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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 2

Bollnow 2024. 3. 10. 14:51

 제3부 성공하지 못한 보좌 신부

 

1

1월 어느 토요일 저녁때 프랜치스가 타인카슬에서 40마일이나 되는 셀즈리 역에 닿았을 때는 운 나쁘게도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러나 그 비마저도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정열을 식히지는 못하였다. 타고 온 기차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에도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지붕도 없는 플랫폼에 서서 황량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중 나온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낙담한 빛도 없이 가방을 들고 탄광촌의 한길로 나아갔다. 구세주 성당을 못 찾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좌 신부가 된 후 여기가 첫 임지인 것이다. 프랜치스는 아직도 뭐가 뭔지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드디어 임명되어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싸움터에 나갈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곳의 이야기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걸으면서 보는 현재 이 비참하고 지저분한 전경은 상상보다 훨씬 더 심했다. 셀즈리 거리는 음울한 회색 지붕과 허술한 점포들의 길다란 행렬이라 할 수 있었고, 그 사이 사이의 공터에서는 산더미 같은 석탄 찌꺼기가 빗속에서도 연기를 품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빛 지붕 위에 렌쇼 탄광의 새카만 굴뚝이 여러 개 솟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신의 흥미는 거리의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있다고 생각하며 밝은 기분으로 자기 자신에게 일러주었다.

가톨릭교회는 마을 동쪽 끝에 있는 탄광 회사에 인접해 있어 주위의 풍물과 잘 조화되고 있었다. 빨간 벽돌로 된 커다란 건물이며 유리창에는 고딕풍의 파란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져 있고, 검붉은 양철 지붕엔 꼭대기를 잘라 버린 것 같은 녹슨 탑이 서 있었다.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 옆으로 사제관이 보였는데, 그 앞도 잡초가 우거진 뜰이고, 그 주위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으나 이것도 이가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부서져 있었다.

태연하려 한 마음이 긴장감으로 위축되는 것을 애써 참으며 프랜치스는 그 쓰러질 것 같은 집으로 가까이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있다가 다시 누르려고 하자, 파란 줄무늬 앞치마를 두른 건장한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신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입니다."

그녀는 순직하고 말수가 적고 호인과 같은 얼굴로 응접실 문을 가리켰다.

"정말 무슨 날씨가 이런지 모르겠어요. 나는 가서 연어 구이를 준비해야지."

프랜치스는 그녀가 가리킨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하얀 식탁보가 덮인 식탁 위에 벌써 저녁 식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식탁 앞에 오십 살쯤 돼 보이는 땅딸막한 신부가 앉아 있었다. 식사를 기다리기에 지쳤다는 듯이 나이프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던 손을 멈추고 새 보좌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오셨군. , 어서 와요."

프랜치스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키저 신부님이시죠?"

"그래요. 나를 윌리엄 3세인 줄 알았나. , 마침 저녁 식사에 맞춰 왔군. 맛있을 거야."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옆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캬퍄티, 어찌된 거요. 밤새워야 하는 건가?" 그리고 프랜치스를 향하여, "앉으라고. 그렇게 미아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지만 말고. 트럼프는 할 줄 알겠지. 나는 밤이 되면 그것을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프랜치스가 식탁에 앉자 이윽고 미스 캬파티가 훈제 연어와 달걀구이 접시를 가지고 황급히 들어왔다. 키저 신부가 달걀 두 개에 연어 두 토막을 자기 접시에 놓자, 그녀는 프랜치스 앞으로 접시를 옮겨 주었다. 키저 신부는 입안에 가득히 넣고 먹으면서 큰 접시를 프랜치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 많이 들게. 사양할 것 없어요. 여기선 힘껏 일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는 까만 털투성이 손과 턱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허둥지둥 먹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야무진 입매, 코는 넓적하고 큰 콧구멍에는 코담배로 물들은 진한 털이 들여다보였다. 전체적으로 정력적이고 위신 있게 보이며 자신이 넘쳐 보였다. 달걀을 반으로 나누어 하나를 입에 넣고, 그는 백정이 소 흥정을 하는 것처럼 작은 눈으로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프랜치스를 살폈다.

"자넨 그다지 건강한 것 같지 않군. 70킬로도 되지 않지? 요즘은 보좌 신부도 많이 달라졌어. 자네 전임자도 말라깽이였고 전혀 패기가 없었어. 대륙적인 체하고 놈이 다 망쳐 놓았지.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그래 메이노스(성 페트릭 신학교의 소재지) 출신들은 모두 사나이다웠는데......"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몸은 건강하니까요" 하고 프랜치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곧 알게 되겠지" 하고 키저 신부는 중얼거렸다.

"식사가 끝나면 가서 신자들의 고해를 받아 주지 않겠나? 나는 나중에 가겠네. 이렇게 비가 오면......오늘밤에는 많이 오지는 않을 거야. 그들에겐 좋은 구실이겠지. 모두 근본적으로 게으름뱅이들이니까......여기 놈들은."

프랜치스에게 주어진 이층의 방에는 튼튼한 침대와 커다란 옷장이 있었다. 그는 그 방의 더러운 세면대에서 손과 얼굴을 씻고 서둘러 교회로 내려갔다. 키저 신부의 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본 인상은 흔히 잘못 보기 쉬운 것이라고 프랜치스는 자신을 타이르며 오랫동안 추운 고해실에서-아직도 전임자인 리 신부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 후 거기를 나와 텅빈 교회 안을 돌아다녔다.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창고처럼 텅 비었고 더구나 청결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안쪽을 대리석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진한 녹색 페인트를 칠했던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한쪽 팔이 떨어진 성 요셉 상은 매우 서툴게 수선되어 있고, '십자가의 길'을 표시한 성화는 물감을 더덕더덕 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재단 위의 녹슨 놋쇠 꽃병에는 야한 조화가 꽂혀 있어 보기만 해도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잘한 결점들은 그만큼 그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셈이 된다. 프랜치스는 감실(성체를 안치해 놓은 곳) 앞에 꿇어앉아 진심으로 자기의 생애를 하느님에게 바칠 것을 기도 드렸다.

그러나 런던, 마드리드, 로마간을 왕복하는 고귀한 신분의 성직자라든가 학자나 선교사 등의 숙사로 되어 있는 산 모랄레스의 문화적인 분위기에 익숙한 프랜치스에게는 처음 4, 5일 동안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더해 갈 뿐이었다. 키저 신부는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가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인데다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신자들의 경애를 얻지 못한 원한에서 마치 철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도 한때는 이스트크리프 해변 피서지에서 훌륭한 본당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를 좋게 안 본 유지들에 주교에게 탄원하여 전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는 몹시 분개했으나 그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생적 행위였다고 생각하게 되어 체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내 왕좌를 스스로 버리고 낮은 의자에 앉은 거야......그러나......어쨌든 그 무렵은 좋았어."

가정부인 미스 캬파티만이 그의 편이었다. 그녀는 벌써 여러 해 그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성격이나 기질이 비슷해서 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큰 소리로 꾸지람을 듣고 무표정으로 응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소중히 하고 있었다. 신부가 매년 6주간의 휴가로 하로 게이트에 여행할 때는 그녀도 휴가를 얻어 자기의 집에 돌아가는 혜택을 받고 있었다.

키저 신부의 태도나 동작에는 조금도 세련된 데가 없었다. 침실 바닥을 요란하게 탕탕 구르기도 하고 목욕탕 문을 열어 놓은 채 물소리를 심하게 냈기 때문에 성냥통 같은 집은 그럴 때마다 메아리치듯이 울렸다.

키저는 무의식중에 자기의 종교를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적인 의미라든가 정신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완고한 자기 고집이었다. '이것을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이것이 그의 마음에 새겨진 말이었다. 성당에는 말과 물, 혹은 기름과 소금을 사용해서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을 게을리 하면 지옥이 타오르는 불꽃의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편견이 심해서 다른 교회는 무조건 매도하는 바람에 그는 친구가 없었고 언제나 외로웠다.

자기 교회에 오는 신자들까지도 그를 바로 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교구가 가난한데다가 교회에는 적지 않은 빚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절약을 해도 수지 균형을 잘 맞출 수가 없는 때가 있었다. 이것은 마땅히 신자들이 협력해야 할 것이지만 그는 붙임성 없이 행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고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나 화를 버럭버럭 낼뿐이고, 설교를 할 때에도 거만하게 버티고 서서 도전적으로 신자들에게 성의가 부족하다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집세와 세금과 보험료를 지불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금 당신들은 이 교회를 어떻게 해서 존속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바치라 이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잘 들어주기 바라오. 나는 헌금 상자에 은화가 넣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거지 너절한 동전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오. 당신들 남자는 거의 조지 렌쇼 경의 덕택으로 일하고 있소. 그러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겁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입는 것에 돈을 적게 들이고 헌금을 하라고 하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소."

그는 이런 식으로 부르짖고선 직접 헌금 상자를 들고 책망하는 눈으로 노려보면서 그것을 신자들 코앞에다 들이대는 것이었다.

그러한 강압적인 요구가 그와 신자들과의 사이에 반목을 불러일으켜 헌금의 액수는 점점 줄어들 뿐이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그는 꾀를 내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갈색 봉투를 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신자들이 돌아가고 나면 봉투를 거둬들였다. 혹시 봉투에 돈이 들어 있지 않으면 몹시 화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느님을 대하는 놈들의 태도란 말인가."

이러한 재정상의 음산한 구름이 뒤덮여 있었지만 하나의 빛나는 태양은 있었다. 셀즈리 탄광만이 아니라 주 내에 열다섯 개나 되는 탄광을 가지고 있는 조지 렌쇼 경은 큰 부자이고 가톨릭 신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름난 자선가이기도 했다. 그의 저택은 70마일이나 떨어진, 셀즈리와는 반대쪽에 있었으나 어찌된 까닭인지 구세주 교회는 그 기부 명부에 실려 있었으므로 크리스마스에는 빼놓지 않고 1백 기니의 수표가 교회에 전달되는 것이었다.

"1백 기니다! 이봐." 키저 신부는 기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쩨쩨한 파운드 따위가 아닐세. 이게 진짜 신자라고 하는 거야."

그는 조지 경을 수년 전 타인카슬의 신도 대회 때에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이야기할 때에도 존경과 외경을 잊지 않았었다. 더구나 이유도 없는데도 기부가 끊기지나 않을까 하여 늘 걱정하고 있었다.

셀즈리에서 한 달이 지날 무렵 프랜치스는 키저 신부와 얼굴을 맞대는 것부터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매사에 안달복달하며 짜증만 부리고 있었다. 전임자인 젊은 리 신부가 심한 신경쇠약에 걸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신생활이 둔화될 뿐이었고, 사물의 가치판단을 확실하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키저 신부에 대한 불같은 적대감이 끓어올랐다. 그럴 때면 그는 정신을 번쩍 차려 남모르게 신음하면서 순종과 겸손을 생각하곤 했다.

성당의 일은 특히 겨울철에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미사를 올리거나 고해를 듣거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이나 먼 브라우톤과 그렌반의 빈한한 두 한촌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말을 지껄여도 도저히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만큼 일하기가 까다롭고 곤란함만 더할 뿐이었다. 어린애들까지도 무기력하고 게을렀다. 가난뱅이가 대부분이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교구 전체가 무신경하고 열의도 신앙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절대로 이 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겠다고 마음에 맹세를 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자기는 결국 패배자인 것이다. 자기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가난한 마음에 구원의 손을 뻗쳐 어떻게 해서든지 갱생을 도모하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이 타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마음에 불꽃은 점화하여 죽은 재가 타오르게 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활하고 조심성 많은 키저 신부가 프랜치스가 맞닥뜨린 곤경을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그는 프랜치스의 이상주의가 자기의 실제적인 상식에 항복하는 것을 은밀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프랜치스가 심한 눈보라 속을 10마일이나 자전거를 타고 브라우톤까지 병자의 위문을 갔다가 흠뻑 젖어 돌아오니 키저 신부는 모멸에 찬 시선에 웃음을 띠우면서 그를 조롱했다.

"어떤가, 공덕을 베푼다는 것이 생각한 대로는 되지 않지, 안 그래?" 그리고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모두 변변치 못한 것들뿐이야."

프랜치스는 순간 발끈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리스도는 그 변변치 못한 것들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프랜치스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버려 그 이후로 고행을 스스로 단행했다. 식사량을 줄이고 홍차 한 잔에 토스트를 먹는 것으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한밤중에 눈이 떠질 때에는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발소리를 죽여 가면서 성당으로 향할 때가 많았다. 어두컴컴하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성당 안은 파란 달빛에 씻기어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몸을 내던지듯이 무릎을 꿇고 이 최초의 시련을 이겨낼 용기를 주십사 하고 간곡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면 온화하고 괴로움을 참고 있는 그리스도의 상처 입은 십자가상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평화가 자기의 몸에 충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날도 잠을 이룰 수 없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당에 갔다가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든 중 멈칫 놀라고 말았다. 계단 위에서 키저 신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친 그는 괴상한 모습으로 손에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털이 덥수룩한 맨발로 버티고 서서 노한 얼굴로 프랜치스를 흘겨보았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참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데?"

"기도실에요."

"뭐라고! 이 한밤중에......"

"왜 잘못입니까?"

프랜치스는 억지로 웃으려고 했다.

"하느님을 깨울 작정이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잠을 깬 것은 저입니다."

키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일부터 당장 그만두게. 이렇게 어리석긴. 이곳을 수도원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해. 기도하고 싶으면 낮에 하면 될 것 아닌가? 자네가 나와 함께 있는 한밤엔 잠을 자란 말일세."

프랜치스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을 꾹 참았다. 그리고 잠자코 침실로 돌아갔다. 이 교구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자신을 억제하고 윗사람과 타협을 잘 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키저 신부의 정직하고 배짱이 있는 것, 엉뚱하고, 소탈하고, 정직한 것 등 그의 장점에만 주의를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던 며칠 후, 적당한 시기를 잡아 프랜치스는 사교적 수완을 발휘할 양으로 신부에게 접근했다.

"신부님, 벌써 생각한 것입니다만......여기는 벽촌이고 어디를 가나 보잘것없고, 그렇다고 적당한 오락장도 없으니까......한번 교구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클럽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 하하" 하고 키저 신부는 매우 만족한 듯이 웃어댔다. "과연 그렇군. 대중의 인기를 얻자는 거로군."

"아니, 천만 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승낙을 받으려고 프랜치스는 진지한 마음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럴 생각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클럽이 있으면 젊은이들은 거리를 방황하지 않을 것이고 나이든 사람도 술집 같은 데에 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계몽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성당에도 나올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호오-"키저 신부는 비웃음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자넨 아직 멀었어. 리 군보다 더 심한 것 같군. 하고 싶은 것은 해도 좋지만 말이야......여기 변변치 못한 것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다간 계산 착오야."

"감사합니다. 저는 다만 허가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프랜치스는 설레이는 가슴으로 계획을 당장에 실행했다.

스코틀랜드인이며 확고한 가톨릭 신자인 렌쇼 탄광 감독인 도날드 카일이 당장에 찬성하고 호의를 나타내 주었다. 그 외에도 현장 직원이며 아내가 가금 사제관의 일을 도와주는 검사계의 모리슨, 또 폭약계 주임인 크리덴의 구급실을 주 3, 밤에만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다. 그리고 현장의 두 사람의 도움으로 계획 중인 클럽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로 했다.

교구 사람들의 도움은 청하지 않았다. 자기 주머니를 몽땅 털었으나 2파운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 탈록에게 편지를 띄워-윌리는 일 관계로 타인카슬의 시립 스포츠 센터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거기에서 필요 없는 헌 운동기구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첫 출발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젊은이들에게는 댄스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댄스 파티를 열기로 했다. 마침 탄광 구급실에는 피아노도 있었고 크리덴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클럽 문에 붉은 포스터를 붙여서 날짜와 시간을 알리고, 목요일이 되자 전 재산을 털어서 케이크와 과실, 레모네드 등으로 뷔페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한 기분이었으나 그날 밤은 예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카드릴(4인조의 춤)을 출 수 있는 팀이 여덟 팀이나 모인 것이다. 청년들은 모두 구두가 없어 갱내에서 일할 때 신던 장화를 신고 춤을 추었다. 댄스의 막간에는 기쁨에 들뜬 얼굴로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여자들은 파트너에게 케이크나 레모네드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왈츠를 추면서 다같이 합창을 하기도 했다. 탄광에서 교대 시간이 되어 돌아온 광부들도 입구에 서서 가스등 불빛으로 숯검정투성이의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들여다보았다. 나중엔 그들도 함께 합창을 하는 등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참으로 즐거운 밤이었다.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고 "안녕!"하고 소리치며 헤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프랜치스는 충만한 만족감에 뛰는 가슴을 누르며 생각했다. '이제야 모두들 살아난 것 같다. 하느님, 하여간 출발은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튿날 아침, 키저 신부가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서 식당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찌된 건가. 대소동이 아닌가 말이야. 훌륭한 착상이군 그래. 자넨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가?"

프랜치스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듣지 않아도 알 게 아닌가. 엊저녁의 미치광이 놀음 말이야."

"허락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일주일 전에 말입니다."

키저 신부는 느닷없이 큰 소리를 쳤다.

"남자와 여자가 한 패가 되어 놀아난 소동을 성당 문 앞에서 하라고 허락한 기억은 없어. 문란하게 껴안고 히히덕거리는 짓은 자네가 거들지 않아도 돼. 난 젊은 여자의 순결을 지켜 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단 말이야."

"엊저녁의 모임은 의심할 여지없이 순수한 모임입니다."

"순수하다고!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군." 키저 신부는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모르겠단 말인가. 자네는-그렇게 껴안거나 손을 잡거나 몸뚱이나 다리가 달라붙거나 하는 것이 결국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바보 천치야. 젊은 놈들이 나쁜 생각을 갖게 하는 첫째 이유가 된단 말이야. 욕정으로 인도하는 도화선이라고."

프랜치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의분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신부님은 욕정과 순수한 이성 교제를 혼동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요?"

"뭐라고!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마치 병과 건강만큼이나 다릅니다."

키저 신부의 두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도대체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프랜치스도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이곳에 와서 두 달 동안 쌓이고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이다.

"누구도 자연의 힘은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낼뿐이고 자신을 망치고 맙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함께 댄스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훌륭한 것입니다. 구애와 결혼의 자연스러운 서곡입니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썩어 가는 시체처럼 더러운 시트 밑에 감추어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추어 두는 데서 괴이한 악과 문란한 행위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 교육하여 성이라고 하는 것을 좀 더 공명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독사나 되는 것처럼 목을 졸라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오직 실패할 뿐입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더욱 추하게 할뿐입니다.

무겁고 두려운 침묵이 계속 흘렀다. 키저 신부의 목에 있는 혈관이 파랗게 부풀어 올랐다.

"벌받을 말은 그만 지껄이게. 풋내기 주제에. 젊은 남녀를 한 조로 만들기만 하면 이젠 절대로 그 댄스홀에 출입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럼 젊은 남녀를 한 조씩-이건 신부님의 말씀입니다만-어두운 골목길이나 후미진 밭으로 내쫓겠다는 말씀이군요."

"입 다물게. 나는 이 교구의 처녀들을 문란하게 놀아나게 하지는 않고 있어. 잔말 말게. 내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프랜치스는 비꼬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면 어째서 통계에 나타난 셀즈리의 사생아 수가 이 관구에서 최고입니까? 오직 순결만을 가르친 신부님의 그 신조 덕분 인가요?"

잠시 동안 키저 신부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 같았다. 손을 꼭 쥐거나 또 펴거나 하여 누군가의 목이라도 조르고 있는 것 같은 동작을 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흔들어댔다.

"통계라면 나도 할 말이 있네. 이곳에서 5마일 내에는 클럽따윈 한 군데도 없어. 자네의 대견스러운 계획은 오늘로써 끝장이야. 절대로 안 돼. 알았어? 이것이 나의 최후 명령이야."

그는 말을 끝내고 식탁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화를 참으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새파랗게 질린 프랜치스는 황급히 식사를 마치고 이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더러운 유리창 너머로 구급실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어제 탈록이 보내 준 복싱 글러브와 체조용 곤봉이 들어 있는 상자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픔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리고 불굴의 기분으로 생각했다-이대로 복종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하느님도 이런 굴종은 강요하시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싸우는 것이다. 키저 신부가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더욱 완강히 대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성당을 떠나 버린 신자들과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 프랜치스는 별의별 생각을 다해 봤지만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셀즈리의 반이나 줄어 버린 교구민을 위해서다. 그는 넘칠 것 같은 사랑과 여기의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야겠다고 하는,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첫 사업이란 생각이 들자 가슴 뿌듯한 사명감이 솟구쳤다.

그 후 며칠 동안 여느 때와 같이 성당 일에 쫓기면서 어떻게든 클럽을 다시 열 길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다시 키저심부를 움직이는 것은 도저히 곤란하다는 생각이 되었다.

프랜치스가 온순해진 것을 자기 멋대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한 키저 신부는 승리의 기쁨을 누를 길이 없었다. 저따위 풋내기를 굴복시켜서 순종케 하는 것은 문제없다. 이러한 인간들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자기의 능력을 주교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비꼬는 미소는 더욱 짙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랜치스는 느닷없이 근사한 생각을 한 것이다. 성공의 가망은 적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만의 하나 성공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쁨에 가슴이 떨렸다. 창백한 얼굴이 약간 불그레해지고 자칫하면 큰 소리를 칠 뻔했다. 그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는 결심을 했다. 하여간 해보자. 어떻게 해서든지 하는 거다......폴리 아주머니가 온다고 하니 아주머니가 다녀가신 후에 바로 실행을 하자.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는 6월 말 일주일간의 휴가를 셀즈리에서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셀즈리는 휴양지는 아니었으나 지대가 높고 건조한 땅이어서 공기가 좋았다. 평상시는 살풍경한 이곳도 6월에는 신록으로 뒤덮여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더구나 프랜치스는 꼭 폴리 아주머니를 모시고 즐겁게 해 드리고 싶었다.

지난겨울 폴리 아주머니는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난삽한 겨울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을 빌리면 길포일은 주점을 망칠 작정인지 파는 것보다는 자신이 마시는 것이 더 많았고, 들어오는 돈은 보여 주지도 않고, 더군다나 뭐든지 자기가 독점해 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네드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마저도 쓸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장사 같은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정신마저 이상해져 꼭 미친 사람 마냥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어떤 때는 아첨하는 길포일에게 자기는 중기 요트가 있다느니 더블린에 양조장을 가지고 있다느니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폴리 아주머니 몰래 스캔티의 부축을 받아 크라몬트까지 가서 모자를 두 타스나 주문한 일이 있었다. 프랜치스의 부탁을 받은 탈록 의사의 진단 결과 네드의 병은 중풍이 아니라 뇌종양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탈록의 권유에 따라 남자 간호사를 두게 되어 폴리 아주머니가 일주일간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프랜치스는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가 오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제관의 내빈실에서 지내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키저 신부의 요즘의 태도로 보아 그런 것을 부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랜치스는 미세스 모리슨의 집에 적당한 방을 하나 얻어 놓았다. 622일이 되자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가 왔다. 두 사람을 역으로 마중 나간 그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아직 건강하고 활기를 잃지 않은 폴리 아주머니가 가무잡잡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이 옛날 노라의 손을 잡고 올 때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폴리 아주머니!"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주머니는 별로 변한 데는 없었으나 어쩐지 복장이 전보다는 조금 허술하고, 볼이 훨씬 야윈 것 같았다. 옛날에 입던 옷과 장갑, 그리고 똑같은 모자였다. 아주머니는 자기를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남을 위해서만 쓰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네드와 쥬디에게만 신경을 쏟는 것 같았다. 전혀 자기라고 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그 모습에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황급히 뛰어가서 폴리를 껴안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참 잘 오셨어요......아주머니......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 프랜치스!" 그녀는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여기는 바람이 심하구나. 눈 속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프랜치스는 아주머니와 쥬디의 손을 잡고는 미세스 모리슨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두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밤에도 늦게까지 폴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프랜치스가 성직자가 된 것을 무척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려운 집안 이야기는 그다지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럽게 꺼내 놓은 이야기는 쥬디에 관한 것이었다. 쥬디는 올해 열 살이 되며, 크라몬트의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복잡한 성격의 아이였다. 겉으로는 애교가 있고 정직했으나 매우 의심이 많은데다가 남의 것을 잘 감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자기 침실에 감추는 버릇이 있었고, 그것이 발견되면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화를 내는 것이다. 흥분을 잘하고 변덕이 심하며 자기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런 때에는 태연히 거짓말을 하고 어디까지나 시치미를 뗀다. 그리고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책망이라도 하게 되면 분해서 엉엉 울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프랜치스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쥬디의 신뢰를 얻으려고 했다. 쥬디는 자주 사제관에 와서 키저 신부의 방에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 놀기도 하고 파이프나 문진 등을 만지거나 했다. 프랜치스는 그것이 몹시 걱정스러웠으나 키저 신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랜치스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휴가 마지막날이 되어 폴리 아주머니는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하며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쥬디는 프랜치스의 방에 차분히 앉아서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정부 미스 캬파티였다. 그녀는 프랜치스를 향해서 말했다.

"신부님이 지금 만나셨으면 합니다."

뜻하지 않는 말에 프랜치스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키저 신부는 방 한가운데 우뚝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몇 주간 동안 처음으로 프랜치스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했다.

"저 애는 도둑이야."

프랜치스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밸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에서 제멋대로 놀게 한 거야. 귀여운 애라고 생각했는데."

키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무엇을 가지고 갔습니까?"

프랜치스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보통 도둑은 뭘 훔치지?"

키저 시누는 벽난로 위쪽을 향했다. 그 위에는 그가 언제나 정중하게 하얀 종이에 쌓아 두는 12페니씩의 동전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그는 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속에서 훔친 거야. 보통의 도둑보다 나쁘단 말이야. 성물 절도죄야. 이것을 보라고."

프랜치스는 꾸러미를 조사해 보았다. 봉함을 뜯고는 돈을 꺼내고 그 자리를 비틀어 놓았다. 3페니가 부족했다.

"어떻게 쥬디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바보가 아니야." 키저 신부는 물어뜯을 듯이 응수했다.

"이 일주일 동안 동전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보고만 있었지. 이 꾸러미 속의 돈에는 모두 표시를 해 놓았어."

프랜치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키저 신부가 그 뒤를 따라 왔다.

"쥬디, 네 지갑을 보여 다오."

쥬디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으나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웃어 보였다.

"모리슨 아주머니 방에 두고 왔어요."

"아니, 여기 있잖아."

프랜치스는 몸을 구부리고 그녀의 포켓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것은 휴가가 되기 전에 폴리 아주머니가 사준 가죽으로 된 작은 지갑이었다. 프랜치스는 맥이 풀리는 기분으로 지갑을 열었다. 그 속에 3페니가 들어 있었다. 모두 동전 뒤쪽에 십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키저 신부의 씁쓸한 표정에는 노기와 함께 승리를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군. 이봐, 하느님의 것을 훔치다니, 나쁜 아이야."

그리고 그는 프랜치스를 노려보았다.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해. 내가 맡고 있는 애라면 당장 경찰에 넘겨 버리겠네."

"싫어요, 싫어요." 쥬디는 갑자기 울어 버렸다. "돌려 드리려고 생각했어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프랜치스는 새파랗게 질렸다. 매우 난처했다. 그렇지만 두 손에 힘을 주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이 애를 데라고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하밀턴 경부에게 넘기겠습니다."

쥬디는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키저 신부는 깜짝 놀랐으나 조소하는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

프랜치스는 모자를 쓰고 쥬디의 손을 잡았다.

", 쥬디,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경찰한테 가서 키저 신부님한테서 3페니를 훔쳤습니다, 하고 말하고 오자꾸나."

프랜치스가 어린애의 손을 끌고 나가려고 하자, 신부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색이 변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좀 지나친 말을 해 버린 것이다. 신교도인 하밀턴 경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의견을 달리해 심하게 말다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하찮은 일로 경찰 신세를 지게 되면......또 마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황급히 중얼거렸다.

"갈 필요 없네."

그러나 프랜치스는 못 들은 척 여전히 시뻘건 얼굴로 문을 열었다.

"기다려!"

그는 자기가 자기의 노기를 진정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쥐어짜는 소리로 말했다.

"가지 않아도 되겠네......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치자구. 자네가 잘 타일러 주게나."

그렇게 말하고서 신부는 무뚝뚝한 화난 얼굴을 하고 나가 버렸다.

 

폴리 아주머니와 쥬디가 타인카슬로 돌아가 버리자 프랜치스는 갑자기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쥬디의 도벽에 대하여 신부에게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저 신부의 얼굴을 대하고 나면 그런 기분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기분이 키저 신부를 한층 외고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곧 휴가로 요양을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 전에 프랜치스를 절대로 버릇없이 굴지 않도록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문 채 아예 프랜치스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 미스 캬파티에게 일러 식사도 프랜치스보다 먼저 혼자서 했다. 휴가를 떠나기 바로 전 주일에는 제 7계명인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프랜치스에게 들어보라는 것 같이 격렬한 어조로 설교를 했다.

그 설교가 프랜치스의 결심을 굳히게 했다. 미사가 끝나자 프랜치스는 탄광 감독인 도날드 카일을 방문하여 그를 한쪽으로 불러내어 귓속말로 자기 계획을 털어놓았다. 카일은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프랜치스의 적극적인 설득에 차츰 흥미를 보였다.

"글쎄요, 과연 잘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디까지나 힘이 되어 드리겠어요."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월요일 아침 키저 신부는 6주일간 예정으로 광천지인 하르게이트로 요양차 출발했다. 그날 저녁때는 미스 캬파티도 고향인 로스레아로 떠났다. 그 이튿날인 화요일에 프랜치스는 아침 일찍 약속대로 카일과 역에서 만났다. 카일은 묵직한 서류철과 경쟁 상대인 노팅검 탄광 회사의 팜플렛을 안고 있었다. 깨끗한 신사복으로 정장을 한 카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떠 있었다. 두 사람은 열한 시에 셀즈리발 기차에 올라탔다.

긴 하루가 좀처럼 저물지 않았으나 그래도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두 사람은 앞만 향한 채로 나란히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피로한 듯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 그럼 안녕히"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했을 때 감독의 얼굴에 엄숙한 미소가 떠올랐는데, 그것만이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4일간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다음날 갑자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 탄광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탄광 바로 옆에 새 건물이 신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랜치스는 교회 일을 보면서 틈틈이 카일에게 달려가 의논을 하고 설계도를 검토하거나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거나 했다. 건물은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보름 후에는 위생실 옆에 골조가 세워지고 한 달이 지나자 대체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목수와 미장이가 일을 시작했다. 쇠망치 소리는 프랜치스의 귀에 기분 좋은 연주로 들렸다. 톱밥의 냄새는 코를 간지럽혔다. 프랜치스는 때로는 목수들의 일을 도와 주었다. 모두들 프랜치스에게 호의를 가졌다. 그는 아버지의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시간제로 성당 일을 맡은 미세스 모리슨이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텅 빈 성당에 혼자 있는 프랜치스는 키저 신부로부터 귀찮은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더없이 유쾌해져 일에 대한 열의는 끝없이 불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도 훨씬 친해진 느낌이었고, 교회에 대한 그들의 쓸데없는 억측도 풀리고 서서히 그들의 단조로운 생활에도 파고들어 잠자고 있는 그들의 영혼을 일깨워 하느님의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위를 에워싼 빈곤과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쳐 사랑으로 감싸주어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할 사명감에 또 다른 긍지와 자신을 느끼며 무한한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목적을 세워 사업을 완성하는 빛나는 감격 바로 그것이었다. 키저 신부가 성당에 돌아오기 5일 전 프랜치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조지 경 귀하

귀하가 친절하게도 셀즈리에 기증해 주신 새로운 레크리에이션 센터는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 건물은 탄광 종사자는 물론 그 가족, 널리 계급이나 신앙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곳 공업 지대에 거주하는 모둔 주민들에게 커다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운영 위원회도 결성되어 여러 차례 회의 결과 운영 강령도 결정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동봉하는 것은 동계 프로그램입니다. 이것에 의하여 회관 활동의 전모를 상상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복싱, 검술, 체육, 그리고 응급처치법 훈련과 매주 1회 목요일에는 댄스파티를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카일 씨와 제가 돌연히 방문하여 외람된 청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쾌히 승낙을 해주신 것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어떠한 감사의 말을 늘어놓아도 도저히 이 기분은 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에 대한 참다운 감사는 오직 셀즈리 주민에게 주신 행복과 이것에 의하여 촉진되는 그들의 사회적 결합에서 얻어지리라고 믿는 것만이 그것을 전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921일에는 개관 축하의 밤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만사를 미루시고 참석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구세주 교회 보좌 신부

프랜치스 치셤

 

프랜치스는 흥분으로 긴자오딘 채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편지의 내용은 감사의 뜻을 담았을 뿐이지만 프랜치스의 다리는 왠지 떨리고 있었다. 가정부 캬파티가 돌아온 이튿날 19일 점심 무렵에 키저 신부도 돌아왔다. 광천에서 원기를 회복하여 돌아온 그는 정력이 충만한 것 같았다. 그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시커먼 털투성이 몸으로 사제관이 좁다는 기세로 들어와선 큰 소리로 미스 캬파티에게 인사를 하고는 당장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명하고 주재중에 온 편지를 모두 읽었다. 그것이 끝나자 두 손을 비벼대면서 식당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접시 위에 놓여 있는 봉투를 보고 봉함을 열더니 인쇄된 안내장을 꺼냈다.

"이건 뭐야?"

프랜치스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용기를 내서 말했다.

", 그것은 이번에 새로 생긴 셀즈리 레크리에이션 클럽 개관 축하의 밤 초대장이 아닌 가요. 저한테도 와 있습니다만......"

"레크리에이션 클럽이라.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지?"

그는 팔을 쭉 뻗치고 얼굴이 빨개지며 초대장을 노려봤다.

"뭐야, 이것은?"

"대단히 근사한 클럽입니다. 저 창문에서도 보입니다." 프랜치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조지 렌쇼 경이 기증한 것입니다."

"조지 경이......"

키저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끊고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당당한 새 건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서 있다가 자리로 돌아와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몹시 시장해 서두르던 아까와는 달리 식욕이 가신 듯 가끔가다 실눈으로 프랜치스 쪽을 힐끔거릴 뿐 식사가 끝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프랜치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태도는 몹시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확실히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댄스 모임이나 남녀 공동의 레크리에이션을 신부님은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교구 사람들이 모두 협동을 하지 않았다던가 클럽을 배척하거나, 혹은 댄스 파티에 모이지도 않거나 하면 조지 경은 대단히 기분이 상하실 것 아닙니까." 프랜치스는 자기의 접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목요일 개관 축하에는 조지 경도 오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키저 신부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막 구어낸 맛있는 비프스테이크가 마치 더러운 걸레 조각처럼 보이는지 먹던 것을 밀어 놓고는 초대장을 무섭게 찢어 버렸다.

"그런 더러운 악마의 축하 따위에 누가 나간단 말이야. 천만에 말씀. 알겠나, 절대로 가지 않을 테니 그리 알게."

그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러나 목요일 밤이 되자 그는 수염을 깎고 새하얀 목셔츠에 외출용 수단을 입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얼굴을 하고 축하식에 참석했다. 프랜치스는 그의 뒤를 따랐다.

새로 생긴 회관은 휘황한 등불과 흥분으로 들끓고 탄광의 노동자와 주민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단상에는 유지들이 자리하고, 도날드 카일 부부, 탄광의 의사, 국민 학교장, 거기에 종파가 다른 교회의 목사 두 사람의 얼굴도 보였다. 프랜치스와 키저 신부가 자리에 앉아 와하고 환성이 오르더니 이어서 몇 마디의 야유가 있자 높은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키저 신부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이빨을 갈았다.

밖에서 자동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군중들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그 다음 순간 일동의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조지 경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예순 살 정도의 보통 키에 적당히 살찐, 대머리가 약간 벗겨진 백발의 노신사였다. 하얗게 쉰 수염에 혈색이 좋아 보였다. 노인들에게서 간간이 이렇게 눈에 띄게 건강한 얼굴을 볼 수도 있으나, 이처럼 백발이 두드러지게 훌륭한 느낌을 주는 것은 드물다. 복장도 태도도 온화한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조지 경은 축하식의 진행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카일 씨로부터 환영의 말을 듣자, 이번에는 자기가 일어나서 짧은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이 매우 가치 있는 계획을 최초로 계획하신 분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님이며, 직접 신부님의 창의와 광대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특히 저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장은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박수 소리에 휩싸였으나 프랜치스는 빨개진 얼굴로 탄원과 후회가 뒤섞인 눈을 키저 신부에게로 돌렸다.

키저 신부는 기계적으로 손을 들어 내키지 않는 박수를 두어 번 쳤으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지며 쓰디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축사가 끝나고 장내가 조용해지자 댄스 파티가 시작되었다. 키저 신부는 선 채로 조지 경이 카일의 딸 낸시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더니 어느 사이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를 쫓는 것처럼 바이올린의 연주 소리가 이어졌다.

프랜치스가 늦게 돌아와 보니 키저 신부는 불도 켜지 않은 응접실 의자에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활기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지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20년간 헨리 8세가 왕비를 갈아치운 것보다 많은 보좌 신부를 갈아치운 그는 이번에는 자기가 보좌 신부에게 쫓겨날 판국이 된 것이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우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일을 주교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네."

프랜치스는 가슴속에서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기세에 물러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키저 신부의 권위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키저 신부는 우울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가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좋을 거야. 그것은 주교가 결정하는 일이지만 말이지. 피츠 제랄드 신부가 타인카슬 성당에 보좌 신부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한 것 같은데......자네 친구 밀리도 분명히 거기에 있을 텐데 말야......"

프랜치스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교구를 뒤에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면 자기의 후계자에게는 사태가 용이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클럽은 계속 성황을 이룰 것이다. 아직 시작의 첫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니까 여러 가지로 변화가 있을는지 모른다. 자신을 결코 그것만을 자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거의 몽상가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착하고 낮은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혹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시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었습니다......그 너절한 것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했습니다."

두 신부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키저 신부는 얼른 눈을 감아 버렸다.

 

2

사순절(부활절 전의 40)도 마지막인 어느 금요일의 일이었다. 성 도미니코 사제관 식당에는 프랜치스와 스루커스 신부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점심에는 빅토리아 왕조 풍의 은그릇과 옥색의 근사한 도자기에 담은 대구포 찜과 버터도 없는 토스트만은 조촐한 식사가 나왔다. 거기에 이른 아침부터 병문안을 나갔던 밀리 신부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뭔가 억제하고 있는 것 같은 태도와 식사도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보아서 프랜치스는 바로 안셀모가 속에 뭔가 은밀한 일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츠 제랄드 주임신부는 사순절 동안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식당에는 젊은 신부 세 사람밖에는 없었다. 밀리 신부는 음식 맛 같은 것은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입만 놀리고 있을 뿐, 약간 상기된 채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인 스루커스 신부가 턱수염에 붙은 빵부스러기를 털면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갈 때까지 그는 그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야 겨우 여느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푹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프랜치스! 오후엔 나와 함께 동행해 주었으면 싶은데, 별다른 약속은 없겠지?"

"으응......4시까지는 별일 없어."

"그럼, 꼭 와 주게. 자넨 내 친구이고 똑같은 신부끼리니까 나는 자네를 제일 먼저......"

그는 거기에서 돌연 입을 다물었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굉장한 신비스러움을 더 이상 말하기가 아까운 모양이었다.

프랜치스가 차석 보좌 신부로서 성 도미니코 성당에 온 지 벌써 2년이 지나고 있었다. 성당에는 주임신부가 된 제랄드 피츠 제랄드가 아직도 머물고 있었고, 거기에 수석 보좌 신부 안셀모와 리투아니아인 신부 스루커스가 있었다. 타인카슬에는 해마다 폴란드에서 이민 오는 사람 수가 상당수에 이르고 있었으므로 절대로 스루커스와 같은 보좌 신부도 필요했던 것이다.

셀즈리와 같은 벽촌에서 옛 고향인 이곳의 교구에 전임해 와서 보니 성당 업무는 태엽을 감아놓는 것처럼 정확했고, 성당은 권위가 있고 흠잡을 데가 없어 잠시 동안은 프랜치스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더욱이 폴리 아주머니의 가까이에 살며 네드와 쥬디를 돌봐 줄 수 있는데다가 록 가의 사람들, 윌리나 그 누이동생 등과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행복스러운 일이었다. 마그냅 학장이 최근 산 모랄레스에서 이 교구의 주교로 영전해 온 것도 일종의 묘한 위로와 같은 기분과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 든든함을 느끼게 했다. 하기는 마그냅의 현재 모습은 전과는 전적으로 달라진 신중한 태도나 침착한 눈언저리의 주름이나 야윈 몸으로 보아 전임지가 그렇게 편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취미가 고상하고 스스로도 신사임을 자처하는 피츠 제랄드 주임신부는 키저 신부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극에서 극이다. 다만 그는 공평하게 행동하는 데에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조금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피츠 제랄드는 안셀모를-그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다-귀여워하는 것과는 반대로 스루커스 신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하기는 루커스는 영어도 능숙하지 못했고, 식탁의 예절도 나쁘고, 식사 때는 언제나 턱수염 아래 냅킨을 받쳐야 한다던가 수단을 입고서 이상한 모자를 쓰는 취미가 있기도 해서, 주임신부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당연했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의 보좌 신부에 대하여도 묘하게 경계하는 데가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기 태생의 미천함과 유니온 주점 관계, 더군다나 그 바논 사건 후 자기와 관련된 일까지 겹쳐 자기는 신임을 받을 수 없는 너무나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매우 서투른 짓을 한 것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교를,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듯이 하는 설교를 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프랜치스는 부임하자 바로 '개인의 성실'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자기가 늘 생각한 대로 신선하고 독자적인 말을 구사하여 간단하게 설교를 해 버렸다. 그러나 피츠 제랄드 사제는 이것을 위험한 혁신 사상으로 간주하고 통렬히 비난했다. 다음 주일에는 사제의 명령을 받들어 안셀모가 설교단에 올라가 지체 없이 해독제가 될 것 같은 설교를 했다. '바다의 별(성모 마리아를 말함)'이라고 하는 제목이었는데 그 설교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수사슴이 샘물을 찾아 우는 이야기, 배가 안전하게 모래톱을 떠나는 이야기 등을 하여 끝에 가서 연극조로 두 팔을 쳐들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신자들 가운데 여자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감동할 만큼 대단했다. 아침 식탁에서 성찬을 들던 제랄드 신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밀리를 칭찬했다.

"그거야, 밀리 신부-진짜 웅변이란 바로 자네 설교일세.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 돌아가신 사제께서 20년 전에 그것과 똑같은 설교를 하신 적이 있었다네."

아마도 이 양 극단의 설교가 두 사람의 진로를 결정해 버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나자 프랜치스는 우울한 기분으로 자기의 전적으로 투기적 모험심이 없는 행동과 안셀모의 훌륭한 성공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밀리 신부는 교구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언제나 기분이 좋았고, 활기 있었고, 누구를 만나도 웃는 얼굴이었으며, 고통받거나 괴로워하거나 하는 사람에게는 상냥하게 들을 두들기며 위로를 해주었다. 그는 노력가이며 일에 참으로 열심이고, 조끼 호주머니에 든 수첩에는 할 일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는 집회의 연설에 초대되거나 테이블 스피치를 요청 받으면 사양하는 적이 없었다. 더구나 <성 도미니코 가제트>의 편집까지 하고 있ㄸ었다. 이것은 종교 관계 뉴스와 유머러스한 기사를 실은 팸플릿이었다. 그런 관계로 외출할 일이 매우 많았는데, 고상한 인품 때문에 상류 가정의 초대도 종종 받았다. 또 유명한 성직자가 이 도시에 설교 차 오면 안셀모는 지체 없이 찾아가서 정중하게 경청을 했다. 그리고 나서는 정중한 편지를 써서, 이번에 뵙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며 정신적인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열심히 표명했다. 이러한 성의를 피력함으로써 그는 유력한 지기를 많이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일의 능력에도 한도는 있었다. 이번 새로 생긴 타인카슬 교구 해외 포교단 본부-것은 맥나브 주교가 절실하게 희망하고 있는 계획이었다-의 비서직을 담당하여 주교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샨드 거리에 있는 '노동 소년 회관'일을 본의 아니게 프랜치스에게 일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샨드 거리의 환경은 이 시내에서 가장 더러운 곳으로 싸구려 아파트와 노동자들의 판잣집이 늘어선 빈민가였다. 그러니 이곳도 자연히 프랜치스의 담당 구역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슨 일을 하거나 효과가 없었고, 또한 문제시되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되고 있었으나 그래도 자기의 일은 오히려 이러한 데에 얼마든지 있다고 프랜치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는 그러기 위해서는 빈곤 바로 그 자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세상의 불행이나 오욕이나 가난이라고 하는 것의 영원한 비를 굴하지 않고 직시하도록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부터 자기가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성인의 사회가 아니라 때로는 눈물마저도 억누를 수 없는 비참한 죄인들의 사회인 것이다.

"왜 그러지. 졸고 있지 않은가?"

안셀모가 책망하는 것처럼 말했다. 깜짝 놀라 몽상에서 깨어나자 모자와 단장을 든 밀리 신부가 식탁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싱긋 웃어 보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밖은 구름 한 점 없이 개인 오후였고 바람이 약간 불고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우아한 안셀모는 혈색 좋은 얼굴에 활기찬 걸음걸이로 걸어가면서 만나는 교구민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성 도미니코 성당에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우쭐하거나 하지 않았다. 많은 숭배자들에게는 그러한 겸손한 태도가 참으로 믿음직스럽게 비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 무렵 새로 교구에 편입된 교외로 가는 길목에 접어들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옛 장원의 흔적이 뚜렷한 이곳에 많은 주택이 건축 중이었다. 노동자들이 벽돌을 운반하거나 손수레를 밀거나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무심코 '호리스 지방 재판소 소속 변호사 말캄 그레니에게 문의하실 것'이라고 크게 쓴 흰 페인트로 칠한 간판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안셀모는 자꾸 걸어가 언덕을 오르고 초록의 들판을 지나, 이번에는 숲속 오솔길로 접어들더니 왼쪽으로 내려갔다. 바로 가까이에 공장의 굴뚝이 있었고 그 근처는 기분이 상쾌한 시골 풍경이었다.

갑자기 밀리 신부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개처럼 조용한 흥분을 보이며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어딘 줄 알겠지, 프랜치스. 이곳에 대하여 물어 본 적이 있었잖아."

"으응."

프랜치스는 이 근방은 자주 다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노란 금잔화로 뒤덮여 있고 구리색의 떡갈나무 숲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이끼 낀 작은 바위 동굴은 이 근처 수마일 되는 주위에서 가장 깨끗한 장소였다. 동굴 안에는 샘이 있었지만 몇 년 동안 물이 말라 있었다. 이 동굴은 '마리아의 샘'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보라고! 프랜치스."

밀리는 프랜치스의 팔을 끌고 샘 가까이 까지 데리고 갔다. 말라 있어야 할 바위틈에서 수정과 같은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으나, 이윽고 밀리가 두 손을 모아 쥐고 마치 성찬식 때처럼 정중하게 그 물을 떠서 마셨다.

"마셔 보게, 프랜치스. 그리고 이 샘물을 맛보는 특권에 감사드리세."

프랜치스도 몸을 구부리고 마셨다. 물은 차갑고 맛도 좋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좋군."

밀리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 그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약간 선심을 쓰는 것 같은 데가 없지는 않았다.

"나라면 천국의 맛이라고 하겠네."

"언제부터 샘이 솟고 있었는가?"

"어제 저녁 황혼 무렵부터 다시 솟기 시작한 거야."

프랜치스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안셀모, 어쩐지 자네는 델파이의 신탁 같은 말을 하는 것 같군. 하느님 은혜의 현현이란 말인가. , 말해 보라고. 누구한테서 들었지?"

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아직은."

"그렇지만 난 매우 호기심이 나는군."

안셀모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바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자세한 말을 할 시기가 못 되네, 프랜치스. 제랄드 사제에게 먼저 보고해야겠어. 엄청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분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까지만 기다리게. 물론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나의 신뢰를 배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프랜치스는 밀리의 인간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는 않았다.

성당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프랜치스는 밀리와 헤어져서 그렌빌에 있는 병자를 위문하러 갔다. 그의 담당인 소년 회관 회원인 오웬 워렌이라고 하는 소년이 수주일 전에 풋볼 시합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집이 가난했으므로 심한 영양 부족인데다가 상처도 그대로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모양이었다. 빈민 구제법에 의하여 의사가 왔을 때에는 이미 상처는 심해졌었고 정강이에 두번 다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상처가 커져 버린 것이다.

이 일로 프랜치스는 오로지 마음이 아팠었고-탈록 박사도 매우 근심하고 있는 눈치여서 더욱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밤엔 워렌과 그 모친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느라 조금 전 안셀모와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제랄드 신부 방에서 탄원하는 것 같은 큰 말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고서 어제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사순절은 주임신부에게는 대단한 고행의 기간이었다. 고지식한 사람인 만큼 문자 그대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영양으로 길들여진 그 매우 호화스러운 몸뚱이는 단식에는 적합치가 않았다. 심신이 다같이 괴로운 시련을 견디면서 사람을 멀리하여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사제관 안을 왔다 갔다 걷는 것뿐이었으나 그의 약한 시력으로는 사람을 분간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날이 지난 표시로 달력에 십자표를 해 나가고 있었다.

밀리 신부에 대한 제랄드의 총애는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긴 하나 이러한 때에 그에게 접근하는 데는 상당한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듣고 있는 동안에 안셀모의 설득 비슷한 탄원의 소리가 낮아졌는가 싶자, 갑자기 사제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밀리의 끈질긴 설득력이 승리를 한 것 같았다. '부드러운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프랜치스는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자 제랄드 신부가 초췌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밀리 신부는 현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시내 중심가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세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이 돌아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사제는 비로소 금기를 깨뜨리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탁에는 앉았으나 뭘 먹으려고는 하지 않고 커피만 시켰다. 단식 중에도 이것만은 빼놓지 않는 유일한 사치였다.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은 신부는 향기로운 커피가 아깝기라도 한 듯 조금씩 음미하는 것이 모두에게 다정함을 느끼게 했으며, 뭔가 마음속에 일고 있는 감동으로 해서 자신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프랜치스와 폴란드인 보좌 신부를 향해 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얘기했다. 스루커스에게도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는데, 이것은 여태껏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번만은 밀리 신부의 끈기에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내가 완강히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하여간 이 사람은 밀고 나갔으니까 말이야. 물론 이......어떤 종류의 현상에 대하여는 될 수 있는 한 의심을 갖는다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본 적도, 보려고도 생각한 적이 없는 현현을 직접 나의 교구 내에서 봤단 말일세."

그는 말을 끊고 커피 잔을 들더니 점잖은 몸짓으로 우쭐한 밀리 신부에게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재촉했다.

"실제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발견한 자네가 직접 하게나, 밀리 신부."

밀리 신부의 볼에는 아까부터 예의 희미한 흥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하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말하는 사건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열변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우리 교구민의 한 사람입니다만 오랫동안 신병을 앓고 있는 한 소녀가 지난 일요일에 산책을 나갔다가-무엇보다도 증거가 확실해야 하니까 정확히 말씀드리죠. 그것은 315일이며 시간도 오후 세 시 반이었습니다. 산책의 이유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녀는 신앙심이 깊고 열렬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경솔한 행동이나 빈둥거리고 놀며 생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산책을 한 것입니다. 이 소녀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습니다. 의사는 보일 크레센트 42번지의 윌리엄 브라인 박사입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흠잡을 데 없는 아마도 이곳에서 가장 신뢰받는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밀리 신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소녀는 중얼거리듯이 기도를 하면서 산책에서 돌아오는데, 우연히 '마리아의 샘'으로 알려진 장소까지 간 것입니다. 이미 황혼이 되어 태양의 마지막 빛이 그 아름다운 장소를 찬연히 비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멈추어 서서 물끄러미 그 경치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새하얀 옷에 하늘색 케이프를 입고 별을 수놓은 관을 쓴 부인이 바로 눈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때 소녀는 신성한 본능에서 그대로 바로 부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부인은 형용할 수 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내 딸아, 너는 병자지만 너야말로 선택받을 사람이니라'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쯤 방향을 바꾸고 심히 놀란 가운데서도 무엇인가를 깨달은 소녀를 향하여 다시 '나의 이름을 가진 이 샘이 말라 있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닌가. 잘 기억해 두어라. 너와 같은 사람들에게만 이런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고운 미소를 보이더니 부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메마른 바위에서 참으로 깨끗한 샘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밀리 신부는 입을 다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있다가 주임신부가 말을 받았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미묘한 문제에는 아무것에도 휘말려 들지 않도록 회의적인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야. 구즈베리의 나무라 해서 어느 나무에나 기적의 열매가 맺어진다고는 할 수 없어. 그 또래의 소녀들은 모두 로맨틱하기 마련이며, 더구나 샘이 솟았다 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일는지 모를 일이지. 그러나, 그렇긴 하나......" 그의 어조에는 깊은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나는 밀리 신부와 브라인 박사와 함께 이 문제의 소녀를 만나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온 참이오.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소녀가 목격한 엄숙한 체험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 그녀는 그후 바로 침대에 누워 버렸는데 지금까지 계속 잠만 자고 있다네."

이야기는 점차 부드러워지고 뭔가 헤아릴 수 없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 동안 소녀는 환희와 행복감에 젖어 있고 지난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육체적으로 더욱 건강해졌다네." 그는 말을 끊었으나 잠시 있다가 묵묵히 이 놀라운 사실에 그럴 듯한 장중함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라......소녀의 몸에 확실히 의심할 여지없이 성흔(그리스도와 같은 상흔을 손과 발에 받는 것)이 나타나고 있었네. 이것은 이미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이야."

제랄드는 득의만면하여 말을 계속했다.

"좀 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때까지 발표는 아직은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나는 지극히 강렬한 거의 확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예감을 가지고 있소. 그것은 이 교구에 있는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의 특권으로서 이것도 최근 발견된 디그비의 동굴집이라든가 혹은 더 오래 전의 더욱 역사적인 루르드의 성지(남프랑스 오토 피레네에 있는 베르나데스 스비루가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본 것) 등과 비교할 수 있는 기적, 아마도 그런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기적을 나누어주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네.'

이 결론의 말에는 뭔가 장중함이 있어 모두들 크게 감동하였다.

"그 소녀가 누구입니까?" 프랜치스가 물었다.

"샬로트 닐리라고 하는 애야."

프랜치스는 주임 신부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묵만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후 며칠간 사제관의 흥분은 점점 도를 더해 갔다. 그러한 일을 교묘히 처리하는 데는 아마도 제랄드 신부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진실한 신앙인임과 동시에 처세 수단에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의 학무위원회나 평의회 등에서의 오랜 경험에서 사제는 속세의 일에 대하여 빈틈없는 처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는 그것이 설사 신도의 집이라 할지라도 일체 누설하는 것을 금하고 모든 것을 극비에 붙여 놓았다. 완전한 준비를 갖출 때까지는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하게 했다.

이 기적이라 할까 좀 뜻밖의 사건에 의하여 그는 새로운 생명이 불어넣어진 것 같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을 통틀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이렇게 만족해 보긴 처음이었다. 그는 신앙과 양심의 두 가지를 혼합해 놓은 것 같은 데가 있었다. 정신도 육체도 다같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자동적으로 지위가 승진한다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교회 자체의 융성과 똑같을 만큼의 큰 동경을 자신의 영달에 대하여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성당의 현대사를 빛내고 있는 뉴먼(근대 영국의 가톨릭 추기경이며 옥스포드 운동의 지도자)과 자기를 비교할 정도로 자만심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순하게 성 도미니코 성당에 다소곳이 머물러 있었다. 더구나 20년 전에 걸친 봉사의 공적으로 비로소 발탁된 것이 겨우 주임신부라고 하는 직위에 머무는 하찮은 승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는 흔치 않은 칭호였으며 타인카슬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흔히 성공회 신부로 오인 받기 일쑤였다. 이것이 또한 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분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싫은 것이었다.

하기야 그는 자기는 존경을 받고 있으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씩 실의에 빠져듦과 동시에 모든 것을 체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나 머리를 숙이고 '오 주여, 주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기도할 때에도 그 겸허한 마음 밑바닥에 '이제 모제타(가톨릭교회에서 고위 성직자가 착용하는 작은 두건이 달린 어깨옷)쯤은 주어도 될 터인데' 하는 불타오르는 상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달라졌다. 성 도미니코 성당에 처박아 둘 테면 얼마든지 처박아 두라. 성 도미니코 교회는 자기가 빛나는 성지로 만들어 보이겠다. 루르드가 좋은 선례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시대도 장소도 훨씬 가까운 중부 지방의 디그비도 있지 않은가? 그곳 기적의 동굴에서 솟는 물은 현재 많은 병자가 치유된 것이 확인되어 이름도 없는 한촌이 흥청거리는 도시로 변모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이름도 없는 그러나 기략이 뛰어난 신부가 일약 국가적인 인물이 되어 있지 않은가.

피츠 제랄드 사제는 새로운 도시라든가 대성당, 장엄한 기도, 훌륭한 수단을 입고 고위직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현란한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속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만반의 준비도 착오 없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계약서의 초안을 다시 검토하면서 모든 일에 충실을 기했다. 그리고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도미니코 교단의 수녀인 테레사를 샬로트 닐리의 집에 들어가 있게 했다. 테레사로부터 확실한 보고가 있으면 안심하고 계약을 맺을 생각인 것이다.

'마리아의 샘'과 그 부근 일대의 토지는 다행히 홀리스라고 하는 부유한 지주의 소유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으나 부인이 조지 렌쇼경의 누이동생이었다. 홀리스는 친절하고 기품이 좋은 사람으로서 이 사람과 그의 고문 변호사인 말캄 그레니는 그후 며칠에 걸쳐서 셰리주와 크랙커를 앞에 놓고 사제와 장황한 밀담을 거듭했다. 그 결과 쌍방에서 서로 좋은 협정이 맺어지게 되었다. 신부는 돈에는 참으로 담담하고 활달한 사람이었다. 돈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여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으로 구입하는 것도 차제에는 중요한 것이므로 장래의 빛나는 계획을 위해서는 돈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그곳의 땅 값이

많이 뛰리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는 것이다.

계약을 맺는 날, 프랜치스는 2층 복도에서 그레니와 마주쳤다. 정직하게 말해서 말캄이 홀리스 사건을 담당하는 것을 알고 프랜치스는 의외로 생각한 것이다. 그레니는 그 동안 변호사로서의 기한이 끝나자 약삭빠르게 처의 지참금으로 기초가 튼튼한 변호사 사무소의 주를 사들여 힘들이지 않고 일류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 말캄!" 프랜치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잘 오셨습니다."

그레니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며 악수를 했다.

"깜짝 놀랐는데. 주홍빛 옷의 여자(그레니 같은 신교도가 로마 가톨릭교를 비방해서 하는 말. 원래는 묵시록에 나오는 음부를 말함) 집에서 너를 만나다니 뜻밖이군."

말캄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더듬거리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나는 자유 주의자야, 프랜치스......거기에다 지금은 돈이 좀 필요하단 말이야."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프랜치스는 이전부터 그레니 가와는 본래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죽은 것을 알고 그것도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더구나 타인카슬에 와서 미세스 그레니를 우연히 만났을 때 자기가 인사를 하려고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갔더니, 외할머니는 곁눈질로 그를 보자마자 마치 악마의 모습이라도 본 것처럼 허둥지둥 달아나 버린 일까지 있었다.

프랜치스는 말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무척 슬펐어요."

", 고맙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사실은 나도 슬퍼. 그저 아버지는 실패만 거듭하셨으니까 말이야."

"실패라고 하지만, 천국에 가지 못할 만큼 큰 실책은 아니잖아요."

프랜치스는 농담으로 말했다.

"그래 옳아. 지금쯤 아버진 틀림없이 천국에 계실 거야."

그레니는 시계줄에 매단 휘장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벌써 중년에 접어들어 몸은 탄력이 없어지고 어깨와 배에 군살이 찌고, 숱이 적은 머리칼을 벗겨지기 시작한 대머리에 두 갈래로 갈라 붙여 더욱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파랗고 반짝거리는 눈만은 아직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초대의 말을 던졌다.

"틈이 있으면 놀러 오게. 내가 결혼한 것은 알고 있겠지? 가족은 둘이야. 어머니도 함께 계신다네."

말캄 그레니는 샬로트 닐리가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는 사건에 그 나름의 독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간직한 채 인내를 하면서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모친으로부터의 유전이며 놀라울 만큼의 탐욕과 어딘지 여우같은 교활한 성질이 있었다. 그것이 이 우스꽝스러운 로마 가톨릭 식의 계획 가운데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는 이것이 다시없는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완전히 믿어 버리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기다리고 바라던 기회가 눈앞에 익은 과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일생을 통하여 두 번 다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사건 의뢰는 적당히 처리해 가면서 말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자기만이 혼자서 메모를 해 두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많은 비용을 들여 지질을 조사한 결과 자기의 생각이 적중했다. '마리아의 샘'은 역시 히스나무가 울창한 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지하수였던 것이다.

말캄은 부자는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부자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저축해 놓은 돈과 집과 변호사의 주를 저당 잡혀서 그 돈으로 주위의 땅을 3개월 후에는 자기의 것이 되도록 계약금을 지불했다. 그는 신비의 샘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기는 샘을 새로 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선수를 쳐서 그것을 협박 수단으로 하여 자기를, 이 말캄 그레니를 대지주로 만들어 주는 확실한 계약을 맺자는 계획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비의 샘은 솟아오르고 있었다. 샬로트 닐리도 여전히 신들린 것처럼 성흔이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고 기적적으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자기 신앙이 더 깊어지기만을 기원하여 마지않았다. 그러한 내심의 고투를 경험하지 않은 안셀모처럼 믿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담의 늑골의 이야기에서, 고래의 뱃속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더더군다나 황당무계한 요나의 이야기까지 무엇이든 믿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부터 믿고 싶다......남을 사랑하고 자기 의복에 기어 다니는 이를 물통에 털어 낼 정도의 빈민굴에서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할 때만은 그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병자나 불구자나 좌절된 창백한 얼굴을 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신앙심이 우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시련, 그 어떤 편파적인 양상은 자기의 신경을 손상시키고 있을 뿐이었고, 기도의 기쁨도 위축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 것은 그 문제의 소녀였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샬로트의 모친이 서디어스 길포일의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무래도 간과해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샬로트의 어머니는 말만 앞세우는 애매한 인물이었고, 아버지는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기는 했으나 게으름뱅이이며, 잡화상을 한답시고 점포를 벌려 놓았지만 장사는 하지 않고 교회 제단 앞에 촛불을 밝히고 장사만 잘 되기를 기원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샬로트는 이 아버지의 나쁜 점은 모두 물려받은 것 같았다. 소녀가 성당에 열심히 나오는 것은 향로와 밀초 타는 냄새가 그녀의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고해실의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닐까 하고 프랜치스는 의심을 해 보았다. 그렇다고 소녀의 순결한 마음과 말없이 의무를 다하는 갸륵한 마음씨까지 부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반면에 얼굴을 씻는 것이 귀찮다면 숨쉬는 것도 귀찮다는 식으로 어쩐지 소녀에게 싫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다음 토요일 프랜치스는 공연히 우울한 기분으로 그렌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143번지의 오웬 워렌의 집에서 의사인 탈록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탈록을 불렀다. 그가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윌리는 나이가 더해감에 따라 몸이 불어난 것 외에는 변한 데가 없었다. 믿음직한 성품에 끈기 있고 조심성이 많았으며, 친구들에게는 신의를 지킬 줄 알았으나 불의에 대하여는 조금도 용서할 줄 모르는 그런 데가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부친의 성실성을 모조리 이어받았으나 부친만큼의 매력은 없었고, 용모에서도 전혀 닮은 데가 없었다. 잘 생기지 못한 코와 세련되지 않은 붉은 얼굴에 빗질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체 모습에서는 고상한 기품이 엿보였다. 의사로서의 경력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성실하고 자기의 일을 즐기고 있었고, 세상 일반의 하찮은 야심 따위는 무시하고 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온 세계를 돌아보고 싶다'던가 어디든 낭만적인 나라에서 모험을 해보고 싶다든가 하는 말을 한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실제는 의연하게 빈민 구제 회의에 나가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에게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자기 생각대로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그날그날을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돈과는 인연이 멀었다. 보수는 몇 푼 되지 않는데다가 그 대부분을 위스키를 사는 데에 써 버리는 것이다.

그는 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늘 아침도 그는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움푹 패인 눈은 음산하고 표정도 여느 때와는 달리 험악한 데가 있어 오늘은 뭔가 세상이 비위에 거슬리고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가냘픈 목소리로 워렌의 다리가 악화됐다고만 말했다. 오늘은 병리학상의 검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환부의 조직을 조금 절취해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그들에게만 통하는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프랜치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에서 샬로트 닐리의 이야기를 했다.

탈록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 넣고 옷깃을 세운 채 하늘만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으음." 그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어떤 사람한테 들었네."

"자네, 어떻게 생각하나, 그 일을?"

"왜 나한테 묻는 거야."

"그야 자네라면 정직하게 대답해 줄 테니까 그렇지."

탈록은 묘한 얼굴을 하고 프랜치스를 보았다. 매우 겸손하고 자기의 지성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는 탈록이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의 태도에는 이상하리만큼 적극적인 데가 있었다.

"종교는 나의 전공이 아니야. 철저한 무신론을 아버지한테서 이어받았고......그것을 또 해부학 교실에서 더욱더 확고하게 했단 말이야. 그렇지만 굳이 내 의견을 듣고 싶다면-아버지의 흉내를 내지 않더라도 나는 그 사건을 부정하고 싶네. 그러나 어떨까, 한번 그 애를 진찰해 보면. 그 애의 집은 여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가. 함께 가 보세."

"그런 일을 해서 브라인 박사와 일이 생기지는 않겠는가?"

"좋아, 브라인과는 내가 좋게 말할 테니까. 동업자와 교제를 하려면 무조건 하고 나서 사과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야."

그는 프랜치스에게 묘한 미소를 던졌다.

"물론 자네의 윗사람이 두렵지 않다면야."

프랜치스는 몹시 난처해 망설이다가 말했다.

"두렵긴 하지만 어쨌든 가보자구."

생각과는 달리 쉽게 그 집안으로 들어갔다. 미세스 닐리는 간호에 지쳐서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점포에 나가고 집에 없었다. 작달막하고 온순하며 교양 있는 테레사 수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타인카슬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탈록을 알지 못했으나 프랜치스와는 구면이기 때문에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은 수녀의 안내로 깨끗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몸을 청결히 하고 하얀 잠옷을 입은 샬로트가 번쩍번쩍 빛나는 놋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테레사 수녀는 소녀에게로 몸을 구부렸다. 깔끔하게 청소된 방이 그녀는 적지 않게 자랑인 것 같았다.

"샬로트 양, 치셤 신부님이 만나러 오셨어요. 브라인 선생님과 친하신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샬로트 닐리는 방긋 웃었지만 좀 귀찮은 것 같은 의도적인 것이 엿보였다. 그러나 어딘가 신들린 것 같은 데가 있었다. 베개에 반듯이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창백하지만 맑은 얼굴을 그 미소가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프랜치스는 마음속으로 가책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조용한 하얀 방에는 일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진찰을 해도 괜찮지, 샬로트?" 탈록은 상냥하게 말했다.

소녀는 그대로 미소를 띠운 채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는 누가 봐도 환자라고 할 수 없었다. 태연하고 오히려 득의양양한 사람의 태도였다. 자기가 자기 내부의 힘,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힘을 의식하고 있으며, 보고 있는 사람에게 외경의 마음을 일게 할 수 있다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창백한 눈까풀이 두세 번 깜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소리는 조용히 어딘가 먼데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괜찮고 말고요, 선생님. 기쁩니다. 나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않았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그렇지만 선택을 받은 이상 기꺼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공손히 탈록에게 진찰할 것을 허용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군, 샬로트."

", 선생님."

"식욕이 없어서?"

"먹을 것은 생각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 있는지도 모르죠."

테레사 수녀가 조용히 말참견을 했다.

"제가 여기로 온 이래 무엇 하나 입에 넣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방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탈록 의사는 몸을 반듯하게 눕도록 하고 곱슬곱슬한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면서 간단하게 말했다.

"참 감사해요, 샬로트. 테레사 수녀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프랜치스가 그 뒤를 따라 나오려고 하자, 샬로트의 얼굴에 문득 그늘이 서렸다.

"보시지 않겠어요, 신부님? , 이 손......발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제물의 희생처럼 양팔을 펴 보였다. 그 새하얀 손바닥에는 이미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못 자국 모양의 혈흔이 보였다. 발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온 탈록은 신중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 동네의 끝까지 왔을 때까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 길목에 와서 황급히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 의견을 듣고 싶을 테지......그 소녀는 이미 위험한 한계를 넘어섰단 말이야. 항진 상태에 있어서의 조울병이라는 거야. 혈흔도 확실히 병적 흥분 때문에 생긴 거야. 다행히 정신병원에 가지 않게 되면 성녀로 추앙되겠지."

그는 여느 때의 침착성을 잃고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예의고 뭐고 없었고 말을 하는데도 헐떡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군. 밀가루 포대를 입은 빈혈증의 천사처럼 침대에 누워서 성녀인 체 방실방실 웃고 있는 소녀가 있는가 하면, 더러운 지붕밑 다락방에 누워 괴저에 걸린 다리가 자네가 말하는 지옥의 겁화의 고통은 고사하고 악성 육종에 시달리는 소년 오웬 워렌이 있단 말야. 자네도 기도를 올릴 적에 그 일을 잘 생각해 보라고. 곧 기도하러 가겠지. 그럼 나도 집으로 돌아가 한잔하기로 할까."

프랜치스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프랜치스가 수난절의 기도(테네브레. 부활절 전 1주일간 등불을 끄고 행하여지는 그리스도 수난을 추모하는 저녁과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니, 사제관의 현관에 걸려 있는 게시판에 긴급 소집 안내가 붙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예감을 안고 2층 서재로 올라갔다. 거기엔 주임신부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융단이 찢어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치셤 신부! 나는 어안이벙벙해서 말도 못할 정도야. 사실 자네라고 하는 인간은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라고, 하필이면 무신론자 의사를 데리고 가서 진찰을 해? 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프랜치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저는......아닙니다. 그 사람은 저의 친구였기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것부터 틀려먹은 거야. 나의 보좌 신부 한 사람이 닥터 탈록과 같은 인물과 교제를 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돼먹지 않은 거야."

"우리들은......우리들은 어렸을 적부터 친구입니다."

"그런 것은 구실이야. 난 자네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했네. 자넨 처음부터 이 위대한 사건에 대해 냉담했고 또한 공감이 결여되어 있었어. 틀림없이 자네는 최초의 발견자라는 명예가 밀리 신부에게 돌아간 것을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공공연히 반대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프랜치스는 자신이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그는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죄송하기 짝이 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무관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탈록을 데리고 갔었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곳이 있어서......"

"미심쩍게 생각했다고! 자넨 루르드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종파의 의사들이 확언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럼 묻겠는데, 우리가 여기에 이 교구 안에 새로운 신앙의 증적을 만들려고 하는 기회를 왜 자네는 부정하려고 하는 건가?"

피츠 제랄드 신부의 얼굴이 어둡게 흐려졌다.

"영적 존재의 의미는 고려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다못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만이라도 존중하라고."

그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병약한 소녀가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9일간이나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더구나 건강하고 충분히 영양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별도의 자양분을 취하지 않고서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야."

"별도의 자양분이라니요?"

"영적인 양식!"

제랄드 신부는 새삼스런 분노를 느낀 듯 거칠게 말했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1347--80. 신비 사상을 가진 도미니코파의 성녀)도 지상의 어떤 음식보다 신비로운 영적 음식을 취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야? 자넨 참으로 의심이 많아. 내가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는 거지. 그렇잖은가?"

프랜치스는 머리를 떨구었다.

"성 토마스(또는 토마. 12사도의 한 사람. 주의 부활을 의심했음)도 의심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도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말입니다. 주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해 버린 프랜치스는 자신도 놀랐는지 문득 입을 다물어 버렸다. 피츠 제랄드 신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으나 곧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프랜치스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뭔가 서류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성당 일을 방해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야. 본당 내에서도 자네의 평판이 좋지 않아. 이제 돌아가게나."

프랜치스는 자기의 결점이 자신도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러자 불현듯 이 고충을 마그냅 주교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기분을 억눌러 버렸다. 라스티 맥은 이젠 옛날의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교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자기와 같은 비참한 한 신부의 고뇌 따위에 주교가 관계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피츠 제랄드 신부는 열한 시 장엄미사 때, 지금껏 없었던 격렬한 설교를 하고 마침내 이 사건을 공개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신자들은 성당밖에 몰려 선 채로 은밀하게 속삭이며 집으로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 엔지 자연히 행렬을 이루어 밀리 신부를 선두로 '마리아의 샘'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닐리의 집 앞은 군중들로 들끓었다. 샬로트가 가입되어 있는 소녀회 회원들이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합창했다.

그날 저녁 때 제랄드 신부는 신문기자단과 회견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문기자단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는 상당히 존경받고 있었으며, 공공 정신이 투철한 성직자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매우 유리한 인상을 주었다. 이튿날 각 신문들은 회견 내용을 비교적 큰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하고 있었다. <트리뷴>지는 제 1면에 이를 게재하고, <크로브>지는 2면에 3단 짜리 기사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외에도 <노산바란드 헤럴드>지는 '2의 디그비'라고 보도하고, <요크션 에코>지는 '기적의 바위샘, 수천의 병자에게 희망을 주다'라고 했으나, 신교의 <하이 앵그리칸>주간지는 '다시 증적을 기다리자'는 애매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런던 타임스>는 신학자의 말을 실어, 에단(에단 오브런디스판. 아일랜드의 성인. 7세기 전반의 수도승. 성스런 샘과의 관계는 불분명함)과 성 에제룰프(또는 에켈볼트. 영국의 성인. 10세기 초의 인물)에까지 소급하는 '기적의 샘'의 역사를 문예란에 게재할 정도였다. 제랄드 신부는 희열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밀리 신부는 아침 식사도 못 먹을 정도였고, 말캄 그레니는 너무나도 기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날뛰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 8일이 지난 후 프랜치스는 저녁 때 시의 북쪽 끝에 있는 크라몬트의 폴리의 작은 아파트를 방문하려고 나섰다. 담당 구역의 지저분한 연립 주택을 하루 종일 돌아다닌 후였기 때문에 피곤하였고 기분도 대단히 우울한 참이었다. 그날 오후 탈록 의사로부터 워렌 소년이 위독하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다리는 악성 육종이 되어 버려 이제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빈사 상태에 빠진 워렌은 이 달을 넘길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크라몬트에서 폴리는 여전히 억척을 부리고 있었으나, 네드는 전보다 더 까다로워진 것 같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모포로 무릎을 감싼 채 지껄이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쩐지 이상했었다. 유니온 주점에 있는 네드의 이권의 나머지에 대하여 길포일과의 사이에 최후의 결정을 간신히 마무리 지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도 대단한 액수는 아니었으나, 그러나 네드는 그것을 큰 재산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쓸데없는 불평을 너무 많이 늘어놓은 탓인지 혓바닥까지 이상하게 되어 애처로울 정도로 발음이 확실하지 않았다.

프랜치스가 갔을 때 쥬디는 이미 자고 있었다. 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표정으로 보아 쥬디가 또 나쁜 장난을 하여 초저녁부터 침실로 쫓아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일을 생각하니 그는 한층 마음이 무거웠다.

아파트를 나왔을 때 시계는 이미 열한 시를 가리켰다. 타인카슬행 차는 벌써 떠난 후였기 때문에 걸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모든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그렌빌 거리로 접어들었다. 건너편에 닐리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층엔 아직 등불이 켜져 있었다. 거기는 샬로트의 방이었다. 노란 블라인드에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것을 보자 프랜치스는 갑자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미련함이 뼈아프게 느껴져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문득 닐리 가의 사람들을 만나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죄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서 거리를 가로질러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놋으로 된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다 그는 고풍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것은 문득 환자를 방문할 적에는 안내를 요청하지 않고 들어가도 좋다고 하는 의사나 성직자의 공통된 특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좁은 현관으로 통하는 침실에서 가스등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멍청하게 돌처럼 서 버렸다.

침대에 일어나 앉은 샬로트가 닭고기와 빵을 담은 접시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참 꾸역꾸역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낡은 잠옷을 입은 미세스 닐리는 근심스러운 듯이 몸을 굽혀 조용히 스타우트를 곁들여 주고 있었다. 처음 프랜치스의 모습을 본 것은 미세스 닐리였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려 스타우트를 침대에 쏟아 버린 것이다.

그러자 샬로트가 접시에서 시선을 돌렸다. 파란 눈동자가 커다랗게 되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침대에 미끄러지듯이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렸다. 무릎 위에 놓였던 접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미세스 닐리의 목줄기의 동맥이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타우트의 병을 잠옷 속으로 감추려고 어리석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겨우 신음 소리 같은 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먹여서라도 기운을 되찾아 주고 싶었습니다......그런 일이 있은 후이므로......이것은 환자용 스타우트입니다."

그의 죄인 같은 놀란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은 명백했다. 그는 속이 뒤집혀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크게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말을 하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매일 밤 이렇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거죠......테레사 수녀님이 잠든 틈을 타서."

"그런 일을 없습니다, 신부님. 하느님이 증인이십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인하려고 했으나 자기가 생각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울음을 터뜨리며 완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나쁩니까. 불쌍한 이 애가 배를 곯아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내버려 둘 수 는 없는 것이 아닌 가요. 이 애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큰 소동이 될 줄 알았다면......와글와글 사람들은 몰려오고, 신문은 떠들고.....이제 이것으로 이 고통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제발 우리들에게 관대히 대해 주십시오, 신부님."

프랜치스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공박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미세스 닐리."

그녀는 다시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프랜치스는 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녀의 울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리석은 행동, 아니 이런 때에 모든 인간이 행하는 어리석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울음을 그치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시오."

샬로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띄엄띄엄 새어나왔다.

그녀는 언젠가 교회의 도서관에서 성녀 벨라뎃다(1858,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의 환영을 보았다고 하는 벨라뎃다 스필을 말함)의 이야기를 쓴 책을 빌려다가 읽은 적이 있었다. 그후 어느 날 '마리아의 샘' 옆을 지나가는데 문득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는 그녀가 즐기는 산책길이었는데, 이상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거기서 그 물과 벨라뎃다와 자기가 우연히 일치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큰 충격이었다. 그러자 어쩐지 성모 마리아의 모습 같은 것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또한 갑자기 무서워지기도 했다. 전신이 새하얗게 질리고 떨리는 것이 그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누워 버리고, 빨리 밀리 신부를 와 주도록 했다. 그리고 전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신부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날 밤은 밤새도록 황홀 상태에 빠진 채 온몸이 경직되어 마치 나무토막 같았다.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니 몸에 성흔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부상을 입은 적은 있었으나 이번의 것은 전연 달랐다.

그래서 신념은 더욱 굳어졌고 음식을 먹으려고 기를 써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너무나 벅찬 행복감, 너무나도 큰 흥분으로 인해서 무엇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자들은 식사를 하지 않고서도 살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이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밀리 신부와 피츠 제랄드 신부가 찾아왔을 때 자기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했다-그때는 정말 그런 상태였다. 그것은 굉장한 감정을 그녀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그런 후부터 그녀는 주목의 과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물론 시간이 지나자 심한 공복을 느꼈다. 그러나 밀리 신부나 피츠 제랄드 신부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밀리 신부가 그녀를 보는 눈은 참으로 경건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에게만 사실대로 고백했고 그의 어머니도 딸의 거짓말을 숨겨 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샬로트는 매일 밤 한 번 때로는 두 번 듬뿍 식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사태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신부님, 처음에는 참으로 근사했어요.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근사했던 것은 소녀회의 여자아이들이 창밖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드려 준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이 그처럼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그녀는 차츰 겁이 난 것이다. 제발 하느님, 이번 일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싶었다. 테레사 수녀의 눈을 속이는 것도 좀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두 손바닥의 성흔도 점점 희미해지고 흥분이나 황홀 상태도 점차로 비참하리만큼 무겁고 침울한 기분으로 바뀌어 갈 뿐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다시 심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속악하기 짝없는 이야기며 어리석은 인간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 비극의 단편인 것이다.

샬로트의 어머니가 옆에서 말참견을 했다.

"이 일을 제랄드 신부님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으시겠지요, 신부님?"

프랜치스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불쌍하고 측은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이 정도까지 발전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먼저 말하지는 않겠어요, 미세스 닐리. 한 마디도 하지 않겠소. 그러나......" 말을 잠깐 끊었던 프랜치스는 샬로트를 향해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네가 직접 신부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고 말했다.

그러자 다시 그녀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할 수 없어요......제발 신부님, 살려 주세요."

프랜치스는 애원하는 두 사람에게 고해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제랄드 사제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은 바로 본색이 드러날 거짓말 위에 꾸며질 수 없는 일이라고 간곡하게 타일렀다. 그렇게 되면 9일간의 기적도 바로 열이 식어 잊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두 사람을 위로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 후, 반드시 충고에 따르겠다는 샬로트의 확답을 받은 프랜치스는 닐리의 집을 나왔다. 텅 빈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서 잠들어 버린 사제관에 발소리를 죽여 들어서면서 문득 제랄드 신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이튿날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는 하루 종일 외출을 했었기 때문에 그와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제관의 내부에는 뭔가 이상한 공허한 분위기, 일종의 가사와 같은 공기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는 분위기를 감지하는 데 민감했었다. 오늘은 그것이 특히 강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오전 열한 시경 말캄 그레니가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프랜치스! 좀 도와 다오. 제랄드 신부가 모든 계획을 취소한다는 거야. 부탁이니 제발 중간에 들어서 뭐라고 좀 해 다오."

그레니는 가련할 정도로 기가 꺾여 있었다. 얼굴은 핏기를 잃고 입술은 떨리고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왜 제랄드 신부의 계획이 그렇게 됐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닐까. 이런 근사한 계획은 다시는 없을 텐데 말이야. 대단히 잘 되어 갈 텐데......"

"나에게는 주임신부를 설득할 힘이 없어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야, 그럴 리가 있나. 그 사람은 자네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네. 더구나 자네는 신부가 아닌가. 자네가 신부로 있는 것은 신도들의 덕택이 아닌가. 이 일이 잘 되면 가톨릭 신자를 위해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 될 텐데 말이야."

"그런 것은 전혀 당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니오, 말캄."

"아니야, 크게 상관이 있네." 그레니는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열심히 지껄여댔다.

"나는 자유주의자가 아닌가. 가톨릭도 근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훌륭한 종교라고 생각해. 부탁이야, 프랜치스. 늦어지지 않도록 빨리 가서 말 좀 해줘."

"안됐지만 이번 일은 틀렸어요. 우리 모두에게 말예요."

그는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그레니는 완전히 자제심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느닷없이 프랜치스의 팔을 붙잡고 비굴한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를 불필요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말게. 자네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도 우리 덕택이 아닌가 말이야. 나는 그 땅을 사는 데 내 재산을 전부 쏟아 넣었어. 만일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 그게 모두 날아가 버린단 말이야. 우리 집을 파산시키지 말아 다오. 우리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는가. 어떻게 어머니가 자네를 길렀는가 생각해 보라고, 프랜치스. 제발 부탁이니 그 사람을 설득해 다오. 그러면 뭐든지 해줄 테니. 가톨릭 신자가 되라면 되겠어."

프랜치스는 한 손으로 커튼을 움켜 쥔 채 성당 지붕 위로 우뚝 솟은 대리석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인간은 돈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인가. 자기의 영혼을 파는 일까지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레니는 드디어 지쳐 버린 것 같았다. 프랜치스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그는 이번에는 하다못해 자신의 체면이라도 지키려고 태도를 표변시켰다.

"그럼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로군. 그래, 알았어. 오늘 일은 잘 기억해 두겠네."

그는 문 쪽으로 갔다.

"언젠가는 너희들 모두에게 복수해 줄 테니 두고 보라고. 그렇게 되면 죽어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의 창백해진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기를 개에게 물린다는 것쯤은 알았어야 하는데, 더러운 네놈들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는 문을 꽝 닫고 나가 버렸다.

사제관은 여전히 공허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것 같은 모든 것이 허무로 변해 버린 듯한 진공상태와 같은 것이었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상가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발걸음마저도 조심했다. 리투아니아인 신부는 오로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밀리 신부는 눈을 내리깔고 돌아다녔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꾹 참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도 천성적으로 활발한 그를 또 우아한 품위로 감싸 더욱 고상하게 느끼게 했다. 입을 열어도 딴 말만 하고 일체 그 일에 대한 것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해외 포교단의 일에 몰두하여 생각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그레니가 행패를 부린 후 일주일 이상이나 제랄드 신부와는 얼굴을 맞댈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제의실에 들어가니 그가 막 수단을 벗고 있었다. 합창대 소년들은 돌아가고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개인적인 체면 손상이야 어찌됐건 그의 사건 처리 방법은 완벽한 것이었다. 실제 그의 손에 의하는 것은 사건도 사건이 아니었고 재난도 재난이 아니었다. 홀리스 대위는 자진해서 계약을 파기했고, 닐리에게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주선해 주고 이것을 기회로 닐리 일가는 아무도 모르게 살그머니 이사를 해 버렸다. 악착같은 신문의 비난도 교묘히 진정시켰다. 이윽고 일요일이 되자 제랄드 신부는 다시 설교단에 올라섰다. 그리고 물을 끼얹은 것 같은 회중을 앞에 놓고, '그대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하고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조용한 가운데도 격렬한 어조로 연제를 부연해 나갔다.

"교회는 이 이상 어떠한 기적을 필요로 하는가? 교회는 이미 기적으로 그 정당함이 입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기적 위에 깊이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샘과 같은 현시를 만나는 것은 영광된 일이고,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를 고무 격려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포함해서 그것을 위하여 열중했다. 그러나 냉정히 반성해 보면 이미 천상의 꽃이 여기, 이 교회 가운데 우리의 눈앞에 피어 있는데도 다만 한 송이의 꽃을 더 찾았었다고 해서 그와 같은 대소동을 벌여야 했을까? 이 이상 더 물질적 증거가 필요할 만큼 우리의 신앙은 약하고 무기력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보지 아니하고 믿는 자는 행복하느니라.' 이 엄숙한 말씀은 사람들은 잊었단 말인가?"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웅변이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얻은 승리 이상의 것이었다.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희생이 있었던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단상에 서 있는 제랄드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제의실에서 처음 부딪쳤을 때 제랄드 신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준비가 다 되어 까만 상의를 어깨에 걸쳤을 때 그는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제의실의 밝은 광선으로 프랜치스는 사제의 잘 생긴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과 둥근 회색의 눈 속에서 피로한 표정을 읽고 불현듯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짓말은 하나만 한 게 아니더군. 마치 거짓말로 뭉쳐진 사람 같아. 하여간 난처했지만 최후에는 정의가 이기는 거야."

그는 잠깐 말을 중단했다.

"자넨 퍽 좋은 청년이야, 치셤. 자네와 내가 배짱이 맞지 않은 것은 유감천만이야."

그는 의젓하게 제의실을 나갔다. 부활절이 끝날 무렵에는 사건은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제랄드 신부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샘 주위에 둘러 친 울타리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입구의 작은 문은 자물쇠도 걸지 않고 봄의 상쾌한 미풍에 뭔가 감상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때때로 몇 사람의 선남선녀가 기도를 하러 와서는 깨끗하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로 몸을 씻고 가기도 했다.

프랜치스는 바쁜 성당 일에 쫓겨 그 일을 잊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자연히 잊어버린 것을 기뻐했다. 그 사건이 남긴 오점도 점차로 희미하게 엷어져 갔다. 다만 마음 속 밑바닥에 약간의 추한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될 수 있으면 완전히 없애 버리려고 노력을 했다. 성당의 청소년들을 위한 새로운 운동장을 만들자는 그의 제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시의회에서는 공원의 일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가 나왔다. 거기다 제랄드 사제의 승낙도 얻었다. 이제 그는 여러 가지 운동기구 안내서에 파묻혀 운동기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스도 승천 축일 전날 밤 갑자기 오웬 워렌을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연락은 그의 얼굴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러한 연락이 있으리라고는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역시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성당으로 가서 노자 성체(죽을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 그렌빌 거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워렌의 집 앞에서 탈록이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것을 보고 그의 표정은 금세 슬픈 빛으로 변해 버렸다. 탈록도 역시 오웬을 귀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랜치스가 다가가니 그는 완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이젠 최후가 온 건가?" 프랜치스가 물었다.

"으응." 그리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어제 동맥이 막혀 버렸어. 이미 늦었어. 절단해 봤자 틀렸어."

"너무 늦었는가?"

"아니."

탈록의 태도에는 뭔가 광포한 기분을 억제하고 있는 데가 있었다. 그는 어깨로 프랜치스를 난폭하게 떠밀었다.

"난 자네가 꾸물대며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오웬을 보고 왔네. 자네가 들어가 볼 마음이 있다면 어서 들어가 보게."

프랜치스는 탈록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미세스 워렌이 문을 열어 주었다. 회색 옷을 입은 그녀는 쉰 살쯤 된 몹시 야윈 모습으로, 요즘 수주일 동안의 심로로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했다.

"참으로 안 됐습니다, 미세스 워렌."

그녀는 힘없는 소리로 흐느끼듯이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신부님."

그는 깜짝 놀랐다. 슬픔이 그녀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미치게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웬은 침대에 누운 채 붕대를 풀고 환부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몹시 야위고 왜소해진 다리였다. 그러나 그의 양 다리는 완전하고 환자 같은 티가 전혀 없었다.

프랜치스는 탈록이 오웬의 오른쪽 다리를 쳐들고 완전하게 곧은 정강이를 손으로 만져 내려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곪아터져 고름이 더덕더덕했던 곳이다. 탈록의 도전적인 눈이 일부러 아무 설명도 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어지러운 눈을 미세스 워렌 쪽으로 돌렸다. 그때서야 그녀의 눈물이 기쁨에서 나오는 눈물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저는 이 애를 따뜻하게 감싸고 낡은 유모차에 태웠습니다. 저희들은 도저히 체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애는 신심이 두터운 애니까요......어떻게든 마리아의 ''까지만 갈 수 있다면 하고 보챘기 때문에 그곳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올리고 이 애의 다리를 물에 적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오웬이...... 스스로 붕대를 풀어 본 것입니다."

방안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오웬이었다.

"잊지 마시고 저를 새로운 크리켓 팀에 넣어 주세요, 신부님."

밖으로 나온 윌리 탈록은 프랜치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건 틀림없이 현대 의학의 한계를 초월한 뭔가 신비스런 그 무엇이 있을 거야. 회복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세포의 심리적 재생 말이야."

그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그 커다란 손으로 프랜치스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하느님이여! 신이 만일 있다면! 하여간 이 일에 대하여는 절대로 딴 말은 하지 않기로 하겠네."

그날 밤 프랜치스는 아무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커다란 눈을 멀뚱히 뜨고 물끄러미 방안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기적이다. 그렇다. 믿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욜단의 물, 루르드의 물, '마리아 샘'의 물-어느 곳의 물이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흙탕물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라 한다면 믿는 마음에 보답이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지진계가 격동을 기록해 간다. 그것은 신의 불가 지성에 대한 인식의 빛이었다. 그는 열렬히 기도했다. ", 하느님이여! 우리들은 이 세상의 시작마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의 작은 개미와 같은 존재입니다. 몇 백만인지도 알 수 없는 두꺼운 막에 덮여서 오직 한결같이 하늘을 우러러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 신이시여......신이여, 저에게 겸손과......그리고 신앙을 주시옵소서!"

 

3

주교로부터 호출장이 온 것은 그런 일이 있은 지 3개월 후였다. 프랜치스는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부름을 받고 보니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교관으로 가는 언덕을 올라가는 도중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빨리 뛰어왔기 때문에 옷이 흠뻑 젖지는 않았으나 흙탕물이 튀어 옷이 더러워져서 이대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러한 불안은 공식 접견실의 훌륭한 붉은 주단과 진흙투성이가 된 자기의 구두와 젖은 옷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더욱 심해졌다.

잠시 후 주교의 비서가 나타나 앞장서서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 묵묵히 어두컴컴한 마호가니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랜치스는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교는 테이블을 향해 앉아 있었으나 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를 가죽 의자의 팔걸이에 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엷은 햇살이 높은 창문의 빌로드 커튼을 통해 주교의 보랏빛 법관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있었고, 얼굴은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주교의 태연한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 분이 정말 호리웰이나 산 모랄레스의 그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방안에는 벽난로 위에 놓인 나전 세공의 탁상시계가 조용하게 시간을 새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윽고 엄격한 소리가 떨어졌다.

"여어, 프랜치스 신부, 오늘은 어떤 기적의 보고를 가져왔는가. 그렇다면 잊기 전에 묻고 싶은데, 댄스홀의 일은 잘 되어 가는가?"

프랜치스는 느닷없이 목을 졸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할 수만 있다면 살려 주십사 하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주교는 넓은 융단 위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프랜치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늙은이인 내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네처럼 눈부신 실수를 거듭하는 신부를 만나는 것도 또한 대단한 효험 있는 약이 되는 거야. 대개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장의사로서 성공했습니다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기 마련인데 말이야. 자네 그 몰골이 뭔가? 더구나 굉장한 구두까지 신고 있잖은가."

그는 천천히 일어나 프랜치스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 참 잘 왔네. 그런데 퍽 야위었군."

그는 한 손을 프랜치스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어찌된 거야. 옷이 다 젖어 버리지 않았나."

"오다가 비를 만났습니다."

"뭐라고! 우산도 없는가! 이리 불 가까이로 오게나. 뭔가 따뜻한 것을 들어야지."

그는 작은 찬장 안에서 술병과 글라스를 두 개 꺼냈다.

"나는 아직 이런 높은 지위에 익숙하지 못하네.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초인종을 눌러서 주교가 애용하는 고급 포도주를 명하는 것이 예의겠지만 말이야. 이건 보통의 그랜리비트(고급 위스키)인데, 우리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이런 술이 훨씬 적합하다네."

그는 위스키를 따른 작은 글라스를 프랜치스에게 건네주며 그가 마시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마셨다. 그리고 난로 옆에 걸터앉았다.

"지금 높은 지위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무서워하는 얼굴로 날 보지 말게나. 나는 이처럼 거창하게 옷치장을 하고 있지만 이 옷 속에는 스틴챠 강을 벌거벗고 건넌 그 볼썽사나운 몸뚱이 그대로일세."

"프랜치스는 얼굴을 붉혔다.

",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잠시 아무 말이 없었으나 이윽고 주교의 다정스러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네도 무척 괴로운 꼴을 당한 모양이더군. 산 모랄레스를 떠나온 후에......"

프랜치스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 그뿐만 아니라 많은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정말인가?"

", 그렇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는 미리부터......여기에 호출되어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제랄드 신부님의 마음에 들지 못한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마음에만 든다는 건가, ?"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저 자신이 정나미가 떨어져서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반항적 성격 때문입니다."

문득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의 가장 큰 실수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의회 의장인 샨드를 축하하는 연회에 출석하지 않은 모양이더군......그는 이번에 주제단 건립 자금으로 5백 파운드라고 하는 큰돈을 기부한 사람이야. 왜 그러는 건가. 선량한 시의회 의장을 자네가 인정하지 않다니......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은 샨드 가의 빈민굴의 집세 문제를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게 한다고들 하던데......"

"아닙니다......" 프랜치스는 망설이면서 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런 일은 알지 못합니다. 출석하지 않은 것은 제가 나빴습니다. 제랄드 신부가 우리들에게 출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특히 다짐을 하셨습니다. 그 연회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기 때문에......"

"?" 주교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 그날 오후 다른 곳에서 꼭 와 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프랜치스는 그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으나 하는 수 없이 말을 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에드워드 바논......벌써 옛날의 모습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계속 병환 중에 있어서 아주 형편이 없습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은 됐는데 그 사람은 제 손을 꼭 쥐고 제발 더 있다가 가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저는 그 이상한 모습으로 죽어 가고 있는 인간이 참으로 불쌍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마침내 '성스러운 아버지 존, 성스러운 아들 존, 성령이신 존' 하고 중얼거리면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제 선을 꼭 쥔 채 희끗희끗한 텁수룩한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저는 차마 그의 잠든 손을 뿌리치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이튿날 아침까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프랜치스는 거기에서 잠시 말을 중단했다. 듣고 있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겠군. 자네가 성인이 아니라 죄인 쪽을 선택했다고 해서 제랄드 신부의 기분이 상했군 그래."

프랜치스는 머리를 떨구었다.

"저 자신도 스스로에게 화가 납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보다 낫게 하려고 노력은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이상합니다......어렸을 때 성직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우리는 모두 성직자 이전에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단 말인가? 그렇겠지. 물론 자네의 반항적인 성격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지도 몰라. 그러나 그건 우리가 너무 단조로운 신앙생활에 혁신적인 훌륭한 해독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프랜치스, 자네는 방황하는 고양이야. 모두들 따분한 설교를 듣고 하품을 꾹 참고 있을 때, 교회 안에 들어오는 고양이란 말이야. 이건 비유로도 잘못된 것이 아닐 거야. 자네는 다 알고 있는 규칙을 절대로 중요하게 지키고 있는 자네 동료들과 잘 어울리진 못하지만 역시 자넨 성당 안의 인물이야. 이 교구에서 진실로 자네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한 사람뿐일 거야.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뭐 내가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하여간 내가 여기 주교로 있다고 하는 것은 자네에겐 행복한 조건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주교님!"

"내가 본 바로는......." 주교는 깊이 생각하는 어조로 말했다. "자넨 실패를 한 것이 아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거야. 그러니까 좀 더 명랑해질 필요가 있네. 그래, 자넬 치켜세울 생각은 없지만 좋으니까 좀 더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자네는 사물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편이며, 또 정에도 너무 약한 데가 있어. 사고와 회의를 확실히 구별하는 두뇌도 가지고 있네. 자넨 아무나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는, 그리고 내 일이 끝났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사무적이고 규칙적인 사람과는 다르단 말이야. 더구나 자네의 가장 좋은 점은 프랜치스, 신앙이라기보다는 교리에서 생기는 누구나 가진 그 거만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일세."

주교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프랜치스는 점차로 이 노인과 대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시선을 떨군 채로 있었다. 이윽고 주교가 온화한 말로 계속했다.

"물론 이번 일도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자네는 또 고통을 받을 것이 틀림없어. 지금까지와 같이 몽둥이를 휘둘러 대면 또 많은 사람이 상하겠지. 자네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어. 아니, 나는 알고 있어. 자네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자네 생각과는 달라. 자네를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수 없어. 그래서 자네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려고 하네."

프랜치스가 황급히 얼굴을 들자, 주교의 애정이 충만한 눈과 맞부딪쳤다. 주교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한번 나를 위하여 분발해 주지 않겠는가. 나는 자네를 참다운 동료로 생각하고 있네. 내 마음을 알겠는가."

"무슨 말씀이라도......"

프랜치스는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랐다.

주교는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그 얼굴은 조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야......전임은 예상도 안 했을 터이고......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말고 그렇다고 말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자네에게 이 이상 적합한 일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거기에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우리 해외 포교단에서는 간신히 중국에 교구 설치를 하게 됐다네. 여러 가지 수속이 완료되는 대로 그리고 자네의 준비가 되는대로 떠나면 되는데, 어떤가, 모험을 각오하고 최초의 선교사로 중국에 가볼 생각은 없는가?"

프랜치스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동안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주위의 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안이라 해도 이것은 너무나도 뜻밖이며 엄청난 일이라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국을 떠나 친구를 버리고, 그리고 멀고먼 미지의 이국땅으로 길을 떠난다......이런 일은 지금껏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만족감이 전신에 충만해 오는 것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가게 해주십시오."

마그냅 주교는 몸을 굽혀 프랜치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은 젖어 있었으며 프랜치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가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네. 그리고 틀림없이 자네는 나의 체면을 세워 줄 것으로 믿었네. 그런데 거기에 가서는 연어 낚시는 할 수 없을 거야, 알겠나. 그것만은 미리 알아두게나."

 

 

 

4부 중국에서 생긴 일

 

1

1902년 초, 톈진에서 1천마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오지인 절강성을 흐르는 황하의 끝없는 황토 기슭을 따라, 한 척의 정크가 한쪽으로 약간 기우뚱한 채 물살이 거의 없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배에는 그다지 남루하달 수는 없지만 신통치 않은 옷을 걸친 한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보통 체격의 가톨릭 신부이며, 테를 두른 구두를 신고 낡은 헬멧을 쓰고 있었다. 잘라 낸 그루터기와 같은 뱃머리의 나무토막에 말을 탄 듯이 앉아서 성무 일과표를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프랜치스는 큰 소리로 중국어를 연습하다가 그것을 잠시 그쳤다. 침이 말라 버릴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한 탓인지 중국어의 음계는 모두 반음계와 같은 억양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나쳐 가는 갈색뿐인 황토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운데 갑판이 겨우 3피트밖에 되지 않는 선실 안에서 벌써 열흘 동안이나 밤을 보냈으므로 그는 몹시 지쳐 있는 데다, 맑은 공기를 쐬고 싶어 손님들의 보따리며 여기저기 짐이 흐트러져 있는 사이를 겨우 비집고 뱃머리로 나온 것이다. 가운데 갑판에서는 농부들과 센샹에서 탄 바구니 제조공, 갖바치, 마적과 어부, 거기에 파이탄으로 가는 병사와 상인, 그들의 집오리를 담은 큰 바구니와 돼지를 넣은 망태, 단 한 마리지만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하는 산양을 넣은 그물 망태 사이에서 그들은 팔꿈치를 서로 맞대고 담배를 피우거나, 이야기를 하고 또 요리 냄새까지 피우는 등 굉장했다.

프랜치스는 결코 너무 깔끔하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으나,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러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이 너무 추하고 풍겨 오는 냄새가 지독한 데에는 정말 참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오늘밤 드디어 파이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프랜치스는 하느님과 성 안드레아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이 진기한 새로운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멀리 이 외국까지 와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거나 또는 알려고 하는 모든 것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고는 아직도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인생행로가 느닷없이 그 자연스런 방향에서 기괴한 방향으로 빗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속으로 삭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온 무사한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만이 불필요하고 잘못되었으며 약간 비뚤어져 있는 인간인 것이다.

고국에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에는 정말로 괴로웠었다. 네드는 고맙게도 3개월 전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 기괴하고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으로서는 오히려 축복된 최후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폴리 아주머니와는......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기도했다. 그래도 쥬디가 타인카슬의 시청에 타이피스트로 채용된 것은 큰 위안이었다-그 자리는 확실하고 승진의 기회도 많은 곳이었다.

다시 한번 신념을 굳게 하려는 것처럼 그는 이번의 임명에 관하여 최후로 받은 편지를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것은 성 도미니코 성당의 성직을 물러나고, 지금은 오로지 해외 포교단의 일만 맡아보고 있는 밀리 신부에게서 온 것이었다. 주소가 리버풀 대학부로 되어 있는 것은 프랜치스가 거기에서 1년간 중국어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프랜치스 치셤 신부에게

여기에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된 것을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네. 지금 막 접수된 보고에 의하면 알다시피 오는 12월에 해외 포교단 관리국에서 신청한 바 있는 절강성 교구 관할 내의 파이탄 파견에 대한 건이 포교성성에 의하여 이번에 정식으로 재가가 났다네. 타인카슬 해외 포교단에서 오늘밤 개최된 회합에서도 자네의 출발을 더 이상 연기시킬 이유가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지. 드디어 동양에서의 자네의 영광된 선교 활동에 대한 성공을 빌 수가 있게 되었네.

파이탄은 내가 확인해 본 것에 의하면, 다소 오지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강변과 쾌적한 환경을 가진 지방이라고 들었네. 대바구니의 주생산지로 알려진 번화한 도시라고 하더군. 곡류, 식육, 거위 및 열대성 과일 등이 풍부하다더군. 그러나 더욱 중요하고 축복된 사실은, 다소 먼 지리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에 요즘 1년간 불행하게도 사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교가 지극히 성행한다는 점일세. 불행하게도 사진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나는 교회와 사제관의 경내 시설은 극히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믿고 있네(이 경내라고 하는 말에는 어쩌면 그렇게 자극적인 여운이 있단 말인가. 자넨 인디언 놀음을 하던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가. 나의 흥분을 용서하게).

그러나 무엇보다도 잘된 일은 확실한 통계가 있다는 점이야. 1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전임자인 롤러 신부의 연간 보고서를 함께 넣었으나 참고하기 바라네. 나는 이것을 자네를 위하여 분석할 필요를 굳이 인정하지 않고 있네. 왜냐하면 자네가 상세히 연구하고 또한 가장 단시간 내에 완전히 파악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세.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숫자를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이야. 파이탄의 성당은 설립된 지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찬의 영광을 입은 자가 4, 영세를 받은 자가 1천 명 이상이라고 하는 성과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야.

임종시에 영세를 받은 자는 그 가운데 겨우 3분의 1뿐이야. 이것은 기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프랜치스 신부!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이교 사원이 한가운데서도 믿지 않는 신도의 마음에까지 얼마나 큰 감화를 미치는가 하는 좋은 일례가 아닌가.

친애하는 프랜치스, 이러한 선택된 지위가 자네의 것이 되었음을 나는 마음으로부터 기뻐해 마지않네. 그리고 자네의 터전에서 노동에 의하여 실질적인 수확이 더욱 증대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네. 하여간 성공적인 첫발을 기다리고 있겠네. 나는 자네가 드디어 천직을 찾은 것이라 생각하며 동시에 과거에 있어서 자네의 명예를 손상시킨 약간의 이상한 행동이 이제는 자네 일상생활의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프랜치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의 종복인 우리들의 생명의 피와 같다고 생각하네. 나는 자네를 위하여 매일 밤 기도하겠네.

다시 뒤에 소식 전하겠네. 부디부디 여행 준비에 세심한 주의를 바라네. 튼튼하고 질긴 고급 수단을 고르게나. 속바지는 짧은 것이 좋으며 그리고 복대를 준비해야 할걸세. 한슨 부자 상회에 가 보게. 주인은 정직하기 짝 없는 사람이야. 아무튼 본당의 올간 연주자의 사촌이니까.

아마 자네의 상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네. 나의 새로운 지위는 나로 하여금 지구를 한 바퀴 돌게 할 것 같네. 파이탄의 경내에서 만난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라 생각하네. 또다시 진심으로 축하하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자네의 충실한 형제

타인카슬 주교관구 해외 포교단 비서

안셀모 밀리

 

해질 무렵이 되자 정크 속의 소란함은 도를 더했다. 드디어 도착 작전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배는 강을 따라 크게 원을 그리더니 거룻배가 여러 척 붐비고 있는 물이 더러운 항만으로 들어갔다.

프랜치스는 낮은 계단 같은 도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거리는 소음과 노란 불빛으로 북적거리는 벌집 같았다. 바로 눈앞에는 뗏목이나 거룻배들이 점점이 떠 있는 갈대가 무성한 갯벌이 펼쳐지고, 훨씬 멀리에는 희미한 복숭아색과 진주색으로 흐린 산자락이 그 배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성당에서 마중을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중 나온 것은 챠씨 소유의 거룻배뿐이었다. 그는 파이탄의 부유한 상인인데, 지금에야 비단옷을 입고 몹시 무표정한 얼굴로 배 밖으로 나타났다.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쯤 된 것 같으나, 그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 때문에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황금색 피부에 머리칼은 촉촉이 젖어 보일 정도로 윤기가 났다. 선원들이 주위에서 떠들 때도 이 사람만은 움쩍도 않고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프랜치스에게 눈길을 주지는 않았으나, 프랜치스는 어쩐지 그에게 관찰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장이 수속을 세밀하게 했기 때문에 프랜치스가 양철 트렁크를 들고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거룻배로 옮겨 탈 때 프랜치스는 커다란 비단 양산을 꼭 쥐고 있었다. 이것은 치셤의 이름을 새긴 좋은 양산이며, 마그냅 주교가 이별 기념으로 준 것이었다.

기슭에 가까이 오자 선착장에 사람들이 매우 북적거리는 것을 보고 그는 약간 흥분이 되었다. 신도들이 환영을 나와 준 것일까. 긴 여행이긴 했지만 이렇게 열렬히 환영해 주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의 심장은 감미로운 기대로 거의 고통에 가까울 정도로 울렁거렸다. 그러나 내려서 보니 전적으로 자기의 착각인 것을 알았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서글픈 얼굴을 무심히 쳐다보는 군중을 헤치고 치셤은 서서히 나아갔다.

그는 계단을 다 올라가서 갑자기 우뚝 섰다. 눈앞에 중국인 부부가 기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산뜻한 청색 옷을 입고 화려한 색채의 '성가족'그림을 마치 신임장처럼 받쳐 들고 있었다. 그가 멈춰 서자 그 작달막한 두 사람은 한껏 기쁨의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열심히 성호를 그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호산나 왕과 피로메나 왕입니다. 당신 교회의 전도사들입니다, 신부님."

"성당에서 나오셨군요?"

", 그렇습니다. 롤러 신부님은 성당을 대단히 훌륭하게 만드셨답니다, 신부님."

"성당까지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가시죠. 그런데 너무 더우니 우선 저희 집에 들렀다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맙소. 그러나 나는 먼저 성당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시겠지요. 그럼 성당으로 가시지요. 신부님을 위해서 가마를 준비했습니다."

호산나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약간 얼굴을 찌푸렸으나 미소를 머금은 채 뒤돌아보며 빠른 중국말로 알아듣지 못할 말다툼 같은 말을 주고받더니, 두 가마꾼들을 보내 버렸다. 뒤에 남은 사람은 쿠리(중국인 노동자) 두 사람뿐으로, 한 사람은 트렁크를 들고 다른 한 사람은 양산을 들고 일행은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좁고 지저분한 거리지만 정크 속에서 시달려 온 프랜치스에게는 다리를 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뭔가 뜨거운 것이 불현 듯 가슴을 치밀어 올라왔다. 처음 보는 것뿐인 가운데서 인간적인 그 어떤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한 심장을 획득하고 그러한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왕이 멈춰 서서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물 상가에 좋은 여관이 있습니다......1개월에 단 5냥입니다......어떻습니까, 신부님. 오늘밤은 거기서 쉬시는 것이......"

프랜치스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돼요, 호산나. 성당으로 곧장 갑시다."

호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로메나가 기침을 했다. 프랜치스는 그때서야 두 사람이 거기에 서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호산나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신부님, 여기가 성당입니다."

처음엔 그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눈앞의 강둑에 햇빛에 말라 갈라지고 비 때문에 도랑이 생기고, 마구 밟혀 발자국이 수없이 나 있는 물렁한 흙에 에워싸인 1에이커 정도의 황폐한 땅이 있었다. 그 한 모퉁이에 지붕은 날아가 버리고 한쪽 벽은 허물어진 채 남아 있는 벽도 거의 성한 곳이 없는 흙벽돌로 된 성당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키가 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 폐허 가운데 기울어지기는 했으나 아직 초가집 하나가 남아 있었다-마구간이었다.

프랜치스는 약 3분간 그대로 서 있었으나 자신의 바로 옆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쌍둥이처럼 서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왕 부부를 마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된 거요?"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신부님. 돈도 꽤 많이 들었지요-우리들은 이 건물을 위해서 여러 군데서 돈을 융통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롤러 신부님이 성당을 이 냇가에 지었기 때문에 악마가 비를 많이 내리게 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그럼, 신도들은 어디에서 모입니까?"

"그놈들은 나쁜 놈들이에요. 천주님을 믿지 않으려 해요."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보충하면서 손짓 몸짓으로 점점 말을 빠르게 했다.

"신부님, 우리가 얼마나 성당을 갖고 싶어 하는지 알아주십시오. , 롤러 신부님이 가신 뒤 우리들은 매달 받던 15냥의 급료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못된 놈들을 다루기는 정말 어렵습니다요, 신부님."

치셤 신부는 벌써부터 비참한 기분이 되어 그곳을 외면했다. 이것이 자기의 성당이며, 이 두 사람이 유일한 교구민인 것이다. 주머니 속의 편지를 생각하니 불현듯 격렬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굳어진 자세로 서 있었다.

왕 부부는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자꾸만 시내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간신히 돌려보내고 나서야 그 귀찮은 존재들로부터 피할 수가 있었다. 지금 그에게서 가장 큰 위안은 다만 혼자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굳게 결심을 하고 마구간 안으로 트렁크를 운반했다. 일찍이 마구간도 그리스도에게는 충분한 삶의 터전이었던 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흙바닥에는 아직 짚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먹을 것도 물밖에 없었으나 최소한 자신의 잠자리만은 생긴 셈이었다. 트렁크를 열고 모포를 꺼내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서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황급히 마구간에서 뛰어나갔다. 거기에는 두꺼운 각반을 차고 노란 솜옷 장삼을 걸친 노승이 저녁 공양을 위해 손종을 울리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성직자는-불타와 그리스도를 받드는 성직자는-말없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노승은 무표정하게 방향을 돌려 돌계단을 넘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밤은 순식간에 찾아와 어두운 장막을 온 누리에 드리우고 있었다. 프랜치스는 황폐한 경내의 어둠 속에 무릎을 꿇고 빛나기 시작한 성좌를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했다.

"하느님, 당신은 저에게 무에서부터 시작하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저의 허영, 저의 고집과 오만에 대한 벌인 가요.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절대로 중도에서 그치지 않겠습니다......절대로......절대로!"

그는 잠을 자려고 마구간으로 돌아와 귀찮게 덤벼드는 모기와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무더운 밤공기를 뒤흔드는 가운데서 억지로나마 웃어 보려고 했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어리석음에 눈을 뜬것이다. 성 테레사(칼멜 수도원을 개혁한 16세기의 스페인 성녀)는 인생을 여관에서의 하룻밤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가 파견되어 온 이곳은 결코 리츠와 같은 여관은 아니었다.

어쨌든 아침은 부옇게 밝아 왔다. 나무상자에서 성찬배를 꺼내어 트렁크로 성단을 꾸미고 마구간 바닥에 꿇어앉아 미사를 올렸다. 그러고 나니 아주 마음이 상쾌하고 기분도 밝아지고 힘도 솟았다. 호산나 왕이 온 뒤에도 그 기분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부님, 제게 복사를 시켜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 일도 저의 급료에 포함되는 일인뎁쇼. 그건 그렇고-그물 상가에 방을 하나 알아볼까요?"

프랜치스는 생각이 달라졌다. 엊저녁엔 사태가 호전될 때까지 여기에서 살겠다고 확실하게 결심을 했었으나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당한 중심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대답했다.

", 그럼 같이 가 볼까요?"

거리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있었다. 개가 사람의 가랑이 사이로 뛰어다니고, 돼지가 도랑에서 밥찌꺼기를 찾아 코를 박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뒤를 따라와서 킬킬거리며 웃거나 놀려대곤 했다. 거지들이 귀찮게 손을 내밀고 아우성을 쳤으며, 초롱 상가에서는 노점을 차리고 있던 노인이 저런 흉한 코쟁이놈 보기도 싫다는 듯이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프랜치스의 발밑에다 대고 침을 뱉았다. 재판소 앞에서는 순회 이발사가 서서 가위 소리를 시끄럽게 내고 있었다. 빈민이나 불구자가 많이 눈에 띄었고 그 중에는 음이 높은 피리를 불면서 대나무 지팡이로 땅바닥을 탁탁 치면서 걸어가는 곰보 장님도 있었다.

왕이 데리고 간 2층집 방이라고 하는 곳은 종이와 대나무로 대강 칸막이를 해 놓긴 했지만 앞으로 할 일에는 그런 대로 소용이 될 것 같았다. 많지 않은 돈주머니에서 홍이라고 하는 주인에게 한 달 분의 방값을 치르고 그는 지체없이 십자가와 한 장밖에 없는 제대포로 방을 장식했다. 수단과 제단용 비품의 부족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번창하는 성당이라 충분한 설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은 거의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명색만은 갖춘 셈이었다.

왕은 그보다도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걸 내려다보니 홍이 아까 그가 건네 준 돈 중에서 은화 두 개를 머리를 꾸벅꾸벅 하면서 왕에게 주는 것이었다. 프랜치스는 롤러 신부가 남겨 놓고 간 것의 가치는 이미 미루어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보자 갑자기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거리로 나와서 그는 왕에게로 조용히 얼굴을 돌렸다.

"유감이지만 호산나, 나는 당신에게 월 15냥의 급료를 지불할 수 없겠어요."

"롤러 신부님은 주셨습니다요. 신부님은 왜 주시지 못하십니까?"

"나는 돈이 없기 때문이오, 호산나. 우리 주님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요."

"신부님은 그럼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글쎄 한 푼도 지불 못한다니까, 호산나. 나도 급료를 받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야. 우리들에게 보수를 주시는 것은 천주님뿐이오."

왕은 웃음을 잃지도 않고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렇다면 호산나와 피로메나는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가야겠군요. 센샹에서는 메서디스트(신교의 교회)라도 존경받고 있는 전도사에게는 16냥씩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부님은 꼭 후회하실 것입니다. 파이탄은 대단히 적개심이 강한 곳입니다. 주민들은 이 읍내의 풍수설이 선교사들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신부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왕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왕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프랜치스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일한 신도인 왕 부부와 인연을 끊은 것은 과연 잘한 일인가? 아니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왕과 같은 사람은 자기의 친구가 아니라 돈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척하는 아첨꾼이며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자신과 이 도시와의 유일한 유대가 이것으로 단절된 것이다. 그는 갑자기 혼자라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며칠이 지나도 이 무서운 고독감은 정신을 마비시킬 것 같은 무력감과 함께 더해 갈 뿐이었다. 전임자인 롤러 신부는 모래 위에 누각을 지은 것에 불과하다. 롤러는 무능하고 기만당하기 쉬운 사람이었으나,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돈으로 사람을 사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에게나 영세를 해주고 '돈으로 낚아지는 그리스도교도'의 무리를 만들어 놓고는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완전히 속고 있는 것도 모르고 기분이 좋아 위장된 승리에 도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는 않았지만 그 허황된 승리는 이 도시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외국인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인상 이외에 남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생활비를 위한 약간의 돈과 떠나올 때 폴리 아주머니가 억지로 손에 쥐어 준 5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밖에는 돈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않은 프랜치스였다. 더구나 새로 창설된 본국의 포교단에 원조를 요청해도 헛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롤러의 못마땅한 처사에 울분을 느끼며 오히려 돈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음을 긴장시키고 돈으로 신자를 사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본연의 임무를 하느님의 도움과 자신의 두 다리로 성취해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입장으로서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꾸려 놓은 성당밖에 게시판을 내걸었다. 역시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고,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왕 부부가 이번에 온 신부는 가난뱅이며, 까다로운 말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녔기 때문이다.

한번은 재판소 앞에서 야외 설교를 시도해 봤다. 그러나 비웃음만 실컷 샀을 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실패로 그는 심한 굴욕을 느꼈다. 리버풀의 거리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엉터리 영어로 설교하던 중국인 세탁소 주인도 이보다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자기의 무능을 비웃는 악마의 소리와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는 거의 필사적으로 기도를 했다. 그는 기도의 효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하느님, 당신은 과거에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하느님, 이번에도 힘을 주십시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떤 때는 미친 사람처럼 날뛸 때도 있었다. 왜 놈들이 나를, 제법 당연한 것 같은 구실을 엮어 이러한 오지에 보낸 것일까. 이러한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하느님의 힘으로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모든 교통이 차단된 이 오지에선 현상 유지조차 어려운 것이다. 가장 가깝다고 하는 센샹의 치보드 신부도 여기에서 4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왕 부부에 말에 선동되어 그에 대한 시민의 적의는 날로 증대될 뿐이었다. 아이들의 조소에도 그는 익숙하게 되었다. 요즘은 거리를 걸을 때면 젊은 쿠리들이 모여들어 그의 뒤를 따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만일 되돌아서기라도 하면 무뢰한이 다가와서 그의 발밑에 오줌을 싸갈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마구간으로 돌아왔을 때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돌이 날아와 그의 이마에 맞았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프랜치스의 본능을 한층 불타오르게 했다. 상처를 입은 이마에 붕대를 감으며 그 상처로 해서 갑자기 무모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렇다! 그는 결연히 생각했다. 좀 더......좀 더 민중에 접근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그렇게 하면......수단은 아무리 소박해도 상관없다......그리고 새로운 노력을 하면 뭔가 효력이 있어 목적에 근접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튿날 아침, 그는 한 달에 2냥씩 더 지불하기로 하고 아래층 점포의 뒤쪽에 있는 방을 빌려 당장 진료소를 열기로 했다. 그는 전문의는 아니었지만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성 요한 병원에서 응급치료 강습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 수료증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닥터 탈록과의 오랜 교우로 보건 위생에는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 한 사람 진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러나 차츰차츰 호기심에 이끌려 한 사람 두 사람 찾아오기 시작했다. 시내에는 병자가 그칠 새가 없었고 중국인 의사의 치료법은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가 치료한 몇 사람의 환자가 완전히 병이 나았다. 그러나 그는 사례비도 믿음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환자가 늘어갔다. 그는 지체없이 닥터 탈록에게 편지와 함께 폴리에게서 받은 5파운드 지폐를 동봉하여 치료 용품과 붕대와 간단한 비상약을 보내 주도록 부탁했다. 성당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으나 진료소만은 예외였다.

밤이 되면 그는 폐허가 된 성당을 거닐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물이 범람하는 이 장소에 성당의 재건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길 건너 아름다운 '비취 언덕'으로 눈길을 돌려 격렬한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언덕은 몇 개의 절이 있는 위쪽으로 삼나무에 덮여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성당을 세우기에는 그 얼마나 품위가 있고 적당한 장소인가!

이 언덕의 주인은 시의 재판관인 파오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의 시정을 장악하고 있는 호상이나 관리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그도 규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이 토지의 관리를 하고 있는 마흔 남짓한 키가 큰 고급 관리인 파오의 사촌은 거의 매일같이 오후에 나타나 숲속의 점토 채취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돌아갔다.

몇 주일 동안의 고민으로 초췌해진 프랜치스는 기분이 몹시 침울했고, 더구나 소외감과 굴욕으로 정신도 심상치 않았다. 자기는 아무것도 가지고 잇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생각 없이 거리를 가로질러가 가마를 타고 가는 키가 큰 파오의 사촌을 불러 세웠다. 그는 이렇게 직접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실제로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의식도 하지 않았다. 요즈음 식사를 해본 적도 없었고 더구나 미열이 있어서 머리도 멍한 상태였었다.

"당신이 관리를 하고 계신 모양인데, '비취 언덕'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긴 했으나 그래도 파오 씨의 사촌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이마에 더러운 붕대를 감은 이 작달막한 외국인의 예의로 대하여 바라보았다. 그는 냉정하면서도 은근하게 신부가 몇 번이나 문법상의 오류를 범하면서 말하는 것을 난처해하면서 자기의 일, 가족의 일, 그리고 자기의 재산에 관한 것은 화제에 올리지 않고 날씨라든지 농사라든지, 작년에는 이 도시가 와이 츄의 비적단에게 돈을 주어 물리친 괴로운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난 다음 성큼성큼 자기 가마의 문을 열었다. 프랜치스가 현기증이 나는 머리로 '비취 언덕'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비취 언덕은 넓이가 60무 이상이나 되고 값을 칠 수 없을 만큼 금싸라기 땅입니다......나무도 물도 풀도 있고요......더군다나 기와와 벽돌, 도자기의 재료가 되는 질이 매우 좋은 찰흙의 채취장이기도 하지요. 파오 씨는 팔 의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습니다......은화 15천 냥으로 사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상했던 값보다 10배나 되는 것을 알고 프랜치스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열은 이미 내린 것 같으나 갑자기 몸이 노곤하여 현기증을 느끼고 자기가 지금까지 꿈꾸고 있던 어리석음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면서 파오 씨의 사촌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도 알 수 없는 변명을 했다.

프랜치스의 실망을 눈치 챈 중년의 깡마른 교양 있는 중국인은 조심스럽게 얼굴에 경멸의 빛을 떠올렸다.

"신부님은 왜 중국에 왔소? 댁의 나라에는 갱생시킬 나쁜 인간이 없단 말인 가요? 우리들은 나쁜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은 당신의 하느님보다 오래된 하느님입니다. 다른 신부님은 임종에 처한 인간에게 작은 병에 든 물을 떨어뜨리면서 '야아, 오오!' 하는 노래를 부르며 많은 그리스도 신자를 만들었습니다. 입을 것이 있고 배만 부르면 무슨 노래라도 부르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자꾸 옷과 음식을 주어 많은 그리스도 신자가 늘어나긴 했지요. 신부님도 그런 방법으로 하실 겁니까?"

프랜치스는 한참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야윈 얼굴은 초췌하여 핏기도 없고 눈은 움푹 패였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파오 씨의 사촌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실례했습니다."그는 매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제가 잘못 안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신부님은 정직한 분이십니다."

그는 가책을 느꼈는지 약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좋은 땅이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파오 씨의 사촌은 아까의 무례를 보상이라고 하려는 것인지 이번에는 은근한 태도로 신부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랜치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정직하게 말해서 여기에는 참다운 그리스도교도가 없습니까?"

파오 씨의 사촌은 천천히 얘기했다.

"아마 없을 겁니다. 파이탄에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무리한 얘기죠." 거기에서 잠시 말을 중단하였으나 다시 "콴산 속에 그런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먼 산자락을 막연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마을은 훨씬 옛날부터 그리스도교도의 마을이라고 불렸죠. 그러나 굉장히 멉니다. 여기에서 수백 리나 떨어져 있으니까요."

프랜치스는 초췌해진 어두운 마음에 뭔가 번쩍 밝은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건 참 근사한 일이군요. 좀 더 상세히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은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원 가운데 있는 작은 마을인데......아무도 모를 겁니다. 내 사촌 동생이 양피 구입 관계로 그 마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말에 프랜치스는 애원조로 말했다.

"그 사촌 동생에게 물어 봐 주실 수 있습니까? 거기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지도 같은 것이 있다면 더욱 좋겠구요."

파오 씨의 삼촌은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촌에게 물어 보지요. 그리고 당신이 대단히 훌륭하다는 것도 전하겠습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전혀 뜻밖의 희망으로 프랜치스는 완전히 활기를 되찾았다. 폐허가 된 성당에는 모포 몇 장과 물을 넣는 가죽부대와 거리에서 산 약간의 도구로 원시적인 야영 설비가 되어 있었다. 쌀을 사용하여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의 손은 쇼크를 받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마을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것은 피로에 지쳐 버린 결실이 없는 요즘 수개월을 통해서 처음으로 얻은 감동이여, 하느님의 계시이기도 했다.

그는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서 긴장된 기분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물가에서 뭔가 썩은 고기라도 서로 다투듯 새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귀찮아 일어나서 그는 밖으로 나가 새떼를 쫓아 버렸다. 추하게 생긴 큰 새들이 울면서 건너쪽으로 날아갔다. 잘 살펴보니 새들의 먹이였던 것은 갓난 여자아이의 시체였다.

그는 전율을 느끼면서 찢긴 시체를 강에서 주워 올렸다. 질식시켜서 강에 던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이 작은 시체를 린넨 천에 싸서 성당 마당 한 구석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렇다. 자기는 여러 가지로 자신을 갖지 못했으나 결국 이 이국의 땅은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2

그런 일이 있은 지 두 주일 후 신록의 계절에 겨우 여행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물 상가의 셋방에는 일시 폐쇄라고 페인트로 쓴 표찰을 걸어 놓고, 모포와 식량을 가죽끈으로 묶어 어깨에 짊어지고 양산을 한 손에 들고서 그는 활기 있게 출발했다.

파오 씨의 사촌이 준 지도는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네 귀퉁이에는 불을 토해 내는 용의 그림이 있고, 산까지 매우 상세한 지형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지명이 아니라 작은 동물 형태의 스케치식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프랜치스는 그들의 이야기와 자기의 방향감각으로 길에 대한 것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콴산을 향하여 걸음을 빨리 했다.

여행을 떠난 지 이틀째까지는 평평한 시골길이었으나 푸른 논은 어느 사이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침과 같은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숲속은 마치 탄력성 있는 융단을 밟는 것 같았다. 콴산 기슭의 입구 바로 옆 야생의 석남화가 불처럼 타는 협곡을 건너갔다. 그 꿈같은 오후, 그는 은행 나무숲을 가로질러 갔다. 그 근처는 포도주의 향기처럼 코를 자극하는 향기로 충만해 있었다. 거기를 지나자 이번에는 산협의 험준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좁은 돌투성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감에 따라서 점점 추위를 느껴야 했다. 그날 밤은 세찬 바람소리와 협곡을 흐르는 해빙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바위틈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대낮에도 높은 산꼭대기에서 차갑게 빛나는 하얀 눈을 바라보면 눈동자가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얼음처럼 차가운 대기는 폐부를 찌르는 듯하였다.

5일째에는 산마루에 닿아 빙하처럼 얼어붙은 황무지와 바위와 바위의 사이를 넘어서 드디어 반대쪽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 고개를 지나 설선을 넘으니 신록의 푸르름이 눈에 스며드는 넓은 고원이 있고, 거기서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둥근 작은 산들이 잇닿아 있었다. 이것이 파오 씨의 사촌이 설명하던 초원이었다.

여기까지는 꾸불꾸불하긴 했으나 어떻게든 산길을 따라 올 수 있었으나 이곳에서부터는 하늘의 도움과 자석과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감각으로만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서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 근처는 고국인 스코틀랜드의 고원과 흡사했다. 수도승과 같은 얼굴로 풀을 뜯고 있는 산양과 들염소 떼를 만났으나 동물들은 그가 다가가자 미친 듯이 도망쳐 버렸다. 또 나는 것처럼 달리는 영양의 모습도 보였다. 진한 감색으로 보이는 널따란 늪 가 풀섶에서는 수천 마리의 오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하늘이 캄캄할 정도로 날아갔다.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직 따스함이 가시지 않은 오리 알을 훔쳐서 보따리에 넣었다.

길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평원이었다. 이러다간 목적하는 마을에 도달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9일째 아침, 이제는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멀리 앞에 양치기의 움막이 눈에 띄었다. 남쪽의 경사지를 내려와서 처음으로 보는 인가였다. 그는 내달리듯 움막까지 걸어갔다. 입구는 진흙으로 칠해졌고,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러나 실망으로 일그러진 눈을 들어 휘둘러보니 양떼를 몰면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양치기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양치기는 열 일곱 살 정도며 양과 마찬가지로 작달막했으나 단단한 체격이었다. 명랑하고 영리할 것 같은 얼굴에는 놀라움과 웃음이 섞어 있었다. 소년은 양피로 만든 반바지를 입고, 모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목에는 해묵어서 종이처럼 얇아진 표면에 비둘기가 새겨진 원시대의 청동제 십자가를 걸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소년의 솔직할 것 같은 얼굴에서 고풍스런 십자가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조용히 소년에게 인사를 하며 류 촌사람이냐고 물었다. 소년은 미소를 지었다.

"전 그리스도교 마을의 사람입니다 .저는 류따아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마을의 사제이시거든요." 소년은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는 듯 바로 덧붙였다. "마을엔 사제가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치셤 신부는 소년에게 좀 더 물어 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참으로 먼 곳에서 왔단다. 역시 나도 사제야. 어때, 나를 그대의 마을에 데려다 주지 않겠는가?"

마을은 거기에서 서쪽으로 5리쯤 들어가 기복이 심한 골짜기에 있었다. 이 고원의 산자락에 숨은 듯이 돌담을 둘러친 약간의 밭 사이의 집이라고 해야 고작 30채 정도의 부락이었다. 중앙의 작은 동산에 느티나무 그늘 아래 돌을 쌓아올린 원추형의 묘한 무덤 뒤에 돌로 지은 성당이 눈에 돋보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기에다 개들까지 와글와글 떠들면서 소매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구두를 만져 보고는 탄성을 올리며 양산을 이모저모 살펴보기도 했다. 그 동안에 소년이 알 수 없는 사투리로 모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60명 정도 될 것 같은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원시적이었고 건장했으며, 순박하고 상냥한 눈을 가지고 있어 용모가 자못 동계 가족에서나 볼 수 있는 특유한 것이었다. 이윽고 소년이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부친인 류찌를 데리고 왔다. 짧은 반백의 수염을 기른 그는 쉰 살쯤 된 작달막한 체격의 사나이로 언행은 적이 소박하고 기품이 있었다.

류찌는 의미가 통하도록 천천히 발음을 했다.

"신부님, 우리는 진심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어서 저의 집으로 가셔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잠깐 쉬시지요."

류찌는 치셤 신부를 교회 옆 돌축대 위에 지은 가장 큰집으로 안내하여, 천장이 낮고 서늘한 방에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방의 한 귀퉁이에는 마호가니의 스피네트(피아노의 전신이라고 일컫는 현악기의 일종)와 포르투갈제 시계가 놓여 있었다. 놋쇠로 만든 문자판에는 '리스본 1632'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류찌가 말을 걸어왔으므로 그는 시계에서 눈을 돌렸다.

"미사를 드려 주시겠습니까, 신부님. 그렇지 않으면 제가 할까요?"

치셤 신부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으로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무의식중에 엉뚱한 대답을 해 버렸다.

"당신이......하시지요."

그는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 불가사의한 기분을 말로 옮기려면 조잡하게 되어 오히려 쉽사리 깨질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침묵을 지키면서 신의 자비를 지켜보자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반시간쯤 지나서 모두 교회에 모였다. 규모는 작았으나 회교 사원의 모습과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홈을 새긴 세줄의 소박한 아케이드(복도)가 있고 통로와 창은 굴곡이 없는 곧은 피라스타로 떠받쳐져 있었다. 벽면은 미완성인 데도 있으나 유연한 모자이크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이 열성적인 회중의 맨 앞줄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성당에 들어오기 전에 깨끗이 손을 씻었다. 남자와 여자 거의가 기도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때 종이 울리고 색이 바랜 황색 수단을 입은 류찌가 두 사람의 젊은이를 거느리고 제단으로 나왔다. 그는 돌아서서 치셤 신부와 회중을 향하여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치셤 신부는 꿈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으로 매료된 것처럼 똑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미사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미사는 구식 그대로였으며 미사의 감동적인 옛 면모를 전해 주고 있었다. 류찌가 라틴어를 알 까닭이 없었으므로 기도문은 물론 중국말이었다. 처음엔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사도 신경을 모두 같이 외웠다. 그가 제단에 올라가 나무 제대 위에 놓인 양피지의 미사 경본을 읽었을 때, 프랜치스는 이 나라의 말로 장중하게 독송되는 복음서의 1절을 똑똑히 들었다. 원전에서 번역된 것이다......그는 외경심에 사로잡혀 문득 숨을 죽였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체를 하기 위하여 차례차례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도 제단 아래까지 데려오도록 했다. 류찌는 쌀로 만든 술이 담겨진 성배를 손에 들고 내려왔다. 그 술에 손가락을 적시어 모두의 입술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었다.

교회를 나가기 전에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상 앞에 모여서 불을 붙인 향을 십자가 아래에 있는 무거운 촛대에 꽂았다. 그 의식이 끝나자 각각 세 번 엎드려 절을 하고 공손히 밖으로 나갔다. 치셤 신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 단순하고 유치한 경건성에 이미 감동되었다. 그것은 스페인 농민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건함이었고, 역시 똑같은 소박함이었다. 물론 지금의 의식은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타란트 신부가 보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희미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할 것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류찌는 그를 집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치셤 신부는 배가 너무 고팠다-산양 고기 스튜와 배추 수프에 작은 고기 경단을 띄운 것과, 그 뒤에 나온 쌀과 천연의 꿀로 빚은 이상한 요리를 그는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프랜치스는 차근차근 류찌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절한 노인은 아무 의심 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노인의 신앙은 확실히 그리스도교였으나 아이 놀음 정도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도교(노자에서 비롯된 철학으로 중국 민간 풍습에 큰 영향을 주었다)의 풍습과 혼합되어 나타났다. 거기다가 어느 정도는 경교(그리스도의 2성설을 주장, 이단자로 몰려 이집트로 추방된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교. 당나라 때에 중국에 전래함)도 혼합되었는지 모른다고 치셤 신부는 나름대로 생각하니 내심의 미소를 금치 못했다.

류찌의 설명은, 이 믿음은 선조 대대로 몇 대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마을은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벽지인 것만은 틀림이 없고, 사실 이 마을은 모두가 한 집안 식구 같았으므로 다른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교란 당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전형적인 목축 생활을 하고 있고 식량은 자급자족했다. 아무리 심한 한발이 들어도 곡물과 양고기만은 충분히 저축되어 있었으므로 걱정이 없었다. 또 양의 위에 넣은 치즈나 콩으로 만든 장이라고 하는 버터(된장을 말함)도 있었다. 옷은 자가제의 양모가 있고, 방한용으로는 모피가 있었다. 또 이 양피는 북경으로 가져가면 값이 비싼 양피지를 만들 수 있었다. 고원에는 야생의 조랑말이 많이 있었다. 때로는 가족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 양피지를 그 조랑말에 싣고 장사하러 나가는 것이다.

이 작은 부족은 세 사람의 사제를 두기로 되어 있었는데 각각 어릴 적에 이 명예로운 지위에 선출되는 것이다. 신직의 사례는 쌀로 납품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삼보위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삼위일체를 말한다. 고로들에게 확인해 보아도 정규로 임명을 받은 사제라고는 이 마을에서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치셤 신부는 노인의 말을 열심히 들이며 가장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했다.

"처음에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그것은 아직 말씀하시지 않으셨군요."

류찌는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평가하는 것 같은 눈으로 손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안심한 듯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돌아왔을 때에는 양피지로 얌전히 싼 종이 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종이 다발을 건네주고 치셤 신부가 그것을 펼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신부가 빨려 들어갈 듯이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것은 포르투갈 어로 쓴 리비에로 신부의 일기였다. 색은 바래고 얼룩투성이의 남루한 것이었으나 거의 모든 부분을 판독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프랜치스는 스페인어 지식으로 어림하여 천천히 해독을 할 수가 있었다. 끌려 들어가는 재미에 해독하는 것이 조금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그는 마치 못 박혀 버린 것처럼 때때로 무겁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 외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대는 3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움직이지 않은 채로 옛 시계가 시간을 새기기 시작한다.

 

마누엘 리비에로는 1625년에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는 리스본의 선교사였다. 프랜치스는 이 포르투갈인의 모습을 눈앞에 환히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물 아홉 살의 청년, 가냘픈 몸매, 올리브색 피부, 성질은 약간 거친 편이고 열정적인 반면 겸허한 까만 눈동자를 가졌다. 이 젊은 선교사는 베이징에서 다행하게도 위대한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와 친교를 맺었으나 샬 신부(1591~1666)는 선교사임과 동시에 순치 황제(청의 세조, 1644--1661 재위, 샬을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한다)의 총애를 받은 충신이며 천문학자이고, 황제의 명을 받아 법전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하다. 궁정의 계속되는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람들의 손가락질 한 번 받지 않게 처신했으며, 후궁들에게까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 혜성의 출현과 일식의 시기를 정확히 짚어 냈으며 가차 없이 적의 증오를 분쇄하고 새로운 역서를 편찬하는 등 많은 신임과 함께 그 자신과 선조들의 이름까지 빛내는 영광을 얻고 있었다. 리비에로 신부는 수년에 걸쳐서 이 놀라운 사나이의 비호 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 포르투갈인은 샬 신부에게 머나먼 달단의 궁정에 포교를 간청했다. 아담 샬은 즉시 그 간청을 들어주도록 했다. 완벽한 여행대가 조직되고 강력한 무장을 갖추었다. 1629815일 일행은 베이징을 출발했다.

그러나 여행대는 달단의 궁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콴산 북방 중간에서 오랑캐에게 습격당했을 때 강대함을 자랑하는 호위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그 때문에 완벽하게 꾸려졌던 여행대는 순식간에 약탈을 당하게 된 것이다. 리비에로 신부는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고 소지품과 성직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가지고 간신히 도망쳤다. 그는 눈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이것이 마지막이라 체념을 하고 아픈 몸을 신에게 맡겼다. 그러나 상처는 추위 때문에 얼어붙어 생명을 되찾았다 .이튿날 아침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양치기의 움막에 다다랐다 .그대로 거기에서 반 년동안 생사의 기로를 헤매었다. 한편 리비에로 신부가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 때문에 수색대는 결국 파견되지 않고 끝나 버린 것이다.

포르투갈인은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담 샬에게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었으나 그는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 광활한 초원의 고원에서 그는 새로운 가치의 의식, 새로운 명상의 습관을 얻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이징은 3천리나 먼 곳에 있었고, 아무리 불굴의 정신을 가졌다 해도 도저히 귀환의 가망은 없었다. 그는 결심을 하고 몇 사람 되지 않은 양치기들을 모아 여기에 한 부락을 만들고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벗이 되고 목자가 된 것이다. 달단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얌전하고 온순한 사람들을 위하여.

 

프랜치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일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물어 가는 햇빛을 받으며 조용히 앉아 상념에 빠져서 갖가지 환영을 좇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옆에 있던 커다란 돌무덤에 가 보았다. 그리고 리비에로 신부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는 류촌에는 일주일 정도 머물러 있었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설득하여 세례와 혼인 성사를 받도록 권했다. 때에 따라서는 부드럽게 말하여 교회 사무를 조금씩 정정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 마을을 엄정한 정교의 법규에 완전히 합치시키기에는 아마도 몇 개월은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몇 년을 필요로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서서히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작은 마을은 맛있는 능금처럼 오염되지 않고 더구나 모두의 생각은 건전하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밤이 되면 류찌의 집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주위에 옹기종기 앉으면 그는 입구의 계단에 앉아서 조용히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들 자신과 똑같은 하느님을 밖의 넓은 세계에서도 믿는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차이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가 유럽의 교회나 본산의 대사원 성 베드로(로마에 있는 가톨릭 교황청의 대사원) 성전에 무리를 이루어 모여드는 순례자 이야기, 위대한 국왕이나 왕자, 정치가나 귀족이라 할지라도 천주님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끓는다는 이야기, 또 그들이 이 마을에서 예배하고 있는 같은 천주님이 그 사람들에게도 주이시며 벗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마을 사람들 모두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황홀해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추측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자기들도 이 세계와 한 몸이라고 하는 의식은 모두에게 큰 희열과 자랑을 심어 주었다.

희미한 모닥불 빛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진실한 얼굴은 기쁨과 놀라움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그를 황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열성 어린 얼굴을 보니, 바로 눈앞에 잠들어 있는 리비에로 신부가 어둠 속에서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순간에는 파이탄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단순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여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광야의 한가운데서 뜻하지 않게 발견한 이 보석을 사랑으로 갈고 닦아 훌륭하게 빛낼 수가 있을 터인데. 그러나 여기 머물 수는 없다. 마을은 너무나도 작고 또 벽지였다.

이런 곳을 참다운 포교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결연히 유혹을 물리쳤다.

류따이 소년은 그가 어디를 가든 따라 다녔다. 소년에게 세례를 줄 때 요셉이란 이름을 주었으므로 이제 그는 요셉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었다. 요셉은 이 새로운 이름에 힘을 얻어 치셤 신부의 미사에 복사를 하겠다고 간청했다. 물론 라틴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요셉이었지만 치셤 신부는 웃으면서 이를 승낙했다. 이윽고 출발하기 전날 밤, 치셤 신부가 집 앞에 앉아 있는데 요셉이 나타났다. 언제나 명랑하던 얼굴은 근심에 싸여서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으러 온 것이다 .그러한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동안에 치셤 신부는 그 슬픔의 원인을 알아내고 무척 기뻤다.

"요셉,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은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말이야. 네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많이 있어요."

소년은 환성을 지르며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키스를 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찬성입니다. 저는 마음으로부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괴로운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요셉. 그래도 괜찮은가?"

"어떤 길이라도 함께 하겠습니다, 신부님."

치셤 신부는 무릎을 꿇은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감동해 마지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드디어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 요셉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털북숭이 조랑말 옆에 있는 짐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 무리의 사내아이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도 신이 나서 바깥 세계의 경이에 대하여 지껄이며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더욱 사게 하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류찌가 손짓으로 불렀다. 가보니 굴 속 같은 제실로 안내했다. 그는 나무상자에서 수를 놓은 제의를 꺼냈다.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근사한 것이었다. 비단천이 종이처럼 얇아진 곳도 있었으나 미사복으로서는 완전하고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노인은 프랜치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런 하찮은 게 마음에 드실는지요?"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럼, 받아 주십시오.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몇 번이고 사양했으나 류찌는 한사코 가져 갈 것을 바랬다. 프랜치스는 곱게 싸서 요셉의 짐 속에 넣도록 했다.

드디어 그들에게 작별을 할 때가 되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축복을 빈 후 6개월 이내에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하여 모두를 안심시켰다. 이번에는 말을 타고 오겠으며, 요셉이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조랑말을 타고 언덕을 올라갔다. 애정을 듬뿍 담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은 두 사람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좇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요셉과 나란히 경쾌하게 말을 몰았다. 다시 자기의 신앙이 소생하고 훌륭히 확증된 느낌이었다. 그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에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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