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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 2

Bollnow 2024. 3. 9. 13:38

5. 음모의 시작

여불위는 영정으로 인해 자신의 계획이 서너 차례 꺾이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점점 자라나는 영정을 보면서 그는 처음에 우려하던 일이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등시위장을 영정에게서 떼어내지 못한 여불위는 영정의 시중을 드는 여러 시위들 중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놓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만한 사람을 찾기란 수월치 않았다. 도총관은 여불위의 명을 받아 수많은 문객(門客)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구했다. 보름 동안의 심사숙고 끝에 그는 마침내 이사를 점찍었다. 넌지시 이사를 불러낸 도총관은 그를 여불위에게 데려갔다. 두 사람이 여불위를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침 꼬마 신동 감라를 전송하고 있었다.

"승상 대인, 이제 걱정을 마십시오. 소생이 바로 장당 장군을 찾아뵙고 제 세 치 혀로 그 마음을 돌려놓겠습니다."

감라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돌아갔다.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이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도총관이 얼른 설명해 주었다.

"채택 노대부 어르신께서 연나라에 가셨는데 그 임기가 곧 끝난다오. 그래서 승상께서는 그 일을 장당 장군에게 맡기려 하시는데, 장장군께서는 진나라와 연나라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갈 수 없다고 버티고 계시지요. 승상 대인께서도 억지로는 보낼 수 없기 때문에 감라에게 장군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셨소. 감라는 워낙 재주가 뛰어나고 언변이 유창하여 장군을 분명 설복시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진나라에 들어온 이래 이사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감라의 재주에 대해 들었다. 이사는 대문을 막 나서는 감라를 보며 생각했다.

'감라는 지리(地理)의 이점을 충분히 살리고 있군.'

여불위는 감라를 전송한 뒤 도총관과 이사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사는 머리 숙여 여불위에게 예의를 갖췄다.

"제가 진나라에 들어온 지 벌써 두 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승상 대인께서 어린마마를 모시고 국정을 처리하는 모습을 죽 보아왔습니다. 오국연맹을 와해시키시니 천하의 민심이 진나라로 쏠렸으며, 또한 도강언(都江堰)을 마무리하고 함양성을 넓히시니 정사는 안녕하고 무공은 사방에 혁혁합니다. 승상 대인께서는 백관(百官)의 으뜸이요, 사욕을 버리고 공도(公道)에 충실한 현상(賢相)이십니다. 진나라는 승상 대인으로 말미암아 기둥이 섰으니 천하 통일은 곧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소생은 일찍이 승상 대인을 존경하고 흠모해 왔습니다. 청컨대 소생의 절을 다시 받으십시오."

이사의 말은 심기가 불편했던 여불위의 마음을 밝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여불위는 조금 전까지의 답답한 마음을 열어젖히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이생(李生)은 소년 영웅의 풍모를 지녔소. 도총관이 수차례 이생에 대해 이야기해 만나보기를 갈망했으나 조정의 일이 워낙 다망하여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소이다. 옛말에 산에 나무가 있으니 목공은 그것을 헤아려 목재로 쓰고, 문객에 예의가 있으면 주인은 가려서 뽑는다고 했소. 이생의 재주는 가히 대부(大夫)로 천거해야 마땅하지만, 특별히 뜻한 바가 있어 왕궁의 어전 시위로 천거할까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소."

"저를 왕궁 시위로 천거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이사가 깜짝 놀라며 여불위를 다시 보았다. 초나라 땅에서 창고지기로 일하면서 이사는 숨은 꿈을 이루기 위해 숱한 노력을 해 왔다. 마침내 목표의 첫걸음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진나라에 들어온 지 불과 두 해만에 그는 권력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비록 고관대작이나 대부와 같은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시위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사는 단지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랑, 어서 승상 대인께 감사드리시오. 그리고 승상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십니다."

이사는 자신의 앞길을 터준 여불위를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 여불위는 흐뭇한 표정으로 이사를 내려보며 도총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도총관이 준비한 예물함을 탁자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젖혔다. 함에는 주옥, 금대와 같은 진기한 예물이 가득했다.

"이생에게 주는 나의 성의 표시이니 받으시오."

이사는 너무나 감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어린마마를 보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도총관이 특별히 이생을 천거하였소. 이생은 궁중에 들어가 마마를 성의껏 보살펴 주시오. 나에겐 그때그때의 상황을 보고만 하면 되오. 보고할 사항은 도총관이 말해줄 것이오."

곁에 있던 도총관이 얼른 여불위의 말을 받았다.

"보고할 내용은 마마께서 무슨 서책을 읽으시고, 어떤 사람을 주로 만나시는지 하는 일따위요. 사흘에 한 번씩만 보고하면 되오이다."

여불위는 이사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혹 의심을 품지는 않을까 걱정하여 설명을 보충했다.

"이 몸은 어린마마의 중부로서 선왕이 부탁하신 일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오. 그래야 승상으로서, 중부로서 제 할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소? 이게 모두 부모된 도리겠지."

이사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밖에서 감라와 장당 장군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여불위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감라는 정말 대단해.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장군을 설복시켰을까? 감라는 내 복덩어리야."

이사는 도총관을 따라나가면서 여불위가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감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고보라구. 나 이사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반드시 이 나라의 최고가 될거야.'

문을 나선 이사는 멀리서 걸어오는 감라와 장당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날 함양궁으로 향하는 수레에 몸을 실은 이사는 누추한 옷을 벗어던지고 화려한 궁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시위모(侍衛帽)를 쓴 채 우뚝 솟은 함양궁을 바라보는 이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궁 앞에 도착하자 이사는 여불위가 서명한 부패(符牌)를 궁위(宮尉)인 갈()대인에게 건넸다. 비쩍 마른 체구의 갈대인이 이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웃었다.

"승상부에서 왔다고 들었네. 삼가 행동을 조심하고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길 바라네."

갈대인은 마차에서 내린 이사를 데리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긴 회랑을 지나 몇 칸의 대전을 거쳐 마침내 내원(內苑)에 이르렀다. 궁 안에 처음 들어와 보는 이사는 이따금씩 발걸음을 멈추고 내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참으로 장관이로다. 구불구불한 회랑하며 수목을 뚫고 치솟은 건물, 마음껏 뛰놀고 있는 짐승들......'

이사는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기암괴석과 푸른 초목이 가득하고 지천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곳이 바로 선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사는 갈대인의 뒤를 쫓아 내원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궁중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은 이사를 일깨웠다. 숲을 지나자 드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그곳에서 이사는 초지의 북쪽에 있는 화개(華蓋;옛날 궁중에서 임금이 쓰던 햇볕 가리개) 아래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어린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벌이는 씨름을 구경하며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이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씨름장에 들어서는 노란 옷을 입은 청년이 보였다. 씨름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그 젊은이는 매우 건장하게 생긴 청년 군관이었다. 그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상대를 기다렸다. 이사는 그 청년의 풍모와 기세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청년은 예의와 용맹과 기지가 넘쳐흐르고, 위엄과 겸손이 몸에 배인 듯했다. 잠시 후 북소리가 세 번 울리자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청년들이 씨름장으로 들어섰다. 청년 군관은 한 번에 세 명을 상대로 겨루려는 모양이었다. 청년 세 명이 좌우, 정면에서 청년 군관과 마주섰다.

"시작하라!"

청년 군관이 소리쳤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청년이 군관의 어깨를 잡으며 다리를 걸었다. 나머지 둘도 달려들어 그의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청년 군관은 앞에서 공격하는 청년을 번쩍 들더니 공중에서 두어 번 돌려 바닥에 내던졌다. 이 틈을 타 허리춤을 잡고 있던 두 명의 청년이 군관을 들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청년 군관은 재빨리 발에 힘을 주며 이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저게 바로 태산을 뽑아올린다는 힘이군. 대단해.'

이사는 혀를 차며 청년 군관의 힘에 감탄했다.

두 사람이 다시 공격해 들어오자 청년 군관은 오른손으로 공격하는 청년의 어깨를 부여잡고, 왼발로는 왼쪽을 공격하는 청년의 발을 걸었다.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는 좀체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들은 비오듯 땀을 쏟으며 서로 엉켜붙었다. 그때 갑자기 청년 군관이 고함을 지르며 왼발에 힘을 가했다.

"어이쿠!"

왼쪽에서 공격하던 청년이 벌렁 넘어지는가 싶더니 청년 군관은 재빨리 오른쪽에 있던 청년마저 어깨 위로 메어쳤다. 이렇게 해서 단숨에 승부를 결정지은 청년 군관은 허리를 굽히며 소년에게 예를 올렸다.

'대단한 사람이군. 틀림없이 장수가 될 재목이야.'

이사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북을 울려라! 다시 싸운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마께서 직접 나서신다!"

이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어린마마의 용맹이 대단하구나. 힘겨루기를 즐겨했다는 진무왕이 다시 환생한 것 같군.'

이사는 옛날 진무왕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진무왕은 매우 용맹한 군주로 그는 평시에도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즐겨했는데, 특히 장군 임비(任鄙), 오악(烏嶽), 맹열(孟說)이 그의 상대였다. 진무왕은 그때 맹열과 더불어 정()을 들어올리는 시합을 하다가 정의 무게에 눌려죽었다고 한다.

화개 밑에서 씨름을 구경하던 소년이 뚜벅뚜벅 장내로 걸어나왔다. 소년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는 자색의 단괘를 걸쳤으며 거무틱틱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가는 눈썹에 그리 크지 않은 키였지만 건장하고 영민해 보였다. 바로 어린 군왕 영정이었다. 영정은 배고픈 호랑이가 전력을 다해 먹이를 잡는 듯한 자세로 청년 군관의 허리춤을 잡았다. 청년 군관 또한 교활한 토끼는 도망칠 굴을 세 개나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영정과의 씨름에 응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발을 건 채 허리를 비틀며 한데 뒤엉켜 힘을 겨루었다. 이사는 임금과 신하가 씨름을 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정이 청년 군관의 발을 걸고 힘차게 밀어제끼자 그가 재빨리 몸을 돌리며 역공을 가하려 했다. 그러는 바람에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에 넘어졌다.

"비겼습니다!"

대장군 몽작의 손자인 몽의가 외쳤다. 먼저 일어난 영정이 청년 군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몽의가 앞으로 나아가 청년 군관을 소개했다.

"마마, 이 청년 군관은 왕전()이라 하오며, 빈양현(頻陽縣;섬서성 부평현) 출신으로 군문에 몸을 담고 있사옵니다. 문무를 겸비한 청년 군관이옵니다."

영정은 왕전의 손등을 가볍게 치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내서 과인의 처소로 한번 오도록 하오."

갈대인이 멍청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이사를 보며 생각했다.

'여승상께서는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시겠어. 천거한 시위가 저렇게 멍청하니 원!'

잠시 후 씨름판이 정리되자 갈대인이 영정 앞으로 나아가 부복하며 말했다.

"새로운 시위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영정은 옥좌에 앉아 예리한 눈빛으로 이사를 훑어보았다.

"네가 바로 여승상이 천거한 시위냐?"

"그러하옵니다."

이사는 매우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네가 초나라에서 온 이사인가?"

곁에 서 있던 몽의가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소신 이사는 대왕마마를 위해 충성을 다해 명령을 받들겠사옵니다."

"충성을 다해 명령을 받든다? 하하하, 여승상이 나에게 쏟는 정성이 참으로 눈물겹군. 아침에는 선왕유훈(先王遺訓) 어쩌구하더니, 이제는 시위를 보내 지성봉명(至誠奉命)이라?"

이사는 영정의 웃음 속에 숨은 분노와 비탄을 읽을 수 있었다.

"너는 진정 이곳에서 일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열 중에 아홉은 버텨내지 못하고 나갔지. 너도 아마 그들과......"

영정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더니 갈대인을 가리키며 이사에게 말했다.

"저 이를 따라가 차라리 금위나 하거라."

영정은 등시위장과 몽의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이사는 다시 한 번 영정의 가슴에 담긴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이사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꿈꾸어 온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한비가 길을 떠나는 자신에게 들려준 말을 생각했다.

'먼길을 함께 갈 사람을 만나라.'

이사는 눈 앞에 있는 영정이야말로 자신과 함께 먼길을 갈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영척(寧戚)이 제환공의 신임을 얻기 위해 썼던 행가(行歌)의 방법은 이때 필요한 거야.'

이사는 승상부에서 눈물을 떨구며 감격하던 일은 어차피 지난 일이고, 이제 영정을 만났으니 그의 눈에 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리라 다짐했다.

'그래, 먼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첫걸음이 중요해. 먼저 이익을 중시하고 그 다음이 의리야.'

이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불위가 천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는 영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떨어져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갈대인도 보였다. 초나라 사람이라고 쏘아붙이던 몽의 또한 눈쌀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이사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다져먹었다. 대장부가 한세상 살면서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영정이 이사의 앞길을 가로막는 둑이라면 기어서라도 올라가야 했다. 비굴하게 물러서서 소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기보다는 당당하게 소신을 밝혀두는 게 앞날을 위해서라도 떳떳했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이사는 영정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영명하기로 소문난 진효성왕의 후예께서 인재를 이렇게 가볍게 여기실 줄은 몰랐사옵니다. 실망을 감출 수 없사옵니다."

이사의 말에 모두들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난데없는 일침에 영정의 얼굴 또한 붉어졌다.

"너는 누구의 위세를 믿고 방자하게 과인을 비방하는가?"

영정의 호통에 이사는 당당한 얼굴로 탄식했다.

"내 마음 거울 아니어서 남이 알아줄 리 없고, 형제가 있다 해도 믿을 수가 없네. 가만히 생각하니 훨훨 하늘을 날고 싶었는데."

영정은 <시경>의 시구를 끌어다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사가 자신의 심정을 비유한 시구는 <시경>에 나오는 '잣나무배(栢舟)'였다. 이 시는 어질고 똑똑하면서도 등용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영정은 등승과 몽의를 비롯하여 몇 명의 심복들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그런 영정의 태도에 이사는 더욱 자신감을 가졌다.

"지난날 효공께서 상앙을 모셔다 변법(變法)을 시행하여 진나라는 강국이 되었사옵니다. 효공께서는 위세를 기사(騎士), 법령을 채찍으로, 국가를 수레로 삼아 7국의 맹주가 되셨사옵니다. 하지만 천하가 진나라에 의지함은 효공의 위세 때문이 아니라 진의 도성에 있는 공경대부들 때문이었사옵니다. 천리 먼길에서 진나라에 달려온 현사들은 많았지만 결코 진의 조정에 충성하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들은 돈 많고 권력있는 공경대부에게 자신을 던졌지요. 따라서 효공께서는 허명(虛名)만 가지셨을 뿐 실권은 없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사귀위란(四貴爲亂)'의 교훈을 잊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

영정의 표정이 비웃음에서 점점 감탄과 경외로 변하였다. 이사의 말은 영정이 평소 품고 있던 제왕의 패도(覇道)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사는 더욱 열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이 시기는 제후를 군현(郡縣)으로 삼는 일이 중요하옵니다. 진나라의 국력과 대왕의 지혜로 제후를 멸하고 제왕의 패도를 세우셔야 하옵니다. 부뚜막의 회토를 깨끗이 청소하듯 천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좋은 때가 없는 줄 아옵니다. 만일 태만하여 시급히 취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자르지 않으면 비록 황제(黃帝)가 환생한다 해도 결코 제후를 병탄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영정은 이사의 막힘없는 논리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 정녕 하늘이 나에게 복을 내려주시려는가? 조금 전에는 왕전을 알게 되고 지금은 이사를 만나니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로다.'

영정은 숨을 크게 내쉬며 이사에게 물었다.

"이생은 순황 선생과 한비 선생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사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자신을 부르는 영정의 호칭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순황과 한비의 일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대왕마마, 순황 선생은 신의 스승이옵고, 한비는 동문수학한 사형제이옵니다."

", 어쩐지......"

이사의 대답에 영정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상왕을 모셨던 범수(范雎)를 다시 보는 느낌이야. 이런 인재를 이제야 만나다니.'

영정은 의자에서 일어나 이사의 어깨를 잡으며 내실로 들어갔다. 이사를 밀실로 불러들인 영정은 그의 고견을 들었다. 이사는 달변이었고 똑똑했으며 견문과 학식이 남달랐다. 영정은 너무나도 흡족하였다.

"하하하,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오. 문사로는 이생을 만나고, 무사로는 왕전을 얻었으니 하늘이 과인을 도와주는구려."

영정은 이사를 만난 후 비로소 현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여불위는 이사를 궁중으로 보낸 후 곧바로 왕태후의 부름을 받았다. 심야에 입궁하여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자는 전갈이었다. 영정이 등극한 이후 여불위와 왕태후의 심야논정(深夜論政)은 수시로 이루어졌다.

이날 밤에도 여불위는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궁위 갈대인의 안내를 받으며 홀로 함양궁의 남쪽에 위치한 감천궁에 들어섰다. ()이 궁문 앞에 서자 두 명의 궁녀가 여불위를 맞이했다. 뜰을 지나고 회랑을 거쳐 여불위는 태후의 침궁에 이르렀다. 그곳까지 이르는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지만 여불위는 눈을 감고도 찾아올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극히 비밀스러운 만남은 마치 늦봄의 꽃샘 추위처럼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나 여불위는 이제 옛날의 장사꾼이 아니야. 오랜 세월을 고독하게 보낸 주희도 더 이상 묘령의 소녀가 아니고. 이런 위험하기 짝이없는 밀회를 계속할 만큼 나에게는 열정도 시간도 없어. 게다가 나는 임금의 중부이고, 주희는 태후가 아닌가? 잘못하다가는 이제껏 쌓은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릴 수도 있어. 어서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여불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실 앞에 당도했다. 여불위를 이곳까지 안내한 궁녀 두 명이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문 앞에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여불위는 마침내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내실은 노란 촛불만이 실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태양 무늬의 벽돌이 바닥에 깔려 있고, 흰 벽에는 두 폭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중 한 폭은 견우와 직녀가 칠월칠석에 은하수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견우직녀도'였고, 다른 하나는 항아(嫦娥)가 옥토끼를 끌어안고 달에서 노니는 '항아분월도'였다. 두 폭의 그림은 붉은색, 황금색, 녹색, 푸른색, 남색, 보라색, 분홍색이 조화롭게 배합되어 그림 속의 인물이 마치 살아움직이는 듯 아름다웠다.

실내의 북쪽에는 우아하고 화려한 침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붉고 푸른 주렴이 바닥까지 드리워져 침상을 살짝 가려 주었다. 여불위는 천천히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침상 앞에는 예쁘장한 비단 꽃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눈에 주희의 꽃신임을 알 수 있었다. 침상 옆에는 주희가 애지중지하는 화장대가 보이고 그 위에 갖가지 색깔의 분갑이 어지러져 있었다.

"보기드문 비운단(飛雲丹)과 만춘고(萬春膏)로군."

화장대 위로 눈길을 멈춘 여불위가 중얼거렸다. 비운단은 동주(東周)의 후궁들이 사용하는 분이었고, 만춘고는 제나라 왕실에서만 쓰는 분이었다. 화장대 옆의 탁자에는 동경(銅鏡)이 놓였는데, 그 동경 앞에 궁녀가 화로를 받드는 모양이 새겨진 동등(銅燈)이 보였다. 구리로 만든 이 등잔은 한 번에 여섯 개의 초를 꽂을 수 있었다.

"!"

침상에 누워 있던 주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여불위는 얼른 침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주희가 침상의 주렴을 걷으며 소리쳤다.

"바보! 이렇게 늦게 오려면 차라리 오지를 말지."

주희의 투정에 여불위는 묵묵히 침상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주희가 살며시 여불위의 가슴에 안겼다. 여불위는 주희의 뜨거운 욕망을 어떻게 잠재울까 고민스러웠다. 꿀을 몽땅 빨아들인 나비는 다시 그 꽃잎을 생각하지 않는 법, 여불위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주희는 여불위가 자신의 열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여불위의 난감해 하는 표정을 보자 주희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태후의 자존심도 버리고 열렬하고 뜨겁게 감정을 표현했는데 여불위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주희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서럽고 슬퍼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주희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여불위는 당황하여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태후, 노여움을 푸시오. 내가 어찌 그때의 맹세를 잊었겠소? 다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기에......"

여불위의 위로에 주희의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부드러운 향기가 실내에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전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이러신다고는 믿지 않아요. 마음이 변했다면 그렇다고 하세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향기를 기억해 보세요. 기억을 하면 용서해 주겠어요."

"태후, 나를 시험하는 거요? 이 향기는 학정향(鶴頂香)이 아니오? 한단성에서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소."

"그때 저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이었지요."

주희가 눈물을 훔치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날 당신은 학정향을 피워 저를 불태웠잖아요. 그러면서 학정향이 탈 때는 백학(白鶴)이 날개를 펼치며 춤을 춘다고 하셨지요. 그때를 기억하세요?"

"기억 못할 리가 있겠소. 마치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히 불타오르듯 했던 것을."

여불위는 주희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그때 일을 생각했다.

그날은 여불위가 함양성에서 화양부인을 만나고 한단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훈향에 목욕을 한 여불위는 한단에서 가져온 선물 꾸러미를 가지고 주희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희는 본래 조나라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가세가 기울어지자 노래와 춤을 팔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여불위는 우연히 주루에서 그녀를 발견하고는 수천 금을 아낌없이 내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만일 여불위가 기화가거의 계책을 꾸미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여불위의 품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주희는 여불위의 품 속에 안기며 아기를 가졌다고 고백했다. 여불위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또다시 무서운 계책을 꾸몄다. 자신의 아이를 이인의 아이로 만드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주희에게 이 계책을 말하자 그녀는 선뜻 여불위의 제의에 동의했다.

"아이, 왜 그렇게 넋을 놓고 계셔요?"

주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소."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 그날 밤 당신이 신첩을 보냈을 때 이미 그때의 주희는 죽었어요. 오늘은 태후일 뿐이에요."

주희는 이렇게 말하고는 여불위의 품을 더욱더 파고들었다.

'향기로웠던 그때의 주희는 어디 가고, 지금은 구역질나는 주희만 있더냐.'

욕망에 물든 주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불위는 속으로 한탄했다.

"뭘 하고 있어요? 빨리 자리에 누워요. 두 시간만 지나면 날이 밝아올 거에요."

이윽고 침상에 오른 여불위와 태후는 서로의 몸을 탐하며 욕정을 불태웠다.

진나라의 국력이 부강해지면서 중국 대륙의 질서는 크게 변하였다. 전국(戰國)의 형세는 초기에 강했던 동쪽에서 점점 서쪽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그 증거는 연나라 태자 단의 처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영정과 함께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단이 진나라로 옮겨온 것이다. 그가 함양성에 인질로 들어온 지도 벌써 수일이 지났다. 단은 진나라로 옮겨온 이튿날부터 여불위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는 몇 번이고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피했다. 그런데 이날 아침, 단은 뜻밖에도 영정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자신의 역량에 무력함을 느끼면서 우울증에 빠져 있던 영정은 등승으로부터 연나라 태자 단이 함양성에 인질로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한단성에서 자신을 구해준 단을 한번 만나고 싶었다.

영정의 초청을 받은 단은 수년 전에 만나보았던 영정을 생각했다. 며칠 전에 함양성의 저잣거리에 나간 그는 사람들이 영정의 지혜와 총명함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다. 영정이 현사를 어떻게 대우하고 어떤 서책을 즐겨 읽으며 나라의 부강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들이었다. 단은 영정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일어났다.

단은 의관을 갖추고 출타 준비를 했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매우 총명하고 의젓하며 사나이다운 기상이 넘쳐흘렀다. 조나라의 한단에 인질로 있으면서도 그의 명성과 기상은 그 누구보다 높았다. 그러던 것이 풍속이 질박하고 검소한 진나라에 오자 그는 단연코 군계일학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어디까지나 잡혀 온 인질일 뿐이었다. 당시 연나라는 7국 중에서 가장 약소국으로 단은 연나라 희왕의 태자였지만 십수 년을 타국에서 인질 노릇을 해 오고 있었다. 그는 인질 생활을 하면서도 유유자적한 표정을 짓고 다녔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이 생활을 마무리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영정이 보낸 수레가 문 앞에 도착하였다. 수레는 중위교(中謂橋)를 지나 남려산(南驪山)을 거쳐 상림원으로 달렸다. 상림원에 다다르니 영정이 벌써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정은 수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감격스럽게 단을 맞이했다.

"과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태자가 몸을 내던져 구해준 일을 늘 생각하고 있었소."

단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영정에게 예를 올렸다.

"대왕마마께서 은원을 분명히 알고 계시니 신은 단지 감격스러울 따름이옵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어떤 분의 부탁을 받고 도왔을 뿐이옵니다."

영정은 깜짝 놀랐다. 단의 뒤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그날 처음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소? 그렇다면 나를 구해 준 진짜 은인은 누구요?"

"대왕마마의 중부이신 여승상이옵니다. 여승상께서는 대왕마마와 선왕을 뒤에서 도와준 진짜 은인이옵지요."

단이 아주 감격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그는 영정과 여불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암투를 모르고 있었다. 놀란 영정의 모습에 더욱 신이 난 그는 비밀스런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그 당시 여공께서는 제게 대왕마마와 왕태후마마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서신을 비밀리에 보내시곤 하였사옵니다. 게다가 감시하는 병사를 매수하여 두 분의 안전을 지켜드렸지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신이 어떻게 대왕마마의 행선지를 알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단의 실토에 영정은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수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을 두고 얼마나 감격해 했던가? 영정은 태자 단을 생각할 때마다 은혜를 갚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야. 여불위, 당신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야. 그때 당신은 함양성에 있으면서도 나의 행적을 손금보듯 알고 있었군.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야.'

영정은 단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영민하고 다정해 보였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추하게 느껴졌다.

'태자 단, 그대가 여불위의 무서움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겠노라. 하지만 그대는 결국 여불위의 사람, 내가 얼마나 무섭게 대하는지 지켜보라구.'

갑자기 등시위장을 부른 영정은 배가 아파 측간에 가야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아무 명도 없이 영정이 훌쩍 떠나자 단은 그 자리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영정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인들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화복(華服)을 걸친 궁인이 나타났다.

"대왕마마께서 모셔오라는 분부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드넓은 상림원 곳곳에 창칼을 세운 금위무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숲 가운데에 이르자 아담하고 소박한 정자가 나타났는데 그곳에서는 한참 주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년 공자 몇몇이 취기에 널부러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나, 영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을 정자로 안내한 궁인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술이 취한 공자들은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그 곁에서 가기들이 교태어린 몸짓으로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렀다.

 

농사꾼은 기술자만 못해요.

기술자는 장사꾼만 못해요.

자수를 놓으면 무엇해요.

비단을 짜면 무엇해요.

글을 읽으면 무엇해요.

저자의 장사가 으뜸이에요.

 

단은 이 노래를 잘 알고 있었다. 그즈음 농부들이 저잣거리의 장사꾼들이 천박하다면서 부르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단을 놀라게 한 것은 궁녀들을 가슴에 품고 술을 마시는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진나라의 고관대작이나 거상들의 자제들로 보였다.

'천박하고 음란하다는 한단성이나 임치성의 주루에서도 보기드문 광경이야. 그런데 어떻게 진나라 수도인 함양성에서, 그것도 왕의 휴식처인 상림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잘못 보았을까?'

단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영정은 대체 어디에 있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를 다시 이곳에 불러놓고 또 어디로 갔을까?'

단이 정자 계단에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술에 취해 바닥에 쓰러졌던 사람이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맙소사, 영정이잖아!'

단은 너무도 놀라 멍한 눈으로 영정을 내려다 보았다. 영정의 얼굴은 취기로 검붉었다. 영명하고 똑똑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영정은 취한 눈을 껌벅이며 궁녀 두 명을 가슴에 품더니 그녀들의 얼굴을 마구 부비고 가슴을 만지며 다리를 더듬었다.

'저잣거리에서 들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구나. 영정은 나라를 망칠 임금이군.'

단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때 영정이 소리쳤다.

"거기 온 사람은 누군가?"

영정은 단의 대답을 미처 기다리지도 않고 또다시 소리쳤다.

"어이, 그대도 이곳으로 오라구. 마음대로 마시고 더듬고 빼앗으라구. 양다리도 뜯고 술도 마시고, 꽃도 따고. , 마시자! 통쾌하게 마시자구!"

이때 등시위장이 단의 팔을 붙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왕마마께서는 어젯밤부터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단 공자를 뵙겠다고 하셨지요. 대왕마마께서는 취기가 오르면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결정하시곤 하오니 오늘 이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단은 천천히 정자에 오르며 영정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영정이 손을 들어 단을 불렀다.

", 이곳에 앉아 과인의 술을 받으시오.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술잔을 기울여......"

영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대왕마마, 태후마마께서 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 입궁하시라는 분부이시옵니다."

정자 안으로 올라온 사람은 태후의 궁인이었다. 등시위장이 영정에게 다가가 이 말을 전하자 영정은 궁인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과인의 흥취를 더 이상 깨뜨리지 말고 그냥 물러가라!"

"마마, 아니 되옵니다. 태후마마께서는 지금 환후가 심하옵니다."

"하하하, 몸이 아프다고? 매일 나를 괴롭히더니, 빨리 먼세상으로 가시라고 전하거라."

영정의 말에 궁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곁에 서 있던 단 또한 그의 무례함에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그리고 등시위장! 저기 저 사람은 그냥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같이 있다가는 술맛이 떨어지겠다!"

영정이 단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정자를 나오는 단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진나라도 얼마 안 가서 끝이 나겠군.'

이때 등승이 얼른 단을 따라나오면서 당부의 말을 건넸다.

"공자, 오늘 본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잊어주십시오. 절대로 외부에 발설해서는 아니 됩니다."

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레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희망이 솟구쳤다.

'진나라도 별것아냐. 어린 군주가 저렇게 용렬한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후후후, 영명하다고, 지혜롭다고?'

향락에 빠진 영정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단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진나라가 강대하다고 말하지만, 이날 단은 직접 그 내면의 실상을 확인한 것이었다. 이런 영정이 임금으로 있는 한 진나라는 지는 태양에 불과했다. 단은 비록 인질로 각국을 떠돌아다니는 몸이었지만 가슴에는 남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다. 가장 강하다는 진나라의 임금이 황음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본 후 그의 야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러나 단은 그것이 영정의 계략이었음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여불위와 한바탕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영정의 속임수에 넘어갔을 뿐이었다.

이렇게 단을 속인 영정은 그 후로도 여불위의 눈을 피해가며 왕태후에게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들어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왕태후 주희는 영정의 병이 점점 더 깊어가는 것으로 알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태의를 불러 진맥을 하고, 갖은 약재를 달여 먹여도 영정은 매일 아프다고만 했다. 마침내 주희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벌였다.

 

훠이 훠이, 떠다니는 원귀야,

사방에 떠다니는 원귀야,

들에 있는 원귀야,

사당에 노니는 원귀야. 천신, 지신, 선영신, 부엌신이여,

원귀를 집으로 돌려보내소서.

우리 주군, 맑은 정신 돌아오게 하소서.

 

굿판 한구석에서 푸닥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궁녀 하나가 지루하고 지쳤는지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에이, 저렇게 해서 마마의 정신이 돌아오시겠다. 설사 돌아오신다 해도 저 사람들을 보면 놀라 다시 정신이 달아나시겠는걸."

"추아(秋娥) 이것아, 입닥치지 못할래. 그런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마. 넌 궁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아 모르겠지만, 태의의 말씀에 따르면 마마는 병이 드신 게 아니래. 단지 무언가 마음에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이란다."

"언니, 언니는 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길래 그런 것을 다 알아요?"

"5년째야."

", 5! 나는 두 달밖에 안 됐는데도 지루해 죽겠어. 지금쯤 바깥 거리는 떠들썩할텐데. 감도 익고 벼도 익고......"

"네 심정은 알겠다만 이곳에 사는 한 더 이상 그런 재미있는 추제(秋祭)는 구경할 수 없을거야."

"그럼 궁중에서는 재밌는 일이 없는 건가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윗사람은 즐겁고 아랫사람은 괴로운 데가 이곳이야. 추아야, 너 궁중 씨름 본 적 없지?"

"여기에도 씨름이 있어요?"

"있으면 뭐하니. 재미가 하나도 없어. 민간에서는 얼마나 재미있니. 이겨도, 져도 사람들이 모두 둘러싸고 박수치며 환호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화끈함이 없어. 윗사람이 눈을 껌벅이면 아랫사람은 풀썩 엎어지는 그런 씨름이야. 장대싸움은 또 어떻구. 사람수도 제한하고 키도 제한하고, 이것도 제한하고 저것도 제한하니 무슨 재미가 있겠니? 민간에서야 어디 그러니. 키 큰 사람, 작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수십 명, 수백 명씩 어울려서 마당을 가득 메운 채 부딪치고, 엎어지고..... 아참, 함양성에 노애라는 곡예사가 있다던데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며? 너 본 적 있니?"

"노애라구요? 승상부에서 궁으로 들어올 때 들어본 이름인데요."

"너 그 사람을 아는구나?"

"장대싸움을 잘 하는 사람인데, 별명이 뭐라더라? , 맞아, , 왕물건!"

"추아, 이 계집애. 다시는 그런 엉터리 소리하지 마."

"너희들 이리 좀 오너라!"

어린 궁녀 둘이 정신없이 재잘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왕태후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왕태후 주희는 궁중의 비빈들과 궁녀들이 자신을 비방하고 험담을 늘어놓으며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궁녀들이 사사로이 잡담을 나누는 것을 발견하면 궁중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엄한 벌을 내렸다. 두 궁녀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주희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희는 몇 마디 주의만 주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두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헐우정에서 처음으로 곡예사 노애를 본 주희는 그 후 비하각에서 그를 다시 보았다. 그녀는 노애의 사내다운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건장하고 대담하며 재주있고 힘이 뛰어난 그의 우람한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케 했다. 노애의 모습은 주희의 가슴에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아무리 떼어버리려고 애를 써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주희는 이런 자기 자신이 난감하기만 했다. 여불위를 부르는 데도 힘이 드는데, 하물며 노애는 시장잡배가 아니던가. 그런데 뜻밖에도 조금 전 어린 궁녀들의 입에서 노애의 이름이 튀어나왔고, 게다가 추아라는 아이는 그의 이름을 승상부에서 들었다고 했다. 주희는 침소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추아를 불러들였다. 추아가 들어오자 그녀는 태후라는 신분을 잊은 듯 다정한 언니처럼 추아의 손을 잡았다.

"추아야, 내가 너를 아껴주면 어떻겠느냐?"

난데없는 주희의 호의에 추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영리했다.

"태후마마께서 소첩을 아껴주신다면 그 은혜는 태산과 같을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말 똑똑히 듣고 대답하거라. 잘만 하면 큰상을 내릴 것이다."

주희는 추아를 침상 머리맡에 앉히며 물었다.

"여승상이 노애를 불러다 기예를 펼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들었사옵니다. 도총관 나으리가 승상 대인께 이번에 궁으로 노애를 초청하여 기예를 펼치면 어떻겠느냐고 간청하였는데, 대인께서는 추하고 비루한 시정잡배는 궁으로 들일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노애는 이번 추제절에 궁의 서문 밖 무대에서 새로운 기예를 펼친다고 들었사옵니다."

"? 새로운 기예?"

"소첩은 그것밖에는 모르옵니다."

"궁중에서 기예를 펼치는 일을 여승상이 반대했다고?"

"소첩은 다만 들은 얘기를......."

", 노애가 추하고 뭐 비루하다고? 그런 자기는 깨끗한가?"

주희는 궁중에서 노애의 기예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여불위가 막았다고 생각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분노의 화살이 온통 여불위에게 쏠렸다. 주희의 심사를 재빨리 알아차린 추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걱정을 놓으시옵소서. 노애가 궁으로 들어올 수 없다면 추제절에 태후마마께서 잠시 궁을 나가 구경하시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 조용하거라, 남이 들으면 큰일날 소리를."

주희가 얼른 추아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밝아져 있었다.

"넌 앞으로 승상부에서 무슨 말을 들으면 나에게 한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고해야 하느니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에게 섭섭치 않게 해 주겠노라. 알겠느냐?"

추아는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추제절이 돌아왔다. 추제절은 진나라의 큰 명절 가운데 하나로 매년 농사를 마치면 조상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리고, 다음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이런 추제절의 풍습은 사흘 동안 성대하게 벌어졌으며 함양성의 모든 거리와 사당은 백성들이 마음껏 놀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추제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석에 끌린 것처럼 함양성으로 몰려들었다. 변방에 수자리를 나갔다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사람, 멀리 장사를 떠나 큰돈을 벌어 돌아오는 사람, 소문을 듣고 기예를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로 함양성은 시끌벅적했다.

이날 성 안의 악사들과 곡예사들, 춤꾼들은 그동안 닦고 키운 기예를 마음껏 뽐냈다. 특히 기예가 뛰어난 사람은 관부에서 골라 큰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재주꾼들은 더욱 재미있고 뛰어난 기예를 선보이기 위해 숱한 노력과 준비를 했다.

추제절은 그 마지막 날이 가장 볼만했다. 첫날과 둘째날은 기예 대회에 참가한 이들이 예선을 치르느라 그다지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 않지만 셋째날은 예선을 통과한 사람들이 궁의 서쪽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기예를 겨루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추제절의 세번째 날이 밝아왔다. 무대가 마련된 서문에는 벌써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대에는 생()과 슬()의 연주에 맞춰 남녀 두 조로 짜여진 춤꾼들이 힘차게 손발을 휘저으며 풍년을 찬양하였다. 잠시 후 창하는 사람이 무대 좌측에서 등장하더니 장엄한 목소리로 수신곡(酬神曲)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풍년일세, 풍년일세.

어서어서 벼를 거두세.

한 되, 두 되, 기쁨도 늘어가네.

누르고 누른 곡식, 술을 담그세.

가장 잘 익은 술, 신령님 받으소서.

튼튼하게 살찐 돼지, 기쁘게 받으소서.

날렵한 사냥감, 미쁘게 받으소서.

, , , , , , ......

우리는 충성스런 대지의 아들.

예를 갖추어 찬미하세.

신령님, 신령님, 복을 내리소서.

내년에도 누른 곡식 맘껏 내려주소서.

 

수신곡이 끝나자 드디어 기예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무대 아래 어두컴컴한 구석자리에서 왕태후 주희가 기예 시합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레를 탄 그녀는 숨을 죽이고 노애가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나와라! 꽃지네 나와라!"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 꽃지네를 불렀다.

"이봐요, 사람들이 꽃지네를 부르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주희가 수레 옆에 서 있는 노인한테 물었다.

"꽃지네요? 하하하, 그 사람은 기예도 뛰어나지만 색을 무척 밝힌다오. 그 뛰어난 물건으로 많은 처자를 낚아챘다고 하여 사람들이 다리 많은 지네에 빗대 그를 꽃지네라고 부른답니다. 별명이 또 있는데 뭐더라? 그래, 왕물건!"

"그럼, 꽃지네가 바로?"

주희는 노인에게 다시 물으려 하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노애가 무대 위에 나타났다. 푸른 색 옷에 허리춤에는 누런 견대(絹帶)를 두른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기예를 칭찬하기도 했고, 지나친 호색을 비난하기도 했다.

"백학이 날개를 폈군!"

"내가 세어봤는데 한 번에 서른여섯 바퀴를 돌더라구."

"이번에는 뭘까? 수레 위를 날아가는 기술인가?"

"아니, 수레바퀴에 깔리는 기술일지도 몰라."

"왕물건이라는데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주희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노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백성들의 선망이었고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동경의 인물이었다. 노애의 얼굴에는 춘풍이 흘러넘쳤다. 넋을 잃고 노애를 바라보던 주희는 가슴에 솟구치는 춘심(春心)을 도무지 억제할 수 없었다.

이날 밤 여불위는 주희의 밀보를 받고 감천궁으로 달려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일이 끝나자 주희가 슬그머니 노애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여불위는 뜨끔했다. 이미 그는 주희가 노애를 마음 속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 서문에 있었던 기예 대회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많이 나왔나요? 어떠했어요? 불쌍한 저에게 말씀 좀 해보세요. 매일 궁에만 있으니 답답해 죽겠어요."

여불위의 품에 안긴 주희가 어리광을 피우며 물었다. 그날 여불위는 대낮부터 밤늦게까지 성 안을 돌며 시정(市井)을 둘러보았는데 그러다보니 자연히 서문에 있었던 기예 대회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기예들이 선보였는데, 노신이 우둔하여 모두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여불위가 뜸을 들였다.

"오늘 제가 밖으로 나갈 수만 있었다면 당신처럼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았을텐데."

여불위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갔다.

"민간의 기예나 향리의 속악은 너무 비천하고 난잡하여 태후의 눈을 더럽히기 십상이오. 그러나 궁중의 기예는 우아하고......"

",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세요. 궁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알 건 다 안다고요."

주희는 자신의 심정을 몰라주는 여불위가 야속해 심통을 부렸다. 여불위는 여름날의 청개구리처럼 변덕스러운 주희를 보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지겨운 할망구 같으니라구. 태후의 신분만 아니었으면 그냥 두지 않을텐데.'

하지만 여불위는 이런 속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태후, 노여움을 푸시오. 오늘 펼쳐진 기예를 생각나는 데까지 말씀드리겠소. 오늘 결전에 오른 기예는 투우(鬪牛), 학춤, 탄쟁(彈箏) 겨루기, 그리고......"

"보잘것없는 기예말고 새로운 기예를 말해줘요."

"새로운 기예라. , 개가 불구덩이를 뛰어넘는 재주도 있었고, 사람이 몇 대의 수레를 뛰어넘는 재주도 있었고, 또 뭐가 있었더라?"

"수레를 뛰어넘는 게 무슨 새로운 기예라고."

주희는 여불위의 입에서 얼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여불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새로운 기예인지는 모르겠으나, 함양성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난 노애라는 곡예사가 나왔는데 달리는 수레 밑에 깔리는 기예를 선보였소이다."

", 무시무시하군요. 정말 새롭고 충격적인 기예네요."

주희가 좋아라 하며 손뼉을 쳤다.

"궁에는 수많은 곡예사가 있지만 그렇게 엄청난 기예는 할 줄 몰라요. , 불쌍한 이 몸은 복이 없어 그런 구경도 못하고......"

"태후,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오?"

"저는 단지 그 곡예사를 궁으로 불러들여 한두 차례 기예를 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주희가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태후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지. 좀더 일찍 알았다면 신이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텐데."

여불위의 대답에 주희의 얼굴은 열망과 욕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될까요?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여불위는 이미 이 기회를 자신이 주희의 품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왕태후 주희와의 밀회는 너무나 위험했고, 남자로서도 그녀와 사랑 나누기가 지겨웠던 터였다.

"어려움이 뭐 있겠습니까? 태후, 여기 노신이 있지 않소. 태후가 별을 따다 달라면 따다 드릴 수도 있소. 하물며 한 사람쯤이야."

"정말요? 아이, 좋아라."

음심이 발동한 주희는 부끄러움도 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승상께서는 저와 노애를 딱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시면 됩니다. 소첩은 오로지......"

여불위가 얼른 손가락으로 주희의 입술을 막았다.

"태후, 딱 한 번이 아니라 평생을 모시고 살도록 만들겠습니다."

"? 평생을?"

주희는 너무나 놀랐다. 그런 일은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불위의 능력을 믿었다. 여불위는 지금까지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었던 것이다.

여불위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태후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자신의 계책을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주희는 여불위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이어 태후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태후, 염려마시오. 노애는 환관으로 가장해서 들어옵니다. 하지만 막대기는 떼지 않고 들어오니 다른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여불위는 주희를 이렇게 안심시키고 급히 감천궁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노애를 불러 환관처럼 꾸미게 하고 태후의 시위로 궁중에 들여보냈다.

그러자 주희는 여불위가 사심없이 국정을 처리하고 민심을 안정시킨 공로가 크다는 이유를 달아 연나라로부터 할양받은 하간(河間 ; 하북성 일대)의 성 열 개를 봉읍으로 내렸다.

 

 

6. 왕태후의 음사(淫邪)

 

왕태후 주희는 노애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 오랫동안 곁에서 시중을 들어온 궁아라는 궁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열여섯이 된 추아를 불러들였다.

추아는 출신이 빈천한 백성의 딸로 난리를 피해 진나라로 흘러들어온 유랑민의 후예였다. 당시 이웃 일곱 나라 가운데 가장 국력이 강했던 진나라는 국외에서 들어온 유랑민을 매우 관대하게 받아들여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조정에서는 새로 정착하는 이주민들에게 약간의 토지와 거주할 집을 마련해 주었다. 추아의 가족도 처음에는 조정의 혜택을 입어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농사를 짓기에 힘이 부친 어머니가 남몰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던 중 추아가 열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오갈 데 없어진 그녀는 홀홀단신으로 함양성에 들어오게 되었다. 다행히 추아는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 덕분에 길 가던 궁인의 눈에 띄어 궁녀가 될 수 있었다.

추아는 주희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그녀의 불타는 춘정을 목격했다. ()에 가까이 있으면 검어지고, 주사를 가까이하면 붉어진다는 말처럼 추아의 마음속에도 어느덧 음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단지 그녀의 곁에는 궁녀나 늙은 태감들뿐 젊은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미처 젊음을 발산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녀가 접할 수 있는 청년은 오로지 등승 하나였다. 태후의 심부름으로 영정에게 서신을 전할 때나 갖가지 약재와 과자를 보낼 때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는 늠름한 등승을 만날 수 있었다. 등승은 과묵하고 침착하며 일체 말이 없었다. 아무리 예쁜 궁녀가 지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호시탐탐 등승을 유혹할 기회를 엿보던 추아는 어느 날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그날도 태후가 보낸 약재를 영정에게 건네고 돌아가던 추아는 뜰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등승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후가 하던 대로 '' 하면서 긴 탄식을 내뱉었다. 이 소리에 등승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다리가 아픈 척하면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이를 본 등승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추아는 기회다 싶어 등승에게 간절하게 사랑을 구했지만 등승의 반응은 너무도 냉혹했다. 추아의 팔을 세차게 뿌리친 등승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녀의 품행을 질책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추아는 수개월 동안 등승이 무서워 영정의 침소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그만큼 그리움이 깊어지는 것일까. 등승이 그리워 잠 못 이루던 추아는 어느 날 마음을 굳게 다져먹고 영정의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높고 웅장한 침궁이 달빛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곳에서 뜻밖의 남자를 만났다.

이날 마침 당직을 서고 있던 이사는 불현듯 나타난 추아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녀는 달덩어리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무슨 일로 오시었소?"

"태후마마께서 보내 왔습니다. 대왕마마의 안부를 묻습니다."

"대왕마마께서는 늦게까지 서책을 보시고 방금 잠이 드셨습니다. 늦었으니 빨리 돌아가십시오."

얼굴이 빨개진 추아가 얼른 몸을 돌렸다. 이튿날 이사는 지난 밤에 다녀갔던 소녀가 왕태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추아라는 궁녀임을 알아냈다.

'태후마마를 곁에서 모신다면 앞으로 잘 보여야겠군.'

한편 추아는 추아대로 새로운 기분에 들떠 있었다. 예의 바르고 언행이 단정한 이사의 풍모는 등승과는 또 다르게 그녀의 가슴에 와닿았다. 추아 또한 그 다음날 이사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등승이 차지했던 그녀의 가슴에는 어느덧 그 주인공이 이사로 바뀌었다. 추아는 밤마다 꿈속에서 이사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이사의 품 안에 안겨 열렬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과 꿈 사이의 간격은 너무도 깊었고, 그 때문에 추아는 춘정을 달래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였다.

이런 추아의 수심 가득한 모습이 왕태후 주희의 눈에 붙잡혔다. 주희는 며칠새 달라진 추아의 안색을 알아보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요즘 이상하단 말이야. 영정에게 붙잡혀 남녀의 즐거움을 배운 걸까? 아니면 영정을 연모하여 저러는 것일까?'

주희는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영정이 주색에 빠져 모후인 자신의 품행을 돌볼 겨를이 없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하루에 한 번씩 추아를 영정에게 보냈다. 추아는 영정의 처소에 갈 때마다 이사를 찾아보았지만 좀체로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사가 매일 당직을 서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사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녀는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사를 처음 만난 지 열흘이 지났다. 춘정은 불과 같다고 했다. 마침내 추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사가 묵고 있는 시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행동은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대담해져 있었다. 시위방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조용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추아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윽고 추아의 발길이 이사의 방 앞에서 멈춰지자 어스름한 달빛이 구름을 뚫고 창백한 추아의 얼굴을 비추었다.

 

올망졸망 마름풀, 이리저리 헤치며 찾았어라.

자나 깨나 그리는 아리따운 아가씨 생각.

자나 깨나 생각해도 아가씨는 얻지 못해.

가이없어 가이없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뜻밖에도 이사의 방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추아는 그것이 언젠가 왕태후가 읊은 적이 있었던 시였음을 기억해냈다. <시경>에 있는 '물수리'라는 시였다. 하지만 왕태후가 그 시를 읊었을 때와 지금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왕태후는 달콤하고 애절하고 유혹적으로 시를 노래했지만, 이사의 방에서 들리는 시는 단조롭고 애처롭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추아는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목에 힘을 주어 조그맣게 이사를 불렀다.

"이랑! 이랑!"

중얼거리며 시를 읽던 이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꿈에도 그리워하는 추아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이사는 꿈결이려니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이랑, 안에 있어요?"

이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다. 그녀가 오다니!'

이사는 문을 벌컥 열어제쳤다. 바로 눈앞에 사랑하는 추아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사는 한걸음에 뛰어나가 추아를 부둥켜안았다.

추아는 이날 늦게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주희는 추아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면서 그녀를 매일 영정에게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영정에게 추아를 자주 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추아와 이사는 사흘에 한 번씩 감천궁의 후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매일같이 서로를 원했지만 궁중의 예법은 너무나 엄격했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사와 추아가 한참 사랑을 불태우고 있을 즈음 마침내 노애가 환관으로 가장하여 감천궁에 들어왔다. 그토록 노애를 원하던 주희는 비로소 마음껏 육체적 쾌락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늙고 힘없는 여불위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노애를 그녀는 보물처럼 애지중지하였다. 두 사람은 낮과 밤이 없이, 침상에서 방바닥에서 뜨락에서 기회가 나는 대로 한데 엉켜붙었다.

이런 왕태후의 열정에 추아의 가슴은 더욱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노애가 온 뒤로는 태후의 침소를 지키느라 이사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아는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 되어서야 겨우 시간을 내 후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이사는 후원의 바위에 걸터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랑!"

추아의 목소리에 이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벌써 나를 잊었소?"

이사의 말에 추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아니에요. 태후마마께서 요즘 무척 바쁘셔서 몸을 빼내기가 너무나 어려웠어요. 오늘에야 겨우 시간을 나서 이랑에게 올 수 있었답니다."

이사는 예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태후에게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추아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돌아가야 해요. 태후마마께서 깨어나셔서 저를 찾을지도 몰라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오늘 저녁 삼경에 그때 그 자리에 만나 다시 얘기해요."

추아의 말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뛰어가는 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루 일을 마친 이사는 자기 처소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삼경을 기다렸다가 그 시각이 되자 은밀하게 감천궁으로 들어갔다. 암문(暗門) 앞에서 추아가 다소곳이 이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태후마마가 홀로 되신 지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누구와 즐거움을 나누고 있소?"

추아는 만나자마자 이사가 직설적으로 태후의 일을 묻자 겁이 덜컥 났다.

"그런 말 마세요. 태후마마의 일은 절대로 물어서는 아니 돼요."

그녀는 이사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은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내요. 이 일이 누설되면 용의 비늘을 건드리는 꼴이 될 거에요."

 

이사는 그녀에게 뭔가 말 못 할 비밀이 있음을 느꼈다.

"알면 어때서 그래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지."

"안 돼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누구누구와 그렇고 그런 일을 벌였다면 이야기거리가 되겠지만, 태후마마의 일만큼은 한마디도 누설할 수가 없어요. 만일 일이 알려지면 저와 이랑의 목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달아날 거에요."

이사는 단호한 그녀의 표정에 더 이상 묻기를 단념했다. 계속 추궁한다면 틀림없이 들을 수 있는 사실까지 듣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사가 기분을 바꿔 가만히 추아를 품에 안자 추아 또한 다소곳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은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며 날이 새는 줄 모르게 사랑을 나누었다.

"!"

추아를 안고 있던 이사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슨 일이에요, 이랑?"

이사는 얼굴을 찡그린 채 고통스럽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심병이 있었는데 다시 도졌는가 봐요."

달빛에 드러난 이사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창백했다. 추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의 희망이고 생명인 이사가 고통으로 쓰러져 곧 죽을 것 같았다.

"잠깐만 참아요."

추아는 문득 여불위가 왕태후에게 선사한 소흑환이 생각났다. 그녀는 단숨에 태후의 침소로 들어가 약궤에서 소흑환 한 알을 꺼내 급히 이사에게 달려왔다. 이사는 여전히 신음을 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 약을 드세요. 승상 대인께서 태후마마께 보낸 귀한 약이에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사에게 약을 건넸다. 잠시 후 이사는 고통이 멈췄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추아,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오. 더구나 신약(神藥)까지 구해 주다니."

추아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미소를 지으며 이사를 바라보았다.

"알면 됐어요. 절대로 이 일을 잊지 말아요."

"추아, 잊지 않겠소. 그런데 이렇게 귀한 약을 내게 주었다가 들통이라도 나면 어쩌지요?"

"당신은 제 생명이에요. 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께요."

추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사를 안심시켰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만일 왕태후가 약이 없어진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이 벌을 받을 게 틀림없었다.

"이 신약은 태후마마에게 많이 있는거요?"

이사의 물음에 추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후마마께서 그러시는데 이 약은 선인이 반하(半夏), 계심(桂心), 행인(杏人), 생강(生羌)을 벌꿀에 다져 만든 신약이래요."

"그럼 많지 않겠군."

"그럼요. 태후마마께서도 긴히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아요."

"믿어지지가 않는구료. 궁중에 태의가 수없이 많은데 이런 약쯤 만들지 못하겠소?"

"이랑, 태의들은 이 약을 절대로 만들지 못해요. 여기에는 말 못 할 사연이 있어요."

"말 못할 사연? 나는 시위로 있으면서 궁중에 일어나는 숱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이 약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걸."

추아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사가 답답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만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이랑, 그 약은 여승상께서 태후마마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서 보내준 거예요."

"여승상께서 보내준 약이라고? 그런데 그게 뭐가 그리 특별한가요?"

"궁중의 일은 마굿간의 여물과 같아요. 겉은 깨끗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럽기 한량없지요. 승상 대인이 태후마마께 다른 마음이 없다면 이런 약을 보냈겠어요? 답답하셔라."

이사는 추아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나오자 움찔하였다.

"그럼 승상 대인은 어떤 병에 쓰라고 태후마마께 이 약을 갖다주었을까요?"

"이랑, 이 일을 알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해요."

추아가 그만 입을 다물려 하자 이사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결연하게 말했다.

"추아, 나를 믿어요? 그렇다면 나에게 얘기해도 괜찮아요. 저 달님께 맹서하건대 절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어요."

추아는 진지하게 맹서까지 하는 이사에게 그만 감격했다. 이렇게 해서 이사는 추아로부터 태후와 여불위의 밀회는 물론, 노애라는 환관과 벌이는 추잡한 음행도 모두 듣게 되었다. 이사는 궁중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추아는 이사의 표정을 보며 이처럼 순진하고 착한 남자는 이 세상에 다시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이런 남자의 사랑을 얻은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웃으며 이사에게 말했다.

"이랑, 날이 새기 전에 빨리 돌아가세요."

추아의 목소리에 이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주희는 노애를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하루하루 생활이 즐거웠다. 하지만 매일 침소에 노애를 끌어들여 욕망을 불태울수록 그녀는 매사에 절제를 잃어버리고 판단이 흐려졌다. 이날도 역시 두 사람은 대낮부터 침상에 뒤엉켜 있었다. 운우(雲雨)가 극치에 이르렀을 즈음 난데없이 추아가 침실로 뛰어들어 왔다. 주희의 얼굴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 태후마마! , 대왕마마께서 왕, 왕림을 하, ......"

주희와 노애는 더듬거리는 추아의 말 속에서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주희는 노애의 품에서 벗어나 얼른 겉옷을 걸치고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노애는 급히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겼다. 눈치 빠른 추아가 경대를 끌어다 태후에게 보여주었다.

"태후마마, 어서 몸단장을 하옵소서. 제가 대왕마마를 대청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주희는 영민한 추아가 대견스러웠다.

"어린것이 참으로 똑똑하구나. 후에 너에게 특별한 상을 내려주겠다. 추아야, 어서 나가 대왕마마를 모시거라."

주희는 경대 앞에서 급한 대로 대충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대청 의자에 자리를 잡고 영정을 기다렸다. 곧 영정이 추아의 뒤를 따라 대청 위로 올라왔다. 영정의 인사를 받은 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회에도 나오시지 않던 임금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영정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주희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비녀는 삐뚤게 꽂혀 있으며 옷차림도 엉망이시군."

주희는 뜨끔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체모를 내세우며 다시 영정을 다그쳤다.

"조회에는 나오지 않더니 이곳은 어쩐 일로 오셨느냐고 묻지 않아요?"

"오늘이 절기로 상강(霜降)이오라 어마마마께 인사를 올리러 들렀습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어마마마께서 차가운 날씨에 그렇게 얇은 옷을 걸치셨으니 소자는 혹 감기라도 드시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영정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예리한 비수가 되어 주희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그녀는 영정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주자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멋적은 표정으로 손을 비비고 발을 꼬던 주희는 순간 자신이 맨발로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아뿔싸, 이런, 너무 급해서 맨발로 나왔잖아.'

주희는 얼른 발을 치마 속으로 감추며 영정의 눈치를 살폈다. 영정은 아직 주희가 맨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마마마께서 수렴청정을 하시니, 제가 조회에 나가서 할 일이 없지 않아요?"

그제서야 영정은 주희가 묻던 말에 대답했다.

"어린 임금께서는 그런 말씀을 해서는 아니 돼요. 군왕은 삼가 조종과 선왕의 뜻을 가다듬고 널리 백성과 신하에게 근면함을 보이셔야 합니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주희가 영정에게 훈계했다.

"이 어미는 단지 여자일 뿐이에요. 수렴청정은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을 뿐, 어린 임금께서 관례를 마치면 조정의 권병(權柄 ; 권력을 의미)이 누구에게 가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니 어떻게 선왕과 조종의 영전 앞에 얼굴을 들 수 있으며, 어떻게 만백성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어마마마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마마마께서는 청정을 하지 않으시고 저 또한 친정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렇다면 누가 국사를 맡아 처리하고 있는 건가요?"

영정의 칼날 같은 질문에 주희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작은 일은 여승상이 맡아 하고 있으며, 큰일은 내가 처리하고 있지요."

이 말에 영정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큰일은 어마마마께서 처리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런 어마마마께서는 지난 두 달 동안 조회에 나가시지 않았잖습니까?"

이 말에 안색이 납빛으로 변한 주희는 뭐라 변명할 말을 생각했지만 얼른 떠오르지가 않았다. 영정은 주희에게 변명의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질풍처럼 다음 말을 쏟아부었다.

"풍문에 듣자하니 어마마마께서 새로이 환관 한 명을 들이셨더군요. 그놈이 함양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로 별명이 꽃지네라고 하던데 설마 감천궁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영정의 말에 주희는 수치심과 분노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주희는 왕태후로서, 영정의 어머니로서 영정의 빈정거림을 인내심 있게 참았지만, 침상 밑에 숨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애는 불같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대청으로 뛰어들어 왔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노애를 영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해인가 답청일에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낯이 익었다. 노애는 꽃이 수놓아진 황포(黃袍)를 걸치고 손에는 채찍을 든 채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후마마,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하여 아직 나오지 않으시옵니까? 수레가 이미 준비되었사옵니다."

노애의 등장에 주희는 난감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말없이 노애를 쏘아보기만 했다. 그녀의 눈빛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노애가 그제서야 영정을 발견한 듯 읍소했다.

"대왕마마, 이곳에 왕림하신 줄 미처 몰라뵙고 소란을 피웠사옵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오니 한 번만 용서하옵소서."

영정은 날카로운 눈으로 조용히 노애를 바라보았다.

"대왕마마, 신은 노애라고 하오며 그동안 함양성에서 기예를 팔며 목숨을 이어갔사옵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야 궁으로 들어와 영광스럽게도 태후마마를 모시게 되었사옵니다."

"그래, 너는 무슨 재주가 있길래 과인이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냐?"

영정이 싸늘한 어조로 노애에게 물었다.

영정의 질문에 노애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배에 힘을 주며 왼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올렸다. 채찍이 일직선으로 공중에 뜨자 노애는 오른손 식지 위에 채찍의 끝을 가볍게 얹었다. 긴 막대를 손가락 끝에 세우기도 힘이 드는데 노애는 뱀처럼 흐물흐물한 채찍을 똑바로 세우고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십여 년은 연마해야 가능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노애의 곡예를 본 영정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문령이 되려면 첫째 고서에 밝고 진율(秦律)을 알아야 한다. 둘째는 덕이 있어야 하며 품행이 단정해야 한다. 기예는 그다음이다. 알겠느냐?"

영정에게 완전히 무시를 당한 노애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신은 약간의 글은 읽었으며, 행동은 예의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게다가 기예로 말하자면 천하에서 어떨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함양에서는 제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 노애의 태도에 영정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런 말똥구리 같은 재주는 누구도 할 수 있느니라. 등시위장, 이 자 앞에서 대장부의 기예를 한번 보이거라."

명령을 받은 등와가 대청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양가죽으로 만든 여덟 장 길이의 채찍이 들려져 있었다. 등승은 채찍을 흔들다 갑자기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마치 나무 기둥처럼 그것을 오른손 엄지 위에 똑바로 세우더니 다시 왼쪽 손가락 위로 채찍을 옮겼다. 노애의 곡예와 다름없는 재주였다. 이를 지켜본 시위와 문사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노애는 승복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채찍을 손에 쥐었다.

"너는 함양성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궁으로 들어왔느냐?"

이 소리에 노애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군관 차림을 한 몽의가 눈에 불을 켜고 노애를 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노애는 얼굴빛이 새파래지며 어떻게 해야 할지 쩔쩔맸다. 몽의가 한 번 더 다그치자 노애가 벌벌 떨며 겨우 입을 열었다.

"신의 입궁은 승상 대인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황문령의 형()과 시험을 거쳐 겨우 입궁하였습니다. 어린마마께서는 소인의 나쁜 소문을 믿지 마옵소서. 소인은 그저 기예를 펼쳐보여 어린마마와 태후마마께서 즐거워하시면 그만이옵니다."

영정은 그가 계속 자신을 어린마마라고 부르자 소름이 끼쳤다. 영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등시위장에게 손짓했다.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 등승이 갑자기 노애의 어깨를 붙잡고 바닥에 고꾸라뜨리자 노애는 아픔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는 천하에 용맹하기로 소문난 몽의가 칼자루를 쥐고 언제든지 빼낼 기세로 노애를 노려보고 있었다. 등승이 노애의 팔을 비틀며 밖으로 끌고 나가자 주희는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났다. 만일 저대로 끌려가면 목이 달아날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들어 등승을 막았다.

"저 사람에 대해 나쁜 소문이 있는 건 알지만, 실은 심성이 곱고 행동거지가 단정하답니다. 대왕마마께서 그 옛날 거두신 양치기와 다를 바 없지요."

"그렇습니까?"

주희를 힐끗 바라보는 영정의 입가에 비웃음이 흘렀다.

"어마마마께서 혹 사람을 잘못 보지 않으셨는지 걱정이 되옵니다."

주희는 자식에게 훈계를 듣는 입장이 되자 화가 불끈 솟았다.

"나를 걱정해 주시니 퍽 고맙네요. 궁 안에 내가 있으면 어린마마께서 불편하실 테니 수일 내로 옹성(雍城)에 거처를 마련하고 떠나겠어요."

왕태후 주희는 영정에게 모욕을 당한 후 사흘 만에 노애와 시비 천여 명을 이끌고 옹성에 있는 대정궁(大鄭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희가 옹성으로 떠나자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여불위였다. 그는 매사에 꼼꼼하고 빈틈이 없어 사소한 일이라도 앞뒤를 재고 문제점을 점검하곤 하였다. 쉽게 처리할 수도 있는 계획도 비밀을 지키고, 진행에 일체의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애를 감천궁에 보낸 일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추진한 계획으로 결코 상책(上策)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여불위는 방자한 노애와 음란한 태후의 소문이 도성에 은밀하게 퍼질수록 몸을 도사렸다. 잘못하다가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불위 다음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은 영정이었다. 그는 궁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란한 소문을 알고 나서 더욱 심하게 위기감을 느꼈다. 이전에는 여불위만 대처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주희와 노애가 새로운 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모후의 음행이 폭로될까 걱정이 되었다. 만일 모후의 음행이 적나라하게 발각되면, 세력 기반이 약한 자신을 사생아라고 매도하며 공격하는 무리가 틀림없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왕위마저 위험할지 몰랐다. 모후의 음행과 더불어 노애를 어떻게 처치하는가도 문제였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음적으로 몰아쳐 꼼짝없이 죽여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영정은 그즈음 자신의 주변에서 일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자신을 공손하게 받들던 왕제(王弟)들이 서서히 무리를 지으며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특히 창평군과 창문군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영정은 이러한 모든 사태가 모후의 음란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한편 여불위는 주희를 염탐하기 위해 옹성에 사절을 파견하였으나 정문에서 거부를 당했다. 옹성의 대정궁은 삼엄한 경비를 펼치며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일로 여불위의 감정이 무척 상했다. 이전에는 왕태후가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먼저 상의를 하고 자문을 구했는데, 이제는 옹성의 대정궁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주희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여불위가 이 문제로 고심하자 도총관이 이사를 이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하였다.

도총관의 통보를 받은 이사는 즉시 승상부로 달려왔다. 여불위는 반갑게 이사를 맞이하며 대정궁에 들어가 태후의 동정을 파악하는 문제를 상의하였다. 이에 이사는 흔쾌히 응답을 하였다.

"승상께서 밀서를 한 통 써주시면 틀림없이 태후마마를 알현하겠습니다."

"허허, 이시위는 들어갈 묘책이라도 있는가 보지?"

이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승상 대인, 아무 염려마십시오. 만일 궁중에서 가장 아끼는 몇 갑의 학정향을 가져간다면 태후마마는 틀림없이 소신을 부를 겁니다."

여불위는 이사의 입에서 학정향이라는 말이 나오자 가슴이 뜨끔했다.

'학정향은 나와 주희만이 아는 비밀인데 이시위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여불위는 이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사의 얼굴에서는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사는 초나라 사람이니 그곳에서 들었을 수도 있겠지. 괜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지는 말아야지.'

이사는 여불위에게 대정궁에 들어갈 수 있는 비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여불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자시가 되어서야 이사는 궁으로 돌아왔다. 멀리 영정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영정이 용봉안(龍鳳案)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는데 유난히 그의 미간이 초췌하고 얼굴빛이 어두워 보였다. 이사는 그러한 영정의 심사를 읽고 조용히 시 한 수를 읊었다.

 

높은 언덕은 골짜기가 되었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이 되었거늘,

슬프다, 지금의 관리들은

어찌하여 정신 차리지 않을까?

 

이 소리에 영정은 책을 덮고 방문을 열었다. 이사가 달을 보며 시를 읊고 있었는데 시로써 영정에게 무슨 이야긴가 하려는 듯했다.

"이시위는 어찌하여 <시경>에 나오는 '시월 초'라는 시를 읊고 있는가?"

영정의 말에 이사가 두리번거리며 먼저 주변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대왕마마께서 매일 시름에 젖어 계신 모습이 마치 '남산은 높다란데 숫여우 어슬렁거리네'라는 시구와 같아 보이시옵니다. 그래서 소신은 시경의 '남산'을 빗대어 '시월 초'라는 시구를 읊었사옵니다."

이사는 영정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소신은 이제 죽음을 무릅쓰고 옹성에 들어가 궁궐에 나도는 나쁜 소문의 진상을 밝혀내어 왕실의 체통을 세우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는 데 이 한 몸 기꺼이 바치려 하옵니다."

이사의 말에 영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임금이면서도 왕태후 주희와 간부(姦夫) 노애가 옹성에 들어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이사가 대정궁에 들어가 역모의 징후나 음란한 행위의 증거를 찾는다면 영정은 자신이 꾸민 원대한 계책을 수월하게 이룰 수가 있을 터였다.

영정은 이사가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이시위의 충심을 익히 알고 있었소. 하지만 옹성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는데. 그리고 요행히 들어간다 해도 이시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아 행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이사는 빙그레 웃으며 승상부에서 여불위에게 받은 서신을 품 속에서 꺼내 영정에게 건네주었다. 영정은 그것을 읽는 동안 얼굴빛이 수차례 변했다.

"이시위, 어찌된 연유로 이런 서신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소상하게 말하시오."

이사는 영정에게 조금 전 승상부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여승상 대인께서 친히 소신한테 써준 서신이옵니다. 향후 유력한 물증이 될 터이니 대왕마마께서 거두어 주십시오. 소신은 초나라 분장수로 변장하여 대정궁의 궁문을 열겠사옵니다."

", 이시위!"

영정이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이사를 바라보았다.

왕태후와 노애는 옹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궁문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방해자가 없는 대정궁에서 곡예사와 시정잡배는 물론이고 성 안의 권문세족을 불러들여 사흘에 한 번씩 연회를 베풀었다.

이날도 대정궁에서는 어김없이 화려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정궁 명당(明堂)에는 등불이 밝게 빛을 발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쓰러진 주희가 궁녀들에 의해 침실로 옮겨졌고, 잔뜩 취한 노애 또한 눈이 발갛게 충혈된 채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하하하, 자 마시자구. 우리의 앞날은 순풍에 돛단배야. 걱정 말고 어서 마시자니까."

"이보시게, 아무리 마셔도 황하의 물은 어쩌지를 못하는 게 인간사라네. 그만 마시자구."

노애의 옛 곡예단 친구가 걱정하는 빛으로 말했다.

", 그 입 다물지 못하겠니. 너는 그냥 있으면 돼. , 마시자. 어이, 계집애야, 이리 와서 술 좀 따르거라."

노애가 부른 궁녀는 지난날 태후를 모셨던 궁아였다. 노애는 머뭇거리는 궁아를 끌어다 곁에 앉히고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았다.

"하하하, 이 계집애 좀 보라구. 나긋나긋한 게 먹음직스럽지 않은가?"

궁아는 움찔하며 노애의 품에서 바둥거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 오빠가 이뻐해 줄테니."

노애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싹 끌어 안으며 손을 치마 밑으로 집어넣었다.

"어머, 안 돼요!"

궁아가 발버둥을 치며 노애에게서 벗어났다.

"얘야, 숨지 말아라. 너에게 운우의 즐거움이 어떤 건지 가르쳐 주려는 거야. 몇 번 하고 나면 그곳이 근질거린다니까."

노애의 음탕한 말에 모두들 낄낄거리며 웃었다.

"노대인! 연회를 계속하실 겁니까, 아니면 당장에 그칠 겁니까?"

노애는 귀를 찢는 듯한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옹성의 사무를 주관하는 중대부령(中大夫令) 제강(齊江)이 서 있었다. 그는 노애가 수천 금을 주고 온갖 노력을 들여 자신의 심복으로 키운 조정의 벼슬아치였다. 노애는 남을 깔보고 무시하는 위인이었지만 제강만큼은 존중해 주었다. 조정의 일을 모르는 자신이 이곳에서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제강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장래에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제강과 같이 지혜로운 심복이 있어야 했다.

제강의 호통에 노애는 얼른 몸가짐을 다시 했다.

"제대인, 술이 너무 과해 이 사람이 실수를 했나 보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따끔하게 질책해 주시오."

"노대인, 이런 생활을 계속하시려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규칙과 예의를 지켜야 하오며, 하찮은 계집종이라도 함부로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을 몰라보고 아랫사람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다스릴 수가 없는 법이지요."

"그렇소, 제대인의 말씀이 맞소이다. 마땅히 예의를 지켜야 하고 규칙을 따라야지요."

노애는 제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떻게 예의를 지키고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 제대인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중대부령 제강은 우선 사람들을 물리고 연회를 끝내도록 하였다. 잠시 후 노애와 단둘이 남게 된 제강이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노대인께서는 우선 '예를 알고 예를 지키는 태도(知禮守禮)'가 필요합니다."

"예를 알고 예를 지키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정나라 장공(莊公;BC 743-701)께서는 예를 알고서야 패업(覇業)을 이루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덕을 바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자신의 힘을 헤아려 행하였다'라고 말하지요."

"그렇다면?"

노애가 눈을 껌벅이며 제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신을 굽히고 남을 높여야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는 법입니다."

", 알겠소. 제대인."

그제서야 노애는 제강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이라면 마땅히 예의로써 선비를 대하고, 자기 자신을 굽혀 인심을 얻어 지위를 튼튼히 하고 나라를 다스릴 역량을 갖추라는 뜻이군요."

노애의 명쾌한 대답에 제강은 깜짝 놀랐다. 글자 하나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노애의 지혜가 의외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대인께서는 문신후 여승상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는 문객만 3천을 키우며, 국가의 정사를 승상부로 옮겨놓았습니다.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지요."

"나는 여승상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그는......"

노애가 갑자기 풀이 죽어 말꼬리를 흐렸다.

"아닙니다. 노대인만이 지금의 여승상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다만 대인의 굳은 결심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노애는 제강의 말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좋아, 사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보아야지. 정상은 쫓기는 입장이고, 그 아래는 쫓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노애는 제강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그의 식견과 지혜에 탄복했다.

"하지만 어린마마는 어쩌지요? 그는 명분상 이 나라의 임금이 아니오. 그가 우리를 짓누르면 어떻게 맞설 수가 있겠소."

이 말에 제강은 빙그레 웃으며 걱정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어린마마가 영특하다지만, 어디까지나 어린아이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태후마마께서 젖을 뗀다면 그는 꼼짝없이 왕관을 벗어야 할 입장입니다. 또한 관례를 치르려면 아직도 멀었지 않습니까?"

제강의 말에 노애는 안심이 되는지 다시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제가 보기에는 얼마 안 있어 어린마마와 승상의 싸움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그때 노대인께서는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하하 제대인, 과연 묘책이오!"

노애는 제강의 상황 분석과 판단에 매료되었다.

"제대인은 나의 기둥이고 대들보요. 나 노애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참모입니다. 내일 3천 금을 내릴 테니 현사들을 모아주시오."

",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날 밤에 벌어진 제강과 노애의 밀담은 권력을 사이에 둔 또 다른 암투를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술에 취해 침실로 옮겨간 주희는 침상에 눕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주희의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추아는 그녀가 완전히 잠든 것을 거듭 확인한 후 슬그머니 제 방으로 물러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추아가 태후를 따라 감천궁에서 대정궁으로 옮긴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녀는 그동안 한순간도 이사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추아는 사랑하는 이사와 자신을 떼어놓은 주희와 노애가 미웠다. 두 사람의 음행 때문에 이사와 맺어진 연분이 허공으로 사라질 판이었다.

그날도 추아는 하루종일 이사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늙은 태감이 그녀에게 분갑 하나를 건네주며 밖에 초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장사꾼이 태후가 좋아하는 분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추아는 초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분갑장수라는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재빨리 분갑을 열어보았다. 분갑에는 구슬이 한 개 들어 있었다. 그 구슬은 원래 두 개였는데 추아가 이사와 사랑을 맹서하면서 하나는 그녀가 갖고 다른 하나는 이사에게 정표로 준 물건이었다. 구슬을 본 그녀는 날 듯이 궁문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가 분갑장수로 변장한 채 궁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애끓는 마음을 잠시 억누르고 삼경에 후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마침내 삼경이 가까워 오자 추아는 태후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하러 그녀의 침실로 달려갔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 님이 나를 기다리네. , 꿈 많은 아가씨, , 애간장을 녹이는 얼굴, , 사랑을 하고 싶어라."

노애가 술이 잔뜩 취해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 누구야?"

노애가 추아의 발자국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추아는 깜짝 놀랐다. 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면 다시는 이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추아는 얼른 재치를 발휘했다.

"대인 어른, 태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빨리 들어가 보셔요."

노애는 태후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태후의 침실로 들어갔다. 추아는 그가 태후의 곁에까지 제대로 가는지 확인을 하고 난 뒤 급히 후원으로 달려갔다.

후원에서 초조하게 추아를 기다리던 이사는 삼경이 조금 지나서야 추아가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어느덧 동쪽 하늘이 희끗희끗해져 왔다. 추아는 이사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랑,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틀림없이 뜻을 이루고 나갈 수 있을 거에요."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는 추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가 동쪽 산마루에 올랐을 즈음에야 주희는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경대 앞에 앉아 '복숭아나무'라는 시를 흥얼거렸다.

 

싱싱한 복숭아나무, 불긋불긋 꽃이 피었네.

시집가는 아가씨, 그 집안을 일으키네.

싱싱한 복숭아나무, 탐스런 열매 열렸네.

시집가는 아가씨, 그 집안을 일으키네.

싱싱한 복숭아나무, 푸릇푸릇 잎새가 무성하네.

시집가는 아가씨, 그 집안을 일으키네.

 

거울 앞에 선 주희는 자신의 몸매를 앞뒤로 비추어 보았다.

",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주희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느끼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탁자 아래에서 잠자던 노애가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너무 예쁘구나, 너무 예뻐 보이는구나."

노애는 탁자의 다리를 꼭 끌어안고 웅얼거리다 제 소리에 잠이 깼는지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는 주희가 자신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누가 예쁘다고?"

노애는 문득 어젯밤에 추아의 부축을 받은 일이 떠올랐지만 그 이후는 생각나지 않았다.

", 태후마마께옵서 너무 예쁘시다고! 그 눈, 입술, , 이마, 어디 예쁘지 않은 데가 없지 않아요?"

노애가 침이 마르게 주희의 미모를 예찬하자 그녀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주희의 마음을 읽어낸 노애는 얼른 그녀에게 달려가 어깨를 감싸안았다.

"태후마마는 너무나도 아름다우시지. 이렇게 안고만 싶으니."

"아이참!"

주희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탐하며 정신없이 침상에서 뒹굴었다.

"태후마마, 당신은 부평초 부부가 되고 싶어, 아니면 받침돌 부부가 되고 싶어?"

"부평초 부부는 무엇이고, 받침돌 부부는 뭐야? 만일 나를 버린다면 그냥 두지 않을거야."

"태후마마, 우리는 받침돌 부부야.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노애는 주희가 좋아할 말만 입에 담으며 주희의 몸을 애무했다.

'당신은 활짝 핀 복숭아꽃이야. 나는 결코 당신을 버릴 수가 없어. 당신이 있어야 이 강산을 나의 강산으로 돌릴 수 있지.'

노애는 주희의 귓볼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렇게 생각했다.

"태후마마, 우리가 힘을 합쳐야 두 명의 적을 쫓아낼 수 있지."

"두 명의 적이라니?"

"여불위, 여승상하고 어린마마, 영정을 두고 하는 말이야. 그들은 태후마마가 두려워 나를 잠시 살려두었을 뿐이야. 그러나 언젠가는 태후마마도 당할 거야. 멀리 걱정할 것 없이 가까운 데부터 걱정하라는 말도 있잖아.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크게 당할 거야."

주희는 노애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전날 영정에게 호되게 질책을 당한 이후로 주희는 가끔씩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노애의 머리에서 나올 리가 없었기에 내색을 하지 않았다. 노애는 다만 그녀의 음심을 풀어주는 동반자일 뿐, 국정에는 아는 게 없는 문외한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노애가 여불위와 영정의 문제를 끄집어낸 것은 의외였다.

"그렇다면 네 생각은?"

주희가 노애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태후마마, 어린마마가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구실이 있잖아. 먼저 어린마마를 설득하여 나를 후()로 봉하게 하고 성을 받으면 그것이 우리의 터전이 되고, 뿌리가 되지."

"무슨 후로 봉하면 되지?"

"여불위는 문신후이니까, 그를 누른다는 의미에서 장신후(長信侯)가 어떨까?"

노애는 참모 제강의 지시에 따라 반은 애원조로, 그리고 반은 협박조로 주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남을 누르는 게 좋은가 봐. 그리고 봉후가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전공(戰功)이 없는데 어떻게 후를 받을 수 있어?"

주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래 군공이 특별히 뛰어난 사람에게만 후를 봉할 수 있었다. 그러자 노애는 다시 제강이 가르쳐준 대로 주희에게 말했다.

"태후마마, 관례를 깨는 일이 어려운 줄은 알아. 하지만 멀리도 말고 가까운 데를 살펴봐. 여불위가 있지 않아? 그는 진나라 사람도 아니고, 양적의 장사꾼으로 군공이 없는데도 후를 받았잖아. 하지만 나는 당당한 진나라 사람이야. 조상의 묘가 엄연히 함양에 있으니 여불위보다 못할 게 없지. 어쨌든 태후마마가 힘을 쓰면 될 거야."

주희는 노애가 여불위를 예로 들며 자신을 설득하려 들자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밥통아, 그는 선왕을 임금으로 앉혔고, 또 어린마마의......'

그러나 주희는 노애가 계속 애원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그래, 그대의 일을 내가 외면할 수야 없지.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떤 명분을 내세우지?"

이때 갑자기 노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엿듣는 사람이 누구냐!"

", 추아이옵니다."

추아가 문밖에 서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들켜버린 그녀는 두려움으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누가 너를 불렀니?"

주희가 매섭게 눈을 흘겼다.

"초나라 땅에서 분을 팔러 장사꾼이 왔는데 태후마마께서 좋아하시는 학정향이 있다고 하길래, 정전(正殿)에서 기다리게 했사옵니다."

주희는 학정향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는 곧바로 노애의 품에서 벗어나 정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7. 개에게 물어뜯긴 사마공

 

등승이 함양궁의 시위장을 맡은 지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그의 임무는 매일 아침 저녁, 그리고 야간에 궁중의 대(), (), (), 화원, 호수, 석림(石林)을 둘러보고, 특히 큰 명절이나 경축일이 오면 순찰을 더욱 강화하여 경계와 방어 태세를 철저히 하는 일이었다.

등승은 이날도 평시와 마찬가지로 야간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가 금위군 몇 명과 함께 궁 안팎의 이상유무를 확인하며 석림에 이르렀을 즈음 어디선가 돌무더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원 뒤편에 있는 석림은 바위가 숲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등승은 재빨리 석림으로 들어갔다. 그가 석림의 끝에 다다랐을 때 마침 소리난 쪽에서 태감 두 명이 황급히 뛰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등승의 물음에 늙은 태감이 선대왕 시절에 있었던 기이한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선대왕이신 소양왕께서는 하늘을 날고 늙지 않는다는 신선술을 연마하고자 널리 선단(仙丹)을 구하셨지요. 그래서 대왕께서는 궁중에 연단로(煉丹爐)를 설치하시고 다년간 선단을 제조하셨는데 그때 숱한 황금, 백은, 주사가 소비되었지요. 하지만 대왕께서는 붕어하시기 바로 직전까지도 선단을 만들어내지 못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붕어하시면서 선단로와 방사(方士)를 후원 뒤의 석림에 영원히 가두어 놓으라고 유명(遺命)을 내리셨습니다. 벌써 스무 해 전의 일이었는데, 오늘 뜻밖에도 동굴 입구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태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가니 그때 갇혀 있던 방사가 아직 살아 있지 뭡니까?"

", 그가 나타났습니다!"

태감들은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등승은 힘차게 패검을 뽑아들고 방사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방사는 은발에 낡은 장삼을 걸쳤는데 어둠 속에서도 두 눈동자가 형형했다. 평온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등승을 바라보고 있는 방사의 위엄이 자못 힘있어 보였는데 그런 방사의 모습에서 그는 얼핏 할아버지 이대퇴와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 등승은 금위군과 태감을 뒤로 물러나라 손짓하고 그에게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어르신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나 늙은 방사는 계속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단지 등승을 노려보는 두 눈만이 번갯불 같은 빛을 쏟으며 번쩍거리고 있었다. 등승은 이제까지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늙은 방사의 눈동자가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등승은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정중하게 물었다.

"삼가 묻사온대 무엇을 구하고자 심야에 나타나셨습니까?"

"......"

늙은 방사가 가볍게 손을 내젓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유로운 삶이 얽매였도다. 무엇하러 이곳에 와서 번뇌를 자초하는가?"

그의 뜻하지 않은 대답에 등승은 어리둥절했다.

"이곳에 와서 번뇌를 자초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는 진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창생을 구제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허허허, 천하평정, 창생구제라. 천하가 나뉘어지면 전쟁이 빈번하고, 천하가 평정되면 백성이 신음하지. 모든 게 다 헛된 욕심이야."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등승이 그의 말에 반박했다.

"어르신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천하가 분할되어 백성들은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 왔습니다. 지금은 통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동굴에 계시더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잊으셨나 봅니다."

늙은 방사가 웃으며 대꾸했다.

"대도(大道)는 형()이 없고, 대음(大音)은 소리()가 없지."

등승은 방사의 말에 담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참 동안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등승은 늙은 방사를 화양부인이 예전에 거처하던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이미 폐쇄되어 인적이 드문 지역이었다. 등승은 방사에게 옷과 밥을 보내고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물었다. 또한 그를 위하여 연단로를 가산(假山)에 설치해 주었다.

어느 날 방사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던 등승이 그의 이름을 다시 물어 보았다.

"하하하, 예전에 세상 사람들은 나를 마선인(麻仙人)이라고 불렀지. 자네도 허명(虛名)을 흠모하거나 금전을 구하지 말고, 마음을 바쳐 남은 시간에 연단을 만들어 욕망에 물든 세상을 초탈하게나."

등승은 빙그레 웃으며 마선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후후후, 오늘은 내가 평생을 기울여 터득한 기술을 가르쳐 주겠네."

그러자 등승은 얼른 무릎을 꿇고 감사의 절을 올렸다.

"궁중의 방사(房事)는 은밀히 해야지. 오늘 그대에게 가르쳐 줄 기술은 고춘환(固春丸)을 만드는 비법으로, 이 환약을 먹으면 수백 명의 여자도 가슴에 품을 수가 있다네."

마선인의 말에 등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런 것은 배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품에서 붉은 환약을 꺼냈다.

"그러면 이 약을 만드는 비법을 배우게. 이 약은 취춘환(醉春丸)이라고, 여자가 이 환약의 향기를 맡으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 어떤가?"

등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니, 나에게 사람을 해치는 사술이나 백성을 그릇되게 만드는 방법을 배우라는 겁니까?"

마선인에게 실망한 등승은 한동안 그의 처소에 발길을 끊었다. 그로부터 반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일전에 마선인을 발견했던 태감이 급히 등승을 찾아왔다.

"늙은 방사가 급히 시위장을 찾습니다."

등승이 그의 방에 들어가 보니 마선인은 방 가운데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동안의 얼굴에 은빛수염을 드리우고 있는 그였지만 숨소리는 아주 미미했다.

"임종을 눈앞에 둔 사람은 말을 잘해야지, 그렇지 않나?"

마선인이 조용히 등승에게 말했다.

"나는 내일 자시 삼각에 이승을 떠난다네. 자네는 위인됨이 충성스럽고 질박하여 가히 세상의 혼란을 평정할 위인이지. 자네에게 특별히 줄 것은 없고 두 가지 물건만 남기겠네."

마선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보니 그것은 평범하게 생긴 표주박과 새와 짐승이 그려진 비단 두루마리 한 폭이었다. 등승은 그것들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려니 여겼다.

"보물은 알아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지. 이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게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필요할 걸세."

마선인의 말에 등승은 공손하게 그것들을 품에 넣었다. 마선인이 등승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먼저, 표주박에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든 연단이 들어있으니 매일 한 알씩 복용하면 힘이 넘쳐흐를걸세. 그리고 비단 두루마리에 있는 그림은 병서이니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대비하면서 연구해 보게. 그러다 보면 오묘한 이치를 깨달을 거야."

마선인이 등승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세상사 뜬구름과 같은데 무엇에 그리도 집착하는가. 명리는 부평초요, 부귀는 여름밤의 꿈이야. 오로지 죽지 않고 장생을 추구하여 등선(登仙)하는 게 가장 아름다운 일, 이제 나는 그 뜻을 이루었으니 여한이 없다네. 자네는 내일 이곳에 와서 나의 시신을 거두어 석림에 있는 동굴에 안치하고 영원히 입구를 봉해주시게."

이튿날 등승은 마선인의 당부대로 그의 시신을 석림의 동굴에 안치하고 입구를 봉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화원을 거닐던 영정은 우연히 등승이 환약을 먹고 무술을 익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등시위장, 방금 입에 넣은 환약이 무엇인가?"

등승은 성품이 강직하고 순진하여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그는 영정에게 그동안 마선인과 있었던 교분을 모두 털어놓았다.

"동방의 제나라와 연나라에 그런 방사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소만 등시위장이 그런 인연을 가졌다니 좋은 일이오. 그런데 어찌하여 고춘환과 취춘환을 만드는 비법을 배우지 않았소?"

"그런 것들은 사람을 미혹케 하고 백성을 그릇되게 이끄는 사술의 하나라 배울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건 등시위장이 몰라서 하는 말이오. 천지음양은 모두 하늘의 이치에 따라 만들어졌소. 일찍이 의서에 보면 황제는 하루에 백 명의 소녀를 상대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했소. 참으로 아까운 보물을 잃었구려."

"하지만 그림이 그려져 있는 두루마리를 한 폭 얻었사옵니다."

등승은 품에서 비단 두루마리를 꺼내 바닥에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짐승과 새가 조화롭게 그려져 있고, 두루마리의 하단에는 고대에 쓰였던 어충문(魚蟲文)으로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영정 또한 해독하지는 못했다.

"과인이 가지고 있는 손오병서(孫吳兵書)나 태공망의 백진도(百陣圖)와는 사뭇 다른 그림이지만, 사도(邪道)의 냄새가 나니 등시위장이 연구해 보시오."

등승에게 다시 두루마리를 건넨 영정은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 들어온 그는 동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신선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나라와 진나라의 경계에 위치한 남양군은 수차례나 진나라에 점령을 당했지만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땅이라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복우산(伏牛山) 주변에도 폐허가 된 몇 개의 성채만이 남아 있었다. 유월의 뙤약볕은 이곳 복우산에도 내리쬐었다. 전쟁의 참화가 스쳐지나간 복우산에도 어김없이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찾아온 것이다. 산록에는 푸릇푸릇한 풀들이 자라고 흰띠풀이 온산을 덮었다. 복우산 한 골짜기에 나무로 엮어 만든 집 한 채가 있었다. 집의 주변에는 소담스런 꽃밭이 가꾸어져 있었는데 여러 꽃들 가운데 남양의 흰 국화꽃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 꽃밭에서 한 노인이 꽃삽을 들고 김을 메고 있었다. 노인의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고, 갈색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것이 이미 고희를 넘어선 듯했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예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인은 가끔씩 허리를 폈다가 다시 앉아 잡초를 뽑곤 했다.

"능매야, 능매야! 이리 와서 좀 쉬거라."

", 알았어요. 할아버지."

국화더미에 묻혀 있던 소녀가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녀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산마루에 울렸다. 소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능매는 예전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피리가 그전에는 그녀의 어깨까지 올라갔었지만 지금은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능매는 꽃밭의 흰 국화처럼 건강하고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비록 갈치마에 베옷을 걸쳤지만 눈부신 그녀의 아름다움은 숨길 수 없었다.

"에이, 할아버지, 나는 언제 처녀가 되지."

능매의 투정에 이대퇴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등와가 영정을 따라 진나라 함양성으로 떠난 이후 그는 능매를 데리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양을 치고 사냥을 하다 어느덧 남양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그는 한벽한 남양의 복우산에서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의 배려로 이곳에서 국화를 심고 외참외를 키우며 조용히 능매와 지내고 있었다. 능매가 곁으로 다가오자 이대퇴는 야채죽을 준비하면서 중얼거렸다.

"흰 국화는 장씨가 남양성에 내다팔려고 심은 거지. 이곳 사람들은 흰 국화를 너무 좋아해. 하지만 우리는 상당 사람이란다, 알겠느냐?"

먼 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상당의 야산에는 노란 국화, 붉은 국화가 만발해 있겠지. 등와는 그걸 꺾어 너한테 화관을 만들어 주곤 했지. 등와만 떠나지 않았다면 네가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이대퇴의 말에 죽을 먹던 능매는 목이 메였다.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상당에서는 국화를 양들이 좋아한다는 뜻에서 양환초(羊歡草)라고 한단다. 가을에 잎과 꽃을 따다 햇볕에 바싹 말려 비단 주머니에 싸서 술을 담그면 참으로 향기 좋은 국화주가 되지.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런 걸 내다팔 생각은 못하고 있을 거야."

"할아버지, 백성들은 그저 하루 먹을 걱정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어디 술을 만들어 내다팔 생각까지 할 수 있겠어요?"

"그래, 능매 말이 옳구나. 우리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지. 장씨의 말을 들으니 무슨 후라는 벼슬아치는 애첩이 좋아한다고 흰 국화를 무려 일백 금을 주고 산다지 뭐냐."

"일백 금이나요? 우리가 이십 년은 쓸 수 있는 그런 큰 돈인데."

능매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는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그 사람들은 돈을 못 써서 안달이 났지."

"등 오빠도 그런 사람이 됐을까요?"

"아니다. 등와는 심성이 곱고 정직해서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야."

능매가 동그란 눈을 굴리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대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후니, 왕공이라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은 아닐 거야. 국화도 흰 게 있고, 붉은 국화, 노란 국화도 있지 않니?"

그제서야 능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얼른 죽을 비우고 바위에 올라앉아 피리를 불었다.

'쯧쯧, 등와를 생각하고 있구나. 가여운 것. 등와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피리를 불던 능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사냥개인 누렁이가 숲을 헤치며 짖어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능매는 얼른 달려가 그 주위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누렁이가 미친 듯이 짖어대는 그 곁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할아버지,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옛날 우리가 구해준 만량이라는 사람처럼 말이에요."

능매의 외침에 이대퇴가 급히 달려오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쓰러져 있던 사내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누렁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한입에 물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 구해주십......시오."

사내는 겨우 이렇게 한마디 하더니 그만 혼절해 버렸다.

사내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이대퇴는 우선 띠풀 뿌리를 달여 그의 입에 흘려넣은 다음 맥을 짚어 상태를 보았다.

"능매야, 너는 가서 쉬거라. 그리 심하진 않구나. 더위를 먹어서 그럴 뿐이다."

능매가 밖으로 나가자 이대퇴는 그의 윗옷을 풀어헤치고 손으로 온몸을 주물렀다. 호흡이 점점 평온을 찾아가면서, 얼마 후 그는 눈을 떴다. 이대퇴는 물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그의 행색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그는 쇠귀풀로 엮은 구멍난 신발에 해진 갈옷을 걸쳤고 작은 보퉁이를 하나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서른 정도로 얼굴빛이 부드럽고 손에 군살이 없는 것이 한눈에 가난한 서생(書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대퇴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대퇴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당연히 도와야지요. 그런데 어느 지방에서 오신 분이오?"

"저는 조나라 장평 사람으로 이름은 사마공(司馬空)이라 합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고 익혀서 저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위나라의 신릉군에게 의탁하기 위해 대량으로 갔는데 뜻밖에도 그가 위왕의 총애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숱한 문객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던 중 이곳 복우산에 이르러 허기지고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사마공의 사연에 이대퇴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평도 전쟁의 참화로 부모님 모시고 평안하게 살 곳이 못 되지요?"

고향을 생각하자 사마공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고향에 가면 몇 뙈기 밭은 있지만 씨 뿌리고 추수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쩐지 고향이 있는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간다 했더니. 지난해에도 초나라에서 도망온 만량이라는 농부를 구해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지금은 저기 뒷산에 정착해서 잘살고 있지요. 그러면 서생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이대퇴의 물음에 사마공은 주저없이 자기의 소신을 밝혔다.

"지금 천하는 매우 혼란합니다. 이런 때에는 인재가 필요하지요. 저라고 강태공이나 관중처럼 현왕(賢王)을 보좌하여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저는 객지에서 죽으면 죽었지 한곳에 머물며 정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마공은 제 말에 흥분하여 목소리까지 떨렸다.

"진나라로 가서 여불위에게 의탁할 생각입니다. 그는 이 시대에 가장 실력있는 사람이지요. 제 생각에는 이전에 이름을 날렸던 4대 공자보다 뛰어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참, 그런데 이 방에서 나는 훈훈한 향내는 정말로 사람의 가슴을 맑게 해 주는군요."

"하하하, 사람의 가슴을 맑게 해 준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대퇴는 사마공이 방 안의 향을 극구 칭찬하자 기분이 좋았다.

"이 향은 동백나무 잎에 송진과 여러 재료를 섞어 만들었지요. 비가 오거나 날씨가 구질거리면 이 향을 피워 습기를 없앤답니다."

"정말로 훌륭한 향내입니다."

", 서생께서는 곡기를 때워야 할 것이니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대퇴는 부엌에 나가 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마공은 상을 받자마자 바람이 구름을 거두어가듯 단숨에 죽 한 그릇을 비웠다.

그런 모습에 이대퇴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이곳은 워낙 살기가 궁해서 먹을 만한 음식이라고는 야채죽뿐이라오. 몹시 시장하실 텐데 그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오. 그리고 이건 심심해서 텃밭에 심은 외참외인데 달고 향기가 좋아요. 한번 드셔보시구려."

이대퇴가 건네준 외참외를 먹으며 사마공이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어보니 상당 분이시군요."

"하하하, 그래요. 상당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마공은 이대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당은 얼마나 좋은 지방인가? 물 맑고 인심 좋고 물산이 풍부한 곳인데, 어찌하여 그런 곳을 버리고 이렇게 궁벽한 곳에 초가를 짓고 살고 있을까?'

사마공의 마음을 읽은 듯 이대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상당 지방도 잦은 전쟁으로 황폐해졌다오. 이곳은 비록 한벽하고 가난한 산간 지방이지만 좋은 점이 하나둘이 아니라오. 첫째는 한나라의 통치를 받지도 않고, 진나라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전쟁의 참화가 일어날 리 없소. 둘째는 그 어느 나라에도 적을 두지 않으니 세금 낼 걱정이 없으며, 셋째는 지주들의 횡포가 심하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사마공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저는 그동안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곳 복우산도 전쟁의 참화는 없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학정(虐政)과 전쟁이 끝나야 백성들이 편안할 텐데......"

말끝을 흐린 사마공이 갑자기 이대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르신, 저를 따라 진나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진나라에서는 도망온 농부들에게 약간의 밭을 나누어 주고 식량과 농기구도 보태주며 세금도 이 년동안 면제해 준다고 합니다."

"국경을 넘어가는 일이 쉽다면 우리도 가겠지만......"

이대퇴는 사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만량과는 전혀 달라. 말에 힘이 있고 언변이 뛰어나 사람을 끌어들이는구먼. 만일 능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등와를 찾으러 함께 가자고 하겠지. 하지만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까. 더욱이 이 사람은 용모가 준수하여 사람들의 이목이 금방 쏠릴텐데. 가는 길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겠어.'

이때 갑자기 방문이 획 열리더니 능매가 뛰어들어 왔다. 아마 문 밖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우리도 사마 선생을 따라 진나라로 가요. 등 오빠를 찾아가요."

"능매야, 그곳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느냐?"

"아무리 힘들고 험하더라도 이 골짜기에 있는 한 언제 등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겠어요?"

능매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마공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간의 사연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르신, 아기씨, 우리는 모두 조나라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저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이고요. 만일 저를 믿으신다면 진나라에 가 있는 아기씨의 오라버니가 누구인지 알려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마공의 제의에 이대퇴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매 또한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깨물며 동의했다.

며칠 후 몸을 추스린 사마공은 함양으로 떠났다. 복우산으로부터 함양까지는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사마공은 온갖 고생 끝에 한 달이 조금 지나서야 비로소 함양의 경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어르신! 함양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마공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늙은 농부에게 물었다.

"이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만 가면 함양의 동문에 이른다오."

사마공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멀리 함양성의 동문이 보이자 그는 날아갈 듯 그쪽으로 뛰어갔다.

"하하하, 함양성에 내가 왔다! 내가 왔다! 사마공이 왔다!"

진나라에 이르는 길목에서 사마공은 비옥한 대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수많은 농부들을 보았다. 또한 완전무장한 무사들이 질서있게 요새를 지키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진나라의 성벽은 거의가 견고했고 백성들은 활기에 넘쳤다.

"백리해(百里奚), 상앙이여, 장의(張儀), 범수, 감무여, 내가 왔다!"

사마공은 가슴을 활짝 펴고 함양성으로 힘껏 달려갔다. 그런데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십여 마리의 개가 달려들더니 사마공의 팔과 다리를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먼길에 지쳐 있던 사마공은 사나운 개들의 공격에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함양성은 어느덧 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가랑비가 달포 가량 줄기차게 내리더니 이날은 오랜만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았다. 등승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목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목연은 여불위가 영정에게 준 선물로, 여불위에게 반감을 가진 영정이 망가뜨렸던 목연을 본떠서 만든 모제품이었다. 영정은 이미 등승에게 화를 내며 목연을 망가뜨린 그때의 일을 사과했지만, 고장난 목연을 완벽하게 고치기는 어려웠다. 등승은 함양성에서 제일 솜씨가 좋은 목공을 불러 새 목연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러던 것이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등승은 마침 날이 개인 오늘, 녹묘원()에서 이 연을 제일 처음 날리고 싶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등승은 아침 일찍 영정을 찾아갔다. 그런데 서재에 있는 줄 알았던 영정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안(書案) 위에는 지난밤에 켜놓은 촛불이 아직 타내려 가고 있었다. 영정은 매일 아침마다 화원에 나가 무술을 연마하곤 했다. 이에 생각이 미친 등승이 급히 화원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영정이 홀로 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등승을 발견한 영정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등시위장, 어서 오시게."

영정은 등승의 손에 들려 있는 목연을 발견하였다.

"목연을 날릴 생각인가?."

영정이 손을 내밀자 등승은 얼른 목연을 등 뒤로 숨겼다.

"대왕마마, 또 그전처럼 부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 말에 영정은 빙그레 웃었다.

"누가 그걸 만지려고 손을 내민 줄 아는가? 저 하늘을 보게나. 등시위장은 오랫동안 야산에서 양을 키웠으니 이런 말을 들어봤을 거야. '아침에 해가 일찍 뜨면 비가 올 징조다.' 하늘을 보니 늦어도 오후에는 비가 다시 내릴 것 같군. 그러니 목연을 날리기보다는 차라리 서재로 가서 바둑이나 두세."

"?"

등승은 영정의 바둑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정이 바둑을 두자는 제의는 거의 없었다.

'대왕마마는 지금 책더미 속에서 탈출해 쉬고 싶으신 거야. 승패를 떠나 나라도 대국을 해 드려야지.'

등와는 영정을 따라 다시 서재로 들어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바둑은 춘추(春秋)시대 때부터 공경대부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다.

영정의 바둑판은 남전(藍田)의 미옥(美玉)으로 만들어 면이 거울처럼 깨끗했고, 날줄과 씨줄로 엮어진 선은 가느다랗게 파서 금실로 상감하였다. 또한 바둑돌은 남전의 박옥(璞玉)으로 만들었는데 돌면이 매우 반들거렸으며 검은 돌과 흰 돌 각각 180개가 칠갑(漆匣)에 가지런히 담겨져 있었다.

등승이 검은 돌을 잡고 영정이 흰 돌을 잡았다. 바둑은 무엇보다도 포석이 중요한데 전체의 국면을 고려하여 적당한 지역을 선점하고 중앙을 공격하는 전술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십여 수를 두었다. 등승의 기국이 힘차고 시원스러운 반면 영정의 바둑은 세밀하고 정확했다.

영정은 바둑을 두면서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등승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영정은 틀림없이 옹성의 대정궁에 잠입한 이사를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대왕마마, 오늘은 신이 예전같이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일전에 왕전 군관으로부터 몇 수 지도를 받았거든요."

딴생각에 잠겨 있는 영정을 바둑판으로 이끌기 위해 등승이 농담을 시작했다.

"조그만 물오리가 입은 석 자구만. 등시위장이 어떤 수를 쓴다 해도 중반이면 승부가 날걸."

"마마, 너무 서두르지 마시옵소서. 신은 아직 수를 쓰지 않았사옵니다."

등승이 웃으며 급소에 돌을 두자 그로 인해 영정은 한 번에 여덟 점을 잃게 되었다. 유리했던 국면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그제서야 영정은 바둑판에 정신을 집중하고 묘수를 궁리하면서 중얼거렸다.

"즐거움에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놀이에 밤 깊어가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 바둑은 참으로 오묘한 놀이야."

이미 정오가 되었는데도 두 사람은 승부를 내지 못했다.

", 바로 여기다!"

마침내 영정이 등승의 약점을 발견하고 돌을 놓았다.

"과연 묘수이시옵니다."

등승은 낭패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단숨에 승부가 결정날 판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사옵니다. 돌을 놓아야겠습니다."

등승이 패배를 시인하자 영정이 밝게 웃었다.

"아직 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이때 등승의 뒤에서 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들어왔는지 이사가 바둑판 옆에서 두 사람의 대국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를 본 영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시위장, 속히 주연을 마련하도록 하시오. 오늘은 군신이 함께 밤새워 술에 취해 봅시다."

과연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도 아니고 장마비도 아닌 띄엄띄엄 내리는 가랑비는 사람의 심사를 짜증스럽게 했지만 영정은 아랑곳없이 마냥 즐거워 했다. 그즈음 등승은 그렇게 밝은 영정의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이시위, 어서 정탐한 사실을 과인에게 알려주시오."

이사는 대정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란한 기풍을 하나도 빠짐없이 영정에게 보고했다. 대정궁에서는 매일 음란한 주연이 벌어지고, 사당(私黨)을 지어 조정을 비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더욱이 노애는 왕태후의 총애를 발판삼아 임금의 가부(假父)로 행세하며 횡포를 부렸다.

이사의 보고에 영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옹성을 공격하여 대정궁을 쑥밭으로 만들고야 말겠노라."

영정은 이사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때 태감이 급히 달려와 대정궁에서 특사가 왔음을 알렸다.

"대정궁?"

영정은 이글거리는 분노를 삭이며 특사를 맞이했다. 화려한 복장을 한 채 거들먹거리면서 들어온 특사는 노애의 곡예단 친구로 영정 앞에 누런 비단에 싸인 백서(帛書)를 바쳤다. 백서를 읽는 영정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얼굴색이 시뻘게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영정의 심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등승이 특사에게 빨리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짐승 같은 놈! 아니 짐승보다 못한 놈이 감히 후에 봉해 달라고 하다니! 등시위장은 지금 당장 여승상에게 달려가 십만 병력을 이끌고 대정궁으로 가 열흘 이내에 노애의 목을 과인에게 갖다바치라고 이르거라!"

등승은 영정의 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평소 영정은 매사에 주도면밀하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만일 성급하게 일을 처리해서 잘못된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즉시 사과하는 성격이었다. 언젠가 영정은 등승에게 <손자병법>을 내보이며 장수란 고요함()으로 평온하고(), 바름으로() 다스린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대왕마마, 부디 깊이 생각하신 후 결정해 주옵소서."

등승이 영정에게 간곡히 간언하자 영정은 그제서야 겨우 화를 누그러뜨리고 연거푸 술 석 잔을 들이마셨다.

"군사를 움직일 때에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추진해야 적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가 있사옵니다."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이사의 말에 영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노애는 봉작을 받으러 입궁하라는 왕의 성지를 받았다. 당시 후의 작위를 받는 사람은 함양궁에 입궁하여 임금으로부터 봉국의 지역을 나타내는 지여도(地輿圖)를 하사받았던 것이다.

성지를 받은 노애는 다음날 왕가(王家)의 사냥터로 사냥을 나갔다. 그는 그 기회에 후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연회에 쓰일 사냥감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대정궁 사람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바로 이날 사마공은 자신도 모르게 노애의 사냥터로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낯선 사람을 발견한 사냥개는 마치 그가 사냥감이기라도 한 양 달려들어 마구 물어뜯었다.

"사냥감을 발견했나 보다!"

개들이 짖어대자 사냥에 동원된 무사들이 쫓아왔다. 그들은 사마공이 피를 흘리며 숲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좌익() 대인, 짐승이 아니라 처음 보는 놈인데요."

"비루한 농사꾼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그냥 버려두고 빨리 떠나자. 장신후마마께 어서 훌륭한 사냥감을 몰아주어야지."

"대인, 혹시 적국의 첩자일지도 모르니 데려가서 심문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장신후마마의 이름도 널리 알려질테고."

그도 그럴 듯 싶어 좌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사들은 사마공을 꽁꽁 묶어 어깨에 들쳐메고 노애 앞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정신을 잃었던 사마공이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났다.

"마마, 적국의 첩자를 체포했습니다."

", 네 공을 기억해 두겠다. 이 놈을 내사(內史) () 대인에게 넘겨 죄상을 밝혀내고 참수하라 일러라. 함양의 저잣거리에 효수하여 진나라의 위엄이 어떤지를 보여주겠노라."

사마공은 어렴풋이 저잣거리에 자신의 목을 효수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함양성에 이르렀는데 효수라니.'

사마공은 있는 힘을 다하여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연회에 쓰일 곰발바닥이 필요한 노애 장신후에게는 사마공이 억울한지 어떤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장신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냥을 떠나려 했다.

"대인, 제 말을 한마디만 들어주십시오!"

사마공의 애절한 호소에 노애가 겨우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생은 학문에 뜻을 둔 서생으로 문신후 나으리께서 널리 문객을 불러들이신다는 소식을 듣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소생은 결코 적국의 첩자가 아니옵니다. 옛말에 장군은 술을 마시며 말을 타고, 재상의 뱃속에는 배가 다닌다고 했습니다. 장군은 기개가 뛰어나야 하고 재상은 도량이 넓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생의 말씀을 부디 믿어주십시오."

그때야 노애는 사마공이 첩자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문신후 여불위의 명성을 듣고 천길 먼길을 달려왔다는 말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멍청한 놈, 나는 네가 천리가 멀다 않고 찾아온 문신후가 아니라 장신후이니라. 그런 너는 도대체 어디에서 굴러온 놈이더냐?"

노애의 말에 사마공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인, 산이 높으면 흙먼지를 거부하지 않고, 물이 깊으면 빗방울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소생은 비록 조나라 사람이지만 진나라의 부강과 민풍을 흠모해 왔습니다. 진나라만이 지금 혼란하기 짝이없는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소생은 그래서 진나라에......"

노애는 사마공이 조나라 사람이라고 밝히자 더욱 분노가 끓었다. 노애는 자신의 모사인 제강이 주장하는 진인치진(秦人治秦)을 어느 누구보다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네 이놈, 진나라는 진나라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 감히 허튼 야망을 품고 이 땅에 들어오다니!"

노애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진인치진의 소신을 펼치기 위해 그동안 함양성에 여론을 확산시키고 사람을 모으는 등 여러 방면으로 준비를 해왔고, 때가 되면 단숨에 국정을 장악하리라 결심한 터였다.

"네 놈 같은 버러지들이 진나라를 망치고 있어. 우리 진나라에는 더러운 혓바닥을 가지고 있는 선비놈은 필요가 없다. 게다가 젖비린내도 안 가신 놈이 함양의 장신후를 몰라보고 이국(異國)의 쓰레기 같은 문신후를 들먹이다니!"

"대인이시여,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사마공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읍소했다.

"네 이놈, '뛰어난 사람은 두말하지 않고, 두말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도 못 들었느냐? 나는 두말 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봐라. 이놈을 단단히 혼내주거라!"

노애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달려들어 사마공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래도 노애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사마공이 피를 철철 흘려도 상관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중대부(中大夫) 안설(顔泄)이 피투성이가 된 사마공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노애에게 말했다.

"대인, <관자>에 이르길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인에게는 지금 사람이 필요합니다. 혹여 저 자를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살려두시지요."

그제서야 노애는 갈대인에게 매를 멈추라고 명령했다.

사마공은 안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대정궁으로 끌려가 상처를 치료받았다. 노애는 그에게 대정궁을 지키는 호위병직을 주어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8. 암내를 구하는 두 마리 여우

 

진나라 영정 8(BC 239)에 노애는 함양성에 들어가 영정에게 후의 작위를 받았다. 영정은 그에게 장신후라는 봉호(封號)를 내리고 산양(山陽)의 땅을 봉지로 떼어주었으며, 그 뒤 태후의 요청으로 다시 하서(河西), 태원(太元)의 땅을 분할하여 노국()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이런 일련의 일이 노애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던 것은 여타 봉국과 비교해 볼 때 노국은 명분만이 아닌 실질적인 권한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국력이 가장 강했던 진나라는 물론, , , , , , 연나라 또한 왕권이 공고히 다져져 있어 신하들의 봉국은 중앙의 엄격한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봉국은 세습이 되지 않았으며 봉작을 받은 사람은 토지권과 봉국의 행정 관리를 임금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정이 노애에게 내린 노국은 궁실, 관복, 수레, 가마, (), 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규칙을 왕실에 버금가게 시행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심지어 봉국 내에서 자치 법령이 통용되었고 봉국에 필요한 관리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으며 사신을 파견할 권리가 주어졌고 군()을 거느릴 권한까지 하사받았다.

이로써 노애의 지위는 단번에 시정잡배에서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왕태후를 품에 끼고 어린 영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진의 권력을 하나씩 차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왕태후의 치마 폭에서 태어난 그가 가슴에서 자라더니 어느덧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 앉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애는 왕태후의 이름을 빌려 감천궁에서 주연을 마련하였다. 그는 진나라의 구신(舊臣)과 그들의 자제, 왕가의 혈족, 원로중신을 모두 초청하고 영정에게 연회의 재가를 요청했다. 영정은 왕태후의 체면을 생각하여 부득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태후마마가 마련한 연회를 어디서 감히 불허해!"

영정의 허락이 떨어지자 노애는 자만심에 가득차 큰소리를 쳐댔다. 그러나 그의 광망스럽고 경박한 언행은 점점 많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고, 이에 반해 어머니 왕태후를 깍듯이 모시는 영정은 찬사를 듣기 시작했다.

"어린마마의 효심은 대단해. 어버이는 자식을 멸시하는데 아들은 어버이를 존경하니 말이야."

연회가 열리는 감천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소나무, 동백나무, 훼나무, 자작나무 등에 오색 비단이 주렁주렁 걸리고 건물마다 등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다. 이렇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연회는 검소한 진나라의 도성에서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연회는 감천궁에서 제일 아름다운 승로대(承露臺)에서 펼쳐졌다. '()'란 산이나 언덕 꼭대기의 편평한 곳에 정자처럼 지은 건물을 말한다. 대를 지을 때에는 동서남북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지만 벽은 두지 않아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승로대는 함양성의 명승으로 이곳에 오르면 함양성이 한눈에 보이고, 함양성을 굽어도는 위수의 아름다움을 시원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로 오르는 계단과 대의 바닥, 그리고 기둥은 남전의 미옥으로 만들어졌다. 함양성의 백성과 고관대작들은 평생에 한 번 이곳에 오르는 게 소원이지만, 승로대는 감천궁 내에 있었고 또 현재는 왕태후의 궁전이라 금지(禁地)나 다름없었다. 노애가 연회를 이곳에서 벌이는 이유 중에는 자신의 명성을 과시하려는 뜻도 있지만, 바로 이곳 승로대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장소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유시가 되자 승로대의 동서남북 사면에 있는 커다란 향로에서 훈향이 은은하게 타올랐고, 대의 주변에는 조나라에서 바친 열두 대의 동수등(銅樹燈)이 빛을 발하였다. 이 등은 마치 나무처럼 생겼는데 한 등에 열두 개의 수지향촉(獸脂香燭)을 꽂을 수 있었으며, 등불은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꽂는 침마다 덮개가 크게 씌어졌고 덮개에는 구멍이 곳곳에 커다랗게 뚫려 있어 빛이 밖으로 쏟아지도록 되어 있었다.

서쪽 하늘이 어느덧 노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대의 우측에는 궁중 악대가 영빈곡(迎賓曲)을 연주하고 있었다.

노애는 대의 남쪽에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노애는 이미 자리를 잡은 손님들의 면면을 훑어보면서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왕제인 성교(成嬌), 좌승상 창평군과 창문군의 얼굴도 보였고, 조정의 여러 대신들이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영빈곡이 계속되면서 그 사이에 궁녀들이 음식과 술을 날라왔다. 잠깐만에 상 위에는 온갖 진미들이 가득 찼다. 통오리구이, 통닭구이, 멧돼지 통요리도 있었고 잉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다고기도 보였다. 잘고 길게 썰어 먹기에 좋도록 만든 장육과 각종 야채요리, 특식인 곰발바닥 요리도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웠으며 향기로운 술이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하였다. 노애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며 술을 들어 건배를 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곁에 있던 내사 사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진나라 사람의 자랑, 함양성의 풍운아, 장신후 노대인께 축주가언(祝酒嘉言)을 올립니다. 복여동해(福如東海), 수비남산(壽比南山)!"

"하하하, 훌륭한 축주가언이오. 동해 같은 복을 받으시고, 남산 같은 수를 누리시라......"

궁정위 대장 갈대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노애의 복락을 기원했다.

"천신, 지신, 곡신, 주신, 해신, 달신, 산신께 청하오니 장신후 노대인을 굽어살피소서!"

"고마우신 말씀이오. 마음 깊숙이 새겨두겠소이다."

노애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처음 감천궁에 들어왔을 때 노애는 미천한 시정잡배로 가진 재주라고는 오로지 기예 하나뿐이었건만,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진나라의 장신후가 된 것이다.

'하하하, 천명이 무엇이더냐.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천명의 굽어살피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장신후가 될 수 있었을까?'

노애는 갑자기 자기 자신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런 기분을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 들었다.

"진나라는 우리 진나라 사람의 사직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진인치진, 국태민안(國泰民安)!"

노애는 그동안 제강으로부터 배운 진인치진의 계책을 연회에서 주장하였다.

"---, ---!"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한자한자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런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짓던 노애는 문득 얼굴을 씰룩거리며 못마땅해 하는 창평군을 보았다. 노애는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그 옛날 노애는 창평군 형제에게 불려가 기예를 보여주고 그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돈에 허리를 굽히며 고마워 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지난날 기예를 팔던 시정잡배 노애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많은 가르침을 주는 수많은 모사들 덕분에 그는 이미 권모술수에 뛰어난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너희들도 언젠가 나로 인해 고통을 받을 줄 알아라.'

노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창평군에게 다가가 술잔을 건넸다.

"두 분 귀인께서 왕림하시니 연회가 더욱 빛납니다. 잠시 후 기예놀이가 있사오니 부디 즐겨 주십시오."

"하하하, 이렇게 초청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창평군과 창문군도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잔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깔리는 비웃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노애가 아무리 지위 높은 장신후라 해도 그는 천박한 출신의 곡예사로 품행이 부정하기 짝이없었다. 창평군과 창문군, 두 사람은 지난날 아무때고 불러 기예를 살 수 있었던 노애와 선대부터 군()으로 대접받아온 자신들이 이렇게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초청을 받은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승로대에 오르는 순간부터 연회의 비속한 분위기와 노애의 방자한 태도를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진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마침내 우승상 창문군이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애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장신후 대인,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데 말을 해야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소이다. 대인께서 남에게 얼굴을 드러내시는 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무슨 일이신데 그렇게 말씀을 어렵게 하십니까?"

"받아주신다면 말씀드리지요. 장신후 대인께서는 '동목전(桐木轉)'이라고 하는 출중한 기예를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몸은 아직 그 재주를 본 적이 없습니다. 좋으시다면 빈객들에게 장신후 대인의 뛰어난 솜씨를 한번 보여주시는 게 어떨는지요?"

창문군이 노애에게 정중한 태도로 부탁을 해왔다. 그순간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노애에게 집중되었다. 출신이 비천한 사람에게 가장 듣기 싫은 소리는 그의 출신을 거론하는 일이다. 하물며 노애는 가장 비천하다는 곡예사 출신이었다.

노애는 심한 모욕감에 두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손에 쥐었던 술잔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곧 폭발할 기세였다. 그때 노애 곁에 붙어 있던 제강이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노애가 언뜻 제강을 바라보았다. 제강은 입을 꾹 다물면서 참으라는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애는 제강을 강태공이나 관중처럼 아끼고 존경하였다. 제강의 행동과 표정에서 참으라는 뜻을 읽자 노애는 가까스로 큰숨을 들이키고는 창문군을 힐끗 쏘아보더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연거푸 술 석 잔을 목에 들이부은 노애는 영정의 이복동생인 성교에게 속삭였다.

"듣자하니 왕제께서는 조만간 병마를 이끌고 조나라를 치러 떠난다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쉴틈없이 전장을 누비셨으니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합니다. 도리어 초나라 출신의 공자들은 함양성에 남아 여자를 끼고 술이나 마시며 풍류에 빠져 있으니 말입니다."

성교는 비록 열여섯 소년이었지만 체격이 어른처럼 건장하고 당당하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홀로 앉아 줄곧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는 노애의 말에 더욱 울화가 치미는지 계속 술을 마셨다.

"왕태후마마께서는 공자께서 예의에 밝고 인의와 도덕이 고상하다 하시며 친아드님보다 더욱 아끼고 계십니다."

성교의 곁에 있던 장군 번우기(樊于期)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공자, 태사령(太史令)께서 말씀하시기를 금년에는 혜성이 네 차례 나타나므로 출병하면 절대로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애를 따라 한자리에 합석한 제강이 말을 거들었다.

"번장군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왕제께서는 금지옥엽의 몸이시고 더욱이 진나라의 희망이십니다. 절대로 몸을 보중하셔야 하옵니다."

제강은 고개를 돌려 번우기를 바라보았다.

"<시경>에 보면 뛰어나고 뛰어난 용장(勇將)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번장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강이 성교와 번우기에게 한창 찬사를 늘어놓고 있는데, 예쁘장한 가기 한 명이 무대에 올라가더니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엉아, 부엉아,

내 자식 잡아먹었으니,

내 집은 허물지 마라.

 

내 집은, 내 집은,

알뜰살뜰 가꾸어 왔는데,

우리 애가 불쌍하지 않니.

 

장마비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 캐다가,

창과 문을 엮었거늘,

이제 와서 네가 부수느냐.

 

손과 발이 다 닳도록,

차잎 끓여주고 띠풀 모아,

집 하나 덩그라니 지어놓으니,

네가 와서 차지하느냐.

 

내 날개짓 모지러지고,

내 꼬리 닳아빠지게 일했건만,

내 집은 네가 차지하고,

비바람에 나는 어디로 가니.

 

무대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노래는 <시경>'부엉이'라는 시로, 백성들이 그 내용을 조금씩 고쳐 부르고 있는 당대의 유행가였다. 이 노래의 유래는 이러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周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은 나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러던 중 주공은 형제인 무경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동해로 떠난다. 그 후 마침내 오해가 풀리자 주공은 이 시를 지어 성왕에게 보내 자신의 우국(憂國) 충정을 노래했다고 한다.

이런 구슬픈 노래는 연회에서 부르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노애는 의도적으로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도록 시켰다. 이 노래를 듣고 가장 감동하는 사람은 바로 왕제 성교였다. 그는 자신의 신세와 운명이 이 노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장군 번우기는 성교에게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진나라의 임금인 영정이 여불위와 주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영정은 진나라 왕족이 아닐 뿐더러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나라의 진정한 왕위 계승자는 바로 성교 자신이었다. 하지만 성교는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힘도 사람도 없었다.

노래가 끝나자 성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가슴에는 비통과 억울함이 가득차 있었다.

"부엉이가 누구이더냐? 집을 빼앗긴 사람은 누구이더냐?"

성교가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승로대를 빠져나가자 그 뒤를 번우기와 몇 명의 장군들이 쫓았다. 노애는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재빨리 성교를 따라가 그를 만류하며 가기에게 다른 노래를 부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성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감천궁을 떠났다.

"노애, 너는 왕제를 능멸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도다!"

좌중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창문군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우승상 창문군에게 쏠렸다. 창평군은 동생 창문군의 성격이 호방하고 불 같아 항상 걱정하고 있었는데 기어코 일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는 얼른 창문군의 옷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번씩이나 모욕을 당한 노애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창문군에게 소리쳤다.

"네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나를 능멸해! 오늘 너의 이빨을 뽑아버리고 혓바닥을 잘라버리겠다!"

창평군에게 끌려 연회를 빠져나가던 창문군이 이 소리에 몸을 획 돌렸다.

"하하하, 네가 감히? 잡기나 팔아먹던 네가 갑자기 작위를 받더니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는 줄 착각하고 있구만!"

창문군은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노애에 대한 경멸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뭐야? 너는 이 자리에서 살아돌아갈 생각을 말아라. 여봐라, 저 놈의 살갗을 당장에 벗기지 않고 무엇하느냐!"

노애의 호통에 수십 명의 시위병들이 창문군을 둘러쌌다. 창평군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얼른 뛰어와 노애에게 허리를 굽혔다.

"장신후 대인, 친제(親弟)가 뭘 모르고 대인께 죄를 범했습니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노애는 창평군이 비굴할 정도로 용서를 빌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네 놈들의 기를 꺾지 못한다면 천하의 노애가 아니로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먹은 노애가 시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제강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을 했다.

"대인, 참으십시오. 대업을 이루려면 왕실의 인척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옛말에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친다고 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강의 간곡한 충고에 노애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사이 창평군은 창문군을 데리고 재빨리 승로대를 벗어났다. 그 뒤를 따라 승상부 도총관과 연태자 단도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 저녁 승상부에서 여불위는 <여씨춘추> 초고본을 읽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쉽게 쓰여진 글이었다. 유시가 끝나갈 무렵, 시위가 급히 달려와 여불위에게 알렸다.

"승상 대인, 우승상 형제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여불위는 얼른 책을 덮고 서재로 자리를 옮겨 두 사람을 기다렸다. 먼저 문을 열고 우승상 창문군이 들어왔는데 그의 얼굴은 오후에 보았던 밝고 명랑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라 창평군도 이마와 눈썹을 찡그린 채 들어왔다.

"아니, 연회가 벌써 끝났소이까?"

여불위의 말에 창문군이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노애, 그 버러지 같은 놈! 승상 대인, 절대로 그 놈을 가만히 두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여불위는 창문군의 분노에 어느 정도 사태를 짐작했다.

일찍이 여불위는 노애의 방자한 태도와 음란한 행동을 이사에게 보고받은 바 있었다. 그는 노애를 높이 평가하지도 그렇다고 조심스럽게 대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시정잡배에 불과한 소인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창문군의 말을 들어보니 노애를 제거할 시점이 예상 외로 빨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승상 대인, 참으시오. 노애, 그 인간이 후의 작위를 받더니 방자하기 그지없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지만, 본래 위인됨이 용렬하고 천박하여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오. 제까짓것이 왕태후마마의 총애를 믿고 날뛰지만 제가 볼 때에는 사막의 누각에 불과하다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옛말에 하루의 수치를 참으면 백 일의 걱정을 던다고 하지 않았소?"

여불위와 창문군 형제가 담소하고 있는 중에 도총관과 연태자 단도 승상부로 돌아왔다. 서재로 달려와 합석한 두 사람은 감천궁에서 벌어진 연회의 정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단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십여 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문신후 대인이 진나라의 국정을 맡은 후 민심이 화평하고 병마가 강건하여 가히 천하의 맹주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장신후가 나타난 이후로 사람들은 '승상 대인은 떨어지는 유성이고 장신후는 승천하는 용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지요. 이런 이야기는 승상 대인께서도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실한 언사는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못한 법입니다. 너무 유념하지 마십시오."

여불위는 자신을 염려해 주는 단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도총관의 말은 여불위의 심사를 뒤흔들었다.

"승상 대인, 장신후가 무어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진나라는 진나라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면서 우승상 대인까지 욕을 보였습니다."

여불위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노애의 말은 결국 조나라 사람인 자신을 두고 하는 말 아닌가. 그사이 연회에 참석했던 대부장 왕관, 중대부 안설도 승상부로 달려왔다. 안설은 일전에 사마공이라는 현사가 여불위의 명성을 흠모하여 함양성에 왔는데 장신후의 사냥터에 잘못 들어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승상 대인, 이는 바로 장신후가 승상 대인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있다는 증거이옵니다."

그제서야 여불위는 노애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체면은 물론이고 조정의 기강이 엉망이 될 게 자명했다. 여불위를 가장 분노케 만든 사건은 사마공의 봉변이었다. 안설의 말에 따르면 사마공은 분명 승상부에 몸을 의탁하고자 진나라의 함양성에 들어왔는데 노애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마공을 첩자라고 몰아붙이면서 무참하게 두들겨 팼던 것이다. 이는 실상 사마공에 대한 폭행이 아니라 여불위를 겨냥해 그를 무시하고 도전하겠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여불위는 자신의 문객이나 가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용렬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여불위는 도저히 그대로 참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이제까지 힘들여 쌓아온 반석 같은 지위가 흔들리고 혁혁한 명성에 타격을 입을 위험이 있었다. 여불위는 안설에게 사마공의 행방을 알아내 보고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친히 왕태후를 찾아가 여러 가지 일을 따지고 확인하기로 결심하였다.

늦은 시각에 승상부를 떠난 여불위는 감천궁에 이르는 동안 주희를 만나는 것이 약간 망설여지기도 했다. 주희와 노애는 이미 뒤집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만일 여불위가 강압적으로 주희에게 노애와 자신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녀가 노애를 선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정 또한 왕태후의 요청이 있자 선뜻 노애를 장신후에 봉하고 많은 특권까지 내려주었다. 이로써 여불위는 그동안 자신의 힘의 근거였던 주희와 영정, 두 사람과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영정이 노애에게 많은 특권을 준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노애를 치기 위한 함정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후에 봉한걸까?'

감천궁으로 향하는 수레 안에서 여불위는 근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황을 생각하며 대책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수레가 감천궁에 도착하자 여불위는 궁위의 제지없이 곧바로 태후의 침소로 향했다. 왕태후 주희는 노애가 장신후에 봉해지자 곧바로 대정궁에서 감천궁으로 되돌아왔다. 여불위는 익숙한 걸음으로 은밀한 소롯길을 지나 월문에 당도했다.

"이랑, 어째서 이렇게 늦었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불위는 깜짝 놀랐다. 월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한 여인이 희미한 달빛 아래 나타난 여불위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여인은 추아였다. 추아는 여불위에게 자신의 부정이 탄로나자 어쩔 줄 몰라했다. 궁녀가 사사로이 궁중에서 정을 통한 사실이 발각되면 절대로 용서받지 못했다. 추아의 약점을 발견한 여불위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리고 분홍빛 저고리에 비취색 치마를 입은 추아는 달빛 아래서 더욱 예쁘고 귀여웠다.

"추아, 네 이년! 태후마마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고 계시건만 궁중에서 감히 남정네와 정을 통해!"

추아는 여불위의 호통에 벌벌 떨었다. 도저히 이 난국을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여불위가 이마의 주름살을 펴더니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몇 마디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용서해 주겠노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추아는 영리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여불위가 새로운 제의를 해 오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비의 생명은 승상 대인의 손안에 있습니다.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그래, 오늘 이 월문은 누가 시켜서 열어놓았느냐, 아니면 네가 스스로 했느냐?"

"태후마마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여불위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누가 들어갔다는 말이냐?"

"."

"그런데 어째서 문을 닫지 않았느냐?"

", 노비는....."

추아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자, 여불위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 노비는 낭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와 평생을 하겠다고 언약을......, 승상 대인, 제발......"

여불위는 어쩔 줄 몰라하는 추아에게 다시 물었다.

"장신후 나으리가 들어갔더냐?"

"그렇습니다. 맹서하건대 장신후 대인이십니다."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추아는 여불위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어오자 단호하게 말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들어가 확인하여 보십시오."

여불위는 추아의 다급한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들어가서 확인을 할 터이니 너는 그 낭군과 이곳에 있다가 무슨 일이 발생하면 즉시 나에게 알리도록 하거라. 일이 잘되면 너희 둘을 인정해 주겠노라."

여불위는 추아의 어깨를 토닥거린 다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주희의 침실 가까이 이르자 안에서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창가로 다가가 안을 보니 침실의 주렴 사이로 남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여불위는 자신의 체취가 배어 있는 침실에 다른 남자의 손길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질투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는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후마마, 나 오늘 완전히 낭패를 당했다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야."

노애가 왕태후 주희에게 어리광 섞인 짜증을 부렸다.

"에이, 바보! 하늘이 무너지지 않으니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그렇게 바보처럼 행동하면 신선이라도 어떻게 산꼭대기까지 올려줄 수 있겠어?"

주희가 노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거렸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

노애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째째하게 그러지 마."

"나 오늘 창문군에게 죄를 지었다오. 그는 조정의 대신인데, 더욱이 태후마마와 선왕의 은인인데."

"할 말이 있으면 속시원히 다 털어놔 보라니까."

"그 자식 창문군말야, 승상의 허리를 꽉 부여잡고 거들먹거리고 있잖아. 거기다가 여불위는 어떻고? 교활하고 음흉한데다, 맨날 깊은 곳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으니 말없는 어린마마와 다를 바가 없어.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노애의 말은 점점 욕설에 가까워졌다. 여불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았다.

"잘 들어. 이건 알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어린마마와 승상은 본래 한 핏줄이야. 그러니 진나라 강산이 영씨의 손에 있건 여씨의 손에 있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 그럴 수가?"

놀란 노애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후마마, 그러면 대정궁에 있는 우리 보배가 앉을 자리는......"

그 소리에 주희가 갑자기 화를 냈다.

"바보, 조용히 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얘기도 몰라? 벽장에도 귀가 있는 법이야. 영정은 걱정하지 마. 병이 많아 매일 골골하는데 얼마나 살겠어. 우리 보배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날은 멀지 않아. 설마 여씨에게 가겠어?"

여불위는 이마의 땀을 조심스레 훔쳤다. 한 차례 악몽을 꾼 사람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주희를 이용하여 대업을 이루고자 했던 일이나,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애를 궁중으로 끌어들인 일 모두가 후회스러웠다. 노애가 감천궁에 들어서자 자신은 주희라는 유력한 발판을 잃었고, 그 대신 노애라는 강력한 원수를 얻은 것이다. 마치 돌을 들어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 꼴이었다.

여불위는 자신의 오판을 탄식하며 다시 월문으로 돌아왔다. 그를 본 추아가 급히 달려와 입을 열었다.

"승상 대인, 장신후 나으리께서 곧 나오십니다. 빨리 떠나십시오."

그 말에 여불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의 낭군님은 왔다갔느냐?"

", 왔다가 바로 떠났습니다."

추아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 그 사람은 아직 이름을...... 말해주지......"

추아가 머뭇거리자 여불위가 다그쳤다.

"내가 말했지 않았느냐. 나를 잘 따르면 상을 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겠느냐!"

"승상 대인, , 그 사람은 이사라고 합니다."

"이사, 어느 이사를 말하느냐?"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바로 왕궁의 어전 시위를 맡고 있는 이사입니다."

추아의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는 똑똑하고 교활한 놈이지.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일개 궁녀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있을까?'

"승상 대인, 그를 아십니까?"

"허허허, 이번에 새로 장사에 오른 그를 모르겠느냐? 잘하면 이제 너도......"

여불위는 말을 하다가 문 안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에 움찔하였다.

"추아, 네 이년! 누구하고 재잘거리고 있는 게냐?"

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불위가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기자 추아는 총총걸음으로 노애에게 달려갔다.

", 아니옵니다. 궁아 언니가 잠깐 다녀갔습니다."

", 그래, 알았다. 빨리 길을 안내하거라."

추아는 허리를 숙인 채 노애의 뒤를 따라 월문을 지나 감천궁을 벗어났다. 여불위는 나무 뒤에서 노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시각에 함양궁의 복룡전(伏龍殿) 앞뜰에서는 영정이 청년 문사, 무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정은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늘 천기는 푸른 빛이 천 리를 달리는 기세야. <시경>에도 이런 기운을 두고 '마셔라, 마셔라, 밤새도록 마셔라. 그래도 취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했지. 오늘 저녁에 그 못된 노애는 주연을 베풀고 떠들썩하게 놀고 먹었겠지만 과인은 이곳에서 저 달을 벗삼아 마음껏 취하겠노라."

"마마, 무슨 일을 상의하시려고 신들을 부르셨사옵니까?"

성격이 불 같은 몽염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그는 노애의 일을 거론해서 이 기회에 나라를 좀먹는 역신을 단칼에 베어버려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과인은 그저 여러분을 초대하여 맘껏 달을 감상하고 싶었소. 오늘 밤만큼은 정사를 잊고 싶소. , , 오늘은 그저 달과 관련된 이야기나 느낌을 서로 얘기하는 게 어떻겠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영정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대체적으로 노애의 방자한 태도와 태후의 음란한 행위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 얼마나 고통스럽고 곤혹스러우면 달을 감상하며 정사를 잊으려고 하겠는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등승은 영정이 시무룩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먼저 이야기 한 가지를 들려드리겠사옵니다. 태행산 아래 반석촌이라는 마을에는 예부터 여우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해인가 중추절 밤이었습니다. 푸르른 보름달이 대지를 훤히 비추고 있었는데, 이날 늙은 여우가 어린 여우들을 소집하여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굴은 무지무지 깊은데 일 년 내내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누가 저 푸른 빛을 동굴 안으로 가지고 올 수 있겠느냐? 가지고 온다면 겨드랑이 암내를 선물로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모두들 등승을 비웃으며 소리쳤다.

"아니 겨드랑이 암내가 무슨 물건이길래 선물로 준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그러자 등승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여러분들이 여우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등승은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우의 겨드랑이 암내는 기묘한 물건입니다. 그건 적을 막을 때도 필요하지만, 수컷들에게는 암컷을 유혹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매력있는 물건이지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에 아주 대단한 보물처럼 여깁니다. 늙은 여우가 말을 마치자 아주 젊은 숫여우 한 마리가 앞으로 나오더니 '어르신의 겨드랑이 암내를 먼저 주시면 푸른 빛을 가지고 들어오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늙은 여우가 반신반의하는 사이에 숫여우는 늙은 여우의 겨드랑이에서 암내를 빼앗아 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잠시 후 동굴 밖에서 암여우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 여우는 들어오면서 '비켜, 비켜! 푸른 빛이 들어온다'고 외쳤습니다. 하하하, 바로 그 암여우의 이름이 '푸른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등승의 재치에 박수를 보냈지만 이사만은 몹시 화를 내었다.

"등시위장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몽염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는 정사를 논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등시위장은 조정의 일을 은근히 빗대어 이야기했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이사의 말뜻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사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옛날 진후(晉侯)에게 질병이 있어 진나라에 의원을 요청했습니다. 진나라의 명의가 도착하는 날, 진후는 꿈에서 두 아이를 만났습니다. 한 아이가 '명의가 왔으니 대책을 세우자'고 하자 다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너는 지방질에 숨어, 나는 가름판으로 도망갈게. 그러면 우리를 찾을 수 없을 거야' 하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진나라의 명의는 진후의 질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바로 <좌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수위학(二竪爲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 두 아이가 해를 끼친다는 이야기!"

몽염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수위학이 암시하는 뜻을 헤아리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이야기에 몽염은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영정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 조정에는 여우 두 마리가 겨드랑이 암내를 탐내고, 두 아이가 해를 끼치고 있사옵니다. 마마,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해 두시겠사옵니까? 이 자리에서 신 몽염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겠사옵니다. 어찌하여 노애를 장신후로 봉하셨사옵니까?"

그러자 등승이 얼른 몽염의 말을 받았다.

"그 일은 마마의 본심이 아닙니다. 태후마마께서 워낙 간절하게 간청을 하시어서......"

"틀렸다. 그건 과인의 뜻이야."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영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마시오."

이 말에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영정이 손을 들어 그들의 대화를 제지시켰다.

"이사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었으니 벌로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하라."

영정의 명에 따라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늙은 태감이 다급하게 달려와 영정 앞에 엎드렸다.

"늦은 밤에 어인 일이오?"

"여승상께서 마마의 알현을 요청하였사옵니다."

영정은 태감에게 여불위를 데려오라고 이른 다음 급히 청년 문사와 무사들을 서재로 들여보내고 이사와 단둘이 승상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여불위가 영정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불위는 그동안 영정 앞에서 보였던 중부의 위엄과 권위는 사라지고 다만 초조하고 무력한 모습뿐이었다.

"마마, 어인 일로 이곳에서 홀로 별들을 감상하고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그 특유의 공손하면서도 거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어찌 나홀로이겠습니까? 이장사도 여기 있지 않소?"

여불위는 그제서야 영정의 곁에 서 있는 이사를 보았다.

"노신이 눈이 어두워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장사도 방금 도착했나 보옵니다."

여불위는 이사가 감천궁에서 추아를 만나고 이곳으로 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사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감천궁은 생적의 소리로 시끌시끌한데, 이곳은 오히려 조용해서 좋사옵니다. 신이 수레를 타고 감천궁을 지나는데 은밀히 정랑을 만나려는 궁녀 하나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보기 좋은 광경이었사옵니다."

여불위의 말에 이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영정 또한 이사의 표정을 보고 그가 감천궁의 추아를 만나고 왔음을 짐작했다.

"이장사는 지금 과인의 문장을 평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를 불렀지요."

"문장을 평해주다니, 역시 이장사는 조정의 인재 중의 인재이옵니다."

여불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이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장사는 방금 전 과인에게 치국의 도리를 말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서 특히 '임금이 된 자는 마땅히 법에 의거해야 한다'는 구절과 '임금이 구()하지 않으면 조정이 부패하고, 신하가 법을 따르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라고 한 구절이 마음에 듭니다."

"신은 아둔하여 잘은 모르겠으나, 임금의 도리는 마땅히 수제치평(修齊治平)에 의거하여 덕정(德政)을 쌓고 예악(禮樂)을 일으키며 시서(詩書)를 선양하고 다스리지 않는 듯 다스려야지, 절대로 엄한 형벌과 법치는 불가하다고......"

영정이 갑자기 여불위의 말을 끊었다.

"무위이치(無爲而治)라니, 어떻게 임금이 된 자로서 다스리지 않는 듯 다스릴 수가 있습니까? 나라의 권세는 임금이 홀로 누려야 부강해진다고 봅니다. 채찍이 둘이면 말을 부릴 수 없고, 더불어 금()을 타면 가락을 이룰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권세를 나누어 갖고서는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정의 말에 여불위는 흠칫 놀랐지만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저는 명가(名家)의 학설이나 경전에서 그런 말씀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 학설은?"

그 말에 영정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러실테지요. 이 학설은 한나라의 공자인 한비의 말입니다. 당연히 그는 명가 축에 끼지 않으니 모르시겠지요."

여불위는 영정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어린 임금이 이렇게 독단이 심하니 장차 나라의 권세를 잡으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겠구나.'

영정은 여불위가 생각에 잠겨 묵묵히 서 있자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승상 대인, 이 늦은 밤에는 무슨 일로 오시었습니까?"

", 먼저 드릴 말씀은 신이 근래에 백여 명의 문객들을 모아 천하에 널리 흩어져 있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을 하나로 묶어 대왕마마께 올릴 작정이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말씀은, 신이 알기에 장신후와 왕제마마 사이에 반목이 심하다고 하는데 왕제마마의 출정을 잠시만 뒤로 늦추었으면 하옵니다."

"승상 대인께서 제자백가의 말을 하나로 묶는다니 참으로 경하할 일이군요. 하지만 제자의 말이라 해도 모두 마땅한 도리는 아닙니다. 우리 진나라는 어찌되었든 무소유제(武昭遺制)를 준수하고 상앙의 법제를 따르는데 이보다 앞서는 말이나 학설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말씀하신 장신후의 일은 승상께서 어떤 대책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여불위는 자신의 계획을 가볍게 생각하는 영정의 속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기분이 언짢았다. 영정은 이미 여불위가 편집한 <여씨춘추>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여씨춘추>에는 일가천하(一家天下;임금이 나라를 혼자 다스리는 일)를 반대하고,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찬성하며, 겸유묵(兼儒墨)이라 해서 유가와 묵가를 겸병하고, 합법명(合法名)이라 하여 법가와 명가를 합해서 결국은 임금의 독정(獨政)을 막아내야 한다는 내용과, 어진 사람이 나오면 임금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선양(禪讓)은 물론 보위를 세습하는 데 따른 폐단을 설명한 문장도 들어 있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영정은 이런 내용의 <여씨춘추>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설사 여불위가 바친다 해도 어람(御覽)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불위는 영정이 <여씨춘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습에 적지않게 실망했다.

"신이 알기에 성교 공자와 번우기 장군의 언행에는 모반의 흔적이 엿보이고 있사옵니다. 또한 장신후의 독설과 음행은 어사대부를 시켜 그 증거를 수집하고 있지요."

영정은 여불위의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교의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만, 아침에 바뀌고 저녁에 웃는 변덕을 지닌 그가 어떻게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또한 장신후는 이보다 더욱 미천하고 혼음(昏陰)하여 누가 그를 존경하겠습니까? 우려할 일이 아니니 승상께서 더 이상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에 여불위의 얼굴빛이 변했다. 영정이 자신의 뜻을 따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을 두둔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마마, 이 몸은 비록 승상의 자리에 있지만 주변에 적이 많고 몸도 늙어 더 이상 국정을 맡아 처리하기가 힘이 드옵니다. 굽어살피소서."

승상 자리를 내놓겠다는 여불위의 말은 영정의 허를 찌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영정은 여불위를 힐끗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그동안 승상께서 십여 년이 넘게 국사를 맡아 노심초사하시느나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 사실은 천하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과인은 승상을 존경하며 중부로서의 공경 또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과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볼 수가 없으니 승상께서 계속 힘을 써 주십시요."

영정의 간곡한 부탁에 여불위는 다시 기운이 솟았다. 주희라는 후원자는 잃었지만 아직까지 영정의 신임과 기대는 살아 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밝게 하였다.

여불위가 사라지자 영정은 자신의 심복들을 다시 불렀다.

"대왕마마, 비가 오기 전에 먼저 우산을 준비하소서. 왕제와 장신후에게 모반할 징후가 있으면 당장에 뿌리를 뽑으시옵소서."

교위(校尉) 왕전이 주청하자 몽염이 그 뒤를 이어 말했다.

"저에게 일 만의 군사를 내어주시면 반역도들을 생포해 오겠사옵니다."

"참으시오. 과인은 아직 친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소. 그러니 이럴 때는 오히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두 마리가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소. 하하하!"

영정이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감천궁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벌어지는 연회는 얼마나 시끄럽소. 과인은 여기에서 조용히 아름다운 달이나 감상하고 싶소이다. 등와, 등와!"

영정이 갑자기 등승의 옛이름을 불렀다. 등승은 그가 무척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등와'는 영정이 기분 좋거나 등승을 남다르게 느낄 때 이따금씩 부르는 이름이었다. 영정이 가까이 다가온 등승의 귀에 무어라 속닥거리자 등승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제쳤다. 성질 급한 몽염은 답답한지 귀를 마구 후벼댔다. 번개처럼 어디론가 달려갔던 등승이 조금 뒤에 여자들이 쓰는 지분통과 치마저고리를 가슴에 가득 안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일인지 궁금해 했다.

"달과 관련된 이야기는 재미없으니 그만 그치고 승부 겨루기를 합시다."

영정이 승부 겨루기를 제안하자 모두들 겨루기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겨룬다는 말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오늘의 승부 겨루기는 수수께끼놀이와 말찾기요."

"? 마마, 그건 머리를 써야하는 게 아닙니까?"

몽염이 실망한 듯 영정에게 물었다. /는 말타기나 활쏘기, 씨름 같은 겨루기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수수께끼놀이나 말찾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몽의가 영정의 기분을 깨지 않으려는 듯 몽염에게 말했다.

"바위를 들어 올리고 멧돼지를 잡는 일은 필부의 용맹에 불과하지. 명장이라면 천문과 지리에도 통달해야 한다. 일찍이 진장공(秦庄公)께서도 말맞추기로 진()에게 승리를 얻은 적이 있었어. 마마께서는 우리에게 미리 그런 훈련을 시키시려는 거야."

영정이 웃으며 몽염과 몽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몽염이 머리를 긁적이며 씨익 웃었다.

"오늘 밤에는 등시위장이 벌을 주관하도록 하오. , 말찾기놀이는 옆 사람에게 문제를 내고 알아맞추는 식이오. 알아맞추면 영밀주(密酒) 한 잔이고 못 알아맞추면 오늘은 열주(烈酒) 대신에 등시위장이 가지고 온 궁녀의 치마를 입고 비녀를 꽂은 다음 지분을 얼굴에 바르고 게걸음을 걸으며 닭울음 소리를 내는 거요. 어떻소?"

"하하하,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몽염만은 여전히 불안한지 바로 곁에 앉은 풍거병(馮去病)을 힐끗 쳐다보았다. 풍거병은 한나라 상당군의 군수였던 풍정(馮亭)의 적자였다. 풍정은 한나라에 등을 돌리고 상당군을 진나라에 바친 후 조정 대신이 되었고, 아들 풍거병은 학문이 깊은 아버지를 따라 각종 전적을 정리하고 국가의 문서를 작성하면서 그 벼슬이 중승(中丞)에 이르렀다.

"풍중승! 풍증승은 학문이 깊고 뛰어나니 조금만 봐주시오. 말찾기 문제를 좀 쉽게 내야지 나 같은 사람도 맞출 수 있지 않겠소."

몽염이 풍거병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말에 풍거병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인재인정재(人在人情在)', <시경>에 있는 구절에서 찾으시오."

영정이 먼저 말찾기 문제를 시작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몽의가 얼른 말을 받았다.

"사람이 있고, 사람의 정이 있나니...... , 그렇다면 저는 '서불상호(逝不相好)', 떠나가면 가슴이 아프다. 어떻습니까?"

몽의는 재빨리 등승에게서 밀주를 한 잔 받으며 풍거병을 보고 말했다.

"'사가견월양면원(辭家見月兩面圓)', 집을 떠나며 달을 보니 두 얼굴이 둥글어라. 답은 <유서(儒書)>에서 찾으시오."

"'망망연거지(望望然去之)', 그윽히 바라보며 그곳을 떠나다. <맹자>에 있는 말입니다."

등승에게 밀주를 받은 풍거병이 이번에는 몽염에게 고개를 돌렸다.

"몽장군 차례입니다."

", 풍중승 같은 문사가 옆에 있으니 알고 있는 구절도 떠오르지 않소이다."

몽염이 호랑이 같은 눈을 찡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문제는 너무도 평이하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백성들이 쓰는 말로 내겠습니다. '누구도 그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노소(老少)를 속이지 않고 빈천(貧賤)을 가리지 않는다. 누가 그것의 머리를 속이면 피 아니면 껍질을 바쳐야 한다.' 한 글자로 대답해 주십시오."

"?"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생각에 골몰하는 몽염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영정이 웃었다. 몽염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언뜻 몽의가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 생각났다! ()! 맞소?"

이 말에 풍거병이 조용히 웃었다. 몽염은 등승에게서 밀주를 가득 받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 그럼 내가 낼 차례인가? '발은 금덩이굴에 걸려 있고 머리는 봉황의 품 속에 안기고 다리는 용상에 걸치고 손은 계수나무를 들고 있다.' 하하하, 쉬운 문제이지요, , 이장사 차례요!"

그때 이사는 추아를 생각하느라 몽염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를 못했다. 몽염은 이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자 탁자를 치며 웃어댔다. 벌칙을 주관하는 등승이 두 번이나 재촉해도 이사는 알아내지 못했다. 영정이 이사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이미 그럴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등승이 이미 이사에게 벌칙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꼼짝없이 벌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등승이 이사에게 궁녀의 옷을 입히고 얼굴에 분을 바르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장내로 나와 게걸음을 걸으며 닭울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몽염이 가장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런 꼴을 당하리라 여겼는데 뜻밖에도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이 유창한 이사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영정과 그의 심복들이 한참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여불위를 전송하러 나갔던 태감이 다시 돌아왔다.

"왕태후마마와 장신후마마께서 다시 옹성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하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등승이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대왕마마, 제가 쫓아가 잡아오겠사옵니다. 임금을 기만한 죄는 반드시 다스려야 하옵니다."

몽염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영정의 시선이 이사에게 쏠렸다.

"마마, 조개와 황새가 다투면 그 이득은 어부에게 돌아가옵니다. 조용히 지켜보시는 게 상책이라 사료되옵니다."

다음날 영정은 후원을 산책하다 처마 밑에서 짹짹거리는 참새떼를 발견하였다. 참새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날아올랐다 앉았다 정신없었다. 영정은 조용히 나무 뒤에서 참새들을 구경하였다. 크고 작은 30여 마리의 참새들은 지붕 위에 앉아 부리를 서로 부비기도 하고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 하늘로 치솟기도 하였다. 그때 영정이 조그만 돌 하나를 주워 그중 제일 몸집이 큰 회색 참새에게 던지자 참새들은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에 놀라 모두 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영정은 나라를 좀먹는 도적들도 참새들처럼 주모자만 잡아들이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정이 후원을 거닐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 함양성의 동쪽 교외(郊外)에서는 왕제 성교가 출정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난 성교는 갑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보검을 찬 채 검정색 준마를 타고 언덕에 올라 함양성을 굽어보았다. 투구 아래에서 밝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출정을 준비 중인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진(方陣)을 구성하고 출정을 서두르는 병사들을 점검하였다. 진나라의 군대편제는 일백 명을 단위로 한 개의 곡형진(曲形陣)이나 방진(方陣)을 형성하였다. 곡형진은 기병(騎兵), 전차(戰車), 보졸(步卒), 사졸(射卒)이 혼성된 편성을 말한다.

이때 출전 부대의 선봉장인 번우기가 말을 타고 급히 언덕으로 올라왔다.

"공자, 10만 병사에서 3만이 빠졌습니다!"

"3?"

성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관례도 치르지 않은 동생을 억지로 출정시키고 왕을 이을 혈통도 아닌 거짓 임금이 조서를 내려 출사일(出師日)도 정해주지 않으며 친히 교제(郊祭)를 올리고 전송하던 관례도 없어지고......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더욱이 처음에는 15만 병력을 내리고는 10만으로 줄였다가 이제 와서 다시 7만으로 깎다니!"

그러자 번우기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공자, 묘 앞에 가시나무가 자라면 도끼로 잘라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교가 씨근덕거리는 번우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번장군?"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번우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성교의 심복이나 참모가 너무나도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 혼자의 힘으로 성교의 운명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자, 우리는 지금 진퇴양난에 빠져 있습니다. 출사를 하여 조나라와 싸운다 해도 적군은 많고 우리 병력은 적으니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명령을 거부하고 군대를 돌리면 곧바로 역모로 몰려 백성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공자, 돌아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전장에서 죽는 게 떳떳합니다. 사내대장부라면 말발굽 아래 쓰러져 가는 주검이 된다 할지라도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옳은 말씀이오."

성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부는 한세상 살면서 구차하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떳떳하게 불길로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하지요."

번우기는 성교가 병법의 하책을 선택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력하나마 공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비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20일 후 성교는 둔류(屯留 ; 섬서성 독장하)에 병마를 주둔시키고 조나라와 전쟁을 치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응하는 조나라의 반격에 맞서 성교의 군대는 이미 절반을 상실하였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땅바닥에 엎어져 잠들었고 초병들은 비록 일어섰다 할지라도 제 몸 하나 가누지를 못했다. 그런 와중에서 중군(中軍)의 군막에서는 성교가 마지막 결전을 선택하고 있었다.

"번장군,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면 후방 백여 리에 지원부대가 뒤따르고 있다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도 우리에게 보내지 않고 있소. 상황이 다급하므로 내가 달려가서 직접 구원을 요청할 테니 이곳의 지휘는 번장군이 맡아주시오."

성교는 몹시 초췌해 있었지만 두 눈동자만은 여전히 빛났다. 그는 번우기의 승낙을 기다렸다.

"공자!"

번우기는 얼굴이 샛노랗게 떠버린 성교의 얼굴을 바라보다 저도모르게 한숨을 지었다. 성교는 비록 대장군의 신분으로 출전했지만 이제 겨우 열여섯의 소년이었다. 번우기의 아들도 성교보다 나이가 많았다. 번우기는 성교를 보면서 안타깝게 말했다.

"공자, 이제 기대를 버리십시오. 지금 영정은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라의 힘을 빌려 공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7만 병력은 오합지졸이지만 조나라의 20만 대군은 정예 중의 정예로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우리는 둔류에서 겨우 적을 막아냈지만 조나라는 이미 포위망을 구축하고 내일이면 총공세를 펼칠 것입니다. 이제 빠져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원군이 뒤에......"

"공자, 그건 원군이 아니라 감군(監軍)입니다. 우리를 감시하려는 군대입니다. 만일 원군이라면 부르지 않아도 마땅히 달려와야 할 것입니다."

"영정이 미워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7만의 죄없는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제거하려 들다니?"

성교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영정은 교활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는 교묘하게 남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공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7만 병력을 전장에 내보냈습니다. 설사 70만이 죽어가더라도 보낼 위인입니다."

성교는 번우기의 말을 들으며 길게 탄식했다.

"그럼 번장군의 뜻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전군(全軍)이 조나라에 투항하여 그 힘을 빌려 영정을 토벌해서 기강을 바로 세우는 길이고, 다음은 공자께서 조나라와 화약을 맺고 전군을 둔류에 주둔시켜 이곳을 기반으로 병력을 모으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되오. 첫번째는 조국을 배신하고 백성을 저버리는 일이라 할 수가 없소. 어떻게 조상의 능묘에 얼굴을 들 수 있겠소. 두번째는 정세를 보건대 이미 성공할 수 없는 일이오."

성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와 인을 굳게 지키는 대장부였다. 그는 번우기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신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번우기는 성교를 보며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보고합니다. 공자!"

이때 밖에서 청년 군관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성교가 후방에 있는 병력에 구원을 요청하러 보낸 전령이었다.

"공자께서 보낸 친서를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습니다."

성교는 그 말에 그만 눈물을 떨구었다. 번우기가 성교에게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였다.

"기병하십시오!"

성교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는 조나라와 강화한다. 그리고 원군조차 보내주지 않는 포악한 영정과 여불위를 다스리기 위해 함양을 공격한다!"

성교의 결정이 내려지자 간자가 급히 조나라 진영으로 달려가고 격문이 사방에 뿌려졌다. 성교의 병력을 뛰에서 쫓고 있던 감군은 곧바로 이를 반역이라 규정짓고 전투를 준비했다. 양군이 충돌하자 조나라 군대는 조용히 물러나 사태를 지켜보았다.

감군과 성교의 군대는 둔류를 중심으로 하루 동안에도 수차례 격돌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에 지친 성교의 군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감군에게 무참히 패배하였다. 흩어진 성교의 병사들은 도망가고 숨고 투항하였다.

성교는 대세가 기울어지자 결국 칼을 품고 자살하였다.

 

 

9. 영정, 여불위, 노애의 승부 겨루기

 

여불위는 성교가 자살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영정의 주도면밀한 계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영정을 견제하고 노애와 주희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노애는 주희를 끌어안고 다시 옹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영정은 이제 친정을 할 수 있는 관례길일(冠禮吉日)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불위는 점점 자신을 위협해 오는 두 세력에 대처할 방도를 찾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심했다. 혼자 둘을 상대하기보다는 영정을 도와 우선 노애를 제거하고 다음에 주희를 묶어두는 계책도 생각했다. 아니면 상대를 바꾸어 주희를 앞세워서 영정의 관례를 계속 미루면서 승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의 기반을 더욱 강화하는 방법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계획들이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영정은 이제 옛날의 열세 살 꼬마가 아니었다. 관례를 치러야 할 스무 살 청년이 된 것이다. 여불위는 혈기왕성하고 결단력 있었던 지난날에 진작 자신의 목적을 결행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점점 영정이 무서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불위는 수년 전부터 편집해 온 <여씨춘추>를 통해 자신의 이상과 야망을 확인하고 권력과 영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날 아침 조회를 마치고 승상부로 돌아온 여불위는 몇 명의 심복들을 불러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 전날 밤에 그는 노애가 보낸 특사를 맞이했는데 특사를 통해 노애는 지난날 감천궁에서 무례하고 방자하게 행동한 자신의 추태를 사과하고 아울러 함께 힘을 합쳐 영정이 친정을 하지 못하게 막자고 제의해 왔다. 여불위는 노애의 제의를 심복들에게 설명했다.

먼저 우승상 창평군이 안색을 바꾸며 반대를 표시했다.

"저는 결코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반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의 국적(國賊)은 바로 노애입니다. 그는 사사로이 병력을 양성하고 궁 내에서 음사를 자행하며 임금을 속이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무를 갉아 먹는 좀벌레가 있으면 반드시 잡아죽여야 그 나무를 살릴 수가 있습니다. 노애는 나라를 갉아먹는 좀벌레입니다."

그러자 대부장 왕관이 나섰다.

"<노자>에 이르기를 '곧음은 굽은 것처럼 하고 기교스러움은 고졸하게 하며 언변은 어눌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린마마는 겉으로 활달하고 트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교활하고 냉혹합니다. 그런 한편 노애는 군공도 없이 후의 작위를 받아 민심을 잃었고 또한 언젠가는 틀림없이 죄를 짓지 않고도 스스로 죽임을 당할 위인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무서운 사람은 어린마마입니다. 만일 어린마마가 권세를 장악하게 된다면 우리 같은 신하는 설 땅을 잃고 말 것입니다. 옛말에 '천하는 바야흐로 고통을 이겨낼 수 없을 정도가 되리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앞으로 벌어질 일이 바로 그렇습니다."

왕관의 생각은 여불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창평군과 왕관의 의견을 두둔했다.

'왕관의 말이 옳아. 임금이 성탕(成湯), 문무(文武)와 같으면 천하가 태평하고 하걸, 은주와 같으면 천하는 대란에 빠져들겠지. 노애는 비록 지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지만 위인됨이 용렬하고 방자하여 패망이 멀지 않았어. 문제는 영정이야. 내가 중부이면 무엇해? 그는 임금이고 나는 신하인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에게 인의를 설득시켜 성현(聖賢)의 거동을 본받게 하고 천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것뿐.'

여불위는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심호흡을 하였다. 여불위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두 가지 의견을 놓고 떠들던 사람들 또한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밖에서 도총관이 들어왔다.

"승상 대인, 이장사가 찾아왔습니다."

여불위는 이사라는 이름을 듣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이사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사라고? 약속을 하루아침에 번복하는 소인배가 무슨 낯짝에 있어 나를 찾아와!"

여불위가 소리를 빽 지르자 도총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마마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오늘은 피곤하니 할 말이 있으면 도총관, 자네한테 하라고 이르게."

여불위는 심사가 몹시 뒤틀렸다. 임금이 보낸 사절을 만나지 않는 것은 죽을 죄에 해당되는 일이지만 지금 여불위의 마음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도총관은 여불위의 말에 따라 홀로 이사를 만나러 나갔다.

잠시 후 도총관이 돌아왔다.

"장신후 노애가 성교의 모반을 도왔다는 증거를 찾아 그 죄상을 밝히라는 내용의 성지가 내렸습니다. 대왕마마께서는 승상께 그 일을 맡기신다고 하셨답니다."

성교가 둔류에서 자살한 이후 조정에서는 이 일을 모반이라 규정짓고 그 일당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이 말에 창평군이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여불위는 노애를 제거하라는 영정의 성지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 칼을 빌려 적을 치겠다는 심사로군."

한편 옹성에서 주희와 노애를 염탐하던 추아는 마침내 노애에게 들키고 말았다. 평소 추아의 행동을 의심하고 있던 노애는 증거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태후와 은밀하게 얘기를 나누는 척 하면서 문틈에서 이를 엿듣던 추아를 잡아내었다. 추아는 꼼짝없이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 한 달 동안 그녀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추아는 공포와 고통과 처절한 인내가 필요한 세계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피가 마르고 몸이 뒤틀리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녀를 지탱시킨 유일한 힘은 사랑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한발짝씩 가까이 다가왔지만 추아는 결코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사의 힘과 능력을 믿었다. 그는 임금의 측근이며 장사라는 벼슬에 올라 있었다. 만일 이사가 자신이 이렇게 견딜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곧바로 달려와 구출해 주리라 굳게 믿었다. 또한 추아는 여불위가 그녀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 주겠다고 한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사와 여불위는 기적의 주인공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녀는 지하방에서 온갖 고문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런 기적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노애는 매일 저녁 한 차례씩 찾아와 그녀를 고문했다. 단지 때리고 윽박지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몸까지 능욕했다. 그녀는 부끄럽고 억울하여 마구 소리치고 몸부림쳤다. 추아의 울부짖는 소리는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아침 저녁으로 밥을 날라다 주는 궁아가 추아를 달래고 얼르고 어루만지며 비밀을 캐려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밀실에 갇혀 있는 동안 추아의 몸과 마음은 점점 황폐해져만 갔다.

왕태후의 처소에서 주희와 노애는 곧 닥쳐올 영정의 관례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노애는 가슴을 치며 주희에게 관례를 일 년만 뒤로 미루어 달라고 애원했다. 자신의 기반을 튼튼하게 세우는 데 그 정도의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한참 심각하게 의논을 하고 있을 때 궁아가 들어왔다.

"추아가 이제는 완전히 미쳐 버렸사옵니다."

노애는 당장 추아를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잠시 후, 추아가 손발이 묶인 채 내전 마당에 대령하자 주희는 괴물처럼 변한 그녀의 모습에 너무나도 놀랐다. 달덩이처럼 예뻤던 지난날의 모습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추아에게 소리쳤다.

"네 이년! 네가 아무리 미쳐 버리거나 설사 귀신이 되더라도 나는 네 입에서 정을 통한 사내가 누구인지 밝혀내고 말겠다. 그 놈이 누구이더냐?"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추아가 가까스로 머리를 들고 노애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얼굴에서 두 눈조차 제대로 떠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노애의 시퍼런 얼굴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음은 괴기스럽기조차 했다. 그 모습에 내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몸을 움찔하였다. 노애는 그런 모습에 더욱 화가 나 다시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심문했지만 추아는 노애의 협박에는 전혀 아랑곳없이 아기처럼 밝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생명력을 동원해 웃음을 지어보이는 듯했다.

'독한 년!'

노애는 하는 수 없이 표정을 바꾸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 추아야 말해 보거라. 그럼 너를 그 사람에게 보내주마."

추아는 그 말을 듣자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녀의 웃음은 어떠한 압력과 회유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눈빛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누구냐고? 그는 죽었어. 나도 곧 그를 따라 죽을거야. 너희들 모두를 끌고 죽을거야. 이 궁전이 무너지라고 저주할거야!"

"네 이년! 헛소리를 하면 목을 베겠다!"

그러나 추아는 노애의 협박에 개의치 않고 더욱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

"그는 죽었어!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너희들 모두를 끌고 죽을거야. 이 궁전이 무너지라고 저주할거야!"

주희는 추아의 저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귀를 막아 버렸다. 노애가 이를 갈며 추아에게 달려들더니 그녀의 목을 움켜잡고 바닥에 세차게 내동댕이쳤다. 그 순간 추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초췌하고 참혹했던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추아가 엉금엉금 기며 다가오자 노애는 그녀의 눈빛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내 낭군이 누구냐고? 똑바로 들어. 이사라고 한다. 대왕마마의 곁에서 장사를 맡고 있는 이사라고! 조만간 그가 이곳으로 쳐들어와 너희들의 목을 벨거야. 쥐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도륙을 낼 것이다!"

추아의 말은 주희와 노애, 두 사람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사는 바로 주희와 노애가 두려워 하는 영정의 측근이었다. 노애가 놀라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바닥에서 일어난 추아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노애는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 했지만 잘 뽑히지가 않았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는지 추아가 마구 달려들자 노애는 아무런 대항도 못하고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아악!"

추아가 최후의 발악을 하자 주희는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내전 시위들이 뛰어들어와 추아를 붙잡았다. 추아는 계속 발광하며 두 사람을 저주하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노애가 소리쳤다.

"저 년을 후원에다 생매장시켜라!"

추아가 밖으로 끌려나가자 노애는 식은땀을 흘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뭐야, 사내대장부가 도망이나 다니구!"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주희가 노애를 비웃었다.

"큰일났군!"

노애가 이마에 주름살을 지었다.

"영정과 이사의 손에 내 목이 달아날거야. 우리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이를 어쩌지?"

추아의 정체를 알고 난 주희는 얼마 전 궁을 다녀갔던 초나라 분갑장수가 이사였음을 깨달았다. 그가 이사임에 틀림없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태후마마, 달아납시다. 몰래 달아나면 되잖아?"

노애가 생각만 해도 겁이 나는지 덜덜 떨었다.

"가만히 있어. <시경>에 보면 '떨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겁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구절이 있어. 그렇게 당황하고 위축돼서 무얼 하겠다는 거야!"

주희의 질책에 노애는 그제서야 겁부터 낸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주희는 그런 노애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태후마마, 이제 우리 두 사람의 비밀이 이사에게 모두 들통이 났으니 우리가 먼저 영정을 공격합시다."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노애가 주희에게 제의했다.

"어찌 그렇게 생각이 짧아? 아무런 생각 없이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대업은 커녕 집안조차 지키기가 어려운 법. 내가 늘 경고했지, 벽장에도 귀가 있으니 조심하라구.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어. 아직도 기억 못 해?"

주희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애를 밀실로 끌고 들어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어느 날 연태자 단은 여 승상부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우선 여불위와 맺은 밀약에 대해 검토했다. 여불위는 단에게 연나라가 진나라에 대항하는 열국들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진나라는 여불위가 있는 동안에 연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며 연나라 국왕의 지위를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단은 여불위의 정치적 지위가 염려되었다. 밀약이 지켜지려면 우선 여불위의 세력 기반이 든든해야 하는데 노애와 영정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해 여불위와 다투고 있는 형편이었다. 만일 여불위가 이들에게 밀려나기라도 한다면 단은 언제 연나라로 돌아갈지 기약할 수 없었다.

자시가 넘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으스스한 기운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단은 서재에서 나와 뜰을 거닐었다. 극성스런 벌레울음 소리에 묻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듯 말듯 바람을 타고 단의 귀에 들려왔다. 뜰의 한구석에서 사람 그림자인 듯한 것이 어른거리자 단은 재빨리 그쪽으로 걸어갔다. 나무 사이에 놓여 있는 바위가 달빛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검은 그림자는 작은 나무로 바람에 흔들려 마치 사람의 움직임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단은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공자, 공자, 가지 마십시오. 나 좀 구해 주십시오!"

키 작은 나무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단이 달려가 보니 나무 뒤에서 피투성이가 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공자, 지난날의 교분을 생각하여 구해 주십시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공자, 번우기입니다.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돌아 왔습니다."

"아니?"

단은 얼른 손바닥으로 번우기의 입을 막았다.

"큰 소리 내지 마시오. 지금 도성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번장군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여서 왔습니다. 우리 7만 병력은 하룻만에 모두 무너졌습니다. 나만 겨우 살아남았지요. , 하늘은 어찌도 이렇게 가혹합니까?"

"우리 인간이 하늘의 이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장군은 장차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이제 어디 갈 데도 없습니다. 차라리 몰래 궁으로 들어가 영정의 목을 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안 되오! 절대로 안 되오!"

단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반대했다.

"함양궁에는 왕전과 등승 같은 무예에 뛰어난 청년 군관이 여럿 있소. 혼자의 몸으로는 그들의 용맹을 당해낼 수가 없소이다. 헛되게 목숨만 잃고 말아요."

"그럼, 공자께서 저에게 살 길을 안내해 주십시오."

번우기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대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단은 잠시 궁리를 한 끝에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옛말에 '푸른산이 그대로 있으면 단풍이 들지 않을 걱정은 없다'고 했소. 오늘 오경에 우리 연나라 화물 수레가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때 번장군은 하인으로 변장해 성문을 빠져나가시오. 일단 호랑이굴을 벗어난 뒤에 후일을 기약하시지요."

"알겠습니다, 공자!"

번우기는 단의 손을 붙잡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공자, 목숨을 구해준 은혜,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번우기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간단히 요기를 마친 번우기는 오경이 되자 하인으로 변장하고 무사히 함양성을 빠져나갔다.

한편 주희와 노애는 추아가 죽는 순간까지 애타게 부른 이사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노애는 매일 군영에 나가 영정의 공격을 막을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노애는 군영에서 급히 대정궁으로 돌아왔다. 노애를 만난 주희가 입을 비쭉이며 투덜거렸다.

"이 태평한 사람아, 매일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며 놀고 있어?"

노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장신후 노애가 얼마나 철저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두고보라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주희는 궁녀에게 음식을 준비토록 지시하고 노애와 함께 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탁에는 벌써 온갖 음식과 술이 가득했다. 그제서야 노애는 주희에게 자신이 준비 중인 계책을 설명하면서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태후마마, 대왕마마께서 왕림하셨사옵니다."

주희와 노애가 한참 밀담을 나누고 있는데 영정이 대정궁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아이가 갑자기 이곳에는 왜 나타났지? 우리의 비밀을 추궁하러 오는 게 아닐까?"

주희가 노애에게 말했다. 노애 또한 긴장이 되는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혹시 추아의 일을 알고 찾아오지는 않았을까?"

노애는 그렇지는 않을 거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가 없어."

주희는 영정의 돌발적인 출현에 가슴이 써늘해져 왔다. 그녀는 영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영정이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감도 그만큼 커져 갔다.

"정말 이건 예기치 않은 습격이야. 태후마마의 측근들은 영정 하나만도 못하니 있으나마나한 것들뿐이라구."

노애가 괜한 주희를 붙들고 화를 냈다. 그러자 주희는 한심하다는 듯 노애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오는 자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 착한 사람은 오지 않는다는 말도 몰라. 얼른 가서 준비하지 않고 뭘 해? 옹성의 대정궁은 함양성의 감천궁과는 다르다구. 여기서는 우리 두 사람 마음대로잖아. 이번에 영정을 다시 보내준다면 다 잡은 호랑이를 숲으로 보내고 그 숲에 맨손으로 다시 들어가는 꼴을 당하게 되는 거라구. 알았어?"

노애는 그제서야 주희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주희는 대청을 나와 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영정이 몇 명 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사와 등승을 이끌고 내전으로 들어왔다. 주희는 원한이 가득찬 눈빛으로 영정을 쏘아봤다. 그러나 영정은 태연하게 행동했다. 영정은 철갑 투구에 보라색 장포(長袍)를 걸치고 표피화(豹皮靴)에 허리에는 보검을 찼다. 그의 눈매는 맑고 빛이 났으며 허우대가 멀쑥하고 건장해 보였다.

"많이 컸구나!"

영정은 아무 대답 없이 내전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희는 이처럼 냉담한 영정을 본 적이 없었다. 비밀을 캐내려는 것 같은 영정의 눈빛에 그녀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린마마는 왕법에 의해 규정을 제대로 지켜야지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이렇게 갑자기 옹성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규정? 사람들의 비웃음? 하하하, 좋습니다. 어마마마."

영정이 차갑게 웃으며 '어마마마'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 말투에는 비웃음과 멸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주희는 듣기 거북해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과인이 왜 왔는지 어마마마께서는 진정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백서에 자세히 적혀 있을텐데요?"

"!"

그제서야 주희는 영정이 관례 때문에 온 것임을 알았다.

"관례를 말하는군. 그 일이라면 일 년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어린마마는 아직 국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게다가 병도 깊어 고통이 심하지 않습니까? 그런 몸으로 보위에 오르시면 더욱 괴로우실텐데요."

"!"

영정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이라면 이미 수차례나 들었습니다. 일 년, 그 다음에 다시 일 년, 그렇게 미루다가는...... 오늘은 과인도 분명히 말을 해야겠어요. 어마마마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면 모든 일이 돛단배가 순풍을 타는 격일테고 그렇지 않으면 모자의 정은 단숨에 무너질 겁니다."

영정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영정의 협박에 가까운 요구에 주희는 충격을 받았다.

'아예 나를 협박하는군.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컸을까? 정말 무섭구나.'

주희는 갑작스런 영정의 요구에 어떤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영정을 바라보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이시여, 저의 운명은 어찌 이다지도 가혹합니까? 자식은 불효하고...... 이인, 이인,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주희는 왕태후의 신분을 잊은 듯 여염집 아낙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주희를 영정은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마마마, 그 입술이나 깨끗이 하시고 선왕을 부르십시오. 구천지하에 계신 아바마마를 더 이상 더럽히지 마십시오. 과인의 불효한 행동이나 어마마마의 난행(亂行)이 어디가 다르다고 그러십니까. 옳고 그름은 각자의 마음에 있으니 어마마마와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영정의 말에 주희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식 앞에서 부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이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노애가 원망스러웠다. 주희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피던 노애가 드디어 영정 앞에 나타났다. 영정은 고개를 돌려 노애를 한 번 힐끗 바라봤을 뿐 주희 앞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마마, 어인 일로 옹성에 나들이를 오셨사옵니까? 신이 모시고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겠사옵니다. 왕태후마마께서는 지금 몹시 편찮으시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다음날을 기약하시옵소서."

영정은 노애의 건방지기 짝이없는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허리에 찬 칼에 손이 갔다. 먼저 일을 터뜨린 다음 뒤에 수습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곁에서 불안하게 영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사가 계속 눈짓을 보내고, 등승도 영정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노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제지에 영정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희에게 소리쳤다.

"어마마마, 이전에는 추아가 어마마마를 모시더니 어찌하여 이제는 장신후가 어마마마를 받들고 있습니까?"

이 말에 노애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댔다.

"마마, 정말로 기억력이 좋으시옵니다. 추아라는 계집애는 태후마마를 모시면서 부정한 일을 저질렀사옵니다. 이씨 성을 가진 사내와 정분을 나누다가 들켜서 유폐(幽閉;여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의 벌을 받았지요. 마마께서는 그 이씨 성을 가진 바람둥이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노애가 음흉하게 웃으며 이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노애의 말에 이사는 추아가 걱정돼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염탐을 하다 들킨 게 틀림없었다.

이사의 굳어진 얼굴을 일별한 영정이 노애를 질책했다.

"일개 시비가 누구누구와 정분을 나누었다는 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소. 문제는 딴 데 있소. 시비의 성품이 그러하면 주인의 성품도 알만 하지 않겠소?"

영정이 은근히 노애의 가슴에 비수를 던졌다. 영정에게 모욕을 당한 노애는 분한 마음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주희는 노애보다 더욱 안절부절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하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정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모두들 물러가고 관례는 네 마음대로 치르거라. 그리고 다시는 어미를 찾아오지 말아라."

마침내 주희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이사와 등승은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어마마마의 배려에 감사드리오며 빠른 시일 내에 관례를 치르고 친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진율(秦律)을 점검하고 위반자는 엄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데 힘을 쓰겠습니다. 바라건대 어마마마께서도 자중자애하시길 빌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영정은 주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주희는 애초에 영정의 관례를 늦추어 노애가 권력을 충분히 장악하도록 계획했지만 추아의 밀고로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조금 전 갑자기 들이닥친 영정의 기세를 보니 도저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정이 밖으로 나가자 노애는 재빨리 무장한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일제히 영정이 지나가는 길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영정이 나타났다. 그러나 영정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병사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나갔다. 이때 영정의 뒤를 따르던 이사가 걸음을 멈추더니 등승에게 귀엣말을 했다. 병사들이 서 있는 제일 끝자리에 노애가 버티고 서서 영정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정이 노애의 곁을 스쳐지나려는 순간 등승이 갑자기 노애에게 달려들었다. 느긋하게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노애는 등승의 기습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등승이 재빨리 허리에서 검을 뽑아 노애의 목을 겨누었다. 등승의 공격은 너무나도 빠르고 완벽해 노애는 손 한 번 쓰지 못한 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등승은 노애의 가슴을 발로 짓누르며 목에 겨눈 검에 힘을 주었다. 노애는 목에 섬짓한 검기(劍氣)를 느끼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영정이 빙그레 웃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자 등승은 노애를 일으켜 세운 후 그를 앞세워 영정을 뒤쫓았다. 대정궁 밖에서는 몽염과 왕전이 초조하게 영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영정이 노애를 인질로 삼고 유유히 궁문을 빠져나오자 일제히 수레에 올라타고 대정궁을 벗어났다.

영정으로부터 풀려난 노애는 너무도 분해 땅을 치고 통곡했다. 영정을 공격하려던 것이 오히려 역습을 당하자 그는 자신의 시위들을 불러 질책하고 주희에게는 쉽게 관례를 허락한 일을 따지고 들었다. 주희는 그런 노애를 기막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군. 제 무예만 믿고 날뛰더니 겨우 양치기 바보에게 당하기나 하고. 따라와요, 이제 진짜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주희의 말에 노애는 얼굴을 붉히며 순한 양처럼 그녀를 따라갔다.

영정은 대정궁을 기습하여 관례친정(冠禮親政)의 목적을 달성하자 곧바로 전례(典禮)를 준비하였다. 이번 관례는 영정에게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국내의 모든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닥칠 영향과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날 아침에 경거(輕車;국가의 중요 문서를 전달하는 벼슬)가 알려온 서신에 의하면 옹성에 속속 병마가 집결하고 있으며, 그 전날에는 태사가 별자리를 관찰하고서 '서방에 혜성이 나타났으니 곧 국내에 전쟁이 일어날 징조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승상부의 움직임은 영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영정은 여불위에게 노애를 잡아들일 방안을 마련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여불위는 모른 척 하고 아직까지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여불위는 <여씨춘추>의 내용을 요약하여 함양성의 곳곳에 써붙여 여론을 확산시켰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임금의 일인 지배 체제를 반대한다(反對一家天下)'는 내용도 있었고, '임금은 있는 듯 없는 듯 정치를 해야 한다(君主無爲)'라는 구절도 있었다. 더욱이 '수제치평을 받침으로 하는 철인정치(修齊治平哲人政治)'를 찬양하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선양정치(禪讓政治)를 소리 높여 외쳤다.

여불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여씨춘추>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면 천 금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이 일로 도성인 함양성은 물론이고 진나라 전체가 크게 술렁거렸다.

영정은 처음부터 여불위의 그런 학설을 극도로 싫어했다. 더욱이 그것이 자신이 친정을 하려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데에 기분이 무척 상했다. 그는 여불위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자신과 노애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살아난 다음에 백 가지 걱정을 하라는 말이 실감나는군."

영정은 기분 같아서는 당장에 여불위의 죄를 따지고 싶었지만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인물이며 문객만 해도 3천이 넘었다. 쉽게 공격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영정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관례를 잠시 뒤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등승은 영정의 뜻을 조정의 대신들에게 전달했다.

"과인은 몸이 불편하여 조회에 참석할 수 없느니라."

영정이 병을 핑계로 관례를 미루고 조회까지 참석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사람들은 영정과 여불위와 노애의 세력 사이에서 나름대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몽염과 함께 늘 궁중에서 영정을 호위하던 몽의는 영정의 병이 하루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에 몽씨 집안 대대로 전해내려 오는 비방을 영정에게 건네주었다. 영정은 자신의 건강에 조바심을 내는 몽의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침에는 저녁을 걱정하지 않는 법, 그런 건 필요없소."

몽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영정에게 얼른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옹성은 매우 위험한 지역이옵니다. 함양성에서 관례를 치르셔야 안전하옵니다."

그러나 영정은 몽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왕전, 풍거병, 왕흘이 내전으로 들어와 영정에게 예를 올리고 제 자리를 찾아 정좌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풍거병이 배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마마, 박이 익으면 꼭지가 떨어지고 물이 차면 해자가 되옵니다. 관례는 중요한 일이옵니다.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신들을 불러 의견을 구하도록 하옵소서."

그 말에 영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영정은 그 다음날도 조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하루종일 서재에서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매일 각지에서 올라오는 간서는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급히 처리할 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영정은 조회에 참석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어떤 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가장 답답한 사람은 등승이었다. 그는 더 이상 답답증을 참을 수 없어 이사를 찾아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지만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등승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마마께서 지금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는데 신하된 도리로 손을 써야 하거늘 그렇게 모른 척 하고 있으면 되겠소? 글 읽었던 사람들이 말도 없이 행동하고 계획없이 지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그제서야 이사는 품에 안고 있던 털이 긴 강아지를 등승에게 건넸다.

"이 강아지를 마마에게 갖다드리시오. 이 강아지는 내가 방금 북지에서 가져온거요."

강아지를 받은 등승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으로 돌아왔다.

영정은 강아지를 보자 이사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날 저녁 영정은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이사를 맞이했다.

"마마께서는 저렇게 사흘 동안 누워만 계셨다오."

등승이 이사에게 속삭였다. 등승은 이사가 영정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이사가 묵묵히 소매에서 죽간을 꺼내 영정의 눈 앞에 내밀자 영정은 조용히 그것을 읽었다. 죽간에는 '일국삼공 오수적종(一國三公吾誰適從)'이라는 여덟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는 <좌전>의 노희공(魯僖公) 5년에 나오는 기사였다.

'한 나라에 세 명의 실력자가 있으면 신은 누구를 따라야 하옵니까?'

이사는 죽간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영정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이사가 다시 소매에서 두번째 죽간을 꺼내 영정에 바쳤다. 그 죽간에는 <노자>의 말을 빌려 '승리하는 사람은 힘이 있다. 스스로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비로소 영정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이사의 손을 잡았다.

"이장사, 고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오. 귀를 씻고 듣겠소."

이사는 영정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자 너무도 기뻤다. 그는 치솟는 기쁨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손자>에 이르기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사옵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으니 서로 싸우게 만들어야 하옵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다투어서 서로 상처를 입으면 모두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지금 두 마리 호랑이는 서로 싸우지 않고 있으니, 신이 생각하기에 싸우지 않으면 세력을 나누어서 하나하나 때려잡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런 계책이 바로 강점은 드러내고 약점은 피하여 적을 이기는 방법이옵니다. 결코 두 마리 호랑이가 힘을 합치게 두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나누어서 치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소?"

"신의 생각으로는......"

이사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영정의 귀에 속닥거렸다. 한 차례 이사의 열변이 끝나자 영정의 얼굴에는 화사한 빛이 흘러넘쳤다. 조금 전까지의 우울하고 답답한 표정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영정이 갑자기 얼굴을 펴고 좋아하는 모습에 등승이 이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어라 말씀드렸기에 마마께서 저렇게 좋아하십니까?"

"하하하, 마마께서는 걱정이 많아 우리가 말을 많이 할수록 번잡도 그만큼 늘어나시지요. 그래서 일부러 강아지를 먼저 보냈던 겁니다. 사냥개도 처음에는 강아지처럼 온순하지만 얼마 후 자라면 무서운 사냥개가 된다는 걸 암시했습니다.

첫번째 보여드린 죽간은 마마께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지요. 그래서 우리 신하들이 그 고충을 익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드렸습니다. 두번째 죽간은 마마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준비했지요. 적을 때려잡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먼저 자신을 이겨야 남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자신감을 세우고 적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아뢰었지요."

이사의 설명을 들은 등승은 그저 그의 지혜에 탄복할 뿐이었다.

한편 노애는 영정을 놓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 밖에 하늘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노애는 몸을 단련하고, 기마술, 궁술, 검술을 익히며 병마를 조련했다. 주희 또한 이제는 영정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더 열정적으로 노애를 도왔다. 하지만 왕태후의 옥쇄를 요구하며 병력을 움직이겠다는 노애의 제안에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노애는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이 그런 주희 앞에서 제동이 걸리자 매우 불쾌했다. 당시 진나라의 병권(兵權)은 국왕에게 있었지만 영정이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라 왕태후의 옥쇄만 있으면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만일 노애가 진의 병력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그는 겨우 사병 일이만으로 영정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사병을 이끌고 대항한다 해도 진나라의 정병을 이길 확률은 전무했다. 노애는 몇 차례에 걸쳐 주희에게 옥쇄를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주희는 그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옥쇄를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활로가 보장되고 또한 노애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강은 그즈음 노애의 안색이 창백하고 안절부절하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모든 것이 왕태후의 옥쇄 때문임을 안 제강은 빙긋이 웃으며 노애에게 한 가지 계책을 은밀히 알려주었다.

옹성은 바야흐로 서리가 내리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즈음 노애는 한동안 대정궁 출입을 하지 않았다. 주희는 답답하고 불안하여 몇 번이나 심부름꾼을 보내 노애를 찾았으나 한결같이 장신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보름이 지나도 노애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주희는 노애가 영정이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거나 잡혀 가지는 않았는지 무척 걱정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옥쇄를 내주지 않아 화가 난 김에 술집에 쳐박혀 계집질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궁녀와 태감들을 모두 풀어 노애의 행적을 찾도록 하였다.

이날 오후 드디어 늙은 태감이 노애의 행방을 알아냈다. 태감의 말에 의하면 노애는 옹성 밖의 어느 한적한 장원 구석에 자리한 띠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주희는 궁금증이 일어나 도저히 그대로 앉아 소식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수레를 타고 곧바로 장원의 띠집으로 노애를 찾아나섰다. 주희가 바람처럼 달려 노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자 집을 지키고 있던 태감이 황급히 달려나왔다.

"장신후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이곳 정원은 등룡채(騰龍寨)이며 장신후마마의 저택이옵니다. 그러나 마마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이곳은 워낙 넓어 찾기가 수월치 않사옵니다."

과연 태감의 말대로 노애의 장원은 매우 넓었다. 그녀는 직접 띠집을 찾기로 결심하고 수레를 이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띠집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동쪽, 남쪽, 서쪽을 지나 북쪽에 이르렀을 때 주희는 숲속 한적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고함소리를 들었다.

수레가 숲을 헤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멀리 여러 채의 띠집이 눈에 들어왔다. 띠집의 가운데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십여 명의 청년들이 바위들어올리기와 주먹다지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주먹다지기는 커다란 솥에 모래를 가득 담고 밑에 섶을 태워 모래가 점점 뜨거워지면 그곳에다 주먹을 쳐서 단련하는 훈련이었다. 노애는 주먹다지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얼굴은 열기로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맨등은 온통 땀뿐이었다. 주희는 나무 밑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노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노애는 훈련을 끝내고 청년들을 불러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주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아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어조로 보아서 심각한 이야기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노애의 연설이 끝나자 청년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욕창국운(欲昌國運)',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면, '당축외민(當逐外民)', 마땅히 다른 나라 사람을 내쫓아야 한다. '아등진인(我等秦人)', 우리 진나라 사람은, '동심서립(同心誓立)', 한 마음으로 맹세한다. '탕소구적(蕩消仇敵)', 원수를 무찌르고, '효충태후(效忠太后)', 태후마마께 충성을 다한다!"

주희는 그 한마디한마디를 모두 또박또박 들을 수 있었다.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콤한 음악도 이처럼 그녀를 취하게 하지는 못했다. 주희는 노애를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군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인기척에 놀란 노애가 주희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태후마마, 어떻게 이곳에...... 신이 죄를 범했사옵니다."

주희는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노애를 바라보았다.

"신이 미리 알려드려야 했는데......"

주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이곳에서 훈련을 하며 때를 기다렸사옵니다. 이제 그때가 되었기에 태후마마께 부탁을 하나 드릴까 하옵니다."

노애는 얼마 전까지 태후에게 쓰던 어리광스러운 말투를 버리고 의젓하고 공손하게 그녀를 대했다.

"장신후, 무엇이든 말해요. 다 들어주겠어요."

주희도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태후마마의 옥쇄를 잠시 빌려 한 차례만 썼으면 하옵니다."

"옥쇄를?"

주희는 깜짝 놀라며 노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애는 끈질기게 태후의 옥쇄를 요구했다. 주희는 대답을 미룬 채 노애에게 궁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그는 옥쇄를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태후마마, 영정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격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아무런 대책없이 궁으로 돌아가면 신은 죽사옵니다. 제게는 옥쇄가 있어야만이 영정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주희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노애가 절대로 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한 번도 몸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옥쇄를 노애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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