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 1
진시황제
류홍택
1. 인질로 태어난 아이
유난히 눈이 많은 겨울이었다. 이른 새벽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른 왕충(王忠)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산 너머에서 들리는 희미한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적막한 산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그 목소리는 왠지 왕충의 마음을 허허롭게 만들었다. 왕충은 눈 속에 깊이 파묻힌 다리에 힘을 주며 노래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삭풍이 불어오는 산 건너편에서 한 중년 사내가 유유자적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제법 우람한 체격에 양가죽을 허리에 두른 그는, 배나무 지팡이로 눈길을 헤치며 왕충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실례지만 상당(上黨)으로 가는 길 좀"
고향 사투리를 듣고 친구와 적을 가른다는 옛말이 있다. 왕충은 그의 농익은 상당 사투리에 가슴이 설레인다.
"아닙니다. 잘못 들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혹여 노형께서는 상당분이 아니신지요?"
"하하하! 그대의 말투를 들어보니 단번에 한 고향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겠소이다."
그도 반가운지 호탕하게 웃었다.
"상당의 토정(土精)과 국화(菊花)는 신선방생을 추구하는 진인(眞人)의 단약(丹藥)보다 낫다는 말처럼 고향이 최고지요. 꿈속에서도 생각나는 고향이 아니던가요. 아참, 노형의 성함은? 한단에는 어떻게 오셨나요?"
그는 왕충의 물음에 몸을 약간 움찔했다. 그는 원래 조나라 군대에서 교위(校尉)를 지냈던 사람으로 성격이 호방하고 강직하여 부패한 상사(上司)의 부정을 직간하다 미움을 샀고, 결국 군대를 떠나 '제왕의 힘이 어찌 나에게 미치리오'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야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양치는 목동으로 이따금씩 사냥도 하며 사는 야인이올시다. 성은 이(李)가이고, 머리가 크다고 해서 남들이 이대퇴(李大堆)라고 부른다오. 방금 며늘아기가 해산을 했다고 해서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데 제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세상이 온통 어지러워서, 언제나 전쟁이 끝날는지. 여기 조나라도 한단성만 번성할 뿐 다른 데는 말이 아니라오. 그런데 형씨는 약초를 캐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갸우뚱대며 물었다. 실은 왕충의 아내도 이날 새벽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아내가 해산 후 기가 몹시 쇠해지는 바람에 약초를 구하러 급히 산에 올랐던 터였다.
"저는 효성왕부(孝成王府)에서 태의(太醫)로 있는 왕충이라고 합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제 몸은 사실 제 것이라 할 수 없지요. 하물며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어려움이란 마치 깊은 못에 이른 듯,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답니다."
"듣자하니 효성왕부에는 어의(御醫)가 수천에 이른다고 하던데, 수많은 질병을 직접 보고 고칩니까?"
"그것은 단지 소문일 뿐이지요. 궁중에는 대왕마마와 왕자님은 물론이고 태후마마, 왕비마마도 계시고 게다가 수많은 비빈들이 황문령(黃門令)도 하나둘이 아닐진대, 만일 우리 어의가 그들까지 보았다가는 몸이 두세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거상들마저 돈을 내고 우리를 부르는 지경입니다."
왕충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말에 이대퇴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무의(巫醫)는 장사치보다 못하다고 하던데 금원(禁苑)에는 들어가 본 적이 있소?"
조용하던 이대퇴가 갑자기 물었다. 왕충은 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머뭇했다. 이때 산 아래로 눈길을 돌리던 이대퇴가 중얼거렸다.
"저런, 길에다 말을 풀어놓다니." 쳐다보았다. 몇 명의 기마병들이 산마루로 올라오고 있었다. 왕충은 기마대의 선두에 있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대퇴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양적(陽翟 ; 한나라의 수도)의 대고(大賈)이시군."
"저기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여대고(呂大賈)라 불리우는 여불위(呂不偉)라고요? 한 명의 가기(歌伎)를 얻는 데 3천 금을 썼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군요."
이대퇴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렇습니다.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섰다 쓰러지는 세상에 누가 앞날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부잣집 말이 있듯, 돈만 있으면 하늘과 통하는 세상입니다."
왕충 또한 어그러진 세상을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기마병들은 그제서야 왕충을 발견했는지 부지런히 산마루로 말을 몰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곳까지 나를 찾아왔을까?"
"집이 있어도 집 같지 않고, 나라가 있어도 나라 같지 않은 세상, 언제 이런 세상이 끝날까."
이대퇴는 왕충의 곁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말문을 닫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비애가 가슴에 솟구쳤다.
잠시 후 기마대에서 한 사람이 언덕으로 올라오며 소리쳤다.
"왕태의! 빨리 성으로 돌아가십시오. 왕비마마께서 해산을 하신답니다!"
왕충은 시위(侍衛)의 다급한 목소리에 매우 급박한 상황임을 느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이대퇴에게 작별을 고했다.
"몸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다음에 또 뵐 날이 있겠지요."
이대퇴는 언덕 아래로 급히 내려가는 왕충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왕충은 기마대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공자 이인(異人)의 비(妃) 주희(朱姬)가 오랜 진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았다. 공자 이인은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와 있는 진나라 공자였다. 왕충은 일찍이 조나라 왕부의 명령으로 이인과 그의 왕비를 보살피고 있었다. 얼굴을 쳐다볼 틈도 없이 부리나케 약재를 챙겨 이인의 집으로 뛰어갔다. 이인의 집에 다다를 즈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북국에서 몰아치는 겨울바람이 살을 에이는 듯했다. 큰 눈은 멈췄지만 삭풍은 어둠을 몰고 오면서 그칠 줄을 몰랐다. 거리는 아주 조용했다. 길옆으로 쭉 늘어선 관가(官家)의 담벼락을 타고 넘은 매화 가지만이 추위에 바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멀리 육중한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누구에 대한 마음일까. 왕충은 오늘 아침 일을 생각했다. 자신은 득남을 해서 기분이 날아갈 듯한데, 이곳에 인질로 잡혀 와 자식을 낳는 사람의 심정은 어떠할까? 인질을 감시하는 병사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냉랭한 표정으로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회랑을 지나 중당(中堂)에 이르니 공자 이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치 수십 마리의 사냥개에 둘러싸여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한 마리 토끼 같았다. 그러나 비록 다급하고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불그스레한 두터운 입술에는 곧 태어날 자식에 대한 기대감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평대의 계단에는 여불위가 팔짱을 끼고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그는 오관(五官)이 단정하고 몸집이 중후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야망 또한 컸다.
젊은 시절 그는 부친에게 경전(耕田)의 이익과 주옥(珠玉)의 이익을 물은 적이 있었다. 경전의 이익은 농사를 말함이요, 주옥의 이익이란 장사를 의미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꾼답게 장사에 투자하면 그 이익이 원금의 열 배 아니 백 배가되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불위는 임금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자를 하면 이익이 얼마가 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에 그의 부친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못했다.
여불위는 지금 임금이 될 만한 사람에게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와 있는 진나라의 공자 이인이야말로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국공(安國公)에게는 아들이 이십 명이 넘었는데 이인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이인의 생모인 하희(夏姬)가 안국공의 총애를 잃게 되자 왕부에서 보호를 받지 못한 이인은 조나라의 인질로 보내졌다.
조나라의 핍박과 감시를 받던 이인은 그나마 여불위를 만난 덕분에 공자의 신분에 맞는 차림을 갖출 수 있었다. 여불위는 이인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엄청난 재화를 들여 이인이 많은 친구를 사귀도록 도왔으며, 주변 여러 나라의 문사(文士)들을 초청하여 가르침을 얻도록 하고, 자신이 아끼던 여자를 이인에게 바쳐 그의 정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그녀가 바로 주희였다. 여불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직접 안국공이 가장 총애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언니에게 뇌물을 건네 이인이 안국공의 적자(適子)로 책봉될 수 있도록 공작을 폈다.
여불위는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늘이시여, 반드시 아들을 낳게 도와주소서!'
뜨락에는 몸이 왜소한 총관이 여러 명의 하인을 거느리며 분주하게 해산 일을 돕고 있었다.
"왕 태의가 도착하였습니다."
여불위와 이인은 그 소리에 찌푸렸던 얼굴을 펴며 뜨락으로 내려왔다. 여불위는 왕충에게 산모의 상태를 설명했다. 이인은 곁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초조한 눈빛은 마치 애원을 하는 듯했다. 왕충은 걱정 말라는 뜻으로 가볍게 눈짓을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마침내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방 안에서 기쁨에 넘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공자님이 탄생하셨다!"
그 소리에 여불위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이인 또한 터져 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지 뜨락을 빙글빙글 돌았다.
왕충은 산모의 진맥을 다시 한 다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자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하하하, 소양왕 48년 정월 초닷새라. 정말 좋은 날입니다."
여불위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런 그렇게 좋아하며 떠드는 모습은 처음이라 약간 당혹스럽기조차 했다. 왕충도 그런 여불위가 의아해 걸음을 멈추고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여불위가 총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도선(圖先)이라는 이름의 그 총관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주칠(朱漆)을 한 옥갑을 계단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옥갑의 뚜껑을 열게!"
여불위의 명에 따라 도총관이 옥갑의 뚜껑을 열었다.
옥갑 안에는 아주 커다란 장옥(璋玉)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기이한 보물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한 보기 드문 장옥이었다. 궁중을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감탄어린 시선에 저으기 만족한 듯 여불위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공자, 제후의 예에 따라 아홉 개의 장옥을 준비했사옵니다."
이 말에 이인은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막중한 예를 비천한 아이가 어떻게 받을 수...... "
그러자 여불위가 얼른 이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공자, 이 아기씨는 왕실의 후예이옵니다. 더욱이 태어난 날짜를 헤아려 보면 대단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제환공(齊桓公)이나 진문공(晉文公)에는 버금갈 기운이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인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이 사람의 운명은 너무나 가혹하여 많은 재난을 당했습니다. 허니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여공(呂公)께서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한구석에서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왕충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에는 사내아이의 이름을 아이가 태어나고 석 달이 지나야 짓는 게 관례였다.
'이인 공자는 무엇이 그리도 다급해서 여불위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애원한단 말인가?'
눈을 감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 생각났습니다!"
한참 후 여불위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위대한 천명(天命)이여! 정월에 태어나시기도 했고, 또 아기씨가 자라 권력을 잡으시라는 의미로 정(政)이라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정이라, 영정(영政)! 정말 좋습니다. 여공께서는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이토록 좋은 이름을 단번에 생각해 내시다니요."
이인은 여불위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하인에게 술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여공, 여공의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깊습니다. 오늘 나는 공을 이 아이의 중부(仲父)로 삼으려 합니다."
"중부가 될 수 있겠사옵니까? 저는 감히 받을 수가 없사옵니다."
그때였다. 도총관이 허겁지겁 뛰어들어 왔다.
"어르신! 큰일났습니다!"
도총관이 급히 여불위에게 귓속말을 했다.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여불위가 이인에게 다시 무어라 속닥였다.
여불위의 말을 들은 이인은 크게 놀란 듯 멍하니 하늘을 우러르며 중얼거렸다.
"주희는 어떻게 하지? 정은?"
"공자! 시간이 없사옵니다."
여불위는 넋이 나간 듯한 이인의 손을 잡아끌고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왕충은 조용히 이인의 집을 빠져나왔다. 긴장이 풀어지자 해산 후 몸져 줄달음을 쳐 왕충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신열을 내며 기절해 있었다. 왕충은 얼른 아내의 맥을 짚어보았다. 그러나 이미 태의인 그로서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다음날 왕충의 아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정이 태어난 날 저녁, 여불위는 이인과 함께 몰래 한단을 빠져나갔다. 이인은 아들을 얻은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여불위의 손에 이끌려 조나라를 탈출하였던 것이다. 여불위는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나라 왕부에 수많은 첩자와 자기 사람을 심어 놓았고, 조나라의 왕부에도 그에게 정보를 전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조나라의 효성왕은 진나라 장수인 백기(白起)가 조나라의 정예 병력 45만을 분노가 하늘까지 치솟아 인질로 와 있는 이인을 당장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여불위는 앞뒤 가릴 틈 없이 우선 이인을 피신시켰다. 덕분에 이인은 함양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적국의 도성에 남아 있는 아내와 아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눈만 뜨면 한단에 있는 처자를 생각하며 눈물에 젖곤 하였다.
조나라 경후(敬侯) 원년(BC 386년)에 지어진 한단성은 매우 번화한 성으로, 성곽은 한산(邯山)이 끝나는 자락을 잘라 기초를 다졌고, 저하(渚河)와 필수(泌水)가 성을 관통하여 흘렀다. 이렇게 산과 강이 천연의 방비를 해 주는 한단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산 높고 물 맑아 살기 좋으며, 남쪽과 했다. 요연(遼燕)으로 통하는 태행고도(太行古道)가 이곳으로 뚫려 있으며, 백여 년에 걸친 경영으로 성내에는 의궁(儀宮)과 동궁(東宮)은 물론이고 총대(叢臺)와 동묘(東廟)도 웅장한 기세로 지어져 있었다. 청동으로 기둥을 받친 진양궁(晉陽宮)과 매화와 오얏나무가 가득한 한단궁(邯鄲宮)은 아름다움과 그 기세로 천하에 널리 알려진 건물이었다. 이 시기에 이미 한단성은 2개의 성곽과 8개의 구역, 13개의 거리가 조성되었고, 성 내에 거주하는 백성만도 이미 십만이 훨씬 넘는 성으로 번성하였다.
하지만 조나라의 국도 한단성은 서북 변방에 자리한 진나라와 장평 전투를 벌일 무렵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봄이 가을이면 열매가 열리고 겨울이 오면 생명이 숨죽이는 자연의 섭리처럼 한단성도 똑같은 운명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50년의 상원절(上元節), 즉 원소절(元宵節)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정월 대보름이었다. 상원절이 되면 민가에서는 탕원(湯元)을 먹고 꽃등(燈)을 구경했는데 그런 풍습은 한대(漢代) 이후에 생겨났고, 이 당시에는 채유사(猜유辭)라고 불리우는, 문설주에 거는 등(燈)이나 초롱에 수수께끼를 적어놓고 맞추는 놀이나 복숭아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대문 양쪽에 세워 놓고 잡귀를 물리치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또한 저잣거리에서는 기예를 겨루거나 노래자랑을 하는 사람들로 떠들썩하였다. 설의 설레임과 즐거움이 채 다음 가는 명절로 자리 잡아갔다.
상원절 묘시가 되자 굳게 닫혀 있던 한단성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이윽고 진시가 되니 한단의 대북성(大北城)은 사람들의 행렬로 시끌벅적해졌다. 대북성은 일반 백성들의 거주 지역, 상업 지역, 유흥 지역, 수공업 생산 지역이 들어선 곳이라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많았지만 이날 만큼은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북성 거리는 온통 진흙밭이었다. 거기에다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이 햇볕에 녹으면서 더욱 진창을 만들어 길은 마차의 바퀴자국으로 울퉁불퉁 엉망이고, 발목까지 차는 진흙탕으로 걷기조차 불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과는 마련된 무대 위에서 예인(藝人)들은 저마다 장기를 선보이며 손님을 끌기에 정신이 없었다. 한쪽에서 투계(鬪鷄)가 벌어지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개 경주(走狗)가 신나게 펼쳐졌다. 뿐만 아니라 앙상한 가지가 하늘 높이 뻗어 있는 버드나무 아래서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술내기 바둑이 한창이었다.
이런 엄청난 인파를 헤집으며 건장한 사내 둘이 길을 트자, 그 사이로 소년 하나가 튀어나와 정신없이 날뛰어댔다. 소년의 이름은 영정, 9년 전 정월 초닷새에 진나라 왕손 이인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난 바로 그 아이였다.
영정은 한단성의 한 초라한 궁중에서 외롭고 고통스럽게 자라났다. 비쩍 마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유달리 컸으며, 눈빛이 차갑고 매서웠다. 영정은 온갖 감시와 멸시 속에서 냉혹하고 침울한 소년으로 자랐던 것이다.
영정은 그동안 거의 궁 밖을 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상원절에야 겨우 바깥출입을 허락받아, 그는 이른 아침부터 새옷으로 갈아입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와! 꼬마 원숭이가 산양을 잡아타고 기사가 되었네!"
거리의 모든 것이 영정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자 영정은 호기심이 당기는지 그리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던 영정이 그만 미끄러져 진흙탕에 주저앉았다.
"에이, 가요. 옷이 다 버렸네. 다른 데로 가요. 저기, 저쪽 무대로 가요. 사람들이 많은 데로요."
키가 큰 가신(家臣)이 영정을 잡아끌었지만, 어린 영정은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비집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쩔 수가 없네 그려. 쯧쯧쯧."
가신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그러나 영정은 금방 싫증을 느꼈는지 다시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내달았다. 그는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이곳저곳을 마구 쏘다녔다. 영정은 아버지 이인에 대한 느낌이나 그리움이 없었다. 여불위가 이인을 데리고 떠나자 갓난아기였던 영정은 곧바로 이인 대신 조나라의 인질로 살아야 했다.
영정이 인질이 될 무렵 조나라와 진나라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매번 진나라가 승리했다. 조나라는 전쟁에 질 때마다 영정에게 그에 대한 보복을 가했다. 진나라 명장인 백기가 조나라의 항복병을 모두 땅에 묻어 죽인 사건 이후로 진나라에 대한 조나라의 원망과 복수심은 어린 영정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찼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은 오히려 영정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다. 질시와 욕설과 멸시가 퍼부어지면 질수록 영정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쌓아갔고, 이를 악물고 참는 인내를 키워나갔다.
허지만 동심(童心)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명절의 들뜬 분위기에 어린 영정의 가슴은 설레이기만 했다. 영정은 가늘고 긴 눈자위를 굴리며 거리의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훑어보았다. 그러는 사이 차가운 눈빛은 어느덧 온화하게 바뀌어졌다. 영정은 그런 부드러운 눈빛으로 흰눈으로 뒤덮인 한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구름을 감싸고 도는 벽송의 푸르름을 감상하였다. 울긋불긋 꽃처럼 아름다운 등롱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웃음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때 하나 묻지 않은 맑고 깨끗한 시냇물 같았다.
"세상이 이처럼 아름답고 멋지다니!"
영정은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매일 자신을 짓누르는 멸시의 눈동자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잊었다. 억제하기 힘든 분노 또한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상원절을 맞이한 한단성은 여느 날과는 달랐다. 냉혹함도 원한도 감시도 없는 오로지 즐거움과 따스함과 웃음이 있을 뿐이었다. 영정은 경쾌하게 거리를 뛰어다니며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에게는 진흙뻘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거리는 넓게 펼쳐진 초원이었다.
영정이 이리저리 헤매며 상업 지역이 거의 끝나가는 품자형(品字型)의 광장에 이를 무렵이었다. 그곳 역시 사람들로 붐볐지만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 마련된 무대 위에서 아가씨들이 손에 불렀다.
님은 강물, 누이는 꽃,
꽃은 물따라 가도 원망하지 않아요.
필수의 물, 흐르면 돌아오지 않으니,
님 그리는 누이, 님과 함께 하늘 끝으로
하늘 끝 어디까지 가더라도
꽃은 물따라 가도 원망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애절한 민가였다. 님의 사랑을 구하는 노랫말에 춤이 어우러지자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무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모두들 아가씨들을 따라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적막에 휩싸인 한벽한 궁중에 갇혀 살던 영정은 순박하면서 자연스럽게 감동을 느꼈다.
'여기에는 자유와 평등이 있다.'
이런 느낌은 영정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리 오세요, 어린 공자님! 향내 그윽한 술 한잔 드세요. 몸이 따스해지고 흥이 절로 솟구칠 거에요."
술 파는 젊은이가 손짓을 하자 영정은 씨익 웃으며 술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신 두 사람도 한 잔씩 받아 마시고는 소매에서 열 매의 도폐(刀幣)를 꺼내 술 파는 젊은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도 다 있다니."
젊은이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며 영정 일행에게 감사했다. 시간이 갈수록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희씨 망나니가 온다아!"
사람들이 소리치자 무대 위의 아가씨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노래와 춤을 멈췄다. 영정이 영문을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자 술 파는 젊은이가 영정에게 귓속말을 했다.
"공자님, 빨리 피하세요. 희씨 망나니 놈이에요. 한단성의 골칫덩어리라니까요."
젊은이는 이렇게 말해놓고는 영정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얼른 술항아리를 짊어지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광장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이 일순간에 흩어졌다. 마치 태풍이 몰아친 뒤 남겨진 처참한 광경처럼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영정은 사람들에게 밀리는 바람에 두 가신과 순식간에 헤어지고 말았다. 영정은 두리번거렸다. 복잡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더 이상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영정도 광장을 벗어나 필수 강변으로 투벅투벅 걸어갔다.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영정이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준마 한 필이 그의 코앞에 멈춰서더니 난데없이 질퍽한 진흙덩이가 튀어 영정의 얼굴을 때렸다.
"쉬익!"
얼굴의 진흙을 털어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말채찍이 영정의 얼굴을 갈겼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다시 두 번째 채찍이 가해지면서 그의 새옷을 부욱 찢었다.
"제기랄! 머저리 같은 놈아, 어르신의 길을 막아? 깔려 죽고 싶은 게로군!"
퍼부어졌다.
"나쁜 자식!"
영정이 고개를 치켜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오, 이제 보니 진나라의 진드기였구만. 나쁜 자식이라고? 하하하, 그동안 얼마나 네 놈을 찾아다녔는데, 이제야 여기에서 만나다니. 오늘 내 말굽에 밟혀 죽어 보라구. 하하하......"
난폭하게 말을 몰고 다니는 이 사람은 한단성의 소문난 난봉꾼으로 가문의 권세를 믿고 날뛰는 공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름은 희단(姬丹)이지만 포악하고 잔인하며 색을 지나치게 밝혀 희씨 망나니로 불리웠다. 희단은 독수리 눈에 물수리 이마를 하였고, 얼굴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는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희단은 자기 자신을 초인(超人)으로 자부하고 위인이 되기 위한 디딤돌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과녁을 찾아다녔다. 진나라는 바로 그에게 디딤돌이자 과녁이었다. 희단은 그전부터 진나라 인질의 처소에 사람을 풀어 그 동정을 일일이 파악했는데 특히 영정이나 이인의 부인인 주희가 밖으로 나오면 곧바로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도록 계교를 부렸다. 영정과 주희는 그간 수차례 그에게 곤욕을 치렀으며, 희단의 명성 또한 그와 함께 널리 퍼졌다.
희단은 상원절에, 그것도 거리에서 영정을 만날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그날도 그는 아침부터 영정의 행적을 찾았지만 많은 사람들로 대북성이 붐비는 바람에 찾는 걸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영정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가신들이 있어 지나친 모욕은 피할 수 있었으나 이날은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영정은 어렸을 때처럼 일방적으로 당할 만큼 나약하거나 두려움이 많지 않았다. 영정은 이제 의젓한 소년이 되었다. 어린 그를 이렇게 어른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좌절과 모욕과 고통이었다. 영정은 수차례 어머니 주희와 함께 곤욕을 당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통은 순간이므로 우선 자신의 몸을 보존하리라는 생각으로 굴욕을 참으며 위기를 넘겼다. 상대와 힘 겨루기를 할 수 없다면 비록 오늘은 물러나더라도, 다음에는 기필코 힘을 키워 사나이답게 일전을 벌이겠다고 결심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이 기다리던 그런 날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물러나거나 위축될 수는 없었다. 영정은 처음에는 당황하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영정은 눈깜짝할 사이에 길 옆에서 뾰족한 돌을 주워 말머리를 세게 후려치고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희단에게 대들었다. 돌로 머리를 맞은 말이 처참하게 울어댔다. 희단은 영정이 이렇게 겁없이 달려들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한 터라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희단은 입을 악 다물며 말고삐를 옥죄었다. 말발굽으로 영정을 짓밟을 기세였다. 그러나 영정은 피하기는 커녕 두 눈을 부릅뜬 채 희단을 노려보기만 하였다.
"멈춰라!"
그때였다. 어디선가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영정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퍽!"
눈을 떠보니 영정 앞에 푸른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희단은 다시 말고삐를 틀어쥐며 또다시 영정을 공격할 기세였다.
그 순간 영정은 쓰러진 청년의 허리에서 패검(佩劍)을 빼어들고 희단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영정의 모습에 희단은 겁을 먹었는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영정은 그제서야 자신을 구해 준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청년을 따르는 몇 명의 가신들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때였다. 화려한 의관을 갖춘 조나라 대신들이 말을 타고 급히 영정 앞으로 달려오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명령을 낭독했다.
"대왕마마의 성지가 내려졌소."
영정에게 성지를 전한 사람은 조나라 상경(上卿)인 곽개(郭開)였다.
그날로 영정의 인질 생활은 끝이 났다. 진나라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6년 동안 재위에 있었던 진나라의 소양왕이 별세하고, 태자인 안국공이 효문왕(孝文王)이 되었다. 그에 따라 영정의 아버지 이인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조나라는 서북의 강국인 진나라와 전쟁을 그치고 강화를 맺고자 영정과 주희를 진나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영정은 조나라를 떠나기 전에 자신을 구해 준 청년 문사의 이름을 수소문하였다. 연(燕)나라의 태자인 단(丹)이었다. 영정은 연 태자 단의 은혜를 언젠가 반드시 갚으리라 다짐했다.
2. 한 시대를 여는 사람들
태행산 남쪽에는 말이나 양을 방목하기에 좋은 풀밭이 많았다. 매년 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 태행산을 찾아 양이나 말을 풀어놓아 길렀는데 이 해 제일 먼저 그곳을 찾은 사람은 상당에서 온 이대퇴였다.
왕충을 만난 후 아홉 해가 지났지만 이대퇴는 세월이 무색하게 검은머리를 어깨에 드리운 채 더욱 훤칠하고 수려해졌다. 그가 몰고 다니는 양 떼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스무 마리가 약간 넘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대퇴 곁에는 어린아이 둘이 함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무척 한가로워 보였다. 화섭자로 불을 붙이려던 이대퇴가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먼 산이 아련하게 푸릇푸릇한 빛을 뿜어내는 가운데 양들은 아주 평화롭게 마음껏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양 떼를 쫓아 신나게 뛰어다니는 두 아이의 모습이 정겨워 이대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너른 풀밭에 털썩 드러누워 천천히 흰구름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매에요! 매가 양을 덮치려고 해요!"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이대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행산의 매는 양이나 말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적이었다. 과연 멀리 굶주린 매 두 마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먹이를 찾는 모양이었다. 매는 마침내 그 대상을 찾았는지 꾸욱하고 길게 소리 높여 울음을 토했다. 공중에서 기회를 엿보며 길고도 느리게 커다란 원을 돌던 매가 갑자기 갈색의 날개를 퍼득이며 쇠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는 쏜살같이 양 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양 떼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숫놈 두 마리가 두 눈을 부라리면서 매에게 대들었다.
풀밭에서 벌떡 일어난 이대퇴는 순간적으로 양과 매의 거리를 헤아렸다. 양을 지키는 사냥개가 요동을 치며 울부짖자, 그는 얼른 개를 진정시키고는 재빨리 활을 꺼내 화살을 댔다.
"와! 맞았다. 매가 맞았다!"
이대퇴가 활을 쏘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멋적은 표정으로 흘깃 여자아이를 보고는 활을 다시 등에 갈무리했다.
"와! 등 오라버니가 맞혔어요!"
화살에 맞아 추락한 매 한 마리가 풀밭에서 버둥거리자 이를 본 사냥개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먹이를 쫓아 내달렸다. 졸지에 짝을 잃은 다른 매는 하늘을 빙빙 돌며 감히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매의 습격으로 이리저리 흩어졌던 양 떼가 점차 평정을 되찾아갔다. 이대퇴는 사내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사내아이의 이름은 등와(騰蛙)로 열네 살 소년이었지만 어른처럼 체구가 당당하였다.
"잘했다, 등와야. 이제는 뫼에 들어가 멧돼지를 잡아도 되겠구나. 지금처럼 양군(兩軍)이 서로 맞붙어 싸우고 있을 때에는 너처럼 먼저 기선을 제압하는 게 중요하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할아버지, 저희에게 감추시는 게 있지요? 양군이 맞붙어 싸운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는 싸운 적이 있으시나요?"
등와가 사냥개의 입에서 매를 나꿔채며 물었다.
"아,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대퇴는 황급히 등와의 질문을 피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속이고 있어요. 엄마한테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싸움을 아주 잘하신다던데요, 뭐."
여자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앙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만두거라. 이런 난세에 그 누가 군대에 나가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다 지난 일이다. 너희들은 저 매나 잘 감시하거라."
이대퇴가 이렇게 변명을 하며 말꼬리를 틀자 여자아이가 다시 입을 삐죽였다.
"등 오빠, 이 매 좀 봐! 눈알이 부리부리하고 피빛이 맺혀 있어. 이 놈을 엄마 산소에 바치면 좋겠다."
여자아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능매(菱妹) 말이 옳다. 가자, 등와야! 네 엄마의 무덤으로 가자꾸나."
이대퇴가 오누이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앞장을 섰다. 잠시 후 산꼭대기에 먼저 오른 등와가 저쪽 산 너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기 보세요! 병사들이 오고 있어요."
그 말에 이대퇴는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많은 수레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구나."
그는 기마병의 수가 꽤 많으리라 짐작하고 얼른 등와에게 손짓했다.
"등와야, 빨리 양 떼를 언덕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거라."
영정이 진나라로 돌아가는 날은 청명(淸明)으로 결정되었다. 영정이 탄 이날의 수레 대열은 한단성을 떠나 남쪽의 태행 고도를 향하고 있었다. 업현(업縣)을 지나고 온성(溫城)을 거쳐 빠르게 남서쪽으로 내달리던 영정 일행은 한단을 떠난 지 이미 엿새째가 되어갔다. 이번 여행은 정말 지루한 일정이었다. 거리에 봄날의 따사로운 정경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한두 개 겨우 싹을 틔운 나무들이 황량한 벌판 위에 부는 바람과 부딪칠 뿐 한단성에서 보았던 거리에 그득한 수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앙상한 나무가 곳곳에 솟구친 시커먼 바위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쓸쓸한 벌판을 더욱 허허롭게 만들었다.
영정 일행은 깊은 계곡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벌판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영정은 수레 대열의 중간에 앉아 있었다. 투박한 비단으로 덮개를 한 세 칸짜리 마차의 가운데에 앉은 영정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타고 있는 수레는 전투에 쓰였던 수레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에는 전투에 사용되었던 수레를 귀족의 여행용으로 개조하여 타고 다니곤 했던 것이다. 마부 자리와 객실이 나뉘어진 수레는 먼지와 태양을 막는 덮개와 창이 달려 있어 안쪽에서 밖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영정은 난생 처음으로 그런 화려한 수레를 타보았다. 그는 연신 밖을 내다보며 낯선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어머니 주희의 팔을 끌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함양은 어때요? 한단성처럼 음산한가요, 냉랭한가요? 할아버님이 다스리시는 진나라는 조나라보다 강한가요?"
스물 여섯이 된 주희는 이미 소녀 때의 수줍음을 벗어 던지고 완숙한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줄곧 한단성에서 갇혀 살아 그런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표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주희로서도 처음 가보는 함양성이라 이것저것 물어오는 영정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부인, 곽대인께서 편안하신가 묻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수레의 맨앞에서 말을 타고 가던 수행원이 물었다. 주희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랐다.
"갈 길이 바쁩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혹여 곽대인께서 피로하신 건 아닌지 여쭙고 싶습니다."
"어머니, 곽가가 꼬리치는 거에요."
영정이 주희의 귀에 속삭였다. 그는 조나라 대신인 곽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란 모두 똑같다니까."
주희는 영정을 나무라며 남편 이인과 여불위를 퍼뜩 떠올렸다. 그동안 그녀는 인질 생활의 고통으로 미처 이인과 여불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던 영정은 냉랭한 주희의 표정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주렴을 제끼고 바깥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멀리 산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급히 양 떼를 구덩이에 숨겨놓은 이대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노라니 두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능매는 당나귀가 따라오지 않고 자꾸 뒷걸음질을 치자 얼른 뛰어가 당나귀를 살폈다. 당나귀는 죽은 매를 버리고 갈 수 없는지 연신 주둥이를 씰룩거렸다. 능매는 그런 영리한 당나귀가 기특해 빙그레 웃었다. 양 떼를 피신시키느라 미처 매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당나귀는 어떻게 기억했는지 신기했다. 이를 본 등와가 얼른 뛰어와 한 손으로는 매를 주워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능매의 손을 이끌며 길을 걸었다. 그때 멀리 기마병 몇 명이 그들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양 떼를 발견하면 안 되니 저 사람들의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리자. 능매야 어서 피리를 불어 봐."
등와의 말에 능매는 얼른 허리에서 갈마(葛麻)로 띠를 두른 단적(短笛)을 꺼내 불기 시작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벌판에 조악하면서도 청량한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빠는 우리에게 사냥을 나가래요.
활을 메고 산으로 올라가요.
제후들은 정벌에 나선대요.
짐승 떼도 무서워 도망가요. 엄마는 우리에게 밭을 갈래요.
가래를 메고 도랑을 지나요.
제후들은 정벌에 나선대요.
말발굽에 새싹들이 죽어요. 밭에는 싹이 죽고 잡초만 무성해요.
횃불은 끊이지 않고 남정네는 죽어가요.
정벌은 어느 해나 끝을 맺을까요?
우리 백성은 언제나 따사로운 햇볕을 쬘까요?
영정은 들리다 끊어지고 끊어질 듯 들리는 노랫가락에 따라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노래에 담긴 내용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했는데 그것이 영정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내용의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한 자 한 자가 영정의 머릿속에 깊이 심어졌다. 그러나 수레가 자꾸 덜컹거리는 바람에 조그맣게 들리는 가락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영정은 창 밖으로 목을 더욱 길게 빼고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정아, 너무 방자하구나. 사내대장부는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주희가 얼굴을 붉히며 영정을 나무랐다. 하는 수 없이 영정은 자리에 바로 앉으며 중얼거렸다.
"저 노래를 배우고 싶은데......"
"들에서 들리는 저런 가락이 어떻게 노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주희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본래 가기 출신이라 노래에는 정통했다.
"정아, 함양에 도착하면 궁중에서 좋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단다."
주희의 주의에 영정이 뾰로통해 있을 무렵, 앞서 달리던 병사들이 돌아와 곽개에게 보고했다.
"앞쪽 산마루의 흰 무리는 양 떼들입니다."
이 말에 얼른 영정이 물었다.
"양 떼 말고 노래 부르는 사람은요?"
"노래 부르는 사람은 양치는 계집아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얼른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오게."
영정의 마음을 알았는지 곽개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이대퇴와 오누이가 잡혀 와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병사들을 피해 수레 옆쪽에 나란히 섰다. 영정은 들에 사는 백성들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늙은이는 머리카락을 베로 동여메고 가슴은 반쯤 드러낸 채 한 손으로는 연신 긴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살이 벤 손바닥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마치 늙은 소나무의 마른 가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들을 뛰어다닌 사람답게 두 다리는 아주 튼튼해 보였다. 늙은이의 왼쪽다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여자아이는 여덟 살 정도 들어보였다. 비록 삼베옷에 갈옷치마를 입었지만 매우 정결한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들꽃을 꽂아 더욱 앙증스러웠다. 늙은이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어 있는 사내아이는 웃통을 벗고 있었고 허리에는 양가죽을 둘렀는데 건장하게 생겼다. 사내아이는 화살이 꿰어 있는 매를 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사냥개의 머리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비록 들에 사는 백성들이지만 굳센 의지와 우람한 체격이 영정의 마음을 압도했다.
기위(騎尉)가 늙은이를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늙은이는 자신의 이름이 이대퇴이며 조나라 상당 사람이고, 해마다 봄이 되면 이곳에 와서 양 떼를 방목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타지에서 만난 등와라는 사내아이는 부모가 죽는 바람에 자신이 거두었다고 했다. 영정 일행을 호송하는 기위는 오래 전에 조나라 군대에서 그 명성을 떨친 이대퇴를 알아보고 지나친 무례는 범하지 않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등와의 어깨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이 매를 네가 쏘았느냐? 정말 대단한 솜씨야. 어르신, 이 아이를 우리에게 주십시오. 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이대퇴는 안색이 변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 아이는 결코 노예가 아니외다. 그러니 남에게 팔 수 없소이다."
이 말에 기위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태도를 바꾸었다.
"옛날 체면을 보아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봐 주겠군. 여봐라! 여기 양 도둑이 있으니 한단성으로 압송하라!"
기위의 이런 행동에 등와가 참지 못하고 단검을 빼어 들었다.
"잠깐!"
이때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조나라 효성왕부의 태의 왕충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에 한산의 남쪽 언덕에서 이대퇴를 만난 적이 있었다.
"노형, 오랜만에 뵙는구려."
왕충은 이대퇴를 알아보고 곽개에게 그의 신분을 알렸다. 곽개가 기위에게 눈짓을 보내자 모두들 뒤로 물러섰다. 이때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영정이 느닷없이 수레에서 뛰어내리더니 등와 앞에 섰다.
"양치는 형, 노래가 아주 좋아요. 노래처럼 나를 따라 세상을 평정하고 싶지 않아요? 백성들에게 하늘의 빛을 던져주고 싶지 않아요?"
영정은 등와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의 어깨를 보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저 사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저기 조나라 병사들은 우리를 진나라로 호송하는 사람들일 뿐이에요."
등와는 영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는 할아버지와 능매가 꿈에도 그리는 하늘의 빛을 함께 얻자고 한다. 이렇게 양을 치면서는 도저히 그런 빛을 얻을 수 없어. 이 아이는 예사 왕손으로 보이지 않아.'
영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양치는 형, 무얼 그리 머뭇거려요? 사내대장부는 천하에 뜻을 두어야지, 양이나 치는 무리에 묻혀 살려고 그래요? 함께 가요!"
영정의 말은 등와의 가슴에 웅크리고 있던 웅지(雄志)를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사실 목동에 불과한 등와에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터였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우연이라면 우연인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등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영정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좋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등와는 흔쾌하게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이대퇴와 능매를 쳐다보았다. 영정의 제의도 빨랐지만 등와의 결정도 이에 못지않았다. 주희는 영정의 성격을 알고 있던 터라 일단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었다. 이대퇴 또한 등와의 기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의 선택에 이의 없이 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래, 장하다. 이 할아버지도 열다섯 살 때 군문(軍門)에 투신했는데, 너도 어린 나이는 아니지. 기러기의 날개는 높이 날라고 있지 예쁘게 보이라고 있는 게 아니란다. 보검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갈 수 있기를 이 할애비는 바라느니라."
이대퇴는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감추며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하던 양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등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능매는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라 눈물만 떨구었다.
"날씨가 어두워진다. 빨리 길을 떠나자!"
기위가 소리쳤다. 멀리 하늘 끝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등와가 앞쪽 수레에 타자 영정은 그의 등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수레가 막 떠나려고 할 때였다. 영정이 갑자기 수레에서 뛰어내리더니 한단에서 가져온 포폐(布幣;조나라의 화폐)를 한 줌 쥐어 이대퇴의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어르신, 염려놓으십시오.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곽개는 이런 영정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저렇게 속이 깊고 사람을 끄는 기운이 있으니, 혹여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곽개는 두 손의 땀을 옷깃에 훔치며 말의 허리를 세게 쳤다. 수레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하자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던 능매가 허리에 차고 있던 죽피리를 꺼내 등와에게 건넸다.
"등 오라버니, 이 피리 가져가."
영정의 호송 행렬은 밤을 세워 진나라로 향했다. 이들은 황하(黃河)를 건너고 낙양(洛陽)을 거쳐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마침내 진나라의 도성인 함양에 이르렀다. 함양의 궁전에서는 각지에서 도착한 국빈(國賓)을 맞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같은 대국에서는 소양왕을 문상(問喪)하기 위해 여러 명의 조례사를 진나라로 보냈다.
함양의 밤이 깊어갔다. 그러나 각국의 사신들이 묵고 있는 숙소는 횃불이 활활 타올라 한낮을 방불케 했다. 제례와 손님맞이에 피곤을 이기지 못한 시위들과 심부름꾼, 의원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적막 속에서 곽개가 머리를 푹 숙인 채 붉은 불빛 아래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여불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개를 드니 눈 앞이 축축했다. 자시가 넘자 사방에 이슬이 맺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 기(氣)를 수련한 곽개이지만 왠지 이날만큼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곽개 앞에 여부(呂府)의 총관을 맡고 있는 도선이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 도총관은 이미 한단에서 곽개와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도총관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굽혔다.
"상경께서 연일 수레를 이끌고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습니다."
실상 곽개가 진나라까지 영정을 호송한 첫번째 이유는 여불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날 여불위는 곽개에게 뒷일을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곽개는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도선에게 말했다.
"이보게, 도선! 오랜만에 보게 되는군. 오랫동안 못 본 사이에 입술에 기름기가 진득하구먼그려. 그런데 여공께서는 어째 아직 오시지 않는가?"
곽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멀리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상국(相國)께서는 너무 걱정마십시오. 장사치에 불과한 여불위가 감히 대인을 뵙습니다."
곽개는 얼른 앞으로 달려나가 여불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어이하여 나를 상국이라 부르십니까? 남들이 들으면 진짜로 알겠습니다."
여불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해본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미 조의 효성왕부에서는 유명무실한 존재이지만 상국의 지위로 상경을 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기쁜 소식을 전하고 약간의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우선은 경사를 축하하고, 다음은 왕손의 고충을 보살펴 주신 일에 감사를 드립니다. 예물은 여기 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여불위는 품에서 예물의 세목(細目)을 기록한 비단 두루마리를 곽개에게 건네주었다. 곽개는 기쁨을 억누르며 예물의 세목을 훑어보았다. 금관(金罐), 옥두(玉簪), 병대(屛帶), 주관(珠冠)은 물론이고 온갖 이름모를 금은보화가 나열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신(小臣)은 공(功)을 세우지 못해 작록(爵祿)을 받지 못했는데, 이런 후한 예물을 받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소왕손께서는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있고,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덕화가 넘쳐흐릅니다. 그 모습이 길인천상(吉人天相)이며 명대지고(命大志高)입니다. 소신은 단지 약간의 도움을 드렸을 뿐이지요."
곽개는 더욱 자신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진나라는 병마가 충분하고 백성이 넉넉하니 육국(六國)의 으뜸입니다. 흉금을 털어놓고 말씀드리거니와 옛날에 있었던 두 나라 사이의 틈을 없애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정말로 좋은 말씀입니다. 상국의 말씀대로 천하의 대세는 우리 진에 있습니다."
여불위가 큰소리를 치자 곽개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는 진나라에 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하하! 정말 기쁩니다. 옛말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감싸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놓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만일 장사를 두고 말한다면, 가격이 정해졌을 때는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곽개가 잠시 생각하다 되물었다.
"산다는 뜻은 무엇이며, 가격은 무슨 뜻입니까?"
"상국께서는 총명하시니 어떤 거리낌도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자한께서 말씀하시길, 좋은 장사치를 구해 사라고 하였지요. 여공께서는 왕을 재화로 삼아 나라를 사셨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최고의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이 곽모는 재주가 어줍고 배움이 낮아 감히 의논할 상대가 못 됩니다."
곽개는 속에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에게 직언을 하는 일은 곽개가 평소에도 매우 꺼리는 금기였으나, 오늘 밤은 이상하게 들뜬 분위기에서 술술 입을 열고 말았다. 순간 곽개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불위도 깜짝 놀란 눈빛이었다.
"상국께서 이렇게 자세히 아시다니 굳이 대세를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군요. 이제 천하를 놓고 나와 함께 공을 세우지 않으시렵니까?"
"소신은 단지 누추한 옷과 검소한 밥상을 구할 뿐, 결코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곽개는 여불위의 속마음을 확연하게 알았으나 일부러 대답을 피하였다. 여불위는 그가 몸을 빼려 하자 언성을 높였다.
"누추한 옷과 검소한 밥상이라! 그런데 어째서 상국께서는 요즈음 그렇게 살이 찌셨습니까? 그걸 일컬어 자하비(子夏肥)라 하지요. 상국께서는 한입에 조나라를 삼킬 수 있는데도 두 눈을 꼭 감고 될대로 되라고 그냥 놔두려 합니까?"
"아, 여공께서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십시오. 이 몸은 여공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두 사람은 비로소 뜻이 합치되자 곧바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방 깊숙이 들어가 은밀한 약속을 하기 시작했다. 곽개는 다음날 어떻게 진왕을 배알하고 국서를 올리며 각국의 사절들과 어떻게 교류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여불위와 밤새워 밀담을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도총관은 하인들에게 아침을 준비케 한 뒤 손수 삼과양심탕(參果養心湯)을 공손히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조금 쉬십시오. 내일 빈례(殯禮)는 바쁘기 그지없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러자 여불위가 그릇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바쁘다는 걸 왜 모르겠나? 하지만 누가 이 사람의 즐거움이 그곳에 있음을 알리오."
이때 밖에서 외침소리가 들렸다.
"태자마마와 왕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여불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이인은 진나라로 와서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었다. 조나라를 탈출하여 진나라로 들어와 이인이 처음으로 화양부인을 만날 때 여불위는 그에게 이름을 바꾸고 초복(楚服)으로 갈아입도록 당부하였다. 진의 효문왕은 초나라 출신의 화양부인을 매우 총애하였는데 여불위는 이 점을 간파하여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인에게 선수를 치도록 꾸몄던 것이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자초의 모습엔 왕족의 품위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붉은색 바탕의 꽃무늬에 화충(華蟲)이 수놓아진 조포(朝袍)를 걸친 자초는 눈빛이 탁하고 위엄이 없으며 신색이 불안해 보였다. 여불위는 주희에게 시선을 옮겼다. 주희 또한 마음에 격정이 일어나는 모양인지 애절한 눈빛에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으며 온몸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여불위의 마음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여불위는 떨리는 가슴을 보듬고, 이번에는 영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정은 여불위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여불위를 노려보았다.
'이 아이는 누구를 닮았을까? 이마가 넓은 걸 보면 자초나 주희를 닮지 않고 나를 닮았군.'
"정아, 어서 중부께 인사 올리거라."
자초가 영정에게 여불위를 소개하였다. 영정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가더니 여불위를 불공스런 태도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주희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정아, 중부께 큰절 올리지 않고, 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지."
그러나 영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여불위를 쏘아보았다. 여불위는 얼른 계단 아래로 내려가 영정의 손을 잡으며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왕손께서는 정말 건장하게 자라셨군요. 듣자 하니 기침이 잦고 몸에 열이 많다고 하시더니 그새 다 나으셨나 보옵니다."
주희가 미소를 지으며 여불위에게 대답했다.
"여대인께서 왕태의를 자주 보내주시어 우리 모자는 큰 병 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희가 눈물을 글썽였다. 인질 시절의 고통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자초가 곁에서 얼른 말을 거들었다.
"그렇소. 여공께서 많이 도와주셨소."
두 사람의 찬사에 여불위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제가 힘쓴 게 무에 있겠사옵니까? 어디까지나 왕태의의 인품과 의술이 뛰어났을 뿐이지요."
"그래도 어쨌든 이 모든 일을 여공께서 꾸며주셨지요."
주희가 다시 칭찬을 덧붙였다. 이때 도총관이 앞으로 나서더니 이들을 객청으로 안내했다.
"중당으로 드십시오. 왕비마마와 왕손께서는 금지옥엽의 몸이시니 너무 오래 서 있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영정이 계단을 훌쩍 뛰어오르며 붉은 칠을 한 대문을 활짝 열었다. 중당은 매우 화려한 건물이었다. 용조각의 대들보와 그림이 그려진 기둥이 큰 키를 자랑하듯 천정으로 치솟았고 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야명주가 걸려 있었다. 벽마다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은 주렴이 창의 품격을 높여 주었다. 옥석으로 다듬어 만들어진 의자 위에는 호랑이 가죽이 덮여 있었다. 영정이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자초에게 물었다.
"아바마마, 저 벽의 그림은 무엇이옵니까? 무슨 연유가 있사옵니까?"
"오, 저건 말이다. 우리의 선조이신 문공(文公)께서 황룡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란다. 나는 그 내용을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중부께서는 아실 거다. 네 중부께서는 모르는 게 없는 분이니까."
자초의 말에 여불위는 빙그레 웃으며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림의 가운데에 위치한 임금은 진문공으로,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의 사람이랍니다. 그 분은 녹지(록地)라는 곳에서 꿈에 황룡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옵니다."
"에이, 거짓말! 6백 년 전에 우리 영씨는 주천자(周天子)에게 목마를 위임받은 벼슬아치로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서쪽의 짜투리땅을 얻어 오랑캐가 되었다고 하던데요. 쓸데없는 거짓말로 사람을 놀리기에요!"
"그만하거라, 계속 듣자꾸나! 중부, 계속하세요."
주희가 두 눈을 부릅뜨며 영정을 나무랐다. 여불위는 영정이 난데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자 순간 당황했지만 주희의 공손한 청에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 그림은 진문공께서 진창이라는 곳에서 옥을 얻은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진문공 16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진창에서 사냥꾼들이 기이한 짐승을 잡았는데 돼지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하였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펴보았지만 그 짐승의 이름이나 내력을 몰랐습니다. 문공께서는 그림을 그려 각지에 붙여 무슨 짐승인지 알아보라고 일렀습니다. 이튿날 저녁에 어린아이 두 명이 그림을 보고 그 짐승의 이름은 미(媚)로 땅굴에 살면서 죽은 사람의 뇌수를 먹는 무시무시한 괴물임을 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문공께서는 그 짐승이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여겨 곧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칼로도 죽이지 못했고, 불에 태워도 죽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다시 그 어린아이들이 말했습니다. 미라는 짐승을 죽이려면 동남쪽 방향으로 뻗어 있는 송백가지를 잘라 그 짐승의 머리 가운데에 있는 작은 구멍에 꽂으면 곧 죽는다고 말입니다."
여불위는 잠시 숨을 돌린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두 아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라는 짐승이 갑자기 황소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길 '저 두 아이는 산비둘기의 화신으로 수컷을 잡으면 제왕이 되고, 암컷을 잡으면 패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문공께서 깜짝 놀란 사이 두 아이는 갑자기 산비둘기로 변하여 푸드득 하늘 높이 날아갔습니다. 정신을 차린 문공께서는 급히 산비둘기 두 마리를 따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에이, 따라가서 뭐해요? 그냥 화살로 잡았으면 됐을 텐데. 그런데요?"
영정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수컷은 먼저 날아가 자취를 감추었고, 암컷은 진창의 북피(北陂)라는 곳에 떨어져서 돌새가 되었답니다. 이에 문공께서는 그곳에 사당을 세워 주었습니다."
"아깝다! 정말로 아깝다!"
영정이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사당을 세우고 예를 올리는데 삼경이 되자 북피의 사구대(祀鳩臺) 위에 신광(神光)이 쏟아지더니 그 신광이 곧 수컷으로 변하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암수 두 마리를 모두 잡은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문공께서는 그렇게 지혜를 두루 갖춘 일대의 웅주(雄主)에 부끄럽지 않은 분이셨사옵니다."
영정은 그래도 무엇이 못마땅한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잡을 거면 멀리 가도록 놔두지 말아야지, 하필이면 멀리 날아가도록 놔둔담."
자초가 이런 영정을 꾸짖었다.
"신물(神物)은 핍박하는 게 아니란다."
"에이, 나 같으면 미라는 짐승을 풀어주고 그 비둘기 두 마리를 잡으라고 했겠네요. 그게 옳은 방법이 아닌가요? 이걸 일컬어 일거양득, 꿩 먹고 알 먹는다고 하잖아요."
영정은 제풀에 신나 혼자 씩씩거렸다. 그런 영정의 모습에 여불위는 속으로 놀랐다. 영정의 버릇없는 태도에 자초가 더 이상 화를 못 참겠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정아, 그 못된 입을 어서 다물지 못하겠느냐? 선조(先祖), 선왕(先王)을 감히 욕되게 하다니 너는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자초의 호통에 여불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진나라는 하늘의 뜻을 잘 따르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상벌(賞罰)에 믿음이 있고, 신하는 충성스럽고 자식은 효도하며, 인의(仁義)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오늘과 같은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사옵니다. 또한 왕손의 증조부께서는 일찍이 동주(東周)를 멸하시고 천하를 다스리는 구주보정(九州寶鼎)을 함양으로 옮기셨사옵니다. 그리고 천 리가 넘는 땅에 남양(南陽), 검중(黔中), 무(巫), 남제군(南諸郡)을 설치하셨사옵니다."
"이런 걸 천명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진나라를 찬탄하는 여불위의 말에 자초가 동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을 영정은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만들 두세요. 그렇다면 상당군은요, 얻었다가 잃은 땅이 아닌가요? 지금 조나라의 수중에 있는데 그 나라에서 저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주희도 영정과 같은 생각인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상당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아세요? 두고 보세요. 제가 반드시 그 땅을 빼앗고 말 테니까요. 조나라도 반드시 멸망시키겠어요."
영정이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런 영정의 모습에 여불위가 웃으며 말했다.
"왕손께서 조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요? 그렇다면 무슨 방책이라도 있으신가요?"
"흥! 장수 백 명에 백 만의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 성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리며 초토화시켜 나간다면 결국 한단성에 이르겠지요."
한단성에서 오랜 고통을 겪은 영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두 눈에서 섬광이 일어났다.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병법의 최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손께서는 이 말을 명심하옵소서."
그러나 영정은 여불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주희는 영정이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우쭐해졌다.
이때 밖에서 궁인 한 사람이 들어와 답청(踏靑)에 쓰일 수레가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하자 주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뛸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희는 오락을 즐기는 여자였다. 그녀는 영정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자초와 여불위는 다음날 있을 소양왕의 빈례로 도저히 몸을 뺄 수 없는 형편이었다.
3월 초사흘은 진나라 풍습으로 답청일이었다. 이날 백성들은 부귀빈천(富貴貧賤)을 가리지 않고 모두 강둑으로 나와 계음(戒飮)을 하고 푸른 새싹을 밟았으며, 어떤 사람은 술을 준비해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하고 춤으로 제례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주희의 마음은 온통 답청일에 쏠렸다. 그녀는 곧바로 영정을 데리고 여부를 떠났다. 거리에는 화사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뺨을 스치고, 마을은 마냥 평화롭기만 했다. 주희가 탄 수레는 순식간에 위수에 이르렀다. 강물은 너무나도 맑고 푸르렀으며 부드럽게 부는 바람에 물결이 가볍게 주름을 세우곤 했다. 강변 양쪽에는 가느다란 버드나무가 늘어지고 들풀 향기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날까지도 소양왕의 장례는 모두 끝나지 않았지만 답청에 나선 백성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또래끼리 서너 명씩 짝을 이루거나, 노인을 모시고 혹은 아이를 이끌고 가족 모두가 놀러오기도 하였다. 머리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레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아 멋을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유유히 강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잇속에 밝은 장사치들은 떡이나 과자를 비롯하여 갖가지 술과 고기를 길가에 펼쳐놓고 팔았다. 곳곳이 이미 조그마한 저잣거리가 되었다. 들녘과 산마루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저마다 봄을 즐기고 있었다. 주희는 이제껏 이렇게 활기찬 바깥 구경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하면서 한단성 시절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억압된 생활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롭게 살게 되었음을 실감하였다.
영정 또한 천진난만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영정과 등와, 두 아이는 수레 뒤를 따르며 강물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길가의 버드나무를 꺾으면서 앞서거니뒤서거니 달음질을 쳤다. 수레는 위수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놓여 있는 길을 몇 차례 지나 이윽고 넓게 펼쳐진 초원에 멈추었다. 초원의 한가운데에는 헐우정(歇雨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헐우정은 초가지붕에 나무를 엮어 만들었지만 누추하거나 더러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질박하고 그윽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헐우정에서는 이미 청년 공자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곡예를 펼쳐 보이는 곡예사들을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곡예사들은 정자 아래에서 장대를 발목에 걸고 얼굴에는 가면을 쓴 채 서로 밀고 치면서 곡예를 펼치고 있었다.
영정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의 깊게 곡예사들을 살펴보았다. 음악은 먼 곳에서 들어야 하고 춤은 가까이에서 감상하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래도 곡예를 자세히 보려면 그쪽으로 다가가야 했다. 가까이 가 보니 길고 짧은 장대가 높게 또 낮게 걸렸으며 가면도 여러 색깔로 울긋불긋하게 그려져 있었다. 곡예사들의 기예는 정말 출중했다.
영정은 한단성에서도 장대를 발목에 걸고 노는 기예를 본 적이 있었지만 고천무투(高踐舞鬪)라고 불리우는 이 싸움춤은 처음 보았다. 언제 왔는지 등와도 영정 곁에서 아무런 말 없이 장대 싸움을 구경하였다. 영정은 눈 한번 껌벅이는 일 없이 구경에 몰두했다. 그 눈동자가 장대 싸움에 흠뻑 취한 듯했다.
어딘가에서 징소리가 울리자, 곡예사들이 순식간에 물러나고 갑자기 주변에 정적이 찾아왔다. 구경꾼들은 다음에 등장할 장면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처음에는 천천히 울리다 갈수록 급하게 울리더니 마침내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듣는 이들의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들었다. 구경꾼들의 심장 박동까지 빠르게 만들던 북소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그 소리가 뚝 멈췄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드디어 푸른 색 깃털옷을 걸친 곡예사가 다섯 척이나 되는 장대를 짚고 푸른 얼굴에 괴기스런 이빨을 드러낸 역귀(疫鬼)의 가면을 쓴 채 세 개의 등나무 고리를 돌리며 무대에 나타났다. 그는 학처럼 허리를 굽혔다 닭벼슬처럼 벌떡 일어서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휘청거리기도 하였다. 갖가지 곡예를 하는 와중에도 손은 등나무 고리를 쉬지 않고 돌렸다. 세 개에서 하나 둘 늘리기 시작하여 어느덧 아홉 개로 늘어난 등나무 고리는 무지개처럼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쥔 채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곁에서 쉬고 있는 곡예사들의 이마에도 긴장감으로 땀방울이 비오듯 쏟아졌다.
영정과 등와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내지른 함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곡예사의 재주로 주위는 너무도 고요했었다. 헐우정 안에서 공자들의 수좌(首座)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손을 들어 공연을 중지시켰다. 곡예사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가 성큼성큼 영정에게 다가오며 소리질렀다.
"어디에서 온 미친 놈들이기에 감히 흥취를 깨느냐?"
주희 또한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던 터라 영정의 고함이 맹랑하다고 생각하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곁에 있던 궁인이 젊은 공자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기 키가 작은 공자는 창평군(昌平君)이고, 키 큰 공자는 창문군(昌文君)이옵니다. 두 공자는 화양부인의 조카들이지요. 함양에서 첫째 둘째로 꼽히는 수재들이옵니다. 저기 뒤에 서 있는 작달막한 장사가 호랑이 아들로 소문난 몽무(蒙武)입니다."
공자들의 신분을 알자 주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초가 태자로 책봉되는 데 제일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 바로 화양부인이었다. 그녀의 친척들과는 가능한 한 시비가 붙지 않는 게 영정으로서는 좋았다.
난데없는 호통에 영정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 미친 꼬마 놈아! 귀가 먹었느냐? 무엇 때문에 우리 답청 의식을 깨느냔 말이다!"
"뭐라고요? 답청 의식이라니?"
영정이 놀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런, 무식장이 같으니라고!"
창문군이 영정에게 소리쳤다. 그는 영정을 비웃으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놈은 답청 의식도 모르는 촌놈이야!"
그러자 창평군이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말렸다.
"이보게나, 그만두게. 아직 어린아이가 아닌가?"
"물론 용서는 해 주겠지만 적어도 머리를 조아리고 제가 진 죄는 빌어야지요."
창문군이 영정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무어라고, 촌놈?"
영정은 자신이 비웃음의 과녁이 되자 갑자기 한단에서 당한 치욕들이 되살아났다. 이제 함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왕손으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런 곳에서 치욕을 당하자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영정은 창문군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빌라고? 툇! 눈깔 삔 놈아! 도리어 네 놈이 와서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어라!"
영정이 악을 썼다. 가슴 깊숙이 쌓인 그동안의 분노와 치욕과 복수심이 일거에 폭발하는 듯했다.
"이 꼬마 놈이 간덩이가 부었군!"
창문군이 어처구니없어 혀를 끌끌 찼다. 공자 체면에 직접 나서서 어린아이를 공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데리고 온 가신에게 영정을 잡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때 잠자코 사태를 지켜보던 등와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가더니 양가죽 채찍으로 창문군의 가신을 공격하였다. 그들이 미처 등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뺨과 손등에 채찍을 맞자 창문군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곁에서 공자들을 호위하는 수십여 명의 병사들이 영정과 등와를 노려보며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창문군이 주희가 타고 있는 수레를 엎어버리고 영정과 등와를 잡으라고 손짓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주희를 모시고 있던 궁인이 밖으로 뛰쳐나가 이들을 가로막았다.
"무엄하도다!"
궁인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한 창문군과 창평군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그 늙은 궁인을 궁전에서 본 적이 있었다. 병사들도 달려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주희가 수레의 주렴을 걷고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진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몽작(蒙작)의 아들인 몽무가 왕비를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고개를 돌려 호통을 쳤다.
"이 밥통들아, 감히 왕비마마께 죄를 범하려 들다니!"
두 공자들도 뜻밖의 사태에 뒷걸음질을 쳤다. 병사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자 홀로 곡예를 하던 그 곡예사도 가면을 벗고 허리를 조아렸다. 문득 곡예사의 눈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왕비의 얼굴이 들어왔다. 주희 또한 곡예사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그를 힐끗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가마에 실었다. 그렇게 답청일의 소동은 끝이 났다.
영정은 수레를 타고 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떨군 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는 함양에 희씨 망나니와 같은 불량배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희가 탄 수레가 멀리 사라지자 곡예사는 무엇에 홀린 듯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창문군이 그 모습을 보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노애, 간덩이가 부었구나!"
창문군의 호통에 그제서야 노애는 정신을 차린 듯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화양부인은 주희가 답청에 나섰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창평군 형제를 궁중으로 불러 사죄토록 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여불위는 소양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서둘러 궁으로 들어갔다. 도총관은 여불위의 수레가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천천히 지난날을 회상해 보았다.
'여공께서는 한단에서 이인 공자를 알고 난 이후 목숨을 바쳐 그를 도왔다. 이번 소양왕의 장례만 하더라도 겉으로는 태자가 주재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모두 공이 하지 않았는가. 무사(巫師)가 복(復) 자를 외칠 때부터 소렴(小斂)과 대렴(大斂)은 물론이고, 관을 만드는 일, 번잡한 호상(護喪)의 일에까지 모두 공의 차지가 아니었던가?'
도총관 자신은 총관의 신분이라 심부름만 제대로 하면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여불위의 행동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오늘 빈례도 공이 맡아 하지 않는가? 몸이 열 개라도 아마 버텨내기 어려울 거야. 공 곁에서 일을 도울 만한 신동(神童)을 한 명 추천해야겠어.'
얼마 후 함양궁에서 슬픈 가락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도총관은 다섯 살 난 아이를 안고 성의 서쪽 지역에 있는 옥천주루(玉泉酒樓)에 올라 창가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곳처럼 누대가 있는 술집이 함양에서는 얼마 전부터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망 좋은 창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오백 전의 원폐를 선불로 예약하기도 하였다.
도총관의 품에서 다섯 살 난 꼬마 신동은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빈례의 행렬은 내궁의 침문(寢門)에서 출발하여 고문(庫門)에 이른 다음에 문무백관과 각국 사신들의 송례(送禮)를 받고, 함양궁의 고문(皐門)을 나와 관서구(官署區), 전사구(傳舍區)를 거쳐 종실(宗室)과 대신들이 사는 주택구(住宅區)를 통해 도총관이 앉아 있는 주루의 서시구(西市區)에 도달하면 마지막으로 영구는 서문 밖으로 나가 왕릉에 묻히게 되었다. 거의 준공이 끝난 소양왕의 수혈(壽穴)은 관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은 하관이 끝나면 모두 종결되었다. 왕궁에서 능묘까지의 거리는 무려 40여 리였다.
도총관은 꼬마 신동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키는 탁자 높이보다 약간 크고 머리는 헝클어져 엉망이었지만 살구씨 같은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하여 총명해 보였다. 아직 젖을 떼지 않은 그 얼굴에는 천진난만함이 가득하였다. 이 아이는 웬만한 경전은 모두 탐독하여 줄줄이 외우고 다녔다. 이름은 감라(甘羅)로, 그의 조부는 승상을 지낸 바 있는 감무(甘茂)였다. 감무는 느지막한 나이에 진왕에게 죄를 짓고 홀로 제나라로 달아나 그동안 쌓아온 명예를 잃었다. 그 바람에 가문은 몰락하였으나 감라는 태어나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세 살 때 진율(秦律)을 썼으며, 네 살 때에는 경전의 구절을 들어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지혜로 삼노(三老)를 이기기도 하였다. 자연히 감라는 뭇사람에게 신동이니 재인이니 하고 칭송을 받았다. 널리 현사들과 교분을 맺었던 여불위는 이런 감라를 아무런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와, 방상씨(方相氏)가 왔구나. 인혼번(引魂幡)의 그림은 정말로 잘 그렸어."
창밖을 바라보던 감라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도총관이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영구를 실은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 앞에는 흰옷을 입은 금궁(禁宮)이 무리 지어 오고 그 뒤를 4대의 인번거(引幡車)가 따랐다. 도총관이 감라를 시험하기 위해 슬쩍 물었다.
"얘야, 인번거에는 무얼 꽂느냐? 너무나 알록달록하구나."
"앞에는 청룡과 주작을 꽂고, 뒤쪽에는 백호와 현무번을 꽂는데 이게 바로 사령(四靈)이며, 사방을 다스리는 영물을 나타내지요. 가운데에 꽂는 인번거는 위쪽 막대를 가로지르고 아래막대를 똑바로 세우는데 위쪽에는 해, 달, 별 그림을 그리고, 중앙의 신룡(神龍)은 소양왕의 혼령을 이끌고 천궁(天宮)으로 모셔가는 영물이지요. 그리고 곁에는 잡귀를 쫓는 방상씨가 호송을 하지요. 아래에는 현학(玄鶴)과 비렴(飛廉)이 있는데 모두 동반자의 하나에요. 수레가 멈췄어요. 방상씨를 잘 보세요. 머리에는 투구를 뒤집어쓰고 손바닥은 갈색의 곰가죽 같으며 방패와 검을 들고 있는 저 모습, 너무나 위엄있어 보이지 않나요?"
도총관은 꼬마 신동의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지나자 48장의 소백견당(素白絹幢)이 지나가고, 그 뒤를 이어 영구를 실은 수레가 뒤쫓았다. 감라가 또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예순네 필의 말이 영구를 끄네. 저건 육가대례(六駕大禮)라고 해서 천자만이 배향할 수 있는데......"
"이봐, 꼬마 신동! 소양왕은 동주를 멸망시켰으니 천자가 아니냐? 관향(棺향)도 그래서 3관 4향으로 맞추었어. 보아라, 뒤에 있는 게 내관인데 바로 저곳에 소양왕의 유체를 염했단다. 그러면 수레를 끄는 사람들은?"
"누가 그걸 모르겠어요? 천자의 예에 따라 좌우에 각기 150명씩 배치하잖아요."
감라가 얼른 도총관의 질문에 답했다.
"맞았어. 바로 그렇지."
도총관은 감라의 영특함에 마음 속 깊이 탄복했다.
잠시 후, 소양왕의 유해가 지나고 뒤를 이어 소양왕비의 영구를 실은 수레가 뒤따랐다. 그녀는 이미 선화(仙化)한 지 오래되었지만 이날 소양왕과 합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예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 뒤를 그릇과 의복, 식품을 실은 수레와 마차가 이어졌다. 잠시 조용하던 감라가 놀라 소리질렀다.
"오늘에야 비로소 <주례(周禮)>에서 말하는 물품의 내용을 알았어요. 종(鍾), 형(馨), 사죽(絲竹), 부극(斧戟), 도검(刀劍), 오곡(五穀), 육축(六畜)도 빠짐없이 갖추었군요. 필요한 물품이 저렇게 많을 줄이야."
"무엇을 천자의 위용이라 하겠느냐?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
도총관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열두 번째 수레에 타고 있는 아름다운 처녀도 함께 매장되나요?"
감라가 수레에 타고 있는 한 여인을 가리켰다.
"그렇단다. 저 처녀의 이름은 한희(韓姬)라 하는데 천상으로 가는 소양왕의 동반자가 되지. 여공께서 소양왕을 위해 3천 금을 주고 산 여인이란다. 다른 수레에 타고 있는 궁녀와 환관도 매장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느니라."
"너무나 잔혹하군요.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어린 감라의 입에서 저주의 말이 튀어나왔다.
"하기야 진목공은 매장자가 170여 명으로 대신들도 매장을 면치 못했다고 하던데, 오늘은 단지 수명에 불과하니 이것만 해도 세상이 좋아졌다는 징조라 하겠지요. 아, 제가 시를 읊을 수 있다면 오늘 새롭게 황조(黃鳥)를 지을 수 있을텐데요."
도총관이 갑자기 손을 들어 감라의 말을 막았다.
"드디어 모두들 오는군."
그러자 감라가 목을 길게 빼고 중얼거렸다.
"임금, 태자,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조나라 상경 곽개 등등 천하의 군웅들이 오늘 모두 이곳에 모였군요."
장례 행렬의 끄트머리가 친척이 탄 수레였다. 제일 앞의 수레 가운데에 효문왕, 왼쪽에 태자 자초, 오른쪽에 한나라 항혜왕과 아홉 살 된 왕손 영정이 탔다. 영정은 머리를 묶고 상복을 입었는데 훤칠한 이마가 돋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정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곤 했는데 그 위풍이 너무도 당당했다.
"꼬마 신동, 수레에 탄 사람의 인물 좀 평해 보아라."
도총관은 감라의 통찰력을 다시 시험하고 싶었다. 그러자 감라는 가슴을 펴고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효문왕마마는 허기(虛氣)가 차고 신색(神色)이 좋지 않으시니 병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갔으며, 태자마마는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기도(氣度)가 부족하고, 한왕(韓王)은 마치 주인을 모시는 노예의 상이니 제왕이 되기는 틀렸어요."
감라는 거리낌 없이 제나름대로 왕족들을 평가했다.
"단지 왕손마마만이 이마가 넓고 코가 우뚝하며 눈이 예리하고 얼굴빛이 강직한 것이 아마 가슴에 깊은 뜻을 품고 있을 거에요. 하늘과 땅을 자신의 띠집에 놓아둘 수 있고, 세상 만물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 수 있는 배짱이 든든해 한세상을 풍미할 군왕의 상이에요. 소문에 왕손마마는 밤마다 글을 읽으면서도 성격은 삐뚤어졌다고 하던데, 실은 붉은 주렴이 황제의 상을 덮고 군왕의 상만 드러내 주기 때문이지요."
"그래? 왕손마마는 다른 데가 있군. 그렇다면 두번째 수레에 타고 계신 여공은 어떠냐?"
"묻지 않으시는 게 차라리 좋겠어요. 저도 말은 않지만 마음 속으로 놀라고 있거든요."
도총관은 감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묻자 감라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여공은 아직 어떠한 직책도 받지 못했지만 조만간 승상(丞相)의 직위를 받을 천기(天氣)를 타고났습니다. 하지만 사마귀 앞에 놓인 참새처럼 위험합니다. 진무왕(秦武王;BC 310-308년)이 붕어하자 계발(季發)이 반란을 일으키고, 소양왕이 친정(親政)을 하자 사귀역모(四貴逆謀)라는 반란이 있었듯이 지금 함양의 공기는 달무리 속에서 밝은 빛이 나오는 형상입니다. 여공은 그런 위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도총관은 감라의 말에 혀를 내두르며 이 아이를 여불위에게 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3. 여불위의 야심
소양왕의 친상(親喪)이 끝나자 함양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하면서도 평안한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약한 효문왕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국사(國事)를 태자인 자초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그해 말 우유부단한 자초가 효문왕의 뒤를 이어 장양왕(庄襄王)에 올라 진나라가 왕을 칭한 이래 다섯번째 군주가 되었다.
자초는 성격이 유약하고 정신이 맑지 못했는데, 특히 한단에서의 핍박받던 인질 생활로 인해 그는 모든 일에 겁을 먹고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에 여념이 없던 자초는 골치아픈 조정의 일이 고역일 뿐이었다. 보좌에 앉아 빛나는 관(冠)과 면(冕), 포(袍)와 홀(笏)을 드날리는 문무대신을 마주하면 왠지 불편하고 괴로웠다. 유창한 언사로 지시를 내리고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정의 일을 집행하는 임금의 일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좋아했으며 구속받지 않고 어디든지 자유롭게 나다니는 생활을 즐겼다. 늙어 죽을 때까지 즐거움만을 탐닉하면서 한세상을 살고 싶은 자초에게 낯선 함양궁은 그야말로 감옥이었다. 그는 대신들의 공경 또한 거짓이라고 여겼다. 굽신거리는 신하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비웃음과 반감이 교차되었다. 자초가 믿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 주고 왕으로까지 밀어준 여불위 하나뿐이었다.
장양왕이 여불위를 우승상(右丞相)으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내리자 조야(朝野)가 들끓기 시작했다. 일개 장사치가 한 나라의 국정을 통솔한다는 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곧바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일으켰다. 그들은 연일 궁정에 나아가 그 부당함을 상주하였고 군현(郡縣)의 관리도 이에 가세하여 상소를 올리며 간언했다. 그러나 장양왕은 신하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이들을 외면하고 정사를 소홀히 했다. 그는 날마다 주희와 더불어 오락에 빠졌고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여불위에게 위임했다. 사람들은 장양왕이 혼미와 용렬함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그 화살을 여불위에게 돌렸다. 평소 여불위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 곁을 떠났고, 교분이 없던 사람들은 글을 올려 통렬하게 비난했다. 심지어 길에 나섰다가 검을 빼어 들고 달려드는 사람 때문에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함양성은 이 일로 한동안 시끌거렸다. 여불위는 이번 사태에 인생을 걸었다. 만일 쉽게 물러난다면 그의 미래는 곧바로 진흙탕일 터였다. 여불위는 그 특유의 승부 근성을 살려 권력을 서서히 장악하면서 함양의 구관(舊官)들과 일대 격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중원의 서쪽에 치우쳐 있어 이웃 나라들에게 오랑캐라는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검소하고 질박하여 중원의 음란한 기풍에 오염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불위가 함양에 온 이후로 민풍(民風)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 비단이 쏟아지면 내일은 주옥이 흘러들어 오는 등 매일같이 천하의 신기한 물품들이 함양성에 속속 나타났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불위의 집에 들락거리며 시정(市井)의 잡일에서 천하가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함양성에 퍼뜨렸다. 하지만 여부가 평안하고 활기찰수록 함양성 귀족들의 원한과 질시는 더욱 깊어만 갔다.
여불위가 함양궁 바로 옆에 자리한 우승상부로 거처를 옮긴 다음 날, 함양성의 모든 귀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우승상의 집들이에 초대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불위는 수많은 금은보화를 들여 우승상부를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으로 꾸며놓았다고 하였다.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오만과 편견, 그리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너도나도 초대에 응했다. 더욱이 이번 집들이에는 장양왕도 친히 참석한다고 전해졌다.
연회는 새로 옮긴 여부의 후원에 자리한 비하각(飛霞閣)에서 열렸다. 이 누각은 일찍이 진무왕이 당시 상국이었던 감무에게 하사한 건물이었다. 소양왕 연대에 감무가 죄를 짓고 제나라로 달아난 뒤부터 이 곳은 폐쇄되어 점차 황폐해져 갔다. 그러던 차에 여불위가 함양에 건너와 수천 금을 주고 이 저택을 사들여 모든 건물과 정원을 새롭게 꾸몄다. 후원의 넓이는 오십 무(畝)에 가까웠다. 정자와 누대가 이곳저곳에 우뚝 들어섰고, 맑은 호수가 그윽한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시인 묵객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정원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졌다. 시나 노래를 읊을 수조차 없었다. 도저히 말이나 그림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황혼이 서서히 밀려왔다. 비하각의 종소리가 사방으로 은은하게 울려퍼지면서 연회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개인이 마련한 연회였기에 사람들은 예법에 그다지 구속받지 않으며 마음대로 정원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었고, 무대에서 펼쳐지는 가기들과 무희(舞姬)들의 솜씨를 감상하였다.
이윽고 장양왕과 왕비 주희가 등장해 상좌를 차지하자 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여불위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손님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였다. 태후가 된 화양부인의 조카 창문군과 창평군 형제도 연회에 참석하였다. 강성군(剛成君) 채택(蔡澤), 대장 몽작, 왕흘(王흘), 장당(張唐)은 물론, 대부장 왕관(王관)을 비롯해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자리하였다. 귀빈석의 맨끝에는 꼬마 신동으로 소문난 감라가 여불위의 모사(謀士)로 초청되었다. 이들 가운데 제일 바쁜 사람은 역시 도총관이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고 일일이 손님을 맞이하여 좌석으로 안내하였다.
잠시 후,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자 누각에는 향목수지촉(香木獸脂燭)이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노랫가락이 은은하게 퍼지고 요염한 무희들이 교태어린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각기 즐거움을 탐닉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때 도총관이 박수를 세 번 치자 하인들이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에 탁자에 있는 음식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참으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완벽한 연회였다. 사람들은 여불위의 철저한 준비와 성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북소리가 둥둥 울리자 붉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무대로 뛰어올라 왔다. 본격적인 여흥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제비돌기를 하였다. 북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붉은 옷의 사내도 더욱 빨리 회전하여 멀리서 보면 붉은 화염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넋을 잃었다. 좌중은 너무도 조용했다. 마침내 북소리가 그치자 사내는 곡예를 마치고 두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저 놈 대단하군, 단숨에 180번은 돌았을 거야."
대부 채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했다.
"아니, 280번은 돌았을 겁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던 창문군이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저 자가 대체 누구요?"
"대인, 저 자가 바로 함양에서는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곡예사 노애입니다. 바람둥이라고도 하지요."
"아, 저 자가 노애라구요? 바람둥이가 정말로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군."
노애의 연기는 이미 끝났지만 사람들의 박수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장양왕은 주희의 품에 기대어 흐릿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노애가 물러가자 사람들은 다시 끼리끼리 모여 앉아 흐들갑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비하각의 밤은 점점 깊어갔다. 고기 굽는 냄새와 술향기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연회가 끝날 무렵이 되자 사람들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 정신을 못 차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상에 엎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이들을 구경하던 감라는 매우 침울한 얼굴이었다. 이를 본 여불위가 웃으며 물었다.
"동자는 어찌하여 그리 우울하오?"
"은상(恩相)!"
감라가 죄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물건을 보니 마음이 상해서 그렇습니다."
"아?"
여불위는 그제서야 자신이 감라의 마음을 상하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상앙(商앙)이 백성의 인심을 얻기 위해 꾸몄던 '입목건신(入木建信)'의 고사가 떠올랐다. 그러자 여불위는 곧바로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가 사방에 대고 소리쳤다.
"귀빈 여러분, 잠깐만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여모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여기 제 곁에 있는 신동 감라가 석 잔의 권주(勸酒)를 받아마셔도 취하지 않고, 이 여모가 내는 수수께끼를 맞춘다면 이곳 비하각과 후원은 물론이고 딸린 하인들까지 모두 원래의 주인이자 감무공의 적손인 감라 공자에게 돌려드리기로 약속합니다."
"비하각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고?"
여불위의 말에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주희도 눈을 둥그레져서 여불위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웅성거렸는데 몇몇 사람들은 여불위가 취했을 거라고 쑤근대기도 했다.
하지만 감라는 여불위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아가 도총관이 건네는 권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모두 마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여불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수수께끼를 하나 내겠습니다. 잘 듣게나. '눈이 튀어나오다. 배가 불룩하다. 싸움에 져도 다시 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감라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좌전>에 나오는 구절로 송화원(宋華元)이 전쟁에 지고도 되돌아 도망온 이야기를 말함이지요."
감라의 명쾌한 답에 여불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총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도총관이 곧 비하각의 문서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 감라에게 건네주었다.
"축하하오. 감라 동자!"
그것을 받아든 감라의 손이 떨렸다.
"은공께서 입목건신하는 일에 비한다면 제가 얻은 건 아주 미미합니다."
감라가 여불위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옛집을 찾은 기쁨은 차마 감출 수 없는지 좌중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대왕마마, 왕비마마 그리고 여러 대신들께서 이곳 비하각을 방문해 주신 일은 제게 과분한 영광이옵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사옵니다."
여불위가 감라에게 비하각을 건네주면서 보여준 믿음의 효과는 매우 컸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여불위에게 쏟아지던 멸시와 음모의 기세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여불위가 전권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 있다면 이제 오로지 소양왕의 원로 대신들뿐이었다. 그들은 양천군(陽泉君)을 영수로 삼고 하나로 똘똘 뭉쳤다. 양천군은 화양부인의 오라버니로 창평군과 창문군의 외숙이었다. 그는 소양왕으로부터 양천의 땅을 봉지로 받았기 때문에 양천군이라 불리웠다. 그는 평시에도 항상 호위병을 대동하고, 무리를 모아 사당(私黨)을 맺어 권세가 대단하였다. 여불위가 일찍이 자초를 태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공작을 펼 때 그는 여불위에게 매수를 당하여 효문왕 앞에서 자초의 칭찬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도 자초를 장양왕으로 옹립하는 데 공이 크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던 차에 여불위가 우승상으로 임명되자 양천군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천군이 밀실로 두 조카를 불러들였다.
"여씨가 조정을 장악하자 수많은 백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혼군(昏君)이 궁궐에 들어앉아 정사를 돌보지 않으니 나라꼴이 엉망이구나. 내 기회를 봐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간언을 하려는데,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을 폐할 생각이다."
이 말에 창평군이 깜짝 놀라 양천군을 극구 말렸다.
"그렇게 하시면 아니 됩니다. 우리 진나라는 몇 해 사이에 두 임금을 잃어 민심이 흉흉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문은 세세로 임금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난신적자의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창평군의 말은 양천군을 더욱 분노케 할 뿐이었다.
"자초는 서자이다. 본래 내세워서는 안 될 인물이었어. 오로지 내 힘으로 임금이 되었을 뿐이야. 지금 국왕의 어리석음이 극에 달해 장사치를 승상으로 중용해서 조상을 욕되게 만들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내가 세웠으니 다시 내가 폐위시키겠다. 그게 어째서 역모란 말이냐? 간언해서 듣지 않으면 반드시 폐위시켜 내쫓고 말겠다!"
양천군의 굳은 결의에 창문군과 창평군은 더 이상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미 양천군은 만반의 준비를 끝낸 것처럼 보였다.
며칠 후 장양왕과 주희는 상림원(上林園)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이 일은 곧바로 양천군에게 알려졌다. 그는 필요한 인마(人馬)를 요소요소에 배치한 후 직접 수레를 끌고 상림원으로 달려갔다. 상림원은 위수의 북쪽 강변에 있는 함양궁과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곳은 왕이 사냥을 하면서 쉬는 숲으로 훗날의 일이지만 진시황은 이곳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아방궁을 지었다.
자초는 주희와 함께 상림원에 도착했다. 맑은 공기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듯한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뻗어올라 하늘을 가리고 곳곳에서 꾀꼬리 울음소리가 애잔하게 들려왔다. 햇빛이 가려진 숲에서 뿜어내는 음울한 들풀 향내가 상념에 젖게 했다. 자초와 주희는 손을 맞잡고 위수가에 지은 정자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바람에 살랑이는 물결을 감상하였다. 멀리 기러기떼가 강변으로 날아내렸다. 그런 정경을 보던 주희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 했다.
"마마, 이 정자의 이름이 아직 없는 줄 아옵니다. 비홍(飛鴻)이라 지으면 어떨까요?"
그 말에 장양왕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은 이름이오. 기러기가 날아드는 정자라! 이처럼 멋진 곳에 음악과 춤이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장양왕의 말을 들은 신하가 궁중 가기와 무희들을 정자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악(雅樂)이 울리고 무희들이 춤을 추자 흥이 난 주희도 함께 어울렸다. 주희는 자초의 손을 이끌고 무희들 사이로 들어가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왕후의 모습을 그 옛날 한단의 여승상 저택에서 본 적이 있소. 비록 세월이 흐르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지만 왕후의 자태는 조금도 변함이 없구려."
주희와 자초가 유희에 흠뻑 빠져 있을 때 궁인이 달려와 급히 보고를 올렸다.
"양천군이 대왕마마를 알현코자 왔사옵니다."
"괴이한 일이로군. 양천군은 들어서지 못하는 곳이 없구나. 하지만 오늘은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전하거라."
막 흥이 오르던 참에 춤을 멈춰야 했던 장양왕은 분노로 몸을 씩씩거렸다. 그러나 양천군은 이미 정자에 도착하여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왕마마를 알현하옵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게요? 상림원까지 나를 찾아오다니."
장양왕이 불쾌한 듯 쏘아붙였다.
"매우 시급한 일이옵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올릴까 하옵니다."
흐뜨러진 장양왕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양천군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주희가 참다못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무슨 직간을 하신단 말입니까? 여승상과 관련된 일이라면 말씀도 꺼내지 마세요. 여승상은 강직하고 국사의 처리에도 유능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존경하고 있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주세요."
주희가 끼어들자 양천군은 매우 화가 났다. 그녀가 처음에 함양성으로 왔을 때에는 자주 자신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더니 왕후가 되자 안하무인격으로 매번 자신의 일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이었다. 양천군은 노기띤 음성으로 주희에게 충고했다.
"왕후께서는 자중하십시오. 우리 진나라는 역대로 여자가 정사에 끼어든 적이 없습니다. 만일 정사에 참견하면 극형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시옵니까?"
"흥, 대감의 동생이신 화양부인께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태자마마를 책봉한 일만 해도 정사에 참견한 게 아니던가요? 그런데 어째서 화양부인을 극형에 처했다는 말이 아직 없지요?"
주희의 말은 칼날이 되어 양천군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장양왕이 헛기침을 하며 주희의 말을 막았다.
"경은 '상의의국(上醫醫國)'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소? 훌륭한 의원은 나라의 병을 잘 고친다고 하오. 여승상은 짐의 상의이오. 더 이상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만하시기를 바라오. 경도 이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양천군은 장양왕과 주희가 동시에 자신을 배척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늙은이가 그동안 눈이 삐었어!"
양천군은 몸을 돌려 미리 숨겨놓은 병사들을 불렀다. 그러나 잠시 후 그곳에 들이닥친 사람들은 뜻밖에도 여불위와 영정, 그리고 창평군이었다. 양천군은 가슴이 섬짓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불위는 장양왕에게 예를 올린 후 양천군의 역모를 상세하게 보고했다. 장양왕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곧이어 눈을 부릅뜨고 양천군에게 말했다.
"여승상이 지금 한 말을 경도 모두 들었으리라. 짐은 경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꾸밀 수가?"
그러자 양천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급하게 변명했다.
"여승상은 심계가 깊고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옵니다. 더욱이 잇속에 밝은 장사꾼인 그를 대왕마마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믿사옵니까?"
여불위가 양천군을 비웃으며 말했다.
"행동이 의롭지 못하면 반드시 목숨을 버려야 하오이다. 그대가 역모를 꾸민 사실은 창평군이 이미 실토하였소. 변명의 여지가 없소이다."
곧이어 여불위는 장양왕에게 주청했다.
"양천군이 반역을 꾸민 것이 밝혀지고 상림원 곳곳에 숨겨놓은 병사들은 대장군 장당에 의해 모두 토벌되었으니 이제 대왕마마의 명령만이 남았사옵니다. 창평군은 사전에 역모를 막는 데 공을 세웠으므로 그를 좌승상으로 제수하시옵고, 나머지 잔당들은 모두 엄벌에 처하도록 하시옵소서."
양천군은 자신의 계획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돌아가자 창평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짐승보다 못한 놈! 반드시 하늘의 벌이 내려지리라!"
결국 분을 참지 못한 양천군은 패검을 빼어들어 자신의 목을 힘차게 찔렀다.
창평군은 외숙인 양천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 시신 앞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 장양왕은 그런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여불위가 장양왕에게 조용히 말했다.
"창평군은 덕이 있는 군자이옵니다. 먼저 모반을 고변하였으니 대의멸친(大義滅親)을 실천하였고, 외숙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혈육의 정을 잊지 못하고 시신을 부여잡으며 울었으니 은덕(恩德)을 잊지 못함이옵니다. 이런 현자(賢者)는 나라에서 거두어 큰일을 맡겨야 옳사옵니다."
그제서야 장양왕은 여불위의 설복에 화를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등와는 영정을 따라 상림원에 갔다가 양천군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한 그의 목이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걸리자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언제나 즐거움 뒤에는 이런 피비린내나는 살육이 있고, 죽음 뒤에 시신이 또다시 욕을 당하니 이러다가 어느 세월에 제후를 정벌하고 하늘의 빛을 백성에게 내릴 수 있겠는가?'
이날 이후 등와는 더욱 침울하게 변해갔다. 홀로 궁원(宮苑)을 지키던 등와는 문득 웅장한 궁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는 태행산과 비교하면 감히 그 장엄(莊嚴)을 거론할 수조차 없었다. 궁궐이 아무리 넓다한들 드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후후후,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등와는 바위에 걸터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이봐, 등와!"
상념에 빠져 있던 등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자 영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태자가 되기 전에 영정은 등와와 친구처럼 다정하게 뛰어놀곤 했지만, 이제는 처지가 완전히 바뀐지라 이전처럼 등와를 대할 수도 없고, 호칭도 딱딱하게 변하였다. 등와는 아무런 말 없이 멀리 하늘 끝에 걸려 있는 검은 점 하나를 응시했다. 영정이 등와의 시선을 쫓아보니 매 한 마리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등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수년 전 등와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생각났다. 등와는 이런 답답한 궁궐에 쳐박혀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영정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광활한 들판을 달리는 준마의 등에 올라탔을 때가 가장 활기찼다. 영정은 숨막힐 듯한 궁궐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등와의 처지가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궁궐의 생활에 너무도 싫증이 나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홍정에서 있었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광경이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어디에 은덕이 있고 의리가 있으며 천하의 공도(公道)가 있었던가?'
영정은 그런 문제가 단지 어른들의 세계에 국한되어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궁궐 안의 모든 일이 싫어지고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었다.
등와는 여전히 시무룩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사내대장부가 계집아이처럼 눈물을 다 흘려?"
"누가 눈물을 흘린다고 그러시옵니까? 눈에 띠끌이 묻었을 뿐이옵니다."
등와는 남들이 자신을 사내대장부로 보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곤 했다.
"그러시는 태자마마께서는 매일 저녁 간서(簡書;임금의 명령)를 받들고 한숨을 짓거나 가슴을 치시던데 그건 어떤 연유이시온지요?"
자신의 약점이 지적되자 갑자기 영정이 등와에게 소리쳤다.
"등와는 계집아이다! 등와는 계집아이다!"
"그러시는 태자마마는...... 응...... 태자마마는, 히히히."
등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혼자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라고 그랬어? 지금 나에게 무어라 그랬지?"
영정이 얼굴을 붉히며 다그쳤다.
"저는 지금부터 입을 다물겠사옵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신분을 잠시 잊고 격의 없이 놀고 있을 즈음 도총관이 상부의 명령을 받들고 후원에 나타났다. 그는 등와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망각하고 영정을 방자하게 대하는 모습에 노발대발했다. 도총관은 영정에게 태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관해 몇 마디 충고를 한 다음, 등와에게 태자를 급히 국화원(菊花園)으로 모시라고 일렀다. 등와는 입을 삐죽이며 영정과 함께 국화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국화원으로 가던 두 사람이 서로 귓속말을 속닥이나 싶더니 갑자기 샛길로 빠져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도총관은 어쩔 줄 모르고 한동안 두 사람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기어이 나타나지 않았다.
"태자의 몸으로 명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다니 이제부터 철저하게 감시를 해야겠어. 그리고 그 놈, 양치기 놈부터 혼쭐을 내야지."
도총관은 태자가 그렇게 날뛰고 돌아다니는 것이 모두 등와에게 배운 습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도총관은 영정을 국화원으로 데리고 가 장양왕과 함께 국화를 감상하며 궁중의 예법을 익히게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만 놓쳐버린 것이었다. 도총관은 씩씩거리며 궁중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도총관을 떼어버린 영정과 등와는 조어대(釣魚臺)로 달아났다. 조어대는 연못가에 위치한 누대로 그 양쪽에는 버드나무가 흐드러지게 그늘을 만들고 있어 두 사람이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영정이 누대에 자리를 깔고 앉자 등와는 얼른 버드나무 사이에 숨겨놓은 낚싯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머리를 맞대고 계속 깔깔거렸다. 등와는 다시 품에서 대나무통을 꺼내 지렁이 두 마리를 골라내어 낚시 바늘에 꿰었다. 힘차게 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운 두 사람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낚시찌가 움직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낚시찌가 움직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잠시 생각하던 영정이 겨우 깨달은 듯 등와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빨리 엎드려! 우리 그림자가 물 속에 비치니까 물고기가 모여들지를 않잖아."
영정과 등와는 조어대에 바짝 엎드렸다.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붉은 잉어를 두 마리나 낚을 수 있었다. 영정과 등와는 도총관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신나게 떠들었다. 그때 마침 궁중의 화원을 지나 조어대 근처를 걷던 도총관이 그 소리를 들었다.
"낚시하기 쉽구나. 어, 잡은 고기를 왜 놔 줘? 계집아이처럼 마음이 약해 가지고."
"이렇게 예쁜 금붕어를 태자마마는 속여서 잡았잖아요. 사람은 정직하고 자비심을 가져야 하옵니다."
"그래, 네 말이 옳구나. 우리가 잡은 고기는 너무나 작아. 저기 동쪽 끝에 가면 백 장이 넘는 고래를 잡을 수 있다고 하던데."
"예? 백 장이 넘는 고래가 있다고요? 얼마나 살았길래 그렇게 크대요? 아마 우리 할아버지도 그것은 못 봤을거에요."
"네 할아버지는 힘없는 백성이야. 견문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느냐?"
"태자마마, 우리 할아버지는 무술이 뛰어나고 포진(布陣)을 펼칠 수 있으며, 곰도 쏘아잡고 사슴도 길들일 줄 알고, 또 조와 기장을 심고 국화를 키울 줄도 안답니다. 누가 이런 우리 할아버지에 비할 수 있겠어요?"
"하하하, 국화를 키우고 박을 심는 일은 이 몸도 할 줄 아옵니다."
두 사람은 난데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뒤돌아보니 바로 뒤에 도총관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태자마마, 어찌하여 신을 속이셨사옵니까? 대왕마마와 왕비마마께서는 국화원에서 태자마마를 기다리시다 지쳐 그냥 돌아가셨사옵니다."
도총관은 영정에게 간곡히 충고를 한 다음, 눈길을 등와에게 돌렸다.
"이 놈 양치기야! 오늘 네가 저지른 행동은 임금의 눈을 속이고 어지럽힌 중죄이니라. 만일 대왕마마께 이 사실을 이실직고하면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도총관의 노여움이 모두 등와 한몸에 쏟아졌다.
"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듯 사람의 도리는 충서(忠恕)에 있을 따름이다. 충이란 무엇이냐? 그건 신하가 주군에게 대하는 진실된 마음이다. 그리고 주군이 신하를 보살피고 용서하는 마음이 서이니라."
짜증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등와는 도총관의 등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영정을 보았다. 도총관을 들어 연못에 빠뜨리자는 영전의 제안이었다. 등와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러자 영정이 소리나지 않게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내-말-안-들-으-면-너-를-쫓-아-낼-거-야.'
어쩔 수 없었다. 등와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도총관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등와를 나무라고 있던 도총관은 두 사람에게 팔과 다리를 잡혀 공중에 들려졌다.
"으럇차!"
영정과 등와가 도총관을 힘껏 연못에 내던졌다.
"풍덩!"
졸지에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도총관은 물도 몇 모금 마셨다. 다행히 연못은 그리 깊지가 않았다. 그는 연못가에 올라 누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어대를 떠났다. 누대에 올라 있던 영정과 등와는 도총관이 씩씩거리며 올라올 줄 알았는데 그냥 사라져 버리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등와, 어쩌지? 다음에 도총관을 만나면 큰일날텐데."
등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잘 됐지요. 매일 궁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답답하기가 연못의 잉어 같았다고요. 차라리 쫓겨났으면 좋겠어요."
"바보. 매사를 그렇게 빠르게 결정하지 마."
영정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백 장이 넘는 고래를 잡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해. 급하게 하다가는 엉덩방아를 찧는다구. 내일부터는 너에게 글을 배우고 책을 읽게 하는 대신 활을 쏘게 해 주지, 어때?"
"좋습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옵니다."
두 사람은 다정히 마주보며 웃었다.
영정은 도총관을 골탕먹인 이후 중부인 여불위의 호통을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도총관마저도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영정과 등와는 걱정을 떨쳐버리고 함께 밖으로 나갈 궁리를 하며 틈틈이 무술을 연마했다.
진나라는 내정(內政)이 안정되고 농사도 풍년이 들어 점차 예전의 힘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영정은 여승상의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호방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한편 영정은 자신의 학식이 다른 사람에 비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정진하였다.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어야만 여불위의 호통도 피하고 멸시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정의 손에서는 <시경(詩經)> <좌전(左傳)> <국어(國語)> <서경(書經)>이 떠나지를 않았으며, 오후가 되면 등와에게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다.
그렇게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영정은 유약하고 장난기 많은 소년에서 듬직하고 영특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어깨가 넓어지고 가슴이 벌어졌으며 반듯한 이마는 훤히 빛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영정은 밤늦도록 순황(筍況)이 지은 <비십이자(非十二子)>를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벅차오는 문장이었다.
"군자의 모습은 관(冠)을 쓰고(士君子之容其冠進)......"
영정은 앞으로 쓰게 될 높은 관과 면을 상상했다. 그 당시에는 남자가 치인(治人)의 지위에 오르려면 관을 쓸 수 있는 나이인 스물이 되어야 했다. 언제 그날이 올지, 영정은 길게 탄식하며 계속 문장을 읽어내려 갔다.
"그 옷이 헤어져야 하고(其衣縫), 그 얼굴이 밝아야 하며(其容良)......"
그런데 영정은 이 구절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모습을 해야 얼굴이 밝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곰곰이 생각하던 영정은 신경질적으로 등와를 불렀다. 등와 또한 매일같이 바위들기를 하고 도검을 휘날리며 무술을 연마한 탓인지 그간 몸집이 훨씬 커졌다. 문 앞에서 쉬고 있던 등와가 영정의 부름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등와, 네가 보기에 내 얼굴이 화평하고 온화해 보여?"
등와는 영정이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몰랐다.
"태자마마, 갑자기 얼굴을 보아 달라니요?"
"아아, 스승이 없으니 경전을 이해하기 어렵구나."
영정은 한숨을 내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선비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랍니다. 마마, 그냥 일찌감치 주무세요."
까닭모를 영정의 탄식에 등와는 얼른 그를 위로했다.
"등와, 순황이란 사람은 공자나 맹자와는 달라. 그 사람은 법이 있고 그 다음에 왕이 있다고 말해. 주장하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쓰임새가 있어. 결코 헛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무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마마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사옵니다. 내일 아침 해가 밝으면 맑은 정신으로 대령할 터이니 어서 주무시옵소서."
등와는 영정을 침상에 눕히고 촛불을 껐다. 그러나 영정은 자리에 누운 채 임금이 지녀야 할 언행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때 멀리서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들판에 덩굴풀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네.
아름다운 아가씨, 맑고 이쁘기도 해라.
뜻밖에 서로 만나니 내 소원이 맞았네.
영정은 귀를 쫑긋 세웠다. 노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오듯, 나뭇가지에 걸려 끊어지듯 실낱같이 들려왔다. 노래는 달콤한 술처럼 영정을 취하게 만들고 잔잔한 가슴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누가 노래를 부르지?"
영정은 노래의 가사를 생각했다. 누군가 <시경>에 나오는 '들판의 덩굴풀'이라는 시를 정감어린 가락에 담아 멀리멀리 날려보내고 있었다.
'누굴까? 어쩌면 가락이 시정(詩情)과 이렇게도 들어맞을까? 저 사람은 틀림없이 군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거야. 선비의 모습이 어떤가 보고 싶구나.'
영정의 마음은 벌써 창문을 넘어 훨훨 허공을 날았다. 수많은 궁궐의 누각과 지붕을 타고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짙은 안개가 하늘과 땅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 마치 수많은 정령들이 밤 하늘 아래 모두 모인 듯했다. 땅바닥을 자세히 보니 사람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영정은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발자국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어디가 끝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영정은 빨리 걸었다. 그러자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가 숨막힐 듯 밀집된 숲속을 걷던 영정이 잠시 후 눈 앞이 탁 트인 곳에 이르니 시원한 바람이 부는 호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 자기 그림자를 호수에 비추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바로 그 건물에서 흘러나왔다.
'이곳이 어디일까? 낯설기도 하고 언젠가 한 번쯤 온 곳 같기도 하고......'
영정은 두리번거리며 돌다리를 건넜다.
들판에 덩굴풀 이슬에 흔건히 젖었네.
아름다운 아가씨, 맑고 이쁘기도 해라.
뜻밖에 서로 만나니 우리 모두 좋은 짝일세.
은은히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그곳으로 다가간 영정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동백나무로 만든 나룻배를 보았다. 뱃머리에 한 노인이 앉아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고, 배꼬리에는 동자 한 명이 유유히 노를 젓고 있었다.
'아, 군자의 모습이란 바로 저렇구나!'
영정은 노인의 모습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높은 관을 쓰고 넓은 포를 걸쳤다. 은빛수염에 백설 같은 머리털하며, 저 웃음은 얼마나 은은한가. 경전에서 말하는 위엄있고 건장하며 단정하다는 모습이 저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격에 찬 영정이 예를 표하려는데 노인이 영정을 알아보고는 미끄러지듯 급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영정은 멍하니 서서 나룻배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이때 멀리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니, 태자마마께서 궁궐을 떠나시면 어떡하시옵니까?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옵니다."
영정이 고개를 돌리니 도총관이 헐떡이며 뛰어왔다.
'아니,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도총관이 영정의 마음을 읽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태자마마를 보호하는 중책이 제게 있사옵니다. 태자마마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해도 궁으로 모시고 내려올 수 있지요."
도총관은 몸을 돌리더니 호수 맞은편으로 사라진 노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놈의 시골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어디서 감히 태자마마를 유혹해!"
노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들판에 덩굴풀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네.
아름다운 아가씨, 맑고 이쁘기도 해라.
뜻밖에 서로 만나니 내 소원이 맞았네.
들판에 덩굴풀 이슬에 흔건히 젖었네.
아름다운 아가씨, 맑고 이쁘기도 해라.
뜻밖에 서로 만나니 우리 모두 좋은 짝일세.
영정은 등와를 불러 밉살스런 도총관을 호수로 밀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도총관은 영정의 공격을 미리 눈치챘는지 슬쩍 몸을 피하며 웃었다.
"태자마마께서 또다시 양치기 꼬마와 함께 저를 호수에 빠뜨리려고 그러시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태자마마께서 호수에 빠져 물 몇 모금 드셔보시지요."
도총관이 뒤에서 영정을 붙잡고 호수로 던지려 하였다. 영정은 등와가 보이지 않자 도총관에게 소리질렀다.
"이 놈, 방자하구나! 누구의 지시를 받았지?"
이때 숲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는 예의로써 다스려야 하느니라. 또한 말씀하셨다. 삶에 잣대가 없으면 똑바른 행동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아이는 마땅히 예의를 배우고 예의를 알고 예의를 지켜야 하며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말을 명심하소서."
숲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은 영정의 중부인 여불위였다.
영정은 너무 놀라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영정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등와가 들어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너를 그렇게도 불렀는데 이제야 오면 어떻게 해!"
영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구 화를 냈다. 그러나 등와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없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마, 당직을 서는 황문령이 급보를 가져왔사옵니다. 중대한 일이 발생했답니다."
영정은 등와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동쪽에 있는 오국(五國)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는 전언이었다. 영정은 정신이 번쩍 났다.
"누가 대장이래?"
"신릉군(信陵君)이라고 하옵니다."
영정은 신릉군이란 말에 급히 의관을 챙기고 의사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국합종(五國合縱)을 맺은 다섯 나라가 진나라의 서방을 공격해 왔던 것이다. 영정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의사청 앞에서 줄곧 서성거렸다.
"태자마마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여승상께서 이미 몽작 장군을 급파하셨다니 적군은 분명 출정을 후회할 것이옵니다."
등와의 말에 영정은 그제서야 약간 안심이 되는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국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한 데에는 깊은 연원이 있었다. 여불위가 '입목건신'의 계책으로 진의 국정을 장악하자, 진나라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이런 진나라의 급성장에 다른 나라들이 위협을 느끼던 차에 지난해에 몽작이 위나라의 고도(高都;산서 진성)를 공격, 십여 개나 되는 성을 빼앗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위나라 안이왕은 절부구조(竊符救趙) 사건으로 한단에 피신 중인 신릉군을 떠올렸다.
절부구조 사건은 십 년 전에 일어났었다. 당시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는 급히 위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안이왕은 한참을 주저하다 마지못해 병력을 파견했지만 진나라 군대와 교전은 하지 못했다. 한편 안이왕의 동생인 신릉군은 왕부(王符)를 이용하여 장군 진비(晉鄙)의 목을 벤 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공격, 한단에서 물러나게끔 하였다. 이때 신릉군은 왕부를 멋대로 훔친 죄로 미움을 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단으로 몸을 피하는 처지가 되었다. 신릉군은 지략이 뛰어나고 용병술에 능했으며 인품이 중후하여 문객이 수천에 이르렀다. 그 당시 그는 뭇사람들이 추앙하던 4군자의 으뜸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다.
위나라 안이왕은 진나라의 공격으로 국가의 사직이 존망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신릉군을 다시 위나라로 불러들였다. 새로이 신임을 얻은 신릉군은 그 기세를 타고 이번 기회에 다섯 나라와 동맹해 진나라를 칠 전략을 세웠다. 이들 다섯 나라는 모두 진나라의 공격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터라 쉽게 합종하였다. 그들은 능력있고 신망이 높은 신릉군이 추진하는 합종책에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렇게 오국합종은 각국의 이해가 하나로 합치된 시점에서 제기되었고, 당시 진나라는 이들 나라보다 월등하게 국력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두 세력의 격돌을 피할 수 없는 대세였다.
진군과 오국합종군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맞섰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함양성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활기차고 평화로웠다. 밤이 깊어가자 성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러나 북피에 있는 여승상의 저택만은 그렇지 못했다.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나라의 대사를 의논하던 이곳은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황(戰況)을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밤이 점점 깊어감에 따라 달은 더욱 밝게 빛났다.
밝은 달빛 아래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 한 대가 승상부령(丞相府令)을 지닌 채 급히 동성문으로 내달렸다. 승상부령을 확인한 병사들이 문을 열자 수레는 쏜살같이 승상부로 향해 달렸다.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도총관이었다. 그는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듯이 승상부 의정당으로 뛰어갔다. 의정당 탁자 위에는 진나라 국경이 세밀히 그려진 지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의정당 문을 연 도선은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여불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여불위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았다. 지금 진나라 20만 대군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그러기에 도선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멀고 험한 함곡관까지 다녀왔던 것이다.
"어째서 아직 도착하지 않는가?"
여불위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도선이 여불위 앞으로 걸어가 공손하게 옥갑을 내려놓자 사람들의 눈길이 온통 거기에 쏠렸다. 여불위가 옥갑에서 밀서를 꺼내들고 읽더니 실성한 듯 소리쳤다.
"이런! 몽작 장군이 과연 병법을 아는지 모르겠군! 어째서 험지를 버리고 평양도(平陽道)에 나아가 적군을 맞이하려 드는가?"
도선이 여불위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몽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진나라 영토는 장수와 병사들이 피땀 흘려 개척하였으므로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양군이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을 때 자칫 작은 이익을 쫓다가는 큰 걸 놓치기 쉽습니다, 승상 대인!"
강성군 채택이 소리쳤다. 그 말에 여불위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적군은 사기 충천하고 아군은 피로에 지쳐 있습니다. 장수가 병법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혈기를 믿고 나섰다가는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자 대부장 왕관이 채택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 진나라의 호랑이 같은 군사들이 어찌 오국의 강아지 같은 군사들을 맞아 승리하지 않겠습니까? 합종책은 일찍이 소진(蘇秦)이 제기했지만 쓸데없이 세월만 지났고, 우리 진나라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승상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동주를 누르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으며, 또한 잃었던 상당군을 회수하여 태원군을 설치했습니다. 오랜 세월 문치와 무력이 날로 뻗어나가 여러 나라가 굴복했습니다. 신릉군은 도망자에 불과한 필부로 지금 천명을 거역하며 날뛰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솔개 앞의 참새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있는 왕관은 진나라의 명문귀족 출신으로 위인됨이 강직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왕관의 말에 채택이 냉소를 보냈다.
"함양의 군 중에 어리석은 장군이 등장했는데, 조정에도 설마 미친 대부가 나타난 건 아니겠지요?"
채택의 독설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채택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 할 말을 계속했다.
"그 어리석은 장군은 지도를 보는 안목까지 잃었습니다. 무얼 믿고 20만 대군 운운하고 있습니까? 이곳 함곡관을 보십시오. 빽빽히 들어선 산, 좁고 길게 뻗은 길, 이곳은 하늘이 우리 진나라에 주신 천혜의 방어벽입니다. 몽작 장군은 이런 곳을 버리고 도대체 어디에서 적군을 맞겠다고 합니까? 만일 함곡관이 뚫린다면 적어도 우리 진나라 20만 대군은 장평 전투에서 위나라 45만 대군이 당했던 치욕만큼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채택은 소양왕 시절 수개월 동안 승상을 지낸 사람으로 지혜가 뛰어나고 언사가 물 흐르듯 유창했다. 무작정 낙관만 하던 왕관도 채택의 말에 그만 승복을 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의정당이 일시에 조용해지며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좌중을 둘러보던 여불위가 천천히 일어났다.
"몽작은 결코 어리석은 장군이 아니오. 다만 지나친 승리감과 자만심으로 잠시 군영의 설치에 실수했을 뿐이오. 이 점만 깨우쳐 준다면 틀림없이 적군을 맞아 훌륭한 전과를 올릴 수 있으리라 보오. 설사 적군을 가볍게 보았더라도 침착하게 대응만 하면 큰 문제는 없소. 옛말에 뛰어난 장수는 어려움에 처해도 결코 놀라지 않는다고 했소. 그리고......"
여불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몽공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후 몽작의 아들인 몽무가 의정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장에서 방금 도착해서인지 얼굴이 검게 그을렸고, 갑옷을 그대로 걸친 채였다. 몽무는 무릎을 꿇고 여불위에게 인사를 한 다음 품에서 죽간을 꺼내 올렸다. 죽간을 받는 여불위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죽간에 쏠렸다. 여불위가 몽무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만 물러가라고 이르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몽무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재빨리 의정당을 빠져나갔다. 여불위의 예상대로 진나라군은 초전에서 패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몽작이 미리 대비책을 세우고 출정했기 때문에 수만의 병사만 잃고 함곡관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는 보고였다.
"몽작 장군은 병마의 지휘권을 부장에게 위임하고 죄를 청하였소."
여불위는 죽간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적군이 함곡관을 넘지 않은 것만도 잘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성군의 선견지명이 맞았습니다."
여불위는 길게 탄식하며 채택을 쳐다보았다.
"신릉군은 두 차례에 걸쳐 우리 진나라의 위풍을 꺾었소. 이 수치를 반드시 갚아야 하오!"
여불위의 결의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십 년 전에 이어 또다시 진나라는 신릉군에게 무참히 패했지만 사람들은 뾰족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여불위는 조정의 고관 대신들이 계책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데 몹시 실망했다.
이때 침묵을 깨뜨리고 꼬마 신동 감라가 입을 열었다. 아홉 살이 된 감라는 이제 제법 의젓했다. 그는 비하각에서 열린 연회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이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간 감라는 묵묵히 학문에 정진하며 뒤에서 여불위를 도와왔는데 이렇게 당장 나라의 사직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승상께서는 소생이 두어 마디 정도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만일 허락하신다면 승상께 불구(不龜)라는 약을 선사하지요."
여불위는 귀가 솔깃하여 감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손자>에 이르길 싸움은 장사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겨야 가장 이득이 남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승상께서는 약간의 돈을 써서 적군의 장수를 진나라로 불러들이십시오."
여불위는 감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에 감라는 신이 났다.
"이번 몽작 장군의 패배는 필연입니다. 원인은 다섯 나라가 하나로 굳게 뭉쳤기 때문이지요. 연합군의 수뇌가 누구입니까?"
"신릉군이네."
여불위가 신음하듯 대답했다.
"적군을 이기려면 적장을 사로잡으라는 금적금왕(擒賊擒王)의 계책이 있습니다. 우선 신릉군이 관직을 잃게 만들고, 그 다음에 말단한직으로 내쫓아......"
"이보게, 꼬마 친구. 그를 너무 얕보시는군."
채택이 웃으며 끼어들자 감라는 그를 흘겨보며 입을 비쭉거렸다.
"강성군 할아버지, 사람은 늙더라도 마음만은 늙지 말아야지요."
어린 감라가 이미 고희(古稀)에 가까운 채택을 훈계하며 일사천리로 자신의 논리를 펴자 사람들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세상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강성군 할아버지도 매섭지만, 가장 두려워 하는 게 손녀가 아닌가요? 물론 신릉군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는 약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는 이미 십여 년 동안 타국에서 방랑 생활을 했고, 또한 돌아갈 집도......"
이번에는 왕관이 감라의 말을 끊었다.
"그건 위나라 안이왕이 그를 내쫓았기 때문이고, 지금은 오히려......"
"지금은 어쨌다는 거에요?"
감라가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채택이 대신 대답했다.
"위왕은 많은 보물과 정성을 들여 신릉군을 다시 초청하였네. 그런데 어찌하여 그를 말단한직으로 내쫓겠는가?"
그 말에 감라가 피식 웃었다.
"노대인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신릉군은 위왕의 친형제이고 오국합종군의 수뇌입니다. 이번 싸움으로 그의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습니다. 위왕이 어찌 그걸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불위가 그제서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계략이 줄줄 엮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신릉군을 제거했다고 치자. 그러면 다섯 나라는 어떻게 하지?"
"옛말에 있잖아요. 원교근공(遠交近功)이라고, 먼 나라와는 외교를 수립하고 가까운 나라는 쳐서 없애면 됩니다. 마침 강성군 할아버지는 고향이 연나라이시니 승상께 청해서 우호사절로 고향땅을 밟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시는 게 어때요?"
감라의 논리는 조리있고 분명했다. 채택은 농담이 진담된다는 말을 생각하며 급히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식견이 짧고 늙어서 우호사절로는 적합하지가 않다네."
채택의 궁색한 변명에 사람들이 한바탕 시원스럽게 웃었다.
"할아버지, 너무 성급히 말씀하지 마세요. 때가 되어야 박도 따는 게 아니겠어요? 가셔서 기다리면 소식이 있겠지요."
감라의 말은 사람들을 더욱 웃겼다. 후의 일이지만 여불위는 감라의 말을 받아들여 채택을 연나라에 보냈다. 또한 위나라 사람을 매수하여 신릉군이 야심이 많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위왕은 신릉군이 군대의 힘을 빌어 역모를 꾸미려 한다는 거짓에 속아 신릉군의 직위를 박탈하였다. 그 후 이 사건으로 인해 오국합종군은 지리멸렬해졌고 그 틈을 타 진나라는 위나라의 도성인 대량(大梁)을 함락시켰다.
이날 밤 여불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감라의 계책이 너무나 주도면밀하고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신에게 주안상을 마련하라고 일렀다. 모두들 자리를 잡고 술을 들려는데 궁중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도총관이 급히 의정당으로 뛰어들어 오며 급보를 읽었다.
"주군께서 붕어하시었습니다. 왕후께서 빨리 입궁하시라는 분부입니다."
여불위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복(朝服)을 준비시켰다. 이제 장양왕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린 군부를 옹립하여 국정을 장악하는 일은 시간 문제였다. 그의 오랜 꿈인 기화가거(奇貨可居)의 이상이 실현되려는 순간이었다.
부왕의 붕어를 맞이한 태자 영정은 눈물을 떨구며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동궁의 시위장으로 승격한 등와가 궁문을 지키며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등와는 일단 명령을 받으면 결코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는 우직한 면이 있었다. 왕후가 파견한 궁인도, 여불위가 보낸 심부름꾼도 모두 등와에게 저지당해 되돌아갔다. 모든 국정 대사와 상례(喪禮)의 절차를 지시한 여불위는 태자에게 보낸 도총관의 소식을 기다렸다. 동궁의 입구에서 등와에게 저지를 당한 도총관이 역시 들어가지 못한 다른 궁인들과 함께 되돌아왔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도총관의 보고를 받은 여불위는 몸을 일으켜 직접 동궁으로 향했다. 이때 등와는 내궁의 뜰에서 흙을 북돋아주며 벌레를 잡고 있었다. 빠른 발자국 소리와 함께 여불위와 도총관이 나타나자 등와는 냅다 소리쳤다.
"걸음을 멈추시오!"
등와가 꽃밭에서 뛰어나와 두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자 도총관이 얼른 그의 손목을 나꿔채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등와가 빨랐다. 등와는 재빨리 옆으로 피해 거꾸로 도총관을 뒤에서 꼼짝 못 하게 잡았다. 도총관이 등와의 팔을 부여잡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팔을 풀지 못하겠느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틈을 타 여불위가 부지런히 태자의 침실로 다가갔다. 그것을 본 등와는 도총관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단숨에 뛰어가 여불위의 앞을 막아섰다.
"태자마마의 명령입니다.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불위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등와 또한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두 사람은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버텼다. 이때 도총관이 바닥에서 일어나 등와에게 달려들자 등와는 살짝 피해 더욱 세차게 그를 내던졌다. 그런 등와의 모습에 여불위는 내심 놀랐다. 그저 양치는 꼬마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태자의 시위장으로 손색없는 무예 솜씨였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누군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허허허, 맹랑한 놈이로구나."
"태자마마의 명령이라 누구도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허허허, 승상도 몰라본단 말이냐?"
"알고 있습니다. 설사 문신후(文信侯) 나으리께서 힘으로 밀어붙인다 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권세가 높다 할지라도 승상 대인이나 저는 모두 태자마마의 신하입니다. 제 머리를 깨부순다 할지라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여불위는 등와의 위풍에 눌려 할 말을 잃었다. 도총관이 화를 내며 등와를 욕했다.
"이 시골뜨기 촌놈 같으니라구. 지난번에 연못에 빠뜨렸을 때는 그냥 용서해 주었다만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야겠다!"
영정은 밖이 시끌시끌하자 문틈으로 그 광경을 모두 보았다. 그는 등와의 충성심과 배짱에 감탄하면서도 당장 뛰어나가 그에게 큰상을 내릴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다.
영정은 부왕이 붕어하자 희비가 엇갈렸다. 왕위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수년 동안 생각하고 다짐했던 꿈을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나이가 아직 어려 국정을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영정은 일찍이 병환 중인 부왕 앞에서 어머니인 주희의 생각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주희는 영정이 아직 어리므로 만일 부왕이 붕어하면 조정의 일은 당분간 중부인 여불위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영정의 병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장양왕이 붕어한 후 이틀 동안 영정은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안 궁리 끝에 영정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래, 그렇게 일을 추진하는 거야.'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 스스로를 우울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여불위와 등와가 벌이는 소동에 영정은 왠지 통쾌함을 느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등와가 너무나 당당하게 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 이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내가 너를 참수하고야 말겠다!"
여불위가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을 핍박하지 마십시오."
등와는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가슴을 떠억 벌리며 말했다.
"나를 통과하십시오. 이곳에는 나 이외의 문이 없습니다."
"어른을 무시하는 네 놈의 목을 오늘 기어코 자르고 말겠노라!"
여불위가 허리춤에 찬 패검을 뽑았다.
"승상 대인,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저놈은 죽어 마땅합니다."
도총관이 옆에서 여불위를 독촉했다. 영정은 더 이상 그대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여불위는 아직 어린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중부이자 실권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급히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등시위장, 어째 그리 밖이 소란스러우냐?"
영정이 나타나자 여불위는 등와를 베기 위해 들었던 검을 황급히 거두었다.
승상부로 돌아온 여불위는 그날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영정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겨우 열세 살의 어린 나이인데 설마?'
하지만 등시위장을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양천군보다 열 배는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야. 일찌감치 길들여 놓지 않으면 훗날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여불위는 승상부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함양궁의 왕태후전으로 달려갔다.
4. 이사의 출현
진나라 소양왕 44년에 초나라에서는 고열왕(考烈王)이 임금에 올랐다. 고열왕은 널리 유세객과 인재를 불러들였는데 특히 천하에 이름을 날리던 4대 공자 중 한 사람인 춘신군 황헐을 초빙하여 상국에 해당하는 영윤(令尹 ; 문관의 최고 벼슬)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그에게 부국강병의 전권을 맡겼다. 춘신군은 이름에 걸맞게 비범한 능력을 나타냈다. 그는 일대종사(一代宗師)로 존경을 받고 있던 순황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학문을 구하였으며, 그를 초나라로 초빙해 조정의 개혁과 부국강병의 비책을 얻고자 하였다.
순황은 열다섯 살 때 제나라에서 학문을 익힌 후 학술의 도성으로 소문이 자자한 임치성 서문에 있는 직하의 학궁(學宮)에서 세 차례나 영수(領首)를 지냈다. 그는 치학(治學)에도 정통하였고, 변론에도 뛰어났다. 순황은 일찍이 조나라 효성왕과 용병(用兵)에 관해 토론을 벌였고, 진나라 소양왕과 상권치국(商權治國)의 방략(方略)에 대해 열띤 논쟁을 편 바 있었다. 순황의 학식과 저술은 연성벽옥(連城璧玉)이라고 불리웠으며,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보물로 취급되었다. 순황이 스스로 자신의 제자라고 칭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의 문하에는 황하로 흐르는 강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한 당시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상채성(上蔡城)은 순황이 초나라로 들어가는 데 반드시 지나게 되는 북군(北郡)의 치소가 있는 성이었다. 북군의 군수는 매일 술단지에 묻혀 살았는데 가끔씩은 일찍 일어나 거리의 청소 상태며 담장의 보수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날도 가장 분주한 시간에 군수는 술에 취해 부하들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군수가 그러하니 관청 청소는 어느새 줄이 끊어진 활처럼 흐지부지해졌다. 그런데 젊은이 하나가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다리를 타고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안에서 놀고 있던 노인이 문을 열며 소리쳤다.
"이보게, 이사(李斯)! 그만 내려오게. 천한 우리들이 공을 세운들 무엇하나?"
그러나 이사라는 젊은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제 일만을 했다. 그러다 먼지가 아래로 떨어져 머리에 쏟아지자 노인은 화를 참지 못해 사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꽈당!"
이사는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한동안 노인을 흘겨보던 그는 다시 사다리를 세우고 위로 올라갔다. 노인이 사다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보게! 예전에 자네가 책만 읽고 글을 쓸 때 내가 무어라고 하던가? 그런데 이 며칠 동안 더럽고 힘든 일을 스스로 하는 이유가 무언가? 봉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하면 할수록 뼈마디가 쑤시는 일을 악착같이 하는 연유가 과연 무언가? 무슨 꿍꿍이속이란 말이야?"
"그걸 알고 싶습니까? 순황 선생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의 대답에 노인은 기막힌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재작년에 자네가 아문(衙門)에 추천되어 왔을 때 일은 하지 않고 법을 내세워 군수에게 기어올랐지. 흥, 대낮에 꿈꾸지 말아라. 오늘 보니 더욱더 미쳤구나. 무어, 순황 선생님이 어쩌구저쩌구?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지. 고관(高官)이 될 사람은 자고로 관상(官相)을 타고나야지, 자네 같은 몰골로는 어림도 없어. 꿈은 일찍 깨는 게 좋다구. 쯧쯧쯧."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찌 참새가 대붕의 뜻을 알겠습니까?"
"흥, 놀고 있군. 경전에 이런 말이 있지. '삶과 죽음에는 천명이 있고, 부와 귀에는 천운(天運)이 있다.'"
계속되는 노인의 비아냥에 이사는 화가 났다.
"아둔한 사람은 영원히 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지."
"자네처럼 미치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노인은 더 이상 이사처럼 덜떨어진 자와 상대하고 싶지 않은지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피했다. 이사는 노인마저도 자신을 무시하고 비웃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그동안 당했던 무시와 고통과 좌절을 모두 모아 노인의 등 뒤로 쏟아부었다.
"왕씨 늙은이야, 뒤뜰 뒷간에 있는 쥐를 본 적이 있지? 똥을 먹다가도 사람이 오면 놀래 달아나지. 그렇지만 앞뜰 곳간에 있는 쥐는 쌀을 먹고 그곳에서 잠을 자며 사람이 와도 놀라 달아나지 않아. 똑같은 쥐인데 운명은 이렇게 다른 거야. 이게 바로 환경이 다른 데서 오는 연유란 말이지. 사람도 이와 다를 바 없어. 아무리 열심히 밭을 갈아도 수확을 하지 못하면 소용없고, 아무리 뛰어난 선비도 기회를 얻지 못하면 허탕이지. 옛날에 내가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었는지 알아? 바로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사람은 기회를 만나면 환경이 달라지는 법! 흥, 나는 승상은 못 되더라도 적어도 이런 작은 마을의 군수로는 만족하지 못해!"
노인은 이사의 한 맺힌 넋두리를 들으며 그가 더위를 먹어 약간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튿날 이른 아침, 순황이 상채성으로 온다는 소식이 있자 이곳의 백성들이 모두 동원되어 수십 리 길을 청소하고 길가의 잡초를 뽑았다. 이사는 얼른 목이 좋은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순황이 오기를 기다렸다.
"순황 선생이 오신다아!"
진시가 되었을 때 멀리서 순황이 탄 수레가 서서히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맨앞 수레에 타고 계신 분이 순황 선생이신가 보구나."
"과연 선생의 용모는 온화하고 겸손하시군. 학문이 깊으면 깊을수록 저런 모습인가 봐. 얘들아, 저 풍모를 보거라."
자식을 가진 사람들은 아이들을 앞세워 순황에게 나아갔다.
"선생 곁에 있는 젊은이는 누구랍니까? 나이도 젊은데 세상을 주유하며 학문을 쌓다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일세."
사람들은 순황을 보면서 제각기 한마디씩 던졌다. 그 사이를 헤집고 이사가 미친 듯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수레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점점 더 다가왔다. 수레가 가까워질수록 이사의 몸이 격정적으로 떨려왔다. 드디어 평생 소원인 순황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사는 인파를 뚫고 부병(府兵)의 경계선을 넘어 순황이 탄 수레 앞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수레를 막았다. 그 바람에 수레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어떤 놈이야!"
수레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이 이사를 발견하고는 그를 들어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이사는 아픔을 참고 다시 일어나 병사들의 손을 뿌리치며 수레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선생님,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선생님의 제자가 되는 게 평생의 소원이옵니다. 부디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순황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순황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젊은이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짧은 갈삼(褐杉)을 입고 역시 삼으로 짠 신을 신었지만 두 눈은 총명하게 빛났고 얼굴도 수려했다. 그러나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지 몸은 깡 말라 있었다. 순황은 그의 인상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굳건하게 살아온 이력을 읽었다. 순황은 그의 용모와 간절한 태도에 마음이 이끌렸다.
'이름없는 백성으로 배움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더냐.'
순황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젊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네의 내력을 말해 보게나."
병사들은 순황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자 더 이상 막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이사는 순황이 자신의 이름과 내력을 묻자 너무도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후생(後生)은 이사라 하오며, 이곳 상채 사람이옵니다. 지금은 북군의 군청에서 창고지기로 일하고 있는데, 꿈에서도 오로지 선생님을 뵙기를 고대하였사옵니다. 일찍이 선생님께서 지으신 <권학(勸學)>과 <수신(修身)>을 읽고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존경심을 억누를 수 없었사옵니다. 그때부터 저는 밤마다 맹세했사옵니다. 선생님을 만나 배움을 얻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저는 오래 전부터 조금씩 돈을 저축하여 언젠가 날을 잡아 북쪽으로 선생님을 찾아가려고 결심했습니다만, 뜻밖에도 이곳 상채에 광림하신다기에 하늘이 저를 도운다고 확신하였사옵니다."
순황은 묵묵히 이사를 바라보았다. 이때 순황의 곁에 있던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선, 선생님! 하, 하나를 구, 구하기도 어, 어려운데, 저, 저렇게 지, 지성이 극, 극진하니 거, 거두어 주, 주십시오."
그 젊은이는 말이 매우 어눌했다. 그는 순황이 가장 아끼는 제자로 한나라 공자 한비(韓非)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에 몸이 왜소했으며 말도 더듬고 목소리도 여자 같았다. 하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그는 문장이 예리하고 엄격하며 논리가 정연하여 감히 그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이사는 한비의 말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읍소했다.
"선생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일가친척 피붙이도 하나 없사옵니다. 오로지 선생님을 모시고 평생 동안 배움을 구하고 수신하면서 살겠사옵니다."
순황은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 논쟁하며 천하를 주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눈에 이사의 재주를 알아챘다. 특히 고난을 겪은 이사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언뜻 보아도 이사는 기지가 흘러넘치고 말솜씨가 뛰어나며 굳센 의지까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꺾이지 않는 기개와 격정적인 애원이 마침내 순황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이보게, 어, 어서 인, 인사를, 올리지 않, 않고......"
한비가 이렇게 귀띔을 하자 이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순황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이사는 순황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 그와 함께 한비와 이사의 운명적인 만남도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비와 이사는 순황과 함께 난능(蘭陵)에서 학문을 닦으며 열심히 그의 저술을 도왔다.
난능은 본래 송(宋)나라 영토였는데 당시는 초나라에 속해 있었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유신(遺臣)이었던 미자(微子)가 주(周)나라로부터 봉국(封國)을 받아 세운 고국(古國)이었다. 서주(西周) 이왕(夷王) 11년(BC 859년)에 후(侯)를 제수받아 사직을 연 지 6백여 년 만에 송나라는 제, 초, 위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그때가 진나라 소양왕 21년(BC 286년), 초나라 경양왕 13년, 위나라 소왕 10년이었다. 난능은 초나라에 귀속되면서 북방의 변경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탈바꿈하였다. 이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하지만 중앙의 통치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탓으로 온갖 병폐가 이곳저곳에서 쑥대처럼 자라고 있었다.
춘신군은 처음에 순황을 초나라의 도성인 정도로 불러들여 부국강병을 꾀하려 했지만, 조정 구신들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정의 대신들이 초왕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순황을 비방하며 면담을 거부토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춘신군은 어쩔 수 없이 순황을 난능령(蘭陵令)으로 위촉하고, 이곳 난능에서 그의 개혁을 시험해 보도록 배려했다. 순황은 대신들의 반대로 결국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춘신군의 성의도 있고 또 몸이 노쇠하여 더 이상 세상을 주유하기가 어려운 터라 난능에 남기로 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의 직책에 몸이 얽매이다 보니 순황은 매일같이 바쁜 일과에 시달렸다.
한비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은 다음 집안 안팎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새벽 맑은 공기는 언제나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한비가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데 비해 이사는 매사가 제멋대로였다. 그는 아무 때나 잠을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났다.
"사형, 저기 죽간을 보십시오. 저걸 만드느라 한숨도 못 잤습니다. 계속 잘 테니 내일 깨워주십시오."
"이, 이사, 너는 잠, 잠이, 너, 너무 많아. 밖에 나와 해, 해를 보라구."
난능은 경치 좋고 물 맑고 하늘이 높은 곳이었다. 대지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서서히 하늘로 오르면 그 색이 점점 붉어져 푸르렀던 산이 갑자기 붉게 변하곤 했다.
"와, 너, 너무나 아름다운 자, 자연이야!"
한비가 아침 해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 세상에 자연보다 위, 위대하고 장, 장엄하게 사, 사나이의 야, 야망을 불, 불태우게 만드는 것은, 이, 이 세상에 없을거야."
"해가 뜨는군. 사형, 우리의 미래도 저 뜨는 해와 같을거야."
어느새 이사가 일어났는지 한비 곁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한비는 조용히 이사의 어깨를 잡으며 먼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아침을 먹고 나면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관도(官道)를 따라 교외(郊外)의 강당(講堂)에 나가 학자들과 학문을 논했다. 길가에는 살구나무 흰 꽃이 피었고 뽕나무의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익어갔으며, 푸른 들풀이 소담스레 자란 너른 들판에서는 농부들이 밭을 갈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름기 흐르는 대지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들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두 해 동안 난능은 참으로 많이 변했어요."
이사가 들녘을 보며 말했다. 한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선, 선생님께서, 현령으로 부, 부임하셔서, 법, 법령을 공포하시고. 민, 민풍을 개혁하시니 그 결과가 부, 분명하게 나타나는 거, 거겠지."
"선생님은 너무 연로하셔서 이미 기력이 쇠하셨어요. 언제나 우리를 데리고 세상에 나가 큰일을 하실지......"
이사는 하루빨리 좁은 난능을 벗어나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 싶었다.
"뜻을 이, 이루려면 말로는 쉽지만, 사, 사실은 인연이 닿아야 하, 하고, 더, 더욱이 의기가 투합되어야, 비, 비로소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공, 공부자(孔夫子)나 맹, 맹자(孟子)보다 학문이 뛰, 뛰어나더라도 천하만 주, 주유하다 일생을 끝, 끝마치지."
한비는 오랜 세월 경서를 읽고 천하의 형세를 연구하여 그 학식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다. 이사가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선생님은요?"
"선, 선생님은 아직 기회를 맞지, 맞지 못하셨어."
"춘신군은 선생님의 지기(知己)가 아니신가요?"
이사가 물었다.
"황헐, 그, 그 사람을 선생님에 비할 수는 없지. 그, 그는 한 사람의 신하로서 주, 주군의 통제를 받, 받는 몸이고, 선, 선생님은 갇, 갇혀서, 이곳 난능에 갇, 갇혀서 아무런 일도 하, 하지 못하시는 거야."
"아?"
이사는 놀란 눈으로 한비를 다시 바라보았다.
'요조숙녀 같으신 사형께서 이처럼 예리한 판단을 하고 계시다니......'
어느덧 두 사람은 교외의 강당에 도착하였다. 이곳 강당은 송나라의 종사(宗祠)였던 건물이었으나 후에 병란을 맞아 폐허가 되었다. 그런 것을 3년 전 순황은 직하의 학궁(學宮)을 본떠 이 건물을 새로 단장하고 강당으로 사용토록 하였다. 강당은 이백여 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으로 바닥은 황토를 개어 판판하게 다지고 그 위에 대나무 자리를 깔았다. 다른 지역에 있는 강당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시설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강당은 이미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강당 중앙에서는 어떤 키 큰 노인이 독특한 논리로 자기의 주장을 펴는 중이었다.
"지금 세상에는 많은 바보들이 천지를 우롱하고 있습니다. 위대하고 위대한 하늘을 어찌 범인이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일장 연설을 하며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청년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청년은 상의를 거의 걸치지 않은 채 아주 초췌한 몰골로 죄인처럼 떨고 있었다. 이사와 한비는 옆 사람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청년의 이름은 만량(萬良)으로, 난능에 사는 소작농이었다. 지난해 흉년으로 만량은 전조(田租)를 내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팔려갈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만량의 어머니가 절대로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다 전주(田主)에게 지독히 두들겨 맞아 세상을 떠났고, 그는 그곳을 탈출한 후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원수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이곳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악독한 전주는 용서가 되고 도리어 만량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비와 이사, 두 사람은 노기띤 눈으로 연설을 하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체구에 이마가 튀어나온 그는 수염이 듬성듬성한 것이 매우 깐깐해 보였다.
"소인은 천명을 알기 어려운 법이다. 천명이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받지 않는 사물이 없다. 길흉화복과 부귀빈천도 모두 천명에 의해 미리 정해지는 법이다. 하늘이 노하면 곧바로 별을 떨어뜨리고 나무를 울리고 재앙이 연이어 일어난다. 백성들은 오로지 가난을 천명으로 여기며 열심히 살면 하늘의......"
노인의 연설을 듣고 있던 한비가 참지 못하고 마침내 일어섰다.
"어, 어르신께 묻겠습니다. 어,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지, 지고무상(至高無上)한 하늘이란 게 도, 도대체 어떤 것을 가리킵니까?"
"하늘이라, 하늘은......"
갑작스런 한비의 질문에 노인은 당황하여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숙인 채 훈계를 듣고 있던 만량도 무슨 일인가 싶어 머리를 들어 한비를 쳐다보았다.
"하늘이 곧 신명(神明)이고, 지고무상한 천제(天帝)이로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노인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한비가 이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천, 천명설(天命說)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법, 법치군주권(法治君主權)을 세울 수가 없어. 네가 말해. 너는 언변이 유창하니 학설을 마, 마음껏 발휘해 봐."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만량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그가 아주 어려보이고 게다가 누추한 옷을 입었으며, 체구 또한 허약해 보이자 냉정을 찾고 가볍게 웃었다. 이사는 노인이 자신을 비웃으며 여유를 보이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어르신은 방금 하늘이 신이라 하셨는데, 비를 내리기도 하고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맑았다가 흐리고 어떤 때는 더운 날이 한 달이고, 어떤 때는 시원한 날이 한 달이니, 도대체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하늘은 무엇입니까? 맑은 하늘을 상제(上帝)라고 칭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흐린 하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흥!"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하늘은 신이다. 태양(太陽)도 태음(太陰)도 모두 신이다. 바람에는 풍백(風伯)이 있고 번개에는 뇌공(雷公)이 있으며 비에는 우사(雨師)가 있다. 만일 하늘에 그런 신이 없다면 어떻게 하우(夏禹)가 때에 맞추어 세상을 다스리고, 걸주(桀紂)가 때에 이르러 멸망했겠는가? 이는 하늘이 세상에 자신의 뜻을 보여준 게 아니고 무엇이던가? 오늘의 세태도 그대와 같이 하늘을 불신하고 천명을 부정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지러운 거야. 하늘의 노여움이 두렵지 않은가?"
"어르신께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하우와 걸주 시대의 태양과 태음은 똑같은 생김새였습니까?"
"당연히 똑같은 하늘이었지. 하늘은 영원불변하니까."
노인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럼 하우와 걸주 때에도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가꾸고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저장하는 일이 똑같았습니까?"
"모두 똑같았지."
노인은 한비와 이사를 번갈아 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땅도 농사꾼도 하우와 걸주 때에 같았습니까?"
이사가 또다시 물었다.
"똑같았지."
이사와 노인이 논쟁을 하는 동안 강당에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이 어떻게 변론을 전개하는지 지켜보았다. 이때 이사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어르신께서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불변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하우의 평화와 걸주의 어지러움은 하늘과 어떤 관계입니까?"
"그건......"
"이미 말씀드렸듯이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는 일은 하우 때에도 그렇고 걸주 때에도 똑같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하우 때의 평화와 걸주 때의 어지러움은 하늘과 무슨 관계입니까?"
"그건......"
노인은 이사의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에게 때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소나 말, 초목에도 모두 똑같이 적용되는 법입니다. 어르신은 박학하시면서 어찌하여 어지러이 사물을 보고 들으려 하십니까? 그리고 어째서 흑백을 뒤집어엎으려 하십니까? 설마 백성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 아닙니까?"
"이 젊은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군. 그건 하늘이 하우를 아끼고 걸주를 미워하기 때문이야."
노인이 이사에게 마구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옛책에 보면 하우의 아버지 곤(鯤)은 치수(治水)에 실패하여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래서 하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년 동안 물을 다스렸고, 세 번이나 자기 집 앞을 지났는데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고통도 하늘이 하우를 편애해서 그런 겁니까? 어르신,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지요. 하늘에는 그 나름대로 일정한 질서가 있는 것이지 하우, 요순을 특별히 아꼈던 것도, 걸주를 미워했던 것도 아니다."
노인은 이사의 말에 대답할 근거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가 만량을 일으켜 세웠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무고하게 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식이면서도 오히려 그걸 그냥 두어야 바로 천명을 알고 하늘을 공경하는 사람이 됩니까? 한쪽에서는 무고하게 사람을 죽이고 탐욕스럽게 남의 재산을 빼앗으며, 다른 쪽에서는 그걸 숙명으로 알고 고개를 숙이며 복종하는 게 과연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천명입니까? 그런 천명은 편벽되고 어지러운 천명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들 이사의 말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자 만량은 이사를 바라보며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저 놈을 잡아라! 저 놈을 잡아라! 만량, 저 놈은 나의 전호(田戶)란 말이다. 나의 노예란 말이다!"
이때 전주가 가신들을 이끌고 강당에 나타났다. 만량은 한비와 이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 다음 번개처럼 달아났다. 노인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강당을 빠져나갔다.
이날 밤, 한비와 이사로부터 그 일을 전해들은 순황은 몹시 기뻐했다.
"오늘 변론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천론(天論)>의 위력을 확인하였사옵니다. 강궁(强弓)은 호랑이를 잡고 날랜 검은 용을 잡는다는 말이 있듯, 제가 보기에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의 가르침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는 제왕을 칭하고 법치를 주장하고 있사옵니다. 바로 선생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나라이옵니다."
순황은 이런 말을 하는 이사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 너희 청년들은 할 일을 찾고 뜻을 세워 개혁을 해야 한다. 나는 기력이 쇠하여 이제 다시 천하를 주유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진나라에서 이루어질 대업을 볼 수는 있을 것 같구나. 십여 년 전에 나는 진나라에 들러 이것저것 살펴본 적이 있다. 진나라는 법치가 엄명(嚴明)하고 민풍이 순박하며 지세가 험준하고 병마가 튼튼하니 대국이라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진실로 그 나라는 내 학문의 이상이 꽃피울 수 있는 곳이로다."
그러자 한비도 흥분하여 말했다.
"천, 천하의 대세란 나, 나뉘면 반드시 합, 합해지고, 합, 합해지면 또다시 나, 나뉘어지는 법이 아, 아닙니까? 7국의 성, 성쇠는 이미 드러났고, 그, 그 가운데에서 진, 진나라가 천하의 제, 제왕으로 우뚝 서, 서리라 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나라의 장양왕 밑에서라면 뜻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사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순황은 묵묵히 한비와 이사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젊은날을 너무 쉽게 살았어. 이처럼 활기차고 야망있는 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러나 순황은 한비와 이사를 번갈아보며 흐뭇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들 두 명의 제자는 똑똑하고 의지가 굳세며 활기찼다. 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걸어나가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생은 등산과 같다.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꼭대기에 오를 수가 없어. 너희 둘은 나를 떠나 진나라로 가거라."
순황이 마침내 출사(出師)를 허락한 것이다. 한비와 이사는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세상에 나가 자신들의 포부를 펼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사가 한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한비는 스승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 이사, 나, 나에게 숨은 뜻이 있으니 이, 이번 뜻은 자네만 이루도록 하게. 어, 어떤가?"
이사는 한비의 마음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붕은 날개를 펼 때 아주 조심한다고 들었습니다."
한비는 난능에 남아 순황의 저술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사에게 진나라 장양왕을 만나 마음껏 스승의 배움을 펼치라고 당부하였고, 이사는 한비의 깊은 뜻을 헤아려 쾌히 응낙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사는 순황의 천거를 받아 진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한비는 순황의 곁에서 저술을 도와 역사에 길이남을 <순자(筍子)>를 탄생시켰다.
마침내 영정이 왕위에 올랐다. 그날 함양궁의 모든 거리는 갖가지 색깔의 깃발로 출렁거렸다. 검극(劍戟)이 시퍼런 날을 번득이고, 종소리가 아침부터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이윽고 정편(淨鞭)이 세 번 울리자 모든 대신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줄을 맞추었다. 단(壇) 위의 보좌에는 영정이 단정하게 앉아 있고, 그 뒤로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태부(太傅)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성지를 낭독했다.
"장양왕께서 붕어하신 후, 어린 주군을 받들고 왕태후께서 오늘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하오니 일이 있으면 나와서 주청하시오."
이날 처음으로 영정은 어좌에 앉아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천명이 자신에게 부여되었다는 기대감과 중압감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정의 귀에는 오로지 전전태부(殿前太傅)의 낭랑한 음성만이 들릴 뿐이었다. 태부의 낭독이 끝나자 문반의 우승상 여불위가 앞으로 나와 주청을 했다.
"마마, 오늘부터 촉군(蜀郡)의 양곡을 수송하는 잔도(棧道)를 수리해야 하오며 농서군의 재해 긍휼미를 내려야 하옵고 연, 제, 초, 조나라로 나아가는 행인(行人 ; 외교사무관)을 인선해야 하오며, 북군과 상당군의 주둔병을 교체해야 하옵고......"
"여승상, 잠깐 멈추세요."
주렴 뒤에서 왕태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사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몰랐어요. 저는 여자의 몸이니 그 많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어요?"
왕태후는 이렇게 탄식을 한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어린 임금께서 빨리 성장해 관례를 치르고 직접 정사를 돌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삼공(三公)의 신분과 업무가 나뉘어 있어 정사를 돌보는 데 어려움이 많아요. 이 시각부터 여승상께서 어린 임금의 중부 자격으로 섭정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잡다한 업무는 경이 모두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왕태후마마,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사옵니다. 미신(微臣)은 재주가 천박하고 위엄이 없어 섭정이 불가하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옵소서."
여불위는 간곡하게 사양을 했다. 이때 좌승상 창평군이 입을 열었다.
"왕태후마마의 지시는 지당하시옵니다. 여승상은 겸허하고 신중한 군자로서 재주가 뛰어나고 덕화(德化)가 넘쳐 충분히 대임을 맡을 수 있사옵니다. 반드시 국가의 창성(昌盛)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뒤를 이어 약속이나 한 듯 장군 장당, 몽작, 왕령, 왕관, 채택이 나아가 주청을 올렸다.
"여승상이 정사를 돌봄은 지당한 처사이며, 신들도 바라는 바이옵니다."
왕태후는 반대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무척 기뻐했다. 그녀는 여불위의 자리를 영정의 오른쪽에 두고 섭정을 하도록 지시했다.
조회(朝會)가 끝나자 영정은 곧장 궁으로 돌아왔다. 등와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영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조회에 나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저렇게 녹초가 되었다면, 틀림없이 머리가 터질 만큼 복잡한 일이 일어났을 거야.'
등와는 영정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화미조가 있는 새장을 가져 왔다. 평소 그렇게도 화미조를 좋아하던 영정이었건만 그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등와는 다시 밖으로 나가 이번에는 목연(木鳶)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목연은 제나라의 특사가 얼마 전 여불위에게 보내온 선물로 어젯밤 영정은 여불위에게 그걸 받고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며 그 정교함에 탄복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배 밑의 단추를 누르자 목연은 날개를 퍼득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던 영정이 웬일인지 등와가 건네주는 목연을 받아들고는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등와가 단추를 누르자 목연이 '빌릴리리' 울면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조용히 목연을 바라보던 영정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등와에게서 목연을 나꿔채 세차게 내던졌다. 정교하지만 매우 약한 목연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등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영정을 바라보았다. 영정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목연을 마구 짓이겼다. 마치 원수를 대하는 듯했다.
'저렇게 화를 낸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아, 내 할 일도 못 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게만 하니 차라리 태행산으로 돌아갈까 보다.'
등와는 이렇게 자책하며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마, 이곳을 떠날까 하옵니다. 마마께서 직접 말을 끌어다 주시면 가볍게 떠날 수가 있겠사옵니다."
영정은 등와의 말에 잠시 움찔하더니 뚜벅뚜벅 밖으로 나갔다. 조금 지나 영정은 뜻밖에도 준마 두 필을 끌고 왔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말 고삐 하나를 등와에게 건네주고 등을 돌렸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큰일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고, 큰공도 이루지 못한 채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가니?"
영정의 말은 그동안 쌓였던 등와의 설움과 불만을 폭발시켰다.
"무엇이 큰일이고, 어떤 것이 큰 공이옵니까? 하루종일 말궁둥이만 쫓아다니는 일이 큰일이고 큰 공이란 말이옵니까?"
그러자 영정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네가 내 마누라라도 된다고 바가지를 긁니?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오늘은 활쏘기를 연습하지 않았으니 빨리 활이나 가져와!"
영정의 호통에 등와는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활과 과녁을 가지고 나왔다. 말을 타고 숲으로 들어간 영정이 활을 쏘면서 중얼거렸다.
"화살에 맞은 과녁은 나라를 도둑질한 간웅(奸雄)의 몸이야."
그제서야 등와는 영정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영정이 미워하는 그 간웅이 여불위일 거라고 짐작했다.
한편 순황에게 출사를 허락받은 이사는 한비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진나라로 떠날 수 있었다. 난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오국합종군과 진나라군의 치열한 전투를 목격하였다. 이사는 진나라로 들어가는 지름길인 효산의 승곡관(丞谷關)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우회하여 위나라와 한나라를 거쳐 무관(武關)을 지나 여수(驪水)와 활하(滑河)를 건너 함양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렇게 여러 지역을 지나면서 많은 견문을 쌓을 수 있었다. 가난하고 궁핍한 한나라와 위나라 백성들의 삶을 체험했고, 전란과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국경에 들어서자 사정은 확연히 달라보였다. 국경의 수비병은 군기가 완벽했고 들에는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을마다 개와 닭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은 평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여러 나라를 지나며 경험한 것들은 이사의 안목을 한층 높여 주었고 자신감을 북돋았다. 함양의 소남문(小南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마침 장양왕의 빈례 행렬과 마주쳤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매우 슬픈 표정으로 지정된 자기 자리에서 장양왕의 영구를 실은 수레에 예를 올렸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이사는 바삐 위수 남쪽으로 달려갔다. 부교(浮橋)를 지나 성으로 들어가니 소복을 걸친 금군(禁軍)이 깃발을 들고 길게 줄을 지어 수레의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다.
"어느 분의 장례입니까?"
이사가 곁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아니 이 사람아, 어린아이도 아는 일인데 모르고 있다니. 대왕께서 붕어하셨다네."
이 말에 놀란 이사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얼 그리 놀라나? 오늘이 바로 대왕의 빈례가 있는 날이네. 겨우 나이 서른다섯에 큰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다니, 쯧쯧."
"그럼 어느 분이 임금의 자리에?"
"겨우 열셋에 불과한 어린 태자가 보위에 올랐다네.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지만 어린애에 불과하거늘......"
"이 사람아, 그래도 여승상이 계시잖아?"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참견을 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저길 보라고. 얼마나 매섭고 당차게 생긴 소년 임금이신가?"
"그래도 여승상의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할거야."
"하지만......"
"무어가 하지만이야. 권력은 여승상이 쥐고 흔들거야. 다만 걱정이라면 산 하나에 두 마리 호랑이가 있어서는 안 되듯 한 집안에도 두 명의 주인이 필요없다는 것이지."
"어이, 우리 같은 백성이야 하늘이 무너진들 살아갈 수 없겠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구."
이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곰곰 생각하며 걷다가 옥기점 앞에서 귀에 익은 이름을 들었다.
"도총관 나으리,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요. 지난번에 주문하신 옥그릇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언제 승상부로 보내드릴까요?"
옥기점 주인이 문 밖으로 나오며 도총관에게 인사를 했다. 이사는 도총관이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르던 하인에게 물었다.
"방금 저 안으로 들어가신 분이 승상부의 도총관 어른이신가요?"
밖에서 기다리던 하인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는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하며 품에서 죽간을 꺼내 하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은 하인은 여전히 이상한 눈으로 이사를 쏘아볼 뿐이었다. 그런 하인에게 이사는 난능을 떠날 때 한비가 선물로 준 백옥패(白玉佩)를 얼른 건네주었다. 그것이 이렇게 뇌물로 쓰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이사는 하인에게 도총관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보물을 받은 하인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는 하인 옆에서 도총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총관이 주인의 환대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사는 이때다 싶어 얼른 도총관 앞으로 뛰어나가 머리를 바닥까지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총관 나으리, 처음 뵙습니다.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아 이제야 만나뵙게 된 것이 유감일 뿐입니다. 저의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승상 대인께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총관 나으리께서 수고를 맡아주신다면 그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도총관은 그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부탁을 받아온지라 별 반응이 없었다. 그냥 그 자리를 떠나려는데 문득 이사의 말에 남국의 정취가 배어 있음을 느꼈다. 걸음을 멈추고 행색을 살펴보니 그는 초나라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역시 초나라 사람인 도총관은 가까운 친척을 만난 듯 반가웠다. 그의 태도가 달라지자 이사는 다시 고개 숙여 간절하게 부탁을 하였다.
"저의 선생님의 함자는 순(筍)자, 황(況)자이십니다. 일찍이 임치에 계셨을 때 여승상과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 순황 선생님!"
순황이라는 말에 도총관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도총관은 여불위가 순황을 매우 존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 그가 가장 존경하는 순황이 보낸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총관은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공자."
이사는 도총관을 따라 승상부로 들어갔다. 그 다음날 여불위는 이사에게서 순황이 보낸 죽간을 받아보았다. 죽간에는 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내용과 자신은 결코 함양에 올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었다. 사실 이사 정도는 여불위에게 그다지 쓸모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불위는 순황의 명성을 생각하여 이사를 환대했다. 여불위는 도총관을 불러 승상부의 광현객사(廣賢客舍) 이등칸에 이사가 머물 수 있도록 지시했다.
이사는 진나라에 발을 디딘 바로 그날 우연히 도총관을 만나고, 또 이렇게 쉽게 승상부에 머물게 되자 너무 기뻐 하늘을 날 듯했다. 이사는 성급하게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회는 언젠가 올 테고 그때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영정은 첫날 어좌에 앉아 조회를 본 이후로 한번도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도 역시 영정은 감천궁으로 사람을 보내 왕태후에게 일이 있어 조회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태후는 먼저 영정에게 탕약을 보낸 다음, 궁인을 시켜 가무를 준비토록 하였다. 그녀는 노래듣기와 춤추기를 좋아하는 영정이 임금이 되고 나서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해 마음의 병이 났다고 지레짐작하였다.
"가무가 준비되었사오니 감천궁으로 드시라는 태후마마의 전갈이옵니다."
왕태후의 사절이 탕약을 바치며 이렇게 말하자 영정은 손짓으로 물러가라는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서책을 뒤적였다. 사절이 나갈 수도 없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안절부절하자 보다 못한 등와가 나섰다.
"마마, 감천궁으로 행차하시지요. 그곳에서 무료를 달래소서."
그제서야 영정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는 궁중의 무료함에 빠져 안일과 나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귀족의 자제들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등시위장은 다시금 영정에게 감천궁으로 바람을 쐬러가라고 재촉하였다. 영정은 지겹다는 듯 다시 하품을 하며 그에게 나설 준비를 하도록 눈짓했다.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영정이 감천궁에 이르자 내시와 궁녀들이 궁문에서 재빨리 영정을 맞이하였다. 궁으로 들어선 영정은 왕태후에게 예를 올리고, 호피의(虎皮椅)에 몸을 기댔다. 기대기에 편안하고 푹신한 호피의자는 영정을 더욱 노곤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영정을 바라보며 주희는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편종이 울리고 옥경(玉磬)이 반주를 맞추었다. 동시에 슬축(瑟筑)이 쟁쟁거리고 생적(笙笛)이 비리리리 울렸다. 실내는 어느덧 음악의 바다로 변하였다. 수십여 명의 예쁜 무희들이 가락에 맞추어 한들한들 춤을 추자 주희도 그 박자에 맞추어 가볍게 무릎을 치면서 흥얼거렸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내내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던 영정이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과인은 갈천씨(葛天氏)의 음악을 듣고 싶도다!"
영정의 호통소리에 악사들은 재빨리 편종의 좌측에 있는 커다란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락은 울부짖는 듯, 호령하는 듯, 채찍을 휘두르는 듯, 여러 가지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점점 귀를 자극했다. 조금 전 실내를 가득 메웠던 부드럽고 간드러진 음악은 어느새 사라지고 사나이의 가슴을 쿵쾅쿵쾅 울리게 하는 호쾌한 음악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얼마 후 북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편종이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72개의 편종은 3층으로 나뉘어져 각기 지렛대에 걸려 있었다. 지렛대의 높이는 두 사람의 키보다도 높은 것이 석 장은 족히 넘어보였다. 가운데 층의 종소리는 맑고 깨끗하여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했다. 그 소리는 마치 사냥을 할 때 부는 호각이나, 사냥꾼의 풀피리 소리, 사냥개의 울부짖음과 비슷했다. 반면 아래층의 종소리는 깊고 은은했다. 탁 트인 초원의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먼 곳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로도 들렸으며 호랑이의 포효를 생각나게도 했다. 그 중 가장 특이한 소리는 아래층의 종들 가운데 가장 큰 종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심산유곡을 가로질러 울려퍼지는 메아리처럼 낮고 길게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들릴 듯 하면서도 들리지 않고, 안 들리는 듯 하면서도 들리는 그 그윽함은 모든 소리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자신이 깊은 산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구름의 바다를 발 아래 거느리고 파도처럼 달아나는 산들을 굽어보는 그런 장중하면서 잔잔하고, 무게있는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넋을 빼앗겼다. 또한 편종의 지렛대에 그려져 있는 여섯 마리의 기이한 짐승과 구름 무늬와 여섯 명의 금동무사는 마치 음악이 주는 생명력을 받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사냥노래와 일체가 되는 듯했다.
32개로 이루어진 석경이 서서히 소리를 내며 7개의 슬축이 내는 장중하면서 부드럽고 번쩍거리며 몰아치는 소리와 합세하자 사냥노래는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이 말을 내달리며 활을 쏘고 격투하고, 마지막으로 모두 잡아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듯이 끝을 맺었다.
영정은 장중하고 기개있는 음악에 흠뻑 취해 버렸다. 갸날프고 여리고 가벼운 향기의 노래는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영정은 음악이 연주되는 실내가 마치 드넓은 초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활을 들고 말을 탄 사냥꾼을 지휘하는 영정은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사냥감을 쫓고 잡았다.
"정말 기분좋구나!"
영정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 소리를 질렀다.
"하하하, 이 사냥노래는 정말 호방하고 멋있습니다. 마마께서도 몸소 그 멋을 맛보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멀리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불위가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사냥? 과인에게는 그런 복이 없어요. 오늘 아침에도 게으름을 피우고 귀찮은 일은 모두 승상에게 떠맡겼잖아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여불위가 빙그레 웃었다.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오로지 즐거운 일만 생각하시면 되옵니다. 노신은 어떤 괴로움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사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시며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신다면 그 즐거움도 끝이 없을 것이옵니다."
여불위는 주희의 불길 같은 눈빛을 느끼며 그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영정은 중부의 신분으로 사사건건 자신의 지위를 넘나드는 여불위의 말에 냉랭하게 대답했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 사냥에 있는 건 아니에요."
순간 여불위는 영정의 가슴에 숨어 있는 불만의 덩어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급히 오만한 자세를 고치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면서 공손히 말했다.
"임금의 웅지는 드넓은 산하에 펼쳐야 하옵니다. 호수같이 맑은 뜻도 밝혀야 하옵니다. 어찌 부드럽고 간드러진 음악만 들을 수 있겠사옵니까?"
"흥, 호수같이 맑은 뜻을 밝혀요?"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매일 칼자루나 잡고 창으로 사람이나 찌르는 연습을 하는데 언제 호수같이 맑은 뜻을 밝히겠어요?"
여불위는 험한 말로 영정을 훈계하고 질책하는 주희의 행동이 지나친 것 같아 얼른 말을 바꾸었다.
"임금은 웅지를 천하에 두어야 가히 존경받을 수 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청산의 기세처럼 심지(心志)를 굳게 세우시고 성정(性情)을 맑게 닦으시옵소서."
"저 아이에게 어디 그런 구석이 있겠어요? 날이 갈수록 더욱 날뛸 뿐이지요."
주희는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여불위를 노려보았다. 무언가 갈망하면서도 원망이 섞인 그런 눈빛이었다. 영정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버리면서 문득 어머니 주희의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뭔가 비밀스러운 것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하고 석연치 않은 느낌만 남을 뿐 영정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여씨와 태후는 어딘가 이상해.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해.'
영정은 여불위의 속마음이 과연 어떤지 혼자 추측해 보았다.
'옛말에 천하가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또 아무리 태평스러워도 사람이란 모두 제 이익을 쫓는다고 했어. 그런데 하물며 장사꾼인 여불위가 가만 있겠어? 여씨는 부왕을 도와 왕위에 오르도록 했고, 지금은 가장 권세가 높은 신하로, 왕의 중부로 존경까지 받고 있는데 그가 그걸로 만족할까? 혹시 권세를 영원히 가지려고 하는 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영정의 모습에 여불위는 왠지 섬뜩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영정의 마음을 떠보곤 하였다.
"마마의 기색이 좋지 않사옵니다. 화원에 나가 우울한 기분을 푸시지요."
"승상께서 마음쓸 것 없어요. 매일같이 일어나기만 하면 화를 내고, 앉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그 모습에 어디 군주의 상이 있겠어요?"
주희의 말은 영정의 아픈 가슴을 또 한번 찔렀다. 영정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왕태후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마마마와 승상께 과인이 혼미할 때 배운 노래를 하나 선사할테니 한번 들어보세요."
그 말에 주희는 낯빛이 창백해지면서 영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불위는 그저 웃기만 했다. 영정은 궁인을 시켜 등시위장을 불러오도록 했다. 대령한 등시위장은 영정과 왕태후와 여승상에게 절을 한 다음 영정의 명을 기다렸다. 지난날 동궁에서 등와에게 길을 가로막혀 낭패를 당했던 여불위는 그때의 치욕을 되살리며 언젠가는 반드시 그를 궁 밖으로 내쫓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영정은 여불위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모습이 통쾌한 듯 속으로 낄낄거렸다.
영정이 등와를 가까이 부르더니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등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슬픈 가락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자 등와가 애절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민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빠는 우리에게 사냥을 나가래요.
활을 메고 산으로 올라가요.
제후들은 정벌에 나선대요.
짐승떼도 무서워 도망가요.
엄마는 우리에게 밭을 갈래요.
가래를 메고 도랑을 지나요.
제후들은 정벌에 나선대요.
말발굽에 새싹들이 죽어요.
밭에는 싹이 죽고 잡초만 무성해요.
횃불은 끊이지 않고 남정네는 죽어가요.
정벌은 어느 해나 끝을 맺을까요?
우리 백성은 언제나 따사로운 햇볕을 쬘까요?
주희가 노래를 듣다 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들으면 들을수록 귀가 아파!"
그러나 영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히히덕거리며 힐끗 여불위의 표정을 살폈다. 여불위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모습으로 등와의 노래를 다 듣고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훌륭한 노래야. 등시위장, 그 노래는 어디에서 배웠는가?"
"할아버지한테서 배웠습니다. 그때 누이동생과 저는 할아버지와 양을 치고 있었지요."
등와는 지난날 태행산 산록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추억을 회상하며 대답했다. 여불위가 등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보아하니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 그곳이 그리운가 보군? 떠난 지 몇 년이 되었는가?"
"4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안 됐군. 가족들이 눈이 빠지게 자네를 기다리고 있겠어. 등시위장, 이렇게 하면 어떨까? 승상부에서 말 네 필과 선물을 내릴테니 집에 한번 다녀오는게."
"집에 다녀오라고 하셨습니까?"
여불위의 말에 등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직 인사를 하고 궁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등와는 눈을 돌려 영정을 보았다. 영정은 몹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때 주희가 답답하다는 듯 등와에게 말했다.
"얘야, 오늘 저녁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지금 당장에 짐을 꾸려 떠나거라."
"하지만, 마마의 성지가, 성지가 없으면 저는 떠날 수가 없사옵니다."
등와가 영정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말했다.
"태후마마의 명대로 지금 당장 준비하거라. 이 노신(老臣)이 말했으니 어리신 마마께서도 반대하시지 않을게다."
여불위는 영정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 그는 지금 등와를 영정에게서 떼어놓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영정에게 절대로 충성하는 등와만 제거하면 어린 임금을 제어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실제로 등와는 영정에게서 없어서는 안 될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잠깐!"
영정이 걸음을 옮기려는 등와를 불러세웠다. 그는 여불위를 매섭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 그리고 승상! 등와가 제 곁에서 저를 따른 지 이미 다섯 해가 가까워 옵니다. 그동안 등와는 궁을 떠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등시위장이 집을 찾아나선다 할지라도 어떻게, 어디에서 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사람을 보내 이 모든 것을 확인한 다음에 보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영정의 시선이 다시 등와에게 돌려졌다.
"등와, 네가 떠난다면 그건 맹세를 저버린 배신이야!"
차가운 영정의 목소리에 등와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한참 뒤 등와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왕태후와 여불위에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태후마마, 승상 대인, 소신은 고향에 갈 수가 없사옵니다. 마마를 모시는 게 지금 소신이 할 일 같사옵니다."
"흥, 시위장에 불과한 꼬마가 이처럼 어른을 놀리다니. 언제는 떠난다고 했다가 곧바로 말을 바꿔?"
주희가 씩씩거리며 등와를 질책하자, 영정이 얼른 나서서 그녀를 다독거렸다.
"어마마마, 이 일은 등시위장의 잘못이 아니에요. 과인은 한 나라의 주인인데, 제 시위장에 관련된 일 하나도 주관하지 못해서야 되겠어요?"
영정은 다시 등와에게 일렀다.
"등와, 왕궁의 시위장으로 너의 이름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과인이 오늘 너에게 이름을 하나 내리겠다. 모든 일에 승리하라는 의미에서 등승(藤勝)이라 부르겠노라."
뜻밖에 이름까지 하사받은 등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해 했다. 영정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주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내리쳤다.
"아이고, 하느님! 저는 어찌 이다지도 복이 없을까요."
등와에게 승이라는 이름을 내린 영정은 주희와 여불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그 자리를 떴다. 그런 영정의 뒷모습을 보며 주희가 여불위에게 신경질적으로 대들었다.
"당신은 바로 영정의......"
무슨 말인가 꺼내려던 주희가 순간 실수를 깨닫고 얼른 말을 바꿨다.
"당신은 영정의 중부이면서도 그 이름이 아깝지 않나요? 선왕께서 중부의 자격을 내리셨을 때에는 거리낌없이 영정을 훈계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의미였지 이렇게 맥없이 지켜보라고 하신 게 아니에요."
그러나 여불위는 아무 대꾸 없이 그저 하늘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주희는 그런 여불위를 보자 더욱 화가 났다.
"저는 모든 권한을 승상에게 넘겼는데 승상은 제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그래요. 승상은 고기를 얻자 망태기를 버렸다고. 제 처소를 자주 찾아보지도 않으시니, 설마 절 잊으신 건 아니겠죠?"
"......"
여불위는 무엇이 그리 답답한지 얼굴을 씰룩거리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후 생각에서 깨어난 여불위가 은근한 목소리로 주희에게 말했다.
"태후, 노여움을 푸시오. 모든 게 노신의 잘못입니다. 무조건 태후의 가르침대로 따르죠."
"그럼?"
그제서야 주희는 여불위의 마음을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 여불위는 고혹한 주희의 미소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