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3. 11. 05:30

13. 종횡무진

시모어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 자식을 어떻게 해치워야 되는 거야! 그놈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어. 우리 지역을 파고들어 마구잡이로 불을 지르고, 죽이고, 그리고..... 어휴!"

"자넨 지금 누구한테 불평하는 거야!"

터린이 쏘아붙였다.

"자네 때문이야! 그 자식은 자네 수하에 있었는데도 자넨 멍청하게 놈이 가짜라는 것도 몰랐잖아! 자네가 그 화냥년들과 드러누워 시시덕거리고 있는 동안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잘 알고 있겠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터린이 뛰어오르며 시모어에게 주먹을 날렸다. 시모어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콜라병을 손에 들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플래스키가 팔을 휘저으며 그들의 싸움을 말렸다.

"그만. 그만해! 이렇게 되면 놈의 계략에 빠진다는 것을 모르냐? 놈이 우리를 이간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 이제 그 정도로 해두라구!"

레오 터린의 입술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곧 어깨를 움츠리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레오."

시모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집들 얘기는 내 본심으로 한 것이 아니었어."

터린은 묵묵히 머리를 끄덕이며 불쾌한 듯이 구두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25만 달러 때문에 그분이 무척 화를 낼 텐데....."

플래스키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것을 다시 찾아내야 해!"

시모어가 말했다.

"물론!"

터린도 맞장구를 쳤다.

"난 그놈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이니까..... 그것도 불과 몇 분간이었어. 놈은 우리 조직의 돈이 그 금고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플래스키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르고 있었나? 그놈은 유령이야! 유령이 아니고서야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아냈겠나?"

터린이 넋두리처럼 투덜거렸다.

"집어치워!"

시모어가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그리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이제 곧 다른 멤버들이 나타나겠군."

터린은 말없이 일어나 버번위스키를 잔에 따르고 얼음을 넣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것을 홀짝거리다 입을 열었다.

"문제는..... 자네들은 그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야. 사실 난 점점 자신이 없어져. 소름이 끼쳐. 그놈은 군대에서도 살인 기계였어. 언젠가 놈과 꼭 닮은 중사를 만났는데 그놈도 무서운 놈이었어. 보란은 꼭 그놈을 닮았어. 내가 보란에 대해 느끼는 것은...."

시모어가 끙끙거렸다.

"그게 아니야. 명심해야 돼. 그놈에게 이기려면 그놈을 잘 알아야 돼. 놈은 불과 서너 시간 동안에 그 어려운 일을 모두 해치웠단 말이야.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은 놈이라구. 순식간에 궁전을 불태웠고, 8000달러짜리 승용차를 박살 냈고 나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놓았고, 제이크의 다리를 뚫어 놓았어. 놈은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치우고 있어."

그는 말을 멈추고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도망쳤는가 싶었더니 몇 분 후에 우리 집에 나타나 아내와 태연하게 지껄이고 갔어. 그놈은 아내에게 뭔가 이야기를 한 것 같아. 그리고 그놈은 시모어의 저택으로 가 풀장을 새빨갛게 물들여 놓고 폴과 토니의 몸뚱이를 풀장에 처박았어. 그리고 전화선과 전선까지 잘라 놓고 침대를 난도질하고 갔어. 또 시모어가 애지중지하는 유화에다 총을 다섯발이나 쏘았어. 그러나 놈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어. 우리의 비밀자금 25만 달러를 갖고 유유히 잠적했어. 내가 알고 있는 그놈과 비슷한 중사는 싱가포르에 있는 모든 창녀들과 공짜로 자겠다고 떠벌이고는 실제 그렇게 했어. 그놈과 꼭 같은 놈이라구!"

"이제 끝났나? 자네의 감탄이?"

시모어가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이 잠시 이곳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간부 회의에서 제안할 작정이네. 어쨌든 우리는 시간을 벌어야 해. 우리가 계약한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이곳을 맡겨 두고 잠잠해지면 그때 돌아오면 돼."

플래스키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시모어도 차가운 눈빛으로 터린을 노려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나이 많은 한 사나이이를 선두로 하여 네 명의 보디가드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것을 본 방안의 세 사람이 급히 일어섰다. 이어서 네 명의 보디가드들이 적당한 위치에 서서 온화한 얼굴에 나이가 60 가까이 되어 보이는 백발의 사나이는 방 안에 있던 세 사람과 악수를 하였다. 그의 부드러운 눈매와 따뜻한 손은 세 사람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테이블의 맨 윗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백발의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세 사람이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보란의 자의 짓입니다."

시모어가 흥분하여 말했다.

"살인 지시는 실패 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살인 청부업자에 대한 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 쪽의 두 명이 당했습니다.

"알고 있네."

백발의 사나이가 조용히 말했다.

"놈은 완전히 미쳤습니다."

플래스카가 끼어들어 말했다.

"놈은 시내를 돌아다니며 쑥밭은 만들어 놨어요. 내 사무실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는 25만 달러를 갖고 사라져 버렸어요." "놈은 제 궁전을 불태워 버렸고 제 아내에게 협박을 했습니다."

터린이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 부하 두 명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시모어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난장판이라구?"

"풀에 붉은 물감을 풀어 넣고 천막을 두 개나 부숴 버렸어요. 전선과 전화선도 끊어 버렸고 게다가 집안의 침대란 침대는 모두 난도질해 버렸어요."

그가 어깨를 움찔하고는 말을 이었다.

"정말 난장판을 벌인 겁니다."

"그리고 그의 유화 수집품에도 총알을 박아 놓았죠."

터린이 빈정대는 투로 시모어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그의 초상화에다 말입니다."

"그게 한 사람의 짓인가? 아니면 1개 부대의 짓인가?"

백발의 사나이가 화가 난 듯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미친놈 혼자의 짓입니다."

시모어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세르지오님, 놈을 어떻게 해서든지 처치해야 합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어떻게 그의 행동에 대처해 왔나?"

세르지오라고 불리는 백발의 사나이가 말했다. 세 사람은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겁이 나서 숨어 있었겠지."

세르지오가 조용히 기침을 했다.

"조직이 이렇게 겁쟁이가 되어 버리다니. 단지 애송이 한 놈이 조직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우리 조직이 무력해졌단 말인가?"

"그놈은 보통이 아닙니다."

터린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전에도 어떤 중사를 한 명 만났었는데....."

"제발 자네의 창녀들이나 골려 먹는 중사 얘기는 집어치워!"

시모어가 소리쳤다. 터린이 그를 칠 듯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또 한 번 나의 창녀들에 대해서 함부로 주둥아릴 놀리기만 해봐. 그땐 이 주먹을 네 아가리에 쑤셔 넣어 버릴 테다."

"잠자코 있어. 레오폴드!"

세르지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자네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헐뜯곤 하지? 우리에겐 처치해야 할 공동의 적이 있지 않나?"

그는 손가락으로 시모어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을 결과적으로 자네의 책임이야. 월트. 알고 있나? 처음의 실수는 자네가 놈을 조직에 끌어들여 우리의 내막을 알게 했기 때문이야. 현재는 놈이 유리해. 우리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놈을 찾아야 돼. 그렇게 하려면 돈도 많이 들 거야."

세르지오가 이렇게 말하자 터린도 덧붙였다.

"난 처음부터 놈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었어. 플래스키가 놈을 끌고 왔을 때부터 수상하게 생각되어 놈의 꼬리가 드러나길 기다리고 있었단 말야!"

시모어가 소리쳤다.

"엉뚱한 소리 집어치워!"

터린이 시모어에게 덤벼들듯이 소리쳤다.

"그래. 놈에게 정체를 드러내게 한 건 누구야?"

"시끄러워!"

백발의 사나이가 말했다.

"누가 실수를 했던 간에 그건 끝난 얘기야. 앞으로 만약 실수하는 자가 있다면 가족 총회에서 끝장을 내어 강물에 처넣어 버릴 거야. 내 말 알아듣겠나?"

"알겠습니다. 세르지오님."

터린이 기가 죽어 말했다.

"자네들은 왜 대답이 없나?"

세르지오가 노여움이 가득 찬 눈으로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세르지오님!"

시모어가 급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세르지오님!"

플래스키도 황망히 대답했다.

"20년 전 같았으면 너희들 같은 겁쟁이하고는 테이블에 같이 앉지도 않았을 거야."

세르지오가 준엄하게 말했다.

"모두 내 발을 명심하게. 나는 보란을 죽이기 위해서 살인 청부업자들을 도처에 풀어 놓았어. 그렇다고 너희들이 방심해서는 안 돼. 너희들에게는 돈과 능력, 그리고 권력이 있어. 게다가 너희들은 우리 조직의 간부란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내가 직접 손을 대야 하지? 보란이란 놈이 이 세르지오의 목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천만에. 놈이 노리는 것은 월트 시모어와 네트 플래스키와 레오폴드 터린이야. 그놈은 이 세르지오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어."

그는 뒤에 서 있는 보디가드에게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사나이는 급히 뛰어서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서 가져왔다. 세르지오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계속했다.

"이 세르지오는 너희들의 목을 지켜 주기 위해서 10만 달러의 거액을 내걸었어. 너희들의 안전을 위해 신경을 써주는 만큼 너희들도 열심히 일해야만 해. 알겠나?"

바로 그때, 방의 커다란 창문이 폭발 소리와 함께 크게 부서져 나갔고 세르지오에게 술잔을 가져다준 사나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어서 강력한 라이플의 폭발음이 테이블 주위의 사나이들을 공격했다. 네 사람을 공포에 떨면서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멀리서 날아오는 총알은 방바닥과 벽을 뚫었다. 잠시 후 총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터린은 고개를 들어 세르지오의 겁에 질린 눈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플래스키와 시모어의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네 명의 보디가드들은 넓은 방의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놈은 벌써 당신도 알고 있군요. 파더 세르지오."

터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르지오는 얼굴을 찡그리며 흰 이빨을 드러낸 채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말했다.

"놈을 죽여!"

짜내는 듯한 날카로운 그의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놈을 죽여! 알겠나? 놈을 죽여 버리란 말이야!"

 

14. 실패

보란은 다음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맥 보란은 어디를 가나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야전용의 검은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32구경 대신 45구경 군용 권총을 허리에 찼다. 그는 검은 스니커복에 검은 베레모를 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고는 히죽 웃었다. 몸에 꼭 끼는 옷은 우스꽝스럽게까지 모였다. 누가 본다면 아마 가면무도회의 의상으로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머린과 25만 달러는 이미 차에 실어 놓았다. 그는 아파트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는 사람이 살고 있던 흔적을 깨끗이 없애 버렸다. 그리고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220분이었다. 그는 곧바로 레오 터린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터린의 집에 도착한 것은 3시 조금 못 되어서였다. 터린의 집은 비교적 상류급에 속하는 집들이 서 있는 깨끗한 주택가에 있었다. 보란은 터린의 집 뒤쪽에 차를 세우고 담을 뛰어넘어 집 뒤곁에 살짝 내려섰다. 몇 야드 앞에서 갑자기 개가 짖기 시작했다. 보란은 터린의 집 차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경사진 지붕에 엎드려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보란은 집의 내부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1층의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로 보아 욕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불빛이 2층 창문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란은 터린에게 세 아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침실의 배치를 생각해 봤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방은 갓난아기의 방이거나 아이들의 방일 것이다. 창문은 회전식 같았으나 보란이 있는 데서 보이는 창문은 모두가 잠겨 있었다.

누군가가 나와서 개를 달래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보란은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차고의 지붕에서 스페인제 기와를 떼 내어 앞뜰을 향해 던졌다. 기와는 정원의 석축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보란은 눈을 크게 뜨고 모든 창문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2층 맨 끝에 있는 창의 커튼이 흔들렸다. 흔들렸다기보다는 흔들리는 것 같았다. 보란은 또 한 장의 기와를 떼내어 아래로 힘껏 던졌다. 맨 끝 방의 불이 켜지더니 누군가가 커튼을 젖혔다. 레오 터린의 모습이 창가에 나타났다. 자시 커튼이 닫히더니 검은 머리의 여인이 침대에서 일어나 스탠드에 손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불을 켰을 때 당황하는 터린의 꼴을 생각하니 보란은 웃음이 나왔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터린이 파자마 바람으로 나타나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그는 문에서 나와 집 주위를 들며 보란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보란은 터린의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터린은 벌써 뒷문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가만히 서 있었다. 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분인가를 서로 찾고 있었다. 이윽고 무엇인가가 날아와 안뜰을 가로질러 차고의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보란은 웃었다. 그것은 보란이 조금 전에 터린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썼던 수법이었다. 터린의 모습이 사라졌다. 보란은 계속 어둠 속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터린보다 높은 곳에 있는 그가 유리했다. 그리고 또 그에게는 유리한 점이 하나 더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집 안에 있는 아내와 세 아이는 터린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유사시에는 맨 먼저 총구를 겨눌 수 있는 좋은 목표다. 보란은 터린이 반대쪽 모퉁이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분명히 그는 본래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 상황을 살피면서 반대쪽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보란은 새삼스럽게 이 용감한 시실리인에게 감탄했다. 적어도 그는 도전에 응해서 용감히 밖으로 나와 서 있는 것이다.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하지도 않았다.

"보란인가?"

보란은 고개를 흔들며 소리를 내지 않고 웃었다. 터린은 차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발을 옮기며 한 걸음마다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는 한 손에는 총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회중전등을 쥐고 있었다. 보란은 터린이 총과 회중전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이윽고 터린은 차고를 지나 반대편 뜰로 향하고 있었다. 보란은 소리 없이 비탈진 지붕을 미끄러져 내려와 훌쩍 땅으로 내려서더니 대담하게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보란인가?"

터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훨씬 안쪽의 뜰에서였다. 보란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벽을 따라 돌아서 정면에 있는 입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생각했던 대로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터린이 밖으로 나오면서 열어 두고 나온 것이리라. 그는 안으로 들어가 문 뒤에 숨었다. 터린은 언제까지 보란을 찾아 뜰을 헤맬 작정인가?

보란은 터린을 등 뒤에서 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종의 우정 같은 것이 있었다. 적어도 보간은 터린을 죽일 때 정면에서 그의 눈을 보고 싶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전쟁 자체가 어차피 이치에 안 맞는 것이다. 잠시 후 터린이 숨을 크게 쉬면서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잠갔다. 그 순간의 터린은 그를 노리는 사나이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보란은 자기 총탄의 표적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란은 가만해 다가가서 45구경의 총구를 터린의 목덜미에 갖다 대었다.

"알고 있었네."

터린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문을 닫는 순간에 자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 쏘지 말고 잠깐 기다려. 보란. 할 이야기가 있네."

"여기서 해치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자네 부인이 청소하느라 애를 먹겠지?" 보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홀 안은 어두웠으나 보란은 상대방의 얼굴이 굳어지며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전에도 그는 그런 얼굴을 보았고 보란 자신도 그렇게 얼굴을 경련시킨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는 그것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몸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근육이 불쾌하게 떨리면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그 기분을 보란은 더 이상 터린에게 맛보게 할 수는 없었다.

"총을 이리 주게. 레오."

터린이 그의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마지 못해 보란에게 건네 주자 보란은 그것을 자기 등 뒤로 던져 버렸다. 총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네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터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네의 누이동생은 정말 좋은 아이였네. 보란."

"그따위 말은 집어쳐!"

보란은 차갑게 말하고 그의 45구경을 터린의 딱딱한 머리 부분에 밀어붙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디로 가는 거지?"

터린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호의라고 생각해."

보란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그때 천장의 불이 모두 켜지면서 홀 안이 갑자기 밝아졌다. 보란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며 벽 쪽으로 뛰어갔다. 터린의 아내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보란은 새로운 적을 향해 그의 45구경을 발사했지만 갑작스런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 총알이 빗나가고 말았다. 계속해서 떠 한 방의 총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터린의 아내가 보란을 향해 쏜 것이었다. 보란은 불빛 때문에 안젤리나 터린의 손에 쥐어진 작은 총을 보지 못했었다. 그는 그 총소리와 어깨의 통증이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자기가 총에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터린이 방바닥으로 몸을 날려 그의 아내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인의 작은 총에 쫓겨 달아나면서 보란은 굴러가는 터린을 향해 두 방 쏘았다. 그는 집의 모퉁이를 달려 나오면서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뛰면서 45구경을 허리에 찼다. 어깨가 타는 듯이 아팠으나 치명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담을 뛰어넘고 옆집 뜰을 빠져나와 도로로 나가려다가 요란하게 들려 오는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면 틀림없이 검문에 걸릴 것이다. 그는 적과 친하려 했던 것이다. 전쟁에 도덕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 적은 죽일 수 있을 때 바로 죽어야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먼 이국땅 월남의 정글에서 수백 번도 더 체험하여 알고 있는 그것을 어째서 마피아의 정글에서 잊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을 비난하면서 멀리 건물들이 밀접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그는 관자놀이의 상처를 베레모로 눌러 피가 흐르는 것을 막았다. 문득 전 세계의 경찰차가 그를 잡기 위해 이리로 몰려들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경찰을 계속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경찰은 보란의 행동을 주목하여 그가 터린을 노리는 것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여기서 또 한 번 맥 보란은 과오를 범했다. 그는 작전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상대는 어리숙하고 무지한 베트콩이 아닌 빈틈없는 미국인인 것이다. 어깨의 심한 통증을 생각한다면 이 실패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총에 맞아 자신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멀리 도망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상처를 치료하여 다시 힘을 되찾을 때까지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그런 곳이 없다면 죽음을 당하는 쪽은 자신이 되고 만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맥 보란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15. 은신처

형사부장 웨더비는 무선차에서 내려 터린의 집 바로 위의 교차점으로 들어오는 순찰차로 걸어갔다. 그는 순찰차의 문을 열고 내리는 경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총소리가 나고 얼마 만에 도로를 폐쇄했나?"

"30초도 걸리지 않았을 겁니다."

경관이 대답했다.

"저는 두 구역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총성을 듣고는 곧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도로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경찰과 이외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웨더비는 경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로를 살펴보고는 그의 차로 돌아왔다. 핸들을 잡고 있던 사복 경관이 미안한 듯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아무래도 그놈이 빠져나간 것 같죠. 안 그래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웨더비는 그 말에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터린의 말로는 녀석은 특공대 같은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거야. 그놈은 고양이처럼 소리를 내지 않고 민첩하게 뛰어다니는 기술이 있는 것 같아. 한데 터린이라는 사나이는 정말 운이 좋았어. 아마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걸세."

"당신은 보란이라는 사나이를 칭찬하는 거죠?"

"나는 그럴 생각이 없으니 자네가 칭찬해 주게."

웨더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내 말은 단지......자네도 알고 있지만 그는 터린의 부인에게 반격도 하지 않았잖은가? 그 여자를 쏘려면 얼마든지 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야. 그런데 그는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이 말이야."

웨더비가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말로는 탄환이 명중한 것 같다고 했어. 그런데 그 녀석은 핏자국도 남기지 않았단 말야. 상처를 입었다면 멀리는 못 갔을 텐데.... 이 지역에 12명 정도 더 배치하게. 어떻게 해서든지 녀석을 체포해야 해."

그는 무전기의 마이크를 들고 특별 주파수로 명령을 내렸다.

". 우리는 동쪽 끝까지 갔다가 거기에서 이쪽으로 되돌아와 보세."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복 경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동쪽을 향하여 운전하기 시작했다.

"발견하면 즉시 쏘는 겁니까?"

"그래."

웨더비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뻗어 있는 주택가에서 동쪽으로 차를 돌리고 그곳에서부터 주위를 살피면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웨더비는 총신이 짧은 총을 끼고 있던 경관도 리볼버를 총집에서 뽑아 무릎 옆에 놓았다.

"이 짓도 못 해 먹을 짓이에요."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봐.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거야. 잠깐! 이봐. 저길 봐....."

그는 갑자기 긴장했다. 저쪽 아파트에서 누가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라이트를 끄게."

한편 보란은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지쳐 있었다. 그는 터린의 집이 있는 곳보다는 지대가 약간 낮은 주택가에 도달했다. 어느 아파트 앞의 손질이 잘 된 넓은 잔디밭을 비틀거리며 건너가려는데 도로에 접하여 줄지어 서 있는 아파트 1층의 어떤 방에 불이 켜졌다. 보란은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어깨의 상처에 대어 놓은 헝겊을 살펴보았다. 이제 피는 더 이상 흘러나올 게 없는지 멈춰 있었다. 그는 아픔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가만히 상처 부위에 손을 대보았다. 총알이 그 속에 박혀 있는 것 같았지만 출혈은 멈춰서 피가 굳어 있었다. 그러나 상처는 불붙은 듯이 쑤셔 왔고 두통도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눈앞의 모퉁이를 돌아 길을 비추었다. 그는 재빨리 땅바닥에 엎드려 옆에 있는 나무 그늘로 기어갔다. 그와 동시에 보란의 등 뒤에 조금 떨어져 있는 아파트의 문이 열리자 헤드라이트는 곧 꺼졌다. 보란은 라이트를 끈 자동차가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이윽고 아파트의 정면에서 불이 켜졌다. 불은 열린 문 위에 켜져 있었다. 안에서 잠옷을 입은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와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정신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보란의 귀에는 여자가 "티티. 티티!"하고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자동차는 천천히 보란의 앞을 지나 그 여자의 앞에 멈춰 섰다. 여자가 깜짝 놀라 문 쪽으로 되돌아가려 하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경관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보란은 여자가 깜짝 놀란 뒤 약간 신경질적으로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잔디밭으로 반쯤 걸어 나왔으나 문 위의 불빛이 비치는 범위를 넘어서려 하지는 않았다. 이때 자동차의 반대쪽 문이 열리며 몸집이 큰 사나이가 자동차 지붕 너머로 여인을 보며 말했다.

"형사부장 웨더비입니다."

그의 말은 정중했다.

"우리는 어떤 남자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실례지만 부인께서는 이 시간에 거기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네에? 저는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고양이가 울어서 잠이 깼는데 집 안에 들여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이 근처에는 고약한 수고양이가 한 마리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부인. 무서운 사나이가 이 근처에 숨어 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고 싶은데요."

웨더비는 자동차의 뒤를 돌아 보도에 서 있었다. 다른 한 경관도 자동차에서 내려 건물 좌우의 어둠을 비추며 근방을 살펴보았다. 세 사람은 보란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여인의 불안스러운 숨소리가 보란의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웨더비가 여자에게 집 안을 살펴봤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쉽게 승낙했다.

"이 젊은 부인과 함께 있어 주게. ."

웨더비는 말을 끝내고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아 있는 경관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 건물 주위를 이리저리 비춰대고 있었다.

이때 무엇인가 보란의 뺨을 비비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고양이라는 것을 알고는 상처 입지 않은 발을 뻗어 다정하게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보란의 팔 밑에서 만족스러운 듯이 몸을 동그랗게 도사렸다. 그때 웨더비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헤드라이트의 눈부신 빛을 피하며 피로한 모습으로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고양이를 찾는 것은 단념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십시오. 당신이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겠습니다. 소란을 끼쳐 죄송합니다."

여인이 무슨 말인가를 했으나 보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문으로 가서 두 경관에게 손을 흔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문 위의 불이 꺼지자 경찰차도 불빛은 번쩍이며 멀어져 갔다. 보란은 고양이를 단단히 끌어안고 몸을 숙인 채로 아파트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고양이를 덧문으로 밀어붙이고는 난폭하게 고양이의 등을 꼬집었다.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보란에게서 달아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덧문을 할퀴었다. 그러자 곧 안의 문이 열렸다. 보란은 문을 밀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 놀라 서 있는 여자의 가슴에 고양이를 안겨 주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왔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몸으로 문을 닫고 문에 기대었다.

"큰 소리를 내지 말아요. 당신이 나가 달라고 하면 지금 나갈 테니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보란의 이상한 차림새와 허리에 찬 권총과 피에 물든 어깨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를 입었군요."

보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총을 맞았소. 잠시 동안만 여기 있게 해주겠소? 당신에게 절대 피해는 입히지 않겠소."

그는 어깨의 심한 통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경찰관이 당신은 위험인물이라고 말했어요."

그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당신에게는 위험하지 않소."

고양이가 여인의 팔을 빠져나가 안쪽의 방으로 달려갔다. 보란은 절망적인 눈초리로 방에 놓여 있는 긴 의자를 펴다 놓았다.

"어깨에 총알이 박혔소. 소독약과 핀셋을 좀 갖다 주었으면 고맙겠소."

"알겠어요" 여인은 재빨리 거실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보란이 따라갔다. 여자가 경찰에 전화를 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자 보란은 안도의 숨을 쉬고는 방 안으로 돌아와 긴 의자에 누웠다.

"혼자서 살고 있소?"

그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물었다. 그녀가 욕실 입구에서 얼굴만 조금 내밀고 대답했다.

"아뇨, 타바사와 함께 있어요."

그녀가 코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내 고양이를 타바사라고 불러요. 나도 그녀도 올드 미스예요."

대답이 끝나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욕실 속으로 사라졌다. 보란은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그녀가 작은 쟁반은 들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보란은 몸에 꼭 끼는 셔츠에서 겨우 한쪽 발과 머리를 빼낸 뒤 조심스럽게 상처 입은 어깨에서 셔츠를 벗겨 내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스카프를 벗고 둥근 머리를 풀어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보란은 생각했다. 작고 섬세한 몸매, 아름답게 빛나는 눈을 가진 그녀의 얼굴은 퍽 지적으로 보였다. 여자는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고 보란이 셔츠를 벗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

"출혈이 아주 심해요. 총알이 아직 박혀 있어요?"

보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가지고 온 쟁반을 바라보았다. 눈썹 화장에 쓰이는 작은 핀셋이 투명한 액체 속에 담겨 있었고 거즈가 한 봉지, 붕대 한 개, 머큐로크롬병 등이 쟁반에 놓여 있었다.

"핀셋을 알코올로 소독해 두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보란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큐로크롬 병으로 손을 뻗었다.

"제가 총알을 뽑아 드릴까요?"

"고맙소. 그러나 전에도 해본 적이 있으니 내가 하겠소."

그녀는 보란을 긴 의자에 누이고 머릿밑에 베개를 대주었다.

"이것을 당신 혼자 힘으로 한다는 건 무리예요."

그녀가 단호히 말하고는 핀셋을 쥐었다.

"괜찮아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16. 귀여운 도둑

보란은 호화로운 실크 커튼이 드리워진 라운지에서 웃옷을 벗은 채 자고 있었다. 터린 부인이 몸에 꼭 달라붙는 선정적인 녹색 바지를 입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군 인두로 그의 어깨를 지져 대면서.

"당신은 정말 목석 같군요. 중사님!"

부인의 녹을 듯한 목소리에 이어 뒤쪽 어디에선가 레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귀여운 여인을 자네에게 주겠네."

"그래?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죽일 거야!"

보란은 속삭이듯 말했다.

"잠이 깨면 당장에 말이야."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햇빛이 눈부셨다. 어깨는 마치 악마가 춤을 추고 있는 듯 화끈거렸다. 젊은 여인이 침대 곁의 창가에 사서 플라인드를 만지작거리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물결치듯 어깨로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이 매혹적이었다. 여인은 거의 알몸에 가까웠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다 그가 눈을 뜬 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양이의 주인이군!"

보란은 술에 취한 듯한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그에게로 다가와 체온계를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오늘 종일 잠만 잘 줄 알았는데....."

보란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그녀는 체온계를 가리키며 제지시켰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체온계를 뽑아 눈금을 읽었다.

"정말. 당신은 강철 같은 사람인가 봐요. 열이 전혀 없어요."

"열은 모두 어깨에 모여 있을 거요."

보란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 보였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이 됐다.

"어떻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떠들석하다구요. 신문에 당신 사진도 나왔어요. 당신이 바로 그 저격수죠. 보란 씨?"

", 당신은 분명 이국적인 이름을 갖고 있을 것 같은데, 카르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저는 발렌티나예요. 발렌티나 퀘렌테."

"발렌티나. 예쁜 이름이군! 그런데 지금 몇 시인가요?"

"점심때가 다 되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군. 당신이 경찰을 부를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왜 부르지 않았죠?"

"아예 그렇게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잖소? 왜 신고를 안 했죠?"

"당신이 저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유죄가 증명될 때까지 누구든 죄인은 아니에요."

"나는 분명히 죄를 지었잖소?"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죠?"

"거의 모두 알고 있어요. 2주일 동안 당신은 모두 11명의 마피아를 죽였죠? 당신은 살아 있는 비극, 그 자체예요. 그래서 전 경찰에 신고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의 동기에 동정이 갔기 때문이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요. 살인은 어떤 이유에 서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잖아요?"

보란은 상체를 조금 움직여 보았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정당화시키지 않겠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그녀는 또 하나의 베개를 그의 어깨 밑에 받쳐 주었다.

"이건 수십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전쟁 중의 하나일 뿐이오.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나는 선의 쪽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정당화시키고 있소."

"그런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당신에게 뭔가 먹을 걸 마련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달걀은 어떻게 한 것을 좋아하시죠?"

"날것이 아니면 다 좋소."

"정말이세요?"

"정말이오. 아무렇게나 만들어 주시오. , 그리고 내 옷은 어디 있소?"

"당신 몰래 내가 훔쳤어요. 당신은 고약한 올드 미스에게 걸려든 셈이에요. 보란. 나는 나의 침대에 들어온 남자를 그대로 보내지는 않아요."

장난기가 가득한 그녀는 정색을 해보였다.

"무서운 올드 미스로군!"

그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스크램블!"

"뭐요?"

"나는 무엇을 잘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써도 스크램블밖에는 안 돼요. 스크램블이더라도 참아 주라구요."

그녀는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보란은 곧 담요를 젖히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다 담요를 끌어당겼다.

"내 옷은 어디 있소?"

그는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훔쳐 두었다고 말했잖아요!"

그녀도 역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게 기분이 나쁘다면 다시 훔쳐 가세요. 욕실에 있는데 일어설 수는 있어요?"

보란은 일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일어나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어지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욕실로 갔다. 셔츠는 깨끗이 세탁해 커튼 줄에 걸려 있었고 팬티와 바지는 타월 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는 팬티를 입고 셔츠는 손에든 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발렌티나가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붕대를 갈아야 하니까 아직 셔츠는 입지 마세요."

"붕대를 감고 있으니 셔츠를 입지 않아도 되겠는걸."

"들어가도 좋아요?"

그녀는 방으로 들어와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바지는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입기가 힘들 걸요. 어쩌자고 그런 이상한 바지를 입었죠? 당신이 뭐 마벨 선장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세요?"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좁은 바지통 속에 그의 발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 옷은 어둠 속에서 행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구!"

바지는 겨우 무릎 위까지 올라갔다.

"이다음은 당신이 끌어올려 보세요. 달걀이 타겠어요."

"당신이 벗겼으니 당신이 입혀 줘야 되지 않겠소? . 위로 올려 주시오."

"달걀이 탄단 말에요. 그리고 저는 담요 밑에서 벗겼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그 점은 오해하지 마시라구요."

그녀는 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보란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일어서서 다치지 않은 팔로 간신히 바지를 끌어 올렸다.

 

17. 살인 모의

세르지오 프랭키의 저택은 피츠필드에서도 가장 경관이 좋은 고급 주택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랭키는 그곳이 지중해 연안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석회칠한 동과 커다란 창문, 수많은 포치와 안뜰, 그리고 아래층은 언덕의 비탈 속에 가려지게 하여 자연경관을 최대한 활용했다. 프랭키의 저택을 사진으로 본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호젓한 곳의 별장 같은 곳으로 여길 만했다. 사실 그 주변의 저택들도 대부분 그랬다. 프랭키의 집은 다른 저택들보다 경관 좋은 곳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다는 점만 달랐다. 프랭키는 중권으로 돈을 모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해운업계의 거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그가 돈을 번 것은 일종의 무역업 덕분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마약 밀매로 그는 돈을 벌었다. 물론 매춘조직에도 그의 영향력이 작용했고 술의 밀조, 밀매, 도박, 기타 법을 어기는 모든 일이 그에게 치부를 하게 해주었다. 최근 들어 프랭키는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조직범죄의 억압 정책에 대처하여 가능한 한 자기의 수입을 합법화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 작은 해운 회사의 주인으로 행세했다. 그리고 그의 수입은 일련의 금융회사들이나 기타 갖가지 사업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그러한 기업들은 모두 프랭키 엔터프라이스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지오 프랭키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줄곧 마피아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나이였다. 가족이란 자의에 의해 나갈 수도, 또 들어올 수도 없는 조직이었다. 가족의 행세는 생명에의 맹세가 무엇보다 우선했다. 부부나 부자간의 인연보다도 더욱 무서운 마피아 가족의 맹세 앞에서는 교회나 신()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르지오 프랭키는 41년간 단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의 피를 이어받아 그의 이름과 가업을 계승할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따뜻한 구석이 있는 세르지오는 자기의 자식이 없는 대신 마음이 가는 사람들을 참으로 잘 보살펴 주었다.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 그는 <세르지오 아저씨>였으며 극히 한정된 몇 사람에게는 <파파 세르지오>였다.

레오폴드 터린도 그 한정된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터린의 아이들은 그 넓은 지중해식 세르지오 저택을 마치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열 살 때 고아가 된 안델리나 터린도 어느 사이엔가 프랭키를 자기 아이들의 할아버지로 여기게끔 되었다. 세르지오의 아내는 최근 10년간 거의 외국 여행만 했기 때문에 그녀를 그 저택에서 마주 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해 9월 초 어느 날 낮. 안텔리나에게는 그 저택이 별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주차장에 여느 때보다도 더 많은 차들이 들어서 있다는 점만 달랐을 뿐이었다. 터린의 아이들은 차에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언제나 그랬듯 세르지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현관을 향해 힘껏 달려갔다. 레오도 걱정말라는 듯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고는 자동차 옆에 서 있는 그녀를 남겨 두고 저택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사람들이 단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변해 버리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그녀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가 오랫동안 그처럼 다정하게 느꼈던 이 저택이 왠지 불길한 예감으로 우뚝 솟아 있다니! 가을 햇살은 그녀의 살결에 따사로웠지만 오히려 그녀는 으스스함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남편은 살인을 모의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는 범죄 조직의 간부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의 아이들은 저택 밖에서 가을 햇빛을 듬뿍 받으며 마냥 즐거워하며 뛰놀고 있었다.

무서운 살인 계획이 검토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대상은 안델리나 자신이 하마터면 죽일 뻔했던 그 사내일 것이다. 그날의 사건은 안델리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남편을 살리기 위한 본능과도 같은 반응으로 저질러진 행동이었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을 전혀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공포에 질려서........그런데 저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 사람을 어떻게 죽일까를 의논하고 있다니........ 그녀는 또 몸을 떨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어쩌면 갑작스런 반응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저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감 역시 자신이 그날 밤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은 아니까? 그것은 목숨을 위한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 사내들은 자기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위기에 대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암흑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남편 레오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녀는 세르지오의 아내처럼 목적도 없이 세계의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비참하게 인생의 황혼을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살아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로 쫓아갔다. 그들은 그동안의 사건을 검토해 보고 있었다. 회의는 블라인드를 내린 방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20명의 경비원이 배치돼 있었다. 그리고 밖에는 10여 명의 보디가드가 저택 주위의 은밀한 곳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안델리나가 그 가냘픈 손으로 1개 소대나 되는 사내들이 못했던 일을 하마터면 해낼 뻔했단 말이지?"

세르지오는 잔뜩 비꼬는 투였다.

"조그만 장난감 총으로 빵빵 하고 쏘았다는 거지. ?"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체면이 말이 아닌 듯한 레오 터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넨 정말 훌륭한 마누라를 얻었어. 레오폴드, 주인을 소중히 모셔야겠어. 그녀 덕분에 자네는 살아난 거야!"

"정말 마누라 덕택에...."

터린이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상황을 말씀드린다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집 뒤를 한 바퀴 돌며 그놈을 찾았어요. 완전포위 상태였는데 그놈이 어떻게 거길 빠져나갔는지 정말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경찰과 한패가 아니라면 도저히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변명은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나?"

노인은 좌중을 한번 쭉 훑으며 자신의 말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틀림없이 그놈은 경찰의 끄나풀이야. 녀석은 위장한 거야. 그놈은 FBI의 첩자나 CIA의 요원일 수도 있어. 하여튼 살인 면허를 가진 미끼임에 틀림없어. 어때, 내 생각이?"

테이블의 맨 끝에 앉아 있던 몸집이 작은 사내가 부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기침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에게도 그런 정보가 들어왔을 겁니다. 그리고 당국이 총출동하여 그놈을 잡으려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점은 제가 확신합니다."

세르지오는 무서운 눈빛으로 그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자네가 모르는 것은 없다. 이 말인가?"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정보가 틀렸던 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저쪽에서 우리를 부숴버리기 위해 극비리에 계획을 세울 수도 있잖은가?"

세르지오는 갑자기 울화가 치미는지 테이블을 쾅쾅 두들기며 열을 올렸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묻겠는데, 경찰이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대봐! 대보란 말이야!"

"그런 것은 아무래도 미국식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몸집이 작은 사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경찰은 절대 그런 방법은 쓰지 않습니다. 적어도 미국 시민에 대해서는."

"그러나 그는 우리들 중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죽었나? 총에 맞은 일이 있어?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놈은 내 손에 쥐고 있는 글라스를 맞추어 깨뜨리는 솜씨를 가진 놈이야. 죽일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어. 어떻게 생각하나, 그 점에 대해서는?"

세르지오 역시 조금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놈을 어떤 방법으로 해치울 작정입니까, 세르지오님?"

플래스키가 물었다.

"이건 심리 작전이야. 그놈은 우리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갖고 놀고 있어. 그리고 아직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놈은 한 놈이 아냐!"

사나이들은 세르지오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채 오랫동안 누구한 사람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세르지오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구. 우리 조직의 하나인 트라이앵글 건물 앞에서 조직원 5명이 살해됐어. 목격자는 아무도 없어. 거기에다 도 월남에서 돌아왔다는 사내가 사무실에 나타났어. 그 녀석은 우리를 속이고 조직에 잠입했어. 그리고 우리들의 정보원으로부터 연락이 왔지. 그 정보원은 그 군인이 바로 트라이앵글의 조직원들을 죽인 범인이며 구리 모두를 죽일 작정이라고 했어. 그래서 우리는 살인 청부업자와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런데 그놈은 그 청부업자들을 오히려 해치웠지. 물론 그때도 목격자는 없었어. 그리고 놈은 레오가 경영하는 매춘관에 나타나 순식간에 쑥밭을 만들었어. 거기에 불을 지른 사나이와 자동차에 사정없이 탄환을 쏟아 놓은 사나이가 같은 놈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월트의 집만 해도 그래. 가정부와 이야기를 나눈 사나이는 그 군인과 모습이 대제로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 월트의 집에 그런 놈이 몇 놈이 왔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리고 그놈은 우리에게 극도에 달한 공포감을 심어주려고 하고 있어. 그놈이 왜 그러고 다니는 줄 알겠나? 바로 그놈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야. 우리들 속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 부수고 죽이고 신출귀몰하는 공포의 이미지를 심으려고 하는 거야.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내 추측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12면의 사나이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서로서로 귓속말을 하느라고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누군가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너도나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세르지오는 자신의 현재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한결 후련해진 기분으로 거리낌 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제 무언가 감이 잡히지? 안 그런가? 우리 정보원은 이제까지 일급 정보를 가져오지는 못했어. 그러니 마피아는 겁쟁이들이라는 말이 세상에 떠돌고 있지. 지나치게 안락한 생활만 해왔기 때문에 약해진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있는 실정이야. 우리 가족의 새로운 세대는 바보 같은 녀석들뿐이야. 세상은 우리들을 비웃으면서 이때다 하고 떠들고 있어. 이제 마피아를 한번 건드려 보자. 겁쟁이 마피아들은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칠 거다. 그래서 그놈을 미끼로 던진 거야. 안 그런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모어는 불쾌한 빛을 띠면서 좌중을 훑어봤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테죠?"

"그놈이 유령이건 귀신이건 지나치게 염려할 건 없습니다."

"뭐라구? 걱정 없다구?"

세르지오가 벌컥 화를 냈다.

"넌 대학생처럼 느긋해진다는 건가? 그러나 이 세르지오는 그놈의 시체를 빨리 보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당신은 보란이란 놈에 대해...."

시모어는 말을 하다 말고 우물거렸다.

"지금 내 말뜻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멍청이들만 모였군! 좀 더 끈질긴 집념을 갖고 임하라는 말이야!"

노인은 다시 격분하기 시작했다.

"그놈이 유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그따위 소리들은 집어치워! 그놈을 우리가 진짜 유령으로 만들어 줘야 해! 연방 정부에서 보내는 놈마다 모조리 유령으로 만들어 줘야 해. 모조리 말이야! 어떤가? 자네들 중 대담하고 용기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야? 어때, 레오폴드 자네는?"

터린은 노인의 시선을 피했다.

"그놈을 죽여야겠지? 어떻게 해치울 것인가, 이것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이야. 우선 첫째로...."

이렇게 해서 9월 초하루의 회의는 시작됐다. 안델리나 터린의 불길한 예감이 맥보란에게도 이미 느껴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가 전투 중 잠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안델리나의 덕이었다. 마피아는 또 그동안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물론 불안한 고요였지만.

 

18. 연정과 욕심

맥 보란은 벌써 48시간 이상이나 발렌티나 퀘렌테의 아파트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치료받는 동안 바렌티나가 이곳 고등학교의 역사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연히도 그곳은 보란이 ROTC의 교관으로 배속된 학교였다. 그는 발렌티나가 26세의 독신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녀에게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보란은 그녀가 유머가 풍부한 반면 섬세한 감정을 가진 순결한 처녀라는 것도 알았다. 또한 그녀는 굉장히 수줍음을 타기는 했으나 퍽 대담한 면도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녀의 침대에서 각기 다른 담요를 덮고 잤는데 보란은 알몸에 얇은 가운만을 걸쳤을 뿐이고 발렌티나 역시 잠옷 차림이었다.

그녀는 보란이 상처 때문에 옷을 입고 벗는 것이 힘들자 그를 거들어 주며 예사로 그의 몸에 손을 대곤하였다. 또한 그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로 그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서로 키스를 하거나 손을 만져본 적도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보란이 눈을 뜨자 발렌티나가 침대 가에 걸터앉아 그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 보란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제가 보고 있을 때 잠을 깨는군요."

"이보다 더 기분 좋게 깨본 적은 없는걸."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발렌티나의 손을 잡았다.

", 안 돼요. 이러시면 안 돼요."

그녀가 말을 더듬으면서 손을 빼내려 했다.

"왜 안 되지? 당신 손은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운데."

보란이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 손은 다친 쪽 손일 텐데요?"

"이젠 괜찮아. 믿기지 않는다면 단신을 껴안을 수도 있어."

"다행이군요, ."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를 쫓아내겠다는 건가?"

"괜찮으시다면 말에요."

"아직 완전히 낫진 않았잖아?"

보란은 짐짓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저를 안아 올릴 수 있을 만큼 나으셨잖아요?"

"여기 누워봐, 발렌티나. 시험적으로 당신을 안아볼 테니까."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내가 나가는 게 좋겠다는 거지?"

", 그래요."

그녀는 보란에게 잡혔던 손을 살며시 빼내며 어색하게 깍지를 꼈다.

"발렌티나, 당신 연애해 본 적 있어?"

보란은 부드럽게 물었다.

"아이, 그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묻는 것이야. 연애해 본 적이 있느냐구, 당신?"

"그야 물론 몇 번 있었어요."

"어떤 기분이었지?"

이 말에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보란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꼭 알고 싶으세요?"

"그렇다니까."

"실은 거짓말이에요. 연애를 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저는 잘 몰라요. 저는 언제나 짝사랑이었거든요. 지금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고백을 결코 뜻밖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서른 살이야."

보란이 무겁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옛날엔 나도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질 것을 생각해 보곤 했었지."

"옛날이라면 언제죠?"

"글세, 정확히 몇 년 전이라고 기억해 잴 수는 없지만 하여튼 오래된 일이야. 그런데 갑자기 또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된 거야. 왜일까, 발렌티나?"

그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표정에서 답을 찾으려는 듯이.

",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어느새 보란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속삭이듯 말했다.

", 제발……저는 살인자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보란의 눈이 얼어붙은 듯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가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자 그녀는 옆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이어 발렌티나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보란은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면서 옷을 찾으려고 걸어갔다.

"그래, 당신이 날 깨우쳐 줬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옷은 첫날과 마찬가지로 욕실 안에 단정히 걸려 있었다. 그는 어깨의 붕대를 풀고는 거울에 상처를 비추어 보았다. 상처는 거의 아물은 듯했다. 그가 옷을 입고 부엌으로 갔을 때 식탁 위에는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보란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먹어 치웠다. 식사를 끝내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발렌티나가 들어왔다.

"당신의 차를 옮겨 놓았어요."

그녀는 보란의 맞은편에 걸터앉으며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발렌티나. 그래서 당신에게 사례로 돈을 주고 싶어."

"뭐라구요?"

"내 자동차 트렁크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어. 당신에게 1만 달러를 주겠어."

"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돈은 어떻게 해서 생긴 돈이죠?"

"돈 말인가?"

그는 빙긋 웃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나는 살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도 하지. 마피아가 몰래 숨겨 두었던 25만 달러를 내가 뺏었지. 하지만 이 돈은 놈들이 도난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돈이야."

"밖에 있는 차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 있단 말인가요?"

그녀가 놀라 소리쳤다. 보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돈은 소중한 것이야. 이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는 없지만 싸움을 하는 데는 돈이 필요해. 그래서 난 놈들에게서 돈을 훔쳐냈지. 발렌티나, 난 살인만이 아니라 훔치고 속이고 거짓말도 한다구."

"아녜요, . , …… 정말로 당신이 살인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니야, 당신 말이 옳았어. 당신은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는 싸움을 하러 나가야 돼. 각자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그녀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제정신이 아니었지."

"하지만 난 정말로 당신을 살인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전 당신을 쫓아내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있고 싶을 때까지 여기 계세요. 하지만 앞으론 긴 의자 위에서 주무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보란이 눈썹을 치켜뜨면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전 제 침대에서 당신을 쫓아내진 못할 테니까요."

그녀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보란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스물여섯 살이 되도록 남자에게 키스를 받아본 적도 없으며 당신 이외에는 남자를 침대에 들어오게 한 적도 없단 말에요. 제가 그렇게 쉽게 당신을 내보낼 것 같아요?"

"정말 때려 줘야겠군!"

그는 화가 난 듯 말하고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좋아요, . 때릴 테면 때려 보세요."

눈물이 그녀의 양 볼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일찍이 느껴 보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 발렌티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안았다. 보란은 어깨의 통증을 약간 느꼈으나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젖은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의 입술을 격렬하게 그의 입술을 빨아들였으며 그녀의 가냘픈 몸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는 듯 그에게 완전히 기대어져 있었다. 보란의 손이 그녀의 허리 부분을 더듬자 그녀는 더욱더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면서 그에게서 입술을 떼고 말했다.

"전 당신을 보낼 수 없어요, . 어쩔 수 없어요."

그는 말없이 그녀를 안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에게 안긴 채 뜨겁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누이고는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조그만 어깨에 입술을 갖다 대자 머리카락을 감싸 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보란의 입술이 벗겨진 그녀의 상체를 따라 목을 타고 내려와 젖꼭지를 더듬었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보란은 그녀의 젖꼭지에 입술을 댄 채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란의 옷을 벗기려 하자 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 당신을 사랑해요."

"고마워, 발렌티나."

그는 부드럽게 말하면서 그녀 옆에 누웠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녀가 헐떡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너무 사랑스러운 여자야."

"사랑해요, !"

"나도 당신을 사랑해."

", ……."

"발렌티나……."

그리하여 맥 보란의 휴식은 끝이 났고 다시 바빠지게 되었다.

 

19. 신념

그녀는 그의 팔에 머리를 대고 그에게 안긴 채로 지친 듯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전 말이에요....."

"말해봐, 발렌티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는 말했다.

"미안해, 발렌티나. 당신은 나보다 훨씬 높은 이상을 가진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했었는데"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그녀가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나쁜 사람들과 싸우지 마세요"

"뭐라구?"

"이제 그런 짓 그만둬요, "

그녀가 진지하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일은 잊어버리고 우리 함께 멀리 도망가요.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아주 먼 곳으로 말이에요.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라도 따라가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줘, 발렌티나"

그는 힘없이 말했다.

"살인은 옳지 않아요. 당신이 이겨서 그들을 모두 없앤다 해도 마지막에 패배하는 건 결국 당신이에요. 악에 대한 해답이 결코 폭력은 아닐 거예요"

보란은 흥미 있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들과 형제처럼 우애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건가? 다시 말해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밀라는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거벗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그만하세요, 간지러워요"

그녀가 숨이 차서 말했다.

"전 당신에게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처럼 착하고 연약한 여자가 폭력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겠지. 악당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겠어, 발렌티나."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악이란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에요. 악에는 자비를 베푸는 것 이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악은 자비를 베푸는 자를 결국 다치게 하겠죠."

"그건 재미있는 이론인데. 당신은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악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건가?"

"히틀러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악 때문에 자신이 파멸한 거예요"

"그래, 그러나 만일 전 세계가 히틀러에게 다른 한쪽 뺨을 내밀었다면 지금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그쪽마저 찢어 버렸을 게 뻔하지 않을까?"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것은....."

발렌티나는 슬픈 듯이 말을 이었다.

"악에는 악으로 대하는 것이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모든 악을 과거의 유산으로 이어받고 있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다정하게 두들기며 말했다.

"발렌티나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이봐, 세상에는 두 개의 기본적인 힘이 있어. 그게 바로 선과 악이라는 거지. 난 십자군의 전사는 아니야. 하지만 난 자꾸만 선 쪽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돼. 선은 좀 더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또 선이 최후에 이기려면 더운 적에 대하여 강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돼!"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렌티나는 보란의 아랫입술에 자기 입을 가볍게 대고서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의로 악을 행하려 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예로든 히틀러의 경우를 든다 해도 최종적으로 그가 선이라고 믿고 있는 행위를 하려 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물론 그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이란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저항을 했던 거지. 선이란 것은 극히 개인적인 생각에서 본능적으로 구별 지어지는 거야. 나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악한 전쟁이라고 말하는 바보 같은 월남 전선에서도 나는 선 쪽에 서 있다고 자부했었어. 내가 만일 참전하지 않았다면 나는 자신을 아주 비겁한 인간으로 생각했을 거야. 내게 있어서 선과 악의 구별은 아주 개인적인 거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싸움 역시 마찬가지야. 맨 처음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내가 아니야. 마피아는 너무 오랫동안 그들 마음대로 행동해 왔어. 어쩌다가 나는 마피아의 악을 알게 되었고 또한 놈들을 때려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이야기는 극히 개인적이고 단순한 거야. 시덥지 않은 철학이나 신앙, 또는 평화 운동 따위를 한 묶음에 놓아도 나의 개인적이며 본능적인 감정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돼. 마피아는 이 나라의 목구멍에까지 달라붙어 생명의 즙을 빨아 먹고 있어.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놈들을 쳐부술 작정이야."

"그렇게 명확하고 간단하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발렌티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흔히 철학이니 평화니 운운하는 자들이 나중에 가서는 머리가 혼동되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리곤 하지. 이 나라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 비인도적인 전쟁을 비판하느라고 종종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고 데모도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절실히 느낀다면 어째서 그 친구들은 상대편에 가담해서 자기들의 진실을 위해 싸우지 않는 거지?"

"당신은 폭력이나 유혈을 전적으로 긍정하는군요"

발렌티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야, 발렌티나. 난 단지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어.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선과 악을 입으로만 떠드는 동안에 적은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게 돼서는 안 되지. 자칫하면 달아날 수도 없게 돼. 내가 그들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이 나라의 모든 바보 같은 놈들이 나를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쫓아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갈 수밖에 없어. 내가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마피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들이 악을 행하는 암흑가의 조직이라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도전이야. 나는 그 도전에 응하려는 것뿐이야. 그런 이유에서 나는 폭력이나 유혈도 불사하는 거지."

"끝없는 전쟁이군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끝없는 싸움이지."

그는 손으로 그녀의 작고 탄력 있는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결코 물러설 수는 없어. 나는 이제 전 세계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어.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자유롭지 못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은 나를 항상 쫓아다니고 있어. 군대에서도 탈주병인 나를 쫓고 있어. 게다가 또 귀여운 이상주의자인 당신까지도 나를 붙잡으려 하고 있으니 나는 정말로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셈이라구."

"당신은 신병 모집은 안 하세요?"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뭐라구?"

그녀는 보란의 몸 위에서 그의 목에다 두 팔을 감고는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당신 편이 되고 싶어요. 모집 안 해요?"

그는 대답 대신 발렌티나를 안아 몸을 옆으로 넘어뜨렸다. 그녀의 다리가 그를 휘감았다.

"왜 질 것이 뻔한 쪽에 끼고 싶다는 거지?"

"전 당신이 이길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처럼 나를 신뢰하다니.....정말 감격했어."

그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겹쳐졌다. 눈물이 고여 있는 그녀의 눈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신념은 훌륭해요."

그녀가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20. 이별

해가 진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맥 보란은 옷을 갈아입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여인은 그의 팔에 매달려 작별 키스를 했다. 그녀는 홀스터의 45구경에 손이 닿자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뺐다.

"조심하세요, "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꼭 돌아와 주세요."

"꼭 돌아오겠어.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내일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야."

그가 분명히 대답했다.

"멋있는 신혼이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짧았어!"

그가 웃으며 말하자 발렌티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로 짧았어요."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왼쪽 관자놀이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기 털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귀가 없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야."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로 내려갔다.

"어깨는 정말 괜찮아요?"

"오른쪽 어깨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어."

"당신은 뭐든지 다행이라고 말하는군요."

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커다란 라이플의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본 경험이 있다면 당신도 내 기분을 알 거야."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 당신은 피를 보고 싶어 해요.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싶어서 어디가 근질근질하신 거죠?"

"사실대로 말한다면 당신 말은 틀려."

그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뒤의 기분은 괴로운 거야."

그녀는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보란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내가 만약 잘못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당신에게 전화는 걸겠어. 그러나 연락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아. 전쟁 중에는 아무 소식도 없는 쪽이 결국 승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알겠지? 잠자코 기다려 줘, 발렌티나"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어요, !"

그녀가 다짐하듯이 단호히 말했다. 그는 불을 끄고 문을 열고 잠깐 뒤돌아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발렌티나는 그의 뒷모습이나마 보려고 뒤따라 나왔으나 이미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들어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얼마 동안 소리 없이 울었다. 그녀의 인생에 왜 이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는 불을 켜고 그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듯 집안을 돌아보았으나 그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흔적은 그와 함께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텔레비젼의 스위치를 넣었다.

"그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21. 전력보강

보란은 공중전화로 웨더비 형사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내가 전화할 때 항상 당신은 자리에 있으니 말이오. 당신은 당신의 직업하고 결혼한 거요?"

", 보란인가?"

웨더비가 말끝을 퉁겨 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리비에라에서 휴가를 보내고 방금 돌아왔소. 당신이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할까 봐 전화를 한 거요."

"뭐라구?"

보란의 말에 웨더비가 화를 내며 말했다.

"겨우 자네의 일을 잊게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 중이란 말야. 보란, 자네는 어째서 멕시코 같은 데로 꺼져버리지 않았나?"

"그쪽은 재미가 없지 않소? 그동안 쭉 텔레비젼만 보고 지냈기 때문에 소식은 모두 알고 있소. 나는 멕시코에도 남미에도 가지 않았소. 쭉 이 거리에 숨어 있었다구요. 그런데 그 겁쟁이 친구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소?"

보란이 여유 있게 응수했다.

"여기는 사설탐정 사무소가 아니야. 보란."

웨더비가 큰 소리로 말했다.

"겁도 없이 이리로 전화를 걸다니. 자네는 여러 건의 살인 혐의로 수배되어 있어.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죄목이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지금 겁을 먹고 있소.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날이 밝을 때쯤에는 살인 건수가 더 늘어날 테니까 말이오, 웨더비."

보란이 웃으며 말했다.

"보란, 더 이상 살인은 하지 말게.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시민들은 지금 자네에게 많은 동정을 보내고 있다는 거야. 그동안 텔레비젼을 보았더니 자네도 잘 알고 있겠군. 자수하게. 보란! 그것이 싫다면 지금 자네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게. 내가 마중을 나가겠어. 미국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변호사 두 분이 자네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섰네. 아마....."

"걱정 마시오, 부장."

보란이 웨더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특히 마피아는 말이오, 그렇지 않소?"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자네가 그놈들에게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놈들은 완전히 원상 복귀하여 지금 기다리고 있을 걸세."

"물론 그럴 거요. 그래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소? 뭔가 좋은 정보가 없을까 해서 말이오."

웨더비의 한숨 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 왔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내가 왜 자네에게 정보를 주는지 알겠나?"

"당신은 내가 당신네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자네와 장난하는 것이 아니네, 보란!"

"나도 진정으로 하는 말이오. 나는 당신처럼 거북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으니 말이오. 나는 처음으로 그놈들에게 혼을 내주고 벌벌 떨게 해줬소. 당신도 물론 그것은 인정하겠죠?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오, 웨더비?"

"지금 누구의 편이라는게 문제가 아니야. 이것은 즉...."

"직업상의 문제라는 거겠죠.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은 앞으로 직업적인 입장에 서서 행동하면 되는 거요. 하지만 나는 지금 그놈들의 동태를 알고 싶소."

"자네를 경찰의 앞잡이로 생각하고 있네."

웨더비는 거의 숨이 막힌 듯이 말했다.

"그들은 특공대를 조직했어. 이번에도 자네가 놈들을 공격하려 한다면 그때는 분명히 놈들에게 당하고 말 거야. 녀석들은 모든 것을 준비했어. 없는 것은 원자폭탄뿐일 걸세."

"정말이오?"

"물론이지. 이제 승산이 없네. 보란. 한번은 자네가 그놈들을 마구 두들겨 주었지만 이제는 안 돼. 만약 자네가 공격을 재개해서 놈들에게 자네의 위치를 알린다면 자네는 그걸로 마지막이야. 아마추어는 항상 그렇지만 자네는 정말 곤란한 일만 저지르고 있어. 자네 때문에 우리가 5년간이나 해온 비밀수사가 하마터면 물거품이 될 뻔했어."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비밀수사를 하고 있소?"

"물론이지. 내가 자네에게 말해준 여러 가지 정보가 어떻게 입수된 것이라고 생각했나?"

"5년 동안이나 말이오? 언제까지 그런 일을 계속할 작정이오?"

"필요하다면 언제까지라도 계속할 거야. 우리는 그들에 관해서 확고한 증거를 잡아야 하네. 우리는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5년 동안이나? 5년 동안에 놈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지 않소, 웨더비?"

형사부장은 초조함을 누르며 답답한 듯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네."

"나도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그런 일을 위해 5년씩이나 한가히 기다릴 수는 없소. 경찰들을 내게 접근시키지 마시오. 웨더비. 오늘 밤도 한바탕 벌일 참이니까 말이오."

"그래?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가 그렇게 못하도록 막을 거야."

"나를 막으려 해도 소용없소. 그것은 또한 나와 당신네들의 공동의 적인 놈들만 좋게 해주는 것일 뿐이오. 다시 말하지만 경찰을 접근시키지 마시오."

보란은 전화를 끊고 자동차로 돌아와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는 곰곰이 웨더비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말할 것도 없이 웨더비의 말이 옳았다. 상황은 지금 그에게 극히 불리했다. 맥 보란은 사실주의적인 군인이었다. 전통적인 정략 행동에서는 강대한 병력과 무기를 갖고 있는 쪽이 반드시 승리했다. 그러나 우위란 항상 수의 문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한 개 소대의 정예는 신병뿐인 한 개 중대를 무난히 격파할 수 있다. 한 대의 탱크는 보병 1개 여단을 무찌를 수 있다. 월남전에서는 화기와 기동성이야 말로 전략적 우위성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싸움터에서 살아남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란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며 육탄적인 전법을 오히려 경멸하였다. 만일 그가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면 자신을 적과 대등한 곳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까지는 그의 작전대로 잘 되어 왔었다. 목적했던 바는 이루어졌다. 적어도 적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나게 한데는 성공한 것이었다. 상류사회의 명사라는 사회적인 연막 속에 숨어 있는 적을 끌어낸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적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더욱 그 정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란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웨더비의 상황분석은 정확했다. 이번엔 놈들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놓고 보란을 죽이려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마 무서운 함정을 파놓고 말이다. 보란은 그들과 맞설 수 있는 특별한 공격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저격수가 중대 병력의 적을 상대로 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보란은 갑자기 미소를 짓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앞을 향해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세라는 것은 수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했다. 그는 곧바로 시가지 끝쪽에 있는 공업 지대로 향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창고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보란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수년 전에 그는 특별 임무로 몇 주일 동안 이곳 창고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창고만 찾을 수 있다면..... 다행히도 그 창고는 곧 찾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지붕이 평평하고 얕은 콜게이트의 철판으로 만들어진 창고였다. 비바람에 의해 거의 바래고 지워진 표찰은 서플러스 엑스포트 INC, 그 밑에 작게 불에 구운 글자로 씌여져 있는 MDI는 보란의 기억으로는 뮤니션 디스트리뷰터스 인터내셔널의 머리글자였다. 유능한 병기계였던 보란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부에서 불하한 막대한 양의 잉여 병기와 탄약을 수출하는 이곳에서 병기를 분류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보란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그가 취급한 병기의 대부분은 이제까지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병기들은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시의 잉여 병기였다. 미국 국내에서는 팔리지 않는 병기들을 무역회사들은 활발하게 해외로 팔아넘겨 돈을 벌고 있었다. 보란이 그 임무를 명령받았을 무렵 그러한 무역은 눈부신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월남전 때문에 창고가 비어 있지 않길 빌었다. 그는 그때에 이 창고를 통하여 흘러나가고 있는 무기가 모두 잉여 병기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란이 취급하고 있었던 것은 진짜로 구식 병기뿐이었다. 하여튼 구식이라도 좋으니 몇 개의 무기만 손에 들어온다면 다행이었다. 보란은 출하구의 그늘에 자동차를 세우고 창고의 뒤쪽으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는 오랜 기억을 더듬에 경보장치가 어떻게 되어있었던가를 생각해 내었다. 그는 자동차로 돌아가 연장 벨트를 허기에 차고 스페어타이어의 우묵한 곳에서 한 뭉치의 지폐를 꺼내었다. 보란은 침입하는 순서를 이미 머릿속에서 그려 놓고 있었다.

10분 후, 그는 창고의 통풍구를 타고 내려와 <특수 병기>가 있는 구획으로 걸어갔다. 그는 전략적 우세를 가져올 수 있는 병기를 민첩하게 골랐다. 그는 그가 골라낸 병기의 전문용어를 리스트에 작성하고 그 추정 가격도 적어 넣었다. 그는 완성된 리스트를 두 번이나 검토하여 계산한 뒤 10퍼센트의 오차를 감안하여 숫자를 더 올려 눈에 띄기 쉬운 장소에다 돈과 리스트를 남겨 놓았다. 그는 도둑이 아니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다가 그는 씁쓸한 쾌감을 맛보면서 생각했다. 적을 쳐부수기 위한 쇼핑을 적의 돈으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는 경보장치를 풀고 공공연하게 출하구의 문을 연 뒤 자동차에 무기를 싣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경보장치를 원상태로 해두고는 들어갔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창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창고들의 경비를 맡고 있는 민간 경비원의 자동차가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보란은 빙긋 웃으며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이렇게 하여 보란은 열세인 화력을 보충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적을 끌어내는 일이다!

 

22. 밤의 축제

보란은 아파트의 뒤쪽 입구에서 자동차를 멈췄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발소리를 죽이고 511호실로 다가가 문에 귀를 대고 안의 기척을 살폈다. 잠시 후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지금 곧 가겠어."

보란은 벨을 누르는 대신 다치지 않은 쪽의 어깨로 벨 근처에 기댔다. 안에서 열쇠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 있던 사나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

사나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를 알고 있군. 옷을 입어.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보란이 차갑게 말했다. 사나이는 되돌려 아파트의 안쪽으로 뛰어가려 했으나 보란은 사나이의 뒤를 쫓아가 한팔을 잡아 돌리면서 주먹으로 배를 한 방 후려쳤다. 사나이는 신음 소리를 내며 맥없이 옆에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에 쓰러지려 했다. 그러나 보란은 쓰러지려는 사나이의 멱살을 잡고 침실로 끌고 갔다. 몇 분 뒤에 두 사람은 아파트의 뒤쪽으로 나와 보란의 자동차에 올라탔다.

아파트의 문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친 이후부터 두 사람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나이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놓여 있는 덮개를 씌워 놓은 불룩한 것을 보고 물었다.

"저것은 뭐죠?"

"누군가의 시체인지도 모르지."

보란은 조용히 대답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면 너도 순식간에 저렇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구!"

사나이는 겁에 질려 몸을 떨며 똑바로 앞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그들이 탄 자동차는 에스코트 언리미티드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나이가 먼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란도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사나이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 아무 짓도 하지 않아. 다만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보란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매출을 하고 있는 여자의 명단을 전부 프린트해. 콜걸, 하우스 걸, 스트리트 걸 등 모두 빠짐없이 말이야. 지금 당장!"

"좋아요, 알았어요."

프로그래머인 그 사나이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상한 버튼은 누르지 말게. 그런 짓을 하면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거야. 조심하게. 재가시키는 것만 하면 돼. 만약 자네가 허튼 짓을 한다면 자네를 그냥 두지는 않을 거야. 알겠지?"

"알고 있소."

사나이가 힘없이 대답했다. 얼마 후, 보란은 사나이를 거리에 남겨둔 채 자동차를 타고 급히 사라져 갔다. 프로그래머가 이 일에 대해 지껄인다 해도 그에게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일이 끝나면 그는 리스트를 웨더비 형사부장에게 보내줄 작정이었다. 이 리스트는 경찰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보란은 그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번져 나갔다. 이제부터 엄청난 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란은 어두운 홀을 지나 어떤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문에다 귀를 대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문을 밀치자 열려진 방 안의 풍경은 마치 포르노 사진과 같았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흐트러진 침대 발치에 알몸을 걸치고 두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었다. 여자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역시 벌거벗은 사나이가 서서 여자의 허리를 힘차게 껴안고 있었다. 문 여는 소리에 그 여자와 사나이는 놀란 듯이 문에 서 있는 보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나이는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야릇하고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보란은 거침없이 방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다가가 손등으로 사나이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사나이는 여자의 허리에서 손을 떼며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보란은 이들이 가엾게도 생각되었으나 성전에 그런 동정은 소용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사나이를 혼내준 것을 생각했다. 사나이를 혼내준 것과 같은 수법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때렸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가 퉁기듯이 몸을 일으키고는 천한 말로 보란을 향해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사나이는 땅에 흩어져 있는 옷을 주워들고는 알몸인 채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그러자 홀의 끝에 있는 문이 열리면서 25세가량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예리한 나이프를 손에 들고 달려가 보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보란은 재빨리 사나이의 손을 나꿔채며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사나이의 머리를 힘껏 벽에다 밀어붙였다. 힘없이 방바닥에 쓰러지는 사나이를 보고는 여자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보란은 여자 쪽을 돌아다보고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또 여기서 돈벌이 하고 있는 여자는 없나?"

여자가 지나칠 정도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래층에 ……바에 있어요."

그녀는 겁에 질려 보란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확인해 볼까?"

보란은 방에서 나와 홀에 접한 문을 모조리 열며 지나갔다. 방은 모두 여섯 개가 있었는데 모두 비어 있었고 마지막 방에 수확물이 있었다. 두 여자가 알몸인 채로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얽혀 있었으며 머리는 잘 보이지 않았다.

"소란이 귀에 들리지 않나?"

보란은 큰 소리로 말하고 한 손을 뻗어 엉켜 있는 두 여자를 단숨에 방바닥으로 끌어내었다. 4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여자의 황홀한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뭐예요? 당장 나가요!"

여자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돈을 벌고 있는 건 어느 쪽이야?"

보란이 웃으며 물었다. 아름답게 생긴 젊은 여인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겁에 질린 얼굴로 보란을 쳐다보았다.

"나를 때리겠어요? 회초리는 가지고 있나요?"

그녀는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

보란은 여자를 잡아끌어 손바닥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두들겨 주고는 다시 그녀를 침대로 떠밀었다. 그리고 옆의 의자에 걸쳐져 있는 나이 많은 여자의 옷을 집어 들고는 멍청히 서 있는 여자의 목에 감아준 뒤 밖으로 내쫓았다.

"싹 꺼져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여자에게 겁을 주면서 말했다.

"곧 이곳을 날려 버릴 테니 말야!"

여자는 울상을 하고는 옷을 입을 생각도 못 하고 알몸인 그대로 달아났다. 보란은 빙그레 웃으며 달아나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방으로 되돌아왔다. 젊은 여자는 당황해서 침대 커버로 허리 근처를 가렸다.

"레오에게 전해! 나는 메인스트리트의 창녀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야."

보란은 그렇게 말하고 저격수의 메달을 침대 위에 던졌다.

"꼭 그렇게 말해!"

그는 방에서 나와 조용히 뒷계단을 내려와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10분 후 그는 시내 주택가에 있는 어느 저택의 뒤쪽에다 차를 세웠다. 그는 파일에 적힌 리스트를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차에서 내려 그 집의 뒷문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는 자동차로 돌아와 트렁크에서 쇠지렛대를 꺼내 다시 뒷문쪽으로 갔다. 그가 정확한 위치에 쇠지렛대를 대고 비틀자 문이 열렸다. 그는 곧 열려진 문으로 들어갔다. 안은 좁은 홀이었으며 오른쪽 유리 창문을 통해 부엌이 보였다. 홀의 안쪽 벽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리고 문의 저쪽에서는 무엇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하이파이 전축의 높은 볼륨과 남녀의 괴성으로 보아 방 안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보란은 권총을 뽑아 들과 부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앞에 벌거벗은 여자가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으로 타일 위에 서서 냉장고의 얼음을 꺼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벗고 있으면 얼어 버릴 텐데!"

그녀의 옆을 지나가면서 보란이 한마디 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녀가 중얼거렸으나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커다란 방 안에는 값비싼 동양풍의 고급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많은 인간들이 취해서 서로 끌어안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불빛은 어두웠고 아무도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으나 이야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거기서 보란은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부엌으로 되돌아가 아직도 얼음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알몸의 여자를 위해 얼음을 꺼내 주고 그 답례로서 키스를 받았다. 그는 현관으로 나와 세탁용 수도를 살펴보았다.

그는 들어올 때 정원에 살수용 호스가 있는 것을 봐 두었었다. 그는 정원에서 호스를 가지고 들어와 한쪽 끝을 세탁용 수도에 끼우고 반대쪽 끝을 클립으로 막은 후 수도꼭지를 한껏 비틀어 찬물이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호스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 바닥에서 얼음을 줍고 있는 나체의 여자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방 안으로 갔다.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의 불이 모두 켜졌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소리쳤다.

"왜 또 불을 켜는 거야!"

방에는 30명가량의 남녀가 있었는데 모두가 알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복잡하게 손발과 상반신이 엉켜 있었다. 방 가운데 있던 젊은 여자가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보란이 예리한 눈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사방으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상태로서는 소리를 지르려면 째지는 듯한 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쪽에서도 불이 켜졌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보란은 슬픈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이쪽을 봐! 맥 보란이다!"

그러나 두세 사람이 꿈틀하고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보란은 45구경의 안전장치를 풀어 전축을 쏘아 구멍을 냈다. 음악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귀청을 울린 총소리에 방 안의 남녀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보란을 바라보았다. 보란은 호스 끝의 클립을 벗겨 내어 그들을 향해 찬물을 마구 뿌려 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짓궂은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불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나이들은 욕을 하면서 꾸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자들은 저마다 비명을 질러 댔다. 보란은 호스를 방에다 그대로 버려두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그 나체의 여자에게 키스의 답례를 한 다음 여자의 부풀어 오른 우윳빛 유방 위에 저격수의 메달을 걸어 놓고 그곳을 나왔다. 그는 또 마지막으로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꼭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는 신중히 그 장소를 선택하기 위해 교외를 향해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정각 230. 보란은 시가의 동쪽에 있는 인가도 드문 교외의 한 호화로운 저택에서 약 100야드가량 떨어져 있는 숲속에 차를 세웠다. 그는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커다란 통조림 크기의 연막탄 세 개를 꺼내어 주머니에 넣고는 숲을 지나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저택의 창에는 모두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으나 불빛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보란의 귀에 들렸다. 주차자에 있는 많은 자동차들로 보아 오늘의 파티는 꽤 요란한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숙이지도 않고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쪽으로 다가가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으려니까 바로 가까운 데서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다른 사나이가 소리를 죽이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보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커다란 저택의 끝에서 15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 두 사나이가 보란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두 사나이는 각각 총신이 짧은 총을 느슨하게 안고 태평스럽게 농담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오는 친구들은 머리가 돈 게 아닐까? 나 같으면 이런 파티에 250달러를 지불하는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거야."

"이봐. 저 친구들의 250달러는 자네나 나 같은 것의 25센트보다도 가치가 없는 거야."

다른 사나이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25센트로 저렇게 즐길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투자하겠네."

"분명히 레오도 여기 올 것이라고 했지?"

키가 작은 사나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자네 혹시 레오를 봤나?"

"아냐. 레오는 오늘도 여기 오지 않을 거야. 내기를 해도 좋다구. 검은 옷의 사나이가 날뛰고 있으니 그 친구들은 겁이 나서 꼼짝 않고 움츠리고 있을 거야."

"난 쓸모없는 이 총으로 레오의 엉덩이를 후려갈기고 싶어. 이런 것을 들고 있으려니 무거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렇다면 그것을 땅에 내려놓게!"

갑자기 그들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가만히 내려 놓으라구,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목숨은 없어."

두 사나이는 놀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키가 작은 사나이는 총을 가진 팔을 똑바로 앞으로 뻗고 천천히 몸을 굽혀 총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키가 큰 사나이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누구야, 당신은?"

사나이는 똑바로 앞을 보고 물었다.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은가?"

보란이 대답했다. "뭐라고? 그럼 당신이."

사나이의 말은 커다란 45구경 권총이 그의 관자놀이를 뚫고 지나가자 딱 끊겼다. 사나이는 힘없이 푹 쓰러졌다. 그러자 검은 옷의 사나이는 땅바닥에 놓여 있는 총을 집어 들어 총신의 뒷부분을 벗겨 내고는 날카로운 나이프의 끝을 키가 작은 사나이의 목에 갖다 댔다.

"너를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꼬마야."

보란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 순순히 대답만 해준다면 지금 죽게 되는 비극은 없을 거야. 알겠지?"

사나이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입술을 떨며 헛기침을 하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지 말하겠소."

"감시원은 모두 몇 명이나 있나?"

"두 사람 더 있습니다."

"그들도 총을 갖고 있나?"

"물론이죠. 그리고 규칙상 이렇게 모여 있으면 안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모양이었다.

"내 위치는 정면이고 찰리는 이쪽이었죠. 매트는 뒤쪽이고 앤드가 그 반대쪽이에요. 그리고 집 안에 두 명이 더 있어요. 2층에 한 명이 있고. 다른 한 명은 정면 입구를 지키고 있어요. 그들은 이것 대신에 숄더 홀스터로 총을 차고 있어요."

"창녀 집치고는 경비가 지나치게 삼엄한데?"

검은 옷의 사나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녀석들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오."

사나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쉰 것처럼 들렸다.

"녀석들은 지금 벌벌 떨고 있어요. 우리의 급료를 올려줄 정도로 말입니다."

"게다가 나를 죽이면 보너스까지 준다고 했겠지?"

"보너스 정도가 아니오. 자그마치 10만 달러요."

"넌 보너스를 받을 생각이 없나? 10만 달러가 무척 욕심이 날 텐데."

"내가요?"

사나이의 쉰 듯한 목소리가 갑자기 본래대로 돌아왔다.

"내가 말이오? 천만에요. 난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소. 또 난 당신에게 원한도 없으니 말이오. 검은 옷차림 씨. 잠깐만 기다려요. 그리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 나이프 좀 치워줘요, 조금만 더 밀어 대면 내 목이 잘라질 것 같아요."

사나이가 겁에 질려 얼굴을 찡그리면서 애원하듯이 말했다.

"얌전히 굴어! 서툰 짓 하면 당장 네 목을 잘라 버릴 테니까. 알았지? 이름이 뭐야? "

"내 이름은 해리요."

"말해봐. 해리. 저기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은 무엇을 하는 곳이지?"

"아아. 저건 바 같은 곳이오. 방 한가운데를 터서 만든 아주 큰 클럽 룸 같은 거죠. 지금은 마침 파티 중이오. 한창 열이 올라 있을 거요."

"무슨 파티지. 해리?"

"섹스 파티예요."

"2층은?"

"모두가 침실이에요. 그리고 참. 홀 끝에 거실 비슷한 방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곳에 2층의 감시원이 있어요."

"파티를 하고 있는 방의 저쪽에는 무엇이 있나?"

"아까 말했잖아요? 벽의 문들을 옆으로 붙여 버리면 거기는 커다란 하나의 방이 되는 거라구요. 끝에서 끝까지 말이오."

"지금 안에는 몇 사람이나 있지?"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32명까지는 내가 세어 보았소. 아마 그보다 많은 게 분명하지만 32명은 틀림없이 저 안에 있을 거요."

"여자는?"

"물론 여자도 있죠. 정식이 25. 그리고 스폐셜 15명쯤 되거요."

"스폐셜이라면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건가?"

"섹스의 묘기 같은 특기를 갖고 있는 여자를 말하는 거죠."

"과연 그렇겠군! 좋아, 해리 많은 참고가 되었어. 만약 네가 말한 것이 거짓말일 때에는 나는 여기로 다시 돌아와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야. 알겠지?"

"나는 거짓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그럼 가볼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나이의 목에 대고 있던 나이프를 떼자마자 사나이의 뒤통수를 45구경의 손잡이로 한 대 후려쳤다. 말 많은 제보자는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보란은 사나이의 총을 집어 들고 언제든지 쏠 수 있는 상태로 장탄한 뒤 저택의 커다란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허리에 매단 주머니에서 연막탄을 한 개 꺼내어 땅 위에 놓고 총으로 유리창을 두들겨 깨고는 유리 파편을 피하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커다란 창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그는 날아오는 파편을 피하면서 커튼 너머로 보이는 천장을 향해 총의 두 방아쇠를 한꺼번에 당겼다.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굉음은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두꺼운 커튼에는 수박 만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뚫려져 있었다. 보란은 연막탄의 고리를 잡아당긴 뒤 커튼의 구멍을 통해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커튼과 창틀 사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보란은 쓰러져 있는 감시원 쪽으로 달려갔다. 보란의 등 뒤에서는 수많은 남녀의 아우성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땅에서 총을 주워들고 다시 조립한 뒤 발포에 대비했다. 바로 그때 저택의 반대쪽에 있던 감시원이 모퉁이를 돌아 뛰어나오고 있었다. 보란은 그쪽으로 총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맨 앞에 달려오던 사나이가 가슴에 총알을 맞고는 부서진 인형처럼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땅바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같은 방향에서 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보란이 다시 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사나이는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지르며 총알 맞은 배를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보란은 탄환이 다 떨어진 총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 지신의 45구경을 뽑아 들었다. 이때 2층의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손에 총을 쥔 한 사나이가 어리석게도 밝은 불빛 속에서 몸을 내밀었다. 맥 보란은 45구경이 2층 창문을 향해 불을 뿜자마자 사나이는 뒤로 몸을 젖히듯 창문 안으로 쓰러지며 사라졌다. 보란은 재빨리 정면의 입구로 달려갔다. 그러자 또 한 사나이가 총을 겨누며 현관 쪽에서 뛰어나와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던 사나이는 허수아비처럼 사격을 멈추더니 땅바닥에 쓰러졌다. 보란은 다시 저택의 옆쪽으로 돌아가 연막탄을 2층 창문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로 돌아와 급히 사우스힐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성전의 전초전은 끝났다. 이제 곧 대살육의 막이 오를 것이다. 보란은 서곡의 연주가 너무 길지 않았는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23. 비상사태

"그 미친놈이 날뛰는 바람에 간신히 도망쳐 왔어요!"

플래스키가 세르지오의 침실로 뛰어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레오도 지금 이리로 오고 있어요. 그리고."

"잠깐 진정하게."

노인이 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 좀 조용히 하라구!"

그는 옆에 서 있는 보디가드에게 고갯짓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보디가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가서 책상 위의 전화를 집어 들었다. 세르지오가 침대 끝에 나와 앉으며 말했다.

"네트,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가?"

"제 말은 보란이라는 놈이 또 날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플래스키는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놈은 한 시간도 안 되는 동안 레오의 창녀 집을 세 곳이나 부숴 버렸어요. 그리고 메도스에서는 경비원을 네 명이나 죽였어요. 지금 레오가 월트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되었군. 안 그런가?"

세르지오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영감님은 놈이 하는 짓을 그냥 보고 있기만 할 건가요?"

"그럼 자넨 더 좋은 방법이 있단 말인가?"

". 세르지오님. 우선 경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원 소집을."

"그런 건 지금 테리가 진행하고 있네."

세르지오는 거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사나이를 보면서 말했다.

"우선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해. 지금 곧 회의실에 가서 무대가 잘 되어있는지 확인해 보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세르지오님. 곧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급히 방을 나와 2층에 있는 큰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에는 모든 게 잘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자마다 사람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플래스키는 의자에 앉아 있는 마네킹의 자세를 고쳐 주고 테이블 위의 술병들을 마네킹 가까이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자동으로 된 전자 장치 버튼을 눌렀다. 전자 장치는 곧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면서 커튼에 비치는 그림자에 움직임을 주는 것이었다. 플래스키는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밖으로 나가 2층의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밖에서 보기에 그것은 완전했다. 방 안에서는 열기를 띤 집회가 진행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플래스키는 세기의 이단자를 맞이하는 가족의 전략적 환영회에 기대를 걸며 천천히 사방을 훑어보았다.

월트 시모어는 벌써부터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겠는지 들뜬 모습이었다.

"그런데 레오, 오늘 밤 놈이 사우스힐스를 공격해 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는 터린을 쳐다보면서 초조한 듯 물었다. 터린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프리웨이의 갈림길을 내려와 호화로운 저택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고급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놈의 수법은 뻔한 거야. 놈은 우리의 매춘 영업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야. 놈이 진짜로 노리는 것은 우리를 마구 짓밟아 버리는 거라고. 한 번은 그것이 들어맞았지. 그래서 놈은 또 같은 수법으로 우리에게 겁을 줘서는 우리 가족들이 한곳으로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우리가 모두 모였을 때 독 안의 쥐를 잡듯이 한꺼번에 쳐부수려는 것이 놈의 계획이겠지. 우린 바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네, 월트."

"그런데 놈은 어디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것일까?"

시모어의 얼굴에 경외의 빛이 떠올랐다.

"글세. 나도 놈이 상처가 나을 동아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해. 지난번에 놈이 우리 집에 쳐들어 왔을 때 내 마누라가 틀림없이 놈을 명중시켰는데 말이야."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에 놈이 저지른 짓을 보면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놈은 반드시 또 쳐들어올 거야. 어딘가 가까운 곳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망원경 같은 것으로 말야."

터린이 몸을 떨며 말했다.

"아니면 저격병들이 쓰는 적외선 망원 렌즈 같은 걸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거야. 레오, 자네 군대에 있을 때 적외선 망원 렌즈를 사용해 보았나?"

"그래, 그런 굉장한 거였지. 2500야드 정도의 거리에서 파리의 입이 보일 정도라네."

"파리의 입이 보일 정도라구?"

시모어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터린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리자 터린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또 한 번 놈이 우리에게 미친 짓을 해온다면 그땐 놈의 숨통을 끊어 버려야 돼."

그러나 세르지오 프랭키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비가 오기 전의 하늘만큼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보란은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처음의 신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나는 침실의 유령이야."

보란이 유쾌하게 말했다.

"! ! 당신 무사했군요."

"물론이지, 발렌티나! 그런데 나의 불타는 정열이 당신을 그리워한단 말이야. 당신이 걱정할까 봐 전화했어. 당신,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 당신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젠 혼자서는 침대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긴 의자에 앉아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발 무사히 돌아와 줘요, . 제발."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유산이라 생각하고 당신이 맡아줘. 그 돈은 누구의 돈도 아닌 내 돈이니까 말이야. 알겠지, 발렌티나?"

",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돌아오는 것만이 제 소원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꼭 제게로 돌아와야 해요. 전 당신만이 필요해요!"

"그런 소릴 해서 미안해. 하지만 내게 어린 동생이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동생은 돈이 필요해. 그래서 하는 말이니."

", 참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울음소리가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 왔다.

"울지 말아요, 발렌티나.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난 그저 당신에게 돈 얘기를 해두고 싶었을 뿐이야."

"제게 필요한 건 오직 당신뿐이에요. , 당장 전화를 끊고 내게로 돌아와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녀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무척 곤란하게 만드는군. 이 일은 내가 꼭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그가 달래듯이 말했으나 그녀는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용기를 내겠어. ."

"그래야지. 나의 귀여운 아가씨. 이젠 침대로 들어가서 편안히 자요. 내가 집에 돌아가면 졸리지 않는 얼굴로 나를 반겨 줘야지."

"그러겠어요. "

"사랑해, 발렌티나!"

"! ,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런 연애도 멋있군. 그렇게 생각 안 해, 발렌티나?"

보란이 유쾌하게 웃으며 발했다.

"그래요, 정말 멋있어요."

", 그럼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군. 당신은 걱정하지 말고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약속하겠어요, . 조용히 기다릴게요. 그리고 또."

"또 뭐지?" "전 당신이 누구를 죽이든 몇 사람을 죽이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꼭 돌아와 주세요."

"꼭 돌아가지."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지금까지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차가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생의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위험한 순간을 맞이해야만 한다. "발렌티나, 난 꼭 돌아간다.!" 그는 수화기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적들의 긴급회의를 부숴 버리기 위해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메트로폴리탄 경찰국의 형사부장 알 웨더비는 보온병과 샌드위치를 들고 젊은 부하인 존 파파스 경사와 함께 차고로 내려갔다.

"오늘 밤에 놈들이 운영하는 창녀 집이 세 곳이나 당했다면서요?"

파파스 경사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렇게 신나는 얼굴은 하지 말게. 그 녀석은 우리까지도 바보로 만들고 있단 말이야."

조금 후 그들은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파파스가 먼저 차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웨더비가 내미는 짐을 받았다.

"아니 이 많은 걸 오늘 밤에 다 먹어 치울 생각입니까?"

"나 혼자 먹을 건 아니야. 우리 두 사람의 몫이지. 오늘 밤은 상당히 길 테니까 이 정도는 먹어야 할 거야."

웨더비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3시가 넘었는데, 2시에 식사를 했으니 뭐 별로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아침 식사는 아마 늦어질 거야. 그러니 든든히 먹어둘 게 있어야 해."

웨더비가 신호를 보내자 자동차는 가볍게 비탈길을 올라갔다.

"출동한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파파스 경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현장 주위에 모두 12대의 차가 배치돼 있어. 사건이 발생하면 그중 8대는 직접 행동에 돌입할 게고 나머지 4대는 증원이 필요할 때 투입될 지원반이야. 물론 보안관도 협력하고 있어. 보안관은 골짜기 쪽에 최소한 12명 이상 투입하기로 돼 있네."

"기마대인가요?"

"가능하면 기마대를 배치하겠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어."

"그를 잡을 수 있을까요?"

"아마 이번엔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하지만."

웨더비 부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파파스 경사에게 얼굴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문쟁이들 말처럼 그놈이 유령이라면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그들이 탄 차는 점점 더 속력을 내고 있었다.

"조니! 그렇게 서둘러 달리지 않아도 돼."

웨더비가 과속이 염려되는 운전석에 앉은 파파스에게 말했다.

"늦으면 안 되잖아요!"

파파스가 웃으며 웨더비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전 이 멋진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형사부장은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잠시 후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침내 그는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그들을 모이게 했으니."

"? 무슨 얘기죠?"

파파스 경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한 계시록의 한 구절이야. 그 구절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 같다구."

파파스는 무의식중에 몸을 한 번 떨더니 마치 핸들을 덮듯 상체를 앞으로 잔뜩 숙였다.

"아마겟돈이라는 곳으로."

그는 부장의 말을 그대로 받아 외어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말하자면 지옥과 같은 곳이란 말씀이시죠?"

"아니야. 지옥은 아니라구! 아마겟돈이라 두 세력이 최후의 결전을 치렀던 장소란 말이야. 이봐! 조심해!"

파파스 경사는 느릿느릿 달리고 있던 두 대의 자동차 사이를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그때 웨더비의 몸은 한쪽으로 처박히듯 했다. 부장은 화가 난 듯 뭐라고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두 세력이라구요?"

파파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의 투덕거림을 완전히 무시한 채 다시 물었다.

"선과 악, 두 개의 세력을 말하는 거야. 이봐, 파파스! 정말 이렇게 속력을 내다간 바로 이 고속도로 위가 아마겟돈이 되고 말 거야! 명령이야! 당장 속력을 늦춰!"

파파스는 하는 수 없이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염려스럽다는 듯 말했다.

"늦지는 않아야죠. 정말이지 저는 아마겟돈의 결전을 놓치고 싶진 않다구요."

"자네의 그 말, 꼭 실감이 나도록 해줄 테니 걱정 말게!"

웨더비 부장이 느긋하게 말했다.

 

24. 처형의 언덕

맥 보란은 세밀하게 지형 정찰을 해두었던 숲속 으슥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곳은 세르지오 프랭키의 사우스힐스 저택의 정면에 있는 언덕으로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간 나무 사이를 헤치고 나가 언덕의 움푹 패인 곳의 진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할 때 역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실려 있는 병기들을 그곳까지 운반하느라 여러 차례 그 진지와 자동차 사이를 왕래했다. 그는 그 언덕을 <처형의 언덕>이라 부르기로 작정했다. 근처에는 인가가 전혀 없었으며 그 진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얼마간의 택지가 조성돼 있긴 했으나 아직 들어선 저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동차와 진지 사이를 왕래하는 동안 몇 번이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보란이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한 번은 욕지거리를 늘어놓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에 드디어 3, 40야드 전방에서 사람을 태운 말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경사가 많이 진 곳이라 말은 미끄러지듯 내려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비친 말 위의 사람은 순찰 보안관인 듯했다.

맥 보란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은밀히 일을 진행해 갔다. 그에게는 운반해야 할 병기가 많았다. 그가 전투를 시작하려는 그 전장터에 뜻밖에도 훼방꾼이 경찰과 보안관이 순찰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전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가 자리를 잡은 진지는 경사진 언덕에 우뚝 솟은 암벽에 가려진 오목한 곳이었다. 그곳은 프랭키의 저택에서 동쪽으로 약 30, 양각 10도인 곳으로 상록수가 낮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먼저 그 장소를 답사했을 때 목표물까지의 거리는 눈대중으로 500야드쯤이었다. 그는 이제 군용 거리계를 이용해 거리를 정확히 재고 있었다. 신기하리만큼 눈대중은 거의 정확했다. 실제 거리 530야드. 그는 머린의 탄도를 계산해 놓은 그래프를 꺼내 살펴보았다. 이 정도의 거리면 목표물보다 15인치 위를 겨냥하면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몇 시간 전에 병기고에서 갖고 나온 다른 병기들의 거리도 맞추었다. 모든 병기를 다시 한번 점검한 뒤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불빛이 새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해야 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는 오랜 습관대로 검은 가죽 표지의 수첩에 전투를 앞두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적었고, 그것이 끝나자 그는 일어서서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몸에 지닌 것 중 필요 없는 것들을 제거했다. 45구결 권총과 나이프만 남기고 허리 근처에 감고 있던 벨트와 도구들을 모두 풀어 놓았다. 정리가 끝나자 그는 조용히 그곳에서 걸어 나와 주위를 정찰했다.

웨더비 부장의 말에 따르면 마피아 일당들은 그의 공격을 예상하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보란이 공격을 시작하면 저쪽에서도 반격할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효과적인 반격을 위해서 집중적인 사격을 해올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보란은 별로 염려하지 않고 있었다. 현대전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노련한 군인들이 마피아의 휘하에 있다면 물론 사정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전투 경험이 없는 악당들일 뿐이다. 길거리에서 총질이나 해대는 불량배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본격적인 전투에 임하게 된다면 연속적인 총성만 듣고도 좌충우돌할 것이 틀림없다.

보란은 노출된 부위에 검은 칠을 했다. 하늘도 보란의 편을 들어 주려는 듯 짙은 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구름의 갈라진 틈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고 처형의 언덕에 희미한 달빛이 비치자 보란은 커다란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숨을 죽인 채 희미한 빛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보란의 눈에 성냥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불과 몇 야드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보란이 귀를 세우자 담배 연기를 내뿜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구름이 다시 머리 위를 가리고 주위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와 동시에 보란은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반원을 그리며 경사진 곳을 빙 돌아 올라가 빨간빛을 내고 있는 담뱃불을 향해 숨을 죽이고 다가갔다.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감에 따라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나이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졌다. 보란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나이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채 바위 위에 혼자 걸터앉아 있었다.

보란은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썩은 나뭇가지를 주워 그 사나이 앞쪽으로 던졌다. 그것은 그 사나이의 몇 야드 앞 나무에 맞았다. 그러자 사나이는 총을 들며 방위 태세를 취했다.

"누구야! 헝크?"

그는 긴장된 목소리로 나직이 외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보란이 그의 등 뒤에 다가온 뒤였다. 보란의 한쪽 팔이 그 사나이의 목을 조르는 동안 나이프는 그의 가슴 깊숙이 박히고 있었다. 사내는 곧 축 늘어졌고 총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보란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그 사나이의 몸을 가만히 바닥에 뉘었다.

그는 다시 발소리를 죽이고 유격 작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의 훨씬 아래쪽에서 오가고 있는 기마 보안관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처형의 언덕까지 순찰대가 올라온다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 경우 마피아의 단 반 번의 반격만으로도 그는 기동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격에 앞서 부근 일대를 완전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처형의 언덕에서>라는 제목을 붙인 일기의 한 부분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내게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 인생에 도전하는 것을 나에게 주어진 임무로 여기고 이행해 간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살인이나 전투를 남이 대신 해주길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 대신 이 일을 한 사람이 법정에 선다는 것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필연적인 싸움이라면 꼭 싸워야 한다. 피를 흘려야 한다면 나 스스로가 흘릴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스스로 법정에 나갈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참다운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물론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무명 사회의 인간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시대, 다른 종족 그리고 다른 이상을 갖고 살고 있는 다른 유형의 동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게 용납될 수 있는 악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투쟁이 생존의 수단이 되는 한, 폭력이야말로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법칙이다. 폭력이 없는 곳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어떤 하나가 살아나는 순간, 다른 하나는 죽어가게 마련이다.

나는 건전하지 못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 자신을 책망하지는 않는다. 인생이란 그 본질부터가 건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결국 산처럼 쌓여 가는 시체 위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육체는 살아 있는 죽음의 기념비에 지나지 않는다. 움직이는 묘비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문명사회라고 다를 것은 없다.

그러나 문명사회에는 살인을 명령받은 킬러가 있다. 보다 위대한 선을 위해 사형 집행을 명령받은 사람도 있으며 보다 큰 악을 위해 사령 집행을 감행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는 누구로부터 명령받은 일은 결코 아니다. 내 스스로 부과한 임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이야 어쨌든 내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발렌티나에게 행복이 가득하길 빈다. 그녀는 어쩌면 내가 황소의 두개골을 박살 내지 못한다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착하고, 귀엽고, 또 애처로운 그 여자는 송아지 스테이크를 좋아한다고 한다. ! 나는 사랑하는 발렌티나를 위해서라고 송아지를 잡아야 한다. 수송아지를 잡아 피가 뚝뚝 흐르는 신선한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를 착한 발렌티나의 식탁에 올려놓기 위해 송아지를 잡아야 한다.

신이여! 발렌티나에게 축복을 주옵소서! 나는 발란테나를 위해, 아니 이 세상의 모든 발렌티나를 위해 악인들과의 투쟁을 스스로 택했다. 그 선택은 우리의 문명사회를 위한 것이라 믿으며 나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투쟁이며, 나는 투사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피를 흘리고, 그 피가 내 몸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한 점의 두려움도 없이 맞설 것이다. 싸우다 지쳐 패배하면 나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최후는 없을 것이다.

, 잔악한 마피아들아, 각오하라! 여기 맥 보란이 네 놈들을 처형하러 가고 있다!

 

25. 응원단

세르지오 프랭키는 생긴 그대로 호전적인 사나이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그의 눈은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빛나고 있었고 그의 정열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나이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의 세력 범위 안에 있는 가족들은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이름과 직업을 나열한다면 상공 회의소 명부를 열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각 분야에 걸친 명사들이 그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은행가, 변호사, 의사, 회계사, 보험회사 간부, 명망 높은 교육자, 도박계의 보스, 풋내기 대의원, 그 밖의 갖가지 직업을 가진 암흑가의 사나이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지역 내의 모든 가족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이 허용된 것을 터린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출석한 사람들의 숫자와 직위에 압도되고 있었다.

터린은 조용히 네트 플래스키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한밤중에 왜 모두 모인 거지?"

그의 의문에 답한 것은 세르지오였다. 신호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손을 들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어느 한 가족에게라도 귀찮은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곧 가족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대부분 정말 끔찍한 일을 지금까지는 당해본 적이 없고. 다시 말해 바로 여러분들은 겁쟁이란 말이오. , 여러분들 자신의 손을 한 번 살펴보시오! 한 개의 2달러씩이나 하는 시거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여러분들은 그동안 너무나 태평스럽게 살아왔고. 이렇게 안락한 생활을 해온 것은 누구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여러분들이 오늘날 이렇게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손톱 손질할 틈도 없이, 2달러짜리 시거를 만져볼 틈도 없이 싸우고 싸워 기반을 다져 놓았기 때문이오. 그 결과 여러분들은 지나치게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고?"

그의 연설 도중 시모어가 나직이 속삭였다.

"교육을 하겠다는 건가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세르지오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들은 공격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니 전혀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요."

플래스키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들의 조직을 세상 사람들이 깔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말의 요점을 말하자면 합법적으로 위장한 돈벌이 덕분에 우리들 가족들은 이제 멍청이가 되었다는 것이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한순간이라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내 말, 모두 알아듣겠고?"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계속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며 가족들 가운데는 여기 있는 다른 가족을 경멸하고 있다고도 하오. 레오폴드나 그가 경영하고 있는 여자 장사를 말이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레오의 사업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수입을 올렸는지 알고나 있고? 그 내막을 알게 되는 날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여러분들 자신이 한결같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말 것이오. 레오의 돈벌이에 비교한다면 당신들은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테이블의 왼쪽 끝에 앉아 있는 말쑥한 옷차림의 한 사내를 가리켰다.

"스카리, 자네의 보석금 500만 달러가 어디서 나온 줄 알고나 있나?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나?"

세르지오는 보험회사 간부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 무서운 눈빛을 잠시 그에게 던져 보였다.

"여러분, 바로 그 돈도 레오의 매춘관에서 나온 돈이오. 우리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그 여자들에게 장사를 시키고 있는지 도대체 알고 있기나 하오? 여러분들에게 나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해 두겠고. 여러분들은 자신의 안락한 생활 속에 안주할 줄만 아는 속 좁은 겁쟁이들이오!"

"영감님이 저렇게 흥분하는 것은 최근 15년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시모어가 속삭였다.

"저렇게 흥분하면 몸에 해로울 텐데."

터린이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테이블 저쪽 끝에 위엄 있게 서 있는 왕년의 전사에게 고정돼 있었다.

"젊은 시절엔 굉장했겠어!"

시모어가 나직이 말했다.

"하긴 전쟁 속에서만 살아왔으니 오죽했겠어? 그런데 이번 전쟁에서도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어."

플래스키가 가만히 끼어들어 소곤거렸다.

", 여러분.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저쪽 문 앞에 총이 걸려 있고. 여러분들은 한 발도 쏘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각자 총을 소지하도록 하시오. 총성이 들리면 어설프게 밖으로 뛰쳐나가지 말고 몸을 낮추고 가만히 기다리시오. 이 회의실의 밖에서 보면 마치 이곳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특수장치를 해두었소. 저쪽에서 사격을 해올 때까지 우리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요. 만약 공격을 받더라고 상대편이 분명히 노출될 때까지는 절대로 발사해서는 안 되오. 알겠소? 정신이 나가 우리 가족들끼리 서로 쏘아 대는 바보 같은 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는 5분 정도 방어와 공격의 요령을 설명하고 나서 회의를 끝냈다. 사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 방을 나갔다. 총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홀 쪽에서 들려 왔다.

터린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세르지오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플래스키와 시모어는 웅성거리는 사나이들 틈에 끼어있었다. 시모어는 어서 오라는 듯 터린을 바라보았으나 곧 단념하고 사나이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세르지오는 가만히 앉아 있는 터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 조용히 앉아 있나? 레오폴드."

"좀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계곡 저쪽의 언덕에도 사람을 배치했습니까?"

"아니, 저 언덕 쪽에는 아무도 없네. 그러나 자넨 걱정할 필요가 없어. 싸움에 관한 문제는 이 세르지오에게 맡겨 두게나."

노인은 자신에 넘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입니다만, 상대는 군인이라 모든 생각도 군대식일 겁니다. 그래서 좀 염려스러운데"

터린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르지오는 염려해 줘서 고맙다는 듯한 표정으로 터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군인이라고 해서 별난 점은 없다네. 나 역시 전쟁터에 두어 번 나가 보았네."

"아무래도 저쪽 언덕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제가 가서 살펴보고 올까요?"

"호오!"

노인은 감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낮에 혼자 정찰을 갔다오겠다구? 저 어두운 곳엘?"

"저 언덕이 도주로로서 안성맞춤인 것 같아요. 저는 저쪽 언덕으로 가서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놈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자네는 저쪽 언덕을 중요시하지?"

"제가 미리 말씀드렸듯이 그놈의 전투 방법은 군대식일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을 공격한다 해도 저 언덕을 이용할 겁니다. 거리가 다소 먼 감이 없진 않지만, 바로 그 점이 좋은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자네도 우수한 군인이었지? 레오폴드. 좋아. 그렇다면 자네 생각대로 한번 해보게. 누구 한 사람쯤 데려가겠나?"

노인은 웃고 있었다.

"아닙니다. 혼자 가는 게 행동하기에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하게."

터린은 노인이 어디까지 자신을 믿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그의 말을 명령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곧 그는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혼잡한 주차장에서 차를 끌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가까스로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멀어져 가는 자동차를 보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레오가 어딜 가는 거지?"

세르지오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터린은 자신의 몸으로 적을 막을 각오로 나갔다네.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무전기의 스피커에서 찍찍거리는 잡음과 함께 한 대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프랭키의 저택에서 자동차 한 대가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웨더비 부장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둬. 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두 현위치를 지키고 있어!"

파파스 경사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물어봤다.

", 놈들이라고 할 일이 없겠어?"

웨더비가 내뱉듯이 말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보면 될 텐데. 틀림없이 생각지도 못 했던 인물들이 끼어있겠죠?"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봐."

"보란은 어느 쪽에서 공격할 것 같습니까?"

"그건 좋은 질문이야. 미식축구 시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3 다운에서 어떻게 쿼터백을 속여 전진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상황이지. 솔직히 말해 저 마피아 놈들도 불쌍하단 말이야. 저놈들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우선 그 점부터 열세란 말이야. 보란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으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야. 상대가 보란 같은 놈이고 보면 피해를 상상할 만하잖아?"

"마피아에게는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어요?"

파파스 경사는 고소하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몇 시지?"

"340분입니다."

"그것 보게. 오늘 밤은 긴 밤이 된다고 내가 말했었지? 샌드위치 생각나나?"

파파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발리춤을 추는 아가씨의 배꼽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걸요."

", 긴장 때문에?"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오늘 이때까지 현장 근무를 많이 해왔지만 오늘처럼."

"이봐, 자넨 범법자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어. 마치 좋아하는 축구팀을 응원하는 기분인 것 같은데."

파파스는 거북한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 저는 그치 편입니다."

"그럴 수 있을 테지. 나도 사실 그런 기분이니까. 나는 단지 그 녀석이 경비망을 뚫고 달아나려 하지 않았으면 해. 죽음을 자초하는 셈이 될 테니."

"그렇다면 왜 저를 비난하는 거죠?"

파파스가 웃으며 말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도정은 금물이야, 조니!"

웨더비 부장도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물로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이 말을 들어줄지는 의문이지만."

파파스는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바뀌었다.

"동정하면 자네 목숨이 위태롭다구!"

웨더비가 잘라 말했다.

"물론이죠!"

파파스도 만만치 않게 응수했다.

"죽일 생각을 하고 쏘아! 이건 명령이야!"

웨더비 부장은 은근히 화가 치미는 듯했다.

"잘 알아보실 테니, 염려하지 마시라구요."

웨더비는 씁쓰레한 미소를 띠었다.

"어쨌든 그 점만은 명심하라구!"

 

26. 최후의 공격

맥 보란은 다시 한번 병기를 점검하면서 앞으로의 행동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린 다음 스코프를 통해 저택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커다란 창문에 비치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벌써 30분이 넘게 똑같은 동작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혹시 예배라도 보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는 거리계의 파인더를 들여다본 후 방 안에 있는 사나이들의 움직임을 손목시계로 재기 시작했다.

시작테이블 끝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팔을 올린다. 그것과 동시에 세 번째의 사나이가 몸을 앞으로 내민다. 2초 후, 한 사나이가 저쪽에서 창문 쪽으로 걸어온다. 5초 후, 끝에 있던 사나이가 팔을 내리고 세 번째의 사나이가 몸을 일으킨다. 3초 후, 창문 쪽에서 한 사나이가 일어나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5초 후에 처음부터 똑같은 동작의 반복이었다.

보란은 그들의 움직임을 5분 동안 자세히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싱긋 웃고 다른 쪽으로 관찰의 눈길을 돌렸다. 정말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참으로 잘 짜여진 연극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에 모여 있는 것일까?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2층 큰 홀의 창문을 제외하고는 아래쪽에 몇 개의 작은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주차장 쪽으로 렌즈를 돌렸다. 렌즈의 시야 족을 한 대의 자동차가 스피드를 내며 가로질러 갔다. 그는 자동차를 쫓아 렌즈를 움직였다. 한순간 차의 불빛이 보란을 비추더니 방향을 바꾸어 저택 밖으로 달려나갔다. 보란은 아주 잠깐 동안 그 자동차를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곧 저택의 관찰에 주의를 돌렸다. 지붕 위에는 아무것도 눈길을 끄는 것이 없었다. 주위는 또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1층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후 한 사나이가 안뜰의 허리 높이쯤 되는 담 옆에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무엇인가를 자기 어깨에 비벼댔다. 총이었다. 사나이는 총신으로 어깨를 긁어 대고 있었다. 안에서 녀석들은 도대체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 걸까? 거리계의 렌즈를 돌려 가며 보란은 눈을 크게 뜨고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돌계단 위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문은 곧 닫혀졌다. 보란은 숨을 훅 들이쉬고는 그곳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안의 불이 꺼져 있었다. 두 사나이가 안에서 뛰어나오더니 계단을 올라가 저택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보란은 싱긋 웃었다. 조금씩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담 쪽을 보았으나 그곳에 서 있던 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란은 어둠 속의 지붕 근처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보란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는 기다렸다. 그는 시간에 맞춰 세밀히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계획에 따라 정확한 시간에 공격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공격 개시 1분 전.

그는 발렌티나와의 일을 생각하고 양친과 조니, 그리고 불쌍한 누이동생 신디의 일을 생각했다. 발렌티나에게는 꼭 돌아간다고 약속했었다. 그것은 지켜질 수 없는 허무한 약속이었다. 보란은 군인이다. 군인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언덕에서 살아서 빠져나갈 희망은 없다. 지금쯤 경찰이 벌써 언덕을 포위하고 있을 것이다. 경찰견까지 동원했을 것이 분명했다. 설혹 마피아가 그를 놓친다 하더라고 경찰은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귀여운 발렌티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발렌티나. 그녀는 좋은 아가씨였다. 평생 동안 지켜온 순결과 사랑을, 죽어야 할 운명의 사나이에게 바쳐준 발렌티나. 그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확실히 슬픔이었다.

보란은 모든 생각을 뿌리치고 거리계 옆에 놓여 있는 긴 통 모양의 화기로 다가가서 다시 한번 조준각을 확인한 다음 열까지 헤아렸다. 이윽고 포신이 떨리고 탄환은 쇳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았다. 드디어 대살육전이 시작되었다.

"저걸 봐요!"

파파스가 소리쳤다.

"저건 뭡니까? 어디서 날아오는 겁니까?"

"로켓의 일종이군!"

웨더비도 하늘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하얀 꼬리를 길게 끈 포탄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어둠을 뚫고 날아가더니 저택의 한 모퉁이에 세게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내면서 폭발했다. 그러자 저택의 모든 불빛이 일시에 꺼지고 모퉁이에는 뱀의 혓바닥과 같이 타오르는 불꽃만이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사나이들은 허둥거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화가 났는지 서로 떠들어 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려 왔다.

웨더비와 파파스는 세르지오의 저택에서 100미터쯤 떨여져 있는 언덕에 무선 차를 세우고는 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겁니까?"

파파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맞은편 언덕이야."

"웨더비가 딱 잘라 말했다.

"쌍안경을 이리 주게."

"가서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자네 정신이 있나? 우리가 나간다면 저놈들은 보란을 쏘는 것과 감정으로 우릴 쏠 거야. 그리고 보란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거야. 잘 보고 있게, 조니."

"아이구, 어찌된 일이여?"

플래스키가 고함을 질렀다.

"녀석은 여기를 폭파할 생각이군."

"조용히 해! 잠자코 엎드려 있으라구."

시모어가 소리쳤다.

"정신 차려, 이제 한 방 얻어맞았을 뿐이야."

"한 방이라구? 저게 한 방이란 말이냐? 영감님은 어디 있지. 세르지오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모두 몸을 엎드린 채 조용히 하고 있어. 잠자코 있으란 말이야."

위층에서 세르지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디서 쏜 것인지 본 사람은 없나?"

"하늘에서 쏜 겁니다.“

누군가가 흥분되 목소리고 대답했다.

"아니오. 남쪽에서 날아왔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똑똑하게 말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달에서 날아온 것이 아닐까?“

시모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말했다.

"뭐라구, 어느 놈이냐?“

화가 난 세르지오는 크게 소리쳤다.

"모두 눈을 크게 뜨고서 섬광이나 연기라도 좋으니 무엇이든지 찾아내. 알겠나?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거야.“

"머리를 들고 보란 말입니까? 어지간히 해두시죠, 영감님.“

시모어는 혼자 중얼거렸다.

맥 보란은 두 번째의 카운트 다운을 끝내고 있었다. 제로! 조명탄의 발사와 함께 그는 싱긋 웃으며 머린을 들어 올린 다음 눈을 갖다 댔다. 몇 초 후 조명탄은 프랭키의 저택 바로 위에서 터지더니 그 일대를 마치 대낮처럼 밝게 비추면서 천천히 지면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조명탄이 터졌을 때 이미 보란의 스코프는 프랭키 저택의 옥상을 포착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며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나이들의 얼굴이 스코프에 들어왔다.

곧 보란의 재빠른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라이플의 굉음과 함께 그의 어깨에 반동이 전해졌다. 보란은 그 반동으로 조준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스코프에 바짝 눈을 갖다 대고 목표의 사나이가 배를 움켜쥐며 쓰러지는 순간을 확인했다.

보란은 자신의 정확한 계산에 만족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통 사람들은 턱과 배 사이가 15인치쯤 된다. 그는 다시 머린의 총수를 왼쪽으로 조금 옮겼다.

다음 사나이가 또 시야에 들어왔다. 방아쇠를 당기자 사나이는 어김없이 쓰러졌다. 그 왼쪽의 다음 목표, 방아쇠, 또 다음, 이어서 또 한 명, 다섯 명을 쓰러뜨리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머린을 옆에 내려놓고 스코프보다 훨씬 시야가 넓은 거리계의 파인더를 들여다보았다. 옥상에는 아직도 많은 사내들이 허둥대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포와 놀라움에 몸이 굳어진 듯한 사나이들도 눈에 띄었다. 피에 젖은 동료의 주검을 안아 일으키는 놈도 있었다.그들 대부분은 옥상 가장자리에 둘러쳐진 낮은 담에 간신히 몸을 숨긴 상태였다. 라이플의 섬광을 보지 못했는지 아직 반격은 없었다. 보란은 슬픈 듯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려다.

"벌써 네 명이 죽었고 한 명은 중상이에요.“

위층에서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세르지오. 세르지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놈의 불은 언제까지 타고 있을 건가? 엎드려. 모두 엎드리란 말이야. 몸을 숙이고 놈이 어디 있는지 잘 찾아봐.“

세르지오는 격분하여 소리쳤다.

"피트! 바니! 저쪽이다. 맞은편 언덕에 놈이 있다. 마구 쏴버려!"

곧이어 죽음의 장막을 깨뜨리고 맹렬한 기관총 소리가 들려 왔다. 겨냥해야 할 목표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편 진영에서 반격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사나이들에게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저쪽에서 다시 하얀 연기의 꼬리가 달린 포탄이 날아왔다.

"저런! 또 날아온다."

포탄은 꺼져 가는 조명탄의 마지막 빛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저택 옥상 위에 떨어졌다. 지붕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땅으로 쏟아져 내리고 사나이들의 고함소리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란 사나이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허둥대고 있었다. 비명과 신음소리, 공포와 고통의 고함소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폭발음이 연달아 일어났고 저택이 크게 흔들렸다. 사나이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맹렬히 들려 오던 기관총 소리도 멎었고 저택은 수라장이 되었다.

"보란이 곡사포를 쏘고 있군."

웨더비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맙소사. 조금도 남아나지 않겠는걸."

"어디서 저걸 손에 넣었을까요?"

파파스가 두려우면서도 존경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걸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놈이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거야. 이거야말로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군. 더욱이 내가 불쌍히 여기고 있는 쪽이 이기고 있으니."

폭발의 진동은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미쳤다. 파편 하나가 그들이 타고 온 무선차의 문에 떨어졌다.

"빌어먹을.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파파스는 파편을 주우려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지금 또 발사한 것 같군. 저쪽 언덕 꼭대기야. 자네는 저쪽을 눈여겨보고 있게나."

그러나 파파스 경사의 시선은 반대쪽. 그러니까 공포와 화염 속에 쌓여 있는 저택 쪽으로 쏠렸다. 새로운 조명탄이 공중에서 터졌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 웨더비가 지시한 반대편 언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무서운 놈이군!"

그는 기가 질린 듯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27. 운명의 신

보란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너무 쉽게 무너져 달아나고 있다. 그에게 반격도 한 번 제대로 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게 아닐까? 그는 머린의 스코프를 들여다보면서 달아나려는 자동차에 계속해서 총을 쏘았다. 차는 제멋대로 구르다가 한 번 튀어 오르고는 불을 뿜었다. 뒤따라오던 차가 불 속으로 뛰어들어 폭발하면서 그곳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저택은 완전히 무너져 양옆의 벽만이 시커먼 연기 속에 앙상하게 서 있었다. 주차장에는 여러 대의 자동차들이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나 있었고, 그 근처에는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분명히 어딘가에 다른 놈들이 숨어 있을 게 틀림없어."

보란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조명탄을 쏘아 올려 거리계의 파인더를 통해 저택 근처를 훑어보았다. 바로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월남 전선에서 수천 번도 더 들었던 헬리콥터 소리였다. 그 지긋지긋한 헬리콥터가 가까이에서 그를 찾고 있었다. 경찰? 아니면 마피아?

보란은 급히 폭발이 빠른 조명탄을 골라 넣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쏘아 올렸다. 조명탄이 터지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헬리콥터가 보였다. 조종석에 앉은 사나이가 눈이 부신 듯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백발의 사나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헬리콥터는 바로 그의 머리 위에 와 있었고 조명탄은 보란 자신도 비춰 주고 있었다. 헬리콥터는 급히 불빛 밖으로 빠져나갔다. 보란은 머린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다시 조명탄의 불빛 속으로 들어온 헬리콥터의 후미에서 자동 기관총의 철갑탄이 보란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총탄에 맞은 거리계가 퉁겨 날아갔다. 보란은 머리를 끌어안은 채 언덕 아래로 굴렀다. 보란은 언덕 아래에 몸을 숨기고 헬리콥터가 다시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보란은 스코프의 눈금으로 목표를 겨냥하면서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백발 사나이의 얼굴이 스코프의 십자선 안에 들어왔다. 보란은 그의 두 눈이 흥분으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큰 총의 반동으로 어깨에 충격이 왔다.백발의 사나이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보이고 응사하는 기관총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 왔다.

"저기다!"

파파스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놈들도 보란을 발견했나 봐요. 헬리콥터에서 마구 총을 쏘고 있어요."

"쌍안경을 이리 줘."

웨더비가 소리쳤다.

"여기 있어요. 하지만 쌍안경 없이도 잘 보이는 데요. 이거야말로 월남전을 TV로 보는 것 같은데."

"여긴 월남이 아니야."

"다를 게 없잖아요?"

"놈은 어디 있지?"

머린의 육중한 총성이 헬리콥터의 툴툴대는 소리를 제압하듯 울리고 곧이어 격렬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다시 기관총 소리에 응답하듯 머린의 총성이 들려 왔다. 그러자 헬리콥터의 회전음이 이상하게 들리더니 곧이어 헬리콥터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크게 한 바퀴 구르면서 땅 위로 떨어졌다.

". 대단하데! 결국 격추시켰군!"

웨더비가 감탄하듯이 소리쳤다.

"맞았어요. 헬리콥터가 추락하고 있어요."

"보란 결국은 살아남았군."

웨더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나 맥 보란은 웨더비가 예견한 대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어깨의 상처는 쑤셔 왔고 옆구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헬리콥터가 떨어지면서 내는 폭발음을 들으며 그는 다리를 질질 끌고서 총좌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구급상자의 뚜껑을 열고 마지막 사격전 때 다친 발목을 치료하고 있을 때 언덕 위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거즈를 어깨에 뭉쳐 넣고 다리를 절면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조명탄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언덕을 내려오고 있는 자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공만한 돌이 굴러떨어져 보란이 숨어 있는 나무 근처에 맞았다. 곧이어 터린의 모습이 보였다.

"보란, 어디 있나? 모란.“

터린이 낮은 소리로 불렀다.

"자네는 끝내 뉘우치지 못하고 나를 찾아다니나, 레오?“

보란이 권총을 들고서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 무사했군. 헬리콥터의 기습에 대해서 알려 주려고 했는데 자네를 찾을 수가 없었네.“

터린이 반가운 듯이 말했다.

"누구에게 수작을 부리는 건가?"

보란이 그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터린은 양손은 앞으로 뻗으며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담배를 잃어버렸군. , 숨이 차."

"곧 담배보다 더한 걸 잃게 될걸."

보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구두를 벗어도 되겠나?"

"그게 자네의 마지막 소원인가?"

보란이 성급히 물었다.

"그래.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구두를 좀 벗게 해주게."

조명탄의 불빛이 숲 저쪽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보란은 터린에게로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는 총구를 그의 머리에 갖다 댔다.

"시간을 벌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난 지금 곧 자네를 죽여 버릴 생각이니까 말이야."

터린은 보란의 말을 무시하였다. 구두를 벗더니 그 바닥 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고 네모진 것을 꺼내어 보란의 눈앞에 내밀었다.

"날 죽이기 전에 우선 이걸 봐주겠나?"

보란은 터린에게 총을 겨눈 채 희미하게 꺼져 가는 조명탄의 불빛 아래 그 카드를 살펴본 뒤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 그것은 경찰의 신분증이었다.

"하마터면 자네는 위장 첩자인데 죽을 뻔했군."

"제길, 난 수십 번 기도를 드렸네."

터린이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체포하고 싶지 않나?"

보란은 장난조로 물었다.

"지금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게다가 자넨 악당들을 모조리 쳐부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왜 자네를 체포하겠나?"

"그건 그렇고 한 가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보란의 머릿속에 갑자기 한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 누이동생의 일인데. 레오."

"그 일은 내가 나빴어."

터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나를 가리는 방편이었으니까.. 자네 여동생과 같은 또래의 어린 아가씨들 일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 아프네. 그렇지만 비말 임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한 아가씨하고는 바꿀 수 없는 더 중요한 일이 있네, 보란. 이해해 주게."

"알아들었네."

보란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젠 산을 내려가게. 가거든 자네 부인에게 내 안부를 전해주게. 그리고 웨더비에게서 들은 정보는 자네에게서 나온 것인가?"

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자넨 항상 나를 노렸거든."

"한마디만 해주었어도 좋았을 텐데."

보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갑자기 터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화가 나는 일이 하나 있네, 중사. 내 마누라를 위협한 것은 용서할 수 없어. 자네 덕분에 걱정 많은 마누라에게 날마다 혼이 나고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정말 미안한 일인데."

보란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머리에 또 다른 걱정 많은 여인이 떠올랐다.

", 이제 산을 내려가게.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터린은 구두를 신은 뒤 군대식으로 차려자세로 목례를 하고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보란은 상처의 피를 닦아낸 다음 무기들을 들고 다음 계곡을 향해 내려갔다. 계곡 위쪽에서는 자동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보란은 경창이 이미 이 근처를 봉쇄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수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렸다. 보란이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여기야!"

그리고는 낮은 덤불 속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잠시 후 말을 끌고 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보란은 45구경으로 기마 보안관의 머리를 후려쳐서 쓰러뜨리고는 말에 올라탔다.

조금 있으며 날이 훤히 밝아 올 것이다. 아침이 오기 전에 그를 기다리는 연인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계속해서 말을 타고 빠져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좀 더 많은 시간과 거리가 필요했다. 잡히고 안 잡히는 것은 운명에 맡겨버렸다. 만약 운명의 신이 그의 편이라면 이번에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맥 보란에게 있어서 승리란 달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타는 듯이 쑤시는 상처와 견디기 어려운 고통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여인의 아픈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붙잡히지는 않았다.

 

28.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보란이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발렌티나의 맑은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당신은 언제나 내가 보고 있을 때 잠을 깨는군요."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란은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그의 어깨는 깨끗한 붕대로 감겨져 있었고 맨살에 닿는 시트의 감촉이 꿈이 아님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알몸이었다.

", 맞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발렌티나가 몸을 숙이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문 앞에서 저를 부르고는 정신을 잃었어요. 생각 안 나세요?"

"난 힘이 빠지고 상처의 고통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어."

그가 중얼거렸다.

",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쉬고 있으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신문에는 당신이 어젯밤 23명을 죽이고 5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씌어 있어요."

"그래?"

", 당신 이 제목 보이죠?"

발렌티나가 신문을 그의 눈앞에 펼쳐 주었다. 신문의 상단에 큰 활자로 씌어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맥 보란, 마피아를 몰살시키다.> 그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발렌티나의 부드럽고 따듯한 손을 잡았다. 갑자기 가슴이 저려 왔다.

"발렌티나, 난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가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그의 다친 어깨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의 옆에 누워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에 대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만약 당신이 해내지 못했다면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것으로 이젠 안심이군."

그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전쟁은 끝났고 당신은 이긴 거예요."

"전쟁이 아니야, 그건 단지 전투야. 발렌티나,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순간 그녀는 가볍게 몸서리를 치며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잠결에 승리는 없다고 소리쳤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글세, 모르겠는데."

보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승리의 기쁨을 느끼지 않으세요?"

보란은 비소를 지으며 다치지 않은 팔로 그녀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것으로 그는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남자란 어떤 관념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 어떤 관념에 반대해서 싸우는 것은 아니야."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그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당신의 그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군요. 그 말은 무슨 뜻이죠?"

그는 어깨의 아픔을 잊어버린 듯이 큰 고리로 웃었다.

"하하하, 그건 말하자면 부드럽고 귀여운 발렌티나를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게 바로 승리라는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타올랐다.

"사나이에 있어서 승리란 그런 거여."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그의 팔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입고 있던 나이트가운을 벗어 버렸다. 알몸이 된 그녀는 시트를 걷고 그의 옆으로 파고들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이제 곧 당신이 완쾌되면 저는 당신의 승리에 도전할 거예요."

"좋아, 나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정력은 어깨에 있는 게 아니라구, 이 바보야."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고 있어요, ."

그녀가 속삭였다.

"허니문이 그렇게 짧은 것은 아니래요. 어쨌든 우리의 허니문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죠?"

"전쟁과 사랑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도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럼 당신은 그중 어느 것에 승리한 거죠?"

그녀가 몸을 흔들면서 물었다.

"양쪽 모두의 승리야!"

그녀가 숨을 삼키면서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속삭였다.

"승리란 정말 달콤하군요."

피츠필드의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맥 보란에게 있어서의 전토란 한 대의 승리로 일단락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아득히 멀어진 과거 속의 한 점에 불과한 것이었고, 불확실한 미래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보란은 하나의 사상도, 하나의 조직도 완전히 파멸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다만 사상 최강을 자랑하는 범죄 조직의 표면에 파문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제 그 조직은 그들의 앞정강이를 물고 늘어진 한 마리의 개미를 없애기 위해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마피아 조직의 역사 속에서도 이토록 주목받은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아메리카의 전설적 인물이 되었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욕심 나는 추적 대상이 되었다. 온 나라 안의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보란의 목은 곧 거액의 현금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마피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었다.

맥 보란에게는 죽음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어떤 사람보다도 더 확실한 죽음 판결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그에게 남겨진 길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을 단축시키려는 놈들의 장벽을 뜯어 먹으면서라도 최후의 숨을 내쉴 때까지 싸울 결심이었다.

보란은 위험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대책을 세웠다. 그는 머리를 염색하고, 입가에 수염을 기르고, 도수 없는 굵은 테의 안경을 끼었다. 이러한 위장으로 적어도 웨스트 코스트까지는 안전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곳에는 그를 좀더 완전하게 변장시켜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월남전에서 보란이 목숨을 구해줬던 군의관으로 지금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성형외과 의사로서 보란은 웨스트 코스트에 도착하는 대로 얼굴을 성형할 생각이었다.

그는 고아가 된 동생과 거액의 돈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맡겨 두고 피츠필드를 떠났다. 그리고 한 사나이의 존재까지도 - 아마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 피츠필드에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912일 저녁, 보란은 새로 구입한 차를 몰고 피츠필드의 서쪽에 있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러시아워의 붐비는 차들에 섞여, 발렌티나와의 눈물 어린 작별이 그의 마음에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뒤로 두고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쫓아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다정한 발렌티나의 모습까지도 남겨 두고 그는 지는 태양의 작열하는 빛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일 뿐이다. 보란은 지옥에 부딪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맥보란의 마지막 길은 피에 물든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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