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노트(Les Thanatonautes) 6
246. 나딘 켄트
나이 지긋한 여인의 목소리.
"여보세요?"
서두르다가 번호를 잘못 누른 걸까?
"저, 나딘하고 통화를 했으면 하는데요."
나는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밤이 이슥한 시각이었다, 저쪽 송수화기에서 망설이는 기미가 느껴진다. 필시 그녀의 어머니일 게다.
"부탁드립니다!"
내 말투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기다림. 사뿐한 발자국 소리. 전화기에 닿는 섬세한 손길. 저쪽에서 누군가가 말문을 열려고 한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부드러운 목소리, 적어도 300 년 전의 환생 때부터 내 귀에 익어 온 음성이다.
틀림없이 그녀였다.
"여보세요!"
침묵이 흐른다.
"나요."
망설임 끝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쪽 송수화기에서 흐느낌 같은 것이 전해 왔다. 기쁨의 흐느낌이었다.
우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한 대화였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속내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는지.
영계 탐사를 하는 동안 나는 어렵고 위험한 순간들을 숱하게 겪은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누었던 그 다정하고 미더운 대화보다 더 놀랍고 굉장한 일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당신 전화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나딘이 상냥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여보세요?"
"전화 끊지 않았어요. 저 여기 있어요. 당신을 위해 언제까지라도 여기에 있을 거예요."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내 아들 프레디 2세가 졸음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아이는 대뜸 (아빠!) 하고 소리를 쳤다.
아이는 살이 통통한 자그마한 손으로 까슬까슬한 수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아들을 안고 방으로 데려갔다. 아이의 이불깃을 여며 주다가 나는 방문을 닫았다. 아내가 하늘색 바탕에 하얀 구름을 그려 예쁘게 장식한 문이었다. 전화기에서는 여전히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그 두 번째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흉악한 사탄 같으니라고! 무엇 때문에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는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딘 켄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영원히 알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라울을 저주했고, 모든 천사와 특히 사탄을 저주했고, 영계 탐사를 저주했다.
제 엄마 눈만큼이나 파란 아이의 눈 위로 금세 눈꺼풀이 다시 스르르 내려왔다. 나는 아이를 꼬옥 껴안았다.
거실로 나오자 라울이 악마처럼 낄낄거렸다. 전화기에서는 아직도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내 운명이 다른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명적으로 정해 진 여자 따위는 없었으면 싶었다. 나는 전생에서 맺은 낡은 계약을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영혼을 덮고 있는 살가죽을 벗겨 내고 싶었다. 나는 피가 맺힐 때까지 한쪽 손의 손톱으로 아른 손을 긁어댔다. 운명은 어찌하여 이토록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내게 강요하는가? 나는 어떤 나라, 어느 곳으로도 달아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이 상황은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지구를 세워 주오, 난 그만 내릴 테요.
지구를 세워 주오, 난 그만 내릴 테요.
나는 마음을 추스른 다음, 번뇌가 가득 담긴 음성으로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렸다.
"날 잊어요, 나딘. 현생에서는 부디 날 잊어 줘요. 다른 남자를 찾아요. 부탁이에요, 나딘. 행복하길 바라오."
나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칠게 라울의 멱살을 잡은 다음 그를 내쫓아 버렸다.
247. 이집트 신화
영생을 얻기 위한 주문92) (매일 잠자기 전에 28번씩 외울 것) 나는 (눈)93)에서 나온 (레)94)의 영혼이고, (후)를 낳은 신의 영혼입니다.
나는 그릇된 행동을 혐오합니다.
나는 그릇된 일을 마음속에 품지 않습니다.
나는 마트를 믿으며 마트의 가르침으로 삽니다.
나는 (후)이며 그 영혼의 이름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눈)과 함께 있던 삶에서 (케프리)의 이름으로 나왔고, 그 이름으로 매일 삶에 이릅니다.
나는 빛의 주인이고 죽음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나는 (눈)이며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나는 원초신 가운데 맏이이며, 내 영혼은 신들의 영혼, 영원의 영혼이고, 내 육신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주인으로서, 억겁의 시간을 자로서 나는 영원히 발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죄를 씻었고, 나의 아버지, 밤의 지배자, 육신이 헬리오폴리스95)에 있는 그분을 보았습니다.
나는 황혼에 일어나는 자로서 동방의 따오기 언덕에 있는 황혼의 거주자들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 "사자의 서"96)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48. 달라지는 세상
제7천계를 발견한 뒤로 세상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원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죽음의 신비가 사라진 마당에 무엇을 바라고 종교 의식에 참여하겠는가? 사제들조차도 믿음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어느 종교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고위 성직자들은 타나토노트들이 발견한 것은 천사들이지 신은 아니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외쳐댄들 소용이 없었다. 신앙심과 신비주의는 이미 종말을 맞고 있었다.
사원들이 박물관, 극장, 개인 주택 따위로 개조되었다. 성당 안에 수영장이 만들어지는 일조차 벌어졌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오색 찬란한 빛이 수면에서 어른거렸고 다이빙하는 순간에 맞추어 오르간 음악이 울려 퍼지곤 했다.
종교는 그렇게 쇠퇴해 가는데, 영계 탐사는 날이 갈수록 번창해 갔다. 사설 타나토드롬이 우후 죽순처럼 나타났다. 어떤 타나토드롬은 여행사나 다름없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주말을 영계에서! 고속 단체 비행. 부스터 완비. 영계 탐사학 학위를 가진 수사가 동반함. 천사들을 만날 수 있음.) 물론 그 광고의 대부분은 거짓이었다. 여행은 대개 제3 천계나 제4 천계에서 멈추었다. 우리는 이미 비싼 대가를 치른 덕에 그보다 더 멀리 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라울은 어머니 찾는 일을 포기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술집을 전전하며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딘 켄트 일 때문에 충격을 받은 뒤로는 라울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어졌고 더 이상 그를 보살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타나토드롬 일은 여자들이 번갈아 가며 맡았다. 라울과 내가 허탈감에 빠진 패잔병들처럼 보였음에 반해, 아망딘과 로즈- 나는 그녀와 곧바로 화해했었다- 는 활기에 차 있었다. 그녀들은 프레디 2세를 키우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프레디 2세는 우리 타나토드롬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다. 아이는 웃음과 호기심이 아주 많고 붙임성이 있었다. 아잇적에는 누구나 위대한 현자인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삶에 찌들면서 다들 바보가 되고 마는 건 아닌지.
우리 아이는 분명히 프레디의 환생은 아니었다. 아무데고 구석구석 누비며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걸 보면, 상당히 활동적인 편이었던 어떤 쾌활한 낙천가의 환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망딘은 우리 아이를 끔찍이 위해 주었다. 아이는 (아빠, 엄마, 쉬, 응가)라는 네 낱말을 하나로 붙여서 말하기를 좋아했다. 나중에 그 네 개념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정신 분석적인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들을 통해 인류의 한 구성원인 내 생명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 유전자가 아들의 세포핵 안에서 내 생명을 이어 가고 있었다.
콩라드 형은 아들과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
"애를 숫제 끼고 사는구나! 그러다간 애가 너를 지겹다고 하겠다. 난 우리 애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러자 아들 녀석이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쉬 아빠야?"
콩라드 형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아니. 응아 아빠야."
형은 영계 탐사 회사를 설립해 놓고, 주문에 따라 세계 어느 곳에건 타나토드롬을 세웠다. 빈틈없는 건축업자로 변신한 그는 타나토드롬의 실내 장식을 혁신해서, 고객이 원하는 대로 신화적인 분위기나 신비로운 멋이 풍기도록 비해일을 꾸며 주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케호프의 피라미드나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성당을 본뜬 비행실로부터 이륙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넉넉치 않은 사람들을 겨냥해서 콩라드는 개인 타나토드롬을 상품화했다.
그것은 사우나탕과 비슷하게 생긴 목조 오두막이지만, 이륙하는 데 필요한 장비는 두루 갖춘 것이었다. 또, 콩라드는 선택 품목으로 우리 타나토드롬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음향 설비와 비행복을 마련해서, 20 만 프랑을 더 내는 사람들에게 제공하였다.
어머니가 하시는 사업도 경기가 좋았다. 어머니는 출판사를 내어 아망뒨 발뤼스의 전집을 출판하였다. 그 전집에는 "빈사자 편람", "천국 주말 여행을 위한 몇 가지 제언", "영계 탐사 10장", "천식환자, 심장병 환자, 간질 환자의 내생을 위한 도움말" 따위가 들어 있다.
아망딘의 책들은 모두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책들과의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영계 탐사에 관한 실용적인 입문서와 증언-이야기 모음도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영계 비행은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콩라드가 파는 장비 일습을 구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명상을 이용해서 언제든지 육체를 벗어날 수 있었다.
249. 인도 철학
죽는 순간의 정신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내생의 형태가 달라진다. 물론 평생토록 악에 빠져 지낸 자의 정신에 고결한 회원이 생겨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전의 여러 삶을 사는 동안에 억눌린 채 움츠리고 있던 좋은 성품이 평생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온 사람의 영혼을 죽는 순간에 완전히 뒤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 마 아난다 모이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50. 상황이 어려워진다
영계 탐사에 관한 지식이 세상에 널리 퍼짐이 따라, 인생이 덧없는 나그네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사람들 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현생 이전에도 삶이 있었고 현생 이후에도 삶이 있을 것이며,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살아 남는다는 것. 구체적으로 촉지할 수는 없지만 천국의 자리는 우리 은하 한가운데에 있는 블랙홀이라는 것. 일곱 천계로 이루어진 (우주적인) 대륙이 있고, 그 마지막 천계에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천사들이 살고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이제 거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 비밀들을 드러냄으로써 가장 먼저 손해를 본 사람은 우리 대통령 뤼생데르였다.
선거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리샤르 픽퓌라는 후보가 뜻하지 않은 주장을 들고 나왔다. 천국에 올라가서 어떤 천사를 만났는데, 그 천사가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자기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환생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르쳐 준게 어떤 천삽니까?"
공개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서 뤼생데르가 물었다.
"무미아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사람들의 사업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천사죠."
상대 후보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뤼생데르가 하나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정치가의 생애에 대해서 달달 욀 정도로 훤히 알고 있었다. 뤼생데르는 자기 지식을 이용해 상대 후보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픽퓌는 고대 로마의 대광장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건망 문제를 낱낱이 이야기함으로써 기자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뤼생데르조차도 상대의 세밀한 묘사에 얼이 빠질 정도였다.
픽퓌는 거짓말쟁이거나 백과 사전적인 기억력을 가진 사람일시 분명했다. 그의 뒤를 이어, 로베르 몰랭과 필림 필루라는 후보도 환생을 들고 나왔다. 몰랭은 자기가 나폴레옹 보나프르트의 환생이라고 주장했고, 필루는 자기가 전생에 알렉산더 대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이 그런 것을 일일이 가르쳐 줄만큼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후보들이 쏟아 내는 그런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뤼생데르는 영계를 개척한 최초의 국가 원수임을 내세웠지만, 카이사르와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환생임을 주장하는 후보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은 프랑스에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다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계를 완전히 정복하겠노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들의 공약에는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뤼생데르는 자기가 낙선되는 것보다 천국의 안위를 더 걱정했다. 그는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를 한데 모았다.
"자신이 카이사르, 나폴레옹, 알렉산더였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선거에서 이기는 날이면, 영계 전투가 다시 벌어지고 은하는 얼마 안 가 통제 불능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 걸세."
로즈가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역사학자들의 도움을 빌리는 거예요. 다른 후보들이 들고 나오는 그 위인들의 삶은 결코 모범적이지 않았어요.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사람들이고 전제 군주였어요. 그들은 여러 대륙을 유린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어요."
우리는 역사책을 다시 뒤척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을 일으켜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렸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을 파괴하고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켜 유럽을 피로 물들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품행이 수상쩍었고, 짧은 생애만큼이나 그의 제국도 단명했다.
우리가 옛 사람들의 악행을 들먹이며 간접적으로 상대 후보들을 깎아 내리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스스로를 베르생제토릭스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 텔리비전에 나와서, 카이사르가 알리지아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농성하고 있던 갈리아 인들을 거리낌없이 굶겨 죽였던 일을 상기시켰다. 그는 갈리아인과 로마 군대 사이의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한 시간에 걸쳐서 이야기했다. 결국 카이사르는 오늘날 프랑스 유권자들의 조상을 굶겨 죽인 인물이 되는 셈이었다.
자기가 나폴레옹의 첫 번째 황후인 조제핀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도 나타났다. 그 여자는 여성 잡지를 통해 나폴레옹의 간통 행각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고, 에스파냐 전쟁 때의 대학살과 러시아 원정 때의 퇴각 및 워털루 전투의 참패를 강조했다.
알렉산더 대왕을 내세우는 후보는 비교적 수월하게 난관을 헤쳐나갔다. 고대를 전공한 역사학자말고는 그의 추잡한 삶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대학살과 방탕한 생활에 대한 그럴듯한 얘기들이 간간이 나오기는 했다.
전생에 대한 폭로가 쇄도하는 상황에서 뤼생데르는 자기 전생에 관해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기 현생만으로도 국민들의 지지를 충분히 얻을 수 있으며, 자기 현생만이 자기 미래를 결정할 거라고 장담했다. 유권자들 대다수는 천사들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자기가 어떤 훌륭한 사람의 환생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뤼생데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심판을 맏을 것은 현생의 업이지 과거의 입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뤼생데르의 태도는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다. 픽퓌가 아무리 카이사르의 환생임을 자랑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픽퓌일 뿐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의 환생임을 주장하는 후보와 그의 천사 같은 열굴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우월감에 가득 찬 거만한 사람이었음에도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행해 진 여론 조사에서 그는 34%의 지지를 얻었다. 뤼생데르는 24%로 그보다 한참 뒤져 있었다. 하위로 처진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은 각각 13%와 9%의 지지를 얻었다.
"막판 뒤집기라는 기적이 일어나야 할 텐데."
뤼생데르 후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아망딘은 꿈을 꾸듯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251. 힌두교 철학
그렇게 끝없이 새로 시작한다는 관점에 힌두교 사상가들은 얼마간 싫증을 내고 있다. 사상가들이 죽음과 환생을 끊임없이 거듭하는 그 고통스런 게임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하는데 반해서 대중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 알렉산드라 다비드 닐, "내가 살던 인도"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52. 선거, 그리고 그 결과
아망딘은 실제로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그것도 아주 그럴싸한 방안이었다. 투표일 바로 전날에 (영계 특파원)인 막심 빌랭이 우리 선거 운동 팀에 합류했다. 뤼생데르의 (기적)은 그에게서 왔다.
빌랭은 기자 회견을 자청하고 기자들을 모은 다음, 천사들이 뤼생데르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고 침착한 어조로 발표했다. 천사들이 왜 뤼생데르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막심 빌랭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사들은, 아니 천사들만이 뤼생데르의 전생과 현생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뤼생데르를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의 보증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악업 점수를 얻을 각오를 하고 하늘이 원하지 않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사람은 거의 없었다. 투표장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병자와 신체 부자유자들뿐이었다. 뤼생데르는 73%의 표를 얻고 재선되었다.
막심이 일등 공신이었다. 그의 명성과 전설적인 정직성 덕분에 뤼생데르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어떤 영혼과의 대화"를 그토록 충실하게 기록한 바 있는 막심 빌랭이 거짓말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심 빌랭은 아주 심한 악업을 스스로 떠맡은 셈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게 분명했다. 천사들이 선거에 대해 어떤 의견이든 표명할 까닭이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 선거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거였다.
막심 빌랭은 악업을 떠맡은 대가로 대통령으로부터 영계 탐사 훈장을 받았다.
축하연 자리에서 나는 농담삼아 막심 빌랭에게 이렇게 물었다.
"혹시 마키아벨 리가 환생해서 자네가 된거 아니야?"
땅딸막한 막심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이왕이면 단테나 셰익스피어에 나를 비교해 주었으면 하네."
"자넨 거짓말을 했어. 그렇지?"
"그렇게 생각해? 난 거짓말을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일세. 진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지. 어쨌든 뤼생데르가 당선되었네. 그건 저 위에서 천사들이 그를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253.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우리가 예견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세상에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관계 부서의 회신
우리는 여전히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음. 우리를 과소평가하지 말기 바람.
254. 유대교 신화
은사슬이 끊어지면...
- 전도서 12: 6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55. 과거의 비밀이 밝혀지다
뤼생데르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된 뒤로 영계 탐사는 과학 실험의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중에게 더욱 확산되었다. 마지막 천계를 다녀오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에 따라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아무나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고 자기 나름의 특종 뉴스를 가져와서 우레같은 충격을 안겨 주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아돌프 히틀러가 어떤 심판을 받았는지 알아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히틀러는 분재(동이 분, 심을 재) 나무로 환생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자, 로즈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분재 나무라고? 사람의 영혼이 식물 형태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망딘이 자기가 아는 바를 들려주었다.
"성 베드로가 내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에요. 사람은 대게 자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환생하지만, 사람으로 사는 동안 동물만큼 어리석었음이 판명되면 동물의 수준에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또, 그 어떤 야수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짓을 한 사람은 식물로 되돌아가고, 더 나아가 광물로 까지 되돌아갈 수 있어요."
사람이 거실의 분재 나무로 환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랐다.
사람들은 경솔한 어떤 천사가 일러준 곳에서 문제의 분재 나무를 찾아냈다.
총통의 환생이라는 분재 나무는 어떤 넉넉한 가정의 사내 아니가 기르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분재 나무의 삶이 어째서 형벌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는 자기 나무를 아주 정성스럽게 돌보았고, 그것에 많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분재 나무를 바라보다가 그것의 삶이 왜 형벌이 되는지를 이내 깨달았다. 분재 나무의 일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수목은 제 크기에 비해 너무 작은 화분에 심어진 다음, 가지솎기, 가지치기, 눈따기, 순따기, 잎따기, 뿌리다듬기 따위를 끊임없이 당한다. 분재란 식물에 대한 잔학 행위가 예술의 수준으로 승화된 것이다. 웃자라지 못하게 하느라고 물도 충분히 안 주고, 사지는 끊임없이 잘려 나가며, 뿌리도 마음놓고 뻗을 수 없고, 탁한 공기에 영양도 변변치 않은 분재의 삶은 한마디로 고통일 뿐이다.
자란다는 것은 모든 식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은 그 권리를 마음껏 향유한다. 그러나 분재의 수목은 자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채 언제나 난쟁이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은 더 예쁘게 보이도록 가꾼다는 구실을 내세운다. 그것은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전족(얽힐 전, 발 족)을 정당화해 온 것과 맥이 닿는다.
종국에는 여자 아이의 발을 면포로 단단히 묶어 발의 성장을 정지시키는 풍속이 있었다. 분재의 경우는 그보다 더 나쁘다. 분재에서는 단지 발마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수목의 상지(上脂)인 가지와 하지(下)脂인 뿌리를 매일같이 잘라댄다.
흉악한 전범에서 일본식 분재 나무로 환생하도록 벌을 내린 것은 대단히 치밀한 판단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단지 돈을 절약한다는 이유로 형이 입던 꽉 끼는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셨을 때, 내가 느꼈던 절망감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나는 심판 대천사들이 아주 멋진 생각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에 대한 대천사들의 심판이 성에 차지 않아, 그들보다 더 악의적이고 더 교묘한 형벌을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대적인 청원을 통해 그 분재 나무를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사람들은 그 분재 나무가 썩어 없어지도록 땅에 묻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 분재 나무의 영원한 형벌이 끝이 났다. (나로서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7 천계를 다녀온 사람들이 폭로하는 (새로운 사실)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는 진실성을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나는 천사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중을 매번 신중하게 검토하였다. 저승을 다녀온 몇몇 여행객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앙리 4세를 시해한 혐의로 사형당한 라바약은 무죄였고, (철가면)은 루이 14세의 알려지지 않은 누이였다. 또, 나치 치하에서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구했던, 스웨덴의 용감한 외교관 라울 발렌베르크는 소련 국가안보위원회 KGB에 죽임을 당했고, 그와 비슷하게 (붉은 벽보)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프랑스 공산당원인 그들의 (동지들)에 의해 고발당했다. 존 레논은 단순히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직접 살인 청부업자를 만나 자살을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기사(탈 기, 말 마) 에옹97)은 남녀 추니였다. 니콜라 플라멜98)은 부르주아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해서 재산을 모은 다음, 쇠붙이를 금으로 변환하는 비법을 발견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할복자(나눌 할, 배 복, 놈 자) 잭은 궁정 의사였던 윌리엄 걸99)이었다.
사람들은 폭군들에게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벌이 내렸음을 확인했다. 스탈린은 실험실의 흰쥐로 환생했고, 무솔리니는 곡마단의 개가되었다 남미의 파시스트 장군들은 대개 거위로 환생하여, 크리스마스의 거위 간 요리를 위해 도살당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짖궂은 사람들)만 있었던게 아니고, 의심스러운 하늘의 계시를 이용해서 자기를 뽐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자기들의 전생을 늘어놓으면서 현생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파리에 사는, 아시아계의 한 식료품상은 자기가 모딜리아니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옛 화상들의 후손이 얻은 상당한 금액의 이익이 자기 몫이라면서 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어로빅 강사로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어떤 매력적인 여인은 자기가 보티첼리의 환생이라고 단언했다. 그 여자는 경매를 통해서 자기 부담으로 몇 폭의 그림을 미술관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었다.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갖가지 소송과 배상 요구가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인류 역사 전체를 재검토, 재규명하고, 허구를 깨뜨려야 할 판이었다.
256. 기독교 신화
본디 영혼은 깨끗하게 되고 바르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에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혼의 정화는 뒤따르는 내생에서 이루어집니다.
- 니사 사람 성(성스러울 성) 그레고리우스100)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57. 스테파니아의 실수
프레디 2세가 자라는 걸 보는 게 우리의 유일한 낙이었다. 영계 탐사에 관한 대중의 관심은 날로 커져가는 데 비해서, 우리의 관심은 갈수록 시들해졌다.
가정이 나의 유일한 우주였고, 나는 점점 더 가정에 매달렸다. 세상은 열리고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견실한 가정을 이루어서 그 상태를 되도록 오래 유지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건전한 가장 생활의 공덕은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집안에서는 성격 장애자, 압제자, 몰인정한 자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행복했다. 로즈를 사랑했고, 아들을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옛날 라울 덕분에 내가 책에 재미를 붙였듯이, 나는 아들에게 책 읽는 재미를 가르쳐 주었다. 로즈는 아들에게 별들을 어떻게 관찰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영계 탐사가 있기 전에, 사람들은 별을 올려다보면서 자기들의 문제를 상대적인 것으로 고쳐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영계 탐사 때문에 별을 바라보는 일의 의미가 아주 달라졌다.
나는 독서에 대한 나의 왕성한 욕구를 아들에게 전수함으로써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키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세 살배기 아이가 가장 흥미를 느끼리라고 생각되는 전설, 동화, 우화, 아름다운 배경을 가진 짤막한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이미 영계 탐사가 몰고 온 충격을 겪고 이겨냈지만, 포근한 우리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는 그 충격의 파동이 여전히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어느 날 스테파니아는 잔뜩 화가 난 채 돌아왔다.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다가와 거액의 돈을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녀를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스테파니아는 그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세상이 온통 달작지근하고 나긋나긋해요. 난 이 모든 게 지긋지긋해요."
"그럼 폭력적인 세상이 낫다는 거예요? 괜히 하는 소리죠?"
로즈가 이렇게 묻자 스테파니아는 얼굴이 벌개지도록 성을 냈다.
"아니, 괜한 소리가 아니에요. 예전에도 착한 사람들은 있었어요. 그들은 자기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착한 일을 했어요. 그들은 착한 것과 악한 것 중에서 착한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모두가 착해요. 그건 순전히 맹목적인 집착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모두 저승에서 치를 시험에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때, 더 이상 닫아 둘 필요가 없어진 우리 아파트 문 앞에 거지 한 사람이 나타났다. 누더기 옷차림으로 보아 거지임이 분명했다. 그는 아파트 안으로 태연히 들어와 곧장 냉장고 쪽으로 갔다. 그는 냉장고에서 훈제 연어 샌드위치와 아주 시원하게 해놓은 작은 맥주병을 꺼내더니 우리 곁으로 와서 편안하게 앉았다. 우리 대화에 동참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스테파니아는 그 거지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샌드위치와 맥주병을 낚아챘다.
스테파니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는거야!"
거지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흥분한 스테파니아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문을 열어 놓고 살게 된 다음부터, 그는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자기 마음대로 뒤져 먹는 짓에 익숙해 있던 터였다.
"어... 어... 당신 미쳤어요?"
거지가 말을 더듬었다.
"이런 무례가 어디 있어?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혼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 가르쳐 준 모양이지?"
부랑자가 분개했다.
"당신이 감히 나한테 적선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거요?"
"네가 지금 동냥하러 온 놈이야? 동냥은 얼마든지 주겠어. 하지만, 더러운 몸에 때가 덕지덕지한 옷을 입고 들어와 집안에 온통 악취를 풍기는 건 참을 수가 없어."
비렁뱅이가 로즈와 나에게 응원을 청했다.
"이 아주머니, 제정신이 아니군요. 적선을 거절하면 카르마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통 모르는 모양이에요."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스테파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분노를 터뜨렸다.
"잔소리말고, 꺼져! 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거지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빈정거렸다.
"좋아요. 가라면 가지요. 하지만, 나중에 다시 태어나서... (그는 잠시 스테파니아가 받아 마땅한 가장 고약한 내생이 뭘까를 생각하는 듯했다) 암에 걸리더라도 놀라지 마시오."
스테파니아는 거지의 역겨운 입 냄새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너 그 말 다시 한번 해볼래?"
거지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자기가 했던 말을 당당하게 되풀이했다.
"당신은 내생에서 암 환자가 될거요."
어느새 스테파니아의 손이 올라갔는지, 따귀 올려붙이는 소리가 두어 차례 울려 퍼졌다. 그 서슬에 탁자 위에 놓은 물잔이 흔들릴 정도였다.
거지는 성이 나기보다는 놀란 눈치였다. 여자가 자기 같은 거지에게 폭력을 행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얼얼한 뺨을 쓰다듬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를 때렸겠다!"
"그래. 때렸다. 너를 때렸으니, 내게 다른 저주가 또 내리겠네? 하지만, 그 따위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암에 걸릴 거라고? 좋아. 그럼, 나는 그때를 기다리면서 현생에서는 좀 즐기며 살 테야. 그러니 너는 당장 꺼지는 게 신상에 이로울걸. 발길질을 더 당해야 정신 차릴래?"
"이 여자가 날 때렸어. 이 여자가 날 때렸어."
그는 거의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그렇게 되뇌었다.
그는 뺨을 맞음으로써 자기가 순교자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여자에게 뺨을 맞았으니 틀림없이 적지 않은 선업 점수를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거지는 환한 얼굴로 문을 나갔다.
스테파니아가 우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봐요. 모두가 미쳐 가고 있어요."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 순간에 우리는 스테파니아를 걱정하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저러다가 스테파니아가 정말 내생에서 암 환자가 되는 것을 아닐까?
"그 사람을 때릴 것까지는 없었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내가 말문을 열자, 그녀가 대뜸 말을 막았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벌레들이 사는 세상이에요.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감정도, 두려움도, 갈등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제 이 세상에는 미신에 빠진 무골충들밖에 없어요. 사람들은 착한 게 아니에요. 이기적인 거예요. 오로지 자기들 카르마만 걱정하고 있어요. 그들이 선행을 하는 것은 오로지 내생에서 좋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이기심 때문이에요. 참으로 따분한 세상이에요!"
스테파니아의 말을 들으니,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이기심 때문에, 게으름 때문에, 그리고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언제나 착하게 굴었다. 악하게 살려면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남의 방어 행동을 고려해야 하며 남을 괴롭힐 수 있는 못된 짓을 구상해야 한다. 그러나 착하게 살면 남을 간섭하지도 않고 남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살 수 있다. 친절은 조용히 살기 위한 가장 편안한 방법이다.
스테파니아는 우리 안에 갇힌 암사자처럼 거실 안을 돌아다녔다.
"난 당신들에게 싫증을 느껴요. 착한 마음에 신물이 나요. 우리가 밝히지 말았어야 할 비밀을 알려 준 뒤로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어요. 이 세상이 지긋지긋해요. 잘 있어요! 난 떠날래요."
그러고 나서 스테파니아는 두말없이 가버렸다. 술에 취해 지낼지언정 여전히 자기 남편인 라울에게 작별 인사 한마디하지 않고, 자기 물건을 챙겨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을 떠나 버렸다.
258. 유대교 신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은 육신의 잘못인가, 영혼의 잘못인가? 육신과 영혼은 대등하게 신의 심판을 받는 것일까?
육신은, 영혼이 자기 곁을 떠난 뒤로 자기가 무덤 속에서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들어,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이전에 지은 죄는 모두 영혼의 탓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에 대해 영혼은 죄 많은 육신을 떠난 뒤로 자기는 새처럼 평화로이 허공을 날고 있다는 점을 들어, 죄를 지은 것은 육신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영혼과 육체는 그런 식으로 신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들으러 어떤 현인을 찾아갔다. 현인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도 비유로 대답했다. 현인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옛날에 어떤 왕이 있었다. 그는 자기 과수원을 충실하게 지켜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사람은 장님과 앉은뱅이였다.
앉은뱅이는 얼마 안 가서 먹음직스런 열매에 넋을 잃게 되었다. 그는 장님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네 등 위에 올라가서 저 열매들을 딸 수 있게 해줘. 그런 다음에 열매를 나누어 먹자."
장님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앉은뱅이의 제안을 따랐다. 왕이 과수원에 와보니 열매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워하는 왕에게, 장님은 자기는 아무것도 못 보았노라고 대답했고, 앉은뱅이는 자기는 나무에 기어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열매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앉은뱅이에게 장님 등 위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장님과 앉은뱅이는 마치 한 사람처럼 엉켜서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육신은 함께 신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을 것이다.
- "바빌로니아 탈무드"101), 산헤드린 9: a~b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59. 역사 교과서
영계 탐사 덕분에 세계는 평화와 번영과 행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뒤로 300 만 년 이상 품어 온 오랜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죽음을 하나의 형벌, 하나의 고통으로 여겨 왔었는데, 영계 탐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지상에서 착한 일을 하면 영계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가 알게 되었다.
타나토노트들 덕분에 지구상에서 전쟁과 증오와 질투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고대 생물학자 썬더는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을 폐기하고 한결 현대적인 (호모 타나토노티스)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호모 타나토노티스)는 자기의 삶과 죽음은 물론이고 전생과 내생까지도 지배하는 인간이다.
영계 탐사는 인류에게 참으로 엄청난 도약을 가져다 주었다.
"기초 강의용 영계 탐사의 역사"
260.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구경
스테파니아가 없어도 삶은 계속되었다. 로즈와 나는 유월절 주말을 이용해서 프레디 2세를 데리고 워싱턴에 가기로 했다. 우리 모험과 관련된 기념물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행은 보람이 있었다. 그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처음으로 사용했던 이륙용 의자를 다시 보았고, 영계 탐사의 제단에 바쳐진 초창기 지원자들의 명단을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끼며 읽었다. 타나토노트들이 일상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흉내내어 밀랍으로 빚어 놓은 우리 자신의 인형 앞에서 우리는 많은 시간의 보냈다. 나를 본떠 만든 인형은 별로 나를 닮은 것 같지 않았다. 입을 기이하게 벌쭉 벌리고 있는 것과 손에 커다란 주사기를 들고 있는 것이 그랬다. 아망딘의 인형은 스타의 인형답게, 한결 더 실물에 가까웠다. 몸에 꼭 끼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품이 영락없는 아망딘이었다.
시신이나 다름없는 라지브 뱅투의 육신도 한 구석에 있었다. 쾌락이 가득한 암흑 천계에서 늑장을 부리며 끝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그 인도의 타나토노트는 냉동고에 보관된 채 아직도 링거액을 주입받고 있었다. 그가 이승으로 돌아오고 싶어할 때를 대비해서 그의 육신을 보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의 육신 옆에 있는 표지판에는 그의 생명 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박물관에는 첫 번째 코마 장벽을 넘은 뒤로 공포에 질린 채 은둔 생활에 들어갔던 브레송의 집 모형도 있었다. 그것은 집이라기보다 하나의 토치카였다.
우리의 라비 프레디 메예르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집단 비행을 위해 그가 고안한 다양한 비행 대형에 따라 인형들이 날고 있었다. 가로 10m, 세로 30m의 거대한 벽화에는 천국 전투의 실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단추를 하나 눌렀더니, 음향 효과까지 더해 졌다 (으악), (악당아, 이걸 받아라), (더러운 이단자), (조심해! 나 죽어) 하는 소리와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생명 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재현하려는 듯 천을 찢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사실 연출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정작 타나토노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소리를 낸다 해도 우주의 진공 상태에서는 그것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거대했다. 관람객들에게 천국에 와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는 듯, 어디를 가나 팝콘과 핫도그와 청량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자동 공급기들이 널려 있었다. 미국인들은 역시 후한 대접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주 진열실 중앙에는 펠릭스 케르보스의 동상이 있었다. 그는 몇 세기를 먼저 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미남 청년은 우리가 알고 있던 아둔한 펠릭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펠릭스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 나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전에는 펠릭스의 새로운 그리스풍 옆얼굴과 (알려지지 않은 곳을 향해 언제까지라도 곧장 나아가자!)는 우리의 표어가 새겨질 것 같았다. 나로서는 그 말보다 우리의 옛날 표어인, (우리 다 같이 바보들을 물리치자)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 표어는 여전히 시의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나위 영혼의 심판을 재미있게 재연하는 곳도 있었다. 덥수룩한 흰 수염을 달고 있는 자동 인형 셋이 투명한 합성 수지로 만든 단 위에 올려져 있고, 그 단에는 심판 장소인 빛의 산을 나타내려는 듯 네온등을 밝혀 놓고 있었다. 자동 인형들은 끊임없이 입을 움직이면서 (지난 생의 모든 선행과 악행을 여기에서 심판합니다) 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영혼의 비행을 탐지하는 감마선 탐지 장치- 그것은 내 아내 로즈의 발명품이다- 와 거대한 파라볼라 안테나, 가짜 초록색 점들이 그럴싸하게 나타나는 모니터 화면 등이 있었다.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었다.
박물관 책임자들은 관람의 마지막 순서로 영계를 본뜬 멋진 모형을 마련해 놓았다. 그 모형은 재생지로 만든 거대한 원뿔 모양의 터널인데, 넓게 벌어진 입구로 들어가서 점점 좁아지는 통로를 거쳐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입구의 지름은 30m, 출구의 지름은 2m였다. 바닥이 컨베이어로 되어 있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터널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나아갈 수 있었다. 터널 안은 구역에 따라 색깔이 변하도록 되어 있었고, 코마 장벽을 상징하기 위해 구역의 경계마다 커튼을 달아 놓았는데, 커튼 가장자리에 두툼한 플라시특 장식이 달려 있어서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 지를 볼 수 없었다.
플라스틱 장막을 넘을 때마다 뭔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주위에 슬라이드를 비춰서 각 천계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설명은 영계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암흑계에 들어섰을 때는, 어디에선가 이런 설명이 들려왔다: (여기에서 악마의 몇 가지 예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악마들은 모흐 1을 처음으로 넘은 초기의 타나토노트들이 보았다고 주장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여 주는 악마들의 그림 중에서, 우리가 마지막 천계에서 만났던 진짜 사탄과 비슷한 것은 전혀 없었다.
적색계에 들어서니, 모형의 설계자들이 아이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였다. 쾌락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재현하기가 어려웠던지, 몇몇 인물들에게 입맞춤을 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기다림의 시련을 겪는 구역에서는 컨베이어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져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컨베이어가 고장이 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절대지의 구역에서는 장외에서 들려오는 음성으로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과 같은 지식을 설명하고 있었다. 열등생들을 위한 보충 수업이라 할 만했다. 초록색계에서 절대미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작은 나비들과 웃는 모습의 돌고래였다.
구경 온 가족들은 사진도 부지런히 찍어 가면서, 한마디 설명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담아들었다.
"아빠 엄마 말 잘 듣고 착하게 살면, 너도 언젠가는 천국을 구경하게 될 거란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나중에 우리 아들에게 저런 이야기를 꼭 들려줘야지.)
컨베이어가 끝나는 곳은 아주 평범한 출구였다. 몇 시간 동안 박물관에 갇혀 있다 나오니, 햇빛이 그야말로 백색 천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햇빛이 고마웠다. 약간 피곤을 느끼는 관람객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보상은 없을 거였다. 넓은 홀에 셀프 서비스 식당이 몇 군데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더니 기분이 상쾌해 졌다. 기념품 가게들도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하는 가게보다 물건을 훨씬 잘 갖춰 놓은 것 같았다. 티셔츠, 이륙용 의자의 모형, 천사와 악마의 모형, 천사나 악마가 들어 있는 그림책, 간편한 비행을 위한 비행식 등이 주요 상품이었다.
프레디 2세는 솜사탕을 맛있게 먹고 나서, 천사의 이름이 들어 있는 열쇠 고리를 몇 개 사달라고 했다. 자기의 수집품 중에 빠진 것을 거기에서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영계를 비행할 때의 모든 느낌을 (실제와 똑같이) 느끼게 해준다는 비디오 테이프를 살까 하고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그렇게 널려 있는 모든 상품들이 웬지 역겹게 느껴졌다. 우리는 일정을 단축하고 대서양을 건너 돌아왔다.
261. 유대교 신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것은 영혼이 한 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길굴림, 즉 환생이라고 부른다
- "조하르"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62. 영계 마케팅
영계 탐사는 그야말로 대중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죽어서 하게 될 여행은 미리 해보려고 덤벼드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은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니까 말이다.
생명 줄을 그대로 달고 있는 채로 새로운 기분을 맛보고 싶어 올라간 (관광객들) 때문에 영계가 북적거리게 되자, 진짜 죽어서 올라간 영혼들은 그들 사이를 겨우겨우 헤쳐 나가야만 했다.
관광객들 중에는 일본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그들은 영계 탐사를 통해서 자기들이 극진히 숭배하는 조상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일본의 한 회사가 (영계 상품)을 가장 먼저 개발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선승들이 염력을 이용해서 그 상품들을 영계로 쏘아 올리는 일을 맡았다. 그러자 세계의 대기업들이 영계 마케팅에 뛰어들 생각을 했다. 2068 년에는 영계에 처음으로 광고가 등장해서 죽은 이들과 영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콜라 회사의 광고로서 내용은 이러하다: (코마 콜라로 당신의 영혼을 상쾌하게 만드십시오.)
보험 회사들도 콜라 회사의 뒤를 따랐다: (당신은 여기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뭔가 경솔한 행동을 하셨군요.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환생하시거든, 저희 런던 종합 보험을 찾아 주십시오. 런던 종합 보험과 함께하면 현생과 내생이 모두 안전합니다.)
처음에는 영계의 입구에서만 나타나던 광고가 급기야 첫 번째 코마 장벽 너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계 광고 전문 대행사도 나타났다. 대행사들은 제멋대로 영계의곳곳을 차지하고 광고를 내걸었다. 수사들이 진로를 바꾸어 광고 회사에서 활약하였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정신을 집중한 다음, 영계에서 읽힐 광고 문구를 원하는 천계에 정확하게 쏘아 보냈다.
광고비용은 면적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판형은 1m × 2m에서 10m × 20m까지 있었다. 하늘은 무한히 넓었지만 수사들의 염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광고 회사를 찾는 고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코마 콜라와 런던 종합 보험의 뒤를 이어 많은 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냈다. 단체 여행 알선업자: (영계 항공과 함께 여행하십시오. 안전한 귀환을 보장합니다.) 기저귀 회사: (애페르메아블렉스102)는 실금(잃을 실, 금할 금)하는 노인과 그 노인의 환생이 될 미래의 갓난아이를 이어 주는 기저귀입니다. 앵페르메아블렉스로 미래의 당신인 갓난아기의 살갗을 보송보송하게 만드십시오.) 유제품 회사: (천연의 맛, 트랑지트 야쿠르트! 트랑지트103)를 마시고 천연의 영계로 상쾌하게 출발하세요.) 침구회사: (솜누스104) 매트리스, 성공적인 명상의 비결입니다.) 콩라드 형의 이륙용 의자 회사: (옥좌(구슬 옥, 자리 좌), 그것은 저승을 향한 발사대입니다. 짜릿한 발진의 기쁨을 만끽하십시오.) 락 그룹: (데드 스토리의 음악에는 천사들마저 열광합니다) 주류 회사: (루킬리우스105), 육익 천사들과 함께 마시고 싶은 과일 맛 아페리티프입니다.)
엽력이 탁월한 어떤 영매들은 자기들의 광고 메시지를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기까지 했다. 영계에 다다른 사람들은 이제 커다란 슈퍼마켓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전에도 영계 탐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문제를 놓고 라울과 의견을 달리한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나빠져 있었다. 라울이 어떻게 생각하든, 영계는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엔에서는 국제 윤리 위원회를 열어 광고의 남용을 규제하기로 했다. 그 결정에 따라, 나쁜 기억들과 싸워야 하는 암흑계에서 기억 활성제의 광고- (메모릭스 한 알이면 당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모두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가 금지되었다. 또, 환상이 난무하는 적색계에서는 부풀릴 수 있는 인형을 광고할 수 없었고, 기다림의 시련을 겪는 주황색계에서는 시계 광고가, 절대지의 천계에서는 백과 사전 광고가, 절대미의 천계에서는 미술 전람회가 금지되었다. 의도야 어쨌든 그런 것들은 결과적으로 과대 광고가 될 가능성이 많았던 까닭이다.
서점의 진열대에도 영계 탐사 관련 서적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이런 책들도 있었다: "죽음과 그 의례", 천국, 정반대의 것들이 공존하는 곳", "죽음 이후에 무엇이 올까?", "다른 영혼, 조상, 천사와의 만남을 위한 기본예절", "환생의 길: 영계 전도(온전할 전, 그림 도)와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몇 가지 도움말", "영계 안무 교본".
지상에서는 모든 일이 단순 명쾌해지고 있었다. 모든 거래가 원만했고, 사람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가난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종교는 쇠퇴했고, 민족들 사이의 몇백 년 묵은 증오가 눈 녹듯 스러졌다. 온 세상이 선행의 기치 아래 정렬하고 있었다. 냉소적인 사람들, 비꼬는 사람들, 빈정거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유머조차도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유머는 뭔가 모자라고 보잘것없는 것에 바탕을 두는 것인데, 사람들이 영계 여행을 통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하찮은 것, 아무리 보잘것없는 행동에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하늘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모든 것을 감시하며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절대적인 숙명론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절대적인 숙명론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무슨 일을 애써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어차피 내 전생에 따라 내 업이 정해져 있는 것을. 나는 그저 수천 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살고 있을 뿐이야. 내 운명은 이미 천국에서 결정해 놓았는데, 마 하러 쓸데없는 노력을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선함과 함께 게으름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 가게나 개인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편안하게 먹을 걸 구할 수 있는데 무엇 하러 힘들여 일을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물질적인 욕망을 갖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게 할 방도가 막막하였다.
나는 영계의 비밀을 누설한 것에 대해 늘 회의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아주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의 불안감은 더욱 가증되었다. 어떤 사내아이가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스포츠카 한 대가 나타났다. 차가 달리는 속도로 보아, 운전자는 제때에 차를 세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에 겪은 사고를 생각하고 달려갔다. (조심해!)
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고 질주해 오는 자동차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게 내 운명이라면,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아이는 팔을 흔들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경고도 자기 운명의 일부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자동차에 깔리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나는 펄쩍 뛰어올라 아이를 가까스로 구해 냈다.
"이 자식, 너 하마터면 개죽음당할 뻔했어!"
녀석이 되바라지게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아저씨 덕분에 목숨을 건질 운명을 타고 난 걸요. 어쨌든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 아닌가 봐요."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깡총거리며 뛰어갔다.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죽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63.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영계 탐사를 당장 중지시키기 바랍니다. 대단히 위험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미 영계에 광고까지 쏘아 보내고 있습니다. 천국에 관한 증언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즉시 개입하기를 간청합니다.
관계 부서의 회신
알았습니다. 상황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검토하겠습니다.
264. 마음의 병
우리 모험의 보람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 인류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고, 숙명론에 빠뜨리고, 삶의 동기를 빼앗아 버린 게 영계 탐사의 결과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다. 그 지독한 악업을 청산하려면 나는 여러 차례의 환생을 거쳐야 하리라.
나는 더 이상 거리를 나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조용히 누워서 현생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타넘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숙명론자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숫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하던 그 아이가 이따금 생각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 옴을 느꼈다.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의 분위기도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로즈와 프레디2세와 나는 우리 가정의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고, 그 동안에도 아망딘은 순회 강연을 계속했다.
라울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 부모에 이어 스테파니아마저 잃고 나자, 그에게는 술을 마실 구실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는 술 속에서 또 다른 세계, 삶과 죽음 너머에 있는 제3의 세계를 찾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술은 모든 탐색이 끝난 허무한 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비탈길로 이끌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라울과 의절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펜트하우스에서 혼자 재즈 음악을 듣고 있었다. 구슬픈 색소폰 독주가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강연에서 돌아온 아망딘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나는 그녀를 본 체 만 채했다. 아망딘은 녹색식물을 밀어내고 내 옆에 있는 버들가지 안락 의자에 털썩 앉았다.
"피곤해요?"
아망딘이 내게 물었다.
"아니오.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요."
"마음의 병요? 누군 그런 거 없는 줄 알아요?"
아망딘은 라울이 두고 간 가느다란 비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예전에 프레디가 한 말 생각 안 나요? (이미 진리를 찾아낸 사람은 바보이고,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은 현자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모두 진리를 찾았어요.)
"그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바보로군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 잘못이에요."
나는 심한 자책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죽는다)는 게 뭐냐고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시트 밖으로 늘어져 있던 아글라에 할머니의 싸늘한 손이 선연히 떠올랐다. 천국에서 보았던 세 대천사의 환한 모습도 눈에 선했다. 영혼들을 심판하기 위해 모여 있던 그 대천사들의 놀라운 모습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심어 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들은 무시무시한 존재다. 나는 비로소 스테파니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이 강요되면, 그것 역시 격에 맞지 않게 너무 달작지근한 음식만큼이나 역겨운 것이다.
로즈가 펜트하우스에 나타나서 손뼉을 한 번 치며 말했다.
"배고프죠? 얼른 내려가요. 식사가 준비됐어요. 프레디 2세는 벌써 먹기 시작했어요. 꾸물거리면 빵 부스러기만 남기고 그 애가 다 먹어 버릴지도 몰라요."
265. 요가의 가르침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건강: 맑은 의식을 유지하자면 몸이 언제나 건강해야 한다. 몸을 정결히 해야 하고 포만감이 들 정도로 많이 먹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지분 안족(知分安足): 지금 자기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
의연(依然)함: 사소한 감정에 휘말리지 말 것. 즉 불의의 사태나 장애를 두려워 말고 덧없이 사라지는 즐거움에 혹하지 말 것.
공부: 성전을 읽고 명상을 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정진할 것.
봉헌: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겸허해야 한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66. 카르마 점수 계산법
막심 빌랭의 "어떤 영혼과의 대화"가 나온 뒤로, 우리는 환생의 고리를 끊고 순수한 정령이 되기 위해서는 선업 점수 600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망딘은 성 베드로에게 다시 문의하여 더욱 정확한 정보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대천사들의 영혼을 심판할 때 적용하는 채점 기준이 밝혀졌다.
그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악업 점수
거짓말을 했을 때 -10~ -60점까지
남을 비방했을 때 -10~ -70점까지
남을 모욕했을 때 -100~ -400점까지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았을 때 -100~ -560점까지
자식을 유기했을 때 -100~ -820점까지
부모를 유기했을 때 -100~ -910점까지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 -100~ -1,370점까지
사람에 대한 잔혹 행위 -500~ -1,450점까지
남의 죽음을 유발하는 범죄 -500~ -1,510점까지
같은 악행을 되풀이했을 때 해당 악업 점수 × 1.5
(행위는 같더라도 경우에 따라 점수가 다르다 즉, 해칠 의도가 있었는지, 해를 입히면서 즐거움을 느꼈는지, 단순한 과실인지, 이기심 때문에 작위 또는 부작위의 죄를 범한 것인지 등을 참작하게 된다.)
* 선업 점수
타산적인 기부 행위 +10~+50점까지
비타산적인 기부 행위 +10~+90점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을 때 +10~+100점까지
위험에 빠진 동물을 도왔을 때 +50~+120점까지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왔을 때 +100~+270점까지
예술 작품을 만들었을 때+100~+410점까지
진보에 기여하는 독창적인 생각 +100~+450점까지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을 때 +100+~620점까지
자녀를 잘 가르쳤을 때 +150~+840점까지
같은 선행을 되풀이했을 때 해당 선업 점수 × 1.2
그토록 구체적인 채점 기준이 제시되자 사람들은 더욱더 겁을 먹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살면 죄를 지을 염려가 있으니, 당장 자살을 함으로써 (계기(計器) 바늘을 0으로 돌려놓고) 싶어 했다. 계기 바늘을 0으로 돌린다는 표현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뜻으로 당시에 흔히 통용되던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의 일로 나타나게 되었다. 어떤 일본 회사가 선업 점수와 악업 점수를 재는 기계, 즉 카르모그라프(주108)를 상품화했던 것이다. 그것은 작은 액정 화면과 키보드가 달린 손목시계와 비슷했다. 사람들은 왼손에는 시계를 차고 오른손에는 그것을 차고 다녔다.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하루 동안 자기가 행한 일들을 입력하면 자기 카르마 점수가 정확하게 몇 점인지 알 수 있었다. 점수가 별로 좋지 않으면 카르모그라프 화면에 말(말 마) 그림이 나왔다. 그것이 카르마 점수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최초의 신호였다. 그보다 점수가 더 나빠지면, 개, 토끼, 민달팽이, 아메바가 차례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었다. 파슬리 줄기나 버섯은 가장 심각한 경우를 표시했다.
카르모그라프로 자기 점수를 정확히 알게 된 사람들은, 대천사들로부터 심판받을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었다.
물론 점수 계산을 정확히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확한 가감 연산을 하자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했다.
우리도 타노토드롬에서 그 기계를 가지고 장난을 해본 적이 있었다. 로즈의 점수를 계산해 보니 선업 점수 400점이 나왔다. 나는 그보다 훨씬 못하게 선업 점수 0점에서 5점 사이에 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나쁜 짓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인처럼 살았던 것도 아니다. 결국 라울의 말마따나 나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내였다. 카르마 점수에서조차 나는 평균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프레디 2세는 그 기계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렇다 할 선업이나 악업을 짓지 않았을 텐데도 아들의 카르마 점수는 +25점이 나왔다. 기특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점수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나쁜 짓을 하면 점수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보려고, 아이는 동네 친구네 집에서 키우는 말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그러고 나서 바로 카르모그라프에 그 사실을 입력하고 점수를 확인하였다.
카르모그라프는 고해 성사를 대체하는 아주 편리한 기계였다.
267. 자살은 오프사이드 반칙이다.
콩라드는 카르모그라프의 복제권을 따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무단 복제를 막기 위한 조처를 이미 취해 놓고 있었다. 그들의 특허권은 확실히 보호를 받고 있었다.
결국 형은 사업의 방향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가 개발한 상품은 (오프사이드)라는 이름의 알약이었다. 그 이름은 축구에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하듯이, 때가 되기 전에 천국에 미리 올라가게 해준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무통 자살)을 위한 정제인 셈이었다. (망친 삶보다는 새로운 삶이 낫다.) 그것이 콩라드가 내건 광고 문구였다. 단순하고 의미가 분명한 슬로건이었다.
콩라드는 영계 탐사에 대해 늘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현생에 미련을 두지 말고 대도약을 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을 섰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의 상품을 이용한 첫 고객들 중에 그의 아들인 내 조카 귀스타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귀스타브는 수학 시험을 망치고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이런 내용의 유서를 휘갈겨 놓고 이승을 떠났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승을 얼른 둘러보고 다른 육신을 빌려 돌아올게요.)
그의 부모는 그가 어디로 환생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대로 될 수도 있다는 눈치였다.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공들여 가르쳤는데, 수학 점수 한번 나쁘게 나온 걸로 다 망쳐 버렸으니,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니고 뭔가!"
콩라드는 그렇게 한탄했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지 아닌지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로즈와 나는 조카의 죽음을 보고 불안을 느꼈다. 만일 우리 프레디 2세도 그런 유혹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겼던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자기 모순에 빠져 있었다. 우리 자신은 천국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으면서도, 우리 아이가 거기로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 아이가 그곳으로 떠나기에는 너무 일렀다. 게다가 아이 스스로 은빛 생명 줄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 사이에 (오프사이드) 알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이미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우리의 어린 프레디 2세도 그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짓을 못 하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아이가 제 용돈으로 살 알약을 유해하지 않은 사탕으로 몰래 바꾸어 놓는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또 우리는 아이가 갑자기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까 봐, 모든 창문에 철망을 달았다.
로즈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아이가 형편없는 성적표를 가져오면, 우리는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선물을 주었다. 우리는 아이에게 결코 성을 내지 않았고, 언제나 애정으로 감싸면서 아이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기 삶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다시 환생하더라도 우리만큼 멋진 부모는 만날 수 없으리라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부모가 다 우리처럼 아이를 대하지는 않았던가 보다. 아이들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뭔가 언짢고 불만스러운 일이 있다고 훌쩍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했다. 극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시안화물 캡슐을 언제나 지니고 다니다가, 조금이라도 언짢은 일이 생기면 그것으로 자기 삶은 망친 거라고 판단하고 미련 없이 캡슐을 삼키곤 했다. 삶이 하나의 놀이처럼 되어 버렸다. 놀이에 끼기 싫으면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콩라드 형이 자유롭게 팔고 있는 알약을 이용해서 놀이판을 떠나면 그뿐이었다.
그 결과, 거리에서 노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얼굴에 주름살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새로운 젊음을 찾아 떠났다. 수심에 잠긴 사람들이나 너무 예민한 사람들도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런 식으로 가다가는, 선행을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덜 떨어진 사람들과 게으른 사람들만이 세상에 남을 판이었다.
그런 현상에서 또 다른 문제가 숨어 있었다. 지도자나 창조자 가운데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혼자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강철같은 성품을 형성한다. 그런데 역경을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자살을 통해 내생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장차 지도자가 될 재목들이 나이가 들기도 전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뤼생데르와 그의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공무원 사회에는 두루춘풍 식의 태도가 만연해 있었다. 그들은 국민 가운데 어느 한쪽이 마을을 상할까 두려워서 뭔가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가장 똑똑하고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의 자살이 잇따르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시급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다.
알 수 없는 장래에 어떤 다른 곳에서 환생할 생각을 하기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충실히 살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삶을 위해 바둥거리고 참을성 있게 역경을 헤쳐 나갈 만큼 삶에 애착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자살을 룰렛이나 복권 같은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사람들은 더 멋진 삶을 기대하고, 행운의 번호가 얼마든지 있는 천국을 향해 떠나곤 했다.
정부가 생각해 낸 것은 고작 (생명 진흥청)을 신설하는 일이었다. 뤼생데르는 뛰어난 광고업자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이승을 떠나기보다는 자기들의 삶에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듯 한 슬로건과 광고 문안을 만들게 했다.
2000년대 이전 사람들은 그런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에 삶이라고 하는 더 기본적이고 더 자연적이고 더 편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광고를 해야 하다니! 그런 상황이 올 줄 그 누가 알았으리.
268. 공익 광고
삶은 풍요로운 감동의 시간입니다. 스무 살 난 대학생, 쉬잔 양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삶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어요. 삶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어요. 제 부모님이나, 삼촌, 조부모, 그리고 망친 삶을 부둥켜안고 사는 친척들을 볼 때마다 한심한 생각이 들곤 했지요. 어떻게 쭈글쭈글해지고 넝마처럼 너덜해 지는 것을 견디며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분들이 참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요, 저는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마약과 술로 삶에서 도망쳐 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마약은 나를 병들게 했고 술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러고 나니 삶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더군요.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떠나기 전에 세계 일주나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그래서 저는 세계 일주를 떠났지요. 여행을 하면서 산다는 게 대단히 멋진 일임을 깨달았어요. 식물도 살고, 동물도 살고, 심지어 돌들도 살고 있어요, (나라고 못 살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이제 저는 제가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망설이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곤 해요: (자, 얘들아, 너희들도 세계 일주를 해보렴. 그러면 삶이 더 오랫동안 유행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이상은 (생명 진흥청)에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269.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세상이 완전히 미쳐가고 있습니다! 힘이 있다고 자만에 빠질 상황이 아닙니다. 귀측의 실수를 인정해야 합니다. 귀측의 관용주의가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아주 심한 해악을 끼치고 있습니다.
관계 부서의 회신
당신들은 두려움 때문에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침착한 태도를 견지하기 바랍니다. 특히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270. 일본 신화
우리는 모래알일 뿐이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있네.
우리는 모래톱에 있는 모래알과 같네.
하지만 모래알이 없이는 모래톱도 있을 수 없다네.
- 와카(화가: 화할 화, 노래 가)(주109)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71. 자살, 그 엄청난 실수
(생명 진흥청)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성과는 보잘 것이 없었다. 결국 사회에 만연한 자살 풍조를 일거에 몰아내는 데는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른바 랑베르 사건이다.
랑베르 사건은 어느 일요일 우리의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에서 벌어졌다. 우리는 이따금 우리와 친한 사람들에게 타나토드롬의 이륙용 의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곤 했다. 랑베르 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륙용 의자를 한번 사용해 보고 싶다고 하기에 우리는 선뜻 허락했다. 그는 우리가 즐겨 찾는 타이 식당의 주인이었으므로 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의자에 앉자, 우리는 기계 장치를 조정하였다. 그는 정해진 방식대로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하고 초를 센 다음, 스위치를 눌렀다.
그것까지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이상한 일은 그가 돌아왔을 때 일어났다. 랑베르 씨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또 다른 장 브레송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이 식당 주인의 온화한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랑베르 씨가 스티븐슨의 소설에 나오는 지킬 박사처럼 또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우리 앞에 있던 것은 랑베르 씨가 줄곧 감춰 온 하이드 씨의 얼굴이었다.
"랑베르 씨,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아, 아, 네.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걸요. 이렇게 좋은 기분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영계를 구경하셨나요?"
아망딘이 물었다.
"아, 아, 네. 구경했어요. 정말 대단히 흥미로운 곳이더군요."
목소리와 생김새는 예전과 같았지만, 나는 그가 옛날의 랑베르 씨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랑베르 씨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의 눈길에는 사악한 기색마저 어려 있었다. 그는 요리에 관한 것을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자기의 전문 요리인 꿀풀 향이 나는 국수 요리법조차 잊어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요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식당을 팔아 버리고 식당업에서 손을 떼었다. 옛날에 그토록 사이좋게 지내던 단골손님들이 어디에 가서 밥을 먹든 그런 것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투였다. 그는 파리를 떠났고, 그 이후로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사건을 겪고 나서 나는 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는 다른 타나토드롬 사람들과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비슷한 경우를 이미 접한 적이 있다고 했다. 지킬 박사 신드롬이라는 이름만 안 붙였을 뿐, 그들도 나처럼 중후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영상 회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인도 타나토드롬의 책임자인 라자와 씨가 한 가지 설명을 내놓았다. 신비주의적이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다.
"그 현상은 자살자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지난 심판 때 결정된 수명을 다 채우기 전에 고의적으로 자기 목숨을 끊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떠돌이 넋이 됩니다. 그 넋은 땅 위를 날면서 남아 있는 수명을 채우기 위해 자기가 깃들일 수 있는 육신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비어 있는 육신을 찾아내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살자들의 넋이 수천 년 전부터 허공을 떠돌고 있습니다.
산 사람들은 그 떠돌이 넋들을 대개 (유령)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넋들은 너무나 비참하고 처량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일로 낙을 삼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들이 아직 약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밤에 벽을 두드리고 마루 쪽을 들어올리고 샹들리에를 흔들어서, 겁쟁이들과 순진한 사람들을 두려움을 떨게 합니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떠돌이 넋들이 갑작스럽게 비와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힘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대체로 미미하고, 두려움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가 십상입니다."
세네갈의 다카르 타나토드롬 소장이 나섰다.
"우리는 그것을 악령이라고 부르죠."
아비장(주110)의 책임자는 서아프리카 인들의 용어를 그대로 소개했다.
"우리말로는 블롤로스라고 합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블롤로스 비안스, 여자의 경우에는 블롤로스 블라스라고 하지요."
로스앤젤레스의 타나토노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날처럼 자살이 성행하다가는, 육신을 찾아 떠도는 유령들 때문에 대기가 포화 상태가 되겠군요."
라자와 씨가 설명을 계속했다.
"산 사람이 명상을 하거나 영계 탐사에 나서면, 한동안 자기 육체를 돌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 틈을 타서 떠돌이 넋이 그 육체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할 말을 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숱하게 영계를 비행했는데,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썼던 것인가! 그보다 더욱 고약한 일은, 영계로 떠나는 관광객들 때문에 수많은 유령들이 자기 몫의 육체를 찾아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자살자는 죄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더욱 나은 삶을 기대하며 떠나지만,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떠돌이 생활일 뿐이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비어 있는 육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타나토드롬의 대표들이 각자 유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이 갑자기 바뀌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경각심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자살과 영계 탐사를 중지시켜야 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제안한 대로, 우리는 각자 자기 나라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믿어 준 것은 아니었다. 우리 발표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영계 탐사가 대중화하여 노동자들조차 일요일에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된 마당에, 우리끼리만 영계 스포츠를 즐기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중상에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경고를 했음에도 영계 여행사들은 일을 계속했다. 아무리 위험을 강조해도 그 위험은 자기들과 상관없다고 믿고 모험에 뛰어드는 무모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인가 보다.
하지만 육체를 벗어나 있는 동안 다른 영혼이 자기 육체를 가로챌 수 있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어떤 자가 자기 행세를 하면서, 자기 가정에 들어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아내와 잠자리까지 같이한다고 생각하니 영계로 떠날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영계 관광객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지만, 자살자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들의 사정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영계 관광객은 모험을 찾고 있었지만, 자살 후보자들은 안전과 행복을 찾고 있었다. 콩라드는 남아 있는 (오프사이드) 알약을 팔아 치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떠돌이 넋이 되어 육체를 찾아 헤매는 것, 그리하여 몇 세기가 걸릴지 모를 유랑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미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살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받은 삶은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질구레한 불행에 익숙해지는 법도 다시 배웠다.
지킬 박사 증후군에 대한 라자와 씨의 설명은 또 다른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주었다. 즉, 아이들이 질병이나 사고 때문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도 자살자들의 떠돌이 넋과 관계가 있을 수 있었다. 떠돌이 넋은 새로운 육체를 찾아 들어가 자기의 남은 수명을 살게 된다. 그런데, 예를 들어 예순여섯 살에 죽게 되어 있던 노인이 예순 살에 자살을 한 다음, 어떤 아기의 육신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여섯 살에 죽음을 맞게 된다.
어쨌든 자살은 자취를 감추었고, 카르마를 관리하는 것은 완전히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카르마의 관리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울은 침묵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스테파니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서 스테파니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스테파니아는 (악인) 무리를 자기 주위에 결집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이탈리아 여인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선과 악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며, 세상이 이토록 무미 건조하면 자살하려는 요구들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테파니아의 비호를 받으며, 불량배 한 무리가 검은 가죽 잠바 차림에 오토바이를 탄 채, 절도나 강도, 살인, 강간처럼 유행에 뒤진 행동들을 퍼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마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여전히 너무 컸다. 스테파니아는 추종자들을 모으는 데 애를 먹고 있었고, 그녀가 벌이는 운동은 고립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경찰관들은 스테파니아와 그녀의 부하들을 체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자제했다. 그들은 그런 행동이 일종의 권리 침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 패거리는 어차피 나중에 그들이 환생할 때 충분히 벌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라울과 나는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스테파니아는 악을 구현함으로써, 세상에 아직 위험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이게 했다. 말하자면, 스테파니아는 자기 카르마를 희생해서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위는 결국 순수한 자기 희생인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저주받을 스테파니아가 사실은 성인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이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 다시 천사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272. 공익 광고
벵스탁 씨는 마흔두 살의 독신 남자로서 모델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사랑하며 그 까닭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인생은 여자입니다. 여자들은 천차만별입니다. 입, 눈, 다리, 젖가슴, 몸냄새, 걸음걸이, 머리 모양, 목의 맵시가 여자마다 다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모든 여자들을 두루 경험해 보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이 짧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열두 번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백수를 누리면서 되도록 많은 여자를 겪어 보고 싶습니다. 인생에 여자라 존재하기 때문에, 저는 인생에 감사하고 여자들에게 감사합니다."
이상은 (생명 진흥청)에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273.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여전히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구 위험은 죽은 이들의 영혼과 우리 타나토노트들만 비행하던 초창기와는 성격이 달랐다. 지구를 떠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영계 관광객의 무리에 휩쓸려 버렸다. 관광객들은 자기들의 생명 줄을 안내자의 생명 줄에 묶은 채 날고 있었다. 광고는 여전히 많았다. 예전보다 오히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다음 생애에서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한다는 영화 광고가 있는가 하면, 고양이와 개를 위한 인스턴트 식품, 담배, 모험 여행 등에 관한 광고도 보였다. 현생으로 돌아가는 것의 장점을 홍보하는 (생명 진흥청)의 광고도 물론 있었다.
뤼생데르 대통령은 영계 탐사의 안전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알림판들을 설치한 바 있었다. 영계로 들어서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알림판은 터키의 회교 수도자가 쏘아 올린 것으로 그 내용은 이러했다.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지구에서 3만 광년 떨어진 곳입니다. 매우 위험한 곳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삼가 주십시오. 여러분의 생명 줄을 안내자의 것과 잘 엮어 주십시오.)
유엔에서 정한, 영계 탐사에 관한 원칙들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제1조: 천국은 어떤 나라, 어떤 종교에도 특별히 귀속하지 않는다.
제2조: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천국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제3조: 다른 타나토노트의 생명 줄을 자르는 행위를 금한다.
제4조: 타나토노트가 영계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지상에 있는 그의 육신이 책임을 진다.
제5조: 관광 타나토노트들은 실제로 죽어서 올라갈 때를 생각해서 천국의 청결이 유지되도록 힘써야 한다.
제6조: 일하고 있는 천사들을 방해해서는 아니 된다.
제7조: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환영을 가로채서는 아니 된다. 사람들은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각자 자기 경험에 대해 소유권을 갖는다.
제8조: 터널을 장식하는 광고물에 심령의 낙서를 붙이면 아니 된다.
제9조: 통과하는 영혼들에게 골탕을 먹일 목적으로 코마 장벽 뒤에 숨는 행위를 금한다.
제10조: 다른 영혼을 심판하고 있는 대천사들에게 말을 걸면 아니 된다.
제11조: 심판받고 있는 영혼을 편들거나 헐뜯을 목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금한다.
제12조: 천국은 유원지가 아니다. 자녀를 동반한 부모들은 자기들 생명 줄로 자녀를 붙들어 매고 비행해야 한다.
관광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미리 알려 주고 있었다. 첫 번째 코마 장벽에는 다음과 같은 알림판이 붙어 있었다.
(모흐 1입니다. 기억의 공격을 조심하십시오.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은 통과를 삼가해 주십시오. 자기 과거를 수용할 수 없는 분들은 안내자에게 묶여 있는 생명 줄을 풀고 육체로 되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경고가 있었음에도, 관광 타나토노트들은 그날 죽어 올라온 사람들과 함께 첫 번째 장벽 너머로 몰려들어갔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공격해 오자, 어떤 관광객들은 무람없이 달려들어 프로 레슬링 선수처럼 싸웠다. 그 천박한 꼴이라니! 그리스 관광객들은 자기들과 아무 상관 없는 기억 거품들을 살피면서 구경꾼 행세를 했다.
주위에는 광고가 널려 있었다. 과거의 잘못을 아직 돌이킬 여지가 있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뛰어난 정신 분석학자나 사설탐정을 소개하는 광고들이었다.
암흑계를 통과할 때마다 늘 그랬듯이, 나는 어린 시절의 교통사고, 형과 다툰 일, 펠릭스 케르보스의 죽음, 아망딘에 대해 품었던 열렬한 연정, 그리고 그밖에 내가 담담하게 참아 내지 못했던 사소한 사건들을 다시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 그다지 시달림을 받지 않았다. 과거를 만나는 일에 미립이 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모흐 2를 넘어 쾌락으로 가득 찬 적색계로 들어갔다. 각자 자기들 내부에 감추어 온 욕망의 환영을 만나는데, 어떤 자들은 너무나 혐오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적색계에 가면 갈수록 그곳이 여성 생식기의 따뜻하고 촉촉한 내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강해 졌다. 아망딘 같으면, 아마 자기가 남성 생식기 않에 들어와 있다고 느꼈으리라...
규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섹스 상품이나 스트립쇼, 포르노 비디오 따위와 관련된 광고들이 있었다. 자기의 난잡한 환상들을 밀어내면서, 아망딘은 검은 가죽옷을 입은 자기의 환영과 내가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나를 끌고 갔다. 어떤 여인이 자기가 나딘 켄트라고 소리치면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결혼한 몸이고 한 가족의 가장이니 나를 그냥 내버려 달라고 텔레파시로 울부짖었다. 그러자 나딘의 환영은 육덕 좋은 스테파니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들에 대해서 환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망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모흐 3까지 이끌고 갔다. 그곳에도 알림판이 있었다.
(주의! 여기는 모흐 3입니다. 여러분은 곧 주황색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참을성이 없는 분은 더 늦기 전에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주황색계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 3분에 불과했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간이 대여섯 시간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도처에 시계 회사들의 광고가 붙어 있었다. 그토록 법을 안 지킬 바에야 애써 만들 필요가 뭐 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스타나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도 예전 같은 감동이 일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곳을 빨리 벗어나려고 비행 속도를 높였다. 아무리 좋은 일도 되풀이되면 싫증이 나는 법이다.
시간이란 참으로 끔찍한 시련이다!
모흐 4가 나타났다.
(주의! 여기는 모흐 4입니다. 여러분은 곧 절대지의 천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모든 진리를 배울 자신이 없는 분은 통과를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유레카(주111)! 유레카!"
그리스 관광객들은 무척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마침내 모흐 6에 다다랐다.
(제7 천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서 모든 운명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블랙홀의 가장 깊은 곳에 와 있습니다. 심판 대천사들 앞에 출두하실 분들에게 멋진 환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일하고 있는 천사들을 방해하지 말 것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영혼을 심판하는 빛의 산 쪽으로 다가갔다. 천사들은 우리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관광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라울과 아망딘과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스 사람 몇몇이 질문을 했지만 천사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리스인들이 말했다.
"여기가 올림푸스가 맞죠? 그런데 제우스 신은 어딨어요?"
그 바보들은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천국엔 제우스나 주피터, 케찰코아틀, 토르, 오시리스 같은 으뜸 신이 없다. 천사들에겐 우두머리가 없다.
또 그들은 특정 언어로 된 이름이 아니라 모든 언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겐 특별한 국적이 없다. 그들은 모든 국적,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을 가지고 있다. 국수주의를 여전히 못 버리고 자기들의 신이 다른 신들보다 더 중요하다가 믿는 저 어리석음이라니!
그때 그리스 사람 하나가 갑자기 텔레파시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처음에 그 외침이 경탄이 소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 때문에 내지른 비명이었다.
"내 생명 줄이 끊어졌어!"
그의 안내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요. 아저씨 생명 줄은 우리와 단단히 묶여 있잖아요."
"아니야. 누군가 아래에서 그것을 잘라 버렸어."
그가 우는 소리를 했다.
그의 말은 영혼이 이곳에 나와 있는 동안 그의 육체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그의 생명 줄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묶여 있어서, 그는 여전히 동료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매듭을 풀기만 하면, 그 가엾은 영혼은 다음 환생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었다. 멀리, 다른 곳에서 자기가 죽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우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자마자 (사람 살려!) 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리스인 관광객 열여덟 명이 잇달아 자기들의 생명 줄이 끊어졌다는 비통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의 생명 줄 뭉치는 온전한 채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지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육체를 잃어버린 영혼이 되었다! 그들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영혼들의 행렬에 다같이 합류하였다.
육체는 그렇게 허약한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버려 두고 떠나는 일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라울과 아망딘과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우리는 여행 일정을 단축하고 재빨리 우리의 육체로 돌아왔다.
저녁 신문들은 그리스인들을 살해한 자들이 스테파니아와 그녀의 무리라고 보도했다. 스테파니아는 주요 언론사에 배포한 성명을 통해, 이제부터는 타나토드롬들을 공격할 것이며, 외계 여행을 좋아하는 자들은 완전히 영계를 보내 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녀의 의도는 죽음의 공포와 신비를 되찾아 죽음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거창한 계획이었다!
기사를 읽고 나서 라울이 큰소리로 말했다.
"스테파니아 말이 옳아. 우리는 너무 멀리 갔어."
"자네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가장 먼저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한 건 자네야. 그리고 우린 그 비밀을 알아냈어.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를 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라울의 생각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펜트하우스 안을 성큼성큼 걸어다니다가 이렇게 말했다.
"무지 속에 그냥 머물러 있을 걸 그랬어. 원자 폭탄 제조에 지도자적 역할을 한 오펜하이머도 그걸 만들어 놓고 후회했지."
"뒤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행동할 때야."
아망딘과 로즈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라울의 어조가 갑자기 그의 아내와 똑같은 말투로 바뀌었다.
"우린 자살 풍조를 끝장내는 데 성공했어. 하지만 우리 주위를 좀 둘러봐. 사람들이 얼마나 나긋나긋한지 보란 말일세. 아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전쟁, 범죄, 간통 따위는 자취를 감추었고, 한순간의 열정도 찾아보기가 어려워. 오로지 스테파니아만이 용기를 보여 주고 있어."
라울의 말대로 세상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따분한 건 사실이었다. 나는 권태와 싸우기 위해 영계 탐사에 뛰어들었는데, 영계 탐사는 온 세상을 따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유리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는데, 포스터를 몰래 붙이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포스터에는 스테파니아의 사진이 들어있었고, 빨갛고 굵은 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악을 재건하기 위해 단결하자!)
274. 장미 십자단(주112) 철학
우리는 우리의 욕망 때문에 삶에 집착한다. 우리 주위에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되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끌어당기지는 않는 정신적인 분위기는 우리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욕망의 부정적인 측면인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욕망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욕망 이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과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욕망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욕망 이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삶의 씨줄을 형성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행동은 그저 욕망이 구체화된 것일 뿐이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감정의 매듭을 풀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 막스 하이델, "장미 십자단의 우주 생성론"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75. 영혼을 훔치는 여자
로즈와 내가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간 것은 프레디의 비명 때문이었다.
프레디가 열심히 보고 있던 푸에르토리코 만화 영화가 갑자기 중단된 채, 화면에는 흑백의 띠들이 구불거리고 있었다.
"아빠, 고장이에요."
그건 고장이 아니었다. 흑백의 띠가 사라지고 이미 스테파니아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스테파니아가 53번 채널을 이용해 불법 방송을 하는군요.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 가장 인기 있는 채널을 용케도 가로챘군요."
아내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는 제가 좋아하는 프로를 빼앗긴 것에 분개하는 아들을 조용히 시키고, 우리 친구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소리를 키웠다.
장소는 어떤 숲속이었다. 스테파니아는 풀이 무성한 둔덕에 올라서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예전에 그토록 명랑하던 그녀의 얼굴이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여러분,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자기의 업을 더럽힐 각오를 하고 악에 헌신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전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위팔에 문신을 새겨 넣은 가죽 조끼 차림의 청년들과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처녀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스테파니아는 수백만 명의 시청자들과 자기 추종자들에게 동시에 연설을 하는 셈이었다.
"세계는 그 자체로만 보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이나 신, 또는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제하는 어떤 원리는 우리에게 보상도 벌도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잘못은 오직 하나, 무지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온통 혐오스러운 일과 잔학한 행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 역사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것 역시 우리가 할 일입니다. 고통 속에서 얻은 깨달음이 즐거움 속에서 배운 교훈보다 언제나 더 효과적입니다. 지구는 경험의 장소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시간에 여러분이 심판 받는 것은 여러분의 모든 경험에 대해서입니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에게 주었던 모든 즐거움과 모든 고통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승에서 행한 모든 행위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순간에 대천사들은 여러분이 저지른 행동 가운데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대천사들은 여러분에게 화를 내거나 여러분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여러분의 어리석음만을 비웃을 것입니다. 보르지아(주113) 가문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30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간에 이탈리아는 전쟁, 공포, 살인, 독살 따위를 경험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와 르네상스라는 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에 비해, 스위스는 어떻습니까? 스위스 인들은 5세기 동안 평화와 민주주의와 형제애를 향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낸 게 무엇입니까? 그들은 끝없는 권태와 시간을 정확하게 재려고 시계를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태초부터 선은 악과, 아름다움은 추함과, 진실은 거짓과, 양(陽)은 음(陰)과 투쟁해 왔습니다. 지식과 진보는 언제나 바로 그 끊임없는 대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온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영계에 관한 지속이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겹쳐서, 사람들은 이제 삶의 목적을 오직 한 가지 책무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책무란 바로 선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 악이 없으면 안 됩니다. 악이 없으면 만물이 평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점을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결같이 불량해 보이는 쉰 명가량의 젊은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악을 되살릴 것이다! 우리는 악을 되살릴 것이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인류에게 현실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되돌려 주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인 관광객 한 무리를 저승으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스테파니아의 검은 눈이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기 명분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그녀 옆으로 뛰어올랐다.
"위협과 폭력으로 우리는 타나토노트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영계 비행에 나서려는 자들은 비행을 떠나기 전에 우리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 관광객들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왁자한 웃음과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몇몇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부르릉거렸다.
눈시울은 검게, 입술은 빨갛게 칠한 펑크 풍의 여자가 소란을 가라앉히며 소리쳤다.
"세상이 온통 타나토드롬 천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악을 모든 곳에 퍼뜨려야 합니다. 세상의 이 밍밍한 분위기를 끝장내야 합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무슨 제안인가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드 록 음악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거기에 가면 이제 클래식 음악이나 명상 음악밖에 들을 수가 없어요. 라디오 방송들이 특히 더해요. 정말 지긋지긋해요. 끝내 주는 록 콘서트를 열었으면 좋겠어요."
"록! 록!"
악의 전사들이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여러분, 록 음악을 원하십니까? 제가 지금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카메라에 잡혔다. 수염이 지저분하고 이마에 손수건을 두른 사내가 오토바이 위에 올라서더니, 담배를 입에 문 채 카세트테이프를 흔들었다. AC-DC라는 그룹 이름과 대표곡 이름이 카세트에 적혀 있었다. (지옥행 고속 도로)라는 아주 오래된 곡이었다. 그의 오토바이에는 카세트테이프 리코더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망의 눈으로 그 카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카세트를 밀어 넣고 볼륨을 최대로 높이자,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 같이 몸을 뒤흔들었다. 미개 부족의 집단무를 보는 듯했다. 그들은 스테파니아 추장을 빙 둘러싸고 그녀의 색정적인 동작을 흉내내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분위기가 한층 더 고조되었다. 오로지 자기들만이 세상 사람들을 각성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마냥 흥분하고 있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스테파니아가 소리쳤다.
"우리가 살인을 하는 것은 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수염을 기른 사내가 부르짖었다.
"우리가 하드 록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펑크 풍의 여자가 외쳤다.
스테파니아가 숨을 헐떡이면서 다시 소리쳤다.
"신은 선이면서 동시에 악입니다. 신은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천국에서 사탄을 만났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탄은 아주 존경할 만한 존재입니다. 빌리 조, 음악을 멈춰."
오토바이의 주인은 즉시 명령에 따랐다. 사람들은 한창 황홀감에 젖어 춤을 추고 있었음에도 음악이 끊어진 것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모두들 스테파니아를 대단히 존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도 그들을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하드 록뿐이 아닙니다. 술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술을 마시는 것은 엄두조차 못 내고 있습니다. 술김에 나쁜 짓이라도 하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모든 주류업체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밀주 공장을 만들어서 세상에 술을 퍼뜨립시다."
스테파니아가 가끔이라도 라울을 만났더라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 라울은 어디에 가면 술을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쨌든 악의 숭배자들은 스테파니아의 제안을 대단히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음주벽을 세상에 널리 퍼뜨린다는 생각이 마음에 꼭 드는 모양이었다. 알콜 중독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 아내와 자식들을 구타하는 남자들이 다시 나타날 것이고, 애먼 사람들을 치어 죽이는 음주 운전자들도 생길 거였다. 억압되어 있던 욕구가 터져 나오면서 강간 같은 범죄가 되살아날 것은 물론이었다. 술은 선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무너뜨리는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될 거였다.
"좋습니다. 술, 그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술 말고 또 뭐가 있을까요..."
"마약이오."
록 음악 애호가인 빌리 조가 스테파니아의 마음을 얼른 헤아리고 말했다.
"마약, 그거 좋지!"
스테파니아는 그렇게 맞장구를 치고 말을 이었다.
"마약 공급망을 다시 만듭시다. 변두리 지역에 아직 재고가 남아 있을 겁니다. 옛날 두목들에게 정중하게 부탁하면 코카인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금단 상태에 있는 중독자들의 도움으로써 자기들이 선행을 하고 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뒤쪽에서 AC-DC의 격렬한 음악이 다시 울려 퍼졌다. 스테파니아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자기 얘기를 요약했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셨을 겁니다. 새로운 동지들을 규합하십시오. 타나토노트들을 죽이십시오. 술과 마약을 퍼뜨리십시오.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선과 악 사이에 다시 평형이 이루어지도록 만듭시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스테파니아는 시청자들을 의식한 듯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침착한 음성으로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여러분, 악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에 전율하든가 아니면 우리에게로 와서 하나가 되십시오."
안개 같은 것이 화면을 뒤덮더니, 프레디 2세가 보던 만화 영화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276.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우리는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운동입니다. 타나토노트들을 제거하는 데 우리가 굳이 스테파니아 키켈리를 이용할 까닭이 없습니다. 너무 오래 지속된 관용주의에 대한 당연한 반발일 뿐입니다.
관계 부서의 회신
귀측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개방 정책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277. 조로아스터교 신화
죽은 이들 다섯 가운데 하나가 땅에서 솟아오르리라. 그들은 육신을 지닐 것이고, 죽던 때의 모습 그대로, 숨을 거뒀던 그 장소에서 일어나리라.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아내와 남편, 스승과 제자, 명령하는 자와 따르는 자 그렇게 둘씩둘씩 솟아나리라.
일어나라, 육체를 가진 자들이여, 야사트를 존중했고 이 땅에서 죽었던 그대들이여!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78. 스테파니아가 이룬 것
스테파니아는 추종자들을 모으기 위해 열정적으로 호소하고 달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악의 힘을 소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모인 악의 숭배자들은 백 명을 넘지 않았다. 그들은 일반의 무관심 속에서 악을 퍼뜨리는 외로운 싸움을 힘겹게 전개했다.
그들은 수천 장의 전단을 거리에 뿌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들을 주워서는 읽지도 않고 가장 가까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도시의 청결에 기여한 공으로 손쉽게 선업 점수를 얻고 있었다.
몇몇 신문에서 전단의 원문을 그대로 보도했지만, 그 효과는 여전히 미미했다. 그렇다고 그 내용에 흥미로운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진짜 죄악인가? 살인인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은 태초부터 계속되어왔다. 만일 어떤 신이든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인간들끼리 서로 죽이는 행위를 허용해 왔던 셈이다. 전쟁은 인구 과밀을 막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신은 어쩌면 인간들 때문에 다른 생물 종들이 괴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는지도 모른다.
훔치는 것이 죄인가? 어떤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속하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산이 어떤 한 사람에게 귀속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신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 죄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아주 지혜로운 실체로 존재할 것이다. 그런 신에게 오만함이 있을 리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자기를 숭배하는 자와 자기를 모욕하는 자를 비웃을 것이다.
성스러운 것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죄일까? 이 세상에 성스러운 것은 없다. 신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사제들이야말로 오만의 죄를 벌하고 있다. 어떤 장소, 어떤 것이 성스럽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주장일 뿐이다.
천사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천사들의 위에는 그들보다 더 많은 권능을 가진 존재가 있다. 원한다면 그 존재를 신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 신은 선행과 친절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세계인들이여, 깨어나라! 선행,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권태로운 세상에 대한 분노 속에서, 스테파니아는 옛날의 애독서인 "바르도 토돌"을 내던지고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추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처럼 그녀도 모순 속에서 세계의 참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영구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자기 나름의 대장정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기꺼이 그 (위대한 조타수)에 비교하고 있었다. 모순이 사상의 동력이라는 마오의 가르침을 스타파니아 키켈리는 인류를 위해 악에 의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말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마오가 붉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스테파니아는 검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군대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 즐길수록 그만큼 이득을 보는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죗값을 치르더라도 우선은 이승에서 악행을 저지르며 기쁨을 누리는 편이 낫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들 덕분에 세상이 덜 따분해 진 건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일상에 흥취를 불어넣어 줄 그들의 다음 행동을 고대하곤 했다. 그들의 이타적인 용기를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악인들) 덕분에 약간의 선업 점수를 거의 공짜로 얻기도 했다. 보낼 만한 옷가지들은 이미 다 구호 단체에 보낸 마당이라, 그런 것으로 선업 점수를 따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어쩌다가 다락방에서 마약이나 술이나 무기를 찾아낸 사람들은 그것들을 곧바로 스테파니아의 추종자들에게 보내곤 했다.
스테파니아 패거리가 영계 관광객들을 수없이 많이 죽였음에도, 영계 여행사들은 오히려 더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많은 선업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던 탓이다.
279. 뤼생데르의 죽음
뤼생데르 대통령이 자기 삶을 끝내기로 결심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비가 와서 차도가 거울처럼 번들거리는 어느 날, 그는 베란다 난간을 넘어 뛰어내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된 그를 길 가던 사람들이 몽파르나스 타워(주115) 아래에서 발견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자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날씨가 궂은 날에는 더 그렇다. 게다가 창문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자기 뜻을 못 이루고 살아난 사람도 많다. 그들은 대개 5 층이나 6 층 정도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살아나는 경우에도 자동차의 보닛이나 쓰레기 더뮈 위에 떨어져 아무 탈 없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리뼈가 으스러지거나 하반신이 마비되어 평생 훨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뤼생데르는 행운이 따를 여지를 일체 남기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59층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을 확실하고 신속하게 끝내기 위해 머리를 아래로 하는 고공 낙하 자세를 취했다.
그는 왜 자살을 했던 것일까? 당시에 그는 정치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정치력과 관련된 지표들이 모두 좋은 상태에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스테파니아처럼 당시의 무기력한 사회에 갑자기 환멸을 느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자신이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던 만큼 그의 혐오감도 나달랐을 것이다. 그는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떠돌이 넋이 되었던 것이리라.
고인이 서재 위에 올려놓은 유서를 어떤 청소부가 발견했다. 우리의 친구 뤼생데르는 이렇게 썼다.
(나는 비로소 명예가 다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불멸성, 그건 권태로운 것이다. 나는 모든 역사책과 사전에서 내 이름이 빠지기를 바란다. 내 동상 따위는 세우지 말았으면 좋겠고, 거리에 내 이름이 들어간 표지판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허식이나 행렬이 없는 장례식을 원한다. 완충물을 댄 관에 넣어져 대리석 무덤 속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꽃다발도 화환도 눈물도 장송곡도 조사도 원치 않는다. 나는 나무 밑에 묻히고 싶다. 내 존재를 표시하는 묘비 따위는 필요치 않다. 곧바로 흙으로 돌아가서 나무뿌리에 뚫리고 민달팽이와 지렁이와 빈대에 갉아 먹히고 싶다. 그럼으로써 비록 자살한 것 때문에 내 넋은 떠돌아가 될지라도, 내 육신은 기름진 부식토로 환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살아 있던 동안에 내 육신은 아무것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기름진 퇴비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오래전에 삶의 의미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그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이든 부랑자든, 왕이든 노예든 우리는 똑같다. 우리는 모두 우주 속에 버려진 작은 모래알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알의 모래에 지나지 않았던 나에게 특별한 대우가 주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한 알의 모래일 뿐이었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모래알이 없이는 백사장도 없다는 것을.)
내무부 장관은 그 유서가 민심에 심대한 악영향을 주리라고 판단하고, 즉시 그것을 태워 버렸다.
뤼생데르 대통령의 죽음은 영계 탐사 운동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의 소원과는 달리 그의 장례식은 웅장하게 치러졌고, 그 뒤에 사람들은 역사 교과서의 몇 장(글 장)을 그에게 할애했다. 시청 광장에는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는 뤼생데르가 세운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을 이제부터 뤼셍데르 타나토드롬으로 고쳐 부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타나토노트 훈장은 뤼생데르 훈장이 되었다. 전국의 도시와 마을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무수히 생겨났다.
자기 삶을 선택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기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리샤를 픽퓌가 차기 대통령으로 무난히 선출되었다. 그의 첫 번째 연설은 뤼생데르에 대한 찬사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영계 탐사의 위대한 선구자인 뤼생데르의 업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연설이 끝날 무렵에 라울은 자기의 재혼 계획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스테파니아가 그의 삶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갔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80. 공익 광고
텔레비전 화면에 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가 나타났다. 나이는 마흔 살쯤 되어 보이고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그가 칠판 앞에서 설명을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필리피니 교수입니다. 과학자죠. 저는 오랫동안 생명에 대해서 연구해 왔습니다. 이 화학식을 보십시오. (교수가 들고 있던 자로 칠판을 가리킨다). 이것은 수소의 화학식입니다. 원자 하나에 전자 하나,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은 데옥시리보 핵산, 즉DNA의 화학식입니다. 좀 복잡하지요? 이게 바로 생명입니다. 우주에 이런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주의 99%는 보잘것없는 수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DNA, 즉 생명은 0.00000001%밖에 안됩니다. 우리 인간도 이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시면 안 됩니다.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을 존중할 수 없으면, 여러분 내부에 있는 화학적인 생명을 존중하십시오."
이상은 (생명 진흥청)에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281. 메소포타미아 신화
그대 길가메슈여
언제나 배가 가득하도록 먹고
밤낮으로 즐겁게 지낼지라.
그대 인생의 하루하루를
열락에 찬 축제로 만들라.
의복을 정결하고 화사케 하고
얼굴과 몸을 깨끗하게 씻을지라
그대 손을 잡는 아이를 어루만져 주고
품에 안긴 아내에게 기쁨을 주라
인간이 지닌 권리란 그저 그런 것뿐일지니.
- "길가메슈 서사시"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82. 재혼
라울이 재혼 상대로 선택한 사람은 아망딘이었다. 뜻밖의 결정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들과 함께 펜트하우스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두 사람이 다정한 눈짓을 주고받거나 손을 잡거나 입맞춤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밤중에 두 사람이 자기들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닫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술에 젖어 살면서 스테파니아를 끊임없이 울렸던 그가 아망딘하고 결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재혼은 성사되었고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아홉 달 위에 아망딘은 딸아이를 낳았다. 그 부부는 아이에게 팽프러넬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라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부모가 만들어 놓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늘 어둡게 살았던 그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에 따라 자기 부모에 대한 그의 생각도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그의 집 거실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울은 갑자기 냉철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죽음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 남자에게서 왜 등을 돌렸는지 그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아버지를 미워했고, 아버지를 속였지. 하지만 어머니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건 아니야. 아버지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신거야. 아버지는 저승에만 관심을 갖다가 이승에서 당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달으신 거지."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팽프러넬이 악을 쓰며 울었다. 그것이 세계를 향해 아이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자기가 보살핌을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거나, 자기가 요구하는 장난감을 어른들이 얼른 내밀어 주지 않을 때마다 아이는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아망딘이 아이를 달래러 갔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라울은 자신이 최근에 갖게 된 생각을
들려주었다.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네. 그분들이 자기에게 무슨 잘못을 하셨든 간에, 모든 것을 용서해 드리는 거지. 그러고 나서, 그분들을 좀 더 일찍 용서해 드리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는 거야."
라울이 옛날을 회상하며 덧붙였다.
"어릴 때는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 철없이 부모님을 원망하곤 했어. 어머니가 나와 놀아 주지 않고 설거지를 하고 계신 것도 견딜 수가 없었지. (잠깐만, 기다려) 하고 계속 딴청을 피우시는 어머니가 미웠지. 어머니가 내 응석을 안 받아 주시고 내 요구를 외면하실 때마다 분한 생각이 들곤 했지. 그 분을 풀기 위해 어머니의 사랑을 모른 체했고, 내 사랑을 일부러
표현하지 않았지.)
따지고 보면 자기 부모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린 시절의 내 태도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팽프러넬은 또 악을 쓰며 울었다. 이번에는 라울이 달려갔다. 라울이 아이를 안아 올리자, 아이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언젠가는 저 아이도 자기 부모가 좀더 일찍 달려오지 않은 일과 온전한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은 것과 세상의 모든 장난감을 사주지 않은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인지.
283. 공익 광고
껑충한 젊은이 하나가 가죽으로 된 안락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다.
"안녕하십니까? 전 토마 프릴리노라고 해요. 전 친구들과 어울려 사는 걸 좋아하죠. 삶이란 그것만으로도 좋을 겁니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서 무얼 하느냐고요? 음, 여러 가지예요. 그중에서도 특히 카드놀이를 많이 하지요. 저는 친구들을 사랑하고, 카드놀이를 좋아하죠. 그리고 물론 삶도 사랑합니다. 삶이 없으면 카드놀이도 친구들도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어쨌든 산다는 건 좋은 겁니다."
이상은 (생명 진흥청)에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284. 베다 철학
사람에게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이 있고,
세상 구석구석을 누비는
천 개의 다리가 있다.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현세를 벗어난다.
사람은 이 우주 그 자체이며
과거이고 미래이다.
사람은 멸하지 않는 세계의 주인이다.
그는 양식이 없이도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 "리그 베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85. 꿈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어찌나 생생하고 현실적이고 논리적이고 끔찍했던지, 나는 깨어나자마자 그것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그날 아침에 내가 기록한 것 그대로이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지구에 내려와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한다. 간결하고 직선적인 연설이다. 세계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바람에, 자기들이 하루에 심판하는 영혼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가 70억이니 그럴 만도 하다. 대천사 셋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해도 모든 영혼을 심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황 색계가 대기 중인 영혼들로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고, 기록은 꼼꼼히 검토할 수가 없어 그릇된 심판을 내리는 일조차 있었다는 것이다. 현자가 불량배로 환생했는가 하면 개차반 같은 건달이 환생 순환을 너무 일찍 끝내고 순수한 정령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즉 출생률을 알맞게 조절하든가 아니면 사람들을 파견해서 자기들의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산 사람들이 육체를 벗어나 영계 탐사를 하는 마당이니, 거기에 머물면서 자기들을 도와 영혼들의 카르마 기록을 조사하고 관리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국가 원수들이 긴급회의를 열어 그 문제를 숙의한다. 그들은 엄격한 인구 억제 정책을 강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천국에 공무원들의 영혼을 파견하는 두 번째 방안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무원들이 생겨나게 된다. 서류나 뒤적이던 샌님들이 대천사들을 돕는 영계의 일꾼으로 바뀌어 매일 아침 이륙용 의자에 앉는다. 다른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교외선 국철을 타고 출근하는 시간에 그들은 그렇게 영계의 일터로 간다. 천사들이 마련해 준 사무실에서 그들은 고객들의 기록을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공무원들은 모두 비밀을 엄수하겠다고 선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에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처음으로 과오를 범한다. 그의 잘못은, 자기 아들의 기록을 보고 난 뒤에, 자기 아들에게 반 친구들을 계속 괴롭히면 나중에 민달팽이로 환생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은 서약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위중한 과오였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공무원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서 영계 공무원들이 자꾸 늘어난다. 그렇게 수가 많아지니 배임 사고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런 사고가 생긴다. 나쁜 짓을 계속하는 아들 때문에 속을 끓이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카르마를 고치기 위해 아들의 기록에 손을 댄다. 100점을 더한 것이다. 재빨리 해치운 일이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가족의 카르마를 고치는 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가족 다음엔 친구가 있고, 그다음엔 그 친구의 친구가 있다. 어느 사회에나 정보가 유난히 빠른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영계 공무원들의 보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이 영계 공무원들에게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내민다. 돈이 많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 돈이 있으면 좋은 환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좋은 환생을 따내기 위한 검은 거래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부자들은 돈을 내고 자기들의 카르마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자기들이 얼마나 더 죄를 지어도 좋은지를 알아낸다. 그들은 자기들이 넉넉한 가정에서 훌륭한 건강 상태로 환생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장받는다. 그럼으로써 부자들은 내생에서도 여전히 부유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된다. 그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내생에서도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
이쯤 되면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지독한 악몽이다. 영계 탐사 덕분에 거부가 된 새로운 부르주아들, 즉 타나토노크라트가 출현한 것이다.
영계 공무원을 매수할 만한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승에서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더 좋은 환생을 받기가 불가능해졌다. 옛날에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이 가장 무섭다. 가난한 사람들은 실패의 악순환을 벗어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그런 삶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오로지 돈을 위해 산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절도, 매춘, 사기, 살인, 마약 거래 등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선의 시대와는 정반대다. 모든 행위의 목적이 돈을 획득하는 데 있다.
우리 아들 프레디 2세는 학교 앞에서 불량배들에게 돈을 뜯겼고 아내는 슈퍼마켓에서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사라졌던 마피아가 다시 나타났다. 남의 돈을 가로채거나 상업적인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거리낌 없이 살인 전문가들을 고용한다. 돈이 있으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카르마는 결백하다. 그런데 무엇을 주저하리오?
세계가 완전히 돈의 지배를 받고 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온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고군 분투한다. 그러나 인간이 천국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그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천국의 일을 포기하면, 카르마를 관리하는 모든 책임이 다시 천사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70억이나 되는 지구의 거주자들을 더 이상 관리할 수가 없다.
결국 사람들은 갈수록 야만스러워지고 무지해 져 갈 뿐이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꿈에서 깨어났다. 전율이 일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는 걸까?
꿈은 천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의사 소통의 수단이다. 나는 천사들이 그 꿈을 통해서 내게 어떤 메시지를 남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도록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영계와 관련된 모든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입은 다음, 다른 사람들과 아침을 먹기 위해 카페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라울밖에 없었다. 프레디 2세는 벌써 학교에 갔고, 아망딘과 로즈는 쇼핑을 하러 나간 뒤였다.
카페의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자태가 자못 침착했다. 모든 깨달음을 얻고 자기 환생을 즐기는 고양이인 모양이었다. 행복한 짐승이로고. 나는 그 고양이가 아주 느긋한 성품을 가진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경찰관 한 명이 무슨 소린가를 지르며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
"당신네 타나토드롬을 그자들이 약탈하고 있어요!"
286. 유대교 신화
인간의 육체가 사지와 여러 등급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서로 작용과 반작용을 하면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듯이 거대한 세계도 피조물의 위계 구조로 이루어져 서로 적절한 작용과 반작용을 하면서 말 그대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한다.
- "조하르"
프랑시르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87.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에 대한 공격
그들은 악의 숭배자들이었다. 스테파니아가 그들에게 우리 타나토드롬을 파괴하라고 명령한 모양이었다. 1층 창문 너머로 그들이 야구방망이와 자전거 체인으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울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자네와 내가 저 바보들을 혼내 줄까?"
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올랐다. 라울과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시절에 라울은 어른 목소리를 흉내내어 악마 숭배자들과 맞선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우리 타나토드롬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과의 싸움 역시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게가 엉망진창이 되고, 영계 포스터가 찢기고, 티셔츠가 짓밟히고, 아망딘의 사진이 콧수염이나 음란한 그림으로 뒤덮이는 광경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는 문을 넘어갔다. 처음엔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라울은 거대한 포스터를 받치고 있던 기다란 쇠파이프를 빼내어 나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나는 라울과 내가 서로에게 화를 냈던 일이며, 라울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 잊었다. 우리는 옛날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무기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라울과 내가 다시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바보들을 상대로, 무기력감에 빠진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라울도 알루미늄 파이프 하나를 잡았다. 1층에는 험상궂게 생긴 불량배 두 사람이 있었다. 몸에는 흉칙한 문신이 가득하고 머리털과 수염이 텁수룩한 자들이 역겨운 냄새를 진동시켰다.
그중의 하나는 영계 지도가 들어있는 스카프에 칼질을 해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가장 인기 있는 천사 인형을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무슨 짓들이냐! 당장 그만두지 못해!"
라울이 벽력같은 고함을 쳤다.
그자들은 우리의 느닷없는 출현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그토록 선량한 세계에서 자기들의 난폭한 행위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믿고 있었다. 경찰과 군인들마저 그들을 건드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들을 이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울의 제지를 받고 잠시 얼떨떨해하던 그자들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둘 중에 키가 더 큰 자가 미소까지 지어 가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발로 내 아랫배를 걷어찼다. 경계심을 푼 게 화근이었다. 악의 숭배자들은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고 명예 규범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허리를 꺾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바로 라울이 달려들어 그 신의 없는 자의 머리를 알루미늄 파이프로 때려 주었다. 다른 사내가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난투가 벌어졌다. 나는 다시 일어나 있는 힘껏 싸웠다. 내가 싸움을 제법 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아마 영계 전투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일 거였다. 누가 뭐래도 나는 기 무시무시한 하샤신의 산중 장로를 격퇴한 몸이다. 물론 아망딘의 도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펠릭스의 석고상을 들어올려 키가 큰 쪽의 머리 위로 던졌다. 그자가 털썩 무너져 내렸다. 고맙네, 펠릭스. 나머지 한 녀석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동료들의 지원을 얻으려고 위층으로 달아났다. 우리는 그자를 추격했다.
7층에서 우리는 건장한 체격의 네 사내와 마주쳤다. 그들은 도끼로 모든 걸 때려 부수며 즐거워했다. 이륙용 의자, 모니터 화면, 오실로스코프 따위가 이미 박살이 나 있었다.
넷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뚱뚱한 사내가 도끼를 들고 덤벼들었다. 라울은 급한 김에 알루미늄 파이프로 도끼를 막아 보려 했다. 라울의 무기가 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두 장한(씩씩할 장, 한수 한)이 내게 달려들었다.
라울은 도끼를 잡고 있는 뚱보의 손을 겨냥하고 발길질을 했다. 일격에 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뚱보가 이를 갈았다.
그가 라울의 머리를 낚아채어 죄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리호리하고 유연한 라울은 금방 빠져나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더 이상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내 상대자들이 덤벼들고 있었다. 우리는 사내아이처럼 바닥을 뒹굴며 싸웠다. 나는 그들의 머리털을 뽑았고, 그들은 길고 더러운 손톱으로 내 목을 긁었다. 판세가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이, 친구들, 내가 왔네!"
막심 빌랭이 우리를 도우러 달려온 것이다. 그는 쌍절곤을 들고 있었다. 그 동양의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지만 그의 지원은 시기적절했다. 어쨌든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경찰을 불러야겠어!"
내가 고함을 쳤다.
"소용 없을 거야. 그들은 결코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경관들마저 카르마를 더럽힐까 전전긍긍하는 판국일세."
한바탕의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얼굴을 향해서 물건들이 날아다니고, 야구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바람소리를 냈다. 그 사이사이에 몸을 때리는 둔탁한 주먹소리가 들렸다. 서로 때리고 조르는데 몰두하느라고 우리는 오토바이의 부르릉 소리가 들리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려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거뭇한 형체 하나가 문을 등지고 나타났다.
스테파니아였다.
"됐어, 그만해!"
그녀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녀가 9mm 구경 자동 권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손을 들었다.
산림 생활이 힘겨웠던지, 통통하던 스테파니아가 무척 날씬해져 있었다. 밤이나 다람쥐가 식량이 되지는 못할 테니, 그렇게 야윌 법도 하다. 스테파니아는 빨간 안감이 언뜻 내비치는 기다란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내가 적색 천계에서 만난 그녀의 환영처럼 멋진 모습이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반가움이 어려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이런 만남을 오래전부터 원했어요."
"그렇게 만나고 싶었으면 전화를 하지 그랬소? 당신이 만나자고 했으면 감히 내가 거절했겠소?"
라울이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스테파니아는 라울의 익살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닌 듯했다. 그녀의 뒤에 있는 불량배들이 불뚝거렸다.
그녀가 우두머리의 위엄을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내 얘길 잘 들어요."
"듣고 있소. 아주 귀담아듣고 있소."
"나와 이 사람들은 이 타나토드롬을 파괴하러 왔어요. 깊이깊이 생각해서 결정한 거예요. 우리가 세운 이 끔찍한 건물을 파괴해야겠어요."
"이자들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도끼를 휘두르며 우리와 싸웠던 뚱보가 뺨을 문지르며 제안했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안 돼. 이들은 내 친구야."
그녀의 어조가 단호했다.
그녀가 나에게 바싹 다가왔다.
"미카엘, 라울, 막심. 당신들은 내 친구예요. 당신들을 결코 해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여기 이것들은 다 없애 버릴 거예요. 자, 시작해!"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의 부하들이 다시 모든 것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륙용 의자를 뜯어 헤치고, 기계를 부수고, 플라스크를 박살냈다.
스테파니아는 여전히 우리에게 권총을 겨눈 채 애원조로 말했다.
"라울, 제발, 영계 탐사를 끝내요. 그러지 않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질 거예요."
라울이 손을 내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총을 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총알은 전혀 발사되지 않았고 라울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프레디 메예르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그들은 도리어 역정을 내겠지만, 그것 때문에라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라울과 스테파니아가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자 폭력이 난무하던 시간이 멎고 동화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펼쳐졌다. 너무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도끼를 휘두르던 뚱보는 그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모두가 얼떨떨해 하고 있는 사이에 그가 도끼를 다시 집어 들고 라울의 등을 찍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아무도 그를 말릴 겨를이 없었다.
라울은 기습을 받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더니 자기가 죽음을 맞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소를 지으면서 스테파니아를 꼬옥 껴안았다. 그는 그녀를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그녀를 찾아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죽음을 발견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달은 그였지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는 오로지 자기가 나눈 마지막 사랑의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에 지상에서 좀더 사랑을 하고 싶어했다.
라울이 무릎을 꿇었다. 도끼는 여전히 그의 등에 꽂혀 있었다.
"자, 빨리!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의 영혼이 영계에 다다르기 전에 다시 다니러 갑시다. 이륙 장비를 다시 작동시켜야 해요."
내가 그렇게 외치자 스테파니아는 울먹이는 소리로 나를 만류하였다.
"아니에요! 그냥 조용히 죽게 내버려 둬요."
그녀가 불량배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우리를 결박했다.
나는 손이 묶인 채로 라울의 곁으로 급히 나아갔다. 라울은 아직 완전히 떠난 게 아니었다. 그가 눈을 뜨고 나를 알아보다니 빙긋 웃으면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내가 분명히 알아들은 것은 이 말뿐이었다.
사슬이 풀리고
나는 내 안에 있던 모든 괴로움을 땅에 던져 버렸네.
오 위대한 오시리스여!
마침내 삶을 얻었나이다.
방금 이렇게 태어났나이다.
라울은 힘겹게 몸을 끌고 가서 스테파니아의 다리를 껴안았다. 마지막 경련이 일었다.
한시가 급한데,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스테파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라울이 (정상적으로) 죽게 내버려 두자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예전 같으면 우리는 그를 붙들어 두려고 했을 거였다. 영계 탐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장례를 치를 일을 생각했었다. 오늘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두는 일이 너무 흔해진 탓에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라울의 영혼은 이 (아래) 세상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위한 입맞춤을 남기고 떠났다.
정말 멋진 죽음이다! 나도 내 죽음을 그렇게 맞고 싶다. 돌이켜보면, 라울은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보험을 계승할 만큼 아버지를 사랑했고, 자기에게 충실한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은 어머니를 용서할 만큼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책을 사랑했고 또, 나를 자기의 모험에 끌어들일 만큼 나를 사랑했다. 그는 아망딘을 사랑했고, 스테파니아를 사랑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환생을 거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삶은 대개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메예르는 말했다.
스테파니아는 라울의 시신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주위에 있는 불량배들은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악을 추종하는 자들의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들은 파괴 행위가 중단된 것이 아쉽다는 듯 팔을 건들거리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자, 갑시다."
스테파니아가 명령을 내렸다. 오토바이들의 연속적인 폭음이 들렸다. 악의 숭배자들은 그렇게 요란한 소음을 남기며 사라져 갔다.
나는 내 친구의 유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영혼은 벌써 육체를 벗어났을 것 같았다. 내 앞에 놓인 것은 더 이상 영혼이 돌아올 수 없는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다시 데려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의 영혼은 벌써 주황색계에 들어가 수십억 명의 사자들 속에 섞였을 거였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할 터였다.
라울의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임을 확인하면서, 나는 라울이 나의 형제임을 깨달았다. 라울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형이었다.
사악한 코요테가 달을 보고 울부짖듯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우우우. 그러나 그것이 고통을 표현하는 나의 유일한 방식임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을 때는 코요테처럼 울부짖을 수 있어야 하고,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288. 역사 교과서
영계 탐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 중 하나인 막심 빌랭이 2068년에 이런 말을 했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다.)
그것은 한 세기 전의 미국 철학자 우디 앨런에게 답하는 말이었다.
사실 불멸성보다 더 끔찍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되고 연장된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는 금방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게 시들하고 권태롭고 짜증스러울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사라지고 희망도 한계도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어느 하루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기계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능력 있는 통치자들은 영원한 지배자가 될지도 모르고, 절대로 늙지 않을 권력자들 때문에 모든 자유가 억압될지도 모른다. 자기 삶을 끝낼 자유조차 사라질지 누가 알겠는가.
불멸은 죽음보다 천 배나 더 나쁘다.
우리 육신이 늙는다는 것, 지상에서 우리가 보낼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 우리의 카르마가 혁신된다는 것, 우리가 받는 새로운 삶들이 저마다 경이와 실망, 기쁨과 슬픔, 관대함과 째째함으로 교직되어 있다는 것, 그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우리의 삶에 죽음은 꼭 있어야 할 요소다. 다행히 언젠가는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지 않은가!
"기초 강의용 영계 탐사의 역사"
289. 라울 라조르박의 영혼
가브리엘 대천사는 깨달은이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서 라울 라조르박의 영혼을 맞아들였다.
그가 영혼의 상태를 간단히 확인하면서 말했다.
"이번엔, 잠깐 다녀가는 게 아니라 진짜 올라온 거군요."
잠시 의견을 나눈 뒤에, 심판 대천사들은 깨달은이에게는 다음 삶을 위한 심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런 이들의 영혼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생을 결정하는 절차가 다르다는 거였다.
라파엘 대천사가 라울의 삶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당신은 전생들을 살면서 선업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등에 도끼를 맞고 그렇게 빨리 죽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선업 덕분에 당신이 원하는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었고 깨달은이까지 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 순수한 정령이 될 때는 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오만함 때문에 너무 많은 죄를 지었고, 음주벽에 빠졌고, 복수심을 품었어요. 그래도 당신이 깨달은이라는 점과 그런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능력을 생각해서 관습에 따라 우리의 심판권을 포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당신 스스로 다음 환생을 결정해야 해요."
라울은 대천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는 환생 순환을 끝내는 데 필요한 600점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오만함 때문에 그것을 그르친 최초의 영혼이었다.
"나는 나무로 환생하고 싶어요."
라울의 영혼이 자기 뜻을 알렸다.
"무엇으로 환생하겠다고요?"
가브리엘 대천사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나무로요."
라울이 단호하게 되풀이했다.
미가엘 대천사가 마음을 바꾸도록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정신은 광물에서 식물, 식물에서 동물,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보해 간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 그래요. 당신이 말하는 그런 종류의 역행은 지독한 악인에게나 어울리는 거예요. 나무는 당신에게 합당치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 있어요. 나 나름대로 냉정히 생각해서 그런 역행을 허용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나는 인간 세계의 소란스러움에 싫증을 느껴요. 동물도 너무 많이 움직여서 싫어요. 나는 식물의 고요함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에게는 그것이 역행이 아니라 평온을 되찾는 일이에요."
"당신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차피 당신의 내생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니까요."
가브리엘 대천사의 한숨을 쉬었다.
라울의 영혼이 활기를 띠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어떤 나무가 좋은지 나한테 권할 만한 것이 있으면 보여 주세요. 세상 어딘가에는 같은 종의 꽃 암술머리에 옮겨붙고 있는 주세요. 세상 어딘가에는 같은 종의 꽃 암술머리에 옮겨붙고 있는 데이지의 수꽃술 꽃가루들처럼 한창 꽃가루받이를 벌이고 있는 식물들이 있겠지요. 어떤 씨앗이나 덩이줄기나 비닐 줄기에 나를 들여보내 주세요. 나는 흙을 뚫고 나가서 고요하고 깨끗한 한 생애를 시작하렵니다. 평온한 삶, 마침내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겠군요."
묵묵히 듣고 있던 라파엘 대천사가 말했다.
"하지만 식물의 삶이라고 다 평온한 것은 아니에요. 바람이 식물들을 후려치고 벌레가 갉아먹고 동물과 사람이 무심코 짓이겨 버리지요."
"알아요. 그래도 식물은 신경 조직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아요."
육익 천사 하나가 식물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담은 몇 가지 영상을 보여 주었다. 아주 시적(시 시, 과녁 적)인 모습이었다. 라울은 대천사들과 함께 그 영상들을 찬찬히 검토하였다.
"아, 저길 봐요!"
미카엘 대천사가 외쳤다.
"맛있는 백포도주를 만드는 데 쓰이는 소테른 산(낳을 산) 포도나무에요. 지금 한창 프랑스의 샤토 이캉이라는 포도원에서 꽃가루받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에요. 그 포도원은 포도 맛이 좋기로 유명한 훌륭한 농원이지요. 저 나무는 볕도 잘 들고 습기도 충분한 곳에서 자라고 있어요. 포도 재배자들도 정성을 다해 돌봐 주고요. 그곳에서라면 어린 포도 묘목이 되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요."
라울은 곧 자기의 부모가 될 포도나무를 감동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나무는 조금 비틀리긴 했지만 아주 착해 보였다.
결국 라울의 다음 환생은 포도나무로 결정되었다.
290. 힌두교 신화
누구에게나 (생애 장부)라는 것이 있다. 근동 사람들은 그것을 (아카슈 문서)라고 부른다. 그 장부에는 각자가 전생에서 했던 행위와 말이 기록되어 있고, 업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치러야 할 내생이 기록되어 있다. 영혼은 여러 가지 내생 중에서 자기가 먼저 시작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예컨대 가장 나중에 살았던 전생에서 지은 빚을 갚기 전에 17세기를 살면서 지은 빚을 먼저 갚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의 환생에서 겪은 불행은 그 이전의 삶에서 받은 행복의 대가일 수도 있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91.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이제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관계 부서의 회신
귀측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개입할 때가 되었습니다.
292. 연쇄 반응
새벽 2시 11분, 암내 내는 암코양이 한 마리가 보도 위에서 암상궂게 울고 있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성이 난 불면증 환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창문을 열더니 고양이 쪽으로 끌신 하나를 내던진다. 끌신은 과녘에 맞지 않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앞유리창에 떨어진다. 운전자가 급제동을 건다. 고양이는 길을 건너 달아났고, 앞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뒤따르던 자동차는 미처 제동을 걸 사이도 없이 앞차와 충돌했다.
그 충격 때문에 앞차의 기름 탱크에서 기름이 샌다. 두 운전자가 차에서 내린다. 두 사람이 조서(調書)와 보험 문제로 입씨름을 벌이는 동안 행인 하나가 버린 불붙은 꽁초가 기름 웅덩이 속에 떨어진다. 기름에 불이 붙고 두 자동차가 폭발한다. 불붙은 흙받기가 튀어 올라갔다가 문제의 암고양이가 숨어 있던 쓰레기통에 되떨어진다.
질겁한 암고양이가 벽 쪽으로 쏜살같이 내닫는다. 그 서슬에 지나는 길에 놓여 있던 통조림 깡통이 고양이 발에 채이고, 그 깡통 안에 웅크리고 있던 커다란 쥐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공터 쪽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공터에서는 건장한 두 젊은이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농구를 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 쥐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농구공을 다 위로 날려 버렸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솟구치던 농구공이 어떤 집의 유리창에 부딪쳤다가 튕겨 나온다. 그 집 안주인은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놀라 새된 비명을 지른다. 한편, 그 남편의 직업은 항공 관제사이다. 그는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수화기에서 겁에 질린 아내의 비명이 터져 나오자, 그는 엉겁결에 어떤 기어 장치를 눌러 버렸다.
그 기어 장치는 공교롭게도 공항 쪽으로 다가오는 노선 여객기에 착륙 활주로를 기준으로 한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 주는 장치였다.
293. 표면과 이면
내 손목시계로 새벽 2시 13분. 나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다.
아, 아니다! 내가 기록해 놓은 것을 검토해 보니 한 가지 빠뜨린 게 있다. 원과 그 원을 중심점을 펜을 떼지 않고 그리는 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해답의 실마리는 종이의 한 귀퉁이를 접는 데에 있다. 그런 다음, 접힌 귀퉁이의 가장자리와 표면이 만나는 경계선에 점을 찍되, 표면과 이면에 걸쳐 커다란 점을 찍는다. 그 점에서 출발하여 표면이 만나는 경계선에서 멈춘다. 그러고 나서 접힌 부분을 펴고 표면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점을 중심점으로 삼아 그 둘레에 원을 그리면 된다.
이면이 표면을 도움으로써 펜을 들지 않고 원과 그 원의 중심점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듯,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을 넘나듦으로써 언뜻 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라울이 옳았다.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하고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신비주의하고는 다르며, 오히려 모든 신비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기의 정신을 넓히는 것, 정신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막심 빌랭이 말한 것처럼, 작가는 자기의 목표를 (더 멀리 꿈꾸게 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종이의 이면을 꿈꾸게 하는 것, 죽음의 이면을 꿈꾸게 하는 것, 그런 것이 작가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문학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우리는 당연히 그 점을 활용해야 한다.
나는 단지 글을 쓰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다른 차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따금 느끼곤 한다.
나는 이제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물음들, 즉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어느 정도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한 인간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영계를 발견하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 살고 있다. 인간의 생각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날기도 하고 물질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 책 속에 저장되기도 하고, 모든 것을 만들고 바꿀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죽일 수도 있다. 나는 시간, 공간, 지식, 아름다움 등 모든 것이 내부에 있음을 안다. 만물은 중심에 있다. 외부에는 그저 반영(反影)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내가 (집행 유예 상태에 있는 시체)일 뿐임을 안다.
나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기록했으니,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잊어도 된다.
천사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내가 영계 탐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을 출판해야 하나? 이것은 인류에게 선이 될 것인가, 악이 될 것인가?
동전을 던져 하늘의 뜻을 묻기로 하자.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이면과 표면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이다. 숫자가 새겨진 뒷면이 나오면 출판하기로 하고, 앞면이 나오면 출판하지 않기로 한다.
뒷면이다.
내 책에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추가해야겠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그들이 이 책을 쓰지 못하게 할까 봐 저어하였...)
294. 신문기사
영계 탐사의 개척자들 사망하다
영계 탐사의 문을 연 주요 개척자들, 즉 미카엘 팽송, 아망딘 발뤼스, 로즈 팽송이 오늘 새벽 돌연한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가 벌어진 상황은 한마디로 불가사의하였다. 보잉 787 여객기가 느닷없이 그들의 타나토드롬을 덮쳤던 것이다. 사고는 일단 항공 관제사의 실수로 빚어진 인재(人災)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전문가들은 사고 원인을 더욱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건물의 잔해 속에서 여객기의 블랙박스를 찾고 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미카엘 팽송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다가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그의 원고가 모두 재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영계 탐사의 개척자인 그가 무슨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쯤 그들은 틀림없이 천국에 가 있을 것이다. 그 천국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의 영혼에 평화가 있기를 빈다.
(프랑스 타나토노트들의 생애나 업적에 관한 특별호를 다음 주부터 발매할 예정이다.)
295. 힌두교 신화
힌두교의 한 유구한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두 신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의 권능을 너무 그릇되게 사용했기 때문에 최고신인 브라마가 그들에게서 신의 능력을 빼앗아 버리고 그 능력을 인간들이 찾아내지 못할 만한 곳에 감추어 두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마땅한 장소를 찾으려 하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가 열리고, 회의에 참석한 군소 신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사람들이 지닌 신성(귀신 신, 성품 성)을 딴에 묻어 버리는 건 어떨까요?"
브라마가 대답하되,
"사람들이 땅을 파고 그것을 찾아낼 터이니 그것으로는 안 될 거야."
그러자 군소 신들이 다른 안을 내놓았다.
"그러면 그 신성을 바다 밑바닥에 던져 버립시다."
브라마가 다시 대답하되,
"조만간 인간들은 마다 속을 탐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그것을 찾아내어 수면 위로 건져 올리고 말거야."
군소 신들은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땅이건 바닷속이건 언젠가는 인간들이 도달하지 못할 장소가 없는 듯하니 인간의 신성을 어디에 감추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브라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인간이 지닌 신성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 방도를 말하마. 그것을 인간들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추기로 하자. 그곳은 신성이 감추어져 있을 거라고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유일한 곳이니라."
전설에 따르면 그 후로 사람들은 신성을 찾아서 세계를 온통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은 산에도 올라가고 물에도 들어가고 땅도 파보면서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으면서도 정작 자기들 내부에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296. 역사 교과서
연습 문제
대학 입시를 대비하여 영계 탐사에 관한 여러분의 지식을 테스트하기 위한 예상 문제입니다. 시간을 정확히 재어 가면서 다음 각 문항에 대해 5분 이내에 대답할 수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영계 비행에 성공한 것으로 공인받은 최초의 타나토노트는 누구입니까?
2. 미국의 철학자 우디 앨런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시오.
3. 영계에는 코마 장벽이 몇 군데 있습니까? (주의! 천계가 아니라 장벽을 묻는 것임.)
4.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방법 가운데 주요한 것 세 가지를 열거하시오.
5. 타키온이란 무엇입니까?
6. 두 번째 코마 장벽을 가장 먼저 넘은 타나토노트는 누구입니까?
7. 파리의 타나토드롬은 구체적으로 파리의 어느 곳에 세워졌습니까?
8. 영혼은 무엇을 발하여 영계 비행을 추적할 수 있게 해줍니까?
9.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10. 프레디 메예르가 영계 비행에 기여한 것은 무엇입니까?
11. 천국 전투는 언제 일어났습니까?
12.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세 심판 대천사의 기독교식 이름은 무엇입니까?
13. 육체를 벗어나기 위한 명상은 어떤 방법으로 합니까?
14. 스테파니아 키켈리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15. 영계 비행을 할 때 영혼의 은빛 생명 줄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6. 무지한 자들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17. 현자들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대학 입시 대비 영계 탐사의 역사"
297. 경찰 기록
관계 부서에 보내는 보고
명령만 내리십시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관계 부서의 회신
작전 개시!
298. 망각의 시간
나는 나의 벗들과 함께 다시 천국으로 날아간다. 이번엔 우리의 생명 줄이 잘려있다. 이것이 현생의 마지막 비행이 될 것이다.
로즈와 아망딘과 나는 뷔트 쇼몽 타나토드롬의 아파트에서 죽었다. 느닷없이 타나토드롬을 덮쳐 버린 보잉 여객기에 희생된 것이다. 빌랭은 자기 집에서 세탁기 모서리에 되우 부딪혀서 쓰러졌다. 우리는 똑같은 순간에 이륙했다. 기계 장치도, 비행복도, 이륙용 의자도 없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여섯... 다섯... 넷... 셋... 둘... 하나. 발진" 하고 촐르 헤아리지도 않고.
우리는 이제 타나토노트가 아니라 진짜 죽은 사람이다. 그래도 이렇게 다 같이 최후의 비행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태양계와 그 외곽을 지나, 은하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이제 저승의 문턱을 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영계에 들어서면 내 집같이 편안하다. 우리는 트루빌이나 팔라마 레 플로에 소풍을 가듯이 영계를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해골 가면을 쓴 하얀 사탱 옷의 여인을 만나도 나는 그저 덤덤하여, 그녀의 텅 빈 눈구멍과 쩍 벌어진 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우리는 영계의 모든 구역을 차례로 지나간다. 청색계, 암흑계, 적색계, 주황색계, 황색계, 녹색계, 백색계. 우리는 다른 영혼들보다 훨씬 더 빨리 나아가고 있다. 아마도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급히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타나토노트이었을 때처럼 빠르게 사자들의 행렬 속으로 들어갔다.
빛의 산이 곧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대천사들이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긴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 영혼 행렬의 흐름을 잠시 중단시킨다. 성미 급한 영혼들이 항의를 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 베드로가 우리를 보고 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느때처럼 그가 일의 자초 지종을 설명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영계를 탐사하고 싶어 하는 타나토노트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어요. 천사들은 그 희귀한 방문객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기꺼이 천국의 비밀을 털어놓았어요. 지상으로 돌아간 뒤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계시)를 전달하고 싶어 했지요. 아브라함, 예수, 석가모니, 마호멧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했어요. 그렇게 해서 "성서", "바르도 토돌", "복음서", "코란", "도덕경"들과 같은 세계의 모든 경전들이 나오게 된 겁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깨달은 이)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천사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어요.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활용해서 인류를 진보시키고, 개선시키고, 순수한 정령의 상태로 더 빨리 나아가게 하려고 노력했지요. 그럼으로써 깨달은 이들은 이승과 천국에 똑같이 공헌했어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계시)를 신비의 너울과 알 듯 말 듯 한 상징으로 감쌌고, 신화와 전설의 외피 속에 감추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어떻게 했지요? 당신들은 비밀을 폭로하고 신의를 져버렸어요. 또 인류를 그릇된 길로 이끌고 지상에 혼란의 씨를 뿌렸어요.
천사들은 깨달은 이들에게 언제나 상냥하게 대했어요. 당신들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이 모두 현자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당신들은 지각이 없었어요. 당신들은 삶과 죽음의 모든 의미를 배워 가서, 그것을 함부로 퍼뜨렸어요. 당신들은 아무에게나 당신들을 따라오라고 권했고, 신비가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하고 비밀이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하는 이곳에 관광객들을 마구 끌어들였어요."
가브리엘 대천사도 성난 어조로 우리가 저지른 일을 나열한다. 천국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던 일, 영계에 광고 게시판을 내건 일, "어떤 영혼과의 대화"를 대대적으로 출판한 일, 카프모그라프의 대유행... 야, 그 엄청난 무질서라니! 사정이 그러했으니 천사들이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끝장낼 때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좋아요. 우리가 지상에 다시 내려가서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바로잡겠어요."
로즈가 말문을 연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요. 당신들은 이승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우리는 마침내 (천사들의 경찰)을 개입시키기로 결정했어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세요."
사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육익 천사 하나가 영상이 담긴 거품들을 뿜어낸다. 공식, 비공식의 크고 작은 타나토드롬들이 번갯불을 맞고 폭발한다. 이륙용 의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영계 탐사 역사 교과서들은 종잇가루가 된다.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죽음 박물관과 어머니의 가게가 불길에 휩싸여 있다. 영계에 게시된 광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지상에 태풍이 몰아치면서 영계 탐사와 관련된 것을 모조리 휩쓸어 가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영계 탐사를 완전히 지워 버린다. 지난 삶에서 우리가 이룬 모든 일들이 무(없을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당신들은 신들을 흉내내려고 했어요. 그러나 인간은 인간들 자신의 방식으로 진리를 깨달아야 해요. 하늘의 지식은 땅의 지식이 될 수 없어요."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을 불끈 내며 우리를 나무란다.
"라울을 먼저 죽인 것은 그 때문인가요?"
내게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그래요. 당신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먼저 시작했고 가장 위험했어요."
"어둠을 지배해야 할 곳에 빛을 비추려는 당신들의 그 광적인 집착 때문에 당신들을 좀더 내버려두었다면 환생의 길에 가로등과 창녀가 등장했을지도 몰라요."
매력적인 육익 천사까지 화를 낸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실수를 하듯이 우리도 실수를 저지른 거예요."
우리 입장을 설명하고 싶은데,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은 깨달이들이에요. 그런데 삶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침묵 속에서 향유하려 하지 않고 마구 떠벌렸어요. 그럼으로써 삶의 동력이나 다름없는 호기심, 즉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진리의 길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없애 버렸어요."
미가엘 대천사가 성을 냈다.
"하지만 라울은 바로 그런 삶의 동력을 찾고 싶어했어요."
"물론 그런 욕구가 있었으니까 깨달은이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지식을 더럽히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들이 오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다녀갔어요. 그중에는 아주 이단적인 신비파 교단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들은 누구나 자기들이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말을 하더라도 비유로써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영계에 관한 지식을 대중화하려 했고, 그러다가 결국 모든 것을 망쳐 놓은 거예요."
대천사들이 우리의 잘못을 다시 열거하기 시작한다.
"당신들은 영계 지도를 만들어 팔았어요."
"당신들은 영계 관광 안내서를 출판했어요."
"당신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냈어요."
"당신들은 우리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누설했어요."
"당신들은 자살을 부추겨서 수많은 영혼을 떠돌이 넋으로 만들었어요."
"당신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우리를 존경하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우리를 주인으로가 아니라 종으로 여겼어요."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이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후로 천사들이 냉정을 잃고 가엾은 영혼들에게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리라.
"배신자, 당신들은 배신자들이나 다름없어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셨지요?"
천사들이 우리를 꾸짖기 시작할 때부터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는 천사들의 말을 막고 그 질문을 던졌다.
몇몇 천사들이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다. 그들이 어쩌면 우리 일에 개입했던 (천사들의 경찰)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명히 처음부터 우리를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일을 계속하도록 허용한 것은 다른 천사들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화를 내고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를 믿고 지지해 준 천사들인지도 모른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난처한 기색을 보인다.
"우리는 당신들이 어디까지 가려 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우리도 가끔은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요. 사람들 가운데는 이따금 아주 특이한 정신을 지닌 자들이 있더군요. 라울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지요. 그 사람을 놓고 우리끼리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어요. "죽음에 관한 한 연구"라는 논문이 도를 지나쳤더군요. 그것이 출판되면 너무 많은 비밀이 폭로될 것 같았지요."
미가엘 대천사가 열없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 뒤에 라울이 아버지의 일을 계승했을 때, 우리는 영계 탐사를 하나의 스포츠처럼 즐기는 타나토노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부심했어요. 우리의 의견은 둘로 갈렸어요. 나처럼 호기심 많은 천사들은 당연히 그대로 두자는 쪽이었고, (천사들의 경찰)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영계 탐사의 위험성을 계속 경고했어요. 하지만 기다리면서 지켜보자는 쪽이 다수였지요. 우리는 우리의 경찰인 지상의 천사들에게 성급하게 굴지 말라고 충고했어요. 우리는 영계 탐사가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집념이 여간 강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위험한 실험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고 쉽게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행내기가 아니었어요. 끝내는 여기까지 들어와서 깨달은이들의 반열에까지 올랐지요.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어요. 당신들의 행동은 너무 도가 지나쳤어요. 세상에! 그 영계 여행사들을 생각해 봐요... 천사들이 아무리 착하다 해도 관광객들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자기들의 세계를 침입해 오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어요. 어중이 떠중이가 다 (나는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지요. 당신들은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선악과의 비유적인 의미를 헤아렸어야 해요. 절대지에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저 그쪽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거예요..."
"어쨌든 영계 탐사는 당신들과 더불어 종말을 맞았어요."
라파엘 대천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책을 읽었어요. 카르마를 걱정하고 관리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습관 속에 깊이 배어 버렸어요."
로즈가 탄식 어린 목소리로 반박했다.
"당신은 우리의 능력을 의심하는 죄를 다시 범하고 있어요. 지상의 모든 죄인을 물에 잠기게 한 노아의 대홍수를 알지요? 우리는 이미 그런 것을 지상에 내려보냈어요. 우리가 아까 영상을 보여 주었는데도, 모든 인간의 기억 속에 망각을 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브리엘 대천사가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로즈의 말을 중산시킨다.
"아무도 여러분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을 네스호(湖) 괴물이나 히말라야의 설인(雪人)이나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아무도 그 진실성을 믿지 않는 희미한 전설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영계 탐사 이야기를 담은 신화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계 탐사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영계 탐사는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아스라한 무의식으로만 남아 있을 겁니다."
성 베드로가 강한 어조로 결론을 짓는다.
"스테파니아도 잊게 되나요?"
내 질문에 성 베드로가 계속 대답한다.
"스테파니아 역시 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과는 달리 그 여자는 용서를 받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들 착하고 곰살갑게 사는 바람에 사탄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에 그의 일을 이어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를 두고 온 어머니들이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럼 프레디 2세는요?"
"그리고 팽스러넬은요?"
"그 아이들 역시 잊을 겁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습니다. 부모들의 죄 때문에 아이들이 벌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299. 메소포타미아 신화
여섯 낮 일곱 밤이 지났다.
큰불을 낸 사나운 비바람은 여전히 몰아쳤고
남쪽에서 오는 폭풍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일곱째 날
군대가 지나가듯
모든 걸 닥치는 대로 휩쓸어 간 비바람이
차츰 수그러들었다.
바다가 고요해 지고
바람이 가라앉았다.
큰물 흐르는 소리가 잠잠해 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흙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을 보았다.
잔잔한 물속에 지붕이 잠겨 있었다.
나는 자그마한 천장을 열었다.
얼굴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나 있었다.
- "우타 나미슈팀(주117) 서사시"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300. 유대교 신화
카발라에 따르면, 태아는 위대한 현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그는 이미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천사 하나가 내려와 그가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한다. 천사는 태아의 입 위에 손가락을 대고 (쉬) 하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태아는 모든 것을 잊는다. (위대한 비밀)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무의식뿐이다. 우리가 (인중)이라고 부르는 곳, 즉 코와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곳은 바로 그 천사와 접촉했을 때 생긴 것이다.
- 프레디 메예르, "연구 노트"
프랑시스 라조르박의 논문, "죽음에 관한 한 연구"에서 발췌
301. 대단원
우리는 여전히 빛의 산 앞에 있다.
어떤 천사도 로즈와 아망딘과 빌랭과 나를 변호해 주려 하지 않는다. 천사들은 모두 차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자기들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수천 년쯤 되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다른 깨달은이들이 이곳에 나타날 겁니다. 그때 가면 관광객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진짜 깨달은이들이 되겠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들의 행적을 더듬게 될 것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말을 잇는다.
실낱같은 위안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오디세우스"나 "성서" 같은 것을 써줄 것이다. 라울의 생각이 옳았다. (신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들은 그 안에 진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죠?"
아망딘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묻는다.
"당신들은 보통의 영혼들과 같은 길을 가게 돼요. 선업 점수 600점을 얻지 못한 다른 영혼들처럼, 당신들도 새로운 삶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삶을 받고 태어나면 당신들은 전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타나토노트였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사실을 뇌리에 깊이 새겨 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나는 타나토노트였다. 나는 타나토노트였어.) 영계 탐사가 실제로 존재했고 내가 그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영혼 속에 아로새기면, 다음 생애에서 내 영혼이 그것을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자, 앞으로 가시오!"
가브리엘 대천사의 명령이 떨어진다.
"당신들은 빛의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지요?"
그렇게 물으면서 그가 빙긋 웃는다.
"몇 걸음 더 가면 그것을 알게 될 겁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을 보여 주겠다는 건가요?"
로즈가 반색을 하며 묻는다.
"물론이오. 당신들은 다시 지상에 내려가더라도, 당신들이 본 것을 더 이상 떠들고 다니지 못할 테니까요."
아내가 몽유병 환자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천문학자로서의 직업의식이 되살아난 듯, 아내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게 된 것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가 보다. 아내는 블랙홀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나아간다.
"당신 차례요, 미카엘."
"심판을 거치지 않나요?"
"라울에게도 이미 설명했지만 깨달은 이들에겐 심판이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믿어요, 당신의 영혼은 아주 젊어요. 당신은 인간의 삶을.."
92)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한 영생의 형태는 여러 가지였다. 저승 왕인 오시리스의 심판을 거쳐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올바른 주문을 외움으로써 넋이 태양신 라의 배에 오르도록 허락을 받아 태양과 함께 우주를 무한히 운행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93) 혼돈의 물.
94) 태양신 라는 아침에는 (캐프리)이며, 한낮에는, (레)이고 밤에는 (아툼)이다
95) 이집트어로 이우누 또는 오누이라고 부르던 옛 도시. 오늘날의 텔 하산으로 태양신 숭배의 중심지이다.
96)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로부터 미라와 함께 관속에 부장(副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텍스트, 중왕국 시대의 석관(돌 석, 널 관)과 같은 계통의 종교 문서로, 상형 문자나 신관 문자, 민중 문자로 된 주문·찬가·신화에 그림이 곁들여진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서를 읽거나 미라 옆에 두면 죽은이의 영혼이 시련을 이겨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1842 년, 독일의 이집트학자 렙시우스가 "츠린 파피루스"를 간행한 이후, 이 문서들을 "사자의 서"로 부르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자의 서"인 "아니 파피루스"는 테베의 신관 아니가 자기를 모델로 삼아 저승에 들어갈 때의 절차, 갖가지 주문, 죽음과 관련된 신화 등을 총 190장(章)에 걸쳐 적어 놓은 것이다.
97) 에몽 드 보몽(1728~1810). 프랑스의 첩보원. 영세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비범한 글재주와 검술 덕택에 루이 15세의 왕실 기밀국에 발탁된 뒤, 여장(女裝)을 하고 러시아와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이성의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경향)을 뜻하는 에오니즘은 바로 에옹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98) 프랑스의 작가(1330~1418). 엄청난 재산을 모아 많은 병원과 성당에 기부했다. 그는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연금술사라고 주장했다.
99) 영국의 의사(1816~1890).
100) 로마시대 소아시아 니사의 주교를 지낸 신학자(335?~395?). 동방교회의 교부(敎父). 381 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여하였고, 황제의 종교 고문이 되었다. 아리우스 신학을 비판하고 오리게네스 신학을 개선하는 저서를 많이 남겼다.
101) (위대한 연구)를 뜻하는 "탈무드"는 "미쉬나"와 "게마라"를 집대성한 것이다. "미쉬나"는 토라(율법: 모세 5경)에 대한 구전의 해석이나 주석을 라비들이 편집한 것이며, "게마라"는 "미쉬나"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모은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집대성하는 과정은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 각각 4세기 말과 6세기에 이루어졌다. 후자 쪽이 분량도 많고 도 중요하게 여겨져 왔기에 보통 "탈무드"라 할 때는 이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가리킨다. "탈무드"는 전 20권, 1 만 2 천 쪽, 250 만 단어가 넘는 방대한 성전(성스러울 성, 법전)이며, "산헤드린"은 그것의 한 권이다.
102) (새지 않는 천)이라는 뜻의 조어.
103) (통과)라는 뜻의 프랑스어.
104) (잠)이라는 뜻의 라틴어.
105) 고대 로마의 시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