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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1

Bollnow 2024. 3. 12. 06:24

2부 민중의 불꽃

 

1. 피할 수 없는 맞섬

겨울밤이 자정을 넘고 있었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짐에 따라 바람과 추위가 한층 기승을 부렸다. 진하고 두꺼운 어둠 속에서 바람 소리는 매몰찼다. 어둠이 짙은 만큼 별들은 초롱초롱 깨어나고 있었다. 어둠에 박힌 겨울 별들의 반짝임은 유난히 또렷하고 맑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 작은 반짝임들은 시리고, 멀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 반짝거림은 맑은 종소리의 울림 같기도 했고, 제각기 종알거리고 있는 작은 입술 같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 수많은 반짝거림은 밤을 지키는 하늘의 파수등 같기도 했고, 얽히고설킨 세상사 어지러움을 염려하여 인간들을 일깨우고자 하는 하늘의 경고등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읍내는 어둠 속에 가뭇없이 묻힌 채 그 별들의 반짝임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읍내의 흔적을 찾을길 없는 어둠 속에 딱 한 군데 불이 밝혀져 있었다. 경찰서였다. 경찰서 안은 밝으나 별다름 없이 추위가 엉켜 있었다. 넓은 사무실은 어둠침침하기까지 했다. 흰 칠을 한 양철 갓을 쓴 알전구 하나가 사무실의 어둠을 밀어내기는 힘겨운 일이었다. 석탄을 때는 무쇠 난로에는 온기가 없었다. 연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난로 옆 바께스에는 석탄이 반나마 차 있었다. "들어앉아 있는 우린 밖에는 견디는 부하들보다 몇 배 뜨듯할 것이오." 심재모의 이 한마디로 난로에 불이 꺼진 것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난로 옆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은 계엄사령관 심재모, 경찰서장 권병제, 토벌대장 임만수, 청년단장 염상구였다. 전투복에 모자까지 쓴 그들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심재모만 권총을 차지 않고 M1 소총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 세워놓고 있었다. 그들은 추위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미동도 없었다.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람이 어둠을 쥐어뜯는 앙칼진 소리가 멀어지는가 하면 다시 가까이 다가서고는 했다.

어디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세 산봉우리에서 거의 동시에 봉화의 불길이 타올랐을 때 심재모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공격신호라고 판단했었다. 다른 세 사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심재모는 지체 없이 비상전화를 돌려 '완전무장, 비상대기'를 각 예하부대에 지시했다. 제이, 제삼의 추리가 나온 것은 그 조치를 취한 다음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였다. 공격을 감행하자면 그들의 입장에서 기습공격만큼 유리한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왜 봉화를 일시에 올린 것일까. 그들이 포위공격을 동시에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무전기 세 대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손목시계 세 개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봉화를 일시에 올린 것일까. 봉화는 예로부터 어떤 긴급사태를 먼 거리에 신속하게 전하거나, 미리 약속된 신호로써 피워 올리는 불이었다. 그러나 세 산봉우리는 봉화를 피워 올려야 할 만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봉화를 일시에 올린 것일까. 세 산봉우리의 봉화는 그들 상호간의 무슨 신호가 아니라 제각각 다른 먼 지역으로 연결해야 할 목적으로 피워 올려진 것이 아니었을까. 징광산의 봉화는 화순 백아산을 거쳐 광주 무등산으로, 옥산의 봉화는 고동산과 몇 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조계산으로, 제석산의 봉화는 승주군의 여러 산들을 거쳐 백운산으로, 그리하여 그것들은 지리산으로 모아지는 것이 아닐까. 심재모는 세 개의 기세등등한 불길들을 차례로 응시해가며 그런 생각의 갈피를 잡아갔고,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불길들이 잦아들게 되자 한층 긴장감이 팽팽하게 뻗쳐오르는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긴장된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완되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이쪽을 위험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으로 불을 피워 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심재모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생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전혀 움직임 없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생기는 것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중대한 사실만은 목전에 닥쳐와 있었다. 그들의 종적을 알 수 없어 그 동안 탐색전만 펴왔었는데 그들 스스로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점이었다. 그들은 세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대담하게 노출시킨 것이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의 세력이 봉화에 따라 삼분되어 있다고 상대방이 단순 판단하리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봉화는 그 위치로 보아 꽤나 전시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세 산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며 반원으로 읍내를 에워싸고 있는 지형 조건에서 세 봉우리에 봉화가 타오르게 되자 읍내를 완전히 포위당한 꼴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반동들아! 네놈들을 깡그리 바닷물 속에 처넣고 말 테다." 심재모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불길의 기세와 함께 들려오는 것 같은 그들의 외침이었다.

그들이 읍내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그들의 당 조직이 지하활동의 음성적 미온적인 것에서 전투화를 위한 양성적 적극적인 것으로 체질개선을 했고, 그에 따라 전반적인 전열과 장비가 끝났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동안 심상치 않게 길었던 침묵과 느닷없이 타오르기 시작한 봉화가 그 점을 헤아리게 했다. 둘째, 일단 행동하기 시작한 그들은 새로운 전략으로 투쟁을 본격화시키게 될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지하조직을 거의 노출시킨 데다가 군경에게 패주 당함으로써 기본적 세력 기반인 민간인들과 차단된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셋째, 그들의 본격적인 투쟁 개시에 따라 민심에 어떤 영향이 미칠 것이며, 민심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가 문제였다. 민심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건 바람 같은가 하면 안개 같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물 같기도 했다. 바람처럼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으면서 어느 순간마다 언뜻언뜻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결정적인 경우에는 폭풍으로 몰아쳐오는 것이었다. 양조장 정 사장사건을 처리하면서, 평소에는 있듯 만듯 하던 그들 민간인들의 힘이 네 소작인을 구해내는 연판장으로 일시에 뭉쳐졌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작은 힘들이 모아져 폭풍으로 돌변하는 모습이었고, 전에는 전혀 경험해본 바 없는 힘의 섬뜩함이었다. 어느 길목에서 갑자기 맞닥뜨릴 때 황급히 옆걸음질 치며 피하는 그들은 흐릿흐릿 흩어지는 안개 발에 지나지 않았고, 장날이면 호의를 가지고 말을 걸어도 잔뜩 주눅이 들어 말더듬이가 되는 그들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에는 한 발 앞도 분간 못하게 하는 진한 안개로 뭉쳐지고, 어떤 계기에는 강둑을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성난 물줄기로 한 덩어리가 될 수도 있었다.

띠이잉...

벽시계가 한시를 울렸다. 낡은 모습만큼이나 벽시계의 울림은 둔탁했고, 사무실의 침묵이 깊은 탓인지 그 여음이 길었다. 염상구의 눈길이 빠르게 시계로 날아갔다. 임만수의 눈길도 일직선으로 시계에 가 꽂혔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들은 미간을 찌푸렸고, 거기에는 짜증이 엉켜들었다. 그들의 눈길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심재모에게로 옮겨갔다. 심재모는 머리를 숙인 채 오른팔로 턱을 받친 앉음새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모자챙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마땅찮아하는 기색이 역연해지며 일그러졌다. 그들의 눈길이 경찰서장 쪽으로 움직였다. 심재모에 비해 벌이라도 서는 아동처럼 꼿꼿하게 앉은 권병제는 똑바로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염상구는 혹시 뭐가 나타났나 싶어 그의 눈길이 박혀 있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어둠을 잔뜩 물고 있는 창문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만수가 입을 있는 껏 벌려 하품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며 염상구는 그만 웃음이 픽 새려고 했다. 임만수가 입을 있는 대로 쫙 벌리자 그 푹 꺼진 콧잔등에 잡히는 주름살하고, 그건 천상 갈 데 없는 원숭이 상판 그대로였는 데다가, 일단 하품을 시작했으면 소리가 나오든 말든 시원하게 끝내고 말 일이지 그게 무슨 죄 될 일이라고 심재모의 눈치 살펴 하품을 토막 치고 마는 그 겁 질린 꼴이 비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요런 때 똥 구녕이 포르르 떨릴 만치 씬 방구나 한 방 터져 뿌렀으먼 속이 씨언하겄는디, 닌장맞을, 그 흔헌 방구도 뀔라고 헌께 안 나오네웨. 저 미련하고 한심헌 심재모놈한테 방구나 한 방 믹였으먼똑 속이 씨언허겄는디. 염상구는 아랫배에다가 몇 번 힘을 주어보았다. 그러나 방귀는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손발이 얼어왔고, 이제 등줄기까지 냉기가 타고 내려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불을 피우지도 않은 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따끈한 물이라도 한 잔 마셨으면 그나마 추위가 가실 것 같았다. "부하들은 우리보다 더 추운 밖에서도 견디고 있소" 물을 끊이기 위해 불을 지피자고 하면 심재모는 틀림없이 그렇게 내쏠 것이었다. 난로를 피울 수도 없고, 뜨거운 물 한잔 마실 수 없는 처지라면 서로 무슨 이야기라도 주고받아야 추위도 덜 느껴지고 지루함도 면하게 될 게 아닌가 말이다. 심재모고 경찰서장이고, 두 놈 다 입을 딱 봉하고 도 닦는 중놈 시늉을 하고 앉아 있으니 눈치 없이 떠들어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치고 환장할 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 싶었다.

"와따매, 우리 부하새끼덜 붕알이 각단지게 얼음과자 되야불겄다. 까마구 날자 배 떨어지느라고, 씨불럴 눔덜이 지랄발광허는디 날씨할라 염병헌다고 요리 칩고 지랄이여, 지랄이."

염상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껏 쏟아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심재모의 눈치를 살폈다. 난로를 피우지는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이 염상구의 의도였다.

"금메 말이여, 날씨할라 염병허게 춥네잉."

기다렸다는 듯 임만수가 사투리를 흉내 내며 맞장구를 쳤다. 심재모의 고개가 들렸다. 얼굴이 보이는가 싶었는데 이내 고개가 숙여졌고, 전과 다름없이 모자챙이 얼굴을 가려버렸다. 잠시 드러났다 감추어진 그의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 태도로 보아 이쪽의 짓을 마땅치 않게 여긴다는 것쯤 염상구는 능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오기가 뻗질러 오르는 판에 입까지 그대로 함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임 대장님, 참말로 장하고 똑똑허시요이. 우리 전라도말얼 그리 징허게 싫어해쌓등마 원제 그리도 찰방지게 익혔습디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등마, 참말로 임 대장님이 그 짱 나부렀소이. 전도밥 묵은 택 단단히 혔응께로 나가 반갑고 고마워서 술 한 잔 걸쩍허니 사야 쓰겄소."

염상구는 일부러 목소리에 신바람을 올려가며 떠들어댔다.

"하먼, 좋고 말고. 개야 삼 년이 걸리지만 난 사람이니까 삼 개월로 풍월을 읊게 된 게 아니겠소. 그러니 마땅히 술대접을 받아야지. 나 사양하지 않을 테니 빈말 안 되게 해야 하오."

임만수도 심재모 쪽을 힐끔거리며 기분을 과장하고 있었다.

"어허 참말로, 나가 누군디 한 분 입밖에 낸 말얼 썩은 호박 맹글겄소. 나 임 대장님이 팍 맘에 들어뿌렀소. 진작에 전라도말얼 그리 찰방지게 했드라면 더 맘에 들었을 것 아니겄소. 좌우당간에 나 기분쪼오소."

"조용히들 하시오. 지금 계엄하의 비상근무중이란 걸 잊지 마시오."

나지막하면서도 무게가 실린 말이 염상구와 임만수 사이를 가로막고 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심재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재모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경찰서장이 두 사람을 향해 빠른 손짓을 했다. 그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키고 나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앞으로 두 시간만 더 참으라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들의 손목시계로 눈을 돌렸다. 한시 반이 겨우 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이면 세시 반까지... 염상구는 어금니를 맞물어 뿌드득 갈아붙였다. 임만수는 권총 손잡이를 매만지며, 이놈의 짓거리를 언제까지 하며살아야 하나, 하는 맥빠진 생각과 함께 잠시 잊고 있었던 추위가 새삼스럽게 의식되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염상진... 그는 어떤 사람일까. 심재모는 동생 염상구를 떠올려보았다. 금방 고개가 저어졌다. 그들은 형제간이지만, 염상진과 염상구는 사뭇 다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도, 품격도, 생각도, 행동도 별로 닮은 데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한 생각은 막연한 예감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 피가 천한 것치고는 인물이야 잘났지."

"천한 피 타고난 놈이 과한 인물 지녔으니 결국 빨갱이로 빠진 것 아뇨."

지주들이 술자리에서 내던진 말이었다.

"김범우 선상허고 어슷비슷허제라, 그 인물이나 맘씨가 말이오."

"금메...공산당 허는 것만 빼먼이야 읍내서 둘지 가라먼 서런 인물이겄지요이."

경찰이나 청년단원들의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동상? 택도 웂소. 괴기로 치자먼 성은 쇠고기고 동상은 개고기제라."

술집 주모의 말이었다. 그들 형제가 닮은 점을 굳이 찾아내자면 두 사람 다 어느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점도 표면적으로 비교했을 때 동일한 것일 뿐 내용적인 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염상구가 믿고 내세우는 것은 완력뿐이었다. 그러나 염상진이 믿는 것은 인민일 것이고, 내세우는 것은 혁명이었다. 염상구가 며칠 전에 물의를 빚은 사건이 그 차이점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하필이면 입산자의 아내를 범해 자살소동까지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 일로 읍내가 떠들썩한데도 당사자인 그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고 태평했다. 현재 같은 상황에서 그런 행위가 민심을 동요시키고, 그것은 관에 대한 불신감으로 직결된다는 판단을 그에게서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심정적으로도 어찌 형의 부하의 아내를 제멋대로 범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빨갱이 마누라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그는 이런 생각으로 거리낌 없이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행위를 추궁할까 말까를 몇 번이나 생각하다 결국 덮었던 것도 그가 그런 식의 말을 내뱉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할까봐서였다. 그가 자신의 면전에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게 되었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하게 될 것인지 심재모는 스스로의 감정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로 결정이 내려져 있었고, 다만 현실적 여건 때문에 마지못한 묵인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권력남용적 강간 및 소문유포에 의한 간접살인음모죄-법적 조치를 전제로 정해놓은 염상구의 죄목이었다. 민심의 흔들림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법의 공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도, 한 여인의 짓밟힌 인권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도 그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했다.

"사령관님 뜻은 옳습니다만, 그러나 두루두루 생각을 넓게 해얄 겁니다. 현실적으로 염상구와 그 여자를 일 대 일의 비중으로 따질 수 없다는 게 문젭니다. 거기다가 염상구를 법적으로 조처하는 경우 아군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공산당을 도왔다는 모략을 당할 위험이 큽니다. 염상구가 범죄자로 법적 조치를 당해도 조용할 수 있는 죄목은, 용공뿐입니다. 정 사장을 놓고 말 한마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염상구가 아닌 그 어떤 평범한 남자가 강간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세상 사람들이 그걸 별로 대단한 범죄로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여자 입장에서는 대체로 사건화 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일반적 현상인 걸 제 경험을 통해 알았습니다."

경찰서장이 신중하게 한 말이었다. 상황적으로 보아 염상구가 평범한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심재모는 눌러 참았다. 그 말은 서장의 조언을 묵살하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서장의 말을 되새길 때 그건 입 밖에 낼 필요가 없는 말이기도 했다.

염상진이 '처단'했다는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심재모는 전신의 신경이 팽팽해지는 긴장을 느꼈던 것이다. 반란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민간조직과의 협동 하에 일으킨다는 것이 공산주의 혁명이론이었다. 염상진은 인민의 이름을 앞세운 그 처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주도면밀하게 실천해나갔음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염상진은 그 처단을 통해서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시키려 하고 있었다. 먼저 당의 입장에서 상대편의 정치지배 세력이나 그에 따른 조직의 척결이었고, 다음은 민간인들의 원한과 증오의 대상이 되어온 자들을 없앰으로써 그들의 지지와 호응을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선 그가 자기 동생이 저지른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혁명이론의 실천에 그렇게 주도면밀한 그는 핏줄이라는 인연을 끊고 동생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냉철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심재모는 자신의 생각을 여기서 중단시켰다. 그 상상이 너무 잔인하고도 비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로 여겨져왔던 염상진과 마침내 정면대결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만이 직시해야 할 현실이었다.

띠잉, 띠이잉...

벽시계가 두시를 알리고 있었다. 네시 무렵부터는 먼동이 트기 시작할 것이다. 심재모는 고개를 치켜들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 동작에 따라 다른 세 사람도 앉음새를 바로잡았다.

"현재 두시, 앞으로 적이 공격해올 확률은 극히 적을 것이오. 왜냐하면 네 시경부터는 날이 새기 시작할 것이므로 적들은 지금 당장 공격개시를 한다 해도 안전하게 퇴각할 시간이 부족한 형편이오."

심재모가 건조한 어조로 상황분석을 내렸다.

"그라먼 인자 비상대기를 거둘께라?"

염상구가 반가운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물었다.

"방심은 금물이오. 네 시까지 상황 계속이오."

심재모가 매정스럽다 싶게 무질러버렸다.

"그렇겠지요. 기습했다가 빠질 시간은 아직 남았으니까요."

임만수가 염상구의 무색해진체면을 다소나마 살려주려는 듯 눈치 보아가며 어눌하게 말했다.

"자아,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합시다. 첫째 중요한 건 상대방의 병력이 어느 정도냐 하는 문젭니다. 이 자리에 그걸 정확히 알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대략 짐작들은 할 수 있을 것이오. 서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심재모는 경찰서장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글쎄요...염상진이 군당위원장이고, 그가 부대를 총지휘한다면, 보성군 병력을 다 모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게...... 백은 넘을 것이고, 이백 이쪽저쪽이 아닐까 싶은데요."

권 서장은 꽁꽁 힘을 써가며 더디고 어렵게 말을 끝냈다. 아무리 짐작이고 예측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는 성질의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은 임 대장 말씀하시오"

심재모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임만수를 지목했다.

"제 생각도 권 서장님 생각하고 엇비슷합니다. 봉화를 올려대는 기세로 보아 군 병력이 다 뭉쳐진 것 같고, 그 수도 수월찮을 것 같습니다."

임만수는 권 사장에게 업힘으로써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입장을 확보하게 되어 여유 있게 말을 해치웠다.

"다음은 염 단장."

"금메 말이오, 똑 봉사 문고리 잡디끼 허는 일이 바로 요것인디, 두 양반이 용헌 점쟁이 점 치데끼 해불로 난께 나가 헐 말이 웂어져부렀구만요. 나 생각에도 얼추 그럴 상싶은디라."

염상구는 면박을 당해 기분이 상해 있는데다가 책임질 소리를 하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병력배치 문제오. 이번에는 반대로, 염 단장,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 머저 말해보시오"

염상구를 먼저 지목한 것은 그가 이 지역의 지리를 제일 잘 알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기럴, 높은 순서대로 헐 일이제 무신 초친 맛이라고 꺼꿀로 이려."

염상구는 혼잣말로 꿍얼거리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나야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신세에 말을 허라고 시킨께로 헐 수 할 수 웂이 한마디 허겄는디, 그 호랭이맹키로 음흉헌 꾀 잘 씀시로 싸납기도 헌 염상진에다가, 백여시맹키로 영리헌 안창민이가 있고, 멧돼지맹키로 기운 씨고 날랜 하대치가 있고, 싸카쓰단 호말맹키로 쭉빠져 뜀박질에 이골난 강동식이가 있는 것이 그 잡것들 부댄디, 고것덜이 요리조리 머리 써서 몰살 당허지 않을 만허게, 그럼시롱도 연락이 후딱후딱 취해지게 부대를 배치혔을 것이오. 그렁께, 봉화가 세 산에서 올랐다고 해서 고것덜이세 산꼭대기에 골고로 퍼져 있다고 생각혀서는 큰 코 다칠 것이오. 봉화야 서너 눔만 있어도 올릴 수 있는 일인께로. 나야 점쟁이가 아닌께 어느 어느 산골짝에 몇 눔썩 백혔는지 세세헌 것이야 알 방도가 웂은 일이고, 딱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헐 수 있는 것이 있는디, 고것이 무엇인고 허니, 주력부대는 징광산에 진을 쳤을 것이다 그것이요. 워째 징광산에 진을 치느냐 허먼, 징광산 바로 아래 짬에 사방이 산으로 뺑뺑 둘러쳐진 율어면이 있다 그것이요. 징광산으로 말헐 것 겉으면 벌교, 조성, 보성을 다 끼고 있는디다가, 봉화를 피웠다 허먼 고흥은 말헐 것 웂이고 화순꺼지 직방으로 연락이 닿을 것이요. 그런디다가 발샅에 율어면꺼지 끼고 있으니 명당치고도 고런 명당은 웂을 것이요, 징광산이야 생각도 안허고 있었는디 뜽금웂이 거그서 봉화불이 솟기는 것을 딱 보게 된께로, 아이고메 명당자리 뺏기고 말았구나,허는 생각이 번쩍 듬시로 가심이 철렁 내려앉고 맙디다. 고 잡녀러새끼덜, 보나마나 율어면을 폴세 차지혔을 것잉께로 요분 겨울은 배때지 뜨뜻허게 나게생겼소. 나 말 다혔구만이라."

염상구는 난로 위에 놓은 주전자를 들더니 꼭지를 그대로 입에다 틀어박아 물을 벌컥거리며 마셔댔다. 그 자들이 벌써 율어면을 장악했을 거라고? 이 말이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심재모는 이빨을 꾹 맞물고 입술에 힘을 가해 참아냈다. 그것은 염상구의 비웃음을 사기에 알맞은 어리석은 말일 것이 분명했다. 면단위 지서에 경찰병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며, 고작해야 네댓 명에 지나지 않을 병력은 공산당 야산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줄행랑치기에 바빠 총이나 제대로 한 방 쏘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제치하에서 반민족적 친일행위를 자행한 자들이 태반인 경찰조직에 대해서 심재모는 애당초 혐오감과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반란사건에서 그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는 그 불신감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반란이 일어난 지 이삼 일 만에 열서너 개의 지역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경찰력이 얼마나 엉성했으며, 경찰조직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기회주의자들의 집단이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이란 힘의 강약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이었다. 경찰력에 비해 반란세력이 그만큼 강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변명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맞서 싸운 기간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고작 이삼 일의 기간이란 반란군이 여수, 순천에서 각 지역으로 진격하는 데 소요된 시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경찰은 반란군을 맞아 단 며칠이고 결사적 전투를 벌였다는 증거가 없었다. 그들은 반란군을 대하자마자 도망치기에 바빴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고 볼 때, 만약 여수 주둔 14연대가 광주 주둔 4연대와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더라면 이삼 일 사이에 전라남도 전역이 반란군에 장악당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율어, 율어면이라..."

심재모는 무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는,

"혹시 가본 적 있습니까?"

권 서장에게 물었다.

"예에, 제 관할지서가 아니라서요..."

권 서장이 궁색하게 얼버무렸다. 심재모는 눈을 내리감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창문이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소리가 세차고, 그 소리는 서릿발 같은 추위를 사무실에 뿌렸다.

"좋소, 내일부터 본격적인 작전 개시오. 적들의 병력배치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특히 율어면이 장악 당했는지의 여부는 내일 중으로 확인 완료해야 할 사항이오."

심재모의 단호한 태도였다.

"금메요, 고것이 중헌 일이기는 중헌 일인디, 뜻맹키로 맘맹키로 하로 만에 알아내질란지 몰르겄소?"

"무슨 소리요?"

심재모의 눈썹이 꿈틀 일어섰다.

"아까참에도 말했지만 율어면이란 것이 산으로 삥삥 둘러싸였응께 만일에 그것덜이 율어를 차지혔으먼, 아니여, 징광산에 봉화불이 올랐음사 고것이야 보나마나 뻔헌 일인디, 그 문딩이덜이 율어로 통허는 고갯목이나 길목은 다 눈깔 시뻘거니 지키고 있을 참인디, 지리럴 아는 경찰이나 청년단에서 가먼 그눔덜이 얼굴 알아보고 팡 쏴뿔 것이고, 얼굴 몰르라고 군인이나 파견대가 가먼 얼굴 몰르는 수상한 눔이라고 팡 쏴뿔 것 아니겄소, 근디 무신 수로..."

"그만 시끄럽소!"

심재모는 버럭 소리쳤다. 염상구는 입을 헤벌린 채 말을 중단했고, 권 서장과 임만수는 얼결에 자리를 고쳐 앉았다. 심재모는 염상구의 말에서 벌써부터 꽁무니를 빼려고 하는 기색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그 교활이 역겹고 가증스러웠던 것이다.

"아직 작전지시는 내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요. 그런 것쯤 다 알고 있으니 더 말할 것 없소. , 이만 얘기 끝냅시다. 염 단장은 남국민학교 앞으로 해서 홍교까지, 임 대장은 소화다리를 건너 봉림을 거쳐 홍교까지 근무순찰 실시하시오."

심재모는 말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벽시계는 세시를 향해 긴 바늘을 밀어 올리며 마지막 두 칸을 남겨놓고 있었다.

심재모는 창가로 다가갔다. 어둠뿐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별들이 잡혔다. 아아..., 문든 가슴에 번지는 감상이었다. 저 별들이 왜 일순간에 감상을 자아내는 것인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낙엽을 보고 마음이 스산해지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 ... 재모야, 니 나이가 벌써 몇 살인지 알기나 하니. 어서 장가갈 생각을 해야지. 군인이야 니가 좋아 된 것이니 어쩔 수 없다만 장가는 가야 될 것 아니겠니. 여동생 민자가 대필한어머니의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어머니의 육성이 그대로 묻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혼기가 다 찬 여동생의 초조함도 깃들여 있었다. 결혼-여자와 사는 것,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자와 성을 나누고 애를 낳아 키우며 사는 것.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와 성을 나누는 것, 그것은 생각만 해도 저항감이 치미는 일이었다. 그가 동정을 떠나보낸 것은 버마 전선에서였다. 상대는 정신대 여자였다. 여자의 음부가 그렇게 진저리쳐지게 추악하고 토악질 나게 더러운 것인 줄은 몰랐었다.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 발기한 그것을 정신없이 여자 사타구니 사이에다 디밀었고, 그리고, 배설이 몰아오는 폭풍에 휩쓸려 정신이 어릿거리다가 풍덩 빠져버린 허망한 구덩이. 바지를 추슬러 올리다가 문득 눈길이 멎은 곳, 그것은 노출되어 있는 여자의 음부였다.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헤벌어진 음부는 가래침 같기도 하고, 고름 같기도 한정액을 머금고 있었고, 음부꼬리로는 그것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거무튀튀한 색깔의 음부 가장자리는 정액이 맥질이 되었는데, 듬성듬성 난 음모들은 맥질된 정액의 끈끈함에 풀죽어 거무튀튀한 피부에 달라붙은 채 어지러운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시궁창! 그 느낌과 함께 토악질을 하며 천막을 뛰쳐나왔다. 수많은 남자들이 싸질러놓은 정액을 닦아낼 여유도 없이 음부를 드러내놓고 있는 그 여자가 바로 동족이라는 사실을 환기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 후로 여자와 성관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젊은 육신이 일으키는 성욕은 수음으로 처리되었고, 깨끗한 여자의 그곳이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생각을 고쳐먹으려 애써보았지만 첫 경험을 통해 판 박혀진 그 더러움과 추악함은 이겨내 지지 않았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여자는 전쟁의 수라장 속에서 살아나기나 한 것일까? 목숨을 부지했다면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을까. 어찌 할 수 없이 수음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 기억에 사로잡히고, 그 기억을 찢어대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떠올려야 했던 그 얼굴을 기억할 수조차 없는 여자에 대한 염려. 심재모는 그 생각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한들 그 몸으로 어떻게 살까. 시집을 갈 수도 없을 것이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못 견뎌 고향에서 살 수도 없을지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을 잇고 있는 심재모의 머리를 스치는 말이 있었다. 남자의 강간은 범죄로 생각하지도 않고, 강간을 당한 여자는 그것이 사건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 현상이라는 권 서장의 말이었다. 심재모는 자신이 그 여자에 대해서 했던 생각이 바로 권 서장이 했던 말의 반증인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손가락질을 당하고, 고향에서 쫓겨나야만 하는가. 그 여자는 가엾고 불쌍한 피해자일 뿐인 것이다. 나라 잃어버린 남자들의 빙충맞음으로 여자들이당한 수난이었다. 그렇게 고통 받은 여자들이 도대체 몇 명일까. 일본 놈들은 극비에 붙인 채전국 방방곡곡에서 여자들을 강제로 끌어갔으므로 그 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고, 그 여자들은 만주에서 버마에 걸치는 광대한 동남아 전선에 고루 보내졌기 때문에 그 수는 상상보다 훨씬 말을 것이리라. 삼만... 아니 오만,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칠만... 그 전선이 얼마나 넓은데, 십만... 심재모는 더 이상의 수를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다 어찌 된 것일까. 분명 해방이 되었는데도 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한 번도 거론된 일이 없지 않았는가. 심재모로서도 그건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임시정부가 귀국해대대적인 환영식을 벌이고, 광복군이 의기양양하게 귀국해서 기세를 올리고, 죽음을 면한 학도병들은 끌려갈 때와는 정반대의 당당함으로 개선 아닌 개선을 앞세우고 돌아와 조직체를 만들고 법석이었는데, 정신대라는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회는 여자들이 당한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잊어버리고 말았을까. 정신대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 나라 체면을 깎고 위신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덮어버리고 만 것일까. 여자들 스스로가 창피스럽고 부끄러워 남모르게 꼭꼭 숨어버린 것이었을까. 심재모는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가, 안직 자냐?"

", 아니어라, 엄니."

외서댁은 잠결인 채로 후다닥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나 앉았다. 앉은 자리가 기우뚱 흔들리며 눈앞이 노랗게 막혀왔다. 그리고 속이 뒤집어 지면서 가슴이 벌떡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야아야, 니 왜 이러고 있냐? 워디 아프다냐?"

외서댁의 귀에는 어머니의 말소리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지기도 하고 짧게 줄어들기도 하면서 들렸다. 정신을 모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머니의 모습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길쭉해지기도 하고 펑퍼짐해지기도 하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말을 하려고 하는데도 가슴이 막혀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아가 이러다가 큰일 당허겄다. 참말로 속썩어 못 살겄다."

외서댁의 어머니 밤골댁은 울상이 되어 다급하게 방문을 밀치고 나갔다.

엄니 속이 숯 안 되게 혀야제. 효도넌 못혀도 속이나 썩히지 말어야제. 미친년아, 정신 채려야 혀. 엄니 복장 터진께 정신 채리라고.’

외서댁은 정신을 수습하려고 안간힘하며 자신을 닦달하고 있었다.

"아나, 찬물 한 모금 넘게 봐라, 정신이 들란지도 몰른께."

외서댁은 사발이 입술에 닿는 찬 기운을 느꼈다. 그 시원함이 가슴의 답답함을 틔우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빨이 시린 찬물을 천천히 넘겼다. 그 차가움이 점차로 정신을 들게 했고, 눈앞의 안개를 걷어냈고, 뒤집힌 속을 가라앉혀갔다. 그러나 가슴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물 사발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좀 워떠냐?"

"그냥...괜찮허구만..."

눈앞이 맑아지고 마음은 환한데도 가슴의 답답함 때문에 뜻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뉘라, 어서 뉘라. 다 요분에 몸고상 맘고상 혀서 얻은 병이다. 니 팔자가 워찌 요리 사내끼 팔자로 비비꾀는지 몰르겄다."

외서댁은 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방바닥에 몸을 부렸다.

"인자 속불을 끄거라와. 몸띵이가 썩어듬스로 손꾸락 발꾸락이 매듭매듭 떨어져나가는 문딩이도 살아보겄다고 발싸심허는디, 새끼꺼정 매달고 있는 니가 짧은 생각 혀서는 안 된다. 다 살아갈 방도가 있니라."

밤골댁은 딸의 몸이 전부 감싸이도록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섰다.

니 팔자가 꾀이는 것은다 타고난 것이고, 니럴 그리 낳아논 이 에미 죄여. 니 샘언 천상 내 것얼 그대로 내림헌 것인디, 니가 처녀티가 나기 시작험스로 눈매고 입매에 그 표식이 내비쳤든 것이여. 청년단장 눔이 많은 예펜네덜 중에서 해필 니헌테 눈얼 박은 것도 그 표식얼 알아묵었기 땜시여. 넘덜허고 달븐 샘얼 지닌 것이 잘만 풀림사 서방헌테 이쁨 받음서 호강허고 평생얼 사는 것이제만 잘못 풀리는 날에는 일부종사 못허는 팔자가 되는 것인디, 니가 딴 남정네럴 본디다가 애할라 배부렀시니, 앞길이 구만리 겉은 나이에 막막허고 막막허다.’

밤골댁은 댓돌로 내려서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외서댁은 사내 끼 팔자라는 어머니의 말을 되씹었다. 저수지에 빠져 물귀신이 되지 못하고 살아나기는 했지만 얼굴 들고 살 수 없는 창피스러움이 앞을 막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배 속에 든 아이는 어찌할 것이며, 남편을 어찌 대할 것인가가 더 큰 문제였다. 남편을 생각하면 할수록 저수지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만 일어섰다.

"선상님, 저것이 배에 담고 있는 아그가 선상님도 아시데끼 낳아서는 안 될 목심인디요. 배럴 갈르든지 무슨 약얼 믹여서든지 안 낳게만 혀주십소사."

퇴원을 앞두고 어머니는 의사 앞에 두 손을 합장하고 빌 듯이 말했다.

"예에, 저도 아주머니댁 딱한 사정을 다 아니까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허나 세상에는 수술로 애를 못 낳게 하는 기술도 없고, 또 그런 약도 없는 형편입니다.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라먼 우리 딸언 워째야 쓸께라, 선상님!"

어머니의 음성은 피라도 토해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단념하지 않았다. 한약방을 찾아갔다. 한약방에서는 서너 가지 약이 있기는 있는데, 꼭 애가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고, 자칫 잘못하면 산모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여기저기로 애 떼는 비방을 수소문하러 다녔다. 이틀쯤 밥을 굶고 묵은 간장을 한 바가지 마신다, 마른 쑥을 피우고 오줌 누듯이 앉아 연기를 내리 사흘만 쏘이면 된다, 양귀비꽃을 진하게 달여 혼절할 정도로 마시면 직방이다, 산 미꾸라지를 거기에 밀어 넣으면 기운 좋은 그놈이 죽을 때까지 요동을 쳐 애를 떨어뜨린다. 어머니가 알아온 비방들이었다.

", 입 자그만치 나불대라니께! 양의사도 한의사도 못허는 일얼 고런 짓거리로 워찌 허겄다는 것이여 이거. 애새끼 띨라다가 딸 쥑인다는 것을 알아야 써."

아버지의 눈 부릅뜬 역정이었다.

"글먼 워쩌자는 것이요. 날이 날마다 뱃속 것은 커가는디. 그냥 낳게 내빌라둘께라?"

", 주딩이 봉허지 못혀!"

아버지는 마침내 놋재떨이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친정은 그대로 바늘방석이었고 감옥이었다. 어둠을 밟아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깥걸음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집도 감옥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바늘방석을 면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던 것이다. 외서댁은 잠깐이나마 아버지를 면대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 괴로움이었다. 시집을 갈 때도 어머니의 눈물보다는 아버지의 뒷짐 진 모습이 더 가슴 메이게 했고, 첫아이를 임신해서 몇 개월이 지나 친정나들이를 했을 때 그 부풀어오는 배는 어머니한테는 더 불러보이게 하고 싶은 자랑이었지만 아버지께는 깊이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런데 외간남자에게 몸을 더럽히고 그 씨까지 받은 신세로 아버지를 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한차례 추궁을 하거나 야단이라도 치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었고, 얼핏 눈길이 마주치면 아버지가 먼저 피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어머니한테만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 아버지의 기척만 느껴져도 몸이 죄어드는 죄스러움과 면구스러움에서 우선 벗어나는 것은 친정을 떠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무가내로 막았다.

외서댁은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봉화 때문이었다. 그 불길들은 남편의 눈이 되어 자신을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불빛에 자신의 뱃속이 환히 드러나 남편이 자기 씨가 아닌 아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봉화가 꺼지고서도 가슴 두근거리는 초조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문을 벌컥 열고 어둠 속에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남편은 그 어디인지 모를 곳에 있다가 바로 코앞으로 가까이 온 것이다. 이제, 그건 반가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남편한테서 멀어지고 싶었다. 아무 데로나 도망가고 싶었다.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날이 밝았다. 어둠보다는 밝음이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어린것을 품고 어렴풋이 잠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부른 것이다. 그 소리를 그녀는, 강 서방이 왔다, 하는 말로 잘못 들었다. 워메, 인자 죽는갑다! 그녀는 질겁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신경을 태우며 밤을 뜬눈으로 세운데다가, 잘못 들은 말이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외서댁은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입맛도 없었을 뿐더러, 밥을 양대로 먹었다가는 뱃속의 아이가 제멋대로 커날 것 같았던 것이다.

외서댁은 윗목에 놓인 반짇고리를 끌어당겨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타원형의 나무틀에 손잡이가 달린 그 거울은 처녀 적부터 써온 것이었다. 손잡이의 밤색 칠은 시집가기 전보다 더 많이 벗겨져 있었고, 나무틀 여기저기에도 찍히고 부딪혀 생긴 잔 상처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거울은 아직 쓸 만했다. 가장자리를 따라 얼룩이 번지고 있었지만 얼굴을 담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거울도 늙어가는구나, 외서댁은 스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 손잡이가 위로 가게해서 벽에 기대 세웠다. 거울 속에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꺼칠하게 들뜬 얼굴이 담겨 있었다. 외서댁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에 상할 대로 상한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더 참혹하게 상해 있었던 것이다. 그 거울에 처음 비춰진 자신의 얼굴은 얼마나 상그럽게 예뻤던가. 열다섯 살 초가을 첫 꽃이 비쳤을 때 어머니는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조용조용 뒷수발을 해주고는 이틀 뒤에 서는 장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마음대로 손거울과 댕기를 고르게 해주었다. "그 댕기넌 그냥 멋으로 다는 거이 아니라 처녀라는 표식인 것이여." 어머니가 속삭여준 말이었다. 그 빨간 댕기와 첫 꽃의 색깔. 그녀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고, 도저히 댕기를 드리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여자로서의 떳떳함이고 자랑스러움이기도 했다. 처음 댕기를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 온몸을 덮어오던 부끄러움 속에는 이상야릇한 간질거림의 뿌듯함이나 아지랑이의 아롱거림 같은 아슴한 황홀감이 숨어 있었다. 외서댁은 거울을 집어 들어 방바닥에 엎어버렸다. 그리고 비녀를 뽑고는 얼레빗으로 머리를 마구 빗어 내렸다.

"온냐, 마침 머리빗기 잘혔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외서댁은 무슨 뜻이냐고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부지가 불르신다."

"워째?"

외서댁은 가슴이 철렁해서 빗질을 멈추었다.

"워찌 그리 놀래쌓냐. 간이 열 개라도 못 당허겄다. 궂은 일은 아닝께로 맘 편히 묵고, 얼렁 건너오니라."

더 말을 물을 새도 없이 어머니는 방을 나가버렸다. 외서댁은 빗질을 서둘렀다. 궂은 일이 아니라는데도 팔에 힘이 다 빠져나가 빗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장흥 이모집으로 가 있그라. 엄니허고 의논얼 혀오든 참이었는디, 봉화가 저리 올르고 헌께 워디 더 지체헐 수 있겄냐. 강 서방이 저리 가차이 밀어닥쳤응께 니가 여그 밍기적이고 있다가는 무신 사단이 벌어질란지 몰를 일이다. 우선 급헌 불은 꺼야 쓴께 오늘 당장 떠나그라."

아버지의 말이었다. 원래 아버지의 말은 거역이 안 되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울고 있었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얼굴 앞에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외서댁은 무슨 말인가를 해야 될 것 같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아버지 앞을 물러났다.

"이모집 일 거듬시로 죽은 디끼 가 있그라. 뱃속에 든 것은 그 담에 어찌헐 것잉께."

"엄니이..."

"알어, 알어, 워찌 니가 헐 말이 웂겄냐. 허나, 여자 한 평상이 가심에 든 말 허기보담은 못험서 살게 되야 있는 법인디, 니 처지는 더 말헐 것도 웂다. 암말도 말고 떠나그라. 아부지가 정해뿐 일인디 무신 말이 소양 있겄냐."

어머니는 매정했다. 외서댁의 가슴은 까닭모를 서러움으로 젖고 있었다.

"문단속 잘 허고자야 써."

"나가 장개 하나넌 잘 들어뿐 모냥이시."

남편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고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집을 지키고 앉아 남편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집을 비우고 말면 일삼아 화냥질을 하고 도망친 것으로 남편이 생각하지 않을까.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되면 남편은 용서할지도 모르는데 괜한 짓 하는 건 아닐까. 외서댁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들로 어지럼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녀는 짐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 선수머리로 가며 외서댁은 징광산 쪽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는 했다. 빤히 뚫린 방죽길은 멀었고, 높게 솟은 징광산은 한정도 없이 뒤를 따라왔다. 방죽길이 끝나는 선수머리에서 배를 타면 바로 바다가 열렸다. 외서댁의 가슴은 온통 눈물로 젖었고, 옮겨놓는 걸음마다 눈물이 방울져 희고 긴 방죽길은 그녀의 가슴에서 눈물의 길이 되고 있었다. 방죽길이 그리도 팍팍한 길인 줄을, 방죽길이 그리도 서러운 길인 줄을, 방죽길이 그리도 머나먼 길인 줄을 그녀는 이제서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징광산은 선수머리까지 따라와 있었다. 외서댁은 배에 오르면서도 징광산에 눈길을 매달고 있었다.

"속 낋이지 말거라이이."

어머니의 목 늘여 뺀 다짐에 그녀는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통통거리고 있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몰라라, 난 몰라라, 워째야 쓸란지."

외서댁은 중얼거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입에서는 흐느낌 소리가 터졌고, 징광산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기 없던 그녀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면서 구겨지고 있었다. 고개가 흔들리고, 어깨가 흔들리고, 마침내 전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등에 업혀 잠든 딸이 잠결에도 맞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싫은지 서너 번 상을 찡그리다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무실에서 아침으로 국밥을 시켜먹은 심재모는 의자에 앉아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정신이 개운해졌다. 걸으면서 잠자기, 걸으면서 오줌 누기 같은 것은 이미 버마 전선에서 몸에 익힌 것이었다. 걸어가며 잠깐씩 자는 것으로 며칠씩 계속되는 정글전투의 수면부족을 채웠고, 남방의 억센 빗줄기 속을 걷다가 요의를 느끼면 굳이 물건을 꺼낼 필요 없이 그대로 오줌을 누며, 다리를 뜨뜻하게 타 내리는 온기와 함께 느끼는 배설의 시원함은 즐길 만한 것이었다. 걸으며 자는 것에 비하면 의자에 앉아 한 시간 남짓 깊이 잔 잠은 하룻밤 정도 뜬눈으로 새운 피로를 풀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심재모는 아침을 먹기 전에 보성경찰서장과 통화를 했다. 혹시 율어면의 상황 파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기대는 어그러지고 말았다.

"거그 근무인원이 넷인디요, 아무 소식도 웂은 것얼 보면 괜찮헌 것도 같고요. 징광산에 봉화 불 올른 것으로 보먼 싹 다 당해뿐 것 겉기도 허고요. 전화시설도 웂이고 헌께 땁땁허구만요."

한 서장이라는 사람의 어리뻥뻥한 대답이었다. 심재모는 벌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눌러 씹었다. 그가 쓰는 사투리까지 귀에 거슬리고 짜증스러웠다. 민간인들이 쓰는 사투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직자가 쓰는 사투리는 왜 그렇게 듣기 싫은지 모를 일이었다.

"관할지역의 상황 파악도 못해놓고 땁땁하다니, 그게 서장으로서 할 말이오! 율어면에 대한 전체 상황을 파악해서 오후 두시까지 보고하시오. 지금은 계엄하의 비상근무태세란 걸 잊지 마시오."

심재모는 있는 냉정을 다해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읍민들 중에서 율어면에 친척집이 있는 사람들, 특히 여자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그 일까지 마치고 나서 심재모는 잠시나마 눈을 붙일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심재모는 사령관실 문을 밀고 나오며 시계를 보았다. 아홉시 이십분, 네 시를 기해 근무병력을 이 개 조로 나눠 두 시간씩 취침시켜 교대 하는 것을 정오까지 반복하라고 지시했으니까 지금은 세 번째의 근무교대가 끝난 상태일 것이다. 사무실에는 칠팔 명의 경찰들이 책상에 엎드리기도 하고 의자에 기대기도 해서 잠들어 있었다.

"서장님 어디 계시냐?"

"서장님 방에서 주무시는디요, 깨울께라?"

사환아이는 금방 서장실로 갈 기세였다.

"아니다, 곧 일어나실 게다. 나 물이나 한 잔 다오."

심재모는 다시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작전계획을 세워야 했다.

경찰과 청년단에서 율어면에 연고가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온 것은 열시쯤이었다. 남자가 둘에, 여자가 둘이었다. 예상보다 빠른 결과에 심재모는 적이 흐뭇함을 느끼며 그들을 사령관실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들을 대하며 심재모는 어떤 미안함과 함께 민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네 사람은 하나같이 겁 질린 얼굴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쭈뼛거리고 눈치를 살피고 하는 것이었다. 어떤 죄를 짓지도 않고,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면서 그들은 겁내고 무서워하고 떨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 네 사람의 모습만이 아니라 바로 일반 서민들이가지고 있는 통념이었다. 그건 일제시대를 겪으며 사람들이 갖게 된 생각이었다.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순사 온다, 순사' 하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것은 떼쓰며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데도 쓰였고, 개구쟁이들의 이런저런 말썽을 제지하는 데도 동원된 종기에 고약같이 효험을 지닌 말이었다. 사람들은 경찰서만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드나들기를 꺼리고 주눅 들기는 다른 관공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또가 납셨다 하면 백성들은 엄동설한에도 길바닥에 납짝 엎드려야 했지. 원래 양반이란 소낙비가 쏟아져도 비를 피하려고 방정맞게 뛰는 법이 아닌데, 위세 당당한 사또행차가 굼뱅이 걸음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 사또행차가 다 지나가도록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손바닥이나 무릎이 닿았던 땅은 얼녹아있고는 했단다." 할아버지가 들려주곤 하던 옛날이야기의 한 토막이었다. 서민들은 옛날부터 그랬고, 일제시대로 바뀌면서 더욱 심하게 닦달을 당하며 살아왔고, 해방이 되고도 경찰이나 관공서의 횡포는 여전했던 것이다. 심재모는 네 사람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내며 가까이 다가섰다.

"의자에 편히들 앉으십시오."

심재모는 그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 먼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네 사람은 마치 명령이라도 수행하듯 빠른 동작으로 앉기는 했는데, 모두 의자 끝에 엉덩이를 겨우 걸친 앉음새를 하고 있었다.

"자아, 편하게들 앉으세요. 여러분들은 무슨 죄를 져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알아볼 게 있어서 모신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계신 네 분은 모두 율어면에 가족이나 친척집이 있으신데, 혹시 그곳에 꼭 가봐야 될 무슨 일이 없나 해서요. 그러니까, 누구 생일이라든가, 누구 제사라든가, 무슨 잔치가 있다거나 하는 일 말입니다."

네 사람은 제각기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심재모는 첫 번째 남자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는 불안한 얼굴인 채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남자는 잠긴 소리로 "웂는디라" 했고, 나머지 두 여자도 고개를 저었다. 심재모는 난감한 심정한 되었다. 저들이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아예 부정을 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 번째에 앉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렸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긍께 머시냐, 생일이나 지사 겉은 잔치는 아니고라, 엄니가 아프신디..."

", 그러세요. 어디가 많은 편찮으십니까?"

심재모는 반가운 감정을 감추며 예사로운 듯 물었다.

"아예, 시난고난하는 만이라."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면 자주 찾아뵙고 해야지요."

심재모의 말은 다른 세 사람이 듣기에는 인정스러운 사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 여자가 해내야 할 일을 나머지 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의도된 대화였다.

"됐습니다. 다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바쁘실 텐데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심재모는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이 사무실을 나서는 걸 지켜보며 심재모는 세 번째의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서로 흩어지면 저 여자 분을 다시 모셔오도록."

율어면에 들어가다 그들에게 조사를 받게 되더라도 첩자로서 의혹을 사지 않으려면 확실한 행동의 동기가 필요했고, 여자라야 더욱 좋았다. 다시 불려온 여자에게 심재모가 한 말은 간단했다. 오늘 안으로 어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붙였다. 그 여자에게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만일의 경우 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염상진네가 율어면을 장악했다면, 그것을 보고 오는 것만으로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었다.

심재모는 선임하사를 불러들였다.

"오후 한시 출동에 대비해서 칠 명 일 개 조, 삼 개 분대를 편성하시오. 군장은 경무장, 행동이 민첩한 병들을 차출하시오."

심재모는 삼 개 분대 중 일개 분대를 직접 지휘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염상진네의 율어면 장악 여부는 보성경찰서, 여자, 자신의 직접 출동까지 세 방향에서 탐색될 것이며, 아울러 삼 개 분대의 출동으로 적들의 병력배치가 정찰되는 것이다.

읍장이 경찰서장을 거느리듯 하고 심재모의 방에 나타난 것은 열한시경이었다.

"출근하자마자 뵈로 왔었는데 잠시 눈을 붙이고 계시던 중이더군요. 날씨도 추운데 철야근무를 하셨으니, 너무 수고가 많으십니다."

", , 앉으시지요."

읍장이 의례적인 인사치레에 심재모도 건성으로 대했다.

"에에, 심 사령관님, 분주하실 줄 알지만 점심을 함께 하셨으면 하는데요. 노고를 고맙게 생각해서 유지들이 자리를 만든 모양입니다."

읍장이 굳이 발걸음을 한 용건인 셈이었다. 심재모는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정신 나간 자식들! 감정이 꿈틀 꼬였던 것이다.

"제가 할 일을 하는데 노고랄 게 없고, 부대는 한시를 기해 작전개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재모는 애써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음성은 경직되어 있었다.

"물론 비상근문 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점심은 어차피 드셔야 할게고, 유지들도 뱃속 편하게 앉아 밥이나 배부르게 먹자는 것이 아니라 사태가 급변한 만큼 자기들대로 할 얘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읍장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었지만 그 말은 묘하게도 감정을 긁고 있었다. 심재모는 권 서장을 쳐다보았다. 권 서장은 읍장의 말을 따르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작전시간은 변경할 수 없으니 할 얘기가 있다면 점심시간을 앞으로 당기도록 하시지요."

"반 시간 앞당겨 열한시 반으로 해서 제가 연락들을 하지요. 이따 남원장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읍장이 나가고 나서도 심재모는 무슨 일인지 아느냐고 권 서장에게 묻지 않았다. 별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알고 있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심재모가 남원장에서 대한 사람들은 이미 예상했던 면면들이었다. 최익달, 윤삼걸, 최익도, 유주상이 그들이었고, 읍장과 권 서장까지 해서 일곱이 둘러앉았다. 형식적인 인사가 한 차례 오가고 나서 첫 번째로 입을 연 것이 윤삼걸이었다.

"머시냐, 그작저작 잠잠해지는가 혔등마 염상진이눔이 바로 코앞으로 밀어닥쳐 뿌렀는디, 심 사령관은 고것덜얼 이 삼동이 가기 전에 싹쓸어뿌러야 헐 것이요이."

심재모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혀도 고것덜이 징광산에 진얼 친 상싶은디, 글타먼 율어가 그눔덜 안방이 아니겄냐 그것이요. 그리 되얐다 허먼 나넌 망헌 것이요. 요분에 난리굿 일어나고 허는 북새통에 차일피일허다가 소작료럴 못 걷어들였는디, , 그 아까운 쌀얼 모다 빨갱이눔덜 아가리에다 처넣게 생겠당께로. 심 사령관! 요런 복통해 죽을 일이 워딨겄소. 싸게싸게 빨갱이덜 몰살시켜 내 아까운 쌀 다먼 을매라도 찾게 해주씨요."

심재모는 얼핏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냈다.

"그것 참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피해를 입은 지주들은 도처에 많고, 그 피해는 어디서 오느냐, 바로 공산당 빨갱이들 때문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무엇이냐, 빨갱이들을 국책에 따라 완전히 섬멸 소탕하는 길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고장의 안정과 질서를 파괴했던 빨갱이들이 마침내 저희들 발로 걸어 우리들 가까이 나타났습니다. 이 기회, 바로 이 기회를 빨갱이 소탕의 기회로 잡아야 합니다. 그놈들이 왜 저희들 발로 우리 가까이 왔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바꿔 말하면 계엄군이고 경찰이고, 그 외에 병력이 될 만한 모든 것을 그놈들이 무시한다는 증겁니다. 이제 우리 편이 승리할 것이냐 패할 것이냐 하는 중대한 시기에 처한 것입니다. 전체 읍민들도 그 점을 염려하며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대 시점에 처함에 있어서 읍내의 치안책임과 빨갱이 소탕책임을 총괄하고 있는 계엄사령관께서는 어떤 전략, 어떤 방법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상기된 얼굴의 유주상은 단상에서라도 선 듯 웅변조였다. 그의 말은 꽤나 선동적이기도 했고 나름의 논리성도 띠고 있었다. 심재모는 그에게서 금융조합장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냄새를 맡으며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뿐 작전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군대의 모든 작전이나 전략은 국가기밀에 포함되며, 그것을 누설하는 자나 탐지하는 자는 다 함께 스파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재모는 유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아냈다.

"아 좋습니다. 심 사령관님의 그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 그것으로 답변은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 말만 믿을 것이고, 그 말을 들으니 마음 든든합니다."

세무서장 최익도가 눈치 빠르게 얼버무리고는,

"그런데 심 사령관님, 지난 이십일일 대한청년단이 발족됐는데 우리 읍에서도 대동청년단을 해체시키고 대한청년단을 정식으로 발족시켜야 할 텐데, 왜 여태까지 안하고 있는가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의 어투는 자못 의혹에 차 있었다. 심재모는 서장을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일에 쫓기느라고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문제였다. 권 서장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서장님, 말씀하십시오."

심재모는 서장에게 지그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지역은 계엄 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체제를 유지시킨 것뿐입니다. 더 효과적이고 건설적인 방안이 있다면 개편을 해야지요.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심재모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권 서장은 의혹의 화살을 요령 좋게 피해버린 것이다.

"대한청년단을 정식으로 발족시키는 경우 현재의 염상구가 단장으로 적임자라고 생각 하십니까"

최익도는 새로운 적임자로 어떤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고 우회하는 요령을 피웠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심재모가 대답했다.

"말이 났으니께 말인디, 염상구 그 자석언 틀려묵었어. 쌈언 잘허는지 몰르겄는디, 무신헌디다가 요분에 말썽 일으킨 짓거리허고, 그 물건은 단장깜언 못돼고 천상 감찰부장이 지 밥그럭이야."

윤삼걸이 말했다.

"그 말이 맞소. 단장이먼 읍내 체면에도 관계되고, 우리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인디, 점잖은 사람이 맡아야제."

최익달이 말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용건임을 심재모는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단장을 지목할 수 있도록 말문을 틔워줄 단계였다.

"혹시 그럴 만한 분이 있으면 추천해보시지요."

"여기 유 조합장이 적임자요."

최익달이 성급하게 말했다. 심재모는 자신의 예감의 적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겸직이야 상관없는 문제고, 읍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심재모는 이 어설픈 음모에 가담했으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읍장의 가면을 찢어버리고 싶어 말머리를 돌렸다.

"본인만 수락하면 우리 읍으로서는 영광이지요."

"본인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께서 동의하신다면 미력이나마 바치겠습니다."

유주상은 그야말로 점잖게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서장님, 이삼 일 후로 발족식을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심재모는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또 무슨 말씀들 없으십니까?"

심재모는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만허먼 되얐소"

윤삼걸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저는 작전 관계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유 조합장님, 앞으로 작전 지원에 직접 참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힘이 나지요."

심재모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유주상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새 청년단의발족이란 명칭을 바꾸는 것에 불과했지만 염상구의 직위를 낮추는 데는 그럴 듯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징계조치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읍민들이 품고 있는 불신감을 다소나마 회복할 수 있는 전기가 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심재모는 생각했다.

 

 

2. 그것은 이긴 싸움

군당위원회의 노출된 조직을 그대로 전투병력화한 염상진의 야산대가 율어면을 기습 장악한 것은 이틀 전 깊은 밤이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밤의 정적 속에서 신속하게 끝낸 작전이었다. 사전 탐지가 치밀하게 이루어진 그들의 기습작전은 기민하게 진행되었고, 야간근무 중이던 두 경찰은 겹겹이 둘러쳐진 포위망 속에서 두 팔을 치켜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머지 두 명은 자기 집에서 잠을 자다가 체포되었다. 만약 경찰들이 대항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자명한 것이었다. 네 명으로서 열두 개 읍면에서 집결된 이백여 명을 이겨낼 도리는 없는 일이었다.

"잘 가둬둬.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팔을 치켜드는 것들이 뭐, 민중의 지팡이? 권력의 지팡이였고, 민중의 몽둥이였겠지. 총을 쏘지 않아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은 걸 공로로 치하해주지."

염상진이 그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이번 사업에 가담한 지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하조직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조직이 노출된 이상 남은 길은 계속적인 투쟁뿐이었다. 당은 그 결정을 내렸고, 지구당은 군당단위로 전투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군당위원회는 군당 전투부대가 되면서 군당 자체가 인민들 속에서 떠나 산중으로 옮겨져, 이동하는 군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염려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당 조직이 인민들 속에 있지 못하고 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당이 땅을 얻지 못한 씨앗이고, 물을 얻지 못한 고기며, 땔감을 얻지 못한 불씨나 마찬가지가 된 셈이었다. 이 점을 중시한 당 중앙은 지구당별로 야산대를 편성하고, 해당지구를 중심으로 사업을 계속 전개하되, 보다 많은 해방구를 확보함으로써 혁명사업의 효율적 극대화를 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각 지구당이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기존지역을 확보하게 되고, 이번 사업의 주축이 된 군 병력이 지리산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당의 세력권은 그만큼 확장되고 확고해지는 것이었다. 도당이 백운산에 자리 잡고, 그 밑에 지구당들이 지역별로 조계산이며 백아산 등지에 거점을 확보하자 각 군당들도 독립 사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염상진이 율어면을 장악한 것은 일차적인 해방구 확보였다.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이차, 삼차의 해방구를 마련할 계획이었다. 염상진은 율어면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장악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리라는 식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율어면을 그렇게 쉽게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율어는 별로 쓸모가 없는 곳으로 옛날부터 행정적인 방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점이 바로 자신들에게는 이중적인 이점으로 작용했다. 산을 이용해서 활동을 전개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곳은 더없이 필요한 거점이었고, 기존 행정력의 방치는 그 필요성을 달성시키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같은 행정단위인 조성과 율어를 비교해보면 그 점은 더 확실해졌다. 만약 조성을 해방구로 확보하려면 경찰 외에 군인 일개 소대 병력과 전투를 벌여야 하고, 전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벌교와 보성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기가 십상이었고, 그런 일 없이 장악을 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협공을 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율어는 원형으로 에워싸인 산줄기들이 천연적 방어벽 역할을 해주므로 그러한 염려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조성이 율어에 비해 생활조건이 나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농촌에서 절대적인 생활조건이라고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농토인 것이다. 그 점을 비교하면 율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조성의 간척 논에서 나는 '애당 쌀'은 벌교의 중도들판 싸고 함께 기름지고 맛난 상등품으로 유명했지만 율어의 논들도 물길 좋은 상답이었고, 특히 산자락을 이용한 삼 농사 할 땅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벌교와 보성의 부자들은 누구나 율어의 논을 손에 넣으려고 눈독을 들여왔다. 그런데도 조성과 율어가 행정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행정적 측면에서는 율어의 폐쇄성을 외면했고, 조성의 개방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진은 일찍부터 율어가 가진 폐쇄성을 유심히 살펴왔던 것이다. 그가 한여름의 더위를 무릅쓰며 한나절 이상 산길로 오르내려 율어를 찾아간 것은 사범학교 삼학년 때였다. 학교로는 삼 년 선배이자 사상적으로는 동지인 김태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태규는 목포상고에서 항일시위를 주도했다가 퇴학을 당하고 이 년간의 복역을 마친 다음 출감해 있었다. 그는 논에서 피를 뽑고 있다가 염상진을 맞았다.

"어쩐 일이다요?"

"어쩐 일이긴. 농사짓는 거 아닌가."

염상진의 물음에 대한 김태규의 대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가 율어면에 거주하는 유일한 지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염상진으로 하여금 그렇게 묻게 했다.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감옥에 갇히기 이태 전부터."

"놀랐습니다. 이념의 몸소 실천이군요."

"글쎄, 그리 거창한 동기는 아니고, 내 밥은 내가 농사지어 먹어보자 하는 정도였지. 허나 그것도 어디 제대로 됐을라구. 잠시 집에 머물 때나 한 것이니까, 그냥 시늉한 것일 뿐이지. 이리 땡볕에 서 있지 말고 저리 그늘로 가세나."

"아닙니다. 하던 일이나 마저 끝내야지 않겠어요? 저도 도울 테니 이 논은 다 끝내도록 하지요."

염상진은 새롭게 가슴에 차오르는 신뢰감에 어떤 떨림을 느끼며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김태규는 다시 논으로 들어섰다. 그 가식 없고 허세 없는 모습에서 염상진은 신념에 찬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이곳의 지세를 자세히 보게. 풍수쟁이들 말로는 산들이 사방팔방을 다 둘러싸버려 인물이 날 수 없는 땅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그거야 해골 덕이나 보자고 헛소리하고 다니는 미친 자들 소리고, 내가 보기엔 이곳은 참 희한하게 생긴 천연요새야. 옛날 성이라는 게 제아무리 높아봤자 서 잔 줄기들을 어찌 감히 당하겠어. 저 줄기들은 평균 높이가 해발 삼사백 미터야. 나는 언제부턴가, 저 산 높이에다 농토가 현재의 열 배쯤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지. 그런 정도라면 이곳을 기반으로 말야... 아니야, 다 필요 없는 공상일 뿐이고, 혹시 자네, 갑오란 때 여기서 동학군을 훈련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요, 처음 듣는데요."

"그때부터 여긴 비밀군사기지로 사용됐던 거야. 자연조건 때문이지. 난 그 점을 중요하게염두에 두고 있네."

김태규가 나무그늘에 앉아 굽이굽이 이어져나간 산줄기들을 따라 그만큼한 크기의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그려가며 진지하게 한 말이었다. 해가 바뀌자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

"큰물구경이나 한번 해보는 거지."

기차에 오르기 직전에 그가 심드렁하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경을 간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 활동을 한다는 풍문이 들려왔고, 해가 바뀌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는 해방과 함께 삼 년에 가까운 옥살이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해방 나흘째 되는 날 그는 벌교에 모습을 드려냈다. 그의 몸은 야위고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야릇한 광채가 일렁이며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볼세비키 혁명의 날이 도래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한 혁명,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할 역사적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일체의 일제 잔재를 일소하고, 모든 친일세력을 완전 소탕 제거하는 것이 그 첫 번째 할 일인 것이다."

환영 나온 사람들의 요구에 응해 그가 역전 마당에서 한 즉흥연설의 전부였다. 그 짧은 말은 그의 눈빛만큼 강력했고 신념에 차 있었다. 그가 벌교에 열흘 정도 머무는 동안 뻘교의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성의 지주들까지 남도여관 뒷문을 드나들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일본 놈들한테 바치던 상납금을 잽싸게 우리 쪽으로 옮겼군. 그건 어차피 인민의 피고, 우린 일본 놈들관 다르다는 걸 알아야지."

그가 비웃음을 물고 한 말이었다. 그는 자기 집의 농토를 거의 다 처분해가지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지역은 자네가 책임져야 해. 자네 같은 일꾼이 밑바탕을 이뤄야 당이 건재하고, 혁명은 성취되네."

그가 떠나기에 앞서 염상진에게 한 말이었다. 염상진이 김태규를 스치듯이 잠깐 대면한 것은 그 석 달 뒤인 십일월 이십일부터 삼일간 서울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때였다. 그리고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고, 사십육년 구월 이후 김태규의 종적은 묘연해졌다. 그건 박헌영 동지의 월북과 일치하는 시기임을 염상진은 나름대로 맥 짚고 있었다. 염상진은 징광산 정상의 초소에서 해거름의 스산함으로 덮이고 있는 주위의 산야를 먼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육 할의 병력을 율어를 에워싼 산줄기를 따라 배치했고, 삼 할의 병력을 반으로 나눠 보성과 조성 쪽으로 전진 배치시켰으며, 나머지 일 할을 각 면에 직접 분산시키고 있었다. 별교는 거리상으로 따로 병력을 배치시킬 필요가 없었다. 인구 비중으로 보나, 행정적 지리적 중요성으로 보나 벌교, 보성, 조성을 제외하면 다른 면들은 별로 보잘 것이 없었고, 특히 율어를 해방구로 장악한 이상 그 옆의 산골 면들은 수중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산줄기를 따라 요소요소에 초소를 설치했고, 각 분대들이 시간단위로 이동근무를 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건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산악활동에 있어서 기본적이며 절대적 요소인 주력을 기르기 위함이었고, 대원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형지세를 익혀 야간에도 혼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각 분대는 이틀이면 일회전을 해서출발지점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염상진은 근무상태를 살피고 지형 파악을 위해 하루 만에 일회전을 마치고 정상 초소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가 지리산에 피신해 있을 때 심마니들이나 사냥꾼들도 그의 주력에 놀라고는 했다.

"대장님, 대장님, 군인덜이 기올라오고 있구만요!"

숨을 헐떡거리는 보고였다. 염상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 지점, 몇 명인가."

"백동마실 지내서 바로 쩌 아래 골짝이고, 여섯인가 일곱인가 그런디요."

"가자!"

염상진은 발을 힘껏 내딛었다. 예상했던 것이고,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적이었다. 그런데, 예닐곱 명일 뿐인 병력으로 상봉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니, 그 인솔자는 총으로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겁 없는 풋내기이거나, 그 반대로 배짱이 보통을 넘는 전투경험자일 것 같았다. 예닐곱의 병력, 그것이 정찰대인지, 아니면 산개전을 벌이려는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최초로 나타난 병력인 경우 십중팔구 정찰대일 것이었다. 군인들은 은폐물을 이용해가며 제법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염상진은 그것이 정찰대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군인이 일곱에다가 민간인이 하나였고, 군인들은 경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들을 모조리 없애자. 총만 일곱 자루다. 염상진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빨리 주리개로. 거기 병력 전부 백동마을로 신속하게 잠복하라고 전하라. 그리고 총소리가 나면 그때부터 적을 무조건 사살하도록!"

염상진의 말은 빠르면서도 분명했다. 적들이 사정권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염상진은 총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다섯 명의 부하들 중 두 명이 말없는 속에서 그의 행동을 따르고 있었다. 정확한 사격을 위해서도, 부하들이 이동할 시간여유를 갖기 위해서도 적들이 최대한 접근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빨리, 그러나 해거름이 다 되어 정찰대를 파견하다니, 그 심재모라는 자는 용감한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적들은 어림거리로 백 미터 정도까지 접근해오고 있었다. 공격에 알맞은 거리였다. 적들도 무기를 가진 이상 방어공격을 위한 거리확보도 필요했다. 염상진은 총을 조준했다. 가늠구멍이 눈에 고정되고, 약간 가로타원을 이룬 그 멍 속으로 맨 앞에 오르고 있는 자를 잡아넣었다. 그러나 그건 이동표적이었다. 잡혔나 싶으면 벗어나고, 얼핏 스치며 빠져나가고는 했다. 머리나 가슴 부분만 조준할 일이 아니었다. 이동 표적 사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가늠구멍에 표적이 잡히는 순간 염상진은 방아쇠를 당겼다. 적들의 모습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른 풀숲이 시야를 방해했다. 잠시 후 적들의 모습이 풀숲 사이에서 나타났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건 적들의 모자일 뿐이었다. 적들은 사격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적 쪽에서 일시에 총성이 울렸다. 진지 앞의 흙이 튕겨 올랐다. 적들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건 조준사격이 아니라 위협사격이었다. 탄환을 낭비하며 응사할 필요가 없었다. 작전상황으로나 지형위치로나 유리한 입장에 선 이쪽에서는 어디까지나 조준사격을 해야 했다. 염상진은 은신해가며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적들은 풀숲을 굴러 내려가며 난사하고 있었다.

"적들이 도망가고 있다. 저 아래, 저기, 굴러가는 보이지! 절대로 일어서지 말고, 마구 갈겨라."

염상진은 진지를 벗어나며 소리쳤다.

"잠깐, 잠깐, 저 아래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심재모가 동작을 멈추고 오른쪽 귀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반원의 귓바퀴를 만들었다.

"그렇습니다. 아까 지나온 마을입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말했다.

"협공을 당하고 있는 셈이군. 좋아, 분산해서 각개행동으로 후퇴한다. 최단거리는 아까 올라왔던 골짜기, 집결장소는 저수지다, 각개행동 개시!"

심재모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내닫기 시작했다. 이쪽의 행동이 노출되자 적진에서

"저놈들 내밴다아"

"잡아라아"

"다 쥑여라아"

고함소리가 터지며 난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위에서 네댓 명이 쫓아내려오고, 아래쪽 동네에서 칠팔 명이 튀어나왔다. 그 기세를 꺾지 못하면 부하들이 위기에 몰릴 상황이었다. 동네에서 튀어나온 자들이 우선 위험했다. 심재모는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하고 맨 앞서 달리고 있는 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숨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거의 동시에 그 자가 우뚝 멈추는 듯하다가 핑글 돌면서 나가떨어졌다.

"총 맞었다아!"

그 외침과 함께 달리던 자들이 일제히 굳어지며 총성도 멎었다. 땅을 박차고 일어난 심재모는 산비탈을 죽어라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는 길 없는 산비탈을 부하들이 구르고 넘어지며 제각기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는 다시 총소리가 쫓아오기 시작했다. 심재모는 자신이 집중표적이 되어 있음을 알았다. 방향을 급회전시키기도 하고, 몸을 굴리기도 하면서 달렸다. 산비탈과 비탈의 사이를 이용해서 일군 다랑이 논들이 나타났다. 논들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단식으로 층을 이루고 있어서 그 논두렁들이 순간순간 좋은 은폐물이 되어주었다. 논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국도 옆 저수지에서부터 첫 접전지점까지의 중간쯤임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전지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불리한 적이 추격을 멈출 만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뛰고 있던 부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심재모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두 정지, 정지!"

심재모는 발악적으로 소리 질렀다.

"자네, 이리 와, 여기 붙들어. 그리고 모두 엄호하면서 후퇴하라."

심재모는 사병 하나와 부상병의 양쪽 겨드랑이를 끼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재모 일행이 저수지에 다다랐을 때는 어둠살이 번지고 있었다. 심재모는 심호흡을 하며 징광산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햇살의 기운을 품고 있는 하늘은 연주황 빛 색조로 물들어 맑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하늘이 배경이 되어 징광산의 모습은 유난히도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흰 종이 위에 먹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분명한 경계선을 드러내며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에서 저항과 거부가 완강하게 전해져오는 것을 심재모는 느끼고 있었다.

"출발. 저 마을까지만 가면 소달구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재모는 부상병에게 하는 것인지, 부상병을 부축한 두 병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흘리듯 하고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석유등잔이 밝혀진 방안은 어둠침침했다. 등잔불빛이 약한데다가 다섯 남자가 대중없이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겹겹이 엉켜 있었던 것이다. 문풍지가 울어대는 바깥 날씨와는 달리 방안은 훈훈했다. 방이 따뜻한 탓인지 언제나 이 방에서 나게 마련인 그 이상야릇한 냄새는 한결 심했다. 그건 사랑방이나 머슴방에서는 으레 나게 되어 있는 퀴퀴하고 텁텁하고 충충하고 쿠리하고, 뭐 그런 것들이 뒤죽박죽된 냄새였다. 그 냄새는 방안 속속들이 밴 담뱃진과 때가 낄 대로 낀 이부자리와 며칠이 가도 걸레질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방바닥과 여러 사람들이 내뿜는 체취와 며칠이고 씻지 않아 발이나 양말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들이 뒤섞이고 범벅이 된 것일 터이었다. 그러나 그 끈적거리고 찐득거리는 것 같은 냄새도 방문을 열 때 왈칵 코로 빨려들 뿐 방안에 들어앉아 얼마쯤 지나게 되면 무감각하게 되게 마련이었다.

방안에 있는 다섯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이 제각각 앉아 있었다.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네 남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나이가 많은 노인이 아랫목에 앉아 짚신을 삼는 데 시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 옆에 노덕보가 두 다리를 있는 대로 뻗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고, 등잔 옆에 바싹 붙어 앉은 김복동은 손가락에 힘을 모아 밤 껍질을 벗기느라고 열심이었고, 윗목 벽에 등을 기댄 강동기는 말이 담배를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인 지삼봉이는 송곳으로 콩에다 구멍을 뚫느라고 애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신경 쓰이는 일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의 혀는 잔뜩 힘이 들어간 입술 여기저기를 쉴 새 없이 핥아대고 있었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

"와따매, 이 썩는 눔에 통시깐 냄새!"

찬바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컬컬한 음성이었다.

", 싸게 문 닫어라, 불 꺼진다. 그 냄새 하로이틀 맡은 것이라고 문 열어놓고 있냐, 시방?"

김복동이가 두 손바닥도 모자라 몸으로 등잔불을 가리듯이 하며 언성을 높였다. 등잔불이 곧 꺼질 것처럼 자지러지다 누웠다가 펄럭이다 그을음을 토하다가 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위치와 모양을 바꾸며 춤을 추고 있었다.

"삼수야 이눔아, 질 늦게 왔으면 뒤진 디끼 사리살짝 들어와 방구석이나 차지헐 일이제 무슨 주딩이는 그리 놀레쌓냐. , 싸게 문 닫어, 방 식는디. 나 나무허다가 등창나는 꼴 볼라고 그러냐?"

지삼봉이가 송곳과 콩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말했다.

"워따 냄새도 지독헌디다가 연기넌 워째 이리 꽉 찼다냐. 요것언 방이 아니라 여시굴이시."

마삼수는 방문을 닫으면서도 떠벌려댔다.

"초저녁부텀 한바탕 떡치고 오니라고 요리 늦었냐?"

졸음에서 깨어난 노덕보가 내쏘았다.

"하먼이라, 몸에 존 보약인디 워째 한바탕만 쳤겄소. 서너 바탕 치니라고 요리 늦어뿌렀소, 성님."

"저 주딩이, 새살 잘도 깐다."

김복동이가 밤을 우물거리며 눈을 흘겼다.

"아재, 저녁진지 잡수셨는게라?"

마삼수가 노인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

"어이, 자네도 밥 묵었는가?"

노인이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야아, 많이 묵었구만이라."

마삼수가 인사를 끝내고 강동기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어른에 대한 인사는 남녀 구별이 없이 아침에는 '아침 잡수셨습니까' 저녁에는 '저녁 잡수셨습니까'였고, 어른들이 밥을 먹었든 죽을 먹었든 굶었든 '먹었다'고 대답하며 '너는 어쨌냐'고 되물었고, 아랫사람 역시 밥을 먹었든 죽을 먹었든 굶었든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는 것이 바른 인사법이었다. '밤새 무고하셨습니까' 하는 인사말도 있기는 했지만 별로 쓰이지 않는 편이었다. 난리로 밤새 무슨 변을 당하게 될 세월은 아니고,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이 중대사인 세월을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은 마음으로나마 서로의 끼니 걱정을 해주게 된 것일 터이었다.

마삼수가 나타나자 방안 분위기는 한 덩어리로 합쳐지게 되었다.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가까운 사람들끼리 머리 맞대고 모여 앉는 사랑방이나 머슴방이 어느 동네나 두세 군데 있게 마련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있었고, 흥미로운 놀이판이 있었고, 고단한 세상살이의 시름과 걱정이 있었고, 농사일에 쓰일 잔일거리들이 모여 있었다. 그 모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남자들의 풍속이었다. 물론 남자들만 그렇게 모여 앉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사랑방채비를 하고 나서면 여자들도 가벼운 일감을 챙겨들고 이웃끼리 모여 앉았다. 그러나 여자들은 으레 남자들보다 일찍 자리를 파하고 일어섰다. 남자보다 한발 앞서 집에 돌아온 여자는 마을을 가지 않은 척했고, 남자는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내외가 이부자리 속에 들면 어느 사이엔가 사랑방 이야기가 남자에게로, 마을 방 이야기가 여자에게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다음날이면 동네 소문으로 번져나고 떠돌게 되었다.

"그려, 서 머시기 찾아갔든 일언 워치케, 무신 결말이 있었능가?"

모여 앉은 여섯 사람 중에 네 사람이나 연관되어 있는 문제에 대해서 노인이 먼저 이야기의 운을 떼었다. 그 일의중요성으로 보아 당연한 순서였다.

"니기럴, 요리 깝깝허고 팍팍헌 눔에 시상, 하늘허고 땅이 딱 맞붙어 따글따글 맷돌질이나혀뿌렀으먼 속이 씨어언허겄소."

마삼수가 이렇게 대꾸함으로써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것부터 알렸다.

"허어 참, 그것 예삿일이 아니로시. 워디, 조단조단 이약혀보소."

노인이 말머리를 열게 하고 있었다.

"서운상이헌테 또 전번맨치로 굽신굽신 험서 워쨌거나 소작만 부치게 해도라도 사정사정 혔지라. 근디도 껄쩍찌근 허구만이라."

"껄쩍찌근허먼, 무신 미꼬미가 쪼깐이라도 뵈긴 뵌다 고것이여?"

노인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마삼수를 향해 목을 늘였다.

"야아, 서운상이는 정 사장눔헌테 억지로 사딜인 논얼 워치케든 혀서 폴아웂앨라고 발싸심을 허는 판인디, 사겄다고 나서는 작자가 웂는것 아니겄소. 그려서 요 똑똑한 동기가 꾀럴 내기럴, 우리도 논이 얼렁 폴렸으면 허고 바래는디, 논얼 폴 적에 우리럴 작인으로 묶어서 폴아도라 혔구만이라."

"어허, 그 꾀 한분 용왕 쇡인 퇴깽이 꾀다!"

노인은 신바람 나게 무릎을 치고는,

"그려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기분을 돋우고 있었다.

"그리 허고, 만에 하나 일이 꾀여 논이 안 폴리먼 소작얼 우리가 붙이게 해도라고 혔지라."

"근디, 그 답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웂이고 똥 깔고앉은 눔 쌍판때기랑께요."

"워째 그까? 누구헌테고 소작이야 낼 소작이고, 그러자먼 기왕 부치든 사람덜이 논 물리 도 훤허고, 집도 가차와 한 분이라도 더 딜에다 볼 것잉께 소출이 나도 더 나먼 니 좋고 나 좋고 헐 일이 고것인디."

노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드라고, 서운상 그눔도 지주기 넌 매일반인디, 정 사장 눔헌테 우리가 헌 것 보고 지눔한테도 그럴랑가 무서바 소작얼 안 부칠라고 허는 것 아니겄소."

김복동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허, 고것이 그리 튀는 불똥인가..."

노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 되야 있응께 우리 속이 껄쩍찌근허제라."

마삼수가 이야기를 막음하고 있었다. 김복동, 노덕보, 강동기, 마삼수 네 사람은 잃은 소작을 되찾기 위해 오늘까지 세 차례나 서운상을 찾아갔던 것이다.

"일정 때야 일정 땐께 전답고 뺏기고, 소작도 띠이고 혔다 허드라도 해방이 되어 우리찌리 사는 시상이 되얐는디도 일정 때나 똑겉은 일이 벌어지니 요것이 무신 사람 사는 시상인지 몰르겄다. 그나저나 일정 때는 전답 뺏기고 소작 띠이고 허먼 만주 땅이나 간도 땅으로라도 갈 디가 있었는디, 인자는 그도 저도 아닌 판에 워쩌크름 살어야 헐랑고. 참말로 막막허고 깝깝헌 시상이시."

노인이 침통한 얼굴로 탄식했다.

"아재는 걱정도 팔자요. 홧짐에 소 잡아묵드라고 빨갱이질이나 걸판지게 한바탕 허고 말제 또 헐 것이 머 있겄소."

마삼수가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어허, 못써. 우리찌리라고 말 막 허다 보먼 암디서나 그리 되는 법이여. 요새가 워떤 시상이라고. 그 문제로 치자먼 일정 대보담 더 무선 시상이 되얐응께 자다가도 입조심혀야써."

연상 문 쪽을 힐끗거리는 노인은 그 음성마저 까라져 있었다.

"기분도 심난시러운디, 아재. 이약이나한 자락 혀주씨요."

줄기차게 담배만 빨고 있던 강동기가 등잔받침대에 붙어 있는 재떨이에 꽁초를 잉끄리며 앉음새를 고쳤다.

"이약?"

노인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노인은 끝도 없는 이야깃주머니를 가지고 있었고, 이야기를 맛있고 달게 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었다. 노인의 이야기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다, 그 누가 이야기를 청해도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남자들이 청하면 삼국지나 수호지를, 여자들이 청하면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아이들이 청하면 장화홍련전이나 도깨비 이야기를, 때와 장소에 따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노인은 이야기부자인 대신 살림살이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옛말을 실증이라도 한 것 같았다. 아이들이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귀찮게 굴면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예사로 "이야 좋아허먼 장수 아재맹키로 가난허게 산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노인은 칠십이 다 되었는데도 아이들한테까지 '장수 아재'로 불리었다. 그는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탓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아재'라는 호칭을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만이 갖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그가 가난한 이야기꾼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를 홀대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깍듯하게 예를 갖추어 대했다. 그건 그가 지니고 있는 내력 탓이었다. 초가삼간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한 그는 아들네의 단간 오두막에 잠자리가 없어서 지삼봉의 방에서 잠자리구걸을 하고 있는 신세였다. 사랑방이나 머슴방에 따로 불청객이 있는 법이 아니지만 남달리 붙박이를 면할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처지를 미리미리 감안했음인지 젊은이들을 대함에 있어서 나이 먹은 티를 내거나 나잇값을 받으려는 내색 같은 것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도 않았다. 그래서 담배나 술은 스스럼없이 피우고 마시는 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가 쪼깐만 유식허고, 쪼깐만 젊었드라먼 이약 책 쓰는 사람이 되얐을 것인디." 칠십 노인 한장수가 다헐어빠진 육전소설책을 되작거리며 애석한 듯 아쉬운 듯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이약도 많고많은디 무신 이약얼 듣고 잡은가?"

한장수 노인은 무언가를 검지손가락으로 찍어 혀끝에 묻혔다. 그건 발이 고운 소금이었다. 그의 말로는, 침이 나오게 해서 혀가 부드럽게 놀려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삼국지같이 긴 이야기를 할 때는 이야기하는 중간 중간 소금을 찍어 넣고는 했다.

"그 갑오난리 중에서 재미진 것으로 한 대목 해주시오."

강동기는 담배를 말아 노인 앞으로 내밀며 이야기를 청했다.

"워째 하필 갑오난 이약이까?"

담배를 받아들며 한장수 노인의 눈길은 강동기의 눈에 박혀 있었다.

"그냥, 맴이 듣고 잡아허요."

"그려, 이약이사 듣고 잡은 사람 맴이 허란 것을 혀야 쓰는 것이제."

한장수 노인은 강동기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 느릿느릿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리 허먼 이약을 허겄는디, 갑오년이라 이월에 터진 그 난리는 중국에 삼국지맹키로나 질고진 이약잉께 이 밤이 꼬빡 새도록 혀도 다 못헐 것이고, 그중 한 대목만 허겄어."

노인의 목소리는 다른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슬퍼지기도 하고, 비감해지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맛나고 재미있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 목소리에 실린 신명이나 탄력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갑오란 이야기를 할 때면 아예 그 신명이나 탄력이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목소리도 누가 들을 세라 낮아지는 것이었다. 이제 동학당 잡으러 다니는 시절도 아닌데 맘 놓고 시원시원하게 재미를 살려 이야기하라고 사람들이 수차에 걸쳐 불만스러운 요구를 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고 마니 어쩔 도리가 없다면서 끝내 그 목소리나 태도를 고치지 못했다. 일정시대에 옛날 갑오란에 가담한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색출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히 일본 놈들의 악독한 행위가 묻어나오게 되고, 그것은 결국 일본을 반대하는 항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갑오란의 이야기는 일정시대 내내 목소리 낮추어 조용조용 말하고 가만가만 전하는 조심스러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 대장이 인내천 깃발 펄럭임스로 전주감영을 뺏은 담에 나라가 불러딜인 청국군 일본군이 밀려들고, 종당에는 일본군이 독판침서 동학군이 패허든 대목을 이약허겄구만. 다 이긴 쌈에 일본 눔덜이 훼방얼 놓고 뎀베들었는디, 그눔덜언 각단지게 총질얼 허는디다가 대포할라 펑펑 쏴질러뿐께로 지아무리 용맹스러운 동학군이라 혀도 당헐 방도가 웂었제. 우리 동학군이 지닌 무기라는 것은 창뿐이고 칼뿐인디, 맞붙어 싸우겄다고 쫓아가다 보면 총에 맞아 수도 웂이 죽어갔제. 그런 쌈얼 허자니께 날이면 날마닥 사람 수는 줄제, 동학군은 산으로 산으로 몰림서 쬧김서 싸웠는디, 고것이 될 일이 아니었제. 근디, 일본 눔덜언 우리 동학군허고 무신 철천지 웬수가 졌다고 그리 악독하고 무작시럽게 혔는지 몰라. 우리야 인내천 믿음서 탄관오리 웂애고 살기 존 시상 맹글겄다고 동학군으로 뭉친 것인디, 일본 눔덜이 새중간에 끼고본께 우리 상대도 일본 눔덜이 되고 말았제. 그눔덜언 동학군얼 생포허먼 총에 달린 칼로 갈가리 찢어쥑이고, 그 폴다리고 창새기럴 나뭇가지에 빨래 널 디끼 널었어. 그리고 총 맞어 죽은 시체도 목얼 다 짤라가뿔어 장사도 못 지내게 맹글어뿌렸어. 그 숭악헌 짓 헌 것이 장사럴ㄹ 못 지내게 헐라는 것이 아니라, 목얼 짤라다가 나라에 바치먼 그 머릿수에 따라 나라서 상금을 내렸기 땀세 그랬다는 것인디, 필경 맞는 말일 것이여. 동학군이야 즈그덜 목심얼 노린께로 그렇다 치드락도, 그눔덜언 여자들도 징허고 무작스럽게 쥑였는디, 지리산으로 ?김서 구례 짬에서 일어난 일이여. 산산쪼각이 난 우리 부대 일곱이 산골마실로 찾아들어 밥얼 얻어묵기로 혔제. 우리넌사나흘을 꼬빡 굶어서 모다 지정신이 아니었는디, 집집마동 찾아댕게도 밥얼 얻어묵을 수가 웂었네. 곡식이 웂다는 것이었제. 고것이 후환이 무서바 그짓말얼 했다는 것은 나중에사 안일이고, 근디, 한 집서 선뜻 밥얼 해내등마. 시어무니허고 메누리만 사는 집이었는디,알고봉께 그 집 아덜도 동학군으로 나갔다고 혔네. 노친네년 자기 아덜 이름에다가 생김생김얼 세세허게 이약해쌈스로 행에 아느냐, 본 일 웂냐, 애가 보트고, 애럴 배서 배서 불쑥헌 메누리넌 몸이 무검스로도 부산허게 몸얼 눌려 뜨신 밥얼 우리 앞에 채레냈구만. 하로밤얼 거그서 묵고 우리넌 떴는디, 그 노친네허고 메누리넌 며칠 있다가 들이닥친 일본눔덜한테 맞아죽었제. 일본눔덜언 그 심웂은 두 여자럴 몽딩이로 때레 죽이고도 모질래서애 밴 메누리 배럴 갈라 애럴 꺼내 사립에다 꺼꿀로 달아맸드란 말이시. 우리헌테 밥혀 준 것이 죄였든 것이제. 워디 고것뿐인감. 쌍계사 뒷골 화전골의 점백이 처녀가 죽은 것도기맥히제. 왼쪽 입술 아래에 껌정콩만헌 점이 백혀서 이름이 점백이인 그 처녀는 나보담두 살이 위에다가 발 빨르기가 나가 무색헐 판이었는디, 나가 맡은 일이 일본 눔덜 부대 이동이나 동정얼 염탐해 속빠르게 알리는 것이라, 그 화전골얼 날마동 지내댕기다 봉께그 처녀허고 낯이 익고, 그러다봉께 나가 허는 일얼 처녀가 알게 되고, 내 나이에 비해 중헌 일얼 허는 것을 신통허게 생각한 처녀는 나럴 친동상 대허디끼 혔제. 근디, 하로는 처녀럴 화전골이 아니라 산길에서 맞닥뜨리게 되얐제. 나넌 내레가든 참이고, 처녀는 날 찾아 올라오든 참이었는디, 일본눔덜이 화전골에 진을 쳤다는 급보럴 전할라고 처녀는 무작정허고 날 찾아나선 질이었등마. 처녀 덕에 나나 우리 부대는 무사허니 피혔는디, 정작 점백이 처녀가 우리 대신 죽어뿐 것이여. 처녀가 미리 연락얼 취헌 것을 알아낸 일본눔덜언처녀를 각단지게 돌아감서 범허고년 그것도 모지래 독사럴 잡아다가 처녀 거그다가 틀어넣어 쥑인 것이여. 그리 지멋대로 활개질치는 일본눔 천지가 되야뿌렀는디 여자덜이 몸 더럽히는 것이야 예삿일이었제. 광목옷 입고 죽은 시체가 이 산골짝 적 산골짝에 즐비혔고, 종당에는 동학군이 깨진 옹기맹키로 되고 말았는디, 워찌워찌 살아난 사람도 다시는 고향땅에서는 살 수가 웂었구만. 일본눔덜 심 빌레 동학군얼 뚜둘겨뿌시게 헌 나라에서는그 담얼 맡어 갱신히 살아난 사람덜얼 이잡디끼 혔응께. 우리 집도 그때 쫄딱 망해뿌렀는디, 접주였든 아부지가 죽은 것이야 장하고 장헌 일이고, 엄니고 동상들꺼정 몰살얼 당혀뿌렀응께. 나는 원체 발이 재서 살아난 것이제. 나가 을매나 발이 쟀으먼 사발통문 전허는그 중헌 일얼 시켰겄어. 정읍 고향에 발얼 끊은 지가 오십 해가 넘지 않었는감. 그려도 섧지가 안혀. 그때 나가 맡어 헌 일이 지끔도 나럴 배불르게 허고, 나가 한 평상 동안 헐 일얼 그때 몰아때레서 다 혀뿐 것잉께. 아매도 나는 이 나이꺼정도 그때 나이 열다섯 살로살아왔는가도 모를 일이제."

한장수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손등으로 양쪽 눈꼬리를 눌렀다.

"그 나이에 아재 인내천을 믿었읍디여?"

강동기가 물었다.

"하먼, 하늘겉이 믿었제."

"고런 시상이 온다고 믿었냐니께요."

"거 무신 땁땁헌 소리여!우리 동학군은 바로 그 시상얼 맹글어냈든 것이여. 전라도 충청도경상도가 다 공학군 것이었고, 동학군이 차지헌 디서는 영축웂이 인내천 시상얼 맹글었당께로. 니나 나나 다 똑겉은 한울인 공평허고 살기 존 인내천 시상얼 말이여. 우리는 애당초 상대였든 관군헌테는 판판이 이겨뿔고, 진 것은 일본 눔덜헌테란 말이시. 고것은 영 달븐 문제라 그것이여. 인내천시상이 짧었다고 혀서 쌈에 졌다고 생각허먼 큰 잘못이란 말이시. 하로밤얼 자도 만리성얼 쌓드라고 그 많은 동학군이 죽음시로도 믿었든 것은 자그덜 손으로 인내천 시상얼 맹글어봤다는 것이었어. 녹두장군이 사형당해 죽음시로 일본 눔헌테 진 것얼 억울해혔지 관군헌테 졌다고 생각혔간디. 동학군도 죽어감스로 다 똑겉은 생각이었단 마시. 우리가 인내천 시상얼 일본 눔 땜시 일 년얼 다 못 채우고 막음헌 것이나, 일본 눔덜이 삼십육 년 동안 우리럴 타고 앉었다가 미국, 쏘련 땜시 쬧겨간 것이나, 차이라는 것은 세월의 길고 짧음뿐이다 이것이여."

강동기는 눈을 내려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갑오란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왔었다. 할머니한테도, 아버지한테도, 외할아버지한테도, 외삼촌한테도, 이모부한테도, 이웃집 아저씨한테도 들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몇 가지는 누구의 이야기에서나 변함이 없이 똑같았다. 동학군 거의가 농민이었다는 것, 동학군이 용감했다는 것, 동학군은 어디서나 환영받았다는 것, 일본 놈들이 잔악했다는 것, 동학군은 졌지만 장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장수 아재가 지금 한 말은 그 누구한테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인내천 세상을 만든 이긴 싸움이었다는 말이 억지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갑오란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여러 어른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만 졌다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강동기는 생각했다.

새야 새에야 파아랑 새애야아

녹두우밭에에 안지 마라아

녹두꽃이 떨어어지이며언

청포장수우우 울고 간다아아

강동기의 귀에는 이 노래가 멀리서부터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가락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것도 있었고, 어머니의 것도 있었고, 동네 처녀들의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여러 가락들은 하나같이 애처롭고 서럽고 사무치고 한스러운 음조로 가슴을 감고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잠들며 한정도 없이 들었던 노래였고, 겨울밤 어머니가 물레를 저으며 물레소리에 맞춰 길고 길게 부르던 노래였고, 처녀들이 아지랑이 밭 속에서 나물을 캐며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리는 소리로 읊조리던 노래였다. 아이들은 아무나 가리지 않고 그 노래를 불렀지만, 남자아이들은 차츰 커가면서 입에 담지 않았다 총각이 되면 여자들이 부르는 것만 먼 바람결로 들으며 기억 속을 더듬었다.

"갑오난에 진디다가 냄편덜꺼정 잃어뿌렀응께 서럽고 한시러바 여자덜이 불른 여자노래제."

언제인가 할머니가 들려준 말이었다.

"근디 장수 아재, 재작년 십일월에 일어났든 일이 똑 갑오난리 같었다고 허는 노친네덜이 있는디, 글먼 그 일도 우리가 이겼다고 헐 수 있겄는게라?"

강동기는 앉음새를 바꾸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허, 그 무신 실달잖은 소리여? 뻔히 졌음시롱 묻고 자시고 헐 것 머 있어? 져도 드럽게 진 쌈이제."

노덕보가 듣기 싫다는 듯 짜증스럽게 내질렀다.

"성님, 나가 성님한테 물은 말이 아니오."

강동기가 노덕보를 쏘아보듯 하며 끼어드는 것을 막았다. 그 서슬이 차가웠다.

", 고것이 입 조심혀야 헐 말인디, 일본군대가 미국군대로 바뀐 것 뿐이제, 농민덜이 더 배곯고 살 수 웂어 일어난 것이나, 여그저그서 불 붙데끼 일어난 것이나, 갑오난리 때허고 같은 디가 많었제. 근디, 고것이 이긴 쌈이냐, 진 쌈이냐럴 따지라고? 긍께... 고것이야 묵기에 딸린 것이제. 세부득하여 밀린 것이야 사실이제만, 안직도 시상 뒤바꿀 그때 적 생각그대로 지니고 고상허는 사람덜이 많은께로 그 사람덜이야 쌈이 연속되고 있다고 생각허제 어디 졌다고 생각허간디? 그리고, 평소에 숨죽이고 사는 사람덜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품고 있는 사람덜이 쌔고쌘 것 아니드라고? 그 증좌가 무언고 허니, 재작년에 그리 지독시럽게 난리 치룸시로 에진간헌 사람덜얼 다 죽고 감옥살이허게 되야뿔고, 남치기 사람덜이야 다시는 고런 생각 안 묵을 줄 알았어도, 보소, 여수에서 일 터졌다 헌께 하로이틀 새로 모다 들고 일어나는디, 무신 바람이 그리 빨를 것이며, 무신 불길이 그리 빨를 것잉가. 고것이야 다 서로서로 맘이 통혀서 지절로 되는 기맥힌 일 아니겄는가? 근디 말이시, 이시상 일얼 내다보는 디는 그 눈이 볽아야 써. 둠벙물에도 다 그 줄기가 있디끼, 이 시상 일에도 그 뿌랑구나 맥이 있는 법이시. 무신 일이고 뜽금웂이 터지고 맥히는 거이 아니라 연관이 있는 법잉께, 그 뿌랑구럴 찾아내고 맥얼 짚을 줄 알아야 시상 일이 지대로 뵈는 법이시. 요분에 터진 일도 그냥 터진 것이 아니라 제주도서 일어난 쌈허고 연관되고, 제주도의 쌈언 단독선거허고 연관되고, 단독선고 반대허고 일어난 것은 재작년 일허고 연관되고, 재작년 일은 해방되고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디로 연관되는 것 아니겄는가? 나 말 알아묵겄능가?"

한장수 노인은 강동기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야아, 고것은 알아듣겄는디요, 글먼 말이제라, 피럴 웂애자먼 지아무리 줄기럴 쳐서는 안 되고 뿌랑구럴 싹 뽑아뿌러야 허디기, 그리 연줄연줄 일어나는 쌈얼 끝내자먼 그 뿌랑구인 양코배기덜얼 몰아내야 허는 것 아니겄소?"

강동기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쟈가 시방 무신 넋빠진 소리여?"

김복동이 눈을 휘둥글하게 떴고,

"니가 목심이 열 개넌된갑다잉! 야 옆에 앉었다가는 나할라 덤터기쓰겄네웨."

노덕보는 벽 쪽으로 앉은걸음을 쳤다.

"아서, 아서. 고것은 그리 소리 내서 헐 말이 아니시."

한장수 노인은 문 쪽을 살피며 손을 내저었다.

"요런 자리서도 말얼 못허먼 속이 터져 워찌 살겄소."

강동기가 담배쌈지를 와락. 잡아 뜯듯이 했다.

"자네 젊은 맘 다 아네. 허나, 목심이 걸린 중헌 말일수록 가심에 짚이이 묻어야 허는 겨. 그래야 목심 보존도 하고, 담에 닥칠 일에 나설 심도 모타지는 법이여."

한장수 노인이 강동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낮게 한 말이었다.

"아이고, 인자 다 소양웂은 소리요. 재작년에 그리 사람덜이 죽고 다침스로 싸왔어도 달라진 것이 머시가 있소. 코쟁이덜이고 경찰이고 끄덕도 안허고, 공출은 자꼬자꼬 심혀지제, 선거 요러타께 해치우고 난께 지주덜언 즈그 시상 왔다고 더 기세등등허제. 요것이 무신미꼬미가 있는 시상이요. 심얼 모트고 지랄이고, 다 틀려묵은 시상이요."

노덕보가 체념적인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성님, 거 무신 맥아리빠지게 허는 소리다요? 허먼, 요런 씨부랄눔에 시상얼 그냥 볿히고 눌림스로 살자 고런 소리다요?"

마삼수가 벌컥 화를 냈다.

"하먼 워쩔 것이냐? 당장 코앞에 닥친 우리 소작문제도 해결얼 못허는 판에 시상 돌아가는 일에 콩 치고 퐅치고 헌다고 무신 수가 나냐? 다 뜬구름 잡는 실답잖은 소리고, 죽 묵은 배에 기운만 빼는 소린께 말허지 말자 그것이여."

"그려, 덕보 자네 말도 철든 소리는 소리여. 헌디, 시방 우리가 허고 있는 소리가 꼭 그리 쓰잘디 웂은 소리만은 아니시. 우리가 사는 것이 혼자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가 서리서리 얼크러지고 설크러져 사는 것인디, 갑오난 때나 지끔이나 앞으로 나서서 싸우고, 죽어가고 헌 사람덜이 워디 자기 혼자 잘 살겄다고 그리 혔간디? 잘못된 시상 바로 잡어 모다 잘살아보자고 헌 일이제. 앞으로 나슨 사람덜이 믿을 것이 머시겄능가? 자기덜 몸띵이겠는가, 손에 든 총이겄는가? 아니여, 아니여, 고런 것덜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 남은 사람덜 맘얼 믿는 것이여. 뒤에 있는 수수많은 사람덜 맘이 자기덜허고 똑같다고 믿는 그 맘으로 쌈도 허고, 죽기도 허는 것이여. 그 맏음이 웂음사 무신 기운으로 싸와지고,무신 강단으로 죽어가겄어. 지 목심 아깝덜 않은 사람이 워디 있겄어."

"이눔아, 그냥 뚫린 주딩이라고 말 씀벅씀벅 하덜 말고 장수 아재 말씸 명심혀라. 앞으로 나스지도 못헌짜잔헌 눔이 뒷전에서 무신 초라니 방정이냐."

김복동이가 노덕보의 화를 지르고 있었다.

"이눔아, 엎어진 눔 등짝 볿기냐! 드런 눔에 심뽀시."

노덕보는 머쓱해져서 김복동이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나저나 제주도 일언 어처크름 되야가고 있는 심판이까? 소문 들으먼 사람덜얼 무지막지허게 쥑인다는디, 그 사람덜 섬에 갇혀 뺑뺑이 치다가 싹 다 죽는 거 아니까?"

마삼수가 한장수 노인과 강동기를 번갈아 보았다.

"그려... 필시 그리 되기가 쉽겄제."

한장수 노인이 한숨을 길게 쉬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근디 말이오, 싸우자고 나슨 사람덜만 쥑이는 것이 아니라 아그덜이고 여자고 노인네고, 양민덜얼 닥치는 대로 떼몰이럴 혀서 죽이고, 동네도 지멋대로 불질러댄다는 소문이 끝도웂이 퍼져오고 있는디, 고것이 참말일께라?"

마삼수가 미간을 찡등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금메... 고것도 필시 그짓말이 아닐 것이여. 고것이 그냥 떠도는 소문이 아니고 순사덜이 즈그덜찌리 허는 소리도 그렁께로. 그라고, 더러 구해서 읽어보는 신문에서도, 무작정 사람덜얼 죽여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쓰고 있응께."

한장수 노인이 꽁초에 불을 붙였다.

"근디 아재, 나라가 스고 이승만이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더 사람덜얼 심허게 죽여대고, 또요분 일 터지고 난께 더 죽여대고 헌다는디, 고것이 대체 워쩐 심판이다요?"

강동기가 등잔받침에 꽁초를 잉끄려 끄며 물었다.

"고것이야 뻔헌 계산속 아니겄능가. 애당초 제주도에서 쌈이 일어난 것이 반쪽아리 나라세우는 선거럴 반대해서가 아니드라고? 우남 입장에서 보자먼 고것은 영축웂이 자기가 대통령 되는 일얼 훼방놓고 든느 일이라 워쨌그나 나라가 스고 대통령이 되얐응께 워치케 나오겄는가? 그 반대럴 없애자고 더 씨게 몰아치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겄어? 그런 판에 또 여수, 순천에서 군인덜이 터져 일어나고, 그 기운이 산지사방으로 불 붙어뿌렀시니 워찌겄는가. 대통령이 되자말자 민간인도 아니고 믿거라 허는 군인덜이 들고일어난 것은 우남 입장에서는 받아논 밥상 엎어뿐 격이 아니냐 그것이여. 우남은 체면에 똥칠 헌디다가, 반대세력이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퍼진 심이니 더 씨게 몰아때레 뿌랑구 뽑을라고 허는 것이야 뻔헌 이치제. 허고, 여그 전라도에서도 사람덜 무지막지허게 죽은 것이야 다 아는 일이제만, 여그서 보담 제주도에서 더 악독허게 양민덜얼 떼로 쥑이고 동네 불 질르고 허는 것은 거기가 외지 사람덜 발 끊긴 섬이기 땀세요."

"아재 말씸 들응께 줄기가 잽히는디요. 이승만이는 국민덜 빨갱이로 모라 때레 잡을 생각 만 있제, 국민덜이 왜 그리 일어나는지 알아보고 일얼 지대로 풀어갈 생각은 웂는 갑제라?"

강동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서, 아서. 그 이약 인자 고만혀. 이리 가다가는 우리 다 중죄인덜 되겄다. 그저 속으로만 새겨."

한장수 노인이 손을 저으며 물러나 앉았다.

"니미씨펄, 아무 죄도 웂은 아그덜꺼지 죽이라고 명령허는 눔덜이고, 그러란다고 총질허는 눔덜이고 싹 다 오살육시럴 헐 것들이여. 거머시냐, 문 머시기맹키로 고런 명령허는 대장 눔덜얼 각단지게 팡팡 쏴 죽이는 군인덜이 자꼬 나와야 허는 것인디. 나가 제주도로 못 가는 것이 철천지 한이다."

마삼수가 제 무릎은 쳤다. 그가 말하는 문 머시기는 다름 아닌 박진경 대령을 암살하고 사형당한 문상길 중위였다.

"와따, 아무나 문상길이 되는 줄 아냐? 못 가게 되야 있는 제주도 놓고 헛방구 꿔대지 말고 여기서 빨갱이질이라도 잠 나서봐라."

김복동이가 코웃음을 쳤고,

"이눔아 삼수야, 고런 허풍생이 소리 나불기리지 말고 당장 니 모강댕이 졸르고 드는 서운상이눔이나 어디 죽여봐라."

노덕보가 정통으로 찌르고 들었다.

"와따 참마로, 무신 말덜얼 그리 모지락시럽게 몰아치고 그러요! 분이 솟긴께 그리 말얼 헌 것인디, 그리 말꼬랑댕이를 잡아채기로 헌담서야 무신 말 해묵고 살겄소!"

마삼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되얐어. 되얐어. 인자 참말로 그 이약덜 고만이시!"

한장수 노인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정색을 했다. 그 얼굴이 딴 얼굴처럼 엄하게 변해 있었다.

"알겄구만이라. 진 이약 허시니라고 애쓰셨구만이라."

강동기는 고개를 약간 숙여 예를 차리고는, "그려, 문상길 겉은 사람이 워디 그리 쉽간디..." 혼잣말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문상길 중위를 다 같이 기억하는 것은 제주도에서 퍼져오는 이런저런 흉악한 소문들 중에서 뜻밖의 속 시원한 것인데다가, 결국 그가 부하 하나와 함께 총살 당해버리게 되자 다 같이 애석함과 허탈감을 나누었던 사건이었다. 한장수 노인은 문상길 중위가 사형당하는 장면을 쓴 신문을 구해왔고, 그들이 둘러앉아 한 노인이 가락을 붙여 읽는 그 내용을 귀담아 들었던 것이다.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의 장면은 그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두 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것은 절규한 것도 아니며 호소한 것도 아니다. 단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것일 뿐이다. 뒤이어 손 하사관이 형상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하였다. 집행장이 낭독되자 유언으로

"여러분 훌륭한 한국국민의 군대가 되어 주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는 순간

"겨누어 총!“

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이때 손 하사관의 입에서는

"오오, 삼천만 민족이여!"

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때

"쏘아

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일천구백사십팔년 구월 이십오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기사였다. 그 동안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소문들은 흉흉하기만 했었다. 평소에도 그들에게 제주도라는 땅은 멀고먼 곳이었다. 그런데 사삼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제주도는 더욱 까마득하게 먼 땅이 되고 말았다. 민간인들이 마음대로 오도 가도 못하게 뱃길에 통제가 가해졌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가지가지 소문들은 바람을 타고 오는 양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이다. 섬에서는 매일같이 싸움이 벌어지고, 군경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빨치산들은 산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산간마을들은 닥치는 대로 불길에 휩싸이고, 그러다보니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밤과 낮의 주인이 빨치산과 군경으로 뒤바뀌고, 의심받는 사람들이 수없이 체포되어 여수나 목포로 실려 나와 광주와 순천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문상길 중위의 사건도 그런 소문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아무도 문상길 중위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 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하는 유언에 그 사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 떨림을 느꼈던 것이다.

"와따, 장수 아재 이약허시니라고 목 컬컬혀졌겄다. 이눔, 삼봉아, 이약 들었으먼 쥔 놈이 이약턱얼 내얄 것 아니겄냐?"

마삼수가 지삼봉을 걸고 들었다. 둘이는 나이가 비슷한데다가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같아서 의형제라며 흉허물 없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눔 삼수야, 워째 그리 소가죽낯짝이냐. 이 차운 날 불 뜨끈뜨끈허게 대서 붕알 노골노골허니 풀리게 혀준게로 헌다는 보답이 덤테기 씌우는 것이냐."

지삼봉이도 입심이 만만하지 않았다.

"어이, 삼봉이, 장수 아재 존 이약도 들었고 헌께 뚜부에 막걸리내기 화투나 한판 놀세."

잡기를 즐기는 김복동이가 말했다.

"삼봉이, 그리 허세."

평소와는 달리 강동기가 선뜻 동의하고 나섰다. 그가 장수 아재를 어른대접하려는 것임을 방안 사람들은 다 알았다. 소리를 청해 들었을 때 형편껏 성의껏 대접을 하듯 이야기를 처해 듣고 나서도 성의표시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뚜부 묵자먼 맛난 짐치가 있어야는디, 니 짐치 따로 장만해뒀겄지야?"

때전 요를 방 가운데 접어놓으며 마삼수가 지삼봉한테 확인했다.

"누구 좋으라고 따라 장먼허고말고 혀"

지삼봉이가 챡챡챡챡 소리가 나게 화투를 익숙하게 쳐대며 눈을 흘겼다.

"아아니, 짐치가 웂이 생뚜부럴 무신 맛으로 묵어어?"

노덕보가 터무니없이 큰 소리를 질렀다.

"와따, 성님 귀창에 빵구나뿔겄소. 점예 꼬딕어셔 갈치속젓에 버물러 큰 독아지로 짠뜩 혀서 묻어놨응께로 배터지게 잡숫씨요."

지삼봉이가 말하며 재빠른 솜씨로 화투장을 나눴다. 세 명씩 편 갈이가 되는데, 으레 마삼수, 지삼봉, 한장수 노인이 한편이었다. 김복동이와 지삼봉이가 맞수 노릇을 했다.

"딱 삼시 세 판만 돌리는겨. 뚜부 사다묵고 통금 대가기 에로울 것일께. 근디, 을매썩 내기로 헐렁가?"

마삼수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술 두 되에 뚜부 여섯 모로 허제."

김복동이가 말했다. 두 가지 다 최소로 잡은 양이었다. 아무도 더는 말이 없었다. 지삼봉이를 빼놓고 빚돈을 쓰고 있는 네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무리를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나마도 지삼봉이가 책임지는 외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두 판을 내리 김복동이네가 져버려서 더 판을 돌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수야, 가자. 이긴 죄뢰 심바람이냐 혀여 안 쓰겄냐."

지삼봉이가 바지를 허리춤으로 끌어올리며 일어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제가 그런 종류의 일은 나이 아래인 두 사람의 차지였다.

"오늘 군인덜이 제석산을 뒤지고 야단났든디."

한장수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옥산이고 징광산이고 다 뒤졌구만이라."

노덕보가 뚜벅 말했다.

"날은 칩어지고, 워찌들 될란지."

한 노인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메요, 염상진 그 사람도 자신 웂이으면 그리 가차이 왔을랍디여?"

강동기의 말에 한 노인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김복동이도 노덕보도 담배만 삐끔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달음박질치는 거친 소리가 한기를 모래 뿌리듯 하고 있었다. 문풍지가 숨 자지러지게 울어대었다.

"사람 복장 터지는디, 날할라 워찌 요리 땡땡 얼어붙고 지랄발광이까?"

노덕보가 불뚱스럽게 내뱉았다.

"니미럴, 온 시상이 싹 얼어붙어 얼음뎅이가 되야뿔면 속이 씨언허겄다. 근디, 동기야, 농지 개혁은 워찌 될 성부르냐?"

김복동이 강동기를 이윽히 쳐다보았다.

"짐칫국 마시지 마씨요. 떡 줄 놈 하나또 웂응께."

"나라 다시리는 눔덜이고 지주눔덜이고 다 지에미 붙어묵을 눔덜이다. 고것덜얼 싹 다 꼬깜 뀌데뀌 한 꼬챙이에다 뀌어뿌러야겄다."

"그려랴? 성님이 녹두장군이 돼서 한바탕 엎어뿔고 잡소?"

강동기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싸게싸게 짐치 내오니라."

발소리와 함께 이 말이 들리고 곧 방문이 열렸다. 마삼수의 한 손에는 주전자가, 다른 손에는 양푼이 들려 있었다. 마삼수가 방바닥에 내려놓은 양푼에는 찬 기운 머금은 두부가 아래에 네 모, 그 위에 두 모로 담겨 있었다. 노덕보의 침 넘기는 소리가 꿀륵 하고 들렸다. 지삼봉이가 사발 세 개와 항아리 뚜껑에다가 배추김치를 수북하게 담아왔다. 배추김치는 반쪽 난 포기의 윗부분만 칼질이 되어 있었다. 연장자 순으로 술잔이 돌았다. 술잔이 차례 오기를 기다리는 세 사람은 손가락으로 김치를 찢기 시작했다. 두 가닥이나 세 가닥으로 짖겨지는 김치는 먹음직스러웠다. 술을 비운 사람은 다음 사람에게 술잔을 돌려 술을 채워주고는, 손으로 두부를 뭉텅 잘라 찢어놓은 김치로 그것을 둘둘 감았다. 그리고 입을 있는 대로 벌려 생 두부 김치쌈을 밀어 넣었다. 두부도 차고 김치고 차고, 그래서 이빨이 시린데도 오히려 차가운 그것이 참맛이었다. 두부와 김치에살얼음이 사르르 잡히면 그 맛은 한층 기막혔다. 김치고 손으로 찢고, 두부도 손으로 떼 내고, 두부에 김치를 감는 것도 손으로 해야만 제 맛이 나는 그런 것이었다.

"어허, 짐치 맛 한분 기맥히다."

김복동이 달게 입맛을 다셨다.

"우리 제수씨 솜씬디 더 말혀 머 허겄소."

마삼수가 김치쌈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니 참말로 장개는 원제 갈 것이다냐. 귀에 못 백히게 헌 말인디, 니 연장이 참말로 션찮은 것 아니여?"

노덕보가 새로울 것 없는 소리를 또 되씹고 있었다.

"맞어라, 나는 붕알이 웂은 고자랑께요."

지삼붕이가 김치를 찢으며 느물거리고 웃었다. 그는 이미 입산한 지필구의 친동생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먹고 살 길을 찾아 머슴살이를 시작했던 것이고, 부엌일하는 점예가 마음에 있기는 했지만 머슴방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술이고 두부고 김치고 금방 깨끗하게 치워졌다. 사랑방이나 머슴방에서 즐겨 벌이는 겨울밤 잔치가 끝난 것이다.

"인자 가야제."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며 일어섰다.

 

 

3. 평행선

공공기관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그러나 개인상점들은 평일과 다름없이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행색에서도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어른들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차림새도 어제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른바 양력설날이었다. 이중과세를 하지 말자. 읍사무소 직원들이 동원되어 보름이 넘도록 마을마다 주지시키고 다닌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중과세라는 말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글줄이나 깨친 어떤 사람은, ‘하먼, 이중으로 세금을 매기먼 쓰간디. 고것이야 당연지사 중에 당연지사제,’ 하는 뜻풀이를 하기도 했다. 읍사무소 직원들은 이중과세가 양력설과 음력설을 이중으로 쇠지 말자는 뜻임을 입에서 쓴물이 나도록 되풀이해야 했고, 그때마다 "음마, 설이야 음력설을 한분 쇳제 원제 양력설이란 것도 쇴습디여? 설이먼 그냥 설이제 음력설은 머시고 양력설은 또머시다요? 무담씨 있지도 않언 양력설얼 맹글어내갖고 요리 북새질얼 쳐대는지 몰르겄네웨."

이런 식의 면박을 당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금년부터는 음력설을 쇠지 말고 양력설을 쇠도록 하라 그런 말입니다."

"음마, 음마, 참마로 갈수록 요상시런 소리가 나오요이. 누구야 무신 설을 쇠든 말든, 넘 젯상에 배 놔라 감 놔라, 살다본께 별눔에 간섭 다 듣겄소."

"이건 간섭이 아니오. 나라가 정한 법이오."

"머시라고라? 나라가 정한 법?..."

이야기는 대개 이런 상태에서 끝나게 마련이었다.

"하이고, 참마로 염병덜 허고 자빠졌다. 허라는 농지개혁법인지 토지개혁법인지는 안 맹글고 기껀해야 설 쇠는 법 맹글었구마? 허 참, 소가 다 웃을 일이시웨."

"금메 말이요, 있는 즈그눔덜이나 설얼 두 분도 쇠고 세 분도 쇨 쌀이 있겄제, 밑구녕 째지개 가난헌 우리들이야 워디 설얼 두 분씩 쇠라고 혀도 쇨 수가 있어야 말이제."

"양력이라는 것을 일본 눔덜도 좋아혔는디, 양력설얼 쇠고 양력얼 쓰고 허는 것이 무신 이문이 있어야 쓸 것 아니냐 그것이여. 양력을 쓰먼 농사절기가 맞기럴 혀, 일 년 사시절 바뀌는 기운이 맞기럴 혀, 양력 써서 농새 망칠 해만 있제 이문이 머시냐 그것이여."

"맞고말고라. 양력이고, 양력설이고 다 서양눔덜 것인디, 날이 감스로 찬찬허니 보자 헌께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믿을 만헌 사람이 못되는디라. 서양서 오래 산디다가 서양 여자꺼지 마누래로 삼다본께 서양물이 푹 들어서 되나캐나 서양식 따르라고 고런 법 맹근 것 아니겄소?"

"그 말 맞는 말이시. 그 영감탱이 안믿은 것이야 첫닭 울 임시부텀잉께. 독립운동 혔담시로 친일헌 것덜얼 때레잡는 것이 아니라됩데 고것덜허고 짝짜꿍이 되얐을 적에 그 드런 뱃창시 알아뿐 것 아니겄어? 인자 그 영감탱이가 노망을 허는 것이시."

사람들은 읍사무소 직원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이런 투로 입들을 모았다. 그리고 막상 양력설이 되었지만 읍내의 어느 구석에서도 ''이라는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공기관만이 관제휴일을 맞은 가운데 계엄군과 경찰은 여전히 비상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우울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 뼈가 상했으므로 부상병을 순천도립병원으로 빨리 옮겨야 한다는 원장의 말이었다. 그냥 골절된 것이 아니라 총상이라서 불구가 될 확률이 크다고 했다. "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바보같이... 부상병은 파리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면서 총 맞은 것을 죄스러워 했다. 그러나 치료가 끝나고도 불구가 되어버리면 그는 어떤 심정이 될 것인가. 그 죄스러워하던 마음이 원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스무 살이라고 대답했다. 내 잘못으로 평생을 불구로 살게 만든 게 아닌가... 심재모는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죽지 않은 것이 다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비겁한 책임회피로 여겨질 뿐 죄책감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 젊은이는 자신의 지휘 아래서 피해를 당한 최초의 부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상하고 다치게 될 것인가, 후송은 기차로 하는 것이 빠르고 안전하겠지, 심재모는 이런 생각을 하며 빠른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근무 중 이상 무!"

두 명으로 짝지어진 동초가 심재모를 향해 기운찬 목소리로 근무보고를 하며 경계를 붙였다.

"계속 수고하라!"

심재모가 절도 있게 경례를 받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어쨌거나 부하들이 떡을 배불리 먹게 됐지, 생각하며 그는 거리를 휘둘러보았다. 설 기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읍내 분위기처럼 두 부하한테서도 설 떡을 먹었다는 기색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어제 읍내 유지라는 사람들이 군인들을 위해 떡을 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었다. 설이 되었는데 고향으로 설 쇠러도 못 가고 타향에서 고생하는 것을 위로하겠다는 명목이었다. 심재모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설였다. 자발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민폐가 되는 것은 분명했고, 특히 "우리가 이런 일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이냐"는 그들의 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군인들이 자기네들을 위해 봉사하므로 자기네들이 그 노고를 위로하겠다는 투였다. 그러나 그 거슬림을 거절의 이유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건 자칫 트집이 되고, 감정의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이게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임을 읍장님께서 보증하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며 그는 헛웃음을 쳤던 것이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유지들은 따라서 껄껄거렸고, 그는 '떡 한 가지'에 한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중과세 폐지, 양력과세 시행이라는 행정 계몽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싸늘하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문을 닫아 건 공공기관의 모습이 이상스럽게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정부가 하는 일이 이렇게도 철저하게 먹혀들지 않다니, 심재모는 자신의 가슴을 떠밀어내는 차가운 손들을 섬뜩하게 느끼고 있었다.

심재모가 경찰서장과 마주친 것은 읍사무소 정문 앞이었다. 서장의 태도로 보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령관님,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염상구, 아니 청년단장이 금융조합장 집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답니다."

서장은 얼굴이 긴장된 것만큼 빠르게 말을 해치웠다.

"횡포라니, 그 사람 뽐내는 재주라는 칼 던지기를 했다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공갈협박을 한다는 건가요?"

심재모는 그저 심드렁하게 묻고 있었다. 그건 이미 꺼림칙하게 염려하고 있었던 점이었다.

"전화가 걸려 와서 자세한 건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형사부장을 앞서 보냈습니다."

"됐습니다, 들어가십시다. 그런 사건에 형사부장이 갔으면 됐지 누가 또 더 가겠습니까."

심재모가 앞서 걸음을 옮겼다.

"글쎄요... 말을 안 들으면 어떨지, 그게 걱정입니다."

"형사부장한테는 현행범에 대한 체포권이 엄연히 있습니다. 체포권 발동에 범인이 저항하면 공부집행방해죄가 첨가될 것이고, 형사부장이 범인을 체포해오지 못하면 직무유기죄가 적용될 것이오."

심재모의 음성은 냉랭했다. 서장 권병제는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의 깡마르고 큰 키의 뒷모습이 오른쪽 어깨에 매달린 쪽 곧은 M1소총과 함께 어느 때 없이 견고하고 냉정해보였다.

염상구는 유주상의 집에서 거칠 것이 없이 마음껏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유지라는 것들이 작당을 하고, 유주상 이놈이 앞으로 나서서 자기의 청년단장 자리를 빼앗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염상구는 세상이 뒤집히는 낙담과 함께 그놈들은 한꺼번에 칼질을 해서 끝장을 내고 말겠다는 불길이 치뻗어 올랐던 것이다.

"염 단장, 내가 먼저 당한 사람으로 염 단장 기분이 어떤지 잘 아오. 허지만 성질 내키는 대로 해선 안 되어. 이젠 칼질을 하고나서 쫓겨 다니며 살 나이도 아니고, 청년단에서 아주 내쫓는 것이 아니라 감찰부장을 맡긴다는데, 유가 그놈이야 감투 하나 더 쓰자는 욕심일 뿐이고, 실권이야 그대로 염 단장 것 아니냐 그 말이오. 내가 심재모한테 당할 때 염 단장이 나더러 참으라고 했으니 이젠 염 단장이 내 말을 들을 차례란 말이오."

토벌대장 임만수의 그럴 듯한 만류였다. 아무리 성질에 불이 붙었다하더라도 잇속이 빠른 염상구가 그 말을 되새김질하지 못할 리 없었다. 청년단장 자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분하고도 창피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단장 자리를 빼앗기고 옛날 자리로 물러나 앉을 수는 없었다. 비비꼬이는 오기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유가 놈의 콧대를 일단 부러뜨려놓기 위해서라도 한바탕 벌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가 그 결정을 따르기는 따르겄는디, 복날 개새끼맹키로 그냥 당헐 수는 웂은 일이고, 유가 눔헌테 한바탕 곤조통은 부려야 쓰겄소."

염상구가 입 언저리에 잔뜩 힘을 넣는 바람에 위아래 입술이 속으로 말려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야 밑져봐야 본전 장사니까 나쁠 것 없소."

임만수가 꺼진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동의했다. 그래서 그 길로 유주상의 집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야이, 니 엄씨허고 붙어묵다가 좆대감지 뿌라져 꼬드라질 눔아, 안직도 이 염상구가 누군지 몰르겄냐! 요것이 여섯 분째 칼잉께 똑똑허니 봐, 요런 씨부랄눔아!"

마당 가운데서 목청껏 소리치며 염상구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마루 쪽을 향해 민첩하게 던졌다. 칼은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짧게 뿌리며 날아가 기둥에 박혔다. 그 칼이 박힌 언저리에는 이미 다섯 개의 짤막한 칼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내 솜씨가 우띠어? 또 새로 첨부텀 차근차근 일러줄 것잉께 똑똑허니 들어. 첫 분째 칼은 니눔 오른쪽 눈구녕, 두 분째 칼은 니눔 왼쪽 눈구녕, 세 분째 칼은 니눔 심장, 네 분째 칼은 니눔 배꼽, 다섯 분째 칼은 니눔 좆대감지, 요번 여섯 분째 칼은 니눔 붕알 오른쪽 새알얼 맞춘 것이다 이거시여."

염상구는 옆에 서 있는 유주상이를 곧 씹어 먹기라도 할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며 말을 마디마디 질겅질겅 씹어서 뱉고 있었다. 그는 칼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똑같은 말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풀이 했고, 설날이라고 한복을 차려입은 유주상은 버선발로 마당가운데 끌려 나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독기가 질질 흐르는 말을 꼼짝없이 다 듣고 있었다. 염상구는 나지막한 소리로 그 말을 질겅거리고는 다시 느닷없이 목청을 뽑아 온갖 상스러운 욕을 섞어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은 다음 왼손에 몰아 쥔 칼을 뽑아 던지는 것이었다. 유주상의 식구들은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고, 대문이며 담에는 동네사람들의 얼굴이 겹으로 매달려 있었다.

"야이, 니눔 딸년허고 붙어묵다가 좆대감지 뿌라져 뒤질 눔아, 개새끼도 지 밥통 차먼 쥔이라도 물어뜯고 뎀비는겨, 요런 개좆 겉은 눔아. 니눔이 날 개만치도 못허게 보고 내 밥통 뺏을라고 혔제! 에라이 똥구녕으로 바람 넣어 뱃대지 터쳐 쥑일 눔아! 나가 바로 염상구여. 요것이 니눔 붕알 왼쪽 새알 맞칠 일곱 분째 칼잉께 똑똑허니 봐!"

염상구의 손에서 다시 칼이 날아갔다. 그때 형사부장이 대문께의 사람들을 헤치며 헐레벌떡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이, 상구, 아니 염 단장!"

다급한 김에 이름을 불러버린 형사부장은 얼른 직함으로 고쳐 부르며, 의아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사람이 서너 명쯤 칼을 맞거나 총을 맞고 나자빠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성님, 워찐 일이시요?"

염상구가 비웃음 서린 얼굴을 뒤로 돌렸다.

", 장 부장님, , 계엄사령관은..."

유주상이 말을 더듬거리며 허둥지둥 형사부장의 뒤로 붙어 섰다. 그 황망한 꼴을 보고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끌끌 혀 차는 소리와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조심스럽게 번져갔다.

"가세, 사령관이 부르네."

"잡아오랍디여? 나도 볼일 다 봤소."

염상구는 기둥을 향해 느린 걸음을 옮겨놓았다.

", 장 부장님, 저놈이 칼을 던지며 날 공갈협박하고..."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리제라. 누가 굴러온 돌 신세에 백힌 돌 빼라고 그럽디여?"

형사부장이 유주상의 말을 무지르며 눈을 흘겨 치뜨고는 돌아서버렸다. 기둥에 박힌 칼 일곱 개를 다 뽑은 염상구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유주상에게로 다가갔다.

"내 칼에 맞은 자리넌 앞으로 시나브로 썩어 들어갈 것이다. 워째 그런지 아냐? 내 칼에는 귀신이 붙었다 그것이여. 나가 미리 말헌 자리에 영축웂이 칼이 꽂히는 것얼 니눔 눈으로 똑똑허니 봤지야? 고것이 다 나가 허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허는 일이여. 니눔 좆대감지넌 오늘 밤부텀 못 쓰게 될 것이다. 좆대감지고 붕알 두 쪽 새알이고 칼 맞어 귀신 붙어뿌렀응게 슬 리가 있겄냐. 내 말이 그짓말인지 오늘 밤에 니 마누래 뱃대지에 올라타 봐라."

염상구가 째진 실눈으로 유주상을 노려보며 나직나직 한 말이었다.

 

여우목도리를 코 언저리까지 밀어올리며 낙안댁은 잔기침을 하고 있었다. 한속이 들며 찬바람이 전신을 싸고 도는 것이 아무래도 구들장 짊어질 만큼 몸살이 도질 징조였다. 몸치장만을 위해 여우목도리를 두르고 나온 것을 낙안댁은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추위를 막고 한속을 푸는 데는 여우목도리가 긴 털목도리를 당하지 못했다. 긴 털목도리로 머리를 감싸면 따라서 귀마개가 되었고, 나머지로 목을 감아 돌리면 코까지 감싸게 되었다. 그러나 기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털목도리를 가지러 갈 수가 없었다. 변호사를 만나면서 천하고 볼품없이 털목도리를 감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낙안댁은 몸을 푸들 떨며 여우목도리를 또 코언저리로 밀어 올렸다. 여우의 유리 눈이 햇빛을 반짝 되쏘아냈다. 코로 맞바람이 통하면서 속살이 으실으실 추워지고 있었다.

"숭악헌 물건들..."

낙안댁은 혼잣소리를 흘리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병이 날 만도 하다고 스스로 진단하다가 불현듯 그들의 생각에 부딪쳤던 것이다. 유지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보증서에 도장 찍기를 외면하고 말았다.

"유지급으로 최소한 다섯의 도장만 받아오면... 장담은 못해도 일심에서 풀려날 가망이 보입니다. 공직자의 보증이면 더 효과가 큽니다."

변호사의 말이었다. 다섯이야 누워 떡먹기다. 그녀는 남편이 풀려날 길이 환하게 열려 있음을 보며 기차가 느린 것을 조바심했었다. 그러나 그건 엄청난 오산이고 착각이었다. 막상 사람들을 찾아나선 그녀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냉혹한 인정의 얼음벽에 이마를 부딪쳐가며 절망적인 현기증에 비틀거려야 했다.

"원래 공직자란 공정한 자리를 지키기에 공직자라 했는데, 공직자가 개인에 대한 보증을 서는 것은 위법입니다."

읍장의 말이었다.

"글씨요, 보증을 서줬으면 좋긴 좋겄는디 말이요이, 고것이 따른 문제도 아니고 사상문제가 되야분께로 내 뜻대로 되덜 않는구만이라."

윤삼걸의 말이었다. 예닐곱 명을 찾아다녔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 그런 식으로 발뺌하고 외면해버렸다. 그들은 모두 남편과 친하다는 사람들이었고, 남원장에서 기생 끼고 사흘거리로 술판을 벌이던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사람 같은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었다. 자애병원 전 원장이었다.

"당연히 보증을 서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머니도 아시다시피 제가 지난번일로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집행유예도 형은 형인데, 형을 사는 몸으로 보증인 자격이 있는지가 문제고, 더구나 제가 보증을 섰다가 오히려 정 사장님한테 불리하게 될까봐 그게 걱정입니다. 변호사한테 일단 알아보시고, 좋다고 하면 언제라도 도장을 찍겠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더니 변호사는 전 원장은 자격이 없다고 했다. 결국 보증인 서명은 한 명도 받지 못하고 순천걸음을 나서게 되었다. 아아, 세상 인심이란 이런 것인가. 낙안댁은 참담한 심정으로 이 탄식을 수십 번도 더 곱씹었던 것이다. 거절을 당하고 돌아서면서는 배신감이 일으키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며 그 탄식을 토했고, 더는 찾아갈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절망감이 몰아오는 상심을 이겨내지 못하며 그 탄식을 뿌렸고, 신원보증인을 세우지 못한 남편의 재판이 어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는 고적감에 빠져드는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 탄식을 앓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 탄식은 솟아올랐고, 그때마다 가슴은 긁히고 멍이 들었다. 믿을 것은 돈뿐이다. 그녀는 다시 이 다짐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돈은 그녀가의지하고 있는 유일한 지팡이였다. 어디 두고 보자. 너희 놈들 없어도 기어코 일심에서 풀려나고 말 것이다. 술도가를 다 팔아 없애서라도 일심에서 풀려난단 말이다. 그녀의 마음은 각오인지 오기인지 모를 것으로 서릿발처럼 차갑게 일어서고 있었다. 멀리서 기적이 올려왔다. 낙안댁은 돈 보따리를 겨드랑이에 바짝 끼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요. 신원보증인이 필요한 건 내가 맡은 일만이 아니라 검사영감이나 판사영감이 일 편하게 처리하는 데 필요한 겁니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변호사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시상 인심이 그리 독허고 야박헌지는 첨 알었구만이라. 긍께 워쩔 것이요. 안 될 일 잡고 실갱이 헌다고 될 일도 아니고, 보증서 대신 비용을 더 써서라도 지발 일심서 풀려나게만 해주시씨요."

낙안댁은 성급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글쎄올시다... 이게 딴 사건도 아니고 사상문제가 돼놔서..."

변호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눈을 내리감았다. 낙안댁은 그만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변호사의 일거일동은 그대로 가슴에 와 박히며 감정의 명암이나 농담을 제멋대로 지배했다. 낙안댁은 숨길을 고르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사상, 사상, 그놈의 소리만 들으면 발작이 일어나려고 했다. 그 모양도 형체도 없고 그래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이 아들을 망치고 들더니만, 이제 자신과 남편을 옭아매서 몸 고생 마음고생을 이리 시켜가며 집안을 망치려 들고 있었다. 변호사의 입에서도 유지라는 것들의 입에서도 '사상문제'라는 말이 으레 나왔고, 그러다보니 어느덧 남편이 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낙안댁으로서는 그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가 자석이 불쌍혀서 돈을 준 것인디... 아니구만요, 아니어라."

낙안댁은 황급히 말을 삼키고는,

"좌우당간 변호사님 심으로 안 될 일이 웂을 것잉께 내 일이다 생각허시고 폴 걷어붙이고 나서주시씨요."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하게 말을 했다. 그녀로서는, 부모가 자식이 불쌍해서 돈을 준 것뿐인데 그것이 왜 죄가 되느냐는 말을 혀가 닳도록 자장하고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그 말의 되풀이를 영 듣기 싫어했다.

"더 난처한 문제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변호사가 젖혔던 몸을 바로잡았다. 낙안댁은 엉겁결에 자리를 고쳐 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또 무슨 문제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하면서 현기증이 일었던 것이다.

"그 무당 쳐녀 말입니다, 서로 말을 맞춰야 하는데 영 말을 듣지 않아요."

"글먼 워째야제라?"

낙안댁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곧 나하고 면회를 하게 돼 있으니 아주머니도 함께 가서 어떻게든 마을을 돌리게 설득시켜야지요."

"영 말얼 안 들어뿐먼 워치케 됩니껴?"

"그야말로 골치 아파지지요. 아주머니도 재판을 받아야 하고, 그렇다고 정 사장님이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거짓으로 꾸민 죄를 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 되면 죄가 제일 가벼운 게 무당 처녑니다."

"아이고, 신령님..."

낙안댁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흘러나온 소리였다. 염상구에게 매질로 낙태를 시키게 한 죄의식이 머리를 쳤고, 소화가 신령님의 영험을 받아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앙갚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변호사가 소화에게 요구한 것은, 사건조사에 맞도록 모든 일이 낙안댁이 아닌 정 사장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것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화라는 젊은 무당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야 빨리 풀려난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일을 간단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모두에게 이롭다, 별의별 말로 다 설득하려 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별것도 아닌 사건인데 봐주려고 해도 피고인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데무슨 수로 봐주느냐며, 검사는 진술부터 일치시키라고 짜증스러워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이치였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했던 것이 실패가 되면서 큰 문제로 둔갑하자 변호사는 신경질이 오르고 있었다. 예상보다 한결 많은 변호비를 이미 수중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젊은 무당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일이 질질 늘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변호사는 그 무당을 미워하지는 못했다. 얼굴이 핏기 없이 파리하긴 했지만 그 미모가 눈길을 사로잡았고, 예사롭지 않게 사리 분명함이 마음을 이끌리게 했다.

"가십시다. 시간이 다 됐어요."

변호사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워치케 해야 헐까요?"

낙안댁은 따라 일어서며 울상을 지었다. 소화를 만난다는 것이 이상스럽게도 두렵고 겁이 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그녀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낙태를 시킨 일말고도 또 하나 자격지심이 있었다. 이번에 소화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점이었다. 아들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는 것을 생각하면 더없이 미안하고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아들의 애를 임신한 그 음흉한 마음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고 미움이 바늘 끝으로 솟았던 것이다.

변호사는 아무런 대꾸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낙안댁은 그 뒤를 따르며 체념적인 한숨을 물었다. 그러면서, 애초에 남편의 말을 듣지 말고 자기가 죄를 짊어졌어야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를 또 했다. 남편을 사상문제와 연관시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일어나곤 하는 후회였다.

"일반일이 여기 출입하는 건 원래 위법입니다. 특별조치를 한 것이니 일을 틀림없이 성사시키고, 빨리 끝내도록 하세요."

면회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변호사가 낮으면서도 빠르게 한 말이었다. 낙안댁은 가슴의 두근거림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번 고개를 든 불길한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변호사의 면회장은 일반 면회장과는 달리 독방이었고, 그 가운데 책상 하나와 의자 네댓 개가 놓여 있었다. 담배를 빨고 있는 변호사 옆에서 낙안댁은 무슨 수로 소화의 마음을 돌릴 것인지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남자한복 차림의 소화가 나타났다. 그리고 간수가 뒤를 따랐다. 낙안댁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소화와 눈이 마주쳤다. 소화는 멈칫하는 것 같더니 그대로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간수가 손가락질한 의자에 소화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긴 자태 그대로 조용히 자리 잡았다.

"수고하셨소. 곧 끝내리다."

변호사가 간수에게 눈짓하며 무언가를 손에 쥐여 주었다. 간수는 무표정한 얼굴인 채로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얘기하십시오."

변호사가 의자에 앉아 독촉하듯 말했다. 그때까지도 낙안댁은 소화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어떤 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소화가 입고 있는 남자한복에 신경을 썼던 것이다. 남편과 소화가 순천으로 넘겨지자마자 자신을 찾아왔던 여자, 그 여자가 해다 입힌 것일 게 분명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그 여자를 냉정하게 대했던 일이 큰 가시로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날언 치운디 을매나 고상이 많은가?"

낙안댁은 인사치레부터 했다. 그때까지 반쯤 수그러져 있던 소화의 고개가 느리게 느리게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눈도 차츰차츰 크게 뜨이어갔다. 고개가 똑바르게 되면서 제 모습을 갖춘 두 눈은 얼굴이 야윈 탓에 평소보다 한결 커보였다. 그 큰 눈은 정면에 앉은 낙안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낙안댁은 그 눈을 마주보는 순간 왈칵 무섬증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 표정이 없는 창백한 얼굴에 박혀있는 커다란 두 눈, 그 눈에서는 이상스런 냉기와 함께 섬뜩한 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신들린 무당 눈이다! 낙안댁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서 말씀하시라니까요."

변호사가 재촉했다. 그러나 완전히 기가 질려버린 낙안댁은 고개를 들 수도, 무슨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끝꺼지 안 올 줄 알았등마 내 그짓말이 필요해서 왔구만요."

소화의 음성이었다. 낙안댁은 얼결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눈이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가 다 잘못혔소. 나가 쥑일 년이요."

낙안댁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며 이런 말을 토해냈다. 그녀는 자신이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 들고 날 봄스로 말허씨요."

낙안댁은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고개를 들고 소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가 다 잘못혔소. 나가 쥑일 년이요."

소화는 냉담한 얼굴인 채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낙안댁을 주시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요분 일에서꺼정 날 천헌 무당으로 취급혔다가는 신령님 노허심얼 못 면헐 것이요."

"알겄구만요. 나가 다 잘못혔어라."

"신령님 앞에 약조허씨요. 날 정 사장님허고 똑겉이 알겄다고."

"하먼이라, 약조허제라."

"얼렁 입으로 약조허씨요."

"예에, 신령님, 기자님얼 우리 남편하고 똑겉이 모셔 요번 일이 풀리도록 약조 드립니다."

소화의 눈길에 묶인 낙안댁은 합장까지 하고 이렇게 뇌었다.

"되얐소. 인자 변호사님이 원허시는 대로 허겄습니다." 소화는 변호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소화는 들몰댁을 통해 낙안댁의 태도를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 했었는데 면회 한번오지 않았고, 변호사도 자신의 일에는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정 사장이 풀려나면 따라서 풀려나겠지 하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낙태가 되었을 때 병원으로 찾아와 그리도 가슴에 못을 박던 낙안댁의 냉혹함을 생각하면 능히 자신만을 감방에 내동댕이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불안감에 싸여 있는데 변호사가 말을 맞추기 위한 거짓말을 하라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낙안댁을 한 그물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낙안댁이 끌려들지 않으려면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일도 돌보게 될밖에 없는 일이었다. 낙안댁을 끌어들이기 위해 변호사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정하섭에게 지향 없이 끌려가는 마음과, 낙안댁에게 버림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것과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라고소화는 구분 짓고 있었다. 처음의 몸가짐이 전혀 흐트러짐 없이 곧게 앉아서 변호사의 물음에 답하고 있는 소화를 낙안댁은 여전히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대한 그녀의 모습은, 돈 전대를 허리에 차느라고 치마를 걷어 올리며 볼을 불게 물들이던 처녀가 아니었고, 낙태를 하고 몸져 누워 가슴 아픈 소리에도 아무 대꾸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던 색시도 아니었다. 오늘의 모습은 그 누구의 힘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괴기를 품은 마당 소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무서운 괴기가 우리 집에 미치지 않게 꼭 뒷수발을 해서 남편과 함께 풀려나게 해야지, 하고 재삼 마음을 다지고 있는 낙안댁은 벌교를 떠나올 때보다 훨씬 심해진 한속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고흥반도를 왼쪽에 품은 보성만에 한겨울의 낙조가 선연한 적황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닷물 위에 싱그러운 붉은 황금빛 낙조가 반짝이는 윤기를 튕기고 있는 보성만은 어느 때 없이 풍만한 자태로 넘실대고 있었다. 그건 황금이 끓고 있는 거대한 용광로였고, 사위어가는 햇살이 그려내는 뜻 모르게 현란하고 고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현란한 빛의 덩어리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싱싱한 생명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선연한 적황 빛이 반사되어 고흥반도도, 조성면 일대도, 장흥군 해변도 그 빛으로 적셔지는 것 같았다. 주월산 마루에서는 보성만 일대가 한눈으로 바라보였다. 눈 아래 조성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왼쪽으로 고흥반도 해변과 오른쪽으로 장흥군 해변을 거느린 보성만의 물길은 멀고 멀게 펼쳐져 있었다.

"참말로 장관이구만이라."

낙조를 바라보고 있던 조성책 오판돌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보성만에 눈길을 박고 선 염상진의 대꾸였다. 그는 낙조가 그려내는 신비스럽고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것이 바다에 햇빛이 반사되어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대로 벼가 익어 있는 농토였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아니, 그따위 망상은 부질없는 것이고, 저 바다만이라도 저 빛처럼 어족이 풍부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문자 그대로 황금어장이었더라면 그 수많은 사람들은 늘어날 길 없은 땅에 매달려 허덕이지않고 바다를 헤쳐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다는 자갈밭처럼 척박하고 메말라 있었다. 바다는 잡어새끼들을 겨우 기르고 있을 뿐이었고, 그것도 떼를 이루지 못했다. 물고기가 없다면 식용해초나마 많았으면 또 모른다. 해초마저 없는 바다는 황량한 소금물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모래밭이 거의 없이 뻘밭으로만 이어진 해변에서는 고작해야 조개 종류나 뒤져내고, 꽃게를 잡아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뻘밭에서 꼬막을 캐낼 수 있는 것은 빈한한 사람들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꼬막이라는 것이 빈한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꼬막이 자갈밭의 자갈처럼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꼬막을 캐는 뻘밭 일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꼬막은 찬바람이 일면서 쫄깃거리는 제 맛이 나기 때문에 천상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었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가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을 잡아야만 하루 목숨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인네들은 살을 찢는 겨울 바닷바람에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 맨살을 드러낸 채 뻘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소금물을 머금은 뻘의 차가움을 얼음물의 차가움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끈적끈적하고 찐득찐득한 뻘은 장딴지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빠지게 해서는, 그대로 물고 늘어졌다. 뿐만 아니라 뻘 속에는 여러 종류의 조개들이 박혀 있어서 그 껍질들이 예고 없이 다리를 긁어댔다. 한차례 뻘일을 하고나면 조개껍질에 긁힌 상처가일삼아 바늘로 긁어놓은 것처럼 온 다리를 실핏줄로 감고 있었다. 앞이 흰 널빤지 위에 왼쪽다리를 무릎 꿇어 몸을 싣고, 왼손으로 단지와 흰 널빤지 끝을 함께 잡고, 오른발로 뻘을 밀며 오른손으로 꼬막을 더듬어 찾는 겨울바람 속의 여인네 모습은 그대로 극한에 달한 빈궁의 표본이었고, 모진 목숨의 상징이었으며,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이었다. 아니, 그것은 눈물이고, 아픔이고, 한이었다. 염상진은 뻘일을 하는 여인네들을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가슴 푸들거려오는 아픈 떨림 속에서 어금니를 맞물고는 했다. 왜냐하면 뻘밭이 베푸는 크나큰 혜택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이미 농토와 마찬가지로 몇몇 있는 자들의 독점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소금밭이었다. 예로부터 소금에 대해서 행정력을 발동해전매권을 행사한 것은 소금밭이 바로 금밭이라는 증거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쓸 만한 뻘밭이 제공하는 혜택은 털끝만치도 받지 못한 채 소금밭을 일굴 수 없는 몹쓸 뻘밭에서 조개류나 캐내 근근이 연명해가고 있었다.

"분대장들을 집합시키시오."

염상진이 앞을 바라본 채로 오판돌에게 지시했다.

"알겄구만요."

오판돌이 지체 없이 돌아섰다. 염상진은 이 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전진 배치되어 있던 오판돌의 소대와 존재산 줄기에서 합류했다. 그곳에서 다시 병력을 이동시켜 주월산에 이르렀다. 당은 모든 조직의 최우선이며, 당 간부는 그 핵심요소이고, 군대는 어디까지나 당을 호위하고 보호하기 위한 책무를 수행시키려고 만든 조직이었다. 그러므로 당간부는 우선보호의 대상이었지 화선일선에 나서거나 전투 병력을 직접 지휘할 필요가 없었다. 적에 비해 무장도 너무나 허술한 뿐만 아니라 지휘를 맡을 만한 전투경험자가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의 형편은 실전을 해나가면서 동시에 전투 병력화를 꾀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간부당원의 자리만 지키고 앉았다가는 군당자체가 어찌 될지 모를 형편이었다. 공격 목표는 조성 한곳이지만, 공격 목적은 다양했다. 첫째, 인민들에게 해방군의 건재를 알린다. 둘째, 계엄군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전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대중들 앞에 그 위신을 추락시킨다. 셋째, 벌교와 보성의 중간지점인 조성을 공격함으로써 계엄군의 전세와 기동성을 파악한다. 넷째, 공격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부하들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을 일소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고, 해방군으로서의 자신감과 긍지감을 세운다. 다섯째, 무기를 노획하여 전력을 강화시킨다. 여섯째,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부잣집 창고를 파괴하고, 그 곡식을 방출한다. 염상진은 조성을 해방구로 장악할 생각은 없었다. 계엄군의 전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서 시기상조였고, 벌교가 아닌 조성은 해방구로서의 값어치가 별로 없었다.

"집합 완료혔습니다."

염상진은 어느덧 그 현란하던 낙조가 변색하고 있는 보성만에서 눈길을 거두며 천천히 돌아섰다.

"앞으로 한 시간 후에 공격개시요. 그 동안 부하들에게 준비한 저녁들을 먹이시오. 춥더라도 절대 불을 피워선 안 될 것이오."

네 명의 분대장 중에는 하대치와 강동식이 끼여 있었다. 염상진까지 다섯이 각각 십오 명씩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판돌이의 조직에 의해 이미 계엄군 일 개 소대의 병력배치는 완전히 파악되었다., 오판돌은 득량에 있는 발전소를 파괴하자고 제의했었다. 염상진은 신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득량 발전소의 파괴는 전남 남부지역 일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었다. 특히 관공서들이 입을 피해는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그건 대상지역을 반이라도 장악할 필요가 있을 때 시행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야산대 활동을 전개하는 입장에서는 그건 무모한 파괴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전기시설이나 통신시설이 작전수행에 방해가 된다면 부분적인 파괴나 차단으로 장애를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익한 행위를 저질러 야산대가 해방군으로서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파괴집단으로 모략 선전 당할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야산대는 진정한 인민의 해방군으로서 인민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그 사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중요한 시설들은 해방의 날이 도래했을 때 역시 유익하게 사용해야 하는 민족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빛이 스러져가는 만큼 어스레한 기운이 그 어디에선지 모르게 퍼져흘렀다. 바다도 연보라색으로 잠겨가고, 들녘도 여린 안개가 낀 듯 흐려지고, 산골도 회백색 어스름에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농담이 차츰 진해지는 먹물을 찍어 붓질을 하는 것처럼 어둠살은 순간순간 그 색조를 달리해가고 있었다. 염상진은 자신이 지휘할 부하들과 함께 바위에 은신하고 앉아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보리가 반 이상 섞인 밥을 김으로 둘러싼 것이었다. 그건 한 덩어리에 짠지 한 쪽씩이었다. 밥은 차가웠다.

"꼭꼭 씹어먹도록."

염상진은 두 번째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는 어두워져가는 산골짜기에 눈길을 보낸 채 밥알이 풀기로 느껴질 때까지 씹고 있었다. 어떤 음식이고 씹을수록 맛이 나고, 아무리 거친 음식도 제대로 씹어서만 넘기면 체하거나 배탈 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생전에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었다. 그건 틀림없는 말이었고, 그는 어려서부터 그걸 몸에 익혔다. 밥을 오래 씹으면 그것이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잡곡밥이든 달치근하고 고손한 맛이 감돌고, 그 맛은 새로운 식욕을 일으켜주었다. 반찬이 없는 밥일수록, 먹기가 험한 밥일수록 꼭꼭 오래 씹어 먹어야 했다. 염상진은 밥을 오래도록 씹으며, 일월인데다가 야산대 생활을 하면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없는 다행과 천행으로 여겼다. 십이월로 접어들면서 곡식이 바닥나기 시작한집들이 숱할 것이다. 그때부터는 시래기죽을 끊여야 하고, 일월을 넘기며 죽거리마저 동이 나고 말면 술도가를 찾아가 술 찌꺼기까지 다툼하며 얻어다 먹다가, 이월 들어 더는 견딜 수가 없게 되면 벗어날 길 없는 올가미인 것을 알면서도 장리쌀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소작인이면 너나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일월에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율어를 장악하고 나서 보니 그때까지 소작료를 거둬가지 않은 쌀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번 혼란을 겪으며 몇몇 지주가 길이 험한 율어 행차를 못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확인을 거친 다음 거출되는 상례를 어기고 소작인 임의로 쌀을 갖다 바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작인들은 죽을 끓이는 형편이면서도 소작료 낼 벼들은 고스란히 모셔놓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진실해서가 아니고, 지주를 섬기는 마음에서는 더구나 아니었다. 만약 그것을 먹어치웠다가는 내년 소작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지주들도 그 무기를 믿고 느긋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염상진은 그 볏가마니들을 모두 거둬들였다. 그리고 부대에 필요한 최소량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를 가구당 식구 수에 비례하여 고르게 분배시켜주었다.

염상진은 다시 분대장들을 집합시켰다. 사방은 진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곧 작전을 개시하겠소. 다시 강조하지만, 무리한 작전, 무모한 작전을 전개하지 말도록. 인명 우선, 이 점 명심하기 바라오. 분대별 작전이나 전체 작전은 변동 없음. 만약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 끝까지 구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상자가 생기더라도 반드시 운반할 것. 이상."

산개한 다섯 개의 분대는 면 사무서와 지서를 최종 목적지점으로 삼고 다섯 방향에서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월산을 넘어 면사무소까지 직선방향을 염상진이, 그 좌우를 하대치와 강동식이, 그 양옆으로 오판돌과 그의 부하 양점수가 포진할 계획이었다. 그건 염상진을 기점으로 한 오각형 포위공격이고, 오판돌과 양점수 사이가 열려 있었다. 거기가 열려 있는 것은 포위공격 시 최소한의 적의 퇴로를 열어줌을 유념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서가 아니었다. 그쪽은 간척지가 끝나면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지리에 밝은 오판돌과 양점수를 양쪽 끝에 배치한 것은 벌교와 조성 쪽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지원 병력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공격의 주력은 염상진, 하대치, 강동식이었다. 정각 일곱 시를 기하여 조성면의 전등불이 꺼져버렸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습입니다! 적 기습입니다!"

심재모가 비상전화를 받은 것은 일곱 시 오 분쯤이었다.

"침착하라! 적의 병력은?"

"모르겠습니다, 전기가 끊겼습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 포위당한 것 같습니다."

"침착하라니까! 포위공격인지 정확히 확인해!"

통화는 여기서 끊기고 말았다. 심재모는 우선 읍내 병력의 총집합을 명령했다. 비상전화로 보성에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깊이깊이 빨아들였다.

일곱시, 포위공격... 일곱시, 포위공격... 목적은... 조성면 장악...? 그렇게 단순한 전략일까... 일단, 현재 상황이 시급하다. 포위공격이면, 적잖은 병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율어는?’

심재모는 시계를 보았다. 삼 분이 지나 있었다.

"염 단장! 똑똑히 들으시오. 보성에서 율어까지와, 보성에서 조성까지와, 어느 쪽이 더 가깝소?"

"질이야 험해도 율어가 가찹제라."

심재모는 마음을 정했다. 양면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보성에서 조성까지의 거리는 벌교에서 조성까지의 거리보다 두 배라는 것은 이미 파악되어 있었다. 자신이 지원공격을 맡고, 보성의 병력으로 하여금 율어를 치게 하는 것이었다. 포위공격을 감행해왔다면 율어의 병력은 그만큼 줄어들어 있을 것이었다. 율어를 치는 것은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인 동시에 보복공격이었다.

"똑똑히 들어라. 경찰병력을 제외한 전군병력은 율어면을 기습 공격한다. 길 안내자를 두세 명 확보할 것이며, 적을 기습하고 신속하게 빠지도록 하라.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작전임을 명심하라."

심재모가 보성에 내린 명령이었다.

"앞으로 삼십 분 이내에 조성 방면으로 가는 기차가 있소?"

심재모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오 분이 더 지나 있었다.

"없습니다."

경찰서장이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좋소, 난 조성으로 출동할 테니 여길 잘 부탁합니다."

심재모가 M1소총을 불끈 들어올리며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서장과 임만수, 염상구는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심재모는 기찻길의 양쪽에 난 인도로 병력을 구보 시켰다. 국도를 피한 것은 만일에 있을지 모를 매복에 대비함이었고, 철로가 국도보다는 직선거리였던 것이다. 한 시간 이십 분에 걸친 줄기찬 구보였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총성은 별로 격렬성이 없었다. 심재모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건 싸움이 한 고비를 넘겨 어느 쪽인가가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증거였다. 그런데, 수세에 몰린 것이 적이 아니라 아군일 것 같은 예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구보를 하면서 몇 번이나 되짚어보았지만 적들은 사전준비를 치밀하게 해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전기를 절단한 것이며, 저녁밥 때를 이용한 것이며, 포위공격을 한 것이며... 돌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사전에 적의 탐지에 노출된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재모는 일단 아군이 수세에 몰린 것으로 판단하고 전 병력을 간촉 논에 이열횡대로 세워 돌격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공격법이었다.

"적을 무차별 사살하라! 돌겨억!"

M1소총을 잡은 두 팔에 힘을 가하며, 심재모는 앞서서 뛰기 시작했다.

 

지서를 장악한 염상진은 두 명의 군인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은 포로가 아니라 투항을 해왔다. 그들은 사회주의 의식을 가지고 건국준비위원회 시절에 치안대에 일했으며, 그 뒤 청년단과 경찰의 횡포를 피해 군에 입대했다고 진술했다. 그건 젊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대체로 겪은 경로이기도 했다.

"그대들은 부대 안에서 노출된 위험이 있었는가?"

"아직까진 그렇지 않았습니다."

염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투항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적의 예비에 의한, 투항을 위장한 첩자의 침투일 수 있는 위험도 전혀 배제할 수 없었다.

"그대들의 혁명 열정을 높이 치하하오. 그대들은 이 시간부터 나의 혁명동지요. 노출의 위험이 없는 한 계속 부대에서 암약하기 바라오. 그것이 혁명과업 수행에 동지들이 맡을 무엇보다 긴요한 임무요. 그리 할 수 있겠소?"

"..."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두 군인은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대장님, 대장님, 적들이 새로 공격을 해오는구만요. 지원부대 겉은디요."

하대치가 다급하게 뛰어들며 보고했다.

"빨리 몸을 숨기도록. 조직이 곧 동지들과 연결될 것이오."

염상진은 두 군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그들은 허둥지둥 지서를 나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 동무, 퇴각 준비하시오."

염상진이 촛불을 확 불어 껐다. 예상을 앞질러 나타난 지원부대였다. 여섯 번째 목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속하고 안전한 퇴각만이 남은 일이었다. 염상진 부대는 퇴각을 위해위장사격을 가하며 주월산 쪽의 최단거리를 퇴로로 잡았다. 이미 예정된 작전이었으므로 그들의 퇴각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심재모는 면사무소 뒤의 야산까지 적을 추격한 다음 부대를 정지시켰다. 일단 산속으로 물러서고 있는 적을 더 이상 뒤쫓을 필요가 없었다. 어두운 데다가 적들은 이쪽보다 산속의 지리에 훨씬 익숙할 터이었다. 무모한 전투를 감행하기보다는 이쪽의 피해를 확인하고 전열을 정비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심재모는 경계태세로 병력을 배치한 다음 피해상황 조사에 착수했다. 일 분, 일 분 시간이 지날수록 심재모의 마음은 굳어졌다. 반 시간 남짓 걸린 점검 결과는 사망 여섯, 부상 아홉이었다. 일 개 소대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잃은 참담한 피해였다. 경찰 사망자 한 명까지 생각하면 심재모는 밝은 날이 올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심재모가 더 암담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횃불까지 밝혀 들고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적의 사상자나 부상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염상진... 심재모는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아무리 기습이나 포위를 당한 불리한 상황의 전투였다 하더라도 이쪽의 피해가 그만큼 컸으면 적에게도 피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싸움이란 힘과 힘이 부딪치는 것이고, 힘이 부딪치게 되면 쌍방이 피해를 입게 마련이었다. 다만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적의 피해자는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염상진이란 사내는 부상한 부하는 물론 사망한 부하까지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으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존중할 만한 대장다운 면모였다. 그러나 이쪽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피해만 입었지 아무런 전과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염상진이란 사내는 바로 그 일거양득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성에는 병원이 없었다. 아홉 명의 부상병을 벌교까지 후송하는 데 소대병력이 필요했다. 부상자 하나의 들것에 네 명이 동원되어야 하고, 경계병도 따라야 했다. 후송부대를 떠나보낸 다음 심재모는 벌교와 보성에 전화를 돌렸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보고였다.

심재모는 비로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지원부대가 나타나자마자 퇴각을 해버린 염상진의조성 공격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되작거려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기습으로 치고 그리고 빠지는 작전... 분명 노린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그 단순한 작전의 저의를 심재모는 시원하게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생각을 일단 덮어두기로 했다. 심재모는 시계로 눈을 보냈다. 아홉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무릎 사이에 넣고 있는 M1소총을 의자 등받이로 옮겼다. 지서장과 신중사가 죄지은 사람들처럼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심재모는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싸움의 성패는 병가지상사일세,’ 그는 그렇게 속말을 하고 있었다.

"지서장님."

", 예에..."

지서장이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앉으세요. 앉아서 얘기해요."

심재모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묻어났고, 지서장은 어물거리며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자들이 말이요, 아까 그길로 곧장 율어면까지 간다면 얼마나 걸리겠소?"

"밤인디다 산길이고 헌께... 지아무리 빨리 걸어도 날샐 임시나 돼얄 것 같구만요."

심재모는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병력을 율어에 투입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너무 경솔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하는 염려가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적이 그렇게 접전을 피해 퇴각함으로써 생기기 시작한 염려였다. 퇴각한 적이 율어의 병력과 합류한 상태에서 아군이 접전을 벌이게 된다면 그건 완전히 작전실패가 될 위험이 컸다. 시간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쓰였다.

"전기가 끊겼는데,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제 불찰로 그만..."

지서장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

",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누구의 소행인지를 밝히자는 것이오. 적이 직접 한 짓인지, 여기 박혀 있는 세포가 한 짓인지, 그게 문제요. 전기 같은 특수시설을, 면내의 전기를 일시에 끊을 수 있는 자, 그건 전문기술자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오. 이 일대의 전기기술자를 대상으로 극비리에 조사를 시작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성책이 오판돌이라 알고 있는데, 그 사람, 어떤 사람이오?"

", 여기 출신인디, 애비 따라 간도살이럴 허고 돌아와 조용허니 잡화상얼 잘허등마, 빨갱이로 둔갑했구만요."

"간도살이?"

"아 예, 간도땅에서 오래 살았구만요."

간도... 그럼 그도 '귀환동포'가 아닌가. 심재모의 의식 속에서는 언뜻 짚이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입산자들을 마을 단위로 분류 검토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데에 비해 회정리 이구가 표 나게 많았다. 그 이유를 묻자,

"원체 귀환동포 마을이라서요"

하는 서장의 대답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귀환동포와 공산주의가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 같은데요."

", 그게 그러니까... 귀환동포라는 사람들이 원체 거칠고, 뭐 그냥...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군요."

서장은 얼버무렸고, 자신도 덮어두었던 문제였다. 귀환동포와 공산주의...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으로서는 그 연관성을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서민영 선생이나 김범우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에 새겼다.

보성에서 전화를 걸려온 것은 새벽 두시였다.

"보고합니다. 작전 무사히 마치고 귀대했음"

"피해는?"

"전무합니다. 전과가 있습니다."

"전과?"

"체포당해 있던 경찰 네 명, 전원 구출했습니다."

"뭐라고? 여태까지 살려뒀더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경찰서장님이 혹시 모른다고 직접 앞장섰는데, 그게 적중했습니다."

"수고했어, 수고했어."

전화를 끊으며 심재모는 허물어지듯 의자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염상진이 세 명의 부상병이 섞인 부대를 이끌고 율어에 도착한 것은 먼동이 터오는 무렵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비보였다. 보성 방면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세 명이 죽고 다섯 명이 부상을 당해 있었다. 경찰 네 명이 탈주했다는 말은 그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심재모... 염상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으며 신음을 씹었다. 그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그런 작전을 펼 수 있단 말인가. 염상진은 두 손아귀에 힘을 가하며 부르르 떨었다.

 

 

4. 야학의 여선생

읍내에는 며칠에 걸쳐서 심재모와 염상진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가 분분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추려놓고 보면 결국 누가 이겼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심재모가 형편없이 진 것으로 소문이 퍼졌다. 그러다가 율어에서 살아난 경찰관 네 명이 심재모에게 감사의 인사를 오게 됨으로써 소문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염상진네한테서 세 집에 은밀하게 전해준 사망소식이 번지면서부터 심재모의 명예는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내린 판정은 '비겼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벌교, 조성, 보성을 제멋대로 넘나들고 오락가락한 연후에 그런 판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심재모는 그런 민심의 동향을 대충 감지하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소문에 신경 쓰기에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연대본부에 사건보고와 아울러 병력충원을 요청해야 했고, 병력보충이 있을 때까지 고흥 주둔 병력의 일부를 조성으로 이동배치 시키고 했다. 그리고 청년단 문제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유지라는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염상구의 횡포를 법으로 처리하라고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무기로 공갈 협박한 죄라는 것이었다. 만약 염상구를 처벌하지 않으면 유주상이 청년단장 자리에 앉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상부에 직접 보고해 염상구를 반드시 집어넣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실 청년단의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기로 예정했던 날이 벌써 며칠째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사령관님도 한분 생각혀보시씨요. 나도 요렇다께 붕알 두 쪽 단 사내새낀디, 내 밥그럭 뺏김스로 빙신맹키로 죽은 디끼 있어야 허겄소. 남자로 한 평상 사는 것이 배짱 놀음이고 오기 놀음인디, 나가 그눔 눈구녕이고 가심이고 푹푹 쑤셔뿔지 않고 그만허니 끝낸 것은 참고 참고 또 참은 것이랑께요. 사령관님, 사령관님이 내 처지가 되얐으만 워쩌셨겄소. 그만헌 오기 잠 부린 것이 무슨 죄냐니께요."

염상구의 말이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 일이 단순하게 처리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지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고, 염상구는 만약 어떤 조치가 취해지면 정말 일을 저지르고 말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유지들 편을 들면 청년단이란 조직 속에 그나마 묶여 있던 염상구와 그 휘하의 주먹패들이 금방 불량패로 바뀔 위험이 컸고, 그렇다고 염상구의 편을 들면 소위 읍내의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어떤 일을 꾸며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간단할 수 없는 일의 현명한 해결이란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심재모는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한편, 유주상은 안팎으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밖으로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유지들이 일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속마음 같아서는 그까짓 허울뿐인 감투를 팽개쳐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초의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을 놓고 번복한다는 것은 염상구 놈의 횡포에 굴복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할 횡포 다 당한 마당에 그건 다시 스스로 체면을 깎는 일일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취할 태도는 속마음을 감추고 강한 척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하나 난처한 일은 유지들이 내세우고 있는 해결책이었다. 그 강경일변도가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해서 밤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더라고 그렇게 몰아가다가 언제 어느 때 또 염상구 놈한테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유지들이 그렇게 강경한 태도로 나가는 것은 다 자신의 위신을 찾아주는 위해서인데 피해당사자가 나서서 적당히 무마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주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서 나날이 속만 타들어가 토끼 똥을 쌀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안에 있었다. 꼭 거짓말처럼 그날 이후로 물건이 말을 안 듣는 것이었다. 그놈 말대로 정말 그놈 칼에는 귀신이 붙은 것일까. 그놈이 괜한 소릴 씨부린 거라고, 귀신이 어디 있느냐고, 그놈이 겁주려고 한 소리라고, 무슨 귀신이 칼에 붙는 귀신이 다 있느냐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강조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루 걸이로 부풀어 올라 나무토막 같은 견고한 힘을 자랑하며 전신이 녹아내리는 쾌감을 주던 그것에 정말 귀신이 붙어버렸는지 형편없이 풀이 죽어 오그라져 있었다. 아무리 색이 동할 기막힌 생각을 해줘도, 아무리 부드럽게 어루만져도, 아무리 아내의 샅에 비벼대도, 그것은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고 봉사였다. 안타깝다 못해 환장할 일이었다.

"당신 워디 아프요?"

아내의 첫 번 째 물음이었다.

"당신 요새 요상허요?"

삼사 일이 지나자 기색이 조금 달라진 아내의 두 번째 물음이었다. 아내가 그럴수록 그건 야속하게도 더 풀죽어들었다.

"당신 딴 지집 보고 있제라?"

표독스럽게 덤빈 아내의 세 번째 물음이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철퍽 갈기고 말았다. 그건 폭력행사가 아니라 그가 내던진 일차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차적인 말로 속앓이 해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굿얼 혀야제라, 굿얼. 귀신이 붙었으면싸게 굿얼 허는 수밖에 웂당께요."

아내가 울먹이며 쏟아놓은 말이었다. 거기에 귀신이 붙어 굿을 하다니, 참 어이없고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는 아내를 윽박질러 눌러놓았다. 그런데 그것은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놈 말마따나 점점 썩어 들어가는 것인지 갑자기 뜨끔거리는가 하면 짜릿거리고, 욱씬거리는가 하면 찌르르 당기고는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변소로 내달아 그것을 꺼내가지고 요모조모 찬찬히 살펴보고는 했다. 그때마다 픽 풀죽어 있는 자신의 물건이 그렇고 볼품없고 초라하고 한심스러울 수가 없어 남모르는 비감을 씹고는 했다. 그가 청년단장직을 이제나마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절절한 것은 염상구 놈의 칼 귀신을 떼쳐내고자 함이었다. 칼 귀신을 물리쳐 자신의 물건이 옛날의 그 당당한 기운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공산당을 척결해야 한다는 적개심이나 장래를 위한 정치기반을 다지는 계획쯤은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가 있었다.

"사령관님, 제 생각입니다만, 서로 화해를 붙이는 게 어떨지요."

옆에서 보다 못한 서장이 심재모에게 조심스럽게 제의했다.

"무슨 묘안이 있나요?"

지금 상태에서 화해만큼 좋을 것이 없지만 무슨 수로 그걸 실현시킬 수 있을까 싶어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양쪽에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나서면 그리 어려운 문제만도 아닐 겁니다. 김범우 선생이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 김범우 선생!"

심재모는 귀가 번쩍 뛰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이 물러나 앉고 말았다.

"이런 궂은 일에... 그분이 꺼리면 피차에 말을 꺼내지 않음만 못하잖겠소?"

"그렇기야 하지요. 허나, 이 문제가 확대되면 염상진이가 조성을 공격한 것만큼이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겁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부탁을 해봐야 되잖겠습니까.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니까요."

"그렇지요. 최선이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김 선생이 응할 것 같소?"

"읍을 위하는 일이니까요. 제가 먼저 찾아가 부탁을 할 테니, 사령관님이 다시 전화를 좀 거시지요."

"아닙니다, 전화로 그런 말 하는 것처럼 큰 결례가 없습니다. 나도 서장님과 동행하도록 하지요."

"그러시면 더욱 좋지요."

"당장 찾아가게, 집에 있는지 전화를 좀 넣어보시죠."

김범우는 집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일어섰다.

"우선, 금융조합장이란 사람이 청년단장 자리를 넘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군요. 스스로 극우임을 내세우고자 함인가요?"

사건 전말을 다 듣고 난 김범우가 혼잣말처럼 한 말이었다.

"공갈협박죄로 고소를 하려면 후딱 할 일이지, 그렇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공갈협박죄를 범하고 있군요. 제 생각으로는, 염상구가 금융 조합장한테 정식으로 사과하는 선에서 일을 무마시켰으면 합니다."

김범우는 이렇게 해결 방법까지 밝히면서 궂은 일 맡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내색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젠 체하는 기색도 없이 시종 신중한 김범우의 태도에 심재모는 친근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고 싹수머리웂은 새끼가 지 명대로 못 살고 황천길 갈라고 해필이면 요 염상구 밥그럭얼 채트렀는디, 성님, 성님도 남잔께 허는 말인디, 성님언 가만 있으셨겄소?"

염상구는 게거품을 무는 장광설을 이렇게 끝맺었다.

"가만 안 있지, 잘했네."

김범우가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워메 성님, 그 말 참말이다요? 워따메, 나 속 알아주는 사람은 역시 우리 성님뿐이시."

염상구는 천진스럽게도 좋아하고 있었다.

"상구, 그런데 말이야, 방법이 조금 잘못됐어."

"? 방법이라고라?"

염상구의 좋아하던 얼굴이 그만 굳어졌다.

"자네 직책이 청년단장이지?"

"그렇제라."

"그러면 직책에 어울리게 좀 점잖은 방법으로 했어야지. 그럼 유주상이 콧대 꺾고, 자네 체면 다 세우면서 이런 말썽이 안 났을 거 아닌가."

"참말로, 진작 잠 갤차주제라?"

"자네가 날 찾아왔어야 말이지."

"허기넌 그렇제라."

염상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나간 얘기 다 소용없고,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 속마음을 말해봐."

"니기럴, 유지라는 것덜이 저 지랄얼 허고 뎀비는디, 깝깝허제라."

"갑갑하면, 내가 들어서 해결을 해볼까?"

"성님헌테 무슨 존 생각이 있소?"

염상구는 반색을 하고 들었다. 감투라는 것이 뭔지, 김범우는 피식 웃었다. 염상구의 반색이 공갈협박죄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됨으로써 청년단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김범우는 해석하고 있었다.

"내가 나서면 해결이 되지."

"아이고 성님, 지발 일 매듭 잠 풀어주씨요. 유지덜이 저 지랄발광을 헌께 속으로는 침이 보트요."

"내가 나설라면 자네가 날 도와야 하네."

"하먼이라, 무슨 일이고 시키는 대로 허제라."

"그럼 됐네. 유지들이나 유주상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네."

"고것이 먼디요?"

"유주상이한테 잘못됐다고 한마디 사과하는 일이야."

"물팍 꿇고 빌라 그 말이요?"

염상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아, 무릎은 무슨 무릎을 꿇어. 그냥 입으로 잘못했다고 한마디 하는 거야."

염상구를 밀어 치듯 김범우도 언성을 높였다.

"알었구만요. 나넌 또 물팍 착 꿇고 엎디려 비는 것인지 알었제라. 그냥 입으로 허는 것임사 열 분 백 분도 허제라. 그 말 험스로 속으로는, 니미 붙어묵어라, 니 애비 좆이다, 욕을 혀도 지눔이 알 게 머요."

"더 심한 욕을 해도 그거야 자네 맘이야."

"되얐소. 성님. 성님 말씸대로 나가 점잔허니 사과헐 것잉께 일만 풀리게 혀주씨요."

김범우는 유주상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그는 차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황당무계한 하소연까지 했다.

", 그건 이제 염려하실 게 없는 문젭니다. 귀신은 주술을 건 사람이 주술을 풀어야 하는 거니까 염상구의 사과를 받아들여 화해를 하시면 깨끗하게 없어질 증상입니다."

김범우는 솟아오르는 웃음을 눌러가며 그럴 듯한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귀신은 무신 귀신이어라. 싸카쓰단에서 나헌테 칼 던지기럴 갤차준 사부님이 써묵은 방법을 나도 써묵어본 것이제라. 그 사부님 말씸이, 사람이란 것이 원체 간사시럽고 요사시런 짐승이라 지헌테 해로운 소리에는 꼼짝을 못허게 되야 있다는구만요. 그려사 사부님은 오기부릴 사람이 생기먼 칼을 던지고 나서 귀신을 폴아묵고 혔지라. , 유주상이 자석, 자지가 말얼 안 들어 애께나 쎅엤겠다. 속이 씨이언하다! 근디 말이요, 성님. 성님은 워찌그리 후닥딱 둘러붙였습디여? 성님 그짓말허는 기술이 나보담 웃질인디요? 성님하고 둘이서 점쟁이나 나설께라?"

"예끼 이 사람, 싱겁긴."

김범우는 염상구의 어깻죽지를 철썩 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방 안에는 제철이 지난 '귀국선'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옷, 사셔서셔소쇼수슈스시, 이응,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지읒..."

하나로 어우러진 여럿의 목소리가 노랫가락처럼 추운 어둠 속에 퍼지고 있었다. 서민영이 운영하는 야학인 교회당이었다. 돌로 지어진 교회당 건물은 어둠에 묻혀 그 윤곽이 지워져 있었다. 밝은 때는 정면의 중앙 상단에 크게 음각된 '벌교교회당'이란 글씨보다 먼저 눈에 띄는 왼쪽 문 옆의'1939'라고 새긴 숫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가 탄생한 지 일천구백삼십구년째에 세워진 그 교회를 서민영은 야학으로 빌려 쓰고 있었다. 가락을 이룬 여럿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흐린 불빛을 담은 창문들이 겨우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히읗, 하햐허혀호효후휴흐히."

하나로 합쳐져 흐르던 목소리들이 여기서 끝났다. 넓은 교회당 안에 문득 침묵이 가득 찼다.

"네에, 아주 잘들 했어요. 그렇게 잘들 왼 것처럼 손으로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알겠어요?"

이지숙이 정다우면서도 엄한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에-"

서른 명 가까운 학생들이 입을 모아 길게 대답했다. 남녀가 합해진 그들은 구구각색이었다. 빨간 댕기를 드리운 처녀가 있는가 하면 단발머리 소녀가 있었고, 상고머리 총각이 있는가 하면 빡빡머리 소년이 섞여 있었다. 그렇듯 나이가 서로 다른 그들이 읍내의 여러 동네서부터 추위를 무릅쓰고 와 한자리에 모여 앉은 공통점은 글을 깨쳐 무식을 면하고자 함이었다.

"네에, 좋습니다. 그럼 추운 것을 조금만 더 참고, 이번에는 다 같이 구구법을 외어보도록 하겠어요. 자아, 다 같이 시이이작!"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이 사 팔..."

모두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합해져 울리기 시작했다. 이지숙은 그 울림이 슬픔인 듯 서러움인 듯 가슴을 적셔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난이란 육신을 배고프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굶주림을 모면할 길이 없는 빈한 속에서 배움을 얻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봉건사회의 착취계층은 그 상관관계를 교활하게 이용함으로써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까지 대대로 향유할 수 있었다. 대중 착취로 부를 축적함과 아울러 대중무지화로 사회의식이 잉태될 시부터 말살해나갔다. 대중의 무지는 개별적인 굴종과 기회주의만을 낳을 뿐이었다. 그 토양 위에 착취계급의 영속적 지배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은 응집력이 없는 모래와 같다. 모래밭을 응집력을 가진 흙으로 변화시키려면 끊임없이 물길을 대야 하는 것이다. 그 물길이 바로 가르침이고 일깨움이었다. 사회의식을 획득해가고, 확대해가는 대중의 응집력-그것은 혁명의 무한한 잠재력인 동시에 원동력이었다. 일제 치하를 거치며 대중들은 일단 왕권의 절대 신성이라는 허위를 깨닫고, 더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끔 되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이 깨닫게 된 인식의 발전이었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사회의 거부, 그 인식은 바로 그와 반대되는 정치, 사회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래가 흙으로 변해가는 대중 응집력의 싹틈이었다. 그 상태에서 대중들이 맞이한 것이 해방이었다. 해방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순박하고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반봉건적 정치, 사회적 혁명을 거쳐야만 이룩될 수 있다는 필연적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대중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극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싹터 오르는 대중의 응집력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바꿀 기회를 잃었던 것이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회를 잃었던 것만큼 더 열정적으로 대중의 힘을 혁명의 힘으로 불붙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미 제국주의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것은 제이의 기회상실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어디까지나 건재하고 있었다. 다만 지하로 흐르는 물줄기로 일시적 침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지숙은 그 물줄기의 정의로움과 진실됨을 믿고 있었다. 안창민이 염상진과 함께 그 물줄기가 솟구치게 하는 길을 뚫고 있다면, 자신은 그 물줄기가 더 힘차게 솟구치도록 불을 때고 있음을 이지숙은 확신했다.

"...칠 오는 삼십에오, 칠 육은 사십에이, 칠 칠은 사십에구, 칠 팔은 오십에육..."

학생들은 두 자리 수로 넘어가면서 가락을 맞추느라고 어느덧 필요 없는 말까지 끼워넣 고 있었다. 이지숙은 혼자 웃음 지었다. 학교에서나 야학에서나 그건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시켜도 그건 고쳐지지 않았다. 합창을 하게 되면 자연히 가락이 생기고, 가락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자가 끼어들었다. 이지숙은 언제부턴가 우리가락의 그 자연스러움을 즐기게 되었다.

덧버선을 신었는데도 이지숙은 발이 시려움을 느꼈다. 석탄난로 하나로는 오십 평이 넘는 교회당 안의 추위를 녹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야학도 겨울방학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민영 선생은 학교의 방학에 따라 야학도 방학을 하라고 했었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이니 조금 더 견디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추위를 무릅써온 것이다. 학생들의 요구도 있기는 했지만 이지숙 자신으로서도 더 가르치고 싶은 숨겨진 욕심이 있었다. 그녀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국어와 산술이 아니라 그 공부를 마친 다음에 꼭 한 가지씩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였다. 그녀는 우리의 겻과 서양의 것을 번갈아가며 이야기했는데, 그것들은 건성으로 들으면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나 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을 써서 들으면 하나같이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에 오르는 우리의 이야기로는 나무꾼과 선녀나 심천전 같은 것이 아니고 홍길동이나 임꺽정이었고, 서양 것으로는 엄마 찾아 삼만 리나 왕자와 거지가 아니라 플란다스의 개와 성냥팔이 소녀였던 것이다.

"...구 팔은 칠십에이, 구 구는 팔십일!"

끝에 힘을 모으며 구구법 합창이 끝났다.

"좋아요, 아주 자알 했어요. 아까 말한 대로 오늘부터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운 것을 총 복습한 거에요. 여러분들은 오늘 복습한 것을 잊지 말아야만 글을 읽고 쓰게 되고, 수를 척척 계산할 수 있게 돼요. 방학 중에도 매일 한 번씩 외어 절대 잊지 않도록 해야 해요. 약속할 수 있죠!"

"네에엣!"

모두의 대답이 기운찼다.

"오늘은 방학 날이고 날씨가 너무 추우니까 옛날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할까요?"

이지숙은 넌지시 묻고 있었다.

"안 되는디요"

이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했고,

"오늘 얼어 죽게 추운디도 이약 못 듣는 것이 아까바 이리 왔당께요"

소녀의 목소리가 카랑하게 울렸고,

"하먼, 공부야 무신 재미가 있간디? 이약 듣는 재미에 그작저작 공부도 허는 것이제"

어느 총각의 굵은 음성이 퍼졌고, 그 체면 가리지 않은 말에 여자들 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지숙은 호롱불의 흐린 불빛 속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피워 올리고 있었다.

"좋아요, 학생 여러분들이 추위를 견딜 수만 있다면 난 얼마든지 얘길 하겠어요."

이지숙은 학생들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선상님, 이약 듣기 전에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디요."

남자 쪽에서 손이 불쑥 올라왔다.

"와따, 워째 초치고 그런다냐"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고,

"통시깐에 가고 잡은 거 아녀어?"

뒤따라 나온 목소리였고, 여자들 쪽에서 다시 킥킥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모두 조용히들 하고, 다 같이 질문을 듣도록 해요." 이지숙이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무명목도리를 두른 빡빡머리가 주저하는 몸짓으로 일어섰다.

"저어... 이 말얼 물어야 될란지 워쩐지 모르겄는디요... 어런덜헌테 물어볼 수도 없고라, 생각허다허다가, 선상님이 몰르는 것은 무엇이고 간에 물으라고 허셔서 묻기로 헌 것인디요."

"하 짜석, 밥 다 타뿔라고 사설도 질기도 질다."

누군가가 불뚱스럽게 내뱉았다.

"선상님, 다른 것이 아니고라, 율어럴 차지헌 그 사람덜이 쌀얼 골고로 노놔줘서 죽끓에 묵든 사람덜이 밥해 묵는다는 소문이 읍내에 쫘악 퍼졌는디, 고것이 참말일께라?"

빡빡머리의 말은 낮고도 조심스러웠다. 교회당 안에는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뒤덮여왔다. 이지숙은 잠시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건 사실이에요. 염상진 동무와 안창민 동무가 인민들을 위해 한 훌륭한 일예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어린 학생이 질문을 할 정도가 된 것으로 그 효과는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학생의 입에서 '빨갱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라고 말이 나온 것이 이지숙의 가슴을 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요, 선생님도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그런데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일이니까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여러분도 모두 그런 소문을 들을 눈치 같은데, 나나 여러분들이나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게 될 거예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지숙의 말은 하등 법에 저촉될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가지 목적을 명백한 계산 아래 달성시키고 있었다. 자신도 그 소문을 들었다고 함으로써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안심시켜 앞으로 더 퍼져나가게 하려는 것이었고, 서로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니까 더 두고 보자고 말함으로써 염상진네에게 계속적인 관심을 두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이지숙이 말을 끝냈는데도 학생들은 싸늘한 기운을 그대로 유지한 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녀는 해독하고 있었다. 그건 율어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염상진네에 보내는 지지였으며, 혁명과업의 수행이 성공하고 있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슴 뻐근해오는 감동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나무 전설'을 이야기 해주기로 마음 정했다. 이런 분위기에 그 이야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자아, 여러분! 그럼 선생님이 지금부터 얘길 시작하겠어요. 오늘 할 얘기는 무언가 하면, 대나무 전설이에요. 잘들 들어요, 시작하겠어요.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정님이와 순덕이는 베갯모에 수를 놓고 있었다. 수틀에 팽팽하게 끼워진 동그란 베갯모에는 한 마리 학이 날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학은 거꾸로 나는 모습이었다. 쪽 곧은 다리를 오른쪽으로 모아 뻗치고 큰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은 긴 목을 왼쪽으로 휘어돌리고 있었다. 머리에 찍힌 핏빛 점이 흰 몸체 속에서 유난히도 선명하게 고와보였다. 학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검은 선의 형체뿐인 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래에는 위의 학과는 반대 모습을 한 학의 수본이 그려져 있었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를 마주보는 모습으로 그 긴 부리가 곧 닿을 듯 말 듯 하니 가까웠다. 학은 일부일처로 새끼를 까고 기르며 오래도록 살아가는 수명이긴 새였다. 두 처녀의 수틀 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한 마리씩의 학에는 그녀들이 색실을 꿴 바늘을 한 땀씩 뜰 때마다, 나도 좋은 낭군 만나 학 같은 금실로 오래오래 살도록 해주십소사, 하고 수수백번 되뇐 기원이 서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갯모가 완성되어 둥그런 베개의 양쪽에 붙게 되면, 베개가 구르거나 놓인 위치에 따라 두 마리의 학은 위아래서도 서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좌우에서도 서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부리를 댈락 말락 하고 있게 될 것이다. 두 처녀는 나머지 한 마리씩의 학을 수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날렵한 손놀림으로 그러나 세심하게 바탕천의 올을 살펴가며 한 땀씩 떠서 부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십자수에 비하면 몇 갑절 어렵고 정성이 드는 수놓기였다. 바탕천이 다르고, 바늘의 크기가 다르고, 색실의 배합이 다르고, 수놓는 방법이 달랐다. 십자수는 올이 굵은 광목에다가 일정한 간격을 맞춰 열십자를 만들어가며 수본에 표시된 대로 색실을 바꿔 가면 되는 것이어서 바늘도 길고 굵었다. 그러나 조선 수는 올이 가는 비단에다가 실의 이음으로 실물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서 바늘 한 땀씩이 제각기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하는 변화를 보이는데다 색깔의 다양한 조화를 맞추려면 색실을 수시로 바꿔 꿰야 하는데 바늘마저 짧고 가늘었다. 그러나 역시 십자수는 조선 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름다움으로나 자연스러움으로나 점잖음으로나 무게감으로나 조선수가 월등했던 것이다.

순덕이는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가녀린 한숨소리에 맞추듯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음마, 가시내! 또 한숨이시."

어느새 정님이가 알아듣고 잽싸게 말을 튕겼다. 순덕이는 찔끔 놀랐다.

"아아녀, 나 한숨 안 쉬었는디..."

순덕이는 얼결에 더듬거렸다. 어쩌자고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것인지,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이 야속스러웠다.

"워따 이눔에 가시내, 나럴 귀먹쟁이 빙신 맹글라고 허네이. 글먼, 그 하르르 떨리든 소리가 니 한숨이 아니고 문풍지 떨든 소리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릴끄나?"

정님이가 바늘을 든 손으로 동작을 멈춘 채 옆 눈길로 순덕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덕이는 정님이의 그 매운 눈길에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얼른 눈을 수틀로 옮겼다.

"금메, 나도 몰르게 나온 한숨인디..."

순덕이는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금방 수심이 가득 찼다. 한 번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정님이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책장사를 하며 사람 눈치 알아채는 것 하나는 남다르게 익힌 그녀였다.

", 무신 일 있제?"

정님이가 수틀을 요 위에 팽개치듯 하며 야무지게 순덕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서슬에 순덕이는 주춤 물러나 앉았다.

"아녀, 암 일도 없어, 가시내야."

순덕이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 얼굴에 그려진 어색스러운 웃음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 멍청한 가시내야, 니 나가 을매나 눈치 빠른지 알지야? 이 시상 사람덜 눈 다 속혀도 내 눈만은 못 속힌다는 것 니 알겄제? 그라고, 니허고 나허고는 성제간보담도 더 가차운 사이란 걸 알아야 써. 전에도 니 맴이 쪼깐 요상시러우먼 나가 딱 알아맞쳐뿔고, 또 나 맴이 쪼깐 깔끄장허먼 니가 딱 알아묵어뿔고 안 혔냐? 긍께 무담씨 나 눈 속힐라 허덜 말고 싸게 속맘 털어노라 그 말이여."

"금메, 암일도 아니랑께 워째 이리 사람 잡지고 그래쌓냐."

순덕이가 수틀을 던지며 짜증을 부렸다. 그 얼굴이 곧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님이는 순덕이의 그런 얼굴을 힐끗거리며 더욱 자신에 찬 웃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순덕이의 가슴에 감추어진 고민이 무엇인지 환히 잡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 병을 앓아본 사람일수록 쉽게 감지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알겄어, 알겄어. 근디 말이다, 순덕아."

정님이는 순덕이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니가 말 못허겄으먼 나가 대신 혀주랴?"

마치 어머니가 그러듯이 능청을 떨었다.

"아녀, 아녀. 암 일도 아니라는디 참마로 니 워째 이래쌓냐. 나 집에 갈란다."

좀 체로 화를 내지 않는 순덕이가 얼굴빛을 달리하며 수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동시에 정님이의 손이순덕이의 치마를 거머잡았다.

"가시내야, 니가 상사병 앓는지 누가 몰를지 아냐!"

정님이가 내쏘듯 한 말이었다.

"워쩌?"

순덕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고,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한껏 들이켠 그녀는 무너져내리듯 주저앉으며,

"요 귀신 겉은 가시내야, 니 워쩌크름 고것얼 알아부렀냐."

탄식하듯 말하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번져 있었다.

"멍텅구리 겉은 가시내, 나가 시방 그 병얼 앓고 있는디 니 맴 하나 못 알아묵을 성부르냐."

정님이가 애조 띤 음성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려, 니 눈 쉭일라고 헌 나가 멍텅구리제."

순덕이의 음성도 가라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요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두 개의 수틀에는 한 마리씩의 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근디... 니 가심에 들앉은 사람이 누구제?"

이윽고 정님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순덕이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정남이는 순덕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고개를 숙인 순덕이는 색실만 쥐어뜯고 있었다. 그다지 활발한 편이 아닌 순덕이가 한번 물음에 대뜸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릴 리 없다고 짐작했던 정님이의 입가에 따스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순덕아, 니허고 나하고 새에 감추고 덮고 할 일이 머시가 있냐. 우리찌리 허는 말이제만 다 큰 시악씨가 어떤 총각 가심에 두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냐. 근디, 그 애타는 맴얼 부모헌테 말허겄냐, 성제간헌테 말허겄냐. 그러길래 동무가 있는 것이여. 동무헌테 말얼 혀서 맥힌 속도 풀고, 지가 못허는 일 동무가 새중간에 서서 돕기도 허는 것 아니겄냐. 나는 니가 가심에 품은 남자가 있다니께 똑 나 일맹키로 좋다. 숨키지 말고 얼렁 말해뿌러라."

정님이는 순덕이의 손을 감싸잡고 정겹게 말을 해나갔다.

"참말로 숭 안 볼 거여?"

순덕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 하나또 숭 잽힐 일이 아니라니께."

"빙신, 워쩌다가 니헌테 들켜뿌렀는지 몰르겄다."

순덕이는 정님이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며 안타깝게 말했다. 도저히 그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누군지 밝히는 순간 정님이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놀릴감이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쩌자고 그런 남자한테 마음이 쏠려가는 것인지 자신이 야속할 뿐이었다.

"순덕아, 니가 누구럴 좋아혀도 고것은 니 맴이고, 니 뜻대론께 숭 잽히고 말고 헐 일이 아닌 것이여. 설사 소록도 문딩이럴 좋아헌다고 혀도 다 니 맴인 것이여. 나 말 그리고 못 믿겄냐?"

"아녀, 믿기야 믿제."

"근디?"

"통 입이 안 떨어지니께 그렇제."

"문딩이, 니 가심에 품고 혼자 속…낋에봤자 약도 웂은 속병만 생긴다니께."

순덕이는 푹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쏟아버리고 나면 무언가 얹힌 듯 답답하고 꺼림칙한 가슴이시원해질 것도 같았던 것이다.

"그려, 말해뿔란다."

순덕이가 고개를 치켜들며 앉음새를 고쳤다.

", 얼렁 말해뿌러라."

정님이도 바짝 다가앉았다.

"심 사령관이여."

순덕이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워쩔끄나!"

정님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놀란 그녀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을 때는 이미 말이 쏟아져버린 다음이었다. 순덕이가 입에 올린 사람은 너무나 엉뚱하고 의외였던 것이다. 키가 큰 그 사람이 키처럼 긴 총을 메고 아침저녁으로 책방 앞을 오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했던, 활동사진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멀리 있는 남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순덕이는 그 남자를 가슴에 품게 된 것이다. 순덕이도 자기네 가게에서 그 사람을 매일같이 보아왔을 것이다. 정님이는 비로소 그 남자가 벌교에서 몇 개월째 살고 있다는 현실감을 느낌과 아울러 젊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다. 언제나 군복차림으로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채 빠른 걸음으로 오가는 그 사람을 남자로 마음에 담을 수 있었던 순덕이가 놀랍기도 했고, 가당찮기도 했고, 정님이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순덕아, 말얼 허고 난게 가심이 잠 풀리지야?"

순덕인는 느리게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허먼, 더 심헌 한숨이 터질 것맨치로 속이 답답혀졌다는 것이여?"

정님이는 순덕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가 미친년이제? 올라가지도 못헐 나무 쳐다보고 있는 나가 영축웂이 미친년이제?"

순덕이가 시름겹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덕이는 지금, 자신이 너무 놀라 쏟아 내버린 "워쩔끄나!"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정님이는 눈치 챘다. 애당초 순덕이에게 말을 하라고 졸랐던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해주거나, 또 다른 신경을 태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정님이는 자신이 엉겁결에 뱉아버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덕아, 니넌 올라가지도 못헐 나무 쳐다본다는 말만 알았제, 열 분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 웂다는 말얼 몰르냐? 그라고 말이다, 니가 올라가지 못헐 나무 쳐다보는 신세람사 나도 피차일반이랑께로. 니나 나나 소학교 포도시 나온디다가, 나넌 책방집 딸년에 니넌 과자점 딸년 신세로, 부잣집 아들인 대학생 정하섭이럴 가심에 담고 있는 나나, 읍내럴 쩌렁쩌렁 울리는 권세 가진 군인 대장얼 맘속에 두고 있는 나나 똑겉은 신세가 아니고 머시냐."

정님이의 말에 순덕이는 귀가 번쩍 띄는 것 같았다.

"니 시방 머시라고 혔냐? 이적지 정하섭이 그 사람얼 가심에 담고 있다는 말, 니 참말이여?"

순덕이는 다잡듯이 묻고 들었다. 울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정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덕이는 마침내 정님이가 여태까지 속마음을 감추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하섭이가 티끌만큼도 마음에 없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독헌 가시내, 워찌 그리도 지독허니 맘얼 숨키고 살아지다야?"

순덕이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정님이가 더없이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금메... 그 삶이 서울로 공부허로 떠날 때꺼지만 혀도 암시랑 안혔는디, 요분 난리통에 좌익으로 떡허니 표식내고 읍내에 왔다 간담부텀은 수놓는 힘에 힘아리가 하나또 없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이, 나가 머 헐라고 요 수럴 놓고 있는고, 허는 생각얼 속으로 많이도혔제."

정님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덕이는 비로소 가슴의 답답함이 걷혀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님이는 단순한 동무가 아니고 그 이상의 어떤 느낌으로 마음을 채워오고 있었다.

"인자 니넌 워쩔 것이냐?"

"애만 타제 나가 워쩌겄냐. 니맹키로 아침저녁으로 얼굴이라도 귀경을 헐 수가 있냐, 워디 있는지 알기럴 허니 찾어갈 방도가 있겄냐. 나헌테 비허자먼 니넌 수놀 힘이 펄펄 생기겄다."

"염병헌다, 가시내. 근디, 니나 나나 인자 워째야 쓸끄나?"

"금메, 찬찬히 생각혀봉게로 니허고 나허고 끈허게 동무 되기는 다 틀려묵었다."

"뜽금웂이 고것은 또 무신 소리여?"

"니 서방 심재모허고 내 서방 정하섭이허고 원수지간인디 니허고 나허고도 그리 되는 것 아니겄냐?"

"음마, 문딩이. 누가 듣겄다!"

둘이는 마주 보고 눈을 흘기다가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만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수월래 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동무였다. 산들은 신비스러울 만치 확연한 동그라미를 그려내고는 그 안쪽에다 평평한 땅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 전체적인 모양은 거대한 크기의 사발이었다. 어쩌면 조물주가 물 사발로 한번 쓰고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재모는 생전 처음 대하는 그 신기한 지형을 정신없이 살피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지도를 참고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완벽한 작전을 짤 수가 없어 직접 지형정찰을 나온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산은 훨씬 완벽하고 완상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보다는 지도가 한결 불확실했다. 지도에는 예사로운 등고선으로만 표시된 산들이 실제로는 놀랄 만큼 완전한 천연요새를 만들고 있었다. 산줄기가 끊겨 있는 곳이 보성 쪽으로 한 군데 있다고 했는데, 거리가 먼 탓인지 아니면 초행이라서 지형파악이 서툰 탓인지, 그곳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햐아, 정말 경치 한번 근사허네."

옆에서 들려온 경계병의 감탄이었다. 심재모는 재빨리 경계병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경계병은 총을 축 늘어뜨려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뭘 하는 거얏!"

심재모의 낮은 목소리가 강한 탄력으로 날아갔다. 경계병이 후닥닥 놀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경계병을 꾸짖고서도 그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하늘로 옮겨갔다. 그는 하마터면 경계병과 똑같은 감탄을 할 뻔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구름의 틈 사이사이로 햇살이 곧게 뻗어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것이 율어면 상공이었고, 햇살은 마치 무슨 축복인 것처럼 율어면에 뻗어 내리고 있었다. 둥그렇게 에워싸인 산들의 기묘함과 그 가운데 이루어진 평지의 신기함에다가 몇 가닥의 햇살까지 뻗어 내리고 있으니 그 경치의 아름다움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심재모는 다시 산줄기를 따라 천천히 눈길을 옮기며 지형을 정찰했다. 지형을 살필수록 마음은 착잡해져갔다. 현재의 병력으로 섬멸작전이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확실해졌다. 염상진 부대는 저 아래 율어면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번에도 확인했고, 오늘도 확인한 사실이지만 염상진은 병력을 산줄기에 분산시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산재한 병력을 소탕하자면 율어면을 둘러싸고 있는 산 전체를 포위하는 것이 기본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건 사단병력이나 투입되어야 가능할 일이었다. 소탕이나 섬멸을 전제로 할 때 그 작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비행기로 폭탄을 투하해도, 포부대가 폭격을 가해도 될 일이 아니었다. 심재모는 지형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지난번에 보성의 병력을 율어에 투입시킨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던가를 가슴 섬뜩하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조성으로 병력이 몰렸기 때문에 율어의 방어가 허술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고,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이긴 했지만 지형적으로 볼 때 그건 포위당하기를 자초하는 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이 전 병력을 끌고 율어면으로 들어가 염상진과 전투를 벌인다고 가정할 경우 그 결과는 보나마나 빤한 것이었다. 자신의 부대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봐, 경계병, 돌아간다."

심재모가 몸을 낮춘 채 재빠르게 움직였다. 두 명의 경계병이 같은 자세로 뒤따랐다. 심재모가 적의 경계를 피하기 위하여 지난번의 주리재 쪽을 버리고 광주로 넘어가는 석거리재로 우회했던 것이다. 그 거리는 지난번에 비해 배 이상 멀었다. 심재모는 율어의 북쪽과 서쪽이 산악지대로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섬멸이나 소탕을 우선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그 산악 쪽으로 몰아내는 퇴치작전도 고려해볼 일이었다. 첫째는 민간인 사이에 세포를 부식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둘째는 기습적이고 산발적인 전투를 끊임없이 전개해 적의 병력을 감소시키고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셋째는 적의 병력이 어느 정도 감소되었을 때 퇴치작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미 벌교와 보성 쪽 길목에서는 율어의 고립작전을 위한 검문검색이 강화되어 있었다. 심재모는 어스름을 밟으며 경찰서에 도착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난감한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낮에 지주들이 모여, 음력설 전후해서 정하게 되어 있는 소작문제에 대한 의견을 통일했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고, 이번 반란사건에 가담했거나 연루된 사람들 집에는 일체소작을 내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권 서장의 요약된 보고였다.

"뭐라고요!"

심재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눈이 부릅 뜨이는가 하자,

"도대체 그 자식들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이야! 그 작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따위 결정이나 하고 자빠져 있어! 그것들 정말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구만."

구둣발로 닥치는 대로 책상을 걷어차며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권 서장 이하 네댓 명의 경찰은 꼼짝을 못하고 굳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는 그렇게 화가 난 심재모의 모습을 처음 보고 있었다.

"염상진 쪽에서 퍼져 나온 소문으로 민심이 현혹되고 있는 판에 그에 맞서 쌀을 풀지는 못할망정 지주라는 작자들이 모여앉아 그따위 결정이나 하고 있으니. 바보 천치 같은 작자들,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군."

다소 진정을 한 심재모가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이었다.

"저어, 방이나 들어가셔서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시죠."

권 서장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럽시다."

심재모는 사령관실을 향해 앞서 걸어갔다. 그의 빳빳하게 세워진 뒷덜미에 아직 풀리지 않은 화가 뭉쳐 있었다.

율어면 사람들이 쌀을 분배 받았다는 소문을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벌교만이 아니라 조성, 보성 일대가 그 소문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소문이 으레 그렇듯 그 소문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확대되고 과장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쌀을 받아 죽 세끼는 안 거르고 겨울 한철을 나게 되었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죽을 끓이던 사람들이 전부 밥을 먹고 산다더라 하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끼 밥을 다 찾아먹고 살게 되었는데 그게 전부 보리 하나 안 섞인 흰쌀밥이라더라 하고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소문은, 음력설에 떡을 하라고 또 쌀을 나눠준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소문을 보고로 들으며 심재모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문을 막을 수도,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찾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문은 마치 바람처럼, 안개처럼 떠도는 것이라서 분명 있으면서도 막상 잡히지는 않았다. 소문을 유포하는 자들을 찾아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소문들은 다 알고 있었다. 소문이 나날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일 수가 없었다. 자기들도 쌀을 받고 싶은 부러움에서, 쌀을 받지 못한 오기로 그러는 것이고, 제가짓것들이 그러다가 지치겠지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염상진이란 존재가 없는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염상진이 부대를 이끌고 일정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한 그런 소문은 한쪽에는 유리하게, 다른 쪽에는 불리하게 작용되게 마련이었다. 그 소문이 날로 악성화되어가는 것도 염상진의 부대가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문의 악성화는 분명 민심의 동요인 동시에 이쪽에 대한 불만이나 불신감의 표현이었다. 심재모는 처음 그 소문을 보고받았을 때 염상진이가 결정적인 심리전을 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심상치 않으리란 생각과 함께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심리전에 맞서 싸우려면 이쪽에서도 쌀을 분배해야 했다. 그러나 그 누가 쌀을 내놓을 것인가. 전쟁이란 군대와 무기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일찍이 버마 전선에서 체험한 바였다. 민심의 동조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전쟁은 지게 마련이었다. 일본의 패배는 연합군의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국적을 달리하는 많은 민족들의 외면과 항쟁에 부딪쳐 일본은 필연적으로 패배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연합군의 무력은 그 패배의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었다. 침략전쟁에서도 그러한데 사상전쟁에서 민심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인민의 세상을 이룩한다는 공산혁명을 앞세우고 있는 염상진은 쌀은 나눠줌으로써 그 실천을 보임과 동시에 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민심까지 얻어내려는 심리전을 꾸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지주들은 꼭 어린애들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심재모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일단 그 결정이 소문으로 퍼지기 전에 지주들을 설득해얄 겁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렵더라도 할 때까지는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 방법밖에는 달리 무슨 방법이 없이니까..."

심재모는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그는 눈을 번히 뜬 채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담배도 건성으로 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말이지요, 서장님하고 저하고 둘이서만 나서서 될까요?"

서장은 금방 심재모의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도 심재모가 없는 동안에 이 문제를 놓고 여러 모로 생각하면서 협조자의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게 회의 참석자 명단입니다. 거기에 김범우 선생댁은 빠져 있습니다."

서장이 접혀진 종이를 펴서 심재모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김범우 선생 댁에서 참석하지 않은 건, 그런 회의를 반대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댁 소작인들 중에는 이번 반란에 연관된 사람이 없기 때문인가요?"

심재모의 빈틈없는 물음에 권 서장은 주춤해졌다.

"그것까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연관된 사람이 전혀 없기는 어려울 겁니다."

심재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주들의 명단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김 선생이니, 면목 없고 미안한 일이오. 서민영 선생한테도 협조를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물론 도움이 될 겁니다."

서민영의 생활방식을 지주들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권 서장은 하지 않았다. 서민영의 영향력이 지주들에게 작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회의는 내일 오전 열시에 여기서 열도록 합시다. 난 서민영 선생을 찾아뵐 테니 권 서장님은 김 선생을 만나도록 해주십시오."

"노력해보겠습니다."

심재모는 그 길로 서민영의 집을 찾아갔다. 서민영은 어둠침침한 방에서 무슨 글인가를 쓰고 있었는데, 초점을 맞추느라고 눈을 몇 번이나 껌벅거리고 나서야 심재모를 알아보았다.

"어쩐 일이신가. 일하기 힘드시지?"

서민영이 몸을 꾸물거려 앉은뱅이책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 할 만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건강하시구요?"

서민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는데, 그 눈길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예에, 선생님을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옵고..."

서민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심재모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심재모는 되도록 간단명료하게 이야기를 요약하려고 노력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서민영은 몸을 약간 꿈지럭거리더니 다시 바로 앉고는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한마디를 했다.

"그건 하지 않음만 못한 일일세."

그 말이 심재모의 머리를 쿵 쳤다. 심재모는 서민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 사람들은 지주고 자넨 군인이야.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사람들은 농사장수고 자넨 국책을 따라야 하는 몸이야. 장수는 이윤추구가 그 목적이고, 그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네. 만약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는 장수가 있다면 그는 제대로 된 장수가 아니고, 결국 장사에 망하게 되지. 농사장수인 지주들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 내린 결정을 누구의 설득으로 번복할 것 같은가? 그건 어림없는 소리야. 그들이 그렇게 어설펐다면 어떻게 대대로 지주라는 자릴 지켜왔겠나. 그리고 이건 자네와 직결되는 문젠데, 그 사람들의 행위에는 공산주의 척결이라는 국책에 부합하는 명분과 정당성까지 붙어있네. 그런데 자넨 그 국책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자네가 만약 그들의 결정을 번복시키려 한다면, 그들은 자기들 결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파괴를 곧 자기네 이익의 파괴로 직결시키게 되네. 그때 그들은 무서운 결속력으로 뭉쳐지게 되지. 그 대목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네. 그들은 대부분 이번 사건에서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네. 그들이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된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 자네 행위는 그들의 보복감정까지 가로막는 것이 되는 셈이지. 그렇게 되면 자네 입장은 어떻게 되지? 막다른 골목이네. 자넬 몰이하는 데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현실은 그들의 편이고... 어쨌든 그 일은 그만두는 게 좋겠네."

"선생님, 그렇지만 그들의 결정대로 소작을 뺏게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민심을 잃는 사회혼란의 원인이 되고, 따라서 그건 국책에..."

"아네, 아네. 내 어찌 자네 맘을 모르겠나."

서민영은 손가지 저으며, 격한 감정으로 이어지는 심재모의 말을 제지했다.

"자네가 날 찾아오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염상진과 대치하는 입장에서 자네 생각은 백번 옳아. 나도 자네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말야. 그러나 또 다른 현실을 무시하거나 적대할 순 없는 일이지. 이건 자네더러 이 세상을 약삭빠르게 살라거나, 옳지 않은 일에 야합하라는 게 결코 아니네. 면전에는 할 얘기는 아니지만, 오늘 같은 현실에서 자네 같은 젊은 군인은 귀한 존재야. 난 자네 개인이 아니라 자네 같은 존재들을 귀히 여기고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야."

"황송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 결정은 작은 일이 아니잖습니까."

서민영은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안은 불을 밝혀야 할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서민영이 잔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게. 어떤 해결책이 있긴 있을 것이니."

서민영의 입은 다시 다물려버렸다. 침묵했던 시간에 비해 너무 짧고도 막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심재모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서민영 선생의 말을 전체적으로 더듬어 내렸다. 그분의 말이 포괄하고 있는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선생님, 그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앉으시게, 저녁 먹고 가야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라니까. 밥 때에 오신 손님이 밥을 먹지 않고 간대서야 말이 되는가. 화급한 공무만 없다면 들고 가시게."

", 별일 없습니다."

심재모는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밥 때에 손님을 그냥 보내는 것도, 권하는 밥을 손님이 먹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니라던 할아버지의 말을 심재모는 떠올리고 있었다.

 

심재모가 경찰서로 돌아왔을 때 김범우를 찾아갔던 서장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 여러 말이 있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김 선생이 나서는 건 어렵지 않은데 , 그 일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문제니까 제고해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 이것 참!"

심재모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크게 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결론을 내린 두 사람에게 감탄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서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지주들한테는 연락했습니까?"

"김 선생 말이 그래서 사령관님을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잘됐습니다. 연락 안하셔도 됩니다."

심재모가 돌아섰다.

"아니, 저어..."

서장이 의아스런 얼굴로 주저했다.

"내일 회의는 취솝니다. 기다리십시다. 어떤 해결책이 있긴 있을 것이니."

심재모는 사령관실로 걸어가며 커다란 목소리로 서민영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부터 지주들의 결정이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거친 바람이 되어 읍내를 뒤덮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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