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4-10
35.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으로
"하, 그 무식하고 주먹밖에 없는 놈이 처가 돈 깔고 앉아 유지 행세하고 드는 것도 눈꼴시어 다래끼가 나고, 비위가 상해 먹는 것이 다 되넘어올 판인데, 그놈이 돈맛이 들어 이제는 또 새 사업을 하겠다고 설레발을 치고 나서는 판이니 이것 참 기가 찰 노릇 아니겠소. 이거 잘못하다가는 벌교바닥이 그놈 손에 놀아나고, 금융조합도 그놈이 먹겠다고 덤빌지도 모르지 않겠소?"
세무서장 최익도는 말꼬리로 낚싯바늘을 만들어 금융조합장 유주상의 면전에다 던졌다.
"아니 최 서장님, 농담이라도 그리 말하지 마시오. 말이 씨 된다는 말이 있는데."
유주상은 기색이 싹 달라지며 자리를 고쳐 앉고는,
"그런 불한당 같은 놈이 감히 어찌 금융조합을 넘보겠소. 금융조합이 청년단 같은 아사리판도 아니고, 엄연히 계통과 체계가 있는 단첸데. 어쨌든 그놈은 쫄딱 망해야 해요."
발끈하는 그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의외로 낚싯바늘을 덥석 물고 덤비는 것에 최익도는 환성을 지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최익도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유 조합장님, 그게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 것이요. 내말은, 그놈이 유 조합장님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려고 한다는 뜻이 아니오. 그 배운 것 없이 무식한 놈이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거저 내줘도 하루도 앉아 있지 못할 무식쟁이지요. 내가 하는 말은 말이오, 금융조합이라는 데가 돈 많이 맡긴 사람이 큰 소리 치게 되어 있는 바에야, 그놈이 딴마음 먹고 돈을 자꾸 저금해대면 결국 유 조합장님 입장이 어떻게 되겠냐 그겁니다."
최익도는 낚싯대를 잡아채고 있었다.
"천만에요! 그런 놈 돈은 절대 받지 않아요. 지금도 한 푼도 저금한 게 없고요."
유주상은 부르르 떨기까지 하며 소리 질렀다. 최익도는 너무나 쉽게 목적달성이 되어버려 싱겁고, 기분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유주상의 기분을 저 정도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놈한테 조합 돈을 빌려줄 리는 없었던 것이다. 정작 그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서도 목적을 달성한 자신의 능력에 최익도는 뻐근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놈이 돼먹지 못하게 설쳐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최 서장님은 날 염려할 게 아니라 오히려 서장님이 책임질 일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주상은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꼬나 물고 성냥을 신경질적으로 그어댔다.
"아니, 내 책임이라니요?"
마음이 느긋해져 있던 최익도는 그 갑작스런운 말에 놀라 의자에서 등을 뗐다.
"세무서가 뭘 하는 뎁니까? 그놈이 시작하겠다는 새 사업이 뭔지 모르지만, 그 전에 그놈이 가지고 있는 솥 공장이나 정미소부터 못해먹게 족치는 방법을 세무서장 쯤 되면 모르지 않겠지요? 자고로 세무서에서 맘먹고 뒤 파헤쳐서 해먹어지는 사업 있던가요?"
유주상은 최익도와는 달리 직사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아하, 그렇지요, 그렇지요. 손에 칼을 들고도 써먹을 생각을 못하다니."
최익도는 정말 그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주상이가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뽑아준 셈이었다. 유주상은 눈을 내리깔고 최익도를 쳐다보며, 자기 힘 들이지 않고 복수를 하게 된 것에 더없는 통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까짓 놈이 내 논을 떼쳐먹고 성할 줄 알았더냐. 유주상은 염상구 놈이 망해 뻘바닥에 거꾸로 처박히는 꼴을 벌써 보고 있었다. 세무서장 최익도는 집안의 사촌, 육촌형들과의 경쟁심으로 땅을 욕심내다가 농지개혁 바람에 그만 혼쭐이 났던 것이다. 논을 온갖 방법으로 빼돌리고 감추고 한다고 했지만 피해를 전혀 안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손해를 본 것이 생살 뜯어낸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손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들보다 두 발 먼저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그는 눈에 불을 켜고 남들보다 두 발 먼저 떨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포착한 것이 후생사업과 제재소 매입이었다. 후생사업은 그 열기가 막 일기 시작한 유망업종이었다. 전쟁으로 불타고 부서진 건물이며 집들이 수없이 많았고, 그것들을 새로 짓고 고치자면 목재들은 끝없이 필요했고, 공비토벌이라는 명목만 붙이면 행정관청의 벌채허가 없이도 군, 경 토벌대장의 직권으로 관할구역의 나무들을 마음대로 쳐낼 수가 있었고, 군, 경 토벌대장과 손을 맞잡기만 하면 그들의 트럭을 동원해 나무를 실어낼 수 있었고, 그 통나무들을 목재로 만들어야 하니까 후생사업에 손대는 경우 제재소 경영은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로 이중의 이익을 거머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생사업, 그 이름도 얼마나 멋들어진가. 그 번드르르한 이름 아래 작전 트럭들이 동원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돈벌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또한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인가. 최익도는 마침내 후생사업에 돈을 걸고, 뒤따라 제재소를 사들이려고 하다 보니 앞을 가로막는 물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염상구였다. 그래서 그는 염상구의 돈줄을 막을 속셈으로 유주상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유주상과 말을 하다 보니 돈줄을 막게 된 것만이 아니라 염상구를 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까지 알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유주상은 유주상대로 자기 손으로 칼질을 하지 않고도 논을 떼먹힌 원한을 갚을 수 있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을 공평하게 이룬 셈이었다. 한편, 염상구는 몇 시간 뒤에 제재소 주인과 남원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가 앗싸리허게 말허는디, 우리 아그덜만 아님사 솥 공장이 제재소 보담 더 값 나가는디 멀라고 맞바꾸자고 허겄소. 전쟁언 끝나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리 되먼 청년단 헐 일이야 당연허니 웂어질 것이고, 허먼 그 아그덜 다 워쩔 것이요? 주먹 써서 묵고 살으라고 역전이고 차부에 쫘악 풀어놔뿔께라? 그리 되먼 유지인 나 체면에 똥칠이고, 나 빼고 벌교바닥서 사업 해묵는 사람덜 애 잠 쎅이 것 아니겄소? 그 꼬라지가 되먼 서로 안 존 일잉께 나가 책임지고 먹여살려야 쓰겄는디, 고것덜얼 솥 공장에 처박자도 기술이 웂고, 정미소에 처박자도 기술이 웂이다 그것이요. 근디 제재소에넌 기술이 웂이도 기운만 써서 낭구럴 퍼내리고 퍼올리는 일이 태산이다 그 말이요. 요것이 나럴 위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벌교럴 모다 위하는 일잉께 맞바꾸자는 것인디, 이 사장 생각얼 톡 까놓고 말해봇씨요."
상대방을 노려보듯 하고 있는 염상구의 실눈 가장자리가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금메 말이요. 말씸이야 천냥만냥으로 존 말씸인디, 고것이 긍께로 크나 작으나 저저끔 아는 터가 있응께 해묵어지는 사업이라는 것인디, 나다 솥 공장 쪽이야 통 땅띔도 못허는 봉사라논께 서로 맞바꾼다는 것이 워디 그리 손바닥 뒤집대끼 쉬운 일이겄소? 쪼깐 더 생각해 봐야제라."
제재소 주인이 염상구와는 다르게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이 사장님, 무신 생각이 그리 기요? 요 이약이 시작된 지가 폴세 한 달이 넘었소. 허고, 일이냐 밑엣것덜이 다 허는 것이제 사장이 허는 것입디여? 나를 봇씨요. 나가 솥공 장얼 아는 것이 머시가 있소. 그렇다고 솥 공장이 엎어지기럴 혔소, 뒤집어지기럴 혔소. 그려도 나가 맡음시로 늘품이 있었으먼 있었지 쫄아붙지넌 안혔소. 이 사장이 말허는 것얼 듣잔께 바꿀 맘이 웂는갑는디, 날만 질질 끌지 말고 가타부타 이 자리서 딱 짤라 말허씨요. 이 사장이 그리 텁터그리허게 나오먼 나가 제재소럴 새로 채레뿔고 말겄소."
"야아!"
제재소 주인이 눈을 흡뜨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머럴 그리 놀래고 그요. 나가 낼이라도 부산으로 떴다 허먼 열흘 안으로 제재소 한나 채리는 것이야 식은죽 묵기다 그 말이요. 나가 솥 공장허고 제재소럴 맞바꾸자는 것이 나만 좋자는 것이 아니란 말 안직도 못 알아묵겄소!"
염상구가 침을 뱉듯이 내쏜 말이었다.
"아이고메, 쪼깐만 참으시오. 나가 속에 있는 말 다 털어놓겄소."
마음이 다급해진 제재소 주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염상구라는 자의 막가는 성질로 오기를 부리자면 능히 제재소를 새로 차릴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자기의 제재소는 똥값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제재소라는 것은 돈만 가지고 있으면 새로 차리기가 너무나 쉬웠던 것이다. 염상구의 말대로 열흘 안으로야 어렵겠지만 빈 땅에 둥근 톱날 몇 가지와 전기설비기계를 사들이면 차려지는 것이었다.
"속에 든 말이라니. 싸게 헛씨요!"
염상구는 상대방을 빤히 노려보았다.
"이, 고것이 다른 말이 아니고라, 세무서장이 폴세부텀 자기헌테 폴으라고 생 난리단 말이요. 그러니 나가 찡게서 워째야 쓰겄소."
"머시라고! 최익도 고런 간나구 겉은 새끼가."
염상구가 버럭 소리 지르며 술상을 내리쳤다.
"세무서장도 헌다 허는 권센디 나가 워째야 쓰겄소."
제재소 주인은 제재소를 솥 공장과 맞바꾸더라도 다소 얼마쯤의 웃돈을 받아낼 속셈으로 세무서장을 팔아대고 있었다.
"하아, 권세에? 나 일에 뒤에서 재 뿌리는 고런 새끼넌 까죽얼 홀라당 벳게뿔 것잉께 나헌테 맽기씨요." 염상구는 험상궂은 얼굴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염상구는 눈치 빠르게 제재소 돈벌이가 제철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보다는 먼저, 솥 공장이 갈수록 돈벌이가 시원찮아지게 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알아내고는 가망 없는 사업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눈을 크게 뜨고 살피다보니 제재소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솥 공장이 장사가 시원찮은 것은 전쟁 통이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고 더 크게는 양은솥 때문이었다. 가벼우면서 나무가 작게 드는 양은솥이 쏟아져 나오는 판에 무겁고 나무가 많이 드는 무쇠 솥은 자꾸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염상구는 그런 속사정은 싹 감추고 그럴듯한 말을 앞세워 솥 공장과 제재소를 맞바꾸려 하고 있었다.
구산댁이 밥상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칠이 벗겨지고 묵은 상처가 많이 찍힌 소반에는 빈 밥그릇 네 개와 숟가락 네 개, 고춧가루라고는 구경도 못한 시퍼런 김치가 한 그릇 놓여있었다. 무거울 것도 없는 상을 들고 마루로 걸어가는 구산댁의 걸음걸이는 약간씩 흔들리듯 하며 불안스러웠다. 구산댁이 밥상을 마루에 놓자마자 아이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세 아이들 중의 하나가 지저분한 손을 내뻗쳐 김치가닥을 냉큼 집어 들었다.
"새끼야, 니가 먼첨 묵지 말어. 우리 것인디!"
옆의 아이가 눈을 치뜨며 바락 소리 질렀다. 김치가닥을 집어든 아이는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뒤로 젖혀 순식간에 김치가닥을 입안으로 감추어 넣었다. 그 아이는 하대치의 둘째아들 종남이었다.
"야 이 씨발눔아, 나 말이 안 딛기냐!"
옆의 아이가 더 크게 소리치며 팔꿈치로 종남이의 옆구리를 푹 질렀다.
"요 개눔에 새끼, 니 죽고 잡냐!"
종남이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이잉, 할메에- 오빠덜 또 사운다네."
빈 숟가락을 빨고 있던 계집아이가 부엌 쪽에다 대고 소리 질렀다. 구산댁은 부엌 벽에 높직이 걸어놓은 소쿠리를 떼 내리고 있었다.
"요새끼럴 그냥 팍 박치기혀서 코피럴 터쳐뿔라."
"이 새끼야, 느그 땀세 우리만 더 배고파진께 싸게 느그 집으로 끼대 가뿌러. 머시가 잘났다고 지랄이여, 지랄이."
두 아이는 서로 멱살을 잡고 곧 싸움이 붙을 기세였다. 그런데 한 아이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런 소란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벽에 등을 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하대치의 큰아들 길남이었다.
"아이구메 요런 징허고 징헌 삼시랑덜아, 워째 그리 서로 못 잡아묵어 걸핏허먼 쌈질이냐 쌈질이. 시상에 웬수가 따로 웂다. 느그덜이 웬수제. 길남아, 니넌 쌈 못허게 말릴 생각언 안허고 멋허고 있냐."
구산댁은 소쿠리를 마루에 던지듯 하고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아들마저 입산해버리고, 외손자 둘까지 얹혀 있는 세월을 살아 내느라고 그 동안 파삭 늙어 있었다.
"할메. 종남이 오빠가 낼름 짐치럴 집어묵어 쌈이 났다네."
서인출의 딸은 제 오빠 편을 들고 있었다.
"아이고 이 웬수녀러 새끼덜아, 인자 고만 멱살잽이 풀고 밥 묵을 채비나 혀. 잘 묵지도 못혀 히놀놀헌 꼬라지덜 해갖고 번뜩허먼 쌈허고 나스는 기운은 워디서 솟기냐. 아, 싸게 손목쟁이덜 놓고 못 돌아앉겄냐!"
구산댁은 소리 지르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제서야 두 아이는 서로 맞잡았던 멱살을 마지못한 듯 놓았다.
"개눔에 새끼, 밥 묵고 보자."
종남이가 셋째손가락 마디가 튀어나오게 쥔 주먹을 눈앞에 들어 보이며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헹! 밥 묵고 일 대 일로 뛰자."
서인출의 아들 상호도 똑같은 몸짓으로 대항했다.
"아이고 요런 속창아리 웂은 새끼덜아, 에미 웂이 사는 요리각다분헌 신세먼 느그덜이 나서로 다둑기림서 살아야제 맘이나 땃땃해질 것인디, 무신 척진 웬수덜이 만냈다고 눈만 뜨먼 그저 달구새끼덜 맹키로 쌈박질이여, 쌈박질이."
구산댁은 두 손자를 나무라는 것인지, 그저 푸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으며 소쿠리의 밥을 밥그릇에 퍼 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기름기 없이 파삭 늙은 얼굴에는 진한 근심이 끼어 있었다. 밥상에 둘러앉은 세 아이의 눈길들은 모두 구산댁의 손놀림에 모아져 있었다. 소쿠리에는 거무튀튀한 깡보리밥이 담겨 있었다.
"길남아, 싸게 밥 묵을 생각 안 허고 멀 그리 넋 빼고 앉었냐."
구산댁은 밥그릇을 상에 놓으며 외손자 길남이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제서야 길남이는 벽에서 등을 뗐다. 구산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것이 워찌 저리 변혀뿌까이. 구산댁은 또 콧등이 찌르르해져 나오지도 않은 콧물을 들이켰다.
길남이, 종남이, 상호, 나이 순서대로 밥 담긴 그릇이 놓여져 갔다. 종남이와 상호는 서로의 밥그릇을 넘보느라고 빠르게 눈을 희번덕였다. 그들의 밥그릇에는 깡보리밥 덩어리가 반을 미처 못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질 나쁜 사기그릇의 투박함은 더 심해보였다.
"다 똑겉이 담었응께 싸울 생각 말고 싸게싸게 묵어!"
구산댁은 손자들에게 눈을 흘기며 먼저 뭇을 박았다. 밥 때마다 하는 소리였다. 그 말은 되씹기 싫었지만, 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미리 하지 않으면 으레 친손자 상호가 투정을 부리고 들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측은한 눈길로 손자들을 바라보는 구산댁의 얼굴에는 그늘이 더 짙어졌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깡보리나마 삶아서 점심을 때워 넘기게 된 유월이라서 더없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어린 것들이 밥 달라고 칭얼거릴 때 아무것도 먹일 것이 없어 끼니를 넘기게 하는 것처럼 가슴 아리고 쓰린 일도 없었던 것이다. 또 눈이 젖어들며 손자들의 모습이 어른어른해지기 시작하자 구산댁은 고개를 떨구었다. 애비들 없이 고생하는 손자들을 바라보노라면 어김없이 솟아나는 눈물이었다. 구산댁은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소쿠리에 붙은 보리알들을 긁어모았다. 그것은 한 숟가락도 다 못되었다. 구산댁은 그것을 입으로 떠 넣었다. 그것이 점심이었다.
구산댁은 소쿠리를 물에 담그려고 일어나다가 되짚어 앉았다. 소쿠리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삼베조각으로 꿰매 때운 사이에 보리알 하나가 낀 것이 보였던 것이다. 소쿠리를 안은 구산댁은 그 보리알을 숟가락 끝으로 깔짝거렸다. 보리알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밀려들어갔다. 구산댁은 어찌할까를 생각하다가 숟가락을 돌려 잡았다. 손잡이 끝으로 다시 깔짝거렸다. 그러나 보리알은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곡식 한 알이 천금인디... 보리알이 잘 나오지 않을수록 구산댁의 고개는 기울어지며 소쿠리 안으로 박히듯 하고 있었다.
"실례헙니다. 실례허겄구만요."
사립 쪽에서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구산댁은 화닥닥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놀란 것은 구산댁만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던 아이들도 질겁을 하며 벽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건 서인출과 하대치, 들몰댁이 입산한 뒤로 온 식구들이 겁내기 시작한 "남자 목소리"였다. 네 아이들 중에서 제일 큰 길남이가 유난히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뉘, 뉘시다요?..."
구산댁은 간신히 이 말을 밀어냈다. 그나마 사립 앞에 선 남자가 혼자인데다가 총을 들지 않아서 혼겁을 한 마음을 거머잡으며 가까스로 밀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구산댁의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예에, 여그가 서인출 씨 집이 맞는 게라?"
키가 멀쑥하게 크고 얼굴이 긴 남자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런데도 구산댁의 가슴은 쿵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아들의 이름 "서인출"이만 들렸지 그 뒤에 붙은 "씨"라는 존칭은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 그런디..."
말끝인 "라" 소리는 입속에서 얼버무려지고 있었다.
"예에, 지넌 회정리 일구에 있는 야학선생인 이근술이라고 허는구만요. 머럴 쪼깐 알어볼 일이 있어서 이리 찾아왔는디, 들어가도 괜찮허겄는게라?"
이근술이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담고 느릿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학 선생님이라고라? 무신 일인지 들오씨요."
구산댁은 그제서야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아그덜이 밥얼 묵든 참인갑네요이."
토방으로 가까워진 이근술이 아이들을 훑어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런데 길남이는 이근술과 눈길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야아, 보리밥 한 뎅이씩 믹이든 참이요."
구산댁은 얼른 밥상을 살펴보았다. 밥그릇들에는 아직 한두 숟가락의 보릿덩이들이 남아있었다.
"이, 순사고 청년단이 아닝께 겁 묵지 말고 싸게들 묵어뿌러라."
구산댁은 쭈뼛거리며 눈치 살피고 있는 아이들 앞으로 밥상을 밀쳐주고는,
"더운디 잠 걸치씨요."
이근술에게 자리를 권했다.
"지가 잠 알아 볼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라, 이 집 아그덜언 학교럴 지대로 댕기고 있는가 어쩐가 허는 것이구먼요. 아부지덜이 입산헌 지가 오래 되야간께 그런 집 아그덜이 대개 사친회비럴 못 내서 학교럴 못 댕기게 되얐드만이라. 그려서 우리 야학에서 그런 아그덜얼 모아 갤치기로 허고 요리 알아보고 댕기는구만요."
입산한 집들은 으레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가릴 것 없이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이근술은 찾아온 용건부터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음마, 시상이 워쩐 시상이라고 빨갱이 자석덜얼 골라다가 갤칠라고 헌다요? 그래갖고 성허것소?"
"빨갱이"라고 발음하는 구산댁의 눈은 휘둥그레져 이근술을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것이야 일 웂을 것이요. 잘못얼 혔으면 어런덜이 헌 일이제 어린 아그덜이 무신 죄가 있겄소. 고런 일이야 다 우리가 알어서 헐 것잉께 걱정 마시고, 쟈덜언 시방 워쩌요?"
"금메 말이요, 선상님이 요리 오신 것이 목타 꼬드라져가는 사람헌테 물바가치 내리는 고마움이제 멋이겄소. 시상에나 만상에나 요리 고마울 디가 워디 있겄소. 글안해도 요분 사월부텀 저 새끼덜 셋얼 핵교 작파시키고 안 있소. 월사금얼 못 낸께 핵교서넌 날이 날마동 잡지기넌 허제, 애비덜이 웂응께 꼬린 동전 한 닢 생길 디는 웂제, 젼디다 젼디다 못혀서 다 핵교럴 작파혔지라이. 근디, 쩌것덜이 즈그 애비 웂은 시상얼 살어가자먼 못혀도 소핵교 공부넌혀야 사람 노릇이 될 것인디, 요 일얼 워쩔 것이다냐, 요 일얼 워쩔 것이다냐, 험스로 요 늙은 속이 솣이 되고 있든 참이었제라."
구산댁은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막힘없이 엮어 내렸다.
"그렸구만이라. 글먼 당장에 오늘 저녁부텀 보내씨요."
이근술은 밝게 웃으며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싯이나 되는디 워쩔께라?"
여태까지 끼어 있던 근심기가 다 가신 얼굴로 구산댁이 물었다.
"다 보내씨요."
"학년이 다 달븐디 워쩔께라?"
"다 따로따로 갤치요."
"워메 존 거. 내 새끼덜 살아났네!"
구산댁이 외치며 손바닥을 맞때렸다.
"아그덜 이름이 머시오?"
"야덜아, 싸게싸게 인나 선상님헌티 인사디리고, 각단지게 느그덜 이름 말씸디려."
구산댁은 신명나는 목소리로 손자들에게 일렀다. 길남이부터 차례로 이름과 학년을 댔다.
"저 길남이가 워디 아프당가요?"
이근술이 수첩을 접으며 물었다.
"길남이요?"
길남이 쪽으로 힐끗 눈길을 돌이는 구산댁의 안색이 싹 어둡게 변하더니,
"말도 마씨요, 어런덜얼 잡어다가 잡지고 왈기고 허는 것도 워디 헌디, 저 에린것얼 끌고 가서 겁먹이고 욱대기고 따구 치고 혀댔응께 저것이 워찌 되얐겄소. 영판 똘방똘방허든 아그가 그 일 당허고 나서부텀 겁이 말도 못허게 많어지고 저리 병색이 돌아뿌렀소. 밤마동 소리도 질르고, 오짐도 싸고, 에린 맘에 골병이 들어뿐 것이요. 즈그덜도 다 새끼 키우고 삼스로 혀도 혀도 너무덜 허요."
구산댁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무 그리 속상해허지 마씨요. 다 험헌 시상이라 당허는 일인께라. 지가 앞으로 길남이럴 다른 아그덜보담 더 맘써서 대허겄소. 야학은 회정리 일구에 있는 교회요."
이근술은 마루에서 일어났다.
"아즘찮이요, 선상님."
구산댁이 치마를 거머잡고 따라 일어나며 눈물을 추슬렀다.
"길남아, 오늘부텀 공부허로 오니라. 알겄지야?"
이근술이 따스하게 말하며 길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아..."
길남이의 가느다란 대답이었다.
"선상님, 시상에나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요."
구산댁은 사립 밖에서 이근술에게 합장을 하고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예에, 예, 얼렁 들어가시씨요."
이근술은 마주 허리를 굽히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뭐라고 할 이유가 없고, 만약 뭐라고 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하겠소. 우리가 지금 할 일이 무엇이겠소. 그 가엾은 아이들을 철저하게 모아 가르치는 일이오."
이근술은 먹먹해져오는 가슴으로 또 서민영 선생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서민영 선생의 권유에 따라 야학 일을 맡게 된 것이 갈수록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서민영 선생의 생각이나, 그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그전에 자신이 전혀 몰랐던 너무나 새로운 별천지였다. 뒤늦게나마 그런 세상을 만난 것이 큰 기쁨과 보람으로 가슴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었다.
유월 팔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가조인되었다. 그 소식이 산에 있는 빨치산 대원들한테까지 퍼지는 데는 열흘 가까이 걸렸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 일오 결정"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산 속의 열 명 당원보다는 인민 속의 당원이 낫다." 그 결정을 알고 충격을 받지 않은 빨치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건 곧 빨치산투쟁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충격 속에서 누구나 똑같이 갖게 된 의문이고 그리고 질문이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허탈과 절망감이었다. 대원들은 굳이 그런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탈주자가 생기는 동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탈주할 만한 사람들은 지난 겨울공세 때 거의 다 떠나버린 탓이었다. 그들은 생활에서 익힌 대로 토론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모아 당에 알리고자 했고, 당이 무언가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욕구들 앞에서 부담을 느껴야 하는 건 부대의 정치지도원들이었다. 당에서는 그 결정에 따른 지도지침을 아직 내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무덜, 너무 다급허게 생각허지 마씨요. 당은 시방 동무덜 맘얼 다알어 그 일얼 허고 있을 것이요. 나 생각으로넌 "오, 일오 결정"이 빨치산투쟁은 계속험스로 인민 속에 지하조직도 구축해야 헌다는 중요성얼 그리 말헌 것이제 빨치산 투쟁얼 아조 끝맺겄다는 뜻이 아닐 것이 틀림 웂소. 모다 맘 풀지 말고 강단지게 챙김스로 기둘립시다."
조원제는 이런 내용의 말로 대원들의 마음속에 일기 시작한 불안감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발사 출신의 대원이 조원제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지도원 동지, 머리 깎을 때가 지냈구만이라."
그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 있었다. 그가 총만큼 소중하게 간직하고 다니는 눈에 익은 가위였다.
"그리 되얐소?"
조원제는 모자를 벗고 머리칼을 만지며 웃었다.
"쩔로 앉으씨요."
"이, 고마우요. 날도 더와진께 씨언허니 깎아주씨요."
조원제는 나무 아래 그늘로 가 앉았다. 사각거리는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조원제는 아른아른한 졸음의 물결에 잠겼다가 떴다가 하고 있었다.
"다 되얐소."
조원제는 졸음에서 깨어나며 그 달치근한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와따 씨언허다. 고마우요이."
조원제는 짤막해진 머리칼을 쓸어보며 인사했다.
"고맙기넌이라. 가볼라요."
그 대원은 날렵하게 생긴 가위를 빠르게 찰칵거리며 씨익 웃어보았다. 그런데, 그 대원은 정말 그날 밤에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발을 해준 것은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고, 작별인사였던 것이다. 그냥 떠나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인가... 조원제는 먼 산을 보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가 산을 내려간 것에 대해서는 실망도 배신감도 느끼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오래 견디었는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대원은 언젠가 보루에서 페니실린 한 병을 구해온 일이 있었다. 약품은 당연히 환자트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페니실린이 만병통치라는 말을 들은 바가 있어서 남들 눈을 피해 홀짝 마셔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주사약이라는 것을 모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어디도 아픈 데가 없었던 것이다. 염증에 특효약인 페니실린 한 병이 대부분 염증환자들로 차있는 환자트로 보내지지 못하고 멀쩡한 자의 뱃속에서 오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이발사라는 잡직 자유노동자가 드러낸 파렴치한 이기주의의 전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도 씁쓰레하게 웃어야 했던 것이다. 조원제는 그 탈주 한 건을 겪고 나서 휴전회담 가조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서 당으로부터 지도지침도 받게 되었다. 한편, 염상진은 총사 대원들을 모아놓고 당의 지도지침을 전달하고 있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난 "오, 일오 결정"이 내려진 다음 낙망이 되어 기운들이 빠지고, 앞날이 걱정되어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여러분들은 휴전협정이 가조인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에 여러분들은 또다시 놀랐을 줄 잘 압니다. 그러한 사태에 임하여 앞으로 우리 모두가 취할 투쟁방향에 대하여 당의 결정을 여러분들 앞에 알리고자 합니다. 당은, 지난 "오, 일오 결정"이 내려진 그날로부터 우리의 투쟁이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의 단계로 바뀌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동지 여러분! 모두 똑똑하게 들으십시오. 우리의 투쟁은 이제 현실투쟁이 아니라 역사투쟁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 학습을 열심히 해왔으므로 현실투쟁이 무엇인지, 역사투쟁이 무엇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현실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눈앞에서 성취시키는 것이며, 역사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투쟁은 바로 목숨을 바치는 죽음의 투쟁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투쟁은 오직 한 길, 우리보다 먼저 역사투쟁을 벌이고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 죽어간 그 많은 동지들은 우리의 정의로운 싸움이 역사 속에서 기필코 승리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인민해방의 진리를 지키는 싸움에 바친 자신들의 목숨이 역사 속에서 틀림없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철통같이 믿어야 합니다. 역사와의 싸움은 깁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승자입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주인입니다. 우리가 흘리고 죽어간 피는 인민해방의 꽃으로 역사위에 찬란히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틀림없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보다 앞서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인민해방의 역사는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민족해방의 역사는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하다가 깨끗하게 죽어가는 것만이 가장 당당하고 떳떳한 해방 전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용맹스럽고 자랑스러운 여러분들의 모습을 인민들은 똑똑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인민들은 계속해서 투쟁할 힘을 얻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민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쟁취되고야 맙니다. 그것이 인민해방의 역사이며, 역사의 발전법칙이며, 불변하는 역사의 힘인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역사투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빨치산으로서 빨치산답게 투쟁할 최후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빨치산답게 당당하고 용감하게 죽는 것입니다. 동지 여러분, 모든 사람은 목숨이 하나씩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꼭 죽고야 맙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죽기를 원합니까! 착취자들처럼 배부른 돼지새끼들로 죽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착취자들에게 붙어먹는 더러운 개새끼들로 죽기를 원합니까! 이것은 다시 물을 것도 없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찍부터 그런 자들을 적으로 삼고 집 떠나 입산해서 지금까지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빨치산투쟁을 전개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 동지들을 버리고 하산해서 돼지새끼들과 개새끼들에게 동지들을 팔아먹는 더럽고도 또 더러운 여우새끼들로 죽기를 원합니까. 동지 여러분! 역사투쟁이 시작된 이 마당에 죽음이 두려우면 당장 앞으로 나오십시오!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앞으로 나오십시오!"
염상진의 불붙고 있는 눈길이 대원들을 휘둘러보았고, 대원들은 굳게 다물린 입으로 염상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습니까! 좋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음을 불사하고 역사투쟁의 길로 돌진할 것을 각오했습니다. 우리의 각오와 맹세를 당과 인민 앞에 박수로써 표시합시다!"
염상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센 태도와 어기찬 어조로 연설을 해나갔다. 그리고 우람한 나무처럼 버티고 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원들도 비장감 서린 얼굴들로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격렬하게 물결치는 박수소리들은 산골짜기를 울려대며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역사투쟁"을 알리는 강연은 각 지구마다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런 다음부터 부대단위로 토론회들이 활발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달라진 투쟁을 맞이하여 자기들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했던 것이다.
조원제도 일대대의 토론회를 열었다.
"전사동지 여러분, 역사투쟁언 곧 결사투쟁입니다. 죽음의 투쟁이라는 말이제라. 그러고또 역사의 승리투쟁이라는 뜻이기도 허구만요. 지끔부텀 역사투쟁얼 전개허는 것에 대하여 토론회럴 개최허겄습니다. 자유롭게 발언덜 허시씨요." 첫 번째 대원이 일어섰다. "예에 머시냐, 휴전이 될라는 이 마당에서 역사투쟁얼 시작허는 것이야 전적으로 찬동허요.우리가 이적지 개덜 가심에 빵꾸 뚫음시로 싸와갖고 인자 와서 던적시럽게 개덜헌테 살레달라고 손들 수도 웂은 일이고, 그런다고 살레줄 개덜도 아니고라. 근다고 앞이 첩첩이 맥혔이니 북선으로 갈 수도 없고라. 우리가 헐 일언 역사투쟁뿐이 웂는디, 나 한나 죽는 것이야 암시랑토 안헌디, 남치기 새끼덜이 짠허고 불쌍허단 생각언 띠치기가 에롭소. 고것덜이 나중에 나이 묵으먼 알겄제만 안직이야 에레서 역사투쟁이 멋인지 몰롱께라. 나만 맴이 덜 좋은것이 아니고 새끼덜 딸린 대원들이야 맴이 다 똑겉을 것잉께 나가 겸사겸사 혀서 헌 발언이요."
두 번째 대원이 다급하게 일어섰다.
"이, 배 동무 발언이 탱자까시맹키로 나 가심얼 찔로요. 나도 새끼가 둘 딸린 몸잉께라. 근디, 나넌 새끼덜이야 다 즈그 묵을 것 타고난다는 옛말얼 믿고 잡으요. 그 말얼 믿고 맘 편허게 죽을 작정이요. 나가 지끔꺼정 시물여서 해럴 살었는디, 그중에서 입산투쟁 험시로 산 삼 년이 질로 존 시상이었소. 니나 나나 다 차등웂이 동무로 살고, 묵어도 항꾼에 묵고 굶어도 항꾼에 굶음서 공평허닌 살고, 웨수덜헌테 총 쏨스로 배짱을 살었응께 요보담 더 재미지고 존 시상얼 워디 가서 또 살어보겄소. 한 가지 한이 있다먼, 요런 시상얼 살아서 못맹글고 가는 것이제랴."
세 번째 대원이 바지를 추스르며 일어났다.
"박 동무 말이 쌈빡허요. 근디 나가 헐라는 말얼 뺏게뿌러서 원통허기도 허요."
몇몇 대원들이 웃었다.
"나넌 기본출 중에서도 질로 지랄겉은 백정눔에다가, 무식허기로야 딱허니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르는 봉사였제라. 근디 박 동무 말맹키로 사람 대접 요러타께 잘 받음서 산디다가, 글 깨쳐주고, 학습시켜주고 혀서 글이란 글은 줄줄이 읽어대고, 에로운 글도 다 해득허게 맹글어준 당의 은혜럴 죽을 때꺼정 안 잊어뿔 것이구만이라. 허고, 입산혀서 지금꺼지 우리 시상얼 맹글어봤응께 나넌 은제 죽어도 원도 한도 웂구만이라. 이러나 저러나 한분 죽을 목심, 나넌 무선 것이 암 것도 웂소."
네 번째 대원이 일어나 모자를 벗어들었다.
"동무덜 발언 다 기맥히게 감동적입니다. 정의로운 역사는 반드시 승리헌다는 역사의 신뢰로 싸워야 될 상황에 처해서 그간에 자제혀왔던 말럴 솔직허니 허겄구만요. 지넌 중학교럴 나왔기 땀세 지식계급으로 취급됐습니다. 지식계급이라논께 기본출인 대원덜에 비해 그간에 여러 가지로 괴로움이 많었습니다. 지식계급의 잔재럴 청산혀야 허는 의무에다가, 똑같은 잘못이나 실수럴 혀도 지식계급잉께 더 비판되었고, 지식계급이라 딴 대원덜보담 더 열심으로 싸울라고 애썼습니다. 그런디도 입당은 또 지식계급이라 밀리고 제쳐지고 혀서 쉽덜 안혔습니다. 그리 되자 서운헌 맘이 생기고, 나가 왜 투쟁허고 있는가 허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려도, 혁명이나 인민해방이 꼭 기본출만얼 위허는 것이 아니고, 또 기본출만이 혁명과 인민해방의 주인은 아니다 허는 생각으로 서운함과 불만얼 참어냈습니다. 이제 모두가 죽기로 각오헌 역사투쟁 앞에서 지가 가진 그런 생각이 옳았다는 것얼 확인헙니다. 죽음의 투쟁 앞에서 나넌 인자 지식계급이 아닌 자유로운 투사가 된 기쁨을 느낍니다."
조원제는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대원은 몸이 더럽고, 옷이 더럽기로 유명한 "거지왕초"였다. 광주동중학교 출신인 그는 몸도 씻지 않았고, 머리도 깎지 않았고, 옷도 빨아 입을 줄을 몰랐고, 찢어져도 기워 입지도 않았다. 그래서 "거지왕초"가 된 그는 싸움은 열심히 해대면서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속말을 다 털어 놓았던 것이다. 그의 발언은 자신이 왜 거지꼴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해명하고 있었다. 물론 조원제는 지식계급들이 세 가지로 분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가짐을 단정하게하고 모든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축, 그 대원처럼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며 투쟁에 대체로 소극적인 축, 그리고, 산에서 견디지 못하고 탈주해버리는 축이었다. 조원제는 그 대원과 자신이 그 동안 너무나 대조적으로 빨치산생활을 해왔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지식계급의 고민과 갈등에 대해서 조원제는 충분히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도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나넌 총이나 씬물이 나게 쏴보고 죽었으먼 좋겄소."
"나넌 쌀밥얼 배가 터지게 묵었으먼 좋겄소."
"나넌 장개럴 가고 잡어 죽겄소. 누가 중매 잠 나스씨요."
"나넌 공산당에서 똑 한 가지가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소. 나넌 죽어서도 귀신으로 웬수덜얼 해꼬지허고 댕기고 잡은디, 공산당에서는 귀신 겉은 것을 웂다고 헌다 그것이요."
토론회는 어느덧 유언발표회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조원제는 제지하지 않았다. 죽음을 결의하는 마당에 유언을 한마디씩 하는 것도 토론회를 갖는 충분한 의미가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원들은 거의가 한마디씩 다 했다. 그러나 "휴전이 되는데 북쪽에서는 왜 우리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느냐"는 식의 발언이나, 당에 대해서 무슨 원망을 하는 내용의 발언 같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조원제는 그런 토론의 결과가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건 대원들이 빨치산의 근본임무를 똑바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비장해진 가운데 서로서로 전보다 더욱 다정해졌다.
36. 감옥살이도 역사투쟁이다
칠월의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그 동안에는 별로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았던 토벌대는 거의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날씨 때문만이 아니라 숲이 짙어질 대로 짙어져 산속으로 파고들었다가는 오히려 자기네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일 수도 있었다.
염상진은 폭염 속에서 폭염보다 더 뜨거운 보고를 받아야 했다. 그건 안창민과 이지숙이 체포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위장귀순이 탄로 난 때문이었다. 염상진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아귀에 산풀들을 움켜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질끈 감은 눈앞에 결혼식 날의 안창민과 이지숙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에게 못할 일을 시켰다는 죄의식이 가슴을 쥐어짰다. 염상진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도록 절망스러운 것은 그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소식이었다. 그들이 이미 광주로 압송되었다는 것이었다. 결사대로 구출작전을 일으킬 기회마저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염상진은 개인적으로 위장귀순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전술은 실현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던 것이다. 적들은 인민들 사이사이에 조직을 강화시켜놓고 있었고, 휴전회담으로 인민들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위장귀순에 의한 지하 세포망 구축이란 거의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기존했던 투쟁인민의 조직들도 거의 와해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안창민과 이지숙이 떠난 다음 줄곧 그들에게 선을 대놓고 있었다. 조사를 받고 경찰서에서 나오고, 집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리고, 그 소식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불안하나마 어떤 기대를 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는 위장에 대해서는 무릎까지 쳤던 것이다.
염상진은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광주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아내야 했고, 손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써야 된다고 생각했다. 기왕 인민 속의 장기화투쟁을 시작한 이상 사형을 당하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 장기화투쟁은 평생에 걸치는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쓰든지 당력을 집중시켜 사형만은 면하게 하고 싶었다. 역사투쟁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적들의 손에 사형을 당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염상진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사령관에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광주시당과 협조하면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소. 염 동지가 책임지고 일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렇게 사령관의 동의를 얻은 염상진은 광주시당과 선을 대려고 직접 나섰다. 그리고 군당의 조판돌에게도 선을 띄웠다.
"안 동무의 어머님한테 선을 대서 최대한 빨리 안 동무가 갇힌 데를 알아내라고 하시오."
염상진은 선요원에게 지시했다. 백운산을 출발한 염상진은 백아산 지구를 거쳐 무등산 기슭에서 광주시당과 접선했다.
"안 동무 집에 선을 대서 안 동무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아내라고 지시해놨습니다. 그러니까 위원장께서는 그 다음부터를 맡아주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안 동무의 집에서도 애를 쓰겠지요. 그러나 노모 한 분뿐이시고, 손을 쓸 만한 재산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위원장 동지께서 발 벗고 나서주셔야 되겠습니다."
염상진은 평소와는 다르게 잔뜩 힘이 들게 말하고 있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당 위원장이 염상진을 쳐다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한편, 안창민의 어머니 신씨는 더 늙고 약해진 몸으로 폭염 속을 허덕거리고 다녔다. 신씨가 땀으로 삼베옷을 다 적시며 찾아다니는 것은 안씨 문중의 사람들이었다.
"워찌허겄습니껴. 죄가 밉제 목심언 살려내얄 것 아니겄습니까."
신씨는 작은 몸을 더 작게 오그리며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어허 참, 숯뎅이 되는 부모 맘이야 어찌 몰르겄소만 죄라는 것이 다 천층만층 구만층인 것이요. 그 자석이 진 죄가 워디 예삿죄고 그 자석이 또 워디 쫄짜 빨갱이기나 허요? 염상진인가 머시깽인가 허는 눔 담이라는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일인디, 무신 수로 목심이 살려내 지겄소. 쌀얼 백 가마니, 천 가마니 쳐딜에 봇씨요. 그 목심이 살려내지는가."
마구 삿대질까지 해대며 언성을 높이던 남자는 카악 가래를 돋워 올렸다.
"긍께, 살려내잔 것이 워디 죄 웂은 몸맹키로 감옥에서 꺼내지는 것이 겄습니껴. 감옥살이야 을매럴 허든지 간에 죽는 거이야 며너게 허자는 것이제라. 딛기는 소문으로 돈얼 쓰고 변호사럴 사고 허먼 목심이야 건진다고 허드만이라. 긍께 워쩌겄습니껴, 그것도 안씨 문중핀께 워찌 심덜얼 잠 모타주시씨요."
몸이 더 작게 오그라 들고 있는 신씨의 두 손바닥은 모아져 있었다.
"금메, 안씨 문중 피도 좋고, 한 족보에 이름 올른 일가친척 뿌시레기도 좋소. 문중에서 심얼 모투든지, 돈얼 모투든지 간에 그럴라먼 무신 똑별난 이유가 있어얄 것 아니겄소. 문중 이름얼 빛냈다든가, 문중에 무신 이익얼 줬다등가 혀얄 것 아니겄냐 그 말이요. 근디 그 자석언 머시오. 나라가 금허는 빨갱이질 허다가 대역죄인 되야갖고 문중 이름에 먹칠 똥칠다 헌 눔인디, 문중에 바랠 것이 머시가 있소. 허고, 아짐씨 생각혀서 문중이 워찌 혀볼라고 혀도 그눔에 죄가 워낙에 숭악해서 경찰 눈앞에 꼼지락 못허게 생겼응께 그리 알고 가씨요. 나 일보로 나가야 쓰겄소."
남자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신씨의 초췌한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며 눈에 눈물이 번져갔다. 문중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식으로 박절했다. 그런 냉대 속에 이삼일을 돌아다니고 난 신씨는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아들을 죽이고 마는구나! 신씨는 그 절박함 앞에서 시시각각 피가 타들고 있었지만 돈을 구할 데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학생으로 나이가 어리면 오백만 원, 나이가 스물다섯이 넘었으면 천만 원, 자리가 좀 높은 경우에는 천오백만 원 정도를 쓰면 풀려난다는 소문이 진작부터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학살당한 민간인 가족이 나타나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 한 그것이 공정가격이라고 했다. 그런데 돈을 구할 수 없는 신씨는 차라리 자기가 먼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밥도 끓이지 않은 신씨는 어둠 가득한 마당의 평상에 넋 놓고 앉아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모기들이 앵앵거리고, 뭇별들이 박힌 하늘에는 은하수가 기다랗게 흐르고 있었다.
"기신게라."
대문 쪽에서 난 조심스러운 여자 목소리였다. 그러나 신씨는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짐씨이, 기신게라?"
대문 쪽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이!"
신씨는 문득 정신을 수습하고는,
"거그 누구 왔소?"
하며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야아, 들몰 가실댁이구만이라."
반가움이 실린 목소리가 좀더 또렷해졌다.
"이 밤중에 가실댁이 워쩐 일이다요."
신씨는 서둘러 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문을 들어서는 건 가실댁 혼자가 아니었다. 네 여자가 더 있었다. 신씨는 어둠 속에서도 그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이 밤중에 워쩐 일덜이요. 어여 앉으씨요."
신씨는 이상한 느낌을 가지며 평상에 자리를 권했다.
"요리 밤중에 찾아뵌 것언 다른 것이 아니고라, 요분 참에 당허신 일얼 챙기시저먼 돈이 목심이라는 소문인디요. 그려서 즈그덜이 논얼 한 마지기썩 내놓기로 맘얼 모탔구만이라."
가실댁의 조심스러워하는 말이었다.
"이 사람덜아!"
신씨의 입에서 나온 감격어린 소리였다. 신씨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 고마움에 가슴이 푸드득 떨렸던 것이다.
"자네덜도 모다 남정네가 없는 헹펜에 새끼덜 델고 살어야 헐 것인디 한 마지기썩얼 내노먼 워쩔러고..."
마음이 다급하다고 그 제의를 덥석 받아들일 수가 없어 신씨는 이렇게 말했다. 방 서방을 위시한 옛 소작인들은 모두 입산을 한 처지였던 것이다.
"아니구만이라. 그간에 즈그덜이 누구 덕으로 살었고, 그냥 공짜로 받은 논인디 요분 일에 내놓는 것이야 당연지사제라. 다도 아니고 한 마지기썩만 내놓는 것잉께 퇴허지 마시고 즈그덜 사람 맹글어주시씨요."
가실댁의 예를 갖추는 말에 신씨는 더욱 가슴이 저리고 있었다.
"나가 면목 안 스는 일인지 암스로도 사정이 워낙에 급헌께 그 말덜얼 고맙고 고맙게 받겄네. 참말로 너무덜 고맙네."
목이 잠겨드는 신씨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꼼짝 말엇!"
방문이 박살나며 구둣발들이 뛰어들었다.
"어!"
조원제와 또 한 사람이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며 총으로 손을 뻗치려는 순간 눈앞에 총구멍이 들이닥쳤다.
"꼼짝 말고 손 들엇!"
경찰은 소리치며 조원제 옆에 놓인 총을 구둣발로 밀어 찼다. 총은 방구석으로 쭈르륵 밀려갔다. 속았구나, 허방인디! 순간 조원제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그의 입에는 밥이 가득 물려 있었다.
"싸게 손 들어!"
다른 경찰이 조원제 옆 사람의 총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조원제와 옆 사람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조원제는 선요원도 속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싸게싸게 일어낫!"
조원제를 겨누고 있는 경찰이 총구를 휘둘렀다. 조원제와 선요원은 팔을 든 채 몸을 일으켰다. 몸을 반쯤 일으키던 조원제가 뒤로 홱 돌아섰다. 그의 손은 뒷벽의 선반에 놓인 수류탄으로 뻗쳐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개머리판이 그의 어깻죽지를 내려쳤다. "억!" 비명과 함께 조원제의 입에서 밥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산중의 열 명 당원보다는 인민 속의 한 명 당원이 낫다!" 그 소리는 자포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의식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다. 그리고 조원제는 그 의미가 새롭게 가슴에 말뚝으로 박히는 것을 느꼈다.
"개지랄치지 말고 싸게 밖으로 나갓!"
경찰이 총끝으로 조원제의 등을 떠밀었다.
"개자석이 박쥐였구마..."
허탈한 선요원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조원제는 마루로 나섰다. 마당의 햇빛 속에 총을 겨눈 경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조원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들리는 말이 있었다.
"요리 이별허먼 은제 또 만내지까이."
이태식의 목소리였다.
"조 동무, 몸조심 혀감스로 잘허씨요이."
강경애의 말이었다.
조원제는 두 팔을 들어올린 채 제재소의 안채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큰길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보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떨구어짐을 느꼈다.
‘니가 무신 죄럴 졌냐! 당당허니 고개럴 들어라!’
조원제는 스스로에게 외쳤다. 이를 맞물고 턱을 끌어당긴 조원제는 앞을 응시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부대를 떠나올 때 대원들에게는 무슨 중요한 물건을 조달하러 가는 것으로 해두었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임무는 "오, 일오 결정" 수행과 "팔, 사투쟁"이었다. "팔, 사투쟁"은 팔월오일에 실시될 정, 부통령선거에 대한 교란 및 저지 투쟁이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시작해보지 못하고 침투하자마자 잡히고 만 것이다. 그 거점책이 이중첩자라는 것을 선요원도 몰랐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한편으로, 그 동안 자신들의 조직이 그런 식으로 물이 새고 있었다는 것을 조원제는 실감해야 했다.
"쩌 앞선 사람은 영판 젊으네이."
"그렁마, 인자 시물이나 됐을랑가?"
"못 묵어서 그렇제 인물이 영 좋구마. 인물 값 허니라고 저리 당당허까?"
"금메, 저리 당당헌 사람 첨 보겄구마. 뉘집 자석인지 영 아깝네웨."
큰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두 사람에게 쏠리고 있는 가운데, 길가에 선 몇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말이었다. 선거바람이 불고 있어서 큰길에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 있었다. 제재소에서 화순경찰서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조원제는 화순에서 제일 넓고 번화한 길을 두 팔 들어 올리고 걸으며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잡혔다는 사실이 집에 알려져야 했던 것이다. 그의 머리는 벌써 "오, 일오 결정"에 입각한 새로운 투쟁을 위해 신속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경찰서 직전에서 조원제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가슴에는 확 전등불이 켜졌다. 그 남자는 문중의 아저씨뻘이었다. 양복차림의 그 남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얼굴을 돌렸다. 조원제는 그 눈치 빠름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으나 사나 약얼 구허로 나왔다고만 허씨요."
유치장에 갇히면서 조원제는 선요원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밤이 늦어도, 다음날도 집에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조원제는 그때서야 문중의 그 아저씨의 외면이 눈치 빠른 행동이 아니라 진짜 외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에게 무슨 불똥이라도 튈까봐 그 아저씨는 집에 알려주는 것마저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인공시절에 그리도 달아올랐던 세상인심은 이제 다시 여순투쟁 다음인 사십구년께로 되돌아가 있음을 조원제는 처절하고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원제는 점심 무렵에 조사를 받으려고 유치장에서 나왔다. 사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려는데 누가 알은 체를 해왔다.
"아니, 니가 누구여! 조, 조원제 맞제?"
조원제는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몸집 건장한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내는 학생 때부터 잡혀 다니면서 낯이 익은 박 형사였다. 그는 턱없이 반가운 기색이었지만 조원제는 오히려 앞이 막히는 낭패감을 느꼈다.
"원제 니가 이적지 살어 있었구나."
박 형사는 신기하다는 듯 조원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의자를 끌어다가 마주앉았다.
"니 잽힌지 집에서 아냐?"
박 형사가 소리 낮춰 물었다. 조원제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알겄다. 나가 알려주제."
박 형사는 짧게 말하고는,
"야이 재앙궂은 눔아, 쪼깐헌 눔이 허라는 공부나 헐 일이제 니까징 것이 공산주의럴 머럴 안다고 입산꺼지 혀서 요 꼬라지야, 요눔아, 느그 부모 애깨나 썩이겄다."
그는 다시 큰 소리로 말하며 조원제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일어섰다. 조원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호의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의 과거까지 환히 알고 있는 박 형사와 맞닥뜨리는 순간 조원제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당할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이다. 과연 아버지는 해질녘에 찾아왔다. 박 형사는 아버지와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자리까지 만들어주었다.
"고맙다. 니가 이리 살어서 왔응께."
아버지의 첫마디였다. 조원제는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를 몰라 고개를 약간 수그렸다. 언제나 어렵기만 한 아버지였다.
"몸언 워디 아픈 디 웂냐?"
"예에... 엄니허고 식구덜언..."
"다 괜찮허다. 원제야, 인자 모두 대결 투쟁언 끝났다. 앞으로넌 세월에 의지혀야 헌다."
조원제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의미 깊은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원제는 그제서야 동지로서의 한 가닥 유대감이 아버지라는 어려움을 헤치고 새롭게 움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사회주의 의식의 바탕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어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조직원이었던 아버지가 인공 때 당의 간부조직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비밀당원"으로 옛날의 선이 다 끊어진 상태인데다가, 신분을 위장하고 있던 공무원으로서 직책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연이 좀 복잡했다.
"알고 있구만요."
조원제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때 아버지의 얼굴이 문득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허먼, 역사 속의 투쟁이 길다는 것을 실천허겄다는 뜻이냐?"
눈에 힘을 모은 아버지가 낮고 질긴 소리로 물었다.
"예, 지시구만요."
"알겄다. 그 담 일부텀언 이 애비가 알어서 허겄다."
아버지가 허리를 폈다.
"비용이 많이 들 것인디요."
"일 웂다. 니가 입산헌 담부텀 이 애비가 헌 투쟁이 먼지 아냐. 요런 날에 대비혀서 정신 웂이 돈 모툰 일이었다."
아버지는 승자처럼 환하게 웃었다.
"부탁이 한 가지 있는디요."
"무신?"
"지 혼자 잽힌 것이 아니고 또 한 사람이 있구만요."
"알겄다. 당연히 항꾼에 혀야제."
조원제는 아버지가 커다란 산으로 느껴졌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선들거리기 시작하는 구월이 되어서야 하대치는 안창민과 이지숙이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메 되얐뿌렀소."
그들이 사형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에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펄쩍 뛰어오르며 외쳐댔던 것이다. 그러니 "무기"라는 징역을 한참 생각해보니 그렇게 반가워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끝도 한정도 없는 징역살이가 무기였던 것이다. 그 끝이 죽음이었다.
"아니, 나가 요리 좋아라 허다봉께 미친 눔이 겉은디요."
기색이 싸늘하게 변한 하대치의 말이었다.
"왜요?"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켠 염상진이 하대치를 쳐다보았다.
"차근허니 생각혀봉께 무기라는 것이 죽어서야 끝나는 징역살인디, 깜방에서 아무 일도 못 험시로 평상얼 보내다가 깜빵에서 죽느니 당장 팍 죽어뿌는 것이 낫제라."
"하 동무, 죽는다는 것만 생각하면 하 동무 말이 맞소. 허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아니오. 감옥살이하는 것도 투쟁의 하나요.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 투쟁이오. 굽히지 않고, 지치지 않고, 꿋꿋하게 의지를 지키며 감옥살이를 해나가는 것은 또한 적들에게 우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 결국 그들이 굴복하게 하는 투쟁이기도 하오. 그리고 특히 안창민 동무 같은 사람은 감옥에서 할 일이 많소. 감옥에 있는 많은 동지들을 상대로 끝없이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리고 교양하고 학습해서 모두가 감옥 투쟁을 굳건한 용기로 해나갈 수 있도록 힘찬 선전과 선동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오. 그 임무에 충실하며 평생을 감옥에서 살다가 감옥에서 죽으면 그 죽음이야말로 얼마나 값나가는 것인지 말로는 계산이 안 되는 일이오. 평생에 걸쳐 전개한 감옥 투쟁에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기억할 것이고, 그 영향은 내일의 투쟁에서 반드시 힘으로 뭉쳐져 솟구치게 되어 있소. 그러니까 감방살이는 또 하나의 역사투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염상진은 그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것 없이 차분하게 설명해나가고 있었다.
"고것이 또 그리 되는구만이라이."
피우던 담배도 끄고 진지하게 듣고 있던 하대치가 뚜벅 말했다.
"물론 안 동무와 이 동무가 감옥에서 평생 동안 겪어야 될 고생을 생각하면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염상진은 풀잎을 뜯어 잘근잘근 씹으며 먼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옥양목 행주질을 친듯 말끔한 하늘에 솜덩이처럼 뭉클뭉클 부풀어오른 새하얀 뭉게구름들이 피어나 있었다. 그 구름에 가을이 깃들여 있었다.
"조판돌 동무할라 그리 가부렀이니 인자 단풍 떨어지대끼 한나한나 시나브로 작별혀 가는구만이라이."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내뿜으며 하대치가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조판돌은 열흘 전쯤에 복내면 뒤 골짜기에서 대원 세 명과 함께 포위당해 싸우다가 탈출구를 뚫지 못하고 끝내 수류탄으로 자결하였다. 조판돌다운 죽음이었다.
염상진은 천천히 하대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 동무,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오. 어차피 투쟁은 동지들을 헤어지게 만드는 것이고, 죽어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법이오."
염상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웃음이 그지없이 스산했다.
"금메요... 찬바람이 일기 시작허는디, 낭구 이파리가 떨어져 내리먼 개덜이 씨게 나오겄제라?"
하대치는 화제를 바꾸었다.
"틀림없이 그럴 거요. 아마 이승만 도당은 이번 겨울을 이용해서 우리들을 다 없앨 작정을 할 거요. 우리를 없애지 않고서는 제 놈 체면이 안 서니까. 작년 겨울에도 이현상 선생을 생포해서 자기 앞에 데려오라고 했는데, 노망 든 영감탱이요. 이현상 선생이 누구신데 생포될 때까지 가만히 있으시겠소? 어쨌든 모든 전투준비를 단단히 해야지요."
염상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뜨시게라?"
"오래 쉬었소."
염상진은 손을 내밀었다.
"살펴가시씨요."
하대치는 염상진의 손을 잡았다 그는 전에 없던 외로움이 왈칵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하대치는 멀어져가는 염상진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안창민과 이지숙의 소식을 선요원을 통해 알리지 않고 직접 걸음해서 알려주고 가는 그 깊은 마음을 하대치는 한없는 고마움과 함께 가슴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태식은 조원제와 선요원이 체포되었다는 것만 알 뿐 그다음 소식을 알 수가 없어 날마다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화순 읍내에 유일했던 거점책이 정체를 드러내면서 등을 돌리고 말았으니 뒷소식이 연결될 리가 없었다. 조원제에 대한 뒷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이었지 긴급을 요하는 공적 업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태식은 옆을 떠난 사람으로 가슴에 휑하니 바람구멍이 뚫린다는 말을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조원제가 옆에 있어서 얻은 도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려운 당 이론은 도맡아 설명해주었고, 문건이나 신문의 어려운 한자말들을 다 해석해주었고, 당의 새로운 전략 전술에 대한 판단과 해석방법을 가르쳐주었고, 연설을 하게 될 때마다 내용을 잡아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도 그는 이쪽을 조금이라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귀찮아하지 않고 성심껏 가르쳐주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가 놀랄 만큼 좋았고 그래서 나이에 비해 아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한 번 슬쩍 읽은 것 같은 문건내용들을 다 머리에 담고 다녔다. 그러니 네댓 차례나 읽었다는 당사를 줄줄이 외워대는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런 조원제를 탐내는 데도 많았다. 사령부 선전과에서 끌어가려고 하는가 하면, 출판과에서 오라고 했고, 후방부에서도 손짓을 했다. 그런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면 화선투쟁을 하는 부대에 비해 훨씬 더 안전하고 몸이 편할 수 있었다. 사령부의 각 조직은 우선적으로 보호되었고, 그 조직원들은 가능하면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보투도 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조원제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옆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런 조원제를 생각할수록 이태식은 가슴에 뚫린 구멍이 커질 뿐이었다. 조원제가 산을 떠나야 한다는 당의 결정을 알았을 때 이태식은 곧바로 시정을 건의할까 했었다. "영웅"이라는 자신의 영향력을 앞세우면 시정이 안 될 것도 없었던 것이다. 당의 결정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그다 붙들어놔도 남은 것은 죽을 일뿐이다. 그려, 그리 똑똑헌 것으로나, 그 시퍼런 나이로나 시방 죽기로는 너무 아깝다. 가서, 무신 수럴 써서라도 죽지 말고 살아나그라. 그려서 그 존 머리, 그 씬 뚝심으로 우리 죽은 담에라도 찰지고 끈끈허게 투쟁허는 것이여. 샘얼 짚이짚이 팜스로 찔기게 투쟁혀나가는 것이 니가 헐 일이고, 그 일얼 잘혀야 우리가 먼첨 죽는 뜻도 되살려지는 것잉께. 그려, 가그라. 가서, 니 목심 닿는 디꺼정 삼스로 니가 맡은 역사투쟁얼 허는 겨,’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했었던 것이다.
"연대장 동무, 또 조 동무 생각 허시오?"
강경애가 이태식 옆으로 가까이 오며 말을 걸었다.
"이, 강 동무..."
이태식이 생각에서 깨어나며 앉음새를 고쳤다.
"연대장 동무가 똑 조 동무허고 연애라도 헌 것 겉으요."
강경애가 이태식의 옆에 앉으며 불쑥 말했다.
"금메, 여자였으먼 그랬을란지도 몰르제."
이태식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 생각으로넌 조 동무가 영리헌께 고비고비럴 잘 넴길 것 겉은디요."
"나도 그리넌 생각허요."
"글먼 인자 맘 단도리허시씨요. 부모자석 지간에도 사람은 다 이별허는 것이요."
"그려, 강 동무 말이 맞소."
이태식이 담배쌈지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 동무도 맘이 강단짐스로도 정이 많은디, 워디 있드라도 그 평상에 연대장 동무럴 잊어뿔겄소."
"그려, 그려, 있는 집 자석치고 그리 난 칙 안 허고, 맘 따땃허니 정 많기로 에로운 일이요."
이태식은 말이 담배에 침을 두 번, 세 번 적시고 있었다.
"음마, 날이 썬들기린다 혔등마 폴세 물오리가 와뿌렀소."
강경애가 저편 하늘을 보며 감탄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소리로 말했다.
"폴세 물오리가!"
이태식의 눈길도 강경애가 보고 있는 하늘 쪽으로 옮겨졌다. 정연하게 줄을 선 기러기들이 남쪽 산줄기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 새들의 느릿거리는 날갯짓에 겨울이 감추어져 있었다.
"우리도 인자 채비럴 단단허닌 허야겄소. 개덜이 좋아라 허는 철이 오고 있응께"
이태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먼, 하먼, 그래야제라! 강경애는 영웅 이태식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것을 뻐근한 마음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 동무, 그간에 고생 참 많았습니다. 이별 기념으로 뭘 하나 드렸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박두병이 소탈하게 웃으며 빈손을 펴보였다.
"무슨 말씀을요. 저도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걸요."
손승호도 웃으며 빈손을 펴보였다.
"그래요, 빨치산의 이별에 무슨 물건을 주고받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우리 서로 마음을 주고받읍시다."
박두병이 뭉툭하게 큰 코를 벌름했다.
"예,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 생각의 일치가 손승호는 자못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자신이 그 말을 할까 했었는데 어색할 것 같아 그만두었던 것이다. 지금도, 저도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해야 하는 건데 말이 그렇게 나가지 않았다.
"이거 받으세요 귀순증입니다. 만일의 경우에 사용하십시오."
박두병이 접은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내밀었다.
"예에..."
손승호는 어떤 긴장을 느끼며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김범우 만나시거든 그때 일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내가 일부러 떼놓았던 거라고요.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결과적으로 그 사람 말이 맞아떨어진 셈이지요."
박두병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동안 무사한지나 모르겠군요."
손승호는 귀순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글쎄요, 워낙에 거칠었으니. 그 사람이 무사하면 손 동무 사업에도 도움이 클 텐데요."
"그러기를 바라야지요."
"예, 손 동무도 부디 무사하시길 빕니다."
박두병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손승호는 그 손을 잡았다.
"손 동무, 그간에 맘고생이 많았어요. 우리의 투쟁경험이 손 동무의 글 솜씨로 씌어져 세상에 널리 퍼질 날을 우리 함께 기약합시다."
"예, 그러지요."
그들은 서로의 손이 으스러져라고 힘주어 잡았다.
"선요원이 범바위까지 안내할 겁니다."
박두병의 목소리가 약간 잠기는 듯했다.
"예, 부디 건강하십시오."
손승호는 발 빠른 선요원의 뒤를 따라 박두병한테서 멀어지고 있었다. 손승호는 고개를 넘어서면서도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박두병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손승호는 덕유산을 떠나고 있었다. 오십년 구월말에 산으로 들어왔다가 공교롭게도 오십이년 구월에 산을 떠나고 있었다. 산에서 보낸 세월이 햇수로 삼 년이고, 만으로는 이 년이었다. 그 동안에 겪어낸 수많은 일들이 떼어놓는 걸음걸음마다 얽혀들고 있었다. 큰일에서부터 작은 일까지, 겪고 본 모든 것들이 결코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산에서 겪은 일들은 그 어느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작정하고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으려고 줄기차게 애썼던 것이다. 치열할 수밖에 없는 산생활의 특수성과 그 노력은 서로 합치되어 아무리 사소한 일도 잊어버린 것이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든 기억에서 떠올리기만 하면 그때의 주변풍경이며, 분위기며, 냄새까지 그대로 되살아나고는 했다. 어줍잖은 것이었지만, 자신이 쓴 글을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외우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었다. 박두병의 말대로 그 체험의 기억들을 모조리 글로 옮겨놓으면 몇 권의 책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 개인의 체험일 수가 없는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자 했던 데는 언제인가 기록으로 남기려는 욕구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손승호는 고향으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고향으로 잠입해 긴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고향을 떠난 다음의 세월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벌써 머리에 엮어져 있었다. 정의로운 역사를 위하여 새로 시작하는 싸움 - 박두병의 이 말을 그는 전적으로 수긍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야 하는 것을 나서게 되었다. 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길이 죽음으로 이어져 있는 길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나서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목숨이 죽음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목숨이 있는가. 그러나 이 보편적 명제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건 죽음을 종교적으로 초월해서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자각으로 죽음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추상적일 때 두려움은 생기고, 현실의 안위에 집착할 때 그것은 증폭되는 것이었다.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각을 기피하는 자에게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자각한 자에게 비로소 역사는 시간의 단위구분이 필요 없는 생명체인 것이다. 역사는 시간도, 사건도, 기록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저 먼 옛날로부터 저 먼 뒷날에 걸쳐져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인 것이다. 올바른 쪽에 서고자 한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으로 엮어진 생명체. 그래서 역사는 관념도, 추상도,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뚜렷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솥뚜껑 같은 사람의 힘과 의지로 역사는 크는 것이다. 솥뚜껑은 하나가 아니었다. 솥뚜껑은 수없이 많았다. 이제 자신도 그 뒤를 따라가는 하나의 솥뚜껑이고자 했다.
"동무, 여그가 범바위요."
선요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손승호는 앞에 우뚝 솟은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집채보다 훨씬 큰 바위의 형상이 흡사 무슨 짐승이 버티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바위의 무게감이 가슴에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금니를 꾹 맞물었다. 그래, 너처럼 억세고 단단하게 버티리라.
"여그서부텀 알로 내래갈수록 조심혀야 쓰요."
"알겠소. 수고하셨소."
"글먼 조심혀서 잘 가씨요."
선요원이 돌아섰다.
"동무도 잘 가시오."
손승호는 선요원의 등을 보고 말했다. 그의 뒷모습이 문득 솥뚜껑처럼 느껴졌다. 솥뚜껑의 죽어가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박난희의 모습도 떠올랐다. 무대에 서시를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손승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돌아섰다. 산의 정적이 왈칵 끼쳐왔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입산을 하고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혼자 떨어져 있었던 때가 없었다. 토벌대의 공격으로 어쩌다가 외톨이가 되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비상선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상선으로 동지들과 다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찾아갈 비상선이 없었다. 오로지 찾아갈 거점이 있을 뿐이었다. 산의 정적이 그대로 외로움으로 바뀌고, 눈 아래로 펼쳐진 드넓은 공간이 외로움의 바다로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그 바다를 혼자 헤엄쳐나가야 한다. 손승호는 다시 범바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발을 내디뎠다. 걸음을 떼놓기 시작한 그는 금방 행동이 민첩해졌다. 총도 배낭도 없어서 그의 몸놀림은 더욱 빠른지도 몰랐다. 그는 무슨 소리 한 가닥 내지 않고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완전히 어두워져서 산을 벗어난다... 외딴 민가를 찾아 옷을 바꿔 입는다... 날이 새기 전에 그 민가에서 남쪽으로 백 리 이상 벗어난다... 그 다음에 어디서 삽이나 괭이를 구한다... 그리고 논길만 타고 남행을 계속한다... 들판이 계속 이어져 있어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의 행동만큼 빠르게 머릿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각이었다. 두어 시간을 줄기차게 산을 타 내린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산을 벗어나 야산으로 붙자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위로 흘낏 눈길을 돌렸다. 해거름이 다 되어 있었다. 곧 어둠살이 내리기 시작할 시각이었다. 그는 은신처를 찾으려다가 발을 되돌렸다. 목이 너무 말랐던 것이다. 땀으로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개울로 빠르게 걸어갔다. 산 개울은 수량이 많으면서도 물소리는 나지막했다. 산이 거의 끝나고 있어서 비탈의 경사가 심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는 머리를 박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은 흐른다. 끊임없이 흐른다, 흘러서 끝끝내 바다에 이른다. 인민해방의 역사도 그와 같다. 이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인민해방의 날을 창조한다. 물을 양껏 마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쪼그려 앉은 그는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탕! 그의 몸이 솟구치듯이 벌떡 일어났다. 탕! 탕! 탕! 그의 몸이 빙글 돌면서 휘청 꺾였다. 그리고 개울물로 첨벙 곤두 박혔다. 가슴이고 배에서 솟구치는 피가 금방 개울물을 붉게 물들이며 풀려나 가고 있었다. 나지막한 왼쪽 등성이에서 네댓 명이 이쪽으로 달려오며 외치고 있었다.
"명중이지?" "틀림없어!"
"표적이 너무 좋았어!“
37. 겨울과 함께 떠난 영웅 이태식
"김 동지, 자꾸 그러지 맙시다. 김 동지의 그 좋은 학벌을 언제 써먹으려고 그럽니까?"
대한 반공청년단 지부단장의 마땅찮아하는 어투였다.
"글쎄 내 몸을 좀 보십시오. 좌우익이 행동으로 정면대결을 벌이고 있는 이런 형편에 무슨 일을 맡자면 학벌보다는 몸이 튼튼해얄 것 아닙니까. 몸이 이 모양이 돼가지고 나 혼자 행동하기도 불편한데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내가 통솔력이 있다하더라도 몸 성한 사람들이 누가 이런 병신한테 명령을 받으려고 하겠어요. 나부터라도 얕잡아보고 아니꼽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딴 사람을 좀 찾아보도록 하세요."
김범우는 상대방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아주 겸손한 태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오. 김 동지 정도 불편한 걸 가지고 병신이라고 하는 건 말이 안돼요. 그 정도면 활동에 별다른 지장이 없고, 오히려 대원들에게 역전의 용사라는 걸 과시할 수 있어서 더 효과가 클 수도 있어요."
지부단장은 꽤나 능숙하게 김범우를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예,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은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법인데,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속으로 많이 결리고..."
"김 동지,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오. 사양이 지나치면 동지의 사상을 의심하게 돼요."
지부단장은 얼굴을 구기며 급소를 찌르고 들었다.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란 말은 일이년 사이에 대유행을 이루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은 이런저런 경우에 상대방의 기를 꺾거나 위압하는 데 더 없이 효과가 큰 무기였다. 반공사상 만능시대다운 현상의 하나였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김범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거 보시오, 윤 단장!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시오? 빨갱이라면 당신보다 내가 더 치떨리는 사람이란 걸 똑똑히 아시오. 내 몸이 누구 땜에 이 꼴이 됐는데. 내가 몸만 성했으면 그까짓 대대장 자리는 우습소. 바로 당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사람이라 그거요. 사람을 알려면 똑똑히 아시오!"
상대방이 이쪽의 허파를 찌르고 들었다면 김범우는 상대방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아니, 김 동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능력 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일 좀 하자는데, 남의 호의에 대해 그거 너무 하잖소."
지부단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금방 수세가 되었다.
"호의면 호의답게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그런 막말을 쓰는 건 예의가 아니잖소. 이 말도 안 되는 포로생활을 하면서 난 아무하고도 감정을 다치고 싶은 사람이 아니오."
김범우는 그쯤에서 이야기를 끝내려고 상대방을 더 몰지 않고 슬쩍 한 발을 물러섰다.
"나도 마찬가지요. 김 동지가 정 그렇게 몸이 불편하다면, 그럼 없었던 애기로 해둡시다."
"그리 이해해주니 고맙소."
김범우는 웃음 지으며 손을 내미는 여유까지 보였다. 김범우가 대한반공청년단에 가입한 것은 "면회심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사월 초순이었다. 그 단체에 가입한 것까지는 신분의 위장을 위해 필요했던 것인데, 귀찮은 일은 그 다음부터 생겨났다. 청년단이 벌이는 이런저런 일에 소집되었고, 그러다보니 직책을 맡으라는 요구를 몇 차롄가 받게 되었다. 그때마다 몸을 핑계 삼아 피해오다가 결국은 그렇게 부딪치게 된 것이었다. 반공청년단에서 하는 절대적인 일은 반공포로들의 수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단원들은 "면회심사"라는 것에 적극 동원되었다. "면회심사"라는 것은 말뜻 그대로 포로교환을 앞두고 북쪽으로 가겠느냐, 남쪽에 남겠느냐를 미리 가르는 조사였다. 수용소의 그 사전행위에 대해서 좌익수용소에서는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상대국의 포로는 완전히 상대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의 위반에 대한 항의시위였다. 그 항의시위와는 별개로 곤궁한 입장에 빠진 포로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익수용소에 있는 포로들이었다. 한 단위 육천 명의 수용소에서 좌나 우로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 사람들은 삼백 명에서 육백 명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인공기가 올라가든 태극기가 올라가든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면회심사"가 시작되면서 우익수용소에서는 반공청년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예비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소대마다 백지가 돌려지고, 무기명으로 남과 북을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백지에, 무기명으로 포로들은 누구나 맘 놓고 자기 속뜻을 적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백지는 그냥 백지가 아니었다. 소금물로 종이마다 포로들의 일련번호를 미리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걸 불에 쬐면 물기가 증발하면서 소금글씨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 조사를 통해서 북쪽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다. 그 종이에 그런 함정이 파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김범우는 뒤늦게 기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익이 곤경에 처할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좌익이 장악한 수용소에서 우익성향을 드러낸 포로들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회유와 협박을 지나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끝내는 죽어가는 폭력이 난무했다. 그리고 드럼통을 잘라 만든 똥통에 토막 난 시체들이 숨겨져 하수구에 똥과 함께 버려졌다. 그래서 거제도 앞바다에는 임자 없는 팔다리가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신문들에는 좌익포로들의 "폭동"과 함께 그런 사실이 "잔악무도한 공산주의자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보도되었고, 우익포로들의 "폭동"은 전혀 실리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포로수용소는 최전선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하와이 포로수용소를 거친 김범우로서는 세계 어느 포로수용소에서도 볼 수 없는 그 특수한 현상에서 6. 25라는 전쟁의 특성을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면회심사"를 계기로 포로들마다 입장이 드러나면서 대립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 "76수용소"의 도드 사령관 납치사건이었다. 도드 준장은 오월칠일 아침에 납치되어 사흘 동안 "포로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했다. 다음날로 콜슨 준장이 사령관으로 부임해왔다. 그는 이틀 동안 도드 준장의 구출에 노력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네 개 항의 각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첫째, 본인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들을 살상한 유혈사건이 있었음을 시인한다. 또 본인은 국제법에 의해 앞으로 본 수용소의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앞으로 폭행 및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만일 이런 사건이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은 본인이 지게 될 것이다. 둘째, 북한공산당 및 중공의용군들의 자유송환 문제는 판문점에서 토의되고 있다. 나는 평화회의에서의 결정을 좌우할 권리가 없다. 셋째, 도드 준장이 무사히 석방되면 본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강제 심사나 재무장 또는 개인 심사가 없을 것을 확언한다. 넷째, 도드 준장의 동의와 본인의 승인을 얻은 세칙에 의해 포로로 구성된 포로대표단을 조직할 것을 승인한다. 나는 귀측의 요청에 의해 이 회답을 보내는 바이다. 이 회답이 접수되는 대로 속히, 늦어도 오늘 하오 8시 안으로 도드 준장을 무사히 석방하겠다는 귀측의 양해 하에 본인이 서명한 이 서면 회답을 도드 준장을 통하여 귀측에 전달한다. 포로수용소 사령관 육군 준장 찰스 F. 콜슨’
도드 준장은 그날 밤 아홉시 반에 무사하게 석방되었다. 그러나 장군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도 미국의 세계적인 망신이었지만, 포로수용소에서 폭행과 살상을 자행했다고 시인한 것은 미군의 추악한 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콜슨 준장은 그런 각서를 발표한 책임추궁을 당해 십이일자로 수용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재직은 겨우 닷새였다. 그 뒤를 이어 보너트 준장이 부임했다. 그는 삼 단계작전을 강력하게 추진해나갔다. 일 단계, 지휘권 확립을 위한 병력 증강. 이 단계, 오백 명 단위의 소형 수용소로 재편성. 삼 단계, 면회심사를 거쳐 송환을 택한 친공 포로의 재심사와 좌우익포로의 분리 수용. 포로들의 분리와 재편성은 무장병력이 동원되어 강압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북쪽의 공작원들이 수용소에 인접한 민가들을 이용하여 암약할 것을 예방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철거명령이 내려졌다. 수용소 부근의 이천백여 가구는 사십팔 시간 안에 강제철거를 당했다. 그런 강력한 시행으로 수용소가 재편성되면서 김범우는 감투를 쓰라는 압력을 더 심하게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막사로 돌아오며 줄곧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는 계속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기왕 시작된 휴전회담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반공포로들을 다른 지역 수용소로 옮긴다는 말도 떠돌고 있었다.
외서댁은 가늘고 긴 풀줄기를 뽑아 검지손가락에 감고 이빨을 닦아댔다. 밥에 찍어먹을 소금도 아껴야 하는 형편에 이는 그렇게밖에 닦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매일 닦을 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세라도 심해지면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풀줄기를 감아 어설프게라도 이를 닦고 나면 입안이 개운해지며 순간적으로 기분이 반짝해지고는 했다. 그 맛에 외서댁은 이빨을 자주 닦는 편이었다. 이빨을 닦다보면 꼭 옛날에 소금으로 닦던 때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발이 가는 흰 소금은 아예 살 엄두도 못 내고, 발 굵은 회색 소금을 사 쓰는 형편이라 이를 닦자면 그것을 몽글게 빻아야 했다. 그녀는 그 소금빻기를 즐겼다. 장독대의 오목한 돌에다가 발 굵은 천염을 한 주먹 놓고, 끝이 뭉실한 돌로 조근조근 정성 들여 몽글게 빻아나갔다. 처녀 적에 봉숭아 꽃술과 잎을 정성스럽게 찧었던 것처럼. 발이 가늘어진 소금을 양쪽 가운데 손가락에 꾹꾹 눌러 찍어 이를 뽀드득뽀드득 닦아냈다. 네댓 차례씩 소금을 찍어 이를 닦고 나면 잇몸이 얼얼해지는 것이었다. 그 기분이 얼마나 개운한지 몰랐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바탕 하고난 기분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생각은 장독대의 하이얀 접시꽃을 생각나게 했고, 먼 세상으로 떠나간 남편을 생각나게 했고,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나게 했다.
"부지런도 허요. 외서댁 동무."
등뒤에서 들인 울림 좋은 굵은 목소리에 외서댁은 하대치라는 걸 직감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으쩌요, 닭지름은 다 장만혔소?"
하대치가 아침 냉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면 물었다.
"야아, 어지께 병마동 다 채왔구만이라."
외서댁이 고개까지 끄덕였다.
"이, 수고혔소. 근디, 보리밥에 못 비베 묵게 잘 단속허씨요이."
하대치가 건너편 물가에 자리 잡았다.
"다 일렀구만이라."
"이이, 말로 일러서 소양 웂소. 눈으로 똑바라지게 지켜야제. 맘이 꼭 아그덜 겉은 대원덜이 있어갖고 살짝살짝 비베 묵고 그러요. 요것 입다셔 봇씨요."
하대치가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머신디요?"
"다래럴 멫 개 땄소."
"음마, 다래가 폴세 익었습디여?"
외서댁은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내밀었다.
"폴세가 머시오. 시월이 다가는디."
손바닥에 놓인 네댓 개의 연두색 다래 하나를 외서댁은 조심스럽게 집어 입에 넣었다. 다래는 연하고도 달았다. 그건 산과일의 맛이면서, 대장 하대치의 따스한 마음이었다. 봄이면 가을에 저 다래를 따 먹어야지 하며 지나쳤고, 가을이면 다시 그곳을 지날 수가 없거나,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어 그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도 했다. 산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맛보는 다래였다.
"참 맛나구만요. 고맙구만이라."
"고맙긴넌. 실답잖게."
하대치가 뚱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강 동무넌 은제 뜨는 게라?"
외서댁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오늘 저녁에 뜰 참이요. 닭지름 잘 챙기씨요이."
하대치는 다시 다짐을 하고는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외서댁은 다래 하나를 다시 입에 넣으며 겨울투쟁 준비를 서둘러 끝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중대에서 닭기름을 볶아 짠 것도 그 준비 중의 하나였다. 닭기름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어느 법이 없어서 총 닦는 기름으로 제격이었다. 그런데 그 기름으로 깡보리밥을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 먹는 맛도 기막혔지만, 그러나 그건 그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빨치산의 이대 별식"으로 꼽혔던 것이다.
강동기는 대원 아홉을 뽑아 야간기습을 나서고 있었다. 겨울투쟁을 위한 총알 확보를 위해서였다. 지난 동계공세로 병력손실이 심해 후방부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버렸듯이 병기과도 거의 파괴상태에 빠져 지난날 같은 총알 공급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태식의 부대도 엇비슷한 시간에 지서습격을 나서고 있었다. 이태식의 부대가 때아니게 지서를 기습하려는 것도 총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강동기 부대의 공격목표는 벌교의 회정리 일구에서 삼구로 넘어가는 도래등에 위치한 초소였다. 그 초소는 지난겨울에 새로 생긴 것으로, 진트재 초소와 터널이 하대치에게 공격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읍내 안통이 공격당할 위험을 그 지점에서 일단 막자는 것이었다. 강동기의 부대가 그곳을 목표로 삼은 것은 우선 그 초소는 기관총으로 무장되어있지 않았다. 그 다음이, 산이 바로 옆이었다. 초소에서부터 소화네 집까지는 이백여 미터거리였고 거기서부터는 바로 제석산 겉자락이었다. 그러니까 진트재 초소와 읍내 경찰서 사이의 거의 중간지점인 그 초소를 신속하게 치고 산으로 붙으면 안전하게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초소에 배치된 병력은 경찰 넷이라고 했다. 이태식은 총알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적을 하나라도 더 무찌르는 동시에 수류탄이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까지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대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지서 하나를 한바탕 까뒤집는 적극적인 공격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 일오 결정"에다가 조원제까지 흉한 일을 당해버려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느 때 없이 어두웠던 것이다.
강동기와 대원들이 제석산 바깥줄기에서 어둠에 묻힌 기나긴 포구와 중도글판과 읍내 안통을 한꺼번에 내려다본 것은 자정이 얼마 안 남은 시각이었다. 강동기는 그저 어둠일 뿐인 회정리 삼구 쪽에 한동안 눈길을 박고 서 있었다. 그 어둠 어딘가에 아내와 딸아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간에 무엇을 먹고 살아왔을지... 그는 가슴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금니를 맞물며 고개를 단호하게 돌렸다. 그리고 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동무덜, 지끔부텀 정신 뽀짝 채리씨요. 우리덜 코밑이 초손께. 짜아, 내래갑시다."
강동기는 힘이 들어간 낮은 소리로 말하고는 혁대 구멍을 하나 줄였다. 그들은 빠르고 소리 없이 산비탈을 타 내리며 어둠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가을벌레들의 울음소리들이 그쳤다가는 이어지고 했다. 저편 포구 쪽의 어둠 속에서 가끔씩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끼륵끼륵 들려왔다. 어쩌면 보초를 서고 있는 놈들의 무슨 신호인지도 몰랐다. 기러기라는 놈들은 하늘을 날 때도 그렇지만 잠을 잘 때도 반드시 보초를 세웠다. 그놈들은 어찌나 귀가 밝은지 조그마한 인기척에도 즉각 신호를 울려 떼 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냥꾼들은 기러기 잡기에 애를 먹었고, 그래서 물오리 값은 집오리 값의 열 배가 더 되는지도 몰랐다. 강동기네는 현씨네 제각 뒤에서 일단 발을 멈추었다.
"동무덜, 초소넌 인자 엎어지먼 코 닿소. 근디 고것이 고개 몬뎅이에 달랑 올라 앉은디다가, 큰길얼 건느야 헌께 치기가 쉽덜 않소. 몬뎅이 초소에서 내래다보먼 큰길이 훤허니 뵌다 그것이요. 긍께 여그서 직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왼짝으로 멀찍허니 돌아서 큰길 반대편짝인 회정리 이구 짝에서 치기로 허겄소. 총언 나가 쏘기 전에넌 절대로 쏴선 안 돼요이. 글고, 여그서부텀 몸얼 땅개맹키로 낮추씨요. 제일비상선, 제석산 뒤골 미륵바우, 제이비상선, 오금재 너메 왕참나무 밑이요. 헹에 일 터지먼 둘썩 소조 짜논 대로 산에 붙도록 허씨요. 짜아, 뜹시다!"
강동기의 빈틈없는 작전 지시였다. 도래등은 제석산의 끝자락으로, 그 끝을 철길 가까이까지 대고 있었다. 큰길을 그 중턱을 무질러 깎아내리고 뚫려 읍내 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정리 삼구 쪽에서 보면 도래등은 제법 가풀막진 고개였다. 그 고갯마루의 오른쪽 등성이에 민가가 두 채 자리 잡고 있었고, 초소는 그 민가를 맞바라보며 왼쪽 등성이에 서 있었다. 강동기와 대원들은 회정리 이구와 초소의 중간인 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강동기는 등성이를 약간 남겨놓고 초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가 발을 멈추었다.
"뒤로 전달, 대열 옆으로."
그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공격대열이 갖추어졌다.
"옆으로 전달, 전진."
가로선 대열이 초소를 향해 움직여갔다. 초소의 불빛이 어둠 속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놓고 있었다. 그 구멍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으아앙, 으응응...’
강동기는 신경이 섬뜩 곤두섰다. 그러나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손간 판단을 했다. 컹! 컹컹컹! 우아앙, 컹컹!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어둠을 흔들어댔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저 쌍눔에 개새끼! 강동기는 그만 암담해지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구냐!"
"손들고 나왓! 쏜다!"
초소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전짓불 빛 두 줄기가 쭉 뻗치더니 어둠을 마구 헤쳐 대며 날뛰기 시작했다. 개는 더욱 기세를 올려 짖어대고 있었다. 개까지 다섯이다! 밀어붙이자!
"동무덜, 돌격!"
강동기는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들은 총을 갈기며 초소를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공비다!"
"저기다!"
초소에서도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초소를 얼마 안 남겨놓았을 때였다. 엉뚱한 데서 전짓불 빛들이 쏟아져왔다. 그리고 총소리가 갑자기 늘어났다.
"길얼 막어라!"
"포위해라, 포위!"
이런 외침도 터지고 있었다. 그 돌발 상황이 초소 건너편의 인가에서 일어난 것을 강동기는 알아챘다.
"엄니!"
비명이 터졌다. 강동기는 대원인 것을 직감했다. 그는 부르르 떨며 외쳤다.
"비상선! 비상선!"
대원들이 흩어져 뛰기 시작했다.
"잡아라! 도망간다!"
"산으로 튄다! 쫓아라!"
"동무덜, 이짝으로! 이짝으로!"
제각 쪽의 길이 막혔다고 판단한 강동기의 회정리 입구 쪽으로 뛰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큰길을 따라 내리막을 뛰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급히 꺾었다. 뒤따라 뛰는 대원이 서넛이었다.
"아이고메!"
그중의 하나가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동기의 마음은 돌아서고 있었지만 발은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날아오는 총알이 그를 쫓아대고 있었다. 민가들 사이를 헤집고 그는 산 쪽으로만 뛰었다. 그가 비탈의 산밭으로 나서서 뛰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총소리들이 난무했다. 제각 쪽으로 앞질러온 경찰이었다. 강동기는 총을 떨어뜨리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 더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먼동이 터올 때까지 도래등에서부터 제석산 바깥줄기 일대에는 수십 개의 횃불들이 겅중겅중 춤을 추었고, 그 사이사이에서 전짓불 빛들이 불눈을 번쩍거리며 어둠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햇살이 퍼지면서 경찰서 마당에 옮겨진 빨치산들의 시체는 모두 일곱 구였다. 그 소문은 읍내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날 밤 이태식의 부대 강경애도 죽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돌격대를 이끌고 앞장섰던 그녀는 대울타리 방어벽을 뚫다가 기관총에 난사 당해 대울타리 사이에 두 팔이 끼여 매달린 채 죽어갔다. 이태식은 지서를 점령하고 나서야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태식은 노획한 무기 대신 벌집이 된 그녀의 몸을 업고 돌아왔다. 이태식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 여자가 도래등을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고름 겹매듭이 풀어져 있었으며, 검정고무신은 한쪽 발에만 꿰어져 있었다. 눈이 뒤집힌 그 여자는 길가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본다는 것도 모른 채 읍내로 뻗은 큰길을 줄기차게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경찰서 마당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총을 맞은 일곱 구의 시체는 양쪽을 터 길게 펼친 가마니 한 장씩을 갈고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길게 뺀 염상구가 빠른 눈길로 시체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긴장의 빛이 가시며 그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구산댁도 사람들에게 밀리며 시체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살펴나갔다. 분명 아들과 사위는 없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구산댁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른 채 더듬더듬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도래등을 넘었던 여자가 경찰서 마당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여자는 뛰던 기세 그대로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광기 서린 그 여자의 눈이 시체를 훑었다. 그 여자의 눈이 한곳에 딱 멎었다.
"워메! 길자 아부지이"
그 여자는 마침내 울부짖으며 앞으로 튀어나가 시체 하나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긴 시체는 강동기였다.
"워메, 워메, 길자 아부지, 길자 아부지, 길자 아부지..."
남양댁은 싸늘하게 식은 강동기의 얼굴에 볼을 비벼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양쪽에서 시체들을 지키고 섰던 두 경찰이 한꺼번에 달려와 남양댁을 잡아 일으켰다.
"워째 그요, 냅두씨요, 냅 둬!"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남양댁은 두 경찰을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그러나 경찰들의 손은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여그 노란께라, 여그 놔!"
그녀는 경찰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안 되겄네, 안으로 끌고 가야제."
경찰 하나가 말했다. 그리고 곧 두 경찰은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끌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두 남자의 힘이었다.
"이눔덜아, 냅 둬어, 냅 둬! 죽었응께 인자 나 냄편이란 말이여어. 여그 놔, 놔아! 죽었응께인자 나 냄편이랑께로오."
경찰 부상 한 명에 공비 사살 일곱. 이것은 엄청난 전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전화보고는 도 경찰국을 놀라게 만들고 말았다. 도경에서 다시 걸려온 전화는, 당일로 도경국장이 직접 내려가 승전 축하식 및 유공자 표창식을 거행할 것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경찰서는 그만 잔치 분위기가 되어 모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없이 돌아치기 시작했다. 도경국장은 오후 두 시쯤 도착했다. 경찰서 마당에는 남국민학교 교실에서 전부 모아온 교단을 쌓아올려 단상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일곱 구의 시체는 단상 아래로 옮겨 눕혀졌다. 읍내의 유지란 유지는 다 모여들어 다투듯 단상차지를 하고 앉았고, 학교 운동장의 반 정도 크기의 마당을 읍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채우고 있었다. 단상 옆에는 벌교 상업고등학교 악대까지 동원되어 빠라빠라, 뿡짝뿡짝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벌교상업고등학교는 학제 변경에 따라 진작 중학교와 분리되었고, 회정리 일구 아래 방죽 옆으로 터를 넓게 잡아 옮겨가면서, 두 손이 악수하고 있는 표지가 찍힌 원조물자 바람에 건물을 번듯하게 지어 학교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악대가 생긴 것도 다 원조물자 덕이었다.
빠라빠빠, 뿡빠뿡짝...
그런데,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단상에 한 발도 올려놓을 수 없는 형편에 네 발까지 떡 올려놓고 있는 이색적인 존재가 있었다. 그건 한 마리의 개였다. 두 귀가 쫑긋하게 선 개는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었는데, 목에서 가슴으로 긴 어깨띠를 엇지게 두르고 있었다. 그 어깨띠에는 "충견만세"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인자, 잘 가씨요, 길자아부지... 근디, 워찌 요리도 허망허니 가뿐다요... 요리 허망허니 갈람사 아덜이나 하나 태와주고 가제... 부디 존 디로 가씨요이, 죽어서나 존 시상 만내 살어야제...’
소리 지를 기운도 다 빠져버린 남양댁은 유치장의 벽에 기댄 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해마다 그래왔듯 잎 다 떨어진 산을 북풍이 휩쓸면서 토벌대의 활동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찬바람에 잎이 지듯이 차츰차츰 수가 줄어들고 있는 빨치산들은 겨울을 맞으며 최소한의 소 투쟁으로 들어갔다. 토벌대를 맞아 상황이 불리해지면 두 명씩 소조가 되어 흩어져 싸웠고, 기습의 기회를 포착하면 다시 큰 덩어리로 뭉쳐졌다. 철저한 이정화령 이령화정의 전술이었다. 전투경찰이 주축을 이룬 토벌대가 아무리 작전을 본격적으로 펼친다해도 작년 겨울의 군작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병력과 화력이 그랬고, 작전기간도 길어야 삼사일이었다. 빨치산들은 우선 밥을 굶지 않아도 되는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경찰토벌대라고해서 전혀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병력과 화력은 빨치산 자신들에 비하면 월등했고, 기동력 또한 얕잡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빨치산들에게 전혀 없는 통신장비를 갖추고 있는데다, 산과 산을 이동하는 데도 길만 어지간히 뚫려 있으면 트럭을 동원했다. 그리고 경찰은 어느 면에서는 군인들보다 대적하기가 더 어려운 상대였다. 군인들은 능선을 타고 훑어 내리기 때문에 자기들의 위치를 다 노출시키는 데 비해서 경찰들은 계곡을 더듬어 올라오기 때문에 자기들의 움직임을 곧잘 은폐시켰던 것이다. 경찰은 그런 방법으로 기습을 시도했고, 포위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낮에 소조로 흩어졌던 하대치의 부대원들은 날이 어두워지며 비상선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서댁은 대원들이 도착하는 대로 인원을 파악해나가고 있었다.
"워찌 되얐소?"
외서댁이 긴장하며 한 대원에게 물었다.
"총 맞어부렀구만요."
그 대원이 힘없이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되얐소. 동무라도 성헌께."
외서댁은 그렇게만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 그리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른 대원이 이미 죽은 마당에 그런 물음은 살아온 대원을 괴롭히게 될 뿐이었다. 대원들이 모두 돌아왔다. 희생자는 더 늘어나지 않았다.
"유만복 동무가 총 맞어 죽었구만이라."
외서댁이 하대치에게 보고했다.
"유만복 동무가?"
하대치가 놀라는 기색이더니,
"지길, 또 한 사람이 떴구마. 그 쿠렁쿠렁소리 잘 질르든 동무가 가부렀이니 인자 개덜 보고 소리 질르자먼 외서댁 동무 혼자서 심이 들겄소."
그는 이내 감정을 감추며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도 더 이상의 말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천막 대신 담요 몇 장을 둘러쳐 불빛을 막고 저녁을 지어 먹었다.
"동무덜, 밥 따땃허니 묵었응께 밥값얼 한바탕 허기로 헙씨다. 우리가 소조 투쟁얼 헝께로 개덜이 아조 안심얼 허고 암디서나 천막을 치요. 고것이야 우리가 기둘리든 것잉께 워디 보고만 있겄소? 우리 빨치산에 맵고 짜운 맛얼 톡톡허니 봬야제."
하대치가 대원들에게 기습작전을 알렸다. 하대치는 이미 보아두었던 공격지점을 찾아 산줄기 두 개를 넘은 다음 골짜기를 타고 내렸다. 경찰토벌대는 야영을 하는 것도 군 토벌대와는 달랐다. 군인들은 골짜기를 빼고는 산중에서 야영을 하기가 예사인데 경찰들은 반드시 산을 벗어났다. 일단 개활지로 나간 그들은 손쉽게 민가를 차지하거나, 민가가 없으면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을 골라 천막을 쳤다.
"쩌어그 천막얼 잘 보씨요. 천막이 네 갠께 한 천막에 시물만 잡아도 합이 여든이요. 그리 되먼 우리 시 배가 되는디, 거그다가 저 여시겉은 새끼덜이 평지에다가, 개울물까지 끼고 천막얼 친 것이요. 반대 편짝에 있는 산이야 맥이 끊어져 우리가 못 붙을지 다 알고 저리 자리럴 잡은 것이요. 긍께로 여그서 공격을 허자면 평지럴 질러야제, 개울물얼 건느야제, 아조 에롭게 맹글어놨다 그것이요. 쌈이란 것이 서로 머리 짜내긴께, 우리넌 요러크름 허겄소. 외서댁 동무가 왼짝으로 싸악 허니 돌아서 먼첨 공격얼 허씨요. 소조로 간격얼 짝짝 벌래갖고, 그려서 개덜이 쫓아 나오면 워리, 워리 총알로 불러감시로 뒤로 빼다가 산으로 붙으씨요, 그 새에 나가 오른짝으로 돌아서 뒤통수럴 뽀개뿔겄소. 물을 말 있으먼 물으씨요."
하대치의 작전 설명이었다.
"웂구만이라."
외서댁은 주머니에서 빨간 띠를 꺼내들며 힘 뻗치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밤이고 낮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간에 싸움만 시작하려고 하면 빨간 띠를 머리에 동여맸다. 그녀는 개털모자 위에다가 빨간 띠를 질끈 동여매며 말했다.
"쩌것덜이 잠 푹 들었겄구만이라."
"그려도 적은 개덜언 보초를 단단허니 시운께."
하대치는 주의를 환기시켰다. 외서댁은 대원 일곱 명과 함께 개울가에 도착했다.
"우리넌 개덜얼 유인허는 것잉께 서로 간격얼 넉넉허니 벌리고 총얼 쏨스로 뒤로 물러스는 것이요. 몸덜 뽀오짝 붙이고, 총언 총구녕 하늘로 솟기게 허덜 말고 한 방이라도 지대로 쏘씨요이!"
외서댁은 물을 건너기 전에 다짐했다. 작전을 계획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외서댁의 부대가 뒷걸음질을 하며 개울을 얼마 안 남겨 놓았을 때 반대쪽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포위당했다. 포위!"
"한쪽으로 몰리지 말앗!"
이런 발악적인 소리와 비명소리가 적진에서 터지는 것을 들으며 외서댁은 다시 개울물에 발을 넣었다. 그 순간 개울을 건너고 싶지가 않았다. 이쪽에서도 함께 공격을 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대장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었다.
"동무덜, 한바탕썩 더 쏘고 물얼 건느겄소!"
외서댁은 대원들에게 외치며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외서댁은 비상선으로 돌아와서야 물에 젖은 발이 시려운 것을 느꼈다. 그러나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하대치의 부대는 꽤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대원덜 워찌 되얐소?"
외서댁을 보자마자 하대치가 물었다.
"다 무사허구만요. 뒷일언 워찌 됐는게라?"
"아조 잘 되얐소. 개덜이 쌩똥깨나 싸댐스로 꼬드라졌을 것이요."
하대치의 목소리가 만족스러웠다.
"근디, 워째 그러고 기시오?"
외서댁은 하대치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의아스럽게 물었다. 하대치는 머리 오른쪽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쪼깐 다친 모냥이요."
"워메, 머리럴! 싸게 불 피고 봐야제라.“
외서댁은 덜컥 겁이 났다.
"우선 여그 떠서 안전헌 디로 가고 난 담에 봅씨다."
그들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하대치는 걸으면서 대원들이 듣지 못하도록 신음을 씹고 있었다. 피는 계속 옆볼로 흘러 목을 타 내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류탄 파편에 맞은 것이었다. 맞은 순간 까마득해졌었고,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통이 심하고 피가 멎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볍게 다친 것이 아닌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워메, 워메, 큰 탈 만낼 뿐혔소. 워찌 요리 크게 다치고도 참어집디여."
불을 피우고 상처를 들여다본 외서댁은 금방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건 그녀의 호들갑이 아니었다. 반 뼘이 넘게 찢어진 상처가 헤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헤벌어졌다는 것은 잘못 본 것이었다. 상처가 벌어진 만큼 살이 떨어져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워메, 쪼깐만 더 심혔드라먼... 외서댁은 그 아슬아슬함에 뒤늦게 가슴이 벌떡벌떡 뛰고 있었다.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는 다른 대원들의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외서댁은 대장, 아니 영웅 하대치가 없는 부대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워쩔께라, 피가 자꼬 흘르는디이."
외서댁이 안타까워 울상을 지었다.
"여그 존 약이 있소. 요것이 피럴 뽈아묵어 쑥떡이 되게 두툼허니 뿌리씨요."
하대치가 꺼내놓은 것은 담배쌈지였다.
"워메, 담배가리야 칼이나 연장에 살짝 다친 디나 뿌리는 것이제, 요리 살점이 떨어져 나가뿐 짚은 자리에 뿌리면 속살이 애리고 씨려 사람이 워쩌크름 살아진다요."
외서댁이 고개를 내저었다.
"싸게 뿌리씨요. 명령잉께!"
외서댁을 노려보듯 하는 하대치의 단호한 말이었다. 외서댁은 하는 수 없이 쌈지를 집어 들었다. 하대치는 그날 밤부터 꼬박 사흘 동안 열에 들뜨고 한기에 떨어대면 앓았다. 외서댁은 날마다 비트를 옮겨가며 하대치를 치료했다. 치료라고 해야 어떻게 해서든 죽을 쑤어서 떠먹이는 것이었고, 담요를 다 모아 몸을 감싼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러다가 그만 죽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날마다 피가 타들었다.
"외서댁 동무가 나러 살려냈소."
몸을 일으킨 하대치가 말했다.
"음마, 무담씨 영웅이간디라."
고마움의 눈물을 머금으며 외서댁이 한 말이었다. 하대치는 이가 갈리도록 아프던 상처의 통증이 말끔히 가신 것을 느끼며, 자신이 죽을 고비를 요행히 넘겼다는 것을 되짚어 생각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겨울은 매운 바람과 거친 눈보라에 휩싸여 변함없이 혹독하게 추웠다. 토벌대들은 지리산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길목이란 길목은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그것은 보투를 차단시켜 추위 속에서 굶겨 죽이자는 장기작전인 동시에, 그래도 보투를 안 할 수 없는 빨치산들을 손쉽게 잡자는 투망작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토벌대들은 그런 안일한 작전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쪽 골짜기를 불시에 습격해 들어오기도 했다. 겨울이면 북쪽 골짜기들이 남쪽 골짜기보다 훨씬 더 추워 빨치산들이 남쪽 골짜기로 몰린다는 것을 그들은 일찍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급습을 가해오는 경우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때가 많았다. 새로 투항했거나 생포한 빨치산들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빨치산들은 대원 중에 하나라도 행방불명이 되면 비트부터 옮기기에 바빴다. 새로운 투항자들은 전투원보다 환자들 속에서 많이 생겨났다. 환자트에는 치료약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보투가 어려워 식량마저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총상을 입었거나 중증의 동상환자들은 마음이 약해져 마지못해 어느 순간 뒤집혀지고 말았다. 한 사람이 마음 변해버리면 같은 환자트의 네댓 명,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포로 신세가 되는 경우는 흔했다. 그렇게 생포된 환자들 중에서는 끌려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기도 했고, 도망가는 척해서 유인자살을 하기도 했다. 어느 환자트에서는 한 명의 변심으로 토벌대가 들이닥치게 되자 한 환자가 몰래 감추고 있었던 수류탄을 터뜨려 환자 네 명과 토벌대 세 명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지리산의 가혹한 추위 속에서 빨치산들은 얼어 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 죽어가며 시나브로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김범준은 이월의 추위 속을 이해룡에게 업혀 다니고 있었다. 그러기를 벌써 두 달째였다. 그건 기동이 어려운 환자는 반드시 환자트로 보내야 한다는 규정 위반이었다. 그러나 이해룡은 규정 위반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환자트로 보내달라는 김범준의 의사도 막무가내로 묵살한 채 김범준을 업고 다니며 토벌대와 싸우고 있었다. 김범준은 동상으로 발이 썩어들고 있었다. 중국의 투쟁에서부터 동상을 앓아온 그는 압록강을 건너올 때 벌써 왼쪽 발가락 두 개가 없는 몸이었다. 빨치산 출신들은 누구나 겨울이면 동상 재발, 여름이면 무좀극성으로 남모르는 고생들을 했다. 김범준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겨울을 지리산에서 나면서 동상이 심하게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지리산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십이월 중순에 그는 결정타를 입게 되었다. 토벌대에게 포위를 당해 쫓기는데 그는 몸을 숨길 데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적들의 눈초리에 에워싸인 눈 덮인 산은 몸뚱이 하나를 숨길 데가 없이 갑자기 손바닥만 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계곡의 개울에 부풀어 올라 있는 얼음덩이였다. 키 높이로 층이 진 개울에 물이 쏟아져 내리면서 얼어붙기 시작한 얼음이 커다란 바위처럼 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그 옆구리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구멍으로 다급하게 몸을 디밀었다. 그는 물로 풍덩 빠지면서 질겁을 했다. 틀림없이 얼음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 물이었던 것이다. 급히 쏟아져 내리는 물이라 그 안은 얼어붙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몸을 숨기기에는 그것이 오히려 오락가락하는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질이 된 동상에 그 냉탕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고, 또한 흩어졌던 부대를 다시 만나기까지도 시간이 너무 걸렸던 것이다. 온몸이 얼음덩이가 된 그는 이해룡을 만나면서 실신을 하고 말았다. 그는 가가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발은 이미 동상이 극심해져 걸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발가락마다 흑자줏빛으로 변해 썩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환자트로 보내달라고 몇 번씩이나 말했다. 원칙을 강조하기도 했고, 명령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추하게 만들지 말아달라고 간청도 했다. 그러나 이해룡은 아침저녁으로 고름을 닦아내고 냉수찜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월이 끝나가면서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동백꽃이 지고 진달래 꽃망울들이 부풀어 오르는 가운데 이태식이 죽었다는 소문이 백아산 지구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해 조계산지구와 백운산지구로 번져나갔다. 부하 세 명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쏘고 죽었다고도 했다. 죽은 것도 통명산 줄기라고도 했고, 무등산 기슭이라고도 했고, 백아산 매봉이라고도 했다. 어쨌거나 "백아산 호랑이"로 "강철부대"를 이끌며 도당의 영웅칭호까지 받았던 머슴 출신 이태식은 영웅다운 죽음의 전설을 남긴 채 겨울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갔던 것이다. 겨울은 또 많은 빨치산들을 데려갔다. 그래서 지구마다 부대개편을 하게 되었다. 지구 기동연대장 하대치는 지구 부사령관이 되었다.
38. 휴전선으로 변한 삼팔선
부산에 머물러 있는 정부는 월 십오일 긴급통화조치령을 발표했다. 원 단위를 환으로 바꾸면서 통화를 백 대 일로 인하했던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조처는 신문들을 장식했고, 사회 일부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돌풍에 휩쓸린 것은 어디까지나 돈 많이 가진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눈 껌벅거리며 듣는 소식일 뿐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십분의 일로 줄어들어 버렸다고 야단들이었고, 빚 쓴 놈만 살판났다고 떠들었고, 현찰이 아닌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이익이라고 수선을 피웠다. 염상구는 그런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들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채로 재산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소리만 귀에 담겨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가 갑자기 그의 입에서 "개새기, 십새끼"로 둔갑하고 있었다. 그가 화폐개혁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공장을 가진 자기는 오히려 이익이라는 것을 납득하기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그는 궁리 끝에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 앞에다 "장하신"이란 말을 붙이기로 했다. 얼른 떠오르는 말로 "위대하신"을 붙일까 했다가 질겁을 했던 것이다. 그건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 동지"에 붙여진 말이었던 것이다. 인공 다음부터 "동무"라는 말은 써서는 안 되는 말이 되었고, 그 대신에 "친구"라는 말로 바뀐 세상에...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던 것이다. 염상구와 반대로 죽을상이 되어 있는 것은 현찰 신봉자 유주상 같은 사람들이었다. 화폐개혁 바람이 미처 잠들기도 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신문들을 요란하게 뒤덮었다. 소련 수상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삼월 오륙일자 신문들은 양쪽 끝이 치켜 올라간 콧수염 짙은 스탈린의 사진을 큼직큼직하게 실어대며 소련이라는 나라가 곧 무너져 내려앉고, 이승만 대통령이 부르짖는 북진통일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처럼 수선들을 피워대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이용하자는 것이었을까. 한동안 뜸했던 휴전반대 궐기대회가 전국적으로 벌어지면서 사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른들은 궐기대회에 동원되는 것을 지겨워했고, 조무래기들은 궐기대회가 마냥 좋았다. 그날은 학교가 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휴전반대 궐기대회"는 유월로 접어들면서 느닷없이 "북진통일 궐기대회"로 바뀌었다. 궐기대회에 동원된 사람들은 왜 그 명칭이 바뀌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른 채 마이크에서 선창하는 구호를 따라서 외칠 뿐이었다.
유월 십팔일 새벽 김범우는 마산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반공포로 분리수용으로 그는 마산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김범우는 철조망을 벗어나고 나서 새벽별을 바라보며 거제도에 있는 정하섭을 생각했다.
‘너는 북쪽으로 가는가. 그래, 가거라. 남쪽에 집을 두고 북쪽으로 가는 것이 어찌 너 혼자뿐이겠는가. 난 이제 고향으로 간다. 너와의 약속은 꼭 지켜나갈 것이다. 휴전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시한부로 멈춘 것일 뿐인 휴전은 우리에게 내일로 남겨진 숙제다. 그건 새로운 분단으로 남겨진 민족의 숙제다. 그 숙제를 가지고 너는 북으로, 나는 남으로 헤어지는 것이다. 그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 휴전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서로 갈라져 살아야 하는 비극적인 시대의 시작 말이다. 그건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너와 나는 그 싸움을 위해 함께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닌가. 부디 잘 가거라.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꿋꿋하자꾸나.’
김범우는 사흘이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그를 놀라게 할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도 또한 집안 식구들을 소스라치게 할 충격을 가지고 있었다. 범준 형님이 인민군 고급군관으로 돌아왔었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고, 집안 식구들은 그의 지팡이 짚은 절룩거리는 다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부터 알려주었지만 김범우는 그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님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형님은 그의 마음속에 이미 재회를 체념한 동경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형님은 인민군 고급군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거듭된 충격이었다. 형님의 그 행로가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은 역사의 웅변으로 가슴을 쳐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김범우는 생략을 모르는 어머니의 사설조의 이야기에 그만 답답함을 느꼈다.
"입산얼 혔지."
"그담은요?"
"그것이야 워찌 알겄냐. 그간에 수도 웂이 많이 죽었다는디..."
그 동안 많이 늙어버린 어머니의 말끝을 흐리며 옷고름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마루에 걸터앉은 김범우는 고읍 들녘 저 멀리 보이는 산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민족독립을 위해 빨치산투쟁을 했을 형님은 이제 민족과 인민해방을 위해 저 산속에서 빨치산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상진 선배도 물론 함께지. 염 선배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 뚝심 좋은 실천가, 어렸을 때부터 형님을 그렇게 우러러보더니 결국 형님은 그의 차지가 되었군. 그는 그만한 자격이 있지. 그런데, 형님이나 염 선배는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살아 있기나 할까. 살아 있다면 휴전이 목전에 닥친 이 마당에 어찌 하려는 것일까. 빨치산은 정규군이 아니니까 휴전회담에서 거론될 리가 없다. 정하섭의 말대로 그들은 지하로 잠적하는 것일까. 글쎄... 잠적하기에는 너무나 노출되어 버린 인물들이 아닐까. 김범우는 불현듯 형님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여 몸 씻거라. 아부님헌테 인사디리러 가야제."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였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자식의 절차가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 그래야지요."
김범우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분꽃이며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같은 여름 꽃들이 무성한 화단에 눈길을 주며 목욕탕으로 걸어갔다. 비로소 오래 간직된 안정감이 되살아나며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앙징스러운 나팔 모양의 분꽃 하나를 따서 입꼬리에다 물었다.
"몸이 많이 상허셨는가요?"
어느새 목욕탕 앞으로 옮겨와 있던 아내가 시어머니 쪽 눈치를 빠르게 살피며 물었다.
"아니오.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거요."
김범우는 그때서야 아내를 제대로 쳐다보며 엷게 웃었다. 아내의 눈이 새롭게 젖어들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눈에서 소식 없이 헤어져 있었던 날들이 꽤 길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집안이 다 찌울렀는디, 몸이 성허셔야제라."
아내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내밀었다. 김범우는 무표정하게 옷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내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몸이 성해서 뭐하게?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키게?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당신이 시집올 때 같은 시집의 형편은 당신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나헌테 그런 기대 하지 말게. 당신도 앞으로는 고생 좀 하고 살 각오를 해야 해. 그러고 말야, 시집 형편이 이렇게 된 것이 당연하다는 걸 빨리 깨닫도록 하게.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은 앞으로 남은 세월을 계속 불행하게 살게 돼.’
김범우는 목욕탕으로 들어가며 언제인가는 아내에게 해야 될 말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는데 신경은 또 오른쪽 다리로 쏠려갔다.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밀어 돌렸다. 그러나 또 다리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지고 말았다. 옷을 벗게 될 때마다 되풀이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의지가 지고 마는 싸움이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에 찍힌 흉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김이 서로 다른 세 개의 흉터는 언제 보아도 흉측스러웠다. 문신이나 화인처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흉물이었다. 미군의 포탄이 찍어놓은 "포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그 흉터들은 더욱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집을 떠난 다음부터 겪었던 일들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생각들을 떼쳐내며 목욕통 안으로 뛰어 들었다. 찬물의 선뜻함이 일시에 온몸을 파고들며 그 생각들이 다 달아났다. 그는 그 생각들을 더 멀리 쫓기라도 하듯 푸우푸우 소리 내며 낯을 씻어댔다. 시원함이 살 속으로 아련하게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낯을 훔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는 흠칫 놀랐다. 왼쪽 팔뚝에 찍힌 푸르딩딩한 글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건 "반공"이었다. 수용소에서 대한반공청년단에 가입하면서 의무적으로 새겨야 했던 문신이었다. 놀라긴 뭘 그렇게 놀라나. 앞으로 평생 신원보증서가 돼줄 텐데.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일깨웠다. 휴전이 된 다음의 남쪽사회에서는 그 기분 나쁘게 푸른 색깔인 두 개의 글자가 상이군인만큼 당당하게 행세하게 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상이군인들의 당당하다 못해 횡포에 가까운 행위는 집으로 돌아오는 사흘 동안 여러 곳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그들은 서너 명씩 패가 되어 닭털에 빨강, 파랑, 노랑 물을 들여 가지고 누구에게나 사라고 내밀었다. 그걸 사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네의 희생을 내세우며 으름장을 놓았고, 그래도 사지 않으면 빨갱이 운운하며 욕을 해대기 일쑤였다. 돈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횡포를 어디다 고발할 데도 없었다. 몸이 성한 자 모두가 그렇듯이 경찰들마저도 그들 앞에서 기가 죽었다. 그들은 국책인 멸공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하나뿐이 몸이 불구가 되었으므로 그 정도의 치외법권은 맘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서 아무런 생계대책을 세워주지 않는 한 그들의 행동은 더욱 당당해지고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경찰들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불구인 그들은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성한 사람들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동시에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두 개의 글자가 그들 상이군인들과 맞먹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할 거라는 생각에 떨떠름하게 웃었다.
"용감무쌍한 반공포로 여러분, 오늘 영시를 기하여 전국의 각 수용소에서는 이만오천여명의 반공포로들이 석방되어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탁월하신 영도력이 이룩하신 장거요 쾌거인 것입니다. 유엔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만오천명이나 되는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석방시키는 것은 밖으로 세계만방에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공포하는 것이며, 안으로 북괴 김일성 집단에게 자신감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대한을 택함으로써 북괴 공산집단이 얼마나 사람이 살 수 없는 잔악하고 무도한 집단인가를 세계만방에 백일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입증할 반공포로들은 또 남아 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오늘 석방되지 못한 팔천여 명이 아직 수용소에 남아 있다 그것입니다."
대령은 열렬하게 연설문을 읽어나갔던 것이다.
목욕탕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내리감은 김범우는 가슴팍을 느리게 문지르면서 대령이 역설하던 그 목적이 과연 제대로 달성되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팔천 명까지 합하면 삼만삼천 명이고, 인민군포로는 우선 접어두고 의용군포로만 놓고 따져보면, 의용군 사십만 중에서 반이 자원이고 반이 강제라고 치고, 후퇴 직전까지 양쪽에서 십만씩이 죽었다고 잡으면 이십만이 남고, 그중에서 반이 후퇴하고 반이 포로가 되고, 아니지, 의용군포로가 십만까지 되지 않았지. 처음부터 다시, 양쪽에서 십여만씩 죽고, 나머지 십만에서 오만이 후퇴, 오만이 후퇴 포로. 포로 오만을 둘로 나누면 이만오천씩. 강제로 끌려 나간 이만오천 명이 전부 반공포로가 되었다면, 인민군포로 중에서 반공포로가 된 것은 팔천 명.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반반이 아니던가.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나, 의용군포로 오만 중에서 고향을 버리고 북쪽으로 간 것이 삼만삼천, 반공포로가 만칠천, 이렇게 되면 의용군포로에서부터 목적달성에 실패한 게 아닌가. 거기다가 인민군포로 중에서 반공포로가 된 만칠천은 어떤가. 인민군포로의 전체 수와, 북쪽체계의 성립과정에서 계급적 피해를 입었을 사람들과, 반공포로를 만들기 위한 그 온갖 행위들과, 그런 것들을 다 감안해보면 인민군포로 중에서 반공포로 만칠천이라는 것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숫자인가. 김범우는 비로소 반공포로라는 허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쓰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 같은 사람도 자유대한의 체계우월을 입증하는 반공포로가 되고 있으니 더욱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성경찰서 서장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 참석자는 네 명이었다. 보성경찰서장 남인태, 벌교경찰서장 권병제, 그리고 두 경찰서 소속의 토벌대장 둘이었다.
"에에, 오늘 회의를 긴급 소집한 건 다름이 아니고,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잔비 토벌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책을 세우기 위해섭니다. 에에, 어차피 휴전협정은 될 것인데, 잔비들을 산중에 두고 휴전협정을 맞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 휴전협정 전에 잔비들을 완전 소탕하라, 이것이 정부의 방침인 동시에 도경의 강력한 지십니다. 그래서 본 회의를 긴급 소집하게 된 것입니다."
남인태는 자못 거드름을 피우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권병제였다. 행정단위의 우위와 지역의 실속이 일치가 안 되어 그전부터 권병제에게 신경을 써왔던 남인태는 작년 말에 공비 일곱을 사살해 도경국장까지 행차하게 된 다음부터 권병제를 더욱 경계하고 의식하게 되었다. 도경국장이 권병제와 악수를 하며 어깨를 두들겨주던 것을 생각하며 그는 속이 뒤집어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남인태의 말에 권병제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고, 두 토벌대장은 옹색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에에, 그 지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라는 목적으로 도경에서는 극비문서를 하달해왔습니다. 그 극비문서가 바로 이건데, 극비문서라는 걸 유념하고 다 같이 보도록 합시다."
남인태는 길지도 않은 말에 "극비문서"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해가며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다 펼쳤다. 여덟 개의 눈이 일시에 그 종이 위로 몰렸다. 팔절지 왼쪽 위로는 "적세분포요도"라는 것이 한자로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두 개의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는 "4268. 6. 30.현재"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 전면에 걸쳐 산들과 지명을 간략하게 표시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남. 북, 경남의 산악지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리산 북쪽으로 덕유산, 서북쪽으로 회문산, 남쪽으로 백운산, 서남쪽으로 조계산과 백악산이 여러 가지 모양의 타원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나 옆에는 다시 네모 칸을 두르고, 그 안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무엇인가를 적어 그 옆에는 일일이 아라비아숫자를 표시해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지도의 제목이 밝히고 있는 대로 각 빨치산지구들과, 거기에 소속된 부대들과, 그 부대의 대원들 수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권병제의 눈길은 빠르게 조계산에 가 박혔다. 토란 모양을 한 타원 안에는 "53"이라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조계산지구에 남아 있는 빨치산들이 모두 쉰세 명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눈길은 그 옆의 네모 칸으로 옮겨졌다. 전남서부도당 15, 서부도당 연락부 8명, 모후산지구부대 14, 조계산소지구당 13, 보성군당3. 그의 눈길은 마지막으로 "보성군당 3"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그 수가 가장 적은 것에 그는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 여기서부터 다 같이 봅시다."
남인태는 연필 뒤 꼭지에 달린 고무로 조계산을 짚었다. 그 연필은 국제적십자사에서 보낸 구호물자로, 각 학교에 배급되고 있는 필통 네 개쯤을 포개놓은 것 만한 종이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연필은 몸체에 잠자리가 금박으로 찍혀 있는 일본제였다. 그건 국산보다 질이 월등히 좋은데다, 특히 나무가 풍겨내는 향내가 좋아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연필까지 팔아먹어 한반도의 전쟁 덕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보성군당은 셋으로 나와 있소. 이건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좋아할 건 하나도 없소. 왜냐하면 우리가 이차로 책임져야 할 곳이 이 조계산지구기 때문이오. 여기를 보시오."
연필 뒤 꼭지가 왼쪽 옆에 있는 백아산으로 옮겨갔다.
"이 백아산지구는 서른여섯밖에 안 된다. 그것이오. 그러니까 백아산 지구를 맡고 있는 화순이나 곡성경찰서보다 우리는 두 배나 더 할 일이 많다는 결론이오. 장흥 유치지구가 다 깨지면서 보성군당이 조계산 지구로 붙었으니 우리 책임도 유치지구에서 조계산지구로 따라서 옮겨질 수밖에 없소. 그리고 우리는 순천경찰서한테 책임을 미룰 수도 없소. 왜냐하면 말이오. 여길 보시오."
연필 뒤 꼭지가 조계산의 오른쪽 옆으로 옮겨가 백운산을 짚었다.
"이 백운산이 삼백십칠 명이나 된다 그것이오. 그러니 순천경찰서에서는 조계산지구보다 백운산지구를 치느라고 정신이 없게 생겼소."
"닌장맞을, 광양 경찰서에서넌 밥묵고 하품만 허고 앉었간디 요리 못자리판얼 맹글어놓고 있을께라?"
보성경찰서 토벌대장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남인태는 그만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너무 크기도 했지만, 그리고 쫓겨 갔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끔찍스럽게 떠오른 탓이었다.
"토벌대장, 좀 점잖게 하시오. 여긴 총 쏴대는 산중이 아니고 회의장이오, 회의장."
남인태가 토벌대장을 꼬나보았다.
"야아, 조심허겄구만요."
어깨 벌어진 젊은 토벌대장이 고개를 꾸뻑했다.
"그런데 이거... 우리 전남이 사백육 명으로 지리산보다 많군요."
권병제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맞소, 바로 그 점이 문제요. 지리산이 삼백칠십일 명으로, 그건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경남도당과 이현상의 남부군이 합해진 게 아니냔 말이오. 그러니 우리 전남은 두 개의 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셈이고, 여기를 보시오, 전북의 회문산과 덕유산을 합해봤자, 회문산 구십팔에다가 덕유산이 백이십칠이니까 가설랑은에..."
"이백이십오 명이오."
권병제의 계산이었다. 남인태는 비위가 확 상하고 말았다. 그러나 감정을 꾹 누르며 얼른 받아넘겼다.
"맞소, 이백이십오 명. 그러니 전북에 비해서도 두 배가 된다 그것이오."
"그런데 말입니다, 전남 숫자가 더 늘어나는데요. 여기 지리산에 구례군당이 서른일곱 명이나 끼여 있어요. 그럼 우리 전남이... 사백사십삼 명이 되는 겁니다."
권 서장이 지리산에 해당되는 네모칸 안에서 맨 끝의 구례군당을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이자식 이거, 수가 늘어나서 좋다는 거야, 뭐야! 남인태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바로 그거요. 우리 전남은 좋은 것은 일등을 못하고 못된 것만 일등을 하고 있소. 그러니 정부에서도 좋아할 리가 없고, 도경에서도 난리가 난 것이오. 빨갱이 놈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도경국장님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게 아니고 뭣이겠소. 그러니까 도경국장님이 하루빨리 소탕을 끝내라고 노발대발이시고, 이렇게 긴급명령이 떨어지고 난리요. 토벌대장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말들을 해보시오."
남인태의 울화는 엉뚱하게 두 토벌대장을 향해 터지고 있었다.
"그, 금메요, 이적지 혀온 것맨치로 열성으로 혀야제 무신 똑별난 수가 있겄는가요."
보성경찰서 토벌대장이 얼버무렸다.
"근디, 종우 우에 요리 딱 적어논께 숫자가 훤허게 뵈는디, 정작 산으로 잡으로 들어가보먼 그 잡녀러 새끼덜이 그 많은 골짝골짝 워디에 쑤셔박혔는지 알 수가 웂은 일인디, 똑 만성리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바늘 하난 찾는 격이구만이라."
벌교경찰서 토벌대장이 남다른 기운이 뭉쳐진 것처럼 보이는 짧고 굵은 목을 두어 번 꺾어 돌리며 마땅찮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무책임한 소리들을 듣자는 게 아니오. 우리 군의 두 경찰서가 특히 책임이 무거운건 뭔지 아시오? 거 염상진이나 하대치 같은 놈들이 다 우리 군 출신이기 때문이오. 그 두 놈만 잡아 없애도 그 졸개들 잡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냐 그것이오."
남인태는 추궁하듯이 두 토벌대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말이야 영측 웂이 맞제라. 근디, 염상진이야 정해진 자리가 웂이 지멋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허고 댕긴께 잡든 쥑이든 워쩌크름 허기가 영판 에롭고, 하대치야 조계산지구에 발얼 붙이고 있기넌 혀도 몸이 워찌크름 날래고 산얼 빠삭허게 뀌든지 무신 씨언헌 방도가웂구만이라."
그들이 벌교 출신이라 책임을 느낀다는 듯 벌교경찰서 토벌대장이 말했다.
"내 생각으론 말입니다,"
권병제는 남인태에게 말머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먼저 이렇게 입을 열고는,
"잔비들을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는 건 정부나, 도경이나, 일선에 있는 우리나 다 뜻이 같을 것입니다. 이번 명령하달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토벌에 박차를 가할 것을 각오하고, 그 효과적인 방법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는 별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는 회의를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에에, 중요한 문제는 말이오, 휴전협정을 앞둔 이 마당에 잔비가 천명 이상이나 남아 있다는 것만이 아닌 것이오. 문제는, 이 극비문서에도 나타나지 않은 잔비들이 또 있을 거라는 점이오. 또, 이 잔비들이 작년 이후로 계속해서 지하로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할 것은 두 가지요. 첫째, 양쪽 토벌대는 토벌사령부의 합동작전계획과는 별개로 매일 잔비토벌을 실시한다. 둘째, 잔비들의 지하침투를 봉쇄하기 위해 금일부터 야간비상경계에 들어간다. 이상이오. 다른 할 말이 있으면 말들 하시오."
남인태는 좌중을 훑어보았다. 세 사람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좋소, 회의를 이것으로 끝내겠소."
일천구백오십삼년 칠월 이십칠일, 마침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만 삼년 일개월 이일 만에 총소리가 멈추게 되었다. 따라서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 십오일 해방과 동시에 미, 소의 합의로 그어진 직선의 삼팔선은 꾸불꾸불한 곡선의 휴전선으로 변했다. 그 난해한 곡선은 "전쟁이 끝난 선"이 아니라 "전쟁을 쉬는 선"이란 뜻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구체적인 차이를 잘 모른 채 그저 "전쟁이 끝났다"고 했다.
"근디, 그간에 죽은 목심덜이 징허게 많을 것인디. 다 을매나 될랑고?"
"징글징글허게 많을 것인디, 고것을 누가 무신 재주로 다 알겄어."
맞는 말이었다. 그 수를 자세하게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가고, 날이 지나가면서 대충 짐작하는 숫자가 나오게 될 터였다.
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신문들은 평양방송이 팔월칠일에 발표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박헌영 외에 이승엽, 이강국, 임화, 설정식 등 열두 사람에 대한 숙청이었다. 재판을 아직 받지 않은 사람은 박헌영 하나였다. 나머지 열두 명은 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되어 있었다. 이승엽, 조일명, 임화, 이강국, 박승원, 배철, 백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은 사형. 윤순달은 징역 십오 년. 이원조는 징역 십이 년. 그들의 죄상은 첫째, 미 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둘째,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 약화, 음모와 테러, 학살행위. 셋째,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였다. 이 소식은 며칠이 지나 각 지구의 신문을 통해 모든 빨치산들에게 전해졌다. 그 신문을 보고 이해룡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고 말았다.
"소장 동지, 소장 동지, 이것 좀 보십시오. 결국 이럴 줄 알았습니다. 보십시오, 그때 구십사호 결정서에서 모든 잘못을 남선 단체들한테 덮어씌웠을 때 저는 벌써 이런 결과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당이 종파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나 소장 동지의 면전이라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휴전이 된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남로당계만 쏙 뽑아 이 꼴을 만든단 말입니까. 이래도 당을 믿어야 합니까!"
눈에 불을 켠 이해룡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범준은 느리게 눈을 올려 떴다.
"이 동지, 그때 내가 이 동지한테 했던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소. 이 동지가 할 말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털어놔보시오. 어떠한 내용이든 정식 토론으로 접수하겠소."
김범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예,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 남선 단체들이 모든 걸 잘못했다고 했을 때 솔직하게 말해 분하고 억울했고, 너무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럼 북선 단체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인데, 당이 어찌 그리 편파적인 결정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남로당과 북로당은 벌써 오래 전에 합당을 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오로지 조선로동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철통같이 믿었고, 오로지 조선로동당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투쟁을 바쳤습니다. 남로당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인공이 시작되고 멋모르는 사람들이 "박헌영 동지 만세"를 부를 때 저나 모든 당원들은 그런 행위를 철저히 막으며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게 했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열심히 지도하고 학습시켰습니다. 그리고 북선 동무들이 갖는 우월감과 자만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남선 동무들은 충돌을 피하고 좋게 해결하려고 많이들 참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당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남로당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까. 당한테 버림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개들의 세상으로 손을 들고 내려가야 하겠습니까? 말씀 좀 해보십시오, 소장 동지!"
이해룡의 충혈된 눈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좋소, 이 동지의 말 잘 들었소. 이 동지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오. 그런데, 내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이 동지한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소."
"예, 말씀하십시오."
이해룡은 그 눈길에 밀리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이 동지의 감정을 누르고, 이 동지의 생각도 접어놓고, 우리가 당사를 학습할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내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오. 그렇게 할 수 있겠소?"
"예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내 애길 시작하겠소.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를 뒤로 미뤘던 것은 나도 오늘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소. 그때 상태로 얘길 해봤자 제대로 설명이 안됐을 것이오. 이 동지는 지금 그때의 일을 한 가지 상기할 게 있소. 그게 뭔가 하면, 두 도당위원장이 결정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그때 "남선 단체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 동지나 중간간부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 두 도당위원장도 이의를 제기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점이오. 어떻소, 생각이 나오?"
김범준이 이해룡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글쎄요... 그게..."
이해룡은 미간에 신경을 모으며 고개가 기울어져 한참을 있더니,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별 의견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맞소. 두 동지는 그 대목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소. 왜 그랬는지 알겠소?"
이야기를 풀어갈 실마리를 잡은 김범준은 이해룡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참 이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해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솔직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은 그때 벌써 선택적 결정을 했던 것이고, 두 동지는 당의 그 뜻을 파악하고, 이의 없이 접수했던 것이오."
"선택적 결정, 그게 무엇입니까?"
이해룡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이 동지, 잘 들어보시오. 민족해방전쟁이 남조선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휴전협정에 임하게 되었소.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때 당은 인민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소. 당에는 인민들 앞에 책임질 의무가 있소. 그 의무가 무엇이겠소? 이 동지가 지난번에 지적한 것처럼 미군개입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겠소? 그건 전쟁이 진행된 원인이고 결과는 될 수 있어도 당이 인민 앞에 지는 책임은 될 수 없소. 만약 그것으로 책임을 대신한다면 그건 당의 비겁이고, 인민에 대한 기만이오. 당은 인민들에게 민족과 인민의 해방을 약속했고, 따라서 인민들의 피의 헌신을 요구했소. 그런데 결과는 무위로 돌아갔소. 그때 당은 인민들의 피의 헌신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오,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는 당은 인민 앞에 존재할 수 없소. 그 책임의 수행을 위해 당은 "선택적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오. 이 선택적 결정은 인민의 단결을 위하는 것인 동시에 당의 장래를 위한 것이며 또한 원대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준엄한 "역사선택"인 것이오. 그 역사 선택의 결과가 이번 일이오."
"아니 그럼, 박헌영 동지께서 스스로 역사 선택을 했단 말입니까?"
이해룡은 그 동안의 생각이 완전히 뒤집히는 착란을 느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죽음도 나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소. 그건 이미 볼셰비키 당사가 입증하는 바이고, 그건 이미 볼셰비키의 전통이기도 하오. 그걸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소. 바로 이 동지 자신을 보면 되는 거요. 이 동지는 지금 역사투쟁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고 죽을 각오로 투쟁하고 있소. 바로 그 정신이 역사 선택을 하는 게 아니겠소. 젊은 이 동지가 하는 일을 박헌영 동지가 안 해서야 되겠소!"
이해룡은 비로소 눈앞에 새로 열리는 것을 느꼈다.
"예,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떠오른 것인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왜 하필 박헌영 동지가 역사 선택을 해야 하는 겁니까?"
김범준은 이렇게 묻는 이해룡을 쓰다듬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 동지, 지금 우리 앞에 적이 몰려오고 있소. 당적 사명을 전달하기 위해 누구든 하나는 살아나야 하고,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은 적을 막아내며 죽어가야 하오. 이때 누가 적을 막고 나서야겠소. 그건 당연히 나요. 그건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자가 지켜야 하는 당연한 임무고, 도리요. 당은 현재고 미래며, 변증법적 발전을 멈추지 않는 생명체라야 하는 거요."
"그렇군요... 그렇군요..."
이해룡은 초점을 잃은 듯한 눈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휴전을 계기로 토벌대들의 공세는 맹렬해졌다. 군 병력의 일부 지원을 받으며 전투경찰대가 총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전투경찰대는 군작전과 똑같이 엄청난 병력을 지리산에 투입해대고 있었다. 빨치산들의 수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그들은 방어의 두려움이 없이 한시라도 빠른 소탕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빨치산들은 두 명 단위의 소조투쟁으로 토벌대를 피해 다니다가 기습을 하고 또 자취를 감추는 전술을 썼으므로 토벌대들은 마음만 급했지 그만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었다.
구월 이십일쯤인데 지리산에 갑자기 삐라가 뿌려지고 있었다. 한동안 뜸했던 일이라 이해룡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삐라가 내려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삐라를 집어든 순간 이해룡은 눈앞이 새까매지는 충격에 부딪쳤다. 그건 이현상의 죽음을 알리는 삐라였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이현상 선생님이 사살을 당하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두려움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삐라에는 분명 이현상 선생의 숨 끊어져버린 모습이 담겨 있지 않은가. 이해룡은 가슴이 컥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삐라에 담긴 이현상의 모습은 머리에서부터 혁대 조금 아래까지 찍힌 사진이었다. 알몸인 상태 여기저기에는 총 맞은 자리가 선명했고, 기라죽한 얼굴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삐라 위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해룡은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현상 선생의 음성을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 수술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다정하게 웃던 모습도 선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작년에 빗점골에서 인사를 드렸을 때 이현상 선생은 자신의 왼쪽 볼 흉터를 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속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대원들에게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이해룡은 삐라에 떨어진 눈물을 닦아냈다.
"혁명가답게 장하게 잘 가셨소."
김범준은 삐라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는 김범준의 모습에 이해룡은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선생은 인민의 영웅이고, 조국의 애국자요."
김범준은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독백하듯 말하고 있었다. 이해룡은 며칠 뒤에 선요원을 통해서 이현상 선생이 빗점골 비트를 떠난 것이 지난 십팔일 오전이었고, 그 자리에서 박영발 위원장과 신문사 주필이 배웅을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런 뒤 소식이 가슴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구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화엄사골과 피아골에 일시에 토벌대가 밀려들었다. 이해룡은 지난번 빗점골과 대성골을 공격했던 병력이 이동해온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주능선을 넘어 뱀사골이나 달궁골로 빠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김범준을 부축해가며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피아골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살아남아 있는 대원은 여섯이 전부였다. 그들이 주능선에 막 올라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기관총이 난사되기 시작했다. "피해라!" 이해룡이 외쳤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다 말고 푹 고꾸라졌다. 총알들이 잇따라 그의 등을 뚫고 나갔던 것이다. 그의 옆에서 김범준도 허리가 휘청 꺾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네 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넘어지고 뒹굴며 비탈을 내려뛰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 부딪친 나무에서 일찍 물든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염상진은 대원 네 명과 함께 막바지에 몰리고 있었다. 위로 밀리고 밀려 산꼭대기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토벌대들은 총을 난사해대며 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병력동원이나 포위망 구축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비트를 기습당하는 순간 염상진은 새로운 배신자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부사령 동지, 총알이 떨어졌구만요!"
어느 대원의 다급한 소리였다.
"서로 나누어 쓰시오. 함부로 쏘지 말고 한 놈씩 정확하게 겨냥하시오."
염상진은 가늠구멍을 들여다본 채 지시했다.
"총알이 다 떨어졌는디요."
뭣이! 그 순간 염상진은 방아쇠를 잡아당기고 말았다. 그 총알이 적을 향해 제대로 날아갔을 리가 없었다. 대원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원들은 총알이 없으면서도 원형을 이룬 형태로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염상진은 자신의 탄띠를 살펴보았다. 탄창 두 개에 수류탄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탄창 두 개를 허물어 네 대원에게 네 발씩 나눠주었다.
"이게 마지막이오. 한 발씩 정확하게 겨냥해서 쏘도록 하시오."
"세 발씩만 쏠께라?"
한 대원이 물었다. 그 말은 곧 한 발씩은 남겨야지요? 하는 말이었다. 염상진은 대원들을 휘둘러보았다. 네 명이 모두 입을 꾹 다문 얼굴들이었다. 그 얼굴들이 평소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금방 느꼈다.
"네 발씩 다 쏘시오. 이게 남아 있으니까."
염상진은 수류탄을 내보였다. 대원들은 더 말없이 적을 향해 몸들을 돌렸다. 염상진은 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한 번, 두 번, 빈 탄창이 튕겨 나왔다. 더 쏠 총알이 없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총알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도 방아쇠를 두 번씩만 더 당기면 빈총이 되는 것이다. 그는 빈총의 가늠구멍을 통해 몰려오고 있는 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왔구나! 이젠 가야지! 그는 어금니를 꾸욱 물었다. 문득 아들 광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새벽공기 같은 맑고 시원한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왔다.
"아부지, 나도 싸게싸게 커서 아부지맹키로 훌륭헌 사람이 될라요."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아내의 얼굴이, 딸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해냈다. 얼른 왼쪽 윗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날 어머니가 주셨던 돈이 손끝에 잡혔다. 그는 돈을 매만져보고 손을 빼냈다.
"부사령 동지, 총얼 다 쐈구만이라."
뒤에서 들린 말이었다. 염상진은 몸을 돌렸다. 그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나갔다.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에는 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염상진, 염상진 들어라. 우린 네가 염상진인 것을 알고 있다. 총알이 다 떨어졌으면 부하들 데리고 자수하라. 자수하면 선처를 보장한다. 이젠 전쟁도 끝난 지가 오래다. 잘못 생각해서 부하들 불쌍하게 죽이지 말고 어서 자수하라. 자수하면 틀림없이 선처하겠다. 앞으로 오 분간의 여유를 주겠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
염상진은 적이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으로 비트가 노출된 이상 이름이 밝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동무들, 다 같이 앉읍시다."
염상진은 바위들을 은폐삼아 서 있는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염상진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대원들이 뒤따라 둘러앉았다. 총소리들에 쫓겨 갔던 산의 적막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그 두껍고 깊은 적막 속에 그들 다섯은 바윗덩어리인 듯 앉아 있었다. 마침내 염상진이 입을 열었다.
"동무들, 저자들이 떠드는 소리 다 들었지요? 투쟁을 끝낼 때가 마침내 우리 앞에 왔소. 동무들은 투쟁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다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적들이 저렇게 떠들어댄 이상 나는 동무들에게 당의 원칙을 강요하고 싶지 않소. 이 마당에 여러분의 마지막을 여러분들 스스로가 솔직하게 결정하기 바라겠소. 저자들의 말을 듣고 자수하겠다면 가도 좋소. 자아, 백 동무부터 돌아가면서 말해보시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지넌 여그서 죽겄구만이라."
"개덜얼 믿느니 경상도 디딜방아럴 믿겄소."
"더 살아서 헐 일도 웂구만이라."
"하먼이라, 다 항꾼에 가야제라."
"동무들, 다들 장하시오!"
염상진의 감격어린 목소리였다.
"염상진 들어라아, 이 분 남았다아!"
아래서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였다.
"자아 동무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한 마디씩 하시오." 염상진이 수류탄을 손아귀에 잡으며 말했다.
"머시냐, 바라든 대로 살아봤응께 원도 한도 웂구만이라."
"나도 더 바랠 것이야 웂는디, 새끼 한나 있는 것이 눈에 볿히요."
"나도 후회헐 것 아무것도 웂소."
"나넌 따로 헐 말 웂고, 그저 부사령 동지 뫼시고 죽은께로 영광이오."
"동무들, 나도 동무들 같은 당당한 전사들과 함께 죽으니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소.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오."
염상진이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삼십 초 남았다아, 삼십 초!"
"동무들, 우리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합시다."
염상진이 팔을 벌렸다. 네 사람도 양쪽 팔들을 벌렸다. 그리고 그들은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를 하게 되자 그들의 간격은 자연히 좁혀 들었다. 수류탄을 든 염상진의 오른손이 그들이 만든 동그라미 가운데 놓였다.
"동무들, 우리 다 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염상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으로 수류탄의 핀을 뽑았다.
"인민공화국 만세에..."
꽝!
이틀이 지난 벌교역 앞마당에는 사람의 목 하나가 내걸렸다. 폭이 육십 센티 정도고, 길이가 이 미터 정도 되는 나무판이 받침목으로 비스듬하게 세워졌고, 그 꼭대기에 머리카락을 위로 모아 묶은 목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로 붙은 종이에는 큼직큼직한 글씨들이 씌어있었다.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 수류탄 자살로 염상진과 다른 빨치산들의 몸은 걸레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토벌대는 염상진의 목만 잘라갔던 것이다. 그 목은 순천경찰서를 거쳐 출신지 경찰서로 넘겨진 것이다. 염상진의 목이 내걸리자마자 그 소문은 거센 바람이 되어 읍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역으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눔들아, 안뒤야, , 안뒤야, 내 아덜얼... 안뒤야!"
한 여자노인네가 울부짖으며 사람들을 밀쳐대고 있었다. 그 동안 허리가 더 굽어 지팡이를 짚은 호산댁이었다. 사람들이 빠르게 길을 터주었다.
"이눔덜아, 안뒤야, 안뒤야!"
호산댁은 계속 울부짖으며 맨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걸음이 뚝 멈춰졌다. 그리고 반으로 접힌 허리가 약간 펴지면서 고개가 들렸다.
"워메! 워메, 워짤끄나! 애비야, 애비야, 내 자석아!"
호산댁의 입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나무판 양쪽에서 총을 메고 서 있던 두 경찰이 제각기 멀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눔덜아, 오런 숭악헌 짓이 워디가 있냐. 당장에 내 아덜얼 내놓거라!"
호산댁이 소리치며 앞으로 내달았다. 두 경찰이 놀라 재빨리 호산댁을 가로막았다.
"요런 숭악헌 눔덜아 비켜나그라! 사람이 죽었으면 그만이제 저런 법이 워디 있냐. 비켜나, 이눔덜아!"
호산댁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할마씨, 존 말로 헐 때 집에 가 있으씨요. 다 빨갱이 자석 둔 죈께."
한 경찰이 내쏘았다.
"에라이 죽일 눔아, 니도 사람이냐!"
호산댁이 눈을 부릅뜨며 지팡이를 내려쳤다. 경찰이 지팡이를 막아 잡으며 낚아챘다. 호산댁이 여지없이 앞으로 엎어졌다.
"워메에에, 참말이네웨!"
그때 한 여자가 두 팔을 벌리며 펄쩍 뛰어올라 허공에서 손바닥을 맞때리며 짐승의 포효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엎어졌던 호산댁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후딱 뒤로 돌렸다. 느낌 그대로 그녀의 눈에 잡힌 것은 큰며느리였다. 호산댁은 불끈 힘이 솟기는 걸 느꼈다.
"아이고 시상에나 광조 아부지이이, 워찌 그러고 기시요오."
수염이 더부룩한 채 긁히고 찢긴 염상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죽산댁은 눈물과 함께 창자를 다 토해내듯 크고 긴 소리로 처절하게 통곡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는 언제 그런 통곡을 했냐 싶게 번개처럼 경찰에게로 내달았다. 방심을 하고 있던 경찰은 그녀를 막고 어쩌고 할 새가 없었다. 그녀가 경찰을 붙들었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야야야..."
경찰이 죽는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경찰의 팔을 물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팔을 물린 경찰이 그녀를 떼쳐내려고 버둥거리다가 결국 총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야야야..."
"어! 쩌, 쩌 저년이!"
반대쪽에 섰던 경찰이 당황한 소리를 더듬거리며 총을 어깨에서 벗었다. 그리고 개머리판을 앞으로 돌려 잡으며 이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려다가 상대방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많은 눈들을 의식한 것인지 개머리판을 그냥 내리고 발길로 죽산댁을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이봐! 어디다가 횡패야, 횡패가!"
"이눔아, 누구러 차야, 차기럴!"
호산댁이 지팡이로 그 경찰을 때리려고 했다. 그때 죽산댁이 팔을 물고 있던 경찰을 떠다 밀며 돌아섰다. 떠밀린 경찰은 뒤로 넘어지고 있었고, 죽산댁은 어느새 다른 경찰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파란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서슬에 놀라 "어! 어!" 하며 어물거리던 경찰은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경찰의 손을 물어뜯었고, 경찰은 체면도 없이 비명을 질렀다.
"저런 미친년 잠 보소. 저년이 무법천지시!"
팔을 물렸던 경찰이 총을 집어 들며 감정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고약스럽게 찡그려진 얼굴이 죽산댁을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아야야, 아이고, 아이고!"
손을 물린 경찰이 계속 비명을 지르며 다른 주먹으로 무릎으로 죽산댁을 닥치는 대로 치고 차고 있었다. 그러나 죽산댁은 물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요것이 멋덜 허는 짓거리야, 시방!"
남자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두 손을 허리에 걸치고 버티고 선 것은 염상구였다. 그때 마침 개머리판을 앞으로 꼬나 잡고 죽산댁을 향해 내닫고 있던 팔 물린 경찰이 염상구를 알아보고는 주춤 멈춰 섰다.
"아가, 큰 아가, 시동상 왔다, 시동상."
호산댁이 작은아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큰며느리를 흔들어댔다. 그 말에 비로소 죽산댁은 물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 염 사장 잘 오셨소. 염 사장 엄니허고 형수씨가 시방 공무집행 방해럴 험시로 이 난리판굿이요."
팔을 물렸던 경찰이 염상구가 나타난 것을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염상구는 매달린 목을 흘낏 올려다보았다.
"그려서, 나보고 엄니, 형수씨 말개도라 그것이여?"
염상구의 말은 얼굴만큼 싸늘했다.
"야아?"
경찰이 어리둥절했다. 손을 물렸던 경찰이 손을 싸잡은 채 다가서고 있었다.
"야이 씨부랄눔덜아, 여러 개소리 씹어돌리지 말고 싸게 저것 띠내려!"
염상구가 두 경찰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니, 워째 그러신다요?"
손을 싸잡은 경찰도 어리둥절해졌다. 상대방은 틀림없이 청년단장 염상구였던 것이다.
"오런 개좆 겉은 새끼덜아,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 당장에 못 띠내리겄어!"
염상구가 두 경찰의 어깻죽지를 동시에 치며 외친 소리였다.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먼, 느그 성인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호산댁은 솟구치는 서러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워메, 워메, 아즘찮은거. 시동상이 인자 사람이시. 예상이 뒤집히자 죽산댁도 비로소 고마움과 서러움이 범벅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 암스로 워째 이러시오."
팔을 물린 경찰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요것이 우리 맘대로 못허는 일 아니오."
손을 물린 경찰이 사정하듯 말했다.
"쪼아, 느그가 못 허겄다먼 나가 헐 것잉께 비켜나!"
염상구가 허리에 걸쳤던 손을 허공에 뿌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는 못허요."
"서장헌테 가서 말허씨요."
두 경찰이 엇지게 잡은 총으로 염상구의 앞을 가로막았다.
"햐아! 느그가 나허고 완력으로 허자 그것이냐."
염상구는 고개를 젖히며 코웃음을 날리고는,
"느그 존 말로 헐 때 앞 티워. 까불먼 마빡에 다 칼침 박고 말 것잉께."
얼굴이 싹 변한 그가 잔인스럽게 내쏘았다.
"맘대로 혀. 요것이 빈 총이 아닝께."
"항, 우리도 그냥언 안 당혀."
두 경찰이 재빨리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서며 총을 겨누었다.
"햐, 느그가 참말로 막보기로 나올 챔이여? 그려, 칼침보다 총알이 더 빨르겄제. 씨기도 훨썩 더 씨고. 알겄어, 나허고 총으로 혀보겄다 그것이제. 기둘려, 느그만 총 있는 것이 아닝께! 권 서장눔 마빡에서부텀 느그덜 마빡꺼정 각단지게 빵꾸럴 뚫버줄 것잉께."
말을 해나갈수록 염상구의 실눈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홱 돌아섰다. 두 경찰이 서로를 맞쳐다보았다.
"어이, 싸게 서장님헌테 보고허소."
손을 물린 경찰이 말했다.
"알겄구마. 핑 댕게올라네."
팔을 물린 경찰이 총을 어깨에 둘러멨다. 둘러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청년단과 경찰이 총질을 하게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요것얼 워찌 혀야 쓰겄냐. 상구 성질에 참말로 청년단얼 몰고 나올 것인디."
호산댁이 걱정스럽게 큰며느리를 쳐다보았다.
"냅두씨요. 그리 안허먼 아범 못 찾을 것잉께라. 서로 총질이야 못허요."
죽산댁이 시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상구가 청년단 몰고 나오는 것으로 일이 풀리먼 올매나 좋겄냐."
호산댁은 새로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태를 보고받은 권 서장은 그만 난감해졌다. 염상구가 그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환영할 리야 없지만 그저 못 본 척할 줄 알았던 것이다. 청년단이 총을 들고 나서고, 감정이 격해져 총질이 일어나고... 그는 더 이상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과 청년단이 총을 맞겨누고 선다는 것 자체부터가 경찰 체면의 손상이었고, 그리고, 어떤 때 마땅찮고 거슬리더라도 염상구의 성질에 불을 붙여서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청년단이 그동안 경찰을 도와 이룬 공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작년의 도래등 공적도 청년단이 아니었으면 세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공비가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청년단을 괄시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유 순경, 내 말 잘 들으시오. 청년단이 밀려들면 마지못한 척 물러서시오. 절대로 경찰에서 그걸 내려주지 말고, 염상구나 청년단 손으로 떼가게 내버려두란 말이오. 알겠소?"
"예,알겄구만요."
팔을 물린 유 순경은 서장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렇게 되면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은 염상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염상구는 과연 총을 든 청년단원들을 몰고 역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염상구의 살기와 청년단원들의 살벌함에 사람들은 뒤로뒤로 밀리며 길을 넓게 틔웠다. 두 경찰은 시전대로부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불어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염상구는 경찰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문득 긴장했다. 그러나 권 서장이 충돌을 피해 섰다는 것을 곧 눈치 챘다.
"저것 띠내레라!"
염상구가 명령했다. 청년단원들이 우르르 시전대로 몰려들었다. 시전대가 천천히 눕혀졌다. 죽산댁이 치마를 받쳐 들고 있었다. 염상진의 목은 그 치마 위로 옮겨졌다. 그 순간 죽산댁이 치마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아이고메, 광조 아부지이, 광조 아부지이..."
통곡과 함께 그녀의 온몸이 심하게 떨려대기 시작했다. 늦가을 볕이 스산하게 내리고 있는 길고 긴 방죽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중도들판이 방죽에 사람이 없는 까닭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장수 노인은 그 빈 방죽으로 들어섰다. 도무지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어 큰길을 따라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 노인은 역 마당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산사람 목이 내걸렸다기에 혹시 강동기나 마삼수가 아닌가 해서 도래등을 허겁지겁 넘었던 것이다. 한장수 노인은 뜻밖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 사람의 흉한 모습을 보고나서 한 세상이 또 막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유명한 대장이 저리 죽었이니 동기나 삼수가 살았을 리가 웂은 일이제. 말자리나 허고, 생각 똑바라지게 묵은 젊은 사람덜언 다 죽어뿔고 인자 나 겉은 쭉찡이에, 지 욕심 채리는 것덜만 남었구만. 해방이 되고 이적지 팔 년 쌈에 죽기도 많이덜 죽었제. 쓸만한 사람덜 요리 한 바탕씩 쓸어불고 나먼, 그만헌 사람덜이 새로 채와지자먼 또 올매나 긴 세월이 흘러야 허는 겨? 인자부텀 새로 낳는 자석덜이 장성혀야 헌께 한시상이 흘러가는 세월이제. 그렇제, 갑오년 그 쌈에서 삼일만세까지가 시물다섯 해고, 삼일만세에서 해방꺼지가 또 시물여섯해 아니라고. 인자부텀 또 그만헌 세월이 흘르먼 워찌 될랑고? 잉, 또 고런 심덜이 모타지겄제. 세월이란 것이 그냥 무심허덜 않는 법잉께. 나가 질게 살아옴서 보고 은 세월이 그렸어. 나도 참말로 징허게 오래넌 살었구만. 인자 나 겉은 쭉찡이부텀 얼렁얼렁 가야제. 그려야 새로 타고난 목심덜이 묵고 커날 것잉께. 복동이도, 동기도, 삼수도 웂은 사랑방얼 혼자서 지키기도 인자심 파허는 일인께. 살아올 기약이 웂어진 사람덜잉께.’
한장수 노인은 눈물이 젖어드는 눈으로 길게 뻗어나간 방죽을 힘겨운 걸음으로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었다.
중도들판이 썰렁하게 비어버린 대신 포구에는 누렇게 변한 갈대밭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갈대밭은 찬 기운 서린 비람 결이 스쳐갈 때마다 서로 몸들을 비벼대며 겨울 숲이 우는 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포구의 물결 위로 실어 보내고 있었다. 포구에 물이 실리고 있었다. 밀물 때는 물결이 커지고, 그 물결을 타고 작은 고기들이 몸을 실었다. 때맞추어 기러기 떼가 갈대숲 여기저기에서 날아올라 끼륵끼륵 소리하면 정연하게 날기 시작했다.
이틀 뒤에 염상진의 상여가 나갔다. 그는 율어로 가는 길목 어느 산자락에 묻혔다. 목 아래로는 짚둥으로 몸체와 두 팔다리를 만들어 붙인 그의 관 위에 서민영과 김범우가 흙 세 삽씩을 뿌렸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갔다. 어둠이 장막을 친 김은 밤, 무덤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인기척이 실리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는 무덤가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림자들은 무덤을 에워쌌다. 그림자는 모두 여섯이었다. 철이 늦어 어둠 속에서는 벌레소리 한 가닥 울리지 않았다. 찬바람에 낙엽들 구르는 메마른 소리만 스산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림자 하나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장님, 지가 왔구만이라. 하대치여라. 대장님, 대장님이 먼첨 가셔 뿔고, 지가 살아남어 이리 될 줄 몰랐구만이라. 지가 대장님 앞에 면목이 웂구만요. 그려도 대장님이사 다 아시제라. 지가 요리 살아 있는 것이 그간에 총알 피해댕김서 드럽게 살아남은 것이 아니란 거 말이제라. 대장님, 편안허니 먼첨 가시씨요. 지도 대장님헌테 배운 대로 당당허니 싸우다가 대장님 따라 깨끔허게 갈 것잉께요. 대장님, 근디 지가 남치기 역사투쟁얼 허고 죽기 전에 똑한 가지 허고 잡은 일이 있구만이라. 지 맘대로 혀뿔기 전에 대장님헌테 먼첨 말씸디릴라고라. 고것이 먼고하니, 지가 할아부지헌테 받은 이름얼 지 손자눔헌테 넴게줄라고라. 요말을 죽기 전에 아들헌테 전허고 죽을랑마요. 대장님, 우리 넌 아직 심이 남아 있구만요. 끝꺼정 용맹시럽게 싸울 팅께 걱정 마시씨요.’
그림자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차례로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원들이 대장 염상진을 만나고 있는 동안 하대치는 두 손에 힘주어 총을 잡고 어둠 속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짙고 짙은 어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이 짙은 만큼 적막이 깊을 뿐이었다. 그러나 산줄기만은 어둠속에서도 그 윤곽을 어렴풋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어렴풋한 윤곽 속에서도 산줄기는 장중한 무게와 굳센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억센 산줄기의 봉우리 봉우리에서 봉화들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봉화들은 너울너울 불길을 일으켜 어둠을 사르며 줄기줄기 뻗어나간 산줄기들을 따라 끝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불꽃들과 함께 함성이 울려오고 있었다. 그는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봉홧불이 타올라 산줄기를 다라 불꽃행렬을 이루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봉홧불들의 기세를 따라 다 같이 함성을 지르며 투쟁의 대열을 지었던 때도 분명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 불길이 타오르고, 그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펴며 숨을 들이켰다. 그와 함께 밤하늘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그는 문득 숨을 멈추었다. 그는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본 것은 넓게 펼쳐진 광대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수없이 빛나고 있는 별들이었다. 그는 멀고 깊은 어둠 저편에서 명멸하고 있는 무수하게 많은 별들을 우러러보았다. 가을 별들이라서 그 초롱초롱함과 맑은 반짝거림이 유난스러웠다. 그 살아서 숨 쉬고 있는 별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별들이 모두 대원들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먼저 떠나간 대원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혁명의 별이 되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 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