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2-1
토지 3부 제 2 편 어두운 계절
1장. 용정행
용정촌에 한복이 내려섰을 때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시끄러운 역두, 괴이스런 풍물에 놀랄 겨를도 없이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하나 품에서 꺼낸 한복이는 골똘이 그것을 들여다본다. 허술한 상민 차림의 옷이, 그거나마 때가 묻어서 남루한데 괴나리봇짐을 늘어뜨린 모습은 누가 보나 품 팔러 온 떠돌이다. 한복은 너덜너덜 해어진 종이를 보면서 목적지에 당도한 것을 가슴 아프게 느낀다. 평사리에서 떠나올 때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이 이 종이쪽지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는지 알 수 없다. 관수는 매우 용의주도했다. 간도와 연해주를 두루 살피고 돌아온 김환이나 혜관은 뒷전에다 물러 세워놓고 용이에게 가서 행선지까지 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으라 하며 일렀던 것이다. 그리고 용정으로 가는 목적에 대해선 함구하라고 다짐했다.
"성을 만내로 가겄다고?"
처음 용이는 무척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몸을 돌려가면서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꼭꼭 눌러서 글을 쓰는 옆모습에는 도적이건 대적이건 동기간인데 어쩌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하지, 천륜은 끊을 수 없는 것이니께, 그런 독백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또박또박 떼어서 쓴 종이에는 기차 타는 곳 내리는 곳, 나룻배 타는 곳 내리는 곳, 마차 타는 곳 그리고 그 옆에는 상세한 도면과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묵을 여관까지 일일이 지적했고,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용이는 용정촌에 대하여 입으로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금년 농사는 어떻노? 비가 시원찮은 것 겉은데,"
"그저 그만하지만, 모르지요. 추수 때가 돼봐야,"
몇 마디 일상에 관하여 말을 주고받은 뒤 공노인에 대한 안부 한마디 없이, 용이는 그저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었다. 종이를 접어서 저고리 안에 기워 붙인 호주머니 속에 넣은 한복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떤다. 막바지에 접어든 긴장이었다.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 옮겨놓는다. 생각하면 줄곧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에 외갓집이 있는 함안에서 평사리를 오가고 한 일은 있었지만 그 밖의 곳에 나가본 일이 없는 한복이가 멀고 먼 만주까지 간다는 일이 불안하였고 행여 왜헌병에게 잡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물론 있었지만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금을 몸에 지녔다는 그 자체가 한복으로선 가장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넘을 때 한복은 불안과 공포와는 사뭇 다른 감정, 무엇인가 심장을 조이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은 슬픔을 느꼈다. 한복의 개인적인 감정도 물론 복잡하였으나 뚜렷이 그것은 망국민의 가슴을 저미는 슬픔이었다. 이때 비로소 한복이는 자신의 결단을 잘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파렴치한 동기로 살인한 아비와 매국노가 된 형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 이 길이요, 지하에 잠든 어머니의 멍든 자긍심을 치유하는 방법도 이 길이라 생각하였다. 한복은 푸르고 거센 강물에 맹세하진 않았으나 푸르고 거센 물결에 맹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머님!'
"형씨는 초행이오?"
움찔하며 한복이는 고개를 돌렸다. 자기 또래쯤, 차림새도 엇비슷한 사내가 담배를 피우며 바로 옆에서 말을 걸었던 것이다.
"예."
"얼굴을 보면 대개 알지요."
사내는 실죽 웃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막노동을 한 듯 손은 뼈마디가 굵고 거칠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음성은 세련된 것 같이 들렸다. 한복이 마음속으로 경계한다.
"노상 오가는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처음 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대개 울상이거든요. 왜 울고 싶은지 모르지만 하하핫..."
사내는 스스로를 비웃듯 웃었다. 그래도 한복이는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는다.
"그러믄 댁에서는 초행이 아니시오?"
"수없이 건넜을 게요."
"멀 하시는데요."
"뜨내기 일꾼이지 뭐겠소."
"벌이는 괜찮은가요?"
"메뚜기처럼 한철이지요. 형씨는 경상도구먼."
"그렇소."
"무슨 일로 가시오."
"형을 만나러..."
"행선지가 정해져 있다면 괜찮겠소만,"
"왜요?"
"겨울이 빨리 오니 말이오. 정처도 없이 남도 사람이 이런 철에 왔다가는 얼어죽기 십상이지요."
사나이는 담배연기를 날리며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긴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가고 오고, 날마다 사람들은 가고 오고 하지만,"
사내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더니 거의 끝까지 다 타버린 싸구려 궐련을 미련스럽게 한 번 쳐다보고 나서 강물에다 던진다. 뭍에 내려서 헤어질 때 사내는,
"초행이라니 몸조심하고 가슈. 여간 분분하지 않소."
한복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사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공노인의 객줏집을 찾아들어갔다. 얼굴이 어글어글하게 생긴 머슴아이가 어둠침침한 작은 방을 잡아주었다. 한복은 크게 숨을 내어서 쉬며 방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긴장이 풀어지고 한꺼번에 피곤이 물려오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머슴아이를 불러 주인장을 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본다. 한복이는 심중이 깊었다. 마지막에 와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며 초조한 마음을 누른다. 사실은 일각이 천추만 같았던 것이다. 한시라도 바삐. 짐을 넘겨주고 숨을 크게 내쉬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 만주 땅까지 왔이까?'
괴나리봇짐을 베고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복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꿈만 같고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떻게 내가 만주 땅까지 왔일꼬?'
어둡기 전에 저녁상이 들어왔다. 그러나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국만 한 그릇 먹고 가져온 숭늉도 다 마셨다. 그리고 또다시 냉수한 그릇을 청해 마셨다.
"손님, 밥은 하낫도 안 잡숫고..."
머슴아이가 상을 내가며 의아해한다.
'뜨내기 품팔이 같은 차림새의 사내에겐 밥 한 그릇도 모자랄 성싶은데, '
머슴아이의 표정은 그러했다.
"음, 갈증이 나서 국하고 물을 많이 마셨더니 배가 터질 것 같다."
한복은 거북하게 웃었다. 국과 물을 들이켜고 보니 오줌이 마려웠다. 한복이는 괴나리봇짐을 끌러서 돈이 든 전대를 꺼내어 배에 두르고 밖으로 나간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뒷간에 갈 때는 늘 그러했다.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뒷간에서 돌아오면 전대를 풀어 보따리에 넣고 잘 때는 보따리를 베개 삼아 베고 잤던 것이다. 기차간이나 배 속에서 왜헌병의 검색이 있어 몸을 만질 경우를 생각하여 돈을 몸에 지니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는 동안 한복이를 눈여겨보는 왜헌병은 없었다. 뒷간에서 용변을 마치고 한복이 막 나오는데 마침내 공노인과 부딪혔다. 공노인이라 직감하는 순간 한복이 입에서 말이 나왔다.
"주인장이시오?"
"그렇소만,"
"공노인이시오?"
다그쳐서 물었다.
"내가 공가요."
"나는 월선아지매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공노인은 동하는 기색 없이,
"아, 그렇소? 그 아아가 내 조카딸이었지요."
한복의 두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최참판댁 심부름으로 왔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공노인은 크게 기침 소리를 내며,
"반갑구만. 오줌 누구 갈 기니 내 방에 가서 기다리소. 허허 참!"
공노인은 뒷간으로 들어가고 한복이는 머슴아이에게 물어서 공노인의 거처방으로 들어간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잔기침을 하며 자그마한 공노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복이와 마주앉는데 무안스러울 지경으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최참판댁은 모두 안녕하신가 모르겄소."
"예, 별고 없다 하더만요."
"그래 심부름이라면?"
"뭘 좀 전하려고요."
"나한테?"
"우선 공노인을 만나라 하더만요."
"그러면 가만있자아, 성씨는?"
"아 참, 나는 김한복이라는 사람입니다. 평사리에 사는 사람이오."
"최참판댁 바깥양반을 알겠구먼."
"압니다. 길상이형님 말이지요?"
"가져온 것이 뭔지 모르겠소만 그러면 일단 나한테 맡기고오, 뒤처리는 며칠 후에 하기로 하지요."
공노인의 어조는 쌀쌀하고 사무적이다. 한복이 마음에 다시 불안이 일기 시작한다. 그러나 관수의 얘기는 공노인을 만나라는 것뿐이었으니까, 한복이는 몸에 감은 전대를 끌러 공노인 앞으로 밀어 놓는다.
"이서방 소식은 아요?"
전대를 받아서 차곡차곡 접으며 묻는다.
"예, 작년에 몸이 좀 아팠지요. 걱정들을 했는데 이자는 걸을 만한 모양이더만요."
"그라믄 중풍기란 말인가?"
"그런갑습디다."
"그것 참 큰일 날 뻔했네. 홍이란 놈 때문에도 더 살아주어얄 긴데,"
비로소 공노인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아직 장가도 안 가고 했으니."
"장가야 뭐 요새는 늦게들 가니까, 그는 그렇고 내가 맡은 물건은 객줏집 주인으로 맡은 거니께 전할 사람이 나타나면 댁한테 돌려주겠소. 손님들은 일상 그러니까, 소중한 물건을 잃어도 안 되고."
다시 사무적 어세로 돌아갔으나 한복의 불안은 가셔졌다. 그리고 날을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자신의 한 말이 되살아난다. 최참판댁은 안녕하냐고 묻는 말에 대답을 별고 없다 하더마요, 그 말이 마음에 꺼림칙하다. 최참판댁 심부름을 왔다 해놓고서 별고 없다 하더마요, 하더마요가 마음에 걸린다.
'의심받은 거야 뭐 어때? 상대를 의심할 여지가 없으면 내 할 일은 다 한 건데."
그러나 한복의 생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짐을 풀어버리고 나니 최참판댁이라는 거대한 짐이 실리어온다. 형인 거복의 존재도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가도가도 번뇌무한이다. 그런데 공노인의 말이 뛰어든다.
"손님은 글 좀 읽었소?"
"예?"
"글을 좀 읽었느냐고,"
"좀 읽었십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드누만."
"나를요?"
"초면일 텐데?"
"..."
"어떻게 집안은?"
몹시 거북한 듯 그러나 집요한 물음이다.
"집안이랄 것 있겄십니까."
하는데 한복이는 낯빛이 조금 흔들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상민이오 양반이오?"
푹 찌른다.
"그런 것이 지금 무슨 소용이겄소."
"그러니까 양반이구만."
공노인은 입맛을 쩝쩝 다신다. 공노인은 한복한테서 김두수의 모습을 보았다. 많이 닮은 얼굴도 아니었는데 처음 보았을 때는 확 들어온 느낌이었던 것이다.
"참 잊었습니다만 용이아제가 안부 전하라 하면서,"
한복이는 구차스럽게 거짓말을 하면서 품속에 든 종이를 꺼내어 공노인 앞에 밀어내었다.
"자세한 것을 적어주더마요."
공노인은 그것을 주워들고 들여다본다. 사실은 용이 필적을 공노인은 몰랐지만, 한복이는 몰린 나머지 또다시 구차스런 말을 한다.
"길상이형님을 만나믄 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할 깁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만나기는 만나야 하는데,"
공노인은 종이를 되돌려주며 애매하게 말했다. 순간 한복이는 눈가에 불덩이가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분노!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분노, 분노의 파도.
"그러면 나는 가서 자야겄십니다."
한복은 어금니를 지그시 누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러시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방으로 돌아온 한복이는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어두운 방에 나자빠지듯 드러눕는다.
'하기는 하루 이틀 겪는 수모는 아니지. 수모랄 것도 없고 나를 의심한 기다.'
한복은 자기 자신을 달랜다.
'이대로 돌아가고 싶다. 형을 만나서 머하누. 내 삼칸 오두막 그것만이 내 천지, 내 세상인데 할 일 했이믄 그만이지 형은 만나 머해.'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뜬 한복이는 눈뜨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생각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아니다. 형을 만나고 가야 한다. 만에 일이라도 내가 만주 간 것을 조사하게 된다믄, 그럴 때 할 말이 없일 거다. 관수형이 날 보낸 것도 형이 있기 때문인데,'
눈을 감았다가 떠본다. 또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떠본다.
'그러믄 형을 어떻게 만나누, 관수 형은 공노인한테 가보라고만 했다. 그라믄 공노인한테 얘기를 털어놓으라른 뜻이었으까? 세상에 이런 경우가 또 있는지 모리겄다. 형은 왜놈의 밀정이고 아우는 독립 자금을 날라오고, 무슨 놈의 이런 세상이 다 있이까.'
한복이는 울울한 심정으로 공노인 집에서 열흘 동안을 묵었다. 그 동안 거리를 나돌아다니면서 울울한 심정을 달래려고도 했으나 이국 풍물에 마음 끌리는 일은 없었다. 다만 화살같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었지만 인내심 깊게 기다려보는 것이었다. 열흘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때쯤 해서 다른 때보다 저녁상이 들어오는 것이 늦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님 기시오?"
공노인의 음성이었다.
"예, 있십니다."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면서 공노인이 말했다.
"나하고 좀 나가겠소?"
"그러지요."
한복은 화닥닥 일어섰다. 공노인이 한복이를 데리고 찾아간 곳은 전에 월선이가 살던 그집이었다.
"들어오시오."
대문에서 공노인이 돌아보며 말하였고 방문 앞에서도 공노인은 돌아보며 말하였다. 방안을 들어간 한복이는
"형님!"
길상이가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복아!"
동시에 손을 맞잡는다.
"용케 왔구나."
"오는 거야 머,"
"고맙다, 고마워."
"그러면 이야기하소. 나는 가볼라누마."
공노인은 나가고 두 사내만 남았다.
"저 노인이 나를 의심한 모양이요. 눈물 바가지나 흘릴 뻔 안 했십니까."
한복이는 억지웃음을 띈다.
"워낙 단단한 노인이라서, 그것은 네가 이해해주어야지. 그렇잖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자격지심에서,"
"나는 네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저나 관수 그자가 썩 생각을 잘했구먼."
길상은 밝게 웃었다.
"집안은 모두 별고 없십니다."
"음."
"형님은 안 돌아올 작정입니까."
"돌아가아! 돌아갈 수가 없지."
"지야 머 아는 것이 있겄십니까마는 희망이 있습니까?"
"희망이야 언제든지 있지. 시일이 문제 아니겠나?"
"하기는 그렇겄소."
"장가는 들었나?"
"아이가 셋이요."
"아이가 셋... 생각 많이 했겠구나."
길상은 눈을 깜빡거리며 한복을 쳐다본다.
"그래 옛날 생각이 나지?"
"와 안 나겄소. 우리집에 모여 새끼를 까믄서 밤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던 생각, 형님은 참 많이 변했소."
"너는 별로 안 변한 것 같구나."
"변해봐야 별수 있겄십니까."
"나는 아주 나쁜 놈이 됐다."
허허 하며 웃는다.
"나쁜 사람이 독립 운동하겄십니까."
"변함없이 고지식하군 그래. 그는 그렇고 이번에 온 김에 러시아 구경도 좀 하고 가지."
"노국 말입니까."
"머 러시아라 하지만 한 귀퉁이지."
"하루가 천추 겉은데 가야제요."
"한 번 오는 게 쉽잖어."
"형님."
"음."
"이번 일 때문에 거복이형은 만나야겄지요?"
길상은 시선을 떨군다.
"만나야지. 잘할 자신 있나?"
"잘해보아야지요."
"니 형은 나를 노리고 있다."
"할 말 없십니다."
이번에는 한복이 시선을 떨구었다.
"지금 어디 있지요?"
"공노인이 주선해줄 게다. 한복아."
"예."
"너 형 만나기 전에 나를 따라가는 거다. 구경하러 가자는 것만은 아니야. 뭐 그렇다고 우리랑 같이 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 하자는대로,"
"그렇지만,"
길상은 한복의 눈을 똑바로 본다.
'우짜믄 저렇게도 눈이 깊으까.'
한복의 가슴에 서늘한 것이 와닿는 것만 같다. 범치 못할 위엄과 덮쳐 씌우는 것 같은 압력, 평범한 대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 한복의 주변을 몇 겹씩이나 감아올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당장에라도 자기 몸뚱이가 낚싯대에 걸려서 올라온 잉어같이 파닥거릴 것만 같다.
"그곳에 가면 너는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다. 너의 형을 네 마음속에서 지우기 위해서도 거복이를 만나기 전에,"
길상은 허름한 양복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었다.
"담배 피우나?"
"안 피웁니다."
손등에 대고 톡톡 치다가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집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확실히 길상은 많이 변했다. 평사리 마을에서 보고 처음 만나는 한복에게는 한 번의 변화겠으나 길상의 변화는 두 번이다. 얼마간 냉소적이며 비꼬였고 자기모순 속에 허우적거리던 용정서의 전반기에 비하면, 그런 모순과 갈등과 열등감은 말끔히 헐리어지고 없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때로는 나약했던 면도 없어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은 힘이었다.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힘, 한복은 바로 그 힘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화살같이 돌아가고 싶어한 마음의 위축을 느낀 것이다. 힘이라고 집어내진 못하였지만 깊은 눈이라 했는데 그 눈의 깊이는 사색에서 오는 깊이는 아니었다. 의지로써 뛰어넘고 시련을 극복한 후에 오는 깊이, 의지의 깊이, 그것은 힘이었다. 그리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이였다. 평범한 대화에 격렬하지 않은 어조는 격렬한 감성, 추상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온 그 두 가지의 융화, 현실과의 융화였던 것 같았다. 기름기 없이 바삭바삭해 보이는 얼굴에 가끔 지나가는 미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형님은 가족들 보고 싶은 생각 안 합니까?"
한복은 길상을 쳐다보다가 뇌듯 물었다.
"보고 싶지. 안 보고 싶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그러나 참을 만하다. 고생은 안 하고 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 같으믄,"
"너 같으면 돌아가겠나?"
"..."
"하기는 내일 일을 누가 아냐. 안 돌아간다고 장담하는 것도 우습지. 허허헛..."
"..."
"한데 너, 저녁을 하겠나 술을 하겠나. 술은 하겠지?"
"술 좀 마시고 싶소."
미리 마련이 돼 있었던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길상이 무라 하니까 이내 술상을 들여 들인다. 술상을 들여온 사람은 청년이었다. 길상이 먼저 술병을 들었다.
"아, 아닙니다. 내가 먼저 따르겄소."
"술잔을 들게. 이번에는 정말 수고가 많았네."
"이거 참, 순서가 바뀌었는데."
따른 술잔을 기울이며 마신다.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밤새워 마실 만한 술은 있으니, 느긋하게 마시자고."
잔을 길상에게 건네주면서
"독합니다. 청국 술입니까?"
"황주라는 거다. 값이 싼 술이지만 괜찮지."
잔을 내어주고 안주를 들면서
"어디 그곳 얘기나 좀 듣자."
막걸리하고는 달라서 몇 잔 술에 한복이는 취기가 도는 모양이다. 취기가 돌면서 굼뜬 그의 입이 다소 활발해진다. 활발해졌어도 그의 죽은 모친의 길쌈 솜씨처럼 차근차근 얘기가 진행된다. 그곳 얘기나 듣자 해놓고서, 그러나 얘기를 듣는 길상은 별다른 감정은 나타내지 않았고 용이가 중풍에 걸렸다는 말을 했을 때 잠시 얼굴이 어두워졌을 뿐이다. 이튿날 아침 길상과 한복이는 훈춘행 마차를 타기 위해 역두에 나와 있었다. 어정쩡한 한복의 표정이었다. 마음은 화살같이 집으로 달리고 있는데 몸은 길상을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담배를 피우며 서 있던 길상이,
"실은 말이야, 너 형이 지금 용정에는 없다."
말을 걸었다.
"그러믄?"
"여기 거복이가 있다면 이렇게 버젓이 역두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게다.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이쪽인들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는 없지. 지금 두수는, 아니 거복이는 하얼빈에 가 있어. 우리는 우리대로 그를 감시하고 있으니까."
예사롭게 말을 하기 때문에 한복이도 차츰 충격 없이 형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상태로 안정이 되어갔다.
"그렇다믄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고 형을 만나려믄 시일을 끌겄네요."
"그렇지는 않지. 연락이 닿는 곳이 있으니까. 그 일에 대해선 걱정마라. 두수도 너에게만은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을 게다. 두수한테 취할 점은 그것밖에 없지. 너가 찾아왔다는 연락만 가면 눈이 허옇게 돼서 달려올 테니까."
"그럴 사람이라믄, 나를 한 번 찾지도 않았는데."
"그건 두수의 고집이지. 제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하여간 밀정이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희대의 악한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예, 어, 어릴 적부터 그랬지요."
"두수가 그렇다는 것을 물건 생각하듯 해야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의외로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 형제니까 어렵겠지만 나하고 너하고는 다르다, 그렇게 갈라놓고 보아. 이번 여행은 너에게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한결 마음이 편할 거다."
길상은 밝게 웃었다. 웃음은 화려했다. 햇빛 아래 보는 그의 얼굴이 만주 벌판의 바람과 눈과 끝없이 오가는 행로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키가 껑충하니 커 보였다. 머잖아 등이 좀 굽어질지도 모른다. 한복은 새삼스럽게 그러한 길상의 모습에 다정한 것을 느낀다.
2장 아버지의 망령(亡靈)
"고맙소. 힘든 일을 해주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사나이는 말했다. 왼편 귀 근처에서 입술 가까운 곳까지 푸르스름한 반점이 퍼져 있는 장인걸을 한복의 손을 꼭 쥐었다. 한복이를 위해 주연이 벌어졌다.
"우리 김형 말이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만난 사람 중에서 착한 사람 다섯 명을 고른다면 그 다섯 명안에 작은 김형이 든다더군요. 하하핫... 아마 우리는 그 명단 속에는 들지도 못할 게요. 이거 부러워서 어쩌지요? 하핫핫."
쾌활하게 웃었고 동석한 송장환도 따라 웃었다. 한복이는 얼굴을 붉혔다.
"선생님, 저는 어떻습니까! 소위 착한 오 인의 후보자 아닐까요?"
"옛날 얘기겠지. 훈장질하던 용정 시대의 송장환이라면,"
"이거 야단났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악인시하면은 어찌됩니까. 이것 참, 안 되겠는데요?"
"지난 사월에 최도헌께서 돌아가셨는데 삼 년 상은커녕 일 년 상도 못 벗지 않았소? 한데 우리는 술을 마시고 담소를 하고, 그래도 악인들이 아니다 자신하겠소? 하하핫..."
순간 화기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고 굳어지고 만다.
"그런다고 서러워들 마시오. 술 듭시다. 죽음은 잠드는 것이오. 잠드는 것은 다반사고. 자아, 우리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쉬는 거요. 작은 김형 덕분에 기분도 내고 기운도 냅시다."
최재형의 죽음, 죽음은 잠드는 것이라 했지만, 그런 말을 한 장인걸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좌중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최재형의 죽음, 예순두 살의 죽음은 흔히 있는 일, 그러나 그는 러시아 땅에서 왜병에 의해 피살된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위대하고 지순하였던 독립지도자였다는 비중을 훨씬 넘어선 것이 있었다. 가장 기반이 탄탄한 연해주 방면의 독립 기지가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충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흔들린다는 것은 사람의 생사보다 사건의 성질에 있었다. 러시아의 시월혁명이 있은 후 만만치 않는 잔여세력 백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계 연합군이 출병을 했다. 물론 일본도 약방의 감초처럼 당연히 끼여들었고,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은 지난날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재빨리 대독 선전 포고에 이어 독일군이 주둔했던 중국의 교주만에 공격을 개시하여 누워 떡 먹은 듯 점령을 한 뒤 얼토당토않게 이십일 조에 이르는 요구 조항을 중국 쪽에 들이대어 부당한 권리를 얻어내었던 그때처럼 백군을 도운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항일세력을 분쇄하려는 작전의 일환이 지난 사월 해삼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4 월 4 일 해삼위에 상륙한 일병이 다음날 러시아 군의 무장해제를 한 것까지는 연합군의 출병 목표로 간주한다 치더라도 이에 편승한 일헌병들은 일군의 원조 아래, 한민 교육 기관으로선 가장 훌륭했던 한민학교, 한민회관, 그 밖의 민가에다 방화하고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살육, 체포하였다. 그때 니코리스크에 체류하고 있던 최재형은 이곳에서까지 쫓아온 일군에 체포되었고 피살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해삼위의 학살에서 정호의 삼촌 박재연도 희생이 되었다.
"전화의복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들은 그 말을 운수, 혹은 운명같이 해석을 하는데 욕망에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희생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대가에는 다시 희생이, 나는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싶소. 여러분들, 기죽지 말고 술을 듭시다. 일본은 행위의 대가를 치를 것이며 우리는 대가를 받아낼 것이오. 송군, 작은 김형한테 술을 권하시오."
"네. 김형, 술잔 받으시오. 나하고 김선생하고는 형제간이나 다름없으니 그렇다면 김형도 내 동생뻘 되는구만요."
한복이는 그냥 얼떨떨할 뿐이다. 장인걸은 사실 좀 일그러져 있었고 감정도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인걸은 빈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고 마음에 없는 말이 아니다.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은, 일본이 러시아 혁명 정부에 못을 박은 행위, 그 부산물인 조선인 학살 사건은, 그것으로 인하여 러시아 혁명 정부와의 유대와 원조를 조선 독립군이 받아낸다는 뜻인데 그것은 일본이 치른 결과요 대가인 것이며 받아낸 대가에 희생이 따른다는 것은 새로운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인걸의 말은 현실이었다. 그런데 길상은 한복이를 왜 연추에까지 데리고 왔을까.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잔뜩 얼어 있는 시골의 촌부 김한복을 어째서 귀빈 대접일까. 자금을 가져온 노고를 치하한다손 치더라도 거물급까지 나와 그를 후대하는 것은 석연치 않고 조직의 맥락을 끊어놔야 하는 것에도 위배된다. 아무튼 일은 순수한 것이다. 한복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김두수의 존재 때문이다. 김두수, 얼마나 많은 일꾼들을 잡아먹었는가. 간도를 위시하여 연해주 일대는 김두수의 무대요 대소간의 사건에서 김두수의 발자국을 이 좌석에 나온 사람들 은 느낀다. 오늘 이 좌석은 한복을 선보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중 삼중의 그늘에 숨겨진 인물을 만들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얘기는 계속되었는데 얘기의 내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나 한복은 어째서 자신이 이 좌석에 와 앉아있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어나갔다. 얼떨떨하고 얼어버린 상태에서 한복의 얼굴은 차츰 심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괴로웠다. 길상이 원망스러웠다. 관수도 원망스러웠다. 명분이야 다시없이 거룩하지 만 일개 촌부로 초가 울타리 안을 세계로 삼고 살고 싶은 은둔에의 습성은 이제 본능처럼 되어버렸으니. 애당초에 보잘것없고 시궁창에 내어버렸던 인생을 이제 주워 올려 어쩌겠다는 겐가. 그것도 자신의 능력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매국노인 형 김두수라는 인물로 인하여, 그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복은 마음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오열을 씹어삼키려는 것이다. 한 번으로 끝내려 했다, 한번으로, 얼마나 어려웠던 결심이었으며 한복으로서는 결사적인 여로였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한복은 술의 힘을 빌어서 폭발하려는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 인내심 깊게 잘 참아내었다.
주연은 끝나고 사람들은 각기 흩어졌다. 한복은 길상을 따라 숙소로 돌아간다. 독한 술을 한복이보다 훨씬 많이 마셨는데 입가심을 했다는 정도의 몸가짐으로, 확실하게 발을 내딛으며 앞서가는 길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복은 푼수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담을 쌓았던 선망의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낀다. 초가의 울타리안, 제 혼자, 아니 불쌍한 처자식의 세계로 달아나려는 은둔의 본능과는 너무나 모순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정신은 말짱했는데 한복의 발끝은 흔들린다.
"취했나?"
길상은 돌아본다.
"취하기라도 했으믄 얼매나 좋겄십니까."
"..."
"형은 잘나서 이일을 하지만 나는 대역 무도한 형을 둔 기막힌 처지 때문에 분복에 넘는 애국자가 되었구마요."
말끝이 흔들린다.
"한복아."
"말씀하십시오."
"잘난 사람은 일 못한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파는 게야. 그걸 알리고 싶어서 너를 데려왔는데 당장에는 못 깨달아 지겠지. 끝내 못 깨달아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마는,"
"말이 그렇지요."
"사실이 그렇다."
"그렇다믄 형님은 답답한 사람이다 그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을긴데, 그럴 리가 없지 않십니까."
어진 한복이로서는 상당히 저돌적이다.
"최참판댁 사위라서?"
"안 그렇십니까?"
"어떻게 된 사위냐."
"..."
"가난한 것도 답답하고 사람의 대우를 못 받는 것도 답답하다. 너는 그 두 가지에서 다 답답한 사람이다."
"예. 두 가지가 다아, 답답할 정도가 아니지요."
"우선은 내 나라가 남의 치하에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많은 것을 착취당하고 차별대우를 받는다. 내 것 주고 빌어먹는 격이지."
"나는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부터 개돼지보다 못했었소."
"그 말 할 줄 알았다."
"누굴 탓하는 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탓을 뉘보고 원망하겄십니까. 사람대접 못 받는다고 해서 나는 아우성도 칠 수 없었습니다. 통곡도 못해 보았십니다. 할 수 없었지요. 할 수 업는 것이 당연했이니께. 형님, 나는 이대로가 좋십니다. 문둥이는 문둥이니까요. 문둥인 줄 알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기지요. 형님도 용정인 가 거기서 비슷한 말씀 하지 않았소? 거복이형을 만난다는 것,그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나보고 가겄소."
"..."
"형님."
"..."
"내가 두만강을 넘은 때 무신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번의 심부름은 살인자인 아버지와 매국노인 형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을 했지요."
한복이는 그때 강물을 보면서 망국민으로서 가슴 저리게 치미던 슬픔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형님, 형님은 나보고 보상이라는 말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너는 죄인이 아니다!"
"말로는 그렇지요."
"너는 나를 모르는군. 나는 너를 아는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길상은 한탄하듯 말하였다.
어느덧 이들은 숙소 앞에까지 와 있었다. 밤이 깊어서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길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복이도 걸음을 멈추었다.
"한복이 이놈아!"
별안간소리를 지른다.
"사내자식이... 누가 너더러 일하라 했냐! 하면 좋겠지...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데. 그러나 아무도 너 목덜밀 잡고 끌어내지는 않아. 마음이 가야 발이 가고... 크게는 독립이다, 크게는 말이야. 그러나 옛날로 돌아가자는 독립은 아닌 게야. 두메산골에 가서 나뭇짐을 지더라도 가난하고 사람의 대접을 못 받는 이치를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 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 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두 사나이는 결투라도 벌이듯 어둠 속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목에서 소용돌이칠 뿐, 해돋는 시각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한복이 연해주에서 용정으로 돌아온 것은 시월 초순께, 그러니까 십여 일을 그곳에서 묵은 셈이다. 공노인은 돌아왔다는 인사를 하자마자 대뜸 일본 영사관에 있는 최서기를 찾아가라는 말부터 꺼냈다.
"저녁때 집으로 찾아가는 게 좋을 게야. 그 사람 동생이라 한다면 괄시는 안 할 터인즉 기죽을 필요는 없고,"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며 한복이를 쳐다본다. 거리 표시의 말뚝을 다 뽑아버린 것같이 시원한 눈빛이다. 그 노인 특유의 어눌한 음성에서 한복은 난생 본 일이 없는 조부를 생각한다.
"직분이 높고 낮고 간에 그놈아이들, 왜놈 밑에 빌붙어서 사는 놈들은 상대편이 약하다 싶으면은 밟아 뭉겨버릴라 하고 잘난 체하면은 겉으로라도 우대하는 버릇이 있으니 그 수를 알아서 앞으로 처신하면은 다소 일이 수월할 게고,"
약하다 싶으면은 밟아 뭉개버릴라 한다는 말의 뜻이 어떤 것인지 한복이는 알아차렸다. 약점,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발설해서 는 안 된다는 다짐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공노인으로서는 이편과 김두수와의 관계에서 과거 지렛대 비슷한 역할을 해온 그 비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배려에서 한 말이겠는데 발설하지 못하게 다짐 두는 것은 그만큼 한복의 사람됨을 이해했다는 얘기가 된다. 형과는 빙탄불상용, 매국노 김두수에 대하여 그 상대가 육친인 만큼 울적한 심정에서 발설하여 형의 지위를 때려 부숴버리려는 충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놈들이 제 백성을 알기를 길바닥에 굴러 있는 개똥만큼도 치부를 안 하니께, 말단으로 내려올수록 그게 더욱 심하단 말씀이야. 자고로 구만리 장천을 날으는 대붕새의 뜻을 모르는 소인배들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곤욕을 겪게 되는데 갈 길은 멀고 자네도 이 어려운 세월을 넘어가자면은 제 몸 제 마음을 지키는 데 악바리가 되어야 하네."
"예."
공노인은 만족하게 웃는다. 웃음에는 존장의 권의를 과시해보고 싶은 치기가 있었다. 그것은 또 상대를 신뢰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 심정이 한복에게 울리어온다. 안늙은이처럼 안존하고 작은 늙은이 몸무게가 자신에게 실리어오는 것은 느낀다. 골통에 담배를 재면서 공노인은 또 말했다.
"하기야 이런 말을 안 해도 어련히 잘 알까마는, 나 같은 늙은이언해 꼬꾸랭이나 알 종도, 보아하니 학식도 있는 성싶고 새겨서 들을 줄도 알것인데..."
"학식이 무슨 학식이겄십니까."
"아아니, 보면 알지. 히여멀쑥하게 양복 입고 다니는 위인들보다 속에 든 것이 많아."
하고 공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시골 무지렁이 같은 한복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오르는데 마침 공노인댁 방씨가 옷을안고 들어온다.
"갈아입을 옷 가지고 왔구만."
방씨는 이유 없이 공노인을 흘겨본다.
"이 옷은?"
앉음새를 고치며 한복은 황송해한다. 연추로 떠날 때 여벌로 가져왔던 바지저고리로 갈아입고 벗어놓았던 겹옷, 빨아서 진솔같이 새로 지은 옷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제 겹옷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애서 솜을 좀 두었소."
"길상형님이 내복도 사주시고 했는데, 수고 시럽게,"
"미안해할 것 한 푼 없구마. 낙으로 생각하고 아들 옷이다 하고, 우리 늙은네한텐 자식이 없인께."
사연은 서글펐으나 조글조글 주름이 진 얼굴의 미소는 종전과 다름없이 앳되고 밝다.
"제에기, 자식없는 게 자랑인가? 젊은 사람을 모았다 하면 그 말을 못해서 몸살이라니까."
공노인은 담뱃대를 입에 문 채 핀잔이다.
"어이구, 어이구, 예에, 이녁은요? 내 말 사돈이 한다든가?"
"때 만났다고. 요즘 며칠 심심했던 판이라."
심심한 것은 오히려 공노인 편인 것 같다. 늙은 마누라를 놀려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그런 얼굴이다.
"담뱃대 들고 왔다갔다하는 늙은네가 심심치, 할 일이 없어 내가 심심을까?"
방씨는 한복에게 얼굴을 돌리며,
"두고 보믄 알 기구마. 저 늙은이 며칠이 안 가서 거기보고 말할기니께, 내 아들 같아는 말이 입에서 나올 기요. 그런 징조로 돌아가는게 눈에 훤하다니까."
하며 자질자질하게 웃는다.
"허허어, 검은 똥을 누어봐야 철이들지. 머리털이 허옇게 되어도 저 꼴이니, 눈이 불쌍해서 데리고 살긴 살았다만,"
"어이구, 어이구, 무슨 소리 하요? 피장파장, 미련하기가 곰 겉소."
"모르는 소리이, 동네방네 다 아는 일을 임자만 모르고 있지이."
한복이는 웃음을 참는다. 노인들의 사랑싸움이 볼 만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한 것을, 즐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제발 덕분이요. 어디서 맨들었든 간에 맨든 아아만 내 앞에 갖다놓으소. 그라믄 어깨춤이라도 출 긴께요. 내 죽으면 머리 풀 자식 아니겄소."
"염치도 좋지. 열 달 배슬은 사람이 따로 있는데 죽은 뒤 물 얻어먹을 생각부터 아니, 눈이 불쌍해서 데리고 살았다는 말을 영 못 알아듣는구먼."
으레껏 하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 그래도 방씨는 그 말에 화가 나는 모양이다.
"머라꼬요? 그렇기 실토 안 해도 이녁 마음 내가 모를 줄 알았습디까? 참말이제 딴 데서 아이라도 하나 맨들었으믄 저 늙은이 그 말하고도 샐 기구만. 누가 모릴까 봐서?"
말을 하고 보니 더욱더 화가 나는가.
"두매를 두고 침을 꼴깍꼴깍 삼키쌌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겄네? 흥, 양지를 삼지 못해서 꿍꿍 앓던 사람은 저기 저 늙은네 아니었던가?“
"몸살은 아닐 게고 감기가 들었던가 보지?"
"순, 인정머리라곤 한푼 없고 나 겉은 사람 안 만냈이믄 팔도강산 자기 마음대로 돌아댕기기나 했을라구? 아 그러시! 나도 딴데 시집갔으면 아들 낳고 딸 낳았을 기요! 흥, 나 하나 없어 보제? 설움을 복 받듯 받을 기믄서,"
"그라면 임자보다 내가 먼저 죽어야지."
"저 하는 소리 좀 들어보소! 내가 이녁더러 먼저 죽으라 했단 말이요?"
믿을 수 없눈 봄날같이 방씨 감정에 샛바람이 분다. 진짜로 토라져서 눈에 눈물이 글썽 고인다.
"우스갯 말씀인데 어머니가,"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한복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어머니라는 말은 착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말에 방씨 마음에 일던 샛바람은 용케 멎었다.
"노망이야, 노망. 나이 들수록 변덕이 죽 끓듯 하니, 나는 도망가야지."
홍당무가 된 한복이 꼴이 민망했던지 담뱃대를 들고 일어선 공노인은 나가다 말고 돌아보며,
"기죽을 것 없고, 그러면 저녁 먹고 나가보도록 하게."
"예"
저녁을 끝낸 뒤 한복이는 일러준 대로 최서기의 집을 찾아갔다. 동저고리바람의 볼품없는 용모, 농사일에 이력이 난 몸짓하며 대수롭게 여길 리가 없다. 최서기의 마누라는 가무잡잡한 얼굴을 휘두르듯 한복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이 댁에 가믄 형님하고 연락이 닿을 것이란 얘기를 듣고 찾아왔십니다만,"
"덮어놓고 형님이라 하면 알 수 있나요?"
톡 쏜다.
"아, 네. 저기 김거복이라고 하는데, 회령 경찰서의....."
"김거복? 모르겠는데요."
"참, 이곳에서는 김두수로 통한다 하더구만요."
"뭐라구요? 그러면 김부장이 댁의 형님이다 그 말씀이세요?"
당황하지 않고 태도는 표변한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비슷한 데가 있기는,"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온, 세상에"
하다말고,
"여보! 여보!"
안을 향해 소리를 친다. 그러더니 쫓아들어간다. 곧이어 최서기가 나타났다.
"어이구, 어서 들어오시오"
방금 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던지 최서기는 양복바지에 속내의를 입고 있었다.
"김부장한테서 동생이 있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하기야 집안얘기는 도통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방에서 마주앉은 최서기는 천착하듯이 한복을 살펴본다. 그러나 한복이는 최서기의 말에 대꾸는 하지 않고,
"저는 김한복이라 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통성명부터 한다..
"네. 한데 그간 김부장하고는 자주 연락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시었소?"
듣기에 따라서 조롱한다 싶으리 만큼 최서기의 태도나 어조는 정중하다.
"예. 이곳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듣기론 삼사 년전입니다만 일런 먼 곳까지 오는 일이 쉬워야지요."
"그것은 깁부장이 잘못했구먼요. 한데 형제분은 여럿입니까"
"조실부모하고 형제라야 단둘뿐입니다."
"허허어 참, 그래요?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김부장이 그럴 수가 있나. 너무 무심했군요, 아니 할 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도 동생하나 살리는 것 문제도 아닐터인데,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구."
희미한 인상의,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얼굴에, 마음에 없는 동정의 빛을 떠올린다. 한복은 고개를 숙인다. 공노인의 음성이 귓가에서 울린다.
'누가 동정을 받을 사람인지 모르겠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복에게는 놀라운 자각이었다. 남을 멸시하는 최초의 자각,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어디서 흘러오는지 모를 의욕과 즐거움 같은 것이 마음 바닥에 고여오는 것을 느낀다.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다!'
길상의 음성이 물결같이 되풀이 되풀이 들려온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의 망령에서 빠져나오는 걸까? 이 사나이를 나는 업수이 여기고 있다. 나는 나다! 아버지도 형님도 아니다!'
한복은 희미한 인상의, 희미한 상대편에 대하여 자기 자신은 더 한층 희미해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하기 시작한다.
최서기의 마누라가 술상을 날라왔다. 술상을 내온 것은 마누라의 재량이었던 눈치다. 최서기는 마누라를 향해 혀를 찼다, 마누라는 남편과 한복이를 번갈아보다가 미리 준비해온 수다를 떨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던지 그냥 나가버린다.
"술은 하시오?"
"하지요."
굵은 대답 소리에 최서기는 눈을 깜박거린다. 마누라한테 혀를 찬 것이며 술상을 갖다놓고서 술 하느냐고 묻는 것이며 무시한 태도가 좀 노골적이었다고 깨달았음인지, 보복심이 강한 김두수를 생각한 탓이었던지,
"우리 김부장이 오면은 백화수란 요릿집에 가서 진탕 마시기로 하고, 우선 자아, 변변찮지만 술 드시오.“
술잔에 술을 채우고 권한다.
"들것십니다."
"김부장을 말할 것 같으면 회령에서 순사부장까지 지냈고, 허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형님에 대해선 잘 모르시는 모양이니까 하는 말이지마는 그 사람, 독립군 잡는데는 귀신이오. 발 안 닿는 곳이 없고 모르는 일이 없고 되놈도 되고 조선 사람 일본 사람 마음대로 행세하면서 그야말로 종횡무진이지요. 하여 당국의 신임이 여간 두텁지가 않아요. 하다못해 순사 자리 하나라도 동생을 위해서 만들어주려면 아, 그건 쉬운 일이지요. 글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소만."
"눈 뜬 장님입니다."
"그럴 리가, 김부장이 딴 말은 안했어도 사대부 집안이라 하던데요?"
"요즘 세상에 양만이믄 뭣하겄십니까."
"그러니 역시, 아아, 아 아니지요. 일본 사람들은 양만을 좋아하니까, 직장을 얻을 때 한결 수월하니까요."
"형님 얼굴이라 볼라고 왔지 직장 같은 것, 아예 얻을 생각도 안합니다. 무식꾼이 언감생심이지요."
공손했으나 비꼰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고, 하여간에 김부장 꽁무니를 꼭 잡아요. 동생인데 어쩌겠소? 놀부가 아닌 다음에야 동생을 모른다 하겠어요? 권력도 있고 돈도 많아요 아무튼 배짱 좋고 입심 세고 승냥이처럼 재빠르고,"
최서기는 김두수를 치켜세우면서 좁혀져서 올라간 형의 이마와는 다르게 다소 불거진 것 같은 기미 비슷한 것이 앉은 한복의 이마에 시선을 준다. 김두수 귀에 닿을 것을 계산하고서 하는 말인 것 같다. 밑천 안 드는 말로 공을 쌓는 거야 쉽고도 쉬운 일이니까.
"회령에서의 순삽부장 자리도 실은 좀 쉬어보라고 준 것이었고 그 때만 해도 왜놈의 순사,"
이때만은 왜놈이라 한다.
"왜놈들 순사도 김부장 앞에서는 굽실굽실했어요, 같은 조선 사람 처지에서 보는 것이 과히 기분에 안 나쁘더구먼. 두고 보시오. 한 몇 년 있으면 그까짓 서장 자리 하나쯤 돌아갈 게요. 대단한 출세지요. 삼일운동인가 그것 때문에 요즘엔 조선인들을 다소 우대한다는 기운도 돌고 있는 터이라,"
"형님은 지금 어디 있십니까?"
최서기는 보채지 말고 내 말이나 들으란 식으로 술을 마셔가면서 제 말만 계속한다.
"뭐니 해도 조선 사람은 경찰방면으로 나가야 출세가 빨라요. 김부장이야 지금은 경찰이기보다 헌병대에 소속된 처지로서 오히려 경찰을 호령하는 입장이지마는 몇 년 있으면, 그렇지요.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경찰의 서장쯤은 따놓은 당상이고, 아 글쎄, 고향 땅에라도 서장이 되어 내려가면 좀 영광이겠어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지요. 옛날로 치자면 원님 격인데 일본 사람 치하에서는 군수보다 오히려 서장 쪽이 실속 있지요.“
"촌구석에서 농사나 짓는 지가 뭐 알것십니까. 그보다 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아, 네. 그것은 나도 모르지요."
"모르신다구요?"
"몰라요."
저만큼 메어치는 듯한 대꾸다. 일껏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두수를 치켜세우더니만 또 변덕이다. 아니, 어리석은 사람을 놀려먹는 재미에서 한 짓 같다.
"술이나 마시지요."
"술이나 마시고 있일 한가한 처지가 아닙니다."
"한가한 처지가 아니라면 김부장 만나기는 어렵지요. 자아, 술 드십시오."
한복은 술잔을 들면서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최서기의 눈자위가 불그레했다. 술잔을 비우고 다시 술을 부으며 천천히,
"불원천리 형님을 만나러 왔더니만, 그렇다면 돌아갈밖에 없구마요."
"야아, 아니오.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연락이 닿는 곳은 있어요. 시일이 좀 결려서 그렇지. 지금 한창 바쁜 때라서, 십중팔구 김부장이 이곳으로 오기보다는 형씨더러 있는 것에 오라 할 게요. 요즘 일본은 잔뜩 핏대가 올라 있거든요. 지난 삼월에 일어난 사건 아시지요?"
"지가 뭘 알겄십니까."
한복이는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러시아 니콜라예프스크라는 곳에서 일본 사람들이 몽땅 학살당한 사실을 모른단 말씀이오?"
"..."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몰살을 당했어요. 계획적이었지요. 얼음이 얼면 교통이 막혀서 쳐들어갈 수도 없는 시기를 잡아서, 표면으론게 아니었거든. '적위군의 두목이 조선놈이었으니까."
한복은 연추에서 들은 박엘리야라는 이름을 얼른 떠올렸다. 조선놈의 두목이 바로 그 박엘리야였으니까. 최서기는 소의 니항사건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사월에 일본군이 해삼위로 쳐들어가서 한민학교와 한민회관에 불을 지르고 조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였지만 그것으론 직성이 안 풀릴 거란 말입니다. 듣기론 니콜라예프스크엔 일본인어부만도 칠팔백이나 있었다니까. 지금 대련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로 회담을 하고 있지만 러시아 놈들은 되놈보다 더 질기거든요. 아무튼 이번 일을 기해서 연해주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된서리를 맞을 것이 분명하지요. 이 잡듯 들추어낼 것이오. 공연히 서툰 짓을 해가지고 긁어부스럼 만든 격인데에, 우리를 두고 앞잡이니 주구니하고 욕질을 하던 놈들 따지고 보면은 독립 운동한답시고 하는 짓거리가 그 모양이라, 저희들은 노국놈의 앞잡이 주구, 그 유가 아니지요. 그 놈의 나라 자체가 임금도 잡아서 죽이는 개판인데 돈푼 받아먹고 싸움까지 가로맞아서 한 대서야,"
자못 개탄하듯, 마음속으론 촌놈이, 하면서도 친일의 동지여, 잘 들으시라! 하듯. 주기도 올랐음인지 턱없이 열을 올린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일본 영사관에 있다 하여 눈인 보이게 안 보이게 따돌림을 당하고 끊임없는 빈정거림 속에서 쌓인 원한도 있어 열을 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미욱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 실정을 알아야 하는건데, 실정을 말이오. 러시아 중국이 제 아무리 땅덩이가 크다 한들 힘이 없는 데야 별 수 없지 않겠소? 어쨌거나 러시아 땅 시베리아에 일본 군대가 들어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보면 중국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네들이 힘이 있었다면은 감히 제 나라에 남의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겠느냐 그 말 아니오? 러시아나 중국이 일본에 대산 감정으로 하여 조선의 독립군을 두둔하고도 싶겠지만 그러나 사태가, 조선의 독립군 때문에 남의 나라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아니지요. 아니고말구요. 조선의 독립군 따위는 깡그리 없이하여도 좋으니 제발 일본군은 나가달라 그 심정인 것은 뻔한 노릇이지. 이를테면 호랑이에게 쫓긴 나무꾼이 움막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합시다. 호랑이는 위험하고 다같이 피해를 받는 짐승이지만 다급한 데야, 또 호랑이를 칠 힘이 없는 데야 어쩌겠소? 잡아먹히더라도 할 수 없이 나무꾼을 내쫓고 자신들의 보신을 기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소? 어리석은 자들이 그걸 모른단 말이오. 그러나 일본의 속셈은 또 그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나 일본의 속셈은 또 그게 아니란 말이오. 오합지졸, 아무 힘도 없는 독립군 따위가 안중에나 있겠어요? 일본이 어디 그리 허약합니까? 국내에서 삼일만세다, 민족자결이다 하고 소란을 피웠지마는 막상 민족자결을 내세운 미국조차 눈도 거들떠보지 않았단 말이오. 그만큼 국제적으로 일본은 힘이 큰 거지요. 아, 그런 일본이 비적떼나 다름없는 독립군을 겁내게 생겼어요? 속셈은 무엇이냐! 핑계 삼아서 만주를 먹겠다 그 얘기요. 못 먹을 것도 없지요."
봉건제도의 잔재요 오늘날엔 침략과 군국주의의 전초병인 소위 일본의 낭인, 조선을 거쳐 만주 대륙을 횡행하며 곡예와 음모를 일삼는 무법자 낭인을 평소부터 두려워하고 존경해 마지않던 최서기는 일장의 시국론을 토하고 보니 자기 자신을 경애해 마지않는 그 사나이 중의 사나이, 낭인으로 착각했었는지 눈알을 빙그르르 돌리며 걸맞지도 않는 위협적인 몸짓까지 흉내를 내는데 모르는 것이 부처님이더라고 한복에게 그것이 통할 리가 없다. 설령 최서기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또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라 할 수도 없으며 영사관에게서 들은 풍월이 있어 제법 논리도 서 있었지만, 그러나 한복에게는 마이동풍이다. 사람을 못 믿기 때문에 말도 믿지 않는 것이며 그의 말을 실감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최서기는 술을 쭉 들이켜고 나서,
"좌우간, 얼굴 한번 보러왔다 어쨌다 하지마는 댁이 김부장 찾아온 거는 잘한 일이오. 아, 시골서 농사 지으며 고생할 것 없다구요. 뭐 우리가 나라를 팔아 묵은 것도 아니겠고 망해먹은 것도 아니겠고 무슨 책임이 있소? 기왕지사, 얼음을 베개 삼는 어리석은 놈들이야 뭐라건 내 살길 내가 찾아야지. 형제간의 우의가 어느 정돈지는 모르겠지만 김부장을 꼭 붙들어야 하고 또 먼 훗날의 일은 우리 알 바 없고 한 백 년은 일본이 흥할 터인즉 일본에 붙어야, 아 글세, 태초에 사람만들 때부터 일본, 조선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 테니 말이오."
횡설수설하는 최서기를 멀거니 바라보는 한복이는,
'형도 만나게 되믄 저런 말을 하겄지.'
3장 영원한 잠
한복이 용정에서 김두수를 기다리고 있을 때 김두수는 하얼빈에 있었다. 1917년 봄에, 화창한 봄날에 허벅지에다 권총을 쏘아대고 달아난 금녀를 김두수는 또다시 하얼빈에서 사로잡은 것이다. 햇수로 사 년 동안, 아무튼 김두수는 진드기 같은 사내다. 금녀가 김두수에게 다시 붙들렸다는 것은 김두수의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는 얘기가 되겠고 장인걸 쪽에서는 계산 착오가 난 결과로 볼 수 있다. 김두수는 권총을 쏘고 금녀가 달아난 그 지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육 개월 후 그 지점에 사람을 심어놓고 장장 사 년을 기다린 것이다.
'일이 년, 삼사 년... 반드시 나타난다. 내가 그곳을 잊었으리라 단념했으리라 생각했을 때. 사건이 난 장소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식으로 판단하니까 오히려 그 점을 고려하여 역으로 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 대가리들이 좋은 놈들이니까.'
쉽게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수포였으나 장인걸 쪽에서는 그곳을 잊었거나 단념했을 것을 생각하고, 정확히 삼년후 금녀를 다시 하얼빈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길상이 훈춘행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한복에게 김두수는 지금 용정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김두수가 봉천으로 떴고 행선지는 아마 상해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받은 때문이다. 그러나 김두수는 봉천에서 하얼빈으로 간 것이다.
중국여자 구마가 사는 벽돌 이층집에서 약 오백 미터쯤 떨어졌을까? 창고처럼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총격 사건이 났던 장소에선 과히 멀지 않았다. 얼핏 창고같이 보이지만 포염시에서 전당포를 차려놓고 왜헌병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양서방의 동생이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사는 집이었다. 집안의 어두컴컴한 방에는 지금 손발이 묶인 채 송장처럼 금녀가 나동그라져 있었고 김두수는 인조견 속바지의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와이셔츠의 두 소매도 걷어 올린 몰골을 하고서 술을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금녀씨."
씨를 붙인 것은 물론 조롱인데,
"날고 기는 나한테서 몇 번 도망을 쳤는지, 가만히 있자아, 윤가 놈한테 두 번 달아났고오, 훈춘에서 한 번 달아났고오, 다음은 나한테 총알을 안기고서 달아났으니 도합 네 번이구먼. 그러고 보니 금녀씨도 대단한 여자야. 아, 아니지이. 심금녀 씨한테만은 이 김두수가 물렁죽이 되어 번번이 도망 길을 열어주었다 하는 편이 옳을 게야. 그러나 이번만은 다를 거다. 그건 나보다 그쪽에서 더 잘 아는 일일 것이며 하하핫 으하핫핫... 다를 것이다! 하하핫! 핫... 초장부터 썩 달랐지. 아암!"
술 한 모금을 꼴깍 삼킨다.
"사내놈이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내가 가지고 논 그 수많은 계집들, 그것들과 동등하게 대접을 해줄 터인즉, 기대해 볼 만한 일이긴 해. 진작부터 그랬어야 하는 건데 턱없이 대단한 여자로 만들어버렸단 말씀이야. 내 하는 식으로만 했던들 이렇게 세월을 끌었을까?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은 나 이 김두수 흥분했다고. 위대한 김두수를 흥분시킨 심금녀는 역시 대단한 여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나동그라진 채 송장처럼 움직이지 않는 금녀의 둔부 쪽으로 김두수의 시선이 간다. 푸른색의 다브잔스를 입은 몸의 곡선은 김두수를 미치게 한다.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에는 썩 기분이 좋았을 게야. 하하핫핫..."
술병을 든 채 일어선 김두수는 둔부에 발길질을 한다.
"천천히, 천천히 삶아먹을까 구워먹을까 지져먹을까? 천천히, 천천히..."
이번에는 머리채를 감아서 여자의 얼굴을 쳐든다. 불길 같은 눈이 김두수를 노려본다. 두려움 없는 눈이 김두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금녀의 납치는 아주 면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구마 여인이 시장가는 틈을 노리다가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중국말이 유창한 양차생이 내객으로 가장하여 문을 열게 하였고 문이 열리는 순간 양차생과 김두수가 난입하여 재빨리 입에 재갈을 물렸고 다음 손발을 묶은 뒤 길모퉁이에 대기시켜놨던 인력거를 끌고 와서 금녀를 담아 실었던 것이다.
"죽는 것도 마음대론 안 될 게야. 점박이놈 그놈을 죽이기 전엔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속바짓가랑이,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렇게도 집요하게 쫓던 여자를 사로잡았건만 김두수는 승리에 취할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금녀를 소유하는 것, 금녀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거물급을 낚아 올리는 일, 그 어느 것도 실현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하여 술을 마시었고 계속하여 지껄였고 때때로 금녀를 구타하곤 했으나 이미 죽음을 결의하고 있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이 확실해지는 이외 다른 틈바구니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분노와 초조, 불안한 나머지 여자를 소유하는 일, 거물급을 체포하는 일, 금녀가 그 둘 중의 어느 한 가지에만 해당이 되었더라도 김두수는 기가 넘어서 금녀를 능욕하고 죽여버렸을는지 모른다. 금녀의 침묵은 죽음을 결의하고 있다는 예감을 더욱 굳혀주었다. 해가 질 무렵에는 와이셔츠까지 벗어던진 김두수는 마치 우리 속에 갇힌 맹수처럼 방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금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둔부에 눈이 가도 욕정 같은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구, 그만!'
김두수는 양차생 내외가 거처하는 방으로 건너간다. 양차생이 힐끔 눈을 들어 쳐다보았고 그의 아내는 애써 김두수의 흐트러진 몰골을 외면하려 든다.
"난공불락입니까?"
유들유들 살이 찐 형과는 달리 균형잡힌 몸집에다 식자깨나 들었을 것 같은 얼굴, 양차생은 야유의 엷은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듣기 싫다."
"온종일 물 한 모금 한 마셨는데 죽는 것 아닙니까?"
"으음... 아이구 가슴이야."
통통하게 살찐 주먹으로 두수는 제 가슴을 친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겠군요."
바닥에 퍼질러앉은 두수는
"담배!"
차생이 담배를 꺼내주고 불까지 붙여주는데 태도는 별로 공손치가 못하다. 그새 차생의 아내는 방에서 나가고 없었다.
"형님."
붕어 물 먹듯 담배를 피워대다가 절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두수는 차생을 외면해버린다. 이빨을 고친 후 한결 나아진 편이지만 돼지 상 같은 인상만은 여전한 두수의 옆모습에 위협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는 차생이 말을 잇는다.
"헌병대에 넘깁시다."
"뭐라구?"
"생각해보십시오. 그간 고생한 것을 건져내는 것은 그 길밖에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
"거기서 찢어먹든 볶아먹든 우리 알 바 아니지요. 뭣 땜에 손해나는 장살 합니까?"
"..."
"저 여자 저대로 죽을 거요."
"이 새끼가! 불난 집에 부채질이야!"
"형님도 참 이상해요. 막마음 먹고 한번 덤벼보시구려. 내 목적은 하나지만 형님 목적은 둘 아닙니까?"
"이 개새끼야! 어느 놈이 송장하고 잠자리 같이하는 것 보았냐?"
"제발 욕지거리만은 그만두슈. 그것만은 질색이니까요."
"차생이 이놈아!"
두수는 작은 눈을 힘껏 부릅뜨고 노려본다.
"나를 몰라서 하는 수작이냐! 네놈 꼭대기 위에 내가 서 있다. 아무나 다 나같이 될 줄 알어? 가소롭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여차하면 가로가는 게야. 이 김두수가 지금 네 눈에는 갈팡질팡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말씀이야.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걸 자알 알면서, 하핫, 하하핫핫...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더라고."
차생은 잠자코 만다.
"흥, 앞뒤를 열 번은 더 재고 사는 놈이다. 네까짓 피래미가? 만주 바닥에서 십 수 년을 굴렀기로."
협박을 쏟아놓는데 누굴 믿고 그러는지 배짱이 있어서 그러는지, 차생은 대항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동요하는 기색은 없다. 나 밀정이오, 하고 얼굴에 그려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차생은 어딘지 세련돼 보이는 용모의 소유자다. 잘생겼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으나 특히 갸름하고 혈관이 솟아오른 손은 귀골로 뵌다.
"그렇지만 저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차라리 달래보는 게 어떻습니까. 풀어주고 대접도 잘해주면은 혹 모르지요."
"흥, 그래서 될 일이면은, 자네도 어리석기가 한량없구먼."
"되든 안 되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요. 방치해둘 순 없지 않습니까."
"풀어줄 수는 없다. 절대로, 송장이 되는 한이 있어도."
"쓸데없는 고집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심한 고문을 하든지요."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자네 안사람 어디 갔나."
"글쎄요."
"자야겠다, 이 방에서."
"주무십시오. 여편네보고 저 방에서 자라지요 뭐."
두수는 침상으로 올라가 이불 자락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돼지 같은 놈! 꼴같지도 않게끔.'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것을 참는 듯 차생은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닦는다.
차생이 이곳에다 주거를 정하였다 하여 금녀를 잡는 일에만 전념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김두수 명령에 의해 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었다. 영사관의 끄나풀로 돈푼이나 받아먹는 형과는 달라서 차생은 정규적인 정보원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하얼빈에 머무는 목적은 애초부터 따로 있었고 말하자면 금녀의 경우는 일을 하는 동안의 낙수를 줍는 정도의 성격이라 할까. 배후의 거물을 낚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생의 명령 계통인 스즈키 대위도 동의했으며 형으로부터 금녀에 대한 사연을 들어서 다소 사정을 아니까 김두수로부터 얻어낼 보수도 계산에 넣고 있었으나 금녀 문제에서 명목상으로는 김두수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비중이야 차생에 비하면 월등하고 일의 범위도 넓고 깊었으며 다사다난한 풍운이 감도는 연해주와 만주 방면을 무대로 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대소사건의 공작에까지 가담하고 있는 김두수고 보면 금녀에 관한 일 같은 것은 내실이야 어쨌거나 표면상으로는 하찮은 낙수다.
이튿날 아침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두수는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세수를 하고 옷도 말쑥하게 갈아입고 신문을 읽고 있던 차생은 신문지에 눈을 둔 채
"어떻게 되긴요. 그대로지요."
"도망가진 않았군."
"무슨 재주로요. 집사람 얘기론 헛소리 한번 안 하고 죽은 것 같아서 심장에 귀를 대보곤 했답니다."
신문에 눈을 둔 채 말을 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런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김두수였는데 잠자코 담배를 집어 들고 붙여 문다.
"소위를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찮겠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뭐가 이해하기 곤란해?"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겠고 형님이 한 여자를 두고 그렇게 긴 세월을 단념 못했다는 일 말입니다. 형님에겐 과분한 여자이긴 합디다만."
신문을 돌려서 기사를 찾으며 차갑게 웃는다.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말을 하네. 그런 말 하니까 두 손 마주잡고 찬송가 부르는 젊은 놈들, 허리가 휘청거리는 젊은 놈들 생각이 난다. 나는 날 때부터 겨루기 위해 태어난 놈이야! 억만금의 돈이 있어도 싸움 없는 세상이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사누."
두수는 들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요란스럽게 가래를 뱉어낸다.
"그 계집이 진작부터 날 받아들였음 옛날 옛적에 버려진 신발짝이었지, 흥!"
조반을 함께 끝내고, 양지로 이빨을 쑤시고 있는 차생을 노려보다가,
"두 번 다시 헌병대를 들먹이다간 골통이 부서질 줄 알아."
비대한 몸을 비비적거리듯 벽 쪽으로 물러나 앉으며 두수는 다짐을 둔다.
"이제 나는 손을 떼겠어요. 형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말해 뭣하나. 두 번 하면 잔소리다. 이제부턴 대가리 처박지 말어."
"허 참, 그 점잖은 말씨 좀 써주시오. 대가리니 골통이니,"
"밑천을 다 아는 터에, 작위라도 받을 생각하는 모양인가?"
"말말이 그렇게 나오면은,“
하다가 내버려두고,
"그 대신 말입니다."
말머리를 돌린다.
"그 대신이라니? 무엇 대신이야?"
"저 여자 일에서 손을 떼는 대신 응당 보수에 대한 매듭을 지어야 안 하겠습니까."
"보수에 대한 것?"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우리들의 관례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하니 상해서 올 물건값 절반은 주셔야겠습니다."
"스즈키가 돈 받으라 했나?"
"그쪽에선 사람이겠지요만 사람도 안 내놓겠다 그 얘기 아니었소?"
"그랬었나? 하하하, 그랬었구나. 그런데 네가 하나 모르는 일이 있어."
"..."
"상해서 올 물건 값 그거 내 돈 아니야. 공작금인 걸 알고 하는 소린가?"
"물론 알고 하는 말이지요. 어두컴컴하고 애매했으면 저 여자 일이 아니라도 갈라 쓰게 돼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여태까지 어두컴컴하고 애매한 돈을 갈라서 써본 적이 없는데?"
차생이 발끈해서 두수를 쳐다본다. 상해서 올 물건 값이란 아편 값이다.
아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돈을 갈라 가질 이유가 된다는 뜻이다.
"하긴 그렇군. 공작금을 잘라주어서 안 된다는 근거는 없지. 공작금이 필요한 인간이라면 말씀이야. 되놈 행세 하는 데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네고 보면은 스즈키 그놈아아가 귀여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냐. 주머니칼처럼 생광스럽게 쓰여질 테니, 하여 네놈이 배짱을 두둑이 내미는 모양인데,"
"제발 욕지거리는 그만두십시오."
신경질을 부린다.
"안심하고 나가게. 나가서 볼일이나 보아. 물건 값은 아직 안 왔고 계집은 저 방에 있어."
"안심하고 자시고 있습니까? 내가 경우없는 말이라도 했어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도 삼 년이면 새경이 두둑할 겁니다. 형님과 내 사이에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겠고,"
"아, 아니, 왜 이리 잔소리가 많지? 누가 못 주겠다는 말이라도 했었나?"
"당연한 것에 형님이 꼬리를 다니까 한 말이지요. 그럼 나가보겠어요."
일어서 나가면서 차생이는
"자알 해보슈!"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돌아본다.
'별 개떡 같은 놈을 다 보겠군.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보아 저러는 게야. 국으로 있으면 다아 돌아갈 텐데 젊은놈이 보채기는 더럽게 보챈다. 윤이병이놈 그놈 꼴로 만들어버리는 것쯤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인 줄도 모르고, 이럴 때 날 건드리면 재미 적다는 걸 왜 몰라. 그렇잖아도 한바탕 굴리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해오는데, 제에기랄! 그림의 떡도 유분수 아니야?'
방 임자를 쫓아내놓고 마치 제 방처럼 벌렁 나자빠진 두수는 다시 벌떡 일어난다.
"계수! 계수씨! 없소오?"
하며 고함을 지른다. 예에, 하고 대답을 하면서 차생의 아내가 달려왔다. 중국말이 서툴러서 중국여자 행세가 어려웠기 때문에 벙어리로 가장하며 지내온 처지였는데 별로 파탄 없이 지내온 것으로 보아 평범해 보이는 여자치고는 상당히 영리하다 할 수 있겠다. 자그마한 몸집에 중국옷이 어울리는 편이었고 몸짓 탓인지 나이보다 앳되고 어리광스런 표정,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타고난 것인 듯싶다.
"그 계집 뭣 좀 처먹었소?"
눈을 깜박깜박하며
"아니오."
"억지로라도 좀 먹여보아요!"
"입을 꼭 다물고 물도 한모금 안 넘기려 하니 어쩝니까. 그렇게 독한 여자 처음 봤어요."
"으응, 그만 그걸,"
침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두 주먹을 쳐들고 흔들어 댄다.
"방문을 잠그고 손발을 풀어주는 게 어떨까요."
"안 돼요. 그건 안 된단 말이오! 송장이 되어도 달아나는 것보담은 낫지."
한나절을 술 가져오라, 여자에게 뭘 좀 먹여보아라,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쉴 새 없이 명령하던 두수는 저녁때가 가까워왔을 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미음을 쑤어서 주전자에 넣어가지고 아가리를 벌려 부어보아요."
"여자끼리 어떻게,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긴말 할 것 없어요. 죽이는 일이오? 죽이는 일이냐 말이오? 처먹어야 살아날 게 아니겠소. 미련하기는, 내가 이런 말 안 해도 해볼 일을 가지고. 어서, 하란 말이오!"
두수는 악을 쓴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죽음이라도 다가오는 것처럼 안절부절 침상에서 뛰어내려 걷어 올린 속바짓가랑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좁은 방안을 서성거리며 계속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쓴다. 여자는 시키는 대로 금녀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기척이 났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아주버니!"
"달아났소?"
두수는 방문을 박차고 나간다.
"아니에요. 손, ...을 물었어요."
여자는 울상이 되어 엄지손가락을 싸들고 있었다.
"날 따라와요!"
두수는 여자의 손목을 불끈 쥐고 잡아 끈다. 몸집이 작은 여자는 마치 팔랑개비처럼 끌려간다. 금녀가 있는 작은방으로 간 두수는,
"계수씨, 저년 아가리를 숟가락으로 벌려요!"
손가락을 물리는 바람에 겁에 질린 여자는,
"나, 나는 못하겠어요."
뒷걸음질을 친다.
"못하겠으면 내가 하지."
옆에 놓인 주전자를 번쩍 쳐든다. 다음 순간, 모로 누운 금녀 옆얼굴에 주전자를 내리친다. 주전자 속의 하얀 미음이 비말이 되어 사방에 흩어진다. 금녀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구머니나!"
여자가 달아나려 하자 두수는 한 팔을 거머잡는다. 그리고 주전자를 내동댕이치는 소리, 그 소리에 이어 옷 천이 찢어져나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서, 두수는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다. 짐승처럼 눈에 파아란 불을 켜고서. 다브잔스가 찢어져나가고 속옷이 찢어져나가고 맨살이 드러난다. 금녀의 육신이 경련하듯 꿈틀거린다. 여자는 어느새 달아나버리고 거의 나체가 되어버린 금녀는, 그 지경이 되어도 무저항이다. 두수는 무저항에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쫓기어 그는 금녀 살덩이를 밟고 짓뭉갠다. 두수가 그 방에서 나왔을 때 여자는 넋 빠진 것같이 멍청하게 두수를 바라보았다. 푸른 불길이 그제도 타고 있는 두수의 눈이 좁혀들면서 먹이를 채려는 순간의 집중, 그리고 다음 여자의 팔목을 소리없이 강인하게 쥔다.
아까처럼 몸집이 작은 여자는 팔랑개비처럼 가볍게 끌려간다. 침상에 냅다 던져버린 몸뚱이가 한 번 퉁겨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살려주어요!"
모기 소리를 내며 여자는 떤다.
"사, 살려주어요!"
"잠자코 있어! 잡아먹지 않을 테니."
"요, 용서,"
달싹이는 입술을 짓이기듯 두수는 머리를 들이댄다.
"하마 네 서방놈이 올 게다."
사나이 밑에 깔리어 여자는 버둥거린다.
"이런 일은 들어서 잘 알 텐데?"
두수는 끼들끼들 웃으며 왜병들이 여자를 어떻게 취급하는가를, 특히 여자를 고문할 때 어떤 식으로 강간을 하며 처리하는가를 지껄이면서 서서히 가랑잎처럼 가벼운 여자 몸에 침입을 기도한다. 죽은 듯 축 늘어진 여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두수는 옷을 챙겨 입고 담배를 붙여 문다.
"네 서방놈 죄야. 돈 좋아하는 그놈에게 준 벌이란 말이야."
끼들끼들 웃는다.
"나한테만은 그래서 안 되지. 자알 타일러주어. 이럴 때 내 비늘을 거슬려놓으면 귀신도 모르게 간다고 말이야."
여자는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좀 나가주실까? 나는 괜찮지만 서방님 오실 때가 되지 않았어?"
순간 여자는 용수철같이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뛰어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양차생이 돌아왔다. 눈물을 흘린 것도 아니었는데 부풀어 오른 아내의 얼굴을 본 차생은 의아해하는 표정이더니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다.
"몸이 좀, 아, 아파요."
하며 얼굴을 돌려버린다. 차생의 시선이 아래로 가며 아내의 손가락에서 멎는다. 피 묻은 손가락? 차생의 얼굴빛이 싹 변한다.
"손에 피가?"
"저기이,"
"왜 그리 됐는가 묻지 않소? 무슨 일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게요?"
"죽 먹이려다가 죽 먹이려다가, 물렸어요."
"물려? 저 방 여자한테 말이오?"
"예."
"기가 막히셔, 그렇담 약이라도 발라야지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해?"
걱정은 하면서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두수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태연자약한 태도에 여자는 으스스 떨며 얼굴을 숙인다.
"양선생."
조롱을 실은 어조다.
"갑자기 양선생은 또, 왜요?"
차생이 올곧잖게 말하며 돌아본다. 교정은 했으나 그래도 뻐드러진 이빨을 드러내놓고 두수는 소리 없이 웃고 있다. 소름끼치게 기분 나쁜 얼굴이다.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차생은 어금니를 깨물어보다가,
"일은 잘돼갑니까?"
"내가 웃어서?"
"기분 좋을 때 웃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왜 웃는지 자네 안사람보고 물어보게나."
차생은 반사적으로 아내 쪽을 돌아본다.
"임자보고 물어보라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게요?"
험악하게 노려본다.
고양이가 쥐 놀리듯 죽을상이 되어가는 여자 얼굴을 곁눈질하며 두수는 또다시 잔인하게 여자를 몰아붙이는 말을 내뱉었다.
"겁이 나서 얘길 못하는 모양이야."
차생은 사태를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음인지 입을 다문 채 두수를 노려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던가? 저 방에 한번 들어가보라고. 그럴 듯한 구경거리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사색이 되었던 여자 얼굴에 핏기가 돌아온다.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구경일걸? 외입하는 셈치고 들어가보라니까."
"나는 또 무슨 일인가 했지요."
차생이 얼버무리며 픽 웃는다.
"자네 안사람을 내가 집적였을까 봐서?"
"형님도, 말이면 다 하는 줄 아시오? 이봐요, 저녁 차리지 않고서 뭘 하는 게요!"
분위기가 이상하여 한순간 그런 생각을 했던 만큼 차생은 당황하고 난처한 것을 감추려 애를 쓴다. 여자는 살아난 기분인지 부엌 쪽으로 달려가고, 두수와 차생은 방으로 들어간다.
"온종일 술을 한 모양이군요. 방안에 술 냄새가 가득 찼어요."
"술, 술 했지."
"많이 취했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술과 돈과 계집이 있는 한 인생도 살아볼 만하지."
"형님한테 그런 풍류가 있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빠진 것이 하나 있군요."
농담이나 남을 약 오르게 하는 말도 기우뚱거리지 않고 네모반듯하게 하는 것은 차생의 버릇인데 그럴 때마다 두수는 배알이 틀리지만 한편 양서방이나 윤이병을 대했을 때처럼 만만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빠진 게 하나 있다아?"
"권력이 하나 빠지지 않았습니까?"
"고지기 자식놈이 선비 행세 하노라 애쓴다. 그 멀끔한 선비 얼굴에 누가 똥칠이나 말았으면 싶지만,"
하다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바보 같은 놈! 외입질도 못하는 주제에, 세상이란 으레 그런 게야."
두수는 네 계집, 방금 내 수청을 들었다는 말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난다.
"또오, 또오 시작이군요. 그 욕지거리 그만둘 수 없습니까?"
"양반이 하는 욕은 자고로 상놈이 들어야 하는 법이야. 양반의 말씨는 거칠어도 상놈의 말씨는 으레껏 공손해야 하는 법, 안 그런가?"
"너무 그러는 것도 신상에 과히 좋은 것은 아닙니다."
"너 날보고 협박하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보다 저 방 여자는 어찌 됐지요?"
"발가벗겨 놨다."
"네?"
"계집년들 발가벗기는 거야 누워 떡 먹기지."
"좀 심했군요."
"풋내기 같은 말 하시네. 고문의 초보를 몰라 하는 소린가?"
"십 년을 두고 짝사랑하던 여자니까 하는 말이지요."
"아, 아, 사양할 것 없네. 가서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구."
"취미 없는데요."
"취미 없으면 지랄한다고 장가는 가아? 중이나 되지. 한 계집이나 열 계집이나 눈감고 아웅이다."
저녁상이 들어왔다.
"계수씨!"
"예."
겁에 질린 눈이 두수를 주시한다. 이번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나는 술이오. 밥은 치우고,"
"예."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차생이댁네는 시키는 대로 술을 가져왔고 밥그릇은 내갔다.
"오늘 들은 얘긴데요."
밥을 먹으면서 차생이 얘기를 꺼낸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막대한 돈이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풍문이 돌고 있었지."
"풍문이 아니라 확실하다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돈이라나요?"
"어마어마한 돈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나온 것을 사실로 치더라도 상해 임정 쪽으로 흘러들어갈 리는 없어."
두수는 일소에 부친다.
"그럼 형님은 돈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시오."
"돈이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엉뚱한 곳으로 갔을 게야. 상해 임정의 대통령 이모라는 작자가 일본 대신 미국의 보호를 받겠다 하여 임정 내부가 쑥밭이 된 모양인데 러시아가 미쳤다고 거기에 다 돈을 주어? 저희들의 코도 석 자 오치나 빠진 판국에,"
"그것은 그렇지가 않지요. 대련서의 일로 양국 간의 회의가 아직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잇는 것을 보아도 러시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지요. 니항사건의 주동자 중에 조선인 독립군이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네 영내에는 조선의 독립군이 전혀 없다고 러시아는 시치미를 떼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요구하는 조선의 독립군 해산 문제가 무슨 딴 계획이 없다면은 이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계획? ... 있을 수 있지. 국제군이란 말이 나돌고 있으니까, 일로전쟁 때부터 이쪽으로 도망온 조선놈들이 러시아 편에서 잘 싸워주었거든. 얼마우제(러시아 귀환인)놈들, 그놈들도 세계대전에 많이 나갔었고, 백군 적군 싸움에도 조선놈들이 끼어들었지. 연해주엔 조선놈들이 우글우글하니까."
"바로 그 국제군이라는 것 말입니다. 조선인 부대가 적위군 편에서 백위군과 싸우는 틈새, 그 총구가 니항의 일인들로 향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겁니다."
"미친 소리 마라. 우연은 무슨 놈의, 자네 변설조도 병이야."
"..."
"설령 러시아가 조선 독립군을 모조리 불러들여서 앞으로 일본하고 한판 하는 데 써먹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가리들이 알아서 할 일, 조선놈들 모아봤자 별수없어. 상해 임정꼴 나기 십상이지. 자네 말마따나 대련서도 독립군 부대 해산을 들먹이는 만큼 다 그만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게야. 벌써 독립군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풋내기 같은 소리 작작 하고, 아무리 군침 삼켜도 어마어마한 돈이 흘러간다는 그 줄기를 자네 손으로 찾아낼 순 없지.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은 뭐 해로울 것도 없지만 말이야. 스즈키 앞에서나 열심히 걱정해봐."
"영에서 매 맞고 집에 와서 마누라 친다더니, 아, 형님 뜻대로 안 되는 게 내 죄란 말입니까?"
"시끄러! 우스워서 그런다. 십 년 전부터 흑룡강 물줄기를 밟고 올라간 사람보고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눈감아도 훤하다, 이 새끼야. 식자 좀 들었다고 날 가르치는 거냐?"
"하 참, 그냥 화가 나면 화를 내실 일이지 엉뚱한 데다 꼬리를 달아서 왜 이러십니까?"
"술이나 처먹어라."
하고 두수는 술을 들이마신다. 하루 종일 별의 별 놈의 지랄을 다 했으나 두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생이 저녁을 끝내는 것을 본 두수는,
"양선생, 일어서시오."
"또 왜 이러십니까?"
"허허허, 일어서라면 일어서는 게야. 사람의 탈을 썼다고 해서 너무 가리는 게 많아도 숨이 가빠서 못사는 게야. 밤마다 저 계집을 품고 자면서 도사연할 건 없다. 자아, 가자. 가는 게야. 못 보고 죽으면 한이 될 게다."
억지로 끌어낸다. 실상 두수는 금녀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가도 못 갈 것이 없는데, 뭔가 구실이 있어야 했다. 구실이, 왜 구실이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오랜 세월을 그토록 집요하게 금녀 뒤를 쫓아다녔는지 그것도 이제 와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금녀를 사로잡음으로 하여 두수의 두 가지 목적, 그 어느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는 것 이외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다만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놓아주느냐 죽여 버리느냐, 그것을 선택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 선택, 두수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차생을 떠밀어 넣는다.
"앗!"
차생의 입에서 비명이 울렸다.
"볼 만하지?"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찌 되긴, 눈요기 자알 하게. 살갗이 비단결 같지 않아?"
"주, 죽었군요!"
순간 두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차생을 밀어젖히고 얼굴을 디민다. 금녀는 죽어 있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고, 두수가 차생이댁네를 정신없이 범하고 있을 때 금녀는 벽에 머리를 부딪고, 수없이 부딪고 죽은 것이다.
4장 형제
공노인 객줏집에 머물면서 김두수에게 연락이 닿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한복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각오하고 느긋하게 대기하는 상태였다. 우물 안에서 대천지 한바다로 나온 것 같은 그간의 변화가 한복을 변하게 한 것은 틀림이 없다. 연추로 떠날 때만 해도 화살같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사람을 대하는 일이 두렵고 괴로웠으며 언제나 그러했듯이 타인과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도랑은 깊고 넓었었다. 그러나 어느 사이인지 한복은 사람을 만나 즐거워지는 것을, 남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도랑이 좁혀지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형과의 대면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던 혼란도 이제는 가라앉고 비교적 안정된 마음으로 기다리는 상태였다. 연해주에서 용정에 온 후 만난 여러사람 중에서 특히 한복의 마음을 사로잡고 멍울을 풀어준 사람은 우연히 알게 된 전라도 사내였었다. 공노인의 객줏집 우물가에서
"말심 소리 들은께로 경상도내기가 분명헌디, 틀림없지야?"
수숫대처럼 키만 멀쑥하게 컸고 형편없이 마른 자가 얼굴을 닦고 수건을 허리춤에 끼우면서 말을 걸어왔다.
"예, 경상도요."
사내는 손바닥에 침을 뱉고 다른 손바닥을 탁 치면서,
"그려! 간밤의 꿈이 그렇더랑께. 내 꿈을 말헌달 것 같으먼 맹도 고조부랑 씨름헐 만헐 것이여."
"예에?"
"똑 떨어진다 그 말이여라."
"...?"
"맞아떨어진단 말씨. 허허어, 그 나그네 늙은이가 아닌디 말귀가 그리 무디어 쓰겄소?"
"아, 예에. 무슨 꿈을 꾸싰는데 그러시오."
한복이는 저도 모르게 성큼 다가서듯이 물었다.
"그, 그야 물어보나마나 돼지꿈이지, 돼지꿈이란 말씨."
사내는 들쑥날쑥하고 담뱃진이 묻어 시커먼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다. 어떻게 보면 사십 안팎으로 보이고 어떻게 보면 오십을 넘긴 것 같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다.
"재수 꿈 아닙니까?"
"암, 암 재수 꿈이지라."
턱을 주억거린다.
"영락없당께로! 돼지만 꿈에 보면은 영락없이 경상도내기를 만난다. 경상도내기를 만나면 재수가 있단 그 말이지라우?"
"허 참, 나는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인데요."
"아아니 젊은 나그네가 이 몸을 뭐로 보신다요? 도둑놈으로 치부하시는감? 잉, 비적들이 우글우글허는 만주 땅이기로,"
한복은 피식 웃는다.
"이리뵈야도 가는 곳마다 보증인은 아쉽잖이여."
시작은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은 아니었다. 이 키 큰 사내는 주갑이였던 것이다. 지금은 하동으로 옮겨간 용이와 주갑의 우연한 만남으로 하여 길상에게로 이어진 인연을 생각하면 그가 객줏집에 나타나서 한복에게 접근해오는 이유는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할 일없이 무료했던 한복이는 그의 재담에 끌리기도 했으나 나이에서 오는 거북한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편안함과 그리고 공노인과도 잘 아는 사이인 듯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며칠 후에는 아예 방을 합쳤고 주갑이 끌고 가는 대로 어디든 따라다니며 구경도 하고 술도 함께 마셨다. 사람을 만나는 데도 주갑은 늘 한복이를 데리고 다녔다.
"여보시요 나그네, 싸게 나가더라고."
이름을 가르쳐주었으며 하대할 것을 여러 번 말했는데 주갑은 계속하여 한복이를 나그네라는 호칭으로 대하였고, 말을 낮추지도 아니했다. 거리에 나온 한복이는,
"어딜 가십니까?"
"닭전에 간당께로."
"닭전요?"
"만났다 하면은 닭싸움허는 곳이 있지라우."
찾아간 곳은 갖바치 박서방의 가게였다. 마침 거간하는 권서방과 여차하면 엿판 메고 나서는 허풍쟁이 홍서방이 그곳에 와 있었다.
"허허, 이게 누군고?"
반백 머리에 중늙은이들이 된 세 사람이 똑같이 얼굴을 쳐들며 반가워한다.
"누군 코가 아니라 여문 코요."
"얼굴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는구먼."
"상제 없으면 어쩔거나 허고 찾아오는디 하품 나게도 사시요."
좁은 점방 안에 엉덩이를 디민 주갑은
"나허고 한방을 쓰는 나그넨디 경상도내기랑께. 경상도내기허고는 전정이 있인께로 일자리 하나 구해주더라고."
"일자리 구해주는 일이야 이팔청춘 젊은 사람 주갑의 소관이지 하품 나게 오래 사는 사람들 소관은 아니지이."
홍서방이 토라진 시늉으로 말했다.
"워째 그리 남의 허풍은 모른다요?"
"아따, 이거 연해주 허풍하고 용정 허풍이가 만났는데 맞바람이 불면 어떻게 되지?"
권서방 말에,
"시원해지겠지요"
꽃 자줏빛 비단을 입힌 당혜에 인두질을 하며 박서방이 받아넘긴다.
"경상도내기라 하니 이서방이랑 영팔이 생각이 나누만. 모두 잘 있는가 모르겠네."
"잘 있겠지요. 우리보담이야 못할라구."
홍서방 말이 떨어지자 바늘에 실을 꿰다 말고 박서방이 힐끔 쳐다본다. 햇빛을 못 보아 그랬는지 누리끼하게 시들고 얄팍한 것같이, 전보다 여윈 얼굴에 일순 생기가 도는 것 같다.
"배은망덕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치도 변함이 없군. 하기야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긴 있지."
"나보고 하는 말이야?"
홍서방이 즉각 응했다.
"이 자리에 배은망덕할 사람이 달리 또 있다면 참말이지 두만강의 뗏목꾼 되겠다아."
퉁겁고 빳빳한 실을 핑핑 소리나게 잡아당기며, 두만강 뗏목꾼 된다는 것은 박서방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저놈의 인사, 좌우당간 내 말이야 하면 자다가도 깃대 쳐들고 나온다니까. 아 글쎄, 내가 뭐랬기에 감아올리는 게야? 응?"
"제 한 말도 금세 잊어버리니 남의 은공 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래도 박가 네놈, 목이 컬컬한가 부다."
"꼬리 감추지 말아. 대가리 내밀지 말고. 주서방 보고 침 삼켜도 허사야."
"그렇다면 배은망덕은 그쪽이다. 주서방 아니더면 지금쯤 백골이 안 되었을까?"
"오오냐. 살던 집 주고 빈손 탈탈 털고 간 사람한테 우리보담이야 못할라구? 씩둑꺽둑 말이 그래야 하나?"
한복이는 늙은이들 싸우는 것이 민망했지만 권서방과 주갑은 실실 웃고만 있었고 아까 닭싸움하는 곳이라던 말도 행각이 나서 다소는 구경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별말도 아닌 걸 가지고, 제에기랄! 눈 팔아먹고 사는 놈을 상대하느니 김매는 계집하고 맹물 마시는 편이 훨씬 낫겄다."
"오오냐. 새는 가는 곳마다 깃털 떨어뜨린다더라. 죽어서 그놈의 깃털 주워 모을라 카믄 허리 굽을 게야. 팔아먹을 눈도 없는 놈이 염치도 좋다."
이쯤 되면 진짜 싸움이 된다.
"그만들 두시쇼. 더 허먼 내일 심심해지들 않겄소?"
주갑이 눈을 찡긋했다. 하여 용이와 영팔의 얘기는 행방불명이 된다. 싱글벙글 웃으며 권서방이,
"이제 겨우 점고는 마친 셈이군."
"점고라, 거 기생 점고도 꽤 사설이 길지라우. 에헴!"
하고 목을 다듬은 주갑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남포월 깊은 밤에
도대천 저 사공아
묻노라 너 탄 배
계도금범 난주!
행수기생 난주가 들어들 오는디
멋기도 사모찬 기생이라,
초맛자락을 거듭거듭 걷어 세요흉당에다가 이럿이 안고
가만가만히 걸어들어들 오더니
점고 맞고
나오
일대 문장 소동파
적벽강에 배를 띄고
거주촉객하올 적에
소언동산 월출이
월출이가 들어오는디 홍상
춘향가 중의 기생 점고다. 모두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그러나 소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차츰 신들이 나서 얼굴이 벌개지는 것이었다. 주갑의 목청이 올라갈 적에 쳐들려서 떠는 턱을 따라 권서방의 턱이 올라간다. 박서방은 아예 일손을 놓아버리고 뚫어져라 주갑을 쳐다본다. 홍서방은 조심스럽게 코를 홀짝거린다. 부채는 없었지만 내미는 손, 맴을 도는 손, 주갑의 손끝은 명주실같이 부드럽고 나비같이 가벼운가 하면 전율하는 현이 되기도 한다.
"헤헤헷, 소싯적에 들은 풍월인디, 웨따매, 사내들 점고는 못쓰겄소잉. 헤헤, 헤헷, 무슨 놈의 쌈질조 점고가 다 있다요?"
주갑의 얼굴은 맑은 물에 씻긴 듯이 해맑다고 한복이는 생각했다. 용수철같이 홍서방이 뛰어일어났다. 손뼉을 친다.
"우리 고을에 명창 났구나아!"
"아니야, 우리 조선에 명창 났다."
박서방이 감동된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하였다.
"헤 참, 그런 소리 마시시요. 굶어서 그런당께로. 만주 땅에서 창허는 사람은 별반 없을 긴께."
"주서방."
홍서방이 은밀하게 불렀다.
"말심하시더라고."
"우리 의논 좀 하자고."
"예, 하시시요."
"자네하고 나하고 나서자고."
"나는 엿판 안 메겄어라."
"아아 엿판이야 이 등바닥 널찍한 내가 멜 것은 정한 이치고오."
"저놈 또 생바람 나는구나."
박서방의 말은 들은척만척,
"사람들은 내가 모아들일 것이니 자네는 따라다니면서 노래만 하면 되는 게야."
"의논껏 해봅시다요."
"그나저나 놀랬구먼. 주갑이한테 그런 재주가 있다는 건, 하 참 기가 막히는데."
살가죽이 늘어난 목덜미를 슬슬 만지며 뒤늦게 권서방은 치사를 한다. 한복은 가만히,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 나그네, 우리는 나가보덜 않겄소? 성님들 편히 기시시요, 내일 바람 따라서 또 올 것인께로."
주갑이와 함께 거리를 거닐면서 한복은 반백의 중늙은이들을 생각했다. 가난이 기름때처럼 가라앉은 얼굴이며 몰골이며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나보다 더 큰 한이 있을지 누가 아나? 그런데, 그렇게도 천진하고 천하태평이고...'
"해가 거물거물 지는디 워째 이 길이 산중만 같다냐?"
주갑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일순간 어둡게 가라앉은 강줄기 같은 이상한 것이 그의 얼굴을 가로지른다.
"나그네."
"예."
"오만 간장이 녹는 것 겉들 않는감?"
"..."
"병이랑께. 얼씨구, 주갑이 이러믄 안 되는디."
"여기는 머하러 오싰십니까?"
그간 궁금했던 얘기를 꺼내었다.
"금매,"
"장삿길로 오셨어요?"
"아니여라. 이 몸은 난생 바늘 한 쌈 팔아본 일이 없지라. 매인 곳 없고 임 잃은 외기러기, 신세는 그러허니 왔다갔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무슨 정처가 있을 것이여? 왔다갔다허는 것이 내 업이랑께."
그네처럼 팔을 흔들흔들 해보인다.
"일 찾아서 왔다갔다 철새란 말씨. 철도 인부도 혔고오 구리 파는 광산에서 광부 노릇도 혔고오 벌목꾼, 고기잡이, 침술도 허고 다녔는디, 아 금매,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못해본 것은 장개드는 일허고 장사허는 일이었지라우."
"가족이 없구마요."
"사모관대를 못혓인께로 숫총각 아니겄소?"
"하하핫..."
"웃들 말더라고, 맘은 삼천궁녀를 거느리고오 있인께."
"이곳에는 며칠이나 기실 깁니까?"
"금매 이번 행차는 여니 때허고 좀 다른디, 워찌 될랑가 모르겄소이. 삼대 구년 만에 고향 한번 가볼라는디 금매,"
"고향이 어딘데요?"
"어디긴 어디다요? 전라도제."
"전라도에서도,"
"아아, 아."
주갑은 손을 저으며,
"전라도가 몽땅 고향이란 말씨. 어릴 적에는 울아부지 괴나리봇짐 위에 앉아서 울아부지 겨드랑이에 손 넣고 잤인께로 전라도 천지가 내 고향인 게라우."
"함께 갔으믄 좋겄소."
"고향 가는 길을?"
"예."
"왜 아니라, 헌디 받을 돈을 받어야 떠날 것이여."
"아제씨."
"기왕이면 성님이라 하시더라고, 아부지 겉은 맏형도 있들 않더라고?"
"예, 그러지요. 아제씨가, 아아 아니, 성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리겄소만 아껴서 쓰믄 내 여비에서 두 사람 갈 수 있을 것 겉은데,"
"아, 아니여라. 그런 말은 우리 사이에서 허는 것 아니여."
그 목소리가 너무 엄격해서 한복이 얼굴을 붉힌다. 객줏집으로 들어갔을 때 공노인이 내다보았다.
"이놈의 팔난봉아! 젊은 사람 몸살 나겠다. 밤낮 어디를 끌고다니나?"
"웨따매, 팔난봉 소린 처음 듣겄소잉. 주인장께서 심심혀서 그런 모양인디 급한 일이 따로 있인께로 잠시만 참으시시요."
"저눔의 인사, 담배가 급한 게로구나. 한대 하고 내 방으로 건너오라고, 저녁 함께 하게."
"알겄소."
세 사람이 저녁상을 받았을 때 주갑은,
"주인장."
"음."
"홍서방허고 권서방 살기가 우떻다요?"
"나을 게 없제. 이서방이 살라고 주고 간 집은 우리 쪽에서 좀... 쓸 일이 있어서,"
"그 집서 나갔다 그 말인 게라우?"
"음. 권가는 조그마한 거간 가게를 하나 얻어주었고 홍가는 최씨네댁 행랑방을 하나 치워주었는데, 권가야 이럭저럭 꾸려나가는 모양이나 홍가 그 사람이... 안사람이 여관일을 보아주어서 밥은 먹지. 아낙이 해서 살자니까 홍가도 걸핏하면 엿판 메고 나가는데 이자는 그 짓도 못할 게야. 병이 들어서 얼마 못 갈 기라니."
여관일이란, 서희가 살던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공노인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쓰이기도 하고, 한편 여관이란 외관으로 하여 연락의 요지로도 사용이 되고 있다.
한복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들이 심상한 관계가 아닌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주갑이를 단순한 뜨내기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달리 함께 저녁을 먹게 되는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거는 그렇고 주서방 자네 고향은 가게 되는 겐가?"
공노인은 화제를 돌렸다.
"가야제요."
"한복이하고 함께 가면 되겠구먼."
"그러면 오죽 좋겄으라? 동무 따라 강남 간다 안 헙디여?"
"나이 몇인데 그런 소릴 하누."
"노소가 있간디여."
공노인 얼굴에 서두는 기색이 나타났다.
"한복이는 만날 사람이 오면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될 게야. 하동으로 떠날 때는 회령에서 떠나게 될 걸?"
"지가 쫓아가먼 안 되겄소?"
"그야."
"돈이 오늘 내일 된다니께, 나도 이 나그네랑 가고 접소잉."
"내가 전에 그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지."
하다가,
"아니 아니지,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고, 회령에서 한복이가 떠나는 날짜 시간만 알면 되니까,"
여전히 공노인은 서둔다.
"그걸 지금 작정할 수가 있어야지요."
한복이 말이다.
"내일이면 회령으로 가게 된다."
"예?"
"그냥 그렇게만 들어두게. 그러면은 주서방 형편 얘긴데,"
"오늘낼 허고 있인께로 내일이면 여비가 나올 것 겉소만, 일헌 품삯인디 오래된 것이여라우. 가진 돈도 쪼갠 된께로, 정 안 된달 것 겉으면은 주인장께서 대봉해주시더라고. 우리가 워디 어제 그제 알던 사이란가?"
"그거는 어렵잖지. 그럼 주서방은 모레, 아니 글피 회령으로 가면 되겠군.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때쯤 집 근가직에서 만나면 되겠고오."
"알겄소. 글피, 그 다음날 저녁때,"
"주서방한테는 다시 가르쳐줄 것이고 한복이만 잘 알아들어 두어야겠다. 자네가 가는 집의 길목인데 청옥이라 하는 선술집이 있네."
"청옥, 청옥."
외듯 중얼거려본다.
"한문으로는 푸를 청에다가 구슬 옥이야."
"예."
공노인 훅 숨을 내쉬며 밥술을 들었다.
"만의 일이라도 글피, 그 다음날 저녁에 못 만날 사정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께로 그날 못 만난달 것 겉으면 그 다음날 저녁이요. 알아듣소, 나그네?"
주갑이 다짐을 둔다.
"예."
성님이라 하라 해놓고서 주갑은 여전히 호칭은 나그네요 공대하는 데도 변함이 없다. 저녁이 끝나자,
"나 급헌 일 보러 가요. 나그네는 숭늉 마시고 천천히 오더라고."
공노인 앞에서 담배를 안 피우는 예절을 주갑은 꼬박꼬박 지킨다.
"한복아."
"예."
"내일이면 틀림없이 회령으로 가게 될 터인데 내일, 모레, 글피,"
공노인은 손을 꼽아본다.
"그러면 적어도 삼사 일,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합하면은 사오 일, 그 이상은 형네 집에 안 머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저도 오래 있을 생각은 안 합니다. 사오 일도 길지요."
"또 한 가지, 만일에 자네 형이 자넬 위하여 고향의 서장이라든가 뭐 그런 층에다가 소개장 같은 것 써주면은 써먹지 않더라도 받아두게. 사정 따라서 가는 도중에 요긴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공노인은 숭늉으로 입가심하고 밥상을 밀어내며
"그럼 가보게."
"예."
한복이 막 방에서 나오는데 허둥지둥 최서기가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마침 계셨구만요."
저승에서 할아버지 만나듯 몸소 온 것도 그러했고, 얼굴 표정을 보건대 몹시 급했던 것 같다. 한복이는 내일 회령으로 가게 될 것이란 말을 상기하면서,
"웬일로 몸소 오싰십니까?"
침착하게 응대한다.
"글쎄 진작 한번 왔어야 하는 건데 일이 번잡해서 소홀했던 것 같소. 용서하시오. 그보다도 형님이 오셨는데 어서 가도록 합시다. 아예 짐도 챙겨갖고 가야,"
"형님만 만나믄 나는 이곳에서 묵다가 가고 싶소만,"
"아 그게 허용될 성싶습니까? 형님께서는 지금 노발대발입니다. 자아 어서, 그러고 가시면은 내 입장도 잘 말씀해주시오. 아시겠지만 김부장 성내면 물불 안 가리거든요."
"짐이래야 머 괴나리봇짐 하난데요."
한복이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오면서 말했다. 주갑이는 코빼기도 안 보였고 공노인만 기웃이 내다본다.
"손님, 가시려우?"
"네. 그간 신세졌십니다. 아주머닐 못 뵈고."
한복이는 서운해한다.
"그럼 주인장, 안녕히 계십시오."
공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최서기는,
"그 짐, 이, 이리로 주시오."
"괜찮소. 짐이랄 것도 없지요."
"그렇지만,"
"형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오?"
다소 비꼬는 투다. 그러나 최서기는 그런 것 헤아릴 여고가 없는 것 같다.
"높다기보다 성질이 무섭지요, 모두들 겁을 내는데. 일본인들도 한 수 놓고 대하니까요. 사실은 연락을 취했는데 연락은 받지 못하고서... 나를 뭘로 보고 내 동생을 객줏집에다 내버려두었느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데는 혼비백산이오."
최서기는 웃었지만 두수의 악쓰는 소리가 상기도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야 이새끼야! 뭘 하구 월급 받아처먹냐!"
나이도 위인데 대뜸 두수는 그렇게 나왔다.
"이 개새끼들! 영사관놈들 다 때려죽인다! 누구 덕분에 베개 베고 편한 잠자느냐 말이다! 목숨 걸어놓고 뛰는 우리한테 뭘 했어! 이게 우리한테 하는 대접이야! 내 동생이 촌놈 꼴을 하고 왔기로, 네놈 눈에는 발싸개로 보이더냐? 모셔앉혀 놔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판인데 아 그래 객줏집에다 처박아놔?"
본인이 굳이 원하여 그랬노라 극구 변명을 했으나 그 말은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금녀의 죽음으로 계획보다 빨리 돌아온 김두수는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누구 하나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참에 한복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으니 두수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한복이, 김한복, 김평산의 아들, 두수는 도저히 정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광태를 부렸다. 사실 그는 주먹을 치며 통곡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통곡 대신 미쳐서 날뛰었는지 모른다. 최서기가 혼비백산한 것은 무리가 아니요 영사관의 서기, 점잔을 빼며 다니는 그가 공노인의 객줏집까지 뛰어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참말이지 김부장 그리 볼 사람이 아니더군요. 형제간의 정이 그렇게 뜨거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절절했더라면 왜 진작 찾아내지 않고서,"
최서기의 말을 귓가에 흘려들으며 걷는 한복의 마음이 차츰 착잡해진다. 안정되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마구 흔들린다.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뛴다. 피는 피를 부르게 마련이다. 그렇다. 대역죄인 살인자일지라도 피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운 것도 애정 때문이며 원망도 애정 때문일 것이다. 한복은 자신에게 부과된 일을, 그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 일을 위해 만나려 했던 형, 그리고 가능하다면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던 형, 최서기를 통하여 형의 미쳐 날뛰는 모습을 한복은 상상할 수 있었다. 옛날, 아득한 옛날 어머니를 매장하던 날, 음달진 곳, 솔방울과 자갈이 굴러있던 곳, 소나무에 머리를 부딪고 피를 흘리며 울던 소년의 모습이 생생하게 한복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형!'
심장에서 피가 솟구쳐오르는 것만 같다. 입속에 고인 것을 뱉어 낸다면 그것은 침이 아닐 것이며 새빨간 선혈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형!'
증오감은 그리움으로, 절실하고 강한 그리움으로, 한복은 달음박질치듯 걸음을 빨리한다.
사방은 어두웠고 칠흑같이 캄캄하게 어두웠다. 두신거리는 사람들 소리를 뚫고 들어간다. 빨간 전등이 오두마니 켜져 있는 현관에, 그 현관에 김두수가 서 있었다. 비대한 돼지 상호의 김두수가 우뚝 서 있었다.
"형아!"
"이놈아!"
가장 악랄한, 잔인무도한 악인이 선량하고 정직한 아우를 껴안고서 눈물을 흘린다.
5장 신여성론
찬방 놋화로 위에서 약이 끓고 있었다. 방안에 가득 찬 약 냄새와 화로의 열기가 싫지 않은 계절, 시월이 가고 십일월도 중반기에 접어들었다. 찬방에는 집기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가모의 손길이 수없이 갔을 청결하고 은은히 빛나는 집기들은 임역관댁 가풍을 엿볼 수 있었다. 일이 년 사이 임씨 일가에 불어 닥친 불행에도 가구 집기는 빛을 잃지 아니한 것 같다. 잠 안 오는 한밤, 고부간은 가구 집기에 걸레질을 하며 고통을 잊으려 했고 참으려 했는지 모른다. 시름을 잊는 데는 일이 보배였으니까. 명빈의 댁네가 약탕관을 들여다본다. 시부의 상중이어서 소복에 목잠을 찌른 백씨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있다. 광대뼈가 솟고 얄팍하게 생긴 얼굴의 미소가 참으로 곱다. 명빈이 출옥한 지 오늘로써 보름이 되는 것이다. 화로에서 약탕관을 들어낸 백씨는 정성스럽게 사발 위에다 약수건을 펴놓고 알맞게 달여진 약을 따르어 짠다. 짜다가 뜨거운 김에 빨개진 손끝을 호호 불고 다시 짠다. 조용했던 집안에 별안간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잠을 깬 모양이다. 백씨는 약탕관에 짜버린 약 찌꺼기를 넣고 부엌을 내려다보며,
"아산댁."
"네, 아씨."
중늙은 여자가 약탕관을 내려 받는다.
"약은 제가 갖다 올릴까요? 애기가 배고픈가 본데,"
"아니,"
하고 일어서려는데 명희가 찬방 옆을 지나간다.
"아가씨."
"네?"
명희가 찬방을 들여다본다.
"죄송하지만 약 좀 갖다드리세요. 애가 울어서..."
"그럴게요. 그러지 않아도 애가 울어서 나왔는데,"
명희는 올케로부터 약사발을 받아든다.
하얀 동정이 꼭 맞는 검정 치마저고리의 모습은 엄숙하고 젊음의 향기를 잃어버린 듯 느껴진다. 집안에서조차 단정한 명희의 모습은 평소의 습성이긴 해도 왠지 주변을 튀겨내는 것처럼,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는데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랑 뜨락에는 노오랗게 물든 은행잎이 흩어져 있었다. 단정한 명희와 같은 모습의 은행잎이.
"오라버니."
"음."
"약 잡수셔야겠어요."
방문을 열고 명희가 들어서자 명빈이 일어나 앉는다.
"학교에 안 갔어?"
옷고름을 여미며 묻는다.
"주일이에요."
"그렇군. 일요일이라... 거기 약사발 내려놓고 앉으려무나."
자리에 앉는데 어느덧 가사과 교사의 특징 같은 것이 명희 몸에 밴 그런 앉음새다. 명빈은 누이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린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안정감을 잃은 사람처럼 엉성한 고수머리를 쓸어넘기고 눈을 깜박거린다. 옥고에 수척해진 모습이 큰 두상으로 하여 기형아같이 허약해 뵌다.
"올케는 어디 갔냐?"
"아뇨."
"..."
"약 잡수셔야지요."
약사발을 두 손으로 내민다.
"식어야 먹지."
"식었을 텐데..."
그러나 명빈은,
"네 나이 올해 몇이더라?"
불쑥 묻는다.
"오라버니도 참, 그건 물어서 뭣 하실래요?"
쓴웃음을 띈다.
"스물다섯이든가? 그렇군."
"별 수 없는 올드 미스죠 뭐."
"그래. 별 수 없는 후처감이로구나."
"누가 시집 간댔나요?"
"설마, 선생질이나 전도부인으로 늙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것 아직 생각해본 일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 말이냐?"
"갑자기 왜 그러세요?"
"..."
"부잣집에 시집가서 호사나 하고 사는 생활, 뭐 별 것은 아닐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하루 밥 세끼 챙겨먹이고 아이를 기르면서 가난과 싸우는 것도... 가난이 무섭다는 얘긴 아니에요. 무슨 의의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애정 얘기군. 그건 그래. 여자의 경우엔,"
"여자, 여자 하시지 마세요, 오라버니."
"아버님보다 보수적이다, 말하고 싶은 게로구나."
"사실 아니에요?"
"그러나 아버님은 남녀평등주의는 아니셨다. 다만 막내딸이 귀여웠을 뿐이야. 딸을 귀여워하신 것만은 이조시대에 사신 분으로선 파격적이었다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중인 신분이기 탓이야. 별수도 없는 족보 물려줄 아들이 뭐 그리 대단하였겠나."
"오라버니도 참,"
피식 웃는다. 농담 삼아 한 말이겠으나 그런 면이 없었다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명빈은 잠시 동안 얘기의 방향을 어디로 돌릴까 망설이는 것 같은 눈치더니 어색하게 말을 잇는다.
"다 그런 거는 아니겠지만 여자들에게 가난하다는 것, 풍요하다는 것, 그런 것엔 별 의미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군. 옛날 여성들은 의미가 있고 없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테지만 풍요한 애정이 있어 빛이 나고 가난한 것도 애정이 있어 보람이 생길 테니까 사실 빈부 자체에는 뜻이 없을 게야. 그러니까 여자란 가장 값진 것부터 받아내려는 속성을 지닌 동물이라고나 할까?"
"남자는 안 그렇단 말씀이세요?"
"글세, 안 그렇다 할 수는 없겠으나 관계 자체가 남자는 여자를 거느리게 돼 있으니까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다 말고 우물쭈물해버린다. 오라버니의 체신같은 것은 당초에 이들 남매 사이에는 없었지만, 이같이 무관하고 자유스러운 것은 형식에 덜 얽매이는 중인계급의 집안 내력과 여느 여자들과는 다르게 전문교육까지 받은 누이이기에 논쟁은 안 되어도 의논은 된다는 점, 그러나 무엇보다 부친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명빈은 누이를 사랑했으며 늘 관대했던 탓이리라.
"글세 뭐냐,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마음가짐이나 표현의 차인 있지. 사랑이나 보호, 아, 아니지, 시중을 받는다, 그래도 남자에게 있어선 받는다는 것에 늘 쑥스러움이 있는 게야."
"오라버니 경우겠지요 뭐, 그러니까 오라버닌 절대로 남녀평등을 용납 안 한다는 말씀 아니에요?"
"그런 게 남녀평등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사사건건 따지고 든다면,"
"제가 언제 사사건건을,"
"아니 네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실은 너도 그런 셈인데 사사건건을 따지고 든다면은 입성도 같아야 하고 머리 모양 걸음걸이 신체적 구조까지 같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잖아. 차이점이야 엄연히 있는 건데 말이야. 아닌게아니라 식자가 좀 들었다 싶으면은 이론 가지고 뭣이든 꼭 갈라놔야 직성이 풀리는 것, 그것은 남녀를 불문코 좋잖은 경향이라구"
"갈라놓은 건 오라버니예요. 여자란, 여자에겐 하시고서,"
"그랬었나?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등하곤 상관이 없는 거라구. 여자는 여자니까 말이야."
명빈은 일종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으나 평소의 의논 좋아하는 그 버릇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입으로 지껄이면서 속으론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뭔지 모르지만 잔뜩 벼르고 있는 것 같은 기색이다.
"약 드셔야겠어요. 식었어요."
"그러지."
"쓰다."
눈살을 찌푸린다. 명희는 일어선다.
"그럼 나가보겠어요."
"거기 앉아."
"모니카 선생 찾아가려구요."
"약속을 했나?"
"약속은... 안 했어요."
"그럼 앉아."
마지못해 앉는다.
"그새 조용히 얘기할 새도 없어고,"
"차차 하지요, 뭐."
회피하려든다.
"언제까지 누워 있겠냐?"
"..."
"그 동안 형무소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생각해보았는데,"
"..."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그랬겠지만 명희 너의 일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았다."
"결혼 문젠가요?"
"골자는 그렇다만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어쨌거나 네 일에 대하여 한 번은 기탄없는 얘기를 주고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라버니께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만,"
명희 얼굴이 갑가지 쌀쌀해진다.
"남남인 것처럼 왜 그러지? 너는 차츰 네가 가진 좋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보냐?"
"좋은 걸 가졌다는 생각도 안 해보았구요, 이젠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나이는 됐다, 그 생각은 하구 있어요."
"바로 그 점이 문제라구.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한다, 그러나 해결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거든. 안 그러냐?"
"저만 그런가요? 대부분 사람들, 남자의 경우도 안 그렇다 할 수 없을 거예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 남자의 경우도 그렇다. 자기 나름대로. 그러나 너에겐 신여성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게야. 신여성, 신여성 말니야. 혼인 문제나 그밖의 일들은 일단 접어놓고 신여성은 무엇이냐,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여간 신여성에 문제가 있는 게야."
명빈은 이상하게 신경질이다. 그것은 명희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감 비슷한 것도 섞여 있는 듯싶었다. 출감한 지 보름, 명빈은 옷살이에서 풀려난 홀가분함보다 어디선지도 모르게 뻗쳐오는 압력과 한편 허탈과 자포자기의 심리 상태에서 좀처럼 일어서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가족을 만나 반가웠던 것도 잠시, 부친의 별세를 슬퍼한 것도 잠시였었다. 그러나 당장에 손을 대야 하는 것이 집안일이었다. 모든 일을 주관해오던 부친이 별세한 뒤 방치돼 있는 가산의 정리와 명희의 결혼 그 일부터 처리 하리라, 다음 자신의 문제와대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부터 네가 신여성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불쾌하게 듣지 말고, 아 말 자체야 나쁠 것 하나 없지. 남으로부터 주목받고 구경거리가 되고 하니까 그렇겠지만 신여성 말 듣기를 좋아하는 여자도 얼마든지 있는 거라구. 얘기를 하다보니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러는 데 따라서 신여성이라 일컫는 여자들 각각의 특질을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는 그렇고 가끔 명희에겐 정열이 모자란다, 정이 엷다, 자라서 시집을 갔더라면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될 성품일 테지만 그러나 소위 신여성에게 정열이 부죽하다면 죽도 밥도 아닌 게야. 아닌게아니라 남녀평등 따위의 말을 할 때처럼 네가 너 아니게 보이는 일도 없어. 오라비니까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너를 남녀평등주의자라고 생각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신여성을, 남녀평등주의를 좋잖다고 생각한 일도 없어. 남먼저 일본에 가서 공부한 내가, 절차가 까다로운 양반 출신도 아니겠다 나로선 누구보다 이해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 그러나 너의 성격상으로,"
"아버님께서 잘못하셨다 그 말씀이로군요."
"나는 그런 생각이다. 스물다섯에 이르도록 결혼 안 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물다섯까지 결혼 못했다 해서 반드시 불행하다 할 순 없는 것 같아요. 결혼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아요?"
"물론 그건 그렇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은 나도 동감이다. 여자도 일생을 걸고 정열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령 의사가 되어 평생을 병든 사람에게 헌신한다든지 교육사업 또는 혁명운동 등등, 여자라고 못하라는 법은 없다. 열정과 신념이 있다면."
"결혼도 마찬가지, 열정과 신념 없이."
명희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는다.
"이상적으론 그렇다. 모든 사람이 다 의사가 되고 교육자가 되고 사회사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결혼은 하게 돼 있어. 모든 여자 남자가 다 이상적인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명희는 참는다. 어물어물 넘겨버리는 자신의 말에 명빈 자신이 실망하는 표정이다. 명빈은 답답했다. 명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진심을 얘기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참하고 착하고 인내심도 있는 누이, 어떤 명에서 아들보다 더 기대하고 사랑했으며 누이의 의사를 존중했던 부친, 명빈은 괴로운 것이다.
"지난해 내가 붙잡혀서 유치장, 형무소, 취조실, 뭐 그런 곳을 끌려다니다보니 목격을 하기도 하고 또 들은 얘기도 많은데, 그때 여자들이 겪어야 했던 곤욕이며 맞서서 호령하던 대단한 여자들, 어쩌다가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섬칫해지는데 확실히 종전과는 다른 여자들, 남의 얼굴조차 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울타리 안의 여자들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변화지. 여자들의 힘도 크다. 여자를 나자의 예속물로만 생각하던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긴 들더군. 그러는 한편 애국애족의 충정이 무질서한 감정이어서는 ㅇ나 되겠다는 것, 그리고 더러는 소국적인 행동을 취한는 여자를 볼 때는 안방에 앉아 있느니만도 못한 거추장스러움을 느끼기도 했고, 아무튼 삼일운동에 참가한 여자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각계각층, 촌부에서부터 화류계의 여자들까지, 그러나 역식 주도한 것은 여학생으로 보아야겠고 따라서 옥고를 겪은 여자들도 대부분 여학생으로 보아야겠는데 이러한 여성들, 소위 신여성들, 뭐 비단 독립운등을 두고 내가 말한는 건 아니라구. 사회 전반에 걸쳐서 신여성이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 말똥머리나 하고 삐쭉구두만 신으면 신여성이냐, 만세운동의 앞장만 서면 신여성이냐, 학교 선생질이나 하면 신여성이냐,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 신여성이냐,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라구. 대강 대별해서 생각해본다면 하나는 생래가 참하고 온순하고 조신스러운 여자가 신교육을 받기는 방았으되 묵은 인습이 타파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든 궂든 사회에서는 두드러지는 존재요 두드러지기 때문에 일거일동에 시선이 모이고 자연 고립하게도 되는데 그러다보면 어느덧 매사에 소극적이요 형식과 사무적인 태도로 일을 치르게 죄니 생래의 참하고 온순하고 조신스러운 것이 저도 모르게 삐뚤어져서 이기적이요 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명, 그리하여 애정은 메마르고 여자는 시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네들이 종사하는 교육이나 혹은 종교사업, 기타 사회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꾼이 아닌 것은 뻔하지. 너를 지칭한 것 같아서 좀 가혹했나?"
명빈은 명희를 바라보며 쓰게 웃는다. 명희는 고통스러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라비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맴을 돌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삼아서 들어두는 게다. 누구든 한번은 생각해볼만한 일이니까. 다른 하나, 용감하게 행동하는 여자, 용감하다 해서 뭐 폭탄 안고 총독부에 들어간다는 얘긴 아니고오, 매사에 있어서 자신이 신여성이라는 것을 과시한느 여자라고나 할까? 무슨 일에든 앞장서길 좋아하고 혁명투사연하고 인생을 논하고 예술을 논하고 모두시시해서 시집갈 곳이 없고 모르는 것 하나 없고 여자라서 잘나지 못하라는 법 있느냐, 기염을 토하고, 그러나 신념이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지. 또 독립운동만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선택이며 시대적인 요구일 뿐 개개인이 잘나고 못난 경주 행위는 아니지 않겠느냐? 한데 식자 든 여자 중에는 잘난 체하기 위해서, 그 허영을 채우기 위해서 용감해지는 사람도 있다, 그거라구. 위험천만아지. 애국하는 행위가 경박하다 그 얘기라구. 물론 여자에게만 한한 일은 아니야. 그러나 사회적으로 여자들은 이제부터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인데 시작부터 이런 식으로 풀이러 나간 분마 꼴이 되고, 차라리 그렇다면 좋게? 등불에 날아든 부나비 꼴 되기가 십중팔구라. 세상이 어디 그리 관대하더냐? 하는 일 없이 소란 하고 한 일 없이 신셀 망치고,"
누구를 지칭해 하는 말인지, 명희는 강선혜 생각을 한다. 강선혜, 부용같이 화려하고 여왕봉같이 도도한 여자, 별의별 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여자, 대담한 차림새, 높은 웃음 소리, 기탄없이 던지는 말버릇, 한 대 명희는 강선혜를 선망했었다.
명빈은 잠시 말을 끓는다.
"명희 네가 동경에 있을 적에,"
화제를 돌린다.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몇몇 청년들이 너의 주변을 맴돌면서 기회를 잡아보려 했던 일은 이 오래비도 아는데 그중에는 부모를 내세워 청혼해온 사람도 있었지. 옛날 같았으면 그중 어느 청년이든, 우리 쪽에서 허혼하고 네가 시집을 갔었더라면 그런대로 괜찮은 남편감들이었어. 아버님이 너의 의사를 지나치게 존중하신 탓을 혼사는 성사되지 못했으나 따지고 보면 그때 너의 의사라는 것도 막연했던 것 아니었을까? 절대로 그 사람에게 시집 안 간다,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곡을 찌른 것이다. 명희의 표정이 흔들리고 시선이 떨어진다.
"그때 아버님께서 조금만이라도 우겼었더라면 아마, 시집갔었지 않았나 싶어. 너의 의사를 존중했다는 것은 어쩌면 끝내 해결이 안 난다는 얘기도 될 게야. 왜 그러냐, 너는 자유연애라도 해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성품이 아니란 말이야. 누구처럼 처자 있는 문사와 손에 손을 맞잡고 남의 이목 같은 것 아랑곳없이 사랑의 도피행각은 더더군다나 못할 게고,"
명희의 낯색이 변한다.
"빈정거린다고 생각지 말어. 난 그들을 이해한다구. 그 젊은 친구는 낙양의 지가를 올린 천재작가요, 나는 번역 부스러기나 하는 뭐 그런 처지지만 적어도 문필에 뜻을 두고 있는데 그만한 이해를 못 하겠나. 어느 세상이든 진짜 가짜는 있는 법이라구. 요즘의 풍조가 그런 모양이더라만 신학문을 한 남성들이 무식한 조강지처를 내치고 자신의 반려로서 신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을 정당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애정도 없이 조혼하여, 하긴 조선의 남자치고 조혼 아닌 사람은 거의 없으나 하여간 이모처럼 사랑을 위해 번민하는 것에는 이해도 동정도 할 수 있고 한 천재가 좌절해도 안 될 것이요, 장차 큰 열매를 맺게 된다면 희생자에겐 안됐지만 보상도 되는데, 그러나 무책임하게 시류를 쫓아서 마치 껍데기만 ?고서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신여성과 마찬가지로 이혼의 자유, 결혼의 자유를 내세운다면 그같이 경박한 일이 어디 있겠어? 개중에는 기방 외입과 마찬가지 기분으로 신여성이란 색다르니까, 한단 말이야.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기생첩에다 신여성 첩도 두자는 놈이 실제로 있다구. 결국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거야. 말이 엇길로 갔다만, 뭐냐, 그러니까, 아직도 조혼 풍습이 있는 이 땅에서 대개의 신여성은 이십 세를 넘겨야 혼인을 하게 되니 더러는 처자 있는 남자,"
하다 말고 명빈은 입맛을 다신다.
"솔직히 말하지. 이모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이상현이다. 공교롭게도 퍽 처지가 같단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오라버니!"
"가만히 내 말 들어. 이 얘기를 터뜨리지 않고는 언제까지 문제는 남는다. 이런 기회에 깊은 얘기를 기탄없이 해보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거라구. 어줍잖은 자존심 같은 것보다 진실이 훨씬 값어치가 있는 거구, 자신에게도 충실해지는 거구, 까놓고 얘기하자 그 말이야. 너는 이상현을 마음에 두고 있다. 오래비한테까지 속일 필요는 없어. 어떤 면에서는 네 마음하고 내 마음이 같다고도 할 수 있지. 만일에 이상현이 독신자였다면 이 임명빈 무릎이 닳는 한이 있어도 너를 떠넘겨주었을 게야. 탐이 나거든. 백 보 오십 보 양보해서 상현의 현재 처지를 용납하고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생각은 안 한 줄 아냐?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져본 미련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상현의 경우는 처자가 있기에 안 된다는 이유에 앞서서 의중의 사람이 이미 있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란 것을,"
명빈은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명희 눈길을 피한다.
"저도 그건 알아요. 진주의 최씨부인이라는 것,'
의외로 명희는 자신의 심정을 시인하는 태도로 나온다.
한때 상현과 함께 명빈이 나막신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는데 그 무렵 사현이 임역관댁을 자주 드나들었다. 동경 유학 당시부터 이미 구면인 상현을 위해 명희는 곧잘 가사과 출신의 요리솜씨를 발휘하고 했으며 비교적 자유스런 부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잦았던 것이다. 임역관도 그러했었으나 집안 식구 모두가 만일 미혼이었더라면 상현은 명희의 썩 잘 어울리는 짝이 됐을 거라 하며 애석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은 오며가며 보는 정도로 아들의, 남편의 동료거니 하고 무관했다. 다만 명빈의 처지는 그렇지가 않았다. 세 사람이 합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명희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이다.
'청춘이니까,'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상대인 만큼 서운하고 안타깝고, 누이에 대해선 애처롭고, 그러나 명빈은 두 사람의 관계를 깊이 염려하지는 않았다. 상현에게는 처자가 있을 뿐더러 사랑의 상처가 있었고, 절제심이 강하여 결코 모험을 하지 않을 명희의 성품을 아는 터이라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명빈의 심정은 누이의 청춘을 장식해준다고나 할까, 아름다운 추억, 사랑의 슬픔과 기쁨을 가져보아라 하는 관용이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심취한 외국 소설에서 받은 영향 때문에 플라토닉 러브를 동경한 명빈의 감상도 있었을 것이다.
비교적 괜찮은 혼처를 명희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상현에 대한 동경과 상현만한 사람이 없다는 무의식중의 심리작용인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상현과의 결합을 열망하는 것은 아니며 체념하다시피, 그러면서 뭔지 모르게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명빈이 지적했듯이 명희는 소극적이며 자제력이 강했다기보다 정역이 부족했는지 모른다. 상현에 대한 연정이 막연한 것은 상황의 탓이기보다 명희 자신의 성격에서 온 탓이 더 많을 성싶다. 따라서 다른 남자에 대해서도 내키지 않고 용납이 안 된다는 것 역시 선명치가 못한 것이다. 애매모호하게 세월만 가고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빈 독신주의라는 또 하나의 막연한 곳에 기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제 와서 명빈이 깨달은 것이다.
"명희."
"..."
"이번만은 내 권유를 들을 시기가 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
"결혼하는 게야. 직장이 있어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처지니까 결혼 문제를 소홀히 한다거나 독신주의가 된다거나 그건 습관에서 온 결과야. 습관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허송하게 것은 바보짓이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그런다면은 생각해볼 여지도 있지만, 아암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습관화되기는 결혼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불쾌한 표정으로 말대꾸한다.
"결국 얘기는 개미 쳇바퀴 돌 듯, 이론으로 따지자면 그렇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무의미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렇게 치자. 그렇다면 관례대로 하는 게야. 직장을 갖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흔치 않지만 결혼은 누구나가 다 하는 거니까 관례대로, 말라비틀어진 떡조각 모양으로 지지리 궁상, 여자는 혼자 사는 게 아니야."
"생각은 해보겠어요. 결혼을 하든지 수녀가 되든지."
"그렇게 반항으로 나오기냐?"
"반항이 아니에요, 오라버니."
"내가 지나치게 솔직했다. 네 마음이 아팠을 게야. 하지만 남 같으면 그러겠냐?"
"알아요."
"어머님 생각도 해얄 게다. 그간엔 나로 하여 심로하셨는데 이제부턴 너 때문에 심로하실 테니 말이야. 아버짐 계실 적하곤 달라."
"..."
"그는 그렇고 어머님 약을 안 드신다며?"
"네."
"너 올케 말로는 돌아가신 분 상도 안 벗었는데 얼마나 살겠다고 약 먹겠느냐 하셨다며?"
"그러셨나 봐요."
"형무소 갔다온 게 무슨 자랑이라고, 나는 약을 먹는데... 허허헛... 흔히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말을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야."
어색하게 또 헛웃음을 웃는다. 명희도 쓰디쓴 웃음을 흘린다. 이들의 모친 유시는 아들이 출옥하자마자 자리에 누워버렸던 것이다. 감옥으로 간 아들 때문에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도 그 슬픔이 온전치 못하였는가, 이제 새삼스럽게 유씨는 남편의 죽음을 실감하여 홀로 병 아닌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명희가 사랑에서 물러나는데
"어머님이 약 안 드시면 나도 이제부터 약 안 먹겠다."
명빈의 말이 뒤쫓아왔다.
명빈이 한 말에 대한 반발은 명희가 제 방으로 돌아온 후, 책상 앞에 앉자마자 솟구쳐 올랐다. 명빈의 말을 새삼스럽게 분석할 것도 없이 요점은 평범한 여자니까 남 하는 대로 시집을 갈 것이며 그 에는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남보다 뛰어났다는 생각을 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명희는 속이 상하는 것이다. 더욱이 최서희를 지적하여 상현이 사랑의 상처를 받았다고 한 것은 명희의 마음을 갈피 잡을 수 없게 흔들었다. 어째서 그런 말까지 했는가 명빈의 의도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비정한 것 같고 야속한 것이다. 듣기 싫고 아픈 이야기를 왜 한담, 싶은 것이다. 그리고 해석하기 따라서 너는 정열이 모자라 상현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명희가 상현을 처음 존 것은 열일곱 살 여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술 취한 명빈을 두고 큰 변괴가 생긴 것처럼 장난삼아 고하러 온 서의돈과 함께 왔었던 미청년, 그때 상현은 명희에게 퍽 인상적이었다. 언제였던지, 집에서 생일잔치를 베푸는 석상에서 명희는 들었다. 서의돈이 상현을 놀려주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아마 서의돈은 기화로부터 들은 성싶었다. 그때 상현은 무섭게 화를 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미묘한 것이어서 경원해야 할 기혼자가 오히려 그 일로 하여 유심히 보아지게 되고 그가 지닌 사랑의 상처에 따르는 사연은 다감한 처녀 마음에 정서를 불어넣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상현은 팔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경서 만났고 서울서도 수시로 만나게 됐지만 명빈의 누이 이상으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처녀의 정서를 불러일으켰던 사랑의 상처가 지닌 사연은 차츰 명희에게 고통스러운 사실로 변해갔다. 결합을 간절히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뭔지 상대편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 그런 것을 가끔 느끼곤 했었다.
'모니카 선생은 관두고 선혜언니나 찾아가 볼까? 주일이라서 집에 있을지...‘
6장 본정통에서
청색 가을 코트를 입고 전차에서 내린 명희는 아현동 강선혜 집을 찾아갔다.
"어서 오세요. 아씨 계세요."
대문을 여는 동시, 하녀 작은 순이가 촐랑거리며 말했다. 오륙십 칸이 넉넉한 큰 집이었으나 도무지 꾸밈새라곤 없어 뵌다. 물건도 아무 곳에나 쌓인 채 내버려둔 것 같고, 몹시 분주한 집안 사정이란 인상이다. 강선혜가 혼자 쓰고 있는 사랑도 아니요 별당도 아니요 애매한 모양의 독채, 그 뜰 앞에만은 꽃이 피어도 시들시들할 것만 같은 해당화 한 그루가 게다리 꼴로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격에 맞지 않게 신발장 하나가, 이건 또 턱없이 높아서 웅장한 감마저 주는 화강암 신돌 한 곁에 오두마니 놓여 있었다. 방안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언니."
대답이 없다.
"언니, 나 왔수."
"응, 명희니?"
"그렇다니까요."
"어서 들어와라!"
목이 쉰 듯 남자 목소리 비슷하게 그러나 묘하게 육감적이며 탄력이 넘친 음성이다.
"주일인데 어디 안 나가셨어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묻는다.
"아이구 졸려. 어젯밤 소설 좀 읽고 잤더니 말이야."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앉는 강선혜, 덩치가 크다. 좀 비대한 편이며 쌍꺼풀이 굵게 진 화려한 얼굴은 방 두 개를 터서 화려하게 꾸며놓은 방과 잘 어울린다.
"아침을 먹고 또 잤지 뭐냐? 살이 찔려고 이러는지 온,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란단 말이야. 아 글세 장승같이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이불을 벽 쪽으로 밀어 붙인다.
선혜는 일본 M여전에 다닐 때 명희보다 일 년 선배였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삼 년 동안 함께 지낸 사이기도 했다. 나이는 명희보다 세 살 위니까 올해 스물여덟, 덩치가 크고 살결이 희고 눈이 커서, 게다가 사치스런 차장 때문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눈을 끄는 존재였지만 거듭 봐나가면 결코 미인이라 할 수는 없었다.
"언니,"
"왜?"
"오늘 방해된 것 아니우?"
"내가 언제 사람 가리데? 그보다도 너의 오빠 나왔다며?"
"나왔어요, 보름 전에"
"잘됐다. 어쨌든 나왔으니까 말이야."
"한시름은 놨는데,"
"그런데?"
"시집가라고 더글더글 볶아댈 것 아니에요? 언니가 부러워."
"그런 말 하지 마라, 이애. 생과부보고 무슨 소리 하는 게냐?"
하다가 선혜는 작은 순이를 분주하게 불러댄다.
"이불 개켜놓고 세숫물 떠와. 빨랑빨랑 하는 거야!"
자신에게도 무슨 변화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왔는데 막상 찾아와보니 선혜의 천기 어린 말투가 명희 비위에 거슬린다. 생과부로 자처하는 선혜는 내소박을 한 것이고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은 결혼에 실패한 후 변덕이 나서 한 짓이지만 용케 삼 년을 마치기는 마쳤다. 조선으로 돌아온 선혜는 취직 같은 것은 생각도 마치기는 마쳤다. 조선으로 돌아온 선혜는 취직 같은 것은 생각도 않고 하는 일 없이 항상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 발의 피 같은 그깟 월급 받으려고 내 몸을 몽땅 저당 잡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큰소리 뻥뻥 치는 것은 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집안형편 때문이다. 선혜의 부친은 마포 강에 장배 수십척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은 보잘것없으나 재력으론 꿀릴 것이 없고 선혜는 그의 외동딸이었다.
"아씨, 세숫물 가져왔어요."
작은 순이가 문밖에서 말했다.
"알았다."
밖으로 나간 선혜는 분주하게 세수하는 기척이더니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들어온다.
"이애 명희야!"
"왜 그러우, 언니?"
"나 말이야, 놀고 있기도 심심하구 해서 말이야, 깃사댄 하나 해볼까 하는데 너 생각엔 어때?"
"뭐요?"
"왜 놀라니?"
경대 앞에 앉아 크림을 찍어 바르면서 거울 속으로 명희를 쳐다본다.
"아주 고급으로 한단 말이야. 예술가들이 모이는 집, 얼마나 멋있니? 본정통에다 조촐하게 말이야. 예쁘게 생긴 소녀나 둘 데리고서,"
"아버님께서 허락하시겠어요?"
"내가 뭐 처녀냐?"
"그래두요."
"아버진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셔. 내가 좋아서 한다면 하는 거지. 너도 단순히 차나 파는 곳이라 생각하니 그렇지. 그것도 경영하기에 따라 문화사업도 되는 거야. 외국에선 일찍부터 귀족들이 살롱을 열어놓고 모모한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드나들며 예술을 논하고 정치를 논하고, 사실 서로의 의견 교환이 없는 사회에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니? 기생방을 드나들며 소동파의 시나 읊조리는 것도 사내들의 사교는 사교겠으나 기생방에 숙녀들이 끼여들겠더냐 말이야. 그거나마 이젠 퇴물이니,"
"그렇긴 하지만, 취지야 좋지만 말들이 많을 거예요."
"마음대로 하라지.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니?"
"언니 용기가 있어서 좋수."
"너라고 없으란 법 있니? 선생질하기 땜에 쪽을 못 쓰는 게지. 아닌 게 아니라 널 보면 속이 터질 때가 있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영 얼굴값을 못한단 말이야. 비타민A가 어떻고 비타민C가 어떻고, 그래 평생 선생질이나 할 참이야?"
"그럼 어떡허우?"
"시집가야지, 부잣집에,"
"오빠한테 실컷 당하고 왔는데 언니도 그러기유?"
"시집 안 가려면 좀더 멋진 일을 해보든가. 도시 그 머리 모양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무슨 놈의 밤낮 한복이니?"
"멋진 일이 있을 리 없지 않우."
"글쎄다아... 내가 너 같으면 말이야, 음, 내가 너 같으면 양행을 하겠어."
"네?"
"안 될 것 없지. 된다구."
"되는 일이면 어니가 하시구려."
화장을 마치고 화장품 케이스를 닫은 선혜는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공부 더 하고 싶은 생각 별로 없는걸."
"..."
"너는 점수벌레가 돼놔서 영어공부 같은 것 착실히 했잖어? 그리고 너 예수쟁이니까 미국인 선교사하고 친분이 두텁고 말이야."
"양행하고 돌아오면 그땐 양여성이라 하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신여성, 그러구들 하니까 말예요."
"못되어 배아프지. 이죽거리 사내들, 그거 다 접근할 용기가 없으니가 그러는 게야. 골샌님들은 여자 시중드는 게 싫구, 하지만 이제는 여자들도 납자들 시중받을 시대라구."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은회색 코트를 입고 단발머리에 갈색 모자를 쓴다. 의복은 모두 동경에서도 일류 양장점의 제품이다. 핸드백을 집어든 선헤는
"나가자."
"어디루요?"
"좋은 데 안내할게."
"어딘데요."
"이애가아? 서울 장안이지 어디긴? 가보면 알어. 너도 가만히 보아하니 우울해서 나온 모양이고, 일요일인데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 바보가 어디 있니? 오빠도 나오고 했으니 숨도 좀 돌려얄 거 아니냐."
늘 그랬었지만 따라나서기가 께름칙하다. 따라갈까 말까 명희는 망설인다.
"못 갈 곳에 가는 거 아니니 가자꾸나."
결국 명희는 선혜를 따라나섰다. 오가는 행인들이 모두 쳐다본다. 늙은이들은 걸음을 멈추고서 바라본다. 엄격한 눈빛 속에 강한 힐난이 있다. 선혜와 함께 가자면 그런 것쯤 각오해야 했지만 명희는 자신의 걸음걸이가 거북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선혜는 오불관어니요 시원스런 표정으로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걷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언니, 나 낯선 곳이면 안 갈래요."
불안해진 명희는 앞서 가던 선혜 팔을 잡아끈다.
"조금도 낯설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날 따라와. 학생도 아니고 선생님이 왜 이러실까."
뿌리치기 어려운 묘하게 강인한 것이 그 어조 속에 있다. 만나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갈 곳이 막연할 땐 찾아가게 되고 따라가면 안 된다, 생각은 하면서도 결국 따라가게 된다. 동경에서 같은 기숙사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 좀 관심이 가는 청년이 있으면 서슴없이 그의 하숙을 찾아가곤 했었는데 그럴 때 선혜는 곧 잘 명희를 대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끌려가는 데는 그만큼 선혜에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법 쌀쌀하지?"
"이제 곧 겨울인걸요."
"그래, 곧 겨울이야. 지금부터 눈 속에서 꽁꽁 얼어서 같이 죽어줄 사내나 물색해놔야겠다."
"미친 소리 하지 말아요."
"참말 미치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겠니."
"안 미쳤으니까 하는 소리죠."
"이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대더라. 짧은 인생에, 오래 살고 멀쩡하면 뭘 하니?
"나도 큰일이지만 언니도 큰일유."
"아암, 너도 나도 큰일이지. 우수수 낙엽은 지고, 낙엽 몇 잎도 안 남았는데 생과부와 올드 미스의 신세가 좀 하겠니? 그래 넌 아직도 애인이 없냐?"
"선생 모가질 날리려고 그러우? 삼일운동 땜에 달랑달랑했던 모가진데,"
"온 세상에, 가엾구나 이애. 월급 땜에 그런다면 내 월급 줄 테야."
"그럼 난 언니 머리나 빗겨줄까?"
"빗길 머리는 어디 있고오? 내가 만일 처녀라면, 너만큼 생겼다면 벌써 옛날에 백작부인은 됐을 게야. 말짱 헛거라니까. 그런 것 하나 낚아채지도 못하고서 밥통 걱정을 하니까 한심스럽다 그 말 아니겠어?"
"망측스러워라."
"아직은 그래도 꽥 소리는 하는구먼. 좀더 두고 보자. 접장 후취자리도 감지야 덕지야 할 테니."
"후취 사태가 났나 부지요."
"뭐?"
"집에서도 후취,"
"으음, 오빠가 기름을 짠 모양이군. 당연한 얘기지."
"내 걱정 말구 언니나 가슈."
"이미 볼일 다 보았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그대 날 늘상 오종종해 있지 말구, 아 글세 임명희가 나 같은 생과부가 됐다 봐라, 아마 발등에 눈구멍 패일 게야?"
명희는 눈을 흘긴다.
"나 언니가 다 좋은데 그 말투만은 싫어! 남이 들을까봐 조마조마하단 말이에요."
"열두 폭 치마로 푸욱 감싼다고 감추어지냐? 내 근본이야 뻔한 걸. 역관이지만 고관대작들 옆에 맴돌며 예의범절에 밝은 너희네 아버지하곤 다르거든. 실컷 해봐야 악악거리는 것 이외 별수없다구, 우리 아버지 말이야. 아무아무 판서의 손녀따님, 아무아무 정승의 고명따님, 그런 치들하고 다르지. 일본까지 가서도 문벌 내세우고 태깔부리는 꼴이 얄미워서 더 그런다, 왜."
"말씨가 문벌만 따라가나요."
"왜놈 땅에서도 문벌 찾더라. 일본 계집애들 귀족이라니까 사족 못 쓰던걸. 이제 다 왔군 여기가 누구 집인 줄 아니?"
긴 돌담, 밖에서 보아도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큰 한옥이다.
"누구 집이에요?"
"조병모 남작."
"뭐라구요?"
"조병모 남작 집이래두."
"그럼 우리가 이 집에 온 거예요?"
"그렇다니까."
"난 안 들어갈래요."
"어째서?"
"알지도 못하는 집에 뭣하러 가요?"
"그게 아니겠지. 남작이라니까 친일 거두의 집인가 싶어 그러는 거지? 안 그래?"
신혜는 놀려주듯 웃는다. 덩치가 크고 얼굴도 눈도 다 큼직큼직하여 귀여운 곳이라곤 별로 없었는데 웃는 얼굴만은 퍽 귀엽게 보인다.
"아무렴 우리 명희아씨를 친일파 두목 집으로 안내할까. 이 집은 말이야. 친일해서 작위를 받은 게 아니고 뭐 왕가와 인척간이어서 받은 작위래. 거절 안 하고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모르는 집인걸. 난 안 들어갈래요."
"들어가면 아는 얼굴이 있어."
"그래도 싫어요."
"아이구 참, 참말이지 여학교 선생님께서 왜 이러실까? 실은 말이야, 너 윤덕화라는 애 알지?"
"왜 모르겠어요? 언니하고 같은 반,"
"응 그래. 이 집이 그 애네 외가야. 천안서 며칠 전에 올라왔는데 한번 만나보재나? 편지를 보내왔던걸. 그것도 속달로 말이야. 귀족들 사는 꼴도 볼 겸, 너하고도 생판 모르는 새도 아니고, 우리 동창이 몇 되냐?"
덕화는 일본인 가정에 맡겨져서 통학을 했기 때문에 명희는 얼굴을 익혔고 인사를 나눌 정도였지 선혜처럼 행동을 같이 해본 적은 없었다.
"애기를 못 나서 진찰받으려고 서울 왔다던가? 뭐 그런 얘기야."
문을 두드리니 행랑할아범이 달려 나왔다.
"덕화 만나러 왔는데요."
선혜는 행랑할아범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거만스럽게 내뱉는다.
"아 예, 예. 들어오십시오."
대문을 활짝 열어준다. 선혜는 큰 덩치하고서는 아주 민첩한 동작으로 들어섰고 명희는 슬며시 문 안으로 몸을 옮겨놓는다. 대문을 도로 닫아 건 행랑할아범이 팔짝팔짝 뛰는 듯한 시늉으로 앞선다.
"아씨는 지금 별채에 계십니다요."
연당을 지나서 키 높이보다 훨씬 큰 철쭉, 새빨간 나뭇잎이 몇 개 남아 있는 철쭉 뒤켠에 유리문이 계속된 한옥 한 채가 있었다.
"아씨."
"왜 그러느냐."
한가롭고 맥 빠진 듯한 음성이다.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손님? 누구라더냐?"
"저어,"
"나야!"
선혜가 소리를 팩 지른다. 동시에 유리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어머, 선혜! 기다리긴 했어도 이리 일찍 올 줄은 몰랐구나!"
남색 치마에 옥색 반회장저고리를 입은 모이 긴 여자가 환하게 웃는다.
"아니, 이애는 명희 아니냐?"
"언니, 그간 안녕하셨어요? 오래간만입니다."
"오래간만이야. 그래 결혼했니?"
"결혼은요. 학교에 나가고 있어요."
"그것도 좋지. 결혼해봐도 그저 그래."
덕화는 까르르 웃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놓을 거야?"
선혜가 덕화의 등을 툭 친다.
"그래 그래, 내 있는 곳으로 가자."
하는데 안으로 뭐라고 하는 모양이다.
덕화가
"잠깐만,"
하고 방안으로 들어간 덕화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누가 있는가 부지? 남편일까?"
선혜가 귓가에서 소곤거린다. 이럴 때 명희는 난처해진다. 그리고 할랑 하고 먼저 보이더니,
"들어와, 응?"
하고 덕화는 하얀 손을 흔들었다.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서 사람을 이리 세워 놓냐?"
선혜가 투덜거리는데 덕화는 꾀꼬리 같이 그러나 조금은 맥 빠진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구 내 거처방은 따로 있어. 한데 오빠랑 동생이 나간다구 그래 손님 을 이곳으로 뫼시라는 거야. 숙녀들을 환대하는 뜻으로,"
명희와 선혜는 다같이 코트를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사람이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M여전의 동창들이에요. 강선혜 씨, 그리고 저기는 임명희 씨,"
덕화는 유연하게 손짓을 하며 소개를 한다.
"네. 조용하올시다."
삼십대로 보이는 조용하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다. 마르고 살결이 희고 회색양복을 헐겁게 입었는데 냉담한 느낌을 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선혜도 조금 얼떨떨해한다. 명희는 잠자코 고개를 숙인다. 용하의 시선이 재빠르게 명희 얼굴을 스치고 간다.
"여기는 동생 찬하."
"안녕하세요?"
비로소 자기 위치를 확보한 것처럼 선혜는 인사말을 슬쩍 던진다. 찬하는 형보다 완강하고 키는 큰 편이 아니지만 균형 잡힌 몸매와 때 묻지 않은 젊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숙였지만 수줍음이 남아 있다.
"편히 놀다 가십시오. 그럼 실례합니다."
세련된 동작으로 소파와 탁자 사이를 지나서 조용하가 앞서 나갔고 찬하는 말없이 형을 따라나가는데 목덜미 근처가 불그레한 것같이 보였다.
"악수나 한번 청하려 했는데 덕화 너 체면을 위해 참았다."
선혜는 수박색 천으로 된 소파에 펄쩍 주저앉는다. 몸이 한두 번 튀듯, 자줏빛 스웨터가 한층 얼굴을 환하게 한다.
"내 체면은 또 뭔고? 오빠랑 그 애, 악수는 숙녀 쪽으로, 그 정도의 예의범절은 안다구요."
"그거 참 억울하게 됐네, 그럴 줄 알았으면 귀공자 손 한번 잡아 보는 건데 말이야. 꽁생원인 줄 알았지 뭐야."
"언니도 참 주책이유."
옆에 앉은 명희는 무안해서 한마디 한다.
"젊은 애가 곰팡내 나는 소리만 하고, 그러니 시집을 못 가는 게야."
"넌 그 반대라 시집을 못 가는 거 아니니?"
덕화가 명희를 감싸듯
"약은 쓰다고. 쓴 약을 좀 먹어야 시집 안 가는 병도 나아요. 나야 뭐 볼일 본 처지고,"
명희는 방안을 둘러본다. 겉보긴 한옥이지만 넓은 마루방엔 고급 융단이 깔려 있고 벽면엔 책장, 그림이 한 폭, 골동품이 몇 점, 누군가의 서재인 모양인데 자질구레한 물건은 일체 없었고 해서 방 분위기가 아주 점잖다. 손님을 안내한 할아범의 전갈이 있어 그랬던지 해맑게 생긴 계집아이가 커피를 날라왔다.
"커피 들어. 명희도,"
"네."
잘 끓여진 커피 냄새.
"굉장히 맛있구나. 찻집에서 이렇게 커피를 끓였다간 장사가 안 되겠지?"
"글세, 값을 비싸게 받으면 되잖아."
덕화는 철없는 아이같이 말했다.
"이 커피란 리치몬드구나."
찻잔을 들어 올려 밑바닥을 보며 선혜는 말했다.
"나는 그런 것 몰라."
덕화는 역시 철없는 아이같이 대답했다.
"어째 좋다 싶었지. 이런 찻잔에 이런 커피 끓여내면 아마 귀공자들도 손님으로 오실 거야."
비꼬는데,
"무슨 말이니?"
"선혜언니 찻집 하나 내고 싶어 하거든요."
명희가 알려준다.
"선혜가?"
"고상하구 심심치 않고 괜찮은 장사야."
"그건 그래."
애매한 대답이다.
"그런데 아까 나가신 두 공자께서는 모두 기혼자야?"
"오빠는 결혼했는데 금슬이 좋잖아서,"
"그럼 작은 공자께선 미혼이구?"
"신부감을 구하는 중인데 마땅한 색시가 없나 봐."
"여기 있잖어?"
명희를 가리킨다.
"언니 미쳤수?"
발끈한다. 놀림을 당한 것 같아서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언니뻘이나 되니깐 이런 야기도 하는 게야. 다소곳이 앉아 있으라구."
"근사한 얘긴데, 누가 알어? 인연이 있으면,"
덕화는 좀 당황한다.
"언니 자꾸 그러면 나 비참해져요."
"그래 그래, 관두자."
"안 따라오는 건데, 시집을 못 가서 누가 환장이라도 했나?"
"너희들 천천히 놀다 저녁 먹고 가는 거지?"
"글쎄에."
"글쎄가 뭐니,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야. 너희들이 와주어 숨이 트이는 것 같은데,"
"네 처지가 그렇게도 한가하냐? 기혼자가 그렇담 그거 반갑잖은 소식이야."
"한가한 처지는 아니지만, 내려가야 하는데 의사를 기다리고 있어."
"의사를?"
"음, 올라온 김에, 며칠 새 온다니까."
"어딜 갔기에?"
"닥터 웨버라구 미국인인데 잠시 귀국했나 봐."
"불임증 땜에 그러는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또오,"
순간 덕화의 얼굴빛이 흐려진다.
"또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꼭 그 의사한테만 뵈야 하니?"
"글세... 확실한 진단을 받아야 하니까. 우리 외삼촌하고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서, 또 권위가 있고,"
명희와 선혜는 동시에 덕화 표정에서, 그 쾌활한 얼굴에서 불길한 것을 예감한다.
"왜 심각해지니?"
덕화 얼굴에 예민한 반응이 나타난다.
"아, 아냐. 난 병원이다 의사다 하면 괜히 겁이 나서 그래."
선혜는 얼버무렸고 명희는 일부러 무료한 표정을 지으며 방안을 둘러본다.
"겁나도 별 수 없지. 인명재천일걸."
"그런 얘긴 칠순 노인이나 하는 말 아니니?"
"죽음에 노소가 있니?"
"그건 그렇지만,"
"내가 어릴 때 말이야, 분이라는 비자가 있었는데 한사코 내가 죽으면 꾀꼬리가 될 거라 하잖겠어?"
"그건 또 왜?"
"웃기를 잘하니까 그랬던가 봐."
"사람이 되어도 억울한데 꾀꼬리가 돼?"
"그렇지만 어릴 적에는 꾀꼬리가 된다는 말이 참 듣기가 좋았어."
"이 마나님 좀 보게?"
실없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그러구러 시간을 보내다가 잘 차려낸 저녁 대접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덕화는,
"또 한 번 만나자, 응?"
했다. 대문까지 따라나온 덕화는 또 한번 만나자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거리에 나온 선혜는 두 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명희."
돌아본다.
"왜요, 언니?"
"좀 이상하지 않아?"
"..."
"몇 해 동안 소식이 없던 덕화가 말이야, 일부러 편지까지 보내어 만나자 하구. 예감이 좋지 않은데?"
"명랑해 뵈던데요 뭐."
했으나 명희 역시 기분이 묘했다.
"본시부터 성격이야 밝은 편이었지만 그런데 기분이 좋잖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진찰받는다는 얘기 들어서 그럴 거예요."
잠자코 걷는다.
"특히 나올 때 마음이 묘해지더군. 매달리다시피 또 만나자, 또 만나자 하지 않던?"
"언닌 누구하고 사별한 일이 있수?"
"아직은,"
"그것만이라도 아직은 행복하네요."
"그것도 시한부지 뭐."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누군가하고 사별한 사람은 죽음이란 말 좀처럼 입 밖에 낼 수 없을 것 같아요. 남자들 경우는 모르겠지만, 오빤 돌아가신 분은 들먹이는데 난 못 그러겠어요. 확인하는 것 같아서."
"이래저래 오늘은 별 신통한 일 없는 일요일이 됐구나. 본정통에나 나가볼래?"
"그럴까요?"
명희는 순순히 응한다. 명빈의 얘기를 한 때문인지 다시 노여움이 치밀었고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진다.
'바로 그 점이 문제라구.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한다. 그러나 해결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거든. 안 그러냐?'
명빈의 말이 코트 깃을 헤집고 스며드는 저녁의 찬바람보다 쌀쌀하게 되살아난다.
'해결을 못하고 있는 현실‥‥‥ 결혼 문제만이 아니다. 정열이 모자라는 여자, 나는 정열이 모자라는 여자야. 오빠는 신여성에게 정열이 부족하면 죽도 밥도 아니라 했다. 그래, 죽도 밥도 아니야. 내가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두려워서 떨었다'
명희의 생각이 훌쩍 건너뛴다. 학교를 마치고 모교에 부임했을 때 일이 맥락도 없이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희망에 부풀어야 했을 것을 그렇지도 못했다. 희망이나 기대 같은 건 없었다. 어떻게 하리라는 포부도 없었다.
'지금도 두렵다. 배운 대로 또박또박 가르치는 것 이외 항상 난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주변에선 날보고 열심히 한다고, 침착하고 상냥하다고, 열심히, 과연 열심일까, 그게? 조금도 흥미가 없고 학교에 갈 때마다 학교가 가까워지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다 팽개치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매번 느끼는데, 도무지 난 선생 같지가 않거든. 학생들은 저만큼 있고 동그마니 내 혼자서 칠판에 글을 쓰고 책을 펼쳐들고 출석부의 이름을 불러나가고, 학생들의 얼굴이 눈에 뛰기 시작하면은 갈팡질팡 나를 가눌 수 없게 되니 언제부터 그랬을까? 처음부터 그랬을 거야. 그런데도 빠지지 않고 용케 나가는 것은 달리 길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어쨌든 나는 죽도 밥도 아닌 것만은 확실해.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 사실 난 전심전력으로 기도해본 일이 없어. 입속으로 기도문을 욀 때도 그렇고 마음속으로 기도할 때도 그래. 어떤 때는 말꼬리를 놓치고서 그걸 찾아보면 기도시간은 끝나 있고 하느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의문을 가져본 일도 없고 확신해본 일도 없고, 아버님이 살아계실 적에 열심히 공부해서 칭찬받고 집에 들면 살림살이 도와주어서 칭찬받고 그것이 내 전부였어, 그것이. 교장선생님은 여성교육의 선구자라 하셨어. 여성교육의 선구자. 선구자 될 생각도 없으면서 뭘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하면 불쾌해진다. 오라버니 말대로 자발적으론 아무것도 못하면서 최고 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은 있어서, 그 무거운 짐짝 같은 선생, 직장, 여성교육의 선구자, 그걸 끌고 막연한 독신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역시 비참하다. 남은 뭐라건 자기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선혜언니 편이 나보다는 훨씬 나아. 혼자 살려고 교사질을 한다는 것은 참말 따지고 보면 우스운 얘기야. 후취자리보다 나을 것 한 푼 없지,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 우스운 일이야. 도시 우스운‥‥‥'
명희는 막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같이 걷고 있는 선혜 옆모습을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니?"
"좀 우울하네요."
"우울한 일이 있으면 확 털어놓는 거야. 넌 혼자서 속으로 꿍얼꿍얼하니까 해결이 안 되지."
"선생질이란 참 고된 직업이유."
"그래 내가 뭐랬냐. 아까운 청춘 다 시든다."
두 여자는 전차를 타고, 다시 한 번 갈아타고 내려서 본정통 입구에 이르렀다.
"동경 있을 때 생각 안 나니?"
"가끔 나지만,"
"한 번 다녀오고 싶다."
"뭐하러요?"
"해거름에 은좌거리 걷고 싶어서,"
"여기가 은좌거리거니 생각하세요."
"아득하다. 언제 우리 조선도 남같이 살아보니?"
"남같이 살아보긴 커녕 나라도 못 찾는 처지예요."
"어떤 때는 말이야, 상해로 튀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어."
"뭐하게요."
"남장을 하구 말이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싶은 정열이 막 솟을 때도 있다 그 말 아니니?"
'책 나부랭이나 들춰보기도 하는 모양인데, 애비가 배 척이나 갖고 있으니 망정이지, 돈 없으면 갈 데 없지, 창부질밖에 못할 계집이라구요.'
동경 있을 때 입정 나쁘기로 유명했던 정상조라는 법과 학생이 내뱉은 말이 퍼뜩 생각난다.
'경고하노니 명희씨, 강선혜를 따라다니면 못씁니다.'
실은 선혜를 따라갔기 땜에 정상조를 만나게 된 것이지만.
"이애! 명희야. 저, 저게 누구니?"
"뭐가요?"
"가만히 있어."
선혜는 명희의 팔을 잡아 끈다. 들어간 곳은 양품점이었다.
"안녕하세요?"
진열대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가 얼굴을 든다. 이상현이다.
"아니, 명희씨,"
인사는 선혜가 했는데 상현은 명희를 먼저 발견하다. 명희의 얼굴이 핼쑥해진다. 상현에게 동행이 있었다.
"이선생 경기 좋으신가 봐요. 다방골 언니까지 대동하신 걸 보면,"
다방골 언니, 기생이란 뜻이다. 상현의 동행은 기화였다.
"서방님, 전 먼저 가보겠어요."
짙은 남색 두루마기에 조셋 흰 수건을 목에 두른 기화는 미소를 띠며 선혜 옆을 스치고 나간다.
"기화!"
"아니에요. 또 만나뵙겠어요."
문을 밀고, 그리고 재빨리 사라진다.
"정말 이선생님도 여간 아니셔. 그러나 우리가 쫓아버린 꼴이 돼서 미안하게 됐어요."
"아닙니다. 괜찮소."
"괜찮다면 우리한테도 서비스 좀 해주셔야지요. 여기 서서 얘기만 할 수도 없지 않겠어요?"
상현의 처지가 딱하거니와 명희의 처지도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 자신은 멋모르고 따라 들어왔지만 이리 되기로 알고서 뒤 따라온 꼴이었던 것이다. 선혜의 팔을 뿌리치고 나가버리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그렇게 한다면 일은 더 우습게 된다.
"하여간 나가봅시다. 밖은 어두워지려고 해요. 요조숙녀 명희아씨도 별 눈에 뛰지 않을 거구요."
하는 수 없이 상현은 밖으로 나온다. 어두워졌다지만 거리는 전등불로 오히려 환했다.
"그냥 돌아가십시오."
상현은 분명하게 말했다. 명희를 생각해 그러는 것 같았다. 명희는 강한 수치심을 느낀다. 일이 처음부터 잘못 꼬여서 끝까지 자신이 당하고 만다는 자기 자신의 성격에 분노를 느낀다.
"임선생님께서는 건강이 좀 회복되셨는지, 일간 한번 찾아가 뵙겠습니다."
상현은 명희에게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발길을 돌린다.
"으음, 여긴 동경 은좌거리가 아니다 그 말이로구나. 조선의 신자께서는 그래도 명희를 아껴주신 거라구."
선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명희는 눈앞이 캄캄해오는 것을 느낀다. 양품점에서 먼저 나와버리든가 아니면 먼저 가겠다는 말 한마디를 왜 먼저 못했을까, 강선혜 같은 주제도 아니면서,
'창피하다, 창피해. 시집 못 간 노처녀가 무엇을 바라는 것 같은 추한 꼴이 되고 말았어. 불쌍한 명희야.'
"언니, 가요."
"그러자꾸나."
그런데 명희는 마음속으로 엄청난 비약을 하고 있었다. 이상현을 한번 찾아보리라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런 뒤에 누구에게든 시집가리라.
시집간다는 것은 상현을 찾아가기 위한 배수의 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