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4-6
19. 어차피 한번 죽는다.
산이란 산은 검푸른 초록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뭇잎들은 무성할 대로 무성해져 울창한 숲을 이루어내면서 산마다 진 초록빛으로 윤기 나는 두꺼운 옷을 입혔다. 쑥빛의 초록으로 치장한 산들은 겨울 산에 비해 넉넉하고 푸근하고 부드러워보였다. 한여름인 칠월 말의 녹음은 새잎들이 돋아 오르는 사오월의 그 다양한 색감의 초록빛이 아니었다.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면서 어린 때의 색깔들을 벗어버리고 짙은 초록빛으로 물이 들었다. 산들은 무성한 나무숲들 속에 제 모습을 감추어 어느 산줄기나 골짜기도 강파르게 보이지 않았다.
염상진은 먼 눈길로 그런 산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그지없이 짙고 맑은 초록빛의 나무바다도 마음의 우울을 걷어가지 못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어지간한 마음의 그늘이나 무거움은 푸른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말끔하게 씻기고는 했었다. 사실 오늘의 우울이 산줄기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가시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 우울은 깊이가 너무 깊었고, 농도 또한 너무 진했다. 저 산들의 굳건한 의지로, 저 나무들의 푸른 기상으로 모든 전사들이 여름투쟁을 전개하기 바랐던 것이다. 여름투쟁을 통해서 해방구를 지켜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투쟁 사업이었다. 그런데 돌발적 상황이 야기됨으로써 기대했던 여름투쟁은 차질을 빚을 위험을 안고 있었다. 염상진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저 푸름에 보호받으며 빨치산들은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뭇잎은 다 떨어져 은신할 데 없이 행동은 노출되고, 눈보라치는 추위까지 몰아닥쳐 살벌해진 겨울 산에 비하면 숲 짙고 물 많은 여름산은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여름 산에 안겨 있는 빨치산들은 겨울에 고대했던 여름 산의 행복감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소식은 비밀일 수 없었고, 거기서 비롯되는 불안감이 빨치산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물론 도당에서도 민주원칙에 따라 그 사실을 공개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학습을 강화시켜나갔다. 그러나 학습만으로 대원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 따라 갖게 되는 불안감을 일소시킬 수는 없었다. 휴전을 받아들이는 감도는 우선 이북 출신과 이남 출신이 달랐고, 이남 출신 중에서도 지식계급과 농민, 기본출이 달랐다. 작년 후퇴 때 그랬듯이 이북 출신들이 가장 심하게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상의 빈약도 아니었고 특별히 겁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건 조직원의 이성이기 이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반응이었다. 학습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여 이북 출신들의 이성회복을 촉구했다. 그 다음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이남의 지식계급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두 가지 양상을 드러냈다. 전혀 끄떡도 않는 축과, 불안을 느끼는 축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불안을 느끼는 쪽이 한결 많았는데, 그 불안의 원인은 그들이 머리를 굴려가며 휴전 다음의 상황을 꼬치꼬치 따지는 데 있었다. 지식계급에 비해 농업인민이나 기본출들은 꽤나 태평한 편이었다. 이래 살다 죽으나 저래 살다 죽으나 어차피 한세상인데, 바라는 세상 못 볼 바에는 실컷 싸움이나 하다 죽겠다는 태도였다. 그런 의연함은 기본출일수록 많이 나타났다. 그런 분석은 각 지구의 정치위원회가 일치하고 있었다. 그 분석을 입증이라도 하듯 한 사건이 총사에서 일어난 것이다.
염상진은 또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의 생명이 달린 사건이었다. 그들은 살아날 가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특별한 변호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을 살려낼 만한 논리를 전개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휴전이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일까? 그들에겐 휴전이 곧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그들의 의지는 고작 그런 식으로 가변적이었을까? 그러면서도 무엇 하러 입산을 했던 것일까? 일시적인 피신이었을까? 그럼 왜 작년 말에 실시한 하산 권유를 듣지 않았던 것일까? 저들의 감정적인 초기보복 때문에 산이 더 안전하다는 기회주의적 판단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고생을 하다 보니 의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다가 휴전소식을 듣게 되자 완전히 변해버린 것일까? 그들은 배울 만큼 배웠으면서도 역사에 대한 전망을 그렇게도 할 수 없었을까? 자의로 바른 역사를 선택했다면서도 그렇게 역사에 대한 신뢰가 빈약할 수 있을까? 목숨 때문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역사의 편에 선 자가 목숨을 변명의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치졸이고 비겁이다. 애초에 역사의 선택은 목숨의 위험을 뛰어넘는 차원에서부터 시작된다.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가 어찌 혁명에 나설 수 있으며,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는 자가 어찌 투쟁에 뛰어들 수 있는가! 피 흘리기를 주저하고, 목숨 버리기를 무서워하면서 혁명의 열매만 따먹으려고 역사를 선택했다면 그런 자들은 반동보다 더 악랄한 적이다! 혁명은 대가를 예약해주지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혁명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고, 과정이며 혁명에 가담하는 자는 그 연료로써 타오르기를 각오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혁명에서 대가를 바랄 때 목숨에 연연하게 되고, 목숨에 연연하면 투쟁력이 약화되면서 기회주의가 싹트게 된다. 탈주를 감행한 그 두 사람은 결국 목숨에 연연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만약 탈주에 성공했더라면 어찌했을 것인가? 그들은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어제까지의 동지들을 적에게 팔아넘길 것이다. 어찌 그런 자들이...
염상진은 다시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마음에서는 그들을 부정하는 논리만이 줄줄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괴로웠다. 동지를 적의 손에 잃는 것도 괴로움인데, 자신들의 손으로 잃어야 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용서받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처단 당하는 것이라 해도 동지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어제의 세월이 괴로움을 만들어 냈다. 그 괴로움은 결코 감상이 아니었다.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해서 그렇게 값없이 더러운 죽음을 해야 하는 자에 대한 안타까운 괴로움이었다. 혁명투쟁에 나선 자의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은 적과 싸우다가 동지들의 가슴에 영원한 추앙의 괴로움을 남기고 죽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 자만이 역사를 짊어질 수 있었다.
염상진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재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건의 중대성에 따라 총사의 전체재판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몇몇 간부들의 제한된 의견과 판단으로서는 될 일이 아니었고, 모든 전사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될 일이었다. 탈주를 모의한 두 사람은 순천중학교 출신으로 선후배 사이였다. 그들은 부대를 이탈해 도주하다가 해방구 접경에서 정보과 분트요원들에게 적발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탈주의 마지막 고비에서 실패한 셈이었다. 염상진은 산비탈을 걸어 내려갔다. 한낮인데도 나무숲이 울창해 햇빛이 스미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숲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심결에 감탄을 흘렸다. 햇볕을 받고 있는 나뭇잎들을 아래서 올려다보면 그 잎들은 하나같이 가늘게 뻗어나간 잎맥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투명한 초록빛으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숲 그늘에는 초록빛이 아련하고 신비롭게 감돌고 있었다. 그는 햇볕을 안고 있는 이파리들을 올려볼 때마다 형용하기 어려운 경이로움과 함께 생명의 약동을 느꼈다. 핏빛의 붉은색에서 혁명의 열정을 느낀다면, 그 해맑은 초록빛에서는 혁명의 성취를 느꼈다. 그는 행군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낮은 감탄의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고는 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숲 그늘에는 벌써 총사의 대원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염상진은 눈어림을 해보았다. 삼백여 명 되어 보였다. 그들은 근무자를 제외한 전원일 것이었다. 인원수에 비해 그들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들은 오늘의 모임이 오락회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표시였다. 물론 삼백여 명씩 모여서 벌이는 오락회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나무숲은 박수소리와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로 들썩거렸을 것이다. 오락회도 투쟁이다! 그건 학습 다음으로 중요시되었다. 오락회는 내일의 강건한 투쟁을 위해 오늘의 피로를 푸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통해 전사들 간의 화목과 유대를 강화시켜 투쟁력을 배가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곧 문화 사업은 오락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염상진은 오락회를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신기함과 아울러 미안스런 아쉬움을 느끼고는 했다. 대개 중대 단위로 벌어지는 오락회에서 어느 중대원들이나 술도 없고 아무 음식도 없는데도 신명나고 신바람 나게 잘들도 어울려들었던 것이다. 여자대원들이라고 해서 몸을 사리거나 부끄럼을 타지 않았다. 같은 대원으로서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우러지고 흥겨움을 나누었다. 여자대원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남자대원들이 술기운 하나도 없이 그렇게들 신명이 날 수 있다는 것이 염상진은 언제나 신기했다. 그러면서, 저 모임판에 술은 금물이니까 먹을 것이나마 조금씩 마련해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미안스런 아쉬움을 갖고는 했다. 그런 생각은 오락회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총을 볼 때도, 제각기 다른 옷차림을 볼 때도, 코가 찢어진 검정고무신을 새끼로 묶거나 헐어빠진 짚신발을 볼 때도, 그때마다 저런 것들을 제대로 갖추어주면 얼마나 더 잘 싸울 것인가 하는 생각을 죄스럽게 하고는 했다. 그는 어쩌다가 오락회에 끌려 들어가 노래를 요청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서슴없이 노래를 불렀다. 학생 시절부터 술이 만취할 때나 불렀던 아리랑이었다. 물론 춤도 추고 싶은 대원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게 했다. 맨 정신이면서도 요청에 선뜻 응하는 것은 그 미안스러운 아쉬운 마음 탓이었다. 맨 정신으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처음 몇 차례는 어색하고 멋 적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 분위기에 어우러져 제법 흥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노래가 들을 만해서 그러는 것인지, 예의를 차리느라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으레 재청이 들어오고는 했다. 그러면 그는 시 하나를 낭송했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와는 다르게 두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똑바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 조국을 떠날 때 사랑하는 동무는
깃발을 메고 돌아오라 하였거니 오냐,
떼몰려 압록강 건너 장백산을 타고 넘어다 우리나라 서울로 진군하련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은 인민의 깃발
둥둥 두리둥 치는 북은 쇠사슬을 끊으리
고국 산하에 구슬픈 호둘기 소리가 우렁찬 자유의 노래 소리로 변할 때까지
동무야 싸우자 형제야 싸우자
못내 뜻을 이루고 싸우다 죽으면 이내 가슴 위에 돌을 세워다오
돌 위에는 새겨라 '조국 해방 만세'라고.
항일 무장투쟁을 그린 김사랑의 [조선의용군]이란 연극에 나오는 시였다. 염상진은 그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오락회의 목적을 십분 살리고자 했다. 그 효과는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 시를 듣고 난 대원들은 하나같이 숙연해지고 비장해졌던 것이다. 노래는 분명 투쟁의 무기였다. 시 또한 그에 못지않은 투쟁의 무기라는 것을 그는 실감하고는 했다.
염상진은 부사령관의 자리에 앉았다. 간부의 자리라고 해서 무엇이 특별하게 준비된 것이 아니었고, 사령관의 옆에 놓인 판판한 돌이 그의 자리였다. 소수의 간부회의가 아니고 이렇게 야외에서 전체 모임이 열릴 때는 간부들의 자리는 지형이 약간 높은 곳에 앉기 편한 몇 개의 돌을 옮겨다 놓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빨치산식의 급조된 의자였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두 사내는 칡넝쿨로 팔이 묶여 대원들 앞에 세워졌다.
"지금부터 신동식과 윤재일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먼저 두 사람이 범한 죄상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신동식과 윤재일은 삼 연대 일 중대에 소속된 자들로서, 휴전회담이 개최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투쟁의욕을 상실해가다가 마침내 두 사람은 학교 선후배라는 관계를 이용하여 반당적이며 반동적인 탈주음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동식과 윤재일은 바로 그저께인 칠월 삼십일 부대를 이탈하여 적진을 향해 탈주를 시도하였던바, 해방구의 경계선상 부근에서 분트요원들에게 적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죄상에 대하여 인민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원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의견 개진과 아울러 공정한 처벌을 결정 내리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발언 시작해 주십시오."
정치위원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한 사람이
"여그 언권 주시오!"
외치며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발언하시오."
정치위원이 발언권을 주었다.
"야아, 저 일이 가당찮고 선하품 나는 일이라논께 나가 질게 말허고 잡지도 않으요. 우리넌 인민에 새나라럴 맹글기 위혀서 굶어도 항꾼에 굶고, 죽어도 항꾼에 죽고, 살아도 항꾼에 살자고 맹세허고 투쟁헌께로 다 동문 것인디, 똥이야 원제 나올런지도 몰르고 인자 방구 한방 뽀옹 나온 것이 휴전회담이라는 것인디, 고까짓 것에 시퍼러니 겁묵고 즈그덜만 살아보겄다고 당과 동무덜얼 배반하고 똥줄 빠지게 달아난 저런 반당분자, 반동분자덜언 볼 것웂이 총살 시켜뿌러야 허요. 나 발언 접수혀주씨요."
"알겠습니다, 발언 접수합니다. 다른 대원 발언 받겠습니다."
"여그 있소." 다른 사람이 팔을 뻗쳐 올렸다.
"예, 발언하십시오."
"앞엣 동무가 쌈빡쌈빡허니 발언 잘혔응께로 나넌 같은 말이야 빼고, 한 가지만 말허겄소. 쩌그 저 두 사람은 중핵교꺼정 나와 배울 만치 배왔다는디, 배운 사람덜이면 배운 값얼 혀서 우리 헹펜이 안 좋게 돌아가먼 배운 머리털 써서 존 쪽으로 돌릴라고 혀얄 것인디, 배운 머리로 못된 꾀럴 내서 당이고 동지덜이고 다 내뿔고 즈그덜만 살아보겄다고 나댔이니, 고런 느자구웂이고 보초웂은 짓거리가 이 시상에 또 워디 있겄소. 고것은 우리 빨치산의 챙피요. 나도 저 반동분자덜얼 총살시키라고 재청허겄소."
"예, 재청 발언 접수합니다. 다른 대원 발언하십시오."
"나요, 나!"
한 남자가 팔도 들지 않고 몸부터 일으켰다.
"워따, 중우도 안 내리고 똥싸네, 저 사람."
누군가 핀잔했고,
"항, 싸게 삼청을 채와야 쓴께."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예, 발언하시오."
정치위원이 그 남자에게 발언권을 인정했다.
"나넌 폐일언하고 총살 삼청이오. 원 시상에 사람이 그랄 수넌 웂은 일이오. 우리가 멋 땀시로 죽기럴 한허고 묵을 것도, 입을 것도, 잠자리도 웂은 요런 산골짝에서 고상얼 허고 있겄소. 근디 중도에 즈그덜만 살겄다고 원수덜헌티로 내빼!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짓거리여! 요런 개돼지만도 못헌 인종들아아, 워디 대답 잠 혀봐라아!"
그 남자는 그만 제풀에 흥분을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다가 정치위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됐습니다, 됐습니다. 진정하시고 앉아 주십시오. 동무의 발언을 삼청으로 접수합니다."
정치위원이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난장맞을, 폐일언은 머시고 질게 새살까는 것은 또 머시여"
"저 사람 성질이 기차 화통이시."
"와따, 들을 만헌디 내빌나둬보제잉."
여기저기서 나오는 소리였다.
"삼청까지 나왔으니 반대발언 있으면 하십시오."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숲 그늘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웂소, 판결 내리씨요오!"
누군가가 외쳤다.
"옳소!"
"옳소, 싸게 허씨요!"
여기저기서 수십 명의 목소리가 합창해댔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정치위원이 팔을 넓게 흔들고는,
"그럼 사령관 동지께서 최종판결을 발표하시겠습니다."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사령관이 일어나서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런거리던 소리들이 뚝 그치며 조용해졌다. 팔을 묶인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전체 대원들의 결의를 존중하여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신동식과 윤재일에게 총살형을 언도하는 바이오!"
그때였다.
"사령관 동지, 살려주시씨요오."
"동무덜, 한분만 살려줏씨요. 한분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앉으며 울부짖었다. 숲 그늘에는 침묵뿐 그 많은 사람들한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동무덜, 나가 잘못혔응께로 한분만, 한분만 용서해주시씨요. 다시넌 고런 맘 안 묵겄소."
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대원들을 향해 연방 고개를 주억 거렸다.
"동무덜, 우리럴 불쌍허니 생각혀서 참말로 한분만 용서혀주씨요. 글먼 더 용감허니 투쟁허겄소."
사령관을 향해 무릎을 꿇었던 남자가 대원들 쪽으로 돌아앉으며 목매이게 부르짖었다.
"저런 짜잔헌 새끼덜, 당장에 쥑여라!"
마침내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외침이 터지기 시작했다.
"저런 벌거지만도 못한 새끼덜, 당장에 쳐죽여라!"
"저런 새끼덜헌테넌 총알이 아깝다. 죽창으로 찔러뿌러라!"
"죽여, 죽여!" "싸게싸게 죽여!"
대원들의 분노와 흥분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염상진은 어금니를 꾹 물며 눈을 감았다. 대원들이 어째서 저리도 분노하고 흥분하는지를 그는 일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두 범인이 보이고 있는 남자답지도, 빨치산답지도 못한 비굴과 비겁에 또 한 번의 배신을 당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만에 하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려면 죽음을 앞에 놓고도 빨치산다운 당당한 태도를 취했어야했다. 대원들이 온갖 악조건을 무릅써가며 투쟁을 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빨치산이면 잠결에 물어도 할 수 있는 대답 - 해방된 인민이 주인인 새나라 건설이었다. 투쟁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도 오직 그 목적달성을 위한 의지와 긍지감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현실적 영광도 지위도 없는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빨치산의 그 긍지를 두 범인은 눈물범벅된 비굴과 비겁으로 끝내 손상시키고 훼손했던 것이다. 그들 두 범인이 대원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려면 정반대의 태도와 발언을 했어야 했다. 염상진의 의식 속에는 백아산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대원들은 진정되었고, 두 범인은 끌려갔다. 재판은 끝나고, 처형만 남아 있었다. 염상진은 돌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음은 더 우울하고 무거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인 민망한 행태 탓이었다. 그때 백아산 지구에서도 중요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광주 외곽에 있는 형무소를 습격해 동지들을 구출해내는 중대한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한 대원을 정찰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는 나무꾼 출신으로 발이 빠를 뿐만 아니라 무등산 주변의 지리에 밝아 특별히 뽑힌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고 말았다. 형무소 위치를 대충 알고 있었던 그는 방심한 채 정찰을 소홀히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보고를 받고 부대를 투입하고 보니 그 형무소는 텅 빈 껍데기였다. 허탕을 친 데다가 토벌대의 추격까지 받는 위험을 겪어야 했다. 그 정찰병은 당연히 재판에 회부되었고, 대원들 전원의 만장일치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지가 저질른 잘못은 입이 열 개라도 헐말이 웂구만이라. 지겉은 얼빙이넌 열 분 죽어두싸제라. 지넌 동무덜이 정헌 대로 먼첨 죽을 것잉께, 동무덜언 더 열성으로 투쟁혀서 인민의 새나라럴 꼭 맹글고, 거그서 복받고 살기럴 바래능마요. 지넌 저시상에 가서도 그런 날이 싸게싸게 오기럴 빌겄구만이라. 지 잘못을 용서허시씨요."
그 정찰병은 대원들을 향해 똑바로 서서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동무덜! 저 동무럴 살립씨다. 저 동무가 진짜배기 빨치산이오!"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맞소, 저런 동무럴 죽이기넌 아까우요."
누군가가 동의를 하고 나섰다.
"옳소, 살립씨다아!"
"그려, 그려. 저런 맴이 진짜배기여!"
모든 대원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판은 다시 열리고, 모든 대원들의 만장일치로 그 정찰병은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염상진은 커다란 감동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따꿍 - 따꿍 -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산속에서 한 발씩 울리는 총소리는 산울림으로 하여 ‘따꿍’하고 들렸다. 총소리가 사라지고, 대원들은 부대별로 숲 그늘을 떠나갔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겁고 어두웠다. 염상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짜피 한번 죽는 건데 못난 사람들 같으니라구..."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바글바글 끓어댔다. 개구리들은 한낮에는 전혀 아무런 소리가 없다가도 어둠살이 퍼지면서부터 울어대기 시작하면 그 소리는 서로 다투듯 시간이 갈수록 요란스럽게 번져나갔다. 모기도 때를 같이해서 날기 시작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여름밤의 정취라면, 모기떼들이 엥엥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더위와 함께 여름밤의 큰 고역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모기떼는 겨울의 이만큼 짜증스럽고 귀찮은 존재였다. 이를 잡아도 잡아도 없앨 수가 없듯 모기도 쫓아도 끝없이 달겨 들었다. 그래서 빨치산들은 이와 모기를 가리켜‘너희들은 우리의 또 하나의 원수’라고 이름 붙였다. 이태식의 연대원들은 날아드는 모기들과 슬슬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찰조럴 짜야 쓰겄는디, 세 명씩 두 조로 여섯잉께, 지원자는 나스씨요."
연대장 이태식이 나직하게 말했다.
"여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게 팔을 들며 일어난 것은 여자였다.
"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이태식이 그 다음 말을 얼른 멈추었다. 말에서처럼 얼굴에도 그의 감정변화가 민감하게 드러났다. 찌푸려지려던 그의 얼굴이 어색하게 웃음 짓고 있었던 것이다. 조원제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연대장과 여자대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 대원들도 소리죽여 쿡쿡 웃고 있었다. 대원들은 연대장이 꿀꺽 삼켜버린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건 ‘...동무요?’였다. 연대장은 그 말을 더 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었다. 그 말을 자칫 잘못 입 밖에 냈다가는 정식으로 자기비판에 붙여질 판이었다.
"이, 강경애 동무가 지원혔고."
이태식은 일부러 이름까지 불러가며 못을 박듯이 하고는,
"다른 동무덜 또 지원허씨요."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되았소. 되았소. 거그꺼정만 여섯이고, 남치기 세 사람은 도로 앉으씨요."
이태식이 일어선 순서대로 지원자 여섯을 지목했다. 이런 데는 아예 자격이 없는 조원제는 빠른 몸놀림으로 열을 빠져 나가고 있는 자원자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치일꾼인 문화부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지는 화선에서도 다소간 안전한 곳에 위치했고, 이런 경우에도 자원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간부보호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돌격대, 매복조, 정찰조 같은 위험부담이 큰 조직을 짤 때는 지명이 아니라 자원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건 민주적 방법의 조직운영인 동시에 투쟁의 자발성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었다. 강제성이 완전히 배제된 그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원자는 언제나 모자라는 일이 없었다. 그건 매일 실시되는 학습과 함께 전체 빨치산들의 투쟁열을 입증하는 일면이었다. 그런데다가 연대에서는 언제부턴가 야릇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앞을 다투는 자원자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회담이라는 달갑지 않은 소식으로 야기될 위험이 있는 사기저하와는 반대되는 현상이었다. 그 변화가 바로 강경애한테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조원제는 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저 강 동무한테 나가 판판이 지는구만."
정찰조가 임무수행을 하러 떠나자 이태식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원칙을 바꾸기 전에야 판판이 지게 생겼지라."
조원제는 씽긋 웃었다.
"그렇겠네. 좌우당간 여자 몸으로 워찌 저리 간도 크고 야물딱진지 몰르겄소. 그런다고 여자 일이 안 매시라운 것도 아니겄고. 나이넌 쪼깐혀갖고 영 사람 애믹이오."
"저리 용맹시런 부하가 생겠응께 인자 강철부대가 강강철부대 되게 생겼는디 머땀시로 애썩고 그러시오?"
조원제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허! 넘 솔 몰르고 그 무신 땁땁헌 소리여? 아, 지가 후방부에서 기동대로 온 지가 을매나 됐다고 지원이 있을 때마동 넘 먼첨 불쑥불쑥 나스냐 그 말이여. 산에서 살았다고 다 빨치산이간디? 염불도 지 각각, 잿밥도 지 각각이드라고 빨치산도 다 지 각각으로 달브덜 않더라고? 후방부에 있다가 기동대로 오먼 빨치산 삥아린디, 삥아리먼 삥아리맹키로 얌전허니 있어야제 삥아리가 겁도 무섬도 몰르고 나댄께 위태위태허제."
"연대장 동무가 시방 헌 발언 나가 강경애 동무헌테 그대로 전허겄소."
조원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이고 지도원 동무, 요것 나가 실없는 소리 혔소.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허씨요."
이태식도 당황하면서 금방 공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건 가식도 술수도 없는 이태식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순진할 정도로 순수한 그는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것이다.
"아이고, 장난이오, 장난."
조원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엣끼! 장난헐 말이 따로 있제."
이태식이 조원제의 어깻죽지를 쳤다. 강경애가 후방부에서 이태식의 연대로 온 것은 한 달 가까이 되었다. 토벌대에게 해방구 반을 빼앗기면서 입은 병력손실을 보충할 때였다. 이태식은 전부터 여자대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체로 남자에 비해 전투력이 약한 여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만큼 부대의 전투력이 약화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대에 있는 여자대원은 간호병 역할과 취사를 겸해서 맡고 있는 최소의 인원뿐이었다. 그런데 강경애는 간호병도 아니고 엉뚱하게도 전투병 중의 하나로 전속되어 온 것이다. 이태식이 강경애를 선선하게 받아들였을 리 없었다. 지체 없이 지구사령부에 재고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강경애가 강철부대에 자원한 것이니까 좀 곤란하다는 사령부의 응답이었고, 그러는 사이에 강경애의 내력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녀의 남다른 내력을 알고 나서야 이태식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강경애는 며칠만에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나섰다. 그 날 매복조를 짜는데 제일 먼저 자원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아니 강 동무, 워쩔라고 그요?"
이태식이 어이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머시럴 워째라. 매복조 지원이제라."
강경애는 새침한 얼굴로 대꾸했다.
"동무넌 안 되겄소."
"음마, 지원이람서 지원헌 사람이 워째 안 돼라?"
강경애의 말은 또렷했다.
"동무넌 인자 총도 포도시 쏨스로, 매복이 먼지나 알고 그러요?"
"매복이야 적이 많이 댕길 만헌 길목에 숨었다가 적얼 때래잡는 일이제라."
"고런 말이 아니라, 고것이 을매나 에롭고 위험헌 일인지 아냐 그 말이오."
"그렁께 싸게싸게 배와야제라."
"허 참!"
이태식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우리가 시방 아그덜맹키로 고샅에서 물총 쌈 허는 것이 아니오. 매복이라는 것은 예사 쌈보다도 훨썩 위험시런 것인디, 여자가 나슬 일이 아닝께 가만 있으씨요.“
"연대장 동무, 무신 발언얼 그리 허시오! 인민해방은 모든 사람이 차등 웂이 똑겉이 되는 것이고, 거그에 따라서 남녀도 평등허게 된다는 것을 아시오, 몰르시오? 나럴 여자로 차별혀서 지원을 안 받아줄라고 허는 것은 해방정신의 기본에 위배되는 일이오. 나럴 지원에 받아주던지, 그 틀린 발언에 대해 자기비판얼 받든지, 연대장 동무는 양단간에 하나럴 골르씨요."
이태식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강경애의 유별난 내력을 다시 생각하며 그녀의 자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태식이 그런 정도의 강경애 논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조원제는 안타까워했다. 강경애의 공박은 꽤나 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결정적 허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인민해방에 따른 남녀평등이란 인권의 평등이었지 획일적인 능력의 평등이 아니었고, 아무리 자원이라고 해도 임무수행에 대한 능력평가는 지휘관의 권한이었던 것이다. 이태식은 그 점을 들어 반격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태식은 전투력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논리전개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그 점이 그의 약점이면서 열등감이기도 했다. 강경애는 그 뒤로도 서너 차례 자원자를 뽑을 때마다 어김없이 제일 먼저 손을 들고는 했다. 그때마다 이태식은 "또..." 하며 얼굴을 찌푸리다가는 얼른 표정을 바꾸어 억지웃음을 짓고는 했다. 이태식의 그런 염려 속에서 강경애는 매번 무사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날이 갈수록 그녀가 야멸찬 전사로 변해가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눈매가 고운 강경애는 자주 자상하고 정이 많은 여자일 뿐이었다. 틈이 나는 대로 남자대원들의 찢어진 옷을 꿰매주려고 했고, 가위로라도 긴 머리를 깎아주려고 했으며, 몸이 불편한 대원이 있으면 지성으로 돌보아주었다. 그런 강경애의 모습은 지극히 여성다웠다. 그런 강경애가 싸움에 나설 때는 남자들이 무색할 지경으로 용맹스러워진다는 것은 꼭 거짓말 같은 일이라서 대원들 모두는 한동안 어리둥절해져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바느질을 하면서 몇몇 대원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대원들에게 그녀는 자신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우리 성제간은 오빠허고 나허고 남매였는디, 집안은 그작저작 밥술은 묵고 살아서 오빠넌 중학교꺼지 나오고, 나넌 소학교는 나왔제라. 성제간이 딱 둘잉께 우리넌 아조 우애가 짚었는디, 오빠는 일정 때부텀 좌익얼 혔제라. 그래 논께 나도 솔래솔래 좌익물얼 묵어갔구만이라. 그러다가 해방이 된께 오빠는 지시상 만내갖고 일정 때 못허든 활동얼 날개 달고 훨훨 허기 시작혔는디, 우리가 다 알디끼 그 활동이란 것이 금세 불법이 안 되야부렀소. 그리된께 오빠도 지하로 숨어 비합법투쟁으로 들어갔는디, 오빠가 원체로 표 나게 활동얼 허다봉께 경찰덜 눈에 딱 백혀서나 날이 갈수록 옴치고 뛰기가 애롭게 되야갔소. 그려서 안전한 비트를 장만혔는디, 거그가 워디냐 허먼, 집 앞 논두렁에다가 굴을 판 것이오. 그 논두렁이 양쪽에 논이 붙어 있는 흔헌 논두렁이 아니고 한쪽으로는 높으단허니 밭이 시작되는, 굴파기에 아조 존 그런 논두렁이었제라. 글고 누가 보드라도 논 저 짝 논두렁에 사람이 숨은 굴이 있을지넌 생각도 못허게 생겼고라. 그 굴에넌 우리 오빠 혼자만 숨은 거이 아니고 오빠친구도 한 사람 있었구만요. 나가 새북이나 밤으로만 밥얼 날르는디, 겨울에 눈이 오면 발바닥이 찍혀 굴 있는 자리가 표가 나게 된께, 그런 날언 논 얼음장얼 깨감스로 맨발로 물 속을 걸어 굴로 밥얼 날랐소. 근디도 오빠럴 살래야 된다는 생각으로 발이 시런 줄도 몰랐제라. 그리 허기럴 일년얼 다 해가는디, 경찰에서넌 오빠 잡을라고 사흘거리로 집얼 뒤지고, 아부지럴 잡아가고 난리판굿이었제라. 아부지가 잽혀가 고초당 허는 것도 못 볼 일이고, 아부지가 고초당험시로 정신이 날다들다 허다가 오빠가 숨은 디럴 말해불란지도 몰를 일이고혀서 나넌 아부지도 지키고 오빠도 지키자 허는 생각으로 맘에 하나또 웂은 시집얼 가기로 작정허고 말었구만요. 그 사람이 순경인디, 오빠 잡으로 우리집얼 발바닥 닳아지게 나들다가 벨로 보잘 것도 웂은 나헌테 미쳤응께라. 나가 그 순경헌테 시집얼 가고 난께 아부지가 고초럴 면허게 되고, 오빠도 무사허니 피했다가 여수, 순천서 그 일이 터지자 굴에서 나왔구만요. 근디 그 일이 또 오래 못가게 된께 오빠는 산으로 들어갔제라. 오빠는 산에서 투쟁허다가 해방전쟁얼 못 보고 죽고, 그 전쟁도 또 뜻대로 안 풀리니 인공 때 여맹서 일헌 나가 워째야 쓸 것이오. 정웂은 냄편 내뿔고 입산혔제라. 입산허는 날로 총 들고 나서서 오빠 몫아치꺼정 나가 다 헐라고 맘묵었는디, 당에서 워디 그 말얼 쉽게 들어줍디여? 후방투쟁도 똑겉은 투쟁이다, 비무장 남자대원덜이 너무 많은께 기둘려라, 그럼시로 차일피일 날만 가는디, 참말로 기가 맥힙니다. 나가 입산헌 것은 오빠헌테서 배운대로 위대헌 사회 맹글라고 싸우는 것이었제 집구석에서 허든 일 산에서도 헐란 것이 아니었응께라. 근디, 그리 바래든 일인자 허게 되岵율껭?나가 을매나 신바람이 나겄소. 나가 우리 오빠 몫아치꺼지 허잔께 지원도 자꼬 허고 그러제라잉. 나가 허는 것 보고 오빠도 저시상에서 좋아라헐 것잉마요."
스물두 살 강경애는 이론무장도 꽤나 실한 편이었다. 그녀가 틈틈이 남자대원들의 옷을 기워주거나 머리를 깎아주거나 하는 것은 단순히 여자로서의 자상함이나 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행위를 통해 동지애를 키우는 한편으로 암암리에 투쟁력을 고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수시로 자기 오빠의 용감한 투쟁담을 이야기했고, 자기가 그런 오빠를 얼마나 존경했으며, 남자다운 남자는 바로 자기 오빠 같은 남자라는 말을 은근히 덧붙이고는 했다. 사람을 가리는 법 없이 누구나 따뜻하게 대하는 그녀를 싫어하는 남자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오빠 같은 남자가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 증거가 바로 그녀를 뒤따라 자원자들이 갈수록 불어나는 것이었다. 조원제는 그런 변화를 유심히 포착하며 혼자 중얼거리고는 했다.
"정치일꾼 열 목 허네웨..."
노을이 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온통 불붙어 타고 있었다. 그건 광채 찬란한 불바다였다. 눈부신 찬연함으로 불타는 노을의 색깔은 이글거리는 불덩이의 싱그러운 생명력이었다. 여름해의 그 뜨거운 열정만큼 노을도 장엄하고 현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침노을이나 저녁노을이나 햇살이 아래서 뻗어 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침노을은 아래서부터 사위어 오르고, 저녁노을은 위에부터 변색해 내려왔다. 그리고 아침노을은 경쾌한 느낌이 많은데, 저녁노을은 장중한 느낌이 강했다.
"참 곱군요."
이지숙이 노을을 그윽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소."
옆에 선 안창민도 노을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을 이렇게 바라보기도 오랜만이네요."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지숙은 싸리나무 잎 하나를 따서 입술 끝에 물었다. 그리고 그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이 별로 없는 남자는 진중해 보이기도 하지만 답답할 때도 있었다.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는 일이 없는 안창민은 당 사업을 하는 데는 진중한 일꾼이었지만, 이렇게 단들이 만났을 때는 더없이 답답한 남자였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좋은 일이었지만, 필요한 말을 필요한 경우에도 하지 않는 것은 좀 곤란한 일이었다. 이지숙은 그 점이 안창민에 대해 불만이었다. 공석이 아니고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도 안창민은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자신이 바라고 있는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서는 안창민을 향한 마음이 저 붉은 노을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안창민은 그 노을을 보는 것인지, 못 보는 것인지 단둘이 만나면 씨익 웃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안창민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의 가슴에서도 자신의 가슴에서 타고 있는 노을과 같은 노을이 타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마음의 표현이야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 있었다. 직접적일 수도 있고, 간접적일 수도 있고, 소극적일 수도 있고, 상징적일 수도 있고, 우회적 일수도 있고, 말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서로 마음을 열고나서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안창민은 남자로서 필요한 한 마디를 여지껏 하지 않았던 것이다. 꼭 그 말을 들어야만 되느냐고 자신을 나무라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말이 그냥 소리와 다른 것은 거기에 마음과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상이 말을 통한 논리의 구체성이듯이 사랑도 말을 통한 마음의 구체성이었다. 자신은 그 구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말을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 말을 꼭 들어야 하느냐고, 여자란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그 모독적인 말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사상에 있어서는 그런 모독을 참아낼 수 없지만 사랑을 앞에 놓고는 그 모독을 달게 감수하면서 필요한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안 동무는 저런 노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시나요?"
이지숙은 싸리나무 잎을 뱉으면서 안창민을 옆눈길로 살짝 쳐다보았다.
"글쎄요, 경치가 아름다울수록 감탄만 나올 뿐인데... 저 노을을 보면서... 혁명의 성취가 저렇게 눈부신 색깔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아이고 맙소사! 그만 이 말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이지숙은 짐짓 참아 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혼자 웃음 지었다. 제 가슴에서는 저런 노을이 타고 있는데 안 동무의 가슴도 그런가요? 이렇게 물으려다가 너무 노골적이고 야한 것 같아서 물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물었더라면 안창민의 대답은 십중팔구 '예, 내 가슴에서도 혁명의 열정은 저렇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했을 것 같았다. 이지숙은 혁명전사로서 강건하게 서 있는 안창민에게 만족하자고 생각했다. 혁명의 정열이 뜨거운 사람은 사랑의 정열도 그만큼 뜨겁다는 말을 믿기로 한 것이다. 사실 지금의 상황에서 그에게 사랑의 말을 듣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지도 몰랐던 것이다. 지구정치위원으로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랑 운운하는 것이 오히려 남자답지 못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한 '안 동무' 라는 호칭도 그런 분위기를 유발하기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볼 때 그건 혁명적 호칭이었지 애정적 호칭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 붉게 타는 노을빛은 마치 동지들이 흘리고 간 피가 한데 모인 것 같아요."
이지숙은 감정을 일신시키며 말했다.
"그렇소, 그런 느낌도 들어요. 사실 말이오... 우리가 입산하고 난 다음에 이 산골, 저 산골에서 죽어간 전사들이 그 얼마요. 우리 전남도 당만이 아니라 각 도당마다 죽어간 전사들을 다 합치면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를 것이오. 그 사람들 거의가 농사를 짓거나 노동을 하던 평범한 인민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오. 그들이 흘리고 간 피를 전부 모으면 저 정도로 하늘을 덮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오."
"어쩌면 더 넓을지도 모르지요.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은 없고, 위대하지 않은 혁명은 없다는 말을 갈수록 절실하게 실감하게 돼요."
"그렇소, 인민은 혁명을 낳고, 혁명은 역사를 낳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인지가 문제요."
안창민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직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리는데, 사실인가요?"
공적인 입장을 회복한 이지숙은 비로소 안창민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토벌대들의 공격이 강화되면서 모든 행방구들이 타격을 입고 있으니 아마 불가피한 일일 것 같소."
"적들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도 휴전과 어떤 관계가 있겠지요?"
"물론이요. 반격에 총력을 기울였던 적들이 삼팔선 부근에 집결되어 있다가 휴전문제가 나오기 전후로 해서 대병력을 우리들 쪽으로 투입하기 시작한 거요.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이고, 우리의 투쟁이 거두고 있는 성과 중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오."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 인민군들의 전쟁수행을 돕는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이승만 정권은 정전반대국민대회라는 것을 각처에서 매일 열어대고 있는데, 그게 휴전회담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수많은 인민들이 또 이승만 반동정권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데, 그 영향이란 미국에 대한 영향이니까 예측하기가 어렵고, 그 대회라는 것이 우선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틀림없소."
"어떻게 말인가요?"
"그 대회 소식이 대원들을 심정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소."
"아 예, 저도 그런 걸 느꼈어요. 그런데, 앞으로 투쟁이 어려워지겠군요."
"사실이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투쟁이 너무 쉬웠다고 생각해얄 거요. 특히 우리 전남도당은 해방구를 철저하게 확보해왔으니까."
"그렇지만 해방구 확보가 불로소득은 아니었잖아요."
"물론이오. 그게 불로소득이란 뜻이 아니고 앞으로는 해방구가 없이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아, 비무장병력이라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면..."
이지숙은 나뭇잎을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뜯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안타까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안창민은 느꼈다. 그건 도당 상부에서부터 한 사람의 전사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은 말로 곱씹는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가며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으로 풀어나가야 했다. 그게 적의 무기로 무장을 확대해나가는 빨치산의 기본전략에 충실하는 일이었다. 빨치산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갖자면 끝이 없었고, 그 안타까운 조건들이 해결된 다음에야 투쟁을 할 수 있다면 결국 투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그런 조건들을 전제하는 것은 빨치산일 수가 없었다. 혁명이 인간들이 만드는 기적이듯이 빨치산도 기적을 만들어내는 군대이어야 했다. 그러나 안창민은 이런 말을 굳이 이지숙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고, 순간적으로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염상진 동지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이지숙은 양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두어 번 손가락 빗질을 해 매만지면서 물었다. 평소에는 고무줄로 잘끈 동여매던 머리를 안창민을 만난다고 풀어헤쳤던 것이다.
"무사하시오. 하대치 동지나 다른 동지들은 더러 만났소?"
"예, 하대치 동지는 가끔 만나게 돼요. 긴 얘기는 못하는데, 그 동지만 만나면 저도 힘이 솟겨요. 그 동지는 언제나 기운이 펄펄한 게, 꼭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사람 같아요."
"우리에게 보물이 따로 있겠소."
"그 동지는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잔정도 많아요. 얼마 전에는 글쎄 저를 일부러 찾아왔는데, 엉뚱하게 분통 하나를 내놓지 않겠어요. 보투 나갔던 부대에 묻어 들어온 건데, 두고 쓰라는 거예요. 빨치산이 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총질도 안 하는 빨치산이 무슨 빨치산이냐며 씩 웃고 돌아서는 거예요. 우습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그러데요."
"그게 잔정이 아니라 그 동지가 표시한 남다른 동지애요. 그 동지는 아픈 동지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사흘씩도 굶는 사람이오."
안창민은 일부러 이지숙의 말을 지적했다. 이지숙은 안창민에게로 빠르게 눈길을 돌렸다. 안경 속의 안창민의 눈이 이지숙을 나무라고 있었다.
"예,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허지만 그 동지의 그런 마음을 가볍게 보진 않았어요."
이지숙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지숙은 안창민이 그런 지적을 하고, 자신이 잘못을 시인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서운하거나 언짢은 기분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자기비판이 생활화된 탓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잘됐소. 우리가 구빨치 투쟁을 할 때 내가 몸살 비슷한 병으로 아주 심하게 앓았는데, 그 동지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사흘을 꼬박 굶었소. 그때 난 동지애가 부모의 정과 맞먹는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소. 내가 그런 동지애를 가질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했고, 혁명투쟁을 하다가 그런 동지와 함께 죽는다면 아무런 아쉬움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지숙은 하대치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 동지는 사람으로도 예사 사람이 아니고, 전사로도 예사 전사가 아니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부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걸 보고 무섭기까지 했어요."
안창민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이지숙은 안창민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공적인 이야기로 끝나는 만남이었지만 이지숙은 단둘이 보낸 시간 그 자체를 소중하게 마음에 담았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부터 새로 시작일 거요. 서로 건강 지킵시다."
안창민이 멀리 눈길을 보낸 채 담담하게 말했다.
"네, 조심하세요."
이지숙도 안창민이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을은 어느덧 변색해 사위어가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마음으로 한곳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지숙은 혼자 후방부로 돌아가면서 계속 목메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이름 모를 시체들이 자꾸만 눈앞에 밟히고 있었다.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도 투쟁은 이제부터 또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번 꼬인 역사를 바로잡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인가... 인민해방의 표적을 향해 불화살이 되어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되짚을 때마다 그녀는 가슴 쓰라리고 저릿거리는 통증이 주체할 수 없는 통곡으로 사무쳐오는 것을 느꼈다. 백삼십 여만 명의 친일반민족세력으로 뭉쳐진 반인민적 반동정권을 쳐 없애기 위해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컸다. 입산투쟁으로 죽어 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자들의 강압적 동원으로 또 수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입산투쟁으로 죽어가는 것은 그래도 보람차기나 했지만, 그자들의 폭압에 끌려 나가 죽는 인민들에게는 억울함뿐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에게 인민을 폭압할 수 있 폭력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자들에게 미국이 없었으면 인민은 단 한 사람도 피 흘리지 않고 그자들을 모두 처단해 인민해방을 맞이했을 것이다. 미국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민족의 적이고, 인민의 적이었다. 그러니까 민족해방전쟁이나 빨치산투쟁은 곧 미국과의 싸움이었다. 빨치산들 중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죽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 비무장이 태반인 후방부는 어찌될 것인지 이지숙은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새로운 투쟁을 위한 대비는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병기과가 어디인지 모를 곳에 비트를 장만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병기과의 비트는 땅속을 파고 들었다는 말이 있었다. 백아산지구와 마찬가지로 조계산지구도 해방구를 절반 가까이 잃은 상태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대책을 세운 것이 병기과의 보호였다. 적과의 싸움에서 총알은 밥보다 더 우선했던 것이다. 그래서 병기과는 땅속에 굴을 파서 잠적했다. 그것도 만일에 대비해서 여러 곳으로 분산시켰다. 김종연과 서인출도 두더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의 비트는 실개울이 흐르는 어느 골짜기의 비탈에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산골짜기고 비탈일 뿐이었다. 키가 크고 작은 잡목들이 숲을 이루고, 여러 가지 잡풀들이 엉켜 무성하고, 여기저기 바위들이 널려 있는 평범한 산골짜기의 하나였다. 실개울도 수량이 적어서 별달리 눈에 띄지 않고, 그저 있는 듯 만 듯했다. 그 골짜기에 병기과 비트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오는 사람까지도 믿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특색도 특이함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곳 어디에 총알을 만들어내는 굴이 있는지 찾아낼 수도 없게 산에는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병기과의 비트는 골짜기의 중간 못 미쳐, 실개울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왼쪽 비탈의 서너 개의 바위가 널린 곳에 있었다. 그 지점의 특색을 굳이 찾자면 서너 개의 바위였다. 산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바위들 중의 하나가 비트의 출입문이었다. 그 골짜기에 병기과의 고정비트가 들어선 것은 비트 설치조건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첫째, 물이 있었다. 절대조건인 물이 있으되 적들이 의심을 품을 만큼 큰 개울이 아니라 그냥 지나치고 말 보잘것없는 실개울이었다. 그러나 비트 옆의 실개울 바위 아래 파놓은 웅덩이에는 비트요원들이 넉넉하게 마시고도 남는 물이 언제나 괴어서 넘치고 있었다. 둘째, 골짜기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첫눈에 은신하기 좋게 느껴지는 곳은 적들의 눈에도 똑같이 느껴지게 되어 있었다. 은신의 가능성이 희박한 곳일수록 은신의 최적지였다. 굴 안은 너덧 평의 넓이였다. 천장은 서서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높았고, 무너지는 사고를 대비해서 통나무들을 세 줄로 가로질러 기둥으로 받쳐놓고 있었다. 통나무 기둥에 걸린 네 개의 석유등잔이 굴속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여섯이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이번에 땅속으로 숨어들면서 여자들은 다 제외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밤낮을 바꾸어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굴속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지만, 낮에 작업을 하다가 혹시라도 무슨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 토벌대에게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을 아예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밤이 아니고서는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물을 떠오고, 대변을 보고 하는 일들은 다 밤에 이루어졌다. 며칠 간격으로 후방부에서 식량과 재료를 가지고 와서는 총알을 가져갔다.
"해를 못 보고 살아서 긍가 어쩐가 속할라 워째 요리 찌푸르둥둥허기도 허고 뻑쩍찌끄리 허기도 허고, 참말로 요상시럽네웨."
김종연이 윗배를 문지르며 나오지 않는 트림을 하려고 목을 늘였다 줄였다 하고 있었다.
"벨 요상시런 소리 다 듣겄네. 해허고 배허고 무신 상관이여, 상관이. 밥얼 넘버덤 많이 묵을라고 씹을 새도 웂이 막 넘게서 그렇제라."
배삼성이 엇지게 질러대고 나왔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가 일부러 말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니 시방 누구 복창 터치자는 심뽀요? 나가 동무맨치로 속이 시커먼 줄 아시오?"
김종연이 지체 없이 맞받아쳤다.
"허, 나가 속이 옥양목맹키로 희연헌 것이야 여그 동지덜이 먼첨 아는 일이고, 배가 그리텁터그리허고 묵지그리헌 것은 해럴 못 바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도 오래 니노지 맛얼 못바서 그런 것이 아니겄소?"
"이, 지속 짚어 넘 속이드라고, 동무넌 니노지럴 굶으면 잠지에 이가 기는 것이 아니라 배가 그리 되는갑소이. 잠지 뿌랑구가 뱃속꺼지 뻗친 빙신이 아니까?"
김종연이 언제 배가 거북하다고 했냐 싶게 배삼성을 몰아댔다. 누군가가 쿡쿡 웃었다.
"얼랴, 나럴 생짜로 빙신 맹글어뿌네?"
배삼성이 어이없어했다. 그는 역시 김종연의 빨리 돌아가는 머리를 당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김종연의 말꼬리를 먼저 잡고 들었지만 번번이 말문이 막혔다.
"속이 안 좋먼 소금 한 주먹 묵제 그려."
서인출이 염려스러운 듯 김종연을 쳐다보았다.
"아니시, 소금도 양석인디."
김종연은 목을 늘이며 헛트림을 하고는,
"짐승도 해를 못 보먼 죽는다든디, 사람이 해럴 안 보고 을매꺼지 살아지는지 누구 아는 사람 있소?"
그는 장난기 없이 말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김 동무, 여길 그리 갑갑하게 생각지 마시오. 내가 어떤 외국소설에서 읽었는데, 하늘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지하 감방에 갇혀서 몇 십 년을 살더군요. 그에 비하면 우린 밤하늘도 보고 하니까 평생 동안 아무렇지도 않을 거요. 김 동무가 여기보다는 자꾸 화선투쟁에 나서고 싶어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아니겠소? “
공과대학 출신인 조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메, 쪽집게 무당이시요이. 동무, 동무가 과장 동무헌테 말혀서 워찌 화선으로 잠 나갈 수 웂을께라?"
김종연은 금방 애걸조가 되었다.
"김 동무, 이 일에 그냥 마음 붙이시오. 갈수록 형편은 어렵게 되고, 총알은 더 많이 필요하게 되고, 기술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할 형편 아니오? 화선투쟁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총알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어떻게 화선투쟁이 이루어지겠소. 모두가 중요한 혁명 사업이니까 김 동무가 성질을 좀 누르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도록 하시오."
"항, 총알이 핑핑 날아 댕기는 화선에 비허자먼 여그사 목심 보존허기가 용궁이제."
배삼성이가 얼른 토를 달았다.
"먼 소린지 몰르겄네. 용궁이야 토꽹이가 목심이 경각에 달린 딘디, 그 무신 뜽금웂는 무식헌 소리여!"
김종연이 화풀이하듯 쏴질러버렸다. 서너 사람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정작 멀뚱한 얼굴로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것은 배삼성이었다.
20. 포로의 섬, 거제도
땡볕이 내리쬐는 남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논에서 일을 하다 말고 나오는 듯 베잠방이를 걷어붙인 늙수그레한 남자들이 많았고, 여자들도 먼지 앉은 머리 수건을 쓴 채 땀 찬 저고리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들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한창 유행 바람이 불고 있는 파랑, 초록, 분홍의 나일론으로 치마저고리를 해입은 여자들이 몇 명씩 눈에 띄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은 농사일과는 아무 상관없이 읍내 안통에서 사는 여자들이라는 것은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어른들 사이에는 국민학생들도 꽤나 끼어 있었다. 어른들의 무표정과는 달리 아이들은 그저 시시덕거리고 킥킥거리며 장난질을 해대고 있었다. 어른들 사이를 뛰고 쫓고 하다가 넘어지기도 했고, 먼지를 일으켜 야단을 맞기도 했다.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마이크 시험 중. 하나, 둘, 셋, 마이크 시험 중."
확성기가 삑삑 울다가, 지글지글 끓어대다가 하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 바쁜 농새철에 아무 묵자 것도 웂은 대회 헌다고 사람덜얼 요리 볶아치고 이려, 이거."
한 남자가 곰방대를 짚신 뒤축에 짜증스럽게 두들겨댔다.
"와따, 말 그리 막 허덜 마씨요. 이장 말이 애국헌다고 안 그럽디여?"
옆의 남자가 말꼬리를 야릇하게 꼬았다.
"니기럴, 정전반대허고 쌈얼 더해갖고 북으로 쳐올라가자 그것인디, 쌈얼 더해갖고 넘 자석덜 씨럴 몰리자 그것이여, 시방?"
처음 남자가 벌컥 화를 냈다.
"아덜이 군대 나갔소?"
"나가 한나라먼 말얼 않겄소. 둘이나 끌려나갔는디, 한나가 폴세 죽어 뿐졌소. 나가 여그나와서 쌈 더허자고 허는 것은 남치기 자석 하나까지 죽이자는 것인디, 요것이 무신 지랄이요. 금메. 두 자석 다 죽어 북진통일인가 머신가 허먼 나가 졸 것이 머시가 있소. 나헌테 금이 생길 것이오, 은이 생길 것이오. 우리겉은 농새꾼이야 불쌍허게 키운 자석덜만 잃어뿌렀제 될 일언 웂고, 다 권세 잡고 돈 있는 눔덜만 좋아라 살판나는 것 아니겄소."
"글고 봉께 이 자리가 영판 고약시럽겄소이. 워째 뒤로 빼고 오지 말제 그랬소."
"허! 요 시상얼 다 암시로도 그리 말허요? 한 집서 한 사람씩 나오게 딱 정해놨는디, 나가 속 안상헐라고 마누래 내보내 천불 끓게 맹글겄소? 나가 당허는 게 낫제라."
"그 말이 속 짚은 말이오. 워쨌그나 장성헌 아덜덜 둔 집이 근심 걱정 잘날 웂은 시절이요."
"글치도 않소. 우리맹키로 웂이 사는 집구석덜이나 그렇제 권세 있고 돈 있는 집구석덜이야 호강날라리 아니오? 권세로 돈으로 뒷구녕으로 빼돌리고, 그리 안돼 군대에 나가드라도 총 맞어 죽지 않을 안전헌 디로 빼돌리니 무신 근심 걱정이 있겄소. 요런 썩어빠진 시상에서 웂이 사는 사람덜 자석만 죽여감서 북진통일허면 머허겄냐 그것이오. 있는 집 자석덜만 존 일 시키는 것 아니겄소? 그런디 멀라고 더 싸와라."
"아이고 말 조심허씨요. 탈 만내겄소."
"탈만내먼 빨갱이로 모는 것인디, 나를 최소한도 그리는 못허게 되야 있소. 빨갱이허고 싸우다가 아덜 한나가 죽었고, 또 한나가 싸우고 있응께로!"
남자가 오기에 차서 말하며 담배쌈지를 거칠게 꺼냈다.
"우리 아덜도 군대에 나가 있는디, 말이 영판 아구가 잘 맞소이."
한 여자가 그 남자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그러요. 찬찬히 들어봉께 말에 꽝아리가 든 것이 아조 속이 씨언허요. 나도 동상은 노무자에, 아덜언 군대에 끌려나갔소. 우리겉은 사람덜헌테 아무 이문도 웂은 전쟁 싸게 막음허는 것이 상책이오."
다른 남자가 또 말을 보태왔다.
"아, 아, 친애허는 벌교 읍민 여러분, 잠시 후에 정전반대국민대회를 시작허겄습니다. 인자부텀 잡담 금허시고 장내 질서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확성기에서 이런 말이 울리자 운동장에 가득 찬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끼리끼리 둘러섰던 사람들이 조회대 쪽으로 돌아서고, 장난질하는 아이들을 단속하고 했다.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곧 대회를 시작허겄습니다."
운동장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아갔다.
"에에, 지금부터 벌교읍 정전반대국민대회를 시작허겄습니다.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올리겄습니다. 읍민 여러분께서는 게양대의 국기를..."
의례적인 식순을 거쳐 읍장이 단상으로 올라섰다.
"친애하는 읍민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북괴 김일성 공산도당들을 쳐부수어 멸공 북진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 정전회담이라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 터지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 전 국민들이 궐기하여 그 반민족적 행위를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이 기회에 기필코 멸공북진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섭니다. 북괴 김일성 도배들은 작년 유월 이십오일을 기하여 자유롭고 평화로운 우리 대한민국을 불법 남침하여 이 나라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이는 천인공노할 동족살상의 만행을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그 천인공노할 만행에 지방폭도들까지 합세하여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을 때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 각하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공산도배들을 저어 압록강까지 무찔러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멸공통일을 이룩하여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릴 날을 목전에 두고 중공 괴뢰집단의 불법 침략으로 우리가 몽매에도 바라던 멸공통일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공 괴뢰들은 잔인무도한 인해전술로 우리의 강토를 다시 피로물들이고..." 읍장의 열띤 연설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엿장시도 아니겄고, 헐말만 딱 허제 아그덜도 다 아는 일얼 워째 저리 질게 닐이고 저러는고?"
한 남자가 짜증을 냈다.
"금메 말이요, 헐 말만 딱 허고 만세 삼창 불르먼 될 것인디, 요리 날 푹푹 쪄대는 판에 벨새 날아가는 소리 다 허고 앉았소."
다른 남자가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연설은 읍장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서장이 올라오고, 유지대표가 비슷한 내용을 읽어대고, 운동장의 사람들은 땀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간에 송경희는 최서학과 마주앉아 있었다.
"어지간하들 떠드네요. 다 그게 그 소린데."
송경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최서학의 집은 일정시대부터 부자들만 모여 사는 '본정통'이라서 남국민학교에서 울려대는 확정기 소리가 다 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계속 저렇게 해야 돼요. 빨갱이들의 사상세뇌라는 것이 뭐 별겁니까? 똑같은 말을 골백번씩 되씹어서 무식한 대가리들 속에다 제 놈들 생각을 심는 거지요. 뻔질나게 학습이란 걸 시켜대고, 노래를 가르쳐대고 하는 게 다 그 방법이죠. 그런 식으로 빨간 물을 먹어 대가리가 완전히 돌아버린 것들은 입산을 했고, 나머지가 저 운동장에 모인 것들의 태반입니다. 거기다가 빨갱이들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으로 선심을 쓰는 바람에 저것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압니까? 무서워서 겉으로는 표를 안 내서 그렇지 속으로는 배상금을 안 내도 되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무식하고 천한 것들이 불로소득이나 바라면서 속에는 시커먼 도둑놈 심뽀들을 품고 있어요. 저것들 생각을 싹 뜯어고치기 위해선 우리 쪽에서도 똑같은 말을 빨갱이들 두 배 이상으로 강조해야 하고, 저것들이 꼼짝을 못하도록 강력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최서학의 어조는 아주 단호했다.
"말 듣고 보니 그렇군요. 역시 판사님 되실 분이라 생각이 남다르네요."
송경희는 눈이 사르르 감길 듯한 눈웃음을 보냈다. 그 눈흘김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통학생들을 사로잡았던 생김과 함께 너무 선정적이었다. 최서학은 가슴이 꿈틀하며, 아휴 저걸 그냥! 하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럴 용기가 없었다. 상대방이 손아귀에 잡힐 만한 복숭아가 아니라 수박 덩이만큼 커보였던 것이다. 잘못 덤벼들었다가 놓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서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감정을 눌렀다.
"저 사람 같지도 않게 천한 것들이 인공 치하에서 어떻게 나대는지 그 꼴들 똑똑히 봤죠? 그런 놈의 세상에서 평생 살겠던가요?"
"어머,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잘사는 사람들은 무조건 저희 놈들 원수라니, 도대체 그 따위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어딨어요. 잘사는 사람들은 다 그만큼 잘 살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누가 저희들 보고 못살라고 했나요? 저희들도 잘 살려고 노력을 할 것이지 왜 남의 것을 거저 갖겠다고 덤벼요, 덤비길. 그게 어디 인간들이에요, 사람 잡아먹는 짐승들이지요. 논밭 내줘서 기껏 저희들 먹여살려주니까 그 은혜, 그 고마움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주인한테 낫 들고 덤빈 게 소작인들이고, 머슴들 아니에요? 광주 그 유명한 현 부자가 누구한테 죽었나요? 머슴이잖아요.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평생을 살아요. 차라리 죽지요. 빨갱이들은 절대로 안 돼요. 서학씨도 어서 판검사가 되세요. 그래서 그런 세상이 다시는 못 오게 빨갱이들을 처단하는 법을 엄허게 시행하세요." 송경희는 제풀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빨갱이들을 아무리 욕해대도 언제나 배고픔 같은 부족함은 남았고, 그래서 그런지 욕을 해댈 때마다 기운이 새롭게 솟기는 것을 그녀는 느끼곤 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그러리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에 맞습니다. 그래야 경희씨 아부지나 우리 아부지 원수를 갚을 것 아닙니까. 내 다리에 흉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빨갱이들에 대한 복수심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두고 보세요."
최서학은 일부러 자신과 송경희가 같은 피해자 입장임을 강조했다.
"어머, 고마워요. 우리 아부지 원수까지 갚아주실 생각을 하시다니..."
갑자기 송경희의 목소리가 울먹거림으로 변하면서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최서학은 순간적으로 수박이 복숭아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열기가 불두덩에서 가슴으로 뻗어 올랐다.
"경희씨, 우린 어쩔 수 없이 한편입니다. 이건 운명입니다."
최서학의 핏기가 싹 가신 긴장된 얼굴로 무슨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가 싶더니 송경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러세요, 왜..."
송경희는 형식적인 몸놀림으로 최서학을 밀어내는 척하고 있었다.
"난 더 참을 수 없소. 양효석 같은 천한 새끼가 경희씰 넘보는 판인데 내가 뭐가 모자라는 게 있소."
송경희가 밀어내는 것보다 몇 배의 힘으로 최서학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뜨거운 소리로 말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어요, 양효석 같은 것."
송경희는 최서학을 떠밀었다.
"안 돼요, 아직은 안돼요."
그녀는 뒤로 넘어가며 계속 남자를 거부하는 몸짓을 지었다. 그럴수록 최서학의 힘을 강해졌다.
"괜찮아요, 우린 결혼하는 겁니다."
최서학의 다급한 손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안 돼요,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요."
그녀는 다리를 꼬아 붙이며 최서학의 가슴을 떠밀어 올렸다.
"염려 마요. 고등고시는 내 필생의 목적이니까."
뜨겁게 들뜬 목소리만큼 최서학의 손이 송경희의 허벅지를 질정 없이 더듬고 있었다. 송경희는 짜릿거리는 성적 자극을 느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날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믿어요."
"맹세합니다!"
"어디다요?"
"하늘에."
"난 하늘을 안 믿어요."
송경희는 갑작스럽게 센 힘으로 최서학을 떠밀었다.
"아니, 글먼, 글먼, 경희씨 아부지허고, 우리 아부지헌테 맹세허겄소."
여지껏 송경희를 따라 서울말을 흉내 내고 있던 최서학의 입에서 고향 말이 튀어나왔다. 송경희는 적이 만족감을 느꼈다. 맹세의 대상도 그럴 듯했고, 평소에는 그리도 듣기 싫어했던 사투리에서도 문득 최서학의 진심을 느꼈던 것이다.
"참말인가요?"
"맹세헌다니께요. 경희씨가 누군디... 우리가 결혼허먼 나가 끝없는 영광이제라."
최서학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누가 보면 어떡해요."
"공부에 방해된께 나가 불르기 전에는 아무도 안 오요."
"그래도 싫어요. 문 잠그고 와요."
"잉, 그러제라."
최서학이 벌떡 일어났다. 송경희도 몸을 일으키며 최서학을 살짝 곁눈질했다. 그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울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무료하게 지내던 송경희가 중도방죽 건너편 방죽에서 최서학을 만난 건 서너 달 전이었다. 서로가 아는 사이였지만, 중학교 때는 서로 피하기만 했고, 입장이 자유로워진 대학생이 되어 그렇게 한적한 장소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최서학이 인민군에게 총상을 입은 것이며, 서로의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며, 같은 입장을 확인해가며 꽤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다보니 송경희의 마음에서는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최서학이 고등고시에 합격 못할 리가 없었고, 그럼 판검사 아내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을 서울에 버려놓고 간 최인석에게 단단히 복수를 하게 되고... 최인석이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다가 추풍령 언저리에서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송경희는 그런 종합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방문을 잠근 최서학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성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겁탈 당하듯이 남자의 일방적 욕구만 채워줄 수 없었다. 성의 쾌락은 공평하게 나누어져야 하고 그리고 즐기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남자의 감정을 일단 진정시키고, 옷을 하나씩 벗으며 감정이 고조되고, 서로의 알몸을 보고 감정의 불꽃이 튀고, 그 불꽃이 불길이 되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
"사랑이 성스러운데 그 행위를 겁탈 당하듯 하고 싶지 않아요. 서학씨가 강간범이 아니잖아요."
송경희는 교태를 적이는 눈웃음을 치며 최서학의 손을 끌어 자신의 블라우스 앞가슴에 대주었다.
"미안허요, 나가 경험이 없어서..."
최서학의 목소리가 더듬거려지고 있었다. 최서학의 손은 잘게 떨리고, 그 손이 여자의 옷을 벗기는 솜씨는 서툴렀다. 그러나 살결 흰 송경희의 젖가슴이 드러나고, 불두덩마저 드러나 알몸이 되었을 때 그는 다시 불덩어리가 되어 자신의 옷은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말았다.
"아으! 아, 사랑해요..."
그녀는 최서학의 속살 깊이 받아들이며 그날 밤에 쏟아져 내린 무수한 별들을 보고 있었다. 그 별들과 함께 김범우의 얼굴도 쏟아져오고 있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김범우가 민기홍을 만난 것은 부산의 포로수용소 병원에서였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도 한순간 멍하니 있다가 손을 맞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 그런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은 서로가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김형, 이게 어찌 된 거요. 포로수용소에다, 거기다 병원에 누워 있으니."
민기홍은 미처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어조로 말하며 붕대로 칭칭 감긴 김범우의 오른쪽다리를 찡그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맞소, 의용군에 끌려 나갔다가 부상을 당했군요, 쯧쯧쯧쯧..."
민기홍은 김범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 김범우는 조용히 웃음 지었다. 팔에 두른 기자 표시의 완장에 어울리도록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해답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예비된 답안이었다. 아니, '끌려 나갔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보면 반공적 모범답안이기도 했다. 김범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웃음 짓고 있었다.
"김형, 언제 의용군에 끌려 나갔고, 어디서 부상당했소?"
민기홍은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들며 물었다. 이 사람이 안부를 묻자는 거야, 취재를 하자는 거야. 김범우는 불쾌감을 느꼈다.
"민 선배님, 전 그 반댑니다."
김범우는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저어보였다.
"반대라니, 그럼 솔선해서 의용군에 나갔단 말이오?"
민기홍이 놀라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목소리가 너무 크면 난처한데요."
김범우는 씁쓰름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로 카드에는 분명히 민기홍의 말대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김 형,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얘기해보시오."
민기홍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가까이 다가앉았다. 김범우는 이미 민기홍의 입장을 확실하게 파악했으므로 이야기할 흥미를 잃고 있었다.
"다 얘기하자면 너무 길고요, 이학송 선배가 해방일보에서 일했고, 제 친구 손승호란 사람이 서울시당에서 일한 걸 알고 계십니까?"
"뭐라구요!"
민기홍이 안경을 또 다급하게 밀어 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저도 그렇게 함께 시작된 일입니다."
"어찌 모두 그쪽을 택했단 말이오?"
"선배님은 어째서 반대쪽을 택했습니까?"
"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소. 난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으니까."
민기홍은 고개까지 저었다.
"그건 지식인의 기만이고 자기 합리입니다. 선배님은 지금 철저하게 한쪽 이데올로기를 위해 종사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말을 자꾸 썼는데, 그건 반공주의에 시작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자를 계속하시는데, 전쟁 이후 지금까지 반공주의에서 단 한 치라도 벗어난 기사를 써보신 일이 있습니까?"
‘"아! 김 형..."
김범우는 민기홍의 눈이 반짝 빛난다고 느꼈다.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는 아래로 떨구어졌다.
"죄송합니다, 너무 고약하게 말해서."
"아니오. 김 형이 정곡을 찌른 것 같소. 실은 그런 점들이 나를 괴롭히고, 나는 그런 점들을 이겨내려고 괴로워하고, ... 그러면서 변명도 하고, 저질러진 잘못에 대한 편리한 명분도 찾아내고, 그러다 보니 잘못을 예사로 감추거나 덮게 되고, 결국... 내 주량이 늘어난 것만큼 난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오. 앞장서서 나서진 않았지만 결과가 그리 됐으니 뭐라고 변명할 말조차 없소. 행위의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차이가 동기의 차이를 해명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오."
민기홍은 괴로운 듯 그러나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시인하고는,
"그런데, 세 사람은 의논해서 그렇게들 행동을 결정한 거요?"
그는 눈길을 들며 물었다.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전쟁은 일자 터지면 그 누구에게도 방관을 용납하거나 중립을 허용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어느 쪽으로든 입장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니까요. 그것이 서로의 이익을 앞세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고 사회개혁의 혁명성을 가진 민족세력과 반민족 세력 간의 전쟁일 때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은 어떤 입장에 서야 하겠습니까?"
"알겠소, 무슨 말인지. 민족의식이나 사회의식이 그렇게들 강했으니, 충분히 이해할 만하오."
민기홍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런데, 이형은 어찌 됐는지 혹시 소식 아시오?"
이학송의 소식을 물었다.
"글쎄요, 지난 일월에 서울에서 잠깐 만났다가 헤어졌지요. 다시 후퇴를 할 때 저처럼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아마 저쪽으로 무사히 갔을 겁니다."
"아니 그럼, 김 형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저쪽으로 갔을 거라는 말 아니오?"
민기홍은 불쑥 말을 해놓고는 그만 후회했다.
"..."
입을 꾹 다문 김범우는 민기홍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민기홍이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중단되었다.
"붕대를 감은 걸 보니까 부상이 심한가 보지요?"
민기홍이 물었다. 김범우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그런 편입니다."
"얼마나 다쳤소?"
"세 군데 파편상을 입었는데, 무릎관절 부분이 좀 말썽입니다."
"파편이 관절에 박힌 거요?"
"아닙니다, 그 옆인데 염증이 관절에 퍼져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관절이면 중요할 텐데... 혹시 다른 뼈에는 이상이 없소?"
"괜찮습니다."
"다행이오. 오늘은 바빠 이만 돌아가야겠소. 또 들를 테니 건강 잘 지키시오."
민기홍은 김범우의 어깨를 꾹 눌러 잡았다 놓고는 돌아섰다. 김범우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취재를 나왔느냐는 의례적인 물음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세월이 갈수록 그와의 간격이 길어지리라는 것을 김범우는 예측하고 있었다.
"민 기자님과 친구시라면서요?"
몇 시간 뒤에 간호장교가 전과는 다르게 살짝 웃기까지 하며 물은 말이었다. 김범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런 분의 친군 줄은 몰랐어요."
김범우는 간호장교의 경박한 감정노출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민 기자님이 친구시라구요."
군의관이 간호장교와 똑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김범우는 역시 고개만 끄덕였다. 민기홍이 병원을 떠나면서 한 일이 무엇인지는 간호장교의 물음에서 벌써 확실해졌던 것이다. 그 뒤로 군의관과 간호장교는 웃음을 앞세운 치료를 해주었다. 그러나 다시 오겠다던 민기홍은 더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관절과 그 부위를 재수술 받았다. 그러느라고 이십여 일을 더 병원에 머물렀다. 그래도 민기홍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거제도로 떠나게 되었다. 재수술도 민기홍의 힘이었다는 것을 김범우는 잊지 않았다. 재수술까지 했지만 다리는 끝내 완치되지 않았다. 세 군데에 박혔던 파편들을 빼낸 흉터가 허벅지에서부터 장단지까지 흉측스럽게 찍힌 다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룩거려야 했다. 더 이상 어찌 할 방법이 없다는 군의관의 말을 듣는 순간 김범우는 그때까지 지켜왔던 삶의 의지가 뚝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부러진 의지에 땜질을 해나가기 시작한 것은 도무지 자신의 다리 같지 않은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기 연습을 시작하면서였다. 파편이 머리나 가슴에 박혔을 수도 있다. 허벅지에서 겨우 일 미터 남짓한 거리가 아니냐, 그랬으면 즉사였다. 아니지, 그보다 더 가까운데, 옆구리나 복부에 박혔을 수도 있다, 그랬어도 즉사였다. 그나마 다리에 박힌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허나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내 인생도 이제 절름발이가 아닌가, 글쎄... 아니야, 절름발이도 못 되고 다리를 몽땅 잘린 사람들도 얼마나 많으냐, 한 다리만이 아니고 두 다리가 다 잘린 사람들도 있잖은가, 나도 한쪽 다리를 잘릴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어, 장딴지에 박힌 파편은 뼈에서 일 센티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 파편이 이삼 센티만 더 파고들어 뼈를 동강냈어봐, 그 아슬아슬함에 의사도 혀를 내두르지 않았나, 그리 됐으면 영락없이 다리 하나는 없어졌던 거야, 이만하기 얼마나 다행이냐, 글쎄... 그런데 이런 절름발이 몸으로 뭘 해먹고 살지, 절름발이가... 할 일이... 아 그래, 서민영 선생이 계시구나, 서민영 선생... 그분처럼 사나... 글쎄 아직 너무 젊고, 그런 일이 아니고 보다 적극적인 일을 해야 하는 건데... 아니야,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 그보다 먼저 할 일은 내가 절름발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일이야, 나 스스로 그 생각에서 해방돼야 하고,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날 해방시켜야 해. 병신이라고 생각해선 안 돼, 창피스럽게 생각해서도 안 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당당해져야 해, 의식이 멀쩡한데 절름발이 정도가 문제야, 절름발이의 상처가 의식을 병들게 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그건 자포자기의 허약일 뿐이다... 김범우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불편한 다리를 끌며 날마다 스스로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집중폭격을 당해 부상을 입고 부대에서 낙오된 상태로 피투성이의 다리를 붙들고 미군들에게 외쳐댔던 자신의 부끄러운 거짓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부상자는 포로 취급을 하지 않고 사살해 버린다는 소문 앞에서 온 힘을 쏟아 발악적으로 외쳐댔던 자신만 아는 거짓말- 그건 살아나야 한다는 충동에서 순간적으로 저질러진 일이었다.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혀 그리 부끄러운 거짓말을 해서 살아났으면 그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서 똑바로 정신을 차려얄 게 아니냐고 자신을 힐난했다.
서울을 거쳐 서부전선으로 후퇴하던 부대가 포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것은 삼월 십육일 금촌 금방에서였다. 치열한 포 공격을 받은 부대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흩어진 병사들은 아무데나 마구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사생결단 북쪽 방향으로만 내닫고 있었다. 김범우는 서너 명과 함께 개울둑을 타넘고 있었다. 그런데 폭음과 동시에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했다! 하는 짧은 의식이 끝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개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견딜 수없는 통증과 함께 오른쪽 다리는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일어나려고 했다. 뒤에서는 적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다가 비명만 지르고 도로 주저앉았다. 지팡이가 필요했다. 주의를 둘러보았다. 지팡이 할 막대기는 보이지 않고 함께 뛰었던 인민군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셋이었는데, 모두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개울둑 위에 불쑥 나타난 것은 총을 겨눈 미군들이었다.
"잠깐! 쏘지 마, 쏘지 마! 난 인민군이 아냐. 대한민국 국민이야.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 나간 대한민국 국민이란 말야!"
김범우는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기를 쓰며 외쳐대고 있었다. 응급처치만을 받아가며 부산의 수용소까지 도착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 그 동안에 파편들이 박힌 상처부위는 염증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릎 가까운 상처에서 일어난 염증이 관절에까지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범우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가며 거제도수용소로 옮겨진 것은 오월을 하루 남겨 놓은 날이었다. 부상을 당하고 나서 정반대 방향인 남쪽 끝 섬에 도착하기까지 두 달 반 정도가 흘러가 있었다. 고향이 남쪽이고, 의용군으로 분류된 김범우는 '6'자가 앞에 붙어 두 자릿수의 일련번호를 이루고 있는 '62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북쪽 출신 포로들은 '7'자가 앞에 붙어 일련번호를 이루고 있는 수용소에 분리시키고 있었다.
김범우는 자신이 부상을 당하고도 포로로 살아나게 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보다는 그 말을 '영어'로 외쳐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총을 겨눈 미군들이 즉각적으로 나타낸 반응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고, 조사과정에서도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 것에 대해 꽤나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김범우는 그들에 대한 오랜 불신을 안은 채 영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에 쓰디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거짓말은 영어뿐만이 아니라 사병에게는 계급이 없는 인민군의 군복으로 그들을 수월하게 속여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의용군으로 위장하지 않고 자신의 행적을 곧이곧대로 늘어놓았다간 미군들의 총이 불을 뿜을 것은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거제도수용소는 철조망을 둘러쳐 네 개의 큰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한 구역에는 여덟 개의 수용소가 들어 있었으며, 한 개의 수용소에는 육천 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수용소의 막사 하나에는 오십 명에서 육십 명 사이의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드넓게 펼쳐진 수용소 전체의 면적은 어마어마한 넓이였고, 그 넓은 땅을 똑같은 모양의 막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제도라는 섬 자체가 수용소나 마찬가지였고, 그 수천 개를 헤아리는 시멘트 막사들은 섬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었다. 단위수용소는 거제도만이 아니라 한산도 아래쪽에 있는 봉암도와 용초도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십오만 명을 헤아리는 포로들과 그들을 경비하는 이만의 경비병들을 기거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거대한 포로의 섬 한구석에 박혀 아직 회복되지 못한 의식 속에 갇혀 있었다. 무료하고 구름 낀 나날의 삶 속에서 그가 억지 정성을 들여 하는 일은 걷기 연습이었다.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다리가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게 하기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건 의사의 경고를 겸한 권유였다. 그는 걷기연습과는 달리 막사 안에서 조심스러우면서도 끈끈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상의 대결과 갈등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입장을 취했다. 수용된 지 얼마 안 되는데다가, 의식의 상처가 아직 덜 아문 상태에서 그 문제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양쪽에서 은밀한 접근이 시도될 때마다 그는 조용하게 같은 말을 했다.
"지금 내 꼴을 좀 보시오. 절름발이가 된 충격에 시달리고 있잖소."
그럼 양쪽 사람들은 멋적게 물러서고는 했다. 걷기 연습을 할 때마다 김범우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경비병들이었다. 무장한 경비병들은 미국과 국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미군의 수가 국군보다 두 배는 많았고, 국군은 미군의 지휘 아래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수용소 전체의 구도를 보면서 새롭게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우리의 땅에 미군들이 미국제의 철조망을 치고, 그 안에 우리민족을 십오만 명이나 가두어놓고, 미국의 무기로 경비를 하는데, 국군이 거기에 경비병으로 동원되어 있는 것이 포로수용소라는 곳이었다. 그 기막힌 꼴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전제되고, 작전권 이양이라는 것이 첨가되면서 민족의 해체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그 참담한 민족의 수난과 모멸은 묵살되어버리고, 미군의 행위가 오히려 정당화되고 합법화되고 있었다. 그런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제도의 것이 규모가 제일 클 뿐, 수용소는 부산에도, 광주에도, 논산에도, 영천에도, 마산에도 있었다. 수용소의 그런 모습은 바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반도 땅의 축소판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아낸 일인데, 미군들은 거제도에 철조망을 치면서 이백오십만 평에 이르는 농토와 임야에 쇠말뚝을 박았고, 자그만치 삼천여 채의 집들을 강제로 허물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미리 통고한 일도 없었고, 단 한 푼의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모든 행위는 '공산당을 무찌르기 위해서' 정당화되었고, '작전권 이양에 따른 징발'로 합법화되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농토를 빼앗긴 수많은 양민들은 얼어 죽고 굶어죽어도 어디 가서 배상을 요구하기는커녕 하소연할 데 한곳 없었다. 김범우 자신이 물건도 아니면서 징발당하며 속수무책이었듯이. 도처에서 자행된 강간이 아무 문제가 안 되듯이. 과잉된 파괴와 방화로 저질러지는 초토화도 아무런 시비가 되지 않았듯이. 김범우는 외로운 분노의 불을 끌 수가 없어 혼자 지팡이를 짚고 서서 분노를 깨물었다.
정하섭을 만나게 된 것은 수용소생활 이십여 일이 넘어가고 있는 유월 하순이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정하섭 쪽에서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놀라움과 반가움에 비해서 정하섭에게는 놀라움이 없었던 것이다.
"성함을 보고 선생님인 것을 직감했습니다. 명단에 출생지 기록이 없어서 약간 불안하긴 했습니다만, 역시 선생님이 맞았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
정하섭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럼. 나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구먼. 자넨 몰라볼 정도로 어른이 되버렸네. 그래, 못 만난 지가 벌써 꽤 오래 됐지?"
김범우는 정하섭의 손등을 쓸며 뜻밖의 반가움에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그 반가움은 민기홍을 만났을 때와는 댈 것이 아니었다. 그건 당연한 것이, 민기홍은 정이 든 사이가 아니었고, 정하섭은 제자였고 고향이 같은데다가 전쟁에서 같은 입장을 취한 사이였던 것이다.
"예, 벌써 사오 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리 됐지. 그러니 자네가 이리 변할밖에."
김범우는 대견하고도 감회 깊은 얼굴로 정하섭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하섭의 모습은 김범우가 놀라워할 만큼 건장하고 강인하게 변해있었다. 체구도 남자답게 틀이 잡힌 데다가, 준수하게 생긴 얼굴에는 투쟁생활의 연륜이 무게감 있게 드러나고 있었다.
"선생님,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게 되셨습니까?"
정하섭이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그게 이야기가 좀 길어, 밖으로 나가세나."
김범우는 침상 끝에 눕혀 놓았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아니, 선생님! 그 지팡이는..."
정하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아닐세, 그리 놀라지 않아도 돼. 자네가 눈치 못 챘던 것처럼 서 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걸을 때만 조금 절룩일 뿐이야. 자아, 나가세."
김범우는 밝게 웃으며 정하섭의 어깨를 잡았다.
"부상이 심하셨군요. 절룩이기까지 하시니."
정하섭이 가라앉은 소리로 말하며 부축을 하려고 했다.
"괜찮아, 괜찮아, 자네가 좀 살펴봐주게. 내 생각엔 별로 흉한 것 같진 않은데 남들 눈에는 어떻게 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나 보고 봐달랄 수도 없고, 마침 적임자를 만났네."
김범우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걷기연습을 하다 보니 발 놀리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절름거림도 덜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김범우는 정하섭을 앞서 걸었다. 김범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른쪽 다리는 금방 표가 나게 절름거리고 있었다. 정하섭은 뒤에서 그 모습을 침통하게 바라보며, 아 김범우 선생님의 전성기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놀라며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김범우는 정하섭이가 자신의 이름을 '명단'에서 찾아냈다는 것을 되짚고 있었다. 수용자의 명단을 파악하고 있는 것, 그건 어떤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하섭은 그 조직의 일원이되, 하부가 아니라 상부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떤가, 내 걸음이?"
김범우는 막사를 나서며 물었다.
"예, 전 아주 심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면 그리 흉해 보이진 않습니다. 선생님, 지팡이를 안 짚으면 훨씬 덜해 보이겠는데요, 그렇게는 안 되십니까?"
정하섭은 쾌활하게 말했다. 그건 꼭 가장만이 아니었다. 뜀뛰기를 할 수 없게 된 김범우선생은 분명 자신의 중학생 시절의 김범우 선생은 아니었지만 절름거리는 정도는 예상보다 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응, 자네 말이 의사 말하고 비슷한데, 걷기연습을 꾸준히 해서 지팡이를 짚지 않도록 해보라고 의사가 말하더군."
"선생님, 그렇게 되도록 연습을 많이 하십시오."
"그러지."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김범우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부터 자신이 겪어온 이야기를 간추려서하기 시작했다. 정하섭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 듣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집중력이 강하게 드러난 정하섭의 모습에서 김범우는 잘 단련된 조직원의 전형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부상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난 여기 있을 몸이 아니네."
"선생님!"
김범우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정하섭은 그를 감격적인 어조로 부르고는,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시 저의 진정한 선생님이시군요. 저는 선생님을 찾아뵈면서, 선생님께서 아마 의용군으로 나오셨을 거라는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졌으니... 선생님의 투쟁을 존경합니다."
그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하고 있었다.
"존경은 이 사람아. 이젠 자네 얘길 듣세."
김범우가 햇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정하섭을 쳐다보았다.
"예, 말씀드려야지요."
정하섭은 간부양성교육을 받으려고 북으로 떠난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논리훈련이 잘된 정하섭은 이야기의 뼈대를 잘 엮어나갔고, 김범우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군관학교에서 이학송이란 기자 분을 만나 선생님 얘기도 나눴습니다."
"아니, 뭐라구?"
김범우는 깜짝 놀라며 정하섭의 이야기를 중단시켰고,
"만주 땅에서 이학송을 만나다니, 정말 세상이란 넓고도 좁구먼."
그는 이학송한테 듣지 못했던 이야기라서 더 신기했던 것이다. 정하섭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김범우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표정이 달라져가며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우리 부대는 임무 상 전진할 때는 앞에, 후퇴할 때는 뒤에 서게 돼있습니다.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해가며 수원을 지난 어느 야산과 야산 사이에서 몇 시간 취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는 동안에 국방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적이 워낙 수가 많았던 것입니다. 저도 그날 포위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기 있을 몸이 아닙니다."
정하섭은 김범우의 말을 흉내 내어 이야기를 끝냈다.
"그렇군, 그래."
김범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하섭도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선생님 오늘 참 즐거웠습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앞으로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재미있었네. 찾아와줘서 고맙네."
김범우는 그의 수용소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묻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서로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정하섭은 열흘 간격 정도로 찾아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62수용소'의 조직부책이었다. 그런데 그는 안부만을 확인하고 갈 뿐 자신을 조직의 일에 연결시키지 않았다. 김범우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짐작하고 있었다. '선생'이라는 것과 '건강'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 태풍이 몰아닥쳤다. 그 태풍의 이름은 휴전회담이었다. 그것은 삽시간에 수용소를 뒤덮고 휩쓰는 해일이고 폭풍이었다. 그 소식을 계기로 포로교환 문제가 표면으로 드러났고, 거기에 맞걸려 사상대결이 노골화되었다. 그 두 가지 문제는 수용소의 모든 수용자들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김범우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해서 포로교환 문제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문제들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는 격랑이 일어나고 있었다. 같은 포로끼리 그런 대결양상을 보이는 것은 어떤 나라의 전쟁에서나 나타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 특이함은 반도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김범우는 팔월의 무더위 속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눈을 아무리 돌려도 보이는 것이라곤 철조망과 막사들과 경비병들뿐이었다. 그 살벌함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즐거움은 정하섭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하섭은 휴전회담 소식 뒤로 열흘 간격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
"이거 참 드럽게 됐소.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맛으로 군대생활 해먹겠소."
정 중령은 쓴 입맛을 다시며 또 술잔을 들었다.
"중령님, 저도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허지만 어쩌겠습니까, 다 잊으셔야죠. 제가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심재모는 정 중령이 당한 그 일을 자신이 당한 것이나 똑같은 심정으로 그를 위로했다.
"심 소령, 내가 이렇게 암담해하고 낙담하는 건 직책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오. 까짓 직책이야 만년묵기가 없는 법 아니오? 난 말이오, 앞으로 군대생활 할 희망을 잃었고, 우리나라 군대가 이래서는 아무 가망도 없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한 거요."
정 중령은 뭉텅이진 한숨을 토했다.
"중령님 심정 제가 잘 압니다. 저도 중령님 말씀에 동감이구요. 허지만 이런 현상은 일시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군대는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군대니까요."
심재모는 확신이 없었지만 상대방을 위로 삼아 이렇게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소만, 가망 없는 일이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미군이 작전권을 틀어지고 계속 그 꼴일 건 너무 확실한 일이고, 전쟁이나 작전권을 찾아오면 그땐 이미 무슨 소용 있는 일이겠소?"
정 중령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댔다.
"도리 없습니다. 일선 지휘관은 우리 사병들이 용감한 것 하나 믿으면서 그날그날 싸움에 이기는 것밖에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위를 쳐다보며 미군이 하는 짓들을 생각하다보면 미군이 적처럼 생각돼 그쪽으로 총 뿌리를 들이대고 싶어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심재모는 순덕이를 생각하며 또 한줄기 증오가 뻗쳐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 심 소령 말이 맞소. 미군이 하는 짓들을 보면 이 전쟁을 왜하는지 의심이 생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오.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우리를 도대체 사람 취급을 안하고 자기들 멋대로 나대는 걸 보면서, 그들이 우릴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인지, 우리가 그들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단 말이오."
"예, 생각이 제대로 박힌 장교라면 다 그런 생각들을 할 겁니다. 미군들의 횡포에서 한 나라 국민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모독감과 증오심을 느낄 때가 너무나 숱하니까요. 그렇지만 당장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약하니까 참는 수밖에요."
"그래요, 참 더럽고 기막힌 일이요. 참는다? 참아야겠지. 한국군 중령이 미군 사병새끼 하나만도 못 돼 개떡이 되는데도, 참는다? 그래 참아야지! 지 놈이 안 참으면 어쩔 꺼야. 그 사병 놈을 향해 총을 쏠 거야, 군복을 벗을 거야. 아무 짓도 못 하잖냔 말야. 그러니깐 참아야지! 참는 게 군자니까. 어허허허허..."
정 중령은 헛웃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들으며 심재모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은 허탈을 느끼고 있었다.
"중령님, 술 인제 그만 드시고 주무십시오. 내일 작전이 또 있잖습니까."
심재모는 정 중령의 손에서 술잔을 뺏었다.
"그래요, 지 아이들이 티껍구 아니꼽게 굴어두 우리가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안 그렇소, 심 소령?"
"예, 맞습니다. 우리가 믿을 건 우리 부하들 밖에 없습니다."
심재모는 정 중령을 일으켰다.
"심 소령, 심 소령은 누구 부하요?"
"바로 중령님 부하 아닙니까?"
"으아하하하하... 심 소령, 앞으로 나 좀 잘 부탁하오."
"예, 선임 대대장님으로 성심껏 받들겠습니다."
"고맙소, 나 심 소령만 믿겠소."
정 중령의 술기운 도는 얼굴에 쓸쓸한 웃음이 스치는 것을 심재모는 보았다. 그날 미군사병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내려치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정 중령의 참모습은 바로 그것이었다고 심재모는 믿고 있었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상 정 중령은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한국군 장교였고, 존경할 만한 선배라고 심재모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사단장이 연대 시찰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전선시찰이라서 심재모는 길 안내를 위해 사단장을 모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사단사령부로 간 심재모는 사단장의 지프로 갈아탔다. 지프의 뒷자리에는 사단장의 부관참모 정 중령과 앉게 되었다. 지프가 사단사령부와 전선의 중간지점쯤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경적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리고 커다란 차체가 지프를 곧 덮칠 것처럼 하며 트럭이 아슬아슬하게 추월해 갔다. 그 바람에 지프가 기우뚱했다. 운전병이 반사적으로 핸들을 급히 꺾었다가 되돌린 때문이었다.
"저 새끼 저거..."
핸들을 돌려대는 몸짓과 함께 운전병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였다. 지프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앞에 앉은 사단장이며 뒤에 앉은 두 사람의 몸이 요란하게 조리질을 당한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앞지른 트럭은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려가고 있었다. 천장덮개를 했을 뿐인 지프가 그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저 앙키 새끼, 저 새끼 눈구멍엔 별판도 안 보이나?"
운전병이 백미러에 눈을 고정시키며 내뱉은 소리였다. 운전병은 그 경황 중에서도 앞의 트럭이 미군 것임을 식별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백미러로 뒷자리를 보며, 저걸 그대로 둘 거냐고 항의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백미러를 통해 마주친 운전병의 눈길에서 그런 항의를 느꼈던 것이다. 옆의 부관참모도 그것을 못 느꼈을 리가 없을 것 같아서 심재모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부관참모가 자신처럼 운전병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운전병이 내뱉은 말에도 그 항의는 똑같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정 중령의 얼굴은 벌써 불쾌하게 변해 있었고, 심재모와 눈길이 마주치자 눈썹이 꿈틀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사단장 각하, 저건 도저히 방임할 수가 없습니다."
정 중령이 어깨를 굽혀 앞에다 대고 한 말이었다.
"음, 고약하긴 고약하군."
사단장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저 트럭은 현재 비었습니다. 작전을 수행중인 것도 아닌데,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처하게 해주십시오."
정 중령은 또 어느새 트럭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해놓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트럭이 일으킨 흙먼지가 사정없이 지프로 몰려들었다.
"그래, 알아서 하시오."
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중사, 저걸 잡아라!"
정 중령이 기운차게 명령했다.
"옛, 알겠습니다."
운전병이 다부지게 대답했다. 그리고 지프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아무도 말이 없었다. 지프는 곧 트럭을 따라잡았다. 운전병은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럭을 추월해서 잠깐 달리다가 급정거를 시켰다. 차가 멈추자마자 운전병은 튕기듯 밖으로 나갔다. 심재모와 정 중령도 거의 동시에 차에서 뛰어내렸다. 운전병은 뒤따라오는 트럭을 향해 두 팔을 휘저으며 정지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정지할 것 같지 않게 달려오던 트럭이 쇠가 맛갈리는 소리를 뿌리며 급하게 멈춰 섰다.
"이봐 미군, 당장 내려!"
정 중령이 트럭을 올려다보며 영어로 명령했다.
"왓스 메러(왜 그러시오)?"
차창에 팔을 걸친 미군이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껌을 질겅거리고 있는 그는 아주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의 계급이 상병인 것을 심재모는 알아보았다. 그 옆에도 군인 하나가 타고 있었다.
"뭐라구!"
정 중령이 버럭 소리 질렀는가 싶었는데, 그는 트럭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이 새끼야, 네놈 눈엔 장군의 차도 안 보여!"
정 중령은 소리치며 지휘봉으로 미군의 철모를 내리치고 있었다.
"아엠 쏘리, 아엠 쏘리 써."
파란 눈이 휘둥그레진 미군은 다급하게 쏟아놓고 있었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나!"
"예스 써."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예스 써."
정 중령은 차로 뛰어오를 때와는 다르게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미군 상병이 정 중령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정 중령이 그 경례를 받고 돌아섰다.
"좆 같은 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어."
심재모와 정 중령보다 두어 걸음 앞서가며 이렇게 내뱉고 있는 운전병의 어깨가 춤을 추듯 가볍게 들먹거렸다. 뒷짐을 진 사단장은 지프 옆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심재모 자신이 목격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 일이 '사건'으로 둔갑한 다음부터의 이야기는 정 중령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사단장은 정 중령이 미군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갈긴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사단장은 인접한 미군부대를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가서 보니 미군부대장은 이미 그 '구타사건'을 접수했고, 수사기관에 넘겨 조사를 하게 할 작정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사소한 일이 '구타사건'으로 둔갑한 사실에 사단장은 당황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미군이 저지른 무례를 지적하기보다는 한국군 장교가 행한 실수를 강조했고, 바로 그 점을 사과하려고 찾아온 거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수사기관에 넘겨지지 않고 그 부대장 손에서 끝나게 하기 위해서 임기응변을 하게 되었다. 그건 다름 아니라, 그 '구타장교'를 이미 인사 조처했다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게 되자 미군부대장은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사단장의 성의 있는 직접방문을 기쁘게 생각하고, 구타장교에 대한 신속한 인사조처는 잘한 일로서, 그 정도의 처리로 만족하고 그럼 그 사건을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고 일단락 짓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 중령은 뒤늦게 사단장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고, 기분이 몹시 불쾌하고 언짢았지만 사단장이 한 일이라서 뭐라고 단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기분은 영 풀리지 않았지만 다 끝난 일이니까 똥 한번 잘못 밟은 셈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단 예하부대들이 연일 벌이고 있는 전투의 작전계획 수립과 점검에 매달려 정신없이 이십여 일이 지난 뒤였다는 것이다. 그 일이 느닷없이 일본 동경에서 '두개골 구타'로 미군신문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한국군 장교가 미군병사의 두개골을 구타! 그건 금방 문제가 되어 미군 수사기관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말 말아요, 미군 사병새끼 철모 한번 갈기고 내가 그 꼴을 당하다니, 도대체 세상 살고 싶지가 않아요. 한국 놈 장교들이 이게 무슨 장교요, 드럽고 비참해서 원."
정 중령은 쓰디쓰게 웃으며 조사받은 것에 대해서는 이 말로 입을 닫고 말았다.
"그 병신 같은 새끼가 글쎄 즈이 어머니한테 그만 대가리라도 박살이 나버린 것처럼 허풍을 쳐서 편질 보낸 모양이예요. 그 편지를 받고 어머니가 어떻게 됐겠어요. 사회단체를 찾아가고, 여기저기 편지를 띄우고, 난리가 난 거지요. 그 편지가 군 관계기관에 들어가 해당지역 군 신문에 기사가 실리게 된 거지요."
정 중령이 간추린 사건 확대 경위였다. 정 중령은 그런 곡절 끝에 결국 사단 사령부를 떠나 심재모의 연대 일대대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게 되었다. 오늘이 그가 대대장으로 부임한 날이었다. 심재모는 잠도 오지 않고, 그렇다고 혼자서 술을 더 마실 수도 없어서 전선의 하늘에 뜬 별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남북을 다 합쳐서 도대체 얼마나 될까. 저 별들만큼 많겠지. 휴전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이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누구고, 진 것은 누굴까? 원점으로 돌아와 끝나는 이 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도 많이 죽어간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인가?...속 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21. 빼앗겨가는 해방구
마당바위는 사방 어느 쪽에서 보나 빼어나게 생긴 바위 봉우리였다. 산줄기 위에 우뚝 치솟은 그 모습은 바위의 무게감으로 장중했으며, 위로 뻗치는 기상으로 장쾌했고,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수려했다. 그 바위 봉우리는 여러 개의 바위 덩어리들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봉우리 자체가 하나의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였다. 그 바위는 이십 미터 이상의 높이로 직립 상태를 이루며 치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바위가 산위에 그냥 덩그렇게 놓인 형상이 아니고 그 뿌리를 산속 깊이 박아 아랫부분과 유연하게 연결을 이루어 자연스러운 조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 벼랑바위 사이를 어렵사리 타서 위에 오르면, 거기에 또 하나의 경이가 펼쳐져 있었다. 삼백여 평을 헤아리는 그야말로 넓은 "마당"이 질펀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무슨 조화인지 바위가 평평해서 된 "바위마당" 이 아니고 흙으로 된 "흙 마당"이었다. 그리고 바위는 담을 치듯 가장자리를 따라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넓은 바위가 흙을 담고 있는 격이었다. 물이 있는 곳에 고기 있는 것이 자연의 철칙이듯이 그 흙에도 갈대, 소나무, 잔디, 풀 같은 것들이 뿌리 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당바위"는 살빛이 하얗고 그지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흙이 또한 인간의 탐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이 명당으로 소문나 오랜 세월 그 언제부턴가 묘 하나가 통명산을 건너다보는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두 개도 아니고 꼭 하나인 그 묘는 인근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무수히 파헤쳐져 왔었다. 그런데도 다시 보면 또 그 자리에 봉분이 솟아 있고는 했다. 그 누구도 상여가 산으로 올라간 것을 본 일이 없었고, 시체를 넣은 관이 그 드높은 벼랑바위를 타고 오르는 것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괭이며 삽을 가지고 마당바위로 치달아 오르는 것은 가뭄이 심하게 들어 논바닥이 짝짝 갈라지고, 개울이 말라 붕어들이 배를 하얗게 까뒤집는 해였다. 비를 기다리다 못해 나락이 타들고, 굶어죽게 될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문득 마당바위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곧 누군가가 또 마당바위에 묘를 썼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마당바위를 치달아 오른 사람들은 으레 봉분 큼직한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분노한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그 묘를 파헤쳐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기우제를 지냈다. 그 자리는 명당인 것이 분명했지만, 사람의 묘를 써서는 안 되는 명당이었다. 그 자리에 묘를 써버리면 하늘에서 내리는 혈을 끓는 것으로서, 그 피해는 백아산 언저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어 있었다. 묘를 그렇게 파헤쳐버려도 어느 때 한번 주인이 나타나는 일이 없었다. 또, 그 묘에서는 뼈들이 나오기는 해도, 썩어가고 있는 시체가 나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이상스러운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몰래 도둑 묘를 쓴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낼 리가 없는 일이었고, 그 깎아지른 바위 위로 관을 옮길 수 없는 일이니까 집안의 오래된 묘를 이장시키는 방법을 썼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밤중을 틈타 묘를 쓰는 사람들을 꼭 어느 한 집안의 소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혀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명당에 묘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았던 것이다. 마당바위는 묘를 쓰는 데만 명당이 아니었다. 빨치산에게나 토벌대에게나 그것은 천연적인 망루고 초소였다. 백아산 지구에서 그것을 빼앗기자 토벌대는 그곳에다 곧바로 병력을 배치시켰다. 그 마당의 흙은 텐트치기에도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빼앗겼다는 것은 백아산지구로서는 실질적으로 안방 문을 다 열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감시를 받았고, 심리적으로 심장을 빼 먹혀버린 것 같았고, 상징적으로 백아산지구가 없어져버린 것 같았던 것이다. 실질적 피해를 없애고, 심리적 불안감을 없애고, 상징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당바위를 다시 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차례나 공격을 감행해 마당바위를 다시 차지했다. 그러나 토벌대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세 번째 싸움에서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거기에 맞서 빨치산들은 네 번째 공격을 준비했으나 실행에 옮길 수가 없게 되었다. 토벌대들은 남아있는 해방구 반을 마저 없애고 말겠다는 듯 지난번 장마 때의 공격처럼 막강한 병력과 화력을 동원해 밀어닥쳤던 것이다. 박격포 탄이 제멋대로 날아들어 해방구를 뒤집어엎고 있는 속에서 빨치산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일단 배수진을 친 곳은 해방구와 천연경계를 이루며 곡선으로 길게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들의 고지들이었다. 백아산보다 낮은 그 봉우리들에 빨치산이 붙인 이름은, 해방구의 무등산 쪽 입구로부터 따발고지, 폭탄고지, 승리고지, 강철고지, 인민고지 등이었다. 그 고지들로 물러선 것이 박격포탄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단 해방구 전체를 적에게 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철고지에 배치된 조원제는 멀찍하게 솟아 있는 마당바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하늘 배경삼아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 있는 마당바위는 유난히 그 모습이 뚜렷하면서 말쑥해 보였다. 역시 마당바위는 멋들어지고, 몇 차례씩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은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마당바위를 빼앗긴 지는 오래고, 이제 반 남았던 해방구까지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파악된 일이었지만 토벌대들은 군경이 합동으로 작전을 펴면서,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각 지구를 차례로 돌아가며 공략해대고 있었다. 그건 이쪽의 병력 소모를 꾀하면서, 해방구를 파괴하려는 이중 작전이었다. 적들의 그 집중화된 공격에 각 지구들은 어찌할 수 없이 많은 피해를 당해가고 있었다. 역시 군인들이 가세된 화력전은 그 위력이 만만찮았던 것이다. 박격포 공격이 뜸해지고 있었다.
"어이, 쩌어그 잠 보소."
"잉. 보고 있네."
"영판 많은 갑는디?"
"아매 그런 감마. 줄줄이시."
긴장된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조원제는 고개를 돌려 무등촌 쪽을 바라보았다. 토벌대들이 멀리서 밀려들고 있었다. 많은 부대가 일제히 몰려 들면서 그들은 길이고 밭이고를 가리지 않고 무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논만은 피하는 것은 물 때문이었다.
"저런 개녀러새끼덜, 밭농새 다 망치네웨."
"적성마실 것덜 농새딘 저것들이 머시가 아까울 것이여."
"허기넌 그려. 해방구 마실사람덜도 저 새끼덜언 다 빨갱이로 몰아때리니께."
"잡새끼덜, 참말로 느자구웂은 인민에 적이여."
이런 수군거림이 또 들렸다. 입을 꾹 다문 조원제는 눈으로는 몰려오고 있는 토벌대들을 보면서, 귀로는 대원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적들은 해방구 안에 있는 마을들을 적성마을이라고 했고, 마을사람들을 적성분자라고 해서 빨치산과 똑같이 취급했다. 그리고 해방구에 가깝거나 빨치산의 영향력이 미치는 마을들을 통비마을이라고 했고, 그 마을사람들을 통비분자라고 부르며 불온시하고 불신했다. 적성마을 사람들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히면 살해되었고, 통비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의심받고 걸핏하면 잡혀가 혼쭐이 났다. 그런 실태를 환히 알고 있어서 해방구 사람들을 진작 승리고지와 인민고지 너머 골짜기로 완전히 피신시켜버려 마을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지난번 장마 때의 전투에서는 피신시키는 것이 늦어져 꽤나 많은 마을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반 남은 해방구로 피해와 투쟁인민이 되었다. 적들의 용어로 적성마을 사람들은 빨치산에게 세금이나 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희들 마음대로 정한 통비마을 사람들은 그 고초가 딱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지구들이 그들까지 보호하기는 어려웠다. 조원제는 그들이 안됐다는 생각은 언제나 버릴 수가 없었다.
앞장선 토벌대들이 마을을 수색해대는 것이 아까보다 조금 가깝게 보였다. 토벌대가 처음 나타났던 지점에서는 계속해서 병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조원제는 입술을 물며 그 수를 어림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으로도 이쪽의 두 배는 될 듯싶었다.
"워메, 쩌것 불질리는 것 아니라고!"
"긍마! 쩌런 잡녀러새끼덜이 금메!"
"쩌것얼 워쩐다냐! 요리 산몽뎅이서 보고만 있을 챔이여?"
"저리 마실마동 꼬실라뿔게 냅둬? 글먼 해방구 지절로 욼어지는 것이제."
조원제는 옆의 목소리가 커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술렁거림을 좌우를 살피며 파악했다. 토벌대들이 첫 번째 마을에서 불붙인 짚단들을 들고 오락가락하는 것이 보였다. 조원제는 입술을 더 세게 물며 숨길을 다잡았다. 증오가 뻗쳐올랐다. 가슴이 화끈하게 뜨거워졌다. 그는 집을 태우는 것을 볼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오가 치솟아 올랐다. 빨치산의 씨를 말린다며 산을 태우는 것까지는 보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집까지 무작정 태우는 것은 사람을 무작정 죽여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오의 불기둥을 솟기게 했다. 인간의 역사가 뭔지도 모르는 새끼들! 인간이 왜 평등해야 하는지를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새끼들! 악랄한 반민족세력에게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날뛰는 새끼들!
"중대별로 돌격대 다섯 명씩 긴급 차출! 중대별로 돌격대 다섯 명씩 긴급 차출!"
연락병이 다급하게 반복을 하고는 다음 중대 쪽으로 달려갔다. 조원제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툭 트이는 것을 느꼈다. 중대장을 찾았다. 중대장이 벌써 이쪽으로 빠르게 오고 있었다.
"싸게 조직혀주씨요."
중대장이 말했다.
"하먼이라."
조원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과 작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과 책임이 정치일꾼의 임무였다.
"동무덜, 싸게 일로 모이씨요!"
조원제는 좌우를 휘둘러보며 중대원들에게 말했다. 중대원들이 신속하게 모여들었다.
"동무덜, 시방 동무덜이 다 보고 있대끼 적덜언 인민의 집얼 불질르고 있소. 인민 해방얼 위해 나슨 우리가 워찌 저런 만행얼 보고만 있겄소. 나가서 쳐부셔야 헙니다. 당은 영웅적 투쟁에 나설 돌격대럴 조직헙니다. 다섯 명 자원혀주씨요!"
조원제는 박진감 넘치게 짧은 선동연설을 했다. 선동연설은 행동을 촉발시키고, 용기를 북돋우는 힘을 발휘해야 했다. 그건 문화부중대장의 책임이고 능력이었다.
"여그요."
"나요."
여기저기서 대원들이 일어섰다.
"다서, 되얐소. 남은 세 대원은 앉으씨요."
조원제는 다섯 명을 중대장에게 넘겼다. 중대장이 다섯 명을 인솔하고 급히 연대장 쪽으로 이동해갔다. 중대원들을 재배치시키고 조원제가 막 돌아서려는데 강경애가 다른 남자대원들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강경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조원제도 웃어 보였다. 강경애는 조원제에게 은근히 누나 노릇을 하려 들었다.
"조 동무넌 얼굴도 여자맹키로 이쁘장허고 나이도 나 동상뻘로 쪼깐헌디, 워찌 그리 연설도 야물딱지게 잘허고, 당이론도 전등불 키대끼 그리 훤헌지 몰르겄소이. 허기넌 나가 실답잖은 소리제. 호남 천재덜만 뫼인다는 서중학교 댕겼당께 비문허겄어. 나헌테 조 동무겉이 똑똑헌 동상이 한나 있었으면 똑 좋겄는디이?"
강경애는 어느새 말도 편안하게 놓고는 살살 웃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해버리면 당장 누나, 동생이 맺어질 판이었지만 조원제는 웃어넘기고 말았다. 산에는 해방투쟁을 하려고 들어왔지 의형제나 맺으려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런 행위는 당규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전사와 전사의 사이에 상호 신뢰와 존경으로 대등관계를 유지하며 인민을 위해 몸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문화부 중대장으로서 그런 엄연한 규정을 어기고 사적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원제는 원칙을 위배되는 일은 스스로도 하지 않았고, 다른 대원들에게도 엄격했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대꼬챙이"란 별명을 영광스럽게 알았으면 알았지 조금도 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대장 이태식마저도 단둘이 있게 되면,
"아익, 자네넌 다 존디 그눔에 원칙 너무 따지는 것이 탈이여. 시상 몰르고 젊어논께 그런 갑는디, 그리 땁땁허게 허덜 말고 헹펜 바감스로 살살 혀, 살살"
하고 충고했다.
"허먼, 나보고 수정주의자가 되라 그것이요?"
조원제의 정색을 한 대꾸에 이태식은 그만 죽어가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강경애의 호의는 좋았지만, 그 호의가 어디까지나 대원간의 상호존경으로 건재하기를 조원제는 바라고 있었다.
"야이 호로개애아덜눔덜아! 여그 무당 아덜 자앙칠봉이가 나간다아-"
컬컬하고 걸직한 목소리가 육자배기가락인 듯 어기차게 터져 오르며 징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폭탄고지에서 한 대원이 신바람 나게 징을 쳐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원제는 장칠봉이도 돌격대에 자원한 것을 알았다. 장칠봉은 스스로가 목청껏 외쳐대는 것처럼 무당의 아들이었다. 그가 쳐대는 징도 자기 어머니가 쓰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렇게 목청을 뽑아대며 한바탕 징을 두들겨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는 장칠봉이라는 이름보다는 "무당 아들"로 더 유명해졌다. 무당 아들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그만 유독 무당 아들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는 그 점을 아주 흡족해했다. 조원제는 그가 자신의 비천했던 과거의 신분을 일부러 드러내는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행위는 자신이 천대받고 살아온 저쪽 세상에 대한 보복감의 노출이었고, 자기를 멸시했던 자들을 적으로 맞대하게 된 증오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제 과거의 신분이 오히려 떳떳한 삶의 조건이 된 상황에서 자기를 맘껏 확대하고 싶어 하는 보상욕구고, 자기 확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다 한군데로 모아져 그를 남다른 투쟁력을 가진 전사로 만들고 있다고 조원제는 생각했다. 그가 소리를 외치며 징을 두들겨대는 것은 제멋대로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장의 허락을 받고 하는 일이었는데, 그의 한바탕 어우러지는 징놀이는 싸움을 앞둔 다른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울리는데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징소리의 여운이 아직 나무숲에도, 대원들의 가슴에도 남았는데 돌격대들은 벌써 조를 이루어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조원제는 나무들 사이사이를 기민하게 빠져나가며 금방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산을 벗어난 돌격대들은 산개한 채 적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적들과의 거리는 아직 꽤 멀었다. 그러나 돌격대의 달리는 속도는 금방금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무질서한 듯 흩어져 달리고 있는 돌격대들을 지켜보면서 조원제는 또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돌격대들은 오륙십 명에 불과한데도 이쪽 들판이 돌격대로 꽉 찬 것 같았던 것이다. 그 착각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민간인 열 명과 무장한 병력 열 명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무장병력이 언제나 몇 배로 많아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 열과 시체 열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격대들이 계속 달리면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집 서너 채가 시꺼먼 연기를 뿜어 올리며 불길을 싸여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터지는 총소리에 놀라고 당황한 토벌대들이 엎드리고 흩어지고 하며 대열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토벌대들 쪽에서도 곧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을에 있던 토벌대들도 모두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돌격대들은 일제히 뛰기를 멈추고 은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고 있었다. 토벌대가 돌격대를 향해 질서 잡힌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돌격대는 토벌대가 다가서는 만큼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건 마을에 불을 못 지르게 하려는 방해 작전이면서, 적을 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유인작전이었다. 토벌대들이 갑자기 돌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돌격대들은 거기에 맞서 기민하게 뒤로 빠지면서 간격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토벌대는 차츰차츰 산줄기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밭두렁이를 타넘고, 논두렁에 은신하고 하면서 뒷걸음질 치던 돌격대는 마침내 산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토벌대들은 마을을 두 개나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돌격대의 작전은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토벌대들은 산 아래서 부대별로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분산되었던 돌격대들이 산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조별로 모아져 자기네 고지로 올라붙었기 때문에 토벌대들도 그 고지를 따라 부대를 배치시키고 있었다. 토벌대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면서 각 고지에서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조원제는 허리끈을 죄며 마른침을 삼켰다. 토벌대의 수는 어림잡아 이쪽보다 세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경찰보다 군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 군인들은 경찰들에 비해 싸우는 방법이 사뭇 달랐다. 군인들은 화력도 셀뿐만 아니라 과감하고 직선적이었다. 공격과 후퇴가 신속하고 분명했고, 고지공격에도 언제나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경찰에 비해 시원스럽고 절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쪽 입장에서는 화력의 열세를 더 심각하게 느껴야 했다. 해방구를 놓고 벌어지는 이 싸움은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어느 때 없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에서 해방구를 없애고야 말겠다는 적들의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적들이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해방구를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더 뜨겁게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들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한꺼번에 병력을 투입해 고지마다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결판을 빨리 내겠다는 공격법이었다. 그건 병력과 화력의 우세만을 믿고 몰아치는 것으로, 힘만 있는 씨름꾼의 우직한 씨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싸움이라는 것이 작전에 앞서 병력과 화력이 우선한다는 엄연한 사실과 함께 그런 공격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우직한 힘에 맞서는 것은 또 하나의 우직이었다. 조원제는 빨치산 전법 중에서 어떤 것이 맞을까를 생각하며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건 보나마나 첫 번째인 적진아퇴였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적을 일단 피하면서 골탕을 먹이고, 상황에 따라 네 번째 전법인 적퇴아진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토벌대들의 모습이 나무와 풀들 사이로 얼핏얼핏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총소리들이 갑자기 터지자 산들이 따라서 울었다. 삐웅, 피우웅,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빨치산들의 머리 위에서 직선을 그어대는 느낌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조원제는 왼쪽 팔꿈치를 풀 밑둥과 밑둥 사이에 고정시키며 총을 단단히 잡았다.
"지도원 동지, 지도원 동지!"
조원제는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연대 지도원 동지 호출이구만이라."
허리를 반으로 접어 몸을 낮춘 연락병이 단내를 풍기며 말했다.
"이, 알겄소."
조원제는 새로운 작전시지라는 것을 직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윽!"
서너 걸음을 옮긴 조원제가 입에 가득 차는 비명을 물며 왼손으로 옆구리를 잡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앞으로 휘청 꺾였다가 바로 세워졌다. 그는 옆구리에 불덩이가 닿는 것 같은 화끈함과 동시에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지도원 동지! 워째 그요?"
연락병이 조원제에게 황급히 다가섰다.
"옆구리가 뜨끔혔는디, 나가 총 맞었으까?"
조원제는 태연한 것도 아니고 놀란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말도 애매하게 하고 있었다.
"워디 봅씨다."
연락병이 잽싼 동작으로 조원제의 손을 왼쪽 옆구리에서 떼냈다.
"워메, 당혀부렀소!"
연락병의 큰 목소리가 탄식처럼 터져 나왔다.
‘워쪄? 당혀? 근디 나가 워째 요러크름 꼿꼿하게 서 있다냐? 앞뒤로 빵구는 안 난 모양인가?’
조원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왼쪽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연락병이 옆구리에서 손을 떼냈던 것이 분명한데 어느새 손은 옆구리를 받치고 있었고, 손가락 사이사이로는 새빨간 피가 삐쳐 나오며 아랫손가락으로 차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도원 동지, 워쩐 일이시오?"
연락병과 함께 중대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짜잔허게 당혔는갑소."
조원제는 씨익 웃었다.
"싸게 환자트로 욂기시오. 피가 심헌디."
"가기넌 가야 쓸랑갑소."
"하먼이라. 무장 인계허시고, 얼렁 쾌차허시씨요이."
"아, 총!"
조원제는 그때서야 자신이 오른손에 총을 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갑자기 팔이 처져 내리도록 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총은 곧 생명이라는 인식으로 입산 이후 단 한 번도 몸에서 뗀 일이 없었던 총을 자신도 모르게 그때까지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잠을 자면서도 품고 잤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깨에 걸치고 먹었고, 똥을 누면서도 앞에 세워 잡고 누었던 총이었다. 총을 받으며 중대장이 경례를 했다. 조원제도 맞경례를 했다. 그 순간, 내가 당하다니! 하는 생각이 가슴을 찡 울렸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기필코 화선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차츰 심해지고 있는 적들의 총소리를 들으며 이를 맞물었다. 조원제는 간호병의 부축을 뿌리치며 일 킬로 남짓 떨어져 있는 골짜기의 환자트까지 혼자 걸었다. 피가 계속 흐르고 있는 옆구리의 통증은 이빨이 빠득빠득 갈릴 정도로 심했지만, 다리의 힘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간호병의 부축을 받는다고 통증이 덜할 리 없었고, 걸을 힘이 있는 이상 혼자 걷고자 했다.
"아니, 이건 참 기막힌 기적이오, 기적!"
옆구리의 상처를 들여다보던 의무과장이 마치 탄성을 지르듯 말했다. 상처를 건드리자 통증을 더 심하게 느끼고 있는 조원제는 상을 잔뜩 찌푸린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옆구리 갈라진 것이 무신 흥해 갈라진 것이랍디여? 기적이게."
"그게 무슨 소리요?"
의무과장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었다.
"기적이먼 무슨 기적인지 싸게 말이냐 혀줏씨요."
조원제는 통증으로 몸을 비꼬았다.
"아 이게 말이오, 총알이 옆구리를 한 뼘 가량이나 뚫고 지나갔는데 말이오, 글쎄 늑막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단 말이오. 이건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보기 힘든 일이오. 그러니 이게 기적이 아니면 뮛이오."
"금메요, 워떤 대원은 연장은 암시랑토 않고 붕알만 똑 떨어져나갔드라는디, 고것에 비허자먼 나넌 기적 같지도 않은디라? 과장동무넌 그 소문 못 들어셨는 게라?"
"언젠가 듣긴 들었고. 그런데 말이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아슬아슬하기로 치자면 그쪽이 더 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고환이 없어져버린 성기가 무슨 소용이 있소? 그 사람은 영원히 생식불구자요. 그런데 지도원 동무는 늑막이 안 뚫려 내장이 보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면했소. 그리고 상처는 아물면 흉터만 남을 뿐이지 별다른 후유증은 없소. 이런데 어떤 게 더 기적이오?"
"듣고 봉께 그렇구만이라이."
조원제는 고통스러운 얼굴인 채 멋적게 웃었다.
"이건 공산주의자로서 전혀 안 어울리는 말이긴 하오만, 천상 명당 집 자손이라고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소."
의무과장의 말에 조원제는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기적이란 원래 설명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총상이 그만한 것을 뒤늦게 다행으로 여기며 이상스럽게 몸이 자지러드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기적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조원제는 어제께 벗어던져놓은 웃도리를 끌어당겨 옷을 뚫고 지나간 총구멍을 살펴보았다. 총알은 주머니를 뚫고 지나간 뒤에 또 하나의 구멍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조원제는 주머니에 뚫린 총구멍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그는 부산하게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서둘러 그것을 꺼냈다. 반으로 접어진 백 원짜리 수십 장에는 옷에 보다 훨씬 선명한 총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고장 동무, 어지께 말혔든 기적이 풀렸구만요. 총알이 요 돈 육십 장얼 뚫고 나감스로 심이 약해져논께 늑막을 못 뚫분 것 아니겄는가요?"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의무과장은 놀랍고도 희한하다는 얼굴로 돈과 조원제를 번갈아가며 보더니,
"지도원 동무 판단이 맞소. 돈 육십 장을 뚫고 나가면서 총알의 힘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진 방향도 달라질 수 있소. 돈을 만드는 종이는 특히 질기고 두꺼우니까, 그런데 말이오. 기적은 여전히 남소."
그는 끝말에 힘을 주었다.
"또 남아라?"
조원제는 의아스럽게 의무과장을 쳐다보았다.
"왜 하필이면 총알이 그 돈을 관통했느냐 그것이오."
"허, 금메요..."
조원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별로 뜻 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의무과장이 묻지도 않았지만, 만약 물었더라도 그 돈을 지니게 된 사연을 말하지 않으려고 조원제는 생각했다. 그 내용은 또 다른 기적으로 확대될 확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돈은 자신이 입산할 때 어머니가 마련해준 삼천 원이었다. 그 백 원짜리 서른 장을 반으로 접어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막상 쓸 데가 없었던 것이다. 산속에서만 살다 보니 세월은 가도 돈은 고스란히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산속에서는 효용가치를 상실하고 그저 그림 그려놓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그것을 왜 내버리지 않고 지니고 다녔던 것인가. 언젠가 써먹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건 "어머니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생명을 지켜준 것이다... 이런 발상이야말로 비이성적이고 반유물론적이었다.
"이거 아픈 것이 통 가라앉덜 않는디요."
조원제는 계속되는 통증을 견디기가 어려워 처음으로 의무과장에게 입을 열었다.
"이거 참 미안하오. 진통제가 없어서..."
의무과장은 민망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글먼 과장동무도 고자 의사시요이."
"무슨 소리요?"
의무과장이 의아스럽게 조원제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째고 짜고 하는 생활만 해 와서 그런지 못 알아듣는 소리가 많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 붕알 웂은 자지나 약 웂은 의사나 머시가 달브냐 그 말이요."
"하하하하... 지도원 동무가 어째서 그 나이에 지도원이 됐는지 알 것 같소. 그렇게 다치고도 혼자 걸어오질 않나,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농담을 하질 않나, 어쨌든 그런 정신력이면 약이 없어도 곧 회복될 것이오."
의무과장은 아주 흡족해하고 있었다. 조원제는 붕대 위로 피가 밴 상처부위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며 눈을 감았다. 옆에서는 네 명의 환자가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화끈거리고, 욱씬거리고, 쑤셔대고, 비비 틀리는 아픔들을 어금니에 물며 어제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가 일천구백오십일년 팔월 십팔일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팔월 하순을 고비로 각 지구들은 해방구를 잃어갔다. 일 년 동안 해방구를 발판으로 삼았던 지역 확보 투쟁이 산악 이동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었다. 그건 군인들이 토벌대로 투입되면서 일어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잃은 것은 해방구만이 아니었다. 병력손실도 함께 겪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해방구를 잃은 것을 패배로 생각하지 않았고, 동지들이 죽고 다친 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이 해방구를 잃은 대신 저 위쪽 전투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넓게 인민의 땅을 확보해나가고 있다고 믿었고, 자기네들이 다치고 죽는 것만큼 그쪽에서는 인민군 전사들의 생명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한 공통된 인식은 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런 유대감 속에서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해방구를 잃었다는 것은 그 지역을 토벌대에게 완전히 빼앗겨버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과 같이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고 불안지대로 바뀌어 지구의 각 조직부서들이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긴 것을 의미했다. 또한 경찰에서도 힘이 모자라 그 지역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대한민국이요, 밤에는 인공"이라는 말이 그 지역들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해방구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해도 각 지구의 관할지역이나 조직임무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천점바구의 중대가 후방대원들을 지원하고 있는 사업도 해방구의 상황변동에 따른 것이었다. 천점바구네는 후방부대원들이 굴 파기 작업을 하는 동안에 경계임무를 맡고 있었다. 굴 파기는 검은 돌덩이들로 뒤덮여 있는 너덜겅 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굴 파기는 벌써 사흘 밤 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 굴은 곡식 저장창고였다. 너덜겅의 어느 부분 돌들을 몇 개 들어내고 땅을 파내려가서 널찍한 굴을 만들었다. 굴 내부의 꾸밈은 병기과 비트나 마찬가지였고, 곡식 창고라서 넓이가 한결 더 넓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점 하나는, 곡식창고에는 반드시 사방으로 돌아가며 배수로 깊이 팠다. 곡식에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굴이 완성되면 처음에 들어냈던 돌들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감쪽같이 출입구가 가려졌다. 오래된 돌밭인 너덜겅 아래에다 곡식창고를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하는 돌투성이인 너덜겅이나 비탈지지 않은 곳이 없어서 빗물을 잘 받아낼 뿐만 아니라 아래의 비탈진 땅도 물기를 오래 머금고 있지 않았다. 무슨 용도의 굴을 파든지 제일 큰 애로가 흙의 처리였다. 굴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서는 그 주변에 흙은 파낸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언제나 굴을 파는 인원보다 흙을 내다 버리는 인원이 몇 배나 더 동원되었다. 그것도 한 장소에다 쏟는 것이 아니고 사방에다 비료 뿌리듯이 흩뿌려 아예 토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천점바구 중대원들은 그 흙을 내다 버리고 있는 후방대원들을 경계해 주고 있었다.
"굴이 영판 큰게비요이?"
외서댁이 천점바구에게 소곤거렸다.
"그런갑소."
"저리 크게 파서 쟁일 곡식이나 머 있겄소?"
"금메요, 가실이 음매 안 남었응께라."
"저 일이 원제나 끝나지겄소?"
"오늘밤으로 다 끝낸답니다."
"여그가 워디짬입니디여?"
"몰르는 것이 약이오."
"이, 냅두씨요."
외서댁은 "비밀"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들었다. 몰라야 될 것을 아는 것도 병이었다. 남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면 입이 놀리고 싶어지고, 입을 놀리면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런 것을 일찍이 생활 속에서 터득한 그녀는 당이 비밀에 붙이고자 하는 일을 알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사실 굴을 파고 있는 후방부대원들조차도 그 위치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두워져서 작업장으로 왔고, 어둠 속에서 작업장을 떠났던 것이다. 모든 비트들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보안이 지켜졌다. 작업조의 경계를 책임 맡고 천점바구는 요즈음의 돌아가는 형편이 구빨치 시절인 재작년 겨울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겨울이 시작되면서 토벌대들은 맹렬하게 공격을 해대며 산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밤에는 산에서 멀찍이 떨어져 야영을 했고, 날만 밝으면 산을 헤집고 다녔다. 밤에도 길목, 길목마다 매복을 쳐 산과 산을 차단시키는 적극적인 작전을 펼쳤었다. 토벌대는 요즈음에도 그때와 똑같은 작전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병력도 화력도 강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작전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포위당하는 일이었다. 적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포위당하기가 십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이 매복에 걸리는 일이었다. 숨어서 이쪽을 노리고 있는 매복에 걸려 사상자를 내지 않기란 어려웠다. 재작년 겨울에 비하면 이쪽의 병력도 막강했지만 그러나 토벌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천점바구는 부르르 어깻죽지를 떨었다.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팔월 중순이 지나게 되자 산속의 밤은 자정 무렵부터 서늘하게 변해갔다. 밤이슬을 오래 맞아서 서늘한 느낌이 더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둠 속 멀리에서 풀벌레 소리들이 가늘고 맑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가을이 실려 있었다. 저것덜언 잠도 안 자는가? 그는 문득 생각했고, 그 생각이 싱거워 픽 웃어버렸다.
‘저것덜 시상에넌 사람 시상맹키로 차등이고 계급이고가 웂겄제? 그렁께 해방투쟁도 웂을 것이고, 근디 워째 저 벌거지덜이 부럽덜 않제? 그려도 사람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제. 투쟁혀서 새시상 맹글어내는 맛도 있고. 요 맛얼 머시라고 혀야 될랑고? 꼬신 것도 아니고, 쌈빡헌 것도 아니고, 달치근헌 것도 아니고, 하여튼지간에 사내자석 목심내걸고 한바탕 혀볼 만헌 일이여.’
"와따! 인자 봉께로 니 말이 딱 맞아뿌렀다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든 니럴 술술 책얼 읽게 갤차놓다니, 그 좌익허는 사람덜 참말로 기맥히시! 나가 나이 묵어 나슬 수넌 웂고, 니가 나 몫아치꺼정 싹 다혀뿌러라. 고런 사람덜이 허는 일이먼 나가 인자 딱 믿어뿔란다."
전쟁이 일어나고 하산해서 아버지 이름 석 자를 써 보이고, 옆집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내자 아버지가 무릎을 쳐가며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염상진 대장에게 생간을 대접하기로 했던 것이다.
천점바구는 당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중대장 노릇을 하는 것도, 그리고... 여중학교 나온 여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아버지에게 다 알리고 싶었다. 백정의 아들은 백정질만 하고 평생을 살다가 죽는것이 아니라 백정의 아들도 이렇게 사람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다 보여주고 싶었다.
"천점바구 동무, 당은 동무의 입당을 결정했소. 동무가 당원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심사과정에서 다 검토하고 확인된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요약하겠소. 당원은 권리를 주장하는 자격이 아니라 의무를 수행하는 자격이오. 당원은 특권을 누리는 자격이 아니라 희생을 앞세우는 자격이오. 당원은 교만을 부리는 자격이 아니라 겸손을 실천하는 자격이오. 그리고 당원은 인민을 위하여 모든 짐을 지는 자격이며, 당을 위하여 마지막 생명을 바치는 자격이오. 이 점 명심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투쟁하기 바라겠소."
당원이 되던 날 안창민 동지가 악수를 한 채 해준 말이었다. 하늘까지 뛰어오르고 싶었던 그날의 감격과 함께 그 말을 한마디도 틀리지 않게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나날의 투쟁 속에서 실천하려고 애써왔던 것이다.
천점바구는 날이 트이기 시작함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쪽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어둠만 가득했다. 그러나 어둠 그 뒤편 하늘에 어리고 있는 아슴푸레한 빛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은 방향에 따라, 장소에 따라다 달랐다. 다만, 그 정확한 느낌이 말로만 표현이 안 될 뿐이었다. 오랜 산 생활은 그런 것을 다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천점바구는 그밖에도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기울기를 확인했고, 풀벌레 소리들이 그쳐 있음을 알았고, 나뭇잎들이 아래서 위로 바람을 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대장 동무, 일 다 끝냈구만이라."
후방부 특무장이 천점바구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알겄소, 날이 새고 있응께 싸게 뜹시다."
천점바구는 총과 함께 어깨를 추슬렀다. 중대원들을 삼등분하고, 작업조도 삼등분시켜 인솔책임을 분담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출발허겄소. 제일 비상선 할매봉, 제이 비상선 미륵봉이오."
천점바구는 "빨치산의 생명선"이라고도 하는 비상선 두 군데를 지적해 주었다. 돌발 사태를 당해 대원들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더라도 제일 비상선에서 다시 합류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대원들은 또다시 제이 비상선에서 합류하게 되는 것이었다. 비상선 설정은, 몸에서 총을 떼서는 안 되는 것과 함께 모든 행군에 앞서 내려지는 빨치산의 두 가지 절대수칙이었다. 그건 곧 항일빨치산의 기본 전략인 이령화정이었고, 그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모여 세력을 형성하는 전법으로 빨치산들은 토벌대의 추격을 쉽게 교란시켜버렸고, 대원들이 부대를 잃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맨 앞에 선 천점바구는 산굽이를 돌아 다음 산굽이로 건너가려 하다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우뚝 멈추었다. 그건 분명 사람 냄새였다. 아니, 그냥 사람의 냄새가 아니라 토벌대의 냄새였다. 몸을 바짝 낮춘 그는 검지손가락을 입속으로 쑥 밀어 넣어 침을 발랐다. 그리고 그것을 꼿꼿하게 세우고 신경을 모았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바람의 방향은 분명 그쪽이었다. 냄새를 잘못 맡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뒤로 수신호를 보냈다. 적정이 있으니 무장병력은 앞으로 나오고, 비무장은 뒤로 빼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네 중대만이 통하는 수신호를 열 가지 이상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건너편 어둠을 유심히 살폈다. 풀숲일 뿐 매복을 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무슨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덤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산굽이의 사이라는 점뿐이었다. 매복은 거의 자기방어에 유리한 은폐물을 끼게 마련이었고, 중요한 길목의 다리 부근이나 개울둑 같은 데에 많았다. 그러나 매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전방에서 분명 냄새가 끼쳐왔던 것이다. 그 냄새는 순각적일 뿐, 다시 맡으려 하면 할수록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천점바구는 중대원들이 다 앞으로 나온 것을 확인한 다음 땅바닥을 더듬어 조그만 돌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개를 던졌다. 이어서 두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탕! 타당, 탕! 어둠 속에서 총소리가 터져 올랐다.
"일조, 사격 개시! 이, 삼조, 후방대와 선 잡아라!"
천점바구는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 매복인원은 많지 않은 법이고, 비무장부터 뒤로 빼돌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쪽에서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요했던 새벽의 어둠을 양쪽 총소리가 예리하게 찢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적진의 총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적은 수가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적이 이쪽의 수를 알아차리기 전에 작전을 바꿔야 했다. 어물거리며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지끔부터 산개혀서 왼쪽 산으로 붙는다. 산얼 빨딱 넘어스는 것잉께, 출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왼쪽 산으로 흩어지며 뛰기 시작했다. 적들이 잠시 방향을 못 잡는 사이에 산으로 붙고, 그들을 산으로 유인해 비무장대원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산중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총알이 그들에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동녘 하늘이 희붐하게 트이고, 어둠도 많이 묽어져 있었다.
"쫓아라!" "잡아라!"
총소리와 함께 아래서 터지는 소리였다. 그들은 제각기 몸을 피해 가며 산을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야산을 그들은 금방 넘어섰다.
"왼쪽으로!"
천점바구는 앞장서며 비탈을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이 산등성이에 오르는 동안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두 개의 야산 옆구리를 타고 돌아 큰 산줄기로 접어들어 숨길을 돌렸다.
"워메, 외서댁 동무 워쩐 일이다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천점바구는 급히 몸을 돌렸다.
"워째 그요?"
어리둥절하고 있는 외서댁의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가 피범벅인 것을 천점바구는 발견했다. 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워디 봅시다, 동무."
천점바구는 별일 아닌 척 외서댁에게로 다가섰다.
"워째, 나가 워디 상혔소."
외서댁이 의아해하며 천점바구를 쳐다보았다. 천점바구는 귀를 살펴보았다. 분명히 있어야 할 귓불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와따, 멀 그리 딜다보여? 무신 일 났소?"
외서댁이 짜증을 묻혀냈다.
"요것 참, 귓밥이 떨어져나갔소." "귓밥이?"
외서댁이 놀라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잘 되야부렀소. 밥도 안 태이게 혀준 귓밥, 달고 댕기면 머헐 것이요. 무겁기만 허제."
그는 아주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허! 말 한분 요상허요이. 꼭 배짱 씬 남자맹키로."
천점바구는 시무룩하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냈다.
"나야 빨치산잉께."
외서댁은 씨익 웃으며 귀로 가져갔다.
"손대지 마씨요. 피가 나고 있응께."
천점바구는 어른 외서댁의 팔을 붙들었다. 외서댁이 귀가 다친 것을 그리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을 천점바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팔에 총을 맞고 쫓기다가 나무를 붙들려서 해서야 팔이 말을 안 들어 총 맞은 것을 아는 사람도 있었고, 엉덩이에 총을 맞은 채 싸우다가 옆 사람이 피를 보고 말을 해서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숨 막히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 자기가 다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흔했다.
벌교 장날이었다. 햇발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두모둠 자리 잡은 마을에서마다 장길을 나선 사람들이 읍내로 이어진 길들을 채우고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돈이 될 물건들을 이고 들었고, 나들이를 한다고 삼베옷에는 풀기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농사일로 검붉게 탄 얼굴들에는 그래도 웃음기가 퍼지고, 발걸음들도 가벼웠다. 그러나 그들의 기분은 언제나 읍내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구겨지고 말았다.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에게 일일이 도민증을 내보이고 검문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자들은 그나마 수월했지만 남자들의 조사는 까다로웠다. 닭이나 돼지처럼 그냥 드러나는 것이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짐들은 다 풀어 보여야 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는 사람은 무조건 경찰서로 끌려갔다 의심을 사는 경우에는 여자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여자들은 낭자머리부터 풀어헤쳐져서 속곳 주머니까지 뒤짐을 당했다. 낭자 속에 빨치산의 연락문을 감추고 있나 해서였다. 검문소는 횡계다리목, 소화다리목, 철길건널목 세 군데였다. 그 세 곳을 막으면 날개를 달고 날아들지 않는 한 읍내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걸리게 되어 있었다. 역이나 철다리아래 선창에는 또 따로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에서는 벌교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접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판단은 옳은 것이기도 했다. 빨치산들은 분명 장날을 이용해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하고 있었다.
"안녕허심녀? 오늘도 애쓰시는구만이라잉."
등짐을 진 한 사내가 낡아빠져 위에 구멍이 뚫린 밀짚모자를 벗으며 꾸벅 절을 했다.
"어 남샌, 그 짐 머시오?"
경찰 하나가 턱짓을 했다.
"항시 그 짐이제라. 연지 꼰지 폴아갖고 삼베 밖북는 것이야 항시 그 타령이제라이."
그 남자는 변죽 좋게 말하며 등짐을 벗어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투덜투덜 말을 씹어대고 있었다.
"니밀헐눔에 빨갱이덜, 원제나 씨가 몰를랑가이. 고 잡년러 것덜 땀세 순사양반덜 못헐 일에, 우리 장돌뱅이덜 못헐 일. 고것덜얼 이 삶아 대디끼 혀뿌는 무신 방도가 웂을랑가 몰라?"
그 남자가 풀어헤친 짐 위에 회푸대 종이봉투가 놓여 있었다. 경찰이 짐을 조사하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요것이 전분에 마씸허셨든, 거 머시냐, 긍께 그 털로 된 물뿌리가 달린 그 기라죽헌 양담배요."
그 남자가 경찰의 귀 가까이 대고 낮고 빨리고 말했다.
"어허, 무식하게 털로 된 물뿌리가 뭐요. 필타지, 필타."
경찰이 경멸적으로 말하며 그 봉투를 세워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메 말이오. 무식해빠진 장돌뱅이 대그빡이라논께 꼬부랑말언 아무리 들어도 모르겄당께라."
봉투는 어디로 갔는 없고, 경찰은 건성건성 짐을 살피고 허를 폈다.
"이, 인자 자네덜 차례시. 순사 양반헌테 절 짚이 허고 싸게싸게 도민증 꺼내여."
그 남자가 짐을 묶으며 뒤에 서 있던 두 남자에게 말했다. 두 남자가 경찰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꾸벅꾸벅 절을 했다. 두 남자의 어깨에는 무명 보자기와 멜빵이 걸쳐져 있었다. 경찰은 두 남자가 내민 도민증을 힐끗 들여다보고는 통과하라는 손짓을 했다.
"보성 삼베가 당신네덜 톡톡허니 믹여 살리는구만."
경찰이 짐을 지고 일어서는 남자에게 한마디 걸쳤다.
"하먼이라, 보성 삼베야 조선시대부텀 명났고, 일본 ㅜ눔덜도 알아주든 명품잉께라. 보성 삼베야 하먼 발 골르고, 바닥 톡톡허고, 올 찬찬하기로 딴 것덜이 당헐 수가 웂구만이라, 원체로 똑별나게 좋아분께 우리가 장사해묵기 쉽코, 그 덕에 처자석 믹에 살리는 것 아니겄는게라."
그 남자는 눈웃음쳐가며 장돌뱅이다운 입담으로 엮어내고 있었다.
"수고허시드라고요이."
그 남자는 허리를 굽신하고 횡계다리목 검문소를 통과했다. 두 남자도 그의 뒤를 따랐다. 앞장선 그 남자는 벌교장을 넘나든 지 오래된 장돌뱅이 남판술이었다. 나머지 두 남자는 그의 조개이면서 동업자였다. 남판술은 여자들의 값나가는 화장품이며 장신구 같은 것들을 큰 도시에서 받아다가 벌교 같은 데다 먹이고, 작은 도시에서는 그곳의 특산물을 가져다가 큰 도시에 넘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건 장돌뱅이들이면 누구나 하는 방법이었고, 그가 벌교에서 사 모으는 것은 예로부터 이름난 "보성 삼베"였다. 그를 따르고 있는 두 남자는 아침에 빈목으로 장터에 들어섰다가 저녁에는 부피 큰 삼베 짐을 지고 장터를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거리에 낯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경찰들하고도 어물쩍 잘 통하는 장돌뱅이들만이 아니었다. 남판술은 백아산지구의 후방부 특무장이었다. 그가 후방부의 실무책임자인 특무장이란 직책을 맡게 된 것도 장돌뱅이였기 때문이다. 그 직업상 각종 물건조달이 용이했고, 행동반경이 넓었던 것이다. 그는 화순장에서 벌교장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산만 타고 다니는 선요원들이 해낼 수 없는 정보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사하게 장터로 들어섰다가고 해도 행동은 여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장터 바닥 그 어디에 감시의 눈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맘 놓고 사들일 수가 없었다. 남자 고무신을 서너 켤레 샀다가 끌려가는 여자도 있었고, 소금이나 석유를 많이 샀다가 조사를 당하는 경우도 숱했다. 일단 빨치산들이 필요로 할 듯한 물건들을 많이 샀다 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형사들이 덜미를 잡아챘다. 남판술이 장터마다 돌며 눈독을 들이는 것은 그런 부피 크고 표 나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첫째가 약이고, 둘째가 성냥이고, 셋째가 칼리비료였다. 약은 갈수록 필요한데도 갈수록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606호니 페니실린 같은 고급 약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손쉽던 아까징끼(머큐로크롬)며 다이야찡 가루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차츰 품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다 칼리비료를 배급 중단시킨 것과 마찬가지의 통제라는 것을 그는 환히 알고 있었다. 조개껍질에 두꺼비기름 담아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쳐대는 뜨내기 약장수한테 귀띔을 하면 다음 장날 다이야찡가루를 몇 봉지 구해 오기도 했고, 엉뚱하게 쇠전 옆에서 뒷거래되는 칼리비료를 살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의무과에서는 아까징끼와 다이양찡 가루만이라도 빨리빨리 구해달라고 매일같이 성화였다. 그 다급하고 애타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낫질을 잘못해서 어디를 벤 것도 아니고 총을 맞거나 폭탄에 맞아 당한 부상에 약이 없으니 의무과에서 타는 속이 어떨지 알만했던 것이다. 다리에 박힌 파편을 꺼내는데 마취약이 없어서 소주 한자 먹여 팔다리를 묶어놓고 생살을 찢어대니 그 악쓰는 소리가 온 골짜기를 울려대 새들이 놀라 다 날아가 버리더라는 종류의 이야기는 수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남판술은 자기가 약을 못 구해 살릴 수 있는 대원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박감에 눌리며 장마다 눈을 부릅뜨고 다니는 판이었다.
"어이웨, 나가 한바쿠 삥 돌고 올 꺼싱께 장시 자알 허소이."
남판술은 옆의 장수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야아, 걱정 마시고 올 고르고 쓸 만헌 물건 나왔는가 싸게 걸음허셔야제랴."
부하 하나가 굽신거리며 말장단을 맞추었다.
"아, 자네넌 말혀! 싸게싸게 안 따라나스고, 국밥 묵은 지 을매나 되얐다고 폴세 배거쪄부렀능가."
남판술은 성질을 돋우듯 다른 부하에게 목청을 높였다.
"아니구만이라, 아니어라."
다른 부하가 서두르는 몸짓으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남판술은 느릿느릿 걸으며 갖가지 물건들을 눈 빠르게 살펴나가고 있었다. 장터의 물목자리를 환히 알고 있는 그는 왼쪽 장마당으로 발길을 하지 않았다. 거기는 자리 잡힌 상점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진짜로 장이 서는 곳은 극장으로 통하는 큰길과 그 뒷길이었다.
남판술은 싸전이 서고 있는 길로 꺾어들었다. 그 옆의 삼베를 주로 하는 포목전이었다. 싸전이 됫박쌀을 가지고 나온 여인네들로 붐볐다. 그것을 장수들이 사모아 다른 지방으로 넘겼다. 뒷짐을 진 남판술은 여인네들이 안고 선 삼베를 힐끗 보기도 했고, 필을 풀어놓고 흥정이 오가고 있는 데를 기웃하기도 하면서 느리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여인네들 중에 가리마 왼쪽 머리에 삼베 상장을 꽂고, 남색 보자기를 든 여자가 있었다. 남판술은 그 여자에게로 다가섰다.
"벨 폴라고 나왔는갑는디, 워디 귀경 잠 헙씨다. 근디 이 삼복에 무슨 상얼 당혔다냐..."
그의 끝말에 여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야아, 귀경허씨요. 냄편이구만이라."
여자가 보따리를 풀어헤치며 뒷말을 낮고 빠르게 해치웠다.
"워디 보자아아, 보오성 삼베라고 혀어서어 다 삼베넌 아닌 께로오오, 워디 보자아아..."
남판술은 가락을 늘여가며 삼베를 풀어 높직하게 들고 바탕을 요리조리 들여다보고 있었다.
"볼 것 웂소. 복내면서 짜낸 것잉께."
여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두 번째 암호까지 확인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값을 흥정하는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나서 남판술은 돈을 꺼내 세기 시작했다. 돈을 받아 든 여자는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다시 세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남판술은 다시 걷기 시작하여 극장 뒤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겹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는 안쪽에서 쉰 목소리가 목청을 뽑고 있었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네하고 닭을 푹푹 과서 그 진짜배기만 쪽 뽑아 만든 만병통치약으로써..."
또 만병통치냐 싶어 남판술은 돌아서버리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떠돌이 약장수가 분명한데 제법 규모 크게 패거리가 셋이었고, 못 보던 얼굴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가까운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염치불고하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가까스로 약장수 옆에 다가선 남판술은 하는 일 없이 손톱을 깨물고 앉아 있는 나이 많은 남자를 질벅였다.
"봇씨요. 우리아덜이 낫으로 다리럴 많이 비었는디, 아까징끼허고 다이야찡 가리 포는 것웁소?"
"이 양반 뱃속 편네. 그런 약품 취급했다가 우리 콩밥 먹는 것 모르오? 그런 약품들 금지하는 덕에 우리가 먹고 산다는 거나 아시오."
약장수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정말 이 새끼들이 씨를 말리기로 작정했구나! 남판술은 고개를 젖히고 훅 한숨을 토해냈다. 뭉게구름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는 푸른 하늘이 그에게는 까만 어둠으로 보이고 있었다.
22. 호산댁
김미선은 날마다 몸부림치고 있었다. 총길이 최소한 이백 자 원고지 천장, 기한 두 달, 그것은 목숨을 담보 잡은 채 요지부동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었다. 그 피할 수도, 무너뜨릴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장벽 앞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나날을 몸부림 속에서 소모해가고 있었다. 원고지 천 장을 두 달, 육십일 동안에 써내려면 하루에 열여섯 장 반씩 써야 했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그건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그 정도 분량의 글을 매일 써내는 것쯤은 이미 기자생활을 통해서 습관이 되도록 숙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숙달된 글쓰기는 자신을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원고지 칸을 메우려고 안간힘을 써도 지난날의 그 솜씨는 살아나주지 않았다. 취재에 매달리다 보면 언제나 마감시간에 헐떡이며 기사를 써야 했다. 시간이 촉박할수록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낱말들이 원고지 칸을 메우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그 예기치 못한 희한함은 자기발견의 경이로움이었고, 글 쓰는 즐거움이었다. 그런 기이한 경험은 기자만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소설가가 <영감>이란 제목의 수필에서 그런 경험담을 아주 실감나게 적은 일이 있었다. 어쩌면, 있었던 일만 사실 그대로 써내는 기사보다는 상상력을 발동하는 소설에서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소설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껴야 했다. 소설에 비해 기사도 글이라고...하는 평소의 열등감이 자극되었던 것이다. 글 쓰는 것이 습관적으로 숙달이 되었던, 머리보다 앞서 손이 먼저 쓰는 경험을 가졌든 간에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는 글이란 써지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김미선은 매일같이 뭇방아를 찧고, 원고지들을 계속 쥐어뜯어대며 새삼스러운 처절함으로 느끼고 있었다.
"참회해가면서 전향적 내용으로 쓰시오!"
어느 적산가옥으로 장소를 옮기고, 원고지 뭉치를 한아름 가져온 소설가 이 아무개가 내린 명령이었다. 자책은 있어도 참회할 것은 없었다. 후회는 있어도 참회할 것은 없었다. 죄책감은 있어도 참회할 것은 없었다. 민족의 올곧은 역사를 위해 혁명은 기필코 성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자책과 후회와 죄책감만 커갈 뿐 그 어떤 참회란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행동은 이미 저질러져 버린 것이고,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두 아이의 목숨에까지 올가미가 씌워져 있었다. 아사지경에 빠진 두 자식을 차마 떼치고 또 떠날 수가 없었던 에미의 괴로운 결정이 당해야 하는 시련은 너무나 감당할 수 없도록 컸다. 참회를 해야 하는 전향적 수기는 곧 혁명의 부정이었고, 당에 대한 배반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다.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이 수기쓰기였다. 참회를 할 마음은 추호도 없고, 두 자식의 목숨은 걸려 있고, 그녀는 그 틈바구니에 끼여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몸부림을 해야 했다.
그래, 거짓말로 쓰자...잘못한 척 시늉을 내자...신도들의 몰살을 앞에 놓고 십자가를 발로 밟은 목사처럼...아니야, 아니야, 그 목사와 난 달라, 신이란 어차피 있지도 않은 허황한 거니까 얼마든지 밟아도 그만이지만 내가 하는 행위는 엄존하고 있는 당에 대한 배반이야, 당의 위대한 실체는 곧 동지들의 순결한 투쟁이 아니던가. 믿음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동지들의 집합이 곧 당인데, 동지들의 순결을 더럽히고 욕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짓말이 용납되는 경우가 있고, 결정적 오류로 영원히 죄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수기는 왜 쓰이려는 것인가. 책을 만들어 선전용으로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 책으로 찍혀 세상에 널리 퍼져버리면 거짓말로 쓴 이야기가 참말로 둔갑하게 되고, 자신의 숨겨진 진심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 결정적 오류가 무슨 말로써 해명될 것인가. 용서될 수 없는 거짓말은 그 어떤 위기를 넘기기 위해 비공개되는 입장에서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경우의 거짓말은 이미 위장술이란 전술로 활용되기도 했다.
"휴전회담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소. 딴 생각 말고 부지런히 쓰시오."
소설가 이 아무개는 처음에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사흘거리로 몇 차례 들를 때마다 아무런 진전이 없자 태도가 바꾸기 시작했다.
"정말 이럴 거요? 당장 감방으로 돌아가고 싶소!"
그는 노기를 띠며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태도를 바꾸어 설득을 하려고 들었다.
"인생이 도대체 뭐요. 허망하고 허무한 것 아닌가요? 짧은 인생 허무하게 살다 가는 건데 사상이고 이념이고 따져서 뭘 하자는 겁니까. 그런 걸 따지나, 안 따지나 인생이 죽음 앞에서 허무한 빈손이기는 매일반 아닌가요. 인생 육십 공수래공수거고, 더욱이 김미선씨는 애들이 둘씩이나 딸린 여자의 몸 아닌가요. 그저 애들 생각만 하면서 겪었던 대로만 어서어서 쓰세요. 빨리 써버리고 자유의 몸이 되어 아이들 데리고, 어머님 모시고 사는 게 젤이지 그까짓 사상이랑게 다 뭐 말라빠진 겁니까? 더구나 그 사상이 이뤄질 가망은 전혀 없는 판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협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는 것도 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날짜를 연기하는 건 내 능력이나 권한이 아닙니다."
김미선은 그의 어떠한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내세우는 인생허무주의는 철저한 봉건적 지배논리였으며, 전형적인 기득권세력의 옹호논리였고, 표본적인 반인민 · 비역사성을 내세우는 문학논리였다. 어차피 허무한 인생이니 그저 그렇게 한평생 살아가자는 그 말은 무척 초연한 것 같고, 달관한 것 같은 것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간교하고 음흉한 함정이 수없이 파여 있었다.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빈손인 공수래공수거가 아니더냐... 아주 감상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한 이 읊조림이 사람들의 의기을 최면시켜 나가면서 깊이 심는 것은 체념과 패배주의였다. 그 대중최면의 체념과 패배주의를 짓밟고 올라서 지배계급은 맘껏 권력을 휘둘러대고, 그와 야합하는 기득권세력은 마음대로 착취를 일삼는 것이며, 이 아무개 같은 부류의 문학을 한다는 자들은 그런 권력과 세력에 기생하면서 대중을 더욱 눈 멀게 하는 체념을 조장하고, 대중을 갈수록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는 글줄을 써대 힘을 빼는 것이었다. 그 반인민적 · 반역사적 복무의 작태가 사랑을 터무니없이 호가대해서 비련의 자살극을 조작하는 삼류 연애소설이었고, 허무가 인생 극치의 멋인 양 과장해대면서 매일 술 취해 허무타령이나 하는 사내를 미화시키는 퇴폐소설을 써대는 일이었다. 이 아무개는 바로 술주정뱅이들의 게걸거리는 꼴들을 낭만적 허무니, 고독한 인생이니, 미화시켜가면서 소설이라고 맡아 놓고 써대는 자였다.
"당신 정말 이따위로 굴거야, 이거! 좋아, 죽고 싶으면 맘대로 해.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음 번에 와서도 시작을 안했으면 그땐 가차 없이 보고하고 말 테니까 알아서 해!"
그는 평소의 유순한 듯한 얼굴을 싹 감춘 채 살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던 것이다. 장소를 옮긴 지 보름쯤 지나서 일어난 일이었다. 김미선은 그의 살기 품은 얼굴에서 위기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기생충적 기회주의자가 자기에게 닥칠 책임의 위험을 얼마나 악랄하고 날렵하게 피해버릴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날짜를 계산해보고 정해진 기한까지 글을 써낼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자는 주저 없이 이쪽을 수사기관에 넘기고 말 위인이었다.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구제불능의 악질 빨갱이니 뭐니 욕을 해대면서. 김미선은 그날부터 원고지를 펼쳐놓고 앉아 펜촉에 잉크를 찍었다. 참회고, 전향적 내용이고 다 외면하고 겪었던 그대로를 일기 쓰듯이 적어 나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글이 수월하게 풀려나가지는 않았다. 한 장을 채우려면 평균 세 장은 찢었고, 어느 대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미군의 잔악성을 욕해대고 있는가 하면, 인민군들의 고난에 찬 투쟁을 고무적으로 적고 있기도 했다. 김미선은 자신의 생각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기행문이 되도록 책상에 매달려 진땀을 흘렸다. 감시가 있는 집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써야 가까스로 열다섯 장을 채울 수 있었다. 장수를 늘리려고 문장을 짧게 했고, 문장마다 줄을 바꾸었는데도 그 지경이었다. 쓰기 싫은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큰 고역이고, 고문인가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이학송은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글재주 좋던 이학송은 이런 경우에 어떨까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도 자신처럼 고통을 당하며 애꿎게 원고지를 찢어댈 것인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심하게 고통을 당할 것도 같았고, 어찌 생각하면 하루에 몇 십 장씩 써내버릴 것도 같았던 것이다. 그는 끝내 아이들의 종적을 모른 채 떠나기는 했지만, 그렇게나마 떠난 그가 문득문득 부러웠다.
사흘 만에 다시 나타난 이 아무개는 글이 적힌 마흔 몇 장의 원고지를 집어 들고 더없이 기분좋아했다.
"됐소, 시작이 반이오. 우선 무조건 쓰시오.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은 원고지 매수가 늘어나는 일이요."
그는 연방 싱글벙글하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김미선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가지고 가서 읽으라고 쏘아대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가 신문사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일종의 실례라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삼가는 것은 신문사에서나 차려지는 예의였다. 그러나 그 예의는 기자들끼리만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외부인사의 원고를 받을 때, 특히 문필가의 글을 받는 경우에 그 예의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했다. 문필가의 글을 받으면서 기자에게 허용된 것은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한 마디뿐이었다. 만약 무심코 원고를 읽었다가는 그건 가지의 기본 자질부터 의심받는 큰 결례가 되었다. 그 무심코 한 행동이 원고를 심사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문필가에 대한 모독이었다. 명성이 높은 문필가일수록 모독의 정도가 커지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명색이 소설가인 이 아무개는 그런 기본적인 예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 담배를 뻐끔거려가며 원고를 읽어나가고 있었다. 저런 작자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내가 바보지...김미선은 경멸적인 곁눈질을 하며 입술을 물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가녀리게 들릴 때마다 그녀는 목이 타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꼬옥 감으며 모아 잡은 두 손에 이마를 댔다. 문득 한탄강 강변에 슬픔인 듯 보랏빛 물결을 이루고 있던 들국화꽃밭이 떠올랐다. 그 꽃밭에 엎드린 채 들국화 가지들 사이로 바라보았던 이학송의 웃음 담긴 모습이 선연했다. 지금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얼어붙은 몸을 옆으로 감싸 풀어주면서, 오라버니거니 생각하라고 해놓고서는, 눈 퍼붓는 통화 역을 먼저 떠나면서는 뒤돌아보지 못했던 남자... 철 들어버린 자신을 울리고 그 응답으로 뒤돌아보지 못하는 모습을 남겨둔 채 또 떠나고 없는 큰 산 같은 남자...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글이 왜 이렇게 물기가 없이 딱딱하오."
느닷없이 뒤이어서 터진 큰 소리였다. 그녀는 왈칵 놀랐지만 금방 감정을 바로잡았다.
"이거 천 매 짜리 수긴데 말이요, 좀 물기가 돌게 쓸 수 없소? 이렇게 딱딱해서야 어떻게 끝까지 읽겠소? 어찌, 말 좀 해보시오."
그는 책상 옆으로 다가서며 불만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저는 기자지 소설가가 아닙니다."
김미선은 앞의 벽만 바라본 채 대꾸했다.
"그래요? 그럼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왜 참회적 전향의 뜻은 단 한 줄도 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입을 꼭 다물었다.
"왜, 전향할 뜻이 전혀 없다 그거요?"
그녀는 입을 더 꼭 다물었다.
"대답해 봐요. 이걸 이따위로 써선 쓰나마나요."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뿌리쳤다.
"왜 이래요, 말로만 하세요!"
그녀가 싸늘하게 내쏘며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드러났다.
"좋아요. 쓰나마나라면 안 쓰겠어요. 난 달리는 쓸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읽어본 원고지들을 와락 움켜잡았다.
"아니, 왜 이럽니까, 왜. 됐어요, 그냥 그대로 써요.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그 조시로 써요."
그는 허둥지둥 김미선이 움켜잡은 원고지들을 맞잡으며 마치 더듬듯 말을 급하게 하고 있었다. 흥, 소설을 쓴다는 작자가 "조시"는 또 뭐야. 김미선은 쓰게 비웃고 있었다.
호산댁은 작은 며느리가 옷을 차려입고 나가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가 동그란 손거울을 꺼내놓고 빗을 집어 들었다. 비녀를 뺀 머리로 빗을 가져가다가 호산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눈길이 잡혔다. 참말로 험허게도 늙었다. 나도 인자 살 날이 을매 안 남았는갑다. 불현듯 호산댁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너무 오래 되어 금이 가고, 물이 잡힌 거울에 얼비치는 자신의 늙을 대로 늙은 몰골에 썰렁한 찬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날로 빠지면서 희어지고 있어서 잎 떨구는 가을 산처럼 헤성했고, 얼굴에 잡힌 굵고 가는 주름살들도 더는 들어앉을 자리가 없을 지경으로 얽히고 설켜 얼굴을 쪼골쪼골하게 구겨놓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빨까지 무너지면서 입이 합죽하게 말려드니 얼굴은 더 볼품없이 늙어 보였다. 나도 꽃맹키로 훤허든 호시절이 있기넌 있었는디...호산댁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비치고 있는 손거울에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담았던 때를 떠올렸다. 혼례식 올린 첫날밤을 새우고 손수 첫 번째 낭자머리를 틀었던 기억이다. 그때 새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남들의 눈을 끌게 잘 생긴 것은 없어도 곱다는 생각만은 주저 없이 했었던 것이다. 그 시절이 바로 잡힐 듯이 엊그제만 같은데...거울도 사람도 함께 늙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흉하게 변하고 만 세월이었다.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보아도 숯장사 마누라로 그 뒷수발을 하면 진구렁 속을 질퍽거리고 살아온 세월일 뿐이었다. 어느 때 한번 숨 돌리고 살아본 적이 없는 궁색한 살림살이였다. 호산댁은 콧물을 들이켰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던 것이다. 니가 워째 요리 실답잖은 생각이나 허고 앉었더냐. 늙은 것이 인자 노망꺼지 허는갑다. 호산댁은 마음을 추스르고 숱 적은 머리칼에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헛생각에 빠져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을 깨닫자 호산댁의 마음은 더 바빠졌다.
‘나가 허는 일 웂이 밥만 죽음스로 근천시럽게 살아도 관조가 중핵교 들어가기 전에야 죽을 수는 없는 일이제잉. 허먼, 고 불쌍헌 것이 우리 집안 장잔디, 나가 워게든 오래 살아서나 고것 뒷수발얼 거들어야제. 고것이 즈그 아부지 탁해서 영판 똑똑허덜 않는디, 고건 장래가 워찌 될란지 생각만 혀도 가심이 터질 일이여. 빨갱이 자석! 빨갱이 자석! 어린 것이 폴세부텀 손꾸락질 당허고 눈총질당험스로 사니 을매나 기가 꺾이고 주눅이 들것이여, 금메. 빨갱이도 그냥 발갱이가 아니라 군에서 질로 높아뿌렀시니, 숨키기럴 헐 것이여, 개키기럴헐 것이여. 입산혀갖고는 자리가 더 높아져뿌렀다는 소문인디, 남치기 식구덜 살기가 자꼬 에로와지제. 그려도 내놓고 말 못혀서 그렇제, 관조애비가 인물이사 을매나 똑별난 인물이여. 인공이 질게 가덜 못혀서 그렇제, 그때 관조애비가 일 공평하고 똑바라지게 혀나가는 것보고 입 달린 사람이먼 모다 머시라고 혔어. 일정 때부텀 이적지꺼지 쳐서 군수 중에서 질이라고 허덜 안혔는감. 순사덜허고 부자덜이나 관조애비럴 원수로 알제, 가난한 농새꾼덜이나 천허게 사는 사람덜이야 모다모다 질로 치지 안혔든감. 나도 그때 서너 달 동안에 떠받들림스로 대접받은 것으로 치자먼 장한 자석 둔 엠씨로 포한얼 푼 심이여. 그때 허는 것 봉께로 광조애비가 허는 일이 열분, 백분 옳여. 모냥새도 생각도 다 똑겉은 사람덜이 사는것도 다 똑겉이 공평하니 사는 시상이 옳제, 워째 한 사람 배터지게 살리자고 백 사람, 천사람이 배곯아야 허는 시상이 옳을 것이요. 고것이야 아그덜도 다아는 이치고, 물 흘르디끼허는 순린디, 워째 그 물줄기럴 꺼꿀로 돌리자고 염병이여, 염병이. 그 억지춘향이 맹글리는 이승만이는 사람도 아니여. 그 잡녀려 영감탱이가 우리 아덜이 고상고상혀서 맹글어논 살기존 시상얼 다 때래뿌식어뿔고 또 문딩이 콧구녕 겉은 시상으로 되돌린 것이여. 사람덜이 무서바 말얼 안헝께로 그렇제 맘속에 두고 있는 군수는 우리 큰아덜 염상진이여! 하면, 염상진이제!’
호산댁은 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큰아들 생각만 하면 언제나 가슴에서는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인공을 거치고 나서 큰아들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고, 남편의 묘를 찾아가서도 아들이 얼마나 장한 일을 해냈는지 차근차근 다 말했고, 남편이 아들에게 가졌던 서운한 마음도 다 풀어버리라고 권했던 것이다. 큰아들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 노릇을 하지 않아 남편의 가슴에 못을 박긴 했지만, 결국은 남편이 평생 한스러워했던 잘못된 세상을 뒤바꿔 선생보다 훨씬 장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은 호산댁은 작은 보퉁이를 들고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 부엌으로 눈길을 돌렸다. 부엌데기 처녀가 입에 붙은 노래인 "임이여 성공하소서..." 하는 대목을 읊조리며 빨래를 주무르고 있었다. 처녀가 그 노래를 할 때는 불러도 잘 알아듣지 못하기가 예사였다. 호산댁은 발끝으로 걸어 빠끔히 열린 대문 사이로 빠져나갔다. 굽어진 허리로 잰 걸음질을 쳐 골목을 벗어난 호산댁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 휴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작은며느리의 눈을 피하고, 부엌데기의 눈까지 피해가며 손자를 만나러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 서글픔을 느꼈다. 부엌데기 쳐녀도 작은 며느리가 시집오면서 데려온 아이니까 눈을 피해야 하기는 작은며느리와 마찬가지였다.
호산댁은 어느 길로 갈까를 잠깐 망설이다가 뒷길로 마음을 정했다. 작은 며느리의 눈을 끝까지 피하자면 아무래도 큰길보다 뒷길이 더 안전할 것 같았던 것이다. 호산댁은 걸음을 옮겨놓으며 작은 보퉁이를 머리에 이었다. 며느리가 하나 더 생겼으며 무언가 좀 나아지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살기가 더 옹색스러워지고 말아 호산댁은 자신의 신세 박복함을 소리 없이 한탄했다. 사람들은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들여온 것을 못내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건 작은아들한테나 기분 좋게 들릴 말일 뿐이었다. 호산댁으로서는 부잣집 딸이 며느리로 들어왔다고 해서 별나게 돈으로 호강하는 일도 없었고, 또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집을 새로 이사해 방이 커지고 깨끗했지만 그것도 전혀 즐거움일 수가 없었다. 그전 집보다 더 작은 방에 거처하더라도 마음 편하고, 그리고 전처럼 손자손녀를 마음대로 보러 다닐 수 있기를 호산댁은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제 틀린 일이었다. 작은 며느리의 마음이 변할 리 없었고, 따라서 작은아들이 그것을 허락할리 없었던 것이다. 작은며느리가 들어오면서 자신의 단 하나 즐거움이었던 손자 만나러 다니는 발길이 막히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작은 며느리는 새살림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도 큰집에 인사갈 눈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아들도 그런 낌새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큰아들이 집을 비우고 있어도 큰집은 어디까지나 큰집이었다. 제사도 엄연히 큰집에서 모시고 있는데, 손윗사람에게 그럴 법이 없는 일이었다. 호산댁은 며칠을 기다리다 못해 아들 내외 앞에서 어렵게 입을 떼게 되었다.
"야야야, 작은애기야, 큰집 동서헌테 인사걸음 한분 혀야 쓰덜 않겄냐?"
아들이 무슨 소리를 걷지를지 몰라 일부러 며느리에게 말을 붙였다.
"워메 어무님, 고것 시방 지정신으로 허는 말씸이다요?"
"아니 니가...고것이 무신 소리여..."
며느리의 그 당돌한 태도에 너무 놀라고 당황한 호산댁은 말을 더듬거리고 있엇다.
"무신 소리넌 무신 소리여라! 우리 아부지, 우리 오빠 죽인 것이 누군지 몰라서 어무님언 고런 소리 나헌테 허고 그요? 나헌테넌 냄편 하나만 있제 큰집이고 지랄이고 웂어라. 포도시 참고 사는 나 가심에 불질르지 마씨요."
눈을 부릅뜬 며느리가 표독스럽게 퍼부어댄 소리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호산댁은 멍한 정신으로 앉아 있었다.
"엄니넌 워째 그리 눈치콧치도 웂소. 아는 것이 웂이으면 해주는 밥이나 묵고 소리 웂이 앉엇을 것이제."
작은 아들이 벌컥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아니여, 아니여. 나가 암것도 몰르고 헌 소린께 웂던 일로 혀, 웂던 일로."
겁 질린 호산댁은 다급하게 말하며 고개를 내두르고 있었다.
"봇씨요, 그 집구석 아그덜 우리 집에 발길 못허게 허라고 혀주씨요."
작은며느리가 작은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 알겄어."
작은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니, 알겄제라! 그 집구석 아그들 여그 얼씬도 못허게 허씨요."
호산댁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호산댁은 작은아들의 기세에 놀리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글고 말이요, 어무님도 우리허고 항꾼에 살라먼 그 집구석에 발길 안허게 혀주씨요."
작은며느리가 또 작은아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항, 그래야제. 엄니, 알겄제라! 엄니도 인자부텀 그 집구석에 걸음 끊으씨요."
호산댁은 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호산댁은 머리를 방바닥에 박고 느껴 울며 괜한 말을 꺼냈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집안의 모양새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자신도 발걸음을 할 수 없도록 일을 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큰아들이 솥 공장 집 부자에게 직접 총질은 하지 않았더라도 그 결정을 내린 것은 틀림없는 일이니 작은 며느리가 그리 치를 떨어대도 아무 할 말이 없긴 했다. 시어머니는 있으마 마나, 남편한테 그런 일을 거침없이 시키는 며느리도 가관이었고,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착착 따라서 하는 아들 꼬라지는 더 가관이었다. 처가 재산 위에 올라앉은 작은 아들놈은 넋도 뼈다귀도 다 빠져버린 얼간이였다. 아들이 그 지경으로 변했거나말거나 호산댁은 자신이 발길을 못하게 된 암담함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호산댁은 시어머니 노릇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며느리도 시어머니 눈치 같은 것은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돌았다. 아들이 에미를 우습게 아니 며느리가 한술을 더 뜨는 판이었다. 며느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호산댁은 어떻게 하면 큰아들네를 도울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발걸음도 못하게 된 형편에 전처럼 쌀을 퍼낼 수는 없었다. 표가 안 나게 하자면 돈이 제일인데, 작은아들한테서 돈이 나오지 않고서는 어디서 땡전 한 닢 생길 데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들한테서 돈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머리를 짜고 짜도 그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나이 또래의 노인네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럴듯한 생각을 해내게 되었다. 그래서 며느리의 눈을 피해 아들을 곧 만났다.
"니가 솥 공장이고 정미소 사장인 것이 틀림웂제?"
호산댁은 첫마디를 이렇게 꺼냈다.
"그렇제라."
작은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이면서도 대답은 야무지게 했다.
"글먼, 그 두 가지 사장이면 읍내서 헌다허는 부자 축에 들고, 유지 축에 드는 것도 틀림 웂는감?"
"아, 그렇제라."
"근디, 요 에미넌 머시여?"
"무신 소리다요?"
"안직도 무신 말인지 못 알아묵는구만잉. 고것이 무신 소린고 허니 말이시, 고런 부자에다 유지 아덜얼 둔 이 엠씨 체면이 사람덜 앞에서 똥친 막대기여. 사람덜이야 나가 아덜 덕에 돈얼 많이 지닌 줄 알고 밥도 더러 사고, 술도 더러 사고 그러기럴 바랬는디. 생전에 나가 돈이 있어야 고런 체면얼 채리고 살제. 헌디, 내가 체면 못채리는 것이야 암시랑토 않는디, 아덜 체면이 항꾼에 깎잉께 고것이 아조 속상허고 젼디기 물뚝잖드랑께로."
"금메, 말 듣고 봉께로 고것이 그렇구만이라이. 가만 있어봇씨요, 고것얼 그리 둬서는 안 되겄는디요."
이렇게 되어 전에 없이 두둑한 용돈을 타내게 되었다.
"요 돈 앗싸리허게 써서 나 체면이고, 엄니 체면이고 싹 세와뿌씨요."
작은아들이 기세 좋게 용돈을 내주며 다진 말이었다. 그러나 호산댁은그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았다. 호산댁은 그 동안 용돈을 받을 때마다 며느리의 눈을 피해 손자에게 다녀오고는 했다. 친정이며 어디로 제멋대로 나돌아 다니는 작은며느리의 눈을 피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아들이고 며느리를 어느 길목에서 불쑥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일이어서 집을 나서서 돌아올 때까지는 줄창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을 무사하게 끝내고 나면 전신이 나른하게 퍼지는 속에서 그지없는 만족감에 젖어들며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손자 광조의 펄펄 뛰며 반가워하는 모습도, 어딘가 그늘이 낀 손녀 덕순이의 안으로 접히는 웃음도, 베틀에 몸을 묶고 사는 큰며느리의 고달픈 신역도 다 꿈에서 다시 만나는 가슴 축축하게 적시는 쓰라림이었다. 호산댁은 질정없는 생각에 빠져 걷다가 그만 소방서 앞 사진관에 가까워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소방서 바로 옆은 청년단 사무실이었다. 작은아들이 읍내 어디라고 안 싸돌아다니는 데가 없지만, 청년단 앞을 그냥 무질러 지나갈 용기는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호산댁은 서둘러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지나쳐온 단팥죽 집 옆 골목을 향해 잰걸음을 쳤다. 작은아들이 곧 뒷덜미를 잡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골목을 벗어나자 큰길이었다. 그러나 호산댁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작은며느리의 친정이 있는 공설시장 쪽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작은아들이 진을 치는 경찰서나 차부하고도 반대쪽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호산댁은 큰길 삼거리를 반으로 접히다시피 굽어진 허리로 잽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왼쪽 팔은 굽어진 허리에 올라가 있었고, 오른쪽 팔은 걸음에 맞추어 폭넓게 휘저어대고 있었다. 다소 마음이 놓인 호산댁으로서는 이 지점서부터 팔다리가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 묘한 돈 힘이었다. 결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속곳 주머니에 든 돈이 그런 새 힘을 내게 만들었다. 호산댁은 삼거리를 가로질러 자애병원 쪽으로 부산하게 가고 있었다.
"어무님, 어무늬임!"
세 여자들 중에 한 여자가 뒤에서 호산댁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호산댁의 부산스런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느그 시엄니가 아닌갑다."
한 여자가 들고 있는 양산을 핑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나가 눈이 삐었간디? 저리 꼽새등으로 표 나게 걷는 늙은이럴 나가 못알아볼 성불르냐!"
윤옥자가 파르르 화를 돋우며 내쏘았다.
"근디, 마실 나왔다가 시엄니 길에서 만내먼 메누리가 먼첨 피해 달아나야 헐 일인디, 워째 니넌 꺼꿀로냐?"
다른 여자가 의아스러워했다.
"저 늙은이가 나 몰르게 저 지랄치고 댕기는 것이제. 당장에 다리럴 뿐질러뿌러야 혀!"
윤옥자는 부르르 떨며 쓰고 있던 양산을 거칠게 접었다. 그리고 호산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예 말이요, 어무님! 거그 스씨요. 거그 스랑께라!"
윤옥자는 뛰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로 쳐다보고 있던 두 여자도 윤옥자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광조할메! 거그 스랑께라!"
윤옥자가 바락 소리질렀다. 그러자 호산댁의 걸음이 뚝 멈춰졌다.
"빌어묵을 늙은이, 인자사 알아듣는구만."
계속 뛰면서 내뱉은 윤옥자의 독 오른 소리였다. 걸음을 멈춘 호산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시방 어디 가시오!"
숨을 헐떡이며 시어머니 앞을 가로막고 선 윤옥자가 내쏘았다. 얼굴이 굳어진 호산댁은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요것이 머시오!"
윤옥자가 시어머니가 이고 있는 보퉁이로 팔을 뻗쳤다. 그런데, 윤옥자의 손이 보퉁이에 닿는 것과 거의 동시에 호산댁의 두 손도 보퉁이를 거머잡았다.
"요것 놓씨요!"
윤옥자가 앙칼지게 말했다.
"안 뒤여!"
호산댁은 울음을 터뜨리듯 한 소리였다. 두 여자가 숨을 씩씩거리며 윤옥자 옆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아, 싸게 놓란 말이요!"
윤옥자가 보퉁이를 잡아챘다.
"워메!"
보퉁이를 놓친 호산댁이 곧 넘어질 것처럼 비척거렸다. 그런 호산댁의 겁먹고 일그러진 얼굴은 울고 있었다. 두 여자의 눈길이 모아진 가운데 윤옥자는 보퉁이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아아니, 요것이 다 머시여! 누구 돈으로 누구 존일 시키자고 요런 것얼 다 산 것이여! 우리 아부지, 오빠 죽인 빨갱이 자석새끼덜 믹이자고 우리 돈으로 요 과자럴 산것 아니냔 말이여!"
윤옥자는 대낮의 큰길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구 소리질러대며 과자 봉지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워메 엄미..."
호산댁은 몸을 움찔하며 가느다란 소리를 흘렸다. 봉지가 터지면서 과자들이 깨지고, 색색의 사탕이 흩어졌다.
"우리 돈으로 빨갱이 자석덜 갤차갖고 또 빨갱이 맹글라고 요런 것 산 것이여!"
윤옥자는 부들부들 떨어대며 공책을 박박 찢어댔고, 연필을 뚝뚝 부러뜨렸다. 길 가던 사람들이 눈치 살피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공책 찢어진 종이쪽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우새시럽다, 헐 일 다 혔으면 싸게 가자."
무슨 일인지 대강 눈치를 챘다는 듯 두 여자가 윤옥자를 잡아끌었다.
"아조 그 집구석에 가서 살제 우리 집에넌 발걸음도 마씨요."
윤옥자가 쏘아 지르고 돌아서며 양산을 확 펼쳤다. 그리고 총총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호산댁은 그때서야 땅바닥에 퍼질러 앉으며 깨진 과자 부스러기들과 찢어진 종이쪽들을 마디 굵은 열 개의 손가락으로 갈퀴를 만들어 싸잡아 긁어모으고 있었다. 두 줄기 눈물이 얽히고설킨 주름골들을 타넘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단의 임무교대에 따라 양효석은 최전방에 투입되었다. 다른 장교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양효석은 오랜만에 양쪽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치는 것 같은 속 트이는 상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낙동강전투 이후로 적과 맞대결하는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하고 후방에 뒤처져 패잔병들 후퇴 길목이나 막고, 공비토벌이나 나서고 하는 것이 그는 여간 못마땅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인이면 군인답게 적과 정면대결을 해서 싸워야 싸우는 맛도 나고, 이겨도 이기는 기분이 통쾌할 것인데, 패잔병들을 상대해 총질하는 것은 도무지 싸움 같지가 않았고,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것들을 상대로 하는 공비토벌이라는 것도 아이들 숨바꼭질도 아니고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양효석이 공비토벌을 마땅찮아하는 것은 그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것들하고 작전도 전선도 없이 총질을 해대야 하는 한심스런 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도 서로 맞대고 총질을 하는 것이니까 전쟁인 것은 분명하고, 내 목숨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없애자면 그때그때 머리 기민하게 돌려가며 용감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가 마땅찮아하는 것은 공비들과 맞서는 싸움이 아니라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엉뚱한 일에 있었다. 견벽청야라는 그 토벌작전이 도무지 마땅찮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견벽청야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작전이라 할 것이 없었다. 적 쪽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다 쓸어 없애라니, 그처럼 무식하고 잔인한 짓이 무슨 작전이랴 싶었던 것이다. 그 작전에 따라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이면 누구든 닥치는 대로 죽여야 하니, 공비가 움직이는 대로 뒤쫓아 다니며 사람들을 죽이다 보면 그 수가 끝도 없이 불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 무식한 견벽청야로 도처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도리가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다만 거창군 신원면의 것처럼 드러나지 않고 덮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런 사건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장교들은 알면서도 그저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으로서, 더욱이 부하들의 지휘책임을 맡고 있는 장교로서 상부에서 정해놓은 기본 작전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거나 불평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행위는 곧 항명이며, 명령불복종이고, 군기문란이고, 사기교란으로 즉결 처분감이었다. 층층이 즉결처분권이 부여되어 분대장에까지 내려가고 있는 전시에 그런 행위를 했다가는 당장 총살이었다. 즉결처분을 당하는 것처럼 간단하고도 허망한 일은 없었다. 양효석 자신은 즉결처분을 해본 일이 한 번도 없지만, 중대장이 된 다음에 예하소대에서 한 건이 발생했었다. 소대장도 아니고 분대장인 중사가 일등병에게 총질을 해버린 것인데, 그 이유는 명령불복종이었다. 분대별로 공비와 접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진격명령을 듣지 않고 바위 뒤로 몰래 숨었다가 들킨 것이었다. 그래서 현장 사살했다는 것이고, 그 사실을 분대원들이 입증했다. 그는 중대장으로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충실한 지휘관의 임무를 다한 것뿐이었다. 그 일은 그것으로 깨끗하게 처리되었다. 그 일등병의 죽음은 복잡하게 "명령불복종에 의한 즉결처분"으로 분류되지 않고 그냥 "전사"로 집에 통고될 뿐이었다. 그런 이유뿐만 아니라 탈주 같은 것으로도 즉결처분은 여러 중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탈주에 따른 즉결처분은 전쟁 초기에 많이 저질러졌다. 겁을 먹은 사병들의 부대이탈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고, 군 기강을 세우기 위해 탈주자들은 잡히는 족족 사살 당했다.
양효석은 신원면을 떠나서도 계속 그때의 기억에 시달리고 있었다. 낮에도 서로 뒤엉켜 죽어가던 사람들의 끔찍스런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르는가 하면, 갑자기 난산하는 기관총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수없이 터져 나오던 온갖 비명소리들이 섬뜩섬뜩하게 들려왔고, 밤에 꿈을 꾸게 되면 그때의 장면들이 영화를 돌려대듯이 생생하게 반복되고는 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을 못한 채 그 일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여자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수없이 죽인 적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과 대조적인 일이었다. 그건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이었다. 아무 죄도 없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살해해버린 죄책감은 그리도 벗어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잔인한 견벽청야라는 것이 작전의 하나가 되었으려면 어디까지나 무장한 적을 상대로 했어야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민간인들을 그런 작전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었다. 그는 자신만이 그런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간이 크기로 중학교 때부터 소문이 나 있었고, 일찍부터 주먹을 휘두르다 보니 어지간히 끔찍한 일은 예사로 보아 넘길 수 있게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리도 오래 시달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군인이었던 것이다. 그놈의 견벽청야로 자신의 사단이 여기저기서 저지른 양민학살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양효석은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진저리를 쳤다. 산청, 함양에서 팔백 명을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문경군 산북면에서 백오십 명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리고, 산청군 시천면에서는 버스 열한 대에 사람들을 실어다가 산골짜기에서 학살했다는 것이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에서는 천여 명의 양민들을 죽였는가 하면, 전라북도 남원군 주천면에서는 청년만 육십여 명을 총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모두 덮여 있다가 거창사건이 문제가 되자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소문들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날짜와 부대가 정확했으므로 헛소문일 수가 없었다. 양효석은 언제 또 양민들에게 총을 갈겨대야 할지 모를 끔찍스러움에서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부대가 전방으로 이동되는 것을 적극 환영했던 것이다.
"중대 장병 여러분, 여기는 적의 정규군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최전선이다. 이제부터 지난날은 다 잊어버리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새롭게 싸울 각오들을 하기 바란다."
전선배치를 받던 날 중대원들에게 일부러 이런 내용의 훈시를 했던 것도 양효석은 자기 나름으로 그 의미가 컸던 것이다. 양효석은 전방에 투입되면서부터 전투의 맛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공비토벌에 비해 최전선 전투는 화력부터가 확연하게 달랐고, 적과 맞붙는 치열도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빨치산들은 뒤쫓다가 지치게 마련인데, 인민군들과는 화력을 이용한 정면대결뿐만 아니라 육박전까지 벌이기가 예사였다. 육박전이 벌어지는 것은 서로가 고지공방전을 얼마나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가를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 전투양상은 휴전협상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휴전선을 정하는데 있어서 미국 쪽에서는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그 시점의 전선"을 내세웠고 북쪽에서는 "전선을 무시한 삼십팔도선"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조건에 따라 모든 전선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뺏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정해졌고, 모든 병사들은 그 목표 아래 집결되어 있었다.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리려는 이쪽의 전투력 강화에 적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전선이 북으로 밀릴수록 "삼십팔도선 휴전선" 조건이 불리해지므로 적들도 총력전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육박전은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갖 비행기들이 동원되고, 여러 가지 곡사포탄들이 난무하는 현대전에서 원시적인 육박전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부인할 수 없는 눈앞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현대무기의 화력에서보다 육박전을 통해서 전투효과를 더 크게 올릴 수가 있었다. 물론 그와 반대로 이쪽에서 병력손실을 크게 입을 수도 있었다. 화력이라는 것은 참호만 단단하게 구축하면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지만, 육박전이라는 것은 서로 뒤엉켜 싸우는 것이므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가장 처절하고 막다른 싸움판이었다. 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치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갈기는 육박전에서 끝까지 살아남고, 부대가 이긴다는 것은 재수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싸움은 어쩌다 폭탄을 피하는 요행수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싸움이야말로 싸우는 실력의 대결이었다. 이 점을 중시한 양효석은 중대원들에게 특별훈련을 강화시켰다. 양효석은 극성스러울 정도로 자기 중대원들에게 훈련시키는 것은 총검술과 격투기였다.
"휴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제군들이 살아서 부모 형제 품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솔선해서 한 번 더 찌르고, 한 번 더 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적보다 먼저 찔러야 살고, 적보다 세게 쳐야 산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죽자 사자 연습하는 길밖에 없다. 제군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가, 죽어서 까마귀밥이 되고 싶은가!"
양효석은 칼칼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하는 이 말은 아주 자극적이었고 선동적이었다. 부하들은 또한 양효석의 말을 상관이면 으레 해대는 그렇고 그런 귀찮은 소리로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 전우들이 육박전에서 죽어가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양효석은 말로만 총검술과 격투기 연습을 강조하지 않았다. 자신도 웃옷을 벗고 나서서 직접 훈련에 가담했다. 그건 솔선수범을 보이거나,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부차적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훈련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자기도 언제 어느 때 육박전에 휩쓸리게 될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위급상황에 대비해 그는 총이 자신의 팔다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총검술을 익힐 필요를 느꼈고,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일격에 적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팔다리도 다시 단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중대장의 그런 열성에 따라 그의 중대원들은 그저 짬만 생기면 땀을 뻘뻘 흘려대며 총검술이고, 격투였다. 양효석은 중대전선을 살피고 다니다가 아무소대나 분대에 끼어들어 부하들과 총검술을 하고 격투를 벌였다.
"나는 중대장이 아니다. 이 순간부터는 적이다. 인정 사정 없이 찌르고 치는 것이다!"
양효석은 모자와 웃옷을 벗어던질 때마다 부하들에게 똑같은 말을 외쳤다. 총검술은 칼을 빼고 했지만 격투는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치고 차게 되어 있었다. 그 길고 무거운 M1소총을 마치 가벼운 막대기 다루듯 하는 양효석의 솜씨는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격투기술이었다. 그는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셋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가 예사였는데, 차례로 나가떨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부하들이었다. 두세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 때 그의 치고 차는 팔다리는 어찌나 빠른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의 주먹에 맞으면 다시 일어나 덤빌 수 있어도, 발에 채여서는 다시 일어나는 사병은 거의 없었다. 그건 그가 강조하는 말을 틀림없는 사실로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발을 써라, 발을! 다리는 첫째, 팔보다 길이가 두 배 가깝게 길다. 그러니까 적이 접근하기 전에 먼저 칠 수 있다. 두 번째, 다리는 팔보다 힘이 두배 이상 세다. 주먹으로는 두 번 이상 쳐야 할 것을 발로는 한 방으로 오케이다. 그리고 셋째, 발에는 이 군화가 신겨져 있다. 맨주먹에 비해 이 군화의 타격효과는 몇 배가 큰지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알겠나, 제군!"
물론 양효석이 남달리 싸움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가 한 방도 안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발길에 배나 옆구리를 채이기도 했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멍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본 사병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발길로 차 비틀거리게 하거나, 그의 얼굴에 멍이 들게 한 사병들은 격투가 끝나면 으레 그에게 칭찬을 받았고, 동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나를 쓰러뜨려 재공격을 못하게 만드는 장병에게는 일 계급 특진에 무공훈장을 수여한다. 그건 적의 중대장을 죽여 없앤 무공으로 인정하여 품위를 상신할 것이다."
그가 부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세운 약속이었다. 그러나 중대원들은 아무도 그 혜택을 탐내지 않았다. 중대장을 그렇게 만들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숨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누구나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효석은 연대의 장교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 권위와 위치를 확고하게 누리고 있는 장교였다. 그의 그런 가시적인 완력이 군대라는 특수사회 속에서 출중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고, 더구나 전쟁 마당에서 그 능력은 눈부신 용맹의 빛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경력이 그 빛을 더욱 찬란하게 떠받쳐주고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그가 사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제 일회라는 사실이었다.
"역시 육사 출신은 어디가 달라도 달라."
사병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오가는 그에 대한 가치평가였다. 사실 모든 장교들, 특히 그보다 계급이 높은 장교들 중에서 그가 확보하고 있는 순수성에 당당하게 맞설 만한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계급이 높을수록 관동군 출신이거나 만군 출신들이었고,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이 장교계급장을 달고 있는 형편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의 존재는 국방군 장교의 처녀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때 묻지 않은 경력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장교들은 광복군 출신들이거나, 학병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극소수였고, 이미 군부의 실세가 아니었다.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의 모든 분야들이 친일반민족세력에게 장악되면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나 양심적 사회개혁주의자들이 하나같이 반공논리에 몰려 무자비한 척결과 제거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규 육사 출신들은 자신들의 순수성이 상급 장교들의 때 묻은 경력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자기네들이 육사 팔기가 아니라 육사 일기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뜻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단기교육으로 끝낸 비정규 육사가 사년제 정규육사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논리적 근거에 앞서서, 그들은 심정적으로 상급 장교들의 때 묻은 경력을 경멸했던 것이고, 그들과 이유 없이 선후배로 연결됨으로써 자기들의 경력마저 더렵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들과 단절을 꾀함으로써 자신들의 순수를 지킴과 동시에 군대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욕구는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년 여름 전투에 투입되기 직전에 진해에서 그 문제가 거론되자마자 곧 막강한 힘으로 묵살되었다. "하극상"이라는 철퇴였다. 그건 군대에서 "명령불복종"이라는 또 다른 죄명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정당한 요구는 불만으로 변해 그들의 가슴에 돌멩이로 남아 있게 되었다. 양효석도 그 돌멩이를 꽤나 크게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어쩌다 동급생들을 만나게 되면 그 불만부터 털어놓고는 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부당성만은 삭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씨 뿌린 사람이 없는 코스모스가 여기저기 피어나면서 구월이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긴급작전명령이 부대마다 떨어졌다. 양효석의 몸은 용수철인 듯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믿고 사랑하는 용맹스런 중대 장병 여러분! 마침내 우리가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번에 실시하는 작전은 그동안 싸웠던 그런 소규모 전투가 아닙니다. 사단 전체가 움직이는 대규모 전투로서 장병 여러분들은 적들을 백두산 너머로 밀어붙이고야 말겠다는 철통같은 각오로 이번 전투에 임해야합니다. 장병 여러분, 여러분들이 똑똑히 보고 있다시피 우리는 지금 전쟁에 이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여기가 바로 삼팔 이북의 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휴전이 되기 전에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군인이 되어야합니다. 장병 여러분, 바로 이번 작전이 충성을 다 바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북괴군들을 닥치는 대로 무찌르고 용감무쌍한 자유대한의 국군으로서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다 같이 철통같이 뭉칩시다!"
양효석은 주먹으로 하늘을 쳐올리며 부하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연대단위로 고지공격전인 감행되었다. 각 연대는 지정된 고지들을 독립적으로 점령해야하는 책임 아래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고지마다 폭탄들이 작열하는 가운데 수많은 군인들이 공격목표를 향해 봇물 터진 듯이 밀려가기 시작했다. 그 작전은 구월 십일을 기하여 대대적으로 전개된 유엔군 추계대공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