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3-7
21. 구빨치 그리고 신빨치
미군들이 노산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북소마을까지 전해져왔다. 둔덕을 사이에 두고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뉘어 있는 북소는 둘 다 합해서 오십 가구 정도 되는 벽촌이었다. 뒤에 산을 등지고 옆으로 넓은 저수지를 낀 마을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붉은 완장을 찬 남녀가 이 고샅 저 고샅을 헐레벌떡 뛰어다녔고, 마을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의 질정 없는 움직임을 살피고만 있었다.
"군 당이 허는 일이 요게 대체 머여유."
젊은이가 고샅을 뛰며 목 잠기는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네, 워낙에 궁벽허잖은감."
좀 더 나이 많은 남자가 뒤따르며 말했다.
"아무리 끝머리에 붙었어두 그렇지유. 시상에 요런 법은 웂은 법이에유,"
"인자 타박해서 멀혀. 얼마나 위급혔으먼 그랬겄냐 이해허고, 인자부텀 방도를 찾으먼 되잖은감."
스물네댓 명의 남녀가 크고 작은 짐들을 이고 지고 허겁지겁 뒷산을 넘어가는 것을 마을사람들은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안 한 번도 뗀 적이 없었던 붉은 완장은 이제 그들의 왼쪽 팔에 붙어 있지 않았다. 핏빛으로 붉은 그 완장은 어디서나 눈에 잘 띄었다. 특히 숲속에서나 논 가운데서 붉은 완장은 눈부시도록 선명하고 또렷했다. 그걸 남자가 차면 금방 기운 세게 보였고, 여자가 차면 갑자기 야무지게 보였다. 그건 분명히 붉은 물들인 손바닥 넓이의 헝겊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헝겊조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헌병이 찬 완장에서 대일본제국의 권위와 위압을 보았듯이 그 붉은 완장에서는 공산주의의 혁명과 투쟁을 보았다. 그들이 떠나게 되자 마을은 텅 빈 것 같은 적막 속에 놓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두 달 반 동안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과 무게가 그렇게도 컸던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동안 인민해방과 혁명투쟁을 위한 여러 가지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가르쳤으며, 혁명의 새 나라를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가며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부르던 노래는 여음으로만 남고, 그들이 추진하던 일은 기억으로만 남겨지게 된 것이다.
"어디로들 저리 가는고..... 쯧쯧쯧쯧....."
뒷짐을 지고 선 이장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사하기나 해야 할 텐데요."
옆에 선 법일의 무거운 말이었다.
"딴 나라 사람들도 아니고 같은 동포끼리 서로가 못할 일입니다."
"부처님 말씀으로 하자면 인생살이가 잠시잠깐인데 실제로는 굽이굽이거든요. 부처님 말씀이 뜻 깊기는 하지만 현실이 고달픈 사람들에게는 귀에 닿지 않는 너무 먼 소리지요."
"그게 왜 그리 되는 겁니까? 가시지요, 가서 앉으십시다."
이장이 돌아섰다. 두 사람은 감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 앉았다. 아이들 손을 타지 않은 감나무에는 감들이 누릇누릇 익어가고 있었다.
"그게, 부처님은 깨달은 입장에서 사람을 삼라만상 중의 하나로 보신 것이고, 인간은 인간끼리만 보는 데서 오는 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차이는 아마 영원히 줄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뺏고 뺏기는 일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렇겠지요, 굶고 살아지는 목숨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 차이를 줄이자면 어쨌든 있는 사람들이 불심을 지니고 욕심을 덜 부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 바로 보시었습니다. 사람의 고통 중에서 제일 큰 고통이 죽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죽는 데도 병들어 죽는 고통과 매 맞아 죽는 고통과 굶어서 죽는 고통이 있는데, 그 중에서 아마 제일 서럽고 큰 고통이 굶어서 죽는 고통이 아닐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평생을 산다는 것은 굶어서 죽는 고통의 연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고통 앞에 부처님의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한들 무슨 위안이 되겠습니까. 배부른 사람들은 사나흘만 굶어보면 배고픈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마음을 고쳐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심이지 따로 불심이 어디 있는 겁니까. 나눌 수 있는 자가 욕심을 덜 갖고 나누려는 것이 해결 방법이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서로 나누는 것, 그것이 서로가 화평을 누리며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자연의 섭리가 바로 화평이고 균등입니다. 물이 낮은 곳과 빈 곳을 채워 언제나 수평을 이루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그 원리가 깨짐으로 해서 빼앗긴 사람들은 빼앗은 사람들에게 대들 수밖에 없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나누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아닙니다, 좋으신 설법이십니다."
"무슨 황송한 말씀을요."
다음날 새벽 북소마을은 완전히 뒤집혔다. 새벽 어스름을 밟고 우물로 나간 아낙네들이 질겁을 해서 물동이를 내동댕이치고 도망을 치거나, 비명을 지르며 고샅을 뛰는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새벽잠에 빠져 있던 남자들이 허둥지둥 우물로 모여들었다. 역시 여자들의 말대로 우물가에는 고무신이나 짚신들이 즐비하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물 속에는 거꾸로 박힌 시체들이 뒤엉켜 있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요것이 어떻게 된 일이여?"
"이 많은 사람들이 빠져 죽다니, 대체 누굴까유?"
"이 일을 어찌 헌디여?"
남자들은 서로가 모르는 일을 물어대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러고들 있지 말고 어서 시신들을 끌어냅시다. 죽은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야 죽은 이유도 알 게 아니겠소?"
이장의 말이었다. 우물은 두레박줄로 열 발 가까운 깊이였다. 담이 큰 두 남자가 팔 다리를 버팅기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새끼줄을 네 겹으로 다시 꼬아 아래로 늘어뜨렸다.
"올려어, 끌어댕기어-"
아래에서 울림소리가 올라왔다. 굵은 새끼줄을 잡고 있던 남자들이 함께 기운을 썼다. 양쪽 겨드랑이에 새끼줄을 감은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방앗간 집 아들 영식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맞네, 영식이."
"어제 떠난 사람들이 어쩐 일이대여?"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는 알아차렸다. 어제 떠난 그들이 사방에 길이다 막혀 되돌아와 어젯밤에 우물에 몸을 던졌다는 것을. 그 소식이 마을에 퍼지자 우물가는 금방 통곡으로 뒤덮였다. 시체가 하나씩 끌어올려질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새로이 통곡을 터뜨렸다. 시체를 다 끌어올리는 데는 한나절이 걸렸다. 우물가에 즐비하게 눕혀진 시체는 모두 스물일곱 구였다. 어제 떠난 숫자 그대로였다.
"흉사를 했으니 집으로 모실 수도 없는 일이고, 장례를 저저끔 치른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니, 묘는 따로따로 쓰더라고 장례만은 합동으로 치르는 것이 어떻겠는가요?"
이장이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도 반대하는 가족이 없었다. 장례도 삼일장이니 뭐니 오래 끌 것 없이 하룻밤 새우고 다음날로 매장을 하자는 말이 나왔다. 시국이 뒤숭숭한데 혼 풀이했으면 됐지 오래 끌어 좋을 것 뭐 있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 말에도 유가족들은 순순히 따랐다. 그래서 우물가에는 차일이 쳐지고, 불이 밝혀졌다. 밤에도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이 달라진 것을 실감하게 했다.
법일은 유가족들의 간청과 이장의 부탁으로 독경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목탁은 없어서 요령만으로 독경을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죽음과 독경 - 법일은 그 부조화를 내세워 독경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장례라는 것은 어차피 산 사람들을 본위로 한 예식이었던 것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혼백을 건진다는 굿도, 망자의 왕생극락을 빈다는 불공도, 명당을 골라 묘를 쓴다는 풍수설도 다 산 사람들이 하는 자기본위의 위안행위였던 것이다. 법일은 종교생활을 해왔지만 아직도 영혼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영혼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그 의문은 언제나 짙고 짙은 안개 밭이었다. 불교에는 엄연히 내세관이 있었지만 그건 영혼의 존재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었고, 모든 종교가 갖게 마련인 현실세계의 질서나 안녕을 유지시키기 위한 종교적 윤리, 도덕률일 뿐이었다. 어느 종교나 사이비 종교인들은 그 내세관을 신도들에게 협박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종교를 돈에 팔아넘겨 타락시켰고, 신도들은 신도들대로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돈으로 종교를 거래하는 이기적 맹신을 낳았던 것이다. 종교 중에서 신화적 부분이 없는 종교가 없는데, 그 부분을 확대하고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야만적이고 비이성적 종교이며, 내세관을 과장하고 과신하게 하는 종교일수록 그만큼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모든 종교의 필요는, 첫째 자아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둘째 동물적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 셋째 경전의 올바른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내세관은 그 세 가지를 지키게 하는 보조 장치에 불과했다. 저 우주적 시야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분명 티끌이고, 일생 또한 찰나였다. 더욱이 목숨이 끊겨 흙 속에 묻히면 그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티끌이었다. 거기에서 영혼이 따로 분리되는가? 분리되어 그 가는 곳이 어디인가? 헤쳐도 헤쳐도 헤쳐지지 않는 그 안개 밭. 거기를 헤치려 함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몰랐다. 법일은 이런 생각을 이어가며 불경 중의 불경인 반야심경을 되풀이 독경하고 있었다. 바로 반야심경에 그 의문과 해답이 고스란히 담긴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면에서 경찰 두 명이 나온 것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경찰을 보는 순간 모두 놀라고 긴장했다. 관을 장만하려고 어제 면에 나갔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경찰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자 무슨 죄라도 진 것처럼 겁부터 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벌써 어젯밤에 차일 밑에 모여 앉아 인공생활을 겪었다는 이유로 어떤 시달림을 받게 되지 않을까를 걱정했고, 스물일곱이 죽은 것으로 족하니 더 궂은일 당하는 일 없도록 서로 입조심하고 감싸야 한다고 이장을 중심으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그런 심리적 불안감이 있는데다, 자신들이 치르고 있는 장례가 경찰들 앞에서 결코 떳떳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경찰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장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관을 한꺼번에 스물일곱 개나 사갔다는 정보가 경찰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거 빨갱이새끼들이 한 짓이지!"
경찰이 대뜸 다잡고 든 말이었다.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인민위원회고 여맹에서 일했던 사람들인데 그저께 밤에 다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을 한 것이지요."
이장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사실 그대롭니다."
"당신은 눈에 많이 익은데, 전에 뭘 했소?"
"예, 직업이야 농사고, 이장을 맡고 있었지요."
"뭐라고 이장? 아니 그런데......."
경찰의 얼굴색이 홱 변하며 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옆에 선 경찰이 눈짓을 해서 말이 중단되었다.
"장례는 언제 치를 작정이오?"
"곧 출상할 작정입니다."
"중단하시오, 허락이 있을 때까지. 더 조사할 게 있으니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당신 우리와 함께 갑시다."
경찰이 이장을 향해 턱짓을 했다. 일제히 고개를 든 사람들의 얼굴은 당혹감에 차 있었다.
"갑시다, 빨리."
경찰들이 앞섰고, 이장이 그 뒤를 따라 발을 떼어놓았다. 이장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고, 차일 밑에는 근심이 서렸다.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 경찰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관에 들어 있는 시체들을 다 끌어내게 했다. 악취가 풍기는 남녀의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졌다. 경찰을 따라온 민간인이 사진을 찍었다.
"이제 내다 묻어도 좋소."
경찰이 말하고 돌아섰다.
"실례합니다, 이장님은 어찌 됐습니까?"
법일이 나서서 물었다.
"아직 조사 중이요."
경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산은 커다란 모습, 억센 자태로 어디에나 있었다. 눈길을 가까이 머물게 해도 산이었고, 멀리 보내도 산이었으며, 눈을 감아도 사방은 산이었다. 눈길이 가까우면 산은 앞을 완강하게 막아서는 장벽이었고, 눈길이 멀면 산은 무거운 물결을 일구며 뻗어간 자연의 성벽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아도 가슴 가득 들어차는 산은 달라진 현실을 일깨우는 거부할 수 없는 생존의 조건이었다. 손승호는 비로소 산이 '거기 있는'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의탁해야 하는 '여기 있는' 확실한 존재로 발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은 있으되 마음의 간격이 멀어 경관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산은 자신이 그 품에 안겨야 하는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이었다.
"산이란 거이 을매나 고마운 것인지 시나브로 알게 될 것이구만. 빨치산헌테 산은 아그헌테 엄니 품이나 같은겨. 근디, 경험 웂은 사람덜이 요것이 무신 말이지 알아묵어지겄어? 차차로 젺어감서 알게 될 일잉께 접어두고, 좌우당간 일단 산에 들었다 허먼 똑 한 가지 지킬 것은 있구만. 고것이 먼고 허니, 맥엄씨 산얼 무서바허고 겁묵을 일도 아니고, 글타고 시퍼보고 마구잽이고 뎀빌 일도 아니다 그것이여. 산이 첩첩이라고 타보도 않고 무서바혀뿔먼 산심에 눌려서나 끝꺼정 갱신얼 못허게 되고, 그 반대로 산얼 시퍼보고 뎀비먼 지가 아무리 지랄 발광을 혀도 산언 끄떡도 안 허는디다가 종당에는 지가 당허고 말제. 산이야 한 발 앞이 워찌 생겠는지 몰르게 골골이 같은 디가 하나또 웂응께. 글먼 워찌 헐 것이냐, 겁 묵지도 말고 시건방구지게 나대지도 말고, 그저 내 한 목심 보존시켜 주십소사 허는 맘으로 산허고 친해지는 것이여. 글먼 산타기도 몸에 숼허게 익고, 산이 엄니 품이 되야 목숨도 보존허게 되는 것이제. 긍께로 산이 엄니맹키로 보듬아주먼 이쪽에서는 순헌 애기맹키로 보듬낀다 그말이여."
이미 전쟁 전부터 야산투쟁을 해왔다는 솥뚜껑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는지 모르지만 손승호는 그의 말을 유심히 새겨듣고 마음에 담았다. 그의 나이는 스물대여섯밖에 안되었지만 그 말은 경험이 바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인 의미가 깊었던 것이다. 손승호는 자연히 그에게 호감을 갖고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머슴출신이라는 것은 거침없이 밝히면서도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빨치산이면 됐지 무슨 이름이 더 필요하냐며, 그냥 솥뚜껑으로 부르라고 했다. 별명에 걸맞게 그의 두 손은 두껍고도 넓었다. 꼴머슴살이부터 했고, 그 손으로 꼰 새끼가 수천 리는 될 거라는 그의 출신성분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는 손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단출해 보이는 짐 속에 [조선공산당사]와 [천자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좌익을 한 다음부터 한글을 완전히 깨쳤고, 이제 한문을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손승호는 자신의 손과 그의 손을 비교하며 죄의식을 느꼈고, 자신이 공부했던 환경과 그가 공부하고 있는 환경과를 비교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읽고 싶은 책을 제대로 살 수 없었던 자신의 환경은 김범우에게 비하면 갈데없는 천민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솥뚜껑과 비교해보면 자신의 환경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귀족적이었다. 목숨을 내건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 한글을 완전히 깨치고, 다시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는데 한문공부를 하고 있는 그 열정 앞에 그저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었다. 산에 대한 그의 예사롭지 않았던 말도 경험만으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구찮시럽겄지만 내 선상님이 잠 되야줄 수 있으시겄소?"
솥뚜껑이 어렵게 해 온 말이었다.
"그러지요, 함께 공부하십시다."
손승호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대답했다. 솥뚜껑이 누구 앞에서나 자랑스러워하는 건 자신이 '구빨치'라는 사실이었다. '구빨치'는 전쟁 전부터 야산투쟁을 전개해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구분 짓는 뜻을 포함시켜 일상어로 쓰이고 있었다. 그 말은 '구빨치산'을 줄인 것이었고, '구'라는 글자는 구닥다리나 쓸모없음이란 의미는 전혀 없고 오히려 '혁혁한 투쟁경력'이나 '산경험의 혁명전사'라는 뜻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후퇴와 함께 새로 입산한 사람들은 자연히 '신빨치'일 수밖에 없었다. 신빨치로서 손승호는 솥뚜껑을 통해서 산 생활을 익힐 작정을 하고 있었다. 솥뚜껑이 자신을 선생을 삼고자 했는데 자신이야말로 솥뚜껑을 선생으로 받들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것에 비해 구빨치들이 그들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도당조직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들의 인적 구성은 거의가 신빨치에다가 나머지는 북조선에서 내려온 당원들이었다. 신빨치들이 갑자기 산에 묻히게 되면서 당황하고 긴장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었다. 그런데 북조선 출신들이 그 동안 가졌던 자신감과 거만스러움을 싹 잃어버리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우왕좌왕하고, 불안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했다. 물론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승리를 확신했던 그들이 먼 타향에서 갑자기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과 구빨치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구빨치들은 오히려 물 만난 고기들처럼 생기가 나고 힘이 솟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시범이라도 보이듯 소부대를 짜가지고 야간작전을 나가 전리품을 짊어지고 돌아왔다. 무기며 총알은 물론이었고 시레이숀 상자들도 많았다. 굳이 그들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미군을 무찔렀음을 그 노획물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화투짝만한 흰 쇠판이 대롱대롱 매달린 쇠줄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미군들의 목에서 벗겨낸 군번 표지였다. 그건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는 빼앗을 수 없는 물건이었고, 상대방도 죽지 않고서는 빼앗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기노획에는 신바람 나 했지만 군표의 수만큼 적을 없앤 것에 대해서는 무덤덤했다.
"우리가 전에 야산 투쟁얼 헐 적에 군경은 우리럴 죽이고 귀때기럴 띠갔소. 고것이 실적보곤디, 귀때기가 워디 한나뿐이간디. 한 눔이 한 사람것 두 개럴 띠 갖고 가먼 실적이 두 배로 늘어뿐다는 것을 멍청헌 웃눔덜이 한참 만에 알고는 귀때기 말고 코럴 띠와라 안 혔겄소. 우리야 고런 악독헌 짓거리 시킬 사람도 웂고, 그냥 요것이나 빗게왔소. 그냥 오기 서운허고, 또 요 쇠줄이 요상시럽게 생긴 것이 워디 쓸만헌 디가 있을랑가도 몰를 일 아니겄소?"
솥뚜껑이 시레이숀의 통조림 쇠고기를 우물거리며 심드렁하게 한 말이었다.
"손 동무도 한나 갖고 잡으먼 담에 구해다줄 팅께, 으쩌요?"
솥뚜껑이 덧붙인 말이었다.
"아이고, 난 싫소. 거 징그럽고 재수 없어서......."
"죽은 눔 물건 지니먼 부적도 돼요."
솥뚜껑이 정색을 했다.
"공산주의자가 부적은 또 뭐요, 안 어울리게."
손승호는 웃으며 눈총을 쏘았다.
"말허자먼 글타 그것이요. 근디, 손 동무가 징허고 재수 웂응께 요것얼 안 가질라는 것은 공산주의자허고 어울리는 것이요?"
손승호는 아이쿠 싶었다. 솥뚜껑은 그만큼 논리무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장파장이요."
손승호는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이 요상시럽게 생긴 쇠줄이 욕심 안 난단께 손 동무야 부처님인갑소."
솥뚜껑은 흰 쇠줄을 양쪽 검지손가락에 걸어 이쪽저쪽으로 돌려대며 서운해 하는 기색이었다.
"아니오, 나도 하나 구해다주시오."
받아서 버리더라도 그의 호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손승호가 얼른 한 말이었다.
"하먼, 진작에 그래야제라."
솥뚜껑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웃는 데도 우수가 가시지 않는 그의 눈자위를 보며 손승호도 따라 웃었다. 그는 투박한 느낌의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언제나 얼굴에 짙은 우수를 담고 있었다. 꼴머슴시절부터 구박과 천대를 받고 살아온 회한이 쌓이고 쌓여 그렇게 살갗으로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고 보면 손 생김에서 연유된 그 별명은 결국 마음의 상처로써 얼굴의 우수와도 이어지는 셈이었다. 흰 쇠줄은 그 생김이 누구나 신기하게 여길 만도 했다. 조알보다는 크고, 작은 이슬방울처럼 생긴 수백 개의 쇠구슬을 실낱같이 가늘고 짧은 쇠도막이 낱낱이 이어져 목에 걸 수 있는 길이의 쇠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쇠줄을 잃어버린 미군은 자기네 땅에 몇 뼘의 묘지도 차지하지 못한 채 영원히 이 땅에 남아 무명용사로 취급받게 될 터였다. 그의 몸뚱이가 썩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 그 쇠줄에 매달린 쇠판이었다. 그러나 손승호는 그 말을 솥뚜껑에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 사실을 모를 것 같지 않았고, 모른다 해도 굳이 필요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솥뚜껑은 하루에 한두 자의 한자는 반드시 익혔고, 손승호는 그가 익힌 한자들을 상하는 물론이고 좌우로 연결시켜 단어를 만들어가며 뜻풀이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면 역사, 문학, 사회, 정치 같은 것에 이야기가 걸쳐지게 되었다. 그는 우수에 찬 눈에 정기를 모으며 무슨 이야기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열정을 보였다. 손승호는 그에게 사격술을 배웠다. 손승호가 성의를 다하는 것만큼 그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가르쳐주려고 애썼다.
"시방 이 전쟁터에넌 일본 눔덜 구구식 장총, 미국 눔덜 에무왕에 카르빙, 쏘련제 따발총, 구구각색이요. 근디, 다른 것 싹 다 보덜 말고요 에무왕만 꼭 지니씨요. 요것을 쓰면 두 가지가 항꾼에 이문이요. 총 중에 성능이 질로 좋아 이문이고, 웬수덜 총으로 웬수럴 죽잉께 이문이요. 웬수덜 총으로 웬수럴 죽이는 고것이 을매나 재미지고 꼬신 일이요."
"그럼 총알이 문제 아니요?"
"어허, 고것도 웬수덜이 다 대주제라. 미국 눔덜언 원체로 물자가 흔해논께 도망험시로 질로 먼첨 내뿌는 것이 총알이요. 무건께라. 앞으로 따발총 총알은 떨어질란지 몰라도 이 에무왕 총알이야 쏘고 잡은 대로 을매든지 뒷댈 것이요."
그래서 손승호는 다소 무거운 것을 개의치 않고 M1을 갖게 되었다. 입산 나흘 만이었다. 자기 총을 갖게 된 손승호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것은 자신이 마침내 빨치산이 되었다는 확인이었다. 염상진으로부터 서민영 선생, 이학송, 김범우 그리고 홀로 사는 어머니와 많은 동생들의 모습이 한 가닥씩의 생각을 이끌고 스쳐갔다.
"손 동무도 엠원이요? 어떻게 재수가 좋았습니다 그려, 신빨치로서."
박두병은 멀리서 굳이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걸며 장난스럽게 웃고는,
"김범우가 이 총을 제법 잘 쏘았지요. 나도 좀 쏜다고 쏘는데 김형이 언제나 나보다 나았어요."
그러고는 먼 데로 눈길을 잠시 보내고 있다가,
"손형, 우리 함께 고생 좀 해봅시다. 이게 옳은 길 아니겠소?"
하며 손승호의 손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손승호는 그가 '손 동무'가 아니라 '손형'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슴 찡 울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 그의 왼손에도 M1이 들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난 김형 생각에 찬동하진 않지만 이해하고는 있소. 우리의 상황은 여러 갈래의 생각을 갖게 만들고 있지요. 김형한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게 옳은 일일 것 같소."
후퇴하기 직전에 박두병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북한군 총사령관에게 그대의 군대와 잠재적 전투능력이 불원간 전면적으로 패배되고 완전히 파괴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유엔의 결의가 최소한의 인명 손실과 재산파괴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본관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대와 그대의 지휘 하에 있는 군대가 한국의 어느 지점에서든지 본관이 지시할 군사적 감독 하에 무장을 버리고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며 또한 그대의 지배하에 있는 유엔군 포로 전부 및 비전투원 억류자를 즉시 석방하여 보호와 가료와 급량을 가하여 본관이 지시하는 곳으로 즉시 수송할 것을 요구한다. 유엔군 사령부의 수중에 있는 포로를 포함한 북한군은 문명적인 습관에 의한 보호를 계속적으로 받을 것이며 가능한한 조속히 그네들의 집으로 귀환하도록 허가할 것이다. 본관은 그대가 이 기회를 타서 장래의 불필요한 유혈과 재산파괴를 방지할 결심을 조속히 행할 것을 기대한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북한군 총사령관에게 보낸 항복권고문이었다. 손승호는 그 삐라를 찬찬히 다 읽었다. 그 내용에 잘 나타나 있는 맥아더의 안하무인과 오만방자함을 손승호는 경멸하고 비웃었다. 그날 밤 손승호에게 첫 번째 야간작전 출동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M1총대를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리고 대열을 따라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시월둘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22. 너희들을 위한 전쟁
민기홍은 시월 이일에야 몸을 숨기고 있던 정릉에서 이화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원효로의 친정에 가 있던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 다음날이었다.
"당신, 기자증 가지고 계시죠?"
미처 자리를 잡고 앉기도 전에 아내가 묻는 말이었다. 민기홍은 까닭 모를 짜증이 솟기는걸 느꼈다. 그러나 마침 반갑게 매달리는 딸아이를 안으며 짜증을 눌렀다. 별다른 이유 없이 아내한테 짜증을 부릴 수가 없었고, 그 동안의 피신처를 구해준 것도 처가인데다가 아내는 아내대로 살얼음 밟듯 양쪽을 오가느라고 고생을 한 처지였다.
"내 수중에는 없지만, 버리지 않았으니 어디 있지 않겠소? 왜 그러오?"
민기홍은 껴안은 딸아이한테서 젖비린내 같은 아이들 특유의 체취를 맡으며 물었다.
"참 당신도, 어찌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처럼 그렇게 말하세요? 지금 부역자들 색출하느라고 야단인 것 모르세요?"
아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눈을 흘겼다.
"엄마! 왜 아빠 보구 싶어하구선 금방 싸워."
딸아이가 제 엄마를 올려다보며 야무지게 내쏘았다. 그는 딸아이를 더 꼭 껴안으며,
"아니다, 싸우는 게 아냐."
하면서 얼굴을 맞비볐다. 아내의 목소리는 딸아이의 오해를 살 만큼 다분히 시비조였다. 그만큼 부역자 색출은 또 하나의 새로운 현실로 닥쳐와 있었다.
"저 쪼그만 게 뭘 안다고, 그냥......."
아내는 딸아이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맥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부역을 안했으면 그만이지 그게 꼭 필요하겠소? 기자증이 부역을 안했다는 증명서도 아닌데."
민기홍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 게 아니라구요. 이번에 부역한 사람들은 아주 본때를 보일 거라는 소문이에요. 날마다 사람들이 수없이 잡혀들어가구 있구요. 이런 판국에 기자증을 가지고 있으면 훨씬 더 안전할 게 아녜요?"
"제기, 진짜는 다 떠나버렸는데 부역한 사람들만 잡아들이면 뭘 해. 피할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부역자들이야 잡아들일 것도 없는 사람들이지."
민기홍은 다시 짜증이 솟기는 것을 느끼며 투덜거리듯 혼잣말을 했다.
"당신, 그런 말 아무렇게나 하지 말아요. 제 귀에도 꼭 그 사람들 편드는 것처럼 들리는데, 경찰이나 군인한테는 어떻게 들리겠어요?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라구요."
아내는 겁 질려 하고 있었다.
"알았소, 그런 말 그만합시다."
민기홍은 안고 있던 딸아이를 내려놓았다.
"저어....... 기자증 찾아가지고 좀 나가보시는 게 어때요? 신문사가 어떻게 되는지......."
"그게 무슨 소리요?"
민기홍은 역정을 내며 아내에게 눈길을 쏘았다. 아내의 말은 까닭 모르게 짜증이 일고 있는 심사를 뒤집고 말았다.
"이제 친정에도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내는 황급하게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 그렇지, 벌써 석 달간이나 처갓집 신세를 졌지. 민기홍은 자신이 가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부양가족이 셋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은 꼬박 삼 개월 동안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처가에 떠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건 당연히 되찾아와야 할 책임이고 권한이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떨군 아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수척하게 말라 있었고, 입성도 꾀죄죄했다. 남편을 피신시키며 보낸 전시 삼개월간의 고생살이가 역력하게 드러난 모습이었다.
"여보, 섭섭해 하지 마오. 내가 딴 생각 하느라고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신문사가 다시 문을 열 준빌 하는지도 모를 일이요. 내가 나가보도록 하겠소."
민기홍은 아내한테 미안한 생각과 함께, 그러나 가망 없는 일이라 싶어 힘없는 소리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일 뿐인 장인에게 얹혀 그 동안 연명한 것만도 면목 없고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민기홍은 줄기가 잡히지 않는 잡다한 생각들을 털어내며 기자증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양복 주머니에도 없었고, 책상 서랍에도 없었다. 책갈피며, 아내의 경대 서랍까지 다 뒤졌지만 그것은 간 데가 없었다. 소용이 닿을지 어쩔지 모르면서 그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쪽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설쳐대고 있는 자신의 꼬라지에 그는 그만 혐오감이 솟고 말았다.
"에이 빌어먹을! 그 잘난 게 어디로 갔어 그래."
그는 서랍을 부서져라 밀어붙이며 소리쳤다.
"됐어요, 됐어요. 그만 찾으세요. 제가 차근차근 다시 찾아보겠어요."
아내가 다급하게 말하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마루로 밀려나오며 아내의 집착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쪽지는 찾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그 엉뚱한 생각은 자기 혐오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작용인지도 몰랐다. 무언가 모르게 짜증스러운 심사도 자신에 대한 못마땅함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삼 개월 동안 스스로 유폐시킨 토굴 속에 갇혀 있다가 무사하게 나왔는데도 어쩐 일인지 살아났다는 산뜻한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토굴 속에서는 어쨌거나 이 전쟁이 빨리 끝나기만을 그리도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토굴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희망이었다. 그런데 막상 토굴을 벗어나고 보니 마음은 찜찜하고 칙칙했다. 이십팔일에 서울을 완전하게 되찾고, 이십구일에 수도탈환식이라는 것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집에 그냥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내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심증이다 싶게 매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아내는 며칠 더 형편 돌아가는 것을 보자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아내의 그런 말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 아래서는 어느 쪽이든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야 하고, 죽음의 위협 속에 내던져져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이나 똑같이 저지르는 작태였다. 그런 집단적 횡포를 그는 용납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전부 동원해 그 횡포를 거부하고 피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집단의식과 거기서 비롯되는 집단행동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불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인 정치조직을 경원했고, 정치행위를 멸시했다. 그 어떤 정치조직이든 대중 선동적이고 대중 최면적인 휘황찬란한 용어들을 내걸어 명분으로 삼게 마련이었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정치행위는 결국 자기네들의 지배 욕구를 달성시키기 위한 사기성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는 체질적으로 집단행동의 획일성이나 광분성을 싫어하는데다가,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된 정치행위의 허위성과 기만성에 넌덜머리가 나고 말았다. 복잡 미묘한 구조로 얽혀있는 사회와 대중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이 미화시키는 찬란한 명분과는 별도로 나날의 삶의 필요에 따라 자생적인 힘으로 꿈틀거리며 움직여가고 있는 면적과 층이 의외로 넓고 두꺼웠던 것이다.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처럼 과장하고 허풍 떠는 정치광적 인간들을 경멸하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세계 사대성인이니, 세계 사대종교니, 세계 사대문명의 발상지니 해서 온갖 것을 세계적인 단위로 분류 정리해가며 밥 빌어먹고 사는 인간들 중에서 또 누군가 인간의 삼대발명을 종교, 정치, 언어라고 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그 분류 자체를 우습게 생각했다.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지배욕구의 산물인 것이 분명한데 발명일 수가 없는 것이고, 어떤 형태의 정치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허위조작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는 한 정치는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추악한 것이었다. 그 분류자야말로 정치제도가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번성을 전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맹신하는 단견의 소유자였다. 정치는 필요악이라고 그는 규정하고 있었다, 경제라고 통칭되는 장사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장사라는 것은 이윤추구를 정당한 윤리로 내세워놓고 끝없이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는 것이었고, 정치라는 것은 정의실현을 정당한 목표로 내걸어놓고 끝없이 정적을 살해하고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합리화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정상배'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종교의 기능은 어느 정도 믿었으되 정치의 효능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적 속성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논리화된 역사구조로 파악해내고, 그 해결방법을 정치형태의 변화에서 찾아내려는 당위성 앞에서 그는 공허를 느낄 뿐이었다. 이학송이나 김범우 같은 사람들의 인식이나 논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주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된 것도 그 공허감을 처리할 수 없어서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은 무엇이다 하는 직설적 속단이었다. 인간은 정치적 존재다. 이것이 포괄적 정의가 아니라 단편적 속단인 것은 인간은 그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자 하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존재인 까닭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 논리에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어도 전적인 찬동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인공치하가 되고 곧 각 신문사 기자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쳐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그는 아예 '심사'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에 그랬던 것처럼 공산주의 정권에도 기대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식은 공산주의적 심사 자체를 거부했다. 그 다음에 남은 길은 무엇이었던가. 구조가 다른 두 정치체제가 맞서고 있는 싸움판은 철저한 편 갈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싸움판에 어느 편에든 솔선해서 뛰어드느냐, 강제로 끌려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두 가지 다를 거부했다. 그래서 토굴 속에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굴을 벗어나게 되자 무사히 목숨을 부지했다는 생각에 앞서, 내 삶은 이게 무엇인가, 이게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꼴인가, 하는 물음이 생기면서 짜증이 꼬약꼬약 괴어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 물음의 밑바닥에는 이학송, 김범우, 손승호 같은 존재들이 어떻게 되어있을까 하는 의문도 도사리고 있었다.
민기홍은 별다른 목적지 없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발길은 자연히 종로 오가 쪽으로 옮겨졌다. 정릉에서 돈암동을 거쳐 집에 다다를 때까지는 외관상으로 보아 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워낙 변두리고 북쪽이라서 전상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종로 오가 네거리에 이르자 대뜸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불타버린 동대문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던 동대문시장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 시장에는 언제나 번잡과 소란이 들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번잡은 무질서가 아니었고, 그 소란은 잡소리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겹겹이 얽히고 설켜서 일어나는 그 분주스러움과 시끄러움은 언제나 싱싱한 생기고, 풋풋한 원기고, 펄펄한 활기로 살아가는 수많은 서민들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어쩌다가 그 속에 한바탕 휩쓸렸다가 나오면 초록빛 들판에서 끝없이 심호흡을 한 것 같고, 푸른 바다에서 욕심껏 수영을 한 것도 같은 시원하고 흡족한 기분이 넘치면서, 삶의 나태로 늘어진 팔다리에 탄력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했었다. 시장이야말로 정치의 찬란한 명분과는 상관없이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자생력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삶의 현장이고, 서민들의 삶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장이 정치의 명분으로 일어난 전쟁에 의해 산산이 박살나 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고,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인가? 잿더미를 건너다보고 있는 민기홍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남긴 상처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타다가 만 건물, 반쯤 부서진 건물, 유리창이 다 깨져나간 건물, 움푹움푹 패인 길바닥, 휘어지거나 동강난 전찻길, 전쟁이 휩쓸고 간 모습은 참담했다. 그러나 그가 참담함을 느끼는 것은 도시가 입고 있는 피해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도시가 저 지경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죽고 상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저까짓 건물이나 길바닥은 고치고 땜질하면 그만이지만....... 그는 심한 목마름을 느끼며 길가에 망연히 서 있었다. 정치의 명분은 전쟁을 정당화시키고, 전쟁은 살인을 합리화시킨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죽인 병사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그런 부하를 많이 거느린 장군은 영웅으로 탄생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민기홍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프차 한 대가 바로 코앞으로 질주를 해갔던 것이다.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그의 눈길은 지프차로 날아갔다. 지프차에 탄 네 명의 군인은 분명히 웃어젖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외국 군인이라는 것도 한눈에 잡혔다. 백인 둘에 흑인 둘이었다.
"저런 망할 자식들!"
민기홍은 그들을 향해 내뱉었다. 왈칵 끼쳐온 모욕감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그는 멀어져가는 지프차를 응시하고 서서 그들이 인천상륙작전을 편 미군들이라는 것을 되씹고 있었다. 차를 인도에 바짝 붙여 질주시키며 사람을 놀라게 해놓고 재미있다고 웃어젖히는 그들의 행위에서 이번 전쟁의 양상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군이 서울거리를 활보한 것은 이미 오 년 전부터였다. 그러나 지프차를 그런 식으로 몰아대며 장난질을 치지는 않았었다. 그때는 점령군이되 현지인의 눈치를 살피는 군대였는데 이제는 현지인의 눈치 같은 것은 볼 것 없는 싸우는 군대로 변해 있었다. 그때도 벌써 미군들이 일으키는 강간사건은 신문보도가 철저하게 봉쇄된 채로 소문에 의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제 싸움을 하는 군대로 변한 그들이 도처에서 얼마나 멋대로 나댈 것인지 두렵기만 했다. 미군과 남쪽정치와의 상관관계를 고상하게 논하기 전에 그에게 박힌 미군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 땅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야만인이나 미개인 취급을 하며 상대적인 우월감과 자만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매끼 육식을 해대서 넘쳐나는 정력을 주체하지 못해 여자를 찾아 허덕이는 동물적 인간들이라는 점이었다. 첫째의 것은 오키나와를 거쳐 오면서 일본 놈들이 제공한 자료에 따라 교육을 받아 머리에 심게 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둘째의 것은 그들의 식생활에 따른 고질적인 측면과 성을 오락시하는 비윤리적 형태가 합해진 것임을 알아내게 되었다. 야만인의 땅에서 야만인들을 위해서 피 흘려 싸우는 그들의 우월감과 자만심은 더욱더 커져만 갈 것이고, 거기다가 보상심리까지 겹쳐지고, 전쟁터의 즉흥적인 야수성까지 한몫을 거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민기홍은 어깨가 처져 내리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리 폭격을 해대지 않으면 그 지독한 빨갱이 놈들이 물러갔을 것 같애?"
"하긴 그렇지. 미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디 이렇게 햇빛을 볼 수 있었겠어. 미군이 어련히 알아서 했을라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자네 동네 부역자 놈들 색출은 잘 되고 있나?"
"응, 지금 한창 열이 올랐네."
두 남자가 지나가며 큰 소리로 나누는 말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팔들을 휘저으며 걸음을 서둘러대고 있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민기홍은 우익 아저씨들, 살 판 나겠구만. 잘들 해보셔. 하며 코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군인들 차만 기세 좋게 쌩쌩거리며 오갈 뿐 사람들은 드문드문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신문사로 옮겼다. 신문사는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최익달이 피난지에서 돌아왔다.
"워째 요리 굼벵이걸음이시요? 삘건 물 안 튕길 디로 아조 멀찍허니 갔었등갑제라?"
먼저 돌아와 있던 윤삼걸이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한 삐딱한 어조로 한 말이었다.
"어허, 윤 부위원장은 토깽이 걸음맨치로 빨르기도 허요이. 빨갱이덜 전송할러고 이리 바쁘게 돌아온 참이요?"
윤삼걸이 왜 그러는지 아는지라 최익달은 지지 않고 되받아치며 오금을 박았다. 일부러 '윤 부위원장'으로 부른 것도, 너는 내 밑이다,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나 인자 부위원장이 아니요. 아무 실속도 웂이 이름만 지단헌 그눔에 벌교, 조성지구좌익척결위원회 부위원장 자리 때레치겄소."
윤삼걸이 눈을 디룩거리며 성질을 부렸다. 그는 여수에서 최익달이 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그와 상판때기를 맞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허! 평양감사도 지 허기 싫으면 벨 수 웂은 일잉께. 허나, 남자 시상살이가 꼭 실속만으로 살아지는 것도 아닌 것이고. 그라고 남자가 지내간 일 술 한잔 묵고 툭툭 털어뿔지 못허고 꽁허니 가심에 담고 있는 것맨치로 짜잔헌 일도 웂은 법잉께."
최익달은 턱을 치켜들고 먼 산 바라기를 한 채 윤삼걸의 약한 데를 쑤시는 한편 화해술 살 의사가 있음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
"허 첨, 말 한분 요상시럽게 비비 틀어 사내끼 꼬요이. 나도 요리 무사허니 돌아온 마당에 지낸 일 다 잊어뿔자 생각도 혔제만, 그냥 잊어뿔기로는 배창아리도 웂은 것 겉고, 남자 오기가 탱자까시맹키로 창창헌 판이요."
윤삼걸도 감정을 한 매듭 꺾으며 말하고 있었다.
"되얐소. 괴기넌 씹어야 맛이고 말언 해야 맛인께로. 그눔에 탱자까시 오기 나가 술 한 판 사서 노골노골허니 풀어야 쓰겄소. 그 잡녀러 빨갱이 눔덜 통에 석 달간이나 가심 통게통게허고 잠자리 아실아실해 감스로 술 한 잔 푹허니 못묵었응께 인자 골마리 풀어놓고 그간에 목에 찐 때 씻거내림시로 코가 삐틀어지게 한바탕 마셔봅씨다."
최익달은 더없이 호기를 부렸다.
"술얼 코가 삐틀어지든지 배가 터지든지 마시는 것이야 존디, 그간에 빨갱이덜이 농지개혁얼 싹 다 새시로 혔고, 아랫것덜이 고걸 고대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아시요?"
"하, 가당찮다! 그려서, 지끔 와서도 그 권리 주장얼 허겄다 고것이여? 고런 눔덜이 있으먼 싹 다 싸게싸게 손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혀. 고런 것덜이야 보나마나 빨갱잉께로 모다 총살감이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최익달은 마구 침을 튀겨대고 있었다.
"지 목심 귀헌 것이야 즘생도 아는디, 시상이 달라진 이 판에 고런 맘 묵고 있어도 권리 주장허고 나설 멍텅구리가 워디 있겄소? 무담씨 빨갱이 눔덜이 개지랄 쳐갖고 아랫것덜 배때지에 헛바람 너놨응께 겉으로야 표식 안 내제만 시상 속인심이 드럽게 변해 앞으로 우리 처신허기가 옷속에 꺼시랭이 든 것맨치로 고약시럽게 생겼다 그것이요."
"원 벨 걱정 다 허고 그요. 아랫것덜이야 원제라고 겉허고 속이 같을 때가 있었습디여? 면전에서야 죽는 디끼 허고 뒤돌아스먼 욕얼 삼태기로 퍼붓는 눔덜이 그눔덜인디. 허기넌 요분참에 아랫것덜 대가리에 전보담 삘건 물이 더 진허게 들고, 맘보도 솔찬허니 변혔을 것이요. 그리허나 걱정할 것 아무것도 웂소. 즈그덜이 빨갱이 따라서 봇짐얼 싸지 않고 이 고장에 그냥 살기로 한 바에야 그 맘보 고쳐묵지 않고서야 워쩔 것이요. 허고, 아랫것덜이야 씨게 다룰수록 말 잘 듣는 법인디다가, 그 삘건 물 든 맘보 싸게 고쳐묵게 허는 디도 씨게 다루는 방도밖에 웂소. 그 씨게 다루는 방도가 머시냐! 첫찌로 빨갱이 눔덜헌테 부역헌 눔덜얼 싹 잡아내는 것이고, 두찌로 빨갱이 눔덜이 그냥 맨손 털고 물러슨 것이 아닐 것잉께 표안 내고 숨어 있는 빨갱이럴 싹 잡아내게 우리가 경찰을 왈겨야 허요."
"고것이 빨갱이덜 뿌랑구뽑고, 아랫것덜 겁믹이고 허는 양수겹장으로 질로 존 방도기는헌디, 말맹키로 쉴털 안헌께 문제요."
"고것이야 걱정 안 해도 쓰요. 요분에 까딱 잘못혔드라먼 나라럴 홀랑 다 뺏길 판이었는디, 고런 꼴 당허고도 빨갱이럴 그냥 두겄소? 군경이 전보담 훨씬 씨게 나올 것이고, 우리 좌익척결위원회도 인자 심지게 나서서 경찰이고 군에 빨갱이 소탕을 적극적으로 허라고 압력을 가허는 것이요."
"그러고 봉께 우리가 헐 일이 있구만이라."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임무가 중차대허요. 유 조합장도 무사허니 돌아왔당께 우리 위원회 회의도 헐 겸 그간 서로 안부도 들을 겸 혀서 오늘밤에 술자리럴 맹글먼 워쩌겄소?"
"그리 혀서 나쁠 것이야 웂제라."
윤삼걸은 마지못한 척 대꾸했다. 그만하면 서운한 기분도 풀린 셈이었고, 앞으로 살아가자면 최가와 이모저모로 손바닥장단을 맞추어야 할 입장이었다.
"되얐소. 유 조합장헌테넌 나가 연락얼 취해둘 것잉께, 이따가 저녁밥 때 남원장에서 만냅시다."
최익달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윤삼걸의 감정을 풀게 된 것이 다행이라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여수에서 그에게 한 처사는 아무래도 좀 모질었던 것이다. 최익달과 윤삼걸은 후퇴하는 경찰을 뒤따라 잡아 여수까지는 사이좋게 갔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수에서 벌어졌다. 여수항은 후퇴하는 군경과 인근 지방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군경은 진해니 부산 쪽으로 이동한다는 풍문이었는데, 그들은 피난민들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어디로 떠야 제일 안전한 것인가를 놓고 말들이 분분하게 오갔다. 그 많은 말들을 간추리면, 군경을 따라가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명한 이치 앞에서 문제가 되는 건 배였다. 쓸 만한 통통배들은 모두가 징발당한 형편이라서 아무리 큰 돈질을 한대도 배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돛단배에다 몸을 싣고 그 먼 뱃길을 갈 수도 없었다. 인민군들이 시시각각 밀려 내려온다는 소식은 다급해지지, 피난 짐을 싼 그들은 인공치하에서는 하나같이 살아남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자신들이 먼저 아는 처지지, 그들은 차선의 방법으로 돛단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안전한 피난지로 섬을 택하게 되었다. 그 바람이 불자 돛단배를 놓고 돈질이 시작되었다. 경쟁이 심해지니 배 삯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돈푼을 손에 쥔 사람들이라 배 삯은 자꾸만 치달아 올랐다. 물론 섬이라고 해서 다 안전한 피난처는 아니었다. 인민군이 여수까지 밀어닥치더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섬이어야 했다. 그러자니 사람이 적게 사는, 거리가 먼 섬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최익달은 소리도로 가기로 하고 배를 한 척 구했다. 그런데 윤삼걸이 따라붙으려고 했다.
"아, 시방 정신이 있소, 웂소! 우리 식구덜만 혀도 배가 까라앉을 판이요. 돈질만 크게 험사 배야 을매든지 있응께 윤 회장 일이야 윤 회장이 알아서 허씨요."
이렇게 내질러버린 것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가먼 워디로 가시요?"
"나도 잘 몰르겄소. 물개똥맹키로 쌔고쌘 것이 섬잉꼐로 암 디나 닥치는 대로 가보는 것이요."
"그려라아? 쪼옿소. 그 심보!"
눈을 부릅뜬 윤삼걸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두 집 식구들이 탈 수 없도록 배가 작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목적지까지 감춘 것은 좀 안된 일이었다. 그러나 피난민이 한 가구라도 많아지면 그만큼 피난살이가 어렵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소리도에서 피난살이는 지루했을 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날마다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자다가 그래도 해가 떨어지지 않으면 바다에 낚시를 던졌다. 그러나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빨갱이 놈들한테 나라를 다 빼앗겨버리면 어쩔 것인가 하는 불안감은 한시도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순전히 미국 덕으로 빨갱이들을 다시 몰아치게 되었으니 그 고마움이야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저 미군들은 은인이고, 미국은 받들어야 할 고마운 대국이라는 생각만이 그의 마음에 가득했다. 윤삼걸과 흡사한 꼴을 당해 그 유감을 뱀독처럼 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청년단장 염상구였다. 재작년 여순사건에 이어 두 번이나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된 염상구는 이만저만 독이 오른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나마 너무 엉겁결에 정신없이 당한 일이라 경찰과 미처 연락이 안 되어 그랬으리라고 이해할 만한 구석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경찰에서 하는 짓을 보니 그때도 청년단을 고의적으로 따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요할 때는 부려먹고 다급할 때는 내던져버리는 것이 경찰의 행투라는 것을 알게 된 염상구는 삼 개월 동안 부하 서넛을 데리고 산을 옮겨 다니며 이빨을 빠드득빠드득 갈아붙였던 것이다.
"씨부랄눔덜, 우리가 똥친 작대기라 그것이제. 워디 두고 보자."
그는 하루에 몇 번씩이나 부하들 앞에서 이 말을 질겅질겅 씹어 내뱉으며 마음에 독샘을 깊이 팠다. 후퇴를 앞두고 경찰서에서 당한 꼴을 생각하면 그는 분이 뻗쳐올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는 했다.
"정신없는 소리 하질 마시오. 경찰들도 버리고 가야 할 형편이오."
경찰서장의 냉담한 말이었다.
"글먼, 좆나게 부레묵을 때넌 은제고, 인자 와서 느그넌 빨갱이 손에 잽헤 뒤져라 고것이요 시방?"
"어쨌거나 상부지시를 받지 않았으니 내 알 바 아니오."
경찰서장은 냉혹하게 얼굴을 돌려버렸다. 소화다리를 건너가는 그들의 등 뒤에다 대고 총을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서 있을 때의 참담했던 심정을 염상구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스무 명이 넘는 부하들을 다 데리고 갈 수가 없어 네 명만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각자가 요령껏 피했다가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면서 그는 눈물을 머금었다. 경찰한테 버림받음으로써 본의 아니게 부하들을 위험 속에다 분산시켜야 하는 아픔이 그의 가슴을 찔러댔던 것이다. 그는 벌교에서 멀리 떠나지 않으면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방법으로 산을 타고 다녔다. 식량도 절대로 훔치지 않고 미리 준비한 돈으로 샀고, 신분도 거리가 좀 떨어진 지방의 민청원으로 위장했다. 그런 방법을 쓰니까 산 가까운 마을에 의심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고, 인공치하가 돌아가고 있는 사정도 귀동냥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외서의 끝마을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 최서학이었다.
"청년단장이시죠?"
최서학이 쪽에서 그를 먼저 알아보았다. 너무 느닷없는 일이라 그의 손은 옆구리로 먼저 갔다. 옷 속의 권총을 잡고 자신을 알아본 청년을 노려보았지만 그로서는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역전 차부를 휩쓰는 주먹대장 염상구를 통학생인 최서학은 잘 알아도 염상구가 최서학을 알리가 없기도 했지만, 더구나 최서학은 날로 심해지는 상처의 고통에 시달리느라고 얼굴에 뼈가 남아 있는 흉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나럴 알아보는 니넌 뉘기여!"
염상구의 입에서 낮고 빠르게 튀어나간 소리였다.
"그전 세무서장 최익현 아시제라? 그 양반 큰 아덜 최서학이구만요."
염상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최서학은 자기를 알리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아버지를 내세웠다.
"잉, 자네가 죽은 최익현 서장 큰 아덜?"
염상구는 금방 알아듣고는,
"근디, 요것이 워쩐일이여?"
최서학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최서학은 의용군에 끌려나가게 된 것에서부터 거기가지 오게 된 경위를 요약했다.
"허! 자네가 용감무쌍헌 반공투사시?"
염상구가 최서학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진지한 얼굴이 되어 한 말이었다.
"은혜는 안 잊을 것잉께 지럴 잠 도와주시씨요. 인자 혼자서는 꼼짝을 헐 수가 없구만요."
최서학은 말라터진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간곡하게 말했다.
"은혜고 자시고 뒷전치고, 우리 편이 요리 쌩고상얼 허는디 워찌 몰른 칙끼 허겄어. 근디, 요 지독스런 냄새가 다리에서 나는 것 아니라고?"
염상구가 얼굴을 찡그리며 최서학의 다리로 눈을 돌렸다.
"그렇구만요.“
최서학의 힘없는 대꾸였다.
"지기럴, 여름살에 부시럼이드라고, 총 맞은 자리럴 지대로 치료 못혔응께 살이 푹푹 썩어드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병원은 빨갱이덜 속에 있고, 요것 참 복장 터져 죽을 환장헐 일이시웨."
염상구가 부하들을 둘러보며 안타깝게 한 말이었다. 최서학은 염상구한테 며칠을 업혀 다니다가 읍내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이 되었다.
"이거 조금만 늦었더라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뻔했군요."
고름투성이인 채로 검붉게 썩어 들어가며 역한 냄새를 진동시키고 있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전 원장이 혀를 찼다.
"원장님, 선상님, 싸게 치료 잠 혀주시씨요. 쟈덜 아부지가 당혀 시상얼 뜬 것만으로도 원퉁하고 절퉁헌디 쟈할라 또 저리 당혔으니 나가 워찌 살어야 허겄는가요."
최서학의 어머니가 눈물바람을 했다. 염상구는 경찰이 없는 경찰서를 차지하고 앉아서, 두고 떠나 부하들을 찾는 한편으로 차부며 장터거리에서 하늘에다 대고 괜한 권총질을 해댔다. 뜻 모르고 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건 천상 미친 놈 짓이었지만 염상구로서는 몸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좌익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미 깊은 일이었다. 경찰이 들어오기까지 이틀간 그는 읍장이었고 경찰서장이었다.
"지 에미허고 붙어묵을 눔덜, 쨀 때넌 질로 먼첨 째고, 들올 때넌 질로 늦게 들오고, 요것이 무신 국립경찰이여, 국립경찰이! 다 내 좆만도 못헌 새끼덜이!"
염상구가 공포를 갈겨대며 경찰서로 밀려드는 경찰들을 향해 퍼부어댄 욕이었다. 그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경찰들은 엉거주춤했고, 그 발악적인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권 서장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경찰서를 떠난 염상구는 청년단에 진을 치고 앉아 경찰서에는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권 서장은 이틀 만에 하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잘난 경찰 혼자서 밥얼 몰아묵든지 죽얼 쒀묵든지 잘덜 혀묵어봇씨요. 쥐좆도 아닌 청년단이야 붕알 맨짐스로 귀경이나 허고 앉었을랑께라."
염상구는 이렇게 지껄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권 서장은 심한 모독감을 느꼈다. 첫 번째는 그러려니 하고 참아 넘겼지만 두 번째 당하고 보니 심사가 뒤틀려 올랐다. 권 서장은 그러나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그들을 떼쳐놓고 후퇴를 한 것이 공적으로야 어찌할 수없는 일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면목 없는 일이 분명했고, 현실적으로 청년단의 뒷바라지는 시급한 형편이었다. 염상구는 서장에게 느긋하게 배짱을 부려가며 하루에 한 차례 병원으로 최서학을 찾아갔다. 그는 겉으로 태평스러웠지 속으로는 벌써 경찰 앞질러 각 마을마다 부하들을 풀어 그 동안의 변동을 조사시키느라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단장님, 워째 우리 엄니 뜻을 퇴허셨는게라?"
최서학은 염상구를 보자마자 서운한 빛을 드러내며 물었다.
"나가 헌 말 엄니한테서 못 들었는가?"
염상구는 최서학의 옆에 앉으며 비식 웃었다.
"다 들었제라. 그려도 지나 엄니 맴이 그렇덜 않은께 서운하구만요."
이상하게도 염상구 앞에서는 표준말이라는 것을 흉내 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최서학은 아주 진하게 고향 말을 썼다. 어설프게 표준말을 흉내 냈다가 금방, 야 니가 잠 배왔다고 쎗바닥얼 그리 놀리냐? 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염상구는 어제 어머니가 적잖은 사례를 했는데 거절을 했다는 것이었다. 한편이니까 도운 것이지 답례를 받자고 도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어머니한테 그 말을 듣고 나서 최서학은 너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먹만 쓰고, 경찰에 빌붙어 좌익을 잡는 시늉이나 하면서 금품갈취를 일삼는 줄 알았는데 그건 전혀 새로운 면모였던 것이다.
"서운헐 것 하나또 웂네. 지끔 급헌 것은 자네가 싸게 낫는 것이제 답례가 아니시. 아픈 것은 잠 워쩐가?"
"열도 내리고, 욱씬거리는 기도 가시고, 인자 살 만허구만요."
최서학은 염상구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것만이 아니라 날마다 병원을 찾아오기까지 하는 염상구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아조 자알 되얐네. 원장님 말씸이 새 살이 돋자먼 한참 걸릴 것이라고 헝께 몸보신헌다 택치고 푹 눠서 지내소. 날도 썬들썬들해지고 있응께 지낼 만헐 것이네."
염상구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최서학의 독기에 일종의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좌익의 손에 죽은 최익현의 아들인데다가, 의용군을 탈출해서 총상을 입고 그때까지 버텨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용기와 독기에 놀란 한편 '니가 진짜배기 사내다!'하는 감동이 가슴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이라는 연대감은 그 다음에 생겨났다. 그러나 최서학에게도, 그의 어머니에게도 자신의 가슴에 담긴 감동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답례를 거절하고, 날마다 병원을 들여다보고 하는 이유가 분명 그것인데도 어쩐지 말로 하자니 제대로 말이 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순창과 담양 사이에서 미군들에게 붙들려 다시 전주로 돌아온 김범우는 다른 미군부대로 넘겨져 반 감금상태에 있다가 나흘 만에 풀려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 감금상태에서 풀려난 것뿐 오히려 그 풀려남은 꼼짝할 수 없는 올가미로 변해 있었다. 전주를 떠나 남쪽으로 길을 잡은 그가 미군의 장갑차와 마주친 것은 그날 저녁 순창에 못 미쳐서였다. 장갑차는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길을 거침없이 달려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보아 목포 쪽에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갑차를 멍하니 바라보고 서서 그는, 결국 전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건 절망도 체념도 아니었다. 자신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난 최초의 목격 앞에서 그의 감정은 이상스럽게 뒤엉켜들었다. 그건 허망한 것도, 허탈한 것도 아니고, 뭐라고 할까, 무엇엔지 모를 배반감이 치미는 그런 허탈이었다.
장갑차의 거침없는 질주가 가슴 한복판에 휑한 구멍을 뚫어놓고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인가, 조직에서 떨어져버리고, 입당을 하지 않았으니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그러나 엄연히 당 사업에 협력했으니...... 부역자! 김범우는 어둠 속을 걸으며 쓰게 웃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전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부역죄인들이 생길 것인가...... 그는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아가는 것을 느꼈다. 전쟁터에서 죽어간 사람들보다도 세상이 달라질 것을 믿으며 앞에 나섰다가 이제 부역죄로 당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더 문제였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인공 삼 개월을 통해서 공산주의 의식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일소를 위해서도 부역자 처벌은 가차 없을 것이고, 반공의 강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삶의 악순환이고 역사의 악순환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제치하의 기억이 생생한 채로 다시 이념의 격랑에 정신없이 휘말리며 부서지고 깨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민중들이었다. 나는 이제 어찌해야하는가....... 미군의 장갑차가 흩뿌리고 간 굉음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김범우는 한층 구체적이고 절박하게 그 생각에 직면했다.
순창도 전주만큼 뒤죽박죽으로 엉켜 어지러웠다. 남자들이 몇 명씩 떼 지어 소리치며 뛰고 있었고, 짐을 머리에 인 여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어디선가 총소리가 띄엄띄엄 울리고 있었다. 어떤 전쟁에서나 후퇴는 무질서하고 정신이 없었다. 순창이 이렇게 된 것은 미군 장갑차의 출현 때문인 것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들이 어둠 속 어딘가에 진을 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갑차의 출현은 당원이나 그 동조자들에게는 자기네 땅이 적진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포위상태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범우는 서둘러 밥집을 찾았다. 초저녁이니까 아직 문을 열어놓고 있는 밥집은 있으리라 싶었다. 밥도 밥이었지만 잠자리도 구해야 했다. 그런 소란스런 와중에서 질정 없이 헤매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되었다. 한동안 불 밝힌 집들을 기웃거려 밥집을 찾아냈다.
"지금 밥 좀 먹을 수 있습니까?"
김범우는 문을 밀치고 들어가며 물었다.
"야아, 국밥뿐인디요."
불안스런 기색의 여자가 말했다.
"예, 그것 한 그릇 주세요."
김범우는 등 받침이 없는 긴 걸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갑자기 몸이 처져 내리는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하루 종일 길을 걸은 피곤보다는 구덩이에 빠져버린 마음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학송, 손승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학송은 어떻게 되고, 손승호는 어디로 갔을까....... 수십 번도 더한 생각을 그는 또 했다.
"얼굴을 봉께로 여그 분이 아니신디......."
주인여자가 국밥그릇을 옮겨놓으며 낮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불안스러운 얼굴에 경계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여그 사람은 아니라도 나도 전라도 사람이오. 혹시 보성 옆에 벌교라고 아십니까?"
김범우는 숟가락을 국밥에 넣으며 주인여자를 쳐다보고 웃었다.
"그려라? 그 꼬막 맛내기로 유명헌 벌교, 알제라."
주인여자가 반색을 했다.
"여기 미국 군인들이 들어왔나요?"
"야아, 요상시럽게 생긴 차 한 대가 여그럴 한바탕 갈고 댕기다가 어디로 핑 허니 떠났는디, 거그에 미국 군인덜이 탔드랑마요. 그래논께 저 난리판 굿이 벌어졌구만이라. 인공사람덜이 정신 웂이 보따리 짐얼 싸는디, 요것이 워찌 되는 판굿일께라?"
주인여자는 어느덧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시는 대로 인공이 싸움에 밀리고 있는 거지요."
김범우는 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근디 워째 넘 나라 일에 미국 군인덜이 쌈얼 걸고 뎀빌께라? 다 떠난지 알었등마."
"아주머니는 미군이 싫은 모양이군요?"
김범우는 주인여자를 건너다보며 흐리게 웃었다.
"한분씩 젺어본 사람이먼 누가 좋아라 허겄소. 생김도 요상시럽게 우리허고 달버 징상시런디다가 또 그 행투할라 고약시런 사람덜 아니요?"
김범우는 고개만 끄덕이다가,
"혹시 여기 여관 같은 거 있습니까?"
밥을 떠 넣으려다 말고 물었다.
"요런 촌구석지에 무신 똑별난 여관이 있간디라. 쩌짝 군 사무소 옆댕이로 가먼 명색만 여관인 것이 있기넌 있제라."
주인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범우는 다 헐어빠진 다다미방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웠다가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또 누웠다가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는 했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총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무엇을 겨냥하는 지 모를 그 총소리가 잠을 더 멀리 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잠이 설핏 들면 종잡을 수 없는 꿈이 엮어졌고, 잠이 깨면 머리도 몸도 무거워 어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낸 김범우는 아침 일찍 길을 잡았다.
묽은 가을안개가 슬픔처럼 들녘 가득 잠겨 있었다. 부풀거리는 안개밭 속으로 나락의 누른 빛이 떠올라 보였다. 그 풍경은 꿈결인 양 환상적이고, 전쟁과는 거리가 먼 아늑함이었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이었다. 안개는 자연의 생성물이되 나락은 인간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을 바쳐 양식시킨 인공적인 자연이었다. 인공적인 자연? 이것도 말이 되나 싶어 김범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김범우는 새로운 생각에 부딪쳤다. 아, 세금은 한 번도 거둬보지도 못하고 인심만 잃고 말았구나! 뒤늦게 낟알 세기 조사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제길, 이런 게 오비이락인가? 김범우는 약간 상쾌해졌던 기분이 다시 칙칙해지는 걸 느꼈다. 두어 시간은 걸어 어느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였다. 한눈에 잡힌 것은 총을 든 서너 명의 미군이었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버마전선이었다. 정글의 낯섦과 습기가 뒤섞여 끼쳐오던 그 야릇한 냄새와, 긴장된 두려움이 기억이 아닌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몸을 피하고자 하는 순간적 충동을 억눌렀다. 의심받을 행동을 했다간 그들의 총이 불을 뿜게 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에는 그들은 물론이고 군경에게 의심받을 만한 물건은 없었다. 미군에게는 평범한 한국인으로, 군경에게는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면 그만이었다.
"헤이, 조온, 와츠 매러(헤이, 조온 무슨 일이야)?"
어느 미군의 외침이었다. 그 소리를 듣자 김범우의 의식에는 산타카탈리나가 문득 떠올랐다. 오랫동안 지웠던 기억이었다. 청각이 되살린 기억이었고, 우리 말보다는 영어를 더 많이 썼던 그때의 생활이 지금의 신경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는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넛씩 모둠한 초가집들이 스무 채 남짓한 마을이었다. 눈에 띄는 미군들은 네댓 명이었고, 여기저기 모여선 마을사람들은 어떤 행동통제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쭈뼛거리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 미군들은 자기네들끼리만 무슨 얘기를 하며 키들거릴 뿐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쓰지 않았다. 수색작전인지 휴식인지는 모르지만 엄연히 적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태평스러울 수 있는 그들의 뱃보가 커 보이기도 했고 규율이 해이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방심은 거의 무저항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격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벌써 오래 전부터 인민군의 거의 모든 병력은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어 있었고, 지방 당들은 우선 조직을 옮기기에 바빴다. 김범우가 거의 마을의 끝머리에 이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탕, 타앙-
"워메 엄니이!"
두 발의 총소리와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바로 오른쪽 옆이었다. 김범우의 몸은 그쪽으로 튕겨지고 있었다.
탕, 따앙-
"워메 나 죽네!"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돌아서던 여자의 물동이가 총소리와 함께 박살이 나고, 물이 쏟아져 내리고,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하는 것이 한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김범우는 보았다. 방금 주저앉은 여자 옆에 다른 여자 하나가 물을 뒤집어쓴 채 퍼질러 앉아있었다. 극히 짧은 사이를 두고 터진 네 발의 총성이 그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망할 자식들이 이거! 김범우가 열이 불끈 솟기는 것을 느꼈을 때였다.
"뷰리플, 뷰리플, 위 아 베스트 화이러(좋아, 좋아, 우린 최고 사격수야)."
"댓츠 잇(맞았어). 으하하하......."
"헤헤헤헤......."
미군 두 명이 둔덕 위로 올라서며 기분이 좋아 죽겠다는 듯 얼굴을 하늘로 들어 웃어젖히고 있었다. 그들이 둔덕에 기대고 물동이를 겨냥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웃음소리에 놀랐는지 두 여자가 황급히 일어나 우물을 벗어났다. 그리고 물 젖은 치마를 거머잡고 마을 쪽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뛰기 시작했다. 한 여자는 낭자머리였고, 다른 여자는 땋아 내린 머리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웃어대고 있던 미군 두 명이 뭐라고 주고받더니 여자들을 뒤쫓아 뛰었다. 여자들은 금방 미군들에게 잡혔고, 두 미군은 총을 던졌다. 그리고 두 여자가 길 옆 풀섶으로 내던져지듯 했다.
"웨러 미닛, 갓 뎀 지아이(멈춰라, 미군 놈들아)!"
김범우는 고함치며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달리던 기세 그대로 한 미군의 등짝을 걷어찼고, 벌떡 일어서는 다른 미군의 낯짝을 후려갈겼다. 두 여자가 재빠르게 기어서 몸을 피했다.
"보쉬(씨팔)!"
"썬 오브 비치(개새끼)!"
두 미군이 각기 욕을 내뱉으며 대검을 뽑아들고 다가들었다. 몸을 활처럼 구부린 김범우는 이를 앙 다문 채 둘을 노려보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는 둘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동작만 크게 일으켜 공격을 해올 때에는 그때의 허점을 틈타 사타구니를 걷어 올릴 참이었다. 그건 상처 하나 없이 상대방을 즉사시킬 수 있는 단 일발의 공격법이었다. 다리는 팔보다 길이가 두 배는 길면서, 힘은 네 배나 셌다. 그리고 불알은 남자의 치명적인 급소였다. 결투가 붙으면 누구나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두 다리를 벌리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격을 가할 때는 수비의 허점을 완전히 노출하게 되어 있었다. 가해져오는 공격을 좌우 사십오도 각도로 피하며 다리를 내뻗어 걷어 올리면 백발백중 상대방의 부자지가 발등과 다리 사이목에 채이게 되어 있었다. 산타카탈리나에서 위기모면과 살인술의 하나로 익힌 방법이었다. 독립을 위해 일본 놈들한테 써먹자고 미국 땅에서 익힌 기술을 이 땅 여자의 정조를 지키고자 미군에게 써먹으려 하고 있었다.
"웨러 미닛, 웨러 미닛!"
미군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며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권총을 들어 공포를 쏘아댔다. 그 뒤를 미군들이 우르르 따라오고 있었다. 김범우는 다잡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두 미군도 욕을 씨부리며 공격태세를 풀었다.
"무슨 일인가? 공산주의잔가?"
소위가 권총을 김범우에게 겨누며 부하들에게 물었다.
"아니오, 당신 부하들이 저 여자들을 겁탈하려 했소."
김범우는 재빨리 말하며, 그때까지 웅크리고 서서 떨고 있는 두 여자를 가리켰다. 김범우는 옛날의 발음이 막힘없이 되살아나는 것을 신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
소위가 권총을 내리며 부하들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장난을 했을 뿐입니다."
머리칼이 붉은 사병이 대답했다.
"총은 왜 쏜 건가?"
"사격연습이었습니다."
"장교님, 죄송합니다만 장교님의 부하는 장교님을 계속 속이고 있습니다. 난 미군 장교는 국제적인 신사고, 미군은 정의롭고 용감한 군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김범우는 소위를 보며 웃었다.
"그건 사실이오."
얼굴 갸름한 소위가 긴장의 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상관을 속이는 저런 거짓말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부하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충분히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당신 부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김범우는 그들 예법을 갖춰가며 그들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좋소, 말하시오."
"고맙습니다. 당신의 두 부하는 사격연습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여자들이 식수를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질그릇을 향해 총을 쏘아 그릇을 깨뜨리고, 물이 쏟아져 저 여자들의 온몸을 젖게 하고, 총소리에 충격을 받아 놀라게 하는 야만적인 장난을 했습니다. 그 증거가 젖은 저 여자들의 옷이고, 저쪽 우물가에 깨진 그릇입니다. 그리고 당신 부하들은 그것도 모자라 놀라서 몸을 피하는 저 여자들을 겁탈하려고 바로 이 자리에다 쓰러뜨렸습니다. 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을 뒤쫓아와 한 방씩 갈겼고, 그들이 대검을 뽑아 덤비는데 장교님이 오신 것입니다. 상황이 급한 김에 당신 부하들을 한 대씩 갈긴 것을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김범우는 말을 할수록 혀가 잘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자기가 한 일을 사과하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소위가 자신의 사과를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
"지이저스 크라이스트(제기랄)!"
소위가 두 부하를 향해 내뱉었다.
"당신 영어를 너무 잘하는데, 직업이 뭐요?"
소위가 권총을 권총집에 넣으며 물었다.
"영어선생이오."
"영어선생? 여기서 말이오?"
"아니오, 서울이오."
"서울? 그런데 왜 여기 있소?"
소위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소."
"고향이 어디요?"
"이름을 대도 모를 거고, 남쪽 끝이오."
"나하고 같이 좀 갑시다. 아무래도 이상한 게 있소."
소위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까딱거리며 고개도 함께 갸웃거렸다. 김범우의 뇌리에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김범우는 걸음을 옮겨놓으며 불쾌하다는 감정을 일부러 드러내서 물었다. 소위는 아무 대꾸 없이 걷기만 했다. 이 젊은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어떤 의심을 받고 있음이 분명해 김범우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많이 하는 건 의심을 키울 뿐이었다. 큰길에는 아까 보지 못했던 트럭이 서 있었다. 소위는 트럭 앞자리로 타라고 턱짓을 했다. 그 태도가 거만했고, 얼굴도 싸늘했다. 일이 더럽게 꼬여간다고 생각하며 김범우는 운전대 옆자리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병들은 차 앞부분을 에워싸듯 하고서 있었다. 운전석으로 소위가 올라왔다.
"당신이 영어선생이란 건 거짓말이고, 적의 스파이지?"
소위가 쏘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스파이라면 암약을 해야지 두 여자 겁탈당하는 걸 막자고 그렇게 공개적인 행동을 할 리가 있소?"
"그럼 당신이 영어선생이란 증명을 하든지, 스파이가 아니라는 증명을 해."
김범우는 소위의 파란 눈을 맞쏘아보았다. 눈싸움에서부터 이겨야 했다.
"영어선생이란 증명은 내가 하는 영어로 충분하잖소."
"안 돼, 다른 증거를 대. 바로 당신의 그 유창한 영어가 스파이라는 증거야. 그 완벽한 미국식 영어로 우리 미군을 상대로 기밀을 탐지해내는 스파이! 그렇지, 내 말이 맞지!"
소위는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기초정보교육을 받은 장교다운 논리의 왜곡이고, 수사적 올가미였다. 잘못 어물거리다가는 꼼짝없이 스파이로 몰릴 판이었다. 스파이로 몰리면 그의 한 방 총으로 세상은 끝장이었다.
"말 조심해! 당신이 유창하다고 인정하는 내 영어는 바로 당신네 육군이 막대한 정부 예산 들여가며 가르쳐준 거야. 내가 천구백사십오년 팔월십오일까지 뭐였는지 알아? 바로 일본을 무찌르기 위한 미국의 스파이 OSS였다. 당신 OSS가 뭔지나 알아? 당신이 육군 소위가 되기 전에 벌써 내 신분은 당신네 정부와 육군이 보증했던 사람이라 그거야! 알겠어!"
김범우는 일부러 '정부'니 '육군'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끌어다 붙이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일본 놈들이 신사 앞에서 꼼짝을 못하듯이 미군들은 정부나 육군이라는 권위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이오?"
소위는 파란 눈을 휘둥글하게 떴다.
"틀림없소."
"이거 나로선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일이오. 어쨌거나 당신은 꽤 위험하고도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당신에 대해 조사를 하는 건 보병인 나로선 능력 밖의 일이오. 당신을 상급기관에 넘길 수밖에 없소."
젠장, 골치 아프게 돼가네. 김범우는 어깨를 늘어뜨려 버렸다. 그래서 전주로 다시 실려 올 수밖에 없었다.
"오우,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소. 우리가 조회한 결과 당신의 진술은 모두 사실 그대로요. 반갑소, OSS대원 톰슨!"
분주스러운 몸짓을 해대던 소령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손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손가락까지 털투성이의 손이었다. 김범우는 마지못해 그 손을 잡으며, 한대지방의 동물답군, 하고 생각했다. 구름이 일 년에 이백 일 이상 끼여 햇볕을 제대로 못 받아 허옇게 설익은 피부, 긴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열량 높은 육식만을 해서 비대해진 체구, 얼어붙은 땅에서 살기에 지쳐 얼어붙지 않는 땅을 빼앗으러 나선 식민주의자들의 후손, 엄연히 주인이 있는 땅을 침략하고 강탈하면서 '발견'이니 '개척'이니 하는 말로 인류사를 왜곡한 자들, 아프리카, 아시아, 남북아메리카를 강탈하며 짐승을 사냥하던 총으로 원주민들을 무차별 사냥하면서 백인우월주의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자기들의 종교인 예수교로 합리화한 교활한 자들, 그러면서도 피지배민족들의 단합을 교란하고 해체시키기 위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 평화'라는 그럴듯하고도 혼란스러운 제국주의적 논리를 만들어낸 겹겹으로 교활한 자들....... 김범우는 살집 좋은 소령을 물끄러미 보며 쓰게 웃었다.
"자아, 앉읍시다. 할 얘기가 있소."
소령이 자리를 권하며 담배를 내밀었다. 검은 동그라미를 빨간 동그라미가 싸고 있는 럭키스트라이크였다. 김범우는 고개를 저었다.
"에에, 할 얘기란 다름이 아니라, 우린 지금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소. 그중의 하나가 당신처럼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의 절대수가 부족한 점이오.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맥아더 사령관께서는 카투사라는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특수부대를 만들기도 했는데, 어려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신이 우리와 함께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소령은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제 능력을 인정해줘서 고맙습니다만, 전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거기서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김범우는 아주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 일이 뭐요?"
소령의 낯빛이 달라졌다.
"선생을 계속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은 전시요. 그리고 이건 당신네들을 위한 전쟁이오. 공부는 전쟁을 끝내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오?"
"전쟁의 승리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았으면 됐소. 당신 일은 결정된 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얘길 다 듣지도 않고."
"더 들을 필요 없소. 난 당신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협의를 하는 게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는 거요. 당신도 당신 의사를 내세울 권리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만 있다는 걸 똑똑히 알아두시오."
"그런 강압적 월권이 어디 있소. 난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오, 한국인!"
"그래요? 설마 이 전쟁의 작전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아직까지 모르고 있진 않겠지요? 우린 언제든지 필요한 인력을 징집하고, 필요한 물건을 징발해서 쓸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거요."
소령이 어떠냐는 듯 비웃는 것인지 야유하는 것인지 모를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썅놈에 영감탱이, 작전권까지 넘겨가지고....... 김범우는 담뱃갑을 와락 끌어 잡았다.
23. 몸 씻기 마을 굿
한탄강에 가을이 젖어들고 있었다. 찬 기운을 품은 물줄기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을 담고 맑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변에는 가을꽃 들국화가 연보라, 진보라, 적보랏빛의 무늬를 수놓으며 끝없이 피어 있었다. 그 위를 바람이 스쳐가면 강변은 서로 얼굴을 비벼대는 들국화들로 보랏빛 물결을 일구었다. 가을은 강 언저리에만 와 있지 않았다. 북녘으로 갈수록 억세고 강해지는 산줄기에도 가을은 황금빛 색조로 내리고 있었다. 산에 먼저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강물에는 어디에서부터 떠내려오기 시작했는지 모를 낙엽들이 드문드문 떠내려가고 있었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으레 한탄강가에서 고단한 다리를 쉬어서 갔다. 엎드려 강물을 마시기도 하고, 먼지 낀 낯을 씻기도 하면서 시름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앉았다가 떠나가고는 했다. 북으로 가고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움직임에는 거의 소리가 없었다. 후퇴하는 사람들은 발만 놀렸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의 후퇴는 침묵을 낳았고, 후퇴의 침묵은 민첩성을 낳았다.
이학송 일행도 강가에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빨며 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파르고 각이 진 산들이 첩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올수록 산들은 많아져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 산들에 갇히고 산들에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땅덩이의 칠 할이 산이라는 교과서적인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산 부자인 땅, 산 부자인 사람들. 넓지도 않은 땅에 산만 그리 많고, 나머지 삼 할인 평지에서 나는 곡식마저 고루 나눠진 게 아니라 세습지주들의 착복이 계속되었다. 그러니 이 땅이 서민들이 삶이 얼마나 배고프고 고달팠으랴. 일 할도 못되는 소수의 삶을 호화롭고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구 할이 넘는 절대다수가 굶주리고 헐벗어야 하는 사회구조, 그게 어찌 인간세상일 수 있는가. 그 구조는 마땅히 뒤바꿔야 하고, 그런 계급은 마땅히 척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이학송은 또 같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얼른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생각은 분노와 함께 절망감을 가져오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다만, 이 길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이키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믿고자 했다.
이학송은 담배를 끄려다가 왼쪽 옆으로 앉아 있는 김미선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그녀는 마치 굳어진 듯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선이 가늘고 섬세한 그녀의 얼굴에는 곧 눈물이 될 것만 같은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인가....... 이학송은 눈길을 약간 돌리며 생각했다. 당원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 그녀는 남모르게 그 두 마음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아이들이 눈에 밟혀요" 하고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어버렸다. 마치 백치와도 같던 그 환한 웃음이 얼마나 쓰라린 어머니의 마음인가를, 그리고 그 마음을 덮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노력인가를 헤아릴 수 있었다. 동대문에서 마지막 취재를 하면서 한사코 신설동 쪽으로 쏠려가던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짐작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갈등은 자식들을 떼어놓고 서울을 떠나온 투철한 정신의 당원이기에 겪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아픔이기도 했다.
"김 동무,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이학송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마음 갉아먹는 생각을 더 못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아, 네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이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는,
"강도 꽃도 눈물 나게 서럽네요"
하고는 엷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서럽도록 외롭다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슬프다'고 하지 않고 '서럽다'고 한 것이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는 별다른 근거 없이 '슬프다'는 말은 서양 정서고 '서럽다'는 말이 우리의 정서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예, 해필 가을입니다."
이학송은 무심한 듯 대꾸했다.
"저어, 혁명의 색깔은 붉은 색인데, 저 보라색은 무슨 색깔이면 좋을까요?"
살짝 턱을 받친 김미선은 들국화 밭을 먼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색깔이 곱긴 한데, 뭐랄까, 강렬성도 없고 너무 애상적이라서......."
"전 말예요, 혁명을 완수한 다음 목숨을 잃은 전사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색깔로 저걸 정했으면 좋겠어요."
"그 이유가 뭔가요?"
"저 색깔은 서럽고 한스럽거든요. 저 색깔은 억울한 일로 매를 맞은 사람의 피멍 같기도 하고, 한의 색깔이 저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당원으로서 안 어울리는 말인가요?"
"무슨 말씀입니까? 헌데, 김 동무는 한의 색깔을 보랏빛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흰빛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네, 그래요.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하얗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허지만 한이란 게 무슨 형체가 있어야 말이죠. 이것도 다 괜한 소리죠."
김미선이 풀잎 하나를 뜯어 입술에다 물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꼭 그렇게 생각해버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정신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또 사상이란 형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만 우리가 형체가 있다고 믿자고 약속함으로써 형체가 있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약속에 따라 사상이라는 체계를 만들어 먼저 정신적으로 결속하고, 다음으로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면 그때 사상은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한이란 무엇입니까? 아까 김 동무가 말한 대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살아온 계급들의 체험이 응축된 수난사인 동시에 정신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지배받은 계급들끼리 통하는 사상입니다. 다만 그것이 정치이데올로기와 다른 점은 분석적 이론화와 실천적 논리화가 안 되었다는 점입니다.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혁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인민을 주체로 삼고, 특히 기본계급을 중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에 분석적 이론화를 가하고, 실천적 논리화를 가하면 그들이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열렬한 혁명세력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응축된 한의 폭발력입니다. 그러니까 한은 역사전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 증거로 갑오년 농민봉기는 동학사상을 불씨로 일어났고, 쏘련과 중국의 혁명성취도 그 불씨만 다를 뿐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을 단순하게 '정서'라고 파악하고 정의해 버리는 게 소위 지식인들입니다. 그건 지식인들이 한의 생성과정과 그 본질을 모르고 그저 '감정적 문제'로만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는 데는 그들 거의가 지배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학송은 손승호의 말을 생각해가며 맥을 잡아나갔다.
"어머, 굉장하시네요. 전 처음 듣는 얘기에요. 전 아무래도 엉터리 당원인가 봐요. 그런 논리를 세울 수가 없고, 그런 논리를 들으면 금방 믿어버리고는 반박거릴 찾지 못하거든요."
김미선이 스스럼없이 웃었다.
"원 별말씀을 다합니다. 그냥 저 혼자 생각일 뿐인 걸요."
이학송은 담배를 빼들었다. 그들의 뒤에서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이원조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저 인민군 전사!"
밝은 음성의 김미선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들국화 밭이었는데, 한 인민군 전사가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는 참이었다.
"어떠세요, 제 눈에는 참 좋아 보이는데요. 혹시 전사와 저 행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까요?"
좀 엉뚱하다 싶은 김미선의 질문이었다.
"글쎄요, 저도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전사의 눈에도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예쁜 건 예쁜 게 아닐까요? 그런 걸 감상하는 건 전투의 긴장이나 피로를 풀기 위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전사의 경우, 저 여유 있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다 든든합니다. 후퇴를 하면서도 저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우리를 얼마나 고무시킵니까. 저 여유는 단순한 꽃 감상이 아니라 앞으로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 아닙니까? 만약 저 전사가 지금과는 반대로 꽃밭을 마구 짓밞으며 허겁지겁 강을 건너갔을 때, 우리는 그 겁에 질린 모습에서 뭘 느끼겠습니까."
"맞아요, 맞아요. 이 동무는 무슨 문제든 답을 술술 풀어내는 마술사예요."
김미선은 마치 소녀처럼 좋아했다.
"발은 좀 어떠십니까?"
"그냥 그렇지요 뭐."
김미선이 농구화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항공! 항공!"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강둑에 앉았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양쪽으로 흩어졌다. 억새풀숲으로, 들국화 밭으로 사람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며칠 사이에 사람들의 행동은 비행기의 빠르기에 맞춰 그만큼 기민해져 있었다. 비행기 편대가 쇠가 맞갈리며 굴러가는 그 소름기치는 폭음을 남기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사람들은 금방 일어서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또 다른 편대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다 짧은 시간에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금쯤 평양은 어찌되고 있을까요?"
김미선이 엎드린 채로 들국화 가지들 사이로 이학송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글쎄요, 저 비행기들이 또 마구잡이로 폭격을 해대고 있잖겠어요?"
알싸할 만큼 진한 들국화 향기를 가슴에 담으며 이학송도 속삭이듯이 말했다.
"우리가 비행기 한 대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조바심이 나고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아요."
"누구나 똑같은 심정이지요."
이학송은 김범우를 생각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전쟁 상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미국에 대한 그의 견해와 판단은 역시 남다른 것이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켰다. 이학송 일행은 다시 북으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왜 이름이 한탄강일까요?"
엉성하게 엮어진 부교를 건너며 김미선이 물었다.
"아마 무슨 연유가 있을 겁니다. 기구한 사연의 전설 같은 게."
"달래 강처럼 말인가요?"
"그렇지요."
"그런데 꼭 우리를 놓고 붙여진 이름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강을 건넌 사람이 옛날부터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청상과부가 된 여자, 소박맞은 여자에서부터 과거에 낙방한 선비, 패주하던 의병, 체포된 독립투사.......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요."
"그렇겠네요."
강을 건넜고,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길은 끝없이 뻗어가고, 걷기가 바빴던 것이다. 철원은 산산이 부서지고 갈가리 찢기면서 불타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퍼지듯 연기로 자욱한 시가지는 불길에 휩싸였고,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은 서로 뒤엉키고 부딪치며 허둥지둥했고,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숨넘어가는 비명과 서로를 외쳐 부르는 소리와 화염에 휩싸인 큰 건물 무너지는 소리와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음이 뒤엉키고, 군인들이 떼 지어 달려가고, 비행기들은 낮게 날며 숨 돌릴 겨를 없이 새하얀 로켓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다 허물어진 벽에는 '서울시 인민위원회 동무들은 철원인민학교로 집합하라' 하는 종이가 너풀거렸고, 전봇대마다 '***동무, ***는 十月二日철원을 지나 평양으로 갑시다' '***가족은 흑교로 와주시오' '**야, 평양 대동강 다리에서 만나자' 하는 종이들이 붙어있는가 하면, 여기저기에 급히 쓴 글씨로 '**연락소'라는 종이쪽들이 나붙어 있었다.
해방일보 일행은 겨우겨우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북쪽 길목의 숲에 이르러 그들은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숲속에 은신한 군부대가 젊은 사람들을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병력보충이었다. 해방일보 일행도 한 줄로 서서 군인들 앞을 지나갔다. 군관의 손짓에 따라 젊은 기자들은 하나씩 줄을 벗어났다. 이학송은 여섯 번째로 줄을 벗어났다.
"어머, 안돼요"
하는 당황스런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낮게 들렸다. 그는 김미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세 명이 더 줄을 벗어나고 해방일보의 차례가 끝났다. 그때 한 사람이 군관 앞으로 다가갔다. 이원조였다. 그는 군관에게 신분증을 내보였다.
"저 기자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소. 그리고 신문 발행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혁명일꾼이오. 군관동무의 선처 있기를 바라오."
"기자 동무, 몇 살이오?"
"서른여섯입니다."
이학송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세 살을 더 올려붙여버렸다. 마흔은 말이 안 되고, 서른여섯이면 마흔에 가깝다고 순간 판단했던 것이다.
"보기보단 그렇소."
군관은 이원조를 힐끗 보고는,
"이쪽으로 나오시오."
이학송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일행에서 떨어져나간 여덟 명의 기자들은 서울방위사단에 편입된다고 했다. 부대의 이름이 그렇듯이 그들은 진격해오는 적을 막아야 하는 최전선 부대였던 것이다. 다시 길 걷기가 시작되었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일행 여덟을 전투 부대로 떠나보낸 우울한감정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전 이 동무가 곧이곧대로 나이를 댈까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이 동무가 태연하게 서른여섯이라고 하는 순간 이 동무 얼굴이 정말 서른여섯 살처럼 보이는 거예요."
쉬게 되었을 때 김미선이 감정을 눌러가며 가만가만 한 말이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저는 나이 많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저도 모르게 순간적인 표정변화를 일으켰을 것이고, 김 동무 눈은 또 김 동무 눈대로 착시를 일으킬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그건 너무 멋없는 과학적 분석이에요. 그냥 신기한 일로 뒀으면 해요."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밤은 겨울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매운 바람이 일어나는 밤길 걷기는 이중으로 고역스러웠다. 밤길을 찾기도 어려운데다 걸을 때 난 땀이 쉴 때는 한기로 변했다.
강원도를 벗어나 황해도 땅을 꼬박 사흘을 걸어 수안에 도착한 것이 시월 십일이었다. 수안도 중심가는 이미 불타버렸고 변두리의 오막살이들만 간신히 폭격을 면해 있었다. 크든 작든 간에 면단위 이상의 소재지는 비행기의 폭격으로 불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군사시설이고 민간인들의 집이고를 가리지 않는 인정사정없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들 일행은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인민위원회를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인민위원회는 텅 비어 있었고, 그들처럼 행여나 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실망스러운 빛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는데 미군 정찰기 한 대가 제트기에 비해 너무 느리게 수안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찰기를 보고도 땅에 엎드리거나 다투어 처마 밑으로 숨어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완전한 비행기 공포증이었다. 그들은 어느 빈 집에서 열 명 남짓한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군관을 만났다. 그에게서 벌써 오래 전에 미군들이 원산과 진남포에 상륙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일행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군의 상륙은 곧 앞길의 차단을 의미했다. 말뜻 그대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동무들, 떠납시다, 북으로."
이원조의 말이었다. 그는 앞장을 섰다. 수안을 떠나 한 시간쯤 걸었을 때 길가에 질펀하게 널려 있는 시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먼발치에서 볼 때는 후퇴하다 지쳐 죽어간 부상병들의 시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워져서 보니까 그건 미군들의 시체였다. 매복에 걸려 일개 소대가 몰살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백인, 흑인이 뒤섞여서 죽어 있는 모습을 그들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흥, 꼴들 좋군."
누군가가 말했다.
"남의 땅에 왜 맘대로 들어와. 당해 싸지!"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게 김미선인 것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이학송은 그녀가 당원이라는 사실을 문득, 그러나 처음으로 의식했다. 그는 굳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사람을 따라 걸음을 떼어놓았다.
염상진 일행 여섯은 옥산 뒤의 군당 집결지를 떠난 사흘 만에 담양 근방에서 북으로의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장성 갈재가 막히고, 순창 쪽의 길도 완전 차단되었던 것이다. 그 양쪽길이 막혔다는 것은 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모두 봉쇄되어버렸다는 의미였다. 물론 위급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후퇴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적이 제아무리 기동성을 발휘해 모든 길을 차단했다 하더라도 깊은 산길까지 장악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도당이 후퇴를 중단하고 방향을 광주 쪽으로 되돌렸기 때문이었다. 삼십 대 가까운 차량행렬이 방향을 되돌렸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서는 안될 일이었다. 도당이 없는 군당이 있을 수 없고, 도당이 후퇴를 중단한 것은 모든 하부조직도 후퇴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군당조직을 양분시키는 무리를 해가며 그 지점까지 온 것도 도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였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빨리 군당으로 되돌아가 미흡한 채로 남겨두고 온 입산자들의 조직화를 완결시키면서 도당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염상진은 생각했다.
"군당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소."
염상진은 일부러 "군당으로 돌아갑시다" 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야지요.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안창민이 표정 없이 말했다. 그 옆에서 이해룡은 입술에 잔뜩 힘을 넣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꽤나 속이 상하다는 내색이었다. 강동기와 다른 두 사람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군당 집결지를 떠날 때 안창민도 이해룡도 북으로의 후퇴를 마땅찮아했다. 하대치와 오판돌은 더 말할 것 없었다. 그러나 도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자기 혼자서 후퇴하는 도당을 따라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군당위원장 하나가 군당의 핵심조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입산자들은 대충 읍, 면 단위로 분리해서 그 지휘책임을 하대치와 오판돌에게 맡겨놓고, 안창민과 이해룡을 나서게 했던 것이다. 다른 세 명을 더 붙인 것은 신변안전을 겸해 하대치 쪽과 선을 댈 필요에 대비한 것이었다. 염상진은 발길을 되돌려잡으며, 군당조직부터 신속하게 빼돌린 것을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 조처를 하지 않고 떠났더라면 자신의 군당도 지금쯤 갈피를 못 잡고 분산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지역 당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모습을 사방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너 명씩, 네댓 명씩 덩어리를 이루어 북쪽 방향으로 계속 가는가하면, 방향을 돌려잡기도 했고, 또 어찌할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축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그때마다 소속을 물었는데, 그들은 거의가 서로 다른 지역 당이었고, 그렇다고 간부들도 아니었다. 소년티가 아직 남아 있는 십대 중반을 조금 넘겼을까 말까 한 젊은이들의 덩어리가 있는가 하면, 서너 가족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기도 했다.
"이러고들 있지 말고 어서 소속 당을 찾아가시오."
염상진은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당에서 북쪽으로 가라고 혔는디요?"
"당도 떴는디, 워디 있는지 알아야제라."
"참말로 난리시, 앞질도 맥히고 뒷질도 맥히고. 인자 워째야 쓸까이."
모두가 이런 식의 대꾸였다. 그들은 선도 끈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염상진은 생각했다. 후퇴를 중단하고 발길을 되돌린 도당이 어디로 갔을 것인가를. 그건 결코 어려운 파악이 아니었다. 산이었다. 전쟁 이전의 상태로 환원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때의 투쟁 선에서 안전지대를 골라 조직을 이동시킨 것처럼. 그 예상을 입증하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광주에서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졌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석방된 우익계와 후퇴한 시당조직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시당이 도당의 지시에 따라 그 동안 가두어둔 우익계를 석방하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단 심사를 거쳐 처단에서 제외시킨 그들에게 후퇴를 한다고 해서 잔혹행위를 가해서는 안 되고, 불필요한 가해행위는 또 다른 보복행위를 유발시킨다는 판단 아래 내려진 결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익계는 풀려나자마자 그날 밤부터 보복행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급간부를 제외한 시당조직은 아직 멀리 가지 않고 무등산 골짜기에 머물러 있다가 곧바로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의도가 거꾸로 나타난 데 분개한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다시 시내로 들이닥쳤다고 했다. 아직 군경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싸움의 성패는 간단하게 가려진 셈이었다. 무장상태인 시당조직원들 앞에서 원시무장을 한 우익계가 당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도당과 시당의 조처와는 상관없이 우익계가 그 동안 갇혀 고생한 것만으로도 보복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서둘러댄 데서 비롯된 참극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그 사건은 결과적으로 적들의 보복행위를 확대시킬 것이고, 또 이쪽에서 저지른 학살행위로 선전 이용될 것을 생각하며 염상진은 더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명분과는 별개로 빚어지고 있는 전쟁이 가진 광포성의 가속화였다. 그는 무등산으로 다시 물러갔다는 시당조직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려고 했다. 전에도 그랬듯이 시내가 너무 가까운 무등산에 도당이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머무를 것 같지는 않았다. 무등산은 시내에서 너무 가깝다는 입지조건 외에도 산의 형태조건으로도 중요 조직이나 많은 투쟁력이 은신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무등산은 천 미터가 넘는 높이로나, 넓게 자리잡은 덩치로나, 온화하면서도 묵직한 생김으로나 이름 그대로 빼어난 산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산의 구조가 단순해서 그 속에 샛가지 친 줄기들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오밀조밀한 골짜기가 없었다. 거기다가 잡목이나 잡풀들마저 무성하지 않아서 어디에 비트 하나 안심하고 만들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무등산에 비해 백운산은 그 입지조건이나 형태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전부터 도당이 백운산에 자리 잡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도당은 다시 백운산으로 갈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염상진은 군경이 광주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버리고 산자락을 밟기 시작했다. 광주에 군경이 들어왔다는 것은 각 군단위에도 그들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될 거라는 의미였다. 자신이 확인한 바대로 무질서하게 흩어진 하부조직들이 그는 걱정스럽기만 했다. 각 군 단위가 모두 군경에게 장악 당하게 되면 조직을 잃은 사람들은 이중, 삼중의 포위에 갇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태에서 우왕좌왕했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우선 산으로 들어가시오. 산에서 어떤 읍, 면당이든지 조직을 찾아내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 조직을 통해서 당신네들 조직을 찾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염상진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렇게 강조했다. 그는 각 읍, 면당에 한두 명씩은 박혀있을 야산투쟁의 경험자들인 구빨치가 이미 산속에 거점을 확보하고 조직수습에 나서고 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다시금 더욱 빛을 발하는 보석일 수밖에 없었다. 염상진 일행은 창평의 야산굽이에서 이상한 말다툼을 하고 있는 네 젊은이를 만났다. 하나는 인민군이었고, 셋은 학생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인민군은 가슴에 *모양으로 탄알꿰미를 걸었는데 총이 없었고, 정작 총을 들고 있는 것은 다른 셋 중의 하나였다. 그러고 있는 모양도 야릇한데다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비에 인민군이 열세라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염상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벌써, 셋이서 인민군의 총을 탈취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소. 무슨 일이오?"
염상진의 목소리는 거칠고 위압적이었다.
"누군디, 왜 그요?"
총을 든 젊은이가 조금도 달라지는 기색 없이 염상진에게 눈길을 딱 고정시켰다. 그 당돌한 것 같기도 하고, 당당한 것 같기도 한 태도에 염상진은 어이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셋 중에 키나 몸집이 제일 작았고, 얼굴까지 하얘서 그런 태도가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눈만은 예사롭지 않게 총기가 서리고 날카로웠다.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그게 나이든 사람한테 쓸 만한 말버릇이라고 생각하시나? 행장을 차린 걸 보니 후퇴하려고 나섰던 모양인데, 어느 지방당 소속이오?"
일본군 배낭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그는 열일곱이나 여덟 정도밖에 안되어 보였지만 염상진은 당규에 입각해서 존대를 쓰고 있었다.
"예, 광주시당인디요, 동무는 워디시다요?"
대답으로 끝나지 않고 되물어오는 그 다부진 태도가 눈 생긴 값을 한다 싶어 염상진은 빙긋 웃었다.
"난 보성군당위원장 염상진이라 하오."
"야아?"
젊은이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그 모스코바 작은 스탈린으로 명난 염상진 위원장님이시라고라?"
믿을 수 없다는 듯 염상진을 올려다보았다.
"틀림없이 그분이시오."
염상진의 입장을 생각해서 안창민이 말했다.
"아이고메 요거 큰 탈 나부렀네. 버리장머리 웂이 대헌 것 용서해주시씨요. 지넌 서중학교 세포책 조원제라고 헙니다."
젊은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찮소."
염상진은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젊은이를 내려다보며 '서중학교 세포책 조원제'를 되뇌이고 있었다.
"같은 사업하든 동무들이구만요. 싸게 인사디려."
조원제는 다른 두 명을 인사시켰다. 하나는 "뵈어서 영광이구만요" 했고, 다른 하나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했다. 염상진은 도무지 쑥스러워 얼굴을 들고 있기가 어려웠다.
"역시 위원장 동무께서는 보성 근방에서만 명이 난 것이 아니라 광주 학생들한테까지도 유명하시군요."
흡족한 얼굴로 싱글거리며 이해룡이 말했다.
"그러먼이라. 화순군당위원장 먹장군 동무와 항꾼에 학생들 새에서는 너무 유명허시구만요. 화순군당의 그 역사 깊은 열렬헌 투쟁과 보성군당의 그 해방구럴 장악하고 벌인 치열한 투쟁은 학생덜의 투쟁의지럴 불타게 허고 강허게 맹그는 교훈이고 시범이었구만요."
조원제는 상기된 얼굴로 기운차게 말했다.
"그건 다 불필요한 소영웅주의의 발상이오."
염상진은 자르듯이 말하고는,
"그래, 인민군전사와 무슨 문젯거리가 있소?"
그는 인민군을 쳐다보았다.
"예에, 이 총알은 중대장 동무께서 제게 맡기시문서 끝까지 잘 보관했다가 반환하라고 했댔시요. 어드케 일이 잘못돼서 부대가 분산됐는데, 중대장 동물 찾아댕기다가 저 동무들을 만나게 됐디요. 기런데, 저 동무래 하는 말이, 자기는 총이 있고 나는 총이 없이 알만 가지구 있으니끼니 총알을 자기한테 넘기라는 거야요. 나는 군관 동무의 명령을 받은 거니끼니 죽어두 안 된다구 허구, 저 동무들은 내놓으라 하구, 똑같은 입씨름을 하고 있었디요. 이 총알은 인민의 총알이니 내 맘대루 할 수 있는 개인소유가 아니지 않카시요?"
인민군은 또록또록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오?"
염상진은 조원제에게 물었다.
"예."
"조 동무는 총알이 하나도 없소?"
"한 서른 발 있구만요."
조원제는 씨익 웃었다. 자기 욕심을 시인하는 그 웃음이 어찌나 천진하고 솔직해 보이는지 염상진도 마주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렀다.
"그것이면 우선 급한 대로 됐고, 차차 구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소. 저 전사 동무한테 무리하게 총알을 요구하는 건 저 전사 동무가 명령 불이행 과오를 범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소? 어떻게 생각하오?“
"논리는 분명 그런디, 이 정신 웂은 판국에 중대장 동무를 찾으란 보장이 웂고, 못 찾게 되면 저 총알은 무용지물잉께요.“
"동무는 그런 걱정까지 마오. 내래 결사적으루 중대장 동물 찾아내고 말 테니끼니."
인민군 전사가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가 총알을 빼앗길까봐 그러기보다는 정말 중대장을 못 찾게 될까봐 그런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염상진은 생각했다.
"전사 동무의 말이 맞소. 꼭 중대장 동무를 찾아서 그 총알을 전하도록 하시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위원장 동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줘서 고맙시요. 안녕히 가시라요."
경례를 붙인 전사는 황급히 돌아서더니 뛰기 시작했다. 낙오된 저 젊은이가 낯선 땅에서 과연 중대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염상진은 멀어져가는 전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중 몇 학년이오?"
이해룡이 조원제에게 물었다.
"사학년이구만요."
"흥, 사학년!"
이해룡은 어깨를 들먹하며 코웃음을 웃고는,
"총 들고 그러지 말고 공부나 하는 게 어떻겠소?" 귀여운 아이 보듯 조원제를 쳐다보았다. "날보고 그런 말 허지 말고 동무나 총 우리헌테 넴기고 집에 가서 쉬는 것이 으쩌겄소? 빨치산 환갑나이 폴세 지낸 것 같은디."
조원제가 야무지게 쏘아붙였고, 그들 일행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이해룡은 무색함을 면하려는지 누구보다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나이를 빨치산 환갑이라고들 했다.
"광주에 군경이 들어왔고, 시당이 무등산으로 빠졌다는 건 알고 있소?"
염상진이 정보제공을 겸해 확인하고 있었다.
"알고 있구만요."
조원제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으론 도당은 백아산 쪽으로 이동할 것 같고, 시당에 선을 댈라면 우리가 가는 길목이니 동행해도 좋겠소."
염상진의 보호의식 발동이었다.
"말씀 고맙구만요. 근디 즈그덜언 딴 디로 붙었으먼 쓰겄구만이라. 셋 다 집이 요 근방잉께요."
"그럼 그렇게 하시오. 연고지를 낀 투쟁이 불리할 때도 있지만 유리할 때가 더 많으니까.“
"근디, 한 가지 의문이 있구만요. 공산당은 그 조직을 자랑허고, 조직 웂은 공산당은 존재헐 수 웂다고 알고 있는디, 요분 후퇴럴 당허고 봉께 선이란 선은 다 뒤죽박죽이 되어 끊기고 헝클어지고 혀서 혼란이 말이 아닌디, 대체 요것이 워치케 된 일이당가요?"
"그게 전쟁이라는 거요. 전쟁이 야기시키는 돌발 상황은 조직을 얼마든지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오. 그걸 불가항력이라 하오. 그러나 조직의 힘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혼란을 얼마나 신속하게 수습 정비하느냐 하는 문제로 연결되오. 불가항력적 상황에 부딪쳐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진 모양을 보고 우리 조직에 대해 회의할 게 아니가 그걸 수습 정비해 나가는 신속성을 보고 우리 조직이 불변하게 가지고 있는 위대성을 확인하도록 하시오. 현 상태의 혼란은 일단계로 열흘, 이단계로 닷새, 합해서 보름이면 완전히 수습될 것이오. 어디서든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주시해보시오. 건투를 빌겠소."
염상진이 팔을 뻗쳤다.
"잘 알겄구만요. 작은 스탈린이라고들 혀서 키도 작으신 줄 알었등마......"
조원제는 악수를 하며 키가 큰 염상진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염상진 일행은 광주를 서쪽으로 두고 담양군 남면을 지나 무등산 뒷골인 화순군 이서면으로 접어들었다. 아직 치안대 청년들이 대창이나 낫을 들고 검문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염상진은, 어서 산으로 들어가 당신들 조직을 찾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멀잖아 면단위까지 밀어닥칠 경찰병력을 앞에 두고 원시무장으로 검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화순군으로 들어서자 지리가 환해 염상진은 걸음이 한결 수월해지는 느낌이었다.
조계산을 가운데 놓고 동으로 백운산, 서로 무등산, 남으로 모우산을 잇는 지역은 지난 야산투쟁이 중심지였다. 그 네 개의 점안에 장흥군, 화순군, 보성군, 승주군, 광양군이 포함되었고, 구례군과 곡성군 일부분이 걸렸다. 도당이 후퇴를 중단하고 발길을 되돌린 이상 유격투쟁은 본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시 그 지역이 핵심투쟁지가 될 도리밖에 없었다. 염상진은 숨을 있는 껏 들이켠 채로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리고 먼 하늘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색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유. 동네 처녀들이 다 시집간 것 모양으로 낭자머리를 올린다고 허니 색씨도 그리 허고 봅시다."
주인아주머니가 마을 갔다 돌아오자마자 순덕이를 불러 말했다. 순덕이는 아주머니의 손에 나무비녀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며 어색스럽게 웃었다.
"얼굴언 그대론디 낭자만 틀어올린다고 눈쉑임이 될께라?"
순덕이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그런 마음씀이 더없이 따스하고 고마웠다.
"사람한테 치장이란 것은 묘해서 낭자머리를 틀면 우선에 십 년은 더 나이 들어 뵐 것이유. 그 서양 것들이 용하게도 처녀들만 골라낸다니, 고것이 머리 모양새 보고 그러는 것 아니겄수. 그 식별하는 것이야 애초에 못돼묵은 조선 놈들이 가르쳐줬을 것이고. 그러니 좀 우습지만 깨끗헌 몸으로 심 중위님을 만나자면 낭자를 틀어야 될 것 아니유."
주인여자가 달래듯 하는 부드러운 눈으로 웃었다.
"그래야제라."
순덕이는 풀죽은 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심재모를 생각하자 또 눈물이 솟구쳤다. 그런 그리움의 눈물만이 아니었다.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심재모가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리고, 그 허망하고 야속함은 버림받았다는 비참한 서러움이 되었다. 그 뒤로 심재모만 생각하면 서러운 눈물이 지체 없이 솟기고는 했다. 그러나 그 서러움에는 자신의 신세 기구함에 대한 아픔이 있을 뿐 심재모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심재모는, 다섯 장의 손수건과 함께 생전 처음 써서 보낸 연애편지의 내용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마음을 이끄는 '등대'였다.
"요거이 무슨 생판 난린지 모를 일이네. 사람들이 대중없이 죽고 다치는 난리에다가, 배곯고 애끓는 뒷난리 참아내기도 힘이 부치는 판에 요건 또 무슨 변고여. 인민군허고 싸우겠다고 이 땅에 들왔으면 쌈이나 고이 할 일이지 어째서 그 악독한 일본 놈들도 안하던 짓을 즈덜은 하는 것인지 몰라. 이 땅 여자들이 즈덜 첩도 아니고 종도 아닌 세상에.“
머리를 빗질해서 몇 번이고 낭자를 틀었다 풀었다 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순덕이는 두려움과 분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그건 여자들이 치러야 하는 새로운 난리였다. 그 난리는 이틀 전에 한바탕 벌어졌다. 미군들이 지나가며 변두리 마을에서 분탕질을 쳐 여자들을 범한 사건이 생겼다. 그날 밤에 처녀 둘이 목을 매 죽어버렸다. 그래서 더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음날 '몸 씻기 마을 굿'을 벌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굿을 조용히 치른 것이 아니라 미리 소문을 내 여자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다른 예사굿도 아니고 그런 험한 꼴 당하고 이름조차 처음 듣는 굿을 한다는데 구경을 오지 말라고 해도 갈 판이었다. 순덕이도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그 마을을 찾아갔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는 속에 칠팔십 명의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몸 씻기 마을 굿'은 어스름이 내리면서 쌍을 이루고 선 당산나무 아래서 시작되었다. 당산나무 주위에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남자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남자는 꼭하나, 하얀 수염이 긴 영감님이 풀기 선 흰 두루마기에 망건을 쓰고 당산나무 밑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무당이 요란한 풍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고 돼지머리가 차려진 상 앞에서 짤막한 주문을 외웠다. 그 많은 여자들이 당산나무 아래 둥그런 빈 터를 남기고 겹으로 에워싸며 있었지만 작은 소리 한 가닥 내지 않고 긴장되어 있었다.
"오너라, 나오너라, 죄 없이 벌 받은 우리 불쌍헌 죄인들 나오너라아!"
무당이 컬컬한 소리로 외치며 큰 쥘부채로 하늘을 쳤다. 당산나무 가까운 집에서 여자들이 줄지어 나왔다. 당산나무를 겹으로 에워싸고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다 함께 놀라는 소리들을 짧게 토했다. 한 줄로 서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여자들은 모두 흰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머리에는 삼베자루를 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삼베자루는 목밑까지 내려왔고, 앞을 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 두 개씩이 뚫려 있었다. 소리 없이 걸어온 여자들은 당산나무 아래 줄을 맞춰 섰다. 모두 열아홉이었다. 그때까지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영감님이 느리게 몇 걸음을 옮겨 굿상 앞으로 나섰다.
"이 불초한 몸이 이 자리에 선 것은 학식이 많아서도 아니요 덕망이 높아서도 아니올씨다. 금번, 세월이 하 수상하고 어지러운 난중에 처하여 우리 마을이 당해서는 안 될 청천벽력 같은 우환을 당하매 나이 최 연장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선 것이올씨다. 우리 마을이 당한 우환은 벌써 다 아시는 고로 재언할 필요가 없는 일이고, 오늘 이 기막히고 통분할 마을 굿을 하지 아니치 못할 연고만 간명하게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자고로 남자는 지조요, 여자는 정절이라 하여 그것을 목숨처럼 존귀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네 법도요 미풍양속으로 귀히 여겨왔습니다. 하여, 정절을 함부로 더럽히는 방탕한 여자는 사람대접을 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엄한 규범이올습니다. 음녀와 탕녀는 마을돌림으로 매타작을 당해 죽어야 했고, 그리 죽기가 무서우면 손수 목숨 줄을 끊거나 야반도주를 했던 것은 모두가 두루 아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허나, 정절이 더럽혀졌다고 하여 다 똑같은 것은 아니올씨다. 정절이 더럽혀졌되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 법이니, 앞서 말한 인륜도덕을 깨치는 죄를 범하는 것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음탕한 짓을 자행한 경우가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생명을 내걸고 정절을 지키려 했으나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도리가 없는 강압으로 정절을 더럽히게 된 경우올씨다. 이 두 가지는 천양지차라, 마땅히 구분되고 식별되어 다루어져야 하는 것인즉, 두 번째 일이 여자들의 본의로 저질러진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그 죄를 뒤집어쓰고 목숨을 끊는 것은, 그런 횡액을 당한 것만도 천추의 한인데 거기에 더하여 분통한 죽음까지 해야 함은 만고에 없는 억울함이고, 그런 비통함을 막지 않고 보고만 있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만행이올씨다. 더욱이 금번 일은 난중에 일어난 난이라, 자고로 난은 남자들의 책임 하에 있는 일이니 금번 당한 우환의 책임도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있음을 부정치 못할 바이올씨다. 이치가 그러하매 남자들은 금번 당한 우환의 책임을 통감할 일이지 그 처의 정절이 더럽혀졌다 하여 하등의 시비를 할 명분도 이유도 없음입니다. 이에 함께 당한 우환은 함께 풀어 그 일을 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즉, 오늘 이리 몸 씻는 마을굿을 함께 올려 천지신명께 죄를 빌고 그 용서를 받자와 우리 다 함께 우환으로 입은 상처가 덧나지 않고 아물어 새 광명으로 살기를 축수하려는 바이올씨다. 이러한 일은 이 불초한 몸의 생각이 아니오라 저 옛날부터 우리 조상님네들이 행해오신 방책인즉, 국난을 당할 때마다 무수한 인명이 상하는 참극 외에도 금번과 똑같은 우환을 여자들이 겪지 아니할 수 없었으매, 일찍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오늘과 같은 굿을 올렸던 것이올씨다. 오늘 여자분네들을 널리 오시게 한 소이는 이 기막히고 통분할 굿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여자분네로서 진정한 마음으로 위로를 하여 주시옵는 한편 저분네들이 몸을 씻고 정절을 되찾는 증인이 되어달라는 뜻이올씁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난이 계속중이오매 다 같이 경각심을 갖고 우환을 막고 피할 방책을 강구하라는 뜻도 합하여 있습니다. 이 불초한 몸은 여기서 말을 거둘까 합니다."
비장감이 서리고 분통함이 밴 노인의 말은 한 겹씩 내리고 있는 어둠을 뚫고 퍼졌고, 당산나무를 에워싼 많은 여자들은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히는 것을 느끼며 자신들이 바로 삼베자루를 쓰고 있는 여자들로 변하고 있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주문과 함께 무당의 춤이 한판 어우러졌다.
"어허어! 천지신명을 위시하야 우리를 지키시고 살피시는 제신들께 죄를 고하야 사함 받을 몸 씻기를 떠나는 판에, 모두모두 마음 정히하여 내 뒤를 따르렷다!"
무당이 둘러선 여자들을 제압하듯 쥘부채를 휘둘러 둘러보면서 엄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에에-"
눈치 빠르고 비위 좋은 여자들이 대답을 길게 늘였다.
"어찌 이리 대답이 다 안 나오고 이런고! 마음 정히 하여 내 뒤를 따르렷다!"
무당의 힘찬 되풀이였다.
"예에에-"
여자들은 다 같이 입을 모았다. 무당은 숙달된 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한 묶음으로 엮고 있었고, 모든 여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가세가세 죄진 몸 씻으러, 천지신명 제왕제신 자비롭게 굽어살펴, 인간중생 온갖 죄를 용서하고 거두시니, 죄를 씻자 몸을 씻자 염수로 먼저 씻고 청정수로 거듭 씻자......"
무당이 앞장서가며 주문을 외웠고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은 합장을 하고 뒤를 따랐다. 이어서 그 뒤를 실이 풀려나가듯 여자들이 한 줄로 섰다. 그 긴 행렬은 발소리도 숨소리도 내지 않고 점점 진해지고 있는 어둠 속을 흘러가고 있었다.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강가의 모래밭에서 무당이 발길이 멈추었다. 모래밭 건너편은 나지막한 등성이가 강물과 맞닿아 벽을 치듯 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물길이 휘돌아 흐르며 모래밭을 일구어 놓고 있었다. 무당의 손짓에 따라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이 모래밭에 줄지어 놓인 커다란 통들 앞으로 가서 섰다. 그 통들은 제각기 그 크기나 모양새가 좀 달랐다. 나무로 만든 것도 있었고, 양철로 만든 것도 있었다. 그 통들 옆에는 바가지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계속되는 무당의 손짓에 따라 뒤따라온 여자들이 모래밭에 반원을 그리며 겹으로 서 나갔다. 마을을 등지고 선 여자들의 반원은 맞은편의 등성이와 함께 이어져 동그라미를 이루듯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반원그리기가 끝나자 무당은 강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쥘부채를 활짝 펼치며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렸다. 무당은 하늘을 우러르고 주문을 외며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렸다. 무당은 하늘을 우러르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무당의 고개가 하늘을 향하여 젖혀진 것과는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의 고개는 깊이 떨구어졌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먼 하늘에는 별들이 갓 돋아나기 시작했고, 강변에는 물 흐르는 소리만 어둠 저편에서 멀고 여리게 들리고 있었다. 주문을 끝낸 무당이 여자들 쪽으로 돌아섰다.
"천지신명을 위시하야 제왕제신께 아뢰온 바로 죄인들의 뜻을 가상히 여기사 면죄를 나리기로 하셨으니 죄인들은 천지신명과 제왕제신이 내려다보시는 가운데 정히 몸 씻기를 시작하렷다!"
무당이 접은 쥘부채로 삼베자루 쓴 여자들은 한일자 쓰듯 한 동작으로 가리키며 호령했다.
"소금을 통에 붓고, 물을 떠다 반씩 채울 일이다!"
무당의 지시에 따라 삼베자루 쓴 여자들이 일제히 바가지를 하나씩 들어 올려 거기에 든 소금을 통에 쏟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두 손에 바가지를 하나씩 들고 강가로 나갔다. 무당은 요령을 한들며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고, 여자들은 강물을 떠다가 통에 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자들의 모래 밟는 소리가 그녀들의 흐느낌처럼 어둠에 스미고, 물 쏟아 붓는 소리가 그녀들의 통곡처럼 어둠을 흔들었고, 요령소리와 주문은 그녀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듯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 떠나르기가 열 번을 채웠을 때 무당의 요령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뚝 멎었다.
"좌로 쉰네 번, 우로 쉰네 번, 합하여 백팔 번을 착실히 하여 염수를 만들렸다!"
무당의 요령소리가 다시 울리고, 삼베자루 쓴 여자들은 다 같이 허리 굽혀 통 속의 물을 왼쪽으로 휘저어 둘리기 시작했다. 어둠은 차츰차츰 짙어져가고, 통마다 물이 휘도는 소리가 그녀들의 울먹이는 기구처럼 어둠 속을 흐르고 있었다.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이 하나, 둘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무당의 요령소리와 주문이 한결 빨라졌다. 마지막 여자가 허리를 펴는 것과 함께 요령소리와 주문이 멎었다.
"염수에 몸 씻기를 시작할 것인즉 속곳 입은 죄인은 없으렷다!"
무당의 호령에 삼베자루 쓴 열아홉 여자들이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가 폈다.
"되었다, 통 안으로 얌전히 들어앉으렷다!"
열아홉 여자는 신들을 벗고 통 안으로 들어갔고, 소금물 속으로 몸을 앉혔다. 무당은 다시 쥘부채를 활짝 펼치며 하늘을 우러러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어느 때 없이 어기찼고, 가락의 폭이 높고 깊으면서도 애절감이 줄줄이 넘쳐흘렀다. 반원을 이루고 선 여자들은 그 뜨겁고 간절한 주문에 휘말리며 요행히 자기를 피해간 우환을 다행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삼베자루를 쓴 채 소금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여자들의 분한 아픔을 가슴 저리게 느끼며 이 굿으로 그녀들이 마음병을 앓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어허! 천지신명 제왕제신께서 굽어보시는 가운데 초벌죄는 씻었으니 다음은 청정수 씻기니, 통 안에서 나오렷다!"
열아홉의 여자들이 통 밖으로 벗어났다. 소금물에 흠뻑 젖은 치마들은 무겁게 처져 내리며 그녀들의 아랫도리 부분부분에 달라붙고 있었다.
"청정수로 거듭 씻어 심신에 죄가 티끌로도 남지 않게 할 것이니, 물이 목에 찰 때까지 들어가고, 천지신명 제왕제신께 아뢰올 동안 머리까지 풀풀 세 번씩 담글 일이렷다!"
다시 울리기 시작한 요령소리를 따라 열아홉 여자가 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드러나는 그녀들의 모습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요령소리가 급해지고, 커지면서 주문이 시작되었다. 물이 목에까지 차오르는 지점은 물살이 제법 셌고, 물때가 낀 강바닥의 돌들은 맨발인 발바닥으로 밟기에는 미끄러웠다. 그러나 여자들은 온 힘을 다리와 발가락에 모아 똑바로 서려고 안간힘하며, 세게 흐르는 물살에 자신들의 몸에 묻은 그날의 더러움이 씻겨져 나가고, 분함과 원통함도 씻겨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들은 제각기 삼베자루 뒤집어쓴 머리들을 물속 깊이 넣었다. 그리고 숨이 차서 더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질정 없이 그러나 간곡하게 빌고 있었다.
"어허허! 청정수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어내었으니 몸도 마음도 말끔하니 되었도다. 나오너라, 당신(堂神)께 절올리러 가자!"
무당이 요령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주문도 신명나는 가락을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가로 나올 때처럼 무당을 따라 한 줄로 서서 당산나무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둠은 짙을 대로 짙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당산나무 아래 줄맞춰 서고, 걸판진 풍악소리에 맞추어 무당의 신바람 도지는 춤이 한바탕 어우러졌다. 두 개의 촛불이 펄렁이다가 자지러 들고, 다시 일어나 펄럭거렸다.
"천지신명과 제왕제신께서 죄를 말끔히 사하시와 새 몸과 새 마음을 나리시니 여기 읍한 열아홉 목숨은 그 뜻 높이 받자와 실하고도 실하게 살아가야 하렷다!"
온몸이 물에 젖은 채 합장을 하고 선 열아홉 여자는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무당은 상에 놓였던 사발을 왼손에 들고, 솔가지를 오른손에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솔가지 끝에 사발의 물을 찍어 첫 번째 여자의 삼베자루 쓴 머리에 뿌리고, 다시 찍어 마주댄 두 손바닥위에 뿌렸다. 그 예식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차례로 치러졌다.
"새 몸과 새 마음을 나리신 천지신명과 제왕제신의 하해와 같은 은공감읍하고 그 뜻을 귀히 받들 것을 약조 드리는 뜻으로 사배를 올리렷다!"
열아홉 여자는 제각기 정성스러운 몸짓으로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네 번씩의 큰절이다 끝나자 다시 풍악이 울리고 무당이 춤을 추었다. 굿을 마감하는 춤이었다. 춤이 끝나자 삼베자루를 쓴 여자들은 처음처럼 줄지어 당산나무 아래를 떠났다. 그때 마침 순덕이는 길을 틔워주는 목에 서 있어서, 줄지어 지나가는 그녀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억누른 울음소리가 느닷없이 가슴을 치며 울음을 솟기게 해 순덕이는 입술을 물고 그 울음을 코로 흘러내고 있었다. 열아홉 중에 처녀가 몇이고 부인네가 몇 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생전 처음 본 그 굿이 그렇게 서럽고 기막힐 수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덕이는 내내 울먹였다. 그리고 학처럼 생겼던 그 영감님의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이만하면 낭자 모양은 됐으니, 어디 좀 봐유."
주인여자는 순덕이를 돌려 앉혔다. 순덕이의 둥글넓적한 얼굴에 낭자머리는 어울렸고, 나이도 분명 더 들어보였다.
"시잡간 여자로 보이기는 해도 그 얼굴이 그래서는 색에 미친 그것들 눈 속이기가 쉽덜 않겠구먼유. 낭자도 머리 빗지 말고 벗대로 틀고, 얼굴에 검댕이도 좀 칠허고, 옷도 누데기를 입어 그놈들 눈에 정내미 떠어지게 허고 있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먼, 생각이 어쩌요?"
순덕이는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베자루를 뒤집어쓰고 그런 굿을 당하고 싶지 않았고, 심 중위를 다시 만날 때까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은 처녀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심재모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떠난 것은 전쟁이 너무 갑자기 터져 그럴 경황이 없었을 뿐이지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라고 순덕이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 또한 굳게 믿었다. 심재모가 떠나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 허망하고 막막함이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죽어버릴까도 몇 번 생각했다. 전쟁이 터지자 심재모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여비와 가는 길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었지만, 그건 심재모의 속 편한 소리였고 자신은 도저히 그냥 집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 되었다. 심재모와 결혼을 해서 돌아가면 더없이 당당하겠지만 그냥 갔다가는 아버지한테 다리몽뎅이 부러지고 어머니한테 머리채 끄들릴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동네사람들 손가락질과 나쁜 소문으로 시집가기는 아예 틀린 일이었다. 그래서 주인아주머니에게 통사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덕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점잖았던 심재모도 생각하고 해서 부엌일이나 거들며 함께 살아보자고 했던 것이다. 순덕이는 낭자머리를 한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미친년, 천리 밖 타향에서 요게 무신 천주악이여,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24. 냄편이고 아덜이고 열썩이나 못 당허겄다, 요런 징글징글헌 눔에 시상!
마을마다 찬바람이 휩쓸고 있었다. 그것은 바뀌는 계절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상대로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듯이 제일 먼저 불어 닥친 바람이 경찰의 바람이었다. 빨갱이와 부역자 색출이라는 그 바람은 마을을 차례로 휩쓸어 갔다. 그러나 그 바람은 별로 거둬갈 만한 것이 없었다. 안창민네가 읍내로 들어오기 전에 지주나 유지들이 미리 피해버렸던 것과 똑같은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바람은 입산자 가족들을 몰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사결과 입산자들 삼백을 넘는다는 사실에 경찰에서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건 진짜 알맹이는 다 빠져나가 버렸다는 뜻인 동시에 자기네들의 적이 전쟁 전보다 그만큼 늘어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뒤늦게 놀란 것은 어떤 마을에서는 남자들이 절반이나 입산한 일이었다. 그 대표적인 마을이 들몰이었다. 들몰이 그렇게 된 것은 김종연과 서인출의 영향 탓이었다. 농지개혁을 앞두고 지주들이 자행하는 파렴치 행위를 막기 위해 집단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경찰들이 다음으로 놀란 것은 여자 입산자들이 상상 외로 많았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염상구였다. 외서댁의 입산 때문이었다. 쌀 열 가마니로 무슨 장사밑천을 삼아 장흥에서 애나 키우고 있는 줄 알았던 외서댁이 인공치하가 되자 굳이 벌교로 돌아와 여맹에서 날뛰다가 입산까지 해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염상구는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사기당한 기분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꼴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은 생각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허! 그년 맘뽀가 꼭 지년 니노지맹키로 찰방지고 찔긴 모냥 아니라고? 허기야 저수지에 빠져 죽을라고 헌 독헌 년잉께. 그나저나 그 니노가 아까와 어쩌까?"
그는 혼잣소리를 씨부리며 짭짭 입맛을 다셨다.
마을마다 두 번째로 불어 닥친 바람은 지주들이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지주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농지개혁에서 빼돌린 자기네들 논을 일삼아 돌면서 헛기침을 해대고, 가래를 돋우어 내뱉고는 했다. 논에 나선 사람들은 그 속이 뻔한 시위를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들의 헛기침이나 가래 돋우는 소리가 '이놈들아 빨갱이들이 한 농지개혁은 다 무효야!" 하는 뜻인 것을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 꼴들을 그냥 보기도 속이 꼬이는 판인데 인공의 농지개혁으로 자기 논이 된 줄 알고 열성으로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속이 뒤집혀도 열 번 뒤집힐 일이었다. 결국 반농사를 지어준 꼴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득을 반으로 나누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품삯을 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요구를 했다가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까지 끌려가는 곤욕을 치른 소문이 이미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이눔아, 누가 니보고 농사지라고 혔어! 니눔이 빨갱이 법에 정신이 홀까닥혀서 내 논 공짜로 묵어칠라고 니눔 좋아서 진 농사제. 허고, 빨갱이 눔덜이 달근마시허는 말에 잠시잠깐 고런 느자구웂이고 호로시런 맘 묵었드라도 다시 대한민국으로 시상이 달라졌으면 회개허고 그못된 맘얼 고쳐 묵는 것이 아니라 뎁되 반타작얼 해도라고? 고런 맘보가 무신 맘뽄지 아냐! 바로바로 빨갱이 맘뽄 것이여! 니눔언 영축웂이 빨갱이여, 빨갱이!"
이렇게 소리친 것도 모자라 지주는 그 사람을 경찰서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후퇴가 시작될 때 벌써 사람들은 인공의 농지개혁이 전면무효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 허망함을 체념하면서 자신들의 헛고생도 체념했던 것이다. 다만 어떤 성질 급한 사람이 그 말을 참아내지 못해서 당한 욕이었다.
마을마다 세 번째로 불어 닥친 바람은 역시 경찰의 바람이었다. 입산자 가족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부역자 색출에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 경찰은 그 조사대상을 각 마을사람들로 바꾼 것이다.
"많이도 말고 한 사람만 대. 그럼 절대 비밀에 부쳐주고, 넌 살아나게 돼. 그렇지 않으면 넌 죽어."
"아 글씨, 부역헌 사람덜언 다 떠나뿌렀당께요."
"너 정말 죽고 싶어! 그럼, 네가 한 부역을 대!"
"아니어라, 지넌 암 일도 안허고 아그덜 키우고 밥만 해묵었구만이라.“
"닥쳐!"
이 대목에서 주먹이 날아가거나 몽둥이가 날아갔다. 그러나 입산자 가족들은 댈 만한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사실 표 나게 움직였던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던 것이고, '부역했다'는 것이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그 범위가 모호했지만, 행동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더라도 동조하는 마음까지 포함시킨다면 농지개혁을 열렬하게 환영한 소작인들 모두가 부역자였다.
"딱 한 사람만 대시오. 이건 당신과 나만 아는 절대 비밀이오. 협조하면 앞으로 많은 편리를 봐줄 거요."
"금메요, 부역헌 사람덜이야 다 뜨고 말었는디라이."
"그럴 리가 있소? 협조를 안 하면 앞으로 별로 좋잖을 것이오."
"아이고 참말로, 고런 사람이 있음사 금세 대제라. 워째 스지도 안헌 애럴 나라고 그러신다요."
마을사람들을 상대로 한 이런 식의 조사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땅하게 댈 만한 이름이 없었고, 역시 그 조사가 끝나고 엉뚱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소동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벌어졌다.
"역시 벌교가 제일 많군요. 이렇게 되면 우리 군에서만도 천오백이오. 군마다 이런 식이라면 도 전체를 따지면 이만이 될 판이오. 이거 보통 난리가 아니오."
남인태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흥분기를 띠고 있었다. 무리가 아니었다. 입산자 집계결과에 자신도 놀라고 있는 참이었다. 권 서장은 숨을 들이켰다.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그런데, 도 전체의 수는 더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화순이나 광양, 구례 같은 군은 우리 군보다 더 좌익이 강세고, 순천, 여수 같은 데가 또 있잖습니까?"
권 서장은 별로 내키지 않는 말이었지만 상황파악을 위한 예상정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소. 규모가 제일 큰 광주가 있고, 목포가 또 있잖소? 이거, 이렇게 계산하면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소? 이거, 이거, 몇 십만이 되는 거 아니오? 가만있어 보시오, 만약 인천상륙작전을 안하고 낙동강전선에서 그대로 위로 밀어붙였더라면 그것들이 다 어떻게 되겠소? 그대로 밀려 이북으로 갔을 게 아니겠소? 듣고 있소, 권 서장?"
"예, 보나마나 그리 됐겠지요."
"아하! 미군이 이거 큰 실수를 한 거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인천 상륙작전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밀어 올렸더라면 남한 빨갱이는 하나도 남지 않고 이북으로 넘어가서 남한은 빨갱이 대청소를 하는 건데. 그리 됐더라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것들만 데리고 나라가 얼마나 편안해졌겠소. 괜히 그것들을 길목마다 고개마다 막아대니까 산속으로 기어들어간 것 아니겠소. 이거야 원,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전쟁이 끝나가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인 거요. 참 골치 아프게 생겨먹었소."
"그런데 한 가지 큰 의문이 있습니다. 겨울은 닥치는데 염상진은 어떻게 하려고 그 많은 사람들을 끌고 산으로 들어갔냐 하는 점입니다."
"글쎄...... 무슨 구체적인 계획이 있기야 했겠소. 다급한 김에 어중이 떠중이 몰고 무작정피하고 본 것 아니겠소?"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어쨌거나 우리 군의 입산자 수가 제일 많지나 말아야 할 텐데, 제일 많았다간 우리 싸움이 어려운 것이야 뒷전 치더라도 당장 창피스러운 노릇 아닙니까?"
"그 말도 맞소만, 우선 우리 군에선 한 부락 전부가 몽땅 입산해버리니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래도 창피는 면한 셈이오."
"아니, 그런 부락도 다 있나요? 참 별일이 다 많군요."
"나도 소문만 들어서 아직 그 부락이 어느 군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소만, 그런 기분 잡치는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소."
"아이들까지 당성이 강해서 그랬을 리는 없고, 대체 그 원인이 뭘까요?"
"그야 보나마나 아니겠소? 도둑놈 제 발 저린다고 그렇게 내빼지 않고는 살아날 가망이 없을 만큼 부락민 전부가 적극적으로 부역질을 한 게 아니겠소?"
"글쎄요, 그게 뭐랄까....... 하여튼 앞으로가 큰일이군요."
권 서장은, 부역을 한 죄보다는 우리 경찰이 무서워 그런 건 아니겠느냐는 말을 입 안에서 죽여 버렸다.
"권 서장, 큰일일 것 하나도 없소. 그전에 해왔던 방식대로 손 안에 든 것들 막 눌러대고 조이고, 입산한 것들을 부락과 완전 차단시킨 상태에서 몰살작전으로 나가는 거요. 권 서장도 다 알고 있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되오. 그것들이 모두 빨갱이 물을 배가 터지게 먹은 것들이니까. 그 물을 빼자면 그것들을 빨갱이로 몰아치는 방법이젤이오."
남인태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예에...... 그런데, 율어지서장 문제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권 서장은 이야기를 돌렸다. 그에게 이근술의 문제는 단순한 흥밋거리일 수가 없었다.
"도경으로 불려갔으니까 무사하진 못할 거요."
"그럼, 무슨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겁니까?"
"자세한 건 두고 봐야 알 일이고, 경찰관이, 그것도 말단도 아닌 지서장이 빨갱이들 손에서 살아났는데, 그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무슨 야로가 있어도 크게 있었던 게 아니겠소?"
"글쎄요, 그 속을 당장 알기야 어렵겠지요. 다른 말씀 없으면 그만 전화 끊겠습니다."
권 서장은 더 전화를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럽시다. 어쨌거나 야물딱지게 닦달하는 것 잊지 마시오."
남인태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왈칵 쏟아지며 전화가 끊겼다. 권 서장은 귀에서 뗀 수화기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이근술 지서장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이 읍내로 다시 들어와 며칠이 지나서 듣게 되었다. 그건 곧 모든 경찰관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살아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게 오갔다. 그 추측과 상상에 불과한 말들이 억측으로까지 변하면서 무성해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본인이 일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도경의 호출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또 도경이 어떻게 그 일을 알게 되었느냐하는 데로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그 관심은 곧 사그라들었다. 내부에서 누군가가 한 짓이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경찰관들의 관심은 그가 어떻게 될 것인가로 옮겨졌다. 권 서장의 관심도 그 순서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살아나기 위해서 어떤 이적행위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진 점이었다. 그 확신의 근거는 그가 자기 판단에 따라 예비검속을 명령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명령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그의 행위는 엄연히 명령 불복종이었다. 그것도 전시상황 아래서의. 그 명령 앞에서 이근술처럼 자기 판단에 따라 행동한 경찰책임자가 전국적으로 몇이나 될 것인가를 권 서장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근술이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엄청나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바보처럼 단순한 기분파일 거라는 상반된 결론을 갖게 했다. 어찌됐든 권 서장은 이근술의 그런 행동을 통해서 자기 마음속에 남아 있던 괴로움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행위의 후유증이 인공치하에서 여지없이 나타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던가를 괴롭게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근술의 행동은 그 명령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것인 동시에 명령수행자들의 행위를 죄악시하는 것이었다. 도경에 불려간 이근술은 사찰과장에게 몇 마디 질문을 받고 자술서를 쓰게 되었다.
"같은 경찰관끼리 일일이 주고받고, 조사형식을 취한다는 게 서로 곤란한 문제니까 자술서를 쓰시오."
사찰과장의 말이었다. 이근술도 그게 속 편한 방법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근술은 수사실 구석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더 보태고 빼고 할 것도 없이 염상진에게 조사받았던 때의 응답과 똑같은 내용으로 자술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할 것도 없고, 꾸밀 대목도 없는 이야기라서 자술서는 그 길이에 비해 두어 시간 만에 끝내게 되었다.
"당신, 여기에 쓴 게 전부 사실 그대로요?"
자술서를 다 읽고 난 사찰과장이 물었다.
"그렇구만이라. 머시가 잘못 되얐는게라?"
이근술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명령을 어긴다는 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소?"
"그것이 긍께 남 서장님이 물었든 말이나 같은 것인디, 거그 쓴 그대로구만이라."
"그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생각이다 그 말이오?"
사찰과장의 어조가 약간 달라졌다.
"하먼 한 가지 일에 사람 맘이 같아야제 시간에 변허고 장소가 달라졌다고 이랬다저랬다 허먼, 둘 중에 하나넌 그짓말 아니겄는게라?"
사찰과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근술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용공행위는 어떻소? 정말 아무것도 협조한 일 없이 살아났다 그 말이오?"
"멀 협조허란 말도 웂었고, 무신 협조를 혀야만 살려준다고 혔으먼 그리 근천시럽게 살아날라고도 안혔을 것잉마요. 좌우당간에 요것도 거그 다 씨인 말잉께 여러 말 혀봤자 도로 그 말이 그 말이고, 그것대로 과장님이 알아서 생각허시먼 좋겄구만이라."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사찰과장이 짧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술서를 들고 일어났다. 그는,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일정시대부터 경찰 노릇을 해먹었는지 모르겠소, 하는 말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근술은 버려진 듯 사무실 구석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내일까지 여기서 대기하라'는 사찰과장의 한마디는 유치장에 넣지만 않았을 뿐 사람대접은 유치장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국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행동통제가 가해진 것이고, 반씩 교대근무를 하는 야간조가 충실한 감시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근술은 몹시 기분이 언짢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건 자신에 대한 조사가 단순한 진상조사가 아니라는 낌새가 맞걸려 있었다. 다음날 경무부장을 만났다.
"이 주임에 대한 조사기록과 자술서를 읽었소. 그 내용을 다 사실이라 인정하고 생각한다하더라도, 이 주임, 이 주임은 그자들의 손에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경무부장은 신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이 아주 느렸다. 그런데 이근술은 그 느린 말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선뜻 잡히지가 않았다.
"무, 무신 말씸이신가요?"
"아, 다시 말하자면 말이오...... 경찰의 신분으로서 그렇게 된 건 모든 경찰에 대한 체면손상이라고 생각지 않느냐 그런 뜻이오.“
가만 있거라, 요것이 워떻게 돌아가는 판국이냐, 이근술은 머리가 핑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렇게 살아난 것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경찰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았으려면 그때 자폭을 하든지, 자결을 하든지, 수류탄도 칼도 없었으니 혀를 깨물어서라도 경찰답게 죽었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그물이 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 생각허자먼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는 허겄구만요."
이근술은 그물을 찢어발기는 기분으로 대들고 싶은 생각을 뚝 부러뜨렸다. 혼자의 힘으로는 찢어질 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인의 생각도 그러하다면 이 일을 조용히 해결하는 방법은 찾아진 셈 아니겠소?"
고개를 숙임막한 경무부장이 눈동자를 밀어 올려가지고 이근술을 쳐다보았다. 이근술은 그 눈동자가 요구하는 말에 밀리고 있었다. 그건 그물에 싸여 내던져지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가 사직서를 쓰먼 되겄는가요?"
이근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경무부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근술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자신은 이미 내던져져 있었다.
"종이럴 주씨요."
이근술은 만년필을 뽑아들었다.
한편, 권 서장은 별로 실효 없는 부역자 색출에 진을 빼가면서 읍사무소와 협조업무로 국민병 징집에 뒤를 쫓기고 있었다. 경상남도에만 국한되어 그 동안 병력충원에 애를 먹어온 정부에서는 전선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병력확보가 더욱 시급하게 되자 징집을 밤낮없이 독촉해대고 있었다. 일정한 시한도 없이 일을 몰아대는 것만이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징집자 수를 할당해 놓은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어차피 징집이라는 것이 의무라는 이름을 앞세운 강제행위니까 해당자를 끌어가는 것이야 총부리 들이대면 별문제 아니었지만 머릿수를 채워야 하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가 징집종류는 전투 병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 병력을 뒷바라지 할 노무자들도 뽑아내야했다. 처음에 이틀이나 사흘을 앞두고 징집영장을 내보냈는데 사건이 발생했다. 몇몇이 그동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집뒤짐 끝에 부모네들을 끌어다가 추궁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고것덜이 가기넌 워디로 갔겄소. 날개가 있으니 하늘로 솟았겄소, 발톱이 씨니 땅으로 기들었겄소. 보나마다 두 다리 갖고 산으로 짼 것이제라. 나한테 그것덜 조사럴 맡기먼 요러타께 실토럴 받아낼 것인디 말여."
염상구의 비웃음 담긴 말이었다. 염상구의 말은 추측만이 아니었다. 그의 무작스럽고 다양한 매질 앞에서 부모네들은 자식들이 산으로 내뺀 것을 실토했던 것이다. 아직 영장을 받지도 않았는데 모습을 감춘 젊은이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아버지는 쉰이 넘지 않은 이상 제일차로 노무자 대상이 되었다. 노무자 확보와 함께 입산도주 근절책이었다. 그 징집바람은 부역자 색출만큼 거세게 모든 마을을 휩쓸어대고 있었다.
"아이고메, 징허고 징헌 눔에 시상. 일정 때넌 일정 때라고 끌어가고, 인공 때넌 인공 때라고 끌어가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라고 끌어가고, 나라라고 생긴 것은 해주는 것 암 것도 웂음시로 못 묵고 못입고 보존해온 생목심덜 끌어다가 쥑이는 일만 헌당께로. 냄편이고 아덜이고 열썩이라도 못 당허겄다. 요런 징글징글헌 눔에 시상!"
"살아도 살아도 요리도 미꼬미 웂은 시상이 워디 또 있을까. 일정 때 징용 끌려가서 포도씨 살아와갖고 또 노무자로 끌려 나가게 생겼이니, 남정네덜 살기만 팍팍헌 눔에 시상이여."
나이든 여인네들의 탄식이었다. 아들을 많이 둔 여자일수록 시름이 깊었다.
"아덜만 끌어가먼 되얐제. 워째 남정네꺼지 끌어가는 기여. 한 집서 둘썩이나, 안뒤여, 안뒤여!"
회정리 삼구의 왕주댁이 눈을 흡뜬 채 경찰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앞뒤를 잘 가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평소의 그녀 모습이 아니었다.
"시상에, 끌어가도 좋고 잡아가도 존께 타작이나 끝나먼 가게 혀주씨요. 아무리 하품 나오는 농새라도 여자 혼자 심으로는 될 일이 아닌께라."
노덕보의 아내 조성댁이 경찰을 붙들고 늘어졌다. 김복동, 마삼수가 강동기와 함께 입산을 할 때 못 본 척 해버렸던 노덕보였다.
"고것이 독자여, 이대독자! 애비도 웂은 이대 독자랑께로오!"
칠동에서 이름난 청상과부 진도댁이 눈물범벅이 되어 울부짖었다. 남자들은 젊으나 나이가 많으나 묵묵히 끌려갈 뿐이었고, 여자들의 숨 가쁜 소리들만 고샅고샅을 울리고 있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송성일은 울적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갔다.
"말 듣든 것보담 많이 아픈갑네이?"
송성일은 최서학의 핏기 없이 메말라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다 살아난 꼴 보고 그리 놀래는 것 봉께 읍내에 막 들어왔을 때 꼴 봤드라먼 기절혔겄다. 앉어라, 목수가 진 집잉께."
최서학이 반가움이 넘쳐 목소리를 높였다. 둘이는 그 동안 서로 지내온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꽤나 긴 시간을 열기에 젖어들었다. 마치 무용담을 얘기하듯 하는 최서학의 열기는 송성일을 압도했다.
"근디 말이시, 징집영장은 나오고 엄니는 절대로 군대에 나가선 안 된다고 야단이고, 나는 새중간에서 똑 죽을 맛이시. 엄니는 돈으로 막겄다고 허지만 아부지도 안 계시는 살림에 언제까지 돈을 써야 할지도 모르고......"
송성일은 기운 없는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마음이 울적한 것은 뭉텅뭉텅 들어가는 돈도 돈이었지만, 돈을 써가며 징병기피를 하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나야 괴뢰군복 입고 괴뢰군하고 싸운 반공 상이용산께 해당 무다마는 니넌 고민이 태산이겄다. 지끔 군대 나갔다가는 다 개죽음잉께."
최서학은 파리한 얼굴에 냉정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빌어묵을, 어째야 헐란지 환장허겄구만."
송성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댔다.
"니기럴, 간딴헌 방법이 있다. 둘째 손꾸락을 작두에다 짤라뿌러라."
"머시여?"
송성일이 윗몸을 벌떡 세울 만큰 놀랐고, 최서학은 누운 채로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리 놀랠 것 웂이 차근허게 생각혀서 헐 일이고, 옜다, 요것이나 똑똑허니 봐둬라."
최서학은 머리맡의 신문지를 집어 송성일에게로 던졌다.
"먼디?"
송성일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신문을 끌어당겼다.
"겨그 기맥힌 기사가 나왔다. 서울서 그 동안에 잡아낸 부역자들이 구천구백 놈이란다."
"머시여? 구백구십이 아니고?"
송성일이 놀라며 다급하게 신문을 펼치고 있었다.
"자다가 봉창 뚜딜기지 말어. 구천구백이여, 구천구백! 도망갈 놈들은 도망을 가고도 그 새끼덜이 그리 남아 있었으니 서울은 온통 빨갱이 새끼덜 세상이었다 그것이여. 그 새끼덜언 싹 다, 싹 다 총살시켜 뿌러야 혀."
최서학은 증오에 찬 눈으로 천장을 쏘아본 채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참말로 구천구백이시. 요것이 지대로 부역헌 사람만 골라서 잡아딜인 것일랑가?"
송성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 시방 무신 말 허고 있냐! 허먼, 우리 쪽이 생사람 잡아다가 부역자 맹글었다 그 말이냐!"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최서학은 곧 일어나 앉을 기세로 몸을 들썩거렸다.
"형, 너무 흥분허덜 말어, 고런 뜻이 아닝께. 형이나 나나 공산당 싫어허기는 매일반인디, 아까 형이 헌 말대로 도망갈 놈들 다 도망가고도 남은 부역자들이 그리 많다는 것이 문제라 그것이시. 농사꾼들이 태반인 시골이야 농지문제가 걸렸은께 그렇다 허다라도 농사꾼들 웂은 서울에는 공산당에 부역헌 사람덜이 그리 많다는 것은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니겄는가. 어째서 그리 됐는지 말이시."
"야, 야, 그까진 거 생각혀서 젯상에 올릴라고 그러냐. 일단 빨갱이들하고 죽기살기로 맞붙은 이상 그 새끼들은 잡는 쪽쪽 쳐 죽이기만 하면 돼. 니가 아무리 뒤집어 생각허고 엎어서 생각허고 혀도 빨갱이새끼덜이 니 이뻐라 안헐 것잉께 정신 똑똑허니 채려!"
최서학은 송성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송성일은 마음이 더 울적해지며 눈길을 신문으로 돌렸다. 사흘이 지난 시월 십이 일자 신문이었다.
이학송 일행은 대동강을 건넜다. 다리를 다 건넌 이학송은 무심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덟시였다. 그는 대동강을 되돌아보았다. 아침햇살이 가을빛 완연한 강 위에 내리고 있었다. 칠 년 전에 느꼈던 감회에 변함이 없었다.
"평양이군요. 오늘이 십칠일이죠?"
김미선은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목소리에는 감격을 담고 있었다.
"맞소, 십칠일. 평양이 처음이오?"
이학송은 앞만 보고 걸으며 물었다.
"네, 처음이에요. 진작 와보고 싶었었는데......"
평양도 역시 전쟁 속에 내던져진 도시였다. 폭격을 당해 불탄 건물들이 흉측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사람들마저 드문드문해서 썰렁한 적막감이 무슨 공포감처럼 섬뜩하게 끼쳐오는 것을 이학송은 느꼈다. 평양도 으레, 아니 더 심하게 상하고 다쳐 있을 것을 알았으면서도 어쩌면 마음 한 가닥은 어떤 기대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아니면, 평양이 후퇴의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순간적인 판단에서 오는 낙망감인지도 몰랐다. 평양까지, 위험하고 먼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이십이일동안 걸어서 다다른 곳,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은 무의식중에 일차 목적지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 저것 좀 보세요!" 김미선은 무슨 감탄할 만한 것이라도 찾아낸 듯 건너편을 손가락질했다. 이학송의 눈길은 지체 없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뻗어갔다.
"아니, 전차 첨 보시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전차 한 대가 굴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전차밖에 안 보이세요? 남자라서 그런가? 아닌데, 남자 눈에는 더 잘 띌 텐데요?"
"뭐가 말입니까?"
이학송은 전차와 김미선을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이었다.
"이제 양키들의 폭탄세례가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인데요. 이 동무의 빠른 눈치까지 멍하게 만들었으니 말예요."
김미선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고는,
"저 전차운전수가 안 보이세요?"
그녀는 다시 전차를 손가락질했다.
"아아, 저건 여자 아닙니까?"
이학송의 어감이 달라졌다.
"이제 보이세요?"
"예에, 여잔데 아주 젊어 보이는군요."
"그래요, 스물 안팎으로 처녀 같아요."
"사람도 몇 타지 않았는데...... 저러다가 폭격을 당하면 어쩔려고 저렇게 태연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학송은 멀어져가고 있는 전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서야 이 동무 눈치가 제자리를 잡은 것 같네요. 제가 왜 놀란 줄 아세요?"
김미선이 이학송을 쳐다보았다. 이학송은 그녀에게 말을 양보하느라고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다 전차운전을 한다는 것 하고요, 저런 젊은 여자가 이런 위험스런 상태에서도 자기가 맡은 바 책무를 유유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국에서 진작부터 남녀평등의 노동법을 시행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런 식으로까지 평등하게 사회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남쪽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 아녜요?"
"그렇지요, 남녀평등이라는 말조차 쓰길 꺼리는 형편이지요."
"그리고 말예요, 그 젊은 여성동무가 이런 위급한 속에서도 의연한 태도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절 감동시켰어요.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보여요."
김미선의 눈과 얼굴에는 정말 꾸밈없는 기쁨의 빛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역시 두 아이의 어머니 같지가 않았고, 저런 정열이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게 했구나 하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저도 그 두 가지 점에 대해서 놀랐고, 김 동무와 동감이기도 합니다."
이학송은 분명 자신의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전차가 여자의 운전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감정에 밀착되지 않고 있었다.
"저기 빈대떡장수가 있네요."
김미선이 눈 빠르게 말했다.
"저 아주머닌 아까 그 여성운전수보다 더 여유만만하군요. 기름 냄새가 시장기를 돋우는데, 드시겠어요?"
이학송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녜요, 평양이 배부르게 해요."
김미선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행은 허술한 밥집을 찾아들어 아침밥을 시켰다. 거기서 평양의 사정을 대충 들을 수 있었다. 지난 십일일에 당의 피난 권유가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피난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서울 쪽에서 후퇴해온 사람들은 모두 강계와 신의주 두 방향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밥집을 나와 동평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피난민들이 아까보다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방금 도착하고 있는 사람들일 터였다. 흐트러진 피난민 사이를 대오를 갖춘 군인들이 소규모로 또는 분대규모로 뛰어서 지나가고는 했다. 시가지 여기저기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대동강의 변함없는 정취에 비해 시내는 살벌한 전쟁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율리에 있는 로동신문사에 도착되었다. 신문사는 폭격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시멘트 삼층 건물인 신문사의 규모와 시설을 둘러본 이학송은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의 그 어느 신문사 시설보다 나았던 것이다. 제작시설뿐만 아니라 이층에 자리 잡은 각 부서의 사무용품이나 소파 같은 것도 고급스러웠고, 삼층에는 기자들의 휴식을 위한 넓은 댄스홀도 갖추어져 있었다. '신문은 조직자이며 선동자이다.' 그런 시설들을 살펴보며 이학송은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해방일보 일행은 곧 평남도당의 지시를 받아 그날부터 도당 기관지인 평남로동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원조가 총책임인 주필이 되었다. 전시신문답게 타블로이드판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심적 부담 없이 그 신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비록 등사판신문이나마 매일 몇 십장이고 해방일보를 만들어내고 있던 구성이라서 타블로이드판의 지면을 메우는 기사작성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이학송은 기사를 쓰고 남는 시간에 평양거리를 배회했다. 공습의 위협 속에 후퇴하고 있는 기관 사람들을 더러 볼 수 있었고, 일반인들의 모습은 전날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그와 반대로 바리케이드 수는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전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는 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 급박한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장수들이었다. 그들이 벌여놓고 있는 저잣거리만을 보자면 전투의 위협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어쩐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피난민들 상대라서 그런지 밥집이 많았고, 닥치는 겨울을 민감하게 의식한 상흔인지 겨울옷을 내다 건 집들도 상당수였고, 후퇴해가는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것이 분명한 시계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엉뚱하게 나무자루의 칫솔과 치분, 홍남 비누같은 것을 차려놓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이학송은 오십 원을 내고 그 유명한 평양냉면 한 그릇을 사먹고 앉아, 목전에 닥친 생명의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고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상인들의 그 지독스러움에 새삼 놀라는 한편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갖는 삶의 치열성이라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평양을 거치면서 알게 된 일인데, 바로 그들이 국방군과 미군이 평양으로 밀려들었을 때 가장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또 장사를 하고, 기관의 끄나풀 노릇까지 하다가 남쪽으로 짐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학송은 그때서야 비로소 상인들이 갖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공산주의가 노동자, 농민은 믿되 왜 그들을 믿지 않는가도 구체적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생산물의 이윤 추구만을 일삼는 중간착취자일 뿐만 아니라, 그 목적달성을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하는 속에서 기회주의가 골수에 박혀버린 구제불능의 부류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내세운 남쪽으로 짐을 챙겨 떠난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십구일이 시작되어 네 시간이 지난 새벽, 해방일보 일행은 잠이 덜 깬 채 베개 삼고 자던 짐들을 들고 신문사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포성이 멀게 그러나 자주 울려오고 있었다. 한 시간 뒤인 다섯 시에 대동강 다리가 폭파될 거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도록 진한 어둠 속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들은 앞사람의 옷자락을 줄줄이 잡고 새벽별빛만 유난히 반짝이는 어둠을 헤치며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평양을 벗어나 날이 밝자 이삼 일 동안 뜸한 것 같았던 비행기들의 맹폭이 감행되었다. 네 대만이 아니라 여덟 대로 편대를 이룬 비행기들은 끔찍스럽게 폭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가을 물이 들면서 헤성해지기 시작한 나무숲을 파고들어 또 억지 휴식을 취해야했다. 아무 거칠 것 없이 멋대로 날아다니며 도시에는 폭탄을 퍼부어대고, 사람에게는 기총소사를 해대는 비행기들을 이학송은 망연히 올려다본 채, 저리도 끝없이 폭탄을 퍼부어댈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어마어마한 화력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해한 민족을 살해하고 그 땅을 황폐화시키면서 그 민족이 가고자 하는 역사를 가로막고 나선 저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비감한 마음으로 같은 생각을 되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 운전수 여성동무 무사히 피했는지 모르겠군요."
김미선이 갈대꽃을 꺾으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피했으니 그 동무도 피했겠지요."
김미선의 평양 기억은 그 젊은 여자운전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이학송은 웃음 지었다. 그 웃음은 가을 숲만큼 썰렁했다. 비행기와 숨바꼭질을 해가며 산자락을 밟아 북행길을 재촉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재빨리 나무 밑이고 바위 뒤로 몸을 감추어야 했고, 비행기가 사라지면 한 걸음이라고 더 걸어야 하는 애타는 발길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처럼 낮에 쉬고 밤에 걷는 방법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 뒤쫓아 오는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한 뼘 길이의 기관포탄이 박혀있는 길바닥에는 으레 인민군들이나 피난민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터지고 찢어진 시체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비행기를 피하려던 마지막 동작들이었다. 어떤 시체는 머리를 풀숲에 감춘 채 기관포를 맞아 엉덩이가 파헤쳐져 있었다. 사인자을 거쳐 순천(順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할 뿐이어서 순천을 우회하기 위해 개천으로 빠지는 산길을 막 돌아나서던 그들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맞은편 하늘이 은빛으로 뒤덮인 것처럼 수십 대의 비행기가 떠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요, 빨리!"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때서야 그들은 야산 다복솔 틈바구니로 머리부터 박으며 기어들었다.
"저 비행기는 소리도 모양도 이상하잖소?"
누군가가 숨 가쁜 소리로 말했다. 한결 가까워진 비행기들의 모양은 폭격기도 제트기도 아니었다. 몸체가 두 갈래로 갈라진 괴상한 생김이었다.
"아니, 저 막 쏟아지는 건 뭐요?"
"가만 있자, 사람 같잖아?"
"맞아요, 낙하산, 낙하산 부댑니다."
흰 버섯 모양의 낙하산들이 수십 개의 쥘부채를 빠르게 펼쳐대듯이 하늘에서 팍팍 펼쳐지고 있었다.
"순천에 낙하산부대가 떨어지는군."
누군가의 한숨 섞인 소리였다.
"순천은 이십 리밖에 안돼요. 이러고 있다가는 꼼짝없이 포위당합니다. 빨리 떠야 해요."
이 말에 모두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투어 산등성이를 내려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성급한 행동이 그런 전쟁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무모함이라는 것을 그 다음에야 깨달았다. 낙하산부대가 투하되기 전에는 만일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그 예정지역에 반드시 맹폭이 가해지고, 낙하산부대가 투하되면서는 외곽지역에서 가해오는 공격을 차단시켜주기 위해 또 그 주변지역에 맹폭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급한 마음으로 큰길을 뛰기 시작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민군 소대병력도 뛰고 있었고, 낮에는 절대로 이동이 금지되어 있는 트럭 한 대도 어디선가 느닷없이 나타나 달리고 있었다. 한 십여 분을 달렸을까. 뒤에서부터 기총소사가 가해져왔다. 이학송은 넘어짐과 동시에 길가 비탈을 뺑뺑이 치며 굴러 논가 개굴창으로 처박혔다. 그는 정신이 아뜩해지는 걸 느꼈다. 어금니를 악물며 정신을 다잡으려고 부르르 떨었다. 그때 고막이 터져나가고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비행기의 폭음과 콩 볶는 총소리가 덮쳐왔다. 그는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을 떴는데, 바로 자신을 향해 비행기 한 대가 곤두박질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는구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같은 폭음과 연발총 소리가 또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눈을 부릅떴다. 또 비행기 한 대가 자신을 향해 곤두 박혀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표적은 자신이 아니라 저 위쪽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막힌 숨을 토해냈다. 미군이 그렇게 쉽게 이 땅에서 손을 뗄 것 같습니까? 김범우의 말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학송은 김범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편, 평양을 향해 서울을 떠난 김범우는 그 시간에 개성을 지나고 있었다. 지프차의 뒷자락에 앉은 김범우는 미 군복차림이었다. 그러나 모자나 옷 어디에도 군인이라는 표지가 없었다. 같은 차림새인 미국사람 셋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내맡긴 김범우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전투부대가 휩쓸고 지나간 이른바 평정지역을 뒤따르고 있는 그로서는 전쟁으로 파괴된 온갖 모습들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당신은 우울하고 언제나 말이 없소?"
옆에 앉은 심슨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며칠 전에 한 말이었다.
"아니, 사람이 저렇게 마구 죽어가고 도시란 도시는 크나 작으나 다 파괴되고 있는데, 그럼 나더러 유쾌하게 웃으란 말이오?"
김범우는 쏴질러 버렸다.
"이건 전쟁이오."
김범우는 더 대꾸하지 않고 픽 웃어버렸다. 그러나 너희 나라에서 이런 꼴이 벌어져도 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하는 말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나 그의 동료들은 말상대가 되지 않는 미국인들이었고 그리고 정보원들이었다. 그들에게 섣부르게 감정노출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 뿐이었다. 김범우는 전주에서 바로 서울로 보내졌다. 용산 어느 부대에서 발가벗겨져 목욕을 하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라는 것은 무조건 네 대의 주사를 찔러대는 것이었다. 그 행위는 버마 전선을 탈출해 영국군을 거쳐 미군에게 넘겨졌을 때와 어쩌면 그리도 변함없이 똑같은지 몰랐다. 그때는 말라리아나 풍토병 같은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가 되었지만, 지금은 무조건 전염병보균자로 취급당하는 모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팬티부터 손수건까지 미군 것으로 뒤집어써야했다. 다시 지프차를 타고 효자동으로 옮겨갔다.
"우린 당신의 경력을 존중하고 믿는 바이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협조해주기 바라겠소. 당신이 맡을 임무는 통역이오. 충실하고 성실한 통역, 그것에만 전념하시오. 그리고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선 알려고도 하지 말고, 관심 쓸 필요도 없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는 어찌 되는지는 OSS훈련을 거쳤으니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고 생각하오."
육중한 체구의 대머리는 손가락보다 더 굵고 긴 시가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삐져나올 듯이 살이 찐 그의 얼굴에 묻어 있는 거만함보다 말이 더욱 거만하게 들렸다. 그곳은 짐작했던 대로 CIC의 분실이었다. 김범우는 전주로 실려 가면서부터 지금까지, 두 여자가 당하게 된 것을 그냥 못 본 척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아니 그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수백 번도 더 엎었다 뒤집었다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CIC의 통역을 해야 한다고 결정이 나버리자 그때의 일이 엄청난 후회로 고정되어버리고, 자신의 행동이 더없이 경솔했던 것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두 여자의 정조의 가치와, 정보통역으로 저질러야 하는 잘못과...... 그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더라면 두 여자가 추행당하는 것을 단호히 외면했을 것이다. 김범우는 그 동안 별 식욕이 없던 입맛을 완전히 잃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시작된 통역 일은 예상대로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곳에 붙들려온 사람들은 더 말할 것 없이 철저한 공산당원에다가 정보적 가치가 있는 직위에 있었거나 그런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미군을 위해 통역을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그런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한 대로 충실하고 성실한 통역이 되도록 애썼다. 왜냐하면 자신은 시험대 이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되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의심이 많아 그들 나름의 몇 단계 시험을 거치지 않고는 국적이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며, 특히 유색인종에게는 더 심하다고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도라지가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기는 정보기관이었다. 자신의 옆에 앉은 서너 명 중에서 그 누가 우리말을 대충이나마 알아듣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선 그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마주앉은 남자는 마흔이 다 되어 보였는데, 얼굴에 고문당한 흔적을 상처와 멍으로 가지고 있었다. 파삭 타서 갈가리 터진 입술에 실피를 물고 있는 그의 눈은 이상스러운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사람과 마주앉으면서부터 등줄기에 섬뜩하게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포로가 아니오.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보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므로 당신의 생사여부는 곧 본조사의 협조여부에 달렸소. 본 조사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귀한 생명을 구하는 동시에 자유를 찾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소."
김범우가 막 통역을 마쳤을 때였다. 그 사람이 침을 뱉았다. 김범우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을 때는 이미 침이 얼굴에 달라붙은 다음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 민족을 팔아먹는 똥만도 못한 놈!"
그 사람이 김범우를 노려보며 외친 소리였다.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김범우는 침을 닦지 않은 채 똑바로 앉아 그 사람의 눈을 맞쳐다보고 있었다.
"저 자식 끌어내!"
조장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 사람이 끌려 나가고 나서 김범우는 천천히 침을 닦았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그 사람이 남긴 말을 통역했다. 그러나 '민족을 팔아먹는'이란 부분은 통역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도, 미국인의 감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만일의 생존을 위해서도.
"왜 참았소, 한 대 갈길 줄 알았는데."
심슨이 야릇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난 통역관일 뿐이오."
김범우는 잘라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잔인하도록 냉정한 사람이오. 그 인내에 놀랐소."
심슨이 뒤에서 말했다. 김범우는 가슴을 긁어내리는 고통에 신음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반 감금상태인 생활을 보내고 서울을 떠날 때쯤 해서 그들은 농담을 던질 정도로 친숙감을 나타냈다. 김범우는 그런 그들의 변화를 분명하게 의식해나가고 있다.
"평양여자들이 한국에서 제일 예쁘다면서?"
심슨이 심심해죽겠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나도 안 봐서 몰라."
김범우는 속으로, 개애새끼! 하면서도 대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했다. 지프차는 덜컹대면서도 평양을 향해 줄기차게 굴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