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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스트 1

Bollnow 2024. 3. 11. 05:14

콘트라스트

Rowan Kirby

 

1

"가엾은 그레타 가르보! 이제 짜증이 나는가 보구나."

줄리아의 푸른 눈이 동정으로 가득 찼다.

"활짝 웃어 봐. 윗입술에 힘을 주고."

그녀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윗입술에 힘을 주고 웃어 보라니깐."

그레타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염소였으니까. 여느 늙어빠진 염소가 아니라 매끄러운 귀, 귀족적인 코, 크림색의 아름다운 털을 가진 혈통 좋은 염소였다. 줄리아는 염려스런 눈길로 울적한 기분에 젖어 있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음 새끼를 가졌다. 그 때문에 기분이 좀 언짢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 난리를 피운다는 게 조금은 못 마땅하기도 했다.

줄리아는 울타리에 기대서서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무사히 끝난다면 우리도 너만큼이나 기쁠 거야."

정말 그렇기나 하다는 듯이 그레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짚단에 몸을 파묻었다. 줄리아는 시계를 흘끔 들여다보았다.

"어머나, 벌써 645분이네! 아쉽지만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어. 강습을 빼먹을 순 없거든. 나중에 보자."

 

스튜디오를 지나다 줄리아는 문득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친구이자 동업자인 핍이 하루종일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서 줄리아는 그 완성된 작품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어 가는 도자기들이 작업대 위에 말끔하게 놓여 있었고 핍은 콘크리트 바닥을 열심히 쓸고 있었다.

저녁 수업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줄리아는 문을 밀고 들어가 핍이 애써 만들어 놓은 작품들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높은 안목으로 찬찬히 살펴보던 줄리아가 탄성을 질렀다.

"기가 막힌데, ! 이번 도자기들은 무척 아름다와. 손잡이를 어떻게 하면 이렇게 구부러지게 할 수 있지? 여기, 바로 이것처럼 말야."

사랑스럽고도 조심스럽게 그녀는 손가락으로 교묘한 곡선을 따라 내려가며 홀린 듯이 그 작품을 바라보았다. 친구의 열정에 익숙해 있는 핍이 그저 비질만 계속하자 줄리아는 그녀 쪽으로 돌아서며 쾌활하게 말했다.

"좋아, 박스터, 그렇다면 난 어째서 네 작품의 반도 못 따라가는지 그 이유만 말해 줘."

핍은 그녀 특유의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어내면서 이까짓 단지 몇 개 갖고 뭘 그러니? 나도 너처럼 동물 모델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래도 그 단지 몇 개가 우리들의 생계 수단이잖니. 그 점은 잊어서는 안 돼."

"그레타는 어때?"

핍이 걱정스런 눈길로 줄리아의 맑고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축 처져 있어. 너무 지친 것 같아. 수의사를 부르길 잘했어. 돈은 좀 들겠지만 한결 마음이 놓이잖아."

"그렇고말고. 만약 그레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너무 걱정하지 마."

줄리아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 수의사가 아주 능력 있어 보이던데 뭘.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느라 그녀의 콧잔등에 주름이 갔다.

"캐닝턴? 그래 맞아, 미스 캐닝턴."

그녀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미스>라는 말을 강조했다.

"넌 자기 일을 가진 독립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좋아하고 말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미스라는 경칭을 갖다 붙이는 전문적인 여성을 내가 왜 싫어하겠어. 그녀는 필요하다면 미스터라는 경칭도 쓰겠던 걸!"

줄리아는 씩 웃더니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난 지금도 그 플래스토 할아버지가 그리워. 우리에게 늘 잘해 주셨잖니? 마틸다 앞발에 가시가 박혔을 때도 얼마나 자상하셨니?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에 가까이 계셔서 편했는데...."

핍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플래스토 씨가 병환이 나셨으니 이 사람들이 대신 할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이 근처에서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인데. 그리고 그분은 이제 나이가 드셔서 힘드실 거야, 일흔이 다 되셨잖니?"

"하긴 그래."

줄리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어쨌든 그 여자는 상당히 유능한 것 같더라. 너무 잘난 체를 해서 좀 탈이지만... 좀 더 일찍 오면 좋았을 텐데 어제서야 겨우 전화연락이 됐으니...."

"수의사들은 워낙 바빠서 아마 하루종일 왕진을 해야 될 거야."

핍은 쓰레받기를 비우다 말고 줄리아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오늘 에어로빅 강습 있는 날 아냐?"

"아이구, 맙소사!"

줄리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겨우 15분밖에 안 남았네. 나는 어째서 늘 도착해야만 될 시간에 떠나는 걸까?"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침실로 달려갔다. 핍은 빙긋이 웃고는 청소를 계속했다. 줄리아는 강한 의지를 지녔으면서도 종잡을 수가 없긴 하지만 따뜻하고 솔직한 성격을 가졌다. 그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조용한 성격의 핍을 6년 전 꿈 많던 대학시절로 되돌아가 다시 예술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열아홉의 열정적인 예술학도로서, 성공을 목표로 조금씩 꿈을 키우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풋내기들이었다.

특히 줄리아는 광도 많고 인생관도 뚜렷했다. 독특한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자립심이 강한 여자라고나 할까. 그녀는 인습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삶을 늘 꿈꾸어 왔고, 지금까지는 그런 대로 성공한 셈이었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쓸 만한 방갈로를 하나 마련해서 타오르는 정열로 일에 몰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을 사갔다.

줄리아는 뛰어난 사업적 두뇌에 예술적 재능을 겸비했고, 핍은 거기에다 그녀만의 독특한 재능을 보탰다-아기자기하면서도 잔잔한 그녀의 토기그릇과 찻잔이 줄리아의 뛰어난 도자기들 못지않게 잘 팔렸다.

줄리아가 스튜디오로 되돌아왔다. 새까만 레오타르(곡예사나 댄서 등이 입는 몸에 꼭 끼는 원피스)와 타이즈를 신고 라일락빛 렉 워머를 한 다음 핑크와 회색 무늬의 신발을 신었다.

"그럼 이 몸은 떠나신다! 캐닝턴 여사에게 행운이 있기를. 도움을 못 주어서 미안하다만 너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물론 내가 해야지. 그레타는 내 거라는 걸 잊지마. 공식적으로도 내 책임이라구."

"책임? 너 지금 농담하는 거니? 언제부터 우리가 책임이 따로 있었니? 물론 염소를 사고 싶어한 건 너였어. 그렇다고 내가 걱정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 안 되는 거니?"

그건 정말 기쁨이었다. 줄리아는 동물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인간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어떤 느낌을 주었다. 사람을 따르는 충성심과 자연스러운 매력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그런 논리라면."

줄리아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따지고 들었다.

"만약 암탉들이나 마틸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넌 나 혼자서 처리하도록 팽개쳐 두겠구나. 그것들은 공식적으로 내 거니까."

"알았어, 알았어."

핍이 얼버무렸다.

"나도 역시 그들을 사랑해. 그런데 너 갈 거니, 말 거니? 도착하면 반쯤은 끝나 있겠다."

"그래, 넌 항상 조리가 분명하지. 이따가 다시 올께."

현관문이 열리고 쾅 닫히는가 했더니 다시 열렸다.

"깜빡 잊었는데 내 차는 지금 수리중이잖아. 네 차를 좀 빌려줄래? . 어디 나가려는 건 아니지?"

"그래, 나는 나갈 일이 없어."

줄리아의 숨가쁜 질문에 핍은 하나씩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마음껏 쓰렴. 열쇠는 어디 있는 줄 알지? 돌아올 때 사과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운전하지 마. 부탁할 건 그것뿐이야."

"난 절대 술 마시고 운전하진 않아.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걸. 날 잘 알면서 그래? 그런 건 철저하잖아. 어쨌든 고마워, , 잊지 말고 암탉들 잠자리 좀 돌봐 줘. 그럼 이따 보자, !"

그녀는 낡은 모리스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낡았지만 세심한 핍의 성격대로 차 안은 말끔했다. 줄리아는 동업자이자 친구인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이 각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다.

둘 사이의 우정을 지속하면서 그렇게 사업을 번창시킨다는 것은흔치 않은 일이다. 그 요령은 뭐랄까, 균형을 잘 맞춰 나가는 데 있었다. 모든 일을 정확히 분담해서 각자 자율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조그만 모리스를 솜씨 좋게 진흙탕에서 빼내 젖은 도로로 몰고 나왔다. 하루종일 9월의 소나기가 퍼부어댔지만 지금은 맑게 갠 초저녁의 감빛 태양이 서쪽 지평선 위에서 아쉬운 듯 머뭇거리며 장미빛 햇살을 촉촉한 대지 위에 뿌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차창을 내리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뿌듯한 환희에 젖었다. 물기를 머금은 향긋한 낙엽 냄새, 타오르던 태양이 남겨 준 아늑한 온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총총히 귀가하는 자동차들... , 평화로와!

그녀는 서머싯을 무척 사랑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10마일도 채 못되는 곳에서 자랐고 아직도 그녀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거기서 커다란 화원을 운영하고 계신다. 대도시가 아무리 화려한 몸짓으로 유혹해도 그녀는 이 조그만 마을을 너무 사랑했다.

줄리아는 좁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모리스를 천천히 몰았다. 이러다가 늦으면 어쩌지? 하지만 그녀는 이런 길에서 속도를 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특히 핍의 차를 몰 때는.

줄리아는 종종 수업이 시작된 지 30분 후에야 슬쩍 끼어 들어가곤 했다. 그렇더라도 그 율동을 따라가는 데 문제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격렬한 그 운동을 좋아했다. 온몸의 근육과 혈관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짜릿한 전율을 맛보았다.

줄리아는 원기 왕성하면서도 섬세한 창조적 감상을 지녔다. 그 두 가지 기능이 서로를 보완해 주었다. 또 그녀 마음 한구석엔 관능적인 요소도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원초적인 욕구가 솟구칠 때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건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아직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 않다.

아니, 줄리아는 엄격하게 삶의 순위를 정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 철칙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더욱 박차를 가하여 야망의 행진을 계속할 테니까.

 

"제기랄!"

세바스찬은 오디가 또다른 웅덩이에 처박히자 이를 갈았다. 울퉁불퉁한 표면, 여기저기 깊게 팬 웅덩이, 끊임없이 굽이도는 길.... 넓고 탁 트인 큰 길만 달리다가 이런 곳에 오니 짜증이 목까지 치민다.

게다가 진흙길-이번 여름처럼 작렬하는 태양볕엔 쩍쩍 갈라지고,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엔 질척질척 곤죽이 되는 진흙길, 하지만 한때는 자신의 고향이 아니었던가. 길고 먼 방랑 끝에 그는 이제 다시 돌아왔고, 일단 결정한 이상 세바스찬은 결코 후회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뛰어난 역량, 민첩하고 정확한 판단력, 동물들을 다루는 뛰어난 솜씨. 영국, 아프리카, 스칸디나비아, 중동, 어느 곳에서건...

세바스찬 트렌트는 우수한 수의사였고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기술과 경험은 지난 10년간 4대륙을 휩쓸면서 더욱 세련되고 풍부해졌으며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 길고도 고된 훈련 끝에 그는 이제 양극대륙에서 몬순 지방, 사막에 이르기까지 어느 환경에서건 동물들을 다를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 영국의 남서부로 되돌아온 것이다-정말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그는 오디를 막다른 골목에서 돌리면서 입을 꽉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다음 속도를 늦추면서 조수석에 펼쳐놓은 약도를 흘끔 들여다보았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이 불쌍한 여자들은 왜 이렇게 찾아가기 힘든 오두막에 처박혀 살고 있담? 정말 고달픈 하루였다. 프리지언의 모든 소떼들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병든 개, 고양이, 양들을 돌보는 일상적인 진료까지 했다. 사실 그런 것은 자신이 할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그는 그런 사소한 일까지 손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 명의 조수와 견습생 하나를 고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수인 스티브와 데보라가 대학의 중요한 세미나에 몹시 참석하고 싶어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견습생인 베리는 아직 혼자서 진료나 왕진을 할 만한 실력은 못되었다.

그는 몸을 숙여 그 메모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데브 캐닝턴이 적어 놓은 거였다:<미스 웨이클링과 박스터의 새끼를 밴 염소, 위급해 보임. 가능하다면 오늘 오후 검진 바람>

염소라니, 하느님 맙소사! 괴상한 노파 두 사람의 애완용 염소겠지. 그 노파들은 보나마나 20마리의 고양이와 한 떼의 암탉들도 키우겠지.

그의 한숨이 이제는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 이 왕진을 내일로 연기하고 싶었다. 내일이면 데브 캐닝턴이 돌아오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자기를 이끌어 준 엄격한 자기수양의 힘으로 그 유혹을 물리쳤다.

이곳 영국의 조그만 마을에서는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다. 더군다나 이제 고령인 플래스토 씨가 은퇴하면서 자신의 고객을 세바스찬의 새로운 라이벌에게 보내겠다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좋은 이미지를 심기 위해서는 다소 짜증스럽더라도 참아 넘겨야 한다.

5분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 늙은 부인들을 기분 좋게 만나서 그 귀하신 염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연의 섭리가 다 알아서 하도록 놔두라고 말해 줘야지. 그러면 좋아할 거야. 그들의 구미에 딱 맞는 단어일 테니까.

줄리아도 반대 방향에서 똑같이 울퉁불퉁하고 질척질척한 길을 요령 있는 솜씨로 천천히 차를 몰고 있었다. 8년 간이나 서머싯에서 차를 몰고 다녔기에 아주 능숙하다. 차가 다소 덜컹거리긴 했지만 강습시간에 무사히 도착하기만 한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핸들에서 손을 떼서 시계를 흘끔 들여다보았다. 7시 반. , 이런! 이번에는 정말 늦었는 걸. 수업은 벌써 15분 전에 시작되었는데 앞으로도 10분은 더 달려야 근처의 유일한 문화도시 웰스에 도착하게 생겼으니...

그녀가 막 커브를 틀려고 하는데 바로 앞에서 빠른 물체가 획 지나갔다. 저녁먹이를 구하러 나선 여우였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는 아직 졸음이 덜 깬 모양이었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가 재빨리 움직여 여우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일단 재빨리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틀면서 차체를 바로 하려는 순간 그 맞은편에서 다른 차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줄리아의 차와 마주치자 운전사는 좁은 길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하며 방향을 틀다가 풀밭 가장자리 쪽으로 그만 처박혀 버렸다.

"이를 어쩌나!"

줄리아는 몇 미터 더 미끄러져 나가다가 길가에 멈춰 서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그대로 잠시 앉아 있었다. 조금 후에야 백미러를 통해 그 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짙푸른 고급 승용차였다. 차의 뒷모습이 마치 주인을 대신해서 감정을 드러내듯 분노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다.

줄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일을 해결해야 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차를 몰고 가버릴 순 없어. 누군가 다쳤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사고가 난 후 멈춰 서지 않는 건 불법이야. 그 차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줄리아는 눈을 뜬 채 짧은 기도를 올렸다.

"제발 사람이 다치지 않았기를, 차도 무사하기를... 제발!"

그 운전사가 서서히 모습을 나타냈다. 먼저 긴 다리가... 남자였다. 그리고...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는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잘 안 보였지만 태도에서 풍기는 인상이 상당히 공격적이고 참을성이 없어 보인다. 줄리아는 차에서 내려서며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불리한 입장에서 선수를 뺏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첫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강하고 남자다운 활력이 넘쳐흐른다. 그를 판단하느라 그녀의 심미안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첫인상을 무척 중시하는데 이 남자는 그 낡아빠진 실용주의에다 본능적인 교활함을 겸비한 사람 같다. 몸에 딱 맞는 검정바지, 두툼한 사파리 재킷, 멋진 부츠-모두가 고급스러워 보이고 완벽할 만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눈빛, 날렵한 콧날, 튀어나온 턱, 거기에 육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이 묘하게도 그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느낌을 준다. , 극과 극을 달리는 사람이로군. 줄리아는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으로 일그러진 그 남자가 적갈색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꽉 다문 채 다가서고 있다. 코 밑 수염이 그의 적대감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세바스찬의 검은 눈길이 줄리아의 상반신과 다리에 잠시 머물렀다-검은 옷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늘씬한 몸매. 핑크 색 줄무늬가 눈이 부신 매끈한 발목과 신발, 그리고 화사한 피부와 윤기 나는 머리칼...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가 연인의 손길인 양 그녀의 얼굴과 몸을 어루만지고 있는 동안 그의 거친 표정이 순간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굳어졌다. 줄리아는 이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마지막 햇살에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칼이 구릿빛으로 빛나는 그 황홀한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짧은 한순간이 지나고 그들은 중간지점에서 서로 마주쳤다. 그 남자가 먼저 팽팽한 긴장을 깨뜨렸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있었던 거요?"

그 목소리는 깊고 떨려 나왔지만 화를 눌러 삼키느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줄리아는 그녀의 모든 의지력을 동원해 차분하게 대꾸했다.

"장난이라구요?"

"그런 식으로 도처를 헤매고 다니시나 본데,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시오? 여긴 아주 형편없는 길이잖소? 더군다나 언제 뭐가 나타날 줄 모르는 커브 길이오. 그래도 당신은 운이 좋았던 거요. 내가 급히 피했길래 망정이지, 트랙터나 소떼였다면 어쩔 뻔했소?"

줄리아는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따지고 들다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트랙터라면 무슨 경주라도 하듯 그런 식으로 커브 길을 돌진 않아요. 그리고 소떼들이 그렇게 과속으로 달리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요?"

"나는 과속으로 달리지 않았소. 이곳의 제한속도는 60km인데, 나는 그만큼 속도를 올리진 않았소."

"이곳의 제한속도는 30km예요. 아직 마을의 경계선을 벗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걸 모르셨나 보죠?"

그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뚫어지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니까요! 저는 이 구역을 잘 알아요. 만약 당신이 규정속도 대로 달렸다면 우린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구요."

그녀는 기세를 올렸다. 분명히 이 남자는 자기보다 이 길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 그런데 이곳 사람이 아닌가 보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렇지 않다면 조금이라도 낯이 익었을 텐데...

"당신이 길 한가운데를 딱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우린 분명히 잘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이오."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신경질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왜 갑자기 방향을 바꾼 거요? 무슨 고상한 생각이라도 하고 계셨나? 그래서 어느 쪽으로 차를 돌리는 건지 잊어버리기라도 했소?"

줄리아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 앞으로 뛰어든 동물을 치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예요."

"동물이라구?"

"여우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맞아, 바로 그거야. 이 남자는 꼭 여우처럼 생겼어.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영리한 동물의 민첩성도 엿보인다.

"여우가 길을 건너는 바람에 전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구요."

"그러다가 내 차와 충돌할 뻔했다 이거로군."

그는 웅덩이에 반쯤 처박혀 있는 자신의 차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좋았을 텐데."

비아냥거리는 투다.

"겨우 여우 한 마리를 위해서였다?"

", 가치 있는 일이구말구요. 저는 죄없는 동물친구들을 죽이는 일 따위는 안해요."

"죄없는 동물친구라고?"

그는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그러다가 죄 없는 운전사는 박살내도 좋단 말이오?"

"당신을 박살내진 않았잖아요!"

"당신 운전 솜씨 덕분에 박살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

그는 눈썹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바로 그때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가 보였고 머리 부분에서 귀까지 사선으로 찢긴 흉터가 보였다. 줄리아는 흠칫 놀라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다면 좋소. 당신은 내 오디 자동차가 한 마리 여우의 생명보다 값어치가 없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니까. 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시겠지?"

그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죽지 않았잖아요. 다치지도 않았구요. 그리고 당신 자동차도 멀쩡한 것 같은데요?"

"그렇소, 나는 다치지 않았고 내 자동차도 별로 상하지는 않았소."

흥분된 어투에서 사무적인 어투로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말투로 그가 말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 그러니 내게 당신 이름과 주소만 대주시오. 만약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당신이나 당신 보험회사에 연락하겠소."

"뭐라구요? 저는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제 눈으로 직접 손상여부를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안 되겠어요. 그리고 설사 손상되었다고 해도 제가 왜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당신 잘못도 있는데. 제가 차선에서 조금 이탈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빨리 달렸다구요."

그는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찬찬히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이름을 대라고 강요하진 않겠소. 하지만 당신 차량번호로 곧 추적할 수 있을 거요."

줄리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살폈다. 혹시 경찰인가? 하지만 그녀는 딱 버티고 서서 계속 대꾸했다.

"제가 손해배상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요? 증인도 없잖아요. 그 여우가 증거물로 나와 줄 리도 없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 편이 되어 줄 거예요. 내가 그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까요."

그 남자는 단지 눈썹을 움찔하는 것으로 우스꽝스런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당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줄리아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이제 해는 완전히 떨어졌고 가을 저녁의 어둠이 융단처럼 부드럽게 깔려 왔다. 레오타르는 이런 날씨에는 적합치 않은 옷이다.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그것밖에 입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소동을 피우느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의 눈빛이 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줄리아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는 제 몫의 책임을 지겠어요. 당신이 당신 몫의 책임을 인정한다면 말예요."

", 도저히 해결이 안 되겠군."

그는 자기 차 쪽으로 가서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시동을 걸어 그 큰 차를 웅덩이에서 단숨에 빼냈다. 그러더니 옆에 차를 세우고는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자석에 이끌리듯 천천히 그 남자 쪽으로 가 함께 차를 살펴보았다.

"."

그는 긴 손가락으로 살짝 긁힌 페인트 자국을 어루만졌다. 줄리아는 그걸 지켜보다가 그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그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럴 때는 침묵이 최고니까.

"그렇게 심한 손상은 아니군."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당신을 그냥 보내 주겠소."

그의 어투는 상당히 경쾌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가 피식 웃었다는 것이다. 줄리아는 비꼬는 말을 한 마디 해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그 미소가 음산한 그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 주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그녀는 숨을 훅 들이켰다. 모든 상황에 잘 대처하는 그녀였지만 이 남자만큼은 다소 예외였다.

기분 나쁜 남자야, 카리스마적인 기질에 민첩한 판단력을 갖췄군. 그리고 그 여우도 얄미워. 기척도 없이 갑자기 뛰어들다니. 줄리아에게는 그 둘이 마치 한 패거리처럼 느껴졌다-자기를 희생물로 만들려는 음모자들처럼...

"고맙군요, 백만장자님."

그녀는 무례하게 쏘아붙이고는 홱 돌아섰다. 그 남자는 다시 차에 올라타더니 문을 쾅 닫았다.

"아 참!"

그가 열린 창문으로 소리쳤다.

"지금 애슈덴이라고 하는 집에 가는 길인데 이 근처 어디라고 합디다. 당신 이 곳 사람이오? 혹시 그 집 모르시오?"

"애슈덴이라구요?"

줄리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애슈덴에 가는 길이세요?"

그녀는 믿기지 않아서 재차 물었다.

"그렇소."

그는 이제 무덤덤하게 말했다.

"새끼 밴 염소를 찾아가던 길이오."

"정말요?"

하지만 그럴 리가... 남자가 아니었는데... 캐닝턴이라는 그 여자는 분명 자기가 오겠다고 했는데... 줄리아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제가 곧 가죠."가 아니라 "우리가 곧 가겠어요."였던가? 어제 아침 일인데 갑자기 분명치가 않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 남자는 이제 운전대를 긴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우습고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도 알고 있소. 우스꽝스러운 일이지. 이 해산부는 2명의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던데... 가만 있자, 이름이 뭐더라...."

할머니? 줄리아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지금 핍과 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겠지? 맙소사! 그렇다면 이 남자는 꽤나 충격을 받겠는데? 그래도 싸지 뭐. 자기 멋대로 시건방진 결론을 내리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를 알아야 해.

"웨이클링과 박스터."

그가 쪽지에서 그들의 이름을 읽어주자 줄리아는 맥이 빠져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그때 섬광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를 곯려 주어야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까? 후훗, 그녀는 핍의 입장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핍은 잘 알아서 처리할 거야. 언제나 침착하니까. 줄리아는 쾌활하게 말했다.

", 어딘지 알겠어요. 거의 다 오셨군요. 여기서 500m쯤 더 올라가다가 좌회전한 다음 좀 더 올라가시면 돼요. 찾기 쉬워요. 평범하게 생긴 방갈로니까요."

", 그분들을 아시나 보군요?"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럼요, 이곳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지내요."

그녀는 얼렁뚱땅 대답했다.

", 이제 그만 가봐야겠는데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얼른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핍의 자동차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때 아직도 할 말이 있는 듯 그가 불렀다.

"이봐요!"

그 억센 어투에 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가기 전에 충고 한 마디 하겠는데, 여우를 아끼는 아가씨...."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역시 자기를 여우와 연관지었다는 사실이 다소 기분 나빴다.

"그깟 레나르(중세의 서사시 (Reynard the Fox)중에 나오는 여우의 이름) 한 마리 구해 줬다고 꽤 인정 많은 척하는데."

그는 심각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당신 차에 치어 죽지 않았더라도 다른 운명이 그를 데려갔을 거요. 덫에 걸리거나, 총에 맞거나, 사냥개들이 갈기갈기 찢어 놓거나 어떤 식으로든 끝장나게 돼 있어."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삶이란 잔인한 거요. 당신은 안 그럴지 몰라도."

줄리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둠이 깔려 와 그의 모습은 희미했지만 목소리만은 차갑게 피부에 와 닿았다. 무슨 훈계라도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는 수의사니까 동물세계에 대한 태도가 다분히 현실적이겠지.

하지만 그녀에 대한 판단만큼은 잘못한 것이다. 줄리아도 삶이 잔인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자연세계의 잔인함은 인간세계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뿐이지. 내가 다른 생명을 존귀하게 여겼다고 해서-그 생명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는 작은 위험을 무릅쓰는 게 낫다는 순간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나를 허약한 감상주의자로 몰다니...

하지만 지금은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가서 수업을 받아야 하니까. 나중에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 잔 들면서 이 분한 마음을 달래야지.

"고마워요, 잘 기억해 두겠어요."

그녀는 돌아서는 자신의 뒷모습에서 냉소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길 바라면서 찬바람을 일으키며 차 있는 데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도 않고 시동을 걸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대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2

시간이 짧은 만큼 줄리아는 에어로빅 강습에 더욱 몰두하여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해 본 적이 없는 그녀다. 디스코 음악에 맞춰 몸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그녀는 그 자신만만한 여우 사나이와의 팽팽한 신경전 때문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음을 느꼈다.

수업을 마치고 샤워를 한 후 다시 기분이 상쾌해진 그녀는 동료들과 어울려 근처 술집으로 갔다. 그건 수다를 떨면서 긴장을 풀 수 있는 즐거운 의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습으로 녹초가 된 몸을 유연하게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대부분은 10시쯤이면 돌아가고 줄리아도 가끔은 그렇게 하지만, 주로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 문 닫을 시간까지 수다를 떠는 게 보통이었다.

오늘 저녁엔 그들이 가고 나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줄리아는 왁자지껄한 군중들 틈에 혼자 남게 된 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스탠드 바 의자에 홀로 앉아 즐겨 마시는 사과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면서 그녀는 뽀얀 안개와 두런거리는 목소리들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렇게 활기 넘치는 장소 한가운데서 자기만의 조용한 상념의 나래를 편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런데 우렁찬 남자 목소리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갸름한 얼굴, 멋쩍은 미소, 옅은 밤색의 긴 머리칼, 텁수룩한 수염, 친절한 회색 눈... 인상에서 풍기는 것처럼 마음씨 좋고 무던하고 속 편한 사람-하지만 왠지 박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

그가 그녀 쪽으로 오더니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줄리아, 아직 여기 있었으면 했는데...."

"안녕, ."

그의 미소에 답하며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강습은 끝난 거야?"

"그럼요."

팀은 목요일 저녁이면 줄리아를 찾아 이곳으로 왔고 그녀도 그를 만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오늘밤엔 이상하게도 짜증이 난다. 이래선 안 되지. 그는 좋은 친군데... 그녀는 짜증을 억누르고 따뜻한 미소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게 일은 어때요?"

"아주 좋아. 다음 작품은 언제쯤 갖고 올 거야? 그 추상작품은 불티나게 잘 팔려. 관광객들이 우리가 부르는 값대로 군말 없이 지불하더군. 당신 작품은 참으로 훌륭해."

그는 감탄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줄리아는 자신의 빈잔을 내려다보며 짜증스러운 감정을 없애려 애썼다. 지금은 팀에게 신경을 써야 해, 그의 찬미의 눈길은 단순히 전문가적인 솜씨에만 국한된 게 아니잖아?

그는 인접한 마을 글래스톤베리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그녀의 도자기와 핍의 토기들을 처음으로 받아 준 가게였다. 그때부터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 사람을 칭찬했고 특히 줄리아에게는 개인적인 호감을 보여 왔다.

그렇다고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팀이 직접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는 섣불리 나섰다가는 그녀를 놓치거나 그들의 순수한 우정마저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다.

그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라도 팀은 그런 불필요한 모험을 할 사람이 아니다. 물론 지난 1년간 그는 그럴 엄두도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추상작품을 맘에 들어한다니 다행이에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특히 어떤 것들이 평이 좋아요? 버섯 모양의 작품요? 아니면 삐뚤삐뚤하면서 각진 모양의 작품요?"

그녀는 무뚝뚝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장사를 목적으로 정말로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전부 다지. 재스퍼는 당신에게 좀 더 가져오도록 해야겠다고 하더군. 그것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니까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야. 요즘은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있지?"

줄리아는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차가운 감촉을 즐겼다.

"저는 요즘 동물모형을 만들어 보고 있어요. 아주 재미있기는 한데 추상작품보다 더 힘들어요. 사람들은 그게 반드시 어떤 모양을 닮아야 한다고 미리 정해 놓고 보거든요."

"당신은 어떤 것을 만들 건 훌륭할 거야."

그는 잔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몇 모금 마셨다.

"그 개구리 모양 기억 나? 그건 일주일 만에 다 팔렸어. 당신의 동물모형은 분명히 반응이 좋을 거야. 이번엔 어떤 종류를 만들려고 하는데?"

"고양이, , 뭐 그런 것들이죠. 그런 게 제일 잘 팔리니까요."

"아주 현명하군. 그런 건 실패할 확률이 적지. 하지만 토끼 같은 걸 시도해 보면 어떨까? 아니면 농장의 가축은 어때? 도시출신 방문객들을 위해 소나 양 같은 걸로."

"실은 염소를 시도해 볼까 해요."

"아주 기막힌 생각인데!"

팀은 껄껄 웃었다.

"그레타 가르보 같은 귀골풍의 염소 말이지? 그런데 그놈은 좀 어때? 해산할 때가 됐잖아?"

"일주일도 안 남은 것 같아요. 우린 그것 때문에 걱정돼 죽겠어요. 하루종일 꼼짝 않고 누워 있기만 해요. 별로 먹지도 않고.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번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해요."

"수의사에게 부탁하는 게 어때?"

팀은 애슈덴의 정규적인 방문객으로 그레타를 무척 좋아한다.

"그편이 안전할 걸?"

"어머, 참 우습군요. 실은 수의사가 오늘 저녁 오기로 했어요."

"정말 좋은 분이야. 그분이 그레타의 소식을 알려 주던 날을 기억하고 있지. 그분이라면 잘 돌봐 주실 거야."

"플래스토 할아버지가 아니에요."

줄리아는 점차 긴장하고 있었다.

"그분은 편찮으세요. 환자들을 전부 다른 병원으로 넘겼어요."

"그럼 새로 온 수의사는 뭐라고 그럽디까?"

"전 몰라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떠났으니까요."

줄리아는 왠지 팀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레타가 무사해야 할 텐데...."

팀은 천천히 술을 들이키더니 문득 줄리아에게 고개를 돌려 다급하게 물었다.

"거기가 어디지? 새로 인수받았다는 그 다른 병원 말이오?"

"몰라요."

줄리아는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전화번호만 받았는 걸요. 이 근처 어딘가 봐요."

"그럼 오기로 했다는 그 수의사 이름도 모른단 말이오?"

팀은 평소와는 달리 계속 다그쳤다. 줄리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스 캐닝턴이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해두는 게 안전하겠지.

"여자로군. 잘됐어."

팀은 잔을 내려놓고는 하릴없이 탁자를 매만졌다.

"세바스찬 트렌트만 아니라면."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의 말투로 미루어볼 때 좋지 못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사과주 한 잔 더 하겠어?"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아뇨, 사양하겠어요. 운전을 해야 되거든요."

건성으로 대답은 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그가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에 있었다. 트렌트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팀은 드러내 놓고 어떤 사람에 대해 혹평하질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누구건 그 순간만큼은 아주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바스찬 트렌트가 누군데요, ?"

"모르고 있었소?"

팀의 놀란 눈빛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웰스 근교에서 새로 개업한 전문의지. 한 일 년은 됐을 걸? 대단한 규모로 운영하고 있지. 여러 가지 설비를 갖추고 이 근처 대규모 농장은 다 진료하고 있어."

온화한 것을 좋아하는 팀인데도 꽤 비꼬는 투로 말을 계속했다.

"그걸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군. 힘 없는 동물들을 상대로 떼돈을 번 거지."

"요컨대 혼자서 가축을 돌보는 소박한 이곳 수의사와는 다르다 이거죠?"

줄리아는 적당히 동조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흥미가 당겼다. 왠지 그의 힐난은 일종의 질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터무니없는 시기심이나 근거 없는 분노 같은 게 아닐까?

"전혀 다르지."

팀은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보며 더욱 비아냥거렸다.

"영국 촌구석보다는 댈라스에나 어울리는 사람이야. 아픈 가축을 치료한다기보다는 대규모 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라구."

줄리아는 팀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그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었으니까. 팀은 대규모 사업이라면 질색인 사람이었다.

"그런 작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잠시 후 그는 말을 계속했다.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모양이야.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어.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나 뭐 그런 곳에 있을 일이지."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 저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줄리아는 마음 한구석에 조금씩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나 역시 몰랐었어. 그런데 우연히 그가 사냥꾼들의 수의사 노릇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

"!"

이제야 모든 게 분명해졌다. 피 흘리는 스포츠는 팀이 가장 혐오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런 일을 즐기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싫어했다. 줄리아는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가능한 한 그런 쪽의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어요. 그럼 그 트렌트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있어요?"

"만나진 못했어. 그냥 먼발치서 한 번 보았을 뿐야. 우리 일행이 지난번 사냥철에 데모를 하려고 갔는데 그자가 거기 있더군. 사냥개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나?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내게 그자에 대해 얘기해 주더군."

팀은 아직까지도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다.

"한 번만 봐도 그자가 어떤 타입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지."

줄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점점 의혹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걸 확인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데요?"

"왜 묻는 거지?"

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줄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 그저 그런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요. 그러니까... 남자로서 말예요."

마지막 말을 하는데 꼭 가시가 목에 걸린 듯 힘이 들었다. 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거칠고 남자답게 생겼지. 그리고 뭐랄까... 식민지인 같은 인상이 풍겨. 아마도 아프리카 평원을 헤매고 다녀서 그런가봐."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우리는 그를 향해 준비해 온 말들을 모조리 퍼부어 주었지."

"알 만해요. 그랬더니 그가 되받아서 뭐라고 않던가요?"

"아니, 아주 냉정하던 걸? 우리의 플래카드를 흘끔 쳐다보더니 그 사냥개를 묵묵히 치료해 주고는 곧 가버렸어."

"뭘 타구서요?"

줄리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굳어 있어서 팀이 눈치챌까봐 은근히 걱정이 됐다.

"꽤 오래 전 일이라서... 가만 있자...."

팀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줄리아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커다랗고 짙푸른 자동차였어."

줄리아는 들릴 듯 말듯 긴 한숨을 쉬었다.

"멋진 TV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신형 오디 중의 하나였던 것 같아."

팀은 저속한 물질만능주의라고 비꼬았다. 그렇다면 틀림없어. 여태껏 바로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데요, ?"

줄리아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 팀이 자신의 얘기에 몰두해 있을지라도 줄리아가 생판 모르는 낯선 남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면 눈치를 챌지도 모르니까.

"맞았어. 이제 내가 왜 그레타를 보러 가는 사람이 그가 아니길 바랐는지 알겠지."

줄리아가 적당한 답변을 찾으려고 궁리하던 차에 문 닫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도망갈 기회다 싶어 후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야겠어요, . 늦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언제 한 번 들르세요."

그녀는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는 백을 집어 들었다.

"새끼를 낳으면 알려 드릴 테니 오셔서 구경하세요."

"그렇게 하지, 줄리아."

그도 따라 일어서면서 그녀가 떠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머뭇거렸다.

"다음주 목요일날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날도 여기 있을 거예요. 집까지 태워 드릴까요?"

밖으로 나오면서 그녀가 물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차를 갖고 나왔어."

"그럼 안녕히 가세요."

길을 건너면서 줄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가게에 물건을 좀 더 갖고 오는 걸 잊지 말아요. 아니면 재스퍼에게 전화해서 상의하든지."

팀도 손을 흔들고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양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어깨를 약간 늘어뜨린 채... 줄리아는 모서리를 돌아 핍의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집에 도착하면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다.

 

마당이 당연히 비어 있을 줄 알고 급히 들어서던 줄리아는 커다란 차 바로 뒤에서 급정거를 해야 했다. 사이드 등이 조롱하는 눈처럼 번득이고 있는 짙푸른 오디가 마당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밤 또다시 트렌트와 맞닥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3시간 전에 애슈덴에 침입하도록 허락해 주긴 했지만 왜 지금까지 있는 것일까? 줄리아는 바짝 긴장했다. 무슨 위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레타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상태가 안 좋은가?

줄리아는 그가 돌아갈 때까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서다가 현관 통로에 딱 버티고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다소 피곤해 보였다.

핍은 평상시처럼 침착한 얼굴로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를 배웅하려던 참인 것 같았다. 줄리아의 눈길이 차례로 그들의 시선과 마주쳤다-조용히 맞아 주는 핍의 미소, 똑바로 쳐다보고는 있지만 불가사의한 세바스찬의 눈초리... 수 초 동안의 침묵이 끝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핍이었다.

"이제 오니, 줄리아? 강습은 재미있었어?"

", 재미있었어."

줄리아는 현관문을 닫고는 거기에 기댔다. 한쪽 팔에 에어로빅 의상을 걸친 채...

"그레타에게 무슨 일이라도?"

"아무 일도 없어. 괜찮아."

핍이 재빨리 대답해 주었다.

"영양식을 좀 만들어 주었소."

세바스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그는 실눈을 하고는 어두운 눈길로 줄리아의 의상을 찬찬히 살폈다. 지금은 평범한 바지에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있다. 저 깊은 눈길은 실망의 뜻일까, 좋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흥미로?

"그런데 깜박 잊고 그걸 두고 와서...."

"트렌트 씨가 친절하시게도 집에 잠깐 들러서 그걸 갖고 오셨어. 급하다는 전화연락을 받은 터라 그렇게 서둘러 오신 거지."

핍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벌써 만난 것 같으니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겠죠?"

세바스찬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만났소. 하지만 정식 인사는 없었소. 그렇죠, 미스 웨이클링?"

그는 그녀의 이름에 힘을 주었다.

", 트렌트 씨."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신이 급히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는 걸 알았죠. 그리고 저는 더욱 급히 웰스에 가야 했구요. 그래서 불필요한 인사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는 나의 장난에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재미있어하는 것일까? 표정으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박스터 양이 곧 바로잡아 주었소."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겠군요...."

사뭇 긴장하고 있는 줄리아를 보더니 핍이 평소와는 달리 수다를 떨었다.

"트렌트 씨 말로는 그레타의 상태는 아주 좋은 거래. 이때쯤에는 다소 불안해하는 게 정상이라는구나. 새끼를 낳으면 저절로 좋아지겠지만 그래도 혹시 걱정이 되면...."

"지체 마시고 저희에게 전화 주십시오."

그는 명령이라도 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든지요. 새끼를 낳기 전후, 아니면 분만 시에라도 좋습니다. 자연의 섭리가 다 알아서 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안전하게 대처하는 게 좋지요. 동물의 생명을 갖고 모험을 해서는 안 돼요. 인간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로 소중한 거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줄리아가 비꼬듯 말했다. 그는 지금 교묘하게 나를 놀리고 있는 걸까? 몇 시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염소에 대한 이 남자의 배려는 여우에 대한 태도와 너무나 판이하다.

"길들인 짐승에 한해서인가요? 야생동물은 예외구요?"

"집에서 기르는 동물은 야생동물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건 우선순위의 문제지요. 여우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당신이 길을 벗어나지 말라는 뜻은 아니오. 단지 그 동물의 안전과 당신의 안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이오.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내 안전도 말요."

그는 씩 웃었다.

"그리고 당신 차도 포함되구요?"

"그렇소, 내 차도 물론."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여우도 무사했고 당신도, 그리고 당신의 오디도 무사하잖아요."

줄리아는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도요."

"아무도 다치진 않았소."

그는 정색을 하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핍은 이 광경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다가 문득 헛기침을 했다.

", 양해해 주신다면 전 이만 물러가겠어요. 트렌트 씨."

그녀는 크게 하품을 했다.

"전 일찍 자는 편이라서요. 이제 그만 달콤한 잠속으로 빠져들고 싶군요. 그래야 미용에도 좋으니까요."

그녀는 세바스찬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리아는 핍이 이 낯선 방문객에게 다소 교태를 부리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았다. 물론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핍은 줄리아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감정적인 동요가 가장 민감한 편이니까. 그녀는 지금 새로 등장한 이 남자로 인해 다소 흥분하고 있는 듯하다. 세바스찬은 핍의 그런 태도에 정중히 응했다.

"당신 같은 미인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미스 박스터?"

진지하면서도 약간 장난기가 섞인 칭찬이었다. 줄리아는 내심 남자들의 그런 기교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말투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사용해 왔던 퉁명스런 어투와는 사뭇 딴판이었다.

"하지만 당신 말씀이 옳아요. 시간이 너무 늦었소."

그는 핍에게 다가가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핍은 악수를 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트렌트 씨, 안녕히 가세요."

그러더니 돌아서서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줄리아를 버려둔 채? 아니면 그녀에게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 준 걸까? 줄리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세바스찬이 재킷을 걸치더니 곧장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현관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으므로 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한 손은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팔엔 옷들을 잔뜩 들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그가 손을 내민다 해도 악수할 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 모르겠소. 평소엔 내 동료 데보라 캐닝턴이 왕진을 맡고 있으니까, 특히 조그만 동물일 때는."

"애완동물말이겠죠? 늙은 할망구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종류 말예요."

그는 그녀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정규적인 방문을 말한 것뿐이오. 미스 웨이클링."

한심한 젊은 여자와 유치한 말다툼을 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줄리아는 탁 터놓고 언쟁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가 원하는 방식이 그런 거라면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기품 있는 태도로 나올 수도 있다.

그녀는 턱을 높이 치켜들고

"그럼 안녕히 가시지요."

라고 얼음같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가 문 쪽으로 가다 말고 멈춰 섰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전 적어도 당신이 누구라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다행이오."

"저도 역시 당신이 누구였는지 몰랐었어요."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물론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나를 이곳으로 쉽게 안내해 줄 때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잖소? 왜 그때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거요?"

줄리아는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무슨 검사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마치 피고를 심문하듯 윽박지르다니...

"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어쨌든 우리에 대해 곧 알게 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알게 될 때까지 나를 골탕 먹일 셈이었소?"

도도한 어투로 쏘아붙였다. 줄리아가 반격할 태세를 갖추려고 하는데 그가 씩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녀가 좋든 싫든 간에 그는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멋진 토론은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합시다."

초면만 아니라면! 줄리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제 돌아가 봐야겠소. 오늘 저녁엔 지겹도록 이곳에 오래 있었으니까, 안녕히 계시오, 미스 웨이클링."

그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더니 그녀를 지나 문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줄리아는 분해서 뭐라도 하나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녀는 들으라는 듯 문을 쾅 닫고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핍은 거실을 정돈하면서 잠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줄리아도 합세해서 거친 손길로 쿠션을 정돈하고 신문도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잠시 후 핍이 곁눈질을 하다가 줄리아의 눈과 마주쳤다.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핍의 눈빛을 보고 줄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둘 다 안락의자에 몸을 내던지고는 미친 듯이 깔깔거렸다.

그때 줄리아의 애완용 고양이 마틸다가 그녀 무릎 위로 올라와 앞발로 그녀의 가슴을 톡톡 쳤다. 줄리아는 그 부드럽고 따스한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음이 푹 가라앉으면서 편안해지고, 핍이 곁에 있다는 게 흐뭇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억눌렸던 짜증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요 깜찍한 계집애야, 왜 그에게 말해 주지 않았지?"

"너도 그자가 하는 소릴 직접 들었어야 하는데... 내가 길을 가는데 그 자의 차가 갑자기 나타났지 뭐니, 그러더니 우리를 가리켜 <두 명의 할머니>라는 거야 글쎄. 그래서 따끔한 교훈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우리들 중 누가 더 놀랐겠는지 상상해 보렴."

"미안해, ."

줄리아는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갑자기 생기 어린 표정으로 핍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그래 무슨 얘기가 오갔어? 그자가 날 만난 건 어떻게 안 거야? 그자가 뭐라고 그러던?"

핍은 느긋한 자세로 등을 기댔다. 그녀는 흉내 내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고 얘기도 실감나게 잘했다. 핍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가 처음에 이러더구나. <미스 캐닝턴이 직접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그녀 못지 않다는 걸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내가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는 그럴 것 같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자가 뭐랬는 줄 아니? <좀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오던 길에 어떤 미치광이 운전사와 충돌이 좀 있었소> 그래서 내가 이랬지. <다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트렌트 씨> 그랬더니 신경질적으로 이러더구나. <보시다시피 다치지는 않았소, 미스 박스터> 그 자는 음..."

핍은 생각에 젖은 눈길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폭발 직전인 것 같았어. 그래서 내가 차를 한 잔 대접하겠노라고 했지."

"그 자가 받아들이던?"

차는 핍의 만병통치약이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차보다는 한 잔의 독한 위스키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줄리아는 생각했다.

"아니, 얼굴을 찡그리더니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고 그러더구나. 그는 아주... 퉁명스러웠어, 줄리아."

", 저런."

줄리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엾은 핍, 안 봐도 알겠어."

"그래서 그를 데리고 마당으로 갔는데 불현듯 뒤를 돌아보고는 소리치는 거야. <핑크와 검정색의 무용복을 입은 미치광이 여자였소. 다 낡은 고물차를 정신없이 몰고 다니는>."

핍이 너무도 실감나게 흉내 내는 바람에 줄리아는 배를 잡고 까르르 웃었다.

"아유, . 그만 웃겨, 설마 그랬을라구! 그래 너는 뭐라고 했니?"

"내가 뭐 대꾸할 말이 있어야지. 화가 잔뜩 나서 붉으락푸르락하는 사람한테. , 내 가엾은 차로 무슨 짓을 한 거지?"

"별 일 없었어, . 정말야. 트렌트의 차가 약간 긁혔을 뿐이야. 그리고 그 사람 잘못도 있는걸 뭐. 백레인 근처의 커브 길 알지? 그자가 거기서 너무 빨리 달렸단 말야. 그리고 나는 내 차 앞으로 뛰어든 여우를 피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을 뿐이구."

"그 말은 들었어."

"그 자가 여우 얘기를 하던?"

줄리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핍은 다시 트렌트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그 하찮은 짐승을 위해 반대편 길에서 오는 사람을 그런 위험 속에 몰아넣다니. 그녀는 여우 한 마리를 피하려고 하다가 나를 칠 뻔했단 말이오."

"뻔뻔스런 녀석!"

줄리아의 목소리가 분노로 흔들렸다.

"그 운전사가 곱슬머리에 검정색 리어타르를 입었더냐고 내가 물었지. 시치미를 뚝 떼고 말야, 그랬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 여자를 아십니까. 미스 박스터?>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말해 주었지. 그 낡아빠진 고물차는 내 모리스고 그리고 그 운전사는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업자이며, 이 집주인인 줄리아 웨이클링이라구 말야."

"이 집주인이라구? , 이런, !"

줄리아는 눈을 곱게 흘겼다.

"언제부터 나를 이 집주인이라고 불렀지?"

", 어쨌든 그건 사실이잖아."

핍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눈가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 말을 듣더니 그 자는 마치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라. 그러더니 입을 꾹 다물고는 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염소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잖아. 그래서 그를 곧장 헛간으로 데려갔지. 그의 관심을 너로부터 돌려놓으려고 말야."

핍은 마냥 짓궂게 놀려대고 있었지만 줄리아는 영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화제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느낀 줄리아는

"그래, 그자가 그레타를 정말 잘 돌봐 주던?"

하고 물었다.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뛰어난 수의사인 것만큼은 분명하더라. 완벽하고 부드럽게 해내던 걸? 그레타가 아주 얌전히 있더라구. 자기가 전문가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말야. 나도 역시 그의 손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

핍은 사뭇 얼굴을 붉히며 고백했다.

"그는 아주 길고 섬세한 손을 가졌더라. 마치 예술가의 손 같았어."

"내가 들은 바로는 그 방면에 아주 유능하대."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술집에서 팀을 만났었어. 팀이 트렌트라는 작자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더구나. 그 설명을 듣고 대번에 그 자인 줄 알았지. 그래서 이름도 알게 된 거구."

그녀는 마틸다를 떨쳐 버리고는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나중에 자세히 말해 줄게, , 지금은 너무 피곤해, 아참, 네 차로 사고를 내서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은 없었어. 내가 얼마나 조심스레 운전하는지 너도 알지? 그런데 그 여우가... 이해해 주길 바래."

"물론이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줄리아."

핍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줄리아의 머릿속에는 그 사고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자를 보니 혹시 여우 생각이 나지 않던, ?"

"그렇게 간교해 보이지는 않던데, ?"

핍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난 단지 색깔을 말하는 거야. 그의 빨간 머리색깔과 피부색 말야. 그리고 콧수염도."

줄리아는 핍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소동을 치르고 나서 그자가 뭐랬는 줄 아니? 여기로 출발하기 바로 직전에 말야."

"뭐라고 그랬는데?"

"이러더라. <그깟 레나르 한 마리 구해 줬다고 그렇게 인정 많은 척할 건 없소>."

핍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레나르? 여우의 별칭? 난 그 이름이 좋더라."

줄리아는 주방 쪽으로 갔다. 핍도 뒤따랐다.

"그런데 말야."

핍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떠서 줄리아는 번뜻 고개를 들었다.

"잠시 잊었는데 맬콤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나더러 토요일 날 파티에 함께 가자고 하더구나. 너 괜찮겠니?"

줄리아는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전에 없이 당황한 모습이다.

"괜찮구 말구, . 그가 내게 같이 가자고 청했어도 난 못 갔을 거야. 토요일날 휠딩 씨네 아이들을 돌봐 주기로 했거든."

"내가 외출하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맬콤과 함께."

핍은 우물쭈물 말하며 방에서 나갔다. 잠시 후 욕실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맬콤은 지난 2년간 그들의 재정적인 문제를 처리해 주고 있는 브리스틀 사의 젊고 매력적인 회계사다.

사업적인 이유로 둘 다 그를 좋아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핍이 그와 친밀하게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갔다 와서도 좀체로 말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는 얘기로 줄리아를 안심시키는 것 외에는.

그녀는 줄리아가 그런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 단호한 생각을 갖고 있고, 그런 문제들이 각자의 소중한 계획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줄리아도 핍이 자신의 그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묵시적인 합의를 방해할 만한 일은 있어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줄리아는 속단하지 않기로 했다. 핍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 중 누구와도 파티에 갈 자격이 있다. 그녀가 수려한 맬콤을 선택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줄리아 자신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가끔은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즐기기도 한다.

우리들의 여자다움이 녹슬지 않도록 가끔씩 달콤한 향료를 뿌려 주는 것도 괜찮겠지. 핍의 이상한 분위기에 대해 아직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욕실로 가던 길에 줄리아는 핍의 방문을 두드렸다.

"잘 자!"

"안녕, 줄리아."

안에서 졸린 듯한 핍의 음성이 들려왔다.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며 줄리아는 자신이 다소 상기되어 있는 걸 알았다. 차가운 물로 양볼을 식히고는 이를 닦으며 혼자서 배시시 웃었다. 녹초가 되도록 보낸 하루였어. 심한 운동에다 뜻밖의 사건, 그리고 때 없는 여우 소동...

그녀는 물빛 실크 잠옷을 걸치고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만족스런 큰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잠속으로 빠져드는 그녀의 이마 위에는 얼핏 주름이 잡혀 있었다.

 

3

"이런, 젠장!"

줄리아는 지저분한 손을 흙투성이 바지에 문질렀다. 도무지 영감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무리 진흙덩이를 열심히 빚어 보아도 그건 그냥 한 덩어리의 진흙일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염소는 아니었다.

"그레타가 지금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그런가 봐."

핍이 위로했지만 줄리아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창의력이 떨어진 건 모델 탓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 때문이다. 목요일 이후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뭔가 영감이 떠오르려고 하면 또다른 영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것이다. 그 영상을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토요일 6시 반이 되자 그녀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어 기뻤다. 핍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멋진 옷을 차려입고 한껏 부풀어서 맬콤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줄리아는 손을 씻고 헐렁한 바지에 푸른 줄무늬 셔츠로 갈아입었다.

오늘밤엔 우아한 옷보다는 편안한 옷이 좋다. 조와 에마 필딩-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그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그들은 6살과 3살짜리 꼬마였고 그들의 부모님은 다정한 이웃이었다.

줄리아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의 천진함과 장난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애들을 돌보아 믿을 만한 유모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그래, 가정이란 소중한 거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지만 그게 여자의 직업에 미친 영향을 익히 보아온 그녀다.

우선 리즈 필링을 보라지. 일류신문사 고정직을 마다하고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 뛰고 있잖아. 그리고 올케 자네트도 그래. 한때 일류비서로 있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오빠를 따라 시골에 내려와 살잖아.

무엇보다도 으뜸가는 본보기는 줄리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녀의 어머니였다. 앤 웨이클링은 젊은 시절 뛰어난 공예가로서 직물 짜는 일로 전국의 상을 휩쓴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직업 정원사인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는 자식이나 키우는 평범한 여자로 안주해 버렸다.

줄리아는 어린 시절 내내 다락방에 처박힌 물레와 태피스트리 틀을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여가시간에도 아버지를 도우면서 늘 흐뭇해하셨는데 줄리아에게는 그게 비극으로 느껴졌다. 그 아까운 재능을 저렇게 썩이시다니... 앤은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으셨지만, 줄리아는 그건 통탄할 일이며 인생을 편협하게 사는 거라고 나름대로 단정지어 버렸다.

어째서 남자들만 자기 길을 가야 하는가? 왜 아버지의 기술과 정열이-그 정도에 있어서는 그녀의 오빠와 콜린 필링도 마찬가지지만-그들 아내들 것보다 더 우선돼야 한단 말인가? 왜 남자들의 것이 더 중요하냐 말이다.

16살이 되던 무렵, 그녀의 예술적 재능이 어느 정도 틀을 잡아가자 줄리아는 자기 자신에게 숭고한 맹세를 했고 그때부터는 그 맹세가 그녀의 모든 행동을 이끌어 주는 횃불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남편과 자식 때문에 타고난 재능을 희생하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나는 내 자신의 욕구와 야망을 가진 한 인격체로 살리라. 모든 준비가 될 때까지 그녀는 조심스레 자신의 삶을 혼자 힘으로 이끌어 왔다.

여자 친구들과의 우정은 지속했지만 그녀의 귀중한 독립성을 위협할지도 모를 애정이 따르는 관계는 가지려 하지 않았다. 남자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고, 다행히도 그녀의 결심을 흔들어 놓을 만한 거센 폭풍은 아직 밀어닥치지 않았다. 단지 부드러운 미풍만이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핍은 적어도 입으로는 그녀의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핍이 지금 흔들리는 걸 보고 심히 불안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젯밤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이 틀리지 않다면... 불안했다. 줄리아는 현관문을 잠그고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새로 말끔하게 수리된 자신의 차 다이안을 타고 대문을 나서다가 문득 멈춰 섰다. 시동을 걸어 둔 채 다시 마당을 가로질렀다.

내 정신 좀 봐. 어젯밤에 닭들을 닭장 안에 넣는 걸 깜빡 잊었네. 물론 닭들을 날이 어두워지면 본능적으로 잠자리로 기어들긴 하지만... 닭장 문은 활짝 열려진 채였고 닭들은 그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줄리아는 큰길에 들어서며 투덜거렸다. 이런, 또 도착해야 할 시간에 떠나고 있네.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니까...

4시간 후 줄리아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으려는데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신경이 곤두섰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급히 달려들어가 백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줄리아, 너니?"

얼큰하게 취한 듯한 핍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술냄새가 확 끼쳐오는 것 같다.

"그럼 누구겠니?"

쏘아붙일 생각은 없었지만 전화가 끊길까봐 불같이 달려왔던 차라 부아가 치밀었다.

"파티는 어때?"

핍이 화난 기색을 눈치 채지 않길 바라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아주 좋아, 정말 근사한 파티야."

핍의 목소리는 많이 풀려 있었다. 줄리아는 살포시 미소를 흘렸다. 핍은 도에 지나칠 행동을 할 사람이 아냐. 몇 잔 술 정도는 기분전환에 좋겠지.

"네가 받아서 다행이야. 실은 오늘밤 여기서 지내도 좋은지 물어 보려고 전화했어. 우리 둘 다 술을 좀 많이 마셨거든. 난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맬콤이 이 근처에 살고 침대도 여유가 있다고 해서 우리 생각엔...."

그녀는 말끝을 사렸다. 줄리아는 억지로 웃음기를 머금고 있긴 했지만 표정은 다소 굳어졌다.

"괜찮구말구, 언제부터 내 허락을 받고 살았니? 난 네 엄마가 아냐, , 침대가 더 있건 없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그녀는 자상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그 말 속엔 가시가 들어 있었다.

"나도 잘 알아. 하지만...."

핍은 머뭇거렸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겠지.

"네가 괜찮다고 해야만... ."

"난 괜찮아.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줄리아는 긴장을 풀려고 심호흡을 했다.

"즐겁게 지내렴, . 걱정 말고."

"고마워."

핍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그럼 내일 보자. 아참, 줄리아...."

"?"

또 뭐지? 이젠 피곤한 생각이 들어 줄리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 전에 잊지 말고 그레타를 한 번 둘러봐 줘."

그런 와중에서도 핍은 자신의 책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려던 참이었어. 아무 걱정 하지 마. 즐거운 시간 보내렴. 서둘러서 돌아올 생각 말고."

핍은 어엿한 성인이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다 해도, 줄리아가 친구의 행동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성인의 인격으로 대접해 주어야만 한다.

"고마워. 그럼, 잘 자렴."

"그래, 편히 쉬어. 내 걱정은 하지...."

선이 끊겼다-핍은 이제 거기 없었다. 줄리아는 한동안 멍하니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커다란 플래시를 들고 헛간으로 갔다.

그레타가 이상한 모습으로 다리를 벌리고 옆으로 누워 있다가 줄리아를 보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더니 다시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줄리아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 순한 눈망울이 겁에 질려 있다. 줄리아는 그레타의 몸 쪽으로 불빛을 옮겼다. 괴로운 듯이 숨을 헐떡거린다. 뱃속의 새끼가 요동을 하는 걸까, 아니면...?

줄리아는 그레타 곁에 꿇어앉아 한 손으로 긴 주둥이를 쓰다듬으며 매끄러운 귀를 어루만져 주었다. 다른 한 손은 옆구리에 갖다 대고는 온 신경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수축했다가 다시 이완하고 또다시 수축... 맙소사,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 분만 중이었다.

, 이런! 어떻게 해야 하지? 세바스찬 트렌트의 고귀하신 충고대로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 하나?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놔둬야 하는 거지? 그레타가 혼자서 해내지 못하면 어쩌지? 겁이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줄리아는 그레타의 꼬리 쪽을 비추어 보았다.

바로 그때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레타가 고통스럽게 울어댔다. 줄리아가 가슴을 죄면서 바라보고 있자니 무엇인가가 빼꼼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래, 다 괜찮을 거야. 묵묵히 기다리자. 곁에 꼼짝 않고 앉아 그레타가 힘내기만을 기원했다. 온몸의 근육이 빳빳해지고 신경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이다.

경련이 끝나자 그레타는 기진맥진해서 몸을 축 늘어뜨리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끙끙거리는 신음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침묵의 공간을 떠다닌다. 너무 오랜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아 줄리아는 불을 한 번 비추어 보았다. 그래, 뭔가 보이는군-머리가 밖으로 나왔나 보지?

아니, 이건 머리가 아니잖아! 그건 분명 조그만 발굽이었다. 이 염소새끼가 세상에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인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줄리아도 머리가 먼저 나와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더욱 난감한 건 더 이상 꼼짝도 않는 것이었다. 그레타는 이제 눈이 풀리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힘없이 누워 있었다. 더 이상의 경련도 없다. 뭔가 잘못됐어!

줄리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레타에게 격려의 말 몇 마디를 던져 주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집안으로 뛰어들어 와 곧장 전화통 앞으로 갔다. 맬콤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긴 하지만 핍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다. 브리스틀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고 무리해서 오려고 하다간 사고가 날 것만 같다.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트렌트가 걱정이 되면 언제라도 전화하라고 했었다. 그다지 위급한 상황은 아닐지 모르지만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는 알고 싶다. 단순히 걱정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미칠 지경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린 뒤 다이얼을 돌렸다. 마음이 급해서 두 번이나 잘못 돌리고 새로 돌려야만 했다. 마침내 신호가 떨어졌는데 계속 울리기만 한다. 수화기를 붙든 자기의 하얀 손마디가 보인다. 왜 안 받는 거지? 이 시간에 왕진을 나간 걸까? 이건 세바스찬의 집 전화번호였다. 급할 때 걸라고 그가 핍에게 주고 간 거였다. 그가 없더라도 연락할 길은 있겠지... , 드디어 받는구나!

"...."

여자였다. 도도한 목소리-줄리아는 누군지 금세 알아차렸다. 전에 몇 마디 주고받은 적이 있으니까.

"수의사지요?"

한심한 질문이군. 하지만 지금 줄리아는 제정신이 아니다.

", 데보라 캐닝턴입니다. 뭐 도와 드릴 일이라도?"

", 우리 집 염소 말인데요, 지금 새끼를 낳으려고 해요. 아직 낳으면 안 되는데...."

"며칠 앞당겨졌다고 걱정하실 건 없어요. 염소가 다 알아서 잘 해낼 거예요."

1210분 전에 전화를 한 사람에 대한 짜증과 경멸을 억제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발만 보여요. 잘못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상관없어요."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가끔 앞발이 먼저 나오는 수가 있지요. 좀 더 기다려 보세요. 얼마나 됐죠?"

"... 그게 문제예요. 그걸 모르거든요. 몇 시간쯤 됐을 거예요. 전 외출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동작이 멎었어요. 그레타는 기진맥진해 있고 마치...."

캐닝턴이 그제서야 고맙게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멈췄다구요?"

", 제가 11시쯤 집에 왔더니 이미 시작되고 있었어요. 괜찮은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발이 삐죽 밖으로 나오더니 그 다음엔 꼼짝 않는 거예요. 제발 와주세요."

줄리아는 애원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지만 트렌트 씨가."

", , 알겠어요. 그런데 트렌트 씨는 지금 왕진 가고 안 계세요. 저는 오늘 근무하는 날이 아니구요. 지금 막 욕실로 들어서던 참이었어요."

그녀는 비난하듯 덧붙였다. 마치 줄리아가 고의로 그 시간에 맞춰서 걸었다는 듯이.

", 저런!"

엉뚱하게도 줄리아의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재빨리 분석되고 있었다. 캐닝턴이 욕실로 가려던 참이라구! 세바스찬 자택의 전화를 직접 받고... 보나마나 뻔한 일이지. 물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목욕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사과라기보다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때 그레타에 대한 걱정이 다시 떠올랐다.

"그럼 이제 전 어떻게 해야 되죠?"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염소 곁에 지켜 서서 기다리세요. 제가 트렌트에게 연락을 해보죠. 그는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예요. 거기 애슈덴이죠?"

", 맞아요."

줄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트렌트라는 남자가 캐닝턴에게 애슈덴의 그 괴상한 염소주인들과의 기묘한 만남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남자와 욕실과 전화를 함께 쓰고 있다면 그런 우스꽝스런 일화도 함께 나눴을 것 아닌가!

"그가 30분 내로 거기 도착하지 않으면 제게 다시 전화를 주세요. 최악의 경우 저라도 가봐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가 늦어지질 않길 바래요."

"고맙습니다."

줄리아는 늦은 시간에 자상한 배려를 해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났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두 눈을 문질렀다. 공포가 이제는 다소 가라앉는 듯하다. 그녀는 날 듯이 다시 헛간으로 달려갔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줄리아가 나타나도 그레타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경련을 하고 있었다. 불빛으로 재빨리 살펴보니 그 조그만 발은 다시 들어가 버렸다.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줄리아는 짚단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너무 안쓰러워 그레타의 조그만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힘이 되길 바라며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가엾은 그레타! 가엾은 핍! 가엾은 새끼염소! 가엾은 세바스찬 트렌트, 이 밤늦은 시간에 왕진이라니! 어머나! 내가 트렌트 씨 걱정을 하다니, 뭐가 가여워? 그건 그 사람의 직업이잖아. , 이제 그가 얼마나 잘 해 내는지 보여 줄 때가 된 거야.

정확히 125분에 오디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 다행이다. 다시 전활 걸어서 미스 캐닝턴의 무뚝뚝한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겠구나. 레나르가 제때 나타나 주었으니. 줄리아는 그가 자동차 문을 쾅 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재빨리 뛰어나가 맞았다.

하지만 그가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켜두어서 그 강렬한 불빛에 눈이 부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불빛을 가리며 그의 얼굴을 찾았다.

"우린 결국 다시 만났군요, 미스 웨이클링."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인사였다. 그는 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는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줄리아는 불빛에서 비켜나 이제 동등한 입장에서 그를 맞았다.

"그렇군요, 트렌트 씨."

줄리아는 그가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투로 나오면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는 묵직한 가방을 다른 손으로 옮겨들더니 다른 한 손으로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길 뿐이었다. 그 동작을 지켜보다가 문득 관자놀이 근처의 그 흉터가 떠올랐다. 그의 콧수염이며 구릿빛을 발하던 머리칼도 눈앞에 아련히 떠올랐다. 왠지 남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저 멀리 달아나던 그녀의 생각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부른 걸로 알고 있는데, 밤이 깊었으니 될 수 있으면 빨리...."

"물론이죠."

그를 헛간으로 안내하며 줄리아는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그레타를 잊은 자신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그레타의 우리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잠깐 동안 발이 나오는가 했는데 다음 순간 없어져 버렸어요. 경련도 있었어요. 아주 크게 한 번요. 그러더니 잠잠해져 버렸구요."

그는 우리 안으로 넘어들어가 가방에서 플래시를 꺼내더니 벽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그레타를 살펴보았다.

"물 한 양동이가 필요하오."

너무도 단호하게 말했기에 줄리아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밖으로 나가 물을 떠왔다.

"여긴 전기가 안 들어와요?"

염소한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불쑥 물었다. 줄리아는 그 긴 손가락이 자신 있게 움직이는 걸 황홀한 듯 지켜보았다. 핍이 얘기한 그대로다. 전문가답게 그는 능숙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고, 그레타조차도 차분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며 안심하는 것 같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그는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펀뜻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 전기가 안 들어와요. 깜박 잊고 플래시를 안 가지고 나왔어요. 들어가서 가져올까요?"

"그걸로는 안 되겠소. 헤드라이트를 사용해야겠군. 내 차로 가서 불빛이 이쪽을 향하도록 돌려 놔주겠소?"

"어떻게 하라구요?"

줄리아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틀 전에 길에서는 그렇게 내 운전솜씨를 탓하더니 그 귀한 차를 나더러 운전하라고 부탁, 아니, 명령하는 것일까? 하느님 맙소사, 설마...

"귀먹었소? 이봐, 아가씨. 우물쭈물할 때가 아냐. 난 지금 불이 필요하다구."

일에 정신을 뺏긴 나머지 억지로나마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었나 보다.

"당신이 내 대신 이 일을 할 수는 없을 테니 미안하지만 차를 좀 갖다 대 주시겠소?"

그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물론이죠."

침착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줄리아는 오디 쪽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발이 페달에 닿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자의 운전석은 그녀의 짧은 다리에 비하면 너무 뒤로 제껴져 있었으니까. 줄리아는 좌석을 조정하는 레버를 더듬거려 찾았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거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해요. 나는 밤새울 생각은 없소."

"미안해요!"

창문으로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떨렸다.

"발이 페달에 닿질 않아요. 좌석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겠구요."

"이런, 젠장!"

그는 줄리아의 다리가 자기보다 짧은 것이 마치 그녀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씩씩거렸다. 그런 그의 태도에 발끈한 줄리아는 "걱정 말아요.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라고 쏘아붙인 후 힘껏 다리를 뻗어 발끝을 간신히 페달에 대고는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약간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조정할 수가 있었다.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그녀는 조심스레 차를 돌려 차 앞부분이 헛간 쪽을 향하게 했다. 환한 불빛이 헛간문을 통해 그레타와 세바스찬에게로 쏟아졌다. 훌륭해! 줄리아도 뭔가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별 어려움 없이. 그녀는 이상하게 우쭐해진 기분으로 차에서 내려 세바스찬 곁으로 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자기 일만 계속했다. 줄리아는 어깨를 추스르면서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지금 그레타를 구하려고 온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두 마리 생명을 구하는 순간이다. 줄리아는 그저 만만한 조수일 뿐이다. 그는 그녀가 자기처럼 상황에 적절히 대처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지금은 어린애처럼 새침해 하거나 토라질 때가 아니다.

그녀는 불빛을 가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어깨너머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 잘 돼가요?"

목소리를 낮추어 가만가만 물어 보았다.

"당신만 뒤로 물러서 준다면."

거침없이 내뱉는 그 말에 그녀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그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미안하오."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하지만 충분한 공간 없이는 수술을 할 수가 없소."

그렇군요, 줄리아는 충분히 납득이 갔다.

"상태가 그리 나쁜 건 아니오."

그는 능숙하게 손을 놀리면서 말했다. 그레타는 끙끙거리긴 했지만 순종하는 태도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새끼에게 조금 조치를 해놨구, 잘못 들어앉아서 머리가 오른쪽 뒤로 꺾였소. 그래서 꼼짝 안한 거지. 당신이 본 건 앞발이었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레타는 숨을 헉헉거리며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줄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트렌트에게 가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레타의 거친 숨소리가 역력히 들려왔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는 듯하다.

"그레타... 그레타는 괜찮을까요?"

줄리아는 너무 걱정되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그를 화나게 만들지라도...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걱정이 가득한 그녀에게 성을 내지 않고 답변해 주었다.

"내 생각엔 잘 해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아줌마?"

그레타에게 말을 거는 그의 목소리엔 정이 넘쳐흘렀다-따뜻하고 부드럽고 자애로운 목소리. 줄리아는 그 남자의 변신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극단적인 사람이야, 그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것처럼.

"그런데 새끼에 관한 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딱딱해졌다.

"아직 뭐라고 말을 못하겠소. 살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레타가 다시 경련을 일으키면서 큰소리로 울어대자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놈이 얼굴을 내밀 때까지는 확답을 할 수가 없소. 이제... 시간이... 된 것 같군."

그는 마지막 조치를 취했다. 그레타가 발작적인 경련을 일으키더니 반쯤 몸을 일으켰다. 세바스찬도 일어나서 뒤로 물러섰다. 바로 뒤에 서 있던 줄리아는 바짝 긴장이 되는 한편으로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드디어 공주님이 나오시는군. 아니 이런, 공주님이 아닌데? 왕자님이잖아."

그는 껄껄 웃었다.

"갈색 왕자님, 살아 있어. 발길질을 하는군."

그의 목소리에는 긍지가 담겨 있었다. 아주 흡족한 모양이었다.

"근사한 놈이로군. 그레타 가르보가 능숙하게 새끼를 핥아 주는데. 잘했어, 아줌마! 정말 잘했어."

그 말에 대꾸라도 하듯 그레타가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새기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마침내 세바스찬이 물러서자 줄리아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레타가 동물 특유의 본능으로 새끼를 열심히 핥아 주는 모습을 보는 순간 줄리아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보이는 거라곤 뿌연 안개뿐이었다. 오랜 시간의 고통 끝에 대하는 이 성스러운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세바스찬은 물을 쏟아 버리고 가방을 탁 닫은 다음 그레타를 한 번 더 살펴보고는 줄리아에게 돌아섰다.

"계속 어미를 돌봐 주어야겠소. 치료가 좀 필요하니까. 너무 진통이 심한데다 피까지 흘렸고 감염될 우려가 있어서... 하지만 지금으로선 저대로 놔둘 수밖에 없소."

", 그래도 되나요?"

줄리아는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럼 뭘 더 해주려는 거요?"

그는 이미 헛간에서 나오고 있었다.

"밤에 자기 직전에 따뜻한 밀기울을 좀 주구료. 지금으로선 내가 할 일은 없소. 하지만...."

그는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줄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날 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뚜렷이 보았다-긴 일정에 지친 그런 얼굴...

"하지만 뭐요?"

"가기 전에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지금 거의 1시가 다 되었다는 건 알지만 잠깐 안에 들어가서...."

그의 어투에 호기심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커피를 한 잔 타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겠소."

그가 선뜻 대답하자 줄리아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주전자를 올려놓는 동안 세바스찬은 밖으로 나가 차에다 가방을 던져 넣고 라이트를 껐다. 그런 다음 욕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그가 다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 줄리아는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과 밀크, 설탕, 그리고 비스킷을 놓고 있었다.

세바스찬이 말끔한 주방 의자에 앉아 있다니, 그에게 비스킷을 대접하고, 그도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핍의 머그로 커피를 마시다니...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줄리아는 크게 도움은 못됐지만 그래도 염소가 새끼를 낳는 데 같이 참여했다는 게 왠지 둘 사이를 가깝게 해준 것 같다.

"박스터 양은 어디 있소?"

커피를 거의 다 마실 무렵 그가 물었다.

"핍 말인가요?"

문득 그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줄리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밖에서 그런 소동을 부리는 동안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갔어요. 내일에야 돌아올 거예요. 그레타가 얄궂게도 저 혼자 있을 때 그 일을 치렀지 뭐예요."

그녀는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당신 정말 잘 해냈소."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에게 전화한 건 아주 잘한 거요. 안 그랬으면 염소는 죽었을지도 모르오. 아니면 영원히 불구가 됐거나."

줄리아는 그 말에 더욱 얼굴을 붉히면서 커피잔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는 겁만 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전화하길 정말 잘했소."

그가 재차 강조했다. 그러더니 혼자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난 염소에 대해 점차 경탄을 느끼게 되었소. 거기선 염소를 아주 소중하게 키우고 있지. 가뭄이나 기근으로 소떼들은 쓰러져 죽어도 염소는 끝까지 살아남더군. 강인한 종족이오. 우유의 질도 아주 좋고, 염소젖에는 지방이 아주 골고루 섞여 있다는 걸 알고 있소?"

", 알고 있어요."

줄리아는 커피를 마시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핍이 염소를 갖고 싶어한 이유 중 하나도 그거였어요. 그녀는 소젖에 알레르기 증세가 있거든요. 그런데 염소젖은 잘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새끼 때부터 그레타를 데려다 키우면서 젖을 짜서 먹었죠. 그레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예요, 트렌트 씨. 심약한 할머니들의 단순한 애완용 동물이 아니라구요."

그들의 첫대면을 상기시켜 주는 그 말은 다분히 도전적인 어투였다. 그런데 불현듯 그 일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줄리아는 숨을 죽이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세바스찬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한방 먹었군. 내가 자초한 일이니 감수하겠소. 그 땐 우리 둘 다 그 사고로 인해 잠시 이성을 잃었다고 해둡시다."

그가 의외로 부드럽게 나오자 줄리아는 다소 안심하면서도 왠지 맥이 풀렸다. 자신의 어린애 같은 질책에 그가 발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여유 있고 현명하게 재치로 받아넘기다니...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줄리아가 공손하게 물었다.

"아프리카 어디쯤 계셨는데요?"

"최근엔 짐바브웨에 있었소."

그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숙여 왔다. 그는 다른 데에 관심이 있었다.

"이봐요, 줄리아."

갑작스런 그의 동작과 접근, 그리고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에 놀라 줄리아는 숨을 훅 들이켰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제쳤다. 가슴이 쿵쿵 뛴다.

"그 새끼염소 말인데."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검붉은 눈빛이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게 수놈이라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박스터 양, 아니 핍이 그걸 없애고 싶어하지 않을까? 당신들 중 누구도 그런 일을 해내지 못 할 테니까 당신만 좋다면 지금 내가 데려가서 당신 대신 해주겠소."

갑자기 어떤 큰 벽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과 어투가 점차 굳어지면서 줄리아에게 도전적인 기세를 뿜어댔다. 줄리아는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없앤다구요?"

"내 말뜻을 잘 알지 않소? 젖이 필요해서 기르는 경우라면 수놈은 귀찮기만 할뿐이오. 특히 염소는 수놈은 그다지 쓸모가 없소. 한 가지 분명한 목적만 빼놓고는."

그는 빈정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론 적당히 키워서 먹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핍이 바라는 게 그건 아닐 거 아니오?"

줄리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가로저을 뿐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앙갚음을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제일 좋은 방법은 태어나자마자 없애는 것이오. 그럼 정들 염려가 없지. 당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미도 말이오."

이렇게 잔인할 수가!

"수놈들은 웬만큼 자라면 사람을 잘 따르질 않지. 가까이 두어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놈들이오."

그는 이제 잔인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골적으로 곯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줄리아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 뻔뻔스런 얼굴을 노려보았다.

"지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트렌트 씨.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어요. 제 친구가 그 수놈 새끼를 어떻게 하든 결정권은 그녀한테 있어요. 저는 어떤 것도 미리 결정할 입장이 못돼요. 전 당신과 달라서 그렇게 쉽게 단안을 못 내리겠군요."

겉으로는 기특할 정도로 침착하게 얘기하면서도 그녀의 속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럼 이런 얘기를 의논한 적이 없단 말이오?"

그는 눈썹을 치켜 뜨며 물었다.

"그래요, 하지만 우리가 의논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우리 힘으로 처리할 거예요. 당신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구요."

그녀는 경멸하듯 그 말을 내뱉고는 테이블 끝을 꽉 잡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전신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 주시면 고맙겠군요, 트렌트 씨."

그녀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차분한 눈길로 그 음산한 눈빛을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건 우려의 빛일까, 아니면 일말의 후회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테이블을 돌아 그녀 쪽으로 왔다.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봐, 줄리아."

그가 목소리를 낮추자 아까 느꼈던 따스함이 다시 느껴졌다.

"당신을 당황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난 단지 도움을 주려던 것뿐이었는데...."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아요. 무엇 때문에, 왜 그랬는지 다 안다구요. 목적을 이뤘을 테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죠."

그는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서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는 어깨를 잡았던 손을 떼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휘청거렸지만 바로 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 불에 덴 듯 후끈거린다.

그는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계략이 성공했다는 승리감에서일까?

"혼자 있어도 괜찮겠는지 증명해 봐요. 그러면 돌아갈 테니."

줄리아는 돌아서서 침착하게 몇 발자국을 걸었다. 그리고는 컵을 집어 들고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끝낸 다음 그곳에 기대 서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안심이 되시겠어요?"

무슨 짓이라도 할 테야, 그를 여기서 내보낼 수만 있다면.

"좋소. 이제 안심이 되는군. 그럼 당신에게 모든 걸 일임하겠소. 나 역시 밤을 새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미스 캐닝턴이 말끔히 단장하고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요... 세바스찬은 문 쪽으로 가다 말고 돌아섰다.

"그레타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준 다음 편히 쉬도록 해줘요. 내가 곧 다시 와서 점검하겠지만...."

위협인지 약속인지 모르겠군. 신경쓸 것 없다구요, 줄리아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혹시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연락처를 알고 있죠?"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제발 그가 빨리 떠나 주었으면... 그도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마침내 방을 나섰다. 줄리아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멀어져 가는 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혼자가 된 것이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그녀는 플래시를 들고 세바스찬의 퉁명스런 지시대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헛간 쪽으로 갔다. 그레타와 그녀의 새끼염소가 다정스럽게 껴안은 채 짚단 위에 앉아 있었다.

줄리아는 그레타에게 불빛을 비추었다. 갈색 눈이 폭풍 뒤의 적막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다. 그런 엄청난 시련을 치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줄리아는 자신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4

줄리아는 쉽게 잠이 드는 편인데도 오늘밤은 그렇지가 했다. 3시가 훨씬 넘도록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몽롱한 가운데 그레타와 그 새끼염소의 영상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가는 차가운 진흙덩어리로 변해 버린다. 그러더니 이번엔 그 진흙이 그녀의 손길 아래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처음엔 여우의 모습인가 했더니 다시 염소로 바뀐다.

세바스찬의 존재로 인해 줄리아는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탁월한 솜씨와 판단력으로 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놓고서는 이내 냉혹한 현실주의자로 탈바꿈하다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과로한 탓일 거야, 줄리아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뜨거운 코코아 한 잔에 요즘 읽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도 들척거리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마침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다음날 아침 11시쯤 줄리아는 상쾌한 기분으로 청바지에 헐렁한 스웨터를 걸치고 잡다한 집안일을 시작했다. 닭들을 닭장에서 내보내고 계란을 걷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염소들을 둘러본 후 물을 갈아주고 짚단도 새로 넣어 주었다.

그녀는 일요일의 상쾌하고 맑은 햇살 아래서 그들을 보는 게 아주 좋았다. 드넓은 하늘에 구름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산들바람이 마을 교회의 종소리를 실어다 주는 이런 날에... 줄리아는 이런 날이 못 견디게 좋았다. 이렇게 화창한 날 아침은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30분 전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간밤의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나 의심했었는데... 하지만 그건 전부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 그레타가 감쪽같이 옛날의 날씬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자랑스런 눈길로 자신의 새끼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새끼를 보고 있으니 줄리아의 가슴도 녹아드는 것 같다. 말쑥하고 뽀송뽀송하고 부드럽고...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사랑스런 모습이 있을까.

그레타처럼 크림 색 반점은 없지만 제 에미를 꼭 빼닮았다. 그 앙증맞은 네 다리로 뒤뚱뒤뚱 버티고 서서, 울타리 밖에서 굽어보고 있는 낯선 사람-줄리아-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쳐다본다.

"그레타, 이 깜찍한 것아. 네가 해낸 일을 보렴."

그녀는 허리를 굽혀 그 조그만 허리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러자 곁에 꼭 붙어 있던 에미가 털을 곤두세운다.

"걱정 말아. 사랑스러워서 그냥 만져 보는 것뿐이야. 너무 깜찍하지 않니?"

줄리아는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그 소동으로 이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나와 세바스찬이 그 잠깐 동안 공을 들인 대가로? 정말 꿈만 같다.

불현듯 세바스찬의 그 잔인한 제의가 떠올랐다. 생사의 기로에서 새끼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써놓고서는 그런 말을 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야.

"당신들은 그걸 없애고 싶을 테니... 제일 좋은 방법은 태어나자마자 없애는 거요, 당신들이나 그 에미가 정을 붙이기 전에."

그런 엄청난 말을 입에 담다니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자기 방어로, 아니면 단지 남자다운 기백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그의 말대로 정말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단 말인가?

줄리아는 새끼를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토했다. 핍은 보나마나 소스라치게 놀랄 거야. 하지만 그녀도 혹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손을 뻗어 그레타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새끼 염소는 젖을 빨려고 에미한테 주둥이를 들이댔다. 줄리아는 문득 이 모든 걸 자기 혼자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한 거라곤 위험한 순간에 이 근처에서 제일 유능한 수의사를 부른 것뿐인데도...

그녀는 울적한 심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정말 오늘 아침은 이상해. 평소의 나답지 않게 비관적이고 울적하네. 이럴 땐 그저 무슨 일인가에 몰두하는 게 최고지.

그녀는 더러워진 짚단을 새로 갈아 준 다음 신선한 먹이와 물을 갖다주고 그 평화로운 곳을 떠나 집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일을 시작했다.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불안할 때 줄리아는 항상 스튜디오로 달려가 일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후 느지막이 핍이 돌아왔을 때 줄리아의 염소 모형은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전원교항곡의 선율에 맞춰 연신 흥얼거리면서, 일에 몰두할 때면 늘 그러듯이 혀끝을 살짝 빼물고 있었다.

줄리아는 핍이 들어서는 걸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

"무척 바빠 보이는구나."

핍은 작업대 쪽으로 왔다.

", 근사한데?"

"그래, 드디어 염소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어."

"정말 즐거웠어."

달콤했던 기억을 떠올리느라 핍의 눈길이 아련해진다. 줄리아는 핍의 감정 상태에 대한 자신의 이중적인 반응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잘 다스렸다. 친구 입장에서는 반갑고 기쁜데 자신의 입장에서는 심란하고 마음에 안 내킨다. 하지만

"파티가 즐거웠다니 기쁘구나."

라고 말해 주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핍은 줄리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여긴 별 일 없었니? 작품이 잘 돼가는 걸 보니 정말 기쁘다만 네가 좀... 달라진 것 같아서 그래. 무슨 일 있었던 것 아냐?"

줄리아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떻게 너의 예리한 관찰력에서 벗어날 수 있겠니? 그래, . 무슨 일이 있었지. , 있었구말구. 그게 뭔지 한 번 알아맞혀 봐."

핍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빨리 말해 줘. 궁금해 죽겠단 말야."

줄리아가 그냥 웃기만 하자 핍은 더욱 안달이 났다.

"새로운 고객이 생겼니? 잃어버린 귀걸이라도 찾은 거야?"

줄리아는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모르겠어. 포기할 테야."

핍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줄리아가 이토록 생글거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줄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줄리아는 좀 더 시간을 끌면서 친구의 표정을 즐기다가 드디어 암시를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레타에게 가보았니? 그레타가 괜찮던?"

핍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한 손을 볼에 갖다 댔다.

"그렇다면 그 무슨 일이라는 게... 여기 들어서자마자 물어 보려고 했었는데 그때는 네가... 줄리아! 벌써 새끼를 낳은 건 아니겠지?"

"직접 가서 보려무나."

핍이 후다닥 뛰어나가자 줄리아도 따라나섰다. 하루종일 핍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예상대로였다. 처음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더니 서서히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줄리아!"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수놈이야. 새벽 1시쯤에 태어났지."

줄리아는 아주 쉬운 일이었던 것처럼 가볍게 얘기했다.

", 그레타! 정말 멋있는 새끼염소로구나!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니? 어젯밤에 네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레타는 네게 자기 곁으로 와 달라고 말해 주었을 거야. 어쨌든 너 없이도 우린 그러저럭 해낼 수 있었어. 거의 그럴 뻔했지."

씁쓸하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니?"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결국 수의사를 불렀어."

", 저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줘, 줄리아."

핍의 눈길이 자석에 이끌리듯 우리 쪽을 향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없는 밤을 택했을까? 그것도 일주일이나 앞당겨서...."

"그게 어디 그레타 맘대로 되는 거니? 나도 처음엔 네게 연락을 하려 했어. 염소의 분만과정에 대해서는 네가 나보다 더 많이 공부해 두었잖니. 그런데 모든 게 정상이 아닌 것 같았어. 그래서 그가 너한테 주고 간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핍은 궁금해 죽겠다는 듯 다그쳤다. 줄리아는 한밤중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말해 주었다. 세바스찬 얘기를 할 때 줄리아는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한편으론 그 남자의 활약상을 세세하게 말해 주고 싶었고, 또 한편으론 그 얘기는 대충하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자신의 심정만을 강조해서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핍은 그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너한테 어떻게 감사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얼마나 놀랐겠니? 파티장의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주고 갈 걸...."

"그랬더라도 별 소용이 없었을 거야. 넌 운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네 입으로 그랬었잖아. 그리고 감사해야 될 사람은 내가 아냐. 그 훌륭하신 트렌트 씨지. 염소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자쯤으로 보이더라. 여우에 대해서만 그런 줄 알았더니."

핍은 차분하면서도 짓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력의 손을 가졌다고 내가 전에 말했었잖아. 넌 그렇게 생각 안하니?"

<마력의 손>이라는 말에 야릇한 전율이 줄리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긴 손가락이 닿는 순간 느꼈던 그 뜨거운 열기...

"그래, 네 말이 맞아."

줄리아는 힘없이 그 말을 인정했다.

"그는 뛰어난 수의사야. 점검하러 곧 다시 온다고 그러더라."

그 순간 핍과 상의해야 할 일이 가슴 아프게 떠올랐다. 그 끔찍한 순간을 자꾸 뒤로 미룬다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그녀는 정색을 하고는 핍을 바라보았다.

", 세바스찬 트렌트가 어젯밤에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고 가더라. 염소새끼가 수컷이라면 어떻게 할 건지 한 번쯤 생각해 봤어?"

"어떻게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수컷이라면 안 될 일이라도 있니?"

줄리아는 마음이 놓였다. 이제 그 끔찍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이 사람들은 수컷을 좋아하지 않는대. 자라면 고약한 냄새가 나고 별로 쓸모가 없다나. 더구나 젖을 얻기 위한 거라면 수컷 새끼를 기를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

핍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줄리아는 말을 멈추고 희망에 찬 눈길로 친구의 대답을 기다렸다.

"걱정할 것 없어, 줄리아. 그레타를 처음 데려오던 날 내가 말해 주지 않았던가?"

"무슨 말?"

이번에는 줄리아가 안달이 났다. 생활에 바삐 쫓기다가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렸나 보다. 그럼 아무 일도 아닌 걸 갖고 그렇게 애를 태웠단 말인가?

"그레타를 내게 넘겨 준 사람이 새끼를 낳아 어느 정도 자라면 자기한테 꼭 팔라고 그랬어. 번식용으로 쓰려고 말야. 이 염소는 혈통이 좋은 순종이잖니."

"그랬었구나, 그런데 기억이 안 나. 그러니까 우린 그저 느긋하게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줄리아의 표정이 환해지며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맞아, 새끼와 우리가 먹을 젖은 충분할 거야. 그런데."

핍이 씩 웃었다.

"어떻게 젖을 빼올까 걱정이야. 하지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재미있겠는데."

,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젯밤 세바스찬의 그 불쾌한 제의에 대해 끝까지 버틴 건 얼마나 잘한 일인가? 내 생각이 맞았어. 그 자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건데, 그렇게 잔인하고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바로 그때 두 사람은 차가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핍이 줄리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가 오기로 했니?"

"아니, ?"

핍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그가 곧 다시 온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리는 없고... 더군다나 일요일에."

줄리아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까 조수를 보냈을 거야."

핍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맨날 나서서 해 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둘 다 틀렸다. 그건 트렌트의 자동차였다. 그가 곧바로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9월의 햇살 아래 찬란한 구릿빛을 발하면서...

"레나르 선생이야."

핍이 줄리아에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줄리아가 미처 대꾸도 하기 전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에 어리벙벙해져 있었다. 더 이상 나를 혼란하게 하지 말아요. 그 훌륭한 솜씨는 어디 다른 곳에 가서나 발휘하시라구요!

"박스터 양!"

그가 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어젯밤의 태도와는 달리 오늘은 아주 매력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돌아오셨군요. 제 환자는 지금 좀 어떻소?"

많이 해본 솜씨야, 줄리아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그의 미소에 새침한 표정으로 답례하고는 꼿꼿이 서 있었다. 핍은 줄리아와는 달리 여유 있고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트렌트 씨, 일요일에 이렇게 와주시다니 정말 친절하시군요.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고요."

핍은 염소를 가리켰다.

"당신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

그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자기 일을 한 것뿐이지, 줄리아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의 부드럽고 상냥한 태도가 왠지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유능한 조수가 있었기 때문이오."

그는 줄리아를 보며 싱긋 웃었지만 줄리아는 본 체 만 체했다.

"그레타가 걱정이 돼서 그냥 들렀소."

그는 다시 핍에게로 돌아섰다. 아마도 줄리아의 적대감을 눈치 챈 모양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괜찮겠소?"

"괜찮냐구요? 그럼요, 오히려 감사한 걸요."

줄리아는 핍이 그렇게까지 고마워하는 게 못마땅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세바스찬이 그들 사이를 지나 가볍게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 아주 좋군."

그는 무릎을 꿇고 새끼염소를 들여다보더니 1초도 안 지나서 대번에 말했다. 그저 머리에서 꼬리까지 능숙한 손으로 한 번 훑어 내리기만 했다.

"모든 게 정상이고 아주 좋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엔 그레타에게 눈길을 돌렸다.

"넌 어떠니, 이쁜아?"

그의 목소리가 어젯밤처럼 친근감을 띠었다. 자신의 생계수단인 동물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겉으로는 그토록 거칠고 현실적이지만 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줄리아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반갑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 왔다. 그 손길을 바라보면서,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줄리아는 그 자리를 벗어나고픈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창작욕구가 솟아오르면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그 작업 속에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적어도 감정발산이라는 부산물을 얻을 수는 있으니까. 너무 늦기 전에 가야 한다.

너무 늦기 전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아냐, 그게 아냐. 그저 세바스찬이 그레타의 건강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나는 지금껏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핍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미안하지만."

두 사람의 어두운 눈길이 동시에 그녀를 주시했다. 하지만 내친 김에 줄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난 스튜디오로 돌아가 봐야겠어. . 이제 너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겠지? 동물 모델의 영상이 지금 한창 꽃을 피우고 있거든."

난 혼자 있고 싶어, 친구가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며 속으로 외쳤다. 제발 방해하지 말아 줘.

"물론이지, 줄리아."

핍은 줄리아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알아차렸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넌 지금 한창 작업 중이었잖아. 다시 돌아가서 하던 일은 마저 하렴."

"그럼 나중에 보자."

줄리아는 돌아섰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한 마디도 안하고 떠나기는 미안하여 다시 돌아섰다.

"아참, 어제 저녁에 와주셔서 고마왔어요, 트렌트 씨."

짐짓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어제 고맙다는 말씀을 못 드려서요.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했을 거예요."

<당신의 도움>이라고 말할 뻔했지만 그 말을 입밖에 내고 싶진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레타의 옆구리를 쓰다듬으면서 알 수 없는 눈길로 줄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별 말씀을, 줄리아."

힘 하나 안 들이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뒤로 주춤 물러서는 줄리아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홱 돌아서서 은신처인 스튜디오로 총총히 걸어가서는 문을 힘껏 닫았다. 허전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녀는 카세트 테이프를 뒤적거려 가장 좋아하는 곡을 찾았다-마일스 데이비스가 연주한 <포기와 베스>. 그 테이프를 틀어 놓고는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은 다음 심호흡을 했다. 서정적인 선율에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천천히 작업대로 가서 만들다 만 염소 모형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나자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음악과 진흙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핍이 들어오는 건가? 줄리아는 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스튜디오는 마당 반대쪽에 있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있었으니 못 들었을지도 몰라. 마음을 굳게 다잡아먹고 그녀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핍이 들어섰을 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세바스찬 트렌트가 문설주에 기대서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코너에 몰린 기분으로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며 작품에만 매달렸다.

"다 괜찮대."

핍이 쾌활하게 말하면서 겸연쩍은 듯 어깨를 추스렸다.

"그레타는 앞으로 두세 번만 더 검진을 받으면 되고 새끼는 아주 건강하대."

"잘됐구나."

줄리아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신경은 온통 문설주에 기대서 있는 트렌트에게 가 있었다.

"트렌트 씨는 곧 떠나실 거야. 그런데 개인적으로 네게 할 말이 있으시대."

핍이 줄리아 쪽으로 걸어오면서 거의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세바스찬 트렌트는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해서 말하도록 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서서히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줄리아의 푸른 눈과 마주쳤을 때 그의 눈에는 다소 분노의 기미가 서려 있었다.

"내가 마무리짓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으니 잠깐 시간 좀 내주지 않겠소? 어젯밤에 우리가 얘기했던 것에 관해서 말이오."

"알겠어요."

줄리아는 내심 긴장했다.

"당신이 하실 말씀이 있다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살풋 미소까지 지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핍은 줄리인를 흘끔 쳐다보더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한테 맡겨도 되겠지, 줄리아. 난 이제 가서 좀 쉬고 싶어. 난 지금 약간...."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눈빛은 충혈되고 얼굴색은 창백하다. 줄리아는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아주 지쳐 보이는구나, . 가서 푹 쉬렴. 먼저 차나 한 잔 하지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문득 동정심이 사라지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푹 쉬어. 내가 나중에 갈게."

"고마워."

핍은 문 쪽으로 가다가 세바스찬에게 돌아섰다.

"여러 모로 고마왔어요, 트렌트 씨."

그녀는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만에요, 미스 박스터. 검진을 하러 다시 오겠지만 그 동안에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주저 마시고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핍은 줄리아에게 괜찮겠느냐는 듯 눈짓을 한 번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때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로 줄리아가 즐겨 부르는 <서머타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율이 어찌나 감미로운지 줄리아는 홀린 듯 그 곡에 빠져들어 갔다. 세바스찬이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랐다.

"훌륭한 곡이죠?"

그는 방 한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시선을 줄리아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훌륭한 예술가요, 데이비스 말이오."

줄리아는 조심스레 작품에서 손을 뗀 다음 수건에 손을 닦았다.

"정말 그래요. 전 이 곡을 굉장히 좋아해요. 언제 들어도 좋은 것 같아요. 데이비스의 연주방식도 맘에 들구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소 놀랐다.

"재즈라면 뭐든 다 좋아하오? 아니면 이 곡만?"

그는 맞은편 작업대에 기대서더니 그녀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는 늘 재즈가 좋았어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오빠가 처음으로 그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그때부터 재즈에 푹 빠져들게 됐죠."

"전부 다? 아니면 고전? 현대곡? 주류를 이루는 음악만?"

그는 이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적극적인 기세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동작이 마치 굽이치는 물결처럼 그녀에게 다가섰다.

"대부분 다죠. 너무 현대적이거나 너무 고전적인 것만 빼구요."

줄리아는 그녀가 열광하는 밴드와 연주가 몇 사람의 이름을 읊조렸다.

"다방면에 걸쳐 다 좋아하는군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의식하며 줄리아는 주위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만있기가 어색했던 것이다.

", 당신은 어때요?"

"좋아하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재즈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조차 없지."

서로 공통의 취미를 가졌다는 것에 줄리아는 흥미를 느꼈다. 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그 기세등등하던 여우 사나이 트렌트가, 사냥꾼들의 수의사 노릇도 마다 않던 그 사람이 이번엔 재즈 열광자라니... 이건 전혀 뜻밖이었다.

그녀는 문득 새삼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푸른 눈빛이 부드러워지면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거슈윈의 이 작품도 무척 좋아하오. 아프리카에 있을 때."

그의 표정이 문득 굳어졌다.

"포기와 베스라는 개 두 마리를 키웠었소. 정말 영리한 놈들이었지. 내가 이 곳으로 돌아올 때 그들을 두고 오자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줄리아는 그가 가슴속 깊이 간직된 이런 사적인 얘기를 꺼내자 문득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던 손길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섰다. 줄리아는 그가 그 개들을 떼어놓고 오느라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지 이해가 갔다. 점점 호기심이 동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2년 정도 됐소. 그 무렵 난 고국에 돌아오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정착하려구요?"

"꼭 그런 건 아니었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지. 아니, 세 가지라고 해야겠군. 첫째는 어머니가 최근에 아버지와 사별하시고 마음이 무척 약해지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내가 돌봐 드려야 했소. 내가 돌아온 뒤 얼마 안 있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적어도 곁에 있어 주긴 한 셈이지."

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얘기했다. 줄리아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그녀에게 있어 가족은 참으로 소중했다. 비록 자주 가보진 못해도 그들이 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했다.

"안됐군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닌 몸이 약하셨지. 예상했던 일이었소."

그는 또다시 냉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 이유는 해외에서 내가 하고 있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이오. 세 번째는 이곳 대학 연구부에서 내 전공분야와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지. 또 내 병원을 세우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요."

늦기 전이라고? 줄리아는 재미있다는 듯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이가 얼마나 됐을까? 35살쯤? 5년만 더 지나면 최전성기를 맞겠군.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야-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진 사람.

"그래요,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선 안 되죠. 능력이 있을 때 몽땅 발휘하셔야죠."

그녀의 비꼬는 듯한 눈길에 그는 피식 웃기만 했다.

"그런데 짐바브웨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소떼를 양육해서 유전학을 연구했었소. 그곳 환경-기후, 풍토, 뭐 그런 것들에 대한 적응 여부를 말이오. 다소 복잡한 일이었지."

그는 그녀가 그 방면에 대해 통 모르니까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그녀는 나름대로 친근감 있게 대해 주려고 했는데... 잠시 망설이다 줄리아는 헛기침을 했다.

"핍의 말로는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던데요? 다른 곳에 또 왕진을 가셔야 한다면 더 이상 붙들고 싶지 않군요."

"너무 오래 있다고 구박하는 거요?"

그가 껄껄 웃는 바람에 그녀는 또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왕진은 없소. 오늘은 비번이오. 그저 어제 상태가 위험했던 터라 점검하러 온 것뿐이오."

"그러시다면 차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그녀는 은근슬쩍 떠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친근감 있게 나오려는 그의 기세를 꺾을 수 있겠지? 그의 입장에선 호의를 베푸는 모든 고객을 다 상대해 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상대가 특히 매력적인 결혼적령기의 여성일 경우 사적인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그걸 받아들이기는 무척 곤란할 거야.

"."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니, 생각 없소. 오늘 저녁에 실컷 먹고 마시기로 되어 있어서."

그는 시계를 흘끔 들여다보았다.

"실은 곧 돌아가 봐야 하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생각에 잠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자 문득 보이지 않는 장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요, 줄리아. 어젯밤에 그런 얘기를 불쑥 꺼내서 정말 미안하오. 그 염소새끼를 죽이자고 한 것 말이오. 당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고 있소."

"당황이라구요?"

줄리아는 예기치 않던 그의 사과 때문인지 아니면 그 사실이 다시 떠올라서인지 넋 나간 표정이 되었다.

"그래요, 당황했다고 할 수 있겠죠."

"당신의 심정을 이해하오."

그는 이제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좋은 의미로 그런 제안을 했던 거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당신이 아무래도 오해한 것 같아서 다시 얘기를 하는 거요."

줄리아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줄리아는 그의 그런 연기력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었다.

"솔직히 어떤 의미에선 당신을 시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소."

그는 인정은 했지만 뉘우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현실주의자요. 다른 사람들도 그러길 바라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오, 줄리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생각하구말구도 없어요. 저는 당신을 잘 모르니까요."

"그렇겠지."

그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다시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박스터 양이 내게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게 됐으니 천만다행이오."

줄리아는 계속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의 갑작스런 태도변화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 그래요. 모든 게 잘됐어요."

그녀는 마지못해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다행히 아무런 탈 없이 해결할 수 있게 됐죠. 당신이 우리들의 일에 쓸데없이 지나친 관심을 보이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냉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것 같군."

그는 갑자기 문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 가봐야겠소.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게 전부요."

그쪽으로 가다가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선반 위에 놓인 그녀의 추상작품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당신 거요?"

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걸 조심스럽게 돌려 가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줄리아는 트렌트 뒤에 가서 섰다. 눈길을 그의 손놀림과 자신의 작품에 고정시킨 채로... 그가 마치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냉정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 제가 만든 거예요."

굳은 목소리였다.

"핍은 커피잔 세트를 만들죠."

"현명하군. 아주 잘 팔리겠어."

그는 계속 그녀의 도자기를 주시했다.

"색상이 정말 아름답소. 당신 정말 뛰어난 예술가군, 줄리아."

"고마워요."

그녀는 또다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꽤 잘 팔리죠. 빵에 버터를 발라먹고 살 정도는 돼요."

"계란과 함께 말이오?"

세바스찬이 그녀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줄리아는 기분이 상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죠?"

"로드아일런드 레드 종 닭들이 마당에 있더군. 아침 식사로 그 예쁜 달걀을 드시오?"

", 그러면 안 되나요? 슈퍼마켓보다 싸게 먹히고 달걀도 아주 신선하니까요.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트렌트 씨? 저는 점잖은 척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닭들이 계속 알을 낳는 한 그걸 먹을 거라구요."

세바스찬은 그 도자기를 다시 살짝 선반에 올려놓은 다음 줄리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줄리아, 난 그저 농담을 한 마디 한 것뿐이오.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나올 것까진 없잖소? 닭들을 키운다고 당신을 놀린 게 아니오. 집집마다 으레 그런 걸 키우지 않소?"

화를 눌러 참으면서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당신 차에 넣어서 드시게 그 예쁜 달걀을 몇 개 드릴까요?"

그는 눈썹을 움찔했다.

"고맙긴 하지만 사양하겠소. 고객으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고 있소.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지."

"트렌트 씨!"

그녀의 푸른 눈이 이글거렸다.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또 사과해야겠군."

하지만 그는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깊고 풍부한 눈길로 미소지으며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세바스찬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순 없겠소?"

그가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강인한 의지력인가?

"그건...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따스한 숨결이 피부에 닿을 듯하다. 그의 체취에 숨이 막힐 것 같다-남자 냄새, 비누 냄새, 그리고 약 냄새...

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전혀, 하지만 이건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몸을 숙여 입술을 포개 왔을 때 그 감촉은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했다. 부드러운 미풍처럼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자 그녀의 내부에 지금껏 감추어져 있던 어떤 욕구가 강하게 솟아오름을 느꼈다. 자신을 내던지고 그 새로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은 보다 진한 입맞춤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미소를 띄운 채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그녀의 양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여전히 그 손을 꼬옥 붙잡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럼 한 번 불러 보구료."

그의 목소리는 열에 들떠 있었다.

"뭘 말인가요?"

그녀는 아직도 촉촉이 젖어 있는 입술 사이로 간신히 그 말을 내뱉었다.

"내 이름말이오. 들어보고 싶소."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기쁨과 충만감으로...

"세바스찬...."

"듣기 좋군."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좋아."

"세바스찬."

그녀는 다시 불렀다. 그 느낌이, 그 소리가 좋았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부턴 그렇게 불러요. 알겠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의 재킷 안쪽에서 날카롭게 울려대는 부자 소리에 둘 사이에 감돌던 은근한 분위기가 깨져 버렸다.

"젠장!"

그가 안쪽 주머니에 손을 갖다 대자 그 소리가 멈췄다.

"내 교신장치요."

줄리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더니 그가 말해 주었다.

"조수한테서 오는 신호지. 편리한 현대적 문명이기는 한데 이것을 갖고 다니는 한 호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지."

세바스찬은 순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줄리아는 누군가 제 3자에게 좀전의 은밀한 장면을 들킨 것 같아 적이 당황했다.

"전화를 좀 써도 되겠소?"

그는 이제 다시 쾌활해졌다.

"긴급한 일일지도 모르니까 확인해 보는 게 좋겠소."

"물론이죠."

그녀는 그를 홀로 안내했다.

"맘껏 쓰세요."

그는 곧장 번호를 돌렸다.

"제발 왕진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곁에 무력한 느낌으로 서 있는 줄리아에게 말했다.

"여보세요? 데보라? 어쩐 일이오? 무슨 일이 생겼소?"

줄리아는 일부러 주방 쪽으로 물러섰다. 그가 미스 캐닝턴과 대화하는 걸 엿듣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열린 문으로 그가 하는 말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려왔다.

"왕진은 없다고?"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아주 다정했다.

"천만다행이군. 그런데 왜...?"

그의 웃음소리에 줄리아는 바짝 긴장했다.

", 그랬지. 나도 알아.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뭐야. ...아니, 물론 안 먹었지. 15분 뒤에 갈게. 따뜻하게 데워 놓구료."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저녁식사에 늦었다고 성화로군."

줄리아가 주방에서 나오자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줄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입술선을 따라 그려 나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어깨 위에 잠시 그 마력의 손을 얹었다. 그건 간단한 작별인사였고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걸 줄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없는 결론에 동의라도 하듯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이 새로운 방식의 언어로 인해 기존의 언어는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는 이제 돌아서서 나를 떠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에게로 달려갈 텐데...

"다시 오겠소."

그는 몸을 돌려 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안녕, 줄리아."

"잘 가요, 세바스찬."

하지만 그는 집으로 달려가는 게 최우선이라는 듯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물론 그렇겠지. 입술과 이마에 아직도 그의 감촉을 느끼면서 줄리아는 캐닝턴이 그를 위해 따뜻한 저녁을 준비한 그곳으로 달려가는 그의 자동차 소리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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