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4-3
8. 천점바구와 외서댁
동백꽃이 봉오리를 열었다. 매운바람 속에서,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다. 동백꽃이 지고 있었다. 피눈물을 뚝뚝 떨구는 듯이 꽃송이 째로. 더욱이 눈여겨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동백꽃은 떨어지며 매운바람을 데려갔다. 달이 지며 어둠을 데려가듯이. 그래도 그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달래만 그걸 알아 동백꽃이 남긴 빈 꽃자리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채웠다. 산자락에서부터 진달래가 피고 있었다.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를 벗 삼아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마저 산을 무서워해 산에서 눈을 돌렸다. 진달래는 배고픈 아이들을 불러대듯이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산들을 느리게 타고 오르며, 보리 싹은 눈독이 들도록 쳐다보아도, 아무도 보지 않았다. 찬바람 속 동백꽃의 그 처연한 핏빛 꽃송이를, 메마른 산자락 진달래의 그 애잔한 분홍빛 꽃무리를.
그러나 그 꽃이 벙글고 이우는 것을 눈물 어린 눈으로 새김질해가면 보는 여인이 있었다. 소화였다. 소화는 꽃봉오리가 벙글어 꽃잎 피어남이 그리도 눈물겹고 사무치는 그리움인 것을 비로소 가슴 저리게 아파하고 있었다. 동백의 그 선연한 핏빛 꽃잎이 예전에는 마음 빼앗는 고움이기는 했어도, 그리도 가슴 저리는 아픔은 아니었었다. 어찌 동백꽃의 피어남만이랴. 매운바람을 더는 견디기 어려워 꽃송이 이울며 꽃송이 째로 뚝뚝 떨어져 내림이 그리도 애타고 피 마르는 기다림의 끝인 것을 비로소 가슴 찢어지게 아파하고 있었다. 동백의 그 꽃송이 째 떨어지는 모습이 예전에는 마음 허망하게 치는 기이함이기는 했어도, 그리도 가슴 찢어지는 아픔은 아니었었다. 동백은 어인 일로 그 소식과 함께 피어났다가 그 소식과 함께 지는 것이었을까. 전선이 다시 서울을 지나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가져오면서 동백꽃은 벙글었다. 동백꽃을 바라보며 그 선연한 핏빛만큼 붉은 그리움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여섯 달째 접어드는 그분의 아이와 함께. 동백꽃이 매운바람 속에서 붉게 타듯, 그리워 어서 오기 바라는 기다림도 나날이 붉어가는 핏빛의 꽃이었다. 그런데, 전선이 다시 서울로 밀려올라간다는 소식을 남긴 채 동백꽃은 이울어갔다. 빛깔도 변함이 없이, 꽃잎도 흩어짐이 없이, 꽃송이 째 뚝뚝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은 그대로 자신이 떨구는 피눈물이었다. 아니, 핏빛 붉은 그리움으로 찼던 가슴이 갈가리 찢겨 동백꽃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그 붉은 살덩이 한 점씩을 토해냈다. 일곱 달째 접어드는 그분의 아이와 함께. 마침내 전선이 서울보다 더 위로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진달래꽃이 가져왔다. 산자락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꽃들은 예전에는 그저 망연한 슬픔으로 젖어드는 고운 꽃일 뿐이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꽃무리는 피멍든 가슴으로 울어야 하는 소리 없는 통곡이었고, 그리워 그리워 그분을 불러야 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상심 마셔야제라. 당장 뱃속 아그가 더 중헌 게요."
들몰댁의 신중한 말이었다. 들몰댁의 말을 따라 군당위원장 오판돌의 말도 생각났다.
"아아, 그렇구만이라, 그렇구만이라. 아그 잘 보존허는 것이 동무가 헐 질 중헌 투쟁이구만이라. 명심허시씨요."
조계산지구에서 선을 받은 오판돌 군당위원장이 안전한 거처를 정해주고 나서, 뱃속의 애 아버지가 그분인 것을 알고 크게 놀라면서 다짐한 말이었다. 그 말의 무게는 곧 그분 정하섭이 지니는 무게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화는 흩어지고 흔들린 마음을 간추리고 다잡기고 했다. 그렇지만 그 일은 하루 이틀로 쉽게 되지 않았다. 어느 때 없이 깊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남긴 아픔은 컸다. 나날이 커나고 있는 아이와 함께 치른 그리움이고 기다림이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불러 오른 배를 하루빨리 그분에게 보여주고 싶음은 한없는 기쁨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이었다. 그 기쁨과 부끄러움이 밤마다의 꿈으로 끝나버리게 되자, 그리움과 기다림은 그대로 아픔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그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가슴에 안고 신음해야 하는 건 터무니없이 커진 욕심 탓이었다. 유산을 한 다음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기를 그리 바라면서도 그분과 현생의 집을 짓기를 욕심 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의 욕심이 채워지자 어느 틈엔가 또 하나의 욕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픔의 씨는 거기에 뿌려진 것이었다. 어리석고 부질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욕심을 거두면 자연히 가실 아픔이었다. 인연의 씨를 받는 것으로 현생살이를 흡족한 고마움으로 끝내려 했던 당초의 마음을 찾아내는 것만이 흔들리지 않고 바로 서는 길이었다. 아래서는 지고 위로는 피어나는 진달래꽃밭을 소화는 욕심 다스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한 달 동안 정신없이 감아 들였던 인연의 실을 그분이 멀어져가는 대로 천천히 풀어내고 있었다. 그분이 무사하기만을 빌면서. 소화는 마음을 바로잡은 다음부터 옷 짓기에 더 열중했다. 바늘을 한 땀이라도 더 뜨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혁명 사업이었다. 자신은 엄연히 후방부 대원이었다.
"투쟁은 산에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하투쟁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가서 은신하면서 후방부 사업을 계속하세요. 그리고 아이도 순산하구요. 그게 이중으로 혁명 사업에 열중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만나요. 난 소화동무의 깊은 마음을 믿습니다."
산을 내려오기 직전에 이지숙이 한 말이었다. 임신인 것을 알고 그렇게 마음써준 이지숙이 더없이 고마우면서도, 그녀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서운함은 따로 남았었다. 그러나 이지숙의 마음이 곧 그분의 마음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소화는 솜을 둔 저고리감에 겹실로 되박음질을 해나갔다. 바늘을 위에서 꽂는 것이나 아래서 꽂는 것이나 그 한 땀, 한 땀이 마치 올을 세는 것처럼 고르게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왼쪽 엄지손톱 끝부분에는 아래서 꽂는 바늘자리를 잡느라고 바늘이 스친 자국이 여러 개의 가느다란 홈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바늘이 한 번씩 스칠 때마다 손톱이 닳아져 생긴 그 여러 개의 홈들은 바느질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화는 들몰댁과 마주앉아 바느질을 하다가 자신의 늘어난 솜씨에 문득 놀라고는 했다. 자신은 어느덧 들몰댁과 맞먹는 빠르기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못지않게 굿이나 잘해내려고 마음 모았지 바느질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그녀는 처음에 얼마나 손톱 밑을 찔렸는지 몰랐다. 그러나 아픔과 고역스러움을 참아내며 굿에 모으던 정신을 바느질에 모았다. 자신이 한 땀, 한 땀 뜨는 바느질이 바로 그분이 목숨 내걸고 하는 일과 같고, 앞으로 나서서 적과 싸우는 전사들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떳떳한 혁명 사업이라는 굳은 믿음과 함께.
"후방부 사업도 화선투쟁과 똑같은 혁명투쟁입니다. 후방부 사업 없이 어떻게 전사들이 화선투쟁을 용맹스럽게 전개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바느질이,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밥 짓기가 전사들의 용맹성을 북돋아 올린다는 것을 잠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늘로 한 땀씩 뜰 때마다 우리의 적인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인 민족반역세력 이승만 일당을 무찌르고, 따라서 우리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후방사업에 온 정성을 다 바칩니다."
이지숙이 학습을 통해서 말한 한 대목이었다. 후방부에 속한 여자들은 이지숙의 그런 힘이 넘치는 말을 들어가면 자신들이 하는 바느질이나 밥 짓기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소화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갖게 된 데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입산해서 비로소 확실하게 보게 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입산자들 중에는 머슴은 말할 것도 없고, 대장장이, 백정, 선소리꾼에다가 무당의 자식들까지 수두룩했다. 그들이 왜 그리도 많이 입산했으며, 왜 목숨 아까워하지 않고 싸움에 나서는지를 가슴 뜨겁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진 것이 없이 평소에 천대와 구박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기본출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그 사람들은 당당한 사람대접을 받아가며 행세하고 있었다. 자신도 남자라면 온 천지를 그런 새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총을 들고 앞으로 나서고 싶은 가슴 떨림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 외서댁처럼 이지숙에게 요구하고 나섰을지도 몰랐다.
"나가 아새끼덜 띠놓고 역부러 입산헌 것이 요런 일이나 헐란 것이 아니었구만이라. 나야 냄편 웬수갚음 톡톡허니 허고 죽자고 입산혔당께요. 긍께로 요런 심에 안 찬 일 말고, 나도 앞으로 나서서 총들고 싸우게 혀주씨요."
외서댁이라는 여자가 이지숙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한 말이었다.
"동무의 마음 알겠어요. 그러나 혁명투쟁이 사사롭게 남편의 원수를 갚는 일이 아닙니다."
이지숙의 엄한 말이었다.
"위원장님 말씸 아능마요. 근디 나가 허잔 일은 냄편 웬수만 갖자는 것이 아니구만이라. 웬수도 갚음서 냄편이 다 못허고 간 몫아치럴 나가 맡아서 헐란 것이구마요. 웬수만 갚자먼 염상구놈 죽이고 나도 죽어뿌는 그 쉰 일얼 두고 멀라고 입산혔을 것이요. 안그런게라?"
외서댁의 말은 다부졌다.
"예, 강동식 동무는 훌륭한 전사였습니다. 동무는 남편이 아닌 혁명 전사 강동식 동무가 이루고자 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이지숙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야아, 말로는 조단조단허게 못혀도 맘으로야 다 알아묵고 있구만이라. 앞으로 학습얼 착실허니 받다가 보먼 더 잘 알아질 것이고라."
"그건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동무, 적과 맞서 싸우는 화선투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압니까? 언제 죽게 될지 모를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남자들과 똑같이 산을 타야하고, 한뎃잠을 자야하고, 밥도 주먹밥을 먹거나 어떤 때는 굶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고생들을 다 견딜 수 있겠어요?"
"냄편이 견디고 헌 일인디 워찌 나라고 못 견딜랍디여. 냄편허고 항꾼에 농새지었디끼, 고런 맴으로 헌다면야 무신 고상이라도 못 이길 것 있겄는가요."
외서댁은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좋아요. 동무의 결심 잘 알겠어요. 동무의 요구를 일단 접수하고, 이삼 일 안으로 결말 짓도록 하겠어요."
물러선 건 이지숙이었다.
"고맙구만이라. 위원장님."
외서댁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외서댁의 행동은 후방부 여성대원 전부를 놀라게 만들었다. 소화도 외서댁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서댁이 그리 당찬 것은, 죽으려고 저수지에 뛰어든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결국 자기 때문에 죽은 남편에게 죄 닦음을 하려는 것이고, 어쨌거나 간에 남편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라고, 외서댁이 없는 틈을 타서 여자들이 입을 모은 말이었다. 외서댁은 이틀 뒤에 후방부를 떠나 군사학교로 갔다.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다고 했다.
"동무덜 잘 있으씨요. 나넌 인자 총을 쏘는 여자빨갱이가 된단께라."
외서댁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여자들은 그 겁 없는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소화의 눈앞에는 후방부를 떠나던 외서댁의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었다. 자신은 화선투쟁으로 나선 외서댁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보더라도 그런 기구한 곡절을 겪은 외서댁이 그렇게 마음 공그린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외서댁이 한겨울을 병나지 않고 무사하게 넘겼는지, 총질을 해내는 싸움을 겪으면서 무슨 탈이나 없는지, 새삼스럽게 마음이 조계산 골짜기 골짜기로 쏠려갔다.
소화는 허리를 펴며 오른손을 주먹쥐어 왼쪽어깨를 콩콩 두들겼다. 베짜기가 힘들다는 말을 들었지만 바느질도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삯바느질이 십 년에 삭신 골병 들어 내려앉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소화는 알 것 같았다. 일이 손에 익어가면서 차츰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동안씩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자세로 앉아 해야 하는 바느질은 전신 마디마디를 굳어지게 만들고, 결리게 만들고, 저리게 만들었다. 정신을 바늘 끝에 모아 한참씩 일에 빠지다 보면 눈은 시고 씀벅거려 앞이 침침했고, 엉치는 남의 살처럼 먹먹하고, 다리는 저릿저릿 저렸다. 팔다리를 거칠 거 없이 휘두르고 뛰는 굿에 비하면 바느질은 영락없이 벌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느질을 따라 마음먹은 대로 옷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몸 고역을 풀고, 이지숙의 힘찬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는 했다.
소화는 지게문을 빠꼼하게 열어보았다. 어느새 햇발이 걷혀 있었다. 들몰댁이 왜 아직 안 돌아오는지 마음이 쓰였다. 들몰댁은 집주인과 함께 장을 보러 집을 비웠다. 물론 자신들이 먹자고 보는 장이 아니었다. 선을 따라 산으로 보내기 위해 보는 장이었다. 옷 말고도 산에서 필요한 물건은 많았다. 약, 소금, 운동화, 고무신... 그러나 돈이 있다고 그런 것들을 양껏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장터에나 표 안 나게 숨어 있는 감시의 눈을 피해 조금씩 사서 모아야 했다. 소금 한말, 고무신 서너 켤레만 사도 덜컥 잡혀간다고 했다. 들몰댁이 그나마 나설 수 있는 것도 벌교가 아닌 탓이었다. 들몰댁은 두 아이와 자신의 해산 수발을 겸해 하산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판돌 위원장의 말로는 감시가 심해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들몰댁은 두 아들을 옆에 두고 싶어 애가 타련만 참을성 많은 성품이라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들몰댁은 외서댁의 그 당찬 행동을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로 무서워했다. 그리 나섰다가 죽기라도 하면 자식은 어쩔 거냐는 게 들몰댁의 걱정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화는 일감을 놓고 지게문을 밀쳤다.
"혼자 깝깝허셨제라?"
머리에 인 짐을 내리며 들몰댁이 반색했다.
"들몰댁이 웂응께 일도 잘 안 되고 어먼 생각만 나고 그러요."
소화는 기지개를 켜며 쪽마루로 나섰다. 치마를 입었는데도 배가 불룩하게 표가 났다.
"무신 딴 일 웂었제라?"
주인남자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야아."
소화는 고개까지 끄덕여보였다. 그때였다.
"꼼짝 말앗!"
두 남자가 삽짝을 뛰어들며 외쳤다. 그들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주인 내외와 소화, 들몰댁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요런 빨갱이 연눔덜, 손 번쩍 들어!"
한 사내가 총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네 사람은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다른 사내는 집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고, 고것이 무신 말이다요. 누가 빨갱이라고 그러시요. 시방?"
주인남자가 간신히 말했다.
"요런 씨부랄눔에 늙은이, 워디다 대고 개좆 겉은 소리여, 소리가!"
사내가 번개같이 총을 돌려 잡아 개머리판으로 주인남자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어쿠!"
주인남자가 벌렁 넘어갈 듯하다가 푹 고꾸라졌다.
"워메 영감!"
주인여자가 남편을 붙들며 주저앉았다.
"힝, 무당년꺼정 항꾼에 아지트럴 틀고 앉았었구만 그랴."
사내가 콧등으로 웃으며 침을 내뱉었다. 소화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랫배에서 찬바람이 일어났다. 저놈이 날 어떻게 알까. 여기 벌교가 아니라 복내면인데. 저것이 벌교 놈 아닐까?
"어이 하대치 마누래! 나가 누군지 몰르시겄어? 입산혔다가 여그 복내면 구성텡이로 숨어들었다고 암시랑 안헐 성불렀드랑가? 빨갱이 새끼덜 즈그덜만 대갱이 잘 돌리고, 우리 경찰이나 청년방위대넌 돌대그빡으로 알었든갑제? 그리 알었드람사 돌대그빡은 바로 느그다! 여그꺼정 말혔응께 나가 워디 사람인지 똑똑허니 알었겄제?"
소화도 들몰댁도 고개를 떨구었다.
"야! 사내끼 갖다가 각단지게 손 뒤로 묶어라."
총을 겨눈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명령했다.
"보시씨요, 요것이 집에서만 입고 있는 치맨디, 요 우에다가 몸빼만 잠 걸치게 혀주시씨요."
소화가 사내를 쳐다보며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안 뒤어!"
사내가 내쏘았다.
"금메 봇씨요, 혼자 몸이 아니고 요리 애 밴 몸잉께 불쌍허니 생각혀서 허락해 주시씨요."
소화는 두 팔을 얼른 내려 손바닥으로 치마를 몸에 붙게 쓸어내려 잡으며 배를 내밀어 보였다. 아이를 보호해야 된다는 생각뿐 수치스러움도 부끄러움도 느낄 새가 없었다.
"애럴 배?"
사내는 소화의 배로 눈길을 옮겼고, 옆의 사내가,
"금메, 애 밴 몸으로 저 치매만 입고서야 워디 지서꺼지 가지기나 허겄소? 밤이 되는디 가다가 얼어 뒤지제."
하고 말했다. 처음의 사내가 옆의 사내를 옆 눈길로 쏘아보다가,
"싸게 몸빼 입고 나와!"
했고, 소화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갔다. 소화는 몸빼만 입지 않았다. 순식간에 솜저고리도 꿰입고, 솜버선도 꿰신었다. 밖으로 나오니 들몰댁의 손은 벌써 뒤로 묶여 있었고, 주인내외의 손이 묶이고 있었다.
"그 여자넌 냅둬. 그냥도 걷기 심들 것잉께."
총을 겨누었던 사내의 말이었다. 소화로서는 들몰댁과 주인내외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자아, 싸게 나서!"
사내의 명령을 따라 네 사람은 삽짝을 나섰다. 회색빛 어둠살이 여리고 묽은 안개발처럼 퍼지고 있었다. 소화는 그 슬픔처럼 내려앉고 있는 어둠살을 밟기가 두려웠다. 어둠살은 갈수록 진해지다가 끝내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되고 말 것이다. 이 길이 그 어둠처럼 캄캄한 죽음의 길일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날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소화의 눈앞에는 새벽안개를 밟고 떠나간 정하섭의 모습만 어른거릴 뿐 도움을 청할 사람은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창양민학살이 마침내 부산의 피난정국에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이미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 정국에 거창양민학살사건은 또 하나의 태풍으로 몰아닥쳤다. 국민방위군사건은, 경찰력을 동원한 강압과 공공기관에 만연된 부패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품어왔던 국민들이 일제히 원성을 터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칠팔만, 재기불능자 이십 여만, 중환자 사십 여만 명을 낸 이승만 정권은 난파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몰아닥친 것이다. 그러나 학살 자행이 정치, 사회문제로 표면화되기까지는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거창학살은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정권의 무자비성과 자기방어적 살해의식뿐인 군부의 잔혹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사건이 완전히 표면화되기 전에 양효석의 대대에서는 장교회의가 열렸다. 그즈음에 사건현장을 헌병대에서 다녀가고, 그 지역 국회의원이 다녀가고, 국방장관까지 다녀가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민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걷잡을 수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우리 대대는 구일날 신원면에 진입해서, 그곳에 경찰과 방위대원으로 편성된 일개중대병력을 남겼고 산청 쪽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산에서 야영을 하고 산청에 도착해서, 지난밤에 신원면이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주둔시켰던 일개중대가 전멸했다는 정보를 듣고 다시 신원면으로 진격했다. 신원면에 도착해서 조사해보니 과연 백오십여 명이 전멸해 있었다. 십일 날 밤에 다시 공비들이 쳐들어와 밤새도록 교전을 해 적을 퇴치했는데, 그 결과 우리 측에서는 사십 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백 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래서 통비분자들을 색출, 체포해서 신원국민학교에 모았다가 처단하게 되었다. 자아, 이상과 같이 작전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다들 명심하기 바라오."
양효석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곧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어떤 조사에 대비한 그런 작전일지와 작전상황의 변조에 대하여 환영했으면 했지 따지고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 일이 공비소탕이 아니라 양민학살이라고 골치 아픈 사회문제가 되는 경우 아무리 작전명령대로 수행했다 하더라도 현장지위를 한 장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모면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새로 짜여진 작전일지와 작전상황에 의하면 그 행위의 정당성이 완전히 입증되고, 그 어떤 장교든 책임을 충분히 모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양효석은 께끄름하게 남아 있던 심적 부담을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더 기막히게 기분 좋은 일이 양효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위 진급에다가, 사단 작전지역내의 전출지 자유선정이었다. 한꺼번에 겹쳐진 경사에 양효석은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그는 지체 없이 고향 쪽으로 전출을 희망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경사는 연달아 일어났다. 그는 그저 막연하게 고향 가까이를 원했을 뿐인데, 중공군을 다시 서울 북쪽으로 밀어 올리게 되면서 병력확충과 함께 토벌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사단에서는 그동안 보류시켜왔던 일부 군 단위까지 병력을 배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보성군도 끼어 있어서 그는 바로 고향으로 전출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대위 계급장을 번쩍거리며 중대병력을 이끌고 고향에 진군하는 토벌군사령관 양효석!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벌교의 큰길을 행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벌떡거려 자리를 차고 일어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때마다 읍장이고 경찰서장이고 유지들이고 가릴 것 없이 발아래 깔아뭉개던 심재모라는 계엄사령관의 막강했던 권한을 떠올렸고, 돈 벌기에만 급급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를 떠올렸고, 아버지의 원수 갚기를 그리도 소원하며 자신의 육사지원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던 어머니를 떠올렸고, 반도호텔에서 블랙커피라는 것을 시켜놓고 자신을 참담하게 모독했던 송경희를 떠올렸다.
"이봐 연락병, 광약을 미제로 한 서너 통 구해. 그리고 계급장이고 빠클이고 매일 번쩍번쩍하게 닦어."
주둔지로 출발하기 전날 양효석이 내린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꼭 서울말을 쓰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다소 어색스럽다 하더라도 토벌군사령관으로서의 위신과 체통을 중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효석이 벌교에 모습을 나타낸 분위기는 심재모와는 너무도 달랐고, 백남식과도 상당히 달랐다. 심재모는 아무런 격식도 없이 부대를 이끌고 읍내로 들어왔고, 백남식은 노천 플랫폼에서 굳이 사열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효석의 경우는, 그가 모습을 나타내기 하루 전에 벌써 역의 앞마당과 남국민학교 교문 위에 현수막이 내걸렸다. 거기에 큼직큼직하게 쓰인 글씨들은 "경 양효석 토벌군사령관 환영 축"이었다. 앞뒤의 경자와 축자가 상하좌우로 네 개의 꽃잎모양으로 싸이고, 빨간색으로 싸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 현수막이 내걸린 하루 동안 읍내에서 제일 기분 좋은 사람과 제일 기분 잡치는 사람이 하나씩 있었다. 하늘로 금방 날아오를 것처럼 기분이 들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양효석의 어머니 된재댁이었고, 사지에 맥이 풀릴 대로 다 풀려 딱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인 사람은 염상구였다. 된재댁은 자기 아들이 장교인 줄만 알았지 그 높은 사령관이 되어 이렇게도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고, 염상구로서는 자신의 완력 앞에 생쥐새끼 뿐이었던 것이 육군사관학교를 가네 어쩌네 하더니만 고작 이 년 사이에 이렇게도 입장이 뒤집힐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특히 양효석의 어머니는 포목점에서 비스듬하게 내보이는 남국민학교 교문 위에 현수막을 손님들이 드나들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입에 침이 말랐다.
"봇씨요, 쩌그 저 핵교 대문 우에 씨인 토벌대사령관 양효석 대위님이 바로 우리 아덜이요!"
된재댁은 어깨가 뒤로 젖혀지고, 배가 앞으로 나올 지경으로 빳빳하게 서서 자기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씩 토닥여 보였다.
"그려라? 참말로 장헌 아덜 둬부렀소이."
어느 여자는 눈을 휘둥글하게 뜨며 된재댁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고,
"워메, 집안에 큰 인물 났소이."
어떤 여자는 부러운 눈치를 감추지 않았다. 된재댁은 장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여자들을 상대로 아들자랑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님들의 독촉을 받고서야 포목을 풀고 자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자질이 어느 때 없이 후했다. 손에 익을 대로 익어버린 눈속임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덤도 대여섯 치씩이나 더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된재댁으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딴 기분으로 아들이 장해 보이고 고맙고, 남편과 자기 설움까지 다 풀리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된재댁이라는 남다른 택호에 그녀의 설움은 서려 있었다. 봇짐장수들이 얼마나 오르기 힘든 고개였으면 된재라고 이름 지었을 것인가. 봇짐지고 오르기가 되고 된 그 잿마루의 주막집 딸이 그녀였고, 어떤 봇짐장수의 아들이 그녀 남편이었다. 주색잡기를 모른 채 오로지 봇짐장수를 면하고 한자리에 말뚝 박고 장사하며 사는 것이 소원인 남편을 따라 그녀는 천하고 험하게 초년을 살아냈다. 뒤끝 없는 고생이 없더라고 결국 장삿발이 좋은 벌교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이 늘어나도 봇짐장수아들과 주막집 딸이라는 주눅 드는 마음은 씻어지지 않았다. 돈이 힘인 것이 분명했지만 돈으로 안 되는 대목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였다.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갖고자 했다. 남편은 끝내 봇짐장수아들이라는 설움을 풀지 못한 채 빨갱이 손에 억울하게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들 효석이가 읍장보다도, 경찰서장보다도 높은 군인대장이 되어 돌아올 판이었다.
어떤 부대가 일정지역에 주둔하게 될 대 그 첫발을 내딛는 곳이 행정중심지여야 하는 것은 공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작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며 지역사령부를 어디다 설치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런데, 양효석의 부대는 순천 쪽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광주 쪽에서 오면서도 군청소재지인 보성을 무시해버리고 벌교로 직접 왔다. 양효석은 광주에서 전화를 걸어 현수막을 내걸게 했던 것처럼 보성경찰서장 남인태도 벌교로 오도록 지시했다. 남인태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어찌 하는 수 없이 군수와 함께 벌교로 넘어와 플랫폼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뙤, 하얀 증기를 뿜어 기적을 울리며 기운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흐트러진 자세로 서 있던 군수 이하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똑바로 서며 줄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다른 사령관들을 맞을 때와는 다르게 떫고 쓰고 시고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구겨질 대로 구겨진 염상구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청년단이 청년방위대로 바뀐 이상 그는 꼼짝달싹할 수 없는 양효석의 부하였던 것이다.
기차가 육중한 쇳소리들을 내며 멈추었다. 기차가 멈추자마자 객실 문 여기저기에서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군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분명한데 와글거리거나 떠드는 소리 한마디 없이 조용한 가운데 그들은 하나같이 가볍게 뛰면서 기차에서 내리는 대로 네 사람씩 줄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군인들은 줄을 맞추고서도 계속 가볍게 뛰고 있었다. 기관장들과 유지들은 군인들의 그 기민하고 질서정연한 동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긴장하며 서로서로 다시 줄을 맞추었다. 그런데 군인들은 동작만 그렇게 돋보인 게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군인들과는 확연하게 달라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색다른 차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똑같은 철모에, 똑같은 군복에, 똑같은 총을 들었을 뿐이었다. 기관장들과 유지들은 한참씩 군인들은 살핀 끝에 그 연유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 군인들은 하나같이 말끔하고 깨끗했던 것이다. 계급장이 빛을 발했고, 허리띠의 고리쇠가 반짝거렸으며, 바지에 줄이 곧게 서 있었고, 군화가 반들반들 윤을 내고 있었다.
"부대에, 차려우왓!"
그때까지 가볍게 뛰고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뚝 멈춰 섰다. 그 절도 있는 동작에 따라 플랫폼에 갑자기 정적이 밀려들었다.
"부대에, 세우워 총!"
개머리판이 일제히 땅을 울리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그때까지도 양효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개머리판 울리는 소리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듯 양효석이 잠시 후에 기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위 계급장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의 차림새에는 그 어디에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말쑥했다. 권총을 찬 그의 오른손에는 새빨간 수실이 끝에 달린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똑바로 앞을 보고 걷는 그의 뒤를 사병 하나가 따르고 있었다.
"사령관님을 향하야, 받들어이 총!"
군인들은 총을 일제히 들어 올려 몸의 중앙에다가 일직선으로 맞추었다. 양효석은 손가락 끝들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힘찬 거수경례로 부하들의 받들어 총에 답례했다.
"부대에, 세우워 총!"
다시 개머리판들이 땅을 울렸다.
"전원 이상 무!"
구령을 붙이던 선임하사의 보고였다. 보고를 받은 양효석이 돌아섰다. 빠르게 휘돌던 그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노천플랫폼에 다 하나 서 있는 작은 건물 앞이었다. 역원들만 사용하는 그 작은 건물 앞에 한 여자가 진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양효석은 기관장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여자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그 여자는 된재댁이었다.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가슴 울렁거리는 된재댁은 기쁜 울음이 넘치는 얼굴로 아들에게로 달려가야 할 지 어쩔지를 몰라 멈칫거리고 있었다.
"엄니, 대한민국 육군 대위, 보성군 토벌군사령관인 아들 절 받으십시오. 군인의 절은 이것입니다."
어머니와 서너 발짝 간격을 두고 우뚝 멈춰 선 양효석이 큰 소리로 외치듯 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의 크게 퍼진 목소리를 플랫폼에서 못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효석아, 내 아덜 장허다!"
마침내 된재댁이 아들에게로 달겨들며 울음과 함께 토해낸 소리였다. 거머잡은 아들의 손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된재댁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계속 솟는 눈물로 얼보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믿기 어렵게 옛 모습은 간 곳 없이 당당한 대장, 실한 어른으로 변해 있었다. 어금니를 꾹 다문 양효석은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엷게 웃음 짓고 있었다.
"엄니, 사령관으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여기선 이만해요."
양효석이 나직하게 말했다. 된재댁은 명령복종에 익숙한 병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손을 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하늘처럼 높게 보이는 아들한테서 된재댁은 남편과의 평생에서 느낄 수 없었던 어려움과 튼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의 위신과 체면을 터럭 끝만큼이라도 상하게 해서는 안 되고, 자신도 사령관의 어머니답게 체통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양효석은 어머니한테서 돌아섰다. 그리고 지휘봉을 오른손에 바꿔들며 기관장들과 유지들이 서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효석이 그들에게 가까워지자 도열한 속에서 경찰 한사람이 직각보행으로 걸어 나왔다. 그 경찰은 양효석 앞에 이르러 거수경례를 붙였다.
"사령관님, 어서 오십시오. 사령관님과 장병 일동을 환영합니다. 저는 벌교경찰서장 권병제입니다. 현지 서장으로서 군내 주요 기관장들과 유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권병제는 격식을 갖춰 말했고, 양효석은 지휘봉을 왼손에 바꿔들며 경례를 받았다.
"좋소."
양효석의 딱딱한 얼굴과 절도 있는 동작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도열한 사람들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보성군수십니다."
권 서장이 첫 번째 사람의 직함을 댔다.
"어서 오십시오. 김달수입니다."
첫 번째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토벌군사령관 양효석입니다."
양효석이 손을 내밀었다.
"보성경찰서장이십니다."
"우리 군에 주둔하신 걸 환영합니다. 남인태라고 합니다."
벌교로 넘어올 때의 아니꼬왔던 생각이 싹 가셔버린 남인태는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권병제를 소개자로 지목할 때까지만 해도 아니꼬움은 창창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토벌군사령관 양효석입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경례를 받은 양효석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 식으로 인사가 계속되었다.
"좌익척결위원회 위원장이십니다."
"이, 나 최익달이시. 자네가 영판 출세혀부렀..."
"차렷!" 양효석이 느닷없이 소리 질렀다. 그 찌렁하게 울리는 외침에 도열한 사람들이 움찔했고, 부동자세로 서 있던 군인들도 놀라 더 꼿꼿한 자세가 되었다.
"이 영감탱이! 대한민국 육군대위를 뭘로 보는 거얏! 토벌군사령관이 뭘로 보이냔 말야! 늙어빠진 눈구멍에는 계급도 안 보이나! 공무수행, 특히 전시하의 작전수행에서 군 직책이 최우선이란 걸 아나, 모르나!"
양효석은 오른팔을 쭉 뻗어 지휘봉으로 최익달을 겨냥한 채 악을 쓰고 있었는데, 지휘봉 끝이 금방 최익달의 눈을 찔러버릴 것만 같았다.
"아느만요, 아는구만요."
하얗게 질려버린 최익달이 더듬거렸다. 겁 질린 최익달의 늙은 얼굴에 비해 열 받친 양효석의 얼굴은 너무 앳되 보였다.
"알면서 어디다 대고 자네야, 자네가!"
최익달의 심보가 바로 송경희 년의 심보와 같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양효석의 화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던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고런 일 웂을 것이구만이라."
"한번만 더 그따위 짓 하면 아주 박살을 내고 말 것이다. 알겠나!"
"예에, 예."
최익달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굽신거렸다. 그는 초장에 양효석의 기를 꺽으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되감겨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있었다.
"당신이 무슨 위원장이라고?"
걸음을 옮기려던 양효석이 물었다.
"예, 벌교보성지구 좌익척결위원횝니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된 단체요?"
최익달이 머뭇거렸고, 옆에 선 권 서장이 대신 대답했다.
"예,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그러니까 민간인 임의단쳅니다."
"거기서 하는 일이 뭐요? 좌익을 척결하려고 총을 들고 나섰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권서장은 뭐라고 설명할 말이 궁색해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이름만 내걸어놓은 그따위 단체, 오늘부로 당장 해체하시오. 전시 하에 혼란만 일으키니까. 이건 토벌군사령관의 명령이오!"
양효석은 최익달을 보기 좋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 단체를 해산시켜버려 그가 이런 자리에 아예 끼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권 서장의 또렷한 대답이었다. 그도 아이고 잘됐다 싶은 심정이었다. 몇 사람을 거쳐 맨끝의 염상구 앞에 이르렀다.
"청년방위대장입니다."
"어여 오시씨요, 사령관님. 반갑구만이라."
염상구는 어깨가 들썩하도록 뒤꿈치를 들었다 놓으며, 팔을 넓게 휘둘러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반갑소, 염대장님. 앞으로 잘 좀 도와주시오."
웃고 있는 양효석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드럽고 다정했다.
"알것구만이라. 잘 받들어 모시겄구만이라."
염상구는 양효석에게 손을 잡힌 채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염상구는 양효석이가 최익달을 다루는 것을 보고 그만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완력 판을 휘어잡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먹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먹에 앞서 절반 이상이 배짱놀음이었다.
‘와따메, 저자식이 저거, 좆대감지 지대로 달아뿌렸네. 잉, 저것이 통학열차 지붕 타고 댕기든 눔이기넌 헌디. 고런 독기에다가 권세할라 하늘 밑구녕얼 찔러뿌러? 아이고메, 일찍허니 모강댕이서 심 빼고 죽은디끼 대허자.’
염상구는 눈치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양효석으로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존재가 염상구였다. 그가 앞뒤 없이 나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규율에 어긋나는 동작으로 야단스럽게 거수경례를 하며 사령관님이라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던 것이다. 그 순간 그의 긴장되었던 신경은 확 풀리게 되었다. 양효석이 앞장선 부대는 착착, 착착 구둣발 소리를 내며 역 앞마당으로 나섰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와아 소리치며 박수를 쳐댔다. 양효석은 앞만 똑바로 보고 걷는 것 같았지만 순간순간 현수막을 훔쳐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역 앞마당에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조장을 돌아 국민학교에 이르는 길 양쪽에 학생들과 어른들이 줄지어 서서 지나가는 부대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들이 동원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그냥 흩어지지 못하고 부대를 뒤따라 학교로 들어갔다. 그들은 청년방위대원들이 시키는 대로 운동장 가를 따라 빼꼭하게 둘러섰다. 양효석이 조회대로 올라가고, 기관장들이며 유지들이 줄을 서자 부대는 곧 열병분열을 시작했다. 무장한 군인들이 가로, 세로 똑바로 줄을 맞춰 힘차게 걸어가고, 길고 짧은 구령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구령에 맞춰 부대마다 다른 동작을 틀리는 구석 없이 이루어내고, 줄줄이 꺾어져 돌면서도 줄이 비틀어지는 일이 없었고, 대열이 길어져도 처음의 간격이 그대로 유지되는 군인들의 질서정연한 움직임은 아이들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었고 어른들의 눈에도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열병분열이 끝나고 사열이 시작되었다. 양효석과 나란히 서서 걷는 두 사람은 군수와 남인태였다. 남인태 서장은 그런 대로 격을 맞추고 있었지만, 군수의 걸음걸이는 옹색스럽고 제멋대로라서 영 볼품이 없었다.
‘와따 자석, 참말로 쌈빡허니 폼 재뿌네이. 이 년 만에 사람팔자가 요렇크름 훼까닥헐 줄 누가 알었을 것이여. 전쟁이 좋기넌 좋네. 전쟁덕 아니었음사 저것이 저리 팔자 고쳤을 것이여? 대갱이에 안직 피도 안 몰른 자석이.’
염상구는 부러움과 질시로 심사가 살살 꼬이고 있었다. 사열을 마친 양효석은 다시 조회대로 올라왔다.
"장병 제군, 우리는 마침내 새 주둔지에 도착했다. 우리 부대는 오늘부터 보성군지구 토벌군이다. 장병 제군들은 새로운 각오로 임무에 임하기 바란다.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군민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부대의 정신을 다 같이 힘차게 합창하기로 한다. 다 같이 부대정신 합창!"
"언제나 씩씩하게, 언제나 용감하게!"
군인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며 운동장을 흔들었다.
"좋다. 거기다가 한 가지를 첨가한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언제나 겸손하게다. 이건 적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대민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민간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민폐근절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나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긴 말 하지 않겠다. 그리고 보성군민 여러분, 우리부대는 이미 사단 내에서 최강의 부대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앞으로 공비를 토벌해 여러분 앞에 그 실력을 실제로 보여드림과 동시에 여러분의 민생안전이 하루빨리 이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상."
"사령관님으 향하야, 받들어 총!."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 올렸고, 운동장가에 둘러선 사람들은 누가 치기 시작했는지 모를 박수를 따라서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는 치고 있는 박수와는 다르게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들고 있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 입산자의 집안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양효석의 여러 행위들은 단순히 자기과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어, 아직 시간이 멀었긴 합니다만, 부대를 환영하는 뜻에서 장병들의 저녁을 읍민후원회에서 장만하면 어떨까 합니다."
조회대를 내려온 양효석에게 다가서며 읍장이 말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다 민폐 아닙니까. 우리 집에다 돼지 열댓 마리 잡으라고 진작 일러놨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지요."
읍장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다른 기관장들이나 유지들도 놀라고 무색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사령부는 벌교에 설치하겠소. 우선 경찰서로 갑시다."
양효석의 말이었다. 교문을 향해 걷고 있는 그는 자신이 벌인 일들의 반응에 대해 꽤나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기관장과 유지들은 저것이 나이에 비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식의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자신의 소대병력을 이끌며 어둠을 헤치고 있었다. 비무장 여섯을 제외시킨 대원은 그 자신까지 합해 스물이었다. 스물 중에는 여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 외서댁이었다.
"오늘 출동은 돌격전인디요."
출발을 앞두고 천점바구는 그녀에게만 따로 말했다.
"또 나이 작은 오빠노릇 허고 잡아 그요?"
외서댁은 눈을 흘기며 하늘에 대고 헛바람 새는 웃음을 웃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였다.
"동무, 오늘은 행군질도 먼디다가, 상대도 검은 개가 아니라 노란 개란께라. 기관총에 수류탄으로 무장허고 말이여라."
"나가 기관총 무섭고 수류탄 무서왔슴사 작년 십이월에 폴세 하산허뿌렸을 것이요. 나야 대포도 안 무선 사람잉께. 벌교 바람이나 쐬게 내빌라두씨요."
"참말로 소 고집이요이."
"사상성이 투철헌께라."
외서댁이 오금을 박으며 짖궂은 웃음을 지었다. 천점바구가 어렵고 위험한 출동에서 외서댁을 빼내려고 하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군당에서 하대치 동지와 맞먹는 무게를 지녔던 강동식 동지의 아내라는 것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다. 하대치 동지나 강동식 동지는 염상진 위원장 다음으로 그가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강동식 동지의 그 허망한 죽음은 그를 얼마나 슬프고 안타깝게 했는지 몰랐다. 강동식 동지는 목숨을 바칠 정도로 외서댁을 귀하게 여겼고, 외서댁은 또 남편 대신으로 입산투쟁을 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그런 외서댁을 언제나 보호해야 될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외서댁 동무럴 워째 천 동무 소대에 배치허는지 알아묵겄소?"
하대치 동지의 말이 그 책임감을 더 무겁게 했다. 그러나 외서댁은 한 번도 천점바구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구구식 장총을 들고 어떤 출동에나 몸 사리지 않고 나섰다. 천점바구는 매번 신경이 쓰이는 반면에 그런 외서댁의 용맹성이 소대원들의 용기를 고무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아직까지도 외서댁에게 가벼운 카빈총을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눈에 익고 발에 익은 산길을 가면서도 신경은 줄곧 곤두세우고 있었다. 앞을 경계하면서, 걸음이 빨라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었다. 앞사람의 등에 종이 한 장씩을 붙여 행군대열을 유지하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칫 자신의 발 빠르기로 걸었다가는 대열이 끊길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종이의 빛이라는 것은 십 보 이상 간격이 벌어지면 어둠에 묻히기 마련이었다. 종이가 없을 때는 고사목을 쪼개 그 속살을 손바닥 크기로 얇게 떠서 등에 매달았다. 그 효과도 종이와 다름이 없었다. 천점바구는 특히 야간행군을 할 때는 외서댁을 대열의 가운데다 세웠다. 전방의 기습에 대비해 안전하기도 했고, 행군 중에 절대로 조는 일이 없는 외서댁에게 바로 앞의 네 사람 사이에서 대열이 끊기는 것을 막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사람을 한 묶음으로 해서 조장을 중간 중간에 세웠으니까, 소대 이십 명이 일령종대를 이룬 행군에서 외서댁 같은 임무를 맡은 대원은 셋이 더 있었다. 야간행군에서 위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적의 기습을 받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누군가가 졸다가 대열이 끊기는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어이없고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위험이었다. 대열의 중간에서 어느 한 사람이 졸며 걷다가 주저앉게 되면 그 다음 사람들은 그저 휴식인 줄 알고 따라서 주저앉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열은 영락없이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산이 겹겹인 어둠 속에서 그런 식으로 몇십 분이 지나버리면 앞서간 대열에서도, 뒤떨어진 대열에서도 한동안 서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뒤떨어진 대열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다급한 마음들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적에게 노출이 되는 경우 몰살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경험 없이 시작된 사십팔, 구년의 초기투쟁에서 그런 실수로 빚어진 희생이 적지 않았었다. 졸음의 위험에 대해서는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매일 두세 시간씩 실시되는 학습을 통해서도 끝없이 강조되고, 반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졸면서 걷는 대원들은 꽤나 많았다. 그것은 사상성의 빈약도, 정신무장의 해이 때문도 아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언제나 체력의 한계를 넘고 있는 빨치산투쟁 자체에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날마다 산을 타고, 야간투쟁을 주로 해야 하는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졸음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대원들 사이에서는 수면투쟁이니 졸음투쟁이니 하는 우스갯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천점바구는 어둠 속을 유심히 살피며 걸음을 늦추었다. 군당위원장 오판돌과 접선하기로 된 산골짜기가 멀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완전히 멈추며 몸을 뒤로 돌렸다.
"휴식, 뒤로 전달."
그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다. 그 속삭임은 빠른 줄잇기를 하며 뒤로뒤로 전해졌다. 뒤에서 무슨 상황이 생겼을 때도 같은 방법으로 앞으로 전달이 이우어졌다. 천점바구는 작전에 돌입하기 전에 잠깐이나마 대원들을 휴식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담배 한 대 짬의 휴식이 얼마나 새 기운을 돋우는지 그는 오랜 투쟁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야간 행군 중에는 절대로 담배를 피울 수가 없으니까 대원들은 휴식하는 동안 거의 잠을 잤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는 잠은 맛으로는 꿀맛이 댈 것이 아니었고, 몸 가뿐하게 기운을 돋우는 데는 그 어떤 명약도 당할 도리가 없었다. 대원들의 태반은 꼭 거짓말처럼 앉자마자 잠이 들었고, 어떤 사람은 코까지 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천점바구는 소대장직을 맡고부터 그 맛있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눈을 붙이려 하면서도 간부들이 지치지 않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건 책임감이 만들어 내는 힘이었다. 입산투쟁이 시작되면서 그에게는 여러 개의 별명이 붙여졌다. 총각대장, 올빼미, 불가사리가 그것이었다. 구빨치 시절에 군당에서 붙여준 새끼대장까지 합하면 넷이나 되었다. 조계산지구에서 가장 나이어린 소대장이라서 총각대장이었고, 밤눈이 유난히 밝아 올빼미였고, 전과를 올리면서도 사상자를 거의 내지 않아 아마 적의 총탄을 들이마셔 버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불가사리였다. 염상진 대장처럼 되는 것이 꿈이라서 붙여졌던 새끼대장은 이제 불리지 않았다. 그 별명을 불러주었던 나이 많은 동지들은 구빨치 투쟁을 통해서 거의가 죽어간 탓이었다. 그 어떤 별명이든 싫은 것이 없었지만, 새끼대장이 없어져버린 것을 그는 못내 아쉬워했다. 그건 죽어간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천 동무야 투쟁경력으로 치나, 밤눈 볽아 조계산서부텀 군당 지광산꺼지 훤허게 뀌는 것으로 보나, 발 빨르고 용맹시런 것으로 보나 대대장 아니라 연대장깜으로도 넘치시. 근디, 동무가 저질른 그 과오 안 있드라고? 고것 땀세 천상 소대장부텀 시작혀야 되겄구만. 당 결정을 접수헐 수 있을랑가?"
기동대장 하대치가 따로 불러 한 말이었다.
"하먼이라, 하먼이라. 지가 저질른 과오 지가 아는디라."
천점바구로서는 소대장이나마 맡겨주는 당의 결정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당이 특전을 베풀어 석방시킨 사람들을 넷이나 쏘아 죽인 것은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큰 과오였다. 그런데 당은 목숨을 구해주었고, 마침내 소대장직까지 허락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반당적 과오의 청산을 뜻하는 것인 동시에 당원이 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린 것을 의미했다. 천점바구는 이를 맞물며 스스로 각오를 다짐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열렬한 투쟁으로 당의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구빨치 투쟁을 통해서 몸에 익힌 전술과 지형지세, 남달리 밝은 밤눈, 펄펄한 젊은 기운, 새롭게 세운 각오, 소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런 것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 결과 그는 전과를 높이면서도 사상자는 제일 적게 낸, 지구내의 최강 소대를 탄생시켰다. 그의 소대 별명은 철갑소대였다. 자기네 소대가 그 명예로운 별명을 얻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 대원이 바로 외서댁이라는 것을 천점바구는 잘 알고 있었다.
"소대장 동무, 나럴 여자로 시퍼보덜 마씨요이. 나넌 인자 손꾸락에 봉숭아물이나 딜임서 좋아라고 시시덕이든 실웂은 가시네도 아니고, 치자물 딜인 모시 치매저구리 부러바허든 속창아리 웂은 지집도 아닝께라. 나넌 우리 냄편이 워째 좌익얼 혔는지 알게 됨스로 딴 사람으로 변해뿌렀소. 나도 당당헌 전사가 되고 잡은께 자꼬 여자로 볼라고 허덜 마씨요이."
외서댁은 정색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워째 그 어린 나이에 빨갱이질로 나섰드라냐 혔등마 백정자석으로는 그 상호가 지맘때로 장군상호로 생게묵어부렀당께로"
이런 농담을 해서 대원들을 웃기기도 했고,
"백정자석에다가, 밤눈 볽겄다, 생간 많이 묵어 기운 씨겄다, 천생에 빨치산팔자로 태인 사람이여."
이런 말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사실 빨치산 활동에서 밤눈이 밝은 것은 남보다 큰 무기를 하나 더 지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밤눈이 유독 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만 되면 완전히 장님이 되어버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발바닥이 편편해 빨리 오래 걷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빨치산 생활에는 선천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이었다. 천점바구는 자신의 밤눈 밝은 것을 더없이 큰 재산으로 여기며 야간투쟁에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출발, 뒤로 전달."
천점바구는 옆의 대원을 흔들며 다시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다시 입에서 입을 건너 뒤로 옮겨갔다. 야산 하나를 돌자 접선지점이 나타났다. 천점바구는 부대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혼자 접선지점을 향해 몸을 바짝 낮추고 이동해갔다. 적에게 정보가 누설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산밭 위로 무덤이 나타났다. 양쪽에 산등성이를 낀 골짜기의 어둠 속에서는 무슨 소리 한 가닥 들리지 않았다. 그는 무덤가를 더듬어 작은 돌 두 개를 주워들었다. 하나를 바위를 겨냥해 던졌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내쉬며 두 번째로 던졌다. 곧 저쪽에서 날아온 돌이 무덤가에 떨어졌다. 하나, 둘, 셋! 합해서 다섯, 암호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꼬막, 꼬막!"
저쪽에서 들리는 낮고 긴장된 소리였다.
"탁주, 탁주!"
천점바구는 비로소 몸을 일으키며 이쪽의 암호를 댔다. 위험을 완전 제거하기 위한 이중암호였다.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빠르게 이동해왔다.
"잉, 천 동무 왔구만. 애썼소."
군당위원장 오판돌이었다.
"야아, 인자부텀 써야제라. 근디 워쩔라고 위원장님이 여그꺼지 직접 오시고그러요?"
천점바구의 걱정스런 말이었다.
"나가 시방 뒷전치고 앉았을 기분이겄소? 그라고 급허고 중헌 때넌 앞차고 나스는 것이야 염상진 동지가 갤친 것잉께 아무 걱정 마씨요."
"알것구만이라. 근디 적정을 워떤게라?"
"병력은 똑겉이 일개분대고, 석거리재 몬댕이, 광주 쪽으로 오른쪽 깔그막에 전호럴 구축허고 기관총얼 내걸었소. 긍께 우리 군당에서 왼쪽 깔끄막으로 올라챔스로 공결헐 것잉께, 천 동무는 오른쪽에서 내리까시오. 글먼 양쪽서 협공당헌 그눔덜이 못 견디고 쨀 디넌 읍내 쪽뿐이다 그것이요. 그눔덜이 꾸불꾸불헌 잿길얼 내리뛸 판잉께. 우리 군당얼 반으로 갈라 매복시켰다가 싹 떼레잡아뿌는 것이요."
"야아, 작전은 존디라, 근디 군당이 너무 위태롭덜 않겄는게라? 왼쪽 깔끄막얼 타고 올른다먼 적허고 정면으로 맞다띠리는 것인디, 적이 기관총 쏴 질르고, 수류탄 퍼붓고 허먼 고것이 올매나 위태롭겄소."
천점바구는 그쪽의 지형을 환하게 떠올리며 말했다.
"긍께로 나가 철갑소대럴 불른 것 아니겄소? 우리 군당은 깔끄막얼 올라채서 바로 신작로로 나스는 것이 아니라 깔끄막 끝머리서 일단 정지혀갖고 몸 숨킴서 총질얼 해댄다 그것이요. 글먼 적들이야 우리 쪽에 대고 넋얼 뺄 것이고, 그 틈에 천 동무가 뒤에서 들이치는 것이요. 그리되먼 즈그덜이 몰살얼 허든지, 뽕빠지게 째든지, 양단간에 하나 아니겄소?"
"고런 이중작전이면 되얐구만요. 근디, 적은 거그 말고 워디다 또 진얼 쳤제라?"
"이, 횡계다릿목이시."
"거그먼 멀도 않고, 가찹지도 않고, 한바탕 벌일 만허겄구만이라."
"되얐소. 우리 군당이야 배치 다 끝냈응께, 천 동무 소대만 자리잡으먼 시작이오. 갑시다!"
천점바구는 소대를 이끌고 오판돌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거점이 노출되어 소화와 들몰댁 등 네 사람이 잡혀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오판돌은 그만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고 말았다. 거점의 노출로 입은 피해도 피해였지만 소화와 들몰댁이 잡혀간 것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두 여자를 적의 손에 넘겨준 것은 군당위원장으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업태만의 과오였던 것이다. 당적 입장을 떠나서 사적으로 보더라도, 한 여자는 동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자는 동지의 아내로서, 그는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임신한 몸이 어찌될 것이며, 하 동무를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그는 그 생각만 하면 당장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그가 더 미칠 것 같은 것은 어디가 잘못되어 거점이 노출되었는지가 밝혀지지 않는 점이었다. 군당의 선에도, 다른 거점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단 하나, 그 세포의 변질이었다. 그러나 그들 내외는 그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들이었다. 오판돌은 아무런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 그 불상사를 조계산지구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소화와 들몰댁이 조계산지구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사고의 사실기록과 함께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내용이었다. 당의 소환을 각오한 그는 네 사람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서를 거쳐 보성경찰서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거점노출의 원인도 알아내게 되었다. 그는 뒤늦게 땅을 쳤다. 벌교, 보성의 방위대가 각 면단위에 침투되고 있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적들의 작전도 예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의외의 지시가 내려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투쟁 사업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그의 죄책감은 더 커졌고, 적에 대한 증오는 더 끓어올랐다. 자기 손으로 네 사람을 구출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는 뒤늦게 밝혀낸 거점노출의 원인보고와 함께, 구출작전으로 보성경찰서를 깔 계획이니 지구의 기동대 지원을 바란다고 했다. 지구의 회답은 또 의외였다. 성공률 희박하고, 빨치산 투쟁방법으로 적합치 못함이었다. 오판돌은 한숨을 토하며 계획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대치 동지가 이 사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약 알고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그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토벌군이 군에 주둔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며칠 만에 석거리재에 토벌군의 진지가 구축되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적극작전이었다. 용감하다고 할 수도 있었고,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는 전진배치였다. 어쨌거나 적이 거기에 고정 배치된다는 것은 조계산지구와 유치지구가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이었다. 그 진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군당은 군당대로 반 고립상태에 빠지고 두 지구는 지군대로 해방구 일부를 위협 당하게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진지는 파괴시켜야 했다. 그 진지의 파괴는 투쟁의 장애물 제거인 한편 주둔군의 기를 꺾는 이중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지구에 보고했다. 그제서야 지구의 지시는 예상대로였다. 조속히 시행할 것.
"우리가 총얼 한바탕 쏴질러 앞에만 정신풀 적에 쌈빡하게 내레쳤뿌시오. 매복조가 따로 있응께 너무 위태롭게 공격하지는 말고."
오판돌의 최종적인 작전 지시였다.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 수류탄 조심시키씨요이."
천점바구도 끝다짐을 했다.
"알겄소. 이따가 만냅시다."
오판돌은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점바구는 소대를 사개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적의 진지를 향해 반원형으로 배치시켰다. 사격의 집중효과를 내기 위해서였다. 진지를 얼마나 튼튼하게 구축했는지 모르지만, 분대병력이 포위상태의 협공을 받고 끝까지 진지에서 버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협공당하는 것을 아는 순간 누구나 도망칠 생각을 먼저 한다는 것을 천점바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별루 어려울 것 없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전투란 적의 움직임에 따라 순간순간 상황이 변하게 되어 있었다. 새벽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외서댁은 땅에 엎드린 채로 하늘끝자락에 박힌 별들을 보고 있었다. 입산하기 전에는 몇 번이나 새벽별을 보았을까. 입산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에 수없이 새벽별을 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벽별을 유심히 보아 버릇하면서 언제부턴가 그 별들이 가슴에 담겨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음성으로, 남편의 체온으로, 남편의 마음으로, 남편의 생각으로... 그리고 남편에 대한 죄의식이 차츰차츰 남편이 걸어간 길로 바뀌어갔다. 그래서 막연한 슬픔이던 새벽별들은 남편을 만나는 먼 그리움으로 변했다. 남편은 혁명의 별이 되어 저리 반짝이는 거라고 그녀는 믿게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눈과 마음이 열려 위대한 인민혁명의 세상을 보고, 믿을 만큼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외서댁은 눈길을 돌려 켜켜이 쌓인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읍내는 보이지 않았다. 새벽별들이 떨어져 박힌 것처럼 어둠 속에 몇 개의 불빛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가 읍내 복판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눈길을 끌어당겼다. 굽이굽이 도는 잿길을 허리에 감은 산이 흘러내리다가 들녘이 펼쳐지는 저 아래 짬이 천장마을이었다. 그러나 천장마을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젖비린내를 물큰 맡았다. "엄니이- 가지 말어어." 울음에 섞인 긴 외침도 들려왔다. 딸아이의 냄새고 울부짖음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묻었다. 이마에 총의 딱딱한 감촉이 부딪쳤다. "니가 미쳤냐, 설쳤냐. 새끼덜 둘이나 두고 워디로 간다는 것이다냐!" 어머니가 치마를 거머잡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따당. 땅땅땅땅... 외서댁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총을 움켜잡았다.
"공격 준빗!"
천점바구의 탄력으로 튕기는 소리였다. 따당탕탕탕탕... 기관총 소리가 숨가쁘게 터지고 있었다. 소총 소리가 거기에 휘말리고 있었다. 꽈광! 폭음과 함께 부챗살처럼 퍼지는 불살들이 어둠을 찢었다. 수류탄이었다.
"공격, 공격!"
방아쇠를 당기며 천점바구가 외쳤다. 외서댁도 방아쇠를 당기며 땅을 박찼다. 기관총소리와 소총 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뒤엉클어져 어둠을 흔들어댔다. 산들이 메아리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엎드렷!"
천점바구가 외쳤다. 비탈을 타 내리던 소대원들이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했다. 꽈광! 저 앞에서 수류탄이 터져 올랐다. 수류탄은 두 개, 세 개, 연거푸 터졌다. 그러나 피해를 입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수류탄이 터지는 사이에 기관총 소리가 멎어 있었다. 천점바구는 적들이 진지를 탈출하고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연거푸 터진 수류탄은 위협투척이었던 것이다.
"저기다! 저기 도망간다. 돌진 사격! 돌진 사겨억!"
천점바구는 다시 방아쇠를 당기며 비탈을 내닫고 있었다. 진지를 벗어난 그림자들이 비탈을 굴러 내리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소대의 집중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쪽에서 비명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천점바구는 적의 진지에 이르러 있었고, 신작로를 내뛰던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동무, 천 동무! 우리 생각대로 아조 딱 들어 맞어뿌렸소. 뽕빠지게 삼십육계헌 눔덜이야 쪼깐 있으면 우리 매복조가 싹 치워뿔 것잉께."
신작로를 가로지른 오판돌이 비탈을 타고 오르며 숨차게 말하고 있었다. 그 뒤를 부하들이 우르르 따르고 있었다.
"야아, 부대에 무신 탈 웂으신게라?"
천점바구는 이마에 내밴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한겨울에도 작전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이마에는 땀이 끈적하게 내배고는 했다.
"잉, 아무 탈 웂소."
미처 확인해볼 겨를도 없었으면서 오판돌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땅땅땅땅... 총소리가 울려왔다.
"매복조요!"
오판돌의 기쁨에 찬 소리였다. 진지와 주변의 수색이 시작되었다.
"위원장님, 쩌그 저것 좀 봇씨요!"
누군가가 소리쳤고,
"이, 불빛이 욜로싹 다 비치는디."
"본대가 치고 올랑갑제?"
하는 말도 뒤따랐다. 오판돌은 읍내 쪽을 쳐다보았다. 네댓 개의 불빛이 엇갈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횡계다리께라고 짐작했다.
"암시랑 않은께 싸게싸게 뜰 채비덜 허씨요."
오판돌이 일렀다. 매복조 쪽에서 울리던 총소리가 그쳐 있었다. 진지에서 노획한 무기는 기관총과 총알 세 상자, M1 한 자루와 총알 두 상자, 수류탄 두 개였다. 신작로에는 도주하던 두 명이 죽어 있었다. 거기서 M1 두 자루를 노획했다.
"시 눔밖에 못 잡었구만이라."
매복조가 그 증거처럼 카빈 한 자루와 M1 두 자루를 내놓았다.
"어허 참, 분대먼 아홉일 것인디, 이리되면 반타작 아니라고?"
오판돌은 짭짭 입맛을 다시다가 혀를 차다가 했다.
"요만허먼 섭헐 것 웂응께 싸게 막음하고 뜹시다."
천점바구는 오판돌을 일깨웠다. 운반의 어려움도 있고 해서 기관총과 그 탄알은 일단 군당이 맡기로 했다. 소총은 상례에 따라 지구에 네 자루, 군당에 두 자루로 나누었다. 천점바구는 외서댁만을 생각하며 눈 질끈 감고 카빈부터 집어들었던 것이다. 군인을 상대하고 보니 구하게 된 카빈이었다. 수류탄 두개로는 적의 진지를 폭파하기로 했다. 그런데 인원점검을 하고 나서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다. 군당에서도, 천점바구의 소대에서도 한 명씩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원이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군당의 한 대원은 비탈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그런데 소대원은 아무데도 없었다. 천점바구는 분명 사상자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대원은 유동수였다.
"어여 뜹시다. 알 만헌께."
천점바구의 침통한 말이었다. 그는 유동수가 고의로 부대를 이탈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전선이 다시 멀어지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사령부에서 벌써 주시해온 문젯거리가 자기소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천점바구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적의 진지에서 수류탄이 터져 올랐고, 그들의 모습은 삽시간에 어둠 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9. 다시 삼팔선 전선
심재모는 최전선 대대장으로서 전쟁의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사단에서 하달되는 작전을 분석해보고, 대대전투를 지휘하고 하면서 명확하게 얻어진 결론을 없었다. 삼팔선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전선에서 전투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전투의 치열함에 따라 사상자는 속출하고 있었고, 힘의 수평상태에서 비롯되는 치열한 전투의 연속은 쌍방이 인명피해를 내는 것에 비해 전선의 변화는 별달리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들을 종합해보며, 전쟁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위치에 전선을 구축한 상태에서, 소모, 공방전의 양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남쪽에서 밀어올리려고 하면 북쪽에서는 밀리지 않으려고 하고, 북쪽에서 밀어 내리려고 하면 남쪽에서는 밀리지 않으려고 하고, 그 아이들의 밀치기 같은 공방전 속에서 군인이라는 양쪽의 젊은이들만 숱하게 죽어가고, 보충되고 있었다. 양쪽이 서로 양보가 있을 수 없는 그 치열함은 전쟁의 초기에 내건 명분은 다 없어지고, 전쟁의 막바지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땅뺏기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심재모는 그런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최전선에 와서야 자신이 볼 수 없는 자신의 기록카드가 꽤나 좋지 않은 쪽으로 기록되었을 거라는 점을 상기했다. 그러나 연대의 작전참모나 정보참모 같은 사람들의 생각도 자신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무심코 내놓는 말에서 심재모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북진통일 말로만 하는 것 아닌가요? 미국은 도대체 어쩔 심판인 것 같은가요? 싸우기 지쳤으면 무기라도 우리한테 속 시원하게 넘겨줘야 어찌 좀 해볼 것 아니냔 말요."
"워커가 죽고 리지웨이 장군이 와서 중공군을 이만큼 밀어젖힌 것도 천만다행이지요. 그런데 눈치가 맥아더 장군도 자기 뜻대로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아래인 리지웨이야 더 말할 것이 없지요. 형편이 그 모양이니 전쟁이 시원하게 풀릴 도리가 없는 일이죠."
"트루먼 대통령이란 사람은 좀 곤란해요. 맥아더 장군 같은 영웅이 하는 대로 내버려둬야지 왜 자꾸 간섭을 하느냐 그 말이오. 밀릴 때 막 밀어붙였어야 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오."
"글세 말입니다. 미군 CIC쪽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어보면, 중공과 쏘련이 힘을 합쳐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까봐 염려하는 모양이더군요. 대통령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지요. 정치인과 군인의 입장이 서로 다르니까요."
"형편없는 졸장부로군. 원자폭탄은 뒀다 어디다 쓴단 말이오? 그나저나 당장 우리가 죽을 판 아니오. 이거."
심재모는 듣기만 했지 그런 말에 되도록 끼어들지 않았다. 미국대통령 트루만과 UN사령관 맥아더가 서로 의견이 엇갈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고급장교들이 거의가 알고 있었다. 그건 전쟁에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계급이 높을수록 관심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교들은 당연히 맥아더의 편이었다. 겨울이 지났으니 다시 한 번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압록강, 두만강까지 밀어붙여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트루만의 반대로 전선은 소강상태로 빠지며 소모적인 공방전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재모도 군인인 이상 정치인 트루만의 편일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맥아더가 위대한 장군으로 판 박혀 있었고, 맥아더의 적극적인 북진작전을 역시 영웅다운 생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도 군인의 논리인 싸움의 승리에 집착해 있었다.
심재모는 대대장으로서 예하부대에 강력하게 내리고 있는 명령이 있었다. 참호파기였다. 그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명령을 강조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모적인 공방전에서 생명을 지키는 데 그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전선에서는 그 일이 의외로 소홀하게 어물어물 넘겨지고 있었다.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정훈교육만큼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목숨을 내건 싸움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달픈 노동인가는 새삼스럽게 따질 필요도 없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땅파기를 한다는 것은 분명 고역이었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직사화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없는 한 참호파기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대대전선을 돌며 직접 확인하고 독려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을 잠깐씩 교육하기도 했다. 결국 참호파기는 병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면서, 부대의 전력약화를 막는 일이었다. 실전경험을 가진 병사들이 죽어가는 만큼 신병들이 보충되면 부대의 전력은 따라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에서 경험이라는 것은, 아이들 나이 먹는 데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르다는 말을 실감시켰고, 고참 하사관 한 명과 신병 한 트럭과 안 바꾼다는 말이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심재모는, 참호는 장병 여러분의 생명을 지켜주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요지의 말을 하고 다녔는데 어느새 그 말은 참호는 어머니의 품, 참호를 파자하는 말로 압축되어 대대 하사관들의 입에 붙어 다니게 되었다.
심재모의 대대는 오백고지를 확보한 상태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적도 비슷한 높이의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대치상태에서 신경전의 일종인 포사격과 소조의 야간기습이 사나흘 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고지점령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개대대를 투입하여 최단시간 내에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연대의 다른 대대도 같은 작전에 나서고 있었다. 전선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금방 감지할 수 있었다.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오백고지를 최단시간 내에 점령하라니까 작전이고 뭐고 있겠습니까. 그냥 막 돌격전이지요."
삼대대장의 말이었다.
"그렇지요. 포 지원을 충분히 한다니까 고지를 좌우로 양분해서 돌격을 칠 수밖에 없지요."
심재모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홉시 정각에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적의 고지 삼부능선 부근에서부터 포탄들이 불꽃 낭자한 쥘부채들을 쫙쫙 펼쳐대고 있었다. 심재모는 대대에 진격명령을 내렸다. 포사격이 중턱에 이르기 전에 고지의 아랫자락에 병력이 도착해야 했다. 이개대대 병력은 고지를 향하여 직진하기 시작했다.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의 별로 넓지 않은 평지는 금방 군인들로 뒤덮였다. 즐비하게 늘어 놓인 시체가 실제 수보다 훨씬 많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듯 무장한 군인들의 움직임도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산개한 병력의 끝이 평지의 중간쯤을 넘어섰을 때 적진에서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박격포탄은 돌진하고 있는 군인들의 여기저기에 마구 떨어져 폭발하고 있었다. 폭음에 비명이 뒤엉키고, 폭풍에 휩싸인 몸뚱이가 붕 떠올랐다가 곤두박질쳐졌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팔이 떨어져나가고, 배가 터져 창자가 쏟아지고, 허벅지가 너덜너덜 찢겨져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히려 군인들의 돌진은 더욱 빨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내려진 명령은 고지점령이었고, 그들의 임무는 적진에서 날아오는 폭탄을 뚫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부상자에게 매달려 돌진을 중단하는 것은 명령불복종이었다. 전쟁에서 명령불복종은 즉결처분이었다. 부상자를 돌볼 책임은 위생병의 것이었다. 심재모는 망원경을 옮겨가며 부하들의 전진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쪽은 어때요?"
삼대대장이 망원경을 눈에 댄 채 물었다.
"선발대가 지금 막 목표지점에 접근하고 있군요."
심재모가 망원경을 눈에서 떼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대대도 비슷해요. 중대장들을 호출해야겠소."
"그러지요."
두 사람은 망원경을 내리고, 각기 무전병에게 중대호출을 명령했다. 적진의 박격포공격은 멎어 있었다. 이쪽의 포탄은 고지의 중턱에서 작렬해대고 있었다.
"일중대, 수고했다. 전열을 정비하라. 작전개시 전과 동. 수고하라."
심재모는 중대마다 같은 명령을 내렸다. 조금 있다가 아군의 포격이 멎었다. 그는 망원경을 얼른 눈으로 가져갔다. 망원경 속에서 군인들이 일제히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렌즈의 거리가 멀어지게 조절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대가 맡은 고지의 왼쪽 반을 부하들이 채우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의 렌즈를 조절하면서 슬픔 같은 그리고 뜨거움 같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부하들이 적진으로 뛰어들고 있는 그 모습이 비장감과 동지애를 한꺼번에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렌즈를 조절하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며 막힌 소리를 토했다. 클로즈업 된 렌즈 속에서 병사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핑글 돌아 쓰러지는데, 입이 찢어지도록 벌어진 그 얼굴은 눈이 질끈 감긴 채 찡그려질대로 찡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병사는 이내 렌즈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적으로 잡힌 그 병사의 모습은 무성영화의 한 장면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심재모는 그 병사의 비명이 가슴을 찌르며 들려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뭐요?"
옆의 삼대대장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심재모는 망원경을 눈에 댄 채 대꾸했다. 그는 충격 때문에 망원경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병사를 찾아 망원경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렌즈에 잡히는 건 마른풀들과 나뭇가지뿐이었다. 그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려다가 주춤했다. 아니, 저게 뭐지? 렌즈의 왼쪽 가장자리로 색다른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 눈길을 모았다. 그것은 반쯤 열린 꽃송이, 진달래였다.
"뭐라구? 또 지원은 안 돼, 포대는 딴 고지를 지원하고 있어. 알았어, 알았어. 노무자들 인솔하고 내가 직접 가겠어."
삼대대장이 무전기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거, 괴뢰군 놈들 저항이 완강한 모양이오. 빨리 탄약 운반을 해야겠소. 포 지원을 못할 형편이니 수류탄이라도 뒷대야 할 것 아니오?"
삼대대장의 말에 심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재모는 무전병에게 중대장들을 불러내게 했다. 전황은 역시 용이하지가 않았다. 현장으로 가겠다는 것을 알리고 무전을 끊었다.
"사단 병참부에서 노무자들을 출발시켰으니까 곧 도착할 거요. 출발 준비합시다. 괴뢰군들이 저 고지를 뺏기면 삼십 리를 뒤로 밀리게 되니까 악을 부릴 수밖에 없소."
삼대대장이 담배를 빼들며 말하고 있었다. 벌써 담배를 피우고 있던 심재모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망막에 박혀버린 그 병사의 마지막 모습이 그때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삼십 리 전진을 위한 고지 점령과 삼십 리 후퇴를 하지 않으려는 고지 사수, 그것이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과 맞바꿔야 할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냐는 말을 그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말은 전쟁의 현장에서, 더구나 지휘관으로서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고, 상대방 또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대대 지휘관이었다. 모든 전선이 삼팔선을 중심으로 공방전 상태에 빠진 것을 보며 북쪽의 해방전쟁이란 명분도, 남쪽의 멸공통일이란 명분도 다 사라져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했던 막연한 의구심이 비로소 보다 분명하게 땅뺏기놀이로 변한 것을 확인하면서 이 전쟁에 대한 회의가 갑자기 커지는 것을 심재모는 느끼고 있었다.
"갑시다. 노무자들이 도착했소."
삼대대장이 몸을 일으켰다. 심재모도 철모를 들고 일어났다. 그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M1소총이 들려 있었다. 노무자들은 트럭에서 부산스럽게 탄약상자들을 내리고 있었다. 일개소대 병력의 군인들이 그 작업을 돕고 있었다.
"아니, 쩌어 머시냐, 사령관님 아니신 게라?"
노무자 한 사람이 계급장 없는 모자를 벗어들며 다가서고 있었다. 그 독특한 어감의 전라도 말을 듣는 순간 심재모의 뇌리에서는 갈대밭 무성한 긴 포구가 여린 갯내음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벌교 분이십니까?"
망설임 없이 심재모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워메, 사령과님이 맞으시제라? 나 벌교사람 노덕보라고 허는구만요."
노덕보가 꾸벅 허리를 굽혔다.
"아, 그러시군요. 이 멀리까지 오셔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심재모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벌교사람이라는 반가움에 노덕보의 손을 잡았다.
"고상이야 다 항꾼에 허는 것잉께라. 사령관님언 그간에 훨썩 높아지셨구만이라이."
노덕보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알은 체를 했다.
"예, 그리 됐습니다. 그런데, 댁이 벌교 어디신가요?"
심재모는 마주 웃으며 물었다.
"야아, 회정리 삼군디요."
"예에, 그러시군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는 심재모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워째 그러신당가요?"
"아닙니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그때 출발준비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사령관님, 영판 반갑구만이라이."
노덕보는 계속해서 사령관님이었다.
"예, 참 반갑습니다. 건강하세요."
심재모가 뛰어가는 노덕보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순덕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읍내안통 사람이기를 막연하게 바랐고, 그를 통해서 순덕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전출 올 때 이삼 일의 여유만 있었더라도 순덕이가 그곳에 그대로 있는지 찾아가 보았을 것이다. 심재모는 순덕이의 그 순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지우며 철모를 고쳐 썼다.
고지는 다섯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희생자는 엄청났다. 대대의 사분의 일의 병력인 백이십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삼대대가 입은 피해도 비슷했다. 그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그러나 고지 전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적들은 밤을 이용해서 탈환전투를 감행해왔다. 조명탄이 끊임없이 터져 오르는 속에서 전투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지형에 따라서 육박전이 벌어지는 곳도 있었다. 먼동이 터올 무렵까지 또 다섯 시간 정도를 싸워 고지를 가까스로 지켜냈다. 산은 폭격으로 찢어지고, 시체들로 뒤덮이고, 피로 범벅이 되고, 피비린내로 에워싸였다. 수류탄 파편이 박힌 팔을 동여맨 심재모는 안개 자욱하게 담긴 산골짜기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 안개마저 핏빛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치른 전투가 이틀 전인 삼월 이십사일 맥아더가 내린 삼팔선 이북의 진격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긍께로 나가 억지소리럴 허는 것인지 아닌지넌 조단조단허니 사무적으로, 권리적으로 또 사람적으로 따지고 보자 그것이요."
염상구는 문자를 써서 권리적이라고까지 하고는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을 사람적이라고 제멋대로 적자를 남발하고 있었다.
"아 글쎄 시끄럽다니까.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남인태가 눈을 부라리며 내질렀다.
"아니 참말로 사람얼 요리 막보기로 헐라요? 경찰서장이먼 단 줄 아는 모양인디. 나도 남 서장맨치는 애국헌 애국자고, 나라가 인정헌 방위대장이다 그것이요. 방위대장이 청년단장허고 워칳게 달븐지야 남서장이 더 잘 아실 것인디. 이 난리 통에서 서장허고 방위대장허고 워떤 것이 더 씬지 한분 박치기 혀보고 잡소오?"
염상구는 태도를 바꿔 노골적인 야유로 맞대거리를 하고 나섰다. 남 서장은 그만 당황하고 있었다. 저 지경으로 나오면 망신당하고 손해 볼 것은 자기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물러서며 저놈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난날 다루던 대로 큰소리 한마디면 꼼짝을 못할 줄 알았는데 상상도 못하게 정면으로 박치고 들었던 것이다. 그가 태도를 바꾼 것은 국민방위군이 생겨나면서 청년단은 청년방위대로 이름을 바꿔 준군사조직이 되었으니 이미 경찰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토벌군이 없다면 또 모르겠는데 토벌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상 염상구의 기를 꺾기는 틀린 일이었다. 그는 물러서더라도 체면 손상하지 않고 물러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좋아, 방위군이 준군사체제니까 토벌군의 통제는 받아도 경찰의 통제는 받지 않는다 그런 말인가?"
"귀 밝아 좋소."
"됐어 그럼. 토벌대장이 정식으로 요구해오면 두 여자를 내주겠어. 아까 자네가 말한 대로 사무적인 일이니까 엄격하게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거야. 내말 알아듣겠나!"
남인태는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아니, 고것이 무신 소리요, 시방."
염상구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이긴 싸움인줄 알았는데 되감기고 말았던 것이다.
"내 말 다 끝났어. 더 이상 떠들면 공무집행 방해야!"
남인태는 돌아앉아 버렸다. 염상구의 옆으로 째진 눈이 더 가늘어지며 남인태의 뒤 꼭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울화만 치솟을 뿐 그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요씨, 워디 두고 봅시다. 나가 한번 뽑은 칼에 피 묻히나, 안 묻히나."
염상구는 얼굴만큼 살벌하게 내뱉으며 서장실을 나갔다. 염상구가 벌교에서 보성까지 일부러 경찰서장 남인태를 찾아와 요구한 것은 소화와 들몰댁을 자기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그런 요구는 나름대로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작년 십일월부터 금년 일월 사이에 입산공비들이 학생들이나 여자들을 하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산을 내려온 사람들에게 경찰이나 청년단의 손이 뻗친 것은 물론이었다. 그들이 밝히는 입산과 하산 이유는 대개, 민학(민주학생운동)이나 여맹에 가입한 것이 겁이 나서 얼떨결에 피했는데 거기서는 더 살수가 없어서, 남편을 따라 멋모르고 들어갔는데 거기가 피난처가 아니라 싸움터가 된다기에 무서워서,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대부분 쉽게 풀려났다.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이 아니라 부모네들의 영향력 덕이었다. 자식을 상급학교에 보낼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모들은 자식의 생사 앞에서 관권과 금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뉘 집 아들은 논 몇 십 마지기 목숨이요, 뉘 집 딸은 쌀 몇 십 가마니 목숨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학생들에 비해 가진 것 없는 여자들이 당한 고초는 말할 수가 없었다. 고문조사를 받으며 분류되었고, 분류에 따라 처형되거나 석방되었다. 석방된 여자들에게는 감시가 붙었다. 이웃사람 그 누구, 이장, 청년단, 경찰 네 겹의 감시였다. 그러나 염상구가 아무도 모르게 사나운 눈빛을 번뜩이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표 나게 하산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하조직을 새로 구축하기 위한 위장 자수로 그렇게 내놓고 하산한 것이라는 의심을 풀지 않은 채, 그는 비밀리에 하산하는 자들이 그전 동네를 피할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경찰과 의논할 것도 없이 눈치 빠른 부하들을 뽑아 각 면에다 파견했던 것이다. 그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이 소화와 들몰댁의 체포였다. 부하한테 그 사실을 보고받은 염상구는 펄쩍 뛸 듯이 기뻐,
"바라, 나가 머라디야! 경찰서장덜 싹 몰아내뿔고 그 자리 다 나가 닦아마시혀야 된단께로."
하며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기분은 부하의 뒤를 잇는 말을 따라 점점 바람이 새는 느낌이었다. 벌교 여자 둘이 하필이면 무당과 하대치의 마누라라는 것이었고, 무당이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던 것인데, 그 무당이 배가 불룩하게 임신을 했더라는 말을 듣자 이게 또 무슨 액운이 낄 징조인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쳤던 것이다. 그리고 강동식에게 총을 맞았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짤짤 흔들며 몸서리를 쳤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서움이 또 덮쳐오고 있었다. 그때 강동식에게 총을 맞고 정신을 잃어 수술실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은 언제 생각해도 끔찍하고 소름끼쳤다. 그날의 지하실이었다. 무당한테서 쏟아지는 피는 멈출 줄을 모르고 지하실 바닥에 번지고 있었다. 자신은 피를 피해 자꾸 발을 옮겨 디뎠다. 그러면 피는 자신을 쫓아오기라도 하듯 방금 피한 자리를 싯뻘겋게 물들였다. 자신은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피는 더 빨리 번져왔다. 더는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철문을 밀었다. 철문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깨로 떠다 밀었다. 그래도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는 발끝을 적시고 있었다. 질겁을 하며 다시 어깨로 철문을 떠다 밀었다. 철문을 열리지 않고 몸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손이며 온몸에 피가 맥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피가 휘돌면서 금방금방 불어나고 있었다. 발목이 잠기고, 장딴지가 잠기고... 펄쩍펄쩍 뛰다가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때까지 쓰러져 있던 무당이 온몸이 피에 젖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피가 아까처럼 아랫도리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는 더 거세게 휘돌면서 무릎을 차오르고, 허벅지를 차오르고... 그때 지하실이 울렸다.
"무당님, 무당님, 살레주시씨요. 잘못혔구만이라. 살레주시씨요."
그러나 그 말은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피에 가슴이 잠기고, 목이 잠기고... 발끝을 세우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휘도는 피에 머리까지 꼴깍 잠기고 말았다.
그 꿈을 깨고 나서 머리를 친 생각이 무당헌테 잘못헌 죄로 해꼬지럴 당려 나가 총얼 맞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완강히 머리를 저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퇴원을 할 때까지 똑같은 꿈에 대여섯 차례나 시달려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 괴로움을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었다. 피를 많이 쏟아 몸이 허해지는 바람에 헛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자위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무당 잘못 건드리면 급살을 맞거나 평생 병신을 면하지 못한다는 말이 덮씌워오고는 했다. 그런 말은 다 자신이 칼을 던지며 유주상을 골탕 먹인 것이나 마찬가지의 괜한 소리라고 부정도 해보았다. 그러나 신대를 잡은 멀쩡한 사람의 손을 와들와들 떨리게 하고, 넋전을 지전으로 달아 올리는 그 묘한 신통술을 부리는 무당과 자기가 같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또 밀려들었다. 혼자서 몸병에 마음병까지 앓고 있는데 외서댁이 자기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직감적으로 외서댁에게 죄 닦음을 하자는 생각부터 하게 되었다. 그 꿈에 시달리면서부터 정하섭의 어머니를 등쳐 빼낸 쌀 스무 가마니도 못내 마음에 걸려왔던 것이다. 그래도 욕심은 죄의식보다 질겨 외서댁에게 주기로 한 쌀은 결국 열 가마니에 그치고 말았다. 또 그런 죄의식 때문이 아니더라도 강동식을 생포하지 못한 바에야 그의 죽음이 꼭 속 시원할 것도 없었고, 자신이 외서댁에게 저지른 잘못이 이래저래 커진 것에 대해 한 가닥 양심의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그런 말못할 속마음을 모르는 어머니는 외서댁에게 쌀 열 가마니 준 것에 대해 그저 복 받게 마음 잘 썼다고 감격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염상구는 남인태에게 즉각 전화를 걸어 그들 네 사람을 잡은 것이 자기 부하임을 못 박고, 부하가 그들을 잡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다음, 그 공로는 바로 자기가 세운 것이니까 그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거봐, 지금 어디다 대고 그런 정신 나간 소리야. 방위대에서 잡았든 농사꾼이 잡았든, 체포된 빨갱이는 모두 경찰서로 넘긴다는 것 몰라서 하는 소리야! 제대로 처리된 공무절차를 왜 뒤집으려는 거야. 니 공로, 내 공로 따지고 앉았는데, 빨갱이 잡는 일이 무슨 애들 운동횐 줄 아나!"
남인태는 여지없는 공박이었다. 염상구는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남인태가 고분고분하게 넘겨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장님이 그리 아구맞게 말씸허실 줄 나 다 알었소. 긍께 나가 허는 말은, 넷 다 넘가도라는 것은 아니고, 여그 벌교사람인 무당허고 또 한 여자, 둘만 넴기라는 것이오. 글먼 공평허덜 않겄소?"
염상구는 미리 준비한 말로 남 서장의 앞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 공무집행을 무슨 장바닥 흥정으로 아나. 전화 끊어!"
남인태는 같잖게도 공무만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염상구는 마음이 다급했다.
"가만 있으씨요, 가만! 무당이 애럴 뱄담서요?"
"뱄지."
"나가 금세 보성으로 넘어갈 것잉께 그 무당헌테 절대로 매타작 놓지 마씨요이."
"뭐라고? 허, 역시 재주 좋네. 진작에 그리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시방 뭐시라고 허요, 재수대가리 웂이. 시상에 쌔고 쌘 것이 여잔디 문딩이럴 올라탔으면 탔제 제수웂이 무당얼 올라탈 것 겉으요!"
"그런데 왜 그리 신짝을 붙여?"
"전화로 질게 말헐 수 웂고, 좌우당간에 그 무당 매 타작 혀서 아그 떨쳤다 허먼 남 서장님 집안 쫄딱 망해뿔고, 식구덜 줄줄이 해꼬지 당헐 것잉께 똑똑허니 명념허씨요이."
"이봐 그따위 재수 없는 소리 때려쳐! 나도 말이야 애 낳아서 키우는 사람인데, 그 여자가 아무리 입산빨갱이라 해도, 무당이든 아니든 따지기 전에 애 배서 배가 불룩한 여자한테 매타작시킬 정도로 인정사정 없는 악독한 인간이 아니라 그 말이야."
"글먼 그 무당헌테 안직 손 안 댔다 그것이요?"
염상구는 아무래도 이상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글세, 그리 알아둬."
남 서장의 어감이 달라진 것을 직감하며 염상구는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워쨌그나 서장님 운수 대통했소. 나가 금세 넘어가겄소."
전화를 끊으며 염상구는 ‘짜석, 드럽게 인정 있는 칙끼 허고 자빠졌네’ 하고 혼잣말을 내뱉으며 심히 아니꼬움을 느꼈다. 이삼 일 안으로 남 서장을 만나러 가려 했었는데 양효석이가 부대를 끌고 읍내로 들어오고 어쩌고 하는 통에 며칠을 지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약간 미심쩍기는 해도 인정상 매타작은 하지 않았다는 남 서장의 말을 들은 터라 마음이 느슨해진 탓도 있었다. 양효석이까지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판에 두 여자를 넘겨받아 자신의 공적도 과시하고, 어떻게 적당히 죽음을 면하게 해줘 마음을 개운하게 하고 싶었는데 남인태는 맞대면을 하고서도 여전히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염상구는 기차를 타고 오며 양효석을 생각했다. 그는 요사이 열이 뻗쳐 있었다. 석거리재의 진지를 공격당한 탓이었다. 그 일은 그에게 이중삼중의 손해를 입힌 셈이었다. 진지를 폭파당하고, 부하들을 잃고, 망신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기세 좋게 석거리재에 진지를 구축하고 나섰을 때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권 서장 자신도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 자기의 용감함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그건 철딱서니 없는 젊은 기분이었을 뿐, 호랑이 잡자고 쥐덫을 놓은 격이었다. 그가 얼마나 열이 뻗쳤는가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총까지 높이 치켜들고 자수해온 들몰의 유동수를 소화다리로 끌어내 쏘아 죽인 것이었다.
"요런 개뼉다구 같은 새끼야, 내 부하를 다섯이나 죽이고 자수는 개나발 무슨 자수야! 빨갱이 새끼들의 새빨간 거짓말이야. 당장 소화다리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총살!"
그래서 유동수는 소화다리로 질질 끌려갔다. 유동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군화발로 채이고, 다시 일어나 몇 걸음 끌리다가 몸부림치며 주저앉고, 또 군홧발에 짓밟히고, 그러면서 살려달라고 발버둥 쳤다. 그의 수척한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때전 누비솜옷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길가의 사람들이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소화다리가 가까워지자 유동수는 느닷없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그러면서 주저앉았지만 군화발이 옆구리고 배고 마구 걷어차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동수는 세 명이 갈겨대는 총을 맞고 다리 아래 뻘밭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총살장면을 양효석은 다리목에 꼿꼿하게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염상구도 그 옆에 끝까지 서 있어야 했다.
‘좆대감지 헛단 자석, 입산헌 심뽀는 머시고 저 꼬라지로 뒤질람사 자수넌 또 무신 넋빠진 짓거리여!’
염상구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유동수 마누라가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며 했다는 말을 듣고 염상구는 깜짝 놀랐다.
"기왕지사 입산헌 거 죽을람사 산에서나 죽제 멋났다고 내레와갖고 요리 험헌 꼴로 죽는다요, 금메."
자신이 했던 생각과 너무 똑같았던 것이고, 사람들이 다 듣도록 그런 통곡을 하다니, 참 겁 없고 맹랑한 여편네였다. 그러나 염상구는 못들은 척 넘겨버렸다. 그런 양효석에게 두 여자를 넘겨받도록 협조를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양이에게 고깃덩이를 던져주는 격일지도 몰랐다. 아직까지도 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두 여자를 데려다가 또 총살시켜버리면 그거야말로 긁어 부스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설득시킬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남 서장의 손아귀에 맡겨둘 수도 없었다. 남 서장이 처형을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두 여자는 자수를 한 것도 아니고 엄연히 비밀가옥에 은신한 채 후방투쟁이라는 것을 전개하다가 잡혔던 것이다. 염상구는 아무리 머리를 짜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은 채 벌교에 도착하고 말았다. 염상구는 습관적으로 대합실을 한차례 휘둘러보고 밖으로 나갔다. 발길은 으레 차부로 옮겨졌다.
"사람이 그럴 법이 웂은 법이시. 같은 읍내 사람이먼 쪼깐이라도 달븐 디가 있어야제, 타관사람이 대장인 것보담 못혀서야 워디 고것이 말이나 되간디?"
"몸써리야, 자수허고 내레온 사람얼 그리 쌩짭배기로 쥑이다니, 고것이야 단박에 인심 잃은 짓거리제."
두 여자가 나누는 말이었다. 염상구는 직감적으로 그 여자들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항, 읍내서 그 무작시런 짓거리 좋아라 하는 사람덜이야 을매 되간디? 사람덜이 말얼 안헌께 당자만 인심 돌아슨 것 몰르고 있제."
"금메 말이시. 그리 실인심혀갖고 대장 노릇 해묵어질랑가?"
"금메, 에롭겄제. 실인심혀서 지대로 되는 일 머시가 있드라고?"
"하먼, 그 대장이 시상 보는 눈이 짧었제. 그 대장이 자수헌 사람얼 살레줬드람사 위함받고 떠받들렸을 것인디이."
염상구는 바로 이거다! 싶어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몸을 돌렸다. 두 여자의 말을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번뜩 들었던 것이다. 염상구는 곧바로 양효석을 찾아갔다. 양효석은 혼자서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령관님, 안녕허신게라?"
염상구는 똑바로 서서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는 아니꼬운 생각 싹 접어두고 면전에서는 깍듯하게 공대를 하기로 작정한 다음부터 그것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아, 방위대장, 어서오시오."
양효석이 반가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양효석은 염상구가 고분고분할수록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금방 염상구에게 정겨운 신뢰감을 갖게끔 되었다.
"내가 부탁한 그 일 어떻게 되고 있나요?"
양효석이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야아, 모다 나무꾼으로, 농새꾼으로 변장시켜 내보낸 것이 사나흘 됐응께로 시방 골골이 더트고 댕길 것이구만요. 하루 이틀 더 지내먼 각단지게 한 가지씩이라도 정보럴 물고 오겄제라."
염상구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하루라도 빨리들 돌아오면 좋겠소. 군당 놈들부터 싹싹 쓸어 없애고 말겠소."
양효석은 아랫입술을 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선제공격을 당해 고스란히 피해를 입은 분함과 치욕을 씻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먼, 그래야제라. 사령관님 부대넌 전에 있든 부대보담 훨씬 용맹시럽게 뵈는디, 그 실력을 앗싸리허게 한분 써묵어 공비덜 시체럴 역전 앞에다가 늘핀허니 깔아야제라. 그리 되먼 지끔 고개 삐까닥허니 틀어돌린 읍민덜 인심이 지자리로 돌아오겄제라."
염상구는 슬쩍 말 낚시를 던지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읍민들 인심이 고개를 틀어 돌렸다니, 지난 번 당한 그 일로 그렇단 말이오?“
양효석은 여지없이 낚시바늘을 물고 덤벼들었다.
‘양효석아 이눔아, 니가 전쟁 덕분에 턱웂이 출세혔다만, 니넌 워쨌그나간에 나보담 멫 수가 밑이여!’
염상구는 슬슬 낚싯줄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워디요, 고까짓 일이야 거 머시냐, 다 병가지상산디 무신 인심이 돌아가고 말고 혀라."
염상구는 느긋하게 담배를 빼들었다.
"그게 아니면 도대체 읍민들이 고개 돌릴 정도로 우리 부대가 인심 잃은게 뭐가 있단 말이오? 어서 말해보시오."
양효석도 담배를 빼들며 자리를 고쳐앉았다.
"긍께 고것이 뭐시냐, 사령관님 기분 상허실란지 몰르는디, 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보먼 겪게 되는 일이고, 얼렁얼렁 고쳐뿔먼 될 일잉께 화내덜 말고 들으씨요이? 다 사령관님 위허는 일잉께라."
"알았어요, 알았어. 싸게싸게 본말이나 허씨요."
양효석의 급한 성질이 출렁거려 서울말과 고향 말이 뒤섞이고 있었다.
"고것이 멋인고 허니, 그 자수한 유동수 죽인 일얼 놓고 입 달린 사람이먼 각단지게 입방아 찧고 돌아가고 있구만이라."
"아니, 뭐라고 입들을 놀리는 거요?"
양효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긍께로, 고향사람이 사령관으로 왔으먼 타관사람보담 나슨 디가 있어야 살맛이 날 것인디, 자수헌 사람 죽이는 판이니 고런 사람 믿고 워찌 살것냐. 그리 사람목심 귀헌지 몰르는 사람이 우리헌테도 언제 무신 일 저질를지 알 것이냐. 인심 잃어 시상에서 지대로 되는 일 웂은 법인디 그래갖고 무신 일 허겄다고 그런지 몰르겄다. 요런 이약덜이구만요."
"워떤 잡것덜이 고런 주딩이 까고 그려! 싹 다 쳐죽여뿔라!"
양효석이 주먹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근디 사령관님 말이오. 화낼 것 한또 웂소. 그 인심얼 훼까닥 돌려뿔 아조 기맥힌 방도가 하나 있다 그 말이요."
양효석이 성깔 돋은 눈으로 염상구를 건너다보았다.
"고것이 먼고 허니..."
염상구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네 사람을 잡게 된 경위에서부터 남인태와의 의견대립까지 숨 쉴 겨를 없이 이야기해 나갔다.
"긍께 그 여자 둘얼 사령관님이 여그 벌교로 딜고오게 혀서, 고것덜이 잽힌 것얼 쫘악허니 소문내는 것이요. 무당이야 읍내사람덜이 몰르는 사람이 웂는디다 아그꺼지 뱄응께 사람덜이 을매나 귀경허고 잡아허고, 또 사령관님이 워찌 조치헐라 궁금해허고 그러덜 않겄소. 그러고, 하대치 마누래도 하대치가 원체로 유명해논께 사람덜 맘 모타지기야 무당이나 매일반이제라. 그 두 여자가 자수럴 헌 것이 아니라 투쟁인지 빨갱이 질얼 하다가 잽힌 것잉께 읍민덜이야 다 죽일 것으로 생각허덜 않겄소. 그때 사령관님이 읍민덜 생각얼 정반대로 팍 엎어뿔고 나스는 것이오. 고런 빨갱이덜얼 그냥 풀어줄 수는 웂은 일이고, 둘이다 여잔디다가 무당언 아그꺼지 뱄응께 특별허니 용서혀서 총살은 면허게 허고 징역을 살리게 재판소로 넴긴다, 요리 결정얼 하시먼, 읍민덜이 워쩌겄소! 워메워메 우리 사령관님 장허신 거, 우리 사령관님 부처님이신 거, 험스로 인심이 사령관님 헌트로 찰떡 붙디끼 헐 것 아니겄소? 그라고 사령관님 엄니꺼정 높게 존대받을 것이요. 나 생각이 으쩌요?"
염상구는 제물에 신바람이 나서 손짓발짓해대고, 목소리까지 변성을 해가며 이야기를 마쳤다.
"글세, 말을 듣고 보니 아주 그럴 듯한 것 같소. 고향땅에서 인심을 잃어 좋을 것 하나도 없으니까."
양효석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먼이라, 고향 땅에서 인심얼 얻어야 번창하고, 출세 길도 훤허게 열리고 그러제라. 쇠뿔 뽑디끼 당장 이 시작허시씨요."
염상구는 깨끗하게 끝장을 내려고 양효석의 뒤를 몰아대고 있었다.
"그럽시다. 이거 염 대장 덕에 고약한 문젤 쉽게 해결하게 됐군요. 너무 고맙소."
"무신 말씸이시다요. 나가 허는 일이 사령관님 높게 받드는 일인디라."
염상구의 아주 예의바르고 공손한 대답이었다.
소화와 들몰댁은 다음날 기차에 실려 벌교로 옮겨졌다. 플랫폼까지는 나가지 않고 개찰구 앞에 서 있던 염상구는 두 군인에게 호위되어 걸어오는 두 여자를 보는 순간 남 서장이 거짓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 여자가 다리를 심하게 절룩이고 있었던 것이다. 염상구는 전화를 통해 미심쩍은 생각이 적중한 것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다른 여자는 예사롭게 걷고 있었다. 그 여자는 몸빼를 입어 배가 부른 것이 금방 표가 났다. 염상구는 그 여자가 무당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보았다. 어쩐 일일까? 남인태는 거짓말한 것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 무당은 손대지 않고 하대치 마누라한테만 매타작을 놓은 것일까? 염상구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있는 생각이었다.
"워째, 고문당혀서 그요?"
염상구는 소화한테서 눈을 피하며 들몰댁에게 물었다.
"아니, 지야 암시랑토 안헌디... 아그 밴 몸으로 저그가 고초당혔제라."
꺼칠하고 스산한 얼굴의 들몰댁이 옆 눈길로 소화를 가리켰다. 들몰댁의 얼굴 여기저기에는 피멍이 잡혀 있었다.
"허먼, 당신보담 더 심허게 매타작 당혔다 그것이여!"
염상구는 언성을 높이며 소화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소화의 얼굴은 말짱했다.
"아니구만이라. 매타작 안헌 대신에 대껍데기로 손톱 밑얼 떴는디..."
"들몰대액."
소화가 나직한 목소리로 들몰댁의 말을 제지했다.
"요런 씨부랄 자식이..."
염상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벌컥 터져 나온 욕이 창피스러웠고, 매타작을 피해 그런 고문을 한 남인태의 약삭빠름을 안 이상 더 말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애는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소화는 두 손을 뒤로 감추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잡혀갈 때 그랬던 것처럼 경찰서에서도 그저 배를 내밀어 보이며 때리지만 말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러자 경찰들은 대껍질을 손톱 밑으로 밀어 넣으며 온갖 것을 알아내려고 닦달했다. 소화는 애를 지켜낼 수 있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손톱이 살에서 들떠오르는 그 환장할 것 같은 고통을 다 이겨냈던 것이다. 소화와 들몰댁에 대해 경찰과 토벌군에서 일삼아 퍼뜨린 소문은 역시 염상구의 예상대로 읍내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관심을 집중시키게 했다. 소화에 얽힌 사연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무당의 몸으로 좌익이 되었다는 것도, 입산을 했다는 것도, 하산해서 잡혔다는 것도, 임신을 했다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역시 임신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과연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엉뚱한 소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염상진의 이름이 떠돌고, 안창민의 이름이 떠돌고, 그러나 정작 정하섭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소화와 들몰댁이 순천재판소로 넘겨진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때쯤 정말 소화와 들몰댁은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떠나갔다. 역 마당에 몰려든 여자들은 소화와 불룩한 배와 들몰댁의 피멍든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먼발치에서 길남이와 종남이는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었지만 들몰댁은 두 아들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화와 들몰댁이 떠나가자 많은 사람들은 토벌군사령관 양효석의 관대함과 인정 많음에 대해 다투어 입을 모았다. 그 보고를 받은 양효석은 역 마당이 좁도록 여자들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이 싹 기분 상하면서도, 그 많은 여자들이 자기를 칭송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염 대장, 염 대장은 정말 기막힌 점쟁이요. 내가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사겠소."
양효석이 흔쾌하게 말했다.
"아이고메, 과만허게 술꺼지 사주실라고라?"
염상구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허리를 굽혔다.
10. 세상을 떠난 김사용
지하실 천장에는 촉수 낮은 알전구 하나가 불그레한 빛을 담은 채 매달려 있었다. 흡사 충혈된 눈 같은 알전구의 탁한 불빛은 지하실의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가득 찬 지하실의 구석구석에는 회색빛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하실 벽면에는 말라붙은 피 얼룩들이 색깔의 감도를 달리하며 낭자하게 찍혀 있었고, 바닥은 피와 물이 섞여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통풍이 잘 안 되는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끈적거리고 는적거리는 냄새는 바로 썩은 피 냄새와 상한 물 냄새와 고문당하면서 쏟은 오물냄새 같은 것들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건 지하고문실이 갖게 마련인 특유의 냄새였다. 그 지하실 공중에 한 남자가 기묘한 꼴로 매달려 있었다. 옷이라고는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인 남자의 팔다리 네 개는 모두 뒤로 모아져 묶인 채 그 동아줄이 천장의 쇠고랑에 연결되어 있었다. 몸무게 때문에 알몸뚱이는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었는데, 허리는 활처럼 휘어 팔다리와 함께 어설픈 동그라미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알몸뚱이에는 거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피멍이 잡혀 있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머리통은 축 늘어뜨려져 있었고, 바짝 오그라붙은 성기가 그가 남자라는 것을 겨우 나타내고 있었다. 그건 무슨 짐승을 몽둥이로 때려잡아 털을 벗겨 매달아놓은 형상이었지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남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거 고기 맛이 괜찮은데 그래."
철문 열리는 소리가 컹 울리며 남자의 소리가 뒤따랐다.
"내가 뭐랬어. 낮에는 고기 맛, 밤에는 계집 맛이라고 하잖았어. 그 집구석 겉보기완 딴 판이라구."
다른 남자의 걸직한 목소리였다.
"자넨 역시 순종 세파트야. 언제 그런 집은 또 냄새 맡았나 그래."
남자는 꺼억 트림을 토해냈다.
"다 그게 요령이라는 거 아닌가, 요령. 어허, 낮술이라 그런지 알딸딸하게 오르네 그려."
다른 남자가 이쑤시개를 질겅거리며 배를 슬슬 쓸어댔다.
"그런 집구석들 그거 간판도 안 붙이고 계집술장사 하는 건 위법 아닌가."
"이 부산바닥에 그런 집구석이 어디 한둘인가? 공짜 밥에 공짜 술, 거기다가 공짜 계집까지 바치는 판이니까 적당히 눈 감어. 그게 다 속으로는 우리 살리고 있는 끄나풀들이니까."
"그렇다면 할 말 없지."
두 남자는 의자에 퍼질러 앉았다. 그들은 부대 표시도,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옘병헐, 이 드런 놈의 냄새가 잘 먹은 속 뒤집네."
처음의 남자가 또 트림을 하며 손가락 끝으로 모자 창을 밀어 올렸다.
"하루 이틀 맡은 냄새도 아니고, 까짓것 담배 한 대 피우면 오케이야."
다른 남자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자주색의 긴 팔말갑이었다.
"난 그 돼지자지 같이 긴 팔말은 싫어. 독한데다 담뱃가루가 입속으로 들어와. 양담배야 화한 맛에 필터 달린 이 쌀렘이 최고지."
처음의 남자가 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뽑아들었다.
"자넨 담배엔 아직 시로도야. 그건 여자들이나 피는 담배지."
"모르는 소리. 그 팔말은 상놈담배고, 이 쌀렘은 양반담배네."
"누가 그래? 그런 좆같은 소리!"
남자의 어감이 달라졌다.
"어허 열 내지 말어. 농담에 쌈 나겠네 그려."
"제기랄, 난 쌍놈 소리만 들으면 치가 떨려. 내가 왜 기를 쓰고 특무대에 들어온 줄 아나? 그놈의 쌍놈신세에 원수 갚으려는 것이었어."
"이런 사람, 나도 백정의 자식은 아니지만 양반도 아니니까 염려 말게. 그나저나 저건 어찌 된 걸까?"
처음의 남자가 매달린 사람을 향해 입꼬리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눈짓을 했다.
"쌔끼들, 국회의원이라고 괜히 깝죽대다가 걸려든 거지. 십만 선량님도 좋지만 지금이 어느 때라고 깝죽대, 깝죽대긴. 전시에 눈치껏 설쳐야지 왜 군대문젤 가지고 물고 늘어지냔 말야. 군대문제 가지고 제멋대로 시비 붙었다간 국회의원 아니라 장관도 골로 가는 세상이야."
"저건 국민방위군사건을 물고 늘어지더니 거창사건이 터지니까 왜 또 그것까지 물고 덤비는 거야? 혹시 뒤에 그만큼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 건가?"
"있기는 뭐가 있어. 이 전시 하에서 삼광빽(화투에서)이면 신 장관님이시고, 오광빽이면 국부이신 것이야 생쥐새끼들까지 다 아는 판인데, 그 두 가지 문제 물고 늘어지는 것이야 그 두 분한테 박치기하고 덤비는 것 아니냔 말야. 저놈한테 빽이 있다면 빨갱이 빽이 있는 거지."
"맞어, 나라 위해 덮어야 할 문젤 일일이 긁어부스럼 만들고 드는 저런 놈들은 다 빨갱이야. 그런데 저놈은 당할 만큼 당하고서도 빨갱이가 아니라고 버티니 어쩐 일이야?"
"아니, 술 취한 놈이 술 취했다고 하는 것 봤고, 미친놈이 미쳤다고 하는 것 봤나? 진짜 빨갱이일수록 독하게 오리발 내미는 것 몰라서 그런 소리 하고 있는 건가, 자네? 저 새낀 빨갱이라는 확실한 제보까지 있는 놈이야."
"그렇긴 해. 변호사질 해먹을 때부터 삐까닥한 놈이었다니까."
"말 말어. 저게 국회의원 나부랭이나 됐으니까 이만큼 신사적으로 대접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벌써 돌 매달아 바다 속에 처넣고 말았어."
"아, 참! 며칠 전에 해운대에 밀려들었다는 시체들은 어떻게 됐어?"
"까짓 빨갱이새끼들 시체 몇 개 밀려들어온 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처리반 놈들이 혼쭐나고 끝났지."
"처리반 놈들은 이번 기회에 톡톡히 혼이 나야 해. 우리 특무대가 나라 지키는 공은 모르고 삐까닥한 것들이 뒤에 숨어서, 양민을 빨갱이로 모느니, 잔인한 학살집단이니, 하고 악선전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고 있는 판국에 어쩌자고 돌을 션찮게 매달아 시체가 해변으로 밀려들게 만들고, 말썽을 일으키느냐 그거야."
"미친 놈의 새끼들이, 밤마다 수가 너무 많아 실수를 했대나 어쨌대나, 좌우간 대장님 특명으로 혼쭐이 날 만큼 났으니 다시는 그런 일 없겠지."
"그거 말이야, 바다에 쳐 넣는 것 말구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밤마다 배로 멀리까지 실어내고, 돌덩이들을 매달고, 바다 속에 쳐 넣고,그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그러다가 자칫 실수해서 시체가 떠밀려들면 말썽이 일어나고 말야."
"그럼, 그 많은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자는 거야? 땅속에 파묻자 그건가?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린 하지도 말게. 땅속에 파묻는 건 번거롭지 않은 줄 아는가? 매일 밤 그 많은 것들을 파묻자면 우선 구덩이를 파야 하네. 그리고 생매장을 시킬 수 없으니까 총질을 해야 되지. 밤마다 총질을 해대면 그 소리 듣고 소문이 어떻게 나겠는가? 그럼, 총소리를 피해 대검질을 하든가, 대창질을 해? 피범벅이 돼가면서 누가 일일이 그 짓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생매장을 한다고 쳐. 구덩이를 다시 메꿔야 하고, 날마다 새 땅은 얼마나 또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말야, 그 시체들이 썩으려면 몇 년씩이나 걸리는지 알기나 해? 그런데 바다는 어떤가? 돌을 잘 매달기만 하면 그따위 귀찮고 골치 아픈 일을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해치워준단 말야. 수천 명이고, 수만 명이고 처박아도 바다는 만사 오케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역시 그렇군. 그런데 말일세. 그동안 수장시킨 빨갱이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엄청나게 많을 거라는 생각뿐이지 조사반이 하도 많으니까 전체 숫자를 도무지 알 도리가 없잖나."
"글세... 나도 대충 짐작이지만, 한 육칠천 되지 않을까?"
"육칠천이라...그리 될지도 모르겠군. 그만하면 부산바닥 빨갱이들도 다 소탕된 셈이겠지?"
"어허 안심하지 말어. 부산바닥에는 피난민이다 뭐다 해서 날이면 날마다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구. 빨갱이들은 바로 그 속에 묻어들고 있다 그 말이야. 빨갱이들이 산마다 진을 치고 있는 판에 여기 부산이 엎어져봐. 그땐 대한민국은 끝장난다구. 국부께서 우리 특무댈 절대적으로 신임하시는 이유가 다 뭔지 아나?"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지금 우리만큼 충성하는 애국자들이 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겠어."
"됐네. 배도 가라앉았으니 또 슬슬 시작해보세."
두 남자는 모자를 벗어 책상 위에 던지며 일어섰다. 한 남자는 양쪽 턱뼈가 불거진 네모난 얼굴이었고, 다른 남자는 폭이 좁은 깡마른 얼굴이었다. 생김새는 서로 달랐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살벌한 잔인기가 내배어 있었다.
"우선 찬물 한 바께스 퍼붓게."
네모난 얼굴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지. 시원하게 해드려야지."
깡마른 얼굴이 바께스를 들어 올려 매달린 남자의 축 쳐져 내린 머리통의 아래에서 위를 향해 물을 왈칵 끼얹었다. 매달린 남자의 알몸이 꿈틀 움직였다. 그 남자는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그들 특무대원들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해왔던 것이다.
"이봐 국회의원 나리 안창배. 고개 똑바로 들어."
네모진 얼굴의 나지막하면서도 차가운 말이었다. 매달린 남자의 머리통이 느리게 느리게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그 느린 동작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는 머리통이 들어 올려질수록 목 줄기에 점점 굵게 드러나는 핏줄이 잘 말하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빨갱이 변호사 이덕우와는 언제부터 내통했나!"
네모진 얼굴의 심문이었다.
"아니오, 선후배... 선후배 관계일 뿐이지 내통한 일은..."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 올린 안창배, 그의 목소리는 쉰 듯이 막힌 듯이 힘겨웁게 밀려나왔고, 그는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간신히 저어댔다. 보성, 벌교지구 국회의원 안창배의 젊은 얼굴은 말이 아니게 터지고 으깨지고 피멍이 들어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이쌔끼, 또 똑같이 개소리 칠 거야! 확실한 정보가 있는데도 개소리 칠 거냔 말얏! 이 새끼야, 국회의원이라고 봐주는 데도 한도가 있어. 너 정 까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다에 처넣어 깨끗하게 고기밥이 되게 만들고 말 거야. 재판이라도 받고 싶거든 좋은 말로 할 때 자백해. 다시 묻는다. 이덕우완 언제부터 내통했나!"
네모진 얼굴이 소리 질렀다.
"아니오, 절대로..."
"닥쳐, 이 개새끼야!"
네모진 얼굴의 주먹이 안창배의 얼굴을 후려쳤다. 안창배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이새낀 아직도 매가 모자라. 한바탕 야무지게 돌리게."
네모진 얼굴이 담배를 뽑으며 내쏘았다.
"그래, 배 꺼지게 잘 됐어. 이 새끼가 아주 독종이라니깐."
깡마른 얼굴이 양쪽 손바닥에 침을 튀겨 맞부비고는 책상 옆에 세워둔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몽둥이는 절반쯤이 미군용 담요로 감겨져 있었다. 그건 살이 찢어지는 것을 막고, 타박상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새끼, 빨리 불어!"
깡마른 얼굴이 외치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는 매달린 안창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안창배의 알몸이 출렁 흔들리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 내통했나!"
네모진 얼굴이 외쳤다.
"아니오..."
‘매달린 듯 처져 내린 안창배의 머리통이 도리질을 했다.
"이 새끼, 빨리 불어!"
깡마른 얼굴이 소리 지르며 또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몽둥이가 아랫배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어크크크..."
"자백해! 언제부터 내통했나!"
"아니오..."
"이 새끼, 빨리 불라니깐!"
"아이고메..."
"언제부터 내통했나, 언제부터!"
"아니..."
"이 새끼 빨리 불어!"
안창배는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는 의식 속에서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이덕우 변호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덕우 변호사는 좌익도, 공산주의자도, 빨갱이도 아니었다. 그는 양심적인 민족주의자일 뿐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농민들의 편에 서서 변호를 했고, 해방이 되자 그 태도는 더욱 확실해졌다. 제주도에서 사삼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광주고법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의 변호를 도맡다시피 했다. 검찰이 뒤집어씌운 좌익혐의를 벗기기 위한 그의 외로운 싸움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는 제주도 사람들을 꽤나 죽음에서 건져내기는 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좌익, 용공 혐의였다. 그는 보도연맹에 강제로 밀려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끝내는 예비검속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갔던 것이다. 안창배는, 그분과 자신과의 교분을 어떻게 부산의 특무대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 교분을 꼬투리 잡아 빨갱이로 얽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문이 가혹하고 혹독하다 해도 빨갱이라는 허위자백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한번 걸려들기만 하면 어떤 수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였다. 그들이 아무리 잔혹하다 해도 국회의원이란 신분이 있는 한 고문으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령 죽는다 해도 빨갱이로 몰려 죽느니보다는 고문으로 죽는 것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명분 살리는 죽음이었다. 고문을 못 견디고 허위자백을 했다가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그 진상을 밝히려고 했던 행위가 꼼짝없이 빨갱이의 행위로 둔갑하게 되어 있었다. 그건 혼자서만 죽어가는 누명이 아니었다. 그 두 가지 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성을 띠었던 다른 소장파 의원들까지도 한 올가미에 끌어들이는 위험스런 행위였다. 빨갱이 혐의만 비쳤다 하면 헌병대나 특무대가 국회의원도 예사로 연행해버리는 전시상황에서 고문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허위자백을 하고 일단 손도장을 눌러버리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전시재판은 피고의 자백번복을 받아들이거나 고려할 만큼 관대하거나 공정하지 않았다. 전시재판은 사상범의 처단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상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민간인들은 빨갱이라는 의심만으로 특무대에 끌려와 고문조사를 당하다가 재판 절차도 없이 부산 앞바다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수장당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무대나 헌병대의 악명은 날로 높아갔지만 누구 하나 소리 내서 말하지 못했고, 국회에서까지도 그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공산당과의 전면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의 제거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정의요, 애국이었던 것이다. 그 성스럽고 위대한 임무수행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다소의 착오나 실수는 당연히 묵살되고 무시되었다. 그들이 자신을 빨갱이로 얽으려는 것 자체가 고문이라는 사실을 안창배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빨갱이로 몰아대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단념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 새끼야, 빨랑 불어!"
몽둥이가 안창배의 가슴팍을 걷어 올렸다.
"으으윽..."
"이 새끼, 언제부터 내통했냐니까!"
안창배는 이덕우 변호사의 모습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안창배가 고초를 겪고 있는 시간에 최익승은 대한국민당의 국회의원 한 명과 낮술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한민당의 변신인 민주국민당과는 겉으로만 웃음 짓고 지낼 뿐 속으로는 이승만계인 대한국민당과 비밀스런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버림을 받아 당의 이름까지 바꿔야 했던 한민당은 이미 정치판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차기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안창배의 정치적 제거였고, 이차적으로는 정치판의 실세인 대한국민당과의 결속이었다. 그는 그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전선이 천 리 밖으로 밀려났는데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작년 시월에 정부가 서울로 옮겨갈 때도 그는 선뜻 따라나서지 않고 부산에서 어물거리고 있었다. 무슨 선견지명이 있어서가 아니고, 부산에서의 옹골진 돈벌이를 걷어치우고 당장 실속도 없는 정치판을 따라가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부산으로 되밀려오고 말았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선견지명을 입이 닳도록 만나는 사람들한테 선전하고 확대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부산을 떠나지 않은 것은 일사후퇴를 예견했기 때문이라는 자신의 거짓말을 언제부턴가 참말로 믿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한 가지 결심을 새로 하게 되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부산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부산만큼 돈벌이가 쉽고, 안전한 땅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통통선도 한척 은밀하게 구해놓은 마당에 대한민국 땅 전부가 빨갱이들 손에 넘어간다 해도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발판 또한 부산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마다요. 국민방위군사건이니 거창양민학살사건이니 하고 떠들어대는 국회의원 놈들은 국부님께 불충을 저지르는 반역도배들이고, 빨갱이들입니다. 그런 놈들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잡아들여 총살시켜버려야 합니다."
최익승은 술기운과 함께 결기를 세웠다.
"암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국부님께서 조용히 하기를 바라시면 신하된 자들로서 응당 입을 봉하는 것이 도리인데도 그것들이 계속 입을 놀려댈 뿐만 아니라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단체행동으로 나온다 그거요. 그걸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소."
맞은편에 앉은 국회의원의 대꾸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불충한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런 놈들 아니라도 충성을 바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맞는 말이오. 최 의원님 같은 분들만 있으면 이 나라가 얼마나 편안하게 잘돼가겠소."
"아이구, 뭘요..."
최익승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나 아부가 넘치는 얼굴로 맞은편 국회의원을 간절하게 바라다보고 있었다.
"어허, 오늘 점심 자알 먹었습니다. 오늘 베풀어주신 호의, 차질 없이 당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약속이 또 있어서 오늘은 이만..."
"아 예에, 거 뭐 호의랄 게 있습니까. 얼마 안 되는 저의 성의죠. 다시 기회를 만들어 좀 더 크게 도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최익승은 밑자리를 까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 그 마음 고맙습니다. 또 뵙기로 하지요."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며 몸을 함께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에는 진득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안창배는 끝끝내 고문을 이겨내고 연행 나흘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냥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에 관심 쓰지 않겠다는 것과, 수사상의 비밀을 지킴과 동시에 수사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일체의 민형사상의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앓아 누운 지 닷새 만이었다. 마침내 국회에서는 국민방위군사건을 정식으로 폭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까지 특무대와 헌병대의 양면추격을 용케 피해 다녔던 거창의 국회의원 신중목이 회의장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의장, 큰 참변이 생겼습니다.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해주시오."
하는 긴급동의를 하게 되었다. 곧 방청객들을 모두 퇴장시킨 다음 신 의원은 거창군 신원면에서 자행된 양민학살을 낱낱이 폭로하기 시작했다. 부산극장에 자리 잡은 피난국회 제오십사차 본회의를 통해 그동안 무성한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었던 사건이 마침내 공식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천구백오십일년 삼월 이십구일에 이승만 정권의 존립을 위협하는 두 개의 커다란 파도가 국회에서 한꺼번에 일어났던 것이다.
"니넌 인자 옴치도 뛰도 못혀. 암만, 요 핀지가 가방서 나온 이상, 나가 바로 빨갱이요, 허는 표식잉께. 니넌 당장에 총살이여, 총살!"
의자에 몸을 뒤로 눕히고 앉은 염상구는 종이 한 장을 기세 좋게 흔들어댔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넘치는 웃음이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아니랑께요. 나넌 몰라라. 나넌 몰르는 일이랑께라."
세라복을 입은 여학생이 발을 동동 구르고 고개를 내저으며 울부짖었다. 겁에 질려 있는 그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세라복의 단정미도 이미 헝클어져 있었다.
"요런 미친년아, 새살까덜 말어! 니년이 입산 빨갱이덜하고 내통허지 안혔음사 그 핀지가 나비라서 가방 속으로 사리살짝 날아들었을 것이냐, 바람잉께 스리슬쩍 기들었을 것이냐, 뉘기여, 니년이 접선하고 있는 연눔이! 대, 싸게 대!"
염상구는 끝말을 느닷없이 고함으로 바꾸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을 냅다 걷어찼다.
"워메 엄니!"
여학생이 얼굴을 가미며 주저앉았다.
"윤옥자, 우뭉떨지 말고 싸게 일어나! 느그 엄니야 집구석에 있고, 여그 있는 것이야 이 염상군께, 저엉 다급허먼 나럴 불르는 것이 훨썩 낫덜 않겄다고?"
염상구는 여학생 쪽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놓았다. 이층인 판자바닥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윤옥자는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에 소스라치며 몸을 일으켰다.
"뉘기여, 싸게 대. 요것이 말로 허는 마자막이여. 말로 혀서 안 불먼 그 담부텀은 워쩌크름 되는지 아시겄제? 자백얼 헐 때꺼정 작신작신 매타작이여. 근디, 요 염상구넌 워찌 허는지 알어? 꿰럴 홀랑 벳게뿔고나서 매타작얼 헌다 그것이여. 워쩌, 맛 잠 볼랑가!"
염상구는 윤옥자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워메 엄니!"
윤옥자는 화들짝 놀라며 옆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옆으로 도망간 것은 마음일 뿐이었고, 어깨를 틀어 잡혀 있어서 몸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뉘기여, 니가 접선허고 있는 것이!"
염상구가 윤옥자를 노려보며 다그쳤다.
"금메 나넌 그런 일 죽어도 웂당께라. 우리 아부지도, 오빠도 빨갱이덜 손에 죽었는디 나가 미치고 환장혔다고 빨갱이질얼 허겄소. 빨갱이넌 우리 식구덜 철천지 웬수당께라."
"이년아, 주딩이 놀리덜 말어! 군수 아덜눔이고, 경찰서장 딸년이 빨갱이질로 나슨 시상인 것 니 몰라서 고런 소리로 빠져 나갈라고 허는 것이여, 시방? 요것이 존 말로 헌께 안 되겠네. 니 쌈빡허니 맛잠 볼 참이여!"
염상구는 말에 팽팽하게 힘을 넣으며 윤옥자를 떠밀었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서너 발짝 뒤로 밀려났다.
"참말로 나 미처뿔겄소. 나 잠 살레줏씨요. 살레줏씨요."
윤옥자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손바닥을 맞부벼댔다. 염상구는 그런 윤옥자의 모습을 실눈 사이로 보며 느리게 담배를 빼들었다. 창에는 어둠살이 번지고 있었다.
"윤옥자, 살고 잡어?"
담배연기를 푸우 내뿜고 난 염상구가 불쑥 내던진 말이었다.
"야아, 살레주시씨요. 살레만 주시씨요."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잡은 윤옥자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요것이 있는디 무신 수로 살아날 것이여, 무신 수로."
염상구가 종이를 집어 들며 흔들었다.
"우리 엄니럴 불러주씨요. 허먼 돈얼 을매든지 내게 헐 팅께라."
"햐아, 도온?"
염상구는 어깨를 들먹이며 코웃음을 치고는,
"저년이 저거 돈푼이나 쪼깐 있는 부잣집 딸년이라고 느자구웂이 돈심이먼 멋이든지 다 되는 줄 아는갑네! 이년아, 정신 똑바라지게 채려. 살인 죄넌 돈으로 면해질란지 몰라도 빨갱이 죄넌 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안 된다 그것이여. 니넌 소화다리서 팡이여, 팡!"
그는 둘째, 셋째 손가락을 붙여 쪽 펴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모아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잔인스럽게 웃고 있었다. 윤옥자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부짖었다.
"살레주시씨요. 무신 일이든 다 헐 팅께 살레만 줏씨요."
염상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니 시방 머시라고 혔냐! 무신 일이든 다 헌다는 말지 정신으로 헌 소리다냐?"
"야아, 시키는 일이먼 멋이고 다 헐 팅께 살레만 주시씨요."
윤옥자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방에서 나온 종이에 대해 전혀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종이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인 것은 분명했다. 자신의 가방에서 그 종이가 나온 이상 아무리 관계가 없다고 부인해도 그건 거짓말이 될 뿐이었다.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녀는 어떻게 해서는 살아나야 된다는 생각만은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고, 오빠가 죽는 그 험한 꼴을 자신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돈이었다. 그것이 퇴짜를 맞자 그녀는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염상구가 얼마 전에 역 대합실에서 야릇한 눈치를 보이며 접근해왔던 사실이 무슨 밝은 빛처럼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염상구가 마음에 드는 남자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글타먼 똑 한 가지 방도가 있기넌 있는디. 거 손바닥 내레뿌러!"
염상구의 말에 윤옥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얼른 내렸다. 눈물이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두려움에 차있었다.
"그 방도가 멋이냐 허먼 말이여, 니가 나 각시가 되야뿌는 것이여!"
염상구의 입에서 나간 소리였고,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염상구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고, 야무지게 다물린 입술 가장자리로는 만족에 찬 냉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 사람이 해결방도럴 내놓았으먼 가타부타 응답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겄어!"
염상구의 터무니없이 큰 소리에 그녀는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잉, 아조 잘 생각혔어. 이 염상구 권세가 니 한나 살려낼 권세야 되제. 각시 되기로 맘 묵은 김에 당장 표식얼 팍 찍어뿔드라고."
염상구가 몸 가볍게 의자에서 일어나며 한 말이었다.
"음마, 워쩌실라고라?"
윤옥자의 당황한 소리였다.
"나 각시가 되겄담시로?"
‘염상구가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웃고 있었다.
"지넌 학교가 일 년 더 남었는디요..."
그녀는 주춤주춤 물러서며 더듬듯 말했다.
"거 무신 새 까묵는 소리여. 지끔꺼정 배운 것으로도 나헌테넌 하이칼라 각시여. 서방 각시가 너무 찌울러서야 안 존께 핵교야 여그서 싹 때레치워뿌러."
염상구가 그녀 앞에 다가섰다.
"혼례식도 안 올리고... 여그서 워찌... 여그서..."
고개를 떨군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드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그대로 울음이었다.
"신식여자가 워째 혼례식 개리고, 잠자리 개리고 그려? 여그넌 나가 사는 왕궁잉께 무신 신방보담 더 좋을 것잉만!"
염상구는 흥이 돋는 소리로 말하며 사무실문을 걸어 잠갔다. 문이 잠기는 쇳소리를 들으며 윤옥자는 무릎이 휘청 꺾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이 밀려들며 그 생각을 덮어버렸다. 그녀는 이를 맞물며 부르르 떨었다. 염상구는 벽장을 열어 담요 서너 장을 꺼냈다. 그것들을 마룻바닥에 겹으로 깔았다. 그녀는 주먹 쥔 두 손을 입에 댄 채 오들오들 떨고 서 있었다.
"욜로 와. 각시 옷이야 서방이 빗기는 것잉께로."
염상구가 끄는 대로 그녀는 힘없이 끌려갔다. 그녀는 이미 저항력을 잃어버린 포획물이었다. 윤옥자의 세라복 윗도리가 벗겨졌다.
‘힝, 니까징 것이 먼디 나 앞에서 콧대 세우고 지랄쳤냐. 나가 맘 한분 묵었다 허먼 못허는 일이 웂은 사람이여. 니까징 것 각시 맨들기야 파리잡기보담 숼타.’
그녀의 세라복 치마가 벗겨졌다.
‘힝, 니가 정신웂이 기차에 올르고 내리는 새에 내 부하 손으로 그 쪽지가 니 가방으로 들어간 것을 니까징 것이 워쩌크름 알 것이냐. 니까징 것이 여핵교 댕긴다고 혀도 고런 기맥힌 시상물정을 워찌 알겄어.’
염상구의 손이 그녀의 속옷에 닿았다. 그녀의 손이 염상구의 손을 지긋하게 밀어냈다.
"잉, 알겄어. 싸게싸게 벗어뿌러."
염상구는 자기의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염상구가 알몸이 되었을 때 그녀의 몸에는 다리목이 긴 팬티만 남아 있었다. 그녀를 눕힌 염상구는 다급하게 팬티를 끌어내렸다. 젖가슴을 엇갈리게 가리고 있던 그녀의 팔 하나가 반사적으로 아래로 뻗치며 손바닥이 거웃을 가렸다. 이미 몸이 달구어진 염상구가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두 주먹을 부르쥐고 이를 앙다문 채 속살 찢기는 아픔을 참아냈다. 그녀는 고개를 외로 틀어 눈을 꼭 감았는데,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콧등을 넘어 오른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과 합쳐져 담요를 적시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은 굳어질 대로 굳어 있었다. 혼자 요동치던 염상구는 긴 숨을 내뿜으며 그녀 위에 풀썩 무너지듯 몸을 부렸다.
‘니미러, 맛대가리도 잔생이 웂은 풋보지시. 요것 딜고 살자먼 깝깝허시. 니노지맛이야 외서댁 것이 질인디, 고잡녀러 것이 아깝고 아깝게도 입산을 혀부렀당께로. 참말로, 겨울꼬막 맛맨치로 그 짠득짠득허든 것이 인자 워떤 빨갱이 눔 차지가 되야뿌렀는고? 워떤 눔이고 그것에 맛들렀다가넌 물팍 녹아나서 산 지대로 못 타고 뒤질 것이다. 요것이 요리 뺏뺏허니 맛대가리 웂은 것이야다 처녀라는 표식잉께, 결혼허먼 시나브로 나사지겄제잉.’
염상구는 두 팔로 마룻바닥을 받치며 더디게 웃몸을 일으켰다.
다음날로 염상구가 솥 공장 집 사위가 된다는 소문이 읍내 안통을 휘돌았다. 그 집 딸과 벌써 몸을 섞은 사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염상구가 손쉽게 목적달성을 해버린 데 비해 양효석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양효석은 벌교에 주둔할 때부터 송경희를 짓밟아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심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벌교에 오게 되자 송경희에 대한 복수심은 한층 뜨거워졌다. 이제는 그녀를 반도호텔로 만나러 가던 때의 설레이던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자신의 배 아래다 한번은 깔고야 말겠다는 보복감정뿐이었다. 그런데 양효석의 가슴팍을 긁어 상처를 내고, 감정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송경희였다. 그가 주둔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두 사람의 집이 남국민학교 언저리라서 양효석은 길에서 송경희와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허시오. 오랜만이요."
양효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요."
송경희도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벌교에 온 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쎄요. 출세했군요. 하지만 괴뢰군들 뒤만 쫓아다니는 군댄 믿지 않아요."
"뭐라구요?"
송경희는 코웃음을 남기고 걸어가고 있었다. 반도호텔에서 내보인 콧대가 변함이 없었다. 양효석은 송경희의 뒤 꼭지에 눈 화살을 꽂은 채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송경희가 긁어 판 상처는 자신과 군대에 대한 이중의 모욕이었던 것이다. 송경희를 노리고 있는 양효석의 눈에 걸려든 것이 그녀의 동생 송성일이었다. 국민방위군에서 탈주한 송성일이 거지꼴을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양효석은 송성일을 잡아채기로 했다. 송성일을 군대로 내모는 것은 그녀를 옭아매는 더없이 좋은 미끼였다. 양효석은 송성일이 앓아 누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징집영장을 내보내게 했다. 예상했던 대로 미끼를 덥썩 물었다. 그런데 미끼를 문 것은 송경희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였다. 송성일의 어머니는 사무실로, 집으로 찾아다니며 애걸복걸했다. 양효석은 며칠씩 징집날짜를 연기해주며 송경희가 나타날 때까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경희는 제 어머니의 애타는 속을 알 텐데도 좀 채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누가 이기나 보자하며 양효석은 마지막 시한을 정해 송성일의 어머니를 몰아대고 있었다. 송성일도 그동안 몸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 된 잔치에 코 빠뜨린다고, 양효석에게 긴급명령이 하달되었다. 부대이동이었다. 사단의 임무교체였던 것이다.
"송성일에 대한 징집은 틀림없이 시행하시오. 본인의 건강이 다 회복됐으니까 징집날짜를 더 이상 연기해줄 필요가 없소. 그 사람 어머니가 돈을 써서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낼려고 발싸심인데. 그 영장은 어디까지나 내 근무기간 동안에 발부된 거니까 시행결과에 대해선 차후에라도 꼭 확인하겠소."
양효석은 벌교를 떠나기에 앞서 권 서장에게 못을 박았다.
염상진은 조계산지구에서 온 선요원을 통해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건 안창민이 일부러 보내온 소식이었다.
"결국 그 어른이 세상을 버리셨군..."
염상진은 여러 가닥의 감회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걸 느끼며 먼 하늘을 바라본 채 중얼거렸다. 안창민이 굳이 그 소식을 전한 데도 공적, 사적인 의미가 함께 들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엄연히 도당 사령부에 속해 있는 김범준의 부친 별세는 공적인 사안이었다. 그리고 옛 친구인 김범우의 부친 별세는 사적인 부음이었다. 그 사적인 의미 속에는 친구의 부친으로서만이 아니라 어른 김사용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는 흠모의 마음을 안창민이 헤아렸다는 것을 염상진은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가 느낀 여러 가닥의 감회 중에서 가장 가슴 먹먹하게 한 것은, 두 아들 중에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임종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두 아들을 보고 싶어 하고 걱정하며 눈을 감았을 그분의 마지막 고적이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김범우는 어디서 무얼 하길래 전혀 종적이 없는 것일까... 그는 새삼스럽게 김범우를 떠올렸다. 김범우만 임종을 지켰더라도 그분의 마지막 길이 덜 고적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유발시킨 생각이었다. 김범준은 더 말할 것없고, 김범우 정도의 인물이 있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일 수 없었다. 그건 김사용 어른의 울타리 안에서 보배우고 다듬어진 탓이었다. 김사용은 일제치하의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서거나, 해방 후의 사회개혁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수용하고 따르려는 기본자세만은 갖춘 드문 지주였다. 그는 새로운 나라가 바르게 서기를 바라 짧게나마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위원장을 맡는 정치행위를 보이기도 했고, 농지개혁을 앞두고는 논밭의 명의변경을 하거나 강매행위를 하는 따위의 추잡한 것을 하지 않은 읍내의 유일한 지주이기도 했다. 완벽한 혁명의 논리 앞에서는 그분의 미온적이고 수동적인 의식이나 행동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지주들이 그분 같기만 했어도 혁명은 그만큼 용이했을 것이고, 피흘림 또한 그만큼 줄일 수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일찍부터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고, 마음 깊은 정을 지녔던 그분의 인품에 염상진은 고마움과 함께 어떤 부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염상진은 김범준을 찾아 모우산 쪽으로 긴급선을 띄웠다. 김범준은 도당위원장의 뜻을 가지고 남해여단장을 만나러 가 있었다. 김범준은 도당위원장의 특사 격으로 도당의 최후통첩을 가지고 간 것이었다. 남해여단은 도당의 두통거리였다. 추풍령에서 북상 길을 차단당해 발길을 되돌렸다는 남해여단은 어떻게 전남도당까지 내려와서 벌써 몇 개월째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었다. 전북도당지역에서는 황소를 타고 다니다가 전남도당 쪽으로 이동하면서 인민군이 버리고 간 적토마를 어느 마을에서 바꿔 탔다는 남해여단장은 사백여 명의 인민군들을 이끌고 다녔다. 무장된 사백여 명의 막강한 병력이 몰려다니면서도 남해여단은 도무지 싸우지를 않았다. 싸우지도 않고 이 산골 저 산골로 옮겨 다니기만 하면서도 도당이나 군당에 요구하는 것은 많았다. 급식을 제대로 제공하라. 동계피복을 부족하지 않게 제공하라. 숙박에 불편이 없게 하라. 그런 요구들은 비록 도당이 해방구를 넓게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전체가 유격체제를 갖추고 있는 실정에서 타당하지가 않은 것들이었고, 더욱이 전투를 기피하고 있는 부대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당과의 관계는 자연히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당위원장이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부대를 해체해 도당의 각 지구 유격대에 편입시키든지 하라는 점을 남해여단장에게 여러 차례 촉구했었다. 그러나 남해여단장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자기네 부대는 인민군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언젠가는 정규전선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때까지는 비정규전인 유격전으로 인명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방당은 일시 곤궁에 처한 인민군에게 숙식 제공과 기타 필요한 지원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런 일방적인 논리가 도당위원장에게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도당위원장의 고민은 작년에 젊은 총위를 상대로 일을 처리했던 것처럼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상대방은 총위가 아니라 소장이었던 것이고, 당의 비중으로도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남해여단이 야기시키는 문제는 그런 무의도식만이 아니었다. 대부대가 싸움은 하지 않고 피해 다니기만 하니까 그 부대 뒤에는 으레 그만한 규모의 토벌대가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인민군부대가 거쳐 간 지역에 토벌대가 밀려들면 그 지역 인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해여단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어느 군당에서나 어느 마을에서나 질색을 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무위도식이 전체 유격대원들의 정신무장에 미칠 악영향도 심각한 문제였다. 대원들 사이에서 벌써 남해여단의 행태는 화젯거리고 웃음거리였다. 허수아비부대, 허깨비부대라고 놀림감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놀고먹자 부대, 지화자부대라는 호칭에서는 대원들이 혹시 그 부대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계심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도당의 수뇌부에서는 벌써부터 남해여단장의 행위가 패배주의, 인정주의, 감상주의, 기회주의 등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남해여단장을 지탄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고, 남해여단의 비군사 행위를 방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전선이 되밀려 올라가면서 군경의 공격은 나날이 가중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도당위원장이 보낸 최후통첩은 남해여단이 도당의 조직에 편입해서 독립부대로 유격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든지, 그렇지 않고 전과 똑같은 행동을 취하려 한다면 도당은 강압적으로 남해여단의 무장을 해제시킬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염상진은 물론 도당의 결정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남해여단이 전남지역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도당의 지도 아래 속해야 하는 것은 원칙이었고, 이 원칙을 남해여단장이 거부할 때에는 남해여단은 당연히 무장 해제시켜 도당유격대로 재편성해야 했다. 그래야만 젊은 총위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고, 빛나게 되는 것이었다. 당의 질서 앞에 어느 개인도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일이었고, 남해여단장은 이미 지휘권을 포기함으로써 해당행위를 자행해왔던 것이다. 김범준은 다음날로 돌아왔다.
"상사 말씀을 어찌 드려야 할는지..."
염상진은 머리를 조아리며 조의를 표했다.
"뒤늦게 불효가 사무치오. 빨리 소식 대줘서 고맙소."
김범준은 먼 하늘을 우러른 채 독백처럼 말했다.
"오일장이면, 내일이 출상 날입니다."
염상진이 나직하나 또렷하게 말했다.
"굴건제복은 못해도 멀리서나마 마지막 가시는 길은 지켜야 되지 않겠소?"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선 김범준의 말이었다.
"그렇지요. 그리 하셔야지요."
염상진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대꾸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당의 허락부터 받읍시다."
김범준이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도착하기 전에 당에 보고해 허락을 받아놨습니다. 이것부터 받으시지요."
염상진이 종이에 싼 것을 내밀었다.
"이게 뭐요?"
"예, 제가 미리..."
염상진이 어물거렸다. 김범준이 펼친 종이 위에는 삼베로 나비모양을 접은 상장이 놓여 있었다.
"아니, 염 동지!"
김범준이 염상진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런 김범준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고, 얼굴은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고 있었다.
"이리 마음써주다니, 고맙소."
김범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닙니다, 춘부장 어르신께서는 제 어르신이기도 했습니다."
염상진의 목소리도 가라앉으며 떨렸다. 김범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길이 먼데 어서 출발하시지요. 제가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소?"
"예, 이것도 허락을 받아놓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참 너무 고맙소, 염 동지."
김범준이 염상진을 새롭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당 해야 할 일이지요."
염상진이 겸손해했다. 김범준은 염상진이 이끄는 소대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벌교를 향해 강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나마 상여행렬을 보자면 제석산 줄기까지 접근해야 했으므로 만일의 위험에 대비해 염상진은 소대 병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행군은 밤새껏 줄기차게 이어졌다. 산길 칠십 리를 걸어 동이 트기 전에 제석산 줄기로 파고들어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잠시도 쉴 짬이 없었던 것이다. 오금재에서 낙안 뒷산을 감돌아 목표지점에 가까워졌을 무렵 날이 희번하게 열려오고 있었다. 새벽빛 싱그러움으로 대기가 맑게 팽창하는 속에서 어둠은 문득문득 스러져가는 별자리와 함께 걷혀가고 있었다. 산들로 둥글고 크게 에워싸인 낙안벌에 찼던 어둠도 은빛의 새벽빛에 밀려 흔적 없이 사위어가고 있었다. 산허리에서는 질펀한 낙안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드넓게 펼쳐진 낙안벌에는 어둠이 남기고 간 자취인 양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안개 속에서 들마을들의 초가지붕들만 모듬모듬 드러나 보일 뿐 길이며 논들은 보이지 않았다. 바위들을 은폐삼아 부하들에게 눈을 붙이게 한 염상진은 담배를 피우며 어린 날부터 눈에 익고 발에 익은 고향의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봄안개가 차면 봄안개가 차는 대로, 가을안개가 차면 가을안개가차는 대로 낙안벌은 고읍들과 이어지며 그지없이 수려한 풍취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벌교의 안풍광이라면, 포구와 중도들판이 이루어내는 풍취는 벌교의 바깥풍광이었다. 겉과 속, 안과 밖의 풍광을 서로 다르게 지닌 벌교라는 땅에 사람들은 그 언제부터 목숨 줄을 대고 살기 시작했던 것일까. 오래고 먼 옛날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바깥의 갯가가 아니라 안쪽의 들판이었을 것이다. 야산굽이들을 감돌 때마다 펼쳐져,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신비스러운 들판을 반기고 믿어 삶의 터를 일구었을 것이다. 왕조시대의 행정관청인 동헌이 낙안에 있음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계급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은 삶의 터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착취계급의 정치권 장악으로 부의 편재는 갈수록 심해져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농토로부터 내동댕이쳐졌다. 벌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어 해방임시에 저 넓은 낙안벌의 주인은 서너 사람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만석지기로 불리운 그 서너 사람의 기름진 삶을 위해서 들마을들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또 하나 황소의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지주 중의 한 사람이면서, 그래도 인간다운 정리를 가졌던 단 한 사람, 김사용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일찍부터 큰아들의 활동과 연관되어 논밭을 팔기만 한데다가, 농지개혁 때도 파렴치한 것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김사용이 남기고 가는 논밭은 극히 얼마 안 되리라는 것을 염상진은 헤아리고 있었다.
염상진은 꽁초의 불을 끄며 김범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김범준은 옆모습을 보인 채 낙안벌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의 인민군 군관복은 많이 남루해져 있었다. 장년의 나이로 낡은 군관복을 입고 산허리에 숨어 아버지의 장레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김범준의 모습. 염상진은 그만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김범준의 모습 자체가 더 설명이 필요없는 이 땅의 비감한 수난사였고, 통한의 민족사였다. 이십대 초반에 민족해방투쟁에 몸을 던졌고, 해방이 되고서도 완수되지 않은 인민혁명을 위해 인민해방전쟁에 참여해서 아직까지 투쟁을 계속하느라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더구나 장남이면서 장례에 참례하지 못하는 김범준의 심정은 어떨 것인가. 그나마 김범준의 통한을 줄였으려면 김사용 어른은 몇 달 앞당겨 작년 팔구월에 돌아가셨어야 했다. 염상진은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잎돋움하는 봄기운 가득한 산에 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낙안벌에 자욱했던 안개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낙안벌이 더 넓게, 더 가깝게 보였다. 낙안벌을 양쪽으로 꿰뚫고 있는 두 갈래 길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김범우네 선산이 저 아래쪽 야산자락이니까 장례행렬은 그 두 길 중에 낙안 쪽 길을 타고 오게 되어 있었다. 염상진은 읍내 쪽으로 뻗어가다 산으로 가려진 그 길 끝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햇발이 햇솜이듯 보드랍고 포근하고 따스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 햇발 속에서 밤길을 걸어온 이십여 명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열시쯤이었다. 산으로 가려진 그 길 끝에서 색깔 있는 천이 펄럭이며 나타났다. 만장이었다. 염상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김범준도 몸을 일으켰다. 색색의 만장들이 산굽이를 돌아 길 위에 줄을 잇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만장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건 고인의 생전의 덕과 문중의 건재를 알리는 것이었다. 삼십여 개의 만장행렬 뒤에 상여가 나타났다.
"아버님..."
김범준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소리였다. 그는 모자를 벗었다. 상여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움직임만 멀게 보일 뿐 상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상여를 향해 두 손을 모은 김범준은 허리를 굽혀 땅에 엎드렸다. 낡은 군복을 입은 그의 어깨가 잘게 들먹이고, 그는 오래도록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번 절을 하고 난 그는 주먹 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김범준의 귀에는 상여소리가 역력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느끼는 나라 잃은 민족의 절망은 더욱 참담한 것이었다. 적 안에서 보는 적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적들만 우글거리고 나나 우리는 없었다. 상대적인 위압감과 위축감 앞에서 난 민족을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 첫발을 디딘 유학생들은 누구나 그런 감정에 부딪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차츰 세 부류로 갈라져나갔다. 철저하게 일본적 지식이니 되고자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철저하게 조국의 독립을 찾으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돈이나 써대는 재미로 사는 축들이었다. 지주나 관리, 자본가의 자식들이 대부분인 유학생들 중에서 기필코 조국의 독립을 찾겠다고 나서는 학생의 수가 제일 적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민족 전체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깊게 생각하되 오래 끌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살이의 사슬을 하루빨리 끊는 것, 그것만이 민족과 내가 한꺼번에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만이 민족과 내가 한꺼번에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다. 그렇게 결론짓고 비밀조직에 가담하게 되었다. 독립의 방법론은 분분했다. 국제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 우매한 대중을 교육시켜 독립의식을 고취시켜 나아가야한다는 교육준비론, 일본과 현실적인 타협을 하며 이상적으로 독립을 얻어내야 한다는 타협구걸론. 그러나 일본은 바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강탈한 강도였다. 강도이되 흉기를 들고 집안에 뛰어들어 값진 물건을 빼앗아 달아난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값진 물건은 물건대로 빼앗고, 온 집안을 차지하고 앉아 집안 식구들을 종으로 부리면서 계속해서 쓸만한 물건은 다 빼앗는 그런 흉악한 강도였다. 그런 강도를 누구더러 몰아내달라고 외교독립론이며, 그런 강도를 어느 세월에 몰아내겠다고 교육준비론이며, 그런 강도에게 무슨 이성이고 인정이 있다고 타협구걸론이란 말인가. 강도를 상대로 그런 것들은 다 정신나간 잠꼬대고, 비겁한 흰소리였다. 강도는 물리쳐야 하고, 물리치는 방법에는 정면대결밖에 없었다. 힘을 믿는 강도가 두려워하는 건 힘밖에 없었다. 무력투쟁을 최우선으로 해서 다른 방법들은 차선으로 시행함으로써 복합적 효과를 노려야 하는 것이었다. 무기를 든 강도를 물리치려는 싸움에서 몸 다치고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해서야 그 싸움은 백전백패일 뿐이었다. 일본의 막강한 무기 앞에 당장 무슨 수로 대적하느냐고, 무력투쟁으로 정면대결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잠꼬대고 헛소리라고 비웃는 것이 학식이 들었다는 자들이 보이는 작태였다. 그건 용기 없는 어설픈 지식인들이 드러내는 표본적인 기회주의였고, 도피주의였다. 싸움은 무기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삼천만 가까운 조선인이 사는 조선 땅에 일본 놈들은 이백여 만이었다. 그것들을 일시에 죽이고 나도 죽을 각오를 해버리면 강도는 물리쳐지는 것이었다. 그놈들의 총에 맞서 이쪽에서는 죽창이며 낫을 들었다고 할 때, 이백만을 일시에 죽이기 위해 그 두 배인 사백만만 죽을 각오를 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세배인 육백만이 죽으면 어떤가. 그러나 천지사방에서 일시에 일어나 이백만의 사분의 일인 오십 만만 죽여 없애면 강도 일본 놈들은 줄행랑을 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이 내세우는 잡다한 독립론으로 그런 민족적 결속은 엄청난 방해를 받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그런 민족적 결속을 이루지 못해 식민지지배는 삼십육 년에 이르렀고, 결국 그 동안에 종의 신세로 죽어간 동포의 수는 이백만이 훨씬 넘어버린 것이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 야’
김범준은 일경에 쫓겨 만주로 떠날 때의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질화로에 제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높이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애비로서 먼첨 권헐 수는 없는 길이로되 니가 알아 먼첨 택헌 길이니 맡기지는 않겄다. 장부로서 나설 만헌 길이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가슴에 담고, 지용의 시를 뇌이며 압록강을 건넜던 천구백이십사년. 검거 작전에 뿔뿔이 흩어져 일본을 탈출하며 동지들이 재집결을 약속한 장소는 상해임시정부였다. 공염불같이 잡다한 독립론이나 생산해내고 있는 임정을 따르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조직과 연계가 없는 상태에서 다급한 김에 정한 일차 집결지에 불과했다. 직접 가서 본 임정은 역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반봉건적 의식에 젖은 사람들이 책상에 모여앉아 입씨름이나 하고 있는 곳이었다. 열한 명의 동지가 흩어졌는데 다시 규합된 동지는 넷이었다. 석 달 동안 기다렸지만 더는 오지 않았다. 일본을 탈출하다가, 고향에서, 임정으로 오는 길에, 체포당했을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다. 동지들을 기다리는 석 달 동안 물론 무위도식하지 않았다. 싸구려 숙소를 정하고, 닥치는 대로 노동을 했다. 거친 노동생활은 여러 면에서 소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중의 돈을 헐지 않을 수 있었고, 신분을 위장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 밑바닥생활의 체험으로 인민성을 진정으로 확보할 수 있었으며, 무장투쟁의 바탕이 되는 체력단련을 할 수 있었고, 중국인들과 뒤섞이다 보니 중국말을 빨리 익히게 되었고, 일본 놈들의 움직임도 꽤나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수확은 공산당조직과의 연결이었다. 공산당의 혁명투쟁은 바로 무장독립투쟁과 직결되는 것이라서 자신들의 행동전개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김범준의 눈에는 거액의 급전을 마련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인자 니가 나 혼자 자식이 아닌데 재산이라고 나 혼자 재산이것느냐."
아버지가 전대를 밀어놓으며 한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남자로서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고, 자신은 그 결단에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의 길을 가기로 각오했던 것이다. 노동을 계속하며 공산당의 지하활동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표피적으로 읽었던 책들을 놓고 본격적인 사상학습을 하는 한편으로, 일본 놈에게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 활동을 위해 비밀장소에서 갖가지 훈련을 받았다. 격투를 위한 기본무술에서부터 장애물돌파, 칼 쓰기, 총 쏘기, 폭약설치, 독도법, 피신법 같은 것들이었다. 부랑노동자로 위장해서 동지들을 확대해 나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임무였다. 그 생활 삼 년을 통해 직접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넷이었다. 둘은 밀정인 조선 사람이었고, 다른 둘은 일본 놈 형사였다. 일본 놈을 죽일 때보다 두 밀정을 죽일 때 더 격렬하게 치솟던 증오는 무엇이었을까. 체포의 위기에 직면했던 것도 서너 번이었다. 배편으로 여수 앞바다 어느 섬에 닿고, 거기서 배를 갈아타고 고흥으로 잠입했던 것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 군사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국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삼년 만에 뵙게 된 아버지의 그 무겁고도 침착했던 모습을 김범준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뿔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그려, 아조 실허게 변혔구나. 장헌 일이여."
아버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벽장 속에서 큰돈을 꺼내놓으며 아버지로서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침착할 뿐이었다. 동지 한 사람과 다시 배편으로 무사히 국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중국군사학교에 들어가면서 조직 활동의 신분이 감추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것은 투쟁을 보다 원활히 확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군관학교의 생활은 너무 편할 지경으로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의 생활과 학습을 통해 중국말과 글이 아무런 장애가 없는데다, 비밀훈련을 통해 몸은 이미 군사훈련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 바쳤다. 조직으로부터 최고의 성적을 올려 헌병병과를 따내라는 지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이 상위에 드는 몇몇 학생들에게는 병과 선택권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변보호를 위해 조직에서는 일체의 다른 일에 가담시키지 않았다. 무풍지대에서 할 일이라고는 공부밖에 없었다. 당연히 최고성적으로 졸업하면서 헌병장교가 되었고, 근무지까지 원하는 대로 상해가 되었다. 겉으로는 국민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장교였던 것이다. 보장된 신분을 확보한 입장에서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조직 활동을 위한 정보 확보와 제공에서부터 조직원의 보호까지, 신분을 감추면서 그런 일을 효과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은 꽤나 힘겨웠다. 신경이 언제나 칼끝처럼 곤두서 있었다. 살인범을 잡겠다고 나선 입장에서 조직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일본경찰들의 무자비한 구타를 외면하기도 했다. 천구백삼십이년 상해의 생활을 끝내기까지 치러낸 일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중국 침략은 본격화되고, 공산당의 홍군과 국민당군의 충돌이 심각해지면서 상해를 떠나야 했다. 상해에서 암약하던 조직 전체의 재편성이었다. 조직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군 헌병대위의 계급을 버리고 홍군지역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조직원으로서 일하다가 애인의 정을 나누게 된 중국처녀 주미령과도 이별했다. 이별을 하면서는 혁명이 완수되면 다시 만날 것을 언약했지만, 그것은 영원한 언약으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완수를 보고 중국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해방된 조선에서의 삶을 꿈꾸곤 했던 그녀는 혁명의 긴 소용돌이 속에서 그 어디선가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혁명은 피를 먹고 피어나는 꽃이고, 핏덩이로 뭉쳐진 태양이니까.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김범준의 흐릿거리는 시야에는 자신이 담배통에 담아드린 담배를 그지없이 흐뭇한 얼굴로 빠시던 아버지의 고단한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범준아, 니는 일찍허니부터 남들이 다 피하는 고생길을 솔선해서 걸은 사람이다. 그 작심은 장하고 장한 것이었는디, 니가 시방 허고 있는 작심도 장헌 것으로 생각해야 허겄냐?"
이건 이십육 년 만에 마음 놓고 부자상봉을 하여 아버지가 처음 물으신 물음이었고, 그리고 마지막 물음이 되었다. 아버지는 상해 임정의 요인들이 반봉건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듯이 역사 발전적 인민혁명에 대해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을 남자로 믿어주는 대범을 보이셨을 뿐, 아들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동생 범우의 자식들에게 어설픈 큰절을 받으며 아버지께 더없이 송구스러움을 느꼈던 것은 대장정을 감행하면서는 전혀 갖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홍군지역으로 넘어가면서 혁명투쟁은 본격화되었다. 조국의 독립투쟁은 전인류적 혁명투쟁에 포함되었고, 중국공산당은 일본을 국민당보다 앞서는 적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었다. 홍군에서의 투쟁은 온갖 시련과 감동의 연속이었지만, 그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대장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만오천 리의 실제 거리와는 다르게 머나먼 길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오만 리 대장정으로 통칭되는 그 끝없는 이동은 중국공산당의 대 시련인 동시에 대승리일 수 밖에 없었다. 봉건군주 진시황은 절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모든 봉건, 제국주의적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인간해방을 실현시키기 위해 혁명가 모택동은 이만오천 리의 이동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대장정을 통해서 배우고 감동한 것은, 그 누구나가 혁명실현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결한 열정과 그 아름다움이었다. 소년전사에서부터 당의 지도자들까지 문자 그대로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평등과 신뢰였다. 숙식에서부터 일체의 차등이 없는 인간존중의 평등실현은 마치 기적 같은 신뢰의 힘을 창출해냈고, 그 기적적인 인간집단은 마침내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끝내는 중국대륙에 혁명의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무정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오며 가졌던 조국 땅의 혁명에 대한 확신은 이십대 초반에 압록강을 넘어가며 가졌던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보다 컸었다. 그런데...그 확신의 어디에 착오가 있었던 것일까. 조선 땅은 중국과는 다르게 미소가 분할한 해방을 맞은 것부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미국은 주력부대는 철수시켰지만 오 년이라는 신탁통치 잔여기간을 남겨둔 채 군사고문단 배치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고문단은 민족해방전쟁과 때를 같이해서 대병력으로 둔갑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큰길을 벗어난 만장행력을 뒤따라 상여도 산자락을 밟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범준은 다시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염상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염 동지, 그만 갑시다."
"예에?"
염상진은 의문스럽게 김범준을 쳐다보았다.
"이젠 됐소. 떠나도록 합시다."
김범준의 물기 어린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염상진은 상장을 가슴에 달고 있는 김범준을 바라보며, 하관절차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심정을 헤아렸다.
"네에, 가시지요."
염상진은 벗어들고 있던 모자를 썼다. 문득 콧날이 찡 울리면서 김사용 어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땅을 빌려 쓰면 사용료는 얼마를 어떤 방법으로 낼 심산인가?"
그분의 넉넉한 웃음이 담긴 얼굴도 떠올랐다. 염상진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데도 흐려 있었다. 그 하늘을 향해 그는 속으로 뇌었다.
‘어르신, 부디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