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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3-2

Bollnow 2024. 3. 13. 06:09

8. 출발

물살이 떠는 강을 건너서, 나룻배를 내려섰을 때 아침 해가 솟아올랐다.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관수, 석이는 걸음을 떼어 놓는다.

"잘 갔다오게에"

베수건으로 귀를 싸맨 사공이 소리를 질렀다. 관수는 대답 대신 발밑을 내려다보며 킥 웃어버린다. 사공과는 안면이 두터운가본데 가슴팍 쪽으로 노를 끌어당길 때마다 중풍 든 사람처럼 입술을 씰룩거리던 사공의 얼굴을 생각하며 웃었는지 모른다. 한참을 걷다가 돌아본다. 강가의 사람들을 태우고 나룻배는 강심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른 잡목 숲에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다. 집을 떠나올 때 근심과 의혹의 빛을 감추려고 애쓰던 어미의 눈을 석이는 생각한다. 하동의 아비 산소를 둘러보겠노라 거짓말을 했었다.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산소에 들를 심산이기도 했다.

'아배 원수를 갚겄다는 그 따우로 시시한 생각이믄 애시 날 따라 나설 염도 내지 마라. 한평생이 잠깐인데 무덤 속에 묻히서 다 썩어부린 세월까지 뒤비시가지고 살아줄라 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사나아라 카믄 원한도 크기 가지야 하고 인정도 크기 가지야, 그래야만 연장 달고 세상에 나온 보램이 안 있겄나. 이 세상에 억울한 놈 니 하나뿐인 줄 아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람 중에 천대받아감서 억울하게 사는 사램이 훨씬 많은께, 그러니께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일이 더 바쁘다 그 말 아니가. 곰곰이 생각해봐라. 니는 펭생을 물지게 지고 니 어무니는 죽는 날꺼지 품팔이나 하고, 니 동생들이라고 다를 기이 있을 성싶으나? 좀 펜하게 살잘 것 같으믄 술집말고 갈 곳이 따로 없인께. 너거들 겉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W이고 ›W일 만큼 많다. 밥 묵는 사람보다 죽 묵는 사람이 많고 뺏는 사람보다 뺏기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그래 니가 조준구 한 놈 직이서 아배 원수를 갚는다고 머가 해겔되겄나? 달라지는 것은 쥐뿔도 없을 기라 그 말이다. 세상이 달라지야 하는 기라, 세상이. 되지도 않을 꿈이라 생각하겄지. 모두가 그렇기 생각한다. 천한 백성들은 그렇기 자파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꿈이라고만 할 수는 없제. 세상이 한번 바뀔 뻔했거든. 왜놈만 아니었으믄. 지난 동학당 난리 얘기는 니도 많이 들었을기다. 왜놈만 병정을 몰고 안 왔이믄... 정사를 틀어쥐고 있던 양반놈들, 그놈으 자석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보담 남으 나라 종놈 되는 편을 원했으니께. 그러니께 송두리째 넘어갔지. 땅도 넘어가고 백성도 넘어가고.'

밤을 새가며 관수가 들려준 얘기다.

'자리꼽재기 그 늙은 전가가 거금을 내던지고 실속도 없는 참봉벼슬을 산 것은 양반이 되어야만 왜놈하고 붙어묵기 좋을 기니께, 노심초사해서 돈을 번 처지라 눈까리는 밝아서 한치 앞은 본 모양이고, 그런가 하믄, 상투를 틀거나 산발을 하거나 조맨치도 불펜할 기이 없는 편한 놈들은 개멩바람을 타야만 양반 되는 줄 알고 너도 나도 머리를 동구리고 댕기는데, 허허... 이마빡에 신짝을 붙이야 양반이랄 것 겉으믄 그놈들은 신짝을 붙일 기고 발바닥은 치키 들고 손바닥으로 걸어야 양반이랄 것 같으믄 또 그렇기 할 긴께 그놈의 양반 체모라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 긴지 모르겄다. 뒤죽박죽,'

그런 세태 얘기를 하며 웃기도 했었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보리밭에 까마귀 서너 마리, 길가는 사람을 멍청히 바라본다. 빈 지게를 지고 목발을 흔들어대며 산으로 올라가는 초동, 잡목숲에 싸아! 하고 바람이 지나간다.

"석아."

활갯짓을 하며 걷던 관수가 불렀다.

"옥봉 기생집에서 술 묵다가 달아난 사람 잽힜다 카더나? 그런 소문 들었나?"

"못 들었소."

"안 잽힜다 칼 것 겉으믄 그 재주 보통은 좀 넘는다."

"그러세... 재주도 있었겄지마는 내 생각에는 담력이 큰 사람 같소."

"니 말이 맞다. 재주보담은 담력이겄지."

"..."

"병신놈으 자석들, 옷 하나도 못 맨들어서 흥, 우리 조선의 상복을 가지간 놈의 쪽발이 자석들이 무신 별수가 있일 기라고."

"정말 의병이까요?"

"내 듣기로는 청국에서 숨어들어온 사램이라 카데. 독립 운동하는 사람, 머 의병하고 다를 것도 없지."

성큼성큼 걸음들이 빠르다. 산이 지나가고 개천이 지나가고.

'봉순이 그놈으 가시나가 참말로 진주서 뜰라 카나? 이부산가 삼부산가 그 집구석 자손이 와가지고 씰데없이, 자는 불을 일으키놨인께, 제에길헐!'

"석아."

"."

"우째 심심코나. 얘기 좀 해라."

"..."

"봉순이가 정말로 이곳서 뜬다 카더나?"

"그런 말을 했갑는데요."

"어디로 가는고?"

"나도 잘 모르겄소. 광대패를 따라갈 기라 카든지..."

"멩창으로 이름 한분 날리보겄다 그 말이구마. , 마음만 가지고 그기이 그리 쉽기 되는 일이라야제. 타고난 소리만 가지고 되는 거는 아니라고. 마음을 독하고 모질게 가지야 하는 기고 참을성도 많아야 하는 긴데 봉순이는 그렇기 못할 기다. 계집이 정에 헤프거든. 화류계에 있일수록 정에 헤프믄... 뻔한 일이지. 기다리는 거는 추풍낙엽밖엔 없는 기라. 그런데 저기이 멋꼬? 하하앙, 밥 묵기 싫어서 가는 사램이구마."

비탈진 밭둑길로 해서 지게송장이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게송장이라 아침에 가는 모양이다마는 땅이 얼어서 묏자리나 파겄나."

석이는 걸음을 멈추고 쳐다본다. 괭이 든 사내를 따라 지게 송장이 가고 상복 입은 아낙 하나가 울며 따라간다. 열 살 안팎의 계집아이 둘, 저고리 앞품에 두 손을 넣고 뛰어가는데 머리에 쓴 천태가 나풀거린다.

"가자."

"... 이상쿠마요."

"머가."

"지게송장에 상복은 머할라꼬 입었이까요?"

"셈을 해보라모."

"?"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입이 포도청이라. 생이를 빌리오고 상두꾼을 불러오고, 죽은 사람 호사는 되겄지마는 허공에다 뿌리는 돈 아니가. 상복이사 떨어질 때꺼지 입는 기니께. 안 그래? 하하하핫..."

"..."

"주막까지 갈라 카믄 한나절이 돼얄 긴데. 아이구우 심심타. 니가 통 말이 없인께. 내 옛날 얘기 하나 하까?"

햇살은 한결 두터워졌다. 여전히 말없이 석이는 걷기만 한다. 무명이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고 결이 고운 주란사 회색 바지에 관수가 벗어준 저고리를 입은 석이 모습은 제법 의젓하다. 머리꼬만 울렸어더라면.

"젊었을 적의 우리 아부지 얘긴데. 아부지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장돌뱅이질 하든 그런 시절이었더란다. 상투는 틀었지마는 삼십이 다 돼가는 총각이었고, 여자를 모르기야 몰랐을까마는... 그랬는데 어느 날 화개 장터에서 이쁜 각시 하나를 보았더란다. 본시 우리 아부지 난봉기가 좀 있었지. 해서 실금실금 그 각시를 숨어보고 있노라니 향을 사고 초를 사고 과실을 사는데 제사 장이라. 옳다꾸나, 저놈으 각시 과부로구나 하고 아부지는 생각했다는 거지. 그래 부랴부랴 짐을 몽당그려서 주막에다가 秀貂?장바구니를 이고 가는 각시 뒤를 따랐는데 여가집에 가는 줄 알았던 각시는 산으로 올라가더라나? 하하앙, 화전민의 계집이로구나, 내친걸음이고 각시 댓거리가 보면 볼수록, 여시에 흘린 것 같아서 돌아설 수가 없었던 우리 아부지는 내처 따라가는데 산막도 아니고 자꾸 산속으로 기어들어가더라는 게야. 뜻밖에 각시는 절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제에기랄! 설마 불공을 디리러 갔이믄 새북에야 안 오겄나 싶어서 목기막을 찾아 늘어지게 한잠을 잤더라는 기지. 한잠을 실컷 자고 나서 절 밑 길목을 지키고 있으려니께 가만 있거라, 이놈의 신총이 끊어졌나?"

관수는 허리를 구부리고 짚세기를 들여다본다.

"빌어먹을, 재수없게끔,"

봇짐 속에서 노끈 하나를 꺼내어 길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신발을 얽어맨다.

"됐다. 가자."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래 절간 길목을 지키고 있으려니께 아니다 다를까, 각시가 나오더라는 기지. 달은 휘영청 높고 산중이 대낮맨치로 밝은데 실상 첩첩산중에서 달이 그리 밝다는 것도 과히 기분 좋은 거는 아니더라나? 각시는 겁을 집어묵었던지 산길을 종종걸음으로 내리가고 우리 아부지는 멀찌감치서 따라가는데 우떻게 된 영문인지 각시 허리띠가 풀리서 슬렁슬렁 내리오더니만 땅바닥에 끌리는데, 그럴수록 각시는 허겁지겁 걷더라는 기지. 그놈으 너부죽한 허리띠는 마치 허영 꼬랑지맨크로 흔들리믄서,"

"여시가 둔갑을 했던가배요."

흥미를 나타내며 석이 말했다.

"내 얘기 들어보라고. 아부지도 처음에는 저눔으 각시 여시 둔갑한 기이 아닐까 생각했다누마. 그래도, 아무래도 우짠지 단념을 해부릴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그놈의 허연 허리띠가 눈앞에 아찔거리니께 맴이 한층 더 끌리가더라는 기지. 죽을 셈치고 걸음을 빨리하야 뒤서 각시를 담싹 안았더란다. 그러자 각시는 그만 기절을 해부린 거라. 아부지는 기절한 각시를 안고 목기막에서 찬물을 떠다가 얼굴에 끼얹고 해서 게우 각시는 정신을 차›는데, 첫마디 말이 고맙십니다. 호식이 되었을 나를 구해주었이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겄십니까? 하하하핫... 하하핫... 참말로 거짓말 겉은 얘기 아니가? 여시가 여자로 둔갑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마는 허리띠가 호랭이로 둔갑한다는 것은 좀, 처음부터 각시는 호랭이 생각만 했던기라. 허리띠 끌리는 소리를 호랭이 발자국 소리로 들었고 아부지가 뒤에서 안으니 호랭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게지. 그렇기 해서 아부지는 호랭이를 쫓은 장사가 되었고 꿈 겉은 밤을 목기막에서 보낸 기지. 그래 알고 보니 그 각시는 역시나 과부, 그러니께 그 과부가 누군고 하니 우리 어무니라."

"..."

"아부지가 동학에 들어간 것은 아마 과부는 개가하는 기이 옳다는 그 조목이 좋았든 때문이 아닐까? 하하하 하하하핫..."

웃음소리에 힘이 없다.

"어무니 소식은 영 못 듣십니까?"

"어디서 듣노? 알아볼 만치 다 알아봤다. 살아서 고생하느니보다 차라리 돌아간 것을 바래는 심정이구마. 허리띠 풀어진 줄도 모르고 호랭이 생각만 했던 얼띤 노친네... 다부졌으믄 우떻게라도 살아서 나를 찾았일 긴데... 그런 생각 하믄 머리카락 센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오십 리 길은 걸었을까? 관수는 석이를 데리고 마을 어귀의 주막으로 들어간다.

"어이구우, 관순지 소금물인지 오래간만에 얼굴 보겄구나."

젊은 주모가 초장부터 헤프게 수작을 걸어온다.

"분인가 가룬가 수절하고 잘 있었는지 모르겄네?"

"열녀비는 따 놓은 당상이지."

관수는 짚세기를 벗고 술청으로 올라간다.

"이분 행비가 늦어서 임자 속이 바짝바짝 탔을 긴데, 우선 목부텀 축이야겄네."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고나, 내 속이 타는데 자네 목부텀 축인다아? 호호호..."

간드러지게 웃는다. 석이는 퉁명스럽게 주모를 쳐다보며 관수 옆에 앉는다.

"이 총각은 누군고?"

"임자 시동생이구마."

"아이구우 그렇다믄 이거 첫상면이 되겄네?"

"그렇지. 잘 알아서 해얄 기구마. 상다리 안 뿌러질 만큼,"

"장이 멀어서 유갬이고, 갈길이 바빠서 유갬이구마는,"

"그놈으 조둥이 잘도 다져놨다."

"관수 왔나?"

구석방에서 한 사내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말했다.

", 성님."

관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주모의 서방인 것 같았다.

"가보소."

골방 쪽을 힐끗 쳐다본 주모는 관수에게 말했다. 그 표정은 염치 없는 여태까지의 수작과는 딴판으로 엄숙하다. 관수는 일어서 골방쪽으로 가고

"총각, 국밥 할라요? 술은 하는지 모르겄네?"

주모 목소리에 석이 당황한다. 천한 계집이라고 마음속으로 멸시를 했었는데 뜻밖에 여자 목소리는 누님같이 부드러웠고 눈이 인자했던 것이다.

", 국밥 주소."

석이 국밥을 먹고 있는데 골방에서 나온 관수는 막걸리 한 잔에 김치 한 쪽을 씹어 삼키면서

"떠나자."

하고 서둘렀다.

"돌아올 직에는 들리겄구마."

주막 밖까지 따라 나오던 주모 분이는 여름날 차일을 치기 위해 박아놓은 말뚝에 받쳐서 한순간 비틀거리다가 말을 했다.

"이 길로 올지 산청을 돌아서올지 그거는 모릴 일이고 소식 없이믄 오늘 이날, 정화수 물 한 그릇 부탁하누마. 그라믄 성님 잘 기시오."

관수 볼 언저리에 소름이 소스랑하게 나돋아 있었다.

"잘 다니오게."

구석방에서 나온 얼굴이 싯누런 사내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해 보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라믄 총각도 잘 가시오."

분이 석이에게 말하며 미소 짓는다. 광대뼈가 솟은 듯 눈빛이 깊다. 헤프게 수작하던 여자로는 믿을 수가 없다. 야 하고 대답한 석이 보따리를 추스르며 관수 뒤를 따른다. 관수의 걸음은 눈에 띄게 급했다. 한참을 급히 걷던 걸음이 늘어지고 관수는 별안간 들판을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하느님이 사람 낼 때 녹 없이는 아니 내네. 우리라 무슨 팔자 그다지 기험할꼬. 부하고 귀한 사람 이런 시절 빈천이요 -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동학교의 교훈가다. 다시 걸음을 빨리한 관수는 입을 봉하듯 말하지 않았다. 땅거미 질 무렵이다. 구례에 당도하였다. 우시장 공터를 지나고 텅텅 비어 있는 장터를 지나서 좁다란 마을길로 접어든 관수는 곧장 올라간다. 엇비슷한 여염집이 엇비슷하게 자릴 잡은 동네다. 열려져 있는 어느 대문 앞까지 온 관수, 성큼하니 들어선다. 자그마한 안늙은이가 기름병을 들고 나오다 말고

"관수 오는감?"

안늙은이는 신병이 잦은 듯 얼굴이 배추시래기 빛이다.

"어르신 기시지요."

"사랑에 기신께 들어가보더라고."

안늙은이는 관수 뒤에 서 있는 석이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집안은 유복한 것 같다. 사간 위채에 아래채가 삼간, 두 동은 초가였고 남쪽을 향해 돌아앉은 것이 사랑인데 지붕은 기와다. 마당은 시원하게 넓다. 관수는

"매구치기 좋겄제?"

마당이 넓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대문을 들어설 때처럼 관수는 사랑 마당으로 성큼 들어선다.

"어르신."

이미 말소리를 들은 듯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

"이제 오는군. 올라오게."

안늙은이보다 젊은 백발머리에 쉰네댓 돼 보이는 사람이다.

"혜관스님도 오셨네."

관수는 신발을 벗으며

"석아 니도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갔을 때 혜관은 관수보다 석이 쪽을 쳐다본다.

"시님, 그새 편안했십니까?"

눈길을 옮기며 혜관은

"편안해지면 죽는 날이지. 앉게."

"석아, 인사드리라."

석이는 한순간 날카로운 눈초리로 반백머리와 중머리를 번갈아 보다가 보따리를 내려놓고 절을 한다.

"부친 비슷이 있구먼."

혜관이 뇌었다.

"어떻십니까? 아이가 실팍하지요?"

관수 말에 반백머리 윤도집이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석이 얼굴을 붉힌다. 사실이 그러했다. 윤도집을 따라 혜관도 웃는다. 그러나 관수는 웃지 않고 작은 눈을 더욱 작게 오므리며 뭔지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기색이다.

"그는 그렇고 저녁은 안 했겄지."

"."

"저녁 먹고, 천천히 떠나도 늦잖어."

윤도집은 뽀뽓한 씨아털을 피운 민들레 같은 느낌을 주는 선비풍의 사람이다. 울퉁불퉁한 중머리에 관골이 튀어나오고 정력적으로 뚱뚱해진 혜관 옆에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 도집이라는 직명이 설명해주듯 운봉 양재곤을 총수로 하여 새로 조직된 동학 별파의 중요 간부 중 한 사람이다. 저녁을 먹은 뒤 관수는

"잠시 다녀올 긴께 너는 여기서 기다리라. , 모레, 늦어도 모레는 돌아올게."

"?"

석이 어리둥절해한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다. 신돌 아래서 윤도집과 혜관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관수를 따라 문밖까지 나가는데 가다 말고 돌아본 관수

"아아, ? 석아. 니 와 그라제? 귀주기 벗은 지가 몇 해라고 울상이고."

주막을 떠난 후 처음으로 우스갯소리를 하고 웃는다.

"모레는 꼭 올 기지요."

"으음."

입술을 꼭 다문다.

"암 돌아오고말고."

관수는 들어가라는 시늉으로 손을 흔들어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석이는 방으로 돌아왔다. 혜관과 윤도집은 석이에게 도무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고 그들의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는 봄에는 임제종의 이차 총회가 열릴 모양인데,"

"작년에는 송광사서 열리지 않았었소?"

"그랬지요. 금년에는 광주 포교당에서 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번에는 한층 더 뚜렷하게 명분을 내걸어야 할 게고 임시 관장이고 보면 새로 관장을 뽑아야 하는데 어째 시끄럽지나 않을란가."

혜관은 입맛을 다신다.

"임시지만 용운이 그냥 눌러앉는 게 아닐까?"

"글쎄올시다."

"나이 젊은 게, 그게 좀 어떨는지 모르겠소."

"실상 용운이 적합하다 할 수는 없지요. 나이도 나이려니와."

"그렇다고 뭐 따로 일할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소? 남의 집안 얘기지만."

혜관은 시큰둥한 얼굴이다.

"팔은 안으로 굽더라 안 하든가요? 스님."

"?"

"용운이 말씀이오."

"그래서요."

"우리 동학에서 본달 것 같으면 좀 괘씸한 사람이지요. 동학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이 머릴 깎았으니까요. 허허헛... 그러나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이 앞장서서 일하느니보다 용운이 편히 낫질 않겠소? 하긴 이 시국에 천도다 불도다 할 시기도 아니고 스님하고 우리가 함께 일하는데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윤도집의 언중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배려가 있는 것 같다.

"뭐 동학이다 불교다 그런 것보담,"

윤도집은 혜관의 말을 가로막는다.

"용운이 그 사람을 말하잘 것 같으면 학식이 도저하고 문장은 능히 종장의 영역이요. 젊음과 패기 또한 늠름하지 않소이까?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그의 부친이나 형을 보더라도 뼈대 있는 집안,"

이번에는 혜관이 윤도집의 말을 가로막는다.

"허나 그 사람한테 약간의 흠이 있지요. 젊은에는 항용 따르기 쉬운 경망과 자만은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때가 때니만큼 시빗거리는 안고 있소."

"혜관께서 무엇을 두고 말씀하시는지 대강 짐작은 가오. 허나 지난해 왜중들과 회동하기 위해 맺은 조약,"

"왜중과 회동이라구요?"

별안간 혜관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얼굴이 벌개진다. 그들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석이 깜짝 놀란다. 윤도집도 다소 머쓱해진 얼굴이다.

"왜중과 회동이라니 거짓말도 유분수지.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치가 떨리는 일이거늘, 실상은 그것도 아니었다 하오! 소승 듣자니까 왜중 족에서 내건 거는 동등한 제휴가 아닌, 조선의 불교 종단을 제놈들한테 예속시키자는 것이었소. 그걸 쓸개빠진, 어이구우! 그 생각만 하면 소승 가슴에 불이 나서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찮을 그놈들을 그만, 똥창까지 썩은 중놈들! 어떡허면 속이 풀리겠소? 그놈! 회광이 그놈을 찢어죽이고 싶소. 동학의 매국노 이용구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이더니,"

혜관의 분노가 너무 격렬하여 윤도집은 열이 식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잠시 동안 말을 끊은 혜관은 고개를 떨구고 있더니

"경전에는 까막눈이나 진배없는 금어, 이 혜관이 화필을 놓은 지 수삼 년 비록 유리걸식하는 땡땡이중이긴 하오만,"

한숨을 푹 내쉰다.

"생각하면 중놈들을 다 때려잡고 싶은 심정이고 쑥밭을 만들고 싶은 심정이오. 아무리 이조 오백 년 배불을 일삼아서 중들이 천민으로 떨어졌기로, 또 도성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끔 천대를 받았기로서니, 어찌하여 조선 중의 서울 입성 금지를 두고 왜중이 와서 조정에다 청원을 했으며 또 그것이 해금됐다 하여 이 땅 중놈들이 왜중한테 감지덕지 상전 보듯 해야 하느냐! 그까짓 도성출입 아니 하면 어떻단 말씀이오? 부처님이 서울에 좌정해 계시단 말씀이오? 이 땅에서 서자 처우도 처러운데 그래, 왜중들 의붓자식 노릇까지 해가며 구구하게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게이요? 조정이 썩고 임금이 불출인 것을 말해봐야 하품인 것을, 소승은 중놈이 더나쁘다는 게요."

혜관의 얼굴은 다시 싯벌개졌다. 굵다란 주먹을 휘두르고 하마 방바닥이라도 내리칠 기세다.

"일체 중생이 불자일진데, 왜국에 내 나라를 들어먹은 도적이라 하여 위정자 아닌 그 나라 선한 백성까지 미워할 까닭이 없겠지요. 연이나 그자들 법의 속에 숨겨 들어오는 게 경전이란 말씀이오? 아니외다. 침략의 칼이요, 약탈의 창이다 그 말씀이오. 그러하거늘 어째 이 나라 중놈들은, 방백 수령 행차시에 술시중 들고 기생년까지 사찰에다 대령시켜야 하는 삼보도 아니겠고 내로라하는 늙다리 중들까지 백주에 춤을 춘다 말씀이오. 그 추태를 무엇으로 형용하리까? 회광이 그 찢어죽일 놈이 매국노 이용구에게 빌붙어서 일본까지 건너가더니 허허어, 나라 망하는 거는 강건너 불구경이요, 조동종의 관장인가 하는 왜중놈들 만나서 손을 잡고 일하잔다고? 그것만으로도 해괴망측한 일이거니와 그나마 완곡한 거절을 당하고 예속이라면 들어주겠다? 무지막지한 섬놈들에게 불법을 전하여주고 제반 불사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군데 말씀이오? 천인공노 종천지통할 수모를 당하고도 그놈 회광의 낯짝은 쇠가죽이든가 칠조약인가를 들고 돌아왔는데, 하아 용궁에서 가져온 여의주로 알았든가. 똥 보고 모여든 파리떼 같은 중들의 그 거동을 보시지 아니 하였소?"

"보았지요."

윤도집이 싱그레 웃는다. 비로소 혜관은 냉정을 찾은 듯 그러나 무안수세하는 아이처럼 입술을 비죽거린다.

"하기야 동학도 마찬가지지만요. 산야에는 동학도를 비롯하여 백성들의 그 숱한 피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거늘 왜적의 일등공신이 된 이용구 놈은 말할 것도 없겠고 명색이 교주로 인을 받은 손병희조차 노일전쟁 때는 왜군한테 군자금을 헌금한 그 따위 너절한 과오를 범했으니,"

혜관은 말해놓고 윤도집을 힐끗 쳐다본다.

"그거야 뭐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킨 격이고 왜국에 대한 항쟁은 시작도 동학군이요 아직 의병의 총본산은 동학이니까, 허허허..."

"임진왜란 때는 중들도 잠자코 있진 않았소이다."

"그때야 어디 동학이 있었던가요? 허허허... 아무튼 혜관스님 말씀 많이 느시었소. 다음 회합 때는 선동 좀 해주시야겠소."

"중이 사바세계를 누비다보니 세치 혓바닥이 절로 놀게 되더구먼요. 느는 거는 주둥이뿐이외다. 하기는 저 구석지에 새끼 의병놈 한 마리 있으니,"

혜관은 너부죽한 입술을 벌리고 웃으며 석일 바란본다. 석이 씩 웃는다. 여간하여 웃지 않는 석이가.

"거 말귀는 밝은 편이구먼. 이놈아."

"."

"앞으로도 내 말이나 여기 이 어른 말씀을 공부라 생각허고 귀담아서 잘 들어두어야 한다. 바쁜 세상에 언제 책자 펴놓고 널 가르치겠느냐."

"."

"스님께서도 아까 말씀이 있었지만,"

객담을 거두고 이야기를 꺼내는 윤도집의 표정에 순간 칼날 같은 것이 지나간다. 살기하고는 다르다. 날카로운 판단이라 할까 결단이라 할까. 민들레 꽃씨같이 뽀뽓한 선비풍과 딴판으로 위압적이며 교활하기조차 하다. 다혈질인 혜관의 험구도 어쩐지 퇴조할 느낌이다.

"오늘날 불교계는 내가 보기에도 인재가 부족한 듯하오. 해서 말씀인데, 좀 길게 앞을 내다보자는 게 내 의견이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일은 교세를 확장하자는 게 아니라 왜놈들과 싸울 수 있는 길을 트자는 게 목적인만큼 그것을 위해선 쓸 수 있는 연자이라면 모조리 모아 갈고 닦고 대비해가면서,"

"왜 소승이 그걸 모르겠소. 그걸 알기 때문에 아까 용운이에 대한 험 운운한 게요. 험이 있다는 것은 다름아니오. 용운의 행적이 나쁘고 좋고 간에 그것이 소승 취향 안의 일이라면야 염려될 게 뭐 있겠소. 다만 두드러져서 일을 하는 데 있어 오해를 살 만한 이유와 원인을 용운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것이오. 몇 해 전 일본으로 건너갔었던 용운이 무슨 심산으로 왜중의 가취법을 들고 나왔느냐, 가취법을 취하느냐 물리치느냐 그것은 모두 어디까지나 중들간에 논의될 문제겠고 연후에 조치될 문제겠는데 지금 소승으로선 그것을 공박할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할 겨를도 없소이다. 허나 조선 불교계와 제휴할 것을 절실히 바라는 친일 중놈들게요. 파계승조차도, 불교도 시류를 쫓아 개화를 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철없는 젊은 중들 역시 그것을 옳다 할 용기는 못가졌을 게요. 그렇게 본다면은 용운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소. 하나 그것은 앞뒤를 살피어 나갈 길을 강구하지 않은 저돌적인 만용이오. 그러니 일단은 교계에 크나큰 반대 세력을 만들었다는 허점을 생각하셔야, 친일 중이든 반일 중이든 교계 자체 일로서 말씀이오. 그리고 또 교계 자체의 일이라고는 하나, 친일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왜중의 대처풍을 받아들이자는 것은 교계 밖에서도 결코 유쾌한 일은 못 될 거 아니겠소? 다음 용운의 명분이야 조선 불교를 유신하자는 것이겠는데 나라가 망하고 머리 푼 것 같은 이런 시국에 비록 탈속하였으나 그도 이 나라 백성임에 틀림이 없는 만큼 중이 장가가고 아니 가는 일이 대수요? 숨 끊어진 아비 시체 앞에서 장가 안 보내준다고 투정하는 패륜아하고 뭐가 다르겠소? 그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경망한 짓이었소. 중들은 고사하고 세인들한테 빈축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지요. 그리고 다음, 승려 가취의 건백서를 낸 일이오. 이완용 송병준과 한통속이요 왜놈들이 뒷배를 보아주며 총애해 마지않는 김윤식 중추원 의장인가 하는 그자에게 하필이면 건백서란 말씀이오? 그야 친일분자니까 왜풍 따르겠다는 건백서에는 관심을 가질지 모를 일이오만 용운이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소. 그러나 그보다 딱하게 된 일은 두 번째 건백서가 어디로 갔느나, 윤도집도 아시다시피 통감 사내한테 가지 않았소? 합방조약이 체결되는 와중에도 말입니다. 왜적이 이 나라를 약탈하여 통치하는 것을 합법으로 인정한 행위였다고 말한다면 용운은 뭐라 대답하지요?"

"그도 그렇소. 그 두 번 낸 건백서는 건백서의 내용보다 그렇지요. 김윤식도 뭣한데 이 나라를 통치하러 온 통감 사내한테 냈다는 것은 입이 열 있어도 변명 못하게 생겼지요."

"소승이 앞서 오해 살 만한 요인이 있다 한 것은 바로 그 점이오. 오해가 오해로 그쳤더라면... 그게 그렇게는 되지 않거든. 용운이 연해주에 갔을 때만 해도 일제 밀정으로 몰려 그곳 조선 사람이 두만강 물속에다 처넣은 일하며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갔다가 역시나 밀정으로 몰려 학생들이 권총을 쏘아서 지금 저렇게 체머리를 흔들게 된 일하며 물론 용운이 밀정도 친일파도 아닌 걸 우린 알지마는,"

"그거야 어디 운용을 알아보고 그랬겠소? 중이니까 덮어놓고 그랬겠지요. 허허허... 중은 모두 친일분자로 본 거 아니겠소? 허허허..."

"허어 이거 야단났소이다. 소승 해동하면은 간도를 한번 다녀올 생각인데 용운 꼴을 당하면 어쩌지요?"

혜관의 노여움은 자신의 말대로 자기 취향 안의 것이요 용운에 대한 윤도집 의견을 반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일단 끝내고 윤도집 판단에 맡기는 눈치다.

"가사에다 명패를 달고 가십시오. 성 반 날 일 이길승 반일승 허허헛, 아니면 깎은 머리에 모자나 올려 쓰고 법의 대신 양복을 입으시든가."

"그러면은 또 왜헌병놈 총이 무섭구요. 양복보담은 중옷이 그놈들 눈 속여먹기가 쉬운데 말씀이오. 참아라 하는 명패면 어떻겠소오? 이거 전후좌우 총구가 있대서야 입망 화정 도화 보행 등 그 어느 것으로도 아직은 왕생할 자신이 없으니 소승 좀더 살아야 하는데 말씀이오."

"아암요. 좀더가 뭡니까? 오래 살아주셔야, 입적이야 앉아서 하든 서서 하든 물구나무로 하든 그것 다 공연한 호사구요. 스님이 여차하는 날이면 우리부텀 팔다리 짤리는 거요. 그는 그렇고 일단 용운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저에게 맡겨주시고 사실은 명분보다 실리니까. 큰 힘을 상대하자면 안팎 위아래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유효적절하게 얽어두어야 하니까요. 명분을 따지잘 것 같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뭐니뭐니해도 회광이 들고온 칠조약을 깨뜨린 것은 용운의 공로니 건백서 건은 상쇄되는 거요. 뭐 아직이야 우리하곤 줄도 닿지 않았고... 우리 일을 위한 포석의 하나인데 쓰이든 아니 쓰이든 혜관스님은 용운과 자주 접촉을 가지도록 하시오."

"소승도 그럴 생각은 하고 있소이다. 산중 깊이 들어박힌 중들이야 움직이려 하지도 않을 거구요."

"아무튼 여러 가지 불미한 일들도 배불정책에 억눌려온 울분의 소이, 성급했던 면도 있었을 게요. 늙은 호랑이가 잠든 사이 여우 토끼들이 까불었던 게요. 칠조약인가 그것을 깨고 회광의 종매를 매도한 지리산 중들의 패기도 높이 사야지요. 내용을 모르고 회광에게 부화뇌동했던 중들도 많이 깨우쳤을 테니까. 허허 참 이러고 보니 주객이 전도되었소. 중이 중의 욕을 하는데 동학인 내가 중을 감싸주니 말이오. 하하핫..."

"하여간에 천지만물에는 목숨이 있어서... 서학이니 동학이니 그게 다 젊은데 불교는 너무 늙었는가보우."

"그러니 혜관도 환속해서 우리 동학으로 오시오. 허허헛..."

"생각해봅시다. 어차피 땡땡이중 부처님도 달가워하시질 않을 테니... 실로 난감하오. 양새 낀 나무처럼 꿈자리마저 사납소이다. 천중들이 나타나서 이놈 혜관아! 중생들이 와글바글 이놈 혜관아! 우관스님 형제분도 번갈아서, 우관스님이 나타나서 이놈 혜관아! 김장수는 김장수대로 이놈 혜관아! 하하핫... 죽을 지경이오. 몸뚱이가 두 개나 있었으면 쓰겄소. 사바를 싸돌아 다니는 혜관하고 산중에 있는 혜관하고 말이요. 하하핫..."

"그러니 동학이 옳다는 게요. 산 중도 사바도 한 심중에 있으니 말씀이오. 허허헛..."

밤늦게까지 얘기를 하다가 윤도집은 안으로 들어가고 혜관과 석이 자리에 들었다. 혜관은 이내 코를 골았고 석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들의 얘기 하나하나를 되새겨보느라고. 이튿날 조반 먹기 전에 일찍 일어난 석이는 윤도집네 넓은 마당을 쓸어주고 물을 길어다주고 또 나무도 패주었다.

"딸이 있었으믄 사위감인디."

쌀쌀해 보이던 윤도집의 마누라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서 좋아라 한다.

"나는 아들만 삼형진디 총각 성씨는 머라 허는고?"

"성은 정가고 이름은 석입니더."

"석이... 우리집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댕기지마는 마당 쓸어 주고 물 질어주는 사람은 못 봤어야. 나무 될 것 같으면 덕잎 적부텀 안다 안 혀? 큰사람 될 것이여."

아들이 삼형제라 했으나 집안에는 유도집 마누라말고 사람의 그림자라곤 볼 수 없었다. 석이 차려온 조반상 앞에 앉았을 때 별안간 윤도집이 소릴 내어 웃는다.

"망둥산이구먼."

석이 밥그릇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마누라 본시부터 손이 작은데 너를 썩 잘 본 모양이라, 허헛..."

혜관도 석이 밥그릇을 복 크게 웃어젖힌다. 윤도집 마누라가 인색하기로 소문나 있는 눈치다. 그것을 짐작하면서도 석이는 수치감을 느낀다. 조반이 끝나고 한나절이 훨씬 지난 뒤

"석아."

혜관이 점‰게 부른다.

"."

"나하고 나가자."

석이는 혜관을 따라 구례 장터로 나섰다. 어제는 텅텅 비어 있던 장터가 오늘은 와글대고 있다. 장날인 것이다. 법의를 펄러덕거리며 이 전 저 전을 기웃기웃 기웃거리는 혜관의 모습은 갈데없는 파락호, 파계승이 분명타. 엄지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지르는 꼴하며 계집 꽁무니를 바라보는 눈빛하며. 중하고 갓전하고 무슨 상관인가. 양태갓을 들여다보고 있던 혜관이 묻는다.

"석이 너 손재주는 있는 편이냐?"

"없십니더."

"으음... 장사는?"

"그것도 모르겄십니다. 해보지 않았으니께요."

"그도 그렇겠군."

갓전 앞에서 물러난 혜관은 아까처럼 기웃거리기를 그만두고 성큼성큼 장터를 빠져나간다. 석이도 빠른 편이지만 뛰다시피 혜관의 뒤를 쫓는다. 장터에서도 한참을 지나서 혜관은 대장간 앞으로 간다.

"박서방 계신가?"

", 스님"

"."

대장간 안으로 들어간다.

"추운 날엔 일할 만하겠군."

풀무질하던 소년이 석이를 힐끗 쳐다본다.

"그 대신 흥정이 뜸한께요."

대장간 임자 박서방도 불간 속에 쇠붙이를 넣으며 석이를 힐끗 쳐다본다.

"박서방."

"."

"이 아이 쓸 만한가?"

혜관은 석이를 가리켜 보인다.

"실팍하게 뵈는디요."

"석아."

"."

"힘이 좋은가?"

", 심은 있습니더."

"너 이곳에서 일 좀 배워볼 생각 없나?"

"?"

"물지게 지는 것보담은 나를 게야, 나중에 형편따라 안 써먹는 일이 있더러도. 사람이란, 더욱이 상놈이란 재주 한 가지씩은 익혀놔야 돼. 이곳에선 널 부려먹는 게 아니라 가르쳐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하겄십니더."

"오냐. 잘 생각했다. 말도 없는 놈이 생각 하나는 빠르구먼. 하하핫..."

박서방은 혜관 말에 대해선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이놈아 한눈 팔들 말고 풀무질이나 심들기 혀."

소년을 나무랐을 뿐이다. 대장장이지만 우락부락한 구석 없이 차분하고 덤덤해 보이는 박서방이다. 혜관도 박서방의 의향 따위는 물어볼 생각을 않는다.

"가자."

석이를 데리고 대장간을 훌쩍 나와버린다. 뛰다시피 혜관 뒤를 쫓아가며 석이 부른다.

"시님!"

"인저 입 열었군."

"저어 말심 하나 묻겄심더."

"물어봐라."

"시님은 쌍계사에 기š?한께 저이 아부지를 아시겄다 짐작이 갑니다마는 윤도집... 그 어른께서는 아부지를 우찌 아시는지 말심 좀 해주시이소."

"내가 얘기를 했지."

"..."

잔뜩 별러 물어본 말이어서 힘이 쓱 빠져 버린다. 장터에서 돌아온 혜관은 서둘러 채비를 차리고 떠났다. 윤도집도 사랑을 비운 채 출타 중이었고 집안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석이는 낡은 갓이 걸려 있는 벽을 쳐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시키는 대로 하겄다 했으니 해야겄지마는 어매는 아아들 데리고 우찌 살 긴고... 내가 나와부리믄 어매는 품을 더 들어야 할 긴데.'

속이 쓰라리다. 그러나 혜관과 윤도집이 자기를 인정해주었다는 느낌은 상당히 강렬한 것이었다. 어젯저녁 상면을 했을 때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 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위해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하는 것임을, 석이는 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를 누르는 것 같은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 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손등에 피딱지가 앉았던 누이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관수는 약속한 대로 돌아왔다.

"낯이 설어서 대기 거북했제?"

관수는 늙은이처럼 지쳐 있었다.

"아니오."

". 아무튼 나 잠부텀 한심 자야겄다."

방바닥에 나자빠진 관수는 늪에 빠져 들어가듯 잠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얼마 후 관수는 이를 갈기 시작했다. 가위눌린 듯 헛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석이는 문종이를 뚫고 들어오던 햇빛이 차츰 문살 위쪽으로 쫓겨 올라가는 것을 쳐다보고 앉아 있다. 일종의 형용할 수 없는 허탈이 온다. 산봉우리 위에 올라선 것처럼 석이의 결단은 어려웠던 것이다. 석이는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지게를 지고 진주 성내를 돌아다니던 모습도 자기 아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할 자기 모습도 생판 딴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신발을 벗어들고 아부지! 아부지이! 외치던 그 악몽, 총검이 바로 코앞에서 번득이고 하늘이 샛노랗던 악몽, 그 악몽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서 핏줄이 꿈틀거리는 것을 석이는 절감한다.

'왜놈을 치자! 왜놈을 직이자! 우리의 원수 왜놈을 몰아내자! 혜관스님하고 윤도집 어른을 받들자! 내 뼈가 부서지고 피가 마르고 할 때꺼지.'

"어이구 많이 잤다."

하늘이 온통 싯뻘겋게 타들어가는데 갈가마귀떼가 울면서 날아가는데 관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하고 나서 석이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 눈에 생기가 영롱하다. 가위눌린 것처럼 헛소리를 지르고 늙은이처럼 지쳐 보이던 얼굴은 비 맞은 푸성귀처럼 풋풋해졌다.

"시님은 떠났일 기고 도집어른은 아즉 안 오셨는가배."

"안 오셨는갑십니다."

"그러믄은 오늘 밤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하동으로 해서 진주로 가자."

"."

"석아."

"?"

"우떻더노? 밤숭이 겉은 시님하고 대쪽같은 도집어른은?"

"시님은 막 성을 내시는데 인정이 많은 것 같고 도집어른은 유하게 하시는데 무섭십디다."

"?"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첫눈에 그만큼 볼 줄 알믄... 제법이다."

싱긋이 웃는다.

"형님이 밤숭이니 대쪽이니 해놓고서."

"요것봐라? 니도 사람 놀릴 줄 아나? 하하핫...하하핫..."

관수는 뱃속에 갇힌 찌꺼기를 모조리 토해내듯 기분 좋게 웃어젖힌다. 윤도집은 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삼형제나 된다는 아들들, 며느리도 있을 법한데 여전히 딴 사람 기척은 없고 안에서는 신병이 잦은 듯안 윤도집의 마누라 혼자 꼼지락거리고 있는 눈치였다. 주인도 없이 나그네끼리 편하게 잠을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 윤도집 마누라의 딸이 있으면 사위 삼고 싶다는 치사를 들으며 이들은 길을 떠났다.

"석이, 니 말도 없이믄서 실없이 인덕이 있구나."

석이 이모저모를 새삼스럽게 관수는 살펴본다. 잘생긴 얼굴도 못생긴 얼굴도 아니다. 다만 어글어글한 눈은 결코 그를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위엄을 나타내는 것 같고 또 한편 그의 눈은 변화무쌍한 심중을 말 대신 상대편에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이눔아아가 물건이 되기는 되겄다. 도집어른 하신 말심도 그렇고 그 어른이 여간해서 그렇기는 함부로 말심을 안 하시는데, 선을 뵈러 온 기이 아니고 선을 보러 왔다 안 하시던가배?'

두 사람은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썰물 때라 하류로 향해 내려가는 뱃발이 빠르다. 상처의 자리, 아비 이장 때는 하동읍에 들렀을 뿐 그 엄청난 환난을 겪은 평사리를 떠난 뒤 뱃전에서나마 바라보기는 처음이다. 관수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으나, 석이는 나룻배가 평사리 나루터에 닿았을 때 그 마을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어금니를 깨물고 돌아서서 강물을 내려다본다. 평사리에서는 초로의 아낙 한 사람과 여남은 살 먹은 머슴아이 두 명이 배에 올랐다. 아낙은 크다만 보통이를 안고 있었다. 배가 다시 하류를 향해 내려가는데 팔짱을 끼고 보퉁이 옆에 오소소 떨며 앉아 있던 아낙이 별안간 한 팔을 뻗치며

"저기, 저어 우, 웃동네."

하다 말고 무엇에 놀랐는지 다음 말을 꿀컥 삼켜버린다. 배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보퉁이 옆에서 일어선 아낙은 비틀거리며 관수 옆에까지 다가간다. 살며시 옷자락을 당기면서

"저기, 저어 관수, 니가 관수제?"

속삭인다. 야무네다.

". 아지매 오래간만임다."

뜻밖에 활달한 관수 태도에 야무네 편이 오히려 안절부절이다.

"석아."

"."

완강히 강물만 내려다보며 돌아서질 않는다.

"석아. 야무어무니다."

"아니 석이라 카믄."

석이 돌아섰고 야무네는 석이를 보는데 미처 뭐라 해야 할지 말을 잊은 듯 두 눈이 싯뻘개지면서 눈물이 글썽글썽 돈다. 석이 눈도 벌개진다.

"니가, 니가 우찌,"

치마꼬리를 걷어 눈물을 찍어낸다.

"아지매는 어디 갑니까?"

관수는 여전히 태연하게 묻는다.

"작은아이가 읍내서 나, 남우집살이를 하는?, , 거기 옷 갖다 주로 간다."

"살기가 우떻깁니까."

"우떻다 할 수도 없고 야무가 농살 지으니께 입에 풀칠은 하지마는... 그래 석이 너거 어매는 잘 있나?"

"고생이지요 머."

"하기사... 이자는 니도 다 컸고나. 관수가 안 그랬이믄 몰라볼 뿐 안 했나."

아슴푸게한 기억이지만 오줌을 쌌다 하여, 키를 쓰고 소금 얻으러 간 아이에게 웬 소금 주었느니 하면서 주걱으로 뺨을 때리던 야무어매 모습이 석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어디 갔다 오는 길고."

"갔다 오는 길이 아니라요 지금 하동 가는 길입니다. 야아가 설에 바빠서 아배 산소에 못 가봤다 캄시로,"

관수가 대신 대꾸한다.

"그러게, 석이아배 산소가 읍내에 있지. 바람결에 들으니께 이장해 갔다 카든가?"

"이장은 했지마는 본시 있던 자리 근처로 옮겼으니께요."

"그래 잘했다. 자석이 있으니께, 글믄 관수 니는 석이 식구랑 함께 있다 그말가?"

"앙입니다. 지가 무신 정한 거치가 있겄십니까. 지나가는 길에 들맀십니다."

"장개는 갔나?"

"거치도 없는 놈이 무신,"

"어짓밤에 태인서 온 도부꾼이 있었제라우. 경찰서라 허든가 주재소라 허든가? 쑥밭이 됐다는 이약을 허잖겄어?"

화개서 오는 장사꾼풍의 사내가 동행인 긋한 사내에게 소근거리는 말이다.

"무신 말이여라? 쑥밭이 됐이야?"

"불을 질럿 옴싹 태워부맀는디, 순사놈들은 산으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직있다잖여?"

관수 입가에 경련 비슷한 미미한 웃음이 번진다.

"우짜든지 아금바리 해가지고 옛말 하고 살아라."

야무네가 석이보고 이르는 말.

"헌디 그 사람들 순사옷을 입고 있었다니 요상한 일 아녀? 그게 참말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나,"

"참말일 것 겉으면 뻔혀. 그런 일이야 의병 아니고 뉘가 할 것이여?"

"동학이 그랬다는 소문도 있는디, 본시부텀 태인 그쪽 곳에는 동학이 기승했으니께."

"보시이소."

관수는 슬며시 밀고들어가는 투로 말을 건다.

"왜 그러지라?"

사내는 경계심을 나다내며 방정스럽게 어미를 오그려붙인다.

"지금 하는 말심을 듣자니께 태인서 무신 일이 일어났다 캤는데 그기이 정말이오?"

"글씨, 이 눈으로 똑똑히 못 봤인께로 장담은 못할 것이오."

꽁무니를 빼는 어투다.

"... 그거는 그렇겄소만 동학당이 했다는 그런 소문도 있더라는 그 말심이오?"

관수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글씨, , 그런 모앵인디, 아니 나도 들은 이야긴께요... 세상엔 헛소문도 혀다하지 않는개비여?"

","

"글씨 태인이 본시 그런 곳이니께로 그런 이약도 나올 법하지라우. 우리네야 머 도통 드런 물정은 모르는디,"

"별의별 놈의 개떡 겉은 말이 다 나도는구마. 동학당 그 직일 놈들이 왜놈하고 붙어 묵은 지가 언제 일이라고? 동학놈들이 정말 그런 일을 했다믄 내손가락에 장을 지지겄소."

관수는 퉤!하고 강물에 침을 뱉는다.

"하기는 동학당이 왜놈한테 넘어갔다는 소릴 듣기는 들었는디..."

상대편의 험한 얼굴도 그렇고 하여 사내는 여전히 꽁무니를 빼려 든다.

"어째 좀 수상쿠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내는 펄쩍 뛴다.

"수상타니 무신 말심이여라우?"

관수는 껄껄 소리 내어 웃는다. 웃다가

"형씨, 안 그렇소? 생각해보시오. 태인서 머 그렇고 그런 일을 동학당이 정히 했다 할 것 겉으믄 일본 쪽에서는 폭도요 역적이니 잡아다가 모가지를 댕강 짜를 일이나, 허 참, 그렇지 않느냐 그 말이오. 조선국에서 볼 것 같으믄,"

사내 눈이 뱅글뱅글 돈다. 약삭빠르기로는 그쪽인들 못할까?

"말하자면 내 나라 내 땅에서 남의 나라 남의 사람 눈칫밥을 먹게 된 백성이고 보면, 자아 그렇다면 이 친구는 어느편 사람이다냐?"

"생각해보시오 형씨, 일본의 대역죄인은 이 조선나라 충신이다! 이치가 안 그렇소?"

"글씨 그러니께로 그기이 우떻다는 말심이랑가?"

"그러니께 왜놈 종이 된 지가 오래인 동학당놈들이 치키세워주는 소문이다 그거 아니오? 내가 수상타 한 것은 동학을 와 치키올리주는가, 형씨가 말심이오?"

"아 아니 이 무신,"

"형씨는 혹 동학당이라는 것하고 한통속이 아니오? 하하핫... 우리한테 듣기 좋은 얘기는 왜놈들한테 있어서 과히 그렇지도 않을 기고 모가지가 댕강 날아갈, 하하핫..."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꼬아도 한두 번이 아닌 관수 말에 사내는 휘휘 말려든다. 혼돈에 빠진다. 갈피를 잡을 수 없으면서 겁이 난다.

", 가당치도 않은 이약, , 누굴 잡으려고, 동학하고 한통속이긴 커녕 서학도 모리고 아아 서학이긴커녕 남학 북학도 모른당께!"

팔을 휘젓는다.

"하하핫! 으하하하핫! 남학과 북학이라? 에이 여보쇼. 그런 기이 세상에 어디 있다 말이오. 내 하도 형씨께서 겁을 먹고 버얼버얼 떨기에 객담 좀 했수다. 하하하핫..."

석이는 잠자코 관수 웃음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야무네는 불안해 하는 눈빛으로 관수를 숨어본다.

"시답지 않은 소문 몇 마디 말했다가 이런 봉변이 어디 있당가? 간밤에 꿈자리도 안 나빴는디,"

투덜투덜했으나 사내는 관수를 두려워하여 힐끔힐끔 숨어본다.

"뭐 심심은데 옷깃만 스치도 전생의 연분이란 말 못 들었소? 한 배 타고 감시러 코빼기만 치다보고 가는 것보담이사 낫지 멀 그러요."

읍내 나루터에서 내린 선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지매 그라믄 잘 가소."

석이 관수가 인사를 하자 야무네

", 그래 이렇기 만내가지고 언지 또 보겄노?"

코맹녕이 소리다.

"머 안 죽고 살믄 다시 만낼 날 안 있겄소."

갈 길이 바쁜 두 사람은 급히 발을 떼놓는다. 한참을 가는데,

"석아! 석아이--"

야무네 외치는 소리가 빈 거리, 이른 아침 거리에 메아리쳐 들려온다. 돌아본다. 야무네가 보퉁이를 들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허둥지둥 뛰어온다.

"아이고 숨 차라. 아이고,"

야무네는 숨을 할딱이며, 조그마한 것을 석이 손에 쥐여준다.

"아무래도 그냥 가기가 서분해서, 마침 떡장사가 있길래 샀다. 가믄서 입가심이나 해라."

"아지매도 참,"

"이냥, ... 서분해서... 부디 아금바리 해서 옛말 하고 살아라이? 우리사 머 지는 해니께..."

야무네는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 간다. 우두커니 손에 쥐여준 떡을 보다가 야무네 뒷모습을 보곤 하는 석이 어깨를 툭 친 관수

"어 가자. 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 산 보듯 강 보듯, 가자!“

 

 

9. 정염

마을 숲속에서 뻐꾸기가 운다. 바람결 따라 멀리서 들려오는가 하면 가까이, 무척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멎었다가는 또 운다. 차라리 저놈의 새 울지나 말았으면 이 밤이 이리 적막하고 길지는 않았을 것을, 봄이 온 것도 아니 생각했을 것을 - 소복단장한 여인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등잔불을 바라본다. 밤길을 오는 죽은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이년아! 내 죽은 지 몇 달이 되었다고 사내 맞일 생각을 하노! 무덤 위 띠잔지에 부채질하는 년보다 한술을 더 뜨는고나. 몹쓸 계집!'

'야아. 맞소. 나는 몹쓸 계집이오. 이녁 생시 적부터 몹쓸 계집이었소. 길손이 오는 언덕길만 치다보믄서 살았이니께요. 밤마다 이녁 심소리를 들으면서 외간남자 생각만 했이니께요. 죽어서 이내 몸이 천 조각 만 조각이 난다 해도 잊을 수가 없었소. 내 육신이 썩고 넋이 허공에 뜬다믄 모를까 잊을 수 없었소.'

'헛허어. 기차게 총기 좋은 조물주로군. 한 해 봄쯤 잊을 법도 한데...'

환이는 술잔을 기울인다.

'산에는 진달래가 팔 텐데 말예요.'

'...'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싶어요. 싶어...'

여자의 목소리다. 별당아씨의 음성이다. 진달래꽃 이파리다. 꽃송이다. 목소리는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가 된다. 붉은 눈송이가 된다. 핏빛 빗줄기가 내린다. 핏빛 눈물이 내린다. 환이는 술잔을 기울인다.

'새야. 봄밤에 우는 새야. 운다. 울어? 헛허어 어머님, 아니 최참판댁 마님, 당신이 세상을 하직한 지도 어느덧 십 년, 십 년 세월이 지났소이다. 속으로만 우시다가 세상을 떠난 당신이나 꿈속에서만 울며 사는 이놈의 신세나 생각해보면 우리, 모자이면서 모자가 아니었던 우리, 그 기구했던 인연과 핏줄을 이제는 잊을 만도 한데 말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니 최참판댁 마님께서는 그래 저승서 며느님 아드님을 만나셨겠습니다. 흐흐흐...'

"하하핫, 하하하핫. 하하핫..."

별안간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아니 성님 와 이러시오?"

강쇠가 놀라며 쳐다본다. 환이는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등잔불이 깜박거리는 방안에서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종내 환이는 말이 없다. 시각을 재듯 천천히 술잔에 술을 붓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리고 결코 말을 하지 않는 환이의 평소 술버릇에 익숙해져 있는 강쇠이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웃어젖히는 그 웃음 소리엔 번번이 놀라곤 한다.

'성님 오늘 밤에는 말 좀 허소. 무슨 심산으로 죽은 인이 집에 와서 묵고 갈라 캤는지. 이놈아 너를 장가 보내기도 심이 드는고나, 그렇기 객쩍은 말심이라고 한분 해보는 기이 좋겄구마는, 그라믄 나는 또 성님 아무리 그렇지마는 친구 마누라를 그럴 수 있겄십니까? 할 기고요. 흥 생각은 꿀떡 겉으믄서 아닌체, 네놈 낯짝을 보면 다아 안다, 생각이야 꿀떡 겉지마는 꿈속에라도 인이를 만내믄은 우찌 낯을 치키들 것입니까, 이놈아 입술에 붙은 밥풀 같은 소리 마라. 산 놈의 계집도 뺏는 놈이 있는데 죽은 놈 계집쯤 그거는 적선을 하는 거다 적선. 글씨요, 그거사 그렇겄소마는 아무리 과부라 캐도 이 사팔떼기 강쇠놈한테 비하믄은 천양지간인데 일이 수울하겄십니까? 병신 같은 놈, 범의 장달이 겉은 놈이 낯짝 반반한게 무섭냐? 그럴 양이면 그놈의 연장 싹둑 잘라서 섬진강에다 내버려. 아이구 성님도 고자가 되는 곰보, 곱새등이 계집도 날 마다할긴데 그 일은 우짜고요?'

넉살좋게, 밀밭 옆에도 못 가는 강쇠는 술이라도 잔뜩 취한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말 없는 환이의 말까지 자신이 지껄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츰 답답해진다. 커다란 덩치가 주체스러워진다. 제에기, 오가는 말이라도 있어야 안주 한 점이라도 집어묵지, 술 좀 마셔보라는 허튼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싶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오늘 밤과 같이 환이는 술을 마시고 강쇠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는데 강쇠가 화가 났다. 덥석 덤벼들 듯 술사발을 빼앗은 일이 있다. 씩씩거리며

"내라고 술 못하라는 법 없지."

연거푸 세 사발의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숨이 막히고 눈앞이 노오래지고 사람의 얼굴이 두 개 세 개로 보이고 천장은 올라갔다 내려왔다 종내는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후 강쇠는 누가 뭐래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제에기, 이렇기 마주보고 앉아서 도를 닦는 것도 아니겄고,'

그러나 눈을 내리깔고 시간을 재듯 술잔에 술을 붓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환이의 변함없는 동작에는, 매번 느껴온 터이지만 강쇠는 놀라움과 숭배감을 금할 수가 없다.

'장사다 장사라. 저런 것이 참말로 장산 기라. 사램이 우짜믄 저렇기, 심줄 하나하나가 강철로 된 거맨치로 천하장사하고 잠 안 자기 내길 한달 것 같으믄 성님이 이길 기구마. 잠은 알 잘수록 눈은 초롱초롱해지고 술은 들어가면 갈수록 정신이 마알개가지고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래기도 까딱 안 한께로, 바윗덩이가 저렇겄지. 심으로 말할 것 같으믄 나도 넘한테 뒤지지는 않을 기다마는 저런 거는 심도 아닌 기고 깡다구도 아닌 기고, 마 신이라도 들린 사람이라카는 기 옳을 성싶으구마는.'

속으로 중얼중얼하던 강쇠는

"하기야 술 마시는 사람하고 가만히 앉아서 치다만 보는 사람하고 못 견디는 편은 어느 쪽인가 뻔하제."

혼잣말인데 그러나 큰소리로 말하고 나서

"성님 나 먼지 자겄소."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 술을 마시는 심사는 아마도 니 죽고 나 죽자는 그런 거는 아닌지 모르겄소?"

"..."

"술이 아니라 이놈의 내 원수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하믄서 마시오?"

"..."

"내 술꾼하테 들은께로 술이란 떠들고 씨부리고 해감서 마시야 해독이 된다 카더마는,"

"..."

"제에기, 참말이지 내겉이 미련한 놈 아니믄 제에기랄! 벌써 달아났일 기구마는,"

투덜거리다가 강쇠는 옆방에 앉아 있을 젊은 과부도 단념을 하고 벽을 향해 눕는다. 뭉긋이 겨를 태운 온돌방은 썩 기분이 좋다. 밤이슬에 젖은 옷도 어느새 말라 가슬가슬하다. 여자 생각보다 잠이 먼저 온다. 강쇠는 드러눕자마자 이내 입술을 불면서 잠이 들었다.

'발 닿는 대로 길을 떠나버릴까.'

낮에 산마루를 돌아올 때 이불 봇짐을 등에 지고 상투는 헝클어진 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가던 사내 생각이 난다. 사내 뒤를 촉새같이 생긴 아이 업은 아낙이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년아! 장석걸음을 걸을 기가! 내 돋으믄 내비리고 갈 긴께 알아 하라고 ."

사내는 아낙에게 욕설을 하다가 다시 환장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면 마루터를 돌아갔다. 과부는 환이 뒷간에 간 뒤 술병에 새 술을 채워놓았다. 잠이 같이 든 강쇠는 여자가 들어온 것도 나간 것도 알지 못하고 꿈속에서 달아나는 여자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여자는 산을 기어오르고 가까이 다가가면은 돌아서서 돌을 굴렸다.

'보소 아지마씨, 내 말 좀 들어보소! 청춘이 구만리 겉은 팔자 안 고치고 우찌 살 깁니까? 보소! , 아지마씨요!'

여자는 또 산을 기어오른다. 절벽을 타고 오른다. 나무 위, 한 그루 소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뭇가지가 휘는데 용케 가지를 딛고 서서 여자는 웃는다.

"아이고! 그만 참, , 내 안 잡을 긴께 내, 내리오소오! 아지마씨요오 -"

술상을 가지러 온 것은 자정이 지나고도 훨씬 후 사경이 가까워졌을 무렵이다. 과부한테선 동백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허리를 구부리고 긴 두 팔이 술상 쪽으로 뻗치는 순간 여자의 눈은 환이 이마빼기에 와서 화살처럼 꽂혔다. 외면할 겨를도 없이 아래로 미끄러진 시선이 환이의 눈동자를 쏜다. 여자의 눈동자가 파들거린다. 필사적으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절망의 몸부림이다. 사내의 눈동자는 바위벽이었다. 잡지도 놓아주지도 않는다. 여자의 흰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쓸고 그리고 사라졌다. 강쇠의 입술에선 풀무질이 요란했다. 정좌한 채 환이는 깜박거리는 호롱불을 쳐다본다. 호롱불은 미친 듯, 춤을 추듯 관솔불로 둔갑한다. 아득한 그날의 관솔불로 둔갑한다. 잠든 것처럼 죽어서 누워 있던 여자, 관솔불은 춤을 추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여자는 죽어서 누워 있고 환이는 앉아 있는 것이다.

'여보?'

'...'

'저 산새 우는 소리 안 들리세요?'

'...'

'새들도 밤이 싫은 거예요. 아침이 좋아서, 햇빛이 환한 게 좋아서 저리 지저귀나봐요. 캄캄한 밤이 싫은 거예요. 나도 저 새들같이 한번 날아보았으면, 산속을 한번만 거닌어보았으면.'

북변의 끄트머리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골짜기의 밤, 환이는 완전히 그 밤 한가운데 정좌하고 있는 것이다.

'여보?'

'...'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그 꽃잎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음성은 진달래 꽃잎이 되고 꽃송이가 되고 -그 꽃잎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 밤길 가는 노새의 요령같이 멀어져간다.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바다, 핏빛 같은 붉은 비가 내린다. 칠흑 같은 검은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내린다. 오랫동안, 이년 가까이 소식 없었던 나그네가 찾아온 것이다. 북변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 얼음조각 같은 달은 검은 능선 위에 걸려 있는 밤으로부터, 입은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감싸 묻은 그 무덤으로부터 나그네가 찾아왔다. 등잔의 심지를 줄인다. 벽을 보고 돌아누웠던 강쇠가 어느덧 벽을 등지고 이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목침을 베고 팔짱을 끼고 모로 누운 모습은 거대하고 의젓하다. 그러면서도 오므렸다 폈다 하며 풀무질을 하는 입술 모습이 천진하다. 우두커니 강쇠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환이 방문을 밀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순간 안방의 불빛이 황망하게 꺼진다. 중천에 조각달이 댕그머니 떠 있었다. 밤바람이 부드럽다. 부드럽고 야정을 실은 바람은 멀리서 왔다가 이십 호 가량 옹달샘 같은 마을을 쓸고 숲 쪽으로 넘어간다. 사립문을 밀고 나와서 환이는 휘적휘적 마을길을 지나간다. 마을과 동떨어진 서편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언덕 중턱에 뿌리박은 한 그루의 소나무, 가지가 아래로 휘어져 내리덮인 그곳에 샘이 있다. 샘터까지 온 환이는 두 손을 모아 서너 번 물을 떠 마시고 얼굴을 씻는다. 소매 끝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지르고 가까이 있는 빨랫돌 위에 걸터앉는다. 물 긷는 이 없는 한밤중의 샘에선 철철 물이 넘쳐흐른다. 넘친 물은 작은 도랑을 따라 졸졸졸 소리 내며 흐른다. 물소리와 이따금 이는 바람소리, 뻐꾸기 울음. 환이는 곰방대에 담배를 재서 부싯돌로 불을 댕긴다. 손이 가느다랗게 떤다.

'어디로 그만 훌쩍 떠나버릴까?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혜관스님 대신 내가 간도로 갈까? 가면 못 돌아오겠지. 못 돌아올 게야. 못 돌아온들 어떠한가.'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저만큼 하얀 자락이 흔들리면서 이곳을 향해 오는 것이 보인다.

"...?"

급히 담배를 빨아 당긴다. 빨아 당기면서 응시한다. 하얀 자락은 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손님."

곰방대를 입술에서 뽑아 손에 쥐고 환이 일어선다. 과부, 죽은이의 아낙이다.

"손님 용서하시이소."

"..."

"아무래도 잠을 잘 수가 없었십니다. 내일이믄 손님은 떠나실 거 아닙니까?"

"그렇소."

퉁명스런 대답이다.

"그러믄 앞으로는 좀체로 못 보겄소."

"..."

"그렇기 생각을 한께... 말심이라도 해보고 저버서, 염치를 무릅쓰고 나왔십니다."

"할 말 있으면 해보시오."

"."

여자는 똘똘 말아붙이듯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땅 위에 쭈그리고 앉는다. 환이를 보는 것도 아니요 아니 보는 것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방향을 향해서. 담뱃재를 떨어버리고 천천히 곰방대를 옆구리에 찌른 환이는 빨랫돌 위에 도로 주질러앉는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왔십니다."

"..."

"부끄럼을,"

"부끄럼이나마나 말해보시오.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드리겠소."

", 아닙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수절하는 과부가 아닌 기생이다 생각하믄서 말입니다, 활달한 기생이다 생각하믄서. , 지는 애당초부터 기생이 됐어야 할 팔자를, 잘못 길을 들었십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믄은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겄소?"

여자의 음성은 차츰 가라앉았고 어둠 속에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지는 여기 오믄서 생각해보았십니다. 길 가다가 만나서 허물없이 신세 얘기를 하는 나그네끼리, 그렇기 생각한다믄 어려블 것도 없일 성싶었고 사램이란 한을 품고 죽는다믄... 풀 수 잇다믄 한을 풀어보자. , 그렇기 생각을 했십니다. 말이 여염집 아낙이지 풍류를 좀 알았다는 기이 벵이었던지 모르겄소."

환이는 구부정하게 등을 구부리고서 눈만 치켜뜨고 방금 여자가 걸어온 어둠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인이의 처 선산댁은 그 자신이 활달한 기생으로 자처하고 왔노라 했고 풍류를 좀 알았다는 게 병이었던지 모르겠다 했는데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풍류를 좀 아는 정도가 아니다. 여자는 한량과 기생들의 분위기를 가까이 느끼며 성장했다. 그에게는 두 언니가 있었다. 사십 초로에 동가식서가숙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큰 언니는 젊었던 한시절 한량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진 명기였다. 둘째언니는 가무나 용색이 언니만 못하여 소위 나무기생으로 그 존재가 미미하였으나 대신 언니 뒷시중을 들면서 알뜰하게 축재한 덕분에 지금도 진주 기방 사회에선 제법 콧김이 센 존재다. 기생 딸들 덕분에 호강을 하며 살던 선산댁 모친은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본시는 양반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농사꾼으로 탈락된 인이에게 집 한 칸까지 마련하여 막내딸을 시집보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숫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여느 아낙들과 선산댁은 다른 점이 많았었다.

"삼 년 전에 손님은 우리 집에 오시서 하룻밤을 지내고 가싰십니다. 그러니까 손님은 오늘로 네 분째 오신 것이오. 지는 삼 년 동안을 길목을 바라보믄서 살았십니다. 처음 손님을 한분 보고는, 그때부텀 꿈속에서만 살았던 것 겉소. 길목을 바라보는 일이라도 없었더라믄,"

음성이 확실해지고 대담해진다. 교태는 아니었다. 솔직했다. 고백같지도 않고 신상 얘기, 나그네끼리 허물없이 하는 말 같았다.

"처음에는 남편 보기가 무서벘십니다. 하늘이 무섭고 세상 사람들 눈도 무서벘십니다. 제삿날 멧상을 올릴 적에는 겨울에도 얼굴에서 땀이 떨어지더마요. 죄 많은 계집, 눈이 시퍼런 서방을 두고 외간남자 생각으로 밤을 지새는 몹쓸 계집, 그러나 사람이란 미욱하다 하까요? 몹쓸 년 하면서도 어느 듯 그런 생각에 익어부리고 괴롬이 없는 날이 차라리 이상터마요."

환이는 조롱하듯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숙이며 입술을 깨문다.

"하기는 손님 맘 대강은 짐작하였소. 뜻이 없는 것을 짐작하였소. 짐작하니께 똑똑히 알고 단념하리니 생각했을 겁니다. 계집이 꼬리를 치는데 바람기 아니게 대할 남정네가 있겄십니까? 추잡한 계집이라 생각해도 억울할 것 한푼 없소."

환이는 낮게 웃는다.

"나는 다만 댁에게 동정을 아니 했을 뿐이오. 형수를 덮치고 형수를 뺏아 달아났던 놈이 천하의 누굴 두고 추잡하다 하겠소. 그런 짓 한 놈이 남을 동정할 리 없지. 댁이 길목을 바라보면 나는 하늘을 치다보는 게요. 가시오."

"..."

"명 보존할 양이면 지금 방에서 코 골고 자는 사내 그쪽으로 팔잘 고치시오. 하룻밤 잠자리로 한이 풀릴 것 같으면 그건 어렵잖은 일이구. 하하핫핫..."

환이 미친 듯이 웃어젖힌다. 그러다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는 여자에게 덤벼든다. 꽉 껴안는다. 여자 얼굴을 뒤로 젖히며 목에 얼굴을 파묻는 환이

"자아, 어서 가요, 어서 가아. 풍류를 아는 게 병이라구? 흐흐흐... 내 말 잘 들어요. 살려거든, 살아남으려거든 사팔띠기한테 시집 가라구."

다시 낮은 소리로 속삭인다.

"사팔띠기한테 시집 가라구..."

다음 순간 환이는 여자를 떼 밀어젖힌다. 여자는 나자빠지면서 몸을 모로 눕힌다.

"싫은 계집이 달라붙으면 죽이고 싶더구먼. 왜놈의 배때기를 찌르듯이, 미칠 지경으로 밉더군."

뚜벅뚜벅 걸어간다. 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저 계집은 목을 매달겠지. 목을 매달 거야. 한 계집 살리려고 잡놈 될 생각은 한 푼 없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성님 어디 갔다오시오."

날이 선 강쇠의 음성이다.

"바람피우고 왔네."

"세상에 그런 법도 있소?"

"과부한테 적선해주고 왔는데 왜?"

사팔눈을 껌벅이며 강쇠는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 좋다 말았구마요."

쓸쓸한 얼굴이 되면서 강쇠는 외면을 한다.

"그나저나 떠나지."

"와요? 아침 해장국이 묵을 만할 긴데 첫새북 발등에 불 떨어졌소?"

환이는 짐을 챙겨서 일어선다. 강쇠는 입술을 닷 발이나 내밀고, 괘씸한 듯 환이를 흘겨보며 따라나서기는 한다. 마을로 빠져나오자

"무신 변덕인지 도모지 종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잔말 하는 게야. 잘못하면 원귀 따라온다."

"?"

"모르거던 관두고 발이나 부지런히 옮겨."

얼마나 걸었을까 부옇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강쇠야."

"와 그라요!"

"섭섭하냐?"

"뉘한테요!"

"계집을 놓쳐서,"

"내사 성님 행토가 분하요! 계집이야 어디 그 여자뿐이겠소?"

"그 계집 처리했으면 싶다."

"머라꼬요? 데리고 놀 때는 언제고, 뭣 주고 뺨맞는다 카더마는 죄 고만 지으소!"

강쇠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른다.

"계집이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그 말 못 들었나?"

"원한? 뭐가 우찌 됐다고?"

강쇠는 갸우뚱 머리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추고 히죽히죽 웃는 환이 얼굴을 살핀다.

", 그라믄,"

"조금은 대가리가 돌아가나?"

", 그라믄,"

"..."

", 하기야 계집치고 백이믄 백 성님 좋아하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신께... 계집의 원한이라 카는 것은 그러닌께 성님이 인이 각시를 뿌리쳤다 그 말심이거마는,"

"그건 뭐 별일 아니고 그 여자 조금은 우리 일을 알 게야."

"그러니까 없이해야 한다 그 말심이오?"

"그렇지."

"씰데없는 걱정 다 하시오 인이가 계집보고 미주알고주알 말할 성미라야지요."

"그러나 함께 살다보면,"

"나는 성님 생각 옳다 할 수 없소! 사람의 목심이 파리 목심이오?"

"너를 내쳤는데도 안 미운가?"

"내쳤다고 직이고 밉다고 직이믄 어디 사람 사는 세상 씨나 남겄소? 나도 사내장분데 그 따위로 좀생이 겉은 생각은 안 합니다!"

"뚝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

"조신하는 것도 나쁘잖소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사람을 직인다 말이오? 나는 그럴 수 없소!"

강쇠는 펄펄 뛰었으나 환이는 염소가 종이 먹듯 맹한 얼굴이다. 가끔은 맥 빠진 웃음기가 지나가기도 한다. 주막에 당도하자

"주모, 잠 좀 잘 방 있소?"

하고 환이 물었다.

"아침나절에 잠을 잔다 말입니까?"

"아침이고 저녁이고 잠이 오면 자는 거지?"

"잠 잘 방이야 없겄소."

"그럼 방 하나 빌립시다."

"아니 성님 저녁까지는 가야 하는데 잠잘 틈이 어디 있소?"

강쇠는 정색을 한다.

"걱정 말어. 내일 가도 되고 모레 가도 돼. 내가 가는 게 아냐. 그들이 날 기다리는 게지."

치워주는 방안으로 들어간 환이는 벌렁 자리에 나자빠지면서

"강쇠야."

"와요."

"니 인이 집에 한번 가보겠나?"

"머하로 갑니까."

"죽지 말라구 말리러 가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넌 소원 성취할지도 모르고... 그 여자 지금쯤 목을 매달지 않았는가 몰라. 아무튼 너 알아서 해."

환이는 돌아 눕는다.

"무신 장난을 하는 깁니까? 말로 축지법을 쓰는 깁니까? 이러는가 하면 저러고 저러는가 하면 이러고 어느 기이 진담이고 객담이오."

환이는 그러나 대답이 없다. 강쇠가 뭐라 하건 말건 대답을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 듯 잠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두 무릎을 안고 환의 어깻죽지를 노려보고 있던 강쇠는 불안한 듯 일어섰다. 다시 주질러앉아 환이를 노려보고 또 일어서고, 몇 차례를 그러다가 술청으로 나가 국밥 한 그릇을 청해 먹는다. 국밥을 먹으면서 강쇠는 생각에 잠긴다. 주모가 묻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그러더니 반쯤 남은 밥을 후딱후딱 먹어치우고 획하니 밖으로 나간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차츰 걸음을 빨리한다. 이윽고 빤히 보이는 길에서 강쇠는 사라졌다. 강쇠는 거의 저녁때가 다 되어 기진맥진한 꼴을 하고 돌아왔다. 술청에 있는 손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환이 잠든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환이는 나갈 때 그 모습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강쇠는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는다. 환이를 깨우려 하지는 않는다. 환이의 잠을 알기 때문이다. 환이의 깊은 잠은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빌어묵을 계집, 싫고 좋은 거를 임의로 하나? 마아 잘 뒤졌다. 저승에 가서 지 서방 인이나 만내지. 일진이 나쁠라 카이... 세상에 성님 겉은 저런 사내 좋아해봤자 계집치고 패가망신, 지 목심꺼지 줄이게 되는 기라.'

환이는 한 낮을 자고도 한 밤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났다. 강쇠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묻지 않는다.

"목을 매 죽었더마요."

"..."

"염을 해주고 친정에 사람을 보내놓고 그라고 어제 저녁때 왔소."

 

 

10. 사나이들

반나절이 훨씬 지나서, 화엄사를 거쳐 구례로, 산들바람에 버들이 휘휘 가지를 휘젓고 있는데 환이는 부어터진 강쇠를 데리고 윤도집네 대문으로 들어섰다. 윤도집의 마누라 환갑이 삼월초엿샛날 그러니까 어제였는데 잔치를 치른 집 같지 않게 인적기가 별로 없고 암탉이 병아리를 몰고 가는 안마당이 호젓하다.

"허허허, 이 사람아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환이와 강쇠가 사랑 문을 들어서려다 말고 돌아본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의관을 갖춘 윤도집이 막 대문간을 들어서고 있었다. 환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강쇠는 허리를 꺾으며

"아이구 도집어른, 무고하싰십니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주인집 장 떨어지자 나그네 국 마단다더니, 잔칫집에 술 떨어지자 술 안 먹는 자네가 오는군 그래."

강쇠에게 농치듯 한 말이었으나 얼굴에는 환에 대한 불만과 힐책의 빛이 역력했다.

'여러 가지로 자네 힘이 크다는 것을 뉘 모르나? 그리고 말하잘 것 같으면 모든 것을 자네 의견에 좇아서 일해온 것도 사실인데 우리라고 바지저고리는 아닌세. 방자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일별하는 눈빛에 그런 의도가 충분히 담겨 있었고 순간 환이의 눈빛도 거세게 일렁인다. 윤도집 마누라 환갑날에 대오지 못한 것은 예가 아닐 테지만 이들에게 있어 환갑잔치쯤 일상 잡사에 불과했으며 환갑잔치를 빙자하여 시천교, 천도교 어느 파에도 전신하지 않는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된 동학당의 지도적 인물들이 모여 회합을 갖기로 한 것이 일의 알맹인데, 그렇다 하여 하루쯤 일정을 어겼기로 윤도집의 심사가 그렇게 뒤틀릴 까닭은 없다. 평소 쌓이고 쌓인 환이에 대한 불만이 내비쳐진 것이다. 환의 입가에 서릿발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노골적인 야유, 야유인 동시 살기다. 윤도집의 눈 밑 근육이 파르르 떤다.

'졸갑스런 귀신은 물밥 천신도 못 받는다더군요. 도집어른께서는 그럴 분은 아닌 텐데요?'

늘 언행에 중심이 잡혀 있고 심지가 꼿꼿한 윤도집인데 어찌하여 환이에게만은 매번 신경이 곤두서게 되고 그런 면은 신경이 바늘 끝으로 변하여 상대방을 찌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윤도집은 환이의 그 살기 어린 야유에 부‹H친다. 살기나 야유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칼을 뽑지 못하고 바늘을 뽑았다는 의식이, 소인배라는 자의식이 그를 부끄럽게 했고 자신에 대한 능멸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매번 환이에 대해서만은 늪과도 같은 도전의 유혹에 빠지는 건지 윤도집은 알 수가 없었다. 깊은 증오심도 없으면서. 야수처럼 사납고 처절한 성품의 김개주, 그 김개주의 영상을 환이에게서 때때로 느끼기 때문인지 모른다. 활화산 같은 그 인물에 완전히 승복하면서도 몸서리쳤던 그 기억, 기억 속 인물의 핏줄을 윤도집은 위험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예리한 심리 대결은 그러나 한순간에 지나지 못했다.

"늦어도 어젯밤까진 올 줄 알았지. 아 글쎄 지리산 호랑이들도 알아 모시는 건각들 아닌가? 허허허헛..."

역시 노련한 윤도집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환이의 눈동자를 직시한 채 후퇴하는 것이다.

"그란해도 어짓저닉에는 왔을 긴데 말입니다. 길 떠나다보믄 자연고로 생각잖았던 일도 생기는 법이니께요. 아무튼지 간에 잔칫날에 참니를 못했이니 미안시럽고 억울커마요."

강쇠의 말에 윤도집은 껄껄껄 한 번 더 웃고 나서,

"들어가자구.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

사랑채 뜰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안에서 운봉노인의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신호이기나 하듯 다른 몇 사람의 기침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온다. 여닫이문으로 질러놨던 것을 터버린 방안은 널찍했다. 그 넓이만큼 건장한 사내들이 왕방울 같은 눈들을 하고서 십여 명이나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굵은 눈망울이 들어서는 환이 얼굴에 집중된다. 대체 네놈은 뭐길래 펄펄 뛰는 놈들을 하룻동안이나 방안에다 가두어두느냐 하고 문책하는 표정의 얼굴들이다. 환이의 눈은 그들 시선 하나를 잡았다간 놔주고 도 하나를 잡고 차례차례 물건을 다루듯, 살피듯, 실로 대적하기 어려운 오만이 전신에 팽창해 있다. 그들 사내들 중에서 환이 아는 얼굴은 윤도집의 큰아들 필구와 진주의 관수 그리고 산천 객줏집 주인 석포뿐이었다.

', 저 자가 바로 조막손이구나.'

환이는 피식 웃는다. 양볼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은 듯, 주먹으로 한번 치면 툭하고 꺼져버릴 것 같은 익살스럽게 생긴 사십대, 환이보다 네댓 위인 듯싶은 사내는 화가 잔뜩 나서 환이를 노려보다가 다음 순간 씨익 웃는다. 사내들 중에서도 제일로 왕방울인 그의 눈은 웃음과 더불어, 그 무슨 신기한 조화일까 조그맣게 오므라들어 실눈이 되어버린다.

"거 장석도 아닐 것이고, 그런께로 자리를 잡고 앉았으면 쓰겄소이."

땅땅하게 되바라졌는데 노리끼하고 성근 수염의 사내가 강쇠를 힐끔 쳐다보면서 슬쩍 한마디 던진다. 환이는 운봉노인 가까운 자리에 앉고 강쇠는 석포 옆에 가서 비비고 들앉는다. 내내 부어터져서 따라오던 강쇠는 데리고 온 자식처럼 약간은 머쓱해지는지 환이 쪽을 자주 바라보곤 한다. 이윽고 늦어진 점심상이 들어왔다. 상차림이 푸짐하지는 않으나 정갈스럽고 솜씨 있게 만든 음식이다.

'제에기, 와 이리 임석이 허옇기 사람을 치다보노. 짭고 맵은 거만 묵던 속에 기별이나 가겄나? 제에기, 그놈의 여편네는 와 죽노 말이다! 사람이 심란해서 임석 맛도 모리겄다. 어디 천지에 성님 겉은 사나아말고는 사나아가 없다 말가? 나 역시도 그 계집말고 천지에 딴 계집이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빌어묵을 살고 볼 일이제. 죽기는 와 죽노 말이다. 제에기 그럴 바에야 한분 기다리나 보제. 뜨물에도 아아 생기더라고. 아이구 마 내사... 사람 사는 기이 와이런지 모르겄다.'

문어 산적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강쇠는 죽은 인이 아낙 생각을 한다. 대들보에 축 늘어져 있던 소복의 시체가 새삼스럽게 밟혀서 음식 맛을 잃게 한다. 때때로 오싹하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로는 왜 죽었느냐 하면서도 이미 정은 뚝 떨어졌다.

'사람으 죽음이란 그란해도 무서븐 긴데... 내 손으로 삶도 직이봤지마는 참말로 입맛 없구마. 우리만 거기 안 갔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긴데, 제에기, 운수가.'

"머를 쭝얼쭝얼. 개대가리 찜져묵는 소리를 혼자 시부리쌌노."

맞은켠에 낮은 관수 말에 강쇠가 찔끔한다.

", 내가 뭐라 캤기에?"

"알아 듣기라도 했다믄 혼자 시부맀다 칼까."

어느덧 점심은 끝나 있었고 운봉노인이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은 으흠!"

이윽고 운봉이 허두를 꺼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늘 우리는 어렵게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한곳에 모였소. 이같은 모임은 처음 있는 일이오. 그런 만큼 매우 중요한 일이외다. 그간 우리 동학은 필설로는 다 못할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왕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서 학정을 쳐부수고 일본에 항쟁한 영광의 동학을 생각하고 무수한 동학의 피가 산천을 적신 그 마지막 싸움 이후 수십만 동학이 친일파로 혹은 중도파라고나 할까 아무튼 싸움을 잊은 형편이며 더러는 일개 화적당으로 전락하여 잔명을 보존하는 이 기막힌 세태를 생각을 적에 가슴에 불기둥이 쏫는 것은 여러분도 매일반일 것이오. 이 차중에 비록 그 수효에 있어서 미약하나마 절을 굽히지 아니 하고 가슴에 불길을 그대로 간직해온 여러분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에 감회가 없을 수 있겠소. 연이나 지금은 감회에 젖을 시기도 처지도 아니오. 두서가 없는 얘기요만 그간 여러분들이 일들을 잘해주신 데 대하여 치하의 말씀을 하고, 으흠,"

운봉노인은 숨이 찬 듯 일단 말을 끊었다.

"나는 이 정도로 하고 윤도집이 말씀하시오."

앉은 자리에서 물러나듯 그리고 운봉은 눈을 감는다. 탈진한 것 같은 그림자가 얼굴에 감돈다. 신념이 상실되어가는 그러면서 해떨어지기 전에 무거운 발길을 재촉하는 안간힘을 볼 수 있었다. 늙은 것이다. 힘이 쇠퇴해가는 것이다. 차근차근하게 얘기를 시작하고 진행하는 윤도집 음성을 귓가에 흘려보내면서 늙은 장수는 산야를 메우던 동학의 무리와 함성과 그리운 얼굴들을 눈앞에 그려본다. 김개주의 핏발 섰던 눈을 보면서 운봉은 감았던 눈동자를 연다. 환이를 유심히 한번 보고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어쨋든 그 동안 우리들이 일을 하면서 의견이 구구했고 불만도 있었던 게 실정이었소. 그리고 중론을 모아서 좋은 방안을 채택한 일도 없고, 해서 몇 가지 방안을 준비하여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고 한편 기탄없는 가부의 토론을 바라오."

"도집어른!"

조막손이 손가가 성급하게 냅다 치듯이 큰소리로 부른다.

"말해보시오."

"지 말심이 매우 당돌한 것도 겉십니다마는 한 말 디리겄십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맛을 다신다.

"누가 머라 캐도 우리는 생사를 같이할 동료 아니겄십니까? 그런데도 인사도 없이 지내는 사램이 있다믄 그기이 어디 도리겄십니까? 다 바쁘고 삼지사방으로 흩어져서 일을 하다보니께 역부러 찾아가서 인사를 닦는 일이사 임의로 할 수야 없지마는 한방에 앉아서 서로 얼굴을 빤히 보믄서도 남겉이 성명 삼자를 모리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워따, 무신 사설이 그리 길당가? 옳은 말이긴 혀도,"

땅땅하게 되바라진, 노리끼하고 성근 수염의 사내, 임실의 지삼만이 엄지손가락으로 수염을 밀며 환이를 힐끔 쳐다본다. 얼굴을 빤히 보면서 성명 삼자도 모른다는 조막손이 손가의 불평은 환이를 두고 한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운봉과 윤도집 배후에서 움직이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많은 데서 나온 불평이기도 하다.

"퉁 성명하고 인사 닦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울고? 그건 쉬운 일일세. 어려운 건 서로 알면서 모른 체하는 일 아니겠나?"

윤도집이 슬쩍 회피한다.

"하 참, 알 듯도 허고 모를 듯도 허고... 도집어른께서 노상 변죽만 치시니께로,"

"변죽을 치믄 한복판이 울릴 거 아니오. 그것도 모리믄서 무슨 일을 한답디요?"

관수가 핀잔인데 어디 지삼만이 몰라 그러는건가?

"헤헤헤헷... 그도 그럴 것이요이. 허지마는 변죽 친다고오 가운데가 너무 싸게 울리도 조막손이 되기 십상이여라우."

와아 하고 웃음소리가 터진다.

"뭐이라꼬?"

조막손이 손가의 얼굴이 벌개진다.

"아아니 내가 동네북가?"

방안에서는 또 웃음소리가 터진다. 운봉도 웃고 환이 싱긋이 웃는다. 그러자

"혜 참 오나가나,"

하다가 조막손이 손가는 남보다 더 큰소리로 웃어젖힌다. 손가가 조막손이 된 것은 동학의 마지막 싸움, 우금치에서 무너지고 패주할 때 생긴 일 때문이다. 몇 사람과 무리를 지어 조막손이도 달아나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오랏줄이 손가 왼편 손목을 감았다. 성미가 급한데다가 억울하고 분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아나던 손가는 환도를 뽑아 오랏줄을 끊는다는 게 그만 자기 손목을 끊고 말았다. 그 일화는 웃음거리인 동시 묘하게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덩치와 생김새에 비하여 눈물이 많은 이 사내는 곧잘 장하지혼이라는 문자를 썼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그의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이다. 장하지혼이란 민란 때 장살을 당한 아비의 넋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죽고 죽어, 골백번을 죽어도 양반놈들하고는 화동 못한다아! 장하지혼이 그거를 허락 안 할 것이다아! 이놈들아! 천대받고 설움 받는 네놈들이 그거를 잊는다믄 사람으 새끼가 아니다아! 세상에 사람으로 함께 태이나 가지고오 와 종놀음을 할 것고오! 사대육부 멀쩡한 놈이믄 나무껍질 벳기묵어도 굶어죽진 않을 기다아! 양반놈, 우리 원수 왜놈한테 빌붙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기다아!"

조막손이가 거느린 수하에 대한 훈시라는 것이 늘 그런 식이었는데

", 우리사 사대육부가 멀쩡한께로 나무껍질이라도 벳기묵겄지마는 이녁이사 그 조막손을 갖고 흐흐흣... 사대육부 멀쩡한 놈이라는 말만은 뺐이믄 좋겄더마는,"

돌아서서 흉을 보지만 결국 손가에게는 조막손은 일종의 애교 같은 것이었다.

"인정사정 얘기는 우리 두었다가 후일 좋은 세월이 오면 하기로 하고 그러면,"

다시 얘기를 시작한다. 억양 없이 나직한 음성인데 그러나 얘기의 내용은 기왕의 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 비판의 화살은 환에게 가는 것이요, 환이의 독주를 견제하지 않는 운봉에 대한 윤도집 불만의 토로이기도 했다.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고 그러나 지엽의 얘기는 그만둡시다. 크게 문제를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렇게 가파롭게만 나갈 것인가. 그리고 쉬이 끝장이 나야 옳은가. 아니면 다소 완만한 길을 택하여 교세를 확장하면서 칼만 휘두를 게 아니라 인재양성도 하고, 의병이 아닌 동학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면서 보다 원대한 계획을 세울 것인가,"

"그거사 지 좁은 소견으로 동학이라는 것을 들내놓자 그 말심 아니겄십니까? 그렇다믄 지금 들내놓고 있는 친일파 동학하고 뭐가 다르겄소. 그렇기 되믄 일 못하지요."

윤도집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관수의 당돌한 반박이다.

"그건 외곬으로만 하는 얘기고, 다소 과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쌈지 속에 엽전 몇 닢 넣고 투전판에 간다고 하지. 한 닢 두 닢 따기고 하고 잃기도 하는데,"

"그러면 도집어른, 우리가 엽전이라 그 말심이다요?"

알고서 어정대보는 지삼만의 수작이다.

"허어, 내 말 마저 듣고, 과한 비유인지 모르겠다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을 바지저고리로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닌세. 그간의 한일을 과소하게 평해 하는 말도 아니네. 그러나 투전판 얘길 또 해야겠구먼. 가령 여기에 만 냥을 가진 사람이 있고 단돈 한 냥 가진 사람이 있다 하자. 그 두 사람이 투전판을 벌였다면 얼핏 생각하기엔 만 냥 가진 놈이 바보 아니겠나? 그러나 또 뒤집어 생각을 해본다면 한 냥 가진 사람의 한 냥이란 피가 나는 돈, 그러니까 만냥 가진 사람이 백 냥 이백 냥 잃는 거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한 냥 가진 사람이 한푼을 잃었다면 백 냥 이백 냥의 유가 아니지."

"도집 어른께서 무신 말심을 하시려는지 짐작은 갑니다만 투전판 얘기론 아귀가 맞질 않십니다. 투전판에서야 돈 한 닢 가지고 만 냥 못 따라는 법은 없으니께요."

관수가 들이대듯 뇌까린다.

"내가 투전판의 요행을 얘기하는 겐가?"

"그러니께 도집어른께서는 엽전 얘기가 아니라 왜놈의 수효 말심이겄는디, 말하잘 것 겉으면 왜놈으 수효는 개미떼맨치로 수만이고 우리 싸우는 군사를 말하잘 것 같으면 가뭄에 콩나듯 수효가 적다 그 말심 아니여라우?"

"결국 그런 얘기지."

"새삼스럽기 지금 그런 말심을 하신다는 것이 지로서는 이상허요. 애당초 쌈이 되질 않는다는 것밖에 이약이 되질 않는디 그렇다면 수년을 우리가 미친 지랄 혔다 그밖에 더 되겠어라우?"

지삼만의 반박이 여간 아니다.

"허허어 자네는 어찌 그리 막말을 하는고? 내 의도는 앞으로 더 탄탄하게 확실하게 지반을 다져가면서 일을 하자는 게 아닌가. 이 지경으로 나갔다가는 장차 화적당으로밖엔,"

윤도집은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라면 도집어른, 우리가 화적당 아니고 뭣이다요? 관군이겄소? 지는 화적당으로 치부하고 있지라우. 또 실상 불도 많이 질렀으니께요."

"무슨 소리야!"

"역정만 내시들 말고 들어보시시오. 의병이냐 동학이냐 갈라놓고 생각하는 것도 지는 마땅찮아요. 수효를 가지고 따지시는 것도 그렇고, 또 화적당이면 어떻소? 핍박받는 백성이 일어서면은 으레껏 역적이다 화적이다 하기 매련이고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당구겄소? 실정이 십만 대군 거나리고 서울 가겄어라우?"

윤도집이 밀린다. 이때까지 관망하는 태도로 듣고만 있던 윤도집편인 순창의 장가가 입을 연다.

"그러크럼 한마디로 통박 짤라서 말해 치워버릴 양이면 우리가 여기 모일 필요는 없는 거 아니더라고? 성급허게 날뛸 것 없이 전후사정 이약을 소상히 들은 연후 자게들 생각을 말허는 게 순서 아니겄냐 이거여. 덮어놓고 무작정 그러는 거 아녀."

느린 말투로 나무란다. 운봉과 환이는 얘기를 듣고 있는지 아닌지 도통 말이 없다.

"덮어놓고 무작정 그러는 거 아니라 말시. 이약은 던져놓은 기니께 받아넘겨얄 거 아녀?"

지삼만이 목을 가다듬고 일장연설을 할 심산인데 조막손이 손가가 가로채어 말을 한다.

"하모 그렇지. 이야기는 도집어른께서 터놓으신 기라. 대체로 내 생각도 지서방하고 비슷하구마는. 일리 있는 말이다 하고 생각는데, 우리 동료끼리는 체면 겉은 거 집어치우고 참말 좀 하자. 지서방 하는 말도 그거 아닌가 싶으구마. 우리가 지금꺼지 불지르고 댕기기는 했어도 화적질 안 한 거는 제제가끔이 알 일이겄고오. 그러나 설사 화적질을 했다 커더라도 상대편이 왜놈이거나 백성들 피빨아서 부재 된 놈이믄 죄될 것도 없는 기라. 그러는데 무신 법이 있을 턱 있나. 잘 묵고 잘 살자고 한 짓 아니겄고 남으 나라도 통째로 꿀컥 생키부리는데 내사 못해서 그렇지 왜헌병놈 둔소에 가서 총이고 화약이고 뺏는 기이 쌈치고도 실속 있기 이기는 기고 오족놈들 고방 털어 군자금을 했이믄 오죽이나 좋으까? 그런 거를 다 일일이 사린달 것 겉으믄 왜순사놈 등에 칼 꽂을 것도 없는 기고 진짜 도적놈이사 성루에 높이 좌정하여 교주랍시고, , 그게 다 우리 동학 팔아묵고 눌러앉은 자리 아니라 할 수 있겄나아?"

이야기를 엇길로 끌고 나가면서 조막손이는 제풀에 흥분한다.

"딱헌 소리 그만혔으면 좋겄소이. 이런 거를 두고 동문서답이라 하는 거요. 명색이 있질 않여? 명색이. 워째서 여기저기 우굴부굴 허는 화적패를 옳다 헌다냐? 나는 도집어른 말심이 지당허다 허겄어야."

사실은 윤도집 얘기는 초반부에서 끊겼고 열심히 들은 것도 아닌데 순창의 장가말고 눈 가장자리가 거무죽죽하고 입술도 푸르스름한 보부상 임가가 말했다.

"잘 생각들 혀보더라고. 주재소에 불지르고 왜순사등에 칼 꽂는 것 그거만 능사 아니랑께. 우리는 그냥 의병이 아녀. 의병이기보담 동학교도란 말시. 칼을 휘두르는 한펜 사람 맘에다 한울님 뜻도 전혀야 한당께로. 그려야만 우리가 칼을 휘둘러 왜놈을 치는 명분도 서는 거 아니겄어?"

"명분이고 개뿔이고, 바린 말 할 것 겉으믄 우리네야 몰린 쥐니께 목심 내놓은 것밖에 확실한 얘기를 못할 기구마. 그렇잖으믄 아예 애시당초 집어치웠던 기라."

조막손이 내쏘는데

"아 세상에 저러크름 무식혀 무신 일을 헌당가? 우물 안의 개구리여, 개구리.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라 혔는디 이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몰러? 허는 이야그가 산채에 숨어살면서 고갯마루 지키다가 장꾼들 벗겨먹는 도적떼."

"아아니 멋이 어쩌고 어째? 도적떼?"

"워째 억울허다냐? 제 입으로 이야그허고서 따지기는 워째 따지는 게라?"

조막손의 눈알이 불거진다.

"아 멋이 어째? 내가 나를 도적떼라 했다 그 말가? 아아니 이거 순도적놈은 니 아니가!"

"도적이나 화적이나 매일반인께, 제 얼굴에 침 뱉는 소리 혀놓고,"

"그 말이야 조막손이가 혔건데? 내 한 말을 거기 갖다 붙일 건 없고, 시비는 혀도 쌈은 안 허는 거여."

지삼만이 거들어주었으나 왈가왈부 시시비비는 말다툼으로 번지고 관수 석포, 나중에는 강쇠까지 주먹으로 삿대질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삿대질에서 그치고 육박전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실상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대었지만 그들끼리의 대결이 별무효력이 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싸우는 이들 중에서 학식이 있고 조리 있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며 이들이 십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일 뿐이다. 한데도 왈가왈부 떠들어보는 것은 먹물 먹은 사람만 대수냐, 우리도 그런 정도는 알고 있으니 무조건 승복은 아니라는 치기 어린 오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환이의 능력을. 몇 사람을 거쳐서 내려오는 지시는 환이로부터, 그리고 그의 지시는 영락없이 정확한 성과를 거두어왔다. 무조건 승복이 아니라는 오기도 속셈으론 환이에 대한 관심의 표시요, 신비스런 뭣으로 가려진 그의 정체를 벗겨보고 싶은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물론 자부심도 있었다. 제가끔 제 수하들을 거느리는 만큼 힘들도 좋고 뚝심도 있었다. 머리도 보통보다는 빠르게 돌아가고 동학의 가장 불우한 시절을 거쳐온 이들은 관수와 강쇠를 제외하고는 실전의 경험자들이기도 했었다.

"그만했으면 많이들 얘길 한 것 같소."

환이의 음성이 팔매처럼 날아왔다. 거만한 분위기에 반발하고 싶은 심정들이지만 방안은 잠잠해졌다. 어디 그림자 같은 네놈이 얼마나 아는 것이 많고 변설이 좋은가 들어보자는 품을 재면서 환이를 쳐다본다.

"왈가왈부, 더 이상 해보아야, 천년이 간들 지상에는 천상의 법이 이루어질 수 없고,"

입가게 조소가 감돈다. 지삼만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거 웃음 한번 고약하당께로. 계집으로 치면 사내 많이 잡아먹을 웃음이여.'

"도둑이라도 사람이니 죽이면 살생이요, 아니 죽여도 살생인 것이오. 도둑으로 인하여 죄 없는 백성을 얼어 죽고 굶어죽는다면 그 도둑을 죽이지 아니 하였던 자는 도둑의 손을 빌려 백성을 살해한 것이오.!"

무슨 심산에선지 환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드높은 소리를 질렀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는 것 같다. 그런데 지삼만이 씩 웃는다.

"누군지 이름 석자나 알고 말 들었음 쓰겄소이. 답대비 뒷간에 갔다가 밑 안 씻은 맴이어라우."

그러나 환이는 천장을 올려다본 채

"묘향산에서 온 천가외다."

한마디 내뱉고 곧 이어 하던 말을 잇는다.

"도둑을 죽여도 살생이요 아니 죽여도 살생..."

환의 시선이 천장에서 제 무릎 쪽으로 옮겨진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여러분이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좀 더 펴서 이약을 해주시시요이, 군령이야 짧을수록 좋은디 여긴 살림방인께로."

"나는 동학이, 동학으로서 어느 길을 가야 하는가 그 얘길 할 생각은 없고. 나는 동학이 아니어도 좋은 사람이라 소임이 없고 경전에도 장님이요. 다만 지금 형편을 구경한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라한다면 할 수 있겠소."

"..."

"지금 크게는 두 쪽으로 갈라진 동학이 있는 거로 알고 있소. 이 판국에 소위 이쪽이 골수파다 하여 또 하나의 분파를 드러낸다면 동학은 세 쪽이 되는 셈이오. 세 쪽 중 하나가 들내어놓고 포교를 한다면 과연 얼마만한 신도를 흡수할 것이냐, 그것은 도집어른 짐작에 속하는 일이겠고 내가 보기는 도집어른께서 욕심이 많으신 것 같소이다. 칼을 두 개 양손에다 하나씩 들고 쓰시겠다는 뜻으로 생각되오만 그것을 저는 반대하겠소이다. 왜냐하면 안 될 일이기 때문이오. 손병희 이용구라고 그마마한 욕심이 없었겠소.? 안 되기 때문에 한 손의 칼은 버린 것이요. 포교를 하고 신도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낮에 일하고 밤엔 잠을 잔다는 것이오. 사도거리를 한낮에 돌아다녀도 왜헌병이 잡아가지 않는다는 얘기도 되겄지요. 손병희의 업적은 많은 동학교도를 연명케 해준 것... 그것이오. 이용구도 그 따위 말을 할지 모르지요."

"...."

"동학당의 명칭 이래, 또 신도라는 명칭 아래 보다 넓게 사람을 포섭하기 위하여 가파로운 일일랑 당분간 쉬어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낮에 일하느냐 밤에 일하느냐 그것만은 확실히 작정해야 할 것으로 본인은 생각하고 그 결정에 따라서 일신의 거취도 정하겠소.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여기 몇 가지 계획을 짜본 것이 있으니 여러분과 함께 의논해볼 심산이오."

윤도집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펴진다. 사실상 환이는 윤도집에게 절반쯤은 양보한 셈이었으니까.

 

 

11. 옛 터전

"강쇠야, 너는 운봉어르신네 모시고 먼저 가거라."

"성님은 이 새북에 어디 가실라꼬요."

"내 가는 데 알아 뭘 해."

환이는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강쇠를 깨워 이르고 길을 떠났다.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는 새벽길을 사뭇 걸어간다. 그는 떠날 때 화엄사에 와 있는 혜관을 만나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발길은 엉뚱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환이 당도한 곳은 평사리 마을 삼신당이 있는 숲속이었다. 숲속에서 빠져나온 환이는 불타 없어진 누각터에 가서 우두커니 마을을 내려다본다. 희미하게 보이는 강줄기, 강 건너편 산허리가 강물처럼 희미한 하늘 아래 누워 있다.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환이는 조막손이 손가 얼굴을 생각한다. 새벽길을 헤치고 이곳까지 뭣하러 왔는가. 그것에 대해선 도통 생각이 없다. 발이 제 혼자 왔겠지 뭐 하는 투로. 손가의 얼굴을 자꾸만 생각한다.

'계집이 있을까, 자식새끼가 있을까, 술은 얼마나 펴마시는고? 옳지! 그자를 한번 찾아가서 술을 마시자. 그자는 강쇠놈보다 더 못견딜 거야. 말을 시키다 시키다 안 되면 술상을 때려엎을 거야,'

환이는 누각터에서 초당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임실의 지삼만이? 그 새낀 배신을 할 놈이다. 물건은 쓸 만하고 큰데 돌아설 게야.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럴 놈은 아니지... 일은 그런 자가 쳐낼텐데 아깝군. 죽여버릴까?'

환이는 대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대숲에서 허물어진 담장이 보인다. 환이는 허물어진 담장을 넘어선다. 별당에 불이 켜져 있었다. 환이는 연못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사방에는 옥색 빛 아침이 일렁이고 있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환이는 허물어진 담을 넘어 몸채 안쪽으로 돌아간다. 아침이 왔는데 기동하는 사람이 없다. 행랑 쪽으로 돌아간다. 마구간에는 말이 없다. 외양간에도 소가 없다.

", 누구요."

환이 돌아본다.

", ."

중년을 넘어선, 그러나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육손이가 벙어리처럼 소리를 낸다.

", , , 니는,"

"오래간만이네."

", 구천이--"

육손의 두 어깨가 축 늘어진다.

"있기는 누가 있이꼬? 곱색 서방님밖엔,"

그러다가 다시 겁에 질린 것처럼 환이를 쳐다본다.

"서방님이라니 장가도 갔단 말이가?"

", 가기사 갔지마는... , 쑥대밭이제. , 어서 가라고, , 거지가 됐다는 소문이더마는,"

"..."

"좀 있으믄 식구들이 일어날 긴데, 식구래야 머..."

"옛날엔 나그네를 괄시하지 않았네."

", 그래서 너 겉은 놈 두었다가 패가망신 안 했나!"

육손의 눈에 분노가 떠오른다.

"너도 여직 연명한 걸 보면 의리 있는 놈은 아니지. 하하, 하하하..."

"죽으로 왔나? 미쳤나?"

"미치지도 죽지도 못하고, 저기 저 마루에 가서 얘기나 좀 하지."

환이는 육손의 겨드랑을 껴안듯, 육손은 뿌리치려고 몸을 흔들었으나 환의 힘은 반석 같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공포의 빛이 육손의 얼굴에 떠오른다. 마루 끝에 나란히 앉는다.

"어짤라꼬 여긴 왔노."

비실비실 묻는다.

"불을 싸질러볼까 싶어 왔더니,"

"무슨 억하심정으로? 지은 죄도 많으믄서..."

"..."

"집구석이 콩가리가 됐는데, 그 많은 땅도 남으 손에 넘어가고오, 하기사 뺏은 재물이니께 차라리 속시원할 때도 있지마는... 멀리 멀리 가서 돌아오지나 말 일이제."

"아마 돌아올걸 미친놈..."

"누구 얘길 하는 것꼬?"

"길상이놈,"

"뭐이라꼬?"

환이는 일어선다.

"잘 있게."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이보라고! 길상이가 우쨌단 말고!"

"겁나서 그러나? 하하 하하핫..."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모습도 사라졌다.

"저기이 구신이까? 구신한테 홀린 길까? 아이구 모리겄어. 콩가리 콩가리 집안이고... 죽을라나? 와 눈에 헛것이 보일꼬?"

멍청하게 서서 중얼거리던 육손이는 벌렁벌렁 활갯짓을 하며 마을로 내려간다. 육손이 환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실은 정신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순이가 죽은 뒤 순이와의 사이에 낳은 계집아이를 애지중지 길러왔었는데 그 아이를 서울서 내려왔던 홍씨가 잔심부름 시키겠다 하며 데려간 것이다. 그 후 반정신이 나간 사람이 된 것이다. 육손은 논둑길을 벌렁벌렁 걸어간다.

"한복이이--"

이른 아침부터 논갈이를 하고 있던 한복이 돌아본다.

"니 방금 구천이 못 봤나?"

"구천이가 누군데 그러요."

"아아, 아 참 니는 잘 모르겄구나. 그라믄 누구 이 길을 안 가더나?"

"아무도 안 가던데요."

한복이는 딱하다는 듯 육손이를 쳐다본다.

"서울 간 딸 소식 들었소?"

"들으나마나."

했으나 육손이는 걸핏하면 벌렁벌렁 두 팔을 휘저으며 마을로 내려왔고 상대편에서 딸 얘기를 안 하면 그 자신이 꺼내는 것이다.

"니는 이분에 생남했다믄?"

"."

어제도 물어본 말이었고 한복이도 어제처럼 짤막하게 대답한다.

"참말이제 하늘도 무심쿠나. 샐인 죄인 아들도 딸 낳고 아들 낳고 땅 사고 집 장만해서 사는데..."

갑자기 심술이 치미는 듯 육손이 내뱉는다. 한복이는 말없이 가래질을 시작한다. 또 다시 외로워진 육손이 우두커니 하늘을 보다가

"아무튼지간에 생각해보믄 그게 다 구천이놈 때문이제. 내가 이리된 것도 물줄기로 찾아올라간다 칼 것 같으믄... 최참판댁이 안 망했으믄 내가 이리 될 리가 없고오. 그만 아까 그놈의 애목이라도 물어씹을 거로 그랬나? 하기사 구신이제, 구신."

논둑길을 되잡아서 걸어나오는 육손이, 보리쌀 든 사기를 이고 우물길을 가던 봉기 마누라와 마주친다.

"육손이 팔자 늘어졌구마."

"뭐라꼬요?"

"아침부터 놀러 댕기는 팔자가 좀 좋은가?"

"할일이 있어야제요. 주인 없는 집,"

"주인이 없긴 와 없노."

"있으나마나, 참 두리어매,"

"아아니 시집가서 자식 놓고 사는 사람, 뉘집 애 이름이가? 두리, 두리, 와 카노?"

", 그러사 머, 그런데 말입니다. 구천이 가는 것 안 봤소?"

"머라 카노? 이 사람이 환장을 했나? 뜬금없이 구천이라니?"

", 구천이요. 길상이가 올 기라 카더마요."

"쯔쯔,"

혀를 차면서 지나치려 하는데 치마꼬리 잡고 따라가는 애처럼 육손이는 봉기 마누라의 하얗게 된 얹은머리를 쳐다보며 따라간다. 밭둑에서 송아지가 운다. 육손이는 봉기 마누라 뒤를 따라가다가 송아지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봉기 마누라가 우물가에 갔을 때 복동이네(서서방의 자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일직구마요. 벌서 보리를 곱찍었십니까?"

중년 티가 완연한 복동네가 안쓰러워하며 묻는다.

"누구 해줄 사램이 있어야제."

"좀 편할 나인데,"

"무신 대복으로? 아직이사 곰뱅이가 성한께... 너거는 지난 장에 무명을 많이 냈다믄서?"

"많이 내기는요, 열 필 냈지요. 김훈장댁에서는 열다섯 필 내고,"

"그 댁 자부는 아금발라서 어정개비 서방 데리고 이럭저럭 사는구만."

"사램이 용해서 그렇지, 농사 지으니께 반년 양도는 되는 모양이더마요. 남자 손떠배기 없는 우리네보담이야,"

"요새도 그 집에 순사가 찾아오는가?"

"머 그런 말은 안 합디다."

"보래?"

"?"

"아까 최참판네 육손이가 구천이를 못 봤느냐고 날보고 묻더라. 영 사람이 돌았는가배. 너 씨압씨맨쿠로 또 한 사람 미친 모앵이다."

"구천이를 보았느냐고 물어요?"

"."

북동네는 물을 긷다 말고 봉기댁네를 빤히 쳐다본다. 봉기댁네는 보리쌀을 씻고 돼지밥통에 뜨물을 부은 뒤

"여기 물 한 바가지 부어주라."

"."

복동네는 급히 물을 길러 보리쌀 사기에 붓는다.

"참 이상도 하지."

"뭐가?"

"구천이 말을 한께, 실은 나도 보았소."

"머라꼬? 구천이를 보았다고?"

보리쌀을 헹구다 말고 복동네를 쳐다본다.

"보았소. 긴가민가 하고... 하도 세월이 오래라서 믿기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께 육손이도 보긴 보았구마요."

"미친 소리 마라. 구천이가 지금꺼지 살아 있을 리가 없지. 헛것이다."

봉기 마누라는 일소에 붙인다. 이 무렵 환이는 마을 어귀 영산댁 주막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환이는 낯선 농부 한 사람을 만났다. 험상궂게 생긴 사내였다. 사십쯤 보이는 건장한 몸집의 사내는 거름바지게를 짊어지고 가면서 눈을 치뜨고 마주친 환이를 쳐다보았다. 흐리멍덩했던 눈에 별안간 살기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에 대한 적의였던 모양인데 적의치고는 치열하다. 그 농부 말고 주막에 이르기까지 환이는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다. 마을은 조용하고 너무 조용하여 그림 같았고 빈터처럼 설렁해지는 기운이 사방에 감돈다. 산천에는 봄빛이 완연하건만, 산은 푸르고 강물도 푸르고 매끄럽게 흐르고 있었건만 영산댁 주막도 낡고 헐거워 보였다. 엉성하면서도 굴간같이 어두운 느낌이 든다.

"어여 오시시오."

그럴 나이도 아닌 텐데, 머리도 아직은 까만데 그러나 영산댁은 할망구가 다 된 것처럼 국솥에 불을 지폈는가. 머리에 불티가 앉아있고 눈까풀이 무겁게 처져서 영산댁은 구천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러크름 일찍 어디 가신다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가겟방 주모 자리에 가서 앉는다.

"어디랄 것도 없고 해장이나 합시다."

"그러시오."

몇몇 해나 도배를 아니 했던지 술청의 벽면도 그렇고 술판도 기름때에 절어서 거무칙칙하다. 나무통에 꽂아놓은 싸구려 주석 숟가락마저 을씨년스럽다. 시래깃국 한 대접과 탁배기 한 사발이 술판에 나왔다.

"주모는 혼자 사시오?"

두 허벅지에 주먹을 짚고 앉아서 술과 김이 피는 해장국을 노려보듯 하고 앉았던 환이 눈을 들어 영산댁을 쳐다보며 묻는다.

"혼자여라우."

툭 내쏘듯

"함께 살아도 편허질 않고 혼자 살자니 적막강산이고 참말이제 워찌 살아야 헐지 모르겄어라우."

"주인장은 죽었소?"

"야아, 뒤졌제라. 조선팔도 다 댕기면서 계집질 노름판, 그러크름 하고서 멩대로 살 것이오? 법으루 만낸 서방도 아니지만... 잡것..."

치맛자락을 걷어 힝 하고 코를 푸는데 콧물은 눈물과 엇비슷한 것, 짐승궂다. 외로움에 찌들고 세월에 찌든 모습이 낡고 때묻은 입성같이 처량하다. 영산댁은 빈 사발에 술을 채워준다.

"주모는 이곳에서 오래 살았소?"

"하모니라우. 오래됐제요. 내 각시 시절에 청보따리 하나 끼고 와서 여그다가 주막을 차렸인께로 반평생인디, 워째 사람의 맴이 늙은께로 그런가 요새는 아침저녁으로 뵈는 산천도 늙은 것 같들 않겄소잉?"

"산천이 늙는다... 그럴 법도 하군. 늙기는 늙을 게요. 하하하하..."

웃으면서 환이는 옛날에 보기보다 영산댁이 수다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어여 술이나 드시시오. 국이 다 식겄는디,"

환이는 해장국 한모금을 마시고 술을 들이켠다. 들이켜면서 바위를 치며 쏟아져내리는 폭포 생각을 했고 술판에 내려놓은 뒤 묻는다.

"동네 인심은 전과 같소?"

"말도 마시시오, 모두 뜨내기판인께로, 늙어서 죽고 의병 나가서 죽고, 조가놈 등쌀에 죽고 쫓겨나고, 옛 얼굴을 보기도 심드는디, 무슨 놈의 조석변동인지 땅 임자 작인이 조석으로 베끼니 이래 가지고는 마을인들 되겄단 말씨. 소문 들은께로 조가놈이 여거 옥답 몇 마지기를 읍내 왜놈헌티 기부혔다는 말도 있고 그러니 왜놈지주가 오죽헐 것이며 또 작인이란 작자는 어디서 굴러온 돌멩인지 뉘 알겄어라우? 동네가 아주 망해버린 거여."

"망해버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일껏 설명을 했건만 환이는 맨 마지막 말만 들었는지 되물었고, 일껏 설명을 한 영산댁도 자기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 듯 환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매 동네가 아주 망해버렸다 그 말 아니여라우."

"왜 그렇게 됐소?"

"아아 나라가 망혔인께로 자연고로 동네가 망허는 게 이치일 것이요만 여거 사정은 좀 다르단 말씨."

"어떻게?"

영산댁은 빈 술잔에 술을 부어놓고,

"망한 사단을 찾는달 것 겉으면 오랜 이야긴디 그걸 워찌 다 말헌다요? 한마디로 이 동리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최참판네 녹을 먹고 살았다 쳐도 과언은 아니여라우."

"최참판이 아니라 최임금이었구먼."

"말이 그렇다 그거 아녀? 아무튼지 간에 동네 기둥이 뚝 뿌러졌는디, 그 댁 서방님이 비명횡사한 게 그것이고오, 다음에는 최씨네 핏줄이 끊어진 것디, 여식아이가 하나 있었지만 여자가 사람이간디? 자식이 어미 성씨 따르는 법은 없인께로. 그 차중에 괴정이 돌아서 마을을 싹 쓸어부맀고, 참말 대들보가 뿌러졌지라우. 최참판네, 그댁 마님이."

환이는 가만히 술잔을 들어올린다.

"그렇기 되고 본께로 까마구 까치집 채듯이, 천하강산에 혈혈단신 나이도 미성한 여식 하나 남았으니, 아 세상에 조간가 뭔가 만석살림 침 한 방울 안 흘리고 먹어치웠당께로. 허지만 세상에는 공것이 없어야. 하늘이 씨퍼렇기 내려다보고 있는디 그 살림을 부지할랍디여? 그것도 왜놈을 앞장세우고 또 그자는 의병들헌티 당한 것을 핑곌 삼고 또, 또 죄 없는 사램꺼지 의병으로 몰아서 잡아죽이고 잡아넘기고, 도척이 겉은 인심 아니고 멋이겄소? 아무리하면 그, 그러크름 혀서 뺏은 살림이 오래 갈랍디여?"

흥분하여 지껄이다가 영산댁은 갑자기 눈알이 횡해진다.

"손님은 어디서 오는 길이여라우?"

"어디랄 것도 없고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이오."

"그렇담 이 동네 최참판네 형편은 영 모르겄소잉?"

"소문쯤이야 들어 알지요."

"아아, 알고 기셨어라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영산댁 얼굴에 활기가 떠오른다.

"금매 모릴 사람이 없을 것이요이. 이약도 하 많고 그 거궁한 살림이 일패도지, 최씨 가문이 끊겼으니 말이요이."

"요즘 그 댁 형편은 어떤가요?"

"말도 마시시오. 헌디 그 댁이라니? 이 근동서는 그 댁이라 말허는 사람 아무도 없단 말씨. 도적놈에다 역적 놈인디."

영산댁은 화를 낸다.

"아아, 그럼 조가놈."

"그 집구석 이야그라면 말도 마시시오. 서울로 거산해 가다시피허고, 곱새아들 하나가 남아서 하인놈 침모 그리고 맹추라는 덩신겉은 종년 하날 데리고 거궁한 집을 지키는디 여름이면 풀이 우묵장성이라 구랭이가 우굴부굴허고 대˜는 귀신이 난다는 말도 있는디 흥, 얼마 전에 곱새아들 혼사가 있었지라우."

영산댁 얼굴에 비웃음만도 아닌 묘한 웃음이 지나갔다. 영산댁 입에서 말은 이미 나오게 되어 있는 것,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었으니 환이는 술잔만 기울인다. 실상 영산댁의 넋두리 섞인 그런 얘기를 들을 이유도 없었다.

"그 곱새아들이사 무슨 죄 있간디? 몸이 병신이제 맘은 백옥 겉다 허든디. 내가 왜 이 집 주인이겠느냐면서 오히려 하인 행셀 허고, 그러니 그 집구석 하인이나 종년은 팔자 늘어졌지라우. 방구들에 똥을 싸도 말헐 사램이 없인께로. 혼사헌다고 금년 봄 들어서 묵은 때를 좀 벗깄일 것이요만,"

환이는 자신이 주막에 죽치고 앉아서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한다. 해장술 한두 잔 들이켰으면 길을 떠나야 한다. 서울로 가게 되어 있는 혜관을 만나야 한다. 낡아 기울어져가는 옛 주막에 앉아서 다 알고 있는, 아니 그 숱한 얘기 속 인물의 한 삶인 자신이 그런 얘기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을 근황에 대해선 혜관이 더 잘 알고 있고 소상한 보고도 받은 바 있지 않은가.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아아 그렇지라우. 아무리 재물이 좋다고는 혀도 헛다리 짚은 거란 말씨. 빈한한 선비집 딸이라 허는디 아 글씨 명색이 선비랄 것 겉으면 아무리 지체가 높다 헌들, 신랑이 병신인 것은 두고라도 조가네 역적, 도척인헌티 딸 줄 것이요? 그쪽도 창자가 썩은 선비일시 분명코. 시애비나 시에미 되는 조가 내외들도 아들을 강아지만큼도 생각 안 허는디 그래 며느리라고 떠받들 것이요? 이야그를 들은께로 혼삿날 받아놓고 곱새아들이 그랬다는디, 머리 깎고 중이 될려 해도 육신이 온전찮으니 내가 어디로 갈꼬, 허면서 한탄을 혔다 그러더랑께."

"얼굴이 관옥 같다든가? 허허헛..."

"손님도 아시기는 아시누마. 암은이라우. 얼굴이사 하눌의 선관이제요. 헌디 손님?"

"..."

"얼굴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아까부텀 어디서 본 듯허다는 생각을 혔는디 이제 본께로."

"어디서 나를 보았소?"

"본 게 아니라 닮았어야."

"..."

"꼭이 닮은 건 아닌디, 비슷이 역력허당께로?"

"..."

"최참판네, 목 졸리서 죽은 그 양반 말씨, 어딘가는 몰러도 비슷이 있단 말씨."

환이 얼굴이 순간 새파래진다. 입술까지 새파래진다. 희미한, 아주 희미한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번진 채 얼굴이 굳어져버린다.

'그럴테지. 비슷한 데가 있구말구. 한뱃속에서 나온 처지니까.'

"손님, 워째 그런다요?"

환이는 빤히 쳐다볼 뿐이다.

"손님, 내가 못할 말 혔소?"

'어지간히 점은 잘 찍었네. 길목서 술장사 수십 년 이력이 있으니 눈이 맵긴 맵군.'

"목 졸리 죽은 사람을 닮았다 한께로, 맴이 안 좋았어라우?"

'한데 영산댁, 구천이를 몰라보니 허허헛, 늙긴 늙었군. 허허헛...'

머슥해져서 영산댁은 술잔에 술을 채워주고 환이는 꺼뭇꺼뭇한 점이 박힌 술 사발을 들면서 영산댁을 빤히 쳐다본다.

'참 요상한 사람 보겄더라고? 누구간디 최참판네 사랑양반을 닮었이까?'

"아따아! 이판사판 술이나 한잔씩 하고 가자고."

주막에 새 손님이 들어온다. 두 사람은 억실억실하게 생긴 장골들이요 한 사람은 나이티가 나는, 곱상한 얼굴이다.

"무신 바람이 불었당가?"

술판을 닦으며 영산댁이 말했다.

"올 바람이 불었제."

퉁명스러운 음성과 함께 중년사내 셋은 땀 냄새를 풍기며 술청에 오른다.

"어디 갔다오는 길이라? 아침부텀서,"

술시중을 들면서 영산댁이 물었다.

"밥맛 떨어지는 데 갔다오누마."

윗마을 오서방의 대답이다.

"밥맛 떨어지는 데랑이?"

술을 벌떡벌떡 들이켜고, 세 사내는 해장국을 훌훌 마신다.

"제에기, 영산집이 탕수국 묵을 나이도 아닌 긴데 국맛이 와 이렇소?"

"국맛이야 춘하추동 그 맛이제. 내 짐작허니 혓바닥에 바늘 돋쳤는개비여."

"혓바닥에 바늘도 동칬일 기구마는."

"밥맛 떨어지고 혓바닥에 바늘 돋쳤다 허는디 노름판서 밤샘혔당가?"

"제에기 물어도 쌌는다. 관가 송사라!"

"그건 또 무신 말이다요?"

"그 빌어묵을 우가놈이, 그 빌어묵을, 그만 질근질근 씹어묵고 싶다마는, 하 참, 사람 악한 거는 범보다 무섭다 카이."

오서방은 속이 타는지 술을 바싹 마른 입술을 열고 들이 붓는다.

"웟따매 갈증은 이쪽서 나는디, 무신 이야그라?"

"우가 그놈이 난데없이 오서방을 의병질했다고 찔렀던 기라."

오서방 대신 그의 처남 끝봉의 말이었다.

"오매, 우가 그자가 사람치고는 말자라 혀도 세상에 그럴 수 있는감?"

"우가놈이 찌른 건지 다른 누가 찌른 건지 그거는 확실찮은 얘기구마. 우리 눈으로 본 게 아닌께."

곱상스레 생긴 오서방의 외사촌형 전서방이 말을 막는다. 오서방의 수염이 푸들푸들 떤다.

"아 그놈 아니고 누가 했겄소? 지리산 중놈이 했겄소?"

"허허 설사 그렇더라도,"

"그 목을 쳐죽인 놈이 며칠 전에, 아 영산댁도 내 말 좀 들어보소. 그놈이, 그 목을 쳐죽일 놈이 우황 든 소를 속임수를 써가지고 팔라 안 카겄소? 그래 이 사람아 장사꾼이 사간다믄 모리까 하기야 속을 장사꾼도 아니지마는, 다같이 땅 파묵고 사는 농사꾼한테는 그러지 말게, 아 그랬더니 이놈이 티끌이를 잡아서 쌈을 걸어오는기라. 마치 내가 훼방을 놔서 소를 못 팔기라도 한 거맨치로. 그래서 대판으로 싸웠는데 나중에 들은께 흥정이 안 됐다 커더마. 봉사한테 판다믄 모리까. 이놈이 그래서 나한테 앙심을 품은 모앵인데 온 세상에 잠자다가 날벼락을 맞아도 푼수가 있지 언제 내가 의병질을 했던고?"

"흐흥, 전에도 그런 사람 하나 있었지야. 눈밖에 난 사람이면 의병질혔다 그 한마디로, 죽고 사는 게 그자 손가락 끝에 매이지 않았더라고?"

"아 설사, 설사 말이오. 이분에 내가 읍내 주재소까지 가서 총을 맞아 죽었다 카더라도 내 하나 죽으믄 그만이다 생각느다믄 어리석은 일이라. 내 자식새끼들이 있는데 애비 원수 안 갚을 기든가? 한조 아들네미도 지, 진주서 헌헌장부로 커가지고 아배 원수 갚을 기라고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 못 들었던가? 천하 없이도 지은 죄는 남 주는 거 아닌께. , 아니고 말고! , 이놈을 그만, 맷돌에다 갈아마시도 맴이, 어이구! 우가놈 이놈아!"

그 동안 어지간히 참은 모양이다. 술이 들어가자 둑이 터진 듯 울분이 솟구치는가. 오서방은 바싹 메마른 입술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다 주먹질한다.

"허허어, 그럴 기이 아니라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캤는데,"

"그러는 기이 아니라고요? 형니임! 지렝이도 밟으믄 꿈틀거리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것도 생사가 걸린 모함을 받았는데도요?"

"사람 영악한 거 범보다 무섭다 안 했나? 그놈 건디리봐야 물구신맨치로 감고들 긴데, 일 없이 풀리나온 것만도 잘 된 일이라 생각해야제."

"하모요. 잘 된 일이라 생각해야제."

끝봉이 사돈뻘 되는 전서방 말에 맞장구를 친다. 외사촌형과 처남이 설동하여 읍내서는 말발이 선다는 허주사의 보증을 얻어서 겨우 끌어내온 오서방인 만큼 두 사람은 제발 성가신 일이 다시 없기를, 그것만을 바라는 마음은 일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잘 된 일이긴 머가 잘 된 일이오? 아 그래 내가 의병질을 하다 붙들려갔단 말이요?"

"허허어. 이런 세상을 살자 카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챙이가 돼야, 참말로 칼날 같은 세상인 기라. 임금님도 들어내고 총칼이 소리치는 세상인데 우리 겉은 농사꾼이야 그저 죽은 듯이 들엎으고 있는 기이 상수라. 도적을 피하믄 강도를 만낸다는 말도 있듯이, 참말이제 옛적에야 아무리 수령관속이 백성을 수탈한다 캐도 우리네 상사람끼리는 할 말 하고 살았는데, 그뿐인가? 동네에는 법이 있어서 사람 같잖은 놈은 동네에 살지도 못했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으며 전서방이 말을 끊자 끝봉이 받아서

"살도 못했지요. 동구 밖으로 쫓아내믄 그만이었인께. 사람짓 못하믄 맞아죽어도 말을 못하지 않았소? 세상이 이렇기 되어가다가는, 참말이지 이렇기 되어가다가는 조상 산솔 파헤치도 꿀묵은 버부리놀음 안 하겄소?"

한동안 세 사람은 풀이 죽어서 말이 없다.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나그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동네 인심이 너남지간 없이 날로 야박혀가는디 그 중에서도 우가하고 마당쇠하고가 젤로 큰일이란 말씨. 에지간히 나쁜 축에서는 걸맞지 않더라고? 성씨부텀 그렇제 우가는 외양간에 살어야 허고 마가는 마구간에 살어야 하는디 그래야 쓸 것인디 푼수없이 사럼집에 산께로 그런 횡패 아니더라고?"

풀이 죽었던 세 사람이 피시식 웃는다.

"우가도 우가지마는 속으로는 숭측한 독사뱀이 들앉았다 카더라도 우선 외면 치레만은 하는 놈이니께, 마당쇠 그놈의 행실이야 들내놓은 거고, 옛적 겉으믄 당산나무가 성가싰일 기고 볼기짝에는 멍 가실 날이 없었일 긴께."

"볼기짝에 멍 가실 날 없어도 제 버릇이야 남 주겄소."

"영락없는 되놈이라 카이. 마당쇠 그놈 모양을 보라고?"

전서방은 붕어 물 먹듯 담배를 피우고 처남 끝봉이와 매부 오서방 둘이서 말을 주고받는다.

"나쁘기로는 우가 그놈 곁방 나앉으라 하겄지마는 천치 겉은 데가 있어서,"

"칠푼이니 망정이지. 그 차중 우가놈맨치로 재주꺼지 피운다믄 동네 사람 다 잡아묵게? 하야간에 마당쇠 그놈 가진 거라고는 똥창에 똥밖에 없일 기구마. 그 주제에 꼴에 꼴방망이 차고 남해 노량간다고 제 제집만은 오금덩이겉이 우둔다 카이 한 가지 볼 점은 있는 모양이제?"

"그놈도 미친놈이고, 서서방맨치로 미친놈 자꾸 생기겄소."

누이를 좀 위하라는 매부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오서방 시뿌드드해서 말대꾸.

"허기야 마당쇠헌티는 과한 마누라 아니더라고? 제집이 그만헌께로 동네서 원성도 덜 듣는 거 아닌 게라우."

"세상에는 호랑이 잡아묵는 담보가 있다 카더라만 마당쇠 그놈한테도 무서븐 거는 하나 있지."

끝봉이 쓴웃음을 띠고

"순사 말이라?"

영산댁 말에 모두 웃는다. 붕어 물 먹듯 곰방대를 빨고 있던 전서방도 웃는다.

"주모, 여기 술이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영산댁이 허둥대며 환이 술잔에 술을 붓는다.

"순사만 보믄 꽁지에 불 붙은 거맨치로 그 덩치 하고서 도망가는 꼴이라니, 며칠 몇 밤 부엉이새맨치로 숨어 있는 꼴이라니, 가관이제. 오서방 잡을라꼬 순사가 왔일 때만 혀도 허 참 그자가 먼지 뛰더라니까."

"그란혀도 마당쇠 아낙이 며칠 동안 애먹었어라우. 어지 저녁때 게우 시루봉에서 찾았다잖여? 아그 달래듯기 달래서 데리왔단께."

"미련한 놈이, 하기는 순사라도 그만큼 겁내니께 논골 장서방도 그 원수는 면할 수 있었을 기라."

"그런달 것 겉으면 논골 장서방이 순살 물러딜이서 마당쇠를 내쫓았다 그 이야기라?"

"장서방이 무슨 권세 있다고? ."

"그렇담 무신?"

"새로 된 땅 임자가 머 왜놈이라 카든가, 왜놈 첩년이란 말도 있고, 그거야 머 자세히 아나마나, 하야간에 세도를 가진 놈이겄지. 순살 불러들일래믄,"

"그도 그렇겄소. 순사 말이 났인께로, 아 금매 지난분에 마서방, 순사만 보면 꽁지에 불 붙은 거맨치로 달아나는디 워째 그런당가? 허고 물었더니 항우장사라도 우쩔 기든고? 화등잔 겉은 문서 있는 제 땅도 뺏들어가는 왜놈이니께, 총 한 방이믄 그만이라요. 내 이 눈으로 푹 꼬꾸라져 죽는 꼴을 봤이니께, 아무리 내 심이 항우장사라 캐도 총 앞에서는 벨 수 없는 기라요. 아 지리산의 생이틀 겉은 호랑이도 총알에는 못 당하니께, 허질 않겄소? 그 말 듣고 한참 웃었제라우."

시름을 잊은 것은 아닌데 모두 웃는다. 화제에 오른 마당쇠, 성은 마가요 이름은 당쇠라 해서 마당쇠인데 환이 주막으로 올 때 만난 그 사내가 마당쇠이다. 이야기를 더 거슬러 올려 본다면 십 년 전, 호열자가 퍼졌을 그 무렵 그러니까 죽은 최참판네 김서방이 마름 장서방 집에서 만난 일이 있는 바로 그 농부다. 참판네 마름이믄 천하제일이오! 떼거지라니! 없는 놈의 이름도 성도 없다 말이오! 하며 험상궂은 얼굴에 눈을 까뒤집고 덤비던 사내, 해면 해마다 약정한 대로 수곡을 낸 일이 없고 그럴 때마다 땅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은 거품을 물고 울부짖고 어느 놈이 죽는가 사는가 보자! 동네가 떠나가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괭이를 둘러메고 논으로 달려가던 사내, 논둑에서 몇 날 몇 밤을 지새우며 누가 논을 떠메고 갈 듯이 지키던 미련한 마당쇠였었다. 그 마당쇠가 논골에서 순사에게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마당쇠의 뚝심은 최참판댁으로 밀고 들어갔고 화장작같이 안마당에 드러누워 이치가 안 그렇소오! 최참판네서 땅만 팔지 않았다믄 와 내가 쫓겨났겄소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마침 마을을 떠나는 작인이 있어 결국 평사리에서는 혹을 하나 붙이고만 셈이다.

", 가리늦기 이기이 무슨 고생일꼬. 아무튼지간에 동네에 남아날라 카믄 우가놈 겉이 영악하든가, 마당쇠 겉이 미련하든가 둘 중 하나라. 이차에 그만... 생각을 고쳐묵고 저븐 생각도 들고, 부산 겉은 도방에나 나가서,"

오서방 탄식에 끝봉이

"부산 가서 머 해먹고 살라꼬."

"산 입에 거미줄 치겄소. 선창가에서 짐이라도 날라주믄 설마 밥이야 안 굶겄지요."

"내 고장도 인심이 이러크름 신산헌디 객지서 어느 누가 타관사람 반기겄으라우?"

"도방이니께... 남이야 밥을 묵던 죽을 묵던 참견이야 안 하겄지요. 안 한 의병질 했다고 찌를 놈도 없일 기고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마음을 놓고 살아야지."

"그럴 바에야 부산 갈 것 없고 더 멀리 만주 땅에나 가지 머."

"살자니 그렇고 더나자니 또 정처 없고 참말이제 우쨌으믄 좋을지 모리겄소."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여. 절에 가면 편헐랑가 혀도 가보면 그렇고, 참고 살아야제. 부모 산소의 풀은 베야, 안 그렇더라고?"

"그러시오. 우짠지 동네에 들어가기가 싫구마요."

"싫으나 좋으나 할 수 없제."

전서방이 곰방대를 털고 허리춤에 찌르며 일어섰다.

"빌어묵을, 제집자식만 없이믄 그놈을 그만, 내 죽고 지 죽고."

전서방은 오서방을 떼밀고 나가고, 끝봉이 술값을 내면서 처음으로 그곳에 외간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환이를 힐끗 쳐다본다.

"..."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그 눈매, 끝봉은 까닭도 모르고 허둥대며 주막을 나간다. 허둥지둥 두 사람 뒤를 따르다가

'가만있자아?'

걸음을 멈춘다.

'가만있자, 가만있자... 누구더라? 저게? , 맞다! 최참판네 머슴놈 구천이다아!'

끝봉은 오던 길을 되잡아 주막을 향해 사뭇 달려간다.

'허 참 뜬금없이, 그자가 여기 머힐라꼬 나타났이꼬? 죽었다 카더라마는 설마...'

그러나 끝봉은 자석같이 잡아끄는 그 눈을 똑똑히 기억한다. 끝봉이 주막 앞에까지 갔을 때 끝봉이 돌아올 것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환이는 문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쫓는 처지도 쫓기는 처지도 아니었는데, 원수도 친구도 아니었는데, 끝봉이로서는 어리둥절한 대결이다. 말한 마디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환이에게 잡힌 눈을 빼내지 못해 숨이 가빠온다. 얼굴이 벌개진다. 환이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드는 순간 끝봉은 물러섰다. 미소짓던 얼굴, 악귀 같은 얼굴, 끝봉은 몸서리를 치면서 헐레벌레 걸어간다. 저만큼 개울가를 따라서 걸어가는, 무명 두루마기에 갓 쓴 전서방과 동저고릿바람인 오서방 뒷모습을 향해 끝봉은 급히 걸어간다.

"사돈,"

"와 그라요."

전서방이 돌아온다.

"오서방!"

"?"

오서방도 돌아서서 기다린다.

"거 희한한 일이 다 있구마."

"머가요?"

"주막에 말이다. 혼자서 술 마시고 있는 사람 안 있더나?"

"."

"누군지 아나?"

"우찌 알겄소."

"구천이다. 최참판네 머슴 구천이란 말이다."

"머라 카요?"

"사돈, 틀림없는 구천이오. 이 눈으로,"

"허허어, 신소리 그만허소."

전서방은 일소에 붙인다.

"틀림없는 일이라요. 나도 하 이상해서 주막에 도로 안 갔십니까? 가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는 수도 있인께."

"허허어 참, 내 말이 안 미더브믄 사돈이 가서 한분 보소."

전서방은 팔자걸음을 휘적휘적 걸으며,

"가서 볼 것도 없고, 설사 거기 있는 살매이 구천이라 캐도 우리하고는 아아무 상관없는 기라요."

", 그거사 그렇십니다만,"

"구천이가... 그거는 아마도 처남이 잘못 보았을 기요.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만무 아니요."

"아아니 그거는,"

"구천이가 죽은 지 언제라꼬요? 지리산에서 최참판네 사랑양반한테 총 맞아서 죽은 걸 모릴 사램이 없지요."

"그것은 헛소문인 기라. 말짱 헛소문,"

"허허어 남우 일에 와 이래쌌는고?"

그러나 세 사람은 구천이가 죽었느니 살았느니, 아니라니 기라니 계속 말씨름을 해가면서 마을로 들어갔을 때 정자나무 아래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둘러서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와 이러요?"

끝봉이 기웃이 들여다본다.

"설사 구신이라 카더라도 보기는 본 거라요. 무신 돈 나오는 일이라꼬 내가 거짓말을 하겄소."

기운이 한 푼 없다는 시늉으로 팔을 젓는, 얼굴이 싯누런 육손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육손이 니 딸네미를 서울에 뺏기고 보니, 하기야 그럴기다. 정신이 온전찮으니께 이것저것 헛갈리는 기라."

"내만 보았소? 내만 보았다믄 나도 믿지 않겄소만 서서방네 자부도 보았다 안 카요."

"그러시... 그기이 정말이라 칼 것 겉으믄 생각해볼 일이제. 그놈이 어디메쯤 갔는지는 몰라도 다리몽댕이 성한채 돌리보내는 거는 아닌데,"

저승꽃이 피고 쪼글쪼글 주름져서 늙은이 티가 완연한 봉기는 하얀 혓바닥을 내둘러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말했다.

"그거라믄 내가 알구마요."

끝봉이 어깨 너머 얼굴을 내민다.

"알다니?"

"어디메쯤 간 기이 아니라요. 바로 영산집 주막에서 술 처묵고 있더마요."

"그기이 정말이가?"

"거 보소. 내가 헛것을 본 기이 아니라요."

육손의 얼굴에 기운이 돌아온다.

"허 참 요상한 일이 다 있네. 거짓말 겉네."

"방금 주막서 만내고 온 기라요."

끝봉이 그들 사이에 끼여들려고 발돋움을 하는데 옆에 있던 전서방이 옆구리를 찌른다.

"...?"

"가는 편이 좋겄구마는,"

눈짓을 한다. 시꺼먼 수염에 온통 얼굴이 가려진 사내가 괭이로 땅을 툭툭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서방의 많찮은 수염이 푸들푸들 떤다. 중풍 든 사람처럼 입술이 비틀어지며 얼굴 근육 전부가 실룩실룩 움직인다.

". , 가입시다."

전서방과 끝봉이 양편에서 오서방을 떼밀 듯,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뜬다. 음흉스럽게 빛나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괭이 든 사내는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 퉤퉤퉤."

하며 가래침을 뱉고 씨익 웃는다. 그러는 새 모인 사람들 속에서 봉기는 나잇값을 하느라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한분 생각해보는 기이 좋을 기구마. 와 우리가 오늘 이지겡으로 살기가 답답해졌는지를. 그거는 날아가는 새 잡고 물어봐도 알 기구마. 그거는 으흠! 그거는 두말 하믄 입 아플 기고, 그거는 최참판댁이 망한 때문이다. 어째서 망했노! 할 것 같으믄, 아무아무 땜에 그랬다 할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시초는 구천이라, 머슴놈 구천이가 별당아씬가 하는 제집을 업고 달아나지만 안 했이믄 아무리 망했다 망했다 해도 이 지겡까지는 안 됐일 기라. 이 동네가 아주 풍지박산이 된 것도 자초지종..."

하는데 어디서 난데없이

"그렇구마. 최참판네만 안 망했으믄 왜놈한테 땅을 팔았이까! 내가 순사놈한테 쫓기서 논골을 나오지도 않았일 기고오!"

우레 같은 마당쇠의 음성과 함께 험상궂은 얼굴이 사람을 헤치고 들어선다.

"듣고 본께 일리 있는 말이라. 별당아씨라는 여자가 살림을 차고 앉았이믄 왜놈 세상 되었다고 이리 허망하까?"

"그라고오, 또오 한 가지이, 우리가 아무리 무식한 농사꾼이지마는 조상 대대로 지키온 기이 삼강오륜이라아. 알겄나아!"

봉기 자신도 모르면서, 그러나 신이 나서 목을 뽑는다.

", 그렇고말고,"

어물쩍거리는 장단이다.

"그러니 머슴놈 구천이는 남으 제집을 돔바갔으니 옛 법에는 장살감이라! 그렇나 안 그렇나!"

", 그도 그렇자."

"지금이사 양반의 세도가 땅으로 뚝 떨어졌고 거기다가 이 동네는 양반이 모두 집을 비우고 없는 기라. 하니께 우리도 삼강오륜을 지키온, 상놈일지라도 천민은 아니고 보믄 종질하든 구천이놈 작살을 못 낼 것도 없다, 내 말은 그거라."

"작살뿐이겄소오! 맷돌에 갈아부리지"

"그럴 거 없이 당산나무에 매달아서 몽둥이질이나 몇 분 하고."

심약한 편의 제안이다.

"아무튼지 간에 그놈이 달아나기 전에 잡기부터 하는 기이 좋겄소,"

해서 봉기가 앞장선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주막으로 달려간다. 점심때가 가까워지는 시각이다. 뿌연 햇살이 섬진강 물결 위에서 희번덕이고 있었다.

"구천이 네 이노옴! 이리 나오니라아!"

주막 앞에 이른 마을 사람들, 그 중에서 봉기가 혼신의 힘을 모아 외쳤다.

"뭣이랑가? 오매! 이게 워찌 된 영문이요잉?"

영산댁이 치마끝을 밟아서 휘청거리며 일어섰고 환이는 잠자코 허리끈을 졸라맨다.

"구천이 네 이노옴! 이리 못 나오겄나아!"

이번에는 합세한 고함이다. 그 중에서 마당쇠 음성이 유독 짐승 울음같이 굵고 크다.

 

 

12. 백정네 식구

"분명 어제 새벽녘에 나갔소?"

혜관이 긴장된 얼굴로 묻는다.

"그렇소. 첫새벽이라 떠나는 것은 보지 못했소이다만 강쇠를 깨워서 운봉어른 뫼시고 먼저 가라 이르더랍니다."

혜관의 긴장에는 개의치 않고 윤도집은 냉정히 말했다.

"어디 간다는 행선지도 말 않구요?"

"글쎄올시다. 거기 대해선 강쇠가 말 안 하더군요"

"그래요? 화엄사에 소승을 만나러 오게 돼 있었는데... 거 이상하군요."

"혜관께서도, 아 하루이틀 일이라도 그 사람 걱정이오? 이곳에도 하루 늦게 왔더이다."

윤도집은 입맛을 다시며 쓰다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그저께 회합 때 환이 쪽에서 절반쯤은 양보했다고는 하나 환이가 내놓은 방안이라는 것은 여전히 종전대로, 그 방침을 굳힌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세를 확장한다거나 전력을 증강한다는 거나 엄밀히 따진다면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왜냐하면 윤도집 역시 교세확장이란 전력 증강의 위장임을 셈하고 내민 터수였으니까. 전혀 감정적 촉각이 없었다 한다면 거짓이겠는데 판단이나 신념을 내던지고서 다툴 만큼, 윤도집이나 환이 다혈질은 아니었다. 그러나 윤도집 쪽은 미처 자세한 설명이 있기 전에 교세 확장으로 몰리고 환이는 전력 증강에 치우치는 분위기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론 환이 양보한 것 같으면서 결코 양보한 것이 아니라는 미묘한 결과, 윤도집으로선 유쾌해질 리가 없다.

"윤도집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엔 서울로 해서 간도 쪽으로 가게 돼 있지 않소이까? 그래서 그 사람 오기는 올 터인데 그래 근심이 되었지요."

"오늘쯤 화엄사로 갈지도 모르지요."

"그렇긴 하오만... 꼭이 만나보고 떠날 이유는 없어요."

혜관 얼굴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떠돈다.

"꿈자리라도 사나웠소?"

"소승 심이 맑지 못해 늘 개꿈만 꾸는 터이니 오랜 옛적부터 꿈은 믿지 아니 하오."

혜관은 약간 성이 나서 말했다.

"그런데... 혜관께서는 얼마나 기일을 잡으시오?"

"글쎄올시다. 철도편으로 갈 테니까 옛날 같기야 하겄소?"

"초행이지요?"

". 만주는 남의 땅이니까."

"하지만 간도는 조선 땅이오."

"말로야 수천 번인들,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격 아니겠소?"

"허허허... 그렇긴 하오만, 간도만 다녀오시겠소?"

"마음으로야 연해주, 그 밖의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이라면 다 가보고 싶소이다."

"그러다가 중옷 벗고 아니 돌아오시면 큰일이지요?"

"그야 모르는 일, 청국 여자 얻어서 살림을 차릴지 뉘 알겠소?"

"그도 해로운 얘기는 아니외다, 허허허. 헌데 스님."

"말씀하시오."

"이번에 그 사람이 내놓은 방안이란 걸 혜관께서도 보시었소?"

"아니오."

"그래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윤도집은 문갑을 열고 네댓 겹으로 접은 한지 하나를 꺼내어 방바닥에 펴놓는다. 가느다란 붓으로 그린 도판 비슷한 것이다. 대강 짐작은 갔으나 혜관은 상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환이 그 사람하고 의견의 충돌은 있었으나 그러나 머리만은 참으로 명석한 사람이오. 이거 보십시오."

혜관은 도판 비슷한 것을 들여다본다. 지리산을 중심하여 그 주변에 검은 점 여남은 개가 찍혀 있다. 그러니까 검은 점은 지리산에 가장 가까운 둘레의 요지들이고 그 요지들 둘레에는 스무남은 개 정도, 검은 점에다 동그라미 한 개를 친 것이 그려져 있다. 그밖에는 동그라미가 두 개, 또 그밖에는 동그라미가 세 개, 다음은 아주 먼 곳으로 뛰어서 화살표로 표시된 그냥 동그라미가 여러 개 된다.

"우리가 기왕에 우리 사람들을 심었던 곳은 혜관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고 여기서 보시다시피 멀리는 강원도 충청도 서울까지 우리자리를 넓히는 건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넓히느냐 그 방안도 이미 서 있고, 나로서도 이의를 말할 하등 잘못이 없는 듯하오."

"이건 종전의 배가 넘는 지역인데 과연 이렇게 확대하여 무슨 수로 감당하지요?"

혜관은 주의 깊게 윤도집의 눈을 쳐다본다.

"물주를 잡아야지요."

"누가? 무슨 수로?"

"전부가, 특히 환이 그 사람, 나 그리고 혜관께서."

"있은 것을 뜯어 나누는 일말고는 그런 재간 없소이다."

"그런 얘기는 그 사람보고 하시오. 그러면은 그 사람이 재간을 심어줄 것이오. 허허헛..."

혜관은 난감하고 답답한 듯 손톱을 물어뜯는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사람이 모자라오."

"그러니까 혜관께서는 청나라 계집 얻어서 살림 차릴 생각 마시고 돌아오시야지요. 허허헛..."

"글쎄외다. 이러면은 부득불 청나라 여잘 얻어서 돌아오지 말아야 겠소."

"여기 보시오."

윤도집은 도판을 가리킨다.

"이렇게 검은 점 하나에다 여러 개 동그라미 하나씩 더한 것을 묶어서 모아놓지 아니 하였소?"

"그렇구먼요."

"실상 검은 점은 그림자요. 검은 점의 자리는 사람이 있되 노상 없는 거요."

혜관은 도판과 눈싸움을 하듯 검은 점 하나를 노려보고 있다. 골이 진 중머리가 요동하지 않는다. 법의 깃 사이로 뻗어난 굵은 목이 아직은 힘차고, 뼈마디 굵은 손, 아까 물어뜯던 손톱 사이에 꺼먼 때가 끼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검은 점에 있는 인물들은 건달패, 대장장이, 장사꾼, 객줏집, 판수, 혹은 백정 무엇이든 제각기 생업에 종사허고, 가령 여기 임실의 지삼만이 관수가 있는 여기 진주를 위시한 둘레 몇 개 고을에다 지삼만의 수하를 펴서 일해나가는 거구, 관수는 또 임실을 위시한 둘레 몇 개 고을에다 제 사람을 심는 거요. 이런 방안으로 동그라미 두 개 세 개에다 사람을 펴나갈 것 같으면 이 검은 점은 그림자요 나타나지 않는 숨은 곳이요 따라서 일을 벌여가는 데 있어 어느 한 곳이 처지더라도 그곳에 그칠 뿐 비화될 염려가 없게 되는 거요. 항용 일이란 크게 벌이면 크게 벌일수록 구멍 뚫릴 확률이 많은 법인데 그것에 대빌 아니 하고서야 밑천도 이윤도 다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허니 그 사람의 이 방안은 매우 잘 된 것으로서, 나도 곰곰이 생각할수록 감탄을 하는바요. 다만 이 같은 개편에 당사자들이 어리둥절한 모양이고 당황해지는 모양인데..."

"한마디로 번거로워졌소이다."

혜관은 또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도판 앞에서 물러나 앉는다.

"번거롭기보다 앞으로 새 인물이 새 지역을 손아귀에 넣고 다루는 솜씨, 역시 사람이오."

윤도집은 도판을 접어 문갑 속에다 넣고 나서

"결국은 동학교로 밀고 나가서 동학당으로 하느냐 초반부터 동학당으로 하느냐..."

"지금 이 시국에 어렵지요."

윤도집은 혜관을 빤히 쳐다본다.

"교로 밀고 나간다면 무당 판수를 지도적 인물로 앉힐 밖에요."

"말씀 계속하시오."

"안 그렇단 말씀이오? 기왕에 하나도 아니요 두 개씩이나 동학교가 있는데 당을 감추고 교를 앞세운달 것 같으면 다 건져버린 국에서 시래기 건지는 격 아니겠소오. 점판에다 엽전 한두 닢 올려놓고 신수점이나 하는 식의 우매한 백성이 다소는 모이겠지요. 나라를 위해, 가난한 백성을 위해 싸우기는커녕 죽 먹기에도 코가 석자 오치나 빠질 사람들, 그들을 먹여 살릴 자금은 또 어디 있고요? 소승 생각엔 윤도집께서 군자금 생각도 하시고 해서 교도들을 많이 수용할 요량인 모양인데 그건 종이 위에서만 나온 셈이오. 어쨌거나 교는 시세 없을 거요. 당이라야, 아니 할 말로 칼 들고 들어가서 왜놈 전대라도 털어올 놈이 생길 것 아니겠소오?"

"바로 그런 자를 만드는 순서가 아니오. 종이 위에 낸 셈이라야지 아무데서나 그때그때 따라서 주먹구구는 안 되오."

"말은 해야 하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랍니다. 꿍얼꿍얼 넣어두니, 소승의 처지를, 또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달 것 같으면, 당이 아닌 교로 나가시겠도, 그런 방침을 굳힐 경우 손을 끊을 수밖에 없소이다. 명색이, 비록 땡땡이중이라 하더라도 불교계에 몸 담은 놈이 그래 동학교 전도나 하고 다니겠소오? 앞으로 얘기가 또 되겠지만 돈푼 있고 땅마지기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진실로 나라 생각하는 사람은 불소하고 또 유형무형으로 왜놈에게 침해를 받은 사람도 많을 거외다. 그런 사람을 두고 생각할 적에 당이라는 것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또 조력도 받을 수 있겠으나 절에 와서 시주하고 공양하겠소이까? 그 점 생각해보시야 할 거외다."

"우리 오늘은 이만, 더 이상 거론 맙시다. 수십만 동학교도들의 옛 모습을 잊고 하시는 말씀이오."

"그때 형편과 지금 형편이 다르오. 그 수십만 동학도 대부분은 왜놈에 의해서, 이용구 손병희에 의해서 초간장이 된 거요."

"허허 오늘은 이만허고오, 혜관께서는 이번 길에 그곳 사정이나 소상하게 알아오시오. 그런 후 우리 다시 얘기하지요. 의견은 많을수록 좋은 방안이 나오는 법이니까."

"대신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살으로 올라가지요. 하하핫..."

"허허허... 그렇기도 하긴 하지요. 안 그럴 수도 있구요. 허허헛..."

윤도집과 작별한 혜관은 다시 저녁 무렵 화엄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환이는 오지 않았고, 왔다갔다는 얘기도 없었다.

'이 자가... 아무래도 그냥 가버린 모양이구먼. 하긴 뭐 만난다고 필히 당부가 있는 것도 아니겠고 최참판네 손녀한테 지가 할 얘기 있을 턱이 있나.'

혜관은 다음날 새벽 진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진주서 관수를 찾아간 혜관은

"그래 봉순이 그 아이 거처는 알아놨냐?"

". 성내 사는 소화란 기생이 주선을 했길래 여기 주소를 얻어놨고요, 또 봉순이 떠나믄서 하는 말이 이부사댁 서방님하고는 연락이 닿을 터인즉, 혜관스님께서는 그 이사부댁 그 사람의 거처를 아실 거라,"

"알긴 알지. 아닌 게 아니라 서울 가면 그 사람을 만나서 좀 더 소상히 알아 떠날 생각이구먼."

혜관은 자갈이 한없이 깔려 있는 강변이자 관수의 처가, 울타리 없이 마당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을 바라본다. 여러 날 비를 보지 못한 강변 자갈 위의 햇볕은 봄이지마는 뜨겁게 느껴진다. 쇠가죽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우리 속에 병아리가 삐약거린다.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가 자갈밭을 뒤뚝거리며 걸어가고 다람쥐같이 젊은 여자 하나가 달려나오더니 아기를 안고 도망치듯 부엌 쪽으로 뛰어간다. 혜관은 여자와 아기가 가버리고 없는, 햇볕만 내리쪼이는 자갈밭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하얗게 바래어진 자갈밭은 백정네 인생처럼 살풍경하다. 마을을 흘러다니며 가락을 뽑는 광대들의 그 한맺힌 가락 하나 없이, 햇볕에 타고 있는 쇠가죽처럼 핏빛에 얼룩 진 백정네 인생이 거기, 자갈밭에 굴러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의 염불 소리였다. 관수는 눈이 희번덕인다. 머릿골이 울툭불툭한 혜관의 옆모습을 쏘아본다.

"동학당한테 염불은 무신, 소 때리잡는 기이 업인데 부처님 은덕을 입을 기든가? 극락왕생할 리도 없고."

어조나 음성이 매우 불손하다. 혜관은 퉁거운 고개를 비틀 듯 하며 관수를 쳐다본다. 피시시 웃는다. 무안쩍어 그러는 것 같다. 혜관은 본시 심성이 여린 사람이다. 나이 들고 체중이 늘어서 유들유들했음에도. 관수는 제 처자에게 동정한 혜관이 미웠던 것이다. 그 감정은 관수 나름의 제 처자에 대한 연민이다.

'코 하나에다가 눈까리는 두 개 있고 아가리는 하나, 남하고 어디가 다르노. 다를 기이 머 있노 말이다. 같은 사람인데 머가 불쌍타 말고. 불쌍할 것 한푼 없다고. 다 같은 사람새끼 아니가.'

"진주로 오기 전에 환이를 한번 보고 올려 했는데 못 만나고 왔구먼."

혜관은 슬며시 화제를 돌린다.

"못 만내요?"

"."

"만내기로 했십니까?"

"잔치 끝내고 화엄사로 오겠다 했는데,"

"그거는 잔칫날 하로 늦기,"

"들었네. 기다리다가 안 오기에 내가 윤도집댁으로 갔었지.:"

"꼭이 만내고 가시야 할 일이라도 있십니까?"

"그런 거는 아니지만..."

"본시 성미가 그러니께요. 밤도깨비 아닙니까?"

혜관은 입맛을 쩍쩍 다신다.

"그렇다믄, 시님께서 윤도집넬 찾아가싰다믄 전후 사정, 시비 얘기를 들었겄구마요."

"대강은,"

관수는 얼굴에 비웃음을 띤다.

"윤도집 그 어른이 만 번 그래봐야 별수없일 거로요? 윤도집 말심이 조리는 있십니다마는 따지고 볼 것 같으믄 목탁 뚜디리믄서 들어오는 불공이나 받아 처묵는 중이 되라, 그 얘기 아니겄십니까? 동학이야 본시부텀 쌈으로 시작된 거지 돈 걷어서 요량껏 하자 그거는 아니었으니깨요."

"허허어, 관수 자네도 낭팰세. 그렇게 성품이 옹졸해서야."

"대천지 한바다처럼 맴이 넓었으믄 극락이야 가겄지마는 남으 등에 칼 꽂는 짓이야 하겄십니까?"

독기 서린 그 말을 들어 넘겨버리고

"그릇이 크다보면 빌어먹어도 빌어먹는다는 생각은 아니 할 것이며 대덕이 되다보면 고기를 먹어도 살생계를 아니 생각할 것인즉, 사람백정이건 소백정이건 낯을 가려서 뭘 하겠나? 거지, 소백정, 갖바치 할 것 없이 시혜를 받는 편은 거지를 거지로 생각할 것이요, 소백정을 소백정으로 생각할 것이요, 갖바치를 갖바치로 생각할 것이나 심신을 바쳐 만백성을 도우고자 뜻을 세운 사람이면 일국의 제왕이건 다리 밑의 걸인이건 추호 다를 것이 없느니..."

혜관은 자못 엄숙한 낯빛으로 관수를 나무란다. 목탁 두드리며 들어오는 불공이나 바다 처먹는 중, 하며 내뱉은 말이 사심 없는 비판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혜관이 알기 때문이다. 백정의 딸인 아내와 백정의 손자인 아들에 대한 연민이 관수의 심사를 일그러지게 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뜻이야 그런지 모르겄소만 머, 그릇이 크믄 얼매나 크겄십니까. 산간벽촌의 매 한 마리가 붕새 꿈을 꾸겄십니까?"

여전히 반항적이다.

"하하핫... 그릇 크기를 말한달 것 같으면 피장파장이지 뭐. 우리끼리는 싸우지 말자구."

혜관은 쉽게 타협의 기색을 나타내 보이며 교활하게 씨익 웃는다.힐끗 쳐다보는 관수 눈에 노여움은 없었다.

"그는 그렇고, 한조 아들네미 그 아이 얘긴데,"

"..."

"처음 내가 생각하기로는 대장간 일이라도 배우게 하면서, 차츰 가르쳐볼까 했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런데요?"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럽다.

"서울 가는 길에 데리고 가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나는군."

"서울요?"

"."

"서울 데리가서 우짤라꼬요."

"어쩐다기보다는,"

"촌닭 장에 갖다놔도 멋할 긴데 서울이라니, 주녁들어 병신 되기 아니믄 간뎅이가 부풀어 외자걸음 걷기 십상이지요. 잘 돼봐야 두만이 꼴 날 기고요. 어차피 좋을 것 하나 없소."

관수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혜관은

"이사부댁 그 사람이 서울에 있고 또 실팍한 연줄도 있는 모양이니, 그리고 봉순이가 있으니 말이야. 그애가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테고... 한조 아들네미 그 아아 신식 공부 좀 시켜보는 것도 훗날을 위해서 나쁘잖을 게야."

"신식 공부... 그러매요."

관수는 솔깃한 기색을 나타낸다.

"하지마는 그 아이가 일자무식, 물지게나 지고 컸는데 그 나이 해가지고 신식 공불 해내겄십니까?"

"그야 본인 마음먹기에 달린 거고, 영악한 지 애빌 닮았으면... 내가 보기엔, 영악할 뿐만 아니라 애가 진중해. 뭣이든 시키는 이상을 해낼 천성이 있는 것 같았어."

"그건, 지 생각에도 그렇긴 합니다만."

관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시님은 어쩌실랍니까?"

얼굴을 찌푸리며 혜관을 비스듬히 바라본다.

"?"

"오늘 밤은 어디서 주무시겄는지 그 말심입니다."

"잘 곳이 없으면 길바닥에 자면 되는 게야. 비 안 오시면 하늘은 천장이지. 안 그런가? 명색이 운수의 몸, 잠자리 걱정을 한 대서야."

잰다.

"백정네 집은 어떻소."

"나쁠 것 없지이-"

어미를 뽑았으나 혜관의 눈알이 빙글빙글 돈다. 일갈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는 모양인데 그러나,

"벼룩 같은 놈아!"

삿대질을 하는데 법의 소매가 마구 춤을 춘다.

"이 노래미 창자야!"

까까중머리가 흔들린다. 얼굴이 시뻘겋다.

"이놈아! 그따위 배장 가지고 평생 백정질이나 해먹어라! 이놈아! 그래 이놈아! 그렇기 비위를 못 샛길 양이면 백정 딸을 왜 얻었어!"

관수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시님!"

"왜 불러! 이 백정놈아!"

", 시님!"

"이놈아! 소 잡는 칼 가지고 날 찔러죽일 테냐?"

"그렇다! 이 중놈아!"

방밖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려왔다. 다음 헝클어진 맨상투의 육척 거구, 화등잔 같은 눈이 시뻘겋게 물든 사내가 칼을 들고 나타났다.

"이놈아! 백정이 니 에밀 XX묵었다 카더나?"

"장인어른!"

관수가 맨발로 뛰어나간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칼 든 손을 잡는다.

"놔라! 내 집까지 찾아와서 내 사윌 보고 백정이 우떻다고? 딸자식이지마는 내게는 금지옥엽이다! 그래 백정이니 우떻단 말고오!"

관수가 힘이 썼으니 망정이지, 늙은 백정은 피를 볼 작정인 모양이다. 미친 듯 날뛴다.

"장인어른.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내 다 들었다. 백정의 딸이니 갈라지라 그 말가! 내일 같으믄 골백 분이라도 차, 참겄다!"

뒤의 음성은 울음이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진정하시고 지 말 들으이소."

혜관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방문 앞에 벌어진 장인 시위의 실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수가 장인을 억지로 끌고 뒤켠으로 돌아가는 모양인데 이 소동이 벌어졌건만 백정의 마누라와 관수의 처인 그의 딸은 코빼기도 내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 관수는 돌아왔고 야트막한 여자 흐느낌 소리가 뒤꼍에서 들려왔다.

"시님!"

관수는 혜관 앞에 꿇어앉았다.

"잘못했십니다. 한분만 용서해주십시오."

"알았으면 됐네."

넌지시 말했으나 역시 혼이 난 음성이 목구멍에 걸린 듯 조그맣다.

"지도 앞으론 그런 생각에서 이겨보겄십니다."

"아암 그래야지. 그렇잖고는 정말 사람백정 노릇밖에 못하지."

", 알겄십니다."

저녁상은 성찬이었다. 말갛게 장만한 채소, 산나물로만 된 찬들의 가짓수가 여간 많지 않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산나물의 향기가 콧가에 스친다. 혜관의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난다.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듣자 관수 눈에 장난기가 어린다. 방에서 밖을 내다보며 부엌 쪽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보래! 이보래!"

대답이 없는데 다시

"개기국은 와 안 끓있노오!"

역시 대답은 없었지만

'아이구 참, 짓궂기도 하다. 시님보고 우예 개기국 잡수라 카노.'

아낙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업은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고 부뚜막에 걸터 앉아 젖을 물린다.

"과해도 모자라는 게야. 대덕도 아닌 중놈한테 고기라니, 소리 한 번 더 지를까? 또 칼부림 나게. 하하핫핫."

"하하하핫... 얼른 대덕 되십시오. 백정네 개기 좀 팔아묵게요."

"씨가 말랐으면 말랐지. 이 혜관이 대덕 되겠나."

혜관은 밥 한 숟가락에 밥 분량만큼 나물을 듬뿍 입속에 집어넣는다. 입속이 굴안만큼이나 깊고 넓은 것만 같다.

"시님 대덕 되시기 글렀고, 이 관수놈 붕새 되기 글렀고, 땡땡이중에다가 매 한 마리... , 매는 끊임없이 살생할 기고요, 땡땡이중은 거짓말만 하고 댕길 기고요, 별수 있겄십니까? 아무래도 지옥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 그렇십니까, 시님?"

"맞어. 하하하하... 하하하핫."

별안간 뚝배기 깨지는 소리를 내어 웃는 바람에 밥알이 튀어서 관수 얼굴에까지 날아온다. 어둑해졌을 무렵, 관수는 석일 만나러 간다고 나가고 혜관은 방안에 큰댓자로 누워서 집이 떠나게끔 코를 고는데 잠이 들어 코를 곤 것은 아니다. 아까 시퍼런 칼을 들고 날뛰던 헝클어진 맨상투에 육척 거구, 화등잔 같은 눈알에 핏발이 섰던 사내를 생각하니 으스스해졌던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13. 산놈으로 태어나서

"정신이 좀 드는가배?"

떴던 눈을 감아버린다.

"어이구 시상에, 이리 맞고도 심이 안 끊어졌어이, 하늘이 아는 자손 아니가, 하모. 그 어른이 냄긴 흔적인데 그리 어수럭히 가기야 할라꼬."

춘매는 환이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쓸어준다. 뼈와 가죽뿐인 손바닥이, 물기라곤 없는 메마른 손바닥이 어쩐지 징그럽다. 환이는 더욱 굳게 눈을 감는다.

'춘매도 육십이 훨씬 넘었을 게야. 오래 사는군.'

"우찌 그리 그 어른을 빼었는고. 씨도둑질은 못한다 카더마는... 나는 아이 적에도 그 어른을 보았고, 목이 짤린 그 어른의 죽은 얼굴도 보았건만 우찌 그리 부친을 뺐일꼬."

환이 얼굴에 경련이 인다.

"참말로 세월이 일장춘몽이다. 엊그제 같은 일들이 십 년 전 이십년 전 삼십 년 전의 일이라니, 나도 한세월은 좋았건만... 아이구 이렇게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이믄 우짜노... 나도 한세월은 좋았건만, 영웅호걸도 내 품에 들어올 것 같은, 아이고 참말로 무상한 거는 세월이라."

"에이, 어지간히 주절대는군."

혀를 차며 잡힌 한 손을 뿌리치고 돌아누우려던 환이 신음한다.

"아아니 정신이 돌아왔음서 으뭉스럽기는,"

하다가 춘매는 납독이 올라서 푸르죽죽한 입술을 쩍 벌리고 방금 찔끔거리던 것과는 딴판으로 사내처럼 웃는다.

"정신이 들었으믄 미음이라도 한 사발 묵어야 할 거 아니든가배?"

"내가 여긴 언제 왔소?"

"어지 저녁 때 들어서더니 픽 시러지더만. 옷은 갈갈이 찢어지고 어디서 우떻기 맞았길래, 하룻밤 하루낮을 송장겉이 자빠져서 죽었는가 싶어서 콧가에다가 손을 몇 분 대봤다고."

"미음 있으믄 주소."

", 그러지."

하다가 춘매노파는 꼿꼿한 허리를 가누더니 맨발이 문턱을 넘는다. 큰 발이다. 튼튼해 뵈는 발이다. 함께 살던 남정네는 십 년 전에 죽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춘매는 살던 산막에 주질러앉아 일구어놓은 화전에 수수, 옥수수, 고구마 등속을 심어 오늘까지 연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남정네를 두고도 강포수가 돌아오지 않으면 웅담 팔아 계집 집에 갔나보다고 강짜부리기를 서슴지 않았던 화냥기 많은 사당패 출신의 춘매, 최참판댁 최치수가 김평산을 지리산에 보냈을 때도, 늦게 돌아온 강포수에게

"아이고 돈 생긴 김에 또 계집질했구마."

"제기랄, 네 서방이라서 참견이가."

망태를 집어던지며 강포수는 투덜거렸던 것이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면 춘매노파를 안다. 또 지리산 안의 일이라면 춘매노파가 모르는 일이 없다. 모르는 일이라면 운봉노인 산하의 동학당이 재조직된 일과 환이 김개주의 아들인 것만은 아는데 윤씨 소생인 것은 모른다. 춘매노파는 강냉이가루를 끓인 뻑뻑한 죽 한 사발을 데워서 가지고 왔다. 뭐 특별히 환이를 위해 미음을 따로 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환이는 끙끙 앓으며 일어나 앉는다.

"이게 미음이오?"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죽으면 송장 치워줄랬더니,"

"내가 더 오래 살 긴께 걱정 안 해도 좋겄구마."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환이는 열려진 방문 밖의 구름이 물드는 하늘을 쳐다본다.

"어디서 뉘한테 그리 맞았는고?"

"알아 뭐하겠소."

"알아 바쁠 건 뭐 있을꼬."

춘매노파의 말투는 공대도 반말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다. 공대하기는 나이 어려서 아들 같았지만 반말하기에는 천하를 삼킬 듯 기승했던 그의 부친에 대한 존경심이 허락치 않는 때문이다.

"유부녀 겁탈하려다가 맞았지요."

"에이구, 누가 그 어른 아들 아니랄까봐?"

"뭐라구요?"

"아 그 어른도 수절과부 겁탈해서 이녁을 낳지 않았던가배?"

"수절과부! 그가 누구요!"

환이 눈이 험악하다.

"우리라도 알았더라면 버얼서 어마님하고 상면했일 거로?"

"모른다 그 말이오?"

"모르지. 돌아가신 그 어른이나 알까. 칠칠 한밤중 겉은 비밀인께."

"! 살아온 가락이군."

환이도 춘매노파에 대해서는 마음을 방치하는 눈치다. 말투가 헤픈 것으로 보아서.

"그나저나 우짤 긴고? 몸이 그래가지고 몸조리를 해얄 긴데..."

"탕수국 냄새 나는 할망구 옆에서 몸조리가 될 턱이 없지."

"말도 우찌 그리 야박스러울고? 미음이나 들라니까."

"이름이 좋아 불로초요. 어디 미음이라 생각하고 강냉이죽을 먹어볼까?"

팔뼈가 잘못되었는지 숟가락을 들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먹여주어도 좋을지 모르겄네."

"그놈의 화냥기는 여전하구먼."

"성미도 참."

환이는 죽을 먹기 시작한다. 얼굴에도 온통 피멍, 손등도 푸릇푸릇하다. 주막집 영산댁이 물을 퍼부으며 말리지 않았던들.

"정 이러크름 헐 양이면 내 순사 데리올 것인께! 알아서들 하더라고."

그 말이 주효하여 마당쇠가 먼저 물러났다.

"워째 구천이는 꼼짝도 안 한당가? 아 시상에 아비 직인 샐인죄도 그 자식밖에는 칠 곤리가 없는 게라우! 최참판네 사돈팔촌이나 된다고 이리들 헌답디여? 인심이 이래가지고, 괄시받는 사람끼리 혀야 옳다 그 말이여라우? 이렁게로 조선이 안 망허고 어쩔랍디여, ? 살이 살을 무는디 남이사 오죽이나 허겄소잉? 이보더라고! 구천이! 처 죽일 놈의 인사들헌티 맞기는 왜 맞는디야?"

결국 한 사람 두 사람 슬금슬금 물러갔다.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물러가던 마을 사람들은 얼마큼 가다간 도깨비에 또 다시 홀릴 것 같은 생각이라도 들었던지 마구 뛰면서 도망을 친다.

"어이구 이 사람, 아 여길 오기는 뭐하러 왔디야? 온 게 잘못이여, 잘못, 이 피!"

영산댁은 바가지에 물을 떠서 환이 이마에 끼얹어준다.

"얼굴 뒤로 젖혀. 코피니게. 아 시상에 맞아죽을 심산이었어? 도망을 치든지 대항을 하든지 그 사람들헌티 맞아야 헐 까닭도 없는디 워째 꼼짝없이 당하더라 그 말이여?"

영산댁이 말리지 않았던들 맞아죽었을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피를 보고 미치는 짐승이었으니까. 올라가고 내려가는 숟가락 따라 눈이 올라가고 내려가던 춘매노파.

"아무래도 모릴 일이구마는,"

"뭐가요?"

"아 생각해본께 그렇구마. 심이 장사인 강쇠도 성님한테는 못 당한다는 말을 했고, 또 그렇지 않던가배? 지리산을 비우겉이 날아댕기는 걸음걸인데 수백 멩 군사한테 둘러싸인 것도 아니겄고 대항을 해도 이깄일 거 아니던가배? 사세가 불리하믄 도망을 쳤어도 그 뉘가 따를 기라고? 내사 심상찮구마."

"말이 많소, 허기 들게. 보릿고개를 자알 넘긴 푼수구먼."

"! 보리밭 한 때기라도 있이야 보릿고갤 넘지. 그런 소리 말고 강쇠보고 토깐이 개기라도 좀 주라 하는 기이 좋겄구마. 솟정나서 못 살겄는데. 늙은 사람을 위해야 복받는다 안 카던가."

"강냉이죽 한 사발에 염치 좋소."

"염치? 내 이팔청춘 시절에도 염치 안 채리고 살았는데 가리늦기 염치 채리까?"

"그만하고 가서 강쇠나 데리고 오소. 토깐이 고기든 호랭이 고기든 이녁 입으로 부탁하고."

"내 말 들어묵으야제."

"하여간에 강쇠나 데리고 오소."

환이 죽 한 사발을 다 먹고 이마의 땀을 씻는다.

"벌시 해가 다 졌는데 우찌 가라고?"

"질긴 고길 먹을 지리산 호랭인 없을 테니."

"어이구 그라믄 강쇠를 데꼬 온다! 대신 토깐이 한 마리 안 주고는 안 될 거로."

춘매노파는 짚세기를 끌고 나간다.

", , 허허허헛..."

환이는 혼자 되자 헛웃음을 웃는다.

'미친놈! 네가 정말 맞아죽고 싶었던 겐가? 왜 무엇 땜에, 죄를 쳐서 그랬었나? 죄를 쳐서 말이야. 으흐흐흣! 아니야. 거기 가보고 싶었다. 거기 연못에 가보고 싶었다.'

환이 눈동자에 괴이한 열기가 떠오른다.

'이건 끝이 없는 쳇바퀴요, 나는 한 마리의 개미 아니겠소? 아무것도 없는, 가도 가도 꼭같은 길이요, 길이 있을 뿐이오. 여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진달래 꽃잎 따서 화전 부쳐주겠다던 당신은 없구려.'

환이는 흐느껴 운다. 꿈속에처럼 흐느껴 운다. 초롱을 들고 여자의 한 팔을 껴안은 채 고소성 골짜기를 지나가던 그 한밤. 여자의 가슴에서 치는 고동 소리가 가랑잎 구르는 소리 사이로 뚜렷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었다. 여자는 걷다가는 최참판댁 쪽을 돌아보며 울었다. 서희야! 서희야! 울부짖는 여자의 마음속의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치수에게 쫓겨 산막을 버리고, 신발조차 벗겨진 여자를 이끌고 달아나던 그날 밤, 여자는 잠들지 않았어도 헛소리를 질렀다. 헛것을 본 듯 낭떠러지로 달려가곤 했었다. 환이도 낭떠러지 아래 황홀한 죽음을 보았다. 황홀한 죽음을 보며 열망하며 그 자신도 헛소리를 지르며 걸었다. 찬바람에 굳어졌던 땅, 잡목 숲에서 들려오던 부엉이의 울음소리, 여자의 작은 손이 손아귀 속에서 타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석등 불빛이 비스듬히 땅에 깔려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찹신만 같았던 우관선사의 법의는 시꺼먼 숲의 어둠을 등지고 있었다. 두 줄기 안광이 환이 이마를 꿰뚫었다. 우관선사의 법의는, 육신은 점점 커졌다. 더욱더 커져서 또 커져서 끝내는 하나의 벽이 되고 말았다. 여자는 자꾸만 자꾸만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환이는 손아귀 속에서 타고 있는 작은 손만을 실감했었다. 땅바닥에 다리를 꺾고 꿇어앉았다.

'이 여인을 살려주십시오.'

한 시간 넘게 지났을까? 밖은 온통 어둠, 실낱같은 초생달이 나뭇가지에 은고리처럼 걸려 있었다. 산의 냉기가 방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울음을 거두고 방문을 닫은 환이는 몸을 누인다.

'혜관스님을 못 만났군.'

얼굴을 방바닥에 묻는다.

'서희... 서희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스님을 만날 필요는 없지. 어느 때고 난 그 애를 한번 보러 가리. 먼빛으로라도 보러가리.'

하다가 환이는 어느덧 수마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진달래 꽃밭이다. 소복한 인이 아낙이 웃고 서 있다.

'서방님! 별당아씨 대신 제가 화전을 부쳐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나한테 앙갚음을 할 작정이군.'

'앙갚음이라뇨? 그런 말씀 아니 하시는 겁니다. 여한이 없게 제가 부처드리는 화전을 잡수시오.'

인이의 아낙은 흰 쟁반에 파르스름한 화전을 담아 내밀었다.

'화전은 부쳐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대신 하룻밤 동침하여 너의 원한이 풀어진다면 그렇게 하리.'

환이는 여자를 안았다. 안고 뒹굴었다. 진달래 꽃잎이 쌓인 푹신푹신한 금침 위였다.

'어떠냐? 원한을 풀겠느냐?'

환이는 여자의 몸을 다루며 거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떠냐? 이젠 여한이 없겠느냐?'

'아니옵니다. 욕망무한이외다. 별당아씰 쇤네는 죽일 것이오. 칼은 잘 들게 갈아놨구요. , 서방님. 그 계집을 잊는다면 쇤네 만리성이라도 쌓겠소. 손톱 발톱이 빠지고 닳아져도...'

별안간 칼이 사칸 대청에서 곤두박질을 친다. 시퍼런 칼이 곤두박질을 친다. 곤두박질치는 칼을 하얀 여자 손이 낚아챈다. 버선발을 굴리며 소복의 여자가 칼춤을 춘다. 화엄사다. 단청 빛깔이 찬란한 대웅전 앞이다. 혜관이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두 손으로 싸안으며 달아난다. 장삼자락이 미친 듯 출렁거린다. 칼춤을 추며 버선발을 굴리며 소복의 여자가 쫓아간다. 흰 치맛자락이 출렁거린다. 어느덧 여자는 송낙을 쓰고 있다. 소복에 송낙이라니.

'나무과안세음보오살! 나무과안세음보오살!'

비명이다. 비명 같은 혜관의 염불 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진다.

'와하하핫핫... 으아하핫핫핫!'

이건 또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웃음의 함성, 웃음바다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구름같이 모여든 중들이 일제히 배를 잡고 웃는다. 잿빛 장삼에 검정빛 붉은빛 황금빛 가사를 걸친 중들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 것이었다. 중들 속에 우관선사가 있다. 소복 여인의 남정네, 인이 얼굴이 있다. 문의원이 있고 수동이 김서방의 얼굴이 보인다.

'저 사람들이! 아아니 언제 중이 됐을꼬? 거참 이상한 일도 있다.'

'와하하핫핫...으아하하핫핫!'

웃음소리, 웃음의 파도는 출렁거리는 장삼자락, 출렁거리는 치맛자락과 범벅이 되어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대웅전 단청한 기둥이, 연화무늬의 연목 뿌리가 흔들리고 숲이 흔들리고 바위가 흔들리고 만산의 진달래 더미가 흔들리고 -

'나무과안세음보오살! 나무과안세음보오살!'

혜관의 비명이 멀어져간다. 새벽하늘의 별같이 멀어져간다. 구역질이 솟구친다. 환이는 가슴을 잡아 뜯는다.

"성님?"

강쇠의 음성이다.

"성님, 정신차리시오!"

"으음..."

"성님! 성님요!"

"내비리두어."

춘맹의 꺽쉰 음성어다.

"내비리두라니,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내비리두라꼬요?"

"꿈을 꾸는개비. 아까 죽 한 사발 묵고 한참 시부›이니 죽지는 않을 기구마."

"어이구 참! 이기이 무신 변괸지 모르겄네."

"변괴는 무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제."

"천지개벽을 했다믄 모르까 성님이 몰매를 맞다니 말도 안 돼요."

"아 구만리 장천을 나는 새도 화살에 맞고 망망대해를 헴치는 물개기도 낚싯줄에 걸리는데 형체가 있고 보믄 사램이라고 우예 안 당한다고 장담할 기든고?"

"안다니 나흘장 간다 카더마는 또 그 안다니 새설 나오누마. 나는 새가 화살에 맞는 거는 정한 이치고 물개기가 낚시에 걸리는 것도 정한 이치고요,"

"젠장! 숯이나 굽어묵음시로 귀동냥도 못한 니까짓 산놈이 머를 안다고 큰소리고. 그놈의 이치이치 하지마는 바로 그놈의 정한 이치를 몰랐기 땜에 몰매를 맞았다는 거부터 알아야 하는 기라. !"

"머라 캤소! 한분 더 말해보소."

"한분 더 해보라카믄 말 못할까봐서! 임자 있는 제집한테 손을 내밀었인께 몰맬 맞을밖에."

"되잖은 소리는 하지도 마소. 서천 쇠가 웃일 일이제. 하 참 내, 손을 내밀기는커녕 내민 손을 뿌리친 기이 동티였다믄 소금치는 믿겄소."

"자게 입으로 한 말인께."

", 성님이 빈말하는 거 어제그제 일이던가? 그것 모르믄은 할매도 만고풍산 다 겪었다 할 수는 없일 기요."

"누가 그걸 모르건데? 니가 미버서 그랬다, !"

"할매한테 미움 받아 서러불 내가 아니거마는. 밤길 가다 도깨빌만내 시름을 했이믄 했지, 그나저나 이를 우짜믄 좋노? 업고 가더라 캐도 정신이 들어야 할 긴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램이 설마, 엎어지믄 코 닿을 긴데 거까지 못 갈까 봐서? 어이구우, 늙으믄 죽어야 하는 기라. 젊은것들 헤굴어 쌓는 거 앵이곱아서,"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소. 백여시가 골백분 둔갑하도록 살고 저블 긴데, 아무튼지 간에, , 그러니께 잔치 끝에 좋은 일 있기 어렵제."

"잔치 끝이라니?"

"할매는 몰라도 되는 일이라요."

환이 몸을 뒤친다.

"성님! 이자 정신이 좀 듭니까?"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려 한다. 강쇠가 얼른 팔을 내밀어 부축하여 일으켜 앉힌다.

"대관절 일이 우떻게 된 깁니까?"

강쇠가 묻는 말에는 대꾸가 없었고, 환이는 입맛을 다시며 춘매노파를 바라본다. 관솔불을 받고 서 있는 노파 눈은 어둠을 안은 소 같이 검고 깊다. 불빛 아래서는 납독이 올라 푸릇푸릇한 살갗, 염낭주머니처럼 오므라진 입술에서는 끈질긴 삶의 의지가 타고 있는 것만 같다.

'저승 가는 관문이 삼도천이지. 그 강가에 노파가 지키고 있다던가? 강을 건너러 온 명부객들 깝데기를 벗겨먹는다는 늙은 아귀가 아마 저런 꼴은 아닌지 모르겠네.'

밤이면 남자 없이 살 수 없었던 계집의 말로가 정녕 저렇게 추한 것인지-- 이승과 저승의 몽롱한 장막을 걷고 내왕하듯 환이의 시선은 흐렸다가 반짝이곤 한다.

"성님."

"..."

"걸으실 만합니까?"

"가야지."

"가입시다 그러믄."

"으음. 강쇠야."

"."

"토끼든 고슴도치는 잡히는 대로 저기, 불로장수할 저 늙은이한테 한 마리 갖다주게."

"말도 마이소. 오믄서 내내 토깐이 토깐이, 하고 토깐이 노래를 부르는데 귀에 못이 백?십니다."

촌매노파가 높이 쳐들어주는 관솔불을 뒤로 하고 강쇠에게 이끌린 환이 산길을 탄다.

"강쇠야."

"."

"너 고생스럽다는 생각 안 하냐?"

"고생이사 타고난 거 아닙니까. 어차피 산놈으로 태어났이니께요."

"팔자소관이란 말이지?"

"아니지요. 산놈으로 태어났이니께 무신 짓을 해도 더 나빠진다할 기이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생각한다 그 말이구먼."

"못하는 일은 아니라 생각은 한께요. 잘 묵고 잘 입고 근심걱정 없는 사람들이사 머가 답답해 백성들 생각하겄소? 우리 겉은 놈 아니믄 누가 나서서 일할 깁니까. 나는 그쯤 생각은 한께요. 성님겉이 학식이 많고 천하를 휘어잡을 그런 뱃심이야 없지마는요."

"미친놈, 미친 소리 하는군. 너를 잡고 애기하느니 돌고개에 가서 미루나물 보고 얘길 하지. 그는 그렇고 혜관스님 신상에 무슨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는데..."

"오랑캐한테 붙잡혀갈까 싶어서요?"

그 말대꾸는 없이

"어서 가자."

"그나저나 성님 몸이 펄펄 끓소 불덩이 같구마요."

역시 그 말대꾸는 없이

"한바탕 하는 모양이야."

멀리서 야수의 울음이 날카롭게 밤공기를 찢는다.

"호대감이 한판 치는 모양이지요. 늑대 소리 아닙니까?"

". 서너 마리 되는가부지."

환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안 되겄소. 지 등에 엎이이소."

강쇠는 다짜고짜 환이를 치켜들고 등에 업는다.

"아무래도 잔치 끝에 좋은 일 있기 어려븐갑소."

"..."

"성님이 우떻다 카믄 일은 다 허사 될 기요. 우짜다가."

등이 뜨겁다. 내쉬는 환의 입김이 열탕을 부은 듯 뜨겁다. 강쇠는 속으로 야단났다는 생각을 한다.

'인이 여편네 친정 식구들이 몰리와서 성님을 이 지경 맨들었는가? 성님이 뭐 잘못했다고? 혹 성님이 겁탈할라 캤기 땜에 죽었다고 뒤집어 씨운 길까? 그랬다믄 와 가만히 맞노? 갑재기 허세비가 됐더란 말가. 저 지경 되도록 맞게. 하야간에 오나가나 기집 땜에 말썽인데 성님도 딱하제. 그만 하나 골라잡아서 데꼬 살믄은 이런 일도 없일 기고 벵이 나도 벵구완할 사램이 있을 기고 멋 땜에 사서 고생을 하는지 내사 그만 알다가도 모릴 일이라. 참말 날이 갈수록 모릴 사람은 성님이다. 사램이란 어느 만큼 옆에서 보고 있으믄 알게 되는 긴데 도리어 성님은 날이 갈수록 더 모르겄다 카이. 우떤때는 구신 같고 우떤 때는 사람 같고...'

발끝에 익은 길을, 환이를 업고도 수월하게 강쇠는 걸어간다. 산속은 낮보다 밤이 더욱 어수선한 것 같다. 바람 소리, 숲이 흔들리는 소리도 요란스럽다. 산막으로 들어간 강쇠는 한곁에다 환이를 눕혀놓고 관솔에 불을 붙인다. 환해진 산막 안에 환이는 상처받은 한 마리 짐승같이 엎어져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성님."

"..."

"몸이 불덩이 겉소."

"춥군."

엎어진 채 말했다.

"운봉선생님한테 가보까요?"

"불이나 피워주게."

"이러다가 산중서 큰 벵 나믄 우짤 깁니까."

"아직은 죽지 않을 게야. 난 그걸 알아. 난 병들어서는 죽지 않는다."

"그렇지마는 누가 그거를 장담하겄소. 자게 몸 자게가 위해야제요."

"불이나 피워주게."

"."

강쇠는 토막나무 네댓 개를 얼키설키 얽혀놓고 솔가지에 관솔불을 댕겨서 토막나무 사이에 쑤셔 넣는다. 산막 안은 더욱더 환하게 밝아왔다.

"강쇠야."

"."

엎드러져 있던 환이는 어느덧 북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벽 쪽에 그림자, 강쇠의 상투머리를 보며 환이는 말했다.

"너 그놈의 굵은 상투머리 연유를 말해보아."

"머라꼬요?"

"언제 어떤 연유로 해서 상투를 올렸느냐, 그렇게 내 물었다."

"별소릴 다 듣겄소. 성님은요? 사모관대 못해보기론 피장파장 아니겄소."

"그런가?"

환이는 몸을 흔들어대며 웃는다. 웃다가

"엇 추워!"

몸만은 연신 흔들어댄다.

"난 말이다, 이번엔 묘향산으로 갈 게야. 가고말고."

"묘향산이라꼬요?"

"엇 추워!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느냐? 난 다리 밑에서 사흘을 굶고 인사불성이 된 일이 있어. 문둥이랑 함께 잔 일도 있고. 그뿐인 줄 아나? 배가 고파서 복어 알을 먹었는데도 안 죽더군. 조선 팔도 내 발이 안 미친 곳이 없고. 졸면서 낭떠러지를 걸었는데 안 떨어졌더구먼. 그때 그러니까! 그때 그러니까!"

강쇠는, 미련한 강쇠는 환이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평소보다 말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환이는 병을 이기려고, 추위를 이기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이야깃소리 정도였다. 얘기에 두서가 없어지고

"스님 살려주시오! 이 여인을 살려주시오!"

하며 헛소리로 옮겨갔을 때 비로소 강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14. 동행

성내에 사는 소화에게 줄을 놔서, 옛날 소화의 기둥서방이었던 운삼을 찾아 서울에 온 기화는 모든 형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협률사에 관계하고 있는 만큼 운삼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소리꾼이었고 장안의 모모한 기생집과는 밀접한 줄이 있었다. 말하자면 말발이 선다는 얘기겠는데 그러한 여건도 여건이려니와 기화의 기생으로서의 자질을 운삼이 높이 샀다는 것에 보다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생래의 목청과 용모며 자태, 그리고 색향으로 전통이 도도한 진주 땅에서 닦여진 언행이며, 그만하게 갖출 수 있는 기생이란 그리 흔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거 소화가 면판만 번드르르했지 변변찮은 계집인 줄 알았는디 보는 눈은 있었던 모양이라."

전라도 태생인 운삼은 어쩌다 비쳐 나온 그곳 사투리로 함춘관 안방에 앉아 함춘관의 주인 추산에게 느긋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십을 갓 넘겼으나 운삼은 아직 젊었고 얼핏 보기엔 선비풍도 있어 광대 사회에선 행세하는 인물이다. 마주앉은 함춘관 주인 추산은 사십줄, 그러나 나이보다는 겉늙은 여자인데 한때 운삼과도 관계가 있었지만 늙어가는 마당에 서로 흉허물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터였다.

"나도 그 애가 마음에 들어요. 얼굴은 그만한 애가 왜 없겠어요? 자탠데, 정말 버들 같이 않아요? 사내들 한번쯤은 품에 안고 싶은, 호호호호홋..."

"으음 은은하지. 봄밤에 소리 없이 내리는 비 같고, 허허헛..."

"아니야. 기화, 다스릴 기에다가 꽃 화, 좋은 이름이야. 허나 그 애 장기는 뭐니뭐니 혀도 소리여. 명창 하나 맨들 수 있을지도 몰라."

"글쎄요. 그건 운삼선생 소관이구요. 저로선 장사가 잘 됐으면 싶어요."

"중이 고기맛을 알면 법당에 파리가 안 끊인다 허던디 추산이도 너무 돈맛을 알아서 그래. 겉늙은 게야."

"그런 말씀 마셔요."

추산의 얼굴빛이 싸늘해진다.

"기생이란 젊은 한철이 용색이지요. 돈 떨어진 늙은 기생 말로를 못 보셔서 그러셔요? 찬서리에 홍낭자 신세, 운삼선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돈은 좀 아셔야 합니다."

"나야 뭐 걱정인가? 함춘관의 추산이 돈 자알 버는디, 허허어."

"객담은 남의 나이(팔십) 잡수신 후에나 하셔요."

"그럴까? 허허헛..."

"기화 그애 경우도 그렇지요. 운삼선생이 골백 번 주선을 하셨다 하더라도, , 선생님이 어려우시면 따로 제가 도와드리지, 사람 하나 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애가 마음에 들어서 저로선 상당히 특대우를 한 거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추산에게는 함춘관말고 다방골에 조용하고 조촐한 사림집에 한 채 있었다. 그러나 추산은 거의 함춘관에서 기거하게 되었고 사림집은 행랑어멈이 지키고 있었는데 기화를 위해 그 집을 쓰게 했으며 여간한 손님이 아니고는 비장한 보물처럼 기화를 함춘관에 불러오지 않았었다.

"마음에 들어서만 그러할까?"

". 물론 기화 뒷배를 서참봉댁 서방님이 보아주시는 탓도 있겠지요. 그 양반한테 빗보이는 날이면 장사 못해먹으니까요."

"추산이 자네도 능구랭이가 다 돼가는구먼, 서참봉네 아들보다 화살은 황부자네 맏아들 황태수한테 꼽아놓고서,"

비로소 추산은 킬킬 웃는다.

"허나 서참봉네 아들이건 황부자네 아들이건 잘못된 과녁이야."

"어째 그렇지요?"

"그건 두고보면 알아. 그러면은 슬슬 나가볼까?"

"뭐가 그리 바쁘셔요?"

"바쁜 사람이야 자네지. 다음 또 올것이여."

운삼은 회색 두루마기에 연회색 중절모를 삐딱하니 눌러쓰고 방을 나선다. 풍채는 옛날과 다름없는데 목덜미의 살갗이 늘어져서 걸음을 따라 가늘게 흔들린다. 정한 여자 없이 봄바람처럼 가볍게 정을 주며 여자들을 거쳐 온 사내의 뒷모습을 홀가분하다 해야 할지, 쓸쓸하다 해야 할지, 추산은 대청 기둥을 짚으며 사내가 사라지고 없는 그곳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다. 겨우 반나절이 지난 시각, 처마 그림자가 댓돌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머물고 있는데 손님이 들기엔 아직 이르다. 담밖 거리에는 오가는 물지게꾼으로 한창이었다.

"어머니."

"."

동기 남선이다.

"저어, 중이 왔어요."

"중이 왔으면 쌀줌이나 시주하면 될 거 아니냐? 날 보고 일일이 얘기할 것도 없다."

"아니어요. 동냥 온 중이 아니어요. 어머닐 만나뵙겠다 하질 않겠어요."

"나를? 별일 일세? 중이 나 보잔다구?"

"."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물어보아라."

추산이 역시 다른 아녀자와 마찬가지로 사문을 박대해서는 안 된다는 미신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앙화를 두려워하고 운수에 예민한 때문이다.

"저어 오시기는요, 진주서 오시구, 어머님한테 물어볼 말씀이 있다나봐요."

"그래? 그럼 들어오시라구."

별로 부피도 없는 바랑을 짊어지고 한 손에는 석장, 한 손에는 단주를 든 혜관이 안마당으로 쑤욱 들어선다. 추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혜관의 행색을 유심히 살핀다.

"나무관세음보살!"

혜관은 석장을 마루 끝에 기대어놓고 추산을 향해 합장한다. 마루 위에 서서 내려다보던 추산이 당황하며 손을 맞잡을 듯 어물어물 고비를 넘긴다.

"스님은 이곳에 무슨 일로 오시었소?"

"네에, 나무관세음보살!"

다시 한 번 합장하고 마루에 걸터앉더니

"후우--"

숨을 내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문지른다. 땀바가지나 쏟았다는 시늉인데 얼굴은 멀쩡했다.

"더름이 아니오라 사람을 하나 만나고저 왔소이다. 진주서 온 기화라는 기생 아인데,"

"기화..."

"네에, 가회동 이판서댁에 가서 기화를 찾을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곧바로 이곳에 왔습지요."

혜관은 곁눈질을 한다. 가회동 이판서댁이라면 이범창 대감댁을 두고 하는 말이었고 그 댁 아들이 서참봉네 아들과 황부자네 아들과 요즘 어울려 다닌다는 것쯤 추산도 잘 아는 터였다.

"기화 그 아일 제가 맡아 있긴 합니다만 지금 이곳엔 없고,"

"없다면 어디로 갔다 그 말씀이오까?"

"성미도 급하십니다. 그 귀한 아일 함부로 할 수 있어야지요? 깊숙이 숨겨놨어요."

추산은 까르르 웃는다.

"그러면 소승도 만날 수 없다 그 말씀이오?"

"그럴 수 있겠어요? 출가하신 분이 설마 그앨 다치기야 하겠어요? 흐흐흣..."

"네에, 네에, 여부가 있겠소이까."

"얘야! 남선아!"

"--"

동기가 달려온다.

"대사님을 집에까지 모셔다드려라. 그럼 스님, 사연은 후일에 듣기로 하지요. 다녀오십시오."

얕잡는 건지 공대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어투에 미소다.

"나무관세음보살. 폐를 끼쳐 죄송하오외다."

"천만의 말씀을,"

문밖에 나선 혜관은

"얘야."

"."

"집이 이곳서 머냐?"

"별루,"

동기는 홀짝홀짝 뛰듯 걷는다. 가다가 돌이 있으면 한 발을 치켜들고 모차기를 해가면서, 나이 열두서넛?

"스님?"

가다가 휘딱 돌아보며 부른다.

"왜 그러느냐?"

"진주서 오셨다구요?"

"그렇느니라."

"진주 거기, 서울집이란 비빔밥집 있지요? 스님 가보셨어요?"

"쪼깐이집 말이구먼. 넌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 꼬마 아주머니 우리 친척이거든요. 기화언니가 날 진주 한번 데려가주시겠대요."

"거미줄같이 얽힌 인연들이구먼, ?!"

혜관은 딸국질을 한다.

"어멈! 문 열어요. 손님 오셨수!"

대문 열리는 것을 본 동기 남선은 홀짝홀짝 뛰면서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저어..."

내다본 행랑어멈은 혜관을 보자 의외한 표정이다.

"어멈!"

기화의 음성이다.

"뉘 오셨수?"

"스님 한 분이..."

"알았어요."

급히 나오는 기색이다. 깨끗하게 단장하고 더욱 아름다워진 기화가 대문간까지 나왔다.

"스님!"

". 그간 잘 있었냐?"

혜관은 부신 듯 눈을 꿈벅거린다.

"들어오셔요. 이부사댁 서방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마침 잘 되었구먼. 널 만나보고서 이판서댁으로 갈려 했더니."

집은 열다섯 칸이 넉넉했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기화는 건넌방과 건넌방에 잇달린 다음 방 두 개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어서 오시오, 스님."

상현이 앉은 채 인사를 했다. 혜관은 바랑을 풀어놓고 염불도 합장도 생략한 채 상현과 마주앉는다.

"서찰을 받고 여기 와서 대기하고 있었소."

"편리한 세상이어서, 좋은 것도 있구먼요."

혜관과 상현은 다같이 어색하게 웃는다. 변명 같은 웃음이다. 봉순이가 아닌 기화를 두고 그들은 남자인 것을 의식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십대의 비구승이건, 아내가 있고 연모하는 여인이 따로 있고 자랑스러운 젊음을 지닌 사내건 기생 기화를 의식 밖에 몰아낼 수 없는 것이 남자의 생리인지, 아니 기화가 지난날의 봉순이었다는 것, 비구의 몸이라는 것, 새파란 나이에 기방 출입, 그런 것에서 파생되는 느낌을 극복하기엔 두 사람이 다 약하다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연해주까지 가신다는 말씀이었는데."

상현이 말을 꺼내었다.

", 기왕 간 김에 두루 살펴보고 싶소. 이동진 나리도 그쪽 형편이 용이하시다면 만나뵜으면 싶소."

"아버님은 지금도 연추에 계시는 모양이고 용정촌과는 부단히 연락되는 줄 압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대감댁 큰자제 되시는 이윤종 씨가 유하현 삼원보에 계십니다. 만일 그곳에 가시는 일, 그분을 만나는 일은 스님을 위해서도 매우 유익할 듯하니까요. 연해주에 가셔서 아버님을 보시고 또 삼원보에 가셔서 이윤종 씨를 만나시면 그곳 사정은 훤해지실 줄 생각합니다."

"고맙소, 그렇게 하리다."

"이대감댁에선, 특히 그 댁 마님께서는 그곳 사정을 소상히 아시기를 바라니까... 스님께서 어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비를 도와주실 눈치더군요."

"주신다면야, 이 소승 손이 작아 못 받겠소이까? 많이만 주십사고 말씀 전하시오."

"떠나시기 전에 한번 만나보셔야지요."

"그러면은 더욱 좋구요. 능변은 아니지만 발바닥 하나 튼튼해서, 한번 길만 터주시면 문턱이 닳도록 다닐 심산이오, 하하핫..."

입을 쩍 벌리고 웃는다. 평소보다 더 크게 벌리고.

"그건 또? 신돈이나 보우, 그 괴승들의 열째 번 제자쯤 되시려구요?"

"하하핫핫... ! 안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만 이 밤송이 같은 상판하구서 신통력과는 만리성이요, 그저 땡땡이중 발바닥만 믿는 게지요. 또오 말하잘 것 같으면, 이대감댁을 말하잘 것 같으면 나라은혜를 많이 입었다 할 수 있는 명문거족, 일하는 사람들한테 돈푼이나 내놔야 마음이 편하질 않겠소? 이 중놈은 믿는 발바닥이라도 있지만 가마 타고 다니던 양반들이야 마음놓고 뛸 수 없는 노릇이니 하는 말이오. 이부사댁 나리야 청백리로서 소싯적부텀 송곳 같은 똥만 쌌으니 연해주 얼음나라에서도 자알 견디시지만요."

매우 신랄하다. 상현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힐끗 쳐다본다. 권위 의식이 눈빛을 싸늘하게 만든다.

"견디고 뛰는 것만 대수가 아니지요."

"네에, 그걸 소승이 모르겠소? 허니 이대감댁에선 고방문을 반쯤여셔야 하고 서방님같이 명석하고 학문 깊은 젊은 분들은 남의 나라에 가셔서 새로운 문물을 자꾸 뺏아와야겠지요. 땡땡이중 발씨가 넓다보니 귀동냥한 것도 있어서, 용서하시오."

"모두가 똑같은 말들을 하니까요. 어지간히 식상하는군요."

하자, 이때까지 중대회의의 참관자처럼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기화,

"저어 스님."

하며 그들 대화를 가르고 들어선다.

"스님이 간도 가시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 저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이번 길에 동행하면 안 되겠습니까?"

"동행? 봉순이가?"

상현의 입에서 옛날 이름이 불쑥 튀어나온다.

". 애기씨도 보구 싶구요."

"그거 조오치."

혜관이 회심의 미소를 띤다.

"스님께서 기생과 동행? 거 재미있군요."

별안간 상현은 그의 평소 균형을 깨뜨리고 박장대소한다. 애기씨가 보고 싶다 한 기화 말에 충격을 받은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 적으로 상현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진 봉순이 길상의 앞에 나타났을 때 광경을 상상했다. 이상한 쾌감이 웃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기도 했다.

"서방님도, 기생이라 이마빡에 붙여놓고 다니나요?"

노기에 차서 기화는 상현을 노려본다.

"기생이란 글자를 이마빡에 붙여놓고 다닌들 어떠리? 필경 중은 중이요, 기생은 기생 아니겠느냐?"

자기를 위해 서의돈, 황태수까지 동원하여 함춘관에서의 우월한 자리를 마련하는 데 힘을 써준 상현의 입에서 차마 그같이 참혹한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그러나 봉순이는 기생 기화였다.

"그는 그렇습지요, 서방님."

미소를 머금는다. 보조개가 패이는 볼에서 턱에 이르는 선이 퍼연하다. 얼굴을 붉힌 편은 상현이다.

"스님."

"네에."

"용무도 끝나고 했으니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상현의 눈은 다시 싸늘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 아니었고 못난 자신을 감추려는 억지다.

"잠깐만, 소승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소이다."

하고서 기화를 쳐다본 혜관은 또 성급하게 상현에게 얼굴을 옮긴다.

"실은 기화뿐만 아니라 이부사댁 서방님한테도 부탁을 드리려고 마음먹고 왔었소."

"내게 무슨 힘이 있겠소."

"다름이 아니오라, 기화는 잘 아는 터이나, 그러니까 한시절 전 얘기가 되겠는데 그 왜 최참판댁 애기씨가 계실 때 일이지요. 김훈장이 의병을 일으켜서 최참판댁을 습격한 그 사건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소. 그 일이 일어난 뒤 조준구가 무고한 마을 농부 정한조를 의병으로 몰아서 죽이지 않았소? 그래 애비를 잃은 자식놈이 늠름하게 자랐소이다. 그애가 지금은 진주서 물지게꾼이 되어 생계를 잇고 있소."

"그래서요."

"놈이 똑똑하고 장차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외다. 그애를 이번에 소승이 데려올려고 마음을 먹었소. 헌데 모친의 급환으로 이번엔 동행하질 못하였소. 그런 사정만 없었다면 무조건 기화한테 맡기려 했었지요. 아마 쉬이 올려보낼 터인즉,"

"저더러 어떻게 하라시는 게지요?"

"신식 공부 좀 시켜주시오."

혜관은 눈을 찡긋해 보이며 헤헤거리듯 웃는다.

"세상이 바뀌어 아직은 자리가 다져지질 못했으니 그 아이 들어설 구멍쯤 넓은 서울바닥 어디든 있지 않겠소? 가령 이대감댁이나 혹은 다른 양반댁에서 잔심부름 시켜가며, 아이가 진중하고 참을성이 많으니 무슨 일이든 해낼 것이고 인재 하나 키우는 심정으로 선심 쓸 분 만나게 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말씀인데,"

"글쎄올시다."

"서방님, 저도 부탁드리겠소. 그 아이라면 저도 발벗고 나서겠어요."

"바쁜 일 아니니 우선 이 정도로 운은 떼어놓고,"

혜관은 또 성급하게 바랑을 찾아 짊어지는 둥 수선을 피우더니

"그럼 봉순이 나 가겠네. 내일 또 보자구."

"오늘 밤은 어디서 주무시게요?"

"가까운 절 마당에라도 가서 자지."

상현은 혜관과 함께 거리로 나온다. 한결 숨구멍이 터진 듯 처마 그늘에 가려졌다가 햇빛에 나타나곤 하는 상현의 얼굴은 맑아 보인다. 혜관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한눈을 팔며 걷고 있다.

"스님."

"네에."

"머리만 깎았지 사람의 육신으론 다를 것이 없는데 다방골 기방서 나오신 기분이 어떠한지 소생 궁금하외다."

"부처님께선 중놈들보고 거짓말을 하라 이르셨소."

"뭐라구요?"

"머릴 깎았다고 중생을 제도하겠소이까?"

"..."

"하지만 머릴 깎았으니 흉내라도 내야... 흉내는 거짓이오. 거짓에 속아서 불도에 드는 중생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거짓말쟁이 중놈이야 지옥에 가든 말든... 뭐 그런 것 아니겠소? 하하하핫..."

"..."

"원래 경전에는 까막눈이 돼서요. 부처님을 욕보이고 다니는 이런 중놈이 있다는 걸, 아아 아니지요. 이 정도, 혜관이 정도의 중놈이라도 많았다면야, 심산에서 불도 닦는 중보다 소승 같은 파락호가 더 많아야 할 세상이지요, 아암요. 하하하하..."

"나는 남을 위해서보다 내 자신을 다스리고 싶소. 심산유곡의 중 생각은 가끔하는데요."

상현의 얼굴에는 갑자기 나이 어린 티가 나타난다.

"바람도 번뇌요 시냇물도 번뇌요. 산새들 짐승 울음, 철 따라서 피고 지는 산꽃들, 그 어느 하나 소리와 형체를 겸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인데 심산유곡이라고 현세가 아니란 말인가. 사시장철 목숨의 소리들은 충만하여 있거늘,"

혜관은 수신가를 읊듯 가락을 붙여가며, 구름 흐르는 하늘을 보고 활갯짓하며 가는 늙은네를 쳐다보고 장옷자락으로 입모습을 감추며 가는 아낙들을 바라본다. 마치 입에서 나가는 말은 여흥이요 거리 풍정에 온통 정신은 쏠려있다 하듯이.

"여하튼 소승은 심산유곡보다는 사람 사는 대처가 좋긴 좋은데 좋다보니 별의별 놈의 일 이 다 생기게 마련이고 상놈 욕을 하면 상놈이 칼 들고 안 나서나, 양반 욕을 할 것 같으면 이게 또한, 헤헤헷... 일전에만 하더라도 백정네 집에 갔었다가 소 잡는 칼로 하마터면 저승으로 왕생할 뻔했지요. 소승이 저승으로 가봐야 지옥일정이라, 필경 삼악도밖엔 갈 곳이 없을 터인즉, 그러하니 되도록 이승에서 민적민적 뭉개며 있고 싶은 게 본심인데 말씀이오. 실상은 소승이 백정을 욕한 것도 아니었소. 그 편에서 지레 짐작으로 그러려니, 아 그러고서는 시비 아니겠소? 다아 그게 평소 제 마음의 소치였다 할 수 있겠지요. 상놈이건 천민이건, 또오 양반이건, 제 앉은 자리가 마음에 걸려서 하는 터수겠는데 자랑스러울 것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창피스러울 것 한 푼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고, 남의 눈치를 보니까... 똥뀐 놈이 화내더라고,"

"훈계하시오?"

"아아 아니, 땡땡이중이 뭘 안다고?"

"거짓말 말아요."

"거짓말 얘기라면 네에, 아까도 소승이 까놓고 얘기하지 않았소이까? 하하핫..."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너구리 달밤에 배 뚜디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스님 배가 너무 나왔소이다. 사바 냄새가 물씬하오."

"그 말씀을 들으니까 한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소."

"..."

"돌아가신 지 벌써 여러 해 전이라... 최치수 그 양반을 모르시오?"

"알 턱이 있나요? 얘기는 많이 들었소."

"그게 어느 해였던지, 그러니까 최씨 부인이 살아 계실 때였으니까 이십 전후가 아니었던지,"

휘적휘적 걷고 있었으나 혜관의 말에 상현은 긴장기를 띤다.

"전준가 어딘가, 그것도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갔다 오시는 길에 들르셨소. 우관스님이 계시는 절에 말씀이오. 마님께서는 막중한 시주시고 하니 그 어른에 대한 대접이야 말할 나위 없이 정중했지요. 그 시절만 해도 최치수 그 양반 팔팔하시고 포부도 크셨고 이름난 유학자 장암 그 어른도 크게 기대를 걸었었지요. 오만하더구먼. 아암. 오만하기가 천하를 눈 밑에 둔 듯하였소. 해서 새파란 소년과 너구리같은 노장이 문답을 시작하는데 소년의 변설은 가을 하늘같이 명쾌하고 가히 유학의 골수를 체득한 듯 놀라웠소. 헌데 우관스님의 능청이 또한 걸물이라, 중들의 주둥이 걱정 아니겠소? 후일에 안 일이오만 결국 탁상공론하여 무엇에 쓰리 그거였소. 탁상공론이랄 것 같으면 불가에서 먼저 공박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것을 최치수 그 소년이 되받아갔다 그거였소. 이를 갈면서 분해했겠지요. 하하하..."

"그렇게 패기에 찼던 어른이 어찌하여..."

"중도에 병들었지요. 비참하게 비명에 가시고,"

"어째서 병이 들었을까..."

"학문을 잘못하면 병이 들 수도 있을 거요. 자기 자신을 찾다 찾다보면 좁쌀이 되니까요."

"그럼 나도 좁쌀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말씀이시오?"

되묻는 상현의 어조는 평온했다.

"글쎄올시다. 예쁜 계집을 어여삐 보구, 태산은 태산으로 보구 버러지는 버러지로 보구, 그러면은 그게 다 참말이지 뭐겠소? 육척 장신의 육신을 두고서어 그림자를 찾는 격, 그러다보면 병들 수밖에 더 있겠소? 그러니 계집한테 들린 사람도 흔히 미치지만 자기 자신한테 들린 사람이 더 많이 미치기 아니면 병드는 게지요."

두 사람은 허위적허위적 걸어 가회종으로 들어선다.

"이부사댁 서방님."

"."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요? 봉순이가 점심상을 준비 안 한 것도 아닐 텐데, 허참 성급한 양반 때문에 불쌍한 중놈 허기들어서..."

"걱정 마십시오. 이대감댁에 가시면 차담상이 나올 게요."

상현은 쓴웃음을 띠었으나 혜관의 머리통과 비대한 몸뚱이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주먹을 쥐고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눈길이다. 묵직한 등짝을 꼬집어주고 싶고 툭 나온 배에 발길질을 하고 싶은 얼굴이다. 미워서라기보다 짜증스럽고 공연히... 혜관은 서울서 닷새 동안 묵었다. 기화는 함춘관 추산이로부터 대단한 우대를 받는 터지만 그에게 매인 몸이 아니었고 또 서의돈이나 황태수 같은 뒷배가 있고 하여 쉽게 양해를 얻어서 혜관의 간도행 동행자가 되었다. 기생 티가 나지 않게 흰 당목치마에 자미사 분홍 저고리를 입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지 않았으나 그런데도 그의 자태는 요염하여 결코 여염집 부인네로 보이지는 않았다. 평양으로 향한 기차 속에서도 승객들의 눈은 중과 함께 있는 기화에게 자주 쏠렸고 차표를 조사하러 다니는 차장, 정차할 때마다 찻간을 둘러보고 지나는 헌병의 눈도 기화에게 쏠리곤 했다. 혜관의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시늉을 했고 기화는 차창 밖에 나타났다간 사라지는 낯선 산천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애기씬 날 보고 얼마나 놀라실까. 그 사람은 날 어떻게 대할 것이며... 다 지나간 일인데 덤덤하게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을 게야. 아암, 난 기생이니까 옛날의 봉순이는 아니니까, 철없는 계집아이는 아니니까,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거야. 애기씨가 보고 싶고 그 사람도 보고 싶기야 하지. 으음 월선아지매도 이서방도, 그 그러고 김훈장도 만나뵐 수 있겠지. 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야. 마치 내 마음이 고향으로 가는 것 같구먼. 겨울이 오면 입김도 얼어버린다는 곳이 어째 내 고향일 수 있으리. 오랑캐의 나라, 남의 나라인데 그리운 사람들 때문에 고향 가는 마음일까. 내 몸이 기생이 되었다고 애기씨나 그 사람이 놀라지는 않을 게야. 종내 그리 되었느냐 하시겠지.'

기화 눈앞에는 엄마 데려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던 어린 날 서희 얼굴이 떠오른다. 차창 밖의 풍경은 무의미하게 스쳐갔고, 소리소리 지르다간 까무러치던 서희, 새파랗게 질리고 눈을 까뒤집으며 까무러치던 서희, 그럴 때마다 우짜꼬! 아이구 이 일을 우짜노! 하며 사색이 되던 죽은 어미의 얼굴도 선하게 떠오른다.

'엄니, 나 지금 간도 가요. 애기씨 보러 가요. 엄니는 늘 말했지요? 니는 에미가 있인께. 그러던 엄니는 지금 어디 계시오. 엄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봉순인 기생이 되지 않았을 것이오. 엄니가 살아서 지금 나를 본다면 잡아죽이려 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젠 혈혈단신이오. 잡아죽이려 드는 엄니도 없고 강짜가 심하던 그 노랑이 늙은이 하고도 헤어졌으니까요. 하긴 늙은이랑은 함께 살았을 적에도 혈혈단신이긴 매일반이었지만요. 외로웠어요. 외로워서 스님을 따라 간도로 가나부죠? 얼굴이라도 쳐다보면 갈증이 조금은 풀릴 것도 같소. 월선아지맬 보면 엄마 본 듯하겠지요? 애기씬 더욱더 아름답고... 이부사댁 서방님 난 그분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떠나기 전날 상현은 서의돈과 함께 왔었다. 밤늦게까지 상현은 술을 마시었고 죽어라 마시었고 주정도 심했었다. 종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자식아! 좋으면 좋다고 토정하면 될 거 아니야! 못난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서의돈은 상현이 기화에게 뜻이 있어 그러는 것으로 오해했다.

"까짓것 기껏해야 기생 그걸 마음댈로 못해? 그래 기화야! 몇 짐이나 풀어놓으면 되겠냐, ? 술자리에서 만난 손도 아니겠고 사연도 깊은 모양인데 그래 끝대 박절하게 굴 테냐?"

"서방님도, 그게 아니어요."

"그게 아니라니?"

"어찌 이부사댁 서방님께서 저 같은 걸 마음에 두시고 그러시겠어요?"

"그렇다면?"

"..."

"그렇다면 저 자식이 왜 저러는 게야? 내 알기론 주정한 일이 없는 놈인데."

"제가 간도 간다니까 아버님 생각이 나서 그러시겠지요."

"그럴싸하게 말은 잘 둘러댄다만 내 눈은 못 속인다. 사내가 계집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형님!"

"못난 자식!"

". 못난 놈입니다아!"

"이 자식아! 우는 눈구멍에 오줌을 쌀까? 애애라, 이 자식아! 그 것 짤라서 시구문 밖에 내다 걸어! 다부진 놈으로 알았는데 사람 잘못 봤군. 기생 오입이 뭐가 어려워서 저 지랄이냐 말이다."

서의돈은 그러나 대추씨 같은 몸을 도사려 놓고 지껄이는 사이사이 적당한 거리를 두며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의돈형님!"

상현의 잘생긴 이마빼기에 정맥이 발딱 솟는다.

"그래서? 말해보아."

"..."

"노려만 보면 어쩔 텐가. 웃통 벗고 울 밖에 나가려느냐?"

서의돈 입가에 냉소가 감돈다.

"제 눈구멍에 오줌을 싸도 좋고 그것을 짤라서 시구문 밖에 내다 걸어도 좋소이다. 기생 오입 한번 못하는 병신놈이면 말입니다. 허나 형님은 동녘 동! 하고 계시오."

"동녘 동!"

"저는 서녘 서!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형님께서 뜻이 있으시면 추호 사양하실 것 없소이다. 사실 형님 같은 분의 수청을 든다면야 기화도 이 장안에서 깃발 날릴 터이고 큰 배에 몸 실은 듯 든든할 터이니 저로선 오히려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이오. 기화는 불쌍한 아이니까요. 불쌍한,"

"이놈아! 불쌍하기는 네가 불상타! 사내자식이 마음에도 없는 그 따위 허언은 아니 하는 게야."

상현의 말은 오히려 서의돈 심사에다 불을 지른 것 같다. 찢어발기듯 산적을 가르다 말고 젓가락을 소리 나게 놓는다.

'머리빡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상통하나 밴밴하다고 뭣이 어쩌고 어째? 추호 사양할 것 없다구? 가소롭다 가소로워.'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켠다.

"무엇 때문에 제가 허언을 합니까? 오핸 마십시오."

"오해할 것도 없지. 허언을 하건 아니 하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자아 술이나 부어."

"왜 상관이 없습니까. 형님이야말로 억지 쓰지 마십시오. 좋으면 좋다?"

술심에 상현도 술상을 두드린다. 여엽집처럼 조용한 집안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정으로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기화는 불쌍한 아이, 최참판네와 더불어 도매금으로 넘어갔지요, . 역시 조준구놈의 희생물이니까요."

백자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던 기화는 갑자기

"서방님!"

하고 불렀다. 힐난의 어조다.

"말씀이면 다 하시는 줄 아셔요?"

상현의 취안이 기화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두 분 나으리께서 기생 하나를 두고 서로 양보하시는 우의를 제가 모르는 바도 아니요, 선비님네 풍류를 모를 만큼 촌년도 아니옵니다. 하지만 조준구 희생물이라는 말씀만은 듣기가 민망하옵니다. 그자한테 몸버렸다는 뜻으로 남이 들을까봐서요."

상현을 빤히 쳐다본다.

"내가 어디 그런 뜻으로 말했겠느냐? 그간의 사정이야 의돈형님께서도 다소 아시는 터이고, 너의 고적한 처지가 딱해서 그랬느니라."

약간은 당황하는 듯, 술잔을 기울이는 상현은 뜻밖에 심약하고 비애스런 일면을 노출한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날이 밝으면 간도를 향해 떠날 기화였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기약 없는 여정도 아니며 친정 다녀오듯 다녀올 것을. 그러나 상현은 그리워 찾아가는 낯선 땅에서 기화가 직면하게 될 그곳 사정을 생각 한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찾아가는 정과 맞이하는 정이 엄연하게 다를 것을 모를 기화도 아닐 터인데, 돌아 올 때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등을 치겠지. 두만강 물살은 거셀 것이다. 그 여름날, 의남매가 되자면서 최서희가 길상과의 혼인을 선언한 그 여름날, 밤과 낮을 방황하던 용정의 거리가, 이를 갈면서 연추로 가는 마차에 흔들리던 일이며, 상현의 눈앞에 선하다. 아니 불에 달군 철판처럼 저리도록 뜨겁게 떠오르는 광경, 그 산야, 다시 조선 땅을 향해 두만강을 건널 때 상현은 거센 물살을 내려다보며 울었었다. 분해서 울었다.

"딱하기론 서방님이십니다. 찾아가는 저도 딱한 계집이지만요."

"쓸데없는 소리 마라."

소리를 버럭 지른 상현은 기갈 든 사람처럼 술을 벌떡벌떡 들이켰다.

고개를 수그리는 기화 무릎 위에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아니, 이 계집이 어떻게 배워 쳐먹었기에 술상머리서 눈물방울이야? 술맛 떨어지게시리. 귀신이 운감하러 왔냐!"

이번에는 서의돈이 소리를 지른다.

"잘못했습니다, 나으리."

기화는 얼른 눈물을 닦는다.

"보자보자 하니 노는 꼴들 차마 못 보겠다! 뭣이 어쩌고 어째? 두 분 나으리께서, 뭣이 어째? 언중유골이냐?"

", 아니옵니다."

"자긍심이 그만했으면 기생이 되긴 왜 되었누! 건방진 년 같은니라구! 푼수없이 굴었다간 없다, 없어! 서울바닥에서 싹 지워줄 테니,"

"그런 게 아니옵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나를, 이 서의돈을 뭘로 알구, 법당에 앉은 목불로 봤더냐? 요망한 계집년 같으니라구!"

서의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결국 기화 얼굴에 술을 끼얹고 뺨을 때리고 술상을 엎고 이만저만한 주정이 아니었다. 서의돈의 행패는, 장안의 망나니로 놀면서도 아직은 여자에 대한 숫기가 남아 있어서 그 나름대로 관심의 표시였던지 - 어젯밤의 일이었다. 기적이 울린다. 정거장이 가까워져 오는 모양이다. 생각에서 풀려난 기화 눈에 창밖 풍경이 들어온다. 들판이 전개되고 있었다. 야트막하고 부드러운 산세는 풍요한 감을 주고 들판에 나도는 농부들의 백의가 유독 희게 보이는 것은 흙빛깔이 짙어서일까. 다시 기적이 운다. 코를 골며 잠이 든 시늉의 혜관의 머리를 쳐들었다.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개경이 가까워진 모양이라."

"개경요?"

기화가 되묻는다.

"개성 말이야."

"어떻게 그걸 아세요?"

"알지."

"스님도 초행길 아니신가요?"

"서울 떠나서 장단 지났으면 개경이지 뭐."

"정거장 하나 더 지나갔는데?"

"알어."

"그럼 평양 가서 전 어쩌게요?"

"묘향산을 다녀올 동안 기화는 조용한 객사 잡아놓고 평양 구경이나 하면 되는 게야."

"묘향산까지 따라가면 안 되나요?"

혜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안 된다는 뜻이다. 기화는 혜관이 왜 묘향산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묘향산에는 보현사라는 절이 있으므로 절에 볼일이 있나보다 대개 그렇게 생각했다. 혜관이 묘향산으로 가기 때문에 여정은 복잡해졌지만 기화는 부탁하여 따라가는 처지여서 불평할 수 없고 자신도 유람하는 기분으로 묘향상까지 따라가고 싶지만 혜관은 떠날 때부터 그 일에 대해선 애매했었다.

"그럼 간도까지는 어느 길로 가죠?"

"원산 가서 배 타는 게야."

혜관의 음성은 뚝뚝했다. 기차는 어느덧 개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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