 바우다.
시내 강변 잔돌도 많다,
쾌지나칭칭 나아네!
타악이 늘어지면서 노랫소리가 높아지니 춤은 멎게 된다. 노래를 위주로 한다. 갑자기 희열의 절정에서 비애의 나락으로 떨어진 듯, 오열하고 하소연하고 멍울 같은 한이 가락마다 굽이굽이 넘어간다. 다시 타악기는 신들린 것처럼 빨라진다. 선창은 사라지고 괘지나칭칭 나아네! 괘지나칭칭 나아네! 되풀이하며 보다 빠르게 놀이꾼들의 몸은 팽이같이 돌아간다.
하루의 해가 저물었다. 놀이꾼도 구경꾼도 각기 제집으로 흩어져갔다. 그러나 밤에 있을 오광대에 대한 기대 때문에 마을은 여전히 술렁거렸다. 노인층은 옛만 못하다 했다. 젊은 층은 신풀이 자알 했다고들 했다. 아이들은 배탈이 나고 혹은 저녁을 마다했다. 그리고 젊은 층과 늙은 층, 여자들과 남자들의 화제는 최참판 댁 서희 모자와 오광대에 관한 것으로 갈리었다.
"비어묵어도 비린내 하나 안 날 것 같더마."
"비어묵을 소리 한다. 숭년 들었다, 사람 잡아묵게."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지. 구신겉이 이삔께 해보는 말 앙이가."
"아들 형제는 우떻고,"
"씨도 좋고 밭고 좋은께 자연고로 그리 될밖에 더 있겄나."
"쓰는 좋을 것도 없지이."
"와 씨가 안 좋노. 내가 어릴 적에 보았는데 관옥 겉더라."
"그래도 하인 아니가."
"제에기, 아 하인이믄 아마빡에 도장 딱 찍어서 태어난다 카더나! 내가 족보 얘기는 안 했다. 아들 형제 인물 보고 한 얘긴께."
젊은 층 사내들의 말이었고 젊은 아낙들은
"그 많은 복, 머리털 하나만큼이라도 뽑아주믄 아마 보리죽 신세는 안 면하겄나?"
"보리죽 신세만 면하까? 비단옷은 입게 될 끼다. 길쌈 안 하고 끌밭도 안 매고,"
왕사를 아는 장년 노년층의 남정네들은 서희가 평사리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무슨 변동이 있을 것이란 말들을 하며 수군거렸다. 전곡을 푸짐하게 내놔서 유감없이 신풀이를 했고 밤하늘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백사장에 벌어질 오광대 굿에 대한 기대도 컸으나 일말의 불안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점아기와 산청댁은 다른 농민들처럼 서희와의 사이에 이해관계는 없었지만 김훈장과 서희와의 인연, 얽히고설켰던 인연을 생각하여 정성들여 지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정중하고 경애스런 마음으로 최참판 댁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관례적인 것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어 두 여인네를 대하였다. 반가의 부인이라 예우는 했으나 살얼음같이 냉담하여 두 여인네는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묵묵히 돌아오는 길에 점아기가 입을 떼었다.
"올케."
"예."
"야들야들한 그 손을 생각하니 우리네 손을 소나무 껍질이오."
얼마간의 울분을 머금고 음성이다. 그 말대꾸는 아니 하고 산청댁은,
"본시 성미가 찬가 부지요."
"최씨네 여인이니까,"
"..."
"하기는 여자몸으로 그것도 어린 나이에 좀해서 잃은 만석 재산을 찾았겠소? 우리는 손가락에 불을 켜서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
"기상이야 어릴 때부터 대단했지만,"
"우리가 뭐 잘못한 거는 아닐까요."
"잘못한 게 뭐 있겠소. 지체가 다르고 사는 풍도가 달라서 그렇겠지요."
달빛과 장작불과 백사장과 강바람, 오광대가 벌어진 강변으로 마을 사람들은 다 몰려갔다. 마을은 텅텅 비어 불빛이 새나오는 집이라곤 언덕 위의 최참판 댁뿐이었다. 갓을 이마 쪽으로 내려쓴 사내가 동저고리 바람의 사내와 소리를 죽이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최참판 댁 뒤채, 옛날에 김서방 내외가 거처하던 곳에서. 이윽고 사내는 마루 끝에 걸터앉고 동저고리 바람의 사내가 급히 안으로 들어간다. 대청마루에까지 간 사내는,
"마님."
"장서방이냐?"
"예."
"밤에 웬일이냐."
"급히 아뢸 말심이 있어서,"
"말하게."
"혜관시님께서 화급한 일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무슨 일로?"
"만나뵙고 여쭙겠다 하옵니다."
"사랑에 들게 하라."
"예. 허나 다른 사람이 알믄,"
"알았다."
갓을 내려쓴 사나이는 사랑으로 들어갔고 서희도 연학을 거느리고 사랑에 든다. 연학은 물러나 사랑과 안채 사이의 문을 지키고 선다. 사나이는 서희가 방으로 들어섰는데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길상이를 예감했던 서희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밤중에 무슨 일로 오시었소."
사내는 갓을 벗었다. 상투는 없고 자른 머리다.
"오래간만일세."
서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구천이, 아니 김환이었던 것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서희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용정에서 대면하고 몇 해 만인가?"
서희는 입술을 피가 나게 문다. 이 세상, 두 자식말고는 단 하나뿐인 혈연이다. 어미를 뺏아갔고 부친의 이부동생이며 간부인 사내, 하늘같이 우러러보았던 할머니 윤씨의 부정한 씨.
"감히, 어디라고 오시었소."
"글쎄, 가라면 가겠네. 쫓기는 몸이라서 왔다만,"
"..."
"허락한다면 잠시 이곳에서 피신하겠네만,"
얼굴은 쫓기는 사람 같지가 않다. 옛날같이 절망의 정열, 스스로 위기에다 몸을 내던지고자 하는 감정과 제어하려는 의지와의 싸움, 그 날카로움, 오뇌,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이다. 김환은 이제 자신을 자연으로 환원시킨 것일까. 서희는 그것을 느낀다.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영혼의 경지를 느낀다.
"위에게 쫓긴단 말씀이오."
"왜헌병이네."
"이곳은 안전하겠습니까?"
"아마도, 이삼 일이면 족할 걸세."
서희는 연학이를 부른다.
"사당으로 가자."
집안 식구들 모르게 숨길 곳을 사당밖에는 없다. 사당의 마룻장을 들어내고 환이 그곳으로 들어간 뒤 다시 마룻장을 끼운다. 사당 문에 쇠통 채우는 소리를 들으며 서희는 현기증을 느낀다. 김환이가 최참판댁 그 면면한 조상들의 위패를 뫼신 사당 안에 들다니, 서희는 대숲 사이에서 얼굴을 내미는 달을 올려본다.
"열쇠를 이리 주게."
"예, 마님."
연학은 깊이 고개를 숙인다.
강변 시장에서는 오광대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울리었다. 여남은 명의 왜병정들이 총대로 구경꾼들을 포위한다. 구경꾼들은 모조리 일어섰다. 마당쇠가 맨 먼저 뛴다. 아우성 속에 총성이 울렸다. 마당쇠는 곤두박질을 몇 번 치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당쇠 마누라의 비명이 울린다.
"꼼짝들 말라이! 움직이는 놈들은 쏘아죽인다이!"
아이들이 울부짖는다.
"시끄럽게 구는 새끼들도 쏘아 죽인다이!"
어른들은 울부짖는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장작불은 끄지 말고오!"
총대를 들고 포위한 채, 소리 지르다가 왜병정들은 구경꾼들을 한 가운데로 몰아붙인다. 안으로 몰려 들어간 구경꾼들, 장작불 타는 곳만 남겨둔 채, 그것을 마치 똬리 같은 형상이었다. 그래도 총대는 계속하여 몰아붙인다.
"어떤 놈이든지 움직이면 쏘아 죽인다이!"
왜병정들은 두 명의 감시병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마을로 향한다. 마을 요소마다 길목마다 왜병정들이 배치된 채 밤을 지새운다. 새벽안개가 걷혔을 때 왜병정들은 마을 빈집의 수색을 개시하였다. 기동이 어려운 노인이 몇 사람 남아 있었을 뿐 왜병정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마을의 수색이 끝나자 서녀 명은 최참판 댁 대문을 걷어찼다.
"무슨 일이시오."
연학이 고분고분 허리를 굽히며 묻는다.
"이상한 놈들이 안 왔소까!"
"예, 아무도,"
"살라거든 바린말이 해라이. 이쪽으로 여러 놈이 왔단 말이다이!"
"개미 한 마리도 못 보았소."
"이놈으 자식이 잔말이 많다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친다.
"어이구우, 나으리 살려줍쇼."
연학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쥔다. 모두 오광대 구경에 나갔고 유모와 안자가 허로의 몸을 의지한 채 서 있었다.
"네놈이 주인이소까?"
"아, 아닙니다요, 나으리."
이때 긴 치마를 끌며 서희가 대청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따라 나오는 것을 타이르며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내가 주인인데 무슨 일로 오시었소."
유창한 일본말, 엄숙한 눈빛에 뱃삥(미인)이라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킨 왜병정이 다소 정중하게 묻는다.
"당신이 주인이오?"
"그렇소."
"작전상 가택 수색을 해야겠소."
"여기는 적지가 아니지 않소? 선량한 국민이 평화롭게 사는 곳이오."
다소 멈칫하다가
"우리는 경찰이 아니오. 우리는 군인이오. 필요할 때는 이유 불문코 우리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소. 그러면 수색 전에 묻겠소. 이상한 놈들이 안 왔소?"
"이 집에는 이상한 놈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오."
"어째서 그렇소?"
"내가 설명하기는 거북하오. 하동 관청에 가서 물어보시오 더 정확히 알려거든 진주 관청에 연락하여 알아보시오. 그러면 이 집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오."
왜병정은 완연히 기가 꺾인다.
"그러나 우리 군대는 관청의 지시 따윈 받지 않소. 우리의 임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못하오. 부인, 죄송하지만 가택수색은 해야겠소."
정중하게 나왔으나 가택수색은 포기하지 않는다. 서희는 빙그레 웃는다.
"직무에 충실한 군인이군요. 그렇다면 할 수 없소. 협조하는 뜻에서, 한데 무슨 일로 그러시오?"
"지리산 폭도들이 이리로 빠졌소."
"지리산에 아직도 폭도들이 남아 있었소?"
"모조리 소탕했는데 잔당이 재규합한 모양이오."
아주 누그러져서 어투는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는 수색을 개시하는 듯 집총한 채 서희 미모에 넋이 빠진 나머지 멍청이가 된 듯 세 명에게 손짓을 한다.
"예의를 지켜주시오. 집안에 오를 때는 신발을 벗어주시구요. 아시었소?"
"그, 그렇게 하겠소."
범치 못할 위엄에 눌린 듯, 왜병정들은 갈라져서 수색을 시작한다.
"마인, 저놈들한테 술이나 퍼 안길까요?"
연학이 다가와 나직이 말한다.
"그럴 필요 없네.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비교적 조용하게 집안을 뒤져나갔다. 서희가 말한 대로 방안을 수색할 때는 벗기 귀찮은 군화를 벗었으며 집안 규모의 웅장함에 내심 놀라는 것 같았다.
"어머님, 군인들이 왜 저러지요?"
환국이와 윤국은 왜병정이 안방을 뒤질 때 어미 옆으로 쫓아 나오며 날카롭게 말했다.
"걱정 말어라. 우리 집뿐만 아니란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아까 서희와 얘기하던 병정이 나타났다.
"부인, 대숲 속에 있는 집엔 열쇠가 채워져 있소. 부술 수도 있는 일이나 예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으니까요. 열쇠를 주시겠소?"
"열어드리지요."
"손수 안 그러셔도 좋소. 열쇠만 주시오."
"그곳에 어떤 곳인 줄 아시오? 이 집에서는 가장 신성한 곳이오. 나말고는 열 수가 없소이다."
"하하하, 보물이 있는 곳이구먼요."
서희는 잠자코 앞서 간다. 자물쇠를 열고 사당문을 활짝 열어젖힌 서희는
"이렇게 나는 협조하였소. 이곳은 신성한 곳이오."
병정은 머리를 디밀고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뭘 하는 곳인가요?"
"조상의 사당이오."
"아 예. 실례했소이다."
대숲 길을 나오면서 왜병정도 임무가 끝난 안도감 때문인지
"부인은 대단한 부자신데 어째서 이런 시골에서 사시오."
"이곳은 내 본가요. 살기론 진주며, 사당에 참배하러 왔소이다. 당신들 때문에 조상들이 여간 노하지 않았을 게요."
서희는 천역스럽게 농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임무이니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부인은 굉장한 부자시고 아릅답고 또 일본말이 유창하시구먼요. 언제 일본말을 배웠습니까?"
"일본인 친구가 많아서 그런가 보지요."
"네, 그렇습니까."
왜병정들은 서희에게 경의를 표하고 나갔다. 아침 해가 뿌옇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사장에 마당쇠 시체는 그냥 나둥그러져 있었고, 장작불을 꺼졌으나 똬리는 풀리지 않은 채, 사람들은 돌같이 굳어버린 상태로 몸서리쳐지는 밤을 지샌 것이다. 여남은 명의 왜병정은 백사장에 집합했다.
"틀림없이 이 중에 폭도들이 있을 것이다! 가차없이 색출하라!"
처음 여자들과 아이들을 갈라내어 한곳으로 몰아붙인다. 추위와 공포 때문에 먹빛이 된 입술을 실룩거리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허둥지둥 몰려간다. 마당쇠댁네는 붕어처럼 헛입을 놀리며 실신한 듯 기어간다. 왜병정들이 발길질을 하며 총대로 엉덩이를 갈긴다. 다음은 늙은이들을 가려내어 한곳으로 몰아붙인다. 청년과 장년들만 모래밭에 한 줄로 세운다.
광대들은 탈을 쓴 채, 그도 그럴 것이 광대놀이 도중에 꼼짝 말라 했으니, 탈을 쓴 채 본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물쭈물하는 놈은 죽여도 좋다! 철저히 조사하라!"
서희와 얘기하던 왜병정이 입이 찢어지게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막상 심문이 시작되자 근거가 없는 것을 깨닫고 면장 면서기를 끌고 왔다. 면소에 기재된 사람들 골라내는 것이다. 영팔이와 용이는 면소에 이름은 없었으나 늙은이들 층에 끼여 제외되었고 점아기는 여자들 쪽이어서 제외되었고, 걸려든 것은 홍이었다.
오가던 나그네 몇 사람, 성묘차 왔던 사람 모두 합하여 열여섯 명이 남았다.
"이놈들은 읍내 헌병대로 끌고 간다.!"
완전히 무시된 것은 광대들이었다. 소대장격인 병정이 생각난 듯 광대들 곁으로 다가간다. 말없이 탈바가지를 걷어올린다. 놀라운 일은 탈바가지 속의 얼굴을 사팔눈이 강쇠다.
왜병정들은 탈바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걷어나간다. 짝쇠의 얼굴도 있다. 조막손이 손가의 늙은 얼굴도 있다.
"하하아... 가하라고지끼까(천하게 부르는 광대의 칭호)."
의심하는 빛이 조금도 없다. 굽신굽신하는 면장과 면서기에 뽐내면서 왜병정들은 열여섯 명의 사내를 앞세우고 평사리를 떠난다.
"이 일을 우짜믄 좋노."
새파랗게 된 영팔이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용이는 우두커니 강물만 바라본다. 망건 밑으로 비어져 나온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검버섯이 피고 탄력을 잃어버린 두 볼, 볼의 살가죽이 이따금 격렬하게 흔들리곤 한다.
"날벼락을 맞아도 유분수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노."
"호랭이한테 물려가도... 호랭이한테, 정신만 차리믄, 그놈이 보기보다는 어수룩하진 않은께."
혼잣말처럼 용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해는 훌쩍 솟아올라서 싸늘하고 습기 찬 대기에 볕살을 펴나가고 있었으며 빈 마을에서 익은 감을 쪼아 먹던 까마귀가 밀려나온 언덕 위 천수답에서는 저와 같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인간들을 비웃기나 하듯 비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가 웅성거리는 모래밭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따로따로 무더기로 모여 있던 노년층과 광대들이 그리고 한 줄로 기다랗게 세워졌던 장년층이 한곳으로 어울려졌고, 왜병정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고함에 터져 나왔다.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저주와 분노와 공포가 지쳐 자빠졌던 사람들의 눈을 불붙게 했으며 더러는 늙은 부모의
고목같이 메마른 손을 어루만지는 자식, 어린것을 껴안고 또 껴안으며 볼을 비비는 아낙도 있었다. 그러나 타다 남은 시커면 장작은 재앙의 잔재같이 불길해 보였으며 마당쇠의 시체는 악몽 같았던 지난밤이 또다시 달려들 것만 같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고함 소리 울음소리에 왜병정들이 발길을 돌려 총대를 들이댈 것만 같다. 고함과 울음소리는 차츰 낮아지고 무력한 자의 한탄, 체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옮겨간다.
"어이구 명천의 하느님네! 기시오! 안 기시오! 금수라도 그러하까, 천하에 극악무도한 놈들! 우찌 벼락도 없십네까?"
북동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벼락이 없기는 워찌 없다냐? 있어도 그놈의 벼락은 없는 놈의 지붕땅 모랭이만 친다는디, 흥."
영산댁의 말이었다. 두리네는,
"대적놈들! 그놈들은 지 에미 지 애비도 없고 자식새끼도 없는 모앵이다. 늙은이, 어린것들도 의병질을 했단말가. 무신 죄가 있다고 밤이슬 맞히고, 내사 마 몸이 짚동겉이 무거바서 운신을 못하겄다."
"몸이 무거분 것은 고사허고 오금이 붙어서 떨어져야 일어서들 헐것인디."
"나는 오줌이 누고 저버서 불두둑이 터지는 것 겉소."
윗마을 오서방댁이 쫓아나가며 말했다.
"빌어묵을, 추석은 거꾸로 쇴다. 전게 없이 오광대 온다고 난리법석이더마는 우리 복에 구겡? 죽 묵든 창자에 개기 들어가문 설사하기 십상이제."
"아따, 태펭한 소리들 하고 있네. 사램이 죽어자빠지고 생때겉은 남정네들 줄응박 엮듯이 붙들어갔는데 오금이야 다리야 그런 소리하게 됐나?"
누군가가 나무란다.
"될 대로 되라 카지. 나부댄다고 살며 머리박 짓찧는다고 어디 죽든가? 마당쇠도 살라꼬 남 먼지 나부대다 죽었제. 살아 있이니 살았는갑다 싶은 기지 죽은 사람보다 우리가 나을 것 한푼 없는 기라.“
"하늘하고 땅하고 그만 딱 붙어버맀이믄 좋겄네. 무서리 나는 세상, 빼빠지게 일해도 등 빠진 적삼에 보리죽인데 더 우짜라고 그 몹쓸 놈들이 밤낮없이 저 지랄인고 모리겄다."
광대들이 맨 먼저 빠져나갔다. 노인과 아낙들은 절룩거리며 어린것들 팔을 잡아끌며 마을로 향해 간다. 장정들은 마당쇠의 시체를 떠메고 뚝길로 올라서는데, 마당쇠의 아낙, 그의 자식들이 울며 발버둥을 치며 따라간다. 강가에는 끌려간 사람들의 친지들이 남아서 웅성거린다. 화개에 있는 사돈댁에 기별하러 간다고 때마침 온 나룻배에 허둥지둥 오르는 사람이 있다. 용이는 여전히 강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실은 어젯밤 용이는 오광대 구경을 하려 하지 않았다. 방에서 영팔이와 함께 얘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야무네가 영팔에게 귀띔해준 점아기의 의중에 관한 것이었다. 말하는 영팔이나 듣는 용이도 거짓말 같은 얘기라 했다.
"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고, 뜨물에도 아아 생긴다 카이. 만일에 그 말이 정말이라믄 용이 니는 우짤래? 니 생각은 우떻노 말이다."
"그러씨, 하도 생각지 않았던 말이 돼나서..."
"그거는 나도 그렇다마는 홍이를 위해서 해로분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과남하지... 만일에 그렇기 된다믄 아아가 기는 좀 필 수 있을 것 겉다."
"그렇제? 나도 그리 생각했다."
"영팔이는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그렇지마는, 설령 말이 있었다 캐도 그기 어디 쉬운 일이겄나."
"인연이란 모르는 기다. 인연이 있으믄, 생각해봐라. 뜬금없이 누가 들어도 깜짝 놀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노 말이다. 그렇기만된다믄 홍이를 위해서 아주잘되는 일이제. 첫째로 니 안사람이 관대로는 침노는 못할 기고, 점아기 그 아씨는 한동네서 커나는 것을 우리가 봤기 때문에 인품이사 속속들이 잘 아는 일이고, 그분의 딸이라믄 물어보나마나,"
용이 얼굴에는 어떤 희망 같은 것,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양반이라 해서 그러는 것보다도,"
묘하게 수줍은 표정을 짓던 용이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진다.
"나를 닮아서 오기가 강한 놈이라... 지 어미 일이,"
하다 만다. 평생 입 내지 않았던 것이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마는, 홍이가 너무 외롭다. 애비 눈 하나 없어지믄 붙일 곳이 있어야제. 명색이 어매라는 여자, 그기이 마목이라. 평생 지네겉이 들어붙어서, 아이 성미나 누긋하다 말가. 신세 조지지. 니가 장개보낼 생각을 안 하는 것도 내 다 알거마는. 처갓집이라도 든든해서 울타리가 돼준다믄, 그기이 젤 바라는 일 아니겄나? 온 세상에, 천하에 그런, 이번에도 흥이가 아배 줄라고 돈 삽십 원을,“
하다가 영팔이는 말끝을 맺지 않는다. 하나마나의 얘기였기 때문이며 임이네 말만 나오면 흥분하기 때문이다. 용이도 들으나마나 뻔한 얘기, 하는 투로 그냥 흘려버린다. 마침 연학이가 들어왔다.
"아제시들은 구겡 안 가십니까?"
"다 늙기, 구겡은 무신,"
입맛을 다시며 용이는 담뱃대를 찾았다.
"다 늙기라니요? 모리시는 말심입니다. 더 늙기 전에 구갱은 해두시야제요."
연학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 서둘듯이 말했다.
"그란해도 내가 구겡가자 했더마는 아이들겉이 싱거분 말 마라 캄서 태박만 주네."
영팔이 일러바치듯, 웃는다.
"구겡하는 데 아아 어른이 어디 있십니까. 그러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한분 가보기나 하지, 시들하믄 들어오더라 캐도."
"맞십니다. 들어오더라 캐도 가보기나 하시이소."
연학이는 전에 없이 집요하게 권한다. 용이는 담배를 붙여물며,
"몸이 좀 고단해서 일찍 잘라 캤는데,"
"영팔이 아제씨는 심심 안 하겄십니까? 동무따라 강남도 간다 카는데 아니 먼 강가까지, 늙을수록 운신을 해야 몸에도 좋고,"
"그라믄 그래보까?"
마지못해 일어섰던 것이다. 오광대라면 그것은 쓰라린 기억이다. 시집갔다가 못 살고 돌아온 월선이와 처음으로 함께 지난 밤, 그 밤은 오광대로 인한 것이었으며 끈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리움도 미움도 다 떠나고 없는 빈터 같다고 믿어온 지금에도 옹이는 그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장작불이 활활 타는 강가에는 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겨울이었지. 초정월이었인께.'
옥색 저고리를 입고 명주 수건으로 얼굴을 싼 일선의 모습이 강가로 향해 걷는 것이 용이 눈앞에 뚜렷이 나타났었다.
'지금쯤 임자 무덤에는 찬서리가 내맀일 기요.'
둥근 달이 능선을 떠나, 그 얼굴이 맑고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임자를 그곳에 두고 온 것을 원망 마소. 요새는, 맴이 착하고 절개가 굳은 사람이 그곳에 묻히는 기요. 나는 이제 임자 보로 가기가 어렵겄지마는 홍이가 갈 끼요. 임자나마 그곳에 있어야 홍이가 안 가겄소? 샐인자 계집의 아들이요, 또 무당의 딸의 아들인 홍이가 이 바닥에서 무신 행세를 하고 살겄소. 가는 곳마다... 흐우... 임자도 그렇지. 안 그런가? 섧게 나서 섧게 크고 섧게 산이 고장에 묻힐 이유가 없거든.'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용이는 강가까지 왔었다. 오광대가 아니었어도 추석이면, 성묘를 가는 길에서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월선이였고 그의 무덤에 찬 서리가 내렸을 거라 속으로 중얼거리는 용이였다. 내키지 않았던 오광대 구경, 그러나 용이 구경하러 나오고 안 나오고 그건 홍이가 잡혀간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홍이도 마찬가지다. 마을에 남았어도 잡혀가기는 마찬가지다.
"머를 우떡하든 손을 써봐야지 이래 있어 되겄나."
옆에서 영팔이 조바심 낸다.
'판술이, 제술이가 따라왔으믄 큰일날 뻔 안 했나. 그 아이들은 만세운동 때 잽히가고 했이니 영락없이,'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쉰 자기 자신이 영팔은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 차중에 제 자식 걱정만 했다 싶어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에 다시
"이대로 있이믄 우짤 기고,"
발까지 구르며 또 조바심을 낸다.
"설마... 한 일이 없는데 제놈들이 이렇게 하기야 하겄나."
영팔이를 쳐다보고 이번에는 먼산을 바라본다. 천수답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살찐 돼지보다 죽지 부러진 한 마리의 송학이 초라한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 옹이가 초라하게 뵈는 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세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을 물리면은 현인신인들 아니 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육일승천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 송학의 부러진 죽지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한발짝도 날지 못하는데 반만 년은 또 무엇인고? 야만한 나라이며 미개한 백성이라, 허허어, 강물도 흘러가고 나뭇잎도 흔들리고, 물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은 구르는 법이거늘 똬리를 틀고서 초대 앞에서 산송장이, 아아- 그렇게 되지를 않으려거든 친일파가 되어야 하느니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서해야 하느니라, 허기야 그것인들 뜻대로 아니 되지. 농부들 주제에 어디 빈 구멍이 있다고 고개를 쳐드누, 쯔쯔쯔...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놈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인 것을, 허허어. 변절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농부들아! 허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대들의 복이니라.'
사람을 보고 타이르는 것처럼 허수아비는 벼 두 섬 나기 어려운 천수답에 삐뚜름히 서서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체면불고하고 오광대 구경 나온 것부터 창피스러운 일인데 한밤의 고초를 겪고 풀렸으면 남 먼저 마을로 가야 했을 것을 점아기는 올케 산청댁만 보내고 남았다. 홍이 붙들려간 것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릴수 없었던 것이다. 남기는 남았으되 용이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것도 민망스러웠고,
'내 사람이 될라꼬 그런가, 왜 이리 가슴이 찡한지 모르겠구먼.'
점아기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영팔이 보았다.
"어이구, 생원님댁 아씨께서,"
그 말을 빌미 삼아 점아기는
"걱정이야 되겠지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소?"
하며 서둘러 말을 한다.
"예, 고, 고맙십니다. 무신 일이야,"
순간 얼굴에 생기를 떠올리며 용이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인다.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허방하기 짝이 없는 착각인 것이다. 홍이의 혼인과 홍이 잡혀간 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점아기는 무슨 도술을 쓰는 사람인가. 영팔이 눈을 꿈벅꿈벅한다.
"그래도 그놈들이 법대로 해야 말이지. 어제밤 마당쇠가 그 꼴을 당하는 걸 본께 머리끄뎅이를 하늘로 당그라매는 것겉이 아찔하더마."
봉기가 말참견을 하고 나선다. 새삼스럽게 사람들 낯빛이 달라진다.
"하기사 그 개새끼들! 사람들을 예배당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러 직이는 놈들인데,"
"흥, 왜놈우 새끼들만 개새끼들만 개새끼 소새끼든가? 제 백성을 닭우새끼 모가지 비틀듯이 마구잡이로 직이는 왜놈들 밑에서 군수 자리 하나 얻으믄 옛적의 재상 자리 얻은 것맨치로, 이놈우 백성들 망해야 한다구. 의병질 해도 고해바칠 일이 못되는 거를 방안에 앉아 멀쩡하게 밥 먹는 사람 의병질했다고 고해바치는 이런 세상이믄은 망해도 홈싹 망해야 하는 기라. 내 이 소리 했다고 어느 놈이 또 고해 바치서 붙잡아갈지 모르지마는 그까짓 독한 맘 한분 묵으면 혼자 죽을 시레비 자석도 없일 기고, 물구신맨치로 함께 끌고 가지 그냥가아?"
가래침을 돋우어 내뱉으며 말하는 사내는 윗마을의 오서방이었다. 의병질했다고 누군가의 밀고 때문에 읍내 경찰서로 붙들려간 일이 있는 오서방은 마을에서 독종으로 이름난 우가를 밀고자로 지목했으나 주변에서 건드리지 말라고 말리는 바람에 분풀이를 못하고 있다가 이런 기회다 싶었던지 으름장을 놓은 것인데, 당자인 우가는 입가에 냉소만 머금고 있었다.
"허허어, 그게 언제 일인데 나배샀는고, 주먹 쥐고 바우 치니께 내손만 아프더란다. 그만 하게.“
그때 읍내에서는 말발이 선다는 허주사에게 부탁하여 오서방을 경찰서에서 꺼내어온 처남 끝봉이 제발 탈 없기를 바라듯 말했다. 그러나 오서방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형니임! 그라믄 물어봅시다."
"물어보기는 멀 물어보노."
"우떤 놈이 주묵이고 우떤 놈이 바우란 말이요!"
"잔소리 말고 집에 가서 뜨거운 국물이나 끓이돌라 캐서 속이나 풀자."
"치믄 내 주묵만 아파야 하는 바우는 대체 우떤 놈이요! 그것부터 알고 넘어갑시다!"
"아아니, 자네 정히 이럴 끼가?"
"그놈 직이고 내 죽으믄 고만 아니요! 더러운 놈의 세상, 살믄 머할 기요?"
"어젯밤 얼쩡거리던 우가가 들으란 듯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멋이?"
오서방은 끝봉이를 밀어젖히고 나서며 눈을 부릅뜬다. 이때 연학이 모래밭으로 내려왔다.
"영에서 매맞고 집에 와서 계집 친다 카더마는 와들 이러요?"
연학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최참판댁 일을 전적으로 밭아보는 처지었으니까. 또 사람이 똑똑하고 일처리가 분명하다는 말을 듣는 처지었으니까. 끝봉이는 슬며시 웃고 우가는 외면을 했으며 오서방은 주먹을 쥐었을 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밤을 새우며 고생을 하도고 심이 남아도는 것을 보이, 확실히 금년은 흉년이 아닌갑소."
연학이는 매우 태연해 보였다.
"흉년이고 풍년이고 간에 십년감수했다."
봉기가 아첨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꾸는 없이 용이 곁으로 간 연학이는
"여기 이러고 기시면 머합니까. 들어가입시다."
"홍이가 붙들리 안 갔나."
연학이 탓이기나 한 듯 영팔이 볼멘소리다.
"듣고 왔십니다. 별일없을 긴께 들어가입시다."
용팔이, 용이한테도 연학의 말은 권위가 있다. 용이 연학이를 쳐다본다.
"실데없는 말 할 홍이도 아닐 기고 며칠 고생이야 하겄지마는 나올 깁니다."
"정말 그렇겄나?"
되묻는 영팔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돈다. 언제 갔는지 점아기는 가고 없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한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5장 인간으로서
"쿠소(똥, 똥 같다)! 새끼들! 탕탕탕 갈겨버릴까 부다! 정체는 고사하고 꼬리라도 잡혀야 말이지."
하사관 출신 나카노 준위, 그러니까 서희하고 얘기를 나눈 왜정병이 책상에 주먹질을 하며 신경질을 낸다.
"대일본제국의 총알까지 쓸 것 있습니까? 일본도는 허리에 차라고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준위님?"
목덜미까지 여드름딱지가 따닥따닥 붙은 매부리코의 상등병 곤도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건방진 소리 말아!"
"몽둥이질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요. 시들해서, 한두 놈 시험 삼아 해치울까요? 일본도 쓸 것까지도 없고, 총검이면 훌륭하지요. 전쟁 없는 요즘 같아서는 팔이 울어서, 사람 못 죽이는 군인같이 병신스러운 건 없지요."
"뭐?"
농담이 아니었다. 곤도의 눈알이 번들거린다. 사람 죽이는 데는 동지요, 손발이 잘 맞는 처지인데 나카노 준위 얼굴에는 혐오하는 빛이 떠올랐다.
'저 새끼 얼굴은 피에 굶주린 야수 같다. 전쟁 때는 저런 놈을 최전방에 내세워야, 미친놈.'
담배를 꺼내 붙여 문다.
"이제는 먹혀 들어가지도 않는 몽둥이질 더 하면 뭐합니까."
"이 새끼야! 재미로 몽둥이질 하는 줄 아냐! 하긴 너같이 우둔한 놈은 몽둥이질, 칼질밖에 못하지."
"준위님의 방법으로도 자백한 놈은 한 마리도 없었으니까요."
자백할 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은 아니다. 서로 까놓고 얘기를 하지 않았다 뿐이지 잡아온 열여섯 명 중에 혐의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이들은 깨닫고 있는 것이다. 총대로,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고문을 했었다. 단검을 목줄기에 들이대고 죽인다는 위협도 수차례 했었다. 나카노는 달래고 어르고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는 한편 혐의자들의 진술 내용에 따라 신원 조회를 하고 행적을 조사하고, 그러나 결과는 의문점을 남길 만한 것이 없었으며 폭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양민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석방은커녕 고문의 손길마저 늦추지 않는 이유는 헛장단을 치지 않았나 하는 의심에서 본 분통과 아무튼 뭣이든 실마리를 찾아야겠다는 초조와 자신들의 오기, 체면 문제 그런 것 때문이겠는데, 천인이 공노할 이같은 횡포는 식민지 백성의 숙명이라 할 수밖에 없고 제 나라 주권 아래서도 천시 당해온 농민이기 탓으로 더욱 자심하게 당하고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병과 경찰의 앞잡이들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에 의할 것 같으면 각기 내용에서 수효는 구구했으나 지리산에 의병이 있다는 것이며, 정보의 출처는 모두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군에서 유언비어로 간주하고 비웃었다.
"도둑놈이 몇 마리 있었겠지. 바보 천치 겁쟁이들이 강 건너 달아난 게 언제라구 의병이야? 배꼽 빠질 얘기, 정보비가 아깝다."
그러나 비웃었다 하며, 유언비어로 간주했다 하여 불문에 부쳐버릴 그들은 아니었다. 은밀히 산속의 동정을 살피고 나무꾼 사냥꾼으로 변장한 밀정들이 산속에 투입했던 것이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한 처사였는데, 그러나 보고는 확실히 의병들이 있다는 것이었으며 근거지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군은 급거 나카노 준위를 파견했고, 나카노는 일개 소대를 이끌고 근거지를 급습했던 것이다.
"도망갔다!"
근거지로 지목한 동굴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당황하여 도망간 흔적이 역력했다.
"멀리 가진 못했다.!"
모닥불 피운 자리에는 아직도 불기가 남아 있었다. 한쪽에 굴러 있는 큰 사기에서 반쯤 남은 보리밥이 따뜻했다.
"방금 도망쳤다! 굴 밖에 나가 수색하라!"
왜병들은 일제히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카노는 동굴 주변을 수색하다가 그들의 도피로를 발견했던 것이다. 숨가쁘게 추적, 도피하는 일군의 폭도를 육안으로 잡은 것이 화개 근방이었다. 화개에서 악양 쪽을 향해 달아나는 것을 본 나카노는 이제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했다. 그리고 평사리 마을을 포위한 것이었는데... 나카노 준위는 사실 구경꾼들 속에서 열여섯 명의 장정을 색출하여 하동읍으로 나오는 순간 헛짚고 엮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어째 그랬던지 오광대의 광대들을 염두에 떠올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뭐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준위님?"
"..."
"상판을 보아도 그렇고 하는 짓거리, 눈깔을 보아도 돈바쿠쇼(농부를 얕잡는 말), 똥이나 싸는 놈들 같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돈바쿠쇼, 똥이나 싸는 놈들이 바로 폭도들이란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니깟 놈이 신참이 뭘 안다구. 일본같이 갈 찬 무사들이 모반하는 줄 알았어? 여기선 모두가 돈바쿠쇼란 말이야! 상놈들이란 말이야! 동학란을 몰라?"
"모르겠는데요."
"소위 농민전쟁이라는 게고 '재작년 삼월폭동 때도 젤 많이 만셀 부른 놈들이 바로 그 돈바쿠쇼란 말이다!"
"핫, 그, 그렇습니까."
그네들이 말하는 폭도, 혹은 난도들 토벌전에서 곤도 상등병이 신출내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삼일만세 후 투입된 병정 중 한 사람이며 나카노는 그 이전부터 의병들 소탕전에 참가해왔으므로 경험도 많고 노련한 축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조선말을 할 줄 알며 듣기로는 거의 다
가능했다.
'그럼 그놈들은 어디로 빠져나갔을까? 만일 그놈들이 귀신같이 빠져나갔다면 예삿일은 아니다.'
나카노는 담배를 비며끄고 군복 상의의 위쪽 단추 하나를 끄른 뒤 펜을 집어 든다.
"뭐라 보고 하나. 사건은 좌초다. 좌초란 말이야."
"준위님."
힐끗 쳐다본다.
"준위님 말씀대로라면 제가 지목하고 있는 한 놈에 대해서는 손을 대햐겠습니다."
"뭐?"
"열여섯 명 중에 돈바쿠쇼 아닌 놈이 한 놈 있어서 말입니다."
"상판 밴드르르한 와까조(젊은놈) 말이냐?"
"핫! 계집 같으면 그냥 두겠습니까?"
"조회 결과 보면 진술과 다른 것이 없어. 빌어먹을..."
"눈깔이 이글이글 타는 것을 보면 그놈은 대일본제국을 증오하는 반역자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식자가 들었으니까 자존심 때문이겠지."
"조선놈 새끼들한테도 자존심 같은 게 있습니까?"
나카노는 픽 웃는다. 웃다가
"내 너한테 일러두겠는데 그놈 때리더라도 병신은 만들지 말어."
"그까짓 조선놈의 새끼 하나 죽인다고 누가 뭐래나요?"
"까불지 마. 종전하곤 달라."
"뭐가 다릅니까?"
"총독부 정책이 표면상으론 전과 달리 유화책이야."
"그런 것 우리 알 바 있습니까?"
"우린 군인입니다.. 우리에겐 두려웁게 천황폐하의 어명이 있을 뿐입니다."
"너 상당히 건방지구나."
"핫!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은 평소 준위님 지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핫!"
"이 새끼가! 누굴 약 올리는 거야? 부글부글 끓는 판에, 혓바닥을 잘라버리기 전에 나가!"
"핫! 곤도 상등병 물러가겠습니다!"
경례를 붙이며 곤도가 나가버린 뒤 나카노 준위는 입맛을 다신다.
평지풍파를 일으키듯 지리산의 의병설이 어째 나돌았는가. 지리산에 의병 대부대가 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며 대부대는커녕 의병이 거의 없다는 것이 실정이다. 왕시 의병을 사칭했던 화적떼들마저 그 그림자는 지금 희미해졌다. 화적떼를 말할 것 같으면 일군과 내통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조선독립군 토벌에 초롱도 들어주던 만주의 비적단만큼 이용 가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동학 이후 양민들을 괴롭힌 화적떼도 일군에겐 그런대로 이용 가치는 있었던 것이다. 의병을 화적떼로 몰아붙이는 점에서 그러했고 관대하게 봐주는 척하면서 의병 치는 데 앞잡이로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병의 활동이 폐쇄되면서 화적떼도 무대를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 그러니 산에는 화적떼조차 그림자를 감추었다 보는 것이 정확하다. 김환의 조직은 의병의 성격을 띤 것도 아니요 화적떼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화전민이요 숯 굽는 사람이요 사냥꾼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실무근의 의병설이 나돌았는가. 그 경위를 쫓아본다면 임실 지삼만이가 장본인이다. 그는 왜헌병 왜경의 앞잡이들을 겨냥하여 수라를 풀어 소위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저의는 지리산을 주목하라는 것이며 환이의 조직 한 모서리라도 부수어버리자는 데 있었다. 실제 의병이 있었다면 지삼만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주의 관수를 건드려보고 혜관을 건드려보고 하면서 신경전을 펴다가 김환에게 비수를 푹 찔러보는, 그로서는 그런 심정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환이라 체포될 것을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대간의 경위가 그러한데 그렇다면 밀정을 잠입시켰을 때 의병의 본거지와 그들이 떠난 흔적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첫째는 본거지를 전혀 새로운 곳에다 가장해놓고 왜병들의 손길이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확히는 환이 조직에 미치지 못하게 함이요. 평사리로 빠져나간 것은 미리부터 연학과 연락이 되어 오광대를 대기시켜놨기 때문이다. 조막손이 손가가 탈꾼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은 조막손이 손가가 오광대와 깊은 유대를 가진 탓이다. 아무튼 오광대라는 비상구를 마련해놓고서, 오광대놀이의 날짜는 추석을 전후하여 연락의 뜻대로 조정하게 돼 있었으니까 왜병정 습격에 때맞추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평사리 쪽으로 유인한 뒤 산청, 임실, 그 밖의 몇 곳에서 한두 사람, 많아야 세 사람씩, 관공서나 경찰서 그중 하나를 목표하여 방화를 하거나 아니면 순사, 그들의 앞잡이, 또는 친일파를 살해하는 계획을 짰던 것이다. 행동은 거의 일 대 일이지만 여러 곳에서 동시에 감행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도주했다고 믿은 사건은 착각으로 증발해버릴 것이며 각처에 일어난 사건도 동시성 때문에 효과가 큰 대신 하수인들을 재빨리 장사꾼, 객줏집 노름꾼, 대장장이 등 갖가지 생업을 가진 양민으로서 일상을 계속하면 되는 것이다. 이같이 완벽한 계획과 준비가 되었다 하더라도 예외가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으나 한두 군데서 불상사가 있다 하더라도 엮은 그물코가 보이지 않게 돼 있으므로 일이 확대될 염려는 없는 것이다. 특히 임실의 경우 그곳을 계획에 넣은 것은 지삼만에 대한 위협이었다. 한 가지 작전으로 방어와 공세와 위협과 교란을 동시에 꾀하는 것인데 환히는 전과 달리 윤도집과 합의하에 면밀히 계획했고 실천에 옮긴 일이었다.
허술한 창고 같은 곳에 처넣어진 열여섯 명의 장정들은 연일 당하는 고문 때문에 초주검이 됐다. 게다가 극심한 굶주림이 이들을 괴롭혔다. 육신의 통증도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몽롱하여 헛소리를 하고 깜짝깜짝 까무러치곤 하면서도 배고픔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지는가, 홍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그것을 깨달았다. 고문을 당할 때는 무엇이든 했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모르는데야 살이 찍혀 나간들 별수없는 일이었다. 한 덩이의 밥을 위해서라면 내일 죽고 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고 말 그 얘기가 없는데야 어쩔 것인가. 사흘이 지나고 나흘로 접어드는 날 열여섯 명의 장정들 거의 모두는 고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도 한고비를 넘겼다. 이따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간 그것도 자맥질하듯 흘러가버리고 짐짝같이 음쭉달싹 못하게 됐다. 고문을 제일 많이 당하기론 홍이다.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고 쓰는 말에 유식한 냄새가 난다 하여 남보다 많이 맞았고 다음은 얼굴 잘생긴 것이 매 하나 더 맞는 원인이 되었다. 육체적 고문뿐인가. 섬세한 감정에 결벽증인 홍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여름이 뚝뚝 불거지고 개기름이 흐르는 매부리코 곤도 상등병은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홍이의 변화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상상할 수 없는 상소리, 더러운 얘기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홍이의 여자관계를 캐묻는 등, 아비를 모욕하고 어미를 모욕했다. 침묵으로 대항하면 단검을 뽑아 덤벼들면서 남자의 그것을 짜르겠다 했고 눈을 부릅뜨면 막대기로 눈을 후려쳤다. 처음엔 이빨이 부러질 만큼 부드득부드득 갈아 젖혔지만 홍이는 육체뿐만 아니라 의식 자체가 무저항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곤도 상등병의 얼굴은 원수로 뵈지 않게 되었다. 친구도 아닌 원수도 아닌 그냥 얼굴이었을 뿐이며,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그냥 얼굴이었을 뿐이며, 그 얼굴 반공중에 떠 있는가 하면 홍이는 자신의 몸뚱이가 꺾어져서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착각은 번갈아서 얼굴이 되고 몸뚱어리가 되고, 얼굴이 되고 몸뚱어리가 되고 되풀이되면서 의식은 새벽녘의 별같이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밤인지 낮인지 홍이는 실눈을 떴다. 전등불이 빨간 명주실같이, 핏줄같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어나랏! 이새끼들아!"
굼벵이같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밥 안 처먹을 테야!"
여기저기서 꾸물꾸물 쓰러질 듯하며 일어나 앉다가 다시 쓰러지곤 한다. 하루 주먹밥 한 덩어리였는데, 어제 하루 그리고 오늘 하루 이틀동안은 그것마저 없었다.
"이 개새끼야!"
쓰러지는 사람에게 곤도가 발길질을 한다. 일등병 하나가 주먹밥이든 바께쓰를 방안으로 옮겨놓는다. 밥을 보고 무섭게 눈을 희번덕거리는 장정들에게 일등병은 묵묵히 주먹밥을 하나씩 집어 건네준다. 소년티가 남아 있는 일등병은 기계적인 빠른 손놀림으로 주먹밥을 집어준다. 간바야시라 불린 일등명이 마침 홍이에게 주먹밥을 건네주려는 순간이었다.
"좀 기다려!"
"네?"
간바야시는 주먹밥을 손에 든 채 얼굴을 들고 곤도를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소년티가 남아 있는 얼굴이 무표정하다면 그것은 힐난인 것이다. 출입문 쪽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곤도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나간다.
"이 새끼야, 넌 이리 와!"
"누구 말입니까?"
간바야시는 분명히 아는 것 같은데 묻는다.
"누구긴? 계집 섞은 것 같은 그놈의 상판 말이다."
간바야시는 홍이에게
"무조건 빌어요."
나직히 속삭인다. 홍이는 주먹밥을 받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말뚝처럼 걷는다. 빨간 명주실 같고 핏줄 같았던 전등불이 차츰 안개같이 번져난다. 곤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안개 속을 헤쳐나간 듯, 안개 속에 묻혀버린 듯, 안개는 허리께까지 덮여오는 것 같다. 허리께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얼굴까지 그리고 숨통을 막아버릴 것만 같았다. 구둣발 소리는 들렸다.
"잠거!"
곤도의 목소리도 들렸다. 쇠통 잠그는 소리. 그러니까 홍이는 소위 임시감방 밖의 복도에 서 있는 셈이다.
"상등병님, 이자의 주먹밥은 어떻게 할까요."
"돼지에게나 주어라."
"넷! 알겠습니다."
다시 구둣발 소리, 그리고 멀어지는 소리.
"자아, 그러면 아귀처럼 처먹는 저놈들 꼴이나 구경해라!"
홍이 뒤통수에 곤도 주먹이 날아왔다. 철창으로 막은 창문에 홍이 이마빡에 부딪는다. 역시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누르께하고 물그레한 안개에 있었을 뿐이다. 다음은 캄캄한 어둠이다. 홍이는 복도에 나자빠졌고 까무라쳤다.
"이 새끼! 엄살이야?"
구둣발로 짓밟는다.
"간바야시! 간바야시!"
"넷! 상등병님!"
간바야시는 날 듯 달려왔다.
"찬물 한 바께쓰 가져와 끼얹어!"
"네!"
간바야시는 찬물을 가져와 홍이 얼굴에 끼얹는다.
"으음..."
신음과 함께 홍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행불행을 있는 것일까. 다 먹는 밥 한 덩어리 혼자만 못 먹는 것은 불행이다. 남이 한 애 얻어맞을 때 두 대 세 대 얻어맞는 것도 불행은 불행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은혜, 나보다 뛰어난 용모로 말미암아 이렇게 철저히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참 이상하다.
"끌어들 엿!"
"넷!"
간바야시는 홍이를 끌고 감방 안으로 들어간다. 곤도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간바야시는 몸을 기울인다. 그러고는 홍이 몸뚱이를 빙그르르 돌려서 엎어뜨린다. 문이 잠기고 발소리 멀어지고 그리고 조용해졌다.
"보래, 보래."
함께 잡혀온 화개의 동태라는 청년이 홍이를 흔든다. 그리고 홍이 배 밑에 깔려 납작해진 주먹밥을 끙끙거리며 꺼내어 홍이 손에 쥐어준다,
"일본병정이 몰래 주고 간 거다."
"..."
"왜놈들 중에도 사람이 있기는 있는갑다."
찬물 가지러 갔을 깨 간바야시는 품속에 주먹밥을 넣어온 것이다. 간바야시 일등병은 결코 홍이를 동정하여 그 밥덩이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곤도를 증오했고 군대를 증오했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혐오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추악한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애국심이라면 그는 그 애국심에 침을 뱉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을 동정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동정했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외쳐볼 수 없는 군대 규율의 제물인 자기 자신을 동정한 것이다.
다음날이었다. 갑자기 열두 명이 석방되었다. 나머지 네 명은 진주경찰서로 인계되었다. 경찰서로 인계된 네 명 중에 홍이도 끼여있었다. 갑작스레 석방되고 경찰서로 옮기게 된 것은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확대된 때문이다. 임실에선 순사가 한 명 살해되었고 산청에서는 경찰서 방화사건이 발생하였고 합천에서 또 순사가 한 명 중상을 입었고, 엇비슷한 사건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발생했는데 모두 하동과는 먼 거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결국 잡혀온 사람들은 지리산의 의병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판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헌병대에서는 체면상 그랬던지, 네 명을 진주경찰서로 넘긴 것이다. 홍이말고 사십 안팎으로 뵈는 장돌뱅이풍의, 과히 천해 뵈지 않는 전서방과 소목꾼이며 먹고 살 만하다는 삼식대의 김가, 역시 그 나이 또래의 윤가, 윤가는 도시풍이 들어 뵈는 좀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선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으나 요릿집에서 일을 보아준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 건달인 것 같다. 홍이와 마찬가지로 추석이라 하여 성묘차 왔다가 일을 당한 사람들이다. 진주경찰서에서는 그간의 사정을 다소 알았음인지 엄중히 취조하는 척했으나, 어딘지 형식적인 면이 있었다. 고문도 하지 않았고 물론 굶기는 일도 없었으며 사식도 허용했다. 석방되니만 못했으나 하동서의 생각을 한다면 살아난 기분이었고, 군의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적당한 시기에 석방될 것을 취조하는 조선인 형사가 암암리에 비쳤다. 그 형사에게 연학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돈이었지만. 그리고 가족들이 진주로 나와 있다는 소식이며 썰렁한 일기에 알맞는 의복도 들어왔고.
"허 참, 팔자에도 없는 호강 하는구마. 집안이 결단났일 낀데 진주까지 오기는 머하러 와."
꺼실꺼실 수염이 돋아난 전서방은 은근히 기쁘고 울먹여질 것도 같으면서도 겉으론 화난 체했다. 그러구러 며칠이 지난 뒤 족제비같이 생긴 홍이 또래의 절도범이 유치장에 들어왔다.
"니는 여기 와 왔노."
전서방이 물어본다. 좋지 않은 눈길로 흘끗 쳐다본 족제비상은
"도둑질을 했다고,"
"젊은 놈이 그래서 쓰나."
"했다는 것하고는 다른 기라요."
"머가."
"나는 도둑질 안 했인께."
"이눔아아야, 그래도 이곳은 극락이다."
"뭐라카요? 극락이라꼬요? 유치장을 극락이라 카는 사람은 처음 보겄소."
눈길이 좋지 않고 입술이 쫑긋 나온 족제비상은 별난 소릴 다 듣는다는 듯 나온 입술을 더욱 쫑긋거린다.
"겪어보지 않았이믄 알 턱이 없제."
"흠, 유치장보다 더한 곳이 어디 있겄소.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어디 있겄소? 있지러. 가봐야 알겄나?"
"악담 마소. 여기도 죽겠는데 무신 그런 말을 하요."
"안 믿으니께 그렇제, 거긴 바로 생지옥이다. 옥사장이는 모두 뿔 달린 도깨비고, 하하핫..."
"어딘데 그러요?"
궁금해 졌는지 묻는다.
"헌병대."
"아아."
족제비상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경찰서보다 그곳이 더 무섭단 것쯤은 그도 아는 모양이다.
"무신 일을 했길래 거긴 붙들리갔십니까?"
"무신 일로 갔는지 알기나 함사? 모른께 기가 차지."
김가의 말이었다.
"그런 일도 있십니까?"
"얼매든지 있는갑더마."
이번에는 윤가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홍이만 얘기 속에 끼여들지 않고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쳇! 머가 먼지 모리겄소."
"이눔아아야, 니겉이 남우 것 다치서 잡혀온 줄 아나? 억울한 사람 많다는 걸 니는 모리는 갑다."
"난들 억울 안 하겄소? 남우 것 훔친 일이 없단 말이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족제비상은 화를 낸다.
"허허어, 그러믄 니도 와 붙잡히왔는지 모르겄고나."
세 사람은 낄낄 웃는데, 역시 홍이만은 웃지 않았다. 족제비상은 당황하다 말고
"그라믄 만세 부르다 들어왔소?"
"만세 얘기라믄 벌써 삼 년 전이다."
"팔자에 없는 의병이라네."
전서방은 벽에 기대며 이제는 말도 그만 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하아, 그런께로 의병질 했구마요."
"의병질을 한 게 아니라 붙들어간 헌병놈이 나도 모리는 일을 가르쳐주데."
김가의 말이었고 전서방은 이제 족제비상을 의식 밖으로 몰아낸 듯
"사람이란 허약함서 잊임이 헐한 물건인갑다."
김가보고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런갑소."
"하동서 겪은 일도 꿈겉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은데, 그라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라믄 얼매든지 견디겄다 싶더마는 며칠을 지나고 본께 답답하구마. 맴이 조급해지고."
"와 아니라요. 그래서 사람우 맴이란 조석변동이라 안 합니까."
"또 그라고 처음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더마는 어제 오늘은 그 곤도란 놈의 얼굴이 떠올라서, 털어부릴라꼬 돌아눕기도 하는데, 사람이란 사세 여하에 따라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한하더라라만 악족이란 따로 맨들어놓은 거나 아닌가 싶네."
"그놈, 그놈은 구신도 잡아묵겄십디다."
"그놈들, 돈바쿠쇼! 돈바쿠쇼! 해쌌더마는."
"돈바쿠쇼가 머요?"
족제비상이 묻는다.
"나도 왜말은 모린께, 농사꾼이란 말인갑더마."
대답해놓고 전서방은
"진주로 온 사람은 모두 뜨내기, 돈바쿠쇼 아닌 뜨내기란 말이다."
"이자부터는 사람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겄소."
"자네 겉은 소목꾼이사 그렇기 할 수도 있겄지마는 나 겉은 장돌뱅이야 사람 모인 곳에 안 갈 수 없제."
"죽자니 청춘이 아깝고 살자니,"
윤가가 아까부터 코웃음을 치며,
"그 말하는 거 본께 이자는 살 만한가배."
"우선 배는 안 고픈께. 그는 그렇고, 아제씨."
"와."
"정말로 수천 수백의 의병이 산에 숨어 있었이까요?"
목소리를 낮추었다.
"수천 수백은 거짓말일 기다. 그러나 있긴 있었인께 그런께 우리를 잡아 안 왔겄나?"
"그건 그렇소."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기는 했다마는, 안 죽었인께 다행이고, 아무래도 그 사람 축지법을 쓰는 모앵이라,"
"우째서요?"
"아 그러씨 생각해보라모. 우리다 당했인께, 개미 한 마리 기어나가겄나? 그리하도고 잡아온 사람 중에 의병은 한 사람도 없었인께 하는 말 앙이가."
"듣고 보이,"
"그놈들도 깨달은 기라. 그 사람들 놓친 것이 분해가지고 우리한테 분풀이하니라고 그리 혹독하게 했일 기다."
"야, 그기이 틀림없겄소. 그렇다믄 앞으로도 자꾸자꾸 그런 일이 일어나겄지요?"
"그런 일 하는 사람이믄 목심 붙어 있는 날꺼지, 다 잡지 못하는 한 그런 일이야 있을 거로 봐야 할 기다."
"그런다고 우리가 독립을 하겄소?'
"이 사람아, 우리 당해봤인께 알겄제? 왜놈 밑에서는 못 산다. 다 항복하고 들어간다고 잘해줄 것 겉나? 아니지이,"
전서방의 목소리는 훨씬 더 낮았다.
"하여간에 머가 있기는 있는갑더라. 왜놈들도 너무 풀세기 날뛰믄은 질잖아. 뿌러질라 카믄 막대기가 회초리보다 쉽게 부러진께로, 어이구 담배나 한 대 피워봤이믄 똑 좋겄는데,"
"말 타니께 마부 부리고 싶다 캅디다."
윤가의 핀잔이다.
"하하핫핫... 배짱 편하게 웃기나 하지 머."
절도범으로 들어온 족제비상은 풀이 죽어서 두 무릎에 머리를 처박듯 앉아 있었고 홍이는 여전히 벙어리같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세 사람이 홍이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저리다가 사람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목을 쳐죽일 놈,"
전서방은 벽에 들을 기댄다.
"오늘이 며칠이나 됐을까요?"
전서방을 갑자기 쳐다보며 홍이 입을 떼었다.
전서방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낼모레, 구월 아닐까?"
"아 우리가 잽히온 지 보름만 됐겄소? 구월에 들어섰을 기요."
김가의 말이다.
"하긴 보름은 넘었을 기구마. 구월 초여드레가 제삿날인데 그대꺼지 나가겄나?"
"참, 아제씨."
김가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최참판댁의 곱새도령,"
"도령이 멋꼬? 삼십이 넘었을 긴데."
"아무튼 그 사람을 만냈소."
"자다가 봉창 뚜디리네. 별안간 곱새도령은 또 뭣꼬? 곱새 도령이 의병질이라도 했나?"
윤가의 핀잔이다.
"생각이란 갑재기 떠오르는 일도 있인께. 평사리에 갔일 때는 그 일을 까매기겉이 잊어부리고 말을 못했거든."
"이제 생각하니 억울하구나. 참 그 성미 하나 좋다. 평생 살은 안 빠지겄네."
"반쪽이 된 사람보고 머라 카노."
"갑자기 윤가는 킬킬대며 웃는다.
"어이구! 몽둥이 맞고 나자빠지면서 손등에 묻은 밥 뜯어 묵든 일이 생각나네."
"누가!"
"누구라는 그 사람."
"지랄하네. 오줌을 칠질 싸던 놈은 누군데. 그래도 밖에 나가믄 의병으로 잡혀갔다고 기생년들보고 자랑할 기라."
"아암 하고말고. 공술이 그리 쉬운가?"
김가는 화제를 돌린다.
"아무튼 통영에서 딱 마주쳤는데, 곱새도령을 말입니다."
"도령은 무슨 도령, 아이 애비이라 카는데 젊은 사람이 잊음이 헐해 큰일이구마."
"하여튼 딱 마주쳤는데,"
"만낸 기이 머가 대단해서 뜸을 들이샀노. 사람이 하늘 밑에 있는 이상 만내는 거는 당연하지."
"만낸 기이 대단하다 그 얘기가 아니고,"
"자네가 그 사람을 우찌 알아서?"
"내가 열넷에 의지로 나갔는데 그거를 모리겄소?"
"그랬나?"
"한데 그 사람이 소목꾼이 됐습니다."
"머라꼬? 소목꾼이 됐다고?"
"야, 내 눈으로 봤인께요. 통영서... 내가 이초시라는 사람한테 일을 배웠거든요. 지나가는 길에 들맀더마는 아 그러씨 그 댁에서 일을 하고 안 있십니까?"
"사람팔자 참말로 기구하다."
음력으로 구월 초여드레는 지나갔고 십이일에 네 사람은 석방되었다. 경찰서 문 앞에 연학이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고생했제?"
"뻔한 얘기 아닙니까?"
의외로 홍이는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연학이는 그들의 가족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세 사람을 데려다주고 홍이와 함께 영팔이 집을 향했다.
"그 사람들 뒷바라지를 연학이형님이 했군요."
"우짜겄노. 최참판댁에서 부른 오광대 구경하다가 그리 된 거를,"
연락이 웃는다.
"그래, 골병은 안 들었나?"
"모르지요. 골병도 들긴 들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오?"
"영팔이아제 집에 기신다. 너거 어무니는 아무것도 모린께, 알믄 씨그럽거든. 아무튼 잘했다."
"뭐 말입니까."
"간도 갔었다는 얘기는 안 했는갑데?"
"그 얘기 했다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겠지요."
"니 아부지가 함부로 말할 아이는 아니라 하시기는 하더라만,"
홍이의 보조는 정확했다.
"연학이형님."
"응."
"앞 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러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 부릅뜨다가 뺨대기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 깨달았소."
"그래, 그걸 깨달았이믄 좀 덜 억울할 기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것, 그건 아무짝에도 못쓴다. 바보 시늉,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게 젤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빼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자믄,"
"벌써 나뭇잎이 누우렇소."
"누우렇다뿐인가, 많이 떨어졌지.“
16장 혼례
이듬해 음력 이월달, 물대 위의 물바가지 얼어 터진다는 바람 많고 변덕 심한 달에 홍이와 점아기의 맏딸 보연의 혼인날이 결정되었다.
초하루부터 열아흐레까지 어항인 통영은 어느 지방보다 풍신제가 성행하는 곳이다. 고사는 상청님이 내려온다는 초하루, 상청님이 올라가고 중청님이 내려온다는 아흐레. 중청님이 올라가고 하청님이 내려온다는 열나흘, 그 어느 날이든 한 번 택하여 지내는 것이지만, 또 각기 고삿날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약 이십오 일간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이집으로 계속하여 시루떡, 쑥떡, 좁쌀떡, 반달떡, 고사떡이 오가는 분주하고 흥겨운 달이 새로도록 명정골은 각시와 쳐녀들이 길을 메우고, 달이 밝은 열나흘, 하청님이 내려오는 그 밤은 통영바닥의 각시 처녀들이 다 명정골로 모여든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어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명정골의 우물, 통영 사람들의 식수를 대면서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옛날 충무공이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이곳 갯마을에 진을 쳤을 때 팠다는 전설이 있거니와 가히 동네 이름과 같이 명정인 것이다. 또 밝은 이월 열나흘의 밤, 농 밑에서 젤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단장도 어여쁘게, 비단 끈을 물린 새 똬리와 물동이를 들고 명정골 우물가 명정골 동백나무 밑에 모여들어 밤을 지새우며 끼리끼리 만나서 노니는 젊은 여자들, 간혹 비녀를 빼가고 옷고름에 찬 가락지를 끊어가고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바람할만네는 변덕쟁이요, 심술쟁이요, 비위를 거슬러놓으면 바다에서 재앙이 온다. 고삿날엔 기하는 것이 많고 정화수를 길으러 올 때는 상제보고 말을 해도 안 되고 인사도 아니 한다. 그럼에도 이월은 봄날인가 싶었는데 밤사이 물대 위의 박지가 얼어 터지곤 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월에 혼삿날을 받았을꼬?"
동문 안의 시외숙모의 마땅찮아하는 말이었다.
"걸마잖는 혼사라서요."
점아기는 시외숙모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걸맞잖다고 서둘러!"
"보연이 성미도 그렇고... 시아버지 될 사람이 몸도 성치 않아서,"
변명치고는 구차스럽다. 곱상스럽게 생긴 시외숙모는 점아기보다 서너 살은 위일까? 죽은 시어머니가 맏딸이었고 외상촌이 막내였으므로 조카와 외삼촌의 연평 차이가 적은데, 자연 안사람들도 그럴밖에 없다.
"걸맞지 않는 혼사는 안 하는 편이 낫지."
"..."
"이미 작정이 됐으니... 부모가 알아 하겠으나 상것하고 혼인하는 것도 반갑잖은 일이거늘 어미 된 여자한테 좋잖은 얘기가 많더구먼."
"보연이가 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아이라서요. 칠칠한 시어머니 밑에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당자 하나보고,"
"자네도 좀 실없는 데가 있네. 당자 하나 본다지만 얼굴 반반하다는 그 얘기 아니냐? 그래 남자가 인물 뜯어먹고 산다든가?"
"..."
"외가에서 이러고저러고 해서도 안 되겠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만 바람결에 들려오는 얘기가 아주 고약하더군. 혼사란 원래 말많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듣고 버릴 말이 따로 있지. 생각해보게. 사돈이랍시고 상면하면 우리가 절을 해야겠나? 너무 흉측스런 소문이라, 한이웃에 살았으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 설마 몰랐다는 말은 못하겠지?"
"..."
"어찌 알고서 딸자식 줄 생각을 하였나. 나는 자넬 그렇게 보지는 않았네."
"해천에 용나더라고 당자만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시아버지 될 사람도 말이 상사람이지 예절 바르고 염치 차릴 줄 알고 착한 사람입니다."
"하기야 뭐 내가 이런다고 혼사 물리겠나."
"숙모님, 보연이 혼사만은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시외숙모 하씨는 더 이상 쏘아대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빛을 감추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가겠네. 지금 같아서는 혼삿날 오고 싶지도 않다만, 여기 돈 이십 원이다. 옷벌이나 장만해줄까 생각도 했으나,"
하씨는 전에 없이 심히 꾸짖은 편이었으나 생각 밖으로 후한 부조금을 내놓은 것이다. 마루에서 내려선 하씨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네로서는 개혼인데 하느님이 날씨 부조나 해주셨음 좋겠다만,“
하고 시외숙모는 돌아갔다. 점아기는 이번 혼사를 성사하는 데 사면초가의 입장이었다. 딸자식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남편 허윤균만이 보내고 나면 남의 자식인데 부인이 알아서 하라 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시가에서는 말할 어른들이 없었고 시외가는 의사 표시는 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점아기로선 시외가의 은덕을 입는 형편이어서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시집갈 당자 보연의 불만도 그러했다. 어제만 하더라도
"어머님은 나를 버린 자식으로 아시는가 봐요. 시집갈 곳이 없으면 중이 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이불 꾸미는 데 도와주러 온 이종사촌 시누이, 그러니까 시어머니 바로 동생의 소생인 김실댁을 보고 보연이 한 말이었다.
"우리 보연이 어디가 어때서 시집갈 곳이 없을꼬? 하긴 걱정은 걱정이구나. 명색이 의관의 집 딸자식인데 상것들하고 어떻게 어울릴지,"
"시누님도 참, 우리 사는 것은 뭐 별다른 절도가 있습니까?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신학문한 사람이 요즘에 큰소리친답니다."
손아래여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하는 말이 얄미웠다. 남편은 의관 따위 벗어던진 지가 옛날이며 주정꾼에다 노름꾼이요, 살기 어려워서 자식들에겐 글 한줄 가르쳐주지 못했고 음식솜씨 있다 하여 부잣집을 전전하면서 혼사 때 장사 때 환갑잔치 때 음식 장만이나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는 형편인데 싶은 것이 점아기의 심정이었다.
"글쎄요, 세상이 달라지기는 많이 달라졌지요. 옛날 같으면 언감생심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앙혼이든 강혼이든 못할것도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지체가 없다면 재물이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요, 올케?"
"재물이나 지체는 당자 하나 잘나면 따라오는 것 아니겠어요?"
"따라오는 거라구요?"
김실댁은 가소롭다는 듯 바늘에 실을 꿰다 말고 점아기를 쳐다보았다.
"올케, 문서에다 도장 직고서 기다리시구려. 바라는 생각만으로 될 일이라면 세상에 상것 빈자가 어디 있겠어요?"
"왕빈들 될 수 없겠습니까?"
보연이 되바라진 말을 한다.
"보연이 너 그 성미 때문에, 바로 그 성미 때문에 이번 혼사를 내가 결정한 거다. 아무리 타이르고 가르쳐도 너 언동에 조신스러움이 없구나. 시집갈 규수가 어른 앞에서 그런 말버릇, 그러고도 법도에 엄한 시모 밑에서 지어미의 자리가 보존될 성싶으냐?'
점아기는 한탄스럽게 말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어머님은 제가 소박당할 것다 그 말씀이세요?"
"아직 시집도 안 간 아이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작은방에 가거라! 혼수 만지는 데 나앉는 것부터 당돌하구나."
김실댁도 그 말에는 동감이던지 역성을 들고 나오진 않았다.
시외숙모가 가고 난 뒤 점아기는 마루에 걸터앉아 하느님이 날씨 부조나 해주셨음 좋겠다던 시외숙모의 말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구 떠밀 듯 혼사날짜를 정하는 데까지 왔었건만 어쩐지 불안하다. 자신이 일을 잘못했다는 후회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서 들쑤시듯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혼사를 깨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굳어질 뿐이다. 그런데 왜 불안한가. 원인은 홍이 쪽에 있다기보다 딸 보연이 쪽에 있는 성싶다. 웬간히 남자가 너그럽지 않다면 보연이를 보아낼 것 같지가 않다. 점아기는 불안을 밀어버리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아랫방에서 딸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연의 목소리가 젤 울린다. 동생들에게 역정을 내고 있는 눈치다.
'사주도 세다고 하던데, 외숙모님은 왜 날씨 걱정을 하셨을까?'
털어버린 생각이 또 떠오른다. 떠오른 생각을 다시 털어버리려고 점아기는 부친 김훈장 생각을 한다. 신분에 대하여 고루하기론 시외가 쪽보다 부친이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재물을 보기를 길바닥에 굴러 있는 개똥같이 보았고 땀 흘려 농사짓는 생활에 자족했었다. 선비가 돈을 알게 되면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고루하게 굳어버린 것이었다. 오히려 남편과 시외가의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는 트였다 할 수 있었다. 체면만 차리면서 굶어죽을 순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한데도 신분 문제에서만은 권위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라기보다 습관, 상민들을 하시하고 횡포하게 다루는 습관을 버리려 하지는 않는다. 지체가 없다면 재물이라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했던 김실댁의 말은 잔적으로 그들의 생리를 요약한 것이다. 시외삼촌의 경우도 돈 많은 친구와 표면상으로 동업이라지만 내막으론 수족 같은 존재로서 어장에 관여하고 또 윤선회사를 차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만큼 재리에는 밝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족 같은 존재, 그럼에도 양반의 자존심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점아기는 남편까지 그렇다는 생각은 아니 한다. 오히려 재리에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돈을 길가 개동 보듯 하지는 않았지만 선천이 무능력한 사람인 것이다.
한편 평사리에서는 옛날 용이가 살던 묵은 집터에 삼간초가를 새로 지었다. 신부를 진주로 데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마을 사람들이 품을 들어주었으며 목재는 산에서 베어왔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를 엮어서 치고 마을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덮었다. 시골집이란 대개 그러했지만 목돈이 들기론 목수 품삯이었다.
"며누리보다 상전을 뫼시오는 꼴인데 이편찮아서 우짤라꼬 그러나."
"양반입네 하고 시가를 업수이 여긴다면 그것도 어러분 일이라,"
"딸은 치넣고 며누리는 아래서 데리온다 카는데 없는 살람, 별난 시어미 보고 살겄나?"
말들이 많았지만 아버지가 원한다면 하고 순순히 장가갈 것을 홍이가 동의한 후 용이도 거의 점아기와 같은 심정의 경로를 겪었다. 누가 뭐라건 떠밀 듯 혼사날짜를 정하는 데까지 왔는데 그로부터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잘한 짓이까?'
홍이를 두고 느끼는 불안이었다. 남들은 처녀 쪽을 두고서 얘기했었지만 뭐니 해도 부모만큼 자식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성미가 별나니께 조금이라도 눌리는 기색이 있이믄 때리부실라안 칼까? 잽혀갔다 와서는 많이 변라기야 했지만 남들같이 가숙섬기고 살란가.'
용이로서는 괴로운 의문이었다. 자기 자신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소망도 간절하였다.
'멀리 떠나보낼라 캤는데 우찌 일이 이렇기 됐이꼬?'
용이는 새로 지은 집 뜨락을 거닐다가 문득 그 생각을 하면 뭔지모를 함정에 스스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거야 뭐 제 가숙 데리고는 못 가나 머.'
진주의 영팔이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손주나 낳아서 한분 안아보고 그런 다음에 용정으로 보내부리라."
모하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었다. 임이네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나 다음에는 나자빠지고 말았다.
"에미 모리는 혼사, 내 참니할 것도 없고 자식이고 서방이고 이자는 남 됐으니께,"
염불 외듯 돈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장가 말을 꺼내던 임이네였다. 혼사하는 마당에서 자나빠지듯 물러나 앉는 심산은 혼이 비용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는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참말이제 이서방 그리 볼 사람 아니네요."
우물가에서는 복동네가 혀를 내둘렀다. 두리네가 맞장구를 친다.
"그러기 말이다. 안부모도 그러기 어럽지. 골골 앓아샀더마는 아들 장개 비용은 꽉 쥐고 있었던갑제?"
"봉채를 보냈다 카는데 아주 짭짤하더랍니다."
"벌써 봉채를 보내?"
"혼삿날이 며칠 남았건데요? 열이튿날인께 봉채가 이르지도 않거마는,"
"음, 그렇구나. 지난번 사주단자 보낼 때도 패물이랑 빠진 것 없이 보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마는,"
"기 안 꺾일라구 그러기는 했일 기요마는 봉채함에 든 옷이 여섯 벌, 그것도 값진 비단이라 하니,"
"농사꾼이 염이나 낼 일이가?"
"포은이 져서 그랬일 기요. 어느 부모치고 맘이사 다 안 그러까마는, 이서방 심정 알 만하지요. 제집이 일부종사 못하는 것도 한이지마는 남자라꼬 안 그렇겄소? 심성 좋고 남자답고, 그런데 우찌 제집 복이 그리 없었는지,"
"그것도 팔자 아니겄나."
"그러나 이서방이 바라는 것맨치로 순조롭기 살란가?"
"그런 소리는 와 하노."
"우리끼리니께 하는 말 아니요? 임이네 전력을 생각하믄 양반사돈, 너무 칭아가 진단 말이요."
"시에미 보고 하는 혼산가? 옛날에도 임금이 딸이 거지한테 시집갔다는 말이 안 있더나. 바보 온달이 말이다. 홍이 그 아아사 바보는커녕 일등 신랑감이제."
"김훈장댁에서 들었는데 신부 될 처니도 인물이 좋다 캅디다."
"지체는 달라도 인물은 거의방해야 살제."
"이자는 친영만 남았구마."
우물가 여론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용이는 세심하게 혼사를 진행시켜왔던 것이다. 상대가 양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납채에서부터 봉채에 이르기까지 붓글씨며 격식이며 소홀함이 없도록, 허물 잡힐 일이 없도록 장차 홀로 남을 아들을 위해 처가 울타리가 든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도 성의를 다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월 열하루 날, 늦은 아침을 먹을 시각쯤 드디어 홍이는 친영길을 떠나려고 말에 올랐다. 통영까지는 당일에 갈 수 없었으므로 남해로 돌아서 그곳에서 하룻밤 중방에 들었다가 내일 아침뱃길로 통영에 갈 것이다.
"어이구, 신랑이 나이 들어서, 제법 의젓하구마."
봉기가 소리쳤다.
"신랑 조오타! 월구의 선녀라도 맨발 벗고 따라오겄고나."
바우의 격려하는 말이었다.
"대접이 미흡하믄 이미 내 사람은 됐것다, 내던져놓고 오는 기다!"
제각기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상객을 따라나선 영팔이 벌죽벌죽 웃는다. 역시 상객을 수행하게 된 진주의 석이도 빙그레 웃곤 한다. 석이네, 판술네, 야무네도 사람들 속에서 발돋움하여 떠나는 홍이를 보랴고 애를 쓴다. 홍이는 의젓했던 게 아니다. 무표정했다. 용이도 긴장한 나머지 무표정했다.
"소동 가는 저눔아아는 누고오?"
마을 아낙이 묻는다.
"김서방 맏손자 앙이가. 소동 갈라꼬 진주서 옴서 데리왔단다."
야무네의 대답이었다.
"너무 어리다. 오줌 싸고 똥싸믄 우짜노?"
"다섯 살인데 오줌을 와 싸노."
마을 사람들은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왔다.
"신랑! 첫날밤에 신부 길 자알 디리야 한다!"
들에서 봄갈이하던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격려하는 고함을 질렀다. 말등에서 흔들리며 홍이는 하늘과 산과 강물을 바라본다. 하늘과 산과 강물같이 홍이는 진정 무심?. 별난 것도 없고 별나게 살아서도 안 될 것이며 두드러지게 보여도 안 될 것이었다. 세상은 살아가기 힘든 곳이지만 쉽게 살 수 없는 곳도 아닐 것이다. 뜨겁게 살 수 없다 하여 차갑게 살아야 한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사랑 할 수 없다고 미움으로 살아도 아니 될 것이다. 그러면은 지아비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아이 아비도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얼굴들은 낡았고 살가죽은 헐거운데 진솔 옷에 새 신발, 영팔이는 남의 통영갓까지 빌려 쓰고 두 활개를 저으며 간다. 지아비가 되고 아이 아비가 되고 그리고 아이 할아배가 되고 버둥거리고 나부대어도 결국은 저 산천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을. 헌병대서 고초를 겪고 경찰서 마룻바닥에서 홍이 얻은 결론은 각박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혼인을 승낙한 것도 그 생각 때문인지 모른다.
남해서 하룻밤 중방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행은 배편으로 통영을 향해 떠났다. 배가 뭍에서 떠나자마자 바람이 거실거실 일기 시작했다. 영팔이 눈이 하늘을 힐끗 쳐다본다. 그름 흘러가는 곳이 심상치가 않다.
'제발 초례가 끝날 때꺼지...'
배가 너울을 타기 시작한다. 석이 얼굴빛도 흐려진다. 용이는 뱃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물결은 드세어간다. 뱃멀미를 하는지 바다가 무서웠던지 아이가 운다. 영팔이는 타독타독 아이 등을 두드리며 달랠 뿐 날씨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날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통영에 당도했을 때 바람은 한층 기승을 부렸다.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방금이라고 떨어질 듯 하늘은 짙은 잿빛, 찌푸리고 있었다. 하루 먼저 떠났던 연학이 말을 준비해놓고 갯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근심과 뱃멀미로 노오랗게 된 용이 얼굴에 연학을 보는 순간 다소 안도하는 빛이 떠오른다. 연학을 보는 순간 다소 안도하는 빛이 떠오른다. 연학이 역시 날씨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홍이 아래위를 훑어보며 싱긋이 웃는다. 사모관대에 목화를 신은 홍이는 잠시 눈길을 떨어뜨린다. 그러고 나서 말에 올랐다. 연학이는
"수고 많십니다. 욕봤지요."
하면서 석이 안고 있는 아이를 받아 안는다. 용이은 우울하게 뒤따르고 영팔이 숨어보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빌어묵을 날씨는 와 이리 지랄이지? 용이 속이 얼매나 끓달겄노. 빌어묵을, 에미년이 별난 께로 아들 장개 가는 날도 이 모앵이다.'
신랑 일행은 바람 소리에 쫓기듯 걸음을 빨리한다. 간창골을 지나서문 고개를 오르는 길을 가파롭다.
'바람은 불더라 캐도 제발 비는 오지 말아라.'
용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팔이는 계속하여 마음속으로 임이네를 향해 옥지거리를 하며 걷는다.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면서도 신랑이 평사리를 떠나올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임이네에 대한 미움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잘못한 거는 조상 탓이라 카더마는 잘못된 일만 있이믄 와 나를 들먹이노! 내가 동네 북가아! 하는 임이네 음성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내가 바람 부라고 비러었나! 비오라고 빌었나! 생모를 박대하는 놈들! 하누님이 벌을 내리신 기지! 재가 안 가고 저버서 안 가건데! 생피겉이 싫어하고 안 왔이믄 좋겄다 생각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가아? 쓸개도 창지도 없는 년인 줄 알았던가? 하는 목소리도 귓가에 쟁쟁 울려온다. 딴은 그렇다. 속셈이에 어떻든 표면으론 임이네 말에 타당성이 있다. 그렇게 타당성 있게 자신을 은폐하는 데는 가히 천재적인 여자였으니까. 석이네, 판술네가 혼사를 치르려고 평사리에 왔고 두만네도 오겠다는 기별을 해왔다. 영팔이는 진작 왔기 때문에 뒤이어 온 판술네에게 물었다.
"임이네는 안 온다 카더나?"
"어디 오겄소?"
"가기는 가봤나."
"야."
"뭐라 카더노."
"머 밤낮 하는 그 얘기 아니요. 죽다 깨난다고 변할 사람이요?"
"와가지고 조신스리 있다믄 누가 머라 칼 기라고, 돈 아까바 그렇지. 잘 묵고 잘 살라 캐라."
"이녁은 무신 전생에 임이네하고 척이 졌는 갑소."
"아, 그라믄 합이 안 맞아 그렇지 그 제집이 나쁘잖다 그 말이가?"
"나쁘잖다는 기이 앙이라 남의 일에 펄펄 뚠께 하는 말 앙이요. 제 식구들보다 더하다 카이."
"시끄럽다! 용이는 내 친동기간이라 캐도 과언 아니고 홍이는 내 조카,"
하다 말고 영팔이는 그만두었다.
신부 집 앞에, 동네서 새집이라 이르는 허윤균의 집 앞에 신랑일행은 당도했다. 잠시 동안 숨을 들이켜고 나서 홍이는 문간에 깔아놓은 노적섬을 밟고 들어선다. 연학이 안고 온 아이를 들여보내고 용이와 영팔이 들어간다. 연학은 잔칫집에 구경나온 사람같이 문 밖에서 얼씬거린다. 신랑을 맞이하는 주혼자는 수염과 눈썹이 새까만, 마치 관운장과 같아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는 홍이를 향해 세 번 읍하고 홍이를 초례청으로 안내해간다. 초례청은 마당에 쳐놓은 차일 안에 마련돼 있었다. 예탁을 중심하여 서편과 동편에 병풍을 둘러쳤고, 차일이 바람에 펄럭인다. 단단하게 돌을 달아서 쳐놓은 차일인데 연신 펄럭인다. 바람은 한층 속력을 내는 모양이다. 바다 쪽에서 짐승 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울려온다. 바람 탓이리라. 혼가에 사람들은 많아서 붐비는데 소리가 없다. 말소리가 도통 없다. 신랑이 들어서도 설레이는 기색 없다. 긴장이 팽팽하게 넘치는 것만 같다.
"신부추울"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었다. 예탁에는 솔과 대를 꽂은 호리병 두 개와 밤, 대추, 쌀, 술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머리와 꼬리만 내놓고 비단 보자기에 싼 장닭 한 마리가 있었다. 홍이는 장닭의 눈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신부가 서 있었다. 다홍에 수가 현란한 활옷에 원삼을 끼고 족두리를 쓴 신부의 입술이 추위 대문에 파아랬다. 홍이는 비로소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문득 갗물에 흘려보낸 꽃신 생각을 한다. 장이에게 주려고 산 꽃신, 그 꽃신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신부 곁에 얼굴이 두리넓적한 수모가 서 있었다. 홍이는 흘려보낸 꽃신 생각을 하며 전안의 절차를 따라 기러기 한쌍 앞에서 진삼배를 하고 퇴삼배를 했다. 수모가 나무 기러기를 신부 앞에 가자다놓는다. 흐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마당에 모여 섰던 사람들이 일제히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혼인날의 비는 불길의 징조다.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 소리, 잦아지고 많아지는 빗방울 소리, 그러나 상견례는 시작 된다. 비단에 싸놓은 닭이 푸드덕거렸다. 마치 쌀을 쪼아 먹으려는 듯 주둥이를 내민다. 수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신부는 신랑을 향해 큰절을 두 번 한다. 홍이는 다시 꽃신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하고 생각한다. 홍이가 답례를 아니 하는 것을 본 안부가 낮을 소리로,
"답례하시오."
홍이는 답례의 큰절을 한 번 한다. 그리고 신부 신랑은 자리에 앉는다. 빗방울은 빗줄기로 변했다. 청실홍실을 늘어뜨린 술잔에 술을 부어 수모가 신랑 앞으로 가져온다. 술잔을 신랑 입술에 잠시 대었다가 떼고 술은 땅에 버린다. 수모는 다시 신랑 편에서 술을 부어 신부에게 가져가서 꼭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교배잔을 세 번 나눈 다음 신부는 재배하고 신랑을 일배 한다. 그리고 상견례는 끝이 났다. 비단 보자기에 싸인 닭이 또 푸드덕거린다. 빗줄기는 장대비로 변했고 뇌성벽력이다. 하느님은 이들을 위해 날씨 부조를 아니 한 것이다.
남편과 함께 신랑 신부의 절을 받는 점아기의 입술을 먹빛이었다. 갑자기 내려간 일기와 찬비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애써 충격을 감추려 했으나 먹빛이 된 입술은 때때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명천의 하느님네, 어찌하여 이렇게 사나운 날씨를 주십니까. 못할 혼사를 내가 치른 것입니까.'
그러나 허윤균은 태연했다. 날씨 따위는 아예 마음에 끼지도 않는 눈치다. 그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위가 뜻밖에 훤칠하고 귀골로 뵈며 행동거지가 매우 침착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방안과는 달리 밖에서는 비바람 못지않게 난리가 났다. 소리를 죽인 난리요 쉬쉬 하면서.
"이 일을 우짜믄 좋을꼬? 초례청에서 멀쩡했던 닭이 죽다니,"
김실댁이 젖은 옷을 털며 말했다. 드난꾼들은 빗설거지와 혼례식의 뒷수습을 하느라 빗속을 뛰어다니면서도
"참말 별일이제?"
"그러기 말이다."
"닭이 죽다니, 창대 겉은 비만 와도 좋잖은 긴데 닭까지 죽어부리니 무슨 변괼꼬?"
"징조가 안 좋아도 이만저만? 신랑 팔자가 센지 신부 팔자가 센지, 그 좋은 신랑을 얻었는데 무슨 날벼락일꼬?"
"이 댁 마님은 아직 모르제?"
"이 댁 외숙모님이 암말 말라 하기는 하더라만 모리고 지날 일이 따로 있지."
이 구석 저 구석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히고 바람 소리에 날리고.
하씨는 김실댁이 내주는 우산을 쓰고 나간다.
"숙모님."
"왜."
"이 장대비를 맞고 어찌 가실라고 이럽니까."
"복통이 터져서 어디 더 있겠나."
"하누님이 하시는 일을 어쩌겠습니까."
"계집이 요망하면 솥뚜껑을 깬다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한사코 내가 말리는 건데,"
"노성벡력 하늘이 말맀건만 이제는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들어가거라."
"지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부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쯔쯔쯔... 어째 초례청 닭까지 죽는단 말이냐. 딸자식 하나 신세 버리는 것도 것이려니와 집안에 흉사 생길까 무섭다."
"왜 아니겠습니가."
"맘이 씌어 그랬던지 하느님보고 날씨 부조나 해주시라 했는데 참, 지내고 보니 방정맞은 말이었던 것 같다."
"그거야 뭐 좋은 날씨 줍시라고 빈 것 아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 보아라. 상객 온 사람들 굶겨서 앉혀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네가 두량해야지, 집안이 뒤죽박죽이다."
하고서 우산으로 몸을 가리며 장대비 속으로 간다. 발아래선 물보라가 일어 뿌옇게 보였다.
비는 해가 질 시각쯤 해서 멎었다.
신방에 촛불이 켜지고 신랑이 들었는데 불길한 여러 가지 징조에 공포심을 느꼈음인지 문구멍을 뚫고 신방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가에 왔던 손님들도 비가 걷히는 것을 보자 황황히 떠나버렸고 두세 사람이 남아서 집안은 갑자기 빈집처럼 조용해졌다. 상객방도 조용했고 허윤균 부부의 방도 조용해고 두 딸은 부엌에서 떡국이 끊고 있는, 아궁이의 불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혼가가 아니라 마치 상가 같았다. 밤은 그러나 깊어져서, 활욧에 원삼족두리를 쓴 채 정좌하고 앉았던 신부가 팔이 아팠던지 꼼지락거렸다. 보연이는 날씨 때문에 혼이 빠진 것 같았고 신랑이 너무 잘생기고 의젓하여 완전히 기가 눌리고 만 것 같았다. 그리고 돌부처처럼 말없이 앉아 촛불만 쳐다보고 있는 신랑 옆모습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소박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첫닭이 울었다. 그때 비로소 홍이는 제 정신이 든 것처럼 신부 곁으로 다가앉으며 족두리를 벗긴다. 큰 비녀를 뽑아준다. 곱게 땋은 머리채가 뱀같이 어깨 위로 미끄러진다. 활옷을 벗기고 원삼도 벗겨준다.
"천둥소리에 놀랬겠구먼."
처음으로 홍이는 입을 열었다.
"아니옵니다."
역시 방자한 성품이다. 홍이 얼굴을 찌푸린다. 잠자코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천둥소리에 놀라지 않았단 말이요?"
"예."
"하 참, 나는 놀랬는데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실수를 깨달았는지
"너무 긴장이 되어 그랬나 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실수를 만회하지는 못했다. 홍이는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참고 홍치마 연두저고리를 벗겨준다. 하얀 소복이 나타났다. 홍이는 마음속으로 용모는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소복의 보연이는 매우 아름다웠던 것이다.
"신부."
"예."
"어찌 나 겉은 상놈한테 시집을 생각을 했소?"
"부모님 뜻에 따랐습니다."
"하긴 그랬을 테지... 그리고 나는 상놈일 뿐만 아니라 집안이 기찹은데 가서 살 수 있겠소?"
"기찹은데 어찌 예물은 그렇게 흡족하게 보내셨습니까?"
이번에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보연이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고 나서 어이없다는 듯 픽 웃는다.
"집안 기찹은 것말고 또 있소. 시모 될 사람의 얘기는 들었겠지요?"
보연이는 그 말대꾸는 하지 않는다. 홍이는 뭐라 말을 하려다 생각을 고쳐먹는 눈치다.
"밤도 저물었고 자리에 드시오."
"아니옵니다. 어머님이 앉아 새우라 하셨습니다."
홍이는 또 픽 웃었다. 그 말은 귀여웠고 사랑스런 것 같았다.
"그럼 나 혼자 자야겠구먼."
촛불을 불어 끄고 어둠속에서 옷을 벗어던진 홍이는 이불 속으로 기어든다. 반듯하게 누워서 캄캄해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본다. 전신이 쑤실 만큼 피곤했으나 잠은 좀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누리팅팅하게 부은 듯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아버지가 무엇을 소망하였는가, 홍이는 갑자기 목이 메이는 것을 느낀다. 혼인날 첫날밤이 이렇게 쓸쓸하고 서러운 것은 비 탓이 아니다. 바람 탓이 아니다. 신부 탓도 아니다. 막연한 앞날 탓인지 모른다. 닭이 두 번째 운다. 빗소리, 바람 소리, 천둥소리, 거짓말같이 사방은 조용하다. 무덤같이 조용하다.
눈길을 천장에서 떼었다. 소복이 어둠 속에 떠오른 것같이 보인다. 순간 여자 관례를 캐묻던 곤도의 여드름투성이 매부리코의 얼굴이 눈앞을 지나간다. 분노의 감정이 너울을 타고 온다.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홍이는 화닥닥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은 내 맘대로다."
소복의 보연이를 낚아채며 이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감정과 달리 홍이는 보연이를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다.
영롱하게 아침은 밝아온다. 새벽 참으로 떡국이 들어왔다.
"저기, 떡국 잡수셔요."
"음, 음?"
홍이는 머리를 들다 말고 보연을 바라본다. 보연이 빙긋이 웃으며 얼굴을 숙인다. 홍이는 속적삼 섶을 모으며 상 앞에 보연과 마주앉는다.
"일찍 떠나야 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하루 만에 갈 수 있습니까?"
"일찍 떠나면 저녁에는 도착한다 하더구먼."
"그러면 오실 때는 어째 중방에 드셨습니까?"
"어두운 곳에서 초례를 할 수 있소?"
친절하게, 비교적 친절하게.
"어두워 했었더라면 날씨는 개었을 텐데..."
옴속옴속 떡국을 떠먹는다. 홍이는 좀 안됐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필사적인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초례청에서 강물에 흘려보낸 꽃신 생각을 했던 자기 자신.
"날이 궂으면 좋지 않다는 것 그건 다 미신이오."
해가 떠오르기가 바쁘게 집안은 떠날 준비 때문에 떠들썩했다. 비로소 혼인집같이 웅성거렸다. 불길한 여러 가지 징조 때문에 상가 같았던 집안에, 신부의 확 트인 얼굴은 생기를 몰고 왔다. 신부가 떠나는 것을 구경하러 온 아낙들은 뒤늦은 감은 있으나 신랑 인물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것이었다.
"새집 처녀는 빤 적삼만 갈아입어도 서문고개가 훤하다 했는데 신랑 인물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두짜믄 저리도 인물이 좋을꼬?"
"옥골선풍이란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제."
"너무 신랑이 좋아서 하늘이 샘을 냈는갑다. 우짜믄 그렇기 노성벡력에다 장대 겉은 비가 내맀겄노."
"잘살고 못사는 것은 타고난 팔자고, 하룻밤이믄 어떤고?"
아낙들의 칭송을 들은 영팔이는 자기 아들이기나 한 듯 두 어깨를 으쓱하니 쳐들었다. 초례청의 닭이 죽은 것은 상객 일행이 알 턱이 없었고, 그러나 용이 안색은 여전히 좋지가 않았다.
올 때는 업혀오고 안겨오고 더러는 걷기도 했던 영팔의 손자 정식이는 신부가 탄 가마에 함께 타게 되었다.
"하동까지 갈라 카믄 가마멀미 많이 하겄다."
"뭐 배편으로 갈 긴데 얼매나 걸을까 봐서?"
"신랑 집에서 보낸 봉채도 짭짭했지만 신부 집에서도 예단을 실팍하게 했다 카데."
"개혼이니께."
"개혼이라도 못하믄 못하는 기지. 어마님이 야물고 조촐해서 예단도 얌전할 까구마."
인심의 변화란 각일각인가. 어제와 오늘,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다. 가마는 떠나고 신랑 태운 말도 떠나고 점아기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물을 닦는다.
예정보다 빠르게, 해가 서산에 깜박깜박 넘어갈락 말락 할 때 가마는 동구 쪽에 당도했다.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모두들 오늘은 기막히게 쾌청한 날씬데 어제는 왜 그랬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두만네, 석이네, 판술네 그네들의 아들딸들의 얼굴이 마을 사람들 속에 있었다. 혼인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산청댁이 먼저 쫓아왔다. 가마 문을 들고
"아가, 가마멀미는 안 했나?"
"외숙모, 괜찮소."
보연은 지친 기색도 없이 활짝 웃었다. 가마 문 드는 것을 본 아낙들이 확 모여든다. 신부의 얼굴을 보자는 것이다.
"신랑만은 못해도 그만하면 인물 좋다."
중평이 그러했다. 이곳의 인심도 마찬가지였다. 비바람 불고 뇌성벽력 때와 선들선들 미치게 좋은 오늘의 날씨, 날씨 따라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시에미가 없으니 신부보고 뭐라 칼 긴고?"
"몹쓸 제집이다. 머 그래봐야 지 손해지. 며누리 손에 따따스런 물이나 한 모금 얻어묵겄나."
새로 지은 초가삼간은 새집이어서도 그랬겠으나 뭐 한 흩어진 곳 없이 깨끗하게 신부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예탁에는 음식을 높이 괸 제기가 각각 놓일 자리에 놓여 있었고 폐백 드릴 자리도 깨끗하게, 신부는 가마에서 내려 작은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잠시 쉬는 동안 따라온 하님이 분단장을 다시 해주었으며 산청댁은 옷매무새를 고쳐준다. 판순이, 제술이는 홍이를 붙잡고 장가든 기분이 어떠냐고들 집요하게 묻고 놀려대고 한다. 마당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서 폐백 드리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참새들도 덩달아 지저귀며 대숲 쪽으로 날아가고 어둠이 묻어오는 마당을 비춰주기 위해 석이네가 청사초롱을 내건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는 남자들이 모였고 술과 밥과 떡이 풍성하다.
"참 오래간만에 걸게 묵는다."
"하모, 그럴밖에 더 있겄나? 최참판댁에서 떡쌀 술쌀을 노놨다 카이."
"거 연학인가 그 사람 사람 됐더라. 이분에도 밖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궂은 일은 혼자 도맡아서,"
"이서방이 인심을 안 잃어 그렇지. 일가친천은 없어도 심덕을 입어서 외롭지 않고 우리 보기도 참 좋네."
"임이네 겉으믄 마당에 풀 날 기다."
"하여간 날씨가 궂어서 그렇지, 신부가 인물도 그만하면, 지체 높겠다, 이서방이 며누리는 잘 본 셈이제."
"신랑이 잘났으이 그렇지, 인물 덕이다. 그란했으믄 양반과의 혼인꿈이나 꾸어보겄나?"
폐백 드리는 것도 끝나고 배부르게 먹은 잔칫집 손님도 다 돌아가고 자정이 넘었을 때는 불도 꺼졌다.
어디서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