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 4
15. 이사의 배신
진왕 영정 13년(BC 234년), 왕명을 받아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조나라 정벌에 나선 번기는 출병을 명령받자 매우 기분이 좋았다. 지난 봄에 번기는 조나라의 평양성(平陽城)을 공격하여 적장 호첩(扈輒)을 주살하고 조나라 병사 15만 명을 참수하여 대공(大功)을 세운 바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영정과 왕료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병사들에게 행군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이 빠른 행군에 지쳐 하나 둘 낙오되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에는 종희(鐘喜)라는 청년 군관도 참여하였는데, 그는 이전에 현리(縣吏)의 벼슬을 지낸 바 있었다. 통일 전쟁이 가열되자 영정은 각지에 조서를 내려 각 현에서 일정 수의 관리를 선발하여 전투에 참가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지방 관리들에게 전투를 몸소 경험케 하는 동시에 행정에 밝은 그들을 통해 부대의 지휘 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 바람에 종희도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희는 입대 통지서를 받은 후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말을 한 필 사서 부리나케 집결지에 도착하였다. 숱한 훈련 과정에서 종희는 줄곧 좋은 점수를 얻었고 국위 왕료의 눈에 띄어 칭찬도 받았다. 때문에 종희는 자신에게 당연히 백부장의 직위가 내려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번기는 엉뚱하게도 후군에 편입시켜 양식을 관리하게끔 하였다. 선봉을 맡고 있는 전군(前軍;동서, 중, 전후의 5군 중 선봉 부대)이나 중군(中軍)에 속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싶었던 종희는 후군에 남아 양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자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황혼이 지자 병사들은 행군을 멈추고 야산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어이, 양관(糧官)! 선두에 나서서 용맹하게 싸워야 할 청년이 이게 무슨 꼴인가?"
늙은 병사가 종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이, 번표자가 온다, 조용히 하라구!"
한 병사가 소리쳤다.
번기는 그 생김새가 그의 족형(族兄)인 번우기와 매우 닮았다. 검은 수염에 강인한 얼굴을 한 번기는 처음 오장(伍長)의 낮은 직책에 있었을 때 맨손으로 표범을 때려잡아 번표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직위가 점점 높아져 장군에까지 이르렀지만 괴팍한 성격은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지난날 성교 공자와 번우기가 모반을 했을 때 번기는 그에 동참하지 않았고, 이후 영정의 총애도 잃지 않았다. 영정은 번기를 늘상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 부르며 그의 용맹을 아꼈다.
측근 몇 명을 대동하고 군영을 순찰하던 번기가 종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빨리빨리 막사를 설치하고 양식을 배분해야지 그렇게 게을러서야 어떻게 대군을 먹일 수 있겠느냐?"
번기가 나타나자 종희는 갑자기 큰소리를 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 소리에 번기가 고개를 돌려 종희를 바라보았다.
"오, 자네였구만. 남군(南郡)에서 온 청년이 맞지?"
종희는 번기가 자신을 알아보자 용기를 얻고 말했다.
"장군, 저를 전군이나 중군에 배치시켜 주십시오."
"전군이나 중군이 얼마나 힘든지 그대는 아는가? 칼을 들고 휘두를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번기가 종희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종희같이 나약한 서생이 어떻게 선봉에 나설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그런 번기의 표정에 종희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말머리를 돌리려던 번기가 갑자기 종희에게 물었다.
"양관, 자네는 남군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안륙현(安陸縣)에서 어사(御史), 영사(令史)를 지냈습니다."
"그럼 경험은 조금 있겠군. 안륙현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틈이 나면 중군으로 나를 찾아오게나."
말을 마친 번기가 그 자리를 떠나면서 소리쳤다.
"먼저 양식이나 제대로 잘 관리하게, 헛생각하지 말고. 그런 다음에 다른 일을 생각해야지!"
번기의 마지막 말에 종희는 마음이 들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나라의 번기가 대군을 이끌고 한단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은 신속하게 조나라의 조정에 전해졌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이날 이른 아침부터 조왕은 대신들을 불러 대전에서 긴급 회의를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왕은 임금의 자리에 올라 연회를 열고 오락을 즐기는 데에만 바빴을 뿐 조정의 정사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이를 본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조왕에게 충고했다.
"위가 바르지 못하면 아래를 바르게 하기 어렵고, 굽어 있으면 바로 펴기가 어렵사옵니다."
그러나 조왕은 이런 충고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왕궁, 관부 그리고 대신들의 저택과 심지어 저잣거리의 작은 상점에까지 온갖 사치품이 흥청망청 흘러넘쳤다. 이럴 즈음 진나라 대군이 조나라를 공격하자 백성들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여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랐다.
조왕이 창백한 얼굴로 대신들에게 말했다.
"지금 진나라의 번표자가 무서운 기세로 우리 땅을 쳐들어오고 있소.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경들의 생각을 말씀해 보시오."
조왕의 말에 대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조왕이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대신들 중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모습에 조왕은 매우 낙담하여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대전에는 홀(笏;조회 때 손에 쥐던 패)이 가득한데 자신있게 나서서 말하는 사람 하나 없다니......"
"대왕,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진군이 의안(宜安;지금의 하북성 석가장 부근)으로 들어올 시점에 맞춰 아군을 비성(肥城;하북성 고성 부근)에 집결시킨 후 방비하도록 하면 쉽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비성은 지세가 험난하여 지키기는 쉽지만 공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옵니다."
승상 곽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는 조나라의 승상직에 무려 이십 년이나 있었지만 기개와 담력이 부족하여 언행에 늘 자신이 없었다. 곽개는 말을 마친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공자 가(嘉)를 발견하였다.
공자 가와 조왕 천(遷)은 모두 조도왕(趙悼王)의 아들로 왕위를 놓고 보자면 가가 윗사람이므로 당연히 조왕이 됐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조도왕이 천의 생모인 소첩을 총애하는 바람에 왕위가 서자인 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큰아들이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가는 항상 불만이 가득했지만 조왕 천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그동안 조회 때마다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조나라의 운명을 가늠짓는 위기 상황이었다. 게다가 침묵 끝에 승상 곽개가 내놓은 계책이라는 것이 너무도 소극적이고 위험하기 짝이없었다. 가는 도저히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진군은 남쪽으로는 업성, 평양을 점령했는데 그곳과 국도인 한단성과는 불과 이틀 거리밖에 되지 않으며, 서쪽의 진군은 알흥(閼興)을 함략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북방의 요새는 이미 번기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비성이 방비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어찌 계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나라는 몇 년 사이에 국토를 반이나 잃었습니다. 망국의 재앙이 곧 우리 곁에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잃는다면 조상의 영전 앞에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조왕 천은 형인 가의 말에 기분이 나빴지만 워낙 위급한 상황인지라 속으로 꾹 참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국난을 이겨낼 수 있겠소?"
"대왕, 소신은 우선 조정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회를 당장 중단하고, 아울러 나라를 좀먹는 간신배들을 모두 뿌리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잠깐, 지금 과인에게 필요한 것은 번표자에게 대항하는 방책이오."
조왕이 자신의 충고를 듣기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가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대왕, 염파(廉頗)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를 부르십시오."
가의 제안에 눈을 번쩍 뜬 조왕이 대신들 사이에 앉아 있던 대부(大夫) 조고(趙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 대부는 대량에 갔다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 어찌하여 여태 보고를 올리지 않는 거요?"
얼마 전 조고는 염파를 다시 조나라로 불러들여 병권을 맡도록 설득하라는 조왕의 명을 받고 염파가 피신해 있는 위나라 대량을 다녀왔었다. 조고는 조왕의 물음에 얼른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대왕, 명령을 받들고 대량으로 갔다가 다시 한단으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만 지금까지 대왕을 알현할 길이 없어 보고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
조왕은 지난 사흘 동안 연회에 빠져 조회조차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에 천은 조고를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소?"
조고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쇠한 염파 장군이 어떻게 그런 대임을 맡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는 소신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무려 세 번이나 측간에 갔다왔습니다. 그런 몸으로는 도저히 조나라의 대장군을 맡을 수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조고의 보고에 곽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왕, 사정이 그러하오면 조총(趙蔥) 장군을 보내 막으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가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조총 장군의 군이 지금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데 반해 적장 번기는 우리의 북쪽을 공격하고 있사옵니다. 비성에 집결한 우리 병력을 도우러 오는 조총의 군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그 전에 번기에 의해 함락될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그리고 만일 비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북쪽은 더 이상 지킬 만한 요새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는 것이 왕형(王兄)의 생각이시오?"
조왕이 화를 내며 가에게 소리쳤다.
"대왕, 노여움을 푸시고 소신의 다음 말을 들어주옵소서. 비성을 지킬 수 있는 장수는 오로지 이목(李牧) 장군뿐이옵니다. 그는 북쪽의 장성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흉노(匈奴)를 격파한 전공이 있는 줄 아옵니다."
그제서야 조왕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형의 뜻에 따르겠소. 이목 장군을 급히 비성으로 떠나게 하시오."
조왕 천은 이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몹시 피곤한 듯 용상에 몸을 깊숙이 뉘였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이번 전투가 빨리 끝나 연회를 베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기만 바랄 뿐이었다.
조회가 끝나자 조고는 서둘러 관부의 밀실로 들어가 서가에 꽂혀 있는 <법경(法經)>이라는 죽간을 꺼냈다. 죽간 안에는 둘둘 말은 백서 몇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탁자에 펼친 조고는 붓을 들어 급히 밀서를 써 내려갔다.
'신 조고는 삼가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대진국(大秦國) 번기 장군께 보고를 올립니다. 조왕은 어리석고 용렬하며 덕이 없어 백성들은 이미 그에게 등을 돌렸고, 조나라의 산하는 피폐 직전에 있습니다. 이럴 즈음 진의 의로운 군대가 일어서니 하늘이 이에 손뼉을 치고 땅도 함께 기뻐합니다. 소신 비록 재주는 없지만 그간 줄곧 진나라를 공격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지금 한단성은 텅 비어 있으니 하루빨리 비성을 공략하고 이곳으로 오십시오. 장군의 대군이 밀어닥치면 안에서 호응을 하겠습니다. 아울러 비성의 병력 배치도를 첨부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고는 가장 믿는 측근에게 밀서를 건네며 말했다.
"이번 출정에서 반드시 이 밀서를 번기 장군의 군영으로 보내야 한다. 이 일이 무사히 치러지면 너의 후사가 보장될 것이다."
이 시각 진나라 대장군 번기는 중군영(中軍營)에 돌아오자 곧바로 종희를 불렀다. 막사에 들어선 종희의 눈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번기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 종희인가?"
잔뜩 취기가 오른 번기가 반갑게 종희를 맞이하며 자리를 권했다. 종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 놓여 있는 의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가서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번기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안륙현의 도(圖) 현승(縣丞)을 아는가?"
종희가 얼른 대답했다.
"바로 소인의 상관입니다. 하지만 임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숙하지는 않습니다."
"오, 그래? 그는 매우 충직하고 기개가 있는 사람이지. 자네와 나는 어쨌든 한 고향 사람이 아닌가. 옛말에 친하든 그렇지 않든 한 고향 사람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이 있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내 반드시 그대를 천거하려 하네."
번기가 불그스레해진 얼굴을 탁자에 기대며 종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희는 이제껏 번기를 용맹한 장수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있는 그의 모습은 매우 비겁하고 용렬하며 무책임해 보였다.
종희의 비웃는 듯한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번기는 혼잣말처럼 연신 중얼거렸다.
"자네가 나를 알게 된 건 아주 행운이지. 만일 왕료와 같은 인간을 따랐다면 틀림없이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을 거야. 잘 보라구, 이번에 한단성을 단숨에 무너뜨려서 그의 코를 납짝하게 만들고 말 테니."
종희는 왕료를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번기가 자기 앞에서 국위인 왕료를 비난하자 너무 기막혀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술에 취한 번기는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 계속 횡설수설했다.
이때 밖에서 병사가 큰소리를 보고를 해왔다.
"왕 도위(都尉)께서 오셨습니다!"
"응, 왕 도위라고? 어서 들라 하라."
번기는 왕 도위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위 왕분(王賁)은 진나라 최고의 명장 왕전의 큰아들이었다. 그의 나이는 열여덟 살에 불과했지만 무예가 뛰어나고 전술에도 밝아 그간 많은 전공을 세운 바 있었다. 때문에 왕분의 명성은 하늘을 치솟았고 번기 또한 일찍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다.
"우리 진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장수는 왕전 대장군과 왕분, 그리고 이신이라오."
언젠가 어느 주연에서 번기는 이렇게 말하며 왕분을 극구 칭찬하였다. 그 가운데 왕분과 이신은 젊은 나이로 두 사람 다 도위직에 올라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채 막사 안으로 들어오던 왕분이 시큼한 술냄새에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주장(主將)께서 금주령을 어기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조나라는 비성의 방어를 위해 대장군 이목을 보냈다고 합니다. 조나라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요지를 점거하고 있는데 장군께서는 어찌 술로 세월을 보내십니까? 빨리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십시오."
"이목? 하하하, 이목이라고? 왕 도위, 이목이 대체 어떻다는 말이오? 그러지 말고 도위도 와서 한 잔 하시오. 이는 주군께서 하사하신 어주(御酒)라오."
번기는 이렇게 말하면서 술잔에 가득 술을 따라 왕분에게 건넸다. 마지못해 술잔을 받은 왕분이 그것을 탁자에 집어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번기를 노려보았다. 그런 왕분의 행동에 번기는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왕 도위는 염려놓으시오. 조나라놈들쯤은 내 한 주먹에 날려보낼 수 있소."
"장군, 교만한 병사는 반드시 패한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목은 비록 적장이지만 교활하고 지혜로우며 경험이 풍부한 장수입니다. 일찍이 저는 이목이 적은 병사를 가지고 많은 적군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여러 번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수천 명의 병력으로 흉노 10만 대군을 격파한 조나라 최고의 장수입니다. 동호(東胡)를 물리치고 임호(林胡)를 항복시킨 이목을 조나라 사람들은 염파 장군 다음으로 훌륭한 장수라고 손꼽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리는 마땅히......"
열변을 토하던 왕분이 문득 구석 자리에 앉은 종희를 발견하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하급 장교 앞에서 군사 기밀을 발설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에 번기가 웃으며 말했다.
"염려할 필요없소. 저 자는 후군의 군량관(軍粮官)으로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오. 안륙현에서 이번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름은 종희라고 하오."
번기의 설명에도 왕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종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즈음 조나라 대장군 이목은 조왕의 명령을 받고 비성으로 달려갔다. 이목은 예상보다 빨리 사흘이나 먼저 비성에 도착하였는데, 그 사흘이라는 시간은 조나라에게 세 가지 커다란 이득을 안겨 주었다.
우선 조나라는 이목이 일찍 나타난 덕분에 비성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게 되었고, 둘째는 혼란스러웠던 방비 태세를 빠른 시간 안에 재정비할 수 있었다. 셋째로 군 내에 있던 밀정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큰 이득이었다. 밀정을 잡은 이목은 조고가 번기에게 보내는 밀서의 내용을 거짓으로 다시 꾸민 다음 조나라 간자를 진군에게 보냈다. 간자의 밀서를 받은 번기는 곧 승리를 자신하고 여유만만하게 시간을 보냈다. 번기는 그 밀서를 조고가 보냈다고 굳게 믿고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감쪽같이 번기를 속인 이목은 진군을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일사천리로 갖추기 시작했다. 이목은 어두운 밤을 이용해 삼경에 밥을 짓고 사경에 군막을 정리하도록 명령하고, 부장(副將) 사마상(司馬尙)에게는 정예병을 선발하여 왕분이 지휘하는 진의 전군(前軍)을 섬멸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군 일부는 우회시켜 진군의 퇴로를 막게 하였다. 또한 그는 진의 전군이 무너지면 곧바로 대군을 이끌고 번기가 지휘하는 중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의도는 진나라 군대를 전멸시킬 수 있는 대담한 책략이었다.
마침내 오경이 되자 조군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진의 중군영은 매우 조용했다. 수병(戍兵)들은 대부분이 졸고 있었다. 날은 칠흙처럼 어두웠고 하늘의 먹구름이 대지를 짓누르듯 깊게 깔려 적막감이 더했는데, 그사이 안개 같은 가는 비만이 바람에 흩날리며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냈다.
조군이 중군영을 급습하자 잠에서 덜 깬 진나라 병사들은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대나무 잘리듯 바닥에 엎어졌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의 붉은 피가 안개비에 섞여 삽시간에 사방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조군은 너무나도 쉽게 진군의 중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진군의 진영은 점점 안정을 되찾아 대항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 십, 졸로 편성된 진나라 병사들은 그간의 엄격한 훈련과 자신의 역할에 맞춰 대오를 구성하고 반격을 시도하였다. 왕료가 계획하고 지도한 진군의 대오가 서서히 위력을 나타내자 이목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사마상의 정예병을 손꼽아 기다렸다.
왕분이 이끄는 진군은 야습하는 조군을 미리 발견하고 철저한 방어진을 구성하며 이들을 기다렸다. 조군이 아무리 사기 충천하다고 하지만 오랜 시간 상당한 훈련을 거친 왕분의 전군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정도 조군의 기습을 막아낸 왕분은 일부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중군영으로 달려갔다.
이 시각 막사에서 잠을 자던 번기는 갑작스런 조군의 침입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군영은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곳곳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조군들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횃불 틈 사이로 보였다. 이미 진군의 중군영은 조군에 의해 대부분 점령당한 상태였는데 그런 고립된 상황에서도 진군은 조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포위를 뚫기에 정신이 없었다.
번기는 그런 혼란한 틈을 타 재빨리 갑옷을 챙겨 입고 말에 올랐다. 그때 마침 번기의 모습을 발견한 조군이 벌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번기는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포위를 뚫고 내달렸다.
"적의 간계에 속아 이렇게 당하다니!"
호위병들의 도움으로 겨우 포위망을 뚫은 번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앞쪽에서 조군을 막아낸 왕분의 군이 중군영에 합류한 것은 이미 아침이 지나 오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대장군인 번기가 달아나자 중군영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가 사방에 진군의 주검이 널렸으며 막사로 사용되었던 천막과 깃발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이미 2만의 진나라 병사와 7천의 조나라 병사들이 쓰러진 뒤였다. 그리고 대세는 조나라에게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왕분은 분전하고 있는 백부장을 통해 번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왕분은 전군(前軍)과 중군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후군(後軍)의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후군의 상황도 거의 전멸 직전이었다. 주력군인 중군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원군을 기다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후군의 병사들은 죽음을 다해 군영을 방어하며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때 왕분의 지원군이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것이 병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후군의 진영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던 종희는 너무나 반가워 마구 소리쳤다.
"원군이 온다! 번표자가 달려온다!"
지원군의 출현에 후군의 병사들은 갑자기 사기가 치솟아 맹렬하게 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목은 애초에 진의 후군 정도는 쉽게 섬멸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후군의 저항은 끈질기고 강력했으며 게다가 중군과 전군의 병력이 후퇴하면서 이들과 합세를 하자 사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목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이목의 명에 진의 전군을 추격하던 사마상이 어리둥절해 하며 소리쳤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적을 섬멸할 수 있는데 어찌 멈추라 하십니까?"
그러자 이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투는 계책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번기의 군대를 모두 섬멸한다 해도 겨우 진나라 군대의 열에 하나 정도를 없앤 것뿐이지. 하지만 우리의 병력은 이미 열에 두서넛은 상실했어. 이렇게 전투를 계속하면 승리는 하겠지만 우리는 병력의 반을 잃을 걸세. 그러나 승리의 요체는 아군의 손실을 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조나라 군대는 번기의 병력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고 비성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조나라가 승리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한단성에 전해졌고, 조왕 천은 비성으로 한걸음에 달려와 이목의 공을 칭찬하고 그를 무안군(武安君)에 봉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왕분은 서둘러 남은 병력을 수습한 뒤 함양성으로 돌아와 죄를 청하였다. 영정은 곧바로 왕분을 대전으로 불러들였다. 뜻밖에도 영정이 아주 온화한 표정으로 왕분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번 전투의 패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오?"
왕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울먹이며 대답했다.
"대장군인 번기 장군은 적을 가볍게 여겼으며, 첩자의 말을 너무나 쉽게 믿었사옵니다. 더욱이 전투가 있던 날 밤 장군은 술에 취해 지휘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사옵니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자 번 장군은 조군의 포위를 뚫고 달아났사옵니다."
영정은 묵묵히 왕분의 말을 끝까지 다 들었다. 곁에 앉은 대신들은 영정이 왕분의 보고를 들으면 틀림없이 진노하여 크게 벌을 내릴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정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죄는 번기에게 있고 잘못은 과인에게 있소. 출전하던 날 그에게 주의를 주었어야 했는데 과인이 그저 용맹하다고 칭찬만 해 주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 같소."
영정의 머릿속에 번기가 출전하던 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날 영정은 친히 교외에 출행하여 주연을 베풀고 번기의 출전을 위로하였다. 영정으로부터 어주와 군포(軍袍)를 하사받은 번기는 단숨에 한단성으로 내달아 조왕의 목을 바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진 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10만의 진나라 정예 병력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그렇게 말한 장본인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말았다.
영정은 힐끗 국위 왕료의 표정을 살폈다. 왕료는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번 출전에 얽힌 숨겨진 뒷이야기는 영정과 왕료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영정이 번기를 대장군으로 지목하면서 단숨에 조나라를 쳐서 멸망시키자고 한 데 반해, 왕료는 왕전을 추천하면서 우선 조나라의 변경을 압박하고 그 후에 외교적 노력으로 승리를 취하자고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왕료의 판단이 옳았다. 영정이 내세운 번기는 제 용맹만을 믿고 섣불리 나섰다가 무참하게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영정은 이런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왕료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왕료는 자신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영정의 눈길을 의식하고 입을 열었다.
"대왕, 화(禍)는 복(福)에 의지하고 복은 화에 숨어 있사옵니다. 번기 장군이 아주 작은 패배를 당하였을 뿐인데 뭐 그리 걱정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옛말에 곡식을 따낸 풀줄기도 쓰일 데가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국위의 뜻은?"
영정이 물었다.
"척(尺)도 짧을 때가 있으며, 촌(寸)도 길 때가 있는 법이옵니다. 풀줄기는 풀줄기의 쓰임이 있는 법, 거기에는 단단한 나무줄기가 필요없사옵니다. 그래서 진목공께서는 백리해를 세 번이나 중용하셨던 것이옵니다. 만일 한두 번의 잘못으로 백리해를 버리셨다면 어떻게 그가 후에 진군(晉軍)을 격파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누구라도 한 번쯤은 실수할 때가 있는 것이옵니다."
왕료의 말에 영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분에게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당시의 엄격한 진율에 따르면 전쟁에 패한 번기는 참수형이었고, 그의 부장인 왕분 또한 대죄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정은 왕료의 말에 따라 패장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이에 대신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다만 왕료만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었다.
'나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국위에 올라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했다. 더욱이 대왕께서는 나를 존중하여 위료(尉僚)라고 부르시니, 나 왕료는 마땅히 진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해야 한다.'
그 후로도 영정은 번기와 왕분의 죄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고 또한 이들을 용서하는 데 결정적인 조언을 한 왕료를 한층 더 존경하였다. 영정은 이번 전투의 패배를 교훈삼아 일국의 군주가 갖춰야 할 소양을 쌓고 널리 현사를 모으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우선 이사를 재촉하여 한비를 진나라로 초청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진나라는 왕료가 국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조정의 질서가 잡히고 산업이 부흥하여 지난날보다 더욱 강성해졌다. 안으로는 좌승상 창평군과 어사대부 풍거질, 태부 왕관, 중서자(中庶子;관원이 올린 범죄자의 죄상을 심리하는 벼슬) 몽의가 문무백관을 다스렸고, 군사와 외교 분야는 군주인 영정과 국위 왕료가 맡고 있었다.
객경 이사는 축객령이 거두어진 후 영정에게 계속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인재들이 많은 조정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때문에 이사는 비록 심사가 불편했지만 적국의 대신을 매수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왕료가 제창한 원교근공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방책을 연구하느라 온종일 고심하였다.
이사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나 세찬 북풍이 부는 엄동설한에도 쉬지 않고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교섭을 했다. 특히 이사는 왕료를 천거한 바 있는 요가를 수행원으로 선발하여 함께 중국 대륙을 돌아다녔다. 한나라 출신인 요가는 이사의 언변과 열정에 반하여 그를 믿고 따라다녔는데, 이사 또한 처음에 좋지 않았던 감정을 버리고 그와 함께 적국의 맹장이나 충신을 매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이사는 사람을 부리는 기술이나 세력을 확장하는 방법을 하나씩 터득해 나갈 수 있었다. 그즈음에야 비로소 이사는 영정이 그렇게도 찾는 한비를 진나라로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비만이 왕료의 세력을 견제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왕료가 뿌려놓은 곡식이 점점 자라 열매를 맺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며 매일같이 팔뚝만한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어부의 심정으로 밀실에 들어가 각국의 밀정들이 보내오는 선물과 밀서를 확인하였다. 이날 영정의 책상 앞에 놓인 함에는 제나라 조정의 고위직에 있는 밀정이 보낸 밀서와 위와 한나라의 밀정이 보낸 병력 배치도가 들어 있었다. 영정은 자신의 손 안에 각국의 사정이 한눈에 들어오자 매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이 때문에 군사상의 작은 실패나 변경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백성의 저항 따위는 이제 그를 조금도 초조하거나 불안하게 만들지 못했다.
영정은 천하가 곧 자신의 품에 들어올 것임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밀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동안 무한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밀서들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밀서가 들어 있는 함을 한 쪽 구석으로 치운 영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이사는 어찌하여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내가 조나라 한단성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사고를 당했나, 아니면 한비를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인가."
영정은 그렇게 며칠 동안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이날 밤도 영정은 밀서를 뒤적이다 말고 울적한 마음에 뜰로 나섰다. 이때 환관이 급히 달려오며 말했다.
"이 객경이 돌아왔습니다."
이 말에 영정은 너무나도 기뻐 환관을 제쳐놓고 대전으로 달려갔다. 이사는 영정이 들어오자 예를 올린 후 말했다.
"조 승상 곽개의 말에 의하면 대부 조고는 우리 번 장군에게 밀서를 보낸 사실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하옵고, 이목은 이번 승전으로 무안군에 봉해졌사옵니다. 한편 조나라 백성들은 방탕한 조왕을 원망하면서 대왕께서 하루빨리 한단성에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영정은 이사의 보고를 들으며 각국의 조정과 궁중에 밀정을 심어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절감했다. 하지만 영정이 그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적군을 섬멸하는 전략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교훈들이었다.
마침내 이사가 영정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비의 소식을 전했다. 우선 그는 소매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영정에게 올렸다. 그것을 받아 펼치던 영정은 두루마리 첫머리에 쓰여진 '세객난(說客難)'이라는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정은 정신없이 그 내용을 훑었다.
이때 태의가 급히 들어와 영정에게 보고했다.
"국위 왕료 대인께서 병으로 쓰러졌사옵니다."
이 말에 영정은 두루마리를 거두고 오가를 대령케 하였다.
국위부(國尉府)는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영정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황급히 왕료가 누워 있는 국위부로 달려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몰골이 초췌하게 변한 왕료는 두 눈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유난히 빛났다. 반짝거리는 눈빛 속에 영정에게 하고픈 말이 절절히 배어 있는 듯했다. 한참 동안 영정을 응시하던 왕료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소신은 원래 몸이 약했는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도저히...... 도저히 회생할 가망성이 없사옵니다...... 대왕마마의 은혜를 모두 갚아야 하는데...... 먼저 가게 되어 죄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영정은 왕료의 말에 그만 목이 메어 얼른 장작깨비 같은 그의 손을 잡았다.
"경은 그렇게 나약한 말을 하지 마오. 과인은 그저 하루빨리 회복하기만 기다리고 있겠소."
그러자 왕료는 처연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신은 가난하고 모자란 선비인데도...... 대왕마마의 커다란 은혜를 입어 직위가 삼공에 버금가고...... 이름이 후세에 남게 되었사옵니다...... 하지만 평생 소원이었던 한 가지 일을 하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게 되었으니......"
"경의 뜻을 알았으니 그만 말하시오. 천하통일의 위업은 내가 꼭 이루겠소."
왕료는 영정이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듣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것이 아니옵고...... 소신은 개인적으로 한 가지 일을 꼭 이루려고 했사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한비를 대왕마마께 천거하는 일이었사옵니다."
"그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소. 내 이미 한비 선생의 소재지를 알아냈다오. 보시오, 이게 바로 그의 새로운 저작인 '세객난'이오."
영정은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왕료에게 건넸다.
"이것이 한비 선생의 작품이옵니까?"
영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신이 병이 들어 감히...... 예의를 표하지 못하고 한비 선생의 저작을 보니...... 죄송스럽기 짝이없습니다."
왕료는 자리에 누운 채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글을 읽는 그의 눈이 점점 더 빛을 발하였다.
"한비 선생은 정말로...... 천하의 기재(奇才) 중의 기재이옵니다!"
왕료의 메마른 입술에 경탄의 미소가 흘렀다.
"선생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저 따위는 결코 선생의 발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겨우 말을 마친 왕료가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과인도 그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오. 그와 더불어 국사를 논하는 게 소원이라오."
그러나 왕료는 영정의 말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태의가 얼른 왕료의 맥을 짚었다.
"대왕마마, 국위 대인은 이미 숨을 거두었사옵니다."
영정은 왕료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비의 '세객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토했다.
"왕 선생마저 내 곁을 떠나니 이제는 한비 선생을 진나라로 불러들여야 하리."
영정은 왕료의 장례를 융숭하게 지내라고 지시한 후, 이사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영정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비 생각뿐이었다. 더욱이 왕료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라도 한비는 더욱 필요했다.
하지만 이사는 왕료가 그렇게 사라지자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왕료를 견제하기 위해 한비를 진나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왕료가 없어진 진나라에서 영정에게 필요한 사람은 오로지 이사 자신뿐이었다. 이때부터 이사는 한비를 진나라로 들이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이사의 속셈을 알 길 없는 영정은 한비를 진나라로 불러들일 방법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한비 선생을 불러들일 수가 있겠소?"
그러자 이사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4년 전에 초나라의 공자였던 황해(黃해)가 이원(李園)에게 피살당하자 은사이신 순황 선생은 초나라를 떠나 사방을 주유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사옵니다. 그런 일이 있자 한비 사형은 순황 선생님의 3년 상을 지낸 뒤 지난해 고국으로 돌아갔사옵니다."
"그렇다면 양적(陽翟;한나라의 수도)으로 돌아갔단 말이오?"
"양적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의 상경직을 맡고 있사옵니다."
"아까운 보배가 진흙 속에 있구나. 어떻게 하면 한비 선생을 함양성으로 모셔올 수 있겠소?"
영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만 너무나 어려운 일이옵니다."
"이 객경, 선생을 진나라로 모셔올 수만 있다면 내 그대를 정위(廷尉)로 삼겠소."
영정은 오직 한비를 데려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말에 이사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움직였다. 정위는 법을 담당하는 최고 직책으로 구경(九卿) 중에서도 실권이 가장 높았다. 이사가 생각해 두었던 계책을 영정에게 설명했다.
"한왕은 매우 유약하고 겁이 많으므로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압박하면서 한비를 요구하옵소서. 틀림없이 한왕은 한비 사형을 진나라에 보낼 것이옵니다."
이사의 계책에 영정은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한나라 안왕(安王)이 왕위에 오를 즈음 이미 한나라는 더 이상 나라의 부흥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상태였다. 게다가 왕위에 오른 지 6년이나 된 한안왕은 국세를 떨치고자 하는 큰뜻이 애당초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한나라는 국토가 더욱 좁아지고 국력이 약해져만 갔다. 게다가 이 해에는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나라의 살림이 엉망이 되었고 백성의 곤궁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자 국사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한안왕은 왕실 종친이기도 한 당대의 대학자 한비를 도성인 양적으로 초빙하여 그에게 정사 일체를 맡겼다.
한비가 한안왕의 명을 받고 한나라의 조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나라 대군이 쉬임없이 국경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양적의 민심은 흉흉해져만 갔다.
"진나라가 공격하는 이유는 영정이 한비를 만나보고 싶어서 그런데."
양적에는 한비에 관한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한안왕은 어쩔 수 없이 한비에게 이 일을 알아서 수습하라는 명을 내렸고 한비도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승낙을 하였다. 한비는 한나라의 조정에 출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기 세력이 거의 없었고, 더욱이 진나라의 압박이 워낙 드세어 사신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 한 몸 던져 고국을 위기에서 건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영정 14년(BC 233년), 마침내 한비가 한나라 사신의 신분으로 진나라에 도착하였다. 영정의 명을 받은 이사는 한비를 영접하기 위해 함양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곳에까지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나라 국경을 넘어 함양성으로 들어가던 한비는 진나라의 거리 곳곳마다 펼쳐진 모습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던 넓고 기름진 평야에서 진의 백성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수레에서 내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한비는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소박하고 희망에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국경과 성 안팎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함양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즈음 한비는 뜻밖에도 사제(師弟)인 이사를 만나자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사를 다시 보게 되니 그동안의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한비는 이사가 예를 다하여 자신을 영접하는 모습에 깊이 감동하였다. 한비는 높은 벼슬에 오른 이사를 보며 그가 진나라에서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수레에서 내려 반갑게 이사의 손을 잡았다.
"이, 이, 이 사제, 난능의 학궁(學宮)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소? 서, 서,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지던 때를 잊지 않았소? 사, 사, 사제가 떠나면서 '형, 형제의 정(情)이란 손과 발처럼 몸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오."
이사는 한비가 먼 길을 여행한 피곤함도 잊고 순황 아래에서 함께 수학했던 시절을 이야기하자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이사 또한 한비의 말에 감동하여 뜨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침 저녁으로 책을 읽고 토론하던 그때의 즐거움을 어찌 잊고 있겠습니까?"
"사, 사제는 정말로 훌륭하게 되었구료. 은, 은사께서는 늘 사제를 생각하셨는데, 사, 사제가 결국 뜻을 이루었구려."
한비는 이사의 옷차림에서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벼슬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사의 입신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번에 내가 진나라로 들어온 이유는, 바로 사, 사제의 곁에서 은, 은사의 학술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오."
한비의 말에 이사의 마음이 다시 냉랭해졌다.
'흥, 착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온 사람은 착하지 않다는 말이 생각나는군.'
이사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르며 한비에게 말했다.
"사형께서는 먼 길에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일찍 쉬시고, 내일 대왕을 만나도록 하십시다."
한비와 함께 함양성에 도착한 이사는 그를 국빈관(國賓館)에 들게 한 후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이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한비에게 속삭였다.
"사형, 진법(秦法)은 아주 가혹합니다. 제가 비록 집법(執法)의 책임자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사로이 용서해 줄 수 없을 정도이지요. 사형께서 조정에 나아가 뜻을 펼칠 생각이시라면 먼저 뛰어난 공을 세우셔야 할 것입니다."
"사, 사제는 내 뜻을 오해하였소. 나, 나는 무엇을 바라고 진나라에 온 것이 아니오. 그저 인연에 따라 일을 하게 되면, 바, 반드시 은사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리라는 생각뿐이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너무나 훌륭합니다."
이사는 한비의 뜻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웃었다. 한편 이사의 음흉한 속셈을 알 리 없는 한비는 그가 자신의 뜻을 이해하자 마음이 매우 편해졌다.
잠시 후 이사가 한비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형의 재능은 진나라의 승상이 되어도 충분합니다. 다만 내일 대왕을 만나시는 자리에서 귀신(鬼神)을 섬기지 마시라고 강력하게 권하십시오. 만일 대왕께서 귀신 섬기는 일을 중단하신다면 사형은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우시게 되며 백성들도 모두 기뻐할 겁니다."
"하, 하지만 그건, 사, 사안이 너무 미묘해서......"
한비가 난처한 얼굴을 하자 이사가 급히 말을 이었다.
"사형은 진나라에 처음 오셔서 모르시겠지만 대왕께서 지나치게 귀신을 믿는 바람에 많은 일을 그르치고 계십니다. 이에 그동안 많은 신하들이 간언을 했으나 효과가 없었는데, 만일 사형께서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반드시 성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알았소."
한비는 그때까지 진왕이 현명하여 인재를 널리 초청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조금 전 이사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은 한비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덧 인시가 끝나가 새벽 여명이 문틈으로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한비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는 밤새워 다음날 진왕을 만난 자리에서 할 말을 생각했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바람에 한비는 이따금씩 몸을 뒤척이며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이, 이사의 모습이 너무 훌륭해 보이지 않은가. 내, 내일 반드시 진왕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을 중단시켜 공을 세우고 말겠노라."
한비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려뜨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뿌연 안개 속을 헤치며 이사가 한비를 영접하러 왔다. 이사가 길을 재촉하자 네 필의 준마가 이끄는 수레는 힘차게 국빈관을 떠났다. 함양성의 거리는 매우 번화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나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한비의 눈에 들어왔다. 전날은 날이 어두워 제대로 함양성의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태양빛에 훤히 드러난 성의 거리는 소박하면서도 복잡했고 활기에 가득 넘쳐 있었다. 한비가 탄 수레는 쏜살같이 거리를 지나더니 어느덧 함양궁에 이르렀다.
너른 궁중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고 커다란 수목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하늘나라의 궁전도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하지는 않으리라.'
진한 풀꽃 향기를 맡으며 한비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마침내 한비의 눈 앞에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나타났다. 진왕이 정사를 집행하는 대전이었다. 이사가 얼떨떨하게 서 있는 한비를 이끌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왕마마께 인사를 올리십시오."
이사는 한비에게 이렇게 이르면서 먼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한비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무릎을 꿇으려 해도 무릎이 굽혀지지가 않았다.
이런 한비의 모습에 진왕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엄하도다! 일개 백성이 감히 왕에게 예를 표하지 않다니, 이는 군왕을 능멸하는 처사로 엄하게 죄를 묻겠도다!"
진왕의 호통이 멈추자 갑자기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이 대전에 울려퍼졌다. 곧이어 검은 구름이 밀려오고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기둥을 세차게 후려쳤다. 마치 '호랑이가 산에서 포효하니 계곡에서 바람이 일고, 용이 못에서 요동을 치니 구름이 피어난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대전이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한비는 너무도 두려워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아무리 해도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는 함께 온 이사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이사는 진왕 곁에서 그런 한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 이 사제, 나, 나를 구해주오!"
한비의 애원에 이사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아니하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는 법(知足不辱知止不殆)'입니다. 그런데 사형은 족함과 그침을 알지 못하니 어찌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사의 말에 한비는 그가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깨닫고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이 사제, 무, 무엇 때문에 나를 벼랑으로 몰아넣는 거요? 지난날 맹, 맹세한 말은 모두 잊었소?"
그러나 한비의 애끓는 절규에도 이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미소만 띨 뿐이었다. 그러자 한비가 계속 소리쳤다.
"형, 형제의 정은 손과 발같이 몸에서 떼, 떼어낼 수 없다는 그 말을 벌써 잊었단 말, 말이오?"
이때 한비를 맞이하기 위해 이른 아침 국빈관에 당도한 이사는 한비의 방문 앞에서 그의 잠꼬대를 들으며 속으로 흠칫 놀랐다.
소리를 지르며 안간힘을 쓰던 한비 또한 문 밖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잠 못 이루던 지난밤 끄트머리에서 짧은 순간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이사는 방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한비가 이마의 땀을 씻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형,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사의 다정한 말에 한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 방금 전에 악몽을 꾸었소. 나, 나갈 채비를 하겠으니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한편 영정은 한비가 함양성에 당도하였다는 보고에 설레임과 기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날 아침 일찍 조회를 마친 영정은 귀빈을 맞이하는 구빈대의(九賓大儀)의 예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침내 한비를 만난 영정은 그에게서 한나라의 국서를 받는 즉시 주변의 대신들을 모두 물리쳤다. 한비와 둘만의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한비를 존경해 왔던 영정은 그와 국사를 논하고 마음에 들면 지난날 국위였던 왕료와 같은 대우를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동안 영정은 한비의 저서를 거의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예리한 필치와 뛰어난 논리에 탄복했었다. '글은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낸다(文如其人)'는 말처럼 영정은 그런 글을 쓴 한비가 늠름하고 기개가 넘치며 뛰어난 언변을 지녀 많은 사람들을 굴복시킬 만한 인물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비에 대해 한없이 부풀었던 영정의 기대는 그를 만나는 순간부터 깨지지 시작했다.
한비는 영정이 꿈꾸어 왔던 기백이 철철 흘러넘치는 사내대장부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수줍은 환관처럼 입술이 붉고 피부는 백설같이 고왔으며 얼굴선이 무척 부드러웠다. 게다가 화려하고 섬세한 옷을 입은 까닭에 그는 생긴 것보다 더 유약하고 곱상해 보였다. 한비는 지나치게 부끄러움을 탔으며 말 또한 듣기 거북할 정도로 어눌했다.
그런 한비와 마주한 영정의 모습은 여러모로 그와 대비되었다. 영정은 어려서부터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강인하게 성장한 탓에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개가 넘쳐흘렀으며 굳게 다문 입과 듬직한 몸에서는 일국의 군주다운 기상이 뿜어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한비의 모습에 영정은 무척 당혹감을 느꼈다.
'저렇게 나약해 보이는 한비와 더불어 어떻게 천하통일을 이루겠나. 남들이 보면 웃겠다.'
영정은 극도의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비는 영정과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겉으로는 여자같이 나약하고 다소 모자른 듯이 보였지만 마음 속에 예리한 칼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뛰어난 지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단지 그런 것들이 외모나 말투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비는 자신의 판단이나 의견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부끄러움이나 유약함을 벗어던지고 그만의 빛을 뿜어대었다. 아름다운 공작이 평소에는 꼬리를 감추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활짝 펴서 그 화려함을 뽐내듯이 한비의 지혜도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야 비로소 빛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영정은 한비의 저술을 읽고 지레 그의 모습을 예상하였고 또 막상 그를 만나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자 쉽게 실망을 하였다. 영정은 한비의 가슴 밑바닥에 숨어 있는 지혜와 야망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비는 역시 총명했다. 더욱이 그는 비범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비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을 처음 봤을 때의 영정과 조금 뒤에 일어난 그의 반응에 영정의 인물됨을 즉시 판단하였다.
'진왕은 아주 변화가 심한 사람이군. 이런 사람에게는 강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한비는 얼른 화제를 바꿔 이사가 일러준 대로 영정에게 귀신을 섬기는 잘못을 주청하였다. 그의 말에 영정은 더욱 놀랐다. 그동안 읽어 왔던 한비의 저작은 주로 법치나 군왕의 통치술, 권력의 이용 등을 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를 만난 자리에서 한비는 수백 년간 조상을 섬기고 각종 제사를 모시는 진나라의 전통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우리 진나라는 이미 천명을 받아 구정(九鼎)을 낙양에서 함양으로 옮겼는데 그런 천명을 부정하다니.'
어렵게 말을 마친 한비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씻어내었다. 그렇지만 힘들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한 한비보다 심경이 더 복잡한 사람은 바로 영정이었다. 영정은 한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한비 선생을 객관으로 모셔다 드리도록 하거라."
한비가 국빈관에 도착했을 때 이사는 먼저 그곳으로 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는 한비가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돌아오자 자신의 계책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신하였다. 한비에게서 대전에서 벌어진 영정과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은 이사는 영정이 한비에게 실망하여 내쫓았음을 알아차렸다.
한편 한비는 궁에서 나오면서부터 줄곧 자신이 진왕에게 주청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귀신 이야기부터 한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한비는 이사를 보낸 뒤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영정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실마리를 모색했다.
이사는 매일같이 국빈관에 들러 한비의 동정을 살폈다. 이사가 걱정하는 바는 한비가 전후 사태를 파악하고 귀신 이야기를 꺼내도록 한 자신의 의도를 알아채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방연(龐涓)과 같은 말로를 당할지도 몰랐다. 위나라의 군사(軍師)였던 방연은 사형인 손빈을 시기하여 그를 모함하였다가 뒷날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사형인 손빈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이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또 다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사는 한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여러 나라를 유세하였던 상경 요가가 일찍이 한비의 문중에 있을 때 잘못을 저지르고 탈출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비와 요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껄끄러운 과거가 있음을 생각해 낸 이사는 그것을 이용하여 한비를 모함하는 계책을 꾸몄다.
어느 이른 아침 한비의 처소에 나타난 이사가 그에게 말했다.
"사형, 진왕께서는 사형을 흠모하여 수천 리를 멀다 않고 초청하셨는데 어찌하여 사태가 그렇게 갑자기 변하였습니까?"
그때까지 자신이 진나라에 들어온 목적과 언행을 천천히 되씹고 있던 한비는 이사의 예리한 눈빛을 피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제, 나, 나라는 사람의 위인됨을 알고 있지 않소? 이제껏 남과 심하게 다, 다툰 적이 없는데, 함양성에 오자마자 그,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한비가 난감해 하며 이렇게 말하자 이사는 그 몰래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형은 바보 같은 글쟁이야, 그러면 글 속에 빠져 죽고 말지.'
이사는 얼른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어 내고 딱하다는 듯 한비를 보면서 말했다.
"설마 요가, 이 자가 꾸민 일은 아닐까요?"
"요, 요가?"
"사형, 요가를 아십니까?"
"그, 그는 우리 문하에서 문객으로 있었소. 요, 요가가 일찍이 내 방에 들어와 물품을 훔치다 발각되어, 많은 사,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가법(家法)에 따라 죽음을 면, 면치 못했을 것이오. 그런데 그, 그 자가 어디에 있소?"
이사의 입에서 요가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한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그걸 두고 모진 인연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사형께서 말씀하시는 요가가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 진나라의 상경이라는 직책에 있습니다. 식읍만 무려 천 호가 넘지요. 대왕께서는 그의 말을 대단히 존중하고 계십니다."
"그, 그렇다면 요가가 나의 일을 그르쳤단 말이오?"
한비가 놀라 소리쳤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사는 단정하듯 대답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라도 그치지 않는다'고 했으며, '소인은 남의 액운을 보고 다행으로 여긴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형께서 그때 그렇게 혹독하게 요가를 혼냈으니 어찌 그가 잊을 리 있겠습니까?"
"아, 그렇다면, 아니, 나, 나도 어쩔 수가 없지만, 그, 그래도......"
한비는 매우 당황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사는 자신의 계책이 손쉽게 먹혀들어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상대가 화를 낼수록 다스리기 쉽다는 말이 있다. 이사는 한비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화를 돋구는 이중 작전을 폈다. 이사의 음모에 말려든 한비는 치솟는 분노를 삭이며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사, 사제, 나에게 다시 진왕을 알현할 수 있는 기, 기회를 만들어 주시오."
한비의 애원에 이사는 짐짓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염려 놓으십시오. 다른 건 우둔한 이 사제가 도와드리지 못하지만 대왕을 만나시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걱정이라면 사형께서 또다시 요가의 함정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겁니다."
이사의 말에 한비는 그만 감동하여 그의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사는 한비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더 이상 헤어나지 못할 때야 비로소 안심할 수가 있었다.
며칠 후 이사는 궁중에서 나오자마자 국빈관에 들러 한비에게 그날 저녁에 진왕이 면담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저녁이 되자 이사는 국빈관에 들러 한비와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요가는 요가대로 이사의 음모에 따라 먼저 궁으로 들어가 한비를 음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날 저녁 대전에서 영정을 대좌한 한비는 그에게 요가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여러 경전을 인용하여 용인(用人)의 도리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영정에게 신하의 과거가 이러저러했다는 한비의 말은 아무런 관심도 일으키지 못했다. 실상 영정은 곁에 있는 신하가 지난날 이웃집 닭을 훔친 좀도둑이든,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가로챈 벼슬아치든간에 출신과 과거사를 막론하고 재능있고 유용한 인물이라고 생각되면 누구든지 중용을 했다. 영정의 용인술 가운데 가장 첫번째가 '큰 강물은 온갖 오물을 받아들이고, 태산은 먼지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인물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사람이지 고결한 성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영정은 이번 만남에서도 한비에게 실망을 느끼고 그를 물리쳤다.
그다음 날 영정은 요가를 불러 지난날의 잘못을 추궁했다. 그러자 요가는 이사에게 언질을 받은 대로 미리 준비한 답변을 털어놓았다.
"소신은 한 공자의 문하에서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런 짓을 했사옵니다. 이미 지난 일이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었사온대 이렇게 대왕마마께 누를 끼치기 되오니 송구스럽사옵니다."
솔직한 요가의 대답에 함께 조회에 참석했던 대신들이 모두들 나서서 요가를 변호하고 한비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한비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그들은 한비의 출현에 위협을 느꼈고, 따라서 그가 진나라 조정에서 높은 대우를 받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대왕마마, 한비 공자는 한나라의 종실로 결코 우리를 위해 일할 인물이 아니옵니다. 또한 상경 대인은 젊었을 때 그의 문하에서 학대를 받은 연유로 분을 참지 못하고 벌인 일이니 이제 와서 잘못을 추궁할 수가 없는 줄 아옵니다."
영정은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비를 비난하고 나서자 그의 사제인 이사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대전에 나타난 이사는 몹시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옛날에 기해(祁亥)는 원수를 조정에 천거하여 많은 공을 세우게 하였사옵니다. 신은 오래 전부터 사형인 한비 선생을 사모하여 대왕마마께 천거한 바가 있사옵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 이렇게 대왕마마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조정의 기강을 흔들어 놓으니 이에 소신도 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옵니다. 사형의 재능을 아까워 한 것은 소신의 사적인 감정이었사옵니다. 하지만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사적인 감정은 떨쳐버릴 수밖에 없사옵니다. 옛말에도 '미친 말은 수레를 깨뜨리고, 악독한 부인은 집안을 망친다'고 하였사옵니다. 감히 간언하오니, 대왕마마께서 한비 공자를 중용하지 않으신다면 후환을 생각하시어 감옥에 가두시거나 엄하게 처벌하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영정은 울부짖는 듯한 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한비를 운양궁(雲陽宮)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이사는 심복들을 시켜 한비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이라는 허위 자백을 받아내게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비는 이사가 보낸 독약에 살해되고 말았다.
16. 궁형(宮刑)을 당하는 조고
한단의 대북성에 있는 두강노점(杜康老店)은 먼 이국 땅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객점으로, 조경후(趙敬侯)가 한단성을 조나라의 국도로 삼았던 때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개점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조환자(趙桓子) 2년(BC 423년)에까지 이르지 않나 싶다. 두강노점은 한단성의 번화만큼이나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퇴락의 증거인 양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진 두강노점 대문의 주칠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볼품이 없어졌고 처마 밑에 비스듬하게 꽂힌 '두강노점'이라는 글씨가 박힌 낡은 헝겊 조각이 바람에 흉하게 떨고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 또한 한물간 객점의 주방장에 어울리는, 다소 불안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야채를 썰고 지지고 볶아댔다. 명성을 잃은 객점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시퍼런 칼을 번쩍 들더니 신경질적으로 도마를 힘껏 내리쳤다.
"어서 옵쇼!"
손님이 든 모양이었다. 점원은 객점 문 앞에 기대 선 채 간간이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습관처럼 '어서 옵쇼'를 외쳐댔다.
객점 안의 풍경은 바깥보다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바닥의 벽돌은 울퉁불퉁 지면이 고르지 못했고, 출입구에서 객점 안을 가로질러 깔린 꽃무늬 융단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어 바닥이 훤하게 드러나 보였다. 왼쪽 벽 구석에는 거미줄이 위 아래로 서너 개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는데 그 거미줄에는 거미가 잡아먹고 버린 곤충의 뼈가 덩그러니 매달린 채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따금씩 흔들거렸다. 또한 객점 안은 이웃해 있는 약방, 신발점, 포목점, 염색방(染色坊)과 양조장에서 흘러들어온 냄새들이 음식내와 한데 어우러져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3류 객점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빛바랜 금색 탁자와 벽에 걸린 몇 점의 그림들이 그 옛날 객점의 영화를 말해주듯 그윽한 멋을 풍겼다.
그 주변에 있는 다른 객점들이 번성하는 모습은 이곳 두강노점의 쇠락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한단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한 주점들은 저잣거리가 활기찰수록 그에 따라 함께 번화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위치에 있는 두강노점은 쇠락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원인은 두강노점의 주인에게 있었는데, 그는 옛날의 방식을 고집한 채 시류의 변화에 적응하려 들지 않았다. 두강노점은 애초부터 일반 백성이나 상인에게는 금지된 구역으로 귀족들만 받아들였는데 이런 원칙을 귀족들이 몰락한 그 시대에까지 고수하였기 때문에 객점의 퇴락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느 날 황혼이 질 무렵이었다. 두강노점에 선비 두 명이 들어섰다. 노인과 청년이었는데 모두 품위 있는 복장에 패옥(佩玉)을 달았고 행동이 매우 단정하였다.
"왕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이곳을 찾으셨습니까?"
청년 선비가 동행한 노인에게 물었다.
"이 객점은 상당히 유명한 곳이라네. 나도 한동안 이곳에 오지 못했지만 말이야."
반백에 가까운 노인은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때 두 사람을 알아본 객점 주인이 뛰어나오더니 오랜만에 두강노점을 찾은 이들을 반기며 친절하게 안쪽으로 안내했다.
"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객점은 일찍이 왕후장상(王侯將相)만이 출입하여 자리를 메웠고 천하의 명사들이 이 자리에서 시를 읊으며 술을 마셨습니다. 조혜왕(趙惠王) 때 상경을 지낸 난상여(蘭相如) 대인도 저희 집 단골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 4공자(四公子) 가운데 한 분이신 평원군(平原君), 신릉군도 이곳에 자주 오셔서 저희 명성을 올려주셨지요. 또한 진나라 승상이셨던 여불위 대인과 연 태자 단도 우리 객점에 들르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천하의 명사들이 모두 음란한 가락과 기운에 젖어 이런 그윽한 정취를 풍기는 객점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주인장, '어느 날 문득 깨어보니 영화는 간 데 없고 이마에 주름살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시었소? 이곳에는 아직도 지난날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으니 그마나 다행이 아니겠소?"
왕이란 성을 가진 그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 뒤 함께 온 청년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조군은 곧 먼 길을 갈 사람이니 이곳처럼 분위기가 아늑한 곳에서 쉬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서 내가 여기를 찾은 거라네."
잠시 후 식탁은 갖가지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두 사람은 사슴구이 꼬지, 쇠고기 지짐, 예쁘게 빚은 물만두를 안주삼아 고량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왕 태의 어르신같이 고명하고 의술에 정통하신 분이 어찌하여 저와 동행하지 않으십니까. 일찍이 어른께서는 진왕(秦王) 모자(母子)를 치료하신 적도 있지 않으십니까."
청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지며 왕 태의에게 말했다.
왕 태의, 이름은 왕충으로 그는 지난 시절 곽개를 따라 영정과 그의 어머니 주희를 진나라로 귀향시키는 데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조나라로 다시 돌아온 왕충은 조왕(趙王)의 태의부에서 태의령직을 맡아 십여 년 동안 오로지 의약과 침술을 연구한 끝에 천하에 그와 비견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이날 왕충은 상국 곽개의 명령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던 조고를 탈출시켜 진나라로 보내는 길이었다. 지금 두강노점에서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는 주연은 조나라를 빠져 나가는 조고와의 이별식이라 할 수 있었다.
왕충은 조고의 말에 길게 탄식을 했다.
"그렇다네. 한단성은 날이 갈수록 싫어지기만 해. 솔직히 나도 함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러시다면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곽개와 왕충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조고는 진나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진나라에 아는 사람이 없어 난감해 하던 참에 이렇게 왕충과 마주하자 조고는 그를 설득하여 함께 진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가 없네."
"어째서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조고는 실망한 눈빛으로 계속 왕충을 재촉했다. 하지만 왕충은 차마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애원하는 조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왕충의 표정을 살피던 조고는 그제서야 왕충의 외동아들 왕단을 떠올렸다. 풍문에 의하면 왕 태의의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왕단은 부친의 의업(醫業)을 따르지 않고 무예 수업에만 열중한다고 하였다. 스물여덟 살인 왕단은 무예가 뛰어나 그 이름이 한단성 안팎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으며 관(官)에 나가 벼슬길에 오르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지닌 채 스스로를 협자(俠者)라고 생각하며 이따금씩 세인의 주목을 받는 사건들을 일으키곤 하였다. 왕단이 저지른 사건들은 대부분이 불쌍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조고는 왕 태의가 선뜻 조나라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그의 아들 때문임을 짐작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은 화제를 돌려 어떻게 하면 진나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이때 밖에서 일꾼 두 명이 들어오더니 왕충에게 인사를 하고 말했다.
"곽 대인께서 준비하신 예물을 모두 수레에 실었습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내민 예물 명세서를 훑어보던 조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모습에 왕충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조군, 무얼 그리 놀라는가? 곽 대인을 그렇게 오랫동안 모셨으면서도 아직도 그분을 모르는가. 곽 대인께서는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에게는 금은보화의 많고 적음을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라네."
왕충은 이렇게 말하며 품에서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꺼내 조고에게 건네주었다.
"조군이 먼 길을 떠나는데 동행하지 못해 미안하네. 이것은 나의 작은 성의이니 받아주게나."
이 말에 조고는 그만 감격하며 보퉁이를 펴보았다. 뜻밖에 그 속에는 커다란 금덩어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아니, 왕 태의께서는 재물에 욕심이 없어 청빈하게 사신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 금덩어리는 어떻게 모으셨습니까?"
왕충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옛날에 살던 집을 팔고 남은 돈으로 사두었던 거지. 요긴하게 쓸 데가 있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이제야 그 기회를 맞았을 뿐이네. 염려 말고 넣어두게나."
조고는 왕충의 뜨거운 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찍이 곽개는 많은 뇌물을 받아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사람들을 재물로 유혹해 자기 심복으로 만들었다. 조고가 곽개 밑에서 충성을 다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충은 조고와 그다지 교분이 있지 않은데도 그가 위기에 빠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도왔으며 또 이렇게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고 있던 금덩어리를 아낌없이 내주는 것이었다. 조고는 왕충이야말로 진정한 협사라고 생각했다.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조고의 부하가 들어오더니 갈 길을 재촉했다.
"주인 어른,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발각되면 성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중으로 성을 나가야 합니다."
그에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조고는 급히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왕충에게 바치면서 무릎을 꿇었다.
"이 잔을 올리오니 만수무강하십시오. 어찌 이 은혜를 다 갚으오리까. 다음에 만날 기약을 하며 소생은 이만 떠나겠습니다."
왕충은 미소로써 대답을 대신하며 서둘러 문을 나서는 조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왕 영정 14년(BC 233년) 가을, 마침내 조나라의 대부 조고는 한단성을 빠져 나와 업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고를 태운 수레는 세찬 바람에 덜거덕거리며 한단성 교외를 쏜살같이 내달렸다. 수레가 한단성에서 멀어져 갈수록 조고의 가슴에는 까닭모를 처연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한단성은 조씨 가문의 사당이 있는 곳으로 조고가 태어나 어린 시절 경학(經學)을 공부하고 사서를 외우며 큰뜻을 품었던 고향이었다. 대부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사연과 정이 절절히 배어 있는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고가 적과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뀌어졌다. 조고가 감옥에 들어간 이후 그의 노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신혼이었던 젊은 아내는 개가를 했으며, 누이동생은 다른 사람의 처첩으로 들어갔다가 곽개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몸을 빼돌릴 수 있었다. 멀어져 가는 한단성을 바라보는 조고의 마음 속에는 아련한 추억과 시퍼런 원한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조고는 고개를 돌려 아련히 보이는 한단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단성! 나의 꿈과 희망을 빼앗아 간 곳, 우리 가문을 망가뜨린 곳, 잊지 않고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
날은 점점 어두워만 갔다. 산과 들녘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흉흉한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휘어감았다. 진나라로 들어가는 이 길에는 수많은 도적떼와 굶주린 맹수들이 나타나 행인들의 발걸음을 어렵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밤길을 피해 여럿이서 함께 그 길을 지났곤 하였다. 어느덧 숲길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디선가 허기진 늑대의 울부짖음이 처참하게 들려왔다. 조고는 더욱 급하게 수레를 몰았다. 한시라도 빨리 진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국경선에 당도해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고의 따뜻한 품에는 곽개가 써 준 밀서가 들어 있었다. 일찍이 진나라의 왕오 장군과 밀서를 통해 교분을 맺은 바 있는 곽개는 그에게 보내는 서신을 조고에게 건네주었다. 국위 왕료의 제자인 왕오는 조나라를 정벌하는 진군의 선봉장으로 지금 조고는 그의 군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둡고 낯선 길을 헤매던 조고는 결국 왕오의 군영을 찾지 못하고 그만 몽무의 군영에 잘못 들어 졸지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시간에 왕오는 함양성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조고는 감옥에 갇히기 바로 직전 함께 따라 온 총관을 몰래 빼돌려 한단성에 있는 곽개와 누이동생에게 구명을 호소하는 한편, 옥졸을 매수하여 왕오에게 보내는 밀서를 함양성의 왕오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진왕 영정은 비성 전투에서 조나라 장군 이목에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그 다음 조나라와의 전투에 몽무를 출전시켰다. 몽무는 우선 조나라의 의안(宜安)을 점령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한단성을 공격했지만 도중에 이목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일단 후퇴하여 함양에서 250여 리 떨어진 운양성에 주둔한 채 패인을 분석하던 몽무는 조나라의 기습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번기는 조고가 보낸 밀서를 믿고 공격했다가 대패했다지만 이번에는 그런 밀서도 없었다. 그런데 이때 공교롭게도 몽무의 군영에 조고가 나타났던 것이다. 마침 패전의 소재를 찾던 몽무는 조고가 제 발로 걸어들어오자 곧바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조고는 억울하다고 항변했지만 몽무는 그를 첩자로 간주하고 진왕에게 이를 보고했다.
감옥에 들어간 조고는 너무나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비록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나라에서 일 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지만 조왕 천이 워낙 유약하여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았고, 곽개가 옥졸에게 엄명을 내려 무례하게 대접하지 못하도록 한 까닭에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지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진나라의 감옥은 인간 지옥 바로 그 현장이었다. 감옥 안에는 거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낮인지 밤인지 구별을 할 수 없었고, 어둡고 습기가 많은 토방이라 벽에는 잔뜩 이끼가 끼었고 바닥은 축축하였다. 눅눅한데다 공기마저 잘 통하지 않으니 감옥 속은 썩은 냄새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조고는 감옥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혀 몇 차례나 구토를 한 뒤 젖지 않은 바닥에 몸을 세우고 천정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흙바닥에는 엄청나게 많은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맨발바닥에 전해지는 벌레들의 움직임 때문에 조고는 온몸이 느물느물 수축되며 구토가 끊이지 않고 목줄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조고는 죽음과 같은 공포를 이겨내고 서서히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뿌옇게 들어오는 빛줄기를 따라 벽면을 샅샅이 조사하고 주변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진나라의 감옥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었다. 첫째, 커다란 창고나 방을 개조하여 만든 감옥으로 그런 곳에는 가벼운 죄를 범한 농민이나 도망가다 잡힌 노예, 엄격한 진법을 어긴 사람들이 수감되었다. 죄수들 대부분이 죄가 무겁지 않기 때문에 모두들 사나흘이면 판결을 받고 법에 따라 각지의 축성(築城) 작업이나 귀신(鬼薪)이라고 불리는 농사일을 하는 데 보내졌다. 따라서 감옥 환경은 좋은 편이었다.
그 다음은 단칸방으로 이루어진 감옥인데 이곳은 왕명을 어긴 관리나 죄를 지은 왕실종친, 고관대작들이 갇혀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런 감옥은 대체로 쾌적하고 주위 환경이 밝았다.
마지막으로 나라에 해를 끼친 역적이나 적국의 간첩을 가두는 감옥으로 조고가 들어와 있는 데가 바로 그곳이었다. 조고는 진나라의 엄한 법률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몽무가 자신을 간첩으로 몰아 이곳에 가두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조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원한과 분노와 억울함을 삭였다.
"기다려라. 언젠가 이곳을 벗어나면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
조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 굳어 있는 살을 풀어주었고 축축한 바닥을 말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바로 이웃한 감옥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조고는 손으로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고 며칠이 지나 두터운 감옥 벽을 여는 데 성공하였다. 그 곳에는 한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억울한 심사를 참지 못하고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선, 선을 행하는 자여, 그 몸이 깊은 물에 빠졌구나. 아, 깊, 깊은 강물이여. 선, 선을 일으키는 자여, 그 목숨이 깊은 계곡에 끊어졌구나. 아, 깊, 깊은 계곡이여!"
그 사람은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입으로 선, 선을 베풀면서, 몸, 몸으로 악을 행하는 자는 나, 나라의 쓰레기로다. 이, 이사야, 이사야, 내가 손, 손빈이 되지 못함이 한스럽다. 간악한 네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죽는다니, 너, 너무나도 억울하도다!"
조고는 그 자의 입에서 이사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길래 이사를 저렇게도 저주할까?"
조고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그의 기막힌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이놈들이, 나, 나를!"
갑자기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를 지르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런 모습에 깜짝 놀란 조고는 얼른 자기 방으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조고는 옥졸에게 옆 감옥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군데 저렇게도 저주스러운 말을 하는 겁니까?"
"아, 누가 알았겠나? 갑자기 눈알을 뒤집히고 허연 거품을 물면서 쓰러져 죽었으니. 불쌍도 하지, 한나라의 공자가 이런 곳에서 죽다니......"
"누구요? 한나라의 공자? 아, 그렇다면 한비 선생!"
조고는 너무도 놀라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던 법가의 최고 이론가 한비가 자신의 옆방 감옥에서 죽어간 것이다.
"진왕이 가장 존경한다던 한비 선생이 어찌하여 햇빛조차 들지 않는 운양의 감옥에서 죽었다는 말인가. 하늘이시여, 진나라에서는 저러한 인재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겨우 대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조고는 놀라움과 허탈감에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법치가 존중되는 진나라를 동경하여 조나라를 탈출하였다. 그런데 이렇게도 법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광경을 보자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을 받아 자리에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온종일 그렇게 넋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조고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한비가 세상을 떠난 감옥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
"올바른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고 있음은 예로부터 그러했다는 증거로다. 설사 이곳에서 살아난다 해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조나라로 돌아가?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진나라에 남아야 하는가? 한비 선생과 같은 고명한 학자도 이사를 저주하며 죽어간 이런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 함양성은 한단성보다 더 무서운 곳이야!"
자신의 갈 길에 대해 한탄하던 조고는 잠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여 한비의 명복을 빌었다.
"한 공자의 원혼이여, 안녕히 떠나십시오! 더러운 세상에 남아 있지 마시고 명부(冥府)에서 법치의 이상을 실현하십시오!"
한비가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한 조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권세이지 이상(理想)이 아님을 깨우쳤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꿈꾸어 왔던 이상의 실현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조고의 웃음소리에 옥졸이 재빨리 달려오더니 감옥 안을 살폈다.
"얼마 전에는 한 놈이 죽어가더니 이번에는 미친 놈이 하나 생겼군!"
그러나 조고는 옥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조고의 누이동생인 조희(趙姬)는 운양성에 갇혀 있는 조고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곽개에게 달려가 눈물로 그의 구명을 호소했다. 곽개 또한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고가 위험을 당하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만일 조고가 간첩죄로 벌을 받게 되면 이제껏 자신이 진나라와 비밀리에 쌓아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곽개는 법의 집행을 맡고 있는 이사에게 밀서를 보내기로 결심하고 그 일을 조희에게 맡겼다.
조희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 나이에 비해 모든 것이 성숙한 편이었다. 곽개의 밀서를 받은 조희는 그녀 나름대로 밀서를 통해 자신의 앞날을 개척할 계획을 세우며, 거기에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기로 작정하였다. 곽개는 조희에게 여러 가지 말로 당부를 하면서 이번 계획이 틀림없이 성공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새벽, 아직 닭이 채 눈을 뜨지 않은 함양성에는 쌀쌀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날따라 함양성의 북문이 일찍 열렸는데 새벽부터 수레 한 대가 힘차게 성문으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정위 이사에게 급히 보고하는 밀서를 지녔다며 서둘러 함양성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가뜩이나 잠이 모자란 성문지기들은 가까스로 떠지는 눈을 비비면서 수레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는 잠이 달아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타고 있었고, 여인의 자태에 깜짝 놀란 시위들은 자세히 조사도 하지 않고 수레를 통과시켜 버렸다.
그즈음 이사는 그 어느 때보다 영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는 그럴수록 더욱 행동을 조심하며 연회를 줄이고 가능하면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않았다. 며칠 전 영정이 한비가 옥사하였다는 보고에 깜짝 놀라 그를 궁으로 불러들이자 이사는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고 영정을 마주했다. 영정은 한비가 운양궁에서 어떤 연유로 감옥으로 들어가 죽게 되었는지 이사에게 그 까닭을 추궁하였다. 이에 이사는 자신의 죄가 탄로날까 두려워 요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고, 그러자 영정은 요가의 관직을 박탈하고 저택에 감금시키는 처벌을 내렸다. 위기를 모면한 이사는 궁에서 물러나오는 즉시 자신의 저택에 한비의 빈소를 차리고 매우 슬픈 표정으로 그의 영혼을 추모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시선을 의식한 것일뿐, 마음 속에는 한비를 제거하였다는 기쁨이 흘러넘쳤다. 이제 이사가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는 오직 한 사람 구경(九卿)의 하나인 전객(典客) 왕오뿐이었다.
며칠 전 왕오는 조나라의 곽개가 보내 온 밀서를 영정에게 바친 바 있었다. 밀서에는 진나라에 몸을 의탁하러 온 조고의 현명함과 능력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이를 본 영정은 이사에게 하루빨리 조고를 찾아 궁으로 데려오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몽무가 영정에게 서신을 올렸는데, 조고는 조나라의 간첩으로 이번 전투의 패배는 그가 꾸민 것이라 감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사는 몽무가 자신의 죄를 대신할 상대로 조고를 선택하였음을 알았다. 이사는 조고를 함양성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 길은 오직 하나 몽무의 서신을 인정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사의 간곡한 말에 영정은 그의 말을 믿고 조고에게 부형(腐刑)의 형벌을 내렸다. 부형이란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혹독하고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날 아침 이사는 곽개가 보낸 사신이 당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조나라는 영정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나라로 특히 무안군 이목은 진나라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영정의 심사를 몹시 어지럽히고 있었다. 때문에 이사는 조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반간계(反間計)를 앞서서 계획하고 추진하는 중이었다. 이런 시점에 조나라의 곽개가 보낸 사신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는 부지런히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곽개가 보낸 사람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사신을 본 이사는 너무나 놀라 그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신은 뜻밖에도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사는 술과 시를 좋아하며 상당히 풍류를 즐겼지만 이처럼 사람의 눈과 마음을 한번에 끌어당기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동그란 눈을 똑바로 뜨고 사뿐사뿐 이사 앞으로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더니 곽개의 밀서를 바쳤다. 이사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밀서를 읽어내려갔다.
조희는 조희대로 밀서를 읽고 있는 이사를 힐끗 보며 의연하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마음 속에서는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였다. 그녀는 이사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사나이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을 망친다고 하였다. 나를 보는 저 사람의 눈길 또한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밀서를 읽는 이사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편지에서 곽개는 어떻게든 조고만 구할 수 있다면 이사와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조고는 이미 부형을 받은 뒤였다. 때문에 곽개의 협조를 얻으려면 일단 조고의 처벌에 대한 자신의 혐의를 벗어던져야 했다.
이사는 살짝 눈을 들어 조희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맑디 맑은 두 눈에 가득 수심이 어려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남몰래 내뱉는 조희의 가벼운 탄식에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넘쳐흘렀다. 그동안 이사는 수많은 미인을 보아왔지만 조희만큼 충격적으로 남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여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아무나 탐할 수 있는 저급한 교태가 아니었다. 웬만한 강심장을 가진 사내가 아니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품위와 엄격함이 조희에게는 있었다.
이사는 갸날픈 몸을 떨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희의 눈망울을 주시하였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도와주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다.'
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저 단 하나,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조희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사는 순간적으로 조희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미색이냐, 권력이냐? 이사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권력이었다.
나에게 모과를 주었으나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하나니
이는 보답이 아니라 영원히 가깝게 지내자는 뜻이오
나에게 복숭아를 주었으나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하나니
이는 보답이 아니라 영원히 가깝게 지내자는 뜻이오
나에게 오얏을 주었으나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하나니
이는 보답이 아니라 영원히 가깝게 지내자는 뜻이오
이사는 <시경>의 '모과'라는 시를 웅얼거리며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잃어버린 권력은 다시 찾을 수 없다.
'그래, 조고를 석방시켜 이 여자와 곽개의 환심을 사자. 그런 다음에 이 여자를 이용하여 내 뜻을 세우는 거야.'
이사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조희를 다시 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는 남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가득하였다. 옛말에 '사내에게 여우 같은 여자가 있으면 남을 움직이기가 쉽다(夫有尤物足以移人)'고 하였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여자의 힘은 비록 나약하지만 그 여자가 남자를 움직이면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는 사태가 빚어졌다.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유세가 장의(張儀)도 초회왕(楚懷王)이 총애하는 정수(鄭袖)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고, 여불위도 애첩을 바쳐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이사는 조희를 보는 순간 영정을 떠올렸다. 영정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은 여색을 밝혔다. 엄격한 진나라의 법률을 집행하는 영정은 백성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공정한 군주로 비쳤지만 이따금 여인들 앞에서 나약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사는 눈 앞에 앉아 있는 조희를 영정에게 바치리라 결심했다. 이렇게 결정하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이사는 조희를 가까이 오게 한 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몇 가지 전략을 함께 상의하였다.
한편 영정은 그즈음 들어 정위 이사와 전객 왕오가 서로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영정은 암암리에 두 사람의 세력을 견제하고 조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상관하지 않는 척하였다. 어린 나이에 임금 자리에 오른 영정은 이러한 통치술을 경험으로 익히고 축적하였다. 이는 마치 닭으로 하여금 밤을 지키게 만들고, 고양이에게 쥐를 잡게 하는 계책과도 같았다. 영정은 한비의 저작에서 배운 지식으로 두 세력의 능력과 지혜를 이용하여 서로를 견제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즉 한쪽의 장점을 극대로 이용하여 상대를 자극하고, 다른 쪽의 약점을 들춰내어 공격하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하였는데 영정은 이렇게 대신들의 욕망과 세력을 교묘하게 조절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그는 심지어 두 세력이 겉으로 드러내고 싸워도 묵인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위기가 고조되어 폭발할 때가 되면 그제서야 간여하였던 것이다. 영정은 이제 이사와 왕오, 두 세력의 다툼이 극에 달하여 곧 폭발하리라 예측하고 마침내 직접 조절에 나섰다.
이날 영정의 부름을 받은 왕오는 그간 심기가 몹시 불편하던 참이었다. 조나라의 곽개는 자신과 끈이 닿는 진나라 밀정인데 그런 곽개가 보낸 조고를 이사 일당이 간첩으로 몰아 형벌을 내렸다. 만일 이런 사실이 각국에 알려진다면 자신을 믿고 망명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신뢰가 땅에 떨어진 왕오를 누가 믿겠는가.
왕오의 가문은 대대로 함양에서 벼슬을 지낸 진나라 명문세족이었다. 함양에 거주하는 구세력을 바탕으로 지리와 인화의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해 왔던 왕오는 곳곳에 사람을 풀어 이사의 약점을 잡아내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왕오는 이날 아침에 입조(入朝;궁궐로 들어가 임금을 뵙는 일)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오와 함께 영정의 부름을 받은 이사는 조희를 이용하여 영정의 총애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힘차게 수레를 몰았다.
이사와 왕오, 두 사람은 조금도 지지 않으려고 앞뒤에서 으르렁거렸다. 두 사람은 구경의 하나인 정위와 전객을 각각 맡고 있었으며 따라서 업무의 중요도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사실 배분은 같다고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세력을 다투는 이유는 각기 맡은 임무 이외에 다른 관직을 더 많이 겸직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당시 구경의 하나인 중위의 예를 들어보면 본래의 업무인 치안 이외에 조선(造船)의 책임도 지고 있었고, 제사를 관리하는 태상(太常)도 본래 업무 외에 의약을 관리하는 일까지 겸직하고 있었다.
마주친 두 사람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쏘아보는 모습에 영정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영정에게 예를 올린 이사가 먼저 입을 열어 운양궁의 행차를 주청하였다.
"대왕마마, 조나라의 상국인 곽개 대인이 밀서를 올려 운양궁에 갇혀 있는 조고는 죄가 없다고 극구 주장하면서 선처를 요구하였사옵니다. 아울러 이목에게 여러 번 패하여 사기가 떨어진 진나라의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운양으로 행차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영정은 처음부터 조고의 간첩죄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더욱이 이목에게 패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진 병사들을 위로하는 게 좋겠다는 이사의 제안은 영정도 생각해 왔던 바였다.
이사는 영정이 쉽게 허락을 하자 더욱 대담한 제의를 하였다.
"대왕께서 경치가 아름다운 운양에 행차하시면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치솟게 될 것이며 또한 사면을 받은 조고는 성은(聖恩)을 잊지 못하고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더욱이 그곳에는 조고의 누이동생인 조희라는 여인이 있사온대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히 세상에서 견줄 여인이 없을 정도이옵니다."
영정은 조희라는 미녀가 운양에 있다는 말을 듣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이 경의 말에 따르면 과인은 반드시 운양에 가야겠구료."
"그렇사옵니다."
이사가 신이 나 계속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천상(天象)의 변화가 있었는데 나라에 커다란 기쁨이 나타날 징조라고 하옵니다."
왕오가 곁에서 듣다가 냉소를 보내며 말했다.
"어젯밤 정위는 운양에 급히 다녀오던데 미리 일을 꾸민 게 아니시오?"
이사는 왕오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려 들자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전객은 어찌하여 대왕마마의 행차를 막으려 하시오?"
"흥!"
왕오가 피식 웃으며 이사에게 말했다.
"어제 아침에 조희라는 여자가 이부(李府;이사의 저택)에 들렀다는데 사실이오?"
이사는 흠칫 놀라며 왕오를 바라보았다. 왕오는 빙그레 웃으며 결코 속일 생각은 말라는 눈치였다. 이사는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했다.
"그렇소. 어제 아침에 만났소."
"어제 오후에 조희를 함양의 서문에서 배웅했는데 그것도 사실이오?"
"사실이오."
"그렇다면 어째서 오늘 대왕마마께 운양에 행차하시라고 권하는 것이오?"
이 말에 이사는 그만 대답을 못하고 왕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위께서 애써 대왕마마를 운양으로 행차하시게 하는 뜻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는 게 아니오?"
왕오는 이사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였다. 뜻밖에도 이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자 왕오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그대는 법을 집행하는 정위에 있으면서 어찌 대왕을 적국의 중신과 만나게 하는 거요? 그러고도 이를 충이라 말할 수 있소? 사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질다고 말할 수 있소?"
이사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왕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왕오의 말을 들은 영정도 매우 화가 나는지 이사를 노려보면서 왕오에게 물었다.
"경의 말이 모두 사실이오?"
왕오는 이사를 힐끗 바라보며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정위 대인이 어제 오후에 조희를 보내는 광경을 목격한 위사가 있사옵니다."
이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삭이며 재빨리 대책을 모색하고 영정에게 말했다.
"조희는 조나라의 명문 규수이며 곽개의 양녀이옵니다. 모습이 수려하고 아름다워 천하에 마땅한 배필이 없을 정도이옵니다. 그녀는 오라버니를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홀홀단신으로 진나라에 왔다갔는데 이러한 담력과 용기만 보아도 여걸 중의 여걸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소신 이사는 덕과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런 여자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녀가 함양에 오게 된 것은 신도 처음에는 모르는 일이었사옵니다. 무슨 간계를 꾸미거나 사심을 위해서 대왕마마를 운양으로 행차하시라고 권한 것은 아니옵니다. 신을 믿어주옵소서."
영정은 이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정은 이번 일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면서 헐뜯었던 그동안의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로 가볍게 여겼다. 다만 이사가 말하는 조희라는 여자를 보고픈 충동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영정이 빙긋이 웃으며 이사에게 말했다.
"이 경은 풍류를 즐긴다고 하던데 남녀의 일에도 정통하오?"
이사는 영정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얼른 대답을 했다.
"정통하다는 말은 과장이옵니다. 약간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사람의 뿌리는 복희(伏犧)와 여와(女蝸)로부터 나왔사옵니다. 건곤(乾坤)이 각각 배합되고 음양(陰陽)은 서로 조화되니, 남자가 크면 장가를 가고 여자가 자라면 시집을 가게 되옵니다. 남녀가 만나면 서로 즐거우니 그 즐거움에는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이사는 문득 말을 멈추고 영정의 눈치를 살폈다. 영정은 매우 관심있는 눈초리로 이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왕오는 아주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사는 빙긋 웃으며 일사천리로 말을 이었다.
"그 하나는 군자와 숙녀(淑女)의 만남이옵니다. 정이 발동하여 눈빛으로 서로 통하고 만나지 않으면 미칠 듯하여 들에서 강에서 만나 서로 하나가 되어 부부의 인연을 맺는 부류이옵니다. <시경>에서 '사랑하면서 보지 않으면 미칠 듯 눈빛이 어지러워진다'고 하는 말은 이를 일컬음이옵니다."
영정은 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하나는 친구와 같은 사랑이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깊어지고 서로 존경하고 아끼면서 예우하는 부류이옵니다. 이러한 사랑은 죽음에 이르러도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사옵니다. 이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말씀드리자면, 그건 서로 마음이 통하여 몸은 천리에 떨어져도 그걸 느끼지 못하고 가까이 있으면 틈새가 전혀 없는 사랑으로......"
"이 경과 추아의 사랑은 어느 부류에 속했소?"
영정이 갑자기 말을 끊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으니 두번째 부류이옵니다."
이제까지 추아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이사는 영정이 갑자기 물어오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정위는 어찌하여 어지러운 말로 영명하신 대왕마마를 혼란케 하고 있소이까?"
이때 왕오가 불쑥 끼어들며 이사를 나무랐다. 이사의 말에 흥미를 느끼던 영정은 갑자기 왕오가 찬물을 끼얹자 화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왕오는 영정의 매서운 눈빛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이 경이 말한 조희라는 여자는 어떻소?"
이사는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없이 말했다.
"지금 대왕마마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고 있사옵니다만 흡족한 배우자가 없어 아직 정실(正室)이 비어 있는 줄 아옵니다. 조희는 대왕마마의 명성을 흠모하여 천길을 멀다 않고 진나라로 들어왔사옵니다. 또한 그녀는 출신이 고결하고 아름다움이 뛰어나 대왕마마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옵니다. 감히 소신이 말씀드리거니와 조희는 확실히 대왕마마를 위하여 하늘이 보낸 여인인 것 같사옵니다. 이번에 이런 좋은 인연을 놓치신다면 후에 큰 후회를 하시리라 사료되옵니다."
영정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실까지 운운하는 이사의 말을 듣고 보니 조희라는 여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더욱 궁금하였다. 지금까지 그 곁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영정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단지 욕망을 배출하는 도구였을 뿐, 그는 여인들을 경멸하였다.
그러나 이날 이사가 한 말은 확실히 영정의 구미를 자극했다. 함께 자리한 왕오는 이사를 눈이 빠지게 흘겨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영정의 눈빛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영정의 눈은 남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의 빛을 띠고 있었다. 이사는 영정이 자신이 세운 계책 속으로 말려들어오자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고는 한비가 운양의 감옥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자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명복을 빌어주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옥졸들은 조고를 미친 놈 취급하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사람들의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조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고의 감옥방 앞에 줄지어 섰다. 잠시 후 몽무의 아들인 몽염이 옥문으로 다가오더니 진왕의 성지를 낭독했다.
"조나라의 조고는 간첩죄를 저질렀으니 진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부형에 처한다."
이 말에 조고는 너무나도 놀라 자리에서 우뚝 선 채 몽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뒤 옥문이 열리며 건장한 옥졸들이 달려들더니 조고를 두꺼운 목판 위에 묶은 채 부형을 가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몸을 맡긴 채 조고는 하반신에 거대한 통증을 느끼며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 누워 있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조고는 목판 위에 그대로 누워 기나긴 잠을 잤다. 어느 순간 서서히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조고는 제일 먼저 자신의 피부 위로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음을 느꼈다. '징그러운 벌레를 털어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정신이 맑아졌다.
조고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쉬기는 하는데 뭔가 허전하고 답답했다.
"이것이 바로 궁형(宮刑)이란 말인가?"
그는 전에 남자의 생식기를 절단하는 형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형벌이 자신에게 가해지자 독살을 당한 한비의 처지가 오히려 부러웠다.
"한비 공자는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부모님이 남겨준 신체는 손상당하지 않았어. 그런데 나는 뭐란 말인가?"
조고는 울다가 웃으며 미친 듯이 발광했다. 분노와 원한이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조고는 이렇게 외치며 마구 울부짖었다.
"하지만 살아서 무엇해? 남자 구실도 못하는 놈이."
조고는 용기와 좌절, 혼란과 모순이 교차될 때마다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어 벽에 얼굴을 부비고 흙바닥에 몸을 뒹굴면서 울고 웃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고는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짐승처럼 울부짖다 보니 어느덧 분노와 좌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고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기가 당한 것보다 더욱더 잔인하게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고통과 수치가 심할수록 복수의 일념은 더욱 강해졌다.
"이런 어두컴컴한 지하에서의 복수가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장소에서 통쾌하게 복수해 주마, 으으으으!"
옥졸들은 조고의 울부짖음을 귓전으로 흘려버리며 그저 미친 놈의 넋두리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조고는 그럴수록 더욱 삶에 집념을 보이며 강인하고 끈질기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감옥 안의 악취와 탁한 공기, 수많은 벌레들은 조고가 살아가는 데 더 이상 제약이 되지 못했다. 조고는 이런 처참한 환경 속에서 분명한 목표를 잡은 뒤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실현 가능한 계책을 하나씩하나씩 세워나갔다. 그가 점차 삶의 활기를 찾아가고 있을 즈음 드디어 누이동생 조희가 그를 찾아왔다. 누이동생이 왔다는 소식에 조고는 떨리는 가슴을 보듬고 주먹을 힘껏 쥐며 미소를 지었다.
함양에서 목적을 이룬 조희는 이사의 계책에 따라 운양성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이사가 건네준 부명(符命;명령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명패)으로 몽무에게서 감옥에 들어갈 수 있는 증명서를 받아냈다. 사실 감옥은 아무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조고가 갇혀 있는 감옥은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발디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설 때와 같은 두려움으로 감옥 앞에서 깊은 숨을 들이켰다.
감옥 안은 어둠과 심한 악취, 습한 기운, 냉기가 한데 어우러져 마음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희는 이런 곳에서 사람이 과연 살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오라버니 조고가 이런 처참한 곳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자 북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오라버니는 법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꿈꾸며 진나라에 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진나라 군대의 승리를 위해 기밀을 누설하였다가 조국에서 고초를 겪었는데 진나라는 이를 원수로 갚는구나.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조희는 터져나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울먹이며 옥졸의 뒤를 따랐다. 옥졸이 조고가 갇혀 있는 감옥의 문을 열자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감옥은 좌우로 두어 걸음 정도의 넓이에 사면은 갈대풀을 섞어 쌓은 토벽이었다. 바닥은 질퍽했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오른쪽 구석에 목판이 하나 놓였는데 그 위에 사람 하나가 누워 있었다.
"저 사람이 오라버니?"
조희가 놀란 눈을 비비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 분이 나의 오라버니라니, 그토록 건장하고 총명하시던 오라버니의 모습이란 말인가?"
목판에 누워 있는 조고는 진나라로 오기 전의 모습과는 너무도 딴판이었지만 혈육에서 오는 느낌으로 조희는 그가 자신의 오빠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고의 품으로 뛰어들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맞죠?"
그러나 조고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조희의 얼굴을 매만질 뿐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그리운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거나 소리치며 마음을 드러내기 십상이지만, 조고는 이미 그런 단계를 훨씬 지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조희는 조고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뼈만 남아 기막힐 정도였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오라버니, 설마 동생의 목소리를 잊은 건 아니시지요? 제 얼굴을 몰라보시는 건 아니시지요?"
그제서야 조고는 바닥에 고꾸라지며 울부짖었다.
"누이야, 우리 조씨 집안은 이제 대가 끊겼다! 대가 끊겼단 말이다!"
조희는 처참하게 소리지르며 오열하는 조고를 흔들었다.
"대가 끊기다니요? 대가 끊기다니요?"
조고를 다그치던 조희는 순간적으로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오라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아, 하늘도 무심하지, 어째서?"
조고는 조희의 등을 감싸안으며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조고를 부둥켜 안은 채 오열하던 조희는 잠시 후 눈물을 그치고 결연하게 소리쳤다.
"오라버니, 절대로 이 원한을 잊지 않겠어요!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어요!"
그런 조희의 모습에 조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장하다! 우리 조씨 집안의 여걸답구나."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자들이 누구누구에요?"
그러자 조고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몽무와 몽염, 그리고......"
조희는 몽무와 몽염이라는 말에 얼른 부명을 건넬 때 보았던 그 두 사람을 떠올렸다.
"또 없나요?"
"진왕 영정이지. 그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몽씨 부자가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었겠느냐."
"그들뿐인가요?"
"아니야. 또 있어. 넌 알지 못할 거야."
"그자가 누구예요?"
"이사, 정위를 맡고 있는 이사!"
이사라는 말에 조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설마 그 사람이?"
조희는 며칠 전에 보았던 자상한 이사의 얼굴을 생각했다. 이사는 그날 그녀에게 조고의 석방과 함께 그녀를 진왕의 정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네가 그자를 알고 있다는 말이냐?"
누이동생의 표정을 보던 조고가 물었다. 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는 그 위인됨이 매우 교활한 사람이야. 그자는 자신의 사형마저 독살시킨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게 흉악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무조건 그자의 말을 믿어선 안 돼."
"정말이에요? 오라버니가 한비 공자의 일을 어떻게 아시지요?"
조고가 냉정을 찾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비 공자는 바로 저 옆방에서 죽어가며 이사를 저주하였다. 쇠처럼 단단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슬픈 울부짖음을 잊지 못할 거야. 그의 억울함은 내가 반드시 밝혀내고 말 테다. 희야, 세상에 무슨 법치가 있고 도덕이 있다는 말이냐. 우리에게는 처절한 피의 복수만이 있다, 알겠느냐?"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 조고는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소리쳤다. 그런 조고의 모습에 조희도 이를 악물었다.
"그래요, 저도 제 몸을 더럽힌 놈들과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조고는 누이동생의 손을 힘껏 잡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남매는 비록 힘이 없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나 복수해야 한다.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을 만큼!"
"예, 거리거리마다 시체가 가득 쌓이게 만들어요!"
조희도 눈빛을 반짝이며 조고의 말에 맞장구쳤다.
한편 영정은 조희를 생각하며 깊은 잠에 빠졌다가 악몽을 꾼 듯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뒤 정신을 차린 영정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인데 어찌하여 여자 하나 때문에 운양궁으로 행차를 한단 말인가. 옛날부터 여자와 소인은 상대하기 곤란하다고 하였어. 가까이하면 달려들고 멀리하면 원망하는 게 그런 부류이지."
영정은 운양궁으로 가는 길이 그리 탐탁스럽지 않게 되자 갑자기 등승을 불렀다. 부름을 받은 등승이 급히 후원으로 달려왔다. 후원의 연못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갈 지(之) 자 모양으로 그 안에 연꽃을 심어놓아 멀리서 보면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붉은 연꽃 사이로 이름 모를 물풀이 향기를 뿜으며 간간이 일고 있는 물결에 가녀린 몸을 떨고 있어 후원의 화려함을 더해 주었다.
연꽃이 물에 넘치니 월나라 미인의 수심을 끊고,
잎사귀, 바람에 춤을 추니 그 그림자, 진나라의 거울을 어지럽힌다
영정이 연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시 한 구절을 중얼거렸다. 어젯밤 영정의 꿈 속에 조희가 이곳 연못에 나타났지만 그는 그녀의 손목 한 번 잡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다. 안타까움에 화내고 얼르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영정의 청을 거절했다.
영정은 지난밤 꿈을 생각하며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한탄하였다.
"대왕마마, 신 등승 대령했사옵니다."
이때 등승이 나타나 영정의 심란스런 마음을 일깨웠다. 영정은 멀리 연꽃을 바라보며 등승에게 가볍게 말을 꺼냈다.
"등 내사, 과인이 그대의 공로를 생각하여 천하에 소문난 미녀를 그대와 짝지워 주려고 하는데 어떻소?"
영정은 등승이 어린 시절 함께 양을 치던 능매라는 누이동생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렇게 넌지시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자 등승은 충직한 사람답게 자신의 심정을 거짓없이 털어놓았다.
"대왕, 이렇게 소신을 부르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사옵니까? 소신은 마마의 성은에 감사를 드리오나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는 감히 받을 수 없사옵니다."
"바보가 여기에도 있군그래."
영정이 혀를 끌끌 찼다.
"받고 안 받고가 어디 있소? 과인이 그대를 아껴서 주려는 여자는 명문가의 출신으로 가무에 능하고 모습 또한 선녀와 같소. 수많은 공경대부들도 감히 얻을 수 없는 그런 여자란 말이오."
이 말에 등승이 머리를 빳빳하게 들고 말했다.
"대왕, 감히 청하건대 그 여자는 그녀를 절절히 원하는 공경대부에게 주시옵소서. 억지로 소신에게 내리지는 마십시오. 그게 바로 소신을 아끼시는 일이옵니다."
등승은 아무런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영정은 그런 등승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은 어찌하여 과인을 따른 지가 벌써 스무 해가 되어가는데도 지금껏 홀몸으로 있다는 말이오?"
등승은 영정이 진심으로 자신의 혼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자 그제서야 감동하여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신은 별다른 바람이 없사옵니다. 다만 한나라를 칠 때 소신에게 선봉을 맡겨 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옵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할아버지와 능매를 고통에서 구하고 싶을 따름이옵니다."
"그 일이라면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경은 '내 마음은 바위와 같으니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떤 경우라도 감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오?"
등승은 영정이 말하려는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대답했다.
"소신과 능매는 비록 스무 해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항상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녀는 한시도 소신의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사옵니다."
등승은 영정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매일 밤 그녀는 소신의 꿈에 나타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옵니다. 소신과 함께 양도 몰고 젖도 짜면서 노래를 부르지요. 소신은 그저 한나라를 공격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옵니다."
영정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등승의 눈동자가 너무도 맑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한 여인에게 보내는 등승의 일편단심은 그동안 등승을 우직한 인물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영정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이사의 말에 따른다면 등승은 가장 고결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뜻이 서로 통하니 마치 금(琴)을 타듯 어우러지고, 두 사람이 한 마음이 되니 수천만 금의 재물도 소용이 없더라. 도대체 정이란 게 무엇이길래 부귀영화와 권력도 마다 않는가?"
영정은 등승의 의연한 모습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등승은 착잡한 영정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 조용히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억지로 가지지 못하는 게 바로 사랑이라면, 과인에게는 바로 그 하나가 모자라구나."
영정은 마음이 바뀌어 다시 운양궁에 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결정하자 영정은 서둘러 조서를 내리고 운양궁으로 갈 채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영정에 앞서 운양에 도착한 이사는 조씨 남매를 영정과 만나게 하기 위해 먼저 조고를 감옥에서 석방토록 하였다. 운양궁의 한 처소에서 이사를 만난 조고는 그를 보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조고의 모습에 이사는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조고가 두 눈을 부릅뜨며 이사에게 소리쳤다.
"뱀이나 전갈보다 더욱 악독한 무리가 감히 찢어진 입이라고 충을 지껄이니 결코 용서할 수 없으리라! 법을 지켜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형을 모함하고 독살하다니 소인도 이보다는 못하리라!"
조고는 이사에게 한 차례 욕설을 퍼붓고 나서 자신을 다시 조나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곁에서 조희가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조고를 바라보았다. 이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 대부, 그렇게 화를 참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내뱉다가는 복이 화로 변한다는 사실을 아셔야지요. 지금 조나라로 돌아가면 그대가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소?"
이 말에 조고는 자신이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더욱이 조희는 아까부터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계속 눈짓을 보내던 참이었다. 이사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조고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17. 영정, 조희를 사랑하다
마침내 운양궁에 도착한 영정은 이사가 조고와 조희를 부르러 간 틈을 이용해 침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뾰족하고 넓은 이마는 역시 군왕의 상(相)이야. 하지만 약간 올라온 어깨는 별로 보기에 좋지 않군. 그러나 까무잡잡한 얼굴색은 수덕(水德)을 받은 징조가 틀림없어. 그렇지만 이런 얼굴을 그 여인이 좋아할까?"
영정은 갑자기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갑자기 자신의 용모와 신체에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영정은 이제까지 28년을 살면서 인생의 달고, 시고, 쓰고, 매운 맛은 모두 보았지만 오직 그리움이란 '정(情)'과 사랑이라는 '애(愛)'는 받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영정은 역시 이십 대의 피끓는 젊은이었다. 그는 어느덧 불안감을 지워버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서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시경>의 '물수리'란 노래를 흥얼거렸다.
꾸룩꾸룩 우는 물수리, 강가 숲에서 슬피 울고
아리따운 아가씨, 멋있는 사내의 훌륭한 배필
올망졸망 마름풀, 이리저리 헤치며 찾아다니고
아리따운 아가씨, 자나깨나 님 생각뿐이라네
그리고 그리워도 얻지 못해, 자나깨나 생각뿐
가이없어라, 가이없어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올망졸망 마름풀, 이리저리 헤치며 따노라니
아리따운 아가씨, 다정한 금슬과 벗하고파라
올망졸망 마름풀, 이리저리 헤치며 고르나니
아리따운 아가씨, 시원한 풍악과 즐기고파라
영정은 '물수리'란 노래에 가슴이 떨리는 듯 온몸을 한 번 뒤흔들었다. 시원스레 휘감아도는 뚝섬의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꾸룩꾸룩 우는 새를 생각하며 그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조희는 어떻게 생겼을까."
영정은 군왕의 위엄을 거두어들이고 가능하면 다정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영정은 군왕이라는 자리가 가져다주는 권위와 허위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몸단장이 끝나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천종실(千鍾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이사가 조고와 조희를 이끌고 천종실에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오자 영정은 재빨리 조희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등장하자 음침하고 싸늘했던 천종실에 갑자기 따스하고 향기로운 생기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조희는 화사한 달이었고 따사로운 해였다.
영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한 번 조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맵시있게 틀어올린 머리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분을 바른 얼굴은 봄볕을 머금은 듯 빛났으며, 가느다란 몸매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연하게 보였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생긋거리는 두 눈동자에는 그윽한 갈망이 담겨 있었고, 입가에 스민 보일 듯 말 듯한 교태는 남자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상의 선녀도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다.
한동안 조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영정이 큰숨을 들이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인이 두 사람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심심한 사의를 표명하기 위해서요. 몽무 대인이 잠시 혼미하여 크나큰 죄를 범하였으니 이는 과인의 성명(聖明)을 흐리게 한 죄로써 엄히 다스리겠소. 조대부는 능력있는 사람인 줄 익히 알고 있으니 진나라를 위해 힘써 주시오. 과인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영정은 교묘하게 사과도 하고 아울러 책임도 회피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대 남매는 한단성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세운 누대와 아름답기 그지없는 신궁(信宮)과 동궁(東宮)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지 잘 알겠구려. 대북성의 저잣거리는 지금도 시끌벅적합니까? 그리고 두강노점은 아직도 번화합니까?"
영정은 조고에게 미처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계속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조고는 쏟아지는 그의 물음에 간단간단히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영정을 욕했다.
'여우 같은 인간! 뱃속에다 서너 개의 칼쯤 품은 위인이야. 하지만 언젠가는 이 조고가 네 목을 자르고 말겠다!'
영정은 이글거리는 조고의 눈빛에 고개를 돌려 조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대들은 이제 운양궁에 왔으니 편히들 쉬면서 달콤한 감천수를 마시고 감천산(甘泉山)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도록 하시오. 아마 한단보다는 수백 배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오."
영정은 온화한 얼굴빛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계속 떠들어댔다.
"이곳 운양궁은 과인의 증조부이신 소양왕께서 80여 년 전에 지으신 건물이오. 이곳은 황제(黃帝) 이래로 역대의 임금들이 동지(冬至)에 제천(祭天)을 드리던 장소로, 소양왕께서는 수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마석령(磨石嶺)에서 돌을 옮겨다가 6년에 걸쳐 이 궁전을 세우셨소. 궁중에는 관(觀), 각(閣), 청(廳), 상(廂), 루(樓), 대(臺), 정(亭)이 하도 많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오. 과인도 이곳에 오면 너무나도 복잡하여 종종 길을 잃곤 하지요. 그런데 이 궁은 처음부터 천상(天象)의 이십팔수(二十八宿)를 본따서 만들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과인이 두 사람에게 질문 하나 하지요. 지금 우리가 들어 있는 이 내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오?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영정의 말에 조고와 조희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어보았다. 내실에는 수많은 작은 종들이 천정과 벽에 걸려 있었고 연주에 쓰이는 편종(編鐘)도 여러 개가 보였다. 대들보에는 이보다 조금 더 큰 종이 십여 개나 걸려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나팔꽃처럼 생긴 거대한 종이 철주(鐵柱)에 매달려 있었다.
영정은 조씨 남매의 놀라는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어떻소? 이곳은 이름 그대로 천 개의 종이 있다는 천종실이오. 여기에 있는 편종들은 모두 30여 년 전에는 주천자(周天子)의 대전(大殿)에 있었던 것들이오. 그 가운데 특히 무사종(無射鐘)이라고 하는 종은 주경왕(周景王;BC 544-520년 재위) 시절에 만들어졌는데 그 소리가 맑고 은은하여 사람의 귀를 아주 즐겁게 한다오. 듣자 하니 위나라에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가종(歌鐘)이라고 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과인은 하루빨리 그 종을 무사종 곁에 달아놓고 싶은 마음이라오."
영정은 이렇게 말하면서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종들은 후종(侯鐘)이라고 하는데 주무왕, 성왕(成王)에서부터 주선왕(周宣王), 유왕(幽王)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들은 이런 편종을 만들었소. 종의 윗부분마다 각각 다른 도안(圖案)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서 서로 얽혀 있는 쌍용(雙龍)과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전하는 포뇌(蒲牢)라는 짐승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소이다. 후종이 모두 울리면 소리가 서로 부딪치면서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아주 먼 곳까지 그 음을 내보낸다오."
잠시 이야기를 멈춘 영정이 조씨 남매의 표정을 살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기 철주에 매달려 있는 대후종(大侯鐘)은 상탕(商湯;은나라를 세운 임금)이 하걸을 물리치고 만들었다는 종이오. 종의 윗부분에는 상(商)나라와 하(夏)나라가 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명조(鳴條) 전투를 그린 명조회전도(鳴條會戰圖)가 새겨져 있는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하걸왕이오. 봉두난발(蓬頭難髮)에 맨발을 한 채 비참하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시오. 혼군(昏君)의 말로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소?
저쪽 남쪽에 걸려 있는 종이 바로 우리 진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소화종(昭和鐘)이라오. 그 종을 만들 때 정말로 많은 공을 들였소. 비록 소화종의 몸체는 좁고 작지만 소리는 어느 종보다 멀리 간다오. 음색이 깨끗하고 가느다란 명주실처럼 끊이지 않아 듣는 이의 귀에 오랫동안 여음을 남기지요. 이 종은 넓고(寬) 좁으며(窄), 두텁고(厚) 엷으며(薄), 길고(長) 짧은(短) 특색을 가려서 만들었소. 과인은 정치 또한 이처럼 특색을 가려서 할 생각이오."
마침내 영정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자 조고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대왕마마의 고명하신 안목과 지혜에 그저 놀랄 따름이옵니다. 더욱이 소화종의 특색과 마찬가지로 정사를 돌보신다는 말씀에는 경탄해 마지않사옵니다. 정말로 훌륭하신 생각이옵니다."
조고의 찬사에 영정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와는 달리 언행에 자제력을 잃고 들떠 있는 영정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사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왕께서 마치 의랑(議郞;임금의 자문역을 맡은 벼슬)처럼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모두 조희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나도 끼어들지 않을 수 없지.'
이사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조고와 조희를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조 대부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대왕마마께서는 천문과 지리에 훤하시고 제자백가의 학문에도 일가견이 있으시다오. 더욱이 농(農), 정(政), 병(兵), 상(商) 분야에도 정통하시지요. 조금 전 말씀하신 종(鐘)에 관한 학식은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오."
영정은 이사의 칭찬에 아주 흡족해져 기분 좋은 얼굴로 조희를 바라보았다.
'이번 승부는 나의 승리야. 함양성 토박이 왕오도 이제는 한풀 꺾이겠지.'
영정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끌려가자 이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이 되어 조고에게 말했다.
"조 대부, 감천산의 저녁 노을은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절경(絶景)이라오. 오늘 마침 하늘이 그런 절경을 다시 내려보낸다고 하니 함께 가지 않겠소?"
이사의 말 속에서 그 의도를 알아차린 조고가 이를 갈았다.
'음흉한 이사, 아직은 내가 참지. 그러나 두고 보자. 반드시 내가 받은 치욕을 갚아주겠다.'
조고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을 한 뒤 영정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대왕마마, 이번 여행을 허락해 주옵소서."
영정이 얼른 손을 들어 허락을 표시하자, 조고는 누이동생을 일으켜 세우며 영정에게 다시 말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번 여행은 동생과 함께 가도록 하겠사옵니다."
조고의 말에 영정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조고가 이사와 함께 감천산으로 떠나고 나면 영정은 조희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이 어긋나자 초조하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사도 뜻밖의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조고의 눈치만 보았다.
잠시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던 조고가 피식 웃으며 조희에게 말했다.
"희야, 너는 몸도 피곤하고 다리 힘도 없으니 감천산에 오르기는 힘들 거야. 그러니 이곳에서 쉬는 게 낫겠구나."
조희는 오라버니 조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이사는 감천산으로 떠나겠다며 조고와 함께 천종실을 빠져나갔다. 영정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희는 천종실에 들어선 이후 줄곧 영정의 눈빛을 관찰했다. 그녀는 영정이 자신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조희는 조고와 자신이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서는 영정을 처음 대면하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못 되고의 실마리는 바로 이날 이곳에서 판가름날 것이었다.
조고와 이사가 나간 순간부터 천종실은 갑자기 기괴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갸날프고 아름다운 한 마리 토끼를 잡아먹으려는 음흉한 늑대의 살기가 수많은 종들의 냉기와 함께 어우러져 실내를 휘감았다. 또한 그 속에는 음흉한 늑대를 품 안에 가두고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여우의 은밀한 교태가 파고들고 있었다.
조금 뒤 조희가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영정을 바라보자, 영정 또한 무엇에 홀린 듯 조희의 온몸을 핥듯이 훑어보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붉은 입술 끝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조희가 천천히 영정에게로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영정은 그만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음흉한 눈초리로 조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희가 그 뜨거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살풋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희고 갸날픈 긴 목이 영정의 눈 앞에 드러났다. 도저히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억제하기 어려워 영정은 그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 안으려 했다. 그 순간 조희는 영정의 손에서 살짝 빠져 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조희의 모습을 보는 영정의 눈빛이 욕정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영정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려 하자 조희는 이번에도 그를 피했다. 안으려는 영정과 피하는 조희가 숨바꼭질을 하듯 계속 실랑이를 벌였다.
영정은 조희가 계속 자신을 피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까지 그의 품 안을 벗어나려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어느 여자도 감히 임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는데, 조희라는 이 여인은 호락호락 영정에게 안기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피하는 조희의 행동은 영정의 욕념(欲念)을 더욱 자극했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손에서 벗어나는 숨바꼭질이 계속될수록 영정은 더욱 미친 듯이 그녀를 갈망했다. 조희를 바라보는 영정의 두 눈에서는 욕망의 빛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조희의 눈은 더욱 초롱초롱하고 맑았다. 백설 같은 눈 위에 피어 있는 매화처럼 순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모습에 영정은 이성을 잃고 오로지 나비를 잡기 위해 풀밭을 헤매는 아이처럼 그녀를 쫓고 또 쫓았다. 조희는 잡힐 듯 말 듯한 몸짓과 표정으로 영정을 계속 농락했다.
한참 동안 천종실을 맴돌던 영정이 그만 지쳤는지 자리에서 멈춰 서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대는 과인을 갖고 장난치려는 것이오?"
영정이 화를 내자 조희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런 무례를 범하는 것은 모두 신첩이 대왕마마를 존경하고 흠모하기 때문이옵니다.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감히 대왕마마의 은혜를 받는 불경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성현의 말씀에 '욕망은 절도가 없는 데서 나오고, 그릇됨은 삼가지 않는 데서 나온다(欲生于無度邪生于無禁)'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첩은......"
"썩어빠진 유생들의 말일랑 그만두시오. 그리고 그대는 과인을 오늘 처음 보는데 무슨 흠모란 말이오! 진나라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존경이란 말이오! 그대는 공손하게 과인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오. 옛말에 '천자가 노하면 피가 강물을 이룬다'고 하였소. 이 말을 알고 있소?"
영정은 조희가 계속 자신을 피하자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다. 조희는 영정이 옛말 운운하며 자신을 위협하는 의도를 간파했지만 기를 꺾지 않고 더욱 당당하게 말했다.
"신첩은 명문가의 출신으로 설사 목숨이 떨어진다 해도 결코 정조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천자가 노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사옵니까. 신첩이 천리가 멀다 않고 진나라에 온 이유는 오로지 대왕마마의 위엄과 명성을 흠모하였기 때문이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조희의 언행은 영정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동안 영정이 대했던 여인들은 모두 그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기라면 기었고 웃으라고 하면 웃었으며 수많은 여인들이 한결같이 영정 앞에서 꼭두각시처럼 행세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조희라는 여자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희의 굳건한 대답에 영정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영정은 하는 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고 조희에게 애원했다.
"과인이 그대의 깊은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는 피하지 마시오."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옵니까?"
조희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과인은 진심으로 그대를 아끼고, 또한 미인은......"
영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면서 조희를 바라보았다.
"신첩은 감히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조희는 얼굴을 꼿꼿이 들면서 더욱 대담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수많은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철석 같은 약속을 하였지만 대부분이 변했사옵니다. 대왕마마께서도 지금 당장 저를 취하고픈 마음에 하고 싶지 않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다."
조희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영정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영정은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과인은 일국의 군주인데 어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겠소?"
"그래도 신첩은 감히 믿을 수 없사옵니다."
"허허, 과인은 결코 식언(食言)은 하지 않소. 절대로 식언이 아니오."
영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조희를 설득했다.
"그렇다면 신첩이 대왕마마께 세 가지를 청하겠사옵니다."
"빨리 말하시오. 세 가지 청이 무엇이오?"
영정은 오로지 조희를 당장 품 안에 넣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첫째, 들에서 교합(交合)하고 작약(芍藥)을 내려주는 그런 비례(非禮)는 신첩이 원하는 바가 아니옵니다. 대왕께서는 신첩을 비(妃)로 삼고 반드시 비녀를 내려주신 다음에 맞아들이셔야 하옵니다."
"좋소, 그것을 들어주겠소."
영정은 그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대왕께서는 신첩이 낳은 아들을 반드시 태자로 삼아주셔야 하옵니다."
"하하하, 사내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주겠소."
영정에게는 그때 열일곱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공주가 있었다. 따라서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정은 눈앞의 욕심에 급급하여 그만 조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신첩은 저의 오라버니를 위해 청을 드리겠사옵니다."
"그만, 과인은 이미 조 대부에게 높은 벼슬을 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소."
사실 조고는 부형을 당해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는 몸이라 당연히 조정의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정은 그녀의 세 번째 요구도 아무런 주저 없이 허락했다.
"대왕마마, 오라버니는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살 것이옵니다. 더욱이 죄인의 몸이라서......"
영정이 얼른 그녀의 말을 막았다.
"과인이 조회에서 그의 죄를 사면해 주겠소."
영정의 명쾌한 응답에 조희는 감격하여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그런 조희의 모습에 영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자신의 요구가 다 받아들여지자 조희는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영정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연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다섯이었다. 단은 특히 영정의 중부였던 여불위와 아주 가깝게 지냈으며, 우아한 풍채와 절도 있는 행동으로 함양성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는 명사(名士)가 되었다. 단은 평소 나들이할 때 호랑이 머리와 각종 짐승의 모습을 조각한 구슬을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황금색 꽃을 수놓은 보라색 장포(長袍)를 걸쳤으며 푸른 색 구슬로 장식한 가죽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이런 모습은 함양성의 권문세족과 귀족의 자제들에게 유행되어 행세한다는 멋쟁이들은 모두들 그의 복장과 행동을 따라할 정도였다. 단은 특히 예의가 바르고 시문에 능하며 인질로 있으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의젓해 많은 이들의 흠모를 받았다.
연 태자 단은 언행과 몸가짐에 있어서 다른 인질들과는 확실히 구별이 되었다. 그는 사흘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장안의 명사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닷새에 한 번씩 연회를 베풀어 풍류를 즐겼다. 단은 비록 인질이었지만 여러 대신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진나라의 국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뚫었고 정사에도 조금쯤은 간여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단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하루빨리 인질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9년만에 관례를 치른 영정은 아주 신속하고도 냉혹하게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정적 여불위를 제거했다. 이에 따라 여불위에게 의지하며 그런대로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을 보내던 단의 처지는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조정의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한 영정은 곧이어 이웃 6국을 통일하려는 야망을 드러냈고 많은 진나라의 귀족들은 왕덕(王德)을 찬양하고 진의 부강을 미화했다. 통일을 꿈꾸는 진나라 조정은 함양성에 있는 각국의 인질들을 더욱 엄하게 감시하고 행동을 제약했다. 연 태자 단은 그런 분위기에서 더 이상 진나라 명사들과 교류를 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함양성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괴로웠다. 엄밀히 따진다면 단의 실질적인 인질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이날 아침에도 단은 탁자 앞에 앉아 술을 마시며 울적함을 달랬다.
넓고 넓은 대지, 끝없이 펼쳐진 북국(北國)의 땅
진나라의 병사들아, 언젠가 그대의 가슴을 밟고 지나가리라
나에게 힘있는 날개만 생긴다면
꿈에도 그리는 고향 북국으로 날아가련다
생명을 이어준 조상님의 영광을 위하여
뜨거운 가슴, 벌판의 시체로 말라죽는다 해도
잠시 노래를 멈춘 단은 술잔을 훌쩍 비우고는 다시 술을 따랐다.
"하하하, 인질의 몸으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안주삼아 반진(反秦)의 술을 마시다니 대범하구려."
갑작스런 목소리에 단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문 밖을 살펴보았다. 만일 조금 전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듣고 이를 관청에 알린다면 그의 생명은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하하하, 나요."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단과 아주 친하게 지내는 창문군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문군은 4년 전에 도위를 맡아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얼마 전 그의 형인 좌승상 창평군과 함께 영정에게 미움을 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 형제는 집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단 앞에 털썩 주저앉은 창문군이 황갈색의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사실 나는 그대보다 더욱 솔직하고 강직했는데 지금 결과는 어떻소? 요즘 세상은 맑고 탁한 걸 구분하지 못한다오. 특히 그대와 같은 인질은 언행에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오."
"옳은 말씀이오. 명심하겠소이다."
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사람은 옛날부터 여 승상과 가깝게 지냈고 또한 인질의 몸이라 감시와 제약을 받는다 치더라도, 그대는 진왕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커다란 공을 세웠지 않소? 그런데 어떻게 그리 낭패한 꼴을 당한다는 말이오?"
단의 한탄에 창문군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는 모습이었다. 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창문군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하겠소. 우리 이모님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겠소?"
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군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래도 진왕은 두 분 형제에게 승상과 도위라는 중책을 맡기지 않았소?"
그러자 창문군이 피식 웃었다.
"문신후가 죽고 나서 영정은 천하를 병탄하려는 야망에 휩싸여 있소. 지난해 초나라를 공격한다고 하여 우리 형제는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를 겨우 말렸지요. 가까스로 출병은 막았지만, 지난 봄에 이 정위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김에 몇 마디 했는데 그게 영정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요. 그 직후 파직을 당하고 말았소."
단은 그제서야 창문군 형제가 관직을 박탈당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창문군을 위로하는 뜻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두 분은 나보다 훨씬 나은 편이오. 남들이 칼과 도마를 들고 있다면 우리 인질들은 그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에 불과하다오. 이렇게 진나라에 있는 인질들은 항상 불안에 떠는 신세라오."
창문군도 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초왕(楚王)의 종실혈족이오. 그렇지만 영정의 눈에는 모두 인질로 보일 뿐이겠지."
단은 창문군의 넋두리에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강산은 변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군.'
창문군은 말없이 웃고만 있는 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뒤 단이 입가의 웃음을 지워버리며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겠소?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기를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소?"
"함양성에서 인질 상태를 벗어나기는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오. 장신후와 문신후의 말로를 보지 않았소? 결코 영정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창문군이 고개를 숙이고 비통한 어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며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때 창 밖으로 병사들이 부르는 군가(軍歌)가 힘차게 들려왔다.
북벌 가세, 북벌! 동정(東征) 가세, 동정!
건장하고 용감한 청년들아,
손에 손에 칼을 쥐고,
어깨 어깨에 활을 메고,
임금을 쫓아 여섯 나라를 무너뜨리세
평화로운 세상을 세워 백성들을 즐겁게 하자
노래를 듣는 창문군의 표정이 더욱 비통해졌다. 그는 두 손을 부르르 떨면서 참담하게 중얼거렸다.
"새는 고향으로 날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태어난 언덕으로 고개를 누인다. 가자, 고국으로 돌아가자. 남쪽으로 돌아가자(鳥飛返故鄕兮弧死必首丘走回故鄕去回南方去) ."
창문군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애정(哀정)'이라는 시를 읊었다. 연 태자 단은 창문군의 비감어린 중얼거림에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가자, 돌아가자'는 말에는 더욱 비통한 느낌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단이 한시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은 조금 전 창문군이 들어오면서 자신을 일깨워 준 것을 생각하고 얼른 바깥을 가리키며 그에게 경고했다.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뜻은 참으로 좋지만 '우리를 돌려보내지 않으니 걱정이 하염없어라'는 말처럼 늘 입을 조심해야지요.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을 벌써 잊었나요?"
창문군은 단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문 밖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단에게 속삭였다.
"태자는 예전에 한단성에서 영정을 구해 준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한번 도움을 청해 보는 게 어떻겠소?"
그 말에 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창문군께서는 진정 영정의 성격을 모르신다는 말이오? 지난달에 영정을 만났을 때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했지요. 그런데 무어라고 말했는지 아시오? 세 가지 징조가 나타나면 그때 다시 청하라고 하더이다."
"세 가지 징조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글쎄, 새의 머리가 희어지고(鳥頭白), 말의 머리에 뿔이 나고(馬生角), 하늘에서 좁쌀비가 쏟아지면(天雨粟) 그때서야 귀국을 허락한다는 게 아니겠소? 세상에 말이나 되는 소리요!"
단이 흥분하여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창문군이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는 어서 고국으로 도망가시오. 지금 위기가 코 앞에 와 있소."
그러자 단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인질로 온 사람을 죽이려고 하겠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태자는 나보다 영정의 성격을 더 모르고 있는구려. 영정은 생모를 구금하고 중부를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소. 또한 감라라는 천재를 폭사시켰고 한비 공자도 죽게 만들었소. 영정은 태자와 여 승상이 가까운 사이였음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을 테니 때가 되면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불가능한 세 가지 징조를 들먹이며 귀국을 막겠소?"
그제서야 단은 창문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귀국하여 연나라의 국정을 장악하고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단은 창문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자는 함양에 많은 친구들이 있으니 나의 귀국을 도와주시오."
조급해진 단의 모습을 살피던 창문군이 음흉하게 물었다.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아무리 훌륭한 그림도 배가 고프면 쓸모가 없는 법이 아니겠소? 귀국을 하게 되면 이곳에 있는 내 재산은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모두 그대에게 드리겠소. 적어도 30만 금은 충분히 될 것이오."
그러자 창문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보물을 남들이 알고 있으면 그 화(禍)가 나에게 돌아올 텐데 어찌 내가 그것을 요구하겠소. 만일 영정이 이를 안다면 내 목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놓으시오. 이곳은 그대와 나를 제외하고는 여 승상, 도 총관, 번우기 세 사람만이 출입했을 뿐이오. 세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말에 안심이 된 창문군은 단의 손을 맞잡으며 몇 마디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이틀 후, 연 태자 단을 감시하는 관원이 진왕 영정에게 급보를 알려 왔다.
"연나라의 인질이었던 태자 단이 객관의 개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 고국으로 도망쳤사옵니다."
이때 영정의 곁에서 애교를 떨고 있던 조희가 이 소리를 듣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연나라의 태자라는 양반이 개구멍으로 달아나다니, 그래도 그런 사람이 대장부인가요?"
영정이 단을 비웃는 조희의 말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개구멍으로 달아날 만큼 그렇게 비겁한 인물이었던가? 모를 일이야."
영정은 곧바로 등승을 불러 자세한 내막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영정은 조희를 알게 된 이후 매일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희는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면서도 풍류와 운치를 즐길 줄 알았다. 미모도 미모려니와 무엇보다 영정이 그녀에게 반한 이유는 조희는 그가 알고 있던 어느 여인보다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조희는 영정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영정은 조희를 받아들인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를 정비(正妃)로 삼는다는 조서를 내렸다. 영정은 조희에게 빠져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않으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이날도 두 사람은 그윽한 후원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정과 조희, 두 사람은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부비며 풀내 향기로운 후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두 사람의 발길이 어느덧 연못 가에 멈춰졌다. 조희가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뜰에는 산색(山色)이 가득한데 안타깝게도 이 연못은 너무나도 작아요. 대왕마마의 기백과 어울리지 않는군요. '넓구나 한수야,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도다'는 옛 시가 있는데 신첩은 꿈에서라도 대왕마마와 그런 곳에서 배를 띄우고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요. 구름이 연못을 모두 가리지 못하고 바람이 연못 위를 날아도 한참 동안 끝에 달하지 못하는 그런 멋진 경관을 구경하고 싶사옵니다."
청명한 하늘과도 같이 맑디 맑은 조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영정은 그녀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천하가 아무리 넓다한들 모두 과인의 흉중에 있지 않겠소? 넓고 넓은 황하도 모두 진나라에 속할 날이 올 것이오."
그러자 조희가 방긋 웃으며 교태를 부렸다.
"대왕마마, 해가 아무리 밝다한들 밤을 비추지 못하고 달이 아무리 밝다한들 낮을 비출 수가 없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신첩의 청춘도 마냥 기다려 주지는 않아요.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은 너무나 괴롭사옵니다."
조희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영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 방울을 보던 영정이 결심을 한 듯 공정 총관(工程總管) 사록을 불렀다.
"이곳에 커다란 연못을 축조하겠으니 서둘러 준비토록 하시오."
사록은 영정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 열흘만에 설계도를 완성하여 영정에게 바쳤다.
"대왕마마, 함양성의 동쪽에 동서 2백 리, 남북 20리의 연못을 만들기 위해서는 위수를 끌어들여야 하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장정의 힘이 필요하온대 성 내에서는 징발할 사람이 없사옵니다. 이를 고려해 주시옵소서."
사록의 보고에 영정은 조용히 서고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중거부령(中車府令)에 임명된 조고가 영정에게 계책 하나를 올렸다.
"대왕마마, 몽염 장군이 출정을 요청하고자 도성에 들어와 있으니 이들 병력을 이용하는 게 어떠시온지요. 조나라 이목의 병력은 몇 차례 승리로 기세가 충천하여 자칫 맞붙었다가는 진군이 또다시 당할 위험이 크옵니다. 그리고 곽개의 밀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하셔도 무방할 듯싶사옵니다."
조고의 말에 영정은 그제서야 어려운 문제를 푼 듯 속이 후련해졌다. 영정은 곧바로 조서를 내려 몽무와 몽염의 군대를 호수 축조 공사에 동원하도록 하였다.
상무 정신이 투철한 진나라 병사들은 이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지만 진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무와 몽염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로 자신들의 병력을 공사에 동원토록 꾸민 조고에게 격한 분노가 일어났다. 다행히 사록이 몽무와 몽염에게 전력을 다해 빠른 기간 내에 공사를 완성하겠다고 약속하여 정면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거쳐 이듬해 봄이 왔을 무렵 함양성 동쪽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진왕 영정 16년(BC 231년), 위수와 진령(秦嶺)에도 봄은 찾아왔다. 관도(官道)와 민가의 거리마다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다투어 키를 자랑하고 물가의 버드나무에도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지난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낸 복숭아꽃이 이른 봄인데도 벌써 꽃봉오리를 피웠으며 멀리 산허리에는 봄꽃이 울긋불긋 제 빛을 자랑하였다. 관중(關中) 지역의 경관은 가히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날 조고는 호수의 공정을 살펴보라는 영정의 명령을 받고 난지(蘭池)로 발길을 옮겼다. 영정은 조희가 난초를 지독하게 좋아하자 아예 연못의 이름을 난지로 명명하였다. 조고의 신색(身色)은 진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관직은 별로 높지 않았으나 영정의 남다른 총애를 받고 있어서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또한 연 태자 단이 진나라를 빠져 나가기 전에 많은 뇌물을 조고에게 바친 바 있어 그의 생활은 상당히 풍족하였다.
조고의 마음 속에는 오로지 강렬한 복수심만이 들끓었다. 원한과 독기 서린 그의 말투 때문에 궁중의 많은 대신들이 그를 싫어했지만 조고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누이동생이 영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무기로 그 누구에게도 조금도 굽히거나 조심하지 않았다.
이날도 조고는 악독한 마음을 품고 난지로 달려갔다. 몽무는 왕사(王使;왕이 보낸 사신)가 도착한다는 급보에 공정 총관 사록과 아들 몽염을 이끌고 영접을 준비하였다. 몽무는 뜻밖에도 왕사의 자격으로 조고가 당도하자 놀란 듯 혼자 중얼거렸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참으로 일이 꼬이는군."
몽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고에게 걸어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조고는 조고대로 몽무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타나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여우 같은 놈, 이제 네가 나한테 당할 차례야.'
몽무와 마주친 조고가 고개를 들고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몽 장군. 보잘것없던 조고가 공사를 감독하러 왔습니다. 이 몸이 사적인 원한으로 인해 공무(公務)를 그릇되게 보지 않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을 마친 조고는 몽무를 앞질러 성큼성큼 난지각(蘭池閣)으로 올라갔다. 난지각은 호수 가에 세워진 아름다운 누각으로 반은 수중에, 반은 둑에 걸쳐 있었다. 누각의 처마에는 난초를 새긴 조각이 빙 둘러 세워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조희의 청대로 난지의 물결은 하늘과 연결되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궁중에 있는 연못과는 크기나 그 화려함에 있어 비교조차 되지 못했다.
연못의 주변에는 2장 거리로 소나무를 심었고 그 사이에 난초와 백지(白芷) 꽃밭이 있었으며, 누각의 왼켠으로는 학들이 무리를 지어 먹이를 다투었고 오른켠으로는 커다란 돌에 조각한 고래석상이 물 속에 배를 담근 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난지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시비걸 꼬투리를 잡으려던 조고의 눈길이 꽃밭에서 멈춰졌다.
"난지는 난초가 많아야 제격인데 너무 부족하군요. 게다가 봄이 되었는데도 아직 꽃조차 피지 않다니......"
조고가 시비를 걸어오자 몽무는 슬그머니 화가 솟구쳐 퉁명스레 대답했다.
"심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꽃을 피우겠소?"
조고는 몽무의 대꾸에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조고는 사실 속으로 매우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연못의 수축 공사는 아주 질서있게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막사가 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감독관들은 소가죽으로 만든 막사에서 거주하고 일반 병사들이나 백성들은 대나무와 풀로 엮은 막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또한 병사와 백성들은 서로 확연하게 구분이 되어 작업을 하였으며 모든 인원은 군대식으로 분류되어 제각기 깃발로 구역을 표시하였다. 공사에 쓰이는 자재들도 요소요소에 제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조고는 내심 몽씨 부자의 노력과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은 채 다시 입을 비쭉이며 말했다.
"장군께서 정말로 이번 공사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조고는 '고심'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몽무를 비웃었다. 몽무는 조고의 말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집안은 역대로 진나라의 장군을 배출해 왔다. 수많은 전장에서 군공을 세운 이 몸이 환갑을 가까이 둔 나이에 난지를 만들고 누각을 세우는 일에 정력을 쏟다니 참으로 원통하구나. 이 모든 게 요사스런 무리들이 들끓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조고는 깊은 생각에 빠진 몽무를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노장수 몽무의 눈에서는 분노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조고는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몽염은 두 사람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부친의 안색을 보고 얼른 헛기침을 하면서 주의를 일깨워 주었다. 그제서야 몽무는 정신을 차리고 눈빛을 거두었다.
조고는 통쾌함을 느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몽 장군, 소신이 이곳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몽무는 가까스로 이렇게 대답하고 고개를 옆으로 획 돌렸다.
조고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이 되어 고래석상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고가 매우 신기한 듯 고래석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고래석상의 크기는 얼마입니까?"
"이백 장이오."
뒤따르던 몽무가 내뱉듯 대답했다.
"작습니다, 너무나도 작습니다. 장군께서는 북방에 사는 고래를 보지 못했습니까? 아마 크기가 수천 리는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이백 장이라니요?"
조고는 울그락불그락하는 몽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기 고래석상이 내뿜는 물은 무엇입니까? 별로 특별하게 보이지도 않는군요. 대왕께서는 저것보다 더욱 신기한 모양을 구경하고 싶어하십니다."
이때 곁에서 조고의 말을 듣던 사록이 끼어들었다.
"조 대인께서는 박학다식하지만 고래석상이 스스로 물을 빨아들이고 뿜어내는 이치는 모르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다가 정작 대왕께서 오셨는데 작동하지 않으면 누가 책임을 지겠소?"
조고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때 갑자기 고래석상의 몸이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힘차게 내뿜던 물기둥이 점점 약해져 갔다. 조고는 그제서야 사록의 기술에 탄복하였다.
"하하하, 정말 훌륭한 기술이오. 이번 공사는 몽 장군이 전쟁에서 패배한 치욕을 씻기에 충분합니다. "
몽무는 조고의 비난 어린 말투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몽염은 자신의 아버지가 조고에게 계속 업신여김을 받자 분을 이기지 못했다.
"저 자가 건방지게 감히 진나라의 대장군을 모욕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몽염은 두 눈을 부릅뜨고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기세를 보아서는 조고를 단칼에 베어버리려는 심사였다. 이를 본 몽무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물러나라고 소리치자 몽염은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얼굴이 시뻘개진 몽무가 얼른 조고에게 사죄를 하였다.
"아들 녀석이 워낙 성격이 거칠어 무례를 범했으니 부디 못 본 척 넘어가 주시오."
조고는 씩씩거리며 멀어져 가는 몽염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몽무를 노려보며 말했다.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다만 장군께서는 국법을 잘 아실 테니 저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멸족의 화를 당하는 그런 일은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고는 이렇게 말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날 오후 난지를 떠나 함양궁으로 돌아오던 조고는 몽무 부자를 곤경에 빠뜨린 일이 즐거워 연신 웃음을 흘렸다.
조고는 이날 이후 다른 사람을 공격하여 얻어지는 쾌락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곧 이러한 조고의 방자한 언행에 조정의 대신들이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정의 원로들을 중심으로 조고의 비행을 찾아내고 공격하는 일이 은밀하게 꾸며졌다. 몽무와 몽염은 물론이고 태부 왕관, 어사대부 풍거질, 장군 장한(章邯)이 한통속이 되어 '진나라를 어지럽히는 괴수'로 조고를 지목하면서 그를 공격하였다. 더욱이 이사 또한 자신의 앞길에 조고가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는지 그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 태자 단의 도주를 조사하고 있던 등승이 그와 관련된 조고의 비행을 찾아내었다. 조정 대신들은 조회에서 이구동성으로 영정에게 이 사실을 고발하였다.
"대왕마마, 조고는 조정의 예의(禮儀)를 담당하는 중거부령에 있으면서 사사로이 연 태자 단의 뇌물을 받았으며 그 자의 도주를 방관하였사옵니다. 마땅히 중죄로 다스려야 국법이 바르게 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영정은 그러한 대신들의 주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조고에게 호통을 쳤다.
"그대는 이 나라의 중거부령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자중자애하지 않고 방자하게 욕심을 내었는가! <순자>에 이르기를 '공이 없으면 상을 주지 말고(無功不賞), 죄가 없으면 벌하지 말라(無罪不罰)'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커다란 죄를 범하였으니 국법에 따라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도다."
영정은 그 자리에서 중서자 몽의에게 조고의 죄상을 심리토록 지시하였다.
이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황혼이 내릴 무렵 황문령이 급히 후원으로 달려와 영정에게 보고를 올렸다.
"조비마마께서 어젯밤에 대왕마마께서 보내신 약을 드시고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사옵니다."
영정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급히 후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정은 대신들 앞에서는 매우 위엄있고 추상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조희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조희가 누워 있는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조희는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온몸을 떨면서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영정은 몹시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 앞으로 달려갔다. 영정을 본 조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마마, 신첩이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영접을 하지 못했어요. 용서하세요."
영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사랑하는 그대가 빨리 몸을 회복하기만 기다릴 뿐이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아름다운 금관을 준비하였는데 얼른 몸이 나아야 쓸 수 있지 않겠소."
조희는 탁자에 놓여진 금관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둥그런 금관이 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용과 봉황이 조각된 열두 개의 산봉우리 금제 장식이 금관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금관을 바라보던 조희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가늘고 가는 갈나무가 너른 들판에 가득하구나
뛰어난 기술자가 그걸 얻어 갈포모시를 만드네
뛰어난 기술자가 그걸 못 얻으면 들에 말라 죽네
영정은 조용히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잠시 숨을 몰아쉰 조희가 영정에게 그 뜻을 해석해 주었다.
"신, 신첩은 다행히도 대왕마마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사옵니다. 갈나무가 뛰, 뛰어난 기술자를 만났다는 의미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옵니다. 이제 신, 신첩은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조희는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겨우 말을 마쳤다. 그녀는 이레 전에 영정과 함께 난지에 나들이를 나갔다가 풍한(風寒)에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영정은 지난밤 너무나 걱정이 되어 자신이 늘 복용하던 지해환(止咳丸;기침을 멈추게 하는 약)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병이 호전되기는 커녕 더욱 심해진 것이다.
조희의 처참한 얼굴에 영정은 가슴이 메어졌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무엇하느냐? 하무차를 빨리 들라고 일러라!"
잠시 후 태의 하무차가 약낭(藥囊)을 들고 급히 후궁의 내전으로 달려와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실내는 여섯 개의 등잔이 벽에 걸려 있어 매우 밝았다. 등잔에는 각각 세 개의 향촉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짐승가죽이 깔려 있었다. 방 가운데에 아담한 침상이 놓였고 그 위에 조희가 옆으로 누운 채 기침을 해댔다. 그런데 조희와는 대조적으로 침상의 뒷벽에는 우람한 체격의 신상(神像)이 그려져 있었다.
하무차는 영정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서 자신을 불렀는지 걱정이 앞섰다.
"그대가 이 환약을 지었는가?"
영정이 예닐곱 개의 환약을 바닥에 내던지며 물었다. 하무차가 바닥에 구르고 있는 환약을 보면서 대답했다.
"소신이 만들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침이 멈추지 않느냐? 네 간을 꺼내 얼마나 부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영정의 위협에 하무차는 혼비백산하여 온몸을 떨었다. 바로 이 순간이 그에게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소신이 어찌 가벼이 약을 지었겠사옵니까? 소신이 직접 약초를 따다 맛을 보고 환약을 만들었으니 조금도 약효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누구 앞에서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느냐! 아직도 기침을 하지 않느냐!"
"조금만 기다려 보시옵소서."
하무차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왕비가 이틀 동안 기침을 하는 걸 보지 못해서 그러는가 본데 얼마나 병이 심해졌는지 아느냐?"
하무차가 두 손으로 땀을 훔치며 다시 말했다.
"대왕마마, 음과 양의 조화를 잃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면 누구나 병을 얻기 마련이옵니다. 지난번 대왕마마께서 폐약다습(肺弱多濕)으로 고생하실 때 소신은 계피(桂皮), 관동(款冬)을 섞고 문동(門冬), 우황(牛黃), 국영(菊英)과 같은 약초를 벌꿀에 이겨서 환약을 만들었사옵니다. 그때 마마께서는 신기하게 병이 다 나으셨사옵니다. 하지만 왕비마마께서는 병명을 정확히 모르는 가운데 이 환약을 드셨으니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제서야 영정은 하무차의 말을 믿고 안색을 폈다.
"그렇다면 빨리 왕비를 진맥하여 병을 치료하라. 잘 되면 상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로다."
하무차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침상 가까이 다가가 왕비의 맥을 짚고 기색을 살핀 다음 호흡이 고르기를 기다렸다. 진맥이 끝나자 하무차는 제자리로 돌아와 영정에게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왕비마마께서는 풍한이 들어 기가 역류하여 위로 치솟고 있사옵니다. 환약은 뜨거운 기운을 상징하는 약초를 위주로 만들어서 한기(寒氣)와 사기(邪氣)를 물리쳐야 할 것이옵니다. 소신이 계피, 강(姜), 화숙(花숙)과 같이 위로 치솟는 기운을 내려주는 약을 만든 게 있사오니 그걸 이틀 정도 복용하시면 반드시 효험을 볼 것이옵니다."
그의 진단에 영정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차가 물러나자 조희가 영정에게 물었다.
"마마, 신첩의 오라버니를 처벌하실 생각이세요?"
영정은 그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조희는 영정이 대신들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더욱 애처롭게 입을 열었다.
"천종실에서의 약속을 잊으셨나요? 신첩의 숨이 아직 붙어 있는데 어찌 약속을 저버리십니까?"
영정은 조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갸날퍼지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아 얼른 그녀를 위로했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하여 그런 괴로움을 자초한단 말이오. 이 일은 과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걱정을 마오."
"어떻게 알아서 처리하시겠어요? 신첩의 오라버니는 위인됨이 충직하고 성격이 불 같아 종종 남들한테 오해를 받습니다. 몇몇 대신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그것을 신첩의 오라버니에게 뒤집어 씌우는 건 너무하옵니다. 신첩은 마마를 흠모하여 이곳 진나라에 왔지만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라버니 한 분뿐입니다. 오라버니는 일찍이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또다시 그런 일을 겪는다면......"
조희는 비처럼 눈물을 쏟으며 마구 흐느꼈다. 영정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영정은 문득 유난히도 대신들이 조고 한 명을 몰아세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틀림없이 거기에는 나름대로 숨겨진 까닭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마오. 과인이 곧바로 조 중거부령을 풀어주도록 명을 내리겠소."
그러나 조희는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을 영정에게 보냈다.
"누가 신첩의 오라버니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주청하였나요?"
영정은 그녀의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는 그런 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소. 중거부령은 스스로 죄를 자초하였소. 그는 연 태자 단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받았단 말이오."
"마마, 옛말에 '소인을 가벼이 보지 마라. 소인이 나라를 망친다'고 하였어요. 등 내사와 몽씨 부자가 이 일을 꾸몄지요? 그들은 서로들 친하게 지낸다고 들었어요."
이 말에 영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만두시오. 아무튼 세 가지 약속은 지키겠으니 다시는 말하지 마오."
조희는 영정의 말에 안심이 되는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조고의 죄상을 심리한 뒤 사형을 선언하고 돌아오던 몽의는 입추(立秋)날에 그의 참형(斬刑)을 거행키로 결정하였다. 조고는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지나친 방종을 후회하였다. 하지만 누이동생 조희가 반드시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다. 이 일은 그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깃털이 적은 새는 결코 높이 날지 못한다'는 말처럼 조고는 이번 일을 통해 힘을 키울 때까지 자중해야 한다는 배움을 얻었다.
사형이 결정되고 나서 이틀 후 진왕의 특명에 의해 조고는 석방이 되었다. 조고는 함양성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석방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반드시 힘을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하늘의 보살핌이 있어 엎어졌다 되살아났구나
화는 덕의 뿌리가 되고, 걱정은 복의 집이 된다
남을 위협하는 자는 멸하고, 따르는 자는 흥한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조고는 철저하게 변신하였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늘 웃음으로 대했고 달콤한 말로 상대의 귀를 즐겁게 하였다. 조고는 가슴에 칼을 숨기고는 완벽하게 부드럽고 자상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 또한 점차 조고를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이사는 조고가 출감한 후 두 달 동안 수차례 입궁하여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조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된 조희를 만날 때마다 이사는 처음에 그녀를 보았을 적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조희 또한 어찌된 일인지 이사를 만나면 정이 그윽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곤 하였다. 이사는 주체하기 어려운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제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쉽게 잠재울 수 없었다.
며칠 전 영정이 함양궁의 누대에서 야연(夜宴;밤에 베푼 연회)을 베풀었는데 한참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누대의 촛불이 모두 꺼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 혼란스런 와중에 어떤 여인의 손길이 이사의 오른손에 와닿았다. 여인의 손길에 이사의 온몸이 떨려 왔다. 그리고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욕망이 그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의 손을 꼬옥 쥔 여인의 손은 매우 부드럽고 따스했다.
얼마 후 촛불이 다시 켜지자 이사는 자신의 오른손을 잡은 여인이 누구인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비 조희에게 의심의 눈길을 돌렸다. 자신 곁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여자는 바로 조희였기 때문이었다.
조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더욱 요염하고 그윽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무언가 애틋한 암시를 풍기는 듯하였다. 이사는 폭풍우를 만난 바다같이 쿵쿵 뛰는 심장의 고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리에서 그만 일어나고 말았다.
다음날 오후 이사는 진왕에게 주청할 일이 있어 내궁으로 들어갔다가 조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각에 진왕은 측간에 가고 조희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는 조희와 아주 짧은 순간에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 의미는 참으로 크게 다가왔다. 이사와 마주한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밤 연회에서 그의 오른손을 잡은 여인이 바로 자신임을 암시하는 눈치였다. 곧 진왕이 나타나자 조희는 자리를 뜨면서 이사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조희의 나긋나긋한 교태와 미소는 이사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이사는 일을 마치고 내궁을 떠나면서 황홀하고 아련한 상상에 온몸을 떨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이사는 조희가 보낸 궁녀로부터 금빛 비녀를 하나 선물 받은 것이었다. 조희는 궁녀의 입을 빌려 앞으로 오라버니인 조고를 잘 보살펴 주면 고맙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이사가 비녀를 받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선물로 준 단순한 비녀란 말인가?"
이사는 비녀를 자세히 살폈다. 비녀의 머리 부분에는 조그마한 작약 한 송이가 양각되어 있었다. 이를 본 이사는 순간적으로 <시경>의 '진유(溱洧)'라는 시가 떠올라 나직이 읊기 시작했다.
진수와 유수는 바야흐로 넘실거리네
사내와 아가씨는 난초를 들고 있구나
아가씨가 볼까요 하니, 사내의 대답은 보았는 걸
그래도 유수가로 구경가요, 정말로 즐거울 텐데
사내와 아가씨는 서로 히히덕거리고 장난치면서
작약을 꺾어주며 헤어지네
시를 읊은 이사는 멍하니 앉아서 조희의 마음 속을 헤아려 보았다. 한편으로는 행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여자의 사랑과 예물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황홀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걱정 또한 기쁨 못지않게 컸다. 조희는 진왕이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만일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어쩐다, 이 비녀를 다시 돌려주어야 하나, 아니면 감추어야 하나?'
이사가 망설이고 있자 궁녀가 그를 재촉하였다.
"정위 대인, 얼른 회답을 주십시오. 늦게 돌아가면 신첩은 벌을 받습니다."
이사는 회답을 달라는 궁녀의 말에 퍼뜩 <시경>의 다른 구절을 생각해 내고 곧바로 비단에 글을 써서 궁녀에게 주었다.
'싱싱한 복숭아나무, 화려하게 꽃이 피었네(桃之夭夭灼灼其華).'
이사는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진 여덟 글자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시경>의 '국풍(國風)'에 나오는 '도요(桃夭)'라는 이 시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심부름을 온 궁녀가 비단을 받으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위 대인의 전서는 너무나도 멋이 있습니다."
궁녀가 떠난 뒤 이사는 터져나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흥얼흥얼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문 밖 언덕에 꼭두서니 자라는데
집은 가까이 있지만, 그이는 먼 듯하네
동문 밖 밤나무에 집들이 늘어섰는데
어찌 그립지 않으리, 그대 내게 와주지 않는가
이사는 <시경>의 '정풍'에 나오는 '동문 밖 언덕'이라는 노래를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읊으면서 달콤한 꿈에 부풀었다.
이때 조나라 상국 곽개가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사자는 이사에게 곽개의 밀서와 옥대를 바쳤다. 밀서에는 곽개가 전객 왕오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오랫동안 이사가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이사는 눈길을 옥대로 옮기며 투덜거렸다.
"인색하기 짝이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내가 사신 편으로 보낸 금은보화가 적어도 수만 금은 넘는데 겨우 옥대 하나만 선물로 보내다니."
이사가 곽개의 선물에 푸념을 하고 있을 시각, 조희는 오라버니 조고의 손에 이사가 보내온 비단을 건네주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호호호, 오라버니, 이 비단 좀 보세요."
비단에 쓰여진 여덟 글자를 보던 조고가 입술을 비죽이며 이사를 비웃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내다니 대단하오, 왕후."
"어때요, 오라버니, 제 솜씨가. 이걸 남겨 두면 언젠가는 유용할 때가 있을 거에요."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통쾌하게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