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5-2
11장. 대면
절 근처에까지 온 환이는 서산 쪽을 바라본다. 해는 아직 노루꼬리만큼 남아 있다. 손등으로 배어난 땀을 씻으며 나무 밑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무너지려는 흙을 소나무 뿌리가 간신히 움켜쥔 건너 편 작은 언덕을 오랫동안 보고 있던 환이는 고개를 숙인다. 역시 오랫동안 새 짚세기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면서 내내 생각했었지만 그 노인이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없다. '김개주를 잘 아는 동학군이었네...... 죽지 않았다면 자네만큼 됐을 테지. 김개주의 아들을 어릴 적 본 일이 있는 늙은이야.' 언동이나 풍모로 보아 노인은 상당한 지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거듭하여 환이가 물어보았더라면 노인은 더 확실하게 신분을 밝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이는 그러질 아니 했다. 그것은 다 부질없는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친에 관한 일을, 그에게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으니 듣게 된 것은 역시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여러 해 동안 환이는 부친을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난밤 윤씨부인 묘소에 엎드렸을 때도 환이는 부친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부친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참한 날들이, 자애로운 애정과 영웅으로 숭배했던 부자간의 그날들이 언제 어떻게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는지. 최참판댁에 머슴으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환이 심정은 부친을 위한 보복에 넘쳐 있었다. 전주 감영에서 효수된 부친의 최후가 뭐 반드시 윤씨부인 탓도 아니겠고 오히려 피해자는 윤씨부인이겠는데 외곬으로 흐르는 환이 마음은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 윤씨부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리라는 억하심정, 물론 그 심정에는 최참판댁 마님이라는 신분에대한 증오심이 있었고 최치수의 어머님으로서 결코 환이의 어머니가 될 수 없었던 여인에 대한 원한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치고도, 부자 이 대에 걸쳐 그들은 최참판댁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긴 것이다.
언제였던지, 부친이 몸져 누운 일이 있었다. 환이는 밤을 세워 부친의 시중을 들었다. 모두가 다 잠들었을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환아."
"예 아버님."
"너 대장부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촛불에 그늘진 얼굴을 환이 쪽으로 돌리며 느닷없이 물었다.
"아버님 같은 분을 대장부라 하지 않겠습니까>"
열기가 떠 있던 눈을 반쯤 감으며 부친은 껄걸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다면 대장부라는 것은 허욕이니라."
"예?"
"나도 내 자신을 만백성 구하려고 창칼을 들고 나선 사내, 그런 사내 중의 한 사람이거니 자부하고 싶다. 때론 그렇게 믿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아버님을 우러러보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시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환이는 진심에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 어린 네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을 위하겠다는 것이 허욕이 아니고 뭐겠느냐? 하룻밤도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한 이 내가 말이다."
"공자께서는 사십에 불혹이라 하시었습니다."
"그 어른께서는 길을 구하여 생애를 걸으신 분이니까. 이 아비는 일개 필부이니라. 내 동학의 접주로서 하눌님의 말씀을 어긴 지 이미 오래이거늘, 나는 구도자가 아니다. 끝없는 싸움, 싸움의 회오리바람 속에 나를 잊고 싶은 게다. 그리고 죽음이 남아 있을 뿐이지."
"아버님!"
"만일 우리 동학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고 이 땅 위에 화평이 찾아온다면 그날부터 나는 죽은 목숨이 될 게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백성을 위하는 것도 하나의 도가 아니겠느냐? 나는 그 도 밖에서 이는 일시적 삭풍일 게다. 혼돈 속에서만 말을 몰 수 있는 위인이야. 화평스런 대로를 시위 소리 들으며 대교 타고 갈 위인이 못 된다 그 말이니라. 내 그동안 수많은 군졸을 거느리고 탐관오리를, 악독한 양반들을 목 베고 추호도 가차 없었으나 그게 사명감에서 한 짓인지 진정 자신 못하겠다. 그 밀물 같은 시기가 지나가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바닥모를 허무의 아가리가 밤새껏 나를 괴롭히는 게야. 실은 내 속에 이는 원한도 진정 그게 원한인가 믿을 수 없구나. 불밀한 너를 위한 아픔도 진정 그게 아픔인가 믿을 수 없구나."
평소 환이에게 엄격한 부친은 아니었다. 때론 친구같이 허물없이 대하기도 했었다. 어미 없이 자란 처지를 가엾게 여긴 때문인지 그의 생활이 삭막했기 때문인지 이같은 부자간의 일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상같은 기상, 피눈물도 없는 것 같은 냉철하고 무자비한 처사, 동지들까지 그를 냉혈한이라 했고 야심가라 했고 무서운 독재자라 했다.
"환아."
"예."
"너 절에 계시는 노스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큰아버님 말씀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민생을 외면하시고 홀로 쇠붙이를 모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친은 빙그레 웃었다.
"홀로 절간에서 쇠붙이를 모시는 음, 그도 도에 이르기만 했다면야...... 그러나 너의 큰 아버님 마음은 때때로 향간을 헤매시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큰아버님을 도를 깨친 법사라 하고 어떤 사람은 땡땡이중이라고 하더이다."
"필시 그 어느 편도 아닐 게다. 노스님께선 널 절에 두기를 원하셨지, 산간일들 항간인들 마음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산에도 가지 말고 사람들 무리에도 섞이지 말고 마음씨 착한 처자나 얻어서 포전이나 쫓고 살아라."
환이는 오래도록 짚세기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절 문을 들어섰을 때 마침 해가 떨어지고 사찰이 등진 산봉우리 중턱에 안개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법당 쪽에서 법고 소리가 들려온다. 간단없이, 숨 쉴 사이 없이 쫓아오는 타음은 가락도 음색도 높고 낮음도 없는 단조한, 그 단조함이 오히려 괴이하다. 환이 눈앞에 장삼 소매를 걷어 올리고 법고를 치고 있을 젊은 사미의 표정과 모습이 떠오른다.
'경쇠 바라 같은 쇳소리도 저렇지는 않지. 법고는 미쳤다. 미쳐 날뛰고 있다. 백팔번뇌, 무량겁의 번뇌를 잠시 잊을 만한 미친 소리구나.'
높은 석대 위에 솟은 대웅전, 그 아래 뜨락에 중들이 법의 자락을 펄럭이며 왔다갔다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녁 공양은 끝났을 성싶다. 환이는 돌아서서 물대를 타고 졸졸 흘러내리는 물을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법고 소리와 물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 소리는 도무지 죽이 맞질 않는다고 환이는 생각한다. 어제 하루,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이 전혀 남에 관한 일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왜 자신이 이곳에 와 서 있으며 어린 날 이곳에서 보낸 일이 있었던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윤씨부인의 죽음을 알고 슬퍼했다면 그것은 그세 당한 슬픔 같은 것이요, 부친의 옛날 지기를 만나 충격을 받은 그것도 거세당한 충격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지. 낯선 땅, 낯선 산천 이곳 역시 환이에게는 낯선 곳으로밖에 더 이상의 감회가 솟지 않는 것이다.
'법고는 미쳤다. 미쳐 날뛰고 있다. 백팔번뇌, 무량겁의 번뇌를 잠시 잊을 만한 미친 소리구나. 저 법고 소리처럼 아버님도 미쳐서 사셨던 것일까. 혼돈 속에서만 말을 몰 수 있다 하셨지, 혼돈을, 저 법고 소리는 잠시 동안 뭣인가 잊게 한다. 뭣인가를, 번뇌를.'
법고 소리는 뚝 끊어졌다. 세상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듯 조용해진다. 금어비구 혜관이 헐레벌레 내려오다가 거지꼴의 뒷모습을 보고
"거 뉘시오?"
하며 말을 걸었다. 환이 돌아본다. 사십 줄에 가까워졌을 혜관. 환이는 마음속으로 많이 늙었구나 했다. 십오 년 세월 동안 환이는 혜관을 만난 일이 없다. 부친을 따라 떠날 때 어릴 적부터 환이를 거두어주던 혜관은 십팔구 세쯤 나이였고 오 년이 지난 뒤 다시 절에 들어 만나보고는 처음 대면이다. 언젠가 최참판댁에서 혜관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절에서 데려왔다는 머슴아이 길상으로부터 들었다. 땅바닥에 자비상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을 때 절에서 배웠노라 했고
"연곡사 혜관스님이 장차 지도 금어가 될 기라 하심서 맨날 초화를 그리게 했심다."
하며 길상이 말했다. 환이 최치수에게 쫓기면서 별당아씨를 이끌고 연곡사로 찾았을 때 그때는 혜관이 다른 절로 떠나고 없었다.
"여보시요. 댁은 뉘시오?"
"나...환이요."
담담한 음성이다.
"뭐, 뭐라고?"
혜관은 서너 발자국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옛날과 다름없이 불거진 관골, 관골 쪽이 금세 시뻘개진다.
"나 김환이오, 혹 잊으셨소?"
"김환이라니! 김환이라니!"
혜관은 크게 두 번을 외쳤다.
"아아."
삿대질이라도 하듯 팔을 휘두른다. 반가움과 노여움을, 달려들어 주먹질이라도 해주고 싶은 반가움과 노여움, 그러나 환이의 표정은 나그네였다.
"노스님께서는 안녕하시오?"
"안녕하시고 뭐고 간에."
"노스님께선 아직도 이곳에 계신지요?"
"계, 계시고 말고. 하, 하여간에."
혜관은 환이의 팔을 덥석 잡는다.
"하, 하여간에 하던 말은 안에 가서 하기로 하고."
환이를 끌다시피 허둥지둥 걸어간다. 골이 패어 울퉁불퉁한 까까머리 뒤통수가 흔들리고 장삼자락도 줄레줄레 흔들린다. 승방까지 환이를 끌고 가 혜관은 그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상좌아이에게 냅다 소리를 지른다.
"이노마! 저리 비켜라!"
방문을 열어젖힌다.
"자아, 들어가게. 어서."
짚세기를 벗고 환이는 방에 오른다. 어둠침침한 방안은 물감 접시랑 붓통이랑 초화를 그리다 둔 백지랑 한켠에 밀어붙여져 있다.
"이놈아! 게서 무얼 꾸물거리고 있느냐! 어서 저리 못 갈까?"
상좌아이한테 악을 쓰고 방안으로 얼굴을 디민 혜관은
"실은 노스님계서 병환이 나시었네, 여기서 잠깐 몸을 풀고 있게."
방문을 닫아둔다.
"이놈 학장아!"
혜관의 떠드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예!"
"방안에 등잔을 밝히고 손님한테 우선 따뜻한 차 한 잔 끓여 올려라."
"아, 아? 손님이라구요? 말짱 거지를 방안에 들어놓고 그러시네."
"이놈! 하라면 하는 게지, 무슨 잔소리냐! 혼짝 나기 전에. 볼기 안 맞을 가거든..."
떠드는 소리가 끊어지는가 싶더니 웬일인지 얼마 되지 않아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혜관이 방문을 열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혜관은
"가다가 생각하니 자네하고 얘가를 좀 해야겠기에 돌아왔지."
하며 등잔에 불을 켜고 나서 환이와 마주앉는다. 서로가 말을 잃고 멀거니 바라본다. 막상 마주앉고 보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혜관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거지고 되어 돌아왔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환이 소식은 언제나 거지꼴을 하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으니까. '어릴 적에는 모르겠더니 부친을 많이 닮았구나.' 눈을 내리깔고 새까만 얼굴의 환이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그러니까 그게 보리 흉년이 들었단 그해 초봄이던가?' 혜관은 생각한다. 그때 사흘 동안 절을 비운 우관스님이 개울가에 서 있었다.
"스님!"
"..."
"노장스님."
"혜관이냐?"
"예."
우관스님은 돌아보았다.
"혜관아."
"예."
"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고 하니."
"..."
"천수관음을 생각하고 있는 게야."
"천수관음을"
"음, 길상이놈 말일세."
"예?"
혜관은 어리둥절 한다.
"길상이놈을 속세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순간, 혜관은 우관스님의 마음을 짚었다.
"길상이놈을 길었으면 천수관음을 조상할 수 있었을 게야."
"예, 그렇습니다. 스님."
사실 혜관은 길상을 최참판댁에 보내기로 했을 때 우관스님의 처사를 대단히 마땅찮게 생각했던 것이다. 무슨 생각에서 천수관음을 조상하고자 하는지 내심은 알 수 없으나 혜관은 우관스님 이상으로 길상의 재주를 믿었고 그놈이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던 것이다. 금어인 자신이 하려며 굳이 조상을 못할 것도 없겠으나 천수관음상인 만큼 심히 난감한 일이다. 우관스님도 그것을 알고 길상을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이 나라 백성들 살기가 매우 어려워질 게야."
그 말로써 혜관은 천수관음을 조상하고 싶어하는 우관스님의 마음을 짚었다. 석장을 짚고 우관스님은 천천히 걸을 옮긴다.
"나간 길에서 내 왜병 놈들을 보았네. 앞으로 점점 시끄러워질 게야. 그는 그렇고... 내 일간에 길을 좀 떠야겠는데."
"어디로 가시려구요."
뒤따르며 혜관이 물었다.
"묘향산을 다녀올까 싶어서."
"예?"
"절을 오래 비우겠구먼."
"아니 그 먼 곳까지, 연로의 몸으로 어찌 가시렵니까."
"아마 먼 길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될 게야. 한 여인의 비원이니."
하다가 우관스님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말없이 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어제 환이놈의 소식을 들었지."
"환이 소식을 들으셨다구요!"
"으음. 하동에 사는 이부사댁 이동진이라는 사람이 얼마 전에 묘향산 근처 주막에서 환이를 만났다는군."
"예..."
우관스님이 묘향산으로 떠난 목적을 알기로는 혜관 혼자였다. 무거운 침묵 끝에 혜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스님께서 묘향산까지 다녀오신 일을 설마 아는 건 아니겠지?"
"묘향산? 뭣 하시려구요?"
반문의 어조가 강했다.
"묘향산 근처 어느 주막에서 하동 이부사댁 이동진이라는 양반을 만났다며?"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래도 노스님께서 그곳까지 가신 이유를 모르겠나?"
음성에는 다소 비난이 있었다.
"법문에 계신 분이 부질없는 일을 하셨소."
혜관의 얼굴이 이그러진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도 우관스님의 묘향산까지 간 일을 과히 기분 좋게 생각지는 않았었다. 노구도 노구려니와 환이 말대로 법문에 계신 분이 속세의 인연에 너무 집착하는 듯싶어 우관스님에 대한 평소의 존경심이 흔들렸던 것이다.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는 심중이 있기는 했었지만 지금 환이 말을 듣고 보니 찝찔했던 기분이 되살아났고 한편 환이를 사랑하는 것만큼 환이의 죄업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 혜관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따지려들다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환이 훌쩍 떠나는 결과가 되어도 우관스님에게 면목이 없다. 그러니 금간 그릇 다루듯 혜관은 조심스러워진다. 마침 상좌가 차 두 잔을 날라 왔다. 상좌는 말없이 대좌하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끔힐끔 보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닫고 나간다. 등잔불이 흔들리고 그림자도 흔들리고, 한참 후 등잔불과 그림자는 중심을 찾아 가라앉는다.
"그래... 그 멀리까지 뭐하러 갔었댔나."
이윽고 달래듯 혜관이 묻는다. 환이는 김이 오르는 차를 내려다보기만 하고 마실 생각을 않으면서 말했다.
"쫓기는 처지, 어딘들 못 가겠소."
"그런데 어떻게 돌아올 생각을 했나?"
"이젠 도망칠 필요가 없어서 돌아왔지요."
순간, 혜관은 심한 불쾌함을 느낀다. 치수가 죽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돌아왔다면 너무 뻔뻔스럽지 않느냐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넨 그곳에서 이곳 소식을 듣고 있었더란 말인가?"
"산중에서 무슨 소식을 들었겠소. 돌아와 보니 올 필요도 없었던 것을."
"그게 무슨 뜻인가?"
"그 여인은 죽었소."
"뭐라구?"
"..."
"그 여인이 죽었단 말이지?"
"예."
혜관은 크게 충격을 받는다.
"음... 그랬었구나. 최참판댁에 홀로 남은 여식이 그야말로 천애 고아가 되었구먼."
탄식한다.
"그래 자넨 최참댁이 결딴난 걸 모른다 그 말인가?"
"이곳에 와서... 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들었소."
"그 댁 마님은 괴정 때 돌아가셨고 사랑 양반은 그보다 앞서 괴상한 죽음을 당하셨지."
"괴상한 죽음?..."
혜관은 최치수가 죽은 전후 사정을, 현제 최참판댁 형편을 대강 이야기해준다. 최치수의 죽음이 비참했던 얘기를 들을 때 환이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혜관은 환이로부터 눈길을 돌린다. '무슨 인과응보인고.' 혜관 역시 찻잔에서 손도 대지 않고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나 노스님께 다녀오겠네."
방문 밖에는 어느덧 달이 떠서 훤했다. 혜관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한 시각이 지나고 거의 두 시각이 가까워오는 듯싶은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혜관은 돌아오지 않는다. '실은 네 속에 이는 원한도 진정 그게 원한인가 믿을 수 없구나. 불민한 너를 위한 아픔도 진정 그게 아픔인가 믿을 수 없구나.' 등잔불을 바라보는 환이 귓가에 부친의 목소리가 울려오는 듯하다. '네 아버님. 소자 지금 이르러 아버님 말씀하신 뜻이 깨달아집니다. 아픔이나 원한이나 인간사에서 그 모든 생각보다 더 깊고 큰것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아픔도 없고 울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난 세월에 겪은 고통은 오히려 감수같이 달콤하게 여겨지니 말입니다. 아버님, 차라리 회한인들 제게 있다면... 그렇지만 아버님 불쌍한 서희에게...'
환이 눈앞에 별안간 능소화꽃이 떠오른다. 능소화가 피어 있는 최참판댁 담장이 떠오른다. 비가 걷힌 뒤의 돌담장에는 이끼가 파랗게 살아나 있다. 창백한 얼굴이다. 움푹 패인 눈, 붉은 입술이다. 팔이 길고 키가 크고 뼈가 앙상하고, 흡사 버마재비 같은 모습니다.
"너 절에서 자랐느냐?"
나직한 목소리다. 다그쳐 물었다.
"어릴 적에 절에서 자랐지?"
환이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아비가 있느냐?"
환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최치수를 쏘아보았다. 가슴이 불이 활활 붙어 올랐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군. 누굴 닮았을꼬?"
치수는 육박해오듯 말했다. '당신 어머니를 닮았단 말씀이오? 아니면 동학군의 살인귀라던 접주, 그렇소! 이 마을을 지나갔었지요. 이 집에서 묵고 갔었지요. 그 접주를 닮았단 말씀이오?' 이빨 사이에서 터져 나오려는 절규를 악문다. '그렇소 나는 당신 어머니의 불의의 자식이오! 당신은 아미 다른 내 형님이오! 그리고 또 있지요. 형수를 사모하는 불륜의 사내요!' 끓던 피가 식었다. 치수는 골똘이 환이를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돌담을 따라 사랑문을 들어가는 치수 뒷모습에서 서릿발 같은 분위기가 번져나고 있었다.
십 년 전의 광경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환이 기억 속에 생생이 살아난다. 발자국 소리에 환이는 그 생생한 기억에서 놓여난다. 방문이 열렸다. 양쪽 관골뿐만 아니라 온통 얼굴 전체가 벌겋게 상기된 혜관이 얼굴을 디밀었다. 마치 술 취한 사람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도 긴장되어 있다.
"나오게."
환이 일어섰다. 밖으로 나갔다. 법의자락을 줄레줄레 흔들며 혜관은 앞서 걷는다. 암자 앞에까지 온 혜관은
"스님, 환이가 왔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혜관은 살며시 방문을 연다. 우관은 돌부처 모양으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12장. 오막살이의 소리꾼
추수를 끝냈을 무렵 마을에서는 집 나갔던 사람 하나가 돌아왔고 한 사람은 마을에서 영영 추방을 당한 일이 생겼다. 사람은 초췌한 몰골의 김훈장으로서 마을 사람을 몹시 실망시켰다.
"김훈장이 돌아왔다 카네."
"그래?"
"빼만 붙어서 못 보게 됐더란다."
"고생을 엄치 했는갑더마."
시무룩하게 말을 주고받는 마을 사람들 기분은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게다가 김훈장은 돌아온 후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않게 되니 마을 사람들은 곡절도 모르면서 노골적으로 김훈장에 대하여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그 양반도 보통으로 질정 없는 사램이 아니구마. 나갈 때는 머할라꼬 나가가지고 돌아오기는 와 돌아왔을꼬."
"의병장이니 머니 해쌌더마는 그거 다 생판 거짓말이다. 식자가 있이니께 말만 번드르를했지 담뱃대 들고 마을길이나 얼쩡거리고 댕기든 사램이 멋을 할 기라고."
"흥, 양반 양반 함시로 오지기도 고만을 떨어쌌더마는 머 별수도 없거마는. 하기사 본시부터 집안 내림이, 안 그렇나? 누구 하나 뽀족하게 벼슬한 사램이 있이야제. 기껏 해봐야 죽은 김진사..."
"아무래 그래싸아도 일 치는 사램은 따로 있는 기라. 양반이라고 저저이가 다 남으 우뜸에 서는 거는 아니거마는. 상놈이라도 지 하나 똑똑하믄 난세에 수만 군졸도 거느릴 수 있는 기고. 하기사 이자는 양반도 뻬가 물러져서 나라나 팔아묵었지, 별재간 없는 모양이라.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네만 이럴 때 녹두장군 겉은 사램이 있었이믄 일어서서 나라를 구할 긴데. 옛적부터 나라가 망할라 카믄 충신부터 죽이니께."
"와 아니라."
김훈장 스스로도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했으나 마음에서도 그를 찾아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두 과부가 살았을 적의 김진사댁처럼 김훈장댁도 완전히 소외되고 만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조준구는
"천하의 못난 위인 같으니라구."
하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한편, 마을에서 영영 추방된 사람은 김서방댁이다. 가을에 들어서면서 딸 남이를 여의에 되었는데 그 혼사에 드는 비용에 대하여 홍씨나 조준구가 일체 외면을 한 데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김서방댁은
"죽은 김서방은 이 댁 종이 아니었십니다. 한펭생을 이 댁에서 뻿골이 빠지도록 일하다가 죽었심다. 돌아가신 마님께서는 쇤네 식구들을 소홀히 하신 일이 없었심다. 큰딸아이 시집갈 때만 해도 생각하믄 서러버 죽겠심다. 그리 졸지간에 돌아가시지만 않았이믄 우리가 이 지경 됐겄십니까. 한 살림 떼어주시는 거사 떼어 놓은 당상이고 그거사 머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시이소. 쇤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물어보시믄 아실 일 아닙니까. 머 그런다고 떼를 씨자는 것도 아니겄고 이 댁만 믿고 살아온 우리 처지고 보니께, 가시나를 늙히묵을 수도 없는 일이고."
하며 장광성을 늘어놓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눈밖에 나 있었고 군식구로 치부되어왔던 참에 눈치코치 없이 돌아가신 마님 어쩌구저쩌구, 찢어진 작은 눈을 까끄름하게 뜨고 바라보던 홍씨 심통이 부채질한 것밖에 없다. 당장 호통이 날아왔다.
"네 딸년을 시집보내면 보내는 거지 누구 앞이라고 와서 감히 따따부따하는 게냐? 당돌하고 무식한 계집년 같으니라구. 그렇게 돌아가신 마님 마님, 하지 말고 무덤에 가서 혼비 내놓으라 하면 될꺼 아니냐!"
그렇게 되고 보니 김서방댁 입에서 악다구니가 나오게 되고, 본시 사대부집 여인네로서 수양을 쌓고 교양을 지닌 여자도 아닌 홍씨인지라 당장에 눈을 까집고 입에 거품을 뿜고 손찌검에 입을 담지 못할 욕설이 나오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어 하인을 시켜 직사한게 매질을 했다. 결국, 남이는 보따리 하나 겨드랑이에 끼고 울면서 시집을 갔고 김서방댁과 개똥이는 쫓겨났다. 삼수의 세력이 약해지면서부터 언론이 되살아난 마음에서는 이 소문이 퍼지다 여론이 분분했다.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해도 너무한다. 도무지 경우에 없는 일 아니가.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김서방으로 말할 것 같으믄 최참판댁에 찌꺼미 아니가. 마님만 살아 기싰으면 백섬지기쯤 띠어 내주어도 주었을 사람 아니가. 종도 아니겄고 머심을 살아도 삼십 년 넘기 살았이믄 그 새경만 해도 얼마겠노. 때 찌었고 더러븐 심사 아니가."
"내쫓으라꼬 생각했던 기지 머."
"체모 없는 짓이제."
"체모? 법도 없는데 무신 체모고."
"뒤에서 말할 사램이 없인께 무신 짓인들 못할까. 그 빌어묵을 할망구 입만 살았지 순 숫되배기라 카이. 내 겉으믄 집에 불을 확 싸질러부리지. 빈 몸으로 쫓겨나? "
"뒤에 말할 사램이 없어 그러까. 흥, 김서방이 살이 있이도 별 수 없네. 씰개를 뽑아주어도 값 달라 못하는 기이 상놈으 팔자 아니가. 앞으로는 갈수록 태산일 기구마. 참말이제 남으 일 같잖다."
언론이 되살아났다고 해서 권리까지 되살아난 것은 아니다. 뭇사람들 입이 들면 무쇠도 녹인다 했었지만 그 입들은 헛바람을 키웠을 뿐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쫓겨만 김서방댁은 읍내 바람 부는 장터에서 혹은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떡장사를 하며 겨우 연명해간다는 소문이었다.
문을 열고 살며시 방안으로 들어갔으나 서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줏빛 모보단 저고리를 입은 가느름한 어깨도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만에 서희는 책장을 넘긴다. 생시 그이 부친 최치수가 하던 그대로의 행동이다.
"애기씨."
"..."
"저어..."
"..."
"읍내, 월선아지매 집에 다녀와도 되겄십니까?"
말해놓고 봉순이는 서희의 허락을 기다린다. 팽팽한 침묵이 지나간다. 한참 후에
"너 마음대로 하려무나."
말이 떨어졌다. 순간 봉순이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겨울 햇빛이 장지문 문살에 꺾여져서 방안에 들이친다. 햇빛을 받아 보송한 솜털이 드러난 서희의 힌 목덜미, 저고리 한가운데를 지나 남빛 치마아래까지 내려진 머리채를 잠시 쳐다본 봉순이는
"그러믄 다녀오겄십니다."
하고 물러나 방문을 닫는다. 손바닥에 쩍 들어붙는 쇠문고리를 놓고 봉순이는 별당 뜨락을 빠진 눈으로 쳐다본다. 연못은 하얗게 얼고 바람에 날리어온 가랑잎이 얼음판 위를 뒹굴고 있다. 강물이 얼지는 않았으나 나룻배가 있을지 봉순이는 생각하다가 육로로 향해 걷는다. 바람이 들판을 휩쓸고 온다. 돋아나다 만 보리밭에 내려앉은 까마귀떼, 오목하게 날개를 접고 햇볕을 쬐고 있다. 움츠리며 걸어가는 봉순이를 능청스럽게 바라보는 놈이 있고 잿빛 주둥이로 언 땅을 쪼아보는 놈, 혼자 싱겁게 까우까우 하며 목청을 뽑는 놈도 있다. 칠흑 같은 털빛이 햇빛 따라. 움직이는 데 따라 선명하고 아름다운 북청빛깔로 변하곤 한다. 누구나가 다 싫어하는 이 새떼들을 바라보며 걷는 봉순이는 오히려 어떤 위안을 느낀다. 장날도 아니다. 날씨는 춥고 길은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다. 산과 들과 강물은 생명을 잃은 듯 얼어붙고 말라버리고 황량하다. 봉순이는 솜토시 속의 두 손목을 꽉 맞잡으며 걷는다. 바람에 흙먼지가 입으로 날라 들어온다. 퉤퉤! 뱉어내면서, 너무 추워 입을 다물고 걸을 수가 없다. '날씨가 추븐데 다음에 가려무나, 그렇기 한 말심을 해주었이도 내가 이 추븐 날에 나서지는 않았일 낀데 세상에 무신 일로 가느냐 말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우찌 그리 매룩궂일꼬.' 바람에 흑흑 느끼는 봉순이 마음도 따라 울먹여진다. 굳이 가야 할일이 있어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아침을 먹은 뒤 봉순이 제 방에 앉아 버선은 깁고 있었는데 서희 방 아궁이 앞에서 장작을 내려뜨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길상이 군불을 때로 왔구나.' 추운 겨울에는 아침저녁으로 군불을 지펴야 한다. 서희 방의 군불은 늘 길상이가 지폈다. 봉순이는 일손을 멈추고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쏘시갯감인 솔가지 분지르는 소리가 툭툭 들려온다. 봉순이은 손바닥을 무릎 밑에 넣어본다. 방이 차다. 길상이 봉순이 방에까지 군불을 넣어줄 리가 없다. 얼음장같이 차디찬 길상의 마음에 가슴이 떨려온다. 입술을 깨물어도 가슴이 떨려온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생각지 않으려고 굳게 결심을 했으면서도 길상이 야속하고 서희에게 대항하는 심사, 그러면 봉순의 마음은 심한 파도에 흔들리는 배처럼 흔들린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날 같은 거사.' 순간적으로 하던 일을 버리고 일어섰다. 그리고 서희 방에 가서 읍내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만 독한 마음 한분 묵고 달아나 부릴까? 멀 믿고 내가 그 집에 있노 말이다.' 치마가 말려 올라간다. 바짓가랑이 쪽에서 찬바람이 종아리를 따라 쑤시며 스며든다.
"엄니!"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엄니! 머할라꼬 날 낳았소! 이리 불쌍커로 날 혼자 두고, 으흐흐흣..."
울며불며 바람 부는 길을 간다. 봉순이 읍내에 들어섰을 때는 점심때나 된 것 같았다. '우짤고? 거기 한분 가볼까? 이 꼴을 하고 우찌...' 삼가름길에 서서 망설인다. 읍내 길에도, 오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 언덕배기서 뛰어내리는 심치고 한분 가볼까?' 지난 가을이었다. 월선이 집엘 찾아가는 길이었다. 가는 도중 게딱지만한 오막살이집 안에서 장구 소리, 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에 관심이 많은 봉순이는 저도 모르게 한참을 서서 들었다. 그러다가 월선이 집으로 간 봉순이는
"아지매요!"
"와."
"옴시로 들었는데요."
"머를."
"게딱지만한 오막살이 안에서 장구 소리가 나고 노랫소리가 나는데 머하는 집이요? "
"아아, 배서방 집 말이가."
"배서방 집이라꼬요?"
"배서방은 소리꾼이니께."
"잘하는 소리꾼이요.? "
"명창이라는 말이사 못 들었다마는 기생들도 배우러 오고 소리꾼 되겄다는 사람도 배우러 오고 하다 카니께 엔간히 하는가부제. "
"근데 와 집은 그리 게딱지만하요? "
"그라믄 대궐 겉을까?"
하고 월선이 웃었다.
"그래도"
"이름이나 크게 떨칬다믄 모르까 광대들이 무슨 수로 큰 집 짓고 살겄노. 재주 하나 가지고 의식을 매련하는 것만도 다행이지. 남 보기사 마른 자리에 앉아서 호강하는 것 겉지마는 광대라 카믄 옛적부터 모두 가난하네라."
"그러믄 기생 아가씨들도 그렇겄구마요."
"그거사 좀 다르겠지. 광대하고 기생하고는 다를 기구마. 하기사 기생도 가무에 능하고 인물이 좋아야."
그러고는 잊어버린 일이었다. 봉순이는 게딱지만한 초가집 앞에까지 왔다. 판자로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으나 시커멓게 썩어서 연방 쓰러질 것 같고 울타리 옆에 가는 버들가지가 훌렁훌렁 바람에 날리고 있다. 오막살이는 동면에라도 들어가 버린 듯 조용했고 사람의 기척도 없다. 반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기웃이 들여다본다. 마루 하나, 방 하나, 방 뒤켠에 부엌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두 탄 겹집이다. 방 앞에는 손바닥만한 툇마루가 있고 세수대야 하나가 댕그렇게 놓여 있다.
"여보시요."
작은 소리로 불러본다. '아무도 없이까' 없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난다.
"여보시요!"
"누구요."
툇마루 쪽의 방문이 열리면서 핏기 없는 중년 사내가 얼굴을 내민다.
"저어."
"뉘를 찾는고?"
"저어, 배서방이라 카는."
"할 말이 있으믄 이리 와서 하지."
"저어."
하면서 봉순이는 머뭇머뭇 들어간다.
"무슨 일로 왔일꼬? "
중년 사내는 여전히 얼굴만 내민 채 퍼렇게 언 봉순이 얼굴을 올려다보고 다시 몸매를 살펴본다. '고거 참하게 생겼구나. 옷맵시도 그만하고, 카랑한 목소리하며 뉘집 귀한 딸 같은데...'
"저어, 소리하는,"
"음, 내가 그 배서방이다."
사내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활기가 있다.
"소리 공부할라 카믄."
"누가? 니가?"
하다가
"추분데 문 열어놓고 말할 수도 없고, 여기 들어오지."
일어서며 방문을 좀 더 열어붙인다.
"야?"
봉순이는 겁이 더럭 난다. 집안에는 이 사내말고 아무도 없는 성싶고 핏기 없는 사내 얼굴이 섬뜩하다.
"자, 들어오너라. 들어와서 차근차근 얘기하믄 내 알아서."
"아, 아니요. 다음 또, 또 오겄소."
봉순이는 몸을 돌리고 뛰어갔다.
"봐라! 봐라!"
급히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쫓아온다. 봉순이는 더욱 겁이 나서 달음박질친다. 얼마를 뛰어가다가 그는 걸음을 늦춘다.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형편을 뻔히 알믄서 우찌 애끼씨를 버리고, 누굴 의지하고 살라꼬 내 혼자 나온단 말고, 차마 그럴 수는 없다. 본시 성정이 그런 거를내가 참아야지. 만사가 뜻대로 안 되니께 그러는 거를... 이자는 길상이 지가 몸뚱이를 천 쪼가리 만 쪼가리를 내보지? 지가 애기씨를 우짤 기든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마는 그 꼽추도령한테 시집을 갔이믄 갔지, 어림 반푼어치나 있는 일이건데? 지 속맘을 모르니께 그렇지 알아봐라. 지 명이 붙어날 기든가? ' 잊는다고 하면서도 역시 가슴은 쓰리고 아프다.
월선의 집에 이르른 봉순이는
"아지매요!"
하고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추위에 입술이 굳어져서 목소리가 작았다. 방안에서 도란도란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지매요!"
"누구오?"
"나 봉순이요."
얼른 방문이 열린다.
"아이고오, 봉순이구나. 이 치븐 날에 니가 우짠 일이고. 어서 들어오니라."
"봉순이가 왔다고?"
월선이 뒤에서 김서방댁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나타났다.
"김서방댁!"
방안으로 돌어선 봉순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와 이라노. 봉순아."
월선이는 딱해하면 봉순이 등을 두드리고 김서방댁은 입을 비죽비죽 하다가 함께 따라서 눈물을 흘린다. 자기도 울면서 우지 마라, 하며 때묻은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는다. 김서방댁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너무 치버서 몸 좀 녹일라꼬 여기 왔더마는 마침 니를 보는고마. 그래 애끼씨는 잘 기시나?"
"야."
"니를 이리 보니..."
설움이 복받쳐 흐느낀다.
"기, 김서방댁은 개, 개똥이를 우, 우짜고 댕기요."
"지 큰누부 집에 갖다 ? 다. 그래 니는 우찌 지내고 있노."
"오도가도 못하고, 그, 그만 똑 죽어부이믄 좋겠소."
"그러기, 니 에미가 살았이믄 니가 인지꺼지 이러고 있겄나. 에미가 없더라 캐도 마님이나 살아 이깄더라믄, 참말이제 오지기 복도 없다. 묵은 식구들은 모두 추풍낙엽꼴로 되고 어디서 굴러왔는지 날도둑 겉은 놈들이 까매기 까치집 뺏듯이 들앉아가지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자는 꽃도 질 때가 됐는데 니를 우짜겄노. 하기사 장안 거지가 도신씨 걱정한다 카더라마는 내 처지에."
"김서방댁은 우찌 사요."
겨우 눈물을 거두고 묻는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머."
찐찐한 코를 치맛자락으로 닦으며 김서방댁이 말했다.
"그 말 좀 참았이믄 이런 고생은 안 할 긴데."
월선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말이가."
"야."
"내사 못 그런다. 빌어묵었이믄 빌어묵었지."
했으나 얼굴에는 후회하는 빛이 역력하다. 풀이 죽는다. 그러나 날개를 털고 일어나듯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런 날도둑이 어디있단 말고, 내 자다가도 김서방 공이 다 허사가 되고 빈몸으로 쫓겨난 생각을 하믄 가심에 이런 기이 치밀어서."
주먹을 쥐고 쑥 내밀어 보인다.
"옛날에 공든 탑이 무너지느냐 카더라마는 그것 다 헛말이라. 삼십 년을 곱다시 우리 죽은 김서방이 그 집을 위해서 말 갈 데 쇠 갈 데 다 댕기문서 곱돌겉이 최참판댁 살림을 지켜주었건마는, 묵기는 파발이 묵고 튀기는 역마가 뛰더라고 벵신자식 앞세우고 빈몸으로 나서는 낸 맘에 피가 지더마. 남으 눈에 피눈물을 내고 그래 저거들은 천년을 잘 살 기든가? 내 오래 살아야겄다. 오래오래 살아서 눈을 닦고 볼 기구마. 망하는 꼴을. 그란하믄 억울하고 원통해서 우찌 눈을 감겄노. 생각수록 분이 나서. 아, 서울아씬가 개차반인가 그기이 어디 사람이가? 내 말 좀 들어보라고. 기왕지사 우리네야 타고나믄서부터 상것이고 불상놈으 자손이니 무신 허물이 있겄노. 참말이제, 우리 돌아가진 마님이사 어디로 평생 분단장을 하시까. 노상 수수한 차림이고 패물이고 많아도 개똥 보듯이 몸에 지니시는 일이 없고. 아, 아닌 말로 하인 놈을 붙어 달아난 별당아씨만 하더라도 얼매나 얼매나 요조했다고? 어디 평생 언성 한분 높이시까. 그래도 아랫사람들이 벌벌 떨지 않던가베? 이거 어디 순 사당패도 아니겄고, 여기가 둔갑해 온 것도 아니겄고 불한당도 아니겄고 어디 한 구석을 뜯어봐도 우리네 불상놈으 자손보다 나은 기이 머 있노? 기떡이 맥히서,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세상에 주산이를 감고 패물을 주렁주렁 달고 댕김시로 그 발모가지 한분 보믄 넉장거릴 할 기구마, 넉장거릴 해. 때가 꼬장꼬장 눌러 붙어서 내 구역질이나서 못 새기겄더마. 얼굴은 밤낮없이 씻고 바르고 씻고 바르고 함시로 발을 까매기가 보믄 할배야 하겄더마. 한분은 하도 얼굴에 분을 칠갑했길래 마님 분이 밀떡겉이 밀습니다, 했더니 단박 한다는 말이, 이 늙은 년아! 니가 내 시어미냐! 그런허나? 한분은 또 내가 말했지. 눈이 찢어지믄 팔자가 세다가 카도 동아살이 져도 팔자가 세다 카는데 마님은 와 일부로 연지를 찍십니까 했더니만 대뜸 덤비들어서 내 뺨을 철썩 치지 않겄나. 그라고 머라 카는고 하니 이년아, 누구보고 시샘이냐! 허 참 내가 그라믄 본처고 자개가 첩이더란 말인가? 아무리 질정이 없고 작살이 없기로 그게 양반댁에서 법도 배운 행실이겄느냐 그 말이다. 누가 말하기로 양반 노릇도 몸에 익어야 하는 기지 저저이 다 하는 거는 아니라 카더마는."
김서방댁은 숨이 가쁜지 일단 말을 끊었다. 추위에 얼었다가 따뜻한 방에서 몸이 녹는 탓인지 봉순이의 양볼은 앵두같이 빨갛게 달아 있다. 흥분하여 지껄이는 김서방댁을 넋 빠진 듯 그는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김서방댁의 사설이야 옛적부터 익히 알고 있는 터지만 대로상을 쉬지 않고 휘젓고 가는 걸음 같은 어세에 눌려 그는 잠시 자기 자신의 설움도 잊어지는가 했던 것이다. 한숨을 돌린 듯 김서방댁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무튀튀하고 더욱 살가죽이 늘어난 얼굴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다. 이대로 나가다간 밤을 새워도 끝이 안 날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 나갔던지 월선이 접시하고 탕기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김서방댁, 떡 좀 삽시다. 엿이 있어서 좀 녹여왔는데."
월선이 말에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떡을 사다니? 원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노?"
"생업인데 사야지 그냥 묵겄소?"
"반가븐 봉순이가 왔는데 떡을 해서라도 믹이 보낼 긴데 야박스런 소릴 다 하느고나."
여전히 내일 끼니가 없을지라도 인심 좋은 말을 하는 김서방댁은 접시를 들고 마루고 나간다. 마루끝에 놓아둔 함지를 검정도를 걷고 콩가루에 굴려 인절미를 접시에 듬뿍 담아 들고 들어온다. 월선이는 떡값을 셈해서 억지로 쥐어준다.
"내사 싫다. 안 받을란다!"
김서방댁은 월선의 팔을 떠밀어낸다.
"김서방백이 안 와도 봉순이가 왔이니께 장에 떡 사러 갔일 기요. 암말 말고 받으소."
한참 승강이를 하다가 겨우 돈을 받은 모양인데 김서방댁 표정은 몹시나 서글퍼 보인다.
"봉순아, 엿에 찍어서 떡 묵고 있거라. 김서방댁도 오고 했이니 잠시 나가서 점시 해올기니."
"아니요, 아지매, 나 점심 생각 없소."
"머 점심 할 것 있나. 식은 밥 있으믄 국밥이나 끓이라모. 속이 떨리서 따끈한 국밥이."
말하는 김서방댁은 배가 고픈 표정이다. 월선이가 나가자 김서방댁은 봉순에게 떡 먹기를 권하면서
"참말이제 장사도 해묵기가 어렵다."
"나 애기씨한테 가서 말 좀 해볼께요."
"말 마라. 집안만 시끄러버질 기다. 참말이제 어서어서 애기씨나 커서 그 살림 차지하믄 나 달리서 갈 긴데."
"그이기 어디 쉽겄소."
"그러니 분통이 터지지. 묵은 식구들은 모두 추풍낙엽이 되고 애기씨 혼자서, 말 들으니께 왜놈들이 득세하니께 조가네도 득세하게 된다 그런는데 참말로 심장이 상해서. 그저께는 길가에 떡함지를 놔두었다고 왜놈 별순사라 카든가 순사라 카든다, 곰겉이 생긴 놈이 지나가다가 발길질을 해서 떡함지를 엎어부리고."
"왜놈으 순사가요?"
음,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씨부리믄서 지랄을 하는데 옆구리에 긴 칼이 철거덕 철거덕 소리를 내는 바람에 우찌나 무섭든지 내가 그만 떡함비 내부리고 달아날라 안 했나."
"그래 하루장사 망칬구마요."
"머 다 파고 떡이사 얼매 안 남았지마는 참말이제 이래가지고 어디 살겄나."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월선이 잽싸게 국밥을 끓여서 들여왔다. 세 여자는 머리를 맞대고 뜨거운 장국밥을 먹는다. 김서방댁은 땀을 흘리며 달게 먹는다. 혹이 붙은 것같이 마디가 굵은 손을 들어 땀을 씻곤 하는데 마디가 긁어져서 빼질 못하였는지 다 닳아빠진 납가락지가 번득거리곤 한다.
"이자 속이 좀 풀리는고나. 어찌 춥든지."
"춥거든 언제든지 오소. 방도 따시고 뜨거운 국물도 마시고."
월선이 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머 양식 맽기놨다고 자주 오까? 사램이 염치가 있지. 만장겉이 받아낼 기이 있거마는 피 한 톨 못 받고, 쫓기나는 세상 인심인데."
"묵으믐 얼매나 묵겄소."
국밥을 먹은 뒤 김서방댁은 떡을 팔러 나갔고 한 시각 가량 얘기를 하다가 애기씨 걱정이 된다 하면서 봉순이 일어섰다.
"아지매, 또 오겄소."
봉순이는 마음을 잡고 바람 부는 거리고 나섰다.
13장. 밤에 우는 여자
'무신 날이 이렇게 푹푹 찌노. 이 오뉴월에 몸은 무겁고 전신에 땀띠가 솟아나서, 내사마 우짤고 싶으다. 옛날 겉으믄 안일이나 하믄서 여름을 곱기 보낼 긴데.' 풋콩을 까다 말고 순이는 풀밭이센 삼베적삼 위로 긁적긁적 팔을 긁는다. 흙먼지에, 기미 슨 얼굴에는 땀띠까지 돋아나 몰골은 대가댁 종이라기보다 농사꾼 아낙이다. '동네서도 못 살겄다는 소리가 떴다 카더마는 우리도 못 살기는 매일반이다. 날이 갈수록 주친 닭맨치로, 서울것들이 말짱 판을 치니께 머잖아서 김서방댁 신세가 안 될 기라꼬 누가 장담하겄소. 첨부터 진일 마른일 다 보아준 삼수도 이자는 언지 보았드냐, 괄시를 받으니 말이다. 마님이 살아 기싰더라면 하다못해... 맨날 말해봐야 그 말이 그 말, 무슨 소앵이 있노. 당당한 만석 살림 임자로 태이난 애기씨도 설움이 자심하고 무신 골리가 있이야제... 아이구 참 이러다가 아아는 우찌 놓을 기며 그 눈칫밥을 우찌 얻어묵으꼬?'
귀녀가 죽은 뒤 삼월이와 함께 집안일을 보던 순이도 어느덧 서울서 데려온 계집종들에게 밀려나 허드렛 일꾼이 되 것은 오래 전일이다. 스물이 넘어서 겨우 육손이와 짝을 지어주어 아이를 배기는 했으나, 옛날 같았으면 본인들이 원할 경우 논마지기라도 얻어 살림을 나갔을 것이요, 살림을 나가면 신역이니 신포니 상전댁에 바쳐야 하는데 윤씨부인은 그런 것에 대하여 과히 엄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작인으로서 세월이 흐르면 두만네처럼 허물을 묻고 어엿한 농부가 될 희망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감히 그런 말을 입밖에 내볼 수도 없었고 법이 바뀌어 떠나는 것은 자유라지만 두 주먹만 쥐고 나가서 살아갈 용기도 없는 것이다. 일이 너무 고되었다. 지금도 순이는 김서방댁이 가꾸던 밭을 매다가 콩밭에서 풋콩을 따왔다.
'짐 안 나는 물이 더 뜨겁다 카더마는 죽은 김서방이사 잔소리는 많아도 이 사정 저 사정 다 보아주었고, 아배같이 의논도 하고... 지서방인가 쥐새낀가 그놈으 인사 생전 나무라지도 않으믄서 사람으 간까지 끄내 묵을라 카이.' 바보가 아닌 대신 똑똑하지도 않았고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았고 그저 수더분한 순이였지만 불평을 안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괴질에 하인들이 많이 죽은 것도 그렇거니와 잡아먹을 듯 으르렁 대던 수동이 죽고 보니 여간한 울타리가 아니었다. 김서방댁 식구조차 다 쫓겨난 집안에서 남은 노비들의 처지는 날로 달라져가고 있다. 군식구 취급이며 어떤 때는 서울서 온 노비들 시중까지 드는 아니꼬움을 참아야 한다.
"니 읍내 머하로 갔더노."
"머하러 가믄 무신 상관인고."
"바린 말 해라!"
"못하겄다!"
"니 정말로 이럴 기가?"
뒤꼍에서 길상이와 봉순이 다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길상이 자아가 와 저리 화를 낼꼬?' 순이 귀를 기울인다.
"니가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아무 까닭도 없다!"
"있다."
"우째서?"
"니 내한테 맞아볼래?"
"니가 와 나를 때릴 것꼬?"
"니, 니, 니 읍내에 머하로 갔다 와?"
"가든지 말들지, 월선아지매한테 갔다 와?"
"본 사람이 있다!"
"본 사램이 있이믄 알 긴데 와 묻노?"
"소리꾼인가 기생오래빈가 그놈으 집에 머하러 갔더노. 사당 될라꼬 갔더나?"
그 말에는 순이도 짐작이 간다. 들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사당 될라꼬 갔다 와?"
"이눔으 가시나가!"
따귀 때리는 소리가 철썩 하고 들려온다.
"와 때리노? 니가 먼데 날 때리노?"
"죽어부리라! 니겉이 화냥기 있는 가시나는 죽어부리야 한다!"
연거푸 때리는 소리가 난다.
"아아니 미쳤나, 와 이라노."
순이는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쫓아가서 말린다.
"죽은 어매 새, 생각을 해도 차, 차마 니가 못 그랄 긴데."
길상은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더니 휭하니 가버린다. 한쪽 뺨이 벌개진 봉순이는 울지 않고 차라리 말뚱말뚱한 눈을 하고 있다.
"길상이가 그럴 만도 하지. 나도 들은 말이 있이니께."
하며 순이 혀를 찬다.
"내가 머 사당이 될라 캤나 머."
"와 하필이믄 그런 집에로 찾아갔노. 아직이사 다른 사람들이 모르니께 그렇지. 니를 쫓아내고 저블 긴데, 험만 잡아봐라 당장에."
"나가라 카믄 나가지 머. 겁날 거 하낫도 없거마는."
"애기씨는 우쩌고?"
"..."
"그러니께 길상이가 화를 내는 거 아니가."
"월선아지매 집에 감서 한두 분 가본 긴데 그기이 머 우떻다고 그러는고?"
"그라믄 그렇다고 말을 할 기지. 니가 달라드니께 안 때리나."
"우린 아밴가? 오래빈가?"
"오래비나 다를 기이 없제. 그렇기 서로 의지하고 왔심서 오새 니와 그라노."
그들 사이의 갈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순이는 객담을 못하는 성미다. 봉순이는 비로소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하는 말은 결코 숙어든 것은 아니다.
"삼수 말이 맞지. 흥! 남 주기는 아깝고 지 묵기는 싫다 그거 아니가."
"가시나가 시집을 안 보내주니께 별놈의 소리를 다 하는구나."
기가 치서 웃는다.
"아무튼지 맘잡아라. 애기씨 생각을 해서라도."
"언제부터? 진작 좀 그럴 일이지."
"오금 박지 마라. 우리한테 무신 심이 있나."
하고 순이는 그때야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봉순이를 내버려두고 돌아와 콩을 깐다. 저녁을 먹은 뒤 순이는 삼신당 옆 개울에 목욕을 하러 갔다. 일곱달 된 뱃속의 아이 생각도 해야 하는데 그보다 그는 더위를 이길 수 없었다. 찬 물속에 들어오니 낮의 불평 같은 건 일시에 사라지고 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물소리가 쿵쿵 울리고 있었다. 전나무 오리나무 도토리나무 머루덩굴과 칡덩굴 사이로 여광이 부챗살처럼 새어든다. 덤불 속에 모습을 숨긴 휘파람새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유월 한더위의 해는 몹시 길기도 했다.
"아이구매! 사람 잡겠네!"
젖가슴을 감싸 안고 물속에 주질러앉으며 소리를 지른다. 바구니를 겨드랑에 끼고 허깨비 같은 삼월이 싸리나무를 헤치며 물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믄 온다고 기척이나 좀 내야지. 사램이 얼매나 놀래노."
삼월이는 개울가 바위에 엉덩이를 붙인다. 나무그늘과 스며든 여광에 얼굴이 진 바위 빛깔은 보랏빛이다. 무릎 사이에 비어져 나온 순이 젖꼭지도 보랏빛이다. 성난 얼굴로 몸에 물을 끼얹다가 순이는 돌처럼 단단함 팔뚝의 때를 밀기 시작한다. 팽팽하게 솟은 젖무덤이 움직임에 따라 경련하듯 흔들린다. 삼월이는 들고 온 바구니 속에서 칼과 참외를 꺼내서 껍질을 쭉쭉 밀어내듯 깎는다.
"내가 목욕하로 온 줄은 뻔히 알믄서 홀몸도 아닌데 무신 심청고."
"와? 구신이 오는 줄 알았더나."
"지랄한다. 내사 남정네가 온 줄 알았나 말이다."
순이는 찰싹찰싹 물을 끼얹으며 물살에 떠내려가는 파아란 참외 껍질을 바라본다.
"외는 어디서 가지왔노."
"..."
"새미 물에 띄우놓은 거를 건지왔고나."
"그랬다."
"간도 크다 들키믄 우짤라꼬."
삼월이는 참외를 두 쪽 내어 한쪽을 순이에게 내밀었다.
"묵어라."
"나가서 묵지."
"묵어라. 물속에서 묵어라."
우격다짐이다. 참외를 받아먹는 순이는 삼월이 손에 있는 칼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삼월이는 이 세상에 참외 먹는 일 이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듯 열중해 있다. 아니 부산스레 소리 내어 먹는 행위 자체를 잊고 있었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순아."
"와"
"내가 구신겉이 보이나?"
"누가 구신을 봤이야 말이제. 사람이 우째 구신 겉을꼬."
그의 말대로 모습은 수척하여 귀신이 저럴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보다 요 며칠 사이 삼월이 전과 같이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동안 병신처럼 말이 없고 반 정신이 나갔다고들 했었는데 어쩐지 하는 말에 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노상 빛을 잃고 있는 눈동자가 야무지게 보여질 순간도 있다. '맘에 씨어서 그리 보이는 거지. 아무리 반 정신이 나갔다 카지마는 자식을 잃어부리고 지가 우찌 환장이 안 되겄노.' 열흘 전에 아이를 잃은 것이다. 이질을 앓았는데 약 한첩 먹여보지 못하고 오히려 주위에서는 죽기를 바라는 야박한 인심 속에서 아이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로는 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심정이 죄책이 되어 순이 눈에 삼월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난 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삼월이는 껍질도 벗기지 않고 통째로 참외를 깨물어 먹고 있었다.
"안 갈래?"
했을 때 삼월이는 멍하니 순이를 바라보았다.
"껌껌해졌다. 가자."
"아니."
"와."
"내가 참외를 다섯 개나 가져왔는데..."
빈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반쪽만 날 주더니 나중에사 껍데기도 안 벳기고 미치괭이겉이 혼자 묵더마는."
"내가 그거를 다 묵어?"
"배 한분 만지봐라. 망둥산겉이 부었을 기다."
"..."
"맛이나 알고 묵었나?"
"..."
"아까 저녁 묵을 때도 밥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묵더니, 간장 한분 안 찍어묵고 우찌 맨밥을 그리 묵노?"
"내가?"
"그래."
"..."
"나 혼자 가까?"
"맘 대로 하라모."
"어두버오는데 안 무섭나."
"안 무섭다."
순이는 우두커니 서서 삼월이는 쳐다본다.
"하기사 니 맴이 머기 그리 놓겄노. 실컨 한분 울어부리고 그만 때리치아라. 니사 섭섭하겄지마는 아니 할 말로 남들은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지. 그래가지고 크믄 뭐하겄느냐고, 잊어부리라."
"내가 머 개새끼 겉은 그거를 귀키나 했건데?"
갑자기 일어서더니 삼월이는 싸리나무를 헤치며 사뭇 쫓아 내려간다.
"빌어묵을 제집, 가자가자 할 때는 꿈쩍 안 하더마는 지 혼자 가부리네."
사방은 어두워왔으나 산바람은 여전히 더위를 머금고 있다. 순이 한참을 걸어 내려왔을 때 불타 없어진 누각 빈터에 삼월이 서 있었다.
"아직 안 갔나?"
돌아본다.
"가믄 머 할일이 있나."
그러고는 우두커니 선 채다.
"달이 떴고나."
중얼거리며 순이 마을을 내려다본다. 달빛과 아직 남아 있는 황혼 빛 아래 산과 강물과 마을이 조용히 누워 있다. 논둑길을 걷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보이고 소를 몰고 오는 목동도 있다.
"옛날은 참 좋았는데."
말을 못 들었는가 삼월이는 그냥 멍청하기만 하다.
"저 들판이 누우렇기 익으믄은 추석이 오고.... 옛날에는 동네에 전곡도 많이 나갔제. 무서븐 어른이지마는 돌아가신 마님이사 그런데는 후하媛?... 참말로 꿈 겉다. 갱매깽이 소리, 징 소리 들은 지가 아득하고나. 이서방은 베수건으로 장구를 걸머지고.... 그런 추석이 어디 갔는지 모르겄네.... 목청 좋은 서서방은 실성했고 신명 내든 사람들은 이자 늙어부리고, 그새 사람도 많이 죽었고나. 우리네 신세도 많이 벤했고 이자는 추석이 와도 명절 겉애야 말이제. 달이 엄치 솟았네."
산에서 뻐꾸기가 운다.
"들어가자. 해가 질어 그렇지 밤은 저물었일 기다. 일찍이 자야 내일 일어나서 꿈적이제."
그들이 집으로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집안이 어수선했다. 항상 조용한 뒤채 쪽에서 두신두신 사람 소리가 들려왔고 별당 안에서도 기척이 이상하다. 연이네 모녀가 우두커니 서로 마주보며 우물가에 서 있었다.
"와 이러요?"
함께 들어온 삼월이는 어디 갔는지 없어졌고 순이가 연이네에게 묻는다. 대답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소?"
"머,"
하다가 입맛을 다시며
"시끄러븐 일이 좀 있었다."
하고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터인데 부인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요."
안채 대청에서 들려오는 조준구의 격한 목소리다.
"쓸데없는 짓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올곧잖은 홍씨의 대꾸다.
"허허어, 내가 뭐라 했소?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조금치도 서둘 것은 없다구요. 그럴 필요는 없다, 그 말을 잊고서 이 소동이오?"
"아아니 무슨 큰 일이 났었다고 이 야단이시오? 그까짓 계집애 하나 숨 좀 넘었갔기로, 죽어 자빠진 것도 아니겠고, 영감까지 이러신 점점 고게 기고만장, 어른을 어른으로 보지 않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병수는,"
"그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 역성까지 들고 나오는 게요? 병신 육갑하더라고 그 놈을 그만."
"만사는 다 되게 돼 있는 것을, 허허 왜 이리 야단이오. 체통을 생각지 않고."
"체통이라구요? 아아니, 자식놈이!"
하자 조준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고 다음 방안으로 떠밀고 들어갔는지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연이네 모자는 어느덧 각기 자기네들 처소로 가버리고 없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잠자리에 들면서 순이는 물었다.
"저녁때 무신 일이 있었소?"
"머 좋은 일도 아닌데 알아서 머할라꼬."
육손이 입맛을 다신다.
"들으니께 애기씨가 숨이 넘어가고 우짜고 하는갑든데."
"큰일이제.... 기어 뒤채 도련님하고 혼인 말을 했이니 애기씨가 넘어서."
"누가요."
'누구시기는, 말할 사램이 따로 있겄나."
"하기사...."
"소동은 그것보다도 뒤채 도련님 따문에 더 커졌거든. 애기씨가 기절한 긴피를 알고 도련님이 오시서 어마님을 보고 옳지 못하다고 따진 기라."
"야?"
"죽는 한이 있어도 장가 안 간다 했일 뿐만 아니라 어려븐 문자까지 들어가믄서."
"그 도련님이요?"
"음, 참말로 그리 똑똑한 줄은 몰랐구마. 하기는 벵신 몸이라 그렇지 나이는 열일곱이니께 글 공부도 했이니 알 만치는 알았을 기구마. 부모 안 닮는 자식 없다 카는데.... 아주 여간 분멩하지가 않더란 말이다."
"그래서 우찌 되었소."
"노발대발 아드님을 내동댕이치고 그런 난리 벼락이 없었제. 나중에는 이초시꺼정 불리와서 멋을 우떻게 가르z는냐 하며 마룻바닥을 주먹으로 치고,"
하다가 육손이는
"저거 우는 소리 아니가?"
하며 베개에 놓인 머리를 든다. 흥얼거리며 우는 여자 울음 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누가 저렇기 우노? 이 밤중에."
"삼월이가 우나배요."
".... "
"죽은 머시마 생각이 나서 그러는갑소."
"빌어묵을 여핀네, 울믄 머하노."
육손이는 혀를 차며 돌아 눕는다. 흥얼거리며 우는 소리는 계속 된다.
14장. 돌아온 윤보
엷은 구름이 흐르는 말끔한 하늘인데 별안간 거실거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차츰 기승을 부린다. 강변 대숲이 마구 일렁이고 거슬러 올라오는 물발이 거세게 뱃전을 친다. 바람을 안고 내려가는 나룻배는 더디게 가는 성싶고 젊은 사공의 양미간 군살이 솟아 불룩불룩 움직이는 것을 보아 힘이 드는 모양이다.
"선바람난 계집 맴이가? 날씨는 와 이리 싱숭생숭하노."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짱하더마는 날씨도 참말 못 믿겄네."
"세상만사 믿을 기이 어디 있노. 철석 겉은 사람으 맘도 못 믿을 세상인데 우찌 하늘을 믿을 기든고. 사시절에 다가 시시로 변하는 기이 세월 아니든가배."
선객들의 객쩍은 말을 귓가에 흘려들으며 윤보는 뱃전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오래간만에 돌아와 보니 시시로 변하는 기이 세월이라 카지마는 산천은 예나 마찬가지로 좋구마. 이 좋은 고장을 버리고 내 참 많이도 떠돌아댕깄고나. 앞으로 어디를 갈 것이며 내 갈 곳이 어딘지 모르겄다. 어디기는 어디라? 그야 겔국에는 저승이겄지. 죽는 날까지, 음.... 이 강변에 앉아서 낚시줄이나 내리놓고 세상만사 다 잊어부리고 한분 살아보까. 남이야 북을 치든 나팔을 불든 조용히 한분 살아보까. 흥, 그렇기 못 살 것도 없제. 살다가 굶을 판이믄 드러누버서 눈감으믄 고만일 기고. 세상에 나겉이 홀가분한 놈이 어디 또 있을라고. 울어줄 계집자식도 없고 남기놓고 떠나는 설움도 없일 기고. 허 참, 천지만물 어느 것 하나 멩이 없는 거는 없는 법인데 멩이 있고 보믄 죽을 날도 있기 매련 아니가. 태산이라꼬 무너질 날이 없이까. 그거를 생각하믄 어기야버기야 할 것도 없일긴데.... 줄지갈지 미치갱이맨치로 나부대는 꼴들을 보믄 하루 살다 가는 버러지보다 나을 기이 조맨치도 없는 기라. 인간 수멩이 칠십이라 카든가? 날포리는 하루를 살다가 가고 거북이는 천 년을 넘기 산다 카는데 곰곰이 생각하믄 어느 기이 질다 짧다 할 수도 없일 기구마. 제에기! 살다가 가기로는 매한가지 아니가 그 말이다. 이 강가에서 낚식줄이나 내리놓고 조용하게 남이사 북을 치든 나팔을 불든.... 흥, 내가 무신 도를 닦았든가? 신선이 돼갈 기든가? 굶을 판이믄 드러누버서 눈감고 죽음을 기다릴 거라고? 흐흐흐.... 흐, 아서라. 그런 짓이사 논어 맹자 공부를 한 김훈장이나 할 짓이제. 상놈이 무신, 마른자리서 죽기는 다 글러묵었다.'
타버리고 연기도 안 나는 곰방대를 빨아댄다. '사람으 사는 이치가 이러저러하고 여사여사하다고 글쟁이들은 말도 많더라마는, 날씨도 개인 날 흐린 날 눈비 오고 바람 불고 노성벽력 치고 하듯이 사람으 살아가는 펭생도 그 같은 거 아니겄나. 그런 거를 낚싯대 들고 강가에 앉아서, 그거는 좀생이 겉은 인생인기라. 사시장철 개인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산천초목도 사람도 다 말라죽어부리는 지옥이지 머겄노 말이다. 그러니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이치이듯이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우찌 낚시줄이나 내리놓고 가만 있겄노. 용천지랄을 해보는 기다. 사나아자석으로 태이나서, 하기야 상놈으로 태이나서 받은 거는 천대밖에 없다마는 내가 그래도 이 강산에 태이났으니 아, 멩줄이야 탄탄하게 태이났지. 용천지랄을 하다가 아무래도 그러크름 죽는 기이 나한테는 걸맞을 기구마. 용천지랄을.'
"강포수."
윤보 옆구리를 찌르며 누군가가 불렀다.
"머라꼬?"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돌린다.
사내가 무안쩍은 듯 씩 웃고 있다. 안면이 있는 윗마을의 농부다.
"날 불렀소?"
"그기이."
건성으로 곰방대를 빨다가 윤보는 눈을 부릅뜬다. 노상 개기름이 흘렀는데 지금은 살갗이 말라서 꺼실꺼실해진 얼굴이다.
"눈에 멩태껍데기를 붙있는갑다. 와 내가 강포수고."
"허허헛.... 우짜다 보니께, 내가 실수했나배."
"탕수국 묵을 나이도 아닌데 함부로 남으 성을 갈아?"
"강포수하고 곰보목수하고는 우짠 일인지 늘 헷갈리는구마."
"포수하고 목수하고.... 하긴 포수 수자하고 목수 수자하고 같긴 하구마."
"허허헛.... "
농부는 싱겁게 웃는다.
"사주팔자도 좀 비슷한 데가 있긴 있지."
윤보는 곰방대를 허리춤에 찌르고 뱃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만년 총각 뜨내기 신세도 같고."
다른 농부 하나가 놀려댄다.
"지랄하네."
"인물이사 털보라서 그렇지 곰보도 아니고 강포수가 잘난 편이제."
"그 대신 강포수 그 자석은 돌대가리니께."
"아따, 그라믄 곰보목수 머리는 미영숭어리요? 강포수를 명포수라 카는 말은 들었지마는 곰보목수보고 명목수라 카는 소리는 못 들어봤구마."
"우찌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넓은 줄을 알꼬? 촌구석에서 두칸 오두막이나 짓고 사는 너거들이 처마마다 풍경 달고 육간 대청은 면경바닥 겉고 빈벽 사창에 별호천지, 기화요초가 우거진 그런 제에집 기경을 못했이니, 죄 없는 짐승이나 직이는 포수 놈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지러."
"죄 업슨 나무 밤낮 썰어대는 사람은 누군고?"
이번에는 머리칼이 성근 농부의 말이었다.
"하핫하.... 그러나저러나 강포수 못 본 지도 나 십 년 되는가배."
"한 십 년, 그렇기 되나? 옥 안에서 놓은 그 종년 아아를 안고 간 뒤부터는 가물이 콧구멍이라 아무도 봤다는 사램이 없이니께. 어디가 죽었일 기구마."
"그거사 모를 일이고. 그런 아아를 데리갔이니께 근본을 모르는 곳에 가서 숨어 사는기지."
"만고에 싱거운 일이제. 씰데없는 짓이라. 오리새끼는 물로 가더라고 에미 애비가 샐인 죄인인데 그거를 키우서 무신 수덕만덕 볼 기라꼬."
"그것도 모를 일이구마. 강포수 자식인지 누가 아나."
"아니거마는, 절대로 그거는 아니라니. 칠성이 씨라는 거는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건데?"
"하느님이나 알제."
"허허 참 칠성이 씨를 받기로 하고 그 무서븐 일을 하기로 한 거 아니건데? 말짱 다 드러난 일을 가지고 우기누마."
머리칼 성긴 농부는 핏대를 세운다. 다른 농부가 거들었다.
"강포수 씨가 아닌 것만은 분멩하지. 그놈으 강포수 환장했제. 남으 씨를 밴 가시나를, 그것도 상전을 직이고 큰칼 쓴 년의 멋이, 어디가 좋아서 깝데기꺼정 벗어감서 옥바라지를 했는지, 씰개빠진 놈."
"씰개 있는 놈도 별수 없더라. 갈밭 쥐새끼겉이 모두 약아빠진 세상에 그 외골수가 얼매나 좋노."
"두 분 좋았다가는 매구새끼 데리가서 키우겄다. 그런 거 키우봐야 나중에 우환덩어리구마는."
"모두 똑똑해서 좋다. 밥풀 하나 안 떨어지겄다. 서울 가서 한자리씩 할 놈들인데 나라가 망했이니 억울코나."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는 이자 고만하고 말이 났이니께 그러는데, 강포수, 아니 아니지, 곰보몫는 서울 일 갔다 카든데 언제 왔소?"
"언제 오긴, 이자 오는 길이구마."
"아아니 이자 오는 길이라꼬? 그라믄 연장망태는 어디다 두고 빈 손으로 오는고?"
"엿 바꾸어 묵었제."
"연장망태도 연장망태지마는 행색은 와 그렇소? 서울서 일했이믄 수울찮이 벌었일 긴데?"
"서울 다방골 기생이 깝데기를 벗기더마. 한양 천리길을 빌어묵어 오다 보니."
웃지도 않고 말하는 윤보.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웃는다.
"그러믄, 서울서 오는 길이라 카믄 그곳 소식을 잘 알겄구마요."
낯선 사내가 마을 걸었다.
"알믄 머하겄소."
"난리가났다 카든데."
"그놈으 난리야 밤낮 나는 기고, 이 수삼 년 동안 난리 안 났다는 얘기 들었소?"
"그, 그렇기는 하요마는."
"우리네 겉은 상놈은 밥이나 처묵고 똥이나 싸믄 되는 기요."
"서울 남대문에서 왜놈 군사하고 우리 군사하고 쌈이 붙었다 카든데 그거 보았소?'
이번에는 괴나리 봇짐을 겨드랑에 낀 얼간이 같은 사내가 물었다.
"보았이믄 머하고 안 보았이믄 머할라요?"
"거 볼 만했일 기니 말이요. 듣자니께 서울 사람들은 피난도 못가고 구겡들 했다 카더마."
시죽거리던 윤보 얼굴이 험악하게 변한다.
"머라꼬?"
하다가
"참말로, 참말로, 밥 처 묵고 똥만 사는 벗님네가 여기 있었구마.
참말로 속 편히 뒤지지 않고 천년은 살겄다. 이런 난세에 벼슬치고도 높직한 벼슬 한자리 하는 데는 안성맞춤이겄고. 어디 우리 요상한 벗님네 손이나 한분 잡아보까?"
얼핏 말뜻을 몰라 눈만 껌벅이는 사내 손가락을 비틀어쥔 윤보는 힘껏 조인다.
"아, 아얏!"
사내는 비명을 지른다.
"요런 것은 맛을 좀 봬야. 머 볼 만했일 기라꼬? 기경들 했다고? 야! 이놈으 자석아! 네놈 조상은 쪽바리가? 아니믄 되놈이가?"
비실거리다가 사내는
"와 남으 조상은 들먹이요."
그래도 할 말은 한다.
"야 이노무 자석아! 천하 대적놈이라도 내 나라 백성을 왜놈이 직인다믄 비감한 맴이 들 긴데 멩색이 이 나라 구졸들이 사생겔판을 내는 마당에서 기경이라니? 볼 만했을 기라니? 야 이놈아, 어디 오광대 기경이 난 줄 알았더나?"
"허 참, 이녁도 밥이나 쳐묵고 똥이나 싸라 해놓고서."
"허허어. 환장일세. 뫼를 보고 길을 묻지, 이 일곱 달도 못 된 놈을 우찌하믄 좋노."
기가 차서 윤보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사람들은 모두 머쓱해져서 말이 없다.
"아따 바람 대기 불더마는 이자 좀 잘라 카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기승을 부리던 바람은 다소 누그러지고 있었다.
"모두 제 밥그릇 작은 줄만 알았지... 한심스러바 한심스럽아."
웃음을 거둔 윤보는 강물을 향해 침을 뱉는다. 평사리에 내린 사람은 윤보 혼자였다.
"흠, 천지개벽도 안 하고 내 안티자리가 고르란히 남아 있는 거를본께 반갑구마. 산천이야 말이 없지마는 간사스러븐 사람보담야 낫제."
혼자 시죽 웃는다.
"한잔 하고 가가? 영산댁 얼굴이나 한분 보고."
중얼거리며 발부리를 한번 내려다본 그는 발길을 마을 쪽으로 돌린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바람은 아주 자는 듯싶다. 소달구지 하나가 드럭드럭 소리를 내며 내려온다. 채찍을 들고 소와 함께 걸어오는 사람은 영팔이다.
"영팔아!"
"야?"
얼른 알아보지 못한다.
"나다."
"야? 아아니! 윤보형님 아니요!"
햇볕에 그을린 영팔의 길쭉한 얼굴이 더욱더 길어지는 것 같다. 그러더니 벌쭉 웃는다.
"서, 서울서, 지, 지금 오는 길입니까."
서로 가까이 다가가서 걸음을 멈춘다.
"음, 그간 별일은 없었나?"
"야. 집안이사 머, 형님은 우찌 이렇기 몰라보겄십니까."
"내 신색이 말이 아니다 그 말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문지른다.
"고생하싰는가배요."
"마 그런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읍내 가는 길이가?"
"막딸어매가 무담시,"
하다가 영팔이 뒤돌아본다. 영팔의 시선을 따라 윤보의 눈도 그곳으로 간다.
"아니 와 저렇노?"
달구지 위에 아낙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여러 배로 부풀어 오른 밤벌레 같은 것이다. 부증으로 퉁퉁 부어오른 얼굴, 햇빛이 부셔 그랬는지 눈을 감고 있었으나 설사 떴다 하더라도 부기에 파묻혀 눈동자가 나타날 성싶지가 않다.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모습이다. 윤보의 시선을 느꼈는지 막딸네는 신음 소리를 낸다.
"무담시 저렇게 부어서, 이것저것 조약도 썼다 카는데 점점 더해가니께 우짜겄십니까. 이팽이 형님 소를 빌리가지고 읍내 의원한테 가는 길입니다."
"막딸어매, 벵이 나는 거를 본께 살기가 편해진 모양이구마."
"실없는 소리 마소. 남은 벵이 나서 죽게 생깄는데 무신 정에 그런 말을 하요."
"죽기는 와 죽소."
"이러크름 몸이 짚동겉이 부었는데 우찌 살겄소. 으흐흐흣흣..."
의원으로 간다고 갈아입은 듯 풀발이 선 무명적삼, 그 소매를 얼굴을 가리며 운다.
"사램이 살라 카믄 벵들 날도 있제. 마른하늘도 울고 오뉴월에 우박도 내리는데 사램이라고 안 아프까? 무신 상팔자로."
하다가 윤보는 영팔에게 눈짓을 하며
"어, 가봐라."
"야."
"좋은 일 한다. 이웃사촌 아니가."
"갔다 와서 만냅시다."
"약 지을 돈이나 있나?"
"있는갑십니다. 이랴!"
달구지가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소는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쫓으며 묵직한 체중을 지탱한 발을 내딛는다. 윤보를 낯선 사람을 보았는지 나무 위에서는 까치 한 마리가 아래를 내다보며 깍깍거린다.
"이년의 무상한 팔자, 고생을 그리 하고 살았건마는 아즉도 죄닦음이 안 끝났다, 그 말인가. 아이고 내 못 살겄네. 으흐흐..."
막딸네 우는 소리, 영팔이 상투에 두른 흰 수건 위에 바람을 잠재운 푸른 하늘이 있다.
"벌써 산다는 기이 지를 보태는 기지 어디 죄닦음하는 기든가? 않는 고만하고, 아픈 덕분에 과부가 호시하는데 멀!"
뒤에서 윤보가 소리를 지른다. 소달구지는 마을길을 돌아 사라졌다.
"용이 있나!"
윤보는 용이 집 마당에 들어섰다.
"누구요?"
보리방아를 찧던 임이 일손을 놓고 돌아본다.
"목수아제 아니요?"
"음. 아배 어디 갔나?"
"풀 베로 갔소."
처녀아이답지 않게 스스럼없이 아래위로 ?어본다.
"니 어매는."
"밭에 갔소. 서울서 오는 길입니까."
"음, 저기이 누고? 홍이 아니가."
손가락을 입에 문 아이가 윤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허 저놈이, 씨도둑질은 못하더라고 애비를 빼썼구나."
아이는 웃으며 다가오는 윤보를 보고 비실비실 뒤걸음질을 한다.
"어디 한분 안아보자."
덥석 안아 올린다. 아이는
"옴마! 옴마!"
하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아니 다 큰 놈이 우네? 이 곰보아제가 무섭나?"
울면서 윤보 얼굴을 눈여겨보던 아이는 더욱 큰소리로 운다.
"아따 이눔으 자석 애빌 닮았이믄 용할 긴데 어맬 닮았나? 와 이리 영악하노."
하며 아이를 내려놓는다. 임이 낄낄 웃는다. 울음을 그치기가 겸연쩍었던지 아이는 계속해서 운다.
"임이도 인자는 처나 티가 잘자 흐르는고나."
"목수아제는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하요. 삼 년 전에도 그러다마는 그라믄 삼 년 후에도 또 그러겄네."
여전히 낄낄 웃는다. 어미를 닮아 되바리지고 숙성하고 그리고 얼굴은 이쁜 편이다.
"아아는 와 울리노!"
호박이랑 열무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던 임이네가 소리를 빽 지른다. 옴마! 하면서 아이가 달려간다.
"목수아제가 이삐다고 안아준께 그리 안 우요."
"울믄 달래지."
올곧잖게 말한다. 그 태도는 몇 해 만에 돌아온 윤보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겨우 마지못해 하는 듯, 자주 만나는 이웃 사람을 대하듯
"우짠 일입니까."
냉랭하게 말을 건다.
"서울서 내리오는 길이요. 용이는 풀 비로 갔다믄서요."
임이네는 치맛자락으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야."
여전히 건강하고 힘이 넘쳐 보인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은 실하고 탄력이 있다. 임이네가 윤보를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된 것은 월선이를 두둔한다는 오해 때문인데 그밖에도 묘한 심리의 갈등이 있었다. 그의 이력은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홍이 어미라는 위치는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었고 용이와 금슬이 좋다는 것도 아이를 내세우면 허세인 대로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이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가장 절친한 사이인 윤보에게 허세가 통하지 않을 것이지만 괴롭고 창피스럽고 비참한 일, 용이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잠자리의 비밀을 어쩌면 윤보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것은 견딜 수 없이 불쾌한 일이다. 월선이 편에 서 있다는 것보다 그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임이네는 어쩔 수 없이 윤보에 대한 강한 증오를 느끼는 것이다.
"마리에 가서 좀 앉으소."
인사치레는 했으나 임이한테 아배 데려오라는 말은 않는다. 윤보는 마루에 가 앉는 대신 마당에 쭈그리고 앉으며 곰방대를 꺼낸다. 임이는 어미 눈치를 알아차리고 찧던 보리방아를 찧는다.
"임아."
"야."
방아질을 하며 대답한다.
"니 아배 좀 불러올래? 내가 왔다 카고."
임이는 어미를 쳐다본다.
"가보라모."
해놓고 이내
"속히 갔다오니라. 그새 물 묻혀놓은 보리가 팅팅 붇겄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삽짝을 나서는 임이을 향해
"곱삶아서 저녁 할라 카믄 늦겄거만는."
짜증스러움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아이는 열무를 다듬는 어미 옆에 붙어앉아서 이따금 윤보 쪽을 숨어 보곤 한다.
"요새 살기는 좀 우떻소."
담배를 피우며 윤보가 묻는다.
"말도 마소. 갈수록 태산이요."
"아닌 게 아니라 집안이 설렁하구마."
"설렁할밖에 더 있겄소. 남정네라는 사램이 남으 살림 살듯 하니께요."
뾰로통해서 말한다.
"우떤 년의 팔자가 좋아서 입고 묵고 걱정이 없인께 사내 생각이 나서 해도 질고 맏고 질다 카더마는 이년의 팔자가 입에 단내가 나도록, 곰뱅이가 썩도록 끔직이도 살 가리고 죽 묵기가 난감하니."
월선이를 두고 비양을 친다. 윤보는 반들거리는 임이네 이마빡을 쳐다볼 뿐 말이 없다.
"기왕지사, 제집은 그렇다 치더라도 귀한 자식 생각은 와 못하는고. 그 자식을 낳아준 사람은 누군데. 그년이 아들만 낳았더라믄 입이 열 개 있이도 내가 말할 기던가? 하기사 무당년이 내질린 새끼가 멧상 들고 선영봉사 할 수 있일랑가, 그거사 모르겄지마는."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평소의 불만을, 용이 앞에서는 참아야 했던 불만을 쏟아놓는다. 남편은 두려우나 윤보는 길가 개똥만큼도 안 여기는 아망스러움. 한낱 품팔이 목수 처지가 뭐겠나, 오죽하면 사모관대 한번 못 써번 몽다리겠느냐, 게까지만한 오막살이서 죽어도 송장 치워줄 사람도 없는 주제, 말깨나 한다지만 그게 대순가? 하는 생각에서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믄 안 되제."
윤보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혼잣말같이 뇌었다. 임이네는 발끈한다.
"올챙이 적 생각 못하믄 안 된다고요? 그래 내 지난날을 거기서도 정계를 거는 거요? 내 팔자치레 못한 거를 누구 모르는 사램이라도 있다 캅디까?"
흥분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었다. 짠득하게 잡아 비트는 어투다.
"아 사람마다 그렇다는 기지요."
"흥, 말 마소. 이리 치믄 저기서 울리고 저리 치믄 여기서 울리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소나아를 잘못 만내 팔자치레는 못했지마는 한잔 얻어 묵는다고 그년 편역드는 거를 뉘 모를 줄 아요?"
"감찰선생도 쑥떡 하나 주는 거를 치니께."
약을 올린다.
"흥, 그러믄 나도 떡 한 시루 쳐서 산 사람 고사를 지내야겠구마."
"구신도 달래는데 산 사람 마음이야 못 달래겄소? 그러나 임이어매도 과욕을 부리지 않는 기이 좋을 기구마. 신상에 해로우니께."
"신상에 해로우믄 더 어찌 해로울 긴고? 지금 내가 고대광실에서 호강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빛 좋은 개살구, 일므이 좋아 서방이지 주야로 내 곰뱅이 꿈직이서 디견이 목에 피내 묵듯이 사는데 과욕부린다고요? 모르거든 말이나 마소."
이웃 아낙네들한테는 보리 한톨 축내는 아이아배가 아니라고 극구 자랑이던 임이네가.
"하기사 남의 집안 일을 내가 우찌 알겄소. 알아서 약에 쓸 것도 아니겄고, 하니께 임이어매도 남보고 이러쿵저러쿵 안 하는 기이 좋을 기구마요. 하늘 보고 침 뱉으니 제 얼굴에 떨어지더라고. 그는 그렇고,"
일어선다.
"개울에 가서 얼굴이나 좀 씻어보까? 용이 오거들랑 요 앞개울로 보내주소."
윤보는 곰방대를 두드려 재를 털어버리고 밖으로 나간다. 냇물에 씻기고 햇볕에 바래서 눈이 부시게 흰 자갈밭, 그 한복판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벼 익는 냄새가 사방에서 묻어오고 겅중하니 엉덩이가 높은 송아지 두 마리가 윤보를 쳐다본다.
"어이 시원쿠나."
얼굴을 북북 씻은 뒤 신발을 벗어버리고 두 발을 물속에 집어넣는다.
"어허허....시원타! 뻬가 저리는 것 겉네."
가을도 저물어가는데 언제 바람이 불었던가, 누르끼리한 숲은 잠잠하고 미련처럼 늦더위는 머물고 있다. 송아지가 매매애 하고 운다.
"형님!"
"용이가?"
했으나 발을 씻을 뿐 돌아보지 않는다. 맨발에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린 용이 개울가로 내려온다.
"우짠 일이요."
뒤에서 윤보의 초라한 꼴을 내려다보며 묻는다.
"그러세."
애매하게 대꾸하며 발만 씻고 있다. 나무그늘이 진 자갈밭에 엉덩이를 내린 용이는 윤보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아따 오래간만에 발 씻어본다."
윤보는 자갈밭을 밟고 용이 곁으로 왔다.
"용이 니도 많이 늙었고나. 몇 해 만이제?"
"한 삼사 년 됐일 기요. 형님도 많이 늙었소. 객리서 고생이 많았던가배요?"
"인간고해라 카이, 고생 하기로 하고."
윤보는 발을 쭉 뻗는다. 발밑에 햇빛이 닿는다. 물에 젖은 발을 말리듯 이리저리 돌리면서 윤보의 얼굴을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한참 만에 입을 무겁게 열었다.
"동네 헹편이나 좀 물어보자. 요새는 우떻노."
"......"
"살기가 우떤고?"
"한도까지 닿았지요."
우울하게 대꾸한다.
"니나 할 것 없이 딱하기로야 매한가지지마는 한조 처지가 앉을데 설 데가 없이 됐소."
"와?"
"최참판댁 조씬가 그 양반한테 빗뵈인 거는 형님도 아는 일 아니요. 하기야 그때 고방을 부시러 들어간 사람들도 차례차례 당할 거는 뻔한 일이요마는 우선 한조가,"
"한조가 우찌 됐다 말고."
"부치묵던 땅을 뺏깄소."
"뺏기? 그러믄 지금 머를 하노."
"식구들은 살던 집에 놔두고 지는 머든지 해서 벌어묵겄다고 읍내에 나가 있지마는 농사짓던 놈이 장사를 하겄소, 날품팔이를 하겄소."
"......."
"다른 사람들이라고 머 더 나을 것도 없지마는 우선 당장에는 한조 일이 말이 아니요. 남으 일 겉지도 않고....
동네에서 이팽이 형님 정도 의식 걱정이 없이까. 본시 근하니께요. 봉기도 이럭저럭 괜찮은 모양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딱하지요. 경우에 없는 수를 내라 하니 굶으믄서 농살 지어야 하는지, 석섬지기 논도 반이요 두섬지기 논도 반이요, 입이 포도청이라 묵어야 하고 그러니 장리빚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밖에요. 다른 곳도 다 마찬가진 모양인데, 말므들 행악도 심하고 여기도 지가란 놈이 우찌나 심히 굴들니 도적을 피하니 강도를 만나더라고 삼수놈보다 한수 더 뜨는가배요. 내놓았던 문전답도 무신 변득이 생깄는지 도로 거둬가더니 걸핏하면 마을 사람 불러다가 논 갈아라 밭 갈아라 하는 판국이니. 그뿐이겄소. 전에 없던 문서까지 맨들어가지고, 말을 할라 카믄 한이 없소."
"......."
"그 김서방댁네도 빈 몸으로 쫓겨났지요. 읍내서 떡장사를 하믄서 그렁저렁, 고생이 자심한 모양이요."
"그래 마을의 인심은 우떻노."
"물으나마나 아니겄소. 복판에서 형세만 살피고 있던 사람들도 이자는 속았다는 기요. 지금에 와서 속았으니 천하의 도척이를 만났느니 만 번을 말해보아야 이불 밑에서 활개치기 아니겄소."
윤보는 용이 하는 말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갑자기 김훈장의 소식을 물었다.
"그 양반도 딱하게 되었지요."
용이는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준다.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윤보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용아."
"야."
윤보는 뻗은 두 다리를 세운다.
"니 보선 있거든 한 키레 도라."
"보선요?"
"음."
용이는 의아해하다가
"그라믄 집에 가입시다."
"너거 집에는 안 갈란다."
"와요? 어디 갈랍니까."
"어허, 아무튼지 간에 여기 갖다도라."
"그럭 허소."
일어선 용이 길켠으로 올라서는데 두만아비가 헐레벌레 달려온다. 용이는 두만아비를 보았을 때 비로소 윤보를 따라 서울에 간 두만이 생각이 났다.
"유, 윤보, 거기 있나?"
묻는 두만아비 입술이 허옇다.
"야, 저기."
용이는 가고 두만아비는 허둥대며 윤보 곁에 다가간다.
"허, 번갯불에 콩 꾸워묵을 놈이 오는고나."
빤히 쳐다보며 윤보가 말했다.
"우, 운제 왔노."
"지금 막 왔다."
"숨 넘어가겄다."
"그, 그래 우리 그놈은 우짜고 자네 혼자 왔노."
허허 발등에 불 떨어지나, 와 이리 서두느."
"혼자 왔이니 하는 말 아니가."
"누가 숭년 들어서 아아새끼를 잡아묵기라도 했다 말가? 그는 그렇고 의식에는 걱정이 없일 긴데 꼬라지가 와 그렇노? 숭년 묵은 풀째기겉이."
두만아비 얼굴을 눈에 띄게 노오래진다. 그의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윤보가 이죽거리기 시작해서 좋은 일은 없었다.
"무, 무신 일이 있었나?"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나날이 무신 일 없이 사람이 우찌 사는고?"
"우리 두만이가, 그 그라믄."
"아따 제기랄! 밥 잘 처묵고 일 잘하고 부전자전 아아새끼가 약아빠져서 날 따라 안 오는 거를 모가지를 끌고 오것나!"
"그, 그라믄 지가 안 내리올라 캐서."
"그래! 일도 더 배우고 돈도 벌어서 올라 카더라."
"으음. 분명 아무일 없제?"
"운제 내가 거짓말하더나?"
두만아비는 겨우 마음이 놓이는 듯 시죽 웃는다.
"서울서는 난리가 났다 카이 우째 근심이 안 되겄노. 빌어묵을 자석, 그만 함께 내리올 일이지."
"맴이란 조석 변동이라. 데리고 가라 칼 때 서울에 내부리고 오라한 놈이 누구더라?"
"난리가 났다 카이."
"니 아들놈이 머가 그리 잘났다고 난리 속에 뛰어들꼬? 너거 식구들이 언제 난 사람들이라꼬? 말 마라. 애비 곁방 나앉으리 카겄더마. 대천지 한바닥에 갖다놔도 지 몸 간수는 휘한하게 하겄더라. 어린 놈이 너무 그래도."
"어린기이 부모 떨어져서 객리에 갔는데 그만한 주모 없이."
변명을 하는데 두만아비는 썩 만족해하는 얼굴이다.
"아무튼지 간에 잘 있다 카이."
"돈 벌어서 하로 이틀이믄 오는 기차 타고 올기니께."
"기차!"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겉이 거지꼴이 돼가지고 걸어서 올 놈은 아닌께."
"그라믄 있기는 어디 있는고?"
마침 용이 버선과 짚세기 한 켤레를 들고 왔기 때문에 두만아비는 윤보 대답을 못 듣는다. 버선을 신고 짚세기도 신은 윤보는
"나 김훈장댁에 갔다가 이팽이 너거 집에 갈 것이니 술이랑 밥이랑 걸게 차리놓고, 알겄나?"
"그, 그러지. 어서 다녀오게."
훌쩍 길켠으로 올라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윤보는 성큼성큼 걸어간다. 용이와 두만아비는 각기 다른 생각에 잠기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15장. 의거
마을 살림이 전보다 점점 더 어려워 허덕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은 물론 조준구의 과도한 수곡 강요에 있었고 희망을 잃은 마을 사람들의 무기력해진 심리 상태에도 있었다. 마을 사람의 기색을 살피며 제법 온정을 베풀고 너그러이 행세했던 왕시 그 무렵은 조준구의 지반이 다져지기 이전이요 농사꾼이란 우마와 다를 것이 별로 없고 일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음이 분명하다는 따위의 말을 서슴지 않는 요즈음은 그의 지반이 그만큼 탄탄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조준구의 처사가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그의 자리는 공고해져서 대항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을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했지만 조준구는 조준구대로
"상놈들이란 원래 귀여워하면 강아지 모양 기어오르려고 하고 채찍을 들어야 일을 하게 되는 소와 같아서 심히 다루어야, 그래야 질서가 잡히는 법이니라."
지서방을 보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웃곤 했던 것이다. 최치수 생존 시에는 그의 상민 혐오 - 정확히는 인간 혐오 - 에 대하여 세계 대세가 어떻느니 구습을 타파하고 인권을 존중해야 하느니 최치수가 치를 떨던 동학란조차 옹호하고 나선 조준구가, 하기는 그정도 말 몇마디 뒤집는 것쯤 조준구에게 뭐 대순가? 여반장이다. 하여튼 이곳 사정은 그렇다 치고 농촌 전반에 걸쳐 피폐하기로는 피장파장이었다. 거듭되는 학정에 민란, 그 악순환의 정점인 저 거대한 분화구 동학전쟁을 겪은 뒤 피곤한 농토와 농민은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을 뿐 눈부시게 급변하는 정치적 현실에서 - 거의 주인 부재의 수렵장이었다 할지라도 - 망각된 존재였었고 농민들 스스로도 뜰안의 한 그루 과목에 세금을 붙이던 무서운 가렴주구에 과목을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와 같은 포기의 자학을 씹으며 가사상태로 도피한 시기,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은 일본제국으로 넘어갔고 실권자를 추종하는 새로운 세력군이 형성되는 혼돈 속에 권력과 동반하게 마련인 경제의 유동, 그 중에서도 후일 대다수 농민들이 피땀에 저린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뜨게 되는 악명 높은 착취 기관 동양척식회사 설립의 소지는 다져지고 있었다. 이런 대세에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면 아니 된다던, 고고하게 현실에서 몸을 사리던 선배들이 그러나 강의하게 일어선 항쟁은 물거품이었고 1907년에 들어서서 해아밀사사건으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던 고종이 그나마 퇴이하는 비극과 훈련원에서의 조선 군대의 해산은 빈사의 목숨에 마지막 칼질이었다. 그로 인하여 참령 박승환은 자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무기고를 부수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들은 남대문에서 일군과의 처참한 교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 서울로 일 갔었던 윤보가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뒷이야기는 연장망태도 버리고 거지꼴로 마을에 돌아온 것을 설명된다.
눈에 뚜렷이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윤보가 돌아온 뒤 분명 마을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럴싸 싶어 그랬는지 마을 사람들에게는 평소 말마디나 한다는 장정들의 눈이 희번덕이는 것 같았고 윗마을과의 내왕이 어쩐지 잦은 듯싶었고 술을 마시거나 낚시질로 소일하는 윤보 모습이 이따금 마을에서 없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여느 때 같으면 그것은 다 심상한 일이련만 마을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태가 급변하는 피비린내 나는 것을.
길상이를 제외한 최참판댁, 조준구 내외를 위시한 최참판댁 사람들만이 마을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러한 마을의 동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뭐니 해도 주막이다. 흔히 살림 이룩하는 집안에서는 그만큼 모든 것을 절용하기 때문에 하인살이가 어렵다는 것이요, 살림 빠지는 집안은 기왕 망하는 살림, 하고 쓰임새가 헤퍼지는 데서 하인살이가 편하다고들 하는데 마을도 그런 형세라고나 할까. 전보다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만 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주막에 술꾼들이 그칠 새 없이 끓는다. 들끓는다고 해서 반드시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 망하는 판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주머니를 끄르며 술을 청하는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자포자기한 심사와 더불어 거침없는 말들이 오고가고, 차츰 마을 공론 장소 비슷하게 발전된 것도 사실이다. 답답하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무슨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하고 어쩔 수 없이 주막을 찾아온다. 영산댁은 술을 안 하는 사람을 냉대한 일이 없고 입이 촉빠른 사람이면 반기는 터이어서 어느덧 그 자신 마을 공론에 한몫을 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중늙은이, 이름만의 남편도 발걸음을 끊어버린 외로운 여자, 오늘도 농부들은 술판에 술 한 잔씩을 놓아두고 예외 없이 공론인지 한탄인지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못 산다. 무신 팔랑개비 재줄 지닜다고 살겄나?"
윗마을의 윤서방이다.
"못 살믄 죽기밖에 더 하까."
같은 윗마을의 배서방이었다.
"까놓고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가 머심살이보다 나을 기이 기가 있노. 아, 남의 집에 머심이라도 산다믄 새경은 꼬박꼬박 안 나오겄나? 이놈으 새가 빠지게 농살 지어봐야 뽀닷이 입치레, 등은 머로 가리고 덮노 말이다. 찬물 떠놓고 코방아나 찧는다믄 모르까 제사고 혼사고."
"코방아만 찧으라모."
"엄두도 못 낼 일이제. 그러니 도지 빚이고 장리 빚이고 안 낼 재주가 있나 말이다. 나중에사 가랭이가 찢어지든지."
"흥, 나올 기이 없는데 빚 줄 사람은 어디 있고?"
"입치레도 시절 좋을 때 얘기고 숭년이나 들어보제. 숭년 들었이니께 수는 물시하자, 그것도 옛날 고릿적 마님 살아 기실 때 얘기고."
"문서에다가 지장을 딱 찍었이니께 숭년 아니라 송장이 나간다 캐도."
두 사람의 얘기 듣고 있던 영팔이
"옛날에는 없었던 새 법이 생깄는가. 조상 대대로 그런 문서 없이도 아무 탈 없이 땅을 부칬는데."
혼잣말같이 뇐다. 그새 밖에 영산댁이 고추장 뚝배기를 들고 들어온다.
"새 법? 그기이 조참판네 법 아니가. 요새 도장 찍는 기이 시풍인 모양인데 나라를 팔아묵을 적에도 다섯 놈이 들어서 도장을 찍었다카고 그놈들은 백성들 허락 없이 도적질해서 팔아묵을 기지마는 우리네사 내 몸뚱아리 팔아묵었는 기라. 몸뚱아리 팔아묵은 기나 진배없지. 문서에다가 한분 약정을 했이믄 나라도 고만인데 이내 겉은 불쌍한 농사치기."
"청승은 늘어지고 팔자는 옹그러진다."
영산댁이 핀잔을 준다.
"아무튼지 간에 꼼짝 못하게 생겼는 기라. 약정된 수를 못 내믄은 곡가를 따지서 돈으로 내야 하고 그것도 못 내믄은 장리빚 이자가 또 장리빚이 되고 또 되고 또 되고 눈사람이 되고 그, 그러고는 자손만대까지 빚을 안고 넘어가는 기라."
"그러매 일이 그쯤 되얐이믄 한분 버투어볼 일이제. 날름허니 지장은 찍어놓고 와 생배를 앓는다요?"
"영산댁 겉으믄 안 찍었일 기든가? 내 혼자 무신 재주로 버텨 보노. 태산 겉은 바우를 작대기 하나 가지고 고울 기든가."
"남정네들이 모도 단이 없어 그러아우."
"이제는 늦었제. 그때 그만, 그 숭년 때 그만 뽀사아부리는 긴데."
"윤서방"
"와요."
"여기 누가 있는가 잘 보고 말허랑께? 참말로 염치도 좋소."
윤서방은 영팔이를 힐끔 쳐다본다.
"그때 고방 때리부실 때는 윤서방 어디 갔더랑가?"
"허허, 오금박는구마. 그때야 어디 누가 이리 될 줄 알았던가."
"물은 건네봐야 깊이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그러고 하나를 보믄 열을 안다 허지 않더라도 남의 살림 덮치는 인사가 작인들 헌티 인심 쓸 것이요? 임꺽정이라믄 모를까."
"이자는 벨 수 없구마. 벼락이나 한분 믿어보는 수밖에"
"머 지금도 늦다고만 할 수도 없일 기구마."
천천히 말하는 영팔의 얼굴에 세 사람의 눈이 일시에 쏠린다. 그러더니 뭔가 네 사람 사이에 양해된 것이라도 있는 듯, 다음은 제각기 생각에 잠긴다.
"윤보가 김훈장댁에 가서 대판으로 쌈을 했다 카는데 와 그랬이꼬?"
배서방이 영팔의 얼굴을 숨어 보며 나직하게 입을 떼었다. 영팔이는 말이 없고 대신 영산댁이
"의논이 맞아서 자주 드나든다고 안 합디어? 헌데 무신 쌈이랑가?"
"머 들리는 말로는 내가 어찌 화적떼로 떨어질까부냐, 함시로 김훈장이 소리를 쳤다 카고 윤보는 자기 일신만 중히 여기는 양반님네 때문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느냐, 체멘이 있지 굿 뒤 날장구라도 쳐야지 않겄느냐 했다누마."
"그 말은 맞는 말 아니간디? 하모니라우. 굿 뒤 날장구라도 쳐야제."
이때 새로운 술꾼이 들어왔다. 두만아비다. 어색하고 불안스런 눈이 주막 안의 분위기를 살피는데 그들도 어색한 침묵을 지킨다.
"제에기! 그만 하늘하고 땅하고 딱 붙어부맀이믄 좋겄다! 영산댁 술 한 잔 더 주소."
윤서방이 역시 어색하게 침묵을 깬다.
"그라믄 세상만사 끝장이지 머."
술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두만아비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윤서방 말에 참견했다.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기는 하나 그의 사람됨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두만아비 역시 따돌림을 당한다고 자기 생활이 불편한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돌아온 윤보 거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은 어릴 때부터 윤보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강했다. 만일 어떤 사태에 직면한다면 자기 처신이 참으로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아는 때문에 마을 공기에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주막에 나타나는 것도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영팔아."
술잔을 받아가고 오랜 동안 잠자코 앉아 있던 두만아비가 불렀다.
"야."
"한조 소식 듣나?"
"읍내서 진주로 갔다 카더마는 그 뒤 일은 모르겄소."
"처가에 갔구마."
"그렇겄지요. 장사 밑천이나 얻을 양으로, 아니믄 어디 땅뙈기 얻을 곳이나 있일까 싶어 갔겄지요."
"그기이 어디 쉽겄나."
"그러기 말이요."
다시 묘한 침묵이 계속된다.
"아무튼지 간에 까놓고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가 머심살이보다 나을 기이 조금도 없고."
윤서방이 목청을 다듬고 기껏 화제를 만들어낸다는 게 아까 하던 말의 되풀이다.
"그라믄 머심살이 하로 가라모."
배서방의 시큰둥한 대꾸.
"아 남으 집 머심이라도 산다믄 새경은 꼬박꼬박 나오지 않겄나. 하, 하모 새경이사.... 이눔으 뼈가 빠지기 농살 지어봐야."
"잔소리할 거 없이 머심 살로 가라 안 카나. 누가 잡는 사램이라도 있다 말가."
"그눔으 원시, 식구들만 없다믄야 내가 이라고 있이까? 벌써 떠났제."
"그는 그런디 최참판네 곱새도령이 아파 죽게 생깄는디. 말 들은게로 왜귀신이 붙었다누마 얼매 전에 왜나막신 신은 왜놈하고 큰칼 찬 읍내 별순사 대장놈이 왔다 가지않았던개비여?"
"그눔으 왜구신, 집은 자알 찾았구마."
"아암, 잘 찾았지. 왜놈한테 빌붙은 집안이라야 물밥이라도 얻어묵제."
막걸리 한잔에 짠김치 한조각을 와삭와삭 씹어먹은 뒤 두만아비는 일어서며 묻는다.
"영팔이는 장에 안 갈 기가."
"장에 갈 일도 없고, 집에나 가야겄소."
"우떤 사람은 장에로 다 가노. 우리사 장길도 잊어부맀다. 참말로 이팽이 봉기한테는 시절이 좋고나."
깊은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배서방은 비꼰다.
"백석지기가 이백석지기가. 비양치고 저브믄 얼매든지 쳐라. 백석지기나 되었이믄, 너희들 심보 밤에 와서 불 지르겄다."
두만아비는 몹시 언짢아한다.
"기왕에 불지를 양이믄 만석지기지 그까짓 백석지기 머할라꼬."
뒤통수에 배서방 말이 날아간다. 장에 간 두만아비는 어물전 앞에서 선이 시아버지 장서방을 만났다.
"사돈 장에 왔소?"
두만아비가 먼저 알은 체한다. 장갱이의 불룩한 배를 쿡쿡 찔러 보고 있던 장서방은 장대한 몸을 돌렸다. 머슴아이가 지게 멜빵을 잡으며 장서방 옆에서 조금 물러선다. 젊을 때는 남의 고지기 노릇을 했으나 지금은 장배를 두 척이나 부리게 된 처지, 신수도 좋고 머슴아이까지 거느리고 장에 나온 모양이다.
"사돈이요?"
입술은 수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담뱃진에 전 들쭉날쭉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머슴아이가 지고 있는 바지게에 생선 비늘이 묻은 손을 쓱쓱 문지른 장서방은
"집안은 모두 평안하요?"
"예, 사부인께선 편안하시고요?"
두만아비와 장서방은 장바닥에 서서 새삼스럽게 맞절을 한다.
"제사 장을 보러 왔더니."
하다가 장서방은 비뚤어진 갓전을 바로잡는다.
"괴기가 물이 나빠서 못 쓰겄구마."
"참 그렇지요. 이맘때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두만아비는 헛기침을 한다. 완연한 가을철이어서 바람은 쌀쌀한데 두만아비의 동저고릿바람의 모습은 초라하다.
"아아들 조모 기일 아니요, 그라고 참 서울서는 소식이 왔다 카지요."
"예. 잘 있다 캅니다. 젊은 놈이사 머."
"장은 다 보았소?"
"예. 죽물전에서 이거 하나 샀십니다. 아수바서."
두만아비는 보리쌀 바구니와 갈구리를 쳐들어 보인다.
"이리 만냈이니 그냥 갈릴 것이 아니라 한잔씩 안 할라요?"
"제사 장은 우쩌시고."
두만아비는 제 주머니 속을 따져보며 불안하게 말했다.
"아따, 해가 저기 반공중에 떴는데 무신 걱정이요."
장서방은 내켜하지 않는 두만아비의 팔을 끌고 가다가 돌아본다.
"이눔아야, 니 거기서 꼼짝 마라. 내 올때까지 꼼짝 말고 거기 있거라이."
"야."
비리갱이처럼 여윈 머슴아이는 시투룸해서 대꾸한다.
"만물이 다 비상 값이라. 조상 물 떠놓기도 어럽기 되고, 세상이나 편하다믄 그래도 좋겄는데."
장서방 말을 귓전에 흘리며 두만아비는 주머니돈 셈을 한다. '말을 안 들었이믄 몰라도 알믄서 괴기 한 마리 안 사줄 수도 없고, 술은 사돈이 먼지 말했으니께 술값이사 낼 기다마는.... 딸 준 죄인이더라고 자반괴기는 한 마리 사서 지게에 올리주어얄 긴데, 눈 밝은 기이 탈이라. 그만 못 본 척 지나가부리는 긴데.' 두만아비는 장서방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술도 마시는 시늉만 하다가 일어섰다. 다시 함께 장으로 들어간 두만아비는 어물전을 몇 바퀴나 돌다가 겨우 흑도미 한 마리를 샀다. 비싼 생선은 아니지만 그러나 명색이 도미였으니까. 사양하는 머슴아이가 짊어진 바지게 위에 올려주고 발길을 돌린 두만아비는 거의 장터를 다 벗어났을 무렵 무슨 까닭인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급히 되돌아간다. 그때까지 장터를 서성대고 있던 장서방을 찾은 두만아비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참을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장서방은
"걱정 말고 그렇기 하소. 하모, 집안이 편해야지."
이틀 후 나룻배를 타는 두만아비와 영만이를 본 뒤 마을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그들의 모습을 마을에서 보지 못하였다. 심상한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 부자가 집을 비우는 일이라고 마을 사람들 기억에는 일찍이 없었다.
"아지마씨, 이팽이 어디 갔십니까?"
윤보는 일부러 찾아온 모양이다.
"저, 사돈댁에."
윤보를 보는 순간부터 당황한 두만네는 보기에 민망스러울 지경으로 안절부절이다.
"사돈댁에요. 머하로 갔는고요?"
윤보의 얼굴은 험악하다.
"새, 생신이고 또 두만이 따문에 의논 좀 하, 할라꼬."
"두만이사 서울 안 있소."
".... "
"장서방이 두만이 데리와서 장배라도 한 채 모울라 캅디까."
"아, 아니요, 무신."
"하기사 배 모는 목수, 집 짓는 목수 따로 있이니께."
"어, 어린기이 아직이사 무신."
심술 사납게 놀리려 드는 윤보에게 고지식한 대꾸를 하는 두만네는 거의 울상이다.
"마 좋소. 이러나저러나.... 한데 집이 허술컸소."
"....?"
"아지마씨 혼자니께 말이오. 요새겉이 분분한 세상에 무신 일이 일어날 지 뉘 알겄소?"
울상이던 두만네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마 좋소. 이팽이 그놈 생각 잘했일 기요. 아지마씨, 나 물 한그릇 주소."
물 한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윤보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돌아선다. 그리고 간다온다 말 없이 삽짝을 나서는 것이다. '생각 잘했제. 이팽이놈.... 번갯불에 콩 꾸워묵을 놈. 하기야 답답한 놈이 새미 파더라고 지가 멋이 답답해서.... 머, 일 그르칠 놈은 아닌께. 동네가 잠잠해지기까지 피해 있자는 기지. 약아빠진 놈!"
"보소."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윤보
"나 불렀나?"
"야."
삼수다.
"와."
"좀 할 말이 있어서."
태연했으나 윤보의 눈길을 긴장한다. 삼수는 여느 때와 달리 수굿한 얼굴이다.
"최참판네 하인 놈이 나한테 무신 할 말이 있이꼬?"
하면서 윤보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삼수는 잠자코 윤보를 뒤따라 걷는다. 언덕을 올라 외딴 윤보의 집 앞에까지 와서
"니 와 따라오노?"
삼수의 얼굴은 여전히 수굿하다. 윤보는 돌연 몸을 돌리며 삼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저어."
"...."
"저어, 오늘은 속마음을 탁 털어 놓을라꼬요."
"와? 누구 사람이라도 직있단 말가? 카더라도 내사 판관은 아니구마."
"그런 기이 아니고.... 나도 사램인데 우찌 내 잘못을 모르겄십니까."
"흐음?"
"조가네 편역이 되어서 최참판댁 은공을 잊어부린 천하에 직일 놈, 모두 그렇기 말하고 있소."
"니 선잠을 깼나? 나는 곰보목수지 최참판네 사돈팔촌도 아니고 최참판네 조상 구신도 아닌데 무신 잠꼬대고."
"최참판댁 은공을 잊은 것도 그렇지마는 동네 사람들한테도 몹시 했고."
"그렇다믄 새는 날에 동네 사람 모아놓고 빌 일이제. 나야 땅 한치 없는 떠돌인데 아무 상관 없구마."
"하여간에 내 얘기나 좀 들어보소. 세상에 못 믿을 거는 양반 놈들이요. 속절없이 속았단 말이요. 그럴싸한 말로 사람으 마음을, 하기는 다 내가 못나서 한 짓이기는 하요마는 나 혼자만 직일 놈이 되고, 지내놓고 보니 억울한 생각이 드요. 하여간에 지 말 조 들어보소."
삼수는 꽤 자세히 그간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결국 다 아는 일, 삼월이 일부터 응당 자기가 차지했어야 할 자리를 서울서 온 지가놈이 대신하여 그나마 자기를 괄시한다는 그런 얘기다.
"부레풀도 풀이더라고 낸들 오기 없겄소? 남보다 더했이믄 더했지. 내 조가놈 망하는 꼴 보고 말겄다 그 말이요."
윤보는 결코 삼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거 그 양반이 잘못하긴 잘못했구마. 그래도 강약이 부동인데 우짜노. 머 요새야 노비 문서 겉은 거는 아무 소앵이 없는 기니께, 그렇다믄 떠나는 기이 우떻노? 나 따라댕기믄서 대목일이나 배울라나? 따른 식구 없는 홀몸이고 보믄."
윤보는 어디까지나 시치미를 뗀다.
"머, 내 살 길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요?"
"그라믄 우짜자는 기고."
"원수를 갚겄다 그거요."
"우떻게?"
"못 묵는 밥에 재 뿌리겄다 그 말이요."
"흠, 그래?"
"그래서."
"아아, 아."
윤보는 손을 내젓는다.
"아무리 이 윤보가 남으 일을 잘 봐주기로, 거 송장 치다꺼리라믄 모르까 못 묵는 밥에 재 뿌리는 일에 동사할 수야 있나. 여포 창날 겉은 삼수 혼자라도 넉넉할 긴데 나보고 말할 거 없다."
"그런 소리 마소. 나도 밥 묵고 사는 놈인데 그만저만한 눈치는 다 있단 말이요."
"머?"
"요즘 시수가 우찌 돌아가는지 그것쯤은 나도 안다 그 말이요. 그 작년에 나라 뺏 다고 해서 김훈장이 일을 꾸밀라 캤는데 그기이 안 되니께 전라돈가 어딘가 의병 일으킨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때 말을 해쌌거든요. 곰보목수가 있었이믄 일이 됐일 기라꼬. 듣자니께 이분에도 서울서 쌈이 있었다 카고 곰보목수는 이러크름 돌아왔고, 모두 소문이 한판 칠 기라꼬."
"머? 한판 칠 기라꼬? 으허허헛헛, 윤보 시세 나가는고나. 으허허헛, 으흐허허핫핫.... "
걸쭉한 웃음이 계속해 나온다.
"아무리 그리 시치미를 떼싸아도 알 만치는 나도 알고 있이니께요. 머 내가 훼방을 놓자고 찾아온 것도 아니겄고,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어서 온 긴데 너무 그러지 마소. 한마디로 딱 짤라서 말하겄소. 왜눔들하고 한통속인 조가놈들은 먼지 치고 시작하라 그 말이요. 고방에는 곡식이 썩을 만큼 쌓여 있고 안팎으로 쌓인 기이 재물인데 큰일을 하자 카믄 빈손으로 우찌 하겄소. 그러니 왜눔과 한통속인 조가부터 치고 보믄 꿩 묵고 알 묵는 거 아니겄소."
"야아가 참 제정신이 아니구마는."
"하기사 전력이 있이니께 나를 믿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겄소. 하지마는 두고보믄 알 거 아니요?"
"야, 야 정신 산란하다. 나는 원체 입이 무겁고 또 초록은 동색이더라고 내 안 들은 거로 해둘 기니 어서 돌아가거라. 공연히 신세 망칠라."
윤보는 삼수 등을 민다.
"이거 놓으소. 누가 안 가까바 이러요? 지내놓고 보믄 알 기니께요. 내가 머 염탐이라도 하로 온 줄 아요? 흥, 그랬을 양이믄 벌써 조가놈한테 동네 소문 고해바z일 기고 읍내서 순사가 와도 몇 놈 왔일 거 아니요."
큰소리로 지껄이며 삼수는 언덕을 내려간다. '빌어묵을, 이거 다 된 죽에 코 빠지는 거 아닌지 모르겄네. 날을 다가야겄다.' 삼수가 왔다간 다음 날 밤, 자정이 넘었다. 칠흑의 밤을 타고 덩어리 같은 침묵을 지키며 타작마당에 장정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에서는 개들이 짖는다. 불은 켜지 않았지만 집집에선 인적기가 난다. 언덕 위의 최참판댁은 어둠에 묻혀 위엄에 찬 그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타작마당에서는 윤보의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얕게 울리고, 이윽고 횃불이 한 개 두 개 또 세 개, 계속하여 늘어나고 그 횃불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집앞에 나서서 횃불이 가는 곳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은 김훈장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라 캤십니까. 화적떼 겉은 소행이라 말심하싰니까? 그라믄 묻겄심다. 서울서 우리 군사가 무기고를 부싰고 왜군하고 쌈질한 거는 멉니까? 그것도 화적떼 겉은 소행입니까? 하기는 왜놈들이 우리 의병들을 폭도라 칸다 캅디다마는.'
곰보 얼굴이 김훈장 눈앞에 어른거린다.
'양반님네들, 날장구라도 치야 할 거 아닙니까! 굿 뒤에 날장구라도 치야 할 것 아닙니까! 체멘하고 염치를 목심보다 중히 여기는 양반님네, 나라 뺏긴 거는 안 부끄럽고 왜놈한테 빌붙은 역적눔 목 베자는 거는 부끄럽다 그 말심입니까?'
곰보 얼굴에 경련이 인다.
'최참판네 만석 살림을 누가 묵었거나 그거야 우리가 있이니께 농사꾼들한테는 전연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겄지만, 지금 이 마당에서 사람으 도리가 우떻고 하는 거를 따질 여가가 없고요, 그 동안 행악이 많았다고 그 자를 치자는 거는 아니지 않십니까. 그런 거야 민란 때의 멩분일 기고, 하기는 농사꾼들 처지로서는 모두 나겉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리는 기 태반이고 보믄 객리 바램이라도 쏘이서 남으 소리라도 많이 들었다믄 모르까. 나라 헹펜이 이러저러하다 해봐야, 그보다는 지금 살기가 어럽기 돼 있고 악에 치받힌께 그자를 치자카믄 모도 일어서게 돼 있지요. 그러나 지금 양반 상민, 있는 놈 없는 놈, 백성하고 관가, 그런 쌈은 아닌 기라요. 다만 그자를 치자는 거는 딱 두 가지 까닭이 있일 뿐인데, 그 하나는 그자가 시적 왜나막신이라고 끌고 낭로 만큼 왜놈들 편에 빌붙어서 자개 영화만 생각는 역적인께 이차에 목을 쳐서 뽄뵈기로 삼자는 거요 다른 하나는 누구 재물이든 간에 고방에 썩고 있는 거를 우리 의병이 써야겄다 그겁니다. 쌈이란 크나 작으나 배고파도 못하고 빈주먹으로도 못하니께, 동네 사람 인심이 딱 일하기 좋게 돼 있고 그 동안 일이 되거시리 다 꾸미놨이니께, 임실 순창에는 의병들이 모이 있고 우리가 가믄 합세하게 딱 그리 돼 있다 그 말심이요. 머 이런 일을 경영한다고 해서 잃은 나라를 당장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겄고 왜군이 물러설 기라는 생각도 없십니다만 부모가가 돌아가시도 곡을 하는 법인데 나라가 죽은 거나 진배없니, 자겔을 하는 것도 충절이겄지마는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보는 기이 지금은 도리가 아니겄십니까. 이분에 우리 군사들도 이길 기다, 살아남을 기다 하는 생각으로 왜군하고 대적한 거는 아니니께요.'
이제는 지나가는 횃불도 없다. 어둠이 있을 뿐이다. 김훈장은 돌부처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선택은 끝난 뒤다. 화적떼 같은 소행이라고 끝내 노여워하고 반대했던 일은 지금 저질러지고 있다. 그러나 김훈장은 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날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신주와 손자를 안겨 아들 내외를 산천 사돈댁으로 떠나보냄으로써 김훈장은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지난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들 내외에게 어떻게 하든 명 보전하여 절손의 불효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김훈장은 잊지 않았다.
이 무렵, 낫 도끼 쇠스랑 대창 등 각기 연장을 들고 최참판댁을 둘러싼 마을 장정들은 삼수가 열어주는 대문 안으로 왈칵 쏠리며 들이닥쳤다. 그 중 몇 사람이 삼수를 보고 으르렁거린다.
"그눔으 자석, 알고도 발설 안 한 거를 본께 우리 편역이다! 전사야 우찌 되었던 직이지 마라!"
하고 윤보가 소리친다. 몇 패로 갈라진 사람들, 그 중 한 패거리는 사랑을 덮쳤다. 그러나 조준구는 없었다. 안방을 덮친 사람들도 홍씨를 못 찾는다.
"멀리 안 갔일 기다! 샅샅이 뒤지라!"
한 패거리는 도망치려는 하인들 계집종을 모조리 도장에 가두고 지서방만을 끌어내어 뒤꼍으로 끌고 가 대창으로 찔러 죽였고, 한편에서는 미리 끌어다놓은 소달구지 다섯 틀, 이 중 하나는 두만네 것이었고 최참판댁 소며 말이며 밖으로 끌어내어 곡식 피륙 온갖 물품, 안방 장롱을 엎고 다락을 쓸고 해서 쏟아놓은 패물 은전 지폐, 닥치는 대로 날라다 싣는 판이었다. 일사불란하고 재빠르고 군소리 없는 팽팽하게 긴장된 시각, 시각이 흐른다. 처음 조준구를 찾는 무리에 끼어들었던 길상은 안방 사랑을 뛰면서 혈안이 되어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토지 문서였다. 별당에서는 아침에 길상으로부터 밤에 일어날 사태 얘기를 들은 서희와 봉순이 등잔 불을 켜고 앉아 있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봉순이는 무서워서 떨고 있었고 서희는 조준구 내외의 죽음을 각일각 기다리는 긴장으로 하여 떨고 있다.
"용아! 짐을 실었이믄 어서 떠라라."
윤보 명령에 달구지는 움직인다.
"형님! 아무리 찾아도 없소!"
장정 하나가 쫓아와서 보고를 한다.
"멀리는 안 갔일 기다!"
윤보는 뒤채 쪽으로 돌아간다. 뒤채 뜨락 횃불 아래 병수는 꿇어 앉아 있었다.
"삼수놈이 귀띔을 한 거 아니까요."
누군가가 말했다.
"벼, 벼락맞일 소리!"
윤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치는 삼수를 바라본다.
"그, 그럴 양이믄 와 미리 쳐들어올 것 기다릴 것도 없었제!"
신변에 위기를 느낀 삼수는 다시 소리를 지른다.
"목수 아제요! 그, 그라믄 뒷산으로 찾아가보까요?"
윗마을 관수가 작은 눈을 초조하게 굴리며 말했다. 이제 조준구 내외는 증오의 대상도 아니요 보복의 대상도 아니다. 일을 저질렀으니 후환을 두려워하는, 다만 그 일념이 조준구 내외의 죽음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냉정히 따져보면 마을을 뜨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남을 가족들에게 화가 미칠 것도 기정사실이다. 함에도 조준구 내외만 없어져버리면 적어도 가족들은 화를 면할 것 같았고 살림이 서희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장차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것은 그러나 일을 저지른 이 마당에서는 너무나 가냘픈 기대인 것이다.
"그럴 시각이 없다! 이 칠흑 같은 밤에 집안에서 찾아라. 못 찾으믄 할 수 없는 기다."
윤보 말에 모든 얼굴들이 굳어진다.
"한시바삐 떠나는 게 멋보다. 시급하제. 느적거리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어, 찾아라!"
"이 꼽새는 우짜꼬요?"
"그 벵신을 머하구로? 내비리두고 사당 있는 대숲 쪽을 뒤지라!"
"그라믄 삼수가 앞장서라! 니가 잘 알 기니께."
따줄이 삼수를 떠민다.
"어럽잖은 일이구마."
횃불을 든 장정이 삼수 뒤를 따르고 삼사 명이 또 따른다. '이 눔으 새끼들이 전자의 내 일을 잊지 않고, 윤보 아니믄 날 직이기라도 할 기세 아니가?' 대숲 쪽으로 가면서 삼수는 생각한다. '이렇기 되믄 나는 머가 되제? 오도가도 못하고 음.... 맞다! 오 옳지! 하하, 와 내가 진작 그 생각을.' 대숲 속의 오솔길을 횃불과 횃불에 비쳐서 검붉게 번들거리는 장정들의 얼굴이 간다. 이글거리는 눈들이 간다.
"사당 안을 보자!"
사당 문을 삼수가 연다. 그의 눈이 마룻장으로 간다. 삼수가 먼저 들어섰고 몇 사람이 따랐다. 구석구석 살펴본다.
"여기는 없다!"
"그라믄 나뉘져서 대숲을 샅샅이 찾자!"
대숲 속으로 흩어지고 횃불은 별당 후원 쪽으로 간다. 흩어지면서 장정들은 삼수의 존재를 잊는다. 이때를 타서 되돌아온 삼수는 사당 안으로 기어간다. 마룻바닥에 엎드린다.
"나으리, 나으리."
아무 소리가 없다. 삼수는 마룻바닥에 귀를 바싹 붙인다.
"나으리, 소인 삼수올시다! 저놈들이 대숲 속을 뒤지고 있심다."
".... "
"나으리! 이러크름 믿지 않으시믄 소인도 맴이 달라질 기니께 대답하시이소. 지금 당장 말 한마디믄 이 세상하고 마지맥이 될 기니께요."
협박이다.
"나, 나, 나."
겨우 마룻장 밑에서 소리가 났다.
"기심서 그러시오. 이자 아싰지요? 삼수놈이 그래도 나으리한테는 쓸모가 있는 놈이라는 것을 우짜겄십니까. 이자는 이놈한테 한몫을 주시는 기지요?"
"주, 주고말고. 제 제발 사, 살려주게."
"예. 언약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기이 이 삼수놈 손에 매 있이니께요. 지서방도 횃바람에 찔러 직있이니께 나으리한테도 가차가 없일겁니다."
삼수는 어둠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띠며 사당을 빠져나온다. 조준구를 찾아 미친 듯이 쏘다니는 무리에 얼렁뚱땅 끼어든다. 삼수가 사당 마룻장 밑을 생각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준구가 토지 문서를 사당 마룻장을 뜯고 그 밑에 감춘 것을 삼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준구는 우연히 소피를 보러 나갔다가 횃불이 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홍씨를 끌고 사당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최참판댁을 습격한 윗마을 아랫마을 그리고 윤보가 맥을 통해놓은 근동에서 온 장정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져 차례차례 떠났다. 조준구를 못 찾는다 해서 윤보는 애초 계획을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새벽까지 남은 사람은 윤보와 길상이 이외 몇 명이었다. 조준구를 찾기 위해서지만 한편 먼저 떠난 사람과 짐이 정해진 장소까지 당도하기까지 최참판댁의 외부와의 연락을 끊어놓자 하는 데 중점을 둔 잔류였다.
결국 조준구 내외를 못 찾고 윤보 일행은 어둠이 걷혀지려 할 무렵 겨우 떠났는데 그 무리에 김훈장이 따랐고 먼저 떠난 무리에 끼여들었던 삼수는 빠져나와 숲속에 숨어 있다가 해가 뜰 무렵 집에 돌아왔다.
16장. 악은 악을 기피한다.
충성심을 가장한 삼수의 은근한 협박을 받으며 구차스러운 언약을 하는 등 그런 상황 아래 산 목숨이라 할 수 없는 일각, 모골이 얼어붙는 하룻밤을 사당 마룻장 밑에서 보내고 구사일생한 조준구는 하인들 눈에도 민망스러웠다. 얼마나 허둥대었기에 파리가 앉으면 낙상하겠다던 이마는 찢겨져 핏자국이며 왼쪽 눈가장자리는 퍼어렇게 부풀어 올라 눈 하나가 짜부러졌고 얼굴 몸뚱이 찢어진 의복 할 것 없이 그을음 거미줄이 줄레줄레 묻어서 갈 데 없는 미치광이 모습이다. 남달리 몸치장에 알뜰했던 성미였던 만큼 그런 꼴을 하고서 이를 부드득 갈아 젖히니 하인들이 돌아서서 웃음을 깨물지 않을 수 없다.
"아아니! 목을 쳐 죽일 그 화적 놈들이! 아이고오, 이 일을 어쩌누."
안방으로 달려간 홍씨는 홍씨대로 울부짖는다. 아무리 뒤져보아야 목숨만큼이나 아끼던 그 많은 패물은 간 곳이 없다. 서울 육의전에는 바리바리 사다 나른 숱한 청나라 비단, 은전 한푼 남아 있는 게 없다. 눈꼬리를 치키고 똥똥한 작은 몸을 솟구쳐가며 고방으로 달려간 홍씨, 그곳인들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울부짖고 악담하고 금새 목이 잠긴다.
"마님, 그저 목숨이 살아남은 것만 천행으로 아시야제요. 고방 빈 것쯤 만석 살림이 끄덕이나 하겄십니까. "
삼수는 환심을 사려고 말하는 것이나 눈앞에 보이는 사태에 눈이 뒤집힌 홍씨
"이놈아! 불난 집에 부채질이냐!"
하다가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별당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서희 이, 이년! 썩 나오지 못할까!"
나오기를 기다릴 홍씨는 아니다.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서희를 끌어 일으킨다.
"네년 소행인 줄 뉘 모를 줄 알았더냐? 자아, 내 왔다! 이제 죽여 보아라! 화적 놈 불러들일 것 없이!"
나오지 않는 목청을 뽑으며, 거품이 입가에 묻어나온다.
"자아! 자아! 못 죽이겠니?"
손이 뺨 위로 날았다. 앞가슴을 잡고 와락와락 흔들어댄다. 서희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울고 있던 봉순이
"왜 이러시요!"
달겨들어 서희 몸을 잡아당기니 실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홍씨 손에 옷고름이 남는다.
"감히 누굴! 감히!"
하다가 별안간 방에서 뛰쳐나간다. 맨발로 연못을 향해 몸을 날린다. 그는 죽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애기씨!"
울부짖으며 봉순이 뒤쫓아간다.
"죽어라! 죽어! 잘 생각했어! 어차피 너는 산 목숨은 아니란 말이야! 죽고 남지 못할 거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서희는 연못가에서 걸음을 뚝 멈춘다. 돌아본다. 흙빛 얼굴에 웃음이 지나간다.
"내가 왜 죽지? 누구 좋아하라고 죽는단 말이냐?"
나직한 음성이다. 홍씨 눈을 똑바로 주시한다.
"사람 영악한 것은 범보다 더 무섭다는 말 못 들으셨소?"
여전히 나직한 음성이다.
"무서우면 어떻게 무서워? 우리 내외한테 비상을 먹이겠다 그 말이냐?"
아이고! 아이고! 눈물도 안 나오는 헛울음을 울더니 이번에는 봉순에게 달겨들어 머리끄덩이를 꺼두르고 한 소동을 피운다. 읍내서 헌병, 순사들이 왔다는 말에 홍씨는 겨우 본채로 돌아갔다. 서희는 찢겨진 저고리를 내려다본다.
"길상이놈이 날 죽으라고 내버리고 갔다. "
눈이 부어오른 봉순이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찾았지마는 사당 마릿장 밑에 숨은 줄이야, 우, 우찌... 으흐흐흐. "
되풀이 입술을 떨면서 서희는 말했다.
"길상이놈이 날 죽으라고 내버리고 갔다. "
달려온 헌병들에게 맨 먼저 당한 것은 삼수다.
"나, 나으리! 이, 이기이 우찌 된 영문입니까!"
헌병이 총대를 들이대자 겁에 질린 삼수는 그러나 무엇인가 잘못되었거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 조준구를 향해 도움을 청하였다.
"이놈! 이 찢어죽일 놈 같으니라구!"
무섭게 눈을 부릅뜬 조준구를 바라본 삼수 얼굴은 일순 백지장으로 변한다.
"예? 머, 머, 머라 캤십니까?"
"이놈! 네 죄를 몰라 하는 말이냐? 간밤에 감수한 생각을 하면 네놈을 내 손으로 타살할 것이로되 으음, 능지처참할 놈 같으니라구 이놈! 어디 한번 죽어봐라!"
"나, 나으리! 꾸, 꿈을 꾸시는 깁니까? 이, 이 목심을 건지디린 이, 이 삼수놈을 말입니다!"
그러나 조준구는 바로 저놈이 폭도의 앞잡이였다고 이미 한 말을 다시 강조할 뿐이다. 물론 이 경우 폭도란 의병을 일컬은 것이다.
"이눔으새끼! 가아. "
헌병은 총대로 등바닥을 후려친다.
"아이고오! 살리주소! 나으리! 나으리마님! 사, 살리주시요! 이놈 살리, 소, 소인은 나으리를 사, 살리 디맀는데 이럴 수 있십니까?"
삼수는 걸레조각처럼 끌려나갔다. 노비들은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문 밖으로 끌려나간 뒤에도 삼수의 울부짖음은 계속 들려왔다. 울부짖음이 끊어졌는가 싶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뒷산 쪽에서 총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숲속에서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얼렁뚱땅 넴기느라고 진땀을 뺐구마. 사당문 열고 들어갈 때는 간이 콩알만해지데. '
'나리께서 거기 계시는 걸 알았던가?'
'하모, 알았지러. 알았이니께 간이 콩알만해졌지. 그눔아들이 지서방맨치로 날 직일라 카는 데는 참말이제 눈앞이 캄캄하더마. '
'그런데 어떻게?'
'아 그랬는데 윤보가 나를 집안 내막 잘 알 기라 캄서 죽는 대신 나으리를 찾아내라는 기라. 그래 찾는 시늉을 했지. 살고 봐야 안하겄나? 게우 그눔아아들이 대숲을 뒤지는 새 사당에 숨어들어가서 나으리께 안심을 시키놓고 의심을 받을까봐서 따라가는 척하다가 뺑소니를 안 쳤나. 참말이제 그눔 아아들한테 들키기만 했이믄 두 양주분 지금쯤 황천 가시는 길일 기구마는.'
아침에 넉살좋게 지껄이던 삼수 모습을 하인들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끌려 나갈 때도 소인은 나으리를 살리디맀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하지 않았던가. 삼수가 믿지 못할 위인인 줄은 모두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서 조준구의 본성을 하인들은 똑똑히 보았다. 이용하고 나면 버리는 무자비한 생리에 소름이 돋았다. 실상 조준구는 사당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 찢어죽일 놈! 어디 한번 죽어봐라!'
마음속으로 별렀던 것이다. 일본 헌병들이 오기까지 안심할 수 없어서 참았을 뿐이다. 삼수가 공포감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수가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도 틀림이 없다. 언약 따위 저버리는 것쯤은 능사라 하더라도 죽이기까지, 그러나 삼수는 이제 성가신 존재, 없어져주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더라도 어쩌면 조준구 머릿속에 삼수를 폭도로 몰아버릴 생각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난 이틀 만에 진주서 출동한 일본군 이 개 소대는 소위 그네들이 일컫는 폭도들의 행방을 쫓아 지리산 방면으로 향했고 읍내서 온 헌병들은 마을을 결딴내고 있었다. 아낙들과 늙은 부모들은 매를 맞고 총칼로 위협받으며 읍내로 끌려가기도 했고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이 북새통에 한조가 돌아왔다. 그 동안 진주에 있다가 솔가할 결심으로 마을에 돌아온 그가 이번 일에 관련이 있을 리 만무다. 사건의 내용조차 모르고 왔다. 한데 그는 삼수 다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저놈도 폭도 중 한 놈이오. 아주 악질이란 말이오. "
조준구는 서슴없이 손가락질을 했다.
"머라꼬? 한조가 잽히갔다고?"
바깥 동정을 살피고 온 두만네 말에 두만아비는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댁네가 울고불고 야단났구마요. "
"하기사 머, 죄 없이믄 나오겄지. 한조가 무신 죄 있다고. "
눈에 불안이 가득 실렸으나 슬그머니 앉는다. 들일도 못하고 답답하게 방에 갇혀서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마을에 불을 지른다는 것이 참말인가, 생각지 말자고 몇 번을 다짐했건만 잃어버린 소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등 심중이 괴롭기만 한데 한조가 잡혀갔다는 것은 또 무슨 징조란 말인가.
"보소."
"... "
"참말이제 이러다가 큰일나겄소. 야무네가 그러는데 조간가, 그 도적놈이 찔렀다 안 카요."
두만네는 남편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소근거린다.
"머라꼬? 그 양반이 찔러? 와. 머 땜에? 한조는 벌써부터 여기 안 있은 거는 다 아는, "
"그러니께 큰일나겄다는 거 아니겄소. "
두만아비는 양볼을 실룩거리며
"하 참, 그래도 죄가 없는 바에야. "
"그기이 그렇잖은갑더마요. 조간가 그 도적놈이 왜말도 잘하고 왜놈들하고 친분이 두터바서 못하는 짓이 없다 안 카요. 그 금지옥엽 겉은 애기씨가 거무겉이 돼가지고 시달림을 당하는데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겄더라 안 캅니까. 날이믄 날마다, 저거들 시키는 대로 안 하믄 왜놈한테 넘기겄다고 얼림장이고. "
"... "
"한조 그 사람도 여기 안 있었노라, 한사코 발멩을 했다 카더마는, 마구 발길질을 함서 개 끌듯 끌고 갔다 안 카요. "
"그, 그라믄 나도 여기 없었는데, 그, 그것 가지고는 바, 발멩이 안 된다 그, 그 말이겄네?"
"그거사 한조 그 사람은 흉년 때 일로 해서 조가가 빼물고 있었겄지요. "
"그, 그래도 법대로만 한다믄 무신 죄 있다꼬?"
그러나 며칠 뒤 들려온 소식은 한조가 총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추달을 받다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게 되자 죽인 것이라 했다.
'이래가지고 우찌 살겄노. 사람으 목심이 포리 목숨이니. '
한조네 식구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다 못해 강가로 나온 두만아비는 눈앞에 있는 강물이 보이질 않는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당할지,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지난날 한조 모습이 눈앞에 삼삼거려 견딜 수 없다. 까닭 없이 조준구한테 끌려가 매를 맞고 미칠 것 같다면서 밭둑에 앉아 있던 한조,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놈 하며 빈정거리면서도 의리를 저버린 일이 없는 윤보의 얼굴, 영팔이와 용이의 얼굴, 친구도 이웃도 없이 혼자 남은 외로움이 찬 강바람과 함께 전신에 스며든다.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막아보지만. 마을은 산천초목이 떠는 형세에 빠졌다. 일본 헌병들의 총칼도 무서웠지만 조준구의 손가락이 더 무서웠다. 손가락 간 곳에 죽음이 있었다. 다른 마을에도 몇 사람인가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일본 헌병이나 조준구가 점점 더 서슬 푸르게 날뛰며 포악해지는 것은 지리산 방면으로 출동한 일본 군대가 성과를 올리지 못한 때문이라고도 했다. 성과는커녕 그들은 마을을 떠난 무리들의 행방조차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났을 무렵, 마을에는 쫓겨난 사람 도망간 사람들로 하여 빈집이 많아졌다. 임이네는 임이와 홍이를 데리고 읍내 월선네 집으로 밀고 들어갔고 영팔이 한조의 식구들은 진주로 달아났다. 그밖에 삼십줄의 달수 붙들이 따줄이, 그의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윗마을에서는 더 많은 집이 비었다고 했다. 표면상으로는 일이 일단락져서 조용해진 듯싶었다. 그러나 때때로 일본 순사들이 마을에 나타났고 말 탄 병정들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시위하듯 지나가곤 했다.
"이엉 갈구마는. "
삐뚜름하게 갓을 쓴 서서방이 지팡이를 든 채 턱을 치키며 지붕 위를 올려다본다.
"야."
두만아비는 건성으로 대꾸한다.
"거 폭신폭신하니 잠자리 좋겄다. 금년이야 묵을 사램이 없어 그렇지 시절이야 좀 좋은가?"
횡설수설인데 입맛을 쭈욱 다시며 말하는 품은 노인답게 의젓하다.
"이팽이. "
"야."
"내일 우리 집에 안 올랑가?"
"... "
"우리 집 마당에서 광대놀이 한다는 말 들었겄제?"
두만아비와 맞잡아서 새끼를 잡아당겨 서까래에 묶던 한복이
"운봉할배."
"와."
"고만 집에 가소."
"아따, 내가 빈말하는 줄 아나? 한마당 논다 카이 그러네. 누가 기경값 내라는 것도 아니겄고, 이분의 광대는 재주가 볼 만하다니께."
"운봉할배."
"와."
"손주를 누가 안아가믄 우짤라꼬 나와 댕기요."
"머라꼬? 아아니, 씨종자 하나 있는 거를 누가 데꼬 간다는 기고? 음. 총 메고 온 사램이 데리간다 카더나?"
퀭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서서방은 허둥지둥 지팡이로 길바닥을 두드리며 집을 향해 걸어간다. 두만아비와 한복이는 영만이가 올려주는 용마름을 지붕 꼭대기에 펴면서 말이 없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일은 거지반 된 듯싶다.
"요새는 와 그런지 부쩍 광대 얘기를 하구마요. "
한복이 혼잣말같이 뇐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갑다. "
"... "
"실성한 중에도 신은 남아 있어서... 그래도 요새는 걸식하로 안 나가니께 과수댁네 심장이 덜 상할 기구마."
"양자 데리온 후부터는 그 버릇을 잡았다는가배요."
"참말로 사램이 살아갈라 카믄 별놈의 풍상을 다 겪는다."
일에 이골이 나서 장골 한몫을 하나 몸집은 열일곱 나이에 비하여 작은 한복이, 부지런하고 착한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두만아비는 말상대를 하거니와 경위 없이 욕심스런 봉기하고도 요즘에는 잘 지낸다. 봉기 역시 풀이 죽어서 두만아비를 찾아오곤 했다. 외로워서도 그랬었지만 같은 낙오자의 비애 같은 것, 공범자로서의 상련, 그런 마음이 그들을 전보다 친밀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들과 달리 한복이는 그 일에 참가하지 않았던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영만아, 새끼 좀 올려도고. "
한복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만이 새끼 한 묶음을 올려준다.
"해가 질라 카는데 어서 하고 저녁 묵도록 하소."
두만네가 지붕 위를 향해 말했다.
"다 돼가거마는."
두만아비 대꾸다.
"한복이 니 배고프겄다."
"괜찮십니다."
일을 끝내고 지붕에서 내려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깜박거리는 등잔불 아래 김이 나는 된장국, 풋김치, 간갈치는 구워놓았고 수북이 올라간 보리밥, 한복에게는 오래간만의 성찬이다.
"한복아. 묵고 더 묵어라이."
남편 앞에 밥상을 날라다놓은 다음 영만이와 겸상한 것을 갖다 놓으며 두만네는 말했다.
"이것도 많십니다."
"무슨 일만 있으믄 니가 와서 거들어주이, 어서 묵어라."
"야, 묵겄십니다."
두만네가 나간 뒤 말없이 밥을 먹던 두만아비는
"한복아."
하고 불렀다.
"야."
"우리 짚 가지가서 니도 지붕을 잇도록 해라. 많이 남았이니께."
"고맙십니다."
"고맙기는. 영만이 니도 가서 거들어주어라."
"그란해도 그럴라 캅니다."
밥을 꿀떡 삼키며 대답하는데 밖에서 봉기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팽이 저녁 묵나?"
"들어오나."
두만아비가 내다보며 말했다. 봉기가 방안으로 들어오고 두만네도 숭늉 대접을 들고 들어온다. 밥을 먹다 말고 한복이와 영만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치른다.
"임자 밥 있거든,"
남편 말이 끝나기 전에
"야 가지오겄소."
"아, 아입니다. 이엉 가는 거를 보고 거들어주지는 못했지마는 여기 술 한 병 가지왔이니 술잔이나 갖다 주소. 밥은 무신."
두만아비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큰마음 먹었구나, 술을 가지고 오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뜰란가? 하듯 영만이 한복을 힐끔 쳐다본다. 한복은 눈을 내리깐 채 서둘러 밥을 먹는다. 한복이는 봉기를 볼 때마다 인사도 하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꾸도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묵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오 년 전 보리 흉년이 들었던 그 해 가을이다.
'참말이제 악세풀겉이 멩도 질기다. 부모가 있이도 벵들어 죽고 굶어 죽었는데 천지간에 의지가지할 곳 없는 저 어린기이 우찌 살았이꼬. 아비는 샐인 죄인으로 죽었고 어매는 살구나무에 목을 매달아서, 아 내가 그 목맨 줄을 지금도 가지고 있거마는. 중값 줄라 캐도 안 팔고 갖고 있지러. 멩색이 양반의,'
장거리서 발길을 돌려놓는데 뒤통수를 향해 쫓아오던 봉기의 음성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한도 아니면서 쓰라린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급히 밥을 먹고 아이들이 나가자 주거니받거니 술잔을 나누면서 봉기는
"나 삼수놈 죽은 생각을 하믄 자다가도 춤을 추고 싶다마는 그것 말고는 모두 한심스러븐 일뿐이라."
시작한다.
"듣자니께 그 목이 뿌러질 놈이 하기는 총 맞아서 지 멩대로 못 산 놈이다마는 그놈이 사당 마릿장 밑에 조가가 숨은 거를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카는데."
"머라꼬?"
두만아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기사 모리는 척 안 하고 있는 곳을 알리주었더라믄 삼수 놈은 지금 땅 밑에서 썩고 있지는 않을 기다마는."
"그러고도 삼수를 직이?"
"그놈이사 천벌을 받아 죽었지. 하여간에 그때 조가 그 작자를 결딴냈더라모... 설사 참니 안 했다 카더라도 누가 우리를 직이기야 했겄나."
"그렇더라 캐도 일은 크게 벌어진 기니께 동네가 풍지박산되는 거는 매일반일 기고, 한조 겉은 억울한 죽음이야 없었겄지마는... 말을 하자 칸다믄 애씨당초 조씬가 그 사램이 이 동네에 안 왔든 기이 제일 좋았든 기라."
"그렇지, 그래... 아무튼지간에 윤보 그놈이 날만 보믄 부애질을 하더마는, 저눔이 무신 원수가 져서 날만 보믄 싶더마는, 흉칙스런 오양보다는 몇 갑절 잘난 놈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보라모? 말 탄 왜병들이 그리 수없이 찾아댕기도 흔적이나 있이야 말이제? 어디 깊은 곳에 굴을 파고 들앉았다가 잠잠해지믄 한판 치고 나올 작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겄네."
"한판 치고 나온다 캐도 이자 다 소용 없일 기다."
"제에기! 요새겉이 답답할 줄 알았다믄 나도 그만 끼여드는 긴데, 아 왜 그 패물이다 은덩이다 비단이다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숱허기 실어갔다누마."
"실어갔이믄 갔제. 그기이 어디 니꺼 될 거더나?"
"말이 그렇다는 기지."
"똑똑한 놈들은 다 가고 말깨나 하는 놈들..."
두만아비는 입에 술잔을 가져간다. 마을의 사정은 그러하거니와 최참판댁에서는 홍씨와 서희 사이의 팽팽한 대결이 그 양상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었다. 늘 서희 처리에 불평이 많았던 홍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경질을 부리며 조준구에게 따졌다.
"서희년은 왜 저대로 두는 거지요?"
"글쎄."
"아니 영감."
"성급히 굴 것 없소. 제물에 터지게 돼 있는 거요."
서희 문제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느라 좀 생각해보자고만 하던 조준구였다.
"서희 년 일이라면 영감은 노상 어정쩡하게 단을 못 내리시는구려. 우리 목에 칼이 들어올 뻔했는데도 이러고 계시겠다 그 말씀이오? 다시 당하는 일이 있어도 할 수 없다 그 말씀이오?"
"내가 왜 그 생각을 아니 하겠소. 허나 상대가 아녀자니, 삼수 놈 경우처럼 직결처분만 받는다면야... 기껏 죄목을 붙여도 의병 뒷배를 보아주었다는 정도일 테고 상사람도 아닌 양반의 규수를 심히 다루지도 않을 테니."
"아아니 영감, 의병 뒷배를 보아준 죄목뿐이라니, 우릴 죽이려 했던 게 누구였지요?"
"부인은 내 말부터 들으시오. 윤보 김훈장 일당놈이 날 죽이려 한 것은 친일파라 해선데 그것은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명분이 서고 떳떳한 일이요만 서희 년이 우릴 죽이려 했다면 경우가 달라진다 그 말 아니오. 자연 서희 년은 발명하고 나설 거구 또 그 계집애가 일본말을 조금은 한단 말이오. 사납고 머리가 명석하니 무슨 짓을 할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아무래도 다소는 허물이 드러날 게고 한편 그 사람들한테 약점을 잡힌다는 것도 재미롭지 못한 일이오. "
"... "
"뭐 내가 미리부터 그네들 환심을 사왔고 그까짓 입막음하는 것쯤, 어느 나라 사람이든 돈 보고 싫다는 자는 없으니 별일이야 없겠으나 순리로 조용히 하니만 못하지요. 하여간 서희 년은 만만한 계집애가 아니니 그 사람들과는... 아무래도 상사람 경우하곤 달라서 그것이 나중에 무슨 화근이 되어 돌아올지 모를 일 아니겠소? 어차피 토지는 모두 우리 앞으로 넘겨놓았으니."
"그러니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역시 병수하고 혼인시키는 그 이상의 상책은 없소."
"우릴 죽이려던 계집아일 며느리 삼아요?"
"며느리랄 거 있소? 볼모지. 병수 놈도 사람 구실 못하는 아이니 형식일 뿐이지요."
"병수 놈도 혼인 아니 하겠다고 펄펄 뛰는 건 어쩌구요?"
아들의 얘기는 귓전에 닿지도 않는다는 듯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소. 서희 년도 꼼짝할 수 없게 됐단 말이오. 말하자면 자승자박한 셈이지. 나는 모르는 척할 터이니 부인이 서희를 달래시오. 그냥 달래는 게 아니라 왜병들이 벼르고 있다는 협박을 하면서요. 사실 서희 년을 어떻게 한다는 건 아까 내가 말한 여러 가지 이유 말고도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아무리 그 사람들하고 친하기로 잡아가시오, 죽이시오 한다면 그 사람들 앞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하니,"
흉년 때의 사건, 서희가 홍씨에게 말채찍을 휘두르려 했었던 사건,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결국 내외의 의견은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만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길상이마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떠나버린 지금 서희는 날갯죽지가 부러진 한 마리의 새, 빈사 상태다. 핼쑥하게 여윈 모습에 퀭하니 뚫린 두 눈에는 일찍이 그에게서 본 일이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홍씨는 별당에 나타나 지껄이는 것이다.
"우리 내외를 죽이려다 못 죽였으니 그게 분해서 머릴 싸매고 이리 누워 있는 게냐?"
"... "
"너를 어른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도 못할 짓이 없는 게야. "
많이 누그러져서 말했다.
"너도 총명한 아이니까 모를 리 없겠지. 요즘 지방의 수령 방백 따위가 쪽을 쓰는 줄 아니? 일본 사람 세상이야. 일본 별순사들이 만사를 쥐고 펴는 세상이란 말이야. 그 사람들이 영감 말이라면 믿어주고 사정도 봐주고 그러니 망정이지. 우리가 몰라라 해보아,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끔찍스런 일을 저질러놓고 계집아이라 해서 가차 있을 줄 아느냐? 영감이 그래도 너를 생각하여 무릎 밑에 접어놓고, 접어놓고 하시니 말이지. 소행이야 괘씸하다 뿐이겠느냐? 의병이고 나발이고 그놈들을 끌어들여 감히 우릴 죽이려고 했었던 너 아니야? 내 오기를 말할 것 같으면 죽든 살든 결판을 내고 싶다만. "
목청이 높아지고 눈꼬리가 치올라갔으나 본시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
"아무리 규중에서 바깥 사정을 모르기로, 의병인지 화적 놈인지 그 일만 해도 그렇지.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일본나라에 항거해서 살아남을 순 없는 거야. 나라 금상님도 일본 눈밖에 나서 임금 자리를 물러난 걸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우리를 죽이려 했고 지서방을 죽였으니 벌써 그것부터가 살인 죄인이요 더더군다나 우리 영감을 친일파로 몰아서 죽이려 했으니, 의병인지 화적놈들인지 일본 병정들도 그놈들한테만은 사정이 없다는 게야. 너도 생각해보아. 흉년 들던 해에도 그 불한당을 네가 끌어들이지 아니 했느냐? 이번에도 그놈들이고 보면, 김훈장인가 그 늙은이, 길상이놈까지 끼어들었으니 너하고 공모하지 않았다는 말은 못할 게야. 안 그러냐?"
매일이다시피 그 말이 그 말, 추운 마루에서 서성거리는 봉순이는 욕설과 포악스런 행동을 거두어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넌더리가 난다. 신체의 아픔도 습관이 되면 으레 아픈 거거니 싶듯이 이제는 홍씨가 무슨 말을 해도 별로 겁나지는 않았다. 그저 지겨울 뿐이다. 그러나 한마디 말도 새나오지 않고 완강하게 침묵을 지키는 서희의 심중을 아는 만큼 봉순이는 초조해진다. 홍씨에 대한 서희의 증오심은 봉순의 습관화돼버린 무섬증과는 다르다. 날로 새롭고 날로 생생해지는 증오심, 서희가 완강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자기 내외를 살해하려 했다는 홍씨의 말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그의 감정 같아서는 백 번이라도 너희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무던히 끈덕지고 무지하여 늙은 말고기같이 질긴 홍씨였지만 교활하기로는 서희가 몇 수 위다. 전신으로 살의를 인정하면서 증거를 잡히지 않으려는 침묵인 것이다.
서희 성미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인내였으리라. 결국 홍씨는, 벙어리냐! 왜 말이 없느냐! 독사 같은 계집애! 하며 그예 악을 쓰다가 물러간다. 그가 나가자 봉순이는 덜덜 떨면서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간다.
"애기씨!"
"... "
"미음이라도 한 모금 드시야지요."
봉순이는 부리나케 다시 밖으로 쫓아나간다.
'어디로 도망을 갈까? 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서희는 농발 대신 장롱을 괴어놓은 막대기 두 개를 멀거니 바라본다. 언젠가 김서방댁이 농발을 어찌하고 막대기로 장롱을 괴어났을까 보냐 하며 의아해한 일이 있었지만 막대기는 아무도 관심 않은 채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왔다. 그 막대기가 서희 육신의 일부분인 양 서희 의식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막대기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 한지는 거무스름하게 때가 묻어 있었다. 그 막대기가 할머니 방 장롱을 괴어놨던 것인지 서희는 가끔 생각해보지만 기억 속에는 없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날 밤 할머니의 얼굴이요 들려오는 것은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서희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등잔불은 누가 켰는지, 불빛 아래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앉은 서희는
"네, 할머님!"
"김서방이 죽었느니라. "
할머니의 움직이지 않는 눈을 바라보며 서희는
"네, 알고 있습니다. "
"봉순네, 복이 놈도 병이 났어. "
"... "
"내가 좀 더 오래 살아 네 뒤를 보아주고 싶지마는 사람의 일은 어찌 알겠느냐?"
"할머님!"
"하기는... "
하다가 윤씨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뜻은 한치 앞일을 뉘 알겠느냐, 이 액병의 환란 속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지 그걸 뉘 알겠느냐, 그런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봉순이는 제 어미 곁에 간 모양, 별당에는 이들 할미 손녀 이외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었다.
"내 지금 할일이 있으니 서희 너는 말 말고 있어야 하느니라. 아니다. 마루에 나가서 누구 사람이 오는지 살펴보는 편이 낫겠구나. "
무섭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떨면서 서희는 마루에 나가 어두운 뜰을 바라보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갔을까. 방안에서는 꽤 오랫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롱 옆구리에 달린 고리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장롱을 열고 닫는 소리도 났다. 이윽고 윤씨부인은 방문을 열고 손짓하여 서희를 들어오게 했다. 방바닥에 농발이 하나 댕그렇게 놓여 있었다.
"농발 대신 저기 막대기를 괴었느니라. 후일 너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만일을 위해 마련해주는 게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것을 쓰게 되고 못 쓰게 되는 것은 오직 신령의 뜻이 아니겠느냐?"
그러고는 농발을 들고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 성큼하게 큰 키에 긴 두 팔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7장. 가냘픈 희망이 그네를 뛴다.
"또 나왔구마. 간도댁 이자 그만, 그만하소."
해가 떨어지려 하는데 나무를 사러 나왔던 이부사댁 억쇠는 얼굴을 찡그린다. 간도댁이란 월선이를 대접하여 억쇠가 붙인 명칭이다. 무당 딸이라 하여, 주모 노릇을 했다 하여 누구든 쉽게 이름을 불렀지만, 이제는 나이 사십, 자식이 없으니 누구네라 할 수도 없고 간도에 갔다온 연유로 해서 노령에 있는 이동진 소식을 알기 위해 서울을 서너 번 내왕했던 억쇠에게 간도가 귀에 선 이름도 아니었기 때문에.
"십 년을 나가 계신 우리 댁 나으리 겉은 분도 기시는데, 맘을 크게 묵으소."
"그 어른은 수천 리 밖,"
하다가 월선이는
"생사를 알아야 안 하겄소."
하고는 스스러워서 외면을 한다.
"참말로 딱하구마. 진작 팔자나 고칠 일이지 머 땜에 이 고생이요."
인정 많은 억쇠는 가엾은 생각에서 도리어 화를 낸다.
"자식도 없이, 요구조리 겉은 그놈의 계집년까지 떠맡기는 와 떠맡소. 이서방이 돈 많이 맽기놓고 갑디까?"
월선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휙 지나간 억쇠는 솔가지 한 짐을 흥정하여 나무꾼을 앞세우고 가면서 모래밭 쪽으로 내려가는 월선의 뒷모습을 돌아보곤 한다. '지난봄만 해도 그리 곱던 얼굴이 못쓰게 됐네. 저 비리갱이 겉은 여자를 염치 좋은 계집년이 한없이 뜯어묵을 기구마. 이서방은 다 좋은데 그것만은 마땅찮아. 돌아가신 최참판댁 그 양반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제. 칠성이 계집년을 데꼬 살다니,'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장배나 뗏목배가 올 리 없다. 나룻배는 저만큼 나루터에 매어진 채 어둠이 오고 있는 것이다. 모래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월선이는 줄어들기를 바라기라도 하는가 몸을 움츠린다. 강바람이 설렁한 때문이지만, 움츠리고 자꾸만 움츠리면 몸과 마음이 함께 굳어져서 집요하게 달겨드는 망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의 행위이기도 하다. 흰 모래밭에 꺼무끄름한 것이 흐려진 월선의 시계에 들어온다. 팔을 뻗어 줍는다. 바람에 날려 왔는지 나무꾼이 흘려놓고 갔는지, 도토리나무 잎새다. 손아귀에 넣어 와삭 구겨본다. 눅눅하여 바스라지질 않는다. 안타까운 생명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항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을은 저물고, 아니 찬바람 부는 초겨울인데 도토리 나뭇잎에 물기가 남아 있더란 말인가. 월선이는 어느 골짜기에 용이도 이와 같이 남은 목숨을 굴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는다. 때묻은 명주수건이 바람에 펄럭인다. 치맛자락도 펄럭인다. 전신에 한기가 드는데 더운 입김이 무릎을 뜨겁게 한다. 한 가닥의 희망, 거미줄 같은 가냘픈 희망이 허한 마음바닥에서 그네를 뛴다. 이치를 따지자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잎은 이미 그 생명을 다한 것이다. 물기가 남아서 아직 눅눅하다면 생명을 잃은 뒤에 남은 온기에 불과하다.
함에도 월선은 그 온기에다 용이 육신의 온기를 견주어보며 거미줄 같은 가냘픈 희망에 매달려보는 것이다. 삼가름길을 향해 소달구지가 내려오면 월선은 점을 친다. '가름길에서 오른편으로 가믄 길조고 왼쪽으로 가믄 흉하다.' 그러나 소달구지는 왼편으로 갈 때도 있고 오른편 길을 갈 때도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솔잎을 세어보는 것도 요즘 월선의 버릇이다. 짝이 맞는 숫자면 길하고 짝이 맞지 않는 숫자면 불길하다. 짝수가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벌레가 방을 향해 기어 들어오면 좋은 징조요 기어 나가면 나쁜 징조다. 기어올 때도 있고 기어 나갈 때도 있다. 그러나 한번 떠난 뒤 용이 소식을 들은 일이 없다. 날마다 나루터에 나가 강 위쪽에서 내려오는 뗏목배, 장배, 나룻배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용이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혹 의병들 얘기를 흘려두고 가는 사람이 있기는 있었으나 확실한 것은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 이외 의병들이 몰살을 당했을 거라는 둥, 아니 더러 상하기는 하였지만 하도 영악하고 재빠르기가 귀신같아서 왜놈들도 의병에게 손을 써볼 수 없다는 둥, 두목이 잡혀갔느니 총살을 당했느니 임실 순창 방면으로 달아났다는 둥, 종잡을 수 없는 장거리 장꾼들 사이에도 이미 퍼진 이야기뿐이었다.
월선이는 허적허적 집을 향해 걸어간다. 장거리, 그 집들, 그 골목. 잎 떨어진 버들가지가 바람에 훌렁훌렁 날리고 있는 소리꾼 배서방 집에서는 여전히 장구 소리 노랫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한테도 신이나 내이믄.' 어미의 칼춤을 추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굿거리가 없을 때는 전신이 쑤신다면서 나른해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굿을 하고 오는 날이면 그냥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한테도 신이나 내이믄, 그라믄 잊을란가.' 월선이 제 집 삽짝을 들어섰을 때 마루 끝에 홍이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어둑어둑해오는데 울상을 짓던 얼굴에 금시 기쁜 빛이 떠오른다.
"아가!"
헤죽 웃는다.
"옴마는 어디 갔노?"
"김서방댁이 와서 함께. "
"누부는 어디 가고?"
"누부도 함께 갔다. "
"아니 우리 홍이를 혼자 놔두고?"
"돈벌이 한다 캄시로. "
"돈벌이 한다 캄시로?"
"응. "
"그라믄 저녁도 안 묵었고나. "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 얼른 밥 해주꾸마. "
"배는 안 고픈데 무서바서 막 울라 캤다. "
하며 홍이는 조그마한 버선발로 마루턱을 찬다. '우찌 저리 아배를 닮았이꼬. '
"춥다. 방에 들어가 있거라. 불 키줄 기니. "
등잔에 불을 켠다. 방안을 둘레둘레 살피던 홍이는 방을 나서려는 월선의 치마꼬리를 얼른 잡고 따라 나온다.
"치븐데?"
하며 월선이는 아이의 손목을 잡아본다. 제 어미가 있을 때는 비실비실 피하기만 해서 월선의 마음을 무척 슬프게 하던 아이, 귀여워서 먹을 것을 주려고 부르면 홍이는 오지 않고 대신 임이가 받아갔다. 받아만 가면 그래도 좋았겠는데
"흥, 강아지도 아니겄고 묵을 거 준다고 꼬리칠까바? 아무리 그래싸아도 소앵없일 기구마. "
제 방에 앉아서 들으란 듯 임이네는 중얼거리곤 했다. 부엌에까지 따라들어온 홍이는 밥솥에 솔가지 불을 지피는 월선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타들어가는 불길을 바라본다.
"홍아. "
"응?"
"사내자석이 정기에 들어오믄 안 되는데?"
부끄러운지 월선에게 몸을 비비대다가 홍이는
"간도댁 옴마. "
"머라꼬?"
월선이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다. 도대체 이 아이는 나를 어떻게 알고 엄마라 부르는가 싶었던 것이다. 제 어미가 억쇠 말을 본떠서 간도댁이라 하더니, 하더라도 간도댁 아지매, 하고 부를 수도 있을 터인데 뜻밖이다.
"홍아."
"응?"
"우째 옴마라 부르제?"
"김서방댁이 그러든데 머, 간도댁도 옴마라꼬."
월선이는 솔가지를 분질러 아궁이 속에 집어넣고 또 분질러 집어넣는다.
"간도댁 옴마."
"응?"
"아까는 무서바서 와 간도댁 옴마는 안 오는고 싶었다."
"그런 줄 알았이믄 진작 올거로."
밥이 끓는다. 월선이는 젓가락 하나를 들고 솥뚜껑을 연다.
"하마 익었일거로?"
빨리 익으라고 얇게 썰어서 밥 위에 얹은 고구마 한조각을 젓가락에 찍어낸다.
"자, 묵어라. "
아이는 그것을 받아 호호 불며 베어먹는다. 삽짝 밀어붙이는 소리가 난다. 발소리와 함께
"홍아!"
임이네 목소리다. 고구마를 베어먹던 홍이 당황하여 일어선다. 월선이도 당황한다.
"옴마 나 여기."
홍이는 고구마를 찌른 젓가락을 든 채 월선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허둥지둥 나간다.
"그기이 머꼬!"
가시가 돋친 임이네 목소리다.
"고, 고구매. "
머리에 이고 온 자루를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임이가 이고 있는 짐도 받아 내려놓고
"고구매라니!"
"저어 가, 간도댁 옴마가. "
"머라꼬? 한 분 더 말해봐라!"
"... "
"옴마?"
"... "
"이 빌어묵을 놈아! 걸구신이 들었더나! 이내 올 기라 캤는데 그새 배고파서 뒤지겄더나!"
고구마를 뺏아 내동댕이친다. 홍이 와! 하고 운다.
"울기는 와 우노. 여기 고구마 사왔이니께 배애지가 터지게 삶아 주꺼마! 장시사 하든지 말든지."
하며 우는 아이를 쥐어박는다.
"아니 머를 그래싸을꼬?"
참다못해 월선이 내다보며 말한다. 임이네는 잠자코 자루 아가리를 풀어서 마룻바닥에 고구마를 풀어낸다.
"내가 머 못 묵을 거를 준 것도 아니겄고."
"못 묵을 긴지 그거사 모를 일이구마. 임아! 거기 우두커니 서 있이믄 우짤 기고? 오밤중에 밥 묵을 기가!"
월선이에게 눈을 흘기며 임이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렇기 의심이 나믄 함께 못 있겄네."
격한 목소리다. 순간 임이네는 찔끔한다.
"가라 카믄 나가지, 어러블 것도 없거마는. 사도거리를 빌어묵어 댕기지 머."
"임이네가 이상한 생각을 하니께 그러는 거 아닌가."
월선의 말은 듣는 척도 않고
"죽도 사도 못해서 왔더마는, 내 그러찮아도 내일부터 고구매 장시나 해보까 하고 김서방댁을 따라가서 고구매를 받아오는데 집 없는 사람은 사람 아닌가? 그리 너무 유세하지 말라고. 흥, 소나아가 없이니 자식이나 뺏아보자, 그런 생각도 들 만하구마. 어림도 없지. 문전문전에 빌어묵어 댕깄이믄 댕깄지."
경우 없는 트집이다. 월선은 기가 막혀 장독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다. 모진 겨울이 가고, 어느 해보다 월선에게는 추운 겨울이었다. 걸핏하면 빌어먹더라도 나가겠노라 하며 큰소리치던 임이네는 그래도 함께 있었다. 나가기는커녕 몇 해라도 월선이 옆에 비비적거리며 생활의 부담은 미루고 저는 장거리에 나앉아 장사나 하고 있을 눈치였고, 덕분에 잔돈푼이나마 모으는 재미가 여간 아닌 모양이다. 한 살림이라도 했으면 절용이 되겠는데 솥은 두 군데 걸어놓고 따로 밥을 짓는 처지고 보면 양식이다, 나무다, 장무새다, 생활비용이 여간 아니어서 앞으로 집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월선의 마음인들 편할 것이 없다. 그러나 돈 모으는 재미에 임이네는 전과 같이 홍이를 자기 날개 밑으로만 밀어 넣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자유스럽게 홍이와 친해질 수 있는 것이 월선이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 봄이 오고 첫번째 뗏목이 내려왔을 때 의병들이 용담 쪽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들었다.
"보소. 댁은 의병들을 보았소?"
월선은 뗏목꾼에게 물었다.
"보기는, 우찌 볼 기요. 내사 말만 들었구마. "
"뉘한테 들었소. "
"사냥꾼한테 들었구마. "
"사냥꾼... 어디 사는 사램이요?"
"그걸 누가 알겄소. 보나마나 사냥꾼이라믄 떠돌이겄지요. 그 사람 말이 며칠 동안 의병을 따라다닜다 카더마."
"따라다니요? 그, 그라믄 평사리에서 간 사람 얘기는 못 들었소."
"못 들었구마."
"얼매나 사램이 상했다 캅디까?"
"상했다는 말은 못 듣고 의병이 도리어 불어났더마요."
용담이라면 전라도에서도 충청도에 가까운 위쪽이라 했다. 덕유산보다 더 위쪽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몇 리나 될까..."
"오백 리도 더 될 기요."
머리에 쓴 수건을 끌러 목덜미를 문지르던 뗏목꾼은 월선의 혼잣말에 대답해주었다. 급히 집에 돌아온 월선이는 사발을 들고 나오는 임이더러
"옴마 왔나?"
하고 묻는다.
"야. 저녁 묵소. "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
볼이 미어지게 밥숟가락을 밀어넣던 임이네가 들어서는 월선을 힐끗 쳐다본다.
"오늘은 좀 희맹이 있는 소식을 들었구마."
김치를 와작와작 씹다가 된장국을 떠서 꿀꺽 삼키고 입맛을 짝짝 다신 임이네
"내사 이자 무신 말을 들어도 시들하거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거마는."
"그런 기이 아니고 의병들을 따라댕긴 사냥꾼의 얘기를 들었다 캄시로 뗏목꾼이 말하는데 지금 의병들은 용담 쪽에 있다누마. 별로 사램이 안 상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의병들이 불어났다 카고."
"흥, 어느 장단에 춤을 치야 할꼬? 내사 좋잖은 소리를 들었구마."
여전히 옹차게 밥을 먹으며 월선에게는 저녁을 권해보지도 않는다.
"좋잖은 소리라니?"
"길상이랑 홍이아배는 죽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든가? 안 보았이니 믿을 기사 못 되지마는."
"그럴 리 없지."
월선의 목소리는 굵었다.
"죽을 사램이 따로 있지."
다시 한 번 못을 박았으나 얼굴빛은 달라져간다. 아니꼬웠던지 임이네는 입을 비쭉거리며
"그 사램이라고 멩을 어디 당그라 매놨다 카든가?"
"그라믄 임이네는 홍이아배가 죽길 바란다 그 말인가?"
"허허 참, 죽은 송장이 코를 고니 산 사람은 우떻기 할꼬?"
숟가락을 놓으며 헛웃음을 웃는다. 용이 여편네도 나, 홍이어미도 난데 주제넘게 네가 뭐길래 이 야단이냐, 그런 뜻이다.
"지금 그런 소리 할 땐가?"
"수염이 댓자라도 묵어야 한다더마. 공연히, 이 소리 저 소리 들을라꼬 쫓아 댕긴다고 밥이 날까 옷이 날까. 그것 다 묵고 배부린 것들이 할일이 없이니께. 내사 앞으로 자식 데리고 우찌 살꼬 싶으니 눈앞이 캄캄할 뿐이고 빌어묵을 년의 팔자, 이야 싶은 날 하루 없이 밤낮으로 종종걸음이니 가숙 생각을 손톱 얄가락맨치라도 하는 사램이믄 그렇기 해서 가부리까? 가숙은 죽든지 말든지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겄다는 사람을 우찌 믿고, 내사 괘씸하고 고생시킨 생각을 하믄 이가 갈리구마. 돌아온다 캐도 바로 치다볼 생각 없거마는. 하기사 나 아니라도 죽자사자 은앙이가 있이니께. "
임이네 말을 듣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월선이 물었다.
"아까 그 말은 뉘한테 들었는고?"
"장에 온 막딸네한테 들었구마. "
"막딸네는 뉘한테 들었는고?"
"두만네한테 들었다 카든가?"
이튿날 월선은 평사리로 가기 위해 첫 나룻배를 탔다. 나룻배가 강심 쪽으로 나갔을 때 월선의 눈앞에 수북이 뜬 밥숟가락이 연달아 들어가던 임이네 얼굴이 떠올랐다. 별안간 구역질이 치밀고 머릿속이 띵해온다. 저녁을 굶고 잤기 때문에 속이 비어 그런가 하고 생각하는데 계속하여 된장국이 들어가고 김치가 들어가고, 한정 없이 들어가던 입의 환상과 더불어 구토증은 심해간다.
"와 그라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는 월선을 보고 사공이 물었다.
"빈 속에 멀미를 하는가배요."
"나릿선 타고 무신 멀미, 아침이니께 회가 동하는갑소."
임이네가 월선이를 찾아온 것은 지난해 가을걷이가 끝났을 무렵이다. 그날도 강가에 앉아 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아낙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월선은 임이네를 알아보기 전에 홍이를 먼저 느꼈다. 아이는 파르스름한 월선의 눈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것이었다. '우째 저리 아배를 닮았이꼬?' 무던히 어색해하며 눈치를 살피던 임이네는 월선의 눈이 아이에게 못박힌 것을 알자 표정이 험악해진다. 쫓아가 아이를 안아보고 싶은 충동에서 문득 제 자신으로 돌아온 월선은 임이네의 험악한 눈과 부딪치자 당황한다.
"어찌 이리... "
입속말이었다.
"임자 없는 집에 들어와서 미안스럽구마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모르겄네?"
당황하고 소심한 것 같은 태도를 본 임이네는 거만스런 자세를 굳힌다.
"치븐데 올라가야... "
더욱 위축되어 월선은 중얼거렸다.
"머 올라가나마나... "
서로 공대도 하대도 아닌 어중간한 투로 얼버무리는데 월선이는 임이네보다 다섯 살이 위였으니까 그랬을 것이며 임이네는 아들 낳은 용이 여편네다, 하는 자부심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이리 왔이니께. 애기도 춥겄고... "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온 임이네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하게 떠오른다. 간도에서 돈을 벌어왔다는 소문과는 달리 방안에 세간이라고는 농짝 하나뿐이었다.
"방이 차지만... 곧 불을 지필 것이니... "
"머 그럴 것도 없고... 하도 답답해서 왔더니만. "
임이네는 아이를 제 옆으로 바싹 잡아끌어 앉힌다. 아이는 어미 치맛자락을 잡아 비틀며 여전히 푸른 월선의 눈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서... "
"소식이 있음 여기 왔을라꼬?"
임이네는 뼈마디가 솟은 제 손을 내려다본다. '우짜꼬?' 칠성이 관가로 끌려가고 마을을 도망쳐나온 일, 아이 셋을 앞세우고 문전걸식하던 일, 보리밥 한덩이를 얻기 위해 머슴놈들한테 몸을 맡기던 일, 그 무서운 과거가 임이네 머릿속을 잠시 스치고 지나간다. '빌어묵을 년의 팔자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씩이나. ' 임이네 눈에 눈물이 어린다.
"옴마아. "
오랜 침묵이 불안하여 아이는 어미 무릎을 흔들었다.
"오, 옹야. "
임이네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고 눈을 들었다. 잔주름에 광대뼈까지 드러난 월선의 피곤한 얼굴이 임이네를 보고 있었다. '할망구가 다 됐고나.' 방금 느낀 비애는 무산하고 저절로 솟아나는 자신에 임이네는 적이 만족한다. 자신을 느낄 만도 했다. 월선이를 찾아오기 위해 각별히 몸치장을 하기는 했다. 검정 베치마에 자줏빛 명주저고리를 입었고 명주수건도 목에 감고 왔다. 얼굴은 다소 거무스름했으나 튼튼한 체력은 굶주리지 않는 한 불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얼굴에는 윤이 흐른다.
"옴마아 집에 가자."
아이는 다시 어미 무릎을 흔든다.
"이눔으 자식아 집이 어디 있노. 이자 집이 없다."
"거짓말이다. 우리 집이 와 없노."
"이 철부지야."
하다가
"다른 기이 아니고 내가 여기 온 거는,"
임이네는 허두를 꺼내었다.
"소문은 들었겄지마는 우리 식구들이 동네서 쫓기나게 됐구마."
"... "
"내가 어지간했이믄 여기는 안 왔일 긴데 길을 보고 뫼를 못 가더라고 자식을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없고, 우찌 한겨울이나 넘길까 생각했더마는 잡아가느니 어쩌느니 더 이상 견디 배길 수 없어서 방이라도 하나 비우주믄 추수한 곡식이 있인께 칠림은 안 될 성싶고. "
월선의 눈치를 힐끔 살핀다.
"밤팅이장시를 하든, 뭣을 해도 입이사 못 묵고 살까마는, 머 안 된다고 카믄 할 수 없고 아이 아배 올 때꺼지 다리 밑에 막을 쳐도 못 살기야."
너는 지붕 밑에서 잠을 자는데 우리는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했다면 홍이아배가 와서 좋아하겠느냐? 은근한 협박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월선이는 홍이를 옆에 두고 보았으면,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임이네가 월선의 집으로 옮겨왔을 때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옷가지, 당장 끓여먹을 솥과 그릇 정도였다. 곡식은 팔아 돈으로 만들었고 살림 부스러기 장무새까지, 돈을 못 낼 형편에는 명년 보리 때 보리를 받기로 하고 철저하게 월선이 덕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나룻배가 평사리에 닿기 전에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두만네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비는 억수로 쏟아졌다. 도롱이를 입고 막 집을 나서려던 두만아비와 영만이 월선을 보자 움찔한다. 우물쭈물 인사도 없이 그들 부자가 나가는 것을 본 월선은 빗속의 망부석처럼 서서 그들 뒷모습을 바라본다. '만사는 끝장이 나고 말았구나. 홍이아배는 속절없이 죽은 사램이다.'
"아아니.. 이기이 누고?"
마루를 닦던 두만네 눈이 휘둥그래진다.
"월선이 아니가? 창대 겉은 비를 맞고 어, 어서 들어오너라. "
"... "
"아니 와 저러제?"
쫓아나와 두만네는 월선을 잡아끈다.
"두만어매. "
"운냐. 훔씬 젖었구나. "
이끌고 마루까지 간다. 두만네가 새각시 적에 월선이는 어미를 따라다니던 조그마한 계집아이였다. 마을을 떠나서 몇 세월이 지났으나 서로 스스럼이 없다. 방안으로 들어간 월선이는 후들후들 떨고 두만네는 마른 수건을 내주며 젖은 옷을 벗으라 한다.
"아니요. 나, 나 좀 물어볼 말이 있어서 왔소."
"말이사 천천히 물어보고 그보다 니 꼴이 말이 아니고나. 아무래도 병 나겄다."
"괜찮소."
"얼굴이 새파랗다."
"저어, 두만어매."
"무신 말고?"
"홍이아배가, 홍이아배가 죽었다는 말을 뉘한테 들었소."
"아아니 자다가 홍두깨 디밀더라고 그기이 무신 소린고?"
"막딸네한테 말했다믄서, 임이네가."
"머라꼬? 아아니 질정없는 그 제집 좀 보게? 내가 운제 그랬던고?"
"그라믄,"
"내 한 말이라고는 홍이아배랑 길상이랑 모도 우찌 됐이꼬?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고 걱정한 것밖에 없다. 세상에 집어묵듯이 그기 무신 소리고? 그놈의 제집 오나가나 주둥이 땜에."
"그, 그라믄!"
"내사 만고에 금시초문이다. 하기사 그 제집이 임이네 미버서 그랬는지 모르지. 본시부텀 어그렁치그렁 새가 안 좋았이니께."
마음을 놓은 탓인지 월선이 퍽 쓰러진다.
"아니! 와 이라노!"
"굶고 배를 타고 왔더마는 좀 어지럽소."
"그 말을 듣고 근심이 돼서 그랬고나. 막딸네 그 제집, 작년에 죽다 살아나서 사램이 되는가 싶더마는 지 버릇 개 못 주고나. 옷이나 벗어라. 씰데없는 걱정 말고."
두만네는 자기 옷을 내주고 부엌으로 나가 따끈한 국과 밥을 차려왔다. 방바닥에 젖은 옷을 펴놓고 두만네 옷을 입은 월선이 숟갈을 든다. 근심은 사라지고 두만네 마음도 따습고 목구멍을 흘러내리는 국도 뜨겁다. 월선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아왔다.
"삐가리 우장 씌우놓은 것 같고나."
품이 큰 자기 옷을 입은 월선을 보고 두만네는 웃는다. 월선이도 비시시 웃는다.
"임이네는 고구매 장시를 한다믄?"
"야."
"아금발라서 어디 가도 살기는 살 기다마는... 니 속이 좀 썩을기라."
"... "
"모도 산다는 기이 뭣인지, 남은 사람도 속 편할 게 없지..."
"애기씨는 요새?"
"말도 말아라."
"고생하시는 거는 알고 있지마는."
아랫목에 깔아놓은 삿자리 위에 첫잠이 든 누에를 바라본다.
"여기꺼지 왔이니께 니도 애기씨한테 문안이나 디리고 가거라."
"그란해도,"
"좋은 말로 위로도 해디리고, 우리사... 눈들이 무서바서."
비가 걷힌 것을 본 월선이는 마른 옷을 갈아입고 두만네와 작별한다. 최참판댁 문전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봉순이를 찾는데 불안을 느낀다.
"별당으로 들어가 보시오."
서울 말씨의 하인 하나가 선선히 대해준다. 따지고 보면 어쩌랴 한 것이.
"아지매!"
별당 뜰에 들어서자 봉순이 쫓아나왔다.
"저어 내가 와도 괜찮겄제?"
"... "
"하인들 눈이,"
"걱정 마소. 일러바칠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전캉 다르요."
"나 애기씨한테 문안 디릴라고 왔다."
"무, 무신 소식이라도?"
긴장하며 낮은 소리로 묻는다.
"소식은 무신... "
"아무 소식도 없소?... 그라믄... 방에 들어가입시다."
"방문 앞에서,"
하는 월선을, 봉순은 방문을 열고 떠밀듯 들어가게 한다. 멍청히 앉아 있는 서희는 목이 길었다. 팔도 길었다. 광채를 뿜어내는 눈은 더욱 컸고 처연하도록 초췌해진 모습이다.
"애기씨! 쇤네 무, 문안 드립니다. 얼매나,"
방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절을 하며 월선은 흐느껴 운다.
"말은 많이 들었느니라. 무슨 소식이라도?"
"아, 아무 소식도."
"그래?"
"도, 돌아가신 마님께 큰 은혜를 입은 쇤네는 죄인입니다. 애기씨!"
서럽게, 그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둑을 차고 쏟아지는가. 봉순이도 따라 울고 서희는 봉창 쪽을 바라볼 뿐이다.
18장. 고국산천을 버리는 사람들
한밤중이다. 바람이 문을 흔드는 것 같기도 했다. 월선이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인다. 옆방에서는 한 잠이 든 임이네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바람이겄지.' 도로 베개 위에 머리를 놓는다. 그러나 한번 설쳐버린 잠이 쉽게 올 리는 없다. 이렇게 되면 새벽녘까지 온갖 잡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임이네는 우찌 저리 심관이 편하꼬? 나도 저러크름 태이났더라믄, 또 문 흔드는 소리가 나네?' 이번에는 일어나 앉는다. 등잔 켤 생각은 않고 더듬어서 비녀를 찾아 아무렇게나 틀어서 쪽을 찌고 벗어놓은 치마를 두른 뒤 조심조심 방문을 연다. 발끝으로 신발을 찾아 신고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 나간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나돋아 있었다. 삽짝에 귀를 갖다붙인다. 얼마나 수없이 되풀이하여 이 짓을 했을까. 삽짝을 열어보고는 휭하니 빈 골목을 행여 어느 구석에 그림자가 없나 찾다가 울어버린 일은 또 몇 번이던가. 그러나 여전히 삽짝에 귀를 갖다 붙일 때는 가슴이 뛴다.
"누구 왔소?"
속삭이듯 묻는다.
"나다."
"야?"
월선은 고함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는다. 믿을 수 없는 일,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
"거기 누구 왔소?"
다시 한 번 속삭이듯 묻는다.
"나다. 가만히 문 열어라."
삽짝을 어떻게 열었는지 알 수 없다.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피가 몰려 내려간다. 발끝에서 머리꼭대기로 피가 솟구쳐 올라온다. 세상이 칠흑 속에 묻혀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만 손이 입을 막는다. 더운 입김이 얼굴 위에 풍겨온다. 월선은 사내에게 이끌리어 방으로 들어간다.
"가만히, 깰라."
등잔불을 켜려고 더듬는데 월선의 손목을 낚아챈 용이 목소리를 죽이며 다시 말했다.
"불은 키지 마라."
"홍이가 와 있소. 저, 저 방에."
월선이도 목소리를 죽이며 말한다. 임이네 코고는 소리는 여전히 요란하다.
"알고 있이니께."
"깨우까요."
"아니."
와들와들 떠는 여자를 끌어당겼으면서도 용이 몸은 굳어 있고 목소리는 엄격했다.
"우떻기 홍이 우리집에 있는 거를,"
"영팔이댁네 친정서 오는 길이구마."
"그 댁네한테서 들었소?"
"음."
"..."
"날 새기 전에 곧 가야."
"어디로!"
"이부사댁에 가야제. 거기 길상이도 와 있이니께."
"길상이가."
"진주서는 김훈장이 영팔이하고 기다리고 기시고, 좌우당간에 임자는 내일 참판님댁에 가서 봉순이를 이부사댁에 오도록 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서둘러야 하니께, 알았나?"
"야."
"우리가 아무래도 여기서는 못 살 형편이라 뜨자는 긴데 애기씨가 우떻게 하실랑고 모르겄네."
이곳에서 못 산다는 것은 월선이도 알고 있다.
"애기씨는 거무겉이 돼가지고 애처로바서 차마."
"이부사댁에서 자세한 말은 다 들어 알고 있어."
"그라믄 간다믄 어디로 갈 기요?"
"조선 땅에서는 못 살아. 아무튼지 강을 넘어보자고 의논이 맞아서 길상이하고 여길 왔는데 일이 잘 될랑가 걱정이구마."
"강을 넘는다 카믄."
"임자가 갔던 그와, 간도, 간도 말이다."
"간도라꼬요?"
"목청이 크다."
"그라믄 우리도, 나도 가는 기요?"
"니가 안 가고 누가 갈 기고."
"홍이랑 다 가지요?"
"다 가지."
"그, 그라믄 됐소. 이자는 맴이 놓이요."
너무 오랫동안 숨을 죽인 탓으로 월선은 흐느끼듯 숨을 토해낸다.
"그나저나 걱정은 참판님댁의 애기씨라. 안 가신다 캐도 걱정, 가신다 캐도 일이 여간 난감해야제. 좌우당간 일은 서둘러야 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해얄 긴데."
용이는 한숨을 내쉰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용이는 갑자기 월선의 몸을 더듬는다. 숨결이 높아지면서 그의 굳어 있던 몸이 일시에 허물어지는 것을 월선이 느낀다. 동시에 임이네 코고는 소리가 귓가 가득히 밀려든다. 치맛말기를 꼭 쥔다. 그 손을 사내 손이 떨쳐내고, 다시 거머쥐면 또 떨쳐내고, 육박해오는 무게 밑에서 여자는 몸을 비튼다.
"와 이라제?"
"저기 저 방에,"
"무신 상관고! 내 사람은 니 하나뿐이다!"
웬 까닭인지 용이는 몸을 떨며 노했다. 드디어 물은 한줄기로 흘렀다.
"이자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야, 야,"
꿈결처럼 잠꼬대처럼 대답한다.
"이대로 죽어부맀이믄 싶다."
눈물이 흠뻑 젖은 얼굴을 비비며 용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 풍랑의 바다에서 항구로 찾아온 듯 격렬하고 평화스럽게 희열하며 몸을 불태운다. 이윽고 사내는 재 속에 묻혀 들어가고 여자는 불안을 안고 일어서려 한다.
"임자."
빠져나가려는 몸을 끌어당긴다.
"많이 야빘구나."
"늙어부맀소."
"늙으믄 우떻노? 우리 함께 늙는데."
용이는 이부사댁에서 억쇠한테 들은 말을 생각한다. '거 불쌍해서 차마 못 보겄더마요. 날이믄 날마다 나루터에 나와서 무신 소식이나 없일까 하고, 이서방 어디 여자 맴이 다 같은 줄 아요?' 임이네에 대한 얘기는 귀를 막고 듣고 싶지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날 생각하니라고 이리 야빘제?"
"아니요."
"불쌍한 것... 어쩌다 나 겉은 걸 만내서."
"보소."
"와."
"그라믄 저어 이녁들은 거기서 도망을 쳤다 그 말이요?"
"거기서라니?"
"의병인가 쌈하는 데서."
"풍지박산이 났지, 윤보형님이 죽고부터는. 그라고 지금 형세가 나라 안에서는 꼼짝 못하게시리 돼부맀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구마. 전에 병정으로 있었던 의병들도 대부분이 강을 넘어간다고 떠나부리고, 소문 듣자니께 선비들도 간도 쪽으로 많이 갔다더마. 조선 땅에서는 대항할 길이 없고 그곳에 가서 청국하고 아라사, 그 두 나라는 왜국하고 불구대천 원수 아니던가배? 그러니 그 나라 도움을 받아서 장차 조선으로 치고 들어오자 그럴 요량으로."
"그라믄 이녁은 또."
"머, 우리 겉은 농사치기들은 나이도 묵었고 땅이나 얻어서 농사 지어야제. 거기는 사람 손이 안 간 땅이 그냥 내부려져 있다 카이. 설마 거기까지 왜놈들이 우리를 잡으로 오겄나."
"보소."
"음."
"홍이 안 보고 접소? 깨우 오까요."
"잘 있이믄 됐지 머가 그리 급해서. 깨우지 마라. 당분간 임이네한테 알리지도 말고."
"그래도 우찌."
"일을 꾸밀라 카믄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편이 낫고 말이 새믄 만사는 끝장이니께. 갈 때 데리고 가믄 그만 아니가."
"그래도 우찌, 날 욕 안 하겄소."
"욕하믄 욕 좀 묵지. 다 잘할라꼬 하는 일인데. 애기씨나 이부사댁에서도 지난 일을 생각하여 그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고, 그러니 왔다갔다 하믄서 심부름할 처지도 아니고,"
용이는 임이네를 못 믿어 그러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얼버무렸으나 사실 그런 점이 없지도 않았다. 서희가 간도로 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이부사댁의 상현은 동행할 결심을 굳혔다. 염씨는 집 나간 지 십 년, 그 동안 한 번 다녀갔을 뿐 소식조차 확실치 않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아들 또한 그러한 길을 가는가 싶어 매우 근심하였다.
"국사를 위해 아버님은 기왕에 가셨거니와 상열(상현의 동생)이는 너도 알다시피 남의 집에 갈 사람, 아직 태기도 없는 새아기가 아니냐? 만의 일이라도 무슨 변이 생긴다면 이 가문은 절손이다."
성미가 느긋한 염씨였으나 남편의 경우와는 달리 말리고 나섰다.
"어머님, 소자가 아주 떠날 결심으로 이번 일행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옵니다. 자식된 도리, 아버님의 소식을 알고자 가는 것이니 아버님을 만나뵈오면 곧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번 떠나면 돌아오기가 쉽겠느냐? 더욱이 젊은 혈기에."
"하오나 혼자로는 어려운 행로인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너의 생각이 옳지 못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 무식한 일개 아낙으로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은 모르겠다마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또 남아 장부로서 편안하게 앉아 있으라는 말도 아니다. 허나 이미 아버님이 가셨고 이 집안에는 너 하나 남았을 뿐인데, 그리고 너는 아직 나이 이십 미만이 아니냐?"
"알고 있습니다."
"허니 좀 더 시기를 기다렸다가 후사라도 보고 난 뒤 그때부터라도 늦지 않느니라."
"어머님,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녀온다는 말씀을 여쭙지 않았습니까. 소자 기필코 아버님 안부를 알게 되면 그 길로 돌아오겠습니다."
"그예 가겠다는 말이냐?"
"네."
"오 년 전에 너의 아버님께서 비 피하시듯 한 번 오셨다가 오늘에 이르도록 돌아오실 생각을 아니 하시는데... 너마저."
"소자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염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새댁은 말이 없었다. 떠나기로 작정한 상현은 길상과 상의하여 부산에 나가보기로 했다. 간도까지 육로로 가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일단 부산까지 가서 선편을 알아보는 한편 일행의 인원이 적지 않아서 두 패, 혹은 세 패로 나뉘어져 갈 경우 합류할 수 있는 장소나 객줏집을 물색도 해놔야겠기 때문이다. 이 말을 봉순이로부터 전해들은 서희는 열 냥쭝은 될 성싶은 은덩이 하나를 보내왔다. 패물도 아니요 은덩이가 어디서 났는지, 그것을 가지고 온 봉순이도 출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궁금해할 사이도 없이 두 사나이는 부산을 향해 떠났다. 떠난 뒤 월선은 쉬이 임자가 나서서 집을 팔았는데 사정을 모르기도 하려니와 염치 좋은 임이네는 자기 식구들을 쫓아내기 위한 소행이라 하며 행패를 부렸다.
"소도 언더막이 있이야 비비제. 자식새끼 데리고 어디 가라고? 내사 못 나가겄다. 집 산 사램이 와서 방구들을 파든지 말든지, 방은 안 비어줄 기니께."
"내가 믹이 살릴 기니 조맨치도 걱정할 것 없고,"
월선네는 달래보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기승이다.
"얼시구 늦복이 터지는구나. 소나아 번 것도 못 묵는 년이 누구 번 거를 묵제?"
"설마한들 산 입에 거미줄 치까."
"흥, 머를 어떻기 해서 우릴 믹이 살릴 기든고? 그 늙어빠진 몸뚱이를 팔아서 믹이 살릴 기든가?"
월선의 얼굴이 벌개지고 하마 무슨 말을 하려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김서방댁이
"참말 니 염치 없다. 이서방이 사준 집이라고 행팬가? 보자보자하니 임이네 니도 예사로 경우 없는 계집이 아니구마. 팔든 사든 니가 무신 상관고."
"남으 일에 입 딜이밀 거 없소! 나는 방 한 칸을 빌려쓰는 처지지마는 귀한 내 자식, 내 자식 애빌 훔쳐간 년이 누구건데? 그만한 값어치도 안 하까?"
얼굴도 안 붉히고 종알거린다.
"허허어 서천 쇠가 웃겄고나. 굴러온 돌이 본돌 친다 카더마는 자석 키우는 사램이 안 그러네라. 여기 월선네가 있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동안 너그들을 믹이준 것만도 대천지 한바다 겉은 맴이니께 그랬제."
"흥, 오면 가면 얻어묵으니 입이 달기는 달 기요. 알랑방귀 대강 끼소."
"내사 입이 헤퍼서 숭이제 세를 따르는 성미는 아니거마는. 그랬을 양이믄 조가놈한테 빈몸으로 쫓기났이까. 자식 하나 놓은 거를 그리 유세할 거 없다. 남으 맘도 생각해야제. 니도 팔자치리 못하고 설움을 복 받듯기 받았이믄서."
"머라꼬요? 이 할망구가!"
이리하여 한소동이 벌어졌으나 부산서 돌아온 상현과 길상은 용이와 함께 밤이 늦도록 의논에 골몰하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우선 용이아제가 식구들 데리고 진주로 가시는 게 좋겄십니다."
"내가 진주로?"
"야, 월선아지매만 남기두고 떠나시믄 월선아지매는 애기씨와 함께 이곳에서 부산으로 나가믄 되니까요."
용이는 임이네 존재를 꺼려하여 그러는 거라 생각한다.
"여기 도면도 상세하게 그려왔고 주소도 적어왔으니 용이아제는 진주로 가시서 훈장어른, 영팔아제, 그러니 모두 몇 명입니까?"
"음, 영팔이 식구가 넷하고 또 넷, 김훈장 합하믄 아홉이구만."
"그러면 한 식구를 더 보태서 열이요."
"한 식구라니, 누구?"
"그거는 나중에 말심드리고 오늘이 오월 초이틀이니까... 오월 열이레까지 부산에 당도하시면 됩니다. 그 도면에 그려진 객줏집으로 말입니다. 며칠지간의 차이는 서로가 기다려보는 거구요."
길상은 그 동안 깊이 생각한 계획을 거의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실상 길상이 결정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 상현으로 말하자면 객원으로 볼 수 있고 용이의 판단력은 길상에게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서희를 데려 내오는 어려운 일을 치를 사람은 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어떻게 한다는 겐가?"
"여기서도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어떻게?"
이번에는 상현이 물었다.
"애기씨, 봉순이를 갈라놓습니다."
"... ?"
"봉순이는 세낸 가마를 타고 구례 쪽으로 가고 저는 월선아지매랑 함께 육로로 애기씨를 여까지 모셔옵니다. 물론 밤을 타고."
"그러니까 음, 눈을 속이자 그 말이군."
상현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예. 십중팔구 조가는 구례 쪽으로 찾아올라갈 것입니다. 서울 쪽으로 향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봉순이가 잡힐 경우는?"
"봉순이가 잘 해야겠지요. 구례 못 미쳐서 가마를 버리고 행선을 바꾸어버려야지요. 쌍계사에 잠시 숨었다가 진주로 가는 겁니다.봉순이는 오히려 가는 흔적을 남기는 편이 애기씨를 위해선 안전하겠지요."
길상의 어세는 딱딱하고 강한 것이었지만 마음에는 이상한 혼란이 일고 있었다. 상현의 눈, 옛날과 다름없이 영롱하였다. 얇삭한 입술에는 냉정한 의지, 오똑하니 날이 선 코는 날카로운 성품을 그리고 소년티를 아직 벗지 못한 미소년의 몸 전체에서는 양반 특유의 자부심이 넘쳐나 있었다. 감나무 위에 올라가서 길상이 먹는 콩국에다 나무를 흔들어 먼지와 풋감을 떨어뜨렸던 옛날의 그 소년, 엉망이 된 콩국을 먹으라고 우격다짐하던 소년, 그 소년을 윤씨부인은 몹시 사랑하여 손녀의 배필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제 생각 같애서는 조가가 한사코 애기씨를 찾아내려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이런 방도를 궁리하긴 했습니다만."
길상은 눈을 내려뜨리고 마무리하듯 말했다.
"그보다 더 좋은 궁리는 없을 것 같군."
상현의 말이었다.
"예. 그만하면."
용이도 동의한다.
"그럼, 내일 봉순이 오기로 돼 있으니 애기씨한테 기별을 하겠습니다."
이튿날 이부사댁을 드나드는 것을 피하여 월선의 집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해가 진 뒤 나타난 봉순이를 길상은 나루터로부터 사뭇 떨어진 강가에서 맞이했다.
"임이네 그 여자 와 그런지 참 못됐더마."
어둠 속인데 봉순이는 길상을 외면하여 옆모습의 위치에서 중얼거렸다. 전달할 말이 끝나면 황황히 돌아가던 길상이었다. 오늘은 용건을 말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봉순이는 마음먹은 모양이다.
"따라나옴서 이리 어둡고 나룻배도 없는데 평사리로 가느냐고 꼬치꼬치 물으니."
"눈치를 챘나?"
"그러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나 기생 될라꼬 소리 공부하로 간다 캤지."
그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봉순이는 길상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떠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길상은 말이 없다.
"나 정말로 그렇기 될까부다."
"맘들이 절박한데 와 하필이믄 그런 소리를 하노."
짜증을 낸다.
"절박하니까 하는 말이제."
"간도에 가믄,"
"가믄 별수 있을라꼬? 나 겉은 것."
침묵이 계속된다. 결국 봉순이 쪽에서 말을 건다. 자포자기한 어투로
"거기는 언제꺼정 머리꼬릴 늘이고 있을 참인가?"
"..."
"스물둘, 아니 스물셋, 나이도 적잖은데 남 보기가 안 부끄러운가 모르겄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으면서 빈정거리는 말투다.
"상투를 틀든지 아니믄 부산 나가서 머리를 짤라부리든지 하지 머."
"조가맨치로? 친일파 될 기든가?"
"우리도 개멩은 해야 한다. 왜놈이나 친일파 조가놈 겉은 무리를 내쫓기 위해서도."
봉순이는 얘기를 본시 자리로 돌린다.
"장가도 안 가고 상투를 틀 기든가?"
"나... 나."
"... "
"애기씨만 아니라믄 중 될 몸이제."
봉순이는 모랫바닥에 퍼질러앉는다.
"애기씨만 아니라믄... 애기씨만 아니라믄 중이 될 몸이라고... 애기씨는 왜?"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다.
"그거는 은혜 때문이다."
"무신 은혜?"
"돌아가신 마님께서... 날 사람으로 맨들어주愿? 글도 배우게 하시고..."
"장개를 들믄 애기씨를 저버리는 게 된다 그 말가?"
"자꾸 감고 들지 마라! 애기씨 아니믄 중 될 몸이라 안 카나!"
"거짓말 마라! 와 맘을 속이노!"
"우관스님이 원망스러블 뿐이다. 산에서 와 나를 내리보냈는지..."
오랫동안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봉순이 픽 웃는 소리를 낸다.
"세상에 주제넘은 사람도 있더마."
"..."
"임이넨가 그 여자 말이제. 월선아지매가 집을 팔았다고... 음, 집을 팔았다고 노발대발 비워주는가 두고 보라니 참 기가 막혀서.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머리를 돌렸는데 길상은 오히려 아픔을 느낀다.
"세월이 지나믄 맴이 달라질지도..."
"..."
"그, 그렇지마는 기약도 없이 봉순이는 언제꺼지."
"이자 그런 말 때리치우는 기이 좋겄고. 도리어 후련해졌는지도 몰라. 조맨치라도 희망을 갖는 것보담은 편할 것 같구만. 이자 전할 말이나 해주지."
"..."
"시각도 늦은 것 겉으니."
길상은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계획한 대로, 목소리에는 조금 전에 흔들렸던 그런 감정은 없었다. 냉정하고 확실한 설명이다.
"그라믄 나는 구례 쪽으로 가다가 가마는 버리고 진주로 간다 그 말이구마. 애기씨는 이부사댁에서 월선아지매랑 부산으로 가고. "
"그렇지. 진주서 모인 사람들은 김훈장을 따라 부산으로 오고,"
"알겠구마. 애기씨께서 또 어떤 이견을 내실지. 말심은 디리겄는데 용이아제는 그라믄 언제 진주로 떠나는고?"
"너가 애기씨 응낙을 받아오는 즉시 떠나야지. 오래 머물수록 좋잖으니께."
이튿날 아침 평사리로 간 봉순이는 저녁 무렵에 다시 왔다. 그는 길상과 용이를 함께 만나기를 원했다. 어젯밤 그 강가에서 봉순이는 서희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한 뒤
"애기씨께서 여비는 어찌 되는가 물어보시던데."
"그거는,"
하다가 길상은 용이를 힐끔 쳐다본다.
"영팔이는 좀 준비가 돼 있고 나도... 뭐 집도 팔고 했이니..."
힘이 쑥 빠진 용이 목소리다.
"이부사댁 서방님께서도 준비하고 갔일 기고 일전에 은이 그대로 있이니께."
길상의 대답이다.
"내 생각에 애기씨는 달리 준비하고 기신 모양인데 그라믄 그 은은 용이아제를 드리는 기이 어떠까? 김훈장도 기시고 아무래도 그 쪽에 사람 수가 많으니."
"그, 그러믄 월선아지매는 여기서 함께 갈 기니께."
허겁지겁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용이는 얼굴이 불덩이가 되는 것을 느낀다. 일생일대의 치욕감이 가슴을 쳤다. 사실 용이는 아무 가진 것이 없었다. 임이네에게는 돈이 있는 눈치였지만 내놓을 여자는 아니었고 월선이 집 판 돈을 가져가라 하는 것을 용이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사정은 어찌되었든 월선이를 떨어뜨려놓고 임이네를 데리고 가는 마당에 차마 집 판 돈을 가져가겠는가. 월선아지매는 여기서 함께 간다 한 것은 집 판 돈을 쓰라는 뜻이었으나 용이는 혀를 깨물고 싶도록 부끄러웠다.
"그라믄 용이아제는 언제 떠날라요."
"내일 새북에라도..."
한동안 말이 없다가 봉순이는
"아제씨, 이거는 지 생각인데 만일에 지가 진주로 못 가게 되는 경우, 그렇더라도 진주서는 열이레 안으로 부산에 닿아야 하니께."
"만일의 경우라니..."
길상의 목소리가 총알같이 날았다.
"그기사 사램 일을 우찌 알꼬. 내가 잽히는 경우, 안 잽힌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니께."
다시 용이를 향해
"지가 못 가더라도 시일 안에 부산으로 떠나야 할 깁니다."
두 사내는 묵묵부답이다. 봉순의 말이 옳기는 옳았다. 절대로 사고가 안 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처음부터 위험이 따른 계획인 것이다. 그러나 길상은 봉순의 저의를 안다. 봉순이는 가겠다고 돌아섰다. 길상은 그를 바싹 따르며
"봉순아."
"..."
"우리 호, 혼인하자. 어떡허든지 무사하게 진주로 가야 한다."
"..."
"혼인하, 하지."
봉순은 그러나 뛰기 시작했다.
"봉순아."
그 다음부터 봉순이는 길상을 만나지 않았다. 월선에게 연락을 취했을 뿐 길상은 여러 번 월선을 통했으나 허사였다. 상황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월선의 집을 낮에 다녀가는 봉순을 만날 도리가 없었다. 설마 한 번쯤은 와주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기회를 놓치기도 했었다. 드디어 그날 봉순이는 저녁때 무심하게 집을 나가 가마를 타고 구례 쪽을 향했고 그날 새벽녘에 길상과 월선에 의해 서희는 육로로 읍내 이부사댁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길상은 마지막까지 봉순을 대하지 못했다. 여하튼 일은 무사히 끝이 났다. 봉순의 신상을 근심하였으나 잡혔다는 소문은 없었다. 억쇠가 부지런히 장터를 헤매며 평사리 사람들을 만나 듣고 온 소식에 의하면 최참판댁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며 하인들을 풀어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마다 뒤지게 했으나 예쁜 아가씨가 가마를 타고 구례 쪽으로 가더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며 하인들도 거의 건성으로 찾는 시늉만 했으므로 서희의 행방은 감감소식이라는 것이다. 모두 시름을 놓고 부산으로 갈 행구를 챙기는 것이었으나 길상은 혼자 우울했다. 과연 봉순이는 진주로 갔을 것인가. 갔다고 생각하며 잊으려 했으나 잠시였다. 가지 않았을 것을 길상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길상이말고 고민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상현의 아내다. 그는 가끔 뒤뜰에 나가 혼자 울곤 했다.
남편이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운 일이었는데 서희와 한방 거처를 하며 그의 미모에 압도당한 평범한 아내는 왠지 자기 운명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잘난 남편에 그러질 못한 아내는 수척해 보였으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서희에게 참을 수 없는 시샘을 느낀다.
윤씨부인이 살아 있을 적에 상현을 두고 탐을 냈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었다. 억쇠도 차츰 풀이 죽어갔다. 처음에는 자신도 함께 떠나는 것처럼 신을 내고 마음이 바빠 성사를 조마조마 기다렸는데 막상 계획대로 되고 보니, 어릴 적부터 정들인 상현이 멀리 아주 먼 곳으로 간다는 실감을 하게 된 것이다.
"오시야지요. 안 오시믄 되겄십니까. "
억쇠는 몇 번이나 못을 박곤 했다. 한편 월선은 집 산 사람에게 집을 비워준 날 김서방댁을 찾아갔다. 돼지우리 같은 단칸방에서 기어나오다시피, 몸이 좀 아팠다고 했다.
"장에 가니까 없어서 이리로 왔소."
"우찌 됐노. 니 일은?"
"머 우찌 되기는요."
"임이네는 끝내 방을 안 비우줄라 카더나?"
"그 사람은 떠났소."
용이 온 것을 모르는 김서방댁은 임이네가 떠났다는 말을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는 않는다.
"그라믄 니는 우짤 기고, 주막이나 채릴래?"
"내사 머... 절에 가서 공양이나 지어주고 살라요."
터무니없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은 결정되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쉴 새 없이 지껄이는 김서방댁 말을 귓가에 흘려듣다가,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것을 뿌리치고 문간까지 나온 월선은
"집을 팔아서 돈이 좀 생깄이니, 운제 우리가 만낼지도 모르겄고."
일본 돈 삼 원을 쥐여준 뒤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5월 16일 일행은 하동을 떠나서 부산에 닿았다. 물색해놓았던 객줏집에 들어 하룻밤 여독을 풀고 17일, 진주서 올 사람들을 기다렸으나 하루해는 초조하게 저물었다. 다음날에야 그들은 도착하였다. 예정보다 하루가 늦은 셈인데 봉순이를 기다려보느라 늦어졌으며 행여 하동에서 애기씨와 함께 오는 게 아닌가고 생각하기로 했었다는 용이 말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했으나 길상은 충격을 받는다. 서희도 무엇인지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지 아무말이 없었다. 번화하고 낯선 밤거리에 바람이 불었다.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겠다고 나선 길상의 눈에 불빛이 아물거린다. '봉순아!'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낯선 거리에는 찝찔한 바닷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