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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5

Bollnow 2024. 3. 11. 12:16

13.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산은 석양의 여린 빛살이 나뭇가지와 잎새들 사이에서 사위어지면 잠이 들었고, 먼동이 트기 전 새들의 부산스런 지저귐을 따라 잠에서 깨어났다. 산이 깨어날 즈음이면 언제나 안개는 산자락을 덮고 있었다. 산을 포근하게 잠재운 이불처럼.

염상진은 다른 날과는 달리 새소리보다 먼저 울리는 선암사의 쇠북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지난밤의 일이 시차 없이 머리를 가득 채워왔다. 무슨 더러운 찌꺼기들이 가득 찬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그건 서로의 주장이 엇갈린 말의 찌꺼기들이 분명했다. 그는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밤늦게까지 피워댄 담배로 목이 죄는 것처럼 압박감이 오고 입안은 껄껄했던 것이다.

염상진은 일어서다 말고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안창민이 달팽이처럼 몸을 말아붙이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잖아도 작은 체구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잠결에 추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덮어줄 것이 없었다. 측은하고 그리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털어내듯 그는 눈길을 돌렸다. 사실 안창민만이 추운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다.

숯막을 나선 염상진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밤은 회색빛으로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유난히 맑게 빛나고 있는 윤곽 또렷한 몇 개의 별이 아직 밤인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십여 미터 걸어내린 염상진 앞에 보초가 나타났다. 그런데 보초는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입을 헤벌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총은 감싸 안듯이 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고함을 눌러 참았다. 전장에서 졸고 있는 보초병의 총을 들고, 그 보초병이 깰 때까지 대신 보초를 섰다는 나폴레옹의 일화를 흉내 내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제대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책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건 지난밤의 일이 연장된 감정 상태였다. 그는 보초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

", 누구여!"

보초가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서서는 잠시 허둥거렸다.

"보초가 잠을 자면 되겠나."

염상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엄하게 말했다.

"워메, 대장님!"

보초는 총을 받쳐 올리며 뻣뻣하게 굳어졌다. 군당을 야산대로 편성하면서 염상진의 호칭은 '위원장'에서 '대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위급상황 앞에서 뒤로 물러나 앉기를 원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근무하게."

염상진은 겁먹은 보초의 눈을 쏘아보고 나서 걸음을 옮겼다. 염상진은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안개는 짙었다. 안개, 이것은 무엇인가.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미세한 물방울이 되어 대기 속을 떠도는 것이다. 구름이 무엇인가. 안개와 마찬가지 현상으로 다만 높은 공중에 형성된다는 차이뿐이다. 쇠북소리는 무엇인가. 청동을 녹여서 울림이 좋도록 만든 금속 기구를 칠 때 내는 소리인 것이다. 부하들이 그렇게만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은 안개에서 우수를, 구름에서 허무를, 쇠북소리에서 죄업을 보려는 식이었다. 그들은 혁명의식과 혈육의 정을 구분 짓는 냉철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하대치나 강동식이 그러한 것은 앞으로 더 혁명의식을 주입시키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유보를 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안창민마저 두 사람의 뜻에 동조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안창민은 사상의 암기화에 그쳤을 뿐 사상의 무장화는 달성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 회의가 일어나게 했다. 어젯밤에 야기된 문제의 발단은 읍내를 다녀온 강동식의 발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식구덜이 젊은 눔덜헌데 각단지게 테러를 당허고 있는디 워찌 보고만 있겠소. 당장 쳐들어가 그눔덜얼 때레잡읍시다."

강동식은 사건보고를 한 것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행동방향까지 정해서 선동을 하고 있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었다. 하대치는 즉각적으로 찬동을 하고 나섰고, 안창민은 논리적으로 반격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들었던 것이다. 비생산적인 토론이 지루하고 피곤하게 엎치락뒤치락 거린 어젯밤이었다. 시간을 벌어 그들의 감정이 어느만큼 진정되기를 기다릴 요량으로 내일 다시 토론에 붙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 내일이 쇠북소리를 따라 오늘로 바뀌어 있었다.

염상진은 개울가에 앉았다. 안개 자욱한 산중의 새벽 정적 속을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맑디맑았다. 물이 괸 수면 위로는 안개가 진하게 내리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는 연기 같은 흐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염상진은 물에 손을 담갔다. 냉기가 일순간에 전신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11월 초입인데도 산중의 새벽 기온이나 물은 겨울을 실감시켰다. 그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그리고 입에 물을 머금어 이빨을 닦았다. 두 번, 세 번 그렇게 했다. 소금을 쓰지 않아서인지 입안의 껄껄함은 가시지 않았다. 물의 냉기가 다소 청결감을 남겨주었다. 손바가지를 만들어 물을 서너 번 얼굴에 끼얹었다. 입안의 껄껄함과는 달리 머릿속의 찌꺼기들이 말끔히 씻겨진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수면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숨이 가쁘도록 여러 모금을 삼켰다. 식도를 타 내리는 시원함이 줄을 긋듯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양쪽 소매에다 얼굴의 물기를 썩썩 문질렀다. 손의 물기는 바지에다 닦았다.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느리게 내뿜었다. 푸른 기운이 가신 변색된 연기가 안개에 섞여들었다. 문득 아내 생각이 떠올랐다. 담배가 촉발시킨 별로 달갑잖은 효과였다. 담배는 생각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면 어느 때는 엉뚱하게도 잠재된 생각을 불쑥 떠올리게도 했다.

어젯밤부터 아내나 자식에 대한 생각을 덮으려고 애써왔다. 그때 염상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그들은, 동생 상구의 덕을 보아 우리집 식구들만은 무사할지 모른다는 오해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염상진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주장이 아무리 완강했다 해도 그건 자신의 지나친 생각 같았다. 그리고 동생 상구가 그런 마음까지 썼을 것 같지가 않았다. 상구는 제 입장을 당당하게 내세우기 위해서 오히려 테러를 이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구만 생각하면 염상진의 의식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상구가 돌아오자마자 손을 썼어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하나는 조직 강화를 꾀하지 못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혈육으로서 정면대치를 피할 수 없게 된 괴로움이었다. 상구는 세뇌만 제대로 되었더라면 한 몫을 단단히 해냈을 재목감이었다. 정신적 단순성과 행동적 기민성은 혁명전사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염상진은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담뱃불은 안개 속에 바알간 포물선을 작게 그리며 물로 떨어졌다. 불이 꺼지는 피지지직 소리가 마치 작은 생명의 마지막 비명처럼 들렸다. 그는 물에 뜬 꽁초를 바라보았다. 물살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깊이로 보나 크기로 보나 웅덩이도 못 될 그 물이 넓고 넓은 바다로 변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담배꽁초는 배로 변해 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망망대해에 뜬 일엽편주라.

한문을 가르치던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자 한다. 그것은 곧 지배의 욕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의 생리는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역사 선생의 말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무산자 혁명,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그늘이나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함이 아닌가. 봉건주의의 지배층과 제국주의의 부유층을 몰아내고, 그래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했는데도 역사는 중심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을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사는 사회주의의 어떤 점을 비판하게 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잘못으로 비판을 받아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될 것인가. 역사 선생의 말은 궤변이 아니었을까. 망망대해의 일엽편주라는 그 감상적 허무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역사 선생의 말은 결코 소홀하게 넘길 수가 없다. 분명 사회는 혁명되어야 하고, 무산자는 그 주인이 되어야 하며, 역사는 새로 박음질되어야 한다. 그 역사가 비판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가 가진 수은주 이하의 냉철성보다 더 차가운 온도의 냉철성을 유지하면 될 것이다. 역사의 비판 생리마저 얼어붙게 해버리게. 그게 바로 사회주의의 완벽성이 아닌가. 그렇다. 역사 선생의 정의는 사회주의 건설 이전의 역사만을 대상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절대다수의 인간을 노예화한 봉건왕조와 절대다수의 인간을 수단화한 제국주의의 역사는 바야흐로 사회주의 새 역사의 비판 앞에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이미 역사적 현실로 실현되고 있지 아니하냐. 그 넓은 땅 러시아가 인민혁명을 창조했고, 그 넓은 대륙 중국이 성공적으로 인민의 깃발을 세워가고 있으며, 한반도의 반 북조선도 인민의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가. 나머지 반마저 인민의 나라로 통일시키는 날도 멀지 않았다. 새 역사는 인민의 편에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인민의 깃발을 세울 그날까지 혁명적 투쟁이 있을 뿐이다. 염상진은 새로운 충족감으로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힘의 용솟음을 느꼈다.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 그들 세 사람의 감상적 주장을 단호히 제지하리라고 마음 정했다. 숯막으로 돌아오다가 하대치와 마주쳤다.

"대장님, 여그 오시능마요. 워디 가셨습디여?"

하대치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태도로 보아 찾고 있었던 듯 싶었다.

", 하 동무, 잘 잤소?"

"야아. 보초가 그러는디, 대장님이 일찍 일어나셔갖고 쩌 알로 내려가셨다고 혀서 찾아나서는 길이었구만이라."

"낯을 씻고 앉았다가 오는 길이오."

"엊저녁에도 늦게 주무셨는디 ……"

하대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어젯밤의 일로 대장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아침밥이 끝나는 대로 강 동무와 같이 내 방으로 오도록 하시오."

염상진은 하대치의 감정 변화를 읽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알겄구만이라, 대장님."

하대치는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대장의 태도는 지난밤보다 강해져 있음이 분명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식구들이 테러를 당하고 있다는데도 대장은 보복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경찰이 아니라 새파란 애송이들한테 당하는 일이 아닌가. 그것들을 잡아다가 결딴을 내버려야 할 것인데도 대장은 고개만 저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네 사람은 둘러앉았다.

"토론은 어젯밤에 충분히 했소. 더 이상 토론을 계속하는 건 비생산적인 시간낭비요. 그러니 지금부터 최종적으로 각자의 의견만을 듣기고 하겠소."

염상진은 세 사람을 한 눈길로 훑었다. 숯막 안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고, 세 사람은 다 헐어빠진 왕골돗자리가 깔린 방바닥에 제각기의 시선을 던진 채 말이 없었다.

"왜 말들이 없소. 안 동무부터 말해보시오."

염상진은 안창민을 지목했다. 사리판단이 빠른 안창민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취할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알 것이고, 안창민의 발언에 따라 나머지 두 사람의 생각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물론 안창민도 대장이 왜 자신에게 첫 번째 발언을 하게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안창민의 눈앞에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어릿거렸다. 강동식의 말로는 중태라고 했다. 정신까지 잃고 쓰러진 그분을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안창민은 그 소식을 듣고나서부터 밥도 거의 먹지를 못했다. 젊은 그들에게 보복을 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테러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들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안창민은 다만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었다. 어느 정도 다쳤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안 동무, 뭘 하고 있소!"

염상진의 목소리가 그의 정수리를 쳤다. 안창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장님 말씀대로 보복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안창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어머님 용서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좋소. 다음은 하 동무!"

하대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 대했던 대장의 태도가 영 께끄름하게 걸려 있었던데다가 안 동무의 발언을 듣자 그만 맥이 풀리고 말았다.

"지도 안 동무허고 같은 생각이구만요."

하대치는 강동식 쪽의 왼쪽 볼에 벌레가 기는 것처럼 스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강동식은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그랬고, 조금 전에 숯막으로 들어서기 전에도 보복하자는 주장을 끝까지 내세우자고 했던 것이다.

"좋소, 마지막으로 강 동무!"

강동식은 어금니를 물었다.

지금 우리가 수행할 일은 그런 사소한 개인감정에 좌우되는 보복이 아니라 더욱 과감한 혁명투쟁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대장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이 상하고 있는 것이 어찌 사소한 일일 수 있는가. 우선 내 가족, 내 피붙이부터 잘살아보자고 혁명도 하는 것이고 고생도 하는 것이지 처자식 맞아죽어 없어지거나 골병들어 병신이 되어버리면 누구 좋자고 혁명이고 투쟁이고 할 것인가.’

강동식은 그 말을 다 쏟아놓고 싶었지만, 그것이 혁명의식의 결여나 박약을 입증하는 개인적 감정주의로 비판될 것이 분명해 어금니를 맞물며 참아내고 있었다.

"다 그런 의견이람사 지도 따라야제라."

강동식은 시선을 떨군 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의 흔들리는 시야에는 아내의 예쁜 얼굴과 두 살박이 어린것의 모습이 어릿거리고 있었다. 염상진은 강동식의 마지못한 대답이 거슬렸다. 분명히 자기 의견을 말하라고 다그치려다가 그만두었다. 고양이도 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않는 슬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겪어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이고 본질적인 갈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감정과 이성의 싸움이었고, 소아와 대아의 싸움이었고, 개인주의와 혁명의지의 싸움이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이 싸움에서 이기게 하는 것이 자기성숙을 기하고 앞으로의 투쟁의지를 키우는 데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좋소, 의견일치를 보았으니 그 문제는 이것으로 일단락 짓기로 합시다. 동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복을 감행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혁명의지가 그만큼 강력하고 투철하다는 산 증거요. 또 그 생각을 이렇게 유보시킬 줄 아는 것도 혁명전사가 갖춰야 할 냉철성의 발로인 것이오. 동지들의 현명한 결정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오."

염상진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대치, 안창민, 강동식의 순서로 박수를 따라 치기 시작했다. 조직의 힘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혁명의 불씨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사의 탄생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염상진은 점점 열도를 더해가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의 가슴에 각인하고 있었다.

"대치 자네, 당최 못 믿을 사람 아니라고?"

숯막을 나서자마자 강동식이 우뚝 멈춰 서며 내질렀다. 하대치는 잠시 멀뚱하니 강동식을 쳐다보았다. 강동식의 말뜻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었다. 호칭 때문이었다. '하 동무'가 아니라 '대치 자네'라는 호칭이 그렇게 귀설게 들렸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눈앞의 강동식이 조금 전의 '강 동무'가 아니라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보였다.

"거 무신 섭헌 소리여?"

하대치는 의당 앞에 붙였어야 할 '강 동무'를 빼고 이렇게만 말했다. 이상하게도 '강 동무'라 부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땅한 다른 호칭도 없었던 것이다.

"섭허다니, 섭헌 사람은 정작 누군디. 나허고 헌 약조는 워쩌고, 붕알이 한쪽밖에 없는 거 맨치로 남자가 워찌 그려."

강동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좀체로 화를 내는 일이 없는 강동식이었으므로 하대치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장 듣겄는디 쩌짝으로 가서 속말 허드라고."

하대치는 강동식의 팔을 잡아끌었다. 강동식은 더디게 발을 옮겨놓았다. 두 사람은 숯가마를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리고 보세."

하대치는 담배쌈지부터 내놓았다.

"자네, 자네 아부지가 그눔덜헌테 맞어 죽었다고 생각해보소."

"머시여?"

하대치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말고 있던 담배를 놓쳐 종이는 종이대로 담뱃가루는 담뱃가루대로 흩어졌다.

"요 사람이 워째 이리 놀래고 이려. 돌아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겄냐 그런 말이시."

"나넌 돌아가셔뿌렀다는 말인지 알았구만."

하대치는 막힌 숨을 토하며 상체를 부렸다.

"안 동무 어무님은 돌아가실란지도 몰르네. 늙은 몸에 그리 무작시럽게 맞었이니. 자네 아부님도 늙으신 몸에 그리 맞었으먼 안심헐 수 웂은 일이고. 자네야 안 봤응께 그렇겠제만, 나는 참아내니라고 애묵었네. 아니여, 자네 성질 같았으먼 그 마당에서 일 저질르고 말았을 것이네. 대장님도 현장얼 직접 안 보고 허는 소린께."

하대치는 마음의 흔들림을 느꼈다. 서둘러 만 담배에 불을 붙였다.

"두고 보소. 나 혼자서라도 기엉코 보복얼 하고 말 것잉께."

강동식은 이를 앙다물었다. 하대치는 묵묵히 담배만 빨아댔다.

염상진과 안창민은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염상진은 앞으로의 효과적인 투쟁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고, 안창민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상학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학습물 준비는 계획대로 되고 있소?"

염상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별 차질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글교본 만들 종이를 좀 좋은 것으로 장만했으면 합니다. 일회용인 삐라가 아니고 오래 간수하며 서로 돌려봐야 할 거라서 지질이 너무 나쁘면 곤란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순천은 위험하고, 광주로 사람을 보내 구해 옵시다. 다른 건 뭐, 철필이나 등사잉크 같은 건 부족하지 않소?"

"등사잉크나 몇 통 구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저어 …… 다른 읍면 당의 학습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그건 상황을 봐가면서 정하는 게 좋겠소.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안 동무가 순회학습을 실시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인데, 형편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우선 학습물부터 배포하고 각 읍면 당에 맡길 수밖에 없겠소."

"알겠습니다. 전 그럼 제 일을 하겠습니다."

안창민은 창문 쪽 벽으로 돌아앉았다. 거기에는 등사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상도 없는 채로 안창민이 안경 쓴 눈을 껌벅거려가며 학습교본을 만들고 있는 도구들이었다. 사범학생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각종 운동은 물론 그림그리기, 풍금치기까지 그야말로 만능이 되어야 했다. 그중에 글씨쓰기인 습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안창민은 몸 생김대로 운동은 그저 보통수준이었지만 그림그리기나 글씨쓰기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손승호가 글재주가 있다면 안창민은 손재주가 있었다. 그들 둘에 비해 염상진이나 김범우는 말재주가 월등했다.

고개를 박고 엎드리는 안창민을 염상진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길을 맞은편 벽으로 옮겼다. 그는 무의식중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건 버릇처럼 몸에 붙어버린 것이었다. 오랜 지하투쟁을 해오면서 가슴 답답할 때마다 깊은 숨을 쉬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남들이 잘못 들으면 한숨을 쉬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어서 특히 부하들 앞에서는 그 숨쉬기를 하지 않으려고 주의해오고 있었다.

염상진은 안창민을 곁눈질하며 앉음새를 고쳤다. 안창민 쪽에서는 철필이 철판을 긁는 소리만 빠른 단음으로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원지를 사이에 두고 쇠와 쇠가 맞갈리는 소리는 염상진의 귀에 언제나 청결하게 들렸다. 그 느낌에는 몇 가지 안 되는 간단한 기구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전단을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기함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염상진은 눈을 내리감았다. 지나온 날들의 기억이 엉켜들었다.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으로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러나 굳이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비록 괴로움에 싸여 있을지라도 결코 후회가 있을 수 없는 자신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해방의 소식과 더불어 지리산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자신을 맞이한 것은 기쁨에 넘쳐 있는 읍민들이었다. 못 먹어 메마르고 억눌림에 찌들었던 얼굴들에 밝은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 밝게 피어난 얼굴 얼굴에 어울리게 활갯짓도 시원스러웠다. 자신을 대하는 어떤 사람의 눈길에서나 신뢰와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인가를 어서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들 자신이 벌써 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친일파나 일본에 붙어먹은 것들은 모두 몰아내고 새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자신은 안창민과 손승호 등을 규합해서 민중들의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군단위 조직을 서둘렀다. 그 조직을 통해 동네마다 이장이 바뀌면서 동시에 건준지부가 결성되었고, 전국 형무소에서 2만여 명의 독립투쟁자들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뒤따라 김태규 선배를 맞이했고, 읍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보냄으로써 독립투쟁자가 겪은 고통을 영광으로 바꿔주었고, 그 아낌없는 박수가 과거의 노고에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을 민중들은 일깨우고 있었고, 조선 인민공화국 선포에 따라 건준지부는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새 나라 세우기는 거침없이 이루어져갔다. 일체의 친일반민족세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민중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인민위원회를 맡은 책임자들은 민중들을 위해 헌신했다. 지주나 유지가 인민위원회에 개입한 경우는 김사용 같은 양심적이고 신망 있는 사람에 한했다. 읍이나 면 단위에서 그들의 죄상유무를 가려내는 데는 새로운 심사나 기준이 하등 필요하지 않았다. 읍민이나 면민들이 먼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침없고 막힘없던 새 나라 세우기는 미군의 점령과 함께 실시된 군정의 조선 인민공화국 부인(否認)으로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정의 인공 부인(否認)은 혁명적 인민의 나라를 파괴하는 1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연속적으로 파괴공작을 펴나갔다. 각 지역으로 군정중대를 파견한 것이 2단계 공작이었고, 그 조직을 이용해 반민족 세력인 경찰과 관리를 재등장시킨 것이 3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경찰을 무장시킨 다음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강압적으로 해체시켜 나간 것이 4단계 공작이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 해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공산당 활동 불법화와 동시에 체포를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 5단계 공작이었다. 공산당의 합법 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회 조직이 다 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가서 보니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투쟁자 삼분의 이가 다시 잡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 들어온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조직이 지하화되자 군정의 폭력적 파괴공작은 가속화되었고, 그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도 무장투쟁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은 남쪽에 미국식 정권을 세우기 위해 혁명세력의 말살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강제적 경제정책인 미곡수매로 인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강제로 시행된 미곡수매와, 관리들의 부정으로 균형을 상실한 배급제도 때문에 인민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그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것이 화순에서였다.

첫 번째 맞이한 해방기념일에 광부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벌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광주를 향해 나아갔다. 광부들의 생활대책을 해결하라는 그 경제성 시위는 군정에 대한 인민들의 최초의 도전인 동시에 군정의 경제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중대성을 인식했던 것인지 군정은 그들의 관례를 깨고 미군들을 직접 내세워 시위진압에 나섰다. 미군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자동차들을 동원해 시위자들을 위협하는 한편 설득작전을 폈다. 곧 요구조건을 들어 해결해주겠으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그 말을 믿고 화순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이 시위를 막으려는 미봉책이고 기만이었다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군정은 한 달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친 광부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들고일어났다. 그 시위는 전보다 사람 수도 많았고, 움직임도 더 격렬했다. 미군들의 대응도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들은 탱크를 동원했던 것이다. 시월이 끝나는 날 미군의 폭력진압은 그들의 잔인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맨몸의 시위군중을 탱크로 밀어붙이며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46101일 대구에서 쌀배급이 중단되면서 터지기 시작한 민중항쟁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불붙어 내려와 마침내 섬진강을 건너 전남으로 그 불길을 옮기게 되었다. 동학농민봉기가 전북에서 일어나 그 불길이 삽시간에 전남을 뒤덮고 섬진강을 건너 경남으로 옮겨 붙은 것과는 반대로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산맥으로 막혀 있는 두 지역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섬진강이었다. 십일항쟁의 불씨를 품은 바람이 섬진강을 건너와 전남에서 제일 먼저 불꽃을 피운 곳은 화순이었다. 화순은 삼팔이남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탄광지대였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주된 경제권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농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탄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왔다. 따라서 사회변혁세력도 삼천여 명을 헤아리는 광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일제 때부터 철도청이 있었던 순천의 철도노동자, 항구로서 일본과의 뱃길이 열려 있었던 여수의 부두노동자와 함께 지방적 특성을 강하게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화순에는 예기치 못한 이변이 밀어닥쳤다. 일본이 물러가면서 사회변동이 생긴데다가 삼팔선이 그어짐에 따라 석탄 소비량이 격감되어 생산이 반으로 줄어버리자 광부들은 날로 심해지는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더구나 쌀을 공출하고 배급을 타먹도록 통제된 군정의 미곡정책 아래서 쌀을 공출한 실적이 없는 그들은 쌀배급마저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날로 심해만 가는 굶주림 속에서 그들이 살아날 가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지난 팔월의 시위에서 속은 분노와 경상도에서 번져온 불길과 함께 일제히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시월 끝날이었다. 그들은 다시 도청소재지인 광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번에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미군들이었다. 언제나 경찰을 앞세우고 자신들은 뒤에서 조정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들이 두 번째로 그 원칙을 깬 것이다.

"우리는 굶어죽을 수 없다, 채탄작업을 정상화하라!"

"석탄생산 복구시켜 우리 생계 해결하라!"

삼천여 명의 광부들이 미군의 저지에 맞서며 구호를 부르짖었다. 그 대열 속에는 광부만이 아니라 때 묻은 머릿수건을 쓴 아낙네들과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아이들도 끼여 있었다. 미군은 또 설득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지난번에 한 번 속은 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설득작전이 먹혀들지 않자 미군 대령이 나섰다. 자기를 믿으라고, 틀림없다고, 요구사항을 금방 해결하겠다고 미군 대령은 자기의 계급을 내세우며 믿어달라고 했다. 전과 다른 높은 사람이라서 광부들은 믿기로 했다. 그래서 시위행진을 중지하고 대열을 다시 화순으로 돌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경찰력이 투입되어 주모자 색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을 똑같은 거짓말로 속이고, 보복행위까지 가하게 되자 광부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총을 가진 경찰들에게 맨주먹으로 맞붙었다. 광부들의 기세에 경찰들은 총을 쏘아댔다. 경찰의 총알에 광부들이 무기로 하여 맞선 것은 채탄작업에서 캐낸 돌멩이들이었다. 아무리 총을 가졌다고 하지만 오랜 굶주림에다가 분노까지 겹친 수많은 사람들의 결사적 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경찰들은 쫓겨 갔다. 경찰의 총에 부상당한 동료들의 피로 분노가 더욱 거세어진 광부들은 또다시 광주를 향해 성난 물결이 되어 밀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에 다다르지 못하고 미군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그들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밀고나갔다. 미군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 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변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돌팔매질을 퍼부으며 미군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돌격대를 만들어 미군 지프차를 공격했다. 여러 사람이 통나무를 지프차 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지프차를 엎어버렸다. 그들은 매일같이 갱도를 뚫어나가는 생활 속에서 통나무 다루기는 그 누구보다 익숙했던 것이다. 막장의 삶을 살아온 고통스러운 인내를 목숨을 내건 살기로 바꾼 광부들의 대항은 악착스럽고 처절했다. 그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목하고 미군들은 도망쳤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또한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글이글 불붙은 석탄덩어리들이 된 그들이 광주로 치달아갈 때 그 앞을 차단한 것은 미군의 탱크였다. 탱크는 그들의 머리 위에다 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포라고 하지만 소총에 비해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차량도 미군들도 몇 갑절 늘어나 있었다. 기동성이 빠른 미군들이 인접 지역에서 동원된 것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돌멩이를 던져도 쇳덩어리인 탱크는 끄덕도 하지 않고 불을 토하는 괴물로 그들을 밀어붙였다.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탱크포만이 아니었다. 탱크포와는 달리 소총은 그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광부들은 굶주린 피를 뿌리며 땅바닥에 죽어 넘어졌고,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들은 동료들을 떠메고 쫓길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그들을 향해 쇳덩어리 괴물은 계속 불을 토하며 육박해오고 있었다. 누가 죽고, 누가 다쳤는지를 알 수도 없이 제자리로 쫓겨 온 그들을 에워싼 것은 미군들과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미군 덕에 되살아나 미군을 위해 충성했던 것처럼 다시 미군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아가며 주모자 색출을 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즉사했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들은 사망자는 물론 부상자들마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십여 명을 주모자로 체포해 갔다. 그러나 광부들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처럼 전체가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여러 개의 조를 만들어 산발적이고 다각적인 공격으로 미군과 경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에 병원치료를 받을 도리가 없는 부상자들은 호박속이나 찧어 붙이고, 쑥가루를 밀가루에 이겨 붙이면서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화순탄광사건의 소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는 들불이 되어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폭력을 불사하는 강압적인 미곡수집에 불만이 쌓일대로 쌓여 있던 농민들에게 탄광사건은 행동을 충동질하는 도화선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밀어붙이며 죽였다는 것은 민족감정을 예리하게 자극시켰고, 경찰들이 또 그 앞잡이놀이를 했다는 것은 그 동안 누적되어온 적개심을 폭발시키게 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벌써부터 경상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이북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환히 듣고 있는 터였다. 미군정의 파괴공작에도 불구하고 인민위원회 조직은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미군은 물러가라!"

"공출제도 쳐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

이런 구호들이 터져 나오며 곳곳에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십일항쟁은 마침내 전라도 땅에서 바람 탄 불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염상진은 주먹을 부르쥐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그 쓰라린 좌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 수가 없었다. 이칠구국투쟁, 단선저지투쟁, 사삼투쟁, 여순투쟁으로 이어지는 아픔과 괴로움은 견디기 어려운 분노고 회한이었다. 그는 그런 감정에 함몰되기보다 내일을 위한 투쟁준비를 계속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야산 투쟁교육을 실시하려는 혁대를 조이며 밖으로 나섰다.

 

노천 플랫폼에는 읍장과 경찰서장을 위시해서 예닐곱 사람이 한 줄로 도열해 있었다. 국회의원 최익승을 전송하기 위해서였다. 최익승은 양쪽 입꼬리가 쳐져 내리는 근엄한 얼굴로 한 사람씩 악수를 해나가고 있었다.

경찰서장 남인태의 차례가 되었다.

"남 서장,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 남은 일 하나만 잘 처리하라고. 그 수고 잊지 않을 것이니."

최익승은 손아귀에다 힘을 주어 남인태의 손을 잡는 것으로 낮고 은근한 말보다도 더 강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의원 각하."

남인태는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양조장 정 사장은 이미 석방시켰고, 나머지 하나는 김범우 건이었다. 남인태는 허리를 꺾은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서너 사람을 거쳐 염상구의 차례가 왔다.

"청년단장,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야지."

"예에, 백골 …… 어라 긍께, 백골 ……"

아아, 이럴 수가 있는가, 염상구는 몸이 달아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왜 그러나. 백골, 백골이라니."

최익승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걸 보자 염상구는 더 몸이 달아 머릿속이 캄캄하게 변해버렸다.

"백골, 백골 …… 긍께 그것이 지독스럽게 고맙고 고맙다는 말인디라. 백골 머시냐 ……"

"백골난망 말인가?"

최익승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맞구만이라, 백골난망!"

염상구는 얼결에 언성을 높였다.

"으어허허허허 ……"

최익승은 허리를 젖히며 웃어 제쳤다. 도열한 사람들이 일제히 최익승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희멀건한 웃음으로 따라 웃으려는 얼굴, 불안에 찬 얼굴, 의아스러워하는 얼굴, 놀란 얼굴, 가지각색이었다.

"백골난망이라! 그래, 그래, 자네 심정 내가 알아."

최익승은 염상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까지 끄덕여주었다. 염상구는 자신의 무식한 실수를 덮어버리고 어깨까지 쳐주는 최익승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염상구는 허리를 있는 대로 굽혔다. 백골난망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절을 하며 쓰려고 준비한 말이 또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첫 대목 두 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최익승이 떠나고 모두는 역 대합실로 나왔다. 뒤처져 역전 공터로 나오던 염상구는 손바닥을 맞때렸다. 그때서야 머릿속에 환히 떠오르는 여덟 글자가 있었다. ‘백골난망 분골쇄신이었다. 청년단장을 만들어준 최익승 위원 각하님의 전송의 자리에서 쓰려고 일부러 한문을 잘하고 유식하기로 소문난 한약방 영감님한테 계란 두 꾸러미를 들고 찾아갔던 것이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인사말이라며 백골난망 분골쇄신을 한자로 써주었던 것이다. 그 여덟 자 가운데 아는 글자라곤 ''자하고 ''자뿐이었다. 창피스런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한문 옆에다 한글을 써달라고 했던 것이다.

"언문으로 써도라고?"

영감은 이렇게 물으며 안경 너머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요런 무식헌 놈아하고 있었다.

"청년단이 아무리 완력 써서 밥묵는 디라고 혀도 명색이 단장인디 그리 무식혀서 쓰겄어? 똥장군도 장군이고 청년단장도 장인디, 앞으로 상대헐 사람덜도 장이 아니겄어? 근디 그리 무식혀서 워쩔 것인가. 공자 맹자야 평생혀도 틀렸고 천자문이나 띠어야지 그런 장이라도 오래 해묵제. 살 날이 창창헌 나이에 말이시. 워쪄, 나헌테 천자문이라도 안 배우겄어?"

한글을 쓰고 난 영감은 거칠 것 없이 쏟아놓았다. 참으로 입바른 영감이었다. 염상구는 왈칵 화가 치밀었지만 영감의 말이 마음 한구석에 닿아오는 바도 없지 않아서 꾹 눌러 참았다.

"생각혀보겄소." 염상구는 대꾸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영감이 가르쳐준 대로 '백골난망이옵고 분골쇄신하겠습니다'를 수십 번 연습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익승을 맞닥뜨리자 '백골' 다음은 새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이다. 영감의 말이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라 싶었다. 염상구는 천자문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영감의 말마따나 살 날이 앞으로 창창하게 남은 나이였다. 주먹 쓰고 칼 쓰는 법을 배웠을 때처럼 정신을 가다듬으면 그까짓 천자문쯤 못 익히랴 싶었다. 오늘 같은 망신은 두고두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다방에 들어가 차나 한잔씩 하도록 합시다. 의논할 일도 있고 하니."

경찰서장 남인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서 걷던 읍장 이병주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활기차게 들렸고 두툼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드디어 평소의 원기를 회복한 것이었다.

읍내를 염상진네에게 빼앗기고 피신했다가 되돌아온 그는 금계란이라도 입에 넣고 있는 것처럼 오만상을 찡그리고 다녔다. 경찰서장을 대할 때는 그 얼굴이 더욱 구겨지고 일그러졌다. 경찰서장에 대한 무언의 책임추궁이었고 불신의 표현이었다. 경찰서까지 잃어먹고 읍사무소에서 곁방살이를 차린 서장의 입장으로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읍장의 그런 경멸과 수모를 감수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회의원 최익승이가 나타나자 두 사람은 한꺼번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 목숨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그런데 용케도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이다. 반란사건이 터진 후로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네댓 명의 손님이 두 테이블에 나뉘어 앉아 있었고, '울고 넘는 박달재'가 다방 안을 출렁출렁 넘쳐흐르고 있었다. '빨갱이'라는 말만큼이나 유행하고 있는 노래였다.

"소리 쥑여."

염상구는 레지에게 사납게 눈꼬리를 세웠다. 그리고 그 눈길을 한쪽 테이블로 옮겼다. 그때 벌써 젊은이 넷은 부리나케 의자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청년단원들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나머지 한 테이블의 두 남자마저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다방을 나갔다.

"우리 벌교가 그래도 살 만한 고장인데. 철도청이 있는 순천을 바로 옆에 끼고 고흥반도의 대문 격에다가 광주로 가는 길목이 아닌가. 일본놈들이 벌교를 중시한 걸 보면 역시 그놈들이 눈이 밝긴 밝은 거야."

커피 오기를 기다리며 읍장이 새삼스러운 말을 지껄였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였고, 그런 읍내의 장자리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일정 때야 좋았지요. 돈 흔허고 이번 같은 난리 없고."

마치 그때가 그립다는 듯 전매소장이 읊조렸다. 듣기가 거북한지 경찰서장이 허엄허엄 헛기침을 했다. 그때 마침 커피가 날라져왔다.

"알고 보면 이 커피라는 물건이 좋고도 나쁜 거요. 쌉싸름하고 달치근한 것이 맛은 그럴싸 해서 좋은데 기름기를 훑어내려 속을 깎는다고 하니 말이야. 인이 박혀 안 마실 수도 없고."

커피를 맛있게 한 모금 마신 읍장이 말했다. 그런 객적은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커피를 인이 박힐 정도로 마셨다 하니, 역시 읍장님은 문화인이십니다."

경찰서장이 아주 우호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에서들은 그렇게 말하는 모양이지만 어디 문화인이라고 할 것까지야 ……"

읍장은 어깨를 출썩거리며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내서 따라 웃었다.

"서장님, 그 사람들 오늘 몇 시에 도착한다고 했지요?"

읍장이 표정을 바꾸며 경찰서장에게 점잖게 물었다.

"오후 두시라고 했지요, 아마."

경찰서장도 정색을 하며 낮게 대꾸했다.

"준비는 다 되셨소?"

"글쎄요, 경찰이나 청년단이 상호 협조할 준비는 끝냈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공적인 급식은 있겠지만."

"천상 후원회 같은 걸 결성해야 되지 않겠소? 우리 읍을 위해 싸우러 오는 사람들인데. 갑시다, 사무실로 가서 구체적으로 의논합시다."

 

김범우는 유치장에 갇혀 이틀째의 아침을 맞았다. 다 헐어빠진 일본군 담요 한 장을 걸치고 지새운 밤은 몹시도 춥고 길었다. 이틀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한 것은 추위 탓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자 자연히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범우는 견디기 어렵게 전신을 포박해오는 오한을 어금니로 질겅이며 담배를 꺼냈다. 밤새껏 피워댔는데도 담배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어제 느지막이 사식과 함께 담배 세 갑이 들어왔던 것이다. 아버지의 처사일 것이었다.

"면회는 안되고 요것만 보돕시 통과혔구만이라."

사식을 유치장까지 가지고 온 만복이가 말했다. 그는 일본군 장총을 거추장스럽게 어깨에 메고 있었다. 청년단원인 그는 경찰서에서 합동근무를 하던 중에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었다. 김범우는 누가 면회를 왔더냐고 묻지 않았다. 아버지일 것이 뻔했고, 그런 것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신 죄를 지셨간디 서방님얼 요리 험헌 디다가 가둬두는지 …… 니기럴!"

만복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해나가다가 끝부분에서 불쑥 감정을 돋우었다. 그의 표정도 어조를 따라 민감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못내 죄스러움을 나타냈다가 '니기럴' 할 때는 상기된 볼이 씰룩였다. 김범우는 그런 만복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만복이의 마음이 그대로 가슴에 닿아왔다. 소작인의 아들이 지주의 아들 편을 들고자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세태와는 걸맞지 않은 현상이었다. 김범우는 아버지를 느꼈다. 그건 아버지의 삶의 결과였지 자신의 몫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삶이 확대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근무 중인 모양인데 그만 가보게."

김범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야아, 당최 죄송시러바서 ……"

만복이는 손등으로 코밑을 씩 문지르며 어물거렸다. 그리고 문 쪽을 살피더니,

"서방님, 지가 오늘 저녁 내내 근무허는디요, 워쩌실라요, 서방님이 맘만 잡수시먼 한방중에 지가 쇠통을 따디릴 팅께요. 급허먼 째고 보는 것이 상수 아닌감요?"

다급하게 말을 해치웠다.

김범우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끼며 그러나 더디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맘은 고맙네만, 그럴 만큼 큰 죄를 진 게 아니니 내 걱정 말고 어서 가보게."

"근디 …… 눈치덜언 안 그렇든디요."

만복이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 말게. 내 죄는 내가 아니까."

김범우는 담뱃갑을 뜯었다. 자신의 죄명이 안에 어떻게 있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어제 취조라는 것을 한 형사부장은 막무가내 '빨갱이'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배운 것 별로 없고, 청년단에 소속되어 빨갱이와 맞서고 있는 만복이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짓고 있는 죄가 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로 여겨질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만복이의 마음씀이 한결 진하게 느껴져 왔다.

"글먼 경찰이 헛소리허는감요?"

"글쎄, 그런 셈이지."

"워메, 경찰서장이 멀믿고 쌩사람 잡아다가 빨갱이죄 뒤집어씌움시로 요 고상 시킬께라? 아조 당당하고 기운 펄펄허든대요?"

김범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경찰서장 남인태의 태도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뒤에는 국회의원이란 거창한 배경이 있지 아니한가. 그에 대한 취조를 통해서 이미 그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밤에 추울 틴디, 몸조심허시씨요."

"고맙네. 어서 가보게."

만복이는 꾸벅 절을 하고는 돌아섰던 것이다.

만복이의 말마따나 밤은 추웠다. 어쩌면 밤의 기온보다 마음이 더 추웠는지도 모른다.

김범우는 뽑아든 담배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입안이 깔깔하고 목줄이 아파 불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틀째 이빨을 닦지도 못했고 낯을 씻지도 못했다. 경찰에서 그런 배려를 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범우로서도 굳이 요구하지도 않았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빨 닦는 일이나 낯 씻는 것을 잊고 정글 속을 헤맨 학병생활에 비하면 그까짓 이틀쯤의 구질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경험을 해서가 아니라 김범우는 그런 정도의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어수선하게 차 있었다.

형사부장 장길춘의 몇 마디 취조로 자신이 왜 잡혀왔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취조방법의 미숙 탓인지 아니면 우회취조를 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장길춘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는 김범우가 최익승에게 했던 말을 들춰대며 그 저의를 추궁하고 들었다. 자신의 체포가 최익승의 명령에 의한 것임은 너무나 쉽게 드러났다. 대충 시차를 계산해보면 최익승은 자신이 그의 집을 나오기 바쁘게 경찰에 연락한 것이었다. 신속하게 그 각본을 짠 최익승의 알량한 솜씨에 김범우는 비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 대신 스스로의 오판에 혐오를 느꼈다. 당초에 최익승을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한테서 이성적인 사태수습 방안이 강구되기를 기대했던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그건 여우에게 교활을 버리기를 기대한 어리석음이었다. 그가 일본의 패망을 책상을 치며 통곡할 정도로 애석해했던 것처럼, 지주계급을 표적으로 삼는 공산주의를 얼마나 증오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일단 최익승의 짓임이 밝혀지자 김범우는 자신의 신상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을 꾸민 최익승의 저의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위세를 보여주고, 행동의 제약을 가하자는 이중목적이라 싶었다. 김범우는 떫게 웃으면서도 그 두 가지 목적 중에서 한 가지는 달성하고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를 빙자해서 시간을 끌면 며칠 동안은 유치장에 가둬둘 수 있는 일이었다. 김범우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잡다한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비중이 큰 것은 안창민 자당의 안부와 전 원장이 말했던 군인주둔 문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였다. 안창민의 어머니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김범우는 떼칠 수가 없었다. 으레 불길한 생각이란 무슨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예감일 뿐이지만 그 적중률은 의외로 높은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칠동에서 한 노인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예감이 드는 것이라며, 그 생각을 머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게 되면 안창민은 어떻게 될까. 더 극렬한 사회주의자가 될까, 아니면 회의주의자가 될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고는 했다. 염상진 같으면 더 뜨거운 사회주의의 불꽃이 되겠지만 안창민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탈색된 회의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어떤 자신 있는 심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 분명히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사회주의 의식무장의 경중이나 강약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사건에 안창민이 붉은 완장을 참으로써 느닷없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 바로 그런 안일한 유추를 거부하는 행위였다. 안창민은 염상진에 비해서 분명 행동성은 약하다. 그러나 그 약점을 보완하려는 방어본능의 결과로 이론무장은 더 철저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면에서 안창민은 염상진보다 더 차갑고 강인하게 변모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판단이 정확하고 이론이 정연한 그의 머리는 일찍부터 소문이 난 터였다. 안창만을 연결짓지 않더라도 그의 어머니가 무사하게 회복되기를 바랐다. 사람이란 어차피 죽음을 맞게 마련이자만 맞아죽는 흉악한 죽음을 한다는 것은 차마 못 당할 일 중의 하나였다.

안창민의 어머니를 생각하다 보면 김범우는 어느덧 아버지 생각에 빠져 있고는 했다. 자신이 경찰서에 갇힌 사건이 아버지한테 충격이 되었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해방, 삼팔선 통행금지, 남북의 이질화, 이런 고비들을 넘기면서 아버지는 표가 나게 늙고 탈진되어갔다. 그건 큰아들을 차츰 단념해가고 있는 고통스러운 인내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사식을 나르는 일방 자신을 한시라도 빨리 경찰서에서 끌어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김범우는 자신의 경솔이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저어, 서방님 ……"

김범우는 웅크려 박고 있던 고개를 느리게 들었다.

"영판 추우셨을 것인디 워처크름 주무셨을께라?"

만복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한쪽 손에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보자기 쌈이 들려 있었다.

"아칙진지 드시씨요."

"그거 집에서 가져온 건가?"

"야아, 날이 쌔코롬허니 추운디 어른신네가 또 손수 걸음을 허셨드만요."

김범우는 미적미적 일어섰다. 추위 탓에 오래도록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어서 몸놀림을 빨리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면목 없는 일이라 싶었다. 밥보자기를 들고 아침 갯바람이 찬 소화다리를 건너고 있는 아버지의 늙은 모습이 떠올랐다. 밥심부름쯤 의당 머슴에게 시킬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어느 때라도 자식의 면전에서 진한 정을 표한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심에는 언제나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자식 사랑의 화로를 품고 있었다. 형이 만주 벌판을 헤매게 되면서부터 가난한 밥상을 받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일본 사람이라면 노골적으로 경원하면서도 자신의 담임선생에게만은 명절 때마다 예를 갖추었던 것도 자식을 지키는 아버지의 내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밥보자기를 받아들며, 아버지가 아직 계시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금세 뜨건 물 갖고 올 팅께 찬찬히 드시씨요."

만복이의 말에 김범우는 눈으로 대답했다.

아침밥을 마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순경이 나타났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이 유치장 자물쇠를 열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김범우도 따랐다. 어제 취조를 받느라고 형사부장과 마주앉았던 방으로 갔다.

"밤새 워쩌셨소? 날이 쪼개 추운디 고상 안됩디여?"

김범우가 들어서자마자 형사부장 장길춘이 던져온 말이었다. 사각이 진 얼굴의 턱을 빼내고 말하는 모양새나 그 어조가 인사말이 아니라 비양거림이었다. 김범우는 가소로운 놈이라고 생각하며,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일로 앉으시씨요. 오늘은 어지께맹키로 뻗대지 말고 신사적으로 혀봅시다."

또 취조라는 것을 할 모양이었다. 김범우는 역정과 함께 심한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담배 태우씨요."

장길춘은 취조장을 넘기며 말했다. 거무튀튀한 색깔에 사각의 모양을 한 그의 얼굴에는 생래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잔인기가 서려 있었다. 짧게 치켜 깎은 스포츠형의 머리가 더욱 그의 인상을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김범우는 장길춘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해방이 되기 직전까지 자신의 집안을 감시해온 인물이었다. 범준 형님 때문이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감시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느닷없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는 뻔뻔하게도 "어르신네, 문안 여쭐라고 왔구만이라" 하는 말을 앞세우고는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감각기관이나 촉각은 집 안의 구석구석, 식구들의 일거일동에 예리한 그물을 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해방과 동시에 햇살을 쬔 안개처럼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미군정 실시와 함께였다.

한반도의 해방군이 아니라 분명 점령군의 태도로 남쪽 땅을 장악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치안유지를 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치하의 경찰 근무자나 그 앞잡이들을 중추로 해서 경찰조직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이러한 처사는 미 제20사 군단장이며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이 194592일 삐라로 뿌린 첫 포고문에서 "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명백하게 밝힌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고문에는, 형식적이고 입바른 인사치레 잘하는 그들답지 않게 조선의 해방을 축하한다거나 조선인이 되찾은 자유를 경하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인사말 한마디 없이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경직된 경고만을 나열해 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미군정의 은혜로운 조처에 의해서,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죄상으로 마땅히 처단되거나 단죄를 받아야 될 고등계형사나 순사, 순사보, 밀정 노릇을 했던 부류들이 다시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일제치하에서보다 한두 계급씩이 더 승진된 상태로서였다. 일본인들이 차고 앉았던 높은 자리를 채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었다. 형사부장 장길춘도 그런 과정을 거쳐 재생의 날개를 달고 퍼득이게 된 인물이었다.

"머시냐, 어지께밤에도 곰곰이 생각혀봉께로 당신이 자백헌 말이 예삿소리는 아니드란 말이여. 아무리 공산당 활동을 헌 자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은 있을 수 없다니. 요것이 워찌 정신 지대로 백인 사람이 헐 소리여. 정신이 삐딱허니 돌았거나 빨갱이 사상을 가졌거나 둘 중에 하날 것이다 그런 말인디, 선상질허는 양반이 정신이 삐딱헐 리는 없고, 남은 길은 뻔한 것 아니겄어?"

취조의 시작이었다. 직업적 습관의 발동인지 장길춘은 반말을 지껄였다. 김범우는 그런 것에는 무관심했다. 장길춘은 어느새 외골목으로 몰이를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의 반복이었다. 김범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말을 물었으먼 대답을 혀!"

장길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같은 소리 되풀이하면 나도 어제와 똑같은 방법으로 대해주마.’

김범우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유식한 법률용어인 묵비권 행사가 아니었다. 아예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니, 참말로 대답 못허겄어?"

장길춘의 어조가 변색했다. 잔인한 느낌이 끼쳐왔다. 그는 어제와는 달리 초장부터 거칠게 나왔다. 되풀이되는 일에 어제의 인내심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작전을 변경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려, 정 입얼 안 열겄다먼 입이 짝짝 벌어지게 혀줄까?"

한층 잔인해진 목소리였다. 고문 솜씨야 이골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김범우는 책상 위에 내리꽂은 시선을 추호도 움직이지 않았다. 네놈이 내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 고문을 하려 든다면 용납을 하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고문의 가해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문을 힘으로 맞서 물리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요런 좆 겉은 새끼야, 귀에 말뚝 박았어? 주둥이 열고 아무 말이나 혀보란 말이여!"

장길춘이 책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순간, 김범우는 피가 머리로 치뻗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김범우의 부릅뜬 눈에서는 불길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경직된 얼굴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장길춘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욕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떤 말에도 대꾸가 없는 김범우의 태도가 확실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어제부터 그런 느낌을 가졌었는데 오늘 다시 그쪽으로 생각이 굳어지자 감정이 끓었고, 그 감정을 삭이려고 소리도 질러보고 공갈도 쳐보았지만 김범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점점 더 무시당하는 것 같아 감정이 폭발하여 상소리를 내뱉고 만 것이다.

장길춘은 김범우의 불이 타는 눈길을 계속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눈길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자 자신감이 흔들렸고, 따라서 허리에서는 힘이 풀려나가면서 눈이 시어 자꾸만 깜박여지려 했다.

"당신, 그 말 다시 한 번 해보시오."

마침내 김범우가 입을 열었다.

"나가 실수혔소. 고 말언 취소허겄소."

장길춘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 말고 동시에 눈길을 돌렸다. 김범우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뽑아들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장길춘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취조고 뭐고 다 틀린 일이었다. 경찰 체면에 사과를 하다니, 장길춘은 분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기가 뻗질러 오르고 있었다.

니눔헌테 기엉코 육모초보담도 쓴 맛얼 보이고 말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두 개의 덫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장길춘은 스스로의 생각에 만족을 느꼈다. 더 취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서 순경, 서 순경!"

장길춘은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내 순경이 나타났다. 그는 턱끝으로 김범우를 가리켰다.

"저어,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 ……"

순경은 부동자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눌한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장길춘의 위세 앞에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유치장으로 딜고 가."

처박으란 말이 혀끝까지 밀려나왔지만, 장길춘은 애써서 '데리고 가'라는 말로 바꾸었다.

"아니, 벌써 끝나셨나요?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어허, 말이 많은 거 봉께로 자네도 빨갱이 아녀?"

장길춘이 거칠게 내쏘았다. 김범우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장길춘은 멀어지는 김범우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뒷모습까지 당당하고 거만하게 보였다. 그는 위축감과 동시에 증오감을 느꼈다. 빳빳하게 세워진 목이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위에 붙은 아무 표정도 없는 뒷머리에서 그는 김범우의 분노에 찬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장길춘은 김범우가 예사 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배짱이 세고 대가 강해도 순경에게 붙들릴 때 반정신이 나가고, 경찰서로 들어서면 온정신이 나가고,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새우면 살아날 구멍을 찾아 급급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틀씩이나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도 늦가을 살모사 대가리처럼 독기를 세우고 있었다. 수사를 하거나 취조를 할 때는 상대방의 기가 꺾일 만큼 꺾여 삶은 시금치 꼴이 되어 있어야 제격에 맞는 것이었다. 그것이 순경질하는 맛이기도 했다. 그 군림하고 짓밟는, 박하사탕 씹는 것 같은 통쾌감과 간지러움 같은 승리감이 없다면 순경질을 무슨 맛으로 한단 말인가. 그런데 김범우는 그런 맛 대신 은근히 경계심을 갖게 했다. 고등계의 밀정 노릇부터 시작해서 이십여 년 동안 경찰물을 먹어온 장길춘으로서는 실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손상된 체면에 대한 보상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길춘은 서장실로 들어갔다.

"취조는 잘되고 있소?"

경찰서장 남인태는 장길춘이 잠시 쉴 짬을 낸 것이라 생각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니미럴, 취조고 머고 다 재 뿌려부렀소."

"아니 왜, 무슨 일 났소?"

남인태는 상체를 세우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장길춘은 멈칫 긴장했다. 자신은 예사로 뱉은 말이었는데 남 서장의 태도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털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취조를 망치게 된, 그럴싸하게 둘러댈 다른 이유가 얼핏 떠오르지 않았다.

"일은 무슨 일이겄소. 김범우 고 자석이 독허기가 똑 서리 뿌리기 전 독새 같응께 사람 미치겄어서 허는 소리제라."

장길춘은 일단 숨 돌릴 겨를을 찾으려고 김범우의 목에다가 말고리를 걸었다.

"거야 다 아는 일 아니오. 그 녀석이 질기면 이쪽은 더 질기게 나가야 되는 것이야 미리 얘기했던 것 아니오."

남 서장은 시큰둥한 표정이 되어 몸을 의자에 부렸다. 장길춘은 긴장을 풀며 맞은편에 앉았다.

"근디, 워째야 쓸께라?"

장길춘은 담배를 빼들며 물었다.

"뭘요?"

", 김범우 말이제라. 당최 꼬삐럴 잡을 수가 있나, 냄새럴 맡을 수가 있나, 사람 환장허겄당께요."

"첨에 내가 말하지 않았소. 김범우는 잡범이 아니니까 계속 취조를 하는 수밖에 없소. 그놈이 파김치가 될 때까지."

"금메, 취조도 취조 같애야 혀묵든지 말든지 허제라. 서장님도 다 아시제만, 워대 취조라는 것이 조단조단 이약허는 것입디여? 죄진 눔 잡아다가 죄 캐내자고 족치는 것이 취존디, , 고 쎄럴 열댓 발 빼내도 분이 안 풀릴 그눔이 무신 말얼 물어도 입얼 딱 봉허고 앉았으니 사람이 복장 터져 워찌 살겄소. 서장님, 그리 주딩이 딱 봉허고 있는 연눔헌테 주딩이 짝짝 벌리게 허는 약이 머신지 잘 아시제라? 헌대, 서장님도 야속허시오. 매질은 못허게 허시제, 그눔언 주딩이 딱 봉허고 앉었제, 취조는 허야겠제, 지가 천불이 올라와 워찌 살겄소."

장길춘은 말을 쏟아놓고 나자 다소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역시 언변이 좋다고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니, 부장한테 일을 맡긴 게 아니오. 속이 상하더라도 꾹 참고 취조를 하도록 하시오. 새로운 취조방법을 배우는 셈치고."

"화아, 두 분만 새로우먼 피 보타 죽겄소. 헌디, 김범우가 빨갱이는 빨갱일게라?"

은근한 목소리로 변한 끝마디 말에는 의문이 서려 있는 듯했다. 서장 남인태는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러나 절대로 내색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왜 형사부장 생각으로 무죄, 무혐의 같소? 보증이라도 서서 내보내 주고 싶소?"

남인태는 계산이 확실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 무신 말씸얼 그리 허씨요. 빨갱이가 마빡에 돋은 종기맹키로 표럴 내는 것도 아니겄고, 시상이 요리 시끌시끌헌디 나가 머 땀시 고런 눔 보증얼 서라."

장길춘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더럽거나 징그러운 물건을 잘못 집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연신 손을 뿌리기까지 했다.

"군인들은 오늘 당도허는 것이 맞는게라?"

장길춘은 화제를 돌리는 척했다.

"오늘 도착하기는 할 것인데,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오."

"군인이 아니고 경찰이라고라?"

장길춘은 자못 놀라움이 컸다.

그의 감정변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그래도 명색이 경찰이라고 경찰이 파견 나오는 것은 싫은 모양이군, 남인태는 나타나지 않는 웃음을 입술로 웃었다.

"쪼깐 속이 꾀일라고 허네. 경찰보담이야 군인이 화력이 씰 것인대 워처케 경찰얼 보내까?"

장길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읍내 치안을 빼앗기고 경찰서까지 적의 손에 태워먹은 그들에게 그건 확실히 죄의식을 자극받는 수치였고 자존심을 밟히는 창피였다.

"우리는 그 사람들 작전 협조에 빈틈이 없어야 할 것이오."

서장 남인태는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근디, 그 사람덜이 와서 헐 일이 머실께라?"

"거 무슨 소리요? 빨갱이를 잡지 뭘 하겠소."

남인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빨갱이야 폴세 삼십육계혀부렀고, 잔당이야 우리가 다 뿌랑구럴 뽑아뿌렀지 않냐 그런 말 아니요. 빨갱이럴 잡자먼 산으로 가야제 머묵자고 평지인 읍내에넌 들어오냔 말이제라."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다 싶었다. 그러나 남인태는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놀려보았자 토벌대는 이미 읍내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니기미, 빨갱이 잡으러 와서 한 눔도 못 잡으먼 헛김 빠질 것인디, 김범우럴 그 사람덜한테 탁 넘겨주먼 워쩌겄소?"

"그건 안 돼!"

남인태는 느닷없이 소리 질렀다. 장길춘은 서장의 서슬에 그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느슨하게 풀렸던 기분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남인태를 비웃고 있었다.

니눔도 김씨 문중이 무섭기는 무선 모냥이구나. 김씨 문중에 밉보여 편히 서장 해묵기는 어려울 것잉께. 헌디, 김범우럴 빨갱이로 족치는 속셈은 머시까?’

장길춘은 그때서야 의문의 꼬리를 붙들었다.

"장 부장은 딴 생각 말고 취조를 계속해주시오. 너무 다급하게 생각할 것 없소."

남인태는 노출되기 직전의 감정을 수습하며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장길춘은 고개만 끄덕였다. 김범우를 토벌대에게 넘기자고 했던 것은 김범우에게 보복을 가하려는 그의 첫 번째 덫이었다.

"취조는 허겄지만서도 지끔꺼지 그눔이 취헌 태도로 보자먼 앞으로도 아무 소양이 웂을 것이요. 긍께 그눔이 영축웂이 빨갱이라는 심증만 있으먼 적당허니 조서 맹글어 순천으로 넘게뿔먼 워쩌겄소. 순천 가서 지눔이 좋아허는 재판이나 신물나게 받게."

이것은 그가 생각했던 보복의 두 번째 덫이었다.

순천으로 넘긴다? 남인태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온 말이었다. 그리고 김사용과 최익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머리는 혼란해졌다. 당장 손익계산서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가서 일 보시오."

남인태는 장길춘에게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장길춘을 내보내고 손익계산을 차근차근 따져볼 심산이었다. 장길춘은 자신의 말이 여지없이 묵살당한 불쾌감만을 가지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김범우에 대한 보복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낭패감까지 겹쳐 기분은 엉망진창이었다. 장길춘의 말이 남인태의 뇌리에 박혀온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사용 영감 때문이었다. 김사용이 남인태를 찾아온 것은 김범우가 체포된 날 오후였다. 경찰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감사용이 찾아온 것에 대해서 남인태는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개의하지 않았다. 대낮 노상의 체포였는데다가, 현장에 '자애병원' 전 원장이 함께 있었다는 보고를 받아서였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약간 켕기는 초조로움으로 김사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가 무어요?"

김사용은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남인태는 그 태도에 약간 위압감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이 더욱 켕기는 것을 의식했다. 그럴수록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했다.

"빨갱이 편을 드는 용공적 발언을 함부로 했기 때문에 조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용공적 발언이라 …… 그게 어떤 말이오?"

"조사 중이니 그 말을 공개할 수가 없습니다."

남인태는 냉정하게 잘랐다. 경찰서장으로서의 권한행사였다.

"공무수행상의 비밀이라면 어찌할 수 있겄소."

김사용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자식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고, 범우는 공산당을 할 리가 없소."

조용한 그러나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부는 조사를 해봐야 알 일입니다."

남인태도 서장의 체면을 최대한으로 내세우며 말했다.

김사용은 더 이상 말이 없이 경찰서를 나갔다. 의당 요구하리라 생각했던 면회신청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잘 부탁한다는 식의 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김사용이 자신의 음모를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아 남인태는 마음이 꺼림칙했다. 김사용은 끼니때마다 손수 사식을 날라 왔다. 그때마다 묻는 말은 짧은 한마디였다.

"결판이 났소?"

기회를 엿보던 남인태는 김사용에게 은밀하고도 넌지시 해결방안을 일깨워주었다.

"가당찮은 소리요. 조사를 해서 죄를 졌으면 벌을 받는 것이고, 죄가 없으면 풀려나는 것이 법일진대 어찌하여 이 일에 최익승이 이름이 들먹여지는지 모르겄소.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 할 일이 따로 있을 것인데, 내 자식이 만에 하나 공산당을 했다 하더라도 최익승이를 찾아가지는 않으리다. 국회의원 세도가 을매나 큰지 모르겄지만."

말을 하는 동안 김사용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어려 있었다. 음성도 웃음처럼 조용조용했다. 그런데 남인태는 찬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건 곧 자신의 음모가 깨어져 나가는 낭패감이었다. 김사용의 냉소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고, 조용조용한 음성은 호령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남인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최익승의 목적은 김범우를 잡아넣어 어느 기간 동안 발을 묶어두는 것보다 그것을 미끼로 김사용을 서울로 끌어올려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데 있는 것 같았다. 남인태는 그것쯤 쉬운 일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자식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보호본능을 믿었던 것이다. 부모의 보호본능이란 자신을 버릴 만큼 강한 힘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협하는 상대적인 힘 앞에서는 명분이나 위신 같은 것은 밤 껍질 버리듯 할 수 있다는 것을 남인태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바였다. 독립운동에 연루된 자들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것이 자식을 둔 자들이었다. 그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잡아다가 고문하면 신효할 정도로 쉽게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부모를 고문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가 마누라를 고문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김사용은 일언지하에 국회의원 최익승을 만나러 가기를 거부해버렸다. 그건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경찰의 힘으로는 자기 자식을 어쩌지 못하고 풀어놓게 되리라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남인태는 계획이 빗나간 낭패감과 함께 직위를 무시당한 모욕감을 떼칠 수가 없었다. 최익승을 대할 면목이 없어진데다가 김범우를 계속 유치장에 가둬둘 명분도 흔들리고 있었다. 김사용을 서울로 올려 보내지 못하면 최익승을 대할 면목이 없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최익승은 출세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줄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사용을 최익승 앞에 무릎 꿇게 만들면 그 동아줄은 사다리로 변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게 되면 읍내를 빼앗겼던 죄까지 들춰져 올가미로 변할 것이었다. 남인태는 난감한 기분에 빠져 있던 차에 장길춘으로부터 김범우를 순천으로 넘기자는 엉뚱하고도 희한한 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순천경찰서로 이첩해 재판을 받게 한다?’

남인태는 이 방법을 몇 수십 번 곱씹으며 손익계산을 따지고 있었다. 순천으로 넘기는 건 하나도 어려울 게 없고, 일단 순천으로 넘어가면 사건의 국면이 달라진다. 김사용은 몇 갑절 위기감을 느껴 마음이 다급해질 것이고, 재판까지 가자면 시일을 오래 끌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김사용은 최익승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고, 김범우의 발을 힘 안 들이고 묶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남인태의 계산은 어느 틈에 이익 쪽으로만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물론 손해도 따져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단 이익쪽으로 기울어진 계산법 앞에서 손해는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 김범우를 순천으로 넘기자. 남인태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양조장 정현동 사장은 정오가 가까워 읍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 사장님, 몸은 좀 어떠시오?"

읍장은 예전과 다름없이 느껴지는 친근감을 가지고 말했다.

"아 예, 별탈 없구만요."

정 사장도 예전처럼 격의 없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드리워진 그늘을 금방 걷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뜨악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그건 읍장에 대한 섭섭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정 사장은 자신이 아들의 덕을 보아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꼭 경찰서에 갇혀야 할 만큼 죄가 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자신의 일에 방관한 읍장에게 심히 섭섭함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령 죄가 된다고 해도 평소의 친분을 생각해서 경찰서에 갇히는 것만은 막아줬어야 한다는 것이 정 사장의 생각이었다. 그런 기대나 신뢰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지금 읍장에 대한 감정은 떫고 쓴맛일 밖에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유치장에 가둔 남인태에 대해서는 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떫고 쓴 맛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버렸고, 언젠가 당한 만큼 보복을 하고 말리라고 앙심을 먹고 있었다.

"별탈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읍장은 허허거리며 웃었다. 정 사장은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따라서 웃는 시늉을 했다.

"정 사장님, 바쁘시지 않으시면 남원장에서 점심을 함께 하시는 게 어떨까 해서 전화했습니다."

의외의 말이었다. 아니, 의외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 나오기 전에는 툭하면 만나 점심을 나누고는 했었다. 장소도 전과 다름없는 남원장이었고 흔한 점심약속인데 그것을 의외로 받아들이는 건 자신의 감정 탓이었다. 읍장의 제의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쳐갔던 것이다.

"실은 눠 있던 참이었는디,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신지 ……"

정 사장은 조심스럽게 사양의 뜻을 비쳤다. 사실 심신이 괴로워 아침도 깨죽 반 사발로 때우고 다시 누웠던 것이다. 몸도 묵지근했지만 마음은 감당하기가 어렵게 얽히고 설켜 있었다. 전혀 누구를 만날 기분이 못되었다.

"별탈 없으시다고 하셨는데, 기분도 바꿀 겸 나오시도록 하시지요. 뭐 그냥 점심 한 끼 나누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어려운 시국에 그럴 시간 여유도 없구요."

어느새 읍장의 어조는 달라져 있었다. 정 사장은 좋지 않은 예감을 더욱 확실하게 느꼈고, 점심의 자리가 선택권 밖에 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러나 정 사장은 금방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싫은 오기로 이렇게 물었다.

"나와 보시면 압니다. 그럼, 나오시는 것으로 알고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정 사장은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싶을 만큼 울화가 치솟았다. 읍장의 말은 다소 예의를 갖추었을 뿐 결국은 명령이었다.

지눔이 감히 …… 정 사장은 부르르 떨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흥분으로 흐려진 그의 시야에 큰아들 하섭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모든 것이 공산당에 미친 그놈 탓이었다. 하섭을 생각하자 사지에 맥이 빠지고 흥분도 이내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다 잊어뿌리씨요. 이리 무사허게 나오신 것만도 을매나 다행헌 일이요. 읍장이나 경찰서장도 따지고 보먼 다 옛날 의리 지킨 사람덜이랑께요. 딴 사람덜맹키로 북국민핵교로 끌어가지 않은 것만도 을매나 마음쓴 일이요, 금메. 거그서 조사받고 죽어간 사람이 실 수도 웂이 많은디, 요리 무사허게 나오셨으니 멀 더 바라겄는가요. 지낸 일 다 잊어뿌리시씨요. 험한 일은 잊어뿌리는 것이 약잉께요."

아내가 눈물 겨워 한 말이었다. 아내의 말은 옳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이 무사하게 풀려난 내막을 모르는 경우에 한해서 옳은 말이었다. 아내는 자기 손으로 경찰서장에게 전해준 돈뭉치의 효력으로 남편이 풀려난 줄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보다 더 은혜로운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형편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지금 형편에 정 사장을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소. 그게 누구냐, 바로 국회의원 최익승 각하시오. 하늘이 정 사장을 돕느라고 그분이 바로 벌교에 내려와 계시오."

남인태가 서장실로 불러 은밀하게 말했을 때 정 사장의 암울하던 마음에는 갑자기 전등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허나, 최익승 의원님을 모르는 사이는 아니나 누가 중간다리를 놓는단 말이오."

정 사장은 기쁜 내색을 감춘 채 말했다. 남인태가 먼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미 건네준 돈을 탈 없이 먹어치우려는 계산임이 분명했고, 중간다리 노릇을 자청하고 있는 판에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야 내가 나서면 될 일 아니겠소. 서로 절친한 사이에 정 사장을 이런 꼴로 만들어야 하는 내 입장이 너무 괴로운데, 정 사장을 돕는 일이라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최의원 각하께서 정 사장의 신원보증만 선다면 당장 석방이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정 사장은 천상 순천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아야 하오. 그것이 내가 정 사장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이고 최후의 방법이오. 딴 사람들 같았으면 어디 재판이고 뭐고 있나요."

남인태는 담배를 빼 물었다. 정 사장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냥 다 총살을 시키고 말았지요.‘ 남인태가 생략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재판을 받는다는 문제도 그래요. 물론 무죄판결을 받기도 어렵겠지만, 무죄판결을 받는다 손 치더라도 그 동안의 고생이 얼마요. 어떻소, 유치장 생활 할 만하던가요?"

남인태는 정 사장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 사장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아는 사람 앞에서 위선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 사장은 유치장에 갇혀 지낸 며칠 동안에 해방 후에 유행되었던 그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정 사장은 한시라도 빨리 유치장을 빠져나가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다.

순천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는다?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재판을 받는 일이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다 아는 얼굴이 있는 유치장에 갇혀 있기도 그리 고통스러웠는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최익승을 상대하자면 돈이 수월찮게 들 것이지만 순천으로 넘겨지는 것에 비하랴. 정 사장은 수족을 잘라내는 아픔과 아까움을 참아내며 큰돈을 쓰기로 작심했다. 그러나 정 사장이 예상했던 큰돈은 최익승 앞에서 '엄청난 재산'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허허허허, 정 사장은 말을 아주 함축성 있게 할 줄 아시는군 그래. 은혜를 받으면 보답을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그렇다면 정 사장은 나한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목숨을 구해줬으니 술도가라도 넘겨주겠소? 어허허허, 정 사장이 떠넘겨도 내가 사양하겠소. 보답이 너무 과하면 폐가 되는 법이니까. 술도가 반 정도라면 혹시 모를까."

정현동 사장은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놀라움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술도가 반이면 수족을 잘라내는 큰돈이 아니라 몸통을 토막 내는 엄청난 재산이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말이었다. 거역을 하게 되면 감정적 보복을 당하게 되어 자신의 신세는 정말 예측할 수 없게 변할 것이었다.

"제 뜻을 그리 받아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기왕 개 아가리에 처넣는 고깃덩어리였다. 정 사장은 쓰리고 아린 속을 말끔히 감춘 채 머리를 조아렸다.

"어허허허, 그럼 정 사장하고 나하고 동업자가 된 셈 아닌가. 하 이거 참 묘한 인연이 맺어지게 됐소."

얼떨결에 술도가 반이 날아가는 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정 사장은 눈앞이 아른아른 흐려지며 꺼이꺼이 소리쳐 울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아내는 이런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사히 풀려나는 데 술도가 반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내는 다행이라고 할 것인가.

정 사장은 다시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어금니로 씹으며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정오가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정 사장은 미간을 잔뜩 구기며 느리게 일어섰다. 그의 무거운 동작에 맞춰 입에서는 마땅찮아하는 소리가 끄으응 길게 늘어졌다.

정 사장이 남원장에 도착하니 읍장과 경찰서장을 위시해서 ''자가 붙은 사람들 거의 전부와 난리통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유지라는 유지는 거의가 모여 있었다. 20여 명을 헤아리는 수효였다.

"에에, 점심식사를 들기 전에 한 가지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을 급작스럽게 이리 무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오후에 도착한 토벌대 때문입니다. 경찰 토벌대는 우리 읍내의 치안을 위하고, 도주한 빨갱이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빨갱이들로부터 우리 읍민 전체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중차대한 일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우리 읍에서도 그분들의 노고에 다소나마 보답하는 뜻으로 민간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어떨까 하여 이리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읍장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좋소' 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

"됐습니다. 후원회 조직을 결정했습니다. 다음은 후원회장을 추천해 주십시오."

", 정현동 사장을 추천합니다."

누군가의 말에 정 사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감의 적중 탓이었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장내에는 '좋소' 소리와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엉키고 있었다.

"난 안되오, 난 안된다니께!"

정 사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사양할 것 없어요, 정 사장이 적임자요,” 하는 소리들과 계속되는 박수소리에 정 사장의 외침은 묵살되고 말았다. 정 사장은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짜여진 각본이었다. 완전히 농락당하는 기분이었고 떼밀리는 기분이었다. 감투라면 무엇이나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 감투는 진정 싫었다. 큰아들은 빨갱이이기 전에 아들이었다. 무엇 쓸 감투가 없어 아들을 적으로 삼는 후원회장 감투를 쓸 것인가. 정 사장은 전에 느낄 수 없었던 핏줄의 끌림을 큰아들 하섭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사상이고 지랄이고 핏줄이 먼첨인 것이여. 핏줄은 땡깅께 핏줄인 것이여."

정 사장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흐린 시야에는 하섭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삼 일 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14. 까마귀떼

가는 가을과 오는 겨울의 엇갈린 길목인 11월 초순이 저무는데도 계엄령은 풀리지 않았다. 밤마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총성이 계엄령이 발효 중임을 강조하고 있었고, 대낮에도 실시되는 검문검색으로 계엄령의 살벌한 얼굴을 대해야 했다.

읍내는 회색빛으로 죽어 있었다. 장날이라고 해야 아침부터 파장 꼴이었고, 철다리 아래 선창에는 배가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문 밖 출입을 저어했고, 어둠살이 퍼지기 전에 읍내 큰길은 텅 비어버렸다.

11월 초순으로 접어들면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기 시작한 것이다. 그놈의 새떼들은 어디서부터 몰려왔는지 수백 마리가 무리를 지어 하늘을 선회했다. 낮 동안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꼭 어스름이 깔릴 무렵쯤이면 문득 나타나곤 했다. 그 새떼들은 하늘에 검은 칠을 하려는 듯이 큰 날개를 펼쳐 비행을 하며 그 특이한 울음을 까욱까욱 울어댔다. 무리를 지은 크고 검은 날개들의 퍼득거림과 제각기 까욱거리는 기괴한 울음소리의 뒤엉킴은 어둠살이 퍼지고 있는 속에서 그지없이 칙칙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새떼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검은 색깔의 바람을 일으키듯 하다가는 어느 순간 소화다리와 철교 사이의 갈숲으로 급강하 하는 것이었다. 그 크고 검은 날개를 퍼득이며 내려앉는 모습은 수백 개의 검은 만장조각이 펄럭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 검은 새떼가 갈숲으로 내려앉는 것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저눔의 것덜이 필시 피냄새럴 맡은 모양이구만."

"금메 말이시, 본시 시체 뜯어묵고 사는 저승새라고 안허등가."

"저눔의 까마구는 까치허고는 달리 흉조는 흉조여."

"저 시커먼 생김새허고 울음소리럴 들어보소. 워찌 길조인 까치허고 대겄는가."

"저 흉물이 승허먼 좋찮은 일이 생긴다등만 그 말이 맞는 모냥이시."

'옛말 그른 것 봤는가. 시국이 요리 뒤숭숭허니 저런 흉물이 안 승허고 워쩔 것이여."

"생김도 껌디껌게 못생긴디다가 울음소리할라 워찌 저 모냥이까이."

", 긍께 송장 파묵는 드러운 새제."

"금메 말이시. 저것들도 한두 마릴 때는 몰라도 저리 수백 마리가 떼를 짓고 봉께로 영 무섬증이 이네그려."

"염병허고, 요번 일로 이짝저짝에서 죽은 숫자만치 저승에서 보낸 모냥이시. 지 명 다 못 살고 죽은 넋 델고 오라고."

"워따 징상스런 소리 마소. 글 안해도 저 울음소리가 똑 귀신 우는 소리 같은디."

사람들은 까마귀떼의 어지러운 선회를 올려다보며 근심스런 어조로 말하고는 했다. 까마귀떼의 출현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계엄령에서 느끼는 것과 또 다른 불길함과 우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까마귀에게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건이 휩쓴 후로 읍내에는 냉기가 도는 이상스런 소문들이 밤안개 퍼지듯 번지고 있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직전 선암사의 미륵석불이 사흘 밤을 내리 통곡했다는 것이었다. 그 미륵석불은 영험이 높아 인명이 무더기로 상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거나 나라에 변이 생기게 되는 직전에는 꼭 예고를 한다는 것이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을 때는 선지피를 토했다는 것이고, 삼일운동 직전에는 며칠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고 했다. 소문은 그뿐이 아니었다. 약효 좋기로 소문난 장광산 중턱의 약수샘에는 약수 아닌 피가 흥건하게 괴어 있었다는 것이고, 어느 마을의 상여움막에서는 며칠 밤에 걸쳐 여자들의 곡성이 울려 퍼졌다고도 했다.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 소문들이었다. 소문이란 으레 그렇듯 그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채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문들을 믿게 마련이었고, 끝내는 그 소문들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부는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89명이 111일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신문에 보도했다. 그것으로 그 사건이 일단락되었음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서는 엄연히 사건이 진행 중에 있었으며, 무수한 주검을 목격하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89명의 사형'이란 아무런 충격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이 지날수록 이곳저곳의 소문들이 꼬리를 달고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여수의 소문이 순천에서 벌교를 거쳐 화순으로 넘어갔고, 광양의 소문이 순천을 거쳐 벌교로 와 고흥으로 이어졌고, 고흥의 소문이 벌교의 소문과 합해져 순천에서 광양과 여수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소문은 거의 군경의 좌익 색출과 처단에 관한 것이었고, 반란군들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 드문드문 섞이기도 했다. 그 소문들은 하나같이 피냄새를 묻히고 있었다. 특히 여수와 순천의 소식들은 끔찍스러웠다. 여수읍민들이고 순천읍민들이고, 표 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운동장에 끌려 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검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의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 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그러나 간단한 조사마저 필요 없이 확실한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서 죽였다. 조사를 거쳐 좌익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삼사십 명이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으로 끌려 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특히 여수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죽어갔다. 14연대 주력은 후퇴를 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동조자들에게 일단 동행을 권유했다. 운신이 어렵게 된 일반인들은 상당수 따라 나섰지만 학생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따라 나서려고 해도 부모네들이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까짓 만세 좀 부른 게 어쩌겠느냐, 그까짓 삐라 좀 뿌린 게 무슨 큰 죄겠느냐,” 하며 자식들을 붙들어 앉힌 것이다. 핏줄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그런 일들을 '설마'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 학생이 한둘이 아닌데다가, '학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믿음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경의 처벌은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만성리 해수욕장 뒤 터널의 골짜기로 끌려간 학생들은 줄줄이 총살을 당해갔다. 기관총의 난사 앞에서 시체들은 차곡차곡 쌓였고, 그 수는 수백을 헤아렸다. 물론 거기에는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소도 그곳만이 아니었다. 허리에 맷돌이며 돌을 매달고 배에 실려 나가 바다로 떠밀려 들어가 죽어갔고, 심사를 받는 학교운동장에서도 죽어갔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의 속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아놓고 공개 처형을 했는데, 좌익들을 줄대로 세워 손수 닛본도를 휘둘러 목을 쳐 죽였다. 그가 닛본도를 단 한 번 내려치는 것으로 목 하나씩이 뎅겅뎅겅 잘려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피와 모래가 범벅된 그 두상들은 가족이 손도 못 대고 가마니에 쓸어 넣어져 동네마다 전시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들은 그 누구도 원망할 사람이 없었다. 강압으로 그 일에 동조한 것이 아니었고, 인민위원장은 14연대가 자원자들을 이끌고 후퇴하던 날 그 대열을 산마루에서 지켜보다가 목매달아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책임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하대치는 빈 지게의 목발을 지게작대기로 쳐가며 멋대로 육자배기 가락을 뽑아 늘이고 있었다. 노랫가락이 제멋대로인 것처럼 걸음걸이도 헤풀어져 있었다.

하암펴엉 처언지이

느을그은 모오미이

광주우우 고햐앙을

가려으으 다가아아

하대치의 육자배기 가락은 그야말로 귀동냥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도지방에서 뼈가 굵은 사람치고 잡가 한 가락쯤 뽑을 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수준이야 감히 '소리'라고 할 수 없는 형편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남녀 가릴 것 없이 술기운을 빌어 목청을 뽑을 줄 아는 것이 남도의 특색이었다. 그 목소리라는 것도 제법 판소리가락의 냄새가 풍기게 컬컬하고 텁텁하고 구성지게 길잡혀 있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부모네들이 불러대는 육자배기 가락을 허기진 배를 채울 감자나 고구마 대신 들으며 귀를 채우고 자랐다. 부모네들은 육자배기 가락을 무슨 신명이 나서 뽑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고된 들일을 이겨내는 방편으로 썼던 것이다. 농사일의 힘듦을 잊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 시름을 달래기 위해서 육자배기는 불려졌다. 그러니까 육자배기는 넓은 들판을 지닌 남도지방의 들녘의 노래였고, 들판이 넓은 만큼 그에 비례해서 많을 수밖에 없는 소작인들의 노래인 셈이었다. 그 가락을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꼴을 베기 시작하거나 소몰이를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허리뼈가 실해져 지게질이 능숙해지고 무논에 발을 넣게 되면서부터는 구성지게 한 가락씩 뽑을 수 있도록 자리 잡혀 있었다.

", 썩을 년, 그리 남자 맛에 환장 들린 년이 워찌 혼자 사는고?"

하대치는 가락을 막음하며 혼잣말을 내뱉았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양쪽 콧구멍을 번갈아 막아가며 코를 탱탱 풀어댔다.

글씨, 혼자사니께 남자맛에 더 환장허는 거시까?’

하대치는 자신의 말에 반대되는 생각이 떠올라 한번 곱씹어 보았다.

허긴 밥 굶은 눔이 밥 보고 허천들리디끼 남자 굶은 조갑지가 연장 보고 아가리 짝짝 벌리는 것이사 당연지사가 아니겄어.’

하대치는 이렇게 따지면서 히물거리고 혼자 웃었다.

"워쪘거나 고년이 방아찧기 놀음에 사죽 못 쓰는 것이 다행 중 다행이여."

하대치는 왼손으로 샅을 추스려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샅이 뻐근하고 묵지근한 것이 간밤의 여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염병헐 년, 여섯 분도 심에 안 차허먼 을매나 더 방아럴 찧어야 직성이 풀릴랑가?"

하대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전신이 나른하면서도 뻑적지근하고 다리가 묵지근하면서 휘뚱거리는 것은 결코 술 탓이 아니었다. 술이래야 막걸리 두 사발을 마셨을 뿐이다. 그 연고는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에 여섯 차례나 그 짓을 한 까닭이었다. 한 차례를 마치고 토끼잠이 들었다가 깨나서 또 한 차례를 치르고, 그렇게 여섯 번을 하고 나니 지게문이 훤히 밝아왔다.

"와따, 인자 뿌랑구가 뽑힐라고 허네 ……"

하대치가 여자 위에서 나둥그러지듯 방바닥에 몸을 부리며 숨을 헐떡였다.

"도굿대(절구공이)가 씨긴 씨요마는 ……"

여자가 단내가 끈적이는 콧소리로 대꾸했다.

"씨긴 씨요마는, 워째 말꼬랑댕이가 요상시럽네?"

하대치는 전신이 녹아내리는 피로감에 빠져들면서도 여자의 석연찮은 말꼬리는 놓칠 수가 없었다. 그건 남자로서의 오기였다.

"도굿대가 지아무리 씨다고 혀도 워디 도구통(절구통)얼 당헐랍디여잉."

여자는 핼끗 눈을 흘기며 말하고는 팔과 다리로 하대치의 몸을 감아왔다. 그 몸이 뜨거웠다. 그러나 하대치는 섬뜩한 차가움을 느꼈다. 뱀에게 감기는 것 같은 징그러움이 전신에 소름을 뿌렸다.

"염병헐 눔에 절구통이시. 인자 나 코에서넌 피냄새가 나네. 쩌리 가소, 쩌리 가."

하대치는 사정없이 여자를 뿌리쳤다.

"방아 더 찧라고 안헐 걱잉께 한숨 푹 지무시씨요. 쪼깐헌 키에 고만허먼 엄칭이 씬 기운이요. 큰소리칠 만허요."

여자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지 이미 풀죽어버린 하대치의 볼품없는 연장을 한 차례 매만지고 놓았다.

하대치는 대장 염상진에게 장터댁에 관한 이야기를 은밀하게 했었다. 염상진은 하대치의 생각을 별로 탐탐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용 목적을 전제로 한 그런 방법은 당규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좀 곤란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대치는, 나뭇짐 싸게 내서 이문 주고, 그러다가 정이 생겨 통정을 하고, 이쪽에서 어떤 도움을 받게 되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룻밤 외박 허락을 받아 하대치는 혼자 장작 짐을 지고 나섰던 것이다.

시간도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참이었다. 장터댁의 가게 앞에 지게를 받쳤을 때는 썰렁한 장터바닥에 묽은 어둠이 담기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둑어둑한 어둠 그 어디에서인지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 냄새는 시장기를 불러일으켰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하대치는 손등으로 코밑을 썩썩 문지르며 시간의 적당함에 만족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가게 안의 동정을 살폈다. 손님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조심하며 문을 옆으로 밀었다. 주막 특유의 훈김과 냄새가 왈칵 끼쳐와 시장한 뱃속을 뒤집었다.

"음마! 뉘기여?"

먼저 알은 체를 한 것은 장터댁이었다.

"몰라보지 않은께 다행이시."

하대치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등받이가 없는 긴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장날도 아닌디 요리 늦게 워쩐 일이다요?"

장터댁은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맞바라보고 앉으며 물었다. 그녀의 태도가 남자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에 이골 나서 취하는 것이 아님을 하대치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무를 겨울 동안 싸게 대주기로 한 거래관계 때문에 보이는 반가움만도 아니었다. 두 번째의 만남일 뿐이었지만 처음에 밑에 깔았던 짙은 음담이 여자로 하여금 마음을 열게 했을 것이라고 하대치는 짐작하고 있었다.

"밥때가 다 되얐는디 워찌 요리 썰렁허니 포리(파리)만 날리고 있으까?"

하대치는 가게 안을 휘둘러보며 전혀 반가운 내색 없이 뚜벅 말했다.

"장날도 아닌디다가 빨갱이 등쌀에 밥장시넌 어느 집이나 다 요러크롬 포리만 날리는 신세다요."

장터댁은 과장기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침 잘되얐네. 나넌 빨갱이 덕 잠 보게 생겼응께."

하대치는 담배쌈지를 꺼냈다.

"고게 무신 말이다요 ……"

장터댁은 의아한 눈빛으로 하대치를 바라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 밥때에 밥집에 사람이 들었으먼 묵을 것부텀 줄 일이제, 자네 눈엔 나도 포리로 보인가?"

"금메 말이요, 이년이 얼이 빠졌는갑소. 시장허실 것인디 멀 드실 께라?"

장터댁은 서둘러 일어났다. 어느새 밥장수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국밥허고 막걸리 한 됫박 주소."

"막걸리를 한 됫박이나 디려라?"

장터댁의 놀란 물음에 하대치는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지난번에 한사발로 끝낸 주량에 한 되 술을 청하니 놀랄 만도 한 일이었다.

"말로 지고 가는 것보담 배에 담고 가야 편헌 사람잉께 싸게싸게 갖고 오소."

하대치는 침을 잔뜩 바른 말이담배에 칙 성냥을 그어댔다.

"참말로 쪼깐헌 체신에 못 알아묵을 소리만 허요이."

장터댁은 혼잣말처럼 하며 돌아섰다.

이내 국밥과 술이 날라져왔다. 하대치는 먹음직스럽게 김이 오르는 국밥에서 국물을 한 숟가락 떠내다 말고 버럭 목청을 돋우었다.

"와따, 딴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겄고, 집구석 인심이 워찌 이려. 술 잠 치먼 법에 걸리드랑가?"

"워메 간 떨어지겄소. 여그가 기생집이간디 술 치고 말고 해라."

장터댁은 입을 삐죽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워디 기생집서만 술 치는 법이간디? 술이야 서로 치고 권하는 맛에 묵는 음식인디."

"말이야 맞는 말이제라. 남정네덜이야 술 치는 맛에 술 묵고, 지집덜이야 화대받는 맛에 술 치는 법인디, 국밥장시 신세에 나넌 무신 맛으로 술얼 치겄소."

하대치는 이때다 싶었다.

", 그 사람 말 한자락 청산유수로 뽑네그려. 자네도 화대럴 받고 잡은가?"

"시장시럽소, 줄 사람이 있어야 받제라."

"참말로 요 사람 눈깔 웂은 것 잠 보소. 코앞에 남정네 앉혀놓고 사람타령 혀야 쓰겄어?"

하대치는 화가 난 척 사납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밥 식는디 싸게 드시씨요."

장터댁은 하대치의 눈 부라림을 아예 묵살하며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어 사발에 막걸리를 따랐다.

"장터댁, 사람얼 그리 무시허는 법이 아니시. 문밖 잠 내다보소. 거그 자네 줄 화대가 잇응께."

"무신 말이다요?"

하대치는 전혀 대꾸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술 사발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장터댁은 어쩔 수 없이 문밖을 내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작을 가득 업은 지게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터댁은 일순간 얼굴이며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가 왜 장날도 아닌 평일 해질녘에 혼자 나타났는지를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장터댁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남자 쪽으로 돌아서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워째, 화대가 될 만헌가?"

"참말로 요상시런 화대도 다 있소."

장터댁은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장작 한 짐을 지고 굳이 자신을 찾아와 준 저 당차게 생긴 남자가 이미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되지 않는 목청을 뽑다 보니 하대치는 목이 컬컬함을 느꼈다. 담배생각이 났다. 습관적으로 쌈지가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먼저 손에 잡힌 것은 쌈지가 아니라 네모 난 조그만 갑이었다. 그 조그만 갑은 손 안에 알맞게 잡히긴 했지만 감촉은 영 낯설었다.

"독헌 쌈지담배만 태우지 말고 궐련 잠 태와봇씨요."

장터댁의 감기듯 하는 목소리와 함께 부끄럼타는 몸짓이 떠올랐다.

"썩을 년, 하로밤 색질에 비싼 궐려꺼정 사 바치다가는 기둥뿌리 내려앉겄다."

하대치는 궐련갑을 뜯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늦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여자는 분발이 짙은 얼굴로 샐샐 웃음을 날렸다.

오냐, 니가 내 연장 맛에 배창새기꺼정 춤얼 춘 모냥이구나.’

하대치는 잠이 덜 걷힌 눈길로 여자를 올려다보며 만족스러운 기지개를 팔다리가 찢어져라 켰던 것이다. 술까지 곁들여진 국밥에는 민망할 정도로 고기가 많이 들어 있었다. 하대치는 궐련 한 개피를 뽑아 물고 궐련갑을 손아귀 안에서 돌리며 매만져 보았다. 그 조그맣고 단정한 생김이 쌈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영 낯설고 어색스러웠다. 쌈지만 만졌을 때처럼 넉넉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평소에 가까이하지 않은 물건이라서 생기는 거리감 같은 것만이 아니었다. 전에도 더러 궐련을 안 피워본 것도 아닌데 그때는 별다른 느낌 없이 궐련갑을 매만졌던 것이다. 하대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다가 무심결에 샅을 걷어 올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마누라 들몰댁의 얼굴이었다. 하대치는 머릿속에서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건 마누라와 밥집 여자의 차이였다. 마누라와 밤일을 치르고 나면 지금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딘가 편안하고 흡족하고 맺힌 데 없이 확 풀린 기분이었다. 목까지 잠기는 뜨거운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시원함이나, 땀 뻘뻘 흘린 들일 중간에 점심 배불리 먹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난 다음의 개운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간밤의 일은 전혀 그런 맛이 없었다.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는 찬 개울물을 첨벙댄 것 같은 석연찮음과 미흡함이 남아 있었다. 미지근한 된장국에 식은 밥덩이를 급히 먹었을 때처럼 영 속이 거북스럽고 허했다. 횟수만 거듭하다 보니 살이 뻐근하고 당겨올리는 것도 과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짓거리는 짚은 정 있고서야 지 맛이 나는 모냥인갑구만.’

하대치는 비로소 밤일의 오묘함을 깨닫고 있었다. 비록 마누라는 무덤덤하고 무심한 듯 자신을 받아들였어도 따뜻하고 깊은 물이었고, 장터댁은 활짝활짝 웃고 간드러지는 꽃이었지만 결국은 차갑고 얕은 개울물이었다. 그러니 마누라가 만들어준 쌈지와 장터댁이 사다준 궐련갑의 감촉이 같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새끼덜허고 으쩌고 사는고.’

하대치는 마누라 생각에 잠겨들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산으로 쫓겨 들어온 후로 언뜻언뜻 생각이 안 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을 버려두고 온 것이 자신만이 아니었다. 애써 떼치려 했고 잊으려 했던 생각이었다. 자기네들이 저지른 일만큼 남은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 것을 생각하면 금방 사지가 푸들푸들 떨려왔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쪼매만 참아라, 우리 시상이 올 것잉께. 우리 시상이 오먼 그 한 다 풀릴 것잉께."

하대치는 이를 앙다물며 이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읍내를 다녀온 강동식의 입에서 테러사건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질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지만 대장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염병, 우리 시상이 오긴 와야 헐 것인디."

하대치는 꽁초를 논바닥으로 튕기며 중얼거렸다. 논바닥에는 낫질을 당한 벼 그루터기만 남아 말라가고 있었다. 산간지대의 논이라 한 뙈기마다 층을 이루고 있었고, 논두렁이라는 것이 발 한 짝 제대로 놓을 수 없이 폭이 좁은데다가 구불구불 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저런 논에서 쌀이 나면 얼마나 날 것인가 싶어 한심스러웠고, 그런데도 시끌시끌한 시국과는 상관없이 이미 추수를 끝냈음이 더욱 한심스러워 하대치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찬바람 속에 자신의 몰골이 불현듯 드러났다. 자신은 저런 한심스러운 땅뙈기나마 한 뼘 가진 것이 없다는 자각이었다.

, , 그것은 무엇인가. 그건 먹고 사는 근본이었다.

농사꾼에게 그것은 분명 명줄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농토라는 농토는 모두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임자가 결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소작인으로 제 아무리 피땀을 흘려도 평생 소작인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지주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돼먹어 있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실낱같은 것일망정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야 고생도 참고 고통도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소작인으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캄캄절벽이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아버지의 신세가 바로 자신의 신세였던 것이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가 없었다. 짐승이 아니고 사람인 바에야 그렇게 평생을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말리라는 결심으로 염상진을 따라 소작쟁의에 가담했던 것이다. 염상진을 뒤따르는 세월 동안 얻은 것은 감옥살이의 고초와 쫓기는 고생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결코 고통스럽거나 후회스럽지가 않았다. 그 치 떨리는 소작제를 깨부수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생쯤 오히려 새로운 힘을 돋게 하는 자극이었다. 자신은 대장 염상진이 시시때때로 입에 올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유식한 말을 빠뜨리지 않고 듣기는 했지만 다 머리에 담기지는 않았다. 마르크스가 어쩌고 무산자 인민대중이 어쩌고 하는 장광설을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지주계급 쳐 없애고 소작인 세상 만들자'가 아니냐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다. 염상진에 대한 존경과 신뢰도, 그가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새끼덜 델고 고상이 많을 것인디 쪼매만 기둘리소. 우리도 요러타께 살 시상 맹글어놓고 말 것잉께. 나도 지끔 호강허고 사는 것이 아닝께."

하대치는 마누라를 면전에 대하고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그리고 양쪽 콧구멍을 번갈아 막아가며 코를 풀었다. 마누라와 새끼들 모습이 눈앞에 밟히며 코끝이 찡해졌던 것이다.

별로 서두르지 않은 걸음이어서 점심때가 기울어 숯막에 도착했다. 배꼽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아침을 배불리 먹었던 탓인지 별로 시장기를 느끼지 않았다.

"어땠소?"

대장 염상진이 무심한 듯 물었다.

"야아, 수월허게 목적 달성얼 혔구만이라. 방아럴 여섯 분이나 찧었응께요."

하대치는 아차 싶었다. 끝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을 말이었다.

"고단하겠소."

염상진은 여전히 무심한 듯 말하고 있었는데, 그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번져나고 있었다.

"여섯 번이라니?"

안창민이 눈을 휘둥글하게 뜨며 하대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하대치와 눈길이 마주치자,

"역시 지독스런 기운이군." 하며 쿡쿡거리고 웃었다.

"뭐 다른 소식은 없소?"

염상진이 담배를 말려고 종이를 찢으며 물었다. 궐련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야아, 장날도 아니고 헌께요. 대장님, 요 궐련 태우시씨요. 지가 먼첨 두어 대 뽑아 태우긴 헌 것이지만도 막담배 몰아 피시는 것보담이야 나슬 것잉께요."

하대치는 궐련갑을 두 손으로 받쳐 염상진 앞에 내밀었다.

"웬 궐련이오?"

"머시냐 …… 긍께, 밥집 여자가 뜽금웂이 내놓드만이라."

하대치는 그 말 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몰랐다.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방아 한번 제대로 찧은 모양이오. 아니, 한 번이 아니라 여섯 번이라고 했지."

안창민은 아까보다 한결 심하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쿡쿡거렸다.

"하 동무만 피우라고 준 담밸 것인데 내가 피워서 되겠소?"

염상진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담배를 뽑아들었다. 이젠 그의 입언저리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지는 그만 나가 보겄구만이라."

"그러시오, 좀 쉬시오."

하대치는 아주 기분 좋게 대장 앞에서 물러나왔다. 대장도 대장이었지만 안창민 동무가 자신 때문에 그렇게 재미나게 웃었다는 것이 하대치로서는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어지간한 일에는 거의 감정표현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수도 적은데다가 언제나 얼굴에 찬바람을 한 겹 덮고 사는 사람이었다. 몸집이 볼품이 없어 그렇지 꽤나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와 마주 대하게 되면 대장한테서 느끼는 위압감이나 든든함은 없어도 어딘지 주눅이 드는 기분은 어찌할 수 없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기운으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주눅이었다.

하대치는 여기저기 강동식을 찾아다녔다. 이상하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를 찾아 간밤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그의 기분을 돌려놓으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자 하대치는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설마 대장의 명령을 어기려고, 하면서도 한번 떠오른 좋지 않은 생각은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강동식 동무 워딨소?"

"몰르겄는디요."

하대치는 장소를 옮겨 물었다.

"강동식 동무 못봤소?"

"못 봤는디요. 워디 있겄제라."

하대치의 생각은 나쁜 쪽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강동식 동무 워디 있는지 아요?"

"아까 점심때꺼정 있었는디요. 그 훌로 못 봤구만이라. 워디 대장님 심바람 갔겄제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러나 일단 느낌이 좋지 않은 이상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대치는 숯막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대장님, 강 동무헌테 무신 명령 내리셨는게라?"

"아니오, 무슨 일 생겼소?"

염상진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점심 때꺼정은 있었다는디, 아무리 찾아도 안 뵈는구만이라."

"글세 ……"

고개를 갸웃하는 염상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방정맞은 생각인디라, 행여 명령 어기고 읍내에 간 것이 아닌가 허는 생각이 드는디요 ……"

"그랬을지도 몰라!"

염상진이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내뱉은 말이었다.

"전원 집합시키시오. 인원파악을 할 테니까."

염상진이 굳어진 얼굴로 명령했다. 인원파악은 삽시간에 끝났다. 인원이 적기도 해서였지만 '전원집합' 명령에 따른 기민성은 이미 훈련을 거친 바였다. 하대치의 예감은 적중했다. 부재인원은 셋이었고, 총도 세 자루가 없어졌다. 강동식, 배성오, 오수길이 없어진 것이다. 강동식이 평소부터 자기 조원으로 가까이 하고 있는 배성오와 오수길을 데리고 읍내 침투를 감행했음을 추리하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 동무, 빨리 조를 짜시오. 각 조에 두 명씩, 여섯 명을 차출하시오."

마침내 염상진이 명령했다. 하대치가 신속하게 대열 속을 누비며 손가락질을 해나갔다. 그러는 동안 염상진은 반대쪽으로 돌아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어떻게 하시려구요."

안창민이 낮게 물었다.

"1차로, 강동식이 읍내로 침투하는 것을 저지해야 하고, 우리가 발이 늦어 그 일이 실패하면 2차로, 강동식조가 당할지 모를 위험을 우리가 막는 것이오."

염상진의 음성은 땅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낙엽처럼 메마르고 딱딱했다.

"대장님, 인원차출 끝냈습니다."

하대치가 쇳소리 나는 음성으로 보고를 하며 염상진의 등 뒤에다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30여 명의 사이에는 얼음살 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염상진이 바람을 일으키듯 대원들 쪽으로 돌아섰다. 그 얼굴이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동무들! 긴급사태가 발생했소. 나와 안 동무, 하 동무, 그리고 여섯 조원이 작전을 나가는 동안 나머지 동무들은 추호도 흔들림 없이 여기를 지켜주기 바라오. 보초근무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오. 이상."

말을 마친 염상진은 하대치에게 명령했다.

"하 동무, 전원 총으로 무장하고 활동준비!"

"알겄습니다!"

하대치가 또 거수경례를 붙였다. 염상진은 급히 숯막으로 갔다. 권총을 차기 위해서였다. 제발 강동식 일행을 읍내에 침투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명령을 어긴 강동식이 면전에 있다면 당장 방아쇠를 당겨 버릴 것처럼 성질이 치솟아 올랐다. 시뻘건 대낮에 총을 들고 설치는 어리석은 작자, 사적인 감정을 억제할 줄 모르는 반혁명적인 작자, 마땅히 총살감이었다. 그 작자로 인해 다시 9명이 대낮에 총을 들고 나선다는 것이 염상진으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서는 그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동식 일행을 읍내에 침투하기 전에 따라잡게 되면 총은 필요 없게 되는 것이지만, 만약 그들을 놓쳐 읍내까지 뒤따라야 한다면 총 휴대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강동식 일행이 총을 휴대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발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읍내에서 총을 발사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쪽에서는 읍내의 화력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고, 보나마나 그 동안 읍내의 경계태세나 화력은 전보다 몇 배 강화되었을 것이었다. 그런 상대를 향해 총질을 하고자 하는 그들을 보호하려면 총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권총을 차며 염상진은 부드득 이빨을 갈았다. 의식의 어느 구석에선가 검은 바람이 회오리치며 일어났다. 그 바람을 내몰기라도 하려는 듯 염상진은 황급하게 담배를 빼물었다.

"강동식조는 아마 오금재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릴 것이오. 우리는 오금재까지 그들을 따라잡아야 하오. 그러기 위해서는 오금재까지 속보행군을 강행하겠소. 모두 단단히 각오하도록!"

그것은 평소에 자신이 지시해온 작전이었다. 염상진은 말을 하면서도 강동식이 제발 오금재에서 오래 머물러 있기를 빌었다. 안창민은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어 해를 가늠해보았다. 벌써 해는 서편으로 반나마 기울어 있었다. 그지없이 투명한 물빛 하늘에 해는 조그맣게 박혀 있었다. 안창민은 해에 눈길을 박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염상진의 계획은 무위로 끝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해는 너무 기울어 있었고, 산속에는 유난히 어둠이 빨리 깃들이는 탓이었다. 어차피 읍내 침투는 불가피할 것 같았다.

안창민은 손차양을 내리며 총의 멜빵을 다잡아 쥐었다.

"출발!"

염상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안창민의 행동을 묵살하고자 하는 그의 감정표현이었다. 안창민이 해를 올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다시 명령을 어긴 강동식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길도 없는 나무숲을 헤치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염상진이 진로를 잡았고, 하대치가 후미를 맡았다. 길을 헤쳐 나가는 염상진은 마치 성난 짐승 같았다.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염상진의 발 빠르기는 키가 크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키가 작은 하대치의 잽싼 발놀림은 놀란 만한 것이었다. 대열은 마치 앞에 선 염상진에게 끌리고, 뒤에 선 하대치에게 밀려서 신속하게 움직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잠시도 쉼이 없이 결사적으로 걸었다. 차차로 냉기가 서리기 시작하는 산중 기온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에 메마른 단내가 내뿜겼다. 그러나 누구 하나 힘든 표를 내지 않았다. 안창민은 오로지 어머니, 어머니만을 생각했다. 장딴지가 경직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은 고비를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까스로 넘기고 있었다. 혁명사업 수행이라는 명분도, 조장이라는 체면도 그 고통스러운 고비를 넘기게 하는 힘이 될 수 없었다. 테러를 당해 위기에 처해 있는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의 되풀이가 그에게는 가장 실감나고 현실적인 극기의 방법이었다. 대장 염상진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분명 사상성의 빈약으로 매도당할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 한 인간의 의식이 날줄이거나 씨줄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듯이. 안창민은 지칠 줄 모르고 앞으로만 내닫고 있는 염상진의 완강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오기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일행이 오금재에 다다랐을 때에는 먹빛 어둠이 진을 친 다음이었다.

"조별로 흩어져 찾아보도록!"

염상진이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이 한숨처럼 들린 것은 숨결이 거칠어서가 아니었다. 염상진은 너무 짙어져 있는 어둠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강동식이 몸을 충분히 숨길 수 있는 어둠이 내렸는데도 오금재에 웅크리고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색명령이 내린 것은 완벽을 기하자는 뜻을 포함해서 행여나 하는 미련이 남아서였다.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염상진은 갈증과 함께 심한 흡연욕구를 느꼈지만 어금니를 꾸욱 맞물며 어둠 저 편의 읍내 쪽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읍내를 장악했었던 그 며칠 동안의 피끓음이 생생하게 떠올라 왔다.

반도 땅의 역사의 길이가 반만년이라고 했다. 그 장구한 세월을 무턱대고 자랑삼으려 한다. 세월의 길이가 왜 자랑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배부른 자, 인민대중의 생혈을 빨고 살아온 자들의 타령이고 최면술인 것이다. 그 긴 세월이 진정 자랑이 되려면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갔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 오백 년, 고려왕조 오백 년, 그리고 통일신라 오백 년과 그 전 왕조들 …… 끝도 없는 착취의 역사일 뿐이었는데 그 세월을 무엇으로 자랑삼는다는 것인가. 단군이 최초에 나라를 세울 때 그 건국이념이 홍익인간이었다고 한다. 그 말은 누가 만들어낸 뻔뻔스런 잠꼬대인가. 아니, 그 말을 전적으로 믿어준다고 한다면 그 다음의 역사는 왜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는가. 홍익인간-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함. 얼마나 그럴 듯한 말인가. 그런데 단군의 정신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짓밟히고 또 짓밟혔던 것이다. 각 왕조는 계급제도를 고수함으로써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라 소수 지배계급만을 이롭게 하는 사회를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단군은 새로운 왕조가 설 때마다 배신을 당한 것이고, 반만년의 역사는 가장 비인간적인 착취의 부끄러운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 세월을 무엇으로 자랑삼을 수 있는가. 해방은 반도 땅의 역사 위에서 단순한 의미일 수가 없다. 자멸한 조선 봉건왕조 위에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중차대한 기점이 바로 해방인 것이다. 봉건계급제도가 일소된 나라, 착취계급을 완전 소탕해 버린 나라, 그야말로 홍익인간의 정신을 되살리는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 해방의 의미였다. 그런데, 역사의 물줄기는 다시 봉건왕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남쪽 땅에는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지주계급과 친일세력이 합세하여 남쪽만의 나라를 세우고 만 것이다.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고 유일한 길일뿐이다.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투쟁, 오로지 투쟁이 있을 뿐이다.

염상진은 어둠을 응시한 채 주먹을 말아 쥐며 부르르 떨었다.

"대장님, 웂구만이라."

하대치의 보고였다. 잇따라 들어온 두 조의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좋소, 지금부터 행동을 개시하겠소. 나는 강 동무를 맡겠소. 하 동무는 안 동무와 함께 행동하시오. 안 동무는 모친의 상태를 확인하는 즉시 퇴각하여 이 지점으로 돌아오시오. 하 동무는 철저히 안 동무를 돕도록 하시오. 그리고, 절대로 충돌을 피하시오. 우리의 목적은 강 동무의 행위를 저지하는 것이니까. 출발!"

염상진은 앞장섰다.

하대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장이 자신을 묵살하고 안창민에게만 집에 들르게 할 줄은 몰랐다. 명령이니까 듣는 도리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차별대우를 받는 것 같아 서운함이 괴었다. 강동식의 말에 의하면 테러가 하루 이틀로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테러를 당한 사람은 안창민의 모친만이 아닐 것이었다. 산으로 피신한 모든 동지들의 집이 당했을 일이었다. 그때 하대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대장의 집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을 터인데 대장은 서슴없이 강동식을 찾아 나선 것이다. 하대치는 자신의 소견 좁음을 뉘우쳤다. 그리고, 안창민을 집에 보내는 것은, 현장을 확인한 강동식이 안창민 모친의 생명이 위독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했으므로 그런 것이라고 넓게 생각했다.

"여기서 헤어지겠소. 경비가 심할 테니 조심하도록."

염상진은 낙안벌이 펼쳐지는 옥산 입구에 이르러 방향을 나누어 잡았다.

"강 동무 집 아시제라?"

하대치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물었다.

"회정리 삼구, 상고 아니오."

"맞구만이라. 무사허니 댕겨오시씨요."

"가자!"

염상진은 두 명의 부하를 데리고 좌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회정리 삼구까지 가자면 낙안벌을 좌측으로 무질러 낙안읍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건너 제석산 자락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거기서부터는 산자락만을 타고 봉림리와 회정리 일구를 거쳐 회정리 삼구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험하고 힘든 길이었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방금 헤어진 지점에서 계산하면 안창민네 집보다는 배 가까이 먼 거리였다. 오금재에서 만나자면 그만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염상진의 목적은 강동식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그 발걸음은 오금재를 향해 걸을 때보다 더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오금재에 이르는 길은 거의가 오르막 산길이었지만 이제는 들판이었던 것이다. 경계가 필요 없다면 뛰고 싶은 것이 염상진의 심정이었다.

신작로를 무사히 건너 민가를 피해 산자락으로 파고 들었을 때였다.

", 대장님 ……"

뒤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염상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워째 그려!"

다급한 김에 진한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다리가, 다리가 ……"

부하 한 명은 주저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우뚝 서 있었다.

"다리가 어떻단 말이오?"

쥐가 난 모양이라고 직감하며 염상진은 재빨리 부하들 쪽으로 다가갔다.

"뻣뻣헌 것이 꼼짝을 못허겄구만요."

"괜찮소. 좀 빨리 걸어서 쥐가 난 거요. 자아, 자아, 걱정 말고 온몸에 힘을 쑥 빼고 편안하게 누우시오. 곧 괜찮아질 테니까."

염상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부하를 눕혔다. 그러나 마음은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낭패감이 왈칵왈칵 몰려왔다.

시간이 없다, 혼자 오금재로 돌아가야 하나, 안될 말이다. 그럼 둘을 함께 보낼까, 나 혼자 간다면 시간은 훨씬 단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둘을 보냈다가 사고가 나면, 그것도 안 될 일이다. 한번 쥐가 나기 시작하면 계속 나게 되는데, 어쩔 수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함께 행동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염상진은 부하의 다리 근육을 풀어주며 생각을 정리했다.

"좀 어떻소?"

"쪼매 땡기긴 혀도 다 낫구만이라."

"됐소, 좀 더 그대로 눠 있으시오."

염상진은 부하의 다리에서 뗀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나 담뱃갑이 손에 잡히는 순간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만났다. 그는 목을 늘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쯤인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도록 어둠은 짙었다.

"걸을 수 있겠소?"

"야아."

쪼그리고 앉았던 부하가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며 대답했다.

"동무 총 이리 주시오."

"아니어라, 암시랑토 안혀라."

부하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소, 내가 메고 갈 테니까 어서 벗으시오."

염상진의 손은 벌써 부하의 총신을 잡고 있었다. 염상진은 속도를 반감시켜 걸었다. 강동식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기는 어렵겠고, 그가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염상진은 계획을 수정했다.

봉림리 뒤편 산자락을 지났다. 읍내에 켜진 많지 않은 전등불빛이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 봉림리와 장터거리와의 직선거리는 포구의 폭에 지나지 않았다. 그 포구에 가로놓인 세 개의 다리가 낙안벌 쪽으로부터 횡계다리(홍교), 소화다리, 철교다. 벌교라는 이름도 포구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그 포구에다가 옛날에는 뗏목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닌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세 개의 다리 중에서 제일 길이가 짧은 횡계다리는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었고, 소화다리와 철교는 일제시대에 만든 것이었다.

벌교 …… 염상진은 불빛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뇌어보았다. 긴 포구를 사이에 두고 두 쪽으로 갈라진 듯 이어지고 있는 땅, 남도지방하고도 그 끝머리에 위치한 땅이 바로 자신의 고향인 것이다. 그런데 그 불빛은 단순한 불빛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불빛은 자신을 거부하는 차가운 손이었다. 그 불빛은 자신을 감시하는 살벌한 눈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 불빛은 자신의 승리를 지키는 깃발이었다. 그 며칠 동안의 일이 마치 멀고 아슴한 꿈결처럼 느껴졌다. 현재의 입장을 결코 패배라고 생각지 않으면서도 흡사 도둑고양이처럼 불빛을 피하고 있는 자신의 몰골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염상진은 불빛을 외면한 채 걷기에만 열중했다.

회정리 일구를 지나 삼구로 넘어가는 분기점인 도래등에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 총성이 울렸다.

염상진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총성이 울린 쪽으로 홱 몸을 돌렸다. 그의 동작은 강한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같았다. 염상진은 자신의 몸이 읍내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안창민과 하대치가 어지럽게 엇갈리고 있었다.

, 타당, , ……

연이어지는 총성이 어둠을 찢어대기 시작했다. 총성의 빈도수와 무질서함으로 보아 접전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불길했던 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읍내로 방향을 바꾼다."

염상진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워쩐 총소릴께라?"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안 동무네 조가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뒤를 따르시오."

염상진은 그때까지 들고 있던 부하의 총을 건넸다. 그리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으며 맑아지고 있었다. 어떤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의식은 백지처럼 깨끗해졌고, 그때마다 그 위에 타개책을 그려 나가고는 했다.

안창민네 집 청년단의 위치 경찰서, 경찰서? 소화다리 ,’

염상진의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읍내의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갑시다, 지금부터 계속 뛰겠소!"

염상진은 회정리 일구를 관통하고 있는 신작로를 향해 방향을 잡으며 부하들에게 일렀다.

, 탕탕, …… 총성은 한층 격렬해지고 있었다.

후퇴, 후퇴! 접전 중지! 분산 후퇴, 분산 후퇴! 부용산 타고 우회 후퇴, 우회 후퇴, 고읍으로 직선 후퇴 말 것, 직선 후퇴 금지!’

염상진은 신작로 가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총성은 어지럽게 밤하늘을 찢고 있었고, 세 사람이 내달리고 있는 신작로에는 사람의 자취라고는 없었다.

"갈기시오. 저쪽을 보고 갈겨!"

소화다리에 도착한 염상진은 두 부하에게 명령했다. 두 부하는 어둠 저편의 읍내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유인작전괴 교란작전을 겸한 것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해도 소화다리를 건너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소화다리를 건너가게 되면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고, 횡계다리와 소화다리가 막히게 되면 독안에 든 쥐 꼴을 면할 수 없었다. 안창민의 집은 남국민학교 뒤편이니까 바로 부용산을 타고 빠져 우회하면 얼마든지 위험을 떼칠 수가 있었다.

"총알 아끼지 말고 계속 갈기시오!"

염상진은 계속 다리 건너편 어둠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다시 명령했다. 이쪽에서 총질을 해대면 안창민네에게로 쏠렸던 적의 화력이 동요를 일으키면서 분산될 것이었다.

타당, 탕 탕탕, ……

예리한 총성은 계속 어둠을 칼질하고 있었다. 총알에 맞아 꺼지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불빛이 꺼져갔다. 읍내는 한층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 앉아가고 있었다. 총소리에 섞여 개 짖는 소리만 사방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 ……!"

염상진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바로 코앞에서 총성이 울린 것이다. 예상대로 적의 병력이 분산되는 것이었다. 다리 건너편 어둠에서 총성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겁내지 말고, 더 몸을 낮추면서 뒤로, 뒤로 천천히 물러나면서 계속 갈기시오. 겁내지 말고."

염상진은 두 부하를 독려하며 자신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총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앞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방 뒤쪽을 경계하며 천천히 물러서고 있었다. 적들은 다리를 건너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짙어 적의 동태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총성만으로 적의 위치를 가늠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적은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우세한 입장이므로 기만전술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몇 명을 다리 건너편에 배치시켜 응사하게 하고, 정작 주력병력으로 포구를 건너게 하는 기만술을 쓰는 경우 이쪽에서 위치를 고정시키고 있다가는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적들은 이미 횡계다리로 병력을 우회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병력이 구보로 장터거리를 거쳐 횡계다리를 건너서 현 위치까지 오는 데는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어차피 현 위치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은 횡계다리를 건너 현 위치까지 병력을 투입시키는 적극작전은 펴지 않더라도 횡계다리를 차단시킬 것은 확실했다. 횡계다리가 막히는 것은 고읍들로 빠지는 길이 차단되는 것이었다. 그들도 도주할 때 이용한 길이 그 길이었음으로 횡계다리 차단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퇴로를 북쪽으로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벌교 특유의 입지조건 탓이었다. 동쪽은 바로 바다였고 남쪽은 섬이나 다름없는 고흥반도가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 지금부터 후퇴요. 사격 일체 중지!"

염상진은 명령과 함께 두 부하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회정리 일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신작로를 따라가다가 일구의 중간쯤에서 교회당으로 오르는 샛길을 타면 바로 그 뒷산이 제석산 줄기로 이어졌다. 적들이 경계를 펴며 소화다리를 건너오는 사이에 교회당 뒷산까지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염상진 일행이 교회당 뒷산에 도착해 잠시 숨길을 돌릴 때까지도 총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염상진은 그 난무하는 총성들 중에 자신의 부하들이 쏘는 것은 없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자신의 부하들은 이미 민첩하게 행동을 취했고, 뒤늦게 적들이 갈겨대는 총성이라고 믿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라고 누차 강조했던 바이고, 부하들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렇게 소극적인 행동만 하다가 물러서야 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고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염상진은 될 수 있는 대로 산속 깊이 파고들었다. 일단 제석산 깊은 골로 들어가서 고읍들 중간지점으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면 위험지역에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염상진은 길을 분간할 수 없는 산속을 한참이나 걷다가 불현듯 강동식을 생각해냈다.

염상진은 우뚝 멈춰 섰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가! 염상진은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뒤로 꺾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공허한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깊고 깊은 어둠 저편에 박혀 반짝이고 있는 무수한 별들뿐이었다.

, …… 우주, 무한대 ……

염상진은 잠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끝도 모르고, 생김새도 모르고, 그래서 크기는 더욱 알 수 없다는 우주. 그 무한공간을 떠돌고 있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수억 개의 별. 그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지구, 그리고 수많은 인간, 그리고 나.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또 무엇인가.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이었다. 언제나 허망의 늪을 장만해놓고 있는 그 생각은 이미 단련을 거칠 대로 거쳐 있었다. 그 생각 다음에는 언제나 '그러나 ……' 하는 부정이 고개를 들고는 했다. 인간의 삶은 하루살이가 아니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인생살이 한평생이 바로 하루살이라고 했다. 그 관념논리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런 관념논리를 추종하며 생혈을 빨리는 노예의 삶을 평생토록 감수할 수는 없었다.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는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평생을 노예로 사는 고통을 인내하느니 차라리 삶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나은 것이다.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혁명투쟁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별을 올려다보며 잠시라도 허망감에 빠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염상진은 이내 감정을 수습했다. 강동식의 문제에 정신을 모았다. 상황이 너무 급한 나머지 그 문제를 지나친 것이다.

예상대로 강동식이 회정리 삼구에 머물러 있었다면 총성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다. 총성이 들릴 수 있는 거리인데다가 밤이어서 그 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을 것이다. 그리 오래 계속된 총성을 들었다면 강동식은 의당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염상진의 걱정은 그 다음에 있었다. 강동식이 어떻게 행동했을 지가 문제였다. 명령을 어기고 단독행위를 감행한 것 같은 무모함을 또 저질러서 총성을 쫓아 읍내로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퇴로를 잡는다고 잡으면서 횡계다리 쪽의 최단거리를 이용했을지도 몰랐다. 두 가지 행동 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강동식이 어떻게 행동을 취하건, 그가 아직까지 집에 은신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를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다시 강동식의 집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무모한 행위라고 염상진은 판단했다. 염상진은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걷는 데만 열중했다. 서너 시간 산속을 헤맨 끝에 고읍들 쪽으로 빠져나왔다. 예상은 상당히 빗나가 있었다. 고읍들의 중간쯤 되는 지점을 목표로 했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래, 횡계다리 쪽으로 치우친 지점이었다. 그러나 위험지대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오금재에 도착했을 때는 염상진마저 기진맥진해 있었다. 염상진은 그때서야 저녁밥을 걸렀음을 깨달았다. 두 부하가 더없이 안쓰러웠다. 염상진은 커다란 바위를 찾아냈다. 그 뒤에 두 부하를 은신시키고 궐련을 한 개비씩 나눠주었다. 담배로나마 허기를 메우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부하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산중 야기를 웅크리고 앉아 견뎌내기는 어려웠다. 두 부하는 자꾸만 시름시름 졸았다. 염상진은 아지트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두 부하를 독려해가며, 개울물을 마셔가며 걷고 또 걸었다. 추수기가 다 지나버려 산간 밭뙈기에는 무 하나 박혀있지 않았다.

염상진이 숯막에 다다른 것은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대장님, 안 동무가 당혔구만이라."

염상진의 정수리를 친 말이었다. 하대치의 울먹이는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15. 기습이다!

"이거 보시오, 남 서장 이래도 당신 말을 믿어야 되겠소!"

무장을 한 남자는 거칠게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온 기세 그대로 내질렀다. 줄곧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남인태 서장은 그 남자를 보자 당황한 빛을 드러냈다.

"왜 대답을 못하시오. 직책이 직책인데 말에 대한 책임을 져얄 것 아니오."

권총을 찬 남자는 목소리도 태도도 당당했다. 아니, 당당함을 지나쳐 위압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남자가 전투복 차림의 무장인 데 비하여 남 서장은 사복차림이었고, 남자가 두 손을 혁대짬에 올리고 버티고 선 것에 비해 남 서장은 엉거주춤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이거 참, 면목 없게 됐소."

남 서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웃음이 그렇게 비굴해 보일 수가 없었고, 그 웃음 때문에 목소리는 한층 기죽어 보였다.

"이게 면목 없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시오? 이건 엄연히 경찰로서 직무태만을 저질렀기 때문에 발생한 사태요."

남 서장이 수세에 몰렸기 때문인지 남자의 태도는 오히려 강경해지고 있었다.

직무태만?’

남 서장은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그만 불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건방진 자식, 엄연히 계급도 낮은 놈이 감히 어디다 대고 ……

그러나, 남 서장은 곤두선 감정의 줄기를 부러뜨렸다. 그 모독감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그는 계엄지구에 파견된 수도경찰 소속의 '토벌대장'이었다. 계엄령이 발효 중인 상황에서 그의 직책이나 권한은 계급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그리 막 하시오."

감정을 자제하느라고 남 서장의 말은 약간 떨려 나왔다.

"? 듣기 싫으시오? 그런 말 듣기 싫었으면 어제 내가 말했던 대로 실시했어야 했소. 그런데, 당신은 뭐라고 했었소? 빨갱이 잔당은 당신네 손으로 다 처치했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장담하지 않았소. 빨갱이들이 읍내 심장부까지 치고 들어오지 않았느냔 말이오. 이래도 잔당들은 다 처치했다고 큰소리치겠소? 우리가 도착한 하루 만에 그 새끼들이 치고 들어온 건 우리 쪽 정보가 잔당들을 통해서 속속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오. 그 새끼들은 오늘밤 우리가 한잔 한다는 것까지 환히 알고 기습을 해온 것이오. 어째, 내 말이 틀렸소?"

토벌대장은 턱을 치켜들고 남인태 서장을 아래로 깔아보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남 서장은 맞은편 문 아래쪽으로 낮은 시선을 던진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놈의 땅, 어서 뜨고 말아야지.’

남인태는 또 이 생각만을 굳히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빨갱이가 소란을 피우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좀 덜한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 것이 그의 당면 문제였고 희망사항이었다. 그 희망의 실현이 결코 멀지 않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고, 그날이 올 때까지 그는 어떤 충돌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다소 체면이 서지 않는 옹색함 같은 것은 큰 목적을 위해서 묵살할 수밖에 없었다.

"왜 말이 없소!"

아무 대꾸가 없는 것이 기분이 상했는지 토벌대장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임 대장, 그 새끼들한테 선제공격을 당한 기분이 어떤지 잘 알아요. 허나 그 놈들을 가볍게 퇴치해버린 마당에 앞으로의 대책이나 논의하는 게 좋지 않겠소."

남 서장은 한 발 비켜서는 기분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토벌대장의 득세하는 기분을 살려주고, 토벌대장을 앞으로 내세운 다음 자신은 위험으로부터 물러서자는 이중계산이 된 발언이었다. 토벌대장에게 빨갱이 색출을 위한 치안권을 완전히 넘겨준다고 해도 자신은 서장임이 분명했고, 토벌대장이 설쳐대면 자신은 읍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거 왜 이러쇼. 누구 맘대로 그 새끼들을 퇴치시켰다는 거요. 그놈들이 총질만 안할 뿐이지 이 캄캄한 어둠 속 어디에 박혔는지 알게 뭐요. 그러다가, 바로 당신처럼 방심하는 새에 다시 뒤통수를 치고 들지 말란 법이 어딨소. 그게 바로 빨갱이새끼들의 곤조통이오. 그 새끼들 곤조통도 제대로 모르면서 서장자리를 차고앉았으니 그 새끼들한테 읍내를 뺏기고 경찰서를 불태워 먹은 것이란 말요. 그리고 오늘 같은 기습공격이나 당하고."

"뭣이 어쩌고 어째!"

남인태가 소리치며 토벌대장의 멱살을 잡은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요런 피래미 같은 새끼가!"

토벌대장이 남 서장의 팔을 후려치며 내뱉았다. 그러나 남 서장의 손은 그대로 토벌대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남 서장의 힘도 만만찮았던 것이다.

"요런 개새끼를 그냥!"

토벌대장이 느닷없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처음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형사부장 장길춘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상급자의 다툼이라고 하지만 보고만 있을 단계가 아니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진정들 허시씨요. 이래서는 피차 챙피만 사제 이문될 것이 머시다요. 진정들 허시씨요, 진정들 혀."

장길춘이 두 사람을 뜯어말리자 다른 세 사람의 순경도 합세를 했다. 두 사람은 곧 사이를 두고 벌어졌다.

"건방진 자식, 말이면 다 말인 줄 알고 주둥아릴 놀려대, 임마."

남 서장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쭉 흘러내린 것을 느끼면서도 소리만은 높게 질러댔다. 기왕 내친걸음이었고 부하들 앞에서 체면유지도 필요했던 것이다.

"저 병신 같은 새낄 그냥, 빨갱이한테 쫓겨 좇빠지게 삼십육계 놓은 새끼가 뻔뻔스럽게 서장자리 차고앉아서 …… 저런 새낀 그냥 한방에 콱 쏴죽이고 말아야 해."

토벌대장은 두 사람에게 붙들린 채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그 숨결에 술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대장님, 담배나 한 대 태움스로 진정허시씨요.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 협조허고 힘얼 합쳐야 쓸 입장인디 이래서야 쓰겠는게라. 미운 것이사 빨갱이 새끼덜이제 우리찌리야 의 상헐 일이 머 있간디요. 어여 담배 태우씨요."

장길춘은 토벌대장 앞에 굽실거리며 담배를 권했다. 토벌대장 임만수는 마지못한 척 담배를 뽑아들었다. 이만하면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고 서장의 기를 꺾기에 충분하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서장님, 서장님도 담배 한 대 태우시고 오늘 일언 다 잊어뿌리씨요. 다 빨갱이눔덜 땀세 생긴 일잉께요."

장길춘은 그저 모든 잘못을 빨갱이한테 떠넘기며 남 서장에게도 담배를 권했다. 남인태도 못 이기는 척 담배를 뽑았다. 그만하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웠고 토벌대장에게도 배짱을 내보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내일부터 당장 철저한 빨갱이 색출에 착수할 테니 남 서장은 일체 간섭하지 마시오."

토벌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도록 하시오."

남 서장은 공중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토벌대는 오늘밤 철야 비상근무에 들어갈 테니까 본서 경찰도 이에 따라주시오."

"좋도록 하시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디선가, 따앙-총소리가 긴 꼬리를 끌었다. 토벌대장이 경찰서로 들어설 때만 해도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총성이 이제 거의 울리지 않았다.

"가자, 본대로."

토벌대장이 돌아섰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남 서장은 반만 탄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새 담배를 꺼냈다. 형사부장 장길춘은 잽싼 동작으로 성냥을 그어댔다.

"짜석이 생긴 거맹키로 영판 느자구가 웂구만이라. 지가 멫 조금이나 갈라고 넘 땅에 와서 저리 설레발얼 칠께라?"

장길춘은 남 서장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췄다.

"내버려두시오. 우린 굿이나 보며 떡만 먹으면 되니까."

남 서장의 입 언저리에는 비웃음이 서렸다.

"지가 굿이나 제대로 헐란지 몰르겄소."

"두고 봅시다. 이봐, 서 순경, 청년단에 전화 걸어."

남 서장은 형사부장을 상대하는 것이 귀찮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벌대장 임만수의 말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잔당의 정보제공에 의한 기습공격

그 판단을 부정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치사스런 변명이 될 뿐이었다.

도대체 그놈들의 잔당은 누구란 말인가. 잔당은 읍내에 얼마나 박혀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막연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임무 위에 겹쳐진 감정 때문에라도 잔당의 뿌리를 뽑으려고 가혹하리만큼 수사를 폈던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상이라는 것은 바람과도 같아서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더구나 표가 나게 설쳤던 놈들은 거의가 도망을 가버렸고, 어지간히 냄새를 피운다 싶은 놈들은 가차 없이 처단을 해버렸다. 그런데도 또 잔당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만큼 본때를 보였으면 정나미가 떨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세포 노릇을 하는 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종들일까. 그놈의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것이 아편치고도 지독스런 아편인 것은 분명했다. 한번 빠져들었다 하면 목숨을 내거는 것이다.

"야아야, 거 빨갱이 사상이라는 것도 말맹키로만 된담서야 워디 나쁠 것 있겄디야. 땅 골고로 나눠 갖고 다 항꾼에 잘사는 시상 맹그는 법이라는디 말여."

명색이 경찰서장의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남인태는 이 대목에 오면 착잡한 심정이 되고는 했다. 경찰서장의 아버지가 그리 귀 솔깃해할 때 다른 가난한 농민들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아녀, 아녀, 니가 경찰서장인디 나가 꿈에라도 고런 소리 입 밖에 내겄냐. 니가 워쳐케 혀서 서장님 자리럴 딴 것이디. 내 허는 말인즉슨, 많고 많은 가난헌 사람덜이 내놓고 말은 못혀도 다 고런 생각얼 맘속에 묵고 있다는 말을 헐란 것이여. 그렁께 니가 서장 노릇을 혀도 눈치껏 잘허란 것이제."

아버지의 말은 반은 진정이었고, 반은 변명이었다. 아버지는 빈궁에서 완전히 벗어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땅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열 살이 못 된 아들을 경찰서 소사로 집어넣고 날이면 날마다 일본말 공부를 하라고 회초리를 들었던 아버지의 뜻은, 아들에게는 당신과 같은 가난으로 찌들린 평생을 살게 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던 것이다.

"서장님, 청년단장 나왔습니다."

남 서장은 어둠이 가득 찬 창가에서 무거운 몸놀림으로 돌아섰다.

"나 서장이오. 그쪽 상황은 어찌 되고 있소?"

", 서장님이시구만이라. 상황이고 뭐고 있간디요. 빨갱이새끼덜이 똥줄 빠지게 삼십육계 혀부렀지요."

수회기 속에서 울리는 염상구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다.

"그리 장담할 일이 아니오. 어둠 속에 일시 잠복해 있다가 반격을 가해올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은 뱉아놓고 나서 남 서장은 찔끔해져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자신의 말이 아니라 토벌대장의 말이었던 것이다.

"금메 말이요, 쪼깐 있어봅씨다 ……"

염상구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 허는 말인데, 오늘밤 청년단도 철야근무를 하도록 하시오."

"알겄구만이라. 철야근무허는 것이사 밥묵디끼 허는 일잉께 하나또 에로울 것 웂은 일인디, 그눔덜이 워디 잠복해 있다가 또 지랄발광헐란지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 겁묵은 소리 아닐랑가요?"

"이거 보시오, 청년단장! 말조심해, 말조심!"

남 서장은 사무실이 울리도록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 서슬에 세 부하들이 의자에서 벌떡벌떡 일어섰다. 남 서장은 토벌대장과 다투고 난 다음의 꺼림칙하고 찜찜하고 석연찮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겁먹은 소리'라는 말에 걸어 폭발시키고 있었다.

"서장님, 고정허시씨요. 지가 주딩이 잘못 놀렸구만이라. 지 말언 고런 뜻이 아니고라, 긍께, 머시라 혀야 쓸랑가, 고것이 금메 ……"

염상구의 당황한 목소리로 보아 전화기에다 대고 꾸벅꾸벅 절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 서장은 다소 기분이 풀렸다.

"잘못을 알았으면 됐소. 그런데, 토벌대장한테서는 무슨 연락이 있었소?"

"아니구만요, 암 연락도 웂었는디요."

"알았소. 혹시 연락이 갈지도 모르니 염 단장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은 일절 하지 마시오."

남 서장은 일부러 '염 단장'이라고 불렀다.

"하먼이라. 그 사람이사 우리 사람이 아닌께요."

염상구는 눈치 빠르게 반응해왔다.

"됐소. 나도 철야근무를 할 테니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연락하시오."

"알겄구만이라. 날도 써늘헌디 서장님 고상되시겄는디요."

"내일 아침 일찍 나한테 오시오."

남 서장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기 물 한 잔 가져와."

남 서장은 의자에 몸을 부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종 서너 잔을 하다 만 술기운이 아직 떨떠름하게 남아 있었다.

자식, 지놈이 무슨 애국자라고 설쳐, 설치긴. 전라도 색시 품고 하룻밤 늘어지게 재미 보려다가 빨갱이 등쌀에 판에 깨지고 말았으니 엉뚱한 데나 분풀이하는 거지. 지놈이나 내나 순경질 해먹는 처지에 내놓을 게 뭐가 있다고.’

남서장은 물컵을 들며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남원장에서 제일 예쁘고 소리 잘한다는 경월이년을 끌어안고 희물거리던 토벌대장 임만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난히 좁은 이마에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또 별나게 검었다. 콧잔등이 심하게 꺼져 있어서 콧구멍 부위가 흉할 만큼 커보였고, 움푹 들어간 눈의 흰자위에는 핏기가 서려 있었다. 천기가 흐르는 생김인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잔인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어제 그를 첫 대면하면서, 네놈도 못된 짓깨나 했겠구나, 하는 것이 남 서장의 느낌이었다.

"거 보아하나 예사 사람이 아니겠소."

소대병력인 그들의 여장을 남도여관에 풀게 하고 사무실로 돌아서는 길에 읍장이 한 말이었다.

"글쎄요 ……"

남 서장은 대꾸를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읍장의 염려스러워하는 말에 동의를 표하자니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부정을 하자니 어설픈 객기만 내보여 자신의 꼴이 더욱 한심스럽게 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저 편안해야 할 텐데 ……"

읍장이 혼잣말처럼 하고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남 서장은 땅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읍장의 마음이나 자신의 심정이나 똑같았다. 더 이상 불상사가 없이 이 상태에서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지금 읍내의 사정은 최고로 악화되어 있었다. 계엄령 하에서 통행제한에 따른 여러 가지 생활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보다도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흉흉해진 인심이었다. 좌익 검거로 야기된 처형으로 초상이 나지 않은 마을이 없었고, 그에 따라 민심은 금이 갈대로 가 있었다. 대다수 민심이 등을 돌린 관의 존재처럼 유명무실한 것이 또 있는가. 읍장도 그 점에 신경을 써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고, 토벌대의 주둔으로 새로운 사태가 벌어져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염려는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당장 내일부터 대대적인 빨갱이 소탕작전을 전개하겠소. 그건 두 가지가 있소. 첫째는 양성적 빨갱이를 때려잡는 일이고, 둘째는 음성적 빨갱이를 색출하는 것이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이미 도주한 양성적 빨갱이들을 잡는 것이 아니라, 두더지처럼 숨어있는 음성적 빨갱이들을 색출하는 일이오. 바로 발밑에 숨어있는 그 세포들의 뿌리를 완전히 도려내지 않고는 양성적 빨갱이들을 소탕할 수가 없는 것이오. 그 음성적 빨갱이들이 바로 양성적 빨갱이들의 손발인 것이오. 먼저 그 손발을 끊어버리면 양성적 빨갱이들을 소탕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요.”

토벌대장은 하룻밤도 쉴 여유가 없이 답치기 하고 들었다.

"그렇지요. 임 대장의 말씀이 맞습니다. 빨갱이조직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도착하자마자 그리 열의를 보여주시니 우리는 그저 마음 든든할 뿐입니다."

읍장이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달차근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읍장은 남 서장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믄요., 더 말해 뭘 하겠습니까. 임 대장의 계획이 백번 옳습니다. 현지 경찰로서도 적극 지원을 해야지요. 그런데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작전을 성공시키자면 현지사정도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할 것이고, 먼 길을 온 대원들의 사기도 진작시킬 필요도 있고 하니 이삼일 여유를 갖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남 서장은 읍장과 계획해둔 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그렇군요, 남 서장님의 의견도 좋습니다. 쇠뿔을 단김에 빼는 것도 좋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면 설뺄 수도 있는 일이지요. 더구나 휴식이 없는 작전을 강행하다 보면 부하들의 불평불만을 살 염려도 없지가 않지요. 여기 앉은 세 사람이 모두 부하를 거느리는 입장이라서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저 아랫것들 심보라는 것이 어디 꼭 윗사람의 뜻대로 따라주던가요. 면전에서나 그러는 척할 뿐이지 돌아서면 불평불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아닙니까. 더구나 임 대장이 하는 일이란 생명의 위협이 따르는 것 아닌가요. 그럴수록 단합이 잘돼야 하는 법인데, 자칫 소홀하게 했다가 무슨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그러니 남 서장님 의견을 참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읍장은 노회한 눈빛을 빛냈다.

"글쎄요, 나도 그 점은 항상 신경 쓰고 있습니다."

토벌대장 임만수는 엉덩이를 들썩 들었다 놓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의 천기 흐르는 얼굴에 가득 찼던 단호함은 어느새 망설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읍장과 남 서장은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삼 일 여유를 갖는 건 일거양득입니다. 작전을 치밀하게 짤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식으로 대원들 사기를 진작시켜 작전에 임하게 하는 거지요. 그럼 작전효과야 보나마나지요."

남 서장은 마무리를 짓듯 말했다.

"허나, 빨갱이 잔당들이 들끓고 있는 판국에 이삼 일은 너무 길어요. 그놈들 세력만 뻗어나가게 해줄 뿐이오."

토벌대장은 좁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좁은 이마가 더욱 좁아서 곱슬머리칼과 눈썹이 거의 맞붙을 지경이 되었다. 그 못생긴 얼굴에는 처음의 단호함이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 서장은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임 대장, 그 점은 그리 염려할 거 없소. 내 비록 일시적으로 읍내치안을 뺏기긴 했소만, 다시 수복을 하고 나서 여태까지 빈손 흔들며 논 줄 아쇼? 나도 명색이 경찰서장이고, 서장 자리 놀음판에서 개평으로 줍지 않은 바에야 내 할 일은 다 했소. 내 입으로 내가 한 일 말할 필요는 없고, 내가 빨갱이 잔당을 어떻게 쓸었는지 읍장님한테 여쭤보시오."

남 서장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읍내 치안을 빼앗긴 사실을 스스로의 입에 올리기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잔당 색출작업에는 자신이 있었다.

"맞는 말이오. 남 서장님은 그 일을 가차 없이 해냈지요. 인정사정없이 철저하게 잔당의 뿌리를 뽑았어요."

읍장은 토벌대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잔당의 뿌리를 뽑았다구요? 그럼, 여기에는 잔당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데, 읍장님이 자신할 수 있습니까?"

토벌대장은 상체까지 읍장 쪽으로 굽히며 격한 어조로 물었다. 그 태도가 아주 도전적이었다.

"그 점에 대해선 남 서장께서 대답하시는 게 어떻겠소."

읍장은 능란하게 대답을 떠넘겼다. 토벌대장의 눈길이 재빠르게 남 서장에게로 옮겨졌다.

"그렇소. 도주한 빨갱이들이 다시 세포를 만들지 않는 한 잔당의 뿌리는 완전히 뽑힌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오."

남 서장은 토벌대장의 눈을 맞쏘아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 믿어도 좋소?"

토벌대장이 푹 꺼진 콧잔등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 표정이며 어조에 조롱기가 역연했다. 남 서장은 왈칵 울화가 치솟았다.

"못 믿겠으면 안 믿어도 좋소."

남 서장은 얼굴에 열이 퍼지는 걸 느끼며 담배를 뽑아들었다.

", 기분 나빠하실 건 없습니다. 내가 할 일에 포함된 것이라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요. 내가 할 일을 서장님이 대신 완료하셨다면 내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내 짐이 반으로 줄어든 셈이니, 그럼 이삼 일 푹 쉬면서 작전을 의논하도록 하지요. 나도 사람인데 편한 것 마다할 리 있습니까."

토벌대장은 금방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허허거리고 웃었다.

"임 대장의 투철한 책임감을 왜 모르겠소. 허나, 그 문제에 관한 한 남 서장께서도 철저를 기했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이오. 앞으로 두 분이 상호협조 해나가면 우리 읍은 금방 안정을 되찾게 될 겁니다."

읍장이 적절하게 중간위치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토벌대장의 성급한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두 사람의 계획대로 토벌대장을 끌고 가기 위해서 오늘 밤 '남원장'에서 첫 술판을 벌인 것이었다.

정종이 서너 순배 돌면서부터 술자리는 흐물흐물 풀려가기 시작했다. 전투복을 벗고 사복을 입긴 했지만 토벌대장 임만수는 술상을 받으며 딱딱한 태도였다. 모두 처음 대하는 타향의 얼굴인데다가 그가 맡고 있는 임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술이라는 것은 역시 쓸 만한 음식이었다. 술잔이 돌아가며 미리 귀띔을 받은 경월이가 눈웃음도 간질간질, 목소리도 야들야들 반죽을 해대는 바람에 임만수도 허물어졌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슬슬 보아가며 경월이의 치마 속으로 손을 디밀기 시작했다. 서장한테 지시를 받고 경월이에게 단단히 귀띔을 했던 염상구는 먼발치에 앉아 임만수의 일거일동을 도둑질해 보면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지눔도 연장 단 수컷인디 벨수 있간디. 워디, 오늘밤에 경월이년 구녕에 한 번만 빠져봐라. 니눔도 기 세우고 날치지 못헐것잉께.’

염상구는 이런 생각을 하며 힐끗힐끗 경월이를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경월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싫다는 의사를 표해왔다. 염상구는 그때마다 냉혹하게 눈총을 쏘았다.

저런 넋빠진 년, 술집 기집이 싫고 좋고가 위딨어. 돈이고 권력이 시키는 대로 허는 것이 술집기집이제.’

염상구의 매몰찬 생각이었다. 한때 경월이에게 파묻힌 적도 있었지만 이미 신물이 난 탓인지도 몰랐다.

염상구가 대문을 막 들어서고 있는 임만수를 가리켰을 때,

"워메 엄니, 무신 남자가 저리 못났다요?"

경월이는 질겁을 했다.

"염병허네, 누가 니보고 서방 삼으라고 혔간디 그리 놀래냐?"

염상구는 면박을 주었다.

"서방이야 안 삼드라도 참말로 심난시럽소."

"지랄허고 자빠졌네. 나는 머 잘나서 나허고는 그짓거리 혔드라냐?"

"음아,음마, 염 단장님이야 저 사람헌테 대헌께 이도령이요, 이도령."

"염병허고, 똑 이도령 본 거맨치로 주딩이 놀리네."

"하먼이라, 이도령이야 소리헐때마동 만나제라."

"찍소리 말고 팍팍 삶아뿌러!"

경월이의 싫은 눈짓을 차갑게 외면하면서도 염상구는 경월이와 나눴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월이, 임 대장님헌테 소리 한 자락 들려디레라."

염상구는 경월이를 잠시나마 임만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셈치고 이렇게 말했다. 좌중이 박수를 쳤고, 경월이는 기다렸다는 듯 발딱 일어섰다.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가 곤장을 맞는 대목이 불려졌다. 경월이는 인물을 더욱 탐나게 하는 목청을 돋우어 구성지고도 애달프게 가락을 뽑아 넘기고 있었고, 좌중은 조오코 조오코 장단을 맞춰가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땅! 총성이 울렸다.

"빨갱이다! 기습이다!"

제일 먼저 소리치며 일어선 것은 토벌대장 임만수였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사복을 입고 나오면서도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총성에 놀랐고, 임만수의 기민한 동작에 놀랐고, 그가 발사 자세로 권총을 들고 있어 놀랐다. 남인태는 허겁지겁 경찰서로 달렸다. 경찰서에 도착해보니 비상근무조는 이미 출동한 후였다. 무질서한 총성을 들으며 남인테는 어이가 없었고, 기가 막혔고, 한심스러웠다. 바로 어제 잔당을 소탕했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술자리를 벌이고 앉았다가 빨갱이들의 기습을 받게 되다니 …… 그 참담함이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직감적으로 그의 뇌리를 치고 지나간 것은, 이놈들이 모든 걸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뒤따라 떠오른 것이 임만수의 얼굴이었다. 그리도 무작스럽게 쓴다고 쓸었는데도 그 어느 구석에 잔당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임만수의 토벌대를 읍 중심에 두지 않고 들몰 너머로 내몰아 그가 말했던 '양성적 빨갱이들'과 대치시키려던 계획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거 낭패요. 큰일났소."

한사코 벽 쪽으로 붙어 앉으며 부들부들 떨던 읍장의 목소리가 귓속을 맴돌았다. 남인태는 벽에 은신한 채 가열되는 총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어둠이 가득 찬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권총을 틀어쥔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총소리만으로는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었고 적의 수는 더구나 어림할 수도 없었다.

이것들이 또 지난번처럼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설마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그놈들은 산발적으로 패주하기가 바쁘고, 계엄령이 실시되면서 이쪽의 병력은 얼마나 강해졌는가. 그런데, 저놈들은 도대체 누굴까. 염상진일 것은 거의 확실한데, 무엇 때문에 기습을 감행했을까. 정보에 따라 토벌대를 미리 치려는 것이었을까.’

남인태는 고개를 저었다. 염상진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읍내의 병력은 토벌대만이 아니었다. 경찰도 청년단도 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강한 화력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염상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습 목적은 무엇일까. 긴장과 불안 속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엉겁결에 남원장에서 경찰서까지는 왔지만 적과 아군의 위치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총알이 난무하는 어둠속을 헤매다가는 자칫 개죽음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총성이 차츰 뜸해지기 시작했다. 남인테는 그때서야 권총을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약간 풀었다. 긴장감이 다소 풀리면서 임만수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함께 남원장을 뛰쳐나오긴 했는데 이내 헤어지고 말았다. 그를 생각하자 또 가슴이 답답해왔다.

나잇값을 하느라고 용기는 있더라마는 네놈은 아직 풋내기야. 결국 누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

남인태는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두 부하를 데리고 돌아온 형사부장에게 상황설명을 대충 듣고 났는데, 그동안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임만수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건방진 놈, 어디 한번 잘해봐라."

남인태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담배를 꺼냈다. 그러면서 또 이놈의 골치 아픈 땅을 어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곱씹었다. 미해결로 남아 있는 김범우의 문제를 생각했다.

김사용 영감을 최익승 앞에 무릎 끓게만 만든다면 ……

남인태는 그 묘책이 생각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그 일만 해결을 잘하면 더 큰 도시, 더 안전한 땅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읍 단위에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당장 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군 단위의 자리는 차지하고 앉아야 했다.

남인태의 고향은 담양 옆에 있는 장성이었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소사 노릇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반농사꾼에 반노동자였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소작인보다 더 쪼들렸다. 그 대신 그의 아버지는 땅밖에 모르는 농사꾼에 비해 세상 보는 눈치는 빨랐다. 읍내 중심가에서 품을 팔며 귀동냥 눈동냥 한 것들이 밑천이었다.

"주걱 든 년이 한술 더 뜨고, 정재 파고드는 쥐가 더 기름기 도는 법잉께, 앞으로 시상에 그래도 배 안 곯고 살자먼 일본 사람헌테 붙어야 써. 시상이 일본 시상인디 뒷전에서 일본눔, 일본눔 욕험시로 딱 맞닥뜨리먼 꼼지락도 못허는 고런 인종덜언 빙신 중에 상빙신이여."

그의 아버지의 지론이었고, 그에 따라 그는 보수 없는 소사 노릇을 해야 했다. 그를 하루빨리 일본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욕구는 거의 광적이었다. 일본말, 일본글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 그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회초리질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그런 광적인 욕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일본 순사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고, 독학으로 계속 검정고시를 치러 학력을 쌓아갔다. 그는 결국 아버지가 열망한 대로 일본 순사제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아홉 살 때부터 주재소의 공기를 마시고 산 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뛰어난 일본 순사였다. 권력의 맛을 만끽하고, 권력이 당연히 배당하는 부의 맛까지 즐기다가 별안간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감과 공로가 죄로 뒤바뀌는 공포감에 안절부절을 못했다. 몰매를 맞아죽을 위기를 서너 차례 모면하며 한 달을 조금 넘게 전전긍긍하다보니 뜻밖에도 광명이 찾아들었다. 과거 경력자를 주축으로 해서 경찰조직이 재구성된 것이었다. 그에게 해방이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캄캄한 밤이었다면 그 조직이야말로 또 갑작스럽게 열린 눈부신 광명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돌변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했고, 그리고 이내 당당해졌다. 경찰제복이 그의 과거를 말끔히 가려주었고 서장이라는 계급이 그의 권력을 떠받들고 있었다. 세상만사 요지경 속이고 인생만사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말을 그는 고개 크게 끄덕이며 수긍하는 맛을 즐겼다. 이제부터 한판 멋지게 살아보는 거다, 하고 아랫배에 힘을 넣은 지 고작 삼 년 남짓인데, 그 빌어먹을 놈의 빨갱이들 등쌀에 미칠 지경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또 해방 같은 캄캄한 밤이 몰아닥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그는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빨갱이 사상으로 말하자면 이북은 복숭아고 이남은 수박이요. 이남 중에서도 여기 전라도하고 경상도는 아주 특제 수박이요.”

이북에서 월남해 순천 경찰서에 간부로 있는 어느 경찰이 한 말이었다. 공산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이북은 겉이 붉고 속은 흰데,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이남은 겉은 푸르고 속은 붉다는 뜻이었다. 남인태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던 것이다. 재수 없게 왜 하필이면 전라도하고 경상도에 빨갱이들이 들끓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인태는 또 물을 따라 마셨다.

 

부용산 자락을 밟아 읍내로 침투한 안창민네가 적의 공격을 받은 것은 거의 집에 접근해서였다. 진로를 바꾸기 위해 한 사람씩 길을 건너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엎드려!"

하대치의 황급한 음성이었다. 미처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적은 사격을 가해왔다. 하대치의 목소리가 울린 탓인지도 몰랐다.

"발사, 발사!"

안창민은 먼저 방아쇠를 당기며 명령했다. 적극적인 공격이 최선의 방어책이라는 순간적인 판단에 따랐던 것이다. 갑자기 총성이 요란해졌다.

"워째야 쓸께라!"

하대치가 옆으로 붙어서며 숨을 몰아쉬었다.

"우선 공격하고, 후퇴요."

"워디로 빠질께라?"

"부용산밖에 더 있고?"

"알겄구만이라."

"계속 갈기면서 빠져야 하오."

적은 순찰병으로 인원이 많아야 두세 명이리라 싶었다. 이쪽에서 일제사격을 가해 적을 일단 저지시킨 다음 후퇴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 계산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일제사격을 가하자 적은 응사를 해오지 않았다.

"하 동무, 후퇴, 빨리 후퇴."

안창민은 메마른 소리로 낮고 성급하게 외쳤다.

"안 동무, 앞장스씨요. 나가 뒤럴 맡을 팅께."

"하 동무가 길을 잘 알잖소. 내가 뒤에 서겠소."

"뒤따라오기가 훨썩 심드는디요."

"시간 없소. 내 염려는 마시오."

안창민은 하대치의 등을 떼밀었다.

부용산을 향해 후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총성이 뒤따랐다. 총성은 뒤에서만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좌측에서도 울리고 있었다.

"워쩔께라?"

하대치가 뛰기를 멈추며 물었다.

"부용산은 얼마나 남았소?"

"쪼깐 더 가야제라."

"일단 위험지역에서는 벗어났으니 더 총을 쏴서는 안 되오. 우리 위치만 노출시키는 거니까. 우측이 빈 것 같은데, 하 동무, 우측에도 길이 있소?"

"알겄구만요. 길이 웂으먼 맹글어 가야제라."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를 뛰지 않아 안창민은 다리가 휘청 꺾이는 충격을 받으며 곤두박히고 말았다. 무슨 소리를 지르긴 했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워째 그러시오, 워째?"

하대치가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몸이 붕 뜨는 것 같으면서 넘어졌소."

안창민은 그때까지도 자신이 총을 맞았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신채리고 얼렁 일어나봇씨요."

하대치의 말을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몸이 왼쪽으로 기우뚱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동시에 왼쪽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휩쌌다.

"당혔구만이라. 워디요, 워디?"

"왼쪽다리가 ……"

안창민은 통증을 견뎌내느라고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총소리는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왼쪽다리 위디요? 니기럴, 불얼 킬 수도 웂고."

", 모르겄소."

안창민은 정말 왼쪽다리 어느 부분이 아픈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다리 전체 아니, 몸 왼쪽부분이 전부 찢기는 것 같은 통증으로 들뜨고 있었다.

"아프드락도 쪼깨 참으씨요. 총 맞은 자리가 워딘지 찾어야 헌께."

총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번쩍 어둠을 갈랐다.

"여그요, 오금 쪼깐 위요. 피가 한 방울이라도 덜 나오게 허벅다리럴 묶어야제라."

하대치는 옷을 벗어 거침없이 북북 찢어댔다.

"아파도 이빨 응등물고 참어야 쓰요. 피 쏟는 것보담이야 나슨께."

안창민은 이빨을 맞물며 고래를 끄덕였다. 의식하기 시작한 통증은 대답 한마디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대치는 허벅지를 동여맸다. 새로운 통증이 폭발해서 안창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부득부득 이빨을 갈다가 끝내는 하대치의 목을 끌어안고 푸들푸들 떨었다.

"참으씨요. 쪼매맘 참으씨요."

하대치는 열심히 손을 놀리며 안타깝게 말했다. 안창민의 질근 감은 눈앞에는 무수한 불똥이 엇갈리고 있었고, 목구멍으로는 뜨거운 열이 확확 솟구쳐 올랐다.

"되얐소. 싸게 업히씨요."

하대치가 등을 디밀었다.

"어쩔 셈이요?"

안창민은 하대치의 등을 떼밀었다.

"워쩌기는 워째라, 싸게 여그서 떠야제라."

"아니오, 날 여기 두고 떠나시오."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하대치가 홱 돌아앉았다. 크지 못한 목소리에 역정이 묻어 있었다.

"하 동무, 난 너무 아파서 길게 말할 수가 없소. 내 말 똑똑히 들어요. 날 업고 가다가는 다 잡혀죽게 될 것이오.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 본부까지 가겠소. 또 본부까지 무사히 간다고 해도 그 산속에서 총 맞은 다리를 어쩔 것이오. 병원이 가까워도 여기가 가깝잖소. 날 두고 어서 떠나시오."

"그렇구만이라. 허먼, 나허고 항꾼에 행동헙씨다."

"저 네 사람은 어쩌구요?"

"즈그덜 발로 오금재를 찾아가야제라."

"하 동무, 우리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소. 나 하나 살리려다가 네 동무를 죽이려는 거요? 어서 떠나시오."

"참말로 사람 환장헐 소리만 허시오. 총 맞은 사람 혼자 달랑 내뿔고 성헌 눔 다섯이 내빼는 법도 있답디여? 고것이 혁명동지의 의리라고 대장님이 갤칩디여?"

안창민은 통증으로 이빨을 갈면서도 웃음이 빚어졌다.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고 하는 말처럼 하대치의 공박은 아주 그럴 듯한 역설이었던 것이다.

"알아요, 하 동무 맘 알아요. 날 두고 가면 대장님도 잘했다고 하실 것이오. 저것 보시오. 불빛이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잖소. 빨리 여길 떠나시오."

"참말로 나 미쳐불겄소. 나허고 항꾼에 갑시다."

"같은 말 두 번씩 하기 싫소."

"금메, 무신 일 나먼 워쩔라고 그러요?"

"난 죽진 않아요."

"워메, 멀 믿소?"

"난 빨갱이요."

"무신 말이다요?"

"빨갱이는 이 정도로 죽지 않소."

"기맥힌 말씸이요."

"어서 떠나시오."

"염병허고, 워째 해필허고 안 동무 다리를 맞혔을께라. 나 다리나 맞히제."

하대치의 음성은 변해 있었다.

"어서 떠나시오. 불빛이 얼마 안 남았소."

"워처케 연락을 혀야 될께라?"

"그런 걱정 마시오. 내 꼭 살아서 본부로 돌아갈 테니. 하 동무, 어서 떠나요."

"알겄구만이라."

하대치는 네 부하를 이끌고 이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안창민은 은폐물을 찾아 땅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난사하는 총성과 어둠을 헤집는 불빛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창민이 짚더미 속으로 파고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총성이 심해졌다. 그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상체를 일으켰다. 불빛이 어지럽게 어둠을 휘젓고 있었고, 사람들의 외침이 멀게 들렸다. 어둠 속을 방황하던 불빛이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총성은 그 쪽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이동해오던 불빛이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감대로 하대치가 유인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 동무 ……"

안창민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방향을 바꾼 불빛이 너무나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하대치가 위험을 무릅쓰며 만들어준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안창민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지팡이를 구해야 했다. 안창민은 지팡이가 될 만한 작대기를 구하려고 땅바닥을 더듬거리며 기었다. 한참을 기다가 지게를 찾아내었다. 지게를 받쳐놓은 지게작대기는 지팡이로 안성맞춤이었다. 안창민을 지게작대기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걸음을 떼어 놓았다. 입이 딱 벌어지는 새로운 통증이 솟구쳤다. 이래 가지고 어디로 피신을 할 것인가 하는 암담한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나 기필코 이 자리를 떠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빨갱이는 이 정도로 죽지 않소.'

자신이 했던 말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총상 때문에 죽음을 실감하지는 않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적에게 체포되는 것이었다. 체포, 그것은 여실하게 죽음을 실감시켰다. 자신의 동료들이 '체포된 자'들에게 가차 없이 죽임을 시행하는 것을 경험한 탓이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 체포는 곧 죽음이었다. 만약 총상이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건 이차적인 죽음이었다. 안창민은 일차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차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를 총상의 고통쯤 이겨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이빨을 부득부득 갈면서 죽음의 그물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머리에 떠오르는 곳은 세 군데였다. 첫 번째가 집이었고, 두 번째가 병원이었고, 세 번째가 이지숙네였다. 거리는 집이 제일 가까웠고, 다음이 이지숙네였고, 병원이 가장 멀었다. 집은 가깝기도 했지만 앓고 있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킬 만큼 강한 유혹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헤어날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일 수가 있었다. 경찰은 곧바로 입산 피신자의 집을 덮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십중팔구였다. 만약 그런 위험이 전혀 없다 하더라고 부상 치료를 위해 집은 적합한 피신처가 못되었다. 집에는 의약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찾아낸다면 쓰다가 남긴 고약이 딱딱하게 굳어 기름종이에 싸여 있을지 모른다. 총상의 출혈을 막지 못하고 밤을 새우게 되면 새벽은 시체가 되어 맞게 될지도 모른다. 요행히 목숨이 붙어 내일을 맞는다고 해도 치료를 하는데 위험이 따르게 되어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병원의 의사가 드나들면서 경찰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총상은 하루 이틀로 치료되는 종기가 아니었다. 결국 집은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두 번째로, 병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우선 아무런 연고가 없으므로 피신처로서는 제격이었다. 그리고 총상을 치료하기도 더할 수 없이 좋을 터였다. 그러나, 빨갱이 환자를 받아줄 것이냐가 문제였다. 의사가 '빨갱이'만을 확대해서 보면 외면을 할 것이고, '환자'만을 확대해서 본다면 받아줄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입각해서 의사는 그 어떤 환자나 차별을 두지 않고 치료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양심선언에서 언급한 '그 어떤 환자'라는 것은 병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었지 의식이나 사상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도 현실적 상황의 지배를 받는 인간인 바에야 환자가 자신의 신변을 위태롭게 하는 사상을 가졌을 때 얼마든지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건 의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행사에 속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전명환 원장은 상식적인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환자'만을 확대해서 보아주리라는 신뢰가 있었다. 그는 '빨갱이'로 피신처를 요구하면 그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거절할지 모른다. 그러나 빨갱이도 환자가 되어 나타나면 필연코 '빨갱이'로는 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병원까지 너무 먼 것이 문제였지만 피신과 치료가 동시에 해결되는데 그것쯤은 가벼운 마음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상적인 길을 이용한다면 병원까지는 전혀 먼 거리가 아니었다. 순전히 이쪽 사정에 의해 정상적인 길을 이용하지 못하고 우회해야 하므로 거리가 세 배 가까이 멀어지게 된 것이다.

세 번째로, 이지숙을 찾아가는 경우였다.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까 생각해낸 것이지 아예 피신처가 될 수 없었다. 이지숙은 방 하나를 얻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학부모네 집이었다. 그런 여건인데도 굳이 이지숙을 떠올린 것은 그녀의 마음이 언제나 피신처가 되어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지숙과 구체적으로 마음을 나눈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가 소극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학교는 달랐지만 선생이라는 같은 직업이 두 사람을 구속했던 것이다. 서로 감정으로만 말했고, 정작 말로는 감정을 죽여야 하는 사이로 지내왔다. 이지숙이 가장 적극적인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은 자신이 붉은 완장을 차면서 갑작스러운 변신을 꾀했을 때였다.

"멋있군요. 안 선생한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붉은 완장이 안 선생 팔에 끼워져 있다는 것이 멋있어요."

물론 그것도 사랑을 표현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에는 그런 말조차도 나눈 적이 없었고, '멋있다'는 말이 두 번씩이나 되풀이된 것으로 자신을 향해 열려있는 그녀의 마음을 측정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멋있다'는 말이 붉은 완장 자체에 국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자에게 사상운동이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

안창민은 병원으로 전명환 원장을 찾아가자고 마음을 정했다. 따라서 체포당하는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칠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빠져 역을 끼고 돌아 철교 아래까지 가고, 거기서 방죽을 타고 병원에 도착하기로 했다. 안창민은 집을 비켜 지나는 지점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잠시라도 어머니를 만나고 갈까, 그냥 가야 하나, 그의 마음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혁명의 최대의 적은 센티멘털리즘이다.'

염상진의 웅변이 그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도 센티멘털리즘일까. 그렇지 않다고 부정을 해보았지만 그 부정에는 전혀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급박함이 자신감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감상주의다. 감상을 버려라, 요런 모자라는 녀석아.’

안창민은 자신을 마구 떼밀었다. 사실,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가는 다시 대문을 나서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유혹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또 다른 적이었다.

안창민은 계속되는 총성에 진저리치며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결사적으로 걸어도 총성의 포박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총성은 한쪽 방향에서만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이 여기저기서 울려왔다. 자신이 잘못 듣고 있나 싶어 안창민은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가다듬고는 했다. 그러나 분명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부용산이나 제석산에 부딪혀나오는 되울림이 아니었다. 왜 그러는지를 따지기 전에 안창민은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온 읍내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은 그 총성이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커다란 손아귀처럼 느껴졌다. 걷는 것만이 그 커다란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안창민은 자신의 머릿속에 그어놓은 길을 찾아 사생결단 어둠을 헤치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당당히 염상진 앞에 서야 한다.’

고통으로 흔들리고 혼미해져가는 그의 의식 속에 단지 이 생각만이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안창민이 철교 아래 갈숲에 다다랐을 때는 총성이 완전히 멎고 읍내는 어둠만큼 농도 짙은 정적에 묻혀 있었다. 안창민은 왼쪽다리를 끌고 그 지점까지 오는 데도 사력을 다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또 방죽을 타고 병원까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었다. 안창민으로서는 그 거리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조계산의 본부와 마찬가지로. 갈숲에 몸을 부린 안창민은 허벅지를 더듬었다. 옷이 질척하게 젖어있었다. 그 질척한 감촉은 물에 젖은 옷을 만졌을 때와는 달리 눅진하고도 끈적이는 느낌이었다. 피와 물의 감촉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안창민은 최초로 깨달았다. 하대치가 옷을 찢어 상처 윗부분을 동여매긴 했지만 출혈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핏자국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절망스런 생각도 함께 자신이 조그맣게 졸아드는 위축감을 느꼈다. 안창민은, 어서 기운을 모아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고 싶은 나른함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 나른함은 이상스럽게 혼미한 편안함이었다. 양쪽 어깨를 그 어딘가 든든한 곳에 눕히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상처의 통증과는 또 다르게 일어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안창민은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때 의식의 어느 구석에선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동맥을 자르는 로마 귀족들의 처형방법이었다. 피가 흘러나옴에 따라 서서히 죽어가는 그 방법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황홀경에 젖어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까지 유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여유가 있다고 그 글은 적고 있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안창민은 짙은 어둠 속을 응시했다. 포구 건너편은 마을이 분명한데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총알이 불빛을 향해 날아올까 두려워한 마음들이 불빛을 죽인 것이었다. 불빛을 죽인 대신 사람들은 어둠을 방패삼아 깨어 있을 것이다. 안창민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무섬증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나허고 항꾼에 갑시다."

어둠 속 어디에선지 하대치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건 환청이었다. 아니, 기억속의 소리였다. 하대치는 몇 번이고 함께 행동하려고 했었다. 누군가 옆에 있기를 바라는 외로움이 하대치의 음성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그건 안돼요. 난 하나고 저 사람들은 넷이오. 빨리 저 동무들을 데리고 떠나시오. 하 동무가 없어서는 저 사람들은 위험하단 말이오."

하대치를 완강하게 떼쳐낸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 경황 중에서도 판단을 그르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남자다운 용기 때문이었을까. 혁명의식의 발로였을까. 조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을까. 그런데 이제 와서 하대치를 지팡이 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이렇듯 구체적으로 만난 것은 처음의 일이었다. 눅진하고 끈적이는 감촉의 피는 분명 물과는 다르다. 그건 생명을 담고 있는 액체다. 그것이 몸 밖으로 흘러나가면 그만큼 생명도 소멸되는 것이다. 생명이 소멸된 공간에는 그만큼의 죽음이 들어서게 된다.

안창민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끌어 모아 일어섰다.

"어엄니이 ……"

신음이 어금니 사이에 물리며 무의식중에 나온 '어머니'였다.

정작 어머니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변을 당했다.

"니가 워쩐 일이여."

자신이 붉은 완장을 차고 나섰을 때 어머니가 했던 단 한마디 말이었다. 그때 그 얼굴이 어둠 속에 걸려 있었다. 그 얼굴이 그랬듯 어머니의 한마디는 물음이 아니었다. 경악이었다. 평생을 말없이 살아온 분답게 어머니는 그 후로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집을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을 때도 그럴 것을 예견이나 했던 것처럼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모시손수건에 싸서 내민 것은 돈이었다. 받기를 마다했을 때 평소하고는 다른 핏기가 번져 있는 어머니의 눈이 꾸짖고 있었다.

어둠 속에 걸린 어머니의 얼굴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안창민은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걷기가 몇 갑절 힘들었다. 지쳐서가 아니었다. 방죽의 비탈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어둠을 과신하고 방죽 위를 걸을 수가 없었다. 방죽 왼편으로는 바로 민가들이 이어져 있었고 읍사무소와 경찰서도 멀지 않았다. 자신이 어둠에 눈이 익어 길을 찾아가듯 순찰병들도 어둠에 눈이 익어 있는 것이다.

비탈의 경사만큼 몸은 우측으로 넘어가려 했다. 지팡이는 왼쪽다리 노릇을 못하고 몸의 중심을 잡는데 쓰였다. 그러니 왼쪽다리에 무리가 가면서 통증은 가중되었다. 이빨이 뿌득뿌득 갈리고 신음이 뭉텅이로 토해졌다. 눈물까지 삐져나왔다. 잡힐 때 잡히더라고 방죽 위로 기어 올라가고 싶은 충동에 떨었다. 그리 아프고 힘이 들어서는 도저히 병원까지 갈 수가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이 일어났다.

, , 이 고통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안창민은 고통에 부들부들 떨며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 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20세기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손승호는 완전무결하게 사회주의를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상진은 손승호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버린 대신 자본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그가 다시 사회주의로 전향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논리의 타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옛정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안창민은 손승호의 생각을 이해해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었고,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 또한 하나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승호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삶 자체라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런 추상적 관념에 지배되고 있는 손승호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땅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그러나 그 생각을 염상진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안창민은 소화다리 아래에 이르러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이 가물가물해가고 있었다. 목이 찢어지는 것처럼 갈증이 심했다. 그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귀에서는 끝없이 어지러운 울림이 맴돌았다. 그 소리가 자꾸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빙글빙글 도는 눈앞에 어머니가, 염상진이가, 이지숙이가, 손승호가 어지럽게 겹쳐지고 있었다. 병원이 바로 저기라고, 바로 저기라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또 일깨웠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의 병원 뒷문은 열려 있었다. 안창민은 곧 쓰러질 듯 흔들리며 그 문을 들어섰다.

"원장님, 전 원장님 ……"

뒷마루 가까이에 이른 안창민은 실낱같은 소리로 원장을 부르고는 쓰러졌다.

그는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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