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태백산맥 4-4

Bollnow 2024. 3. 12. 07:05

11. 재귀열이란 돌림병

아침이면 산골짜기마다 안개가 짙게 드리워지고, 햇발이 퍼지면서 안개가 스러져가면 골짜기에는 어제 없던 진달래꽃이 활짝 웃고 있고는 했다. 실비가 건 듯 스쳐가고, 가랑비가 사운거리며 한식경씩 내리고, 이슬비가 함초롬히 솔잎을 적시다 가면 산빛의 초록은 그 다양한 색감을 자랑하듯 아래서부터 위로 물결 져 올랐다. 그 봄 물결에 실려 진달래꽃도 산등성이를 타올랐다. 비가 한 차례씩 스쳐갈 때마다 풀이란 풀, 나무란 나무는 환성을 지르듯 푸른 기지개를 켜며 우쭐거려 일어서고,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는 차츰 맑고 크게 도란거리고, 햇발은 솜이불인 양 나날이 포근하고 두터워져 갔다. 사월은 산골산골에 부풀대로 부풀다 못해 끝내는 터져 낭자하게 물감 칠하는 초록의 봄을 현란하고 화사하게 펼쳐놓고 있었다.

"와따메, 이불이 따로 웂네이. 요 따땃허고 두껀 햇발 이불삼아 덮고 한숨 늘어지게 잤으먼 쓰겄네."

김복동이 비탈에 비스듬하게 몸을 뉘인 채 늘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글안해도 건전주름헌 성님 눈에 잠이 따뿍 찼소. 허도, 금세 출발명령 떨어질 것잉께 잠잘 생각이야 허덜 마씨요."

마삼수가 손에 닿는 진달래꽃을 따서 연상 입에 넣으며 말대꾸를 했다.

"짚이 잠언 못 자도 요리 자울자울허먼 그려도 고단헌 것이 풀리는 법이시. 근디, 아그덜멩키로 자네 무신 짓거리 허는 것이여. 시방."

"보먼 몰르요? 봄 따묵고 있소."

"머시여? 봄얼 따먹어? 거 무신 생뚱헌 소리여?"

김복동이 잠이 찬 눈으로 마삼수를 쳐다보았다.

"와따, 멋대가리 웂은 성님하고는 말이 안 통헌께 그냥 자울기리기나 허씨요."

마삼수는 새로 딴 진달래꽃을 입에 넣으며 눈총을 쏘았다.

"아니, 근천시럽게 배 채우자고 꽃 따묵음시로 봄 따 묵는다고 생뚱헌 소리 허는 눔이 누군디, 누구보고 말이 안 통헌다고 그냐?"

김복동은 졸기도 틀렸다는 듯 윗몸을 세우고 쌈지를 꺼냈다.

"참말로, 성님언 워찌 그리 맘이 돌뎅이요. 그 징허게 춥든 삼동이 은제 가뿔고 요리 기맥히게 존 봄이 왔는디, 성님언 맘이 요상시럽게 할랑기림스로 꽃도 잠 따묵어 보고잡은 생각이 안드요?"

마삼수는 그렇지 않느냐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김복동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가 인자 물 올르는 이팔청춘 가시넨지 아냐? 봄이 왔다고 맘 할랑기려 꽃 따묵고 자시고 허게. 염병하고, 봄이 된께 생각나는 것은 처자석덜뿐이다."

김복동은 담배를 말며 어깨로 한숨을 쉬었다.

"와따 참말로, 성님언 못 말기겄소. 헐 생각이 잔생이 웂어서 그런 심 파허는 생각허고 앉었소. 나가 한 말 팍 혀뿔께라. 워쩔께라?"

마삼수가 쌈지를 거칠게 꺼냈다.

"못헐 소리 머있고, 못 들을 소리 머 있간디?"

김복동이 담배연기를 빨며 코웃음을 쳤다.

"성님이 허는 생각이 바로 해당적 감상주의고, 가족주의요."

마삼수가 정색을 하는 척하며 내놓은 말이었다.

"아이고 똑똑타, 우리 삼수. 니가 당원 찜쪄묵겄다."

김복동이 눈을 휘둥글하게 뜨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똑똑헐라고 허는 말이 아니고라, 학습에서 배운 말 한분 써묵어봤소. 근디 성님, 오도가도 못허는 집 생각 겉은 것 허덜 말라 그 말이요. 집 생각 허먼 공연시 맘만 씨리고 기운만 빠지제 얻어지는 것이 머시가 있소. 다 항꾼에 겪는 고상잉께 투쟁이나 심지게 혀얄것 아니겄소."

"고것이야 누가 몰르간디. 맘이란 것이 다 지절로 씨이는 것이제 워디 생각맹키로 되는 것이드라고? 어이웨, 근디 말시, 우리가 허는 투쟁이라는 것이 미꼬미가 있으까? 어름 풀림스로 일어나는 바람기가 쎄코름헌 것이 워째 요상시럽덜 않은가?"

김복동이 주위를 살피며 뒷말을 속삭임으로 낮추었다.

"성님, 무담씨 고런 말 해쌓지 말고맘 강단지게 묵으씨요. 기왕지사 입산혀뿐 것, 죽기 아니먼 살기 아니요? 여자들도 총 들고 나스고, 시무살도 안 된 것들도 총 들고 나슨 것 생각허씨요. 허고, 우리 시상이 꼭 온다고 철통겉이 믿으씨요."

마삼수는 낮춘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자네넌 그것이 믿긴가?"

김복동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마삼수를 쳐다보았다.

"믿제라. 아니 어쩌다가 맘이 뜨광허니 묵어져도 고런 맘 팍팍 쳐내뿔고 믿을라고 애써야제라."

마삼수의 말에는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자네 맘이 장사시. 나도 그리 심지게 맘이 묵어져야헐 것인디..."

"봇씨요 성님, 염상진 동무나 안창민 동무 같은 사람덜얼 봄스로 그것을 믿으씨요. 고런 유식허고 똑똑헌 사람덜이 앞날얼 올매나 잘 알먼 그 고상덜얼 그리 사서 허겄소. 그 사람덜언 편케 살자먼 올매든지 편케 살아지는 사람덜 아니겄소?"

"그야 그렇제. 끝 못 보고 그간에 죽어간 사람덜얼 생각허나, 고런 잘난 동무덜이 몸 안애끼는 열성을 생각허나 맘 강단지게 묵어야 쓰겄제. 나가 영판 쫌팽이넌 쫌팽이시."

"되얐소. 그만허먼 아조 근사한 자기비판이요. 성님이 고런 맘 살짝허니 들었던 것은 바람난 잡년이 궁뎅이 살랑살랑 흔드는 것맨치로 맘 싱숭생숭허게 맹그는 요 지랄 겉은 봄바람 땜시오. 나가 담배 한 대 맛나게 몰아줄 팅께 고런 맘 탈탈 털어뿌시오."

마삼수가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종이를 접었다.

"자네넌 영 용네이. 학습 받든 에로운 말얼 척척 써묵어쌓고."

"흐흐, 나도 그런 말 써묵음스로 뒷통수고 볼때기고 간질간질허요. 근디, 안창민 정치위원동무가 말혔디끼, 싸게싸게 사상 무장얼 허자먼 자꼬 써묵어봐야제 워쩔 것이오."

"금메, 그리 써묵어진께 용허단 말이시. 나넌 그리 혀볼라고 혀도 영 입이 안 떨어진당께로. 글 깨치기도 영 늘품이 웂이고 말이시."

김복동이 풀이 죽어 말했다.

"성님, 성님이 워째 고것이 안 되는지 아시오? 나맹키로 비우짱이 웂어서 그러요. 요 말얼 써묵다가 틀리먼 으쩔끄나, 저 대목에서 무신 말얼 써묵어야 헌다냐, 우선에 고런 쭈밋쭈밋헌 생각얼 싹 웂앴뿌씨요. 틀릴라먼 틀려라, 웃을라먼 웃어라, 허는 뱃보로 미친년 널뛰대끼 아무 말이나 씨불씨불 해대다 보먼 늘품이 생긴당께라. 괴기도 묵어본 놈이 잘 묵는다는 말 안 있습디여? 말도 체면 볼 것 웂이 씹떡껍떡 많이 해대는 놈이 결국 잘허게 되는 것 아니겄소?"

"그려, 자네가 나 맘얼 영축웂이 찍어내는구마. 이치야 그리헌디, 공산당 말이라는 것이 음담맹키로 술술 풀려나덜 않은께 탈이여."

김복동이 짭짭 입맛을 다셨다.

"음담도 워디 첨부텀 술술 풀렸습디여? 자꼬 연습허시씨요. 여깄소."

마삼수가 말이 담배를 내밀었다.

"워째 뜰 생각얼 않고 요리 태평시런고?"

김복동이 담배를 받아들며 지휘관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설핏해지기럴 기둘리는 것 아니겄소?"

마삼수가 부싯돌을 치며 대꾸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정확한지, 부시로 서너 번을 쳐서 부싯깃에 불을 붙였다. 부싯깃의 쑥 타는 냄새가 연기만큼 가늘게 퍼져 흘렀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하나같이 부싯돌을 사용하고 있었다. 성냥은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어쩌다가 수중에 넣게 되면 지체 없이 부대장에게 내놓았다. 그 성냥은 모아져 병기과로 보내졌다. 성냥은 재생총알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원료였던 것이다.

"그렇제, 우리 대장님이 누군디, 비문이 알아서 헐라드라고." 김복동은 마삼수한테 옮겨 받은 쑥을 담배 끝에 조심스럽게 붙이고 담배를 빨아댔다. 쑥을 태우고 있던 불씨가 금방 담배로 옮겨 붙었다.

"하먼이라, 하대치 대장동무만 따라나스먼 심이 절로 나고, 맘이 탁 놓이제라. 나가 저리만 된다면야 원이 웂겄소."

"워따 그눔에 원 한번 크시. 하대치 대장님이야 워디 하루 이틀에 저리 됐간디? 허고, 그 씬 기운에, 날랜 몸, 강단진 몸이 다 타고난 것이여. 그리 높은 낭구 쳐다보덜 말고 동기맹키로나 될라고 혀."

", 동기도 소대장으로는 솔찬허제라. 그려도 지까징 것이 하 대장 동무허고 비허자먼 솔개 앞에 삥아리요. 사내자석이 안 될때 안 되드라도 워찌 삥아리 탁허기럴 바래겄소."

"말 한분 찰방지게 헌다. 니넌 누구럴 그리 탁허고 잡은 맘이 묵어지게 안직 기운 펄펄혀서 좋겄다."

김복동이 몸을 뒤로 벌렁 눕혔다.

"하먼이라, 그리 못 묵고 얼어감시로 삼동얼 났어도 새북좆이야 지끔도 펄펄허게 슨께요."

"염병헌다."

"두고 봇씨요, 기왕지사 빨치산 된 거 나도 요러타께 한가락 허고 말팅께."

마삼수는 불이 패이도록 담배를 빨았다.

풀꾹 풀꾹 푸풀꾹 풀꾹 어디서인가 풀꾹새가 애절한 목태움으로 울고 있었다. 강파른 보릿고개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어린 자식들을 뒤따라 죽은 과부의 넋이 이 산골 저 산골을 자식들 찾아 헤매며 우는 목쉰 울음이라고도 했고, 첫날밤 정을 나누고 과거를 보러 떠난 임이 아무 소식도 없이 몇 해를 돌아오지 않아 기다림에 지쳐 죽은 여인의 넋이 임을 찾아 그리도 섧게 운다고도 했다. 너무 울어 목에서 피를 토하고, 제 피를 되마셔 목을 축이며 또 운다는 목쉰 피울음은 보릿고개 속 아리는 밤마다 지칠 줄을 몰라 풀꾹새는 사월이 다 가도록 섧고 섧게 울었다. 그런데 새 한 마리를 두고 만들어진 두 가지 이야기는 그 내용에서 너무나 차이가 많았다. 하나는 배고파서 죽은 사연이고, 하나는 임 그리워 죽은 사연이었다. 배고픈 농민들이 지어낸 이야기와 배부른 양반들이 지어낸 이야기의 차이였다.

"풀꾹새가 저리 울어쌓는디, 사람덜 배꼽이 등창에 다 붙겄다."

하대치의 멀어진 눈길이 그 어딘가 먼데를 더듬고 있었다.

"금메요, 후방부 보투도 아조 에로와진 모냥이드만이라."

강동기가 쑥잎을 뜯어 냄새를 맡으며 말을 거들었다.

"허먼, 투쟁인민덜 고상이 말로 다 헐 수 웂겄제. 우리덜 도울라, 군경 눈 피헐라. 새중간에 찡게서 죽을 맛이 따로 웂은 판 아니겄소."

"그러겄제라. 근디, 군경할라 자꼬 씨게 나온께 투쟁인민덜이나 우리나 곱쟁이로 심드는 일이제라."

"그려도 인민덜에 비허자먼 우리가 훨씬 낫소. 산으로 뒷빠져서 적이나 팡팡 쥑잉께."

강동기가 무르춤해졌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추위에 얼어붙고,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우는 것이 그래도 인민들이 당하는 고생보다 낫다... 그것은 저울에 달 듯이 따져서 될 말이 아니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그것이 그대로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언제나 저런 당성을 지니게 될까... 강동기는 어떤 죄스러움으로 고개를 수그렀다. 하 대장은 그 용맹스러움도 진작에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 강단진 마음도 모든 대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 대장의 아내와 무당이 잡혔다는 소문이 지구 안에 쫙 퍼졌을 때의 일이었다. 그건 보나마나 총살을 면치 못할 변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하 대장은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른 때와 똑같이 부하들을 지휘하며 싸움에 나섰고, 싸움터에서도 달라진 것 없이 용맹스러웠다. 그러다가 하 대장의 아내와 무당이 죽음을 면하고 재판소로 넘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 더없이 반가운 소식 앞에서도 하 대장은 역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대원들은 그것이 바로 당성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혀를 내두르며 기가 죽었다.

하대치는 자신의 기동연대를 이끌고 작전에 나서고 있었다. 삼월 중순을 넘기면서부터 기를 세우기 시작한 군경의 공격은 사월로 접어들자 더욱 기세를 올렸다. 적들은 병력의 규모도 달라져 있었고, 공격방법도 변해 있었다. 경찰의 병력도 커진데다 군부대까지 합세해서 과감한 공격을 펼쳐댔다. 적들은 해방구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해방구와 인접해 있는 면의 지서들에 보루대를 쌓아 올려놓고, 그곳을 거점삼아 해방구를 공격해대는 작전을 썼다. 경찰에 비해 화력이 월등한 군인들은 해방구를 제법 깊게 파고 들기도 했다. 각 지구는 어디나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조계산지구는 백아산, 백운산, 유치지구의 중간지점이었다. 그래서 각 지구를 잇는 중요성을 갖는 동시에 양면공격을 받을 위험을 안고 있었다. 적들은 순천 쪽에서 밀려들 수도 있었고, 벌교 쪽에서 밀려들 수도 있었다. 물론 위험이 큰 것은 순천 쪽의 적이었다. 순천에는 광양 백운산까지를 관할하는 대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조계산지구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순천에서 밀려드는 적을 막아내는 데 달려 있었다. 순천의 적이 조계산지구를 공격하는 데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이 쌍암면이었다. 일제시대에 넓힌 신작로가 번듯했던 것이다. 하대치는 휘하의 기동대 병력을 이끌고 바로 쌍암지서의 공격에 나서고 있었다. 지서의 보루대를 폭파해버려 적들의 기를 꺾고, 기선을 잡자는 작전이었다. 다른 지구의 기동대들이 그렇듯 하대치의 기동대도 조계산지구에서 최강의 부대였다. 강동기, 천점바구가 다 기동대 소속이었고, 기동대는 거의가 벌교사람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동안 지구의 비무장을 무장으로 바꾸는 데 하대치가 세운 공은 무척이나 컸다. 그건 말을 바꾸면 경찰이나 청년방위대들을 그만큼 많이 죽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하대치는 경찰과 청년방위대들 사이에 악질 땅딸보로 소문이 나 있었다. 잡히기만 하면 회쳐 먹는다느니, 포를 떠서 죽인다느니, 마디마디 토막을 쳐 죽인다느니, 온갖 악담을 다 들었다. 그런데, 쉬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정반대였다. 산길 백 리를 한 나절에 걷고, 날아가는 참새 똥구멍을 맞힐 만큼 총질을 잘하며, 경찰과 맞붙었다 하면 그 빠른 발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그 기막힌 솜씨로 총질을 해대는 바람에 경찰들은 추풍낙엽이라는 것이었다. 하대치는 마침내 염상진을 뒤따르는 또 하나의 신비스런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대치는 승주군당 유격대와 합류하기 전까지 대원들의 휴식을 겸해 해가 기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짜기에 산그늘이 내리는 것을 보고 하대치는 소대별로 분산되어 있는 대원들을 집합시켰다.

"예에, 조선 인민공화국 전남유격대 조계산지구 기동대 여러분! 지금부텀 우리 기동대가 오늘 밤중에 나슬 작전에 대해 말허겄습니다. 오늘 작전은 쌍암지서허고 보루대럴 공격허는 것입니다. 오늘 공격은 지서고 보루대럴 우리가 차지허자는 것이 아닙니다. 싹 다 뚜둘겨 뿌시거뿔먼 됩니다. (이 대목에서 하대치는 주춤했다. 완전히 파괴해버리면 됩니다, 하는 말이 뒤미처 생각났던 것이다.) 공격은 삼개조로 노놔서 허는디, 정면, 왼손 쪽, 오른손 쪽, 요렇게 세 방향에서 헙니다. 승주군당서 허는 말로넌 지서허고 보루대 앞에 대창울타리, 바닥에 대창 박아논 구뎅이, 또 대창울타리, 요로크름 삼중으로 방어선얼 둘러쳤다 협디다. 고것이야 지서마동 다 그렁께 우리가 다 아는 것이고, 고것얼 워쩌크름 돌파헐 것이냐가 문제요. 그려서 공격얼 삼개조로 노놔서 허는 것인디, 정면에서 공격허는 조가 검은 개덜이 쏴질르는 기관총에 안 상헐 만치 멀찍허니 떨어져 총질얼 험스로 검은 개덜 정신을 뽑는 새에 오른손 쪽, 왼손 쪽 조덜언 번개부치대끼 방어선얼 돌파헌다 그것이요. 누런 개덜이 멀찍허니 있응께 위험시럴 것 웂고, 검은 개덜언 이적지 공격당혀본 일이 웂었응께 태평치고 있을 것이오. 긍께 오늘 야간작전에서도 인민해방얼 위한 강철 겉은 굳센 맘으로, 용맹시런 전남유격대 조계산지구 기동대의 당당헌 전사로, 모다 용감무쌍허게 싸와주기럴 바라겄소. 앞으로 삼십 리 행군이 남었응께 지금뿌텀 지니고 있는 저녁밥얼 묵도록 허겄소."

하대치는 말을 마쳤다. 백여 명의 대원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총들을 뻗쳐 올리며 입들을 있는 껏 벌렸다. 입들의 모양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소리쳐 외치고 있는데 소리라고는 전혀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똑같은 동작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그들이 총을 치뻗어 올리며 소리 없이 외치는 소리는,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였다. 그러나 그 외침은 안전지대인 해방구 안에서는 목이 터지도록 크게 외칠수록 좋았지만, 일단 해방구를 벗어나 작전에 들어가게 되면 빈 소리 외침으로 바꾸게 되어 있었다. 물론 박수를 칠 일이 있어도 손바닥이 서로 엇갈리는 공박수를 쳤고, 노래를 부를 일이 있어도 입놀림과 손짓만으로 공노래를 불렀다. 그래도 그들은 소리를 내는 것과 똑같은 기분을 느꼈고, 마음들을 한 덩어리로 뭉칠 수 있었다. 하대치는 흩어지는 대원들을 바라보고 서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함을 떼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연설을 말끔하게 해내지 못하고 또 한 군데 흠을 낸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잘하는 연설이란 어려운 말을 많이 하거나, 말을 막히지 않고 줄줄 해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 모두가 그 뜻을 다 알아듣도록 쉬운 말을 하는 것이라고 안창민은 말했다. 직책이 자꾸 높아지면서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게 되니까 자연히 연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갔다. 자신도 염상진 대장처럼 멋지게 연설을 해보고 싶은 것은 오래 된 꿈이었다. 마음으로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환한데 막상 사람들 앞에 나서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평소에 말하듯이 하면 됩니다. 자꾸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늘게 되거든요."

안창민의 말이었다. 안창민의 말은 그랬지만, 말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면서도 그냥 둘러앉아 하는 말이 다르고, 회의를 한다고 모여앉아 하는 말이 다르고,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하는 말이 달랐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인 연설이 제일 어려운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동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려면 연설부터 하는 것이 일이었다. 기본적인 군사교육이 그랬고, 매번 작전을 앞두고 실시하는 설명과 지시가 그랬고, 작전을 끝내고 꼭 시행해야 하는 평가와 비판이 그랬다. 회의석상에서 하는 말까지는 어떻게 해 넘길 수 있었는데, 수백 명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오금 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무장대원까지 칠백여명을 모아놓고 첫 번째 연설을 한 기억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일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섰는데, 몇 번이고 연습했던 말은 다 어디로 달아나버려 머릿속은 텅 비고, 눈앞이 어질어질하면서 사람들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입에 침은 마르고, 가슴은 숨을 쉴 수가 없게 벌떡거리고, 두 팔은 뒷짐을 질 수도 없고 앞으로 모아 잡을 수도 없게 거추장스러워 당장 잘라 내버리고 싶고, 두 다리는 아무리 힘을 줘서 버팅겨도 후들후들 떨리고, 어찌어찌 말을 생각해내서 하려고 하니까 볼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고, 기를 써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연상 더듬거려지며 같은 말이 되씹혔고, 겨우겨우 말을 끝내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보니 등판과 가슴팍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창자가 꼬이는 것인지 어쩐지 배가 살살 틀리며 아팠고, 열이 오르며 아프기 시작한 머리는 이튿날까지 띵했던 것이다. 혼자서 칠백 명의 적과 맞붙었다 해도 그렇게까지 힘이 들 것 같지는 않은 심정이었다. 새삼스럽게 염상진 동지가 높게 보이고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상진 동지는 칠백 명이 아니라 남국민학교 운동장을 빡빡하게 채운 수천 명 앞에서 아무런 거침이 없이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떡 주무르듯 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자신의 꼴은 너무 한심스럽고 병신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창민의 말은 차츰 맞아 들어갔다. 대원들 앞에 자주 서게 될수록 처음의 증상들이 점차로 가라앉아가며 마음먹은 대로 말을 해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말을 끝내고 나면 꼭 한두 군데씩이 께끄름하게 마음에 걸리고는 했다.

"아마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걸요."

안창민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럼 염상진 동지도 그렇겠느냐는 말을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런 물음이 염상진 동지에 대해 버릇없는 짓 같았고, 염상진 동지도 그럴 거라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골짜기에 산그림자를 덮으며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산어스름은 평지의 어스름과는 달리 빠르게 어둠으로 변해가는 법이었다. 하대치는 부대를 출발시켰다. 대원들은 소대별로 기민하게 행군대열을 이루며 산실을 타기 시작했다. 그들의 때절고 남루한 옷들은 각양각색이었고, 총들고 가지각색이었으며, 신발도 구구각색이었다. 그러나 소리 없이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는 행동만은 일사불란하게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어스름은 빠르게 어둠으로 바뀌고, 긴 그들의 행렬은 어둠 속에 묻혔다. 한 시간 남짓 걸어 하대치의 부대는 승주군당 사십여 명과 합류했다. 승주군당은 공격보다는 현지정찰과 길안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거그 사정은 으쩌요?"

하대치는 군당 지휘관에게 물었다.

"검은 개덜만 그대로 있고 벨 변동이 웂구만이라."

"되얐소. 개덜이 밥처묵고 늘이지근허게 자빠져 있을 적에 들이쳐뿝시다. 초저녁공격이야 새북공격맨치로 전과가 큰 법잉께."

하대치의 낮지만 기운이 서린 말이었다.

"그러제라. 우리 군당은 워찌 헐게라?"

"두 조로 노놔 우리 기동대헌테 질얼 잡아주씨요. 질만 자알 잡아주먼 됐제 공격에 앞슬라고 허지넌 마씨요. 위험시런께."

"알겄구만이라."

부대는 다시 반시간 가까이 어둠을 헤쳐 나갔다. 쌍암면은 어둠에 묻힌 채 몇 개의 불빛으로 그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쩌어그 저, 질로 높으뎅헌 불빛이 바로 보루대구만이라."

군당 지휘관이 속삭였다.

"알겄소. 싸게 부대럴 둘로 쪼개씨요. 글고, 작전지시넌 다 내레놨응께 질만 까딱웂이 잡도록 허씨요."

하대치는 다시 다짐했다.

"영축웂이 해내겄구만이라."

군당 지휘관이 돌아섰다. 기동대는 이미 지시된 대로 신속하게 삼개조로 중대단위를 이루었다.

", 삼중대넌 아까 참에 지시헌 대로 일중대가 총질얼 퍼붓으먼 방책을 뚫부씨요. 군당에서 준비헌 나무다리가 셋썩잉께 대창울타리 끊는 것도 거그에 맞게만 허먼 되겄소. 글고, 절대적으로 조심시킬 것이, 구뎅이에 걸친 나무다리럴 건네가는 것이오. 날이 어둔디다가, 나무다리넌 쫍제, 맘 다급혀 허방 딛고, 뒤에서 밀치기혀뿔먼 워찌 되는지 다 알겄지라잉? 두 질이 넘는 구뎅이 바닥에 촘촘허니 백힌 대창이 전신에 백혀 직사해뿌요. 그리 죽는 것이 바로 개밥된 것만도 못헌 개죽음잉께 절대적으로 고런 실수 웂게 단도리허씨요들. 이상."

하대치가 말한 개밥이란 군경에게 죽는 것을 가리키는 빨치산들의 통용어였다. 두 중대장이 물러가자 하대치는 일중대장에게 전진대열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는 정면공격을 하는 일 중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한 줄로 가로선 부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리고 좌우로 명령을 내렸다.

"몸 접고 전진."

그 명령은 빠른 속삭임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전달되어나갔다. 그러면서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켜켜이 쌓여가는 어둠 저편에 있는 산골 면에서는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어둠의 정적 속을 풀꾹새 소리가 낮에 보다 더 선명하고 구슬프게 퍼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박혀 있는 몇 개의 불빛을 향해 몸 웅크린 모습들이 천천히 움직여가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어둠과 하나가 되어 있었고, 움직임에서도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밭두렁을 넘고, 밭을 가로지르고, 또 밭두렁을 넘고 있었다. 하대치는 불빛과의 거리를 눈가늠하며 양쪽에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정지."

양쪽으로 전달되는 명령을 따라 대열의 움직임이 차례로 멈추어져갔다.

"대열 지킴스로 가차운 밭둑에 은폐."

하대치는 연달아 명령을 내렸다. 웅크리고 앉았던 모습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하대치는 밭두렁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거림들이 깜빡거리는 불빛이라는 생각이 또 들었다. 봄별이 다르고, 여름별이 다르고, 가을별이 다르고, 겨울별이 달랐다. 같은 별들이면서도 철에 따라 분명 달라졌다. 눈은 그것을 아는 데도 말로는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나타낼 수가 없었다. 입산투쟁을 하게 되면서부터 유난히 자주 보게 된 별들이었다. 일부러 올려다 본 것이 아니었다. 자려고 누우면 으레 별들은 눈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숙을 할 때는 더 말할 것 없었고, 초막 안에 누워도 억새풀 줄기나 산죽으로 엮은 지붕 사이사이로 별들이 반짝거렸다. 결국 하늘이 천장이고 지붕이었으니 별들은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얼마동안은 별들을 무심히 보아 넘겼다. 그러나 자꾸 보다 보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음에 담기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생각은, 혁명의 세상이 오면 모든 인민들도 저 별들처럼 또록또록 빛을 내면서 살게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 안창민하고 함께 별을 올려다보고 누워 그 생각을 우연하게 입에 담게 되었다. 안창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하 동무, 바로 그거요. 혁명이 이룩된 세상은 모든 인민이 바로 그렇게 빛을 내며 사는 세상이오. 하 동무는 우리의 사상을 아주 정확하게 깨달은 거요."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손을 거머잡았던 것이다.

그런 날이 기어코 오기넌 와야 하는디...’

하대치는 무시로 하는 생각을 곱씹으며 고개를 돌려 정면의 불빛을 응시했다. 양쪽에서 전진한 부대가 방책에 가까워지고 있을 시각이었다.

"사격준비."

하대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숨을 들이켰다. 보루대의 불빛을 향해 팔을 뻗쳤다. ! 총소리가 어둠의 정적을 찢었다. 뒤따라 총소리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당, 타다다다다... 타당 탕탕탕, 탕탕탕... 적진에서 기관총과 소총사격을 동시에 가해왔다. 유탄 날아가는 소리가 삐웅삐웅 허공을 찢고 있었다. ! 콰당! 수류탄까지 터지고 있었다. 적의 위치도 모르면서 수류탄을 던져대는 적들을 가소롭게 생각하며 하대치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경찰들이 겁 질려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였던 것이다.

"소리질름서 사격!"

하대치의 명령이 마침내 크게 터졌다. 명령을 전달하는 목소리도 거침없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우와아."

"와아아."

엇갈리는 총소리 속에서 함성이 터져 올랐다. 적진에서 던지는 수류탄이 더 많아졌다.

"더 씨게 소리질럿!"

하대치는 또 명령을 내렸다.

"와아아."

"우와아."

함성이 더 크게 울렸다. 계속 수류탄이 터지고 있었다. 수류탄이 터지는 거리는 멀었고, 소총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담 밭둑꺼지 전진!"

하대치는 새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이 소리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가고 있었다. 하대치도 땅을 박치고 앞으로 내달았다. 밭두렁에 몸을 붙일 때였다. 오른쪽 어둠 속에서 함성이 터지며 총소리가 울려댔다. 하대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 겹의 장애물을 뚫었다는 표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적진에서는 수류탄 투척이고, 총소리고 뚝 멎어버렸다. 뒤따라 왼쪽에서도 함성이 터지며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쪽도 방책을 뚫은 것이었다. 그런데, 적진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은 적들이 상황이 불리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도주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돌겨억!"

하대치는 목청껏 외치며 곧장 앞으로 뛰었다. 보루대 쪽에서는 함성과 총소리가 시끌짝했다. 하대치가 왼쪽에 뚫린 길을 통해 보루대에 도착했을 때는 보루대와 지서는 이중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삼 중대넌 워찌 되얐소?"

"달아난 개들을 뒤쫓아갔시오."

인민군 출신의 이 중대장 대답이었다.

"너무 멀게 갈 것 웂는디. 이 중대넌 싸게 짚불 맹글어 지서고 보루대럴 뒤지씨요."

하대치는 이중대장에게 일렀다. 그리고 총소리가 나고 있는 삼 중대 방향으로 연락병들을 띄었다. 도망치는 개들을 더 좇지 말고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오늘의 작전은 개들의 소탕이 아니라 지서와 보루대의 폭파를 겸한 무기 확보였다.

횃불들에 어둠이 타며 사방이 밝아졌다. 일중대가 경계를 맡은 가운데 이중대가 지서와 보루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담배를 피워 물며 코를 큼큼거렸다. 이상스런 냄새가 언뜻 코끝을 스쳤던 것이다. 언젠가 맡아본 냄새 같은데 무슨 냄새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담배를 빠는데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맞어, 장터댁! 온몸이 색정으로 흠뻑 젖은 그녀한테서 나는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헤어진지도 꽤나 오래 되어 있었다. 그녀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대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치산인 줄 알면서도 그리 맛나게 밤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대치는 자신의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여자를 상대하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달째였다. 그러나 여자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언제나 고무줄을 팽팽하게 늘이고 있는 것 같은 산중생활에서 여자생각은 아예 끼어들 틈이 없었다. 부대 안에 여자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여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하고 전사일 따름이었다. 구빨치투쟁 때와는 달리 여자들이 많아지게 되자 당에서는 대원들 사이의 남녀문제를 염려해서 금지규율을 만들고, 학습을 통해서도 교육했다. 그 교육은 사상무장의 일환이기도 했다. 인민군들이 그러했듯이 지난 일곱 달 동안 인민들을 상대로 한 강간은 물론이었고 대원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일반대원들이 그러할 때 하물며 간부의 입장에서 딴 생각이 날 리 없었던 것이다.

"대장동무, 경찰 하나럴 생포혔구만이라."

"생포?"

하대치는 반사적으로 꽁초를 내던졌다.

", 짚북데미 속에 숨은 거럴 찾아냈구만이라."

"어디요, 갑시다."

포로는 횃불들에 싸여 지서마당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왼쪽다리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대치는 총상을 입고 도망을 못가 잡힌 포로를 내려다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겁에 질려 있는 포로의 얼굴은 의외로 앳되 보였다.

"몇 살 묵었냐!"

하대치의 위압적인 소리였다.

", 시무 살이구만이라."

포로는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경찰질 해묵은 지 몇 년이냐!"

"야아, 지넌 정식 경찰이 아니고라 의, 의경이구만이라."

"고것, 참말이여!"

"야아, 인자 반 년 되얐구만요."

"아부지넌 멀 허는디?"

하대치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농새꾼인디요."

"농새는 많여?"

"아니어라. 본시 소작 부치다가 농지개혁 받아갖고 포도시..."

"동무들, 피가 많이 못 흘르게 저 다리럴 묶어줏씨요."

하대치가 둘러선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대원들의 눈이 하대치에게로 쏠렸고,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서너 명이 앞으로 나섰다.

"다리럴 다쳤응께 인자 경찰에 안 끌려나올 것이여. 다리 낫아갖고 농새나 잘 지묵고 살아. 알겄어!"

하대치가 포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하먼이라, 하먼이라.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살아난 것을 알게 된 청년은 애써서 웃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런 그의 두 눈에 횃불의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하대치는 돌아섰다. 일제시대부터 악질로 굴러먹었던 경찰들 거의는 무슨 수를 쓰든지 안전한 읍이나 군의 본서에 뒷빠져 있고 앞으로 내밀린 것은 해방 후 경찰 투신자나 저런 의경들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무기와 탄약을 수거하고, 인원점검을 마쳤다.

"지서를 불 질르고, 보루대럴 폭파헌다!"

하대치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지서에 불이 붙고, 보루대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횃불들이 꺼지면서 그들은 어둠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김복동은 숨을 헐떡거리며 앞서 걷고 있는 마삼수를 붙들려고 팔을 휘저었다. 머리가 휘둘리고 숨이 막혀 올라 도저히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제부터 등줄기에 으시시 찬바람이 돌았고, 낮에는 더 자주 찬바람이 일어나며 전신이 나르지근하게 맥이 풀려나갔다. 그러면서 자꾸만 잠이 왔다. 몸살이 오는가 생각하며 이겨내려고 했다. 꼭 감기기운과 함께 오는 몸살기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몸이 뜨거워지며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질을 하는 싸움판에서 이를 맞물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다시 행군이 시작되자 열은 더 심해지면서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마삼수한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기 한 몸 간수하기에도 힘이 든 야간행군에서 짐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걸을수록 증상은 심해져 정신이 까마득해지고 숨이 막혀 더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어이, 삼수..."

김복동은 신음처럼 소리를 흘리며 피그르 쓰러져버렸다.

나가 죽을 병에 걸렸는갑다...’

그가 흐릿하게 한 생각이었다. 뒤따라오던 사람이 김복동에게 걸려 넘어졌다.

"동무, 김 동무! 워째 이러고 있소. 워디 아프요?"

몸을 일으킨 사람이 야간행군에서는 있을 수 없는 너무 큰 소리를 내며 김복동을 흔들었다. 그 소리에 놀라 마삼수는 몸을 돌이켰고, 김복동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워메, 몸이 불뎅이시!"

마삼수의 입에서 나온 소리도 너무 컸다. 뒷줄은 자연히 정지되었고, 앞줄로는 "정지, 앞으로 전달!"이 이어졌다. 곧 소대장 강동기가 달려왔다.

"무신 일이요, 동무."

"소대장이시여? 나 삼순디, 복동이 성님이 탈나부렀구마. 몸이 불뎅이인디다가 정신할라 나가부렀네."

마삼수의 말은 대원의 입장을 벗어나 있었다.

", 삼수냐. 요것이 워칳게 된 일이여?"

"나도 잘 몰르겄는디, 무신 병이 들어도 큰 병이 든 것이여."

"뜽금웂이 워째 이래뿌까?"

"아니여, 인자 생각혀본께 낮에부텀 쪼깐 요상혔어. 병든 삥아리맹키로 자꼬 자울자울허든 것이."

"알겄어, 여그서 워쩔 방도가 웂응께 니총 맽기고 싸게 들쳐업어. 나가 교대조럴 짤 것잉께."

강동기는 지휘관답게 신속하게 조처했다. 마삼수는 정신을 잃고 늘어진 김복동을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업었다. 그러나 강동기의 소대에서만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천점바구의 소대에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증상으로 하나는 업히고 하나는 부축을 받았으며, 또 다른 소대에서도 같은 환자가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부대 전체의 행군이 느려지면서 그 사실이 하대치에게 보고되었다.

"고것이 무신 요상시런 일이까? 무신 시합허디끼 항꾼에 고런 일이 벌어지니... 고것이 무신 돌림병일랑가..."

어둠 속에서 하대치가 무겁게 중얼거린 말이었다. 하대치의 염려는 그대로 맞아들었다. 다음날 기동대의 환자는 열댓 명으로 불어났다. 다른 부대들에서도 환자들이 열에 들떠 퍽퍽 쓰러져갔다. 감기나 몸살기운처럼 시작된 그 병은 하루 이틀 사이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이 높아지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돌림병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무슨 병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돌림병은 조계산지구에만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각 지구마다 퍼지고 있다는 것이 선요원들을 통해 곧 확인되었다. 김복동은 환자트로 옮겨질 새도 없이 발병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펄펄 끓는 열로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였다.

"성님, 성님! 요것이 무신 일이요, 끝도 못 보고 요것이 무신 일이요."

한 손으로는 숨 끊어진 김복동의 몸을 흔들며, 또 한 손으로는 거적바닥을 치며 마삼수가 통곡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김복동의 식어버린 몸을 피해 밖으로 도망 나오는 이들이 때 절고 헐어빠진 옷 위에서 깨알을 흩뿌린 것처럼 수없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체온 속에서 생피를 빨며 기생하던 이들은 으레껏 그 사람의 숨이 끊어지기가 바쁘게 도망쳐 나오고는 했다. 그래서 특히 겨울철에 죽는 빨치산들의 시체는 이들로 하얗게 뒤덮이기 마련이었다.

손승호는 겨드랑이며 등줄기에서 으실으실 찬바람이 일고, 갑자기 부르르 떨리는 한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설마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한낮에는 후덥지근함을 느끼는 형편에 몸에 한기가 도는 것은 심상치 않은 징조라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병세는 완연하게 드러났다. 눈앞이 흐릿거리고, 바싹 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몸은 열로 끓고 있었다. 그건 더 볼 것 없이 바로 그 유행열병이었다. 손승호는 환자수용소로 떠날 작정을 했다. 환자 발생 즉시 격리수용은 도당의 지시였다. 전염병인 이상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건 당연한 조처였고, 환자들은 자신들이 먼저 부대장을 찾아가 발병신고를 하고 환자수용소로 떠나갔다. 연예대에서도 벌써 두 명이 앞서 떠났다. 그 유행열병은 아직 원인도, 이름도 모르고, 약도 없는 채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속수무책인 도당이 할 수 있는 일은 환자들의 격리수용뿐이었다. 손승호는 연예대장을 찾아갔다.

"죄송합니다. 환자수용소로 가야 되겠습니다."

손승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손 동무도 그 병에 걸렸소?"

대장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더니,

"빌어먹을, 어쩌겠소, 병균이 제멋대로 침투하는 거니까, 힘껏 투병하시오, 건강하게 다시 일해야 하니까. 안 그렇소, 손 동무!"

하며 손을 내밀었다.

"저어... 저는 환잡니다."

손승호는 악수하기를 주저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의 동지애가 그까짓 전염병만 못하단 말이오?"

대장은 나무라듯 목소리를 높이며 손승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또 다른 손으로 손승호의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

"손 동무, 힘을 내시오. 아무리 무서운 병도 의지의 힘으로 반 이상 물리치는 것이오. 우리가 여기서 좌절할 순 없지 않소."

"명심하겠습니다."

손승호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가슴 울리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장의 초막을 나와 얼마 걷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손 동무,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절박한 느낌의 여자 목소리였다. 손승호는 짜증스러운 느낌으로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고 기우뚱거리는 흐린 시야에 박난희의 울상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손승호는 웃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병이 찾아들었소."

"알아요, 어제까지 말짱하셨는데."

입술자리가 유난히 또렷하고 눈이 큰 박난희는 더 울상이 되면서,

"가세요, 제가 환자수용소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하며 팔짱을 끼려고 들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박 동무 마음대로."

손승호는 머리가 휘둘리는 어질거림 속에서도 뒤로 주춤 물러섰다.

"손 동무, 염려 안 하셔두 돼요. 수용소까지 안내하라는 대장동무의 명령을 받았구요. 제가 팔짱을 끼는 건 어디까지나 동지를 부축하자는 거니까요."

박난희의 서울 말씨는 야무지게 또렷했고,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허락을 받은 것이겠지 생각하며 손승호는 비식이 웃었다.

"왜 웃어요, 기분 나쁘게."

박난희는 쏘아대듯 말하며 손승호의 팔짱을 끼었다. 어조와는 달리 그녀의 곱상한 얼굴도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고맙소, 갑시다."

평소에는 여자로서의 부끄러움과 소극성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어떤 결정적 기회가 오면 남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돌출된 그 여성 특유의 과감성을 느끼며 손승호는 발을 떼어놓았다.

"걷기 힘드신데 부담 느끼지 마시고 저한테 기대세요. 제 임무가 손 동무를 부축하는 것이니까요. 손 동무가 부담을 느껴 저한테 기대지 않는 것도 당의 지시를 어기는 해당행위고, 제가 그런 해당행위를 방조하는 것도 임무태만을 저지르는 해당행위니까요. 아시겠어요?"

박난희는 자못 근엄한 목소리를 꾸며 거창하게 말하고는 쿡쿡 웃었다. 과연 단역배우다운 연기고 재치라고 생각하며 손승호는 머리 조이는 어지러운 열기가 순간적으로 산뜻 가시는 것을 느꼈다.

"어찌 감히 위대한 당의 지시를 어겨 해당행위를 할 수 있겠소."

손승호는 이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몸을 의지했다. 그동안 부끄러움으로 머뭇거려왔던 그녀가 과감하게 마음을 열어 다가선 때에 자신도 그녀보다 마음을 더 크게 열어 그녀의 마음을 감싸고, 그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기대고 싶었던 것이다.

"됐어요, 편안히 기대고 걸으세요. 손 동무는 역시 당명에 충실히 따르는 순결한 전사예요."

박난희는 그 맑고 고운 음성으로 쾌활하게 말했다. 그녀의 쾌활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손승호는 알고 있었다. 박난희는 연예대의 가요보급원이면서 단역배우였다. 그녀는 노래솜씨가 단연 뛰어났고, 단역배우 노릇은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한 임시변통 정도였다. 그녀는 서울의 덕성여중 시절부터 민학에 관계해오다 해방전쟁을 따라 대전을 거쳐 전주까지 파견을 나온 문화선봉대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기운차고 씩씩하게 불러야 할 노래건, 감미롭고 애조 띠게 불러야 할 노래건, 무엇이나 막힘이 없이 잘 불렀다. 그녀는 천부적으로 목소리를 타고났고, 노래 부르는 일 자체를 행복하게 여겼다. 그녀는 미색도 어느 만큼 갖추어 대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녀가 손승호에게 동지 이상의 호감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손승호가 쓴 극본으로 연극을 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손승호는 옛날 읽었던 희곡들을 돌이켜 생각해가며 난생 처음 극본을 만드느라고 끙끙댔다. 그건 다름 아닌 솥뚜껑을 주인공으로 한 내용이었다. 전사들의 투쟁의지를 고무시키고 사기를 진작시켜야 하는 연극의 목적에 구빨치 솥뚜껑은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극본을 꾸려 연극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의외였다. 대원들은 하나같이 열렬하게 박수를 쳐대며 환호했던 것이다. 그 의외의 반응이 오랜만에 연극을 구경해서가 아니었다. 도당위원장 방준표까지 손승호를 따로 불러 격려하고, 만족스러워 했던 것이다. 그 극본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어 시를 지어 마무리했던 것인데, 그 시를 읽은 것이 박난희였다. 그녀는 그냥 시를 읽은 것이 아니라 그녀 특유의 맑고 고운 음성에 감정까지 넣어가며 암송연기를 했던 것이다.

"많이 아프신가요?"

박난희가 나직하게 물었다.

"참을 만하오."

손승호는 실은 박동무의 부축을 받으니 한결 낫소, 하는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얼마나 견디기 어렵게 아프면 사람들이 그리..."

박난희는 문득 말을 멈추고 몇 걸음 옮겨놓더니,

"아니예요, 힘을 내세요. 꼭 병을 이겨내셔야 해요."

하며 붙들고 있는 손승호의 팔을 꼬옥 힘주어 잡았다.

"그럽시다. 나도 병을 이겨내고 싶소."

손승호는 가슴 뭉클함을 느끼며 솔직하게 대꾸했다.

"제가 손 동무를 위해 시를 한 편 낭송해드리고 싶어요. 들으시겠어요?"

"좋지요, 어서 하시오."

", 잘 들으세요."

그대의 이름은 머슴 천하게 살아온 머슴 그대의 계급은 머슴 비굴하게 살아온 머슴 그대에겐 노동뿐

황소처럼 부림당한 노동뿐 배우려 해도 가르쳐주는 자 없고 배움도 죄가 되는 머슴 그대는 머슴

그대에게 빛이 있었으니 머슴도 사람인 것을 노동이 위대한 것을 노동자가 주인인 것을 깨우쳐 알게 하는 빛이 있었으니

그대의 밝은 귀 그대의 밝은 마음사슬을 끊으려 일어섰으니 그대의 이름은 빨치산 자랑스러운 빨치산

인민의 이름으로 빛나는 빨치산 그대는 계급의 굴레를 벗고 혁명의 깃발 아래 나섰으니

그대는 한 손에는 총 또 한 손에는 조선말교본 그대는 싸우며 학습하고 학습하며 싸우다 조선 글을 깨쳤어라 눈물겨운 노력이여

가슴 저린 투쟁이여 그대는 학습에 매진해 사회발전사를 해득하고 해방후 조선을 암기하고 볼셰비키당사를 익히며 세상을 알고 역사를 알고 투쟁의 참뜻을 알아 새롭게 태어났네

더 강한 혁명일꾼으로 더 굳센 인민전사로더 장한 빨치산으로 이제 그대의 이름은 빨치산 인민을 위해 싸우는 빨치산

이제 그대의 계급은 인민유격대 인민을 위해 죽는 인민유격대혁명은 그대를 부르고 그대는 혁명을 부르고 그대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빨치산 그대의 이름은 빨치산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비탈을 걸어 내렸다. 손승호는 자기가 지은 시이면서도 감동적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처한 입장과 박난희의 낭송이 겹쳐져 일으키는 감상이었다. 박난희는 연극에서와는 다르게 낭송을 했다. 그때처럼 몸짓도 하지 않았고,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고 나긋나긋하게 낭송을 해나갔다. 그런데 그 낭송은 또다른 호소력으로 가슴에 물결을 일구었다. 그녀가 왜 그 시를 다시 낭송한 것인지 손승호는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래, 내 이름은 빨치산, 인민을 위해 죽는 인민유격대다. 솥뚜껑의 말대로 이 눈물 나게 좋은 봄에 하필이면 돌림병에 걸려 죽을 수야 없지 않느냐. 시야 됐든, 안 됐든 내가 진정한 마음으로 썼던 그 구절처럼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 인민을 위해 죽는 인민유격대가 되어야한다. 손승호는 살고 싶은 의지를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환자수용소는 별로 멀지 않았다. 말이 수용소지 그곳은 단순히 환자격리장소에 불과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는 너덜겅 위에 이백여 명을 헤아리는 환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약도 의사도 없는 가운데 그 많은 환자들이 병에 시달리며 앓는 신음 소리들이 음산하게 골짜기를 채우고 있었다.

"남쪽으로 자리를 잡읍시다."

손승호는 어두운 마음으로 말했다.

"남쪽으로요?"

"열이 나서 몸이 추우니까 햇볕이 잘 드는 곳이 좋소."

남쪽으로 넓직한 바위를 골라 박난희를 바라보며 웃었다.

"전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박난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번지는 것을 손승호는 보았다.

"박동무가 할 일은 병을 앓지 않는 거요. 내가 꼭 나아서 갈테니 염려 말고, 어서 돌아가시오."

"네에, 힘내세요. 또 오겠어요."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쫓기듯 돌아서서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바위들을 밟아갔다. 그녀가 남긴 말도, 그녀의 위태로운 발걸음도 쏟아지는 눈물 때문이었다. 점점 심해지는 열로 정신이 몽롱해지자 손승호는 더 견디지 못하고 햇볕 아래 시름시름 졸며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졸았는지 몰랐다. 그는 옆에 인기척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열병답게 입안이 파삭 타고, 정신이 흐리멍텅했다. 눈앞에 박난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왜 왔소."

손승호는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이거요."

그녀가 무안한 얼굴이 되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손승호는 눈을 껌벅이며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건 낡은 담요였다.

"반쪽밖에 안 되지만 밤에 덮으세요. 산속이라 밤에 얼마나 쌀쌀하다구요. 그리고 이 물, 목마른 대로 잡수세요. 물만 제대로 마셔도 열을 떨어뜨려 회복에 효과가 있대요."

미군 탄통에 물이 찰랑찰랑 차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던 참이라 손승호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생각했다. 담요와 탄통은 어디서 구한 것일까. 저걸 구하려고 얼마나 쏘다녔을 것인가.

"인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말아요. 왜 그러는지 알겠소?"

손승호는 박난희를 달래듯이 말했다.

"제가 어린앤 줄 아세요? 제 심정은 말예요. 저도 병에 걸려 함께 앓고 싶다구요."

박난희가 말을 끝내자마자 휙 돌아서서 바위를 타고 있었다.

", 저런..."

손승호는 어이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만 제대로 마셔도 치료효과가 있다는 그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열에 들떠 정신을 잃다시피 된 환자들은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는 워낙 많고, 환자가 늘어난 만큼 병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투쟁은 계속해야 하고, 악순환 속에서 간호병 배치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손승호는 물을 찾으며 신음하는 가까운 환자들에게 탄통을 돌렸다. 탄통은 금방 바닥이 났다. 그러나 바위투성이인 너덜겅 그 어디에 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떨어지고, 열은 더 심해져 손승호는 담요 반쪽으로 몸을 감고서도 부들부들 떨며 신음했다. 잠을 자보려 했지만 열이 심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엇갈리는 의식 속에서 별을 바라보며 신음을 씹었다. 무슨 까닭으로 별을 바라보면 감정이 축축해지며 옛 생각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별과 인간의 감정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많은 시인들은 그 축축해지는 심상을 노래했을 뿐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떤 과학자가 그것을 밝힌 것도 아니었다. 지난 일들을 대중없이 떠올려가며 열에 시달리다가 언제부턴가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햇살이 푸른 어린잎들 사이사이로 비쳐들고 있었다. 싱싱한 어린잎들 위에서 부서지는 빛살들에 눈이 부셨다. 진달래가 그 많은 햇살 속에서 꽃봉오리들을 반 나마씩 열고 있었다. , ... 그는 감탄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그는 강한 삶의 충동을 느꼈다. 목이 찢어질 것처럼 갈증이 심했다. 어이없게도 박난희가 기다려졌다. 그는 소변을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밤사이에 몸이 몇 갑절 무거워져 있었다. 몸을 간신히 일으키자 머릿속이 쏟아지는 것처럼 어지어우며 눈앞이 캄캄한 어둠으로 막혔다. 바위 모서리를 붙들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켰는데 바위가 뒤뚱 흔들려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바위가 흔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이 흔들린 것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 바위들을 붙들어가며 벌벌 기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도 멀리 갈 수가 없었다. 바위들이 걷잡을 수 없이 출렁거렸던 것이다. 열로 그렇게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것은 지금껏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엉거주춤 앉은 자세로 소변을 보고 나자 다소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보니 어제 물을 얻어 마시면서 거의 정신을 못 차리던 옆 사람이 반듯하게 누운 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중환자는 잠결에도 신음 소리를 내게 마련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옆 사람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섬뜩 놀랐다. 옆 사람은 죽어 있었다. 그가 분명 죽었다는 것을 그의 옷 위를 기고 있는 이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에 감싸여 졸고 있는데 박난희가 또 왔다.

"드세요."

그녀가 내민 건 밥 한 덩이였다. 물론 잡곡밥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았다. 고개를 젓는 바람에 머릿속이 휭휭 돌았던 것이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세게 저었던 것은 그 밥덩이가 어떻게 마련된 것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못해도 두 끼를 굶고 그 밥덩이를 가져온 것이었다. 사월로 접어들면서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보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인민들마저 곡식이 바닥나 굶주리는 계절이었다. 보리가 타작되는 유월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이 땅의 고질적인 춘궁이었다. 그래서 대원들이 끼니를 거르며 양을 대폭 줄여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환자들의 급식이 더 나빠지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러세요, 먹어야 낫지요."

박난희의 목소리가 간곡했다.

"박 동무를 굶기며 내 병을 낫게 하고 싶지 않소. 내가 형편 다 알고 있으니 밥을 먹었다는 거짓말은 말아요. 박 동무가 그러다간 정말 박 동무까지 병들게 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난 여기 있는 환자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투병해 일어서는 내 모습을 나 자신한테도, 박 동무한테도 보이고 싶소."

손승호는 결연하게 말했다. 박난희는 그런 손승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좋아요, 손 동무의 그런 자존심을 존중하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기왕 가져온 거니까 이 밥은 그냥 나눠먹도록 해요.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박난희가 그의 어지러운 시야에서 무슨 꽃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저게 무슨 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럽시다, 그럼."

"고마워요."

박난희는 더 곱게 웃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더는 오지 않았다. 손승호는 사흘 동안 이를 뿌득뿌득 갈아가며 고열과 싸웠다. 발병 닷새째부터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열이 내리는 현상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가거나,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그 며칠 사이에도 새 환자들은 연달아 들어왔고, 중환자들은 연이어 죽어갔다. 결국 기본체력이 약한 사람은 죽고, 강한 사람만 살아남게 되는 극한상황이었다. 이틀 만에 열은 거의 내렸지만 손승호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 비틀거렸다. 마침내 병을 이겨내고야 말았다는 터질 듯한 기쁨으로 마음은 곧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동안의 많은 체력소모로 탈진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승호는 기를 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열이 내리는 이틀 동안 정신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들어야 했던 그 많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낮에 보다는 밤에 더 신음소리가 심해졌는데, 어둠 가득한 골짜기에 온갖 신음 소리들은 괴기스럽고 끔찍스럽게 떠돌았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채 그 고통에 시달리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너덜겅을 벗어난 손승호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어 지팡이삼아 허리를 폈다. 눈앞이 흐릿거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몸을 버팅기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봄 하늘은 따스하게 푸르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시 구절을 뇌었다. 혁명은 그대를 부르고, 그대는 혁명을 부르고... 그대의 이름은 빨치산, 자랑스러운 빨치산... 한편, 전남의 모든 지구에는 도당의 비상령이 내려져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였다. 환자들은 날로 급증해서 지구마다 절반 가까이가 앓아 눕는 형편이었다. 위생을 위한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 이런 구호 아래 모든 대원들에게 방역교육이 실시되고, 방역대책을 강구시켰다. 방역대책은 다름 아닌 이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 전염병은 재귀열이고, 그것을 전염시키는 것은 이나 벼룩, 빈대로 밝혀졌던 것이다. 치료약이 없는 상황에서 감염의 주범인 이를 소탕하는 것은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부대마다 이를 소탕하느라고 법석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소탕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마리씩 잡아낸다는 것은 아예 안 될 일이고, 그렇다고 모닥불에 옷들을 쬐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를 그야말로 소탕하는 유일한 방법은 옷을 끓는 물에 삶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제히 해야 효과가 있을 텐데, 아무리 소부대단위로 실시한다 해도 그럴 만한 솥을 구하는 것부터가 문제거리였다. 도당에서는, 삭발을 할 것, 옷을 삶을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역문제와는 별개로 전남도당의 빨치산지구에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재귀열이란 전염병은 미군비행기가 뿌린 병균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병이 발생하게 된 원인규명인 동시에 미군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소문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갖추고 있었다. 폭격기가 아닌 정찰기가 이상하게 아주 낮게 떠서 산골짜기 골짜기마다 날아다닌 삼사일 뒤부터 그 병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비행기는 삐라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귀순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 때문에 산골짜기마다 그렇게 낮게 떠서 날아다녔느냐는 것이었다. 빨치산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정찰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빨치산들이 정찰기에 노출될 만큼 낮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적들이 먼저 아는 것이고, 정찰기의 비행은 자주 있었지만 그런 식의 아슬아슬한 저공비행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나 벼룩, 빈대가 옮기는 병이, 그것들이 갑자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날짜의 차이도 없이 그 넓은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비행기로 병균을 살포하지 않고서야 전북 산악지대부터 전남 산악지대까지 어떻게 그리도 일시에 병으로 뒤덮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선요원들을 통해서 이가 건너다녔다 해도 그런 시차 없는 발병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 병이 세균전에 의한 발병이라는 또 하나의 반증은 그 치료약인 마파상과 606호를 각 지서들이 이미 갖추고 있는 점이라고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실들이 아무도 없었다. 빨치산들은 한층 더 미군에 대해 증오를 갖게 되었다.

각 지구마다 돌격대를 편성해서 지서들의 습격에 나섰다.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목숨을 건 기습작전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더러 약을 구해오기는 했지만, 환자들이 워낙 많았던 것이다. 재귀열은 고열이 오르는 일차 일주일 정도의 고비를 넘기면 한 일주일 정도는 괜찮다가 다시 열이 오르는 주기적인 증상을 나타내는 병이었다. 그런데 일차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은 체력을 너무 소모해 하나같이 먹을 것을 찾아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전투를 하는 사람들이 끼니를 거를 정도로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있는 형편에 그들의 병후회복을 도울 만한 양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풀이든, 풀뿌리든, 새순이든, 꽃이든,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며칠씩 고열이 차 있어 약해진 내장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부드럽게 해서 먹어도 소화가 어려울 형편에 그런 거친 것들을 마구잡이로 먹어대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체력소모와 허기가 겹친 배를 안 채울 수가 없고, 아무거나 먹어대니 탈이 생기고, 탈이 생겨 체력이 더 약해지니 이차 열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이었다. 일차 고비를 넘긴 사람도 이차에서 대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삼차, 사차까지 고생을 하다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어가기도 했다. 도당에서는 회복기의 환자들을 살려내려고 부심했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했다. 적에게 둘러싸인 사월은 도당 간부들을 그지없이 무능한 사람들로 만들 뿐이었다. 회복기의 환자들은 기운이 없어 맥을 못출 뿐만 아니라 고열 탓인지 정신도 멍청한 상태였다. 발병 다음부터 소속을 떠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흐리멍텅한 눈으로 흐느적거리며 몇 사람씩 떼 지어 돌아다녔다. 이 산골, 저 마을을 헤매 다니는 반 폐인인 그들의 모습은 차마 보기 딱한 비통스러움이었다. 몸 성한 대원들이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죄인들처럼 고개 떨구며 눈시울을 적시고는 했다. 그들을 도와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전염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무데로나 헤매 다니다가 산골이나 개울가에서 죽기도 했고, 해방구의 경계를 잘못 벗어나 경찰에게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사월이 남긴 것은 산과 들의 푸름뿐인 채 오월이 시작되려는 즈음에 전남도당은 병력의 삼 할을 잃고 말았다. 돌림병 재귀열은 한 달 동안에 삼십 퍼센트의 막대한 병력손실을 전남도당에 입히고는 그 기세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었다. 아니, 그건 병세 자체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한 방역으로 환자 발생이 줄어든 것일 뿐이었다. 환자들이 죽어가는 대로 시체를 파묻었지만, 떠돌다가 아무데서나 죽은 시체들 때문인지 각 지구의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는 까마귀 떼들이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그 음산한 울음을 울어댔다. 꼭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은 그 모습만큼 칙칙하고 괴기스런 울음들을 까욱까욱 울어대며 산골짜기를 빙글빙글 돌다가 어는 한곳에 내려앉고는 했다. 까마귀들은 으레 시체의 눈부터 파먹었다. 눈들이 빠지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찍히고 찢어지고 헤쳐진 시체들을 산골짜기에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체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시체를 쪼고 뜯는 까마귀들은 어지간한 인기척에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죽음이 흔한 전쟁 통에 번창하는 것은 까마귀들이었다. 까마귀 떼들의 선희는 마치도 이남 빨치산의 본거지는 지리산이고, 그 정통과 주력은 전남도당이라는 지금까지의 긍지와 자랑이 재귀열로 막대한 병력손실을 입고 흔들리게 된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12. 싸울 수밖에 없는 싸움

소화와 들몰댁은 똑같이 오 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목청 다듬은 판사의 징역 오년에 처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소화도 들몰댁도 헛들은 줄만 알았다. 그래서 둘이는 멀뚱하게 판사를 올려다보았고, 판사가 무표정하게 다음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언도를 내릴 때에야 비로소 소화와 들몰댁은 서로 마주볼 수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둘이의 얼굴은 더없이 밝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건 잡힌 이후로 처음 대하는 서로의 얼굴이었다. 그녀들은 오년이라는 세월의 길이를 따질 겨를이 없이 오로지 살아났다는 감격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눈으로만 서로의 마음을 잠깐 나눈 다음 소화는 그동안 더 불룩해진 배를 내려다보았고, 들몰댁은 두 아들을 생각하며 눈을 사르르 내리감았다.

"죽는 것이야 면헐 것잉께 재판이나 잘 덜 받도록 허씨요."

벌교를 떠나올 때 염상구가 불쑥 내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소화도 들몰댁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재판을 받아봐야 결국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들의 처지에서 오년 징역이라는 감옥살이가 어떤 것인지 실감될 리가 없었다. 부역자에 대해서는 단심판결로 끝나버리는 재판에서 부역만이 아니라 입산활동까지 한 그녀들이 오년 징역밖에 안 받았다는 것은 역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염상구의 덕이었다. 선심 쓰는 김에 푹 쓰기로 작정한 염상구는 그녀들의 조서를 단순동조로 꾸미게 했던 것이다. 만약 상기 자는 정하섭이라는 좌익분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은 물론 그자의 자금운반책으로 암약하다가 적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던바 징역 일 년에 집행유예 일 년을 선고받고 석방된 자로서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다가 동란 발발직전에 행방이 묘연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공치하에서는 여맹원으로 광분하다가 수복과 동시에 입산하여 소위 투쟁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자임. 이 자의 임신도 상기한 정하섭과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임, 이런 식으로 소화의 조서가 작성되었더라면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들몰댁의 경우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한번으로 끝나버리는 부역자들의 단심제 재판에서 경찰조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오고 있었다. 부역자들의 수가 워낙 많은데다, 전시상황 속의 정치범이라는 특수성까지 겹쳐져 검찰에서는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은 채 경찰조서에 따라 재판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것이 또한 경찰의 타락을 부채질하는 부정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피고들은 거의가 변호사를 댈 수가 없었고, 한 법정에서 무더기로 재판이 처리되는 형편이었다. 사형과 무기징역이 속출하는 속에서 징역 오 년은 무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일 년 삼백육십오일이 다섯 번 지나가야 풀려날 수 있는 징역살이가 결코 짧은 세월일 수는 없었다. 소화와 들몰댁은 형무소로 넘겨지기를 기다리는 이틀 동안에 오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긴 것인가를 차츰차츰 실감해가기 시작했다. 소화는 한정도 없이 가라앉아가는 마음으로 불러 오른 배를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뱃속에서 노는 몸짓이 갈수록 힘차지고 있는 아이는 두 달 뒤면 어김없이 세상구경을 하려고할 것이다. 그런데 오년이라니... 아이는 어떻게 낳을 것이며, 또 어떻게 길러야 한단 말인가. 소화는 서럽고 막막하여 마음 둘 데가 없었다. 마음을 둘 데라고는 단 한 군데, 정하섭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간 기러기였다. 들몰댁은 들목댁대로 깊은 시름 속에서 오년 세월을 헤아리고 있었다. 남편은 어차피 죽기를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니까 마음 밖에 있었지만, 눈망울 초롱초롱한 두 아들의 모습은 한사코 눈앞을 가렸다. 남편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 다시 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오년 세월은 두 아들의 전정을 망치게 되는 가시울타리였다. 그것들이 외삼촌도 없는 외갓집에 얹혀 하루 세 끼 밥을 얻어먹기도 어려운 형편이 빤한데 학교 다니기를 바라는 것은 허망하고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자꾸만 깊어졌다. 입산하는 남편을 선뜻 따라 나섰을 때는 형편이 이렇듯 오래 꼬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저 한두 달 피했다가 세상차지를 다시 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 믿음은 남편의 말 때문만이 아니고 자신의 가슴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새 세상을 몸소 겪어보고 나서 생긴 것이었고, 남편이 세월 바쳐가며 했던 일이 옳았다는 것을 속 깊이 깨달으면서 더 확실해졌다. 입산을 할 때 위험을 피하자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새 세상이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도 무슨 일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그런데 한두 달로 생각했던 것이 반년이 넘어버렸고, 징역살이 오년까지 앞두고 보니 두 자식 걱정이 가슴에 얹힌 돌덩이였다. 새 세상 다시 이루기가 이렇듯 어려울 줄 알았더라면 무슨 고초를 또 겪든 두 자식을 끼고 견디었을 것이다. 남편이 지아비자로 하늘보다 높다면, 자식은 그 아래에 있는 하늘이었다. 남편의 품에 안기면 온갖 시름과 고단함이 치자색깔 물에 풀리듯 하면서 부끄러운 어리광만 생겨나는데, 자식을 가슴에 품으면 이 세상 그 어떤 고생이나 고초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는 팽팽한 힘이 생겨났다. 돌절구통도 깰 것만 같은 힘을 두 자식을 위해 쓸 수가 없게 되어 가슴한복판에 시름의 샘만 깊어져가고 있었다.

"들몰댁, 혹여 옥살이에서 몸얼 풀게 되먼 워칭게 허는지 아시오?"

소화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야아?... 금메요, 고것이 워찌크름 되는지... 지도 잘 몰르겄구만이라."

들몰댁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어렵고 더디게 말꼬리를 흐렸다. 임신한 죄수가 감옥에서 몸을 풀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전에 들어둔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그 밴 여자가 옥살이허는 일이 흔털 않은께라..."

소화는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들몰댁이 알 거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생각을 자꾸 하다 보니 두려움은 눈덩이 굴리듯 점점 커져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낳을 것이며, 감옥에서 키우게 하는 것인지. 만약 키우게 한다 해도 애가 제대로 클 수 있을 것인지. 안된다고 하면 누구에게 맡겨 키울 것인지. 그분의 어머니 낙안댁은 남보다 못한 사람이고, 그 누가 핏덩이인 남의 자식을 맡아 무병하게 키워줄 것인지... 이런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 소화는 서러움이 사무치고, 근심에 파묻히고 있었다.

"너무 속 태우는 근심 마시제라. 아그럴 안에서 못 키우게 허먼 우리 친정에라도 맽기면 된께라."

들몰댁의 말이었다. 그것이 비록 친정의 형편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당장 소화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고, 그건 그녀의 진심이기도 했다. 입산투쟁을 함께 한 관계를 떠나서라도 소화가 그 전에 베풀어준 정리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은혜였던 것이다.

"말이라도 고맙소. 들몰댁."

소화가 들몰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엷게 웃었다. 얼굴에 서린 수심을 다 씻어내지 못하는 그 흐린 웃음기 아래로 드러나고 있는 눈밑자리의 기미가 그지없이 쓸쓸했다. 배가 불러지기 시작하면서 얼굴에서 해맑은 기운이 시나브로 스러져가고, 어떤 옷으로도 배부름을 감출 수 없게 될 즈음에 이르러 돋아나기 시작한 기미였다.

임 소식 멀어 마음고생하면 먹는 것이나 실해 몸고생을 하지 말았어야 저 기미가 덜 솟았을 것을...’

소화가 겪은 몸 고생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들몰댁은 고개를 수그리며 낮게 말했다.

"맘 강단지게 묵으씨요. 죽을 고비 넘겠응께 또 견디다 보먼 눈 번쩍 띠는 세상이 생각보덤 금세 올란지도 몰릉께라."

"그럽시다. 들몰댁도 아그덜 땀세 속 낋이지 말고 맘 강단지게 묵으씨요. 오년 세월이 길고 짧은 것이야 다 맘 묵기에 달렸응께라."

소화의 낮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먼이라. 아그덜이야 무신 험헌 것얼 묵든지간에 크는 법이고, 산입에 거미줄 치는 법이야 웂제라."

들몰댁도 힘주어 말했다. 친정에 어머니가 있는 한두 자식이 배곯아 죽을 리는 없었던 것이다.

"자아, 싸게싸게들 일어아! 인자부텀 징역살이허로 떠야 헌께."

경찰들이 철문을 따며 외치고 있었다. 소화와 들몰댁은 아직 자기네들의 철문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몸을 일으켰다. 다른 열서너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동안의 생활을 통해서 경찰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익혔던 것이다. 사람들은 포승으로 줄줄이 팔을 묶였다. 소화와 들몰댁은 서로 앞뒤로 묶이려고 사이에 누구라도 끼어들까봐 몸을 바싹 붙인 채 경계하고 있었다.

"징역살이럴 워디로 간다요?"

어느 여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가보먼 알 것인디 멋났다고 주딩이 놀리고 지랄이여! 말 많은 빨갱이라고 표식 내는 것이여, 시방?"

경찰이 눈꼬리를 치세우며 목소리에 대꼬챙이를 박았다.

"아니어라, 그냥... 잘못혔구만이라."

겁 질린 여자의 말이 다급했다.

"공연시 씹덕껍덕 주딩이 놀리덜 말어. 비우짱 틀어졌다 허먼 그눔에 주딩이 쫙쫙 찢어뿔 팅께."

경찰이 정나미 떨어지게 내뱉었다. 줄줄이 묶인 사람들은 포장이 둘러쳐진 트럭에 떠밀려 실려지고 있었다. 법원 뒷마당에는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넘치고 있었고, 붉은 벽돌담을 따라 선 나무들은 윤기 나는 진초록 빛 잎들로 무성했다. 그 나무들 사이에 구름덩이마냥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연보라 빛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수국이었다. 아아, 곱기도 해라! 소화는 그 복스럽게 생긴 꽃 덩이들을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솟았다. 수국은 자신이 유독 좋아하는 꽃이었다. 야하지 않으면서 고왔으며, 유별나지 않으면서 풍성했고, 별스럽지 않으면서 경건했다. 그리고 수줍은 듯하면서 어딘가 슬픈 그늘을 간직한 꽃이었다. 먼발치에서 보면 풍성한 하나의 꽃송이로 보이는 것이 실은 한 개의 꽃송이가 아니었다. 그건 수십 개의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꽃 덩어리였다. 그래서 수국 꽃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덩이 같기도 했고, 더없이 넉넉하고 풍요로와 보이기도 했다. 소화는 문득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저 수국처럼 활짝 피어나는 한때를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에 출렁거렸다. 예쁜 아이를 낳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 그때가 바로 수국처럼 활짝 피어나는 한세상이리라 싶었다. 그 불현듯 일어난 욕심을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을 나무라며 서둘러 털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소화는 이제 그 욕심을 누르려고도 떼쳐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욕심을 가슴에 오롯이 간직해서 키워나가고 싶었다. 그런 욕심을 갖지 않고서는 오년 세월을 이겨낼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화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이지 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은 입산을 하고 나서부터 점차로 커져가며 마음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 생각의 마음자리가 넓어져가면서 무당질을 해먹고 사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부자나 지주들이 끝도 한도 없이 바라는 부귀영화나 수복강녕을 빌어주는 굿질을 해서 먹고 산다는 것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자고 부채질을 해대는 못된 짓이었고, 못난 거렁뱅이였던 것이다. 작인들에게 지주보다도 더 미움을 사는 마름들의 행투와 무당질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정하섭은 범접할 수 없도록 저 높이 있는 지체가 아니라 똑같은 사람으로 나란히 서 있는 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소화는 앞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포승줄에 끌리며 발을 떼어놓았다. 시야를 벗어나는 수국 꽃 덩이가 정하섭의 얼굴로, 예쁜 아기의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결국 춘천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파편상을 입은 팔이 가끔씩 뜨끔거리고 씀벅거리고 하더니만 기어이 말썽을 부리고 말았던 것이다. 상처부위를 중심으로 퉁퉁 부어오를 뿐만 아니라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열이 올랐다. 덧이 나도 예사로 난 것이 아니라 싶었다.

"이거 아무래도 큰 야전병원으로 가셔야 되겠는데요. 아마 파편 제거가 다 안 돼 염증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휴가삼아 야전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으셔야 되겠습니다. 약이나 주사로 될 증세가 아니로군요."

사단 의무관의 말이었다. 심재모는 도리 없이 붉은 십자 표지가 붙은 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부상을 당한 이틀 뒤에 의무대에서 파편을 빼낸다고 빼냈는데 잘못 놓친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확인했던 두 개의 파편은 다시 생각해도 섬뜩하게 소름이 끼쳤다. 한 개는 손가락 매듭만한 크기였고, 다른 한 개는 그 반쪽쯤 되는 것이었다. 그 끝이 찢어지고 갈라진 두 개의 쇠붙이는 피범벅인 채 그믐달 모양의 스텐레스 그릇에 놓여 있었다. 피가 맥질된 두 개의 파편은 스텐레스의 싸늘한 흰빛 탓인지 유난히도 뚜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두 개의 파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를 죽이지 못해 분하다 하면서. 그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 파편들은 심장을 파고들 수도 있었고, 머리를 파고들 수도 있었고, 눈을 파고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철모를 썼으니까 머리는 무사했을 것이다. 심장을 파고 들었으면 즉사했을 것이고, 눈을 파고 들었으면 장님이나 애꾸눈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터의 생사란 순전히 요행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야전병원은 철판조립인 반달형 건물들로 되어 있었다. 그건 미군야전병원이었고, 한국군은 장교에 한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를 미군의관이 치료해주는 것은 아니었고, 미군과 한국군 장교들이 거처하는 막사도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한국군 장교들을 치료하는 데 미제약품이나 의료기구들을 손쉽게 얻어 쓰기 위해 곁다리 붙어 있는 셈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되자 심재모는 싸악 비위가 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작전권 일체가 미군으로 넘어가버린 것에 대해 그것이 절대로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고, 그동안 미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온 무법적 작태에 대해서나, 화력의 막강함만을 앞세워 무작정 초토화로만 밀어붙이고 있는 작전에 대해서나, 한국군 장교들을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으려고 드는 미고문관들의 거만스러운 태도에 대해서나, 못마땅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낙동강전투에서 세 겹으로 구축한 방어선 중에서 미군은 맨 뒤의 제일 안전한 방어선을 차지했다거나, 똑같은 고지선을 전개하는데 미군 쪽에는 한국군 쪽보다 배 이상의 포사격을 지원한다거나, 미군은 보병이라도 차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군은 줄창 걸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아예 당연한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기네 나라도 아닌 곳에서 싸우면서 안전을 도모하고 고생을 덜 하겠다는 것까지 시빗거리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심재모는 수술을 받았다. 콩알만한 파편 하나를 찾아내느라고 상처부위의 살은 밭갈이하듯 파헤쳐갔다.

"이놈이 말썽이었어요."

사십대의 군의관이 손가락 끝에 든 파편을 심재모의 눈앞으로 디밀어 보이며 씽긋 웃었다.

"설마 또 숨어 있는 놈은 없겠지요?"

심재모는 얼굴을 찡그린 채 군의관을 쳐다보았다.

"이젠 염려 안하셔도 될 겁니다. 살이 걸레가 다 되도록 파헤쳤으니까요. 그나저나 참을성이 대단하십니다."

"아프긴 좀 했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팔 잘라내지 않으려면 참아야지요."

심재모는 말은 태연하게 하면서도 찡그린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살 찢어지는 통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좀 아픈 게 아니었을 겁니다. 곪기 시작했던 참이라 마취가 잘 듣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소리 한번 안 지르시니 대단하신 거지요."

군의관은 마치 어린 환자를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에 지긋한 웃음을 물었다. 심재모도 그런 군의관의 인정스런 태도가 싫지 않았다.

"언제나 퇴원할 수 있겠습니까?"

"인제 감꽃 떨어졌는데 홍시 찾으시는군요."

군의관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웃었다.

"네에?"

심재모는 되묻고 나서야 그 말뜻을 알아 새겼다.

"곪아가는 살을 다 파냈으니까 새살이 돋고 상처가 아물어 그 팔을 다시 전쟁용으로 불편 없이 쓰려면 한 달 이상 걸릴 텐데요."

심재모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군의관의 말마따나 오랜만의 휴식을 얻게 된 셈이었다.

"자아, 일어나셔서 주사를 좀 맞으시지요."

간호장교와 위생병이 붕대를 감고, 팔을 목에 걸친 줄에 고정시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군의관이 말했다. 팔 때문에 엎드릴 수가 없어서 심재모는 엉거주춤 선 채로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야 했다. 간호장교가 환자복을 끌어내리고, "힘주지 마세요." 하며 엉덩이를 찰싹 치고, 바늘이 꽂히는 아픔이 따끔하게 느껴지고, "힘주지 마세요." 하며 다른 쪽 엉덩이에서 찰싹 소리가 나고 하는 동안에 심재모의 껑충한 키는 어설프게 구부러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어색스럽게 구겨져 있었다. 그는 간호장교가 엉덩이를 찰싹찰싹 쳐대는 것도 견디기 어렵게 곤혹스러운 데다, 혹시 바지를 너무 끌어내려 자신의 물건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도 엉덩이에 힘을 빼기가 바빠 아래를 내려다볼 틈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됐습니다. 이봐 위생병, 여기 잠깐 주물러드려." 간호장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나 어투가 군인답기는 했지만 심재모의 귀에는 어쩐지 거슬리게 들렸다. 군의관이나 간호장교는 그 계급이 어쨌든 간에 의사고 간호원이었지 군인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간호장교라고 해서 위생병에게 군대식의 해라를 거침없이 해대는 것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군병원도 엄연히 군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군대조직의 하나이고, 그 조직도 명령으로 통제되고 관리되는데 어째서 군인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면 더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군인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위생병, 한쪽은 내가 주무를 수 있으니까 관두게."

심재모는 성한 팔을 뒤로 돌렸다.

",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없구요. 마음 편히 갖고, 어디에 부딪치지 않게만 조심하십시오."

군의관이 손을 수건에 닦으며 말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재모는 눈인사를 보냈다.

병실의 좌우로 빼곡히 들어찬 침대에는 여러 종류의 부상 장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붕대가 감긴 부위에 따라 어디를 다쳤는지 금방 알 수 있었고, 붕대가 감긴 정도에 따라 부상의 경중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잘려나가지 않은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으면 경상이었고, 머리나 가슴, 배에 붕대를 감고 있으면 중상으로 보아 거의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전신에 붕대를 감다시피 한 환자도 있었고, 코와 입에만 구멍이 뚫렸고 얼굴이 온통 붕대로 감긴 사람도 있었다. 심재모는 그런 환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상을 멋 적게 생각했다. 병실에는 느낌이 다른 신음 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각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질량만큼씩 흘려내고 있는 나이든 남자들의 신음 소리는 음산하고도 절망적이었다. 심재모는 눕고 싶으면서도 그 소리들을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오월의 햇볕은 두꺼웠고, 나뭇잎들은 윤기 나는 푸름으로 무성했다. 햇볕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뜬 심재모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미간은 찡그러져 있었다.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수술자리가 씀벅거리는 통증 탓이었다. 그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가볍게 날개를 팔랑거리며 엉킬 듯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져 하나가 될 듯하다 사이를 뛰우고 하면서 햇살 속을 날고 있었다. , 나비들에게는 전쟁이 없구나! 심재모는 자유로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두 마리의 나비를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쟁은 인간만이 하는 잔인한 놀이였다. 그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 너무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밀려들었다. 나비들은 눈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맑은 하늘만 가득한 눈앞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순덕이였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그대로 그 집에 있을까, 전진과 후퇴가 뒤죽박죽된 속에서 무사할까. 그는 그녀가 생각나기만 하면 줄줄이 이어지는 걱정을 또 되풀이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담배가 갈수록 느는 것도 전쟁 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순덕이의 생각을 지우려 하면서 앞쪽 풀밭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거기 풀밭에 네댓 명의 환자들이 둘러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경환자들이거나 회복기의 환자들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소령 심재모라고 합니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심재모는 둘러앉은 환자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아니, 소령님..."

환자 하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유 소위, 여긴 어쩐 일인가!"

심재모는 상대방을 금방 알아봄과 동시에 그가 이런 엉뚱한 곳에 와 있다는 것에 직감적인 의문을 품었다.

"저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 그런가. 그런데 어째서 여기까지 와 있는 건가?"

심재모는 추궁하듯 묻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물음만큼 엄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로서는 저 남쪽의 훈련소에 있어야 할 자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이상스러웠고, 부하를 구타해서 죽인 그의 소행을 지금까지도 용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도 일부러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자를 장교로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럴 사정이 있어서 전방으로 전출했습니다."

유 중위는 심재모의 눈길을 피하며 약간 멋 적은 웃음을 지었다.

"자원은 아닐 텐데, 왜 또 무슨 사고라도 저질렀나!"

심재모의 더욱 매서워진 눈길이 그를 조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사고는 무슨 사곱니까. 그냥 뭐, 전출명령이 떨어진 거지요."

유 중위는 표 나게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심재모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어딜 다쳤나?"

심재모는 말을 바꾸었다.

"네에, 저어 폐가 좀 나빠서요..."

"폐에? 그거 전염병 아닌가."

너무 의외의 대답에 심재모의 얼굴은 어이없게 변해 있었다.

", 그래서 곧 후방으로 후송될 겁니다. 전 열이 나서 그만 좀 들어가 봐야 되겠습니다."

유 중위가 어물거리며 옆걸음질을 쳤다. 심재모는 더는 말없이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후방으로의 후송이 아니라 의병제대겠지 생각하며.

"거기 앉으십시오. 저 사람, 부하였습니까?"

목발을 허벅지 위에 걸쳐놓고 앉은 환자가 심재모를 올려다보았다.

", 훈련소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심재모가 자리를 잡으며 대꾸했다.

"저치 저거 순 빽으로 만들어진 나이롱 환잡니다."

왼쪽 볼에 긴 흉터를 가진 환자가 역정을 내듯 내뱉었다. 심재모는 담배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옷감은 한창 유행을 이루고 있었고, 그것은 엉터리, 가짜를 나타내는 뜻으로 새말을 번창시키고 있었다. 나이롱 신사, 나이롱 담배, 나이롱 처녀 같은 말이 다 그것이었다. 전쟁 통이라서 양복 빼입고 머릿기름 자르르 바른 사기꾼들이 드글거렸고, 입에 풀칠을 하느라고 꽁초나 실담배로 만든 사제품 가짜 담배가 수없이 많았고, 군인들에 의한 강간이나 겁탈이 예사가 되어 머리를 땋거나 단발이라고 해서 처녀라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 나이롱환자가 저것 하나뿐인가. 권력층 자식 놈들이야 다 나이롱환자가 아니면 미꾸라지들이지."

옆구리를 손으로 받친 환자가 쓰게 웃었다.

"좆이나 개판 군대요. 빽 있는 놈들은 다 뒷구멍으로 빠지고, 별자리들은 양키들한테 쩔쩔매고, 돈 없고 빽 없는 놈들만 최전선에서 퍽퍽 죽어가고 있는 판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 군대요."

어디가 아픈지 표가 안 나는 사내의 말은 사뭇 거칠었다.

"어허, 몸에 해로운데 성질 돋구지 마시오. 군대가 그런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야 다 아는 일이고, 그게 고쳐지기야 틀려먹은 일이니까 전쟁이나 어서 끝나기를 바랩시다."

목발을 가진 환자가 공허한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놈의 전쟁이 언제 끝나겠어요. 괴뢰군이고 중공군 놈들은 더 악을 부려대지, 폭탄을 퍼다 부을수록 경기가 좋아진다니까 양키들은 더 신바람이 나지. 전쟁이 끝나기는 부지하세월입니다."

어디가 아픈지 표가 안 나는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걸요. 무조건 싸워서 이기자고 밀어붙여온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당한 판이니까 의외로 전쟁이 빨리 끝날 수도 있는 일이죠."

옆구리를 손으로 받친 환자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싸움은 드럽게 돼먹고 있어요. 삼팔선에서 서로 안 밀리겠다고 으르렁대니 전과는 없고, 생사람들만 수없이 죽어 자빠지는 것 아닙니까. 후방에 있는 놈들은 방위군사건 같은 어마어마한 부정이나 해먹고, 이거 전방에서 죽는 놈들만 불쌍하니 사기 떨어져 다시 총잡을 기분 납니까."

왼쪽 볼에 흉터를 가진 환자가 고개를 돌려 침을 내뱉었다.

"어떻게 소령님도 한마디 하시죠."

듣고만 있는 심재모가 신경에 걸리는지 목발을 가진 환자가 말했다.

"아 예, 다 없는 말 하는 게 아니니까 제가 따로 할 말이 별로 없군요. 제 생각으로는, 전쟁이야 한번 터졌으면 끝나는 날도 있으니까 참고 견딜 수밖에 더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부상을 당한 입장이라서 더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사를 헤아리며 심재모는 말을 완곡하게 돌렸다. 심재모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 노는 꼬라지 봐라. 미친년들!"

어디가 아픈지 표가 안 나는 사내가 또 입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 성질내지 마시오. 남 중위. 다 유엔 사모님 되고 싶어 저러는데, 남 중위는 흰둥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나 원망하시오."

옆구리에 손을 받친 환자가 앞쪽을 바라본 채 딱하다는 얼굴로 쯧쯧 거렸다. 심재모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군의 환자막사들이 줄 맞춰 선 그 앞 풀밭에서 공치기가 한창이었다. 회복기 환자들의 운동시간인 모양이었다. 열댓 명씩이 두 패로 갈려 공을 치고받으며 껑충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간호원들이 섞여 신바람 나게 뛰고 있었다. 그녀들이 바로 국군 간호원이라는 것을 심재모는 알아듣고 있었다.

"! 유엔사모니임? 그리만 되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한테는 불친절하면서 양키라면 사병이고 장교고 가리지 않고 사죽을 못 쓰고 덤비는 저년들이 잘돼봐야 양갈보 아닙니까? 저년들이야 태평양 건너가 삼시세끼 빠다 먹고 살 생각이 굴뚝같겠지만, 떡 줄 놈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시면 뭘합니까? 양키 놈들이야 재미보다가 훌쩍 떠나면 그만인데, 저년들이 다 넋 빠진 미친년들이지요."

심재모는 까르르 웃기도 하고, 짝짝짝 손바닥을 치기도 하는 간호원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유엔 사모님이라는 유행어를 실감하고 있었다. 유엔 사모님이 되려는 꿈을 꾸다가 실패하면 나이롱 처녀가 되는 또 하나의 길이 거기 있었다. 병동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으면서 왜 저 간호원들이 저쪽에 가있는 거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그건 물으나마나 지원근무일 터였다. 가시철망으로 병동을 구분해놓고 미군의사나 간호원들은 국군을 치료하지 않아도 국군 간호원들은 미군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들은 미국사람이고, 작전권이 그들에게 있으니까. 국군 장성들이 미군 중령이나 대령인 고문관들한테 쩔쩔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군 장성들의 진급은 그들의 작전권 행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문제였다.

"뭘 좀 배웠다는 여자들일수록 미국이야 하면 신짝을 벗어 붙이는 이 된 풍조가 왜 생기기 시작했는지, 참 망조는 망조요."

옆구리를 받친 환자가 혀를 차며 힘겨웁게 몸을 일으켰다. 심재모도 묵지근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팔에는 통증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몸에서는 열이 느껴졌다. 다시 자리에 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음산하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들 속에서 쉬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땅에 반쯤 박힌 바위를 찾아내고 그리로 걸어갔다. 그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오래 햇볕을 받은 바위에서 온기가 느껴져왔다. 그는 다리를 뻗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햇발의 따스함이 얇다란 솜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보드랍고 포근하고 안온했다.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은 노곤함이 몸 전체를 지그시 눌러오고 있었다. 전쟁 일 년 정신없이 보냈으면서, 지칠 만큼 날마다 시달리며 보낸 세월이었다. 그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이 정도나마 무사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인지 그 기미는 보이지 않고, 부상당한 장교들은 거의가 지쳐 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당해서 전쟁을 겁내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이다 싶게 사람이 죽어가고 다치는 전장의 일 년은 평상시의 일 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전쟁이 금년 안으로 끝나면... 그럼 내 나이가 몇인가... 그는 시름시름 잠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교실과 운동장의 사잇길 옆에 있는 긴 화단에는 가지가지 봄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화단에는 띄엄띄엄 학년과 반을 표시하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화단이 말끔하게 가꾸어진 것이며, 화단이 좁도록 많은 꽃나무들이 심어진 것이며, 꽃들이 싱싱하게 꽃피움한 것이며, 모두 학생들의 정성이 시샘하듯 쏟아 부어졌다는 것을 그 팻말들이 설명하고 있었다. 그 꽃밭 위를 노랑나비 흰나비들이 한가로운 날갯짓으로 날기도 하고, 꽃에 앉기도 하고, 나비와 달리 벌들은 날개 떠는 소리를 아련하게 내며 부지런히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다가 호랑나비가 그 크고 화려하게 생긴 날개를 느릿느릿 펄렁이며 꽃 위를 날다가 어디론지 사라지기도 했다. 나비를 쫓는 아이도 없는 화단에는 봄날 오후의 적요만이 가득했다. 넓은 운동장가에는 아이들이 서너 명씩 모여 무슨 놀이들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신명나는 몸짓에 맞춰 가끔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그 소리들은 운동장에 가득 찬 정적 속으로 묻혀버리고는 했다.

"자아, 너희들 힘들지. 이 과자 먹으면서 쉬어서 해라."

한 남자가 교실로 들어서며 봉지를 흔들었다.

"야아, 우리 선생님 잴이다!"

한 아이가 몸을 일으켜 두 팔을 뻗쳐 올리며 소리쳤다.

"아이고메 좋아라."

그 옆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깡충 뛰면서 손뼉을 쳤다. 그런데 나머지 한 아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저 선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은 무표정한 것 같기도 했고, 침울한 것 같기도 했다. 그 핏기 없는 아이는 하대치의 큰아들 길남이었다.

"자아, 이쪽으로 모여앉아 과자들 먹어라."

선생의 말을 따라 세 아이가 한책상으로 모여들었다. "반공일인데 놀지도 못하고 너희들 고생이 많구나. 어서들 먹어라."

선생이 봉지 가운데를 찢었다. 네모난 밥풀과자, 파래가 찍힌 부채과자, 희고 단 박하물을 묻힌 대통과자, 왕설탕을 묻힌 눈깔사탕, 하얀 빛 박하사탕, 땅콩 박힌 비가 등속이 푸짐하게 드러났다.

"선생님, 요것얼 우리 셋이서 다 묵어도 된가요?"

소리쳤던 아이의 말이었다.

"그래라. 반공일에 너희들만 고생해서 선생님이 사주는 선물이니까."

선생은 토요일을 꼭 반공일이라고 하며 세 아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치이, 욕심쟁이. 선생님은 안 잡숫고 우리덜만 묵을라고 그냐?"

여자아이가 야무지게 눈을 흘기며 입을 삐쭉했다.

"아니, 니가... 그것이 아니고..."

사내아이가 그만 무색해진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보고, 여자아이를 노려보고 하면서 말이 막히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동철이가 욕심쟁이라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니까."

선생이 고개를 젖히며 허허대고 웃었다. 그 사이에 동철이는 여자아이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입술에 무슨 말인가를 물었다. 그 아이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독기가 올랐고, 위아랫 입술이 앞으로 쑥 내밀렸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입모양을 보아 그 입에 물린 말은 니 죽어였다. 동철이의 빠른 몸짓에 따라 여자아이의 어깨가 솟기며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이 앉아있는 길남이는 줄곧 과자봉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빨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침을 벌써 몇 번이나 소리 나지 않게 삼켰는지 몰랐다.

"자아, 선생님도 먹을 테니까 너희들도 어서 먹어라."

선생이 과자 하나를 집어 들며 봉지를 아이들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동철이가 잽싸게 손을 뻗쳤다. 길남이도 질세라 손을 뻗었다. 길남이는 마음 같아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주먹 집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내며 부채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동철이는 벌써 으석으석 씹어대고 있었다. 길남이도 입을 있는 대로 쫙 벌리고 부채과자를 밀어 넣어 콱 깨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길남이는 멈칫했다. 동생 종남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서엉 나두 묵고잡어 하는 소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길남이는 목이 메어서 과자를 씹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과자를 공평하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과자를 야금야금 먹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지 동생에게 한두 개라도 갖다 줄 수 있을까. 동철이하고 숙자가 보는 앞에서 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만 다급할 뿐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동철이는 새로 과자를 집어와 와삭와삭 씹어대고, 숙자도 야금야금 먹어대고 있었다. 애가 닳아 미칠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먹으면서 생각하자. 길남이는 과자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씹은 과자를 넘기고, 남은 과자 쪽을 입에 넣는 순간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과자를 반쪽씩만 먹고 나머지를 손안에 감춰 두 애들 몰래 주머니에 옮겨 넣자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일들을 얼마나 했냐."

선생이 담배를 빼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남이는 그만 소리를 지를 것처럼 기뻤다. 이젠 선생님의 눈치는 안 살펴도 되었던 것이다. 길남이는 손안에 감추기 쉬운 밥풀과자와 대통과자만을 골라서 반씩 깨문 다음 나머지는 눈치껏 주머니에 넣고는 했다. 동철이와 숙자는 저희들 먹기에 정신을 팔고 있어서 그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길남이는 마음이 흐뭇해져서 과자 맛이 제대로 나고 있었다. 이렇게 과자며 사탕을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누구나 그랬고, 과자점에 쌓인 과자나 유리그릇 속의 사탕은 부잣집 아이들의 차지였다. 가난한 아이들은 과자점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회가 동할 때 같은 군침만 흘렸다. 빨리 먹을 수 있는 과자가 동이 나고 사탕만 남았다. 사탕도 서로 빨리 먹으려고 이빨이야 아프든 말든 마구 씹어서 삼켰다. 길남이는 사탕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먹어대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입안이 화해지는 박하사탕은 와삭와삭 씹어 먹는 것이 제 맛이 났지만, 눈깔사탕은 한쪽 볼에 몰아넣고 살살 녹여가면서 먹어야만 제 맛이 나는 것이었다. 사탕은 반쪽씩 깨물어 쪼개자면 힘도 들고 침도 많이 묻어 길남이는 입에 넣는 척하며 손안에 감추고 다른 손으로 새 사탕을 집어드는 방법을 썼다. 그러면서 길남이는 숙자에게 은근히 미움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숙자는 언제나 장조림이나 짱뚱이 무침, 계란 부치기 같은 반찬을 싸오는 부잣집 딸로 평소에 과자나 사탕을 실컷 먹고 살았으면서도 조금도 양보하는 기색 없이 먹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길남이는 자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숙자는 평소에도 누가 반찬을 뺏아 먹을까봐 도시락 뚜껑을 세워 도시락을 가리고 밥을 먹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 짓은 계집애인 숙자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잣집 아들들인 최경석이나 안장호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먹었냐? 이제 또 일을 시작해볼까?"

선생이 아이들 가까이 다가왔다.

"선생님, 요것 잡수시씨요. 선생님 몫아치로 냄긴 것인디요."

숙자가 네댓 개 남은 사탕을 가리키며 냉큼 말했다.

", 그래. 선생님은 됐으니 너희들이나 다 먹어라."

선생이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러나 길남이와 동철이는 서로 눈짓하며 머뭇머뭇 일어섰다. 길남이는 속으로 저 여시! 했고, 동철이는 지년만 신용 얻을라고! 하고 있었다. 숙자는 벌써 제가 그리던 그림이 놓인 책상으로 가 있었다. 길남이는 오랜만에 달고 꼬신 사탕과 과자를 푸짐하게 먹은 것이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직 양은 다 차지 않았지만 제 몫에서 동생 것을 따로 챙겨 넣은 것이 마음을 그렇게 흡족하게 할 수가 없었다. 길남이는 언제나 동생이 가엾고 불쌍했다. 동생은 언제나 배가 고파 허덕거렸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 허덕거렸다. 어머니가 소화아주머니와 함께 순천으로 떠나는 것을 멀리서 보고 돌아온 그날 밤 동생은 자면서도 울며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그 뒤로도 자주 그랬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동생은 어머니가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부지넌 멀 허는 겨, 엄니가 잽혔는디."

동생은 이런 말을 불쑥하며 눈물이 핑 돌기도 했고,

"나가 어런이먼 을매나 좋까, 엄니럴 팍 구해내뿔게."

이런 말을 느닷없이 하고는 입술을 깨물고 돌로 땅바닥을 쳐대기도 했다. 배를 곯는데다 어머니 걱정 때문에 동생은 더 기운이 파해가고 있었다. 길남이는 환경미화를 하기 위해 뽑힌 것도 기뻤지만, 사탕과 과자를 동생 몫까지 챙기게 된 것은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꼭 손재주가 좋아 환경미화에 뽑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 공작품을 잘 만들고, 그림을 잘 그려도 선생님이 뽑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자기는 아이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빨갱이의 아들이었고, 공비의 아들이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환경미화에 뽑아준 것이었다. 월요일에 실시되는 환경미화 심사 때문에 교실마다 아이들이 서너 명씩 남아 선생님과 함께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경미화에는 교실치장과 복도 윤내기, 화단 가꾸기가 다 들어갔다. 수수깡으로 여러 가지 공작품을 만들고 있는 길남이는 자꾸 목이 마르고 오줌까지 마려워 마음먹은 대로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은 단 것을 많이 먹은 탓이고, 오줌이 마려운 것은 주머니에 넣은 동생 몫의 과자며 사탕을 변소에 가서 아무도 몰래 다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길남이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변소 잠 댕게올라는디요."

", 그래라."

붓글씨를 쓰고 있던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남이는 하르르 숨을 내쉬며 교실을 뛰어나갔다. 그 쉬운 말이 왜 그렇게 하기 어려웠는지, 가슴까지 두근거림을 느꼈다. 변소로 곧장 달려간 길남이는 소변보는 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변소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닫은 길남이는 앞뒤로 밀고 당기는 문잠그래를 힘껏 밀어댄 다음 어깨로 문을 떠받쳐보았다. 변소문은 잘 잠겨 있었다. 길남이는 비로소 휴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과자와 사탕이한 움큼 잡혔다. 길남이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의 눈앞에는 동생의 놀라는 얼굴과 기뻐하는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주머니에 든 것을 몇 개만 조심해서 꺼냈다. 그것을 두 손바닥을 모아 받쳤다. 반으로 잘린 대통과자 두 개, 박하사탕 하나였다. 그러고도 주머니에는 또 과자와 사탕이 들어 있었다. 당당하게 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길남이는 만족감으로 숨을 한껏 들이켰다. 오래 된 똥냄새가 그대로 빨려들었다. 그러나 길남이는 웃고 있었다. 그 냄새는 평소와는 달리 쿠리지도 독하지도 않았다. 한쪽 주머니에만 다 넣으면 표가 날까봐 길남이는 과자와 사탕을 양쪽 주머니에 갈라 넣기 시작했다.

"무찌르자아 오랑캐애 몇백만이냐아..."

"음마, 엄니이..."

남자아이들의 노래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의 다급한 외침이 바로 변소 뒤에서 터져 나왔다. 과자와 사탕을 갈라 넣는 데 정신을 팔고 있던 길남이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찌르자아 빨갱이이 몇백만이냐아..."

"아야야! 워째 이려!"

여자아이를 때리는지 그 비명이 날카로왔다.

"이년아, 니가 빨갱이 딸년잉께 그런다."

사내애의 말이었다.

"긍께로 니도 무찔르는 것이여!"

다른 사내애의 목소리였다.

"나가 워쨌간디 이려. 어런덜이 헌 일얼 갖고."

계집애의 또렷한 말이었다.

"이년이 멀 잘했다고 싸납게 뎀비고 지랄이여!"

또 다른 사내애의 목소리였다.

"아야야! 엄니, 엄니!"

계집애의 비명이 숨이 넘어갔다. 길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계집애가 세 사내애들한테 당하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환하게 떠올랐다. 자신이 혼자서, 또는 동생과 함께 벌써 여러 차례 당해본 일이었던 것이다. 어떤 불쌍한 계집애가 변소 뒤에까지 끌려온 것일까... 길남이는 이를 맞물었다.

"무찌르자아 오랑캐애..."

"무찌르자아 빨갱이이..."

"아야! 아야! 아이고 엄니! 엄니, 엄니!"

사내애들이 노래를 불러대며 마구 때려대는지 계집애의 비명 소리가 더 다급하고 날카로와졌다. 길남이는 더 견디지 못하고 변소 문을 밀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변소 뒤로 돌아갔다.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아..."

"아야야, 엄니 나 죽어! 엄니이!"

길남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 사내애들이 계집애를 둘러싸고 노래에 맞춰 막대기로 때리고 찌르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했고,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며 치마를 움켜잡느라고 정신이 없어 사내애들이 때리고 찌르는 것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집애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려지는 순간 길남이는 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여자아이는 하필이면 덕순이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과 덕순이 아버지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덕순이하고는 인공이 되었을 때 서로 알게 되었고, 인공이 끝나자 서로 모르는 척하게 된 사이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저절로 서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모른 척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사내애들은 셋이었고,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몸집도 다 자신보다 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찌르자아 빨갱이이..."

"아야야! 엄니이!"

길남이는 앞으로 튕겨나가며 외쳤다.

"이 새끼덜아, 지랄치지 말어!"

세 사내애들의 몸짓이 뚝 멈춰졌다. 길남이와 덕순이의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눈물범벅인 덕순이가 멈칫 놀랐다. 그리곤 얼른 눈물을 훔쳤다.

"니가 먼디 나서야, 이 새끼야!"

한 사내애가 눈을 부라리며 나섰다.

"쥐방울만헌 새끼가 뒤지고 잡은갑네?"

다른 사내애가 더 당당한 기세로 나섰다.

"우리 누나다, 워쩔래!"

길남이의 입에서 튀어나간 말이었다. 덕순이는 나이도 한 살 많았고, 학년도 한 학년이 높은 육학년이었던 것이다.

"옳여, 니도 빨갱이 새끼여?"

", 아조 잘 만냈응께 맛 잠 봐."

"새다리겉은 새끼가 워째 겁도 웂이 뎀비고 지랄이여!"

세 사내애들이 한마디씩 내뱉으며 얼굴들을 구겼다.

"안 되어, 싸우면 안 되어. 쟈덜언 셋이여, ."

덕순이가 고개를 저으며 길남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덕순이의 얼굴은 울고 있었다. 이빨을 앙다문 길남이는 부르르 떨었다.

"오냐, 뎀베라. 니까징 것덜 셋이먼 다냐!"

길남이는 소리치며 잽싸게 돌을 집어 들었다. 그때 세 아이가 막대기들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안 된다니께! 안 되야!"

덕순이가 팔딱팔딱 뛰며 소리쳤다. 그러나 길남이와 세 아이들은 뒤엉키고 있었다. 길남이가 아무리 독을 부렸지만 혼자서 세 아이를 당할 수는 없었다. 세 아이들을 상대로 치고 차고 하다가 얼마 못 가 엎어지고 말았다.

"선생니임! 선생니임!"

덕순이는 소리소리 질러대며 교실 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고 있는 덕순이의 한쪽 발에는 검정고무신이 신겨져 있었고, 다른 한쪽 발은 맨발이었다. 덕순이가 선생님을 모시고 변소 뒤로 왔을 때는 세 아이들은 간 곳이 없고, 길남이만 코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 땀세 니가 요리 다쳤시니..."

우물가에서 물을 떠주며 덕순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녀, 나넌 아니간디."

길남이는 얼굴의 피를 닦아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덕순이를 구하려고 당당하게 나서서 싸운 것이 더없이 기분 좋았고, 오랜만에 먹은 과자와 사탕이 피를 흘려버려 본전치기가 된 것이 아까웠고, 얼떨결에 누나라고 둘러 붙였던 것인데 막상 단둘이 있게 되자 그 말이 안 나오는 것이 이상했고, 길남이의 마음은 복잡했다.

"니가 그리 용감헐 줄은 몰랐다. 니가 느그 아부지 탁했는갑다."

그 엉뚱한 말에 길남이는 덕순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두레박을 들고 선 덕순이는 그런 겁나는 말을 언제 했느냐 싶게 베시시 웃고 있었다. 그 태연함에 안심하며 길남이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아부지가 밉냐?"

덕순이가 물었다.

"아녀."

길남이는 고개를 젓고는,

"우리 둘이라고 고런 말 자꼬 허지마."

불퉁스럽게 말했다.

"알았어. 나도 오랜만에 혀본 말이여."

덕순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길남이는 고개를 돌리면서 덕순이의 장딴지가 여기저기 긁혀 있는 것을 또 훔쳐보았다. 그놈들한테 얻어맞은 자리가 볼이고 가슴팍이고 옆구리고 아직까지 얼얼하고 아팠지만 자신의 아픔보다는 덕순이가 당한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지고 있었다. 길남이는 덕순이와 헤어져 교실로 돌아오면서야 자기가 과자와 사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것을 좀 나눠줄 것을 하고 생각하며 길남이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니! 길남이는 멈칫 섰다. 손에 잡히는 과자의 감촉이 아까와 달랐던 것이다. 잡히는 대로 과자를 꺼냈다. 손바닥에는 밥풀과자 반쪽과 눈깔사탕 하나,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가 조금 놓여 있었다. 길남이는 그때서야 동그란 대통과자가 싸움을 하면서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하는 바람에 다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깝고 또 아까웠다. 그렇지만 싸움한 것이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평소에 싸움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어쩌다 싸움을 하게 되면 꼭 아버지와 연관되는 일 때문이었다.

"어디, 많이 다치지 않았냐?"

", 암시랑 않구만요."

덕순이네 선생님 연락을 받고 변소 뒤에까지 나오셨던 담임선생님의 물음에 길남이는 고개를 숙이며 낮게 대답했다.

"그래,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다. 다 잊어버려라."

선생이 길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남이는 코허리가 찡 울리면서 목이 메이는 것을 느꼈다.

 

 

13. 위대한 전사 조원제

마루에 햇볕이 반나마 젖어들어 있었다. 울타리를 치고 있는 탱자나무들 윗가지마다 해맑은 연초록빛 새순들이 한 뼘 길이로 솟아오르고, 그 연하디 연한 새순들에는 또한 연한 가시들이 서로 엇갈림하며 돋아나 있었다. 그 연초록 새순들은 한 해를 지낸 바로 밑가지와, 여러 해를 지낸 더 아래쪽 밑가지들이 띠고 있는 진초록 빛과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그 연한 새순들이 여름을 지내고, 너무 진해 검은빛이 도는 초록빛 탱자들이 샛노랗게 익어 가는 가을이 오면 믿을 수 없도록 억세고 단단하게 변해버렸다. 물론 그 빛깔도 밑가지들과 구분할 수 없도록 하나가 되어버리고, 가시들도 언제 부들거리며 휘어지고 구부러졌나 싶게 가지를 닮아 억세고 단단해져 있었다. 울타리를 이루며 촘촘하게 늘어선 탱자나무들의 가지가지마다 작고 하얀 탱자 꽃들이 수없이 피어나 있었다. 그 작고 하얀 꽃들은 갓 돋아나기 시작한 초록빛 잎들 사이사이에서 눈송이들이 얹힌 것처럼 흰빛의 정갈함을 깔끔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탱자나무울타리는 토담이나 싸리나무울타리, 대발울타리 같은 것들과는 달리 계절을 따라 그 모습을 다양하게 바꾸는 정취를 지니고 있었다. 봄이면 꽃 울타리였고, 잎 무성한 여름이면 으레 위통을 벗어 제치고 등물도 하고, 그런 모습인 채로 감나무 그늘아래 놓인 평상에 나앉기도 했다. 그런데 무성해진 탱자나뭇잎들은 그런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가려주는 초록비단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런 흉스런 모습을 안 보여도 되는 겨울이 오면 탱자나무 울타리도 잎 다 떨군 가시울타리로 바뀌어있었다. 남도의 농가에 싸리나무울타리나 대발울타리보다 탱자나무울타리가 더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싸리 울타리나 대발울타리는 몇 년 간격으로 새로 울을 쳐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탱자나무는 한번 심어놓기만 하면 해가 갈수록 싱싱하고 실한 울타리가 되는 평생묵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절기가 바뀜에 따라 변하게 되는 농가생활의 지나친 노출을 서로 간에 살짝살짝 가리는데 탱자나무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건 생활과 자연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활용한 슬기고 지혜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토담이든 싸리울이든 탱자나무울이든 모두가 일치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토담을 쌓되 그 높이는 고샅을 걸어가는 보통 키의 어른 눈높이 정도로, 그냥 걸어갈 때는 집안이 안 들여다보이고 무슨 볼일이 생겨 사람을 부르거나 인기척을 낼 때는 발뒤꿈치를 들어 목을 늘이면 집안이 다 들여다보이도록 했다. 나머지 울타리들도 아무 때나 눈길만 돌리면 집안을 들여다보이도록 했다. 네 가지 울이 갖는 공통점은 모든 집들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마을이 한 집안처럼 감추는 것 없이 터놓고 살며 서로서로 정을 나눈다는 친족의식과 집단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울타리들은 도둑을 막자고 친 것이 아니라 경계의 표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었고, 예로부터 부자면 부자일수록 권세가 크면 클수록 담은 두껍고,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하얀 꽃 곱게 핀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암팡지게 생긴 암탉이 느릿느릿 발을 옮기다가 한바탕씩 땅을 헤집어 파고는 했다. 그 뒤를 예닐곱 마리의 병아리들이 종종거리며 따라가기도 하고, 쪼르륵 달려가기도 했다. 그런 병아리들이 연방 삐약삐약 그 맑고 고운 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병아리들이 서로 다투어 쪼르륵 달려가는 것은 암탉이 한바탕씩 땅을 헤집어 판 다음이었다. 서로 앞서려고 삐약거리며 몰려간 병아리들은 새로 파헤쳐진 땅에 주둥이들을 대고 정신없이 먹이를 쪼아댔다. 그러다가 어떤 놈들은 지렁이 한 마리를 서로 양쪽에서 물고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서로 먹이를 뺏으려는 그 싸움은 한 치 양보도 없이 맹렬하고도 치열했다. 어떤 놈은 큰 지렁이를 삼키느라고 목을 뺀 채 뺑뺑이를 돌며 애를 썼고, 어떤 놈은 지렁이를 물고 다른 놈들이 덤비는 것을 피해 제 어미의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고, 어떤 놈은 어미닭이 파헤친 곳으로 너무 빨리 달려 나가다가 넘어져 뒹굴어지거나 코방아를 찧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삐약거리는 소리는 더 유난스러워졌다. 그러나 그 병아리들은 금방 몸을 일으켜 다시 기를 쓰며 달려가는 것이었다.

"참말로, 삥아리 새끼덜도 묵고 살겄다고 저리 난리 판굿인디... 사람이야 당연지사제."

외서댁은 병아리들의 그런 모양을 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암탉은 병아리들이 어쩌거나 간에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땅만 헤집어 파며 느린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 살리고자 하는 암컷의 진지하고 충실한 모습이었다. 장닭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외서댁은 무심결에 콧물을 들이켰다. 떼놓고 온 두 자식의 모습이 왈칵 밀려들며 가슴을 흔들었고, 콧등으로 물줄기가 찡하니 내리 뻗쳤던 것이다. 딸년은 딸년대로 애비 없어져 가엾고, 아들놈은 아들놈대로 애비한테 버림받아 불쌍했다. 새끼 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애비는 흉물로 꿈에 볼까 무서우면서도 그 새끼는 젖꼭지 물리다보니 딸년한테나 마찬가지의 정이 홈통을 대게 되었다. 곡식이 땅이 없고 씨만 있어 가지고는 소출을 못 보듯이 사람 목숨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서 그것을 뱃속에 넣고 키워낸 정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허벅지게 먹어대면서도 어쩐 일인지 살이 실하게 오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달수가 겨워도 목을 잘 겨누지 못했다. 친정어머니 말로는 늦되는 애들이 있다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영 께름칙했었다.

기둘려, 이 엠씨가 존 시상 맹글어 기엉코 느그덜헌테로 갈 것잉께. 고상 되드락도 이 엠씨 원망은 말어. 이 엠씨도 호강 날라리로 사는 것이 아닝께로.’

외서댁은 또 콧물을 들이키며 손등으로 코밑을 썩 문질렀다.

구굴 꿀꿀, 구구구...

암탉이 갑자기 이상스런 소리를 내며 두 날개를 늘어뜨렸다. 그 소리는 알을 품을 때 내는 소리와는 달랐고, 장닭을 등에 업거나 알을 낳고나서 내는 소리와는 더욱 거리가 있었다. 그러자 병아리들은 제각기 하던 동작들을 멈추고는 일제히 어미닭을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병아리들의 달리기는 그 어느 때 없이 다급하고 빨랐다. 그러다보니 나뒹굴어지는 놈, 한쪽다리가 헛짚어 기우뚱하는 놈, 흙더미에 머리를 박치기하고 구르는 놈, 가지각색이었다. 넘어지고 뒹굴어진 놈들은 지체 없이 일어나 또 달리기 시작했다. 어미닭에게 당도한 병아리들은 늘어뜨린 두 날개 속으로 쏙쏙 자취를 감추었다. 워메, 솔갱이가 떴는감네! 외서댁은 괜히 마음이 다급해져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하늘에는 실구름이 놓고 길게 떠 있을 뿐 어디에도 솔개는 보이지 않았다. 요상시러라... 외서댁은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되돌렸다. 그런데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탱자나무들 가지사이에서 짹짹거리는 참새들 소리였다. 참새들이 태평하게 짹짹거리며 푸득푸득 자리 옮김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솔개가 뜨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솔개가 떴다하면 참새나 병아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들쥐나 두더지까지도 찍소리를 내지 못하고 숨을 데를 찾아 허둥지둥하는 법이었다. 외서댁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암탉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암탉은 두 날개를 늘어뜨렸을 뿐 아니라 몸의 모든 털들을 부풀려 곤두세운 채 병아리들을 품고 있었다. 솔개가 떴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것이 미쳤다냐, 노망얼 헌다냐! 외서댁은 또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아까와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외서댁이 눈길을 돌렸을 때 병아리들이 암탉의 양쪽 날개 속에서 쪼르륵 달려 나오고 있었다. 병아리들이 다 나오자 암탉은 두 다리를 쭉 뻗치고 목을 뽑아 늘이며 두 날개를 퍽퍽퍽 털어댔다. 그제서야 한가지생각이 외서댁 머리를 스쳤다.

"음마, 염병하네웨. 긍께로 저것도 새끼덜헌테 미리 학습얼 시키는 것 아니라고?"

외서댁은 기가 차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해서 헛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그런 연습을 시키는 것을 목격하긴 처음이었다.

달구새끼가 저러는디 빨치산덜이 날마동 학습허고 토론허고 허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이나저나 목심 보존허자는 것이야 달블것이 하나또 웂은 일잉께.’

외서댁은 토방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햇발이 더 안으로 밀려든 마루에서는 천점바구가 무릎을 꺾고 바짝 엎드려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고개를 삐딱허니 틀고 연필을 놀려대다가 멈추고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연필을 다시 놀리고 하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이런저런 움직임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엎드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 되었다. 그는 오늘만이 아니라 벌써 며칠째 글쓰기에 열중해 있었다. 그는 꼭 적과 맞서 싸움을 하고, 야간작전을 수행하는 식으로 글쓰기에도 열성을 부리고 있었다. 작전을 주로 밤에 하게 되니까 아침나절에는 대개 간밤의 작전에 대한 비판, 평가와 학습을 두세 시간하고, 오후에는 번갈아가며 보초를 서면서 학습의 복습을 하거나 총기청소 같은 것을 하며 보냈다. 장기작전을 하지 않는 한 해방구 안에서는 누구나 그런 시간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거처도 부대별로 인민들의 방을 하나씩 빌려 교대로 들고 있어서 낮잠 자기도 편안했다. 천점바구는 그 오후 시간을 며칠째 글쓰기에 바치고 있었다. 글을 쓰다가 시간이 되면 야간작전에 나서고 다음날 오후에 또 이어서 쓰고 하는 글이었다.

"워따메 참말로 징상시럽게 찔기고 찔기요이, 천 동무!"

천점바구를 오랫동안 물쓰러미 바라보고 있던 외서댁이 마루에 철퍽 앉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아?"

천점바구가 고개를 들었다. 외서댁을 쳐다보는 그의 눈은 졸음이라도 찬 듯 초점이 잘 맞지 않았고, 멀뚱한 그의 얼굴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무셔라, 을매나 정신얼 폴았으먼 그리 크게 소리 질른 그 쉰 말얼 못알아묵는다요?"

목소리를 더 키워 말을 한 외서댁이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지었다.

"무신 말 혔는디라?"

천점바구는 여전히 엎드린채 눈을 껌벅거렸다.

"글쓰는 일이 워째 그리 징상스럽게 찔기고 찔기냐고 혔소."

", 그랬구만이라. 글먼 워쩔 것이요, 포도시 깨친 글로 자서전얼 쓰잔께 글언 지대로 안 되야묵고 심만 짠득 들제라."

", 재미진 춘향전이나 삼국지럴 쓰는 것도 아니겄고, 다 아는 자기 이약 쓰는 것인디 그리 뼈대 쌓지 말고 퍼뜩퍼뜩 씨뿌씨요."

"금메 말이요."

그제서야 천점바구는 굼뜨게 몸을 일으키면서,

"말이야 외서댁 동무 말이 맞는디, 워낙에 글 쓰는 재주가 웂어논께 고것이 워디 맘대로 뜻대로 되간디라? 나가 젺은 일잉께 맘에야 훤헌디 워쩌크름 생게묵은 것이 글로 쓰자고 들먼 생각이 싹 다 미친년 머리크락맹키로 헝클어져뿔고, 아 새끼가 물고 뜯은 실패맹키로 헝클어져뿐단 말이요. 나가 똑 미쳐뿔겄소."

그는 뒷머리를 득득 긁어댔다.

"와따, 늘라는 글은 안 늘고 말만 늘었는갑네. 안창만 동지가 뭐랍디여? 말허디끼 쓰면 된다고 안 그럽디여? 에롭게 생각덜 말고 그리 술술 잘 허는 말얼 그대로 글로 쓰먼 안 되겄소? 엉치 작은 여자 아그 낳기 심들어 밤낮 사흘 삐대는 것맹키로 끙끙 삐대싼께 옆에서 보는 사람도 심이 들어 못젼디겄소."

"외서댁 동무, 그럼 동무가 그런다고 소대장 동무를 돕는 것인 줄 알아요? 동무가 그러는 건 글 쓰는 걸 방해하는 것이고, 소대장 동무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라구요."

갑자기 끼여든 여자의 카랑하게 울리는 빠른 말이었다. 외서댁의 눈이 소리 나는 쪽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어깨에 얹히는 머리를 쌍갈래로 땋아 내린 여자가 방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목소리만큼 상기되어있었다.

", 혜자 동무, 고것이 무슨 소리당게라?"

외서댁의 어조는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무슨 소리긴요? 그 쉬운 말도 못 알아들어요?"

김혜자의 말도 꼬이고 있었다.

", 나넌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는 무식쟁잉께 식자든 사람이 허는 유식헌 말은 하나또 못 알아묵는 귀먹쟁이요."

외서댁의 말은 새끼를 꼬듯 해놓은 엿가락처럼 완전히 겹꼬여 있었다.

"소대장 동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김혜자가 눈에 힘을 모으며 허리를 세웠다.

", 인자 알아묵겄구만."

외서댁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비웃음 문 입술을 야무치게 훔치고는,

"말이 난 김에 나가 혜자 동무헌테 한마디 꼭 찍어서 허겄는디, 나가 소대장 동무 허는 일 방해헌다고 간섭허덜 말고, 혜자 동무나 소대장 동무 투쟁심 약혀지게 달근마시험스로 꼬랑댕이 치덜 말라 그것이여. 여그넌 목심덜 내걸고 투쟁허는 빨치산 해방구제 연애치고 놀아나는 예배당이 아닌께로!"

그녀의 말은 가차 없이 상대방을 후려치고 있었다.

"동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얼굴이 하얗게 변한 김혜자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천점바구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임막하고 있었다.

"워째, 나가 틀린 소리 혔소?"

외서댁은 토론의 발언을 할 때 같이 가다듬어진 얼굴로 김혜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심한 말이에요. 난 같은 동지로서 소대장 동무를 돕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건 오해예요."

한풀이 꺾인 김혜자의 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혜자 동무, 기왕지사 탁 털어놓고 말이 된 것인디, 동무가 그리 속에 든 맘허고 달브게 말허먼 못쓰요. 혜자 동무가 소대장 동무헌테 갖고 있는 맘이야 우리 대원덜이 다 아는 것인디, 그리 말혀서 쓰겄소? 나가 허는 말은 젊은 남자 여자가 눈 맞고 맘 맞는 것이야 하늘이 시키는 일인께 서로 좋아라 허는 것이야 다 존디, 동무넌 소대장 동무가 대원덜 앞에서 옹색시러바지고 궁색시러바지게 맘얼 표식낸다 그 말이요. 소대장 동무가 그런 혜자 동무럴 피해 슬라고 애쓰는 일이 자꼬 생기는디, 소대장동무가 소대장질 지대로 허게 헐라먼 그래서야 쓰겄소? 긍께로 좋아라 혀도 그리 야하고 숭허게 표식내지 말고, 그저 바람 불듯말듯허게, 비 온듯말듯허게 숨키고 개레감스로 진득허고 끈허게 허리 그런 말이요. 나 말이 으쩌요? 접수헐 만허요?"

외서댁의 말은 그대로 비판토론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끝에 단 "접수헐 만허요?" 한 말이 그녀의 말에 무게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혜자의 그 동안의 태도는 정식으로 비판토론에 올려지기에 모자람이 없기도 했다. 그것은 대원들 간에 이성 관계를 금하고 있는 당규에 저촉되기 시작한 것이다.

", 외서댁 동무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김혜자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마음을 대원들이 다 알아버릴 정도로 자신의 언행이 표 났다는 것에 그녀는 전신이 뜨거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되얏소, 혜자 동무. 우리 소대장 동무넌 전사로도 장허고, 남자로도 실헌께 혜자 동무 눈이 볽기는 볽소. 나 말 알아들어준께 아즘찬이요."

외서댁은 김혜자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퍽 나이 들고 철이 든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와따, 소쿠리 비행기 태우지 마씨요. 어질어질혀서 정신이 웂소."

얼굴이 달아오른 천점바구는 연필 끝에 침을 묻히며 얼른 엎드렸다. 그가 가진 연필은 손가락 두 매듭 정도의 길이의 몽당연필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반 뼘 길이의 대나무에 끼워져 있었다. 그 몽당연필은 몽당숟가락처럼 빨치산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품이었다. 그 몽당연필들을 가지고 날마다 실시되는 학습을 받았다.

"소쿠리 비행기가 아니라 진짜배기 비행긴께 안심 푹 허씨요. 나도 남자 보는 눈이야 쪼깐 있는디, 소대장 동무야 모지랜 것 하나또 웂은 총각이요. 맘씨 넓겄다, 인물 훤칠허겄다, 몸 건장허겄다, 거그다가 출신 성분 좋겄다, 쪼깐 있으면 당원꺼지 되겄다, 머시가 모지랜 것이 있소. 나도 처녀람사 소대장 동무헌테 달근마시험스로, 당신언 나 맘에 오아시스요 등대입니다 허느 연애 편지럴 멋떨어지게 쓰고 잡은 맴이 동혔을 것이요."

외서댁은 손짓까지 해가며 감정을 묻혀내고 있었다.

"아이고메, 외셔댁 동무넌 워째 그리 말이 술술 나옴시로, 찰지고 그요. 나야 못 당허겄소."

천점바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나가 입산혀서 달라진 것이 먼지 아요? 달라진 것이야 쌔고 쌧제만, 나가 알게 딱 표 나게 달라진 것이 세 가지가 있소. 말허는 것이 장마에 물외 크대끼 늘어뿌렀고, 산 타는 것이 토깽이맹키로 빨라져 부렀고, 겁만 나든 총질이 널뛰대끼 재미지게 되야뿐 것이요. 참말로 나가 나럴 생각혀도 생판 딴 사람이 되야부렀는디, 나가 요런 시상얼 살아볼 줄이야 꿈이나 꿔봤간디라. 우리 냄편이 그 고상혀감스로 워째 산사람으로 살었는지 알게 되얏소. 나겉은 무식헌 촌년이 출세혀뿐 것이요."

그런 변화를 겪는 것은 외서댁만이 아니었다. 그런 배움이 없는 입산자들의 공통된 변화였다. 특히 나날의 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그들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의 생각을 조리정연하게 말로 엮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가 새살얼 너무 깠소. 요러다간 참말로 소대장 동무가 헐일 망쳐 놓게 생겼소. 글먼 자서전 잘 쓰씨요."

외서댁은 천점바구와 김혜자에게 눈웃음을 보내고 자리를 떴다. 천점바구가 쓰고 있는 것은 당원심사에 필요한 자서전이었다. 그는 그리도 바라던 당원이 될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그는 당원이 되는 기본조건인 글을 깨침과 동시에 학습내용의 해득능력을 인정받았고, 절대조건인 투쟁을 통한 당성을 또한 인정받았던 것이다. 당에 제출해야 될 서류는 추천서와 자서전이었다. 추천서는 당원 두 명의 추천을 받는 것이고, 자선전은 말뜻 그대로 본인이 쓰는 것이었다. 입당자의 사상적, 인간적인 연대책임을 지는 추천인은 안창민과 하대치가 되어주었다. 천점바구는 오래 전부터 염상진 대장의 추천을 받아 입당하고 싶은 욕망을 간직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염 대장은 총사에 가 있어서 그 꿈은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천점바구는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안창민과 하대치도 언제나 높게 우러르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당원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당 사업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영예였다. 당원이 되는 것은 조직원으로서 새로운 탄생을 의미했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었다. 당 조직은 그 기초기반을 중시했으므로 당원의 입당절차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이었다. 그래서 입당 대상자의 선정과 심사는 당의 초급조직인 다섯 명 이상의 당원들로 구성되는 세포회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세포회의는 대개 중대단위로 형성되었다. 거기를 통과하면 연대, 연대에서 지구사령부를 거쳐 도당에서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천점바구는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그 빤한 이야기를 쓰는데 며칠째 진땀을 빼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글쓰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말로 하면 술술 풀려나올 이야기가 어째서 글로 쓰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김혜자 동무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조금씩 쓴 것을 김혜자 동무에게 보이고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대목을 수정받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결정을 쉽게 한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가까이에 김혜자 동무만큼 학식이 든 대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김혜자 동무는 순천여중의 졸업반에 다니다가 입산한 지식계급이었다. 수수한 생김에 말솜씨가 있는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을 소대장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님을 천점바구는 느끼게 되었다. 그건 얼떨떨하면서도 난처한 문제였다. 그 어느 때라고 여중학생을 자신의 상대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고, 남녀대원들 사이의 사랑문제는 당에서 금하고 있는 것인데 소대장으로서 그 규율을 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치를 모르는 척해왔고, 그녀가 표 나게 뒷수발을 하고 드는 것도 적당하게 피하고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도 그녀가 싫지 않다는데 있었다.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 때문에 투쟁의욕에 무슨 이상이 생길 리는 전혀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마음이 감기고 있는 것은 스스로 속일 수가 없었다. 혁명을 이룩하고 함께 살면 어떨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불덩이라도 잘못 집은 것처럼 화다닥 놀라 그 생각을 떼치고는 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혁명투쟁이 먼저였고, 만약 그녀 때문에 자신의 혁명의지에 손상이 오거나 그녀가 자신의 혁명의지를 손상시키려 한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그녀를 다른 부대로 보내버릴 작정을 확고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염상진 대장처럼 되고 싶은 꿈을 여자와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되얐소. 작전 나갈 시간이 을매 안 남었응께 오늘 몫아치넌 요걸로 혀야 쓰겄소."

천점바구는 연필을 끼운 손으로 마룻바닥을 치며 윗몸을 세웠다. 옷을 꿰메고 있던 김혜자가 옷을 옆으로 치웠다.

"많이 쓰셨군요."

김혜자가 종이로 눈길을 주며 밝게 웃었다. 한쪽 볼에 보조개가 살짝 패었다.

"몰르겄소, 말이 되얐는지 워쩌는지. 나헌테로 질로 쉰 것은 산 탐스로 총질 허고 싸우는 것이오. 글이란 것을 써봉께로 사나흘거리로 신문 맹글어내는 출판사 동지덜이 하늘맹키로 높아뵈요. 고것이 신선놀음인 줄 알었등마."

천점바구는 두 팔, 한 다리를 내뻗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렇지도 않아요. 글이란 것도 자꾸 써보면 늘어요. 전투를 자꾸 하면 요령이 늘 듯이 말예요."

김혜자가 종이를 집어 들며 천점바구를 바라보았다. 그 그윽한 눈길에는 촉촉한 따스함이 어려 있었다. 천점바구는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리며 벌떡 일어났다.

"몰르겄소, 늘란지 워쩔란지."

마루를 내려서며 천점바구가 뚱하게 한 말이었다. 그런 천점바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혜자의 눈길은 더 그윽해지고, 얼굴에는 연분홍 웃음이 잔잔하게 번지고 있었다.

 

화아, 하늘도 참 기맥히시. 가을 하늘만 존지 알었등마 인자 봉께 봄하늘도 아조 그만이시. 근디 가을 하늘허고 봄 하늘이 그 맛이 달털 않다고? 달브기는 달분디 워쩌크름 달븐고? 가만 있어라 보자, 가을 하늘이 시퍼렇고...... 봄 하늘도 시퍼렇고...... 요상허시? 시퍼런것은 똑겉은디...... 그려, 시퍼렇기로 친다면야 여름 하늘도 시퍼렇고, 겨울 하늘도 시퍼렇제. 하늘이야 본시 껌댕이 하늘이야 웂은 법이고, 그 시퍼렇기는 시퍼런 하늘이 요상시럽게 달브기는 달브단 말이여. 근디 고 야라꾸리허게 달븐 차이가 딱 잽히덜 않는단께로. 요런 답답헌 인종아, 손에 딱 잽히덜 않고, 말로 딱 짤라서 안된께 야리꾸리가 아니겄냐. , 그렇기사헌디, 그 달븐 차이럴 속 씨언허게 찾어야 쓰겄는디. 참말로 요상허단께로...... 근디 고것이...... , 알겄어! 가을 하늘은 물 속맹키로 투명험시로 먼 것이 싸아허게 추운 기색이고, 봄 하늘은 아조 흐린 안개가 사르르 낀 것맹키로 덜 투명험시로 잠푹허게 따땃헌 기색이 도는 것이 서로 달븐 차이 아니라고? 아이고메 못해묵겄다, 나가 무신 음풍농월허는 시인이라고 이래싼다냐. 고것얼 간딴허게 과학적으로 말해뿔먼, 고기압과 저기압이 교류하는 기류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니겄어. 근디, 고것이 유물론자답기넌 헌디, 역시 멋대가리넌 웂단말이여. 좌우간 하늘이란 것이 먼디 하늘을 보고 있으먼 맘이 편안허니 가라앉고, 고단헌 몸이 풀리는 것일까? 혁명이 성취된 시상이 저 하늘 겉을랑가? 근디, 보리풀 때죽도 못 낋이는 철에 하늘만 저리 징허게 시퍼렇고, 배곯는 인민덜이 저 하늘을 쳐다보먼 더 배만 고플 것아니라고. 혁명은 기엉코 완수혀야 될 것인디, 골백 분 생각혀도 혁명 웂이는 이눔에 시상얼 바로잡을 방도가 웂응께로. 근디 다 돼간 잔치에 코 빠쳐뿐 그 양키눔에 새끼덜......’

"중대장 동무, 여그 기셨구만이라."

느닷없는 소리에 조원제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팔을 베고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최 동무. 워쩐 일이오?"

"야아, 연대장 동지가 모시고 오라고 허느만이라."

연락병들이 언제나 그렇듯 최 대원도 말하는데 숨이 가빴다.

"무신 일 생겼소?"

조원제는 땅을 밀어 차며 일어났다.

"잘 몰르겄구만요."

"싸게 갑시다."

조원제는 앞장섰다. 그의 하얗던 얼굴은 겨울 산 생활을 거치면서 흑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포동하게 올랐던 살도 다 빠져버려 양쪽 볼이 패일 정도였다. 그러나 눈만은 여전히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아니, 눈도 그전의 눈이 아니었다. 그전의 눈이 남다르게 날카롭기는 했지만 초롱초롱한 그 속에 소년적 호기심과 나약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눈은 초롱초롱함이 부리부리하게 바뀌어 있었고, 그 부리부리함에서는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거나 찾고 있는 것 같은 탄력적인 힘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그런 눈과 함께 흑갈색의 마른 얼굴은 그를 더없이 강인하게 보이게 했다.

"연대장님, 불르셨는게라?"

조원제는 연대장에게 경례를 붙였다.

", 어여 오씨요."

연대장이 들여다보고 있던 신문을 치우며 반색을 했다.

"무신 일 있는게라?"

조원제는 연대장을 주의 깊게 쳐다보며 느리게 엉덩이를 빼고 앉았다. 그의 부리부리하고 날카로운 눈이 상대방의 대답에 앞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 아조 기분 존 일이 생겼소."

언제나 웃는 얼굴인 연대장이 더 환하게 웃었다. 조원제는 연대장에게 눈길을 둔 채 무슨 일인가를 묻고 있었다.

"배고픈디 요것부텀 묵고 신문은 찬찬히 보드라고이."

연대장이 무엇인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고구마였다.

"워쩐 고구매다요?"

신문에 무슨 좋은 일이 났을까 생각하며, 조원제는 고구마를 받을 생각을 않고 물었다.

", 돌른 물건 아닝께 싸게 묵드라고."

연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야 배 안 고픈께 연대장님이나 드시씨요."

조원제는 고개를 저었다.

"어허! 또 그 고집이여? 나야 참말로 배 안 고프시. 중대장 오기 전에 폴세 배불르게 묵었응께로."

연대장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훔쳐보였다.

"일로 주씨요."

고구마를 받은 조원제는 그것을 반으로 자르더니 한쪽을 연대장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런 그의 눈은 연대장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려, 항꾼에 묵드라고."

연대장이 빙그레 웃으며 고구마 반쪽을 받아들었다. 그때서야 조원제도 마주 웃었다. 곡식이라고는 완전히 바닥이 난 오월에 연대장이 배불리 먹을 고구마가 있을 리 없었고, 연대장의 성품을 아는 터라 어떻게 손에 들어온 고구마 하나를 입도 대지 않고 통째로 내놓는 것을 보지 않고도 환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조원제는 고구마를 베어 물었다. 철 지난 고구마답게 껍질은 끈적이고 속은 물컹거렸다. 그러나 단맛은 가을 고구마에 그것이 아니었다. 삶으면 껍질로 내배는 진이라는 것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고구마의 성분이 변해 나타나는 당분이었다. 입춘을 지낸 그런 "물고구마"는 아이들보다 이빨 부실한 노인네들이 더 좋아했다.

"신문에 무신 소식 났습디여?"

조원제는 고구마를 꿀꺽 삼키고 물었다.

", 자네 이약이 아조 근사허게 나부렀네."

연대장은 흡족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떡거리며 신문을 내밀었다. 연대장이 단둘이 있으면서 직책을 부르지 않고 "자네"라고 할 때는 아무 스스럼없이 정을 나타내는 경우였다. 그때는 조원제도 "강철"이란 별명을 가진 연대장 이태식이 아니라 인정 많고 마음 넓은 인간 이태식으로 대했다. 조원제는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도당신문이었다. 그런데 그 첫머리에 크게 쓰인 자신의 이름이 퍼뜩 눈에 띄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숨을 들이켰다.

"백아산 지구의 위대한 전사 조원제",

이것이 큰 제목이었고,

"재귀열 예방의 위생투쟁에서 중대원 중 단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은 혁혁한 과업성취",

이것이 두 줄로 된 작은 제목이었다. 그 내용은 지구신문에 이미 실렸던 것과 같았고, 다만 "본 지구 내에서 유일한 중대""본 도당 내에서 유일한 지구"로 바뀌어 있었다. "지구"라는 낱말이 "도당"으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실제로 그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지구 안에서 인정된 공적이 다시 도당 차원에서 인정된다는 것은 그 공적이 다섯 배로 확대되었다는 수치적 계산일 수가 없었다. 도당이 단순히 다섯 개의 지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그 정치적 의미는 수치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도당으로부터 투쟁공적을 인정받는 전사 - 그것은 무한량의 영광이고 영예였다. 조원제는 몸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주체하기 어렵게 가슴 벌떡거리는 감격에 휩싸이고 있었다.

"자네가 해낸 일은 이리 장헌 일이었구먼."

이태식은 조원제의 어깻죽지를 턱 치면서 잡고는,

"자네 나이 생각허면 더 장허고 장헌 일이제. 앞으로도 그 나이 잘 눌르고, 축대겨감서 더 장헌 일 많이 허소이!"

무게 실린 얼굴로 조원제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

조원제는 이태식을 마주보며 위아래 입술이 말려들도록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몸 뜨거운 흥분과 가슴 벌떡이는 감격이 찬 기운으로 가라앉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나이 잘 눌르고, 축대겨감서......"

이태식의 충고가 알 수 없는 힘으로 흥분과 감격을 눌렀던 것이다.

"젊은 혈기로 방자하지 말고 더 겸손하면서 이를 계기로 더욱 분발해서......"

좀 배웠다는 사람이면 필경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태식은 그런 문자를 쓸줄 몰랐다. 아니, 굳이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나 그의 꾸밈없는 말이 오히려 더 진실하고 무게 있고 마음을 그러잡고는 했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공부 좀 했다는 것이 무슨 중뿔난 자랑일 수가 없었고, 대답까지도 자연히 ""가 아니고 ""로 나오게끔 되었다.

도당신문이 지구당신문의 보도를 받아 재게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행병 재귀열의 피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그 위세가 꺾여든 재귀열의 희생자들은 도당 전체 병력의 사 할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팔천여 명이 죽어간 것이었다. 그건 투쟁력의 상실과 아울러 약화를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막대한 희생자를 낸 돌림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한 예방으로 중대원들 중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는 것은 지구 안에서 떠돌다가 말 단순한 화젯거리가 아니라 도당 차원에서 인정받을 만한 투쟁공적이기도 했다. 특히 중대장 조원제가 약관 스물이라는 데에서 그 공적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원제는 정보과 분트에서 후방부대장 연락병을 거쳐, 입당을 하면서 문화부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그때 마침 이름 모를 열병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도당에서는 본격적인 위생투쟁 전개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 지시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정치일꾼인 문화부중대장에게 있었다. 조원제는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치일꾼으로서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할 임무가 너무나 벅차고 무거웠던 것이다.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막아내서 중대원들의 목숨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산더미 같은 중압이었다. 그러나 그 중압감을 떠밀어내고자 하는 의욕 또한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싸잡고 궁리에 몰두했다. 그러나 선뜻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와 벼룩, 빈대의 박멸이었다. 도당에서 제시한 그 답에 어떤 방법으로 도달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적과 무력투쟁을 계속하면서 이를 박멸해야 하는 방법, 그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 순간 군사일꾼인 중대장을 부러워하기도 하면서 그 문제의 해결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렇다고 군사일꾼인 중대장에게 의논하지도 않았다. 전투 시에 부대의 지휘책임을 맡을 뿐인 그에게 어떤 묘안이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설령 그가 제시하는 무슨 방법이 그럴듯해서 시행하게 되더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정치일꾼인 자신이 지게 되어 있었다. 그 무한책임은 군대에 대한 당 우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고, 그 원칙에 따라 군사일꾼은 당원이 아니라도 될 수 있었지만 정치일꾼은 당원이 아니고서는 절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치일꾼의 책임은 평상시 부대원들의 사상교양에서부터 돌발 사태에 직면한 작전수립에까지, 그 범위는 실로 넓었다. 그러면서도 그 행위가 돌출되지 말아야 하고, 군사일꾼인 중대장과 마찰이나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되었다. 그 이원 조직은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당에서는 그것을 "예술적 조화"라고 일컬었다. 조원제는 머리를 앓은 끝에 마침내 대책을 강구하였다.

첫째, 전부대원이 머리를 완전히 깎을 것.

둘째, 전부대원이 주기적으로 일제히 옷을 삶을 것.

셋째, 다른 부대원들과 여하한 경우에도 접촉을 하지 말 것.

넷째, 인민들과의 접촉은 물론 어느 집이건 마루에도 앉지 말 것.

이 네 가지 사항은 돌림병을 옮기는 이나 벼룩, 빈대를 박멸함과 동시에 옮겨오는 것도 근절하는 방법이었다. 조원제는 그 네 가지 방법을 명시해 중대장에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부대원 전부가 머리를 빡빡 깎는다. 옷 삶을 솥을 구하려고 보투에 나선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결국 그 무자비한 돌림병에 부대원을 한 명도 잃지 않았던 것은 그 네 가지 사항을 철저하게 지킨 결과였다.

"! 시무 살 나이 갖고 고런 일 해낸 것이 장허다고 혔음사 나 진짜 나이 알었으먼 더 야단났겄소이?"

신문을 옆으로 치우며 조원제는 이태식을 보고 히죽 웃었다.

"하먼, 열야답 나이로 고런 일 혀부렀다 허먼 생판 난리굿이 일어났겄제."

이태식은 얼결에 거침없이 말해놓고는 찔끔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조원제의 실제 나이는 이제 열여덟이었던 것이고, 두 살을 더 먹게 된 연유는 그들 몇몇만 아는 비밀이었다. 조원제는 입당을 해야 했는데 나이가 모자랐다. 그 결격사유는 그의 당성이나 투쟁경력 이전의 문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입당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 이론에 밝고, 말재주가 뛰어난 그를 나이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연락병을 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학의 농민들이나 기본출들의 사상, 교양의 진작은 하루가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를 두 살 올려 입당절차를 밟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묵계는 정작 본인한테 알려지면서 말썽이 되었다.

"택도 웂은 소리 허덜 마씨요. 멋났다고 당규를 어김스로 고런 일얼혀라. 나넌 안헐라요."

조원제의 첫마디였다.

"어허, 워째 그리 생각혀보도 않고 무참허게 말해뿌요. 요 일이 긍께......"

",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얼 갖고 멀라고 생각허고 말고 혀라. 나도 당원 되고 잡은 맘이야 하늘 겉애도 그리 원칙에 안 맞게는 되고 잡지 않당께라."

이태식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원제 앞으로 다가 앉았다.

"알겄소, 조 동무 맘 알겄소. 원리원칙 지키잔 것 다 좋고, 조직생활에서 원리원칙은 꼭 지켜야는디, 요 일언 원리원칙을 안 지키는 일이 아니고 외려 조직을 위허는 일이다 그 말이오."

"아이고 땁땁허게 그 말 허고 또 허먼 머헐 것이요.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야 자명헌디. 나넌 그리 껄쩍찌근허니 입당 못허겄고, 그냥 아는 그대로라면 고맙게 입당허겄소."

"어허, 요론 소 잡아묵을 고집통머리가 있는가! 그리 될라면 당규럴 고쳐야는디, 고것이 될 일이겄소?"

", 긍께로 입당 안허겄다 그 말 아니요."

"참말로, 배왔다는 사람이 워째 이리 말귀럴 못 알아묵고 벽창호까? 긍께, 조직이란 것도, 원리원칙이란 것도 사람이 살자고 맹글어진 것이고, 사람이 살다가 보먼 특별한 경우에넌 고것얼 피해가는 수도 있는디, 고것이 나쁘게 쓰잔 것이 아니라 좋게 쓰자는 것잉께 맘 돌리씨요."

"나가 시무 살 될 때꺼정 이약허고 또 혀도 나 맘언 똑겉으요."

조원제의 단호한 말이었다. 그의 판판하고 견고하게 생긴 이마와, 그 가운데 돋은 핏줄이 남다른 의지와 고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고 그 고집!"

이태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돌아서다가

"남자답기넌 헌디......"

혼잣소리를 흘렸다. 결국 이태식의 설득으로는 안 되어 출판과장까지 동원되어 조원제는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출판과장은 그의 중학교 교장이었던 것이다. 당이 정한 원리원칙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조원제의 순진무구한 진실성도 그렇고, 그런 무리까지 해가며 쓸 만한 재목을 쓸만한 자리에 찾아놓으려고 애쓴 이태식도 어지간한 사람이었다. 이태식은 연락병으로 오가는 조원제를 눈 여겨 보았다가 뒷조사까지 해보고 그런 일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는 머슴 출신으로 구빨치였다. 스물일곱인 그는 항시 웃음기 도는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강철"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싸움에 강인했고, 통솔력이 뛰어났다. "강철부대"로 불리는 그의 부대는 백아산지구의 최강부대이기도 했다.

"어이 말이시, 자네 혹여 그간에 요상시런 연판장에 손도장 눌른 일 웂는가?"

이태식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뜽금웂이 연판장이고 손도장은 머시다요?"

조원제는 좋잖은 예감을 직감하며 고개를 저었다.

", 그렸으먼 우선에 되얐고."

이태식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귀에 꽂은 꽁초를 뽑아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이고는,

"글먼 자네 중대서 연판장 도는 눈치는?"

담배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물었다.

"고런 일도 웂는디요."

조원제는 대답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 짤라 장담은 못허겄는가?"

이태식일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금메요, 장담 못허겄다면 지가 허깨비 노릇 혔다는 것이제라. 장담허겄구만요. 근디, 무신 안 존 일이 생긴 모냥이제라?"

"그렇구마. 나가 자네헌테 요리 묻는 것은 자네가 집이 동북이기 땜시여. 동북 출신덜 멫멫이 말이여, 인자 가망웂이 진 쌈인께로 손들고 나가자 하는 연판장얼 즈그덜 마실사람덜얼 중심으로 돌리다가 꼬랑댕이가 잽힌 것이란 말시."

"머시라고라! 워떤 넋 빠진 새끼덜이!"

조원제는 아랫입술을 힘껏 물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시방 정보과에서 조사럴 벌이고 있응께 메칠 안으로 끌탕이 빠질 것잉마."

이태식이 언짢은 얼굴로 혀를 찼다.

"워떤 잡녀러 새끼덜이 고런 빙신 팔푼이 같은 짓거리 허는지 몰르겄소. 고것이 다 그 새끼덜 정신상태가 틀려묵어 생긴 일이지만, 또 한 가지, 신문덜이 전황을 너무 세세허게 알리고 있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요. 민주주의 허는 것이야 존디, 상황에 따라 알릴 것, 안 알릴 것은 개레야 되지 않겄는가요? 알면 병이고 몰르는 것이 약이란 말이 공연시 생게났겄는게라?"

"! 원칙론자가 그리 말헐 때도 다 있능가? 그리 말허는 걸 봉께로 아조 묵직허니 뵈는디?"

이태식이 피식 웃고는,

"맞어, 그 말도 중헌 말이시. 초기에 민주주의 잘허자고 작전도 공개토론에 부쳤다고 자꼬 정보 새나가 피해본 것이나 매한가지 일이제. 정식으로 제기혀야헐 문제시."

그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원제는 이태식과 헤어져 돌아오며 기분이 영 언짢았다. 조직 안에서 그런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완전히 적발을 해낸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파급시킬 나쁜 영향은 돌림병 재귀열만큼 고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동요는 이 백아산 지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지구들에서도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입산투쟁 여덟 달, 고생과 굶주림이 따른 그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사상무장이 빈약하거나 소홀한 사람들의 경우 사기가 떨어지고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기간이었다. 투쟁이 장기화될수록 사상무장은 강화되어야 하고, 지나치게 자세한 신문보도도 통제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등사판 신문들은 여러 곳에서 발행되었다. 도당, 각 지구당, 단위당(시당)에서 각기 발행해서 조직마다 선요원들을 통해 배달되었고, 나머지는 해당지역의 인민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신문들의 발행은 조직 간의 활동보고이면서, 대민 선전, 선동공작을 겸하는 중요한 정치행위였다. 신문들의 이름도 노동신문, 인민일보, 민청신문, 여맹신문 등으로 다양했다. 그런데 원지에 철필로 긁은 글씨들은 그야말로 깨알같이 작으면서도 놀랄 만큼 또렷또렷했고, 등사도 흠잡을 데 없이 선명했다. 필경 솜씨도, 등사기술도 전문적이었던 것이다. 적지의 신문들도 선요원들을 통해 사나흘씩 늦게 다 들어왔다.

조원제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저 멀리, 원리 쪽으로 나가는 길목 첫 마을 당산나무 옆의 게양대에 인공기가 유유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해방구는 아직까지도 이렇듯 건재한데 주전선은 천리 밖, 너무나 멀었다. 기분 언짢은 소식을 들은 다음이라서 그런지 조원제의 심정에는 그 유유하게 펄럭이고 있는 인공기가 오늘따라 눈물 겹게 느껴졌다. 그는 어금니를 꾸욱 맞물었다. 며칠이 지나 그 사건에 연루된 열세 명이 공개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모든 지구대원들의 격분을 샀다. 그들은 총살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염상구의 결혼식날이었다. 일요일인 남국민학교로 아이들 대신 어른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결혼식 장소가 신부 집이 아니고 국민학교 강당인 것은 염상구가 결혼식을 "신식하이칼라"로 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염상구의 그 생각에 신부 윤옥자도 반색을 했던 것이다.

"그 몬지 탱탱 쓸고, 이눔저눔이 걸쳐 땟국 쩔은 사모관댄가 지랄인가 귀신단지맹키로 입고 쓰고 근천떨지 말고 양복 쪽 뽑아입고 신식하이칼라로 멋떨어지게 혼례식 올리드라고!"

염상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윤옥자는 즉각적으로 환영했던 것이다.

"워메, 참말로 멋지요이. 지도 말언 못혔어도 그 구식 혼례식이 영 정떨어졌는디라. 아그덜도 아님스로 색동저구리 치렁치렁 닐이고 근천떠는 것보담이야 흰 드레스 받쳐입는 것이 을매나 더 멋지다고라."

두 손을 모아 잡은 윤옥자는 부끄러운 웃음을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곧 시무룩하게 변하고 말았다.

"아니, 워째 금방 똥 집어묵은 상호가 되는 겨?"

염상구가 눈치 빠르게 잡아챘다.

"신랑 양복은 신부 쪽에서 해주고, 신부 드레스는 신랑 쪽에서 해주는 법이라는디...... 드레스가 영판 비싸서."

", 시끄럿!"

염상구가 버럭 소리치며 담뱃갑을 방바닥에 떡을 쳤다. 그 서슬에 윤옥자는 화닥닥 놀라며 두로 얼른 물러나 앉았다.

"아아니, 이 염상구럴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시방? 니도 느그 엄씨맹키로 나럴 썩은 홍어좆 보디끼 무시헐 참이여! 나가 붕알 두 쪽밖에 찬 것이 웂은 줄 아는 모냥인디, 카악 그냥!"

염상구는 담뱃갑을 집어 들어 던질 듯한 몸짓을 했고, 윤옥자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며 몸을 옆으로 트는데,

"사람 시퍼보덜 말어라. 이 염상구가 맥엄씨 주먹질만 허고 산지 아냐. 드레쓴가 머시깽인가가 지아무리 비싸도 나가 요러타께 혀줄 수 있응께 니넌 맘 푹 놓고 있으면 되야?"

그는 사뭇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야 거그럴 무시혀서 헌 말이 아니고 거그가 엄니헌테 체면 깎일까 걱정시러서 헌 말이제라."

언제 겁나서 방구석으로 몰렸나 싶게 윤옥자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니기럴, 느그 엄씨가 나럴 맘놓고 무시허고 앉었는디, 그 코 납짝허니 맹글어뿔고, 나 체면 당당허게 세움서 니 시집 잘 간다는 것을 온 시상에 다 봬줄 팅께 니넌 찍소리 말고 기둘려."

염상구는 담배 연기를 기운차게 내뿜었다. 그건 그가 주먹패의 헛기세를 부리는 큰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장모가 될 오씨는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이년아, 쥐도 새도 모르게 뒤져뿔 일이제 그 꼬라지로 시집가겄다고 나서서 집안 우세시키고 엄씨 애간장 요리 긁어파냐."

오씨는 염상구를 외면한 채 이런 식으로 욕해댔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구는 그런 면전박대를 꾹꾹 눌러 참았다. 어차피 한번은 넘겨야 할 고비였던 것이다. 오씨가 그럴수록 그는 윤옥자를 살붙게 감싸고 들었다.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학교도 그만둔 처지의 윤옥자는 하루가 다르게 그에게 끌려들고 있는 판이었다. 염상구는 과연 광주까지 윤옥자를 데리고 가서 그 비싼 드레스라는 것을 맞춰 입었다. 순천에서는 만드는 데가 없어서 광주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결혼식 때만 잠깐 입고 마는 그 예복이라는 것이 쌀 열 가마니 값이니, 열다섯 가마니 값이니, 읍내 안통의 여인네들 입을 떠돌았다. 특히 처녀들은 모여 앉으면 그 이야기들을 하느라고 입에 침이 말랐다. 그 소문으로 가슴에 열불 난 처녀가 교환수 영자였고, 말없이 눈물 떨어뜨리며 벌교를 떠난 것이 남원장 기생 경월이었고, 가슴에서 모과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은 아버지도 죽고 장사에 맥을 놓고 있는 책방의 정님이었다. 염상구는 신부에게 드레스만을 맞춰준 것이 아니었다. 양효석의 어머니네 포목점의 고급비단들이 바닥이 날 정도로 채단을 끊어 보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신부의 것만이 아니고 장모의 몫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부에게 예물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또 사람들 귀를 의심하게 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옥 쌍가락지, 금 쌍가락지, 홍산호 반지, 금 브로치, 홍산호 브로치, 호박 브로치, 스위스제 시계 등속이었다. 사람들의 의문과 놀라움은, 예쁜 데라고는 없이 그저 덤덤하게 생긴 윤옥자의 어디에 미쳐 염상구가 그 비싼 예물을 해주느냐는 것이었고, 껄렁패로만 알았던 염상구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지닐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장 정신없이 놀란 사람은 바로 장모가 될 오씨였다. 그저 주먹패 건달이요, 사람 못된 빈털터리가 딸년 신세 망쳐놓고, 집안 재산까지 덮치려 든다고 눈 부릅뜨고 있던 오씨는 그 값진 예물들을 앞에 놓고,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그전의 불신을 신뢰로, 미움을 사랑으로,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놓았다. 염상구의 말마따나 높았던 코가 납작해진 것이었다. 염상구는 그 계획추진을 위해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터 바닥에 깔아놓고 있던 돈을 다 끌어들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가 돈을 다 털어내서 그리 엄청나게 결혼준비를 한 것은 단순히 장모의 콧대를 꺾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해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이중삼중의 효과까지 노리고 있었다. 예물을 많이 받은 당사자가 제일 기분 좋고 행복한 것은 더 말할 것 없는 일이고, 그 예물들을 친정에 묻고 오는 것이 아니라 다 가지고 올 것이니 어차피 자신의 재산이었다. 그러면서도 온 읍내 사람들, 특히 기관장들이나 유지들에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수가 있었다. 장가를 들기만 하면 솥 공장이고 정미소가 굴러 들어와 어엿한 유지가 될 판인데, 그러기 전에 자신의 재력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처가 덕 보았다는 어줍잖은 소리를 피하고, 당당하게 유지행세를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옥자가 그저 벙글거리고, 그 어머니 오씨가 독기 간데없이 나긋나긋해지고, 읍내가 떠들썩해지는 것으로 염상구가 노린 목적은 결혼식 전에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결혼식장은 사람들로 터져나갈 듯했다. 읍내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모여든 데다, 모처럼 벌어지는 신식결혼식을 구경하자고 안통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던 것이다. 군수를 주례로 내세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풍금 소리가 울리면서 신랑이 입장했다. 검정양복에 머리에 기름을 반들반들 바른 염상구는 전혀 딴 사람처럼 말쑥했다.

"저리 채리고슨께 아조 하이칼라 신사 아니라고?"

"긍께 의복이 날개라고 안허등가?"

"음마, 말 그리 허덜 말어. 인자 저 사람이 주목 쓰는 청년단장이 아니시. 윤가 집 재산 한손에 몰아쥔 읍내 유지여, 유지."

", 그야 그렇제. 아들 하나 있든 것이 죽어뿔고 남치기가 딸만 싯인디다가, 큰사운께."

여자들의 숨죽인 수군거림이었다. 다시 울리는 풍금 소리를 따라 신부가 입장하고 있었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신부 앞에는 두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가고, 옆에서는 들러리가 손을 받쳐주고 있었다. 흰빛 화사한 드레스는 마룻바닥에 깐 옥양목 위를 길게 끌리고,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탄성이 꼬리를 잇고 있었다. 원앙새 금슬로 아들딸 많이많이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하고...... 긴 주례사가 이어지고, 신랑 염상구씨로 말할 것 같으면 반공전선의 일선에서 좌익 공산당들을 척결함에 있어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반공투사일 뿐 아니라...... 염상구를 끝없이 치켜 올리는 축사가 연설조로 장황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축사를 들으며 가슴 미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서 굽어지는 허리를 자꾸 펴려고 애쓰고 있는 호산댁이었다. 아들이 제 체면 살리느라고 해준 비단 치마저고리를 얻어 입고, 아들의 체면을 상하게 될까봐 굽어버린 허리를 어떻게 해서든 펴보려고 애쓰고 있던 호산댁은 그렇잖아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 못하는 큰아들 생각에 마음이 젖어있던 참인데 그런 축사를 듣게 되자 자신의 신세 기구함이 사무치고, 평생 한 번 있는 경사에도 오지 못하는 형제간의 처지가 새롭게 서러워져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솟고 있었다. 염상구는 신부와 함께 하객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절을 했다. 마침내 결혼식이 끝났다. 들러리가 신부의 팔을 그의 팔에 끼웠다. 풍금 소리가 다시 울리고, 그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쇳물덩이 이글거리던 솥 공장과, 피댓줄 맹렬하게 돌아가던 정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워쩌끄나! 신랑이 웃는다, 첫딸 낳겄다."

어떤 여자의 상쾌한 외침이었다. 그는 더 환하게 웃었다. 여기저기서 색색의 줄종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14. 덕유산의 비밀회의

그 일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일의 중대성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그 정보가 새나간다면... 그건 가정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군경은 총력을 집중해서 추격과 수색을 펼칠 것이 자명했다. 전남도당 위원장의 덕유산행 -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도당 안에서 다섯뿐이었다. 본인 박영발, 여비서, 부위원장이며 총사 사령관 김선우, 위원장 보위부대장, 그리고 염상진이었다. 그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총사 부사령관의 직책으로서가 아니었다. 보위부대만으로는 완전하게 안전을 기할 수가 없어 제이의 보위대를 편성하게 되었고, 염상진은 그 지휘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위원장의 그림자로 불리는 여비서도 길을 떠나게 되니까 결국 도당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부위원장 혼자가 되는 셈이었다. 도당 위원장을 보위한 오십여 명은 오월 초순 깊은 밤에 길을 잡았다. 염상진도 덕유산이라는 목적지만 알았지 왜 그 멀고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인지 내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혹시 위원장이 교체되는 게 아닐까,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추측이었다. 백아산 지구를 옆에 끼고 통명산을 돌아 곡성을 무사하게 지났다. 지역마다 선요원들이 기민하게 움직여 길을 잡아나갔다. 곡성에서고, 구례에서고 지리산으로 파고 드는데 최대의 장애가 섬진강이었다. 이쪽에 장애가 되는 지형지물은 적들에게는 유리한 지형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적들은 그 강을 최대한 이용해 지리산자락에서 이루어지는 도당과 도당, 도당과 지방당과의 접선을 차단하고, 방해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활동이 심해지는 밤에는 적들이 경비도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적들은 중요한 지점의 경비에는 근방의 민간인들을 밤마다 동원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에게 대창이나 농기구 같은 것을 들려 강둑에 양팔 간격으로 세워서 경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띄엄띄엄 서서 민간인들을 감시했다. 그 방법이야말로 강변에 사람 울타리를 친 격이었다. 그런 경비를 뚫고 섬진강을 무사하게 건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두 사람이면 또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 오십 여명이란 인원은 대부대였던 것이다. 선요원과 숙의를 했지만 역시 인원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점이었다.

"니야 혼자서 활동허는 것잉께 단출혀서 간딴허제라. 우리 투쟁인민덜이 멫 사람 쪼로록슨 자리가 있응께, 그 목만 찾아 왔다리 갔다리 허기야 누워서 콩떡 묵기보다 쉽제라이. 근디 수가 원체로 많애논께..."

선요원의 난감해하는 말이었다.

"피실격허요. 날이 새면 건너는 거요."

이 갑작스러운 말은 위원장이 한 것이다. 그 말은 도당사령부를 떠나온 뒤 이틀 동안 위원장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좌중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적의 허를 찔러라 - 그 말은 갑작스러움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날이 새면 민간인들의 경비가 풀리게 되고, 적들의 경계심도 해이해질 것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과감한 작전에 위험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원장의 명령이었다.

", 알겠습니다."

보위대장이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강변 일대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밤샘을 한 민간인들이 몇 사람씩 짝지어 돌아가고 있었다. 경찰들은 먼저 참호나 초소로 들어갔는지 어쩐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선요원의 뒤를 따라 그들 일행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안개가 더없이 좋은 은폐물이 되어주었다. 몸은 최대한 낮추고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안개에 가뭇없이 가려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거뜬하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피실격허... 염상진은 다시 뇌어보며 앞서가고 있는 위원장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항일무장투쟁의 네가지 기본전법 중의 하나이면서, 모택동 동지의 십육자전법까지 합해 삼십이자전법을 모르는 빨치산은 아무도 없었다. 네 자로 된 여덟 가지 그 전법은 그 누구나 군사학습을 통해 뜻을 익히고, 암기하도록 되어 있는 빨치산의 기본 상식이었다. 염상진이 피실격허를 다시 뇌어보는 것은 그 전법의 신통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전법을 응용, 활용하는 위원장의 판단과 과감성에 놀라고 있었다. 염상진은 이따금 위원장을 가까이 대할 때마다 가슴 섬뜩거리는 긴장과 놀라움을 느끼게 되었다. 마른 체구에 언제나 우울이 깃든 얼굴,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외모만으로는 위원장은 무슨 병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을 처리할 때 보면 그의 의식이 얼마나 예민하게 번뜩이고, 의지가 얼마나 굳건하게 자리 잡혀 있는지를 실감하게 되고는 했다. 염상진은 위원장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어린애 같은 미숙과 속 빈 강정 같은 부족을 느꼈다. 그가 유일하게 위안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위원장과의 나이 차이뿐이었다. 세월이 쌓이면 나도 저렇게 되리라 하는 기대였지만, 그것도 꼭 자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원장이 지금 자신의 나이 적에 어떠했는지를 알 수 없는 탓이었다. 만약 그때부터 그랬다면 자신이 연륜에 걸고 있는 기대는 부질없는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원장의 굳이 그때를 알고자 하지 않았다. 섬진강을 건너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굽이굽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들, 그건 소백산맥이 일으키고 있는 산 물결이고, 산 파도였다. 덕유산까지의 길은 그 억센 물결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행군이었다. 수많은 산들은 가지가지 초록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북으로 올라갈수록 봄은 더딘 걸음을 걷고 있었다. 더딘 봄의 모습은 나뭇잎들에서도 나타났지만, 진달래꽃들이 더 확연하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쪽의 산에서는 이미 그 절정의 아름다움이 지나버린 진달래꽃들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싱그럽게 피어나 있었다. 안전도모를 위해 거의 야간행군이었고, 낮에는 은폐물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 날이 지날수록 위원장의 걸음은 느려졌다. 일제시대에 고문을 당해 상한 다리가 강행군으로 차츰 무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지팡이를 짚었을 뿐 부축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염상진은 그 절룩거리는 모습에서 한 투사의 견고한 일생을 보고 있었다. 토목기술자로 시작한 삶을 일찍이 혁명투쟁으로 바꿔 온갖 고난을 무릎 쓰며 오십이다 된 사나이 - 그도 투쟁으로 상처받은 다리를 끌며 또 투쟁을 위해 험준한 산악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굽힐 줄도, 지칠 줄도 모르는 모습은 투사의 한 표본이었다. 닷새째 되는 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던 위원장이 염상진을 불렀다.

"거기 앉읍시다."

위원장이 옆자리를 눈길로 가리켰다.

"예에."

염상진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산이 깊어서 그런지 솔잎이 그대로 거름이 되고 있소. 어렸을 때 솔가리나무 해 본 적 있소, 염 동지?"

위원장이 바스라져가고 있는 솔잎 몇 개를 집어 들며 물었다.

", 자주 했습니다."

"그랬겠지요, 염 동지 성이 그걸 말하고 있으니까. 자아, 담배 피우시오."

위원장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낮이고, 산이 깊어 담배 피우기는 자유로웠다.

"아닙니다, 저한테도 있습니다."

염상진은 담배를 사양하며, 이분이 꾸척시럽게 성으로 양반 상놈을 가르자는 건가 뭔가 하고 생각했다. 염가 성을 상놈 취급하는 데는 소학교 적부터 반발과 분노를 느껴왔던 것이다.

"어서 뽑으시오."

"예에."

자신을 굳이 "동지"로 부르는 것이나, 담배를 권하는 것이나 모두 위원장이 나타내는 각별한 호의라는 것을 생각하며 염상지은 담배를 뽑았다.

"염 동지의 성에는 우리 민족의 모순과 계급의 모순이 함께 점철되어 있소, 그 모순의 힘이 오늘의 염 동지를 있게 한 것이오."

"모순의 힘",

염상진은 그 말이 의식에 강하게 찍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직도 그렇지만 이론에 아주 탁월하다는 위원장을 문득 의식했다.

"참으로 만산에 진달래고, 꽃잎마다 뻐꾹새 피울음이오."

위원장이 시를 읊듯하며 눈길을 멀리 보내고 있었다. 그 느닷없음에 염상진은 어리둥절해서 위원장을 얼핏 쳐다보았다. 위원장은 눈길을 저 멀리 둔 채 담배를 깊이 빨고 있었다. 염상진의 놀라움은 그 갑작스러운 말 바꿈도 말 바꿈이었지만, 그런 감상적인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는 "모순의 힘"을 시작으로 어떤 명쾌한 논리가 전개되리라고 예상했고, 또 기대했던 것이다. 염상진은 무슨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저 앞을 바라보았다. 초록빛 숲 사이에 모둠모둠 피어 있는 진달래꽃들이 역시 곱기는 고왔고, 멀리 들리는 뻐꾹새울음도 언제나처럼 서럽고 애절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혹시, 염 동지는 밥 대신 진달래꽃을 따먹어본 적이 있소?"

", 어렸을 때 봄이면 꼭 그랬습니다."

염상진은 위원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나도 저 꽃을 많이 따먹었소. 뻐꾹새 울음을 내 어머니 넋이거니 생각하면서 말이오."

염상진은 그때서야 위원장의 말이 퍼뜩 깨달아지는 것을 느꼈다. 뻐꾹새의 피울음이 어머니의 넋이면,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었다. 그는, 뻐꾹새 울음이 배고파 죽은 자식들을 찾아다니는 어머니의 환생이라는 전설을 떠올리며 위원장의 말이 결코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찍 사별하셨느냐는 말은 어려워서 물을 수가 없었다.

"염 동지는 애들이 몇이오?"

"둘입니다."

"그렇군요."

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염 동지가 이러고 있으니 그 애들이 또 진달래꽃을 따먹겠구려."

했다. 염상진은 두 아이의 얼굴이 눈앞으로 확 다가듦과 동시에 가슴이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은 그 동안 누르고 감추고 잊으려 해왔던 애비로서의 죄스러움과 책무감을 일순간에 까뒤집어 덮어씌우는 격이었다. 가장 예민한 부분의 감정을 왜 그렇게 정통으로 찔러대는 것인지,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염 동지, 나한테도 자식들이 있소. 그 아이들이 진달래꽃을 따먹게 하는 건 우리 대에서 끝나게 해야 되는 것 아니겠소."

염상진은 의식 속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땅에 떨어졌던 마음이 느닷없이 저 위로 치솟겨 오르고 있었다.

", 그래야지요, 꼭 그래야지요."

염상진은 목매임을 느끼며 힘주어 대답했다. 염상진은 혼자서 오래도록 위원장과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일부러 자신을 부른 것이며, 그리도 말이 없는 분이 대화를 이끌어간 것이며, 스스로의 과거 일부를 내비친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과 격려의 뜻이었다. 염상진은 새삼스럽게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위원장이 누구보다 이론이 탁월하다는 것을 새로운 국면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의 확인은 총 맞아 죽은 인민군 총위를 다룰 때였다. 그때는 정공법적인 이론 전개였다. 그런데, 자신과의 대화는 우회적이고 비약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직설법보다 훨씬 더 충격을 주고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상대와 경우에 따라서 구사되는 그 다양한 방법은 남다른 이론을 갖춘 데서 비롯되는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염상진은 이리저리 휘둘린 기분을 느끼는 한편으로, 새로운 화법을 익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염상진은 덕유산 송치골에 도착해서야 왜 먼 길을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어마어마한 회의가 벌어지게 되었다. "남반부 육 개 도당 위원장회의"가 그것이었다. 남쪽의 여섯 개 도당위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거기에 전쟁 전의 지리산지구 사령관 이현상도 합석하는 회의였다. 그 규모로 보나, 참석자들로 보나, "어마어마한 회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동안 선요원들에게 "위원장의 존재"가 일체 비밀에 부쳐졌던 것이 새삼스럽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 회의에서 논의될 내용이 선요원들을 이용할 수 없는 "중대한 것"임을 짐작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회의가 열렸다. 각 도당에서 위원장들을 보위하고 온 정예부대들이 회의장을 에워쌌고, 회의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회의는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회의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다음날로 이야기가 떠돌았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중대한 사안이니까 그 멀리에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위원장들이 모인 것일 터이고, 또한 위원장들은 일제치하에서부터 계속된 투쟁경력이나 모스크바 당 학교를 나온 이론축적을 당 중앙으로부터 공인받은 인물들이었으므로 사안의 문제점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로서는 불안감 또한 없지 않았다. 다음날 회의도 격론의 계속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이론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회의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빨치산투쟁의 당면한 전략, 전술에 대해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론투쟁"에는 "자리바꿈"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염상진은, 혹시 이현상 선생이 어느 도당을 맡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회의가 완료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 결과가 알려졌다. 이현상 선생이 남반부 유격대 총사령관이 되고, 각 도당 유격대는 그 지휘 아래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의 중에 가장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것이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다는 말도 퍼졌다.

염상진은 그 결정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선뜻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설명을 그 누구한테서도 들을 수가 없는데다, "이현상 선생"이란 존재가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도당으로 돌아가는 남행길은 덕유산을 향해 가던 때와는 달리 침울하고 지루했다. 위원장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보위대에도 민감하게 그 영향이 미쳤다. 거기다가 위원장의 다리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도록 노독이 도졌다. 위원장은 못내 미안해하고 괴로워했지만 대원들에게 업힐 수밖에 없었다. 칡덩굴로 엮어 들 것을 맞들려고 했지만 위원장이 누워서 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평지가 아닌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을 줄이기 위해 칡넝쿨로 업을개를 엮었다. 업힌 사람이 무게를 두 팔로 받치는 것이 아니라 두 어깨로 지탱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원들이 번갈아가며 위원장을 업었고, 오르막길에서는 두 사람씩 뒤를 밀었으며, 내리막길에서는 옆에서 부축을 했다. 그런 행군은 위원장이 절룩이며 걷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위원장의 다리가 악화된 것은 노독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염상진은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위원장을 한차례 업어 모시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혼동하거나 착오를 일으키는 것은 용납되는 일이 아니었다.

"지고마동 정신이 하나또 웂구만이라. 오월공세다냐 지랄이다냐 혀갖고 노란개, 검은개덜이 대포 쏴질름서 워쩌크름 많이 몰아닥치는지 난리판굿이 벌어지고 있당께라."

섬진강에 이르러 접선된 전남지구 선요원한테서 들은 소식이었다. 언제나 대비해오고 있던 공격이기는 했지만 보위대에는 금방 긴장이 감돌았다. 아무런 느낌도 드러내지 않은 건 위원장뿐이었다. 섬진강에서 도당사령부에 도착할 때까지는 덕유산으로 갈 때보다 몇 갑절 힘이 들었다. 예상보다 강력한 적의 공격에 따라 야간매복도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매복공격에 맞서야 했고, 염상진은 부하 넷을 잃어야했다. 총사에 도착해보니 적은 박격포공격을 앞세워 병력을 대량으로 투입하면서 각 지구를 차례로 공격하는 작전을 펴고 있었다. 긴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그것이 유린하려는 작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투쟁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염상진은 감지했다. 그러나 토벌대의 적극공세와 덕유산 송치골의 결정이 어떤 관계로 작용하게 될 것인지 막연한 의문이 생겼다. 이틀 뒤에 도당 간부회의가 소집되었다. 도당사령부 부장급과 지구사령관으로 제한된 긴급회의였다. 총사 부사령관은 지구사령관급이라서 염상진도 물론 회의에 참석했다.

"왈 오월공세라고 하는 적들의 공격이 감행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부득이 간부회의 긴급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번 덕유산회의의 결정사항이 그만큼 중대하여 시급한 보고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원장의 개회선언을 겸한 회의소집에 대한 이유 설명이었다. 회의장은 어느 때 없이 긴장되어 있었다.

"회의는 덕유산회의의 결정사항과 그 배경에 대한 보고, 다음으로 그 결정에 있어서의 문제점 확인, 끝으로 우리 도당의 입장에 대한 토론의 순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위원장이 앉음새를 고치며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만 유난히 예리했다.

"에에, 남조선 육 개 도당의 위원장들과 전 지리산유격지구 사령관 이현상 동지가 참석한 덕유산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이현상 동지를 남조선유격대 총사령관으로 하고, 그 지도 아래 각 도당의 유격대를 재편시킨다는 조직개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직개편에 대한 제의는 이현상 동지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근거는 이승엽 동지의 지령에 있습니다. 이상이 결정사항과 그 배경에 대한 보곱니다. 다음으로, 그 결정에 있어서의 문제점 확인이 되겠습니다. 첫째, 전체적 조직개편에 따라 각 도당은 "사단" 편제로 그 조직을 바꿔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야기되는 중대한 문제점은 각 도당이 해체되고 단순한 군사조직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첫째, 당 조직의 해체를 어찌 감히 도당 위원장들이 결정할 수 있으며, 둘째, 당 조직이 부재한 상태에서 어떻게 군사조직이 있을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이상은 결정사항에 대한 문제점 파악이고, 그 이전에 중대한 문제가 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현상 동지가 당초에 제기한 조직개편 그 자체입니다. 그 조직개편에 따르면 당이 군사조직의 하위에, 군사조직이 당의 상위에 올라서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의 절대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해당행위이며 도전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급한 전시 상황이라 하더라도 군사조직이 당의 우위에 서는 도착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상황이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당 조직이 더욱 강화되어야만 다른 여타 조직들도 통일을 이루어 그 위기를 타개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의 절대원칙 수호에 대하여 이현상 동지는 계속 그 조직개편이 당의 지령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중대한 문제점이 또 있었습니다. 당의 지령이면 지령서가 있어야하고, 당이 이현상 동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면 당의 임명장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현상 동지는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승엽 동지로부터 강원도 후평에서 구두지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후퇴상황이라는 것을 십분 감안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지령의 중대성으로 보면 더욱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당의 지시는 그 어떤 것이든 정확과 확실을 기하고, 착오와 와전을 막기 위하여 문건화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기본적인 대원칙이 아닙니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상황을 비춰볼 때 아무리 후퇴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중대한 지령을 내리면서 지령문을 겸한 임명장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잇따라 또 의문이 생기는 점은, 과연 이승엽 동지가 당의 절대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그런 엄청난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이승엽 동지가 그렇지 않다면, 그럼 모든 혐의가 이현상 동지에게 돌아가는 난처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승엽 동지와, 특히 이현상 동지가 세운 혁혁한 투쟁공로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는 현 시점에서 두 동지 중 누구를 의심하거나, 누구에게 혐의를 둘 수가 없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과 의문점을 남긴 채 결국 그 의제는 결정이 된 것입니다."

위원장은 천천히 담배를 빼 물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완연히 술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부분 어리둥절하거나 의문에 찬 얼굴들이었고, 누구는 고개를 갸웃갸웃했고, 어느 사람은 옆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고, 어느 사람은 염상진에게 무슨 눈짓을 했고, 가지가지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런 결정에 대하여 우리 도당의 입장을 본인은 위원장으로서 개진하고자 하며, 여러분들도 기탄없는 토론을 거쳐 그 결과를 정리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 본인은 그 결정에 있어서 반대표시를 명백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당이 군사조직에 우위를 상실할 수 없다는 절대원칙을 확고하게 믿음과 동시에 그 원칙을 지키고자 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러한 태도결정의 결정적 계기는 지령서와 임명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현상 동지의 그러한 제의와 결정이 과오냐, 아니냐는 추후에 명백히 밝혀질 일이므로 여기서 비생산적인 논의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문제는 앞으로의 우리 도당의 입장에 대해섭니다. 이에 본인은 당 중앙의 지시문을 접수하지 않는 한 우리 도당을 군사조직 아래 편입시키는 반당적 과오와 해당적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경우에도 당이 군사조직에 우위를 상실할 수 없다는 절대원칙에 충실하면서 덕유산 결정을 배격하고, 현재의 조직과 체제로서 해방투쟁을 계속 전개해나갈 것을 제의하는 바이올시다. 동지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토론을 기대합니다."

위원장이 말을 끝냈다. 그가 평소에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이런 회의에 대비한 것이기라도 한 듯 그의 말은 막힘없이 길었고, 말 매듭매듭에는 질긴 힘이 서려 있었다. 회의장에는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이건 중대한 문젭니다. 기탄없이 말씀들 하십시오."

위원장이 의견을 유도했다.

", 위원장 동지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한 가지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도당이 독자적인 투쟁을 전개할 때 총사령부 및 다른 도당과의 사이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야기될 것 같은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부위원장의 말이었다.

", 좋은 말씀이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다른 도당들은 그 결정을 따르면서 도당이 "사단"이 되어 내용적으로 도당 자체가 해체되어버리는 판국이니 더 말할 것이 없고, 남은 건 총사령부와의 문젠데, 그것도 원칙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한 원칙을 고수하는 우리 도당에 대해서 특별한 문제를 야기 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대응하면 되리라 싶소."

", 알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발언을 하지 않았다. 염상진은 발언할 만한 문제점을 신중히 찾아보았다. 그러나 당의 기본원칙 고수에 찬동하는 한 위원장의 논리에 어느 한 곳 허점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이현상 선생과 위원장 사이가 어쩔 수 없이 거북하게 될 것이 마음 무거울 뿐이었다. 그 무거운 마음속에서 이미 부위원장이 제기한 문제점이 자꾸만 의문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다른 간부들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들일 거라고 짐작했다.

"다들 의견이 없으십니까?"

위원장이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대답이 나왔다.

", 토론이 없으면 본인의 의견을 안건으로 상정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표결해주십시오."

위원장이 "찬성"을 묻기도 전에 모두가 손을 들어올렸다.

", 우리 도당은 새로 구성된 유격조직의 산하로 편입되지 않고 현재의 조직과 편제로써 당의 기본원칙에 투철하면서 조국과 인민의 해방투쟁을 가일층 용맹스럽게 전개해나갈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바입니다."

위원장이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간부들도 일제히 일어섰다. 박수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박수소리는 차츰차츰 힘차고 크게 울려가고 있었다.

 

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면서 빨치산 무장부대들이 정신 못 차리게 바빠진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못지않게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방부 병기과 대원들이었다.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총알이나 수류탄의 소비가 급증하게 되자 그만큼 일거리가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각 지구마다 설치된 병기과에서는 여러 가지 병기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은 총알과 수류탄이었다. 공격용이라기보다는 호신용이나 자살용이고, 산 생활에서 여러 모로 활용할 수 있는 칼을 지급한 것도 병기과에서 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병기과에는 대장장이나 주물공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고, 공대 출신이나 화학 전공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다음에는 손재주가 괜찮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후방부에 많게 마련인 여자대원들이 병기과에서도 일하고 있었다. 병기과에서 주력하고 있는 총알 생산은 M1 탄피를 이용한 재생총알이었다. 총탄, 탄환, 탄알, 여러 가지로 부르는 총알이 대가리인 """몸체""화약"으로 이루어지는 건 상식이었다. 그런데, 재생 총알쇠를 녹여 붓는 것으로 ""은 아주 그럴듯하게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몸체""화약" 만들기에 있었다. 먼저 "몸체"인데, 한번 사용한 M1 탄피는 그대로 다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속에 든 화약의 폭발로 탄피가 팽창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사용하려면 탄피가 팽창된 부피만큼을 고르게 긁어내야만 했다. 팽창된 탄피가 걸리고 막히는 일 없이 총신을 다시 통과할 수 있도록 탄피 한 알을 고르게 긁어내야 하는 일, 그건 여간 어렵고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을 바로 여성대원들이 주로 맡아서 했다. 탄피를 조금씩 돌려가며 무쇠 칼로 긁어내는 일은 단순노동 같으면서 단순노동이 아니었다. 어느 한 부분을 너무 많이 긁어내서도 안 되고, 전체를 너무 많이 긁어내서도 안 되고, 넘치고 모자라지 않게, 알맞고 적당하게 긁어내야 하는 그 일은 신경을 모아 정성을 바쳐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그 일은 동지들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다는 정신적 부담까지 작용하고 있었다. 탄피를 긁어내는 밑에는 꼭 판자나 삐라 종이 같은 것들이 받쳐져 있었다. 긁어낸 놋쇠가루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 가루들은 알뜰하게 모아져 ""을 만드는데 보탰다. 날마다 모아지는 그 양은 적지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티끌 모아 태산이었다. 그런 노력 하나가 놋그릇을 보투나가야 하는 대원들의 힘을 덜 수 있게 되고, 인민의 재산을 아끼는 것이라는 점을 여성대원들은 다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은 날마다 진행되는 학습을 통해서 깨우치는 바였다. 그런데, 그 탄피 긁어내는 작업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을 보다 능률적이고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탄피와 탄피끼리 마찰을 시켜 "닳아지게" 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에 그 실험은 나무 술통을 가지고 행해졌다. 술통의 위아래 가운데에 구멍을 맞뚫어 자동차시동을 거는 쇠막대기를 박아 고정시키고, 술통에 탄피를 반 이상 채워 옆으로 누인 다음, 술통의 앞뒤로 나온 시막대기를 말뚝에 받치고 시막대기 손잡이를 돌려댔다. 술통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속에서 탄피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참을 돌려대고 나서 탄피를 꺼내보았다. 과연 탄피들은 처음 술통에 넣었을 때와는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칼로 긁어냈을 때와 똑같은 그 빛깔은 탄피들이 "닳아졌다"는 증거였다.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동그란 탄피들은 둥근 술통 속에서 회전운동에 따라 마찰을 했으므로 닳아진 것도 아주 고르게 닳아져있었다. 다만 수시로 통 돌리기를 멈춰 닳아진 정도를 신경 써서 점검하면 되었다. 그러나 통속의 탄피들이 하나같이 총구에 맞도록 닳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여성대원들이 긁어낸 탄피들도 하나하나 총구에 끼워보는 점검을 거쳐 화약을 넣게 되어 있었다. 통 속에서 어느 정도까지 닳아진 탄피들은 여성대원들의 손에서 마무리 손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통 돌리기는 일의 능률을 엄청나게 높여주었다. 그래서 그 방법은 신속하게 각 지구 병기과로 전해졌다. 각 병기과에서는 술통보다 몇 배 큰 나무통들을 짜 맞추느라고 한동안 고심들 했던 것이다. 그 희한한 탄피재생기를 발명한 것은 백아산 지구 병기과에 배속되어 있는 어느 공대출신이었다.

재생총탄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애로는 화약의 제조였다. 그 제조법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원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병기과마다 애를 먹고 있었다. 화약의 원료는 농촌의 집집마다 있게 마련인 오줌통에서부터 구하게 되었다. 오줌이 오래될수록 오줌통 안쪽에 많이 엉기는 흰 앙금, 그것을 긁어모아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암모니아였다. 거기다가 양잿물을 섞어 끓이면 흰 앙금이 생겼다. 그것이 질산나트륨이었다. 거기다가 때죽나무 숯가루와 유황을 일정 비율로 섞은 것이 화약이었다. 숯가루를 쓰되 꼭 때죽나무 숯을 쓰는 이유는 소나무 숯보다 참나무 숯이 훨씬 더 불땀이 좋은 그런 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때죽나무 숯은 그 성분 때문에 숯 중에서는 화력이 제일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조된 화약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질산나트륨 때문이었다. 질산나트륨은 조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총탄이 조금 오래되면 질산나트륨이 빨아들인 습기로 불발탄이 생기게 되었다. 그 불발탄 때문에 생겨난 별명이 "영웅탄"이었다. 그 사연인즉, 어느 골짜기에선가 전투가 벌어졌는데 한 빨치산이 숲속에서 적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간발의 차이로 빨치산이 적을 먼저 발견했든지,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바로 불발탄이었던 것이다. 이제 적이 방아쇠를 당길 차례였다. 그런데 그 빨치산은 다음 동작을 취했던 것이다. 다음 동작이란 총알을 갈아 끼운 것이 아니라 총을 휘둘러 개머리판으로 적을 내려친 것이었다. 적은 쓰러졌고, 그 빨치산은 적을 생포했다. 그 다음부터 습기 잘 차는 질산나트륨이 든 총탄은 "영웅탄"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영웅인 장본인은 영웅답지 못한 말은 했다. "머시가 먼지 나도 통 몰러. 워디 고것이 지정신으로 헌 짓이간디?"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동료들은 그에게 붙여준 영웅칭호를 박탈하지는 않았다. 그 멍청한 듯한 말이 오히려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의 아무런 꾸밈이 없는 솔직한 말에서 동료들은 그때의 위기를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 위험 속에서 "제정신으로 한 짓이 아닌" 그 짓이 바로 엄청난 담력이고 용기라는 것을 그들은 체험적으로 생생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그런 위기에 처하면 주저앉거나, 손을 들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다음에도 빨치산들은 여전히 그 총알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총알이 "영웅탄"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러고 보면 "영웅탄"이란 별명은 서글픈 익살이 섞인 빨치산적 역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습기가 안 차는 완전한 총알을 만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양잿물을 쓰는 대신 칼리비료를 쓰면 질산칼리 (KNO3)가 생성되어 완전한 화약을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적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농촌에 칼리비료의 배급을 전면 중단시켜버렸던 것이다. 재생시킨 탄피에 화약을 채우고, 놋쇠알을 박은 다음, 탄피의 뒤 꼭지 뇌관자리에 성냥에서 뜯어낸 화약을 발라 촛물로 고정시키는 것으로 재생탄환은 완성되었다. 대원들이 성냥을 손에 넣게 되더라도 쓰지 않고 굳이 불편한 부싯돌을 사용하는 것도 성냥이 총알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기 때문이다. 물론 ""은 놋쇠로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놋쇠가 떨어지면 납으로 만들었다. 납탄은 그 치명적인 피해 때문에 가능하면 그 제조를 금하고 있었지만, 적들의 경계로 놋그릇은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적들의 공격을 받아가면서 빈총을 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납탄은 그 피해가 무서웠다. 몸 어느 부분이든 맞기만 하면 납이 산산이 흩어져 살을 파고들 뿐만 아니라 독을 퍼뜨려 아주 빠른 속도로 살을 썩게 만들었다. 그리고 뼈나 핏줄에 닿았다. 하면 납은 마치 뱀처럼 그것들은 감고 돌았다. 납탄을 몸통에 맞았을 때는 더 말할 것이 없었고, 다리나 팔에 맞고 수술을 했다고 해도 십중팔구는 결국 다리나 팔을 잘라내게 되었다. 수술을 여간 잘하지 않고서는 살 속에 퍼진 납 파편들을 다 찾아낼 수가 없었고, 약간 남아 있던 파편이 끝끝내 말썽을 부렸던 것이다. 재생총알의 성능이 물론 신품과 같을 리가 없었다. 공격용이 되기는 어려웠고, 그런대로 방어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빨치산들이 갖춘 개인 화력의 육십 퍼센트 정도가 그 재생탄이었다. 빨치산들은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을 나갈 때 재생탄을 쓰지 않았다. 모든 빨치산들은 총을 쏘고난 다음에 탄피 수거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신품으로는 재생탄을 만들어야하고, 재생탄피는 녹여서 알을 만들어야했던 것이다. 경찰들은 빨치산들이 재생탄을 만들어 쓴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기네들이 쏜 총알의 탄피를 거의 남기는 일없이 쓸어갔다. 그러잖아도 경찰들 태반이 친일반역자들이라서 빨치산들의 증오의 대상인데다가 그런 짓까지 하게 되어 빨치산들의 증오는 커져갔다.

경찰들의 그런 행동도 자기네들을 가장 미워하고 척결하려 드는 부류가 빨치산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롯되는 일이었다. 빨치산과 경찰사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갈수록 적대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은 경찰들하고 사뭇 달랐다. 그들은 탄피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빨치산들은 기왕 전투가 붙으려면 군인과 붙기를 바랐다. 병기과에서 두 번째로 주력하는 것이 수류탄 제작이었다. 수류탄 껍질은 대개 놋쇠를 녹여 만들었고, 그 속에 놓는 파편은 무쇠 솥을 잘게 깬 것이었다. 화약과 함께 무쇠 조각들을 놓고, 불붙일 뇌관을 달면 수류탄이었다. 깡통도 구하는 대로 수류탄 껍질로 사용되었다. 그 성능이 적의 수류탄과는 비교가 할 수 없었지만 방어용, 위협용으로는 제법 위력을 발휘했다. 그 폭음이며 유난스러운 연기가 아주 그럴 듯했던 것이다. 물론 그 수류탄이 사람들 한복판에서 폭발하게 되면 서너 사람 정도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만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병기과에서는 더러 "자살탄"도 만들어 보급했다. 기관포 탄피에다 화약을 넣고 심지를 박은 것이었는데, 불가항력적 상황에 빠졌을 때 그것에 불을 붙여 자살을 꾀하는 탄이었다. 그것을 품거나 입에 물고 죽어간 빨치산들도 가끔 있었다.

"와따메, 이눔에 오월공세인지 염병인지 시작된께 오짐 누고 그것 털새도 웂네잉."

김종연이 재생탄피의 뒤 꼭지에다 촛물을 돌리는 일을 하며 입을 놀렸다. 화약을 고정시키기 위해한 동작으로 촛물을 도르륵 흘려 돌리는 그 작업은 재생총알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는 입을 놀리면서도 손은 빈틈없이 화약을 따라 촛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서인출과 함께 병기과로 배치되었을 때는 달굼쇠에 매질하거나, 쇳물그릇 들고 내는 것같은 일을 주로 했다. 그러나 남보다 눈치 빠르고 영리한 그는 일들을 속빠르게 익혀 재생탄피 점검을 거쳐 제일 중하고 어려운 일을 맡게 되었다.

"옳여, 워디서 찌릉내가 폴폴 나쌓등마 바로 김 동무가 오짐 방울 덜 털고 옷에다가 들겨서 그런 것이로구마!"

김종연과 말장단이 척척 잘 맞는 배삼성이가 잽싸게 말을 받았다.

"어허! 긍가 그 코 한분 유명짜씨. 근디 눈이나 볽고 귀나 볽아야 빨치산으로 쓸 것인디, 코가 볽아뿐께 고것을 워디다 쓸 것이다냐. 천상 근천시럽고 짜잔허게 넘 다리새 냄새나 맡아야제."

김종연이 잠시 지체도 하지 않고 말을 받아쳤다.

"그 말 한분 찰떡이시. 술도가가 있으니 술 뜨는 냄새를 맡을 것이며, 장바닥이 있으니 괴기 냄새는 내럴 맡을 것이여. 요코가 헐 일이 천상 그것이제."

배삼성이가 말을 되받아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역시 그는 김종연의 입심을 당하기가 어려웠다. 입산을 하고서도 김종연의 음담은 생기가 줄지 않았고, 남자대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는 병기과에서 일하면서도 언제나 총 들고 화선에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유동수의 도주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차마 입에 못 담을 욕을 해대며 무섭게 화를 냈다.

"고런, 붕알얼 까서 소금 닷 말을 칠 눔. 자수혀서 혼자 살어보겄다고? 니기미, 총살이나 당해 칵 뒤져뿌러라, 잡새끼!"

성님, 성님 하며 깍듯이 대해왔던 유동수에게 김종연이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퍼부어댄 욕이었다.

"동수 성님이 병기과에 있었더라먼 그리 안되얐을 것인디..."

안타까워하는 서인출의 말이었다.

"고런 인종은 워디에 있어도 매한가지여. 입산헐 때부터 맘이 뜨광혔응께!"

김종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종연이나 서인출은 아직까지도 유동수가 총살당해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시간에 하대치의 부대는 순천 쪽에서 밀려드는 군경을 맞아 중대단위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서로 연결된 산등성이 하나씩을 중대가 맡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전이었다. 중대단위로 전투를 하되 총지휘는 하대치가 맡고 있었다. 하대치는 지휘를 위해 양쪽에 이 개 중대씩을 배치하고 가운데 봉우리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각 중대로 띄울 연락병들이 여섯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보위중대를 제외한 사 개 중대에 필요한 연락병들은 보두 여덟이었다. 상황변화에 따라 작전지시를 연달아 띄울 것에 대비해 일개 중대에 두 명씩의 연락병들을 배치해놓고 있었다. 하대치는 얼마 전까지 쓰고 다니던 레닌모를 어떻게 했는지 엉뚱하게 국방군 작업모를 쓰고 있었다., 머리에 납작 붙는 레닌모는 그의 작은 키를 더 작아보이게 하고 , 다부진 체격을 더 다부져보이게 했다. 그런데, 모자천장의 둘레에 철사를 넣어 천장이 둥글고 팽팽하면서 레닌모에 비해 높이가 높은 국방군 작업모는 그의 키를 약간 커보이게 하면서, 강단지게 생긴 두껍고 넓적한 얼굴에 썩 잘 어울렸다. 누구의 솜씨인지 모자에는 큼지막한 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계급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기의 별을 본뜬 것일 터였다. 염상진이 오래 전부터 지령문의 끝에 꼭 별 하나를 그렸던 것처럼.

"이 중대, 적덜이 왼편짝 골짝으로 이동허고 있응께 그짝 깔끄막얼 조심허라고 전혀!"

하대치가 눈살을 찌푸리며 지시했다.

", 알겄구만이라."

앞으로 나섰던 연락병이 하대치 뒤에다 경례를 하고는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대치는 키가 작기도 했지만, 어떤 전투에서나 여간해서 몸을 구부리거나 낮추는 법이 없었다. 나는 총알을 맞아도 안 죽는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언제나 꼿꼿하게 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입산 초기의 일로, 총 쏘는 법을 겨우 익힌 신빨치들은 싸움이 붙었다하면 겁부터 먹고 머리를 쑤셔받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하대치는 대원들 앞을 거침없이 걸어 다니며 마구 소리치고는 했다.

"동무덜! 겁묵지 말구 나럴 봇씨요, 총소리가 저리 방정떨고 지랄쳐도 잘 맞덜 않는 것이 총알이오, 긍께 겁묵지 말고 허리피고, 고개덜 드씨요."

그런 하대치의 배짱과 용감성에 신빨치들은 그거 주눅 들고 기가 죽었다. "땅딸보 하대치"가 지구 안에서 금방 유명해진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중대장 동무, 중대장 동무! 개덜이 왼편짝 골짝으로 몰린께 그짝 깔끄막 잘 지키라능마요."

이 중대 연락병이 숨 가쁘게 토해놓았다.

", 폴세 다 종그고 있소. 저것덜이 총질은 오른편짝서 멫 눔한테 시킴스로 정작 왼편짝 깔끄막얼 기오라 공격허겄다는, 즈그대로넌 대그빡 돌리는 위장술인디, 고것이 워디 즈그 맘대로 되간디? 괭이 앞에 생쥐새끼덜 놀기제."

여유만만한 중대장은 천점바구였다, 그는 말을 끝내며 연락병을 향해 씨익 웃었다.

"글먼 가보겄구만이라."

연락병이 경례를 붙였다.

"그러씨요. 시간도 얼추 다 되야간께 한두 파수만 더 애쓰먼 될 것이요."

천점바구가 경례를 받으며 연락병을 격려했다. 골짜기 아래서 산발적이 총성이 계속 되고 있었다. 산등성이에서는 거의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적들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총을 쏘지 않겠다는 작전이었다. 전투는 벌써 세 시간을 넘게 끌고 있었다. 그 동안 적들이 세 차례 공격을 해왔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하대치의 중대들은 그때마다 거뜬하게 적들을 물리쳤다. 천점바구는 해를 올려다보았다. 해는 서쪽으로 꽤나 기울어 있었다. 적들이 위치이동을 하는 것은 오늘의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려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중대장이 된 것은 부대 재편성에 따른 것이었다. 재귀열로 희생자들이 극심해지고 나서 각 부대의 재정비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도당의 지시에 따라 각 지구는 소대편제를 없애고 중대단위의 편성을 다시 하게 되었다.

"동무덜, 봇씨요. 개덜이 쩌그서 움직거리는 것 뵈제라. 저것덜이 요 왼편짝 깔끄막으로 올라붙을라고 허는 것잉께. 우리넌 죽은 디끼 있다가 저 잡것덜이 깔끄막 중테기 쪼깐 우에 쩌그 참나무 뵈제라? 거그 짬에 오먼 우리 중대의 폭탄 맛얼 한바탕 뵈고 나서 공격개시허겄소."

천점바구는 낮은 소리로 중대원들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새로 편성된 중대의 인원은 그전의 소대원들보다 조금 많은 서른다섯 명 평균이었다.

토벌대들은 울창해지기 시작한 나무숲에 몸을 숨겨가며 빠르게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산개해서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나무숲 사이사이로 드러났다가 가려지고 다시 드러나고 했다. 산등성이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이 다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며 그렇게 적극공세를 펼치는 것은 빨치산들이 벌써 여덟 달이 되도록 장악하고 있는 해방구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해방구를 없애려는 쪽과 해방구를 지키려는 쪽과의 싸움. 그건 서로 양보가 있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토벌대들이 비탈의 중간지점을 넘어 참나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점바구가 팔을 치켜들었다. 토벌대들이 참나무께를 지나려하고 있었다. 천점바구가 팔을 힘차게 아래로 쳐 내렸다. 그와 함께 아래로 굴러 내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건 큼지막한 돌덩이 들이었다. 여러 개의 돌덩어리들은 쿵쾅거리며 비탈을 굴러가고 있었다. 여러 개의 돌덩어리들은 구를수록 가속도가 붙어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떤 것은 큰 나무에 부딪쳐 튕겨 올랐다가 다시 구르기도 했고, 어떤 것은 작은 나무를 그대로 깔아뭉개며 굴러 내리기도 했다.

"피해라!, 돌이다!"

아래서 터진 다급한 외침이 먼 느낌으로 들려왔다.

"쩌 빨갱이새끼덜!"

"워메, 사람 잡겄네!"

이런 소리들도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돌들을 피하려는 토벌대들의 황급한 모습이 숲 사이사이로 보이고 있었다. 아래로 총을 겨눈 천점바구네 부대원들은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천점바구가 말한 폭탄이란 그 돌덩이들이었다. 그 돌덩이들을 굴려 내려서 적들에게 피해를 입히자는 것이 아니었다. 적을 위압하고 신경을 자극시키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돌덩이를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싸우다보니 등성이 언저리에 돌덩이들이 많이 박혀있어서 천점바구는 그런 계획을 세웠던 것이었다.

"요런 빨갱이새끼덜아, 총알이 떨어졌으면 자수혀! 돌뎅이 굴리지 말고 자수혀! 자수허먼 살레준다아-"

아래서 들려오는 목청 돋운 소리였다. 누군지 꽤나 배짱이 두둑한 자였다.

"워메 고마우요이이- 에라이 반동새끼덜아, 좆 뽀는 소리 말고 느그가 우리헌테 자수혀라. 진짜배기로 살레줄 팅께로."

소리 지를 일이 있을 때마다 도맡고 나서는 목청 큰 유만복이가 외쳐 댔다. 이것 또한 주간전투에서 흔히 있는 심리전이었다. 밤에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하고 활동하는 빨치산들은 그런 기회에 맘껏 소리질러보려고 서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적보다 더 큰 소리로 적의 기세를 제압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적진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적들이 돌격전을 펴고 있었다. 양쪽 산에서도 총소리가 콩을 볶기 시작했다.

"사겨억 개시!"

천점바구가 외쳤다. 중대원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들이 한층 요란하게 엉클어졌다. 천점바구는 적 하나가 핑글 한 바퀴 돌아 나뒹굴어지는 걸 노려보며 총구 방향을 약간 틀고 있었다. 적진에서 던진 수류탄이 터져 오르고, 폭풍과 불길에 휩쓸리는 나무와 풀들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수류탄들이 터지고 있는 거리는 이쪽 화선에서 꽤나 멀었다. 수류탄 폭연이 잦아들고 있는 사이로 적 하나가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있는 것을 외서댁은 비식 웃으며 쏘아보고 있었다. 십여 분만에 적진에서 먼저 사격을 멈추었다.

"중지, 중지!"

천점바구는 다급하게 팔을 내저었다.

"야이 빨갱이덜아! 납탄 쏘지 말어. 제네바 협정 위반이다!"

적진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나가 대거리헐라요."

외서댁이 벌떡 일어났다. 외서댁의 목청이 유만복 다음가게 크고 카랑카랑한 것은 다 아는 일이었다.

"아조 야물딱지게 맹그러뿌씨요."

유만복이가 물러서며 말했다.

"요런 반동새끼덜아! 납탄이 무서우면 총알 놓고 가먼 될 거 아니여! 잡소리 말고 총알이나 놓고 가!"

두 주먹을 부르쥔 외서댁이 있는 껏 목청을 뽑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는 옷고름 너비의 새빨간 천이 질끈 동여매져 있었고, 뽑아 늘인 목에는 힘줄이 불끈 돋아 올라있었다. 그녀는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그 새빨간 천을 동여매고는 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그것을 풀어 정성스럽게 접어가지고 몸빼 주머니에 넣었다. 새빨간 천을 낭자머리위에 매듭진 그녀의 모습은 남자대원들이 무색할 정도로 용맹스럽게 보였다. 그런 외서댁을 보면 힘이 절로 난다는 남자대원들도 있었다.

"야이 씨부랄년아! 집구석에서 좆이나 뽈제 멀라고 입산혀 갖고 재수대가리 웂이 나수고 지랄이냐아!"

적진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 저눔이 얄랑궂은 소리 허네?"

외서댁이 헛웃음을 치며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대원들의 얼굴이 어색하고 민망해져 있었다. 그런데 외서댁이 숨을 들이켰다.

"야이 씨부랄눔아! 뽈자도 뽈 좆이 웂어 입산혔다. 니눔 좆대감지럴 뿌랑구가 뽑히게 뽈아줄팅께 욜로 당장에 올라오니라, 올라와!"

부들부들 떨어대며 외치는 외서댁의 목청은 아까보다 훨씬 컸다.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유만복이가 외쳤다.

", 그 말 좋으요. 다 항꾼에 그 말 서너 분 소리 질릅씨다."

천점바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 그러제라."

유만복이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철퍽 치며 좋아라 하고는,

"글먼 다 항꾼에 시 분만 허는 것이요잉. 짜아, 한나 둘, !"

하며 손짓했다.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서른다섯 명이 합친 소리가 우렁차고도 우람하게 퍼져나갔다. 아래쪽에서는 아무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꾸 대신 들려오는 것은 웃음소리들이었다. 분명, 궁지에 몰린 소리 질렀던 사람을 놓고 서로가 웃는 웃음일 것이었다. 오른쪽 산등성이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공화국 시간 왔다아!"

"? 폴세 그리 됐는갑네. 동무덜, 우리도 싸게 공화국 시간얼 알립시다."

천점바구가 손짓을 했다.

"공화국 시간 왔다아! 나가자, 쳐 부시자!"

이중대원들이 팔을 뻗쳐 올리며 합창을 했다. 주간전투에서 대개 오후 두세 시 사이를 "공화국 시간"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앞으로는 우리들 세상"이라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야간 전투력이 약한 군경들은 야간전투를 피하려면 안전지대까지의 거리 때문에 그 무렵에 일단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늑장을 부리다가는 철수하는 도중에 날이 어두워져 기습당하게 십상이었다. 그래서 빨치산들은 전투를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일삼아 "공화국 시간"을 외쳐대며 기세를 올렸고, 군경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퇴각준비를 하고는 했다. 아래쪽에서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위협사격을 가하며 적들이 부산스럽게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무들! 빨치산의 노래, 시이이작!"

천점바구가 손을 치켜들며 신호했다.

반동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섬진강아 흘러간다 우리는 승리한다

원한 위에 피에 맺힌 반동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피어나는 혁명의 깃말이여

공화국 시간에만 부르는 "빨치산의 노래"였다. 그것 또한 상대방들의 사기를 위축시키고자하는 심리전의 하나였다. 자기네들의 주제곡 가사를 바꿔버린 그 노래를 등 뒤로 들으며 퇴각하고 있는 적들을 더 몰아치는 기세로 그들은 노래를 합창해대고 있었다. 해는 서쪽으로 많이 기울고, 산등성이에 드리운 그들의 그림자도 키보다 길어져 있었다.

 

송치골의 육 개 도당 위원장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전북도당사령부 소속 대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제일 많이 관심이 모아지거나 우김질을 일으키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가 도당위원장이 모든 권한을 이현상 선생한테 빼앗겼다는 것이고, 둘째가 전북도당에서 많은 대원들이 이현상 부대로 전출을 가야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모든 권한을 뺏겼다. 아니다로 말이 오가는 우김질이 반복되었다. 그런 회의 결과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우김질은 팽팽히 맞설 뿐 어떤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 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어디 가서 회의 결과를 속 시원히 알아볼 길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김질을 하는 당사자들도 자기네들의 생각일 뿐이지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문제는 가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말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김질까지는 되지 못했다. 조직은 어디까지나 명령이었으므로 가고, 안 가고가 자기네들의 의사로 결정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누가 전출될 것이냐 하는 관심이었다. 그것 역시 우김질은 될 수 없었다. 그 대신 출처 없는 소문들을 만들어냈다. 총사령부로 전출되는 거니까 싸움 잘하는 대원들이 갈 것이라고도 했고, 비무장대원들 중에서 뽑을 거라고도 했고, 재귀열을 앓아 회복중인 대원들을 보낼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손승호는 그런 소리들을 귓등으로 들으며 무겁고 기운 없는 몸을 끌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관심 쓰는 것은 그저 재귀열의 재발을 막는 것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입에 쓸어 넣고 싶은 눈 뒤집히는 허기를 이겨내는 것이 재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들끓는 열에 휘둘리며 사경을 헤맸던 그때를 생각하고, 처참하게 죽어가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의지를 세우며 먹고 싶은 고통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래서 재발의 위험은 어느 정도 넘겼지만, 끼니가 부실해서 회복이 더디었다. 손승호는 찔레 순을 따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살 오른 찔레 순은 약간 떫은 듯하면서도 달차근해 꼭꼭 씹으면 먹을 만했던 것이다. 어린 날 남의 집 담장 너머 찔레 순을 따다가 야단을 맞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찔레 순도, 삐비도, 띠풀뿌리도, 장다리꽃도, 먹을 것 없는 봄철의 아이들 먹이였다. 그런 것들을 먹고 자란 세월이 눈물겹게 뿌우연 저편의 기억으로 떠올라왔다.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먹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은 흘러갔으되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그 세상을 보지 못하고 이 산속에서 이대로, 더욱이 세균전의 희생물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승호는 다시 어금니를 맞물었다.

"손 동무, 여기 계셨군요."

옆에 서는 박난희가 숨을 할딱거렸다.

"무슨 좋은 일 있다고 그리 급하게 다니시오."

손승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좋은 일이 아니고 나쁜 일이 생겼어요."

박난희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그때서야 손승호는 그녀에게 눈길을 모았다.

"저 말예요, 이현상 선생 부대로 회복기 환자들을 보내기로 결정이 됐대요. 큰일 났잖아요."

그게 무슨 큰일이오? 하는 말이 곧 나오려는 것을 손승호는 참았다. 그 말은 박난희를 너무 무색하게 만들 것 같았던 것이다. 손승호는 고개를 숙였다. 이현상 부대로 가게 되면... 결국 지리산으로 가게 되는 거지. 이현상 부대가 지리산으로 간다는 건 여기 도착할 때부터 확실한 사실로 알려졌으니까. 각 도당이 자기들 도에 거점을 확보하고 무한책임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리산이 삼개 도에 걸쳐 있으니까 총사령부를 설치하기 좋아서인가? 글세, 그게 아니면... 사령부 설치를 겸해 미리 투쟁거점을 확보해두자는 목적인가? 지금 상황은 여순항쟁 직후와는 다르지 않은가. 그때는 피신투쟁지로서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그때처럼 상황이 급박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지리산으로 일부러 들어간다는 것인가. 그것은 투쟁력의 사장이 아닌가. 지금은 한 사람의 투쟁이라도 확대하면서 인민들 옆에서 투쟁할 시기가 아닐까. 지리산은, 그런 투쟁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피신투쟁지로 선택하는 곳이 아닐까. 의병들도, 동학군들도 그랬던 것으로 아는데... 투쟁이 치열하게 진행 중인 이 상황에서 어째서 그 깊은 산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인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내 생각이 모자라는 것인가...

"뭘 그리 생각하세요?"

박난희가 얼굴을 가까이 디밀었다. 손승호는 얼굴을 들었다. 껍질을 벗기다 만 찔레 순은 그 동안에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에서 잉끄려져 있었다.

", 별생각 아니오."

손승호의 수척한 얼굴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떡하시겠어요?"

잘 먹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맑은 윤기가 도는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박난희가 물었다.

"뭘 말이오?"

"아이 참! 몸이 이래가지고는 딴 부대로 가실 수 없잖아요."

박난희 씨, 좀 더 솔직하게 말씀하셔야지, 내가 떠나는 게 싫다고 말야. 그래, 나 같은 놈을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고맙고... 그리고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손승호는 지그시 웃었다.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이겠소? 조직이 하는 일이지.“

"아니에요. 조직은 뭐 사람이 움직이는 게 아닌가요? 빨리 그분을 찾아가도록 하세요. 가서 부탁하세요. 그 분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요."

박난희의 눈은 더 윤기가 났고, 말하는 입술에는 질긴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 색다른 모습에서 손승호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강인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개방성과 적극성에 그 강인성이 작용해 그녀 자신을 이 산속에 있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그런 그녀의 개성이 손승호에게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누구, 박두병 동지 말이요?"

"예에, 박 동지."

"글쎄... 좀 생각해봅시다."

"아니에요.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곧 전출이 시작된다더라니까요."

박난희는 안달이었다.

"알겠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오."

"이런 몸으로 여길 떠났다간 큰일 난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해요."

박난희는 힘주어 다짐했다. 손승호는 그저 웃었다. 박난희가 돌아간 다음에도 손승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원 병력을 보내면서 왜 하필이면 회복기의 환자들일까. 자기네들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회복기 환자들만을 전출시키는 의미는 무엇일까. 유격조직을 개편하는 그 회의가 순조롭지 못했던 것과 그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현상 사령관의 병력 요청에 도당 위원장은 마지못해 그 숫자나 채우자고 회복기 환자들을 골라낸 것이 아닐까? 현재 도당사령부의 병력 중에서 제일 쓸모가 없는 것이 회복기 환자들이니까. 글쎄... 그게 아니라면, 그럼 지리산으로 가는 길에 허약한 사람들을 데려가 보호하고, 건강을 회복시키자는 것일까? 글쎄, 지금 그런 배려까지 할 여유가 있을까? 그 깊은 내막이야 알 도리가 없는 일이고, 어쨌거나 지금 상태에서 지리산으로 가 틀어박힌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은 전역이 도당단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야말로 유격투쟁 시기이지 여순항쟁 때처럼 전남 일부지역만 움직이고 다른 지역에서는 연계투쟁이 일어나지 않아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피신투쟁 시기가 아닌 것이다. 일차 박두병을 만나고 보자... 손승호는 기운 없는 몸을 무거운 짐이라도 진 듯이 일으켜 세웠다. 박두병은 무슨 글인가를 쓰고 있다가 손승호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쿠 손 동지, 몸 회복은 좀 어떠시오?"

박두병은 언제나처럼 그늘 없는 얼굴로 힘이 넘치는 악수를 했다.

", 점차 좋아지고 있습니다."

손승호는 박두병의 구김살 없는 성품에 또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아직도 수척하신데, 워낙 먹는 게 부실하니까..."

박두병이 민망해하며 혀를 찼다.

"아닙니다, 그것도 투쟁 아닌가요. 그런데 방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손승호는 책상으로 대용되고 있는 미군 탄약상자 위에 펼쳐진 종이로 눈길을 보냈다.

"아니, 염려 마십시오. 신문에 낼 글인데, 거의 다 썼습니다."

손승호는 박두병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길을 책상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

"뭘 그리 보십니까?"

", , 저 펜에 무슨 영어가 씌어 있어서..."

그때서야 손승호는 책상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 이 볼펜 말입니까? 미군전용 볼펜입니다."

박두병이 볼펜을 집어 손승호에게 내밀었다. 손승호가 받아 든 검정 볼펜에 씌어 있는 흰 글씨의 영어는 U.S. GOVERNMENT였다.

"그게 다 보투에서 생긴 겁니다. 미군전용 볼펜으로 미제를 타도하자는 글을 쓰고 있는 거지요."

"그렇군요. 빨치산전술에 아주 충실하고 있는 셈이군요."

"맞어요, 맞어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박두병은 손승호의 입장을 생각해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저 심심해서 왔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전출문제에 관해 좀 알아볼까 해서요. 회복기 환자들을 보낸다는데 저도 포함된 것인지, 포함되었으면 좀 빼주실 수 없으신지 알아보려구요."

손승호는 말이 길어지지 않게 용건을 한마디로 말했다.

", 여기가 좋으십니까?"

박두병이 손승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었다.

", 정도 들었고, 투쟁적인 면에서 볼 때도 지금 지리산으로 들어가야 할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입을 꾹 다문 박두병은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염려 마십시오. 손 동지는 처음부터 전출자명단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도당에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인 걸요."

박두병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아닙니다. 일꾼이긴요. 모자라는 게 너무 많습니다."

손승호는 마음이 가라앉는 안도감을 느끼며 말했다.

"겸손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손 동지의 지적대로 지금 시점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앞선 문제점은 각 도당들 위에 유격사령부가 올라앉게 된 조직개편에 있습니다. 그건 조직의 기본이 뒤집어진 오류고, 과옵니다. 당 조직 위에 군사조직이 올라앉게 된 건 국가조직 위에 군사조직이 올라앉은 것과 똑같은데, 그런 경우는 그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해고당한 맥아더의 경우를 보세요. 그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인 맥아더는 자신의 유엔군사령관이란 직책이 곧 전 세계적인 지배자라는 것인 줄 착각했어요. 그 착각이 대통령에게 도전하게 만들고, 더 심하게는 대통령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한 겁니다. 군인이 대통령 위에 올라앉으려는 짓이었지요. 그 결과가 어째 됐습니까. 축출당할 수밖에요. 아무리 전시라고 하더라도 군대조직은 어디까지나 국가조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손승호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박두병은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너무나 명쾌하고도 완벽한 논리로 문제의 핵심을 찔러버렸던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손승호는 신경 써서 몸을 가볍게 일으키려고 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박두병은 손짓을 하고는 때 묻은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박두병이 내민 것은 검정 볼펜이었다.

"아닙니다. 저한테도 있습니다. 두고 쓰세요."

손승호는 진심으로 사양했다.

"손 동지가 가진 것은 몽당연필 아닙니까. 내가 두 개를 가지고도 미처 나눠 쓸 생각을 못했어요. 이걸로 미제를 타도할 극본이나 시를 더 멋지게 쓰세요. 자아, 받아요."

박두병은 볼펜을 손승호의 손에다 쥐어주었다.

"그럼, 잘 쓰겠습니다."

손승호는 목례를 했다.

", 건강하세요."

박두병이 환하게 웃으며 그 큰 코를 씰룩거렸다. 손승호도 따라 웃었다. 손승호는 느린 걸음을 옮기며 박두병의 말을 되짚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길지 않았던 말은 여러 가지의 질문과 답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 회의의 결정은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않다. 민주적인 방법이 아닌데 왜 그런 중대한 문제가 결정될 수 있는가? 주재자가 이현상이니까. 호의적인 협조가 아니면서도 왜 대원들을 차출하는가? 요구자가 이현상이니까. 왜 이현상은 당의 근본원칙을 위배하는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맥아더 같은 착각에 빠졌으니까. 당을 무시하는 그런 결정적 과오를 범한 이현상은 어떻게 될까? 맥아더처럼. 손승호는 마음 무거운 우울함을 느꼈다. 성인들 중에서 이현상이란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의 투쟁은 장기간에 걸쳐 영웅적이고 신화적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과오를 범하고, 그런 오류를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니까 그럴 수가 있는 거라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손승호는 볼펜을 주머니에 꽂으며 연예대의 움막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삐라 뒷면에다 이 볼펜으로 미제와 그 앞잡이 들을 척결하는 내용의 극본을 쓰면 아주 안성맞춤이겠군, 하고 생각하며.

"손 동무, 손님이 찾아왔소."

움막에 가까워졌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손님?"

손승호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김범우가 번쩍 떠올랐다.

"손 동무시오?"

그러나 앞으로 다가서는 얼굴은 김범우가 아니었다.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산중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라는 말을 갑자기 듣게 되자 반사적으로 김범우가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김범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에 새삼스럽게 놀라고 있었다.

"누구신지요?"

", 손요원인디요, 솥뚜껑 동무 아시지라?"

", 압니다."

손승호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요것 받으씨요. 그 동무가 보낸 것이요."

선요원이 담뱃갑만한 것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몰르겄소. 속에 편지 들었답디다. 시간 노무 지체혀서 나 싸게 가야겄소."

손승호는 선요원이 내밀고 있는 것을 얼른 받아들었다.

"고맙소, 안부 좀 전해주시오."

"그리헙시다."

손승호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선요원의 뒷모습과, 손에 든 것과를 번갈아보며 한동안을 그대로 서 있었다. 선요원이 마치 솥뚜껑이라도 되는 것처럼. 종이를 풀자 나온 것은 뜻밖에도 인삼 두 뿌리였다. 편지는 그 밑에 들어있었다. 손승호는 마음 급하게 편지를 펴들었다.

손 동무 전상서 병후회복은 잠 어떠시오. 늦게사 병 앓았단 소식 듣고 기 맥힙디다. 혀도 목심 탈웂응께 을미나 다행허고 다행어요. 회복에 쪼깐 이로우라고 요것을 보내는 것이니 때때로 씹어서 잡시시씨요. 너무 작아서 면목이 웂소. 맘으로야 당장에 가보고 잡아도 그리 못허는 것이 우리덜 형편인께라. 선요원헌테 사사로운 일 시키는 것이야 당이 금허는 것이제만 손동무겉은 장헌 동무 보허자는 일인께 당도 이해헐 것이구만요. 어서어서 회복허시고 산 생활 무사 허시기를 바랩니다. 한문자가 틀린 것이나 웂는지 걱정시럽구만이라.’

솥뚜껑배상편지 위에 물방을 하나가 뚝 떨어졌다. 손승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 전쟁 통에 인삼을 구하느라고 무진 애를 썼을 솥뚜껑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손승호는 자꾸만 솟는 눈물을 목이 아프도록 되삼키고 있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