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3-6
18. 워매, 논두렁 콩알꺼지 시고, 울안 감나무 감꺼지 시는 저런 법은 워디서 나온 법이드랑가!
외서댁이 장흥에서 돌아왔다.
"나가 아무리 생각허고 또 생각혀도 그대로는 못 있겄드란 말이시. 아무 일도 웂었든 사람덜도 나서는 판인디 나가 그냥 발 묶고 앉었자니께 나 땀세 그리 허망허고 원통허게 죽어뿐 냄편헌테 죄 짓는 일이 따로 웂드랑께. 그려서 기왕지사 나설라먼 벌교에서 나서자 허고 이리 온 것이제."
외서댁이 동서 남양댁에게 밝힌 돌아온 이유였다. 그녀는 여맹에 가입할 것을 마음 굳히고 있었다.
"성님, 아조 잘 생각하셨소. 길자 큰 아부지도 저 시상에서 참말로 좋아라고 허시겄소."
이미 여맹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남양댁은 더없이 반색을 했다.
"나가 이래저래 진 죄가 많은디 그리라도 허먼 죄닦음이 될라는지 몰르겄네."
"성님도 자꼬 죄졌다고 생각허덜 마씨요. 고것이 워디 여자 맘으로 헌일입디여? 시국 시끌시끌헌 통에 억지춘향이로 당헌 일이제라."
남양댁은 이 말을 동서에게보다는 먼저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허출세가 잡혀 들어간 다음부터 어떻게 하면 자신이 당한 일을 보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다른 죄 같았으면 진작에 여맹에 보고해서 마름으로 진 죄에다가 하나를 더 씌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만은 자신이 부정한 여자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서 혼자 속만 앓아오고 있었다. 그 문제를 자꾸 생각하다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장흥댁이나 목골댁은 괜찮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장흥댁은 나이가 몇 살 위인데다가 그즈음 시아버지 상을 당해 있던 처지여서 그래도 의심이 덜했다. 그러나 목골댁의 경우에는 자기와 동갑내기였고 허출세가 거리낄 것이 없기는 자기와 마찬가지였다. 목골댁도 나처럼 혼자 분을 씹고 있는 게 아닐까. 생김생김이야 내가 목골댁보다 나으니까 나만 건드린 게 아닐까. 아니지, 열 계집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 했는데.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죄진 맘이란 것이 손에 묻은 꺼멍 씻대끼 되는 일이 아닝께 맘고상이 되는 법이제."
외서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양댁은 동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보냈던 아들을 다시 맡은 이상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은 평생 마음에서 떠날 날이 없을 터였다. 남양댁은 외서댁을 데리고 여맹위원장 이지숙을 찾아갔다. 이지숙은 외서댁을 금방 알아보았다.
"강동식 동무는 훌륭한 혁명 전사였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당한 고초도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는지를 잘 압니다. 강 동무만이 아니라 부인께서도 혁명투쟁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여맹에 가입하시겠다니 열렬히 환영합니다. 함께 혁명 사업에 매진하십시다. 그럼 강동무도 저승에서 기뻐할 겁니다."
이지숙은 외서댁의 손을 맞잡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외서댁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랐고, 눈에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위원장 동무, 한 가지 여쭐 말씸이 있는디요"
동서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남양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에,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지숙은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태도에다가 친절함이 조화된 그녀 특유의 모습으로 남양댁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어......다른 것이 아니고라, 죄인얼 다루는 디는 꼭 인민재판으로 혀야 허는게라?"
"아니, 그렇지 않아요. 무슨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피해자, 그러니까 손해를 본 사람의 곤란한 입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민재판처럼 공개하지 않는 재판도 있어요"
상대방의 질문 의도를 재빠르게 간파한 이지숙은 두 번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도록 대답했다.
"옳여! 그런 재판도 있구만이라. 잘 알았구만요"
이지숙은 남양댁의 입술에 순간적으로 힘이 모아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외서댁 때문이었다. 아무리 동서지간이라 하더라도 감추어야 할 일은 분명 있을 것이고, 어쩌면 가까운 사이라서 더욱 감출 필요가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었다. 역시 남양댁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돌아갔다. 남양댁은 목골댁을 찾아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허출세에 대한 말을 불쑥 꺼냈다.
"영 요상하데, 허출세가 아무 벌도 안 받고 그냥 풀려난다고 허드랑께."
"머시여? 허출세 그 문딩이가?"
목골댁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으쩔끄나, 그눔이 바로 인민재판감인디......"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며, 어깨며, 팔을 맥 빠지게 늘어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눈치만 지키고 있던 남양댁은 마침내 무릎을 쳤다. 더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자네도 그눔한테 당혔제!"
남양댁은 목골댁 앞으로 얼굴을 바짝 디밀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허먼, 자네도 당했단 것이여?"
목골댁은 맥 빠진 소리였고, 남양댁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째 근디 자네넌 기운이 그리 펄펄혀?"
눈물이 크렁해진 목골댁의 말이었다.
"자네도 기운 내소. 그눔이 그냥 풀려난다는 것은 자네가 워쩐가 보자 허고 나가 꾸민 그짓말이시. 인자 우리가 서로 당헌 것을 툭 터놓고 알었응께, 남치기야 그눔한테 되갚음허는 일만 남았네. 존 방도가 있응께 기운채리고 나 말 듣소."
남양댁은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치마말기를 야무지게 끌어올리고는 다시 자리를 잡았다.
"긍께로 말이시, 나가 여맹위원장을 만내서......"
남양댁은 이지숙에게 묻고 들은 이야기를 했고, 그러니 이지숙이를 통해 둘이서 당한 일을 다 털어놓고 허출세의 죄를 따지게 하자고 했다.
"근디, 발 웂은 말이 천리 가드라고 그 소문이 나불먼 우리 신세가 워찌 되겄어. 그눔한테 원수 갚음 혔다 혀도 우리 신세가 쪽박신세 되야불먼 고것이 멋이겄어."
목골댁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위원장 동무가 을매나 딴딴허고 찰방진 여자라고 고런 실답잖은 소문 내겄어? 위원장 동무럴 믿소."
"금메, 위원장 동무야 믿제만 그 일얼 워디 혼자 허는 일이겄어? 아무리 인민재판이 아니라고 혀도 말이 입에서 입으로 왔다리갔다리 허다보면 소문나는 법이제."
"그려, 자네 말도 틀린 말이 아니시. 긍께 우리찌리 요리 말방아 찧어싸도 아무 소양 웁는 일이고, 위원장 동무 만내갖고 우리 이약허기 전에 소문이 날랑가, 안 날랑가, 고것부텀 세세하게 알아보는 것이 워쩌겄는가?"
"금메......"
목골댁은 남양댁에게 이끌려 이지숙을 만나러 갔다.
"쩌어...... 그 인민재판 아닌 재판을 허먼 손해 본 사람이 당헌 일이 소문이 나는지, 안 나는지럴 알았으면 쓰겄는디요."
남양댁은 힘이 들게 말을 했고, 그 옆에 목골댁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그런 표 나는 태도에서, 두 사람이 한 사건의 피해자이며, 그 사건은 표면화 되었을 경우 오히려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히게 되고, 여자 피해자의 경우 그런 사건이란 십중팔구 성문제라는 것을 이지숙은 판단내리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판단이 맞는다면 그 사건이야말로 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자신이 도맡고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이지숙은 생각했다.
"분명하게 약속하겠어요. 소문이 나서는 안 되는 일로 억울한 손해를 당했는데, 재판을 하다가 소문이 나서 또 손해를 보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요."
이지숙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남양댁은 밝은 얼굴로 목골댁을 쳐다보았고, 목골댁은 약간 멍한 듯한 표정으로 이지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 여기서 하는 얘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이에요. 언제, 누구한테, 무슨 일로, 어떻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있었던 그대로만 차근차근 얘기하도록 하세요."
이지숙은 종이를 끌어당기고, 만년필 뚜껑을 돌렸다. 남양댁은 허출세에게 당한 일을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러나 하나도 틀리지 않게 또록또록하게 말해나갔다. 남양댁의 진술이 끝나고 목골댁이 시작했다. 남양댁이 먼저 자세하게 이야기해서 목골댁은 한결 수월했다.
"중간착취만 아니라 강간까지 하다니, 이 작자는 완전무결한 반동분자로군!"
이지숙은 책상을 치듯이 만년필을 소리 나게 놓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됐습니다. 이제 아무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곧 일을 해결하도록 하겠어요. 물론 그런 일이 없었던 것만은 못하지만, 그 일은 강제로 당한 거니까 두 분의 잘못은 없어요. 더구나 두 분은 그 일은 그냥 덮어버리지 않고 이렇게 고발을 해 악질반동분자를 색출해내게 했어요. 오늘부터는 남편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도록 하세요."
이지숙은 다정하게 말했다.
"위원장 동무, 고맙구만이라."
남양댁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즘찮이 아즘찮아 또 아즘찮이구만이라."
목골댁도 허리를 깊이 꺾었다. 이지숙은 당장 염상진과 안창민에게 극비사항이라는 단서를 붙여 사건보고를 했다. 그리고 수사허락을 받아 허출세를 직접 심문했다. 허출세는 처음에 부인을 하다가 이지숙의 날카로운 추궁과 단호한 태도에 밀려 남양댁과 목골댁이 진술한 사실 전부를 시인했다. 다음날 군당위원장 · 부위원장 · 인민위원장 · 부위원장 · 여맹위원장 다섯 간부와 피고 허출세가 앉은 재판이 열렸다. 그 동안 조사된 피고의 중간착취행위와 강간행위에 대한 사실심리가 진행되었다. 허출세는 더듬거리고, 당황하고, 떨어대던 한 대목씩 확인하는 사실들을 거의 다 시인했다. 허출세는 그날로 방죽 위에서 총살을 당했다. 팔을 뒤로 묶인 시체는 방죽의 비탈을 데굴데굴 굴러내려 팔월의 무성한 갈대숲으로 묻혀들었다. 그의 죽음이 회정리 삼구에 알려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별로 딱해하지도 않았다. 남양댁과 목골댁도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아무 표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정신 못 차리게 빠른 일 처리에 놀라고 있었다.
김범우는 전주로 들어서면서 결국 심문에 걸리고 말았다. 역시 도시답게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무서에 끌려가 갇혔다. 그는 갇히기 전에 간단한 조사에서 '시당 문화선전부 손승호'를 되풀이 했다. 더위에 지쳐 졸다가 '김범우' 를 외쳐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는 밖으로 끌려 나왔다.
"으째서 거짓말을 혀! 시당에는 눈 씻고 찾어도 손승호란 사람이 없어."
다소 어감의 차이가 나는 전라도말이 감정을 묻어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허는 짓거리가 영 수상혀. 거기 앉어!"
성난 목소리를 따라 걸상에 앉던 김범우의 머리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어 죄송하지만 도당에 한 번 더 알아봐주십시오."
"아니, 누구럴 놀리자는 거여, 시방!"
상대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인민을 위한다는 세상에 인민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겁니까? 수상하게 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민의 한 사람이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협조를 하는 것이 진정 인민을 위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김범우는 상대방을 쳐다보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일부러 '인민' 이란 말을 많이 썼다. 상대방은 표정을 바꾸며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좋소, 들어가 기둘리시오"
상대방의 말이 존칭으로 바뀌었다. 손승호가 나타나기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다. 김범우는 땀이 범벅인 손승호를 보고 웃었고, 손승호는 그런 김범우를 보며 어이없어 했다. 손승호의 노력은 허사였다. 당원이 아닌 그의 힘은 철창문을 열 수가 없었고, 오히려 통행증 없는 사람을 불법 동행시킨 사실로 입장이 난처해져 있었다. 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기껏 풀려나는 길이 의용군으로 나가는 것이다. 손승호의 애달아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채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김범우는 더위에 눌려 벽에 등을 기대고 죽은 듯이 앉아 있다가 옆 사람들이 가만가만 주고받는 소리에 문득 귀가 열렸다. '박두병이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언뜻 스친 것 같았다. 그는 신경을 곤두 세웠다. 그러나 더는 '박두병' 이라는 이름은 그들의 입에 오르지 않고 이야기가 끝났다. 그런데 그들이 나눈 이야기 내용은 자기들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어떤 느낌에 이끌리며 등을 벽에서 뗐다.
"저어, 실례합니다. 아까 혹시 박두병이란 사람 이름을 말씀하셨는지요?"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김범우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에......그러기는 했는디요......"
한 남자의 경계하는 대답에 김범우의 가슴은 쿵 울렸다.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을 합니까?"
"으째 그러신디요?"
남자는 더욱 경계하는 빛을 드러냈다.
"예, 친군데 그간 소식이 끊겼습니다."
"도당 조직부장이구만요."
아, 그랬었구나! 막연했던 예감의 적중 앞에서 김범우의 감정은 그저 담담했다. 편지 왕래가 있다가 그의 답장이 연거푸 중단되었을 때 김범우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서울이나 어딘가로 이사를 간 것하고, 좌익 활동에 따른 잠적이었다. 그는 농민을 곧 이데올로기의 덩어리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 어떤 말을 자신이 '생체언어'라고 이름 지었을 때 그리도 흡족해하던 박두병은 결국 좌익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도당 조직부장 박두병이란 사람을 찾아가 내 형편을 알리게."
김범우가 면회 온 손승호에게 한 말이었다. 박두병이 나타난 것은 한 시간이 미처 못되어서였다.
"역시 자네가 맞군!"
코가 큰 박두병은 김범우를 얼싸안았다. 그를 맞안은 김범우의 의식 속에서는 하와이의 포로수용소가 보이고, 해변의 파도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무슨 반동질을 하다가 해필 전주에 와서 잽히고 이런가?"
내무서를 나서며 박두병이 사람 좋게 웃었다.
"미제국주의자 스파이 노릇 했네."
김범우가 그의 어깨를 툭 쳤고, 둘이는 마주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둘만이 아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가까운 얼음과자 집으로 들어갔다. 김범우가 손승호를 소개했다.
"아까 우리끼리 인사 다 했네"
박두병이 손승호에게 친근한 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팥이 박힌 얼음과자가 커다란 접시가득 나왔다.
"염천에 죄수 노릇 하니라고 고생했으니 자네 많이 묵소"
박두병이 김범우 앞으로 접시를 조금 밀어놓았다.
"난 담배가 더 급하네."
김범우가 박두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 우리 손 형한테 잠깐 듣자 하니 회색적 사상에 젖어 있던데, 나한테 교육 좀 받아야 되겠네."
박두병이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
"벌써 내통했나?"
김범우는 다급하게 담배를 빼들어 불을 붙이고는,
"교육하는 건 좋은데 효과가 날지 모르겠네."
말과 함께 담배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효과가 안 나면 내 입장이 곤란해져."
박두병은 여전히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자체가 벌써 '교육'이라는 것을 김범우는 알아차리고 있었다.
"자네가 아무래도 불량학생을 맡은 게 아닌지 모르겠네."
"아닐세, 자질이야 우수하니까 별로 걱정 안하네.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묵도록 하게."
손승호는 두 사람의 이야기 밖에서 얼음과자만 으석으석 씹어 먹고 있었다. 두 시간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박두병과 헤어졌다.
"난 정말 자네가 의용군으로 나가는 줄 알았네. 참 천만다행이네."
손승호가 새삼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 반동적 발언 막 하는군. 역시 비당원은 어쩔 수 없다니까."
"참 사람, 배짱 한번 소가죽이네. 계속 농담이 나오니 원."
손승호가 픽 웃고 말았다. 박두병의 집에는 저녁상이 걸직하게 차려져 있었다.
"술부터 한잔 하겠나?"
박두병이 술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괜히 입맛만 버리는 것 아닌가?"
김범우가 술 사발을 들었다.
"염려 말게. 자네 주량을 알아 좀 넉넉하게 준비했네."
"넉넉하다면 이게 인공이 되고나서 처음 마시는 술이 되겠군. 전시인데도 여긴 술을 맘대로 담게 하나?"
"아니시, 대폭 통제되고 있네. 허나 사람이 사는 데는 필요한 건 최소한이나마 갖추어야 허니까 그 범위 내에서 생산 허는 거지. 그래 술도가들이 못 살겄다고 죽는 소리네."
"별 수 없지, 더 급한 게 군량미니까"
술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지나온 이야기를 했다. 김범우에 비해 박두병의 이야기는 너무 짧았다.
"난 전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좌익 활동을 시작했네. 그 길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어. 불법화의 탄압으로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여순병란 이후로는 고생을 좀 했지. 그 투쟁기간 동안 양키들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네. OSS훈련을 받은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으니까 말이시."
박두병이 말한 지나온 이야기의 전부였다. 이야기가 현실문제로 바뀌면서 김범우는 박두병이가 이학송이나 손승호와 다르게 도당의 고급간부로서 염상진과 똑같은 골수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의 현실구축을 위해 매진하는 열렬한 당원이었고, 전쟁의 필승을 확신하고 있는 행복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전혀 토론의 상대자일 수가 없었고, 자신의 생각 같은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김범우는 그의 말만 듣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김범우는 자신이 서울에서보다 더 좁은 울타리 안에 갇힌 것을 깨달았다.
"아까 낮에 '교육'이라는 말을 했는데, 내가 어찌 감히 자넬 교육 시키겄는가. 내 능력도 모자랄 뿐만 아니라 자넨 이미 교육으로 어떤 생각이 달라질 사람이 아니시. 자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근본적으로 양키들을 거부한다는 것이 확실한 이상 그 외의 생각은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뿐이니까 난 그런 걸 개의치 않네. 자네가 분명히 알아둘 것은 자금 자네는 공화국의 정치현실 속에 있다는 점이시. 그것도 안정상태가 아니라 전쟁 중인 현실이네. 전쟁이란 비상상황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네도 조직의 통제 아래 권리주장은 유보하고 의무수행을 해야 할 뿐이네. 의무수행의 거부는 체제의 부정이고, 체제부정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자네가 너무 잘 알겄지. 자네가 의무수행을 긍정하는 경우 당이 자네한테 부여한 선택권은 두 가지네. 첫째는 손 형과 함께 도당 문화선전부에서 일하는 것이고, 둘째는 의용군으로 나가 참전하는 것일세. 내가 현재로서 자네한테 베풀 수 있는 우정을 굳이 따지자면, 그 두 가지 선택권이나 마련했다는 것이네. 그리고 이런 얘기는 사석에서 허는 것이고, 자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혼자서 얼마든지 허게. 조금씩 다른 생각의 차이란 인간이 갖는 특성이니까. 그 결정은 내일 아침까지시."
김범우는 의미 모를 웃음을 얼굴에 담은 채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만 있었다. 손승호도 말이 없었다.
그만그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햇볕 따가운 줄도 모르고 뻘밭에서 복작거리고 있었다. 팔월 중순이 지나면서 더위는 완연하게 한풀 꺾여들었고, 아침저녁으로는 바람끝이 스산하게 감겼다. 이즈음부터는 논의 메뚜기도 개구리도, 개울의 미꾸라지도 붕어도 속살이 오르며 윤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처럼 뻘밭의 꽃게도 속이 여물어갔다. 한여름 꽃게가 속이 부실한 채로 간장의 짠맛에 곁들여 식어빠진 꽁보리밥을 넘기기 위한 반찬이라면 이즈음부터의 꽃게는 속이 알차서 씹는 맛과 함께 그 고소함이 제격을 갖춘 반찬 노릇을 했다. 그래서 여름을 나느라고 잃은 입맛을 돌리거나, 바뀌는 계절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사람들은 꽃게장을 즐겼다.
"어허, 꽃게장을 좀 묵었으먼 좋겄다."
염상진은 구두를 신고 일어서며 무심코 말했다.
"아부지, 지가 꽃게 잡아올라요."
마루에 서 있던 광조가 신바람 나게 말했다.
"우리 광조가?"
염상진이 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광조가 꽃게를 잡을 줄 아는가?"
정겨운 눈길로 물었다.
"하먼이라, 지도 인자 학생인디요."
광조는 걸핏하면 쓰기 좋아하는 그 말을 또 썼다.
"그래도 뻘밭이라 어려울 건디?"
"아니어라, 전에도 잡아봤당께요."
"그랬어? 화아, 우리 광조가 아주 용감허고 장하구나, 광조가 꽃게를 잡아다가 장을 담구먼 더 맛나겄다."
"하먼이라, 지가 많이많이 잡아오겄구만요."
"그래, 뻘밭에서 조심혀야지."
염상진은 아들의 뒷머리를 위아래로 빠르게 서너 번 쓸어주었다. 광조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환하게 피어났다.
"아부지, 댕게오시씨오."
사립까지 따라 나온 광조는 아버지 앞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펴서는 고개를 뒤로 발딱 젖혀 키가 큰 아버지의 얼굴을 눈이 부신 듯이 올려다보았다.
"온냐, 싸우지 말고 잘 놀거라."
아버지가 내려다보고 웃었고, 광조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아침 하는 인사였다. 광조는 그 인사하기를 즐겼다. 광조는 누나를 볶아쳐서 단지를 들고 나섰다. 광조는 단지 하나 가득 꽃게를 잡을 참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게 광조의 마음이었다. 광조가 게 구멍을 엇지게 찔러대고 누나 덕순이가 게를 덮쳐 단지에 넣고 하면서 한나절이 다 되도록 뻘밭을 헤집고 있었다. 단지 속은 바글거리는 꽃게들로 거의 차오르고 있었다. 덕순이는 어느만큼 지쳐있었지만 동생이 기를 써대는 바람에 차마 그만 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새 게 구멍을 겨냥해 막 작대기를 찔러 넣으려던 광조는 누군가가 엉덩이를 사정없이 부딪쳐오는 바람에 그대로 뻘바닥에 철퍽 엎어지고 말았다.
"워메 광조야!"
덕순이가 놀라 소리쳤고, 광조는 약간 버르적거리는 듯하다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옷을 입지 않은 윗몸 가슴패기며 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마며 코끝에도 뻘이 묻어 있었다. 그 옆에서 한 아이가 꽃게를 덮쳐가지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그 아이가 달아나는 꽃게를 쫓다가 광조의 엉덩이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워째 가만 있는 사람얼 치고 지랄이여!"
두 주먹을 부르쥔 광조가 그 아이를 향해 야무지게 소리를 질렀다.
"쥐방울만헌 새끼가 어따 대고 욕이여, 카악 그냥!"
그 아이는 잘못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광조에게 겁을 먹이려했다. 그 아이는 광조보다 서너 살은 더 먹어 보였고, 키도 목이 하나가 더 붙어 있는 것만큼 컸다.
"니가 겁믹이먼 워쩔래 새끼야, 잘못혔다고 빌기는 새로."
광조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대들었다.
"요 새끼럴 한주먹에 카악 그냥!"
상대방은 곧 내지를 것처럼 주먹을 치켜들며 한 걸음 다가들었고, 덕순이는 그 앞을 가로막고 서며 카랑하게 내쏘았다.
"왜 이려 왜. 지가 잘못혔음시로."
"야이 쌍눔에 새끼야, 니 울 아부지가 누군지 알고 까불어?"
광조가 내뱉은 말이었다.
"아이고메 과앙조야아......"
덕순이가 동생을 돌아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려, 느가부지가 누구냐! 똥친 작대기 된 순사냐, 군인이냐. 저 코딱지만헌 새끼럴 그냥......"
덕순이가 가로막는 바람에 주춤해졌던 아이는 다시 주먹을 치켜 올렸다.
"울 아부지가 군당위원장이다, 워쩔래. 워디 나럴 때레바라."
광조가 기세 좋게 내쏘았다.
"뭐시여?"
아이는 금방 기가 꺾이며 주먹을 슬그머니 내려뜨렸다.
"광조야, 니 그런 말 허먼 아부지헌테 혼날 것 몰르냐?"
덕순이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찡그려졌다.
"저 새끼가 지가 잘못해놓고 나럴 팰라고 헌께 그랬제 워째."
광조는 누나한테 눈을 흘기며 입술을 쑥 내밀었다. 그 아이는 벌써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어 보이지 않았다.
"광조야, 인자 가자."
덕순이가 단지를 내려다보며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려, 그 새끼 땀세 매가리 빠져뿌렀응께로."
광조가 뻘이 묻은 작대기를 포구의 바닷물로 던졌다.
"니 뻘 씻고 가야제."
방죽 위로 올라온 덕순이가 동생을 보고 말했고, 광조는 방죽의 반대편 비탈로 내려가는 누나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얼떨결에 아버지 이야기를 입 밖에 내고 말았던 것인데, 광조의 기분은 영 찜찜했다. 봇도랑가에 앉아 덕순이는 동생의 얼굴과 가슴에 묻은 뻘을 씻겨나갔다. 광조는 얌전하게 참고 있었다. 둘이서 철길을 넘어설 즈음에 포구 쪽에서 불어오는 눅진하고 묵직한 바람이 방죽을 핥고 지나가고, 하늘이 어두워지는 듯싶었다.
"비가 올랑갑다."
덕순이가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선수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바다 쪽에서 먹장구름이 낮게 밀려들고 있어서 선수머리 하늘은 벌써 뿌옇게 빗발을 머금고 있었다.
"싸게 가자, 그 단지 이리 도라."
"싫여."
광조는 더 세게 단지를 가슴에 품었다. 덕순이는 그런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더 탓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 했다. 소화다리에 다다르기도 전에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퍼부을 소나기였다. 뛰어야 했다.
"인자 단지 이리 도라."
"싫여!"
"워메, 니 고집통머리넌 누구 탁했냐."
"아부지."
거침없이 말하는 동생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덕순이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비는 뛰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앞을 가로막았다.
"광조야, 쪼깐 기둘려라, 쪼깐."
덕순이는 뛰고 있는 동생에게 소리치며 방죽의 비탈을 내려뛰었다. 방죽과 봇도랑 사이의 작은 터에 누군가가 토란밭을 일구어 놓았던 것이다. 덕순이는 제일 큰 것으로 골라서 토란잎 두 개를 줄기째 뜯어냈다.
"요것 써라. 우산이다." 덕순이는 동생에게 넓적하고 윤기 나는 토란잎 하나를 내밀었다. "잉, 우리 누나 질이여." 광조가 토란잎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둘이는 토란잎 우산을 하나씩 받고 비가 거칠게 쏟아지기 시작하는 방죽을 종종거리며 뛰었다.
"광조야, 비가 너무 온다. 쪼깐 피했다가 가자."
소화다리를 지나며 덕순이가 숨 가쁘게 말했다. 거기서부터 집들이 줄지어 선 데다가, 큰길가의 집들은 대개 담이 없어서 잠깐 비를 피할 처마가 많았던 것이다. 둘이는 어느 집 처마 아래로 들어섰다. 토란잎 우산을 받았다고 하지만 몸은 둘 다 쪼로록 젖어 있었다.
"심드는디 단지 놓고 앉자."
덕순이는 동생이 꼭 끼고 있는 단지를 받아 조심스럽게 발치에 놓고 웅크리고 앉았다. 광조도 누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로 물방울이 튀어 올라 둘이는 토란잎으로 앞을 가렸다.
"누나넌 이 시상에서 질로 존 사람이 누구여?"
광조가 불쑥 물었다.
"금메...... 니넌?"
"아부지!"
덕순이는 으레 그럴 줄 알고 있어서 피식 웃었다.
"나넌 후제 커서 아부지맹키로 훌륭헌 사람이 될 것이여."
"금메......"
덕순이는 낙숫물이 떨어지면서 끝없이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는 반쪽 동그라미인 투명한 물거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더는 말이 없었다.
"금메가 머시여. 누나 맘으로는 아부지가 안 훌륭허다 그것이여?"
"금메...... 고상을 너무 허고, 위험시롭고 헌께 걱정인 것이제. 아부지가 장허고 훌륭한 것이야 누가 몰르간디."
"광조야, 엄마나, 니나, 나나 아부지 땀에 을매나 애타고 그랬내. 그렁께 아부지맹키로 말고, 딴 일 혀서 훌륭하게 될 수도 있능겨. 알겄어?"
덕순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생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누나넌 지집앤께 그런 말 허는겨. 나넌 꼬치 달린 사내새끼여!"
광조는 누나의 손을 홱 뿌리치며 일어섰다.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만 왁자하게 퍼지고 있었다.
구월과 더불어 그 일은 시작되었다. 그 일은 누구나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그 희한한 일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그래도 그 일은 계속되었다. 아무도 그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도 여전히 그 일은 계속되어 집안을 벗어나 논밭으로 번져나갔다. 사람들의 불평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농민의 흥분과 기대 속에 논밭의 분배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장터거리의 상인들이 처음으로 농사꾼을 부러워할 만큼 농지분배는 공평하고 정확했다. 사람들이 그 흥분에 취해서 두어 달 나짓 뒤에 거둬들일 논밭곡식을 셈하고 있을 때 그 희한한 일은 시작되었다. 각 가구당 재산조사와 농산물 수확량조사가 그것이었다. 조사는 푸른 견장을 단 인민군 한 명씩과 여맹원이나 민청원 네댓 명씩이 한 조를 이루어 나왔다. '큰애기'라는 별명이 붙은 것처럼 인민군은 평소와 다름없이 공손하게 예의를 지켰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이 무엇을 조사하러 나왔는지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일정시대부터 '조사'에는 넌더리가 나고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농지분배로 기분이 흔쾌해져 있던 사람들은 조사원들을 아무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사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조사원들은 돼지의 수를 세었고, 닭의 수를 세었으며, 감나무의 감 숫자를 헤아렸고, 텃밭의 고추 수를 따졌다. 그리고 울타리에 매달린 익은 호박의 수까지 장부에 적었다. 그 일을 끝내고 논밭으로 나간 조사원들은 수수밭에서 수수목 하나에 달린 수수알을 일일이 센 다음 밭 전체의 수수대 수에다가 그 수를 곱셈했다. 수수밭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조밭에서 깨알보다도 더 작은 조알들을 일부러 종이 위에 털어 그것을 하나하나 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논에서의 계산법도 마찬가지였고, 논두렁에 심은 콩이나, 밭 가장자리나 무명 밭 사이사이에 심은 고추가 제외될 리가 없었다. 이할 오부의 세금은 그 조사에 의해서 징수될 계획이었다.
"요것이 대체 머럴 허는 짓거리들이여. 숭악하고 숭악헌 일정 때도 그리 수만 가지럴 공출 당험시로 피뽈렸어도 달구새끼 대갱이 시고, 돼지새끼 마릿수 시지는 안혔다 그것이여."
"긍께 말이시, 인민얼 위헌다고 그리 해쌓등마 알고 봉께로 똥구녕으로 호박씨 깐단께. 지아무리 지독시런 지주라고 혀도 평띠기로 소출얼 정했제 은제 나락 모강댕이 하나 꼬나잡고 알갱이럴 시는 일은 꿈에라도 있었간디?"
"워디 고것뿐인감? 시상에서 질로 숭악헌 지주라도 논두렁 콩이고 밭머리 꼬치는 눈 한분 깜짝 안혔다 그것이여."
"농지 공평허게 노놔줬응께로 세세허게 조사혀서 세금 야물딱지게 매기겄다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쳐. 허나, 또록또록허게 생긴 나락모가지고 수시모가지 골라잡어 시갖고 몽창 세금 몰아때레뿔먼 쭉징이, 묵은 것, 병든 것, 덜 달린 것은 어쩌라는 것이여."
"허고 말이시, 농지럴 줬으먼 농지에서 난 소출이나 세금으로 거둬갈 일이제 어째 농지허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우리가 죽을 둥 살 둥키운 돼지나 닭꺼지 손대냐 그것이여."
"좌우당간에 아눔에 시상이 믿을 눔 하나또 웂은 시상이랑께. 이 눔이고 저 눔이고 다 우리 농새꾼 눈 속이고 등까죽 벳길라고 뎀비는 판굿뿐이랑께."
"항, 다 도적 눔덜이여."
"옳여, 믿기넌 지랄 누구럴 믿겄어."
"참말로 각다분허고 가심 내레앉을 일이랑께로."
마을마다, 사람들이 모여 앉는 장소마다 불평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불만이 형성하고 있는 공감대는 농지분배를 통해서 갖게 된 호감이나 신뢰감을 빠른 속도로 식히고 허물어갔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냉기가 돌기 시작했고, 어떤 집회에 나가는 태도도 그전하고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런 반응과 변화에 대해서 누구보다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지숙이었다.
"이러한 사태의 급변은 좌시할 수 없는 중대 문제라고 판단됩니다. 우리 군당의 실태를 신속히 보고하고, 당이 전반적인 대응책을 하루라도 빨리 마련할 것을 촉구해야 될 국면에 와있다고 봅니다."
"이 동무의 발언은 시기적절하고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소. 나도 인민들이 갖는 불만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소. 그 정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조사부터 실시했으면 좋겠소."
염상진이 신중하게 말했다.
"네, 제가 여맹을 통해서 군 전역에 걸쳐 오 일 동안 조사한 자료를 분석 종합한 통계가 여기 있습니다."
이지숙이 옆에 놓인 공책을 펼쳐서 염상진 앞으로 밀어놓았다.
"세 사람이 회람하는 것보다 시간절약을 위해서 이 동무가 발표를 하는 게 좋겠소."
염상진 옆에는 안창민과 하대치가 앉아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조사는 첫째 비밀리에, 둘째 일반여론으로, 셋째 자료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사장소, 대상인원, 성별구분을 명기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조사방법으로는 첫째군 전체의 리단위를 기초로 했으며, 둘째 남, 여로 구분 실시하여 그 결과를 종합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조사결과는 놀랍게도 일백 퍼센트 불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불만요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조사대상의 범위 문제로서, 집안의 가축이나 기타 농작물에 대한 조삽니다. 둘째, 조사방법상의 문제로서, 정확한 산출을 위한 낟알 세기가 몰인정한 행위로, 또 자기네들에게 실질적 피해를 입히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점입니다. 셋째, 앞의 두 가지가 일제 때도, 그 어떤 지주도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과 비교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여맹원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 역시 구십 퍼센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긍정적 반응을 보인 십 퍼센트에 대해서는 여맹원의 구성이 농가부녀자들만이 아니라는 점과 그 대상이 '여맹원'이라는 사실이 참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직접 확인해주시고, 이상으로 보고 마칩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내가 뭐랬어요. 그게 다 지지가 아니라고 하잖았소?"
염상진이 무거운 어조로 말하며 안창민을 보았다.
"예, 그렇구만요."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이지숙의 눈빛은 예리했고, 하대치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이 동무, 솔선하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소. 그런데, 그 조사결과를 내고 나서 이 동무의 생각이 없지 않았을 텐데, 이 동무는 당책에 어떤 하자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보시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정식 토의 발언입니까?"
이지숙은 발언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사견으로서의 당책에 대한 언급은 극히 주의를 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소. 군당 전체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먼저 기초토의를 하고자 하오."
"알겠습니다."
이지숙은 자리를 고쳐 앉고는,
"이번 당책은 하나의 정책으로서 하등의 하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행에 있어서 다소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조선 농업인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작인민들의 전반적인 실태, 즉 의식실태와 생활실태의 정확한 파악이 당책시행에 선행되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의식실태는 오랜 착취에 의해 피해망상 상태에 있으며, 생활실태는 기아 직전의 상태에 빠져 있으므로 그들은 본능적인 자기보호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음과 동시에 어떤 것이든 혜택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 근본적인 실태를 파악한 다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적 의식을 단계적 교육을 통해 시정해나가면서, 그들이 건전하고 건강한 혁명인민의식을 갖춤에 따라 당책도 단계적으로 실시되었어야 한다는 점을 또한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상의 지적이 이미 경과된 문제점일 뿐인 현시점에서, 팽배해 있는 인민들의 불만을 극소화시키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압니다."
이마로 흘러내린 서너 올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녀는 말을 마쳤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당에서도 그 점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단계적 시행을 못하게 된 건 전쟁수행 때문에 불가피했을 거라고 판단되오."
침통한 얼굴의 염상진의 말이었다.
"이 문제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지방당 간부들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벌써 보성, 조성에서도 문제제기를 해오지 않았습니까. 당이 처하고 있는 상황이야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인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인민들의 전적인 불만도 외면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 경우가 적합한 비교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택동 동지의 홍군이 해방구를 만들어가며 오만리 대장정을 하면서도 해방구에서 전혀 세금을 걷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현시점에서 방법개선은 불가피합니다. 지방 당에서 현지실정과 그에 따른 구체적 개선방안을 제시하여 당에 보고하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안창민의 말이었다.
"사실이오, 인민을 탓할 단계가 아니오. 그런데, 그 개선방안이라는 것이 또 문제 아니겠소?"
염상진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제 소견으로는 세금징수에 다소의 차질이 생기더라도, 첫째 집안의 것에 대해서는 그 범위에서 제외시켰으면 합니다. 둘째 낟알 세기의 통계방법은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그 방법이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설령 정확해서 인민들에게 결과적으로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그 방법은 반감을 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후한 인심'을 미덕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계산법이 통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심정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입니다. 당이 인민을 착취하자는 목적으로 그 계산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히 아니면서 왜 반감과 오해를 사는 겁니까. 그 두 가지 때문에 이 땅의 유사 이래 처음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혁명적 농지분배와 그에 따른 이할 오부에 지나지 않은 세금의 빛이 완전히 가려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지숙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동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오. 곧 군 전체회의를 열도록 합시다."
염상진이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 중앙은 팔월십팔일을 기해 농업생산물에 대한 현물세를 이할 오부로 결정했고, 그 수거시기를 늦가을인 추수 직후로 잡았다. 그러나 전선의 교착상태가 길어짐에 따라 군량미 확보를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급한 상황에 대처하느라고 그 일은 어찌할 수 없이 강제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 농촌에서는 고질적인 추궁기가 시작되는 시기라서 농민들은 얼마 남지 않은 곡식을 감추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감추고 찾아내고하는 조기공출은 인민들과의 사이에서 야기된 첫 번째 갈등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갈등이 인민군 모병이었다. 그것 또한 전선의 교착상태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인민의 불만요소인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세금원 조사방법에 대한 불만까지 겹쳐지고 있었다. 염상진은 머리 무거운 괴로움을 떼칠 수가 없었다.
19. 고구마 똥
김범우는 광한루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나무숲 우거진 광한루 주변에 매미소리만 자욱할 뿐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은 자취가 묘연했다. 「춘향전」은 어렸을 때부터 그 줄거리를 환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살 때,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인지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실화인지 전설인지 소설인지 명확하게 구분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분명히 꾸며낸 이야기인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때는 실화 같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소리를 귀동냥하는 것으로 족했을 뿐 소설로서 「춘향전」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만약 전쟁에 이겨 체제가 바뀌면 「춘향전」은 어떻게 될까. 혁명적 작품으로 우대를 받을까, 아니면 반혁명적 작품으로 천대를 받을까. 글쎄...... 사또의 아들 이몽룡과 기생의 딸 춘향이가 계급차별 없이 사랑을 나누는 대목까지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돼가지고 춘향이를 구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문제 아닌가. 춘향이가 이몽룡의 정실부인이 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계급상승이지 계급혁명이 아니니 말야. 계급혁명이 되려면 그 이야기가 어떻게 꾸며져야 하나...... 이몽룡이가 사또 자제라는 신분을 내던지고...... 춘향이와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이고, 골치 아프다. 이건 내 소관이 아니고 손승호의 소관이다. 내가 무슨 소설가라고, 주제넘게. 참, 모든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 작품들이 씌여진 시대적 특성과 사회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참고해서 파악해야 한다고 손승호가 말했었지. 그 기준으로 본다면 가만 있자, 「춘향전」은 어떻게 되나. 양반이면 그 아래계급 누구든 가릴 것 없이 사형을 가할 수 있었던 어이없는 봉건사회 속에서 「춘향전」이란 소설은 나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역시 혁명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에 그런 이야기 줄거리를 엮어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분명 양반은 아니었을 것이고, 계급제도를 증오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을까, 아니면 더 천한 신분의 자식, 그래 기생의 자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이야기를 다 꾸며내고 고이 살아남았을까. 어쩌면 죽었거나, 미리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을지도 모르지. 그 이야기를 누가 지었는지 이름이 없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 이야기를 그리 재미나게 엮어낸 재주나, 계급제도의 모순에 대해 남들보다 앞선 생각을 가진 그 사람은 어쨌거나 예사 사람이 아니야.
"도당으로는 은제 가실랑가요?"
옆에 앉아 있던 남원인민위원회 선전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그 어감이 벌교 쪽과는 사뭇 달랐다. 벌교 쪽 말이 억세면서 탄력이 있는데 비해 전주. 남원 쪽 말은 부드러우면서 묘한 가락을 타고 있었다.
"예, 두어 군데 더 들러 갈 예정입니다.
"김범우는 꽁초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불이 꺼진 것을 알고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 시행이 하로라도 빨르게 될 수 있었으먼 좋겄구만요. 인민은 물이고 당은 괴기라는디 이리 인심이 돌아서서야 워찌 혁명이 되겄는가요?"
"예, 이렇게 실태조사를 나서고 있으니 무슨 조처가 이루어지겠지요. 그전까지는 도당의 지시대로, 당이 해를 입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선전해서 인민들을 이해시키기 바랍니다. 중앙당의 어떤 새로운 조처에 앞서 인민들이 논리적 설명을 듣고 이해해서 감정적 오해를 푸는 것이 더 급선뭅니다."
김범우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것이사 다 알제마는 인민덜이 맘얼 딱 닫아걸고 이해럴 안헐라고 헝께 탈 아닌가요."
"꼭 그렇게 생각할 일만은 아닙니다. 그 동안 여맹원이나 민청원들은 물론이고 인민군들까지, 왜들 이렇게 야박하게 난리를 치느냐는 인민들의 항의나 불평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이나 설득을 하지 못하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해 온 것이 문젭니다. 물론 그에 앞서 조직원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키지 못한 게 또한 문제겠지요. 그런 중첩된 문제 해결을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최단시간 내에 최대효과가 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김범우는 열성당원처럼 신념에 찬 어투로 말했다.
"그렇기는 허구만요, 근디......"
선전과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워째 후닥닥 끝장을 내뿔지 못허고 저리 껄쩍지근허니 날만 보내고 있을께라?"
전세에 대해 근심의 빛을 드러냈다.
"글쎄요. 적도 최후의 저항을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곧 우리 인민군의 승리로 결말이 날 테니까 우린 후방사업에나 열중하도록 합시다. 구경 잘했으니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요."
말이 길어지는 것이 싫어서 김범우는 일방적으로 말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어색한 얼굴로 선전과장도 따라 일어났다. 교착상태에 빠진 전세에 대해서 조직원들은 거의가 조심스럽게 염려를 나타내고는 했다. 간부직으로 올라갈수록 그 우려의 도는 심해지고 있었다.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은 만큼 그들은 날을 소모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낙동강 연변에서 정지해버린 전선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채 한 달 가까운 날들을 허비하며 구월로 접어들게 되었다. 간부들 사이에 불안한 기색이 드러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김범우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 우울했고, 어느 누구하고도 전세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으레 미국에 대한 혐오감만 커질 뿐이었고 아무런 해결책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가실 질이 먼디 요것 잠 지니시제라."
선전과장이 종이에 싼 것을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햇고구마가 나와서 잠 샀구만요."
"이거 폐가 아닙니까."
"민폐라먼 몰라도 요것이야 우리찌리 나누는 정인디요. 남원 땅에 오셨으먼 소리라도 한 자락 들으시고 뜨시게 혀야 허는디, 워낙에 전쟁 통이라 논께 손님대접이 그리 안 되느만요."
선전과장이 정말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소리의 고장에 사는 사람다운 말이었고, 인심이었다. 그가 굳이 광한루를 구경시키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별말씀 다 하십니다. 그럼, 고맙게 먹겠습니다."
김범우는 종이 쌈을 받아들며 웃었다.
"전쟁에 이기고 시상이 편안해지먼 꼭 한분 새로 만내십시다. 오늘 못 들으신 남원소리 곱쟁이로 대접헐랑게요."
"예, 먼 질 무사허니 댕게 가시씨요."
김범우는 종이 쌈을 꼭 들고 걷기 시작했다. 선전과장의 마음처럼 고구마의 온기가 손바닥에 느껴져 왔다. 그럴 날이 오기는 와야 할 텐데...... 김범우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원으로 출장을 나온 것은 재산조사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실태를 도당이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세금징수를 위한 재산조사와 그것에 전면적으로 불만을 나타낸 농민들과의 문제는 하나의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당은 인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데 있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재산조사를 해서 인민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나라 재정에 피해가 생기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세금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목적으로 과학적인 조사방법을 동원한 것이 낟알세기였다. 그리고 공산주의국가에서 규정하는 재산의 범위가 각 개인이 생산해낸 일체의 소유물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조건 아래서 농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아 자작농으로 독립한 농민들은 이할 오푼의 세금만 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과 다르게 가축까지 다 세금원으로 계산했다하더라도 세금은 삼할 미만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에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가 반타작인 오할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바치고, 세금은 또 따로 내게 되어 있었다. 새 법에 따르면 전에 비해 배 이상의 이익을 보게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거칠게 반발을 보이고 있었다. 완벽한 홍보. 계몽을 통한 이해. 납득의 과정 없이 시행됨으로써 농민들은 재산의 범위와 조사의 방법에 대해 감정적인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의 지배에서 간신히 벗어나서 딴 나라의 지배나 간섭에 대해서는 무조건 몸서리치며 거부하도록 민족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아무런 이유 설명도 없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변경함으로써 민중의 오해를 사서 막대한 지지를 잃었던 경우와 똑같았다.
농민들은 자기들이 어엿한 자작농이 되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않고, 소작인 시절에 지주한테도 간섭받지 않았던 논두렁의 콩을 세는 것에 정나미 떨어져 하고, 열을 올렸다. 지주들이 논두렁의 콩이나 밭고랑의 고추를 못 본 체하고 넘긴 작은 혜택은 결코 소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양이도 쥐를 막다른 길로 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건 소작인들의 숨통을 미리 틔워버리는 지주들의 교활한 지배방법이었다. 소작인들에게 자기들을 괴롭히는 악질의 표본과 기준은 지주들이었고, 그들이 심정적 좌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주에 대한 반감과 좌익의 선전활동에 따른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주들도 하지 않은 짓을 좌익이 하자 그들은 자초지종을 따질 겨를이 없이 감정적 반발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기대만으로 가득 찼던 농민들과, 전시상황의 급박함 속에서 정책시행의 선전활동을 제대로 못한 당과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리현상을 김범우는 괴로운 심정으로 겪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각 지방의 불만실태를 조사함과 아울러 문화선전부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요령 있게 설명하는 방법을 전달 주입하는 것이었다. 손승호도 물론 같은 임무를 띠고 다른 지방을 출장 중이었다.
김범우는 박두병을 상대로 이학송과 나누던 식의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이학송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긴 했지만 당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박두병은 지하투쟁까지 감행한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당 간부였다. 그에게 전쟁에 대한 회의론 같은 것이 용납될 리가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고, 그가 만약 회의론에 동조한다면 그는 당 간부의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임무고 미덕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대하는 데 옛날의 우정과 현재의 임무를 분명히 구분 짓고 있었다.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석에서는 '김 동무'였고, 사석에서는 '김 형'으로 바뀌는 호칭이 그의 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공적으로 일을 지시하면서도 입당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입도 떼지 않았다. 김범우는 일단 일할 자리를 정하게 되자 스스로의 태도를 확실하게 했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식의 수동성을 버리고 맡은 일을 적극적으로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자신의 성격에도 맞았고,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따라가는 바른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에 대한 불안스러운 예측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자넨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그렇게 가시 박힌 소리만 해대며 사람 복장을 쑤셔댈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일을 열성으로 해대는 건 뭐고......"
손승호의 얄궂은 표정의 말이었다.
"글세...... 내가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이 아니라 염 선배나 자네가 내 진의를 잘못 파악한 게 아닐까. 염 선배는 나를 감상적 민족주의자로 곡해했고, 자넨 나를 기회주의자로 매도하지 않았나? 다 생각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일이지."
김범우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미안하네, 자네 생각이 너무 깊어서 그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뭔가 좀 생각할 줄 안다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문제를 생각하면서 미국이란 존재를 너무 가볍게, 너무 소홀하게 취급하는 걸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미국이란 존재의 속성과 그 영향력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내 생각이나 태도가 금방 이해 될 거네. 미국은 절대 간단한 나라가 아니고, 이학송 선배 말을 흉내 내자면, 미국은 우리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될 걸세."
"그래, 반민특위의 불법해체를 놓고 이 선배가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
"역시 기억력 좋군."
"중요한 말이었으니까. 헌데, 미국이 그렇게도 문젤까? 자네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네만 그렇지가 않으니 문제네. 미군과 쏘련군이 이 땅에서 철군을 했는데 그 차이가 뭔 줄 아나? 쏘련군은 그냥 다 물러갔는데 미군은 오백 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다는 사실이네. 그거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흐지부지 잊어버리게 되지 않았나. 그런데 그 군사고문단의 구성이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거의가 장교들로 이루어졌고, 미국은 남쪽 땅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표시였네. 유사시에 그 장교들 밑에 사병들만 갖다 붙이면 그대로 전투 병력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실제로, 미국은 며칠 만에 전쟁에 개입했었지? 문제는, 미국을 과대평가해서가 아니라 과소평가한 데 있는 것이네. 적을 과대평가해서 패하는 것이나 과소평가해서 패하는 것이나 똑같은 어리석음이라고 케케묵은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지 않던가? 보게, 며칠 전에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에서 유엔을 상대로 '조선인민의 성명서'를 냈는데, 열다섯 살 이상의 조선인민 중에서 천삼백삼십만 명이 서명한 압도적 다수의 인민의 의지를 중시하고 유엔은 그 헌장에 입각해서 조선에 대한 미국의 무력간섭을 즉각 중지하고 조선으로부터 외국군대를 철거시킬 방안을 강구하라는 게 그 내용인데, 자네 생각엔 그게 실현될 것 같은가?"
"글세......"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어림도 없는 소리네. 미국이란 나라가 그런 성명서 하나로 물러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거네. 그리고 유엔이라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미국의 힘으로 만들어져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야 세상이다 아는 일 아닌가. 물론 당에서 그런 성명서를 낸 건 미국이 물러 갈 것을 기대해서라기보다 남의 민족문제에 무력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미국의 만행을 세계여론에 알리자는 목적이 더 크겠지만 말야."
"어쨌든 전선이 너무 오래 교착상태에 빠져 있으니...... 미국이 문제는 문제야"
손승호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범우는 자신이 마음의 안정을 얻은 데는 손승호가 옆에 있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데 서로는 부담이 없고 짐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좋은 동무였던 것이다. 김범우는 걸음을 옮기면서 조심해서 종이를 펼쳤다. 짙은 자주색 껍질에 싸인 고구마 네댓 개가 키를 맞대고 누워 있었다. 그 눈에 익은 생김새에서 뭉클 슬픔이 느껴졌다. 고구마는 쑥덕. 개떡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 줄을 이어주는 농가음식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식이 떨어지는 겨울 막바지에 이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구마 한 개씩으로 하루살이를 해냈다. '고흥 놈들 고구마 똥'이라는 말이 있었다. 섬이나 다름없는 고흥은 밭이 태반인데다 땅이 거칠어 생명력이 강한 고구마농사가 자연히 성행했다. 세 끼를 고구마만 먹다 보면 그 똥도 '고구마 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곡식 없이 겨울나기를 해야 하는 고달픈 삶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범우는 고구마 하나를 집어 뭉텅 베 물었다. 고구마는 어디까지나 간식이어야 했다. 농지가 고르게 나누어지면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농지를 고르게 나누어 갖고자 하는 농민들의 욕구를 이번에 실감 있게 목격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전주에 도착했을 때 무상몰수 부상분배의 농지개혁이 한창 추진되고 있었다. 그 신속함에 놀라자,
"놀랄 것 없네. 당에서 일을 추진하기 전에 벌써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기 시작했네. 내가 옛날에 뭐라던가. 농민들은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말한다고 하지 않던가? 정확한 기회포착에, 신속한 행동개시네."
박두병의 말이었다.
"참 기막힌 생체언어의 표현이군. 농지개혁을 새로 안하려고 했다간 큰일 나겠군."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 당장에 이승만 정권 꼴 나는 거네."
"당연하지. 사람에게 생계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고,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결국 그 해결책이니까."
"우리 인민군이 해방시키는 날짜에 따라 지방마다 약간씩 시간차만 있을 뿐 어디서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기는 마찬가지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농지개혁이 상호이해의 불충분으로 말썽을 빚고 있었다. 김범우는 하루라도 빨리 그 오해가 해소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노력이 그 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는 우물거리고 있던 고구마를 꿀떡 삼켰다. 그리고 걸음을 더 빨리하기 시작했다.
율어지서장 이근술이 체포되었다. 몸을 숨긴 지 사십칠일 만의 일이었다. 그가 잡혔다는 소식은 율어면을 삽시간에 휘돌았다. 소문이 샛바람 탄 불 번지듯 한 것은, 다른 경찰들처럼 벌써 오래 전에 먼 데로 떠났으리라고 생각했던 그가 면내에 숨어 있었다는 놀라움 때문이었고, 다음은 그가 죽게 되리라는 다급함 때문이었다.
"근디, 이적지 잘 피해 있다가 워찌 잽히고 말었능고?"
"이, 윤샌집 헛간서 나무고 짚북데미고 오만 잡동사니럴 싸올레갖고 담허고 새에 눌 자리럴 맹글어 피해 있었는디, 아 금메 방정맞은 두 아새끼가 숨바꼭질인가 대갱이 숨키는 놀인가에 미쳐선 즈그덜 몸띵이 숨킬라고 해필나게 그 잡동사니럴 허물어댔다고 안허요."
"워메, 문딩이! 저것얼 으짤끄나! 그려서?"
"썩을 눔에 새끼덜? 긍께 워찌 되얐을 것이요. 잡동사니가 허물어 짐스로 삐쩍 몰른 얼굴에 머리크락허고 쉬엄이 질게 난 지서장이 뿔쑥 솟긴 것이제. 그래논께 간 떨어지게 놀랜 두아새끼가 고샅으로 날고 뜀스로 귀신이야, 도깨비야, 소리소리 질러뿌렸제라."
"염병헌다, 염병헌다! 뉘집 삼시랑덜이 그리 방정 맞을끄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근술이 잡히게 된 경위였다.
"근디, 지서장은 워째서 미리 안 피허고 혼자서 뒤처졌을꼬?"
"그럴 만헌 무신 사단이 있었겄제. 고런 것 따지는 것이야 다 새 날아간 소리고, 시방 다급헌 것은 지서장이 워찌 되느냐 허는 것 아니겄어?"
"워찌 되기넌 워찌 돼라. 그 맘 존 지서장이 무신 죄가 있다고."
"그리 태평시럽게만 생각헐 일이 아니여. 지서장이 아무리 맘이 좋고, 면민덜얼 위혔어도 지끔은 전시인디다가 지서장은 경찰이란 말이시."
"지 아무리 사람 목심이 포리 목심이고, 순사치고 악질 아닌 것이 웂지마는, 죄도 지 각각 순사질도 지각각인 것이 지서장 두고 허는 말 아니겄소? 순사질 해묵었다는 것만 갖고 지서장 겉은 사람 죽이먼 인공시상도 워디 사람 살 시상이겄소?"
"고것이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시. 무신 방도가 있어야 헐 일이제."
"방도야 무신 방도가 따로 있겄소. 지서장 덕에 살아난 보도연맹 사람덜이 시물대여섯이나 있겄다, 우리 면민덜이 나서겄다 허먼 워찌 죽이겄소?"
"잉, 고것 참 좋고 존 방도시."
다시 이근술을 염려하는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마음들이 모아지고 있을 때 그의 배려로 예비검속에서 죽음을 면하게 된 스물일곱 사람은 이미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근술이 갇힌 분주소로 몰려가 구명운동을 펴는 한편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면민들은 하루 만에 구명운동에 한 덩어리가 되어 나섰다. 그 사건은 곧 염상진에게 보고되었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염상진은 깜짝 놀랐다. 군내에서 유일하게 예비검속이라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은 율어지서장이 바로 율어에 여지껏 숨어 있었다니! 군당으로 되돌아와서 율어의 소식을 들었을 때, 아, 그런 경찰관도 있었나! 하는 놀라움과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째서 혼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염상진이 직감적으로 가진 의문이었다. 의문은 직감적이었지만 해답은 직감적이지 못했다. 예비검속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물론이고 면 인민들까지 구명운동에 나서고 있다는 대목을 염상진은 몇 번이고 읽었다. 그들이 구명운동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스물일곱 사람이나 살려준 그를 표창은 못할지라도 죽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염상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왜 피신을 하지 않고 혼자 숨어 있었는가가 가시로 걸렸다. 혹시 어떤 목적을 가진 은신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고, 염려였다. 만약 그가 어떤 목적을 위해 은신했고, 활동을 했다면 그 사실 때문에 살려 줄 수가 없었다. 염상진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면 인민들을 위해서도 사건처리를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정적으로도 이근술이란 색다른 사람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염상진은 안창민을 불러 보고서를 건네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염상진은 담배를 깊이 피우며 김범준을 생각하고 있었다. 김범준은 순천에 주둔하면서 관할지역을 주기적으로 돌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보성군을 거쳐 고흥군으로 가는 길에 집에 머물고 있었다. 염상진은 그에게 율어 동행을 청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에게 동행을 청할 만한 희귀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희귀한 사건을 목격시키고 그 처리에 대한 의견을 듣겠다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한번이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와의 첫 대면 이후 서로가 바빠 좀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첫 대면한 김범준은 역시 소년시절부터 흠모해왔던 대상으로 부족감이 없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준수하면서도 예리한 얼굴에는 사십객의 혁명가다운 중량감과 원숙감이 담겨 있었다. 만주 그 어느 곳에선가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인민 군관이 되어 해방전쟁을 통해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로서 항일빨치산투쟁을 했다는 사실 앞에서 염상진은 그저 온몸이 조여드는 위축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 투쟁경력이야말로 아무 사족이 필요 없는 골수요 정통이었던 것이다.
"저는 범우 친굽니다. 소학교 때부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염상진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첫인사를 삼았다.
"아, 범우 친구요?"
김범준은 반색을 하며 손을 잡았고,
"부끄럽소,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도 못했는데"
하며 쓸쓸한 느낌의 웃음을 얼핏 지었다. 김범준은 동생 범우의 사상적 동향을 알고자 했다. 염상진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민족의 발견...... 그 말 한번 재미있군. 반민족세력을 제거한다는 전제 아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념투쟁에 앞서 민족의 단합을 꾀하자는 뜻이라니, 현실성은 약해도 논리성은 강하군. 민족은 백번 강조되고 확인되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김범준은 혼잣말을 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첫 대면은 그것으로 끝났다.
"이거...... 다 읽었습니다."
"아, 그래요 어찌 생각하시오?"
염상진은 담배를 끄며 앉음새를 고쳤다.
"글쎄요...... 면 인민들의 뜻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조사를 면밀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경찰이 집단후퇴를 했는데 왜 혼자 떨어졌는지 의문이고, 그게 어떤 임무수행을 위해서가 아닌가도 의심스럽습니다."
안창민의 예리함에 염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는 사람은 아니오?"
"얼굴을 본 적은 없고, 마음씨가 좋다는 소문은 투쟁 중에 얼핏 들었습니다."
"만약 숨어 있었던 것에 아무 혐의가 없으면 어째야 되겠소?"
"글쎄요, 스물일곱이나 되는 목숨을 살려낸 사람 아닙니까?"
"알겠소, 내 생각과도 일치하고 있소, 곧 율어로 넘어가야겠는데, 안 동무 일은 어떻소?"
"별로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럼 같이 갑시다."
"예, 준비하지요"
안창민이 일어섰다. 염상진은 전화기 발신 손잡이를 돌려댔다. 염상진은 김범준에게 사건내용을 간추려 말하고, 가능하면 동행하기를 원했다.
"그것 참 드문 경찰관이오. 시간이 전부 얼마나 걸리게 되겠소?"
"왕복 소요시간이 두 시간 정도, 조사에 한 시간 정도 해서, 세 시간이면 되겠습니다."
"그럼 가보도록 합시다. 나 곧 나가겠소."
"예, 시간 절약을 위해서 횡계다리목으로 나오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좋겠소"
염상진은 기분이 더 없이 좋았다. 김범준 같은 혁명투사와 함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는 일이었다. 그는 과묵한 인상이었고,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되새겨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무게를 느끼게 했고, 궁금한 것이 수없이 많으면서도 함부로 물을 수가 없었다. 김범우의 생각에 대해서도 자신은 일찌감치 환상주의자나 감상적 민족주의자로 단정 내려 무가치한 것으로 치지도외하고 말았는데 그는 색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민족은 백번 강조되고 확인되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했던 말의 의미를 어떻게 해득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계급성 속에 민족을 두는 것인지, 민족 속에 계급성을 두는 것인지, 계급성과 민족을 수평에 놓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모호했다.
횡계다리목에서 만난 세 사람은 율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예사 빠르기가 아니었다. 안창민의 발걸음도 가볍고 빨랐다. 그는 야산투쟁을 통해서 하대치의 발 빠르기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다리가 단련되어 있었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서 얼마 동안 발이 허공에 뜨거나 헛놓이는 착각 속에서 몸이 자꾸 뒤뚱거리는 것 같은 혼란을 겪었고, 요즈음도 가끔 그런 기분이 스치고 지나가곤 했다. 산만 오르내리는 데 익숙해진 다리가 평지를 걷게 되자 적응이 안 되었던 것이다.
"다리가 영판 요상허시제라? 한식경 지내야 지대로 자리럴 잡을 것잉마요"
하대치가 경력자답게 넌지시 한 말이었다.
"의용군사령관 김태규 동무집이 율업니다."
염상진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들었소."
염상진은 맥이 빠졌다. 그 말을 고리삼아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가려 했는데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은 곧 자신을 비웃었다. 김범준의 입장에서 호남지구 의용군사령관 김태규에 대한 신상파악이 안되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단순했던 것이다. 김태규 선배는 자신이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북쪽에 건재하고 있다가 봉건시대 용어로 금의환향했던 것이다. 그는 직책 그대로 의용군들을 모아가지고 전선으로 갔다. 그의 출현은 김범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읍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여쭤봐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전황의 전망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안창민은 김태규의 이름을 듣자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불안스러움과 궁금증이 한꺼번에 일어나 그 말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쎄에...... 전황의 전망이라......"
김범준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담뱃갑을 꺼냈다. 염상진이 성냥을 켰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고, 담배를 빨면서 한동안 걸어가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미군이...... 미군이 문제지요"
마침내 김범준이 한 말이었다. 된 신음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 였다. 안창민은 염상진의 눈길을 느꼈다. 염상진의 눈은 더 묻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염상진의 눈길이 아니었어도 안창민은 무슨 말을 더 연결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큼 김범준은 대답하기 곤혹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짧은 대답은 다른 말을 더 물을 필요 없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하늘에도, 산에도, 들녘에도 가을이 깃들고 있었다. 하늘의 빛이며, 산의 모습이며, 들녘의 색깔에서 가을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걷기에만 열중했다. 주리재까지 한달음에 치올랐다.
"잠시 쉬시겠습니까?"
주리재 마루에서 염상진이 말했다.
"괜찮소."
김범준의 표정 없는 대꾸였다. 산으로 에워싸인 율어면이 언제나처럼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언제 보아도 가관의 경치였다. 김범준은 걸음을 멈추듯 하며 담배를 꺼냈다. 염상진이 빠른 동작으로 성냥을 그었다.
"저도 피워도 되겠습니까?"
염상진의 말이었다.
"아, 괘념치 마시오"
김범준이 재빨리 담뱃갑을 꺼내 염상진 앞으로 내밀었다.
"저한테 있습니다."
"어서 뽑으시오."
김범준이 염상진을 쳐다보며 그윽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바람결을 타고 어지러이 흩어지고 있었다. 두어 걸음쯤 뒤따라 걸으며 그 상큼한 냄새를 맡고 있는 안창민은 담배를 피워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 민족에 대해서 강조하셨는데...... 그게 어떤 뜻인지요?"
염상진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내리막길이라서 걸음은 한결 더 빨라져 있었다.
"아, 그 생각을 지금까지 하고 있소?"
김범준은 염상진을 옆눈길로 보고는,
"계급혁명을 전제로 한 공산주의운동에 있어서 민족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또 얼마만한 비중을 두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심각하고 그리고......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소. 그러니까, 중국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인데...... 거기에 민족문제는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오.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되 민족 자주적 혁명, 민족 주체적 혁명을 분명히 했던 것이오. 그러니까 중국인의 힘으로 중국민족을 위한 공산주의 계급혁명을 추진한다는 노선이오. 그 노선에 따라 모든 전략. 전술은 수립되고 추진되었소. 코민테른의 지시 거부도, 부르주아혁명단계를 생략하고 농민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주체로 삼은 것도, 어제까지 적이었던 국민당과의 투쟁을 중지하고 일본 놈들을 내몰기 위해 팔로군으로 국민당 군에 편입된 것도, 그리고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것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쏘련에 넘겨주거나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을 모택동 주석이 공개적으로 했던 것도, 다 그 노선에 근거한 것이었소. 계급은 사회의 수평적 인식이고 민족은 수직적 인식인데, 그건 베짜기의 날줄과 씨줄 같은 것이오.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베가 짜질 리가 없지 않소. 그런데 조선공산당은...... 어찌 되었소. 민족 반역세력에게 '민족'을 도용당하다니...... 그자들이 어찌 감히 '민족진영'이란 말을 쓸 수 있느냔 말이오. 그건...... 그자들이 뻔뻔스럽고 교활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먼저 조선공산당이 민족을 등한히 한 데 문제가 있을 것이오. 공산당 쪽에서 계급과 함께 민족을 내세웠다면 그자들이 어찌 민족을 도용할 수 있었겠소. 고유한 문화전통과 생활풍습을 가진 사회집단일수록...... 계급보다는 민족에 더 호응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요. 그 연장선상에서 찬탁이 나왔고, 찬탁 때문에 '조국을 쏘련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결정적 모함을 당했고, 그러고도 그 모함을 깨끗이 척결할 만한 시원한 대안을 인민 앞에 제시하지 못했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 이념 아래 세계인민의 해방을 주창해온 쏘련이 조선 문제를 놓고 제국주의자 미국과 한 탁상에 앉아 신탁통치안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오. 그건 쏘련이 저지른...... 분명한 오류이며 모순이고, 조선공산당은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써 그 모순을 지적하고...... 그 오류를 시정하게 했어야 하는 거요. 그런데...... 찬탁을 했소.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차이가 여기에 있소. 인간이 지역적으로 집단을 이루며 종족이 다르게, 말도 다르게 살아온 역사가 수만 년을 헤아리는 이상 계급혁명의 통일로만 살아질 수 없다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오. 그 파악 위에서 중국공산당은 붉은 깃발을 내리고 국민당과 연합해서 일본도 물리치고 혁명도 성취시켰는데......"
김범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염상진은 충격에 부딪쳤다. 충격을 받기는 안창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당혹스런 얼굴로 서로를 잠시 맞쳐다보았다. 김범준이 생략해버린 말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말은 자신들이 여지껏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고, 비판이었다. 그의 안목이 크고 예리함에도 놀랐지만, 그런 위험천만한 비판을 가하는 데 더욱 놀란 염상진과 안창민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분주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더는 말이 없었다. 세 사람 앞에 이근술이 끌려 나왔다. 바람이라고는 통하지 않는 헛간 뒷구석에 갇혀 한여름의 무더위에 시달리며 먹는 것도 부실했던 데다가, 오랫동안 햇볕마저 못 보고 불안스럽게 지내온 이근술의 얼굴은 뼈가 있는 대로다 드러나도록 삐쩍 마른 채 피부는 희끄므리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래서 긴 얼굴은 더 길어 보였고, 부르튼 입술 언저리엔 수염이 더부룩한데다 머리칼까지 길어 모습이 사람 꼴이 아니었다.
"그 걸상에 앉으시오."
염상진의 말에 따라 이근술이 퀭한 눈을 껌뻑이며 걸상에 앉았다.
"이분은 지구사령관이시고, 난 군당위원장이오. 그리고 이분은 부위원장이오."
염상진이 앉은 순서대로 신분을 밝히고는,
"지금부터 당신을 취조하겠소. 묻는 바에 대해 명료하게 사실대로 대답하기 바라오. 불필요한 거짓말이나 위장술을 쓰려고 해서 우리가 경찰간부인 당신에게 갖추고자 하는 예우가 깨지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오"
그는 이근술의 눈을 주시하며 엄격한 어조로 말했고, 이근술은 멍한 듯한 눈으로 염상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찰들은 단체로 일시에 후퇴를 했는데 왜 당신 혼자만 남아 있었소?"
"금메 말이오, 워쩐 일인지 여그 지서에는 아무 연락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구만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그럼 당신 부하들은 어떻게 되었다는 거요?"
"긍께 들어보시게라. 아무 연락도 못 받고 태평허니 시무나흗날을 보내고 시무닷새가 되었는디 차석이 워디서 알아왔는지, 온 경찰이 전날 후퇴해뿔고 인자 인민군이 코앞에 닥쳤다고 보고럴 허드랑께요. 하도 말 같지 않은 소리라 믿지 않음시로 본서로 전화를 건다 어쩐다 험서 알아봉께 고것이 사실이드랑께라. 부하 셋을 불러 기술껏 암디로나 피허라고 앞질러 보내놓고, 나 혼자서 문서 챙기고 어쩌고 험서 하롯밤을 보내고 봉께 워디로 피헐 도리가 웂이 시상이 달라지고 말았드만요. 그려서 가차운 디로 숨은 곳이제라."
"우리가 알고자 하는 건 왜 이곳에만 연락이 취해지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오."
"나도 날이날마동 쪼글치고 앉어갖고 그 이유럴 캐낼라고 애럴 썼는디, 맘에 짚이는 것은 본서 서장허고 한바탕 다툰 건이 있기는 있었구만요. 허나, 고것도 나 혼자 추측이제 사실여부야 알 도리가 웂은 일이제라. 나가 생각허는 상식으로는 그 다툰 일로 작전지시럴 중단 헌다는 것은 있을 수 웂은 일잉께요."
"그 다툰 일이 뭐요?"
"긍께, 예비검속 때 여그서만 총질이 웂었는디, 그 일로 서장이 나헌테 책임추궁을 혔제라. 그러다봉께 말쌈이 벌어졌는디, 서장은 무조건 시행명령이라고 혔고, 나넌 현지 책임자의 판단권한이라고 혔고, 쪼깐 고약시런 일이었제라."
"이 지서장은 그때 왜 처형을 하지 않았소?"
염상진은 '당신'을 '이지서장'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는 이근술이 그 일로 보복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진작에 서장헌테도 입에 춤이 보트게 헌 말인디, 진짜배기 좌익이야 다 산에 있고 그 사람덜이야 인자 땅이나 파묵음스로 사는디다가, 모이라먼 모이고 가라먼 가는 그 순헌 사람덜이 좌익이 아니란 것을 뻔허게 암스로 워찌 총질을 허겠는게라. 그것 뿐이구만요."
"됐습니다, 조사 다 끝났습니다. 들어가 조금 쉬고 계십시오."
무표정하게 의자에서 일어서는 이근술을 대기하고 있던 두 청년이 양쪽에서 붙들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염상진이 김범준에게 물었다.
"진실한 사람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염상진이 안창민에게 물었다.
"거짓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저 사람을 숨겨주었던 집주인을 불러 보충조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염상진이 다시 김범준에게 물었다. 김범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근술을 숨겨준 집주인은 예비검속에서 살아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도 이근술이 숨어있는 동안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한 일은 없었다. 이근술이 다시 불려나왔다.
"면 인민 전체의 뜻을 존중하여 이 지서장의 석방을 결정하는 바이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이근술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면민 이백여 명이 오래 전부터 분주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말없이 모여 서 있었다.
인천은 불바다라고 했다. 상륙을 시도하기 위한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인천 시내는 불바다만이 아니라 피바다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했다. 신문사 안은 그런 소식들로 술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이거 어드렇게 된 기야, 이거."
"내래 어찌 알갔소. 베락맞기야 마찬가지디."
"어드렇게 요런일이 벌어질 수 있갔시오. 우리 정보대는 낮잠만 자고 있었다는 결론 아니갔소."
"허를 찔려도 이륵케 찔릴 수가 있갔소. 이거 앞으로 어찌 해야 되는 기요?"
당황과 두려움으로 더욱 억양이 거세진 이북 말들이 신문사 안을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학송은 담배만 피우며 혼자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사태는 그야말로 돌발적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쪽 입장일 뿐이었다. 적들은 벌써 오래 전에 계획한 작전일 것이었다. 동해안의 어느 지점에 상륙하려 한다면 또 모른다. 그런데 적은 분명 인천을 공격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럼 배들은 부산 쪽에서 출발해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인천 앞바다에 이른 것이다. 그 이동기간만 해도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그 움직임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해군력이 전무한 상태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육군. 공군에서 미국은 마침내 해군까지 동원한 것이다. 육. 해. 공군의 삼면 입체작전 앞에 이쪽은 육군밖에 없는 것이다. 김범우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학송은 눈을 감았다.
"이 선배요, 눈 좀 뜨이소."
낮고 급한 목소리에 이학송은 더디게 눈을 떴다. 국도신문에서 함께 일했던 유재웅이었다.
"이기 우째 된 일인교?"
이학송은 고개를 저었다. 유재웅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거침없이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감정상태가 어떤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 선배는 우째 그리 태연할 수 있는교?"
"내가 태연해 보이오? 그럼 다행이군."
이학송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앞으로 우째 될 것 같습니꺼?"
"여기서 함부로 할 말 아니잖겠소?"
이학송이 눈총을 주었다.
"기얀습니더. 서로 정신없이 떠드니라꼬 우리말 엿들을 사람 없임더. 그라고 목소리를 요리 쪼맨허게 내니께요."
"내 생각으론 어려울 것 같소, 막아내기가."
"그렇겠지요? 군대란 군대가 다 낙동강전선으로 몰렸이니 언제 와 막아내겠는교. 군대가 오는 동안에 양키들이 서울을 치고들낀데요."
"형편이 그리 돼 있소."
"그리 되먼 우찌 되는 기요?"
유재웅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후퇴밖에 더 있겠소?"
"후퇴요? 이북으로 간다 그 말입니꺼?"
"그만 합시다."
"이 선배는 이북으로 갈 겁니꺼?"
이학송은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이학송은 변소로 가서 또 담배를 빼들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변기 앞에 섰다.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변의를 느껴서 변소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때 같았으면 소변이 안 나올 리 없는 일이었다. 제길, 똥줄이 탄다더니 오줌 줄이 타는 모양이군. 그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창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네모난 하늘에서 문득 가을이 느껴졌다. 아, 벌써...... 반사적 감상을 느끼며 그는 오늘이 구월도 반으로 접힌 십육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전쟁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한 이상 성공을 목표로 화력도 병력도 최대한으로 확보했을 것이다. 승리를 위해서 화력은 물론이고 병력손실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상륙작전이라는 것 자체가 병력손실을 전제로 해서 적진으로 뛰어드는 무모하고도 과감한 작전이었다. 미군은 이미 상륙작전에 재미를 붙인 군대였다. 이차대전 때 노르만디 상륙작전으로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경력을 재현하고자 하는 미군을 현실적으로 막아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조짐은 벌써 낙동강 연변에서 전선이 고착되면서 생기기 시작했었다. 김범우의 예상은 여러 면에서 들어맞은 셈이었다. 후퇴를 하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아내와 세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개인행동이 용납되지 않겠지만, 만약에... 그럴 기회가 온다면...... 군인과 경찰이 다시 서울을 차지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부역자들의 색출이 대대적으로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어디고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후회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정당한 역사행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선택했다. 그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후회가 없다. 그럼 함께 후퇴를 해야 하겠지? 처자는 어떻게 되지? 후퇴가 영원한 이별은 아니니까......당분간 고생이야 어쩔 도리가 없지. 그래, 후퇴를 하면 함께 따라가야지...... 선택한 길인데! 이학송은 마음을 결정했다. 조금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뭘 그리 생각하고 있소?"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 예예......"
이학송은 말한 사람을 보지 않고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그때까지 오줌도 나오지 않는 물건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오줌은 나올 기미가 없고, 물건은 볼품없이 맥이 빠져 있었다. 자신은 그 볼품없는 자신의 뿌리를 붙들고 서서 자신의 중대 문제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학송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 이기자, 어디 갔었소? 한참이나 찾았는데."
취재부장이 서둘러대는 몸짓으로 책망했다.
"변소에 있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배 아프시오?"
"아닙니다."
"됐소, 그럼 취재진을 짰으니까 빨리 인천으로 떠날 준비 하시오."
"알겠습니다."
이학송은 바지춤을 추켜올렸다. 그건 기다리고 있었던 일이었다. 인천을 통해 또다시 허리를 자르려고 드는 미군의 그 무모하고도 과감한 상륙작전의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항구도시 인천은 갈가리 찢기고 불타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오는 폭탄들은 아무 데나 가리지 않고 곤두박히며 불길을 토해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시가지 여기저기는 불타고 있었고, 새로운 폭탄이 터질 때마다 새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연이어 터지는 폭음에 휩싸여 사람의 비명이나 아우성은 들릴 리가 없었다. 폭탄이 쉴 새 없이 터져 오르고 있는 시가지에는 아예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학송 일행은 야산마루에서 무자비한 폭격에 찢기고 터지고 불타면서 죽어가고 있는 도시의 처참한 몸부림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폭탄은 참으로 빗발치듯이 쏟아지며 폭음과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폭탄한 발이 터질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만 죽어간다 해도 인천시민은 한 사람도 살아남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바다 쪽에서는 숨막히도록 폭탄이 날아오는데 이쪽에서 바다 쪽으로 날아가는 폭탄은 없었다. 저 어지러운 난장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것인가...... 이학송은 어금니를 맞물었다. 저건 민간인들마저 적으로 취급해버리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풍부한 물량을 이용해 모든 것을 불 질러 태워 가루로 만들고, 재로 만들어 버리는 작전-인천은 위로 불바다가, 아래로는 피바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명분으로 시작되어 광적인 살인과 파괴를 거친 다음 잿더미로 끝난다...... 이학송의 머리에 모아진 생각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나는 무슨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이학송은 눈을 감았다. 시내로 들어가지 못할 바에는 이 산마루에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로마시를 불질러놓고 그 구경을 하면서 시상을 얻는 기발한 천재 시인 네로가 아닌 이상 무차별 폭격아래 무방비상태로 불붙어 재로 변해가는 도시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비감과 분노만을 키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학송은 그만 돌아가자는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았다. 적을 손수 무찌르지는 못하더라도 적에 대한 분노나마 키우는 것이 기자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편에 있었던 까닭이다.
"분빠바 분빠바 잘이헌다아, 부분분빠 잘이헌다아-하먼, 하먼, 막 퍼붓어, 퍼붓어뿌러! 괴뢰군눔덜 씨도 안 남게 더 씨게씨게 퍼붓어뿌는 것이여!"
현오봉은 고개를 뒤로 발딱 젖혀 하늘을 올려다본 채 신바람이 나고 있었다. 그는 소대장이라는 체신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뽑아대는 가락에 따라 팔다리까지 꺼떡거렸던 것이다.
"오이야, 진작에 그리 했어야제 지금꺼지 머허고 있었드노."
"옳지러, 자알 한다 마. 괴뢰군눔덜 카악 다 뭉카뿌러라."
"웜매 씨언허니 깔겨대는거. 괴뢰군눔덜 좆빠지게 생겼다."
소대장을 따라 소대원들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강 건너편의 하늘에는 B29 수십 대가 떠서 폭탄을 줄줄이 쏟아 내리고 있었다. 비행기들이 지나간 뒤쪽에서는 먼저 떨어져 내린 폭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연쇄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집이 큰 만큼 날개도 긴 B29 수십 대가 한꺼번에 날게 되자 갑자기 하늘이 좁아졌다. 그 쇠로 된 새들은 별로 높이 뜨지도 않아서 쌕쌔기라고 부르는 전투기에 비해 몇 배나 커 보였다. 하늘을 덮듯이 한 B29들은 강변을 따라 묵직하고 느리게 날아가며 끝없이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로 융단폭격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폭탄을 촘촘히 떨어뜨려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폭격법이었다. 조준도 명중확인도 필요 없는 그 폭격은 전쟁물자가 많지 않고서는 해낼 수없는 또 하나의 물량작전이었다. 폭탄을 줄줄이 쏟아내는 그 폭격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처음의 비행기 떼가 사라지면 다른 비행기 떼가 뒤를 이어 나타나 똑같은 방법으로 폭격을 해댔고 그것이 사라지면 새로운 비행기 떼가 나타나고는 했다.
"다들 들어라. 저 삐이십구 폭격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강을 건너서 진격이다. 적들은 지금 저 폭탄세례를 받고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저 폭탄 터지는 소리 때문에 괴뢰군들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너희들은 저 폭탄 터지는 소리가 바로 적들이 죽어가며 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렇게 쑥밭을 만들어대는데 살아남을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남은 놈들을 우리가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미 알려준 것처럼 위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서 밀어붙이고 있고, 아래서는 우리가 밀어붙이고 올라가면 괴뢰군들 꼴은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독 안에 든 쥐다! 앞으로는 그 쥐를 때려잡는 일만 남았다. 이번 전쟁의 승리는 바로 우리의 것이다. 진격을 앞두고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알겠나!" "예엣!"
"원기 부족, 알겠나아!" "예에엣!"
"쭈우아, 각자 위치."
빠른 움직임으로 흩어지는 소대원들을 바라보며 현오봉은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전쟁터에 대한 공포감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부하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킬 때도 자신감에 차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는 시체 썩는 냄새에 속이 뒤집히지 않았고, 두 눈알이 없어져 버린 채 입에 구더기를 가득 물고 썩어가는 시체를 예사로 보아 넘겼으며, 폭탄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속에서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변화와 함께 그의 마음속에는 미군에 대한 신뢰가 차츰 넓게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 동안 미군의 줄기찬 지원 폭격이 아니었더라면 도강해오는 적들을 막지 못하고 전선은 벌써 뚫리고 말았을 것을 그는 직접 겪어서 알았다. 미군의 그 막강한 힘이 전선을 지키게 했다는 것에 앞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시켜 주었다는 구체적 실감은 바로 미군에 대한 신뢰로 바뀌었다. 그런데 마침내 총반격이 개시되면서 B29들이 날개를 나란히 맞춰가며 적진을 맹타하는 것을 보게 되자 미군은 역시 세계최강의 군대, 위대한 군대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 참 근사허다. 공군이 육군보다 훨씬 멋 떨어진다니까."
현오봉은 새로 나타난 B29들이 토끼 똥 싸듯 폭탄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신명나고 있었다.
"참 폭탄도 많기도 하군요. 언제까지 저렇게 퍼부어댈 거죠?"
옆에서 선임하사가 말했다.
"왜? 선임하산 폭격하는 게 싫은가!"
현오봉은 선임하사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닙니다."
선임하사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들리지?"
"아닙니다, 하도 끝이 없어서 그냥 한 말입니다."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말 조심하게. 내가 선임하사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혹시 방첩대원 앞에서 그런 투로 말했다간 골로 가는 날이니까 내가 미리 주의시키는 거야."
"예, 조심하겠습니다."
선임하사는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 드런 놈, 외다리 게다짝하나 붙였다고 나이도 새파란 새끼 좆같이 놀고 있네. 이 새끼야, 사람 무더기로 죽이자고 폭탄 저리 쏟아 붓는 게 뭐가 그리 근사하고 재미난 구경거리냐. 네 놈이 저쪽에 있다고 생각해봐, 참 근사하기도 하겠다. 그러고 말야, 저 폭탄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게 따지고 보면 다 우리 동포야, 동포. 원 개새끼, 드러워서 못 참겠네. 그는 되는 대로 욕질을 해대고 있었다.
20. 소용돌이
자개박이로 호사스럽게 치장된 술상에는 가지가지 생선회를 담은 커다란 접시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안주가 그득하게 차 있었다. 마주보고 앉은 것이 두 사람뿐인 것에 비해 술상은 너무 컸고, 안주도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툭 까놓고 얘기해서 그 물건들이 니 것이냐 내 것이냐 그것이오. 그것들이 우리나라 것인데 손을 대자면 그것이야 말할 것도 없이 반역자지요. 허나, 물자가 남고 처져 주체를 못하는 사람들 물건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막말로, 사람들은 들끓지, 물자는 부족하지, 이런 부산바닥에서 그런 물자라도 빼내서 사람들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애국애족 아니겠소? 그 물건들은 도둑질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오. 그러니까 대장님한테 부탁하는 건 뭐 어려운 것도 무리한 것도 아닙니다.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관할구역 내에서 검문만 하지 말고 모른 척 눈감아 달라는 겁니다."
"글쎄요, 그러다가 나한테 불똥이 튀기면 어쩝니까."
"아하, 일을 어디 그리 허술하게 합니까? 다 연줄연줄 얽어져 있으니 그럴 염려는 절대로 없어요. 박 대위만 앞길이 창창하고 난 앞길이 캄캄한 줄 아시오? 나도 앞으로 정치인생이 창창한 사람이오. 한마디로 내 정치야심은 태평양보다 넓소. 그런 내가 이런 일을 허술하게 해서 얼굴에 똥칠할 것 같소? 아무 염려 말고 나하고 인연을 맺어보시오. 당장 보는 이득도 이득이지만 앞으로 군대생활 하는 데 두고두고 이득을 보게 될 거요."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만...... 사실 세상이 엉망진창이긴 한데...... 그래도 그게 좀......"
"박 대위,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지금 우리가 전쟁을 하는 통에 전쟁물자 대면서 신바람 나게 재미보고 있는 놈들이 누군지 알지요?"
"일본 놈들 아닙니까."
"그거요. 일본 놈들은 지금 미국에서 미리 주는 딸라를 받아가면서 문 닫아 걸었던 군수물자공장들을 돌리기 시작했고, 소고기다, 닭이다, 밀가루다, 하다못해 계란까지, 미군식당에서 쓰는 물건들을 다 팔아먹고 있소. 그런데 우린 뭐요. 재미 보는 것 아무것도 없잖소? 터놓고 얘기해서 미국이 즈이 좋아서 하는 전쟁이고, 물자를 많이 없앨수록 경제가 잘 돌아가는 부자나라 덕을 우리도 이번 기회에 좀 보자 그거요. 그런데 말이오, 박 대위도 잘 알겠지만 미국이 총 반격전을 개시한 지금부터가 절호의 기회요. 매일 물자가 산더미로 들어오고 있잖소? 어차피 전쟁에서 써 없앨 물건, 먼저 먹는 게 임자요. 그리고 이런 기회는 그리 쉽게 오는 게 아니오. 박 대위, 돈은 정치하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오. 계급이 높아질수록 군인생활에도 돈은 필수조건이오. 어떻소, 날 도와주시겠지요!"
"돕게 된다면 그 다음은......"
"좋소, 잘 생각하셨소. 건마다 일 할씩 현찰로 미리 드리겠소.“
"........."
"왜, 적어서 그러시오?"
"그게 아니고...... 총액을 모르는 일 할이라는 게 좀......"
"어허허...... 박 대위는 역시 헌병장교답소. 난 또 무슨 일인가 했소. 그건 아무 염려 마시오. 건마다 총액을 밝힐 거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비밀장부를 보여드리겠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일 할 분빠이는 광장히 큰 거요. 대강 눈치는 채겠지만 걸리는 데가 박 대위만이 아니기 때문이오. 누구하고 손을 잡아도 이런 분빠이는 어렵다는 거나 알아줬으면 좋겠소."
"그런데, 내 일만 하면 확실히 안전한 겁니까?"
"아하, 그거야 털끝만치도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내 일생에 금이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거 참 답답해서, 속을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일생에 금이 가는 게 아니라 일생이 훤히 열릴 기회가 될 테니 제발 걱정하지 마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정치야망을 버리지 않는 이상, 막말로 나하고 박 대위하고 사회적 비중을 따질 때, 만약에 일이 잘못됐다고 치고, 누가 더 손해를 보겠소?"
"알겠습니다. 모든 걸 최 의원님만 믿겠습니다."
"고맙소, 잘해봅시다."
남자가 박 대위에게 팔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술상 위에서 마주 잡혔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최익승이었다.
"자아, 우리 지금부터 색시들 불러 앉히고 술 한번 기분 좋게 마셔 봅시다."
최익승이 껄껄대고 웃으며 손바닥을 딱 딱 딱 맞때렸다.
"저어, 국회의원을 지내시기 전에는 사업을 하셨던 모양이지요?"
사복차림인 박 대위란 사람이 세모꼴을 거꾸로 세운 것 같은 얼굴에 약간 비굴기 서린 웃음을 피우며 물었다.
"난 일정시대부터 사업과 정치에 함께 뜻을 둔 사람이었소. 헌데, 일제치하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민족자본을 형성시킨다는 떳떳하고 당당한 명분이 있는 일이었지만, 정치를 한다는 것은 바로 친일파 노릇을 하는 민족반역행위가 아니겠소. 그래서 난 정치는 포기하고 사업에만 열중했던 것이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민족자본 형성에 미력을 보탠 셈이었지요. 그런데 해방이 되지 않았겠소. 바야흐로 새 세상이 오고 새 나라가 서는데 일제치하에서 보류해 두었던 정치의 꿈을 펼치지 않을 수 있어야지요. 민족을 위해 새 나라에서 내 한 몸을 바치자! 그런 각오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됐던 것이오. 내 그런 뜻이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져 난 당선됐고, 신성한 제헌국회에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오."
최익승은 자기소개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써먹는 말을 그 거창한 내용에 걸맞은 근엄한 얼굴로 아무 거리낌 없이 해대고 있었다. 박 대위는 연상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너야말로 아구가 제대로 맞는 정상배로구나. 나도 일본군에 붙어먹은 뒤가 구른 놈이다만 그래도 네놈보다는 나은 것 같다. 미군물건 해먹자고 덤비질 말든지. 뻔뻔스런 소릴 지껄이질 말든지. 좌우지간 다 그렇고 그런 놈에 세상이니까 어디 똥창 헌 번 맞춰보자, 그는 상대방의 속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시다가......"
"부르시었습니까아-"
문 밖에서 들려온 조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에 박 대위는 말을 끊었다.
"엉, 들어오너라, 어서."
최익승의 목청을 가다듬은 말이었다. 방문이 옆으로 밀리며 한복차림의 앳된 여자 둘이 옆걸음질을 치면서 들어왔다.
"해연이라 하옵니다. 나누신 말씀들은 잘되셨는지요."
엷은 옥빛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가씨가 나붓이 절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그래, 잘되었다. 해연이라?"
최익승이 비릿하게 웃었다.
"예, 바다 해에 제비 여잡니다."
"허, 바다제비라!"
"전 해산이라 하옵니다. 즐겁게 많이 드십시오."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가씨의 인사였다.
"해산이라니? 바다산이면 섬이란 말이냐?"
최익승이 아는 체를 했다.
"아닙니다, 바다 해에 산호 산잡니다."
"허 이거, 바다산호라? 그래, 산호야 다 바다에 있지 육지에도 있더냐. 제비야 육지에도 바다에도 따로따로 있으니 해연이가 말이 된다만 해산이야 꼬감접말이다. 어떤 놈이 한문자 좀 안다고 식자우환이로구나. 어쨌거나 부산이라고 너희들이 다 해자돌림으로 개명을 했구나. 그래 좋다, 술을 마시자. 박 대위......"
최익승이 눈짓을 했다.
"아닙니다, 먼저......"
"어허, 오늘은 박 대위가 주빈이오."
박 대위는 바다제비를 골랐다. 아가씨들이 자리 잡고 술잔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남보다 많은 돈을 내고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넌 최익승은 일단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사태가 점점 불리해지는 걸 보면서 몸 피할 데를 찾고 있었다. 사촌인 최익달은 벌써 안전한 섬을 물색해 놓았으니 아무 염려 말라고 했지만 그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 벼렸다. 아무리 섬이라고 해도 사람이 사는 한 육지의 정치바람이 안 미칠 리 없을 것이고, 연고가 없는 그런 데서 험한 꼴 당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은밀하게 살핀 것이 정부의 이전과 현지 경찰의 움직임이었다. 정부만 따라다니면 거기가 제일 안전한 피난처였고, 현지 경찰이 움직일 때가 위험을 피하는 막바지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 앉더니만 뒤따라 광주와 목포가 같은 날 점령당하고 말았다. 피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그는 미리 대고 있던 선에 연락을 해서 경찰이 부산 쪽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현지 경찰보다 하루 먼저 여수로 내달았다. 거기서 배를 구해 부산에 도착하기는 한강을 건너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그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돈벌이를 찾아 여기저기 훑고 다녔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그는 전시경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플레와 함께 일어나는 전시경기의 물결을 타면 그것처럼 손쉬운 돈벌이가 없었다. 그의 눈에 잡힌 것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부산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먹는 일이었다. 그는 쌀장사를 결정했다. 물론 됫박질을 하는 소매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업으로서의 쌀장사였다. 창고를 빌려 무조건 쌀을 사쟁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동업자 몇 명이 짜고 쌀을 슬슬 풀어놓기만 하면 돈은 벌리게 되어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쌀장사, 아니 쌀 사업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측대로 쌀값은 날이 날마다 솟겨갔다. 그는 땀 홀릴 것 없이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쌀장사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미군의 총반격이 있기 전에 벌써 부산항에는 수많은 미군들과 함께 어마어마한 전쟁물자가 쌓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 써서 없앨 그 물건들에 그는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애써 참았다. 돈이 아무리 좋다지만 자칫 잘못하면 생명의 위험까지 있는 군수물자 취급에 직접 뛰어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위험을 피하면서 자본도 대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을 택했다. 뒤에 멀찍이 물러나 앉아 다리를 놓아주고, 만일의 사태에 뒷수습을 해주는 조건으로 이익배당을 받기로 한 것이다.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그의 국회의원 경력은 마침내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그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명함에는 '제헌국회의원'이란 경력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너희들 둘 다 서울 말씬데, 집들이 서울 어디냐?"
최익승이 술기운 퍼지고 있는 눈으로 두 아가씨를 홅으며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건 등에 혹을 달고 서 있는 낙타가 그려진 미국담배 카멜이었다. 상 위에 올려진 술병도 미국 것인 켄터키위스키였다.
"서울이란 것만 아시고 동은 묻지 마셨으면 합니다."
바다제비의 대꾸였다.
"왜, 신분이 노출될까봐 무서워서 그러느냐? 그게 아니면 서울 생각하면 서러워서 그러느냐?"
"맞아요, 서러워서 그래요. 우리 서럽게 만들지 마시고 술이나 맛있게 드세요."
최익승 옆의 바다산호가 눈웃음치며 말했다.
"어허, 너희들을 서럽게 만든 건 빨갱이 놈들이지 내가 아니다."
"그렇지만 불난 집에 부채질이죠."
바다제비의 재빠른 응수였다.
"어허허허....... 그게 그리 되나? 하여튼 불을 지른 건 빨갱이 놈들이니까 너희들 원수는 빨갱이로구나."
"그래요, 빨갱이들은 우리 원수예요."
바다산호의 맞장구였다.
"빨갱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바다제비의 앙칼진 소리였다.
"이거 술자리가 아니라 빨갱이척결 궐기대횐가?"
박 대위가 얼굴을 찌푸렸다.
"야 이년들아, 빨갱이 소리 그만들 하고 요새 유행하는 노래나 하나씩 뽑아봐라."
최익승이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까 여쭤보다가 얘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말이 끊어졌는데요, 저어...... 어쩌시다가 이대 선거에선 실패를 하시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박 대위가 바다제비 치마 속으로 손을 디밀며 묻고 있었다.
"아, 마침 잘 물었소. 내가 참고로 그 얘길 해둘 필요가 있소"
최익승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몸을 바로잡고는,
"내가 당할 걸 당한 게 아니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좌익 세들의 농간과 협잡 때문에 다 받아놓은 밥상이 엎어진 것이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 발판을 딛고 당선이 된 그 새파란 안창배라는 놈이 사상이 불온한데다가, 선거운동도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는 놈이 도맡아서 귀가 여린 농민들을 회유했다 그 말이오. 순서를 잡아 말하자면, 안창배라는 놈은 나이도 새파란데다가 고향을 떠나 광주에서 변호사질을 하고 있어서 고향에는 아무 발판도 없는 놈이었소. 그런데 그놈이 서민영이라고 하는 좌익사상을 가진 놈하고 야합을 한 것이오. 그 서민영이란 어떤 놈인가 하면, 일정 때부터 좌익사상을 가지고 선생질을 하면서 학생들을 조직해 가지고 독서회니 야학이니 해서 위장활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했고, 해방이 되고는 제 놈 농토를 소작인들과 함께 지어먹는다는 '공동농장'을 만들었는데, 그게 쏘련에서 하고 있는 '집단농장'에서 앞대가리 글자 둘만 바꾼 것이지 내용이야 다를 게 뭐가 있소. 그놈이 그러는 좌익인데도 살아 남아있는 건 그게 예수꾼인데다가, 미꾸라지처럼 남로당조직에는 가담하지 않기 때문이오. 문제는 그놈이 경영하는 공동농장인데, 그놈 하는 짓이 다른 일반 지주들과 비교돼서 그놈이 아주 양심적이고 인격자인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농꾼들은 그놈을 떠받들면서 그 공동농장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형편이오. 그런 서민영이란 놈이 제자인 안창배의 선거운동을 하고 나섰단 말이오. 물론 내가 서민영이한테 먼저 손을 안 뻗친 게 아니오. 그런데 그놈은 지주라고 하면 무조건 배척을 하는 놈이오. 박 대위, 문제는 서민영이가 아니라 안창배라는 놈이오. 그놈이 어떤 놈인가 하면 광주에서 변호사질을 할 때부터 좌익을 편 들었던 좌익사상을 가진 놈이오. 서민영하고 야합이 된 것도 사제지간이란 것은 제이의 조건이고, 첫 번째가 서로 생각이 같은 좌익이라는 것 때문이었소. 안창배라는 놈이 변호사질을 하면서 무슨 짓을 했는고 하니, 이덕우라는 변호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좌익들에게 유리한 변론을 했소. 그럼 이덕우는 누구냐! 그놈은 전라도에서 소문이 뜨르르한 좌익변호사요. 그놈은 제주도 사삼사건의 좌익폭도들 변론을 도맡고 나서서는, 그놈들이 진정한 민족주의자니 애국자니 하고 떠들어댄 놈이오. 안창배는 바로 그런 놈하고 한통속을 이루고 지내면서 그놈 행동에 동조한 놈이오. 이덕우란 놈은 이번 난리가 나고 예비검속 때 처단됐는데, 그놈이 글쎄 경찰서에서 실려 나가 도라꾸가 시내 큰길을 지나게 되자 느닷없이 길 가는 사람들을 향해, 오늘이 이덕우 죽는 날이다, 오늘이 이덕우 제삿날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그것만이 아니라 발바닥에다 제놈 죽는 날짜를 써놓고 죽은 독종이오. 그런데 문제는, 안창배란 놈이 미리 국회의원에 당선이 돼가지고 예비검속도 피해버리고, 그런 과거 싹 위장한 채 신변보호까지 받아가며 이 부산바닥에서 국회의원 행세를 요러타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런 모든 사실을 방첩대장한테는 벌써 다 얘기해 두었소. 박 대위도 직책상 참고로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오."
"아하, 사정이 그리 된 일이구만요. 안창배, 안창배라......"
박 대위는 눈빛이 이상스럽게 변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구월이 저물어가는 이십육일, 김범우와 손승호는 박두병의 집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갔다. 추석이었던 것이다.
"이게 햅쌀밥이네. 어서들 들세. 전쟁으로 세상은 시끄러워도 나락은 변함없이 영글었네."
박두병의 말이었다.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침울한 기색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도 평소의 탄력이 없었다.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는 김범우와 손승호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일체의 통제를 하고 있었지만 도당 안에는 벌써 며칠 전부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먹구름은 하루가 바뀔 때마다 검은 농도가 짙어갔다.
"추석을 타향에서 돼서 안됐네. 많이들 먹게."
박두병은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면서도 주인 노릇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굳이 청한 것도 타향에서 추석을 쇠게 된 기분을 위로하려는 것보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을 두고 서로 마주앉으려는 뜻이 더 컸다.
"사태가 어찌 돼가고 있는가."
김범우는 일부러 '어찌 될 것 같으냐'고 가정으로 묻지 않았다.
"이대로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네."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김범우는 숟가락 가득가득 밥을 떠 넣고 있었고, 손승호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찍어 올리고 있었고, 박두병은 토란국의 국물만 떠올리고 있었다.
"상륙작전에 걸려든 상태에서 후퇴를 한다면 어디로 한다는 것인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상륙작전은 차단작전이고 교란작전이네. 서울 쪽 중부는 이미 차단됐고, 해안이 완전 봉쇄된 상태에서 곧 교란작전이 시작될 거 아닌가."
김범우의 말이었다.
"그렇지. 거기에 맞는 대응책을 강구해야지"
또 말이 끊겼다. 김범우는, 후퇴날짜는 정해졌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건 최종순간까지 지켜야 될 비밀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박두병의 입장을 거북하게 해주고 싶지 않았고, 후퇴를 한다는 대원칙이 정해진 이상 날짜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로 삼 개월이구나..... '해방전쟁'은 '삼 개월 전쟁'으로 해방이 무산되어가고 있었다. 김범우는 자신이 염려했던 예상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 허망하고도 안타까웠다. 미국은 결국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한 민족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가려고 하는 길을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가로막고, 동강내고, 좌절시키고 있었다.
"후퇴는 일시적이네. 미국이 이런 식으로 만행을 부린 이상 쏘련이나 중국도 가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박두병이 얼굴을 찡그린 채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네만, 그게 당의 견해인가, 자네 개인적인 생각인가?"
김범우가 박두병을 주시했다.
"그야 나 혼자 생각이지."
"그렇다면, 이것도 나 혼자 생각인데, 그런 기대는 안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한 민족문제의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건데, 쏘련이나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그리 쉽게 전쟁을 벌이려고 할 것 같은가? 간단하게 말해서 미국은 지금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가진 나라네."
눈을 내리깐 박두병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만 일어나세. 출근시간 다 됐네."
손승호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그리 됐나. 이거 명절날도 쉬지 못하고...... 먼저들 나가게. 난 어디 좀 들를 데가 있네."
박두병도 시계를 보며 말했다. 길거리에는 이상한 느낌 전혀 없이 명절기분이 완연했다. 전쟁으로 세상이 시끄러워도 나락은 영글듯이 전쟁은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 사람들의 생활은 여전히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허망해."
손승호는 또 같은 말을 무심결에 한숨 토하듯이 했다. 그는 요 며칠 사이에 그 말을 질정 없이 하고 있었다.
"이 사람아, 이젠 그 소리 그만하고 정신 똑똑히 차려. 후퇴할 땐 누구나가 마음이 다급해져 소란이 벌어지고, 갈팡질팡하다가 자기 소속을 놓치기가 십상이니까. 그리고 앞으로 상황이 아주 어렵게 될 테니까 마음을 정리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게. 허망한 건 이미 과거고, 전쟁 때는 그저 순간순간 대응하면서 앞만 내다보는 게 젤이네. 지난 일에 매달리다 보면 현실대응이 어려운데다 상황판단이 빗나가게 되니까."
"그래야겠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순간적인 거지만 전쟁터에선 그게 더 절박해질 테니까. 그런데, 서울 이 선배는 어찌 됐는지 걱정이군."
손승호의 침울한 대꾸였다.
"서울이야 벌써 후퇴하지 않았겠나. 이 선배야 잘하고 있겠지. 의지력도 강하고 판단력도 정확하니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번 후퇴가 일시적인 것 같은가?"
"그걸 어찌 알겠나만, 자네한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둘 게 있네. 내가 전부터 계속 말해온 것인데 말야, 이 전쟁의 상황판단을 할 때는 언제나 미국을 중심에 놓고 하라는 것이네. 미국이 전쟁을 도맡고 나선 순간부터 계급혁명도 민족해방도 다 없어지고 미국과의 싸움판으로 변하고 말았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래도 덜했지만 앞으론 그 양상이 본격화될 거네."
"자넨 지금 후회하고 있겠군."
손승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무슨 섭섭한 소린가. 자네가 선택이었다면 나도 엄연한 선택이야. 시간만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내가 이 전쟁을 기피하고 싶었다면 시간도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어. 그걸 제일 잘 아는 자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김범우는 정말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화내지 말게, 미안하네. 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자네 예상이 다 들어맞는 것을 보면서, 자네 심정이 어떨까 생각하고 한 말일 뿐이네."
"바로 그런 생각을 이젠 집어치우란 말일세. 아까 상륙작전이 교란작전이라고 했는데, 앞으론 전선이 따로 없이 아무 데나 적이 나타나는 곳이 전선이 될 거네, 그런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가는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포탄이 어디서 터지는지 알게 뭔가. 자네 목숨은 둘이 아니란 걸 명심해."
"알겠네, 실전경험이 많은 자네 꽁무니만 따라다니면 되겠지."
손승호가 씨익 웃었다.
"원, 사람 싱겁긴."
김범우도 웃었다. 손승호의 그 웃는 모습이 춥고 외로워 보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일거리가 김범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동무, 명절에 쉬지도 못하고 안됐소만 사태가 시급하니 이해하시오. 공작을 좀 나가야겠는데, 이리시당을 거쳐 군산까지 좀 다녀와야겠소. 발 빠른 김 동무가 적임자로 뽑힌 거니까 신속하게 다녀오도록 하시오. 전화로는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되니까 특히 군산 쪽 상황을 직접 확인할 겸 말이오. 최대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소."
부장이 두툼한 편지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노력하겠습니다."
김범우는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손승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그는 옆 사람에게 물었다.
"손 동무 어디 갔나요?"
"예, 방금 공작 나갔어요."
김범우는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분위기 때문에 밥맛은 없었지만 아침을 다 먹어치운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김범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속보로 걸었다. 미얀마 전선에서 후퇴를 할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때에 비하면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 셈이었다. 바람이 선들거려 아무리 빨리 걸어도 땀이 나지 않았고, 돌이 툭툭 불거진 길이었지만 정글에 비하면 아스팔트였다. 위에서부터 누른빛으로 물들어 내리면서 초록빛이 점차로 사위어지고 있는 넓고 넓은 들녘의 이중조화는 더없이 아름답고도 풍성함을 느끼게 하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나락이 익어가고 있는 그 끝이 아슴한 들판은 지루함을 주지 않는 눈요기 감만은 아니었다. 쌀 공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곡창지대 호남평야 - 이곳은 수백 년에 걸친 삶의 투쟁 장이었고, 저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익어가고 있는 나락은 투쟁목적물이었다. 그건 자연이기에 앞서 인간의 생존의지의 응집물이었고, 또한 인간의 탐욕본능의 대상물이었다. 기존생존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다수와 탐욕본능을 채우기 위해 그것을 빼앗으려는 소수와의 끝없는 싸움. 그러나 다수는 소수에게 번번이 졌다. 다수가 소수에게 지는 싸움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사회에서만큼은 그런 싸움이 분명히 있었다. 자연법칙을 거역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라는 것이 그런 황당한 힘을 발휘해냈다. 먹이를 제공하는 땅을 사이에 둔 다수와 소수의 싸움은 결국 모순된 제도를 없애려는 싸움과 옹호하려는 싸움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동물로 규정하는 계급제도를 지배도구로 삼아 다수의 삶을 속박하고 착취해온 봉건주의는 마땅히 척결되어야 할 전시대의 망령이고 인간의 수치였다. 땅이 기름지고 넓을수록 그 땅에서는 그만큼 싸움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싸움 또한 처절하고 비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이 땅의 칠 할의 쌀을 생산해내 곡창지대라는 이름을 얻은 여기 호남평야에서 갑오년에 농민들의 전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 어찌 우연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일정시대에 삼분의 이 이상의 소작쟁의가 이속에서 줄기차게 일어났던 것도 어찌 우연일 수 있을까. 그 다수가 벌인 싸움은 기본생존권 투쟁인 동시에 역사전환을 꾀한 혁명투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봉건주의 폭력 앞에 피만 뿌리고 좌절했고, 또 군국주의 폭력 앞에 피를 흘리면 죽어갔다. 해방이 되어 그들의 꿈은 부풀었지만 지주 중심적으로 만들어진 농지개혁법에 그들은 결국 기만당했고, 마침내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농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아 열심히 농사를 지어 그 수확을 눈앞에 둔 채로 다시 그 꿈이 깨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김범우는 답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수백 리를 걸어 다니며 인민의 불만실태를 현지 조사했던 일이 더없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단 한 번도 세금의 징수를 못한 채 전체 농민들에게 인식만 나쁘게 심어진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이해 납득시켜 그 인식을 바꿔놓지 못하고 후퇴를 한다는 것은 너무 큰 손상이었다. 그 사소한 방법적 실패는 곧 정치적 실패로 확대될 위험이 컸던 것이다.
"이거 추석인데 쉬지도 못하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선전과장이 문서접수증을 내밀며 말했다.
"피차일반이지요."
김범우가 접수증을 접으며 대꾸했다.
"도당은 지금 어쩌고들 있나요?"
선전과장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감이 전라도 사람 같지가 않았다.
"별 이상 없습니다. 전 또 갈 데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김범우는 자신의 임무 이외의 말은 하기 싫어 돌아서려고 했다.
"아니, 어딜 또 가는데요?"
"군산까지 갑니다."
"군산까지요?"
선전과장이 눈을 흡뜨며 놀랐다.
"아니, 왜 그리 놀라십니까? 그쪽에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
군산 쪽 상황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공작 목적이라던 부장의 말이 김범우의 뇌리를 스쳐갔다.
"아닙니다, 아직 완전히 확인한 건 아닙니다만, 해상에 좋지 않은 징조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핵심지역의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국은 교란작전을 목적으로 요소요소의 항구를 골라 제이, 제삼의 상륙작전을 전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천에 뒤따라 군산, 목포가 그 대상지로 꼽힐 것은 상식에 불과한 일이었다. 군산의 상륙은 충남, 전북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고, 목포의 상륙은 전남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인천에 상륙한 병력이 서울을 장악하면서 북쪽을 차단하는 동시에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고, 낙동강전선의 병력이 경남북 일대를 밀고 올라가게 되어 남한 전역은 포위상태에 빠지는 셈이었다. 이건 사흘 전 손승호와 함께 학생용 지도책을 펴놓고 예측해보았던 작전 상황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김범우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길에 정오의 가을빛이 가득했다. 이리는 전주와 군산의 중간지점이었다. 지금가지 걸어온 만큼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김범우는 손가락 끝으로 배를 눌러보았다. 칠십 리 길을 가자면 아무래도 배를 채워야 될 것 같았다. 배가 고파서는 어떤 일이고 제대로 하기가 어렵지만 특히 길을 빨리 걷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주머니에 돈도 넉넉하겠다, 밥을 굶을 필요는 없었다. 김범우는 군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음식점을 찾았다. 돈이 주머니에 언제나 넉넉한 것은 출장근무자에게 봉급의 오십 퍼센트를 더 지급하는 혜택을 받기 때문이었다. 손승호가 그 혜택을 받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자신이 그 혜택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박두병이가 취한 조처였다. 봉급을 받고 나서 놀라자, "주는 건 무조건 받아둬, 자네 술 좋아하잖아" 하면 박두병은 무심한 척했던 것이다. 그건 박두병이 표현한 말없는 우정이었다. 명절날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거지는 있어도 밥을 사먹으러 다니는 멍청이는 없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는 밥집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김범우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길가에 섰다. 밥을 먹기로 작정했는데 먹을 수 없게 되자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들었던 것이다. 남아 있는 길을 빨리 걷자면 무엇으로든 배를 채우기는 채워야 했으므로 그는 걸음을 옮기며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떡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밥이나 떡이나, 하는 생각으로 그곳을 찾아들었다. 추석이라 했지만 아직 송편도 입에 넣어보지 못한 처지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떡이 접시 가득 담겨 나왔고, 전라도식의 맑은 콩나물국이 곁들여 나왔다. 김범우는 콩나물국부터 한 숟가락 떠올렸다. 콩나물 냄새가 상큼하게 코끝을 스치는 순간 불현 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거의 끼니때마다 콩나물국을 끓였다. 아버지가 콩나물국에 적시는 김쌈을 즐긴 탓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따라 아내의 모습이며 아이들의 모습이 줄줄이 이어졌다. 갑작스럽게 밀려든 향수에 그는 콩나물가락이 늘어져 있는 숟가락을 든 채 멈춘 자세로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명절을 타향에서 맞는 축축한 기분과 좋지 않은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가 콩나물국 냄새에 자극되어 그런 감상을 일으킨 것인지도 몰랐다. 자리를 고쳐 앉은 김범우는 콩나물국을 후후 불어가며 속이 뜨끈해지도록 마신 다음 떡을 몰아넣기 시작했다. 군산에 도착한 것은 짧아지기 시작한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군산시당은 비상상태였다. 사무실의 짐은 모두 꾸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긴장된 얼굴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미군 함정들이 해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김범우는 물었다.
"미국 놈들이 가까운 섬에 배를 대기 시작했소."
얼굴이 일그러진 선전과장의 대답이었다.
"도당에 보고하셨습니까?"
"했소. 김 동무는 안 와도 되는 걸 그랬어요."
김범우는 온몸의 맥이 쑥 빠지는 걸 느꼈다.
"그럼, 지금 당장 후툅니까?"
"아닙니다, 상황을 좀 더 살피라는 도당의 지십니다."
김범우는 등받이 뒤로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았다. 절망도, 슬픔도, 분노도, 괴로움도 아닌 그 무엇이 가슴을 덮쳐오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끝나는 것인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전쟁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피만 흘리고 전쟁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아아, 미국, 미국...... 돌아가야지, 도당으로 돌아가야지, 길은 하나, 도당과 함께 행동하는 것뿐이다...... 김범우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 지도책에서 본 산맥들과 남원 쪽에서 바라보았던 우람한 지리산 줄기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저는 도당으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몸을 바로잡은 김범우가 말했다.
"지금 말입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적의 선발대가 이미 침투되어 야간활동을 전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긴장상태에 있는 우리 조직원들에게 오인되어 피해를 당할 위험도 큽니다. 야간보행은 절대 반댑니다. 우리와 함께 밤을 지내고 내일 일찍 떠나도록 하십시오. 김 동무 신상에 무슨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내 책임문제이기도 합니다."
선전과장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럼 밥이나 좀 주십시오. 명절이 돼서 사먹을 데가 있어야지요."
김범우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이고 이런, 아직 저녁을 못 잡수셨군요. 일어나시지요, 어서."
선전과장은 몹시 미안해하며 서둘러 일어났다. 김범우는 백사오십 리 길을 내달아온 피로감에 눌리면서도 사무실 구석자리에서 자다 깨다 하는 지루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흐린 불빛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 서성이거나 들락거렸고, 서로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리고는 했다.
밤은 별일 없이 밝았다. 김범우는 이른 아침을 먹고 일부러 부두까지 나갔다. 물빛깔이 달라진 가을바다가 싸아한 냉기를 품고 펼쳐져 있을 뿐 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어차피 육안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나마 상황을 살피고 군산을 무사히 떠나게 되어 사무실에서 하룻밤 보낸 것이 이래저래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걷기는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한데다 밤잠까지 설친 탓이지 다리가 무겁고 어깨가 처져 내렸다. 몸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김범우는 걷기를 늦추었다. 간추릴 수없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현실의 전면에서 물러나 앉은 법일, 서민영 선생은 어쩌고 있는지...... 염상진은 지금쯤 어떤 심정일까...... 참담하기는 해도 그는 그 순간 정신무장을 다시 갖추었을 것이다. 손승호, 그는 얼마나 괴로울까...... 그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그를 몰아붙인 남쪽의 상황 탓이었다. 이학송은 후퇴를 하고 있을 것인가...... 전쟁은 속임수 없는 편 가르기를 해낸 것이었다. 다시 국방군과 경찰이 점령하게 되면...... 좌익이나 부역자 색출이 첫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공 아래서 바뀐 모든 제도가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삼십분 남짓 걷자 몸이 다소 풀렸다. 그러나 어제 같은 탄력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자주 목이 말라 김범우는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개울에 얼굴을 박아야 했다. 전주에 도착한 것은 밤 아홉시가 다 되어서였다. 시내로 들어서면서 김범우는 무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불빛 없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수선스러움과 어디선가 기 쳐오는 섬뜩함이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후퇴가 시작됐구나! 그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낡은 트럭이 엔진소리를 요란하게 토해내며 어둠 속을 달려갔다. 시내는 완전한 혼란 상태였다. 사람들이 떼 지어 뛰어가고, 고함소리가 엇갈리고, 트럭이 달려가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행렬이 지나가고, 대창을 든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도당 사무실까지 줄기차게 뛰어갔다. 도당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김범우는 무릎이 휘청 꺾이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해서 자기 책상으로 가보았다. 아무것도 남겨놓은 지시가 없었다. 손승호의 책상 쪽으로 가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김범우는 숨을 헉 토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글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본대와 떨어졌을 때와 똑같은 암담한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전쟁마당에서 소속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좌절적 공포감과 절망적 소외감에 빠지게 했다. 김범우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얼굴을 훔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올 줄 뻔히 알면서 왜 목적지를 몇 자 적지 않았을까. 그렇게들 정신이 없었단 말인가. 내가 돌아오는 동안 미군이 상륙했다는 연락을 받은 게 틀림없다. 정보누설 때문에 목적지를 적어놓지 못한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의 머리에는 두 군데가 떠올랐다. 하숙집과 박두병의 집이었다. 김범우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숙방에도 손승호가 남긴 글씨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손승호, 망할 자식!"
김범우는 방바닥에 나둥그러 있는 베개를 걷어찼다. 날씨는 서늘한데도 그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그는 다시 박두병의 집으로 뛰었다.
"워디 그런 말 지헌테 허간디요."
박두병 아내의 느릿한 대답이었다. 김범우는 숨을 헉헉거리면 큰길로 나섰다. 가눌 수 없는 지경으로 몸이 처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며 걷다가 대창을 들고 서있는 서너 명을 만났다.
"민청원들이오?"
"근디요."
"난 도당 문화선전부의 김범우란 사람이오. 공작을 나갔다오니 도당이 다 비었는데, 혹시 어디로 간지 아시오?"
"체에, 고런 걸 알먼 민청원을 멀라고 허겄소?"
불뚱스럽게 내쏘는 말이었다. 김범우는 후적후적 걸어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한 바가지 가득 찬물을 들이켜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김범우는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속이 쓰리도록 배가 고팠다. 그제서야 어제 저녁밥을 굶었다는 생각이 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깊이 빨아 당기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박두병이가 일부러 목적지를 안 밝힌 게 아닐까! 손승호는 그 의견에 동조하고......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승호까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박두병은 그러는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박두병이도 망할 자식이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잉끄렸다. 김범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도당과 함께 행동하자고 했던 어제의 각오는 다 허물어지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오래도록 꼼짝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깊은 잠에서 깨듯 천천히 고개를 들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주머니에 든 것들을 다 털어냈다. 신분증과 통행증, 어제 받은 접수증을 차례로 찢기 시작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했던 것이다.
만년필 펜촉 끝이 거칠고 거무튀튀한 종이 위에 '9월 29일'이라고 썼다. 그리고 나서 펜촉 끝은 더 이상의 글씨를 그려내지 않고 종이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학송은 만년필을 든 채 생나무 울타리를 따라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의 회오리에 사하는 찢기, 선혈만 뿌리며 역사는 균열해도, 주인은 간 곳 없고 홀로 핀 가을꽃’
무심결에 시조형식으로 얽어진 생각이었다. 미친 놈, 아직도 센치멘탈이 덕지덕지 묻었군. 그 따위 것 빨리 청산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해야지! 그는 민망한 생각을 덮기라도 하듯 스스로를 자못 근엄하게 꾸짖었다. 어쩌자고 그런 생각이 삼사조의 율조로 얽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의식 속에 아직도 그 시절의 향수가 남아 있다는 것이 그는 부끄럽고 민망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능력에 못 미치는 과욕인 것을 깨닫고 단념한 이후 문학적 감상은 다 지워진 줄 알았는데, 분위기 탓인지 어쩐지, 기사를 쓰겠다고 종이를 펼쳐놓고 앉아 그런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어쩌면 마땅히 쓸 만한 기사거리가 없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퇴의 행렬 속에서도 '해방일보'는 매일 등사판으로 발간되고 있었다. 질이 나쁜 종이에 찍혀지는 한 장짜리 등사판 신문을 후퇴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몇이나 눈여겨볼 것인가. 그러나 '일보'로서 하루도 쉬지 않고 발간한다는 의미와, 그날그날의 후퇴상황이나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다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와 함께 이학송이 놀라는 것은, 이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묵묵하게 해내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성과 진정성에 대해서였다. 신문사로 수류탄 열댓 개와 창이 운반되어 온 것은 이십사일이었다. 그때 이미 신문사는 가회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서울이 위험하게 되자 이십일을 전후로 하여 중요 기관들이 북쪽의 경복궁 언저리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배당된 수류탄과 창은 직장을 사수해야 하는 무기였다. 그 무기를 받게 되자 기자들의 심정은 더욱 비감하고 암담하게 변하고 말았다.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시가전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바리케이트가 쳐졌는가 하면, 모래가마니를 쌓아올려 전호를 구축해 놓기도 했다. 거리에 사람은 부쩍 줄어들었고, 김포 쪽에서 울려오는 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또 하루가 가고, 이십오일이 되었다. 신문사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이 깔리면서 드디어 포탄이 시내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그랬던 것처럼 폭탄은 아무 데서나 날아와 터져 올랐다. 이제 서울이 불바다가 될 차례였다. 신문사 이동지시가 내려왔다. '사업을 보장하기 위해서' 신문사를 성북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폭탄이 제멋대로 날아들어 터지고, 여기저기가 불타는 속에서 신문사는 옮겨지고 있었다. 밤이 늦어 이사를 끝낸 기자들의 손에는 인민군의 겨울솜옷 한 벌씩이 쥐어졌다. 이십육일 시내는 완전히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기자들은 열두시 전까지는 신문사로 돌아오라는 시간제한 속에 취재를 나서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완전히 통행금지 상태였다. 이학송은 다른 기자 둘과 함께 동대문 쪽으로 나갔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을 수 없는 대낮의 적막 속에 동대문시장이 불타고 있었다. 폭탄에 상한 것이 분명한 시체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 이학송은 자꾸 신설동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는 시계를 보고는 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눈치로 보아 아무래도 오늘이 서울의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잠깐만이라도 집에 들르고 싶었다. 아내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이들 데리고 아무 데로나 피하라는 말을 해야 했던 것이다. 자신이 해방일보에서 일한다는 것은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열두시까지는 삼십여 분밖에 남지 않아 신문사로 돌아가기도 촉박한 시간이었다. 열두시에 신문사 일행 마흔 두 명은 말없이 신문사를 뒤로 했다. 일행은 정릉의 천향원이란 별장 뒷숲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밤이 되어 쌀 한 말씩을 받아 짐을 꾸리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길은 의정부 쪽으로 잡혀 있었다. 바로 앞에는 서울시당이 가고 있었다. 적요하기 이를 데 없는 밤을 둥글고 둥근 추석달이 밝히고 있었다.
포천으로 가는 길은 제각기 무리를 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비행기들의 폭격과 난사로 낮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낮에는 어디든 숨어 있다가 어둠이 내려서야 길을 잡았다. 포천으로 가는 길에는 사복차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수백 명씩 떼를 지어 가고 있었다. 당은 분명히 '모든 인민군부대는 편제를 유지해서 춘천으로 집결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춘천과는 점점 멀어지는 길로 가고 있는 그들을 이학송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원인 기자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취재하려고 하지 않았다. 명령을 미처 못 들었거나, 어떤 다른 임무를 띠고 이동하는 것이겠지, 생각하고 말았다. 그들은 역시 군인답게 신속하게 움직여 자취를 감추고는 했다. 포천에는 이십칠일 새벽, 날짜로는 이십팔일에 도착했다. 주인 없는 빈 집을 찾아들어 하루를 쉬기로 했다. 평소에 많이 걷는 생활을 하지 않은 일행은 꽤나 지쳐 있었고, 여자기자까지 끼여 있는 형편이었다.
"뭘 그리 넋 놓고 보고 계세요?"
"아 김 기자, 앉으시오. 쓸 거리가 마땅찮아서요......"
이학송은 김미선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코스모스에 대해 쓰시려구요?"
김미선이 옆에 앉으며 배시시 웃었다.
"들켰군."
이학송도 씨익 웃었다. 이제 김미선의 눈에는 서울을 떠나오던 날 계속 그렁거렸던 눈물은 없었다.
"제가 하나 가르쳐드릴까요?"
"좋습니다."
"공짜로는 안 되는데요?"
"그래오. 김 기자 짐을 져드리죠."
"그래요. 그게 뭔가 하면 말예요, 어제 그 군관 얘길 쓰세요."
"아 그 박 뭐라던!"
얼굴이 밝아진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기사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맘에 드세요?"
"예, 기사거리가 돼요."
"그럼 짐을 반만 져주세요."
"아닙니다, 약속은 지켜야죠."
"아니에요, 그래라 또 기사거릴 하나 더 제공할 수가 있죠."
"아, 그런가요?"
둘은 마주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전남여중을 나와 이화여전을 졸업한 김미선. 그녀는 두 아이의 어머니였고, 폐간되기까지 해방일보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당원이었다. 몸이 가냘픈 것만큼 작은 얼굴에 미모인 그녀는 진작 월북했던 남로당 고급간부의 부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어머니 같지 않은 모습이었고, 글 솜씨보다는 말하는 재치가 언제나 신선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친밀하게 대하는 건 고향이 같기 때문일 거라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어제의 일이었다. 무슨 용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군관 한 사람이 두 전사를 데리고 자신들의 숙소로 찾아들었다. 그가 한 말 중에서 말썽이 된 것은, 어제 대한청년단원 스무 명을 처단했다는 대목이었다.
"군관동무, 동무는 그걸 전과라고 자랑하고 있는 거요? 동무는, 반동을 색출 처벌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신중을 기하고, 경솔한 가혹행위를 절대로 금지한다는 당의 지시도 모르고 있소!"
이원조의 노기 서린 호통이었다. 과묵한 그가 화를 내는 것이었으므로 모든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군관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요?"
"청년단원들은 모두 악질반동들이고 우리 적입니다."
"청년단원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소. 묻겠는데, 그자들이 무장을 하고 우리 전사들의 생명을 노리거나 대항했소?"
"그렇진 않았습니다."
"또 하나 묻겠는데, 우리의 후퇴가 일시적이라고 생각하오, 아니면 항구적이라고 생각하오?"
"그야 분명히 일시적이오."
"군관동무는 두 가지 답변으로 해당행위를 한 스스로의 과오를 완전하게 시인했소. 그자들이 무장을 하지 않았고, 전사를 가해하거나 대항할 의도가 없었으니까 전사의 적이 아니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선 반드시 당의 지시에 따라 신중한 조사를 한 다음 그 반동성에 맞도록 조처를 했어야 했소. 그런데 군관동무는 바로 당이 절대 금지한 '경솔한 가혹행위'를 저지른 것이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퇴가 일시적인 것이 분명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당의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이 더욱 문제요. 우리가 여길 다시 해방시켰을 때 그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크게 확산되어 있을 것인가를 군관동무는 상상이나 해봤소? 첫째, 그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척들까지도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을 것이오. 한 사람을 잘못 처단해서 열 사람의 진짜 적을 만든 거란 말이오. 둘째, 해방전쟁을 원하지 않는 집단이 그 사건을 확대 과장해서 반공선전물로 이용해 먹게 될 것이오. 당의 지시는 이런 모든 점들을 고려해서 취해진 것인데, 군관동무의 행위는 도대체 뭐요!"
당 이론가요, 문학평론가요, 편집국장다운 분석이고 비판이라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그 반동들을 그냥 풀어주면 결국 우리 등에 총질할 적으로 둔갑한다는 건 왜 생각 안합니까?"
"과오를 시인하지 않고 그게 무슨 비겁한 변명이오. 반동성이 약한 자들에 대해선 용서를 전제로 한 세뇌공작을 펴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술은 어디다 써먹을 작정이오? 군관동무 같은 경솔한 사람들이 화선일대에 많았다간 당 사업은 어찌 되고, 이 해방전쟁은 또 어찌 되겠소. 이거야말로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소."
젊은 군관은 더 말을 못했다. 이학송은 당의 지시가 일선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그 문제점을 기사화하려고 생각했다. 출발을 앞두고 작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인원점검을 하는데 다섯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집이 남쪽인 사람들이었다. 출발이 중지되고, 한동안 소란이 계속되었다.
"갑시다.“
편집국장 이원조는 이 한마디를 하고 먼저 발을 내디뎠다. 더 열릴 것 같지 않게 입이 다물린 그의 얼굴은 딱딱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이학송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를 대하기가 부끄럽고 면구스러웠던 것이다. 이제 남쪽 출신은 자신과 김미선 그리고...... 그는 얼른 계산을 해내지 못한 채 북쪽으로 향하는 걸음을 크게 떼어놓았다.
전선이 무너져 후퇴를 하기 시작한 적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선발대로 낙동강을 건넌 현오봉은, 이런 싱거운 전쟁도 다 있나, 생각하며 헛웃음을 칠 정도로 적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보병이면서 어떤 때는 트럭을 타고 백 리 이상이나 북상 전진을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군은 일차로 비행기를 동원해 인민군들의 퇴로를 맹타해댔고, 이차로 탱크와 장갑차로 밀어붙이기를 했으며, 보병은 삼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군의 그 막대하게 증강된 화력 앞에서 인민군들은 저항을 시도하기는커녕 후퇴하기에도 다급한 형편이었다. 인민군은 비행기들의 폭격을 당해 부대가 분산되기 일쑤였고, 탱크나 장갑차들의 공격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오봉의 중대는 전투를 한다기보다 저항이 미약한 적을 뒤로 젖혀 두고 전진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낙오병들을 발견하게 되면 포위를 펴 포로로 잡는 작전을 주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손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기가 떨어진 낙오병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어서 이쪽에 사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의외로 쉽게 손을 들어버리는 낙오병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끝까지 저항하다 죽어가기도 했다. 현오봉은 얼마 동안은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관심을 두고 보니 그 차이가 드러났다. 먼저, 장교가 있고 없는 것의 차이였다. 낙오병들 중에 장교가 없으면 총 몇방 쏘다가 쉽게 손을 들어올렸고, 장교가 있을 경우에는 그 저항이 완강하게 마련이었다. 군대에서 장교라는 것이 왜 필요하며, 장교와 사병이 어떻게 다른가를 새롭게 느끼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오봉은 저항하다 죽어간 인민군 장교를 내려다보며, 나도 저렇게 죽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자문해보고는 했다. 그 다음이, 인민군과 의용군의 차이였다. 인민군들은 그래도 저항을 해보다가 손을 드는데, 의용군들은 거의가 그냥 항복을 하고 말았다. 현오봉은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정훈교육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거기서 다시 깨닫고 있었다.
사병들의 경우에 사역만큼 싫어하는 것이 정훈교육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현오봉은 바위에 기대 졸음졸음 졸고 있었다. 낙동강전선에서는 일부러 눈을 붙이려 해도 오지 않던 잠이 전진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무 데나 앉으면 몰려들었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린 탓도 있었고, 살 오른 큰 몸집만큼 그는 잠이 많기도 했다. 남달리 많은 잠 때문에 통학열차에서 얼굴에 환칠을 당하거나 입에 파리를 담기도 여러 번이었다. 무슨 꿈인가를 꾸고 있던 현오봉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사병들이 나무 밑에 몰려들어 떠들어대고 있었다. 포로라도 잡았나 싶어 현오봉은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가까이 가보니 포로가 아니라 무슨 헝겊조각을 펄럭여대며 왁자지껄했던 것이다.
"왜들 이렇게 떠드나! 최전선에서 이 따위로 무질서하게 구는 게 군기 위반인 줄 모르나!"
현오봉은 단잠을 빼앗긴 짜증을 묻혀내고 있었다. 펄럭이던 헝겊을 뒤로 감춘 하사가 눈치를 살피며 어물거렸다.
"김 하사, 내 말 안 들리나!"
현오봉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예...... 이걸 저쪽에서 주웠습니다."
하사가 내보인 건 그냥 헝겊이 아니라 인공기였다.
"이게 첨 보는 물건인가. 이까짓 걸 가지고 왜 떠들고 야단이야. 왜 그랬어! 왜."
현오봉은 화가 터지고 말았다. 그는 언제나 인공기만 보면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걸 주워들고 와 무슨 자랑거리라고 펄럭여대는 놈은 뭐며, 또 그 짓이 무슨 구경거리라고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놈들은 뭐냐 싶었던 것이다.
"예 소대장님,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지역이 전부 괴뢰군들 밑에 있었으니까 다음 동네에 들어갈 때 이것을 꽂고 들어가 보면 어떻겠느냐는 말들을 한 겁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규율을 어기고 떠들어 잘못했습니다."
하사 옆에 서 있던 이등중사가 대신 말했다.
"그래?" 현오봉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다가,
"사상조사를 하기에 그거 아주 괜찮은 방법인데. 그렇게 하도록 해봐."
그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병들은 장난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그의 생각은 '사상조사'로 비약하고 있었다. 현오봉의 소대는 행군을 시작했다. 후퇴가 아니라 진격이었으므로 분대마다 행군대형을 유지하며 사주경계를 폈다. 아무리 쫓기고 있는 적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총질을 가할지 모를 일이었다. 한 시간 남짓 행군을 했을 때 마을이 멀찍하게 나타났다.
"소오대 정지!"
현오봉이 손을 들어 보이며 멈춰 섰다. 소대가 행군을 중지했다.
"선임하사, 깃대를 장만하시오."
현오봉의 명령을 받아 선임하사가 사병 둘을 옆의 산비탈로 올려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가늘고 긴 생나무를 잘라가지고 왔다.
"됐어, 거기에 인공기를 다는 거야."
현오봉의 말에 따라 두 사병이 얼룩지고 때가 묻은 인공기의 한쪽씩을 잡고 나무 끝에 묶었다.
"됐다, 출발!"
소대는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나아갔다.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선임하사가 말했다.
"소대장님, 인공기만 들어서 소용이 없잖습니까?"
"무슨 소리요?"
현오봉이 선임하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복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철모야 벗어야 되지 않겠어요?"
"아, 그렇지. 괴뢰군들이야 철모가 없으니까. 다 벗어서 배낭 뒤에 매달도록 합시다."
선임하사의 지시에 따라 소대원들은 철모를 벗어 배낭 뒤에다 매달았다. 마을은 여섯 가구밖에 안되었다. 두 개의 야산 사이에 여섯 채의 초가집이 감싸이듯 모여 있었다. 여섯 채의 집에 비해 당산나무가 너무 커 보였다. 그 우람한 당산나무는 그 작은 마을이 규모에 비해 오래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대는 마을로 접근하고 있었다. 마을사람 서넛이 움직이는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개가 컹컹 짖어댔다. 뒤따라 사람들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려졌다. 그 얼굴들이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돌려지면서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몸을 놀려 자취를 감추었다.
"도망가는 모양인가요?"
선임하사가 물었다.
"글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가면 어딜 가겠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오봉은 경계심이 일어났다.
"혹시 괴뢰군 잠복이 있는 건 아닐까요?"
선임하사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그때 마을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허겁지겁 당산나무 쪽으로 몰려나왔다. 소대는 당산나무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인공 만세에-"
"인민군 만세에-"
스무 명 남짓한 마을사람들이 당산나무 아래 한 줄로 늘어서서 목소리를 맞추어 외치는 소리였다.
"저, 저, 종자들 노는 꼴 봐라."
선임하사가 혀를 차댔고, 사병들 사이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런데 현오봉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선임하사는 이상해서 소대장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주춤했다. 소대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사납게 구겨지고 있었고, 부릅뜬 눈은 살기가 차 있었으며, 아랫입술이 물린 입 언저리는 떨리고 있었다.
"혁명적 인공 만세에-"
"영용한 인민군대 만세에-"
사람들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활개 짓을 열심히 해대며 더욱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시끄럿! 중지, 중지!"
선임하사가 소리쳤다.
"내버려두시오, 맘껏 하게."
현오봉의 말이었다.
"예?"
선임하사가 놀란 눈으로 소대장을 쳐다보았다.
"저것들은 모두 총살감이오!"
현오봉의 싸늘한 말이었다.
"소대 제자리에 섯!"
어느 때 없이 큰 현오봉의 구령이었다. 소대가 뚝 멈추었다. 그 위치는 바로 당산나무 앞이었다.
"그 깃발 가져와!"
현오봉이 명령했다. 맨 앞에 섰던 사병이 뛰어왔다. 인공기가 펄럭였다. 현오봉은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인공기를 잡아 칼을 꽂더니 아래로 긁어내렸다. 헝겊 찢어지는 소리가 짧고 둔하게 들렸다.
"구 국방군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마을사람들 속에서 비명처럼 터져 나온 소리였다.
"머시라고? 국방군!"
"아이고......"
"크, 큰일 났네."
마을사람들이 연거푸 터뜨린 탄식 같은 소리였고, 가슴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발을 구르는 사람도 있었고,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현오봉은 그런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공기에 계속 칼질을 해대며 북북 찢고 있었다.
"국방군 만세에-"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군인들이 잠깐 멀뚱한 얼굴이 되었다.
"국방군 만세에-"
마을사람들의 팔이 일제히 올라가며 일어난 소리였다.
"대한민국 만세에-"
누군가가 선창했다.
"대한민국 만세에-"
마을사람 모두가 입을 합친 외침이었다.
"저 박쥐같은 연놈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현오봉이 그들을 노려보며 침을 내뱉었다.
"소대 칠 보 뒤로, 일렬횡대로 헤쳐모여!"
현오봉이 구령했다. 소대원들이 기민한 동작으로 뒤로 물러서며 촘촘하게 일렬횡대로 늘어섰다.
"삼사분대 삼 보 뒤로!"
현오봉의 구령이 다시 내려졌다.
"간격을 조정하라!"
현오봉이 살벌하게 소리 질렀다.
"아이고 대장님, 대장님, 살려줍시유. 우리 속맘은 그렇지 않은디 어쩔 수가 웂어서, 잘못보고 그런 것이니 한번만 살려줍시유."
그때서야 사태를 알아챈 한 남자가 현오봉에게 매달렸다.
"요런 빨갱이새끼, 저리 비켜!"
현오봉의 발이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어쿠쿠......"
남자의 몸이 달팽이가 되며 나둥그렀다.
"일이분대, 거총!"
한 줄로 늘어선 열여덟 명의 군인이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당산나무 아래는 사람들이 엉킨 채 울음소리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발사!"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한꺼번에 뒤엉켰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그 소리는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놀란 개가 도망치며 짖어대는 소리만이 다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수고했다. 행군대열을 갖춰라."
현오봉은 명령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소리 내서 내뿜었다. 아버지와 염상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염상진 네놈을 내 손으로 죽일 날이 있을 것이다...... 현오봉은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내뿜었다.
"출발준비 완료했습니다."
선임하사가 보고했다.
"좋소, 출발하시오."
현오봉은 꽁초를 손가락 끝으로 튕기며 비식 웃음 지었다.
"소대, 전진 앞으로!"
선임하사의 구령에 따라 소대는 다시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오봉은 그 뒤를 따라붙으며 당산나무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염상진이 도당으로부터 후퇴에 관한 지령을 접수한 것은 추석 전날이었다. 첫째, 당을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둘째, 입산투쟁에 대비할 것. 셋째, 해방구 확보계획을 세울 것. 넷째, 북으로의 후퇴계획을 세울 것. 그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며칠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결과였다. 지하당으로의 개편은 재작년 시월처럼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퇴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고 두 달 동안 전개된 활동으로 조직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둘째와 셋째 항목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넷째 항목이 문제였다. 그리고 도당이 지령하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여맹이며 민청에서 활동한 그 많은 조직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그것을 둘째 조항에 포함시켜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독립시키거나 어디에 포함시키거나 간에 문제는 똑같은 비중으로 남았다. 그 많은 수를 입산시켰을 때 첫째 식량조달이 문제였고, 둘째 투쟁효과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선별입산을 시켰을 경우 남은 사람들에게 당장 닥칠 생명의 위협이 문제였다. 그의 고심은 해결되지 않았다. 군당 간부회의를 열었다. 역시 넷째 조항이 토론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건 별로 고려할 만한 문제가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룡의 주저 없는 발언이었다.
"그것이야 북조선 동무들헌테나 해당되는 말 아니겄는가요? 쌈에서 밀고 밀리는 것이야 병가지상산디, 잠시 밀리먼 또 심모타서 밀어붙일 작정을 혀야제 북쪽으로 가먼 여그넌 워쩔 것이요. 말 씹힐 것도 웂는 문제구만이라."
오판돌의 거침없는 발언이었다.
"북쪽으로 후퇴럴 헌다는 말이 나왔응께 속에 든 말 털어놓는 것인디, 우리가 다 암시로도 긁어 부시럼이고, 존 것이 존 일이다 생각험시로 덮어온 일로, 북조선 동무덜이 그 동안에 을매나 잣지받지허니 우리럴 눈 아래로 깔아보고, 코방구 뀌고 그랬소. 지 땅 지 마실에서도 그런 꼴 당혔는디 북쪽으로 가먼 우리 꼬라지가 머시가 되겄소. 나가 이리 발언허는 것이 분파주의 조장이다, 지방주의 조장이다 허고 비판을 받을란지 몰르겄는디, 나넌 있는 그대로 젺은 그대로 말얼 허는 것잉께 비판을 허자먼 북조선 동무덜부텀 먼첨 비판 받어야 헐 것이요. 나가 기가 찬 것은 우리가 목심 내걸고 공산주의 허는 것은, 니나 나나 차등 웂이 공평허니 사는 시상 맹글잔 것이었는디 정작 공산주의의 허는 사람끼리 그 모냥이 되니께 무신 살맛이 나겄소. 허고, 북조선 동무덜이 남조선 해방시키니라고 고상혔지만, 우리도 두 손끝 맺고 논 것이 아니라 못 묵고, 못 입고, 동상 걸려감스로 목심 내놓고 투쟁혔다 그것이요. 우리가 그리 좆빠지게, 아니 아니구만요, 요 말언 취소허고, 우리가 그리 세빠지게 고상혀갖고 그런 하대 받을라고 고상혔습디여? 다른 사람 다 몰라도 나넌 북쪽으로 안 가겄구만요."
하대치의 막힘없고 단호한 발언이었다. 고개를 약간 수그린 염상진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하 동무의 발언 잘 들었습니다. 하 동무가 지적하신 사실은 당 전체가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북으로 후퇴를 하지 않는 이유로 연결되는 것은 하 동무의 좀 지나친 감정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문제점은 문제점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고, 북으로의 후퇴는 별개의 문제로서 당명이 내려지면 이의 없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 동무의 보충발언을 듣고자 합니다."
안창민이 지긋한 눈길로 하대치를 지켜보았다. 하대치는 안창민의 발언이 자신을 바람막이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안창민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발언은 많은 읍, 면당 위원장들에게 나쁘게 작용할 염려가 있었다.
"안 동무의 발언을 접수허고, 지 벌언이 잘못된 것을 시인합니다. 당이 북으로 후퇴허라고 결정허먼 그대로 딸컸고, 이 토의에서넌 지넌 반대구만요. 여그 인민덜얼 지켜야 헌께요."
하대치의 눈치 빠른 정정발언이었다.
"아직까지는 북으로의 후퇴가 당의 완전한 결정이 아닌 것은 전체적 상황으로 보아 북으로의 후퇴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당의 결정적 지시가 있을 때까지 상황을 보아가며 대처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안창민의 신중론이었다. 조직원들의 입산문제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원하는 사람은 전부 데려가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문제는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다만 동요를 막기 위해 실행 전날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방해책동으로 우리의 해방전쟁은 전세가 다소 불리해져 일시적인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무들! 우리는 이에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용기를 잃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용감무쌍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앞서 죽어간 동지들의 피와 전사들의 피를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이 혁명을 위해 흘리고 죽어간 피 값을 우리가 혁명을 쟁취하는 것으로 값지게 해야 합니다. 혁명의 성공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가슴에 새겨 우리 다 같이 새로운 용기를 가집시다. 새로운 투쟁을 향해 일어섭시다!"
누가 치기 시작했는지 모를 박수에 따라 회의장은 금방 열렬한 박수소리로 출렁거렸다. 염상진은 박수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허용할 때까지 오늘부터 극비리에 투쟁인민들을 확보토록 각 읍, 면당은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투쟁인민의 확보는 앞으로 우리의 투쟁발판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염상진의 마감발언이었다. 사흘 뒤인 이십팔일 아침 도당이 광주시당과 함께 그 중추조직은 북으로 후퇴를 한다는 연락이 았다. 아울러 군당의 핵심조직도 이에 따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염상진은 즉시 그날 밤을 출발예정으로 잡아 각 읍, 면당에 후퇴준비를 지시했다. 군당의 전체조직부터 안전지대로 옮길 작정이었다. 읍내의 마을마다 동요가 일어났다. 각 조직을 통해 후퇴소식과 함께 원하는 사람은 당을 따라 입산하라는 지시가 전해졌던 것이다.
장면 ㄱ. 주막
김복동 “자네 어쩔랑가?”
마삼수 “안 델고 간다고 혀도 따라나설 판인디 델고 간다는 디야 얼씨구나 아니겄소? 성님언 안 가게라?”
김복동 “나 목심이 둘이간디?”
마삼수 “맞소. 앉어서 죽으나 입산혀서 한바탕 허고 죽으나 죽기사 매일반잉께요. 좆 달린사내새끼 죽는 꼬라지가 어느 편짝이 낫겄소?”
김복동 “두말허먼 잔소리제. 뜨도록 허세!”
(꽁초를 내던지며 벌떨 일어선다.)
장면 ㄴ. 강동기네 집
강동기 “아, 친정으로 가 있으랑께!”
(버럭 소리지른다.)
남양댁 “성님도 간다는디 나도 델꼬 가주씨요.”
강동기 “머시여? 형수씨가 어째 따라나서고 그려?”
남양댁 “여맹서 일헌디다가, 산사람 돼갖고 냄편 웬수 갚는답디다.”
강동기 “허! 사람 칵 미치게 맹그네웨. 새끼덜언 워쩌고?”
남양댁 “친정에 맡긴다드만이라.”
강동기 “그려서 자네도 아새끼 친정에 맡기고 따라나설 챔인 것이여? 확 그냥, 찍소리 말고 싸게 친정으로 떠, 싸게!”
(강동기는 곧 주먹질을 할 기세고, 남양댁은 두 팔을 들어 올려 옆걸음질로 피하며)
남양댁 “여맹서 일허라고 허덜 말든지, 일허라고 혔으먼 델고 가기럴 허든지. 묵을 것도 웂은 친정에 아새끼할라 델고 들이닥치먼에 진간히 좋아라 허겄소. 혼자 맘대로 허는 성님(외서댁)이 부럽소.”
강동기 “원족가는 것이 아닝께 시키는 대로 혀!”
(휙 돌아서 나간다.)
장면 ㄷ. 여맹 사무실
이지숙 “나랑 같이 가십시다, 고생은 돼겠지만. 남아서 당하는 고초보다야 낫겠지요.”
(이지숙이 소화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소화 “고초라먼 당허기고 허겄제만......”
이지숙 “맞아요. 이젠 전하고 형편이 달라요. 예비 검속한 걸 봐요, 그놈들은 다 죽일 거예요.”
소화 “지는 그분 만내기 전에는 죽을 수 웂구만요. 지도 입산혀서 그분 몫아치럴 험스로 그분을 기둘릴랑마요.”
이지숙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빨리 가서 준비하세요. 치마 입지마시고 몸뻬를 입고, 솜옷서너 벌하고, 쌀을 챙기세요.”
소화 “알겄구만이라.”
(소화 총총히 사라진다.)
장면 ㄹ. 당산나무 아래
김종연 “성님, 정신 똑똑허니 채리씨요. 여그 있다가는 면장 아들 아니라 서장 아들이락도 삭신만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카악이요, 카앗!”
(김종연이 빳빳하게 편 손바닥으로 목 치는 시늉을 두 번 한다.)
유동수 “금메 말이요, 새끼덜이 우루루헌디 맥엄씨 민청서 설레발 쳤능갑다.”
서인출 “와따, 짜잔허게 이자 와서 뒤진 새끼 붕알 맨지는 소리넌 멀라고 허고 그요. 글먼 성님 혼자 남으씨요.”
(등을 돌리고 선다.)
유동수 “아니시, 아니시, 나도 갈라네.”
장면 ㅁ. 하대치네 집
들몰댁 “넘덜맹키로 친정이 멀기럴 허니 친정으로나 피허겄는게라?”
하대치 “금메 말시. 엎어지먼 코 달 디라논께.”
(그는 짭짭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젓는다.)
들몰댁 “요리 허먼 워쩔게라. 임시로 물러스는 것잉께 우선에 급헌 불부텀 끄게 아그덜 친정에 맡기고 지도 따라나스는 것이.
하대치 “글다가 질어지먼 으쩔라고?”
들몰댁 “그러기사 헐랍디여. 팔다리 묶이고 허는 쌈도 아닌디.”
하대치 “허기넌 그려. 가세, 우선 뜨고, 판 돌아가는 것 봐감서 그때 가서 워찌 허드락도.”
어둠이 감기기 시작하면서 전에 읍사무소였던 인민위원회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두들 큼지막한 짐들을 이고 지고 있었다. 짐에 매달린 바가지도 보였고, 지게 뒤에 묶은 솥도 보였다.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집안도 서넛이나 되었다. 염상진은 착잡한 심정으로 사람들을 눈어림하고 있었다. 줄잡아 삼백 명이 넘었고, 여자가 사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염상진이 시계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하대치가 다가서며 말했다.
"다 온 것 겉구만이라."
"알겠소."
염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군내의 내무서나 분주소에 배치되었던 인민군들과 몇 안 되는 당 일꾼이 모여 있었다.
"우린 곧 떠나겠습니다. 앞서 떠나도록 하시지요. 그 동안 수고들 참 많이 하셨습니다. 가시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곧 돌아오십시오. 언제든지 환대하겠습니다. 장흥 유치지구나 화순 백아산 지구, 아무 데나 형편 닿는 데로 합류해서 우리 군당을 찾으면 언제나 선이 닿을 겁니다."
염상진은 모두를 향해 말하고,
"이것 받으십시오. 우리 군당이 드리는 노잡니다. 혹시 돈이 떨어지게 되면 쓰시라고 금반지 몇 개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며 인솔자에게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거 참, 이거......"
인솔자는 당황해했고, 염상진은 그의 손을 끌어 잡아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그럼 전사동무들, 편히 가십시오!"
염상진이 소리 높여 외쳤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동무들, 조심혀서 가씨요이-"
누군가가 소리쳤다.
"잘들 계시라요."
움직이기 시작한 인민군 대열에서 보내는 화답이었다.
"사우 삼을라고 혔는디 워찌 그리 허망허니 가뿌까이. 참말로 무사허니 가씨요오."
어떤 여자의 외침이었다.
"고맙시오, 또 만나자요."
박수소리 속에서 들려온 화답이었다. 인민군들은 역 쪽의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염상진은 사람들 앞에 섰다.
"여러분, 우린 지금 단순히 피난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형편이 어렵게 되면 산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산은 피난처가 아니라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애들까지 데리고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애들을 데리고 나오신 분들은 왼쪽으로 따로 나오십시오. 앞으로 세 시간 여유를 드릴 테니 애들을 어디다 맡기든지, 무슨 해결을 해야 합니다."
"암 디도 맡길 디가 웂는디라."
어떤 여자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염상진은 더 말이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구분해내고 조 편성이 시작되었다. 한 조를 삼십 명으로 해서 세 명씩 가로세우기를 한 다음 앞뒤에 인솔자를 배치시켰다. 조 편성이 끝나자 곧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은 들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염상진은 각 읍, 면의 입산자들을 옥산 너머 골짜기로 집결시키도록 지시했다. 율어로 할까 했지만 밀려들 적의 병력도 화력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격당할 위험이 컸다. 징광산도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은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조금 먼 그 골짜기에서 안전을 유지하며 각 읍과 면의 무장투쟁조직을 짤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짐들을 이고 진 삼백 명이 넘는 행렬은 어둠 속의 횡계다리를 건너 낙안 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추석이 지난 가을밤의 대기는 싸늘하게 그 꼬리를 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