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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3

Bollnow 2024. 3. 12. 06:29

9. 머시여, 벌거지!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새해는 일월 일일부터가 아니라 이월 십일일부터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인 활동이 공개된 날이었다. 신문마다 "삼천만의 시선집중" "육천만 개의 눈동자 주시" "민족정기 세울 반만년 역사 초유의 쾌거" 등 그야말로 주먹만한 활자와 대문짝만한 사진이 실려 그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반한 친일분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이 마침내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 말은 꿈결에서나 듣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것이 신문에 보도된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 일에 대한 해결의 기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돌덩이로 굳어진 체념이었다. 그것은 해방이 됨과 동시에 제일 먼저 해결을 보았어야 할 문제였다. 해방을 맞은 이 땅의 사람들은 남녀와 유무를 가릴 것 없이 두 가지 공통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첫째는 공평하게 사는 새나라가 세워질 것과, 둘째는 모든 친일세력에 대한 응분의 응징이었다. 일천구백사십오년 십이월 이십칠일 미국, 영국, 소련이 결성한 오개년 신탁통치 실시가 발표되자마자 탁구공을 되받아치듯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것은 첫 번째 기대가 무너지는 데 대한 민족적 자각의지의 표현이었음과 동시에, 또 다른 외세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민족적 결의가 응집된 외세배격 항거였다. 일본 놈들에게 눌려 산 지긋지긋한 세월을 현실감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 오 년 동안의 신탁통치라는 것은 또 다른 식민체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필연적이면서 자연스럽고, 순수하고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반탁운동과 함께 미국과 소련에 대한 불신감정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고... 하는 노랫말이 바람결처럼 퍼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리고 반탁만이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이라고 부르짖는 이승만이 "역시 진정한 애국자"로 대중 지지를 얻게 되고, 반탁에서 갑작스럽게 찬탁으로 태도를 바꾼 좌익은 "넋 빠진 이완용의 환생"으로 이승만이 얻은 만큼의 대중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외세배격으로서의 반탁인 대중 순수감정은 정치의식을 가진 집단들이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어떤 목적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반탁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다리 놓기라는 것도, 좌익의 찬탁이 사회주의의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숨죽이기라는 것을 식별할 여유가 없이 일단 흐르기 시작한 대중의 물결은 제 흐름만 따라 흘렀다. 자신들의 순정을 더럽히는 정치의 덫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반탁의 물결을 이루기 전에 이미 두 번째 기대가 먼저 허물어지는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다. 반탁의 물결이 그렇게 거세게 일어나는 데는 그 배신에 대한 보복감도 작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대중들의 정의로운 기대는 여지없이 짓밟힌 채 각종 친일세력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양지살이를 하며 더 오르고 더 거드름을 피웠다. 사람들은 썩은 놈의 세상, 망할 놈의 세상을 되뇌었고, 세월은 한 해,그리고 또 한 해, 그리고 다시 또 한 해, 삼 년이 흐르면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제멋대로의 세상을 외면했고, 체념은 돌로 변해갔다. 독립운동 혐의를 앞세워 지하실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바로 그 자가 해방된 땅의 경찰로 변해 이번에는 좌익 혐의를 놓고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지하실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된 세월이었다. 그런데, 사 년째로 접어들면서 친일한 자들을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 아닌가. 체념이 깊고 단단했던 만큼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물론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기까지는 관계법이 두 차례에 걸쳐 국회를 통과했다. 지난해 구월 칠일 반민족행위처벌법과 십일월 이십오일의 반민족특별조사기관법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반민족특위가 각 도에 조사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은 일월 팔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별달리 나타나지 않았다. 신문의 보도도 예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고, 세상을 흔드는 더 큰 사건들이 사람들을 휘둘러댔던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 본격화는 벌교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보급소마다 신문이 동났고, 이 집 저 집 신문을 빌리러 다니는 발길이 부산스러웠다. 주막이나 이발소, 구멍가게 같은 데서 신문 한 장을 에워싼 사람들의 모여 앉음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멋대로 가락을 넣어가며 신문을 읽어 내리고, 모여 앉은 사람들은 유심한 얼굴로 그 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읽기가 끝나면 으레 한바탕씩 말잔치가 벌어졌다.

"한때 패검도 멋지게 금테두리 모자에 검정 경부제복을 입고 동분서주하던 노덕술 또한 고동색 두루마기에 몸을 감은 채 조사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하면, 이 땅의 갑부 박흥식도 자가용 자동차에 마까오 양복은 옛일이라는 듯 꾀죄죄한 세루 두루마기에 눈만 번쩍이며 고랑을 차고 끌려 다니고, 일본의 국민복을 입고 각반에 전투모를 쓰고 학병을 권유하던 미쯔오도 이제는 이광수로 돌아와 회색 두루마기에 몸을 쓰고 조용히 제이의 "나의 고백"을 쓰고 있다. 흥망성쇠 -인생의 허무함이 이 같을진대 어찌하여 그들은 사람으로서 걷지 못할 친일반역의 길을 걸어 이같은 눈물의 길을 걷고 있는가?"

"와따, 하든 일중에 질로 잘 허는 일이다. 인자 나라가 지대로 채가 잽히는 갑다."

"어이, 어이, 카만 있어부와, 거 반민특위라는 거이 말이여, 고것이 무신 뜻이당가?"

"어허허! 자다가 봉창 뜨딜기는 거여 시방?"

"이눔아, 무식허먼 입이나 봉허고 있어야 무식이 덮어질 일인디, 무식 자랑헐라고 입 놀리고 그러냐?"

"하 호로자석, 니가 그리 주딩이 놀리고 앉었응께 사서삼경 다 띤 눔맨치로 유식해 뵈는디? 그려, 유식헌 니가 무식헌 날 잠 갤차도라. 반민특위가 무신 말이다냐?"

", 무신 말언 무신 말, 친일 해묵은 눔덜 때레잡는 일 허는 디라고 듣고도 몰르냐."

"워메 성님, 공자 맹자 빰따구 치게 똑똑허시요이. 에라이 씨부랄눔아, 고까징거시야 누가 몰라서 묻냐! 나가 알고 잡은 것은 반, , 특위, 그 네 글자가 품은 뜻이 머시냐 그 말이여. 워디 답혀봐라.“

"금메...나도 몰르겄는디."

"잡것, 염병허고 자빠졌네. 무식헌 눔이 무식험스로 유식헌 척 방정떠는 꼬라지, 확 그냥 불알을 훑어뿔라."

"워따 성님, 잘못혔소."

"인자 삥아리쌍 다 끝났다냐! 반민특위가먼고 허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럴 간딴허게 쭐인 말이시. 긍께, 반민족행위자란 말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허고 같은 뜻인디, 거그서 반, 민 두 자럴 뽑고, 특별조사에서 특 한 자럴 뽑고, 위원회에서 한 자럴 뽑아, 합친 말이 반민특위시."

"기와지사 간딴허게 쭐일람사 "반특" 두 자로 짝 쭐여불먼 워쩔랑가?"

"워따 이 자석이 인자 엿장시 맘뽀할라 생기는 갑네?"

"그려, 싸게 신문사로 달음박질펴 가서 갤차줘라, 상금 받겄다."

"아니시, 아녀. 쩌 평삼이 말이 실답잖은 소리가 아니시. 평삼이 말맹키로 "반특"은 아니고, "특위"라고 두 자로 쭐여 불르기도 허는구마."

"봐라, 요런 무식헌 눔아! 나가 비싼 밥묵고 쓰잘 디 웂은 소리 헐성부르냐."

"오냐, 오냐, 니가 군수감이고 도지사감이다."

"근디 말이여, 친일헌 눔덜얼 처벌허는 것이야 골백분 자알허는 일인디, 일본 눔덜헌테 붙어묵은 눔덜이 한들이 아니고 천지에 쫘악 깔렸는디, 고것덜얼 다 벌헐 수 있을랑가 몰라?"

"고것은 권세부리는 자리서 내몰고, 각단지게 콩밥을 믹여야제, 한 눔도 빼놓지 말고 권세부리는 자리서 내몰고, 각단지게 콩밥 믹여야제. 워떤 눔이 을맨치 친일해묵었는지 우리 눈으로 똑똑허니 봤응께 아는 일인디, 즈그눔덜이 뒷걸음질침서 쥐구녕 찾는다고 피해질 일이간디?"

"어허! 나말언 고런 뜻이아니시. 관공서고 워디간에 심 쓰는 자리넌 다 그 똥묻은 잡것덜이 차지허고 앉었는디, 우리 벌교바닥만 해도 읍사무소고, 경찰서고 싹 다 문 닫아뿌려야 헐 것 아니냐 그 말이시."

",이 사람 참말로, 걱정도 팔자고, 구데기 무서바 장 못 담구고 앉었네그랴. 그 드런 눔덜 싹 쳐내뿌러도 신선맹키로 깨끔헌 사람 을매든지 있어. 친일헌 눔덜이 지아무리 많여도 친일안허고 깨끔허니 산 사람덜이 멫십 곱절 많다는 것을 알아야 써. 친일헌 눔덜얼 처벌혀야 현다는 것이 먼지. 고눔덜이 바로 깨끔헌 둠벙물 꾸정키리는 느자구웂은 미꾸랑지 새끼덜이라서 그런 것 아니겄어!"

"워따 말 한분 씨언하게 자알헌다. 니가 읍장 해묵어뿌려라."

"참말로, 기왕지사 시작헌 일, 이잡디끼 혀부렀으면 좋겄다."

"금메 말이시, 일본순사질 험스로 그리 못되게 굴든 눔덜이 해방이 되고도 설레발치는 꼴 보는 것도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고, 그때 권세 잡았든 눔덜이 그대로 권세잡고 모강댕이 잣지잣지 해갖고 뻗대고 사는 꼴 보는 것도 환장헐 일인디, 인자 고눔덜 꼴 안보게 생겠응께 삼 년 묵은 쳇증 떨어지겄다."

"그리만됨사 그 씨언허기가 용잿물 싸는 것보담 더 씨언허겄네."

"저 허풍쟁이, 이 세상에 지 아무리 씨언헌 것이 있어도 용잿물 싸질르는 것을 당허겄냐!"

"어허, 워째 그리 말맛을 몰르고 땁땁헌 소리 허고 앉았당가? 나 말언 말이시..."

"아네, 아네, 자네 말이 맞네."

"워쨌기나 요 일언 잘되고 잘된 닐이여. 낼 신문에도 또 소식 나겄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중헌 일인디 안날라등가?"

"인자 일 나가기로 허고, 낼 또 듣세."

"참 재미로 쳐도 삼국지보담 재미가 오진 이약이시."

"당연지사제. 금으로 명함얼 박았다는 그 유명한 부자 박흥식이도, 자유연앤가 그 유명한 글쟁이 이광수도 덜컥덜컥 잽혀들어가는 판굿인디 삼국지가 성님! 허고 엎어져야겄제."

"근디 말이여, 친일파 때레잡는 법얼 맹근 것도 중허고 존 일인디, 토지개혁인가 농지개혁인가 허는 법 맹근다는 소식은 신문에 웂능가?"

"고것은 웂느디."

"참말로 사람 환장허겄네웨. 친일파 때레잡는 법보담 그 법이 먼첨 맹글어져야 지대로 되는 순서 아니겄어?"

"고것이야 우리 맴이제."

"생각지도 안헌 친일파 처벌법도 맹글었응께, 그 법이야 폴세부텀 맹근다맹근다 혔으니 하매 뜸들 때도 안 됐겄다고? 방구가 찾으먼 똥 나오는 법잉께 기둘려보드라고."

"방구면 다 방구간디? 헛방구도 있고, 핏방수도 있재. 뜸 딜이다가 밥 다 태와뿌는 수가 있응께 애달아서 혀는 소리네."

"고런 맴이야 아그덜꺼정도 다 통허는 맴 아니겄는가. 기둘리세, 믿거니 허고 기둘려보세."

", 인자 시상이 지정신 채리고 지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께."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서는 남자들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도 남자들 버금가게 그 일에 신경 쓰며 한 가지라도 더 얻어들으려고 귀를 세웠다. 남자들처럼 신문을 둘러싸고 모여 앉기가 어려운 여자들은 주로 남편들 겨드랑이 아래서 살랑거려 귀에 담은 말을 다음날이면 서로 모여앉아 합치고는 했다. 거기다가 바람타고 다니는 소문까지 곁들여 신문은 구경조차 못한 처지에서도 신문을 직접 읽은 사람 못지않게 남자들처럼 말잔치를 벌이게 마련이었는데, 그 내용은 남자들과 엇비슷했다.

 

봄이 한 발 먼저 오는 남도지방의 이월말은 푸른 기색이 완연했다. 논두렁 밭두렁에도 푸른 기가 돌았지만 보리밭의 싱싱한 초록빛이 봄을 내뿜고 있었다. 보리는 죽이나 국을 끓일 수 없도록 억세게 자라 오르고, 하루 볕이 다르게 밤을 새고 나면 더 진한 초록, 더 진한 초록으로 옷을 바꿔입어갔다. 보리갈이를 하지 못하는 습한 논에는 날이 갈수록 벌건 속살을 드러낸 봉분이 늘어갔다. 그 객토할 흙더미가 한 해 농사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거름에 절고 벼에 기름기를 빨려 회색빛으로 변한 논바닥에 봉분을 이루고 있는 객토흙더미는 유별나게 그 빛깔이 진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옛날 옛적부터 전라도 땅에 흉년이 들면 온 나라가 굶어죽는다는 말은 전라도에 평야가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넓은 땅이 많되 그 땅이 차지고 기름진 황토라서 논농사 밭농사가 다 걸게 될 수 있었다. 전라도 땅 중에서도 보성군과 고흥군의 황토는 그 명이 예로부터 널리 나 있었다. 문둥병을 앓으며 소록도를 찾아가느라고 고흥의 황토 길을 걸어야 했던 시인 한하운이 "가도 가도 황톳길/끝이 없네"라고 읊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소가 멍에를 끌 듯 또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반민특위의 소식은 몸 가볍게 만드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이 아닐 수 없었다.

 

손승호는 하염없는 눈길을 창밖에 던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질정 없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이데올로기, 인간의 인간다움, 혁명, 투쟁, 아는 자의 자각, 시대적 삶, 일제시대와 오늘의 현실, 선택, 행동, 기회주의와 개인의 당위, 진실과 변명, 이데올로기의 출동과 민족과 집단과 개인, 집단의 진실과 개인의 허위, 집단의 허위와 개인의 진실, 마르크스 과학의 명징성과 인간, 인간이란 존재와 인간의 논리인 과학으로 인간을 규명할 수 있다는 논리, 인간은 인위적인 존재가 아니고 자연적 존재라는 그 미궁, 마르크시즘의 맹신적 종교화와 자본주의의 추악한 물신주의, 염상진의 확신과 행동, 나의 불확신과 비행동, 김범우의 또 다른 인식과 내재된 활동성...

"선상님, 선상님만 믿는당께요. 이 늙은 년 소원얼 풀어줄 사람언 이 시상에서 선상님뿐이란 말이어라."

그 잡다한 생각들을 일시에 덮어버리는 노파의 애달픈 음성이었다. 노파는 벌써 두 번째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다. 결국 어떻게 해보마고 해서 돌려보내야 했다. 늙은 학부모인 노파를 동정해서도 아니었고, 선생으로서 학부모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상황과는 상관없이 노파의 요구는 부모로서 당연하고도 정당했던 것이다. 손승호는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받치며 눈을 감았다. 노파의 사연을 가지고 심재모를 찾아가야 할 일이 숙제로 남아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음을 느꼈다. 심재모의 입장에서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미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왔다. 평소에 되풀이했던 그 결론 없는 잡다한 생각들에 다시 빠졌던 것도 노파의 일 떠맡게 되면서 거기에 연장되어 일어난 사고행위다.

"선상님, 지가 새끼덜언 다섯이제만 팔자가 박복허니라고 고것하나만 아덜이고 남치기 넷언 쪼로록 허니 딸년이랑께라. 그러니 고것이 으짤 도리웂이 독자 아닌가비요. 즈그 아부지 눈감기 전에 소원 풀어 디딜라고 웂은 살림에 장개럴딜였등마, 아 글씨 그 미친 눔이 밭에 씨뿌레갖고 즈그 아부지도 탁허고, 지도 탁헌 아덜 날 생각언 안허고, 그 오살헐 눔에 좌익에 미쳐갖고 쭈룰허니 염상진이 뒤따라 입산얼 해부렀당께요. 즈그 아부지가 눈 번히 뜨고 죽음시로, 그눔이야 워찌되든간지 가네 무신 수럴 써서라도 씨받아 아덜얼 얻어라, 그러드란 말이요. 긍께 워쩌겄습니껴. 전에야 암스로 워찌 참고 있겄는게라. 돈이 지아무리 존 물건이라 허드라도 사람 나고 돈 나 순차가 있데끼, 사상이란 것도 사람 살자고 맹근 것잉께 그 순차가 사람 담 아니겄는게 혀줘야 인간 도리고 순리 아니겄는게라. 선상님, 선상님이 들어서 이 늙은 년 소원 잠 풀어주시씨요. 선상님..."

그 늙은 학부모에게 심재모를 직접 찾아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선생을 신뢰해서 찾아온 학부모에 대한 무책임한 배신이고, 선생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한 인간이 정당하게 찾고자 하는 자연적 권리를 손상시키는 비열한 회피였다. 결과를 예측하지 말고 노파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만이 노파의 말마따나 "인간 도리"라 여겨졌던 것이다. 손승호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펼쳐진 백지에 난무하고 있는 낙서였다. 말이 백지지 그것은 암회색 빛이었다. 바탕도 고르지 못해 곧 구멍이 날 것처럼 얇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김자반처럼 두꺼운 부분도 있었다. 그 조악한 지질의 종이에 해방의 실감이 담겨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지질은 형편없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 놈들의 고의적인 기술 불이전, 기술 미숙상태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업, 그 종이는 오늘의 산업현실의 허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내주고 있었다.

밤마다 시대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다

밤마다 시대를 신음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듣는다

밤마다

사람의 신음하는 고통에

마른 나무 가지들까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다

올올이 신음이 감겨

요가 되고 이불이 되고

마침내 무덤이 된다

나는 그 무덤에 파묻혀

무엇을 신음하는가

 

똑바로 서야 하는 것이 어디 나무뿐이랴

신음하는 시대 앞에

삼대의 곧음으로 세워야 할 생명 의지

시대의 바람은 계절의 바람이 아니어서

의지를 세울 방향을 몰라

둔전거리는 바보 같음을 신음하는가

시대의 신음은 시대의 혼미가 낳는가

끝없이 나열되는 무슨무슨 주의들

그 많은 이름들에 의탁함은

우리의 모자람이다

모자람이 허덕거리는 욕심이다

 

시대가 신음하고

시대를 사람이 신음하고

사람을 마른 나무가지가 신음하는

밤마다

신음의 무덤 속에서

나는 먼저 나의 바보 같음을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모자란 욕심을

신음하는가

질 나쁜 종이 위에 질 나쁜 잉크로 끄적거린 낙서였다. 잉크라는 것도 정제품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물방에서 물감가루를 사다가 적당히 물에 풀어서 쓰는 것이므로 겨우 글자 모양을 그려내고 있을 뿐 선명도라고는 없었다. 비교적 행간을 맞춰가며 쓴 그 낙서의 사방에는 알아보기 힘든 다른 낙서들이 무수하게 자빠지고 엎어지고 넘어져 있었다. 낙서들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손승호는 갑자기 두 손으로 종이를 와락 몰아 쥐더니 박박 찢기 시작했다. 그 순간적인 동작은 마치 무슨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암회색 종이쪽들이 낙엽처럼 책상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손승호는 종이를 찢어대며 김범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범우를 동원하는 것이 힘이 될 것 같았다. 김범우까지 동원되면 심재모가 압력으로 느껴 언짢아할 수도 있었지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까지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송승호는 손바닥을 맞 때려가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암회색 종이 조각들은 썩어가는 나뭇잎처럼 교무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손승호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까닭 없이 적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의미 모를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전화기가 걸려 있는 벽쪽으로 걸어갔다.

"자넨가? 나 승홀세."

"자네가 어쩐 일인가, 먼저 전화를 다 걸고."

"그럴 일리 생겼네. 자네, 시간 있나?"

", 언젠가 말했던 법일 스님 일로 광주에 갈까 하던 참이었네. 왜 급한 일인가?"

손승호가 입맛을 다셨다.

"글세,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 일보다급할 건 없네만...“

"아니네, 그분이 오늘 재판을 받는 건 아니고, 재판을 빨리 받게 하려고 누굴 만날까 한 거네. 나 나갈 테니, 거기 어딘가?"

"학교...“

"알았네, 전화 끊세."

손승호는 수화기를 전화통 옆구리에다 걸며 생각했다. 왜 범우는 좌익에서 돌아선 것일까. 그것은 새삼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새삼스러운 생각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이유를 물어본 일이 없었고, 김범우도 그에 관해 입을 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마치 두 전향자 사이에 지켜야 되는 무슨 계율인 것처럼. 김범우, 그는 여러 모로 건강한 존재였다. 뼈대 앞세우는 가문의식이나 지주자식으로서의 우월의식 같은 것이 없었고, 순천중학교의 기질인 고상한 현학 취미도 없었으며, 더욱이 일본 유학생들이 감염되어 오는 전염병인 일본식 서구 열등감도 없었다. 그와 우정을 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그런 격의 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가 같은 순천중학교 학생들보다 사범학교 학생인 염상진이나 안창민 등과 더 가깝게 지낸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순천중학교, 사범학교, 농업학교 학생들은 얼핏 보기에는 다 똑같은 학생일 뿐이었고, 좀 더 관심을 가진 눈으로 살피는 경우는 모표가 다르다는 것을 식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서로서로의 기질과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 확연하게 구분 짓고 있었다. 농업학교 학생들은 순천중학교 학생들을 "늘고자"라고 불렀으며, 순천중학교 학생들은 농업학교 학생들을 "야쿠샤"라고 불렀다. 그런데, 농업학교 학생들이 순천중학교 학생들에게 대놓고 "늘고자"라고 불러대는 데 비해 순천중학교 학생들은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야쿠샤"라고 맞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그 만큼 농업학교 학생들의 완력은 순천중학생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두 학교 학생들이 견원지간처럼 지내는 중간지점에 사범학교가 놓여 있었다. 두 학교 학생들은 사범학생들을 "애늙은이"라고 불렀다. 순천중학은 상급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인문학교로서 학구적인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집안 살림이 비교적 넉넉한 학생들로 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세 학교 중에서 일본인이 특히 많은 것도 그 까닭이었다. 농업학교는 그와 반대로 실생활에 직접 활용을 목표로 하는 실업학교로서 새끼 꼬는 경연을 벌일 정도로 실습위주의 교육을 시켰는데 집안이 가난하거나 비학구적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농업기술의 과학화를 자각하고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지만 순천중학이나 사범학교를 낙방한 경험을 가진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데, 사범학교는 학구적 두뇌를 가졌으나 집안형편이 궁색해서 인문학교를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이 일본의 교육정책에 의한 학비의 특혜를 받아 공부하려고 모여들었다. 두뇌적으로는 인문학교와 가깝고, 졸업과 동시에 사회진출을 하는 것으로는 실업학교와 가까운 사범학교의 특수성에 따라, 사범학교가 순천중학교와 농업학교의 중간 지점에 놓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순천중학생들이 "늙은 고자"라고 불리는 것은 책만 파고드는 행동성의 빈약 때문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에게 모욕적일 수밖에 없는 그 별명이 붙여진 데는 여중학생들의 작용이 컸다. 여중학생들은 그들 나름의 계산속 빠른 기회주의를 십분 발휘하여 한사코 순천중학생들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 다음의 대상이 사범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타산적 속성을 야비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꼴이었다. 가문 좋고 돈 많고 머리 좋은 남자가 최고야, 하지만 그게 안 되면 머리 좋고 장래 보장된 남자는 잡아야지. 여중생들은 거의 전부가 동일한 호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천중학생들은 "늙은 고자"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신통한 연애사건 하나 일으키지 못했다. 사범학생들은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도록 대부분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예절바른 점잖음과 진중한 사고력을 갖추어 어른스럽게 철이 들어 있었다. 그건 완제품으로서의 "선생님"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일본식 사범교육의 결과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인간은 교육으로 재창조될 수 있으며, 그건 소년기 교육으로 결정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민학교 선생들은 군국주의적 인간을 양성해내는 전초병이었고, 그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낼 수 있는 능력자를 길러내는 것이 사범학교였다. 사범학교 교육은 선생이라는 존재가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할 지식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융합시켜 주도면밀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뇌세포 하나하나까지 일본화되게 하는 의식교육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에는 언제나 다소의 실패나 약간의 의외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염상진을 위시하여 사회주의에 경도된 학생들은 완제품을 만들어 내려는 사범교육의 본보기 실패작이었다. 특히,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사범 출신자들에게 부여된 의무근무까지 징역살이로 때워버린 염상진의 경우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일본화 교육이 어느 학교보다 치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사범학생들이 학생사회의 좌익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했던 사범학교의 그런 양상은 "애늙은이"란 별명 속에 이미 포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천중학생인 김범우에게 "늘고자"라는 집단별명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지닌 건강성은 사범학생들과 연계를 이루어 사상학습에 몰입했고, 그가 품은 진지한 열정은 누구에 눈에나 모범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만약 해방이 된다면 봉건적 지배계층은 그날로 몰락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몰락을 막을 순 없다. 그건 역사의 필연적 힘이니까."

방학이 되어 동경에서 돌아온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둘러앉은 모두는 감동적 동감을 표했다. 그의 말이 새로워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에 인식은 좌중의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 말을 김범우라는 사내가 함으로써 더 값지게 느껴졌던 것이다. 지주의 아들인 그가 스스로가 속한 계급에 몰락을 예견하면서도 조금도 연연해하는 빛 없이 의연할 수 있음에 대하여 좌중은 동지로서의 신뢰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학병에서 돌아와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승호, 혼자 있나?"

김범우가 교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일직교사는 서무실에 가 있네. 이쪽으로 앉게."

"자아, 애길 들어보세."

김범우는 담배를 뽑아들며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생각은 깊게, 행동은 빠르게, 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다운 태도였다. 손승호는 노파의 사연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요약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있겠는가."

손승호는 망연한 눈길로 김범우를 바라보았다.

"그것 참 고약스러운 문제로군. 뭐랄까...인간 본성과 이데올로기의 대결? 말이 되나?“

김범우가 입술을 조금 내밀며 웃어 보였다.

"그럴 듯하군. 거창한 논문 제목 같아 입맛은 없지만."

손승호가 윤기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실현 가능성이라... 전혀 예측 불가능인데."

", 심재모 그 사람 그렇게 막힌 사람이 아니던걸."

"심재모도 문제지만 염 선배도 문제 아닌가. , 두 사람이 합의했다고 해도 그놈의 씨를 받는 방법이 문제 아닌가. 씨를 받는다는 게 잠자리를 하룻밤 같이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임신이 확인될 때까진데, 그 기간 동안 남자가 집으로 나올 것인지, 여자가 율어로 들어갈 것인지도 문제란 말일세."

"나도 그 문제까지 생각해봤는데, 이 일이 간단한 성질은 물론 아니지, 일이 겹겹인 셈인데, 염 선배야 쉽게 이해가 될 것 같고, 우선 심재모의 이해부터 얻어내는 게 순서 아니겠나."

"그야 그렇네만, 염 선배도 낙관만 해선 안 되네, 지금 상황이라는 게 이게 활시위 잡아 늘인 상황 아닌가."

"그렇긴 해. 헌데, 심재모는 언제 만나면 좋겠나?"

"거야 단김에 쇠뿔 뽑아야지."

김범우는 새로 담배를 꺼내며,

"참 빌어먹을 일이군. 그러길래 서로 갈라서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투덜거리듯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성냥을 그었다.

"광주 일은 바쁘잖은가?"

"괜찮아. 그럼 가보세, 다 이게 우리 일인 셈이니."

말에다 한숨을 묻혀내며 김범우는 무겁게 일어섰다.

"먼저 나가게. 나 일직선생 불러올 테니."

"그러게. 난 심재모한테 전화부터 걸어놔야겠구만."

전화는 받은 사환아이는,

"심 사령관님 안 기시는디라우,"

귀청이 떨어져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거슬리고, 말의 내용에 맥 빠진 김범우는 울컥 짜증이 솟기는 걸 느꼈다.

"이눔아, 기차 화통 삶아먹었냐! 어디 멀리 가셨어?"

"아니구만요, 칙간에라우."

"예끼놈! 전화 끊어라."

김범우는 어이없는 웃음을 픽 흘리며 전화통 앞에서 돌아섰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나무복도에 윤기가 반들거렸다. 어린 조막손들의 정성스런 노동이 거기에 어려 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무판자가 유리를 닮도록 반들거리는 데서 김범우는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청소도 교육이라고 강요한 일본교육의 모습이 변질 없이 그대로 시행되어 어린것들에게 불필요한 노동을 강요한 결과가 바로 그 복도의 반들거림이었다.

", 춘부장 어르신은 평안하신가?"

현관 쪽으로 돌아서며 손승호가 물었다.

"별로 안 좋으셔."

", 어디가 편찮으신가?"

손승호의 어조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저, 노쇠현상이지."

"그래, 범준이 형님 땜에 상심도 많이 하시구."

손승호는 무삼결에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자신은 분명 범준이 형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겨 말을 해 버렸고, 그런 투의 말을 김범우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은 뒤미처 떠올랐다.

"그래, 형님이 어딘가 살아 있다는 보장만 확실하면 아버님 건강이 그렇게 표 나게 나빠져 가진 않을지도 모르지. 아버님이 형님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신 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설 거네. 귀환 동포들 말야. 작년 일월 말에 미군정이 이백십만 명 정도로 발표 했잖나. 그 사람들 중에는 간도 · 만주, 더 멀리는 중경 쪽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거든. 그것도 홀몸이 아니라 가족들을 이끌고 말야. 그런데 홀몸인 형님은 안 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 단념해얄 밖에. 허나, 어머님은 달라. 형님이 틀림없이 살아 있다고 철석같이 미고 있거든. 그 근거는 꿈이고, 점이야. 그건 아마 논리성이 강한 남자와 논리성이 약한 여자의 차일 거고, 부성과 모성의 차일 거고, 그렇지."

김범우의 정연한 말 속에는 정작 그 자신의 생각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형의 생사를 속단하고 싶지 않다는 김범우의 마음임을 손승호는 읽어내고 있었다.

",, 정말 춘색이 도도하도다, 로구먼."

김범우가 두 팔을 뻗쳐 올리며 목청을 높였다. 형의 생각을 털어내려는 몸짓인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술 생각나나?"

"그래, ! 사상이고 이즘이고 다 때려치고 염 선배하고 우리 다 같이 만나 옛날처럼 술이나 코가 비틀어지게 마셨으면 좋겠구만."

김범우의 얼굴은 소년처럼 밝아졌다.

"빌어먹을, 그런 날은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르지."

김범우의 얼굴은 이내 침울해지고 말았다. 그는 술을 입에 한번 댔다 하면 끝도 한정도 없이 마셨다. 그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꼭 술에 만취했을 때였다. 염상진의 주량도 대단했고, 손승호의 주량도 만만치 않았지만 김범우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무슨 술을 그리 마시느냐고 만류하면,

"이게 다 그 망할 놈에 부르주아 잔내라. 뱃속이서부터 보약 먹고 태어났으니 술을 마셔도 취해야 말이지"

그는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대꾸하고는 했다. 침울하고도 탄식적인 김범우의 말이 섬뜩한 차가움으로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손승호는 그 말을 되뇌어보았다. 빌어먹을, 그런 날은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르지... 영원히..? 영원히...? 손승호의 의식 속에서는 격분처럼, 비애처럼 솟아오르는 말이 있었다. 만약에 지금 상태가 악화돼 완전히 두 패로 갈라져서 전쟁을 하게 되면 범우 자넨 어느 편에서 싸울 건가? 그러나, 손승호는 이빨을 사려 물었다. 그건 김범우에게 물을 말이 아니었다. 김범우야 자신을 미친 놈 취급은 하지 않겠지만, 그 말은 결국 김범우를 심각하게 만들고 괴롭히게 될 것은 빤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답이 있을 수도 없는 물음이었다. 자신이나 무시로 그런 꿈을 꾸며, 어느 쪽 편도 못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양쪽에서 총을 맞고 죽어가는 연기를 계속하는 것으로 족했다. 김범우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승호는 심재모에게 노파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상세하게 해나갔다. 무미하게 사연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 자체가 설득적인 감흥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심재모는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신경이 긴장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폐를 끼치게 될 줄을 알면서도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승호가 이야기를 끝냈다.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심재모는 담배를 빼들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는 희한한 이야기 내용을 되짚고 있었다.

"그러니까, 먼저 심 사령관께서 허락을 하시면, 이차로 씨받을 방법까지 강구해서 제가 염상진을 찾아가 동의를 구하는 식으로 하면 어떨까 합니다."

김범우는 정면으로 압력을 넣고 있었다.

"예에, 김 선생께서 수고를 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연이야 기박히고 가슴 아파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그게 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라서...어떻게, 제가 좀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율 주시겠습니까?"

심재모는 유연하게 김범우의 압력을 피해섰다,

"물론 그러셔야죠."

김범우는 고개까지 폭넓게 끄덕이고는,

"그런데, 사상이란 것도 사람이 살자고 만든 거니까 그 순서가 사람 다음이고, 그러니까 좌우익 따지기 전에 자기 며느리가 씨받게 해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고 순리라는 그 여자 노인네의 말 앞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단 말입니다. 그 말 앞에서는 어떤 군자의 말이나 철학자의 말도 무색해지고 말게 돼 있습니다. 그 말이 바로 철학이고 진리 아닙니까"

간접화법으로 우회작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 저도 동감입니다. 아까 손 선생 얘길 들으면서도 그 대목이 특히 머리에 남았습니다."

두 분께서도 제 입장에 서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 난처한 부탁은 하지 말아달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그 모호함을 밝힐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자리를 뜨기는 찜찜한 기분이고 해서 김범우는 심재모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말을 한마디 해둘 필요를 느꼈다.

"그 노인네의 소원대로 씨를 받게 해주면 여태까지 당한 심리전의 참패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심재모의 반응이 금방 달라졌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사령관 입장에서 시간 여유를 갖고 더 생각해보시지요. 아무래도 우리 입장과는 다를 테니까요. 전 광주에 볼 일이 있어 이만 일어서야겠습니다."

김범우를 따라 손승호도 일어섰다.

"자네가 결정타를 가했네."

손승호가 경찰서 정문을 나서며 싱긋 웃었다.

", 될 것 같은가?"

"능청 떨지 말게. 그 얼굴빛이나 목소리가 반갑게 변하는 걸 나보다 가까이서 확인한 게 누군데."

"그래, 어찌 되겠지."

두 사람은 역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나 사표냈네."

김범우가 말했다.

"사표?"

손승호가 걸음을 멈추며 김범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 사표."

"언제?"

"어떡헐려고?"

"서울로, 지각한 공불 하려고."

"결국 그렇게 결정했군."

손승호는 눈길을 돌리고 발을 떼어놓았다. 손승호의 옆얼굴로 쓸쓸한 그늘이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곧 술 한 잔 하세."

김범우가 말했다.

"그러지, 술은 내가 사겠네."

좋아, 자네도 사고, 나도 사고 그러세."

둘이는 역에 이르도록 도는 말이 없이 걸었다.

 

고흥으로 넘어가는 뱀골재는 가풀막지면서도 구불구불 길었다. 뱀이 많아서 뱀골재라 한다고도 했고, 생김새가 뱀을 닮아 구불거려 뱀골재라 한다고도 했디. 그 두 가지 이유가 함께 어울리도록 뱀골재 언저리 남향받이 산에는 뱀이 많았고, 순천으로 넘어가는 진트재에 비하면 뱀골재의 구불거림은 행인들의 짜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했다. 세 사람이 뱀골재를 오르고 있었다. 마삼수 · 깁복동 · 강동기였다. 그들은 또 서운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이, 다리 쉼서 담배나 한 대씩 꼬실리고 가세."

김복동이가 앞서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소리침은 숨이 가빴고, 거칠한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쪼깐만 가먼 몬뎅잉께, 몬뎅이서 쉽시다."

마삼수가 계속 걸어 올라가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야 이 문딩아, 몬뎅이럴 올라챌 심이 모지랑께 심 모타 올라챌이라고 쉬잔 것이제, 몬뎅이 올라챌심 있음사 멋났다고 쉬자겄냐! 느그눔덜 뱃보 시컴허기가 똑 덕보눔 뱃보다."

아예 걷기를 멈추어버린 김복동은 어기 부리듯 소리 헐 기운으로

"한 발이라도 더 걸을 맘 묵으씨요. 안직 정기가 입꺼지 올를 나이도 아님스로 위찌 그리 입심만 쎄다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마삼수가 말끝에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달았다. 마른 풀섶에 엉덩이를 붙인 강동기는 담배쌈지를 꺼내고 있었다.

"이눔아 말 조심혀. 안직꺼지 내 정기는 요렇타께 붕알에 있다. 나가 찌렁찌렁 허니 소리 질르는 것 들음시롱도 그리 멍청헌 소리허고 자빠졌냐. 그 찌렁찌렁헌 소리넌 붕알에 재인 정기가 뱃창새기럴 뻗질러 타고 올라 목구녕으로 터져나오는 거이다. 나 말이 참말인지 그짓말인지는 정작 정기가 입으로 올라붙어뿐 노친네덜얼 바라. 뇐네덜이 워디 나맹키로 찌렁찌렁헌 소리 질르디야? 소리럴 질러바야 숨보트는 소리가 발 앞에 떨어지는 골골허는 소리제."

마삼수 쪽으로 걸음을 놓으며 김복동은 변명인지 강변인지 모를 말을 숨 식식거리며 해대고 있었다.

"오따매, 성님 사설 참말로 징허요잉. 속 뻔허니 딜다뵈는 그짓말얼 워찌 그리 목수 문틀 아구맞추대기 혀분다요? 성님 붕알에 정기가 따악 쟁앴으먼, 울 정기는 워디 있을께라?"

마삼수는 귀에 꽂았던 말이 담배 공초를 뽑으며 느물거리고 웃었다.

"물으나마나 다리에 있제. 긍께로 나 앞질러 팽팽허니 걸어가제.“

김복동은 휴우 숨을 내뿜으며 강동기 옆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성님 말이 요상허시? 다리에 정기가 있는디도 새끼럴 까는 붕알도 있읍디여? 동기나 나 붕알언 글먼 미친놈에 붕알일랑가, 똑별난 붕알일랑가. 성님, 고섯 잠 판결 내레줏씨요."

진작부터 말머리를 잡았다 싶었던 마삼수는 김복동의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미친눔."

벌교 쪽으로 먼 눈길을 보내고 앉아 있는 강동기는 말을 흘리며 피식 웃었다.

"고것은 미친것도 아니고, 느자구웂은 붕알이다."

능청스럽게 말을 한 김복동이는 말이 담배에 흠뻑 침을 묻혔다.

"느자웂은 붕알? 그 판결 한분 요상시럽네. 워떤 붕알이 느자웂은 붕알이다요, 성님?"

"워따 그 자석, 몰르는 것도 많고, 알고 잡은 것도 많다. , 느그덜 붕알맹키로 풋붕알임서 새끼나 까잘르는 붕알이 느자웂은 붕알이제 워째."

"허어 참말오, 나가요 나이꺼정 삼스로도 풋자지라는 말언 들었어도 풋붕알이란 말언 오늘 첨 듣는 말이시. 성님, 우리 나이가 멫인디 행에 우리 것 보고 풋자지라고 헌 것은 아니겠제라? 으쩌요, 말이 궁허다 봉께 헛나온 것이제라?"

입 꼬리가 처지게 입을 다문 마삼수는 김복동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야가 시방 무신 소리럴 험시로 사람얼 무시헐라고 든다냐. 풋자지 넌 아그덜 자지로 따로 있는 것이고, 머시냐, 느그덜 나이 것이냐 안직도 설영근 좇잉께로, 그려, 풋좇이다, 풋좇!"

"니기럴, 자지 · 풋자지 · · 풋좇, 그눔에 것 천자문보담 더 에로와 워디 해묵겄소."

마삼수는 가래를 돋구어 퉤 내뱉고는,

"근디 성님, 나 한 가지 걱정이 있는디라. 안직 바람언 썬들썬들헌디 성님이 그리 담얼 흘리는 거시 필시 식은 땀일 것인디, 그래 갖고도 새북좆이 스요오?"

아주 진지하고도 은밀하게 물었다.

"야가 시방 사람얼 멀로 보고 허는 소리다냐!"

김복동은 펄쩍 뛰듯이 했다.

"나가 성님얼 무시혀서 허는 소리가 아니고, 새북좆 안 스는 눔헌테는 돈도 빌레주지 말라고 혔는디, 형님이 그리 식은땀 흘리는 것 서운상이가 보면 워디 소작 줄라고 허겄소. 성님이 걱정시러바서 허는 소리요."

"나 좆이 새북에 스는지 눕는지 속씨언하게 알아뿔라먼 대환이 엄씨헌테 물어바라."

"어허 성님, 무신 말얼 그리 쌈빡허게 혀뿌요. 쌍눔헌테도 범절이 있는 법인디, 아저씨헌테 워쩌크롬 고런 말을 묻겄소. 성님 말 그냥 믿기로 허고, 나가 담배나 한 대 몰아디리겄소."

마삼수가 쌈지를 펼치며 밉지 않은 눈짓을 보냈다.

"그려, 진작에 그럴 일이제."

김복동이는 헤식이 웃음을 피우고는,

"에라 또 봄언 영축옶이 오고, 땅 한 뙈기 웂은 이눔에 팔자 앞날이 막막허고 막막허다."

하늘을 향해 푸념을 토해냈다. 멀리 건너다보이는 제석산 줄기에도, 멀리 내려다보이는 중도들판이나 포구에도 봄내가 뿌유스름하게 끼여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포구의 하늘에 물 아랑을 짓던 기러기 떼의 날개 짓도 사라졌고, 회색빛으로 넓은 중도들판에는 객토 흙더미들이 앵두 알처럼 붉은 점으로 점점이 박혀 있었다.

"요 담배피고 기운채리씨요. 산 입에 거미줄 칠랍디여."

마삼수가 김복동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어이, 고맙네. 헌디, 꿈에도 생시에도 덕보눔 맘뽀가 워찌 그리 변해뿌렀는지, 알다가도 올을 일이랑께."

김복동은 또 노덕보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잡녀러 인종이 이약 때레치고, 고만 가드라고."

강동기가 내쏘며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두 사람도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앞서 걷고 있는 강동기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뒤를 따르고 있는 두 사람은 강동기의 성깔을 아는 까닭에 노덕보의 이야기를 더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노덕보가 세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어떻게 뒷손을 써서 최씨네 소작을 얻어 부치게 됐음을 안 것은 보름 전쯤이었다. 그들은 노덕보네 집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노덕보나 그의 아내는 미안해하거나 잘못했다는 기색은 털끝만치도 없이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만만 했다. 정 사장네를 함께 찾아가고, 분하고 억울함으로 함께 일을 저지르고, 유치장 살이를 함께 치르고, 변상을 해주느라 함께 빚돈을 내고, 소작문제를 풀어보자고 서운상을 찾아 함께 뱀골재를 넘나들었던 노덕보가 아니었다. 소작을 얻어 부쳐서 이제 몸 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생판 딴 사람인 노덕보가 앉아 있었다. 노덕보보다 더 가관인 것은 그의 아내 조성댁이었다. 연상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입을 나불대다가, 떨어진 감 먼저 줏어 먹는 것이 임자지 못 줏은 사람들이 왜 여러 말 하느냐고 나왔다. 그때, 이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소리치며 목침으로 방바닥을 내려침 것이 강동기였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이 진중하다가도 어떤 그른 짓을 대하고 한번 성질을 돋우었다 하면 그 결기와 강단을 막기 어려운 강동기가 목침을 손에 잡은 것이다. 노덕보와 그의 아내는 사색이 되었고, 마삼수와 김복동은 강동기를 방문 밖으로 떠밀어냈다.

"워디고 노덕보맹키로 개 겉은 눔덜이 갈렷응께 지주 눔덜이 그리 뱃짱퉁게감서 세세만년 덩덩거리고 사라지는 것이여. 개잡녀러 세끼덜!"

어둠 속을 걸으며 강동기가 말했다. 서운상의 집이 먼발치로 보이게 되엇을 때 세 사람은 어느만큼 지쳐 있었다. 묽은 죽 한 사발씩으로 아침을 때우고 삼십 리가 겨운 길을 걸었던 것이다.

"넘덜언 객토짐얼 지는 판인디, 오늘이야 꼭 결말얼 보게 돼얄 것인디."

서운상의 집에 들어가지 전에 기운을 추슬리느라고 다리쉼을 하며 김복동이가 시름겹게 말했다. 강동기는 물론, 마삼수도 말이 없었다. 찌르륵, 찍찌그르. 어디선가 봄새가 방울 굴리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마삼수가 담배연기를 푸우 뿜어내며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깊게 푸른 하늘뿐 새는 보이지 않았다.

"와따, 머 묵자고 하늘인 저리 시퍼런고. 아매 넘 시장끼 돋구니라고 저리 시퍼런갑구마."

마삼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일어나 보드라고."

강동기가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더디게 일어났다. 문 앞에서 그들을 제지한 것은 머슴이었다. 머슴이 처음 팔을 벌렸을 때는 잠시 기다리라는 듯인 줄 알았는데, 떡 버티고 서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있는 그 얼굴이 전 같지 않게 냉기가 돌아 제지를 당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세 사람은 동시에 불길한 생각에 부딪쳤다.

"워째 이려?"

마삼수가 퉁명스럽게 내 질렀다.

"나도 똑겉이 가나헌 처지에 복통 터질 일인디, 다 긑나뿐 일잉께 암말도 말고 그냥 돌아쓰시요. 쥔 어르신네가 딜이지 말라고 허요."

"고것이 먼 소리당가?"

눈을 부릅뜬 것에 비해 김복동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다 끝나뿔다니, 똑똑허니 말해봇씨요!"

강동기가 머슴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의 굳어진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세세허게는 몰르겄고, 논얼 딴 사람헌테 폴아넴겠소."

"고것이 누구요!"

"몰르것소."

"을매나 되얐소."

"하매 댓새된 상싶으요."

"질 틔우기요. 서운상이럴 만나야것소."

강동기의 입에서는 "서운상"이라는 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리 안 된다니께."

자기도 모르게 내렸던 팔을 머슴은 다시 황급하게 벌려서 문을 막았다.

"삼수 니 머 허냐, 내쳐뿌러라." 강동기의 말에 몸집 큰 마삼수가 머슴의 양쪽 어깻죽지를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당하고만 있을 머슴이 아니었다. 대문간에서는 밀치고 젖히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사이에서는 밀치고 젖히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사이에 강동기와 김복동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멋들 허는 짓거리여!"

느닷없는 소리가 강동기와 김복동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사랑채 마루에 서운상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강동기와 김복동은 꾸벅 인사부터 했다.

"못 들어오게 허는 말 전해 들었으먼 순순허니 돌아슬 일이제, 요런 쌍것덜이 누구 마당서 난리굿이여, 난리굿이."

서운상은 전에 없어 서슬이 시퍼렇게 돋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도금 날짜를 어겼으니 계약금 몰수하고 해약이라는 통고가 정 사장한테서 왔고, 몸이 달아 정 사장을 찾아가 변명하고 사정하고 했지만 정사장은 막무가내로, 중도금을 어긴 날짜만큼을 잔금 날짜에서 가내서 치르되 만약 하루라도 어기면 해약하고 딴 사람한테 팔아넘길 테니 할 말 있으면 법으로 하라고 숨통을 죄어왔고, 법으로 해보았자 계약금 떼이는 것이야 자명한 일이라서 하는 수 없이 다음날로 미룬 중도금을 급전을 돌려 막았고, 중도금 어긴 날짜를 까내고 보니 잔금 날짜도 며칠 남지 않아 논 팔아넘길 작자를 찾아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유주상이와 선이 닿아 사들인 값에서 이 할을 밑지는 조건으로 일시불을 받아 잔금을 치렀던 것이다. 그 난리를 겪으며 몸은 몸대로 다고, 손해는 손해대로 본 서운상은 그 심기가 말이 아니었다. 상것들이라는 말에 강동기는 속이 뒤집어지려 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렇제라, 우리야 가난혀서 쌍것잉께 쌍것 소리 듣는것이야 당연지사고요, 논얼 폴아 냄기셨다는디, 그 경우 우리 소작권도 항꾼에 넴게주십사 헌부탁언 워찌 되얐는고 허고요."

"나가 원데는 느그 소작 띠묵은 사람이여? 고것이야 정 사장헌테 가서 따져."

강동기는 눈앞이 아뜩해짐을 느꼈다. 한 가닥 남았던 기대가 불길한 생각 그대로 끊어져버린 것이다. 이놈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가슴이 푸들거리고 떨리며 다시 속이 뒤집어지려 했다. 강동기는 이빨을 맞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렀다. 아직 한 가닥이 더 남아 있었다. 논을 사들인 사람을 알아내 찾아가보는 일이었다.

"글먼 논 사딜인 사람이나 갤차줏씨요."

"아니, 시방 누구 복장 긁자는 심뽀여? 그눔 꿈에 다시 볼까 무선께, 나가, 싸게 나가!"

서운상은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복장 긁자는 거이 아니라 우리덜 목심이 붙은 중대사구만이라."

"벌거지 겉은 것덜 죽으나 사나 나 알 일 아니다. 머 허고 있냐! 물찌끄러 내몰아라."

"머시여, 벌거지!"

강동기가 소리치는가 싶더니 담 쪽으로 내달았다. 십을 집어든 그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머슴이 팔을 벌리며 그를 막아서려 했다. 그는 삽을 내려쳤다. 머슴이 폭 꼬꾸라졌다.

"동기야! 동기야" 김복동과 마삼수가 소리쳤다. 눈에 파랗게 불을 단 강동기는 동료들의 외침도 아랑곳없이 서운상을 향해 내달았다. 돌발한 위험을 피하려고 허둥거리면 방문을 열어젖히던 서운상은 비명을 토하며 나뒹굴어졌다. 강동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또 삽을 치켜 올렸다. 뒤따라 쫓아온 김복동과 마삼수가 강동기의 팔을 붙들었다. 강동기가 버둥거렸다. 김복동이 강동기의 뺨을 철퍽 갈겼다.

"이눔아, 정신채려. 살인죄인 되겄다. 니가 요리 미쳐뿔먼 우리넌 위쩌란 것이냐."

김복동의 목소리는 그대로 울음이었다.

"냅두씨요. 요런 인종덜언 싹 다 때레쥑여뿌러야 쓰요,"

강동기는 질펀하게 뻗어 있는 서운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서운상의 어깻죽지 언저리에는 벌써 피가 시뻘겋게 배나고 있었다.

"인자 워쩔 것이다냐?"

김복동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망가야제라."

"얼로?"

"모르것소."

"우리도 항꾼에 가야제."

마삼수가 마른 침을 삼켰다.

"니 미쳤냐!"

강동기가 마삼수를 노려보며 내쏘았다. 그때였다. 한쪽 팔이 피범벅이 된 머슴이 안채 쪽으로 기어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 살인이여! 살인났네에!"

"여그서도 망허먼 죄인 된께 꼼지락 말고 있어야 써."

강동기는 김복동과 마삼수를 마당으로 떠다 밀며 자기도 마루를 뛰어내렸다. 안채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머슴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머슴과 눈이 마주치자 강동기는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 저눔이다. 저눔 잡아라아! 저눔이사람 쥑였다아!"

머슴은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안채에서 쫓아 나온 세 여자가 허둥지둥 마루로 뛰어올라 소리쳐 울기 시작하고, 머슴은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그제서야 피 흐르는 팔을 다른 손으로 붙든 채 아이고땜을 놓았다. 하얗게 질린 김복동과 마삼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마당 가운데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10.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서민영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배나무 사이를 오가며 잔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배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며 월동 결과를 점검하고 있었다. 상처입고 말라버렸거나 자연고사한 가지들을 찾아내 가위질을 해나갔다. 그리고 점검이 끝난 나무 둘레로는 한 뼘 남짓한 깊이로 괭이질을 했다. 한쪽 다리가 성나지 못한 그의 괭이질하는 모습은 어설프고 힘들어 보였다. 절룩거리며 손수레를 끄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농장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한사코 만류했지만 서민영은 귀머거리인 양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농장 여기저기에 세워진 푯말의 일하지 않은 자는 먹으려 하지 말라, 내일 먹으려 하거든 오늘 일하라, 하는 문구들이 서민영의 대답인 셈이었다. 몸 성한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것뿐 서민영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불편도 힘듦도 느끼지 않았다. 신체 어느 부위가 불구가 되면 전체적 균형이 깨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불균형이 야기하는 착란이나 불편은 또한 치유되게 마련이었다. 그 불균형 속의 균형인 자연스러운 치유는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력이며 모든 생명체에 내포된 오묘한 생명력이라고 서민영은 믿고 있었다. 불구라는 사실로 스스로를 불구로 구속하지 않는 정신력만 갖게 되면 육체의 활동은 정상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그 질긴 생명의 적응현상에서 서민영은 우주의 신묘한 힘과 신의 섭리를 보고 있었다. 서민영은 나뭇가지를 매만지면서 나무들이 저마다 봄맞이 숨을 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지 마디마디마다 맺혀있는 꽃봉오리들은 하룻밤 사이가 다르게 변해갔다. 하룻밤을 지낼 때마다 팽팽한 탄력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꽃봉오리들은 어느 절정의 순간에 다다라 마침내 껍질을 벗어던지고 꽃을 피워낼 것이다. 모든 꽃봉오리들은 겨울을 맞기 전에 벌써 그 속에 꽃을 담고 겨울을 나는 것이다. 봄의 꽃피움을 위하여 그 얇은 껍질에 싸여 엄동을 견디어내는 꽃의 인내, 아니, 엄동의 추위 속에서도 꽃이 얼지 않도록 하는 그 얇은 껍질에 모아진 보온의 힘, 서민영은 거기서 우주의 신비를 보았다. 그것은 모든 생명현상에 걸치는 경이로움이었고, 인간으로서의 자만을 버리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인간의 고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논리라는 것이 얼마나 일방적이며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그것이 결국은 비인간적이고 반자연적인 올가미라는 것을 서민영은 홀로 깨닫고 있었다.

"선상니임, 선상니임, 손님 오셨어라우."

꼬마가 나무들 사이를 다람쥐처럼 빠져나가며 외치고 있었다. 그 카랑한 목소리가 봄기운 가득한 과수원에 싱싱한 파문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서민영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상님, 선상님, 손님 오셨어요."

아이는 숨 가쁘게 말했다.

"어허, 힘드는데 살살 다니잖고."

서민영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빙그레 웃으며 서민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누구시더냐."

", 첨 보는 사림인디, 목사님이라고 허시등마요."

"모옥사아?"

서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양복 입고 모자럴 썼는디, 영 멋지드만이라."

아이는 무언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다는 눈으로 작은 입을 놀렸다.

"그래, 가보도록 하자."

서민영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선상님, 구르마는......"

아이가 서민영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따 또 일해야지. 둬둬라."

아이의 말대로 회관에는 양복차림에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 선생이십니까. 첨 뵙겠습니다. 전 황순직 목삽니다."

남자는 중절모를 벗고 고개 숙였다.

", 전 서민영입니다."

이북 사투리의 억양, 자칭 목사라고 내세우는 태도, 대머리도 아니고 계절도 지났는데 쓰고 있는 중절모, 서민영의 첫눈에 거슬리는 것들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순천교회 장 목사님이 이걸....."

황순직이 양복 속주머니에서 꺼낸 봉투를 받아 든 서민영이 돌아섰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편지를 겸한 소개장이었다.

건강은 어떠하시며, 하시는 일은 여일하신지요. 소생은 염려지덕으로 무사평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집안의 일로 의논드릴 사정이 생겼기로 필을 들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여기 서 선생을 찾아가는 분은 황순직 목사로서, 이 땅의 기구한 형편상 월남한 목회잡니다. 황 목사는 이곳 순천에서 교회를 갖고 목회활동을 하고자 하여 저를 찾아오셨는데, 서 선생도 아시다시피 여기는 작년, 재작년에 걸쳐 새 교회가 세 개나 생겨 포화상태가 아닙니까. 그래 생각다 못해 서 선생한테 소개를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곳에도 기존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만 아직 새 교회가 생기지 않은 까닭입니다. 물론 서 선생이 통찰하여 일을 처리하실 것이고, 행여라도 저를 의식하시어 일을 무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해방 이후 교회의 과다한 증가는 기독교 내적으로도 그러하고 기독교 외적인 사회적으로도 문제점이 많은 것이야 진작 서 선생과 논의한 바가 아닙니까. 건강 누리시고, 하시는 일에 늘상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이만 난필 줄입니다. 총총.

읽기를 마친 서민영은 편지를 본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때 마침 찻물을 끓여 내왔다. 서민영은 자그마한 오동나무상자를 왼손에 받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갇혀 있던 향그러운 차향이 그윽하게 스며났다. 그는 눈을 사르르 내려감으며 부드럽게 숨길을 당겼다. 땅내음인 듯, 꽃내음인 듯 차향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네 겹으로 덮인 한자의 한 자락씩을 조용조용한 손놀림으로 펼쳐 나갔다. 그때마다 조금씩 더 진한 차향이 코로 스밈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차향 자체보다는 어쩌면 월주 스님의 정성을 감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지 네 자락을 다 펼친 서민영은 옆에 놓인 무쇠주전자 뚜껑 위에 오른손 가운데 세 손가락을 모아 조심스럽게 대보고는 했다. 물의 뜨겁기를 감지해보는 것이었다. 물의 뜨겁기가 차 맛이 떫고 잠기고, 물이 너무 식으면 차 맛이 싱겁고 들떴다. 알맞은 물 식히기, 적당량의 차 넣기, 알맞게 맛 우리기, 이 세 가지가 쇠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어우러져야 차 맛이 제대로 나는 것이다. 물을 끓여 내온 다음 상자뚜껑을 열고, 한지 한 자락씩을 펼치고 하는 서민영의 동작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느렸던 것은 물 식히기를 한 셈이었다. 서민영은 손가락 끝을 모아 입차의 양을 어림해가며 그것을 세 번에 나누어 주전자에 넣었다.

승려 월주는 손수 만든 차를 잊지 않고 보내왔다. 그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지닌 대승불교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승려였다. 그는 조선불교의 폐쇄적인 보수성을 늘 안타까워했으며, 사회적 실천 자각이 없는 개인주의적 기복성을 우려했다. 그는 기독교적 성경 한글화를 무엇보다도 부러워했으며, 한용운 같은 승려가 열만 된다면 조선불교가 제대로 되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고는 했다. 그와 교분을 나누게 된 것은 그가 순천포교당에 머무를 때였다. 그와 의식을 맞물림으로 이루어진 일이 야학경영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교직에 몸담은 상태에서 야학경영이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차 맛을 음미할 줄 알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깊고 넓게 생각하고, 많은 글을 써야 했던 다산이 호를 다산으로 지을 만큼 차를 좋아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차는 미각도 미각이지만 그보다는 정신을 쇄락하게 해주거든요. 다산은 과중한 정신노동으로 머리에 쌓이는 피로를 차로 푼 것이지요. 다산에게 차를 대준 게 대흥사 절집이었는데, 예로부터 중들이 차를 즐겨왔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지요. 정신노동자가 차를 즐기고, 육체노동자가 막걸리를 즐긴 것은 퍽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놈들 때문에 어이없는 꼴들이 생겨나게 되잖았습니까. 차를 마시는 일이 무슨 신선놀음이나 한량놀음을 하는 것 같은 도착된 풍조 말입니다. 닛본또를 휘두르는 군국주의자들이 찻잔을 받쳐 들고 앉은 꼴이라니, 가관 중에 가관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일본 놈들이 보성일대 야산에 대단위 차 재배단지를 조성하게 되자 못내 불쾌해했다. 도미를 위시해서 맛진 생선이면 다 일본 놈들이 차지해 식생활까지 파괴당했듯 우리의 고유한 정서생활 중의 하나가 또 일본 놈들에게 침해당하는 것은 그는 아까워했다. 서민영은 주전자를 들어 차를 찻잔에 반씩이 미처 못되게 따랐다. 그는 하루에 꼭 한번, 낮일을 마치고 저녁에 책을 펼치기 전에 차를 만들어 마셨다. 차를 만드는 그 시간에 하루 일을 더듬어 생각에 잠기는 것이 좋았고, 천천히 차를 마시며 책 속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갈피 잡아가는 것도 좋았다. 승려 월주는 한용운이 세상을 떠나자 선암사 대웅전 마룻바닥을 쳐대며 한나절을 통곡하고는 그 길로 종각으로 내려가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눈 한번 붙이지 않은 채 쇠북을 울려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빌었는데, 그 소문이 짜하게 퍼져나가 그는 갑작 고승이 아닌 명승이 되고 말았다.

"삼일 삼야에 일순불면, 식음 전폐, 통시타종, 부단 염송 하였으니 소승이 바로 생불이란 겁니다. 그것까지도 좋은데, 글쎄 넋 나간 늙은이들이 생불님 모시고 불공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쌀 됫박 이고 줄을 서지 않았겠습니까. 그 꼴을 만해 선사께서 내려다보시며, 이놈 땡초 월주야, 그런 재앙 떨었으니 당해서 싸다, 하실 겁니다. 이게 우리 불교의 한겝니다.“

서민영은 두 번째로 차를 따라 찻잔을 채우며 소리 없이 웃었다. 생불곤욕을 피해 말사를 떠돌던 월주를 생각하면 언제나 웃음이 나왔다.

"드십시오, 선암사 경내 큰 나무 그늘에서 잘 자란 것인데다가, 한 스님의 정성까지 깃든 찹니다."

서민영이 찻잔을 들며, 편지를 읽고 나서 처음 한 말이었다.

"아니, 크리스찬으로서 우상숭배자들과 관계를 하십니까?"

황순직은 차를 마실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정색을 하고 있었다. 서민영은 혐오감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장 목사를 생각했고, 그의 왜곡된 편협성 또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우상숭배......내 종교가 소중할수록, 신도가 확장되기를 바랄수록 남의 종교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헐뜯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여 우상숭배라고 매도하다면, 그럼 우리 기독교가 내세우는 십자가는 뭔가요. 부처님이나 십자가는 각 종교의 상징물이지 우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상을 숭배치 말라 하심은 인간 영혼을 사악하게 만드는 마귀적 우상을 가리킨 것이지, 엄연한 경정을 가지고 내세관을 확립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상징물을 지칭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비난하라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불교는 그뿐만 아니라 미신적 기복이나 일삼는 집단 아닙니까"

"그래요오? 그러면 우리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는 뭡니까. 우리가 밤낮으로 외는 주기도문이 바로 기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무엇 무엇 하여 주시옵고의 계속 아닙니까. 모든 종교를 비난하고 헐뜯음으로써 우리 종교의 위대성을 내세우려는 착각과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비열성을 버려야 합니다. 김교신 선생께서 외롭게 실천하신 일이 뭡니까. 이 땅의 기독교에 미국식 물량주의와 저돌성이 감염된 것을 치유해서 건전하고 건강한 민족종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물량주의는 무질서한 교회짓기였고, 저돌성은 바로 다른 종교의 무조건적 배척과 전통생활양식의 조직적 파괴였습니다. 이 땅의 목회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서양 사람들의 저의가 감추어진 말을 그대로 따라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도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고사잔치도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심지어 나라의 상징인 국기에 예를 표하는 것까지 우상숭배냐 아니냐로 지금 유치하고 졸렬한 입씨름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럼, 이 땅에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전파시킨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엄연히 그들 풍습대로 부모 죽은 날 모여 앉고 묘지를 찾아가서 절하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나 마치고는 뻔질나게 파티를 해대고, 전쟁을 할 때나 식민지를 약탈할 때나 그들은 철저하게 국기를 모시고 다니며 경례를 붙였습니다. 기독교 본고장 나라들에서는 우상이 아닌 게 왜 우리한테 와서는 우상이 되어야 합니까. 김교신 선생께서는 일찍이 그 저의를 간파하신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한 민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시켜 의식을 완전히 속국화 시켜버리려는 강대국의 저의 말입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민족종교화를 꾀했던 것은 그 음모에 맞서기 위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황순직은 찻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차를 마시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다 보니 못 견디게 목이 말랐던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공박할 만한 말이 없는데다가, 괜한 트집을 잡았다가 용건은 아직 꺼내지도 못한 채 인상만 나쁘게 박힌 것이 몸이 달았다. 꾀죄죄한 차림에 볼품없는 생김에서 그런 강단지고 아구 맞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미리 귀띔을 한마디도 해주지 않은 장 목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편지에 적힌 일은 어떻게....."

"예에, 월남을 하셨다고요?"

서민영은 차로 혀를 축였다.

"그 빨갱이 놈들의 탄압으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 아까운 교회 다 버리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갱이라면 아주 치가 떨립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그 놈이야말로 진짜 사탄입니다. 이북 목회자들은 예수님 다음가는 수난을 당한 겁니다."

말이 진전됨에 따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가는 황순직을 서민영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차로 혀를 적셨다.

"그럼 반공주의자가 되셨겠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내 원수, 아니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원숩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왜 공산주의가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사탄이니까 그렇지요."

"생각이 분명하시군요."

서민영은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스쳐갔다. '단순'이라고 나오려는 말을 '분명'으로 바꾼 것이었다.

"성경 말씀의 예언이니까요."

저리도 단순한 사람은 얼마나 속이 편할까. 그러나 이 땅의 기독교가 문제로구나. 서민영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그와의 자리를 파할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서민영은 생각했다. 시계로 눈길을 보냈다. 열두시가 이십여 분 남아있었다. 밥 때까지 일손을 다시 잡기도 어중간하고, 먼 길을 온 손에게 밥은 먹여 보내야 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게 성경 말씀인 사탄이라서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모든 종료를 부정하는 건 종교가 저지른 잘못 때문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종교들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타락한 결과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인간 사회구조를 재편성 하고자하는 논리를 전개한 마르크스한테 부정당한 겁니다."

"아니, 서 선생은 그럼 막스 그놈이 옳다는 말입니까!"

황순직은 말허리를 자르며 버럭 소리쳤다. 서민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순직을 바라보았다. 서민영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러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비록 인식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예수의 품 안에 든 목숨이었다.

"말을 다 들어보시고 말씀하셔야죠. 다 제 생각일 뿐이니까 더 말하지 않도록 하지요."

", 아닙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막스 그놈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바람에 제가 실수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일방적인 얘길 한 거지요, 목사님이 필요로 하는 얘긴 젖혀놓고 말입니다."

"예에, 그 일은 어떻게 될지....."

황순직은 반색을 하며 앉음새를 고쳤다.

"편지에는, 황 목사님이 교회를 갖고 목회활동을 하시고자 한다고 썼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요."

", 그 말 그대로지요. 목회활동을 하자면 교회가 있어야 되니까, 조그맣게 하나 짓든지, 맞춤한 건물이 있으면 사들일 작정이지요."

우문현답이 될 것이기에, 어떻게 그런 경제력이 있는지 서민영은 묻지 않았다.

"여긴 삼십구 년에 세워진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꼭 십 년이 됐군요. 그런데 신도라는 것이 오십 평 정도에 반도 안 차 운영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아니, 인구가 얼만데 그 꼴이란 말입니까. 그건 진적으루 전도활동에 문제가이서요."

황순직의 말은 갑자기 사투리 억양이 심해졌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곳 일대는 토착화된 불교세가 뿌리 깊은데다가, 오래도록 사람들은 절박한 생존문제로 시달리고 허덕여오면서 신에 눈 돌릴 여유도 없고, 신을 믿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황 목사님을 위해서나, 현존 교회를 위해서나, 이곳은 피하시는 게 현명한 처살 겁니다. 아무래도 농업지역이 아닌, 대도시라야 개척이 쉽잖겠습니까. , 서울 같은 데 계시잖고 이 멀리까지....."

"여북 했으믄 예까지 왔갔어요, 서울엔 교회 천지고, 그것도 다 끼리끼리 해먹고 말아요."

또 말허리를 자른 황순직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그의 한마디에서 월남한 교파들 간의 난맥상과 기존 교회들과의 갈등 같은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십육년과 칠년, 이년 동안 무슨 유행처럼 일어났던 교회 짓기는 바로 월남한 목사들의 터 잡기였다. 그에 따른 미군정과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 사회적 의혹과 비판이 생겨났다. 사실 군정은 월남한 목사들을 상대로 일본 대종교의 회당들을 넘겨주는 특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낯선 땅에서 안착이 급선무였고, 미군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필연적이고도 원색적 증오심을 가진 장래성이 확실한 조직세력이었다. 상호간의 필요에 의해 주고받은 밀월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북청년단이 그랬던 것처럼, 서민영은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성직노동을 통한 단계적 안정을 꾀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쉽게 타협해 스스로 정치올가미를 쓰는 것을 걱정하고 우려해왔었다. 미군정과의 그런 관계는 물론 월남기독교인한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서민영은 이 땅의 기독교 장래를 우려하며 김교신선생을 생각했고,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절감했으며, 그럴 때마다 '한 알의 밀알'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농장 일에 파묻혀 들고는 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순직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점심이나 잡숫고 가셔야죠. 밥 때가 됐습니다."

열두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또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황순직은 거칠게 마루를 내려갔다.

"글세, 밥 때에 그냥 가시면 됩니까."

서민영은 다급하게 뒤따랐다.

"전 지금 밥 먹는 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황순직이 돌아서며 말했다. 서민영의 눈앞에는 노기 찬 한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서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루를 내려섰다.

"괜히 실례했습니다. 가보겠습니다."

", 편히 가십시오."

서민영은 황토 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황순직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서민영의 가슴에는 까닭모를 슬픔이 차 올라왔다. 주여......서민영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김복동과 마삼수는 고흥 경찰에 결박당해 심재모에게로 넘겨졌다. 내려치는 삽날에 찍혀 어깻죽지에서부터 등줄기까지지 사선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서운상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피를 흘리며 자애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처치로 지혈을 한 전 원장은 환자를 순천도립병원으로 옮기게 했다. 척추에 이상이 있을지 모르니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다는 것이었다. 머슴이 입은 상처도 경상이 아니었다. 살점이 너덜거릴 만큼 외상을 입은 데다, 뼈가 부러졌던 것이다. 그도 외상만 치료받았을 뿐 골절치료를 위해서는 순천으로 넘어가야 했다. 머슴은 순천으로 떠나기 전에 대충 조사를 받았는데, 삽을 휘두른 것은 강동기요, 두 사람은 그에 합세했다고 사건 진술을 해버렸다. 그 진술에 따라 두 사람은 흉기난행 폭행공범이 되어 꼼짝없이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너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자신들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자신들이 뒤쫓아 가 동기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서운상은 죽고 말았을 거라며 두 사람은 사실대로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서운상을 찾아간 목적이 가해자와 동일한데다가, 유일한 목격자인 머슴의 증언이 그랬으므로 두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일단락된 것으로 알았던 정 사장 사건이 사람을 옮겨가면서까지 그렇게 확대된 것을 조사를 통해서 알고 난 심재모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는 지주와 소작인의 그 끈질긴 관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소작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건 결국 먹고 산다는 문제였다. 지주는 배불리 먹고 살겠다는 욕심이었고, 소작인은 최소한 배는 채워야겠다는 집념이었다. 그 줄다리기에서 목숨을 내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재모는 두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처음 보는 순간 자신의 몸 그 부분에 차가운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상처에서 끼쳐온 것은 살의였다. 죽이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사람의 몸에 그런 끔찍한 상처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서운상의 상처에서 그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그렇게 깊이 파고든 삽날이 머리에 떨어졌더라면 그가 즉사하고 말았을 것은 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더욱 배가 부르고 싶은 싸움과 굶어죽지 않으려는 싸움, 그 싸움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심재모의 마음은 착잡하게 가라앉아갔다. 바로 그날 밤부터 강동기의 집 주위에 경찰을 잠복시켰지만 이들이 지나도록 범인의 행방은 감감했다. 범인을 잡지 못하고서는 다른 두 사람도 어떻게 조처할 수가 없었다. 머슴은 그들이 합세했다고 진술했지만 그것이 갖는 증언으로서의 타당성이 문제였다. 머슴은 서운상의 한 식구나 마찬가지 조건에서 피해까지 입은 입장인데다가 당사자들은 합세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범인을 제지했기 때문에 서운상의 피해가 그 정도로 그쳤다는 두 사람의 주장은 타당성을 인정할 만한 심증을 갖게 했다. 그 사건이 터지고 보니 김범우가 부탁한 노인의 문제는 자연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탐문수사를 벌이게도 했지만 범인을 목격한 사람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병원에서 온 연락은 심재모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운상이 척추를 상해 대수술을 받았는데 계속 혼수상태이고 의식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완치가 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완치 여부의 불확실함은, 척추의 이상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 혼수상태가 계속되거나, 깨어나더라도 전신마비나 반신불수가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나무꾼 차림으로 석거리재를 넘은 하대치는 쌍암장터가 멀지 않은 조계산 자락에 이르러 지게를 받쳤다. 우선 바지춤을 까 내리고 오줌부터 누었다. 오줌발이 뻗어나가기 시작하자 그의 눈꺼풀은 사르르 잠겨 내렸다. 배설의 쾌감을 감지하는 말초신경의 반응이었다.

"어어 참 션타!"

하대치는 온몸을 푸드들 떨어 진저리를 치며 흡족감이 넘치는 소리를 토했다.

닌장맞을, 혁명이고 해방이고 요리 오짐누고 똥누대끼 션허게 되야뿔먼 을매나 좋아뿌까이.’

하대치는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그는 허리끈을 단단히 동여매며 주위를 두리번거려 살폈다. 산이 깊어 나무감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러나 이제 솔가리나무는 쓸모가 없었다. 그 대신 솔가지나무를 하면 되었다. 솔가리는 겨울을 나면서 진기가 거의 빠져버려 불땀이 없이 아궁이에 재만 채웠다. 그러나 큰 나무에 붙어 저절로 죽어버린 솔가지들은 겨우 내내 잘 말라서 솔가지나무 하기는 제철이었다. 해를 힐끗 올려다본 하대치는 양쪽 손바닥에 침을 튀겨 맞비볐다. 한바탕 나무를 할 작정이었다. 장터댁으로 돌아가자면 위장을 위해서나 장터댁을 위해서나 나뭇짐이 나뭇짐다와야 했다. 첫 번째 나뭇가지를 툭 꺾으며 하대치는 코웃음을 흘렸다. 대장 염상진이 생각나서였다. ()을 대러 가는 길에 장터댁을 한번 만났으면 한다고 말하자 염대장은 으윽히 쳐다보고 웃으며 "정들었소?"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 쳐다보는 눈길이나 웃음이 반은 농이었고, 반은 의심이라고 느껴졌다. 서운한 생각이 왈칵 치밀었다.

"나가 미쳤간디라? 대장님 따라댕김서 허는 일이 워디 색질입디여? 그라고, 대장님이 은제 색질허라고 갤찼는게라?"

자신도 모르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하 동무 맘 다알고 있소."

염 대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장터댁얼 한분 찾아볼라고 허는 거슨, 우리 사업얼 지성으로 도와준 것도 고맙고, 지가 으쩌다 봉께 홀압씨라고 혀부렀는디, 고 창아리 옶는 예펜네가 고것 믿고 한정 웂이 목 닐이고 있으먼 지가 사람 못헐 일 시키는 것이고, 그차 저차 혀서 고마운 것 표식허고, 이사 허는 것 맨치로 혀서 끝막음도 깨끔허니 허고 헐란 것이었제라."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리 하시오."

염 대장은 어깨를 잡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대치는 육자배기 가락을 흥얼거리며 마른 가지를 꺾어나갔다. 아직 햇발이 넉넉하게 남은 데다가 나무가 많아 서두를 것이 없었다. 오늘은 장터댁을 만나고, 선은 내일 대도록 되어 있었다. 하대치는 선요원 노릇 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만족스럽고 떳떳한 일로 생각했다. 선요원 노릇은 위험하고도 힘이 들었다. 언제나 감시의 눈을 피해야 하고, 혼자서 산을 타야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눈치 빠르고 몸이 날래야 하는 것에 앞서 당성이 강하고 혁명의식이 투철해야 했다. 염 대장은 선요원을 '혁명전사 중의 전사'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그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그건 영광이었고 기쁨이었다. 보람이고 힘이었다. 실한 솔가지나뭇짐을 지고 하대치가 쌍암장터로 들어섰을 때는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하대치는 지게를 받히기 전에 국밥집 안의 동정부터 살폈다. 장날 저녁이 아니라서 그런지 손님 있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게를 진 채로 문을 옆으로 밀었다.

"어여 오씨....."

여자의 목소리가 여기서 끊기는 듯하다가,

"음마아! 요것이 누구다요."

장터댁은 두 팔을 뿌리듯 허공을 치며 반가운 소리를 내질렀다.

"위따, 춘향이 이도령 보디끼 허네이."

하대치는 심드렁하게 말하고 서 있었다.

"반갑기로 치자먼야 고것으로 모지래고, 죽었다가 되살아난 심청이가 봉사 아부지 새시로 만난 것만 허요. 근디, 나뭇짐 안 부리고 워재 그러고 섯소. 워디 딴 국밥집 새로 맹글었소?"

장터댁이 화기 도는 얼굴로 눈을 흘겼다.

"하먼, 자네보담 이쁘고 창방진 여자가 쩌짝에 있데."

하대치는 서너 발짝 옆걸음질을 쳐 지게를 벗었다.

"고년이 워떤 년인지 대갱이에 머리크락 싹 다 잡아띧겨 중놈 상호 되고 잡은개비요. 얼렁 들오씨요, 국밥 맛나게 몰 거싱께."

하대치는 지게작대기를 받치며, 다시 오기를 백번 잘했다 싶은 생각을 했다.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했다. 그녀가 옷 짓는 일을 말끔하게 끝내자 마음먹었던 수고비를 내밀었는데 그녀는 한사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욱대기다시피 해서 돈을 쥐어주고 돌아서서도 돈을 마다하는 그녀의 마음이 끈이 되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건 밥장사를 하는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옷 짓는 일을 맡았다고 해도 고마울 판인데, 그녀는 돈을 상관하지 않는 마음으로 일을 해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국밥집 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고 하는 계산속으로 잠자리를 폈을 그녀가 잠자리가 거듭되면서 임만 보아도 좋다는 쪽으로 마음이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신분을 감추려고 홀아비니 뭐니 해가며 밑자락을 깐 탓이었다.

"장시 잘해갖고 이문 톡톡허니 냉케오씨요이."

옷짐을 지고 돌아설 따 흡사 남편에게 하듯한 그녀의 말이 날이 갈수록 마음에 죄로 걸렸다. 그 옷을 혁명 전사들이 입게 될 것은 그녀가 끝까지 모르는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녀가 자신을 텃 없이 기다리게 만들어놓고 소식을 끊어버리는 것은 사람을 이용만 해먹고 똥 치운 막대기 내던지듯 하는 사람 같지 않은 짓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순결한 전사다...... 그 순결을 더럽히는 것만 같은 찜찜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장터댁은 엄연한 인민의 한 사람이었고, 더구나 혁명 사업을 도운 장한 인민이었다. 뒷마무리를 깨끗하게 하여 그녀의 마음에서 기다림을 없애주고, 자신도 찜찜함이 없는 순결한 전사이고 싶었다. 염 대장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 같았다. 어깨를 잡고 흔들던 것이며, 고개를 끄덕이던 것이 그렇게 느껴졌다.

"머 허고기시오, 국밥 다 몰았는디."

"어이 들어가는 참이시."

하대치는 생각을 털며 돌아섰다.

"워찌 그리 함흥차삽디여?"

장터댁이 술 바가지를 들고 뒤따르며 말했다. 그 말을 할 만큼 수십날이 지나갔음을 하대치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

"워쩌다 봉께로 그리 되야부렀네."

하대치는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옷장시 해갖고 돈벌어 거그서 새 장개 들어뿐 줄 알았소."

마주보고 앉은 장터댁이 바가지의 술을 잔에 따르며 하대치를 진득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나도 글 되길 바랬는디 뜻대로 안 되야뿌렀네."

하대치는 헤식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씨엉쿠 잘되야 뿌렀소"

장터댁은 오기를 지르듯 말하고는,

"근대, 무신 일이 있기는 있었는갑소이. 신색이 전만 못헌디다가 기색도 워째 구름찐 것맹키로 쌔코롬헌디, 장시가 밑갔읍디여?"

장터댁은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눈빛을 하대치의 눈치를 살폈다. 하대치는 마음먹은 말을 꺼낼까말까 망설였다. 만나자마자 마지막 걸음을 하러 왔다는 말을 꺼내자니 너무 야박한 것 같고, 장터댁이 깔고 있는 말자리는 그 말을 꺼내기에 안성맞춤이고 그랬다. 하대치는 술사발을 쭈욱 기울였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고, 일부러 걸음 한 것도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대치는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훔친 입술을 되짚어 손등으로 훔쳤다.

"장시고 머시고, 나가 오늘로 장터댁얼 끝보기럴 혀얄랑가비네."

"머시라고라?"

장터댁은 엉덩이를 벌떡 들었다가 놓았다. 그 바람에 의자가 신음소리를 냈다.

"와따 걸상 뿌시러져뿔겄네."

"음마, 태평시런거. 궁뎅이는 성허로라.?"

"자네 궁뎅이야 실헌께."

"사람 간 떨어지게 혀놓고 무신 싱건 소리 허고 앉었소. 시방.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터댁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감돌고 있던 화기는 간 곳이 없고 놀란 기색만 드러나 있었다.

"나가 벌교로 이사럴 가야 허게 생겼네. 근디, 나 따땃허게 대해주고, 일 지성으로 챙게준 자네럴 안 보고 뜰 수가 있어야제."

"참말로, 정들라 헝께 이별인갑소이."

장터댁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대치는 또, 찾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으짤 수가 있겄소. 사람찌리 만내고 멀어지고 허는 것이야 서운헌 일임스로도 서운해허덜 말어야 헐 일이제라. 나가 암것도 헌 일이 웂는디 요리 찾아온 맴이 하여튼지 간에 아즘찬이요, 국물 다 식는디 싸게 드시씨요."

장터댁이 코를 들이마시며 국밥그릇을 하대치 앞으로 조금 밀었다. 그는 비로소 국밥에 꽂힌 숟가락을 잡았다. 그날 밤 그녀는 미친 듯이 하대치를 탐하고 들었다. 그녀는 몸이 불붙어 타오를 때마다 신들린 무당처럼 온갖 소리를 토해내고는 했다.

"가지 말어. 가지럴 말어. 갈라먼 날 딜꼬 가, 딜고 가아, 워메 요래 놓고, 워메, 요래 놓고....."

"워메,워메,나넌 따라갈라네, 천리만리 따라갈라네. 워따, 워따, 혼자서는 못 살것다, 기엉코 따라갈라네, 못 오게 혀도 죽어도 따라갈라네. 요리 미치게 혀놓고 워째 가, 워째가."

"나가 믹에 살링랑께 항군에 살어. 가덜 말고 항군에 살어. 워야 죽겄다. 워야 못 살겄다. 나가 믹어살릴랑께."

"아이고 웬수야. 아이고메 이 웬수야, 그리 허망허니 가뿔람사 요리 달지나 말아야제, 요리 담스로, 요리 꼬심스로 가기넌 워딜 가. 워메메 나죽겄다. 워메메 미치겄다. 날 두고 갈라먼 쓰고 맵고 짜와야제, 요리 달고 꼬셔뿔먼 난 워쩐디야, 난 워쩐디야, 요 무정헌 웬수야."

그리 정신이 없다가도 화합이 끝나면 그녀는 하대치가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는 했다.

"심청이가 닭아 닭아 울지럴 마라혔던 맴얼 인자사 알아묵을 것 겉으요."

"나넌 평상 거그럴 안 잊어뿔 것 같은디 거그넌 나럴 돌아슴스로 잊어뿔겠제라?"

"사람 맴이란 것이 요상시러븐 것잉개비요. 전에넌 그냥저냥 그랬는디, 영영 못 볼 것이다 싶은께로 옶던 맴이 도지고 그러요."

"나넌 여그서 말뚝박고살 것잉께 무신 일로 여그 가차이 오고 허먼 꼭 찾아오씨요이."

그녀가 정신없이 한 말이든,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이든 간에 하대치는 그저

"그려, 그려"

하고 대꾸했다. 그 대꾸가 자신의 말에 맞든 안 맞든 그녀도 탓하지 않았다. 먼데서 장닭의 목청 뽑는 소리가 길게 들려오기 시작하고, 창호지문에 새벽빛이 젖어들었다.

"와따 인자 코에서 피 냄새가 나네."

하대치가 머리를 짤짤 흔들었다.

"고상혔소, 잠 한심 지대로 못 잠시로, 이년 띠 놓고 가는 죄 딲음 톡톡허니 헌 심이요. 이년 가심 씨언허게 맹글어놓고 간께 고맙기는 헌디, 너무 심빼게 혀서 미안시려 워쩔께라. 인자 이년이라먼 씬물이 나겄소."

장터댁은 하대치의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콧소리를 냈다.

"아니시, 아니시, 자네 시언허게 되앗으면 좋제. 자네가 시언허당께 나가심도 씨언허시. 암시랑 않네. 암시랑토 안혀....."

하대치는 선을 댈 것이 오늘 해질 녘이라는 것을 되짚으며 밀려오는 잠의 파도에 휩쓸려들었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술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둘이서 심재모를 찾아갔다가 돌아온 뒤로 며칠이 지나도 심재모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손승호는 몇 번이나 김범우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고는 했다. 가부간 무슨 연락을 받고서도 무심하게 있을 김범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 참에 학부모가 다시 찾아 왔다.

"기둘리다 기둘리다 애가 보타서 또 왔구만이라. 그 여드레가 워쩌크름 그리 질든지......성가시럽게 해싸서 참말로 미안시럽구만이라. 선상님."

노인네의 말을 듣고서야 여드레가 지난 줄 알게 되었다. 그 여드레가 노인네한테 얼마나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이었을 것인가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노인네를 보내놓고 바로 김범우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내가 진작 알아봤었네. 무슨 사건이 터져 심재모 그 사람 거기 매달리느라고 좀 복잡하데. 자네, 오늘 시간이 어떤가. 술도 한잔 해야니까. 만나서 자세한 얘길 하세."

겸사 겸사로 술자리를 만들게 되었다.

"아직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피해자는 생명이 위독한 상태고 좀 시간 여율 달라는 거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난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있었네."

"당연하잖은가. 옆에서 총소리나 울려대면 모를까, 자네야 저 밑바닥만 내려다보고 정신을 팔고 앉았으니 읍내가 시끄러운 소문도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밑바닥......"

손승호는 되뇌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찔러왔다.

", 그 말이 싫은가?"

"아니야, 뭐랄까.....내 맘을 꼬집힌 생각이 들어서."

"아픈가?"

김범우가 빙그레 웃으며 술잔들 들었다.

"글세, 아프다기보담은 ....... 쓰라리군."

"쓰라려 하지 말게, 다급하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보단 깊이 생각해보자는 자네 태도가 더 옳을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그 폭력사건도 단순한 무제가 아니로군."

손승호는 화제가 자신 문제로 향하는 것이 싫어서 말머리를 돌렸다. 김범우는 그런 손승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술잔을 건넸다.

"그건 피할 도리가 없는 상황사건 아니겠나.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면서 묻혀 있던 농지개혁법안 상정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지 않았나.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해서 실질적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건 농지개혁법도 언젠가는 통과된다는 의미네. 두 법안이 통과되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는 따로 얘기할 문제고, 농지개혁법이 통과될 거라는 전제 아래 지주들이 자기네한테 끼칠 손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할 판인데, 그리되면 소작인들과 정면충돌은 불가피하게 되고, 앞으로 그런 사건은 속출하게 돼 있네."

"그렇겠지, 인간의 역사란 경제구조의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피나는 싸움의 연속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된 상황이군."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손승호가 술잔을 들었다.

"맞는 말이지. 경제란 결국 생존이란 뜻이니까. 정치라는 것도 경제 구조를 어떻게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용할 것인가 하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직 아니겠나. 권력은 그 운용과정에서 생겨난 파생물이고, 모든 정치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 건 그 파생물인 권력을 과신하거나 남용하는 가치전도의 결과고 말야."

"그런데 우리 앞엔 시작부터 그 순서가 뒤바뀐 정권이 버티고 있으니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삽으로 사람을 찍는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그게 이놈의 정권이 억지춘향이고 사상누각이란 증거 아닌가 참, 자네 혹시 해방직후에 대표적인 정객들이 내세운 정치관을 비교해본 적이 있는가?"

"글쎄에, 어떤 식으로 말인가?"

", 해방이 되자마자 새 나라 건설을 전체로 제각기 내놓은 그 사람들의 정치설계를 비교 대조해보는 거지. 해보면 현 정권의 문제점이 환하게 드러나네. 해방 직후에서도 나 잘났다는 정객들이야 부지기수였지만, 그 조직이나 세력으로 보아 네 사람으로 좁힐 수 있잖겠나. 건준을 대표하는 여운형, 임정을 대표하는 김구, 한민당과 손잡은 이승만, 공산당의 박헌영, 그렇겠지.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김구는 중국 땅 중경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각각 서울에서 건국강령이라든가 또 다른 이름으로 정치설계를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네, 세 사람이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판단으로 작성한 그것들이 기막힌 일치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네. 세 사람 모두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처단을 내세운 것이 그것인데, 그 것도 각각 열 가지 정도씩이 되는 항목 중에서 그 두 가지를 맨 앞으로 내세워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으로 잡은 것까지 똑같아. 공통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네. 그 두 가지를 실행하려는 방법까지 똑같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엄중 처단하여 일체의 정치참여를 못하게 한다는 것 말일세. 물론 어느 사람은 거기다가 더 강경하게, 평생 동안 투표권도 박탈하겠다고 했지. 그 세 사람의 정치의식이 뛰어나서 그런 일치를 보인 게 아니고 그 두 가지 문젤 해결하지 않고선 정치가로서 대중들에게 지지나 인정을 받을 수 없게끔 현실상황은 분명했던 거지. 그런데 말야. 그건 확실하고 분명한 정치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야. 그 무정견한 약삭빠른 기회주의가 미군정과 한민당에 이중으로 업혀 결국 정권을 탈취하게 되었으니, 뭘 기대 할 수 있겠는가."

"그 영감탱이야말로 가짜 중에 가짜지."

손승호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빈 잔을 잠시 들여다보고 있다가,

"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네. 내가 거기서 등을 돌린 건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를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군다나 무조건적이 반공주의에 협력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상황이 이따위로 획일화되고 말았으니, 결과는 그 꼴을 면할 수 없게 되었거든, 이 직장에 계속 붙어 있으면 앞으로는 더욱더 의무화된 강요를 받아 반공교육을 시키며 적극적인 협력자로 타락해갈 거고, 내가 설 자리가 없어. 최소한 날 지키고, 강요당하는 억지의 삶을 살지 않는 방법은....우선 이 직장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김범우는 송승호를 한동안 건너다보기만 했다. 그 갑작스러운 말이 김범우에게는 전혀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손승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민해온 그대로의 표현이리라 싶었던 것이다. 그가 교직을 떠나려 하는 것은 생계 이전의 의식의 문제였고 사회주의 자체가 아니라 혁명 방법론에 회의를 느껴 등을 돌린 그로서는 반대 이데올로기에 강제로 종사해야 하는 직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가 교직을 버린다는 것은 현 체제에 종사하는 모든 직장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다. 현 체제 속에서 현 체제에 전혀 종사하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거기서부터 손승호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될것 같았다. 생각이 깊은 손승호는 어쩌면 이미 그 방법을 찾아내놓고 직장을 버릴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생계 해결이라는 문제와 구분될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지. 앞으로의 교육은 자넨 물론이고, 의식면에서 평범한 교사들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반공체제로 개편될 테니까. 그건,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스스로는 대통령이 아닌 국부로 추앙받기를 원하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주의자 이승만이 가장 중대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니까."

손승호는 쓰디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 더 말이 없었다. 바깥 술청에서 술기운으로 뽑아 늘이는, ‘가으네 가으네 나넌 가으네에에 이므으을 두이고 나너언 가으네에에,’ 하는 잡가 소리가 컬컬하면서도 구성지게 들려왔다.

"꾸척시러운 소리네만, 자넨 어째서 그 사상을 포기한 건가?"

손승호가 김범우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에는 술기운이 어지간히 젖어 있었다.

"사람 싱겁기는, 꾸척시런 소린지 암시로 머 헐라고 꾸척시럽게 고런 말 묻고 그런가."

김범우는 손승호의 '꾸치시럽다'는 말을 받아 있는 대로 사투리를 쓰며 웃었다.

"금메 말이시, 꾸척시럽단 것 암스로도 자네가 서울로 뜬다니께 그런지, 맘이 요상허기 비는 것도 같고, 고것을 알고 잡아진단 말이시. 술 묵은 짐에 그 이약이나 털어놓고 가소."

손승호의 얼굴은 어떤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려, 자네가 원허먼 평생 생각허고 싶지 않았던 이약이지만 술기운 빌레 해야지 어쩌겄는가."

"그리 허소. 술안주삼아 듣세."

손승호가 듣기를 원하는, 행동의 계기가 명료하게 밝혀질 수 있도록 김범우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간추릴 필요를 느꼈다. 김범우는 물론 탈영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군부대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기까지의 그 복잡한 과정을 몇 마디로 요약했고, 그 혹독하던 OSS훈련 과정은 아예 생략해버렸다. 그렇지만 이야기하는 목적에 필요한 대목은 가능한 한 자세하게 말을 했다.

"......그런 마음이 완전히 굳어진 건 거기서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옮겨져 사개월을 갇혀 사는 동안이었지."

박두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김범우는 배에 실려 하와이로 이송되었다. OSS예비첩보원으로서 미국으로 갈 때는 물론이고 국내 이동에서도 비행기만 태우던 것에 비하면 이제 포로일 뿐인 자들을 배에 태운 것은 미국인의 합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제대로 어울리는 처사였다.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려 실려 간 곳이 하와이 포로수용소였다. 그들이 반나절 가까이 대기실에 죽치고 앉았다가 만난 것이 수용소 소장이었다. 붉은 머리칼의 대령은 기분 나쁜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우리 미합중국은 두 분에게 특별히 독방을 제공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소장은 어떠냐는 듯 입가에 묘한 웃음을 그려냈다.

"사양하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말이었다.

"아니, 무슨 말입니까!"

소장은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그따위 호의 우린 필요 없소."

박두병이 대꾸하고는, "미친 새끼들"하며 우리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미합중국 정부가 결정한 사항입니다."

소장은 가슴을 펴 보이며 엄한 얼굴로 말했다.

"호의를 명령처럼 말하지 마십쇼. 호의는 주는 쪽의 권리가 아니라 받는 쪽의 자윱니다. 우리가 어차피 포로 취급을 받을 바엔 일반 포로들과 똑같이 지내겠소."

김범우의 말이었다. 소장은 난감한 얼굴로 붉은 머리칼을 두어 번 쓸어 넘겼다. 그 빠른 손놀림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좋소, 뜻대로 하시오."

소장은 내뱉았고, 두 사람은 형식적인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두 분, 개죽음 면한 걸 축하합니다."

비서실로 나오자 대뜸 들려온 뚜렷한 우리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는 한 여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조선사람 아닌가!"

박두병이 화들짝 반가와하며 여자의 손을 잡았고,

"그게 무슨 소리요?"

김범우는 차례가 온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마땅찮은 기분으로 물었다.

"기분 나쁘라고 한말은 아니니 오핸 마세요. 조국 독립에 기여하고자 OSS요원을 자청한 두 분의 순수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너무 감동적이기까지 해요. 그러나 두 분의 그런 뜻은 결국 묵살되고, 두 분은 미국의 전과만 올려주는 소모품으로 사용될 뻔했으니까 하는 말예요."

"좀 심각한 말 같군요."

김범우가 여자의 까만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다음 말을 했다.

"독방 사용을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알은 체하지 않았을 거예요. 대신, 개 같은 것들이라고 욕을 해댔겠죠. 근대, 소장이 화가 나서 한 가지 빼먹은 게 있어요. 수용소 안에서의 행동은 자유예요. 이건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치사한 특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예요."

"그럽시다. 그럼."

박두병이 말하며 김범우를 보았고, 김범우도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여기다 싸인 하세요. 앞으론 이곳도 출입 자유예요."

여자는 종이를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그 여자 그거 보통내기가 아닐세. 미국 놈 밥 먹으면서 철저한 반미 아닌가."

대기실로 가며 박두병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필시 하와이 교포 이셀 텐데 우리 비슷한 꼴을 수없이 당한 게지."

김범우는 예측하고 있었다. 김범우의 예측 그대로였다. 그 여자의 성은 도씨였고, 미국식 이름은 흔해빠진 메리였고, 그 이름이 싫어서 스스로 지은 조선식 이름은 장난스럽게도 라지여서 성까지 합해놓으면 '도라지'가되었다. 그런데 미국을 심층으로부터 혐오라며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자 그 이름이 장난스럽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진지하게 지어진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끝도 없이 흥얼거리는 도라지 노랠 들으며 자랐어요. 거 있잖아요, ‘도오라아지 도라아지이 백도오라아지이 시이임신사안천에 백도오라아지이,’ 하는 노래 말예요. 우리 부모님은 그 노랠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곤 한 거죠. 그래서 저도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그녀는 군속이었다.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삼학년에서 공부를 중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공부를 할수록 미국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감만 커져 더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해방을 맞은 조국의 장래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녀는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미국이 제안하고 있는 신탁통치에 대해서는 그 비판의 열도가 불같이 뜨거웠다.

"미국은 인디언을 무차별로 죽이고, 흑인을 노예로 짓밟은 식으로 약소국들을 먹어치워 세계의 제왕이 되려 하고 있어요. 신탁통치란 게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인데. 교활하게도 소련. 영국. 중국을 동원해서 그 침략성을 위장하고 합법성을 가장하고 있어요. 루스벨트가 신탁통치 기간을 삼십 년으로 잡은 그 음흉하나 저의가 뭐겠어요. 일본 식민지의 재식민지화예요. 조선 사람은 뭉쳐야 해요. 뭉쳐 미. 소를 몰아내야 해요. 스테이트가 아니라 내이숀이 먼저예요. 민족이 단합하지 않으면 이 위기는 해결할 수 없어요."

그녀는 일과를 끝내고 늦게까지 두 사람과 토론에 열중하고는 했다. 조선 문제가 언급된 신문이나 잡지는 꼭꼭 구해다주기도 했다.

"이건 한번 읽어둘 만한 책일 거예요. 읽고 나서 얘기하도록 해요."

그녀가 내민 두툼한 두께의 책에는 Red star over China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이라. 구미가 당기는군."

박두병이 먼저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은 에드가 스노우란 기자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주덕. 주은래. 임표. 팽덕회 등 중국공산당 주요인물들과 만나 깊이 있는 인터뷰를 시도하여 그들의 사상과 투쟁 및 인물 됨됨이를 기록하고 공산당 지역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그 조직체계. 교육방법. 인간관계. 질서유지 등을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취재한 내용이었다. 그건 공산당 결성으로부터 홍군의 대장정을 거쳐, 홍군이 팔로군으로 변신하기까지의 초기 중국공산당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제가 왜 그 책을 권한 것 같애요."

도라지는 의미 깊게 웃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의식을 확고하게 가졌던 모택동과 그 노선에 발맞춘 사람들 때문이 아닌가 싶소."

김범우는 미리 정리한 생각을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고 있는 것은 중국을 소련에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스노우에게 한 모택동의 말이 제일 인상적이었소. 그리고 코민테른이 일차 시도에 실패하고 이차로 주은래에게 코민테른화의 주도권 장악을 지시했는데 그 사실 자체를 모택동에게 알려버린 주은래의 태도가 그다음으로 인상적이었소."

박두병이 진지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제 의도와 꼭 들어맞는지 모르겠네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보다 먼저 민족을 내세우는 건 참으로 기막혀요. 그러니 다른 주의도 어째야 할 건지 자명하잖아요."

도리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택동, 그 사람 어찌 보면 흠집투성이야. 이혼을 밥 먹듯 하고, 대장정을 하며 제일 고통스러웠던 게 담배를 구할 수 없었던 거라는 소리는 예사로 하고, 계집애처럼 예쁜 나비를 잡아 책갈피에 끼우질 않나. 그런데 그런 게 다 흠으로 뵈는 게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매력으로 느껴진단 말야. 역시 매력 있는 인간이고 가식이 없는 인물이야."

박두병은 혼잣말을 하듯 하고 있었다.

"그걸 선물로 드리겠어요.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릴 위해서 그걸로 영어 공부 열심히들 하세요."

도라지는 두 사람이 빌려 썼던 사전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 주었다.

십이월 중순에 귀국하는 배를 탔고, 그때 김범우의 의식 속에는 친일반역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이상으로 뭉쳐진 '민족의 우선'이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 보니 미. 소의 점령에 따른 좌우의 대립은 생각보다 치열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색채를 조금씩 달리하는 정치조직들끼리의 갈등까지 얽혀져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속에서 민족은 골 깊게 분열되고 있었다. 우익은 더 말할 것 없었고, 그렇다고 좌익의 편에 설수도 없었다. 좌익은 역시 역사의 필연성에 있어서나, 민중의 생존성을 창출함에 있어서나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상대가 버티고 있는 한 좌익이 지향하는 바는 그 실현성이 희박할 뿐이었다. 좌익이 미군정에 정면대결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목적 실현은 그만큼 강한 힘으로 저지당하고, 그에 따라 민족의 분열은 심화될 분이었다. 첫째 민족의 삶, 둘째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생각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실천만을 목표로 성급하게 내딛고 있는 좌익의 방법론에 동의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나 소련의 점령목적이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우려는 것임이 유리그릇 들여다보듯 자명한 이상 이남이나 이북 그 어디에서든 그들의 뜻과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려고 나서는 것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민족의 삶을 위해서는 그들의 점령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데올로기의 실현은 그 다음 단계로 추진해도 늦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연합하거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어느 기간 동안 정치색을 은폐하거나 해야 했다.

"자넨 나보다 생각이 더 구체적이고 앞서 있었군 그래. 자네가 왜 백범을 마음에 두는지 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군."

손승호가 술기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백범을 전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네. 자기가 곧 임정이고, 임정이 곧 국가라는 비민주적이고 우익적이던 초기의 사고방식 같은 건 용납할 수가 없네. 다만, 민족자주통일을 위해 공산당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한 정치태도와, 그런 맥락에서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시도한 대목을 좋아하는 거네. 시기적으로 늦고, 여러 상황이 복잡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나마 그런 노력을 한 것은 남북의 현실 정치세력들 중에서 백범이 유일한 분 아닌가. 백범의 그 노력만큼은 성패와 상관없이 분단이 굳어져갈수록 높이 평가될 게 틀림없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김범우는 손승호에게 잔을 내밀며 물었다.

"그래, 정면대결로 끝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민족과 통일을 전제로 한 백범의 그런 뜻은 높이 평가해야지. 그런데 말이네, 앞으로 세상이 어찌 돼갈 것 같은가?"

손승호가 스산한 얼굴로 김범우를 건너다보았다.

"글쎄, 용한 점쟁이인들 그 일을 어찌 맞추겠는가. 그저 현상만 더듬을 뿐이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선 세계제일이라고 자랑하는 미국이 자기들과는 정반댈 막강한 경찰조직으로 보호되는 가장 비민주적인 정권을 세우지 않았나. 그게 좌익과 그에 동조하는 민중들한테 도전을 받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제주도의 투쟁도 계속되고 있고, 여순투쟁도 새로 시작되고 있지 않나. 이승만 정권은 이미 공산당 박멸을 정책으로 내세웠고, 공산당은 이번 여순사건을 계기로 무장공개투쟁으로 맞서고 있잖은가. 그건 서로가 피할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싸움이네. 그 정면대결이 어떤 또 다른 사태를 야기 시킬지 그 누구도 전혀 모르는 일 아니겠나?"

"그래, 한치 앞을 제대로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이야. 빌어먹을, 군정 삼년은 민중학살의 역사야......"

손승호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미군은 이번 여순사건으로 철군을 미룰 명분까지 얻었네."

김범우가 중얼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11. 미운 진달래

강동기가 서운상을 가해한 사건은 읍내 지주들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우선, 소작인이 지주를 가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주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감정적 문제였고,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따져보더라도 그 사건이 다른 많은 소작인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무제일 수가 없었다. 지주로서의 체면을 위해서나, 휘하의 소작인들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서나 지주들로서는 좌시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결성을 하기로 합의를 본 벌교 · 조성지구 좌익척결위원회가 그 사건을 계기로 결성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유주상의 머리로 짜여진 그 계획은 모든 지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서운상이 곤궁에 빠진 입장을 십분 이용해서 논을 헐값으로 몰아 때려 사들인 유주상으로서는 그 사건이 남달리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다. 서운상이 그런 흉악한 꼴을 당한 것에는 자신이 무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 사장 때부텀 부치든 작인 넷이 있는디, 그 사람덜이 성가시럽게 쫓아댕게 싼께 기왕지사 소작 낼 것이먼 그 사람덜얼 부치는 것이 워쩌실란지."

돈을 챙긴 서운상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도록 하죠."

그자들이 바로 정 사장 집에서 난동을 부린 것들 아닙니까? 하는 말이 곧 입 밖으로 쏟아지려는 것을 유주상은 겨우 참아내며 그렇게 완곡한 대꾸로 지나쳤다. 그런데 그자들이 서운상을 그 꼴로 만들고 말았다. 유주상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놈들에게 소작을 부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를 몇 번이고 다행스러워했다. 만약 소작을 부쳤더라면 서운상이가 당한 꼴을 자신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자신이 서운상의 논을 사들인 연관 말고도, 앞으로 벌교 바닥에서 지주 노릇을 하게 된 이상 그 사건을 소홀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달아난 범인은 틀림없이 잡아야 하는 것이고, 유치장에 갇힌 두 공범도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해야 했다. 그래야만 께름칙한 마음도 개운해질 것이고, 모든 소작인들이 딴 마음 먹지 않고 정신 바짝 차려 황소처럼 일하게 될 것이었다. 그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벌교·조성지구좌익척결위원회 결성식을 대대적으로 벌일 필요가 있었다. 지주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게 되면 심재모도 범인들 처리에 압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소작인들도 지주들의 단결된 힘 앞에 기가 죽게 될 터였다. 벌교·조성지구좌익척결위원회 결성식은 남국민학교 강당에서 그야말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벌교, 보성, 조성, 고흥의 한다하는 지주들은 다 모여들었고,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이 빽빽하게 강당을 채웠다.

"...우리 국가와 민족의 양양한 앞길을 가로막고 파괴하려는 공산도배들을 우리는 그대로 좌시 관망할 수 없어 다 같이 힘을 합쳐 무찌르기 위하여 이에 본 좌익척결위원회를 결성하는 바이며, 앞으로 공산도배와 그 분자들을 일소 척결함에 있어서 우리는 용맹무쌍하게, 일사불란하게 나설 것이며, 따라서 이 어떠한 용공적 행위나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도 결단코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이에 천명하는 바이며.."

위원장으로 뽑힌 최익달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만큼 격앙된 어조로 취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읍장과 나란히 앉은 심재모는 뒤늦게 이 위원회가 결성되는 저의가 무엇일까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지주들이 중심이 된 데다가 '좌익척결'을 내세우고 있는 이 모임을 현실적으로 권장을 했으면 했지 불법으로 간주할 근거나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좌익척결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있었지만 지루하게 긴 취지문 낭독이 다 끝나도록 그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네들을 방어하기 위한 모임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일 해먹기 힘든 골칫거리가 될 거라고 심재모는 생각을 정리했다. 결성식이 끝나고 옆 교실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물론 지주들만으로 한정되었다. 심재모는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피할 방도는 없었다. 심재모가 그런 눈치를 보이자 경찰서장이,

"조금만 참으시지요"

하며 만류의 눈짓을 보냈다.

"짜아, 좌익척결위원회 결성을 축하허는 뜻으로 우리 모다 한잔씩 쭈욱 듭시다!"

위원장 최익달이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고, 제각기 기분 들뜬 소리들을 한마디씩 해대며 술잔을 높였다. 술잔이 오가는 속에서 심재모는 술을 마시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기분도 기분인데다가 낮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자아, 심 사령관, 내 술 한잔 받으씨요."

단상에서 흥분된 기분이 그대로 연속되고 있는 것 같은 최익달이 술잔을 내밀었다.

"예에..."

심재모는 엉거주춤하게 잔을 받았다.

"거어, 서운상이럴 해꼬지헌 놈은 안직도 잽힐 미꼬미가 안 뵈요?"

술을 따른 최익달이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심재모는 순간적으로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꼈다. 최익달이 고의적으로 큰 소리를 지른 듯했고. 그 어투가 시비조가 완연했다. 술을 권한 것도 그 말을 꺼내기 위한 의도적 행위로 여겨졌다. 이걸 어떻게 대처하나, 심재모는 흔들리려는 감정을 누르며 잠시 생각했다.

", 지금 수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심재모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장 권병제가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그런 서장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얼른 그런 식의 형식적인 응답을 해버리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서장헌테 물은 말이 아닝께,권 서장은 나서지 마씨요."

최익달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침없이 내쏘았다. 권 서장의 안색이 변하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권 서장을 보자 심재모의 마음은 금이 가고 말았다.

"말씀 삼가시오. 수사행정에 민간인은 개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엄연한 수사행정관한테 나서라, 나서지 마라, 하는 말투는 도대체 뭐요. 권 서장이 나서지 말라면, 나더러 나서라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수사상행정에 간섭하려 드는 거요? 좌익척결위원장 자격이오? 내가 계엄사령관 자격으로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건 그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민간인의 단체일 뿐이고, 만약 그 단체를 이용해서 불법적 권한행사를 하게 되면, 계엄사령관 권한으로 그 단체를 해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지금은 엄연히 계엄 하요."

심재모는 최익달이보다 큰 소리로 억제하고 있던, 그러나 언젠가는 쐐기를 박고 싶었던 말을 시원하게 토해내 버렸다. 술자리는 금방 얼어붙어버렸고,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최익달은 말이 막힌 채 볼만 씰룩여대고 있었다.

", 심 사령관님, 최 위원장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범인이 잡히지 않아 염려해서 하신 말씀 아닙니까. 오해 마시고, 제 술 한잔 받으시죠."

유주상이 끼어들며 술잔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난 낮술은 한 방울도 못하니 마신 걸로 합시다."

심재모는 손을 들어 잔을 거절하고는,

"좋습니다. 유 단장 말대로, 염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위원회의 협조에 기대를 걸면서, 난 근무 중이라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만큼 상대방의 감정을 수습해놓고 자리를 뜰 요량으로 그는 속과는 다른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는 곧바로 술자리를 빠져나갔다. 심재모는 의식적으로 유주상을 '유 단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유주상이 끼어들었을 때, 당신이야말로 나서지 마시오, 하는 말이 곧 튀어 나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유 단장'으로 호칭함으로써, 너는 내 휘하야, 하는 사실을 일깨워 그의 잘난 체하는 콧대를 꺾어버리려는 의도였다. 그의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연 얼굴을 대할 때마다 심재모는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 혈색 좋은 허연 얼굴에는 교활과 간사함이 언제나 감돌고 있었다. 그의 교활기는 염상구의 교활과는 사뭇 다른 냄새를 풍겼다. 염상구의 교활은 단순하면서도 썩는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의 교활은 복잡하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염상구에게는 주먹패의 의리나마 있지만 그에게는 돈과 권력만을 좇는 파렴치함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청년단장에다가 좌익척결위원회 총무 직책까지 거머쥔 그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우익이 아닐 수 없었다. 심재모는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암..어째야 좋을지.."

교문을 나서며 권 서장이 한숨을 흘렸다.

"신경 쓰지 말아요. 자기네가 입으로 떠들어댄다고 좌익이 척결될 것도 아니고, 배부르고 할 일들 없으니까 저런 일이라도 만들어내야 소일거리가 될 거 아닙니까."

심재모가 모자를 고쳐 쓰며 코웃음을 흘렸다.

"어쨌거나 강동기를 잡기는 잡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권 서장이 근심스럽게 말했다.

"잠복근무는 여전히 효과가 없나요?"

심재모는, 그가 어디로 도망갔을 것 같으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없습니다."

"허점을 찔리게 될지도 모르니 잠복은 계속시키도록 하고, 피해자의 그 뒤 소식은 뭐 없습니까?"

"계속 전신마비상탠 모양입니다."

"전신이 마비라니, 더 회복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 앞날도 참 딱하게 됐소."

심재모는 그 사람의 인생살이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삼월로 접어들면서 산과 들은 완연하게 푸른 색조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들녘에는 온갖 풀들이 저마다 다른 색감의 초록빛으로 돋아 오르며 맑은 햇살 속에서 눈부신 싱그러움으로 반짝거렸고, 산은 가을에 위에서부터 갈빛으로 물들어 내리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아래서부터 위로 화사한 봄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푸른 봄기운은 마치도 물이 차오르듯이 하루하루의 밤이 바뀔 때마다 위로 위로 번져 오르고 있었다. 그 푸른 물결에 감싸여 진달래도 아래서부터 꽃을 피워내며 문득문득 꽃피움자리를 위로 바꾸어갔다. 진초록 · 연초록 · 황초록 · 감초록 등 갓 돋아나는 가지가지 나뭇잎새들이 어우러져 이룬 푸름 속에 점으로 찍힌 듯 피어난 진달래의 붉은 꽃잎들은 점점이 불꽃으로 고운, 산이 입은 봄옷의 화사한 무늬였다. 산이나 들녘이 그리도 신비롭고 곱게 변해가지만 그런 것을 눈 여겨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연이 새로운 활개 짓으로 싱싱하게 살아 오르는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은 절정에 이른 춘궁기의 굶주림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로도 하루 한 끼를 때울 둥 말 둥 하는 굶주림에 시달리며 나날의 삶을 넘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황기로 들뜬 얼굴에 눈이 풀렸고, 병약한 노인네들은 목숨 줄을 놓아버리고 잠들 듯이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봄 초상을 당하는 것처럼 박복한 목숨도 없었다. 산 사람 입에 넣을 것도 없는 형편에 죽은 사람 길 닦음에 격식 차릴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어느 집에서나 거적쌈을 하다시피 하는 것이 봄 초상이었다. 그것이 서로 간에 흉일 수 없었고, 부모에게 불효일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네들은 가을에 죽기를 소원했지만 춘궁기의 아리고 아린 굶주림은 그런 소원을 매정하게 외면했다.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는 아뜩한 현기증에 비틀거렸고, 저 깊은 데서부터 귀가 찌잉 울리는 이명에 시달리며 그저 먹을 것, 먹을 것만을 찾아 허덕거렸다. 굶주리고 굶주려서 생긴 병인 부황기가 전신에 퍼지다 못해 누까지 누르끄리하게 물들였다. 그 눈에 새 순 돋는 초록빛의 다양함이 신기할 리 없었고, 꽃이라고 해서 고와 보일 리 없었다. 싹은 싹대로, 꽃은 꽃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대상일 뿐이었다. 먹을 수 있는 싹은 쑥이었고, 먹을 수 있는 꽃은 진달래였다. 여자들은 쑥을 찾아 논두렁 밭두렁에 쪼그려 앉았고,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좇아 산자락을 기어올랐다. 그 어느 풀보다도 먼저 돋움하는 쑥은 그저 예사로운 풀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흔적도 없다가 봄기운이 비치기 무섭게 젖빛 솜털로 감싸인 잎을 피워내는 것이나, 그 쓰임새가 한두 가지가 아님이 그러했다. 풀들 중에서 제일 먼저라고 할 만큼 빠르게 잎을 피우는 쑥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어엿한 양식이 되어주었다. 시래기가 진작 동나고, 보리 싹도 억세어져 버린 때에 연초록 빛 어린 쑥잎은 죽거리고 너무나 흡족스러웠다. 그 보드라움과 향기로움은 주린 뱃속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너나없이 굶주린 손들이 다투듯 쑥을 뜯어냈지만 쑥은 동나는 법이 없었다. 잎을 뜯어내면 뜯어낼수록 다년 생의 질긴 뿌리에서는 새 잎이 돋아 올랐다. 굶주린 속 더 많이 채워주겠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쑥을 '불사초'라고도 불렀다. 자기네들을 굶어죽지 않게 해주는 풀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자기네들이 그렇게 모지락스럽게 뜯어먹는데도 죽지 않는 풀이라는 뜻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불사초인 쑥을 그 어떤 풀보다 먼저 돋아나게 한 것은 하늘의 무수한 섭리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쑥은 춘궁기의 죽거리로만 그 몫을 끝내지 않았다. 쑥이 쑥다운 면모를 갖추는 것은 보리가 알을 퉁퉁하게 밸 즈음이었다. 그때쯤이면 쑥잎은 검푸른 죽거리로는 쇠었지만 쑥으로서의 다양한 쓰임새로는 제격을 갖추고 있었다. 여자들은 보리농사 틈틈이 그 쑥을 치마폭에 뜯어 담아다가 툇마루 그늘에 펴서 말렸다. 그늘에서 말려진 쑥은 망태기에 꼭꼭 눌러 담겨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갈무리되었다. 그건 가난한 설을 쇠기 위한 갈무리이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길흉사에 떡감으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쑥은 떡감만이 아니라 남자들이 곰방대 담배를 피우는 데 없어서는 안될 부싯돌 불쏘시개였고, 줄기나 잎꼭지는 한방의 약제였으며, 특히 뜸을 뜨는 데는 쑥이 절대가치를 발휘했다. 그런 것들 말고도 쑥은 또 한가지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쑥버무리'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었다. 쌀가루에 연한 어린 쑥을 버무려 시루에 쪄내는 것이 쑥버무리였다. 고슬고슬하게 익은 쌀가루가 쑥잎들과 섞인 쑥버무리는 색감의 조화로도 식욕을 자극했고, 입에 씹히면서는 쑥향의 그 진하고 그윽함이 한결 맛이 돋우었다. 그러나 그건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배부른 사람들이 봄을 즐기기 위한 미각놀이거나, 환절기의 밥맛없음을 벌충하기 위한 간식 마련이었다. 그 어디를 훑어보아도 물밖에는 배를 채울 것이 없는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따라 산자락을 헤맸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었지만 아무리 먹어도 밥처럼 배가 불러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허리가 꺾이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진달래꽃을 따먹어야 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아도 코끝에 스미는 여린 향기와 함께 무언가를 씹고 있다는 기분이 당장의 허기를 달래주는 탓이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개의하지 않은 채 손승호는 교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그 글짓기를 읽어 내리며, 아이들 앞에서 낭독을 시킬까 말까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동시는 국민학교 육학년으로서는 놀라우리만큼 잘 지은 것이었다. 문학적 소양을 가진 누군가가 써준 것이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러나 글짓기는 바로 지난 시간인 어제 실시했던 것이지, 숙제가 아니었다. 그 동시에 투영되어 있는 체험이 특히 가슴을 치는 아픔과 함께 감동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그 대목은 거짓 없고 숨김없는 동심의 표현이면서, 문제점이 중첩되어 있는 현실의 가장 큰 일면을 거울이듯 생생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이런 좋은 글은 점수를 많이 주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모든 아이들이 듣고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낭독시켜야 한다고 손승호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망설이는 것은 혹시나 허명길이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잠시 놀림감이 된다 하더라도 동시를 낭독시키기로 그는 마음을 정했다.

"자아, 모두들 조용히 하고, 일동 주목!"

손승호는 손바닥으로 교탁을 가볍게 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교실 안의 소란이 일시에 딱 멎으며 아이들의 눈길이 선생을 향해 모아졌다.

"에에,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글짓기를 했지요?"

아이들이 함께 입을 모아

"예에"

대답했다.

"됐어요, 그럼 지금부터, 그 중에서 제일 잘된 것을 골라, 글을 지은 사람이 앞으로 나와 낭독하도록 하겠어요."

아이들의 얼굴에는 금방 긴장감이 감돌았고, 교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고요가 흘렀다.

"허명길!"

마침내 이름이 불리었다. 실망스러운 소리, 놀라는 소리, 부러워하는 소리가 뒤섞이면서 아이들의 눈길은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학우들의 눈길을 받으며 소년은 주춤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당황기와 함께 상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부족으로 인한 초췌함을 가려지지 않았다.

"자아, 명길아, 어서 나와야지."

손승호는 쓰다듬듯 하는 눈길을 보내며, 감싸듯 하는 어조로 말했다. 허명길은 공부가 중간 정도인, 별로 표가 나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글짓기를 해냈기 때문에 더 신통하고 대견하게 여겨졌다. 손승호는 허명길을 교단으로 오르게 해서 교탁 앞에 세웠다.

"여러분, 조용히들 하고, 허명길의 글짓기를 잘 듣도록 해야 해요. 왜 잘된 글짓기인지, 어디가 잘되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들어야 해요. 이게 다 국어 공부니까요."

손승호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나서,

"명길아, 글을 지을 때의 기분을 다시 생각해가며, 빨리빨리 읽어버리지 말고, 또박또박, 천천히, 네 기분이 잘 살아나도록 읽도록 해라. 겁먹지 말고, 알겠지?"

허명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승호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어린 몸의 떨림과 열기가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져왔다.

"잘 읽을 수 있겠지?"

손승호는 허리를 구부려 허명길의 눈을 쳐다보았다.

"예에.."

소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자알 지은 글이니까 읽기도 잘할 수 있을 게다."

손승호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교단을 내려섰다.

"그러면 지끔부텀 선생님이 시키신대로 지 글짓기럴 읽겄습니다."

허명길이 교탁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며 고개를 꾸벅했다. 눈길은 떨구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또랑했다. 손승호는 안심이 되며, 손뼉을 쳤다. 아이들이 모두 따라서 짝짝짝짝 손뼉을 쳐댔다. 눈이 커진 허명길은 잠시 어리둥절 하는 것 같다가 부끄러운 웃음을 띠며 머리가 교탁에 닿도록 다시 절을 했다.

"미운 진달래. 육학년 이반 이십칠번 허명길."

허명길은 삐쩍 마른 목을 길게 늘이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두 손에 잡힌 종이 끝이 바르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달래 진달래

분홍빛 예쁜 꽃

진달래 진달래

분홍빛 먹는 꽃

 

진달래 진달래

온 산에 피면

풀꾹풀꾹 풀꾹새

따라서 우네

 

풀꾹새 풀꾹새

배고파 우는 새

풀꾹풀꾹 우는 소리

배고파 배고파 하는 소리네

풀꾹풀꾹 풀꾹풀꾹

우는 소리 들으며

배고파 배고파

나도 더 배고파

 

진달래꽃 따먹으러

산으로 갔지

많이많이 먹을려고

혼자서 갔지

 

진달래꽃 쌀밥 같아

하루내내 따먹었제

구역질 참아내며 먹어도 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았네

밤중에 배가 째지게 아프고

옷에다 그만 설사를 했네

주욱주욱 쏟아진 물똥은

진달래꽃 물똥이었네

 

엄니가 물똥을 닦으며

그 꽃 많이 묵으먼 뒤져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네

나는 거짓말로 크게 울었지

 

진달래 진달래

분홍빛 미운 꽃

설사만 나게 하는

분홍빛 미운 꽃

일기를 마친 허명길은 아까처럼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손승호가 손뼉을 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이 한꺼번에 손뼉을 쳤다. 허명길은 허둥지둥 교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 글도 잘 지었고, 낭독도 아주 잘했다."

손승호는 교단으로 올라서며 말하고는,

"여러분들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왜 잘 지은 글인지 알겠어요?"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피이, 돼지새끼맹키로 미런허게 진달래 따처묵고 물똥 깔긴 그런 이약이 머시기가 잘 쓴 것이여."

불쑥 터져 나온 말이었다. 손승호는 소리 나는 쪽으로 빠르게 눈길을 쏘았다. 느낌 그대로 박태웅이었다. 박태웅은 눈길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는데, 쑥 내밀고 있는 입술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래, 너 같은 아이들한테는 물똥 깔긴 더러운 이야기일 뿐이겠지. 손승호는 그 아이가 미워지려는 감정을 지그시 눌렀다. 박태웅은 언제나 쌀밥에 장조림이나 계란부침, 멸치볶음 같은 것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였다.

"그래, 박태웅군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건 박태웅군의 생각이니까, 좋다. 어떤 글이든 읽거나 듣고 나서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다. 자아,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박태웅 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님 눈치 보지 말고 손 들어봐요."

손승호는 학생들을 휘둘러보았다. 박태웅의 말을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그와 비슷한 생활여건을 가진 아이들이 네댓 명이 있었고, 그들은 학급의 주도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냥 지나쳤다가는 허명길은 놀림감만이 아니라 '돼지새끼맹키로 미런허게 진달래 따처묵고 물똥 깔긴 드런 눔'으로 멸시당하고 천대받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해주려다가 오히려 기를 죽이고 상처를 받게 만들 판이었다. 손승호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어쩐 일이지 손을 드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 다들 허명길군의 글이 잘됐다고 생각합니까!" “

네에"

"좋아요,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서 허명길 군처럼 배가 고파서, 재미나 장난이 아니고 정말 배가 고파서 진달래꽃을 따먹어본 사람은 솔직하게 손 들어봐요. 그건 절대로 창피스러운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니까 솔직한 마음으로 손 들어야 해요."

손승호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이들은 별로 자신이 없는 태도로 미적미적 팔들을 밀어 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손을 든 아이들은 거의 다였다.

"됐어요. 다들 손 내려요."

손승호는 교탁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는,

"여러분들은 거의가 배가 고파 진달래꽃을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지고 좋은 글을 지은 건 허명길군 한 사람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첫째, 그 슬픈 일을 하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입니다. 그리고 둘째, 그 일을 창피스럽거나 부끄럽게 생각해서 감추려고만 했지 글로 써보려고 마음먹지 않아서입니다. 여러분, 좋은 글을 짓는 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를 솔직하게 쓰는 것입니다. 자아, 보세요. 만약 허명길군이 남에게 보이는 것이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해서, 밤중에 배가 째지게 아프고 / 옷에다 그만 설사를 했네 / 주욱주욱 쏟아진 물똥은 / 진달래꽃 물똥이었네, 이 대목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잘 지어진 글이 될 수 없어요. 이 대목이 바로 제일 잘된 대목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 대목, 엄니가 물똥을 닦아내며 / 그 꽃 많이 묵으먼 뒤져 /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네 / 나는 거짓말로 크게 울었지, 얼마나 눈에 선하게 보이도록 있는 그대로 썼습니까. 이 두 대목이 없었다면 이 글은 칭찬받을 수 없는 보통 글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

"네에"

"좋아요. 그럼 선생님이 허명길 군의 '미운 진달래'를 다시 한 번 읽겠어요. 여러분들은 진달래꽃을 따먹던 일을 생각하며 잘 들어보도록 해요."

손승호는 목을 가다듬었다.

 

유동수네 아랫방에 서인출과 김종연, 세 사람이 모여 앉았다. 그들이 모이면 으레 끼게 마련인 장칠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칠복이 쪽에서도, 그들 세 사람 쪽에서도 서로 얼굴 맞대하고 앉기를 꺼렸다. 장칠복이가 세 사람 몰래 소작을 더 얻어 부친 것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사이에는 살얼음이 끼게 되었다.

"으쩌까, 궂으나 좋으나 오동평이럴 찾아가야 허겼제?"

유동수가 힘없는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눔에 꼬라지 꿈에 볼까 무섭제만, 워쩌겄소. 물만 묶고 젼디는 것도 한도가 있제."

김종연이 체념적으로 말했다.

"동평 아재도 우리가 대문 넘어스기럴 이제나 저제나 허고 기둘리고 있을 것잉만."

서인출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 인종이야 폴세부텀 입맛 다시고 앉았겄제. 지 재산 불키는 호시절인디."

유동수의 쓰게 웃는 얼굴이 흐린 등잔불빛 속에 쓸쓸했다. 등잔불빛도 그 밝기가 가을과는 달랐다. 심지를 줄일 대로 줄여서 등잔에 간신히 붙어 있는 불꽃은 반딧불처럼 미약했다.

"고 잡녀러것 심뽀로는 춘궁기가 일년 사시절 내내이기럴 바랠 것이요. 지주눔덜도 몰악시럽지만 마름눔덜 악독헌 것은 지주 쩜쪄묵는 판인디, 그중에서도 오동평이는 질일 것잉만. 양반집 마당쇠가 양반보담 곱절 권세 부리드라고, 마름눔덜 허는 행투, 싹 다 배꼽에 대창 꽂아뿌러야 써, 씨부랄 눔덜."

김종연이 결기를 부렸다.

"금메, 고것이 워디 하로이틀 된 일이등가. 말허는 입만 아프제."

유동수가 꽁초를 집어 들었다. 세 사람은 마름 오동평에게 장리쌀을 내러가기로 한 것이다. 장리쌀을 내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빚인 줄 다 알지만 굶주림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막바지에 이르면 그 함정에 발을 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부변인 장리쌀을 먹는다는 것은 제 살을 뜯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급한 형편에 장리쌀을 빌 때는 그래도 덜한데, 가을에 빚을 갚다 보면 자신들이 지주나 마름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생살을 뜯기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는 했다.

"긍께, 입만 아프지 말게 이눔에 시상얼 뚜둘겨 뿌식어 뿌러야 헌다 그 말이요."

"짜가 시방 무슨 뜽금읎는 소리 허고 앉었다냐?"

유동수가 길쭘하게 찢은 종이 끝을 등잔에 갖다 대고 불을 붙이며 김종연을 곁눈질로 쏘아보았다.

"뜽금읎는 소리가 아니어라, 성님. 요분 참에 술도가 정가눔 논 사딜인 고흥 지주눔 등짝얼 삽으로 찍어뿐 일이 벌어지고 나서 나가 되작되작 생각혀봤는디, 고 강동기라는 것이 물건언 물건이다 싶고, 지나 내나 나이 묵은 것이야 얼추 같은 것인디, 나넌 먼고 허는 한심시런 생각이 듭디다. 강동기가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썩이나 그리 독허니 대드는 판인디 나넌 머 허고 자빠졌는 삼시랑이다냐 생각헌께 나가 똥친 작대기맹키로 빙신 판푼이로 뵙디다."

", 그 사람이야 소작이 떨어져 뿌렀응께 그리 독얼 부리는 것이고, 니야 소작이 그대로 붙어 있응께로 가만 있는 것이제 워째야."

"성님, 나 말언 고런 말이 아니랑께요. 나도 소작이 떨어져뿔먼 그리 덕허고 야물딱지게 혀낼 수 있느냐 허는 생각이 한 자락 있고라, 또 한 자락 다른 생각이 있는디, 나가 이 젊디나 젊은 나이부텀 소작에 목매고 찔찔이 고상험스로 살아갖고 대체 은제꺼지 요런 꼬라지로 살아야 헐 것이다냐 하는 생각이 그것이요."

"참말로 뜽금읎다. 죽을 때꺼정 살아야 허는 것 몰라서 실답잖게 고런 생각허고 앉었었냐."

유동수가 어이없어했다.

"성님, 바로 고것이 문제요. 죽을 때꺼정 요리 사느니 요눔에 시상얼 팍 엎어뿔러야 헌다 그것이요."

"쟈가 시방 미쳤다냐? 무신 수로 시상얼 팍 엎어뿔고 뒤집어뿔고 헐 것이다나."

"금메 들어봇씨요. 평상얼 지주고 마름눔덜헌테 등까죽 벳게지고 피 뽈려감서 굶기럴 묵디끼 허고 사는 요것이 워디 사람 꼬라지라고 헐 수 있겄소. 아나 어런이나 모다 누르팅팅허니 부황이 들어 멋이 되얐거나 묵을 것을 찾어 눈에 불키고 헐떡기리는 요 허천딜린 꼬라지가 개나 돼지허고 머가 달브요. 끝도 한정도 웂은 뻘밭 걷대끼허는 요팍팍허고 징헌 시상살이럴 원제꺼지 젼디고 살 것이요. 인자 시상이 변혔구만요. 일정때가 아니랑께요. 시상이 변허먼 으당 사람 사는 법도 변해야제라. 그 무선 일정때도 소작쌈얼 여기저그서 일으켰는디, 인자 달라진 시상에 삼스로도 우리가 손끝발끝 맺고 앉았어야 되겄소. 우리 밥그럭 우리가 찾어묵지 않으먼 누가 찾아주겄소. 그렁께 말이요, 우리가 당허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강동기가 헌 것맹키로 일시에 들고 일어나 지주고 마름이고 싹 다 때레 쥑여뿔먼 시상이 엎어진다 그것이요."

"쟈가 양잿물얼 묵은 것도 아니겄고, 워째 저리 생각 삐까닥헌 소리럴 해쌓는지 몰르겄네? 고것이 니 혼자 맴이제, 일시에 일어나지는 것도 아니고, 일시에 일어나서 그리 헌다 혀도 나라가 귀경만 헐 숭불냐? 무신 일 벌어졌다 허먼 나라가 무지막지허게 닦달해대는 것 그간에 한두 분 젺어봤다고 고런 실답잖은 소리여. 글안해도 사지 늘어지고 기운 웂는디 쓰잘디웂은 소리 허덜 말어라."

", 고것이야 누가 몰르요? 우리가 요리 살아 있는 것도 다 운수가 좋아 그런 것 아니겄소? 그간에 죽을 고피 한두 분썩 안 넴긴 사람덜이 웂은 것이야 니나 웂이 다 아는 일잉께 더 말헐 것 웂고라, 작인덜이 지주나 마름보담 수십 배가 많은께 강동기 그 싸람이 헌 식으로 새로 들고 일어나먼 시상얼 엎을 수 있따 그것이요."

"어허! 그 똑똑헌 염상진이도 총 지니고 내쫓기는 판인디, 니가 참말로 정신이 훼까닥 혀뿌렀구나. 인자 나라꺼지 새시로 맹글어 갖고 쪼간 옳은 소리 험스로 나대기만 허먼 쩨까닥 빨갱이로 몰아쳐 평생얼 망치게 허는 시상잉께, 존 일 헌다고 입 조심혀. 순사덜이 즈그계 급 올라갈라고 되나케나 사람 잡아딜여 빨갱이 맹그는 무선 시상이란 것 니 알제?"

"참말로 니미럴 것, 우로 봐도 옆으로 봐도 모다 칵칵 맥히고 첩첩 산중이라 살 방도가 웂은 환장헐 눔에 시상이요. 우리 웬수가 한둘이 아닌디, 순사 눔덜이 코쟁이덜 믿고 사람 개잡디끼 헌 것도 기가 찬디, 배급표 띠묵어 부자할라 되고, 인자 고런 느자구웂은 짓거리꺼지 해대니 요눔에 시상얼 워째야 쓸께라. 똥통보담도 더 드럽게 썩어가는 시상이요."

"냅두소. 썩을 대로 썩다가 보면 지물에 밑창이 빠져 내레앉을 날이 올 것이네. 그때꺼정 기둘리는 것도 한 방도시."

"태평시럽소. 그간에 피 뽈리고 굶어서 다 죽게 되는 것은 안 생각허시오? 염병헐 것, 강동기 그 사람이 장허고 장헌 인물인디, 서가눔 대갈통얼 수박 쪼개디끼 반으로 쫙 갈라뿔어야 허는디 말이여."

김종연은 마른입을 짭짭 소리 내며 담배쌈지를 끌어당겼다.

"니 말허는 것이 영 위태위태허다? 여기서야 무신 소리 혀도 암시랑 않제만, 혹여 암디서나 그리 입 씸벅씸벅 놀리다가는 영축웂이 빨갱이로 몰릴 것이다."

유동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니미럴 것, 속 씨언허게 빨갱이질이나 한바탕 혀부렀으먼 좋겄소. 요런 미꼬미 웂은 시상 살아가기도 인자 징글징글허요."

"참말로 니 못허는 소리가 웂다이. 인출이 맹키로 잠 진득혀라."

"아이고 성님, 인출이가 입 봉허고 앉었응께 생각이 나만 덜헌 것 같지라? 사람덜이 다 속언 뻔험스롱도 말만 안허고 있데끼, 인출이도 입만 봉허고 앉았을 것이요. 워디 한분 물어봇씨요."

김종연이 자신 있다는 듯 유동수를 응시했다.

"행에 니 같을라디야. 워쩌냐, 니넌?"

유동수가 서인출에게로 눈을 돌렸다.

"금메요..."

서인출은 더디게 앉음새를 고치더니,

"종연이 말이 맞기야 맞제라. 작인덜치고 속맘으로 지주고 마름이고 쥑여보지 않은 사람덜이 워디 있겄소. 열 분,스무 분, 분허고 원통헐 때마동 쥑였겄제라. 으쩌요, 성님언 그런 일 웂었소?"

그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유동수는 눈길을 돌리고 말았따. 자신도 마음속으로 지주나 마름을 죽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종연의 말이 어느 대목 하나 틀릴 리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자신의 마음이었다. 다만, 나이 값을 해야 했으므로 종연의 결기를 다독이려고 했을 뿐이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바뀌어야 했다. 이대로는 평생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세상인심은 다 그쪽으로 돌아 있었다. 강동기라는 작인이 지주를 삽으로 찍은 것에 대해 사람들은 큰길에 나서서 외치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들 시원해하고 고소해했다. 그리고 지주가 죽어버리지 않은 것을 아까워했고, 강동기가 영영 잡히지 않기를 빌었다. 작인이 지주를 찍어서 조용했지, 만약 지주가 작인을 찍었더라면 읍네가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세상살이 불만으로 입들을 모았고, 세상이 뒤집어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눈치들이었다.

"성님, 강동기 그 사람이 워디로 도망질헌 것 겉으요?"

김종연이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뿜고 나서 물었다.

"나가 점쟁이다냐? 고런 것얼 알게."

"어허, 점쟁이만 고런 것을 안다요. 이적지 잽히지 않은 걸 요리조리 생각혀보먼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인디라?"

"금메... 하늘로 솟았을끄나, 땅으로 꺼졌을끄나."

"와따, 강동기가 홍길동이간디 하늘로 솟고 땅으로 꺼지고 혀라. 그리 건숭건숭 생각지 말고 책장 넴기데끼 조단조단 생각혀봇씨요."

"책장 아니라 명주올 시데끼 혀도 나넌 몰르겄는디."

유동수는 허기로 맥이 빠져 필요한 말을 하는 것도 힘이 드는 판에 그런 엉뚱한 일을 생각하느라고 신경을 쓰는 것은 너무 귀찮았다.

", 성님이 고런 생각 허기가 성가신 개비요이. 어이 동상, 자네가 한분 용헌 점쟁이가 되야보소."

김종연이 다리를 뻗어 서인출의 무릎을 질벅였다.

"호로자석, 성님얼 몰라보고. 이눔아, 복채럴 내야 점얼 치제."

"워따, 선무당 장구 나무래네. 몰르겄으먼 솔직허니 몰르겄다고나 혀야 붕알값을 허제."

"아까부텀 니눔 말허는 꼴라지가 워디 짚이는 디가 있는갑는디, 그려, 니나 붕알값얼 싸게 혀바라."

서인출도 허황한 이야기를 길게 끌 흥미가 없어 종연에게 대답을 떠넘겼다.

"나가 묻고, 나가 답허는 요런 싱건 일얼 나가 멀라고 혀. 오동평이 헌테넌 낼 아칙에 가기로 허고, 일어나 보드라고."

김종연은 등잔 받침대 아래 붙은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어허, 이 사람아, 내논 말이나 끝내고 가야제. 그 사람이 대체 워디로 갔다는 게여?"

유동수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컸다.

"아이고, 나도 모르겄소. 혀봤자 다 봉사 문고리 더듬는 소리제라."

"이눔아, 비싸게 꼬랑댕이 틀지 말고 싸게 말해뿌러. 글안허먼 니 못 간다."

서인출이 김종연의 바지를 틀어잡았다.

"처자식 기둘리는 집에 갈라먼 천상 말얼 혀야 쓰겄구마."

김종연은 피식 웃고 나더니,

"율어"

한마디를 툭 던지듯 했다.

"율어?"

유동수가 허리를 세우며 큰 소리를 냈고, 서인출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참말로 그까?"

유동수가 입을 열었다.

"아매 그럴란지도 몰르요."

서인출이 대꾸했다.

"요것이 니 생각이 아니라 워디서 진짜배기 소식으로 들은 것 아니어?"

유동수가 김종연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고메, 성님언 나보담도 한술 더 뜨고 나오요이."

김종연이 고개를 저었다.

"만일에 율어로 들어갔다 허먼 남은 마누래허고 새끼덜이 큰 걱정이다."

유동수가 힘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님, 워째 말얼 꺼꿀로 허고 그러요. 마누래야 젊디나 젊은 삭신에, 딸린 새끼가 하나뿐잉께 정재살이럴 허든, 품을 폴든, 산 입에 거미줄 칠랍디여. 걱정이람사 입산헌 남자가 걱정이제라."

김종연이 지게문을 밖으로 밀었다.

"참말로 빌어묵을 시상이다."

유동수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서인출도 몸을 일으키며 어찌할 수 없어 매형 하대치를 떠올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딸자식이 겪는 고생이 마음아파 사위에게 미운 살이 박혀 있었지만 속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 되어 매형이 징용에서 돌아오자 아버지는 갑자기 능구렁이를 잡아야한다며 산을 헤매 다녔다. 매일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는, 능구렁이를 어디에 쓸려고 그러느냐는 어머니의 줄기찬 물음에 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산을 헤맨 지 열흘이 다되어 아버지는 실히 한 발이 가까운 능구렁이를 기어코 잡아왔다. 그 살아 꿈틀거리는 능구렁이는 대두병에 대가리부터 밀어 넣어졌다. 대두병 주둥이는 작고, 능구렁이 대가리는 커서 아버지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반나절을 애먹어야 했다. 일단 대가리를 밀어 넣자 병 주둥이보다 세 배는 굵어보이던 몸매는 앞으로 뒤로 불룩불룩해지며 미끄러지듯이 병 속으로 들어갔다. 지체 없이 병 속에 소주가 채워졌다. 능구렁이는 제 몸을 제자 감으며 가리로 병 주둥이 쪽을 수없이 치받았다. 그 뱀술은 헛간 기둥에 꼬박 백 일 동안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이 그 술을 손수 사위에게 갖다 주었다. 술을 받고 매형이 눈물을 훔치더라는 말도 누님을 통해서 들었다. 매형은 장인의 정을 그렇게 고마워했으면서도, 장인이 버리기를 바라는 공산주의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매형 하대치는 몸만 강단진 사람이 아니었다. 몸만큼 마음도 강단진 사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버지가 맞아 죽었는데도 그는 좌익 활동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맞아 죽었으므로 그는 더욱 마음이 강단져질지도 몰랐다. 서인출은 그럴 수 있는 매형이 두렵고도 부러웠다.

 

 

12. 율어의 왕복길

솜털 같은 보드라움과 따스함으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 끝에 감기던 서늘한 기운도 어느덧 가시고 햇살의 포근함 속에서 바람은 가볍게 산들거렸다. 정원 가운데 자리 잡은 둥글고 깊숙한 연못에 햇살이 그득하게 담겼고, 돌축대 사이사이에서는 풀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맑은 햇살 속에 담긴 풀잎들은 금방 초록물을 방울방울 떨굴 것처럼 싱그러웠고, 바람이 산들거릴 때마다 잎잎이 가벼운 몸놀림을 지으며 반짝거렸다. 초록빛 햇살! 풀잎들의 반짝거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화의 뇌리를 문득 스친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풀잎들의 반짝거림은 정말로 초록빛으로 보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건 풀잎만이 아니었다. 연못의 물도 바람결이 스치는 만큼 잘게 반짝거렸다. 그런데 그 반짝거림은 초록빛이 아니었다. 물의 반짝거림은 풀잎의 반짝거림보다 밝아서 눈이 부셨다. 물의 반짝거림은 그럼, 무슨 빛일까?..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 물의 반짝거림에 시선을 모으며 소화는 골똘히 생각했다. 풀잎에 닿아 초록빛이 되는 햇살은 물에 닿아 무슨 빛이 될까... 물에 닿았으니... 그래, 물빛이 되겠지. 그런데, 물빛은 무슨 색깔이지? 물빛, 물빛... 물빛에도 색깔이 있던가? 흰빛? 아닌데... 물은 무색이던가? 소화는 생각이 모으며 회고 긴 목을 갸웃했다. 그때 그녀의 의식 속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다였다. 씻김굿을 할 때 우러르곤 하던 바다, 그건 얼마나 신비로운 형형색색이던가. 가까이에서부터 멀리로, 깊이에 따라 색조를 달리하던 바다, 그게 바로 물빛이 아니던가. 사발에 떳을 때는 무색인 듯하다가 저수지에 담기면 푸른빛을 품고, 강으로 흐르면서는 또 굽이굽이 달라지는 빛깔. 하늘이 가깝고 먼 깊이에 달라 그 빛깔이 형용할 수 없이 달라지듯 물빛도 그러했다. 물은 많이 모일수록 하늘빛 그대로 닮아갔고, 하늘빛을 인간의 말로 형용하기 어렵듯 물빛도 인간의 말로는 형용되지 않았다. 하늘빛은 하늘빛이고, 물빛은 물빛일 따름이었다. 하늘이 내린 세상의 수수만상이 제 각자 형체가 있고, 그에 따른 색깔이 있게 마련이듯 물에도 색이 있어 빛을 띠되 물빛이라고 할 밖에 없다고 소화는 생각했다. 수면의 반짝거림들이 모아져 형체를 이루어내듯 서서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분, 정하섭의 모습이었다. 그분을 향해 열린 그리움의 바다가 금방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움의 바다는 한편 목마름의 바다였다. 목마름이 파도로 일어나려 하는 것이 소화는 두려웠다. 그 파도는 한번 일기 시작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도록 거칠어져 제멋대로 몸부림치며 가슴을 터치고, 전신을 조각조각 부수고서야 가라앉고는 했다. 신내림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듯 그 파도의 일어남과 스러짐도 자신의 의지 밖의 힘인 것을 소화는 체념하고 있었다. 지금 어릿거리고 있는 얼굴은 그분의 떠날 때 모습이었다. 그분은 다시 오겠다는 대답을 고개 끄덕임으로 대신했다. 말보다 그 끄덕임이 더욱 있게 느껴지면서도 찬 기운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전과는 달리 자신을 그리도 오래 쳐다보던 깊은 눈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깊은 눈길에도, 웃고 있는 얼굴에도 이상스러운 슬픈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났다. 그러나 그 감정을 말로 나타낼 수는 없었다.

"허시는 일에 지가 심이 되고잡은께, 지 걱정은 마시고 무신 일이고 시켜주시씨요."

이 말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마음을 대신했다. 그분은 여전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슬픔이 담긴 눈을 남긴 채 새벽어둠의 안개 속으로 안개가 되어 사라져갔다. 앞으로 영영 안 올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생각은 그분을 따라가라고 몸뚱이를 사정없이 떼 밀었고, 그런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느라고 그녀는 나무를 껴안아야 했다.

욕심내덜 말어, 애시당초 현생에서 집을 짓잔 것이 아니었응께. 가먼 보내야허고, 오먼 맞어야 허는 그런 인연잉께.’

그녀는 나무등걸에 볼 비벼대며 자신을 일깨웠다. 그러나 또 다른 말이 그 말에 맞서고 있었다.

엄니럴 그리 허망허게 잃어뿌러감스로 고리럴꿴 인연인디...’

소화는 치마귀를 여미며 일어섰다. 그분은 바람이었다. 바람으로 왔다 바람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인연은 인연이되 붙들어둘 수 없어 아리고, 잡히지 않아 허허로운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결코 뜻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잠시 잠시 머물렀다가면서도 정의 샘을 갈수록 깊이 팠고, 믿음의 산줄기를 가슴에 옮겨다놓았으며, 신령님의 세상만 보아온 눈을 돌려 사람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그 분이 하는 일, 그건 사람의 세상을 올곧게 하려는 뜻이었다. 사람의 세상에 층하가 지어져 있음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하늘의 뜻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그건 하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으로 정해진 것이고, 사람의 잘못된 뜻은 또 다른 사람의 옳은 뜻으로 뒤바꿔야 하며, 뒤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눈뜨게 했다. 그런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되면서 소화는 드넓게 펼쳐져 있는 중도들판을 예전처럼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현 부자가 왜 굳이 야산 중턱의 높은 지대를 골라 집터를 닦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터가 명당이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채와 사당을 중심으로 해서 두 개의 연못이 있는 정원과 가무를 즐길 수 있도록 널찍하게 지어진 정자에 이르기까지 집터는 넓고 넓었는데, 그 어느 곳에 서더라도 끝이 아슴하게 펼쳐진 중도들판이 한눈 안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이만 석 지주 현 부자는 명당에 자리 잡고 앉아 삼만 석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한편으로 중도들판 웃머리로 이어진 자신의 농토를 구경삼고, 작인들을 감독삼아 연못가의 나무그늘에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서도, 솔솔바람 시원한 정자에서 기생들의 춤과 노래를 안주로 낮술이 거나하게 취해가면서도, 언제나 눈아래짓을 할 수 있도록 높직하게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소화는 비로소 다른 지주들의 집도 거의가 높으막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공통점을 깨닫게 되었다. 굿판을 차리려고 지주들의 집을 일년에 한두 번씩은 으레 드나들었으면서도 건성으로 지나친 점이었다. 횡계다리목에서부터 시작되는 낙안벌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항아리 속처럼 자꾸만 넓어졌고, 그 넓은 벌판을 차지한 지주들의 집은 한결같이 명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채 높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소작인들의 집은 거기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아래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고는 했다. 덩치가 큰데다가 위치까지 높아 지주들의 기와집은 한층 우람하게 보이는 것에 비해 소작인들이 초가집은 그지없이 초라했다. 지주들의 집터가 다 명당이라고 하는 것과는 달리 거기에는 꼭 이상스러운 말들이 따라다니게 마련이었다. 누구네 집터는 혈을 끊었으므로 당대의 재물은 모르지만 자손들이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했고, 누구네 집터는 그게 절을 지어야만 될 명당인데 개인집을 앉혔기 때문에 기를 누르지 못해 당대에 망하게 될 거라는 식의 말이었다. 누구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그 말들은 당사자 앞만을 피해 당연한 사실처럼 떠돌았다. 그것들이 바로 소작인들이 지주들에게 품고 있는 원한의 표시라는 것도 소화는 알게 되었다. 소화는 들판 쪽으로 먼 눈길을 보낸 채 새싹이 돋고 있는 잔디밭을 천천히 걸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전신의 살갗 밑으로 으스스하게 찬바람이 일곤 하던 증세도 말끔하게 가셔지고 없었다. 감방에서 풀려나 시간이 지나고, 약을 먹고 해서 나아진 것만이 아니었다. 그건 그분의 힘이 나타낸 기적이었다. 그날 밤 목욕탕에서 그분이 자신의 전신을 핥아 내릴 때 혀가 닿는 자리마다 살이 드겁게 떨리며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매질당할 때의 아픔만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신효함은 그 어떤 약은 말할 것도 없고, 신령님의 영험으로도 될 일이 아니었다. , 그때의, 부끄러움과 함께 감당할 수 없었던 황송함, 그리고 혼미함과 행복감, 천한 무당의 몸으로 더 이상 무엇을 또 바라랴. 그분은 떠났어도 그분의 혀가 남긴 질긴 감촉과 뜨거운 체온은 전신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때의 느낌이 전신에 다시금 퍼지는 걸 느끼며 소화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돌기둥이 선 바깥대문 가까이에 다다른 소화는 걸음을 멈추어 섰다. 벚꽃이 한두 송이씩 피기 시작하는 길을 따라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짧게 입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소화는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그 여자가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생각이었고, 아직 얼굴을 알아볼 만한 거리가 아닌데도 그 여자가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상한 예감을 다시 생각하며 소화는 허리를 굽혔다. 발치께의 쑥을 뜯어 코끝으로 가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쌉싸름하게 진한 쑥향기가 일시에 가슴을 적셨다. 가슴속이 온통 쑥빛으로 물 드는 기분이었다. 쑥 냄새는 솔잎냄새와 함께 언제 맡아도 싱그럽고 푸르렀다. 여자는 얼굴 윤곽이 확실해질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소화는 그 여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시 쑥 냄새를 맡았다. 여자는 아무런 주저하는 기색 없이 소화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소화라는 분이 아니신지요?"

여자가 소화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구만요."

소화가 눈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이지숙이라고 합니다."

이지숙은 약간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혹시, 병원에 좌익 한 사람을 감춰서 치료하다가 발각 난 사건을 아시는지요?"

자기 소개를 쉽고 빠르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 그 소학교 선생님..."

소화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소화는 이지숙을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이미 아는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감방에 갇혀서는 막연하게나마 더러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 여자도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도망시키는 일을 도왔다가 벌 받지 않고 그냥 풀려났으니 나도 별일이야 있을라고...하며 생각했던 이지숙이었다.

"알아보시는군요."

이지숙은 무언가 깊은 의미가 담긴 듯한 웃음을 피우며 소화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생 많이 하셨죠. 몸은 좀 어떠신가요"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그만 허구만요."

소화는 대꾸하며 빠른 눈 놀림으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소화는 이지숙이 자신을 찾아준 것이 반갑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했다.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를 감시의 눈에 이렇게 만나는 것을 들키게 되면 의심사기는 십상이었다.

"여기도 감시받고 있는 모양이죠?"

이지숙이 비웃는 투로 말했다. 소화는 놀란 눈으로 이지숙을 주시했다. 그 눈치 빠름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염려 마세요. 난 굿을 부탁하러 온 사람이니까요. 만약 의심을 받게 되면 소화씨도 그렇게 말을 맞추세요."

이지숙은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이지숙은 감시나 의심 같은 것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소화씨그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 생소한 호칭은 자신의 이름 같지 않게 영 어색스러우면서도 무당이라는 굴레를 금방 벗어나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을 소화는 느끼고 있었다.

"죄송한 물음입니다만, 정하섭이란 사람을 돕다가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후회하지 않으세요?"

소화는 이지숙의 말을 갈피 잡을 수가 없었다. 후회한다는 말을 들으려는 것인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려는 것인지, 이지숙의 태도는 모호하기만 했다. 그리고 소화는 약간 불쾌감을 느꼈다. 친한 사이에서도 조심해야 할 그런 말을 초면에 불쑥 묻는 것이 마땅찮았다.

"댁은 후회허시는가요?"

소화는 이지숙을 똑바로 쳐다보며 반문했다. 이지숙이 자신을 '소화씨'라고 부른 것처럼 자신도 이지숙을 '지숙씨'라고 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 입에서 나간 소리는 ''이었다.

"아뇨, 후회하지 않아요."

이지숙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소화는 뒤로 밀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지숙을 똑똑하고 당찬 여자라고 생각했다. 처음 대면할 때부터 그런 이상이었는데 역시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지도 후회 않는구만요."

소화는 또렷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다시 도움을 청하면 또 도울 마음이군요."

이지숙이 웃음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 신령님 뜻잉께요..."

소화는 포구 쪽으로 멀리 눈길을 보냈다.

"저 아래 회정리 입구까지 왔던 길에 나와 비슷한 처지로 고생을 겪은 소화씨가 생각나 염치불구하고 들러봤지요. 아직도 몸이 성찮은 것 같은데 조릴 잘하세요.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지숙이 눈인사를 했다.

"아니, 안으로 잠 드실 것을..."

"아닙니다. 바빠서 그만 가봐야 합니다. 앞으로 종종 놀러 와도 될까요?"

이지숙이 돌아서듯 하다가 물었다.

"하먼이라, 은제라도 이시씨요."

소화는 자신이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이어서 반색을 했다.

이지숙은 흡족한 마음으로 벚나무들이 양쪽으로 줄을 선 신작로 넓이의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흡족한 마음 한편으로는 증오감이 서리고 있었다. 아까, 같은 길을 올라가며 느꼈던 불쾌감이 이제 증오감으로 바뀐 것이다. 그 넓고 긴 길을 바깥 대문에 이르는 사도였던 것이고, 소화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대충 살펴본 집의 규모나 그 주변의 꾸밈새는 돈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을 하듯 돈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어느 부자의 몸부림이었다. 지주가 낭비하는 돈, 그건 돈이 아니라 쌀이다. 쌀은 인간의 생존이고, 그 쌀은 소작인들의 생존은 위협 당한다. 생각에 잠겨 걷던 이지숙은 무언가가 부딪쳐오는 느낌에 언뜻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의 손엔가 부러진 벚나무가지가 눈높이에 휘어져 있었다. 가지에는 꽃망울들이 촘촘히 매달려 있었다. 사꾸라, 일본 놈들의 꽃. 이지숙의 가슴속에서는 강한 거부감이 일어났다. 일본 놈들은 도처에 신사를 짓는 것만큼 열성으로 사꾸라를 심었고, 신사를 신성시한 것에 못지않게 사꾸라를 떠받들었다. 우러를 수는 있으되 꺾을 수는 없는 꽃. 그 사꾸라의 수난은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꺾어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일삼아 밑동에 도끼질을 해서 없애버리기도 했다. 사꾸라는 조선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유일한 꽃이었다. 어느 꽃이고 곱지 않은 꽃이 있으며, 사람치고 꽃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사꾸라가 미움을 받는 것은 일본 놈들이 국화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건 사꾸라의 의사가 아니었고, 잘못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꾸라가 미움이나 수난을 모면할 길은 없었다. 더구나 조선인 모두에게 사꾸라의 무고함을 환기시킬 필요도 없었다. 사꾸라는 스스로의 기구한 운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조선인들은 사꾸라를 줄기차게 미워함으로써 일본에 지배당한 역사를 계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가엾은 꽃! 이지숙은 꽃망울 하나를 따며 벚나무에 연민을 느꼈다. 이지숙은 중도들판을 바라보았다. 긴 방죽을 경계로 간척지는 질펀하게 펼쳐져나가고 있었다. 바다를 막아 일군 농토...그녀의 가슴으로 알 수 없는 슬픔이 물결쳐왔다. 방죽을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바로 발 아래로 뻗어가고 있는 신작로 가까이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 넓고 넓은 간척지는 그때 뻘밭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뻘밭을 농토로 만들기 위해수 많은 사람들은 의지를 모으고 노동을 바친 것이다. 그건 평지에서 돌담을 쌓거나 축대를 쌓는 일이 아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뻘밭을 가로질러가며 바닷물을 차단시킬 수 있도록 튼튼한 방죽을 쌓는 일이었다.

"워따 말도 마씨요,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허고 가난헌 개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돼지맹키로 천대받아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쌓는 일에 비허겄소. 돌뎅이 지고 깔끄막(비탈) 올라댕기기도 심이 들겄제만, 장딴지고 허벅지꺼정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돌짐지는 고초에야 비허겄소? 그라고, 뻘밭이 그냥 뻘밭이 아니라 아칙에 한분, 저녁참에 또 한 뿐,하로에 두 차례썩 바닷물이 들고 나는 판이니 일허기가 워쩌겄소, 뻘언 소금물을 품고 더 잔득짠득혀졌제, 물이 실렸든 동안에 못헌 일 볼충허라고 뒤에서는 잡지제, 심이 곱쟁이로 드는 것이 그 일이요. 저 방죽 높기가 논 쪽에서는 한질, 갯바닥 쪽에서는 두 질 남짓이라고 시퍼 보덜 마씨요. 저 방죽이 바닷물이 밀어대는 심 이겨냄스로 저리 짱짱허니 버티게 헐 기초를 맹그니라고 뻘 속으로 을매나 많은 돌뎅이럴 처박아 도굿대질(절구질) 헌지 알겄소? 하매 눈에 뵈는 것보담 더 많은 돌뎅이가 뻘밭 속에 백혔을 것이요. 그렁께 저 방죽을 지대로 볼라먼 눈에 뵈는 높기만 볼것이 아니라 눈에 안 뵈는 높기꺼정 합쳐서 봐야 지대로 보는것이요. 그리혀서 이십 리럴 뻗어간 방죽잉께, 거기에 백힌 돌뎅이 수가 을매일 것이며, 퍼날른흙은 또 을매나 많은 등짐이겄소. 다 골 빠지게 일얼 혔음스롱도 고것을 아는 살믕 아무도웂소. 그 에롭고 피맺히는 일얼 가난허고 배곯은 조선사람덜 손으로 혔다는 것만 확실허제. 근디 기맥히게도, 방죽을 다 쌓고 본께 배불리는 눔덜언 일본 눔덜이었다 그것이요. 방죽을 쌓다가 죽기도 여럿 허고, 다쳐서 빙신 된 사람도 많고... 하여튼 지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헌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덜 속이 워쨌겄소. 허나 그보담도 더 큰, 나라 뺏게뿐 못난 처지에 고런 서럼이야 도리웂이 참았다고 혀도, 더 기맥힌 꼴은 해방이 되야갖고 벌어지지 않았겄소. 동척 재산인 저 논얼 불하헐 적에는 응당 소작인헌테 해야만 옳은 순서고 순린디, 미군정청 눔덜언 소작인은 제께놓고 지주눔덜허고 짝짝꿍이 되어부렀단 말이요. 중도들판 소작인덜언 거지반 방죽쌓는 일얼 혔던 사람들이고, 또 그런 집안 자석들인디, 모다그 꼴얼 당허고 말었으니 누가 이눔에 시상얼 믿고 따르겄소. 니나 웂이 가심에 샇이느니 미움이고 원한이제."

들판을 한스럽게 바라보며 방 노인이 한 말이었다. 이지숙은 방 노인의 말을 되새겨가며 일부러 방죽을 걸어 선수머리까지 갔다가 되짚어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 긴긴 방죽을 쌓아나간 일은 과연 대역사가 아닐 수 없었고, 돌 하나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의 핏방울이라는 말이 실감으로 가슴을 쳐왔다. 그 방죽은 가장 잔인한 노동착취의 증거물인 동시에 가장 신성한 노동축적의 창조물이었다. 방죽은 바로 인민의 응축된 힘이었고, 그것은 혁명을 갈구하는 현장이고 현실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지숙은 회정리 이구에 사는 동철이를 찾아보고 돌아가는 길에 도래등을 오르면서 소화를 만나보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동철이는 야학의 학생들 중에서 제일 자신을 따르는 아이였고, 영리했다. 동철이네 형편을 알게 된 이지숙은 쌀말이나마 팔 수 있는 돈을 그애의 어머니에게 전했던 것이다. 소화가 자신을 그렇게 반긴 것은 이지숙으로서는 의외였다. 그리고 정하섭에 대한 소화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기대 밖의 수확이었다. 이지숙은 꽃망울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넣고 무의식적으로 문지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금재를 넘어 낙안 들녘길을 걷고 있던 운정은 향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잎 돋기 시작한 우람한 은행나무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향교의 울안에서 은행나무도 변함이 없었다. 이십대 젊은 날 벌교 포교당에 본산 소식을 전하러 오가며 바라보고는 했던 은행나무는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은행나무가 제대로 잘생겨 보일 때는 아무래도 잎이 무성할 대로 무성한 한여름이었다. 키가 드높고 가지들이 넓게 뻗은 만큼 무성한 잎들을 매달아 우람스런 체구를 갖춘 은행나무는 위풍스러움을 넘어 신성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 은행나무는 나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는 오백 살이라고 하는가 하면, 어느 사람은 칠백 살이라고도 했다. 열 살이나 스무 살 정도의 차이라면 모르겠는데 이백 살이나 차이가 나고 보면 그 어느 말도 믿기는 어려웠다. 고작 육십여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수수백년을 사는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나무의 나이를 알려고 하는 것부터가 부질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운정은 고개를 젖혀가며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인간에겐 삼사십 년 세월이 늙고 병들게 하는 긴 세월이지만 천 년을 넘게 사는 나무한테는 그 세월이 인간의 하루 이틀에 불과할 것이니 무슨 변함이 있을 리 있나. 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정은 은행나무에 정을 주고 있으면서도 향교안에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한여름 뙤약볕 속을 걸으며 그 은행나무가 드리우는 큰 그늘 아래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에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더위를 삭이고는 했다. 중의 몸을 하고 향교 드나들기를 무심히 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 저어함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그건 조선왕조가 숭유배불함으로써 비롯된 일이었다. 중은 향교를 싫어했고, 향교에서는 중을 반기지 않았다. 피차가 꺼리는 입장에서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해를 눈가늠한 운정은 발길을 옮겼다. 횡계다리 옆의 포교당까지 가기에는 햇발이 넉넉했다. 벌교걸음을 이렇게 일찍 할 생각은 없었다. 선암사에 자리를 잡았으면 벌교야 한 울안이었다. 선암사까지 발길이 것이 문제였지 벌굔 될 수 있는 대로 더디게 걸음 하는 것이 나을는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영영 발길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본산의 나날은 바랑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러움에 따라 절집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바깥세상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절집도 두 패로 갈려 대립하고 있었다. 순천 포교당에서 들었던 것보다 본산의 대립은 더 심각했다. 법일이 좌익으로 몰리는 것으로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험악해졌던 것이다. 주지 측에서는 법일을 그런 식으로 몰아감으로써 법일의 세력을 와해시켜 일을 수습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법일과 뜻을 같이하는 승려들은 힘을 잃기보다는 더 강하게 뭉쳐 주지에게 맞선 것이다. 법일의 세력은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거의가 젊은 중들이었다. 수가 적은 대신 젊은 기백으로 뭉쳐진 그들의 힘을 주지 세력과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절대권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는 본산회의도 그들 앞에서는 이미 권위를 잃었고, 수적인 우세를 이용해 완력으로 몰아내려 했지만 그들의 완강한 저항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주지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란 유일하게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법일을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좌익으로 모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쓰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좌익으로 몰았다가는 주지 자신도 온전하지 못한 일이었다. 객승이나 다름없이 운정으로서는 어느 편도 들 수가 없었다. 승려도 사람이고, 사람 사는 옳은 사리대로 따지자면 젊은 승들의 편에서야 했다. 그러나 사리가 사리대로 따져져 순조롭게 풀리는 일이 아니라 사리는 없어지고 감정적 싸움으로 패가 갈려 있는 형편에 어느 한쪽의 편을 든다는 것은 그 싸움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가 될 분이었다. 일의 옳고 그름을 마음으로 헤아려 마음에 담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함을 얻는 것이었다. 운정은 생각다 못해 바람결에 발길을 맡기기로 하고 바랑을 챙기게 되었다. 마음이 일으키는 바람은 결국 몸뚱이를 벌교 땅에 데려다 놓고 말았다.

", 고것 참 골칫거리들이시. 즈그가 무신 중생 위허는 똑별난 중놈들이라고 넘 중살이꺼정 심들게 맹글라고 그래쌓는지 모르겄네."

본산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듣고 난 당주승 지현이 내쏜 말이었다. 운정은 방바닥만 내려다본 채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원래 포교당이야 객승이 하루 이틀 여독을 풀고 가는 것이 상식이지만 여기서는 하룻밤 눈 붙이기마저 거북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시국이 뒤숭숭해서 그렇지 발길 옮길 만한 절은 얼마든지 있었다. 먹물 옷을 걸친 몸으로 뜬구름 되어 살자 마음 정하기만 하면 수많은 절집이 다 내 거처이니 평생을 떠돌며 마칠 수도 있었다. 면벽참선만 수도가 아니라 그것도 수도의 한 길이라 해서 일찍이 중 한평생을 그리 살다 간 사람들도 많았다.

"스님은 그 일얼 워찌 생각허시오?"

당주승이 따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글쎄요...아직까지 아무런 깨달음도 갖지 못한 나 같은 사람 생각이야 말하나마나 한 일이고, 우리 절밥 먹는 사람들이나 중생들이나 제일 귀 가깝게 들을 수 있는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그 답이 있지 않은가 싶소. 보시하라, 하신 말씀이요."

", 선문답이로시."

당주승은 거침없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그의 마음의 행방을 알아 버린 운정은 그 예절 없는 행동거지가 아무렇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포교당을 맡고 있으면서도 순천의 당주승과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자리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도 그 해석을 달리하는 판에 재물을 앞에 둔 입장에서 그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너무 자명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옳고 그름이 있음은 또한 엄연했다. 인간의 주장으로 공산주의거나 자본주의를 내세워 서로 다툼하기에 앞서 부처님은 까마득한 세월 전에 벌써 자비의 실천을 가르친 마당에 중들이 소작인을 거느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여기 형편은 좀 어떤가요?"

기왕 발길한 김에 이곳 사정을 대충 알고 떠나고 싶어 운정은 말머리를 돌렸다.

"춘궁긴디다가 시상이 요리 시끌시끌헌께 시주도 싹 줄어뿔고, 살림살이에 궁짜가 낄 대로 꼈소."

동문서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재물을 밝히는 성정이라서 물음을 그렇게 잘못 들었을 것이고, 오래 파먹고 앉아 있지 못하게 하려고 미리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운정은 가만히 웃음 지었다.

"절 살림을 묻는 게 아니라, 여기 별교 돌아가는 사정을 물은 것이오."

운정의 말에 당주승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득득 긁어댔다. 민망해서 그러는 것인지, 귀찮아서 그러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채로 운정은 당주승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말 허나마나 여그도 빨갱이눔덜 땀세 난장판이요."

당주승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쏘았다.

"난장판이라면, 아직도 그 사람들이 물러가지 않았단 말이요?"

"말도 마씨요. 물러간 디끼 허등마 새시로 밀어닥쳐 율어를 뺏어 진을 치고는 밤이면 벌교고 조성이고 보성이고 즈그덜 멋대로 난장판을 치고 댕기는 판굿이요."

"어허, 그 사람들만 밤눈 밝은 호랑이가 아니겠고, 경찰이나 군인들은 잠만 자는 것인가, 무서워서 꼼짝을 못하는 것인가. 어찌 된 일이오?"

"군인이고 경찰이고 상대가 상대라야 해묵어보제, 그눔덜이 워낙에 씨고 날랜께 해묵어볼 방도가 웂는것이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일 침스로 쩌그서 딴짓허고, 쩌그 침스로 여그서 딴짓허고 헌께 군이이고 경찰이고 정신을 못 채리요."

"거참, 홍길동이가 새로 난 것도 아니고,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군요."

"고것이 그리 되게 되야묵었소. 대장이라는 염상진이가 예사 물건이 아닌디다가 그 부하라는 것들꺼정 소문난 것들이다 봉께 군인이나 경찰은 항시 미꾸랑지 잡기제라."

"말을 듣고 보니, 쓸 만한 사람들은 다 거기 모였다는 말 아니오?"

"글씨라... 똑똑허기로 친다면야 다 아까운 사람들이기도 허제라. 숯창시 아덜로 사범학교럴 나온 염상진이가 그렇고, 양반 족보 지닌 안씨문중 태생 안창민이도 그렇고, 보성 땅 이씨 문중의 이해룡이도 아깝고, 땅딸보 하대치에 조성 오판돌이, 다 젊고 실헌 인물들이제라."

"스님은 어찌 그리 그 사람들 이름까지 줄줄 외시오?"

운정은 안씨 문중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고, 안창민이라는 사람이 안씨 문중 어느 집 자식인지를 물어보고 싶은 욕심이 동했다. 그러나 그건 눌고 눌러야 할 원색적인 인간의 욕심이었다. 그는 먹물 옷을 걸치고 살아온 세월의 무게로 그 욕심을 눌렀다.

"고것이야 역서는 아그덜도 다 외는 이름덜이요. 그 사람덜 몰라서는 벌교사람이라고 헐 수 웂응께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인심은 어떤가요?"

"금메요, 인심이란 것이 참 묘헌 것인디, 시상이 워찌 돼무기을라고 인심이 고것들 쪽으로 쏠리는 눈치랑께요. 염상진이가 워낙이 백여시 맹키로 인심살 짓만 허는디다가, 지주나 부자덜언 반대로 인심 잃을 짓만 골라감서 허는 판인디 당연헌 일인지도 몰르제라. 그눔덜 시상 되얐다가는 우리 신세도 깨진 목탁 신세가 될 판국인디, 워째 시상 돌아가는 것이 위태위태허당께요."

"글쎄요, 위태로움을 면하고 세상을 편안하게 살려면 먼저 그 방법이 무엇인가부터 찾아내야 하지 않겠소. 편안한 세상이란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면 자연히 오게 되어 있는 법일진대, 그러자면 절집부터 재물 탐한 마음 버리고 소작인을 부리지 말아야 될 일 아니겠소."

"아니, 스님..."

당주승이 허리를 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더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기가 꺾여들었다. 당주승을 응시하고 있는 운정의 눈빛은 엄하고도 차가웠다.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은 경찰서로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밤만이 아니라 낮에도 형사나 청년 단원들이 헛간에 몸을 숨긴 채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남양댁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빤히Š뚫린 총구멍뿐이었다. 그 작은 구멍은 날이 갈수록 커지면서 아무데나 졸졸 따라다녔다. 부엌에도, 우물터에도, 잠자리에도 그 동그랗고 매몰차게 생긴 구멍은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미칠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무슨 구멍이든 구멍만 보면 다 총구멍으로 보여 남양댁은 화드득 놀라고는 했다.

"이 시상에 총 안 무선 사람 웂응께 정시 채리소. 정신얼 한분 놓치기 시작허먼 자꼬 헛것이 들앉는 법잉께. 남정네가 일 당허먼 예펜네가 강단지고 실허게 버팅겨야 그 집안이 되제, 예펜네가 정신 놓고 휘둘려뿔먼 그 집구석 볼장다보는 판잉께."

우물터에서 와주댁이 해준 말이었다. 그 말뜻은 잘 알았고, 일 저질러 놓고 쫓기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집에서 당하는 마음고생쯤 아무것도 아닐 것을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생각은 그렇게 돌아가면서도 남양댁은 총구멍의 뒤쫓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편들이 좌익을 한 죄로 매타작을 당하며, 그 사람 죽이는 구멍 앞에서 견뎌낸 여자들의 고통과 피마름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것 같았고, 새삼스럽게 그들이 장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사촌 동서 외서댁에 대한 뒤늦은 이해와 동정으로 남양댁은 가슴이 아팠다. 남양댁이 무서워하는 건 총구멍만이 아니라 또 하나가 있었다. 독이 서린 가느스름한 눈을 휘돌리며 수시로 나타나는 염상구였다. 그가 밤중에 나타나면 남양댁은 그만 전신이 굳어지고는 했다. 동서 외서댁 같은 신세가 될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그가 총을 들이대면 어찌할 것인가. 그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기로 작정을 하는 일이었다. 새끼가 딸린 몸으로 몸을 지켜 죽어야 할 것인가, 몸을 내주고 목숨을 부지해야 할 것인가. 그거야말로 여자가 당해야 하는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동서는 그 어려운 일을 당해 결국 몸을 내주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새끼, 집 나설 때부텀 사람 죽이자고 맘묵었제!"

염상구는 나타날 때마다 느닷없이 말을 불쑥불쑥 물어대고는 했다.

"평소에는 서운상이헌테 앙심을 품은 말 허고 그랬제."

"강동기허고 강동식이가 다 연줄이 있었제!"

그럴 때마다 남양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염상구는 실눈을 더 가늘게 뜨며 협박을 했다. 그 협박이 아무리 무서워도 사실이 아닌 일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염상구에게 한바탕씩 시달리고 나면 남양댁은 세상 살 맛을 잃었다. 남양댁은 밤마다 남편이 집에 발을 들이지 않기를 빌었다.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할지 모를 일이지만 당장의 위기를 넘기자면 집을 찾아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남편이 그 정도는 다 알리라고 믿으면서도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남편이 집을 찾아들었다가 총을 맞고 죽는 꿈을 거의 매일 밤 꾸었다. 강동기의 소식이 묘연한 채 날마다 자꾸 흐르게 되자 염상구의 태도가 달라졌다. 강동기를 좌익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촌 강동식과의 연관을 끝까지 추궁 당했고, 남양댁은 고개만 저어대다가 주먹다짐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심재모는 강동기의 체포에 대해 차츰 체념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처가가 있는 고흥의 남양면에까지 수사력을 뻗쳤지만 범인의 행방은 탐지되지 않았다. 범인 체포가 용이하지 않은 것은, 범인이 상식을 넘어 연고지를 철저하게 피하고 있었고, 모든 경찰력이 좌익세력 퇴치에 집중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사력이 약했던 것이다. 심재모가 범인 체포를 체념적으로 생각하는 데는 그런 이유 외에도, 해결 가능성이 불투명한 사건에 언제까지 매달려 시간과 병력을 소모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경찰서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경찰력은 일단 거두고 청년단원들로 잠복근무를 시키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일을 정리했지만 심재모이 기분은 여전히 축축하고 흐렸다.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로 그와 동행했던 두 사람의 일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께름칙한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그 동안 범인을 잡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했던 것도 사건의 시원한 해결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였다. 강동기가 잡혀 그의 입으로 단독범행인 것을 자백하기만 하면 두 사람은 무혐의로 그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형편으로는 두 사람은 살인미수 폭행범의 혐의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서운상이네 머슴은 단독수사에서만 두 사람의 공범사실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과 얼굴을 맞댄 대질수사에서도 공범임을 침 튀겨가며 주장해댔다.

"삽 들고 쫓아오는 그눔얼 나가 막아슬라고 헐 적에 느그 두 눔이 나럴 붙들어 꼼짝 못허게 허고, 그눔이 삽얼 내리쳐 나럴 요 꼴로 맹글지 안혔냐 그 말이여. 그라고 우리 어르신이 방을 피헐라는디 항꾼에 쫓아가 우리어르신 붙들고, 삽으로 찍고 헌 것이 느그시 눔이 아니고 누구여."

머슴의 말은 이랬고, 두 사람은 가슴을 퍽퍽 쳐 대고 의자가 부서져라 엉덩방아를 찧어대며 결백을 주장했다. 두 사람이 공범이면 왜 함께 도망을 가지 않았겠느냐는 심문에,

"삽 들고 개지랄 친 것은 강가 눔이고 즈그야 거들기만 혔응께저 징하고 숭악헌 것덜이 즈그는 죄가 웂다고 생각혔겄제라."

머슴의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피해자의 한 사람이면서 유일한 증인의 진술이 이랬으므로 두 사람이 비록 결백하다해도 공범혐의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머슴을 따로 남겨, 거짓말로 진술을 하면 그것이 죄가 되어 벌을 받게 된다는 말도 해보았다.

"아니, 나가 허는 말언 안 믿기고 저눔덜 말이 믿긴다 그것이요! 알겄소, 멀 얻어묵었는 지는 몰라도 저눔덜 편역을 들라고 그러는갑는디, 편역들라먼 들어봇씨요. 나 말언 한 치도 빼도 보태도 안헌, 있는 그대론께. 나가 그짓말얼 혔음사 당장 급살을 맞을 것이요."

두 사람에 대한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될 수도, 변화가 있을 수도 없었다. 강동기가 잡히지 않고, 머슴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한 두 사람을 살인미수 폭행범으로 검찰에 송치할 수밖에 없었다. 증인의 증언이 분명한 이상 아무리 수사관의 심증이라 하더라도 심증은 심증으로 그칠 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들 몇 년이나 살게 될까요?"

심재모는 서류에 도장을 누르며 권서장에게 물었다.

"글쎄요, 제 경험으로 봐서... 일이 년 가지고야 되겠습니까."

권 서장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렇겠지요."

심재모는 서류에서 도장을 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정확한 대답을 듣자고 물은 말이 아니었다. 심재모는 두 사람을 송치장과 함께 순천으로 넘긴 다음날 김범우와 손승호가 의뢰해온 건 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염상진이 동의한다면 여자를 율어로 보내겠다는 조건이었다. 염상진의 입장에서 남자를 집으로 내보낼 리가 만무했고, 만에 하나 남자가 나오게 되는 경우 이쪽의 입장이나 책임문제가 심각해질 것이었다. 일을 가장 무난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여자가 율어로 들어갔다가 임신을 하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권 서장은 그 일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 일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사정이 딱하고 안됐습니다. 허나 현 상황으로 볼 때 이 일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결정하셨겠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권서장은 전에 한 번도 나타낸 적이 없는 단호함을 보이고 있었다.

"서장님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심재모는 기분이 석연찮아지면서 겉으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는 원래 제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밉니다. 그러나 이 일만은 강하게 반대하고 싶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심재모는 하루의 여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미칠 수 있는 불이익에 대하여 이모저모로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은 다각적으로 펼쳐보아도, 자신이 직접 염상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김범우가 중간에 서게 되고, 그 여자가 율어로 들어가게 될 경우 별다른 문제가 생길 것이 없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따지더라도 적을 이롭게 하는 점이 하등 없었고, 아군이 손해를 보는 점도 없었다. 작전상으로 따지자면, 염상진이가 이미 주도권을 잡고 있는 대민심리전에 맞설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해 볼 만한 좋은 기회였다. 특히 자식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유교윤리 사회이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는 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심재모는 그 생각을 곧 지워버렸다. 불이익을 따지고 계산해야 하는데 이익 쪽을 생각해서 판단을 흐려서는 안 되었고, 더구나 그건 자신의 생각이기에 앞서 김범우가 했던 말이었다. 그 어떤 불이익의 가능성도 찾아내지 못한 심재모는 다음날 일찍 김범우에게 연락을 했다. 그때의 일로 좀 만났으면 한다는 말만으로 전화를 끊었다. 김범우는 미처 삼십 분도 안 되어 모습을 나타냈다.

"저어, 김 선생이 제 직책을 맡고 있다고 입장을 바꾸고 말입니다. 김 사령관은 그 할머니의 소원을 풀어주겠습니까?"

의레적인 인사를 마치고 나서 심재모가 웃음 띤 얼굴로 김범우에게 건넨 말이었다. 반 농담 같은 그 물음에 들어 있는 심각한 뜻을 김범우는 직감적으로 포착했다.

"고심하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제 대답은, 물론입니다."

김범우는 심재모에게 용기라도 심듯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좋습니다. 그 여자가 율어로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그 일을 허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큰 결심 하셨습니다."

김범우가 손을 내밀었다. 심재모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젠 김 선생이 수고하시게 됐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첫째, 이 일과 기본 작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둘째, 임신이 확인되는 즉시 집으로 돌려보낸다. 셋째, 그 기간 동안에 일체의 이념주입을 가하지 않는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도 이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이상 네 가지 조건을 준수하도록 전해주시오."

"잘 알겠습니다."

"염상진, 그 사람이 동의할까요?"

"만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동의할 겁니다."

"언제 가시겠습니까?"

"별 할 일도 없고 하니 곧 가도록 하지요. 그 할머니는 한시가 급할 테니까요."

"오늘 돌아올 수 있을까요?"

"거리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그쪽에 가서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 되잖겠습니까?"

"혹시 김 선생을 안 보내는 것 아닙니까?"

심재모가 웃었다.

"그건 곤란한데요. 제가 영 불리해질 테니까."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일어섰다.

김범우는 주리재 가까이에 이르러 "피룽 피룽"하고 우는 새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새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으로 몇 걸음 옮기는데 이번에는 "쿨꾹 쿨꾹"하는 새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모으고 들으니 그것은 역시 새소리가 아니었다. 염상진네가 율어에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주리재가 가까워졌으니까 무슨 제지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진짜 새소리가 아님을 식별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락없는 새소리로 듣게 되어 있었다. 김범우는 염상진의 철저한 경계를 피부로 느끼며 몇 걸음을 더 옮겨놓았을 때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정지! 도망가면 쏜다!"

김범우는 걸음을 멈추고, 미리 두 팔을 들어올렸다.

"폴 들지 말고 엎디려! 땅에 엎디려!"

김범우는 명령대로 두 팔을 땅을 짚고 엎드리며 가만히 웃었다. 염상진은 두 팔을 들게 하는 수하법도 안심이 안 되어 가장 안전한 방법을 훈련시킨 것이다. 대장 노릇을 빈틈없이 하고 있는 염상진을 환히 보는 기분이었다. 제복이 사람을 만든다. 나폴레옹의 말이 얼핏 떠올랐고, 하긴 염 선배가 군당위원장 아니라 도당위원장인들 못해낼 리 없고, 중앙당 핵심자리에 앉혀도 못해낼 리 없겠지, 김범우는 풀잎 사이를 기어다니고 있는 조그만 개미를 내려다보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꼼지락 말엇!"

억센 느낌의 손의 빠르게 몸을 더듬어 내렸다.

"일어낫!"

김범우는 손바닥을 털며 일어섰다. 네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서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을 든 사람은 둘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대창을 들고 있었다.

"누군디 여글 멀라고 왔어."

"나 김범우라는 사람인데, 당신네 대장님을 만나러 왔소."

"멀라고!"

"그거야 대장을 만나 얘기해야 하니까 빨리 전하시오. 그러고, 수하가 끝났으면, 이쪽에서 존대를 쓰면 그쪽에서도 존대를 써야 하지 않겠소? 혁명전사고 인민해방군이란 사람들이 그 정도 예의는 있는 줄 알았는데, 염 대장이 그러라고 시킵디까?"

네 사람은 당황하는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총을 내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고것은 미안시럽게 되았구만요. 누구신지, 용건이 멋인지 몰르는 헹펜이라 그리 되얐소. 대장님이 그러라고 시킬 리가 있깐디요. 잘못 됐구만이라."

"됐습니다. 듣기 거북해서 한 말이었어요. 대장님한테나 빨리 연락을 취해주시오."

김범우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시라고 혔지라?"

"봉림 사는 김범우."

"대장님이 시방 워디 기신지몰라 신호럴 올려야 쓴께 우선 쩌짝으로 가십시다."

김범우는 나무들 사이에 완전 은폐되어있는 토굴형 초소로 안내되었다. 그건 초소를 겸한 전투용 참호였다. 김범우는 가마니가 깔린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나이든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초소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경계에 열중해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총을 세워 잡고 자신과 마주보는 위치의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총만 겨누지 않았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김범우는 쉽사리 눈치 챌 수 있었다. 꽤나 훈련이 된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느낌을 또 받으며 김범우는 담배를 빼 물었다. 그들의 건강상태나 사기는 생각보다 좋아 보였다. 율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탓이라 여겨졌다.

"대장님은 어디 계시길래 날 여기다 두는 거요? 아까 그 사람은 어디 갔소?"

"담배나 피고 앉었제 암것도 묻지 마씨요. 난 암것도 몰릉께."

총을 세워 잡은 사내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김범우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것도 교육의 결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해방구를 장악하고 있는 염상진, 그는 어쩌면 장개석 군대의 추격으로 해방구를 수없이 버려가며 기약 없는 장정을 계속하면서도 공산혁명의 신념을 어느 한 순간에도 회의하지 않았던 모택동보다 더 견고한 신념과 확고한 자신감에 차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하긴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해방구의 안정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회의 없는 신념을 가진 사나이, 그는 행복하다. 그 신념을 추종하는 동지나 부하를 가진 사나이, 그는 행복하다. 신념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먹이를 나눌 수 있는 땅을 가진 사나이, 그는 스스로의 행복을 넘어서 행복을 생산하는 영웅이다. 현재의 염상진은 최소한 그들 사이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영웅이다. 김범우는 깊은 생각에 빠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염상진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두 시간 남짓이 걸렸다.

"범우 자네, 어쩐 일인가!"

염상진은 반가움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형님...!"

김범우도 가슴이 출렁이는 반가움을 그대로 표했다. 옛정이 슬픔처럼, 안타까움처럼 솟기고 있었다.

"처음에 자네 이름을 듣고는 설마 했었지."

참호 밖에 선 염상진이 허리를 굽혀 팔을 뻗쳤다. 김범우는 그 손을 잡았다. 염상진이 힘주어 끌어당겼다. 김범우는 참호를 벗어났다.

"건강해 뵈는 군요."

수염이 더부룩해 더 강한 탄력이 느껴지는 염상진을 보며 김범우가 말했다. 염상진은 꾹 다문 입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말을 꺼내기는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김범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정치성을 가진 얘긴가!"

염상진은 금방 태도가 달라졌다. 정치성이 있는 이야기라면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거부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얘길 가지고 여길 찾아오게, 제가 어린앱니까? 아니면, 형님이 어린앤가요?"

"알겠네, 자릴 옮기세."

염상진이 앞장섰다. 나무숲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 율어로 가는 길로 내려섰다. 둥글게 이어진 산줄기와 그 안에 담긴 듯한 분지가 한 장의 그림의 도구처럼 눈에 들어왔다. 김범우는 그 희한한 지형 구조를 조망하느라고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분지에 일구어진 논과 서너 채씩 모여 있는 집들이 인상적이었다.

"왜 여기 처음인가?"

앞서 걷던 염상진이 뒤돌아보며 의문스럽게 물었다.

", 중학교 저학년 때 한번 왔었는데, 그때하곤 영 느낌이 달라서요."

김범우는 눈길을 멀리 보낸 채 느리게 발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렇겠지. 어린 눈은 눈이 아니니까."

김범우는 눈길을 따라가고 있는 염상진의 얼굴에는 깊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아주 쓸 만한 지형이군요."

김범우가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자아, 이 길을 따라서 저 아래까지 내려가는 동안에 얘길 듣도록 하지."

염상진은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달구지가 오갈만한 넓이의 길은 아래쪽 분지를 향해 산허리를 따라 구불구불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거리로 보아 시간이 충분했고,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사연 자체에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상세하게 전하려고 김범우는 생각했다.

"...그래 심재모는 그 여잘 여기로 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이제 형님 결정만 남은 셈이죠."

김범우는 일단 여기서 이야기를 막음했다. 심재모가 내세운 조건들은 염상진의 결정에 따라 말을 하든지 말든지 하게 될 터였다. 염상진은 한참을 말이 없이 걸었다.

"그 친구, 생각보다는 괜찮은 친구로군."

이윽고 염상진이 말했다. 빛과 어둠의 사이에서 긴장되어가던 김범우의 심경은 대번에 빛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 의견을 들어보도록 해야겠네."

염상진이 김범우를 쳐다보았다. 김범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봄기운이 가득한 논밭에서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긴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도 총을 멘 사람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고, 이곳이 좌익의 해방구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그 어떤 색다른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초소의 분위기를 제외하면 이데올로기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긴장감이나 불안감 같은 것이 없이 그저 사람 사는 마을에 감도는 평온이 있을 뿐이었다.

"형님도 고유화폐를 발행합니까?"

김범우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소린가?"

"모택동은 해방구를 설정하면 제일 먼저 일체의 세금을 없애고, 꼭 자기네 발행 화폐를 썼어요."

"지나친 농담 말게, 모 동지는 중국공산당 주석의 자격으로 그리한 거고, 난 군당위원장일 뿐야."

염상진은 눈 가장자리가 험하게 보일 정도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반응에 김범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농담을 염상진은 당의 신성을 모독하거나 야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농담으로라도 모택동과 자기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그 나름의 확고한 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사과드립니다."

김범우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됐네."

염상진은 앞만 보고 네댓 발짝 옮기고는,

"머잖아 우리 조선공산당 화폐를 반도 땅 전체가 쓰게 될 거네"

마치 어떤 엄숙한 예식의 장소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어조로 말했다. 김범우는 그런 염상진한테서 끼쳐온 냉기를 느꼈다. 그것은, 강한 정신력으로 무슨 일엔가 몰입하고 있는 사람한테서 종종 느끼게 되는 일종의 압도감이었다. 저 신념의 덩어리, 당신은 역시 행복하다.

김범우는 담뱃갑을 꺼냈다. 네 사람이 자리를 같이했다. 안창민 옆에 앉은 사람은 김범우로서는 초면이었다. 그런데 염상진도 안창민도 그 사람을 인사시키지 않았다. 불필요한 노출을 꺼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김범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성책 오판돌이었다. 염상진은 김범우가 길게 했던 이야기를 짤막하게 간추려 두 사람에게 했다.

"... 사정이 이런데, 우린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의견들을 듣고 싶소."

김범우의 담배가 반으로 타들 때까지 좌중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 결정에 동의를 하는 경우, 전반적인 작전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까요?"

안창민이 입을 열었다.

"그 문젤 생각해 봤는데, 별로 없을 것 같소."

염상진의 대답이었다.

"그렁께 고것이 신방 아닌 신방얼 채레주는 것인디, 혹여 기강이 물러지지 않을란지 몰르겄는디요."

오판돌의 말이었다.

"그런 특별한 일로 기강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 부대는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고 봐야 할 거요"

염상진의 말이었고,

"허기는 그렇제라"

오판돌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동의해도 좋을 것 같군요. 거부했을 경우 오게 될 역반응도 고려해서 말입니다."

김범우는 엷게 웃었다. 안창민은 그다운 민감함으로 역반응까지 계산해내고 있었다.

"그렇소. 우리가 거부하는 경우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충분하오. 심이라는 자는 인간적인 측면 외에도 그 점까지 계산에 넣었다고 봐야 하오."

김범우는 또 웃음 지었다. 심재모는 뱃속까지 해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동의하도록 합시다."

마침내 염상진이 결정을 내렸다.

"고맙습니다."

김범우는 좌중을 돌아보며 눈인사를 했다.

"기왕 결정을 했으니 오래 끌 것 없이, 이틀 안으로 주리재를 통해 여자를 보내라고 전하게."

염상진이 김범우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부대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 까다로울 것 없는 것이니 일단 들어보시고, 형님도 필요하면 또 조건을 제시하세요. 첫째..."

김범우는 종이에 적은 것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도 이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이상입니다."

"어허허허...그 친구 제법 똑똑하고 맹랑하다니까."

염상진은 고개까지 젖혀 헛웃음을 치고는,

"이보게, 자네가 혹시 그거 거든 것 아닌가?"

김범우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전혀 아닙니다. 이번 일에 저는 순수하게 심부름꾼 노릇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친구 정말 제법이로군."

염상진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우리가 따로 내세울 조건은 없고, 그 네 가지 조건에도 동의하네."

그는 일이 끝났다는 표시라도 하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심재모 그 사람, 자기가 학병출신이란 걸 긍지로 삼고 있는, 무슨 일이나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꽤나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더군."

염상진의 대꾸에 김범우는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읍내에 정보의 망원경이 아니라 현미경을 대고 있을 염상진 앞에서 너무 새삼스러운 소리를 지껄인 셈이었다.

"저는 그만 떠나야겠습니다."

김범우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염상진은 담배 연기 속으로 김범우를 쳐다보고는,

"형편이 형편이니 하룻밤 묵어가랄 수도 없고, 날이 저물어가니 길을 서두르긴 해야지. 이거 급한 일이 생겨 바래다주지도 못하게 생겼네

하며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래다주긴요."

김범우는 어떤 아쉬움을 떼치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모두 밖으로 나왔다. 석양이 불길의 싱싱한 색조로 타고 있었다. 제 그림자를 안고 검은 빛으로 변하고 있는 산들이 한층 억세게 보였다.

"... 건강하세요"

김범우는 피식 웃음을 지어내며 염상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석양빛을 등지고선 그에게서 김범우는 전보다 강해진 야성과 산 같은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세, 서로건강하세. 춘부장 어르신께 안부 여쭙고."

염상진이 손을 맞잡았다.

"형님, 수염이 잘 어울립니다."

염상진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김범우가 불쑥 한 말이었다. 김범우는 그를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다시 불러보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다.

"그런가, 짬이 없어서. ...편히 가게."

김범우는 염상진 옆에 선 안창민과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만 쳐다보았을 뿐 말이 없었다. 김범우는 아까 염상진과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 걸었다. 쉽지 않은 일을 성사시켰다는 성취감보다는 염상진에 대한 신뢰감이 더 크게 앞서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듯 쉽사리 매듭지어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만나던 순간의 반가움이 이제 허전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어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불러왔다. 멀지 않아 서울로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한 것은 그 허전함이 더 커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잖아 우리 조선공산당 화폐를 반도 땅 전체가 쓰게 될 거네."

그의 이런 견고함이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근거로 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상황의 불리를 개인적 신념으로 극복하려는 자기 최면적 과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한 김범우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현실적 상황은 염상진에게 유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부의 입장에 서 있는 신문의 보도나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을 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주도의 항쟁도 갈수록 궁지에 몰리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당 수뇌부조직은 이미 섬을 탈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쪽의 실정은 염상진이 누구보다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상황의 불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삼월 팔일을 기하여 정부는 전국적으로 학도호국단을 결성시켰다. 그것은, 군대의 계속적인 강화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상황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학도호국단의 결성은 반공교육을 넘어서 학생들을 군대 조직화시키는 제도였다. 염상진이 그런 상황변화를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혁명은 신념과 용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혁명이 투쟁이라면 신념이나 용기는 상대가치이지 절대가치는 아니다. 투쟁은 상대적 싸움이다. 서로의 힘겨룸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바탕으로 거기에 물리적 힘이 가세되어야 한다. 그리고 싸움에 이겼을 때 비로소 그 두 가지 힘은 혁명을 창출해낸 절대가치가 되는 것이다. 염상진이 속한 조직은 그런 물리적 힘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인가. 모를 일이었다. 김범우는 가슴에 허전한 바람을 안고 주리재를 넘어 큰길에 이를 때까지 석양을 등지고 섰던 염상진과 함께 걸었다.

 

정현동 사장의 집과 술도가 앞에는 벌써 며칠째 네댓 명의 젊은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정현동이 이사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익달에게 일당을 받고 고용된 불량배들이었다. 서운상에게서 돈을 다 챙긴 정현동은 한시가 급한 마음으로 이사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삿짐을 역으로 실어내려다가 그 불량배들의 방해를 받아 발이 묶이게 되었다. 형 최익승의 심부름으로 당당하게 정현동을 찾아갔다가 형편없이 체면만 다치고 돌아온 최익달은 기분이 상한 만큼 거친 내용의 편지를 써서 서울로 보냈다. 편지를 받고 정현동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게 된 최익승은 치솟는 성질대고 하자면 당장 쫓아내려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놈의 아가리를 찢어놓고 싶었지만 서울의 형편이 도저히 여의치가 못했다. 사사건건 물고 뜯는 야당의 치열한 공세를 겪어내며 거의 날마다 새 법을 통과시켜야 했으므로 팔 들어올리기가 바빠 서울을 비울 수가 없었다. 여당의 팔 하나는 야당의 팔 둘을 막아내는 무기였다. 그래서 최익승은 정현동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정 사장이 우리 익달이 동생한테 말하기를, 술도가 소유권 반을 나한테 넘기기로 약조한 일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아아니, 고것이 사실인 게 사실대로 그리 말헌 것인디, 최 의원님은 지끔 무슨 뜽금옶는 소리 허시요오?"

"뭐라고 이놈아! 니놈이 니자 나한테까지 안면몰수 해!"

"지끔 무신 소리 허는지 나는 하나도 모를 일이요."

"이놈아, 니놈이 빨갱이로 갇혀서, 빼주기만 하면 술도가 반을 넘기겠다고 내 앞에서 애걸복걸 약조 안했단 말이야!"

"어허, 이눔저눔 허지 말고 말허씨요. 나가 당신 새끼요. 종놈이오?"

"이놈아, 돼먹지 못하게 딴전피우지 말고, 약조를 했는지 안했는지 말해!"

"글씨요, 나가 빨갱이였으면 빨갱이 돈 묵고 빨갱이 풀어준 국회의원은 빨갱이가 아닐랑가요?"

", 이 쳐 죽일 놈! 시방 누구 분통 질르는 거야."

"있는 그대로 허는 말잉께 분이 나고 안 나고는 내 사정이 이니요."

"이놈, 내 너를 그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맘대로 혀봇씨요. 담에 국회의원 안 해묵을라먼."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버린 최익승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가 놈이 술도가를 팔아치워 어쩔 작정이냐?"

"광주로 뜬다는 소문이구만요."

"막아라."

"야아?"

"어허, 못 뜨게 막으라니까. 청년단 염가를 시키든 어쩌든, 절대로 뜨지 못하게 막어. 내가 내려가서 그놈 모가지를 비틀어뿔 것잉께, 그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로 그 말이여."

정현동은 요모조모 따져본 다음 자신에게 손해가 없다는 계산이 나오자 불량배들의 횡포를 경찰에 알렸다. 불량배들이 잡혀가고, 최익달이 경찰서를 드나들고 하는 사이에 정현동은 이삿짐을 다시 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도 옮기지 못하고 또 불량배들의 방해를 당하게 되었다. 유치장에 갇힌 줄 알았던 그들이 풀려나온 것이었다. 정현동은 숨을 헐떡이며 경찰서로 내달았다.

"개인적인 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 하십시요. 경찰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젊은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릴 근거가 없습니다.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재산을 파괴한 일도 없잖습니까."

경찰서장의 말이었다. 정현동은 심재모를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소관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는 거절되었다. 경철서장이 한 말은 바로 심재모의 결정이었다. 최익달을 통해서 사정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심재모는

"짐승만도 못한 작자들!"

하고 내뱉고는 그런 조처를 취해버렸다. 정현동은 꼼짝없이 발이 묶인 형편을 모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천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는데, 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재산을 버려야 했다. 이삿짐을 포기하고 밤에 벌교를 뜨는 일이었다. 그런 막다른 생각에 몰리면서도 정현동은 남모르는 안타까운 후회를 씹고 있었다. 서운상이 그런 변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잔금을 그렇게 몰아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그랬으면 계약 위반으로 돈은 그대로 차지하고 딴 사람에게 새로 팔아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지난번에 변호사 입에 털어 넣은 돈을 고스란히 복구할 수 있었다. 정현동의 생각은 그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운 후회에서 끝나지 않았다. 서운상이 전신마비라는 사실에서 새로운 생각을 끌어냈다. 그 절망적인 상태를 이용해서 술도가를 헐값으로 되사들이는 일을 그의 부인을 만나 은밀하게 진행시켜보는 계획이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서운상이 다시 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에서 그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을 어떻게 회유하느냐에 성패가 달린 문제였다. 정현동은 이사 갈 집을 물색하러 광주에 갔던 길에 새로 맞춰 입은 마카오양복을 꺼내 외출차비를 했다.

"어디 가시게라?"

낙안댁이 양복 입는 것을 거들려고 하며 맥없는 소리를 흘렸다. 목소리가 기운 없이 풀린 데다 얼굴에도 짙은 근심기가 배어 있었다. 연달아 일어나는 사건에 시달리며 그녀의 얼굴에 서려들기 시작한 근심기는 이사를 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자 완연하게 자리를 잡고 말았다.

"가볼 디가 있어서."

"집을 이래놓고 어디럴 가실라고..."

"다 알아서 헐 것잉께 애태워쌓지 말소. 일이야 다 시나브로 풀리게 돼 있응께."

정현동은 되풀이되어온 아내의 투정을 미리 막으려고 일부러 불퉁스럽게 말을 했다.

 

윤 부자의 아내 송씨는 일부러 몸놀림을 느릿느릿하게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 서너 올을 옆 볼로 내려 보다가 다시 귀 뒤로 올려보다가 했고, 족집게로 잔 눈썹을 톡톡 뽑으며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제 모습을 즐겼고, 분을 이마며 콧잔등에 토닥거리며 아직도 늙었다고 하기에는 아까운 포동하게 살 오른 볼의 탄력을 손가락 끝으로 음미하고 있었다.

"참말이제, 요 인물에 요 몸으로 혼자 살기넌 심들고 억울타. 여자 몸이라는 것은 남자허고는 달버서 꽃이 끊기고도 예전허고 똑겉이 남자 생각도 나고 맛도 변허지럴 않는다는디, 나야 안직 꽃도 안 끊긴 몸 아니라고. 아이고메, 남정네 웂이 잠자리럴 헌 것이 폴세 을매여. 혼자 눈 잠자리넌 워째 그리 썰렁허고, 밤언 워째 그리 질어. 전에 한바탕 일치루고 나먼 한숨 잠으로 깨든 밤이 혼자 보내기는 워찌 그리징허게 진고. 남정네 연장이라는 것이 여자헌테는 하늘인 것이 영축웂어. 몸도 노골노골허니 풀리게 허고, 마음도 사글사글허니 풀리게 허는 그 오진 재미럴 이 시상에서 머시가 또 당허겄어. 워메, 꽃이 비치기 전에 사나흘, 꽃이 시들고 사나흘, 맘은 따로 몸은 따로 노는 것이, 그 젼디기 에로운 거. 무신 명약으로 아랫배 뻑적지그리허게 땡기고, 거그 옴죽기림스로 근지럽고 간지럽고 스물기리는 것얼 낫게 헐 것이여. 남정네 퉁겁고 실헌 연장이 거그럴 채우지 않고서야 나을 병이 아니제. 그 병이 도지먼 머리할라 어질어질허고 정신이 까물까물혀지는 것이, 그때야 누구 연장이라고 개리고 골르고 헐 것이여. 근디, 시상언 너무 불공평허게 맹글어져 있당께로. 남자만살기 편허게 맹글어져 있제 여자야 옴치고 뛸 수가 있어야제. 남자야 돈만 지니먼 발에 채이는 것이 지집들인디, 여자야 돈이 있으먼 머허고 재산이 있으먼 머헐 것이여. 설사 돈으로어찌 된다 혀도 소문이 나부렀다 허먼 낯 들고 살 수 웂게 되야묵은 시상이 아니냔 말여. 빌어묵을, 요 인물이 아깝고, 요 몸이 불쌍타."

송씨는 열기 묻은 한숨을 폭 토해내며 경대 앞에서 물러나 앉았다.

그것도 실허게는 생겼는디.’

그녀의 머리를 얼핏 스치고 간 생각이었다.

밖에 기다리게 한 마름 오동평이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치마를 털고 일어서며 쓰며 웃었다. 어찌어찌 기회가 되어 그놈이 겁 없이 덮치고 들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먼저 기색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재산 한쪽을 관리하는 아랫 것인데, 잘못 얽혀 들었다가는 그것도 남자꼭지라고 주인 행세 하려고 들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오동평이를 어찌 자연스럽게 끌어들여 자신을 범하게끔 일을 꾸며볼까 하는 궁리를 안해 본 것도 아니었다. 불공을 드리러 간다고 해서 그에게 짐을 지워 선암사 길을 둘이서 나서고...산길 몇십 리를 가다 보면 발목을 삔 척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그가 덮쳐오면 당하는 척 재미를 보고...일을 끝내고는 마름자리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놈 죄인 만들어 기도 꺾고, 소문도 막고... 그러나 마음뿐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지체 높은 과수댁이 머슴하고 배를 맞췄다는 연고를 그녀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송씨는 방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잔기침을 하며 감정을 간추렸다. 그리고 방문을 옆으로 밀었다.

"불르셨는 게라. 마나님."

댓돌 아래 움츠리고 서 있던 오동평이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어여 안으로 들소."

오동평을 눈 아래로 깔아보고 있는 송씨의 얼굴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싶게 냉담하고도 엄했다.

"야아..."

오동평은 고개도 제대로 못 든 채 서둘러 고무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앉게."

송씨는 폭넓은 치마를 손끝으로 살짝 들고 앉으며 턱짓을 했다.

"야아..."

주눅 든 모습을 풀지 못한 오동평이는 윗목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리 기럴 못 피먼 연장도 저리 맥아지가 웂을라?...’

송씨는 오동평을 흘깃 보며 속웃음을 웃고 있었다.

"작인덜 요시 으쩐가?"

송씨의 입에서 나간 무게 실린 말이었다.

"별 탈 웂이 보리농새 짓고, 쌀농새 질 바닥 골르고 허는디요."

오동평은 이렇게 대답하며 상전의 눈치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혹시 자기가 모르고 있는 무슨 일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였다.

"틈새 생기지 않게 닦달 잘 허소. 영감님 시상 뜨셨다고 딴 맘 묵고 들라고 헐지 몰른께. 나가 여자라고 시퍼볼라고혔다가는 꼬치가리 물보담 더 매운 맛덜 볼것잉께. 나가 평상얼 영감님 옆에서 작인덜 행투고 곤조고 다 몸에 익힌 사람잉께. 알겄능가!"
"하먼이라, 하먼이라."

오동평은 말에 맞춰 허리를 굽신거렸다. 송씨의 말이 작인들한테 하는 것이기에 앞서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오동평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윤 부자가 죽었다고 해서 추호도 마음을 달리 먹어본 적이 없었고, 송씨가 여자라고 해서 티끌만치도 넘보고 들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세나 부가 오로지 윤씨네의 덕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그로서는 예전보다 더 잘했으면 잘했지 주제넘은 생각을 할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근디 말이시..."

"야아..."

오동평은 무릎자리를 고치며 허리를 굽신했다.

"소문 안 나게 단도리혀감스로 작인덜 중에서 돈푼이나 변통헐 수 있는 제겐덜이 누군가 알아내소."

"야아..."

오동평은 대답을 하면서도 그게 무슨 말인지를 얼른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런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허고, 돈언 웂이더라도 맘이 순허고 야들야들헌 작인도 찾아내소."

"야아..."

오동평의 머리는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마름이라는 자리가 눈치 빠름으로 해먹는 것인데, 상전의 심중을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처럼 몸 다는 때도 없었다.

"나가 워째 요런 말 허는지 아는가?"

마침내 송씨가 물었다. 오동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진땀이 솟기는 걸 느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당하는 고약스런 대목이었던 것이다. 이런 때 엉뚱한 소리 잘못 지껄였다가는 점수가 깎이기 십상이고, 어떻게 어물어물 넘기는 게 상수였다.

"야아... 마나님헌테 무신 짚은 뜻이 있겄제라. 지야 시키시는 대로 고런 작인눔덜얼 후딱 찾어내겄구만이라."

"그려, 자네가 헐 일얼 영축웂이만 해내먼 되는디, 그려도 마름으로 자리 지킬라먼 시상 돌아가는 것에도 눈 지대로 뜨고 있어얄 것이네, 요시 시상 시끌시끌허게 맹그는 것이 반민특위라는 것이야 알겄제?"

"야아, 알구만이라."

오동평의 머리에는 그때서야 '농지개혁'이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송씨가 했던 말이 한고기로 꿰어졌다.

"그 법이 시행되는 판잉께 인자 농지개혁법인가 머신가도 맹글어질 판이라는디, 법이야 맹그라져라 하고 태평치고 앉었다가 베락 맞을 수야 웂은 일 아니겄능가!"

송씨의 목소리며 표정이 결연했다.

"하먼이라, 미리미리 다 방책얼 세와야제라. 무신 돈얼 끌어대든지 끌어댈 수 있는 작인얼 골라내 싸게싸게 폴아 넴기고, 보들보들헌 작인 골라내..."

"나 맘 알았으면 되얐네."

송씨는 매정하다 싶게 말을 무질렀고, 자신의 의심받은 능력을 회복시킬 기회를 포착하고 한창 신바람을 올리던 오동평은 그만 무참해져버렸다.

"자네 수고에 나가 섭섭잖게 혀줄 것잉께 쥐도 새로 몰르게 그런 작인덜얼 찍어내소."

"야아, 후딱후딱 허겄구만요."

오동평은 머리를 조아렸다.

"되얐네. 가 보소."

송씨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동평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읍사무소의윤 주사가 찾아왔다. 송씨는 오동평이 때와는 다르게 지체 없이 윤 주사를 맞이했다. 그 태도에도 거드름이나 거만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여 오시씨요, 윤 주사님."

송씨는 웃음을 담뿍 담아 윤 주사에게 보내고 있었다.

"방으로 잠 들어갔으먼 쓰겄는디라."

머리가 벗겨진 사내는 대문 쪽으로 경계하는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하먼이라, 얼렁 들오씨요."

송씨는 치마폭을 여며 잡으며 얼른 방문을 열었다.

"넘덜 귀 무서바 전화 안 걸고 그냥 왔구만이라."

윤 주사가 방으로 머리부터 디밀며 말했다.

"하먼, 그래야제라. 소문나서 졸 일이 따로 있응께요."

송씨가 따라 들어가며 말 반죽을 하고 있었다.

"아니, 요 정신 잠 바라."

방문을 닫으려던 송씨는 문득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목을 문 밖으로 빼고는

"장흥대액, 장흥대액!"

목청을 늘였다.

"야아워째 그러시요오."

멀찍이서 들려오는 화답이었다.

"여그 꼬깜허고 식혜 잠 가져오소오."

"알겄구만이라아."

송씨는 웃음 머금은 얼굴로 자리 잡고 앉았다.

"전번 참에 부탁허신 것 끝막음 혔구만이라."

윤 주사가 허름한 양복 안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놓았다.

"아이고메, 애쓰셨소. 한두 분도 아니고 요리 수고럴 끼쳐서 워쩔께라이."

송씨는 방바닥에 놓은 서류를 얼른 집어 들었다.

"넘덜 눈치야 쪼깐 뵈는 일이제만 수고넌 무신 수고여라."

윤 주사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벗겨진 머리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어 넘겼다.

"으쩌요, 그눔에 법언 은제나 맹글어진 성불르요?"

송씨는 서류를 건성으로 뒤적이며 물었다. 그때 방문이 밀리며 부엌아주머니가 곶감 한 접시와 식혜 두 그릇을 갖고 들어왔다. 말을 시작하려던 윤 주사는 시침을 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자 되얐소."

부엌아주머니가 나가자 송씨가 말을 재촉했다.

"긍께, 시방 국회에서 지주인 국회의원들 허고 지주가 아닌 국회의원들 허고 밀고 땡기고 한참 씨름판이 벌이지고 있는 갑는디, 농지개혁법얼 맹근다는 원칙이야 딱 박은 말뚝이고, 맹글기는 맹그는디 논값얼 을매로 매길 것이냐 허는 문제로 싱갱이럴 벌이고 있다는구만요. 긍께,국회 판이야 워찌 돌아가든지 맘쓸 것 웂이 명의이전이나 싸게싸게 해놓은 것이 두 다리 뻗고 자는 상수랑께요."

"그렇겄구만이라. 덜컥 법 맹글어져 눈 뻔히 뜨고 논 뺏기기 시작허먼그 씨린 속이 워쩌겄소. 시상이 요상허니 변해갖고 별 빌어묵을 법얼 다 맹근다고 시끌시끌해쌓소."

권하기를 더 기다리지 못하고 윤 주사는 식혜그릇을 집어 들었다.

", 어여 드시씨요. 나가 그눔에 법에 넋 빼니라고 권허지도 못허고..."

송씨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서류를 경대 설함에 넣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준비해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다 윤 주사님 덕분에 우리 집이 손해 면허게 되얐소. 앞으로도 사람구헐 때마동 얼렁얼렁 부탁허요이."

송씨는 윤 주사 앞으로 봉투를 밀어놓았다.

"아니, 머 껀껀이 이리 주시고 이러시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윤주사의 손끝은 봉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작인이란 것덜, 참말로 가당찮소. 무신 도적눔 심뽀로 넘 재산얼 꽁짜로 묵겄다고 종그는지 몰르겄소."

"고것이 다 빨갱이덜 물 묵어서 그런 것아니요? 인자 꽁짜로 묵기는 다 틀렸고, 유상몰수에 유상분배라고 혀도 농지개혁 당허먼 지주만 손핸게 아짐씨맹키로 눈치 싸게 명의변경 해두는 것이 질이요. 나 그만 가봐야 쓰겄소."

언제 봉투를 감추었는지 윤 주사는 빈손으로 일어섰다.

"고맙구만이라. 나가 또 연락 취허겄소. 자알 부탁디리요잉."

"하먼이요. 나가 헐 일언 나가 착착 알아서 헐 것잉께 아짐씨넌 아짐씨가 헐 일이나 싸게싸게 허시씨요."

윤 주사는 큼큼 헛기침을 흘리며 신을 꿰신었다.

 

경찰서장 권병제는 두 번째로 찾아온 장 순경과 마주앉아 있었다.

"빨갱이한테 총맞고 순사질 못해묵게 된 것만도 복통해 죽게 억울한 일인디, 그 대신에 그 자리 하나 내도란 것이 과해서 서장님은 그리 뜨광허니 협조를 안허는 거요? 서장님이 내 입장이 안 되란 보장이 어디 있소? 서장님이 요런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시오. 어찌, 내 말이 틀렸소?"

장 순경은 처음부터 아예 시비조였다.

"장 순경 심정 잘 알고 있어요. 그래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요. 그 자리가 서로 타협을 해서 물려주고, 물려받고 하는 자리지 무조건 관의 힘으로 좌우하는 자리가 아닌 건 장 순경도 잘 알잖소."

권 서장은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달래듯 말했다. 장 순경은 작년 시월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염상진네에게 복부총상을 세 군데나 입고도 전 원장의 손으로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는 사개월여의 긴 요양을 거쳐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과 같은 건강을 되찾은 건 아니었다. 심장질환과 함께 주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는 다시 경찰근무를 원했지만 신체검사 결과는 부적격 판정이었다. 그는 그 판정을 억울해하며 도 경찰국에 항의를 겸한 청원서를 냈으나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고의적인 이직을 철저히 막고, 계속 인원 확대를 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무 부적격판정이 내렸다는 것은 그의 건강이 얼마나 나쁜 상태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경찰근무를 단념한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서를 찾아와 청년단장 자리를 맡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경찰근무가 어려운 몸으로 청년단장 자리라... 하긴, 유주상이가 하는 판이니. 그거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서장님이 맡아서 잘 처리해보시죠."

심재모가 이렇게 밀치는 바람에 권 서장은 그 일을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권 서장은 말로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무성의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일을 풀어나가야 할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유주상이가 그 자리를 쉽게 내놓을 것 같지 않은 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장 순경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데 또한 문제가 있었다.

"기다리라고 하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겠소."

"날짜를 확정할 순 없지만, 내가 장 순경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요."

"나 서장님 말만 믿겠소."

장 순경은 손으로 복부를 누르고 일어서며,

"만약 그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 배 갈라 경찰서 바닥에 창자 뿌리고 죽고 말 것이요."

험악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권 서장은 그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 저거 제정신이 아니구만."

"악밖에 안 남았을 테니께."

"저 사람 능히 배가를 사람이시. 원체로 독헌 디가 있응께. 몸이 실허기도 했지만 총을 세 방이나 맞고도 살아난 것은 그 독기 때문일 것이네."

순경들이 주고받는 말이었다. 권 서장은 헛기침을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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