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태백산맥 3-4

Bollnow 2024. 3. 12. 06:48

11. 1950625

이지숙은 눈이 뜨이자마자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앉은뱅이책상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북괴군들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대거 남침을 강행해왔습니다."

잡음과 함께 라디오가 토하는 말이었다. 태평스럽게 하품을 하고 있던 이지숙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딱 멎었다.

"이 불법남침을 격퇴하기 위하여 국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시민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는 추호도 동요하지 마시고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

충격을 겨우 수습한 이지숙은 허겁지겁 라디오 볼륨을 낮추었다. 아나운서의 소리가 도망치듯 까마득하게 멀어지면서 지글지글 끓는 잡음만 더 소란스러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그런 반사적인 행동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판단은 그 다음에 왔다. 그것은 틀림없는 남쪽의 국영방송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바로잡은 이지숙은 조심스럽게 볼륨을 다시 높였다.

"...전국의 국민 여러분들께 다시 알려드립니다. 오늘 새벽 네 시를 기하여 북괴군들이 삼팔선 전역에 걸쳐 대거 남침을 감행해 왔습니다. 이 불법..."

두 무릎을 깍지 끼어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지숙의 가슴은 계속 벌떡 거리고 있었다. 처음에 가슴을 쳐온 충격은 예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움 때문이었고, 되풀이되는 방송을 따라 그 충격은 감격으로 바뀌며 가슴에 거센 물줄기를 일구고 있었다. 평소와는 판이하게 긴장감과 다급함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통쾌감과 승리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아, 마침내 인민해방을 위해 일어났구나! 드디어 인민해방의 날은 오는구나! 그녀는 푸들거리는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며 눈을 내리감았다. 아아,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렸던가! 아아, 얼마나 애타게 고대했던가! 이제 본격적 투쟁은 시작되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을 척결하고 그 앞잡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여 진정한 인민해방의 나라, 참된 민족통일의 나라를 이룩할 투쟁이! 가죽혁대로 온몸을 고문당했던 그 살 찢어지는 고통이 비로소 저릿저릿한 환희로 바뀌는 것을 그녀는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두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얼굴의 굴곡을 따라 턱에 이르러 방울져 떨어지면서 턱 아래를 타고 흘렀다. 그녀는 눈물이 목까지 타고 내리는 것을 느끼며, 투쟁하리라, 끝까지 투쟁하리라, 싸우리라, 끝까지 싸우리라, 마음 다져 속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쉴 새 없이 똑같은 말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지숙은 단호한 몸짓으로 라디오를 꺼버렸다. 이지숙은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칠동 쪽으로 길을 잡았다. 고정선을 찾아 나선 것이다. 라디오가 있을 리 없는 안창민에게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릴 필요가 있었다. 도당이나 다른 어떤 선을 이용해서 알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였다. 이지숙은 사람들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면서 걸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디오라는 물건은 전화나 축음기처럼 귀한 물건이었다. 어지간한 살림살이가 아니고서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그 소식을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금쯤 지주 몇몇이 알고 있을지 몰랐다.

뻔뻔스럽고 가증스러운 것들, 어디다 대고 불법남침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는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민족적 죄목도 모자라서 미제국주의자들에게 붙어 나라와 민족을 또다시 팔아먹는 신식민주의자들이 어디다 대고 그 따위 소릴 지껄이고 있는가. 일제시대에 저지른 죄과에다가 해방 오 년 동안에 다시 저지른 죄과까지 합치면 그 집단은 마땅히 하나도 남기지 말고 처단해버려야 한다. 가차 없는 그놈들의 처단 없이는 인민해방도, 민족 일체도, 통일조국도 성취되지 않는다. 인민을 착취하고, 민족을 배반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아무런 속죄도 처벌도 받지 않고 외국군대의 폭력으로 보호를 받아가며 또다시 군림하는 역사, 그 더럽고 추악한 역사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혁명의 피흘림은 기필코 필요한 것이다. 오라, 인민의 군대여, 혁명의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어서 치달아오라! 이지숙은 줄기차게 뛰는 심장의 격렬한 박동을 느끼며 칠동의 당산나무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배 동무네 사립 왼쪽에는 고추와 숯이 새끼줄에 끼워진 묵은 금줄타래가 걸려 있었다. 안전신호였다. 이지숙은 민첩하게 주위를 살폈다. 의심스러운 인적은 없었다. 그녀는 사립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권 서장은 숙직근무자한테서 라디오의 보도내용을 보고받고 부랴부랴 경찰서로 나왔다. 마음이 다급한 것처럼 생각에도 아무 질정이 없었다. 빨치산만 제거한다고 일이 해결될까, 하는 평소부터 미심쩍고 꺼림칙하게 남아 있던 생각이 들어맞았다는 것만이 분명할 뿐이었다.

"보성에서는 무슨 연락이 없었소?"

권 서장은 라디오에 신경을 모으며 물었다.

"없습니다. 연락을 취해볼까요?"

권 서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관두시오, 기다립시다."

고개를 저었다. 이런 긴급사태에 대비해서 상부에서 어떤 명령하달이 없을 리 없었고,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하부에서 괜히 미리 설쳐 일을 번거롭게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빨리들 출근하도록 연락을 취하고, 김 중사도 이쪽으로 부르시오."

백남식도 떠나 버리고 없는 지금 일개 분대로 줄어든 군 병력도 자신의 지휘책임 아래 있다는 것을 권 서장은 환기하고 있었다. 권 서장은 라디오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내용만 되풀이하고 있는 보도를 그대로 놓고 보자면, 전쟁은 북쪽에서 먼저 도발한 것이고, 그 양상은 전면적이고, 상황은 이쪽이 불리하다는 인상이었다. 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없는 것은, 대통령이 멸공통일. 북진통일을 당당하게 내세운 것이 언제부터였으며, 대통령의 그 힘찬 주장에 발맞추어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 입을 모아, 한시라도 명령만 내리시면 점심밥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밥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있다는 호언장담은 그 얼마나 자주 했던 것인가. 그 장담은 마치 무슨 노랫가락처럼 유행된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북쪽한테 먼저 공격을 당하는 것은 뭐며, 상황이 불리해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국방장관이고 참모총장이고 정작 별다른 실속도 없으면서 대통령이 듣기 좋도록 허풍만 떨어댔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북쪽의 행위를 놓고 '불법남침' 운운하는 점이었다. 주의를 달리하는 두 정권 사이에 상호협약한 무슨 법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런 법이란 애초에 없었던 상태로 이쪽에서는 멸공북진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빨갱이들을 소탕해왔고, 저쪽에서는 공산혁명통일을 내세우며 남쪽의 자기편을 지원하는 상태로 싸움은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불법' 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다급해서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쪽의 멸공북진통일은 '합법'이고 저쪽의 공산혁명통일은 '불법'이라는 것인가. 도대체가 모를 소리다. 불법을 따지자면 이차대전 때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폭격한 경우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쪽에서는 저쪽 공산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따지고 있는 불법인가. 이쪽의 정권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저쪽에서도 이쪽이 북진통일을 감행하는 경우 불법을 따질 근거가 없기는 매일반 아닌가. 그 동안 공산혁명을 하겠다고 태백산맥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파시킨 빨치산과 이번의 도발과는 뭐가 다른가. 수의 많고 적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싸움의 규모가 크고 작음이 다를 뿐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때는 불법이라고 하지 않고 이제 와서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싸움이 크게 벌어졌으면 그에 맞서 싸우는 일뿐이 없지 않은가. 잠꼬대 같은 엉뚱한 소리 지껄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싸움은 총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빌어먹을... 권 서장은 울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라디오 앞에서 돌아섰다.

"서장님, 전화 왔습니다."

권 서장은 바삐 전화기 쪽으로 갔다.

"전화 바꿨습니다. 권 서장입니다."

", 이거 대체 워치케 된 사태요!"

전화기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보성경찰서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던 권 서장은 상대방의 무례함으로 그만 속이 뒤집히고 말았다. 상대방이 유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는 감정이 솟기는 대로 내쏘았다.

", 나 최익달이오."

", 우리도 방송 외에는 더 이상 아는 게 없습니다."

권 서장은 전화를 짧게 끊으려고 이렇게 말을 무질렀다.

"아아니, 고게 무신 무책임헌 소리요. 빨갱이덜 난리가 터졌는디 경찰에서 몰르다니, 고것도 말이라고 허고 앉었소, 시방?"

권 서장은 울컥 솟기는 울화를 애써 억눌렀다. 돈에서 비롯되고 있는 그의 상습적 무례를 견디거나 받아줘야 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갖게 된 당연한 불안감이나 초조감은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경찰인 자신이 갖는 답답함이나 궁금함을 감안한다면 최익달을 비롯한 유지라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지는 충분히 헤아려지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 앞에서 경찰이나 그들이 동일한 표적이기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아, 최 위원장님,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십시오. 우리 경찰이나 유지들이나 좌익 앞에서는 다 똑같은 입장 아닙니까. 난리가 천리 밖에서 터지다보니 아직 구체적인 지시가 없고, 여긴 위험하지도 않은 상태 아닙니까. 아마 상부에서 무슨 지시가 곧 내려올 것 같으니 다시 연락하도록 하십시다."

"서장님 말도 알아듣겄소만, 여그가 위험허지 않다는 말은 틀린 말이오. 산중에 안직도 헌다허는 빨갱이덜이 그대로 살어 있는 판인디, 그것덜이 요 멫달맨치로 가만 있을 성불르요? 때는 요때다 허고 설레발치고 나설 것 아니겄소? 천리 밖에서 진을 친 수많은 빨갱이야 안직 무서울 것 웂이지만 바로 옆구리에 붙어 있는 빨갱이가 문제다 그것이요. 고것덜이 예삿 것들이 아닌디다가, 군인도 수가 팍 쭐어불지 안했냐 말이오."

"그래서 군경은 벌써 비상근무에 들어갔습니다."

"비상근무고 머시고 다 존디, 으쩌요 권 서장님이 보기로는, 빨갱이덜이 여그꺼지 밀고 내레올 것 겉으요?"

"아까 말한 대로 그건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러다가 그냥 쫓겨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고, 어쨌거나 우리 쪽에서 하기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고것이야 봉사 문고리 더듬디끼 허는 소리고, 산중 빨갱이덜언 워찌 움직기릴 것 겉소?“

"아마 무작정 덤비지는 못할 겁니다. 눈치보아가며, 상황에 따라 움직이겠지요."

"그것 참, 농지개혁도 그냥저냥 지내가고, 인자 다리 뻗고 살만 혀졌는갑다 혔등마 요것이 또 무신 일인지 몰르겄소. 좌우간에 빨갱이넌 우리 철천지 웬수요, 웬수."

한숨을 내쉬는 최익달의 말에 맥이 빠져 있었다.

"그럼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요."

권 서장은 전화를 끊는 쪽으로 말을 매듭지었다.

"그리헙씨다, 그나저나 피난얼 가야 헐란지 워쩔란지원."

최익달은 끝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그 말은 권 서장의 가슴에 묘한 느낌으로 엉켜들었다. 경찰이나 유지들은 공산주의자들 앞에서는 동일한 표적이면서 그 행동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경찰은 공산주의자들과 맞서야 하는 의무뿐이었고, 유지라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얼마든지 도망칠 자유가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는 무슨 어려운 문제나 되는 것처럼 그때서야 깨우쳤던 것이다.

"어이 박 순경, 앞으로 보성경찰서가 아니면 전화 바꾸지 마시오."

권 서장은 다시 라디오 쪽으로 가면서 일렀다. 방송에서 알리는 새로운 소식은 없는 채로 유지들의 전화만 줄을 잇대고 있었다. 보성경찰서에서 전화가 온 것은 열시쯤이었다.

"이십사시간 비상근무에 돌입하시오."

남인태의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항은 없습니까?"

"도경의 명령은 현재로선 그것뿐이오. 도경에서도 아직 정신이 없을 테니까 새로운 지시가 있으면 아마 수시로 하달하게 될 거요."

"전황을 뭘 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무래도 간단할 것 같지가 않은데요."

"권 서장, 아무 염려할 것 없소. 간단하지 않으면 제놈들이 뭘 어쩌겠소. 여순반란사건을 좀 보시오. 지금 그놈들 꼴이 어찌 돼 있소? 이번 도발도 여순반란사건이나 마찬가지 결과가 될 거요. 이북 놈들이 직접 일으켰고, 규모가 좀 크다는 차이뿐이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꼭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지가 문제로군요."

"그거야 걱정할 게 없는 문제 아뇨. 미군이 다 알아서 해줄 텐데 무슨 걱정이오. 여순반란사건 때처럼 미군의 화력으로 박살을 내기 시작하면 그놈들 신세도 잠시잠깐이오. 미국을 믿어요, 미국을."

"미국이 또 손을 써준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권 서장, 참 별걱정 다 하시오.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하고는 다르잖소? 얼마나 의리 있고, 인정 있고, 책임감 있소. 우리 경찰들한테 해준 것하며, 빨갱이들을 몰아친 걸 보시오. 이번에도 여순반란을 진압해버린 것처럼 간단하게 해치우고 말 거요. 미국은 문자 그대로 위대한 나라 아니겠소. 그러니까 우린 안심하고 그 그늘에서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예에, 여기 딴 전화가 와서 이만 실례해야 되겠습니다."

권 서장은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머리가 띵한 것을 느꼈다. 자신은 그때까지 미국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미국은 이미 떠나버린 나라로 되어 있었다. 미국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남 서장이 참으로 용하게만 느껴졌다. 공산주의가 싫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에 대해서 남 서장처럼 감지덕지 하고 우러러볼 수는 없었다. 일본에 그랬던 것 한 번이었으면 됐지 다시 미국을 향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족이니 양심이니 하기 이전에 스스로 부끄러워 차마 못할 짓이었다. 남 서장이 미국을 들먹이는 것은 사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이 전혀 엉뚱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어쨌거나 미국이 다시 나서기만 한다면 이번 도발도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될 것 같았다.

난리가 났다는 소문은 점심나절까지 읍내 안통을 휘돌아 남쪽마을로는 된바람이 되어 퍼지고, 북쪽마을로는 마파람이 되어 퍼지고, 동쪽마을로는 하늬바람이 되어 퍼지고, 서쪽마을로는 샛바람이 되어 퍼져나갔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그것을 놓고 입을 모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워낙 놀라운 소식이기도 한데다가,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없는 성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사상문제 하면 좌익을 떠올렸고, 좌익 하면 아는 척도 들은 척도 본 척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못 박혀 있었다. 똑똑한 사람치고 좌익 안한 사람없고, 좌익 안 해가지고는 똑똑하다는 말 못 듣는다는 말은 해방이 되고 얼마 동안까지만 통한 말이었고, 경찰에서 본격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한다면서 부터는 좌익해서 남아나는 집 없고, 좌익해서 목숨 부지하는 사람 없다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간에 좌익에 관한 것이면 일체 내색을 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묵계되어 있었다.

 

이지숙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한편으로 경찰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며 하루를 보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것이 아무래도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내세운 것과는 달리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줄기차게 의심했고, 감시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 동 단위로 모이게 해서 점검을 했고, 예고 없이 찾아들어 이런저런 흰소리를 지껄이다 가고는 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애병원 전 원장을 대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큰 괴로움이었다. 언제나 목례만 했을 뿐 그런 감정표현을 물론 말로 하지는 못했다. 전 원장은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돌아가고는 했다. 도저히 공산주의자일 수 없는 전 원장을 그들은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그냥 둘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자기네들에게 불리해지면 반드시 보복행위를 취할 것 같았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지숙은 자정을 넘겼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안창민의 소식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에 보도연맹 가입자들 소집이 있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읍내 전체 가입자들을 남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동네별로 줄을 선 사람들은 팔십여 명이었다. 모두 침울하거나 불안한 얼굴들이었다. 이지숙은 먼발치로 소화를 찾아냈다.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은 그녀는 다소곳이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목하 야기된 긴급사태 때문입니다. 어제 삼팔선 전역에서 남침을 도발한 북괴군들은 지금 현재도 쏘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우리 자유대한의 땅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상시국에 처하여 여러분들은 추호도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것이며, 과거의 죄를 일소하여 불문에 부친 조국의 은전에 재삼 감사하면서, 북괴도당을 물리치고 자유대한이 승리할 수 있는 애국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며..."

권 서장의 목청 돋운 연설이었다.

"...우리는 조국 대한민국이 베풀어준 은전에 대하여 골수에 사무치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멸공전선에 용맹스럽게 나서 북진통일을 완수하고,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는 그날까지 분골쇄신 충성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우리 다 같이 만세삼창을 합시다!"

보도연맹위원장 문기수의 핏발 세운 낭독이었다.

"대한민국 만세!"

문기수의 선창에 따라 팔십여 명은 만세삼창을 하고 있었다. 이지숙은 소화를 알은 체하지 않고 운동장을 벗어났다. 전 원장에게도 처음부터 눈길을 보내기 않았다. 보도연맹의 소집은 생각보다 빨랐고, 좋지 않은 예감은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지숙은 대문의 네모난 기둥 왼쪽 면을 살펴보았다. X표지가 새로 그러져 있었다. 지령이 있으니 선을 대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되돌아서 칠동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보도연맹 위험, 선 따라 입산 요망.’

배 동무가 곰방대 물부리 속에서 꺼내준 종이에 적힌 안창민의 글씨였다. 이지숙은 종이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며 가슴 뭉클해오는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 생각의 일치가 순간적으로 유발시킨 감정의 떨림이었다. 그 일치는 군당위원장의 직무수행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바다를 이처럼 격렬하게 출렁거리도록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요, 그러잖아도 당신을 찾아가려 하고 있었어요.’

이지숙은 일부러 '당신'이라고 해보며, 자신의 말에 부끄러워져 자신의 가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투쟁생활이 피로감과 함께 긍지감을 갖게 했다.

"이삼일 안으로 다시 선을 대겠어요."

씹고 있던 종이를 뱉아 낸 이지숙이 말했다. 이지숙은 오리가 넘는 길을 걸으면서도 전 원장을 찾아갈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창민을 살려준 은혜를 생각하면 찾아가서 피신을 권유해야 했다. 그러나 전 원장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쪽의 신분만 노출시키는 결과가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찾아가는 것 자체를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 어떤 피해를 당해버리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었다. 이지숙은 전 원장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다만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눈치껏 말을 하기로 했다. 전 원장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신으로서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 것이다. 치료해주고, 재판을 받는 고초를 겪고, 그것도 모자라서 보도연맹이라는 것에까지 강제로 받는 끌려 들어간 전 원장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막혔다.

"원장님 바쁘신데 몇 말씀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전세는 어제보다 더 나빠진 것 같은데, 전세가 자꾸 나빠지면 경찰에서 보도연맹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요."

이지숙은 전 원장을 쳐다보며 말을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전 원장이 오히려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말보다는 얼굴로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긴요."

전 원장은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자기 마음 같이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장님,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원장님 앞에서 주제넘은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꼭 무슨 보복을 할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듭니다."

"그러세요?"

전 원장이 이지숙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약간 놀란 기색이 드러났다.

", 무슨 근거가 있는 생각은 아니지만, 겁을 먹고 한 생각도 아닙니다."

전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숙이 겁먹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같이 재판을 받으며 알았던 것이다.

"보복이라면...?"

전 원장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전시의 보복은 죽이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지숙은 일부러 차갑게 말했고, 전 원장은 그녀를 놀란 듯 다시 쳐다보았다.

"그 많은 사람을 그럴 수 있을까요? 이제 좌익도 아닌 사람들을."

"원장님께서는 경찰이 보도연맹 사람들을 전적으로 믿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까지 계속 의심하고 감시해왔지 않아요. 그들은 보도연맹 사람들이 언제라도 좌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원장은 어두워진 얼굴로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걸 알려줘서 고맙소."

이지숙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일어섰다. 전 원장은 말없이 이지숙을 배웅했다. 이지숙은 전 원장에게 피신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전 원장은 이지숙에게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을 묻지 않았다. 이지숙은 그길로 소화를 찾아갔다.

"어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피할 데가 없나요?“

"무신 말씸이신지?"

소화는 금방 겁이 실린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보도연맹에 가입된 게 위험해요. 한 이삼백 리 밖에 몸을 피할 데가 있으면 피해야 되겠어요."

"워치케 위험헌디요?"

"잘못하면 죽게 돼요."

이지숙은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워메, 그런 소문이 났등가요?"

"아니, 나 혼자 생각이에요."

"하메 그럴란지도 몰르제라."

소화는 창백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글먼 선생님도 항꾼에 가시는가요?"

기대에 찬 눈길을 보냈다.

"아니에요. 이런 때 서로 짐이 되면 안돼요. 소화 씨는 나 아니라도 식구가 넷이에요."

"들몰댁은 가입이 안 됐는디도 떠야 허는가요?"

소화 씨가 자취를 감추면 들몰댁이 끌려가 얼마나 고생을 하겠어요."

"그렇구만이라."

"여유가 없어요. 내일이나 모레, 이틀 사이에 피하도록 하세요."

처음에는 함께 입산할까 했었지만 두 아이들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먼, 은제꺼정 피해 있어야 헐께라?"

"인민군이 여길 해방시키면 바로 돌아오세요."

이지숙이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그리 될께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이지숙의 말은 단호했고, 소화는 그 단호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근디, 딴 사람은 몰라도 의사선생님만은 피허시게 혀얄 것인디요."

"병원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에요."

"워메, 고맙구만이라."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정하섭을 치료해준 그 은공은 평생토록 갚아야 될 고마움으로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시골도 괜찮지만 광주 같은 도시도 좋을 거예요. 여러 가지 소식을 빨리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찬찬허니 생각혀보겄구만요. 근디, 선생님은 가실 디 정허셨는게라?"

"오늘 저녁 안으로 정해야지요."

서로를 위해서 그렇게 대답했다.

"피허기 전에 또 만낼 수 있을랑가요?"

"아니에요, 자주 만나는 건 위험해요. 만나는 건 이것으로 끝내는 게 좋을 거예요. 짐 같은 건 크게 싸들지 말고, 누구 눈에나 나들이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세요. 네 식구가 한꺼번에 움직이지도 말구요. 그만 가봐야겠어요. 모든 걸 잘 알아서 하세요."

이지숙의 소화의 손을 잡았다. 소화는 손을 맞잡으며 일어섰다.

"무사허시씨요."

"소화 씨두요."

 

유월 하순의 비가 어둠속에서 억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비오는 밤이나 눈 내리는 밤이나 눈 내리는 밤의 어둠은 유난스레 짙게 마련이지만, 거칠게 퍼부어대는 빗줄기 소리가 요란해 어둠은 더욱 진하게 장막을 친 것 같았다. 자정을 넘기고 이십팔일이 시작되어 두 시간 반이 지나고 있는 시각이었다.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 굉음이 뒤따랐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고 있었다.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시간에 김범우는 손승호와 마주 앉아 있었다. 손승호는 어제 점심나절에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인민군의 선발 탱크부대가 형무소 문을 밀어붙인 것이다.

"내일 이 선배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나?"

꽁초 서너 개를 까서 신문지 쪽에 말며 김범우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손승호는 그 동안 많이 말라 광대뼈가 불거지고 볼이 패어 있었다. 그러나 얼굴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탄력이 느껴졌다. 김범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옆눈길로 손승호를 보았다. 그의 눈이나 얼굴에는 무슨 끈끈한 기름처럼 피곤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잘 기미를 보이지 않고 무엇을 응시하듯이 앉아 있었다. 그는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 잡혀 들어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심적 변화를 일으킨 것만을 확실해보였다. 그는 성급하게도 이번 전쟁의 의미를 규명하려고 들었다. 물론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입장에서였다. 그런 손승호의 모습은 전향했던 고향에서의 손승호가 아니었다. 물론 손승호의 태도 변화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교직을 떠날 생각을 했고, 보도연맹 가입을 피해 고향을 등졌고, 서울생활을 새롭게 체험했고, 잡혀 들어갔고... 그의 속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만큼 헤아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 묻지는 많았다. 급변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신의 머리부터 혼란했기 때문이었다. 묻지 않아서 그런지 그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만 자세. 너무 피곤해보여."

김범우는 담뱃불을 껐다.

"자야지, 내일이 또 있으니까."

손승호는 무슨 생각에서 깨어나듯이 하며 앉음새를 고쳤다. 김범우는 바지를 벗고 호롱불을 껐다. 그리고 방문에 쳤던 담요를 떼 내고 방문을 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밤이 깊어지자 방문에 담요를 쳤던 것이다. 일제시대부터 몸에 익은 방어습관이었다. 깊은 밤의 시원함과 함께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김범우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 이제 어떻게 되려는가. 곧 말이 되어 나올 것처럼 그 생각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깊게 들이켠 숨은 한숨으로 변해 나왔다. 김범우는 자리에 누웠다. 빗소리에 섞여 또 총소리가 들렸다. 이 비오는 깊은 밤에도 전쟁은 진행되고 있었다. 날이 새면 서울은 인민군이 완전히 점령하게 될 것이다. 회사는 오늘 오전, 아니 시간을 정확하게 따져 말하자면 어제 오전에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접수된 외신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군에 원조를 하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미국의 참전을 의미했다. 짧은 시간 동안에 기자들의 찬반이 격렬하게 엇갈렸다. 그 논쟁은 이번 전쟁의 견해 차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 다음 소식이 정부의 대전 이전이었다. 회사가 하루를 다 채우지 않고 부리나케 문을 닫은 것은 그 소식의 충격 때문이었다. 서너 시간 전까지도 회사에서는 '국군이 서울을 사수한다'는 소식을 각 신문사에 응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는 문을 닫으면서 '각자가 알아서 행동하라'고 했을 뿐이다. 정부는 서울을 포기하고 시민을 버렸고, 회사는 통신 업무를 포기하고 기자를 버렸다. 그런데도 '서울사수' 방송은 하루 종일 계속되고 있었다. 쫓겨나듯이 회사를 나왔을 때 시내의 모습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장병들의 부대복귀를 외치고 다니던 군용차량들이 보이지 않는 대신 어제까지는 눈에 띄지 않던 피난 짐을 싼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불안한 기색을 완연히 드러냈고, 문을 닫은 가게들도 꽤나 많은데다가, 은행 앞에서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은행에 돈을 맡겨두고 살 만한 형편인 그 사람들은 이번 전쟁을 필히 피해야 될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각자가 알아서 행동하라'는 무책임에 대해서 스스로를 책임질 행동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지 못할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니었고, 손승호를 만나지도 못한 채로 서울을 허겁지겁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손승호도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세상이 달라지려 하고 있다. 역사가 바뀌려 하고 있다. 역사가 세 번째로 요동치려 하고 있다. 해방이 되었고, 남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섰고, 이제 그것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전면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보다 먼저, 유엔의 이름을 앞세운 미국의 참전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신탁통치의 권한은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아니, 신탁통치 기한이 오 년이었으니까 아직 잔여기간이 남았다고 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이 도움을 청해서 그것에 근거하는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남쪽 사람들 절대다수가 이번 전쟁은 민족 자체의 문제니까 개입하지 말라고 의견을 모으면 미국은 어떻게 할까. 참전을 중단할까? 포기할까? 아닐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뜻을 가차 없이 묵살하고 참전을 감행할 것이다.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화하여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당초의 계획을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철저한 실리추구의 자본주의 계산법에다가, 이차대전에 이겨 세계최강이라는 권위주의 자만심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그 동안 남쪽에 한 투자를 포기할 리가 없고, 자기네의 권위를 심은 땅을 남이 넘보게 방관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군정기간을 통하여 공산당을 철저히 파괴하고, 친일반민족세력을 철저히 옹호함으로써 자신들의 실리추구와 권위주의 실천을 얼마나 잘 증명해보였던 것인가. 그때 이미 남쪽사람들의 의사는 가차 없이 묵살되지 않았던가. 친일반민족세력의 옹호에 대하여 당사자와 그 가족을 빼놓고 모든 사람들의 반발과 항의가 그 얼마나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어났던가. 그러나 끝내 친일반민족세력의 정권은 세워지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미국은 자기네의 이익을 지키고, 충복인 그들을 다시 보호하기 위해서 참전할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미국이 참전한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김범우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바윗덩이가 얹히는 것처럼 답답했다.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별로 덥지도 않은데 땀이 끈적거렸다.

비는 말끔히 개어 있었다. 집안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화단의 화초들은 싱싱한 생기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하숙생들로 아침이면 시끌덤벙하던 집안이 절간 같은 적막에 싸여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숙생들은 소리 없이 변소를 오갔고, 세수들을 했고, 방마다 밥상이 들고났다. 모든 것은 전과 같이 움직여지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에서 소리가 제거되고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전쟁의 한 모습이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김범우와 손승호는 집을 나섰다. 큰길로 나와 가게에 들어간 김범우는 담배부터 샀다. 담배가 진작 떨어지기도 했지만 전화를 빌려 쓰기 위한 비위맞춤이었다. 이학송은 고참 기자답게 귀한 전화까지 회사에서 가설해주고 있었다.

"이 선배님이십니까, 저 김범웁니다."

", 김 형! 그 동안 어찌 지냈소, 별일 없지요?"

그동안 고생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이학송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차암, 제가 할 인사를 그렇게 급하게 하실 건 뭡니까."

이학송이 껄껄거리고 웃었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좋아요, 경찰서에서 맞은 것 형무소 밥으로 다 치료했소."

"손 형이 어제 서대문에서 풀려난 걸 보고 선배님도 나오신 걸 알았지만 일부러 연락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손 형이 서대문에서 풀려나다니?"

"도통 면회가 안돼서 소식을 전하지 못했었는데,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손 형과 함께 뵙고 싶은데 시간이 어떠십니까."

"만납시다. 시내 돌아가는 걸 보려던 참이었으니까. 보신각 뒤 그 다방에서 봅시다."

김범우는 가게를 나서며 담배를 빼 물었다. 기다리고 있던 손승호가 불쑥 말했다.

"자네 짐작이 맞네, 어젯밤에 한강다리가 끊겼다는군."

"그거 난리 났군."

성냥을 그어대며 김범우는 코웃음 섞어 말했다.

"뭐가?"

"뭐긴 뭔가,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사람들 말이지. 전국적인 비율로 따져보자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이 제일 많이 못자리판을 이룬 곳이 서울 아닌가. 그런데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해놓고 갑자기 다리를 끊어버렸으니 그 사람들 다 독 안에 든 쥐가 됐으니 말야."

"잘된 일이지 뭐. 그래도 빠져나갈 놈들은 다 정부 따라 빠져나간 거 아닌가."

전과 다른 손승호의 모습을 김범우는 또 느끼고 있었다.

"그래 봤자 그 숫자는 얼마 안 될 거네."

"서울 못 떠난 놈들은 지금쯤 이승만한테 욕을 퍼부어대며 한강으로 몰려나가고 있겠군."

손승호가 코웃음 쳤다.

"가면 뭘 하나, 한강이 개울이 아닌데."

"저기 한 집이 도망치고 있구먼."

손승호가 턱으로 가리킨 쪽에는 피난 짐을 이고 진 한 가족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저래가지고 언제 한강까지 가겠나. 어쨌거나 이북에서 그랬던 것처럼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용납하지 않을 테니 서울에서 일어날 인명피해가 극심하게 생겼어."

"자네 지금 인명피해라고 했나? 마땅히 죽어야 될 놈들을 죽이는 건데 피해는 무슨 피해란 말인가."

"너무 그리 들이대지 말게, 내가 민망해지네. 그자들을 편들자는 게 아니라 상황을 말한 것뿐이네."

손승호가 저리도 격렬해질 만큼 이번에 잡혀 들어가 못 당할 일을 당한 게 분명하다고 김범우는 생각했다.

"자넬 민망하게 만들자는 게 아니라, 이번 전쟁은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민족통일을 달성하려는 세력과 친일민족반역으로도 부족해서 다시 나라를 팔아먹고 있는 신식민주의자들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네."

"그게 자네가 정의한 이번 전쟁의 의민가?"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좋은데, 너무 민족 내부문제로 국한시켜 보는 것 아닌가? 우리를 강제로 분단시킨 미쏘의 책임과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당연하지. 그건..."

"그만하세. 길바닥에서 길게 할 얘기가 아닌 것 같네. 이따가 이 선배 만나서 계속하세."

"그러지."

손승호는 손바닥으로 입을 훔쳤다. 그 몸짓에서 김범우는 보도연맹가입을 피해 자신을 찾아들었을 때의 손승호를 떠올렸다. 서울로 도망쳐온 경위를 대충 이야기하고 나서 그는 그때도 입을 야무지게 훔쳤던 것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심정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부양가족이 많은 형편에 직장을 버리고 친구 하나만을 믿고 서울로 피신을 하면서 남달리 생각이 많은 그가 얼마나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인가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시내는 인민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원남동 로타리에서부터 탱크와 인민군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억새풀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으로 위장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의 모습에서 전장의 폭음과 화약 냄새가 그대로 느껴져 왔다. 김범우의 의식 속에서는 아무 시차 없이 미얀마 전선이 다가들었고, 이 전쟁에서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또 고개를 들었다.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개라도 한 마리 잡아야 되겠는데요."

김범우는 이학송에게 인사했다. 이학송은 그 좋던 얼굴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좋지, 보신에야 개장국 당할 게 뭐 있겠소. 더구나 여름인데. 그런데, 손 형은 어떻게 된 일이요, 도대체."

이학송은 대뜸 손승호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 그게 일종의 필화사건인데요..."

손승호는 될 수 있는 대로사건 내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나갔다.

"...결국 저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그자들이 작성한 조서에 지장을 눌렀습니다. 그래서 출판사는 남로당 비밀 아지트로 둔갑하고, 저는 남로당 프락치가 되어 서대문으로 넘어갔습니다. 사장님도 지장을 찍은 걸 보면 고문을 더 당할 필요 없이 재판에서 진술을 번복하려 했거나, 아니면 고문으로 자포자기했거나, 둘 중의 하날겁니다. 재판을 기다리다가 어제 나오게 된 겁니다."

"그것 참, 이 시대의 전형적인 조작극이로군요."

이학송은 쓴 입맛을 다시고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 온갖 방법의 고문 앞에서 휘이거나 꺾이는 것, 그건 분명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한 굴욕이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자기혐오를 일으키는 괴로움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그건 패배는 아니다. 이학송은 자기도 전향서를 썼다는 말을 차마 하기가 어려웠다.

"이 선배님, 이렇게 말씀드리면 손 형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손 형은 이번 사건으로 생각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전의 탈사상적이랄까, 순수 인간주의랄까 하는 입장에서 또다시 좌파의식으로 돌아선 게 아닌가 합니다. 전향에서 재전향이라고나 할까요.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민족통일 추구세력과 친일민족반역자에서 신식민주의자로 바뀐 매국적 세력과의 싸움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적극적 입장이 됐습니다. 손 형의 태도에 대해서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승호가 이학송을 만나고자 한 뜻을 헤아려 김범우는 대신 말을 했고, 손승호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칠한 채 듣고만 있었다.

"허어! 손 형은 이번 전쟁을 그렇게 보시오?"

이학송은 손승호를 이윽히 쳐다보았고, 손승호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흘렸다.

"손 형의 생각은 어느 국면의 정곡을 찌른 판단인 것 같소. 내 생각으로는 이번 전쟁의 양상이랄까, 이유 그리고 목적 같은 것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복잡한 점이 많이 있소. 지금은 해방직후의 단계가 아니고, 양쪽 정권이 수립되기 직전의 단계도 아니고, 서로 적대하는 두 정권이 나름대로 기반을 구축한 단계이기 때문이오. 그러니까 보는 각도에 따라, 관점의 차이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게 되어 있소. 그러나 보다 올바른 판단은 있게 마련이고, 착오를 줄이고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주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소. 먼저, 우리를 분단시키고 오늘의 대립상황을 주도한 미쏘를 주체로 하는 시각인데,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대립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우리는 그들의 냉전을 실전으로 대신 싸울, 왈 이데올로기 대리전쟁이라는 판단이오. 미쏘의 관계와 우리의 분단현상과의 관계에서 볼 때 아주 그럴듯한 판단이 아닐 수 없소. 그러나 그 판단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아무 뜻도 생각도 없는 바보나 천치로, 그야말로 괴뢰 노릇이나 했다는 뜻이 되오. 물론 그 판단에는 두 나라에게 이 땅의 강점과 분단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 민족을 스스로 비하시키고 모멸하고, 민족의 삶이나 존재를 부정하는 허점을 가지고 있소. 그와는 달리 우리 자신을 주체로 하는 시각인데, 그러자면 해방의 시점을 연장해서 우리를 보아야 할 것이오. 해방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커다란 역사변동의 계기나 전환점인 것이 분명했는데, 미쏘가 강점하지 않고 해방을 맞이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요. 사회혁명이나 사회개혁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었소. 그것은 계급적으로 지주 제도를 척결하는 것이었고, 민족적으로 친일반민족세력들을 처단하는 것 아니었겠소. 그런 역사적 욕구 앞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건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이 없소. 그 욕구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데올로기로 채택되고, 빛을 내게 되어 있소. 그런데 그 욕구가 강대국 점령 하에서 중단되고 좌절된 것이 바로 남쪽 땅이오. 그 욕구는 어쩔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숨을 죽인 것이지 소멸되거나 해손된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가 설득력을 잃고 불신의 대상이 된 것에 반해 사회주의는 상대적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소. 그런 상태로 두 정권은 대치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실현을 위해 '통일'을 우선과제로 내세우게 되었소. 한쪽은 무조건 공산주의를 없애자는 통일이고, 다른 쪽은 사회혁명을 이루자는 통일인데, 어느 쪽이나 그 방법으로는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었소.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소. 미국이 아니었으면 해방이 되고 깨끗하게 처단 당했을 자들에게 미국이 국가정치권력을 만들어주고, 무장을 시켜주고 해서 이제 그 반민족세력들이 제 놈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오히려 민족을 강제동원해서 제물로 써먹게 되었다 그것이오. 그리고 그놈들의 권력을 무너뜨리기까지 무고한 민중들이 수없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소. 이것이 다 미국이 저지른 죄요.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피를 흘리더라도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오. 이번 전쟁은 우리 민족의 삶에 박힌 모든 갈등과 모순을 일소시키기 위해서 외세와 반민족세력을 동시에 척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오."

김범우는 이학송을 그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학송은 손승호보다 한 술 더 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선배님은 어쩌겠다는 겁니까?"

우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김범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취할 입장도 함께 말이 된 것 같은데..."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이학송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명이고 우둔이고가 없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요?"

"얘기 서두에서 말했지만 지금은 해방직후도, 두 정권수립 직전도 아니오. 제삼의 입장이란 있을 수 없소."

김범우는 가슴이 막히는 걸 느꼈다.

"미국이 참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더욱 내 입장은 분명해지오."

"전쟁이 어떻게 되다니, 질 게 뻔하니까 좌에 서지 말라 그 말인가? 그거야말로 기회주의적 결과론이네."

손승호가 정면으로 내쏘았다.

"아니, 자넨 왜 그리 달라졌나. 도대체 알 수가 없어."

김범우는 참아왔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글세 뭐라고 할까, 변한 게 아니라 저 멀리 가 있던 생각을 가깝게 끌어당긴 것뿐이네. 난 일방적 반공교육을 시키면서 괴로움을 당하기 시작했고, 내 생각이 환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했네. 그러면서 교직을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커져갔지. 그 고민을 자네한테 비쳤는데, 기억하나 몰라. 그 생각이 커져가면서, 서로 맞선 두 정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난 어느 편에 서야 하나 하는 구체적인 고민까지 하게 됐지. 그 말을 자네한테 물으려다가 그만뒀었지. 그리고 보도연맹 때문에 서울로 도망 오며 그 구체성은 더 강해졌고, 이번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내 생각의 잘못과 내가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게. 아니야, 정하게 되었네. 그것이 뭔 줄 아나? 나를 고문하는 형사 놈을 향해, 네놈 같은 민족반역자를 한 놈만 죽이고 나도 죽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겠다는 치떨림이었네. 단순하고 유치한가? 그러나 명쾌하고 확실하네. 관념이 아니고 체험이니까. 그 결심을 지킬 좋은 기회가 온 거네."

김범우는 손승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신명에 찬 손승호는 한 십 년쯤은 더 젊어 보이는 것 같았고, 책을 탐하던 그가 새로운 지식을 얻을 때면 얼굴이 상기되곤 했던 사범학생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범우는 손승호에게도, 이학송에게도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손승호의 경우는 그의 말마따나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었고, 이학송의 경우는 그 나름의 논리에 빈틈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제삼의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무서운 데가 있었다. 그 말은 다른 말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김범우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한강다리가 폭파됐는데 서울은 어찌 되겠습니까?"

손승호가 이학송에게 물었다.

"이승만이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인데. 글쎄요, 인민군 입장에서는 좋고도 나쁘게 된 게 아닌가 싶소. 전국에서 집합해서 드글거리고 있는 친일반역세력들의 발을 일시에 묶게 된 것은 좋을 것이고, 얼마동안이라도 전진이 중단된 것은 나쁘고, 그렇지 않겠소?"

"그런데, 서울에 몰려 있는 친일반역세력들은 얼마나 되고, 그것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요?"

"손형이 아주 심각한 문제에 관심을 두는군요. 글쎄요, 나도 오래 전부터 서울에 몰린 친일반역세력들이 대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고는 했었소. 한마디로 서울은 친일반역자들의 도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거요. 서울의 구조를 따져보고, 사건들을 점검해보면 그 답은 금방 나오게 되어 있소.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수도였으니 정치 도시고 양반도시고 소비도시였소. 그 양반님네들이 경복궁 가까운 팔판동, 제동, 가회동, 안국동, 인사동까지 자리 잡아 양반동네를 이루었고, 그 아래 종로통을 중심으로 그들의 소비생활을 받치고 있는 상인들이 자리 잡았소. 그런데 일정시대가 되잖았소. 일본 놈들은 경복궁 안에다가 총독부 건물을 들어앉히고는, 옛날 양반들과 맞대거리라도 하겠다는 듯 북악산과 맞바라보고 있는 남산 아래 필동, 회현동부터 시작해서 반원을 그리며 원효로, 만리동, 효자동까지 진을 쳤고, 그들의 상권은 을지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소. 필동에서 효자동까지 적산가옥이 그리 많은 게 그 까닭이오. 그런데, 일본 놈들은 조선시대가 무색하게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했고, 그 바람에 양반님네들은 나라 팔아먹고 대신 얻은 감투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관리생활을 거의가 했소. 거기다가 출세욕을 가진 지방 지주나, 그 자식들이 또 하나 부자촌을 만들었는데, 그게 명륜동이고 혜화동이오. 그들이 서울 양반동네 옆으로 자기네들 집을 이어붙인 게 재미있소. 순경이나 여러 종류의 하급관리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것이고. 해방되기 직전까지 그 인구가 대략 오십오만 정도였는데, 해방이 되고 사십칠년 중반까지 그 배 이상이 늘어나고 말았소. 귀환동포, 지방의 상경자 등도 있지만, 그 절대적인 수는 오십만이 넘는 월남자들이었소. 우리가 친일반역자들은 그때 모두 몰려 내려온 셈이오. 물론 그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몇 퍼센트는 있소. 자아, 이렇게 볼 때 현재 서울 인구 백사오십만 중에서 친일반역자 아닌 깨끗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어림잡아 친일반역자들이 반을 넘지 않을까싶소. 그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건 앞으로 두고 볼 일이오."

이학송이 물 잔을 들었다.

", 중대한 문제로군요."

손승호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좀 가볼 데가 있는데, 우리 또 만나기로 합시다."

이학송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손승호가 말했다. 자기와 이학송 사이를 손승호가 비집고 끼어든 것 같아 김범우는 서먹한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밖은 여름햇살이 따가웠다. 시가지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가전을 치르지 않은 도시는 부서진 곳 없이 말짱해서 건물들만으로는 전시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시는 역시 전시였다. 사람들의 두서없는 듯한 발걸음, 불안하고 두려움에 찬 눈빛, 문을 닫은 상점들, 평소보다 많이 줄어든 행인들, 그런 것들이 합쳐져 썰렁하고 휑뎅그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민군 병사 이십여 명이 두 줄로 발을 맞춰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손승호는 그 낯선 복장의 군인들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김범우가 물었다.

"당장 할 일이 없으니 집으로 가야지."

두 사람은 안국동 쪽으로 길을 건넜다. 그들이 집에 도착해보니 송경희가 와 있었다.

"선생님!"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는 그들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듯이 하며 내달아왔다. 그녀는 김범우 앞에 우뚝 멈춰서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어깨가 들먹거렸다.

"어쩐 일이오?"

김범우는 난처한 눈길로 손승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손승호는 씨익 웃고는 관심 없다는 듯 발을 옮겼다.

"선생님, 절 좀 도와주세요."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울음 섞여 말했다.

"뭘 말이오?"

"한강다리가 끊겼어요."

김범우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하늘로 들었다. 그러니 한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말인 것이다.

"덥소,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김범우는 이상하게 짜증이 나는 것을 꾹 누르며 앞장섰다. 짜증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 그녀를 짜증받이로 삼으려 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송경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문 옆에 앉았다.

"다리가 끊긴 건 나도 아는데, 내가 도울 방법이 막연하잖소."

"선생님, 절 도와주실 분은 선생님밖에 안 계세요."

송경희는 눈물로 붉어진 눈으로 목소리보다 더 절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친척집에 있다면서 거긴 어떻소?"

"밥하는 노인네하고 중학생 둘뿐예요."

"대학생 동생은 어떻게 됐소?"

"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걸 보고 이리 왔어요." “

저런 못된 사람이 있나. 누나를 떼놓고 혼자 가 버리다니."

책을 뒤적이고 있던 손승호가 불쑥 말했다.

"그게 아녜요. 혼자 안 가겠다고 하는 걸 제가 막 물속으로 밀어 넣었어요. 난 김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건널 테니까 먼저 떠나라고 한 거예요. 동생은 그 말을 듣고서야 떠났어요."

김범우는 자신도 모르게 올가미가 씌워진 것을 느꼈다.

"왜 꼭 서울을 떠나려고 그러오?"

"어머 선생님, 서울은 빨갱이 세상이잖아요!"

김범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승호를 보았다. 손승호는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한강은 폭이 넓은데다 곳곳에 물살이 세서 내 힘으론 돕기가 어렵소. 딴 데 도움을 청할 데가 없으면 그냥 서울에 있으시오."

"선생님, 거짓말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수영을 얼마나 잘하시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만성리 앞바다에서 학생을 둘이나 구해내셨잖아요. 선생님은 우리 여학생들의 호프였어요. 동경이었구요. 그리고 전 빨갱이는 죽어도 싫어요. 그것들 생각은 무경우하고 뻔뻔스럽고, 하는 짓은 징그럽고 더러워요."

"이봐 학생, 무슨 말을 그리 막하나."

손승호가 책을 탁 덮으며 송경희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제가 무슨 말을 막했어요.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예요. 그게 무경우하고 뻔뻔스럽지 않으면 뭐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왜 자기들 멋대로 죽이는 거예요. 그 짓이 징그럽고 더럽지 않단 말예요? 염상진 제까짓 게 뭔데 우리 아버질 죽여요. 우리 아버지가 제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빨갱이는 제 평생, 아니에요, 우리 식구 평생 원수예요."

송경희의 곱상하게 생긴 얼굴은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손승호는 눈길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김범우는 또 하나의 선우진을 보고 있었다.

"어이 범우, 저 학생은 구제불능일세. 새로워진 서울에서 단 하루도 더 살 자격이 없네. 날도 더운데 수영도 할 겸 당장 건네다 줘버리게."

손승호의 화난 목소리였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사상이 아주 불온하시군요."

"어허,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오."

김범우는 엄한 얼굴로 송경희를 꾸짖고는,

"한강은 어떤 형편이었소?"

말을 바꾸었다.

"네에, 사람들은 몰려들어 들끓는데 배는 없었어요. 젊은 남자들은 더러 동생처럼 헤엄을 쳤구요. 강 복판에서 떠내려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 것 말고, 도강을 막는 경비 같은 건 없었소?"

"그때까진 없었어요."

"어디, 건너보도록 합시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송경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잡으며 몸을 떨었다. 미모의 얼굴에 감격스러움이 넘쳤고, 김범우를 바라보는 눈에는 야릇한 빛이 타고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는데도 뚝섬에 다다랐을 때는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잘생긴 미루나무들이 큰 키를 자랑하며 강변 언덕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었고, 넓은 남새밭이나 참외밭 사이로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농가에서는 전혀 전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강변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인도교 가까이나 마포강변으로 몰려든 것이 분명했다. 시내 중심에서 보자면 그곳이 거리가 가깝기도 했다. 김범우 자신이 직선거리를 따져 뚝섬으로 나온 것처럼. 김범우는 모래밭을 걸으며 강 건너편을 살펴보았다. 회색빛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어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지막한 산들만이 윤곽이 잡혔다. 김범우는 물가에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깊이 빨며 도착지점을 대각선으로 눈짐작하고 있었다. 물 흐름을 따라 헤엄치다 보면 현재의 위치보다 꽤나 아래 지점에 당도하게 될 터였다. 혼자 헤엄을 치더라도 물살에 밀리게 마련인데 수영을 못하는 여자를 달고 헤엄을 치자면 물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헤엄은 좀 칠 줄 아오?"

"아니에요, 멍청이에요."

"벌교 사람답지 않게 어쩐 일이오. 포구를 옆에 끼고 살았으면서."

"그냥 들어갔다 나왔다만 했지요."

"바닷물에 목욕만 하신 모양이군."

"여자들은 다 그런 걸요."

"물을 뜰 수는 있소?"

"머리까지 넣으면 떠요."

"그나마 다행이오. 준비합시다."

김범우는 꽁초를 모래밭에 찌르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훌렁훌렁 옷을 벗기 시작했다. 몇 개 입지 않은 여름옷이라서 곧 팬티만 걸친 김범우의 알몸이 드러났다. 근육이 요란스럽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건장한 체구였다. 그는 바지에서 혁대를 뽑아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옷가지들을 왼쪽 옆구리의 혁대에 끼워 넣었다.

"자아, 이거 봐요. 여길 꽉 잡아요."

김범우는 오른쪽 옆구리 혁대를 잡아 늘여 보이며 송경희를 쳐다보았다.

"전 어떡해요."

송경희는 운동화까지 그대로 신은 채로 서 있었다. 그녀는 후레아 원피스 차림이었다.

"머리나 바짝 묶고, 운동화나 벗어요."

그녀는 김범우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의 운동화도 김범우의 왼쪽 옆구리에 매달았다.

"자아, 겁먹을 것 하나도 없이 여기만 잡고 있으면 돼요. 놓치지만 않게 잡으면 됐지 너무 힘줘서 잡을 필요도 없어요. 괜히 몸만 굳어지니까. 숨만 여유 있게 쉬면 다 물에 뜨게 돼있어요. 그 뭉툭한 발을 가지고 개나 돼지도 헤엄을 치니까, 거기에 비하면 사람의 손발은 헤엄치기에 아주 적합하게 돼 있는 거요. 모든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겁먹을 것 하나도 없어요. , 가봅시다."

김범우는 물을 첨벙거리며 강으로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듯 하던 송경희도 옷자락을 여미며 발을 물속에 넣었다. 어둠은 더 진해져 있었다. 물이 배꼽 짬에 차오르자 김범우는 걷기를 멈추었다.

"이제 여기 잡아요."

김범우는 혁대를 잡아당겨 손 넣을 공간을 만들며 송경희를 쳐다보았다. 김범우보다 키가 작은 송경희는 가슴 가까이까지 물에 잠그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주저하며 혁대를 잡았다.

"자아, 갑니다아."

김범우는 몸을 물에 띄웠다. 송경희도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들이켰다. 어둠 저편 멀리서 총소리가 먼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신호탄이 어둠 속에서 꽃처럼 고운 빛깔로 피어나고 있었다. 인도교 쪽이었다. 김범우는 물흐름을 따라 서두름 없이 평형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민물인데다가 사람까지 매달려 있어서 바다에서보다 몇 갑절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제길, 이게 무슨 짓인가, 구제불능인 대가릴 가진 여자를 살려주려고. 손승호 그 자식도 우스워. 제놈이 무슨 서울시인민위원장이나 되는 것처럼 추방령을 내리듯이 하지 않았나. 결국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쌍방이 원했던 전쟁이고, 서로 이긴다고 장담했던 전쟁이었지. 허나, 서로 이기는 전쟁도 있나.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그런 전쟁은 없었다. 이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손승호의 말도 맞다. 이학송의 말도 맞다. 올바른 의식으로 역사를 본 판단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것만으로 이겨지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지 모르지만 전쟁 자체가 정의는 아니다. 전쟁은 정의도 사상도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더구나 아니다. 전쟁은 오로지 힘일 뿐이다. 철저한 폭력으로 결판나는 약육강식이다. 그런데, 미국이 참전을 한다. 어떻게 될까.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서 이긴 나라, 그 기세로 세계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나라. 물량작전으로 독일을 초토화시키고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나라, 일본이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나를 써먹지 못했듯이 비축된 화력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는 나라. 그 미국이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려 한다. 위험천만이다, 위험천만이다...

"선생님, 선생님, 팔이, 팔이 쥐가 나려고 해요."

송경희의 다급한 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혁대 놓지 말아요!"

김범우는 헤엄동작을 멈추고 송경희를 붙잡았다. 오른쪽 팔에 그녀의 젖가슴이 뭉클하게 눌렸다. 제길할, 그는 혀를 차며 그녀를 왼쪽으로 돌렸다.

"이젠 오른손으로 여길 잡아요. 거의 다 와갈 테니까 겁먹지 말아요."

김범우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강은 어둠으로 차 있을 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주책없이 담배 생각이 났다. 담배가 여지껏 함께 헤엄쳐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빌어먹을... 앞으로 어느 시간까지는 그 즐기는 담배를 꼬박 굶게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먼 총소리는 더 자주 울렸다. 그러나 그건 공격의 총소리가 아니라 경계의 총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먼 신호탄이 방향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물 흐름에 밀려 그녀의 몸이 자꾸 부딪쳐와 헤엄치기가 아까보다 훨씬 거북하고 힘들었다. 손승호가 얄미워졌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배를 깔고 책을 읽고 있을까, 인공치하에서 활동할 꿈에 부풀고 있을까. 잘못했다. 그 친구를 끌고 나오는 건데! 기왕 활동을 하려면 염상진 선배한테 가는 게 좋았을 텐데. 염 선배가 얼마나 반가워하고 손승호는 또 얼마나 떳떳했을 것인가. 그 생각을 왜 미리 못했을까. 염 선배나 안창민을 지금쯤 기분이 어떨까. 기가 막히겠지. 감격 감격일 거야. 혁명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면서 그만큼 매력도 있어. 제삼의 입장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막연할 건 없다, 그러나 간단하지가 않다.

"선생님! 땅이에요, !"

송경희의 감격적인 외침이었다. 옆구리에 매달려온 그녀의 발에 강바닥이 먼저 닿은 것이었다. 김범우는 몸을 세웠다. 물은 가슴 밑의 깊이였다. 갑자기 맥이 처지는 걸 느꼈다. 느릿느릿 발을 옮겨놓았다. 물이 발목에 찼을 즈음이었다.

"선생님, 고마워요."

송경희가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 고맙기는, 같은 고향사람인데..."

그는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아녜요, 선생님은 정말 좋으신 분예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김범우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벼대며 울먹였다. 얼굴처럼 그녀의 몸도 김범우의 몸에 밀착되어 있었다.

"됐소, 됐소, 자아, 자아..."

김범우는 거북해서 자신의 몸을 뒤로 빼면서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그런데 밀어낸 것보다 몇 갑절 강한 힘으로 그녀는 매달려왔다.

"선생님, 제발 이대로 있게 해주세요. 선생님을, 선생님을 사랑해요."

"그게 무슨 소..."

김범우의 말은 그녀의 입술로 막혀버렸다. 그녀의 입술은 정상이 아닌 체온을 품고 그의 입술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물에 젖은 얇은 옷 속에 담긴 그녀의 몸 부분 부분이 입술처럼 자신의 몸을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짝 긴장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입술을 떼내며 그녀를 떠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떨어져나가지 않고, 그녀에게 가해진 자신의 힘과 그녀가 매달리는 힘에 이끌려 그녀와 함께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아래 깔리고 그가 위에 얹힌 민망한 체형이 되었는데도 그녀는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요. 난 결혼한 사람이요."

"알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전 선생님을 사랑할 뿐예요.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는 속삭이고는 다시 그의 입술에 입술을 부딪쳐왔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싸아한 풀냄새를 맡았다. 그 순간 자신의 남성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안돼, 안돼! 그는 자신의 남성을 갈겨댔다.

"이러면 안 돼, 자아, 자아."

그는 두 팔로 모래바닥을 떠밀었다.

"저를 드리고 싶어요. 저를 드리고 떠나고 싶어요. 둘만의 비밀이에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잖아요. 어둠뿐이에요."

그녀는 딸려 올라오며 뜨거운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의 속삭임을 따라 그의 남성은 불붙어 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서 그의 의지는 땔감일 뿐이었다. 그는 팬티를 벗어던졌다. 그를 따라 그녀도 팬티를 벗었다.

"아아... 사랑해요오..."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는 뜨겁게 요동했다. 그의 단단한 육체만큼 강한 뜨거움에 휘말리며 그녀는 휘어진 하늘에 매달린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오."

그녀 위에 몸을 부려버린 그가 쉰 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바란 거예요. 전 너무 행복해요."

그녀는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쏟아져 내린 수많은 별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김범우는 한 팔을 베개로 그녀에게 내준 채 못 견디게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을 견디며 모래바닥에 누워 있었다.

,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한테서도 성욕을 느끼고, 관계를 통해 희열을 느끼는 수컷의 야비하고 무분별한 본능이여.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심증으로 섭섭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 수컷의 이 뻔뻔하고 몰염치한 심보여. 미친놈아, 민족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전쟁이 터진 판에 이게 무슨 짓이냐. 전시에도 밥은 먹고 똥은 눈다고? 답 한 번 멋지다, 미친놈아.’

"무슨 생각을 하세요?"

", 어서 떠날 준비하시오."

"선생님, 기왕 건너오신 김에 함께 가시지 않을래요?"

"뭐라구?"

김범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제 욕심일 뿐이에요. 선생님이 좌익사상을 가진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강을 건네준 게 더 고마워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떠나도록 하시오."

성욕의 찌꺼기인 허탈감을 먼 총소리가 강요하는 긴장으로 털어내며 김범우는 물젖은 옷을 집어 들었다. 송경희도 몸을 일으켰다.

 

 

12. 산골짜기를 울리는 한밤중의 총소리들

삼팔선 부근으로 이동될 것 같던 심재모의 중대가 대기명령을 받은 것은 이십칠일이었다. 모든 전선이 후퇴를 하고 있는 전황 속에서 부대 이동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불안한 닷새가 지나갔다. 모든 전선에서 밀리다보니 날이 바뀔 때마다 위도에 맞춰 도시를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었다. 서부, 중부, 동부의 전선에 따라 의정부, 춘천, 강릉, 서울, 원주, 삼척 하는 식이었다. 그런 한심스런 전황을 확인해가며 부대에서 토끼잠을 자고 있는 심재모는 낮 시간을 잠깐씩 이용해서 하숙집에 발걸음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보면 순덕이는 그대로 있었고, 이제 떠났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가보면 순덕이는 또 그대로 있었다. 전쟁이 터졌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녀의 입장을 위해 부모에게 편지를 썼고, 노자도 넉넉하게 마련했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도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비죽거리던 그녀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이 쏟으며 목메어 말했다.

"지가 그리 싫으시다면이야 못 보는 것잉께요. 그려도 너무 허시는구만요. 지가 빙신이 아닌디, 여자 맘얼 워찌 그리도 모지락시럽고 야박허게 대허는지, 똑 죽고 잡은 맘뿐이구만요.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겄고, 거짓꼴로라도 한분만이라도 지 맘얼 받어주셨으먼 그 표시로 평상 혼자서도 살아졌을 것인디, 너무 허시느마요. 대장님이 여그 뜨시는 것 보고 뜰 것잉게, 나 겉은 년 인자 알은 척 마시씨요."

부대에 즉각 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잠시의 짬도 없이 부하들을 수습해서 이동이 시작되었다. 심재모는 마음 한 자락을 순덕이에게 남겨놓은 채 이동 아닌 후퇴의 발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꼴로라도 것인디..."

그녀의 울음 섞인 말이 어디가지고 따라오고 있었다.

이 순박하기만 한 여자야, 나라고 왜 그대를 갖고 싶지가 않았겠어. 그대 말마따나 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니라 젊은 남자야. 허나, 난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고, 그러면서 그대같이 순박한 여자를 장난삼아 무책임하게 손댈 수 없었던 거야. 어느 날 저녁밥상을 놓고 일어서는 순간 끼쳐오던 그대의 냄새를 맡을 때, 이부자리를 깔아놓고 나가는 그대의 뒤꿈치를 보았을 때, 목욕을 하고 아직 물기에 젖어 윤나고 있는 그대의 머리칼을 보았을 때, 그대를 갖고 싶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참아냈다. 나는 그런 사내다. 나를 속이면서 틀린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내 곁에 있으면서 아주 큰일을 해냈다. 그대는 내 병을 고쳐준 것이다. 여자의 거기는 시궁창보다도 더 더럽다는, 내가 전쟁터에서 얻은 그 병을 그대는 서서히 치료해준 것이다. 내 마음에서 그대를 갖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이 그 증거 아니냐. 그대의 거기는 그대의 마음처럼 깨끗하리란 생각이 든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 그때 그대하고 하리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 있거라. 그때는 내가 그대를 찾아가리라, 그 벌교라는 이상스럽게 정겨운 땅으로.’

부대는 영주를 거쳐 촌에서 후퇴를 중지했다. 전방부대와 교체될 거라고도 했고, 다시 후퇴할 거라는 말이 엇갈리는 속에서 사나흘이 흘렀다. 부대는 다시 후퇴를 시작했다.

"이거 왜 자꾸 후퇴만 합니까. 우리 부대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후퇴부댄 겁니까?"

상사가 투덜거렸다.

"염려 마시오, 윤 상사. 세상살이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오. 특히 군대에서는 더 그렇소. 군인이란 작전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고, 작전이란 피눈물 없이 냉정한 기계조작이오. 편할 때 후회 없이 푹 쉬어두시오. 우릴 이렇게 후퇴부대로 두는 건 우리가 이뻐서가 아니오. 다 작전수행에 따른 거요. 무찌를 가능성이 없는 막강한 적 앞에 우리를 내보내봤자 병력손실만 커지니까 어차피 후퇴작전을 하고 있는 처지에, 전방부대를 받치게 하면서 병력손실을 막자는 것이오. 우린 지금 반격을 가할 어느 지점인가를 향해 후퇴하고 있는 것이고, 이러다가 전방부대 어디에 구멍이 뚫리면 언제 전방으로 투입될는지도 모르오. 우릴 놀린 만큼 써먹게 될 테니 염려 말고 기운이나 모아두시오."

심재모의 말은 일종의 하사관 교육이었고, 상사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부대는 상주를 거쳐 구미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에 국군이 유엔군에 편입되는 조처가 취해졌다는 소식이 들렸고, 다음날인 팔일에는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심재모는 국군이 유엔군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국군은 대한민국의 군대고, 유엔군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돕겠다고 온 여러 나라의 잡동사니 군대였다. 그런데 어째서 대한민국 군대가 그 잡동사니 군대에 '편입'이 된단 말인가. 주인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군이고, 유엔군은 분명 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주인이 객 밑으로 들어가다니, 이거야말로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는 주객전도가 아닌가. 제대로 되자면 유엔군이 국군에 편입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지 못할 바에는 서로 독립된 상태로 작전 협조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우리 형편이 다급하니까? 어차피 원조를 받아서 싸워야 할 처지니까?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느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기 나라의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이 다른 나라들의 군대에 속해 명령을 받아야 하다니, 그럼 우리나라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군대란 무엇인가. 한 주권국가의 영토와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하는 집단 아니던가. 그러므로 그 집단은 한 국가의 주권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 집단이 의무수행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해 다른 나라들의 군대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주권해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없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도대체 대통령이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심재모는 누구에게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속만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런 말을 내놓고 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장교도 주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김범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속 시원한 답이 나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내 십이일에 이르러 국군의 통수권을 미군에게 이양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심재모는 무릎이 꺾이는 절망을 느꼈다. 헌법에 따라 국군의 통수권은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행사하는 절대적이고 고유한 권한이었다. 그 권한을 미군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국권의 포기이고, 대통령이 없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그 영감이 노망을 하는 것인가. 그 영감은 그렇다 하더라도 통수권을 받아가는 미군의 속셈은 또 무엇인가. 이제 실질적인 통치자는 맥아더가 아닌가. 심재모는 참담함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런 꼴을 보자고 학병에 끌려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것이 아니었고, 해방된 나라의 군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해답을 주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남쪽이 이 지경이 된 건 미국 군인들이 강압적으로 세워놓은 군사정권이기 때문입니다."

이학송의 말이었다. , 이학송이나 김범우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심재모는 끝 모를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아직 감정정리를 하지 못한 심재모가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연대에서 호출이 내려왔다.

"심 중위도 아다시피 지난 팔일에 전국적으로 대한 학도의용대가 결성되었소. 이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 대한의 운명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들끓는 애국충정으로 구국전선에 나서기 위하여 열혈 애국청년학도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것이오. 청년학도들의 애국심이 이러한데 나라에서는 그 고결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소. 하여, 우리 군에서는 학도의용병을 받아들이기 위해 각 지역별로 병력을 급파하게 되었소. 이에 따라 심 중위는 근무경험이 있는 전남서남지방으로 파견결정이 내려졌소. 활동의 세부사항은 참모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아무쪼록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오."

연대장의 말이었다. 참모실로 가며 심재모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휘황한 문자들로 꾸며진 연대장의 말 자체도 전혀 실감이 가지 않았고, 더구나 연대장 같은 경력의 소유자가 그런 과장된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연대장은 바로 일본 만군 출신이었고, 그 경력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때의 경험들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랑처럼 입에 올리는 위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 수뇌부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만군시절부터의 관계를 강조해 자기과시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저런 것들이 장교의 칠 할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심재모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참모실 문을 열었다.

 

보도연맹원 소집은 해가 지기 전에 완료되었다. 그들은 경찰서를 거쳐 동척 쌀 창고에 갇혔다. 창고 안에 어둠이 들어차고 있었다. 창문이라고는 없이 높게 바람구멍만 네 군데 뚫려있는 창고는 바깥보다 빨리 어두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득하게 차 있어서 더위도 한결 심했다. 남자들은 홑것인 삼베저고리마저 열어젖혔고, 여자들은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손부채를 부쳤다. 그러나 그건 더위를 면해보려는 부질없는 몸짓들일 뿐이었다. 창문이 없는데다 양철지붕이 내뿜는 열기는 창고 안을 찜통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위를 타박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어두워지기 전까지였다. 창고 안에 어둠이 켜를 이루며 쌓여가자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국도 시국인데다가 전에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워쩔라고 요리 오래 가둬두는고?"

"금메, 쓰다 달다 무신 말 한마디 웂이 말이시."

"워째 기분이 요상시럽덜않으요?"

"글씨, 워째 맴이 좋덜 않구마."

여자들 사이에서 소곤거림이 시작되었다.

"요것 참 요상허시? 원제꺼정 요리 처박아두자는 것이제?"

"우리가 복날 개도 아니겄고, 요런 더운 디다 몰아 때레놓고 워째 찍소리가 웂어."

"워째 눈치가 요상허지 않는감?"

"금메 말이시, 워째 냉기가 싸르르 도는 것이 영 안존디."

"행에 워찌 혀뿔라는 것 아니까?"

"워쩌!"

남자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말이었다.

"위원장, 위원장!"

어느 남자가 소리질렀다.

"워째 그러요. 나 여깄소."

문기수가 뭉기적거리며 일어섰다.

"우리럴 워째 요리 가둬두고 이러요?"

"나도 잘 모르겄소."

"위원장이 워째 고런 것도 몰르요? 은제나 풀어줄 것 겉소?"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고것도 잘 모르겄소."

"워째 위원장이 몰르는 것 천지요. 행에 우리럴 워째뿔자는 것이야 아니겄제라?"

"워째뿔다니! 고것이 무신 소리요?"

문기수가 화들짝 놀라며 갈라지는 소리를 질렀다. 창고 안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시절이 요리 위태위태 헌디다가, 우리만 피 뽑디끼 쪼로록 몰아서 부지하세월로 가둬둔께 고런 겁이 생긴 것이요."

"아니요, 아녀. 자수허고 전행허기만 허먼 과거 잘못 깨끔허니 용서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평등하게 살게 혀주겄다는 것이야 나라가 헌 약조요, 나라가. 개인이 사사로이 헌 약조도 아니고 나라가 만천하에 대고 헌 약존디 워찌 식은 죽 묵디끼 헐 수가 있겄소. 고런 약조 깼다가는 나라 위신이고 신용이고 다 항꾼에 깨져뿔고, 그래서야 누가 나라럴 믿고 딸컸소. 무담씨 쓰잘디 웂은 소리 혀서 사람덜 간 떨어지게 맹글지 마씨요."

문기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아랫배에 힘을 넣어가며 큰소리로 말을 했다. 그건 위원장으로서 연맹원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달라붙는 공포감을 떼쳐내기 위해서였다.

"그리만 되먼이야 을매나 좋겄소. 꼭 그리 돼야제라."

"하먼, 나라가 헌 약존디 비문헐랍디여."

"그렇겄제, 그래야 되제."

"나라럴 못 믿으먼 누구럴 믿겄는가."

", 나라야 하늘이제."

남자와 여자의 구별 없이 서로 말이 뒤섞이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얼굴들이 되었다.

권 서장은 보도연맹원 명단을 훑어 내렸다. 이지숙과 무당, 둘만 빠져 있었다. 그의 매운 눈길은 전 원장의 이름에 박혀 있었다. 전 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신경만 소모될 뿐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권 서장님,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오. 이번 일은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돼선 안 되는 국가적인 중대사요. 내가 보기에 권 서장님은 마음이 너무 좋다고 할까, 대가 좀 약하다고 할까, 어쨌든 좀 염려가 안 되는 바 아니오."

남인태의 말이었다.

"그리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일을 가능하면 경우에 맞게, 한편으로 쏠리지 않게 공평하도록 처리하자는 게 제 근무정신인데, 그러다보니 그렇게 보인 모양입니다. 저도 명색이 서장입니다. 경우에 맞지 않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단호하고 철저합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두고 보세요."

권 서장은 남인태의 주제넘음을 정면으로 받아쳐버렸다.

"아 뭐, 기분 나쁘게 생각할 건 없소. 그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소."

남인태는 헛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 권 서장이 남인태에게 한 말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한 말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의 마음에 든 생각 그대로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공산주의나 좌익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못이 박혀 있었다.

이지숙과 도래등 무당이 자취를 감춘 것을 안 것은 정기소집을 하고 나서였다. 형사부장이나 염상구의 말이 아니더라도 권 서장의 직감은 이지숙에게로 날아갔다. 이지숙은 세포였고, 무당은 포섭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는 그 동안 뚫린 허점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정세포의 암약을 포착하지 못한 것도 그랬고, 엉뚱하게 무당이 포섭 당했다는 것도 그랬고, 포섭당한 입산자의 아내가 보도연맹 가입에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랬고, 일단 한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까지 받은 고정세포가 야학의 선생으로 위장한 것이 방치된 점이 그랬고, 이지숙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세포를 부식시켰을까를 생각하면 그랬다. 허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나간 것은 다 덮는다 하더라도 이지숙이 뿌린 조직만은 캐내야 했다. 그러나 그러자면 읍내를 발칵 뒤집어야 하는 소란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리한 전시상황 속에서 그건 말할 것 없는 긁어 부스럼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자살행위였다. 이미 떠나버린 두 계엄사령관에게 책임전가가 될 일이 아니었다. 계엄 하에서도 경찰의 임무는 엄연히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건을 밀봉하는 한편 그 범위를 축소시켰다. 그래서 첫 번째 조사대상에 올린 것이 서민영이었다.

"말씀드린 대로 이지숙은 고정세포였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권 서장은 서민영의 취조를 직접 나섰다.

"지금 뭘 묻는 거요? 이 선생의 정체를 알고 있었느냐를 묻는 거요, 아니면 나와 이 선생과의 사상적 내통 여부를 묻는 거요?"

"죄송하지만, 두 가지 답니다."

"둘 다 나하곤 상관이 없소."

"선생님,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여자는 선생님의 야학에서 일 년이 넘게 암약해왔습니다. 선생님한테도 그 책임의 일단이 있습니다."

"나는 야학을 경영하는 사람이지 경찰이나 수사관이 아니오. 어느 쪽 책임인지 한계를 분명히 하시오."

권 서장은 오히려 책임추궁을 당하는 자신의 꼴에 어이가 없었다.

"그 여자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건 아셨지요?"

"알았지요."

"그런데 왜 종적을 감췄는데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습니까?"

"이 선생이 그냥 없어져버렸다면 사상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무슨 사고가 났나 걱정이 돼서 내가 먼저 경찰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오. 그런데 이 선생은, 난리가 났으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떠났소."

서민영의 취조는 더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서민영이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과 닮은 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또 기독교인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그 회색적인 면이 의심을 갖게 하고, 혼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다룰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현직 의원 최익승을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그의 저력이었다.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꼬리를 남겨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권 서장은 그 다음에 전 원장에게 손을 뻗쳤다.

"이지숙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젭니까?"

권 서장은 기습을 하고 들었다.

"이지숙 선생 말인가요? 만난 일이 없는데요."

전 원장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지숙이 자취를 감출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경찰에서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전 원장은 여유 있게 기습을 피했다. 지난 사건으로 수사를 당하고 재판까지 받아본 전 원장은 무조건 솔직함이 자기보호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이지숙이 자신을 찾아오긴 했지만 자신이 이지숙의 피신권유를 듣지 않은 이상 만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괜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아무 연관도 없는 그녀의 사건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재판을 받았고, 그 사건으로 보도연맹에 함께 가입된 것을 다 알고 있는 처지에 이지숙이가 도주를 하면서 원장님한테 아무 연락도 안했을 리가 없는데요.“

"글쎄요, 경찰에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 선생은 재판을 받고 나온 뒤로는 나한테 미안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한 번도 찾아온 일이 없었어요."

전 원장은 자신의 능청에 기묘한 쾌감까지 느끼며 말하고 있었다.

"일 년이 넘게 한 번 아프지도 않았단 말인가요?"

"그거야 젊은 나이에 예사 아닌가요? 서장님은 여기 부임하신 후에 아파서 병원 찾아오신 일 있습니까?"

전 원장은 자신의 말주변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원장님은 함께 재판을 받으면서 이지숙의 사상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까?"

"나야 의사 노릇이나 제대로 해내려고 할뿐이지 원래 사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경찰 수사에서 좌익이 아니라고 한 이 선생을 의심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지요."

권 서장은 다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그도 역시 함부로 다룰 존재가 아니었다. 내통한 의심은 버릴 수 없지만 어떤 구체적인 근거 없이 수사만을 빙자해서 유치장에 가둘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민영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해서 전 원장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이지숙의 도주는 완전히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야학부터 시작해서 수사를 본격적으로 벌일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서 쌀 창고에 감금하며 전 원장은 따로 구분해 유치장에 넣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전 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는 읍내에 하나뿐인 의사였고, 신망도 두터웠다. 그의 처리문제는 두 가지 우려를 안고 있었다. 원칙대로 처리해 버리면 읍민 전체의 원성을 살 염려가 있었고, 그 혼자한테만 혜택을 주었다가는 원칙을 어긴 피해를 입을 염려가 있었다. 두 가지 다 자신의 신상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의논할 상대도 없이 권 서장은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서장님, 삼십 분 남았습니다."

형사부장이 고개를 디밀고 말했다. 권 서장은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었다.

"병력은 어찌 됐소?"

"창고 앞에 집결시켰습니다."

"됐소, 실시하시오."

"알겄습니다."

"잠깐!"

사라졌던 형사부장의 머리가 다시 나타났다.

"유치장에 있는 전 원장도 끌어가시오."

"알겄구만요."

커다란 창고 문이 삐그덕거리는 마찰음을 어둠 속에 뿌리며 느리게 열렸다. 창고 안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시끄럿! 입 닥치고 다들 일어낫!"

살벌한 외침과 함께 전지불빛이 번쩍하며 창고 안의 어둠을 갈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분주한 몸놀림 소리만 들렸다. 그 사이 서너 개가 더 늘어난 전지불빛들이 어지럽게 엇갈리며 사람들의 몸을 핥아대고 있었다.

"아까 지시헌 대로 앞뒤로 열씩 묶어라!"

두 번째의 외침이 섬뜩하게 창고 안을 울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사람들을 향해 몰아닥쳤다.

"워메에, 우리럴 죽일라고 허네에!"

어떤 여자의 외침이 비명처럼 날카롭게 찢어졌다.

"워떤 년이냐, 아가리럴 찢어뿌러라!"

같은 목소리의 세 번째 외침이었다. 여자의 외침을 따라 일어날 듯 싶었던 동요가 이내 스러지고 말았다. 남자든 여자든 순한 짐승들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는 사람들은 묶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 명씩 묶인 여덟 줄의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 세워졌다. 그리고 발밑만 비추는 전짓불 빛을 따라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총을 멘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지난 지 오래되어 인적이라곤 없는 거리에 그들의 발소리들만 둔중하게 퍼지고 있었다. 얼마를 걷다가 행렬은 철길을 건넜다. 사람들은 말이 없는 속에서 자기들이 뱀골재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철길은 읍내 안쪽에는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칠동쪽 들녘에서 볏잎 냄새와 함께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켜켜이 쌓인 어둠은 까마귀 날개처럼 검게 장막을 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길바닥에 박힌 돌에 채여 비척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잡기도 했다. 그가 곤두 박히는 것을 면한 것은 앞뒤로 묶여 있어서였다. 발소리뿐인 그들의 행렬은 비스듬하게 경사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기네가 뱀골재를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갯길을 세 굽이 째인가 돌았을 때 행렬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경사가 급한 산이 시작되었다. 길을 벗어나 산을 밟는 순간 사람들은 아뜩한 현기증과 부딪쳤다. 그건 어둠보다 더 진한 죽음의 공포였고, 절망이었다. 뱀골재 골짜기가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북향음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행렬은 풀숲을 헤쳐 등성이를 넘었다. 검정고무신이며 짚신을 신은 발들은 이슬에 젖어 축축해졌고, 발길에 놀란 풀벌레들이 가느다란 울음소리들을 흘리며 어둠 속을 튀었다. 행렬은 골짜기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쥐어짜는 듯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끄럿!"

후려치듯 차고 매운 소리였다. 울음소리가 그쳤다. 여러 개의 전짓불 빛은 여전히 사람들의 발밑을 빠르게 기고 있었다. 대열은 골짜기의 약간 평평한 곳에 멈추었다.

"한 줄씩 실시!"

메마른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알겄습니다."

대답도 어둠 속에서 들렸다. 그때였다.

"서장님, 서장님, 나만은 살려줘야제라. 그간에 공얼 생각혀서라도 나만은 살려줘야제라. 장 부장님, 장 부장님, 말 잠 혀줏씨요."

남자의 울부짖음이 터졌다.

"어떤 새끼야!" 전짓불 빛이 소리 나는 쪽으로 뻗어갔다. 불빛에 드러난 것은 눈물범벅인 문기수의 얼굴이었다.

"서장님, 나만은 살려줘야제라아!"

불빛 속에서 문기수가 통곡했다.

"저 줄부터 실시하시오."

"!"

대답에 이어 지시가 떨어졌다.

"전대원 들어라. 죄인덜얼 꿇어 앉혀라. 제일 조, 저 줄부텀 실시한다. 끌어내라!"

그때까지 전짓불 빛은 문기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열 명이 뒤돌려 한 줄로 세워졌다. 그들의 윗몸을 여러 개의 전짓불 빛들이 일제히 비추었다.

"발사!"

총소리가 서로 뒤엉키며 어둠을 깨고 찢었고, 손들을 뒤로 묶인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완료했습니다."

"수고들 했소. 갑시다"

권 서장은 긴 숨을 소리 없이 어둠 속에다 내쉬었다. 열 명씩인 그 어느 줄에서 한 명이 모자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간 것이었다. 예비검속은 보성군 각 읍면단위로 비슷비슷한 시간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 군데, 율어면에서만은 아무런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이튿날 마을마다 통곡이 물굽이를 이루며 퍼져나갔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장례를 치르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시체를 찾아오지 못해서 그 통곡들은 더 진하고 질기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들이 눈 부릅뜨고 오락가락하는 속에서 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갔다는 소식이 퍼졌다.

 

송경희는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다. 두려움에 쫓기는 마음으로 날마다 더위 속을 허덕이다보니 체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거기다가 돈을 아끼느라고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해 몸은 더욱 휘둘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걸어도 하루에 오십 리 걷기가 어려웠다. 이틀 만에 발이 부르터 물집이 생겼고, 장딴지는 부어오르면 알이 뱄고, 무릎은 시큰거려 자꾸만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런 육체적 고통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동행이 없는 길 걷기의 팍팍함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쉽진 않은 일이겠지만, 좌익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생각지 않도록 노력해보시오. 달라진 시대가. 송 양은 너무 젊고, 배운 사람이오. 부친을 잃은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사적 감정만으로 세상을 보지 않도록 노력해보시오. 내가 송 양을 이렇게 강을 건네준 건 같은 고향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오. 염상진이란 사람 대신 사과하는 뜻도 있고, 송 양이 세상을 바르게 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서요."

키가 큰 김범우 선생은 어둠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싫어요, 선생님 싫어요. 부자나 지주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무조건 죽어야 하나요. 그런 좌익을 저는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알았소, 더 긴 말 할 시간이 없소, 한 가지만 말하겠는데, 혹시 임꺽정이란 소설을 쓴 홍명희 선생을 아시오?"

자신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범우 선생은 말을 이었다.

"그분은 그야말로 뼈대 있는 양반에다가 지주였는데, 벌써 일정시대에 자기 농토를 소작인들한테 나눠주었고, 누구한테나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존댓말을 썼소. 먼 길 조심해서 가시오."

김범우 선생은 돌아섰다. 그리고 강을 향하여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가 남자의 무게가 아니라 산의 무게로 자신의 가슴에 젖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속살 깊이 파고드는 남성을 받아들이며 '아아 어쩔 수 없어!' 하고 느낀 본능적 항복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부끄러움이 앞을 가로막아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다시 매달렸다가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힘으로 내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최초로 느낀 부끄러움은, 신분은 같으면서 생각은 다른 데서 오는 거리감이기도 했다. 정작 정하섭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점이었다. 송경희는 김범우와의 기억을 길동무삼아 고역스럽고 한정 없는 길을 그나마 걸을 수 있었다. 김범우 선생을 그리고 손승호 선생을 되짚어 생각해보고는 했다.

그들은 좌익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도 분명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좌익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좌익인데 위장을 해오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만으로 동조한다고 해도 이렇게 전쟁이 터진 판국에 그들이 좌익을 편드는 결과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 아닌가.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임꺽정을 쓴 홍명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양반 족보도 버리고, 땅도 버리고, 상것들한테 존대를 쓰다니, 그런 얼빠진 인간 때문에 김범우 선생도 손승호 선생도 본받는 것 아닌가. 인간은 과연 평등할 수 있는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피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품격이 다른데 어찌 양반과 상것들이 평등할 수 있다는 것인가. 김범우 선생은 상것인 여자와 피를 섞을 수 있고, 당장 농사를 지어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김범우 선생은 결혼을 했으니까 그만두고, 정하섭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니야... 호강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것 다 걷어치우고, 잡히면 죽을 것 뻔히 알면서도 정하섭은 좌익 활동을 하고 있지 않나. 김범우 선생은 어쩌고. 기껏 건너온 한강을 괴뢰군들이 드글거리는 서울을 향해 되 건너가지 않았나. 그게 도대체 다 뭐야. 염상진, 안창민, 김범우, 손승호, 정하섭... 읍내에서 똑똑하다고 손꼽는 사람들이 왜 다 이 모양이야. 우익이라는 건 정말 틀려먹은 것일까. 우익전인 사고라는 건 정말이지 비인간적이고 반역사적인 것일까. 아니야, 아니냐, 난 싫어. 아버지를 죽인 좌익은 싫어, 빨갱이는 싫어.’

송경희는 더위 탓만이 아닌 진땀을 흘리며 그런 생각을 털어내고는 했다. 도저히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그 고통스러운 생각을 그녀는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김범우 선생을 생각하다보면 어느덧 그 생각으로 빨려 들어가 있고는 했다. 하기 싫은 그 생각이라고 해서 꼭 마음만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그 생각에나마 빠져 걷다보면 한숨 나오도록 멀리 보이던 산이 가까이 다가와 있고는 했다. 송경희는 한사코 김범우와의 정사 기억만을 붙들려고 애썼다. 그 기억은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황홀하면서도 명료해 걸음걸이를 한결 가볍고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난처한 점이 있었다. 얄궂게도 그 기억은 눈을 감고 서야만 환하게 재생되었고, 그 감각의 황홀함도 살아 올랐다.

그 행위 자체가 눈을 감기게 하는 것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눈을 감고 걷노라면 그때의 안개 밭 같기도 한 혼미함이, 꽃밭 같기도 한 현란함이, 별 밭 같기도 한 찬란함이, 파도 떼 같은 격렬함이, 여름 모래밭 같은 뜨거움이 남자의 숨결과 체취와 동작에 뒤섞여 휘돌고 맴돌고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누가 성을 추하다고 했는가. 누가 성을 죄악시했는가. 성만큼 깨끗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순수한 작업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진지한 몰두가 어디 있는가. 증류수가 제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성에 몰입되었을 때의 영혼을 당할 수가 있을까. 성에 몰입되었을 때는 육체만 있지 영혼은 없다고? 바보천치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육체가 일으키는 그 온갖 미묘하고 야릇하나 감각의 맛을 느끼고 식별하는 것이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냐. 인간을 놓고 정신과 육체를 따로따로 떼서 말하려 하고, 특히 사랑을 말하면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고 아둔인가. 정신과 육체는 공존하면서 서로 자극해서 사랑을 키우는 비료 역할을 하고, 서로 충동해서 사랑을 불붙이는 연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나 그것이 좋다고 떠들거나 깨끗한 척하는 것들은 모두 성불구자가 아니면 위선자들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결혼이라는 것과는 마땅히 구분해야 하지만 사랑에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다. 그 현명하고 똑똑한 서양 사람들이 어찌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랑을 느끼는 남자와의 성행위,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진실이 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사랑을 느끼는 남자의 성기가 나로 하여금 발기하는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수수께끼. 그리고 발기한 성기의 그 당당하고 굳센 모습 앞에서 허물어지고 주눅 드는 마음. 마침내 그 모습만큼이나 거침없이 속살을 파고들 때 주저 없이 백기를 들어 올리게 되는 통쾌하고도 행복한 항복. 굴욕이나 모멸이 아닌 항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신의 존재. 그러나 신은 야속하다. 그 아름다운 성의 희열을 임신과 출산으로 갚게 하다니.’

송경희는 김범우 선생과의 관계가 단 한 번뿐인 것이 아쉽고 아까웠다. 여러 기억들이 있었더라면 길을 걷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그 기억을 음미하고 또 음미해가며 눈을 감고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했고, 발걸음이 빗나가 길 옆 개울로 구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대로 자리 잡고 앉아 다리쉼을 했다. 김범우 선생과의 관계를 생각하다보면 꼭 그 사이를 비집고 드는 얼굴이 있었다. 애인이라고 마음 정하고 자신의 처녀를 내준 최인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꼴도 보기 싫은 존재였다. 다만 김범우 선생이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봐 마음이 쓰였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김범우 선생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최인석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최인석은 결국 자신과 동생 성일이를 떼놓고 떠나고 말았다.

"치워라! 우리 식구도 다 못 떠날 판인데 둘씩이나 따라붙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도 말아라."

최익승이 조카 최인석에게 내지른 고함이었다.

"미안해, 경희. 큰아부지가 저러시니 난들 어쩔 수가 없잖아."

기가 죽은 최인석의 어눌한 말이었다. 그의 큰아버지가 그렇듯 냉정하게 내쳤다면 최인석은 자신과 함께 뒤에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사랑한다며 몸까지 차지했던 최인석은 자신을 버리고 큰아버지를 따라가고 말았다. 그 배신감은 당장 증오와 복수심으로 바뀌었다. 내가 네놈의 눈앞에 내 모습을 기어코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그녀는 복수심으로 이를 갈아붙였다. 그 복수심 또한 길 걷기의 고역을 이겨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녀는 한발 앞세워 동생을 떠나보낸 것을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김범우 선생이 그리 쉽게 강을 건네줄 줄 알았더라면 앞세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김범우 선생을 찾아가면서 마음은 완전히 반신반의였다. 그분이 이미 서울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떠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지 어떨지 모를 일이었다. 동생을 먼저 보낸 후회가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그만큼 걷기가 힘들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뒤쫓아 오던 인민군들을 직접 대면하고 나자 그 생각은 부쩍 심해졌다. 적들보다 앞서서 집에까지 가려고 했던 그녀의 몸부림은 평택 근방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인민군을 보는 순간 '괴뢰군에게 잡히고 말았다'고 낙망했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절망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민간인들에게도 거의 무관심에 가깝도록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무슨 조사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젊은 여자라고 해서 희롱 같은 것을 하는 일도 없었고, 어쩌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젊은 병사들은 전혀 악의라고는 찾을 수 없는 순한 웃음을 오히려 부끄러운 듯 짓고는 했다. 그런 현상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였고, 놀라움이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엿이나 참외 같은 것을 꼬박꼬박 돈을 치르고 사먹었고, 우물가에서 물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도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차렸다. 그녀는 그들의 일거일동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유심히 살피며 자신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던 적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이 차츰차츰 가셔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반복해댄 '불법남침을 감행한 괴뢰군', 그래서 포악하고 잔인할 거라는 인상이 박혀버린 군대가 아닌 그들의 말마따나 '인민해방을 위한 인민의 군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쟁과 군인하면 살인, 방화, 약탈, 강간 같은 것이 한 꾸러미에 엮어져 의식에 박혀 있는데 그들은 그런 짓을 전혀 저지르지 않고 자신을 앞질러 남쪽으로 가버렸다. 그녀는 의식의 혼란을 일으키며 앞서 보낸 동생을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군인인 줄 알았으면 이런 고생 하지 말고 서울에 그대로 있을 걸 그랬다는 마음도 생겨났다. 그들은 억양만 다를 뿐인,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생김을 하고, 같은 예절을 갖추는 동포였고, 경우 바르고 순한 군인들이었다. 그런데 왜 방송에서는 '괴뢰군'이란 말을 수 없이 반복해서 공포감을 키우고 나쁜 인상을 갖게 했을까. 아니다,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는 생각을 하고 이러는가. 그들은 분명 공산주의의 군대다. 공산주의는 지주나 부자들을 무조건 착취계급이라고 몰아 죄인 취급하지 않던가. 그리고 바로 그 군인들이 지주나 부자들을 상대해서는 염상진처럼 포악하고 잔인하게 변할 것이다. 그들에게 모든 재산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되어 삼팔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서울에는 얼마나 많던가. 염상진은 아버지를 죽였고, 이제 그들은 우리 재산을 뺏으려고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안 된다, 그건 안 된다. 공산주의는 어차피 나의 적이고, 내가 믿을 건 부자나 지주들을 우대해주고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군대는 다 어디로 갔는가. 적들이 나를 앞질러 가버렸으니 나는 적지에 있는 것 아닌가. 고향까지 적들이 밀고 내려가 버리면 우리 집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재산을 다 빼앗기고 알거지가 되어 농사를 짓고 살아야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쉽진 않은 일이겠지만, 좌익을 무작정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해보시오."

김범우 선생도 넋 빠진 사람이다. 어떻게 좌익을 좋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의식의 혼란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강가에 몰려들었던 그 많은 피난민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날이 바뀔수록 피난을 떠나는 사람의 모습은 드물어져 갔다. 농부들은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평스럽게 농사일을 하고 있거나, 논두렁에 편안히 앉아 밥을 먹고 있기도 했다.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서 그들은 그렇듯 편안하고 태평스러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렇다면 그 농민들도 자신의 적이었던 것이다. 그럼 내편은 누구이고, 몇이나 되는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새로운 두려움을 느꼈다. 적들이 앞질러 가버린 고향까지의 길이 끝없이 멀게 만 느껴져 다리는 더 팍팍해졌다.

 

심재모는 광주에 닷새를 머물면서 현지경찰과 협조해서 학도병을 모았다. 말로만 자원이었을 뿐 그건 징집이었고, 각 학교마다 이미 편성되어 있었던 학도호국단을 바로 군대편제로 바꾸는 일이었다. 대학생과 고등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주 대상이었다. 학생들은 학교별로 소집을 했는데 벌써 적잖이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이유는 두 가지로 파악되었다. 첫째는 좌익사상을 가진 학생들의 잠적이었고, 둘째는 우익 쪽 학생들의 고의적인 기피였다. 가까운 군 단위 학생들까지 수습해서 열차편으로 여수로 보냈다. 그는 순천으로 가는 길에 보성군과 고흥군을 목표로 해서 벌교에 잠깐 들렀다. 이미 지역마다 경찰조직을 통해서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아짐씨, 아짐씨, 기시오 으쩌요!"

형사부장 장길춘이 송성일의 집으로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송성일이 문을 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안방문도 열렸다.

"장 부장님, 어여 오시씨요. 무신 일로 그리 급허다요?"

송성일의 어머니가 낭자머리를 매만지며 대청마루로 나섰다. 송성일은 무거운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열사흘이 걸려 집에 도착했지만 뒤따라오겠다던 누나의 소식은 날이 가도 감감한데다가 학도병 문제까지 겹쳐 마음에는 먹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와부렀소, 첨에 계엄사령관 혔던 심 사령관이 학도병 델꼬 갈라고 왔단 말이요. 워찌 헐란지 싸게싸게 결정봇씨요."

장길춘은 송성일과 그의 어머니를 번갈아 보며 서둘러댔다.

"은제 뜬답디여?"

"저 학생만 빠지고 다 모아논 것잉께, 담 기차로 뜬답디다."

"아이고메, 그리 다급헌디 물으나마나 아니겄소. 우리 성일이넌 빼줘야제라."

송성일의 어머니는 말을 하며 안방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엄니, 나 그냥 학도병으로 나갈라요."

송성일의 분명한 말이었다.

"머시여? 나 미쳤냐! 장 부장님이 빼주겄다는디 니 발로 쌈터로 끌려 나가겄다는 것이 무신 소리다냐!"

송성일의 어머니는 몸을 되돌려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번에 피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닝께 그렇제라. 징집은 계속헐 것이고, 괴뢰군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면 그때는 군대에 나간 것만 못허게 된다니께요."

", 시끄럽다! 좌익 놈들 손에 아부지 하나 쥑였으먼 됐제 니꺼정 또 죽일 성불르냐. 나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넌 시상웂어도 그리는 안돼야. 이 엠씨가 열질 굴을 파든, 바다 밑창에 구녕을 뚫든, 니 목심 보존 기엉코 해낼 팅께 그리 알어."

"엄니, 지가 허는 말은..."

"금메 시끄럽당께로 워째 자꼬 그래쌓냐. 니가 정 군대에 나갈라먼 이 엠씨 죽이고 떠나그라. 니럴 막는 것은 이 엠씨 뜻이 아니고 아부지 뜻이여, 아부지 뜻."

송성일은 입을 다물며 하늘로 먼 눈길을 보냈다. 허겁지겁 한강을 건너고, 천릿길을 허덕거리며 쫓겨 내려오면서 오로지 생각한 것은 이번 전쟁에 대해서였다. 좌익이 아버지를 죽인 원한을 자신이 하판석 영감을 죽인 것으로 상쇄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전세가 자꾸만 불리해져가고 있는데 어차피 군대에 나가야 되리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며 집에 당도했었다.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을 돈을 주고 피해야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이, 자네 바깥에는 얼씬도 허덜 말어. 자네넌 벌교에 웂은 사람잉께."

돈다발을 몸 어딘가에 감춘 형사부장은 태연한 척 대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송성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먹물 붓을 붙여 놓은 것처럼 짙은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을 뿐이다. 갑자기 심재모를 만나게 된 권 서장은 너무나 반가워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함께 근무하는 동안 감정 한 오라기 다치지 않은 사이었는데다가, 백남식을 겪게 되면서 멀리 있는 그를 자주 생각하고는 했던 것이다.

"혹시 진급을 하셨나했는데 역시 그대로시군요."

권 서장은 이 말을 피할까 생각했으나 모르는 척 넘기는 것이 오히려 정 없는 짓 같았고, 진급이 안 된 이유가 그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이쪽도 알고 있음을 나타내 그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 군인이 진급과 훈장에 관심이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전 당분간 열중쉬어 해얄 겁니다. 앞으로야 죽을 기회도 많지만 진급할 기회도 많으니까 두고 봐야죠."

심재모는 구김살 없이 말을 받으며 웃음 지었다.

"다음 기차로 떠나셔야 한다니, 일정이 그리 급하십니까?"

권 서장은 하룻밤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에서 말했다.

", 대전이 적에게 떨어지고 정부가 대구로 이전한 상황에서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정부의 대구 이전은 전라도 지방의 포기로 보아야 합니다."

심재모는 자기네 연대의 무작정 후퇴가 정부 이전에 대비한 외곽방어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어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전라도 지방의 포기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한민국은 경상도하고 제주도밖에 더 남습니까?"

권 서장은 금방 얼굴빛이 달라질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예측에 불과한 거지만, 학도병들을 여수로 집결시켜 배로 부산 쪽으로 이동시키는 걸로 보아 전라도 지방의 포기는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전라도 지방의 방어계획이 있다면야 단기교육으로 실전투입이 가능한 학도병들을 굳이 배편으로 이동시킬 이유가 없는 거지요."

"상황이 그리도 급한가요. 작전권까지 가져간 미군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미군이 참전을 하긴 했지만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니까 제대로 능력발휘를 못하는 상태로 봐야겠지요. 병력이나 화력 준비도 그렇고, 지리도 서툴고, 모든 게 초기단계니까요."

"참 큰일이군요. 이제 우리가 믿을 건 미군밖에 없는데요."

권 서장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이었다.

"김범우 선생은 어찌 됐습니까? 내려와 있습니까?"

심재모는 미군타령이 귀에 거슬려 말을 바꾸어버렸다. 군인 장교들이나 경찰 간부들이나, 오나가나 그저 미군타령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명백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처럼 내보이는 지나친 의존성이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는 한국군의 통수권이 미군에게 넘어간 것이 근본적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요오?"

심재모는 놀라며 윗몸을 세웠다. 으레 김범우가 내려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오지 못했으면 내려오기 어렵겠지요?"

"글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심재모는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물론 손승호 선생도 안 내려왔겠지요?"

권 서장을 쳐다보았다.

"손승호 선생이라니요?" 반문을 하면서 권 서장은, 손승호가 김범우와 서울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김범우가 백남식의 추궁을 일부러 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꿰어 맞추었다.

"두 분이 함께 하숙을 했는데, 모르셨나요?"

", 방금 알았습니다."

그의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이 곧 나오려 했지만 권 서장은 눌러 참았다. 그는 예비검속을 용케도 피했구나. 권 서장은 그가 서울로 도망간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지난번 처형에서 그도 전 원장처럼 거북스럽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빼돌린 전 원장은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집안에 깊이 박혀 있었다. 난리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전 원장을 빼돌린 것은 그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를 죽이고서는 자신이 괴로워 살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전쟁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 참,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서울을 빠져나올 여유가 그렇게 없었을까."

심재모는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는 김범우, 손승호, 이학송과 함께 했던 술자리의 모습들이 떠올라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어찌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심재모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어섰다.

"어디 가시게요?"

권 서장도 따라 일어났다.

", 좀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경찰서를 나선 심재모는 지름길을 찾아 곧장 '본정통'으로 나갔다. 책방과 대각선을 이루고 있는 순덕이네 가게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가게를 확인하자 심재모는 가슴에 묘한 느낌의 물결이 이는 것을 느꼈다. 두근거림도 아니고, 긴장감도 아니고, 여자를 놓고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은 무슨 냄새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무슨 색깔이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썩 기분이 괜찮았다. 순덕이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대할 것인가 하는 상상도 그 묘한 감정을 부추기는 한몫을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순덕 씨 집이죠?"

심재모는 큰 키를 구부리며 가게를 보고 있는 여자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한눈에 순덕이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근디요, 아니, 요것이 누구다요? 그전 때 대장님 아니시다요?"

순덕이의 어머니 나주댁은 심재모를 금방 알아보았다.

", 그렇습니다. 순덕씨 어머니신가요?"

"그렇구만이라."

나주댁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심재모를 찬찬히 바라보며 미심쩍게 대답했다.

"순덕씨 돌아왔습니까?"

순덕이 어머니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 심재모는

"순덕씨 집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려던 말을 직감적으로 바꾸었다.

"아닌디요, 순덕이 안 왔는디요. 근디, 우리 순덕이 집 나간 것을 대장님이 워쩌크름 아신당가요?"

입 언저리에다 금방 울음이 잡힌 나주댁은 눈을 빛내면서 심재모 앞으로 다가들었다.

"아니, 아직까지 안 돌아오다니... 이게 그럼..."

심재모는 굳어진 얼굴로 혼잣말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돌아와 있으리라고 믿었고, 돌아와 있어야 했다. 자신이 떠나온 뒤에 그곳은 곧바로 적지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심재모는 순덕이의 어머니를 의식하며 참담한 심정이 되고 있었다.

"우리 순덕이가 워디 있는지 아시는갑는디, 워쩌크름 된 일인지 싸게 싸게 말 잠 혀보시씨요."

나주댁은 애가 타고 있었다. 심재모는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한 가지 후회가 심한 갈증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몸을 합했더라면 그녀는 자신의 말을 곱게 듣고 집으로 돌아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 싸게 말 잠 혀보랑께라."

", 순덕 씨는 저를 찾아 집을 떠난 겁니다."

"머시라고라? 지가 대장님허고 워찌워찌 혀보고 잡아서라? 워메 문딩이, 쎄는 짤라도 춤언 질게 뱉을 작정혔구만. 기도 안 차시. 그려서라?"

"수원 저희 집을 거쳐 단양까지 찾아왔는데..."

심재모는 어떤 책임감과 함께 그 동안의 이야기를 간추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따라 순덕이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떠오르며 슬픈 감정이 안개발로 가슴에 번지고 있었다.

 

 

13. 사회주의 리얼리즘

은하수는 어느 때 없이 폭이 넓어지고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빛가루들이 폭넓은 강을 이루며 손을 뻗치면 바로 잡힐 듯 가깝게 머리 위를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밤마다 반딧불들은 모기 소리 자욱한 어두운 풀섶 위를 느리게 날고, 박꽃은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는 이 없는 채 헛간의 초가지붕 위에서 희게 피어나는 즈음이면 먼 논에서 목청을 맞추는 개구리 소리들도 극성스럽게 바글바글 끓어댔다. 봇도랑가에나 논귀에 송글송글 물방울이 떠오르도록 따갑게 꽂혀내리던 한낮의 불볕더위는 어둠이 켜를 이루면서 한풀씩 꺾이기는 했어도 아직 그 기세는 성성히 남아 부채바람만으로는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땅에서 솟음하듯 하늘에서 내림하듯 어둠살이 광목폭이 접혀가듯 서너겹 쌓일 때면 마당가에 모깃불부터 푸짐하게 놓고, 평상에는 남자들이 자리 잡고 담뱃불을 붙이고 그 아래 덕석에는 여자들이 풀빨래를 마주잡고 앉아 다리미 불에 활활 부채질을 해대며, 남자는 남자들대로 농사 이야기를 목청껏 하고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동네의 자디잔 이야기를 나직나직 해나갔다. 아이들은 반딧불을 쫓아 어둠 속을 뛰다가 허방을 딛기도 하고 풀섶의 가시에 찔리기도 하면서 기어코 반딧불을 잡아 호박꽃 속에 넣어 호박꽃등을 만들다보면 어느새 더위는 비켜 지나고 여름밤은 촉촉이 내리는 이슬을 따라 은하수의 기울기만큼 깊어져 있었다. 그즈음이면 삭기 잘하는 보리밥은 어느덧 소화가 되어 배가 출출하게 마련이었고, 살림살이 알뜰한 아낙들은 감자 한 바가지 아니면 옥수수 한 소쿠리를 삶아냈다. 평상에 모두 머리 맞대고 앉아 부채로 모기 날리고, 손바닥으로 허벅지며 종아리에 붙는 모기 쳐가며 감자나 옥수수를 먹고 나면 여름밤의 더위도 마지막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 금년의 여름밤은 더위를 물리칠 그런 묘방들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전쟁 탓이었다. 밤만 되면 불빛이란 불빛은 다 죽여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난데없고 느닷없이 나타나는 비행기 때문이었다. 모깃불도 지필 수 없었고, 담배도 마음 놓고 피울 수 없었고, 다리미질도 덕석 펴놓고 할 수가 없었다. 곰방대에 든 그 작은 불빛 하나가 몇 십리 밖에까지 나가고, 비행기는 그 불빛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폭탄을 퍼붓는다고 했다. 담뱃불 빛이 그러니 모닥불로 타드는 모깃불이나, 숯불로 이글거리는 다리미불이 얼마나 멀리 갈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곰방대를 빨며 밤길을 걷다가 폭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다고 했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앉았다가 온 식구가 몰살을 당했다고도 했다. 전쟁의 가지가지 흉흉한 소문과 함께 모깃불을 피우지 못하니 모기들만 제 세상을 만나 극성을 떨었고, 남자들은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데도 헛간이나 처마 밑을 찾아들어야 했고, 여자들은 다리미질을 안할 수 없는 풀 빨래를 가지고 방안에서 불질을 하느라고 젖가슴골로 팥죽 땀을 쏟아야 했다. 그렇게 달라진 여름밤이라 아이들마저도 신명을 잃어 호박꽃등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여름밤은 무덥고도 길었다. 그런데 비행기의 인정사정없는 폭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불빛이 있었다. 짙은 어둠 속의 저 높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봉홧불이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후로 해서 기더니만 날이 갈수록 그 불꽃의 수가 늘어나면서, 꺼지고 피어나는 횟수도 빈번해졌다. 산봉우리마다 만발했던 봉홧불은 한동안 뜸해졌다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솟기더니만 날이 갈수록 그 불꽃의 수가 늘어나면서, 꺼지고 피어나는 횟수도 빈번해졌다. 하나의 불꽃이 피어남에 따라 그만한 높이의 산봉우리마다 도깨비불이 옮겨 뛰듯 봉홧불이 점점이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바로 이웃에서 산사람이 되고, 아랫마을에서 산사람이 된 그들의 모습을 보았고, 목소리를 들었고, 체취를 맡았다. 그리고 전쟁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그들이 마을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더위만큼 끈적하게 느끼고 있었다.

 

심재모가 떠나고 이틀만에 권 서장이 상부로부터 받은 전화는 광주가 인민군에게 떨어졌다는 것과, 비상이동대기였다. 권 서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의 급변을 믿을 수도 없었다.

"이게 대전이 점령당했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이곳도 위험하게 될 겁니다. 서로 몸조심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십시다."

심재모가 기차에 오르며 한 말이었다. 그 말을 생각할수록 광주가 적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대전이 점령당하고 단 사흘 만에 다시 광주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대전에서부터 광주까지의 거리를 생각할 때 그건 상상으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대전을 점령한 부대와 광주를 점령한 부대가 서로 다르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그처럼 급변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백하나 이유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두말 할 것 없이 아군 병력의 허약이었다. 심재모의 말대로 아군은 전라도 지방을 완전 포기한 것이 틀림없었다. 최소한의 방어만 했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사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군대도 그렇지만, 미군까지도 그렇게 허약하단 말인가. 아니, 괴뢰군은 도대체 얼마나 세단 말인가. 이렇게 허망하게 내리밀리기만 하면서 북진통일이고 멸공통일이라고 큰소리만 쳐댔단 말인가. 미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참전을 했기에 망정이지 며칠이라도 더 늑장을 부렸더라면 지금쯤 어찌됐을 것인가. 이미 땅을 한 치도 남김없이 다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 신세는 어떻게 되었을가. 가망 없는 총질을 하다가 죽었거나, 땅 끝까지 도망을 치다가 바다에 빠져 고기밥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은 또다시 은인이 아닌가. 이 작고 가난한 나라가 뭐가 볼 게 있다고 미국은 그다지도 은전을 베풀어주고 있는 것인가. 권 서장은 결정적 시기에 두 번씩이나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 대해 가슴깊이 고마움을 절감하는 한편으로 비상이동대기에 따른 마음의 헝클어짐을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서장님이시오? 나 윤삼걸인디, 광주할라 빨갱이덜헌테 뺏게뿐 판굿이 벌어졌다는디 인자 워째야 쓰겄소. 피난얼 가야 허겄제라?"

"글쎄요, 좋을 대로 하세요."

"아니, 무신 말이 그리 뜻뜨미지그리 허고 그러요. 흑이먼 흑이다, 백이먼 백이다, 딱딱 짤라서 말얼 허덜않고."

"아니, 내가 그런 대답까지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거요?"

권 서장은 그만 울컥 역정을 냈다.

", , 고런 뜻이 아니고, 경찰이 워찌 움직기릴란지, 경찰이 뜨먼 우리도 떠야헐 것 아니겄소?"

전화 속에서 울리는 윤삼걸의 목소리에 금방 아첨기가 흘렀다.

"경찰 움직임이야 작전비밀이고요, 피난을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고메, 알겄소."

그런 전화가 잇따라 걸려오는 속에서 비상대기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권 서장은 부하들에게 가족들을 피신시키라는 명령을 이미 내렸던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어떤 보복이 가해질지 몰라 가족들을 남겨둔 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괴뢰군들이 여기까지 밀어닥치는 경우 읍내가 어떤 꼴이 될 것인지는 보나마나였다. 봉화를 올려대고 있는 염상진 패거리들이 괴뢰군과 함께 읍내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 것이고, 농지문제로 불만을 품고 경찰서로 몰려들었던 소작인들 거의 전부가 그들을 지지하고 나설 것이다. 그들의 등쌀에 고이 살아남을 지주가 없을 것이고, 지주를 감싸고 돌았던 관공서원이나 경찰도 똑같은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전쟁은 겹겹의 싸움이었다. 겉 거죽은 이 땅을 반 동강낸 미국과 소련의 응등거림이었고, 속 거죽은 그 두 나라가 내세우는 주의에 따라 무장한 군대의 맞부딪침이었고, 그 속살은 착취한 지주와 착취당한 소작인들의 맞대거리였다. 이번 전쟁은 양쪽군대만의 싸움이 아니라 지방마다 소작인들이 들고일어나는, 겉과 속이 한꺼번에 뒤집어지고 엎어지게 되어 있는 싸움판이었다. 그런 전쟁의 승패가 어떻게 갈라질지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풍비박산이 날 판이었다. 아아, 미국이야말로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나라인가. 권 서장은, 미국만 믿으면 된다는 남인태의 전화를 받았을 때의 심정과는 달리 생각할수록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변하고 있는 상황으로는 미국만을 믿고 안심할 수도 없이 위태로웠다. 제공권은 미국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만 지상병력은 이 남도의 끄트머리까지 위협을 가해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경찰병력은 다음날 새벽어둠을 타고 아무도 모르게 읍내를 빠져나갔다, 여순사건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와는 반대방향인 진트재를 넘어갔다. 그들의 일차 목적지는 여수였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한식경이 지나서야 칠월 스무나흗날의 첫닭이 울었다.

 

대전에서 소위로 임관을 한 양효석은 싸움 한번 변변히 하지 않고 부대를 따라 후퇴를 거듭해서 군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미군 함정을 타고 남하해서 다도해를 거쳐 진해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미군들의 전쟁식인 씨레이숀이라는 것을 처음 먹어보았다. 깡통을 까먹으면서 풍광 수려한 다도해를 눈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맛은 아주 그럴싸했다.

", 쩌그 쩌것이 오동도시."

배가 여수를 먼발치로 두고 지나갈 때 계급장 없는 전투복을 입은 현오봉이 턱짓을 했다. 일학년들은 진해에서 훈련을 좀 더 받은 다음에 임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근디?"

양효석은 바다를 바라본 채 말끝을 올렸다.

"그렇다 그 말이시."

"도적눔, 심뽀 씨커머시. 니 시방 집 생각허고 있지야?"

", 오동도 봄스로 집 생각 안 나먼 고것이 사람이여."

"나넌 안 난다."

"하먼, 장교님이시니께. 워쨌거나 괴뢰군덜 때레잡을 생각만 허시겄제."

"씨발눔, 말 한분 쌈빡허니 허고 앉었네. 니나 괴뢰군 열 도라꾸 때레잡아 당장에 별 따묵어라."

"니기럴, 정내미 떨어지는 소리 허덜 말어. 괴뢰군덜이 홍어 좆이 아니란 걸 겪어봤음스롱도 그런 악담이여, 악담이."

"빙신, 니 괴뢰군헌테 겁 묵었구나."

"성언 겁 안 묵은 칙끼 말허네. 도봉산 아애 전툴 끝내고 봉께로 얼굴이 백지장이등마."

"성질 사가다찌허게 맹그는 소리 씹떡껍떡 해쌓지 말어, 이 새끼야. 맨주먹찌리 싸우는 것허고 총알이 핑핑 날르는 쌈허고 같을 수가 있겄냐. 한 방 정통으로 맞었다 허먼 황천길로 가는 진짜배기 쌈에서 지도 몰르게 얼굴이 하얘지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나넌 괴뢰군헌테 겁묵은 거이 아니라 지멋대로 날라댕기는 총알에 잠시잠깐 겁묵은 것뿐이다."

"참 요상시런 말도 다 있네."

", 육사에 온 것 후회허고 있지야!"

양효석이 눈꼬리를 세우며 현오봉을 노려보듯 했다.

"글씨... 첨에 들어올 때 허고는 맘이 똑같덜 않은 것이야 사실이제."

현오봉은 양효석의 눈길을 피했다.

"니 정신 똑똑허니채리고 나 말 들어."

양효석은 현오봉의 팔을 낚아채듯 하고는,

"시방 전쟁이 사방천지 안 터진 땅이 웂다. 니가 육사에 안 들어왔다 허드락도 이 난리 통에 어느 편짝 군인으로든지 끌려 나가게 돼 있다 그것이여. 국군이 아니고 괴뢰군에 끌려나가먼 니 워찌됐겠냐. 고것이 을매나 기맥힌 꼴이겄냐. 니도 니제만, 느그 아부지가 저승에서 피럴 토혔을 것이다. 그라고, 국군으로 나간다고 혀도 쫄병으로 따라댕기는 그 꼬라지가 머시겄냐. 기왕에 군인 노릇을 허자먼 쫄병보담이야 장교가 훨썩 낫덜 않겄냐. 서학이고 성일이고 서울서 워떤 꼬라지덜허고 있는지 알 것이냐. 고것덜 잘못혔다가는 괴뢰군에 끌려갈 판일 거이다. 아매 서학이고 성일이가 지금쯤 우리 둘이럴 하늘맹키로 부러바라 허고 있을란지도 몰른다. 긍께로 니 맘단단허니 묵고 딴 생각 허덜 말어라. 나 말 알아묵겄냐?"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알겄구만. 나가 무담씨 헛생각허고 있는 것이제."

현오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바다 끝으로 보냈다. 그는 전쟁이 터지고 나서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나날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면서 의정부 쪽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나갔고, 우왕좌왕하는 장교를 따라 갈팡질팡 하다가 후퇴명령을 따라 허겁지겁 학교로 돌아왔고, 또 한 차례 나갔다가 탱크가 토해대는 불길에 쫓겨 처음보다 더 엉망인 꼴로 도망질을 쳤고, 한강을 건넜고, 머리 처박고 총을 쏘아대다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후퇴를 하고, 다시 건성으로 총질을 해대다가 후퇴를 하고, 그러다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쇠배를 타게 된 것이다. 너무 정신없이 쫓기다보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육사를 지원한 애초의 목적까지 희미해지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감만 커졌던 것이다.

서울의 밤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계속이었다. 아무리 불빛을 감추어 서울을 찾아내지 못하게 해도 비행기들은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을 가쁜 숨을 쉬듯이 깜박거리며 용케도 서울하늘에서 맴돌았다. 비행기들의 폭격은 밤마다 계속되었다 폭탄은 마포강변과 영등포 쪽에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물깊이가 낮고 물살이 세지 않은 마포강변에는 밤마다 물건을 운반하는 부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비행기는 그 작업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어둠을 틈타 전쟁 물자를 옮기려는 측과 조명탄을 터뜨려가며 그 일을 막으려는 측의 싸움은 끈질기게 계속되어오고 있었다. 민간인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물건운반은 비행기의 폭격을 무릅써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고, 군인이 그들을 대공포로 보호한다고 해도 인명피해는 생기게 마련이었다. 한쪽에서는 물자를 옮겨야하고, 반대쪽에서는 옮기지 못하게 해야 하는 필요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전쟁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영등포가 폭격을 당하는 것은 공장지대이기 때문이었다.

이학송은 강둑을 따라 구축된 참호를 등지고 서서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체뿐인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도 질서를 지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상자들을 이고 진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고, 왼쪽으로는 짐을 부리고 오는 사람들이 만드는 줄이었다. 배가 자유롭게 뜰 수 있는 물깊이까지 뻗어 있는 둑은 서너 개였다. 그 둑마다 사람들이 소리 없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인민의 노력봉사 - 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이학송은 한강에 나오게 된 것이다. 저 현장이야말로 이번의 전쟁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축도가 아닌가! 이학송의 느낌이었다. 미국의 참전, 한국군의 유엔 편입, 미군에게 넘어간 통수권, 미군의 제공권 장악, 그런 숨 가쁜 상황의 변화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건 바로 이번 전쟁이 조선 인민과 미국과의 전쟁이 된 것을 의미했다. 미국의 폭격기 B29는 유월 이십팔일부터 서울 상공에 나타나 폭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공격양상은 날로 심해져가 인민군의 진로를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낮 시간을 앗아 가버린 것이다.

"두고 보십시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피를 흘리고 손해를 보는 건 우리 민족일 뿐입니다. 인민해방은 수포로 돌아가고, 민족좌절만 남게 될 겁니다. 미국은 인디언을 멸종시키다시피 했고, 흑인을 노예로 짓밟아 오늘을 이룩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김범우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이학송은 눈을 더 크게 열어 어둠 속을 응시했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습이었다. 이학송은 전신이 경련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강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이렌이 가쁜 호흡으로 울려대고, 대피소로 뛰고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어둠을 흔드는 것은 사이렌 소리뿐이었고 비행기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이학송은 뛰면서 연상 코를 벌름거렸다. 일제말기부터 시작된 공습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코에서 피 냄새가 물씬거렸던 것이다. 느닷없이 어둠을 태우는 빛이 쏟아지면서 하늘을 다글다글 갈아내는 쇳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바로 머리 위를 굴러가고 있었다. 소리보다 빠르다는 제트기의 폭음은 언제 들어도 냉혹하고 살벌했다. 조명탄이 쉴 새 없이 터지고, 적기를 향해 대공사격이 시작되었다. 이학송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려 박은 채 숨길이 막히는 저, , 소리만 터뜨리고 있었다. 조명탄의 밝은 불빛 아래 그대로 드러난 둑 위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스무 명 남짓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의 폭음과 총소리와 호루라기 소리와 외침이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그때 김포 쪽에서 비행기가 곤두박히듯이 날아들며 폭탄을 토해냈다. 폭탄은 뜀박질을 치듯 강물에서부터 둑에까지 불길을 뿌리며 터져 올랐다. 둑 위에 남은 사람들이 물로 뛰어들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고, 내달리기도 하고, 뻣뻣하게 서 있기도 했다. 비행기들은 줄달아 곤두박혀오며 폭탄을 토해내고 있었다. 둑 위에서 사람이 빙글 돌기도하고, 불쑥 솟기기도 하고, 팔을 내뻗기도 하며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둑 위에 네댓 사람이 꼼짝을 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가운데 비행기들은 번갈아가며 폭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둑이 경련을 일으키며 상처를 입어가고 있었다. 불빛이 약해지는 듯싶으면 조명탄은 다시 터져 올랐다. 대공사격에 아랑곳없이 비행기들은 무슨 곡예라도 하듯이 곤두박혀 내리며 빨강색 파란색의 폭탄을 토해내고는 다시 치솟아 올랐다. 느릿느릿 떨어져 내리는 조명탄이 세 차례 하늘을 밝히는 동안 비행기들의 폭음이 멀어지자 이학송은 둑을 향해 내달았다. 둑 위에 쓰러져 있는 여섯 사람 중에 다섯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무사한 것은 아이를 업은 한 여자뿐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무사하다고 느낀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여자가 업고 있는 아이가 피투성이였다. 스물네댓밖에 안 먹어 보이는 젊은 여자는 자기를 에워싸기 시작한 사람들을 두려움에 찬 눈길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 폭격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새댁, 정신 차려요. 어서 포대기 풀고 애기 내려 봐요. 애기가 다쳤어요."

삼십대 여인이 포대기 끈을 풀며 말했다. 그때서야 젊은 여자는 눈빛이 달라졌다. 파편을 머리에 맞은 아이는 온몸을 피로 적신 채 죽어있었다.

"아가! 아가! 아가!"

젊은 여자는 피투성이의 아이를 품에 끌어안으며 핏덩이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쇠가 맞갈리는 비행기의 폭음은 감감히 멀어져 있었고, 조명탄 불빛이 사위어가는 하늘에 다시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미국을 과대평가하자는 게 절대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이념의 실천이 현실이라는 말, 좋습니다. 그럼 그것을 저지하려는 미군의 세력도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희생당하고 있는 대중들도 현실입니다. 이념의 실천이 확고한 보장이 없을 때 대중들의 희생은 무엇으로 보상되고, 어떻게 설명되는 겁니까."

다시 들리는 김범우의 말이었다. 이학송은 젊은 여인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인민해방, 밤마다 실시되고 있는 노력동원, 밤마다 가해지는 폭격, 밤마다 발생하는 희생, 피투성이의 아이...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김범우와의 논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해방일보에 근무하기로 결정한 그날 이학송은 김범우를 찾아갔다. 김범우에게 함께 근무할 것을 권하기 위해서였다. 신문사에서는 영어 잘하는 사람 몇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에게 신문사 근무를 제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날의 논쟁은 술 한 방울 없이 몇 시간을 끌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김범우는 그날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다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반민족세력의 지배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것, 그래서 이념적 통일을 이룬 민족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은 저도 진작부터 인식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제반 여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벌써 서울 하늘에 미군 비이십구가 거침없이 날아다니며 제멋대로 폭탄을 퍼부어대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전쟁이 일어나고 며칠이나 되어 벌어진 현상입니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겠습니까, 아니면 덜해지겠습니까. 그거야 말하나마나 한 사실 아닙니까.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졌을 때 과연 이번 전쟁을 이길 수 있을까요. 미국을 상대로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민해방의 좌절과 민족의 상첩니다. 그걸 빤히 내다보면서 행동을 한다는 건 민족의 상처만 키우고, 불행을 조장하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자네 왜 자꾸 기회주의적 결과론만 내세우고 그러나."

서울시 당 문화선전부에서 일하기로 된 손승호가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며 말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할 말이 따로 있지."

김범우도 정색을 했다.

"아니, 모든 당위성에는 동의하는데 그 결과가 나쁠 것이니 참여할 수 없다는 태도가 기회주의가 아니면 뭔가?"

손승호의 한발 더 내딛는 공박이었다.

"자넨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행동의 여부만 따지고 있군. 그건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관점의 차이네."

김범우가 대화에 차단기를 내릴 태도를 분명히 했다.

"아니오, 기회주의란 두 세력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며 양쪽을 저울질하다가 유리한 쪽으로 붙는 걸 말하는 게 아니겠소? 김 형은 이미 한쪽을 부정한 상태에서 이번 전쟁의 결과를 우려하고, 그 다음에 닥칠 문제까지 생각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잘못된 것 같소."

이학송이 끼어들었다.

"그럼 방관적 패배주의지요."

손승호가 지체 없이 말을 받아냈다.

"허허허... 그게 좀 더 그럴 듯한 것 같소. 허나, 이 땅이 처한 전체적 상황으로 보아 김 형의 생각도 아주 중요하고 폭넓은 생각이라 싶소. 우리의 분단이 미쏘에 의해 저질러지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분명 그 영향 하에 있었고,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전쟁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다음에 야기될 문제에까지 생각이 뻗치는 것이야 생각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요."

", 제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상상하기 어렵게 빠른 미국의 전쟁개입은 미국이 당초에 남쪽을 점령한 목적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입니다. 그 결의는 우리 민족이 목표가 아니라 쏘련이 목표 아닙니까. 그런 결의 앞에서 이번 전쟁이 이길 확률이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쏘련이라고 가만히 있겠소?"

손승호가 내쏘았다.

"좋네, 쏘련이 미국하고 맞붙었다 치세. 그 싸움판에서 박살나는 건 도대체 누군가. 바로 우리 민족이 아닌가 말야. 그렇게 되면 인민해방이고, 이념적 민족 형성이고를 어디 가서 찾게 되겠나. 그 다음에는 쏘련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 전쟁이 좌절할 것은 뻔하고, 그 결과는 여순사건 다음의 되풀이가 될 뿐이네. 여순사건이 좌절되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 자네도 잘 알잖나. 미군무기로 군경의 무장이 강화되었고, 정부는 반공을 정책으로 내세웠고, 좌익은 괴멸상태로 치닫고, 미쏘가 갈라놓은 분단은 민족의 이념적 분단으로 변모되지 않았나 말야. 그때의 상태가 몇 십 배로 팽창해서 작용할 것이 이번 전쟁이 좌절한 다음에 초래될 상황이란 말일세.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뭐가 되겠는가. 그런 걸 뻔히 내다보면서도 무작정 행동을 하는 것만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네가 하는 말은 패배주의에 빠진 비관적 전망에 지나지 않아. 그러다가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어쩔텐가. 그때 자넨 또 뭐라고 할 건가?"

"승호 자넨 근본적으로 내 말을 이해하려고 하질 않는군. 자네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난 민족제일주의자야. 그래서 민족보다 먼저 이념을 내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튼튼한 민족의 생존을 위해선 그 어떤 이념도 상관하지 않네. 그런 입장에서 민족이 상하기만 하고, 목적 달성이 어려울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게 내 괴로움이란 말일세. 그럼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냐고 자넨 묻겠나? 당분간 이 괴로움이 계속되겠지."

"자네 말을 듣자니까 근본적으로 방법이 틀렸다는 뜻 같은데?"

손승호가 김범우의 의중을 탐지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글세... 이 땅이 처하고 있는 전체적 조건이 미쏘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우리의 민족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전쟁이라는 방법론 가지고는 어렵다는 것이 내 판단인 것만은 분명하지.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쏘의 영향력을 동시에 배격할 수 있는 그 어떤 슬기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된다고 생각허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 혼자만일까?"

김범우가 괴로운 표정으로 담배를 빼들었다.

"그 어떤 슬기로운 방법이라니? 자네 생각은 너무 막연하고 환상적이야. 구체적 대안도 없으면서 예측만 가지고 현실을 비판하는 건 비판이 아니라 비겁이네."

손승호는 다시 한발을 내딛고 있었다. 김범우는 손승호의 그런 태도를 보며, 서울시 당에서 일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신을 내보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의지를 북돋우려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손승호의 변화를 서민영 선생이 알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겁도 좋고 비굴도 좋네. 나야 안목도 짧고 정치권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구체적 대안을 낼 수가 없네. 그러나 근대사회의 구성이 철저하게 민중 중심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고, 그 바탕 위에서만 민족의 주체형성이 가능하고, 민주주의도 가능하며, 역사발전도 도모된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런 최소한의 인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볼 때한 가지 명백한 것은 있네. 미쏘가 우리를 어떤 형태로든 제약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념을 하나씩 나눠 갖고 사회문제나 민족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이네. 미쏘 두 나라가 맞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느 쪽 시도든 무위로 끝나는 환상이 될 수밖에 없고, 만에 하나 미쏘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포기를 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했다 해도 나머지 한 나라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는 한, 민족은 노예적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없을 거네. 내가 파악하는 건 지금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은 볼셰비키의 혁명 상황도 아니고, 중공의 혁명 상황도 아니라는 점이네. 로서아에도 중국에도 그들을 제약하거나 속박하는 막강한 두 외국세력은 없었다는 사실이네. 그들이 지금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혁명을 성취시킬 수 있고, 민족의 문제를 생각대로 해결할 수 있었겠나를 묻고 싶네. 그래서 난 외국세력의 배격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거네."

손승호는 아무 말 없이 성냥개비만 씹고 있었다.

"그래, 김 형은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소. 미국의 참전과 기동성에 대해 당이 놀라고 있는 건 분명한 눈치 같았소. 난 솔직히 말해서 김 형이 예상하는 전쟁 결과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소. 다만, 불행하게도 결과가 나빠진다면 그때는 김 형이 말하는 대로 후유증이 심각하게 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오. 어쨌거나 민족의 영원성을 생각할 때 김 형의 그 긴 안목이나 신중을 기하려는 태도는 결코 환상도 비겁도 아니라고 생각하오. 이념의 문제도 그렇겠지만 민족의 문제처럼 신중하게 다뤄야 할 게 또 없을 것이오. 김형의 괴로움이 그렇다면 신문사에서 일하는 건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도록 하시오."

이학송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민기홍을 생각했다. 민기홍은 사회주의 방법론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입장에 선 개혁론자였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김범우와 민기홍은 또 그 모습을 달리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민기홍이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크리스찬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종교색이 전혀 없이 혁명의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번 전쟁에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회주의 색채가 농후한 중도파라고 하는 건 전혀 합당하지가 않았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역사의식과 시대양심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해야 될 것이라고 이학송은 생각했다.

예정된 기사 분량은 이백자원고지 일곱 장이었다. 처음부터 크게 취급하도록 되어 있는 기사였다. 이학송은 원고지 일곱 장을 메우는 데 꼬박 밤을 새다시피 했다. 칠팔 배의 파지를 내야했다. 전에도 큰 사건을 많이 다루었지만 파지를 그토록 많이 낸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보다 속필이고 미문이면서 가시가 성성하다는 평을 받아왔던 기사였다. 쇳덩어리가 맞갈리는 굉음과 난폭하기 이를 데 없던 공격과 속수무책이던 방어와 피범벅이던 아이의 작은 몸뚱이와 젊은 어머니의 피토하듯 하던 절규가 하나씩 정리가 되지 않고 한꺼번에 뒤엉켜 가슴 벽을 치는 분노로 살아 오르는 까닭이었다. 까만 줄 세 개씩을 양쪽에 거느리고 가운데 박힌 하얀 별, 그 표지를 옆구리에 부착하고 제멋대로 날아다니던 흉물과 피투성이의 아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던 여인의 모습이 마치 김범우가 예고한 결과인 것처럼 대비되면서 가슴을 긁어내렸다.

이학송은 잠을 못 자 뻑뻑하고 따끔거리는 눈을 연상 껌벅거리고, 담배연기로 칼칼하고 옥조이는 목을 계속 칵칵거리며, 매일매일 하루살이로 시간제한 받아가며 살아야 하는 기자인생에 쓴 입맛을 다시며 신문사로 나갔다.

"이 기자는 역시 속사포요. 참으로 혁명적 열성이고, 혁명적 일꾼이오."

기사를 받아든 취재부장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기사가 제대로 됐는지나 모르겠습니다."

"어련하겠어요, 이 기자의 기본능력에다 당성이 합해져 생산해낸 기산데요."

이학송은 빙긋 웃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혁명과 해방을 위한 전시라서 그런지 일상어에도 군사용어나 사상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런데도 그게 전혀 거슬림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자신도 예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이학송은 문득문득 느끼며, 인간이라는 것이 상황과 환경에 얼마나 민감한 촉수를 가진 동물인지 새삼스럽게 생각하곤 했다. "당성" 이라는 말만 들으면 이학송은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져 결국 전향서라는 것을 쓰고 손도장을 눌렀고, 전향자감방에 들어앉아 있다가 풀려났고, 그런 사실이 덮여진 채 인공치하의 최고 신문인 해방일보에서 일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사실 전기고문까지 당하고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작성한 전향서라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자신이 작가동맹에 가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작가동맹은 남로당의 외곽단체로서 당원이 아니더라도 글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신은 당원이 아닌 상태로 가입해서 정치활동을 한 바가 없었고, 더구나 문학이라는 그 끝도 없이 난해하고 한도 없이 지난한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에 한계를 느껴 스스로 그 단체에 얼굴을 내밀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전향서는 써야 했고, 몸 부서지는 고문 앞에서 못쓸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일보에 몸담고 보니 그것은 양심의 흠이 되었고, 의식의 죄가 되었다. 그렇다고 지난 일을 따져 묻거나 의심하는 일이 없는데 스스로 발설할 수도 없었다. 신문사 안에는 자신과 똑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전향자감방에는 아홉 사람이 갇혀 있었다. 서로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남고 처지는 감방의 시간을 소화해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재미있게 들을 수 있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음담이나 농담이었다. 순서 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전혀 입을 열지 않는 사십객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을 뿐 이야기를 듣기는 하는 모양으로 어쩌다가 빙긋이 웃기도 했는데, 그가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하는 일 한 가지가 있었다. 중학교 일학년용 영어책을 앞에서부터 뒤로, 뒤에서부터 앞으로 느릿느릿 넘기는 일이었다. 그 똑같은 일을 한 시간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매일 같이 계속해내고 있었다. 책을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똑같은 손놀림을 그러나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영어책이 어떻게 해서 감방에 들어와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성경이 있는데도 고집스럽게 일 학년짜리 영어책만 넘겨대고 있는 그의 바탕을 감방 안의 전향자들이 눈치껏 헤아린 결과인지도 몰랐다. 서로의 전향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고 있듯이.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을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한지 나흘 만에 복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서로가 놀라 한참을 맞쳐다 보았고, 말이 없는 채 서로가 신문사에 근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리고 새롭게 눈길을 나누고 엇갈려 지나쳤다. 그는 놀랍게도 논설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 뒤로부터는 서로가 눈길을 피하게 되었다. 인간의 진실과 허위에 대해서, 조직의 순수와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서, 양심의 죄와 양심의 속죄에 대해서, 집단적 폭력의 상황과 개인의 의지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그 사람이 거울로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자님, 편집국장께서 보시고자 하십니다. 어서 가보시오."

부장의 말이었다.

"저를요?"

피로감에 눌려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있던 이학송은 필요 이상으로 목청을 높였다.

"그리 놀랄 것 없어요. 아마 기사 잘 썼다고 칭찬을 받을 거요."

부장이 웃음 지었다. 이학송은 긴장감을 느끼며 편집국장 자리로 걸음을 서둘렀다. 편집국장 이원조, 그 사람은 자주 만날 수 없는 채로 마음속에 어려운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건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이기도 했다.

"부르시었습니까."

이학송은 이원조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 이 동지, 어서 오시오."

이원조는 부드러운 웃음이 담긴 얼굴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이학송은 왼손을 받쳐 그 손을 잡았다.

"이 동지는 역시 문장가요. 기사 잘 읽었소."

"황송합니다."

"저 회의실로 좀 갑시다."

이학송은 이원조를 뒤따르며 기사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이 동지의 기사를 유심히 읽었는데, 참으로 생동감 있게 잘 쓴 기사였소. 그런데..."

이원조는 책상 위의 원고를 집어들었고, 이학송은 예상을 했으면서도 가슴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이 동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기사의 말미가 그렇게 끝나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오."

이원조의 어조는 어디까지나 정중하고도 부드러웠다. 기사는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적으며 끝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이학송은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학송은 자신의 심중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이 동지의 그 솔직함이 좋소. 기사는 죽은 애를 어머니가 안고 통곡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건 기사란 있는 그대로를 옮겨놓는다는 원칙에 아주 충실해 있소. 그러나 그건 제국주의적 시대착오적 기사작성법이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고 있으며, 인민해방전쟁을 수행하고 있소. 모든 인민이 노력을 바치는 모든 분야의 일들은 그 두 가지를 성취시키기 위해 복무해야 하며 집중되어야하오.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인민선동을 고무시키는 문화선전사업의 선봉에 서 있는 신문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이오. 따라서 기사작성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그 두 가지 사실의 실현을 위해 충실한 복무가 되도록 씌어져야 하오. 그러니까 이 동지가 쓴 기사가 어떻게 끝나야 하겠소? 애어머니가 애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마는 것, 그건 전시대적 패배주의고 체념주의며, 그것은 또한 반혁명적이며 반해방적인 꼴일 뿐이오. 우리는 그 시점에서 혁명적인 인간상을 창조해내야 하며, 해방을 갈구하는 인민 상을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이 동지, 주저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오. 그것이 일 단계요. 그 다음에 어머니가 안고 있는 죽은 자식에게, 너를 이렇게 죽인 미제국주의자들을 쳐부셔 너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이 에미는 끝까지 싸우겠다, 하는 결의를 소리높이 외치게 하는 것이오. 어떻소, 이 동지, 이게 조작으로 느껴지오? 사실의 왜곡이라고 생각되오? 어디 말해보시오"

",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까지 기사를 써 온 습관 때문에 익숙하지는 못합니다."

"당연한 일이요. 중요한 건 기자로서의 그러한 기사작성이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이 아니라 혁명의식의 실천이라는 것을 강요 없이 이해 납득하는 것이고, 그리고 진정한 필요에 의해서 기사가 그런 방향으로 씌어져야 하는 것이오. 자아, 그런 식의 기사작성이 사실의 왜곡이나 조작이라는 거부감을 가질까봐 하는 말인데, 사실의 왜곡이나 조작은 남조선 신문들이 반민특위를 좌익집단으로 매도하거나, 좌익을 매국노로 몰아세우거나, 김구 선생을 민족반역자라고 쓰거나, 민족반역자들을 오히려 민족주의자나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짓들이 아니겠소? 사실의 조작이나 왜곡이란 반역사, 반사회, 반인민적인 기록일 때를 가리키는 것이오. 애어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그런 결의를 다짐하게 하는데 반역사, 반사회, 반인민적인 요소가 어디 있소. 그렇게 기사를 써서 인민들의 혁명의식이 고취되고, 해방의지를 고무 받게 되면 그 가엾은 어린아이의 죽음은 헛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 동지는 기자로서 혁명과 해방에 훌륭한 복무자가 되는 것이오. 어떻소, 내 말이 납득이 되오?"

이원조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혁명적 인간상의 창조, 사실의 조작과 왜곡의 차이, 혁명과 해방의 복무, 이학송은 무언가 의미가 잡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리송했다. 그러나 대답은 일단 이해가 된 것으로 할 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납득해줘서 고맙소. 납득한 대로 이걸 이 동지 손으로 손질하면 어떻겠소."

"그리 하겠습니다."

"수고해주시오. 앞으로도 종종 토론하도록 합시다."

이원조는 이학송을 감싸듯 하는 따스한 눈길을 보내며 원고를 내밀었다.

"말씀 고맙습니다."

이학송은 원고를 받아들고 다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학송은 자기 자리로 돌아오며 보름 전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이미 미군 비행기들의 야간폭격이 감행되고 있어서 신문사의 창이라는 창은 모두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런 사무실의 더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 속에서 그는 기사를 마감하고 있었다.

"이 동지, 일이 다 끝나가는 모양인데, 나하고 바람 좀 쐬시지 않겠소?"

이원조가 옆에 와 서 있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강 쪽에서 들리는 비행기의 폭음과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번쩍 거리는 불빛들이 밤하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원조는 그런 하늘을 올려다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동지, 저게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이오. 비합법활동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본격적인 혁명투쟁의 시기가 된 것이오. 비합법시기에는 리버랄리즘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오. 그러나 이제 혁명을 통한 진정한 인민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런 묵은 사고는 일소하고 진실로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서는 진정성을 발휘해얄 것이오."

그는 마치 독백하듯이 말했다. 그가 왜 굳이 자신을 불러 그런 말을 하는지 그때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지만, 이제 다시 그 의미가 떠오른 것이다. 보통 키에 야윈 편이어서, 윤곽이 분명한 이목구비에 지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이원조.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해서 소련 공산당사를 누군가와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는 그는 대화를 하는 데도 부드러움과 친밀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이 동지, 동지가 쓴 글들은 많이 읽었소. 문상길 투사의 처형, 사삼투쟁, 여순병란에 관한 것 등등 말이오. 이 동지 글에는 민족적 자각이 분명하게 자리 잡혀 있어서 믿음직하오"

하는 말을 했다. 그건 자신을 왜 해방일보 기자로 발탁했는가에 대한 이유 설명이라고 이학송은 받아들였다.

이학송은 원고지 마지막장을 펼쳤다. 자신은 기자생활을 통해 남다르게 굵은 역사적 사건들의 기사나 취재기를 많이 쓴 편이었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스스로 자청한 결과였다. 그건 일차로 정권의 정치조작을 방관할 수 없어서였고, 이차로 신문들의 무책임한 동조를 묵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역사, 사회적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은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었다. 사삼사건에 대해서도,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신문들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사실을 조작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데 열중해 있었다. 왜 민중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섰는가에 대한 진짜 원인을 외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군 순양함이 제주도를 빙빙 돌며 항해하고, 비행기들이 한라산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조차 쓰지 않은 채 반기를 든 민중을 "폭도"로 몰아붙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기는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그런 것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사실대로 써내려고 몸부림했고, 그러다보니 차츰 수사기관의 미움을 독차지하다시피 되었던 것이다. 이학송은 담배를 잉끄려 껐다. 그리고 새 원고지를 끌어당겨 만년필을 힘주어 잡았다.

 

 

14. 살아서 돌아온 그들

안창민 부대가 군 전역을 장악한 것은 경찰병력이 떠난 다음 날이었다. 아직 인민군은 진주하지 않은 상태였다. 인민군은 광주 쪽에서 올 거라고도 했고, 순천 쪽에서 올 거라고도 했다. 인민군이 어느 쪽에서 오든 간에 안창민의 군당은 도당의 지령에 따라 현실적인 당 조직을 신속하게 이루어나갔다. 각 읍. 면 단위마다 인민위원회를 주축으로 해서 여성동맹위원회와 청년동맹위원회 그리고 농민위원회를 결성시켰다. 그러나 안창민이 당일로 한 일은 전단 배포였다.

보성군 전체 인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친애하는 보성군 인민 여러분,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해방의 날은 마침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 것입니까. 이제 우리 인민은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미 제국주의 괴뢰정권인 이승만 도당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지주와 자본가들의 착취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인민 여러분의 앞날에는 해방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복되고 영광스럽게 살 길이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여러분, 우리는 해방투쟁을 다 완수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인민해방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각 전선에서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인민군 전사들이 고귀한 피를 흘려가며 해방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전사들이 고귀한 피를 흘려 찾은 해방된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완전한 해방을 찾는 그날까지 우리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된 승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지원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첫째로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으로 사사로이 보복행위를 저지르거나 인명피해를 내는 일은 절대로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에 따라 모든 것을 당이 공정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둘째로 당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이기 위해 여러 조직을 결성함에 있어서 인민 여러분들께서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알려드릴 것은, 당 조직을 회복하는 대로 취대한 빠른 시일 안에 이승만 도당이 악질적으로 자행한 농지개혁을 전면 무효화하고, 공화국의 법에 따라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전면 새로 실시할 것임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읍내로 들어오기 전에 벌써 보복행위가 한바탕 회오리를 일으키고 지나갔다는 것을 안창민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건 보도연맹의 예비검속에서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뭉쳐 경찰 가족이나 청년단 가족들에게 자행한 보복이었다. 하루의 치안공백이 생기면서 발생한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경찰이 읍내를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예비검속 피해자 가족들은 괭이며 삽을 들고 뱀골재 산골짜기로 내달았다. 시체나마 찾기를 애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 쥐어뜯으며 숨죽이고 있었던 그들로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새롭게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눈물 쏟으며 서로 다투어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흙을 얼마 파내지 않아 그들은 주춤 물러서게 한 것은 속을 뒤집히게 하고, 숨을 막히게 하는 지독스러운 냄새였다. 그것이 무슨 냄새인지 그들은 금방 알았고, 그들의 눈빛은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빠르게 흙을 파 내려갔다. 시체 썩는 냄새는 점점 더 심하게 진동하고, 한 자 남짓 흙을 파내서 시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팔이 뒤로 묶여 엎어진 시체들은 하나씩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때서야 시체들이 줄줄이 엮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눈빛은 다시 또 달라졌다. 엮어진 끈을 칼로 끊어서 시체를 하나씩 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삼끈이나 칼로 끊어졌지 전홧줄은 칼로 끊기가 어려웠다. 그들의 눈빛은 한층 더 달라졌다. 작두나 뻰찌로 전홧줄을 끊어 시체를 들어냈다. 시체를 하나씩 들어내 산비탈에 즐비하게 눕히고 있는 그들의 눈빛은 이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한여름의 아흐레 동안에 총 맞아 죽은 시체들은 썩을 만큼 썩어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체를 다 끌어내고 난 사람들은 여자고 남자고 소리 내 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슬픔과 분노로 굳어지고 일그러진 얼굴로 시체들 사이를 정신없이 허둥거리고 다녔다. 그러는 사람들의 수는 즐비하게 누운 시체들보다 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산골짜기 비탈이 사람들로 뒤덮인 형국이었다.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은 입성마저도 비슷비슷한 삼베옷들이었다. 여기저기서 통곡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시체를 빨리 찾아낸 사람들이었다. 시체들은 옷이 벗겨지기도 했고, 뒤집혀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썩은 살들이 옷에 묻어나고, 뭉그러지고는 했다. 신체의 특성으로는 시체를 찾아낼 수 없게 된 여자들은 눈물어린 눈들을 씻고 또 씻어가며 남자시체들의 옷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자기네들이 지은 옷의 박음질로 시체를 식별하려는 것이었다. 자기의 바느질이나, 손수 만든 아래속옷의 끈 같은 것은 자기 눈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주인을 만나지 못한 시체가 남녀 삼십여 구였다. 남녀를 구분해서 합장할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오. 시상이 달버졌는디 우리도 우리 웬수럴 갚읍시다!"

누군가가 부르짖었다.

"맞소! 이 억울허고 분통헌 웬수럴 갚으로 갑시다!"

누군가 따라서 외쳤다. 여러 갈래로 퍼지고 있던 통곡과 울음소리가 뚝 멎었다. 산골짜기에 섬뜩한 고요가 밀려들었다. 한여름 땡볕 속에 시체들이 내뿜는 지독스런 냄새와 쉬파리들 나는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갑시다! 우리가 당헌 만치 갚어야 허요?"

곡괭이가 하늘로 솟았다. 그들은 시체를 파냈던 연장들을 손에 손에 들고 읍내로 몰려갔다. 그리고 네댓 명씩 갈라져 경찰들의 집과 청년단원들의 집을 덮쳤다. 눈에 파란불이 돋은 그들은 곡괭이로 찍고, 삽으로 내리쳤다. 그들이 연장을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고꾸라지고, 피가 튕겨 올랐다. 더 죽일 사람이 없어지면 그들은 살림살이를 산산이 때려 부쉈다. 그때까지 미적거리고 있던 경찰가족은 물론이고 아예 피신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청년단원 가족들은 꼼짝없이 맞아죽고 말았다. 염상구의 어머니 호산댁이 그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한 것은 아들이 집을 떠나버려 마음 놓고 쌀을 퍼가지고 큰아들네로 갔기 때문이었다. 안창민은 그 끔찍한 보복행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해져 있었다. 보성과 조성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예비검속이란 학살이 자행됐던 곳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거나, 벌어지리라는 것을 유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괴로운 악순환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급한 것은 앞으로라도 그런 무법행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단속하는 것이었다. 전단을 신속하게 뿌린만큼 그 효과도 빠르게 나타났다. 젊은 층들이 인민위원회로 몰려들었으며, 모여 앉은 사람들마다 새로 실시될 농지개혁을 화제로 삼았다. 여순사건 때 혼쭐이 난 지주나 부자들은 전쟁이 벌어지자 제각기 피신할 곳을 물색해두고 전황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므로 몸을 숨길 시간 여유가 넉넉해 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또한 그 동안의 편파적 정부 정책에 반감을 품었거나 고쳐질 가망이 없는 사회현상에 반발을 하면서도 숨을 죽이고 있던 젊은 층들은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지개혁에 억울함과 불만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의 모든 소작인들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푸르러가고 있는 논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와는 다르게 안창민네가 들어오게 되어 벌교에서, 아니 보성군 안에서 머리꼭지가 하늘에 닿도록 펄펄 뛸 만큼 제일 기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이었다. 그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 한 조각 없던 남편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도 까맣게 소식이 없던 남편이 산사람이 되어 돌아올 줄은 남양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깡마르고 검게 탄 얼굴에, 오래 된 땀내가 진동하는 다 헐어빠진 누더기를 걸치고, 긴 총을 멘 남편을 처음 대했을 때 남양댁은 허깨비를 보듯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나시, !"

남편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다가섰을 때에야 남양댁은 울음이 울컥 솟는 것을 느꼈다.

"워메! 참말로 길자 아베구만이라잉.“

그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두 손바닥에 받았다.

"그간 고상이 많었제."

남편이 어깨를 감싸 잡았다. 얼굴은 많이도 상했는데도 어깨를 감싸는 힘은 전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지야...... 지야 무신....."

지야 무신 고상이간디라, 을매나 고상허고 사셨소,’ 하는 말이 울음에 범벅되어 지워지고 있었다.

"아그넌 날웂이 큰가?"

"야아......“

주체할 수 없이 솟는 눈물로 남편의 모습마저 볼 수가 없었다. 그동안 혼자서만 애달파해 온 걱정과 불안이 한꺼번에 눈물로 풀리고 있었다.

"고만 울소. 죽어 못 돌아온 집안에 미안시런 일이시."

남편이 어깨를 감싸던 팔을 풀며 말했다. 남양댁은 무거운 느낌의 그 말이 삼동의 찬물처럼 가슴에 끼얹어지는 것을 느꼈다. 살아 돌아온 남편을 놓고 눈물바람을 하는 것은 남편을 잃은 여자 앞에서는 배부른 호사일 것이 분명했다. 유 서방은 워찌 됐을꼬, 하는 생각과 함께 남양댁은 울음을 잡을 수 있었다.

"유 서방은 워찌 되얏소?"

남양댁은 얼굴을 훔치며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이웃으로 관심 쓸 사람이 우선 유 서방이었다.

"유 서방...... 죽었네."

담배쌈지를 꺼내는 강동기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워메, 으짤끄나! 고것이 은제다요?"

남편을 그리도 원망해 쌓던 샘골댁의 생각에 남양댁은 그만 절로 작담이 되었다. 샘골댁은 그 누구보다 좋은 끝을 보았어야 했을 사람이었다.

"정월에."

"거그가 워디요?"

"산이제 워째, 딴말 쌔고 쌨는디 고런 말 그만 묻소. 나 찬물이나 한 그럭 주소."

강동기의 말에 역정이 묻어났다. 남양댁은 속이 찔끔해져서 부리나케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런 말을 곱씹고 싶어 하지 않는 남편의 마음을 익히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산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묻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굳이 묻지 않더라고 그때의 정황으로 보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야속허니, 워째 소식 한 가닥 웂었습디여."

남양댁은 물 사발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는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몰르먼 약인디 공연시 알았다가 병 된께 그랬제."

"병언 무신 병이어라. 살었는지 죽었는지 몰르고 속 태우는 것이 병이제라."

"하나만 알고 둘은 몰르는 소리 말소. 순사눔덜 닦달에 몰름서 몰른다는 것허고 암스로 몰른다고 잡아띠는 것허고는 생판 달븐 것잉께. 그라고 암스로 속 태우는 것이 훨썩 더 병 되는 것잉께로."

남양댁은 남편의 말이 맞다 싶었다. 그러나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이 다 가시지는 않았다.

"그려도 암스로 속 태우는 것이 나슨 대목도 있제라."

"글씨, 산 넘어댕김스로 멀찍허니서라도 자네가 무사 허니 사는 것 나가 알었으면 되얐제."

남양댁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식지 않은 인두를 잘못 잡은 것처럼 허출세와의 관계가 가슴을 지짐질하고 들었던 것이다. 그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의 앞에 서자 어찌할 도리 없이 마음이 조여 들었다. 남편에게 일러바쳐 자신이 당한 만큼 앙갚음을 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일이었다. 그놈이 그 짓을 하고 나서 쌀 한 됫박 값씩만 놓고 갔더라도 기막힘이 그렇게 사무치지는 않았을지 몰랐다. 쌀 한 홉 값에 불과한 십 원짜리를 던지고 갈 때마다 그것을 찢어대며 갚을 길 없는 분함으로 혼자 얼마나 울었던가. 이제 남편의 세상이 되었는데도 자신이 당한 분한 일을 앙갚음할 수 없다는 것이 남양댁은 너무 원통했다.

같은 시간에 하대치는 텅 빈 소화네의 먼지만 자욱하게 내려앉은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총을 두 다리 사이에 세워 왼손으로 잡고 집안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수염이 더부룩한 채 약간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작고 바라진 체구는 여전히 단단하고 억세게 보였다. 그가 총을 마루에 뉘어놓거나 기둥에 따로 세워놓지 않은 것은 산 생활에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하대치는 익숙한 솜씨로 담배를 말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푸우 소리 나게 내뿜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무당 동무가 을매나 멀리 삼십육계럴 쳤뿌렀간디 이적지 안 오고 이런다냐. 새끼덜델꼬 무신 일이야 웂겄제."

하대치는 말상대라도 있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토방을 내려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집안을 둘러보았다. 무당이 거처하기로는 과만하다, 생각하며 집안을 더듬어나가던 그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먼지가 두껍게 덮인 마루 끝에 자신이 앉았던 자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다시 토방으로 올라섰다. 마루 위에 자신이 왔다간다는 무슨 표지를 남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먼지 낀 마루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어보며 잠시 생각했다. 먼저 마누라의 무던한 둥글넓적한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고 두 아들의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 콧등에 매운바람 한 올이 엉키는 것을 느꼈다. 그 바람을 쫓기라도 하듯 그는 한쪽 눈을 찡그려 붙이며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서 몸을 구부렷다.

길남아 종남아 아부지가 왔다 인민공화국 만세다.’

하대치는 허리를 폈다. 한 자, 한 자, 다시 읽어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샅바를 양껏 잡지 않고 몸을 일으킨 기분이었고, 숟가락을 놓았는데 트림이 솟기지 않는 기분이었고, 불두덩 뼈가 서로 부딪쳐 뻐근해지기도 전에 물을 사질러 버린 기분이었다. 그 끝머리에 무언가를 적어야 딱 끝막음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 그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오른손바닥에 침을 두어 번 튀겨 손가락을 비비고는 다시 검지손가락을 쪽 폈다. 그리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첫 자가 였고, 두 번째가 였고, 세 번째가 였다. 그는 허리를 펴고 전부를 다시 읽어보았다.

길남아 종남아 아부지가 왔다 인민공화국 만세다 河大治.’

그는 씨익 웃고 있었다. 비로소 제대로 꽉 짜인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써야 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어쩌다 쓰게 되면 그는 꼭꼭 한자로 썼다. 한자로 쓰면서 큰 , 다스릴 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는 했다. 하대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소화네의 울을 벗어났다. 이지숙에게 말을 들어 몸을 피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고, 벌써 돌아왔을 것 같지 않았으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했던 것이다. 길 양쪽에 늘어선 잎 무성한 벚나무에서 매미들이 소낙비 울음을 울어대고 있었다. 진한 그늘이 드리워진데다 매미소리까지 어우러져 한결 시원한 느낌인 길을 걸어 내리며 하대치는 멀리 펼쳐진 중도들판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현 부자 놈이나, 그놈하고 같이 활 쏘고 기생몰이 하느라고 다니던 다른 부자 놈들이나 이길이 시원하고 기분 좋았겠지만 나는 더 밉기만 하고 기분이 드럽구나. 하대치는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지금 산에서 죽어 돌아오지 못한 많은 동지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투쟁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하자고 어느 때 한번 몸을 사리거나 비겁하게 군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은 앞서 죽어간 동지들에게는 죄스럽고 면목 없는 일이었다. 오늘과 같은 날을 보려고 그들은 산중에서 굶어가면서 투쟁했고, 얼어가면서 투쟁했고, 그러다가 결국 죽어간 것이다. 살아서 돌아온 동지들보다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동지들이 몇 갑절 더 많았다. 그 가족들에게 남겨진 슬픔을 생각하면, 승리의 기쁨이란 승리의 울음이라고 했던 안창민의 말이 맞았다. 다 항꾼에 살아 와서 저 들판에서 난 쌀로 밥해 묵음서 항꾼에 웃었어야 허는디...... 하대치는 눈길을 떨어뜨리면 총을 바짝 당겨 멨다.

보성군에 주둔할 인민군 이개 소대 병력은 사흘이 지나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와 목포를 같은 날인 이십삼일에 점령한 인민군 주력부대는 그때 이미 곡성을 거쳐 구례에 이르러 섬진강을 끼고 하동 쪽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중동부전선에서 밀고 내려오는 주력과 경남북을 협공하기 위해서였다. 인민군이 도착했을 때는 보성군 각 읍면에 이미 인민위원회가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염상진이 도당 조직부장으로 벌교에 나타난 것도 같은 날이었다. 남국민학교에서 베풀어질 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끔하게 면도를 한 얼굴에 깨끗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볼이 약간 패인 듯한 인물은 한결 준수해 보였고, 체구는 더욱 건장하게 보였다. 남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조선인민해방군 환영대회 및 보성군 전 읍면 인민위원회 발족식이 열렸다. 각 읍면에서 모여든 조직원들에다 구경꾼들까지 합쳐져 넓은 운동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읍면별로 구분해서 줄은 서 있었는데, 벌교읍 조직원들 속에는 안창민네의 소작인이었던 다섯 사람은 물론이었고, 들몰의 김종연. 서인출. 유동수가 들어 있었고, 회정리 삼구의 김복동, 마삼수 그리고 지삼봉도 눈에 띄었다.

"저 열 밖에 둘러선 사람들, 동원된 것이오?"

염상진이 안창민에게 낮게 물었다.

"아닙니다."

안창민이 앞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 염상진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동원 없이 사람들이 그만큼 모였다면 일단 만족이었다. 그러나 벌교 인구가 오만을 넘고, 한 가구를 오인가족으로 잡으면 성인은 이 반이고, 그 수에 비하면 결코 많이 모인 것도 아니라고 그는 계산하고 있었다. 물론 운동장에 나온 사람들만이 지지자일 리는 없었다. 일손이 바쁜 농사철인데다가, 참석 권유도 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러나 전체 인민의 절대적 지지와 호응을 얻기 위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건 어쩌면 유격투쟁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승만 정권에 실망한 인민들의 기대는 그만큼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 인민해방군 만세, 인민해방 만세를 삼창하는 것으로 식이 끝났다.

"대장님, 대장님!"

간부들과 함께 교문 쪽으로 걷고 있던 염상진은 설마하면서도 고개가 돌아갔다.

"대장님, 안녕허신게라."

뛰어오던 앳된 얼굴의 젊은이가 우뚝 멈춰서며 거수경례를 했다.

"아아, 천점바구 동무!"

염상진의 목소리는 반가워하는 얼굴만큼 컸다.

"대장님, 몸은, 몸은 성허신 게라?"

얼굴이 상기된 천점바구는 말을 더듬었다. 염상진 대장님이 자기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렇게 반가워하는 것에 그의 감정은 출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괜찮소. 천 동무는 어떻소. 동상은 다 나았소?"

염상진은 밝게 웃으며 분명한 존대를 썼다.

"야아, 땀나먼 쪼간 근지럽기는 혀도 다 나았구만이라."

"이젠 신발을 벗고 자도 괜찮으니까 날마다 발을 깨끗하게 씻고 자도록 하시오. 그리고 쑥 말려둔 게 있을 테니 날마다 한 주먹씩 태워 그 연기를 쐬도록 하시오. 그래야 겨울이 돼도 도지질 않소."

"알겄구만이라. 근디, 대장님이 우리 집에를 가셨으면 쓰겄는디요."

천점바구는 눈치를 살폈다.

"천 동무 집에?"

"야아, 쩌아...... 생간얼 잡수시게라."

천점바구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생간?"

"야아, 오늘 소럴 잡는디 아부지가 대장님 잡수시게 헐라고 손 안대고 딱 모셔놓겄다고 혔구만이라."

"이걸 어쩐다, 그럴 시간이 없는데......"

염상진은 난감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대장님, 아무리 바뻐도 시간 쪼깐 쪼개내서 얼렁 댕게오시제라. 소는 모레 잡을 날인디 대장님 오신다는 소식 듣고 아부지헌테 역부러 졸라서 오늘 잡기로 헌 것인디요. 생간을 남자한테 영판 좋다는디요."

천점바구는 울상이 된 얼굴로 염상진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바로 간부회의를 해야 하고, 그것이 끝나는 대로 장흥군으로 넘어가야 했다.

"천 동무, 대장님이 바쁘셔서 거기까지 가실 시간이 없으니까 천동무가 핑 가서 가져오는 것이 어떻겠소?"

옆에서 웃고 있던 안창민의 말이었다.

"야아, 맛은 쪼간 덜혀도, 그리 허제라."

천점바구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그리고

"핑 허니 댕게오겄구만요"

하고는 뛰기 시작했다. 아아...... 저 어린 나이에 살아남다니. 염상진은 멀어져가는 천점바구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저려오고 있었다.

"거 아조 보기 됴은 감동적 장면입니다레."

귀에 선 억양의 인민군 장교 말이었다.

"저 전사가 우리 군당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데, 소원이 부장 동무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부장동무의 직책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저 전사는 옛날 그대로 '대장님'이지요."

안창민의 설명이었다.

", 기래요? 기렇게 존경받는 부장동무가 부럽구만요."

인민군 장교가 염상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끝낸 염상진은 간부들과 둘러앉아 참기름 친 소금에 생간을 찍어먹고 거리가 가까운 어머니부터 뵙기로 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몸이나 성허신가. 자네럴 이리 보게 되니 상구가 또 떠나뿔지 안혔는가. 이내 팔자가 워찌 이 모냥인지, 기가 맥혀 못살겄네웨."

큰절을 받고 난 어머니의 눈물 뿌리는 탄식 앞에서 염상진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는 모성 앞에서 혁명의 논리나 해방의 당위성 같은 것은 허황한 말로 탈색될 뿐이었다. 그 동안에 많이 늙어버린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염상진은 큰아들로서의 자책을 느꼈다. 혁명은 자기의 선택이었지만 효도는 핏줄의 의무였다. 혁명의 의미 아래 짓눌려 깔려 있던 죄스러움이 쓰라리게 확대되고 있었다.

"어무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염상진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시, 아니여, 나헌테 효도허란 것이 아니여. 성제간에 서로 원수맹키로 살덜 말고 옛적에 커날 때맹키로 서로 얼굴 맞대허고 사는 것 보고 죽는 것이 이 에미 소원이란 말시, 어이웨, 자네가 성인께로 상구 미워허덜 말소. 사람 나고 돈 났디끼 핏줄이 먼첨이제 사상이 먼첨이당가. 워쩌겄어?"

"알겠습니다. 제가 상구를 미워할 리가 있나요, 동생이데."

염상진은 괴로움을 씹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해방이 되어 상구가 돌아오자마자 손을 쓰지 못했던 오래 된 후회를 다시하고 있었다.

"하먼, 하먼, 그래야제. 나가 배운 것 암 것도 웂이 무시허네마는 시상 돌아가는 판세럴 워찌 몰르겄는가. 성제간에 그리 척지고 살게 된 것도 다 이 시상이 잘못 돌아가는 죄제. 그려도 상구 고것이 영판 못돼묵은 물건은 아니여. 어쩔 때넌 인정머리도 있고 말시......"

이 에미한테도 헌다고 허니께,’ 하는 말꼬리를 호산댁은 삼켜버렸다. 그건 효도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큰아들의 가슴을 긁는 말일뿐이었던 것이다.

"어무님,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요, 저어, 오늘은 너무 바빠 이만 뵙고,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이, 어이, 자네야 인자 나 혼자 자석이 아닌께로."

호산댁은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먼저 일어섰다.

"인자 워디로 가는고?"

호산댁이 사립 앞에 멈춰서며 물었다.

"아이들 잠깐 보고 장흥으로 갈 겁니다."

", 아그덜? 쪼깐 기둘리소.

"호산댁은 얼른 돌아서서 삼베치마를 걷어 올리며, 그려도 에미라고 나럴 먼첨 보로 왔구먼, 생각하며 새로운 눈물이 솟기는 것 느끼면서 속곳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요것 을매 안되는디, 아그덜 과자라도 사갖고 들어가."

호산댁이 꾸깃꾸깃한 돈을 내밀었다.

"어무님, 저한테도 있습니다."

염상진이 난감한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아니시, 받어. 산에서 내레온 지 을매나 됐다고."

"아닙니다, 정말 있어요. 그건 어무님 용돈이나 쓰세요."

"아니랑께, 이 에미 맘잉께 싸게 받어."

허리가 굽은 호산댁은 어느새 키 큰 아들에게 매달리듯 해서 바지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고 있었고, 그런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염상진의 얼굴은 울 것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그덜 눈 빠지는디 싸게 가부아. 고상 끝났다고 맘 풀어놓덜 말고 밥 제때 제때 챙게묵고. 산에서 곯은 몸잉께로."

굽은 허리를 펼 수 있는 대로 펴려는 듯 호산댁은 목을 늘여 빼 아들을 올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 감감한 눈길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 어무님도 진지 많이 드세요."

염상진은 큰 키를 반으로 접었다. 골목어귀에서 어머님한테 다시 인사를 보낸 염상진은 빨리 걷기 시작했다.

어무님, 제가 어찌 당신의 괴로운 심정을 모르겠습니까. 두 자식 사이에서 차마 못 당할 고초시지요. 자식으로만 친다면 저희 두 놈이 모두 천하에 불효자식들입니다. 핏줄이 먼저지 사상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씀, 옳습니다. 어무님 생각을 제가 어찌 감히 원시혈연주의니 원시감상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제 어무님이 왜 막심고리키의 '어머니'가 아닌가를 어찌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고리키의 '어머니'가 다행히도 아들이 하나지 둘이 아니로군요. 그 어머니에게 우리처럼 딴 생각을 가진 아들이 둘이었다면 그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군요. 이건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는데, 참으로 궁금하군요. 고리키도 이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했더라도 소설로 쓰기가 난감하고 어려워서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어무님, 어무님은 스스로 배운 것 없이 무식하다고 하시면서도 아실 것은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와 상구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게 된 것이 세상이 잘못 돌아가서 그런 거라고 말입니다. 어무님, 세상이치의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은 배움의 유무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을 겪어나가면서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이 또 진짭니다. 그러고 보니 어무님은 조직행동이나 집단행동만 안하셨을 뿐이지 고리키의 '어머니'나 다르실 것이 없습니다. 아니, 제가 부탁을 드리지 않아서 그렇지 부탁만 드리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삐라도 뿌리실 것이고, 몇 백리 밖에까지라도 선을 대시겠지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본능적 모성의 행위이지 혁명의식을 자각한 이성적 행위가 아니지 않느냐고 비판할 겁니다. 그러나 고리키의 '어머니'가 그렇게 의식화되는 것도 모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무님, 혁명에 몸 바친다고 해서 불효가 상쇄되거나 변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다양함이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서로 다른 도리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혁명이 인간 생존을 위한 미덕이라면, 효도는 인간 윤리를 위한 미덕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당연한 도리지 어찌 유교만의 잔재겠습니까. 혁명사회도 인간다운 윤리의 바탕 위에서 존재합니다. 어무님,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혁명이 목전에 와있습니다. 혁명이 완수되면 그 동안 못한 효도를 다하겠습니다. 어무님......’

염상진은 자애병원 앞을 지나고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였다. 시계를 보았다. 여유가 없었다. 전 원장은 다음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극장 앞에 이르러 염상진은 과자방을 찾았다. 과자방은 일정시대 그대로 극장 옆 세 번째 집이었다. 과자를 고른 염상진은 바지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꼬깃꼬깃 구겨진 돈 위에 주름살이 거미줄처럼 엉킨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졌다. 염상진은 그 돈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른 돈을 꺼냈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