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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4-7

Bollnow 2024. 3. 12. 07:11

23. 이동 준비

한낮에도 더운 기는 다 가시고 바람결은 서늘서늘했다. 아침저녁으로 일어나는 찬바람은 선뜩선뜩하게 옷 속을 파고들었다. 산속에는 풀들이 먼저 저 추위를 타며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잎들이 작고 얇은 싸리나무며 단풍나무 같은 것들이 가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짙푸른 녹음과 함께 산골짜기마다 진을 쳤던 무더위는 팔월이 가고 구월이 오면서 시나브로 사위어져가고, 잎들이 누릿누릿 물들어가는 산줄기로는 소슬바람이 소리 낮게 스쳐가고는 했다.

산속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을 가장 반기는 곳이 있었다. 골짜기들 그 어디엔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환자트들이었다. 환자트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총상이나 파편상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 상처들은 거의가 깊게 마련이었고, 깊은 상처는 약을 제대로 쓰는 경우에도 무더운 한여름에는 염증이 생기거나 곪기가 쉬웠다. 그런데 현대의약품은 거의 쓰지 못하고 민간요법에 의지하고 있는 환자트의 환자들의 경우에는 그 치료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깊은 상처의 치료에 무더위는 치명적인 장애였다. 무더위 자체가 상처를 에워싸고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물이었고, 또 환자의 체온을 전체적으로 상승시켰으며, 파리를 위시해서 상처에 해로운 온갖 세균들을 번창시켰다. 그런 백해무익한 무더위가 가고 선들선들 찬바람이 일게 되었던 것이다. 깊은 상처에 찬바람은 무더위와 정반대의 치료효과를 나타냈다. 무더위 속에서 고름이 질질 흐르던 상처가 거슬거슬해지며 아물어 들었다. 꼭 거짓말 같은 자연치유의 효과였다.

"동무들, 이제 됐소. 이제 됐소. 여름을 견디느라고 동무들 너무 고생했고, 다들 장하시오."

의무과장의 그 감격스러워함은 틀림이 없어서, 구월로 접어들면서 환자들의 상처는 나날이 고름이 걷히고, 새살이 돋고, 아물어갔다. 그러면서 의무과장이 이 환자, 저 환자를 붙들고 노래하듯 되풀이하는 말이 있었다.

"긁지 말아요, 절대로 긁지 말아요. 지금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긁어서 덧나버리면 그땐 위험해요. 가려운 건 상처가 다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참기가 어렵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의무과정은 낮에 잠깐씩 눈을 붙이면서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환자들을 지켰다. 환자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잠결에 상처부위를 벅벅 긁어댔고, 그럴 때마다 그의 손은 환자의 손을 떼 내며 사정없이 때리고는 했다. 그의 그런 열정에 환자들은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일도 하지 않으면 어쩌겠소. 동무들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오히려 민망스런 얼굴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환자들은 그의 그런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약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서 그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했을 것이며, 그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모두가 충분히 짐작했고, 또 이해했다. 그는 환자들은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름 내내 무더위를 무릅써가며 늙은 호박 속을 작은 나무절구에 찧는 일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호박 속을 환자들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나눠 붙여주고는 했다. 그 일을 하는 얼굴은 한없이 침울하고 괴로움에 차 있었다. 환자들의 상처에 호박 속을 찧어 붙이고 있는 양의사 - 그건 희극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하고, 영 아리송했는데, 어쨌거나 진풍경인 것만은 사실이어서 조원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는 했다. 희곡에 희비극이 있다는 걸 배운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닐까 싶었고, 침울하고 괴로운 얼굴로 호박 속을 붙이고 있는 의무과장은 가장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명배우같이 보였던 것이다. 그 일이 웃음을 자아내지 않았으려면 호박 속을 붙이는 사람이 의무과장이 아니라 할머니여야 했다. 지극히 과학적이어야 할 의사가 지극히 비과학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었고, 의무과장의 괴로움도 바로 거기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장 동무는 양의사시다요, 한의사시다요?"

조원제는 이죽거렸다.

"죽도 밥도 아니오."

의무과장은 더 얼굴을 찡그려 붙였다.

"이왕 붙일라면 웃음스로 붙이씨요. 그래야 환자들이 맘이 편해 병이 낫제라."

조원제는 과장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며 한 번 더 몰아댔다.

"아 그럽시다, 그래야지요."

진지하기만 했지 농담을 할 줄 모르는 과장은 금방 어색스러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조원제가 과장에게 붙인 별명은 "땡초"였다. 차마 가짜의사라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고, 그건 또 별명으로서 맛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장은 그 별명을 아무 싫은 내색이 없이 그저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는 어쩌면 그렇게 불리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할는지도 몰랐다.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침은 물론이고 한약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가 그보다 더 비과학적인 호박 속 붙이기를 하고 있으니 그 곤혹스러운 입장을 면하려면 아예 가짜의사라는 것을 수긍해버리는 것이 자연스런 해결책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가짜의사가 되는 위기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죽지 못해서, 아니 환자들을 그냥 죽일 수가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찧어 붙인 호박속이 꼭 거짓말처럼 신기하게도 상처치료에 효과를 나타냈던 것이다.

"보시씨요, 우리 민간요법이 무턱대고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랑께라. 과학적이라고 낯 내세우는 서양의학이 우리 민간요법이 갖고 있는 과학성을 몰르고 허는 비과학적인 소리제라. 나 말이 워쩐가요?"

조원제가 비꼬는 투로 서양의학의 허점을 찔렀다.

"글쎄요, 호박에 염증을 빼는 무슨 성분이 좀 들었는지 원..."

의무과장은 미심쩍고 마땅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원제의 지적을 수긍하려고 하지 않았다.

"서양의학이 지 아무리 과학적이라고 혀도 이 세상에 허천나게 많이 있는 생물덜이 사람의 병에 워떤 효력얼 나타내는지 일일이 분석실험얼 못혔으면 한방이고 민간요법을 무작정허고 비과학적이라고 몰아 때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 게라? 돼지고기나 닭고기럴 묵으면 상처가 곪아터지는디 개고기럴 묵으먼 암시랑토 않은 것도 서양의학이 과학적으로 답허덜 못허지 않는 게라?"

조원제의 또 다른 공박에 과장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는 환자들이 체험한 그 두 가지 약효에 대해서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어채피 약 구허기넌 틀렸응께 과장 동무도 빨치산의학이나 새로 연구허는 것이 워쩔랑가 몰르겄구만요."

조원제는 짓궂게 웃으며 계속 이죽거렸다. 그건 옆구리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데서 얻은 심적인 여유이기도 했다. 약이 조달되지 않는 환자들의 유일한 상처치료제는 호박 속이었고, 상처에 부작용 일으키지 않는 영양식은 개고기였다. 그건 새로운 것이 아니고 구빨치들이 벌써 써온 방법이었고, 그보다 앞서서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요법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양식의 하나였던 늙은 호박이 봄을 거치고 여름까지 남아 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흔할 것 같은 개도 구하기가 그리 손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빨치산들은 자신들의 야간활동을 위해 중요한 지역에 해당하는 마을에서 기르던 개들을 일찌감치 잡아 개장국을 끓여먹어 버렸던 것이다. 호박은 천상 양식이 넉넉한 집들을 훑어야 나왔고, 개도 해방구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나 잡아챌 수 있었다. 두 가지 다 위험을 무릅써야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두 가지는 보투를 나갈 때 양식과 함께 확보해야 하는 대상물이었다. 그러나 환자가 늘어감에 따라 후방부에서는 전담조를 따로 짜기도 했다. 그렇지만 환자보다 싸우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선되어야하기 때문에 어느 환자트에서나 개고기는 자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옆구리의 상처가 나날이 나아가는 것을 조원제는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부기가 빠지면서 욱씬거리는 통증이 가라앉았고, 배 전부가 묵지근하던 기운이 사라지면서 상처부위가 가렵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몸 전체가 가벼워지면서 기분도 아주 상쾌해졌다. 그런데 새로 생긴 고통이 있었다. 가려움을 참아내는 것이었다. 가려움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는데, 긁지를 못하고 참아내자니까 가려움은 더 심하게 느껴졌고, 더 심해진 가려움을 긁어서 풀지 못하니까 끝내는 고통이 되었다. 손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옆구리로 가고는 했고, 그 손이 상처부위에 닿기 직전에 멈추게 해서 앞으로 끌어당기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손을 멈추게 하는 순간 가려움은 와아 소리라도 지르는 것처럼 갑자기 더 심해지고, 어금니를 맞물며 손을 끌어당기다 못해 손가락들은 상처부위에 닿을듯 말 듯해가며 허공을 긁어댔다. 그럴 때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팔다리가 저릿거리며 꼬이고, 정신까지 흐릿거리고 헝클어지려 했다. 가려움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견디기 어렵게 심한 것도, 가려움을 참아낸다는 것이 그렇게도 괴로운 고통이라는 것도 조원제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사람 환장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가려움을 참는 고통은 통증을 참는 고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가려운 데를 마음 놓고 박박 긁어댈 수 있다는 그 하찮은 행위가 회복기의 환자들에게는 가장 절실한 소원이 되어 있었다. 멀쩡한 정신으로도 그런 정도이니 잠결에 환자들의 손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의무과장이 밤샘을 해가며 상처를 긁어대는 손들을 사정없이 쳐내고 있는 것은 너무나 현명한 치료법이었다.

"아 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복막에 염증이 생길까 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르오. 복막염이 됐더라면 참 곤란했을 텐데... 체력이 강한 데다 젊어서 무사했던 거요."

의무과장은 헤벌어져 있던 상처가 차츰 아물어 붙고 있는 조원제의 옆구리를 들여다보며 못내 기뻐했다.

"워디가라, 명당 자리에 묘럴 써서 그렇제라."

조원제는 또 걸고 들었다.

"맞소, 동무의 그 여유 있는 마음도 상처회복에 큰 도움이 됐소."

분명 웃어야 할 대목인데도 의무과장은 이렇게 진지하기만 했다. 농담을 걸었던 조원제가 오히려 멋적어지고 말았다. 그는 체질적으로 의사 같기도 했고, 정서감이 모자라는 쑥맥 같기도 했으며,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입산까지 하게 되었는지 의아스럽기도 했고, 그런 진지함이 바로 열렬한 사회주의자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원제는 그의 별명을 또 하나 생각해내고 있었다. 그건 "맹물"이었다. 그는 진지하되 답답한 사회주의자는 될 수 있어도, 활달하면서도 멋있는 사회주의자는 되기 틀렸다고 생각했다. 조원제는 의무과장의 모습에다 "대꼬챙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문화부중대장으로서 원리원칙을 어기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을 대원들이 마치 의무 과장처럼 생각하고 "대고챙이"란 별명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활달하면서도 멋있고, 지혜로우면서도 따뜻한 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세 사람이 종합되어 이루어진 욕구였다. 서중학교 교장이었던 출판과장, 연대장 이태식, 총사 부사령 염상진이었다. 출판과장의 지혜로움과, 이태식, 염상진의 활달함과, 염상진의 멋있음과, 이태식의 따뜻함을 고루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자기반성을 하게 된 것은 조금 별난 의무과장에 대하게 된 때문만은 아니었다. 환자트까지 일부러 병문안 왔던 노만석의 책망하는 것 같았던 말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연대가 다른 노만석 중대장이 환자트를 찾아온 것은 열흘쯤 지나서였다. 분트사업을 할 때 소대장이었던 그가 환자트를 찾아온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물론 함께 사업을 할 때 너덧 살이 많은 그가 자신을 유달리 아껴주었고, 부대 재편에 따라 서로 헤어지면서 그는 무척이나 아쉬워했고, 작전 중에 어쩌다가 스치게 될 때도 그는 자기 부대로 오라는 말을 꼭하고는 했었다. 그런 정리가 서로 간에 있었다 하더라도 연대가 다르면서 트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역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중대장 동무, 워칳게 아셨는 게라?"

조원제는 혈육을 만나는 반가움으로 노만석의 손을 잡았다.

"이 그그저께 조 동무 중대럴 만냈는디, 눈 씻고 찾어도 조 동무가 웂덜 않더라고. 워메, 그때 땅이 푹 꺼짐스로 놀래분 거, 말또 말소, 수명 십년 감순께로."

노만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어뿐 줄 알았구만이라?"

", 우리 처지에 사라이 안 뵈었다 하먼 열에 아홉은 그리 되는 법잉께. 근디 말이여, 부상얼 당혔단 말 듣고 당장에 쫓아오고 잡었는디, 빈손으로 안 올라다 봉께 늦어부렀구마."

노만석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이 천 동무, 고것 일로 딜이씨요. "

밖에다 대고 일렀다. 그의 말에 조원제는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밖에서 들어온 것은 너무나 뜻밖의 물건이었다.

", 요것으로는 부상당헌 디 쨈미는 디 쓰고, 요것으로는 보신 잠 허드라고."

노만석이 말의 순서대로 먼저 내놓은 것은 무명 한 필이었고, 다음에 내놓은 것은 소다리한 짝이었다. 그가 저지른 두 번째의 뜻밖의 일에 조원제는 한동안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요 많은 물건이 워찌 된 것이다요?"

조원제는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엇갈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 인민덜 괴롭히고 뺏은 물건이 아닝께 안심허드라고, 후방부 특무장헌테 정식으로 말혀 배당받은 것잉마."

노만석은 어떠냐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나 조원제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목 메이도록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한 대원의 위문품으로 너무나 지나친 양이었다. 아무리 특무대를 거쳤다 하더라도 한 대원에게 그 많은 양이 배당되어 버리면 다른 여러 대원들에게 배당될 양이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지적하자니 개인적 정리가 상하게 될 것이고, 그냥 지나치자니 원칙위배에 대한 동조였던 것이다. 조원제는 짧은 시간 동안에 심한 갈등을 느꼈다. 노만석의 행동은 분면 정이 넘치는 것이었지만, 그건 조직의 입장에서 보며 감정에 치우친 인정주의 내지는 가족주의였다. 환자트는 후방부의 조직을 통해서 엄연히 보급을 받고 있으니까 그런 사적인 이중보급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들이 자꾸 묵인되면 조직의 건강은 병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빈손으로 왔어도 고마움은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꼭 정을 표시하고 싶었으면 그 양이 지금 것의 십분의 일 쯤만 되었다라면 이쪽에서도 마음 가벼웠을 것이다. 조원제는 조직원으로서의 상식과 양심으로서 도저히 그 물건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중대장 동무, 나럴 생각혀주는 중대장 동무 맘얼 다 암스로도 요 물건들에 대해서 한 말씀 안 디릴 수가 웂구만이라. 이리 많은 양이 나 한나럴 위해서 요렇크름 처리되는 것은 조직의 원칙에 많은 어긋나는 것이구만요. 워찌 생각허시는 게라?"

조원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철도노동자 출신인 그는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조금 심한 편이었고, 자신보다 나이도 많았으며, 특히 호의를 저버리는 것 같은 오해가 생길 염려도 있었던 것이다.

"! 그 말얼 안 허고 넘어가먼 조 동무가 아니제."

그는 어글어글한 생김에 어울리게 턱을 치켜들며 야성적으로 헛웃음을 치고는,

"나가 조 동무럴 좋아하는 대목 중에 한나가 탱자까시겉이 꼿꼿헌 양심인디, 요것덜얼 갖고 옴스로 폴쎄 조 동무가 그 점을 끌탕잡을 거이다 생각혔구만. 근디 말이여, 원칙은 지키라고 정헌 것잉께 꼭 지켜야 허는 것이야 당연 지산디, 고것도 사람이 서로가 위험스로 탈 웂이 똑바라지게 살아보자고 맹글어 낸 것이 분명헐시, 고것얼 지켜도 사람얼 우선으로 생각혀서 받들고 위허는 쪽으로 늘 품있이 지키고, 낙낙허게 지키고, 푼더분허게 지키고 깝깝혀서 사람이 원칙얼 지킬라고 사는 것이다냐, 사람보담도 원칙이더 중허고 웃질이다냐, 어질어질혀질 판이여. 조 동무가 안직 펄펄허게 젊어서 그러기도 헐 것인디, 그리 대꼬챙이맹키로 뺏시기만 혀갖고는 조직생활이 에로와. 조동무넌 시방 나가 볼 것도 웂이 원칙얼 위반혔다고 믿고 있는디, 미안허제만 요것덜언 원칙 하나또 위반허덜 않고 갖고 왔다는 것을 알아두드라고잉. 무신 말이고 허니, 우리 중대원덜이 괴기국 한 끄니 안 묵기로 만장일치 동의헌 것이 요 소다리짝이고, 나가 개인돈얼 내서 보충해놓게 허고 변통헌 것이요 무명필이다 그것이여. 요래도 원칙 위반인게라, 지도원 동지이?"

노만석은 고개를 쭉 늘여 조원제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조원제는 얼굴이 화끈해지는걸 느끼며 눈길을 떨구고 말았다.

"글고 말이여, 환자트에 워디 조 동무 혼자만 있간디? 이참 저참 혀서 다른 환자들도 보신잠 더 허고 그러는 것이제. 긍께로 원칙얼 지키기넌 지키는디 유도리가 있게, 아니시, 아니시, 안직도 요놈에 쌧바닥꺼지넌 사상무장이 덜 되야갖고 왜눔 말이 튀나오고 그렁마. 왜눔 말일단 취소허고, 긍께로 맘 쪼깐 넉넉허니 묵고 살살 혀, 살살, 뻣뻣허기만 허먼 뿐질러져뿔고, 자리가 높음스로 땁땁허먼 사람이 안 딸른 법잉께로. 조 동무말이시, 사사로운 자리서 나가 요렇크름 말얼 놓는 것도 원칙 위반잉께 당장에 원칙대로 존대럴 붙이까?"

"와따 중대장 동무, 너무 그리 몰아치지 마씨요. 무신 말인지 다 알아묵었고, 나가 면목이 웂어서 똑 죽을 것 겉으요."

조원제는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조원제는 노만석이 돌아가고 나서도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그의 말이 옳고, 그는 훌륭한 조직운영자이면서 원칙실행자였던 것이다. 그보다 학력이 조금 높고, 당사나 좀 더 많이 외우고, 논리적인 단어나 얼마만큼 많이 늘어놓을 줄 아는 자신에게 조원제는 심한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일은 또 하나의 기억과 연결되었다. 출판과장을 놓고 이태식과 벌였던 사유재산 시비였다. 오랜 교단생활의 경험으로 출판과장은 어려운 이론을 아주 쉽게 풀어서 강연하는 솜씨로 지구의 모든 대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특히 배움이 없는 기본출들에게 그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그 인기는 인기로 끝나지 않고 기본출들 거의 출판과장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가 주로 하는 강연은 "사회발전사"였다. 인간의 원시생활과 노동의 시작, 노동의 신성과 평등, 농경생활과 집단사회, 공동경제사회와 정치권력구조, 봉건사회와 경제 착취, 착취의 부당성과 노동신성권의 회복, 혁명의 필요성과 인민이 주도하는 혁명, 이런 단계로 풀어가는 강연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웠고, 설득력이 강했다.

"출판과장 동지 강연얼 듣고 나께 이 시상이 대낮맹키로 훤허게 보이네."

"긍께로 말시. 눈이 번허게 열링마."

"듣고 봉께 우리가 시상얼 속고 속고 또 속음서 헛지랄만 허고 산 것이여."

"참말로 원통허고 절통헐 일이제."

"어허, 긍께로 혁명으로 나서야제. 그 존 말씸 듣고도 앞으로 나슬 생각 않고 죽은 자석붕알만 맨진당가!"

"옳여! 썩은 시상 다 때래뿌식뿌러야제. 혁명혀야 혀!"

"하먼, 우리 권리 찾아나서야제!"

강연을 듣고 난 기본출들은 이렇듯 감동하고, 자각하고, 결의하고 되었다. 의식무장이 안된 입산자들을 집단적으로 교육시키는데 출판과장의 강연은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출판과장은 연일 강연을 다녔고, 한번 들은 대원들이 또 다른 강연을 원해서 부대마다 다투어 새 강연을 청하기에 바빴다. 대원들이 출판과장 앞에서 허리를 반을 꺾어 깊이 절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고, 멀리서 일부러 달려가 절하는 대원들도 많았다. 그런 존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투를 나간 대원들은 출판과장에게 선물할 물건들을 따로 챙기게 된 것이었다. , 조청, 약과 같은 것을 손에 넣게 되면 출판과장에게 갖다 주었고, 그런 귀한 것을 구하지 못한 대원들은 지고 온 쌀을 축내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출판과장에게는 먹을 것이 쌓이다 못해 사유재산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유재산얼 소유하는 것은 원칙위반이오."

조원제는 정색을 하고 나섰다.

"아서,아서, 조 동무. 고걸 그리 한 가닥만 보지 마씨요. 고 물건덜얼 과장 동지께서 원허신 것이 아니라 존경의 맘으로 쪼깐씩 갖다디린 것이야 다 아는 일 아니오?"

이태식이 고개를 저어댔다.

"동기야 그렇제만 결과적으로 사유재산얼 소유헌 것이야 틀림 웂이 원칙 위반인디요. 고것 문제제라."

조원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허, 그눔에 원칙. 사람 참 땁땁허시. 글먼 묻겄는디, 그 사유재산얼 뒤로 빼돌렸소?"

"그러지넌 않제라."

"떡이고 식혜럴 과장 동지 혼자 다 묵고 배탈이 났소?"

"그도 안 그렇제라."

"글먼 해결난 일 아니겄소? 과장 동지가 아무리 마다고 혀도 대원덜언 선사럴 해대제, 쌀이 쌯잉께 과장 동지넌 할 수 웂이 떡얼 허고 식혜럴 맹글어 대원들헌테 도로 갈라 믹이는 것 아니겄소? 결국에 과장 동지넌 사유재산이 하나또 웂은 심이요. 워째 나 말이 틀렸소?"

조원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조 동무, 원칙 잘 지킬라고 허는 것이야 참 존 일인디, 원칙도 다 사람 살라고 하는 것잉께 그리 무시 치대끼 생각덜 마씨요. 이 시상에 사람보담 중헌 것이 따로 웂응께."

이태식의 조용한 말이었다. 그러나 출판과장에게 전해지는 선물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양식이 바닥나는 계절로 접어들면서 자연히 없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비트들이 그렇듯이 환자트들도 많은 골짜기를 따라 그 어딘가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환자트는 병기과 비트처럼 땅을 파내려간 굴이 아니었다. 반드시 물이 가까이 있는 지점에 설치되는 것은 같았지만, 환자트는 가시덤불숲이거나 칡덤불 같은 것이 잡목과 우거져 자연은폐를 이루고 있는 곳에 움막을 치거나 비탈을 파내 반쪽 굴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환자트는 병기과의 비트나 너덜겅 밑의 곡식저장 굴처럼 위장이 완벽하지는 못해도 그 은폐가 아주 교묘해서 어지간한 눈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찾아낼 수가 없었다. 환자트에 며칠 간격으로 차질 없이 공급되는 양식은 후방부 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때 이런저런 약품들도 들어오고는 했다. 미군야전용 다이야찡 가루 한 봉에 의무과장은 환성을 지르기도 했고, 머큐로크롬 한 병에 목이 메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때는 큼직한 조개껍질을 한지 띠로 두른 약 아닌 약이 들어와 의무과장을 실망시키거나 짜증나게 만들었다. 한지 띠에는 용도가 씌어 있었지만 의무과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던져버렸다. 그건 바로 정체불명의 떠돌이 약장수들이 파는 사제품이었다. 약에 따라 그렇게 감정이 민감하게 달라지는 의무과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원제는 의사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치료약을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화선에 나서는 전사가 화력 좋은 총알을 넉넉하게 갖기를 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환자트에서는 막소주도 소금도 약품이었다. 소주는 수술 마취제와 소독제였고, 소금물도 고름을 닦아내는 소독제였다. 그러나 한두 잔 마시게 하는 소주의 취기가 생살을 찢는 수술의 통증을 잊게 해줄 리가 없었다. 더러 파편을 빼내는 수술을 할 때마다 목 찢어져 나가는 처절한 비명소리는 골짜기를 흔들어대고는 했다. 환자트에는 특별한 규율은 없었지만 대변 처리만은 엄격하게 지켜야했다. 똥은 가능하면 밤에 누고, 그것은 반드시 표 나지 않게 땅에 묻어야 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땅에 묻되 표가 나서는 토벌대에게 트위치를 발각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땅에 묻지 않으면 그 냄새를 맡고 날아온 까마귀가 상공을 맴돌아가며 내려앉기 때문에 토벌대가 트의 위치를 알아채게 되었다. 까마귀는 사람의 시체만 뜯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똥도 즐겨 먹었던 것이다. 까마귀가 떼를 지어 맴돌이하는 곳에는 시체들이 있고, 한두 마리가 선회하는 곳에는 아직 썩지 않은 똥이 있다는 것쯤은 토벌대들도 다 알고 있었다. 대변의 뒷처리를 야무지게 해야 하는 것은 환자트가 완전 비무장상태인데다가, 무장대는 화선투쟁에 나서기도 바빠 무장보호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똥을 묻지 않는 사소한 실수 같은 것으로 환자트가 발각당하면 꼼짝없이 몰살이었다. 토벌대에게 발각된 환자트 사방에는 언제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토벌대가 들이치는 순간 비무장인 환자들은 제각기 도주하다가 총을 맞고 죽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트에서 무위도식만 하지는 않았다. 어느만큼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들은 후방부의 일을 거들었다. 그건 담배 썰기였다. 후방부에서 가져온 잎담배를 서너 장씩 말아 자살용 칼로 실 담배를 만들어 다시 후방부로 돌려보냈다. 그 실 담배는 대원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그 일이 대원들을 위한다는 의미는 접어두더라도, 회복기의 환자들에게는 그 일 자체가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 일을 하게 되면 그 괴로운 가려움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담배 썰기를 하려면 두 손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두 손을 묶을 수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자연히 생기게 마련인 성취 욕구에 의해 담배를 더 가늘고 고르게 썰려고 정신을 모으게 되어 가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담배 썰기가 소일거리도 된다는 것은 그 다음에는 오는 덤이었다. 조원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담배 썰기에 몰두했다. 그는 상처가 큰 만큼 가려움도 심했던 것이다. 그가 몰두를 하는 만큼 썰어낸 실담배의 볼품은 누구 것보다 좋았다. 조 동무는 해방되면 전매청장할 거냐고 사람들이 놀렸다. 점심으로 배당된 밀 한 주먹씩을 생으로 우물거리며 모두 담배 썰기를 하고 있었다. 멀지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참이라 불을 피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총소리들이 산울림으로 여울져가며 아슴푸레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환각적이고 몽환적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멀찍이서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뒤따라 사람들이 말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은 모두 담배 썰기를 멈추었다. 그들의 눈길이 의무과장에게로 쏠렸다. 의무과장은 벌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무과장의 뒤를 따라 그들은 트 밖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내밀었다. 아래쪽 숲 사이로 서너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자지러지는 신음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다 왔소, 쪼깐만 참으씨요."

숨이 가쁜 소리였다. 의무과장이 후적후적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침울해져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의무과장과 함께 올라오고 있는 것은 들것이었다.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는 손을 내저으며 계속 신음하는 사람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트의 위장문 앞에서 비켜서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침울했던 그들의 얼굴은 이제 어두워져 있었다. 들것에 실려 올 정도면 목숨에 위험은 없더라도 중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켜선 그들 앞으로 들것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 저 사람..."

조원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더듬거리고 있었다. 들 것을 뒤에서 들고 있는 사람은 땀범벅인 얼굴로 조원제를 힐끗 쳐다보았다. 조원제가 급히 들것을 따라붙으며 다시 환자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아이고 오마니, 나 좀 살려주시라요, 나 죽갔시요오."

들것이 트로 들어가며 환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이북 사람인디, 아는 사람이요?"

옆에 선 사람이 조원제에게 물었다. 조원제는 아무것도 보는 것 없는 빈 눈길을 앞에다 둔 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아랫배짬이 피투성이가 되어 들것에 누워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 인민군이었다. 작년 구월하순의 북상 길에서 총알을 놓고 시비가 붙었던 그 인민군.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인민군복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민군복은 너무 표가 나서 입산 초기에 벌써 후방부에서 만든 옷이나 국방군복으로 바꿔 입기 시작했고, 굳이 인민군복 입기를 고집한 사람들도 그동안의 거친 산생활로 다 헐고 찢어져 다른 옷으로 갈아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결국 북상을 하지 못했군... 그렇겠지, 도당도, 염상진 동지 같은 사람도 발길을 되돌렸으니까... 그는 그동안 어느 지구에 있었을까... 찾아 헤매던 중대장은 찾은 것일까...

"아이쿠 오마니이, 나 죽갔어! 동지, 의무관 동지, 나 좀 살려주시라요. 나 죽어도 오마니 있는 고향에 가서 죽갔시오. 그때까지만 살려주시라요. 아우, 야야야야..."

환자트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였다. 의무과장이 진찰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원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부상이 자신처럼 기적적(?)이기를 바랐다. 그가 불러대는 귀에 선 "오마니"라는 소리가 그리도 절망적일 수가 없었다. 조원제는 잡히는 대로 풀줄기를 뽑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간호병을 앞세우고 의무과장이 트에서 나왔다. 조원제는 그쪽으로 걸음을 빨리 옮겼다.

"어두워지기 전에 수술을 해야겠소. 빨리 좀 끓이시오."

의무과장이 간호병에게 지시했다.

"워디럴 다쳤는게라?"

조원제가 물었다.

"오른쪽 허벅지하고 아랫배 사이에 파편이 박혔소."

얼굴이 냉정해진 의무과장의 대답이었다.

"근디, 어쩌겄는게라?"

"글쎄... 위치가 고약해서 아직 잘 모르겠소. , 조 동무가 불 피우는 걸 좀 거들어주겠소?"

"하먼요, 그러제라."

의무과장은 곧 트로 들어갔다. 조원제는 간호병을 제치고 연기가 나지 않게 때죽나무를 우물 정자로 걸쳐놓고 불을 피웠다. 수술기구가 끓는 동안에도 환자는 계속 신음과 함께 어머니를 외쳐 부르고 있었다. 수술기구가 트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으악! 아으 아아아아..."

곧 죽는 것 같은 발악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고통에 몸부림치는 처절한 비명은 끊일 줄 모르게 길게 이어지며 골짜기를 울려대고 있었다. 그 피를 토해내는 것 같은 소리의 힘으로 풀들도 떨리고, 나뭇잎들도 떨리고, 바위들도 금이 가는 듯싶었다. 주먹을 부르쥐고 선 조원제는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도 제각기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아으 나 죽어어! 오마니, 나 여기서 죽기 싫으니까 나 좀 데려 가시라요오, 오마니이-"

그리고 비명은 뚝 끊어져버렸다. 모두의 고개가 환자트로 돌아갔다. 긴장된 얼굴들에 의문이 서려 있었다.

"죽어뿌렀으까!"

누군가가 침묵을 깼다.

"금메, 그 소리가 쪼깐 요상허기넌 혔는디..."

누군가의 자신 없는 말이었다.

"아니오, 혼절혔을 것이오."

조원제의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완강했다. 아무도 더는 말이 없었다. 먼 산울림으로 들리던 총소리의 기세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맑게 높아진 하늘에 날갯짓 느린 새가 서너 마리 날아가고 있었다. 옆의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바람결이 선뜻하게 느껴지면서 풀벌레 소리가 가느다랗게 울리기 시작했다.

환자트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의무 과장이었다. 조원제는 그에게로 빨리 걸어갔다. 얼굴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그는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워찌 됐는게라?"

"복막이 다치지 않았길 바랐는데, 상하고 말았소. 내출혈이 너무 심해서 어려울 것 같소."

의무과장은 먼 곳을 바라본 채 고개를 저었다. 조원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옆구리의 상처가 긴 꼬챙이로 찌르는 것처럼 뜨끔 결렸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왼손으로 옆구리를 받쳤다. 그 인민군이 어머니를 부르는 외침이 쟁쟁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인민군은 혼수상태인 채 자정 무렵에 숨이 끊어졌다. 그가 남기고간 것은 환자트에 가득한 피비린내뿐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부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환자는 부실한 연장들을 가지고 묵묵히 땅을 파기만 했다. 연장이 시원찮아 땅을 깊이 팔수는 없었다. 그가 실려 온 가마니를 뜯어 한 자락을 깔고, 한 자락은 덮었다. 봉분 없는 그의 무덤은 산풀들로 덮였다.

"동무들, 이 인민군 동무가 어지께 소지 질르는 말 다 들었제라? 이북동무들은 다 그리 고향땅에 가고 잡아 험스로 수천 리 타향 땅에서 이리 죽어가고 있소. 거그에 비허먼 고향땅에서 죽을 수 있는 우리넌 을매나 큰 복이오. 이점 생각혀서, 우리가 다 이북 동무덜헌테는 감정이 쪼깐썩 안 좋은디, 앞으로 그런 맘 다 웂애고 진심으로 잘 대허도록 헙씨다."

조원제의 침통한 말이었다.

"야아, 존 말씸이구만이라. 지도원 동지 말씸대로 허겄구만요."

누군가가 대꾸했고,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몸들 나서갖고 부대로 돌아가먼 오늘 이약 차근허게 혀서 다른 동무덜도 그리 허게 맹글어주씨요."

"하먼이라."

"그리허제라."

서너 사람이 대답했다. 조원제는 갓 피어난 갈대꽃 하나를 꺾었다. 무덤을 덮고 있는 풀들 사이에 그것을 꽂았다. 같은 나이 또래인 그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조원제는 흰 갈대꽃이 바람결에 가벼이 흔들리는 것을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환자트에 긴급대피령이 내려온 것은 이틀 뒤였다. 그들은 신속하게 세 명씩 소조를 이루어 대피에 들어갔다. 대피령은 토벌대가 공격해 오는 골짜기와 등성이에 따라 그때그때 내려오고는 했다. 만일의 위험에서 환자들은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그 동안 두 차례의 대피경험이 있어서 그들의 신속한 움직임에는 여유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승리고지 산마루를 넘어 골짜기를 타고 내려갔다. 토벌대는 해방구에서 공격해오는 것이고, 아직도 해방구를 사이에 둔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쩌그 양쪽 등성에서 쌈이 붙을 것잉께 요 골짝 밑으로 퍼져서 피허씨요. 글고, 쩌 통명산새끼맹키로 생긴 고지럴 우리가 점령허먼 만세 두 분, 개덜이 점령허면 만세 한 분얼 불를 것잉께, 그 신호를 듣고 움직기리씨요덜."

선요원이 길을 바꿔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그들은 각기 조별로 분산했다. 조장인 조원제는 은신처를 찾으며 비탈을 내려갔다. 왼손으로는 옆구리를 받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두 사람은 똑같이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하나는 무릎 뼈 부상이었고, 또 하나는 발목 부상이었다. 조원제도 몸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걷는 것은 그중 나은 편이었다. 조원제는 골짜기가 휘어져 돌며 다른 산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을 멈추었다. 만일 토벌대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더라도 곧 옆의 산줄기로 붙기 위해서였다. 키 작은 잡목들 사이의 풀덤불을 헤치고 들어가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골짜기 위에서 총소리가 울리가 시작했다. 조원제는 눈을 감았다. 총소리의 울림이 유난스러웠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등성이에서 맞총질을 해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지형적으로는 총알들이 난무하는 아래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토벌대가 해방구 쪽에서 공격을 하고, 이쪽에서 승리고지를 비롯한 외곽고지 밖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해방구를 다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해방구를 다 잃게 되면... 투쟁할 산이야 얼마든지 남아 있지만 투쟁은 그만큼 어렵고 불리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식량 확보도 그렇고, 그 많은 비무장대원들의 보호도 그렇고... 또 사기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다. 자꾸만 물을 잃어가는 고기들이 아닌가... 해방구를 장악했던 투쟁이 일 년, 어쩌면 적들의 그 막강한 화력 앞에서 그 세월은 기적처럼 길었는지도 몰랐다. 그 동안 도당 전체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반 가까이 죽지 않았을까, 아니 반이 넘을지도 모른다. 돌림병 재귀열로 그리 떼죽음을 당했고, 또 싸우면서 수없이 죽어가지 않았나... 반으로 잡아도 그 수가 얼마인가... 만여 명이 죽은 것이다. 정규군이 아닌 인민들이 그렇게 죽어간 것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죽어간 것인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간해방의 역사를 위해, 인민행방의 세상을 위해... 그들은 짓밟히는 인간으로 주저앉아 있지 않고 스스로 전사가 되어 불의의 역사와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것이다. 빨치산 - 자각한 인민들이 전사로 뭉쳐진 덩어리. 강제가 없는 그 자주적 군대는 가장 순수한 혁명의 동력이고, 바로 인민의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들의 피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뜨겁다. 그래서 그들이 죽어가면서 뿌린 피는 고결하고, 그 피는 참다운 인민의 역사를 키운다. 그 역사는 기필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역사의 성취를 위해 몸 내던져 죽어간 인민전사들은 전남도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도당마다 다 있는 것이다. 그 수를 다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수만 명... 그러나 그러나 아직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투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구빨치들이 그랬던 것처럼. 앞서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 앞에서 지금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은 죽음을 건 투쟁뿐이다. 투쟁을 통한 죽음은 의무가 아니다. 앞서간 동지들이 보여주었듯이 그건 권한이다... 인민해방의 역사를 창출하기 위한 권한이다...

조원제는 언제나처럼 감정의 뜨거운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꼭 감은 그의 입에서는 무엇엔가 억눌린 소리가 무슨 신음처럼 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총소리들이 강약의 물굽이를 이루며 계속 울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외침이 가끔씩 그 사이에 섞이고 있었다.

"인자 저 잡녀러 새끼덜이 공화국 시간도 안 무서바 헌당께로."

조원제의 왼쪽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운이 씨졌다 그것 아니겄소."

맞은쪽에 앉은 남자가 말을 받았다.

"저 잡것덜이 갈수록 심이 씨지는 모냥인디, 은제꺼정 그럴께라?"

"금메 말이요, 영 지랄 겉은 일인디... 고것얼 워찌 알겄소?"

"휴전얼 헌다헌다 해쌓는디, 휴전이 되면 그짝 병력이 이짝으로 왈칵 내리밀리는 것 아니겄소?"

", 그럴란지도 모를겄소. 그리 되면 우리가 큰 탈 나불 것인디, 으쩌제라?"

조원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길이 왼쪽사람에게 박혔다. 그리고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동무덜..."

조원제의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다.

"동무덜언 앞날이 걱정인 모냥인디, 그리 걱정헐 것 웂소. 우리헌테넌 당이 있고, 항꾼에 목심 걸고 싸우는 동지덜이 있소. 근디 머시가 걱정이고, 머시가 겁나시요? 물런 동무덜 맘 몰르는 것이 아닌디, 목심이 위태혀지먼 겁 안 묵을 사람 이 시상에 하나또 웂을 것이오. 허나, 고것이야 지 욕심밖에 못 채리는 쫌팽이 쌔끼덜이 허는 짓거리고, 동무덜이야 새 시상 맹글겄다고 총 들고 나슨 전사덜 아니오? 글먼, 우리보담 먼첨 죽어간 동지덜얼 생각해 봇씨요. 그 동지덜이 재수가 웂어서 먼첨 죽었겄소? 명이 짧아서 먼첨 죽었겄소? 그것이 아니오. 그 동지덜언 우리럴 대신혀서 먼첨 죽어간 것이오. 우리헌테 날라오는 총알얼 그 동지덜이 먼첨 맞고 죽었다 그것이오. 글먼 우리넌 인자워째야 쓰겄소! 그 동지덜 원수를 갚어야 쓸 것 아니겄소? 그 원수들이 또 우리럴 죽일라고 뎀비는디 맞대거리고 싸와야 쓸 것 아니겄소? 새 시상 맹글기 바랬든 뜻 못이루고 원통허게 먼첨 죽어간 동지덜이 사방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우리를 뻔하니 쳐다보고 있소. 그러고, 당도 건재허고, 모든 동지덜도 용맹시럽게 싸우고 있소. 동무덜언 워째야 허는 것이 좋다고 생각허요?"

조원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성적이고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지도원 동지, 면목 웂구만이라."

"지도원 동지, 다시넌 고런 짜잔헌 소리 안허겄구만이라."

두 사람은 고개를 수그렸다. 조원제는 그들의 손을 덥썩 잡았다.

"동무덜, 믿으씨요. 우리가 바래는 시상이 꼭 올꺼싱께. 고것얼 믿고 용감하게 싸웁시다. 그러다가 죽으먼 아까울 것이 머시가 있소. 우리 뒤에는 또 우리 뜻얼 따라 싸우는 동지덜이..."

"지도원 동지! 쩌그 저 만세 소리!"

오른쪽 대원의 다급한 말에 조원제는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만세 소리?" "야아, 만세소리가 났구만요."

"멫 분이요?"

"두 분인디요."

"틀림 웂소?"

조원제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말에 취해 그 소리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럴 것인디요...“

그 대원은 약간 더듬한 얼굴이 되었다. 조원제는 미심쩍어 골짜기 위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총소리가 걷힌 그쪽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만세는 약속대로 한차례 불렀으면 그만이지 계속 부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갑시다. 우리가 이겼는갑소."

조원제는 풀덤불을 헤쳤다. 조원제는 당원이면서 정치지도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다시 앞장섰다. 아까 피신을 하려고 골짜기를 내려갈 때보다는 다시 올라가는 것이 한결 마음도 몸도 가벼웠다. 조원제는 빨리 걸으면서도 물들기 시작하고 있는 나뭇잎들과, 언제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을 눈에 담으며, 아아, 벌써 가을인가! 하는 감정의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골짜기를 절반쯤 넘어섰을 때였다. 앞에 인기척을 느끼며 조원제는 반사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숲 사이에서 사람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아니, 저게 뭔가! 조원제와 두 사람은 딱 굳어지고 말았다. 이십여 미터나 될까, 비탈 저 위에서 까딱까딱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은 경찰이었다.

"여기야, 이리 와, 이리!"

총을 세워 들고 있는 경찰은 빠른 손짓과 함께 낮춘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은 비무장인 자기네들을 자수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조원제는 퍼뜩 깨달았다.

"우측 사면!"

조원제는 돌아서며 외쳤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서라! 안 서면 쏜다"

뒤에서 외쳤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귀에 그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세 사람은 마치 성한 사람들처럼 오른쪽 비탈을 향해 제각기 내달리고 있었다. 조원제의 옆구리를 받치고 있던 왼쪽 팔은 오른쪽 팔과 똑같은 모양으로 힘차게 엇갈리며 허공을 쳐내고 있었고, 두 사람의 발도 절룩거림 없이 길도 없는 비탈진 땅을 박차대고 있었다. ! 타당! ! 세 사람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들의 뜀박질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타당, ! , ! 총소리는 더 많아졌다. 그들의 옆이고 뒤에 총알이 푹푹 박혔다. 그때 오른쪽 등성이에서도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여럿의 목소리가 합쳐져 외쳐댔다.

"이 새끼들아 쏘지 마라, 환자다아!"

"환자다, 환자! 쏘지 말아라아!"

그 외침이 조원제의 가슴을 콱 막히게 했다. 그는 눈물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동지들을 향해 더 세게 달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쏘지 말어! 환자야!"

"더 씨게, 더 씨게 뛰어!"

"영차, 영차! 영차, 영차!"

오른쪽 등성이에서는 총소리와 함께 이런 외침과 응원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탈로 너덧 사람이 총을 난사해대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환자구출에 나선 돌격대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조원제를 끌어안았다.

"조 동무, 나 눈앞에서 조 동무럴 죽이는지 알었소!"

그 사람이 격하게 한 말이었다. 조원제는 비틀거리며 그 사람이 연대장 이태식인 것을 알아보았다.

"나 동상허제, 동상."

평소에 이태식이 농담처럼 하곤 했던 말이 떠오르며 조원제는 눈물이 울컥 솟았다.

"연대장 동지!"

조원제도 이태식을 끌어안았다. "강철" 말고도 "백아산 호랑이"라는 또 다른 별명을 지닌 이태식의 눈에 눈물이 엷게 번지고 있었다. 이태식의 부축을 받으며 등성이로 올라와서야 조원제는 옆구리가 견딜 수 없도록 아픈 것을 느꼈다.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것처럼 쑤시고 화끈거리고 쥐어짰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옆구리를 감싼 그는 어이없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목숨을 건 한바탕 굿은 물론 신호를 잘못 들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가 워째 찾아가보고 잡은 맘이 웂었을 것이오. 맘이야 하로에도 열 분도 더 일어나도 트에 워디 조 동무 혼자뿐이간디. 딴 부하들도 있는디 조 동무헌테만 표 나게 헐 수 웂은 일이고... 아픈 디가 에진간허먼 트에서 나오제 그려. 신색이 많이 상혔는디, 위험시런 고비 넘겠으먼 그 담 부터야 묵는 것이 실해야 병도 얼렁 낫고 사람 몸도 지대로 넘겠으먼 그 담이오. 후방부에서 지 아무리 열성으로 묵을 것얼 댄다 혀도 고것이 워디 부대허고 댈 것이나 있간디. 다 아는 일이제만, 부대야 움직이다 보면 과외 것도 생기기도 헌께. 의무과장허고 의논혀서 하로라도 얼렁 나오도록 혀, 조 동무."

이태식이 헤어지기 직전에 간곡하게 한 말이었다. 환자트에 돌아와서 보니 아물었던 옆구리의 상처는 손가락 길이만큼 다시 터져 있었다. 굳어진 피를 물고 벌어져 있는 상처를 내려다보며 조원제는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흉터의 길이가 한 뼘이 넘는 중에서 가운데가 그 정도 벌어지고 목숨을 구한 것을 생각하면 별로 억울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옆구리의 흉터는 자신이 보기에도 끔찍하고 흉측스러웠다. 총알이 헤집고 지나간 자리는 푹 패인 채 살이 우둘투둘하게 되어 아물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색깔이 다른 피부와 달리 거무칙칙하게 붉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물린 자리는 주위의 살을 잡아끄는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흉터는 총알이 지나간 자리만이 아니라 그 주위까지도 흉터인 것처럼 보여 엄청나게 크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상처가 그렇게 못난 것을 조원제가 불평하자, 의무과장은 의학치료를 못하고 자연치료가 되어 그렇다며 민망하게 웃었던 것이었다.

"더 무슨 약물치료를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까 환자트에 머무는 건 요양치료 정도인 셈이지요. 이 상태에서 부대로 돌아가는 건 별 무리가 없겠지만, 아문 자리가 그리 됐으니 붕대로 감고 여기서 한 사나흘 더 지내다가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 자리가 다시 빨리 아물어야지 무리해서 움직이다가 덧나기 시작하면 참 곤란해집니다."

의무과장의 말이었다. 조원제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덧나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통증이 심해 떠나라고 해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함께 변을 당한 두 사람도 상처의 통증이 도져 끙끙 앓아대고 있었다. 그런데 만세 소리를 잘못 들었던 사람이 더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원제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그저 비식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벌써 다른 환자들에게 한바탕 면박을 당했던 것이다. 그 사람의 실수는 세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것이었지만, 결과가 무사하게 된 이상 굳이 들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실수를 따지자면 그 궁극적인 책임은 조장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조원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 어쨌든 간에 만세 소리를 놓친 것도 그렇고, 직접 확인이 안된 상태로 행동을 개시한 것도 그랬다.

조원제는 사흘 뒤에 환자트를 떠났다. 시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동안 한 달반이 지나가 있었다. 한 달반이라는 시간감각은 별것이 아닌데 그 동안에 일어난 시각적 변화는 엄청났다. 짙푸른 녹음을 헤치며 환자트를 찾아들었는데 그 녹음이 단풍 드는 것을 보면서 환자트를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대로 돌아오니 더 크고 많은 변화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부대원들이 얼굴이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은 딴 부대로 간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죽어간 것이었다. 그 다음이 지구 재편성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 비무장대원들을 지리산으로 피신시키는 작전이었다. 각 지구의 해방구가 유린되면서 비무장대원들의 보호가 어렵게 되자 취해지는 불가피한 조처였다. 여순항쟁 때 그러했든 지리산은 또 피신투쟁지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난 구월 이십일에 이승만이 휴전수락 사대원칙을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정전반대국민대회를 극성스럽게 열어대던 그 영감이 휴전을 "수락"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투쟁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정치국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휴전수락 사대 원칙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조원제는 하늘을 보고 한참이나 웃어야 했다. 중공군 철퇴, 북한군 무장해제, UN 감시 하 총선거, 휴전조건 동의기간, 회담종결 기한 설정이 그것이었다. 이승만의 그 원칙을 뒤짚어 놓고 보면, 남쪽에는 UN군 주둔, 남한군 무장유지, UN보호 하 강압선거가 되었다. 휴전협정의 "협정"이란 말뜻을 최소한이나마 안다면 그 따위 잠꼬대 같은 일방적 주장은 내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의 권력 장악과 그 유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늙은이의 또 다른 작태를 보며 조원제는 옆구리가 결리도록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네 번째의 소식은 너무나 통쾌했다. 그러나 통쾌한 만큼 실망을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그 신화적인 인물인 이현상의 부대 "남부군"의 곡성읍 전체와 그 인접지역 점령에 대한 것이었다.

"긍께로 구월 삼십일 자정에 남부군이 우리 도당 백운산 부대허고 합동작전으로 곡성을 들이쳤는디, 새북꺼지 깨끔허게 읍내럴 묵어불고, 오곡지서꺼지 손안에 넣었구마. 구례 쪽이고 남원 쪽이고 질이란 질언 남부군 손에 다 맥히고, 곡성은 완전허게 해방구가 된 것이제. 시뻘건 대낮에 신작로럴 턱턱 막고 선 남부군덜얼 봉께 그 뱃보허고 용감시런 모냥이 참말로 기맥히등마. 소문에 듣든 대로 천하무적이란 말이 바로 저것이로구나 허고 탄복이 절로 나왔제. 금메, 곡성으로 진격험스로도 대낮에 행군얼 혔당께 무신 말얼 더 허겄어. 빨치산이 "밤손님"이란 말얼 싹 뒤집어뿐 것이제. 근디, 남부군 작전은 곡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어. 곡성 담으로 광주럴 치고 들어간다고 혀서 우리 백아산지구도 합동작전에 나슬라고 단단허게 준비럴 혔제. 광주럴 새로 접수헌다고 생각헌께 그 심정얼 참말로 말로 다 헐 수가 웂드란 말시. 대원들이 모다 새 기운얼 체리고 나스는디, 남부군이 따로 웂었제. 근디 말이여, 본시 곡성 것덜이 싹수 웂이 경찰 쪽에 많이 붙고, 보투에도 질로 협조럴 안 허는 느자구웂은 땅 아니드라고? 요분 참에도 그 행투럴 또 부려서 젊은눔덜이 경찰허고 붙어서 저항얼 벌인 것이여. 경찰에, 의경에, 청년단에, 새로 붙은 눔덜꺼지 합친게 그 수가 수백 명인디, 요것덜이 여그저그서 찝쩍기리고 뎀빈께 광주로 치고들어가기 전에 그것부텀 쓸어얄 것 아니라고, 그러고 있는 판에 얼토당토않는 일이 터져뿌렀어. 아 금메 남원 쪽에서 경찰 전투사령부 병력이 기차로 느닷웂이 곡성 읍내로 들이닥쳐뿐 것이여. 그 가당찮은 일이 워찌 벌어졌냐 허먼, 외곽방어럴 맡고 있든 남부군 일부가 맘얼 턱 놓고 놀고 있는 새에 기차가 통과혀뿐 것이드라 그것이여. 기차에서 쏟아진 적덜이 공격얼 해대는 디다가, 전남경찰국에서 또 기동대가 몰아닥친 것이로구만. 그렁께 남부군은 두 패로 갈라져서 협공을 당허는 꼴이 되야뿐 것이제. 헹펜이 그리 된께 남부군이라고 워쩌겄어. 병력도, 화력도 딸린께 도로 지리산으로 물러슨 것이제."

이태식이 허탈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참 맥빠지고 싱겁게 되야부렀소이. 그 씨다는 남부군이 워째 본전치기도 못되는 고런 일얼 혔는지 몰르겄소?"

조원제도 떫은 입맛을 다셨다.

"지내놓고 찬찬히 따져봉께 남부군 작전에 문제가 많아. 경찰이 그리 빠르게 양쪽에 들이닥친 것은 남부군이 대낮에 헹군얼 헌 것 땜시여. 자신 있게 행동허는 것이야 존디, 고것이 적얼 끌고 댕낀 꼴이 되야부렀어. 글고, 그리 쉽게 물러슬람서 적이 날로 씨져가는 판에 멀라고 곡성얼 쳤나 그것이제. 남부군 실력얼 한분 뵈잔 것이먼 몰라도, 이문 본 것이 암컷도 웂은 그런 작전은 빨치산 기본전술에도 어긋나는 것이로구만. 남부군얼 새로 봐야 쓰겄어."

이태식은 아주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금메 말이요, 쌈이 다 끝난 것도 아닌디 기차가 그냥 통과허도록 방어럴 허술허게 헌 남부군도 우섭고, 적진으로 무작정 들이닥친 경찰도 우섭고 그렇구만이라."

"바보허고 바보허고 붙은 쌈에서 더 바보가 이게뿐 것이 요분 쌈이여!"

이태식의 일갈이었다.

 

조계산지구도 지리산으로 피신시킬 비무장대원들을 편성하느라고 한창이었다. 비무장의 범위는 원시무장까지 포함시켰다. 그러나 비무장대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내지는 않았다. 일단 그 원칙을 정해놓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무장대원과 비무장대원이 바뀌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무장대원이 지리산으로 가기를 원하면 무기를 반납하고 비무장대원 되었고, 비무장대원이 지리산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으면 무장대원으로 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아 부대편성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비무장대원들의 지리산 이동은 단순히 피신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건 모든 지구의 투쟁력 정예화였다. 토벌대의 세력 확산으로 해방구들을 잃게 되고, 그에 따라 신속한 기동성을 발휘하는 산악이동투쟁이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해방구의 투쟁인민들까지 포함한 비무장병력을 전투 때마다 안전지대로 이동시키고 보호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연대는 통 그 연대의 병력보다 두세 배가 많은 비무장들을 이끌게 되었다. 그건 이동투쟁의 생명인 기동성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기동성의 약화는 곧 전력의 약화였으며, 또한 전투 중에도 그들을 보호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인 전력약화도 초래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방법은 언제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을지 모를 위험을 안고 있었다. 화선투쟁에 나선 무장대가 무너지면 그 보호를 받고 있는 비무장대가 따라서 결정적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투쟁을 두 달 가까이 해온 결과 도당은 지리산 이동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동과 함께 또 한 가지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대원들을 대상으로 간부양성을 위한 대학생들을 뽑았다. 지리산에는 단기과정의 당 학교, 군정대학, 의과대학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장기투쟁에 대비해 안전지대인 지리산에 간부를 길러내자는 계획이었다. 자원과 추천의 두 방법으로 젊은 대원들은 그 길을 나서고 있었다.

"어이, 천 동무, 동무도 지리산으로 가는 거이 어쩌겄소?"

어느 날 하대치가 천점바구를 조용하게 불러 한 말이었다.

"야아? 지리산이라고라?"

천점바구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워째 그리 놀래고 그요? 나할라 깜짝혔구만."

하대치는 가볍게 혀를 차며 씨익 웃었다.

"지가 무신 과오 범했는 게라?"

천점바구는 하대치의 친근한 웃음은 아랑곳없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 무슨 생뚱헌 소리요?"

하대치가 정색을 했다.

"지럴 비무장 맹글라고 그러신게라?"

", 고런 것이 아니고 천 동무보고 대학상 되야보라는 이약이오."

"야아? 지까징 것이 뜽금웂이 무슨 대학상이라?"

천점바구의 얼굴이 이젠 어리둥절하게 변해 있었다.

"고것이 무신 말인고 허니, 지리산에 대학이 서너 개 있는디, 천 동무가 갈 아조 마땅헌 대학이 한나 있소. 고것이 군정대학이라는 것인디, 거그서 공부허고 나오먼 천 동무가 염상진 대장맹키로 되고 잡아허든 질이 훤허니 열리게 되야뿌는 것이오. 으쩌요?"

"금메요, 핵교는 문턱도 못 볿아보고, 포도씨 글이나 깨친 지겉은 것이 워쩌크름 대학생이 되겄는게라. 맥없이 뱁새가 황새 따라 갈라다가 가랭이나 찢어지제라."

천점바구는 고개를 저었다.

"어허 천 동무, 동무넌 아직도 그 못된, 거 머시냐, , 계급적 피해의식을 청산허지 못혔소! 무학자에서 당원꺼지 된 몸으로 고것이 무신 못난 소리요. 동무 자격이야 당이 인정헌 것잉께 가서 잘 배와갖고 당당허니 염상진 대장 겉은 인물이 되게 혀봇씨요."

그건 하대치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였다. 지난날 염상진이 자신을 이끌어 주었듯이 자신은 천점바구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염상진의 되풀이된 다짐이기도 했다. 끝없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봉사해야 한다. 인간사업 없이는 당도 혁명도 해방도 없다. 하나의 적을 무찌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 인간에 대한 사업이다. 적의 척결과 인간 사업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당의 이대 사업이다.

"염 대장 동지께서 지리산으로 가신당가요?"

천점바구가 뚜벅 물었다.

"여그넌 으쩌고?"

"허먼, 연대장 동지가 가시는 게라?"

"나도 안 가는디..."

"글먼 지도 안 가겄소."

천점바구의 태도는 단호했다.

"어허 천 동무..."

하대치가 입을 열기 바쁘게 천점바구가 말허리를 자르고 들었다.

"지 맘언 한 가닥으로 땅 정해졌응께 더 말씸혀도 소양웂구만이라. 두 동지 옆에서 한 발도 안 띌 참잉께라."

"허 참, 저 고집통머리! 넘 웂은 저눔에 점 땀세 긍가 워쩐가..."

하대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어디까지 순조롭게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천점바구의 완강한 태도에서 하대치는 어떤 뜨거운 믿음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군정대학을 가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원으로서의 내일을 보장하는 것이면서, 당장의 위험을 피하는 길이기도 했다. 천점바구는 그 정도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망설이는 것 없이 그 길을 마다했던 것이다.

장흥 유치지구에서 이해룡이가 도착할 날이었다. 그저께 안창민에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뒤로 하대치는 지난날 씨름대회를 기다리던 심정으로 이틀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것이 꼬박 일 년 세월이었다. 산 생활 일 년 동안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오래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날을 위험 속에서 살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드는 지도 몰랐다. 이해룡은 해질녘이 다 되어 안창민과 함께 나타났다.

"하 동무, 나요, 이해룡이!"

두 팔을 쫙 벌린 이해룡이 소리쳤다.

"우화아, 이 동무!"

하대치도 맞받아 소리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다.

"와따, 보고 잡아 죽을 뿐혔소. 이도령 기둘리넌 춘향이 맴이 나만 혔을랍디요?"

하대치가 반가움이 출렁거리는 소리로 이해룡을 불끈 들어올렸다.

"어허, 그 황소기운은 여전하군요."

이해룡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참 해도 너무합니다. 남자끼리 좀 기다린 걸 가지고 춘향이까지 팔아먹습니까. 그래." 웃음 띤 안창민이 하대치에게 눈총을 보냈다.

"안 동무, 섭헌 소리 마씨요. 이도령허고 춘향이야 하로밤 정 통헌 풋정이고, 우리야 목심 항꾼에 내걸고 싸운 짠득짠득헌 갱엿정잉께."

이해룡을 내려놓은 하대치가 지체할 것 없이 대거리한 말이었다.

"아이고, 그리 말하면 내가 손발 들었소."

안창민이 팔을 드는 시늉을 하며 물러섰다. 객담으로 하대치의 입심을 이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 동무! 얼굴이 워째 그리 되얐소?"

하대치가 느닷없이 소리 질렀다. 그는 그때서야 이해룡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 이거 별거 아니오."

이해룡이 왼쪽 볼을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며 말했다.

"아닌디, 많이 상혔는디. 워찌 해필나게 얼굴이여, 그려. "

얼굴을 잔뜩 찡그린 하대치는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 하듯 하고는,

"빌어묵을, 워디 잠 똑똑허니 봅씨다. "

이해룡에게로 다가서며 혀를 차댔다. 이해룡의 왼쪽 볼은 그 흉터가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말로, 은제 이리 됐습디여? 씨부랄 눔덜이 그 좋든 인물얼 요리 망쳐놨구만 그려."

하대치는 빠드득 이빨을 갈아붙이더니 또 혀를 차댔다.

"지난 사월 달에 그리 됐어요."

이해룡은 그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옳여, 그때 쌈판이 컸제라. 총알입디여, 파편입디여?"

"총알이었어요."

"와따메, 큰 탈 날뿐혔네! 총알이먼 이만허기 참말 요행이요."

"그렇지요, 운이 좋은 셈이지요."

이해룡은 얼굴이 그리 흉하게 망가진 것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워쨌그나 그 좋든 인물이 너무 아깝게 되얐소."

하대치는 "안직 장개도 안 간 나이에..." 하는 말을 꿀떡 삼키고 있었다.

"아깝기는요, 얼굴 뜯어먹고 사는 악극단 배우도 아닌데요. 이게 다 인민의 훈장이고, 빨치산의 훈장 아니겠소? 어때요. 진짜 빨치산 같지 않아요?"

이해룡이 두 손을 허리에 거리며 가슴을 펴보였다. 그런 이해룡의 모습은 전과 다르게 훨씬 억세고 강해 보이기도 했다.

", 아조 당당허고 용맹시러와 보이요. 워쨌그나 이 동무가 그리 화통허게 생걱헌께 사람도 맘이 씨림스롱도 좋으요. 그리 맘묵기가 쉽덜 않은디, 하여튼지 간에 이 동무가 장허요."

"장하긴요, 의당 그리 생각해야지요."

이해룡이 담배쌈지를 꺼냈다.

"자아, 저쪽으로 앉읍시다. 그래야 담배도 말고, 다리도 쉴 테니까."

안창민이 움막 쪽으로 발을 옯겼다. 세 사람은 움막 안에 자리를 잡았다. 통나무로 기둥을 얽어 세우고 지붕을 갈대와 풀로 위장해 덮은 움막이 해방구를 잃은 것을 실감시켰다. 그 임시방편인 움막은 구빨치 투쟁을 겪은 그들에게는 친숙한 것이기도 했다.

"이지숙 동무도 불를 것인디 그렸소. 이 동무가 을매나 반가와라 헐 챔인디."

하대치는 안창민과 이해룡에게 동시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창민과 이지숙을 한번이라도 더 같이 있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보투에서 묻어 들어온 분통을 굳이 이지숙에게 갖다 주었던 것도 안창민을 만날 때 쓰라는 뜻이었다. 이지숙이 무색해 할까봐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거 좋은 생각이오. 당장 부릅시다. 어디 있는지, 하 동무, 연락병 띄울 수 있소?"

이해룡이 반색을 했다.

"아니오, 아니오, 내일 만나도록 합시다. 지리산으로 떠나는 걸 최종 점검하기 위해 총사에서 염상진 동지가 내일 오도록 돼 있소. 그때 한꺼번에 다 만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안창민의 말이었다.

"글세, 그럼 옛날 군당간부회의가 되겠군요."

이해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려도 오판돌 동무가 빠지제라."

하대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오 동무는 더러 만났나요? 그쪽 사업은 좀 어떤지..."

안창민이 이해룡에게 눈길을 주었다.

", 가끔 만났는데, 군당도 형편이 좋지가 못합니다."

"왜 안 그렇겠소. 항시 지구보다 먼저 당하는 게 군당 아니오."

안창민의 얼굴에 침울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리산으로 빠지는 게 괜찮은 방법일까요?"

이해룡이 말이 담배에 침을 묻히고 나서 물었다.

"글쎄요, 지금 상황으론 무모한 인명손실을 막기 위해 그 방법밖에 더 있겠소? 이 동무생각엔 마땅찮은 모양이지요?"

"나라고 무슨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내 경험으로 봐서는 별로 좋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그게 뭐냐고 안창민이 눈으로 물었다.

"겨울이 곧 닥칩니다. 십일월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해서 다음해 사월까지 가니까 지리산의 겨울은 반년인 셈입니다. 거기다가 산간 마을들은 사십팔 년 말에 거의 다 소개시키고 불러버렸습니다. 많은 인원에 추위와 식량난이 동시에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거기에도 앞으로 토벌대가 투입되기는 마찬가지겠지요"

", 이 동무 지적이 적절한 것 같소. 도당에서는 그런 문제점들이 검토된 것 같은데, 그러나 일단 이동을 결정한 모양이오. 현재의 위기를 넘기는 데는 그래도 그게 최선이니까 말이오."

"혹시 그 결정에 이현상 선생 부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닙니까?"

"글쎄요, 도당에서 그 점을 얼마나 고려했는지는 전혀 모를 일이오. 나 혼자 생각인데, 위원장 동지의 평소 태도로 보아 별다른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요."

이해룡은 더 말이 없이 담배만 깊이 빨고 있었다.

"워째, 맘이 껄쩍지근허요?"

하대치가 담배 연기로 눈을 찡등그리며 이해룡을 쳐다보았다.

"아니오. 내가 가게 되니까 그저 한번 생각해본 문제지요."

이해룡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는 새로 편성된 지리산지구로 가기 위해 조계산지구에 들른 것이었다. 도당에서는 지리산 경험자들로 간부편성을 하고자 했다. 학병을 피해 지리산에서 생활했던 그는 적임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유치지구와 조계산지구의 비무장대원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갈 참이었다.

"염상진 동지가 같이 가시면 좋았을 텐데..."

이해룡이 담배를 끄며 뇌었다.

"도당 문제가 더 급해놔서 염 동지는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고, 아마 김 소장께서 같이 가실 것 같소."

안창민은 이해룡의 마음을 헤아리며 말했다.

"김 소장이오?"

"김범준 소장 동지 모르시오? 거 왜 김범우란 사람..."

", 예 알아요. 그분이 도당에 계신다면서 어쩐 일인가요? 사령관을 맡게 됩니까?"

이해룡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것까진 잘 모르겠소만, 하여튼 이번에 도당을 뜨시는 것만은 틀림없소."

"그분이 사령관을 맡으시면 아주 괜찮겠는데요. 투쟁경력이 굉장히 혁혁하시던데, 그런 분 밑에 있으면 힘이 절로 나지요." 이해룡은 금방 힘이 절로 나는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럴 가능성이 많으니까 내일까지 기다려봅시다."

안창민은 전혀 자신이 없으면서도 이해룡의 기분을 생각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런 눈치도 모르고 하대치가 뚜벅 말을 내놓았다.

"인민군 소장신디 워찌 지구사령관에 어울리겄는 게라?"

그는 가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내둘렀다.

"글쎄요, 그것도 그렇군요. 도당 총사령관이면 몰라도 지구사령관이면 좀 곤란하겠는데요. 계급과 직책이 제대로 어울려 하는 건데..."

이해룡은 하대치의 말을 수긍하며 실망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아니오, 그건 꼭 그렇지가 않소. 지금 하는 말은 사무적인 경우에 한해서 그렇고, 문제는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소. 무슨 말인가 하면, 김 소장 동지께서는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계급에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맡으실 분이다 그런 말이오. 그분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당신의 투쟁경력을 자랑한 적도 없고, 계급을 내세운 일도 없고, 오로지 사업에 유익한 입장에서만 일을 가리지 않고 한다고 그 인품이 알려져 있소. 그 좋은 예가, 도당위원장의 뜻에 따라 남해여단장의 일을 해결하려고 나서서 끝까지 애썼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결국 남해여단장이 총살을 당하게 되자 그분은 "다 내 잘못이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거요.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남해여단장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이었다는 거요. 남해여단장에 대해선 비난은 물론이고 비판도 한마디 없었다는 거요. 그게 어디 당성만 가지고 될 일이겠소."

안창민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에서 김범준에 대한 존경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예에, 그런 분이시군요."

이해룡은 한참이나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그런데 말입니다, 총살을 당해 죽으면서까지 싸우기를 거부한 남해여단장의 속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분은 그것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던가요?"

이해룡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고 있었다.

"한마디 했다는데, 그 말이 아주 알아듣기가 어렵고 뜻이 모호해요."

안창민이 입꼬리가 약간 돌아가는 묘한 웃음을 피워냈다.

"그 말이 뭔데요?"

이해룡은 말을 재촉하는 턱짓까지 했다.

"지친 혁명가의 허무적 초월주의!"

안창민은 마치 시를 읊듯했고, 이해룡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아니, 그게 다요?"

이해룡이 잠에서 깨듯 불쑥 물었다.

"그렇소."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오?"

"아까 말했잖소, 알아듣기 어렵다고."

", 제기랄, 지친 혁명가에다가, 허무니, 초월이니, 다 반동적인 말들뿐이오."

이해룡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아니, 이 동무, 남해여단장이 그랬다는 말이니까 반동이 누군지는 확실히 구분해얄 거요."

"아니, 그럼, 김 소장 동지가 반동인 줄 알까 봐 그럽니까! 남해여단장 그 사람 죽어도 싸요."

이해룡이 자르듯이 말했다.

"혁명가가 지치면 그것 자체가 죽음인 거요."

안창민의 나직한 말이었다.

 

 

24. 지리산

입산투쟁의 제이단계를 맞고있는 것은 전남도당만이 아니었다. 전북도당 사령부는 이미 팔월에 지리산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들 사령부가 트를 마련하여 머물고 있는 곳은 천왕봉, 노고단과 함께 지리산의 삼대 주봉중의 하나인 반야봉 줄기를 타고 내리면서 뻗친 뱀사골이었다. 지리산의 그 많고 많은 골짜기들 중에서 그들이 하필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들은 지리산으로 옮겨와서도 자기네 관찰지역은 무한책임으로 지킨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령부와는 달리 남원군당이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길고 깊은 골짜기가 노고단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리고 있는 달궁골이었다. 그 원칙에 전라 · 경남도당은 일찍이 재작년 구월부터 자기네 지역을 찾아들어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대원사골, 동북쪽의 칠선골, 동남쪽의 중산리골에 걸처서 투쟁의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남도당은 노고단과 반야봉을 잇고 있는 주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내리고 있는 골짜기인 화엄사골, 문수리골, 피아골이 그 관할이었고, 화엄사골에는 오래전부터 구례당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투쟁력을 과시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세 덩어리로 나누고 나면 지리산에서 남은 역을 천왕봉 아래 장터목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주능선을 따라 제석펑전의 영신봉, 덕평봉, 꽃대봉을 거쳐 명선봉에 이르는 남쪽과 북쪽의 골짜기들이었다. 남쪽으로 뻗어 내린 큰 골짜기들은 백부골, 한신골, 영원사골이었다. 남부군은 주로 이 지역을 넘나들면서 필요에 따라 각 도당들과 함께 합세했다가 분리되고는 했다. 그러니까 지리산이 품고 있는 삼도오군의 분기점은 주능선인 지리산맥의 토끼봉과 반야봉의 중간지점인 날라리봉(삼도봉)이었고, 그 행정구역에 따라 세 도당의 빨치산들과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은 명확하게 그 관할을 구분지어 책임분담을 하고 있었다. 지리산 뱀사골이라는 깊고 깊은 골짜기로 사령부를 따라 들어온 손승호는 어디가 어딘지 모른 채 트를 만들고, 부대정비를 하고 하느라고 한 이틀을 분주하게 보내고 나서야 한가한 시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울창한 숲들이었고, 귀에 들리는 것은 끊임없이 계곡을 울려대는 물소리였고, 마음에 담기는 것은 크고 큰 산이 지니는 무한량의 정적의 무게였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가고 있었다. 그 막연한 불안감은 사령부가 남덕유산의 줄기를 벗어나 지리산 줄기를 밟으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건 지리산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이 나빠진데서 비롯된 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 하필 지리산일까, 다른 산들도 많은데.......하는 생각으로 지리산으로 가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리산에 어떤 악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리산은 언제나 오르고 싶었으면서도 오르지 못한 채 멀리로만 있었던 선망의 산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산을 가게 되었는데 왜 꺼려지는 것일까. 그는 그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외면했을 뿐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집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싫었고, 그리고 전북도당이 밀리고 있는데 전남도당이라고 밀리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지리산에서 염상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가장 구체적이 불안의 이유였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이제 그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투쟁을 통해 당원이 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객관적 조건이 그와의 지난날을 해결시키지도 못했고, 청산하게 하지도 못했다. 지난날은 지난날대로 가슴벽에 화석으로 찍혀 있었다. 당원이 되었을 때, 이제야말로 염상진 떳떳하게 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 그때의 순간적인 생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염상진을 만나 오늘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킨다 하더라도 자신 가슴벽에 찍힌 화석이 결코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염상진을 만나고 나면 어쩌면 그것은 더 커질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킨다는 것은 그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던 인내심을 입증시키는 것이었고, 그의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실증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자신의 오늘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든 간에 그 결과는 결국 염상진이 쳐놓은 그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포획물의 꼴에 지나지 않았고,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만나지 않는 다른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 싸워나가는 동지로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줄기차게 계곡을 울려대는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채 손승호는 멍하니 않아 있었다.

"손 동무, 뭘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뒤에서 들리는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손승호는 생각을 수습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박두병이 사람 좋게 웃고 서 있었다.

"아니 어서 오십시오."

손승호가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니오, 같이 앉읍시다. 무슨 생각이 깊으신 것 같은데, 방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두병이 손승호 옆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저 물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물소리, 좋지요. 하늘이나 숲을 보는 것처럼 물소리를 듣는 것도 오랜 긴장과 피곤을 푸는데 아주 효과가 큽니다. 요즈음이 수량이 제일 많은 때라서 물소리가 또 유난스럽지요."

박두병이 예사스럽게 하는 말에서 손승호는 구빨치다운 세월의 축적을 또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손승호는 먼저 아랫사람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

", 다름이 아니고, 손 동무가 지리산이 초행이라고 하셨죠?"

박두병이 지리산 자락을 밟으면서 잠깐 나누었던 말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 처음입니다."

"그럼 내가 군당을 거쳐 노고단으로 돌아올 일이 있는데 동행하면 어떨까 해서요. 길도 익힐 겸 지리산도 관찰할 겸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리산을 넓게 관찰하는 것은 손 동무의 사업에 필요한 일이거든요."

손승호는 박두병이 "구경"이라고 하지 않고 "관찰"이라고 하는 말에 유의했다. 투쟁중의 모든 행위는 곧 혁명 사업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요. 언제 떠나십니까?"

"두어 시간 있다가 떠날 겁니다. 그럼 준비해두시지요."

박두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승호는 고무신을 묶은 삼끈을 풀었다. 고무신을 벗어 왼쪽 손바닥에 대고 털었다. 고무신을 벗자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가려움증이 발가락 사이사이에서 무슨 벌레가 기는 것처럼 스물거리기 시작했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도지게 될 가려움이었다. 발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거친 발 하나가 바닥을 드러낸 채 풀섶 위에 놓여있었다. 발바닥 전체에는 허이연 군살이 두껍게 붙었고, 그 군살은 늙은 얼굴에 잡힌 주름살처럼 굵고 가는 금들로 수없이 갈라 터져 있었다. 물론 그 금들은 힘을 많이 쓰는 부위에 따라 엄지발가락에서 시작해서 앞굽을 거치고, 다시 뒷굽에서 심해지고 있었다. 군살의 두께는 얼른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손톱의 서너 배쯤 두꺼운 것도 같았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두꺼운 것도 같아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뒤꿈치에 굵게 갈라터진 금들은 들여다보면 손톱의 서너 배 두께쯤 되는 것 같았지만, 손가락으로 눌러보거나 나뭇가지로 쑤셔보면 속살이 어딘지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어 그보다 훨씬 두꺼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손톱을 손톱 끝으로 누르면 그 색깔이 금방 하얗게 변하면서 감각을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는 군살은 손톱보다 몇 배 두꺼운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강도도 몇 배가 강한 것이 분명했다. 그 감각 없는 군살에는 그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넘고 넘었던 산들의 자취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발의 변화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발등에는 언제 긁히고 다쳤는지 모를 크고 작은 흉터들이 얽혀 있었고, 발가락들 끝에는 동상의 흔적이 푸르죽죽하게 박혀 있었고, 발가락 사이사이에는 무좀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손승호는 그야말로 소도둑놈 발 같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솥뚜껑을 생각하고 있었다. 솥뚜껑이 살았었더라면 그 발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손도 입산 초기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거칠어지고 억세져 있었지만 솥뚜껑 앞에 내놓기는 부족함이 많았고, 발만은 그에게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자신의 발이 부르터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발목이나 무릎이 삐어 절룩거리며 뒤처질 때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부축을 하거나 짐을 벗게 했다. 자신은 그럴 때마다 자기의 계급에 어울리지 않게 배움을 가진 수치심과 죄의식이 얼마나 깊이 느끼고는 했는지 몰랐다. 자신은 그런 감정을 솥뚜껑에게 한문을 열심히 가르쳐주는 것으로 상쇄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또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하며 발바닥의 군살은 자신도 모르게 두꺼워갔고, 아무리 험한 산길을 오르내려도 힘든 것을 모르며 산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치고 발바닥에 그런 식으로 군살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어린애처럼 솥뚜껑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가... 그건 끊을 수 없는 솥뚜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손승호의 길 떠날 준비는 삼끈을 고쳐 매는 것으로 끝났다. 짐이라고는 총 한 자루와 간추린 배낭이 전부였다. 일행은 넷이었다. 하나는 선요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두병의 연락병 겸 경호병이었다. 손승호는 자신에게도 문화부 연대의 대본집필이라는 기본임무 외에 박두병의 경호원이라는 임무가 주어져 있음을 무언중에 느끼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어떤 위험에 부딪치게 되면 도당 간부인 박두병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 사람은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서야 한다. 그건 박두병 개인이 아닌 당을 보호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난 선요원의 말을 들으면 그럴 만한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자신들은 깊고 깊은 골짜기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고, 전투경찰대들은 지리산 초입의 중요한 길목인 운봉이나 마천 · 구례 같은 곳에 보루대를 쌓아놓고 진을 쳤다는 것이었다. 토벌대가 수색대 활동을 펴지 않는건 아니지만 마음대로 산 깊이 파고 들지는 못하는 처지라고 했다. 그런 느낌은 어제의 집단목욕에서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부서별로 트들을 완성시켜놓고 나서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그 맑고 시원한 물로 뛰어들어 맘껏 목욕들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몇 개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거의가 일 년만의 목욕이었다. 모두가 꼭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서로 물을 끼얹고, 물장구를 치고 했다. 그건 목욕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말이 없는 속에서 목욕을 할 수 있게 된 그 안전까지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숲속의 폭염에 허덕이면서도 목을 축일 짬도 없이 계곡물을 건너뛰며 쫓겨야 했던 것에 비하면 맘 놓고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고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표현을 여자 대원들은 남자대원들보다 몇 배 강렬하게 했다. 여자 대원들은 남자대원들의 목욕터에서 한참 떨어진 아래쪽에서 목욕을 하고 있어서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그녀들이 뿌려대는 웃음소리와 탄성은 그 요란한 물소리를 이기고 낭랑하고 탄력적으로 퍼졌던 것이다. 손승호는 때를 문지르면서 여자들이 터뜨리고 있는 온갖 기쁨의 소리에서 새들이 깃을 퍼득이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빨간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도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 것인데도 때는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물이 뜨겁지 않아 그런가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신빨덜이 멀 알아야 말이제잉, 때라는 것은 빗게 내먼 빗게 낸 만치 빨르게 찌는 법이고, 안 빗기면 또 그만치 덜 찌는 법이오. 우리 몸이란 것이 그리 묘허니 되야 있는 디다가, 우리가 또 하도 움직기리고 난리판굿얼 치다봉께 옷에 씻겨서 빗게지기도 허고 그러는 것이오."

어느 구빨치의 말이었다.

산길은 끝이 없었다. 산봉우리들도 끝이 없었다. 하나를 감고 돌면 또 나타나고, 그것을 감고 돌면 또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그들 넷은 말을 하는 법도 없이, 발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줄기차게 걷고 있었다. 손승호는 걷기에만 열중할 뿐 지리산이 덕유산과 어떻게 다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리산이 덕유산보다 몇 배 장대하고 웅장하다는 말이 머리에 담겨 있을 뿐, 산속의 어느 한 부분에 파묻혀 걷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말은 아무 실감도 없었다.

"여기서 다리 쉼얼 잠 허시제라."

산마루의 넓적한 바위 앞에서 선요원이 발을 멈추었다. 모두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밤중에도 산등성이를 타고 걷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불문율인데 선요원은 하필이면 산마루에서 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누구도 그 점을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이었고, 기왕이면 산마루에서 땀을 식히자는 선요원의 뜻을 다 알아차렸던 것이다.

"손 동무, 걸을 만한가요?"

박두병이 쌈지를 꺼내며 손승호를 바라보았다. 출발하고 나서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었다.

", 좋습니다."

"손 동무 걷는 걸 보니 재귀열 앓았던 게 완전히 회복된 것 같더군요. 그 병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다니, 손 동무도 갈 데 없는 빨치산이오."

박두병은 담배를 말며 쿡쿡 소리 내서 웃었다. 손승호는 그의 마음이 언제나 세심하게 자신을 감싸 돌고 있다는 것을 또 느끼며 소리 없이 마주 웃었다. 박두병이 부싯돌을 치기 시작하자 손승호는 산을 휘둘러보았다. 좌우 양쪽에 산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다. 산의 물결, 그의 직감적인 느낌이었다. 짙은 녹음에 덮힌 채 겹을 이루며 펼쳐져 있는 산들은 거칠게 일어나고 있는 파도들의 형상 그대로였다. 그 산마루가 꽤나 높은 지점이라는 것은 그 다음에 온 깨달음이었다.

"손 동무, 전에 지리산에 와본 일이 없더라도 혹시 지리산에 대한 글을 읽어본 적은 있습니까?" 박두병이 담배 연기를 시원하게 내뿜고 나서 물었다.

"아 예, 기행문을 그저 몇 편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기억이 납니까?"

"글쎄요...다 예찬이었는데 특별한 기억은 없고, 최남선의 글이 제일 낫지 않나 하는 정도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 친일파!"

박두병이 내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전혀 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에 쿵 부딪쳐오는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그건 갑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박두명의 단호함 때문인 것 같았다.

"나도 그 글을 읽었소. 그런데, 재주를 친일하는 데나 더럽게 써먹은 자라서 그 글에는 경치에 대한 찬사의 말들만 너절하게 늘어놓고 있을 뿐이지 조국강산에 대한 진정한 애정은 찾을 수가 없었소. 아무리 기행문이라지만 기행문도 어디까지나 글인 것은 분명한데, 글이 그 모양이 돼서야 글이라고 할 수 있겠소?"

"글쎄요, 박 동지 말씀이 틀림은 없는데요, 최남선한테서 그런 정신을 기대하는 건 이광수한테서 항일투쟁을 기대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 맞소! 내가 잠깐 어리석었소."

박두병은 무릎을 치는 것과 함께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담배를 깊이 빨아들여 연기를 천천히 내뿜고는 입을 열었다.

"손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최남선의 친일은 계급적 기회주의의 표본이오. 그는 돈 많은 중인 집안의 자식이었는데, 그 중인계급의 생리란 게 아주 묘하고도 고약합니다. 중인계급은 지배계급과 기본계급 사이에 끼어 중간착취를 일삼는 게 그 계급적 특성 아닙니까. 그 중간착취계급의 대표적인 게 관리로서는 아전부류고, 도시사회에서는 상인이고, 농촌사회에서는 마름인건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지배계급에게는 열등감과, 기본계급에게는 우월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이중성은 위로는 계급상승욕구로 나타나고, 아래로는 지배확대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를 향해서는 간사한 아부와 아첨을 일삼고,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악랄한 회포와 억압을 자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직접생산을 위해 땀 흘리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두 계급 사이에서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한 보수집단인 반면에 정치세력의 변동에 따라 언제나 민감하게 변신하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중성은 민첩한 현실주의와 교활한 기회주의를 낳게 됩니다. 그들의 그런 기생충과 같은 생리는 일제 치하에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제 치하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들 주변을 유심히 살펴봐요, 중간계급 출신들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살펴본 바로는 거의 없어요. 농민들이 그렇게 많은 데 비해 마름이나 그 자식들은 하나를 찾기가 어렵다 그 말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무런 기대도 걸 수 없는 속물적 집단이고 반역사적 집단입니다.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내 생각이 어떻습니까?"

박두병은 입을 훔치며 큰 코를 씰룩했다.

", 저도 중간계급에 대해선 좋지 않게 생각해오긴 했습니다만, 그렇게까지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확한 파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손승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박두병에게 새삼스럽게 놀랐는데, 그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실례가 될 것 같았던 것이다. 흡사 논문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그 문제를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었고, 그가 지배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그 비판은 더 설득력이 강했던 것이다.

"인자 가보시제라."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듯 선요원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해를 흘낏 올려다보았다. 남원군당까지는 굽이쳐 출렁거리는 산의 파도를 내려다보며 걷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걸어갈수록 높이가 낮아져 언제부턴가 그 산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손승호는 얼핏 바다 속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군당에서 약간 늦은 점심을 얻어먹고 박두병을 제외한 세 사람은 계곡물로 뛰어들었다. 그 골짜기도 거센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골짜기들이 깊고, 골짜기마다 물이 많은 것이 덕유산과 다르다는 것을 손승호는 첫 번째 차이점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손승호는 두 손으로 바가지를 만들어 물을 떠 마시며, 이 물들이 흘러 섬진강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틀을 연거푸 목욕을 한다는 것이 꼭 꿈만 같고, 살을 파고드는 시원함으로 더위를 씻어가는 맑은 물이 소중스러워 그는 물을 끼얹으며 감탄했다. 거침없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는 반들거리는 넓은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이 매끄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줄기의 그 유연한 흐름은 물기 젖은 긴 머리카락을 빗겨 내린 것 같기도 했고, 볏잎 푸른 들녘이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느린 물이랑을 이루며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물줄기의 흐름은 언제까지나 그렇게 부드럽고 얌전하지만은 않았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부딪쳐 제 몸을 바수었고, 갑작스럽게 낭떠러지가 나타나도 주저 없이 제 몸을 굴려 떨어뜨렸다. 물줄기는 그때마다 몸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들이 모아져 골짜기의 양쪽 벽을 그리고 세차게 두들겨대는 큰 소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물소리는 물줄기가 장애물들과 싸우는 소리였고, 그 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장애물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물줄기는 장애물들을 만날 때마다 부딪치고, 깨지고, 부서지고, 휘돌고, 솟구치고, 나뒹굴고, 처박히고, 맴돌이질 쳤고, 그러면서도 흩어지거나 멈추지 않고 하나로 뭉쳐져 끝끝내 목적하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아아, 저 물의 흐름은 혁명의 과정과 같지 않은가! 혁명에는 그 얼마나 장애가 많던가. 그 장애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가. 수많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그 핏빛처럼 처절한 외침을 남기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저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물소리는 그들이 남기고 간 함성이다. 그리고 또 살아남은 자들이 이어받아 외치고 있는 함성이다. 혁명에 이르는 그날까지 물줄기의 격렬함으로, 물줄기의 끈기로 싸워나가야 한다... 싸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손승호는 솥뚜껑이 숨을 거두던 모습을 또 보며 목이 메이고 있었다. 그는 갔으되 그의 죽음의 의미는 자신의 의식 속에 선 굵은 강렬한 판화로 찍혀 있음을 손승호는 무시로 느끼고 있었다.

"손 동무, 봇씨요, 손 동무!"

물이 몇 방울 얼굴에 튕겨오며 부르는 소리에 손승호는 오랜만에 깊이 빠져들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무신 생각얼 그리 허고 있으시오?"

유난스럽게 검은 얼굴에 물방울들을 매단 선요원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아 예, 죽은 동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손승호도 그에게 웃음을 보냈다.

"죽은 동지럴 생각허는 것도 존디, 빨치산은 생각이 너무 많으먼 사업 망치게 되는 수도 있소. 죽은 동지덜 생각허자면 고것이 워디 끝이나 한이나 있는 일어겄소. 여그 이 달궁골에서도 작년 그러께 을매나 많이 죽었는지 몰르요. 이 나무, 저 나무에 묶여서 총 맞어 죽은 시체가 수두룩 혔고, 이 깔끄막, 저 깔끄막에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헌 시체가 늘핀혔응께. 그 시체덜얼 까마구가 파묵고, 여우가 뜯어묵고, 쉬포리가 쉬 깔기고, 그럼시로 썩어가는디, 요 골짝이 썩는 내로 진동혔소. 아매 요 물에도 그 동지덜에 살 썩은 물이 섞앴을 것이요."

선요원은 여기서 말을 끊고는 한 손바닥을 오그려 물을 떠 홀짝 마시고는,

"요 골짝얼 타고 쪼옥 허니 내래가먼 반선이라고 나오는디, 거그서 김지회 동지도 안 죽었소."

팔을 들어 물 흘러가는 쪽을 멀리 가리키며 속상하다는 듯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려라? 그 유명한 김지회 동지럴 동무넌 보셨소?"

연락병이 침을 삼키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먼, 보기만 헌 것이 아니라 손도 만져보고, 밥도 항꾼에 묵고 혔는디. 글고 워디 그 뿐이간디? 나가 그때 김지회 동지허고 항꾼에 죽고 잽힌 동지덜 웬수럴 갚은 결사대였다 그것이여!"

선요원은 그때 생각으로 감정이 흔들리는지 주먹으로 물을 내리쳤다. 손승호는 그때서야 관심이 쏠렸다. 그가 말하는 품으로 보아 구빨치라는 건 금방 알았지만, 그 사건에 이렇게까지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 단편적으로 들어왔던 그 사건의 전모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로는 그들이 죽은 장소부터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무, 그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가 많은데 좀 자세히 들었으면 좋겠소. 어디 얘기 좀 들읍시다."

손승호는 선요원 쪽으로 옮겨 앉았다.

", 전라도 사람치고 이약 한 자락 쌈빡허니 못허는 사람 옯고, 청해 받은 이약 마다허면 고것언 전라도 사람 자격이 옶는디, 더군다나 나가 하늘맹키로 생각허든 김지회 동지 일잉께 안헐라야 안헐 수가 옶제자잉. 긍께 머시냐, 미인박명에다가 영웅졸사드라고, 김지회 동지가 시상 떠나뿐 것이 똑 그 짱이요. 그 적에 홍순석 동지할라 항꾼에 죽어 부렀시니, 두 지리산 영웅이 참말로 물거품 꺼재대끼 허망허니 죽어뿐 것이요. 을매나 허망허니 죽어뿌렀는지 이약 들어봇씨요. 그날이 양력으로 사월이라 초아흐렛날인디, 김지회 동지넌 부하덜얼 델꼬 전북도당 야산대럴 지도허니라고 덕유산에 갔다가 지리산으로 들어오든 참이었제라. 비밀선얼 타고 반선 마실꺼정 와서, 은제고 그리혔던 것맨치로 마실 뒷짝으로 멀찍허니 떨어져 앉은 그 고정세포 아지트로 들어스지 않었겄소. 그 집 쥔년이 희반닥 웃음시로 반가워라 헌 것이야 전허고 달븐 것이 하나또 옶고, 믿거라 허는 오래된 세폰께로 밥얼 싸게 허라고 일르고 다덜 방으로 들었제라. 걸어온 질언 멀제, 밥때넌 늦었제, 모다 곤허고 배가 고프기가 거지 삼시랑이 따로 옶는 판이었제라. 근디 암만 기둘려도 밥이 안나온단 말이요. 그려서 쥔년얼 불러 밥이 워찌 됐냐 물은께, 쥔년 허는 대답이, 지끔 불얼 때고 있는디 낭구가 안몰라 그런다, 그것이요. 싸게싸게 허라고 혀놓고 또 이제나 저네나 기둘려도 밥이 나와야제라. 또 쥔년얼 불러 잡진께, 그년이 눈물얼 찍어냄스로 허는 말이, 요리 눈물 짜감서 생짜배기 낭구 부지런히 때고 있응께 쪼깐 더 기둘려라. 낭구가 그 모양인 디다가 쌀얼 많이 안치다봉께 밥이 더 늦어진다. 긍께 정 시장허먼 잔치에 쓸라고 담군 술이 있응께 먼첨 한잔썩 허는 것이 워칳겄냐, 아 요랬단 말이제라. 하아! 빨치산에 술이 극약인 것이야 하늘 천 따 지고, 고것얼 귀닳게 갤친 사람이 바로 김지회 동진디, 그때 고것이 허방인지 착 알아묵고 그 백여시 꼬랑댕이럴 잡아챘어야 헐 것인디, 와하! 무신 잡귀가 씌었든지 그러던 못허고 그 백여시 꾀에 넘어가 술얼 받아묵고 말었소. 그러니 워찌 됐을 것이요. 몸언 곤헌 디다가 빈속에 술이 들어간 판이니 관우 아니라 장비가 당허겄소? 보초도 멋도 웂이 다 곯아떨어져뿐 것이제라. 근디, 알고 보면 술얼 마시기도 전에 또 한 가지에 속힌 것이오. 고것이 먼고 허니, 낭구가 안 몰랐다고 혀서 생솔가지럴 때게 냅둔 것이오. 생솔가지럴 때먼 내가 을매나 지독스럽게 나오요. 고것이 바로 신호였드라 말이오. 그 내럴 보고 아랫동네서 두 놈이 토벌대헌테 연락얼 한 것이오. 토벌대가 들이닥쳤는디, 더 말혀서 멋허겄소. 그 자리서 열여섯이 죽고, 일곱이 달아나다가 잽혔는디, 결국에넌 다 총살당혔제라. 김지회 동지가 총얼 맞고 그 자리럴 피허기넌 혔는디, 거그서 이십리 떨어진 연장 골짝에서 죽었시니 다 소양웂은 일이 되야뿌렀소. 그 개잡년이 변심혀갖고 토벌대허고 내통험시로 허방얼 파놓고 딱 기둘리고 있었던 것이요. 사람이란 것이 그리 무서운 즘생이요. 좌우당간 그 연눔 셋이서 우리 동지럴 시물넷이나 죽였시니 우리가 워째야 쓰겄소. 고 개잡녀러것덜이 호강날라리로묵고 살게 냅둘 수야 웂는일 아니겄소! 고것덜이야말로 동지덜에 웬수고, 인민에 적인디. 그려서 결사대럴 짰소. 세 연눔얼 잡아다기 지금까지 헌 이약대로 다 실토받고, 죽였제라! 고런 잡것덜언 총알이 아까와 돌로 쳐죽였제라. 그려도 분이 안삭아 갈가리 찢었제라. 그라고 시범쪼로 돌팍 우에 넣었제라."

선요원은 목이 잠기며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손승호는 물에 입을 들이대고 물을 벌컥벌컥 넘겼다. 그의 귀에는 멀어져 있던 물소리가 다시 세차게 밀려들고 있었다. 다시 노고단을 향해 길을 잡았다. 서로의 거친 숨소리만 들으며 오르막길의 강행군이 계속되고 있었다. 손승호는 선요원이 했던 말을 곱씹어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선요원의 말은 단순한 체험담이 아니라 살아 있는 투쟁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귀한 경험자들에 의해 투쟁사는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생생한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엮고 싶은 의욕을 느끼고 있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 다리를 쉬게 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겹을 이룬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로 펼쳐지고 있었다. 손승호는 사방으로 눈길을 돌리며 지리산의 모습을 살펴나갔다. 한 시간 정도의 노동을 바쳐 얻은 대가치고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동무, 지리산을 보는 기분이 어떠시오?"

어느새 담배를 말아 피운 박두병이 석양 햇빛을 받고 앉아 물었다.

"글쎄요, 아직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럴 거요. 인제 시작이니까."

박두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먼이라. 요것 쪼깐 보고 지리산이 어쩌니 저쩌니하는 것이야 순전 헌 그짓말이제라. 노고단에나 올라야 갱신히 문턱 넘어스는 것잉께요."

선요원이 말을 보태고 있었다. 노고단까지는 두어 시간이 넘게 줄창 걸었다.

"기왕지사 걸음헌 것잉께 해 떨어지는 것얼 귀경혀야제라."

앞장선 선요원이 걸음을 서둘러댔던 것이다.

"옛사람들 말로 지리산 십경에 노고원해, 반야낙조라고 했는데 그리 급할 것 없잖겠소?"

아주 느긋한 박두병의 말이었다.

"말이야 필경 그렇제라. 근디, 날이 은데꺼정 요리 말끔허다는 보장이 웂는디라? 지리산 칠팔월이야 요리 깨끔허다가도 은제 먹구름 깜깜허게 찔란지 몰르는 일 아니겄는가요?"

"그야 그렇소. 여름 지리산 날씨야 시시각각 변하는 거니까."

박두병이 물러서고 말았다. 그래서 선요원의 걸음은 줄달음질치듯 하게 되었다. 세 사람 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나 있으면서도 선요원의 발길을 따라잡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고단에 오르는 순간 그들이 마주친 것은 커다랗게 둥근 불덩어리였다. 상상하기 어렵게 큰 그 불덩어리는 해였다. 해는 하늘 가운데 떴을 때보다 열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하늘 끝에서 떨어져 내리기 직전인 해는 스스로의 몸을 그렇게도 크게 키워 하루를 마감하는 모습을 찬연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해는 서쪽 하늘을 스스로의 빛으로 온통 붉게 물들여 자신의 모습을 떠받치게 하는, 세상에서 제일 큰 휘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휘장의 붉은색은 생기 퍼득이는 광채와 윤기 반짝이는 채색으로 싱그럽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해는 하늘을 그리고 곱고 아름답게 물들이느라 제 빛을 다 써버려서 그러는 것일까, 하늘 가운데 머물 때는 눈이 시다 못해 눈물이 나도록 강한 빛을 내쏘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더니만 이제는 그 빛을 거두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한낮의 해는 작으면서 맵고 거만했는데, 저물녘의 해는 크고 부드럽고 친근했다. 노고단이 장만해놓은 하늘은 사람의 눈을 감당해낼 수 없도록 넓고도 넓었다. 그 서쪽을 물들인 휘장만으로는 모자라는 것인지 해는 무슨 큰 깃털들처럼 옆으로 뻗친 구름층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엷고 가볍게 뜬 구름들도 층층이 붉게 물들어 찬란한 색조로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불덩어리는 이글거리는 황금빛 몸을 아래서부터 느리게 느리게 감추어가고 있었고, 그 주변의 하늘은 커다란 황금빛 동그라미를 그리며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이 엷어지는 데서부터 황적색으로 물들고, 황적색이 엷어지면서는 청적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빛의 변화와 조화를 따라 구름의 층도 색감을 달리해가고 있었다. 손승호는 어디론지 잠겨들고 있는 그 신비스러운 불덩이와, 현란하고도 황홀한 빛의 채색화를 그리고 있는 낙조를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른 세 사람도 긴 그림자를 하나씩 단채 해를 향해 굳어진 듯 서 있었다. 마침내 해가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하늘을 물들였던 색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해를 에워싸고 있던 커다란 황금색 바탕이 옆으로 넓게 퍼지면서 황적색과 섞이고, 황금색이 묽어지자 하늘은 더 붉게 물들었다. 하늘은 이제 온통 붉은 색조의 바다였다. 그 붉은 색조는 살아서 뛰는 빛으로 넘치고, 그 빛들이 부딪쳐 불꽃을 일구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은 마침내 불붙어 타고 있었다. 구름들도 그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면서 자취를 감춘 해가 쏘아 올리는 빛살을 받아 구름들의 아랫부분은 눈부신 흰빛으로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구름들은 열도 높은 흰빛을 발산하는 발광체가 되어 있었다. 해가 사라져간 그 언저리에서 뻗어 오르는 빛살이 차츰차츰 약해지면서 하늘을 뒤덮은 붉은 색조에서도 싱그러움과 싱싱함이 서서히 사그러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황적색이 적색으로 변해 하늘은 더욱 붉은 빛으로 칠해졌다. 그 진해진 붉은 빛은 이제 불길이 아니었다. 불길이 잦아든 그 진한 붉은 빛은 환상적인 핏빛이었다. 하늘은 처연한 핏빛으로 물들어 침묵하고 있었다.

, 저건! 손승호는 가슴을 쳐오는 충격을 느꼈다. 저건... 지리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동지들의 넋이 아닐 것인가! 한이 아닐 것인가! 그 생각이 들자 그는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한참 만에 떴다. 노을은 그대로 핏빛인 채 가장자리가 적보라 빛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듯 웅장하고 장엄하고 기 질리는 노을을 여지껏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산으로 막힌 좁은 하늘의 규모 작은 노을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노고단은 하늘을 있는 대로 다 열어주고는, 그 넓은 하늘에 해가 그려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찬란하고, 가장 황홀한 그림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안개가 골짜기를 자욱하게 채운 산중턱에서 해돋이 직전의 아침노을을 보며 솥뚜껑은 그런 경치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차라리 죽고 싶었다. 황홀하고, 현란하고, 아름답다 못해 기가 막혀버리는 자연의 그 신비로운 조화 앞에서 말을 잃은 감동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죽음의 충동이었다. 어느 화가가 있어 저 기막힌 빛의 조화와 변화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려놓은 것은 흉내일 뿐,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자는 끝내 절망하여 죽고 말 터였다. 그가 진정한 화가가 아닐까. 또한, 무슨 말이 있어 저 노을을 글로 표현할 것인가. 그 시도는 화가보다 더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보다 자연에 가깝지만 말은 전적으로 인간들끼리만 사용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손승호는 그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음만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우리 강토가 이토록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을 이제야 알다니...

노을의 가장자리에서 생기기 시작했던 적보라 색은 점점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고, 처음의 적보라 색은 청보라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노을은 윤기를 잃어가며 서서히 사위어 들고 있었다. 엷게 뜬 구름들도 어느새 그 눈부시던 흰빛의 현란함을 잃고 회백색으로 칙칙하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겹겹이 물결 이루며 뻗어나가고 있는 먼 산들도 서로의 그림자에 묻혀가며 어슴푸레한 기운에 잠기고 있었다. 어둠살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시요들?"

선요원이 기지개를 켜며 오랜 침묵을 깼다.

"아 참, 언제 봐도 장관이오."

박두병의 말이었다.

"와따 참말로 기맥혀뿌요. 정신이 다 어질어질허요."

연락병의 말이었다.

"손 동무넌 으쩌요?"

손승호가 말이 없자 선요원은 자기에게 일행의 감상을 다 들어야 하는 책임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승호에게 독촉했다.

"아무 할 말이 없소."

손승호의 입에서 나온 무뚝뚝한 소리였다.

", 고것이 질로 잘헌 답인지도 몰르겄소."

선요원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떡끄떡하고는,

"싸개 샘터로 내래갑시다. 해가 떨어졌다 허먼 금세금세 어두워진께로."

그는 서두르는 몸짓으로 앞장을 섰다.

"옛사람들이 왜 낙조는 반야봉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 줄 알겠소?"

박두병이 배낭을 지며 손승호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거...잘 모르겠는데요."

손승호가 멋적게 웃었다.

"그거 아주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요. 반야봉은 그 높이가 천왕봉 다음이고, 여기 노고단보다는 이백오십 미터 정도가 더 높아요. 그래서 동쪽에서 제일 높은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아야 한다고 천왕일출이라고 했고, 서쪽에서 제일 높은 반야봉에서 낙조를 보아야 한다고 반야낙조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 사실 높이가 이백오십 미터나 차이나는 반야봉의 낙조와 노고단의 낙조가 같을 수가 없지요. 높이 이백오십 미터 차이에서 오는 서쪽의 전망이 달라지니까요. 높을수록 더 멀리, 더 넓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오늘같이 맑은 날이면 반야봉에서는 바다 가까이까지 보입니다. 그 낙조를 즐긴 옛사람들의 관찰이 예사는 아니었지요."

"그렇군요..."

어둠이 묻어오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손승호는 이번 행보에서 자신이 해야 할 "관찰"이 무엇일까를 언뜻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박두병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샘터에 이르렀을 때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선요원이 쌀을 꺼내고, 손승호와 연락병은 나무를 구하러 나섰다.

"동무덜, 낭구넌 요것저것 개릴 것 웂이 닥치는 대로 해오씨요. 밤이 되기 시작헌께 내가 나도 암시랑 알고, 여그서넌 모닥불얼 피와도 뎀빌 개덜이 웂소."

선요원이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참 희한하군요. 이 높은 산에 이리도 물이 많이 흘러나오는 샘이 있다니."

밥을 먹고 나서 냄비를 씻으며 손승호가 말했다.

", 명산잉께라."

선요원의 대꾸는 간단했다. 손승호는 그저 웃었다. 천오백 미터를 헤아리는 산꼭대기 언저리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로는 그 이상의 말이 없다싶었던 것이다.

"요 샘이 노고단 보물인디, 노고단언 또 요것 땀시로 숭악헌 꼴 당허기도 혔소. 노고단이 빡빡 중대가리로 큰 나무 한나가 웂은 것이 워째 그런지 아요? 요 샘물 찾어 구빨치덜이 여그에다 트럴 장만허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겄소? 이 골짝, 저 골작으로 빠지기도 좋고, 붙기도 존 고지기도 허고라. 그래논께 개덜이 우리 잡겄다고 요 넓은 노고단에다 싹 불얼 질러뿌렀소. 잡녀러새끼덜, 일본 눔덜언 천왕봉 아래 장터목에 슨 산신령을 넘어뜨려 골짝으로 내리굴리등마, 인자 친일민족 반역자덜언 명산 꼭대기에 불얼 질르고 염병이오."

선요원의 명확한 역사 파악에 손승호는 문득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까부터 불탄 흔적들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 뒤늦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높은 산꼭대기에서까지 인민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산까지 불에 휩싸이는 수난을 겪는 그때에 자신은 역사의 현장에서 비켜서 있었던 것이다.

"보초 슬 것 웂이지 않겄는게라?"

잠자리를 잡으며 선요원이 박두병에게로 물은 말이었다.

"필요 없으면 그냥 자는 게 더 좋지요."

"개덜이 여그꺼지 올라 붙을라먼 당아당아 멀었구만요. 두 동무넌 두 다리 쭈욱 뻗고 늘어지게 자뿌씨요. 빨치산 팔자에 보초 안스고 편안허니 자보는 것도 큰 복일 것이요."

선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보초를 안서도 되는 밤을 손승호는 입산하고 처음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총을 겨드랑이에서 떼어놓지는 못했다. 지리산의 별들을 올려다보고 누워 오랜만에 집 생각을 하다가 그는 깜빡 잠이 들었다. 손승호는 누가 흔들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은 아직 안개가 낀 듯이 흐리칙칙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팔을 뒤로 한껏 젖히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옷은 이슬에 함뿍 젖어 있었지만 몸은 가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깊이 잔 단잠이었다. 그들은 차례로 샘물을 마셨다.

"이 샘얼 선도샘이라고 허요. 우리넌 그냥 노고단 빨치샘이라고도 허고요."

선요원의 말이었다.

"욕심도 많소. 인민샘이라고 하면 몰라도."

박두병의 말에 선요원은 큭큭큭 웃었다. 그들은 노고단 정상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비탈길을 오르는 선요원의 발길은 빨치산답지 않게 느렸다. 그러니 뒤따르는 사람들의 발길도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느리게 걸으면서 무슨 노래를 나직하게 부르고 있었다.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꽃피는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 봐도 옛날을 불러 봐도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비만 내린다.

구슬픈 음조의 노랫소리는 흐려져가는 어둠살을 타고 고산의 새벽 공기 속에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저게 무슨 노랜지 아시오?"

박두병이 손승호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저게 여순 이후 구빨치들이 지어 부른 노래요."

손승호는 그때서야 선요원이 빨치산 노래 같지 않은 그 노래를 부르는 이유와, 그 노래가 왜 그리 구슬픈 가락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감이 서린 가사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노고단 정상에 이르는 동안 어둠은 다 걷히고 싱그러운 새벽의 대기 속에 하늘과 산의 건강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경쾌한 새소리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풀잎들이 이슬에 함초롬히 젖었고, 어떤 잎에는 맑은 구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기도 했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왔다. 녹음의 푸름을 묻혀온 것처럼 싱싱한 그 바람결에 나뭇잎이며 풀잎들의 잔물결을 이루며 가볍게 흔들렸다. 어둠에 묻혀 있던 자연의 생명들이 마침내 하룻밤의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손승호는 애써서 불타버린 노고단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불타다만 큰 나무들의 뼈대 앙상한 모습은 사람의 해골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살벌하고 끔찍스러웠다. 그러나 그 황량한 땅에서도 풀들은 다시 돋아나 푸르고, 나무들도 잔가지들을 뻗쳐 올리며 초록의 잎을 매달고 있었다. 식물의 생명력을 닮을 일인 것이다! 그건 산에 들어와서 깨달은 것이었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선 소나무를 보면서, 바위 사이의 한줌 흙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패랭이를 보면서 가슴 깊이 느낀 바였다.

"어허! 또 눈이 호강허게 생겨뿌렀네. 짚었다 허면 명당이시." 앞장선 선요원이 노고단으로 올라서며 감탄스럽게 토해내고 있는 말이었다. 뒤따라 정상에 발을 디디는 사람마다 탄성을 질렀다. 동쪽 하늘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노을이었다. 어제 본 저녁노을보다 붉은 기운이 더 진하고 넓게 퍼져 있었다. 황금빛 찬란함이 덜한 대신에 붉은 기운은 펄펄 살아서 넘치고 있었다. 아침의 해맑은 대기와 함께 그 붉은 기운은 풋풋한 생명력으로 부풀고 있었고, 싱싱한 활력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제의 저녁노을에서 느낄 수 없었던 꿈틀거리고, 용솟음하는 것 같은 생동감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손승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생빛이 살아서 뛰는 붉은 기운은 일렁거리며 불길로 타고, 출렁거리며 물결로 솟고 있었다. 그 선혈의 붉은빛을 밀어 올리며 황금빛 빛살이 뻗어 오르고 있었다. 그 황금빛살은 붉은 색조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붉은빛은 황금빛과 섞이면서 더 싱싱하게 살아 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저녁노을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아!..."

손승호는 감탄의 소리를 신음처럼 흘리고 있었다.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어제의 해가 불덩어리는 불덩어리이되 타는 것은 정지한 불덩어리였는데, 아침의 해는 일렁거리는 불길을 온몸에 달고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그래서 어제의 해는 정교하게 동그랗고 그 색깔도 붉은 기 섞인 황금빛이었는데, 지금의 해는 정교함이 없는 동그라미이면서 그 색깔은 눈이 시린 순황금빛이었다. 어제의 해는 마주 바라볼 수 있었는데 오늘의 해는 마주 바라 볼 수 없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하늘을 물들인 붉은 기운에서 넘치던 생명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손승호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해가 솟아오르면서 퍼져 나온 햇살이 일시에 천지에 가득 차며 하늘이고 땅이고 한 덩어리로 붉게 물들었다. 나무란 나무, 바위란 바위, 풀이란 풀, 타다 남은 나무의 잔해까지도 붉은 기운에 젖어 있었다. 지리산이 온통 붉게 물들어 해 앞에 숨죽여 읍하고 있었다. 그리고 햇살은 나뭇잎이며 풀잎에 샅샅이 스미고, 고루고루 뿌려져 잎마다 맺힌 이슬방울들 모두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롱한 구슬이 되게 해놓고 있었다. 그 장엄하고도 경건한 신비스러움 앞에서 손승호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축감과,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경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옆에 선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도, 몸도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친 얼굴은 더 거칠어 보이고, 남루한 옷은 더욱 남루해 보였다. 당신들은 그런 몰골로 왜 이 높은 산 위에 서 있는가. 나는 또 왜 이렇게 서 있는가. 당신들과 나, 우리는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가 뜻이 같아 만나게 되었고, 그 뜻을 함께 이루어나가기 위해 서로의 생명을 함께 지키며 싸우는 동지가 되어 이 자리에 서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혁명이다. 역사의 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혁명은 역사의 해다. 해가 세상 만물에게 평등한 생명을 부여하고, 평등한 생존을 보장했듯이 혁명은 인간의 평등한 역사를 창조하고,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삶을 보장한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인간으로 태어나 한목숨 바쳐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역사의 해를 만들어내는 날, 이 거친 얼굴들, 이 남루한 모습들은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도 눈물겨우랴. 그리고 그때 다시 보이는 해돋이는 얼마나 더 가슴 벅찬 감격적이랴. 손승호는 목 메임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해는 높이 떠오를수록 크기가 작아지면서 붉은 색조도 사위어져갔다.

"저 해 아래 솟은 것이 천왕봉이오."

박두병이 팔을 뻗어 가리켰다. 손승호는 해 아래 삼각뿔로 솟은 무게실린 봉우리를 눈에 넣고 있었다. 그 거리는 꽤나 멀어 보였다.

"인자 운해요오. 모다 뒤로 돌아습시다아."

아침 햇살을 받고 새 기운이라도 돋은 것인지 선요원이 흥이 얹힌 소리를 길게 뽑았다. 몸을 돌려세운 손승호는 다시 감탄을 입에 물었다. 눈앞에는 구름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새하얀 구름이 끝없이 넓은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구름바다 위로 산봉우리들이 붕긋붕긋 솟아 크고 작은 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안개 자욱하게 낀 섬 많은 남해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았다. 질펀한 구름 위로 솟은 산봉우리들은 안개 가득 찬 들녘의 초가지붕들 같기도 했다. 운해는 바람결을 타고 구름 깃들을 뭉클뭉클 피워 올려 구름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구름파도들은 햇빛을 받아 위는 맑은 흰빛으로 빛나고, 아래는 제 그림자를 드리워 아주 세찬 파도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 구름파도들은 바람결을 타고 쉼 없이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뭉클거리며 더 크게 피어오르기도 하고, 어느 것이 갑자기 가라앉으면 새 것이 솟기도 하고, 서로 엉키듯 밀리듯 하기도 하는 그 수많은 구름파도에서는 정말 쏴아쏴아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바다를 이루고 있는 흰 구름은 어찌나 농밀한지 그 위를 걸어 붕긋붕긋 솟은 산봉우리들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구름바다 위로 솟은 산봉우리들은 그래도 높은 축에 드는 것이었다. 낮은 봉우리들은 모두 구름 밑에 잠겨 흔적이 없었다. 어느 산봉우리로는 구름파도가 밀려올라가기도 했고, 어느 산봉우리에서는 밀려올라간 구름파도가 갈기를 나부끼며 밀려 내려오기도 했다. 바다가 그러하듯 구름파도도 살아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운파만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로군, 생각하며 손승호는 빈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는 "장관"이라는 말이 너무 단순한 의미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구름만 모아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두 동무한테 산들을 좀 설명하는 것이 어떻소?"

박두병이 선요원에게 말했다.

"그러제라. 산 이름얼 암스로 보먼 더 맛나제라. 글먼 아까맹키로 뒤로 돌아스씨요."

손승호와 연락병은 시키는 대로 했다.

"천왕봉언 아까 알았을 것이고, 거그서 왼쪽 옆으로 쪼깐 틀어서, , 쩌그 저 아시무락허니 산꼭대기가 서너 개 맞붙은 것맨치로 된 것 있제라? , 뵈요, 안 뵈요!"

", 뵈요."

선요원이 어조에 맞추어 손승호가 힘을 꽁 쓰며 대답했다.

"고것이 바로 덕유산이오. 더 확실하게 말허자면 남덕유요. 그라고 잔잔헌 것덜이야 덮어두고, 눈얼 팍 끌어댕겨 코앞얼 보면, 폴짝 뛰어올라 앉을 수 있을 것 겉은 저것이 반야봉, 다시 뒤로 돌아서서, , 동작이 빨른께좋고, 쩌그 저 똑바라지게 뵈는 디에 두리 뭉시릴 생겼음시로 질로 높은 것, 고것이 광주 무등산이고, 거그서 쪼로록 왼짝으로 돌아스먼, 무등산허고는 반대로 뾰쭉허니 싸납게 생긴 저 뽈록헌 산, 저것이 광양 백운산이오. 요 정도로 알아두면 학습이 된 상불르요."

선요원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훔쳤다. 박두병은 돌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표시였다.

"워쨌그나 두 동무가 참 복이 많으요. 넘덜언 한 행보에 한 가지 보기도 에로운디, 두 동무야 한 행보에 시 가지나 봐부렀응게."

선요원이 쌈지를 꺼내며 말했다.

"그 존 것얼 넷이서만 본께 영판 아깝구만이라."

말수가 적은 연락병이 한마디 했다.

"해방의 날이 오면 인민들하고 다 함께 다시 보도록 합시다."

박두병이 구름바다를 바라본 채 힘주어 말했다. 햇발이 강하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구름바다는 꼭 거짓말처럼 빠르게 썰물이 되고 있었다. 구름들이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고, 휘감기고 꿈틀거리면서 어딘가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운해가 낮아지는 만큼 산허리들이 드러났고, 새로운 봉우리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풀잎에 맺혔던 이슬들도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저 구름들은 남해에서 일어나 여기로 몰려든 것이오."

박두병이 몸을 일으키며 손승호에게 말했다.

", 그렇군요. 구름들이 저리 움직이는 게 꼭 무슨 함성 같습니다."

손승호는 무심코 대답했다.

"함성! 함성이라고 했소?"

박두병이 달라진 눈빛으로 손승호를 쳐다보았다.

", 함성. 여러 사람들이 질러대는 소리 말입니다."

", 좋소. 그것 참 좋소."

박두병은 손뼉을 치며 반색을 하고는,

"역시 손 동무는 남이 느끼지 못하는 걸 감지하는 능력이 있소. 바로 그런 관찰을 하길 바라고 있었소. 그런 관찰을 동원해서 손 동무가 지리산에 대해 글을 좀 써야겠소. 그 동안에 우리가 상황이 나빠 도당신문을 제대로 발간하지 못하지 않았소? 이제 형편이 안정도 되고, 여기 종이공장에서 나오는 종이도 충분하니까 신문을 본격적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그 말이오. 거기에 손 동무가 우리의 투쟁과 지리산에 대해서 글을 좀 써야 되겠소."
손승호는 그때서야 이번 행보에서 자신이 해야 될 "관찰"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여기에 종이공장이 있다고요?"

손승호는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기 전에 박두병의 말에 대한 놀라움부터 먼저 나타냈다.

"뱀사골에 종이공장도 있고 정미소도 있소. 물론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설치한 건 아니고, 수공업적인 것이긴 하지만 말이오. 그래도 우리가 필요한 정도의 종이는 생산해 내고 있소."

박두병은 달궁골에 탄약창과 당 학교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탄약창은 통신설비와 함께 일반대원이나 평당원들이 알 필요가 없는 기밀사항이었고, 당 학교라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개설이 어렵지 않은 별로 특이할 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승호는 수공업적인 종이공장이나 정미소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빨치산 중에는 여러 가지 직종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으니까 제지공장에서 일했던 기술노동자가 없을 리 없었고, 또한 한지 만드는 기술자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목수가 있으면 계곡의 많은 물을 이용해서 물레방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구름이 걷히자 산들의 무리가 드러났다.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무리를 이룬 산들이 각기 높낮이가 다르게 겹겹이 포개지면서 하늘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구름의 바다가 사라지자 산의 바다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 바다에는 지리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리산이 보듬고 품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에다가, 노고단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수많은 산들이 한눈에 다 보이고 있었다. 서로 업고 업혀 억세게 뻗어나가고 있는 산들은 층층이 그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가까운 데서 멀리까지, 그 색깔은 진한 초록에서부터 시작해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점점 엷어지는 초록으로 바뀌어가면서 하늘 끝에 이르면 아슴푸레한 회색빛이 되고 있었다. 산들은 온갖 초록빛 잔치를 꾸며놓고 있었다.

"자아,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 내가 설명을 하겠소."

박두병이 손승호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연락병도 박두병 가까이 다가섰다.

"지리산은 너무나 크고 넓어 어느 지점에서도 한꺼번에 볼 수가 없소. 천왕봉에서 이 노고단까지만 해도 백리가 넘소. 그러니까 지라산은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그 부분도 골짜기 중심으로 나눠서 봐야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소. 자아 그럼, 오른쪽으로 돌아서서 우리가 올라왔던 골짜기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왼쪽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트를 잡고 있는 뱀사골은 저 반야봉에 가려 보이지 않소. 반야봉 바로 아래 골짜기가 뱀사골이오. 반야봉과 이 노고단 사이의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계곡이 어제 우리가 타고 올라온 심원계곡이오. 흔히들 달궁골이라고 해버리는데, 골짜기가 너무 길고 휘어져 여기서 보이는 건 심원계곡뿐이고, 그 아래로 계속 이어진 달궁골은 안 보이오. 그러니까 한줄기 골짜기에 지명을 따라 두 개의 이름을 붙인 셈이오. 그리고 저기 반반하게 잘생긴 봉우리가 만복대요. 여기서부터 만복대 아래로 쭉 뻗어 내리고 있는 산줄기가 지리산 서북능선이오. 그 왼쪽으로 넓게 퍼진 골짜기가 보이지요? 그게 삼성재골이오. 그 옆으로 좁장하게 뻗어 내린 것이 천은사골이오. 그리고 조금 더 왼쪽으로 돌아서서, 저기 산줄기가 좀 더 억세 보이는 그 아래 계곡이 화엄사골이고, 저 앞에 바로 내려다보이는 게 문수리골이오. 저 피아골과 문수리골 사이로 뻗어 내리고 있는 산줄기가 지리산 서남능선이오. 이렇게 되면 노고단에서 볼 수 있는 여섯 개의 골짜기를 다 설명한 셈이오. 어떻소. 내 설명이 틀린 데는 없소?"

박두병이 선요원을 쳐다보았다.

"와따, 쪼로록허니 뀌시는 것이 총기도 좋고, 눈썰미도 좋구만이라. 여그서 투쟁허신 지도 이년이 넘으셨을 것인디라."

선요원이 과장되게 혀를 내둘러 보였다.

"그럼 지리산에는 저런 골짜기들이 몇 개나 됩니까?"

하나의 산줄기에도 수십 개의 봉우리들이 이어지고 있는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손승호는 박두병에게 물었다.

"큰 것으로만 스무 개 정도 될 거요."

"그럼, 박 동지께서는 그 골짜기들을 다 다녀보셨습니까?"

"아이고, 어림없는 소리요. 난 주로 이쪽에서만 투쟁했고, 이쪽에서도 발길을 못해본 골짜기도 있소."

박두병은 고개와 손을 함께 내저었다. 그리고 선요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르겠소. 저 동무는 다 다녀봤는지."

"와따메, 택도 웂소. 지리산서 포도시 사오년 살아갖고 지리산 아흔 아홉 골짝얼 지가 무신 수로 다 안당가요. 말이 시무개제. 한 골짝에도 샛골짝이 쌔고 쌨고, 그 샛골짝이 또 새끼럴 쳐서 수십 개가 되는 판인디 워떤 장사가 고것얼 다 알 것이요. 세석평전에 약초 캠스로 평상얼 지리산서 사신 영감님이 기신디, 그 영감님 말이 자기도 지리산 골짝골짝얼 다 몰른다고 그럽디다. 긍께로 나겉은 겉이야 반봉사로 그냥 둔전기리고 댕기는 것이제라."

그리도 길은 잘 찾아 노고단까지 왔던 선요원의 말이었다. 손승호는 그 말이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휘둘러 볼 수 있는 여섯 개의 골짜기들만 해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 네 배 가까운 골짜기들이 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전체의 규모는 상상으로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사람의 몸뚱이와 비교를 할 때 지리산의 크기는 상상의 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가보도록 합시다. 마침 노고단에서 볼 것을 거의 다 봤으니 반야봉엔 오르지 말고 뱀사골로 빠지는 게 좋겠소. 아침 겸 점심을 임걸령에서 해먹고 말이오."

박두병이 선요원에게 말했다.

"그러제라. 임걸령꺼지 가자먼 시장허실 것인디 싸게 뜨십시다."

선요원이 동작이 빨라졌다. 그들은 천왕봉 쪽으로 뻗은 주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깝도록 평탄했다. 그들에겐 그런 길이 오히려 걷기가 거북했다. 오르막, 내리막, 비탈에 익숙해진 그들의 다리는 평탄한 길을 낯설어하며 더듬거렸다. 능선에서 큰 나무들이 별로 없었다. 산이 높아 바람을 많이 타는 큰 나무들은 능선에서 견디기 어려운 탓일 것이었다. 진달래와 철쭉나무들이 많았고, 다른 잡목들과 억새풀들이 뒤섞여 있기도 했다. 어떤 곳은 산죽밭이 펼쳐져 있기도 했다. 그런 지점에서는 왼쪽이나 오른쪽 중에 어느 한쪽으로는 끝없이 겹을 이루며 뻗어나가고 있는 산의 물결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능선길을 약간만 벗어나 비탈길을 접어들게 되면 금방 수림에 파묻히게 되었다. 그런 숲속에서는 햇발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돼지평전을 지나다 넓은 철쭉나무 밭이 펼쳐졌다. 그 옆으로는 싱싱하게 자라난 억새풀들이 또 밭을 이루며 사람의 키를 넘고 있었다. 그 한 옆에 누가 손질을 해놓은 것처럼 잔디밭이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바로 내려다보이는 게 피아골이오. 그리고 저 산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물줄기가 섬진강이고."

박두병이 손가락질하며 설명했다.

"그럼 저 멀리 솟은 게 백운산인가요?"

손승호는 정면을 가리켰다.

", 딱 맞쳐뿌렀소!"

자기가 했던 학습의 효과를 반기기라도 하듯 선요원이 신바람을 냈다. 손승호는 산줄기들이 굽이치고 있는 저 멀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무등산과 백운산 사이에 들어서 있는 그 많은 산들 중에 조계산도 있을 것이고, 그 산 너머 육십 리면 벌교였다. 늙은 어머니의 얼굴과 동생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완강하게 그 얼굴들을 의식 밖으로 몰아냈다. 부모와 형제가 아닌 자식들을 떼어놓고도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염상진이 그랬고, 바로 앞에 있는 박두병이 그랬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엄걸령의 샘은 노고단의 샘에 비해 물길이 아주 가늘었다. 그러나 그 높은 능선에서 물이 졸졸거리며 나온다는 사실은 역시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삼거리에서 피아골로 내려가게 되오."

박두병은 꼬박꼬박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그런데... 앞으로는 지리산에서 투쟁하게 됩니까?"

손승호는 여지껏 마음에 담아왔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거요. 지리산에 계속 머무른다는 건 투쟁원칙에 어긋나고, 또 지리산은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때 선택하는 투쟁지일 뿐이오. 우리는 불리한 상황을 잠깐 피할 겸 휴식을 취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우린 휴식을 통한 전력강화도, 사상 재무장도 필요한 상태에 와 있소."

박두병의 신중한 말이었다.

"바람이 후덥찌그리헌 것이 워째 요상시럽네?"

밥을 먹으려고 둘러앉으며 선요원이 하늘을 휘둘러보았다.

"내 느낌에도 날이 안 좋아질 것 같기는 같소."

손잡이 짧은 몽당숟가락을 든 채 박두병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길, 안 좋아져봤자 비 오는 것이제라. 시장허신디 싸게 드시씨요."

선요원이 태평스럽게 냄비 뚜껑을 열었다.

세 도의 분기점인 날라리봉에 이르렀을 즈음에 그들은 완전히 비구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지리산의 팔월이 보여주는 급격한 날씨 변화였다.

"날씨가 빨치산얼 신선 맹글어주네. 신선이 구름 속에 산당께로, 신선이 따로 있간디. 우리가 신선이제."

빗방울이 듣는 데도 선요원은 느긋하기만 했다. 사실 지리산 같은 데서 서둘러 대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랜 산 생활에서 얻은 그 느긋함과 묵직함이 손승호는 너무 믿음직스러운 고마움에 들었던 것이다. 비구름은 그 넓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말았다. 구름 속을 걸으면서, 구름 속에서 내리는 비를 맞았다. 비로 목욕을 하며 뱀사골 트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저녁밥 때였다. 지리산은 산이 산을 품고, 산이 산을 업고, 산이 산을 거느리고 있는, 그 크기도 모양새도 쉽사리 알 수 없는 미궁의 산이었다. 이것은 손승호가 배낭을 벗으며 한 생각이었다. 다음날부터 두 달 가까이를 손승호는 지리산에 대한 글쓰기로 일과를 삼다시피 했다. 처음 며칠은 한 줄도 쓰지 못 하다가 어찌어찌 시 한 편을 엮은 다음부터 여러 종류의 글을 써내게 되었다. 시와 기행문은 신문에 게재했고, 지리산의 구빨치 투쟁을 그린 희곡으로는 덕유산 이후 처음으로 연극을 하게 되었다. 그런 여러 가지 글을 태연하게 써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손승호는 스스로 뻔뻔스러움이나 쑥스러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치산으로 완성되어가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빨치산은 온갖 투쟁에서 불가능이 없는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25. 피아골

지리산의 시월은 가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고 있었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가을빛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잎이 작고 얇은 나무들부터 색갈이를 하기 시작하여 잎이 크고 두꺼운 나무들까지 가을로 치장하고 있었다. 분홍, 주황, 노랑, 빨강, 나무에 따라 그 색깔은 가지 가지로 물들어 산을 뒤덮고 있었다. 여러 가지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숲을 이루었어도 녹음은 자연스럽게 조화되었듯이 그 나무들이 단풍 들어 온갖 색깔들로 변해도 그 다양한 채색들은 또 그지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지고 있었다. 봄이 늦어 철쭉을 유월초순에나 피워내는 지리산은 가을은 또 유난스레 빨라 시월이면 단풍 들지 않은 나무가 없었다. 다만 바늘잎을 가지 침엽수들만이 둔감하게 초록빛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흐드러지고 자지러지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피아골은 특히나 유별났다. 피아골에는 금방 뿌려놓은 핏빛 같은 선홍의 단풍들이 다른 골짜기에 비해 유독 많았다. 그 새빨간 단풍들은 계곡의 물까지 묽게 물들였다. 주황빛이나 주홍빛의 단풍들 사이에서 핏빛 선연한 그 단풍들은 수탉의 붉은 볏처럼 싱싱하게 돋아보였다. 피아골을 단풍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지리산 십경 중에 하나로 끼이게 한 그 나무는 바로 단풍나무였다. 피아골에는 단풍나무가 다른 계곡에 보다 많아 단풍이 빨리 들면서도 그 곱기가 빼어나 다른 계곡을 앞지르고 있었다. 경사가 급한 계곡을 올라가면서 보면 단풍잎들은 곧잘 하늘과 겹쳐져 보이고는 했다. 해맑게 푸른 가을하늘과 어울어진 새빨간 단풍의 투명함은 흡사 백설 위에 점점이 찍힌 피의 선연함이었다. 그러나 피아골의 단풍이 유명한 것은 단풍이 고와서만이 아니었다. 피아골은 그 길이가 길 뿐만 아니라 암반과 기암괴석들이 많았고, 암반 위를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넓고 굵었다. 단풍잎들은 가지가지 형상의 바위들과 넉넉하게 흘러내리는 물과 조화를 이루어 그 곱기가 한층 돋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피아골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먼 옛날로부터 그 골짜기에서 수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떠도는 말은, 연곡사 아래서부터 섬진강 어름까지 물줄기를 따라가며 양쪽 비탈에 일구어낸 다랑이 논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바람이듯 떠돌며 전해져오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옛날부터 피아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고, 바깥세상에서는 살 길이 없어 이 지리산 골짜기로 파고들어 비탈에다가 층층이 돌을 쌓아올려 땅뙈기를 만들어내 연명해가던 사람들은 여러 곡절 끝에 그것마저 빼앗기고 굶어죽는 일들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전하는 것은 원혼들이 단풍으로 환생했다는 신기함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많은 목숨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바람처럼 떠도는 그 이야기는 바로 사람들의 삶을 엮어놓은 역사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한 맺힌 죽음은 임진왜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조라는 것이 한심하고, 거기에 붙어서 일신의 영화나 누리자고 도모하는 벼슬아치들 또한 한심하여 왜놈들이 쳐들어왔으나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왜놈들은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일삼으며 경상도지방을 휩쓸고, 전라도 땅도 어지럽히려고 들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섬진강을 따라 전라도 땅을 들어오는 외길목이 바로 피아골 입구였던 것이다. 그 길목에서 왜놈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전라도 내륙 땅은 그대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관군은 이미 있으나마나한 상태라서 백성들은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승려들도 합세하여 연곡사에 군량미를 쌓고 지휘본부를 만들었다. 의병들은 밀려드는 왜놈들에 맞서서 싸웠지만 무기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섬진강 상류를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고, 힘이 모자라게 된 그들은 피아골로 밀리게 되었다. 싸우며, 죽으며, 밀리며를 되풀이하면서 의병들은 연곡사도 빼앗기고 자꾸 피아골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왜놈들의 포위에 걸려 삼흥소 부근에서 거의 다 잡히고 말았다. 왜놈들은 결박한 의병들을 바위에 세워 일일이 목을 쳐 죽였다. 칼을 내려칠 때마다 목 따로, 몸뚱이 따로 계곡물에 곤두 박혔다. 삼흥소가 시체로 넘치고, 거기서부터 피로 물든 계곡물이 이십 리를 넘게 흘러 강에까지 닿았다.

그리고 갑오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을 또 피아골의 물은 피로 물들었다. 그때도 농민들은 목이 뎅겅뎅겅 잘리며 계곡물에 곤두 박혀 온몸의 피를 남김없이 쏟아내고 죽어가야 했다. 알량한 왕조는 왜놈들을 불러들여 청부살인권을 주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왜놈들의 노골적인 식민지화에 저항하여 한일협약을 계기로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때 전남의병은 몰리고 몰리다 그 최후를 피아골에서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순사건 때도 많은 사람들이 섬진강을 건너 피아골로 쫓겨 들어와 피를 뿌렸던 것이다. 연곡사 언저리에서부터 강변마을 가까이까지 계곡의 양쪽 산비탈에 다랑이논들이 수십 개씩의 계단을 이루며 진 틈이라고는 없이 촘촘하게 일구어진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피아골에 물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산, 저 산을 옮겨 다니며 고달픈 삶을 부지해가는 화전민이라는 것도 다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이유가 있듯이, 바깥세상을 등지고 피아골로 들어와 다랑이 논을 일구어야 하는 사람들도 다 그들 나름으로 바깥세상과 고리 지어진 쓰라리고 아픈 곡절들을 간직하고 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선량한 사람들인가는 그들이 일궈내 다랑이논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돌투성이 산비탈들을 따라 일구어진 다랑이논들, 성품이 선량하지 않고, 정신력이 끈질기지 않고, 몸이 부지런하지 않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돌투성이 산비탈에다 농사지을 땅을 만들어내는 그 일은 생존의 터전을 잃고 죽음과 맞선 인간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면서, 인간의 인내와 의지와 성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하는 시험장이기도 했다. 그 세 가지 중에 어떤 것 하나만 모자라도 그 일은 해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다랑이 논을 일구자면 먼저 산비탈에 박힌 돌들을 다 파내야 한다. 물론 파낼 수 있는 정도의 돌들을 말하는 것이고, 움직일 수 없는 돌들은 그대로 두었다가 땅을 고를 때 가능하면 논둑으로 이용한다. 돌을 파낸 다음에는 물을 실을 논을 만들어야 하니까 비탈을 수평의 땅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자면 비탈을 지각으로 깎아서 계단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땅을 한꺼번에 넓게 할 욕심을 비탈을 마음대로 깊이 깎아서는 안 된다. 깎은 높이가 높을수록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힘이 커져 산사태의 위험도 따라서 커지고, 깎인 면적이 윗 논의 논둑이 되는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는 논 넓이가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까 산사태도 막고, 논의 넓이도 최대한 넓히자면 억지를 부리지 말고 지형에 따라 비탈을 깎아나가면서, 생기는 만큼씩 수평의 땅을 얻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논둑은 구불구불한 추상적인 곡선이 되고, 어느 부분에선 딱 밥 소반만한 땅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비탈을 깎아 내려가면 하나의 산비탈에는 수십 개 다른 수평의 땅이 붙게 된다. 비탈을 깎아나가다가 골이 심하게 파인 부분을 만나게 되면 그 아래의 땅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공간에서도 땅을 얻어내기 위해 몇 단계로 돌을 쌓아올린다. 그리고 계단마다 흙을 퍼 넣어 골을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땅의 넓이는 쌓아올린 돌 축대의 넓이보다 적은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넓히기 위해 논둑이 경사진 것이 하나도 없듯이 돌을 쌓아 올리는 것도 반드시 직각 쌓기를 한다. 비탈은 그런 식으로 하지만, 개울에 가까워지면 그때부터는 돌쌓기가 본격화된다. 폭넓게 벌어져 있는 개울가의 공간을 땅으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돌쌓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담이 아닌 돌 논둑이 직각으로 쌓여 올라가며 층계를 이루게 된다. 골을 메울 때처럼 그 층마다 흙을 퍼다 부어 땅을 만들어낸다. 개울과 맞닿는 마지막 돌 논둑은 그 높이가 사람의 키를 훨씬 넘기가 예사인 것이다. 장마가 져 개울물이 불어나는 것에 대비한 것이다. 그런 논의 넓이는 돌 논둑 넓이의 반도 안 되기가 예사인 것이다. 그런 원시적인 노동을 바쳐 다랑이 논을 일군 그들은 근근이 목숨 줄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엉뚱한 일에 부딪치게 되었다. 생활의 여유라고는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우환이 닥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식구들 중에 누가 큰 병을 앓게 되는 경우였다. 그렇게 되면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해 치료를 하다가 더는 견딜 수 없게 되면 병원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갈 수 있는 돈은 빚밖에 없었다. 빚은 바깥 세상에 나가야 얻을 수 있었다. 그 빚돈은 이자가 높아 양잿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식구를 죽일 수는 없었다. 다랑이 논을 담보로 오부 빚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빚돈에 손을 대게 되면 다랑이 논은 십중팔구 빚쟁이 손으로 넘어갔다. 오부 이자라는 빚 구덩이는 호랑이 아가리나 다름없어서 한번 빠지면 벗어날 가망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빼앗긴 논을 소작이라도 부칠 수 있으면 또 모르지만, 그것마저 틀어지고 말면 그 사람은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다랑이 논을 일궈내지 못하고 피아골을 헤매다가 죽어갔다.

피아골, 그 이름이 하필 왜 피아골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룡은 화엄사골과 문수리골을 거쳐 마지막을 피아골로 파고들었다. 이동병력의 안전대피를 위해 세 골짜기에 분산시키고 있다. 세 골짜기에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전남도당에는 구례군당을 바탕으로 한 지리산지구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었다. 이해룡은 우치지구에서 지리산지구로 옮기며 그 직책도 연대장에서 부사령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직위가 올라간 것에 대해서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지리산지구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없는 상황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불갑지구가 일찌감치 소멸되었고, 그 뒤를 따라 노령지구도 차츰 약해지다가 끝내는 소멸상태로 빠져 들었다. 그리고 다른 지구들도 해방구를 점차로 잃어가더니만 이젠 해방구를 확보하고 있는 지구가 하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변화는 여순투쟁 때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평지에서 야산으로, 야산에서 좀 더 크고 깊은 산으로, 거기서 또 더 크고 깊은 산으로. 그 마지막으로 이르는 산이 지리산이었다. 지리산보다 더 크고 깊은 산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십사연대를 제외한 군당들이 지리산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지금처럼 비무장병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갈수록 궁지에 몰리게 되었더라면 결국 군당들도 지리산으로 뒷걸음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쩌어그 저 아래가 삼흥소구만이라."

구례군당의 선요원이 걸음을 늦추며 아래쪽을 손가락질했다.

"알겠소. 오륙 년 전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소."

이해룡은 눈에 익은 삼흥소와 그 언저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먼이라, 산잉께라."

선요원이 가볍게 대꾸하며 이해룡에게 눈길을 돌렷다.

"아마 그런 것 같소."

이해룡은 옛 기억과 함께 물큰 풍겨오는 어떤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아련한 추억의 냄새 속에는 염상진 선배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적색농민운동 주모자들 검거와 학병을 피해 염상진과 지리산 생활을 하면서 이맘때쯤이면 땅꾼노릇을 하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뱀 잡기는 단순한 재미나 소일거리가 아니었다. 지리산독사는 정력이나 보신에 더 없이 좋은 특효약이라고 옛날부터 소문이 나 있었고, 뱀은 가을 뱀이라야 약효가 뛰어나다는 것 또한 널리 펴져 있는 상식이었다. 그래서 나뭇잎들이 물들기 시작하는 구월부터 된서리가 내리기 직전인 시월말까지 두 달 동안은 뱀 값이 최고로 오르는 철이었다. 그건 자신들이 월동준비를 손쉽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우째 이러고 서 있소? 질 까묵어뿌렀소?"

하대치가 이해룡의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 하 동무! 이 골짜기가 전부 피아골이오. 다 온 겁니다."

이해룡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하대치를 반갑게 대했다.

", 나도 그럴란지도 몰르것다 허는 생각이야 있기넌 있었소. 피아골! 참말로 단풍이 오지고 오지요이."

하대치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숨을 있는껏 들이켰다.

"너무 강행군을 했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는 게 좋겠소."

"그리 혀얄 것이요, 비무장덜이야 산 타는 것이 무장덜보담 서툴릉께로."

하대치는 골짜기의 위아래를 휘둘러보며 대꾸했다. 그는 말로만 들어왔던 피아골과 그 이름난 단풍을 함께 눈에 담고 있었다.

"여기 도착하는 부대별로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이해룡은 연락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참말로 소문대로 단풍도 기맥히고, 저 바우엥이덜에 물소리도 기맥히요. 우리도 쩌로 가 자리잡고 담배나 한 대썩 고실립시다."

하대치의 들뜬듯한 목소리였다

"경치가 볼 만합니까?"

이해룡이 하대치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따라 그의 왼쪽 볼에 길게 팬 번들번들한 흉터가 이상스러운 모양을 구겨졌다.

"말해 머 허겄소. 지리산이 요리 끝도 한도 웂이 크고,또 골길이 요리 풍광 기믹힌 것에 맘도 눈도 다 놀래뿌렀소."

하대치는 비탈을 걸어 내려가며 고래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하 동무, 그렇게 놀라고만 갈 것이 아니라 지리산에 온 기념으로 피아골 독사나 몇 마리 잡아먹고 가도록 하시오."

이해룡이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비암얼!"

하대치가 목청을 높이며 우뚝 멈춰 섰다.

"아니, 왜 그리 놀라시오? 뱀 고기 못 먹소?"

이해룡이 의아스럽게 하대치를 쳐다보았다.

"와따 고런 징상시런 소리 허덜 마씨요."

하대치가 상을 찡그리며 팔을 내저었다.

"아니 뭐가 징그럽다고 그러는 거요? 뱀이 정력에 좋고 보신에 좋다고 돈 많은 사람들이 일삼아 비싼 돈 써가며 뱀 사들이는 것 몰라서 하는 소리요?"

"아이고메, 고런 눔덜이나 비암 많이 처묵고 색질 씨게 혀감서 오래 살아보라고 허씨요. 나야 싫은께로."

"하 동무, 뱀장어도 안 먹소?"

"뱀장어?... 고것이야 묵제라."

이해룡의 말에 하대치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하대치는 곧 반격을 가했다.

"아니, 이 동무넌 고것이 같다고 말허고 잡은 모냥인디, 고 것이야 생판 달브테라. 뱀장어야 물괴기고, 비암이야 즘생이요."

"뱀도 물에서도 살아요. 알도 물에다 낳고 말이지요. 뱀하고 뱀장어는 대가리와 고리만 다를 뿐이지 몸뚱이는 다 똑같아요. 뱀이나 뱀장어나 대가리는 안 먹는 거니까. 뱀을 먹으나 뱀장어를 먹으나 똑같다 그겁니다. 이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염 동지의 말입니다."

"염 동지?...글먼 염 동지가 비암얼 묵는다 그것이여?"

하대치의 눈이 휘둥글해졌다.

"그럼요, 아주 자알 먹지요. 나도 뱀 고기 먹는 걸 염 동지한테 배웠으니까요. 굽지도 않고 생으로 먹는 맛이 아주 그럴듯합니다."

이해룡은 하대치를 반히 쳐다보며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점잖은 염 동지가 비암얼 쌩짜로 묵느다고라? 예끼! 그짓말 마씨요. 나가 그리 오래 뫼시고 댕김스롱도 한 분도 비암 잡아 묵는 걸 본 일이 웂소. 염 동지가 아무리 맘이 넓아도 고런 택 웂은 소리 들으면 화낼 것이요."

하대치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완강하게 말했다.

"허허허허... 남대문 본 사람하고, 안 본 사람하고 다투면 누가 이기는지 알지요? 오륙년 전에 나하고 이 지리산에서 살 때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독사를 백 마리, 아니 백 마리는 너무 많고, 아마 오십 마리씩은 넘게 잡아먹었을 것이요. 그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는 지구로 돌아가서 하 동무가 염 동지한테 직접 물어보시오."

이해룡은 느물거리고 웃으며 말했고, 하대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표정이면서도 막상 아무 말도 내놓지 못한 채 걸음만 떼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물가에 다다랐다. 해맑은 물줄기가 넓은 폭을 이루며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나뭇잎들이 그 위에 실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는 낙엽들도 많았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개울바닥이 유리병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였다.

"여기 앉읍시다."

이해룡이 먼저 바위에 걸터앉으며,

"하 동무, 이건 농담이 아닌데 말이오, 가을 뱀은 겨울잠 준비를 하느라고 살도 많이 오르고, 기름도 많이 쪄서 영양이 아주 좋으니까 몇 마리 먹도록 해봐요. 씨름대회에 나가자면 기운을 돋워얄게 아니겠소? 기운을 돋우자면 고길 먹어야 하는데, 당장 구하기 쉽고 몸에 좋기로는 뱀밖에 없어요."

그의 얼굴은 이제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아이고메 고런 말 마씨요. 씨름얼 첫판에 져도 전께 고 징헌 비암언 못묵겄소."

하대치는 질색을 하며 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여 엎드리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울대 울리는 소리와 물 넘어가는 소리가 시원스러웠다. 그런 하대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참 사람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뱀 잡아먹는 것쯤 예사로 할 줄 알았던 저 사람이 그리도 끔찍스러워 하다니, 이해룡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두 가지 일을 해내기 위해 잠시 지리산에 온 것이었다. 비무장들의 이동을 그의 무장부대가 경계하는 것이 첫 번째였고, 시월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러나 하대치로서는 또 하나의 목적을 개인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씨름대회에서 "이현상 선생"을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씨름대회에 나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선뜻 응했는지도 몰랐다. 비무장대원들은 계곡의 물가에 차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물가에 앉자마자 하나같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모습들로 물을 마셔대고는 했다. 물을 양껏 마신 다음에야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경치의 아름다움에 서로 감탄을 나누었다.

"워따, 간뎅이가 얼어 붙을라고 허네웨."

물을 다 마신 하대치가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훔치고는,

"저 씨언헌 물에다가 무등산 수박 한뎅이럴 푹 잠것다가 쪼개 묵으면 신선이 따로 웂겄다."

그는 짭짭 입맛을 다시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보통 수박보다 두 배 이상 크면서, 산중에서 늦되는 무등산 수박이 한찬 제 맛이 날 때이기도 했던 것이다.

", 빨치산 팔자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그만 하시오. 빨치산 팔자에 어울리는 건 독이 탱탱하게 오른 뱀이나 잡아먹는 것뿐이요."

이해룡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하대치를 옆 눈질하고 있었다.

"이 동무가 그리 비암 잡아 묵는 타령 허다가는 오늘 저녁에 자다가 장개도 못 간 잠지럴 다 물어띧길 것이오."

하대치가 담배를 말며 퉁명스레 내쏜 말이었다.

"하하하하... 하 동무가 왜 뱀을 안 먹으려고 하는지 인자 알았소. 뱀을 죽이면 그 짝이 밤에 찾아와서 잠지를 물어 복수하고, 뱀을 꼬리까지 다 안 죽이면 밤중에 이슬을 맞고 되살아나 꼭 복수를 하고 만다는 어릴 적에 들은 얘기 때문이군요. 유물론자가 그런 미신을 믿으면 좀 곤란하지 않겠소? 빨치산한테 뱀은 뭔가 하면 말이요. 한 끼 밥이고, 양식이요."

하대치는 이해룡의 탄력이 넘치는 말을 못 들은 척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그런 하대치를 보고 이해룡은 짓궂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동무, 기다리시오, 이따가 내가 몇 마리 잡아다가 맛을 봬드리테니까. 생으로 먹는 게 징그러우면 구워서 먹는 방법도 있소. 구워서 먹으며 기름이 지글지글한 게 그 구수한 맛이 뱀장어 뺨칩니다."

"아이고메, 나 싸게 지리산 떠야 쓰겄소."

얼굴을 찡그린 하대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해룡도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왼쪽 옆구리의 혁대 사이에 찔러 넣고 있던 막대기를 뽑아 손바닥을 딱, , 딱 때렸다. 그 소리는 유난히 맑고 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에 있었던지 연락병이 그의 앞에 금방 나타났다.

"대대장과 중대장들 곧 집합시키도록!"

이해룡은 또 막대기로 손바닥을 딱 치며 명령했다.

"야아, 댕게 오겄구만요."

거수경례를 붙인 연락병이 황급히 돌아섰다. 이해룡이 들고 있는 것은 그냥 막대기가 아니었다. 팔 길이 반만한 그것은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서로 맞대어, 손가락 세 개 정도를 합한 넓이가 되도록 삼끈으로 엮어 묶은 죽도였다. 검도 솜씨가 남다른 그가 총만큼 소중하게 여기며 몸에서 떼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것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호신용 무기였고, 지휘봉이었고, 작전지시기였으며, 연락병 호출기였다. 연락병의 전갈을 받은 간부들이 서둘러 모여들었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목적지 피아골에 도착했습니다. 부대를 인솔하느라고 여러분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오늘은 강행군을 한데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트는 내일부터 만들라고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부대별로 저녁밥을 하는 동시에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들을 찾도록 하시오, 또한, 아직 별 위험은 없습니다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무장대가 보초를 철저히 서도록 해주시오. 이상입니다."

이해룡이 하대치와 농담 반 진담 반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의 냉엄한 얼굴에는 상급지휘관다운 무게와 여유가 실려 있었다. 하대치는 그런 이해룡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 사람도 인자 염 동지허고 어슷 비슷허니 되얏구만, 하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이번에 그가 부대를 지휘하고 인솔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했던 것이다. 그럴 때면 그의 왼쪽 볼을 길게 찢고 있는 흉터도 꼭 흉하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인민의 "훈장" 이고 "빨치산의 훈장"으로 당당하고 값지게 보이기도 했다. 지시를 받은 간부들이 흩어져가고 있었다. 그들 속에는 하대치를 따라온 강동기와 천점바구도 끼여 있었다.

"여그가 산 높기로 치자면 워디잠이요?"

하대치가 골짜기를 둘러보며 이해룡에게 물었다.

"이 피아골이 오십 리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중간쯤 되겠소."

"글먼 우선에 안전허기넌 허겄는디..."

하대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보일듯 말듯 저었다.

"왜 그러시오?"

이해룡은 신경에 자극을 느끼며 빠르게 물었다.

"금메라... 머시라 혀얄랑가."

하대치는 난색을 표하며 느리게 바위에 앉더니,

"지리산얼 와서 봉께 듣든 것보담 훨썩 크담허고 짚은 산언 산이요. 긍께로 묵자 것만 있다먼 피허기도 좋고, 신선놀음도 좋겄느디. 묵자 것이 웂어갖고야 요것도 저것도 앙패가 아니것냐 허는 생각이 드요, 산이 높아논깨 폴세 요리 단풍이 왁짜허게 들어뿔고, 이리 가자면 삼동도 금세 닥칠 것인디, 삼동 나자먼 옷이고 양석이 문젠디다가, 이리 짚이 들어앉아먼 보투도 을매나 심이 들겄소."

그의 말이 걱정스러웠다.

", 도당에서도 그 문제를 제일 걱정했소. 그러나 토벌대들의 수가 자꾸만 늘어나며 더 공격도 치열해지니까 우선 피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소. 구례군당과 힘을 합쳐 무슨 수를 쓰든지 이번 겨울을 넘기는 것이 우리 지구가 할 일이요. 어떡하든 겨울만 넘기고 나며 다시 도당으로 돌아가게 되니까요."

"하먼이라. 우리 헹펜이 좋아져서 지리산얼 싸게 벗어나게 되야겠제라이. 어런덜이 허는 말로 지리산언 명산임스로도 악산이라는 말이 안 있습디여? 귀경허기로넌 명산이라도, 반란 일으킨 백성들헌테는 악산이라는 말이제라. 예적부텀 들판에서 들고 일어난 백성들은 산으로 피해감스로 싸우고 싸우다가 지리산으로 몰리먼 종당에넌 끝장나 뿌렀다는 것인디 우리야 싹 다 지리산으로 쫓기는 것이 아니고 비무장만 임시변통을 뒤로 재는 것잉게 달브기야 허제만, 그려도 지리산으로 뒤뺀다고 헐 적에 맘이 껄쩍지근혔고, 이리 와서 봉께로 맘이 쌔코롬해짐스로 탁 까라지는 것이, 자꼬 어런덜 말이 되씹히고 그러요."

"나도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사실 지리산은 본격적인 투쟁지가 아니라 투쟁의 마지막 장소일 뿐입니다. 지리산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거든요. 길목길목을 다 막아버리면 꼼짝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싸워서 죽지 않으면 긴 겨울에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안 동무와 우리가 함께 만난 첫날 내가 그 점을 걱정한 겁니다. 어쨌든 해동하면 바로 벗어나야지요. 본격적인 투쟁은 언제나 인민의 옆에서 해야 됩니다."

"근디 말이요, 우리가 이동허는 것을 적덜이 다 알었으니, 고것은 워찌 될 것 겉으요?"

아무리 유인작전을 써가며 야간이동을 했다고 해도 이쪽의 수가 워나 많아서 적들의 눈을 말끔하게 속일 수가 없었다. 적들의 대항이 의외로 약했던 것도 그 많은 수에 기가 질린 탓이라고 보아야 했다. 적들은 어둠 속에서 이쪽의 무장과 비무장을 구분할 리 없었던 것이다. 하대치는 이동을 완전하게 감추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께름칙하게 걸려 있었다.

"글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당장 뭐라고 할 수가 없군요. 토벌대들도 병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당분간이야 별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각 지구들이 맹렬하게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이쪽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말이지요, 우리로선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요. 우린 여기 이 넓은 지리산을 골짝골짝 피해 다니며 싸우고, 그러는 동안에 각 지구들은 빼앗긴 해방구를 되찾고 말이요. 허나, 적들도 그리 미련하지는 않겠지요."

이해룡의 말에는 풀기가 없었다.

"여그 지리산에넌 우리 도당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디. 그 수럴 다 합치면 을매나 되겄소?"

"글쎄요... 남부군 사령부 병력이야 삼사백일뿐이고, 전남, 북도당에다가 경남도당까지 합하며 한 삼사천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염 동지 말로는 우리도당과 경남도당이 팔 할쯤 될 거라고 했소.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최선의 조처를 취한 거니까 좀 더 두고 봅시다. 나 보투 나갈 참인데 하 동무도 같이 갑시다."

이해룡이 밝은 얼굴로 몸 가볍게 일어났다.

"보투요?"

하대치가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뱀 잡으러 잔 말이오."

"와따 참마로 그눔에 비암 이약 찔기기도 허요. 혼자 가서 배터지게 잡아 묵고 오시오."

하대치가 벌컥 화를 내듯이 했다.

"흐흐흐흐..."

이해룡은 어깨를 들먹거리고 웃으며 돌아섰다. 하대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부대별로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을 피우고, 물가에서 무엇을 씻기에 바쁜 사람들도 있었다. 온갖 색깔의 단풍들이 곱고, 맑은 물소리 요란한 골짜기에는 해거름의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 연기 냄새까지 퍼지고 있어서 하대치는 갑작스럽게 솟기는 시장기를 느꼈다. 이해룡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뱀을 잡으러 간 것인지 어쩐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생으로 뱀을 먹는 염상진을 상상할 수가 없었고, 그 생각을 하면 속이 메슥거려지려고 했다. 그러나 염상진이 뱀 고기를 먹을 리가 없다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보기에 징그러울 뿐이지 뱀도 고기는 고기였고, 염 대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뱀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 싶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뱀 먹기 타령을 듣게 되자 그는 까마득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인가 논가 풀섶에서 개구리를 잡다가 뱀에게 오른쪽 다리를 감겨 까무라친 일이 있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 뒤로도 뱀만 보면 질겁을 하고 도망쳤고, 아이들이 떼 몰려 돌질로 뱀을 토막 쳐서 죽이는 일에도 끼지 않았다. 뱀에게 다리만이 아니라 목까지 감기는 꿈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 것도 불두덩에 거웃이 날 무렵이었다. 물뱀에게 물렸으니까 괜찮았지 산에서 사는 독사에게 물렸더라면 영락없이 죽었을 것이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뒤에까지 잊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대치는 손바가지로 물을 몇 모금 먹고 자기 부대를 찾아 나섰다. 여기저기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연기를 피워대고 있는 것에서 지리산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싸아한 연기냄새를 맡으며, 지리산에 소나무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잎 없는 나무들이 많았고, 바늘잎을 가진 것으로는 소나무보다 잣나무가 더 많았다. 산에 소나무가 적으니 그는 이상하게도 허전함과 생소함을 느꼈다. 그가 조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 산이 온통 참나무로 뒤덮여 있는 탓이었다.

"대장님, 여그구만이라 여그!"

하대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동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맞흔들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밥은 워찌 되야가요?"

하대치는 친근한 눈길로 대원들을 둘러보며 웃음 지었다. 대원들도 스스럼없이 마주 웃으며 자리를 조금씩 비켜 앉았다.

"인자 끓을라고 허능마요"

강동기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대답했다.

"천 동무는 워디 있소?"

하대치는 강동기 옆에 앉으며 물었다.

"바로 쩌그 바위 옆에 자리 잡았구만요."

"좀 불러 왔으먼 좋겄소."

"그러제라."

강동기가 연락병을 띄웠다.

"강 동무도 지리산이 첨이요?"

하대치가 쌈지를 꺼내며 물었다.

"그럼아요."

"기분이 으쩌요?"

"금메요, 워디가 워딘지 정신이 하나또 웂구만이라."

그때 천점바구가 나타났다.

"대장님, 여그서 진지 잡수실라고라?"

천점바구가 대뜸 물은 말이었다.

"그러시기로 혔소."

강동기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뿔먼 영 섭헌디요. 빈말로라도 의논이 있었어야제."

천점바구는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천 동무, 앉으씨요. 강 동무가 맥엄씨 허는 소리요."

하대치가 손짓을 했다.

"! 나가 또 강 동무 싱건 소리에 넘어갔구만이라."

천점바구가 멋 적게 웃으며 하대치 옆에 앉았다.

"긍께로 머시냐, 오늘로 우리 부대가 맡은 임무넌 다 끝낸 심이요. 오늘밤에 대원덜 푹 쉬게혀서 낼 아칙에 여그럴 뜰 참이요. 남치기 일언 씨름대회럴 보고, 지구로 무사허게 돌아가는 일잉께 끝꺼정 대원덜 단도리 잘 혀얄 것이요."

"야야."

"알겄구만이라."

천점바구와 강동기가 함께 대답했다. 하대치는 담배말이에 침을 흠뻑 바르고 있었다.

"씨름 연십은 많이 허셨는게라?"

강동기가 하대치에게 넌지시 물었다.

"연십얼 따로 헐 새가 워디 있소. 그냥 옛말 맘으로 샅바 잡고 한바탕 놀아보는 것이제."

하대치는 연기를 내뿜으려 씽긋 웃었다.

"근디, 장사한테 황소럴 상으로 준다는 말이 있등마, 고것이 참말일께라?"

천점바구가 하대치를 쳐다보았다.

"아매 헛말은 아닐 성물르요. 본시 씨름판이야 소가 상금으로 안 내걸리먼 심바람이 안 일어나는 법잉께."

"글먼 대장님이 그 소럴 쌈빡허니 따내뿌씨요. 그눔얼 턱허니 몰고 지구로 돌아가먼 대원들이 을매나 반가워라 허겄는게라."

천점바구는 눈을 빛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맘이야 그러고도 잡은디, 고것이 에로운 일일 것이요, 빨치산 환갑이 시물다섯이라면 씨름꾼 환갑이야 그보담 더 밑인깨로. 나가 나이 쉰디다가 키할라 요리 쪼깐허니 크다가 말어뿌렀이니 소 탈 욕심아야 진작에 털어 뿌는 것이 안좋것소? 같은 동지찌리 부자지럴 걷어차서 이길 수도 웂은 일이고."

하대치는 쿡쿡거리며 혼자 웃고 있었다. 그 옛날, 황소를 눈앞에 둔 결승전에서 연 삼 년째 맞붙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부자지를 걷어차 쓰러뜨리는 오기를 부렸던 일이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연대장 동지, 부사령 동지께서 찾으시마요."

이해룡의 연락병이 하대치 앞에 거수경례를 붙였다

"이 동지가!"

하대치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지면서,

"비암 몇 마리나 잡아왔는지 봤소?"

화를 내는 것처럼 소리 질렀다.

"비암은 무슨 비암이요? 무신 말인지 몰르겄는디라."

연락병은 어리둥절해했다.

", 부사령 동지가 비암얼 묵겄다고 잡으로 갔다 그것이요."

"아닌디요. 손에 진 작대기럴 들기넌 들었는디 비암은 웂드만이라."

"고것 참말이여? 동무가 잘못 본 것 아니요?"

하대치의 얼굴은 반색을 했고 목소리는 밝아졌다.

"지가 똑똑허니 봤는디, 틀림 웂이 빈손이었당께라."

연락병의 자신 있는 말이었다.

"되얐소. 갑시다."

하대치는 활기차게 일어섰다. 역시 연락병의 말은 맞았다. 이해룡은 끝이 ㅅ자로 갈라진 긴 나뭇가지로 땅을 푹푹 질러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담배 피워대고, 사람냄새 풍겨대고 하니까 뱀들이 다 도망가고 숨어버린 것이요. 이거 참, 지리산 온 기념으로 몇 마리 잡아 구울려 했었는데."

이해룡은 짭짭 입맛을 다셨다.

"아조 꼬시개 자알된 일이요. 흐흐흐흐..."

이제 하대치가 아까의 이해룡 닮은 웃음으로 어깨 들먹거리며 워어대고 있었다.

"하 동무 심뽀 참 고약하오. 씨름대회 나가서 이기라고 기운 돋워주려는 동지애도 모르고 그리 좋아하다니."

이해룡이 섭섭한 척하며 나뭇가지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아이고메 아즘찬이요. 그 맘이 고마워서 나가 꼭 소럴 타갖고 이동무 보신허게 소붕알얼 보내겄소."

하대치는 시원하게 말하고 나서 한참이나 껄껄거리고 웃었다.

"아이고 고맙소. 밥이나 먹읍시다."

이해룡이 털퍽 주저앉았다. 물소리가 되울림 하는 긴 골짜기에는 안개발이 퍼지듯 어둠살이 끼어 오고 있었다. 어둠살을 타고 선뜩거리는 바람결도 일어나고 있었다. 높고 깊은 지리산 골짜기에는 벌서 겨울기운이 서려 들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밥을 마치자 이해룡은 다시 간부들을 집합시켰다.

"모닥불을 피우고 중대별로 한 시간 정도씩 오락회를 실시하도로 하시오. 여기 온 대원들은 오늘밤이 지리산의 첫날밤이나 마찬가지요. 밤에 불을 못 피운 지도 오래 됐으니까 맘껏 모닥불을 피우고 오락회를 즐기도록 하시오. 학습은 내일 낮에 하도록 합시다."

이해룡의 이런 지시에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염려를 느꼈다. 그러나 곧 염려를 털어버렸다. 부대의 지휘책임자는 이해룡이었고, 여기는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오락회도 투쟁의 하나인 한, 장소가 바뀌었으며 그 장소에 어울리게 오락회를 벌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아직은 토벌대의 위험이 전혀 없는 지리산에서 맘껏 모닥불을 피워 올리고 오락회를 하는 것은 그 동안 억눌려왔던 감정을 누고, 앞으로의 사기를 높이는데 더 없이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적의 위협이 없다고 해도 그런 결정을 척척 내리는 이해룡의 과감성을 보며 하대치는 또 그의 변모를 느끼고 있었다. 어둠이 가득 찬 골짜기의 사방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너훌거리는 별들이 어둠을 사르며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 얼굴을 붉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둠 속 여기저기에서는 수십 개의 불꽃들이 싱싱하게 피어났다. 그리고 다투듯이 박수소리들이 울리고, 노랫소리가 흐르고, 웃음소리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들은 물소리와 함께 섞여 밤 계곡을 한층 요람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하대치는 어둠 속에 묻혀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뿌듯하게 솟기는 힘을 느끼기도 했고, 어딘가 빈듯한 허전함을 느끼기도 했다.

저리 심 뻗치는 대원들 손에 각단지게 총이 들렸드람사 을매나 좋을것이여. 그리 되얐으면 여그꺼정 뒷걸음질 안쳤을 것인디, 참말로 목심 내걸고 싸우겄다고 나슨 사람덜헌테 총이 웂은 것맹키로 환장헐 일이 또 있으까! 어나 워쩔 것이여., 빨치산인디. 싸와감스로 무장혀야제. 워쨌그나 오랜만에 모닥불덜 푸지게 피워고 아무 눈치 볼것 웂이 오락회럴 헌께로 좋구만. 요것도 다 지리산이 보둠아준 덕이여. 근디 원제꺼겅 보둠기고 있어야 헐란가 몰르겄네. 이해룡이 말대로 해동이 됨스로는 참말로 일이 풀렸으먼 쓰겄는디...’

하대치는 마음 무거움을 떼치지 못한 채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닥불들의 불길은 한층 깃 좋게 일렁이고 너훌거렸으며, 모닥불을 에워싼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어가면서 오락회의 홍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하대치는 다음날 아침 일찍 부대를 집합시켰다. 그리고 달궁골을 향해 피아골을 출발했다.

"이 동무, 해동되먼 만냅시다이!"

하대치가 이해룡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럽시다. 씨름에 꼭 이기도록 하시오. 여기서 이기면 지리산 장사요."

이해룡도 하대치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이 말을 나누고 두 사람의 입은 다물렸다. 그들은 서로를 맞쳐다보다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하대치는 돌아섰다. 그의 눈언저리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해룡의 눈가에도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요원을 앞세우고 하대치의 부대는 바위투성이인 험한 피아골을 치올라 임걸령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담배 한대씩을 말아 피운 그들은 곧장 심원계곡을 타고 내렸다. 내리막길 심원골은 피아골에 비하면 너무 심심할 정도로 험한 데라고는 없었다. 피아골이 남성적이라며 심원골은 여성적이었다. 같은 산이면서도 등성이를 가운데 두고 그리도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심원골의 단풍들도 피아골에 못지않게 고왔고, 샛가지 많은 깊은 골짜기의 경치는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심원골 용소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은 그들이 달궁골로 접어들어 돌고개를 지나 달궁골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 시경이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세배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러나 선요원은 그 빠르기마저도 불만스러워 했다. 달궁골을 처음 본 하대치와 그의 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골짜기가 갑자기 확 트여 넓어지면서 눈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에 들어와 사흘 동안 줄기차게 골짜기들만 넘나들고 오르내리면서 그런 곳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 운동장처럼 넓은 풀밭에는 광목천막 대여섯 개가 나란히 쳐져 있었다. 맑게 흘러가는 물과 넓은 풀밭과 울긋불긋 물든 숲과 나란히 쳐진 천막들 - 그건 그지없이 평화로운 별천지의 풍경이었다.

"옛날 옛적에 여그에 궁궐이 있어서 달궁이라고 헌답디다. 긍께 저 풀밭이 궁궐터였을 것이오. 쩌그 쳐져 있는 천막은 남부군 사령부 기동부대 것이오."

선요원의 설명이었다.

"허먼, 이현상 선생님이 쩌그 기신단 말이제라?"

하대치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하먼이라. 나가 도착보고럴 허고 올 것잉께 쉬고 있으씨요."

선요원이 다람쥐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돌들을 타고 개울물을 건너갔다. 하대치는 그때서야 골짜기의 이곳저곳에 모둠모둠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씨름대회에 참가하러 온 다른 도당의 대원들이겠거니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대치는 아랫배에서 뻗질러 오르는 힘을 느끼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동무덜, 편허게 앉어 쉬씨요."

하대치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어제와는 달리 황소를 한번 타볼까 하는 욕심이 슬그머니 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욕심에 따라 그는 몸의 이 부분, 저 부분으로 힘이 몰려다니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업어치기, 허리치기, 옆물리기, 들어치기, 다리치기. 밀어치기. 당겨치기, 꼬아치기... 씨름기술이 빠르게 떠오를 때마다 몸의 부분부분이 꿈틀꿈틀하고 있었다.

"맘에 드는 디럴 골라 하로 밤 편안허니 쉬랑마요. 보초야 사령부 기동대가 다 알어서 헌다고라."

선요원이 전갈이었다.

", 손님대접 지대로허는구마."

하대치는 흐뭇하게 웃고는,

"우리 구례군당이 도착혔는가 몰르겄소?"

그는 선요원에게 좀 알아보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으쩌제라? 지가 시방 딴 일얼 명령받었는디라."

"되얐소. 나가 알어서 허겄소. 우리 여그거정 딜꼬 오니라고 동무 수고가 많었소."

하대치는 선요원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수고넌 무신 수고라. 당연허니 허얄 일인디요. 편허게 쉬시씨요들."

선요원이 흡족해하며 다시 개울을 건너갔다.

"와따 빨치산 오래 허다봉께 보초 안스고 자보는 밤도 생기네이."

"그런 맛도 있어야 기분나제."

"하먼, 오늘 저녁이 우리덜 생일 잔치시."

대원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하대치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부하들을 쉬게 한 하대치는 연락병을 데리고 직접 넓은 골짜기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구례군당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대치는 구례군당과 함께 오기로 되어 있는 김범준 소장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염상진은 그분을 지리산까지 무사하게 모시라고 특별히 다짐했던 것이다. 하대치는 바위 위에 앉아 담배만 연거푸 말아 피우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김범준이란 사람을 며칠 동안 가까이에서 대하며 염상진이 그 사람을 왜 그리도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대충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잔잔한 웃음이 감도는 얼굴로 하루 종일 가야 말 한마디가 없었고, 어쩌다가 아랫사람들이 작전에 대한 것을 물으면 한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 고개를 저을 때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는데, 그때도 하는 말은 짤막했다. 그런데 그 작전지시가 빈틈없이 들어맞고는 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데도 젊은 대원들과 똑같은 속도로 걷는가 하면, 대원들보다 쌀이 좀 더 많이 놓인 밥을 한사코 먹지 않았다. 웃음기 감도는 얼굴에 비해 눈은 이상하게 매웠는데, 그 눈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앞에 서는 것이 어려워지면서도 마음은 끌리고 있었다.

"다 오랜 투쟁경력이 저런 인품을 만들어내는 거요."

그분을 모시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이해룡이 한 말이었다. 그분은 지리산지구 사령관을 옆에서 돕는다고 했다. 차마 지구사령관을 맡길 수가 없어서 그리된 것이고, 사령관의 ""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에 있다는 것을 하대치는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구례군당은 두 시간 남짓 지나 도착했다. 하대치는 허겁지겁 그쪽으로 뛰어갔다.

"장군 동지 인자 오신게라. 피아골꺼정 무사허니 이동허고, 지부대넌 쪼깐 아까 여그 도착혔구만요."

하대치는 거수경례를 붙인 채 보고 했다.

", 하 동지 수고하셨소."

김범준이 따스하게 웃으며 경례를 받았다.

"인자 푹 쉬씨요, 하 동무."

김범준의 옆에 선 지구사령관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대원 하나를 앞장 세워 개울물을 건너갔다.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천막 쪽이었다. 앞장선 선요원이 가운데 어느 천막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김 장군 동지허고 지구 사령관 동지께서 오셨구만요."

선요원이 보초에게 말했다. 보초가 문득 긴장한 얼굴이 되더니 재빨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되돌아 나와 천막 깃을 들춰 올린 채 말했다.

"안으로 드십시오."

키가 큰 김범준은 고개를 약간 구부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김 장군 동지,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굵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김범준을 맞이했다. 김범준은 손을 내미는 오십 객의 남자가 이현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범준이라고 합니다."

김범준은 상대방의 손을 잡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인사드립니다. 이현상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키의 이현상은 약간 올려다보는 눈길이었고, 키가 큰 김범준은 약간 내려다보는 눈길이었다. 두 사람은 웃음 띤 얼굴로 한 동안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그들 사이에는 초면 같지 않은 어떤 친숙함과 반가움이 오가고 있었다.

"저쪽으로 앉으시지요."

이현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범준은 뒤에 서 있는 지구사령관을 인사시켰다. 이현상은 지구사령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김범준은 이현상을 한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강건하게 다져진 체격에 기름한 얼굴은 중후하고 수려했다. 콧마루가 긴 높으담한 코가 어떤 품위를 지녔으면서도 남자다운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유난히 맑은 눈은 부드러운 것도 남자다운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눈은 부드러운 거 같으면서도 예리한 빛을 품고 있었고, 귓밥이 많은 큰 귀는 부러우면서도 인정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잡히고 있는 몇몇 개의 주름살들은 평생을 혁명의 길로 살아온 고난과 경륜을 담고 있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이 그 유명한 혁명가 이현상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김범준을 느끼고 있었다. 이현상은 빨치산답게 미군장교복 차림이었다. 혁대까지도 미군용이었다.

"김 동지의 경력은 대강 전해 듣고 있습니다. 중국 땅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자리를 잡은 이현상이 나지막하면서도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저야 뭐... 적진 속에서 싸우시느라고 이 선생께서 고난 많이 겪으셨지요."

"아닙니다. 숨어 사느라고 변변히 투쟁해 본 적이 없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를 그냥 동지라고 불러주십시오."

이현상은 아까와는 다른 세심한 눈길로 김범준의 면모를 살펴보고 있었다.

"겸양의 말씀이십니다. 퇴로를 두고 적과 싸우는 것하고, 퇴로도 없이 적진 속에서 싸우는 것하고, 그 어려움은 비교가 될 수 없는 문제겠지요. 그건 성과로만 따질 성질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김범준의 신중한 말이었다.

"예에... 그런데 그게..."

이현상의 미간이 좁혀들며 눈에 힘이 모아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더 계속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입은 점점 굳게 닫혀지고 있었다. 김범준은 잔뜩 힘이 뭉쳐진 그의 입을 보면서 그가 무슨 속말을 되넘기고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담배... 태우십니까?"

이현상이 기분을 바꾸듯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 고맙습니다."

김범준은 이현상이 되넘긴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담배를 빼들었다. 그런데, 이현상이 기름한 가죽쌈지에서 빼든 것은 파이프였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물었다. 의외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의 준수하고 중후한 면모에 파이프가 잘 어울린다고 김범준은 생각했다.

"파이프가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아닙니다. 뭐 멋을 부리자는 게 아니라 매번 말아 피우는 것이 번거롭고, 불빛도 막을 수 있고 해서 어쩌다 손에 들어온 것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멋은 부수적인 것일 뿐인 셈이었다. 김범준은 그 세밀한 철저성에서 오랜 지하투쟁자의 일면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김범준은 조선공산당의 커다란 두 갈래인 남로당과 북로당, 그리고 거기에 연결된 국내파와 국외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현상이 되넘긴 말은 그 당의 구좌와 직결되는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것에 관한 발언은 곧 정치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김범준은 혁명과 정치의 그 복잡한 이질성을 오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혁명전쟁의 시기라는 것만을 생각하고자 했다.

시월혁명 기념 씨름대회 날은 더없이 쾌청했다. 시월의 청명한 햇살이 달궁에 가득 처지면서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남부군 사령부 병력과 전남, , 경남도당의 대원들까지 합해 육백여 명이 넓은 풀밭에 도열했다. 시월혁명을 성취한 볼셰비키의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아 해방투쟁을 더욱 가열하게 전개해 나가자는 내용으로 이현상이 짤막하게 연설을 했다. 그리고 곧이어 씨름대회로 들어갔다. 맑은 날씨에 산들산들한 바람은 씨름판을 벌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지가지 색깔로 물든 나무숲은 국민학교 운동회 날 펄럭이는 만국기들과 다름이 없었고, 누릿누릿 면한 풀밭은 모래밭보다 더 좋은 씨름판이었다. 그리고 풀밭 가장자리에 매어진 황소가 씨름대회의 기분을 한껏 돋워 올리고 있었다. 도당별로 뽑힌 선수들이 위통을 벗어젖히고 씨름판으로 나섰다. 씨름도 붙기 전에 각 도당의 대원들이 와아, 와아 소리 지르며 응원을 해댔다. 그런 출렁거리는 열기와는 상관없이 하대치는 아까부터 한곳에만 눈길을 박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이현상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는 오래오래 간직해왔던 소망을 이루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은 간절함으로 이현상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새로 생겨난 욕심이었다. 그전의 바람은 그저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었다.

"와아, 다리 걸어라, 다리!"

", 쩌쩌쩌쩌..."

"넘겨라, 넘겨!"

대원들은 제각기 외치고 손짓해가며 신명을 올리고 있었다. 하대치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위통을 벗고 씨름판으로 나서며 두 팔을 휘둘러 댔다. 그의 부대원들이 박수를 쳐대며 소리소리 질렀다. 샅바를 잡고 일어서며 하대치는 벌써 상대방이 싸울 상대가 못 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어깨와 다리에 받쳐오는 힘이 영 시원찮았던 것이다. 기술을 쓸까, 기운을 쓸까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기왕 기운을 한판 쓰려고 한 것, 다음 판을 위해 기운을 돋울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하대치는 허리를 불끈 세우며 두 팔을 끌어당겼다. 상대방이 붕 떠올랐다. 하대치는 허리를 약간 비틀었다. 그 연속동작에 상대방은 허망하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다섯 판을 별 어려움 없이 이기고 하대치는 여섯 판째에서 결승전에 나서게 되었다.

"대장님 꼭 이기씨요이."

"소가 대장님 보고 웃소."

"우리대장 동지가 비문헐라고."

대원들이 신바람 나서 말들을 다투었다. 하대치는 씨름판으로 나서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체구에 젊디젊은 얼굴이었다. 나이가 스물이나 됐을까... 호리치기와 다리치기가 눈에 들어오던 대원이었다. 하대치는 두 팔을 벌리며 숨을 양껏 들이켰다. 가슴이 팽창되며 양쪽 옆구리에 힘이 팽팽하게 잡히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을 보기 좋게 메다꽂고 싶은 전의가 솟구쳐 올랐다. 하대치는 상대방의 다리샅바를 틀어잡으며 손목을 확 꺾었다. 손목에 느껴지는 상대방의 힘이 제법 짱짱했다. 힘을 써볼만한 상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샅바잡기가 끝나고 서로의 힘을 어깨로 받치며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대치는 그때 약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힘이 자신의 어깨에 얹히는 것은 느꼈다. 묘한 탄력을 지닌 그 힘에서 하대치는 문득 자신의 그만한 나이 때를 떠올렸다. 기운이 펄펄했던 만큼 이기고 싶은 기도 펄펄했던 나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이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들어치기 같으면서 허리치기로 들어왔다. 하대치는 상대방의 샅바를 확 끌어당기면서 허리를 뒤로 뺐다. 공격을 피하면서 상대방의 중심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하대치는 다리걸기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운은 예사가 아니었다. 분명 다리가 감겼는데도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큰 몸집으로 누르고 들었다. 다리를 감은 채 눌리면서 밀리다가는 볼품없이 주저앉게 될 것이었다. 하대치는 다리를 풀면서 허리치기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의 중심을 뒤로 빼며 다리를 풀었다. 그 순간이었다. 상대방이 엎어치기로 들어왔다. 하대치는 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나이 한 살이라도 덜 묵은 기운이 이겨야 순리제, 하는 생각과 함께 하대치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에 골짜기와 사림들과 하늘이 빙그르르 뒤집히는 것을 보며 하대치는 풀밭에 쿵 나가떨어졌다. 어느 때 없이 큰 함성이 터져 올랐다. 풀밭에 주저앉은 하대치는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올려다보며 팔을 뻗쳤다. 얼굴이 상기된 젊은이가 하대치의 손을 붙들어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며 대원들의 함성과 빅수소리가 다시 터져 올랐다.

"동무, 기운 참 씨요. 투쟁 잘 허씨요이."

하대치가 젊은 대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야아, 상한데 없는교?"

젊은 대원이 고개를 꾸벅했다.

"대장님, 아실아실혔는디요이."

"와따 수고허셨구만이라."

"참말로, 황소 내주기넌 아까운디요."

대원들이 박수를 치며 하대치를 맞이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사람이 나보담 훨썩 씨요. 젊은 기운에 기술할라 존께 나가 지는 것이야 당연지사요."

하대치의 구김살 없는 말이었다. 젊은 장사에게 소가 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소는 오늘의 잔치를 위해 곧 잡게 되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 잡이에 지난날 백정 노릇을 했던 대원들이 자진해 선 것은 물론이었다.

"간은 몰라도 붕알이야 우리 대장님 차진께 나도 나서야 쓰겄소."

천점바구가 그들 사이에 끼려고 나서며 한 말이었다. 부대마다 소고기가 나눠졌다. 고기를 굽고 끓이는 냄새가 달궁 골짜기에 진동했다. 대원들의 흥겨운 웃음소리와 정다운 이야기들이 오가며 푸짐한 점심이 준비되고 있었다. 친점바구는 정말로 축 늘어진 소불알을 가져와 한바탕 부대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락회였다. 오락회는 씨름대회 못지않게 모든 대원들을 흥겹고 즐겁게 만들었다. 여성 대원들이 참여한 까닭인지도 몰랐다. 문화공작대가 이끌어 가는 오락회는 다채롭고도 성대했다. 단막극, 노래, 집단춤, 개인장기 등으로 엮어지면서 흥겨움이 넘쳐났다. 해가 지면서 오락회가 막을 내렸는데, 그 마지막 순서는 "빨치산의 노래" 합창이었다.

태백산맥에 눈 날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가슴속엔 피 끓는다

참고 견디는 고향 마을 만나로 가자 출진이다

고난에 찬 산중에서도 승리의 날을 믿었노라

높은 산을 넘어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날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눈을 찾아 영을 내린다.

모든 대원들은 똑바로 서서 합창을 하고 있었다. 약간 애조를 띤 듯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노랫소리는 우렁차게 달궁 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는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26. 새로운 전술

각 지구는 무장병력을 중심으로 정예화되었다. 남아 있는 비무장대원들은 후방부 사업에 필요한 인원들뿐이었다. 산악 이동투쟁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춘 것이었다. 전투력의 정비완료와 함께 총사에서 각 지구에 내린 지령은 철도 파괴와 열차 습격 그리고 교량 파괴였다. 그런 적극적인 전략은 주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엔군의 대공세와 휴전회담에 맞걸려 있었다. 후방을 강하게 교란시켜 적의 병력을 뒤로 유인함으로써 주전선의 공격을 둔화시키자는 빨치산 본연의 임무수행이었다. 염상진은 그 적극적인 전략의 타당성과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투쟁의 효과를 위해 골몰했다. 정예화된 무장병력은 상황에 따른 신속한 분산과 결합시키면서 야간 침투와 이동에 주력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해방구를 지키기 위한 주간 전투나 남부군 사령부의 곡성 습격 같은 주간 작전은 적의 월등한 화력과 병력 앞에 노출되어 실효가 별로 없이 타격을 꽤 입는 바람직하지 못한 전술이었던 것이다.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서 빨치산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기동성과 악조건 활용뿐이라는 것을 염상진은 철칙으로 믿고 있었다. 빨치산이 의무군대가 아니라 자각군대인 한 악조건을 호조건을 바꾸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소조로 분산시킨 야간의 동시다발적 교란과 신속한 소조의 결함의 한 지점에 결정타를 가하는 야간기습을 병행 또는 교차시킬 기본 계획을 세웠다. 염상진은 지난 구월 초순에 지리산에서 열린 육개 도당 회의의 결정 같은 것은 하등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각 도당의 유격대를 사단편제로 바꾼다는 것과, 도당들이 발행하고 있는 로동신문의 제호를 "승리의 길"로 바꾼다는 것이 그 결정이었다. 그 두 가지 결정은 어느 면에서 보나 당면하고 있는 빨치산투쟁에 아무런 도움도 이익도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조직상으로나 대원들에게나 혼란만 야기 시킬 뿐이었다. 당장 투쟁에 필요한 것은 보다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의 수립, 보다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전술의 개발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항 두 가지를 도당의 위원장들이 모여 앉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고작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도당위원장들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지리산까지 모여 들었단 말인가. 그 점을 생각하면 염상진은 실망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한 사람은 누군가, 이현상이었다. 그가 느끼는 실망스러움은 곧 이현상에 대한 실망스러움이었다. 그분이 왜 그러는 것일까.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각 지구당이 나누어져 투쟁하고 있는 전남도당을 남북으로 갈라 "57사단, 58사단"으로 한다고 해서 투쟁에 무슨 효과가 생기는 것일까. 전남로동신문을 "백운산 승리의 길""백아산 승리의길"로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투쟁에 무슨 이득이 있는 것일까. 염상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부터 항일투쟁에 나섰고, 일천구백이십오년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주요 인물이었으며, 일제의 탄압 아래서 거의가 전향이라는 더러운 길을 걸을 때, 그분은 해방이 되는 날까지 꿋꿋하게 지하투쟁을 계속한 몇 사람 중의 하나였고, 해방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또 다시 미군정에 맞서 싸우며 무수한 고난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분의 생애는 그야말로 티끌 하나 없는 혁명가의 표본이었고, 우러러 마지않는 대상이었다. 그런 분이 덕유산회의에서부터 연속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들을 내리고 있었다. 염상진은 못내 안타까웠다. 그분에 대한 실망스러움은 곧 자신의 불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떠받치고 있는 신뢰의 기둥 하나가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잃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빨치산투쟁의 최일선에 서서 염상진이 언제나 중대시하는 것은 현실적 상황변화와 그 대응책이었다. 눈앞의 상황은 비무장대원들을 지리산으로 피신시킨데 이어 도당 사령부도 백운산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변해가고 있었다. 경험으로 보아 투쟁은 분명 위기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총사에서 띄우는 선들이 분주하게 각 지구로 오가고 있었다. 염상진은 그 선들을 통제하며 종합적인 작전계획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부사령 동지, 댕게왔구만이라."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염상진은 몸을 후딱 돌렸다. 앳된 얼굴의 강대진이 거수경례를 붙이고서 있었다. 어린 티를 그대로 담고 있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그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도 엄숙했다.

", 강 동무! 수고했소."

염상진은 똑바른 자세로 경례를 받으며 반가움을 나타냈다. 그는 강대진 소년전사가 임무 수행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일부러 절도 있는 모습을 취해 보이고는 했다. 강대진 소년을 어른과 똑같은 한사람의 전사로 대접해서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이에 대한 열등감을 없애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그렇게 대해주는 것을 강대진 소년은 무척이나 좋아하고, 전사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을 염상진은 잘 알고 있었다. 입산하고 한동안 강대진 소년은 나이든 대원들에게

"집에 가서 젖이나 묵어라."

"집에 가서 밥 많이 묵고 더 커 갖고 들오니라."

"워디, 잠지가 음내나 큰지 잠 보자"

하는 식으로 별의별 말을 다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놀림들은 악의라고는 있을 수 없는,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입산한 것을 기특하고 대견하게 생각해서 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선의의 말들이 강대진 소년에게는 노엽게 들리고, 기가 꺾이는 마음의 그늘이 되었던 것이다.

"자아, 이리와 앉으시오. 위험한 일은 없었소?"

염상진은 다정하게 웃으며 강대진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손에 느껴지는 어깨의 빈약함에 염상진은 또 마음이 찐했다.

"야아, 암시랑토 안혔구만이라. 근디 요것..."

강대진 소년은 앳된 눈웃음을 씽긋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었다. 염상진은 웃음 띤 얼굴로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부사령 동지, 요것 드시씨요."

강대진 소년이 불쑥 내민 것은 홍시 한 개였다.

"난 됐소. 강 동무가 먹으시오."

염상진은 두 손을 받쳐 올린 여윈 손바닥 위에 놓인 빠알간 홍시가 가슴을 쳐오는 것을 느꼈다.

"저 것언 요쪽 괴비에 또 있구만이라."

강대진 소년은 반대쪽 주머니를 눈길로 가리켰다. 염상진은 홍시를 받아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대진 소년은 아까와는 달리 부산스런 몸짓으로 홍시 하나를 또 꺼냈다.

"이거 어디서 났소?"

억새풀이 깔린 바닥에 앉으며 염상진이 물었다.

"접선 끝내고 오다가 낭구에서 땄구만이라."

강대진 소년이 마주 앉으며 침을 꿀떡 삼켰다.

"강 동무, 이게 다 인민의 것인데 마음대로 나무에서 딴 거요?"

염상진은 웃으면서 물었다.

"아니구만이라. 집덜언 다 불타뿔고 감나무만 한그루 서 있었구만이라. 거그가 개덜이 자주 댕기넌 길목인디, 지가 감얼 안 따묵으먼 개덜이 따묵을 것인디요."

강대진 소년은 약간 시무룩하니 말했다.

", 잘했소. 그랬으면 더 많이 따오지 그랬소."

염상진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감이 꼭대기에만 몇 개 달려서 요것도 포도씨 땄구만이라."

강대진 소년이 목을 움츠리며 쑥스럽게 말했다.

"아하하하하... 누가 다 따가고 남긴 까치밥을 따왔다 그 말이오? 아 참 애썼소. 어서 먹읍시다."

염상진은 고개를 젖히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건 감정의 위장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감나무 높은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를 따려고 애쓰는 강대진 소년의 위험스런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부사령 동지 얼령 드시씨요."

강대진 소년은 밥을 먹을 때처럼 윗사람이 먼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동무도 어서 먹어요."

염상진은 얼른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강대진 소년도 입을 쪽 벌렸다. 씹을 것도 없이 넘어가게 마련인 홍시의 속살을 넘기지 못한 채 염상진은 강대진 소년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 소년은 산에서 설을 쇠었으니까 이제 열일곱 살이었다. 그런데 워낙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몸집이 나이에 비해 작고 갸날펐다. 그래서 더 어려 보였다. 그가 입산한 경위는 너무 순진해서 어린 나이와 함께 어른들을 더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가 밝힌 이유는 "아저씨들이 좋아서"였다. 아저씨들이란 구빨치를 말하는 것이었고, 주막집에 나무를 해다 주고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그는 나무를 하러 다니면서 아저씨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밥도 더러 얻어먹었고 총도 만져보았으며, 그러다가 소금 같은 것을 구해다 주는 심부름도 하게 되었다. 그런 말로는 입산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가 외쳤다는 소리는 자못 걸작이었다.

"나도 인자 미꼬미 웂은 나무꾼질 그만허고 해방투쟁에 나스겄다 그것이요. 나가 나이 에리다고 시퍼보는는디, 여그서 나보담도 산질 잘 아는 사람있으먼 나와봇씨요!"

그 야무진 말 앞에서 어른들은 아무도 그의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는 결국 입산을 허락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은 산길을 잘 아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나이 탓으로 마땅히 할 일이 없는 그는 후방부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총을 못 쏘게 된 것을 불만스러워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총을 쏠 수 있는 어른들이 남아돌아가는 판이었다. 그는 후방부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희한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소를 기막히게 잘 타고, 아무리 억세게 날뛰는 소라도 그가 고삐를 잡으면 고분고분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입산 초기에 후방부에서는 정당한 값을 치르고 소를 사들여 잡았는데, 후방대원들은 소를 잡기 전에 올라타는 놀이를 곧잘 벌였다. 그런데 사람을 태우는데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소들은 사람이 올라탔다 하면 화를 내고 날뛰거나 몸을 내둘러 사람을 내동댕이치게 마련이었다. 소가 거칠수록 남자들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일 수밖에 없었다. 소잔등에서 내동댕이쳐지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데 유일하게 어린 강대진이가 의젓하게 소를 타고 이리저리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주막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소장수들이 몰고 다니는 소들에게 여물을 주면서 수없이 많은 소들을 다루어 보았고, 주인 몰래 많이 타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엉뚱한 일로 유명해진 다음에야 산길도 귀신같이 잘 안다는 것을 인정받게 되었다. 산길은 잘 안다는 것은 빨치산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이었다. 그는 곧 정보과로 옮겨져 집중적인 사상학습을 받은 다음 염상진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염상진은 강대진 소년은 남달리 아끼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것에 비해 아주 총명했고, 몸이 왜소한 것에 비해 강단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는 연락병의 몫을 어른이 무색하도록 야무지게 해내고 있었다. 김범준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강소귀"였다. "소귀"는 대장정을 치른 중국공산당의 홍군 안에 있었던 소년병들의 지칭이었다. 강대진은 김범준 소장이 별명을 지어준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별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대진 소년은 홍시의 꼭지에 묻은 것까지 깨끗하게 핥아먹고는 입맛을 맛있게 다셨다. 염상진은 자신의 것을 그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억지로 홍시를 다 먹었다. 먹으라고 해봤자 먹지 않을 것이 뻔했던 것이다.

"강 동무, 고단하지 않소"

염상진은 미안한 마음으로 힘들게 말을 꺼냈다.

"아니구만이라. 워디 또 갈디 있느게라?"

강대진 소년은 눈치 빠르게 응수했다.

"그렇소. 백아산 쪽으로 한 번 더 갔다 왔으면 좋겠소."

"하먼이라. 이 강소귀 다리넌 백분얼 왔다리갔다리 혀도 안 아푸구만이라. 당 뜰게라?"

강대진 소년은 금방 일어날 기세였다. 염상진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넉넉하지만 힘이 덜 들게 그러는 게 좋겠소."

"장소넌 여우고개 알 그대론 게라?"

강대진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암호는 육자 맞추기로 이쪽이 두 번, 저쪽이 네 번이오."

염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두알 하나를 내밀었다. 그 속에는 지령문이 들어 있었다. 육자 맞추기 암호란 접선장소에서 서로가 미리 정해진 횟수만큼 돌을 두들기거나 손바닥을 쳐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합해서 여섯이 되게 하는 방법이었다. 같은 육자 맞추기라 하더라도 수시로 양쪽이 내는 소리의 횟수가 달라졌고, 사자 맞추기나 오자 맞추기로 바꾸기도 해서 그 방법은 다양한 변화를 보이게 되어있었다. 소리와 횟수가 서로 맞지 않을 때 접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핑 댕게오겄구만이라."

강대진 소년이 거수경례를 받았다. 강대진 소년은 잽싸게 트를 벗어났다. 염상진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는데 후방부에 특별히 부탁해서 두꺼운 겨울옷을 구해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원에서 기관차가 전복된 것은 시월 십육일이었다. 그건 빨치산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하필이면 전투경찰사령부가 있는 남원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양쪽에 정반대의 양상을 드러냈다. 경찰들은 체면은 말이 아니게 깎여버린 반면에 빨치산들에게는 새로운 전술 전개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태식의 부대 돌격조는 어둠 속의 산길을 헤쳐가고 있었다. 이태식이 직접 이끌고 있는 돌격조는 자그마치 스무 명이었다. 그 속에 강경애도 물론 끼어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극성스러울 만큼 투쟁력을 발휘해 결국 대장 이태식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건 이태식이가 뒤로 앉고만 일종의 만족스러운 항복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가 그녀는 소조의 조장까지 맡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도 네 개의 소조 중에 하나를 맡고 있었다. 하늘에는 가을 별들이 유난히 맑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없고 대기가 맑아서 그런지 어둠은 그다지 진하지 않았다. 여름이나 겨울의 구름 짙게 낀 밤에 비하면 하늘 맑은 가을밤은 빨치산들에게 낮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둠에 적응력이 길어진 그들의 눈에는 가을밤의 어둠속에서 포착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산비탈을 밟고 걷던 그들은 들판이 나타나면서 방향을 아래로 바꾸기 시작했다. 앞장선 이태식은 벌써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철길을 환히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 마차가지로 어렴풋한 윤곽뿐이었다. 그에게 철길이 환히 보이고 있는 것은 시각작용이 아니라 의식작용이었다. 지리를 샅샅이 아는 그는 의식 속에서 철길은 환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산비탈을 다 내려선 그들은 신호에 따라 신속하게 쪼그려 앉았다. 이태식이 머물러 있는 지점은 철길과 최단거리가 되는 곳이었다. 그래도 철길에 이르자면 논들을 가로지르고, 개울을 건너야했다. 토벌대의 잠복을 피하기 위해 평소에 자신들이 전혀 왕래하지 않는 길목을 골랐다고는 해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뒤로 전달, 십 보 간격, 신속 이동."

이태식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만일의 잠복 공격에 대비해 십 보 간격을 유지시켰다. 잠복공격은 으레 난사를 하게 마련인데 간격을 충분히 띄우지 않고 촘촘히 섰다가는 한 총알에 두 사람이 꿰어 죽음을 당할 위험도 있었던 것이다. 앞을 응시한 이태식은 몸을 바짝 낮추고 돌진을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한 사람씩 간격을 유지하며 뛰기 시작했다. 몸을 반으로 접은 그들의 모습이 어둠속에 한 줄로 이어지는 점으로 찍혀 나갔다. 추수가 끝난 논들을 가로지른 그들은 서로의 간격을 좁히며 차례대로 개울가에 엎드렸다. 이태식은 사방을 경계하면서 한편으로 대원들이 하나씩 도착하는 것도 주시하고 있었다. 강경애도 사방을 경계하느라고 눈길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가 문득 한 곳에 눈길이 멈춰졌다. 어둠 속에 시퍼런 불빛 두 개가 동그랗게 떠 있었다. 흰빛이 서린 그 시퍼런 빛은 그러나 순간적으로 꺼져버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총을 더 힘껏 붙들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이태식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빛은 이태식의 눈이 내쏘고 있는 안광이었던 것이다. 이태식과 야간 작전을 나서는 동안 벌써 몇 번째 그 섬뜩한 빛을 보았던 것이다. 처음 그 시퍼런 빛을 보았을 때는 얼마나 까무러치게 놀랐는지 몰랐다. 밤이면 고양이의 눈에서는 푸른빛을 예사로 볼 수 있었고, 개의 눈에서도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사람의 눈에서도 푸른빛이 나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의 눈에선 나오는 푸른빛이 고양이나 개의 눈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사람얼 만물에 영장이라고 허는디 워찌 사람 눈에서 빛이 안 나오겄소. 짐숭 중에서넌 호랭이가 안광이 질로 시다고 허는디, 호랭이도 사람 안광에넌 못당헌다는 말이 안 있습디여? 사람이 정신얼 집중헐 때나 신경얼 칼날 맹키로 세울 적에 안광을 시퍼런히 내쏘는 법인디, 고것이 밤이먼 잘 뵈제라. 강 동무가 본것이야 물으나마나 이태식 동지 것이요. 그 냥반 야간 작전에 나섰다 하먼 그 시퍼런 불뎅이럴 달고 댕기요. 허기넌 낮에 싸울 때도 그 불뎅이럴 달고 있는디 해 땀세 우리가 못 보눈 것일 것이요. 그 냥반 쌈에 나슬 적에 보먼 평소허고넌 얼굴이 안 달라 집디여? 고것이 그 표식이요."

이런 조원제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녀는 안광의 정체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태식은 마지막 대원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지시를 내렸다,

"옆으로 전달. 앉은걸음으로 물가꺼지 이동!"

그들은 소리 나지 않게 앉은걸음으로 물가를 향해 이동해갔다. 물소리가 돌돌거리며 들려왔다. 이태식은 앞을 응시했다. 그리고 징검다리의 돌 수를 세기 시작했다. 모두 아홉 개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옆으로 서너 걸음 옮겨 앉으며 다시 세기 시작했다. 또 아홉 개였다. 그는 신경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정찰보고보다 돌이 하나가 더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옆으로 전달, 강경애 동무 대장 옆으로 이동!"

이태식은 다급하게 속삭였다.

"옆으로 전달, 강경애 동무 대장 옆으로 이동"

삼 조장으로 열한 번째에 자리 잡고 있던 강경애는 이 전달을 받는 순간 전신에 찡 전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슨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민첩하게 이태식을 향해 이동했다.

"대장님, 불르셨는게라?"

강경애의 속삭이는 입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 아까 저 다리 돌이 몇 개라고 혔소?"

"여덟 개라."

"새로 시보씨요."

"알겄구만이라!"

강경애는 눈에다 힘을 모아 돌을 차근차근 세나갔다. 돌은 아홉 개였다. 이럴 수가 있나! 그녀는 대장이 부른 이유를 알았다. 다시 세어보았다. 틀림없이 하나가 불어나 있었다.

"아홉 개구만이라."

"맞으요, 아홉 개요."

"워찌된 일일께라?"

"날 저뭄시로 한나가 더 늘어난 것이요."

"워째서라? 누가 저 무건 돌얼 실답잖게 그렸을께라?"

"개덜이요. 저그 아홉 개 중에 워떤 것이 새로 놓인 것인지넌 몰르겄는디, 고것얼 볿았다하면 영축 웂이 죽소. 그 밑에넌 지뢰가 장치 되있응께."

걍경애는 그 처음 듣는 말에 소름이 끼쳤다.

"글먼, 우리가 여르로 올 것얼 미리 알았단 말인게라?"

"고것이 아니오. 개덜언 우리가 댕길 만헌 디다가 날이 저물먼 지뢰럴 장치 혔다가는 날이 새먼 띠내고, 밤에넌 또 장치 허고 허는 것이오."

"워매 징해라. 그러다가 죄 웂은 인민들이 볿아 죽으먼 워쩌라고라?"

강경애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는 싶었다.

"걱정도 팔자요. 지뢰 볿아 죽으먼 다 공비에 빨갱이고, 개덜이야 전과럴 올리는 거 아니겠소?"

"글먼 여그 워디 잠복이 있는 것 아니겄소?"

강경애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잠복이야 저 지뢰헌테 맽긴 것 아니겄소?"

이태식의 되물음에 강경애는 새로운 깨달음에 부딪쳤다.

"물얼 건느야 스겄응께 동무 자리로 가시오."

이태식의 말을 듣고 강경애는 빠르게 돌아섰다. 그녀는 목숨을 건 투쟁이라는 말과 투쟁경력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옆으로 너달, 우측 방향으로 이동!"

이태식은 지시를 내리고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지시가 뒤에까지 전달되기를 잠깐 기다렸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귀는 개울 쪽으로 열려 있었다. 물소리가 나는 부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은 물이 깊게 마련이었다. 물 깊이를 모르고 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었다. 징검다리가 놓인 개울이니까 빠져죽을 정도로 물이 깊은 데는 없다하더라도 가능하면 몸에 물을 많이 적실 필요는 없었다. 옷이 물에 젖으면 그만큼 기동성이 떨어졌고, 자칫 잘못해서 총까지 물에 젖게 되면 그거야 말로 큰일이었다. 총이 물에 젖은 상태로 매복에라도 걸리는 날에는 더 볼 것이 없었다. 총들도 부실한데다가 탄알까지 부실해서 연속적인 불발을 내며 살아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태식은 물소리가 졸졸거리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뒤로 전달, 물얼 건는다!"

지시를 보낸 이태식은 발을 물속에 넣었다. 물은 장딴지 바로 아래까지 찼다. 생각보다 차가운 물의 냉기가 섬뜩하게 다리를 타고 올라 가슴에까지 뻗쳤다. 와따메, 풀세 물속은 겨울이시! 이태식은 푸들 어깨를 떨며 생각했다. 그는 그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빨치산에게 겨울은 또 하나의 적이었다. 토벌대는 싸워서 이길 수나 있는 적이었지만, 겨울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적이었다. 거기다가 토벌대가 겨울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겨울은 점점 더 무서운 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물을 건너 이태식은 철둑의 비탈에 가 붙었다. 대원들도 빠른 동작으로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물이 찬 고무신에서 발을 옮길 때마다 빨칵 거리는 소리들이 어둠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이태식의 귀에는 그 아무것도 아닌 소리까지 거슬리고 있었다.

"옆으로 전달, 조장 집합!"

이태식은 지시를 내리고 숨을 들이켰다. 정작 작전은 이제부터였던 것이다. 세 명의 조장들이 신속하게 모여들었다.

"지끔부텀 헐 일언 철길얼 한 동가리만 띠태뿌는 것이요. 긍께 이조넌 오른편 짝얼 맡고, 삼조넌 왼편 짝얼 맡으씨요. 글고 사조넌 침목에 빅힌 못얼 빼내씨요."

조장들 이제 자리로 돌아가자 이태식은 주먹만 돌 두 개를 집어 철둑 너머로 던졌다. 저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이태식은 옆으로 부하를 툭 치며 철길로 오르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비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별로 철길 한 매듭을 떼 내는 작업에 매달렸다. 공구는 군당을 통해서 미리 확보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업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우선 공구 다루는 것이 서툴렀고, 나사마다 녹이 슬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지만 전혀 소리를 안 낼 수는 없었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움찔움찔 놀랐다. 어둠에 잠긴 깊은 정적 속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는 유난히 예리하게 퍼지고는 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이태식은 초조하게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철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산등성이를 타고 다니는 것과 똑같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늘이 배경을 이루고 있는 탓으로 어둠 속에서도 그 움직임이 쉽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작전인 이상 뻔한 위험도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철길 파괴 작전은 적의 기동성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적들은 거의 기차를 이용해서 병력을 이동시키고, 화력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건 어떤 특정한 기차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객차와 화물차가 따로 없이 객실 칸과 화물칸을 함께 끌고 다니면서 아무 때나 병력과 화력을 수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차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을 기관차 앞에 내 단 무개차에다 싣고 다니는 판이었다. 적들의 기동성을 마비시키고, 후방을 교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철도의 파괴였던 것이다.

"대장님, 다 끝냈구만이라"

강경애가 이태식 옆으로 다가서며 숨 가쁘게 말했다.

"이 잘혔소."

이태식이 반색을 했다.

"쩌 동가리럴 워쩔께라?"

"저것얼 쌂아묵을 수도 웂고, 엿 사 묵을 수도 웂응께 쪼깐 심이 들드라도 쩌 개울꺼정 들어다가 물속에 처박아 뿌는 것이 워쩌겄소."

"그러제라. 나사허고 못들도 그리 허는 것이 좋겄는디라."

"하먼, 하면."

이태식의 작은 목소리가 만족스러웠다. 그들 모두는 긴 레일 한 토막을 낑낑대며 개울까지 옮겼다. 그리고 무릎까지 차오르는 개울물 속에다 수장시켰다.

"나사허고 못덜언 이따가 산속에다가 내뿝시다."

꽤 커진 이태식의 말이었다.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산자락을 밟기 시작했다. 대열의 앞뒤에서 긴 숨을 내쉬는 소리들이 연거푸 들렸다. 이태식도 소리 나지 않게 숨을 길게 내쉬며,

그려, 그려, 피덜 보탔을 것이여. 목심 내걸고 허는 일잉께. 요리 고상덜 혀서 한시상얼 기연시 보기넌 봐얄 것인디 말여... ’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잠시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걷기를 서둘렀다. 담배를 피우게 하려면 아무 데서나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산굽이 두 개를 감아 돌아 골짜기로 파고들었다.

"동무덜, 여그서 쉬겄소. 담배덜 태우씨요."

이태식의 목소리는 예사 크기로 변해 있었다. 그곳은 산이 겹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라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 이상 어느 곳에서도 불빛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지형이었다. 그곳에서는 담뱃불이 아니라 밥을 해먹는 불빛도 염려할 것이 없었다. 빨치산이라고 해서 야간작전에는 담배를 쫄쫄이 굶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형을 잘 알고, 주위에 적정이 없다는 것만 확인되면 얼마든지 느긋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이태식은 어느 부대장보다도 부하들에게 그런 기회를 자주 줄 수 있는 부대장이었다. 담뱃불들이 어둠속에서 무슨 꽃들처럼 빠알갛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둠속에서도 용케 담배를 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마치 무슨 빨치산의 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담배를 못 피우는 남자 빨치산은 거의 없었다. 그건 어쩌면 긴장과 위기가 연속되는 산 생활과 무관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인지도 몰랐다. 이태식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사방을 살피는데 신경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담배는 왼손에 들려 있었고, 총을 든 오른손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결려 있었다. 그들이 본대가 있는 지점에 거의 다다르고 있을 때였다. 대열 중간쯤에서 사람이 넘어져 구르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왈칵 터져 올랐다. 대열이 뚝 멈춤과 동시에 그들은 순식간에 엎드렸다.

"머시여! 무신 일이여!"

잔뜩 놀라서 쉰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앞쪽에서 다급하게 들려왔다.

"다리럴... 다리럴 접찔렸구만요."

신음소리를 묻혀내며 들려온 말이었다.

"누구요."

강경애가 물었다.

"김동혁이구만요."

강경애는 예감의 적중에 약간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구르는 소리가 났던 거리의 느낌으로 그녀는 자신의 조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걱정이 되기에 앞서 맥이 빠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가 김동혁인 까닭이었다.

"삼조 동무덜, 내레갑시다."

강경애는 조원들에게 이르며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조원들 셋이 뒤를 따랐다. 김동혁은 열 발짝 쯤 굴러 내려가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아 있었다.

"김 동무, 많이 다쳤소?"

강경애가 김동혁 옆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갱신얼 못허겄소."

김동혁이 신음소리를 물었다.

"위디가 접찔렸는디 갱신얼 못혀라?"

강경애의 목소리는 차게 느껴졌다.

"발목이구만요."

"두짝 다요?"

"아니, 왼짝 한나구만요."

김동혁이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발목이 똑 뿌라져 뿌렀는갑소."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그렁께 갱신얼 못허제라."

"강 동무, 워째 그리 말얼 야박허니 허고 그요."

김동혁의 낮은 목소리가 완연히 원망스럽게 들렸다. 그때 둘러서있던 세 대원 중에 누군가가 쿡 웃음을 터졌다.

"김 동무, 자울름시로 걸었제라!"

강경애의 목소리는 완전히 싸늘했다.

"자울르기넌, 나가 팔푼이간디라? 행군험스로 자울르게."

"안 자울렀으먼 위찌 딴 동무덜언 다 무사허게 지내간 길얼 김 동무만 팔푼이맹키로 넉장구리허고 그요."

"재수가 웂을랑께 그렇제라."

"본시 술 취헌 사람이 술 취혔다고 허는 법 웂소."

"와따, 말 좋게 혀서 돈 드는 법 아닌디 다친 사람 앞에 놓고 말이 위찌 그리 야박허고 익모초맛이다요. 강 동무가 그렁게 발목이 더 아파뿌요."

대원들이 또 쿡쿡거리며 웃었다. 강경애는 그만 기분이 사아하고 말았다.

"동무덜, 김 동무 델꼬 싸게 올라오씨요."

그녀는 발딱 몸을 일으키며 내치듯이 말했다.

"많이 다쳤소?"

기다리고 있던 이태식이 물었다

"그댁잖구만이라. 한 짝 발목이 접찔렸응께요."

"그만하기 다행이요. 부대에도 인자 다 왔응께"

이태식이 돌아섰다. 김동혁을 두 대원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대열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대원들 중에서 강경애를 싫어하는 대원은 하나도 없었다. 여자 대원들이 네댓 명 있었지만 유독 강경애가 인기가 높은 것은 여자답지 않은 용맹성과 여자다운 헌신성의 양면 때문이었다. 그 두 가지 점은 이성인 동지로서 남자대원들이 좋아하기에 꼭 알맞기도 했다. 여자가 함께 용감하게 싸우니까 더 용기가 나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친절하니까 서로가 부담 없이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동혁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강경애를 "여자"로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약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편인 그가 적극적인 용기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부터가 강경애 때문이었다. 강경애가 돌격대나 정찰대에 자원을 하면 혹시 누가 끼어들세라 뒤따라 자원을 하는 건 김동혁이었다. 그의 그런 표 나는 행동이 시작되면서 대원들은 금방 그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강경애였다. 그녀는 전혀 그런 눈치를 모르는 척 김동혁을 하나의 대원으로만 대했던 것이다. 더 냉정하지도 더 친절하지도 않게, 그러면서 김동혁이 보는 앞에서 다른 대원들의 가벼운 상처를 정성스레 돌봐주거나, 스스럼없이 팔씨름 같은 장난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무표정 앞에서 김동혁은 돌격대에 자원할 때와는 다른 그의 본래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그가 오늘 다친 것을 계기로 드러낸 감정은 꽤나 노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나 연애감정 같은 것을 갖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입산을 한 이상 모든 행동이 투쟁과 연결되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몸이 고단하고 힘겨우면서도 잔일로 남자대원들의 뒷수발을 자진하는 것도 그들의 사기를 돋우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녀는 그저 투쟁력이 강한 남자대원일수록 더 좋아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동지는 이태식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태식이 곡성 쪽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데 조계산지구의 하대치는 승주군당의 향도를 받으며 돌격대 이십 명을 벌교와 구룡사이의 진트재 터널을 기습하고 있었다. 벌교 쪽 터널 위인 고갯마루에 초소가 있었다. 거기에 다섯 명의 전투경찰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그들을 총을 쏘지 않고 없애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터널 속의 레일을 안심하고 제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구룡 쪽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들을 그대로 두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머리에 불화로를 이고 밥을 먹는 격이었다. 터널이 짧아서 쇠 부딪치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릴 위험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다섯을 총소리 내지 않고 하는 부하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반대한다고 정한 생각을 바꿀 하대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대치는 돌격대에서 네 사람을 뽑아냈다.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은 바로 결사대였던 것이다. 초소로 뛰어들어 한 사람이 하나씩 맡아 육박전을 벌일 작정이었다. 그들은 낮은 포복으로 초소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하대치의 신호에 따라 앞에선 세 사람은 한꺼번에 문을 향해 돌진했다. 세 사람의 몸에 부딪친 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떠밀려 나갔다. 어둠속에서 비명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별로 오래 가지 않았다. 다섯으로 정찰된 초소에는 네 명밖에 없었다. 문을 박차느라고 이마에 혹이 솟은 하대치는 터널 속에서 레일 두 토막을 빼내고, 기관총과 수류탄 이십 여개를 챙겨가지고 바람처럼 어둠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토벌대는 아직 지리산 골짜기들까지 깊이 파고 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골짜기의 어귀나 산으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초소를 세워 차단작전을 꾀하고 있었다. 한 초소는 대개 열 명 정도씩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그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위험지구에서는 그렇듯이 그들도 대부분 의경이었던 것이다. 의경들은 전투경험이 별달리 없는데다 전투 의욕도 별로 없었다. 전투의욕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의경답게 싸우는 것을 겁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싸움이 붙어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줄행랑을 놓기 바빴고, 그렇지 않으면 두 팔을 쉽게 들어 올리고 말았다. 그래서 빨치산들도 그들에게는 퍽 관대했다. 도당에서도 몇 개월 전부터, 토벌대 속에 들어 있는 인민성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기도 했다. 그 말은, 강제로 동원된 의경들에게 관대하게 해 그 영향이 인민들에게 빨치산의 지지와 동조도 확산되게 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당의 정치군대로서 인민을 선무해야 한다는 기본전략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경을 친일경력자들과 구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올바른 것이었고, 그 파급효과 또한 컸다.

이해룡은 당장 식량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해결은 해방구가 없는 한 천생 보투밖에 없었다. 지리산자락에 있었던 작은 규모의 얼마 되지 않았던 마을들은 이미 사십구년 하반기에 대대적으로 실시된 소개로 다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보투를 하자면 어쩔 수 없이 지리산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위험을 전제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겨울을 앞둔 식량 확보는 그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해룡은 구례군당과 힘을 합쳐 보투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을 세웠다. 자체무장도 허술할 뿐만 아니라 보투 대상지를 물색하는 데는 현지 사정에 달통해 있는 군당의 협조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가실이 다 끝낫응께 보투럴 허기로야 적시기넌 허제라. 그리허나, 쪼깐 문제가 있당께라."

군당위원장이 마뜩찮은 얼굴로 꼬옹 힘을 쓰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게 뭔가요?"

고개를 숙임막해서 눈을 위로 뜬 이해룡은 나직하게 물었다.

"고것이 말이요, 시상 인심이 조석변이드라고 정전이다 휴전이다 해싼께로 그 새에 인심이 야리꾸리허게 변해가는 눈치등마, 가실이 시작됨스로부텀은 아조 훼까닥 달라져 뿌러서 우리럴 인자 똥친 작대기로 안다 그것이요. 하곡 거둘 때꺼정만 해도 보투럴 나스먼 미리 면당 세포럴 통해서 쫘악허니 연락이 돌고, 또 마실마동 투쟁인민덜이 나서서 집집마동 문 앞에다 곡식이럴 내놓는 협조가 착착 자알 되얐는디 인자 와서는 고것이 표 나게 깨져감스로 보투가 에로와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런디다가 지리산지구가 생겨나 입이 갑작시리 수천으로 늘어뿌렀이니 요것이 예삿 문제가 아니덜 않겄소?"

군당위원장의 말은 무거웠고, 얼굴은 침통하게 변해있었다. 군당위원장의 말이 맞는 줄 알면서도 이해룡은 벌컥 화부터 솟았다. 그런 기회주의자들! 동네마다 시범을 보입시다. 이 말이 곧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옆에 김범준 소장만 없었더라도 그 말은 터져 나오고 말았을 것이었다. 인심이 그런 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유치지구에 있으면서 벌써 눈치 챌 수 있었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그런 기회주의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보투를 안할 수는 없는데, 그 문젤 어쨌으면 좋겠소?"

감정을 누르고 이해룡이 내놓은 말은 이랬다. 군당위원장이 이해룡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멍했다. 문제점을 제시했던 군당위원장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금메요... 나야 걱정이 된께 말얼 꺼낸 것이고, 지절로 돌아가는 인심얼 가래로 막겄소, 삽으로 막겄소."

군당위원장의 마지못한 듯한 말이었다.

"아니 그럼, 그 따위 기회주의자들이 멋대로 놀아나게 내버려 둔단 말이요!"

마침내 이해룡의 입에서 거칠게 터져 나온 말이었다.

"허먼, 고런 사람덜얼 막..."

"가만, 가만!"

무심한 듯 앉아 있던 김범준이 군당위원장의 말을 제지했다.

"그래요, 인심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두 동지의 마음이 다 같아요. 또 나하고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를 생각할 때에 우리와 인민을 따로 떼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소. 자아 생각해봅시다. 그 동안 우리는 다같이 고생들 많이 해왔소. 그럼 인민들은 아무 고생도 없이 호의호식을 했나요? 아니지요. 그 증거가 바로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건 우리가 총을 잘 쏘고 잘 싸워서 그런 겁니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입산하고 지금까지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입혀 살렸습니까? 바로 인민들입니다. 우리가 고생한 만큼 인민들도 고생했습니다. 인민들은 우리를 돕느라고 고생을 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도왔다는 혐의로 적들에게 시달리는 고생도 겹으로 해왔습니다. 인민들이 겪은 그 이중적인 고생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민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물을 것도 없이 인민의 해방 아닙니까? 그 찬란한 약속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정전이 되면 그 약속은 결정적으로 빗나가게 됩니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쉬운 말로 그들을 기회주의자라고 합시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혁명된 세상을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생존의 상황이 달라지게 되니까 어찌할 수 없이 그 겉모습을 바꾸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달라진 겉모습을 문제 삼기 전에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그들이 우리한테 가질 실망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치열하게 투쟁해얄 것 아닙니까? 그러자면 우리가 믿을 건 누굽니까? 인민들뿐입니다. 인민의 도움을 받자면 우리는 지난날보다 더욱 인민 앞에 겸손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강압적인 방법을 쓸 때 우리의 최대목표인 혁명은 파괴되어버리고 우리는 더러운 폭도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민들은 우리를 완전하게 외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민 앞에 전보다 더욱 겸손하고 진실해도 인민들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우리가 약속을 실천하지 못한 대가로 인민들에게 받는 대접이니까 당연히 감수해야 합니다. 세끼에서 두 끼로, 두 끼에서 한 끼로, 한 끼에서 굶게 되는 형편에 처하더라도 우리에겐 인민을 강압해서 양식을 뺏을 권한은 없는 겁니다. 굶으면서 싸우다가 죽어가는 것, 그것이 혁명전사의 순결이고 인민들에게 신뢰를 심는 길이고, 다음의 역사에서 혁명이 성취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혁명은 적에게만 폭력인 것이지 인민에겐 끝없는 신뢰와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혁명전사는 외롭고 또 위대한 것입니다."

김범준이 긴 말을 끝냈다. 그의 묵직하고 담담한 어조는 처음서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고, 무슨 깊은 생각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편안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해룡은 내색을 하지 못한 채 너무 놀라고 있었다. 자신을 힐책하는 말의 내용도 내용이었고, 그분이 그렇게도 긴 말을 하는 것을 듣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말의 내용으로도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깨우칠 수 있었는데다, 그리도 말이 없던 분이 그렇게 긴 말을 한 것에서 더욱 잘못을 느끼게 되었다.

"제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앞으로는 명심하겠습니다."

이해룡은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소, 이 동지, 우리 죽는 그날까지 꿋꿋하도록 합시다."

김범준이 이해룡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예에, 명심하겠습니다."

이해룡은 김범준의 체온이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움과 감격스러움이 엇갈리고 있었다. 군당위원장도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있었다. 사흘 뒤부터 이해룡은 자신의 무장병력과 군당의 무장병력을 합해 보투에 나섰다. 비무장병력은 무장병력의 세 배가 되게 했다.

"봇씨요, 무장 백에 비무장 삼백이먼 합이 사백 아니요? 무신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 많은 수럴 몰고 워쩔라고 그러요?“

군당위원장은 처음에 고개를 내둘렀다.

"동무, 내 말 들어보시오. 우리 형편으로 보자면, 식량은 없고, 대원들은 많고, 날씨는 날마다 추워지고 있소. 거기다가 적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가 없소. 추수가 끝났겠다, 면소재지 정도에 배치된 적들은 아직 별것 아니겠다, 우리가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호가 요새란 말이오. 그러니까 소부대로 산 아래 작고 가난한 마을인 집적거리지 말고 대부대로 부자들 많은 면단위를 덮치자 그거요, 적들이 태평치고 있을 때 기습을 감행하면 우리 무장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부자들을 털면 그만큼 수확도 많고 우리 맘도 편할 것 아니오. 내 말이 어떻소?"

"금메, 그리 들으먼 그 말도 맞기넌 허요, 근디, 면 단위에넌 적덜 병력이 솔찬헌디 피해 보덜 않겄는게라?"

군당위원장은 살짝 꼬리를 사렸다.

", 호랑이를 잡을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하고, 큰 고기를 잡자면 큰 물로 나가야하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보투가 원족이 아니고 쌈이요, . 피해 입는 것 미리 생각해서 무슨 투쟁을 할 수 있겠소. 안 그렇소?"

이해룡은 군당위원장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렇기넌 허제라."

"됐어요. 그럼. 적들은 내가 다 맡을 테니 위원장 동무는 보투를 맡도록 하고, 광의면부터 치도록 합시다."

"그리 씨게 치고 나가자먼 거그말고도 덜 위험험흐로 묵자 것도 많은 동네가 서시천 따라감스로 대산리, 지천리, 마산리, 냉천리, 광평리가 쪼로록 줄 서 있소. 서시천이 맹글어준 넓고 존 농토가로 앉은 부자덜이 동네마동 쌔고 쌨소. 나가 한나썩 골라낼 것잉께 맽겨두씨요."

"정찰 세심하게 시키도록 하시오."

"하먼이라."

그래서 면소재지인 광의를 피해 대산리와 지천리를 함께 치기로 했다. 냉천리와 광평리도 쓸 만했지만 서진강 다리에 경비 병력이 많은데다 구례읍이 또 바로 옆에 있어 광의를 치는 것보다 더 위험해 일단 젖혀놓게 되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야 화엄사 뒤를 멀찍하게 돌아 완사재를 넘은 그들은 얼마 걷지 않아 수월리의 큰 길을 앞에 두게 되었다. 대산리와 지천리로 갈라지는 길목에 돌로 쌓아올린 초소가 있었다.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마을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정찰에 의하면 그 초소의 병력은 열이었다. 이해룡은 자신의 병력 중에서 삼십 명을 뽑아 두 조로 나누었다.

"일조는 우측, 이조는 좌측에서 은밀하게 공격해 초소를 포위하시오. 적에게 노출되어 공격을 당하기 전에는 절대 먼저 총을 쏴서는 안 되오. 적의 공격을 당할 시는 돌격전을 감행하시오."

그리고 이해룡은 비무장들에게 지시했다.

"공격조가 초소를 포위하게 되면 제가 초소를 향해 항복을 권유할 거요. 자수하라는 내말이 끝나면 동무들은 일제히 와아, 두 번 소리 지르시오. 개들한테 우리가 정말 수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오. 그럼 공격조, 작전 개시!"

이해룡의 명령이 떨어지자 공격조는 좌우로 갈라져 신속하게 어둠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비무장들은 소리 나지 않는 느린 걸음으로 큰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공격조의 모습들이 흐릿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비무장들은 큰길에서 꽤 떨어진 밭둔덕 앞에서 멈추었다. 이해룡은 혼자서 큰길에서 가까운 언덕배기까지 걸어갔다. 초소 쪽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불빛 몇 개가 반짝반짝 빛나다가 이내 사라졌다. 포위완료를 알리는 부싯돌 불빛이었다. 이해룡은 언덕배기에 몸을 안전하게 감추고 손나팔을 입에다 갖다 댔다.

"초소에 있는 검은 개들 들어라아! 검은 개들 들어라아!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다. 항복하고 나와라. 항복하면 다 살려준다. 만약 저항하면 전원 몰살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다아!"

찌렁찌렁하게 울리던 이해룡의 외침이 끝났다. 우와아... 우와아... 삼백오십 명이 넘는 빨치산들이 한꺼번에 외치는 소리가 두 번을 연거푸 어둠을 흔들어댔다.

"빨리 항복하고 나와라. 저항하면 몰살시킨다.!"

이해룡은 다시 외쳤다. 와아아... 와아아... 빨치산들의 외침이 또 어둠을 뒤흔들었다. 이해룡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피식 웃어버렸다. 대원들은 자신의 명령대로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하는 말에 한해서만 두 번 소리 지르라고 제한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때 초소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항복한다고 살려준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냐아."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빨리 항복하고 나와라. 틀림없이 살려준다. 우리 빨치산한테 체포되어 서약서 쓰고 살아난 경찰들이 수없이 많다는 소문도 못 들었느냐. 너희들도 항복히고 나와서 서약서를 쓰면 틀림없이 살려준다. 시간 끌지 말고 셋 셀 동안에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몰살시키겠다. 하나아...두우울...!"

그때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나간다아, 기다려라, 기다려!"

그리고 초소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네모난 불빛이 어둠을 도려냈다. 그 불빛 속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린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격조들이 그들을 빠르게 에워싸고 있었다. 이해룡은 말할 수 없는 통쾌감을 느끼며 큰길을 건너뛰고 있었다. 비무장들도 초소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 명은 불빛 속에 갇힌 듯 팔들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차 있었다.

"겁내지 마라. 약속대로 다 살려주겠다. 먼저, 옷들을 다 벗어라!"

이해룡이 내린 명령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우물거렸다.

"뭘 꾸물거리고 있나. 빤스만 남기고 구두까지 다들 벗어! 우리가 월동 준비하는 거니까."

그때야 그들은 다투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구두까지 벗은 그들은 팬티만 걸친 알몸이 되었다.

"팔들은 내려도 좋다. 다들 얼굴 똑바로 들어라."

그들이 굳어진 얼굴들을 똑바로 세웠다. 이해룡이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펴나갔다. 불빛에 드러나 그들의 얼굴은 거의 스무살 안팎으로 보였다.

"! 일정 때부터 순사질 해 먹었지."

이해룡의 손가락이 한사람을 겨냥했다. 그 얼굴은 서른다섯이 넘어 보였다.

"아나구만요, , 해방되고 부텀인디요."

그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며 말을 더듬거렸다.

"맞구만이라. 그눔이 순사보럴 해묵은 배창순디, 행투께나 고약시럽게 헌 악질이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외친 소리였다. 그 사내의 겁 질린 얼굴이 그만 푹 떨구어졌다.

"요런 민족반역자 새끼!"

이해룡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사내의 가슴을 푹 찔러 버렸다. 사내가 신음을 물며 몸을 접었다. 이해룡이 칼을 뽑았다. 사내의 머리가 땅에 박히며 쿵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기를 전부 노획하고, 전홧줄을 절단하시오. 그리고 이 사람들 이름과 동네를 적은 다음 다 묶어 초소 안에 가두시오."

이해룡은 공격조에게 명령한 다음 알몸의 사내들을 향해,

"약속대로 너희들은 살려준다. 너희들의 이름과 동네를 적어두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라. 얼굴도 다 봐놨으니까 또 걸리면 그때는 저 새끼 죽이는 것처럼 가차 없이 죽이고 말 것이다. 다들 명심해라."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들은 두 마을을 향해 거침없이 어둠을 헤쳐 나갔다.

"절대로 인명피해는 내지 마시오."

마을로 들어서기 직전에 이해룡이 명령을 내렸다.

대산리와 지천리 부잣집들은 쌀이라 쌀은 남김없이 다 털렸다. 부잣집들은 쑥밭이 되었지만 동네 전체로 볼 때는 별 소란이 없었다. 그들은 미리 짜여진 조에 따라 부잣집들을 덮쳐 일을 해치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큰길에 다다라 매복하고 있던 토벌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적은 내가 맡을 테니까 동무는 빨리빨리 비무장을 산으로 빼시오."

이해룡은 군당위원장에게 숨 가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대원들에게 외쳤다.

"동무들, 지금부터 돌격이오. 저 공격을 뚫고 바로바로 산으로 붙으시오. 그래서 비무장들을 경계해야 하오. 자아, 돌겨억!"

빨치산 무장대들은 총을 난사해대며 어둠속을 내뛰기 시작했다. 토벌대의 추격을 떼치고 완사재를 넘은 이해룡은 인원점검을 실시했다. 무장대원 넷, 비무장대원 셋이 없었다. 일곱 명의 목숨을 잃어가며 감행한 오늘의 보투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쩐지 이해룡은 선뜻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늘로 고개를 젖히며 긴 숨을 토해 냈다. 결국 일곱 동지의 몸을 뜯어먹는 셈이로구나! 별들을 건성으로 보며 그가 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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