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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4

Bollnow 2024. 3. 12. 06:32

13.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

하대치는 마땅찮음이 가득 물린 입을 삐뚜름하게 해가지고 서운상이네 솟을 대문을 올려다보며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다.

"씨부랄놈, 이눔도 작인덜 등까죽 깨나 빗긴 놈이구만."

그는 투덜거리고 나서 카악 가래를 돋구어 대문을 향해 내뱉었다. 날아간 가래가 왼쪽 대문 중간쯤에 찰싹 붙었다. 그는 얼굴을 찡등그린 채 대문으로 다가가 거침없이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누구다요오! 대문 그리 쳐대먼 그짝 주먹 깨지제, 대문에 실금이나 갈 줄아요?"

앙칼진 여자의 소리가 날아왔다.

"워떤 년이 새살 한분 잘 까네.“

하대치는 욕질을 하며 대문 두들기기를 그쳤다.

"누구요?"

대문이 열림과 동시에 성질 돋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요?"

하대치는 큰 소리를 내며 얼굴을 안으로 쑥 디밀었다.

"워메 엄니!"

여자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워따 애 뱄으먼 애 떨어져뿔것소. 밤도 아닌 뻘건 대낮에 사람이 사람얼 보고 워찌 그리 놀래고 그러요?"

하대치는 헛 눈질을 하며 능청을 떨었다.

"워메 시상에나....... “

여자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고 숨길을 돌리는 듯하더니,

"체신이고 얼굴이고 하나또 보잘 것 웂이 생게갖고 멀 믿고 그리 난리 판굿이요, 판굿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 여자가 초면인 남자 인물평도 막 해불고, 영 똑똑해부네.“

하대치는 바람 새는 헛웃음을 흘리며,

믿기는 머럴 믿어, 서운상이가 없는 것을 믿제,’

속 대꾸를 하고는,

"좌우당간, 여그가 서운상이란 사람 집이 맞제라?"

표정을 싹 바꾸며 물었다.

"그런디, 워째 그요?"

여자는 하대치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곱지 않은 눈매에 업신여기는 빛이 역연했다.

"허먼, 머심 있소?“

"음마, 음마, 참말로 벨꼬라지 다 보겄네. 피 서방이란 이름이 요러타께 있는디, 첨 보는 사람이 누구보고 머심이여. 머심이."

여자가 금방 대들 것 같은 기세로 눈꼬리를 세웠다. 여자의 하는 품으로 보아 머슴의 아내라는 것을 하대치는 이내 눈치 챘다.

"나야 심바람얼 왔응께로 피서방인지 물 서방인지 알 것 웂고, 벌교. 경찰서서 왔는디, 피 서방 시방있소?"

"워메, 경찰서라?"

여자는 순간적으로 질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피 서방 있소, 웂소."

하대치는 여자를 더 몰아 붙었다.

"몸이 아파 자니께 쪼간 기둘리씨요. 얼렁 깨와 갖고 나오겄소."

태도가 돌변하는 여자는 쫓기듯이 돌아섰다. 하대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귀에 꽂았던 꽁초를 빼들었다. ㄴ자로 꺾인 뻣뻣한 느낌의 왼쪽 팔을 목에 늘인 멜빵에 건 남자가 여자와 함께 부산스럽게 나왔다.

"경찰서서 오셨다고라?“

남자는 고개를 꾸벅이며 물었다.

"그러요. 심바람얼 왔는디, 싸게 오랍디다."

"다 끝막음 난 줄로 알았등마 무신 일이까?"

피 서방은 불안한 낮 빛으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무신 일이랍디여?"

하고 물었다.

"나야 심바람만 허는 신센디 무신 일인지 워찌 알겄소. 급헌 일인께 나허고 항군에 싸게 오라고만 헙디다."

"오라면이야 가기넌 갈밖에 웂은 일인디,고 오살헐 강가눔 땀세 볶에 못살겄네. 그눔으 새끼가 워디로 내뺐는지, 눈앞에 있으먼 가쟁이럴 짝짝 찢어 났으먼 속이 씨언허겄다."

피 서방은 얼굴에 핏기를 올리며 혼잣말을 질겅거렸다.

", 워디 가요."

하대치는 뒤돌아서는 피 서방을 제지하듯 말했다.

"와따 사람 숨넘어가게 잡지지 마씨요. 질이 먼디 신이나 바까 신어야제, 요러고 가겄소."

하대치를 돌아다본 피 서방은 한쪽 다리를 들어 뻗치며 버럭 소리쳤다. 그 발에는 다 찌그러진 짚신이 걸려 있었다.

"멋 땀세 나헌테 성질내고 그러요?“

하대치는 눈을 부릅떠 맞 쏘아 보며,

"싸게 나오씨요, 싸게. 늦게 왔다고 졸갱이질 당혀도 내사 몰릉께."

은근히 겁을 먹였다. 하대치는 피 서방과 함께 벌교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 걸음이 무척 빨랐다.

"와따 찬찬히 잠갑씨다. 키는 쪼간허고 다리넌 짧은 양반이 심바람만 해묵고 살아서 그런가 워째 그리 발이 빨르다요."

자꾸 뒤 처지던 피 서방이 더 못 견디겠다는 듯 말했다. 하대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는다.

"벌교 워디 사는 누구요?"

말문을 틔워 하대치의 걸음을 늦추자는 속셈인지 피 서방이 말을 걸었다.

"경찰서꺼지만 가먼 됐제 고런 건알어서 무신 쓰잘 디가 있소."

하대치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 시상살이가 꼭 무신 쓰잘 디 있는 일만 허고 살아집디여? 그라고, 오다가다 옷끝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디 요리 항군에 행보럴 허게 됐음시로,사는 동네 알고, 이름 아는 것이 그리 쓰잘 디가 웂은 일이 겄소?“

여편네고 서방 눔이고 드럽게 새살은 좋네. 하대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쩌 들몰 사는 염대치요."

염상진의 성을 따고, 자기의 이름을 뒤바꾼, 하대치가 더러 써먹은 가명이었다.

"나넌 피보길이요."

피보길, 하대치는 이름을 되뇌어보며 픽 웃었다.

"워째 웃소?"

"성도 순 불쌍눔 성에다가 이름 할라 고것이 머시요."

"이름이 워째서라."

"피보길이가 머요, 퍼보길이가. 피보지라고 허는 기 훨썩 낫제."

"머시라고라, 피보지!"

피서방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워째, 나 말이 틀렸소?"

하대치는 느물거리며 웃었다.

"허면, 넘 존 이름 갖고 욕을 맹그는 짓거리가 잘허는 것이여!"

피 서방은 성한 오른팔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름이 하도 요상시런께 안 그렇소. 요러다가는 영축 웂이 늦어 참말로 졸갱이 치겠소. 미안시럽게 됐응께, 싸게 갑시다.“

하대치가 팔을 끌었고, 피 서방은 마지못한 듯 발을 떼어놓았다.

"당신이 무식혀서 그렇제, 보배 보자에 길헐 길자, 보배가 쌓이고 쌓여라 허는 뜻인디, 요리 존 이름이 머시가 요상혀, 요상허기는. 그라고 나도 한마디 허고 넘어가야 쓰겄는디, 염가는 참 양반성이고, 치대라는 이름도 참말로 쪼옿고 쪼오옿소. 염치가 너무 커서 넘 이름을 욕에다 갖다 붙이는 염치 웂은 짓 허는 갑소이."

"아이고메 유식허고 유식헌거. 하여튼지 보배가 쌯이고 쌯여 서운상이 맹키로 잘한 분 살아 봇씨요."

하대치는 말에다가 가시를 박고 있었다.

"걱정 마씨요. 나도 요분 참에 잡은 밑천으로 그리 살 날얼 기엉코 맹글고 말 팅께."

피서방의 말이 하대치의 뇌리에 부딪쳐오며 불똥을 튀겼다. 그래서 이눔이하대치의 의식에 명확히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하대치는 기분변화를 감추고 천연스럽게 물었다.

"무신 존 일이 있었는 갑제라?“

"아니요, 아녀. 존 일은 무신"

피 서방은 당황한 기색으로 얼버무렸다.

"아 그러덜 말고 말혀봇시요. 존 일이야 자꼬 말을 혀야 더 좋아지는 법잉깨요."

"어허, 아무 일도 아니라는디 왜 그래쌓소."

피 서방은 화를 벌컥 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알겄소, 알겄소. 가기나싸게 갑시다.“

하대치가 달래듯했다. 두 사람은 황톳길을 말없이 빠르게 걷고 있었다. 봄 하늘의 끝 둘레에 땅기운이 부유스름하게 서려 있었고, 봄새들의 지저귐이 어디에선가 청량하게 구르고는 했다. 고흥을 지키는 수문장이라 일컫는 삼각뿔로 외로운 듯 서 있는 첨산을 왼쪽으로 지났다 싶으면 뱀골재는 시작되었다. 하대치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피 서방은 그 뒤를 따라잡느라고 성한 팔 하나만을 휘둘러대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하대치는 피 서방과 보조를 맞추느라고 평소의 제 빠르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력은 혁명전사의 생명이고 무기다. 발끝으로 걸어라. 뒤꿈치가 닿기 전에 빨리 다른 발을 내밀어라. 걸음은 걸을수록 빨라진다. 걸어라, 계속 걸어라. 염상진이 되풀이하고 되풀이하는 말이었고, 하대치의 주력은 염상진과 맞먹는 입장이었다. 뱀골재 마루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하대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피 서방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멜빵에 걸쳐진 피 서방의 왼쪽 팔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으쩌요, 걸을만 허요?"

피 서방이 가까워지자 하대치가 입을 열었다.

"아이고메 죽겄는거."

피 서방은 숨을 헐떡거리며 이마에 내밴 땀을 훔치고는,

"나도 기운 에진간히 쓰고, 발 빠르단 말도 듣는 축인디, 당신 겉이 발 빠른사람, 나 보기럴 첨 보요. 뛰는 것인지 날르는 것인지, 산 사람덜 발 빠르단 말이야 들었는디, 산사람 아닌 당신은 그 빨른 발로 천상 발심바람 해묵고 살게 타고났소."

힘이 들어 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요 몬뎅이럴 올라챘으먼 벌교도 다 간 심잉께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림스로 다리 쉼얼헐께라?" 하대치가 인심 쓰듯이 입을 뗐다.

"아이고 지발 그럽시다. 아무리 다급혀도 사람이 살고 봐야재, 요폴이 천근만근이요."

피 서방이 왼쪽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엄살을 섞었다.

"그러기도 헐 것이요. 나도 땀이 곤곤하게 뱄는디 기왕 쉴라 먼쩌그 저 바웃뎅이 그늘로 갑시다."

하대치는 턱짓을 하며 발을 떼어놓았다. 그가 턱짓한 쪽은 큰길에서 서른 발짝 남짓 떨어진, 골짜기가 시작되는 지점이었고, 거기에는 큼직큼직한 바윗덩이들이서로 등을 기대고 있었다.

"다리가 심들어 쉴라는 것인디 멀라고 한발이라도 더 가고 그래쌓라. 나넌 그냥 여그서 쉴라요."

피 서방은 선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으려고 했다.

"피 서방, 그러덜 말고 날 따라 오씨요. 담배 꼬실리는 간격이 한참인디, 편허게 쉬고 담배 맛도 지대로 보자먼 자리가 좋아야 쓴다 그 말이요. 나 말 안 듣고 정 거그서 쉴라고 허먼 나 그냥 가뿔라요. 워쩌 겄소?"

"허기넌 손 요 모냥 해갖고는 나 혼자 담배도 못 몰 처지고, 그냥 가기 보담이야 쉬는 것이 낫겄제라아."

피 서방은 기운 빠진 소리를 늘이며 하대치 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바위 그늘을 골라 앉았다. 하대치는 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았다. 피 서방에게 먼저 건넸다. 또 하나를 말아 자신의 입에 물었다. 성냥 하나로 불을 나눠붙였다. 담배를 맛있게 빨아대고 있는 피보길의 옆모습을 하대치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긴장이 안개 걷히듯 풀려나감을 담배맛과 함께 느끼고 있었다. 하대치는 담배를 새로 돋은 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입에 대고 둥글게 겹쳐 모았다. "풀꾹, 풀꾹,풀꾹." 풀꾹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울렸다.

"먼 소리 여?"

피 서방이 놀란 듯 후딱 고개를 돌렸다.

"짬짬혀서 한분 혀봤소."

하대치가씨익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무신 새가 요리 가차이서 운다냐 싶어 놀랬소. 영축웂이 풀꾹새 소리요. 참말이제 별난 재주 다 지녔소이.“

"돈벌이도 안 되는 요런 것이 재주는 무신 재주요."

"돈벌이야 발심바람으로허고. 넘 못허는 그것이 을매나 용헌 재주요."

"싸게 담배나 태우씨요."

피 서방이 고개를 되돌리고 막 담배를 입에 물 때였다.

"하 동무, 무사허셨구만이라."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였다.

"머시소리 나는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피 서방은 말을 멈춘 상태의 모양 그대로 입을 반쯤 벌린 채 뻣뻣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개 겉은 자석, 나가 누군지 알겄어?“

피 서방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은 강동기였다.

"싸게 뜨세, 강동무."

하대치가 피 서방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끌며 일어섰다. 피서방은 마치 허깨비처럼 자기보다 키가 작은 하대치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골짜기로 좀 더 들어간 바위 뒤에 염상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댕게왔구만이라. 요눔이 그눔이구만요."

하대치가 피 서방을 염상진 앞에 세우며 보고했다.

"수고했소. 그놈을 무릎 꿇려 앉히시오."

염상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 서방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 들어. , 우리가 누군지 알겠지?"

바위에 걸터앉은 염상진이 찬바람 도는 엄한얼굴로 피 서방을 쏘아보며 물었다.

"야아"

"저 사람 알아보겠나?“

염상진이 강동기를 가리켰다.

"야아, 그때 그"

"왜 잡혀왔는지 알겠나.“

", 모르겄는디요."

"지금부터 묻는 말에 거짓말하지 말고 대답해라. 만약거짓말을 하면 죽는다."

"야아"

"그날 서운상이를 해치운 게 저 사람혼자였나, 그렇지 많으면 셋이 함께였나.“

"저 사람 호, 혼자였구만이라.“

"다른 두 사람은 뭘 했나."

"저 사람얼 말겠구만이라."

"그런데, 왜 경찰서에 가서는 세 사람이 합세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나?"

피 서방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하대치는, 바로 이 대목이라 생각했다.

"고개 들어. 죽고 싶으면 거짓말해도 좋다."

"아니구만요, 참말만 허겼어라. 긍께, 쥔아짐씨허고 쥔어런 동상허고 둘이서, 쥔어런 원수를 갚아야 쓴께자꼬.그리 말허라고 혀서"

피 서방은 또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장님, 아까 저눔이 설핏 말허는 것이, 한 밑천 챙기고 헌 짓이구만요."

하대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뭘 받아먹었는지 빨리 말해.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당장 죽어."

"야아, 첨에넌 그럴 맴이 하나또 웂었는디, 쌀 가마니럴 줄 팅께 그리 허라는 말얼 듣고 봉께 지맴이 요상허게 변혔구만요. 그런 그짓말 혀주고 쌀가마니 받을 수 있다면야나 폴 뿌라진 값도 쳐받어야 쓰겄다, 고것 둘을 합친 값얼 톡톡허니 쳐받어 머심살이럴 면허자, 그리 생각이 돌아간께 지 정신이 아니게 그짓말얼 하게 되얐구만요. 살려 주시씨요."

"못난 놈, 네놈이나 똑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네놈 혼자 잘 살겠다고 그 사람들을 해치다니. 너 같은 놈은 서운상이보다 더 나쁜, 생매장감이다.“

"아이코메, 살려주시씨요. 시키는 일이먼 멋이든지 다 헐 팅께 살려만주시씨요."

"그 말, 참말이냐!"

"하먼이라, 하먼이라."

"그래, 네놈이 살아날 길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앞으로 재판이 벌어지면 네놈이 또 증인으로 나가게 되니까, 그때 네 입으로 네놈이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것처럼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하먼이라."

"하먼이라, 하먼이라, 쉽게 대답하고 또 마음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염상진이 피 서방 눈앞으로 무언가를 불쑥 디밀었다. 권총이었다. 피 서방은 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또 거짓말을 하면 넌 우리 손에 죽는다. 약속해라."

", , 야 악속"

"똑똑하게 끝까지 말해!"

"야악속허겄구마안이라."

"됐어. 또 하나, 오늘 일을 죽을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걸 약속해라."

"야 악속허겄구마안이라."

"그 두 가지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넌 다시는 우리를 안 만나도 된다. 그러나 약속을 어기면 우리를 다시 만나야 하고, 넌 죽는다. 우리는 네가 하는 짓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안다는 걸 명심해라. 알겠나."

"야아"

"됐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라. 어서가."

",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피 서방의 목소리는 그대로 감격적인 울음이었다. 몸이 경직되었던 탓인지 목소리에 비해 그가 몸을 일으키는 동작은 더디고 힘들어 보였다. 그는 흔들리는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골짜기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것도 가엾은 인민의 한 모습이다염상진은 피 서방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자, 출발이다.“

피 서방의 모습이 반쯤 가려졌을 대 염상진이 돌아섰다. 하대치와 강동기는 몸을 추슬렸다. 율어까지의 산길은 꽤나 먼 거리였다.

 

'심재모 사령관님 각하' 전상서 수업 시 생각허고 또 생각허고 망설이고 또 망서리다가 종당에는 작심을 허기로 하였습니다. 타향사리 허심스로 불편허지 안는 거이 업것지만은 사소헌 손수건 하나라도 지대로 장만이 되었는가 허는 걱정시러움이 마음에 자꼬 걸려서입니다. 여자가 먼첨 나대는 것이 숭 잽히는 일이라는 거슬 다 암스로도 허는 일이니 숭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지가 누군지 알라고도 마시고 보내는 손수건만 자알 써주시면 지 마음은 족허고 족헙니다. 항시 몸조심 허십시요.

사령관님을 멀리서 등대불로삼고 있는 못난 여자가

심재모는 편지로 눈길을 보냈다가 손수건으로 눈길을 보냈다가 하고 있었다. 글씨는 그다지 잘 쓴 것이 아니었지만 또박또박 씌어진 한자, 한자가.얼마나 신경을 쓴 것인지 첫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창 유행하고 있는 가제 손수건에도 글씨에 못지않은 정성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물처럼 얼금얼금하게 짜인 가제 천의 올이 풀리지 않게 하려고 그 가장자리를 실로 감치게 마련인데, 기왕 감치면서 멋까지 내기 위한 이중효과로 색실을 쓰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들은 그 색실이 각기 다른 다섯 가지였다. 빨강 · 주황 · 노랑 · 초록 · 파랑두 색을 더 보태 사랑의 무지개를 만들지 그랬나, 이런 생각이 얼핏 떠오르자 심재모는 스스로에게 쑥스러워져 픽 웃었다. 편지와 손수건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심재모의 기분은 여러 가지로 묘했다. 그것이 여자로부터 생전 처음 받아보는 연애편지고 사랑의 선물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그 동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한 여자의 주목을 받아왔다는 점이 그랬고, 자신이 어느 여자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그랬고, 그런 사실들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음이 그랬고, 결혼을 재촉하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을 때는 무관심했던 마음이 낯모르는 여자의 편지를 받게 되자 자신이 결혼적령기를 넘기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 그랬고, 자신을 위해 색색의 수실을 써서 손수건을 만든 여자가 어떤 여자일까 하는 관심이 슬그머니 동하는 것이 그랬다. 심재모는 다시 편지로 눈길을 보냈다. '심재모 사령관님 각하 전상서' 그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각하'라는 존칭이 웃음을 자아냈다. '사모하는 심재모씨'로 쓰고 싶은 마음을 참아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업 시 생각허고 또 생각허고 망서리고 또 망서리다가손수건을 만들면서, 만들어놓고도 보낼까 말까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여자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먼첨 나대는 것이 숭 잽히는 일이라는 거슬심재모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을. 자신이 정숙하지 못하고 얌전하지 못한 여자로 오해받을까봐 염려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가 누군지 알라고도마시고심재모는 눈을 내려 감았다. 몇 번을 읽어도 이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감추려는 여자가 안쓰럽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심재모 자신으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사령관님을 멀리서 등대불로 삼고 있는 못난여자가' 심재모는 다시 빙긋이 웃었다. 소설 같은 데서 본을 따 멋을 부리려 한 것이 웃음을 짓게 했다. 한지에 함께 싸인 편지와 손수건을 가져온 것은 사환아이였다.

"누가 요걸 전해드리라고 허든디요."

"그게 뭐지?"

"몰르겄는디요."

"누구였는데?"

"워떤 아이요."

'심재모는 사환아이를 부를까 말까 망설였다. 사환아이를 불러 그 아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고도 싶었고, 사환아이가 모르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결국 사환아이를 부르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여자의 마음씀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몰라도 굳이 알아내려고 하기가 싫기도 해서였다. 심재모는 편지를 본래대로 접어 손수건과 함께 한지에 쌌다. 그것을 책상 오른쪽 맨 아래 서랍에다 넣었다. 그러면서, 아무튼 앞으로는 읍내를 돌아다니며 전처럼 마음에 거리낌이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연정을 가진 여자의 눈길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나쁜 일은 아닐지 모르나 신경이 쓰이는 일임은 분명했다.

김범우는 서울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무심코, 오늘이삼월 십육일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학기는 유월에 가서야 바뀌지만, '공부에 임하는 태세를 갖추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옛 어른의 가르침에, 공부는 빠르고 늦음이 없다고 했니라. 가서 공부에만 충실해라. 속이 차야 볼 것도 바르게 보는 눈이 생기고, 듣는 것도 바르게 듣는 귀가 생기는 법이다. 그라고니는 이 집안의장자 노릇을 해얄 사람잉께.“

아버지의 말이었다. 아버지는 마침내 형이 이 세상 사람이아니라고 체념하고 있는 당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낸 것이다. 그 대목에서 말을 두 번이나 멈춘 것은 당신의 괴로운 심중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어머니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버지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아내처럼 심하지만 않았을 뿐 어머니도 자신이 때늦은 공부를 하러 집을 떠난다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놓고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는 각기 그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다. 아버지의 뜻은 "가서 공부에만 충실해라" 하는 말에 함축적으로 들어 있었다. 중단한 공부를 시킬 겸해서 불안정한 정치상황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자식을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버지의 그런 이중적인 의도에 비해 반대 입장에 선 어머니나 아내의 뜻은 순진하도록 단순했다. 어머니는 큰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저에 작은아들이나마 옆에 두고 싶어 하는 모성이었고, 아내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꺼리는 여자의 마음이었다. 누구의 뜻이 어쨌든 간에 막상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서울행을 작심한 것은 정작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계획이 있어서였다. 공부를 마저 마치겠다는 점은 같았지만, 혼란한 정치상황으로부터 격리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또 하나의 현장을 찾아가는 기회로 삼기로 한 것이다. 학병에 끌려가면서 중단된 공부를 다시 이으려고 하는 사이에는 흘러간 오 년 세월이 들어앉아 있음을 김범우는 새삼스럽게 상기하고 있었다. 그 오 년, 결코 허송했거나 뜻 없이 보낸 세월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공부는 중단되었을망정 그 세월은 많은 것을 겪게 했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으며,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공부가 가르치거나 일깨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범우는 벌교를 떠나오기 전에 서민영을 만났을 뿐이다.

"공부가 끝이 있겠나만 정규과정을 끝내기로 한 건 잘한 일인 것 같군 사람이 공부를 하는 건 사람으로서 뜻을 바르게 세우고자 함일 것이네. 자네 전공이 역사학인 만큼 그 점 특히 명심하시게.“

서민영 선생다운 다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신설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손승호를 생각하며 물었다. "교육법이 아직 통과되지 않아 금년에는 어려운 모양이네. 벌써 삼월 아닌가. 교육법보다 더 시급한 농지개혁법도 통과가 안 되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지."

"농지개혁법은 곧 통과가 될 거라는 소식 아닙니까?“

"그게 현 정권 유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문제이니 도리가 없는 일이지. 허나, 그 실시는 진작 늦어진 거니까 이제 와서 시기는 문제가 안 되는 것이고, 문제는 방법인데, 그것 때문에 통과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야 뻔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농지개혁을 하나마나로 만들 것이네. 농민들의 호응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평과 반감만 사게 될 테니까."

현시점에서 분단 상황을 완화시키는 것은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일이고,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은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일이고,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법을 택하는 일이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지주계층의 와해와 함께 사회경제의 새 구조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사회경제의 새 구조가 탄생되는 것은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동시에 이룩하는 일이고,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이룩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의사로 좌우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되는 것은 민족통일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서민영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이게 다 잠꼬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으니 비애가 아니겠나. 현 상황으로선 내가 한 말의 반대방향으로 내닫고 있으니 암담할 뿐이네.“

서민영 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분단 상황의 경직화를 심히 우려했다. 현 정권의 주도세력인친일 지주계층과 그 하수인격인 민족반역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찰과군대의 기존조직에다가, 오십만을 넘는 월남자 태반이 그 조직에 분산 가세했고,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의 원한에 찬 생존욕구가 팽배해 있는 상태에 이백만을 넘는 귀환동포가 거기에 흡수 가세한 점을 지적했다.

"귀환동포라는 사람들은 그 의식이나 식견이 토착농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네. 그들도 물론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대체로 농민들이었는데, 고향을 떠나서는 여러 가지 직종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네. 도시 막노동자, 공장이나 광산 · 부두 등의 하급노동자로 말이네 물론 계속 농민생활을 한 사람들도 많은데, 문제는 그들의 생활환경이 우리나라와는 판이했다는 점이지. 우리 땅이 폐쇄적이고 통제적이었던 데 반해 그 사람들이 산 일본이나 간도 · 만주 등지는 훨씬 개방적이고 자율적이었던 게야. 그들은 직종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의식이나 식견이 달라지게 되었네. 경제에 대한인식은 물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사상적 영향도 많이 받게 된 거지. 그런 그들이 막상 고향에 돌아오니 어찌 되었지? 먹고 살 땅이 있나, 잠을 잘 집이 있나. 식이나 식견이 이미 달라져 있는 그들은 타관생활보다 더 나쁜 생계위협을 당하게 된 게 아닌가. 그들이 자구수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나. 월남한 숫자에 못지않게 월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이고, 회정리 이구처럼 그들 중에 좌익 가담자가 월등히 많은 것 등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이 대립적 갈등을 일거에 해소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내가 보기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 단행밖에는 없네. 보게, 지금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농토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어떤 주의든 지지하고 따르게 되어 있는 상황이네. 이건 바로 갑오란 때와 똑같은 상황이란 말일세.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이 갑오란을 일으켰느냐, 농민들이 그 종교사상을 행동의 계기로 삼았느냐가 문제인 것이네. 다시 말해, 어떤 사상이 다수의 사람을 의식화로 무장을 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처한 생활의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사상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 점일세. 그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호작용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지만, 갑오년 농민항쟁의 경우에 있어서나 지금 우리의 상황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가 분명하네. 그 근거는 중국을 보면 확실해지네.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지난 이월 북경으로 옮기지 않았나. 그건 중국대륙의 공산화 성공을 뜻하는 것인데, 그게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능력이냐, 아니면 봉건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절대다수 민중들의 수용이냐, 하는 점인데, 그건 먼저 후자의 작용인 것이네."

이야기 중에 김범우는 손승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을 할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에 올리지 않고 서민영 선생 앞을 물러 나왔다. 손승호의 괴로움은 손승호의 것이지 서민영 선생이 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손승호를 다시 만나지 않고 벌교를 뜬것도 그 까닭이었다. 학교를 그만두려고 할 정도인 손승호의 고민에 대한 대안은 그 누구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손승호의 고민은 그야말로 철저한 개인적 문제였다. 왜냐하면 손승호는 김범우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범우는 서민영 선생 곁을 어느 기간이나마 떠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비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홉 시간 남짓 걸려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밤기차는 어둠 속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은 잘 가고 있는 것일까김범우는 창밖의 진한 어둠에 눈길을 던진 채 망연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 길이 여행일 수 있다면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이 어이없어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이다. 여행은 새로운 체험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다.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영혼을 살찌운다. 여행을 이런 식으로 호들갑스럽게 미화하고 과장한 글들에 김범우는, 아무런 실감도 동감도 느끼지 못했다. 여행이 새로운 곳, 미지의 세계를 보고 느끼는 것이므로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단연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지구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았으니 말이다. 그 교통수단도 다양해서 배와 비행기까지 다 탄 것이다. 그런데도 여행에 대한 보드라운 감상이나 낭만적 정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아마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적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동지나해를 횡단해 버마에 이른 뱃길, 버마에서 이집트를 경유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의 비행기길,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거기서 다시 인천까지 태평양을 횡단한 뱃길, 이렇게 따지고 보면 자신은 정작 가장 손쉬운 기차를 제일 짧게 탄 셈이었다. 중학 오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통학한 거리를 다 합친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차와 기찻길은 일본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올리던 자랑거리였다.

"우리는 미개한 조선 전역에 기찻길을 놓아주었다. 그 편리한 시설로 걸어 다니는 미개생활을 면하게 하고, 타고 다니는 문화생활을 하게 해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조센징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대대로 감사해야 한다.“

일본 놈들이 뻔뻔스럽고도 자신만만하게 지껄여댄 소리였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서구라파 제국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선망과 동시에 열등감으로 바라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산업혁명의 성취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이루어진 과학문명의 발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차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검은 철마, 그 신기한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끈질긴 관심은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만들어내게까지 되었다. 그들은 그 신기한 기계를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영토에 미친 듯이 설치해나가기 시작했다. 본토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대륙에까지 일본인이 가설한 철도는 뻗어나갔다. 결국, 서구라파 제국이 산업혁명의결과로서 발전시켜온 기차와 철도를 일본인들은 일차적으로 효과적인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이차적으로 대륙침략의 무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였고, 이차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그 순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기차는 중국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전투 무기화 하게 되었다. 일본은 본래 섬나라이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 수많은 항구를 개발해 해상교통을 극대화시켰지만, 만약철 도시설이 없었거나 빈약했더라면 조선의 수탈을 그렇게 잔인할 만큼 철저하고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 것인가는 결코 상상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중국대륙 깊숙이 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시설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느 외국학자의 별로 새로울 것 없는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사 년이 다 되어 가는 최근가지도 일본 놈들이 강변하고 주입시킨 대로 철도시설을 '일본의 공이고 은혜'라고 주절거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김범우는 암울해지고는 했다. 그는 얼핏 스쳐간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기차가 멈추려는지 속력이 아주 느려져있었다. 그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저언주, 저언주, 여기는 전주역입니다. 내리실"

아아, 전주! 김범우는 감정의 동요를 느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전주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강한 감회가 가슴을 흔든 것은 그 땅에 어떤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박두병 때문이었다. 속이 깊고 농담을 즐길 줄 알았던 박두병, 그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한 고생, 그와 함께 한 고뇌, 그와 함께 한 결의, 그와 함께 한 체념, 그런 것들이 감정적인 면에서나 이성적인 면에서나 교직을 이를 수 있었던 그와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고, 겸손한 양보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 이상을 넘어선 상태의 어떤 결속감이 발휘해낸 힘이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불현 듯 떠오른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떠밀며 그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이성적 그리움처럼 일어났다. 그를 찾아보고 하루쯤 묵어가는 게 어떨가. 김범우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때 그를 제지하듯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두 차례의 편지가 오가고, 자신이 세 번째로 소식을 보냈을 때 그에게서는 답신이 오지 않았다. 배달 사고인가 해서 네 번째의 편지를 보냈지만 역시 그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박두병과는 그것으로 연락이 두 절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그가 전주에 살고 있으면서 말 한 마디 없이 소식을 끊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이 막연함이 그를 더 보고 싶게 했다.

김범우는 느릿느릿 걸어 기차를 내려섰다. 전주의 하늘은 어둠으로 타고, 어둠 그 깊고 먼 곳에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김범우는 깊게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그 하늘을 향해 자꾸 내뿜었다.

"서울행 추울바알, 서울행

기차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김범우는 같은 생각을 다시 하며 기차에 올랐다. 박두병은 법대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 나온 처지였다. 그는 보통 키에 비해 체력이 강했고, 평범한 얼굴에 코가 유난히 뭉툭하게 커서 그나마. 개성을 유지하는 얼굴이었다. 약간 부족한 듯한 생김을 유감없이 보충하고 있는 것이 그의 목소리였다. 굵으면서도 맑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에는 언제나 정감이 흐르고 있었고, 그 목소리로 부르는 틀이 잡힌 판소리는 그의 품격을 다시 느끼게 했다. 박두병의 소리에 정신없이 반한 것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도라지였다. 위법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두 사람을 지프차의 뒷자리에 태우고 해변으로 빠져나가고는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으레 소리를 청했고, 박두병은 수영을 즐기게 해준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태평양의 동쪽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서 소리를 뽑아댔다. 노래라고는 아리랑도 제대로 못 부르는 김범우 자신은 언제나 미안한 청중일 뿐이었다. 훈련 사이의 휴식시간에 농담들을 하다가 유태인 교관이 박두병의 코를 가리키며 '돼지코'라고 놀려대며, 별명을 삼자고 했다. 박두병은 코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며 능청맞게 응수했다.

"그걸 별명으로 부른다면 나는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다. 너희 서양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동양에서는 코 큰 남자를 제일로 친다. 왜냐하면 코가 크면 남자의 상징인 그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한 속설이나 미신이 아니고 바로 내 물건이 그것을 증명한다. 내 물건은 보통사람의 두 배는 큰데, 네 눈으로 확인해볼래?"

박두병은 벌떡 일어나 혁대를 풀었고 유태인 교관은 갓 댐 어쩌고 소리치며 혼비백산 했던 것이다. 배짱이나 농담이 언제나 그런 식인 박두병은 이미 아내와 자식을 거느린 몸이었다. 완고한 아버지의 주장에 따라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가를 간 것이다. 박두병은 그런 몸으로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OSS에 자원한 것이었다. 그 점이 박두병을 더욱 큰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식자가 좀 들었다는 사람들이 농민들을 무조건 무식하다거나 무지한 집단으로 몰아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에 대해 무엇보다도 분개했다.

"그건 글줄이나 읽었다는 자들이 저지르는 가당찮은 착각이고 자만이고 오해야. 인생살이 전체를 놓고 생각해볼 때 유무식의 차이란 글줄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가 아닐 것이네. 그건 인생살이의 진실이나 고통을 얼마나 아느냐, 모르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네. 농민들만큼 인생살이의 쓰라림과 아픔과 슬픔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 또 누가 있나. 그리고 세상의 잘못 짜여진 구조에 대해서, 그것이 배웠다는 자들이 꾸미는 집단 횡포라는 것에 대해서, 배운 자들의 교활과 위선과 자만에 대해서 그들은 다 느끼고 판단하는 이지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은 그들이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바보나 천치들인 것으로 취급하려 들어. 그거야말로 큰코 다칠 일이지. 배웠다는 자들이 번드르르한 말로, 그럴싸한 이론이라는 것으로 발라 맞추는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치고, 몸으로 깨닫고, 몸으로 말하네. 소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말을 배웠다는 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야. 농민들은 인생살이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세상판세 돌아가는 잘잘못이 무엇인지 환히들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식자라는 것들처럼 소리 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말을 해도 그들끼리만 낮게 말하고, 그들끼리만 통하는 몸으로 하는 말을 해. 배웠다는 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지 동냥 주는 식으로 한다는 짓이 '농촌계몽'이야. 그거야말로 식자층이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무시하고 멸시한 결과로 나타난 대표적인 행위지. 도대체 삶의 진정한 아픔이나 괴로움을 모르는 자들이 그것을 뼈저리게 체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엇을 계몽한다는 것인가. 글자 몇 자 가르치고, 허황한 소리나 지껄이다 마는 것이 계몽인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계몽을 고마워하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네. 고달픈 삶을 온몸으로 겪고, 온몸으로 부대끼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따위 어설픈 짓들 하다가 언젠가는 크게 당하게 될 거네. 그런데 말이야, 농민들이 온몸으로 하는 말, 그것을 딱 한마디로 줄일 수 있는 말이 없을까? 나도 생각해볼 테니, 자네도 한번 생각해보게."

김범우는 하룻밤을 생각한 글에 두 개의 단어를 조립해낼 수 있었다.

"이봐, 전신언어나 생체언어가 어떤가?"

"전신언어, 생체언어, 생체언어가 힘도 느껴지고 실감이 나서 더 좋은데. 그래, 생체언어, 그거 좋은 말이야. 농민은 생체언어로 사회에 발언하고, 생체언어로 삶의 진실을 표현하며, 생체언어로 역사에 참여한다. 됐어, 됐어, 아주 잘 어울리는군.“

박두병은 소년처럼 기뻐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김범우는 이 생각을 되풀이하다가 피곤이 변색해 가는 흐릿흐릿한 잠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심재모가 여자를 율어로 들여보낸 것을 문젯거리로 제일 먼저 포착한 것은 토벌대장 임만수였다. 심재모는 그 일을 공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밀에 부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임만수는 그 일을 금방 알게 되었고, 심재모에게 줄곧 앙심을 품어오고 있던 그에게 그건 일대 사건으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큰 먹이가 걸려들었음을 직감했고, 가슴이 벌떡거리는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그렇게도 무참히 병신을 만들더니내가그것을 한시라도 잊은 줄 아느냐. 네놈은 공포를 쏴질렀다만 나는 네놈 심장을 정통으로 쏘아 맞히고 말거다.’

임만수는 전신을 떨어댔다.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힘이 팽팽하게 뻗쳐올랐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실수가 없도록, 일거에 공격을 가해 쓰러뜨릴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이 죄목이야말로 결정타가 아닐 수 없었다. , 이런 기막힌 기회가 오다니, 이런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된다. 임만수는 차츰 침착을 회복해갔다. 놈이 한 짓을 샅샅이 적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한 곳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보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커지고, 묵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나 혼자 이름으로 해야 하나? 혼자 하면힘도 약하고, 결국 내가 한 일인 게 밝혀지지? 그 정도로 사형을 당할 리는 없을 거고, 심재모 그놈이 풀려나면 또 보복을 하려 들겠지? 안되지,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되지. 놈이 꼼짝달싹 못하도록 큰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내 이름을 감출 수 있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때 마침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염상구였다. 그도 심재모에게 감정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지눔이 계엄사령관이먼 다여? 나가 한분 종그기 시작허먼 지눔 신세가 바가지 깨지대끼 헐 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써."

지난번에 염상구는 이빨을 갈아붙였던 것이다. 임만수는 지체없이 염상구 찾아 나섰다. 경찰서를 거쳐 청년단까지 갔지만 염상구 는없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임만수는 짜증을 부리며 다시 차부 쪽으로 내려왔다. 다방에서 아가씨를 희롱하고 있는 염상구를 찾아냈다.

"대낮부터 이게 뭣하는 짓이오, 점잖찮게."

임만수는 그를 찾아다니느라고 괴어오른 짜증을 그대로 토해냈다.

"허어 참, 장닭이 밤낮개림스로 일 헙디여? 몰르먼 말이나 마씨요. ."

염상구는 태연하게 대꾸했고,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며 달아났다.

"아니 임대장, 워째 넘 청춘사업에 재 뿌리고 그러요? 저것이 새로 온 가씨네라 입맛 다사고 있는 참인디."

"청춘사업이고 입맛이고, 사건이 생겼소.“

"사건?"

염상구는 금방 반응을 나타냈다.

"혹시, 심재모가 어떤 여자를 율어로 들여보낸 사건을 '알고' 있소?"

"알제라."

의아한 얼굴을 한 염상구는,

"그까징 거이 무신 사건이라고 그래쌓소. 나넌 나가 요리 태평치고 앉었는 새에 강동기라도 잡아뿐 줄 알었소."

그는 맥 빠진다는 듯 의자에 몸을 부려버렸다.

"염 부장!“

임만수는 염상구 앞으로 얼굴을 내밀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것이,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의 소행이라고 생각지 않소?"

낮으면서도 질긴 목소리로 말했다. 염상구의얼굴은 긴장되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맞소!“

소리 지르며 탁자를 내리쳤다. 임만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무식한 놈이 눈치 하나는 여우새끼처럼 빨라,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에 물었다.

"글먼 고것을 워째야쓰겄소?"

염상구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염부장이 말한 대로 이번 기회에 그놈 신세를 바가지 깨버리듯 하지 않겠소?"

임만수는 벌써부터 뒤로 물러서며 염상구의 옆구리를 긁어대고 있었다.

"하먼이라, 종그든 기회가 왔는디, 나가 당헌 만치 짭고 맵게 복수럴 혀야지라. 근디, 워째 임 대장은 넘 일 말허대끼 허고 앉었소?“

임만수는 그만 속이 뜨끔해졌다.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염 부장을 찾아온 게 아니겠소. 그런데 말이 오, 심가 그놈이 꼼짝을 못하게 치려면 이쪽 힘이 클수록 좋고, 그놈 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감쪽같이 해치워야 하는데, 그게 문제란 말이오."

"걱정도 팔자요. 그눔 헌 짓거리에, 죄목할라 그리 근사허고 멋 떨어진 마당에 그눔 손모가지에 쇠고랑 채우기는 목구녕에 넴긴 괴기요. 들어 봇씨요."

염상구는 입을 야무지게 훔치고 다시 자리를 고쳐 앉더니,

"심재모 그눔이 지 혼자 잘난 칙험시로 꺼떡기레봤자 폴세부텀 지주덜헌테 미움을 살 대로 다 사고 있소. 임 대장도 다 알디끼. 지주덜 편에 거마리 붙디끼 찰싹 붙어야지 신간 편코, 지 명도 질 것인디, 요것이 멀 믿고 사사건건 지주덜이 싫어 허는 쪽으로만 일을 혀왔다 이것이요. 긍께로 지주덜이 그눔얼 바까치고 잡아허는 속맘이야 우리허고 피차 일반일 것이요. 요분 일얼 지주덜이 해치우게 허먼 워쩌겼소."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렇지, 좌익척결위원회가 있었지. 임만수는 그 단체가 동원되면 힘이 커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염부장은 좌익척결위원회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은 심가가 모르게 깜쪽같이 해치워야 할 판인데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다 보면 이야기가 새나가 심가가 미리 알아버릴 염려가 있단 말요."

"구데기 무서바 장 못담겄소. 사람이 많다고 해야 위원장 · 부위원장 · 총무 세 사람이고, 그사람덜이 세 살 묵은 아그덜도 아니겄고, 다 즈그덜 눈구녕에 백힌 까시 빼는 일인더 즈그 발등 찍는 해로운 입얼 워째 놀리겄소."

염상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했다.

"그럼, 어쩌면 좋겠소?"

"워쩌긴 워째라. 고름이살 안 되는 법잉께 당장 유주상이럴 찾아 가야제라, 갑시다, 얼렁.“

염상구가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며 일어섰다. 두 사람은 기세 좋게 금융조합을 향해 발을 맞추었다. 거만스러운 앉음새로 이야기를 다 듣고난 유주상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좌시할 수 없는 중대사요. 빨갱이를 소탕해서 멸공통일을 이룩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띤 자가 빨갱이를 소탕할 생각은 않고, 빨갱이와 내통해 빨갱이의 새끼를 낳게 하다니, 이건 엄연한 용공 · 이적행위요. 당장 좌익척결위원회의 이름으로 그자를 상부에 보고해서 처단해야 할 일이오. 오늘 저녁에 위원장님과 부위원장님을 모시고 결정을 내려야겠소. 남원장에서 일곱시에 회의를 겸한 저녁을 먹을 테니 두 분도 참석해주시오. 그리고 두 분께 당부할 말이 있소. 이 사실을 절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것이오."

"하먼이라.“

염상구가 머리를 조아렸고,

"그것에 대해선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염려했던 문젭니다.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 비밀 유지가 어려워지는 법이니까요.“

임만수는 유주상의 지시하는 것 같은 꼴이 아니꼬워 말을 되받아 넘겼다.

", 우리 쪽은 추호도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그럼, 이따가 다시 만나도록 하죠."

두 사람은 조합장실을 나왔다.

"염 부장, 나 염 부장 다시 봐야겠소."

임만수가 금융조합을 나오자마자 경멸적인 투로 말했다.

"먼 소리다요?"

염상구는 짚이는 것이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뭔소리긴, 언제부터 유주상이한테 그렇게 꼼짝을 못하게 됐소? 염부장, 배짱도 있고 오기도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영 뼈도 없고 배알도 없는 사람이구만. 자기 자리 뺏어 앉은 사람 앞에서 굽신거리기나 하고."

임만수의 말은 신랄했다. 염상구는 속으로 감추고 있는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임만수에게 노골적인 무시를 당하게 되자 그만 성질이 치솟았다. 속사정은 속사정이고 임만수에게 그런 꼴을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임 대장님, 사람 드런 입장 몰르고 말 막 해대지 마씨요. 나가 그러고 잡아 그러는지, 헐수할수 웂응께 그러는지 한분이락도 생각혀보고 허는 소리요, 시방? 청년단도 조직잉께 분명히 질서가 있어야 헌다고, 심가고 서장이고 유가헌테 무조건 복종해야 헌다고 왈김스로, 안 그러먼감찰부장꺼지 띠뿐다고 허는디, 나가 워째야 쓰겼소. 아니, 임대장이 나 입장이라먼 워쩌겄소. 배짱으로 허고 주먹으로 헌다먼야 나 이 시상에무서운 눔 하나또 웂소. 임 대장은 넘 속도 몰르고 넘 아픈디 푹푹 쑤시지마씨요. 이해 헐만헌 사람이 그러먼 더 섭헌께요. 나가 임 대장보고, 워째임 대장은 심재모헌테 꼼짝을 못허냐고 허먼 임 대장 속언 좋겄소?“

염상구는 마침내 임만수의 약점을 덜퍽 물고 들었다.

"아냐, 아냐, 내가 그냥 한 소리요. 미안하게 됐구, 그만둡시다."

임만수는 손까지 저으며 말을 피했다. 염상구는 말은 그렇게 얼렁뚱땅 해치웠지만 속이 켕기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유주상이한테 뒷다리가 잡혀있었다, 염상구를 마음대로 다스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자기편은 만들어야했던 유주상은 그를 불러 돈 다발을 내밀며 회유했고, 어차피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자리 내놓은 것인데 의외의 돈이 생기자 염상구는 덥석 받아 챙기고 말았던 것이다. 최익달과 윤삼걸이 추가된 그들 다섯은 남원장 별실에 모여 앉았다. 술이 곁들여진 저녁 밥상이었는데도 시중드는 여자는 없었다. 유주상이 최익달과 윤삼걸을 상대로 일의 전말을 이야기해나갔다.

"좌익척결위원회의 이름으로 심을 고발조처하자는 건의인데 두 분, 위원장님과 부위원장님의 고견으로 결정을 내려야만 될 것 같습니다.“

유주상은 윤기 도는 눈망울을 굴리며 달변을 끝냈다.

"고 싸가지웂는 자석이 인자 그물에 걸렸구만!"

최익달은 이렇게 불쑥 내뱉으며 책상다리를 고치더니,

"그눔언 용공 · 이적행위럴 헌 것이 아니라 바로 빨갱이질얼 헌 것이고, 빨갱이허고 내통헌 좌익분자가 아니라 바로 시뻘건 빨갱이여. 그렇지 않음사 그 자리 차고 앉어서 고런 짓거리럴 워찌 허겄어. 그눔이 그 짓가리 허먼 글안해도 삘건 물이 불그딕디그리허게 든 저 아랫 것들이 워쩌고 나대겄냐. 그것이여 안뒤여, 고런 눔헌테 우리 벌교럴맽겨서는 안뒤여. 더 말허고 자시고 헐 것 웂어. 당장 상부에 보고해서 그눔얼 처치혀. 그눔얼 갈치속젓 담대끼 짭고 짜운 맛 뵈서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허게 해야 써.“

그 말은 흥분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열분백분 맞는 말이요. 그눔얼 요분 참에 단단허게 몰아쳐서 비얌 껍디기 빗기대끼 군복을 홀랑 빗게서 다시는 못 걸치게 맹글어야 허요. 그 상녀러 자석이 예시당초부텀 허는 뽄새가 삐까닥허고 야리꾸리혔는디, 고런 군인 눔덜이 많앴다가는 우리 겉은 유지덜 볼장 다보고, 이 나라도 결국빨갱이 손에 엎어지고 말 것잉께 고런 종자덜언 뿌랑구부텀 쏙쏙 뽐아뿌러야 허요. 지금 시상이 워떤 시상인디 빨갱이 써럴 받게 혀? 화아, 그눔이 뒤질라고 환장얼 혀도 열 분 혔지. 요런 일얼 알고도 그런 눔얼 조처허지 않으먼 우리도 빨갱이고, 대역죄인 되는 것이요. 당장 일을 벌레야 쓰요."

윤삼걸도 최익달 못지않게 흥분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결정이 내렸으니 좌익척결위원회 이름으로 곧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유주상이 결론 짓듯 말했다.

"가만있어 보씨요. 아까 말허기럴 심이 클수록 좋다고 혔는디, 저 토벌대 이름도 항꾼에 넣고, 유 조합장이름으로 청년단도 넣고 해서 도장 쾅광 눌러야 더 심이 씨질 것 아니겄소."

윤삼걸의 지적이었다.

"그거 부위원장 말씸이 맞소. 이름이야 많이 붙을수록 심지고 좋은께로."

최익달의 맞장구였다.

"그것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주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느닷없는 결정에 임만수는 정신이 얼떨떨한 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짜아, 큰일을 결정했으니 일자 술 한 잔썩 돌립시다."

위원장 최익달이 술 주전자를 들었다.

"다시 당부합니다만, 일이 성사될 때까지 절대 비밀이 지켜져야 합니다.“

유주상이 좌중을 훑으며 못을 박았다.

"하먼, 대사에는 함봉이 질잉께로!“

최익달이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좌중을 훑었다.

에라, 될 대로 돼라. 술이나 마시자.’

임만수는 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술잔을 들었다.

 

 

14. 물과 기름

남원장 별실에는 .기생집에 어울리지 않는 애송이 손님 다섯이 모여 앉아 있었다. 다섯 중에 넷은 밤송이머리라서 아무리 사복을 입었다 고는 하지만 그 앳된 얼굴들과 함께 학생이라는 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은 그들은 하나같이 어색스러운 태도와 불안정한얼굴로 제각기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다섯 중에 제일 느긋하고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유일하게 머리가 긴 윤태주였다. 그는 등을 벽에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자세로 담배를 뻐끔거렸다.

"야이 요런 촌놈들아, 원제까지 그 모냥들로 얼어붙어 앉았을래? 느그 시방 벌스냐, 도 딲냐? 여그넌 학교 훈육실도 아니고 절간도 아니여. 기분 좋게 술 마시고 재미지게 노는 술집이여, 술집. 아무리 떠들고 멋대로 해도 간섭헐 사람 하나또 웂응께 기분내, 기분."

몸을 일으킨 윤태주는 담뱃불을 끄며 방안의 기분을 돋을 양으로 목청을 높였다.

"치이, 성님이사 태평무사암시랑 않겄지만 우리 겉은 빡빡대가리가 요런 요상시런 디 들랑이다가 잽히는 날에는 워찌 되는지 몰라서 허는 소리다요?"

현오봉은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흘기며 양쪽 볼에 불만을 물었다.

"요런 빙신아, 니허고 성일이럴 퇴학 당허게 헐라고 태주 성님이 역부러 일로 끌어딜인 것니 몰라서 허는 소리냐?"

살갗 속에서부터 돋아 오르는 것 같은 진한 불량기가 얼굴에 맥질된 양효석이 전혀 농담이 아닌 것처럼 말했고, 최서학은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온냐, 효석이 말이 맞다. 니눔이고 성일이고 이 집구석에서 술 한 잔씩 뽈고 팍 퇴학이나 당해뿌러라.“

윤태주는 옹이 박힌 말 뒤에 흐흐거리는 웃음을 매달았다.

"와따메, 넘요리 옹색시럽게 맹글어놓고 에진간히 재미지겄소. 지길, 중국집서 모이잔께로 자꼬 일로 와갖고는"

부자연스러움을 못 견디겠다는 듯 현오봉은 상체를 비비 틀며 투덜거렸다. 그 옆에서 송성일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아니 그러먼, 느그 학교 교칙에는 중국집서 술 마시는 건 괜찮다 고 돼있냐?"

윤태주가 딴전을 부리고 있었다.

"와따, 성님은 워째 등짝 긁으랑께 장딴지 긁고 그러요. 우리가 시방 기분이 몰뚝잖은 것이 그까징 것 퇴학 당허고, 안 당허고 땀세요 워디? 생전 첨으로 기생집 문턱 넘어스고 본께 걸쩍찌근해 이 지랄이 제라. 다 성님이 저질른 죄요.“

"온냐, 온냐, 다 첨에는 그리 몰뚝잖고 껄쩍찌근허고 그러는 법이니라. 니가 시방 날 원망허는 쫀디? 워디 오늘 한번만 맛 봐봐라, 그 원망이 통사정으로 휘까닥 바뀔 거니까."

"아이고, 또 기생집 델다도라고라?“

"하먼. 성님, 성님, 나 기생집서 술 한 번 더 믹여줏씨요, 험스로 통사정하고 매달리게 되지."

윤태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길, 통사정헐 것이 잔생이도 웂는갑다."

현오봉은 코웃음을 쳤다.

"온냐, 코웃음을 치든, 콧방구를 뀌든 다 니 맘대로니까 머리 긴 체면에 더 말 않겠다만, 일단오늘 한번 겪어봐라. 나잇살 먹은 것들이 왜 기생집 뻔질나게 드나들고,

기생집이 장터거리 술집이나 중국집허고 어찌 다른지도 알게 될 거니까.“

윤태주는 어른이 다 된 척 몇 살 더 먹은 나이를 한껏 과시했다. 현오봉은 더 말끝을 물지 않았다. 오늘의 주빈은 최서학과 양효석이고, 주연을 베푸는 것은 윤태주였다. 두 사람이 서울로 떠나기 전에 송별회를 열자고 의견이 모아지자 윤태주는 대뜸 그 장소를 남원장으로 정하고 나섰다. 술값 전부를 자기가 맡을 테니 송별회를 멋들어지게 한판 벌이자는 것이었다. 현오봉이나 송성일은 처음부터 그 제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송성일은 끝까지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하판석 노인을 죽인 죄의식에 시달려오며 그들과 만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송별회를 하는 자리까지 퍼할 수가 없어 응하기로 했지만 난데없이 기생집에서 술판을 벌이자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이새끼, 선배를 뭘로 알고 이래 이거 정 싫으면 니 혼자 빠져 !“

윤태주의 이 말 앞에서 송성일은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윤태주는 멸공단 단장답게 송별회를 떡 벌어지게 차려 체면을 세우고자 했다. 사람을 하나 죽이는 바람에 활동을 중단 당하고 말았지만 그는 아직도 스스로를 멸공단 단장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그 활동을 중단 당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활동을 시작할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공부에는 전혀 뜻이 없는 그가 굳이 멸공단에 애착을 갖는 것은 공산당에게 아버지나 작은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읍장은 한심스럽고, 군수는 시장스럽고, 도지사는 우습고, 국회의원이라면 한 자리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남모르게 품고 있었다. 그 먼 꿈을 위해 그는 멸공단 같은 어떤 조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가 송별회를 굳이 남원장에서 걸판지게 벌이려는 것은 단순히 멸공단원이었던 양효석과 최서학의 서울 유학을 축하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는데 그 속셈도 모르고 송성일이가 반대를 하고 나섰으니 통할 리가 만무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두고 갚기 위해 사관학교를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그대로 양효석은 금년 칠월부터 사년제 정규과정으로 바뀌는 육군사관학교를 택했고, 법관이나 정치가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던 최서학은 법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반의 공부는 이미 흐지부지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서울을 익힐 겸해서 미리 떠날 채비를 한 것이다.

"와따, 인자 모 심었다냐 어쨌다냐, 배꼽이 등까죽에 들러붙을 참인디 웨째깜깜 무소식이여, 이거."

현오봉이가 헛 입맛을 다시며, 장지문을 꼬나보았다. 그 기세가 곧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았다.

"요런 촌놈아, 진득허니 기달려라. 기생집 출입 아무나 써는 줄 아냐. 상이 나올 때까지 점잔허게 기다릴 줄 알아야 양반이다. 이것도 다 공부니까 잘 배워둬라."

윤태주가 그야말로 점잖게 말했다. "아이고 성님, 그러고 본께 성님 혼자 참말로 양반 겉으요. 니기럴, 중국집 같았음사 열 번도 더 나왔겄다."

",, 음식 같지도 않은 중국집 타령 그만 허고 쪼금만 더 기달려라. 진수성찬 채레갖고 꽃 같은 가시네들이 상을 받쳐들고 곧 들어올 것이다.“

윤태주가 팔다리가 찢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성님은 학교 그만두셨소?“

최서학이 불쑥 물었다.

"학교? 거 뭐 배울 것이 있어야제."

여기까지 말한 윤태주는 계속 밀려나오려는 말을 꿀떡 삼키고는,

"갤치는 선생이 션찮다고 공부를 안헐 수야 있겄냐. 신학기가 되면 또 시작해야제."

사뭇 진지한 얼굴을 꾸미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가 꿀떡 삼켜버린 말은,

힘들고 성가시게 학교 나댕길 것 워 있다냐, 내라는 학비 제때제때 내놓고 졸업임시에 몇 푼 더 써서 졸업장을 받으면 꾀진 일이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것들 앞에서, 더구나 원대한 꿈을 앞에 두고 있는 처지에 그건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자아, 술상 모셔 올립니다아아.“

소리를 하듯 길에 뽑아대는 여자의 신바람 실린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허리를 굽힌 두 남자가 길고 큰 상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북이며 장고며 가야금을 제각기 든 여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릇들이 겹칠 정도로 술안주가 빽빽하게 들어찬 상이 놓이고, 서로 다른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들은 웃목에 악기들을 놓고, 그 앞에서 한 발짝씩 나서 줄지어 섰다.

"자아, 오늘의 주빈이 이 상좌로 오시고, 성일이하고 오봉이는 그쪽으로 앉고, 그렇지."

윤태주는 부산스럽게 자리 배정을 했다.

"자리덜 잡으셨으먼 우리 아덜 절 받으시씨요."

사십 줄의 주인여자가 간드러지는 눈웃음으로 좌중을 훑으며 말했다. 그 눈웃음을 받은 건 윤태주뿐. 밤송이 머리 들은 멋 적고 어색스런 얼굴들로 엉뚱한 데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 절 받아야지. 어디, 어떤 년이 질로 절을 잘허는가 보자.“

윤태주는 호기를 부리고 나서,

", , 돌아앉아 절 받을 준비를 해야지 절을 할 것 아니냐."

그는 송성일과 현오봉에게 돌아앉으라고 빠른 손짓을 했다. 현오봉은 마땅찮은 얼굴로, 송성일은 시무룩한 얼굴로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냥 절만 받는 게 아니라 이건 선을 보는 순서야. 맘에 드는 여자가 누군지 속으로 정허는 겨.“

윤태주의 말이었고,

"정허먼 멋 혀. 보나마나 우에서 부텀 골라잡음서 내레올 것인디,나나 성일이야 헛방치기제."

현오봉이 어눌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눈을 내리깐 채 줄지어 서 있던 여자들 중에서 누군가가 킥 웃음을 터졌다.

"못써!"

주인여자의 낮고도 엄한 목소리가 웃목으로 날아갔다.

"짜석, 걱정도 팔자시. 고것이 걱정시러우먼 애초에 아무도 안골를, 질로 안 이쁜 것을 니 것으로 정허먼 될 일 아니냐.“

양효석의 말이었고,

"그래, 니 말이 명언이다. 역시 육군 장교답게 시악씨 골르는 작전 지시도 아조 그은사허다."

윤태주가 맞장구를 쳤다.

"와따, 하도작전지시가 그은사혀서 그런가 방구가 다 나올라고 똥구녕이 간질간질 허시."

현오봉의 목소리는 어눌한 느낌이 더해져 멍청스럽게 들릴 정도였다. 그는 마땅찮음을 일부러 그렇게 표하고 있었다.

"방구야 자연지출물이니 나올라 허만 뀌어야 순리제."

윤태주가 유식한 척 말했고,

"참말이요?"

현오봉은 말을 하는가 싶더니 엉덩이를 들썩하며 방귀를 뀌어댔다. 뿌아앙도 아니고 빠아앙도 아닌 요란한 방귀소리는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소리가 약해지며 세 번이나 울렸다.

"저 자석 저것, 참말로 방구럴 뀌뿌네."

양효석의 어이없어하는 말이었고,

", , 이 음식 먹기는 다 글렀다.“

최서학이 얼굴을 찌푸렸고,

"아이고, 방구 나올 준비가 그리 딱 된 줄 알았음사 내가 꾸라고 했을 리가 웂지, 저 죽일 놈.“

윤태주가 쩝쩝 입맛을 다셨고, 현오봉의 옆에 앉은 송성일은 고개를 돌려 코를 막고는 비로소 속 풀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사이에 주인여자고, 웃목에 나란히 선 다섯 여자들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워쨌거나 이 좋은 날, 웃을 일 맹글었응께 좋다. 자아, 싸게 싸게 절해라."

윤태주의 말에 다섯 여자가 몸가짐들을 가다듬었다.

"여그 기신 분네들은 읍내서 질 가는 양반 댁 되련님들 이시다. 얌전허고 곱게 절올리거라."

주인여자가 엄한 소리로 일렀다. 오른쪽에 선 여자가 소리 없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느리고 느리게 몸을 아래로 낮추어갔다. 눈을 내리깐 채 가볍게 수그린 여자의 얼굴은 앉은자리에서 약간 올려다보며 살피기에 딱 알맞았다. 여자는 절을 하고 일어날 때도 앉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성을 들인 느린 동작을 했다. 절을 하기 전의 자세로 돌아간 여자는 다시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앉음새로 머리를 조아리며

"거울경자, 달 월자, 경월이라 하옵니다"

하고는 얼굴을 드는가 싶더니, 그때까지 내리 깔고만 있던 눈을 마침내 손님들을 향해 떴다. 그 눈이 뜨여짐으로 해서 인물이 보다 확실해지고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극히 짧았고, 여자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똑같은 순서로 나머지 네 여자가 차례로 절을 했다.

"자아, 인자 주빈부터 골라잡으시지.“

윤태주가 생기 도는 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한 여자가 빠른 몸놀림으로 쪼르륵 와서 윤태주 옆에 앉았다.

"와따, 묏돼지 잡을 만치 날쌔기도 날쌔시. 저 시악씨 속으로 찍은 것이 누군지는 몰라도 속이 씨릿씨릿허겄다."

여자 고를 생각은 하지 않곤 술상 쪽으로 돌아앉아버린 현오봉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을 능청스럽게 하고 있었다.

"넌 왜 벌써 돌아앉았어."

윤태주가 얼굴을 찡그렸다.

", 다 골라잡은 남치기 둘이 성일이허고 나 것잉께 맘 편안허니 기달려야제라.“

"자식 참"

윤태주는 더 탓하지 않았고, 고개를 빠뜨리고 앉았던 송성일도 그때서야 슬그머니 상으로 돌아앉았다. 그 사이에 양효석과 최서학은 다투듯 여자 하나씩을 골라잡았다.

", 인자 니들 둘 차례다.“

윤태주가 현오봉과 송성일에게 눈짓했다.

"나 눈에는 싹 다 각씨 삼고잡게 이쁘고 이쁜게 아무나 앉어뿌러."

말을 내지르듯 하면서도 현오봉은 윤태주를 향해 히멀건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알았다, 너 이쪽에, 너 저쪽에."

윤태주가 손가락으로 두 여자에게 앉을 자리를 가리켰다.

"짝을 다 맞치셨응께 지는 그만 물러 가겄읍니다. 깨 쏟아지게 재미지게 노시고, 야들아, 되련님덜 지성으로 뫼셔야 쓴다아."

"어이, 어이, 월매는 인자 나가보소."

윤태주는 주인여자에게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속도 출출허고, 싸게싸게 술 따러."

아가씨들을 휘둘러보았다. 두 아가씨가 부리나케 술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정종이 차례로 잔을 채워나갔다.

"자아, 서울로 공부를 떠나는 우리 멸공단의 두 동지 최서학과 양효석의 양양한 앞길을 축하하는 뜻으로 다 같이 쭈욱 한 잔!"

"고맙습니다, 성님."

최서학과 양효석은 합창하듯 하며 윤태주에게 고개를 꾸뻑하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밤에는 내가 다 책임지기로 했으니까 코가 삐틀어지든, 눈알이 돌아가든, 맘놓고 마셔,"

윤태주가 양효석에게 술잔을 건네며 큰소리를 쳤다.

"통금은 워쩌고라?"

현오봉이 술맛으로 찡등그려진 얼굴로 말했다.

"길바닥에 안 나서고 집안에 들앉어 술 마시는데 통금이 그것까지 간섭허냐?"

윤태주의 말에 송성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실 작정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술을 마실 자신이 없을뿐더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집을 술 마시는 일로 비운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 할 수가 없었다. 현오봉이 반대를 해주기를, 바랐지만 더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송성일은 가슴에 차오는 무거운 어둠에 눌리고 있었다.

", 술잔 팍팍 비우고 두 선배헌테 싸게싸게 권해."

윤태주가 현오봉과 송성일에게 눈길을 박으며 손짓했다. 그는 어느새 왼팔로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럽씨다, 기왕 틔운 물고, 씨언허게 터뿝시다."

현오봉은 술상머리로 몸을 밀어붙였다. 송성일은 그만 암담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현오봉이 술을 마시기로 작정해버리면 통금 전에 집에 들어가기는 틀린 일이었다. 현오봉은 덩치값을 하느라고 술을 한번 입에 댔다 하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막걸리 서너 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셔버리는 주량이었다. 송성일은 현오봉의 다리라도 질벅여 자신의 뜻을 알리고 싶었지만 사이에 끼여 앉은 여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 효석이야 장교님이 되실 것이고, 자넨 법대를 가면 법관 나으리가 되시는 건가?"

최서학에게 술잔을 건네는 윤태주의 목소리에는 술기운이 묻어나고 있었다.

"마음이야 그렇지만 두고 봐야겄지요."

술기운이 불콰하게 번지기 시작한 얼굴로 최서학이 말을 받았다. 말은 겸손한 듯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자만이 차있었다. 비웃음 같기도 하고, 찬바람 같기도 한 그 자만기는 언제나 최서학의 얼굴에 감돌면서 하나의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좋네, 좋아. 효석이가 장교로 앞에 나서서 빨갱이들을 소탕허고, 자네가 법관으로 뒤에 앉어서 용공분자들을 재판허고, 그거 얼마나 보기 좋고 자알 어울리는 일인가. 그리 되면 억울허게 돌아가신 우리 아부지들 원수를 제대로 갚는 일이고공산당 씨를 말릴 날이 훤히 내다보이네."

윤태주는 아가씨의 치마 밑으로 손을 디밀어 허벅지를 주물러대며, 두 사람을 소쿠리비행기 태우고 있었다.

"공산분자들을 깨끗허게 청소하자면 군인이나 경찰이 총을 쏴대는 것으로는 되지 않아요. 그것보다 먼저 법을 강력하게시행하면서, 빨간 물이 든 민간인들을 하나도 빼지 말고 잡아내서 처단 해얍니다. 군인이나 경찰은 그 법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어디까지나 법이 앞이지요."

윤태주가 한 말의 순서를 뒤집고 있는 최서학의 말은 싸늘했다. 양반이면서 지주고, 권력을 가진 집안이라는 가문의식이 남달리 강한 그로서는 자기와 양효석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판인데 더군다나 양효석을 ''이라 하고, 자신을 ''라고 하는 말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의식 속에 판 박혀 있는 양효석은, 지질하게 돈푼이나 모은 보부상 출신의 쌍놈 집구석 자식일 뿐이었다. 거기다가 돌대가리에 주먹이나 휘두를 줄 아는 경멸적인 존재였다.

"맞어, 니 말이 맞어. 높기로 치자먼 판검사님허고 육군 소위허고 워쩌크름 비허겄냐. 판검사가 을매나 높으먼 나이럴 고하간에 '영감님'이라고 존대럴 붙이겄냐. 근디 육군 소위야 그냥 소위제 무신 존대가 따로 있드라고?"

양효석은 눈치 빠르게 대꾸하며 최서학에게 잔을 권했다. 최서학의 시험지를 보고 베낀 국민학교 시절부터싹트기 시작한 양효석의 열등감은 나이가 들면서 지워진 것이 아니라 나이만큼 커져갔던 것이다. 돈으로나, 뼈대로나, 권력으로나 최서학네를 이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주먹 하나가 있을 뿐이었는데, 최서학에게 주먹맛을 보였다가는 그 주먹만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박살난다는 것은 너무나 빤한 일이었다. 최서학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주먹을 부르쥐며 양효석은 그저 최서학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쪽으로 오래도록 스스로를 길들여왔던 것이다.

"내 말을 오해 말어. 높고 낮고를 따져 앞·뒤라고 헌 것이 아니라 빨갱이들 허고 싸우는 싸움에서 전방이고 후방이란 뜻잉께로. 자네, 알아 묵어?"

윤태주는 술기운 젖은 눈에 힘을 모으며 분명하게 말했다.

"압니다. 다 알 만한 성님이 그런 실수를 헐 리가 없지요."

얼굴이 불그레한 술기로 젖은 최서학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잔을 윤태주에게 내밀었다.

"와따, 술 묵음시로. 재미 웂은 이약들만 골라서 허네."

부지런히 안주로 배를 채우고 난 현오봉이 투덜거렸다.

"맞어라, 술맛 나게 재미진 이약 잠허시씨요."

현오봉의 옆에 앉은 아가씨가 날름 말을 받았다.

"어허, 말에 고물 묻을랑가 싶어 그리 얼렁 채 받치고 그요?"

여자를 내외하듯 한 앉음새 그대로 현오봉이 불쑥 내질렀다.

"하먼이라. 우리 서방님 말씸에 고물이 묻어서야 쓰간디라아."

아가씨는 감겨드는 콧소리를 섞어 말하며 현오봉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들었다.

"워메 징헌 거!"

현오봉은 질겁을 하듯 소리치며 아가씨의 팔을 털어 냈고, 모두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웃지 않은 건 송성일 혼자였고, 그 옆에 앉은 아가씨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쿡쿡거리다가 그의 눈치를 살피고는 웃음을 잡았다.

"예말이요, 젊은 서방님, 나가 벌거지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디 머시가 그리 징허다고 인정사정 웂이 탈탈 털어내뿔고 그러시오. 나가 서럽고 무참혀서더 못 살겄소."

현오봉의 옆에 앉은 아가씨는 상글상글 웃어가며 신파연극 대사조로 읊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하필이면 능수능란한 경월이었다.

"못 살겄으먼 죽어아제."

현오봉은 무뚝뚝하게 말했고, 모두는 와아 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굳은 듯 앉아 있던 송성일도 픽 웃음을 흘리며 현오봉에게 눈길을 던졌다.

"어허, 우리 오봉이가 질이다.“

윤태주는 손바닥을 맞 때리며 흥겨워하면서,

"오봉이허고 경월이가 천상 이 도령하고 춘향이다. 오늘밤 신방 차려 뿌러라, 나가 장가밑천 댔다.“

그는 있는 껏 호기를 부렸다.

"와따 성님, 아무리 술이 취했어도 말은 바로 허씨요. 춘향이야 처녀였응께 이 도령이 좋아했어도 손해날 것 웂겄지만,나야 손해날 것 뻔헌디 미쳤다고 신방 채려라?"

현오봉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음마, 음마, 우리 서방님이 이 나이 때꺼정 총각 수절허셨구만이라. 아이고메 나 겉은 헌 지집이야 발샅에 때만도 못허고 말고라. 아까부텀 워디서 달치근허기도 허고, 시큼시큼허기도 허고, 꼬시름허기도 헌 냄새가 코끝에 잽힐 둥 말 둥 잽힐 둥 말 둥 혀쌓길래, 요것이 무신 냄새다냐, 요것이 무신 냄새다냐 험시로 맴이 요상시럽게 싱숭생숭 할랑할랑해 쌓등마 인자 알고 봉께 고것이 바로 우리 서방님이 솔래솔래 풍긴 총각냄새였구만이라. 아이고메 시상에나, 이 헌 지집이 총각 옆에 앉었는 것만도 황송시럽고 죄시런거. 헌 지집이 깨끔헌 총각헌테 때 묻힐라, 훠어이, 훠어이."

경월이는 무당 주문 외듯, 명창 사설 외듯 하고는, 현오봉의 몸에서 먼지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주춤주춤 물러나 앉고 있었다.

"역시경월이가 채를 자알 잡는다. 느그덜 어떠냐, 총각들허고 이리 술상 받고 앉었는 기분이."

윤태주는 아가씨들을 둘러보았다.

"가심이 찌릿찌릿 허구만이라."

양효석의 옆에 알은 아가씨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옆에 니넌?"

"오늘밤에 그냥 애 배 불고 잡으요."

최서학의 옆에 앉은 아가씨가 불쑥 말하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시 웃음이 터지고, 최서학은 여자가 예뻐 죽겠다는 듯 덥썩 끌어안았다.

", 니넌!“

"우리 서방님이 원체로 점잖으셔논께 지야 그냥 잔뜩 심만 드는구만이라."

송성일 옆에 앉은 아가씨가 과장되게 울상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송성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술집에서 남자가 점잖 빼는 건 다 여자 책임 아니냐. 술을 더 믹이든지, 니가 딴 기술을 부리든지, 니 알아서 해라."

윤태주가 술자리 묘리를 통달한 것처럼 말했다.

"질 잘난 인물값 허니라고 그런가 삼대맹키로 영 뻐신디, 어설피 기술 부릴라다가 퉁이나 맞지 말고, 나 그냥 독수공방허는 거이 낫겄구만이라."

여자의 말에 또 웃음이 일어났다.

"경월이는 아까 길게 새살 깠고, 그려 , 우리 숙향이는 워떠냐."

윤태주는 제 짝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워메 서방님, 양심 잠 소금물에 행궈내고 말씀허시씨요. 남덜이 총각이랑께 서방님도 도매금으로 총각행세 허고 잡은 갑는디, 지야 서방님 뜻 받들어 을매든지 그런 칙헐 수 있는 일이지만, 서방님 총각 아닌 것이야 저 사람들도 훤히 아는 일일 것인디 지가 속힐라펴 혔다가는 가부시끼로 웃음거리 된다니께요."

숙향이는 애교스럽게 눈을 흘기며 면박했고,

"에라 이 의리 업는 년아."

팔을 치켜든 윤태주는 때리는 시늉 끝에 여자를 얼싸 안았고, 술기운으로 웃어대는 소리가 술상에 빼곡하게 들어찬 그릇들에 담기다 못해 넘쳐나고 있었다.

"기분이 알달큰허게 쪼은데 어디 돌아감서 노래나한 가락씩 뽑아라. 경월이부텀!"

윤태주는 이제 혀가 말려드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리로 헐게라?"

"아니, 아니. 그 먼지 탱탱 진 구식말고, 신식 노래로 불러, 신식."

최서학이 손을 내저었다. 술에 푹 담가진 듯 풀려버린 눈에, 그의 혀도 꼬부라지고 있었다.

"허먼, 멀로 불를께라. 귀국선?"

"쪼아, 쪼아. 울고 넘는 박달재도 부르고 말야."

경월이는 노래를 시작했다. 노랫가락을 따라 젓가락 장단이 시작되었다. 윤태주나 최서학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부터인가 양효석도 여자를 마음 놓고 주물러대고 있었다. 송성일은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요런 더러운 놈들아, 네놈들이 끌어안고 있는 여자가 바로 네놈들 아버지가 끌어안았던,, 것들일 수도 있어,’ 이 미친놈들아, 욕을 해대고 있었다.

 

남인태는 순천행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기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그는 사복 차림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잠이 든 것 같았으나 그는 자신의 신상문제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궁리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번으로 광주에 네 번째 걸음을 했다. 손 써서 퇴원날짜를 늦춰가며 병원에서 두 번 걸음을 했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광양으로 돌아가서 두 번째였다. 다소 무리를 해가면서 퇴원날짜를 늦췄던 것은, 퇴원을 하면서 바로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입원기간이 하루라도 길어지는 것은 신상에 그만큼 유리하기도 했다. 우선, 지옥 같기만 한 광양을 피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입원기간의 길이만큼 중상으로 변해갈 부상을 공로로 내세워 전출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 계획이 별로 실현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밀어 붙여본 일이었다. 그는 광양에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준비한 돈은 일을 꾸미는 데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정도로 큰 액수였다. 인사관리과장은 돈에 군침을 흘리면서도 막상 시원한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게 떡 묵디기 쉽덜 않은 문제지요. 아시다시피 니나 나나 안전한 곳으로만 빠질려고 발싸심인데, 우리 전남지역 전체를 놓고 볼 때 안전한 곳 보담은 불안한 곳이 더 많은 실정 아닌가요. 진작 안전한데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야 다 줄이 든든한 사람들이고, 이러니 이거 원

과장은 액수를 더 올리기 위해 무슨 수를 쓰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형편이 옹색한 건 저도 잘 압니다. 허나, 안전한 곳도 등급이 있을 건데, 일등급을 원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등급이고 삼 등급이고 간에 광양 같지만 않음사 어디든 좋겄읍니다.“

그는 몸이 달아 매달렸다. 목숨이 둘이 아닌 바에 다시 광양 땅에 발을 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유념할 것이니 어디기회를 봅시다."

만날 때마다 똑같은 과장의 말은 막연하고도 답답했다. 남인태에게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바로 그 과장이었다. 나이도 자기 또래밖에 안 되는 그 사람은 날카로운 눈매 하나를 빼버리면 살이 오른 허여멀쑥한 얼굴 그 어디에서도 경찰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총을 잡을 필요 없는 편하고 안전하고 돈 잘 생기는 자리에서 펜대나 굴리고 있는 팔자 좋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난 언제나 저런 자리에 앉아보나과장을 만나고 돌아설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리고는 했다. 그 부러움은 그의 마음속에서 열등감으로 직결되었다. 저놈이야 핏줄 잘 타고나 제대로 배운 데다 배경 좋아 저리 됐겠지. 그의 열등감은 다시 체념으로 연결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직책이 올라가도, 가난뿐인 보잘것없는 근본과 사환으로부터 시작한 과거의 열등감은 없어지지 않고 가슴 그 어느 구석엔가 딱딱한 쇠붙이처럼 박혀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불똥을 달고 솟구치고는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무진 애도 써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 자신의 마음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는 마음이었다. 그 열등감을 이기려고 남다른 열성을 바친 결과로 서장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도경국장이나 해야 그 마음이 없어 질라나? 그는 혼자 고개를 갸웃거려도 보았다. 네 번째 걸음에서도 결말을 보지 못한 그의 마음은 까라질 대로 까라져 있었다.

광양을 생각하면 당장 경찰복을 벗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운산은 반란군 주력 일부와 전남도당까지 품고 있는 탓인지 광양이나 구례 일대는 난장판이었다. 아니, 지옥이 죽은 사람들이 살기가 제일 고약한 곳이라면, 산 사람들이 살기가 제일 고약스러울 것이 분명한 그곳은 생지옥이라 해야 옳았다. 더우기 경찰에게 그곳은 생지옥이 틀림없었다. 반란군은 반란군대로 날뛰고, · 면 단위 야산대들은 야산대 대로 설쳐대는 바람에 경찰은 어느 쪽 총에 맞아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토벌을 한다고는 하고 있었지만 날마다 없애고 있는 탄알에 비해 성과는 그다지 신통하지 못했다. 낮에는 이쪽에서 쫓고, 밤에는 저쪽에서 덤비고 있는 공방전의 되풀이 속에서 날로 커 가는 것은 생명의 위협이었다. 반란군이나 야산대의 소탕이 지지부진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산을 발판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전진 · 후퇴를 신속하게 했고, 민간인들이 그들에게 음성적인 협조를 계속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고 있는 이쪽에도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게 아니었다. 먼저, 반란군이나 야산대를 일거에 소탕할 만한 병력이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 그 다음 현존하는 군대병력이나 경찰병력 거의가 자신처럼 마지못해 총을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삼사건의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집중되었던 군대병력이 여순 반란의 돌발로 분산된 채 제주도는 제주도대로 전투가 계속 중인데다가, 여순 반란을 계기로 수많은 지역에서 공산당 지하세력이 노출되어 그대로 전투병력화하게 되자 갑자기 팽창된 전투지역을 충분한 군 병력으로 채우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군 병력이 그러할 때 지역단위치안유지 조직인 경찰병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의 단위부대 증원은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사병력의 충원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 원인은 병역이 의무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대우에 있어서 군대 사병이 경찰 하급자와 다른데다가, 현직 경찰마저 기회만 있으면 이직을 하려는 판에 제 발로 군대에 걸어 들어올 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군인 모집은 모집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시행된 것이 벌써 오래 전부터였다. 지역별 할당에 맞춰 청년단이. 앞장서고경찰이 엄포를 놓아가며 만만한 젊은이들에게 그물을 씌웠다. 만만하다는 것은 으례 가난하고 관에 아무 연줄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둑으로 몰아 감옥살이를 면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군대에 밀어 넣었고, 사촌이나 육촌이 입산한 것을 트집 잡아 군대로 내몰기도 했고,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그렇게 억지춘향이로 군복을 입은 자들이 사기가 있을 리 만무했고, 원래 사상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오기나 반발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나 작전 중에 입산해 버리는 자도 적지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강압적인 방범은 경찰이나 청년단을 불신하고 경원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의 경력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똥 묻은 것들'로 불신 당해온 경찰은 계속 악명만을 덧붙여 가는 꼴을 면할 수가 얼었다. 그런 강압적인 편법을 쓰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불평불만을 없애는 길은 병역을 의무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법을 만든다는 게 언제인데 그것은 통과되지 않고 엉뚱하게 반민특위법이 통과되어 그렇잖아도 경찰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의 기를 더욱 세워주는 반면경찰들은 일할 맛이 싹 떨어지게 기를 꺾고 말았다. 반민특위법이 전국적으로 엄하게 실시되는 한 현직 경찰치고 그 법에 안 걸릴 사람은거의 없었다. 콩밥을 먹이게 만든 위치에서 콩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국회의원이란 놈들은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는 놈들이었다. 제 놈들 국회의원에 당선시켜주기 위해서 경찰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말이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짓이 경찰 때려잡는 법이나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놈들이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이었다. 그런 배신감은 자신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조용히 모여앉은 자리에서는 으레 그 법의 시행에 공동의 관심이 모아지고는 했다. 그 법만 생각하면 그는 전출운동이고 뭐고 사지에 맥이 빠져버렸다. 그러나 당할 때 당하더라도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광양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그 법은 아직 강 건너 불이었다. 광양에서 느끼는 생명의 위협은 전투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어둠 속에 그 위험이 산재해 있었다. 그건 적의 공격에 의한 위협뿐만이 아니라 어둠과 함께 누가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위협이었다. 어두워지기 얼마 전에 굽신굽신하며 지나간 그 사람이 바로 어두워짐과 동시에 적으로 바뀌어 옆구리에 칼을 박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낮에만 믿고 밤에는 믿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민간인들과 그런 살벌한 불신관계가 조성된 것은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멸공이라는 정부의 다급한 정책이 앞선 문제였고, 그 지시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시행하려는 것이 뒤따르는 문제였다. 초반부터 밤은 이미 그쪽의 차지였다. 산을 등지고 야간공격을 감행했다가 다시 산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하는 그들은 자연 공격적인 반면 이쪽은 수비 위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으면 물론 이쪽에서도 공격을 시도했지만 산이라는 지형의 불리를 무릅써야 하는 공격이 공격다울 리가 없었다. 적이 산 속에 진을 치는 경우 산은 또 하나의 적이었다. 퇴로를 산으로 잡은 적을 쫓아 산을 파고들었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처음의 무모한 실수를 감안해 그다음부터는 적극적인 소탕이 아니라 민간인 지역과 차단시키는 산중고립작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산 속의 유리한지형을 확보하고 있는 그들을 적극전법으로 소탕하자면 그들보다 갑절이상의 병력이 있어야 했다. 산중고립작전은 이중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인민'과의 접촉을 단절시켜 그들의 세포부식을 근절함과 동시에 민간인들의 음성적 협조를 차단하여 그들의 보급원을 동결하고, 그 난점 해결을 위해 그들의 공격이 더 적극화되면, 일부러 산으로 파고드는 위험을 겪지 않고도 그 기회를 역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현지의 노력과는 별개로 멸공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강력한 지시가 거의매일이다 싶게 하달되는가 하면, 그에 못지않게 전과보고의 독촉이 성화같았다.

'반란군의 완전 소탕'

'지역폭도 완전 제거'

'민간세포조직 완전근절'

그런 지시 앞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용맹스러운 활동을 전개한 것은 군대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서북청년단이었다. 명칭 그대로 이북청년들로 구성된 그들은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제주도의 사삼사건 진압대의 일부로 투입되어 그 용맹성을 떨친바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그야말로 공산당의 씨가 마른다는 소문이 일찍부터 바다를 건너와 뭍에까지 퍼졌던 것이다.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삼팔선을 넘어온 그들은 이남의 공산당을 뿌리 뽑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반공투사들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는 더 말할 것 없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가차 없을 정도로 냉정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이미 여수와 순천에서 그들의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멸공이라면 그 누구보다 앞장서는 그들의 용맹스러운 열성은 반란군이나 지방 빨갱이의 수사, 색출, 체포, 처단에까지 손을 안 뻗치는 곳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솔선해서 나가자, 그렇지 않아도 인간관계로 얽히고 설켜 냉정한 공무집행에 난색이 되어 있던 현지경찰은 그들에게 굳은 일을 모두 떠넘겨주고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일이 일단 그들의 손에 넘겨지자 반란의 뒷수습은 냉정하고도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민간인들의 원성이 후유증으로 남게 되었다. 그들에 대해 민간인들 사이에서 '악독한 이북내기들' 이라거나, '이북에서 내려온 악질들'이라는 욕이나 비난이 떠돌았고, 사실 어느 면에서는 억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을 박멸하고자 하는 열정적 일념으로 행동하는 그들이 그따위 욕이나 뒷소리에 신경 쓸 리 없었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공산당에 연관되었거나 공산당 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당한 자들의 피붙이들이 지껄이는 소리에 불과했고, 설령 다소 과했거나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국책을 수행해나가는 데 의당 따르게 마련인 사소한 시행착오로 묵살되었다. 그 후의 소탕작전에서도 계속 발휘된 그들의 용맹성은 끊임없이 하달되는 지시에 의해 더욱 촉발되고 있었다. 멸공이라는 말과 함께 빈번히 사용되는 소탕 · 제거 · 근절 같은 용어에 일맥상통하고 있는 뜻은 '무조건 죽여서 없애라'는 것이었고, 그들이 다소 과격한 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다 덮이게 되어 있었다. 이 기회에 남한의공산당은 뿌리째 뽑고 말겠다는 대통령의 공공연한 결의와 공산당에 원한을 품은 그들의 복수심과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마부요 말이었다. 그들은 군인도 아니었고, 경찰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민간인은 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멸공전선에 나선 특수무장부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스스로도 그 특수성을 긍지와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미군정의 막대한 지원으로 결성되었다는 소문이 초기에 파다했고, 결국 그들과 합동작전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남인태 자신은 그들 조직이 어떻게 움직여지는 것인지 알 수도 없었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들의 용맹성을 앞세우고 이용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그들의 끝없는 용맹성은 민간인들 사이에서 끝없는 원성을 일으켰다. 물론 군대나 경찰도 원성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특히 심하게 지목을 받았다. 말을 바꾸면, 민간인들 중에서 공산당 가담자나 연루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이고, 그 피해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용맹성이 잔인성이었던 것이고, 낮의 원성이 밤에는 살의로 바뀌는 위험이 어둠 속에 산재해 있었다. 이미 그런 식의 피해자가생기고 있음이 문제였다. 적의 공격의 기미가 전혀 없는 밤에 행방불명자가 발생했고, 다음날 아침이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잘린 목이 바위에 달랑 올려져 있는가 하면, 긴 대나무 간짓대 글에 꽂혀있기도 했다. 그런 행위는 적의 특공대 잠입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러나, 직감적 심층은 원한을 품은 민간인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일벌백계주의로 치달은 이쪽에서 먼저 시범을 보이고 되받은 형국이었다. 목을 무참하게 자르는 처형은 반란 당시에 백두산호랑이 김종원 대대장이 일본도를 휘둘러 시범을 보인 다음부터 예사가 되었다. 목만을 친 것이 아니라 다시 그 목들을 모아 가마니에 넣고 다니며 동네마다 전시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썩어 가는 흉한 두상들을 가마니에서 쏟아내 벽돌장이나 판자 위에 즐비하니 늘어놓고 사람들을 일삼아 끌어 모아 구경을 시켰다. 빨갱이질을 하거나, 그들에게 동조하면 다 이런 골이 된다는 시위였다. 그런 짓은 광양이나 그 언저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들리는 말로는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니, 제주도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한 것 같았다. 광양 근방에서야 한마을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집들을 불질러버리는 짓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그런 일이 예사로 저질러지는 모양이었고, 빨치산을 잡아다가 나무에 묶어놓고 마을사람들에게 대창으로 찔러 죽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명령에 반항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대창으로 찌르지 못한 사람까지 처단 해버린다고 했다. 그러한 방법들이 효과를 거두는지 어쩐지를 알 수 없는 채로 적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보복을 가해오고 있었다. 논에서 멀쩡하게 일을 하고 있던 농부가 지나가는 경찰의 등을 낫으로 찍어 죽이거나, 풀숲에 감추어두었던 총을 갈겨대거나 하는 일이 끝이지 않는 걸 보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인태는 자신도 벌교에서 몰악스럽게 한다고 했으면서도 그런 행위를 보고는 그만 오만정이 다 떨어지면서 생명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야 했다.

그런 살벌한 상황 속에서 내 모가지를 내 모가지라고 장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 난장판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 나오는 길뿐이었다. 멸공이고 반공이고 내 한 목숨 있고 나서야 할 일이라는 것이 남인태가가지고 있는 확고부동한 생각이었다. 남인태는 두 팔을 뻗어 올리며 눈을 떴다. 사복을 입고 광주행을 한 것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옷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턴에 색깔이나 모양이 다를 뿐인데 어느 것을 몸에 걸치느냐에 따라 마음이 생판 달라지고 말았다. 제복을 입으면 무언가에 억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힘이 전신을 버팅기고 있는 기분이었고. 사복을 입으면 무슨 짓이든 해도 좋을 것 같은 한없는 자유스러움을 느끼는 반면 어딘가 허전하고 힘이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남인태는 창밖으로 눈길을 보내며 담배를 빼 물었다.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는 천천히 내뿜었다. 제길, 사람 한평생 사는 게 뭐라고피로감과 함께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담배를 입 꼬리에 문 채 변소로 향했다. 변소 문을 열자 구린내와 지린내가 뒤섞여 왈칵 끼쳐왔다.

"바가야로!"

주춤하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는 스스로의 입놀림에 놀라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 형편없는 야만인들이야.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변소로 들어가며, 일본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냄새만큼 변소 안은 더럽고 지저분했다. 말라붙은 똥 덩어리에 새똥이 엉겨 붙고, 변기 주변이나 바닥에는 오줌이 고여 있었고, 똥 묻은 신문지조각이나 담배꽁초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연상 '바가야로'를 내뱉으며 오줌을 깔기고 있었다. 기차가 흔들리고 있다고는 해도 아무 데로나 제멋대로 떨어지고 있는 오줌방울로 보아 그도 오줌줄기가 변기 아가리로 향하도록 물건을 조정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저리치며 물건을 거둬들인 남인태는 입꼬리에 물린 담배꽁초를 퉤 내뱉고 변소를 나섰다. 객실로 들어서 네댓 걸음을 옮기던 그는 숨을 들이켜며 우뚝 멈춰 섰다. 어떤 낌새를 알아챘는지 상대방이 이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시에 서로를 외면했다. 남인태는 그 자리를 지나쳐 허둥지둥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슴이 벌떡거리고 있었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우치고 있었다. 그놈은 하대치였다. 틀림없이 하대치였다. 그런데 총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인 것이다. 저놈을 어째야 하나, 헌데, 저놈이 무슨 배짱으로 벌건 대낮에 버젓이 기차를 타고 다닌단 말인가. 아무리 통행증이 없어 겼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허고, 그놈 옆에 앉았던 젊은 놈들은 누군가. 그게 일행이 아닐까. 그렇다. 아무리 배짱이 센 놈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기차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놈들이 홀몸일 리가 없다. 보이게 무기를 갖지 않았을 뿐 무엇이건 호신용 무기를 지니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설프게 저놈을 잡으려다가 내가 오히려 당할지도 모른다. 아이고, 그럴 수는 없다. 이쪽에서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저놈들이 먼저 이쪽을 건드릴 리는 만무하다. 이것은 호기가 아니라 위기다. 눈 딱 감곤 못 본 척해 버리면 그만이다. 에라, 안전이 제일이다. 남인태는 단단히 팔짱을 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총을 갖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대치도 눈길이 맞부딪치는 순간에 남인태를 알아보았다. 그 순간 하대치의 머리를 친 생각은, 이제 죽었구나!였다. 총부리를 들이댈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남인태는 쫓기듯 휘적거리며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가지만 해도 하대치는 남인태가 부하들을 부르러 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두 동료에게 뜨거운 핏덩이를 토해놓듯 한 한마디는 "쨀 준비!"였다. 여차하면 그대로 기차에서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남인태 폭에서는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사람들 머리통 사이로 조심조심 살펴보니 남인태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비로소 하대치는 무릎을 쳤다. 사복인 그는 무기도 없고, 일행도 없다는 직감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그는 남인태에게 눈을 박고 있었다. 보성역은 바로 코앞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기차가 정거 허먼 금방내리지 말고, 출발 허는 것보고 내려."

하대치는 두 동료에게 일렀다. 기차가 정거하자마자 내렸다가는 남인태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 뒤따라 나오며, 빨갱이 잡으라고 소리라도 질러대면 그보다 더 위태로운 사정은 없을 터였다. 남인태가 눈을 감고 있다고 하나, 눈을 감은척하고 있을 뿐 이쪽의 움직임을 다 살피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하대치는 광주의 병원에 맡겨졌던 네 명의 부상자 중에 장기치료를 받느라고 남아있던 마지막 중상자 한 사람을 데리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처음에 두 명, 그 다음에 한 명을 똑같은 방법으로 아무 일 업이 본대에까지 데려갔었는데 끝 걸음인 세 번째에 탈이 생기고 말았다.

꼬랑댕이가 질먼”볿힌다등마, 지미랄

하대치는 떫은 입맛을 다셨다. 기차가 멈추었다. 과연 남인태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떴다. 하대치는 자지 끝에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인태의 눈길 이쪽으로 일직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금방 어떤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단단허게 준비혀. 여차허먼 쨀 것잉께."

하대치는 숨 가쁜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분주함 속에서 남인태는 이쪽을 그냥 보고만 있을 뿐 어떤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저눔이 무신 맘얼 묵고 있는고

하대치는 왼쪽겨드랑이에서 땀방울이 내비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비이, 가자!"

하대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대치도 그 뒤를 쫓았다. 문을 닫으면서 뒤돌아본 하대치의 눈에 벌떡 일어나는 남인태의 모습이 잡혔다.

"기차가 가는 쪽으로 뛰내려!"

그 경황 중에서도 하대치는 소리치고 있었다. 기차의 속력은 뛰어내리기에 아직 별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와따, 한바탕 똥줄 탔네. 근디, 쩌 자석이 순사질얼 그만둔 것이다냐, 어쩌다냐?"

하대치는 멀어져 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서서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 참 천만다행이오. 그자가 경찰을 그만뒀을 리가 없소."

보고를 받은 염상진은 한마디로 고개를 저었고, 염 대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하대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동무, 수고했소. 쉬도록 하시오."

염상진이 일어섰다.

"오늘 작전이 있담서요?"

하대치가 따라 일어섰다.

"있소. 허나, 하 동무는 임무를 끝냈으니 쉬도록 하시오."

"고것이 무신 심든 일이라고 혀고 말고 혀라. 지도 나갈라능마요."

하대치는 조르듯 하는 태도였고, 그런 그를 부러운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안창민은 가만히 웃음 짓고 있었다.

"그냥 쉬라는 게 아니라 여길 지키라는 것이오. 여길 지키는 것도 큰 작전이란 걸 알지요?"

염상진이 하대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눈에 혈연을 대하는 듯한 정이 담겨 있었다.

"야아, 알겄구만이라. 여그넌 철통겉이 지킬 팅께 염려 마시씨요."

하대치는 염상진을 올려다보며 티 없이 웃었다.

, 저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두 사람의 하는 양을 바라보며 안창민은소리 죽인 감탄을 했다. 사람의 관계가, 그것도 남녀가 아닌 남자와 남자와의 관계가 '믿음직스러움'을 넘어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입산한 다음 부터였다. 그 아름다움의 발견과 계속되는 확인은 피를 흘려야만 성취되는 혁명이 왜 가능한 현실인지를 증명해주는 소리 없는 웅변이었다.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의 문맥에서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행간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의지로운 뜻과 뜻을 합치시킨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생성되는 그 어떤 마력적인 힘이었다. 그건 염상진의 힘만이 아니었고, 하대치의 힘만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힘이 합해짐으로써 비로소 피어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염상진과 하대치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염상진과 오판돌. 하대치와 강동식, 강동식과 염상진마치 그물코가 이어진 듯 그 아름다움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사이에 매듭져 있었다. 다만 염상진과 하대치 사이에서는 그 아름다움의 색깔이 좀 더 진하게 나타날 뿐이었다. 모택동이 이끄는 홍군에는 계급이 없다는데, 그 난해함이 바로 이런 인간관계의 엮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인가. 그러고, 역사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의 베 짜기이되, 그 분기점들은 의지로운 사나이들이 뜻을 합치시킨 슬기롭고 용기 있는 작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안창민은 하대치의 자리에다 김범우를 놓아보았다. 염상진과 김범우 옆에서 지켜본 그들의 헤어짐은 사뭇 인상적이었다.

"형님, 수염이 잘어울립니다."

"그런가, 짬이 없어서편히 가게."

두 사람이 헤어지기직전에 나눈 이 말에는 깊은 정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 정은 지극히 사사로운 것이면서, 과거가 있을 뿐이었지 어떤 결속감이나 현재가 없었다. 그들의 헤어짐이 인상적일 수는 있어도 감동적일 수는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염상진과 김범우가 헤어지는 장면이 한 장외 사진이라면 염상진과 하대치의 관계는 피가 맞통하고 있는 생존 그 자체였고, 염상진과 김범우가 언제라도 적대관계에 설 수 있음에 비하여 염상진과 하대치는 언제든지 서로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사이였다.

"강동기는 작전에 끼웠는 게라?"

하대치가 염상진을 뒤따라가며 물었다.

"훈련을 더 받아야 되지 않겠소?"

"그렇제라, 안직 삥아린디요. 허먼, 댕게오시씨요, 대장님!"

하대치가 오른발을 옆으로 뻗쳐들어 왼발에 갖다 붙이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염상진이 절도 있게 돌아서며 경례를 받았다. 염상진은 고두만을 미리 기억했다가 오늘 밤 작전에서 제외시켰다. 그의 아내 칠동댁의 임신이 확인될 때까지 그를 위험지대로부터 격리시켜야 했다. 그가 배성오와 함께 전사한 고두일의 사촌 형제라는 사실이 염상진에게는 또한 뜻 깊게 느껴졌다. 염상진은 그들에게 방을 마련해주기 전에 한약방을 찾아갔다. 어떻게 하면 임신을 빨리 할 수 있겠나를 묻기 위해서였다.

", 여자 뱃속에 애럴 하나 들앉힌다 허는 일이 말맹키로 그리 숼털 안혀. 그려서 그 처방이 수수십 가진디, 기왕에 합궁을 헌 부부에다 서로 무병허단께 그 많은 처방 일일이 다 들믹일 것 웂고, 간딴허게 남녀가 지킬 일한 가지색만 허겄는디, 남자는 다방사 허지 말 일인 것이며, 여자는 조립좌허지 말라는 것이여. 요것이 무신 말인고 허니 남자가 밤마동 그 짓을 졌다가는 씨가 부실해져 애럴 맹글 수가 웂이다 그 말이고, 긍께 최소한 사나흘 간격은 두고 방사를 허라아 그 뜻이고, 씨가 지아무리 영글고 튼실혀도 씨럴 받는 여자가 씨 귀허고 중헌 것을 알고 행동거지를 얌전코 진중허게 혀야지 촐랑이고 방정을 떨어서는 안 되는 일인디, 남자가 일단 방사헌 담에는 여자가 방정맞게 발딱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고, 그저 뒤진디끼 그대로 나자빠져서 남자 것이 한 방울도 새나오덜 못허게 모시는 디만 정신을 쏟아야 헌다 그 말인디, 잠자리가 지아무리 불편시러도 궁뎅이 밑에 비개 높직허니 받치고 하롯밤 젼디는 찔긴 맘이 있어 야는디, 오짐 매럽다고 발딱 어나뿔고, 목 말르다고 물 묵자고 발딱 일어나뿔고 혔다가는 다 허사여, 허사."

한약방 영감님의 말을따라 고두만에게는 나흘마다 한 번씩 동침을 허락했고, 아내에게 조립좌하지 말고 베개를 받치고 자게 하라는 말을 염상진은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일렀다. 그 말을 하는 기분이 계면쩍고 우스울수록 그의 얼굴은 엄숙하게 변해갔다. 동침하는 밤을 빼놓고는 고두만은 물론 전과 생활이 달라진 게 없었고, 그의 아내 칠동댁에게도 방을 빌려주고 있는 주인집의 모든 일을 돕게 했다. 최근 들어 염상진의 마음은 한층 무거워져 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모두 최악의 기아상태'라는 이지숙의 보고를 받도록 그 문제의 심각성은 구체적인 무게로 가슴을 누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소작을 빼앗겨버린 동지들 가족의 생계문제였다. 소작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재 겪고 있는 '최악의 기아상태'는 소작인이면 누구나 수십 년에 걸쳐 겪어온 연례적 삶이었다. 춘궁의 사월 고비는 배고픔이 사람의 정신을 돌게 할 정도로 극악한 상태에 달하는 시기였고, 굶어죽는 노인네와 아이들이 속출하는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런데 동지의 가족들은 그 최악의 기아상태를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 더 심각하게 맞게 되어 있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율어를 언제까지 장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율어를 오래도록 장악할 수 있다면 그 문제 해결은 간단했다. 지주에게 빼앗기지 않는 상태에서 율어의 농사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했다. 집집마다 배급을 할 수도 있었고, 그것이 장애를 받으면 일시에 율어로 이사를 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율어를 언제까지 장악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가변적이었다. 상대방과의 힘의 관계에 있어 언제든지 상황이 나아질 전망은 희박한데 반해 저쪽은 체계적인 무장화 작업을 꾀해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울한 소식은 제주도 항쟁이 거의 막바지로 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어진 줄기라고는 없는 외따로 떨어진 하나의 산이면서 섬인 그곳에서 벌써 만 일 년 동안 투쟁을 벌여왔는데 그 결과는 절망 쪽으로 기울어있었다. 그런 결과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구구법 산수처럼 간단명료하게도 힘의 약세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는가, 투쟁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염상진은 언제나 그 벽에 막혔고, 그 벽을 허물어뜨리지도 뛰어넘지도 못했다. 다만,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생각을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다 적극적인투쟁이었다. 오늘의 작전지역은 보성이었다. 군수가 제 아버지의 칠순잔치를 흥청하게 벌인 뒤끝에 계엄군과 경찰을 모아 한턱을 낸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기왕 차린 음식으로 잔치 설겆이를 할 겸 생색을 내자는 것이 군수의 속셈 같았다. 아들이 군수질 해먹게 가르쳤으면 그 애비가 일정치하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보나마나 뻔한 노릇인데, 그렇게 오래 산 것이 또 무슨 대수라고 아들놈은 이 춘궁기에 잔치를 벌이고 흥청거리는 것인가. 염상진은 속이 뒤틀리면서도, 어찌 됐든 그런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준 데 대해서는 군수가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오판돌에게 조성과 보성의 중간 길목에 매복하게 하고, 염상진은 이해룡과 함께 보성으로 진입했다.

"정보대로라면 경찰서엔 보초 정도밖에 없을 거요. 그러나 사전에 정확히 탐지한 다음 행동하시오. 무기 확보가 완료되는 즉시 퇴각하시오. 지금부턴 독립작전이요."

염상진은 이해룡에게 지시했다. 아무리 술에 취하고 있는 적이라고 하나 접전을 예상하면서 그 임무를 이해룡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군수의 집은 향교 옆이었고, 정원수가 많은 널찍한 마당의 차일 밑에서는 낭자한 웃음과 함께 술판이 한창이었다. 두 개를 잇댄 차일 안에 다 찰 정도로 사람이 많았고, 여기저기에 총들이 기대어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했다. 상황으로 보아 기습적인 집중공격이 효과가 클것 같았다. 따앙- 염상진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신호로 차일을 향해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그림자들이 여기저기서 담을 타넘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뒤엉키고 엇갈리는 속에서 마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비명소리는 사라져버리고 총소리만 울렸다.

"사격 중지!"

총소리가 뚝 멎었다. 널부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 피 냄새에 섞일 뿐 집안은 적막에 덮여 있었다.

"빨리 저 총들을 들어라, 출발이다!"

염상진의명령에 따라 그림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골목의 어둠 속으로 묻히자 여자들의 외침과 울음소리가 터져 올랐다.

 

 

15.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심재모가 보성이 공격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잠이 설핏 들어, 어디인지 모를 산중을 혼자 헤매는 궂은 꿈을 꾸다가 깨워 일으켜졌다.

"대장님 , 대장님 , 보성이 공격당했습니다."

잠과 꿈의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그의 정수리를 친 숨 가쁜 소리였다.

",뭐라고!" 그는 왼쪽 손에 바지를, 오른쪽 손에 시계를 집어 들며 소리쳤다.

"보성이 공격을 당했읍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똑같은 말 두 번씩 할 거야! 전체상황 보골 하란 말야, 전체상황!"

그는 바지를 꿰입으며 몸서리치듯 소리 질렀다.

"전 그것밖엔 모릅니다."

심재모는 그때서야 문득 정신이 들듯 문 밖에 서 있는 것이 새까만 사병임을 깨달았다.

"알았다. 먼저 가라."

미안함을 표하기라도 하듯 그는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경찰서로 나온 심재모는 인명 손실, 무기 망실 등 .상상할 수없는 피해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 새끼들이 도대체 지금이 어떤 상황이라고 술을 처마시고 자빠졌어. 쌔끼들, 뒈져서 싸다."

하얗게 변한 얼굴의 부분부분이 푸들거릴 만큼 감정이 격해진 심재모는 책상을 걷어차며 외쳤다. 그런 그의 모습께서 한 인간의 괴로움과 절망스러움을 느끼며 권 서장은 그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사령관님, 엎지러진 물입니다." 심재모는 어금니를 맞물며 숨길을 다잡았다. 팔에 지그시 가해지는 권 서장의 힘에서 심재모는 여러 가지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 흥분은 무용지물이었다. 타박도 무용지물이었다. 오로지 남은 건 사태의 수습뿐이었다.

"그런데초저녁에 당한 놈의 일을 한밤 중에사 보고를 하다니,, 그놈들이 다 정신 나간 놈들 아닌가 말이오."

심재모는 진한한숨을 토했다.

"아마도 피해 수습을 하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습니다.“

권 서장이 심재모 앞으로 담뱃갑을 내밀었다.

"보고라도 빨리 했어야 거길 갈 수 있었을 게 아뇨."

"천상 첫 기차를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수습책이나 강구하시지요."

권 서장은 심재모가 도보 행군을 강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속보행군을 한다 해도 도착시간은 기차를 타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거였다.

"도리 없지요."

심재모는 의자에 몸을 부렸다. 자애병원 전 원장을 동행시킨 심재모는 분대병력을 이끌고 첫 기차를 탔다. 잔칫집이 초상집으로 변해버린 현장의 모습은 참혹하고도 비참했다. 핏자국을 덮느라고 마당에는 색깔도 선명한 황토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속을 뒤집는 피비린내가 역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가마니때기를 뒤집어쓴 시체들은 담을 따라 즐비하니 누워 있었다. 시체는 보고 받은 것보다 두 구가 더 많은 서른한 구였다. 왜 두 구가 더 많은지를 심재모는 묻지 않았다. 중상자가 사망자로 바뀌었을 것임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추가된 두 구는 어느 쪽이요?"

심재모의 입에서 처음 튀어나간 말은 이랬다.

"예에?"

심재모의 옆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경찰서장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고,

", 네에, 군인이 아니고 경찰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는데, 핼쑥한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군인 열넷, 경찰 열일곱의 사상자를 전 것이다. 열넷이면 보성 병력 반을 잃은 것이었다. 접전도 아니고 술을 퍼 마시다가심재모는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운 허망감으로 거적 쓴 시체를 바라보았다. 선임하사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살았더라면 그를 그대로 살려둘 것 같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피해에 비한다면 죽은 선임하사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은 칠 할의 인명 손실을 당한 형편이었다. 선임하사는 그나마 반은 야간 근무를 시킬 것이었다. 무기 망실까지 합치면 경찰조직은 완전히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잔치를 벌인 장본인인 군수와 잔치 참석을 선도한 경찰서장은 죽음을 면하고 살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마당의 아랫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대청마루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가 사태가 벌어지자 혼비백산 방으로 뛰어들어, 다시 다락으로 기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심재모는 경찰과 구분되어 있는 부하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거적을 들춰가며 확인했다. 사람의 죽은 모습은 언제 보아도 정떨어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총을 맞고 죽은 모습은 그 도가 한층 심했다. 그리고 똑같은 수의 사람이 잠들어 누워 있는 것과 죽어서 누워 있는 경우와는 이상하게도 죽은 쪽이 훨씬 많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장례 준비는 어찌 되고 있읍니까."

"예에, 지금 목수를 불러 모아 관을 짜고 있구만요."

"서두르시오, 시간이 없소. "

심재모는 부대 점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통제선을 벗어난 골목에서부터는 사람들이 법석거리고 있었다.

", 군인 대장인감마."

"그러시. 속이 씨리씨리 허겄네웨."

"금메, 좋기사 헐라등가."

"멀라고 뒷북 치로 왔으까.“

"높은 사람잉께 뒷북 치제.“

이런 수군거림이 스치는가 하면,

"음마, 저 사람 대장인갑는디, 꿈 잘 꿨네."

", 키도 질고 인중도 질어 명언 질겄넨네

"몰르겄네, 워쩔란지."

이런 뒷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심재모는 그 숨죽인 짧은 말들에서 묻어나는 야릇한 비아냥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씩 놓고 보면 트집이나 흥을 잡을 데가 없는 말들인데, 그 어조나 말하는 분위기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고, 거부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과연 할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심재모는 이 지역에 파견 근무를 나온 이후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되씹고는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심재모가 보성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벌교는 염상진 부대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염상진 부대는 읍내 중심부를 향해 들몰과 칠동 양쪽방향에서 협공을 가해왔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낮의 기습인데 다가, 협공이었고, 지휘관도 없는 공백상태여서 읍내의 방어는 오래가지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권 서장은 강 상사와 함께 병력을 집결시켜 적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심리상황적으로도 열세였다. 양쪽에서 모두 밀리기 시작한 군인과 경찰은 결국 경찰서로 다시 집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총소리만 요란할 뿐 읍내 중심부에는 사람의 그림자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쩔 랍니까!"

강 상사가 숨을 헐떡거렸다.

"여길 사수합시다."

권 서장도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미쳤습니까, 사수하게. 죽어서 지켜져야 사수지, 지금 형편으론 죽고도 뺏기게 생겼어요."

"그럼 어쩌잔 거요?"

"후툅니다. "

"후퇴? 심 사령관도 없는데?"

"정신 차리시오! 현재의 지휘관은 서장님이오."

"좀 생각해봅시다."

"아니, 적이 코앞에 닥쳤는데 뭘 생각해요. 좋소, 난 내부하들 데리고 후퇴하겠소. 후퇴도 작전이요!"

강 상사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권 서장도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시오, 다 같이 후퇴할 테니까!"

그들은 철교를 목표로 삼아 방죽을 따라 후퇴하며 총질을 했다. 협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퇴로는 포구를 건너는 것이었고, 포구를 건너기에는 소화다리보다 철교가 더 가까웠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철교 쪽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올랐다. 칠동 쪽에서 공격해온 적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방죽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막다른 길이었다.

"물로 뛰어들어 ! 물로!"

강상사가 방죽의 비탈을 뛰어 내려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물을 건너라, !“

권 서장도 소리치며 방죽을 굴러 내렸다. 군인이고 경찰이고 우르르 방죽을 타고 내려 갈대 순이 타박하게 돋아 오른 뻘밭으로 뛰어들었다. 썰물 때라서 민물만 흐르고 있는 포구는 깊지 않았다. 제일 깊은 곳이 불두덩께였다. 총알이 물 여기저기에 박히며 물방울을 튕겨 올렸다. 비명을 지르며 한 명이 물에 머리를 박았다.

"붙들어라, 붙들어!"

권 서장은 권총으로 물을 치며 외셨다. 물을 벗어나 뻘밭을 돌파하는데 또 저쪽에서한 명이 꼬꾸라졌다.

"이 새끼들아, 끌어, 끌고 가아!"

강 상사의 발악적인 외침이었다. 그들이 방죽을 거의 타넘었을 즈음에 적들은 건너편 방죽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포구를 사이에 두고 방죽을 은폐 삼아 그들은 대치하게 되었다.

"적을 더 추격할 필욘 없다. 이 상태에서 적을 경계하고, 이상이 발생하면 즉시 보고하도록."

염상진은 어림잡은 적의 수와 맞먹게 병력을 배치하고는 나머지 병력을 뒤로 빼냈다. 그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심재모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역을 중심으로 배치시켰고, 다른 한쪽은 소작권을 탈취한 지주들을 잡아오도록 풀었다. 벌교에 머무를 시간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보성을 공격할 때 이미 염상진은 벌교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재모를 보성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보성 공격의 성공과 직결된 문제였다. 보성이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심재모는 지난 번처럼 병력을 이끌고 보성으로 출동할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 기회를 이용해 벌교를 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보성 공격이 예상보다 큰 성과를 거두게 되자 염상진은 벌교 공격 실시에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지난 번에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심재모는 과학화된 통신망을 이용해 기동성을 발휘한 것이고, 자신은 야산대의 생명인 주력의 기민함을 동원해 기동성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런 똑같은 방법으로 공략해서 타격을 입히지 않고서는 지난번에 입은 심신 양면의 상처가 아물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일이었다. 보성에서 퇴각한 염상진은 네 시간의 충분한 잠을 잔 다음 새벽 어둠살을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지숙과 선을 대고 있는 칠동의 거점을 통해 역시 심재모가 보성으로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염상진은 이번 공격에 또 하나의 의미를 새기고 있었다. 야산대는 밤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움직인다는 과감성을 보이는 점이었다. 강동식은 네 명의 조원을 데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세 지주를 찾아내려고 횡계다리 옆 동네를 뒤지고 있었다. 첫 번째 집도, 두 번째 집도 발칵 뒤집었지만 찾고 있는 주인들은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고하는가 하면, 어디 갔는지를 모른다고 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없는 한 아무 소용이 없는 말들이었다. 잡아가야 할 놈들을 잡아가지 못하는 초조감으로 강동식은 세 번째 집을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예 말이요, 외서댁 바깥양반이 맞제라!"

느닷없이 들려온 여자 소리에 강동식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런디, 누구요?"

젊은 여자가 황급하게 다가섰다.

"나 외서댁 동문디, 아까 지내갈 적에 설핏 본께 그런 것 겉애서 기둘리고 있었소. 워찌, 외서댁 소식언 다 알고나 있으시요?"

"워째, 무신 일 있소?“

강동식의 얼굴이 긴장되며 의혹의 빛이 드러났다.

"음마, 얼굴 본께 암것도 몰르는갑네. 갸가 염상구 놈 애 배갖고 저수지에 빠졌다가 되살아 난거 몰르요?"

", , 머시여!"

말을 더듬는 강동식의 부릅뜬 눈에 불이 켜졌다.

"아이고 시상천지에, 공산당 허는 것도, 좋제만 공산당 허다가 마누래 망쳐뿔고, 그 공산당 워디다 써묵을라요?"

", 워찌 된 일인지 세세허게, 세세허게 말혀봇씨요."

"세세허게 말허고 말 것도 움소. 아까 말헌 것이 다요. 죽을라고 저수지에 빠진 것 보먼 둘이 서로 좋아 배가 맞은 거이 아닌 것이야 틀림 웂고, 되살아나 갖고 친정에 쪼간 있다가 장흥으로 갔다요."

"장흥 ?"

"이모 집이 있담서요."

강동식은, 언제 떠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리 더 이상 물을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아내가 테러를 당했을 것 같은 염려 때문에 명령을 어기곤 집을 찾아갔다가 안창민 동무가 총상을 입는 의외의 사건을 일으키게 된 다음부터 아내 생각에는 일체 문을 닫았었다. 조직의 규율도 규율이었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마누라에 연연하는 것이 사내답지 못한 짓이라 여겨졌던 때문이다. 오로지 강하고 순결한 혁명전사 되기를 일념으로 삼고 생활하는 동안에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대장의 동생 염상구와 대장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몰랐을 리가 없는 일이다. 대장은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더우기 군내나 읍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말을 것이 없다. 대장은 다 알면서도 자신에게 감춰온 것이다. 안창민, 하대치도 모르고 있을까. 그들도 알면서도 함봉을 했을지 모른다. 대장의 명령이라면 그들은 능히 그랬을 것이다. 이 일을 어째야 좋은가. 염상구 놈을 어째야 하는가. 그놈은 당의 원수인 악질 반동만이 아니라 내 개인의 원수가 아닌가. 그놈을, 그놈을

"강 동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상 싶은 디라"

넋을 빼고 서 있는 강동식을 옆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일깨웠다.

", 알겄소. 어여 움직기립시다."

강동식이 앞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러나 그 걸음걸이는 아까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어느 조나 마찬가지로 지주들을 하나도 잡아오지 못했다.

"집구석이란 집구석은 다 이 잡디끼 흘랑 까뒤집고, 부치기 부치데끼 엎어뿔고 뒤집어뿔고 험시로 눈얼 뒤집고 찾아도 요것덜이 땅으로 기들어 갔는지 하늘로 올라 붙었 뿌렀는지 고랑댕이도 뵈덜 않트랑께요. 아매 요것덜이 작년 시월에 똥줄 타게 혼난 뒤로 총소러만 났다 허먼 워디로 째는 연십얼 날마동 헌 모냥이요.그러덜 않고서야 절마당 검불 쓸데끼 요리 말끔허니 웂어질 리가 웂덜 않겄는가요?"

하대치의 긴 설명에 입을 꾹 다문 염상진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하대치의 말에 타당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대치의 판단은 정확했다. 작년 시월의 사건을 겪은데다가 염상진이 율어에 진을 치고 있어서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지주나 유지라는 사람들은 총소리만 울렸다 하면 뻘밭의 꽃게처럼 순식간에 몸을 감출 수 있는 자기들 나름의 피신처를 다 갖추어놓고 있었다. 염상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자아, 우리 볼일은 다 끝났소. 그만 떠납시다."

적의 사살을 확인하지 못한 채 총 여섯 자루를 전리품으로 거둔 염상진은 부하들을 앞세워 퇴각을 시작했다. 그들이 읍내에 머문 시간은 두 시간이었고, 읍내는 두 시간 동안 그들의 해방구였던 셈이다. 그들은 아무런 추격도 받지 않고 장터 길을 지나고, 쇠머리를 돌아, 국도를 따라 율어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그들이 지나는 길목에는 몇몇씩 모여선 사람들이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도 그 사람들 앞에 묵묵히 지나쳐갔다. 조성의 병력까지 모아 심재모가 역에 내려선 것은 그들이 떠나고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사망 셋에 부상이 여섯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권 서장은 상황보고를 마쳤다. 심재모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루 동안에 당한 일이 꼭 꿈속에서의 일만 같았다. 보성 경찰서장도 염상진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고, 이곳의 형사부장도 염상진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고 했다. 어떻게 보성을 치고 다시 벌교를 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장님, 조성 병력은 어떻게 할까요?"

강 상사가 다가서며 물었다.

"빨리 돌려보내시오."

심재모가 앞만 바라본 채 말했다. 그때 목을 늘여 뺀 염상구가 가느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어슬렁어슬렁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제서야 권 서장은 그의 모습을 그동안에 볼 수 없었음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를 외면해버렸다!

 

김복동의 홀아버지 김 노인이 눈을 감았다. 육십을 채우지 못한 쉰아홉의 나이였다. 열일고 여덟에 장가를 가고, 서른 고개를 넘으면서 서넛 자식들을 거느리며 소작생활을 꾸려가고, 마흔 고개를 넘기면 서는 억지기운을 쓰고 살아온 이십 년 세월이 삭신 마디마디를 갉아내려 마흔 중간고개를 넘어가지 못하고 불붙은 짚단 무너져 내리듯 허망하게 푹푹 쓰러져 가는 것에 비하면 쉰아홉의 나이는 그래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살이였는지도 모른다. 비록 환갑을 목전에 남기고 떠났을망정. 환갑 진갑 차려먹고 세상 떠나는 것을 천복 중에 천복을 누리는 것으로 여겨옴은 농사의 중노동과 소작의 가난에 시달리면 서는 도저히 그 나이까지 삶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으면서 손자를 보고, 마흔 다섯이 되면 중늙은이로 불리며 손자 오줌으로 옷섶을 적시고, 쉰 고개에서 늙은이가 되고 마는 궁핍한 인생살이에서 환갑 진갑 상을 받아본다는 것은 기름지게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일 뿐 소작살이를 면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둠 속에 멀리 있는 불빛처럼 까마득한 이야기였다. 김노인의 초상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봄 초상치고도 유별나게 냉기만 돌고 적막했다. 아들 김복동이라도 있었으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가 갇힌 신세니 초상이 그리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집안 형편으로는 김 노인이 죽은 것보다 김복동이가 갇혀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였고, 김복동이가 갇히지 않았더라면 김 노인도 저승길을 그렇게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덜 아부지가 순천으로 넘어가뿔자 노친네가 나보담도 더 애타허고 상심허고 허드랑께요. 땅뙈기가 있으니 뒷수발얼 허겄냐, 폴 몸띵이가 있으니 재판 비용얼대겄냐, 혀쌈시로 맴얼 못 잡고 허둥기리고, 밤잠도 못 자고 그랬제라. 시상 뜰라니께 그리 맴얼 쓰신는지, 그 일로 상심이 심혀서 시상얼 뜨신는지, 몰를 일이구만요."

곡성도 내지 않는 장흥댁이 드문드문 찾아든 사람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가 곡성을 내지 않아도 그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던한 며느리였다는 것을 감안해서가 아니라 남편일로 그녀의 가슴에 들어앉은 근심의 덩어리를 다 헤아리고 있었던 터였다. 전 한 가지도 제대로 부치지를 못했다. 고기나 생선은 아예 엄두를 내지 않더라도 돈 안 드는 호박전이나 고추전이나마 부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호박이나 고추는 손바닥만한 텃밭에 씨로 박혀있는,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찬거리나 전거리 하나 될 만한 푸성귀도 없는 지랄 같은 계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거적쌈 하듯 하는 장례라 해도 맹물로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출상 전까지 끼니 따라 영전에 상을 차려야 하고,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이 궂은 일 추슬러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최소한의 술과 그에 따른 안주가 장만되어야했다. 제일 만만한 것이 술로는 막걸리요, 안주로는 콩나물과 꼬막이었다. 그것 말고도 장작관 하나는 장만해야 했고, 관 옮겨 묏자리 만들 인부를 사야 했다. 그런 것이 다 돈이고, 빛이었다. 마삼수의 아내 목골댁과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은 초상이 났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장흥댁네로 와서 물일을 차고 나섰다. 이웃 간의 정리로도 의당 그리 할 일이었는 데다가 그녀들 사이에는 같은 근심을 품고 있는 끈이 이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돈으로든 곡식으로든 조의를 표하고 싶음이 간절했지만 그녀들은 빈손으로 초상집 사립을 옆 걸음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물일을 더 지성스럽게 말끔하게 해내려고 모두들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서로 등지거나 마주보거나 해가며 일을 하다가 번갈이를 하듯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그리고는 흠칫 하며 상대방의 눈치를 훔쳤고, 상대방은 못들은 척 물소리를 더 크게 내거나 삭정이를 힘쓰며 부러뜨렸다. 서로가 가슴에 찬 근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마음 썼지만 근심이란 술 괴듯 하는 것인지 한숨은 무심결에 흘러나와 버리고는 했다. 그녀들은 이렇듯 서로 마음 쓰면서도 어느 결엔지 자신들의 신세 한탄에 입을 맞추고 있고는 했다.

"참말로 이적지 암 소식도 웂으먼 워찌 된 일이까이, 지닌 돈 한푼웂이"

"긍께 나가 죽고 잡은 맴뿐이란 말시. 워디럴 워쩌크롬 쏘대고 댕기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요 땁땁헌 가심이 재가 다 되야뿌렀네."

남양댁은 진하고 긴 한숨을 물었다. 굶주림으로 살이라고는 없이 깡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은 검게 타들고 있었다. 예쁘다는 말을 듣게 했던 제대로 생긴 이목구비도 그런 얼굴의 바탕에 파묻혀 전혀 드러나 보이지를 않았다.

"자네 맘 워찌 몰르겄는가. 내 속 짚어 넘 속이라고, 나가 요리각다 분헌디 자네 속이야 더 말헐 것 웂제. 그려도 맘 약허게 묵지 말드라고, 우리. 당허는 남정네들헌테 비허자먼 우리야 용궁에 앉었는 심이고, 새끼덜 땀세라도 맘 독허니 묵어야제 워쩌겄는가."

목골댁의 말은 꼭 남양댁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기미가 두껍게 앉은 목골댁의 얼굴은 냠양댁과는 반대로 살이 올라 보였다. 그러나 그건 살이 아니라 검누른 빛과 함께 돋아 오른 부황난 부기였다. 굶기는 거의 비슷하게 했으면서도 목골댁이 먼저 부황기를 드러내는 것은 그만큼 체력이 약하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색이 검게 변하면서 살가죽이 말라붙는 것으로 보아 남양댁도 멀지 않아 부황기를 드러내게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제 나이 스물넷의 동갑나기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얼굴에는 나이 스물넷인 여자가 지녀야 하는 젊은 생기도 탄력도 없었다.

"면회는 안직도 못 갔제?"

남양댁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다른 말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 돈도 웂는디다가, 또 여그 장흥댁이 시아부님헌테 매여 있니라고."

"재판 뒷수발이야 못혀도 면회나 자주자주 댕기소. 갇힌 사람이 을매나 답답허고, 집 걱정 되고 그러겄는가."

"맴이야 하로에 열 분도 가고 잡지만 거그가 읍내도 아니고 순천인디 돈이 을매나 깨지겄는가."

"돈이 먼첨인가, 사람이 먼첨이제, 나야 냄편이 갇혀 있기만 험사 걸어서라도 면회 댕기겄네. 소식 몰르고 요리 깝깝허니 앉었응께 냄편이 하늘이란 말 인자 알겄고,이리 맘이 씨리고 아픈디. 워디서 멀허는지"

남양댁의 목이 잠겨들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그려어, 남정네 하나가 지집 목심이여. 외상이먼 소도 잡아묵는 판인디 냄편 구허는 일에 빛돈 무서바 허겄는가."

그녀들은 더 말이 없었다. 서로가 남편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허어, 워째 뚱금웂이 이 영감이 저승 행차시여어. 아덜 워찌 되는 지도 안 보고 말이시."

상가 집을 찾는 예절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커다란 목소리가 아무거침이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상가 집에서 마신 술이 취해 가지고 노래를 불러대는 놈처럼 그 말투나 목소리에는 조문을 하자는 뜻이 전혀 없이 망나니짓이나 하자고 덤비는 놈 같았다.

"아니, 워떤 넋 나간 자석이여!"

남양댁의 얼굴이 싹 변하여 문쪽으로 돌아섰고, 목골댁도 행주든 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남양댁이 주춤하며

"문댕이!"

했고, 뒤따라 목을 내밀던 목골댁이 화답이라도 하듯

"오살허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띈 것은 마름 허출세였다.

", 두 댁네가 애쓰는구마. 하먼, 그래야제, 모다 한배 탄 몸들잉께로."

합죽한 얼굴의 허출세는 눈에 얄궂은 웃음을 피워내며 그녀들에게 아는 체 했다. 남양댁과 목골댁은 마지못해 눈 인사를하고 뒷걸음질로 그를 피했다.

"저 문딩이 웃는 거 참말로 징상시러바 못보겄네."

남양댁이 어깨를 떨었다.

"그 염생이 웃음이야 별호난 것 아니드라고, 즈그 마누래 속불 질르니라고."

목골댁은 예사롭게 대꾸했다. 허출세가 여자들만보면 그 묘하게 피워내는 눈웃음은 여자들 사이에 소문이 나있었다.

"별호난 것이야 허나마나 헌 소리고, 나 말은, 오늘 웃는거이 더 징허고 징허다 그런 말이시. 자네는 안그리 생각킨가?"

"금메, 자네 말 듣고 봉께 그런 상 싶으네, 쩌눔이 필경 남정네덜 웂응께 염생이 웃음 더 진하게 웃는 것이시."

"문딩이 잡것, 백여시맹키로."

남양댁이 혀를 찼다.

"쩌것이 참말로 백여시는 백여시여, 우리넌 소작은 소작대로 띠이고 요꼴할라 됐는디도 쩌눔은 새 쥔 따라감서 그대로 마름자리 물고 늘어져 있는 것 보면."

"쩌눔이야 살얼름판도 안 빠지고 건넬 눔 아니등가.“

"금메, 그라고 보면 우리 남정네덜이 워디가 모지랜 것 아니까아?"

목골댁이 푸석푸석한 얼굴에 의문을 담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란지도 몰르제, 안직 젊은께."

남양댁이 한숨을 내쉬며 몸 무겁게 일어났다.

", , 세상 이치라는 것이 해가 뜨먼 달이 지고, 달이 뜨먼 해가 넘어가대끼 다 순서가 있고 상하가 있는 법이다 이거시오. 나라가 공산당이 나쁜께 허덜 마라 허먼 아래서야 그 말 그대로 따라야 나라가 채가 슬 것인디, 요런 느자꾸웂은 것덜이 공산당이 즈그 할애비 위패도 아니겄고, 죽자 사자 고것 떠받듬서 저 지랄발광들잉께, 요것덜 씨럴 싹 다물레 뿔자먼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웂이다 그것이요. 고것이 머시냐, 각지 빨갱이럴 붕어몰이 허대끼 싹 다 지리산으로 몰이럴 혀서, 거 히로시마에 떨어티린 원자폭탄얼 딱 한 방만 떨어티레뿌는 것이요. 그러먼 빨갱이는 씨도 안 남을 것인디, 그 간딴헌 방법을 나라가 몰르고 있다 그것이요.“

영전에 건성으로 절을 해치운 허출세는 한장수 노인을 상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한 노인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한 노인은 초상이 나자마자 김복동이가 없는 영전을 지키고 있었다. 사랑방에서 얽은 끈끈한 정이 시키는 일이었다. 밑천이 없어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있는 지삼봉이가 주인에게 사정을 해 새경 쌀 한 말을 미리 받아 선뜻 내놓은 것도 그 정이 시킨 일이었다. 지삼봉의 그 마음씀이 너무 고맙고 눈물 겨워,

"니가 사람이다, 니가 사람이다."

한 노인은 목이 메었던 것이다.

"나 말이 으쩌요? 사람이 말얼 혔으먼 쓰다 달다 무신 표식이 있어 야제라."

허출세가 한 노인을 치떠 보았다.

"존 생각 겉으요."

"금메요, 속으로는 벨로 안 존 것 겉은디라?"

한 노인의 무관심에 기분이 상한 허출세는 그렇게 오금을 지르고 나서 , 홱 돌아앉아 두 다리를 토방으로 내렸다.

"나가 물려도 되게 잘못 물린 상 싶은디, 워째, 재판은 워쳤게 돼갈 눈칩디여?"

허출세는 고약스런 얼굴을 해가지고 토방에 서 있는 장흥댁에게 물었다.

"안직 면회럴 못 갔구만이라."

"워째라!"

허출세는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 질렀다. 장흥댁은 고개를 숙였다. 부엌에서는 남양댁과 목골댁이 몸을 움츠러뜨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그가 부리는 역정이 무엇 때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두 소작이 떨어진 데다가, 하나는 어디론지 도망을 가버렸고, 둘은 갇혀있는 신세니 빚을 못 받게 될까봐 그는 몸이 달고 있었던 것이다.

"싸게 면횐지 쥐 콧구멍인지 댕게 와서 재판이 워떤 꼴로 돼갈란지 나헌테 알리씨요."

허출새늘 이렇게 내지르고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토방을 내려섰다.

그는 사립으로 걸어가면서 부엌 쪽을 옆 눈질하고 있었다.

"호로자석 겉으니라고"

한노인은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상가 집에 빈손으로 오다니, 하는 말을 삼키고 있었다. 정작 자신도 빈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그렇게 면목 없고 죄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죄가 아니라 가난이 죄라서 어찌 하는 도리가 없었다. 상제도 없고, 특별한 조객도 없고, 구색 맞출 것도 없는 장례라서 격식에도 없는 이일장을 하기로 했다. 지삼봉과 함께 밤샘을 한 한 노인도 침통한 얼굴인 채 이일장 치르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삼봉이가 지게에 관을 짊어졌고, 한 노인이 그 앞을 시름없이 걸어가며 요령의 울림도 없는 길 닦음 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인생 육십 한평생을 못 채우고 나는 가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삼수갑산 넘을 적에 왜왔느냐 물음 받고 내 뭐라고 답변할꼬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굶고 굶어 왔다는 말 서럽고도 남새시러득병했다 답할라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한 노인의 사설을 잇고 받치는 소리에 언제부터인가 지삼봉의 컬컬하고도 어기찬 목소리가 가락을 타고 있었다. 한 늙은이와 한 젊은이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솟아올라 터지는 것 같은 그 길게 늘어지면서 감기고 다시 풀려 휘돌아 흐르는 소리는 서러운 울음인 듯 괴로운 통곡인 듯 사월의 허기진 푸름 속으로 물굽이를 이루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허출세가 남양댁의 지게문을 흔들어대다가 끝내는 문에 구멍을 뚫고,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뽑아낸 것은 그날 밤이었다.

"소리 질를라요, 소리."

"맘때로 혀 나야 남자고, 배 맞춘 담이라고 소문 내뿔 것잉께 ."

허출세가 방으로 들어서며 내뱉었다.

"금메 , 워쩔라고 이러요, 워쩔라고."

저고리 섶을 틀어잡은 남양댁은 방구석으로 몰리며 숨이 잦아들고 있었다.

"남녀가 밤에 만냈으먼 워쩌는지 몰라서 그러는겨? 몰르먼 인자부텀 갤차줘야 쓰겄구만. 강동기 잡겄다고 파수보든 눔덜도 지물에 기운 빠져 다 가뿔고, 인자 자네허고 나뿐잉께로 선선허게 허드라고. 강동기가 빚돈 갚기는 다틀려 묵었응께 자네가 몸으로라도 갚어야 헐 것 아니겄어? 근디, 나도 사람인디, 그리 인정머리 웂이는 안 허겄어. 나말 얌전허니만 잘 들으먼 새끼덜허고 죽 낋일 곡식은 줄 챔이여 죽으먼 썪을 몸띵이고, 한 바가치 물이먼 깨끔허게 표도 안 나는디, 처녀도 아닌 몸에 정절 지키겄다고 새끼덜허고 굶고 부황들어 뒤질 끼여? 나 말만 들으먼 서로서로 존일이고, 쥐도 새도 물르는 일이여. 워쩔끼여?"

허출세는 바득바득 다가섰다.

"무신 일이고 다 헐 팅게 지발"

", 시키는 일이나 지대로 혀!"

허출세는 남양댁을 와락 끌어안았다.

"안돼라, 죽어도 안돼라.“

그녀는 남자를 떠다 밀었다. 그러나 남자가 떠밀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이불 위로 뒹굴어졌다. 그녀는 내리 덮이는 남자의 어깨를 떠밀어내며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암컷이야 발광을 헐수록 맛난 법잉께. , 발광을 혀야 잡아묵을 맘이 동헌다니께,"

남양댁의 허벅지를 타고 앉은 허출세는 이렇게 씨부렁이며 그녀의 두 팔목을 한 손에 몰아 잡았다. 고리고 다른 손으로는 속곳을 끌어내렸다. 그녀는 다리를 비비꼬았지만 이미 남자의 손이 불두덩 아래를 파고들었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그녀의 몸에는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맨살이 닿는 감촉을 허벅지에 느낀 그녀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때마침 떠밀려오는 남자의 몸에 부딪쳐 그녀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의 몸이 실리는 압박과 함께 그녀는 하체를 뒤틀었다.

"어엄니"

허출세는 옷을 챙겨 입으며,

"여자 조갑지 진짜 맛이야 아럴 한둘 뽑은 담부텀이란 것이 영축웂은 말이고, 굶고 살아서 거그 살맛도 찔게진 것잉가, 짠득짠득허니 묵을 만허시"

하고는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나가 곡식 들고 댕길 체면이 아닝께 요것으로 폴아다 묵소."

돈을 그녀 알에 던졌다.

"가지가씨요. 그라고 다시는 오지 마씨요."

남양댁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말 씹히지 말어. 굶고 살아지는 목심 웂은 법잉께."

허출세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방을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잠자리를 수습하려고 등잔에 불을 당겼다. 방바닥에는 구겨진 지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건 쌀 한 홉 값에 불과한 십원 짜리였다. 그녀는 그 돈을 와락 모아 잡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굻고 머리를 방바닥에 박은 채 흐느끼면서 그 돈을 갈가리 찢어대고 있었다. 이틀이 지난 밤 허출세는 목골댁의 지게문을 흔들었고, 문을 열어주지 않자 구멍을 뚫었으며,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뽑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고, 같은 액수의 지전을 던지고 나왔다. 그러나 그는 장흥댁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장흥댁은 두 여자보다 열 살 가까이 더 먹었던 것이다. 염상진네에게 읍내를 두 시간 동안 장악 당한 사건은 이삼 일에 걸쳐 지주들 사이에서 불만스럽게 오가던 말이 뭉쳐져 마침내 문젯거리가 되었다. 공개적인 책임 추궁을 하자는 데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만약 미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를 곱씹게 되었고, 잡혔으면 죽었다는 너무나 분명한 결론 앞에서 새삼스럽게 끼쳐오는 공포를 느껴야했고, 먼저 염상진에게 치를 떨다가 그는 증오한다고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러자 눈앞의 대상으로 잡힌 것은 당연히 심재모였고, 도대체 그놈은 뭘 하고 자빠져 있는 놈이냐고 일시에 의견이 모아지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느낀 공포감과 두려움과 생명에 대한 애착과 염상진에 대한 증오심과그런 것들이 뒤죽박죽된 감정풀이를 심재모에게 하려 들었다. 도저히 그런 놈 믿고 살 수 없으니 당장 갈아치우자는 것이 그들의 흥분된 의견이었다. 그 움직임을 파악한 유주상은 그것을 또 하나의 효과적인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최익달을 앞세워 그런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유도했다. 물론 좌익척결위원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임으로 했다. 중국집에 모여 앉은 그들은, 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의 말에 촉발되어 흥분하고, 타인의 말을 들으면서 군중심리에 말려 흥분하고 해서 중구난방이었다.

"염상진이 그눔이 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혀도 철통겉이 방비만 되얐으먼 워찌 시뻘건 대낮에 고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그것이요. 그눔 모강댕이럴 당장에 쳐뿌러야 허요."

"하먼이라, 당장에 쳐뿌러야 허고말고라. 다덜 생각혀봅씨다. 대체 여그 뫼여 앉은 우리덜이 다뉘기요? 하늘겉은 지체가 아니냐 그것이요. 근디, 그 지체, 그 체면 다 똥 묻쳐감서 그개녀러 빨갱이 새끼덜 피해 도망해야 허고, 그 호로쌍녀러 것들이 감히 워디라고 우리덜 집얼 그 꼴로 난장판얼 맹글 수 있냐 그것이요. 고것이 대체 누구 책임 이겄소. 그눔얼 지금 당장 잡아다가 우리 앞에 물팍 굻칩씨다!"

"물팍만 끓쳐? 부자지럴 훑어뿌러야제. 고런 빙신 늘고자 겉은 놈."

"여러 말 헐 것 웂이 문제는 말이여, 쥔어런 잘못 모시는 종눔은 삭신 녹아내리게 매질 당허고 내쫓기는 것이 법칙이다 그것이요. 지금 보자먼 대체 이 나라 쥔이 누구요? 바로 여그 앉은 우리 겉은 사람덜일 것이요. 워째 그냐. 나라 쥔이 한민당잉께 한민당얼 떠받치고 있는 우리덜이 쥔이고, 더 세세허게 따지자먼 여그 읍내 쥔이 바로 우리덜이다 그것이요. 허먼, 심가눔이 헐 일언 무엇이냐. 쥔인 우리럴 편안허게, 안전허게 받들어 뫼시는 것이요 .근디, 그 자석이 쥔이 위험허게 불편허게 잘못 뫼셨응께 잡아다가 매 타작부텀 혀얄 것이요."

유주상은 제멋대로 쏟아놓고 있는 말들이 제각기 한 차례씩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바탕씩 자기 말들을 해야 속이 풀릴 것이고, 그래야 계획대로 일을 몰아가기가 수월해질 터였다.

"되얐소. 다아 심가눔 때레잡자는 뜻으로 그 말이 그 말잉께, 워디 유 조합장 말얼 한 분 들어봅씨다."

유주상의 눈치에 따라 최익달이 사람들의 말을 막았다.

"예에, 명색이 청년단장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에 발생한 불미스런 사건에 대하여 면목 없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청년단이란 보조역할일 뿐이지 작전권도 지휘권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청년단장으로서가 아니라, 제가 맡고 있는 소직도 큰 애국하는 자리는 못될지라도 빨갱이한테 미움 사는 자린 것은 틀림없고, 이 고장이 맘에 들어 제가 얼마 전에 논마지기를 장만하다보니 저도 여러분과 같은 입장이 되어 여기나온 겁니다.“

유주상은 여유만만하게 꾸벅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호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을 경청했는데 하나도 틀린 데가 없는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씀이었습니다. 심재모, 그 사람은 마땅히 책임져야 하고, 우리는 또 책임을 추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신 말씀은 다 옳으나, 그러나 정말로 그 사람을 여기에 끌어다가 목을 비틀거나, 무릎을 꿇리거나, 매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나 우리끼리 한바탕 욕을 해대는 것으로 기분을 풀고 끝낼 겁니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감정을 누르고 냉정하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숨을 돌릴 겸 뜸을 들이기 위해 유주상은 한 숨길 정도 말을 멈추었다.

"에에,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우리의 그런 뜻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문서로 꾸미자는 겁니다. 말로하면 감정이 들어가기 쉽고, 또 날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문서로 꾸미면 감정이 안 들어가 점잖고 확실해지고, 날아가지 않고 언제까지나 남습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여기저기서, 좋소, 좋소, 하는 찬동이 나왔다.

"에에, 그 다음이 일을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모여 앉기는 했지만 개인에 불과 합니다.이런 일은 개인들의 힘으로는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무슨 단체를 만들 수도 없는 일이고 한데, 마침 우리는 지난번에 결성한 좌익척결위원회라는 좋은 단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상당수가 회원이시기도 합니다. 그 단체의 이름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효과가 아주 크리라 믿습니다. 그 단체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일임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유주상은 여기서 말을 끝냈다.

"쪼옿네, 쪼오와."

최익달의 선창으로,

"말 한분 씨어언허게 자알헌다."

윤삼걸이가 맞장구를 쳤고,

"어허, 설익은 국회의원 빰따구 맞겄네. 그리헙시다."

"금메 말이여, 인물맹키로 말도 청산유수시. , 그리허드라고."

모두 흔쾌하게 찬동을 했다.

"에에, 저의 소견에 찬성을 해주시어 고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다시 모이는 것도 어렵고 하니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일임한다는 것부터 문서로 꾸미기로 합시다."

의견을 묻던 유주상의 태도는 이미 바뀌어 일방적으로 일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백지를 탁자 위에 내놓았다.

"돌아가면서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으십쇼. 도장이 없으면. 지장 도 좋습니다."

유주상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물 컵을 들었다.

"워째 종이가 두 장이요?"

누군가가 물었고,

", , 그 말을 깜박 잊었군요. 한 장은 보관해야 하니까 두 장에다 이름을 다 써야 합니다. 한 장에 한 번씩, 두 번입니다.“

유주상은 아차 싶어 말을 힘주어 다지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기까지 했다. 계획대로 일을 깨끗하게 마친 유주상은 중국집을 나온 그길로 경찰서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던 심재모가 유주상을 맞았다. 요즈음 심재모의 심사는 말이 아니었다. 그 어이없는 병력손실을 연대본부에 보고해야 하는 참담함을 겪었고, 욕설이 태반인 연대장의 노발대발을 그대로 뒤집어썼고, 염상진에게 보복당한 패배감에서 벗어날 묘안이 없는 채 신경이 삭아들고 있는데, 지주와 유지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따져 책임추궁하기 위해 모임을 갖는다는 전화를 유주상한테서 받았던 것이다. 그 전화는 연대장의 폭언보다 몇 십 갑절 그의 자존심을 손상하고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아이구 이거, 청년단장 노릇 해먹기 진땀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려, 제가 유도한 대로 일이 무난히 끝났습니다."

유주상은 땀도 안 난 이마를 훔쳤다. 심재모는 아무런 반응 없이 담배를 빼 물었다.

"그 사람들 그거, 처음엔 굉장했습니다. 서로 홍분들을 해가지고 사령관님을 욕해대고, 면전에서 말씀드리기 안됐습니다만, 여기서 몰아내야 한다고, 자기네들의 생명과 재산을 빨갱이들로부터 지킬려면 실력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야단이 났었습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실컷 떠들다가 제물에 지치기를 기다려 설득작전을 폈습니다. 그 얘기야 제 낯내는 것 같으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어쨌든 좌익척결위원회에 일임한다아, 하는 쪽으로 귀결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요겁니다.“

유주상은 양복 속주머니에서 기세 좋게 종이를 꺼내 심재모의 앞에 펼친 다음 손바닥으로 다리미질하듯 종이를 쓸어내렸다. 그것은 중국집에서 받은 두 장의 위임장 중 한 장이었다.

"이걸 찢으십쇼. 그럼 일은 없었던 걸로 깨끗하게 끝납니다."

"수고하셨소. 내 일에 관한 건데 내 손으로 찢고 싶지 않소. 유조합장께서 찢어버리십시오." 심재모는 담배를 끄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그게 좋겠습니다." 유주상은 거침없이 종이를 박박 찢어대며, 짜식이 오기는 창창해서, 비웃고 있었다. 유주상은 통쾌한 승리감에 차서 경찰서를 나왔다. 이곳에서 내쫓기는 심재모의 비참한 꼴이 눈앞에 훤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리벙벙한. 시원찮은 놈은 당연히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가 와야 한다. 볼세비키 혁명,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냐. 엄연히 신분이 다르고, 능력이 다른데 어떻게 모두가 공평할 수가 있는가. 토지개혁, 어떤 날도둑놈들이 떠드는 개소리냐. 왜 남의 재산을 공짜로 나눠먹자는 거야. 공산주의는 단연코 쓸어 없애야하는 돼먹지 못한 정신의 문둥병이야. 유주상은 그 생각을 하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또 열이 치받치고 있었다. 지주들의 움직임을 알았을 때 유주상의 머리에는 그것을 심재모를 치는 또 하나의 힘으로 이용하자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영향력이 절대적인 지주와 유지들이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준 것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번에 띄운 고발장에 뒤따라 이번 일을 사건화해서 관계요로에 다시 보내게 되면 심재모야 말로 죽은 목숨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심재모가 그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위임장을 두 장 만들어 그의 앞에서 한 장을 찢는 연막을 쳤던 것이다. 지난번 고발장은 육군본부 · 헌병사령부로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 최익승 · 도지사 · 광주고법까지, 보낼 수 있는 데는 다 보냈다. 대통령 앞으로도 보낼까 말까를 놓고 말이 많았지만, 그 자리는 너무 높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결국 보류시켰다. 심재모는 아무리 감정을 자제하려고 해도 지주들이 벌이고 있는 소행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아닌 짓은 도맡아하면서 큰소리는 또 도맡아 치는 그 뻔뻔스러움이 너무 파렴치하고 역겨웠다. 이번에 읍내를 장악 당한 것은 상황의 불가항력이 작용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구차스럽게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염상진이가 또다시 지주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어디가지나 그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소작을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몰수하지 않았는데도 염상진이 그랬을 것인가. 현재의 상황으로 염상진은 군경과 대치하기에 여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잘못을 저질러 당한 일가지 이쪽의 책임으로 떠넘기며 작당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할 것이다. 너희들이 방어를 철저히 했다면 우리가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거나, 어떤 잘못을 저지르거나 간에 군인이나 경찰은 무조건 자기네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심재모는 언제나 그 대목에서 혼란과 회의를 느꼈다. 군대는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 나는 누구를 위한 군인인가. 군대는 돈과 힘을 가진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무조건 지켜주어야 하는 종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손승호의 말이었다.

"심 사령관이 기왕 이곳에 근무하게 된 입장이고, 이렇게 마주앉게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이데올로기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이 뭐 별겁니까. 식자나 좀 들었다는 사람들은 고걸 자기네들만 아는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되는 깃처럼 어렵게 말하려 하고, 그런 것은 그런 것대로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들이 심한데, 결국 그런 것이 필요하게 된 건 사람의 목숨이 살아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그 자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나 사상이란 것이 유식한 사람들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전유물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따지는 연구물도 아니라는 겁니다. 배우지는 못했을망정 기본생활 조건의 모순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고, 그 잘못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무슨 방법으로든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사상입니다. 식자가 든 사람들은 거기에 논리와 이론이 없으니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건 식자층의 상투적인 용업니다. 그건, 불교나 예수교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경전을 가졌으니 종교고, 무속은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으니 미신이다, 하는 식과 똑같은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절대적인 삶이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지 어디 이론으로 살아가는 겁니까. 제가 왜 이런 말을 길게 늘어놓느냐 하면, 이 지방에 사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은 자기들이 왜 가난한지, 가난을 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고, 더구나 해방이 되는 것을 계기로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길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정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작쟁의를 벌여 그 길을 뚫으려 했고, 해방이 되자 이제야 때가 왔다 생각한 그들은 다 같이 힘을 모아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게 바로 사십육년 시월에 전국 규모로 일어난 농민항쟁 아닙니까. 그 항쟁은 결국 폭력 앞에 피만 뿌리고 좌절되었습니다만, 지금 그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 그들의 욕구를 포기하거나 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행동하는 이데올로기의 덩어리고, 사상의 덩어리인 겁니다. 그런 그들은 자기네들이 원하는 길을 뚫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들은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하고, 선택합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를 우익적 식자들은 또 부화뇌동이니 비이성적 감정주의니 하는 유식한 문자를 써가며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하려 할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삶의 절박함과 절실함 속에서 나오는 가장 이성적이고 현명하고 순수한 판단이고,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생존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심 사령관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군인이나 경찰을 경원하는 것 같다고 아까 말씀하셨는데, 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현상이 이 지방만의 특성은 물론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그건 남한 전역에 걸친 문제점입니다. 전 정치는 잘 모릅니다만, 옛날 봉건왕조 때에도 잘하는 정치는 백성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했고, 다수의 백성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는 임금을 현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봉건시대가 아니라 명색이 민주주의를 내세운 시댑니다. 그러니 정치가 어때야 하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차피 군인이 되신 거, 현명한 군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손승호의 말을 되새길 때마다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출발이 너무 순진하고 단순했다는 사실을 심재모는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된 땅에서 무언가 바르게 한몫을 해보고자하는 마음을 정했을 때는 이렇듯 복잡 미묘한 사회구조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권 서장이 눈치를 살피며 들어섰다.

", , 금융조합장이 다녀갔습니다. 일을 조용하게. 끝냈다고, 좌익척결위원회에 일임한 위임장을 가져와 손수 찢고 갔습니다."

"아아, 네에에"

고개를 끄덕이는 권 서장의 얼굴에는 미심쩍어하는 빛이 역연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권 서장의 반응이 마음에 걸린 심재모가 물었다. 사실 자신의 마음에도 유주상의 협조적인 태도가 의문스럽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 아닙니다. 그 사람을 전혀 모릅니다만, 워낙 영리하게 느껴져서요."

"제 생각하고 같군요. 아주 똑똑한 사람 같기도 하고, 야심이 큰 사람 같기도 하고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 왠지 불안하고, 믿음이가지 않고, 그렇지요."

"사람을 인상만 가지고 전부를 말할 수는 없읍니다만, 인상이 꼭 틀리지만은 않거든요."

"서장님이나 저나 그 사람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이 여기에 온 후로,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이것저것 분주하게 벌인 일들을 목격해왔으니까요."

"글쎄요, 일단 그 일이 조용하게 끝났다니까 다행,“

서장은 문득 말을 끊었다가,

"성가시지 않아서 잘 됐습니다

하고 말을 고쳤다.

"그런 셈이죠."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심재모는 느리게 담배를 뽑으며,

"염상진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고심하고 있는 문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예에, 그게 머리에 이고 있는 화로 격인데그걸 어째야 좋을지"

권 서장은 힘준 손바닥으로 입술만 좌우로 문질러댔다.

"그걸 말입니다, 병력을 총동원해서 한바탕 밀어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심재모의 갑작스러운 말이었고, 권 서장은 놀라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역시 승산 없는 무모한 일이겠죠?"

심재모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대책이 있긴 있어야겠지만, 그 방법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습니까. 다 아시다시피 그쪽 지형이 우리 쪽에 너무 불리합니다. 그건 지휘관의 능력이나, 부대의 전투력과는 별개 문제 아닙니까. 소극적인 생각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현재 상황으로선 무리한 공격 보단 안전한 방어가 더 유리한 작전이 아닐까 합니다."

"그건 사실이죠."

심재모는 한동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번 사건에서 제기된 문제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적의 세포활약과 상식을 초월하는 적의 기동성이었습니다. 우선 이 두 가지에 대한 대책 없이는 우린 계속 당하게만 될 겁니다. 이문젤 급선무로 해결하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이번에 집단음주를 한 건 상황이 지구전으로 계속되다 보니 마음들이 해이해진 탓일 겁니다. 계엄령이 다소 완화된 건 민간인들의 생업을 위한 생활상의 불편을 없애기 위한 것이지 작전상황의 호전 때문이 아닌데, 그 점을 착각한 결괍니다. 이 점도 강력 주지시켜야 합니다."

심재모는 머리에 무거운 통증을 느끼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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