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2-7
22. 팔월의 들녘
고읍들녘은 고읍들녘대로, 중도들판은 중도들판대로, 칠동들은 칠동들대로 나날이 그 푸름이 진하고 두꺼워갔다. 봄숲이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색감이 다른 치장을 해나가듯 벼가 자라고 있는 들판도 햇살의 따가와짐을 따라 그 색조가 나날이 변해가고 있었다. 초록의 색감이 진해질수록 드넓은 들녘은 부드럽고도 두꺼운 질감으로 푸르게 푸르게 부풀어 올랐다. 푸름이 짙어갈수록 볏잎마다 부서지는 햇빛은 그 반짝거림에 윤기를 더해갔고, 드문드문 불어가는 바람결에 볏잎들이 수많은 물이랑을 이루며 부드럽고도 묵직하게 출렁거릴 때면 들녘을 온통 햇빛의 조각들이 살아서 뛰는 눈부신 초록빛 바다였다. 그 물결 속에 무슨 부표처럼 여기저기 찍혀 있는 하얀 점들의 흩어짐. 농부들의 밀짚모자와 삼베옷은 쑥빛으로 짙은 푸름 속에서 그 누르께한 빛을 표백당해 그저 흰색으로만 돋아 보였다. 칠월 중순을 넘어 팔월에 이르면 햇빛은 말 그대로 불볕이 되어 지글거렸고, 들녘의 푸름도 흰 천을 담갔다가 건져내면 금세 초록빛 물이 들 것처럼 한 고비를 이루었다. 그런 넓고 넓은 들녘은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누구나 절로 감탄을 흘릴 만큼 아름답고 풍요로운 경치였다. 그러나 그 푸름 속에 무슨 추상의 무늬처럼, 아니면 작은 들꽃들의 흩어짐처럼 박혀 있는 농부들에게는 숨길 헉헉 막히고 살 껍질이 타드는 힘겨운 일터였던 것이다. 그즈음 이면 논에는 벼와 함께 사는 것들이 많기도 했다. 크고 작은 개구리들이 버글거렸고, 한창 자라고 있는 메뚜기들이 개구리들을 조심하며 위에 붙은 볏잎 사이에서 소란스러웠고, 개구리를 노리는 물뱀들이 느닷없이 벼 포기 사이를 헤엄쳤고, 하루살이 나작은 날것들이 볏 잎 뒤에 붙어서 밤을 기다렸고, 그것들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볏잎과 볏잎을 연결해서 줄을 쳐놓은 물거미가 몸을 숨기고 있었고, 피를 빨 농부의 다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거머리가 물속에 웅크리고 있었고, 우렁이 꿈지럭 거리며 물속을 기었고, 물방개가 매끄러운 몸뚱이를 뒤뚱거려가며 헤엄쳤고, 소금쟁이가 미끄러지듯 물위를 달렸다. 참새는 아직 떼짓기가 이르고, 제비들만 그 빠르고 곧은 비상을 자랑하며 논 위의 공간을 제패하고 있었다. 한창 식욕 왕성한 새끼들의 배를 넉넉하게 채워줄 수 있도록 논에는 메뚜기며 잠자리 등속의 먹이가 얼마든지 상차리듯 마련되어 있었다. 농부들은 제비가 봄 따라 와서 집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자기네들 처마에 집을 짓기 바랐고,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 온 식구가 기쁜 웃음을 나누었고, 집을 짓는 동안 진흙이나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떨어뜨려 마루를 더럽혀도 누구 하나 얼굴 찡그림 없이 오히려 "어쩌끄나, 심드는디 또 헛걸음 쳤네웨." 안쓰러워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런 것을 훔쳐냈다. 제비가 알을 품을 때는 아이들도 큰소리치지 않고 발소리를 죽였으며, 마침내 새끼들이 털숭숭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몇 마리인지 세려고 다투어 손가락들을 까딱거렸고, 어른들은 새끼가 많을수록 어미 제비의 노고를 치하하는 동시에 고마워했다. 농부들은 제비의 번창을 그해 농사의 풍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만큼 해충의 피해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제비새끼 많은 것을 서로 자랑으로 삼았고, 어머니 아버지가 들일을 나가버린 집을 지키는 아이들에게는 어미 제비 두 마리가 부지런히 번갈아 가며 먹이를 물어오고, 그때마다 새끼들이 서로 받아먹으려고 노온란 입들을 있는 대로 크게 벌려 짹짹거리는 것은 보아도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구경거리였다. 두 어미 제비는 용케도 차례차례 순서를 맞춰 먹이를 먹였지만, 어쩌다가 실수를 해서 방금 받아먹은 놈의 입에 또 넣어주는 경우가 있었다. "아녀, 아녀, 그담이여, 그담!" 아이들은 지체 없이 손바닥으로 마룻장을 때리며 안타깝게 소리쳤다. 그러나 어미 제비는 이미 더위 가득 찬 푸른 하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그리도 시끄럽게 짹짹거리며 먹이 다툼을 하던 새끼제비들도 잠잠해져 있었다. "쩌거 순 도적눔이다. 똑 삼칠이 겉은 도적눔이다!" 남의 먹이를 채뜨려 먹고도 능청스러운 새끼제비를 분한 얼굴로 꼬나보면서 아이들은 저희들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애까지 싸잡아 욕해댔다. 그러나 그런 밉고 얌통머리 없는 새끼제비라 해도 아이들은 해칠 마음은 조금도 갖지 않았다. 다음번에 순서가 바로 잡히는 것으로 아이들은 분함이나 미움을 말끔하게 잊었다. 아이들은 벌써 누구에게 들었는지도 모르게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환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기들이 흥부이기를 바랐지 놀부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말귀를 알아듣게 되는 네댓 살 무렵부터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몇 번씩이고 되풀이해 들으며 자라났다. "흥부전"은 형제간의 우애와 정직한 삶에 대찬 가르침뿐만 아니라 농사일에 있어서 제비가 도움을 주는 큰 몫과 제비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그 보호의식까지 고양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흥부전"은 유교사상을 바탕에 간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구전문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런 분석적 인식을 굳이 이야기 끝에 사족으로 붙이는 일없이 그저 손자나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 속에 담긴 가르침과 일깨움을 손상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 내리는 무의식적인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해냈던 것이다. 아이들은 여름 한낮의 무더위에 겨워 새끼제비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잠이 들었고, 배고픔을 느끼며 부스스 잠을 깨면 새끼제비들은 여전히 노오란 입들을 짝짝 벌려대며 먹이다툼을 하고 있었다. "느그넌 좋겄다, 배터지게 묵은께." 아이들은 새끼제비를 부러운 눈길로 올려다보고는 슬슬 부엌으로 가 물 한바가지를 떠서 점심 굶은 빈속을 물로 채웠다. 논에는 벼와 함께 사는 것들이 그리도 많았지만 아이들은 별로 논두렁을 타지 않았다. 아직은 새를 몰 때가 아닌데다가, 메뚜기도 잡아서 볶아먹을 만큼 크지 않았고, 우렁도 새끼가 슬어 있어 맛도 없고 독이 진했다. 닭에게 먹일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내몰릴 때도 아이들은 굳이 논두렁을 밟지 않았다. 개구리가 논물로 뛰어들어 잡기도 어려운데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물뱀이 무서웠던 것이다. 개구리는 방죽풀숲이나 철둑 풀숲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거의가 방죽 너머 갯가로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바닷물이 언제나 있었고, 뻘 밭에는 재빠르게 옆걸음질 치는 꽃게가 수도 없이 많았다. 갯가로 몰려드는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단지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실컷 놀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면 거기다가 꽃게를 잡아넣어야 했다. 아이들은 논게를 잡으려고 발이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한바탕씩 싸움을 벌이고는 했다. 그건 재빠른 꽃게와의 싸움이면서, 발목을 물고 늘어지는 뻘밭과의 싸움이었다. 꽃게를 단지에 잡아가면 해가 떨어져 집에 들어가도 야단을 맞지 않았다. 그 꽃게는 장에 담가 좋은 반찬거리가 되었다. 상치 쌈에 얹어먹으면 쌈맛을 고소하게 했고, 식어빠진 꽁보리밥을 넘기는 데는 더없이 좋은 반찬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농사일에 쫓기느라고 꽃게를 잡을 틈이 없었으므로 여름 한철 밥상에서 꽃게장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말없는 가운데 아이들의 몫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꽃게를 잡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꽃게는 땡볕이 내리쬐어 더욱 검어 보이는 뻘밭에 마치도 붉은 꽃들이 핀 것처럼 수없이 많이 흩어져있었다. 그러나 어찌나 눈이 밝고 몸놀림이 빠른지 방죽을 걸어가는 사람 소리에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리곤 했다. 꽃게를 쫓아가서 덮치는 방법으로 잡으려 했다가는 하루종일 걸려도 한마리도 잡기 어려웠다. 참게를 갈대 꽃술이나 철사에 산 미꾸라지를 묶어 잡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이들은 몸 빠른 꽃게를 손쉽게 잡는 법도 알고 있었다. 꽃게들이 제 구멍을 찾아 숨어버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단지와 넓죽한 나무막대기를 들고 서두를 것 없이 뻘밭으로 들어섰다. 뻘밭에 뚫린 구멍들은 거의가 그만그만했지만 그래도 큰 것을 골랐다. 그리고 그 깊이를 어림해서 나무막대기를 엇지게 뻘 속으로 찔러 넣고는 두어 번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구멍에서는 놀란 꽃게가 십중팔구 튀어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꽃게를 덮쳐 단지에 넣는 것을 한 동작으로 해치웠다. 꽃게는 대개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였는데, 수컷의 생김은 독특하고도 기이했다. 두 집게발의 크기가 얼토당토않은 짝짝인 데다가 그 색깔마저 같지 않았다. 오른쪽 집게발은 몸체보다 크면서 색깔이 붉었다. 그런데 왼쪽집게발은 오른쪽 것의 이십분의 일 정도 밖에 안 되고 색깔도 다른 다리들과 같은, 기형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쪽으로 치우칠 것만 같은 그런 이상스런 생김을 하고도 그렇게 기민한 동작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희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쭉스름하면서 둥그스름하게 생긴 몸체는 뻘색과 비슷한 윤기 나는 각질로 덮여 있었는데, 그것을 꽃게라 부르는 것은 선연하게 붉은 오른쪽 집게발 때문이었다. 넓은 뻘밭에 수없이 많은 꽃게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멀찍이서 보게 되면 그 붉은 집게발들이 거무스름한 뻘과 대조를 이루어 작은 꽃들처럼 고와 보였다. 그런데, 수컷의 그 화려한 생김에 비해 암컷의 생김은 볼품이 없을 정도로 두 집게발이 모두 작은 채 색깔도 몸 색깔 그대로였다. 본래 이름이 농게인데 꽃게라고 부르는 것은 순전히 수컷의 생김에서 딴 것이었다. 여름 한철 아이들 손을 그렇게 타면서도 꽃게는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았다, 꼬막이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그렇게 흘태질을 당하고도 또 뻘을 헤치면 나오듯이, 유별나게 툭 불거져 나온 큰 눈으로 깊은 뻘밭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짱뚱이"와 함께 꼬막과 꽃게는 순천만 일대의 뻘밭에 사는 명물이었다. 찬바람이 사르르 일 무렵부터 글이기 시작하는 짱뚱이탕은 추어탕이 그 족보를 내밀 수 없도록 독특한 진미를 갖추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짱뚱이를 제맛나게 먹는 것은 가을볕에 바짝 말렸다가 겨울에 숯불에 구워 갖은 양념한 간장에 무치는 것이었다. 고소하고도 쫄깃거리면서 씹을수록 갯내음이 나는 듯한 그 깊은 맛은, 그러나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잡기가 힘든 데다, 말리는데도 손이 많이 간 짱뚱이꿰미는 그 값이 혓바닥 빼물 만큼 비쌌다. 못생긴 유자가 선비 방에서 겨울을 나듯, 못생긴 짱뚱이도 부자들의 밥상머리에만 올려지는 겨울반찬이었다. 들몰댁의 두 아들 길남이와 종남이는 열댓 명의 아이들과 뒤섞여 꽃게를 잡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가 잡아오라고 한 것이 아니지만 갯가에 미역감으러 나오면서는 버릇처럼 단지를 들게 되었다. 꽃게잡이는 봇도랑을 막아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는 것과 함께 아이들이 즐기는 여름놀이이기도 했다.
감물을 들인 짧은 삼베바지를 입은 길남이는 웃통을 벗은 채 나무막대기를 뻘 속에 박느라고 기운을 써대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길남이처럼 웃통을 벗고 있었다. 서너 아이는 아예 알몸인 채 뻘밭을 설쳐대고 있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아이들의 윗몸은 햇볕에 그을 대로 그을어 검은 갈빛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으레 감물 들인 짤막한 삼베바지 하나만을 걸치고 맨발로 여름을 나게 마련이었다. 삼베에 날감물을 들이는것은 광목에 쌀풀을 먹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색깔로 더럼 타는 것을 쉬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막 감물을 들인 새 삼베옷은 어찌나 억세고 빳빳한지 사타구니가 씻겨 헐 지경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새 삼베옷 입기를 꺼렸고, 새것을 입었다 하면 누구나 어김없이 엉기적거리는 걸음을 걸어야 했다.
"잉, 가시네덜언 붕알이고 자지고 웂응께 좋겄다."
사내아이들은 연상 사타구니를 훔치며 이런 귀엣말을 하고는 키득거렸다. 위 아랫입술이 말려 들어간 사이로 혀끝을 내민 길남이는 잔뜩 긴장한 채 게 구멍을 노려보고 있었다. 왼손으로 막대기를 한 번 더 흔들려는 순간 구멍에서 꽃게가 튀어나왔다. 길남이의 오른손이 그대로 꽃게를 덮쳤다. 그때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동생의 소리가 얼핏 들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길남이는 손아귀에 든 꽃게를 단지에 넣는 일이 더 급했다.
"서엉, 서어엉! 야아 잠 보소오!"
울음 섞인 다급한 소리는 동생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길남이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길남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과 그 앞에 버티고 서있는 발가벗은 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야 이눔에 새끼야! 니가 누군디 넘 동상얼 패고 지랄이냐. 니 쪼깐 기둘려, 기둘려 새끼야!"
길남이는 소리소리 지르며 동생 쪽으로 허겁지겁 발을 옮기고 있었다. 마음은 급한데 뻘이 자구 발목을 붙들고 늘어져 길남이 속은 더 급해지고 있었다.
"쪼옺 겉은 새끼, 니가 그리 소리 질름서 쫓아오먼 나럴 워쩔겨! 한분 뛰겄다 고것이여!"
동생을 때린 놈은 발가벗은 채 버티고 서서 잘못한 기색 하나도 없이 오히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식이었다.
"서엉, 쩌것이 나가 잡은 게럴 채틀어 뿔고, 내노랑께 막 팼다네."
동생이 콧물을 훌쩍이며 일렀다.
"니, 참말이여!"
길남이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내쏘았다.
"그라고 빨갱이눔 새끼라고 욕험스로 팼어, 성."
동생이 덧붙여 이른 말이었다.
"참말이다, 워쩔래!"
상대방의 당당한 대꾸였다. 길남이의 속은 이미 뒤집어져 있었다.
"니, 그 욕도 참말이여!"
눈을 부릅뜬 길남이는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고 있었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몸집이 약간 크다는 것도 "빨갱이눔 새끼"라는 욕 앞에서는 하나도 마음에 쓰이지 않았다.
"참말이다, 요 빨갱이눔 새끼야. 빨갱이눔 새긴께 빨갱이눔 새끼라고 불렀는디, 그려 니가 날 워쩔겨!"
"야 이 씨발눔아, 빨갱이, 빨갱이 허지 말어, 주딩이럴 찢어놓기 전에!"
길남이는 부르르 떨며 소리 질렀다.
"요런 주먹댕이만헌 새끼가 워따 대고 까불어. 니 맛 잠볼래!"
상대방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에라이 씨발눔아 어디 붙어보자.’
길남이는 이빨을 앙다물며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박치기로 상대방 가슴을 떠받았다. 몸집 조금 더 큰 것만 믿고 덤비던 상대방이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길남이는 그 위에 올라타고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방은 위기를 모면하려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아이들은 이미 게잡이를 멈추고 싸움구경에 열중해 있었다. 길남이는 왼손으로 상대방의 목을 눌러대며 오른쪽 주먹으로는 얼굴을 갈겨대고 있었다. 상대방도 다리를 버둥거리며 주먹질을 해댔지만 길남이는 맞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때리는 것에만 온힘을 쏟고 있었다. 목이 졸리며 얼굴을 집중 공격당한 상대방의 저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코피 터졌다아, 길남이가 이겼다아!"
아이들이 합창하듯 소리쳤고, 종남이는 너무 좋아서 몸을 들까 불었다. 종남이의 마음은 깡총깡총 뛰고 있었지만 두 발이 뻘 속에 빠져 있어서 몸을 들까 부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야이 씨발눔아, 우라부지가 느그집에 잘못헌 거이 머시가 있냐! 있으먼 말혀바!"
길남이는 상대방을 올라타고 앉은 채 소리쳤다.
"웂어."
상대방의 기운 빠진 소리였다.
"근디 워째 좆만헌 아새끼가 어런언 욕허냐!"
"빨갱잉께로…"
"야이 씨발눔아, 잘못헌 거 웂담시로 욕혀?"
길남이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녀, 아녀, 인자 다시는 안 그럴겨."
상대방이 두 손바닥을 모았다.
"씨발눔, 또 한분만 더 까불먼 그때 넌 참말로 아가리럴 찢어놀 것 잉께!"
길남이가 침을 뱉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길남이는 싸움에 이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가슴에 가득 찬 슬픔만 느꼈다. 길남이와 종남이는 중도들판의 물길 중의 하나인 개울둑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꽃게가 든 단지는 종남이가 꼭 끌어안고 있었다.
"성, 성이 지먼 나도 뎀빌라고 작대기 꼬옥 잡고 있었네."
동생의 말에 길남이는 픽 웃었다.
"성은 워째 그리 쌈얼 잘헌가? 성보담 큰디도 코피 터쳐 이게뿔고. 나 엄너헌테 자랑해야제."
길남이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종남이도 따라서 멈춰 섰다.
"니, 엄니헌테 찍소리 말어."
"워째?"
종남이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형을 올려다보았다.
"아부지 일로 쌈혔다먼 엄니 속상헌께로."
"성이 아부지 욕허는 눔 막 패서 이겨뿌렀는디도?"
"금메, 성이 시키는 대로 혀. 안그러먼 다시는 딜고 댕기지도 않고, 아무 말도 안 들어줄 것잉께로."
길남이는 동생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알어, 성 시키는 대로 헐겨."
종남이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길남이가 앞서 걸었다. 종남이는 뒤처져 걸으며, 형이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 나쁜 빨갱이질을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가슴에 묻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고 기운이 빠진 종남이는 형의 뒤를 따라 따가운 햇볕 속을 타박타박 걸었다. 샘골댁은 아들 칠상이를 데리고 봇도랑의 물굽이나, 높낮이가 다른 논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토하를 뜨기 위해서였다. 맑은 물줄기를 좋아하는 토하는 지형의 차이로 물 흐름이 달라지는 지점에 떼를 지어 바글거렸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금씩 긴 토하는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지도 못하고 수백 마리가 한데 엉켜 맴돌이질을 치고 있으므로 소쿠리로 떠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물이끼를 먹고 살아서 그런지 민물새우인 토하는 투명한 청록색이었다. 물에서는 그 투명도가 한층 더해 몸속까지 비칠 정도였고, 떼를 짓지 않으면 얼핏 물빛과 구분되지 않았다. 맑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받으며 그 투명한 토하들이 떼 지어 휘돌고 맴도는 속에 강렬한 햇살까지 어우러진 난무는 무수한 빛의 반짝거림이었고, 덩이진 빛의 휘돌이였다. 토하가 한창 번성하고 살이 오를 시기였다. 샘골댁은 이틀째 토하를 뜨러 나섰다.
"소작도 띠이고, 무신 살 방도럴 챙게야제, 세 자석 델꼬 품만 폴아서야 워디 살아 지겄냐. 긍께 이 엄씨 말 듣고 임자 웂은 토하나 부지런허게 떠다 쟁에라. 나가 소금이야 대줄 팅께 젓갈부텀 담구고, 소금이 모지래먼 요 두껀 햇발에 뽀짝뽀짝 말래라. 고것이 다 돈 되는일잉께."
발 굵은 소금 두 말을 땀 뻘뻘 흘리며 이고 온 친정어머니의 말이었다. 소금밭이 가까운 친정에서 소금을 돈 안 들이고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품팔이를 하고 소금을 받으면 되었다. 그러나 삼십 리 길 불볕 속을 그 무거운 소금을 이고 온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샘골댁은 남편이 다시 미워지고 어머니에게 면목이 없었다.
"아이고 그 문딩이, 칵 디져뿔기나 혔으먼 좋겄소. 지가 지 푼수럴 알아야제, 나이가 젊기럴 허요 배운 것이 있기럴 허요. 서른 넴긴 나이에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몰르는 일자무식이 염병헌다고 공산당은 해갖고 집구석 요리 망치는지 몰르겄소. 그 빙신 말대로 공산당 시상이 된다고 혀도 지까징 것이 면장을 해묵겄소, 읍장을 해묵겄소 아이고메 내 원수!"
샘골댁은 어머니에게 면목 없음을 남편에게 욕을 퍼붓는 것으로 씻으려 했다.
"야아야, 말이 씨 된다, 그리 말허덜 말어라. 다 너 팔자소관 잉께 남정네허는 일 잊어뿔고 니나 새끼덜 델꼬 살 방도 찾어야 써."
친정어머니의 말은, 토하젓을 많이 담갔다가 장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흙냄새가 상큼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물풀냄새가 물큰 나는 것 같기도 한 토하젓은 여러 바다젓갈과는 그 맛이 달랐다. 아이들은 그 이상야릇한 냄새를 싫어했지만 어른들, 특히 남자들은 좋아했다. 술안주며 밥반찬으로 즐겼고, 젓갈이 귀한 산중에서는 김치도 담갔다. 말린 토하는 여러 가지 된장국을 끓일 때 넣기도 했고, 볶음을 해서 먹기도 했다. 여자들은 농사일에 쫓기는 틈을 내서 한 단지쯤 젓갈을 담아 요긴하게 먹는 나무랄 데 없는 음식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소금을 대주기만 하면 맨주먹으로 돈을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토하알젓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토하의 알로만 담그는 젓갈이었다. "새발의 피"라는 말이 있고, "벼룩의 간"이라는 말이 있듯이 토하알젓이라는 것도 거의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토하라는 새우가 워낙 작은데다, 그 배에 붙은 알이라는 것이 조알보다 훨씬 작은 탓이었다. 그러나 토하알젖은 분명히 있었고, 그것을 먹고사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알밴 토하를 몇 수만 마리를 잡아 알만 뜯어내야 한 종지의 젓갈이 될 것인가. 그건 상식적으로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삼아 토하알젓을 담아 젓가락 끝으로 찍어 흰쌀밥에 살짝살짝 발라먹는 지주들이 있었다. 그것은 향내가 유별날 뿐만 아니라 정력에 좋다고도 했고, 장수의 비결이라고도 했다. 지주들 사이에서는 토하알젓을 먹는다는 것이 서로 간에 내놓는 자랑거리일 만큼 그것은 귀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먹는다는 소문이 난 지주는 못 사는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그것은 못 사는 사람을 수없이 괴롭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물길이 아래로 트인 논귀를 찾아낸 샘골댁은 걸음을 빨리했다.
"워메! 엄니이-"
뒤에서 들리는 질겁한 소리에 샘골댁은 후딱 몸을 돌렸다. 논두렁에 엎어져 있는 아들과 나뒹굴어진 소쿠리가 그녀의 한눈에 잡혔다.
‘워메, 토하가…’
그녀의 머리를 먼저 때린 생각은 넘어진 아들이 아니라 서너 차례 떠 담은 소쿠리의 토하였다. 그녀는 속이 뒤집어지며 아들 쪽으로 내달았다.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소쿠리에서 쏟아진 토하들은 논두렁에 흩어져 어지러울 정도로 파득 거리며 뛰고 있었고, 기운이 좋은 놈들은 높이 뛴 덕으로 연상 논물로 빠져들고 있었다.
"웬수야, 이 웬수야!"
샘골댁은 엎어진 채로 울고 있는 아들의 머리를 쥐어질렀다.
"비얌이, 비얌이…"
칠상이는 이렇게 말하다가 그만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시끄러, 비얌이 워쨌다는 기여!"
샘골댁은 바락 악을 쓰며, 두 손바닥으로 정신없이 토하를 소쿠리에 쓸어 담고 있었다.
"비얌이 나 잡아묵을라고 막 뎀벴당께로."
칠상이는 울음을 추슬러 올리며 좀더 크게 말했다.
"아이고 요런 등신아, 못난 느그 애비 탁헌 그 꼬라지 뵈기도 싫은께 싸게 집으로 끼대가뿌러."
뱀에 놀라 엎어진 아들의 꼴이 눈에 환해서 샘골댁은 더 역정이 솟기고 있었다. 굳이 제가 소쿠리를 들겠다고 해서 맡긴 것이 후회스러웠고, 애써 뜬 토하를 반이 넘게 잃은 것이 그리 아까울 수가 없었다.
"엄니넌 워째 아부지보고 욕헌가. 나넌 아부지가 좋고, 보고 잡은디."
칠상이는 몸을 일으키며 야무지게 말했다.
"이 문딩아, 토하 다 엎어 묵었으먼 엄씨 복장이나 긁덜말어. 빨갱이질 허는 애비가 머시가 좋고, 머시가 보고 잡냐."
샘골댁은 자신의 말에 맞추어 아들의 머리를 두 번이나 쥐어박았다. 칠상이는 또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따라나서지 말랑께 꼭 따라나서등마 이 웬수가 기엉코 말 씹히고 지랄이랑께. 가뿌러, 싸게 집으로 끼대가! 인자 유가라먼 씨도 징글징글허다. 문딩이 잡것이 물려받은 재산 웂고, 배와 쳐묵은 것 웂은 팔자에 죽은 디끼 소작질이나 해처묵고 살 일이제 지까진 것이 머시가 잘났다고 빨갱이질로 나서, 빨갱이질이. 아 금메, 빨갱이질 혀서 남은 것이 머시여. 죄 웂은 예편네 끌려댕김서 매타작이나 당허게 허고, 새끼덜 쫄쫄이 배나 곯리고, 소작꺼지 띠이게 혀서 토하나 뜨로 댕기는 신세 맹긴 내 웬수야아!"
샘골댁은 하늘에 삿대질을 해대며 한바탕 푸념을 토해놓고는,
"아, 그러고 섰지 말고 싸게 집으로 끼대가랑께!"
벌떡 일어서며 아들을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칠상이는 또 맞을까봐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아섰다. 옷을 입지 않은 윗몸은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났고, 그와 반대로 배는 볼록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칠상이는 울면서 긴 논두렁을 맨발로 걸었다. 울면서도 뱀을 또 만날까봐 조심했고, 방아깨비를 발견하고는 살금살금 다가가다가 놓치고 다시 울었고, 푸른 하늘을 서서히 맴도는 솔개를 올려다보며 걷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서 정말 서럽게 울었다. 꿈에서만 더러 만나는 아버지를 잠이 깨서도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고 싶었다. 아버지가 큰손으로 양쪽 볼을 눌러 잡고 위로 번쩍 들어 올려 시켜주던 서울구경도 다시 하고 싶었고, 바늘로 아무리 찔러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아버지의 그 두꺼운 발바닥을 다시 가지고 바늘 찌르기를 하며 발 냄새를 맡고 싶었고, 마룻장이 울리도록 센 아버지의 방구 소리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아버지가 그립고 서러워져 칠상이는 울음을 추슬러가며 울고 또 울고 하면서 뙤약볕 속의 논두렁을 혼자 걸었다.
조합장실에서 유주상과 세무서장 최익도는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움과 짜증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지주 출신 국회의원들이 절반이나 되는 판인데도 농지개혁법이 통과된 걸 보면, 그 사람들도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는 뜻 아닙니까."
유주상이 떫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망할 놈의 법을 통과시킨 건 지주출신들이다 핫바지 저고리란 뜻밖에 더 됩니까? 다 팔푼이들이요. 최익도가 성질을 돋우며 담배를 잉끄렸다.
"어쩌겠소, 해방이란 것이 되자마자 작인이라고 생긴 것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놈들 세상 만난 것처럼 설쳐대고, 좌익들은 좌익들대로 토지의 주인은 지주가 아니라 인민이라고 떠들어대며 작인 놈들 똥구멍에 바람 불어넣고, 그 위태위태한 속에서 이만큼이라도 끌어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요."
"내 생각은 그와 반대요. 그 동안에 이런저런 고비 잘 넘기면서 농지개혁을 눌러온 판에 더 바짝 눌러서 그대로 밀고 나갔어야지 그놈에 법을 통과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요. 그 동안에 빨갱이를 쓸만큼 쓸어 힘이 약해졌고, 반대로 우리 쪽 경찰이나 군인들 힘이 막강하게 세졌는데 뭐가 무서워 그 천하에 못돼먹은 놈의 법을 통과시키냐 그 말이요. 전보다 더 강하게 몰아쳐 빨갱이들만 씨를 말려버리면 작인 놈들이야 믿고 등 비빌 데가 없어지니까 꼼짝없이 기죽어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인데, 이제 와서 뭣 때문에 농지개혁을 하느냔 말요. 이 대통령이 그놈에 법을 빨리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계속 압력을 가했다는데, 그 영감도 당최 믿을 사람이 못돼요. 자기가 누구 덕에 대통령이 된 건데."
"최 서장님 말도 맞소. 허나 그 영감 생각은 따로 있소. 좌익이 소작인인지, 소작인들이 좌익인지 식별을 할 수 없게 얼클어져 돌아가는 판국이니 그 영감은 자기 정권이 언제 엎어질지 뒤집어질지 몰라 겁을 먹은 거요. 자기 정권을 지키기 위해선 수많은 작인들이 공산당 편을 들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완력만으로는 안 되니까 결국 농지개혁을 할 수 밖에요."
"글세,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앞 짜른 생각이요. 농지개혁만 하면 작인들이 다 빨갱이한테서 등 돌리고 자기편이 될 줄 알았겠지만, 저 작인 놈들 허는 짓거리 좀 보시오. 이북 빨갱이식으로 무상몰수에 무상분배를 하지 않는다고 저 지랄발광들 치는 꼴 말이요. 저하는 꼴들이 꼭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라는 격이 아니고 뭐시오. 작인 놈들은 일정 때부터 빨갱이들한테 물이 들어 빨갱이 세상이 되길 바라는 쳐 죽일 것들이요. 그런 것들을 상대로 이 박사는 신사적인 방법을 쓰겠다는 것인데, 어림없는 소리요. 그것들은 그저 일정 때처럼 주먹으로 닥달해서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인제 저리 되감고 드는 놈들을 어쩔 심판이냐 그것이요."
"최 서장님 말이 백번 옳아요. 허나, 인자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요, 지금 형편으론 그놈의 화살에 맞지 않게 피하는 게 상수 아닌가요. 완전하게 피할 수야 없겠지만, 심장에 맞느냐, 배에 맞느냐, 허벅지에 맞느냐, 하는 건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겠소? 우선 토지가 아니라 농지로 국한되고, 무상몰수에 무상분배를 면했으니까 지주들은 심장에 정통으로 화살을 맞을 위기는 일단 피한 셈이요. 그것이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이젠 더 피해를 줄일 방도나 강구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 싶소."
유주상이 기름기 도는 두툼한 얼굴에 묘한 웃음을 피워 올리며 최익도를 건너다보았다.
"그야 더 이를 말이요. 말을 해봤자 내 입만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하도 화가 나니까 자꾸 곱씹게 되는 거지요. 날강도 같은 놈들, 지놈들이 남의 금싸래기 같은 재산 맨입으로 먹어치우겠다고 덤비는데 우리라고 그냥 앉어서 당할 수 있소? 당연히 막고, 피하고 해야지요. 어디, 유 조합장한테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시오?"
최익도는 앉음새를 고쳤다. 그가 일삼아 유주상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한 것이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 사촌형 최익달은 벌써 작년 초부터 전답의 명의를 처가 쪽 사람들 앞으로 바꾼다거나, 적당한 매수자가 나서면 팔아치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은 작인들의 불평불만을 사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촌형이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를 해나간 것인지, 최익도로서는 그저 감탄스럽고 부러울 뿐이었다. 물론 그런 눈치 빠른 앞가림을 해나간 지주들은 적지 않았다. 어떤 지주는 자기 돈을 오부로 빌려준다는 조건으로 작인들에게 논을 억지로 떠넘기는 바람에 욕을 있는 대로 먹기도 했다. 그런 모양들을 자신은 태평한 마음으로 구경만 했던 것이다. 시끄럽기만 하지 농지개혁은 결국 안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지주들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온갖 방법을 찾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색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는 혹시나 하고 머리 잘 돌리는 유주상을 찾아오게 되었다.
"글쎄요오, 날마다 궁리를 한다고는 하는데, 이거 참, 똑 별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유주상은 짭짭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밤잠을 설칠 지경으로 그 방법을 찾아내는 데 골몰해 있었지만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서운상에게 뒤늦게 논을 사들인 일이 속 쓰린 후회로 가슴을 긁어내렸다. 그는 땅을 믿기는 했지만 돈 장사만큼 믿지는 않았다. 이자가 이자를 물고 들어오는 돈 장사에 비하면 땅 가지고 소작 놀이하는 건 선하품 나오는 장난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서운상에게 논을 사들였던 것은 논 값이 너무 헐했던 까닭이었다. 추판알을 튕겨보니 돈 장사보다 나았던 것이고, 소작놀이를 하기가 성가시면 제 값을 받고 되팔아도 이문이 큰 장사였다. 농지개혁법이 언젠가 만들어지긴 만들어지되, 그러나 그처럼 급하게 닥칠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 목적 없이 돈을 한 푼이라도 손해 보며 산다는 것은 그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그 어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그는 속을 썩이고 있었다.
"유 조합장님한테 똑 별난 생각이 없다면 이것 참 탈났구만요. 에이 빌어묵게 날할라 이리 푹푹 쪄데고 지랄이여."
최익도는 사투리를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부쳐댔다.
"속 터지는데 일이고 뭐고, 찬물에 목간이나 한바탕 하고 낮잠이나 잤으면 좋겠소."
유주상은 속에 없는 말을 씨부렁거렸다. 그는 속으로, 내가 똑 별난 생각이 있어도 뭣땜에 너한테 가르쳐주겠냐, 비웃고 있었다.
"허먼, 유 조합장님은 앉은자리에서 당할 참이시요?"
최익도는 노려보듯 유주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말투며 눈길이 유주상의 심장을 헤집고 들었다.
"어찌 그럴 수야 있겠소? 도둑놈도 지 재산은 눈에 불 키고 지키는 법인데, 도둑질해서 모은 것도 아닌 그 귀한 재산을 어찌 앉은 자리에서 뺏긴단 말요. 생각하는 데까지 해보고 정 똑 별난 생각이 없으면 다른 지주들이 하는 방법으로 재산을 지켜야지요. 똑 별난 방도가 없을 때는 남들이 다 쓰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쉬운 법이요."
유주상의 이 말 또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제삼자 앞으로 명의를 변경하는 방법과 작인들에게 떠넘기는 방법을 놓고 저울질해오고 있었다. 작인들에게 떠넘기는 경우 값이 시세보다 월등하게 싸면 모를까 제 값을 받고서는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값이 싸다고 해도작인들이 모두 오 년 분할 상환이란 농지개혁법 내용을 알고 있는 이상 빚돈을 내서 일시불을 해야 하는 논을 사려고 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방법은 이미 적기를 잃은 것이었다. 그러면 명의변경을 하는 방법뿐인데, 타향이라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골라잡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유조합장님을 만나보면 무슨 좋은 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고, 날은 쪄대고, 그만 일어나야 겠읍니다."
최익도가 더디게 몸을 일으켰다. 최익도가 문을 나서려는 참에 염상구가 더위를 묻힌 얼굴로 들어섰다.
"서장님 와 기셨구만이라?" 염상구가 최익도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어서오시게. 그건 뭔가?"
최익도가 인사말로 염상구의 손에 들린 종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건성으로 물었다.
"야아, 요것 땀세 단장님헌테 보고 디릴라고 왔구만이라. 삐라가 또 동네마동…"
염상구는 정말 유주상을 염려한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 또 뭐요, 어디 봅시다." 유주상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고, 최익도는 삐라 내용을 알아야 되겠다는 듯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또 농지개혁법 욕허는 것이드만이라."
염상구가 삐라를 내밀며 말했다.
"참 끈질기기도 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벌써 몇 번짼가 그래."
유주상이 방정맞을 정도로 빠르게 혀를 차댔다.
"참 돈도 많다. 종이 귀한 세상에."
최익도도 따라서 혀를 찼다.
‘인민 여러분, 속지 맙시다! 다 같이 뭉칩시다! 그리고 일어납시다! 미 제국주의 괴뢰정권을 쳐부시고, 모든 인민들의 적인 지주들을 쳐 없애기 위하여! 농지개혁법은 인민을 죽이려는 악법이다!’
겹으로 쓴 큰 글자 안을 빗금으로 채운 이런 문구들이 삐라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빌어먹을 빨갱이 놈들! 다 한꺼번에 쳐죽이고 말아야 하는데."
유주상은 이빨을 뿌드득 갈아붙이며 삐라를 마구 구겨버렸다.
"그러게 말이요. 이 빨갱이 놈들을 일시에 다 잡아 죽이는 무슨 방도가 없을까."
최익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일어섰다. 서로 건성으로 인사를 나누고, 최익도는 밖으로 나갔다.
"삐라는 다 수거됐소?"
유주상은 청년단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 물었다.
"야아, 담배 몰아 피든 것꺼정 다 뺏었구만이라."
"그러나 깊이 감추고 있는 게 아직도 남아 있을 게요. 변두리 동네에만 뿌려대니 사전에 적발해내기도 어려운 일이고, 이거 참 문제로군."
유주상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청년단장으로서가 아니라 빨갱이라면 본능적인 증오감을 일으키는 개인으로서 계속되고 있는 삐라살포를 염려하고 있었다. 작인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대고 있는 삐라는 작인들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미리 손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점점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염 부장, 전답가진 게 있소, 없소?"
유주상은 불쑥 물었다. 삐라를 보고 촉발된 그의 감정은 명의변경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했다. 그리고 염상구를 첫 번째로 이용하자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사람이 거칠고 사나운 반면에 생각이 단순하고 주먹패다운 의리가 있지 않은가. 더우기 청년단의 끈으로 묶여 있는 한 얼마나 믿을 만한 관계인가. 그의 속 빠른 계산이었다.
"전답이 라고라?"
염상구는 유주상의 말뜻이 얼른 잡히지 않아 미심쩍을 얼굴로 되물었다.
"아, 염 부장의 재산이 얼만가를 알자는 게 아니고, 내가 도움을 좀 청할 일이 있어서 논밭이 있나, 없나를 알려는 거요."
"나겉은 눔이 전답 지녔을 리가 있간디라. 족보 웂대끼 그냥 맨주먹이제라."
‘나넌 돈얼 좋아허제 그까징 것 전답은 안 좋아허요,’ 하는 말이 곧나오려고 하는 것을 염상구는 간신히 참아냈다. 일찍이 도망 다니는 타향생활 속에서 뼈가 굵고 철이 든 그는 남자의 세상살이가 돈과 주먹의 세기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고, 해방이 되면서 권력조직에 끼어든 뒤로는 주먹의 자리에다 권세를 바꿔놓게 되었다.
"그거 마침 잘되었소. 염 부장,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소? 염 부장한테야 아무 손해가 없는 일이니까."
유주상은 일단 자신의 이익 쪽으로 계산을 끝낸 이상 그다운 적극성으로 일을 몰아대고 있었다.
"무신 부탁인지 몰르겄제만, 나헌테 손해 웂이 단장님 좋아지는 일이람사 돕고말고라."
그때까지도 염상구는 유주상의 부탁이 무엇인지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고맙소, 염 부장."
유주상은 접대용 담배를 염상구에게 권하고는,
"내 부탁이 뭔고 하니, 내 논 얼마를 농지개혁이 끝날 때까지만 염 부장 앞으로 명의변경을 좀 해달라는 거요. 물론 내가 사례는 하겠소."
그는 끝말에다 힘을 주었다.
"아아, 나넌 또 무신 부탁이다냐 혔지라. 법에 안 걸릴만치만 을매든지 나 이름 갖다 쓰시씨요. 탱탱 놀고 자빠졌는 그까징 이름 석 자, 단장님 위허는 일에 워째 못 빌려디리겄소."
염상구는 아주 흔쾌하게 응답했다. 그러나 사례를 고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름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장사는 또 처음이었다.
"염 부장, 고맙소. 이따가 저녁때 다시 들러주시고. 사례금을 준비해 두겠소."
유주상은 역시 내 판단이 기막히지, 스스로에게 더 없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글먼, 이따가 오겄구만요."
염상구가 기분 좋은 얼굴로 일어섰다. 저런 단순한 물건 서넛만 더 있어도 일은 깨끗하게 해결 나는 건데, 유주상은 밖으로 나가고 있는 염상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큰길로 나선 염상구는 땡볕으로 부신 눈을 가늘게 찡그려 붙이며,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깔겼다. 생각지 않은 돈이 생기게 되어 그는 기분이 한껏 좋은 상태였다.
‘워디 다 두고 보자, 나가 누군디 요렇타께 까발릴 날이 올 꺼싱께.’
그는 또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잔돈푼이 아닌 상당한 재산을 모아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남모르게 목돈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철저하게 간수했다. 그리고 장터거리 술집 주 서방을 새 중간에 놓아 이자놀이를 시키고 있었다. 장터거리 붙박이 장수들은 자기네가 쓰고 있는 돈이 염상구의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염상구는 누구누구가 자기의 돈을 쓰고 있는지 환하게 알고 있었다. 놀부 돈은 떼먹을 수 있어도 주 서방 돈은 떼먹을 수 없다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장터거리에서 무슨 법칙처럼 통하고 있었다. 주 서방이 청년단의 완력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이 장터거리 장수들의 파악이었다. 염상구는 자기가 돈놀이하는 것을 철저하게 감추려 했으므로 소문은 오히려 거꾸로 나게 된 것이다. 염상구는 읍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지게숯장수인 아버지가 평생을 이기지 못했던 가난 속에서 배곯으며 자라난 어린 날이 그의 의식에는 언제까지나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었다. 큰아들을 상급학교에 보내는 것과는 반대로 작은아들에게는 숯장사를 시키려 했던 그의 아버지의 우격다짐이 결국에는 그에게 돈을 간수하는 법을 깨우치게 해준 셈이었다. 아버지가 장사와 돈벌이에 대해서 되풀이했던 여러 가지 말 중에서 "돈은 쓰지 말아야 번다"는 한마디는 그의 의식 속에서, 가난의 기억과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 말은 돈을 모아갈수록 옳고도 기막힌 말이라는 것을 그는 확인해 나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증오나 미움도 차츰 엷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텃세벌이로 모아들이는 돈은 청년단 운영과 부하들 거느리는데 공평하게 사용하며 사사롭게는 한 푼도 욕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음성적 수입은 전혀 축내는 일없이 옹골차게 모으고 불려나갔다. 그는 술도가고, 정미소고, 솥 공장이고, 제재소고, 다 한 손아귀에 넣고 싶은 욕심에 남모르게 가슴을 떨고는 했다. 돈 모으기가 그리도 손쉽다는 사실이 가금씩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가 역시 살 만한 세상이라고 착실하게 믿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빨갱이들을 쳐 없애야 한다는 그 나름의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광주로 이사가는 것을 아예 작파해버린 정현동은 술도가를 내주고 금융조합 언저리의 왜식집으로 옮겨 앉았다. 일본 놈들이 모여 살았던 본정통 주변 좌우로는 한옥보다 왜식집이 더 많은 형편이었다. 정현동은 다다미방을 온돌로 개조하는 번거로운 일을 벌이면서도 굳이 왜식에 살기를 고집했다. 그가 이사 가는 것을 작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최익승의 방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보도연맹에 무조건 떠밀어 넣은 백사령관이란 자가 금족령을 내렸던 것이다. 도리 없이 벌교에 주저앉아야했다. 그리고 술도가를 다시 차지해볼 계획으로 서운상의 아내에게 접근했다가 실패한 것이 영 찜찜하게 가셔지지 않았다. 서운상이가 건강을 회복하기에는 전혀 가망이 없는 상태였지만 술도가를 내놓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서운상의 동생이 형수를 조종하는 탓이었다. 서운상의 아내는 시동생을 믿고 술도가를 경영할 작정을 세우고 있었다. 술도가는 이미 서운상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기 박힌 소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시동생을 믿고 술도가를 해? 그건 보나마나 고양이 입에 고깃덩어리 털어 넣어뿐 일이요."
그런데 서운상의 아내의 대꾸가 희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말로 걱정도 팔자고, 넘 지사에 배 놔라 감 놔라 말도 많소. 한 성제간 돈인디 그러믄 어쩌고, 저러믄 어쩌겄소!"
"하! 그려어라아? 여자가 속 한분 넓고, 보살님이 따로 웂소잉!"
하며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무슨 눈치를 챘는지 바락 소리쳤다.
"멀 그리 보요, 넘 여자 얼굴을!"
필경 산송장이 된 서운상만 불쌍하고 억울한 노릇이었다. 시동생은 딴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돈을 놓고 그렇게 관대하고 편안할 수 있을 것인가.
"에에이 더러운 것들!"
그는 별다른 근거도 없이 두 남녀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단정 해버리고 있었다. 그건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데 대한 화풀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최익승과의 문제가 꺼림칙하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술도가를 팔아 넘겨버린 마당에 깨끗하게 안면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는데, 나날이 무료해서 정현동은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의 무료감은 술도가나 논밭을 다 처분해버려 일거리가 없어져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무료감은 갑자기 없어진 "사장"이라는 직함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농지개혁법 공포를 맞게 되었다. 그는 그 소식을 누구보다도 반갑게 받아들였다. 농지를 진작 처분해버린 자신은 걸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다, 자신이 순천 미결감에 갇혀 있을 때 도장 한번 눌러주기를 외면했던 유지라는 것들이 당할 꼴을 생각하면 그렇게 속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도장 찍기를 거절했던 인물들을 일삼아 찾아다니며 며칠에 걸쳐 그들의 속을 긁어대거나 뒤집어놓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몸 달아하는 꼴이나, 턱없이 이승만과 작인들을 싸잡아 욕해대는 꼴을 느긋한 마음으로 구경하는 것은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료감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았다. 이 북새통속에서 이득을 볼 만한 일이 뭐가 없을까, 하는 쪽으로 신경을 돌리며 그는 무료를 달래려고 했다. 논밭 값이 병든 소 값처럼 곤두박질치고, 지주란 지주들은 하나같이 정신 제대로 못 잡고 허둥거리는 판에 눈 똑바로 뜨고 어느 한 대목만 옳게 잡았다 하면 한밑천 단단히 챙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혼란한 때일수록 빈 구멍은 많은 법이다. 그는 이 판단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으로 세상이 온통 뒤집어지고 있을 때 시세의 반의 반값밖에 안 되는 금붙이를 내놓고 술도가를 차지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정현동은 빈 구멍을 찾아내기 위해 농지개혁법을 다시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서랍에 고이 모셔놓았던 묵은 신문을 꺼낸 그는 돗자리 위에 배를 갈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눈길은 "매수대상농지" 항목을 거쳐, "매수대상 제외농지"의 항목에서 고정되었다. 한 차례 읽고, 되짚어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첫째, 과수원, 종묘포, 삼전 등 다년생 작물 농지. 둘째, 오 백 평 이내의 가정원예지. 셋째, 정부, 공공단체, 교육기관 등에서 사용목적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정부가 인정하는 농지. 넷째, 소작료를 받지 않는 분묘위토로서 묘일 위당 이 단보 이내의 농지. 다섯째, 미간척지 및 미개간지 등. 나머지 항목들은 "분배대상 농가의 순서" 매수농지의 가격설정" "분배농지의 상환금방법" 등이었으므로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정현동의 눈길은 셋째의 "교육기관"에 박혀 있었다.
‘교육기관이면 각종 학교가 다 들어가는데, 농토를 교육을 위해 사용하면 농지개혁에서 제외시킨다? 이것 봐라, 이 구멍 한번 크다. 공짜가 아니라 월사금 꼬박고박 받아들이는 판에 교육을 위해 돈을 써? 월사금에서 남고, 농토 빼돌려 남고, 이거야말로 이중 장사가 아닌가! 학교 가진 놈들만 살판나지 않았나. 이거, 교육자라고 있는 대로 체면 다 세우고, 대접은 대접대로 받아가며, 이런 기막힌 특전까지 또 받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아니야, 가만있어 보자, 나도 학교 하나 세우고, 똥값 다 된 논 마구 사들여 뒤로 빼돌려봐? 논은 논대로 남고, 교장자리는 교장자리대로 떨어지고. 하아! 학생들을 줄 세워 놓고 일장 훈화를 하는 맛도 괜찮을 거라. 그리고 교육자의 집안, 아아 거 참 근사허다! 보기 좋고, 듣기 좋고, 양조장 사장에 비교가 되나. 헌데, 학교하나 세우는 데 돈이 도대체 얼마나 들까?’
정현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당에 가득 찬 햇살에 눈이 시렸다.
‘아니지, 이리 흥분할 일이 아니지. 당장 학교가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한 대목이 남았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세세허게 따져봐야지. 덤벙댔다가는 나만 손해다.’
정현동은 다섯째의 "미간척지 및 미개간지"에 눈을 고정시켰다. 몇 번을 읽어도 그 뜻이 파악되지 않았다. 임야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으면서 똑같이 농지가 아닌 미간척지나 미개간지는 왜 따로 표시를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미간척지면 뻘밭일 것이고, 미개간지면 산자락일 것 아닌가. 미친놈들이 이것도 법이라고 만들어서 공포를 해대니 원.’
정현동은 혀를 차대며 담배를 빼들었지만 미심쩍은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이거 찜찜해서 안 되겠다, 알 건 알고 넘어가야지. 그는 읍사무소로 전화를 걸기로 했다.
"아, 나 양조장 정 사장인데."
"아이고, 이 더우에 전화를 다 허시고 워쩐 일이시당가요?"
상대방의 굽신거림에 정현동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며 기분이 꽤 좋았다.
"어이, 더위에 수고허시네. 나가 전화를 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농지개혁법 중에서 좀 자세허게 알아볼 대목이 있어서 그렁마."
"예에, 워떤 대목인지 말씀해보시제라. 아는 디꺼정 말씀 올릴 것잉께요."
"그러세. 매수대상 제외농지 중에서 말이시, 다섯째 미간척지 및 미개간지라고 했는데, 그것이 대체 멀 말허는 것인지 모르겄네."
"아 예에, 미간척지는 간척을 허기는 했어도 안직 농사를 질 수 없는 땅에다가 염전까지 합한 것이고라, 미개간지는 말 그대로 농사를 질 만한 땅인디도 안직 개간이 안 되어 논도 밭도 아닌 땅을 말허는 것이제라."
"고것이 그렇구마. 어이, 잘 알었네. 더운디 수고허소."
정현동은 전화를 끊으며,
‘자알들 논다, 요리조리 빼묵을 것은 다 장만혔구나, 과시 농지개혁은 농지개혁이로구나,’
생각했다. 지주출신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마지못한 심정으로 그 법을 만들었는지 "매수대상제외농지" 항목에 환히 드러나 있었다.
‘가만 있거라, 간척을 하기는 했는데 간기가 안 빠진 땅이라, 몇 년이 지나 간기가 빠져 농사를 짓게 되면. 그때 가서 농지개혁에 추가할 건가? 그런 조항은 없었는데, 어쨌거나 그런 간척지 가진 놈 팔자 고치게 생겼다. 염전이 빠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밭 전자지만 그게 소금밭이지 곡식밭은 아니니까. 염전 가진 농들도 애초에 늘어진 팔자에다 이 북새통에 속 편해서 좋겠다. 나도 진작 염전이나 하나 가졌어야 하는 건데. 그때 양조장은 쉽게 생각했었는데 염전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니, 그 좋은 기회를 놓친 거지. 아니, 가만 있거라! 그 논에 바닷물만 끌어대면 염전이 될 거 아닌가. 그렇구나, 그래!’
정현동은 무릎을 치고 또 쳤다. 논 값이 제 값일 때도 중도방죽에 가까운 논들은 그 값이 한 층이 낮았다. 제석산자락에서부터 이어지는 물길이 먼 데다가 방죽 너머에서 바닷물이 들고 나는 탓으로 자연히 간기의 영향이 미쳤다. 지금 논 값이 똥값이 되고 있는 형편에 그 논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것들을 사들여 소금기 좋은 밀물을 끌어들여 논에 채우기만 하면 그대로 염전이 되는 것이었다.
‘햐아, 이거야말로 기막힌 생각이다. 누가 감히 내 머리를 따라와. 당장 일을 추진해야겠다.’
논을 사들이는 것이야 한나절이면 끝낼 일이고, 그 다음 문제가 지목변경과 염전허가였다. 그것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돈 힘이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어이, 어이."
정현동은 기세 좋게 부채를 부쳐대며 아내를 불렀다.
"불르셨소?"
"불렀네. 콩국 있는가?"
"있는디요."
"우무많이 띄우고, 아이스케키 집서 얼음 구해다가 씨언허게 해서 한 사발 내오소."
"알겄구만이라."
오랜만에 남편의 기색이 밝아진 것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낙안댁은 부산하게 몸을 돌렸다.
23.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이지숙은 소작인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앞서 안창민의 집으로 갔다. 손에는 김치단지와 과자를 싼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이지숙은 안창민의 어머니 신씨의 한량없이 큰 도량을 대하면서 사람의 인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익혀나갔다. 그 욕심 없음과 겸양이 꼭 불교의 가르침만으로 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신씨를 보면 안창민의 과묵과 의지가 저절로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안창민은 군당의 조직원 개편을 알리면서, 조직이 본격적인 전투화로 재편성되고 있으니 읍내의 조직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거기에는, 자기 소작인들에게 현재 상태 그대로 경작지의 소유권을 이전 시켜주라는 사적인 용건이 첨가되어 있었다. 작인들에게 땅을 넘겨주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나, 어머니의 생계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물론 혼자 사는 분의 생계쯤 다섯 작인들이 해결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미 세뇌된 상태이므로 그 문제 해결은 전혀 염려할 게 없었다. 그러나 전 재산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염려스러웠다. 아니, 그분의 반응에 앞서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옹색하고 민망할 것 같은 기분을 이지숙은 떼칠 수가 없었다. 몇 마지기라도 남겨둘 일이지, 그녀는 진광산 쪽으로 눈을 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허먼, 그래야제. 나야 다 산 목심잉께 한창 살 사람덜이 땅얼 지니는 것이 순리제."
신씨는 마치도 미리 소작지를 넘겨줄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면 아들에게 이미 말을 전해들은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던 것이다. 아, 어찌 저럴 수가 있는가. 작인들의 말마따나 저분은 정말 생불인가. 이지숙은 놀라움과 경이스러움으로 신씨를 바라보며 자신이 미리 했던 염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서 세상이 좋아져 저런 분을 시어머니로 모시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순간적으로 스쳐간 생각이었다. 그 거짓 없는 생각이 부끄러워 그녀는 속 입술을 물었던 것이다. 오늘 작인들을 모이게 한 것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신씨는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완두콩을 까고 있었다.
"편안하셨습니까."
이지숙은 언제나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이, 어서 오소."
신씨가 잔잔하게 웃으며 별로 흩어지지도 않은 콩깍지들을 한데 모으느라고 손을 빨리 놀렸다.
"이거 심심하실 때 드시라고…"
이지숙은 보자기를 풀어 과자봉지를 신씨 앞으로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멀라고 이런 것을…"
신씨는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미안한 빛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안쓰러움과 측은함을 항시 느끼고 있는데 이지숙이 그런 마음을 쓸 때마다 신씨는 이중으로 미안했던 것이다. 젊디나 젊은 나이에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르는 남자를 마음에 둔 이지숙의 모습에서 신씨는 흘러간 자신의 모습을 언뜻언뜻 보게 되었다. 여자 한평생은 남자 하나에 달렸는데, 저것이 나같은 팔자로 살아선 안되는데… 신씨는 가슴에 찬바람 서리는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맛이 괜찮습니다, 하나 들어보시지요."
"그려, 이선생도 묵어야제."
신씨는 과자를 집어서 이지숙에게 내밀며 어서 먹으라는 턱짓을 했는데, 그 얼굴에는 자식에게나 드러내는 어머니의 정이 끈끈하게 묻어있었다. 이지숙은 어린 날 어머니한테서나 받았던 그런 정 표현이 가슴을, 뭉클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과자를 깨물었다.
안창민이가 군당위원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신씨에게 알리지 않은 것을 이지숙은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비밀 유지 때문이 아니었다. 아들이 중책을 맡은 걸 알게 되면 신씨의 걱정이 더 커질지 물라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신씨는 이따금씩 지나가는 소리처럼 아들의 다리를 걱정하고는 했다.
"걷기에는 탈이 웂는지 원."
그 무심한 듯, 흘리는 듯하는 말에는 신씨의 마음이 항시 아들의 다리 걱정으로. 차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들몰댁에게 하대치의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며칠 전 소화를 찾아간 길에 들몰댁도 자리를 함께 했었다. 자리변동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하대치가 벌교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워메, 우리 길남이 아부지가!"
들몰댁은 눈물이 크렁해질만큼 반가와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글먼 이편짝 것으로 치자먼 고것이 긍께 머시다냐"
하며 직위를 비교하고자 했다.
"읍장님 아니겄소."
소화가 눈으로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금메 말이요. 선상님, 영축웂이 그렇제라?"
들몰댁은 상기된 얼굴인 채 이지숙에게 확인하고 있었다.
"비교를 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일부러 비교를 해보자면 그렇게 되겠지요."
이지숙은 들몰댁의 마음을 헤아리며 대답에 응했다.
"그 남정네 그리라도 고상끝 봤응께 을매나 좋아라 허겄소. 나 맘도 우선 에이리 존디. 그 남정네 인자 더 기운 펄펄 나게 생겼소. 기왕지사 고상질로 나슨 것, 기운지게나 혀야 나 맘도 덜 아프제라."
들몰댁의 목소리는 차츰 가라앉아 가며 물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말을 마친 그녀는 벽에 몸을 부리며 치마 끝으로 자구 눈물을 찍어냈다. 이지숙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혁명의식 이전에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남편으로서 바라보고 고대하는 절절함이 자신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울려오고 있음을 이지숙은 느끼고 있었다. 지아비를 향한 한 아낙의 그 순박하고 순수한 감정 앞에서 혁명전사에게 직책을 부여하는 것은 개인적 출세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며, 혁명투쟁이 개인적 소영웅주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원칙론이 환기되어야 한다면 그것처럼 부질없고 허황한 말이 어디 있으랴 싶었다. 그것은 전사들에게나 강조되고 주입되어야 할 말이었다. 들몰댁은 전사의 아내이며, 한 사람의 건전한 인민일 뿐이었다. 그녀가 표하는 기쁨은 전사의 아내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보람이었다. 혁명에 대한 그녀의 자각은 아직 부족하다 하더라도 전사의 아내로서는 훌륭한 투쟁을 전개해온 것이었다. 때때로 끌려 다니면서 고초를 당했고, 그러면서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런 제이혁명전선의 투쟁 없이 어찌 전사들이 제일전선에서 사기 높은 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인가. 혁명의 그 지난한 길에 전사의 아내들은 또 다른 하나씩의 전사인 것이다. 혁명완수의 그날 그녀들에게 돌아갈 진정한 기쁨은 무엇일까.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를 다시 품에 안는 것이 아닐 것인가. 혁명의 본질은 인간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이며, 진정한 인도주의의 완성이다. 확고한 의식도, 열렬한 투쟁도, 모두 혁명에 이르는 과정의 수단으로써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행되고 바탕을 이루어야 하는 건 인간에 대한 불변의 긍정과 사랑이다. 그것이 결여되면 의식은 편파성을 면할 수가 없고, 투쟁을 파괴성으로 오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혁명은 인간의 삶의 창조고, 투쟁은 그 건설을 위한 도구다. 그러므로 혁명의 적을 척결하기에 앞서 보다 많은 동지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의 본질을 경시하며 투쟁을 위한 전략전술에만 너무 치우쳐 있지 않나 하는 점을 언제나 반성하고 경계할 줄 알아야한다. 잘못된 사회주의자는 어설픈 민족주의자보다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서상철 선생이 조직원들에게 수시로 강조했던 말이었다. 선생님, 제가 들몰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옳은지요. 이지숙은 속으로 묻고 있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이지숙이 소화를 보며 말했다.
"예, 가실 준비 혀야지라."
소화가 신단으로 다가가 요령을 집어 들었다. 뒤따라 들몰댁이 일어나 바라를 들었다. 소화가 요령을 짤짤 흔들어대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몰댁은 소화의 왼쪽 손짓에 따라 바라를 쳐대다가 그치다가 했다. 무당집답게 한바탕 요령소리와 바라소리가 엉클어지고 나서 이지숙은 소화의 집을 나섰다. 누가 보아도 치성굿을 올리고 가는 모습이었다.
"아짐씨, 무고허신게라?"
"혹여 더우는 안 잡수셨는게라?"
방 서방과 노 서방이 들어서며 인사했다.
"더운디 어서들 오시게."
신씨가 인사를 받았고, 이지숙은 평상에서 일어서면서 눈인사만 했다.
"농새들은 어떤고?"
신씨는 인사 삼아 물었다.
"날이 요리 땡글땡글허니 더운 게 사람이야 볶에도 나락이야 아조 쑥쑥 자알 크는구만이라."
방 서방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으며 대답했다.
"풍년 만댈라먼 더우야 참아야 쓰고. 근디, 저 옆집 말들은께 시상이 시끌시끌허다는디. 워쩐가?"
"야아, 이 집 작인덜이 뫼여서 불끈허먼, 저 집 작인덜이 뫼여서 불끈허고, 아조 난리판 굿이구만요. 요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무신 난리판이 벌어질란지 영 아실아실 허당게라."
"세세만년 살 목심도 아닝게 지주덜이 순리럴 따라야 될 것인디. 다 공수래 공수거란 걸 몰라서 그러제."
신씨가 멀리 눈길을 띄웠다.
"감이 솔찬이 살이 올랐네 그려,"
노 서방이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따묵소."
신씨가 말했고,
"아니구만이라. 그냥 헌소리구만이라. 노 서방은 당황스런 몸짓을 지었다. 김 서방이 오고, 뒤이어 박 서방과 임 서방이 함께 오는 것으로 작인 다섯이 다 모였다. 모두 평상에 둘러앉았다.
"말씀하시지요."
이지숙이 신씨에게 말했다.
"아니시. 이 선생이 말 전허고, 나야 그냥 듣기로 허제."
신씨가 이지숙을 바라보며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 속에 담긴 의미가 이지숙의 감정을 잠시 혼란스럽게 했다. 며느리로서의 자격 부여인지, 안창민의 소식을 접한 사람으로서의 책임 완수인지, 얼른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모여주십사 한 건 다름이 아닙니다. 안 선생께서 연락을 하셨는데, 지금 여러분들께서 농사짓고 있는 땅을 그대로 여러분 앞으로 소유권을 이전시켜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안 선생의 생각에 자당님께서도 그렇게 하기로 하셔서 그 일을 결정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모여 주십사 한 겁니다."
이지숙이 말을 끝냈는데도 다섯 사람은 얼어붙은 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지숙이 알린 사실은 현실적으로 볼 때 분명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이 일은,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밖으로 표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유권 이전도 한꺼번에 하지 말고, 한 분씩 조용조용 하기로 하구요."
이지숙은 이 일로 그들이 혹시라도 의심받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지숙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짐씨, 지까징 것덜얼 요리 생각혀 주시는 은혜야 골백분 아짐찮이고 기맥힌 것인디라, 아짐씨넌 워찌 사실라고 우리헌테 있는 땅을 몽땅 주실라고 허시는 게라. 고것은 안되겄구만이라."
방 서방의 말이었다.
"자네덜이 날 믹에 살리먼 안 된가."
신씨가 다섯 사람을 둘러보았다.
"고것이야 당연허게 그리 헐 일이고라, 그러드락도 아짐씨 밑에 다먼 멫 마지기라도 냄게둬야 즈이덜이 사람이제, 글안허고 준다고 낼름 받아 챙게뿔먼 고것이야 즘생이제라. 아짐씨, 즈이덜 즘생 맹글지 마시씨요."
"자네 맘이 보살님 맘이시. 그리 맘 묵는 것으로 다 되얀네. 허고, 요일이야 안 선생이 정헌 것이제 나가 정헌 것이 아닝께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시."
신씨는 완곡하게 그러나 엄중하게 방서방의 뜻을 밀어냈다.
"알겄구만이라. 즈이덜이 따로 의논혀서 이 하늘겉은 은공 받들겄구만요."
방 서방이 말했고,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자리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디서인지 매미가 진저리치듯 울어대고 있었다.
"그리 앉었들 말고 이 과자 묵음시로 이약들 허소. 농새일 바빠 이리 한자리에 앉음허기도 쉰 일이 아닌디."
신씨가 과자봉지를 가운데로 옮겨놓았다.
"그러세요, 이것들 드세요."
이지숙이 다섯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과자를 먹을 것 같지도, 무슨 이야기를 꺼낼 것 같지도 않은 숙연한 얼굴들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사령관 백남식은 딸부자에 논 부자인 윤영부의 집에서 하숙비 없는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숙비를 안 내는 것만 이아니라 그 집안의 빈객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가 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려 하기 전에 벌써 주인 송씨가 떠받들고 나섰고, 그 어머니를 따라 딸자식들도 그랬으므로 그는 전혀 힘들일 것 없이 빈객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음식솜씨 좋고, 깨끗한 집을 고르라고 권 서장에게 말했고, 권 서장은 그 말을 염상구에게 그대로 옮겼던 것이다. 염상구는 지시를 받기가 바쁘게 읍내 안통의 한다 하는 집은 다 들쑤시고 다녔다. 거의가 거북해하고 난색을 표했는데 윤 부자의 아내 송씨는 반색을 했던 것이다.
"잉, 아조 잘되얀네. 글안해도 바같 양반 잃어뿔고 실헌 남자 하나또 웂이 가시네덜만 우루루 델꼬 사니라고 밤만 되먼 가심이 통게통게 헌 것이 똑죽겄드란 말시. 아덜 하나 있는 것이 소핵교 사학년이니 밤마동 나가 적근무섬이 워쨌겄능가. 군인 대장이 턱허니 우리 집에 진을 치먼 도적 눔도 빨갱이도 얼씬을 못헐 것이니 고것이 을매나 존 인인가 .우리가 삼시 세끼 밥 뜨근뜨근허게 혀서 자알 뫼실 것잉께 싸게 모시고 오소. 요것이야 서로서로 존 일이시."
송씨는 작년 시월 하순에 하대치에게 혼쭐이 난 다음부터 밤만 되면 안으로 자물통을 채우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와따, 그리 무섭고 간이 보타들었으먼 진작에 나럴 들앉힐 것이제라."
염상구는 송씨에게 옆 눈질을 했다.
"자네야 집 요렇타께 있음시로 무신 실답잖은 소리여."
"어허, 땁땁허게 워째 그리 말귀럴 못 알아묵소. 그 많은 딸 뒀다가 다 워디다 쓸라요. 나럴 사우 삼아 뿌렀으먼 일이 간딴허게 해결 났을 것 아니요."
"워메 문딩이, 염병헌다."
송씨는 염상구에게 눈을 흘겼다. 염상구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눈치 보아가며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의 나이가 장가 들기에는 꽤나 쇠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옆에 헌 계집들이 흔한 데다가 해방이어 설레발치다 보니까 몇 년이 후딱 지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금년 들어서부터는 장가라는 것을 가보자 생각하고 여기저기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첫째가 조갑지맛 좋게 생겼으면서 이뻐야 하고, 둘째가 집안이 부자라야 했다. 그 두 가지 조건이 다 맞지 않으면, 생김은 보통이더라도 집안만은 부자여야 했다. 책방 집 딸 정님이가 자격상실인 것은 그 두 가지 조건이다 맞지 않았다. 집안도 볼 것이 없는데다가, 활짝 핀 꽃처럼 낯짝이야 해한닥 했지만 그 어디에도 조갑지맛 좋게 생긴 데가 없었던 것이다. 윤부자네 딸들은 인물이야 덤덤할 뿐이지만 그 많은 재산 때문에 그는 눈독을 들여오고 있었다. 더구나 하나뿐인 아들이 어리다는 것이 그의 구미를 더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송씨의 "워메 문딩이, 염병헌다" 하는 말투가 영 신경에 거슬렸다. 그 눈흘김까지 합해 보면 '니까징 것이,어림도 웂다' 하는 뜻이 분명했다. 그러나 염상구는 기분 나쁜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윤 부자의 딸 여섯 중에 둘은 시집을 갔고, 자신이 점을 찍을 수 있는 것은 그 아래 둘이었다. 힝, 양반 따지기 좋아허는 니년 눈구녕으로 보기에는 염가가 개좆 만치도 안 뵈지야? 하먼, 그럴 꺼이다. 우라부지야 지게숯 장시나 해묵은 쌍눔 중에 쌍눔이었응게. 헌디, 그 아덜 염상구야 달브다는 걸 알어야 쓸 것이여. 시상이 달라진 디다가, 사람할라 달븐께로. 니년이 나럴 무시허먼 헐수록 내 오기가 새북좆 스대끼 창창허게 뺀질러 올른다는 것을 알어야 써. 양반 년 니노지는 금칠허고, 쌍눔 좃에는 똥칠헌지 아냐. 쌍눔 좃에 빵구 안 나는 양반년 니노지 있는 줄알어? 워디 두고 보자, 누가 이기나. 염상구는 경찰서로 발길을 옮기며 침을 내뱉았다. 끼니때마다 맛갈스러운 반찬이 고루 올라오는 밥상을 받으며 백남식은 포식을 누렸다. 음식만이 아니라 이부자리며 빨래 같은 수발도 송씨가 미리미리 알아서 했으므로 그는 때 아닌 호강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송씨한테 몸호강까지 받게 되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를 넘치게 환대한 송씨는 친절 또한 넘치게 베풀었다. 식모가 있는데도 귀한 분 대접을 하느라고, 첫날부터 밥상을 손수 들어날랐다.
"안식구가 해바치는 진지를 드셔야 헐 것인디, 타관 생활 허시니라고 넘이 맨든 찬이 입에 맞으실란지 몰르겄구만요."
송씨의 인사치레에,
"안식구 아직 없는 몸이니 무슨 반찬이나 다 잘 먹습니라"
하는 대꾸가 나왔다. 그가 총각이라는 의외의 사실에 놀라와하며 송씨는 순간적으로 욕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사우를 삼으먼 으쩔고! 과년한 딸을 가진 어머니로서 당연한 감정반응이었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그의 방을 스스럼없이 드나들게 되자 송씨의 가슴에서는 음심이 살살 살아나며 어머니의 마음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송씨는 그런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지만 한번 피어오르기 시작한 음심은 그의 그 야물딱지고 짱짱하게 생긴 몸을 보면 어지럼증처럼 가슴을 흔들어대고는 했다. 송씨는 아는 병이 도진 어쩌지 못할 괴로움으로 혼자 몸을 비비꼬았다. 남자와 사흘만 잠자리를 하지 않아도 몸살기를 느끼는 몸뚱이였다.
"니년에 그 천지분간 몰르는 음기가 아덜 맹길 아까운 씨럴 싹 다 쥑여뿌는 것이여!"
딸이 불거질 때마다 남편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며 걷어 채였던 것이다. 줄줄이 딸만 낳는 서러움에 그런 구박까지 당하면서 서러움이 곱으로 커져, 나가 니눔허고 또 그 짓거리럴 허먼 개잡년이다, 하며 마음을 공글리고 이빨을 맞물었지만 산후가 회복되고 나면 그 결심은 물거품이 되고는 했다.
"나가 인자 니년 뱃대지럴 다시 올라타먼 개아덜이다."
걷어차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큰소리치며 돌아섰던 남편도 언제 그런 소리했느냐 싶게 다시 감고 들게 마련이었다. 남편이 그러는 것은 자신이 이뻐서가 아니라 음기가 센 만큼 그것도 남달리 좋기 때문이란 것을 그녀는 환히 알고 있었다. 남편이 기어이 아들을 보겠다고 딴 배를 타도 그다지 속 끓이지 않았던 것은 딸만 퍼질러댄 죄책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남편이 결국 돌아오고 말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감은 남편이 횡사를 할 때까지 빗나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횡사 당한 충격으로 서너 달 꼬리를 감추었던 음기가 언제부터인가 살살 잠자리를 괴롭히기 시작하더니만 백남식을 보자 본격적으로 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송씨는 그 음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백남식이 만취해서 돌아온 날 밤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 이거, 영 딴 세상이네."
백남식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송씨는 오랜 성경험을 십분 발휘해가며 중년을 넘어선 몸뚱이의 음기를 태워 올렸다. 열일곱에 시집을 온 그녀는 이제 마흔 여덟이었다. 그러나 고생 모르고 잘 먹고 산 덕에 주름살 없이 기름기 도는 얼굴은 네댓 살은 더 젊어 보이게 했다. 백남식이 자기를 총각이라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해방되던 해에 장가를 간 그는 고향집에 아이까지 하나를 두고 있었다. 바람기 승한 남자가 으레 그렇고, 어설픈 술꾼이 술집여자 옆에 앉았다 하면 총각 행세하듯이 그도 결혼에 대한 말만 나오면 총각이라고 대꾸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식구들의 눈이야 피하는 형편이지만 몸을 섞게 되면서부터 백남식은 그야말로 하늘처럼 떠받들려지게 되었다. 송씨는 남의 눈이 무서워 탕을 달이지는 못하고 환으로 보약을 지어다 먹일 정도였다. 좌익에 대한 백남식의 서슬은 변함이 없었지만 정작 본격적인 토벌 작전은 한 번도 일으키지 않은 채 삼 개월 째를 넘기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은 수시로 뿌려지는 삐라를 수거하고, 만약 소작인들이 삐라 내용을 믿고 엉뚱한 짓을 했다 하면 모두 빨갱이로 간주해 가차 없이 처벌한다는 엄포를 놓게 한 것이었다. 삐라가 뿌려진 다음에는 꼭 그 엄포가 뒤따랐고, 각 마을에서는 총소리가 터져 올랐다. 백남식의 지시에 따라 엄포 다음에 쏘아대는 공포였다. 백남식의 그런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율어에 논을 가진 지주들이었다. 그들은 잘못하면 두 해째나 농사를 좌익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판이었다. 백남식의 처음 기세로 보아 율어에서 금방 좌익을 몰아낼 것으로 기대했던 지주들은 실망과 함께 그만큼의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백남식의 면전에서 그 불만을 다 털어 놓을 수 없는 일이어서 지주들은 한층 속이 끓고 있었다. 백남식은 지주들의 그런 눈치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며 지냈다. 백남식은 부임하자 곧 자기 관할지역을 돌며 벌교에서와 같은 사상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율어의 정찰까지 마쳤다. 율어를 정찰하고 난 그는 능동적인 작전을 펼칠 의욕을 잃게 되었다. 말로만 들었던 지형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자 빠른 진급 욕심이고 뭐고 싹 가시면서, 전임자의 입장을 이해할 것 같았던 것이다. 최선의 공격은 최대의 방어다. 그리고 최선의 방어는 차선의 공격이다. 백남식은 차선의 방법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이 이끄는 부대는 계엄군이었지 돌격대가 아니었고, 계엄군의 제일차 임무는 주둔지역에 대한 좌익으로부터의 치안확보였다. 먼저 치고 들어갈 수는 없어도 덤비면 받아칠 작정을 하고 있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적은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한다는 짓이 밤을 이용해서 계속 삐라만 뿌려대는 것이었다. 아무 지역에서나 한바탕 총질이 일어나 체면유지를 해야 될 판인데, 백남식은 답답하고 짜증이나 미칠 지경이었다.
‘이 새끼들이 삐라만 뿌려대면서 민심을 혼란시키는 심리전만 하겠다는 건가. 이것 참 골치 아프네. 그 심리전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가. 그 위력을 총이 어찌 당해. 천하무적 관동군이 만주 땅에서 제일 애먹은 게 바로 심리전 아니었나. 빨갱이 새끼들이 뿌려대는 그 삐라를 총알이 무슨 수로 당해. 소작인 입장에서 보면 구구절절이 옳은 말뿐인데. 이따위 법이나 만들어대면서, 정치한다는 씨발놈들 도대체 뭘 하고 자빠졌는 새끼들이야. 공산당을 이길라면 공산당보다 더 좋은 법을 만들어야지 그게 뭐야, 그게. 공산당이 삼팔선 이북에만 싹 몰려 있으면 또 몰라. 산골짜기 골짜기에 드글거리며 이북에서 한 일 팔아가며 민심을 선동하고 교란하고 지랄발광인 판인데, 이 새끼들 법이라고 만든 게 그게 뭐야. 그래놓고 공산당 하지 말라니, 소학생도 웃을 일이다. 아니, 개도 웃을 일이다, 이 새끼들아. 그따위 법 만들어놓고 공산당 때려잡으라니, 소작인 다 죽이라는 소린데, 이 세상 소작인 다 죽이면 니놈들은 뭐 쳐 먹고 살고, 누구보고 정치할래? 이 정신 나간 새끼들아, 법을 만들어도 아래서 일을 해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지, 좆이나, 눌러대는 것도 한도가 있고, 억지도 정도가 있지, 이래가지고는 못해먹겠다 이 말이다. 나도 소작인이면 빨갱이 편이라 그 말이야. 이 실정을 똑똑히 알고 법을 만들든, 정치를 하든 하란 말야, 요런 병신 같은 놈들아!’
책상 위에 두 다리를 뻗대놓고 눕듯이 앉아 있던 백남식은 제풀에 열이 올라 재빨리 자세를 수습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 기세로 서장 방으로 갔다.
"권 서장님, 이 새끼들이 삐라만 뿌려대지 도대체 움직이질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백남식은 권서장의 방으로 들어서며 터무니없이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글세요…"
백남식의 행동이 너무 느닷없기도 하고, 대답이 궁하기도 해서 권 서장은 그 막연한 말 '글쎄요'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닐 것이고, 더우니까 쉬자는 것도 아닐 것이고, 이거 답답해 미치겠단 말요."
그런 내용의 말은 그 동안 한두 번들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권 서장은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불리한 입장은 그쪽이니까 더 두고 보지요 뭐."
맹물 같은 소리를 했다.
"병력이 현재의 세배만 돼도 당장 치고 들어가 싹 쓸어버리는데, 병력보충이 돼야 말이지."
백남식은 무엇을 쥐어뜯기라도 하듯이 손바닥으로 낯을 훔쳤다.
"며칠 전에 병역법이 공포됐으니까 그게 시행되기만 하면 병력보충이야 원활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법도 기왕 만들려면 진작에 제까닥제까닥 해치울 일이지 실컷 꾸물대고 있다가 이제사 공포니 뭐니 하는 꼴이라니, 정치하는 놈들은 도대체가 다 틀려먹었소."
그건 팔월 육일에 공포된 병역의무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법은 한 달 전쯤인 칠월 십이일에 이승만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세계반공투쟁 대열에 한국의 참가를 선언한 것과 맞걸리는 것이기도 했다. 백남식의 목소리는 계속 높았고, 권 서장은 더 대꾸할 말이 없어 손부채를 부쳤다.
"아이스쿠리, 얼음 과자아- 아아시키 얼음 과자아-"
아이스케익 장수의 쉬고 패인 목소리가 오후의 더위를 더 덥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스케익이란 소리가 어쩌면 '아이고 쿠려'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 새끼'로 들리기도 했다.
"더운데 저거나 사먹을까요 ?"
백남식이 불쑥 말했다.
"글쎄요…"
권 서장은 난색을 표하며 문 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더운데 상관없어요. 사무실 사람들 전부 하나씩 먹입시다."
그들이 팥이 듬성듬성 박힌 얼음과자를 핥고 있는 시간에 율어의 안창민은 병력을 진두지휘하여 석거리재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목적지는 진트재였다. 석거리재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야음을 타고 고읍들을 건너 회정리 일이삼구 뒤의 제석산자락을 밟아 진트재에 이르는 쾌나 먼 이동작전이었다. 작전장소는 진트재 터널 앞 벌교 쪽 경사면, 작전시간은 다음날 아침 여덟 시경, 공격목표는 광주 발 여수행 군수품 수송 특별열차, 지원 병력은 별량면당의 비무장 십 명, 세부적 작전계획은 보성군당에 일임, 노획물 이동장소는 조계산 비트(비밀아지트), 이것이 도당의 지령이었다. 농부들이 이미 일을 시작했을 시간인 아침 여덟시에, 틀림없이 무장경비가 딸렸을 달리는 기차를 공격하고, 군수품을 탈취한 다음, 조계산까지 운반한다. 결코 쉬운 작전이 아니었다. 별량면당의 비무장 병력지원은 노획물 운반과 비트까지 선을 대기 위해서 일 터였다. 안창민은 간부회의를 소집했고, 사격술과 기동력을 갖춘 대원 사십 명을 뽑았다. 율어는 오판돌에게 맡겼고, 하대치와 이해룡은 작전에 참여시켰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자신이 작전에 나서는 것을 반대했지만 안창민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율어를 지키는 것이 작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명분도 있었고,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이유 설명 없이 그들의 주장을 물리쳤다.
심재모의 부탁으로 김범우는 이학송과 민기홍에게 연락을 했다. 부대복귀를 하게 된 심재모는 근무지로 떠나기 전에 자신을 도와준 두 사람에게 인사를 치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학송과는 약속이 되었는데 민기홍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지방 출장 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울에서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김 선생한테 손 선생 얘긴 대강 들었어요. 그러나 백이라는 사람한테 너무 유감 갖진 마세요. 제가 거기 그대로 있었어도 별수 없었을지 몰라요. 시체를 역 앞에 전시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때 손 선생이 항의를 했었는데, 전 참 면목 없고 난감했었지요. 그러나 매인 몸이니 어쩝니까."
손승호를 만난 심재모가 더없이 반가와하며 한 말이었다.
"그때 말씀을 하시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면목이 없지요. 난 군인의 몸이오, 했던 심 중위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돌아나 오며 제 경솔을 후회했지요."
손승호가 쓸쓸한 듯한 웃음을 웃었다.
"저기 이 선배가 오는군."
김범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저 매냥, 요새 유행하는 말로 코리안 타임이군."
이학송이 변명처럼 말하며 다가왔다. 코리안 타임이란 한국 사람들이 약속시간을 잘못 지킨다고 해서 붙인 전형적인 양키 용어였다. 김범우의 소개로 심재모와 이학송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곧 다방을 나와 술집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이학송이 앞장을 서게 되었고, 그의 발길이 멈춘 건 으레 다니는 싸구려 막걸리 집이었다. 그런데 심재모가 거기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글세, 이 집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모시는 거니까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뭐, 호화판 기생집으로 가자는 게 아니라, 좀 조용하게 마실 수 있는, 방이라도 따로 있는 곳으로 가자는 거지요. 제가 선생님들하고 술을 마시면 몇 번이나 더 마시겠습니까. 이게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하 이거, 군인 고집에는 못 당하겠소. 협박까지 해대니 도리 있소? 갑시다, 괜찮은 데가 있으니."
이학송의 말에 모두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이학송이 안내한 술집은 인사동 언저리의 조그만 한옥이었다. 술상은 조촐했고, 여자도 붙지 않았다.
"말씀대로 술집이 괜찮군요. 이 근방에 이런 술집이 많습니까?"
김범우가 물었다.
"이쪽에서부터 저쪽 낙원동까지 요정 투성이지."
이학송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몇 급이나 됩니까?"
"이거야 삼류 축에도 못 들지. 일류 요정들이야 상상할 수도 없는 호화판이지. 최고급 비단으로 도배를 하고, 젊고 이쁜 여자들이 드글거리고, 아방궁이 따로 없네. 오죽하면 미군정이 요정에서 다 녹아났겠어."
"미군을 요정으로 끌어들인 한민당 놈들이나, 거기서 놀아난 미군장교 놈들이나 다 똥물에 튀길 것들이죠."
"말 말게, 양귀비 구멍 하나에 중국 대륙이 녹아나는 판인데 조선반도 반쪽쯤이야. 자아, 술들 드십시다."
이학송을 따라 세 사람도 술잔을 들었다.
"심 중위님은 어디로 가시게 됩니까?"
이학송이 심재모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단양으로 가게 됩니다."
"단양?"
이학송이 눈썹이 꿈틀할 정도로 되물었다. 김범우는 그의 감정 변화를 직감적으로 포착했다.
"예 , 태백산지구 사령부가 거기 있죠."
"그렇지요."
이학송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째 심 중위님은 고약한 데서만 근무를 하게 되는지 모르겠소."
하며 혀를 찼다.
"병과가 보병 아닙니까."
심재모는 그저 예사롭게 말하며 엷게 웃었다.
"글세요, 거기도 지금 한창 골치 아프게 비벼대고 있는 지역이지요."
이학송의 언짢아하는 기색이 좀 더 진해졌다.
"아마 지리산 일대나 비슷한 공방전이겠죠. 다른 게 있다면, 지리산 쪽은 십사연대와 지방 세력이 주축이고, 태백산이나 오대산 쪽은 이북에서 남파시킨 병력이 주축이라는 점이죠. 어디로 가나, 군인이야 어차피 싸우는 게 일이니까요."
심재모가 잔을 비우고 이학송에게 권했다.
"지형적으로 보면 긴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바둑알 놓듯이 유격전 거점을 형성시킨 것인데, 드디어 사상대결이 무력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니, 이거 참 문제지요."
이학송이 술을 받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유격전을 확대시키는 배경은 뭘까요? 혹시 미군철수나 농지개혁 같은 이쪽의 상황변화가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김범우가 심재모에게 잔을 건네며, 이학송에게 묻고 있었다.
"그렇게 보는 게 별로 무리는 아닐 거요. 미군철수보다는 농지개혁 문제가 특히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 거요. 이 땅의 인구 팔 할이 농민이고, 그 팔 할이 소작농이라는 건 남북을 다 합친 통계고, 농토가 더 많은 남쪽만 통계를 내면 농민이고 소작농 수는 더 늘어날 거요. 다 아는 소리 또 반복할 것도 없이, 농민문제가 곧 나라의 문제고 전 국민의 문젠데, 이번 농지개혁법은 그 중대한 사실을 외면했으니 상대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전 국민의 외면을 당한 상태에 있잖소. 그러니 북쪽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소."
"전 국민을 배신하고, 그래서 전 국민에게 배척당하는 정권이 그 어떤 체제하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엄연한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 허구로 바뀐 게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미국의 영향력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는 한 그 허구를 다시 사실로 바꿔놓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현실에서 북쪽이 시도하는 방법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 저는 아주 회의적이란 말입니다. 미군이 철수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면, 그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나 감상적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옵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국사람을 잔인한 완벽주의자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삼팔 이남을 점령해서 이승만 정권을 세워놓고 철군하기까지를 살펴보면 그 시나리오가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삼팔 이남을 점령해서 자기네 깃발을 꽂으면 소련의 세력을 직접 견제함과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자기네 정원의 연못으로 만들 수 있다는 대전제 아래 그들은 우선 조선 땅을 일본의 식민지로 철저하게 규정했습니다. 그래야만 전리품을 줍는 것으로 점령이 합법화되는 거지요. 그 맥락에서 임정은 당연히 부인 당했고, 몽양의 인공(조선 인민공화국)도 부인 당했습니다. 자기네의 뜻대로, 자기네를 위한 정권을 자기네의 손으로 세워야 한다는 대원칙을 그들은 자기네 조상인 링컨이 정의한 민주주의 뜻에 대입시켜 남쪽을 제멋대로 칼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주의세력 경원, 공산당활동 불법화, 친일반역세력 옹호, 경찰력의 확대, 대구십일폭동을 계기로 남쪽 전역의 인민위원회 조직 파괴, 제주도 사삼사건 발발, 단정수립, 여순사건을 거쳐 지금입니다. 제가하고 싶은 말은, 공산당과 연결을 짓지 않고 생각하더라도, 그 큰 사건들을 통해오면서 우리 대중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군정의 횡포에 대항했고, 그때마다 군정은 얼마나 철저하게 탄압을 가했는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 점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미군정 기간은 공산당이 당한 수난에 앞서, 살기 좋은 새 나라가 세워지기를 바라며 행동으로 나섰던 대중들의 수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이 당한 수난에 비하면 공산당이 당한 수난은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군정은 자기네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책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대중들을 무조건 좌익이나 그 동조세력으로 몰아붙였고, 또 공산당 쪽에서는 대중들이 그렇게 일어난 것은 자기네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공적과시를 하고 있는데, 그건 아전인수의 큰 착각입니다. 그게 정치선전을 위한 의식적인 과장이라면 모르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거기서부터 그들의 감상주의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미군이 철수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남쪽의 현실과 장래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파악해야 된다는 겁니다. 미군은 물러갔지만 그건 표면적 현상일 뿐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힘은 군대와 경찰의 힘으로 바뀌어 상존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전봇대가 몇 개인가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이거, 되잖은 소리로 너무 혼자 떠들고 말았습니다."
김범우가 입술을 훔치고 나서 정종 잔을 한숨에 비웠다. 수고라도 했다는 듯 세 사람이 한꺼번에 술잔을 김범우 앞으로 디밀었다.
"아니 이거, 왜들 이럽니까!"
"빨리 받어."
이학송이 왼손으로 주전자를 들며,
"자네 판단이 옳은 것 같군. 미국의 정보망이나 그 조직이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한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데, 그 사람들 정말 무섭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들이 잔인한 완벽주의자라는 것하고 요정에서 기생 끼고 놀아났다는 것하고는 앞뒤가 안 맞잖은가?"
술만 마시고 있던 손승호가 불쑥 말했다. 김범우가 술을 마시고 있던 참이라 이학송이 말을 받았다.
"그거야말로 잔인한 완벽주의의 기막힌 실례라고 생각하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네들한테 필요한 정권을 세우기 위채서 어차피 한민당 같은 부류들이 필요했었소. 그런데 자기네들이 회유해야 될 부류들이 오히려 향연을 베풀고 달려드는 판이니 마달 게 뭐 있소. 그들은 도도한 자세로 실컷 취하고, 실컷 재미 보며 자기들이 달성해야 할 목적은 빈틈없이 달성한 거요. 그 얼마나 완전한 계산법이오."
손승호는 고개만 느리게 끄덕였다.
"미국에 비해 그럼 쏘련은 어떻습니까?"
심재모가 물었다.
"글쎄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쏘련이라고 다를 게 뭐 있습니까. 자기네들 목적을 위해 우리 땅을 점령하기로는 둘 다 똑같은 종자들 아닌가요?"
이학송은 담배를 뽑으려다 말고 반쯤 남은 술을 비우고 잔을 심재모에게 넘겼다.
"우리 땅을 전리품화한 것은 미국과 동일하다 할 수 있으나 그 후의 방법적 차이까지를 동일시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손승호가 제시한 반대의사였다. 김범우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방법적 차이 말이오?"
이학송이 구미가 당긴다는 듯 앉음새를 고치며,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신탁통치 기한을 정하는 것도 달랐고, 군대 철수도 달랐고, 정부수립에 대한 견해도 다르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대목들을 지적했소."
이학송은 술잔을 들더니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기울이고는,
"손형, 그 차이라는 게 말이야, 미국과 비교를 하니까 나타나는 차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차이가 우리 민족을 위해서가 절대 아니고 자기네들 이익을 위해서 나타낸 차이라는 것이오. 자아, 따져보세. 손형도 시인한 것처럼 우리 땅을 전리품화한 것, 그건 그들이 우리 땅을 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서로 양보가 없는 야욕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우리도 확실한 전제로 놓고 얘길 해나가야 하오. 그 전제 밑에서 신탁통치 기한 차이를 따져 보드라고. 처음에 미국의 루스벨트가 삼십 년, 쏘련의 스탈린이 오 년을 제안했고, 결국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오 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는데, 그게 쏘련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철저하게 자기들을 위한 계산이었오. 쏘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변동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던 거요. 일본과 친일파에 대한 민중적 반감, 지주와 소작인간의 갈등, 이런 것들이 해방과 함께 사회변혁 요인으로 크게 작용할 거라는 걸 말이오. 그런 여건은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이고, 힘 안들이고 공산화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미국이 삼십 년씩이나 이 땅에 머물기를 바라겠소. 신탁기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한 스탈린의 말이 우릴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곡해요. 그 다음에 군대 철수의 차인데, 쏘련군이 미군보다 구 개월 앞서 철군했다는 게 우리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이익이 되오. 그 기한의 차이는 쏘련이 북쪽에 자기네들이 믿을 수 있는 정권을 세워 안심할 수 있다는 점과, 미국이 남쪽에 자기네들 뜻에 맞는 정권을 세우기는 했는데 사회상황이 아직 안심할 수 없다는 점과의 차이일 뿐이었소. 쏘련의 철군이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가졌으려면 북쪽 정권이 수립되기 전에 실시 됐어야겠지. 그 다음이 뭐였나, 응, 정부 수립에 대한 견해차이라는 것도 신탁통치 기한에 대한 제안과 맞걸리는 발상 아니오. 전 민족적 외세배격에 부딪쳐 당황한 미국은 신탁통치를 포기하고 이 땅의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고, 이에 맞서 쏘련은 미쏘 양군의 동시철수와 한민족 자체 노력에 의한 자율정부 수립이라는 입장을 취했는데, 언뜻 들으면 전적으로 우리민족을 위하는 것 같은 소리요. 그러나 그건 진실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소. 한민족의 의사는 물론이고 그 존재까지 완전 묵살하고 저희들 멋대로 신탁통치를 하겠다고 덤빈 자들이 저희들한테 불리한 상황이 되니까 그따위 소릴 지껄인 거지 뭐요. 월슨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기만과 똑같은 거지.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유엔에서 힘을 쓸 수 없으니까 쏘련은 자기네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 민족을 이용하려 한 것뿐이오. 자아, 내 판단은 이런데 손형 생각은 어떴소?"
하고는 담배를 빨아댔다. 그러나 담배에서는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동안 담뱃불은 꺼져 있었던 것이다.
"제가 쏘련을 두둔하자는 게 아니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말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손승호가 어색스럽게 웃었다. 이학송은 술잔을 기울이며 왼손을 저었다.
"그건 아니고, 우리 땅을 강점한 두 외세가 우리 민족을 망친 행위에는 조금치도 경중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거요.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들 두 강대국은 고맙고도 황송하게도, 우리한테 자치능력이 없으니까 자기네들이 신탁통치를 해주겠다고 나섰잖소? 그게 침략을 합리화하는 일방적인 강대국 논린데, 그럼, 과연 우리에게 자치 능력이 없었던가? 천만에, 우린 일차로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서, 이차로 조선 인민공화국을 통해서 완전한 자치능력을 확보하지 않았던가 말이요. 먼저, 건준이나 인공의 구성원을 보면 친일세력을 완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이념에 구애되거나 편중되지 않고 양심적 민족세력으로서 자유민주주의세력 · 공산주의세력 · 중도우파세력 · 중도좌파세력을 망라해서 민족적 민주세력의 연합체를 만들었었소. 그리고 이런 상부조직에 호응해서 전국에 걸쳐 지방조직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었지. 이 두 가지의 엄연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거요? 상부조직은 해방조국 앞에 사욕 없는 정치양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화합하는 정치능력을 보인 것이오. 그리고 하부조직은 우리 민족이 새로운 나라건설을 얼마나 원하고 있으며, 그 능력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증명한 것이었소. 그런데 미군정이 한 짓은 뭐였나. 바로 그 인공을 부인하지 않았소. 그 행위는 바로 우리 민족 전체를 부인하는 만행이었소. 그럼,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세. 미국과 쏘련이 바뀌어서, 아니 그렇게 하면 복잡하니까, 인공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구성되었다면 쏘련은 어땠을 것 같소! 인정일까, 부인일까? 그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부인했소. 그들도 미국처럼 자기네한테 필요한 정권을 세워야 하는데 인공은 민족 주체적 정치조직이고 따라서 외세 배격적 민족세력이었기 때문이오. 우리는 우리의 훌륭한 자치능력을 새로운 침략자들의, 폭력으로 파괴당했소.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내 나름대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공과 같은 구성, 그 이상은 없소. 모든 이념물 가진 조직이 한 테두리 안에 모이고, 그 속에서 각기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그리고 선택은 오로지 국민 전체에게 맡기는 거요. 그 결과로 권력을 맡은 세력이란 그것이 어떤 이념을 표방하든 민주제일의 정신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 정권이기 때문이오.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기회의 회복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민족적 과제가 아닐까 싶소."
이학송은 잔을 비워 손승호에게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사타구니께에 가 있었다.
"이거, 얘기가 지루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이학송이 방을 나가자 김범우가 심재모에게 물었다.
"술자리에선 언제나 이런 얘길 하십니까?"
심재모가 자리를 밍기적거리며 물었다.
"예,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전 이런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술자리가 아니라 무슨 어려운 공부 시간 같은 기분입니다. 세 분은 이미 알 것 다 알고. 나서 나누는 애기가 분명한데, 전 못 알아들을 대목이 너무 많군요, 서민영 선생님 앞에서처럼 제가 무식하다는 것을 또 느끼고 있습니다. 배우는 기분으로 열심히 듣고 있으니 저한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심재모가 긴 허리를 세우며 호의에 찬웃음을 입술로 웃었다.
"벌교 생각은 안 나십니까?"
김범우가 마주보고 웃었다.
"웬걸요, 사흘거리로 꿈을 꿉니다. 꼬막 맛도 생각나고, 기러기 날아가는 갈대숲 우거진 포구도 생각나고, 술찌끼를 얻으려고 양조장 앞에 줄을 선 가난한 농부들도 생각나고, 욕이 뒤섞인 걸직한 사투리도 생각나고, 점잖았던 권 서장, 교활하다 싶게 영리한 염상구도 생각나고 율어면으로 들어간 여자가 임신을 했는지도 궁금하고, 생각나는 게 너무 많지요."
심재모가 회상에 잠긴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손승호는 심재모의 말을 따라 고향 냄새가 물큰물큰 끼쳐오는 것을 느끼며, 어머니며 동생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벌교에서 우스운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떠나오기 얼마 전 일인데, 사환아이를 통해서 어떤 여자한테 손수건 다섯 장을 선사받았습니다. 편지가 들었긴 했는데, 이름이 없었어요. 어떻게 아는 날이 오겠지, 생각하고 덮어뒀는데 그만 잡혀오고 말았지요. 그런데 , 너무 급하게 떠나오느라고 경황이 없어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던 그 손수건을 놓고 왔지 뭡니까.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고 떠나온 것은 괜찮은데, 그 손수건을 못 가지고 온 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저런, 그런 로맨스가 있었군요? 그것 참 아쉽게 됐습니다."
김범우가 혀를 찼고,
"벌교 처녀 하나 한 맺히게 만들었군요. 지금도 때는 늦지 않았어요, 전라도 사람들 한은 무서우니까 당장 내려가 그 처녀를 찾으세요."
손승호가 꼭 정말인 것처럼 말을 했고, 세 사람은 함께 소리 내 웃었다.
"이럴 법이 있나, 내가 없어지니까 웃음소리가 들리잖나. 내가 객소리로 술자리 망친 모양이니 먼저 짐 싸야겠구먼."
이학송이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벌교에서 벌어진 심 중위의 비련 한 토막이 지나갔습니다."
김범우가 이학송을 놀리는 투로 말했다.
"암, 그게 훨씬 술맛 나게 하는 이야기지."
이학송은 자리를 잡더니,
"부인 있는 몸이 겪은 비련이야 비련 자격도 없지만"
하며 심재모를 흘깃 쳐다보았다.
"왜 멀쩡한 사람 혼삿길을 막고 그러십니까? 누굴 총각귀신 만들려고."
김범우가 이학송에게 잔을 넘기며 말했다.
"이런, 그 나이에 총각이라니, 여기 못난 사람 둘이나 되네."
이학송이 손승호와 심재모를 훑어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선배님, 이건 전부터 가져오던 의문인데 말입니다, 아까 말을 하다 보니까 또 의문이 생기고, 미군이 철수한 마당에 확인도 필요한 문젠데요, 그 동안에 일어난 큰 사건들을 통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가 대체 얼마나 될까요? 마음대로 보도는 못하더라도 신문사 쪽에는 그래도 취재 조사한 자료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김범우는 딴 방향으로 흐르는 분위기를 막기라도 하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그거 전공을 위한 본격적 질문인데, 민족분단이 야기한 피해상황이란 측면에서 그 정착한 숫자 파악이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 그런데, 그게 비합법적인 탄압으로 자행되는 일이니까 책임문제, 여론문제, 민심문제 등등으로 보도통제를 한 것은 물론이고 취재나 조사도 방해했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에서는 은폐하고 조작하느라고 급급했었지. 그래도 신문사들은, 극우 쪽 신문 서넛을 빼놓고는, 정확한 숫자 파악을 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것도 정확한 것일 수야 없지."
"물론이지요, 그것만이라도 알고 계시면 좀 말씀해주십시오."
김범우는 만년필과 종이를 꺼냈다.
"글세, 뭐 대충은 알고 있는 편인데, 뭐부터 말해야 하나…"
"좌익엔 대한 음성적이고 산발적인 것이야 알 도리가 없을 것이고, 대구 십일폭동부터 큰 사건 별로 따져볼 수밖에 없잖겠습니까?"
"그렇겠군. 보세,"
이학송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십일폭동에 동원된 인원이 백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가 천여 명인데, 이 어림잡은 통계에서도 완전히 제외된 수가 또 천여 명은 될 거고. 거기다 경찰 사망자, 이삼백 명을 합해야겠군. 그 담에 큰 사건이 제주도 사삼사건인데, 살상당한 수가 팔만오천 여명, 그 담이 여순반란사건인데, 그게 그러니까 구천에서 만여 명이지. 그리고 작다고 할 수 없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죽어간 사람들 수도 합해놓으면 굉장할 거네."
"그러니까… 사 년 동안에 남쪽에서만 죽어간 사람들이 십만 명을 헤아린다는 계산이군요."
"그런 셈이지."
"허 ! 한 읍을 이만 명으로 잡으면, 다섯 개의 읍민들이 깡그리 죽어 없어지고, 다섯 개의 읍이 사라져버린 셈이군요."
손승호가 기막혀했다.
"그게 군정 삼 년이 세운 업적이고, 그 시체들 위에 이승만 정권은 세워진 것 아닌가."
김범우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말이네, 이차대전 이후에 강대국이 점령한 나라들이 한둘이 아닌데, 모르면 몰라도 삼 년 동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건 이 땅이 세계적으로 유일한 거네. 그런데 문제는,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끔찍한 범죄행위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네."
이학송이 침통하게 말했다.
"미국 놈들은 일본 놈들보다 더 악독하게 학살을 해댔군요. 저도 막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게도 엄청난 숫자인 건 오늘 첨 알았습니다."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손승호가 딸꾹질을 했다.
"그건, 자기네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미국의 잔악과, 자기네를 방어하고자 한 민족반역세력과의 야합으로 이루어진 결과겠지요. 반면에, 대중들이 외세의 간섭과 반민족세력의 제거에 그만큼 치열하게 대항한 결과이기도 하지요. 언젠가는 그런 사실들이 다 밝혀지겠지만, 오늘 우리 네 사람이나마 함께 확인했으니 다행이고, 그것만으로도 이 술자리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이학송의 무거우면서도 담담한 말이었다.
"그 사실을 앞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될 것 같습니다. 입으로나마 말입니다."
김범우의 말이었다.
"그게 우리 역사를 위해 좋은 일이긴 한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거요. 이승만 정권은 공범자의식으로도 그리고, 솔선한 친미의식에서도 그렇고, 자기네 정권유지를 위해서도 그렇고, 그런 자극적이고 충동성이 강한 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거요. 좌익적 유언비어니, 용공적 이적행위니 해서 철저하게 단속하려 들것이요. 그렇게 끌려들어 가면 자료나 근거를 댈 수 없으니까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잖겠소?"
이학송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렇게 되겠군요."
김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의 앞으로의 문제일 거요. 정치만을 반민족세력들이 장악한 게 아니라 경제까지 반민족세력들이 장악하고 말았기 때문이오. 군정은 정치와 경제 양면 모두를 반민족세력들에게 떠넘겨줌으로써 이 땅의 남쪽을 명실공히 속국화 시켜버린 것이오. 미곡수집정책으로 쌀값을 오백 배까지 올려 인플레와 함께 대중경제를 파탄에 몰아넣고는, 미국의 각종 잉여상품과 잉여농산물을 풀어놓지 않았소? 점령지를 자기네 경제에 예속시킴과 동시에 자기네 시장으로 확보한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그 많은 귀속재산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기업이윤을 빼먹을 만큼 빼먹고 나서 그것을 또 반민족세력들한테 넘겨주고 말았소. 군정은 정치도 경제도 다 자기네 뜻대로 재편성하고 조직했소. 그러니 앞으로 대중생활이 어떤 꼴이 되겠소. 해방은 되나마나고, 사회모순은 새롭게 야기되고, 그 결과 민족모순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오. 그게 다 군정 삼 년이 남긴 것들이오. 미군은 철수했지만 군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 되도록 되어 있는 게 우리의 실정이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느 방에선가 불러대는, 그으리이운 내에에 니이임이여어, 하는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도 이런 답답한 얘기는 그만하고, 노래나 한가락씩 부르도록 허세."
이학송이 술상을 가볍게 치며 그 울림 좋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아직 취하지도 않고 무슨 기분으로 노랠 하시겠어요. 자 드십시오."
김범우가 잔을 불쑥 내밀었다.
"자네, 얘기가 다 안 끝난 모양이군."
"뭐 특별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밤을 지샌다고 끝날 얘기도 아니지요."
"이 사람, 노래부르랄까봐 미리 피하는 겁니다. 술은 남 두 몫을 마시면서 노래하는 건 질색을 합니다."
손승호가 흐리게 웃었다.
"그거 멍청이 술일세. 음주가무야 우리들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본받아도 좋을 생활 지혠데. 술 마시고 부르는 노래에 재주가 필요하나 솜씨가 필요하나. 술기운 따라 그냥 막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제끼는 거지. 술 마시고 부르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제각각 제멋대로 하는 기분풀이야. 분풀이, 화풀이, 설움풀이, 슬픔풀이, 뭐 그런 것들 말야."
이학송이 멀어진 눈길로 말하고 있었다.
"이 선배님이 시 쓰신다는 사실을 인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한풀이는 빠졌습니까?"
이학송을 바라보는 김범우의 눈은 흥미에 차 있었다.
"한이야 어디 그렇게 해서 풀려지나. 술 마시고 노래 불러 풀릴 한이라면 한이 아니지."
손승호가 고개를 끄덕였고, 김범우는 머쓱해졌다.
"한 가지 여쭤보겠는데요, 한민당이 군정을 상대로 요정정치를 한다는 거야 다 들었읍니다만, 사실이 그렇게 심했었나요? 전 군대에 박혀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심재모가 이학송에게 물었다.
"예, 저도 뭐 신문기자라고 설쳐대면서 그저 이것저것 잡다하게 보고 듣고 한 것 뿐이지 특별하게 아는 건 별로 없습니다. 물으신 말씀에 대해선,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사십육년 일월에 서울에 요정이 자그만치 오백 개라는 사실이 신문에 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룻밤 기생 수입이 평균 삼백 원이라 해서 세상의 물의를 일으켰지요. 시청 앞에는 쌀을 달라는 군중이 연일 밀려들어 데모를 하는 때에, 삼백 원이란 돈은 미곡수매가격으로 따져 두 가마니 반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요정이 그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기생들의 수입이 그렇게 좋아진 것도 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군정은 결국 한민당을 대다수의 한국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민주정당'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군정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한민당 사람들에게 '사바사바'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릴 정도였습니다."
"그랬군요."
심재모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전에도 그런 생각은 조금씩 했습니다만, 오늘 … 하시는 걸 들으니까 그 생각이 더 분명해지는데, 현 정부는 전체 국민을 위해 도대체 한 일이 없이 반대만 당하고 있는데, 저 같은 사람은 어째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공산주의가 별로 좋지를 않은데,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라는 게 이 모양이니 친일경찰들처럼 무작정 나설 수도 없는 일이고요. 제가 처음에 군대로 들어갈 때는 뭔가 뜻있는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이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침통하게 말을 마쳤다.
"예, 심 중위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 중위님뿐만 아니라 그런 입장에 처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공산주의에 비해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이념으로서 하등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공산주의와 대등하게 되려면 순수한 대중의 손에 의해 생겨나야 하고, 그 정권은 절대적 대중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절대적 대중을 위해 정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자유민주주의는 그 과정을 일체 생략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허울뿐이고, 대중들의 배척을 받고, 현재로서 북쪽의 체제와는 대적이 안 되는 겁니다. 다 알다시피 북쪽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친일반역세력을 일소해 민족감정을 해결했고, 농민을 위해 토지개혁을 했으며, 노동자를 위해서는 노동법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남로당 지하조직을 통해서 끊임없이 정치선전을 해왔으니 남쪽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과, 반감은 날이 갈수록 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쪽이 이 지경이 된 건 미국 군인들이 강압적으로 세워놓은 군사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떳떳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게 되려면 아까 말한 그 과정을 거쳐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이미 틀린 일입니다. 그러니까 심 중위님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설자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려야 하고, 혼자 괴로와야 하고, 대중들로부터 오해받아야 하고, 배척당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죠. 미국은 '남쪽 정책에 있어서 대중들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양심적 지식인들 입장에서도 매도를 당할 수밖에 없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그 과오에 대해서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한테 비판당하고 매도당하게 될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니 심 중위님은 현재의 위치에서 좋은 쪽으로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킬 날이 올 거라는 걸 믿으면서 말입니다."
"저 같은 게 하면 뭘 얼마나 하겠습니까?"
심재모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 선배님, 이제 술도 어지간히 되신 것 같은데 아가 보류된 노래를 좀 하시죠. 심 중위님의 앞날을 축복하고, 괴로움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범우가 술기운 퍼진 얼굴로 빙긋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의미가 아주 좋네 "
이학송은 서슴지 않고 일어서고는,
"나 이거, 나이 값도 못하고 술만 마시면 주책이라니까. 심 중위님, 그럼 심 중위님을 위해 한 가락 해 보겠습니다"
하며 심재모를 향해 고개를 끄떡했다.
"아이고, 이거!"
당황한 심재모는 황급히 몸을 반쯤 일으켰고, 김범우를 따라 손승호도 박수를 쳤다.
"우울밑에 서언 봉선화아야아 네 모양이이이처량하다아아…"
평소에도 울림 좋은 목소리가 가락에 실리며 애조 띤 우람한 소리로 바뀌어 방안에 소리의 물결을 일으켰다. 아니,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가가 있나. 박두병에 못지않군, 역시 저런 풍류기질이 있어 시도 쓰는 모양인지. 그런데 정치나 시국에 관한 얘길 할 때는 전혀 딴사람이거든. 하여튼 예사 사람은 아니야. 김범우는 지그시 눈을 내리 감고 봉선화를 열창하고 있는 이학송을 올려다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24. 일어서는 산 민중
"후여어 , 후여어어 -"
"훠어이 , 훠어어 훠!"
"후이 후이, 후여어 -"
허수아비들이 팔 벌리고 선 들녘에 새 쫓는 소리들이 길게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넓은 들판에서 메아리 없이 사라지는 그 소리들은 쉬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칠팔월 농사가 더위와의 싸움이라면 구월의 농사는 참새 떼와의 싸움이었다. 새 쫓기가 시작되면 농가의 아이들은 사내와 계집애의 구별 없이 들판으로 내몰렸다. 형제간이 많지 않은 집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못하기가 예사였다. 부모네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결석을 시켰고, 아이들도 책보 대신 보리밥덩이를 싸들고 사립을 나서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학교에서도 새 쫓기는 당당한 결석사유로 통했다. 농가에서 농사는 모든 것에 우선했고, 특히 소작농에게 있어서는 쌀을 한 톨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서 아이들의 배움도 뒷전으로 물려야 했다. 참새 떼의 극성스러움은 어른이든 아이든 짜증나게 했고, 화나게 했고, 끝내는 지치게 만들었다. 참새 떼는 아예 처음부터 허수아비는 우습게 알아 그 위에 올라앉아 쉬는 판이었고, 사람들이 목젖이 떨리도록 질러대는 소리도 날이 지나감에 따라 무서워하지 않게 변해갔다. 소리만 질러서는 날아가지 않아 논두렁을 뜀박질해야 했고, 쉬어 버린 목소리만으로는 모자라 못 쓰게 된 양철통을 두들기거나 돌팔매질을 쳤다. 그러나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진 참새 떼들은 높게도 날지 않고 빙그르 선회해서 한두 마지기 건너 옆 논으로 내려앉고는 했다. 그래도 소리보다 효과적인 것이 돌팔매였다. 하필이면 중도 들판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철길은 한철 새 쫓기가 지나고 나면 침목 사이의 자갈이 표 나게 줄고는 했다. 추수가 끝날 무렵이면 으레 철도인부들이 수동식 수리차에 자갈을 싣고 다니며 보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철길에 가까운 논에서 벼 베기를 하던 농부들은,
"어허, 우리 땀세 생짜배기 고상얼허는디, 영판 미안시럽소이.“
소리쳐 말했고,
"괜찮허요. 요리 일거리 맹글어준께 우리가 월급 타묵고 사는 것 아니겄소."
철도인부들이 웃으며 대꾸했고, 그 둘은 서로 일손 쉬는 시간을 맞춰 막걸리 한 사발이나 담배 한 대라도 나누었다. 철길의 자갈이 돌팔매질로 쓰인 것은 그 독한 일본 순사도, 극성맞던 일본 역원들도 막지 못했던 일이었다. 올해의 새보기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은 이 집 저 집 모여 앉는 일이 잦아지고, 떼 지어 읍내로 들어가는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후이여, 휴여어- 아이고메, 저 문딩이 겉은 참새들, 사람 애럴 워찌 요리태우까이."
계집아이는 소리치며 논두렁을 뛰다가 멈춰서 발을 굴렀다. 계집아이의 안타까운 눈길은 유연하게 휘돌며 옆 논으로 내려앉고 있는 참새 떼에 박혀 있었다. 마지막 남은 돌을 던진 것인데 새떼는 멀리 날아가지 않고 도로 자기네 논으로 옮겨 앉았던 것이다. 계집아이는 주저앉고 싶은 마음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려다보았다. 흙 때가 묻은 두 손에는 땅만 진득하니 차 있을 뿐 돌은 쥐어져 있지 않았다. 인자 으쩌까? 계집아이는 해를 올려다보았다. 서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해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새떼는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날아들기가 예사였다. 그때까지 새를 쫓으려면 아무리 아껴 쓴다 해도 돌은 다섯 개는 더 있어야 했다. 복남이헌테 있을랑가? 계집아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복남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야가 워디갔을꼬? 계집아이는 선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복남이를 찾았다. 새는 안 쫓고 메뚜기를 잡느라고 정신을 팔고 있진 않나 생각하면서. 그래도 복남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맞어, 낮잠 자는지도 몰러! 계집아이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척도 없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진 것이 한참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금씩 스쳐 가는 바람을 쐬고 앉아 있으면 으레껏 그 바람결 같은 졸음이 밀려들고는 했다. 그 아슴하기도 하고, 달치근하기도 하고, 묵지근 하기도 한 졸음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졸음이 오면 일어나야했다. 일어나서 소리치며 논두렁을 뛰어 졸음을 이겨내야 했다. 그건 집을 나설 때면 아버지 어머니가 이르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앉아 있다가 잠이 들어버리면 반나절은 참새 떼에게 밥상 차려주기가 십상이었다. 낮잠이 들었다가 부모들한테 들키는 날에는 눈에서 불똥이 튀도록 귀쌈을 얻어맞거나, 머리카락을 휘어 잡혀 패대기쳐지기가 일쑤였다. 낮잠을 자는 아이는 자기네 부모한테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옆을 지나가는 아무 어른한테나 깨워 일으켜져 정신이 확 돌아오도록 생야단을 맞았다.
"니 뉘집 아덜이냐! 당장 느그 아부지 엄니헌테 일러 혼바람을 내야 쓰겄다."
어른들의 이 말 앞에서 아이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어 잘못을 빌었다. 아이들은 남에게 야단을 맞아도 고까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야단을 친 어른들도 그 아이들 부모에게 이르는 일은 없었다.
"복남아, 복남아아!"
짧은 삼베치마를 팔락거리며 계집아이는 논두렁을 뛰기 시작했다. 흑갈색으로 그을린 다리는 너무 여위어 두루미 다리처럼 가늘고 길어 보였다. 계집아이는 유동수의 딸 옥자였다.
"얼려, 밤중에 자대끼 허고 있네!"
옥자는 잠자는 복남이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런 말과 함께 코로 새는 헛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하늘로 돌렸다. 기둥을 네 개 박고 가마니뙈기를 걸쳐 햇빛막이를 한 크지 않은 그늘에 네 활개를 펴고 잠이든 복남이는 가랑가랑 코까지 불고 있었던 것이다. 옷을 걸치지 않은 배위로 개미 한 마리가 한가하게 기고 있었다.
"잠도 맛나게 잔다."
쪼그려 앉은 옥자는 잽싸게 개미를 잡아 멀리 던졌다. 그래도 복남이는 아무 느낌 없이 자고 있었다.
"야아야, 복남아, 그만 자고 일나그라."
어깨를 흔들었지만 복남이는 옥자의 팔을 내치고 짭짭 입맛을 다시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옥자는 그런 복남이를 향해 눈을 흘겨대며 입술을 삐쭉했다. 그리고 다부지게 다가앉더니 아까보다 세게 복남이의 어깨를 흔들며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 머이매야! 싸게 일나 싸게, 쩌그 느그 아부지온다, 아부지!"
꼭 거짓말처럼 복남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엉! 워,워디, 워디!"
잠이 그대로 담긴 벌건 눈을 흡뜬 복남이는 정신을 바로 잡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 모양을 보며 옥자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서야 거짓말인 것을 안 복남이는,
"이 미친년아! 워째 지랄이여"
소리치며 벌렁 누워버렸다.
"니 시방 누구보고 욕 허고 지랄이냐, 싸가지웂이! 나가 무담씨 그짓말 허냐. 존 말로 깨와도 안 일난께 그짓말 혔제. 나야 깨와줬응께 인자 니 맘대로 다 혀. 잠 뽕빠지게 잠스로 농새 다망치든지, 참말로 느그 아부지헌테 들켜서나 귀창 터지게 귀싸대기럴 맞든지."
좋은 일 해주고 욕을 얻어먹은 옥자는 그만 화가 치밀어 바락바락 악을 썼다. 복남이는 나이도 한 살 아래고, 학년도 한 학년 아래였던 것이다.
"소리 질르지 말어, 나가 잘못혔응께로."
복남이가 일어나 앉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듣기 싫어. 잠이나 퍼자제 멀라고 일어나 주딩이 놀리냐?"
옥자는 토라지며 홱 돌아섰다.
"나가 잠이 안 깨서 멋도 몰르고 헌 소리제, 고것이 워디 참말이간디. 나가 잘못혔당께."
가까이 다가선 복남이가 옥자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옥자는 마지못한 듯 돌아서며,
"문딩이, 그리 넋 빼고 자다가 참말로 느그 아부지헌테 들키먼 워쩔라고 그냐?"
눈을 흘겼고,
"참말로 양쪽 귀 다귀창 빵구 나뿔라고? 요새 우라부지 논 땀세 속 터지는 판인디, 들키먼 그 화풀이 다 받게 돼야."
복남이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논 땀세 속 터지기야 우라부지도 똑같제. 읍내 나간 일 워찌 되얐는지 몰르겄다."
옥자가 한숨을 폭 쉬었다. 둘이는 나란히 앉았다.
"요거 묵어. 아까 애껴논 것이잖여."
옥자는 복남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남이의 손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개떡이 들려 있었다. 옥자는 금방 이빨 사이사이에서 신침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복남이가 거무스름한 개떡을 반으로 잘라 옥자에게 내밀었다.
"나 너무 많다. 니가 더 묵어라."
옥자가 개떡을 받지 않고 도리질을 했다.
"아녀, 똑같어. 요거 봐 "
복남이가 두 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알어. 그려도 니가 더 묵어. 니넌 기운이 씨야헐 남잔께로."
"아녀, 둘이 똑같이 묵어도 니가 나이 더 많은께 더 배고플 참인디, 나가 더 묵어불먼 워쩌라고."
"알겄어, 인 내."
옥자는 자기 몫의 개떡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반에 반쯤을 떼 내서 복남이 앞으로 내밀었다.
"더 묵어라."
"아니랑께, 나 것이라 나보고 많이 묵으란 것이냐?"
"아녀, 아녀. 고것은 참말로 아녀."
옥자는 단발머리의 끝이 번갈아 가며 콧등을 스치도록 고개를 홰홰 저어대고는,
"그냥, 나 많이 주고 잡은겨."
나직하게 말하며 복남이를 바라보는 옥자의 눈길은 그지없이 따스했다.
"글먼 반만 묵을끼."
복남이는 씨익 웃으며 옥자가 내밀고 있는 개떡 쪽을 다시 반으로 잘랐다.
"쪼간썩 , 찬찬히 묵어."
옥자가 말했다.
"잉."
둘이는 개떡을 먹느라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넌 후제 어런이 되먼 죽어도 농새 안 질껴."
복남이가 불쑥 말했다. 개떡은 이미 먹어치우고 없었다.
"무신 소리다냐? 글먼 멀 묵고 살게."
옥자가 눈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복남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장시헐 것이여. 농새 지먼 나도 아부지맹키로 가난허게 살고, 지주 헌테 찾아 댕김서 빌고 속태우고 헐 것잉께."
"그려, 존 생각 혔다. 나도 농새꾼은 징허다."
장사는 무슨 돈으로 할 거냐는 말이 광방 나가려고 했지만 복남이의 대답이 막힐까봐 옥자는 말을 바꾼 것이다. 인자 삼학년인 것이 별 쑹헌 생각 다 허고 그러네. 저것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서 그런가? 일만 죽도록 험스로 가난허디 가난헌 농새꾼이 싫음스롱도 나넌 못허 본 생각인디. 옥자는 복남이가 철이 다 든 총각인 듯싶어 옆 눈질을 했다.
"장시혀서 돈 벌어 갖고 논얼 백 마지기 살란다."
복남이가 힘이 잔뜩 들어간 눈길을 들판에 꽂은 채 말했다.
"백 마지기?"
옥자는 숨을 들이키다 멈춘 표정으로 복남이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그리 되먼 을매나 좋겄냐. 느그 아부지가 질로 좋아험스로 벌렁벌렁 춤추겄다."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열 마지기라면 모르겠는데 백 마지기라는 말이 힘 빠지게 했다.
"그려, 나가 기엉코 불쌍헌 우라부지 원풀어디릴껴."
복남이는 입심 좋은 김종연의 아들이었다.
"그리 되민 좋제. 근디, 읍내 나간 일은 워찌 되얀는지 몰르겄다."
옥자는 아까 한 말을 되씹으며 또 한숨을 폭 쉬었다.
"지주덜언 다 도적 눔덜이여. 우리 것이 될 논얼 워째 넘헌테 폰다고 지랄이여, 지랄이!"
복남이가 벌떡 일어서며 돌팔매질을 했다. 돌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참새 떼가 화르르 날아올랐다.
"워메 탈났네. 새살까니라고 참새만 존 일 다 시켰다. 복남아, 니 자갈 남은 것 있냐?"
"이, 여그."
복남이가 내민 손바닥에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워메 어쩌끄나. 해는 안직도 많이 남었는디."
옥자가 울상이 되었다. "그냥 소리 질름서 쫓아댕게야제 워째."
복남이의 퉁명스러운 말이었고, 옥자는 자기네 논 쪽으로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벌써 며칠 전에 유동수 · 김종연 · 서인출은 마름 오동평에게 불려가 그만 숨길이 막힐 것만 같은 말을 전해듣게 되었다. 지주 윤씨네가 마땅한 작자들을 찾아 논을 팔아넘기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돈만 생각하고 연고 없는 사람들에게 넘기느니 기왕이면 인연 맺고 있는 작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인정상 의리상 피차간에 좋은 일이라 미리 알리는 것이니 뜻이 있으면 나서보라는 것이었다. 목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 장리변을 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건 송씨와 오동평 사이에서 그 동안 비밀리에 추진해왔던 일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어 마침내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지주들이 상습적으로 써먹어온 강매방법이기도 했다. 논 값은 논 값대로 다 받고, 현금지출을 안 해도 되는 돈놀이까지 하자는 것이 지주들의 속셈이었다. 소작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네들이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명의가 바뀌어버리거나, 딴사람들에게 팔아 넘겨지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명의를 바꾼다는 것은 농지개혁을 당하지 않을 범위 안에서 논을 갖지 않은 사람들 앞으로 분산시키는 방법이었고, 논을 팔아넘기는 경우에는 사들이는 사람들 거의가 농지개혁에 저촉될 필요가 없는 자작농이었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방법은 소작인들이 가지고 있는 농지분배기득권을 완전히 박탈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논을 강매하는 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소작인들의 입장이었다. 돈 없이도 당장 자기 명의로 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앞의 두 방법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오부나 되는 논 값의 이자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작인 노릇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었고, 이자에 치여 본전은 갚을 수가 없는 상태에서 본전 독촉을 받게 되면 꼼짝없이 논을 되돌려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되어갈 농지개혁이든 간에 농지개혁이 눈앞에 닥쳐와 있는 형편인데 그런 악조건으로 논을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종연과 서인출은 윤씨네의 백 명이 넘는 작인들을 동네마다 찾아다니며 행동을 같이하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다. 왜냐하면 작년에도 앞뒤 생각하지 않고, 입에 당긴다고 감 많이 먹어대는 식으로 논을 떠맡은 다른 지주네 작인들이 더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쉽게 행동통일을 할 수 있었다. 첫째, 논을 사들이겠다는 태도로 나가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배우선권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둘째, 농지개혁이 어차피 유상몰수 유상분배인 바에야 분배우선권을 언제 빼앗길지 모를 위험을 면할 겸해서 매매조건을 일괄적으로 타결해 나가 적당한 선에서 사들이자는 것이었다. 그 매매조건의 조정으로는 첫째, 논 값은 시세에 맞추되 일시불이 아니라 오 년간 분할로 하고, 이자는 이부로 하여 매년 갚을 본전에 한해서만 물기로 찬다. 둘째, 모든 조건은 첫째와 같고, 분할만 삼 년으로 한다. 셋째, 논 값은 시세에 맞추어 일시불 하되, 이자는 이부로 하고, 본전 상환기간을 십 년으로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단계적으로 제시해가며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어가기로 한 것이다.
입심이 좋은데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김종연이 자연히 대표격이 되었고, 유동수 · 서인출에다가 다른 동네에서 두 사람이 보태져 다섯 사람이 윤씨네를 직접 찾아가게 되었다. 마름 오동평을 무시해버린 것은 자기네들의 뭉쳐진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고, 서로 얼굴을 마주대함으로써 말고리를 만들어가며 타협의 실마리를 풀고, 시간을 끌어갈 수 있는 데까지 끌어가려는 것이었다.
"즈이 작인 눔덜이 마나님 분부 전해 듣고, 다 그리 헐 맘이 있어서 즈이 다섯이 대표로 뽑혀 이리 찾아뵙는구만이라."
송씨를 대하고 김종연이 내놓은 첫마디는 이랬다. 그는 넉살 좋게난데 없이 '마나님 분부'를 찾아가며 상대방 기분을 발라 맞추고 있었지만, 실은 자기네들이 한 덩어리로 뭉쳤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었다.
"대애표? 오 서방은 멀 허는 사람인디?"
턱끝을 치켜 올린 송씨가 깔아보는 눈길로 던진 말이었다.
"야아, 모든 일얼 동평 아재럴 통허기로 돼 있는 것이야 다 알제라 헌디, 고것이야 농새 일에 속허는 것이고라, 요분 일언 농새 일이 아니라 농지 소유권이 왔다 갔다 허는 중대헌 재산문젠디 마름이 새중간에 낄 자격이 웂다고 생각되느만이라. 그러고 마름이 새중간에서 왔다리 갔다리 허다가는 시일만 질질 늘어지기도 허고 또 무신 야료가 생길란 지도 모르고 혀서 당자들이 만내는 것이 질이라고 생각 혔구만이라.“
"아니, 논얼 사딜일맘이 있음사 사딜이먼 될 일이제 당자가 만내야 된다는 거이 무신 소리여?"
송씨는 내치듯이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작인들의 속셈을 간파했던 것이다.
"야아, 논얼 사고 포는 일이야 소작얼 띠고 붙이고 허는 일허고는 영판 달브제라. 논얼 사고 포는 일이야 장에서 물건을 사고 포는 일허고 같은께, 서로가 좋아지게 흥정을 혀야 지 값이 나오는 것이고, 그래야 서로 사고 폴고 혀지는 것 아니겄능가요. 고것이 순서고 순리라는 생각이 드는구만요."
김종연은 침착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송씨의 감정은 벌써 뒤집어지고 있었다.
‘저 천헌 것덜이 시키는 대로 헐 일이제 워더다 대고 흥정이여, 흥정이.’
그러나 송씨는 감정을 꾹 눌렀다. 젊은 놈의 말이 영 틀린 것이 아니다 싶었고, 더구나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이 그야말로 소작을 떼고 붙이고 하는 것처럼 당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헛 배짱 부리다가. 농지개혁 당해 재산 억울하게 잃는 것보다야 천한 것들하고 흥정을 해서라도 재산을 지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나가 장돌뱅이가 아닌디 흥정이다 머시다 허는 쌍시런 발언 내덜말어. 기왕지사 생판 몰르는 넘덜 손에 님기느니 작인덜 손에 냄기기로 헌 마당에 쪼간 더 인정 못 쓸 것도 웂응께, 워째 도란 것인지 말해보소."
송씨는 마음을 잔뜩 공그렸다.
"아이고메 마나님, 그리 말씸혀 주신께로 아즘찬이 아즘찬이 또 아즘 찬이구만요."
김종연은 정말 고마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하며 넓죽 절을 하고는,
"작인 눔덜이 마나님 뵙기 전에 워쩌크름 을매로 해도라고 허자 허는 입을 맞칠 쑤 있간디요. 시상이 지 아무리 변혀 양반 쌍눔이 웂어지고, 인자 농지개혁꺼지 되야뿔먼 지주고 작인이고도 웂어진다 혀도 즈덜이사 고런 느자구웂이고 싹수머리 웂는 짓거리사 못 허는구만이라. 이적지 입고 산 은혜가 을맨디 고런 짓거리 혀서 쓰간디라. 오늘 요리 찾아뵌 것이야 바로 그 고마우신 말씸 들을란 것이었구만요. 그 말씸 들었응께 인자 핑허니 돌아가서 작인덜 모다모이게 혀서 일얼 한몫에 깨금허니 끝내게 해갖고 메칠 새에 새시로 찾아뵈겄구만요."
청산유수로 말을 끝냈다.
"알었네, 그리 허소."
말을 듣는 동안 긴장이 다 풀린 송씨는 흡족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들 다섯은 공손하게 인사들을 하고는 송씨 앞에서 물러났다.
‘저것이 똑똑허기가 예삿것이 아니시. 저리 야물딱진 것이 워찌 빨갱이물은 안 들었을꼬. 워쨌거나 소작질해묵기는 아깝다.’
송씨는 김종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아 워찌 된 일이다냐? 첫찌 조건 내놓기로 헌 것 까묵어뿌렀냐?"
윤씨네 대문을 나서자마자 유동수가 책망하듯 물었다.
"아이고 성님, 자다가도 물으먼 또록또록허니 답허도록 챙기고 있소. 나가 워찌 그랬냐 허먼, 고 늙은 것 맘보럴 딱 짚어봉께 우리가 생각허는 것이 믹히게 생겼습디다. 고것이야 지가 몸달았다는 표신디 우리가 멀라고 다급허니 조건 내걸어라. 그것 맘 살짝허니 끌어 댕게놓고 우리야 메칠이라도 더 버는 것이 이문인디라."
그렇지 않느냐는 듯 김종연은 비식 웃으며 꽁초를 꺼냈다.
"이, 듣고 봉께 니 말이 옳여. 와따, 우리 종연이 찰방지다."
유동수가 환하게 웃으며 김종연의 어깻죽지를 쳤고,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십사일 목포형무소가 파옥되어 삼백오십 여명이 탈출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탈옥수들 거의가 제주도 사삼사건 연루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산줄기를 타고 지리산으로 도주할 것이 뻔하니 중간지점에서 경계를 강화해 한 놈이라도 잡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어제 바로 연대본부로부터 소식을 받았고, 오늘 다시 신문으로 확인을 하며 백남식의 심사는 뒤틀리고 있었다.
"이봐 백 중위, 경계 철저히 하라구. 진급 앞둔 처지에 지난번 같은 일 또 일어나면 정말 곤란해진다구."
연대참모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연대본부의 전화는 목포 소식을 전해주려는 것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백남식은 기막히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 사건이 이렇듯 불신당하는 계기가 되다니, 지난번 일을 생각하며 그는 다시 이빨을 갈아야 했다. 그 일은 생각할수록 분하고 안타까왔다. 그놈들이 터널 저쪽에서만 일을 저질렀어도 자신은 깨끗하게 책임을 모면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 새끼들이 구월에 총선거를 하자느니, 구월이면 박헌영이가 내려와 남쪽정권을 세운다느니, 하고 떠들어댄 소리는 엄포가 아니라 사실이란 말인가? 유격댄지 빨치산인지를 내려보내 태백산맥 줄기에다 투쟁거점을 확보하고, 지리산에 새로 사령부가 생겼다더니 여기 야산대까지 겁 하나 없이 군수품 실은 열차를 습격해대며 맹렬하게 나오고 있으니, 이런 게 다 그놈들이 말한 '구월대공세'라는 것인가. 이 새끼들이 이 지랄발광을 쳐대는데 우리 쪽은 도대체 뭘 하고 자빠졌는 거야. 병력보충을 시켜줘야 빨갱이를 때려잡든 빨치산을 때려잡든 할 거 아닌가. 병력만 더 있었다면 그놈의 사건도 미리 막아낼 수 있었지. 빌어먹을, 읍내 안쪽이나 근근이 지켜내는 현재 병력을 가지고 무슨 재주로 진트재 터널까지 지켜낸단 말인가. 높은 놈들이라는 건 일정 때나 지금이나 현지 사정은 깔아뭉개고 큰소리만 친단 말야. 이 짓도 드러워서 못해먹겠어.’
백남식은 신문지를 와락 거머잡았다. 그날 진트재 쪽에서 총소리가 울려대는 것을 듣고 백남식은 즉각 부대를 출동시켰다. 적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회정리 삼구 끝머리에서 병력을 산개시켜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타게 했다. 산발적으로 울리던 총성도 그때는 이미 완전히 멎은 상태였다. 총소리가 그쳐버리자 그때까지 계속되었던 다급함과 긴장감이 허물어지면서 이상스런 불안감과 초조가 밀려드는 것을 백남식은 느꼈다. 장양리 중간목을 지나면서야 불안한 얼굴로 밭두렁 아래 쪼그려 앉아 있는 농부한테서 기차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차가 군수품 수송열차라는 것은 현장에 가서야 알았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은 이미 끝나고, 적들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기습당한 현장은 그대로 전쟁터였다. 아직도 피 흘리는 시체가 여기저기 나 뒹굴어져 있었고, 일곱 개의 화물차량 문들은 전부 열어 젖혀진 상태였다. 부하의 보고로 기관실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관실로 간 백남식은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기관사와 군인들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맨발에 입이 틀어 막힌 꼴이었다. 결박을 풀고 보니 군인은 여덟이었다.
"장교님까지 십오 명이었습니다."
중사의 대답이었다. 인솔 장교인 중위는 가슴과 복부에 총을 맞고 철길 옆 둔덕에 죽어 넘어져 있었다. 그 위치로 보아 기차를 뛰어내려 적에게 응사하다가 총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잘 죽었어, 어차피 사형을 못 면할 형편 같은데. 백남식은 시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대강 사오십 명되는 것 같았고, 무기만 가져갔습니다. 대장님이 출동해주셔서 그래도 피해가 줄었습니다. 망을 보고 있다가 대장님 부대를 발견하고 도망치기 시작했으니까요."
중사의 말에 백남식의 머리 속에서는 확 불꽃이 일어났다. 살았다는 생각이었다. 이 한마디, 증언이면 사건이 비록 자신의 관할지역 안에서 일어난 것일망정 책임은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기차 앞에는 바윗덩이들이 겹으로 쌓여 있었다. 그 바윗덩이들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다소 경사진 철길이라 하더라도 달리는 기차가 소총 정도의 공격을 받고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과, 특별열차 운행이 사전에 탐지되었다는 점과, 기습을 위해 그 준비가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백남식은 아까 밝아졌던 마음이 그만큼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만 사람 죽고 무기 뺏기고,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그는 벌컥 화를 냈다.
"아닙니다, 적도 두세 놈이 죽었는데 시첼 악착같이 떼 메고 간 겁니다."
"시체를?"
백남식은 그때서야 군인 여덟과 기관사 셋을 살려주고 간 사실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사령관님, 사건 보곱니다."
권 서장이 들어서며 말했다.
"또 무슨 일이오?"
백남식은 얼굴을 찡그렸다.
"보성에서 발생한 사곱니다. 소작인들이 지주 집에 난입해서 집단폭행을 가하고 기물을 파손하고,"
"모두 잡아 처넣으라고 하시오!"
"그게 아닙니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제지가 안 되고 오히려 경찰에게 덤벼드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계엄군이 나서야 될 형편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명령하달을 원하고 있습니다."
"거 남 서장이란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총 가진 경찰이 민간인들한테 당할 입장이라니, 고양이가 쥐한테 몰리는 꼴 아닌가. 참 드럽게 돼가는 세상이네, 이거."
백남식이 의자를 차고 일어났다.
"다음은,"
"아니, 또 있소?"
"이곳 칠동에서 현재 발생중인 사건입니다. 보성에서와 동일하게 소작인들이 지주 집에서 난동을,"
"방침 정한 대로 난동자들을 무조건 잡아들이게 하시오."
"예, 당장 급한 건, 소작인들이 난동을 부리다가 지주 집에 방화를 했는데, 소방소에서 진화를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워라고요? 소방서 놈들은 계엄군을 도대체 뭘로 보고 그따위 요청을 해오는 거요? 계엄군이 지금 소방서에 부역이나 나가게 생겼소! 손이 모자라면 동네사람들 동원해서 끄라고 하시오."
"그러잖아도 소방소에서 먼저 지원요청 이유를 설명했는데, 지주가 인심을 잃어서 그런지 동네사람들이 서서 구경만 하지 돕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 새끼 그거, 어떤 새낀지 집 다 태워먹게 내버려두시오. 평소에 얼마나 악질로 굴었으면 사람들이 그러겠소. 우리가 할 일은 방화범만 체포하면 되오. 그놈의 농지개혁법인지 뭔지가 공포되고 나서부터 우리 계엄군이 빨갱이를 잡는 것이 주 임문지, 난동 소작인들을 다스리는 것이 주 임문지 뒤죽박죽된 것도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데, 뭐 불을 꺼! 요런 쌍녀러 세상이 어찌 돼갈라고 이 꼴인지 원. 갈수록 소작인들의 난동은 심해져가고, 이 짓도 못해먹을 노릇이요. 무슨 보고가 또 있소?"
"현재로선 없습니다. 보성에 명령하달 잊지 마십시오."
권 서장은 돌아섰다. 백남식은 곧 보성으로 전화를 걸었다.
"공포를 쏴서 해산시키고 주모자를 전부 잡아들여. 너무 많은 게 무슨 상관야. 장소야 학교를 빌리든 어쩌든 거기 사정에 맞춰 해결해야지. 공포만 쏴! 위협사격은 절대 안 돼! 잘못해서 누구 하나 죽었다 하면 큰일 나니까."
백남식은 공포만을 강조했다. 일단 화가 나기 시작한 민간인들이 얼마나 무섭고도 골치 아픈 대상인지를 그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농민들이 논두렁을 벗어나 길바닥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하면 그건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그 양순하고 고분고분하던 황소가 한번 성질을 부리며 날뛰기 시작하면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묵묵히 농사를 짓던 그들의 질긴 힘이 폭력으로 바뀌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손에 들려 곡식을 가꾸던 연장이 무기로 둔갑하는 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었다. 호미 · 낫에서부터 곡갱이 · 쇠스랑까지 무기 아닌 것이 없었다. 그는 십일폭동을 통해서 화가 폭발한 그들의 무서운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그 사건을 통해서 민간인에게 총질을 잘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시월로 접어드는 가을은 들녘에서 농익어가고 있었다. 검푸른 초록빛으로 출렁이던 들녘은 어느덧 황금빛으로 변해 묵직한 흔들림을 보이고 있었다. 바람은 같은 바람이 불어가도 그 바람을 맞는 여름의 들판과 가을의 들판모양은 완연히 달랐다. 여름들판이 잔잔하게 물결 이는 초록의 바다라면 가을들판은 묵직하게 흔들리는 황금의 도가니였고, 여름들판이 처녀의 몸짓이라면 가을들판은 임산부의 몸놀림이었고, 여름들판이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이라면 가을들판은 허허허 웃는 어른들의 웃음이었다. 포구의 갈숲도, 산의 나무들도 아직 싱싱하게 푸르렀으므로 들녘의 황금빛은 유별나게도 두드러져 보였다. 벼만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기름기 돌고 살 오르는 계절이었다. 뱀도 개구리도 메뚜기도 미꾸라지도 가을볕 속에서 살쪄가고 있었다. 새보기가 고비를 넘기게 되자 아이들은 메뚜기 잡이와 미꾸라지 잡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메뚜기는 저희들을 위한 요기였고, 미꾸라지는 어른들을 위한 수고였다. 물론 좀피 가루 냄새 상큼하고 진한 국물 맛 고소한 추어탕을 아이들도 한 그릇씩 안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어탕은 어른들이 유독 좋아해서, 미꾸라지를 잡아가면 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좋아할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아버지의 웃는 얼굴도 보고, 칭찬도 듣게 되었다. 미꾸라지 잡이에 비해 메뚜기 잡이는 지천을 듣기가 예사였다. 아이들로서는 메뚜기볶음이 맛있는 요깃거리였지만 어른들은 반찬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메뚜기 잡아들이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강아지풀줄기에 꿴 메뚜기꿰미들을 풀숲이나 텃밭에 감추었다가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 눈치껏 볶아내서 밤참을 삼고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미꾸라지를 잡아가도 어른들이 전처럼 반기지 않는 까닭을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제 살판났다는 기쁨의 소리가 고샅고샅을 울려대고, 어른들이 당산나무 아래로 모여들어 징치고 꽹과리 치며 덩실덩실 춤출 때부터 아이들도 팔딱팔딱 모둠발을 뛰고 깡총강총 맴돌이질치며 어른들에게 지지 않게 소리쳐댔던 것이다.
‘와아, 인자 우리도 우리 논 생겼다아, 우리도 인자 부자 되얐다아. 하아아 우리도 인자 쌀밥만 묵고 산다아아-’
그리고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앉아 다투어 자기들의 꿈을 부풀렸다.
‘나넌 하로에 열 그럭썩 묵고 살란다. 나넌 올베쌀얼 가마니로 해놓고 묵을란다. 나넌 흰떡얼 일년 내내 해 묵을란다. 나넌 쌀밥얼 참지름에만 몰아 묵을란다. 나넌 쌀밥이 먼 숨 안 쉬고 열 그럭도 묵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그런 꿈도 어른들의 한숨과 분노를 따라 차츰차츰 금이 가고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가슴이 휑 비는 허망함 속에서 울상이 된 얼굴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하늘을 쳐다보다가 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봇도랑을 막거나 웅덩이의 물푸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을 추어탕은 여름 개장국만큼 어른들의 몸보신에 좋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싸게 가서 미꾸랑지 잡아오니라. 느가부지 저리 한숨토해 쌓다가는 기운 다 파해 탈나겄다."
어떤 아이는 할머니의 이런 말을 듣고 기운 없는 몸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범우의 집 마당에는 오십 여명을 헤아리는 남자들이 말없이 서있었다.
"어르신, 다들 뫼였구만이라."
머슴 천 서방이 댓돌 아래서 허리를 굽히며 방을 향해 말했다. 천 서방의 말을 따라 마당을 채우고 선 남자들이 제각기 자세를 가다듬었다. 곧 방문이 열리고 김사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왔는가."
대청 끝으로 나선 김사용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 말에 맞추어 남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다들 잘 왔네. 자네들을 모이게 헌 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몇몇 사람이 헛소문을 듣고 어지께 여길 찾아들었기 땀세 다른 사람들도 그런 헛소문으로 공연시 속 아프게 살랑가 몰라 내 입으로 분명허게 말을 해두고자 함이네. 지금 농지개혁을 앞두고 세상이 더없이 시끌시끌 허고, 온갖 소문이 날이 날마다 퍼지고 있는 형편인데, 거기에 내가 농지를 명의 변경시켜 뒤로 빼돌리고 있다는 소문도 끼여든 모양이네. 내가 그런 못되고 못난 짓을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지금 자네들 모두가 듣는 앞에서 내 입으로 똑똑허니 못 박아 말 허는 것이니 그리들 알도록. 내가 자네들헌테 큰 선심은 못 썼어도 그 동안 다른 지주들에 비해 다먼 얼매라도 소작료를 낮추었고, 토지개혁이 되든 농지개혁이 되든 그때는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농지를 분배한다는 것은 일찍감치 내 아들 범우와 한 말이기도 한데, 내가 어찌 그리 온당치 못한 짓을 하겠는가. 앞으로 실시될 농지개혁에 따라 지금 자네들이 짓고 있는 농토는 당연허니 자네들 것이 될 것이니 자네들은 공연시 딴 생각, 딴마음먹지 말고 애써지은 농사 추수나 잘들 허도록 허소, 허고, 당부할 말은, 지금 세상이 이리 시끄러운 것은 지주들이 자기들 욕심만 채우니라고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기 땀세 생겨나는 분란인데, 오늘 일은 자네들 속에만 담아두고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것이네. 왜 그런고 하니, 자네들이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자네들만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헌테는 속 뒤집는 소리가 될 것이고, 그리 되어 분란이라도 일으키게 되면 결국 자네들의 말이 죄인 것잉께. 내 말 다 끝났으니 다들 돌아들 가시게."
작인들이 또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어서들 가아."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보인 김사용은 힘없고 느린 몸놀림으로 돌아 섰다. 핏기라고는 없이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거뭇거뭇한 저승꽃과 함께 병색이 드러나 있었다. 김사용이 방문을 닫자 작인들은 비로소 뒤돌아서서 대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부인 이씨는 소리 없이 대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온화한 얼굴로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김사용의 당부는 이삼 일이 못 가 들마을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김사용이 아무리 당부했다지만 그 듣기 좋은 소식을 이부자리 속에서 아내의 귓볼에 속삭이지 않은 남자가 몇이나 될 것이며, 또 남자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 그리고 말을 끝내고 나서도
"요 말자네 만 알고 있으소. 소문내서 이문 볼 것 하나또 웂응께"
하고 다짐을 단단히 했다고 해도 그 귀 간지럽게 들은, 자랑삼고 싶은 말을 가슴에 진득하게 담고 있을 여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여자들은 남편한테 다짐받은 것과 똑같은 식으로 다짐을 앞뒤로 박아가며 다른 집 작인에게 입을 달싹이게 되고, 그때부터 그 말은 말한 사람이라고는 없는 채바람 타는 소문이 되어 퍼지게 마련이었다. 항아리 속처럼 넓은 낙안벌에 몇 십 호씩 이마 맞대고 있는 들마을들은 구 할이 넘게 작인들이었고, 항아리 속에 머리를 넣고 소리치면 되울림이 갑절이나 커지는 것처럼 그 소문은 낙안벌 들마을 들에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다른 지주나 소작인들을 동시에 자극했다. 소작인들은 김사용과 다른 자기네 지주를 더 증오했고, 지주들은 자기네의 일에 재 뿌리는 것만 같은 김사용을 욕해댔다.
윤삼걸은 최익달의 사랑방에 마주앉아 있었다. 최익달은 느긋한 얼굴인데 비해 윤삼걸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워쨌거나 서민영이나 김사용 영감 겉은 물건들 땀세 재수에 옴붙는단 말이요. 서민영이야 원체로 예순지 하느님인지 믿음서 지멋대로 놀아난 미친 눔잉께로 그렇다 치드락도 김사용 영감이야 꾸척시럽게 그 무신개지랄이요."
윤삼걸이 성질을 부렸다.
"그 영감이 하매 그리 인심 얻어 담에 국회의원 출마 헐라는 갑소."
최익달이 비웃음을 입꼬리에 물었다.
"영감탱이가 노망을 허는 것이요. 늙었으먼 싸게싸게 꼬드라지기나 헐일이제 헌다는 짓거리가 넘 못헐 일이나 시키고 자빠졌으니, 저걸 그냥 성질대로 확 워째뿔지도 못허고, 그 영감탱이 땀세 암시랑토 않든 우리 작인 놈덜꺼정 들썩이고 야단 아니요."
"작인 눔덜 들썩이는 것이야 워디 윤 회장댁만이요? 우리 집도 매 일반인디, 지까징 것덜이 들썩이먼 멀허고, 떼거리로 몰려댕기먼 멋 헐 것이요. 일정 때부텀 지금꺼지 고것덜이 지랄발광친 것이 워디 한두 분이었소? 그리 혀도 즈그덜 뜻대로 된 것이 머시가 있소? 말자리나 헌다고 똑똑헌 칙험스로 앞장슨 놈이나, 급헌 지성질 못 이기고 앞장슨 멫 눔을 때레 잡아쁠먼 깨금허니 해결되야뿔고 해결되야뿔고 안혔소?, 그럼시로 우리가 요렇타께 쥔 노릇 해왔는디 머시가 그리 걱정이요? 윤 회장이야 아무 걱정 말고 논이나 싸게싸게 이전 시키씨요. 서울 성님 말씸얼 들은께 원제 득달겉이 농지개혁을 실시헐란지 아무도 몰른다고 헙디다."
"금메요, 고것도 위원장님 맹키로 진작에 끝냈어야 허는디 한 발이 늦은 디다가, 사람도 마땅허덜 않고…"
"무신 소리요, 시방? 지닌 논이 많음시로 일가친척만 찾고 앉었소?"
"안그러먼 워쩌겄소."
"어허, 윤 회장, 워째 그리 땁땁허요. 만약에 우리덜 일가친척 뿌시레기덜이 싹 다 똥구녕이 째지게 가난혀서 집집마동 논얼 갈라 부친다혀도 논이 남을 판인디, 우리덜 일가친척이란 것이 거지반 밥술뜨고 사는 사람덜이니 애시당초 그 방법이야 가망이 웂은 일 아니겄소?"
"허먼, 위원장님은 무신 방법을 쓰셨는게라?"
윤삼걸이 바짝 다가앉았다.
"허어 이거 참, 고것이야 말허기가 곤란헌디."
"아이고메 위원장님, 항군에 장 삽시다. 비밀이야 철통겉이 지키겄응께요."
윤삼걸이 더 바짝 다가앉았다.
"요러다가 코 깨지겄소."
최익달이 거만스런 얼굴로 물러나 앉고는,
"나가 십 원을 이문 볼라고 허먼 최소한도 일원은 웂앨 생각 혀야허고, 이 시상에 사람이 허는 일에 돈 갖고 안 되는 일이 웂다! 요것이 시상을 사는 법칙이고, 이 법칙이야 빨갱이 시상이 돼도 변허지 않을 법칙이요. 요 법칙에 맞춰서, 작인덜 중에서 새끼덜 많이 딸리고 순헌 눔덜얼 골라내 따로따로 불러, 열 마지기 이전시키는 값으로 한 마지기 준다는 식으로 허먼, 말 새지 않겄다, 을매나 간딴허요. 사람 맘보야 믿을 것이 못된께 아홉 마지기에 대해서는 미리 소유권 포기각서를 받어야겄제라."
"아하, 그렇구만이라, 그렇구만이라."
윤삼걸은 감탄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연상 고개를 끄덕여댔다.
‘아서라, 그리 좋아하덜 말어라. 그 짓도 진작에 했어야제 인자 때가 늦었다.’
최익달은 비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인자 논바닥 믿고 큰돈 맨짐서 신간 편케 지내든 호시절은 막음허고 있는 모냥이요."
최익달은 선하품을 했다. 윤삼걸은 그의 말꼬리에 자신의 말머리를 잇댈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어 위원장님, 반가운 소식이 딛기드만이라."
"무신 반가운?"
최익달은 거드름을 피웠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아는 때문이었다.
"양조장얼 새로 세우신다지라?"
"윤 회장님 귀도 에진간이 볽소. 하나 혀볼 작정인디, 워찌 돼갈란지 몰르겄소. 서울 기신 성님이 허가럴 내줌시로 하도 혀보라고 해싸소…"
최익달의 거드름은 더 심해졌다. 양조장을 하면 네까짓 재산쯤 우습고, 내 배경을 감히 누가 당해, 하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국회의원 최익승은 결국 정현동과의 양조장문제를 포기해 버리고 새로 만들 계획을 세워 손아래 최익달과 동업하기로 했던 것이다.
"위원장님, 혼자서만 좋지 말고 나헌테도 그 선잠 짬매주씨요. 나가 사례야 톡톡허니 헐 판잉께요."
윤삼걸은 갑자기 비굴해졌다.
"금메 말이요, 무슨 일인지는 몰르겄으나 될 만헌 일임사 못헐 것도 웂덜 않겄소? 워디, 이문 존 일 있으먼, 나허고 동업허먼 고것이야 제까닥이요."
"그것도 아조 존 생각이시오. 나가 시방 멀 하나 종그고 있는디, 고것이 자신 있다 싶으먼 위원장님허고 의논 나누도록 허겄소."
"그리 헙시다. 우리야 다 아는 사인께로 이문 되는 일이먼 멀 못허겄소."
최익달은 어느새 거드름을 거두고 친근한 웃음을 피웠다. 윤삼걸도 더없이 흡족한 웃음으로 응답했다.
세상이 뒤숭숭한 가운데서도 올벼쌀은 추석을 앞질러 두 파수 전부터 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석은 예년 같지가 않았다. 정월대보름이 불놀이 없이 어둡게 지나갔듯 농촌의 대명절인 추석도 어디서 풍물 잡히는 소리 하나 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대보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관에서 보름놀이를 막은 것이었고, 이번에는 사람들 스스로가 추석놀이를 꾸미지 않은 것이었다. 동네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냉랭한 기운 속에서 시월 육일이 지나가고 말았다.
"니도 나도 못 묵게 저 썩을 눔에 나락얼 싹 다 불 쳐질러 뿌렀으먼 속이 씨언허겄다.“
소작인들은 누렇게 물든 들판을 노려보며 이런 증오를 폭발시켰고,
"니미럴, 우리헌테 추석이 워디 있어, 추석이. 앞날이 깝깝허게 맥힌 판국에 머시가 좋다고 놀아날 것이여."
그들은 이런 말로 감정일치를 보았고,
"풍물? 고것 누구 좋자고 허는 것이여! 배꼽이 요강 꼭지가 되게 쳐묵고 숨 씩씩기리는 지주 눔덜 소화 잘되게 혀주자는 것이여, 고것이 아니먼, 우리넌 요리도 속창아리도 웂은 것덜이요, 허고 굿 뵈자는 것이여? 올해 풍물 잡는 손모가지덜이야 모다 작씬작씬 뿐질러뿌러야 혀!"
누구의 개입도 없이 그들은 이렇듯 자각적 행동을 이루어나갔던 것이다. 추석이 전에 없이 냉랭하게 지나가게 되자 그 기분을 민감하게 감지한 것은 지주들이었다. 스스로의 행동에 켕기는 데가 있는 지주들은 그 분위기에서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그때뿐이었고, 며칠이 지나자 지주들의 마음은 원상 복구되고 말았다. 조성이나 보성이나 벌교에서는 번갈이를 하듯 말썽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는 속에서 삐라는 사흘거리로 뿌려졌다. 백남식은 사건을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이 없었다. 그는 사상자만 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소작인들을 무조건 잡아들이는 강경책을 쓰고 있었다. 일단계로 주모자를 색출해서 격리시켰고, 이단계로 개개인을 상대로 폭행이 가미된 좌익혐의를 추궁했고, 삼단계로 주모자를 재판에 넘김과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을 하나씩 내보내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되고 보니 방화범으로, 폭력범으로, 폭행범으로, 집단난동범으로 집을 떠나야하는 소작인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소작인들의 행동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자기네 지주의 비행이 확인될 때마다 소작인들은 지주에게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김종연네는 두 번째의 매매조건마저 송씨에게 무참하게 거절당했다.
"하! 나가 여자라고 느그 눈에 시퍼 뵈냐! 어림 반쪼가리도 웂은 맘뽀 묵지 말어. 나가! 고런 도적눔 심뽀 갖고는 다시 내 앞에 얼찐대덜 말어. 그눔에 근천시런 쌍판때기 뵈기도 싫은께!"
열이 받친 송씨가 카랑카랑하게 쏘아댄 말이었다. 그러나 김종연네는 그 모독적인 말을 하나도 고깝게 듣지를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반응이 나오리라고 다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까지는 시간을 끌어가는 한편으로 세 번째 조건을 보다 쉽게 관철시키기 위한 준비단계였던 것이다. 세 번째 조건이 타결되기만 한다면 십 년 후에는 그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내 논'이 되는 것이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 김종연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방 서방이 찾아들었다.
"워쩐 일이다요, 성님이 다 우리 집얼 오고 .어여 들오씨요."
"지내가든 질이 있어서 얼굴이나 보고 갈라고 그랬네."
방 서방이 웃음 띠며 예사롭게 말했다.
"나가 요새 이 시상에서 질로 부런 게 바로 성님이요. 우리가 쎅히는 속 안 쎅히고 산께 성님이야 을매나 좋겄소."
김종연은 마주앉자마자 이렇게 말하고는,
"그라고, 결국에 가서넌 논이 공짜로 생기는 것 아니겄소? 안 선상이 주장허는 것이 바로 무상몰수에 무상분밴께."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고것이야 더 두고 볼 일이고, 근디 말이시, 자네덜이 요새 벌이고 있는 일얼 나도 들었는디, 고것이 다 헛일 허는 것이등마."
"헛일이라!"
김종연이 놀라며 말허리를 잘랐다.
"잉, 나가 들은 말로는 말이시, 윤 부자네 논이 절반이 넘게 폴세 딴 사람 앞으로 이전돼부렀다는 것이여. 고것얼 알고나 그 일 허고 댕긴가?"
"누가, 누가 그럽디여?"
김종연이 눈을 부릅뜨며 말을 더듬었다.
"고걸알먼 멀 혀. 읍사무소 서류가 그렇다는디."
"요런 오살육시헐 년! 요런 가쟁이럴 찢어죽일 년!"
김종연은 부릅뜬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뽀득뽀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근디 말이시,그 꼴 헌 것이 윤 부자 집만이 아니고 여그 들몰에 논가진 최익달이, 윤삼걸이가 거지반 그 모냥이란 것이네. 그려서, 그 집덜 작인덜이 메칠 있다가 항군에 들고 일어날 판이라등마."
"워쩔라고라?"
"워쩌기넌, 서로 심 보태 가짜로 넘어간 소유권을 되잡게 허는 쌈얼 벌이잔 것이제."
"글타먼 우리라고 손끝 맺고 앉었을 수 있겄소. 심이야 보탤수록 씨지는 법잉께 항군에 나서야제라."
"자알들 생각혀서 허소. 공연시 몸만 상허고 안 될란지도 몰를 일잉께."
방서방은 슬그머니 꼬리를 사리는 척했다.
"성님이야 태평헌께 허는 소리고라, 우리는 시방 죽냐 사냐 허는 판이요. 요분에 아조 끝장얼 보고 말어야겄소!"
김종연이 다시 뽀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엇비슷한 시간에 최익달의 작인 집에서 노 서방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삼걸의 작인 집에서는 임 서방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고읍들을 관통하고 있는 신작로에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다. 그 행렬은 신작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등등한 기세로 읍내 안통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행렬은 남자만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수는 사백을 헤아렸다. 근 행렬은 홍태거리 변전소 앞에서 멈추었다.
"여그서부텀은 뜀스로 아까 우리가 연습헌 구호럴 목이야 터져라, 목이야 째져라 허고 소리 질르는 것이요. 허고, 군인이고 경찰이 우리 앞을 막을 것잉께 절대로 겁묵지 말고 읍사무소꺼지 가는것이요. 공포럴 쏴도 고것이야 공포니께 겁 묵을 것 웂고, 우리럴 해산 시킬라고 뎀베들먼 서로서로 폴도 끼고, 골마리도 잡고 혀서 죽으나 사나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야 쓰요. 우리가 요 일에 져뿔먼 우리넌 인자 새끼덜 델꼬 굶어죽는 일밖에 안 남었소. 고 기맥힌 사정을 모다가 심에 말뚝으로 박고, 우리 뜻이 풀릴 때꺼정 사흘이고 나흘이고 읍사무소 앞을 지키겄다고 작심덜 혀야 허요. 다들 그리 작심덜 되얐소?"
김종연의 흥분에 찬 말이었다.
"작심되얐소?"
"하먼이라!"
사람들이 팔을 치뻗어 올리며 합창했다.
"되얐소. 갑시다!"
열 명씩 줄을 맞춘 행렬이 뛰기 시작했다.
"우리 땅 내놔라!"
선창이 나왔다.
"우리 땅 내놔라!"
복창이 힘차게 터져 올랐다.
"악질 지주 처단하라!"
"악질지주 처단하라!"
땅을 차는 수많은 발소리와 함께 대열의 복창이 우렁찼다. 대열 뒤로는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땅 도적눔 잡아내라!"
"땅 도적눔 잡아내라!"
갑작스러운 함성에 놀란 사람들이 집집에서 몰려나왔다. 몇몇 아이들이 어느새 대열을 따라 뛰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은 횡계다리 목에서 제지를 당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세 겹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다들 해산하시오!"
강 상사가 대열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땅 내놔라!"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 김종연이 팔을 치뻗으며 구호를 선창했다.
"우리 땅 내놔라!"
복창하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컸다. 강 상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김종연에게로 다가섰다.
"이봐, 대표인 모양인데 좋은 말로 할 때 해산시켜."
"우리넌 대표가 따로 웂소. 우리가 다 대표제."
"글세, 잔소리 말고 해산해."
"못허겄소. 우리 땅 우리가 찾겄다는디 워째 군인이 간섭이오. 군인이먼 빨갱이나 잡으씨요."
"뭐야, 이 새끼! 너 지금 계엄 상태란 걸 몰라? 감빵에 처넣어야 정신 차리겠어!"
"워디 맘때로 혀봇씨요. 그까징 말이 무서움사 애시당초 나스지럴 안혔소. 우리야 우리헐 말 혀야 쓰겄응께 당신이야 당신 헐 일 시작 허씨요."
김종연은 까딱도 하지 않고 이렇게 내뱉고는 대열로 돌아서며,
"자아, 우리 앞으로 나갑시다. 악질 지주 처단하라!"
울부짖듯 선창했다.
"악질 지주 처단하라!"
복창이 터져 오르며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을 가로 잡은 삼십여 명의 군인들은 대열을 막아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뒤로 밀리고 있었다. “
땅 도적눔 잡아내라!"
"땅 도적눔 잡아내라!"
읍내안통이 시작되는 어귀라 그 동안에 구경나온 사람들이 떼를 짓고 있었다.
"우리 땅 내놔라!"
"우리 땅 내놔라!"
구경나온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구호를 복창하는 소리는 더 우렁찼다.
"김 상병, 전화로 병력지원 요청해."
강 상사가 뒤로 밀려나며 옆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악질 지주 처단하라!“
"악질 지주 처단하라!"
구경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수군거리기도 하고 혀를 길게 차기도 했다. 구호를 외치는 대열은 자꾸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후미열, 십 보 뒤로! 공포발사 준비!"
강 상사가 명령했다. 맨 뒷줄 병사들이 신속하게 뒤로 물러서며 총들을 어깨 위로 올렸다.
"발사!"
따당! 땅! 땅! 총소리가 진동했다. 대열이 주춤했다.
"땅 도적눔 잡아내라!"
김종연이 부르르 떨며 소리 질렀다.
"땅 도적눔 잡아내라!"
김종연의 외침처럼 복창하는 소리에도 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구경꾼들은 총소리에 놀라면서도 흩어지지 않았다. 대열은 공포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총소리도 잇달아 울려댔다. 구호와 총소리가 뒤섞이는 속에서 대열은 어느덧 극장 앞에 이르러있었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 뭘 하고 자빠졌는 거야. 청년단까지 병력 총동원해서 소화다리 앞 삼거리 전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해산시켜! 죽이지만 않으면 돼."
대열이 극장을 넘어섰다는 보고와 함께 두 번째의 병력지원 요청을 받은 백남식이 내린 명령이었다. 대열이 제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나타났다. 읍내의 모든 병력이 총동원된 것이고, 총을 들지 않은 청년단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즉각 해산하라.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킨다. 명령이다, 즉각 해산하라!"
토벌대장 임만수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외셨다.
"우리 땅 내놔라!"
김종연이 부르짖었다.
"우리 땅 내놔라!"
대열이 복창하며 앞으로 서너 발짝 움직였을 때였다.
"작저언 개시!"
임만수의 명령에 따라 대열을 에워싸듯 하고 있던 군인 · 경찰 · 청년단원들이 개머리판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대열 사이사이로 뛰어들었다. 아우성과 비명이 뒤엉키며 제재소 앞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구경꾼들이 골목으로 피해 달아나고, 제재소의 톱 돌아가던 요란스러운 소리가 뚝 멎었다. 불시의 공격인 데다가, 소작인들은 맨주먹이었으므로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개머리판에 찍히고,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짓밟히며 나 뒹굴어지고 거꾸러져 가는 소작인들의 모습을 구경꾼들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지숙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월 중순의 투명한 햇살 속에 핏방울들이 여기저기서 튕겨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