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1-2
5. 조계산 숯막
염상진과 하대치 일행이 서리 내리는 10월 하순의 산중 야기(夜氣)를 해치며 조계산 초입에 당도산 것은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한 번도 멈춤이 없이 산길 70여 리를 내달아온 발걸음이라 뼈끝을 시리게 하는 산중 추위는 아랑곳없이 모두의 몸은 끈적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내쉬는 숨결마다 허옇게 김이 서렸고, 피로한 단내가 묻어났다.
"일단 정지!"
염상진이 낮으면서도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하며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모두는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일제히 몸을 낮춰 쪼그려 앉았다. 그 동작들이 훈련으로 숙달된 것처럼 정확하고 기민했다. 그들은 그런 식의 훈련을 받은 바 없었지만 공통적인 위기의 긴장감이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분명 요 근방 어딜 것인디 ……"
염상진이 전방을 부정확하게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멀 찾으시는디요?"
하대치가 쪼그려 앉은 채로 그러는 염상진을 올려다보며 눈치 빠르게 물었다.
"선암사 사리탑 자리가 ……."
"사리탑 자리여라?"
하대치는 말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전방 좌우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 하대치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십여 년 전에 아버지와 함께 두어 번 다녀갔던 기억을 신속하게 더듬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주라고 해야 고작 쌀 한 됫박 정도밖에 못하는 신세이면서도 굳이 먼 길을 걸어 선암사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조계산 자락에서 화전을 일구어먹은 것도, 벌교 땅에서 그나마 뿌리 내리고 살게 된 것도 모두 선암사 부처님의 가피 덕이라는 것을 하대치에게 일깨웠다.
“니기미, 부처님 가피를 받아서 그리 알량허게 사는구만. 씨펄눔의 것, 고런 가피라먼 떡 해 놓고 빌어도 싫다.”
점심도 쫄쫄 굶고 먼 길을 걷는 것만 싫어서 하대치는 속으로 상소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맞구만이라. 사리탑 자리는 여그가 아니라 쪼깐 더 올라가야 허겄구만요."
산세와 길목이 눈에 익은 것을 확인하며 하대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이 개울을 타고 올라가지."
염상진이 앞장섰다.
짙은 안개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산자락을 휘감고 있었다. 그 안개 위로 먼동이 터오는 여린 빛이 내리며 단풍 든 숲속에 도사린 어둠을 서서히 표백시키고 있었다. 몸집 작은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안개 속 그 어디에선가 방울을 굴리듯 경쾌한 음향을 뿌렸다. 그건 개울가의 잔돌들이 저벅저벅 밟는 사람들의 기척에 놀란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새들은 먼동이 터오는 빛으로 잠이 깨어 날개 퍼덕이며 첫 울음을 우는 것이었고, 그 울음소리를 듣고 산도 깨어나고 있었다.
"사리탑 자리가 쩌그 보이는구만요."
하대치는 그곳에서 모종의 접선이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하며 건너편을 손가락질했다.
"그렇구만."
염상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모두 여기서 대기하시오. 하 동무는 나허고 가고." 절도 있게 지시했다.
염상진은 큰 키를 이용해서 길 쪽의 경사 급한 비탈을 성큼 올라섰고, 그 뒤를 키 작은 하대치는 나무 등걸을 타오르는 다람쥐처럼 날랜 동작으로 따라붙었다. 나머지 일곱 명은 개울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서있거나 앉은 커다란 바위들을 골라 몸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개울에는 인적이 사라졌다. 안개에 에워싸인 심산의 정적만이 깊었다. 염상진과 하대치는 길을 가로질러 사리탑 자리로 접근했다. 실히 열 길은 넘을 듯싶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가지각색의 사리탑이 스무 개가 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염상진이 하대치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하대치는 지시받은 사리탑에 몸을 찰싹 붙였다. 그의 차갑게 긴장된 눈길은 염상진을 향하고 있었다. 10미터 정도 옆으로 자리 잡은 사리탑에 몸을 붙인 염상진이 하대치를 향해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잡아 입에다 대고 부는 시늉을 했다. 염상진은 그 다음 동작으로 손가락 세 개를 허공에 빳빳하게 펴보였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하대치는 자세를 바꿔 두 무릎을 땅에 대고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입으로 가져갔다.
‘풀꾹, 풀꾹, 풀꾹.’
쉰 듯하면서도 슬픈 음조의 풀꾹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울리며 심산의 정적 속에 그 무늬를 새기듯 선명했다.
‘끼룩, 끼룩, 끼룩.’
아름드리 전나무 숲에서 들려온 기러기 소리였다. 위치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바로 가까운 곳이었다.
"됐다!"
염상진이 단내가 묻어나는 숨결을 토해내며 말했다. 하대치도,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접선이 일단 성공한 것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 동무, 앞으로."
염상진이 손짓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리탑들 사이를 옹송그린 걸음으로 중앙 부분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허리 높이의 돌담을 뛰어넘어오는 참이었다.
"안 동무!"
염상진이 먼저 불렀고,
"위원장 동무, 무사하셨구만요."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사내가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하대치는 그만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바로 북국민학교 선생인 안창민 동무였던 것이다. 그가 왜 예기치 않은 이런 장소에 나타났는지를 하대치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염상진은 역시 위원장이고 대장답게 행동한 것이었다. 염상진은 이미 신분이 노출된 각 마을의 동무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한 발 앞서 미리 떠나보낸 것이 분명했다.
"동무들은?" 염상진이 나직하게 물었고,
"22명 전원 이상 없이 숯가마에 대기 중에 있습니다."
안 동무가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습관적으로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날이 너무 밝았습니다."
안 동무가 아름드리 전나무 숲으로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고,
"어서 뜹시다" 염상진이 빠른 동작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하대치는 뒤를 바짝 따르며 또 한 번 대장 염상진에게 놀라고 있었다.
어젯밤 9명만이 일행이 되어 오금제를 넘으면서 영락없이 다른 동무들은 모두 버려두고 떠나는 줄 알았었다. 너무 숨 가쁘게 진행된 후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염상진은 미리 입 한번 떼지 않은 채 그 일을 말끔하게 처리한 것이었다. 그런 염상진이 대장으로서 더없이 믿음직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 마음이 몇 수십 겹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 때의 소작쟁의 사건 전부터였으니까 염상진과의 사이가 어느덧 십년 세월이 넘었으면서도 그 속의 깊이를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장은 그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래서 대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언제나 똑같은 깨달음으로 하대치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염상진 대장이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 언젠가는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리라는 새로운 확신이 섰고, 그 새롭게 솟는 힘을 다 바쳐 충성스런 부하가 될 것을 하대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고는 했다.
그들은 차츰 엷어져가는 안개를 헤치고 30분 남짓 걸어 숯가마에 도착했다. 해는 아직 솟지 않았지만 먼 하늘은 눈이 부신 현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염상진은 아침이 열려오는 그 찬란하고도 황홀한 빛의 기막힌 조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빛의 찬란함으로, 저 빛의 황홀함으로 공산 혁명의 아침이 열리는 줄 알았었다. 햇덩이 같은 뜨거운 열기로 혁명의 힘이 폭발해서 반동의 세력을 일거에 재로 태워 없애고 혁명의 새 천지가 이룩되리라고 믿었었다. 남조선의 지하조직이 깃발을 올린 그 절호의 기회에 북조선의 주력은 정작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둠을 이용한 후퇴, 그건 후퇴가 아니다. 야음을 틈탄 패주다, 굴욕스러운 패주다 ……
"위원장 동무, 모두 모였습니다."
안창민이 옆에 와 서며 보고했다.
"알겠소."
염상진이 가슴속에서 들끓어 오르기 시작하던 분노의 열기를 감추기라도 하듯 눈길을 발끝으로 떨구며 대꾸했다. 지금 그의 감정은 아침 햇살이 퍼지고 있는 동녘하늘과는 정반대로 캄캄한 어둠이었고 암담한 좌절뿐이었다. 후퇴, 패주, 그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건 말의 뜻이나 강도만 다를 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 상대적인 힘의 약세 때문인 것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북조선의 힘은 막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혁명의 붉은 깃발을 세웠고, 이듬해에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 말살과 함께 토지개혁을 완료한 북조선의 조직화된 공산주의의 힘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미군정하에서 시작된 남조선은 어떠했는가. 친일파와 지주계급이 군정과 어울려 득세를 했고, 새 시대의 국민을 위해 실시한다는 토지개혁은 해방 3년이 지나도록 단행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오합지졸이 모인 힘의 비조직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힘은 조직화될수록 강해지고, 그 힘은 공격을 감행할 때 더 강해지고,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힘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건 힘의 법칙이고, 힘의 미학이었다. 북조선의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힘은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면 남조선의 오합지졸인 비조직화된 힘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한반도 전역에 공산 혁명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임을 굳게 믿어왔다. 그래서 굶주리며 쫓기는 투쟁을 불사했던 것이고, 마침내 봉기의 때가 왔음을 확신하고 읍내를 장악한 다음 무차별한 혁명의 숙청을 감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늘처럼 믿었던 북조선의 조직화된 힘은 뻗쳐오지 않았고, 오합지졸인줄만 알았던 남조선의 힘에 쫓기게 된 것이다. 힘은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왜 북조선은 힘을 쓰지 않은 것인가. 남조선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었는가. 그럼 북조선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아니다, 아니다 ……’
염상진은 깊이를 더해가는 회의를 떼쳐내려고 괴로운 신음을 물었다. 자신의 마음을 회의와 절망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했다. 그때 염상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분명 이랬을 것이다.
"그래, 이번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염상진은 스스로를 일깨우듯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목판을 새기듯 자신의 가슴에 선명하게 박히는 것을 느꼈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내 판단일 뿐이지."
염상진은 어느덧 자아비판의 자세로 바뀌어 있었다. 당은 언제나 위대하고, 현명하며, 신성한 것이다. 당은 비판의 대상일 수가 없고, 회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염상진은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새로운 힘의 탄력을 얻었다. 당의 현명한 판단에 의한 혁명의 날이 도래할 때까지 용맹스러운 투쟁을 전개하는 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임무라는 것을 확신했다.
염상진은 숯막 쪽으로 돌아섰다. 사람이 떠난 지가 오래된 숯막은 퇴락할 대로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기에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다음부터 숯의 소비가 절감되어 조계산의 숯가마도 자연히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다. 상여 움막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꼴을 한 숯막을 바라보고 있는 염상진의 시야에는 아버지의 늙은 모습이 어릿거리며 겹쳐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숯장사를 억척스럽게 했었다.
염상진은 아버지의 상념을 밀어내듯 숯막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숯막의 하나뿐인 방에는 밤새워 오금재를 넘어온 대원들이 비좁게 붙어 앉아 있었다. 방안에는 숯내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축이 숯등걸이라도 모아 불을 피웠던 모양이었다. 염상진은 좌중을 훑어보았다. 모두 어떤 결의가 담긴 긴장된 모습들이었지만 밤을 새워 산길을 걸은 피로한 기색은 역역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동물적인 욕구의 해결이었다. 배가 고플 것이고, 잠이 올 것이다. 정신무장은 그 다음 단계였다.
"동무들, 먼 길 오느라고 수고들 많았소. 동무들은 지금 배가 고프고 잠이 올 것이오. 당장 그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자, 조를 나눠 시작하시오."
좌중에는 잠시 의아해하는 침묵이 감돌았다. 사태의 중대함만큼 이야기도 길 것이라고 마음 작정하고 모여 앉은 그들에게 염상진의 태도는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 동무, 뭘 하고 있소. 어서 조를 편성해서 보초를 세우고, 아침밥을 하도록 하시오."
염상진은 대원들의 마음 움직임을 환히 들여다보며 큰 소리로 하대치에게 지시했다. 그때서야 하대치가 벌떡 일어났고, 좌중의 긴장이 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염상진은 내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태가 다급할수록, 상황이 긴박할수록 어느 시간까지는 느긋할 필요가 있었다. 그 여유를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긴장된 군중심리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가 있고, 지휘자로서의 배짱의 두께도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급한 불덩이는 일단 피한 셈이고, 행동개시를 할 수 있는 밤까지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아침밥을 먹인 다음 재우면 오전이 다 갈 것이다. 그동안 몸 날랜 하대치라도 쌍암면으로 내보내면 어떤 정보라도 접수하게 될지 모른다.
"동무들, 내가 많이 나서는 안 될 것잉께 솥은 숯가마 안에다 걸고, 나무는 뽀짝 말른 솔갱이럴 때도록 허씨요."
하대치가 식사당번 조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염상진은 곁눈으로 그런 하대치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가 물었다. 배움은 많지 않지만 타고난 머리가 있고, 건강한 몸에 용기까지 지니고 있는 하대치는 어느 모로 보나 소중하고 충직한 부하였다. 무슨 일을 맡겨도 마음 든든했다. 하대치의 지시를 받고 대원들은 다 밖으로 흩어져나갔다. 텅 빈 방에 우뚝 서 있던 염상진은 문득 무릎이 접히는 것 같은 무거운 피로감을 느꼈다. 다 해진 왕골 돗자리가 깔린 방바닥에 그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마누라와 두 자식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꼭 감았다.
"음마, 음마,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그렁께, 쬧겨간다 고런 말이제라?"
마누라는 괄괄한 성미 그대로 말을 쏟아냈다.
"워매, 인자 두 다리 뻗고 권세 누림시롱 살 만헌 시상이 왔능갑다 했드만 열흘이 못가요. 무신 꼴이당가."
마누라의 끝이 없을 사설을 더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아이고 요런 문딩아, 공산당 헐라먼 애시당초 장개럴 들지 말든지, 장개럴 들었으먼 새끼덜이나 싸질르지 말든지. 지리산 호랭이가 칵 씹다가 도로 뱉을 요 문딩아, 나만 새끼들허고 어찌 살라고 혼자 내빼는겨."
마누라의 목소리가 담을 넘을 만큼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쫓기듯 사립을 나와 고샅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노곤하신가요?"
염상진은 눈을 떴다. 안창민이 꺾은 무릎에 손을 받치고 구부린 자세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앉으시오, 안 동무."
염상진은 웃는다고 웃었지만 그렇게 빨리 감정 전환을 시킬 수가 없어 안면근육이 어색하게 씰룩였을 뿐이다. 마누라의 말마따나 장가를 들지 말았든지, 마누라가 좀 더 혁명가의 아내답든지 했어야 했다.
"사태가 …… 어찌 전개되고 있는지 ……"
안창민은 염상진의 정면을 피해 약간 옆으로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동무, 수고 많았소. 그 많은 인원을 인솔하면서 취사도구까지 챙기느라고."
염상진은 엉뚱한 말을 했다.
"아니, 지가 머 …… 딴 동무들이 다 알아서 했지요."
안창민은 안경을 다급하게 밀어 올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그는 괜히 소리를 지껄였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안 동무, 우린 이제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오."
염상진은 안창민의 안경알을 곧 뚫을 것처럼 매운 눈길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도수 높은 안경알 저쪽의 눈동자가 염상진의 눈길을 받아내지 못하고 아래로 굴렀다. 눈동자를 덮어 내린 눈꺼풀이 바르르 경련했다.
"너무 걱정 마오. 혁명의 성취는 투쟁 다음에 얻어지는 열매요."
염상진은 안창민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남자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부드러웠다. 그건 그의 모든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물이었다. 그의 출신성분, 성장과정, 사상배경까지 그 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하대치와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염상진은 그에게 하대치와는 또 다른 애정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가서 일해야 되겄구만요."
안창민이 옹색한 자리를 피하려는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염상진은 자기의 손에 잡혀 있는 안창민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시오, 안 동무."
염상진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안창민의 손을 놓아주었다. 안창민을 당장은 그런 식으로 눌러놓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현재로서는 자신도 사태파악이 안 되고 있는 형편이라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런 식으로 처리한 것뿐이었다. 사태가 정확하게 파악되면 자신들의 행동방향도 결정될 것이므로 안창민에게 어차피 알려야 될 것이었다. 안창민은 그에게 있어 하대치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안창민의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판단력은 하대치의 기민한 행동과 과감한 용기와 함께 그를 늘 든든하게 받치는 기둥이었다.
안창민은 염상진의 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염상진에게 3년이, 김범우에게 1년이 아래인 안창민은 두 사람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들 셋은 사회주의 이념에 마음을 하나로 뭉친 때가 있었다. 이미 과거의 흔적뿐이긴 했지만 고읍 들녘의 대지주 집안의 아들 안창민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순전히 염상진에 의해서였다.
"형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교단에 서야 되겠습니다. 어머니의 고생을 그만 끝내드려야지요. 형님한테 면목 없는 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안창민은 졸업을 앞두고 염상진을 찾아와 이해를 구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염상진은 농사를 지으며 적색 농민운동을 독립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하면서도 그 선택은 달랐다. 염상진이 더 이념적으로 투철하고, 안창민이 그렇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인간적인 기질의 차이였다. 안창민은 체구부터가 선병질적으로 가늘게 생긴데다가 마음마저 여렸다. 눈까지 나빠 안경을 끼었으니 그는 한결 허약해 보였다. 염상진이 곧잘, 머리 좋은 것 하나 빼버리면 장타령하는 거렁뱅이만도 못할 거라는 좀 지나친 농담을 해도 그는 씨익 웃고는 그만이었다. 그러나 염상진이 '감상적 사회주의자'라거나 '관념적 사회주의자'라고 비꼬면 그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도록 흥분을 하고는 했다. 안창민에게 홀로인 어머니가 소중했다면, 염상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도 결코 그만 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염상진은, 평생을 숯장사를 하며 아들을 가르쳐 '선상님' 되기를 고대한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을 뿌리치고 농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그래. 사람이 어찌 다 하나같을 수가 있겠는가. 자네는 선생으로, 나는 농부로 최선을 다허세. 뜻이 같으면 결국 닿는 길도 같을 거니까."
염상진은 안창민의 교단행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해방이 되고 염상진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행동화시키면서 한 차례 감옥 생활을 거치고, 뒤이어 쫓겨 다니는 수난을 겪는 동안에도 안창민은 정치 회오리의 무풍지대인 국민학교 울타리 안에 안주해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코흘리개들에게 '나비야, 나비야'나 가르치는 시장스런 훈장노릇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심 깊이 잠겨 있는 보이지 않는 섬이었다. 그는 염상진이 피신해 있는 동안 읍내 지하조직을 움직여나간 그림자 없는 손이었다. 그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 염상진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는 물 위로 불쑥 솟긴 섬이 된 것이었다. 그의 느닷없는 변신은 우선 학교 선생들을 까무러치게 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붉은 완장을 찬 그의 앞에서 선생들은 하나같이 전전긍긍했다. 특히 평소에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말해온 몇몇 선생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붉은 완장을 찼다고 해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전과 마찬가지로 별로 말이 없었고, 어떤 권한행사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가 오히려 선생들을 더 두렵고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선생들 대하기가 영 기분이 찜찜해요." 그가 떫은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고,
"거 무슨 소리요, 안 동무. 그거야말로 우리 조직의 탁월성을 입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염상진은 약간 언짢은 기색을 띄며 면박을 주듯 말했다.
그는 처형의 대창을 들지도 않았고, 주변의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지만 결국 후퇴의 대열에 끼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창민은 고읍의 지주 안재윤의 하나뿐인 손자였다. 한말까지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낙안 고을에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안씨 문중은 그 뼈대로나 재력으로나 넉넉히 큰기침을 할 만 했다. 안재윤은 학문도 꽤는 깊었고 덕망도 갖추었지만 망국의 비운과 함께 날개를 잘린 새 신세가 되었다. 그는 말년에 망나니 아들로 속을 썩일대로 썩이다가 화병을 얻어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었다. 그때 벌써 아들 안서규는 투전판을 들락거리고 주색에 빠져 재산의 반 이상을 날린 상태였다. 안재윤이 죽고 나자 가세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졌다. 안서규는 방탕한 생활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마침내 전답 거의를 헐값에 팔아치워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것으로 안재윤의 집안은 겨우 논 30여 마지기를 가진 소지주로 전락했고, 뼈대 자랑하던 안씨 문중은 덩달아 근동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망신을 감수해야 했다. 종적을 감춘 안서규는 3년이 못 되어 남원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 왔다. 안창민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러나 안창민의 어머니 신씨는 그 정도의 재산이나마 남아있는 것을 천행으로 여겼다. 궂은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신씨가 직접 논두렁에 나서게 된 것이 그때부터였다. 손수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몇 안 되는 작인들을 독려했고, 눈에 띄는 피를 뽑으려고 논에 예사로 들어가는가 하면, 새떼를 쫓으려고 있는 껏 소리치며 논두렁을 맴돌았다. 그런 신씨를 먼발치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안쓰러운 혀를 찼고, 작인들은 농사일에 성의를 다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씨가 아들의 제의에 따라 표 나지 않게 소작료를 낮춘 것은 안창민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결정적인 시기라는 걸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습니까?"
안창민은 안경알을 빛내며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모한 감정적 행동이거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된 오판이 아니냐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건 허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른 안창민 특유의 예리함이기도 했다.
염상진은 그가 필요로 하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물거릴 수도 없었다.
"날 믿으시오. 큰일에는 비밀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그건 안창민의 신중성에 대한 결정적인 거짓 발언이었다. 염상진은 그만큼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안창민은 빨간 완장을 차게 되었다.
지난 4월 3일 제주도에서 혁명의 깃발을 올린 것은 그곳을 해방구로 하여 남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의 음모를 분쇄함과 아울러 남조선 전역의 해방을 성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제공하는 화력으로 무장한 군경이 계속 투입된 것이었다. 화력의 열세와 사방이 바다로 차단된 악조건 속에서 전사들은 벌써 7개월에 걸친 투쟁을 전개해오고 있었다. 이번에 혁명의 깃발을 또 올린 여수 주둔 14연대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파견될 부대였다.
'지구별로 투쟁 개시하라.'
지령은 언제나 간단명료했다.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설이 붙지 않는 것이 지령의 본모습이었다. 첫째, 전라남도의 일부인 제주도에 국한하지 않고 전남 전역을 해방구로 설정한다. 둘째, 지역을 확대함으로써 투쟁을 적극화시키고, 아울러 적의 화력을 분산시켜 제주도 전사들의 투쟁이 용이하도록 유도한다.
염상진이 지령을 통해서 유추해낸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유추일 뿐 당의 공식적 언명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미줄이 얼킨 숯막의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염상진은 고개를 떨구며 휴우 한숨을 쉬었다. 한번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지 말 것을 신조로 삼고 있으면서도 안창민의 신분을 노출시킨 것이 자꾸만 후회로 되살아 올랐다. 자신의 오판이나 그의 말을 봉쇄하기 위해 한 거짓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완전 파괴되다시피 한 읍내 조직과 그에 따른 앞으로의 일이 난감했다. 읍내에는 이제 미온적인 세포 몇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경찰의 색출작업이 시작되면 어떻게 될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안창민을 노출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더 완벽한 거점은 없었을 것이다. 배수의 진을 쳐야 했던 것인데 ……
염상진은 다시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냈다. 염상진은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푸르스름한 담배연기는 공중에서 추상의 몸짓을 지으며 빠르게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순간순간 변하는 그 몸짓의 유연함은 다음의 변화를 예측할 수 없게 했다. 그렇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몇 년 세월이 저와 같았고, 앞으로 살아내야 할 세월도 저와 같이 전혀 예측 불가능인 것이다.
"이눔아, 사람 한 시상 사는 것이 똑 갱물 흐르디끼 허는겨. 큰 물줄기 따라 감시로 지 몫아치 딱 잡고 앞만 보고 애써 살아가자먼 시나브로 풀리게 돼 있는겨. 무식헌 애비 말이라고 귓등으로 듣지 말고 얼렁 맘 고쳐묵어. 이 애비야 암시랑 않다만 처자석 생각혀서 맘 고쳐묵고 선상질이나 열심히 허란 말이다. 이눔아, 선상님 지체면 하늘에 별 딴 것이지 멀 더 바라는 겨. 애비 말 듣고 있는겨?"
아버지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나 애석해하는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기대가 허물어진 아버지의 낙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능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길이 잘못 잡힌 큰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를 거부하는 그의 마음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보다 우선했다.
선생님 지체면 하늘의 별을 딴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성취욕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기도 했다.
종에서 선생으로 ……
이 신분의 변화는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천지개벽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룩한 것임에랴. 염상진의 아버지 염무칠은 지주 최씨네 꼴머슴살이를 벗어나 읍내의 숯가게에 취직한 것이 열여섯 살 때였다. 염무칠의 아버지는 낙안벌의 토호 최씨네의 가복이었다. 국법에 의해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른 대부분의 노비들이 그렇듯 염무칠의 아버지도 경제적 독립을 꾀할 수가 없었다. 노비문서만 불살라졌을 뿐 생활조건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법에 의해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소작농으로서의 자립경제를 도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땡전 한 닢 없는 신세로 어디로 거주를 옮길 것이며, 이미 소작을 부치고 사는 작인들도 농지가 줄어들까봐 급급하는 판에 소작인들 어디서 구할 것인가. 천생 소작을 얻게 되는 경우는, 주인이 그동안의 노고와 정리를 생각해서 소작 나가 있는 농토를 재조정해서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얼마만큼 마음을 쓰는 지주들은 다 그런 방법으로 거느렸던 가복들의 생활대책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염무칠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그런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낙안과 고읍들의 그 넓고 비옥한 농토는 거의가 세 성씨의 소유였다. 유씨, 김씨, 최씨가 그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최씨네가 인심 사납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작인의 타작마당에 지주가 직접 나서는 것이 바로 최씨네였다. 염무칠의 아버지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을 뿐 주인 앞에서 입 한번 뻥긋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최씨네를 박차고 나가서 새경 받는 머슴살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슴살이 새경을 받아가지고 식솔들 목구멍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 없이 최씨네에 눌러앉아 문서 없는 가복 노릇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소작농의 생활이 제아무리 팍팍하다 한들 어찌 가복의 신세에 비하랴. 비록 제 소유는 아닐망정 처자식 먹일 농사를 손수 짓는 것하고, 세끼 밥 근근이 얻어먹자고 온 식구가 종질을 하는 것하고 어찌 비교가 되랴. 염무칠의 아버지는 세상 살 맛을 잃고 원기를 뽑아내는 것 같은 짙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날로 달로 개명혀가는 시상이니께 농새만 짓고 한평생 살라고 허덜 말어. 이 애비가 산 시상허고 니가 살 시상허고는 생판 달블 것잉께."
눈을 감기 전날 염무칠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염무칠이 숯가게 배달원으로 취직을 한 것은 아버지의 그 말을 좇아서였다. 배운 도둑질이라고 염무칠이 숯 행상을 나선 것은 배달원 생활 육년 만이었다. 나이가 들기고 해서였지만 그보다도 그동안 읍내 바람에다가 장사물을 먹은 탓에 지게 목발을 두들기던 옛날의 염무칠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맹무식이었던 그는 계산법도 완전히 익히고 있었고, 서툴기는 했지만 주판알을 굴릴 줄도 알았다. 숯을 많이 쓰는 일본인들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어지간한 일본말은 다 알아들었고, 쉬운 말은 척척 해낼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염무칠의 사람됨을 달라지게 한 것은 장사문리가 트이면서 함께 눈뜨게 된 이재의 방법이었다. 외상은 할 수 있는 대로 하되 절대로 주지는 마라, 로 시작되는 몇 가지 조항은 염무칠을 차돌멩이처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세상을 대하는데 밤송이 같은 경계의 촉수를 갖추게 했다. 일전을 보고 물 밑으로 오십 리를 기어라. 하루에 십전을 벌기로 작정했는데 구전밖에 못 벌었으면 굶고, 11전을 벌었으면 일전어치만 먹어라. 한번 수중에 든 돈은 이문을 물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내놓지 말아라. 이익이 남는 장사를 하는데 손님이 열 번 밟으면 백번 밟히는 시늉을 해라. 돈을 빌려주지 말고 차라리 마누라를 빌려줘라. 싸릿대를 엮어 만든 숯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행상을 다니는 염무칠의 가슴에는 그런 말들이 비석의 비문처럼 새겨져 있었다. 염무칠이 행상으로 나선 것은 가게를 세낼 만한 돈이 없으니까 당연한 것이었지만 매물인 숯을 구하는 과정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싸게 팔면서 이윤을 높이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 숯가마에서 직접 물건을 떼오는 것이었다. 염무칠은 망설일 것 없이 오금재를 넘어 조계산 숯가마를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돈을 낸다고 숯을 아무한테나 파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판매조직에 의해서 중간유출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70리 산길을 걸어온 것이 억울해서 염무칠은 빈 지게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숯장이를 붙들고 구구한 사정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애걸하다시피 했다. 그런 염무칠의 마음에는, 제아무리 엄하게 단속을 한다 한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숯 서너 가마니 뒤로 못 빼내랴 하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와따 참말로, 젊은 사람이 징상시럽게도 찔기네잉. 갱엿만 묵고 살았능가 칡뿌랑구만 묵고 살았능가, 워찌 그리 찔기당가?"
숯장이는 숯검정이 범벅이 된 얼굴로 질렸다는 듯 염소웃음을 웃었다.
"죽지 못허고 살아야 헐 찔긴 목심 땀세 요리 찔겨졌는갑구만이라."
"허어, 말도 청산유수시네. 워쨌그나 내 동상 겉은 젊은 사람이 살아 보겄다고 그래싼께 살짝 혀주는 소린디, 나는 불이나 때고 불구녕이나 막고 험시로 아무 심도 웂는 사람이고, 고 찔긴 맘으로 저 아래 선암사 주지시님을 찾아가 보드라고. 주지시님 맘에 들었다 허먼 그까징 거 숯 서너 가마니 얻기는 손바닥 뒤집기여. 엔돈가 벤똔가 허는 일본놈도 주지시님헌테는 괭이 앞에 생쥐새끼니께."
그래서 선걸음으로 주지스님을 찾아갔고, 대웅전 앞뜰에서 주지스님을 맞닥뜨리자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리며 넙죽 큰절부터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온몸의 피가 말라붙는 마음으로 찾아온 경위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마쳤을 때 염무칠의 양쪽 입가에는 침 찌꺼기가 희게 말라붙어 있었다.
"으음 ……"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주지스님은 얼굴을 약간 내리고 눈은 올려 뜬 엄한 모습으로 염무칠을 쳐다보며 뜻 모를 으음 소리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스님의 그 눈길이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훑고 있는 것만 같아 염무칠은 꼼짝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하다면, 오늘만 달라는 것잉가 아니면 앞으로도 쭈욱 달라는 것잉가?"
마침내 스님이 물었다.
"살아갈 방도가 따로 웂는 몸인디 주지스님께서 질을 잠티워주십소사 허능구만요."
"하면, 매번 지게로 숯가마니를 벌교 읍내꺼지 져날르겄다는 말인가?"
주지스님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으며 눈을 반쯤 내리감았다.
"시님, 주지시님, 질만 티워주심사 고것이야 지 심으로 허는 일인디 워찌 못허겠능가요. 질만, 질만 티워주시씨요."
염무칠은 곧 장삼자락을 붙들 것처럼 몸이 달아 있었다.
"이것도 다 부처님의 인연일시, 내 엔도한테 양해를 구할 것이니 어디 해보도록 하게나."
염무칠은 한 행보에 숯 세 가마니씩을 지고 오금재 가파른 산길을 넘기 시작했다. 주지스님의 도움으로 숯을 생산가에 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문이 컸다. 그러나 왕복 백사십 리의 도보운반으로 물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목돈을 만지기는 어려웠다. 염무칠은 지치지 않았다. 1년, 2년 …… 장가를 들고 자식을 낳고, 염무칠은 20년이 넘게 오금재를 넘나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들 둘, 딸 셋을 낳아 길렀다. 그리고 선암사 주지스님이 세상을 떠났다. 다비가 끝나고 사리를 거둘 때까지 오로지 속인 옷을 입고 섧게 운 것은 염무칠이뿐이었다.
숯장사는 아무래도 한겨울을 대목으로 해서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미처 반년 장사가 못 되었다. 그래서 염무칠은 여름 한 철은 참나무를 쳐내는 산판에서 품을 팔았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부터 숯을 구워내기 위해 벌이는 산판이었다. 식비를 제한 품삯이 숯장사보다 나을 리가 없었지만 일곱 식구 호구를 위해서는 잠시인들 손을 쉴 처지가 아니었다. 호구만이 아니라 사내자식들은 가르쳐야 했으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형편이었다. 사실 20년 넘게 숯장사를 하면서 염무칠은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장사 대목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오금재를 넘다가 눈길을 헛디뎌 지게를 진 채로 계곡으로 굴러 눈덩이에 쳐박히기가 몇 번이었고, 폭설을 만나 길을 잃어버려 얼어 죽을 뻔도 했고, 길을 질러가려고 저수지 얼음판 위를 걷다가 한가운데서 얼음이 뿌지직뿌지직 갈라지며 내려앉는 바람에 물귀신이 될 뻔도 했다. 쉬운 말대로라면 그때도 숯을 세 가마니나 진 지게를 후딱 벗어던졌으면 물에 빠지는 것은 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그 숯값이 얼마며, 그 먼 길을 얼마나 애쓰고 지고 왔는데 벗어던진단 말인가. 물에 빠질 때 빠지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곰 같은 염서방'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막 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큰아들 상진이를 사범학교에 진학시키고부터는 그를 대하는 읍내 사람들의 태도가 완연히 달라졌다. 염무칠의 이름은 읍장이나 경찰서장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큰아들 상진이가 자랑스러운 것만큼 염무칠에게는 두통거리가 있었다. 작은아들 상구로 하여 속을 썩었다. 큰아들이 혀에 착착 감기는 조청이라면 작은 아들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였다. 작은아들은 소학교를 졸업시키자마자 옆구리에 끼고 장사나 착실히 가르칠 심산이었다. 그런데 미꾸라지처럼 쏙쏙 손 밖으로 빠져나가기만 할 뿐 영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물론 무작스럽게 패기도 여러 차례 했지만 한번 비뚤어진 심성은 바로 잡아지지가 않았다. 작은아들이 그렇게 엇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는데도 염무칠은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봉건사회의 세습제와 유교전통의 불문율인 장자제일주의 인습을 염무칠은 미련하게도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염무칠은 장남과 차남의 위치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모든 것이 장남 본위, 장남 우선이었다. 차남은 상대적으로 무시 묵살되었다. 둘이 다투어도 작은아들이 쥐어 박혔고, 명절에 쑥떡 하나라도 큰아들이 더 먹었고, 가뭄에 콩 나듯 닭을 잡으면 똥집은 으레 장남 차지였고, 그러면서도 자질구레한 심부름은 다 작은아들에게 돌아갔다. 상구는 형 상진이가 그 쫄깃쫄깃한 닭똥집을 소금에 찍어 야금야금 먹는 것을 손가락을 물고 멍하니 바라보다가 끝내, ‘저 문딩이 겉은 새끼가 팍 디져뿌렀으먼 속이 씨언허겄다,’ 속으로 욕을 퍼대고는 했다. 차남 상구는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부모 앞에서만 서면 목을 꼬아박고 두 팔을 치켜들며 옆걸음을 치는 주눅 든 방어 자세를 취하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형이 줄곧 일등을 하는 데 비해 동생의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어떤 일의 기억은 형보다 더 초롱초롱한데도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게 된 다음부터였다. 역전이나 차부를 얼쩡거리면서 왈패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생겼다. 이러다간 새끼 하나 버리겠다 싶어 더 늦기 전에 길을 잡기로 작심한 염무칠은 작은아들을 붙들어 멱살을 틀어쥐고 집으로 끌고 갔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매타작을 놓았다. 다시는 한 그러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차례 더 매를 들었지만 그럴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염무칠은 작은아들을 버린 자식 취급하기로 해버렸다. 그렇게 되자 큰아들에게 마음이 더욱 쏠려갔다. 사범학교를 나와 떠억 하니 소학교 '선상님'이 되면 ……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벌떡거려 염무칠은 숨을 쉬기가 거북할 지경이었다.
'선상님' 아버지가 되어 대접도 받고, 그 지긋지긋한 고생에서도 벗어나고 …
염무칠의 달디단 꿈은 끝이 없이 펼쳐져나갔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두 가지에 집착해 있었다. 사람으로서 그 신분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과, 장사를 통해서 갖게 된 돈의 효능에 대한 신뢰였다. 그것을 큰아들이 한꺼번에 해결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염무칠이 세상을 떠난 것은 큰아들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 다음해였다. 그는 눈 가장자리에 지저분하게 눈꼽이 끼어 일 년 내내 비실비실하더니 죽은 것이다. 사람들은 두 아들놈이 불쌍한 염 서방을 잡아먹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큰아들은 사범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나오고도 선생을 마다하고 농사일을 시작했고, 완전히 주먹패가 되어버린 작은 아들은 철교 아래 선창에서 칼부림을 해 일본 선원을 찔러죽이고 도망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눔아, 이눔아, 니가 행여 그리 못쓰게 변, 변헐 줄은 …… "
염무칠이 큰아들의 손목을 틀어잡고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이눔아, 니가 아부지 가심에 못을 쳐도 대못을 친겨. 아부지가 워째서 요리 일찍 죽어뿐지 니는 알겄제? 인자라도 안늦었응께 아부지 한을 풀어줄라먼 싸게 선상질을 혀. 그라면 아부지도 저승길을 편히 가실 껴. 이 에미 말 알아듣겄냐?"
호산댁은 큰아들을 마구 흔들며 울부짖듯 했다. 염상진이 자식 된 도리를 할 수 있었던 일은 장가를 가는 것까지였다.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사상문제로 의심받아 발령이 보류된 상태였다. 의무복무가 저절로 없어져 버린 그 조처를 그는 오히려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다. 농사를 짓기로 결심을 했지만 염상진은 손바닥만한 땅뙈기도 없는 형편이었다.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을 찾아가기로 했다. 염상진은 일본군국주의의 정신을 주입하는 선생노릇은 차마 할 수 없어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는 요지의 말을 김사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연하게 해나갔다.
"저에게 농사지을 땅을 좀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농사를 짓고 있을 전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땅을 얻고자 하면 다른 소작인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개간을 해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빌려주시라는 겁니다."
김사용은 단정히 꿇어앉아 말하고 있는 염상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그지없이 따뜻했고, 입가에는 조용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래, 자네가 교직을 갖지 않겠다는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네만, 내가 듣기로는 자네 춘부장 어른께서 자네가 선생이 될 날을 고대하심서 많은 고생을 허신 걸로 아는데."
김사용은 염상진의 아버지를 최대 존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예에, 아버지는 물론 서운해허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입장이고, 제가 선생이 되어 일본정신을 가르치는 것은 친일이고 매국이 됩니다."
"오호, 자네가 어느새 ……"
김사용은 놀라워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작은아들 범우와 소학교 적부터 절친하게 지내오고 있고, 특히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있는 장남 범준이를 흠모하는 기특한 소년으로만 알고 있었던 염상진이가 어느새 주견이 반듯한 성인으로 성장해 있음은 자기 자식의 변모를 보는 듯 흐뭇하고 대견했다.
"개인이 남 아닌 부모일 때 대의명분을 따라 행동하자면 그 아픔이 얼매나 크겄는가."
김사용이 침통한 표정으로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혼잣말처럼 낮게 말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 총명과 사람됨을 눈여겨 보아온 터이지만 역시 염상진은 예사 젊은이가 아니라 싶었던 것이다.
"자네의 그런 큰 결단 앞에 내 어찌 땅뙈기 내놓기를 주저하겄는가. 자네가 필요한 만큼, 개간을 헐 수 있는 만큼 쓰도록 해줌세."
큰아들 범준이가 만주 벌판 그 어딘가에서 하고 있는 고생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김사용은 흔쾌하게 말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염상진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외레 내가 고마우네. 농담으로 묻는 말인디, 그래, 땅을 빌어 쓰면 사용료는 얼마를 어떤 방법으로 낼 심산인가?"
김사용이, 어디 보자, 하는 애정이 넘친 표정으로 염상진을 쓰다듬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어르신의 소작인이 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사용료 같은 것은 없이 일정기간 동안 빌어 쓴 다음 반환하기로 하겠습니다. 반환받으실 때는 박토가 옥토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염상진은 전혀 농담하는 기색이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허허허허 …… 박토가 옥토로 변했다. 내가 남는 장사를 허게 생겼구만. 그래, 그 생각은 미리 헌 것인가, 내말을 듣고 당장 생각헌 것인가."
"땅을 빌러 오면서 그냥 와서야 되겠습니까?"
"허어, 자네는 역시 앞뒤가 철저한 사람이네그려. 그 조건에 내 동의함세."
김사용은 눈가에 잔주름을 잔뜩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가세, 내 땅을 보여줌세."
김사용이 장죽을 옆으로 치우며 일어설 자세를 취했다.
"아니 어르신, 어쩌시려고 ……"
염상진은 당황한 나머지 두 팔을 벌려 제지하는 몸짓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몸짓이 어른 앞에서 취할 바가 못 됨을 순간적으로 깨닫고는 재빨리 팔을 수습해 들였다.
"어찌하긴, 말이 난 김에 쓸 만한 땅을 골라보자는 게지. 자네 맘 한시가 급헐 것인디 서둘러야제."
김사용은 무릎을 짚고 더디게 일어섰다. 염상진은 다급하게 따라 일어서며 어떤 뜨거운 기운이 빗줄기 내리듯 가슴 전체를 덥혀오는 것을 느꼈다.
"어르신, 지체하지 않으시고 땅 장만해주시는 것만도 …… 어르신, 어찌 어르신께선 손수 걸음까지 하시려고 ……"
염상진은 출렁거리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말까지 더듬거렸다.
"암시랑 않네. 어여 앞서게."
김사용은 대견해 하는 따스한 눈길을 염상진에게 보내며 두루마기의 긴 고름을 유연한 손놀림으로 매고 있었다.
"어르신, 머슴한테 일러 보내도 될 일입니다. 어르신께서 직접 걸음하시면 제 사람 노릇이 ……"
염상진은 참으로 몸들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황송하고, 송구스럽고 …… 자신이 김사용을 '어르신'이라 호칭하는 것은 봉건적 지체의 높낮음을 지켜서가 결코 아니었다.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어른으로서, 우러르는 선배와 신뢰하는 친구의 부친으로서 더 이상의 존칭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보다 더 높은 호칭이 있었더라면 염상진은 서슴없이 그것을 택했을 것이다.
"괘념치 말게. 자네는 다 받아놓은 밥상을 마다하고 시작허는 일인데 내 한 행보 걸음이 머 그리 대단헌 것인가. 가세, 원족삼아 자네허고 함께 걷는 맛도 별미일 것이니."
김사용 어른이 자신에게 쏟고 있는 애정이 얼마나 짙은 것인지를 염상진은 여실하게 느꼈다. 그분의 손수 걸음을 하려는 것은 자신이 앞으로 하려는 일에 대한 격려의 뜻임을 염상진은 너무나 잘 알았다.
제석산의 북쪽 줄기인 거선봉 아래까지 십리가 넘는 길을 김사용 어른은 묵묵히 걸었다. 염상진은 두어 발짝 뒤쳐져 걸으며 여러 갈피의 생각들을 질정없이 떠올렸다가 버리고는 했다. 그 생각들 중에서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김범준의 모습이었다. 털모자에 털외투를 입고 매서운 눈초리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던 사람. 그 눈초리뿐만이 아니라 굳게 다물린 입이 주던 위압감.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본 사진 속의 김범준은 염상진의 의식 속에서 항시 숨 쉬며 살아 있었다.
염상진이 소학교 졸업반이던 한겨울이었다. 밤사이에 읍내는 추위보다 더한 살기로 뒤덮였다. 순사들이 눈을 희번덕이고 숨을 몰아쉬며 동네마다 들쑤시고 다니는 소란이 벌어졌다. 독립운동을 하는 김범준이 또 한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는 쉬쉬하는 소문이 이미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김사용이 경찰서로 붙들려갔고, 김씨 문중 사람들이 떼 지어 경찰서로 몰려갔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김범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김씨 문중 사람들은 김사용의 몸에 손만 대면 끝장을 보고 말겠다며 경찰서를 에워싸고 서슬이 시퍼랬다. 염상진은 작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경찰서 주변을 맴돌기도 했고, 창백하게 풀기 죽은 범우를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 범준이 성님은 지리산 호랭이맨치로 날래고 싸나운께 폴세 지리산 천왕봉 넘고 금강산 지내 백두산꺼정 갔을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 다소 화색이 돌아온 범우가 힘을 꽁꽁 쓰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과는 달리 먼 하늘 끝을 보고 있는 범우의 눈에는 눈물이 크렁 괴어 있었다. 그 눈물을 보자 상진이도 그만 목이 메었다.
"그럴껴, 필경 그럴껴. 느그 성님은 폴세 백두산도 넘어 만주꺼정 갔을 껴. 하먼, 독립군인디."
상진이는 그분의 무사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목멤을 삼켜가며 힘주어 말했다.
"근디, 니는 느그 성님을 만내봤냐?"
상진이는 여태껏 감추어왔던 말을 속삭이듯 낮게 물었다.
"아녀. 아칙에 일어나봉께 엄니가 운 티가 나고 ……"
범우는 목이 메는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도 싸게 커서 느그 성님 겉은 사람이 돼야 쓰겄다,>
상진이는 이 말을 가슴속에다 묻고 말았다.
상진이가 두 학년이나 차이가 나는 범우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바로 '김범준'때문이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그 사람, 그건 꼭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 형을 가진 범우가 너무나 부럽고, 범우와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웠다. 그런데, 먼먼 땅 만주에만 있을 줄 알았던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상진은 그분이 무사하기를 밤마다 얼마나 간절히 빌었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장독대 삼신할메한테 비는 것을 흉내 내어 간절하게 빌다가 꿈은 꼭 그분이 잡히는 것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그분이 잡히지 않는 꿈을 꾸려고 용을 썼지만 허사였다. 꿈은 생시와는 반대라니까, 어른들의 말을 상기하며 안타까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사용은 풀려나기는커녕 순천경찰서로 넘겨진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과 함께 읍내에는 심상찮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너너덧 명씩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다음날이 저물기 전에 읍내에는 새로운 소문이 퍼져나갔다. 김사용을 순천으로 넘기기만 하면, 자동차로 가면 소화다리를 끊어버릴 것이고, 기차로 가면 철교를 끊을 것이라고 했다. 벌교 사람을 타지에 넘기기만 하면 '벌교 주먹' 본때를 보여 일본놈 씨를 말리고 말 것이니, 그나마 서로 다치지 않고 살려면 김사용을 곱게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틀 후에 선 오일장에서 그 소문은 입증되었다. 음력설밑 대목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터는 아침부터 파장꼴이 되고 말았다. 순천에서 넘어오는 진트재, 보성에서 넘어오는 석거리재, 고흥에서 넘어오는 뱀골재를 막아 장사꾼들의 발을 묶은데다가, 읍민들이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썰렁한 장터에 감돌고 있는 냉기는 냉기가 아니라 벌교 사람들이 내보이는 무언의 살기였다. 그건 김씨 문중의 사람들의 은밀한 움직임이 작용한 탓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갯가를 끼고 사는 벌교 사람들 특유의 독기의 표현이라고 해야 옳았다.
김사용은 이틀을 더 경찰서에 묶여 있다가 결국 풀려났다. 염상진은 아슴하게 뻗어나간 방죽 끝을 향하여 와와 목청껏 소리치며 달리고 싶을 만큼 기쁘고 눈물겨웠다. 설날 아침햇살이 퍼지기를 기다려 세배를 하러 갔다. 상진이 세배를 마치고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자,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김사용이 마고자 섶을 들춰 조끼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우리 상진이 금년에도 건강허고 공부 잘해야 쓴다."
김사용이 너그럽게 말하며 세배돈을 내밀었다.
"저어 …… 돈보다 지헌테 한 가지 소원이 있는디요."
상진은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 주눅든 것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원이 있다고?"
김사용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묻고는,
"그래 상진이 소원이 무얼꼬? 새해 소원인데 내 심으로 헐 수 있는 것이먼 들어줄 것이니 어여 말을 해보거라."
어려워하는 어린것의 마음을 헤아리며 선선하게 말했다.
"저어 …… 범준이 성님, 아니 …… "
상진이는 소스라치게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리 친구 범우의 형님이지만 자기도 '범준이 성님'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두려운 깨달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사용은 직감적으로 어린것의 그런 감정 변화를 눈치 챘다. 참 기특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암시랑 않다, 니는 범우 친구니께 니헌테도 성님이다. 그래, 범준이 성님이?"
김사용은 말문을 틔워주듯 다음 말을 재촉했다.
"사진으로라도 얼굴을 똑 한번 보고 잡은 것이 소원인디요."
의외의 말이었다. 어린 것이 이제 고개를 똑바로 들어 김사용을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어린아이답지 않은 결의가 서려 있음을 김사용은 보았다. 그건 큰아들에 대한 소년의 티 없는 존경심이기도 했다.
"요 돈 먼첨 챙겨넣거라. 니 소원 풀어줄 테니까."
코허리가 매콤해지는 걸 느끼며 김사용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사용이 안방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눈을 말똥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던 범우가 입을 열었다.
"성! 뜽금웂이 왜 아부지헌테 고런 소리 먼첨 허는겨."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는 자기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서려 있었다.
"니 심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께로."
상진이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런 상진이는 범우에게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이, 성은 은제고 지맘대로 허는 게 질 못써."
범우는 볼멘소리를 냈다.
상진이는 아무 대꾸가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 사진을 감추듯 손바닥 안으로 감싸 잡은 김사용이 들어왔다. 상진이는 반사적으로 허리가 쭉 곧아지는 긴장을 느꼈다.
"여깄다, 어여 보거라."
김사용이 선 채 사진을 내밀었고, 상반신 사진을 받아든 상진이는 흡 숨길이 멎는 것을 느꼈다. 사진 속의 매서운 눈초리가 일시에 그를 위압해왔던 것이다.
"경사가 지긴 했어도 이만 허먼 밭을 일굴 순 있을 것이니 자네 맘에 드는 쪽으로 개간을 해서 쓰도록 허게."
김사용은 이미 밭으로 쓰여지고 있는 그 위쪽의 산등성이를 손가락 끝으로 넓게 가리켰다. 경사라고 해야 십도가 넘을 것 같지 않았고, 나무라고 해야 다복솔이 듬성듬성 박힌 정도였다. 뗏장을 떼어내고 나면 그대로 밭구실을 해낸 수 있을 만큼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김사용 어른의 배려임을 염상진은 직감했다.
"어르신, 이 땅은 몇 명만 놉을 사면 금세 농토화시킬 수 있는 땅 아닙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이런 과분한 땅이 아닙니다."
그분의 배려는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감사한 것이었지만 염상진은 진정 그분에게 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원했던 땅은 경사가 심한 곳에 있는 돌투성이의 그야말로 박토였다. 버린다 해도 별로 아까울 것이 없을 정도의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다가 반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반적 제의를 할 수 있었을 것인가.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밝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니 어련허겠는가. 맘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
염상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김사용 어른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분이 가진 땅 중에서 이 부분이 제일 나쁜 것일 리가 없었다. 그분의 웃음소리가 묘한 바람으로 변해 자신의 가슴을 휩싸는 것을 염상진은 느꼈다. 그 웃음이 그렇게 자조적이고 허탈할 수가 없었다. 눈 밝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니 어련허겄는가, 하는 말과 웃음소리가 미묘하게 엉키고 있었다.
염상진은 문득, 현재 이분이 소유한 재산이 얼마나 될까, 하는 회의스런 의문을 떠올렸다. 전체 재산은 알 수 없지만 고읍들의 상답이 그동안 수차에 걸쳐 최씨네에게로 팔아 넘겨졌던 것이다. 그때마다 읍내에는 조심스런 소문이 나돌았다. 또 일본에 회사를 했다는 것이었고, 큰아들로 김사용은 끝내 집안을 망치고 말 것이라는 거였다.
"자넨, 앞으로 신중해야 허네. 젊은 뜻 세우는 거야 장하고 고마운 일이네만, 급허다고 뜨거운 물 식히지 않고 마실 수는 없는 법이니까. 세상이 날로 악허고 독허게 변해가고 있네."
김사용 어른은 드넓게 펼쳐져나간 고읍 들녘을 바라본 채 뒷짐을 지고 서서 나직하고 느린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바둑판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는 그분의 말에 염상진은 결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땅을 요구했을 때 이미 그분은 그 의도를 충분히 간파했을 것이었다. 그분의 뒷모습에서 천근 무게를 느꼈다.
"명심하겠습니다."
염상진은 겨우 이 말만을 했을 뿐이다.
통학차가 도착할 저녁 무렵에 염상진은 역으로 나갔다. 김범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또 상의 한마디 없이 결정했는가?"
염상진의 결론만 추린 이야기를 듣고 김범우의 첫마디였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는 조용하게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의논해도 같은 결론일 바에야 한시라도 시간을 벌어야지."
염상진이 김범우의 어깨를 살짝 치며 씩 웃었다.
"언제라고 형 말 틀린 데 있나? 어쨌거나 형의 그 추진력에는 기가 질려. 신속하고, 끈질기고 …… 머 당해낼 도리가 있어야 말이지."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고는 허황한 공상에 지나지 않아. 공상처럼 무용지물도 없지. 특히 현재 우리들이 처한 상황 아래서는 말여."
"형의 논리는 맞지. 허나 앞으로 몸조심해야 할 거네. 벌써부터 순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까."
"각오하고 있어. 드디어 막은 올랐으니께!"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우정 이상의 이념세계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탐독했던 것이고, 거기서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의 그런 뜻 모아짐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던 유행적 독서 성향과는 달리 구체적인 사표가 있었다. 김범준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내재해 있었다.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로서 소작농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면 필연적으로 봉건 계급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식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그런 자책과 죄의식의 과정은 아예 생략되었고, 이상세계의 빠른 실현을 위해 지주계급이나 경제적 지배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무산자들의 힘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무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염상진이 그들 책을 통해서 받은 충격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었고, 새로운 빛의 출현이었고, 새로운 길의 열림이었다. 가난으로 기죽어 식어 있는 피를 뜨겁게 끓게 했고, 비천으로 주눅들어 움츠러든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가난도 비천도 함께 면해보자고 사범학교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어줍잖고 가소로운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마르크스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볼셰비키 혁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그까짓 소학교 선생자리는 헌 짚신짝 버리기나 마찬가지였다.
염상진이 김범우를 동지일 수 없다고 판단내린 것은 범우가 학병에서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김범우도 똑같은 시기에 염상진의 극렬적 좌경을 체념해버렸다. 염상진은 한때 김범우를 완전히 적으로 속단할 뻔했다. 김범우가 교직에 몸담으면서부터 좌익 학생조직을 와해시키는 행동을 시작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태워 올리고 있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행위였다. 그건 재고의 여지가 없는 정면 도전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감상적인 옛 우정이란 한갓 두엄더미 옆에 구르는 똥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염상진이 김범우를 혁명의 적으로 단정하려 할 즈음에 김범우의 실체가 드러났다. ‘백범 김구’식의 민족주의 통일노선을 김범우는 실현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범우는 경찰서고 군정청이고 드나들며 좌익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에 바쁘고, 한편으로는 좌익학생들을 설득시키느라고 진땀을 빼는 것이었다. 염상진은 그런 김범우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가 했던 '민족의 발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꽤는 그 의미가 넓고 깊은 말이라 싶었다.
민족 ……
그건 모태와 같은 것이고, 음성적으로도 어머니를 부를 때처럼 정겨운 슬픔을 담고 있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은 소중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일제하에서나 생기가 도는 말인 것이다. 이미 반도 땅은 해방을 맞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바나 행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동지도 아니었고 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동지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지만 그건 또 다른 '주의'는 될 수 없었다. 이상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대치해 있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제삼의 세력이 될 수 있는 힘의 조직화가 없었다. 그의 생각은 환상이고 몽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한계였다. 그의 핏속에 용해되어 있는 부르조아 근성은 환상가는 만들어낼 수 있어도 혁명가는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염상진은 김범우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혼자 '민족의 발견'이나 많이 하게 방치해두면 이쪽에도 다소의 이익을 주는 셈이었다. 읍내를 점령하기 전날 밤 굳이 김범우를 찾아가 피신하라고 일렀던 것도 그의 '민족 발견'을 위한 행위 때문이었다. 그가 얌전하게 선생노릇만 했더라도 그런 사전조치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분명 정치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움직여 자기 존재를 드러냈고, 그의 행위는 자칫 오해받은 위험성을 띠고 있었다. 그가 무턱대고 순천바닥에 나갔다가 누군가 그를 오해하고 있던 혁명군에게 체포되면서 영락없이 곤욕을 치를 것이었다. 그리고 벌교바닥에서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가 체포되어 자신 앞에 끌려오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더구나 체포해온 부하에게 그의 무죄를 해명해야 하는 옹색스런 입장에 처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리 피신시키는 것이 우정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김범우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김사용 어른을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웠던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먼저, 지주인 그분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떳떳한 명분을 세우고자 함이었고, 다음은,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데 있어서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단상에 세워진 김사용 어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분은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찡그리듯 눈을 꼭 감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재판이 끝나고 단상을 내려올 때 머슴이 부축을 하긴 했지만 그분은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염상진은 그 모습에서 강한 거부의 뜻을 읽어냈다. 그런데 그분의 주름골이 심한 창백한 얼굴 위에 햇볕이 반사되는 느낌을 받았다. 언뜻 이상한 생각이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분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꼭 감은 눈과 눈물과 …… 염상진은 한 가닥 전류가 찌르르 가슴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꼈다. 염상진은 얼른 외면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의 눈물이 생명을 건진 안도의 감루가 아니라는 사실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염상진은 어두워진 다음에야 겨우 짬을 내어 그분을 찾아갔다.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고, 그대로 밤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네가 어인 일로 ……"
김사용은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염상진은 그토록 냉담한 그분의 얼굴을 여태껏 본 일이 없었다.
"어르신, 저를 용서하십시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
김사용은 단상에 섰을 때처럼 양쪽 눈꼬리에 주름살이 겹치도록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제 입장을 이해해주십시오."
“………”
김사용은 숨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밤이 다 새어도 그 눈이 뜨이거나 그 입이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염상진은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음을 느꼈다. 그러나 자신은 김사용 어른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분은 버린다고 버려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염상진은 방문을 닫고 마루로 나서며, 찾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오금재를 넘으면서부터 김사용 어른과 김범우의 생각이 다른 많은 생각들을 밀치고 염상진을 괴롭히고는 했다. 그건 패배감으로 직결되는 괴로움이었다. 또 그 패배감은 모멸감과 연결되었다. 그들의 소리 없이 비웃는 모습이 금방 눈앞에 어릿거리는 것만 같았다.
"위원장 동무, 아침진지 드시씨요."
염상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양쪽 손에 그릇을 든 하대치가 씽긋이 웃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태평하고 건강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염상진은 자신의 몸에도 탄력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래, 저게 바로 혁명전사의 모습이다. 불필요한 생각을 곱씹는 건 혁명의지를 약화시킬 뿐이다.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있을 뿐이다.’
염상진은 심호흡을 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벌써 밥이 다 됐소?"
"야아, 헌디 찬이 웂어서 워쩔께라?"
그릇을 돗자리 위에 놓으며 하대치는 어쩔 수 있느냐는 듯 콧등을 찡그려 붙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만하면 훌륭하오."
염상진은 밥 한 사발, 김치 한 보시기를 내려다보고 나서 하대치에게 진득한 웃음을 보냈다.
"하 동무도 같이 묵읍시다."
"아니어라, 지는 동지들허고 함께 묵을랑마요. 밥 식는디 싸게 드시씨요."
하대치는 어찌 감히 맞바라보고 밥을 먹겠느냐는 듯 팔까지 저으며 황급히 일어섰다.
"하 동무, 아침 먹고 나면 보초를 빼고 다른 대원들은 잠을 재우시오. 그 다음 하 동무는 나와 얘기합시다."
"야아, 그리 허겠구만이라."
염상진은 한 사발의 밥과 한 보시기의 김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이 간소한 한 끼 식사였다. 그러나 겉보리죽이나 배추시래기죽에 비하면 성찬이었다. 어린 날로부터 지금까지 보릿고개라는 춘궁기는 없어질 줄 몰랐고, 소작농들이나 품팔이꾼들은 으레 그 시절을 얼굴이 비치는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몸이 푸석푸석 부어오르는 부황기에 시달려야 했다. 모습만 사람이었지 먹고 사는 꼴은 짐승만도 못한 그런 삶은 자연의 이변이 만든 불가항력적인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그건 사천 년을 헤아리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봉건체제로 이어져온 사회의 인위적 구조였다. 봉건왕조가 와해되고, 식민시대가 종지부를 찍은 시점에서 그 비인간적인 사회구조는 기필코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절박한 필요성 앞에 주저나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만이 그 유일한 길임을 신봉했고, 그 완성을 위해 줄기차게 뛰어왔던 것이다.
염상진은 숟가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밥 속으로 깊이 찔러 넣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자. 투쟁을 하다 보면 죽마저 먹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 그때 이 밥은 더없는 성찬으로 그리워질 것이다. 염상진은 밥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릇이 사기로 되었음에 생각이 미쳤다. 무겁고 깨어지기 쉬웠다. 빠른 시간 내에 그것들을 나무로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조계산에는 매년 겨울 숯을 구워내면서도 삼십 년이 걸려 일회전할 만큼 참나무가 지천으로 덮여 있었다. 장기화될지도 모르는 투쟁을 위한 첫 번째의 준비 작업이었다.
6.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김범우는 아침햇살이 반 넘어 차오른 지게문의 때 묻고 낡은 창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은 창호지의 누추를 어느 한 부분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누르께하게 번진 얼룩이나 아무렇게나 찢어 붙인 땜질자리나 하나도 누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햇살은 그런 자리마저 가리지 않고 고루 퍼지는 까닭인가. 지게문 위로 드리워져 은밀한 걸음걸이로 밀려 올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처마의 것이었다. 그림자 끝은 볏짚의 삐죽삐죽한 모습을 그대로 창호지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그 그림자마저 초가지붕의 솜옷 같은 두툼한 질감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갑자기 그 그림자의 처마 끝에 요동치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짹짹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참새 두 마리가 뒤엉켜 날개를 푸드득거리고 있었다. 김범우는 문득 그걸 싸움이라 여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서로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내 참새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허공을 치며 푸득거리던 두 마리 작은 새의 생기 넘치던 날갯질이 잔영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 그것들은 싸운 게 아니라 분명 사랑을 한 것일 게다. 김범우는 되씹어 생각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싸움 -
김범우는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염상진이 생각났다. 김범우는 그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6일째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동안 신물이 나도록 그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로 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죄 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전개하고 있는 싸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말할지 모른다. 그런 공개처형은 인민의 선동과 동원을 위해서 혁명과정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방법은 이미 혁명을 성취시킨 나라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김범우는 염상진을 밀어내고 아버지를 생각하려고 했다. 문 서방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인민재판을 치르고 난 다음부터 몸져 누운 모양이었다.
"의사 선상님도 댕겨가시고 혔는디요, 벨 병은 아니라는디 어르신은 시름시름 앓으시는구만이라."
문 서방의 설명이 없었어도 아버지의 병은 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무사했다고는 하지만 인민재판을 받은 아버지의 심적 타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았다.
"서방님, 서방님."
문 서방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그래요, 문 서방?"
김범우는 가슴이 철렁하는 걸 느끼며 지게문을 떼밀다시피 했다.
"워메 서방님, 얼렁 채비허시씨요, 채비혀요."
문 서방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은 밝게 웃고 있었다. 김범우는 읍내의 사정에 변화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요?"
"금메 좌익덜이 다 도망가뿔고 읍내에는 순사들이 총 미고 댕긴당께요."
김범우는 돌아앉으며 새 담배를 꺼냈다. 결코 반가움일 수 없는 감정을 밀어내며 우울이 가슴을 채워왔다.
또 시작된 싸움 - 그건 암담한 우울이었다.
염상진과 그의 부하들은 어디로 피했을 것이며, 군이나 경찰은 그들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념의 현수막을 내건 정치적 전쟁은 바야흐로 그 수레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에서나 민족은 내세워졌으나 정작 수레바퀴 아래 깔려야 하는 건 민족이었다.
"서방님, 싸게 채비허시랑께요."
"그럽시다, 가긴 가야지요."
김범우는 한숨에 섞어 말하며 미적미적 문지방에 다리를 걸쳤다.
"문 서방, 그 동안 폐가 많았어요, 그만 들어가시오."
김범우는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을 나서며 말했다.
"워디요, 댁에꺼정 모시고 가야제라. 어르신께서 당부허신 말씸이신디요."
문 서방은 가당찮다는 듯 앞서 걷기 시작했다. 김범우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다면 그건 문 서방이 지켜야 할 책무였던 것이다. 자식의 나이를 감안하지 않고 그런 당부를 한 아버지의 마음이 추운 바람으로 가슴을 적셔왔다. 아버지의 고적을 알 듯도 싶었다.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내심으로 큰아들을 체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해방이 되고 벌써 3년이 넘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귀향을 위해 소모하는 시간으로는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형이 집을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새벽마다 첫 샘물을 장독대에 올리고 무릎 꿇는 어머니의 합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벽 지성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심신의 곤욕을 치르고 물질적 손해를 보면서도 그런 큰아들을 둔 것을 무언중에 긍지로 삼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 긍지는 촌스러운 과시욕이 결코 아니었다. 벌교와 낙안에 걸쳐 뼈대나 재산을 자랑할 수 있는 집안들은 꽤나 있었지만 그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 있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경사 났다고 벌이는 잔치는 법관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은행원이 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벌교라는 지역에 작용하고 있는 행정적 특수성에 비추어 보면 범준 형님 같은 존재는 경이적인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 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내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어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돈을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한들 그들이 만지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고, 주된 경제권은 몇몇 일인들과 소문난 지주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지주들은 땅이 제공하고 있는 치부에만 만족하지 않고 일인들과 줄이 닿는 안전한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 사업가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족보와 지체를 내세우면서도 돈 계산이나 잇속에 더 빨라 그나마 양반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품격이나 인품 같은 것은 거의 손상해버리고 있는, 잘못 개명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읍내 사람들도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다 해도 다른 데 농민들과는 달리 귀와 눈이 밝았고, 따라서 입이 야무졌다. 돈의 마력 탓이었는지 읍내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인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려 살았다.
그런데 벌교의 그런 분위기에 김범준이 긴장의 찬물을 끼얹은 것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지 1년이 가까워서였다. 학생 지하운동에 가담했다가 발각이 나서 일본을 탈출했다는 것이 벌교에 퍼진 첫 번째 소문이었다. 선창에 들고 나는 배를 노리는 도둑이나 지키고, 타부나 역전에서 일어나는 주먹패의 싸움이나 막던 순사들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는 김사용의 집 근처에 잠복조를 배치하고 순시를 강화시켰다. 제 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하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김범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서 체포되었다는 소식도 없었다. 지친 경찰에서는 잠복조를 철수시켰다.
석 달이 지나 김사용에게 소식이 왔다. 다 낡아빠진 북 하나를 허리에 매단 남루한 차림의 떠돌이 소리꾼이 어느 날 소리걸식을 청했던 것이다.
"지멋대로 질르는 소리오나 퇴허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어르신께서 일찍부텀 소리럴 좋아허신다는 소문 듣고 요리 찾아왔으니, 못허는 소리 들으시고 한술밥 내리시면 되겄구만요."
삼십 중반의 사내는 김사용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김사용은 그 예사롭지 않은 눈이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눈빛이 아니었어도 한 끼 밥을 청하는 소리꾼을 퇴할 김사용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소리걸식을 청하는 사람치고 명창 아닌 사람이 없는 법인디, 워디 한번 들어봅시다."
사내는 대청마루에 정좌하더니 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의 소리 속에 '범준이 춘부장님 소식 받으시오' 하는 말이 섞이고 있었다. 사내가 옷섶에서 꺼낸 종이쪽에는 '아버님 소자는 무사하옵니다.' 하는 글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틀림없는 아들의 필적이었다. 구례에서 왔다는 그 사내는 아들 범준이를 모른다고 했다. 자신과 접선되는 사람한테서 그 쪽지를 받았을 뿐이고, 만주의 독립군에 가담되어 있다는 사실은 구두로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 오게 될지 모르지만 독립자금을 준비해놓으라고 했다. 사내는 몇 끼를 굶은 것처럼 억척스럽게 밥을 먹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김사용이 노자를 내밀자,
"어르신, 그런 것이 다녀간 근거가 됩니다."
사내는 스치듯이 낮고도 빠르게 말했다. 김사용은 반사적으로 돈을 조끼주머니에다 쑤셔 넣었다.
"함펴엉처언지이 느을근 모오미 ……"
이름도 밝히지 않은 사내는 천연덕스럽게 소리를 뽑아대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김범준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읍내를 왁자하게 만든 것은 그로부터 반년쯤 지나서였다. 그보다 2개월 앞서 김범준은 평양이 고향인 황해룡과 함께 집에 나타나서 독립자금을 가지고 갔었다. 읍내에 퍼진 소문은 헌병대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 읍에서도 기어코 인물 나부렀구만 그랴."
"금메 말이시, 제석산 뿌랑구가 있긴 있는디 고런 인물 하나 못 나올라등가."
"참말로 벌교 사람덜 체면은 헌 것이구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었다.
어느 때 김범우의 기억 속에서는 형 범준의 모습이 어슴푸레하게 흐려지고는 했다. 형과는 열 살 터울이었고 그 사이에 누나가 셋이 있었다.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형은 아버지만큼 큰 남자라는 인식이 범우에게는 박히게 되었다. 형이라고 해도 살가운 정을 느끼기보다는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어려웠다. 형과 헤어진 것이 아홉 살 때였으니까 어느덧 20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형은 세 차롄가 다녀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염상진도 보았던 사진을 통해서 독립군인 형의 모습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형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사진의 모습만 분명해질 뿐 그전의 얼굴은 뿌옇게 흐렸다. 김범우는 아버지가 일흔셋, 어머니가 일흔 다섯임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서방님, 한 가지 여쭐 말씸이 있는디요."
앞서 가던 문 서방이 무료했던지 뒤돌아서며 말을 꺼냈다. 김범우는 무슨 말인지를 눈으로 물었다.
"긍께 말이요, 염상진인가 위원장 동무란가 허는 사람이 말허기를, 지주덜 전답을 싹 다 뺏어갖고 소작인덜헌테 골고로골고로 갈라준다고 혔다는디, 고것이 참말이었을께라?"
김범우는 엷게 웃었다. 염상진이 사람들 앞에서 가장 자신만만하게 외쳤을 말이었다.
"문 서방 생각으론 참말 같소?"
"금메 말이요, 고렇게 됨사 싫을 작인 하나또 읎을 것이지만, 시상에 고런 기맥힌 인심이 워디 있을라디야 허는 생각이 듬스로,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읎이 요상시럽구만이라."
김범우가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물었던 것은 문 서방이 말을 하는 동안 마땅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지주의 땅이 몰수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분배된 땅이 결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납득시키기가 난감했다. 그걸 납득시키자면 사회주의 경제체제 전반에 걸친 장광설을 늘어놓아야 할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문 서방은 너무나 무지했다. 그렇다고 염상진의 말을 전적으로 거짓말이라고 일축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더구나 모호하게 대답을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그건 문 서방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일 것이었다.
"문 서방, 문 서방은 문 서방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싶지요?"
"하먼이라, 살아 생전에 안되먼 저승에 가서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그럴 테지요. 만약 그 소원이 풀려 열 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는데 그 쌀을 몽땅 빼앗긴다면 어떻게 되겠소?"
"워메 워메, 그럴라먼 염병헌다고 농새를 지어라?"
문 서방은 눈까지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렇지요,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지요 그럼, 쌀을 그냥 빼앗긴 것이 아니라 다 나라에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다 먹으면 어떻겠소?"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새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지 손으로 간수허는 맛에 살제 무신 초친 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 동냥아치도 아니겄고, 고런 농새도 안 지어라."
"그런 농사도 안 짓겠다면, 그럼 이런 것은 어떻겄소? 그 누구의 명의도 아닌 수백 마지기 논에 공동으로 동네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정해진 양을 배급 타먹는 것 말이요."
"허어, 갈수록 태산이시웨. 아, 니 것도 내 것도 아닌 논에 그눔에 농새 자알 되야 묵겄소. 쎄빠지게 일헐 눔 하나도 읎을 것잉께 가실허고 나먼 쭉징이만 수북헐 농새 지나마나 아니겄소?"
"문 서방, 염상진이가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오."
"머시 워째라? 명의도 읎는 땅에 다 항꾼에 농새짓고 배급 타묵는다는 것 말인 게라?"
"그래요."
"워메 시장시런거. 고것도 말이라고 헌당가? 그려서 다 항꾼에 잘 살게 된다고 떠들어 쌓는갑구만. 고건 공염불이여. 시상 사는 이치를 몰라서 허는 소리제, 내 텃밭 배추가 쥔 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물게 차는 이치가 머신디."
문 서방은 찔끔해져서 얼른 입을 다물고 김범우를 쳐다보았다. 김범우는 못 들은 체 앞만 보고 걸었다.
"긍께 믿을 눔 하나또 읎는 시상이여. 좇 뽄다고 지주 논 뺏어서 공짜로 주겄어. 다 즈그덜 이롭게 해처묵는 짓거리제."
문 서방은 뒤쳐져 오며 맥빠진 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김범우는 당황스러웠다. 설명을 한다는 것이 그만 염상진네를 모략하거나 매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반응은 분명 자신의 본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소작인들의 무조건적인 땅 소유욕망 앞에서는 그런 거부나 불신을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명으로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김범우는 그 정도에서 끝내기로 했다. 문 서방의 태도로 보아 염상진의 말에 솔깃했던 것이 분명했고, 그런 기대를 단념시킨 것만으로도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문 서방, 조금만 기다려 봐요. 농지개혁이 실시되면 문 서방도 문 서방 이름이 적힌 땅을 갖게 될 테니까요."
김범우는 풀이 죽은 문 서방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니기럴, 고걸 믿는 작인은 이 시상에 하나또 웂어라."
문 서방은 벌컥 화를 내듯이 언성을 높였다.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언짢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믿는 작인이 하나도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차암 서방님도, 유식헌 양반이 그걸 몰라서 물으신당가요?"
문 서방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픽 바람이 새는 헛웃음을 쳤다. 김범우는 그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짐작은 하고 있소. 그런데 작인들이 그리도 안 믿는단 말이오?"
"지주양반덜이 양심적으로 혀야 믿제라. 농지개혁헌다는 말이 나돔스롱부텀 지주덜이 뒷구녕으로 실금실금 무신 짓거리덜 허는지 서방님도 아시제라?"
김범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지주들은 자기네 농토를 가난한 친척들 앞으로 명의변경을 해서 은폐시키거나 타인에게 매도하거나 하는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그건 우선적으로 분양 양도권을 가진 작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지주의 법적 토지가 줄어드는 만큼 작인들은 분배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 찜질 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허는디,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오?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헌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 허지, 가난하고 무식헌 것덜이 믿고 의지헐디 웂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쳐웂애고 그 전답 노놔 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이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문 서방을 어찌 무식하다 할 것인가. 김범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충청도보다는 전라도가, 전라북도보다는 전라남도가 더 좌경세력이 강하다는 것과 문 서방의 말과는 상통하고 있었다.
"문 서방, 문 서방의 지주는 누구요?"
김범우는 문 서방을 쳐다보지 않고 걸으며 물었다.
"무, 무신 말씸이다요?"
문 서방의 목소리는 완연히 당황해 있었다.
"김사용이 맞지요?"
"그, 그런디요 ……"
"그분도 뒤로 그런 짓 합디까?"
"워디요, 워디요. 어르신이 어디 그럴 분이시간디요."
"틀림없이 믿어요?"
"하먼이라. 그렁께 지는 빨갱이 될 생각 꿈에도 안혔제라."
"됐어요. 농지개혁이 되면 틀림없이 문 서방 앞으로 땅을 드리도록 내가 약속하겠소."
"아니, 서방님 ……"
문 서방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분명 꿈은 아니었다. 문 서방은 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김범우 앞을 막아서듯 했다.
"서방님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문 서방은 두 번, 세 번 허리를 꾸벅거렸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춰선 김범우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문 서방, 그러지 말아요. 그건 문 서방이 오래도록 고생해서 얻은 당연한 권리인 거요."
"아니어라우, 아니어라우."
문 서방은 기어이 목멘 소리를 냈다.
"어서 갑시다. 아버님이 기다리시는데."
김범우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집의 위치가 읍내를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에 있음을 김범우는 다행으로 여겼다. 염상진의 손에 5일 동안 장악되었던 읍내의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문 서방 ……"
김범우는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문 서방을 불렀다.
"야, 서방님."
뒤따르고 있던 문 서방이 빠른 동작으로 김범우 옆으로 다가섰다.
"문 서방도 눈치로 다 알고 있겠지만 뒤숭숭한 세상이 됐소. 각별이 말조심하도록 하시오. 한 치 혀가 역적 만든다는 옛말이 있는데, 마음에 있는 생각이라고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하먼이라. 명심허겄구만요."
문 서방은 김범우의 말뜻을 십분 헤아리며 방아깨비처럼 연거푸 허리를 꾸벅거렸다.
아버지의 신색은 많이 상해 있었다.
"아버님, 문 서방 편에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좀 어떠신지요."
"내사 괜찮허다. 니는 무사허냐?"
김범우는 아버지의 음성마저 탄력을 잃고 습하게 변해 있음을 느꼈다.
"금메, 상진이 그눔이 글씨 ……"
"어허!"
아버지의 목청이 높아졌고, 어머니는 마땅찮은 표정인 채로 말을 중단했다.
"고생 많이 했지야?"
"제가 무슨 ……아버님이 못할 일 치르셨지요."
"다 시국 어질운 탓이다. 안직 읍내는 못 보았을 테지?"
"네, 당분간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려 ……"
"그만 누시지요."
"눠야지. 워쨌거나 앞으로가 또 큰 문제다."
김사용의 근심 짙은 목소리가 잠겼다.
"마음 상하신 것 이기시고 어서 쾌차하여야죠."
"그래야지."
김사용은 솟아오른 한 뭉텅이의 한숨을 어금니로 깨물었다. 그 한숨은 파장이 불규칙한 콧김으로 변해 흘러나왔다. 김범우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더 지켜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가그라. 건너가 쉬어."
김범우는 말없이 일어나 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한숨을 애써 참아내는, 낡은 창호지 같은 아버지 모습이 그렇게 비애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건 한 자연인의 늙은 모습이 주는 소박하고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봉건의식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그 마지막 잔영이었다.
서른 언저리의 나이에 충의 대상인 왕조의 몰락을 겪은 아버지는 전형적인 이조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40년의 생애는 정지된 삶일 뿐이었다.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게 된 유교적 학문과 자랑삼을 의미를 상실한 양반의 족보를 함께 싸서 벽장 속 깊숙이 넣어야 했다. 아버지의 무미한 생활을 그나마 지탱시켜주었던 것은 낙안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일이었을까. 몇몇이 모여 앉아 아무리 개탄하고 통분해 한들 이미 무너진 왕조가 다시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학문을 논하고 운율 맞춰가며 한시를 짓는다고 한들 이미 끊어진 맥이 다시 이어질 리 없었다. 그건 서글픈 회고취미였을 뿐이고, 여름 한낮 사방의 격자문을 모두 처마끝으로 걷어 올린 대청마루에서 그들이 목청 가다듬어 읊어대는 시조가락 소리는 낙안 들녘 소작인들의 증오심만 더욱 끓어오르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향교에 발길을 끊다시피 한 것은 범준 형님 사건이 발생한 다음부터였다.
"찬을 세 가지 이상 올리지 말 것이며, 명절이라 하더라고 떡을 두 가지 이상 해서는 안 된다."
엄명이 내려졌다. 집안에 갑자기 궁핍이 몰려든 것 같았지만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슬이 전에 없이 매섭기도 해서였지만 그런 조처가 왜 취해진 것인지를 집안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범준이 성님이 집 떠나 고생하는디 우리만 잘 묵고 살아서는 안된께 이러는 것이다."
갑자기 가난해진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굳이 설명을 하려 들었다.
"엄니, 그 말 순사가 들어먼 큰 일난께 고만 혀. 엄니가 말 안혀도 나 다 알고 있응께로."
범우는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고,
"워쩌?"
어머니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워메, 신통방통한 내 새끼, 어린것이 워찌 그리 속이 짚을끄나와."
어머니는 범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범우는 어머니의 포옹이 어느 때 없이 뜨거운 걸 느끼면서도,
"나가 애기간디?" 하며 어머니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려, 니는 열 살 묵은 어른이다."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그런 생활의 내핍이 형의 고생을 함께 아파하는 가족으로서의 유대감만이 아니라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한 방법으로 이중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범우가 깨달은 것은 이삼 년이 더 지나서였다. 아버지는 예사롭지 않은 슬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형으로부터 비롯되는 시련과 고통에 의연하게 맞서고 꿋꿋하게 이겨나갔다. 아버지는 회고취미에 빠져 있는 족보뿐인 양반의 후예도 아니었고, 선대가 물려준 농토나 타고 앉아 소작인들의 등껍질이나 벗기려는 포악한 지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함께 나라 잃어버린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건 경이롭게까지 느껴지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형은 조선인으로서 정지된 삶을 살고 있었던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적극적 삶의 방법이 아버지의 의식세계 전체를 형성하고 있을 조선적 가치관이나 윤리관까지를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아버지의 변모는 염상진을 흉허물 없이 대하고, 해방을 맞은 새 세상에는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일 것이었다. 그런데 염상진은 어버지를 끌어다가 인민재판의 단상에 세웠다. 염상진은 아버지의 목숨을 부지시키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염상진에게 결코 고마워할 것 같지가 않았다. 김범우는 아버지의 여생이 그다지 길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런, 그 예감을 떼쳐내려고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가움에 겨워 매달리는 아들 경철이를 안고 아랫목에 막 앉으려는 참이었다.
"경철아, 니 할무니 방에 가서 놀아라."
아내가 꾸짖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녀, 나 아부지허고 놀란디."
하며 아들이 가슴으로 바싹 파고들었고, 김범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 싸게 엄니 말 들어. 안 그러먼 매맞을 팅께."
아내는 한층 거친 음성이었다. 평소의 아내답지가 않았다. 아내의 초조한 기색이 드러난 얼굴이 아니었어도 김범우는 아이를 피해야 할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리 경철이 할무니한테 가서 놀아라. 이따가 아부지가 말 태워줄 테니까. 우리 경철이 착하지? 그렇지?"
"치이, 둘이서만 재미있게 놀란 것이제? 나 아부지가 을매나 보고 잡았다고. 나 안 간당께."
아들은 몸까지 훼훼 돌리며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 그 동안의 이별이 어린것의 마음에는 그 나름의 그리움을 키웠을 것이고, 만난 반가움을 미처 풀 겨를도 없이 떼어놓으려 하는 것이 무리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말뜻을 헤아릴 나이도 아니었다.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잘못이 없는 아이를 꾸짖어 내쫓을 수 없을 바에는 신효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잔돈 가진 것 있소?"
김범우는 아내를 향해 엷게 웃으며 물었다.
"돈을 주실라고라?"
"당신이 급한 모양인데 그 방법밖에 더 있겠소?"
아내도 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 하는 어린것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돌릴 방법은 강압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는지 벽 쪽으로 돌아서서 치마를 걷어 올렸다. 치마 속에 매달고 있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경철아, 이 돈 가지고 가서 사탕 사먹어라."
"와아, 우리 아부지 젤이다!"
경철이는 언제 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했냐 싶게 소리치며 방을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오?"
김범우는 별로 좋지 않은 예감으로 물었다.
"저어 ……오빠가 순천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갔다는디요."
"아니, 처남이 왜?"
김범우의 목소리는 느닷없이 컸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처남이 왜? 였지만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뇌리를 친 것은, 아니 그 사람도 좌익이었단 말인가! 하는 충격이었다.
"좌익 활동에 뒷돈을 댔다고 허는디, 참말로 믿을 수가 없구만이라."
아내는 옷고름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것 참 ……또 더 아는 게 있으면 다 말을 해보시오."
김범우는 느리게 담배를 빼들었다.
아내가 그렇듯 그로서도 처남의 좌익 활동이란 믿어지지가 않았다.
"긍께 ……뒷돈 댄 일이 발각나서 잽혀갖고 농업학교 운동장까지 끌려갔는디, 하늘이 도왔는지 거그서 잘 아는 사람을 만내 포도시 총살을 면허고 경찰서에 갇혔당마요. 고것이 어지께 아칙 일인디, 앞일이 워쩌크롬 될랑가 알 수가 웂응게, 얼렁 손 잠 쓰라고 친정서 사람을 보냇드만요."
김범우는 깊게 들이켠 담배연기를 한숨으로 토해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처남은 좌익 지하조직의 자금책이었던 모양이다.
처남 신석주와 좌익과 …… 전혀 맥이 닿지 않았다.
항시 웃음이 감돌고 있는 눈언저리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잔잔한 성품의 그는 천생 타고난 은행원이었다. 그는 순천 금융조합에서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을 하고 있는 편이었고, 그 자신도 은행원이라는 직업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성품의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가정적이었고 소시민적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정치, 사회적 격변에도 그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그가 민첩하게 보인 반응은 '제니스' 축음기를 안방에다 모셔다 놓은 것이었다. 그는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 소리 내는 기계를 애지중지하며 '귀국선'이니 '가거라 삼팔선'이니 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흡족해 했다. 터무니없는 정치의식에 들떠 날뛰는 것보다야 그런 소시민의식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김범우는 처남 신석주와 자주 마주앉을 수는 없었다.
"워째야 쓸께라?"
아내가 행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내 곧 순천으로 넘어가볼 것이니."
김범우는 방바닥에 초점 없는 눈길을 던진 채 대꾸하며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가 비밀리에 자금책 노릇을 한 경우이고, 둘째는 어느 누군가에게 돌려준 돈이 자신도 모르게 좌익 자금으로 사용된 경우였다. 김범우는, 사람이란 그 속을 알 도리가 없는 무서운 짐승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속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처남의 경우는 후자 쪽이리라고 생각이 기울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을 듯싶었다.
김범우는 아내가 가져온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무담시 당신이 고상허시게 생겼구만요."
대문까지 따라 나온 아내가 주눅 든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고생은 무슨 고생이오. 학교에도 나가볼 겸 마침 잘됐소."
말은 그렇게 하고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지만 기분은 찌뿌덩하게 흐려 있었다.
김범우는 학병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며칠이고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염상진이 5일 동안에 걸쳐 한 행위를 보지 않았듯이 군경이 앞으로 할 행위도 보지 않으려고 했었다. 염상진의 행위를 제지할 수 있는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듯이 군경의 행위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책임한 목격자, 무능력한 구경꾼이 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김범우는 언제부턴가 학교에도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난 4월 19일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있는 열성을 다 바쳤었다. 제발 서로가 정치적 욕심을 앞세우지도 말고, 강대국이 내세우는 이념에 얹혀 춤추는 꼭두각시 노릇도 하지 말고, 나라 잃어버리고 산 40년의 굴욕과 슬픔을 먼저 생각하며 민족이 똘똘 뭉쳐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을 상대로 싸운 연합국의 입장이고, 그들의 승리로 해방을 얻은 땅의 사람들이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로 굳게 뭉쳐 새 나라 건설을 주장했을 때, 설령 그들이 한반도 땅을 놓고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 한들 끝내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환상도 망상도 아니었고 두 강대국이 제멋대로 줄 그어 양분시켜놓고 있는 한반도의 주인인 동포 모두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었다.
김범우가 민족의 발견과 그 단결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식민지시대를 살아내서만이 아니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OSS동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포로취급을 당하면서였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수용소를 거쳐 하와이 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내면서 그 생각은 굳어졌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자존이나 독립을 철저하게 우롱하고 기만하며 강대국들이 상호 이익보호를 위한 연극적 대사였듯 연합국이라는 존재들이 해방된 한반도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공동의 삶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구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국이 그런 식으로 대했는데 소련이라고 다를 리 없는 것이고, 그 불신의 의식 속에서 소생하는 것은 민족뿐이었다. 그런데, 해방된 땅의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백범 김구가 바로 자신과 똑같은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아, 백범!
김범우는 그 옛날부터 지녀왔던 그분에 대한 신뢰감 위에 감동의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김범우는 백범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분이 2월 10일에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으로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란 글은 민족의 현실과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피가 통하는 진실의 기록이었다.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십육 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산을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하는 대목에서 그분의 인간적 진실을 보았고,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 하겠다'
하는 대목에서는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을 보았다.
그러나 김범우가 소망했던 바는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 한국위원단 감시 하에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5월 14일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함으로써 남북협상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남한에서는 8월 15일에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고, 북한에서는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로써 김범우의 소망은 그야말로 환상이나 망상이 되고 말았다. 4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찾은 선택의 기회를 그처럼 망가뜨려버리는 현실 앞에서 그는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의 망막 속에서 백범의 초상은 하얗게 표백되고 말았다. 그는 교단에서도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기계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죄책감으로 학교를 떠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인가 되풀이했던 것이다.
김범우는 홍교 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기차역까지 나가자면 천상 읍내를 관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교를 건너 길을 잡으면 장터거리와 극장을 지나 소화다리로 이어지는 삼거리에서 다시 경찰서나 우체국 등속의 관공서가 들어선 길이 끝나는 지점에 역이 있었다. 다른 하나의 길은 봉림리 앞길을 따라 소화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그 길을 이용하면 항시 번잡스러운 장터거리 길은 지나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염상진이 남겨놓은 흔적은 장터거리 길보다는 관공서 길 쪽에 더 심할 것이었다. 문 서방 말에 의하면 경찰서를 불태웠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기차역을 당장 다른 데로 떼어다 옮길 수 없는 한 그 길을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염상진이 피해를 입히고 떠난 읍내의 모습 대하기를 과민하게 꺼리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며 김범우는 씁쓰름하게 웃었다. 그건 무엇 때문일까 …… 예상보다 심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심하면 심할수록 염상진의 쫓김은 그만큼 숨 가빠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아무리 경미하다 하더라도 이미 죄인으로 단정된 염상진의 모습을 거기서 보아야 하는 것은 괴로움이었다. 결국 저 멀고 긴 날로부터 싹틔워 왔던 염상진에 대한 애정 탓이었다.
김범우는 봉림리 앞길을 지나 소화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빨리 했다. 역에 다다를 때까지 결코 고개를 들지 않기로 했다. 소화다리에 첫발을 디디면서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중간쯤에 이르렀을까, 김범우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흙을 뿌리긴 했지만 거무칙칙한 색깔을 띠고 있는 얼룩이 피가 말라붙은 흔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말라붙은 얼룩에서는 아직도 농도 짙은 액체의 끈적거림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전신에 끼쳐오는 한기에 전율하며 그 얼룩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처 입은 자가 흘린 피에는 고통이 있을 뿐이지만 죽은 자가 남긴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저주하는 영혼인 것이다. 염상진은 코웃음 치며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념은 심정적인 느낌을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할 것이고, 더구나 그는 양면 거울의 한쪽밖에는 볼 수 없는 외눈박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염상진이 저지른 행위를 차마 맞바라볼 수 없어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걸었는데 그 결과는 마치 그의 숙인 시야 안으로 기어들 듯 다리의 콘크리트 바닥에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게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며칠 전에 들었던 문 서방의 말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걸었던 것은 염상진이 저지른 잘못을 일삼아 찾아내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경찰서뿐만이 아니라 읍사무소고 세무서고 우체국이고 다 불 질렀다 한들 어떠랴. 인명을 어떤 객관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리 성급하게 살상하지 말고 그런 것들이나 다 태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범우는 그 얼굴을 피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계속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피해 걷기는 했지만 더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핏자국이 나타날 때마다 김범우의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염상진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소화다리를 다 건넜을 때는,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변해 있던 염상진은 그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흔들리는 의식을 애써 가누며 관공서들이 자리 잡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어서 곧 나타난 불탄 경찰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지나쳤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이층 콘크리트 건물은 뼈대만 흉측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성님, 성님."
한 사내가 길 건너 전매소 앞에서 왼쪽다리를 까딱거리며 김범우를 부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김범우는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아, 범우 성니임!"
사내는 목청을 돋우어 불었다. 그러면서도 왼쪽다리를 연신 까딱거리고 있는 품이 길을 건너올 낌새는 아니었다. 김범우는 역시 그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걸어가고만 있었다.
"니기미 씨펄, 귓구녕에 말뚝을 박은 것이여, 사람을 무시허는 것이여."
사내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혼잣말을 씹어뱉듯이 하고는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김범우를 향해 길을 가로질러 뛰었다.
"아 범우 성님, 나 잠 봅씨다."
사내는 거친 목소리와 함께 김범우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았다. 그때서야 김범우의 발길이 멎었고, 느리게 고개가 들렸다. 그러나 안개가 낀 것 같은 김범우의 눈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알아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성님, 나 몰르겄소?"
사내가 자신의 가슴을 퍽 치며 턱없이 큰 소리가 말했다.
"상구 아닌가, 어쩐 일인가?"
김범우의 목소리에는, 알은 체한 상대가 면구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성님, 나가 지끔 동냥질허는 것도 아닌디 워째 사람을 요로크름 뜨광허고 찬바람 나게 대헌다요?"
상구라는 사내는 눈꼬리에 힘을 모으며 완전한 시비조로 말했다. 염상진의 동생인 그는 표정마저 적의에 차 있었다.
"이 사람아, 그 무슨 서운한 말인가. 내가 뭘 좀 생각하느라고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그리 됐네."
김범우는 뒤늦게 미안함을 느끼며 웃음을 지었다. 이제 눈에 끼었던 안개도 걷혀 있었다.
"사람 무시혀서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지라?"
염상구는 적의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검은 동자가 반나마 가릴 정도로 작게 찢어진 눈, 살이라곤 붙어 있지 않은 강파른 얼굴에 주걱처럼 안으로 휘어든 턱, 성깔 사나움과 독기가 한데 어울려 있는 생김이었다. 바짝 마른 체구는 허약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굴의 느낌과 함께 날쌔고 강인해 보였다.
"사람 하루 이틀 대해봤나? 그런 말 함부로 하게."
김범우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금메 말이요. 돈 많고, 많이 배운 놈들이 다 그려도 성님만은 고런 맘 묵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믿기 땀세 두 번씩이나 알은 체럴 혔는디도 몰라라 허고 간께 속이 뒤집힌 것이제라."
염상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결 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근디, 무슨 생각얼 그러크롬 짚이 험시로 워딜 가는 질이당가요."
염상구는 금세 무엇을 탐지해내려는 듯한 눈초리로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순천에 넘어가려는 참이네."
"그러탕께! 내 눈을 못 속인단 말이여!"
염상구는 손가락으로 유난히 크게 딱 소리를 울려대며 스스로의 식별력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런 염상구를 김범우는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헌디, 찡은 가지셨는게라?"
염상구가 김범우 앞으로 얼굴을 디밀듯 하며 물었다. 그 어조나 태도가, 가졌을 리가 있나, 하는 투였다.
"찡이라고?"
김범우는 염상구의 예상에 걸려들 듯 반문했다.
"아, 대학공부꺼정 배우고, 선상질꺼정 허는 성님이 찡 하나 먼지 몰라서 묻는다요?"
비아냥거림과 으스댐이 뒤섞인 말투였다.
"찡이라는 말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무슨 찡이 필요하냐고 묻는 말이네."
말을 하면서 김범우는 무슨 신분증이 긴급히 발행되고 있음을 알았다.
"성님,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리 고만 허씨요. 똥줄 타게 도망친 빨갱이가 산지사방에 백혀 득실거리는 판이고, 타향서 밀어닥친 진압군이 멀로 빨갱이 안 빨갱이럴 구별허겄소. 아, 성님을 벌교바닥에서나 김범우로 알아주제 벌교바닥 벗어나뿔먼 누가 알아볼 것이요. 통행찡 없음사 영축웂이 빨갱이제. 나가 성님을 딱 본께로 기차 타로 역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헌디, 찡을 안 가진 것이 틀림웂덜 않겄소. 찡 웂이 역에 가봤자 헛걸음질이고 되짚어 찡 맹글로 읍사무소로 와야 헐 것인디, 워찌 성님이 그 고상 허게 냅둘 수가 있겄습디여? 그려서 불러 세운 것이구만이라."
"그랬었구먼. 고맙네."
김범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우울이 가슴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참 한심스럽게 변해가는 세상이라 싶었다.
"고맙기는 머시 고마워라. 고런 것이나 내 심으로 도와야지라. 얼렁 맹글게 헐 팅께 항꾼에 갑시다."
염상구는 활기차게 앞서 걷기 시작했다. 김범우는 염상구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쩝쩝 입맛을 다시고는 발을 떼어놓았다.
그는 염상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그의 가슴을 덮는 우울이었다. 무슨 견원지간이라고 염상구는 또 형 염상진이와는 반대 입장에 서 있게 됐을까.
"빨갱이눔덜이 경찰서를 불질러부러서 읍사무소서 경찰업무를 보고 있구만요."
염상구는 마치 자기가 경찰업무를 맡고 있는 양 이런 설명까지 했다.
순경보조원이 듯싶은 앳된 보초병이 염상구를 보자 거수경례를 붙여 올렸다.
"어이, 수고허네."
염상구는 트림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자세로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를 받았다.
"어이웨, 서 순경, 싸게 찡 하나 맹글소. 자네도 알제? 봉림 사시는 김범우 선상님. 우리 성님이신디 순천 넘어가신당마. 싸게싸게 맹글소."
염상구는 아무 거침이 없었다.
"김 선생님, 나오셨는게라? 요리 오시씨요."
서 순경이라고 불린 사람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쪽에서는 알고 있는 모양인데 김범우로서는 안면만 있을 뿐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통행증은 담배를 반나마 피웠을 때 완성이 되었다.
"와따메, 서 순경 글씨는 은제 봐도 한석봉이 찜쩌묵을 명필이여."
염상구는 통행증을 눈높이로 치켜들고 큰 목소리로 치하의 말을 하고 있었다.
"선상님 앞에서 거 먼 소리여."
서 순경이 혀를 찼다.
"수고하셨소."
김범우는 담배를 비벼 끄며 인사를 했다.
"성님, 경찰서란 오래 있어야 존 것 웂응께 싸게 값시다."
염상구는 통행증을 들고 앞서 나갔다.
"수고 많았네. 그만 자네 볼일 보소."
큰길로 나선 김범우는 손을 내밀었다.
"머 따로 볼일이 있간디요? 역꺼정 가십시다."
염상구는 통행증을 건넬 생각도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까지 바래다줄 모양이었다.
그만하면 오랜 정리를 위한 친절로도, 자기과시를 위한 시위로도 충분한데 ……
김범우는 염상구가 번거롭게 느껴졌다.
"성님은 난리통에 워쩌고 지냈는게라?"
" ……대밭골에 숨어 있었네."
자네는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인 줄 알면서도 김범우는 전혀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엎어지면 코 달 디서 용허니 무사혔구만요. 나는 소록도로 좆 빠지게 내뺐구만이라. 문딩이덜 속에 숨어뿐께 참말로 안전헌 피난처등마요. 쪼깨 징허기는 혀도 말이어라."
김범우는 씁쓸한 웃음을 씹었다.
염상구는 작년 9월에 결성된 대동 청년단의 열성단원으로 좌익 지하조직을 파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을 것이다. 그건 형 염상진이와 맞서 싸우는 일이었고, 그래서 염상구는 그 일에 더 신바람이 났을지도 모른다.
‘만약 염상구가 도망을 못 가고 붙들렸으면 ……’
김범우는 그런 상상을 유발하고 있는 자신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성님, 찡도 맹글었겄다. 기차 탈 일만 남았응께 차나 한잔 하십시다."
"나 바쁘네."
"와따, 성님!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감아서 쓰는 법 있읍디여? 임허고 잠자리럴 혀야 아들을 볼 것이고, 기차가 와야 탈 것 아니겄어라우? 기차가 올라먼 40분이니 남았응께 그새 따끈헌 커피나 한잔 대접허겄다는디."
염상구의 입에서는 금방 상소리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말이 거칠어져 있었고, 그 몸놀림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주먹패의 냄새가 나도록 난잡스러웠다. 제 나름으로 다하고 있는 성의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고, 그래서 화가 난 것 같았다. 제멋대로 열등감을 품고 있는 사람을 대하기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를 김범우는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성님 성님 하질 말든지, 그리 상스럽게 굴질 말든지 하게. 내 맘은 바쁘고, 기차시간은 모르고 해서 그런 것이지 내가 어디 자네 대접을 마다했는가!"
김범우는 귀찮은 오해를 막기 위해 정색을 하며 힘을 넣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님, 그러셨겄제라. 배운 것 웂이 무식허다 봉께로 소갈머리가 쥐창아리만 해갖고 오해혔구만이라."
염상구는 금방 기분을 풀었다.
읍내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소문난 주먹패 염상구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머리를 숙이듯 하고, 귀찮을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것은 형의 친구로서 오랜 정 때문만이 아님을 김범우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형의 친구라는 관계뿐이었다면 오히려 형에 대한 적개심을 옮겨 피해를 입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전과 차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염상구는 통학생들을 통해서 자신에 관한 그런저런 소문을 다 듣고 있었을 것이었다. 힘쓰는 자는 힘쓰는 자 앞에서만 꼬리를 감춘다고 하던가. 김범우는 오래 전부터 염상구의 태도에서 그런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가실께라. 다방에 성님맹키로 서울식으로 말허는 솔찬이 이쁜 가시내가 새로 왔구만요."
염상구는 그 작은 눈을 찡긋하며 씨익 웃어보였다.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인지, 제 놈이 벌써 요절을 냈다는 것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고 웃음이었다.
읍내의 유일한 다방인 '포구'에는 손님이 뜸했다. 김범우는 거의 발길을 하지 않는 곳이어서 실내 분위기가 눈 설었다. 낮에는 주로 관공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날이 어두워지면서부터는 역전 주먹패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야 가시내야, 찻잔 얌전허니 놓고 그 선상님 옆에 이쁘게 앉거라."
염상구는 차를 날라온 아가씨에게 우악스럽게 말했다. 그건 거친 명령이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입술을 삐죽였을 뿐 전혀 노여운 기색이 없었다.
"아니네, 아냐. 자네하고 따로 할 얘기가 있네."
김범우는 손까지 내저었다. 그는 엉겁결에 한 말이었는데, 말을 해놓고 보니 염상구와 마주앉은 김에 그동안의 사정을 듣는 것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염상구도 피해 있긴 했지만 경찰서를 그전처럼 제 집 안방 드나들 듯하고 있으니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을 것이었다.
"식기 전에 쭉 드시씨요. 요 커피란 것이 쌉싸름하고 달착지근헌 것이 마실 만허당께요."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채 커피는 미군정과 함께 전국적으로 퍼진 물건이었다.
"지허고 헐 이야기가 먼 이야긴디요?"
염상구는 커피를 탕약 마시듯 단숨에 마셔 치우고는 김범우를 향해 고개를 뺐다.
김범우는 느린 동작으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뽑고 나서 염상구에게 내밀었다. 몸에 익은 민첩한 동작이었다.
"이번에 상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말에 씹혀 나온 담배연기는 김범우의 입술 가에서 뒤엉키다가 흩어졌다.
"안직 몰르고 기신게라? 맞어, 성님은 우리허고는 달분께."
뒷말은 혼잣말로 바꾼 염상구는 자리를 고쳐 앉더니
"고 오살헐 눔덜이 쥑여도 무지막지허게 많이 쥑였당께요. 지끔도 계속 조사 중인디, 오늘 아칙꺼정 확인된 것만 100명이 넘었단 말이오."
돌변한 그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범우는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게 확실한 거냐고, 혹시 잘못된 조사가 아니냐고 묻는 말은 그의 의식 속에 갇혀 있었다.
"백을 쥑였든 이백을 쥑였든 고런 건 다 과거지사고, 인자부텀은 우리덜이 헐 복수전이 남았구만요."
염상구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야무지게 훔쳤다.
"복수전?"
김범우는 정신이 번쩍 들며 염상구를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하먼이라. 빨갱이눔덜이 먼첨 칼을 뽑았응께 우리도 칼을 뽑아야지라. 고 숭악헌 눔덜이 다시는 고런 개지랄 못허게 헐라면 요분에 빨갱이 씨럴 말려뿌러야 허요. 섣부르게 혔다가는 고것들이 또 까불 것잉께."
염상구의 살기등등한 말 속에서는 혈연으로서의 염상진의 존재는 찾을 수도 없었다. 완전한 편갈이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김범우는 쓰디쓰게 웃었다.
"엊제녁에 한바탕 콩을 볶았응께, 고런 식으로만 가먼 사나흘이먼 읍내 뿌리는 뽑을 것잉마요. 도망간 반란군하고 빨개이눔덜언 진압군허고 경찰이 쫓고 있응께."
"콩을 볶다니?"
김범우는 직감은 하면서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물었다.
"참 성님도, 빨갱이 총살도 몰르요?"
염상구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군."
김범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워디 빨갱이질 나선 눔만 빨갱이간디요? 소리 소문 웂이 과부 뱃때지에 올라타는 눔맹키로 빨갱이질허는 세포도 있고, 빨갱이 앞잽이로 설레발친 눔덜도 있고, 빨갱이 숨키고 있는 집구석도 있고, 잡아딜이고 봉께로 하로 반 만에 북군민핵교 교실이 다 찰 헹펜이구만요."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다 알아냈단 말인가."
"허어, 스파이 훈련인가 먼가 받았다는 양반이 워찌 그런 말을 다 묻는다요? 빨갱이만 조직 있고 우리 경찰은 핫바지저구리간디요?"
김범우는 야무지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소화다리 위해서 피얼룩을 보았을 때처럼 김범우는 의식이 혼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순천을 빨리 다녀와야 되겠다는 생각만이 마음을 다급하게 하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세."
"시간이 당아 멀었는디요?"
"머리가 아파서 찬바람을 쐬야겠네."
김범우는 염상구를 묵살하고 일어섰다. 다방 안에는 한창 유행되고 있는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가 흐르고 있었다. 김범우는 찻값을 치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휘적휘적 다방을 벗어났다. 한낮인데도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그 썰렁함이 읍내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김범우는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네 범우 아닌가!"
김범우는 눈길을 들었다. 남국민학교 선생인 손승호였다.
"승호 자네 무사했구만."
김범우는 손승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의 지난날을 알기 때문이었다.
"말 말게. 꼭 죽는 줄만 알았네."
파리한 안색의 손승호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노상에서 긴 말 할 수는 없고 …… 염상진이한테 붙들렸었지. 과거를 묻지 않겠으니 다시 전향을 하라고, 밤낮으로 시달리는데 못살겠더군."
"그래서?"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구만."
손승호는 감정의 동요 없이 말하며 입가에 찬웃음을 물었다.
그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좌익에 발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익의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가 속출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국제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을 불문한 세력 확장의 도구로 사용되는 허구성을 발견하고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버렸을 뿐 그 반대개념의 사상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는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손승호의 생각은 김범우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김범우가 관심하는 '민족'이라는 자리에 손승호는 '인간'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 순천을 좀 넘어가는 길이네. 오후에 집에 있겠는가?"
김범우는 손승호에게 어느 때 없이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지."
언제나 얼굴에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 손승호는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성님, 여그 기셨구만이라. 찡도 웂이 이 양반 워딜 가셨다냐 했구만요."
거침없이 떠벌리며 가까이 온 염상구가 손승호를 알아보고는 멈칫했다. 염상구와 시선이 마주친 손승호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적의가 담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다녀오소."
손승호는 김범우를 보지도 않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김범우는 염상구를 의식하며 빠른 걸음을 옮겼다. 염상구가 무슨 객적은 소리를 지껄일까봐 손승호와 한 발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었다.
"저 개좇 겉은 시끼가 사람 대허는 꼴 잠 보소. 삭신울 못 쓰게 맹글날을 폴세부텀 종그고 있단 것을 지눔이 알어야 쓸 것이여."
염상구가 살벌하게 내쏘며 탁 침을 뱉았다.
"상구 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김범우는 휙 찬바람이 일도록 돌아서며 염상구를 노려보았다. 그 눈이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성님, 위째 그러시오? 성님은 저눔 과거를 몰라서 그러시오?"
염상구는 완연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 과거가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게 삭신을 못 쓰게 만들 죄야? 그리고, 자네가 뭔데 그런 소릴 함부로 지껄여. 그럴 권한을 누가 자네한테 줬어!"
"성님, 빨갱이덜이 전향했다는 말을 콩으로 메주 쑤디끼 믿을 수 있는 줄 아시오? 고것이 눈 개리고 아웅허는 빨갱이덜 수법이랑께요. 고것이 아님사 요번 난리통에 워찌 저눔이 살아났겄소. 제 일착으로 죽었을 눔인디. 그렁께 저눔이 세폰지 아닌지 종그는 것인디, 고것이 워째 나빠라?"
김범우는 차가운 쇠붙이가 가슴팍에 섬뜩하게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염상구는 단순한 주먹패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손승호에 대한 의심을 풀어줄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괴롭지만 염상진을 입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 내 말 똑똑히 들어. 아까 자네가 오기 직전에 무슨 말 했는지 아는가? 손승호 그 사람이 자네 형한테 붙들려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자네 형은 다시 전향하라고 했고,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총까지 들이대더라는 거야."
"그 말을 워처케 믿냐니께요."
염상구는 교활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입가에 바르고 있었다. 형의 이야기에 조금도 감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의심하자면 나는 어떻게 믿나."
김범우는 두려운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집단화된 의식의 단면이었던 것이다.
"좋소, 지눔이 깨끔허니 발을 씻었다고 칩시다. 근디 워째서 나럴 대허는 뽄새가 똑 고름 질질 흘리는 문딩이 대허디끼 허냐 그것이구만요."
김범우는 말이 막혔다. 손승호의 생각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뒤늦은 발견이긴 했지만, 염상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손승호의 실수였다. 한마디로 말도 잘못 해서는 안 될 어려운 국면이었다.
"자네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감정이 상한 모양인데, 그럼 자네한테 먼저 묻겠네. 그 사람은 나하고 동창인데 자네는 무조건 이놈 저놈 하고 부르는구먼. 그 사람이 좌익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 자네는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나를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지켜봤나? 자네가 깍듯하게 대하는데도 그 사람이 그러던가?"
김범우는 엉뚱한 허를 찌르고 있었다.
"니기미, 난 빨갱이 혔던 눔이고, 허는 눔이고 다 싫은께요 ……"
염상구는 시선을 떨구며 웅얼웅얼 말끝을 얼버무렸다. 김범우는 염상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자네가 여러 모로 수고하고 있는 것, 내 다 알아. 그런 수고가 더 효과를 나타내게 하려면 손승호 같은 사람을 자네가 먼저 잘 대하는 일이네. 내 말 알겠는가?"
"야아 ……"
김범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잡고 있던 염상구의 손을 놓았다.
염상구는 굳이 역에까지 따라와서야 통행증을 내밀었다.
"지가 표를 끊어디려야 허는디 ……"
염상구는 멋쩍은 듯 웃었다.
김범우는 그런 그의 얼굴에서 구박둥이로 자란 어린 날의 모습을 떠올렸다.
주먹패가 되고, 형을 원수 대하듯 하는 오늘의 그는 그 옛날부터 예비된 것이기도 했다.
스무 평 남짓한 대합실에는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을 뿐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김범우는 개찰구를 나섰다. 노천 플랫폼에는 네댓 사람이 기차가 올 광주 쪽 철로로 몸들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김범우는 천천히 걸어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역사(驛舍) 양옆으로 길게 드리워진 탱자나무 울타리로 눈길이 갔다. 잎이 거의 다 떨어진 탱자나무의 성긴 가지 사이로 서너 명의 코흘리개들 모습이 얼비쳐보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린 것들의 조잘거림도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무수한 가시가 돋아 있을 가지 사이사이에 샛노란 탱자들이 매달려 있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을 자리에 열린 것들은 벌써 다 따 가버리고 가시 사이에 열린 것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손쉬운 데 달린 열매들은 노랗게 익어보지도 못하고 진초록 몸의 아기열매 때 벌써 코흘리개들 손에 들어가 구슬치기의 구슬 노릇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꼬마들은 가시 사이에 매달린 탱자들을 따려고 열중해 있는 것이었다.
김범우도 어렸을 적에 억센 가시에 손을 찔려가면서도 한사코 탱자를 따내려고 애를 썼었다. 곰보딱지로 울퉁불퉁하게 못생긴 유자에 비해 탱자는 매끈하게 잘생겼으면서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향기도 유자만 못했고, 맛은 더구나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몇 번 굴리고 던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발로 밟아 터뜨리거나 시궁창 같은 데 처넣었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탱자를 딴 것은 그 샛노란 색깔의 동그란 생김에 이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탱자나무는 대부분 서민 집들의 앞울타리 노릇을 했고, 대나무는 뒷울타리 노릇을 했다. 억센 가시를 가지마다 촘촘히 달고 있는 탱자나무는 그 생김과는 다른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 자식 다섯을 데리고 과부가 살았다. 남편이 남기고 간 것이 없는 살림살이는 혼자 힘으로 아무리 뼈가 휘도록 일을 해도 자식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몇 년을 이 앙다물고 살아낸 과부는 더는 견디질 못하고 병이 들어 눕고 말았다. 그대로 굶어죽게 될 형편이었다. 그 소문이 나자 하루는 어떤 노파가 찾아왔다. 산 너머 부잣집에 큰딸을 소실로 보내면 논 닷마지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큰딸은 열다섯 살이었다. 과부 어미는 딸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노파가 대신하기로 했다. 노파의 말을 들은 처녀는 하룻밤 하루낮을 운 끝에 그리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노파한테 내세운 조건이 있었다. 닷마지기의 논 대신 그 값에 해당하는 쌀을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도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었다. 처녀는 쌀을 받은 날 집을 떠났다. 늙은 부자와 첫날밤을 지낸 다음날 저녁 처녀는 뒤뜰 감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늙은 부자는 처녀의 죽음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속았다고 펄펄 뛰며 당장 쌀가마를 찾아오라고 불호령을 쳤다. 하인들이 부랴부랴 처녀의 집으로 갔으나 식구들은 간 곳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늙은 부자는 더욱 화가 나서 처녀의 시체를 묻지 말고 산골짜기에 내다버리라고 명령했다. 저런 못된 것은 여우나 늑대한테 뜯어 먹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녀의 시체는 정말 내다버려졌다. 그런데 그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며 처녀의 시체를 업고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건 처녀와 남몰래 사랑을 나누어왔던 사내였다. 사내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평장을 했다. 그런데 다음해 봄에 그 자리에서 연초록 싹이 터 올라왔다. 그 싹은 차츰 자라면서 몸에 가시를 달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때서야 그것이 애인의 한스런 혼백이 가시 돋친 나무로 변한 것을 알았다. 아무도 자기 몸을 범하지 못하게 하려고 온몸에 가시를 달고 환생한 애인의 정절에 감복한 사내는 평생을 혼자 살며 그 한을 풀어지기 위해 산지사방에 나무 심는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김범우가 어렸을 적에 무심코 들어 넘긴 그 전설을 무엇인가 깨우치듯 떠올린 것은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게 된 어느 날이었다. 그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농경사회의 부와 빈곤이 고질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기름진 평야지대에서 생성된 서민이나 소작인들의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드넓은 곡창지를 품고 있는 전라도 땅과 탱자나무 전설과 소작 농민들의 봉기였던 동학란과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자가용 비행기를 가졌다는 전라도 어느 지주와 ……
김범우는 염상진과는 다른 고통으로 사회주의 서적을 덮고 자정을 넘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멀리서부터 기적이 울려왔다. 김범우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색깔이라서 더욱 육중하게 느껴지는 기차가 역이 가까워졌음인지 흰 연기를 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처남 신석주를 떠올리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7. 그리고 청년단
염상구는 양쪽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단음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역전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 양쪽 어깨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단이라도 맞추듯 건들거리는 상체는 천상 주먹패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생각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몸짓으로 걷고 있으면서도 그의 작은 눈은 마당의 좌우와 건너편 차부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지기미, 하루 벌어 하루 묵고 사는 것들이 목심은 드럽게 아까운 것인갑구만."
그는 이빨 사이로 찍 침을 내쏘았다. 침은 반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나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차부나 역전이고 도둑맞은 집구석처럼 썰렁한 것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길을 떠나자면 통행증을 일일이 발급받아야 하는 형편이니 차부나 역에 손님이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날이면 날마다 자리다툼을 하던 행상들마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읍내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하루 벌어 하루먹기가 다급한 가난뱅이 신세에 그래도 목숨을 지키겠다고 그리 약삭빠르게 구는 꼴들이 역겨웠다. 떡장수, 엿장수, 과일장수, 순대장수, 오이장수, 고구마장수, 이런 행상들이 각기 함지박이며 목판이며 광주리에 물건들을 담아들고 도착하고 떠나는 차를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악다구니 쳐대는 시끌벅적함이 어우러져야 차부나 역전의 기분이 제대로 나는 것이었다. 염상구는 그 소란 속을 헤치고 다니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가슴 뻐근함을 느끼고는 했었다.
염상구는 길을 건너려다 말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잡화상 옆에 쪼그리고 앉은 두 여자 행상을 향해서였다. 떡과 고구마를 차려놓고 앉은 두 여자는 염상구가 자신들에게로 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찔끔 긴장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시침을 떼며 이야기에 열중하는 체했다.
"아짐씨들, 무슨 이약이 그리 재밌지요?"
좌판에 다다른 염상구가 불뚝스럽게 내질렀다.
"아이고메, 요게 뉘시다요? 감찰님 오시는 것도 몰라보고 두 년이 새실 까니라고 …… 어여 오시씨요."
깜짝 놀란 시늉을 하며 자리를 차고 일어선 떡장수 여자가 반가움을 과장하고 있었다.
"하먼이라, 하먼이라."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고구마장수가 꺼칠하게 마른버짐이 핀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굽신거렸다.
"아짐씨는 머가 하먼이라, 하먼이라요?"
염상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꼬리를 세웠다.
"긍께로 ……"
고구마장수가 당황한 나머지 미처 말을 꾸며대지 못한 채 질렸고
"감찰님, 금메 요 여편네는 워낙이 빙신이라 높은 양번덜 앞에만 섰다 허면 쟁신을 못차린당께요. 멀리서 순사만 봐도 오짐얼 찔금거리는 빙신인디, 요러크름 감찰님을 딱 맞바라보고 섰붕께 헛소리 나올만 안 허겄소? 감찰님이 이해허셔야 쓰겄구만이라."
떡장수가 눈치 빠르게 둘러대고 있었다.
"날 첨 보간디 그래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염상구의 어조는 '감찰님'답게 점잖게 변해 있었다.
소학교 적에 긴 칼을 찬 일본순사만 보면 오금에 오소소 찬바람이 감기고는 했던 경험을 통해 그 촌스런 여편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을 그런 '높은 양반'으로 대해 주눅이 들 정도라는 것은 열 번 들어도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떡이 따끈헌디, 한 쪼가리 허실랑게라?"
떡장수가 금방 떡을 떼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날이 무뎌 보이는 부엌칼을 집어 들었다.
"어허, 점잖찮게."
염상구는 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팔을 내젓고는
"헌디, 썩은 괴기에 쉬파리 앉디끼 허든 예펜네덜이 다 워디로 가부렀소. 빨갱이허고 내통허다가 다 뽕빠지게 도망간 것 아니라고?"
썰렁한 차부고 역전을 휘둘러 억지소리를 했다.
"워메 감찰님, 사람 잡을 소리 허덜 마씨요. 아, 쉬파리가 앉을 썩은 괴기가 있어야 쉬파리가 끓제라. 타작마당 거불 쓸어불디끼 요리 손님이 웂는디 장사 안 나오는 것이야 당연지사제라."
떡장수가 힐금힐금 눈치를 살피면서도 야무지게 말하고 있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법한 이치였다. 돈을 좇는 장사치들의 눈치만큼 재빠른 것도 없을 것이었다. 염상구는 그런 자신의 허점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것이 좌판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시 억지소리를 했다.
"필경 여그 장사꾼덜 속에도 빨갱이눔덜 꼬랑댕이가 숨어 있을 것인디."
염상구는 떡장수 여자의 눈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작게 옆으로 찢어져나간 눈에는 섬뜩섬뜩 냉기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고런 눈치 있음사 얼렁 감찰님헌테 귀뜸해야제라. 우리가 누구 덕에 사는디, 하먼 허고말고라."
떡장수 여자는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굳어진 얼굴로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바로 그거요. 쬐끔만 요상허다 싶으먼 꼭 나헌테 연락 취해야 쓸 것이요. 만일에 여그서 무신 일 생겼다 허먼 그날로 장사판 싹 엎어뿔팅께."
염상구는 여자의 눈을 응시한 채 한마디 한마디를 상대방 눈 속에 박아 넣듯이 낮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해나갔다.
"하먼이라, 하먼이라."
떡장수 여자는 더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허고, 장사 잘 허씨요."
염상구는 눈길을 거두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워째야 쓸께라, 궐련값이라도 디레야 헐 것인디 아직 마수걸이도 못혔으니…"
떡장수는 안절부절 못했고, 고구마장수도 빈손을 허둥대고 있었다.
"판이 요리 시장스러운디 오늘은 그만두씨요. 우리 아덜헌테도 일러놓겄지만, 행어 모르고 오먼 나가 댕겨갔다고 말허씨요."
염상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돌아섰다.
"감찰님, 고맙구만이라, 고마워라."
두 여자는 염상구의 뒤에다 대고 허리를 꾸벅거렸다.
"뱅골댁, 워쩔라고 고런 약조를 다 허는가?"
고구마장수가 후유 한숨을 내쉬며 떡장수를 타박하듯이 말했다.
"음마, 녹동댁! 한마당서 한시에 당헌 일임스롱도 똑 넘 일 말허디끼 허는 심뽀는 또 머시여?"
뱅골댁은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며 한바탕 대거리를 벌일 것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뱅골댁, 나가 넘 일 말허디끼 허잔 것이 아니라 그런 약조헌 것이 겁이 난께 허는 소리 아닌가."
녹동댁이 마른버짐 핀 얼굴을 훔치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워쩌겄능가, 나중 당헐 때 당허드라도 당장 급헌 불길 꺼야제. 자네도 고 독오른 눈구녕 봤네? 독새 눈깔이 그럴라등가, 도깨비 외눈깔이 그럴라등가. 시퍼렇게 날 선 백정눔 칼끝으로 찢어논 거맹키로 생긴 눈에 그눔이 퍼런 불 켰다 하먼 지 정신이 아닌께. 고때 즈그 아부지가 훈계허로 나서먼 지 애비도 찔러죽일 눔이란 말이시. 아까도 눈치 싸게 그러크름 허지 안했음사 워찌 됐을지 아능가? 내 떡 함지고, 자네 고구마 소쿠리고 역전 마당에 폴세 패대기쳤을 것이네. 그리 돼불먼 속 씨리고 아픈 것은 누군가?"
뱅골댁은 수심 깃들인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무작시런 눔, 우리맹키로 불쌍헌 장사꾼 껍데기 뱃게묵는 저런 눔을 감옥에 처너야 허는디, 순사들은 멀 허는고."
"이 사람,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리 허고 앉었네웨. 저눔이 쫄때기 순사 알기를 지 발샅에 때만치도 못허게 아는 눔이여. 아, 못헐 말로 저눔이 장바닥에서고 역전에서 부리는 세도가 경찰서장이나 읍장보담도 더 씬 것을 몰라서 허는 소린가? 저눔 비우짱 거실리고, 눈밖에 나서 고이 장사 해묵을 장사꾼은 크나 작으나 이 벌교바닥에는 하나또 웂네."
"참말로, 무신 인종이 그리 독헐꼬, 소문에는 허리끈에다 칼을 열 개씩이나 차고 댕긴다든디, 그짓말이겄제?"
"아녀, 참말일 것이구만, 저눔이 누군지 모르고 뎀비다가 손등에 칼 침 맞은 젊은 장사꾼들이 더러 있응께."
"그러다가 사람 쥑이기라도 허먼 워쩔라고 칼을 열 개썩이나 ……"
녹동댁은 팔짱을 끼며 부르르 떨었다.
"칼이 크지도 않고 똑 가운데 손꾸락만썩 허다데. 고걸 뽑아 던지는디, 워찌나 몸짓이 날랜지 번개 같다등마. 허고, 칼이 꽂혀도 꼭 죽지 않을 만한 디만 골라서 꽂힌다드랑께. 손등, 손목, 폴, 장딴지, 허박다리 같은 ……"
뱅골댁은 어느덧 자시의 신세 서글픔이니 염상구에 대한 미움은 사그라지고, 믿기 어려운 그의 무용담에 신명이 오르고 있었다.
"고것이 재주는 재주시."
"하먼, 재주치고도 보통 재주는 아니시. 고런 귀신도 곡을 헐 재주에다가, 철다리 한가운디서 기차가 코앞에 닥칠 때까정 버팅기다가 아래 갱물로 뛰어내린 배짱을 가졌응게로 왈패 오야붕도 해묵고, 청년단 감찰 자리도 해묵제, 아무나 고런 자리 앉겄능가?"
"긍께 말이시, 근디, 즈그 엄니한테 효자 노릇헌다는 소문이든디, 참말이까 몰라?"
"참말일 것이네. 즈그 성은 일정 때부텀 공산당 허니라고 미쳐서 도망댕기고, 해방이 되니께 더 날치다가 감옥살이 허고 또 도망댕기고 허니라고 즈그 엄니헌테 뜨신 밥 한 그럭 올릴 돈벌이를 원제 했드랑가. 해방되고 이날 이때꺼정 삼시세끼 밥 묵고 사는 것이 다 누구 덕인디. 세빠지게 농새 짓고도 세끼 밥 찾아 묵기 심든 시상에 왈패짓 혀서 홀엄씨 세끼 밥 찾아 먹이먼 그보다 더헌 효자가 워디 있겄는가."
"내 새끼도 높은 핵교 공부시키기는 글른 팔자, 저눔맹키로 왈패 오야붕이나 되얐으면 쓰겄네."
"이 사람아, 말이 씨 되는 법이시."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멀건 웃음을 지었다.
다 식어빠진 고구마 위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그 투명하고도 섬세한 무늬에 날개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싸리나무의 명주실보다 가는 끝가지에 살폿 앉아 네 개의 투명하게 붉은 날개를 비스듬히 치켜세우고 허공에 미세한 율동의 파문을 일구던 여름의 생명력을 고추잠자리는 이미 잃고 있었다. 시월이 저물어가는 찬 기운 서린 대기 속에서 고추잠자리는 한 생애를 살아낸 고단한 육신을 싸늘하게 식은 고구마 위에 부려놓고 있었다. 여자가 파리를 쫓듯 손부채를 부쳤지만 고추잠자리는 날아갈 줄을 몰랐다. 손바람에 늘어뜨린 날개가 둔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무신 눔의 잠자리가 ……"
여자가 중얼거리며 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고추잠자리를 잡아 무심하게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허공에 떠오른 고추잠자리는 본능적인 날갯짓을 했지만 몸은 비상을 하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져 내렸다. 푸른 음향이 맑게 흐를 것 같은 시월의 깊은 하늘만이 한 마리 고추잠자리의 임종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철교 아래 선창에서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던 염상구가 읍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해방과 함께였다. 그는 이미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 있었다. 그가 물건 훔쳐내다가 들켜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독립투사로 자처하는 그의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부정을 하지 못했다. 자취를 감추었던 몇 년 사이에 그는 기골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언변도 변사 뺨칠 만큼 늘었고, 특히 온몸에 서늘한 살기를 감고 있었다.
염상구가 읍내에 나타나서 제일 먼저 벌인 일이 장터거리의 싸움판이었다. 사람들이 운집한 장터거리에서 벌어진 그 싸움은 주먹패의 '오야붕' 쟁탈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싸움을 건 것은 염상구였다. 치고 박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피가 흐르고 하다가 사태가 불리해진 상대방이 칼을 쑥 뽑아들었다. '땅벌'이란 별명을 가진 그가 위협만으로 칼을 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염상구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늘한 웃음을 흘린 채 태연하게 서 있었다. 땅벌이 뭐라고 소리치며 칼을 휘두르고 돌진했다. 염상구의 손에서 단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것은 그때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연거푸 세 개가 날아가 땅벌의 어깨, 팔, 허벅지에 꽂힌 것이다. 땅벌은 비척거리다가 땅바닥에 쓰러졌고, 염상구는 서늘한 웃음을 입가에 문 채로 천천히 다가가 왼발로 땅벌의 가슴팍을 밟고는 어깨에 박힌 단칼을 빼냈다. 그리고는 칼에 묻은 피를 땅벌의 이마에다 문질러 닦으며,
"워째, 요만허면 항복해야겄제?"
그러나 이빨을 응등 문 땅벌은 말이 없었다.
염상구는 땅벌의 팔에 박힌 두 번째 칼을 뽑았다. 거기에 묻은 피를 땅벌의 왼쪽 볼에다 문질러 닦으며,
"워째, 안직도 항복을 못허겄어?"
역시 땅벌은 염상구를 노려본 채 말이 없었다.
염상구는 허벅지에 박힌 세 번째의 칼을 뽑았다. 그것에 묻은 땅벌의 오른쪽 볼에다 문질러 닦으며,
"억울하먼 은제라도 또 도전혀. 니눔 아가리로 항복헐 때꺼정 상대혀줄 팅께."
염상구는 세 개의 칼을 한 손아귀에 몰아 쥐고 돌아섰다.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틔웠고, 염상구는 훤하게 트인 그 길을 유유하게 걸어 사라졌다.
그들의 '오야붕' 쟁탈전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상처자리를 꿰맨 땅벌은 실을 뽑자마자 희한한 설욕전을 제안해온 것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주먹패의 반 이상은 염상구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땅벌이 제안한 것은, 철교의 중앙에 똑같이 서서 누가 더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버티다가 아래 바닷물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를 겨루자는 것이었다. 완전히 썰물이 되었을 때는 물 깊이가 얕으니까 밀물 때와 기차 시간을 맞추자는 말까지 해왔다. 염상구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좋다는 답을 보냈다. 둘이 다 똑같이 무릅쓰는 위험이었고,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도전이었던 것이다. 밀물이 실리는 시간과 순천에서 오는 통학차 시간에 거의 비슷하게 맞았다. 다음날 바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심판은 양쪽 부하들이 보기로 했고, 경찰서나 역에 알려지면 제지를 당하게 될 것이기에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뜬다는 조건이었다. 다음날 해거름에, 순천에서 광주로 뻗어나간 철로의 벌교포구를 잇는 철교 중앙에 땅벌과 그동안 '쌍칼'이란 별명이 붙은 염상구가 서로 등진 채 수영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땅벌은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선수머리를 향해 서 있었고, 염상구는 포구가 좁아지는 소화다리 쪽을 향해 서 있었다. 밀물로 실려 있던 바닷물은 썰물이 되기 시작했다. 철교 아래에는 스물서너 명의 양쪽 부하들이 숨을 죽이고 모여앉아 있었다. 그때 회정리 삼구를 돌아오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검은 지네같은 기차의 꿈틀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기차는 삽시간에 '중도 들판'을 가로질러 회정리 이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철교는 이구를 경계짓고 있는 방죽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검은 괴물은 교각 한 개의 간격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또 순식간에 교각 두 개째의 간격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또 순식간에 교각 두 개째의 간격을 먹어치웠다. 검은 괴물이 세 개째의 간격을 반쯤 먹어들 때였다. 한 사람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땅벌이다!" 하는 철교 아래의 짧은 외침은, 요란하게 울리고 뒤엉키는 쇠의 마찰음에 섞이고 말았다. 검은 괴물이 네 개째의 간격을 먹어치우려고 돌진해오는 순간 나머지 한 사람이 바닷물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 사람의 몸이 철교와 바닷물 사이의 중간쯤 되는 허공을 지나고 있을 때, 기차는 조금 전에 그 사람이 서 있었던 자리를 박차고 지나가고 있었다. "쌍칼이 이겼다아아." 철교 아래서는 긴 환성이 터져 오르고 있었다.
주먹의 세계는 비정했다. 염상구가 헤엄쳐 올라오기를 기다려 땅벌의 부하들은 그의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충실한 부하되기를 맹세하는 것이었고, 염상구는 당당하게 '오야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땅벌은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자리를 떠났고, 밤이 어두워진 다음에 옛 부하 몇 명의 전송이 아닌 감시 속에서 고리짝만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하여 땅벌이 장악하고 있었던 읍내의 권한이 고스란히 염상구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터를 중심으로 한 역전 일대의 텃세권, 상점들의 정기적인 상납권, 하나뿐인 극장의 기도권, 부잣집의 경조사 보호권, 그러나 무엇보다도 염상구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읍내 치안대의 장악에 있었다. 그것은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이 발족시킨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벌교지부에 소속되기를 바라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직이었다. 치안대장은 유지급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건 명목상 내걸어 놓은 이름일 뿐이었고 실권은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염상구로서는 여운형이고 건준이고 알 바 아니었고, 지부에 소속이 안 되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목전에 펼쳐져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만이 중요한 현실이었다. 치안대의 실권자로서 염상구가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자신의 이력 변조였다. 일본 선원의 '살인'이 '독립운동'으로 바뀌었고, 그러므로 염상구는 당연하게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치안대의 실권자와 독립투사의 경력은 금상첨화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 사실을 목청 높여 선전하고 강조하고 다녔지만 그 뻔한 거짓말 앞에서 누구 하나 바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읍내에는 제 정신 바로 박힌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두 가지 사건을 벌인 쌍칼 염상구에 대한 소문이 윤색까지 되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만들어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 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40년에 이르는 일제의 지배를 받는 동안 벌교 읍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근동에서도 일인을 살해한 것으로는 염상구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완력이나 배짱만이 아니라 권력행사라는 감미에 맛이 들린 염상구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모든 치안권이 경찰 중심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그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애국'이라는 말이 너절너절 넝마가 되도록 너도 나도 목청 돋우어 외쳐대며 날이면 날마다 생겨나느니 정당이고 사회단체였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결성되는 청년단체도 허다했다. 바로 그 '청년'이란 이름이 붙은 단체가 염상구의 기식처였다. 그렇다고 염상구는 아무 청년단체에나 몸을 담는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 권한행사를 할 수 있는 곳, 전망이 확실히 보장된 단체만을 골랐다. 그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로서는 경찰에서 후원하는 단체에만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치안대가 해산되자 전국청년단체총동맹의 지부 실권자가 되었고, 1947년에 이르러서는 정치 발판을 굳힌 이승만이 결성한 대동청년단의 지부 실권직인 감찰부장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러한 권력지향성은 어찌할 수 없이 형 염상진과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염상구는 형과의 그런 피할 수 없는 대치에 대해서 추호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형과 그렇게 맞설 수 있게 된 것을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염상구의 가슴 저 깊은 곳에는 어린 날로부터 차곡차곡 쌓아둔 형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닭똥집을 언제나 혼자서만 야금야금 처먹었던 형, 다 해진 고무신을 벗어 던져주고 새 고무신을 신으면서도 뽐내기만 했던 형, 그 형이 얄밉고 밉살스럽다 못해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 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랐고,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죽기를 바랐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를 얼마나 궁리했던가. 소학교를 끝으로 상급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형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형을 함께 죽일 작정을 했었다. 가슴에서 그런 증오심이 끓고 있는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 하찮은 숯장사 하는 방법을 따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구박과 편애, 형의 자만과 무시 속에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독거림이 있어서였다. 어머니가 아무도 몰래 건네주던 콩누룽지를 받아들고 뒷산 팽나무 아래서 얼마나 울었던가. 콩누룽지 한 덩어리가 고마워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형만이 아니라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정이 고마워 목이 메었던 것이다.
형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상님'이 되기를 목 빠지게 기다린 아버지의 뜻도 거역하고 농사꾼이 되자 아버지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펄펄 뛰다가 끝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그때 얼마나 고소하고 시원했던지 아무데나 찍찍 침을 내깔기며, 씨엉쿠 자알 됐다, 속 씨언하다, 소리를 몇 수십 번도 더 했었다. 일본놈을 죽이고 피했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형에 대한 낙담이 원인이었다. 아무런 슬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묘를 찾아가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머니를 보아 마지못한 걸음을 했었다. 두 번 올린 절도 건성이었고, 눈물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런데, 형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심은 아버지에 대해서보다도 몇 갑절 더 심한 것이었다.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부터였다. 염상구로서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그건 적이었다. 경찰에서 그렇게 단정했으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해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땅속에 숨은 두더지도 잡아내는 판에 느네놈들이 지하로 숨어들었다고 하지만 땅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은 아닌 바에야 누가 이기나 보자. 염상구는 이런 승부욕을 내걸고 공산당 색출에 혈안이 되어 날쳤다. 형이 미쳐서 하고 있는 일에 훼방을 놓고, 형이 자기에게 좇기는 신세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신이 근질근질해지며 가슴 한복판이 환하게 뚫리는 통쾌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공산당을 잡아내는 일은 한마디로 형에게 사무친 복수를 할 수 있어 좋고, 공을 세워 권한을 키워갈 수 있어 좋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 신명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염상구의 그런 속앓이를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그들 형제간의 행동을 놓고, 집안 망칠 종자들, 몹쓸 인종들, 하고 혀를 찼다. 염상진이 체포되어 일 년 실형을 받게 된 것은 내용적으로 염상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염상구는 오히려 그 기회를 놓친 것을 애석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염상구가 형을 잡아놓은 것으로 지레 치부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들 형제가 극적으로 부딪힌 것은 금년 3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시행을 발표하고 나서였다. 전국적으로 경찰과 대동청년단에서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전면적 준비작업을 전개했고 이에 맞서 좌익에서는 총선거를 저지하려고 모든 지하조직을 표면화시켜 총력전을 개시했다. 그래서 4월로 접어들면서 좌익의 반대폭동은 전국에서 극렬하게 벌어졌다. 염상진도 부하들을 이끌고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경찰력만이 아니라 청년단까지 합세된 데다가 화력의 열세는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부하 서너 명만 잃어버린 무모한 행위가 되고 말았다. 청년단이 주먹패의 못자리판으로 민폐나 끼치고 정치행동대 노릇이나 하는 줄 알았지 경찰과 합세해서 전투병력화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소화다리를 건너 재석산 쪽으로 퇴로를 잡으며 염상진은 청년단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동생 상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워서 상구와 맞닥뜨리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여겼다.
한편, 예상했던 것보다 가볍게 적을 물리치게 된 염상구는 형도, 좌익이라는 것도 우습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형을 정면으로 맞바라보지 못한 것이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었다.
염상구는 새벽같이 부하들을 동리마다 풀어 남자가 밤사이에 집을 비운 집을 일제히 조사해오라고 명령했다. 밤샘 노름을 하지 않는 놈이라면 바로 경찰서를 습격하고 도망친 빨갱이일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염상구의 이 계산은 한 발이 늦고 말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불찰이었다. 부상을 당해 붙들린 세 놈 말고는 지난밤에 집을 비우고 안 들어온 놈은 하나도 없다는 보고였다. 날이 밝기 전에 빨갱이들이 모두 집을 찾아들어가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결론이었다. 염상구는 형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만 패배감을 질겅질겅 씹었다.
"니미럴 눔, 워디 두고 보자."
그는 빠드득 이빨을 갈아붙이고는 경찰서로 내달았다. 세 명의 포로를 사정없이 주리를 틀어댔다. 거품을 물고 까무러치면서도 그놈들이 입에서는 한결같이 저희들이 아는 것은 '염상진 대장님뿐'이라는 것이었다. 저희들끼리도 동지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염상구는 말로만 들었던 공산당의 점조직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고, 또 한 번 형에게 패배하는 기분이었다.
"지까짓 눔이, 워디 두고 보자."
그러나 5월 10일, 염상구로서는 더없이 신바람 나는 첫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까지 형은 더는 습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형이나 좌익이라는 것을 썩은 홍어좇 정도로 우습게 취급하고 있었던 염상구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좌익의 습격이라는 통고를 받고도 코웃음을 쳤었다. 겨드랑이가 스물거리던 판에 총질이나 한바탕 해볼까 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이미 경찰서를 빼앗기고 보성 쪽으로 후퇴를 했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경우를 생각할 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염상구는 혁대를 단단히 죄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역전에 다다르기도 전에 사태가 불리하게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 어제와는 다른 냉기가 싸아하게 돌았고, 얼핏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핫바지에 총을 든 녀석의 모습이었다. 얼쩡거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다? 어디로 도망을 간다? 경찰은 보성 쪽이라고 했지? 염상구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잡히는 날에는 경찰 못지않게 당할 것이었다. 보성 쪽으로 가기에는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경찰의 반대방향으로 튀자. 그것이 안전도가 높을 터였다. 보성의 반대쪽이면 고흥이었다. 고흥을 떠올리자 연줄로 소록도가 생각났다. 그래, 문둥이들 속에 숨어버리면 …… 염상구는 그 길로 똥줄이 빠지게 뱀골고개를 넘어 고흥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염상구는 입 끝에 배달고 있던 꽁초를 퉤 뱉아 발끝으로 잉끄리며 사나운 눈길로 차부 쪽을 훑었다. 그 썰렁함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리치고는 작은 난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백 명이 넘는 사상자 중에 그의 부하가 아홉이나 끼여 있었다. 염상구는 그 사실만 생각하면 갑자기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빨갱이에 대한 뜨거운 증오심이 들끓는 한편으로 죽어간 부하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움을 당했다. 급한 김에 그들을 팽개치고 혼자서만 달아났던 그 비겁하고 의리 없음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죄의식과 부끄러움은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에 한층 뜨거움 불을 붙였다.
"빨갱이는 씨를 말려뿌려야 혀."
염상구는 새로운 각오라도 하듯 거칠게 내뱉고는 길을 건넜다.
남국민학교로 통하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정 사장네 술도가로 가는 길이었다. 정 사장의 아들 정하섭을 표적으로 밤낮없이 부하를 잠복시키고 있었다. 아들 덕에 죽음을 면한 정 사장은 벌써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그의 죄는 빨갱이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것이고, 덕을 톡톡히 보았으니 그도 빨갱이라는 점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으로 알았던 정하섭이가 이번 사건이 터지자 곧 읍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정보는 소홀히 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경찰에서도 정하섭을 만만찮은 놈으로 찍고 있었다. 염상구는 경찰보다 먼저 자기 조직으로 정하섭을 잡고자 했다. 그놈을 잡기만 하면 어느 모로 보나 실속이 클 것이었다.
염상구는 3년 전에 있었던 정현동 사장과의 은밀하고도 옹골진 거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염상구는 자신의 과시를 위해 '독립투사'라는 변조된 이력을 당당하게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치안대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고 기세를 올렸던 것이다. 해방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염상구의 그런 외침은 의외로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친일파의 이름이 줄줄이 엮어지고, 그 이름들은 욕과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본 놈한테 금덩어리를 주고 술도가를 손에 넣었다는 정현동 사장의 이름이 맨 앞에 거론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안대의 힘으로 무슨 의법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심의 물줄기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어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난감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더구나 염상구의 사람 됨됨이로 보아 무슨 일을 저질러 낭패를 당할지 모를 형편이었다. 염상구는 그들 모두의 눈꼬리에 생긴 종기였고, 염상구를 회유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현동 사장과 염상구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시작되었다. 돈 가진 자들의 회유책이란 으레 그렇듯이 정 사장은 돈뭉치를 내밀었고, 그 돈은 염상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액이었다. 염상구는 돈의 액수에 놀랐고, 이런 일로 돈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염상구의 마음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떠들어댄 말에 대한 체면이 한 가닥 목에 걸리는 가시였다. 돈도 먹고 체면도 세우고 ……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끙끙거리던 염상구는
"되얐소!"
외치며 무릎을 쳤다.
"공일날 남국민핵교 운동장서 잔치를 벌입씨다. 돼야지 열 마리 남짓 잡고, 막걸리 쉰 말 정도 풀어서 읍내잔치를 벌이는 것이오. 그 자리에 친일파로 몰린 사람덜이 모다 나와서 한바탕 어우려져불먼 깨끔허니 끝날 것이오. 혹시 행패부리는 눔이 있음사 우리 아그덜이 책임을 맡을 것잉께. 내 생각이 어쩐게라?"
"어허허허, 고거 한번 존 생각이시."
정사장은 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한갓 주먹패에 지나지 않는 상구놈에게 돈거래로 입막음했다는 소문이 날까 두렵고, 상구놈 입만 막는다고 해서 한번 등을 돌린 인심이 수습될까 찜찜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서로가 필요한 명분과 실효의 방법을 찾은 셈이었다. 정 사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도, 저놈이 사람 여럿 잡을 놈이다. 염상구의 머리 돌아가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염상구는 샛길을 꺾어 돌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술도가는 그대로 길을 따라가면 이십여 미터 앞이었다. 그 길 건너 맞은편 가게에 부하를 잠복시켜두고 있었다. 염상구는 천천히 담배를 빼물었다. 정 사장네 살림집은 술도가 뒤로 붙어 있었다. 출입문은 분명히 큰길 쪽으로 나있는 대문뿐이었다. 사방으로는 다른 집들이 잇대어 있어서 담을 타 넘을 수가 없었다. 만약 정하섭이가 나타난다면, 제 놈이 홍길동이 재주를 타고나지 않은 바에야 죽으나 사나 대문으로 드나들 도리밖에 없었다. 염상구는 정하섭이가 꼭 나타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가 난리통에 어디서 활동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쫓기고 있는 몸일 것은 분명했다. 쫓기는 몸으로 무엇보다 궁한 것은 돈일 것이고, 돈을 손쉽게 구하는 방법이란 집을 찾아드는 길일 것이다.
염상구가 꽁초를 두 손가락 끝에 끼워 튕기려는 참이었다. 어떤 여자가 대문을 나왔다. 염상구는 정 사장네 식구이리라 싶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슬며시 옆으로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길은 여자 쪽으로 쏠려가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염상구의 의식은 굴절을 일으켰다. 저게 누구더라? 분명 눈에 익은 얼굴인데 얼른 잡히지가 않았다. 저 얼굴이, 저 얼굴이 …… 그 여자의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이 있었다. 무당 월녀의 얼굴이었다. 그렇다, 월녀의 딸이었다. 염상구는 픽 웃어버렸다. 굿을 할 모양인데, 굿을 한다고 풀려날 정사장이 아니었다. 정사장을 붙들어간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귀신과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일어난 일에 제아무리 굿을 해봤댔자 무당 배불리는 노릇이지 영험이 나타날 리 없을 일이었다. 염상구는 느긋한 마음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가까워지고 있는 무당 딸의 모습을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다소곳이 숙인 얼굴이 참으로 잘생겨 보였다.
보통이 넘는 키에 날씬한 몸피 또한 눈을 흘렸다. 전에 더러 본 일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샅이 뻐근해지도록 예쁜 줄은 몰랐었다. 염상구는 그 처녀를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시악씨, 나 잠 봅시다."
염상구는 불쑥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엄니이!"
소화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진저리를 치고 놀랐다.
"와따매, 워째 그리 놀래뿌요잉? 내 목청이 쪼깨 크기는 혔지만서도 ……"
염상구는 미안한 생각에 뒷말을 어물거렸다. 급한 김에 말을 한다는 것이 턱없이 큰 소리를 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서툴고 촌스러운 짓이었다.
"무신 일이신디 ……"
소화는 앞을 막아선 남자가 바로 그 소문 사나운 염상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자 놀라움은 일순에 사라져버리고 마음은 차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침착하게 먼저 입을 뗀 것이다.
"머 무신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
차마 니가 이뻐서 그런다고 할 수도 없고, 염상구는 막상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여자를 경험할 만큼 했지만 지금처럼 가슴이 이상스럽게 흔들린 적은 없었다. 두근거리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참 지랄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불러 세워놓고 아무 말도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 사장네 굿을 헐랑갑제라?"
고작 이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야."
소화는 간단한 대답만으로 족했다. 자신이 대답할 말을 그 사내가 대신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거길 뭐하러 왔다 가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그렇게 대답할 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화는 긴장을 풀었다. 이 사내는 무슨 낌새를 챈 것이 아니라 남자냄새를 풍기느라고 자신을 붙들어 세웠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무신 굿이랍디여?"
"흔헌 재수굿인디요."
염상구는 또 말이 막혀버렸다. 고 가시내, 말허는 입술도 곱다. 꼭 끌어안고 쪽쪽 빨먼 달디단 물이 나오겄다. 더 물을 말이 없어진 염상구는 여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보씨요."
소화는 눈을 내리깐 채로 고개를 약간 숙여보이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봇씨요, 시악씨."
사내의 부르는 소리에 소화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걸음을 멈추었을 뿐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머시냐, 아무리 무당 딸이라도 이름은 잇을 것인디, 이름이 머시오?"
옆에 다가선 사내가 물었다.
"소화구먼요."
"소화? 소화? 밥 묵고 소화시킨다는 소화는 아닐 것이고, 무신 뜻이요?"
"흰 꽃이라는 뜻인디요."
"흰 꽃? 허어, 참말로 누가 진 이름인지 생김허고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이시."
얼결에 말을 해놓고 염상구는 그만 스스로 민망해졌다.
"얼렁 가보씨요, 얼렁."
염상구는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나 되돌아서 멀어져가는 소화라는 무당 딸의 뒷모습을 음탕한 눈길로 지켜보고 서 있었다.
‘저, 저 살랑사랑 흔드는 방댕이 잠 보소. 저년 니노지가 아매 낯짝 이쁘게 생긴 거맨치로 쫄깃쫄깃헌 것이 꼭 겨울꼬막 맛일 것이다. 헌디, 신 내린 무당 잘못 건디렸다가는 급살을 맞등가 빙신이 된다니께 말이여. 화아, 저것 한번 조지고 급살을 맞을 수도 웂고, 운 좋아 급살을 면해야 빙신이 되는 것인디, 와따매 참말로 사람 환장허겄네잉.’
염상구는 손바닥으로 샅을 쓸어대며,
‘염병헐, 오늘 저녁에는 다방 화자년이나 조지는 수밖에 웂제,’
쩝쩝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낙안댁은 마루 끝에 서서 소화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문 밖까지 전송을 하려 했었는데 소화가 침착한 눈길을 주며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낙안댁은 그 뜻을 금방 깨달았다. 소화는 대문 앞에 이르러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이 여전히 침착하고 그윽했다. 낙안댁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화의 모습이 바람처럼 대문 밖으로 사라져버리자 그때까지 억누르고 있었던 울음이 흑 복받쳐 올랐다. 낙안댁은 이뿌리가 저리도록 어금니를 맞물어 울음을 후들 떨려왔다. 낙안댁은 기둥을 붙들어 안았다. 아녀자의 울음이란 평소에도 헤퍼서는 안 되는 법인데 지금 집안 형편은 더욱 그러했다. 바깥어른과 장남이 함께 변을 당하게 될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낙안댁은 목젖이 아프도록 울음을 삼키며 시야가 흐려지는 눈을 한사코 위로 떴다. 부옇게 흐려 보이는 하늘에 남편과 장남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하섭아 ……"
낙안댁은 기둥을 더 꼭 껴안으며 절박하게 아들을 불렀다.
남편은 어제 아침에 붙들려갔다. 남편은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지 아침밥을 한술도 뜨지 않았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양복을 입었다.
"너무 걱정 말고, 되는 대로 돈이나 장만해두소."
남편이 방을 나서면서 남긴 말이었다. 남편이 붙들려가는 것 같지 않게 경찰의 앞장을 서 대문을 나선 다음에야 집안에는 조심스런 웅성거림이 퍼졌다. 세 아이들이 불안한 눈으로 영문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낙안댁은 아이들을 안심시켜 저희들 방으로 들여보내고 나서야 남편이 붙들려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돈은 따로 장만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평소에 남편이 알뜰하게 간수해온 돈을 챙겨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돈만 가지고 무사하게 끝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을 낙안댁은 떨칠 수가 없었다. 큰아들이 아니었더라면 남편도 필경 그 참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로 붙들려간 것이다. 그들이 몹쓸 짓을 저지른 수가 너무 많음이 낙안댁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들의 죄가 모두 남편한테 덮씌워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찌해야 좋을지도 모른 채 낙안댁이 망연하게 앉아 있는데 소화가 찾아온 것이다.
"자네가 워쩐 일인가?"
낙안댁은 뜻밖이라는 생각으로 소화를 맞아들이면서도 더 이상의 아무런 예감도 갖지 않았다. 평소에 소화네는 부름을 받고서야 발걸음을 할 뿐 그쪽에서 먼저 걸음 하는 일이 없어서 낙안댁은 그저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 뜻밖의 걸음이 왜 이루어졌는지를 더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낙안댁의 심정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소화를 웃음으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무당인 탓이었다. 누구나 무당이라는 신분은 천시하면서도 막상 대면을 하게 되면 그런 감정을 감추고 나름대로의 예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건 그네들의 몸을 타고 내리는 신통력과 그 재앙을 저어하는 이기심의 발로일 터였다. 더구나 낙안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월녀의 신통력을 믿어오는 터였다.
"방으로 잠 ……"
소화는 조용한 고개 놀림으로 주위를 살피며 방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소, 어서 드소."
낙안댁은 앞서 방으로 들어서며, 어미가 몸이 더 심하게 아파 돈을 빌리러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저어 ……집 안에 딴 식구들 있는가요?"
문을 닫는 소화가 숨죽인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달리 당황하고 있었다.
"아덜이 즈그덜 방에 있는디, 왜 그러는가?"
낙안댁은 그때서야 비로소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장남 하섭의 얼굴이 퍼뜻 떠오른 것이다. 그녀의 의식은 분명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고 있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이 핀지 ……"
소화는 약간 옆으로 돌아서 치마 말기 속에 감추었던 정하섭의 편지를 꺼내 낙안댁에게 내밀었다.
"아드님이 ……"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떨구고 말았다. 정하섭의 얼굴이 선하게 떠오르며, 낙안댁이 그럼 자기와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던 것이다.
"요게 워찌 된 일인가?"
편지를 읽고 난 낙안댁이 소화의 팔을 붙들었다. 아랫목에 앉혀진 소화는 대충의 이야기를 전했다.
"고맙네. 자네 은공이 태산이네. 지끔 지닌 돈이 있긴 헌디, 그것 갖고 워디 되겄는가. 내가 더 장만헐 것잉께 낼 요맘때 한 행보 더 해줄랑가? 내 자네 은공 안 잊을 것잉께."
낙안댁은 간곡했고, 소화는 그 간곡함이 오히려 면구스러워 겨우 대답을 했다.
낙안댁은 남편을 위해 챙기려고 했던 돈 말고도 자신이 손을 뻗쳐 모을 수 있는 돈은 거의 다 모아들였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남편보다는 쫓기고 있는 아들의 피신이 더 급했던 것이다.
소화는 어김없이 아침나절에 다시 왔다. 낙안댁은 돈보퉁이를 내놓았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소화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전대 없으신게라?"
"전대?"
"요대로 들고 가서는 남덜 눈에 ……"
그때서야 낙안댁은 소화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전대에다 돈을 넣어 치마 속에 허리에 차겠다는 뜻이었다.
"광목이 있응께 얼렁 맹글세."
낙안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화의 생각 깊음에 놀라고 있었다. 그 조신한 몸가짐, 박꽃같은 인물만으로 아까운데, 생각까지 저리 침착하고 깊으니 무당 딸로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바느질 솜씨가 남다른 낙안댁은 재봉틀에 앉자마자 전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광목을 겹으로 접어 한쪽을 박음질하고, 양쪽 끝에 묶을 끝을 매다는 전대는 금방 만들어졌다.
"금메, 우리 하섭이도 이 전대를 그대로 차먼 되겄구만."
소화에게 이르듯이 전대 속으로 돈을 옮겨 넣으며 낙안댁은 말했다.
"예."
소화가 가느다랗게 대답했다.
소화는 온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워하며 통치마를 걷어 올렸고, 낙안댁은 묵직한 전대를 들어 소화의 허리에다 얹었다. 그때 문득 낙안댁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 애가 혹시 전대를 아들 앞에서 푸느라고 이런 모양을 하면 어쩌나 ……설마 이 조신한 처녀가 그런 실수를 할라고,’
낙안댁은 자신의 생각을 천덕스럽게 여기며 덮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를 치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하섭이는 제 생명이 걸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을 어떻게 이 처녀한테 시킬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리도 믿을 수 있었을까.’
어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소화는 무슨 이유로 이런 위험한 심부름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혹시 …… 낙안댁의 여자적 직감은 예리한 촉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딸의 첫 생리를 눈치 채고도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인데, 더구나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건 딸이 아니라 생판 남이었고 처녀였으며, 생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 낙안댁은 신음을 씹었다. 아무리 짚이는 데가 있다 하더라도 차마 입 밖에 내어 물을 수가 없는 물음이었다.
"부디 몸 성해야 헌다드라고 전해주소."
낙안댁은 겨우 이 말을 했을 뿐이다.
남편한테서는 언제 돈을 필요로 하는 전갈이 올지 모른다. 어서 그 돈을 장만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낙안댁은 기둥을 붙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대들보고 기둥이고 다 무너져버린 것 같은 황폐감이 그녀를 못 견디게 했다.
장남 하섭이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마음을 서운한 그늘로 적시는 무정한 나무였다. 자식은 하나같이 열 손가락 깨무는 아픔의 정이 골고루 사무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장남에게로 쏠려가는 한 가닥 살뜰한 마음은 따로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계집아이들과는 달리 한결 빨리 어미의 품을 벗어나는 것이다. 일곱 살을 지나 열 살을 넘으면 벌써 어미의 손이 사타구니의 때의 문질러주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어미는 아들의 그 이쁘고도 귀여운 고추가 늦봄의 애고추가 아니라 초여름의 풋고추로 변하고 있음을 문득 부끄럽게 발견해야 하고, 한편으로 대견하게 여기며 샅을 쓰다듬는 감축 속에서 아릿아릿하게 솟음하는 정을 거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변성기가 오고, 코밑의 솜털이 검은 빛으로 변해가고, 그 몇 고비를 넘기면서 어미의 정은 땅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더욱 간절해지고, 미처 나타내지 못한 정은 믿음으로 변해 장성한 아들의 어깨에 걸리는 것이다. 그것이 장남인 경우에는 더 말하여 무엇 하랴.
그런데 장남 하섭이는 중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마치 병을 앓듯이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고, 그 몹쓸 생각은 어미의 믿음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게 만들었다. 장남이 그렇게 변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말 못하는 속에서 안타깝게 조바심쳤고,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살아야 했다. 하섭이가 서울로 대학을 가고 나서는 그 몹쓸 생각을 완전히 버린 줄 알았었다.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 것은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조건이었고, 아버지와의 그 단단한 약속을 지키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남편의 눈길이 닿지 않는 서울에서 더 마음 놓고 활발하게 그 몹쓸 생각에 빠져 들어간 모양이었다. 낙안댁은 아무리 되작거려 생각해보아도 하섭이가 어째서 그 몹쓸 생각에 토끼가 덫에 걸리듯 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식이라서 역성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커가면서 그 심성이 독하거나 고집스럽지가 않았다. 닭 모가지를 비틀거나 돼지 멱을 따는 것을 끔찍스러워했고, 욕심이 없고 인정스러워 아이들과 다툼질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런 아들이 어떻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자들과 한패거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변해도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신이 씌지 않고서는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귀신도 예사 귀신이 아니라 불지옥귀신이 씐 것이다. 아들의 넋도 혼도 빼앗아간 좌익사상이라는 것이 낙안댁에게는 꼭 불지옥귀신 같게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염상구의 희롱에서 놓여난 소화는 한사코 빨라지려는 걸음걸이를 늦춰 잡느라고 신경 쓰며 소방서 앞에 이르렀다. 소방서만 돌아가면 염상구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아직도 그자가 그곳에 얼쩡거리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떼밀려 소화는 소방서를 끼고 돌았다.
왜 그자가 거기에 있었을까. 우연이었을까. 혹시 술도가 집을 염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자는 이미 경찰만큼 무섭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만약 그자가 그분의 거취를 염탐하고 있었다면, 돈 보퉁이를 그대로 들고 나왔더라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의심 품은 눈이 그대로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큰 굿을 준비할 돈이라 하더라도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거액이었다. 그런 둘러댐이 통할 리 없었을 것이고 …… 끼쳐오는 소름에 소화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잰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소화다리를 건너 회정리 일구의 끝머리에 다다를 때까지 소화는 빨리 걷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그래서 순천으로 오가는 자동차가 서너 차례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곤 했지만 소화는 손바닥으로 코를 가리고 돌아서는 평소의 몸짓을 하지 않고 그 먼지 속을 내쳐 걸었다. 회정리 일구의 경계인 도래등 비탈길을 다 치올라서야 소화는 숨길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뒤쫓아 오는 것만 같았던 그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길에는 흰빛 햇살만이 약간 추운 느낌을 띠고 가득 차 있었다. 도래등 마루를 살짝 넘어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따라 소화는 빨리 걸었다. 자동차가 내왕할 수 있도록 넓게 닦아놓은 약간 오르막 진 그 길이 끝나는 곳에 현 부자네 별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벚나무들이 유난히도 가을을 타는지 어느덧 잎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 있었다. 서둘러 걷고 있는 소화의 발이 옮겨 놓일 때마다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가 연약하게 흩어졌다.
소화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연못을 지나치고 있었다. 석등 앞에 이르러서야 소화는 집보다는 별장 쪽으로 훨씬 가까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머니를 혼자 있게 한 시간도 꽤 지났고, 그분을 만나면 또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소화는 집부터 먼저 들르기로 했다. 집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도 그녀의 마음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머니 얼굴 대하기가 민망하고 죄스러웠다.
어머니는 그분이 나타난 그저께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줄곧 불안에 떨고 있었다. 식사도 거의 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밥을 떠 넣어도 어머니는 내뱉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밥맛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알리라는 의사표시였다. 어머니의 그런 반응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저, 아무 일도 아니니 안심하라는 말만 되풀이 해왔던 것이다. 그 말은 오히려 어머니를 더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제 낮에도 거의 어머니 옆을 떠나 있다시피 했고, 밤에는 아예 옆에서 자지를 않은 것이다. 그렇듯 무슨 일인가를 벌이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풍을 맞아 말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들 비밀이 샐 리가 없었다. 그러나 소화는 어머니에게조차도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 그 누구에게는 발설을 하면 액운이 끼쳐 그분이 무사히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 예감을 거역하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다. 그건 신령님이 내리신 예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화는 토방으로 올라서며 잔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엄니, 주무시오?"
소화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주무실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인사로 한 말이었다. 역시 어머니는 눈을 뻔히 뜨고 있었는데 핏발이 성성하게 엉킨 그 눈에는 불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얼굴은 더욱 핏기가 없어진 채 표나게 푸석푸석 부어올라 있었다. 어머니가 이틀 동안 애태우고 있는 흔적이 역연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미친년이다, 내가 미친년이다. 소화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로 대할 수가 없어서 눈길을 떨구며 자책했다.
"엄니, 인자 쪼매만 참소. 일 다 끝나가니께. 일 좋게 끝나먼 엄니 속 씨언하게 다 말헐라네. 엄니도 내 이약 들으면 잘혔다고 날 치하헐 것이네. 엄니, 엄니럴 속이잔 것이 아닝께 쪼매만 참소."
소화는 어머니의 소변자리를 갈면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이 꼭 어머니에게 하는 말만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분과 헤어질 시간이 임박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렇게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이별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엄니, 아무 걱정 말고 워 있으소. 나 얼렁 댕겨올라네."
소화는 굳이 어머니의 눈을 피하면서 말하고는 일어섰다.
소화는 석등 부근에서부터 사방을 살피며 걸었다. 가까운 곳만이 아니라 먼발치까지 세심하게 눈길을 보냈다. 그 경계방법은 정하섭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별장 본채의 쪽문을 들어서기 전에 다시 전방을 좌우로 살폈다. 가을 정오의 정적 속을 작은 잎새들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을 뿐 어디에도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불안에 시달리며 혼자 누워 있는 집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풍성한 대숲이 느린 흔들림의 물결로 바람을 타고 있었다. 그 흔들림의 물결이 흐르는 굽이를 따라 무수한 햇빛의 조각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화는 거기에 잠시 눈길을 보내고 서서, 아아,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감탄의 소리를 신음처럼 흘렸다. 소화는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이루는 그 보드라운 물결의 흐름을 좋아했고, 그 흐름을 따라 헤아릴 수 없이 이파리들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 조각들을 보느라면 가슴 저려오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곤 했다.
소화는 기민한 동작으로 쪽문을 밀고 들어갔다. 후원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돈 전대를 풀었다. 그것을 가슴에 안고 후원 잔디밭을 가만가만 걸으며 소화는 잔기침을 했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그 공간에 정하섭의 얼굴이 정물처럼 박혀 있었다.
"댕겨왔구만요."
소화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들어오시오."
정하섭이 방문에서 비켜 앉았다.
소화는 빠른 동작으로 고무신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고무신을 윗목 구석에 놓은 소화는 돈 전대를 정하섭의 앞에 조심스럽게 밀어놓았다. 정하섭은 그것을 길게 펼쳤다. 전대를 따라 옆으로 쭉 움직이던 그의 손끝이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는 손끝에 물기의 감촉을 느꼈던 것이다. 정하섭의 눈이 머무른 부분에서 분명 물기의 얼룩이 번져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소화의 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슴이 뭉클해졌고, 반사적으로 소화를 쳐다보았다. 소화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이 바알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소화는 정하섭의 손끝이 멈추었을 때 벌써 자신의 땀이 거기에 밴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알몸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전신을 덮었던 것이다. 정하섭은 소화의 상기된 얼굴의 색조가 자신에게로 묻어오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전대로 옮겼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펴 전대를 좌측에서부터 우측으로 쓸어나갔다. 아까 그 부분이 조금 심했을 뿐 전대는 전체적으로 눅눅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하섭은 그 눅눅한 감촉이 가슴에 야릇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두근거리는 것도, 흔들리는 것도, 어지러운 것도 아닌, 전에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라서 무어라고 딱히 짚이지 않는, 기묘한 충격 같은 것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화라는 여자가 일으키는 색다른 바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소화는 정하섭의 손바닥이 전대를 쓸어나갈 때 그 손바닥이 자신의 맨 허리를 감고 도는 것만 같아서 눈을 꼬옥 감고 말았다.
날씨도 서늘한데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그리 땀을 흘렸을까. 나는 이 여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하섭은 전대를 천천히 접으며 생각했다. 그저께 밤에 그녀의 속살 속에서 그녀를 구체적으로 만난 이후 최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금으로선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에 정하섭은 공허감을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둠이 오는 것과 더불어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정하섭은 이내 자신의 생각 자체를 비웃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감상적 위선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읍내는 어제보다 달라진 게 뭐 없습디까?"
정하섭은 전대를 벽 쪽으로 밀치며 별로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은 잠긴 어조로 물었다.
"별일 없드만요."
소화는 미처 무슨 말부터 해야 할 것인지 정리도 못한 채로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정하섭은 그 말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생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고생했다'는 말이 아닌 그 어떤 말, 자신의 마음과 느낌이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담겨질 수 있는 확실한 말은 찾아지지 않았다.
정하섭은 말이라는 것이 어이없이 불확실하다는 걸 느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집안에도 별일 없지요?"
어저께 물었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며 정하섭은 쓴 웃음을 엷게 흘렸다.
"예예 ……"
소화는 자신 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낙안댁은 정 사장이 경찰에 붙들려간 사실을 아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낙안댁의 그런 다짐이 없었더라도 소화는 그 말을 전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분을 괴롭혀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집 앞에서 마주친 그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오다가 설핏 들은 이야긴디, 어지께 밤에 좌익 쪽 사람덜 총살을 시켰다고 허드만요."
소화는 일부러 이 말을 했다. 이말 저말 다 감추다보면 그분이 안심하고 읍내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어지간히 다급하기도 하군."
정하섭은 픽 웃음을 흘렸다. 오늘밤에도 또 죽일 것이오, 하는 말이 잇달아 나오려는 것을 눌렀다. 그건 그들에 대한 감정이었지 소화에게는 하등 필요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당 그러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분노가 갈퀴발처럼 일어나며 가슴팍을 긁었다.
"난 어두워지는 대로 떠나야겠소."
정하섭은 열기 묻은 목소리로 불쑥 말했다.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 앉은 소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하섭은 스스로에게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꼭 소화가 가지 못하게 붙드는 것을 뿌리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 말을 이런 식으로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최소한이나마 담아 그 말을 하려 했던 것이다.
소화는 소리 없이 일어났다.
"왜 일어나오?"
정하섭이 소화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노여움이 서린 듯했다.
"점심 진지 ……"
"나 배고프지 않소. 앉으시오."
정하섭은 소화가 앉기를 기다리지 않고 상체를 기울여 팔을 뻗쳤다. 그는 소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화는 멈칫했다. 그의 손이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그 뜨거움만큼 억센 힘이 소화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끌려가며 또 굿판에 설 때 같은 아슴한 현기증에 싸인 발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품었다. 그녀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들꽃냄새가 가슴을 적셔왔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의 체취에 어느만큼 익숙해져 있었고, 그 체취에 의식을 적셔가는 슬픈 안개 같은 황홀을 알았다. 그는 어제 낮에야 비로소 그녀의 나신이 얼마나 맑고 눈부신가를 알았다. 그녀가 읍내를 다녀온 다음 그는 시간의 초조와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손수 옷고름을 풀었던 지난밤과는 너무나 다른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거부가 강할수록 그의 남성은 더욱 강해졌다. 거부를 포기한 그녀는 울먹였다.
"한낮에, 한낮에 ……"
그는 그때서야 거부의 뜻이 부끄러움 탓임을 알았다. 그녀의 부끄러움을 이해하려 한 것은 그의 이성이었고, 그녀의 부끄러움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자 한 것은 그의 남성이었다. 승패가 자명한 싸움에서 그의 남성은 이성을 여지없이 무찔러버렸고, 그녀의 부끄러움으로 경련하는 그녀의 알몸 위에서 불붙은 그의 남성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었고, 그 불길이 어느 한순간 수천수만의 불티로 쪼개지며 흔적도 없이 사그라져버렸을 때, 비로소 그의 이성은 패배의 먼지를 털며 소생했다. 소생한 이성이 발견한 것은 얼음처럼 응고되어 있는 그녀의 슬픔이었다. 무당인 그녀의 빼어난 인물과 고운 몸매와, 그것들은 슬픈 운명의 실로 꿰어진 염주 같았다.
한 번의 경험도 쉽게 습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제처럼 거부의 몸부림을 하지 않았다. 어제의 부끄러움이 부끄러워질 만큼 부끄러움은 엷어져 있었다. 어쩌면 헤어짐을 앞두었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그도 어제처럼 서두르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손놀림에 따라 옷을 하나씩 벗어냈다. 그녀를 떠나는 옷가지마다에서 풀 먹인 옷의 싱그러운 내음이 풍겼다. 마지막으로 속곳이 벗겨지면서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가 이불을 끌어다 그녀를 덮었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더 꼭 감았다. 그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맨몸이 그대로 닿아왔다. 그녀는 아슴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목을 감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등을 더듬어 내리고, 허리에 잠시 머무른 손은 둔부를 지나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그는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기억해두고 싶은 욕구가 성욕에 앞서 있었다. 그의 손은 다시 그녀의 어깨로 올라왔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꼭꼭 끌어안으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하는 평소의 자문이었다. 그는 문득 떠오른 그 물음을 내팽개치듯이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흰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는 마구 비벼댔다.
‘소화, 너는 누구냐. 나는 또 누구냐. 사는 것이 이런 것의 연속이라면 얼마나 간단하고 좋겠느냐. 그런데 이건 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도 주어져 있지 않다. 과연 사는 건 무엇일까. 소화, 넌 신령님과 통한다는데, 알고 있느냐.’
그는 욕구가 식어 있음을 느꼈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 소화를 보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아랫입술을 속으로 물고 있었다. 질린 듯 상기되어 있는 얼굴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흘러내려 있었다. 그는 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소화 ……"
그는 간절하게 그녀를 불렀다. 소하의 팔이 그의 목을 감아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의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아까보다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욕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화는 불덩어리인 그의 힘에 빨려들어 혼미하게 녹아가며 부르짖고 있었다.
‘신령님, 신령님. 애를 배게 해주십시오. 신령님의 영험으로 애를 배게 해주십시오. 애를 배게 해주십시오.……’
정하섭은 소화가 일찍 마련한 저녁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만이 아니었다. 그대로 물리다시피 한 상을 보고도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하섭은 담배를 연거푸 두 대째 피우고 나서 돈 전대를 챙겼다. 밖에는 땅거미가 묽은 안개 퍼지듯 내리고 있었다. 제석산 자락을 타고내리는 것 같은 그 어스름은 곧 짙은 어둠으로 바뀔 것이었다. 정하섭은 전대를 찼다. 윗목에 놓아두었던 구두를 가져다가 신고 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담배를 빼 물었다. 담배연기를 푸우 소리 나게 내뿜고 물었다.
"어머님 병세는 좀 어떠시오."
"그대로구만요."
"나 때문에 잘 돌보지 못해 더 나빠지지 않았나 모르겠소."
"아니구만요."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끊어졌다.
정하섭이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행동이 노출되지 않을 만큼 어둠은 짙어져 있었다. 진트재 너머 구룡까지 빈틈없이 시간을 맞춰야 했다. 접선은 오늘과 내일 이틀간, 같은 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접선 가능 시간은 약속 시각으로부터 이십 분이었다. 그 지점의 접선자가 이동위치로 안내하게 되어 있었다.
정하섭은 담배를 끄고 벌떡 일어났다. 소화도 소스라치며 따라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조그만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여기서 헤어집시다."
후원 쪽문 앞에서 정하섭이 말했다.
"요 문을 나가 뒷길로도 집에 갈 수 있는디요."
소화는 정하섭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하섭을 만나고 처음인 그 눈길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정하섭이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쪽문을 나서 담을 타고 이어진 길을 빨리 걸었다.
"됐소, 난 여기서부터 산을 타야겠소."
정하섭이 담이 꺾여 돌아가는 지점에 멈춰서며 말했다.
"김밥이구만요."
소화가 보퉁이를 내밀었다.
"그거 필요 없을 텐데 ……"
정하섭이 난처한 얼굴로 망설였다.
"밤길인디다가 갈 길이 을매나 멀지 모른디, 또 저녁진지도 안 잡쉈고 ……"
소화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그래요, 필요할 것이오."
정하섭은 얼른 보퉁이를 받아들였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머잖아 다시 오게 될 것이오. 그때까지 잘 있어요."
정하섭의 말을 들으며, 소화는 자기도 무슨 말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퍼뜩 떠오른 말이 있었다.
"참 읍내 어무님 당부신디요, 부디 건강하시라고요."
"고맙소. 그럼 ……"
정하섭은 돌아섰다. 그리고 뒷산 쪽을 향하여 날쌔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이내 어둠에 묻혔고, 눈을 부릅뜨다시피 한 소화의 시야에서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화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서는 실타래가 풀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은 정하섭에게 묶여 있었다. 정하섭이 아무리 험한 길을 아무리 멀리 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서 끝도 한도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