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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이르는 33단계 깨달음의 여행

Bollnow 2024. 3. 9. 13:16

지혜에 이르는 33단계 깨달음의 여행

Christian Jacq

 

머리말

조각가 오퀴스트 로댕은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을 한 적이 있다.

"! 말 많은 이론가들아! 지금 그대들이 도서관에서 찾아 헤매는 진리를 저 옛날에는 그저 장색(중세 건축 조합에서 견습 기간은 끝났으나 아직 독립하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도제(견습공)과 석공장의 중간 계급)만 되어도 자연과 그의 마음속에서 쉽사리 발견했었다. 진리는 랭스였고 수앙송이었으며 샤르트르였다. 진리는 우리의 모든 대도시가 지니고 있는 멋들어진 돌덩이들이었다. 자주, 나는 그 돌덩이들의 꿈을 꾼다. 타오르는 창작의 열병에 걸려 이 도시 저 도시로 작품을 찾아 떠돌아 다니는 순례자들을 따라 다니는 꿈을 꾸곤 한다. 그들과 함께, 나도 '어머니'의 집에서 걸음을 멈춘다. 프랑스 전국을 편력하는 장색들을 한데로 모아들인 '어머니'의 집에서...석수장이들의 식탁에 나도 앉고 싶구나."

로댕의 말은 일리가 있다. 박식한 것도 좋고, 중세의 문헌들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겠지만, 그와 병행하여 '말하는 돌들'을 창조한 건축가들의 세계를 직접 탐색해 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돌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우리가 사랑과 존경으로써 그들을 바라볼 줄만 안다면 말이다.

요즈음에는 교리가 전수가 거의 금물이 되어 왔지만 우리 선조들은 건축물과 석조 조각상이라는 매개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이라든가 신성, 인간의 유한성, 심오하고 가슴 벅찬 구도 등에 관한 교리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구도를 여러 단계로 나뉜 하나의 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각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각자의 리듬에 따라 자유로이 구도의 길을 답파할 수 있게 했다. 기독교 신앙을 묘사한 종교적 장면들만이 아니라, 건축가 고유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구도 과정들이 조각되어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할 메츠 대성당도 그 중 하나이다.

'지혜에 이르는 33단계'를 다룬 이 책은 1981년도에 처음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석조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지극히 생생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철학자. 당시 도미니코회 교단 최고 위치에 있으면서 중세적인 학자와 달리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플라톤적인 범신론의 신비사상을 주장했다. 간결한 문장으로 유명한 그의 저작은 사후에 이단시되어 대부분 소멸되었다. 대표적 조서로 '신의 위안의 서'가 있다.)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작품과 시간은 흘러가도, 작품 속에 깃든 정신만은 살아남는다."

그 이후, 중세에 관한 수많은 저작물이 출간되었다. 오늘날 중세는 더 이상 중간시대나 암흑시대로 간주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사시적인 성당 건립의 그 시대가 밀도 높은 영성의 시대였으며, 쉬제르(프랑스 수도사. 외교에 능란하여 생 드니 수도원의 사제로 있으면서 루이 6세와 루이 7세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차 십자군 운동 동안은 왕국의 섭정공이었다.)의 절묘한 표현과 같이 중세의 빛이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집트학 학자로서, 필자는 이집트의 상징학이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중세의 성상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인 바 있다. 중세의 성상학은 광대한 연구 분야로서, 독자는 이 책에서 중세 성상학 연구의 몇 가지 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동물의 상징학이 주로 다루어진다. 중세의 성상 제작자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작품에 영향력을 부여해 주는 고대의 전통들을 수용하고 있다.

13세기의 망드시의 주교였던 기욤 뒤랑의 저서를 보면, 중세의 건축가는 신성한 군축물의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거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뒤랑은 이렇게 썼다.

"가톨릭교회의 성무, 관례, 장식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은 성스러움과 신비로 가득하다. 그 하나하나는 제각기 신묘한 감미로움으로 넘쳐흐른다. , 그것을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제대로 살펴볼 줄 아는, 그리고 돌덩이에서 꿀을 뽑아내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윗덩이에서 기름을 뽑아낼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성상의 기둥머리 앞에서, 그리고 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앞에서, 우리는 시각과 청각을 써서 그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결정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는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집트식 표현에 따르자면, '마음이 편협해질' 우려가 있다.

'마른 나무'에서 '꽃 핀 나무' 까지 가는 길로 들어서기에 앞서, 우리는 조각가가 우리에게 전력을 다해 보여준 일곱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만 한다. 불충, 파괴적 행위, 인색, 우상숭배, 자기중심주의, 비겁, 그리고 허영이 그것이다. 이 얼마나 원대한 계획인가! 누가 진정 이 일곱 가지 결함을 극복했노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결함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의 실체를 파악하며,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멀리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꽃 핀 나무'를 향해 돌아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은 책은 중세의 영성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결과를 전하려는 소박한 시도이며 증언이다. 따라서 전달 방식이 부분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생각이 상징을 통해 표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마리 마들렌 다비는 훌륭한 답변을 제시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는 구도의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구도의 경험은 아무리 명쾌한 것이라 해도 단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조금씩 무르익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도자는 글자가 언어를 가르쳐주듯이 지식과 사라의 언어를 가르쳐주는 상징적 표현과 기후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안다. 구도자는 상징을 통해 배우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고자 할 때에도 반드시 상징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들어가기

이 책은 현대 서구인이 체험한 깨달음에 대한 증언이며, 우리 모두가 우리 내면이나 주위에서 찾고자 하는 지혜와 풍요, 조화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구도의 길에 관한 증언이다.

어느 아름답고 추운 겨울날, 나는 운 좋게도 20세기 건축의 달인 한 사람을 만났다. 구도 입문의식과 깨달음의 가치를 계속해서 전수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보통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은발의 그 사람이 내게로 다가왔을 때, 나는 앞으로의 내 삶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한 시간도 더 넘게 메츠 대성당 앞 현관에 새겨진 일련의 조각상들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오랜 탐구 끝에 그곳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돌로 형상화된 그 조각상들 속에서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 내용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누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어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 자신도 그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차였다(이 조각상들이 언제 제작된 것인지는 지금 따져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얻어 이들을 제작한 조각가가 깨달음의 주요 열쇠를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들이 처음 완성되었던 시기와 그 후 복원된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였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처음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몇미터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추위를 몰아내려는 듯 손가락에 후후 입김을 불었다. 그러더니 큼직한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그 사람도 신비로운 조각상들을 보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성당 앞 현관을 눈여겨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가곤 했다. 현관을 바로 앞에서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는 두 관광객에게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도 싸늘한 날씨 때문에 걸음을 지체하지는 않았다.

사진을 다 찍고 나자,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사진기를 정돈해 넣었다. 그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행동했다. 그가 미소를 머금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추워 보이시는군요. 뭐 좀 마시러 가지 않겠소?"

음료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한 우리는 다시 대성당 앞 현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여러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옛날 그의 '형제' 조각가들이 새겨 놓은 조각상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는 구도공동체에 관한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그랬고 중세의 대성당 시대에도 그랬듯이, 구도공동체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원을 건설할 것이다. 공기나 음식물처럼, 깨달음도 인간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면서 기온이 더 내려갔지만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그가 내게 준 가르침은 언제까지나 내 사람과 생각들을 환히 밝혀줄 것이므로...

그의 얘기들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그 말을 전해 받은 사람에 불과하다. 오늘날 서구에서 그와 같은 달인들이 전달해 주는 깨달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때문에 나는 피에르 들뢰브르라고 불렸던 그 사람이 대화를 통해 나에게 전해준 깨달음을 나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그의 이름이 들뢰브르였다고 과거 시제로 말하는 것은, 이제는 그가, 달인들이 이른바 영원한 동방세계라 부르는 그곳으로 영영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지혜'와 깨달음에 이르는 33단계의 길에 대한 가르침은 비밀로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그 가르침을 내게 전해 준 것은 사람들의 귀에 구도공동체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때는 동계 성 요한 축일(건축가들의 동계 성 요한 축일은 1224일로, 저 유명한 624일의 하계 성 요한 축일에 대응하는 겨울 축제였다)이었고, 장소는 사원 문 앞이었다...

"저렇게 비슷비슷하게 연속으로 늘어서 있는 조각상들은 처음 보는군요."

"여행을 많이 했소?"

". 이집트와 유럽을 다녔습니다. 몇 년 전부터 성당 조각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책도 수백 권 읽었습니다만..."

"허나 그 많은 책들 가운데 조각상의 의미를 밝혀놓은 책은 하나도 없었겠죠. 조각상은 말하는 돌이오. 조각상이 이야기하는 것은 꼭 한 가지뿐이오. 바로 깨달음이지요. 그걸 모르면 조각상을 이해할 수 없소."

"저 조각상들을 제작한 것은 조각가 공동체 아닙니까?"

"건축가들의 구도공동체야말로 깨달음을 전수받은 모든 시대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끈이오. 얘기는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의 건축가 조합은 그야말로 국가 안의 국가였거든요. 중세의 내 '형제' 조각가들도 건축가 조합의 비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 그들은 자연의 언어로 말을 했소. 바로 돌의 언어로."

"그런데... 왜 하필 이곳을 택했습니까? 여러 성당에 흩어져 있던 요소들을 왜 이곳에다 모아 놓은 겁니까?"

"건축가 조합이 보기에 메츠는 평범한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이오. 건축가들이 솜씨를 발휘해 놓은 요충지들이 여럿 있지요. 파리, 스트라스부르, 리옹... 지금 여기서 그 끝도 없는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는 건 아니고... 여기 이 앞들에는 그라울리라고 하는 용이 한 마리 있었다오. 그런데 자넨 용과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피에르 들뢰브르가 내게 낮춤말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크나큰 존경심 때문에 줄곧 깍듯이 높임말을 했다.

내가 말했다.

"영웅이나 성인이라면야 누구나 한 번은 용을 죽였지요. 하지만 저야..."

"아니야, 그건 잘못 안 걸세. 그들은 용을 죽이지 않았어. 용과 싸워서 이겼고 굴복시킨 거야. 그들은 용이 단순한 용이 아니라, 숨겨진 보물을 지키는 수문장이라는 사실을 ㅒ달은 거지. 자네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원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 말일세."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여기 마주 앉은 걸세. 그 질문이 자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거라면, 자넨 분명 답을 발견하게 될 거네."

"중세 '형제'들의 그 깨달음을 말씀하시는군요."

"바로 그걸세. 우리는 그들의 의식과 상징물들을 보존해 왔어. 그것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깨달음의 과정을 거쳐야 하네. 그러나 그 상징들과 의식도 우리가 내면으로부터 체험하지 못한다면 한낱 공염불을 남게 되지. 내가 여기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저 조각상들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거든. '지혜'에 이르는 33단계가 이만큼 자세하게 묘사된 것도 아마 없을 거야. 저 메시지를 구상한 '석공장'(중세 건축 조합(길드)를 구성하는 최상위 단위로 석공들의 우두머리. 중세의 성당들은 '석공장'이라 불리던 빈틈없는 전문 건축가의 설계와 작업 감독으로 세워졌고, 실제 작업은 길드로 조직되어 노동의 대가로 일당을 받던 석공들에 의해 이루어졌다.)이 아무 생각 없이 저 상징물들을 모든 사람들의 시야에 노출시켜 놓은 건 아니란 말일세.“

"모든 것을 해석해서 봐야겠군요."

"석공장을 비롯한 조각가들은 돌로 책을 쓴 셈이지. 한 페이지씩 읽을 수 있고, 시작과 끝도 있는 한 권의 책 말일세. 그중 한 페이지를 건너뛰어 버리면 나머지는 이해할 수 없게 되네. 허나 빛나는 진리는 작품이 아니라 자네의 시선 속에 있네. '진리의 빛은 토론에서 생겨난다.'는 옛 속담 속에, 깨달음을 위한 가장 심오한 진리 하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지. 자네 앞에는 구도입문 의식의 열 단계가 놓여 있네. 33단계를 통해 '지혜'에 접근해야 하네. ,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세. 우린 아마 둘 다 '지혜'의 길로 나아가게 될 걸세. 자네에게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내게는 경험이 있으니 말일세. 나는 나를 인도해 준 분들 덕분에 그 경험을 체득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니, 지금 자네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어디 설명해 보겠나?"

그의 목소리는 명령조도 아니었고 퉁명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질문에는 자연스러운 권위가 배어 있었다. 초대 같기도 하고 시험 같기도 하고 한 질문이었다.

"마른 나무가 한 그루 보입니다. 그리고 독수리 한 마리, 황소 한 마리, 가면을 쓴 사람이 넷, 용 한 마리, 돌고래 한 마리, 비둘기 한 마리, 코끼리 한 마리, 뱀 한 마리, 검을 든 사람 하나, , 태양, 양손에 술잔을 하나씩 든 사람 하나, 눈가리개를 한 사람 하나, 펠리컨 한 마리, 불사조 한 마리, 독수리 한 마리, 사자 한 마리, 항아리를 든 사람 네 명, 날개 달린 사자 한 마리, 천사 하나, 그리고 맨 끝으로 꽃 핀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군요."

"33단계 하나하나는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깨달아야 할 특질들을 나타낸다네. 저 속조상들을 보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여행길을 볼 줄 아는 사람이야. '석공장'이 이룩한 정신적 도야, 빛의 성당으로의 진입, 깨달음의 성취 등 연속적인 단계들이 저런 식으로 묘사되어있는 거라네. 저 조각상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원의 극히 비밀스러운 문을 여는 황금의 열쇠를 얻게 되지. 헌데..., 자네가 본 건 그게 전부인가? 뭔가 빠진 건 없나?"

나는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중앙에 기둥이 있군요... 그 기둥에 여러 가지 이상한 장면들이 묘사되어있습니다."

"정확하게 일곱 가지야.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상징하는 장면들이지. 구도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에 앞서서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이라네. 그것까지 하면 한 걸음씩 '지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갖추어진 셈이지. 간단하면서도 신비로운 요소들일세. 그것들을 해석하고 싶으면, 특히 체득하고 싶으면, 변신과 시험을 거쳐야 하네."

"시험을요?"

"두려운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시험을 치른다고 해서 반드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 텐데요. 사람을 파괴하는 시험도 있잖습니까."

"중요한 것은 변신의 길을 열어주는 시험일세."

"달리 말하자면, 자아를 향상시켜 주는 시험이로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중요한 것은 상태가 달라지는 걸세. 아무나 저 조각상들을 바라보고 사원의 문을 두드리는 건 아니네. 구도자라든가 영원과 진리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하는 게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구도자에게 이렇게 대답한다네. '마른 나무, 황소, 사자가 되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 꽃 핀 나무가 되라." 이렇게 말일세."

"윤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만에."

"선생님께서는 윤회를 부정하십니까?"

"부정할 필요도 없고 단정할 필요도 없네. 내가 할 일은 자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저 비밀들 하나하나에 관련해서, 건축가 조합이 체험한 바를 보여주는 일이네."

"윤회의 개념이 아니라면, 구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갖고 있던 상징적 변신의 개념이로군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

"황소가 된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동물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황소가 상징하는 특질을 사람이 획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황소로 변신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의 온갖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왕이 황소의 힘을 가졌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을 이었다.

"상태를 바꾼다는 것은 어느 한 진리를 고수하지 않고, 어느 한 독단적 사고에 생각을 고정시키지도 않으며, 회의를 품지도 않은 채로 한 진리에서 다른 진리로 넘어간다는 말일세. 자네 말이 옳아. 자네는 조각상 하나하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아내야 하네. '기하학' 용어로 말하자면, 조각상들의 '성스러운 수'(종교라든가 연금술 등에서 신비적인 숫자로 간주되는 7, 12 따위의 수로, 여기서는 조각상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나 진수를 뜻함.)를 말일세."

"동화에도 종종 동물 인간 이야기가 나오지요. 가령, 늑대 인간이라든지 곰 인간처럼요. 유럽에서도 부족이나 고대 씨족 사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신성한 동물과 동일시하곤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각 지방마다 그런 동물이 하나씩 있었지요. 한 도시에서 숭배받는 동물이 다른 도시에서는 잡아먹힐 수도 있었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만큼 깨달음의 얼굴이 다양하고 특질도 다양하다는 뜻이겠지요?"

"구도 입문자들의 공동체마다 각기 나름대로 고유한 특성과 진리를 갖고 있다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현관문의 특성이라면 '지혜로 향하는 길'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겠지. 먼저 상태를 변화시킨 뒤, 보다 확실한 자아를 되찾기 위해 자아를 버려야 하는 길 마일세. 자네, 영웅 투안 이야기를 아는가?"

"모릅니다."

"투안은 변신의 길을 두루 겪은 자였네. 9일 동안 잠을 자고 난 후 연어로 변신했지. 하루는 어부가 그 연어를 잡아서 군주에게 가져갔다네. 군주는 연어를 굽도록 했고, 군주의 아내가 그것을 먹었지. 그런데 왕비의 내장에서 나온 그의 모습이 전과 달라져 있었네. '지혜'의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래서 그는 새 이름을 하사받았다네."

"고대 이집트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직 깨달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변신 이야기들이요."

피에르 들뢰브르가 웃으며 말했다.

"장애물을 잊어서는 안 되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이미 구도의 길에서 한참 멀리 나아가 있기를 바라지만, 장애물은 여전히 거기에 버티고 서 있네."

"저 기둥이 왜 세워져 있는지, 저 문간의 수문장이 왜 저렇게 버티고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구도의 길로 들어서는 데에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야 물론이지. 깨달음을 갈망하는 것이 첫걸음일세. 우리 각자에게 올바른 길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바로 그런 욕구라네. 하지만 그런 마음만으로 우리 앞의 장애물들이 없어지지는 않아."

"저 기둥에는 왜 일곱 장면이 있습니까?"

"7이라는 수는 가장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생명의 수이기 때문이지."

"그렇다면...그 신비와 비밀이 장애물입니까?"

"그렇지, 그것을 장애물로 여기는 자에게는 장애물이지. 자네가 삶이 신비롭고, 그 신비가 불가사의하다고 단정한다면, 자네의 삶은 실제로 그런 상태에 머무르게 될걸세. 만일 저 문이 영원히 닫힌 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은 영원히 닫혀있게 될 거네."

"그러니까,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로군요. 그저 환상일 뿐이군요."

"아니, 환상이 아닐세. 사물에 이름을 붙이지 그 사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네. 그렇게 되면 삶은 장애물로 가득 차게 되지. 그래서 우리 스승들께서는 저 기둥에 새겨진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악덕(불어의 악덕은 결함이나 흠을 의미하기도 함)들의 총체와 맞서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거라네."

"악덕과 맞선다구요? 그만큼 도덕을 중시하기 때문입니까?"

"지금 나는 도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격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결함을 말하는 걸세. 사람이 자기 인격을 형성할 때는 설계에서도, 재료 선택에서도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돼. 그 단계에서 실수를 저지르면 괴상망측한 기형이 돼버리기 때문이지. 그런 기형은 저절로 허물어져 버리든지, 아니면 자유를 잃게 돼. 악덕이든 악마이든 하자든, 이름이야 뭐라고 해도 상관없네만, 그것들은 무시해도 괜찮은 사소한 것들이 아니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네가 작은 것을 지키지 않았다면, 누가 너에게 큰 것을 주겠느냐? 내가 말하노니, 작은 일에 충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실하느니라.'"

피에르 들뢰브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 보게나. 그리스도도 벌써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 않나."

내가 말했다.

"'작품''결함들'을 힘껏 물리쳐야겠군요. 거기에서 일단 해방되기만 하면, '지혜'의 단계들에 다가설 수 있겠지요."

"순진한 생각이로군. 우리가 앞으로 벌여야 할 싸움은 어려운 싸움이 될 걸세. 결코 끝나지 않을 싸움이."

기둥 앞에서, 돌로 구현된 문간의 수문장 앞에서, 나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나는 상징적 문양이라면 거의 모든 것들을 연구해 왔는데, 이제 저 상징물들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몹시 불안했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기운을 돋워준 것은 내가 지금 분명히 생의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확신이었다.

말하는 돌 앞에 마주 선 것은 나의 지성만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였다.

더욱이 피에르 들뢰브르가 내게 분명하게 예견한 것도 시험과 변신이었다. 그가 한 말의 뜻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1단계에서 제7단계까지 깨달음의 장애물들

 

", 무엇이 보이는가?"

"왕좌에 앉은 여인이 보입니다. 시종이 여인에게 다가가는군요. 시종이 술잔을 내미는데, 술잔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태도가 몹시 거칠군요. 여인이 시종의 가슴 한복판을 거침없는 발길질로 밀쳐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

"배은망덕, 몰인정한 마음, 이유 없는 폭력... 그런 것들을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자네의 해석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나?"

"그런 결함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게 확실하군요. 한편으로는... 귀족과 불충한 시종 간의 대립이 나타나 있는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시종은 평소에도 저런 대접을 받을까?"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할 때라면... 불손한 언행을 했거나 임무에 어긋나는 짓을 했을 때이겠지요. 그렇다면, 저자가 불충한 시종이란 말씀인가요?"

"바로 그걸세. 저자는 불충한 자야. 자신의 말에 충실하지 못한 자야. 저자는 왕좌에 앉아 있는 저 여인의 특질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저 여인은 천지만물의 살아 있는 영혼을 상징하네. 저자는 자신을 배반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네. 저자가 쏟고 있는 술잔을 보게, 저것은 범상한 물건이 아니야. 불멸의 물약이 담겨 있는 그릇이지. 진리는 체험하게 해 주는 물약 말이야. 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는 길로 들어서려 하질 않아. 낡은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 물약인데, 그것을 마시질 않아. 저자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아느니 차라리 술잔을 쏟아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네. 삶에 대한 깨달음에 맞서서 반항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저 여인은 저 불충한 자의 공격을 쉽게 물리치고 있네. 비록 무기는 없어도, 저 여인에게는 저런 폭력과 무절제한 반발을 물리칠 충분한 힘이 있거든."

"깨달음은 그렇게 깨지기 쉬운 건가요?"

"깨닫고자 하는 영혼은 겉보기에는 매우 약해 보이고, 또 인간의 엄청난 파괴적 충동에 비해 볼 때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충동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 결코 어느 누구도 깨달음을 없애버릴 수는 없네."

"저자가 다른 손에는 양피 문서를 들고 있지 않습니까?"

"저자는 세상을 가르쳐줄 책, 삶의 비결이 들어 있는 책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네. 술잔에 걸고 변신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맹세도 하지 않은 사람이 저 책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지. 허나 저자의 생각은 틀렸네. 저자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입을 다물고 있어. 그러니 저자는 책의 내용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여인이 겸손하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시험을 저자는 거부했어. 그러니 앞으로도 헛되고 무지하게 살 수밖에 없네."

"요한묵시록에 보면, 독실한 신자는 앞으로 닥칠 시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신앙심이 두텁고 충실한 사람은 생명의 왕관을 받게 된다는 거죠."

"그렇지. 구도의 삶에 충실해야지. 헌데 그런 삶은 지속적인 주의를 요하는 어려운 것일세. 못된 시종은 '건축가들의 어머니'의 왕관을 빼앗으려 하고 있어. 왕관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데 말이야. 왕관은 공동체라는 일체의 상징물이야. 공동체는 각자가 적절한 위치에서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는 곳이고."

첫 번째 장애물은 불충이었다! 충실성이라고 하면 거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감정으로, 심지어 쓸모없는 감정으로 간주되는 요즘 세상에서, 이것은 뜻밖이었다. 어쩌면 현대가 더 이상 깨달음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두 번째 장애물로 넘어가세."

돌에 새겨진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며 내가 말했다.

"제사 보기에, 저것은 자살하는 장면이로군요. 검으로 자기 몸을 찌르고 있는 저 남자는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 스승들께서 굳이 저런 장면을 택한 것은 우리에게 저런 행위의 원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깨달음을 구도 과정에 포함시키기 위해서였어. '자살'장면은 부정적인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네. 우리 각자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신성한 측면을 파괴하려는 의지 말일세. 알겠나, 스스로를 죽이는 자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 내면의 빛을 소홀히 한 자라는 것이 구도공동체의 관점이네."

"자살이 정말로 저 사람의 책임일까요?"

"자신을 감정이나 반사적인 반응에 내맡기고 삶을 그저 수동적으로 살았다면, 책임이 있지. 환영이 숨 막히도록 무서워지는 날이 언젠가는 오고야 만다네. 하지만 변신도 할 수가 없지. 상징을 소홀히 해왔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게 되는 거야. 더 이상은 세상이라든가 타인과의 교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돼. 그렇게 되면, 내면의 공허감에서 생기는 견딜 수 없는 긴장감을 피하려고, 가자 소중한 '도구'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하게 된다네. 자기 자신의 의식이라는 도구를 말일세. 달리 말하자면, 자신의 작업 도구를 부서뜨리는 나쁜 일꾼이 되는 셈이지. 검을 망나니의 도끼로 삼아버린다는 말일세. 그렇게 해서 신성한 측면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자기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제기하는 신성한 측면을."

"그런 인물에 대해서는 시인 프루던스(348-415. 스페인 출신의 기독교 시인. 미덕과 악덕의 싸움을 주제로 우화시를 창시함)도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인내''분노'의 싸움 이야기에서요. '분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인내'를 아무리 찔러도 소용이 없었답니다. '인내'의 갑옷에 상처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더 화가 치민 '분노'는 결국 검으로 제 자신을 찌르고 말았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싸움에서 이긴 '인내'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광기에 찬 격노는 제 자신의 적이다. 길길이 날뛰다가 제풀에 제가 죽는다. 제 자신의 무기로 스스로를 죽이고 만다.'"

"자네가 말하는 '인내'야말로 여간한 장점이 아니라네. 진정한 '인내'는 입문자로 하여금 쓰러지지 않고 세상의 무게를 버틸 수 있게 해준다네. 저기 저 기둥이 메시지의 무게를 견디어내듯이 말일세. '현자에게는 호랑이도 발톱을 못 쓰고, 병사도 검 끝을 대지 못한다. ? ''를 따르는 현자는 지상에서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내 중국인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 말일세. 자살에서 벗어날 방법이 이 말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세 번째 장애물인 조각상을 살펴보며, 내가 말했다.

"저 장면은 해석하기 어렵지 않군요. 탐욕에 찬 추악한 인물을 저것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겠어요! 저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욕심 사납게 궤짝을 금화로 채우고 있습니다. 뚜껑을 닫고 나면, 아무도 손댈 수 없을 것 같군요. 심지어 품속에도 금화 꾸러미를 집어넣으려 하고 있어요. 팍톨강(사금의 산지인 고대 리디아의 강)의 사금 알갱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돕니다. 이웃 사랑과는 거리가 멀군요."

"어떤 이웃 사랑을 말하는 건가? 단지 우리가 소유한 물질적인 부로 선을 행하는 것만을 말하는 거라면, 그것은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는 탐욕에 대한 치유책이 되지 못하네."

"이웃 사랑이란 자기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온 마음으로 지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비슷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나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세. 그보다도 먼저, 우리는 수전노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네."

"그런데 만일 저자가 쌓아 모으는 보물이 진짜가 아니라면 어쩌지요? 저렇게 잔뜩 쌓고서 궤짝을 단단히 닫아 놓았는데, 그것이 다 헛것이었다면요?"

"대개의 경우가 그렇다네! 저 수전노는 사고를 마비시키는 헛된 가치들에 얽매인 노예야. 썩어빠진 부의 획득에만 관심이 있지. 저 사람은 결국 자기가 축적한 부로 인해 죽게 돼. 자기 손으로 자기 의식에 빗장을 걸어 닫고 이중으로 단단히 잠그고 있지만 얼마 안 가서 열쇠를 잃어버리게 될 테고, 숨이 막혀서 죽게 되어 있어. 차라리 노현인과 함께 아테네의 시장에 가보고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일세.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이 참 많기도 하구나!' 허나 저 수전노보다 더 나쁜 경우도 있다네."

"실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저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말씀이신지요?"

"부를 혼자 쥐고 있는 것이 그렇다는 말일세. 바리새인이라든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모든 인색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한 조각의 진리를 얻었으면서도 그 진리를 혼자서만 누리기 위해 남에게 전해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축적도니 부는 결국 흉물스러운 용이 되어, 수전노에게 덤벼들어 그를 아귀아귀 잡아먹고 말지."

"옛날 사람들도 항상 사악한 부자들을 비난하곤 했습니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이런 무서운 대목도 바로 그런 인색한 자들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

피에르 들뢰브르가 지적했다.

"불순한 금속을 창조를 위한 재료로, 내면의 태양으로 변모시키라는 말일세. 입문자들에게 있어서 황금이란 장사치들이 말하는 금속이 아니야. 그것은 광명의 천체이고, 생명의 광채이며, 불멸의 표식일세."

"고대 이집트인들은 황금이 신의 살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전의 비밀스러운 성소인 '성상 안치소'를 밝게 비추던 것도 바로 황금이었지요. 상형문자로는 빛을 발한다는 것과 세상에 창조해 내놓는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건축 석공장이 말하기를, 돌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이라고, 조각가의 손에 들어 있는 빛이라고 했다네. 그러니 우리는 만지는 물질을 빛으로 변모시키는 황금의 손을 단련하는 법을 배우는 셈이지."

"달리 말하자면, 탐욕과는 반대 개념이로군요!"

"우리는 소유가 없는 황금의 집으로 들어가야 해. 조각상들의 황금이 환하게 빛을 발하는 곳이야말로 인간이 거짓된 가치를 벗어버리고 진정한 부를 발견하는 곳이라네."

내가 덧붙여 말했다.

"고대 이집트에는 신전마다 '황금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조각상들이 세상에 태어나곤 했지요.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조각상들은 생명력이 없는 물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넨 고대 이집트와 대화를 나누고 그 언어를 말할 수 있으니 좋겠군. 자네가 얘기하는 그 건축가들은 진리를 말한 것이네. 그들도 우리의 선배라는 점을 알아두게나."

"'레크미레'라는 이름의 고관이 있었습니다. 레크미레는 '빛처럼 아는 자'라는 뜻이었지요. 테베에 그의 웅장하고 화려한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 무덤의 벽면에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표정을 한 남자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깨가 마치 황금으로 도금된 것 같았습니다."

"탐욕을 극복하면, 사람 자체가 상징이 될 수 있네. 시험을 통과한 입문자를 신전으로 맞아들일 때, '달인'은 온 마음으로 커다란 기쁨을 표시하고 그를 황금의 팔로 얼싸안는다네."

"페토시리스 대신관의 무덤에 새겨진 이시스 여신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군요. '그대는 그대의 사지에서 나오는 황금으로 삶을 새롭게 하는구나.'"

"황금은 아직까지도 저신의 보석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남아 있네. 옛날에는 '달인'들이 온 누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황금의 산에 비유되었거든."

"우리 내면의 불길이야말로 수전노가 결코 궤짝에 가두어놓지 못할 황금이 아니겠습니까?"

"'낙원'은 이 세상에도 있네. 허나 현자들의 '황금'에 자기 살을 문질러서 거듭나지 않는 한, 인간은 '낙원'과는 거리가 멀어. 창세기에 보면, '인간', 개인이 아닌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신과 닮은 모습으로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나와 있네. 물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나 인간이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흙은 황금의 흙이 될 걸세.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나지 못한 세속적인 인간은 흙이라는 물질에서 통속적인 황금으로 변하게 돼. 무거운 눈꺼풀이 그의 눈을 감겨주게 된단 말일세."

"'석공장'들에게는 어찌 보면 연금술사 같은 일면이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이지. 개인적인 연금술은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만 전수해 주는 기술적 비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네. 그러나 공동체의 연금술이라는 것도 있네. '지혜'를 추구하는 모든 과정에는 늘 이 신성한 과학의 상징들이 있게 마련이야. 설령 이 보물들이 수전노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수전노는 그것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지. , 저것은 더 큰 장애물일세."

"받침돌 위에 세워진 흉물스러운 우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저 사람은 전에 파리, 아미앵, 샤르트르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술사가들이 우상숭배의 전형으로 보는 인물이죠. 하지만 고대 문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우상숭배란 별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어느 종교 단체든, 우상숭배자란 다른 '종교'를 숭배하는 자를 지칭하지. 단죄하기 딱 좋은 희생자이지! 이렇게 독단주의적인 태도로 오로지 자기들만이 완전하고 결정적인 진리를 갖고 있다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네. 신전 건축가들은 결단코 교조론자들도 아니었고 광신자들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건축가들에게는 기독교도 다른 양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양식일 뿐이었어. 더구나 로마의 기독교만이 유일한 기독교인 것은 더욱 아니었지."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우상숭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우리의 지성을 왜곡시켜 상징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정신적 메커니즘이네. 우상숭배는 작품 속에 표현된 사상과 작품의 형식을 혼동하는 걸세. 우상숭배자는 고정관념에 집착하고, 그 고정관념 안에서 꼼짝할 줄을 모른다네. 자기가 가졌던 믿음이 달라질까 봐 겁이 나는 거지."

"새로워지지 않는 모든 지식은 경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물질을 다루는 학문에서의 진리는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더더욱 진리여야 하지요."

"우상숭배자의 시선은 메말라가고 그의 사고는 빈 껍질이 된다네. 수액을 잃은 그는 덧없는 허상의 노예야. 하느님이 이 세상에 뿌려놓은 기호들을 보지도 못하니 말일세."

"우상숭배를 악마의 장난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우상숭배를 싹트게 하는 것은 바로 악마가 아니겠습니까?"

"'악마'... 너무 앞서가지 말게. 깨달음의 여행길은 멀고도 멀다네. 이 여행길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는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조급한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확실성이나 확신이 없는 상태를 못 견뎌하지. 그러나 공부하고, 추구하고, 깨달으면서 혹은 깨닫지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밤과 낮을 보냈는지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나! 중요한 것은 이 세상과의 관계를 점점 더 밀도 있게 체험하는 일일세.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저 돌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일이란 말일세."

"사실, 진리 추구가 운동 경기는 아니지요.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자격증이나 학위가 중요시되는 문명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로군요."

"구도 입문자에게는 학위도, 자격증도 필요 없네. 그리고 입문자들끼리는 서로 비교되지도, 분류되지도 않는 법이야. 이 시대가 학위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시대인 것은 사실일세. 그 학문이 덕분에 때로는 무능한 자가 형편없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처벌을 피해가기도 하니 말이야."

"우상숭배라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우리 시대의 가치판단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악마란 정도에서 일탈하고 비뚤어진 길로 뛰어드는 자를 말한다네. 웃음이 악마를 달아나게 한다는 것은 사실일세(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웃음을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파악하고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성공에 지나치게 연연해 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우상숭배자들을 겁낼 필요가 없네. 그러나 저 속 빈 자들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 있네."

"더 무서운 사람이라니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저 젊은 여자 말씀입니까? 창부, 경박함, 유혹, 음란...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매춘부에 관한 모든 성향들.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불순한 고기를 먹게 하는 여자."

"자네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네만, 그런 것들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네."

"거울 말씀입니까?"

피에르 들뢰브르가 물었다.

"이집트인들은 그것을 무어라고 부르는가?"

"거울은 '얼굴을 열어주는 물건'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동의어이기도 하지요. 대상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고, 그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니까요."

"그러나 거울은 단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만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네. 거울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각할 수 있는 세계의 반영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하지. 우리의 선배 건축가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계는 하느님의 거대한 거울이고 우리는 그 거울에서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고 했네. 우리의 지성이라는 시각은 간접적이야. 그러나 직관의 시각은 거울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고, 반영을 초월하여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점성가도 거울을 자신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게 놓지 않는가. 장자는 이런 말을 했어. '잔잔한 물이 사물을 비추거늘, 하물며 잔잔한 정신이 무엇이든 비추지 못하리오? 현자의 정신은 얼마나 잔잔한가! 현자의 정신은 만인과 삼라만상을 비추는 거울이라.'"

"일전에 기묘한 인물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요, 조짐 드파노폴리스라는 그 연금술사는 '진리'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는 반영이 아니라 그 반영 속에 숨겨져 있는 빛을 보는 거라고 했습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지적했다.

"저기 저 인물은 그렇지 못한 경우일세. 저자는 거울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잖은가. 저자는 텅 비어 있어. 게다가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자기중심주의적 사고에 빠져 있지. 연금술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연금술사는 우리 건축가 조합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네.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네만, 연금술사들은 '작품' 완성 과정에서의 거울과 거울의 역할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네. '결코 자화자찬에 빠지기 위해서 거울을 바라보지는 말라! 연금술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는 자신의 결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런 용기 있는 시선이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화에도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하겠지요?"

"세속의 인간에 대한 시각이 아니라 거울에 대한 시각을 갖게 해주는 것이지. 그러한 관조는 그림자의 왕국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살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도취라는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네."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닌 ''이겠지요?"

"그렇지.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우리를 초월하는 것이라네. '영혼'의 원초적인 순수성이야말로 '현자의 거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로 볼 때,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될 때, 사람은 더 이상 신도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네. 그 어떤 악덕이나 미덕의 노예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지."

"말씀을 듣고 보니, 아랍의 이런 속담이 생각나는군요. '악덕도 미덕도 낙원의 문을 넘지 못하리라.'"

"이슬람교의 구도자들은 말하기를, 일곱 개의 문과 열두 채의 집 위에 '거울'이 있다고 했네. 사실, 거울은 일곱 개의 행성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있는 조화로운 우주를 볼 수 있게 해주지."

거울 이야기를 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피에르 들뢰브르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넓은 사고 영역을 열어놓았다. 나는 어쩐지 이야기 중간에 개입해 이의를 제기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이제 장애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모양이로군요. 지금 우리는 메마른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라 우주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을 잘랐다.

"시험을 거치는 다른 방법은 없네. 시험을 묘사하고 명명하고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장애물 자체가 아니라, 장애물로 상징되는 빗나간 생명력일세. 장막에 가려져 있어도 감지되는 생명력."

악의는 없지만 짓궂은 시선으로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 생명력을 바르게 인식하려면 먼저, 불쑥 나타난 시련 앞에 주저앉아 버리지 않아야겠지."

"저 산토끼를 말씀하기는 겁니까?"

내가 여섯 번째 장애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저 조그만 짐승 때문에 검까지 버리고 달아나는 저 겁쟁이 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저렇게까지 비겁할 수가 있을까요? 파리, 아미앵, 샤르트르, 랭스의 성당에게도 저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보아도 여전히 놀랍군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 말 말게. 구도 과정에서 비겁함은 흔히 있는 현상이네. 기사처럼 중요한 직책을 밭은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공격적이지 않은 작은 짐승에 대해서도 잔뜩 경계하게 되지."

"야행성인 산토끼는 어둠에 익숙한 짐승으로, 기사가 모험을 찾아 들어간 저 이상한 숲에 있는 것이겠지요?"

"틀림없이 그렇겠지. 그렇기 때문에 사전 준비도 갖추지 않고, 꼭 들어가고 싶은 욕구도 없이 상징의 숲속으로 들어선 자의 비겁함이 더더욱 잘 드러나는 걸세, 저자가 얼마나 호언장담을 했겠나? 자신이 최강자이며,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도 손가락 하나로 퉁겨서 무찔렀다고 떠벌였겠지! 그런데 저것이 그 결과라네. 덤불에서 나온 토끼 한 마리에, 입으로는 도통했다던 기사가 무기도 버리고 벌벌 떨고 있지 않나."

"그러고 보니 충격적인 몇 가지 경우가 생각나는군요. 온갖 종류의 '정신적 지도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그런 사람들 가운데 많지. 사실 정신적 지도자란 없네. 지혜와 몸소 체험한 바를 전달해 주는 '달인'이 있을 따름이지. 명예가 실추된 기사가 두려움을 갖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모험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네. 깨달음을 위해선 자기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재검토해야 하기때문이지. 진정한 위험에 맞서고 진정한 승리를 거두려면 먼저 우리의 잘못된 안전장치부터 포기해야 하네."

"갑옷을 입었다고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군요. 저 기사는 깨달은 사람처럼 보이고 검도 받았지만, 모든 것이 연극이고 허위였을 뿐이군요."

"그렇기 때문에 구도 과정에서의 비겁하은 매우 큰 장애물이라네. 처음 관문을 통과한 구도 입문자들 가운데에는 위선자들이 있네. 그러나 저 시시한 산토끼를 만났을 때, 신비의 숲에서 나온 저 살아 있는 짐승을 만났을 때, 그들의 기만성은 드러나고 말았지. 자네는 저자들처럼 되지 말게. 마음속으로 '스승'의 가르침에 늘 대비하고 있어야 하네. 어느 피조물에든 그 안에는 '스승'이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해. 만일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비겁자가 되지 않는다네.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해야 하네. 지금은 비굴과 핑계가 존경받는 가치의 대열에 올라 있는 세상이니, 진실하려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걸세."

"검을 간직하는 것, 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달아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구도 과정에서 타인을 기만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하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법일세. 빛의 검을 간직하고 전사로 남아야 하네. 일곱 번째의 장애물을 넘으려면 모든 용기를 동원해야 할 걸세. 그 장애물은 우리와 사원 문 사이에 있네."

나는 마지막 장애물을 바라보며 놀랐다. 구렁텅이로 한없이 추락하는 사람처럼 거칠고 극적인 장면이었다.

"낙마하는 기사가 보이는군요. 장면은 저도 압니다. 건축 석공장 빌라르 드 온쿠르(13세기의 프랑스 석공장. 그의 정교한 크로키 수첩은 당시의 건축과 조각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가 크로키 수첩에 그려놓은 그림을 봤거든요. 다른 성당에도 저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에 대한 해설도 나와 있던가?"

". '허영'을 묘사한 것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선조들께서는 성난 말 위에서 날뛰는 모습으로 '허영'을 묘사했습니다. 불쌍한 짐승을 쉬지 않고 때리고, '겸손'에게 덤벼드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허영'은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고서 형편없이 볼썽사납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마지막 장애물이겠군요. 터무니없는 오만이요."

"오만을 허영과 혼동해서는 안 되네! 허영은 죽음이고 허무일세. 허영심이 많은 자는 온갖 결점을 지닌 채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야. 일단 가기만 하면 어떤 단계라도 넘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그러나 말이 상징하는 본능의 세계는 조화롭지 못한 사고를 사정없이 떨어뜨려 버린다네. 허영심 많은 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오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만이란 미지의 일 앞에서 절대로 패배를 자인하지 않는 구도자의 용기라네. 사원으로 데려다줄 군마에 똑바로 올라타기 위해서, 고결한 오만으로써 자기 내면의 '불길'을 얻으려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지. 이 일곱 가지 장애물은 결코 완전하게 극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이 장애물들은 우리가 가는 길 곳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네. 그 점을 항상 명심하게나. 그러나 우리의 결함을 책임질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하네. 우리가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다면, 모든 어려움은 사라질 걸세. , 아제 '마른 나무'를 생각해 볼 때가 되었군."

우리는 일곱 가지 시험 기둥을 남겨두고, '지혜'33단계 중 제8의 단계를 향해 걸어갔다.

 

 

작은 신비들 '마른 나무'에서 ''까지

 

8단계 마른 나무-최초의 자각

 

깨달음의 첫 번째 양상은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헐벗고 앙상한 가지를 뻗고 선 나무였다. 모든 것을 빼앗긴 세계의 슬픔이었다.

내가 말했다.

"죽음이로군요. 저것이 혹시 제 자신의 죽음은 아닐까 겁이 나는군요. 장애물들을 앞두고 좌절한 모습 같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저건 죽음일세.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죽음은 아니네. '마른 나무'는 장애물과 맞서 싸우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네. 들어 올리기엔 너무 버겁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 최초의 문이 슬며시 열리지. 그 순간, 우리의 눈을 떠야 하네. 상징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태에, 즉 깨어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네. '마른 나무'의 겉모습만 본다면, 깨달음의 여행 처음부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테고, 그렇게 되면 보다 화려한 다른 길들을 찾아 나서겠지. 하지만 그 길들은 막다른 길일 뿐일세."

"그렇지만 저 나무에는 생명력이 조금도 없잖습니까. 구도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것만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싹 말라보이지만, 저 나무는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세. 저것은 비록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내포되어있는 겨울나무라네. 더 이상 수액이 올라오지 않고 에너지도 밑둥과 뿌리에 붙잡혀 있지. 외재성은 전혀 없고 거의 완전히 내재성뿐이네. 그러나 저것은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아로의 귀환을 의미한다네. 수액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해. 수액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야. 뿌리도 뽑혀버린 것이 아니라, 아직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지 않을 뿐이지. 모든 나무는 알고 있다네. 창조의 원리는 자라난 나무의 기운을 꺾어 위축되게 하기도 하고 위축된 나무를 자라나게 하며, 푸른 나무를 마르게 하고 마른 나무를 다시 푸르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구도 여행의 이 단계에서 꽃 핀 나무가 될 수는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그렇지요? 첫걸음부터 완전한 계시를 기대했다가 '마른 나무'를 발견하고는 기가 꺾이는 거로군요."

"기가 꺾인다기보다는 겸손해지는 것이지. 허황된 자는 '마른 나무' 단계에서 발길을 돌려버리지만, 진정한 순례자는 자기 내면으로 수액이 차오르게 할 테니까."

"나무 속에 신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종교가 많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가 나무 속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마른 나무가 다시 초록으로 물드는 것을 본 순간, 세트신(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전투의 신. 세트는 하늘의 신, 사막의 왕, 태풍, 무질서, 전쟁의 신으로 형인 오시리스를 속여 죽이는 등 음침하고 다루기 위험한 존재였다. 때로는 그리스의 악마 티폰, 이집트의 악마 아페피와 동일시된다.)은 그 나무가 십자가로 바뀔 것이며 세상이 신성해지리라는 것을 알았네. 모든 것은 인간이 삶과 자연 앞에서 어떤 시각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거든.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나무 옆을 지나갈 때, 사람에 따라서 나무를 무시하기도 하고, 거기에서 비록 매우 약하기는 해도 장차 큰 빛이 될 작은 빛줄기를 발견하기도 하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지혜를 찾아 동방으로 길을 떠난 왕이 있었다고 하네. 깨달음을 얻자 왕은 출발점으로, 그러니까 '마른 나무'로 되돌아왔다는군. 왕은 그 나뭇가지에다 지신의 무기를 걸어놓았지. 그랬더니 죽은 나무가 금세 다시 초록으로 물들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저 삭막한 상징물에 믿음을 가져야 하겠군요. 우리의 진정한 자질들을 발견하게 해 줄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요."

"'마른 나무'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목적일 뿐일세. 옛날에 그 나무에 도달한 기사나 순례자는 큰 명성을 획득했네. 오드릭 드포르드론 신부는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줄곧 그 나무가 헤브론에서 멀지 않은 맘레 산에 있었다고 했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무덤, 그리고 아담의 무덤가지 헤브론에 있네.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온 사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지."

"아직도 '마른 나무'의 그루터기를 볼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지.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는 것은 구도의 삶의 비밀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세. '마른 나무'를 통해서, 인간은 득도의 길로 이끌어주는 연결끈을 붙잡을 수 있어. 13세기의 옛날 지도에서, 탐험가 리샤르 드 알딩감은 그 '마른 나무'가 지상 낙원과 인도 인근에 있다고 보았네."

"인도라고요? 그것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인도가 아니겠지요. 중세 사람들이 생각한 인도는 괴물들의 땅이었고, 여행자들에게 달갑지 않은 끔찍한 피조물들의 땅이었잖습니까."

"'마른 나무'로 가는 길에는 적잖은 위험이 있네. 사람들은 신기한 것, 이상한 것, 예사롭지 않은 것에 탐닉하고, 깨달음의 길을 망각하며, 스스로 만든 환각에 빠져들기도 하지. 마르코 폴로는 코비난시를 나서면 세상에서 가장 메마른 사막에 도달한다고 전하고 있네. 그곳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과실도, 나무도 없다네, 1주일을 걸어가면 북페르시아 끝자락인 토노카인 지방에 도달하지. 그곳에는 ''나무가 있는 거대한 고원이 펼쳐져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마른 나무'라고 부른다네. 그 나무는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하다는군. 나무껍질은 한쪽은 초록색이고 다른 한쪽은 흰색인데, 나무에서는 밤이 열리지만 속이 텅 비어 있다네."

"그러고 보니 그 나무 이름의 숨겨진 뜻을 알 것 같군요. '' 나무는 외로운 나무로군요?('외로운'이라는 의미의 불어 'soel'''의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한 설명.) 알맹이를 전부 잃어버린 빈 껍질의 위험, 그것이 우리의 고독감이겠지요?"

"'마른 나무'는 우주 한가운데에 고립된 인간을 의미한다네. 삶의 부분과 부분을 서로 연결해 주는 정신적인 관계, 사람과 사물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그리고 일관적인 사고와 인식의 가능성을 아직 깨닫지 못한 인간 말일세."

"하지만 '마른 나무'에서부터 진정한 깨달음의 경험이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구도 입문자의 마음이 진지하다면, 구도의 경험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나무가 우뚝 서 있는 곳이 보이면, 자기만족 따위는 배제한 자네의 결점과 약점들을 열거해 보게. 감정에 흽쓸리지 말고 우주를 기준으로 해서 자네 자신을 판단해야 하네. 자네의 빈 마음은 더 이상 추운 공허가 아니라 미래의 충만함을 얻기 위한 초대가 될 걸세.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성배'에 관한 전설에는 '마른 나무'에 대해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나?"

"이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이브는 자신이 당한 불행을 기억해 두기 위해 생명의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간직해 두었다네. 당시에는 그것을 넣어둘 뒤주도 궤짝도 없었기 때문에, 이브는 나뭇가지를 땅에다 꽂아 놓았어. 그랬는데, 겉으로 보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낙원의 나무에 새싹이 돋아, 말라버린 줄 알았던 나무가 하늘을 향해 일어선 거야."

"그러니까 이브는 마른 나뭇가지를 땅에 꽂음으로써 원죄를 씻은 셈이군요?"

"삶의 '이유'를 찾지 않는 자는 '마른 나무'를 외면하지. '마른 나무'를 멸시하고 비천하게 생각하며, 좀 더 무성하고 싱싱한 자연을 좋아해. 깨달음의 길이 좁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네. 그러나 알고자 하는 자는 '이 나무는 왜 말랐을까?'를 생각해 본다네. 그러면 자신의 내면에 멸하지 않는 뿌리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그래서 그 뿌리를 하늘의 땅에 다시 심을 준비를 한다네."

"제 생각에는 뭔가 조리에 닿지 않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른 나무'라는 것은 극점이라든가 맨 끝점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마른 나무'가 사람이 이룩할 수 있는 발전의 최종점일까요? 물론 그건 아니겠지요. 지금은 아직 여행길의 시작에 불과하니까요. 그럼 끝부분은 과연 무엇입니까?"

"종말이라든가 죽음은 한편으로는 탄생이라고도 볼 수 있네. 세속 생활의 끝이라든가, 원죄인의 죽음, 또는 정체 상태의 인간에서 생성 상태의 인간으로의 이행 따위를 생각해 보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러한 상태 변화를 겪는 사람의 정신을 훌륭하게 표현한 바 있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은 눈에 띈다. 인간이 빛과 가르침에서 얻은 바가 전혀 없다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인간이 어둠과 고통 속에 있을 때 빛은 나타나야 한다.'"

"자기가 '마른 나무'가 아니니 다행이라면서 '마른 나무'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형편없는 실수가 되겠군요. 제 생각에는 그 나무로 여행자용 지팡이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현자도 이렇게 노래했잖습니까. '비틀린 나무가 벌판에서 껍질이 벗겨져 건조함과 뜨거운 태양에 단련되네. 목수가 그것을 가져가 일으켜 세워서는 현자의 지팡이로 삼는구나.'"

"일시적인 진공 상태에서 충만함이 솟아나고, 고통스러운 건조 상태에서 꽃이 피어나게 될 걸세. 깨달음이라는 기적도 바로 그런 것이라네. '마른 나무'와 신성화해야 할 건축 자재는 깨달음의 길을 열어준다는 맥락에서 서로 같은 말이네. 자아도취적인 거만한 태도는 깨끗이 버리게나. 순례자의 지팡이에 몸을 기대게. 중세의 루앙에는 도관이 세 개 달린 샘이 있어서, 샘에서 시원한 물이 솟아 나와 '민중'이라는 이름의 '마른 나무'에 물을 뿌려주었다네. 나무의 푸른 이파리는 쑥쑥 자라났지. 내 생각에는 구도 정신이 대대손손 전해진 덕에 공동체가 되살아난 사실이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네."

"'마른 나무'는 사원의 문을 열어주는 의식의 자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옛날에는 '달인'의 무덤에 나무가 꽂히면 생명이 멸했었네. 하지만 지금 자네의 경우에는, 외양이 마른 나무에 의해 생명이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어. 모든 것이 다 틀린 듯이 보이는 순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탄생한다네. 겉보기에는 거친 원재료 속에 내일을 위한 변신의 비밀이 들어있다네. 고립된 나무는 곧 깨달음의 길가에 놓인 자네의 고독이라네. 자네는 아직 비옥한 토양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자네의 의식이 아직은 과실을 생산하지 못하지만, 자네는 자네 앞에 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을 걸세. 이제 저 '독수리'의 말을 들어보지."

 

 

9단계 독수리-빛의 직관

 

사원 앞에서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자네는 지금 성당 문 안의 현관 홀에 들어서 있네. 이제 자네의 세계는 바뀌었어. 속세의 문은 이미 자네 뒤에 있네. 자네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될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띨 걸세. , 자네가 앞으로 만나게 될 상징물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겠지만 말이야."

"맨 먼저, 저것은 '독수리'로군요."

"'독수리'와 그다음에 나올 '황소'는 수문장 군에 속하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독수리''황소'는 깨달음을 완성할 가장 확실한 상징물들이네. 빛이나 창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동물이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높은 이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의식의 어둠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참인데, 선생님은 제게 가장 높은 가치들을 손에 넣으라고 하시는군요!"

"현대 세계에서는 뭔가 배우고자 할 때 단순한 개념부터 시작해서 점차 보다 복잡한 문제를 공략하지. 하지만 구도자가 사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것과는 다르네. 건축가는 교사가 아니고, 그들의 방식도 교과서적인 것이 아니네."

"초심자는 분석에서부터 출발해 종합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요?"

"절대 그렇지가 않아. 먼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완벽성을 잠재의식 속에 집어넣고, 그런 다음 그것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네. 마치 꼭대기가 보이는 거대한 산기슭에 있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진행시키는 거야. 비록 다분히 흐릿하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기어 올라갈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

"저는 건설 현장에 마악 투입된 셈인데, 그리고 겨우 작업을 시작한 참인데, 선생님은 제게 완공된 성당을 보라고 하시는군요."

"그런 심상이 마음속에 있어야만 시험을 거치는 자네에게 길라잡이 노릇을 해주게 될 걸세. '독수리''황소'는 탑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두 개의 뾰족탑이라고 할 수 있네. 그들은 자네의 시야에 여행 목적을 제시해 주지. 그들 덕분에 자네는 사고의 목표를 자네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설정할 수 있네."

"'독수리'는 성 요한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장 아낀 사도이며, 빛을 증거한 그 요한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많은 교회들이 지어졌지. 요한은 우리 건축가 조합의 상징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네. 석공장들은 도마와 함께 요한을 모델로 여기고 있어. 하계 성 요한 축일도 있잖은가. 그때가 되면 공동체들이 모여 즐거운 잔치를 벌이지. 또한 요한은 뱀의 지성이 들어있는 불멸의 잔을 지닌 자이기도 해."

"왜 지금 이 순간에 요한의 '독수리'가 등장하는 겁니까?"

"아마 자네가 '마른 나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깨달았고 이 여행을 계속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독수리'는 자네가 내면의 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자네가 아직 그 내면의 빛의 힘을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독수리'는 왜 두루마리 부적을 갖고 있습니까?"

"두루마리 부적이라... 이 복잡한 말에는 의미가 있지. 그것은 그리스어 두 단어가 합성되어 생긴 단어라네. 우리말로는 '신율의 파수꾼' 정도로 번역할 수 있지."

"'독수리'가 깨달음의 계율, 즉 우리로 하여금 빛에 눈뜰 수 있게 하는 신성한 문서를 갖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어둠 속에 있었지만 어둠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서의 도입부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애초의 순수한 의미대로 읽는다면 그렇지. 많은 번역서에는 '빛이 어둠 속에 있었으나,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옮겨져 있어. 허나 그것은 잘못된 번역일세. 그 오류는 다소 의도적으로 전해졌고, 반복되었지. 원문대로 하자면, '그러나 어둠은 빛을 가로막지 못했다.'라고 해야 하네."

"언어상의 사소한 문제 아닙니까?"

피에르 들뢰브르가 대답했다.

"그저 사소한 문제라면 나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걸세.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박학다식해야 할 필요는 없네. 그러나 상징학적인 글 중에는 너무나 중요해서 엄밀하게 탐구해 볼 가치가 있는 내용들이 있다네. 만약에 어둠이 정말로 빛에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은 영원토록 무지하게 지낼 수밖에 없을 걸세. 신은 하늘에 남아 있고, 인간은 땅바닥이나 기어 다닐 수밖에 없을 거야."

"선생님은 빛이 어떤 불투명한 물질이라도, 어떤 투박한 인간이라도 다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방어막도, 어떤 성벽도, 천지를 창조한 '건축가'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변질시켜 놓지는 못하네."

"샛길, 말하자면 사막과 어둠에서 빠져나갈 방법도 찾아보아야 하겠지요."

"모든 것은 구도자가 어떤 어둠 속을 여행하느냐, 즉 어둠의 성질이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네."

"무슨 뜻이지요?"

"어둠에는 두 종류가 있네. 첫째는 외적인 어두움일세. 그 어둠은 굽이굽이 굴곡이 져 있어, 인간이 길을 잃게 되지. 그 어디에도 길은 전혀 보이질 않아. 그리고 둘째는 내면의 어두움을 의미하네. 이 경우, 이기주의적 사고에 눈이 멀었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참된 성격을 생각해 보기 위해 반성을 하지. 그러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엷은 빛이 보이고, 그 너머에 기다란 통로가, 기둥들이 죽 늘어선 통로가 희미하게 보인다네. 마치 구도자가 불빛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컴컴한 지하 납골당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바로 그 최초의 흐릿한 빛 속에, 구도 여행이 끝나면 구도자가 얻게 될 거대한 빛의 특질들이 들어 있다네."

"그 빛을 지키는 수문장이 바로 '독수리'로군요? '독수리'가 구도자에게 빛을 선사하는 것이겠지요?"

"'독수리'는 빛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기능을 의미한다네. 우리는 '독수리'를 통해서 최종적인 세계를 예감할 수 있네. 자네도 '독수리'의 날개를 타고서,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졌던 영혼의 정경을 다시 발견해 보게나. 다시 또 '독수리'를 만나려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걸세. 자네가 '독수리'를 다시 만나게 될 때면, 새싹 단계의 빛은 성숙기에 도달해 있겠지. 자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수문장, '황소'에게로 가보세."

 

 

10단계 황소-창조의 직관

 

"'황소...' 제게도 낯설지 않은 동물이로군요."

"자넨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기던 신성한 황소를 비롯해서 기타 고대의 여러 종교에서 숭배하던 황소들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파라오가 제사를 지낼 때 입던 예복 차림 중 하나가 황소 꼬리를 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소'는 왕의 창조력을 상징하는 동물이었거든요. 입문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그것이겠지요?"

"이집트, 바빌로니아, 중국, 그리고 베다 시대의 인도 등지에서 위대한 구도 문명이 탄생하고 널리 전파된 것도 바로 '황소' 시대였네. 그 메시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어. '독수리'처럼 '황소'도 구도자를 인도하고, 또 삶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가능성과 직관을 단련시킨다네."

"이 새로운 단계는 존엄한 삶의 기술을, 창조 활동을 배우는 단계이겠지요?"

피에르 들뢰브라가 대답했다.

"'황소'야말로 의식이 열린 삶의 출발점이야. 우주를 계속해서 굴러가는 일련의 바퀴들로 본다면, '황소'는 그 바퀴들을 지탱하는 축이라네. , 바퀴들 전체가 굴러갈 수 있게 해주는 중심축이 바로 '황소'인 거지.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내적인 변화의 중심이고, 열쇠란 말일세. 그것을 알기 전에 구도자는 꼼짝 못 하는 상태를 겪기도 했고, 속력을 통제할 수 없는 '바퀴'에 마구 이끌려 가기도 했지. 몸의 균형을 찾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어. 그런데 이제 '황소'의 단계를 거쳤으니, 자네의 차원은 달라졌네. 이제는 중심과 동시에 둘레를 체험할 수 있고, 안정된 상태에서 이동을 시도해 볼 수도 있어."

"고대 이집트의 상징학에 따르면, 때로 태양은 자연 전체를 탄생시키는 황소의 모습을 띠기도 한답니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건축가에게 중요한 자질이라네. 더 이상 외부에서 진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을 창조해 가는 자질 말일세."

"건축가 및 장인의 지배신인 프타가 왜 '황소'와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가 가는군요."

"'황소'는 인간에게 재료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준다네. '황소'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영원토록 우주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힘이야. '황소'는 생의 곳곳에 빛을 넣어준다네. '황소'가 없다면 모든 것은 멈추어지고 말 걸세."

"바빌로니아에서는 남녀 제신드의 회의를, 성서에 나오는 유대족의 위대한 신으로 알려진 엘이 주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라는 말은 어떤 신이 됐든 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될 수 있는데, 그 말을 수식하는 가장 빈번한 형용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황소'입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만 황소를 제신의 아버지이며 지도자로 간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 '사자의 서'에서 보면 흰색 왕관을 쓴, 머리와 심장이 온전하게 깨어난 현자는 완전한 합일의 도시로 들어갑니다. 그는 우등한 자들을 인도하고 열등한 자들을 성장시킵니다. 그런 그가 '나는 터키옥 속을 걸어가는 완벽한 황소'라고 말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황소'의 상징적 특질들을 단순화시켜서, '황소'에게 가축의 아버지이며 수태자라는 역할을 부여했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수태의 성격이 주로 깨달음의 수태라는 점을 간과해 버리게 되었지."

"그러니까 여기서 '황소'를 만난 것은 우리의 창조력에 대한 계시를 받은 셈이로군요?"

"자네가 기운 센 전사라면 그렇지! '황소'는 보자마자 자네를 쓰러뜨리려 들 테니까."

"그러한 대전 장면은 오래전의 '피라미드 문서'에 나오는 장면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자기 형제 신들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왕은 길을 열어달라고 거대한 황소에게 부탁합니다. 황소에게는 네 개의 뿔이 달려 있습니다. 첫째는 '서방'에 있고, '북방'에 있습니다. '황소'의 온몸이 환하게 빛을 발합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의도가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해서 마침내 '황소'를 설득시키고, '황소''서쪽' 뿔을 내리고서 파라오에게 길을 열어주게 되지요."

"우리 구도 여행의 방향은 서쪽에서부터 빛이 떠오르는 동족을 향하도록 되어 있네. 동방에서 인간은 '황소'''에 올라앉은 별의 형태로 다시 태어나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에녹(성서에 나오는 기원전 2-1세기의 인물로, 그가 쓴 에녹서는 민간에 널리 퍼졌다.)은 수많은 별이 우주 저 높은 곳에서 쏟아져 우리의 땅 위에 내려앉는 광경을 바라보는 특권을 부여받았다네. 땅에서 별들은 황소들이 되었지."

"대부분의 문명에서 '황소'는 왕의 탄생과 불가분의 관계인 모양입니다."

"켈트족에게 있어서, 새 군주를 왕위에 즉위시키는 존재가 바로 '황소'였네. 사제는 밤새 꿈 속에서 장차 군주가 될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에서 깬 뒤 백성 앞에서 왕을 지명하기 위해서 흰 소의 살을 먹었지. 잠을 잔다는 것은 힘들었던 하루에 무게를 흩어버리고 과거와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네. 잠은 우리를 소생시켜 주고 새로이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지. '황소'는 새벽에 태양의 모습으로 출현해 그 빛으로 들판을 풍요롭게 해. 그리고 규칙적으로 사원과 제식용 조각상들에게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지."

"선생님의 건축가 조합은 미트라신(페르시아의 태양신) 숭배자들의 유산을 전해 받았군요?"

"초기 기독교와 겨루었다는 그 사상 말인가?"

"그렇습니다. 미트라 신의 신봉자들은 '황소' 숭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붉은 프ㄹ리지아 모자를 쓴 미트라 신을 모신 모든 신전의 내부 벽면은 그 신이 인간을 위해 이룩한 위업을 묘사한 신이 '황소'를 죽이는 장면이었지요. 신전들은 동굴 안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동굴의 둥근 천장은 하늘을 상징했습니다. 대신관의 좌우 양면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었고요. 미트라 신을 상징하는 공동체 의장은 공동체 입문의식 때 또다시 황소를 죽여서, 처음 탄생 때 못지않게 활기찬 또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켰답니다. 한 줄기 햇살이 그 생명을 향해 빛을 발하는 동안, 희생된 짐승의 피가 제불 아래 구덩이 속에 무릎을 꿇은 초심자를 흠뻑 적셨습니다. 창조의 사랑을 상징하는 '황소'가 초심자에게 제 생명을 선사한 것입니다."

"자네도 그런 초심자처럼 되고 싶다면, 2의 탄생을 가로막는 결점들을 버려야 하네. 자네 혹시 가죽 통과의식을 아는가?"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신봉자는 짐승 가죽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아가 되어 거듭나야 한다지요?"

"진정으로 신들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황소 가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네. 상징물 안으로 들어가서 그 상징물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중요한 걸세."

"저도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만, 미로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당들이 있더군요. 옛날에는 거의 모든 성당마다 미로가 하나씩 있었다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미로가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미로의 수문장인 미노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우두인신의 괴물) 때문에 질겁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겠습니까?"

"미로 한가운데에 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네. 우리의 선배 건축가들은 그물망 같은 미로 중심부에다 석공장의 두상을 한 개 내지 여러 개 비치해 놓았다네. 미로는 복잡해 보여도 실제로는 누구도 길을 잃을 수가 없네. 미로 안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미로 안에는 갈 수 있는 길이 꼭 하나밖에 없다는 건 확실하니까. 어려운 것은 그 안에서 석공장을, 그러니까 석공장을 형상화한 '황소'를 만나는 일이야. 언제나 미로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유일한 존재를 말일세."

"거기에 이르려면 전설적인 '황소'의 능력이 꼭 필요하겠군요."

"바로 그래서 '황소'는 끈질긴 작업, '마무리되고' 완성된 작업을 상징했던 걸세. '황소'라고 불릴 만한 상태를 얻어내려면 매우 특별한 성격의 기운을 단련해야 하네.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 말일세.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시간 개념을 없애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그런 이상을 간직할 수는 있어. '황소'의 힘은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것이라네. 건축가가 사원 건설에 참여할 때는 그런 힘이 필요해."

"항상 우리의 내면세계를 준비하고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건축가 공동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겠지요?"

"채석장에 석재가 풍부하든 빈약하든, 건설 지대가 평평하든 울퉁불퉁하든, '황소'는 개의치 않네. '황소'는 순간의 어려움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그 곤경에서 최선을 끄집어낸다네."

"황소의 성적 능력에 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중세 작가들의 얘기로는, 발정했을 때 '황소'의 성기가 굉장하다고 했어요. 암컷의 음문에 성기를 집어넣고서 꼼짝도 안 한 채로 정액을 사출한다고 합니다. 암컷의 음문을 빗나가서 몸뚱이 다른 곳에 성기가 꽂히게 되면, '황소'의 기운이 너무나도 격렬해서 암컷은 상처를 입고 만다지요. 그렇지만 암컷이 일단 새끼를 배고 나면, '황소'는 절대로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법이 없답니다. 이런 얘기들 속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네는 '황소'와 암소의 짝짓기를 어떻게 보나?"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필수불가결한 상보성으로 봅니다. 절대를 갈망하는 뜨거운 열망과 얻어진 결실을 유지하는 내면의 절제 사이의 균형 말입니다."

"깨달은 '황소'는 기운만 센 것이 아니라, 성숙기에는 침착함까지 갖추고 있다네. 세상이 '제대로 잘 돌아갈' , 현자는 만사를 그대로 놓아둔다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급하게 서두르는 자라든가 자신의 실패에 성을 내는 자가 바로 악마라네."

"아주 멀어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황소'는 청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황소'를 통하여, 입문자는 아직은 매우 먼 거리에 있는 구도의 실재성을 파악할 수 있다네."

"'황소'의 꼬리는 주술적인 힘이 모여 있는 요체였습니다. 미트라 비전의 신봉자들은 말하기를, 제물로 바쳐진 황소의 꼬리에서 밀 이삭이 솟아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황소'가 공동체를 먹여 살린다네! '황소'는 아낌없이 베푸는 창조자야. 우리 성인들에 대한 전설에서 보면 '황소'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네. 툴루즈시에서는 사람들이 성 사투르누스를 숭배한 적이 있었네. 그의 인기가 치솟자 로마 당국은 그를 체포해 우상숭배를 명령했지. 명령을 거부한 그는 '황소'에게 비끄러매졌고, '황소'는 카피톨(툴루즈의 시청)의 계단까지 맹렬하게 질주했다네. 그 후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지. 현재는 거대한 성 세르냉 교회가 그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네. 교회의 앞문 서쪽은 창조자인 '황소'와 함께 선 그 성자의 모습이 얕은 돋을새김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네. 신을 섬긴 사투르누스와 '황소'와의 만남은 사원을 건설하고 예배를 올릴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거지."

"랑 성당의 수소들에 관한 길베르 드 노장의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하루는 성당이 건설되고 있는 언덕 기슭으로 수소들이 돌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가던 중에, 수소 한 마리가 지쳐서 쓰러졌답니다. 그러자 어디선지 '수소' 한 마리가 나타나 쓰러진 수소를 대신해 언덕 꼭대기까지 수레를 끌어 올리고는, 일이 다 끝나자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었답니다."

"그때 나타났던 수소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소'였다네. 창조력을 전달하여 물질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지닌 고대의 '황소' 말일세. '황소'는 어떤 장애물에도 굽히지 않아. '황소'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창건자라네. 장차 교회가 지어질 위치를 지정해 주거든. 내 자네한테 가르강 이야기를 해주지. 390년경 시폰토 지방에 가르강이라는 남자가 있었네. 가르강은 양과 소 무리로 이루어진 엄청난 가축떼를 소유하고 있었지. 이 짐승들이 언덕 기슭에서 풀을 뜯는 동안, 황소 한 마리가 멀리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서는 다른 가축떼와 함께 돌아오질 않았다는군. 주인은 많은 종을 풀어서 그 황소를 찾도록 했지. 황소는 산꼭대기 동굴 입구에서 발견되었네. 화가 치민 가르강은 황소에게 독을 바른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되돌아와서 그에게 상처를 입혔어. 시폰토 주민들은 겁에 질려서 그 이상한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교에게 물었네. 주교는 기도를 시작했지. 단식을 하며 기도한 지 사흘 만에, 대천사 미카엘이 주교에게 나타나서는, 이제부터 황소가 지정한 그곳에서 살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는군."

"몽 생 미셸 성당의 창건에 얽힌 전설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주교가 바닷가 '툼바'라는 곳에, 그러니까 통블렌 언덕에 있었는데, 그때 주교 앞에 미카엘이 모습을 나타냈답니다. 주교는 교회 입지 선정 문제로 망설이던 차였는데, 대천사가 도둑이 숨겨놓은 황소가 발견되는 곳에 교회를 지으라고 명하더랍니다. 주교가 또 건물의 규모 문제를 놓고 걱정했더니, 대천사는 흙에 찍힌 황소의 발자국이 정확한 교회의 규모 문제를 놓고 걱정했더니, 대천사는 흙에 찍힌 황소의 발자국이 정확한 교회의 규모라고 설명했답니다."

"문제는 바로 그거야. 수행해야 할 '작업'의 규모를 알아야 한다는 말일세. 만일 진정한 마음과 인격을 갖고 있다면, 자네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옳은 것이 되네. 허나 '황소'가 밝혀준 희미한 빛은 아직은 가능성에 불과해.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앞으로 넘어야 할 단계가 많다네.“

 

 

11단계 가만-이중성

 

'독수리''황소'는 내게 가슴 벅찬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없이 거대한 파노라마를 발견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가면' 앞에 도달하자, 나는 묘하고 당혹스러운 느낌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극복하고 말겠다는 의지와 두려움이 묘하게 혼합된 느낌이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독수리''황소'에게서 배운 바가 있으니, 자네는 이제 가면을 쓴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갖춘 셈이군."

"인물들이요... 그렇군요.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로군요. 네 명인데, 모두 두 개씩 가면을 들고 있네요."

"중요한 확인일세. 저 인물들이 나타내는 깨달음의 단계는 하나이지만, 조각가는 그 단계를 각기 여러 단계로 분할해서 우리가 자기 의도를 올바로 감지할 수 있도록 해놓은 거라네. 모습은 다양하지만, 다들 이원성을 제시하고 있는 거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첫 번째 인물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린 두 개의 가면을 들고 있는데, 그 가면들에서는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군요. 어떤 갈라짐 같은 것이, 해결되지 않은 이원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요. 선이 악을 배척하고, 악은 선을 배척합니다. 저 사람은 서로 반대되는 두 경향 사이에서 양분되어 있습니다."

"'지적 원리'는 분할이 불가능한 단일체인데도, 쓸데없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이성에 의해 동강이가 나 있어. 저렇게 되면 입문자는 추락해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네. 저자는 대립의 시각으로 삶을 보고 있는 거야. 자네 갈 길을 계속 가보게나."

"두 번째 인물이 손에 쥐고 있는 '가면들'에서는 바람이 뿜어져 나오지 않는군요. 저 사람은 가면 머리 부분을 쥐고서 가면들을 무릎에 대어 탄탄하게 받치고 있어요. 왼발은 오른발 위에 얹혀져 있습니다. 발판을 삼은 셈이로군요. 저 사람은 더 이상 상반되는 두 경향에 놀아나는 철없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오직 자네 혼자서 그 두 경향을 책임져야 하네. 자신의 모순에 직면해도 이제 자네는 절대적인 하나의 선을 주장하지는 않겠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득을 절대적인 선이라고 착각하거든."

"네 개 중에서 왜 첫 번째 가면에서만 바람이 나오는 걸까요?"

"바람은 폭퐁이고 동요를 의미하네."

"하지만 바람은 활력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이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습니까?"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군. '신의 손이 너에게 뻗쳐왔다. 그리고 너를 데려갔다. 신은 뼈다귀 가득한 계곡 한가운데에 너를 내려놓았다. 신이 네게 묻는다. 이 뼈다귀들이 살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령이여, 사방에서 불어오십시오. 이 죽은 자들에게로 불어오십시오. 이자들을 살게 하십시오!"

"고대 이집트에서는 바람이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람 속에 생명력이 깃들여 있다고 여겼거든요. 석관과 신전의 벽면에는 바람의 모습이 정령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황소를 죽이는 모습과 미트라 신의 탄생 모습이 새겨진 많은 부조에서, 네 귀퉁이에는 바람의 신들이 묘사되었지요."

"첫 번째 조각상에서, 바람은 자기모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이 죽지 않도록 해주고 있네. 두 번째 장면에 이르러 사람이 투쟁하기 시작하자 바람이 사라진 것은, 생명의 숨결이 외부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하지. 자 그럼, 다음 장면으로 넘어 가보세."

"세 번째 인물은 두 개의 '가면'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군요. 저런 자세는 제게도 매우 익숙합니다.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거든요. 자기 정신력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나타내는 장면 같은데요. 조각가는 인물의 발을 한쪽만 드러내놓았군요. 어느 정도 합일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신은 우리 마음속에도 들어 있네. 현실과 단절된 시각은 갈등의 원천이 되고, 우리는 그 이원성을 극복하기로 결심하지. 정적인 의식의 자각은 이 원성의 존재를 아는 것이고, 동적인 의식의 자각은 사방에 넘치는 통일된 기운을 인식하는 것이네. 그렇지만 '가면' 단계를 넘기 위한 최종적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네. 자세히 살펴보게나."

마지막 '가면' 장면에는 뭔가 전혀 새로운 면이 있었다. 어떤 평화나 조화 같은 것이 있었다.

"이원성이 극복된 것 같습니다만,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피에르 들뢰블가 설명했다.

"저 조각상에는 기하학적인 법칙이 가미되어 있네. '가면들'은 역시 위로 들어 올려져 있지만, '신율'의 법칙에 맞게 배열되어 있어. 돌이 하나의 선을 그리고 있는데, 두 가면은 그 선의 양쪽 끝 점이고 사람의 머리는 가운뎃점으로서, 지극히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 작은 부분과 큰 부분의 비율이, 그러니까 오른쪽 '가면'에서부터 사람의 머리까지와 사람의 머리에서부터 왼쪽 '가면'까지의 비율이 큰 부분과 전체의 비율과 똑같아. 저 모습이야 말로 구도 입문자가 ''의 원칙을 발견하는 순간의 모습이라네. 석공장들은 건축을 할 때 별도의 계산을 하지 않았네. 수치들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석공장들은 이른바 음악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황금률을 적용해서 건축물의 조화를 이루어냈던 거야."

"'신율'이야말로 생명처럼 중요한 것 아닙니까?"

"'신율'은 이 세상이 대칭이 아니라는 점과 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네. 우리는 타협점과 절충안을 찾아보고 쓸데없는 대립은 초월할 수 있어야 하네."

"그러고 보니 도마복음서의 이 대목이 생각나는군요. 도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렇게 밝혀놓았습니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여길 때, 안을 바깥처럼 여기고 바깥을 안처럼 여길 때,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여길 때, 그리고 여자와 남자를 한가지로 여길 때, 그럴 때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로다.'"

"'가면'을 잊지 말게. 가면이 등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신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발전도 '가면'을 통해서 표현된다네."

"중세에 신성한 종교 의식 집행의 주역들은 상징적인 가면을 썼습니다. 고대 동방에서 전해져 온 관습이었지요. 고대 동방에서는 신의 얼굴을 한 사제들을 통해서 신들의 세계를 창조했거든요. 하늘의 세계는 그 가면들을 통해서 땅 위의 세계에 줄곧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석관 위에 놓여지는 가면은 고인이 정신이 도야된 사람임을 나타내주는 표식이었습니다."

"'정신의 도야'라는 말을 백과사전적 지식의 축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자네 말이 맞네. 우리 선배 건축가들에게도 정신의 도야는 중요한 것이었어. 우리 내면의 흙을 끊임없이 가는(경작하는) 일이었으니까. 흙을 가는 일과 정신을 도야하는 일은 비슷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을 이른바 '경작술'이라고 했다네. 구도입문 축제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계 성 요한 축일 때에도 '갈고 닦이지 못한 미개함', 다시 말해 맹목적이 파괴력을 몰아내기 위해 가면이 사용되었다네."

"프랑스어의 '인격'이라는 단어는 파틴어의 페르소나(가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구도입문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인격'을 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신의 형상을 본뜬 가면을 씀으로써 신성한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원성의 장애물을 넘었으니, 이제 자네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개체성의 차원에서 우주의 열린 인격 차원으로 넘어갔네. , 이 장애물의 극복으로 이제는 놀라운 힘이 생겼어. 그것은 무서운 힘이 될 수도 있네.“

 

 

12단계 용-믿음에 대한 각성

 

"왜입니까? 이원성을 초월했는데, 왜 불쑥 저런 흉물스러운 괴물이 나타나는 겁니까? 발톱으로는 땅바닥을 콱 짚고, 등에는 날개가 달고서, 입에서는 불길을 뿜어내고 있군요."

"괴물이 아니야. ''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은 네 원소(헬레니즘 시대 연금술 발달의 계기가 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공기, , )설에 근거한 것)의 결합을 상징한다네. 주둥이에서는 불이, 날개에서는 바람이, 꼬리에서는 물이, 발톱에서는 흙이 나오고 있어. 그렇게 해서 세상을 만들 재료가 미래의 석공장들에게 제공되는 거야. 이제 남은 일은 '5원소'를 찾아내는 일이라네."

"''과 싸우는 일 말씀입니까?"

"맞아. 지금은 전사로 살아야 할 때야. 본래적 의미에서의 전사로서 말일세."

"옛부터 영웅은 가공할 힘과 맞서 싸웠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호루스가, 바빌로니아에서는 마르둑이, 그리스에서는 아폴론이, 그리고 기독교 세계에서는 성 미카엘이 그랬지요. 다른 성인들처럼 그리스도도 용을 만났습니다. 이른바 외경(정경(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총칭)에 속하지 않는 구약의 제2경전. 모두 열 권으로 되어 있음) 복음서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군요. 거기에는 예수, 마리아, 요셉 등 성가족이 휴식을 취하려고 동굴로 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가 나귀에서 내려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자리에 앉았답니다. 요셉을 따라온 소년 셋과 마리아를 따라온 소녀 하나가 함께 있었고요. 그때 갑자기 용 떼가 동굴에서 몰려나오더랍니다.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지요. 그런데 예수가 마리아의 무릎에서 내려와 용 떼 앞에 서자 용들은 위협적인 모습을 버리고 예수에게 경배를 올리더니 자취를 감추었다는군요."

"어린아이는 ''과 싸워서 이길 수 있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상태를, 즉 일체의 가능성과 유연한 정신을 되찾은 전사라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일세. 옛날에는 ''을 누구에게든 보여주었어. 감추지 않았다네. 십자군 병사들과 순례자들이 중동에서 가져온 박제 악어들을 생각해 보게. 사람들은 그 박제 악어들을 현관이나 예배실 천장에다 걸어놓았고.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걸어 놓았다네. 생 베르트랑 드 코맹주 교회만 해도 그렇잖은가."

"'악어 용'이라... 고대 이집트의 악어 신은 이름이 소벡이었습니다. 정신이 우둔한 사람들에게 무서운 공격성을 보여주는 신이었지요."

"'악어 용'을 악마를 상징하는 불길한 양상으로만 보지는 말게."

"맞습니다. 소벡에게는 긍정적인 태양의 일면도 있으니까요. 오시리스의 비전 전문가였던 플루타르코스도 신성한 악어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졌다고 했죠. 혓바닥이 없는 유일한 동물이거든요. 사실, 신은 이치를 말할 때, 소리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악어로 말하자면, 물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마에서부터 내려오는 얇고 투명한 막으로 두 눈이 덮여 있어서,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자신은 남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능력은 창조주 하느님만의 특권이 아닙니까. '사자의 서'에서 저는 '악어 용'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무시무시한 모습의 '악어 용'이 나타나면, 우리의 조화를 책임진 마아트 여신 쪽으로 얼굴을 돌려야 한답니다."

"그렇게 하면 환영이 사라지지. ''도 본래의 신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말일세. ''은 샘을 지키고 숨겨진 보물을 보호한다네.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는 꼬리에 밀짚을 가득 채운 용을 떠메고 열을 지어 행진을 했네. 밀짚이 다 빠져 꼬리가 비면 '신율'이 이루어진 것이었네. 연금술사들은 ''의 꼬리가 화금석(연금술을 통해 만들어진 황금색의 돌)을 찾아낼 수 있는 길로 이끌어준다고 보았네. 페르뒤르의 동화를 생각해 보게. 신기한 돌은 주인이 원하기만 함녀 얼마든지 황금을 내주잖은가. ''은 목구멍에 보석을 감추어두고 있다네. 이마에 석류석이 달린 ''들까지 있어. 문장학(문장의 기원과 구성, 구도, 색채의 상징 등을 연구하여 중세사회의 문화사를 해명하는 학문)에서 말하는 '귀속' 가운데 하나인 그 석류석 말이야. 그 하나의 점에서 여덟 개의 선이 뻗쳐 나온다네."

"이 모든 이야기는 ''은 악이 아니라, 변신의 도을 찾아내어 악을 쫓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한다는 의미겠지요?"

"''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있네. 노래하는 '새의 혀'처럼 말일세."

"조화로운 하늘의 목소리로군요?"

"사람들의 영적인 면을 이해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해 주는 목소리이지. 그 목소리는 '혀의 재능', 그러니까 각자의 언어 능력이고, 타인의 시각에 마음을 개방하는 능력이라고도 불렸다네."

"''은 왕의 성격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르장토라툼(과거의 스트라스부르. 357년에 이곳에서 카이사르와 게르만족과의 싸움이 있었음) 전투가 한창일 때, 병사들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인 자주색 용을 보고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은 하늘의 옥좌에서 내려와 직접 전쟁에 개입해서 왕을 보호한 겁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을 황제로 삼았습니다. 궁궐까지 갖추어주었고요."

"''은 겁쟁이에게는 공포감을 유발하는 괴물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왕좌에 자리하고서 천둥 번개와 벼락을 내리는 능력을 보유한 군주에 비유되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하네. 우리 대지가 비옥한 것은 그 ''의 덕택일세."

내가 지적했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왕은 신관이면서 전사로 간주되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만든 법을 강요하는 광신자가 아니라, 늘 대지가 비옥하도록 끊임없이 투쟁하는 전사 말입니다. 그러한 가치들은 필시 선생님의 건축가 조합에도 보존되어 있었겠지요."

"그렇다네. 입문의식 문구에도 그렇게 나와 있네. 성배 이야기(유럽 중세 아서 왕 전설의 중심 주제 중 하나. 성배는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하였고 아리마대의 요셉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은 잔으로, 요셉 사후 영국 아발론 섬에서 사라진 이 성배를 기사들이 찾아다닌다는 이야기)에 보면, 신관의 직무는 마법사 멀린이, 왕의 직무는 아서가 수행했네. 아서 왕과 그 부하들이 멀린의 깃발 아래 모였는데, 깃발에서는 새끼 용 한 마리가 불꽃을 내뿜는 듯했다네. 용의 입속에서 혓바닥이 끊임없이 날름거리는 것만 같았지. 멀린은 불의 ''을 통해서 종주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현자였어. 멀린은 '5원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깃발을 장식하는 데 ''을 택한 거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아서 왕은 '' 모양으로 깃털 장식이 둥글게 휘어진 황금 투구를 머리에 썼다네."

"'''수도원장'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신의 의자, 그러니까 교회 성직자석에 선 채로 약간 몸을 기댈 수 있게 붙인 돌출부에서도 ''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왕인 동시에 신관으로 간주되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공동체의 인도자인 '수도원장'의 몸속에는 신성과 인간성이 함께 있는 셈이야. 지극히 큰 사랑과 동시에 지극히 큰 준엄함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수도원장'은 사제들을 올곧은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도록 사제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지. 건축에서 석공장이 견습공들을 대하는 것도 그와 같다네."

"석공장의 가르침을 ''에게서 배울 수 있겠군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모든 학문의 창시자이자 연금술의 중심 신. 토트와 아느비스로부터 망령을 인도하는 임무를 물려받는다)에 따르면, ''은 힘이 세고 수명이 길며 악의가 없는 동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친구라네. 말이 통하는 사람에게는 자진해서 순종하지. 신처럼 ''도 늙으면 다시 새로운 젊음을 얻게 된다네."

"''은 젊음을 되찾게 해주고 자신의 이상을 재검토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로군요."

"''은 불의 힘이야. ''은 자기를 길들여줄 손을 기다린다네. 그러니 ''을 진정시키고 친구로 만들어야 해. 이 점을 제대로 알아야 하네. 성자나 영웅이 ''과 싸우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의도는 ''을 죽이는 것이 아닐세. 그들은 무서운 싸움을 벌이지만, 자기들이 상대하는 ''이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들의 싸움은 증오심을 발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권을 얻기 위한 것이지. 의례적인 싸움이 끝나면, 입문자는 용에게 이렇게 묻는다네. '그대의 불길 속으로 나를 집어삼킬 생각이오?' 그럼 용은 이렇게 대답하지. '아니오. 나는 오히려 그대를 일깨우려 하오. 그대가 내게서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을 겁내는 것은 큰 실수인 것 같습니다. ''과 대화하기를 바라는 자는 이미 자신의 격노를 가라앉힌 사람이로군요."

"''의 임무는 구름 속에 난 비밀의 길을 일러주어서 의인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것이네. 인격을 도야하는 사람은 ''과 협약을 맺고서 진정한 보물이 있는 곳을 용에게서 알아내지. 참된 구도자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을 정신력이라는 보물 말일세."

"이 구도 입문의식에서, ''의 단계는 대오각성의 단계이겠군요?"

피에르 들뢰브르는 말했다.

"의식의 일깨움이라는 단계이지. 헌데 ''은 제 기운을 자제하지 못한다네. ''이 권유하는 각성은 때로는 너무나 격해서 길 위의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기도 해. 그래서 소생시키고자 하는 것을 파괴해 버릴 우려가 있지. 그렇기 때문에 '돌고래'가 필요한 것이네."

 

 

13단계 돌고래-원하는 자는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구원

 

나는 ''을 통해 얻은 새로운 힘으로 활력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피에르 들뢰브르가 한 마지막 말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앞으로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위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내가 말했다.

"'돌고래'는 물고기의 왕으로 간주되어 온 동물입니다. '돌고래'에게는 놀라운 도덕적 자질들이 있고, 그 본능이 지극히 예민해서 인간의 이성과 매우 가깝다고 여겨져 왔지요. 현대의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 다른 많은 점들에서도 그랬지만 그 부분에서도 고대인들의 직관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물의 왕인 '돌고래'의 민첩성도 강조되어왔지. 출구 없는 길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사람이나 배를 표류하게 하는 위험한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고서, '돌고래'는 곧바로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네. 유혹이나 환상에 걸려들지 않기 때문에 '돌고래'는 바다 세계를 비추어주는 빛이라고 할 수 있어."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돌고래'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뱃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면, 배를 마주하기까지 한다고 했어요."

"악사 아피온이 번 돈을 뺏으려고, 뱃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그를 죽이려 했다네. 뱃사람들은 아피온에게 마지막으로 칠현금을 뜯으며 노래를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지. 그런데 그의 연주를 듣고 돌고래들이 모여들었어. 아피온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돌고래 한 마리가 그를 테나론(펠로폰네소스 땅의 맨끝 도시)의 해안으로 실어다 주었다네."

"'돌고래'를 만나려면 음악을 연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까?"

"세상의 음률과 우주의 진동에 맞추어서 자네 자신의 리듬을 조화시키고 단련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그리고 '돌고래'는 물하고만 관련된 동물은 아닐세.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홍수가 닥치자 돌고래 떼가 숲으로 몰려가 나무들을 차지했다고 하네. 분리가 아닌 합일을 추구하는 지성에게는 액체인 물과 고체인 흙 사이에도 단절이 없기 때문이지. 숲은 나무들이 신성한 언

어를 말하던 시절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네."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의 바쿠스에 해당하는 그리스 신화 상의 주신)도 돌고래들과 접촉한 적이 있다지요?"

"술에 취한 해적들이 돛대에다 디오니소스를 묶어놓았다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뱃사람들을 벌하지 않았네. 그들이 겁에 질려 물속에 뛰어들었을 때 그들은 돌고래로 변하게 했지. 그들에게 새로운 변신을 허용한 거라네. 산 위에서 몸뚱어리가 갈가리 찢겨 천지 사방에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디오니소스는 석공장이 재구성한 '태초의 인간'에 대한 그리스식 해석판이라네. 디오니소스를 묶어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것은 광대무변한 것을 묶어놓겠다고 덤비는 것과 다름없어. 하지만 의식을 통해, 이 자유의 멍에를 통해 디오니소스와 결속될 필요는 있지."

"'돌고래'도 길을 인도하는 '형제'입니까?"

"'돌고래' 역시 자네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네. 그 죽음에서 자네의 생명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말일세. 비잔틴 사람 코에라누스의 이야기를 해주지. 코에라누스는 돌고래들을 잡아서 죽이려 하는 어부를 보았네. 그는 그 돌고래들을 사서는 도로 놓아주었지. 그로부터 얼마 후, 그리스의 파로스 섬에서 낙소스 섬으로 향하던 배가 전복되었을 때, 코에라누스 한 사람만이 돌고래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네. 돌고래는 그를 동굴로 데려다주었지. 그가 죽자, 그의 몸은 관례에 따라 해안 근처에서 불태워졌네. 그때 돌고래들이 모여들어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았고, 자기들을 보호해 주었던 사람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어. 주변의 것들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유를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이야. 코에라누스가 돌고래들을 구해준 것은 지각 있는 행동이었어. 필멸의 존재인 개인은 화장을 통해 불타버렸지만, 돌고래 공동체가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코에라누스는 참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거야. 돌고래들이 내세로 가는 길을 그에게 알려주었지."

"입문자의 주위에 돌고래들이 있는 것은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을 전해주기 위해서이겠지요?"

"돌고래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한다네. 신앙 포기를 거부한 안티오키아(터키 공화국의 도시. 일찍부터 교회가 생겨 기독교 전도의 기지 구실을 함. 신약성서에도 나온다.)의 성 뤼시앵(235~312. 고대 시리아 출신의 순교한 사제로서, 안티오키아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음. 그의 신학 교육 경향으로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창시되었음. )은 니코메디아(소아시아의 고대 도시)에서 순교했네. 그런데 그때 돌고래 한 마리가 땅 위로 올라와 시신을 등에 업어 뤼시앵 제자들에게 시신을 전해주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하네. 돌고래의 등은 둥그스름하고 미끄러운데도 성자의 몸뚱이는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거야. 돌고래는 형제애가 지켜지도록 애쓴다네. 형제애야말로 깨달음이라는 공통의 이상을 지닌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독특한 관계가 아니겠나."

"옛날에 왕관 모양의 의식용 조명 기구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방사되는 광선들을 '돌고래들'이라고 불렀잖습니까?"

"지구에서는 우리가 갈 길을 일러주는 빛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네. 바닷속 깊은 곳에서 폭풍우가 발생하려 하면, '돌고래'는 이내 우리의 배를 항구로 향하도록 해주지. '돌고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일을 직감적으로 예견할 줄 안다네. 그래서 '돌고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있어. '돌고래'는 그런 축복받은 자들의 영혼을 영원히 지복을 누릴 수 있는 섬으로 데려다준다네."

"'돌고래'는 마음속에 있는 물질주의적인 정신, 무기력한 타성,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로막는 방해물 따위를 버리라고 가르쳐주는 것이로군요?"

"'돌고래'는 입문자가 정결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물 세계의 제왕이라네. '돌고래'는 입문자를 '태초의 바다', 곧 인간이 궁극적으로 되돌아가는 세계로 데려다준다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다 그곳에서 나왔지."

"이집트인들은 태초의 바다를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 ''은 에너지의 발생지였습니다. 모든 신들이 영원토록 그 속에 있고, 항구적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에너지의 불씨도 그 속에 있습니다."

"'돌고래' 단계가 왜 가장 까다로운 단계 중 하나인지 이제 이해가 가겠지. 자네는 에너지가 발생하는 태초의 바다에서부터 시작해서 자네의 감정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온간 성질의 바다를 다 건너야 하네. 하지만 구도 과정도 중반에 이른 지금, '돌고래'의 미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군. 구원이란 진정으로 그것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라고 말일세. , 물속에만 머물러 있을 게 아니라, 이젠 '비둘기'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네."

 

 

14단계 비둘기-혁신적 순수성

 

'비둘기'의 등장으로 인하여, 나는 '돌고래'가 내게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준 물의 차원에서 불쑥 공기의 차원으로 옮겨졌다. '비둘기'는 내가 방금 체험한 것을 넘어서서 더 높이 올라가라고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저 높은 곳으로 비상하지 않는다면, 내면의 상징물을 경험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네."

"'비둘기'는 형성되고 있는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하느님의 전령 아닙니까? '비둘기'는 신성한 창조신들에게 영감을 부여해 주었고, '천지 창조' 당시에 발생한 일들의 의미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비둘기'는 구도 공동체라는 배를 인도하는 신속하고도 확실한 사자라네."

"'비둘기'는 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결코 잃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달리 말하자면 사원으로 가는 길이지. 순수성에 충실하다는 것은 임의적인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어떠한 경우에도 머릿속에 나름대로의 기준점을 견지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비둘기'는 부활절 전날이면 늘 예루살렘으로 새로운 불을 날라다 주었지. 구도 입문자의 지식욕이 약해지면 곧 '비둘기'가 나타나서 모험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활력을 가져다준다네."

"'비둘기'는 곧 단순소박성과 순진무구성, 그리고 솔직성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오늘날 그런 말들이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신을 받아들이는 성질인 단순 소박성을 행복한 어리석음과 혼동해서는 안 되네. '생각이 단순 소박한' 사람을 바보와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네. 옛날에는 생각이 단순 소박한 사람을 삶에 어떠한 개인적인 방어막도 내걸지 않은 성자로 여겼어. '비둘기'의 순수성은 그와 같은 겸허한 순진무구성에서 나오는 결실이며, 오랜 노력의 결과이고, 우리를 거쳐 가는 세상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결과일세."

"하지만 겸허함은 안이한 포기가 아닐까요?"

"결코 그렇지 않아. '겸허함'이란 굴욕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시선이라네."

"'비둘기'는 날개가 중요하겠지요? '성령'의 은총을 날라왔으니까요."

"비둘기를 바라보며 위그 드 생 빅토르(1411, 파리에서 출생한 프랑스 신학자. 12세기 스콜라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는 이런 사색을 했네. '삶에도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 두 종류가 있듯이, 비둘기의 날개도 둘이다. 비둘기 날개의 푸른 깃털은 하늘의 생각을 나타내준다. 몸뚱이 나머지 부분의 빛깔들, 파고 높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그 변화무쌍한 색채들은 한없이 많은 인간의 갖가지 열정을 상징한다.'"

"적어도 초기 기독교 시대 이후로 서방세계에서는 구도의 삶도 수도원과 도시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갈등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사회질서가 더 이상 거시적인 우주의 모델을 따르지 않아서 그렇다네. 엄청난 혼돈의 시기를 거친 우리는 또 하나의 미분화 상태로 나아갔어. 거기에서 새로운 건축술들이 나왔지. 허나 사원과 성당이야말로 활동과 관조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은 공동체가 이룩한 작품의 본보기라네. 구도입문자의 정신도 그래야 하네. 활동과 명상을 함부로 분리하는 사고방식을 점차로 초월해야 하니까 말일세."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비둘기'는 우리에게 수도원의 진리와 도시의 진리를 합일시키라고, 그러니까 두 날개는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일러주는 것이로군요."

"구도 세계의 '어머니'가 비둘기의 눈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라네. '어머니'가 지켜보는 신성한 활동에서는 명상과 행위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 자네의 영혼도 빛에 가까이 가게 되면 '비둘기'가 될 걸세. 그렇게 빛과 가까워져서 생겨난 시선은 구도자와 구도의 길을 동시에 환히 밝혀준다네."

"구도 입문세계에서 전통적으로 말해온 옛날 '어머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동정녀 마리아'도 분명히 성당 건설을 지휘한 '성모'였지 않습니까?"

"그노시스설(신비적 영감과 영적 직관을 존중한 초기 기독교의 한 교리. 구원사 이해에 있어 믿음보다는 오해려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1세기경에 성행하였으며 동양철학이 가미된 기독교 사상으로, 이단시되었다.) 신봉자들은 그것과는 다른 상징을 유지해 왔네. 그들은 '성령'이 여성이라고 생각했어. '남성' 극성이 '여성' 극성과 결합하여 '어린이 신'을 탄생시킨 고대 3신의 역할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창조신의 여성적 양상인 '비둘기'는 전적인 순응으로 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순수성'을 나타냈네. '비둘기'는 받아들인 물이 한 방울도 새지 않는 항아리에 비할 수 있어."

"제 생각에 '비둘기'는 고대 이집트 '' 개념의 궁극적인 표현 같습니다. ''는 마음대로 무덤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가는 시신으로 되돌아와 시신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새와 같은 영혼을 말합니다."

"그게 다 물질세계를 어김없이 정신화하고 그 물질세계에서 이탈해 나오기 위한 거지. '성배'의 보석은 그 보석을 아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닥치지 않도록 해 준다네. 그 보석은 그들의 젊음을 영원토록 유지시켜 주지. 성 금요일마다, 신이 보낸 비둘기는 그 신성한 돌 위에 성체 빵을 얹어놓아 보석의 미덕을 새로이 되살린다네."

"그러니까 돌에도 양분이 보충되어야 하는군요?"

"인간은 하나의 돌이라고 할 수 있어. 인간은 하늘의 도시에서 자기에게 꼭 맞는 자리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네. 석공장들은 그 하늘의 도시를 땅 위에다 건설하려는 사람들이지. 살아 있는 돌이라고 할 입문자는 자기를 성장시켜 주고, 보다 일관성 있고 안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특별한 양식을 필요로 해. '비둘기'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젊음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새롭게 한다는 것이라네."

"옛날에는 구리로 만들고 에나멜과 황금을 칠한 비둘기 상들을 매달아 놓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비둘기 상은 안이 텅 비어 있어서 봉헌물들을 그 안에 넣어놓았지요. 오늘날에는 잊혀지고 말았지만, 그 비둘기 상은 '성배'를 넣었던 항아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의 실체가 담긴 '비둘기'는 매일 아침 다시 태어나서 온 누리에 태양의 존재를 알리고, 그 태양 광선은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네.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각기 그 이상한 '비둘기'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지."

"아직 한 가지 얘기가 빠졌군요. '비둘기'가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있다는 얘기 말입니다."

"고대의 신관들은 예언 의식을 치를 때 길조를 발견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사용했지. 그들은 단순한 주술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 예언 의식을 통해 우주의 리듬과 맥동을 파악하고자 했던 거라네."

"그 나뭇가지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세트, 신은 선조인 아담의 무덤 위에 생명 나무의 싹을 심어놓았다가 그 나뭇가지를 손에 넣게 되었어. 그는 거대한 나무 둥치에다 그 나뭇가지를 접목시키고 싶어 했어.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그 나무 둥치를 기독교 입문자들은 그리스도로 보았거든. '비둘기' 단계를 넘었으니, 자네는 이제 꽃 핀 나무를 향해 또 한 걸음을 내디딘 셈이군. 이제는 꽃 핀 나무에 접목되어서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을 수 있겠어."

"주술사는 자기 몸을 직접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월계수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 비둘기에 비유되었지 않습니까? 병든 비둘기가 월계수 잎사귀 하나를 둥지에다 넣어놓았고, 그 잎사귀는 비둘기를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기에 충분했다더군요."

"스스로 자기 몸을 치유하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우리 스스로를 정상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장애물로부터,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의지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내는 거야. 고대의 왕들이라든가 그리스도도 사람의 영혼을 치유시키는 의사에 비유되었어, 피타고라스학파들은 구도 입문 지도자라면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네. '비둘기'의 매혹적인 외양에 넘어가지 말게. '비둘기' 단계는 가장 혹독한 시험 가운데 하나야. 생각의 바다에서, 에너지의 물결에서 빠져나와야만 해. 허나 그것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은 상태로,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새로운 땅을 향해 생명의 나뭇가지를 날라야 해. 그것이 건축가가 깨닫게 되는 혁신적 순수성의 주요 의미들 가운데 하나일세.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을 떠날 줄 알아야 하네. , '코끼리'가 제 미덕들을 자네에게 부여해 주어야 하지만 말일세."

 

 

15단계 코끼리-수용적 지성

 

많은 고대 문헌에서 그야말로 동물의 왕이라고 일컬어져 온 동물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욥이 '동물 중의 동물'이라고 했고, 자타가 공인하는 동물계의 제왕이었다.

"이집트인들은 무분별한 경솔함을 멀리하는 왕을 상징하고자 할 때 코끼리를 그렸습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그래, 맞네. '코끼리'는 입문자에게 왕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 '코끼리'의 위대성은 물질적인 면에 있지 않네. 다른 동물들을 인도하는 '코끼리'의 역할은 지성, 신앙심, 정숙함 등, 세 가지 중요한 미덕에 바탕을 두고 있어."

"'코끼리'의 지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코끼리가 제가 살고 있는 자연의 언어를 알아듣고, 별을 숭배하며, 해와 달을 공경하고, 타인의 종교에 관대하다고 했습니다."

"'코끼리'에게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네. 적응 능력, 열린 마음, 그리고 특히 관용도 있지. '코끼리' 단계의 입문자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가용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을 이해해 주는 면이 요구되네. 비록 자신이 안정성과 힘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말일세."

"코끼리들은 어떤 알 수 없는 본능에 이끌려, 저희들이 사는 숲에서 나뭇가지들을 뽑아내 하늘을 향해 쳐들고는 신앙심 가득한 기도를 올린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신과 땅 사이의 매개자이기 때문에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는 동물이라네. 그건 '코끼리'의 교육과 성찰에 대한 열정으로 설명될 수 있네. '코끼리'는 오랜 연구에 기꺼이 몰두하는 동물이야."

"그렇게 지성을 추구하는 태도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일세. 대부분의 기운을 명상에 쓰다 보니 점차로 성욕의 불길이 사그라들고, 결국은 어버이로서의 의무를 망각하게 되지. '코끼리'는 도덕성이 변질되지 않는 동물이라서, 결국 제 잘못을 깨닫고 종족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그대는 이미 더 이상 생식할 힘이 없다는 것을 ㄲ닫게 되네. 다행히 '코끼리'는 상징학 책을 보고서 정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지. '코끼리'는 낙원에서 멀지 않은 동방세계로 암컷을 데려간다네. 그곳에서 암컷은 만드라고라(약용 가지과 식물로서 고대와 중세 때 마법용으로 사용되었음.)를 따서 동이 트자마자 수컷에게 권한다네. 그러면 다시 '코끼리'의 왕성한 성욕이 솟구치지. 그렇게 해서 '코끼리'는 암컷과 결합하여 새끼를 한 마리 낳는데, 새끼 역시 아비처럼 금세 지성을 발전시키게 된다네."

"명상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거나 폐쇄된 회로 속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는군요. 느낀 것을 꼭 표현해야 하겠지요?"

"전달을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하네. '코끼리'처럼 빛의 원천으로, 동방세계로 돌아가게. 그러면 삶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시각으로 지력을 쇄신할 수 있을 걸세. 생명 나무의 비밀을 아는 암컷은 지성에게 자궁을 제공한다네. 그리하여 지성이 구체화 될 수 있게 해주고 합일의 결실을 맺을 수 있게 해 준다네."

"'코끼리'의 코도 참 특별한 요소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즐겨 코끼리의 코를 인간의 손에 비유했다지요."

"'코끼리'의 코는 최초의 행동 가능성을 나타낸다네. '코끼리'는 우리를 '깨달은 자'의 길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지. 이미 '비둘기'의 날개에 의해 이루어진 활동과 사색의 합일을 '코끼리'는 더욱 진전시켜 주는 셈이야."

"<동물 우화집>에서 보면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인도의 순례자들이 본 코끼리는 너무나 거대해서 산맥으로 착각할 정도였답니다. 인도인들이 기록해 놓은 것 중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습니다. 코끼리는 다리를 구부리지 못하기 때문에 혹시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일어서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잘 때면 나무에다 몸을 기대게 되죠. 코끼리를 본 사냥꾼은 나무가 겨우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밑둥을 거의 다 베어놓은 뒤 몰래 숨어서 코끼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답니다. 코끼리는 그 나무 밑으로 쉬러 돌아와 아무 의심 없이 나무에다 몸을 기대고, 곧 나무와 함께 쓰러지고 맙니다. 사람이 와서 잡아가지 않으면 코끼리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날카롭답니다. 그러면 코끼리들이 떼로 몰려와서 쩌렁쩌렁 비명을 지르고, 그 비명은 또 다른 코끼리 떼를 불러들이지요. 어린놈이든 자란 놈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코끼리가 신기하게도 마음을 합쳐서 결국 저희 형제를 일으켜 세워 죽음을 모면하게 해 준답니다. 이 얘기는 입문자가 구도 여행 도중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다는 것과, 자기가 범한 과오를 고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코끼리와 용의 싸움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용은 은신처에 숨은 코끼리를 목 졸라 죽이기도 했고, 강물 속에 새끼를 낳은 암코끼리를 공격하기도 했는데요."

"'코끼리'는 구도 입문의 세례식을 상징했네. 심지어 암코끼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품은 '성모 마리아'에 비유되기도 했어. 저 조각상을 다시 보게.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오랫동안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대답했다.

"귀로군요. 코끼리의 귀가 꼭 사람의 귀 같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코끼리'의 귀가 '창조신'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냅니다. 프타신에게 바쳐진 기념 석주들이 생각나는군요. 그 석주들은 오로지 귀로만 장식되었거든요."

"귀가 빛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면 자네는 아마 놀랄걸세. 양쪽 귀에는 램프가 하나씩 있다네. 그 빛은 우리가 신성에 '청각'을 여는 정도에 따라 더 강렬할 수도 있고 덜 강렬할 수도 있네."

"'귀의 모양은 앞으로 닥칠 일을 의미한다.'는 옛날 속담이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자네 내면에 있는 신성한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만 자네는 창조 작업에 임할 수 있는 거야."

"<어린이 복음서>를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동정녀의 귀를 통해서 몸 안으로 들어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정녀의 신체가 거룩해졌고 마치 불에 단련된 황금처럼 정화되었답니다."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하겠네만, 니케아 종교회의(소아시아 니케아에서 열린 가톨릭 종교회의. 1회는 325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것으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고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인정했음. 2회는 787년에 동로마 이레네여제에 의해 소집되어 성화상 파괴문제를 논함.)에서는 그런 비교적인 신화 전수를 비난하고, 이를 금지한 바 있네. 그렇지만 옛날 미사 경본에도 이런 말이 나와 있었지 않은가? '기뻐하라, 귀를 통해 수태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요.' 알겠는가, 깨달음의 전수 과정은 그렇게 험난했네. 하지만 지금껏 수없이 반복되어 온 교리조차도 결국 깨달음의 전수를 막을 수는 없네."

"구도 과정에서 '코끼리' 단계의 귀는 지성에의 수용성, 자연에의 수용성을 말하는 것 같군요."

"최종 단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소극적으로 임해서는 안 되네. 자네 내면의 세계를 준비해야 해."

"기둥머리 부분의 저 형상들은 무엇입니까? 코끼리가 등허리에 커다란 탑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요?"

"'코끼리'는 행동의 무게를 떠받쳐야 하는 우리의 수용성이 무기력하거나 수동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걸세. '코끼리'는 성당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명상의 열쇠를 구도자에게 넘겨주고 있어. 덧없는 꿈이나 꾸고 게으르게 웅크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 사원의 토대를 준비하라는 말일세. 구도 여행길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과 맞서려면, 그런 자질을 확실하게 얻어두어야 하네."

 

 

16단계 뱀-능동적 지성

 

". 악마의 화신. '.'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파충류와의 대면."

내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얘긴가?"

"''이 인간의 적이라는 것 말입니다. 창세기의 그 유명한 대목은 원래의 성전이 왜곡된 것입니다."

"잘못 알려진 많은 상징들은 결국은 부정적인 의미를 띠게 되지. 그 상징들이 내표하는 본질적적인 개념들도 자동적으로 암흑 속에 내던져지고 말일세. 지금 저 조각상을 보면, 사람이 ''을 움켜쥐고서 위로 들어 올리고 있어. 저 사람은 ''을 지배하며 복종시키고 있고, 더 이상 악을 두려워하지도 않아."

"길가메시의 서사시(전설적인 영웅 길가메시를 주인공으로 하여 읊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도니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에서 보면, 주인공은 생명의 나무를 찾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 생명 나무에 의해 결국 그는 불사의 생명을 얻고, '새로 태어난 노인'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우물에서 목욕을 할 때, 생명 나무 남새를 맡은 뱀 한 마리가 슬그머니 땅속에서 기어 올라왔습니다. 뱀은 생명 나무를 훔쳐 갔지요. 그리고 뱀은 금세 허물을 벗었답니다."

"자네 얘기처럼 ''은 재탄생을 이룩하는 동물이라네. 서사시의 주인공은 불사의 비밀을 알았고 새 이름을 얻었지만, '파충류 신'은 변신을 이루었잖은가."

"고대 이집트에서 ''은 위대한 창조신 아툼과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천지 창조 얘기가 나올 때마다 '' 얘기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은 제 신의 아버지들의 아버지로 여겨집니다. ''은 말하자면 일종의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뚫고 지나갈 수 있으니까요."

"이제 천지 창조 때의 '' 얘기로 넘어왔군. ''은 제 허물로 대지를 에워싸고 보호한다네. 우주가 형성되던 태초에, 뱀 여신이 있었네. 그 여신은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지."

"말씀을 듣고 보니 구도 세계의 '어머니'가 생각나는군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축가협회가 한결같이 인정한 '어머니 신' 말입니다.

'어머니 신' 덕분에 저는 큰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불멸의 힘으로 풍성해진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요. 전설에 따르면, 이 땅을 태초의 뱀이 에워싸고 있다지요."

"고대 이집트의 왕이 이마에 달고 있던 ''의 형상이 바로 그 여신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건 불의 뱀이었습니다. 왕이 길을 나아갈 때 적을 물리쳐주는 뱀이었지요."

"그 뱀은 ''의 이마에서 용솟음치는 직관적 지성을 상징했네. ''에게서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도 바로 그러한 자질일세."

"기독교인들도 ''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155?-222?. 초기 기독교의 주요 신학자, 논쟁가, 도덕주의자. 최초의 라틴 교부로서 이후 1000년 동방 서방 기독교의 어휘 및 사상 형성의 기초를 이룩했다.)도 뱀은 늙었다고 느껴지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주름진 허물을 벗어버린 뒤에야 밖으로 나오는 동물이라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지적했다.

"테르톨리아누스와 같은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로마 말기의 종교가. 초기 그리스도 교회 최대의 사상가로 교부 철학의 대성자. 모든 국가 권력은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음.)도 구도입문의 세계를 드나들었다네. 그의 말에 따르면, 뱀은 항상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추고 다니고, 사람에게 뻐기다가 두들겨 맞게 되더라도 머리를 드러내기보다 차라리 온 몸뚱이를 노출시킨다고 하네. 이것은 뱀의 신중함을 본받으라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거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의 우두머리가 아니고 무언가. 해마다 뱀은 돌담 속 은신처에 갑갑하게 갇혀 있지만, 낡은 허물을 벗고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네. 우리의 본질적인 소망을 피력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걸세. 원죄인의 타락한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일세."

"옛날 동물 우화집에서, 순례자에게 이런 충고를 하는 장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시골길을 지나다가 잠든 뱀을 보더라도 만약 뱀이 머리를 보호하고 있다면 뱀을 때려도 죽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막대기로 머리를 단 한 대만 쳐도 뱀은 죽고 만답니다. ''의 지혜는 바로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자네도 자네 내면의 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를 보호해야 하네. 사람을 시험에 들게 유혹하는 악마적인 ''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가식 없는 사람, 간계와 핑계의 허물을 벗어버린 사람뿐이라네. 우리는 거듭날 줄 아는 ''의 섬세함을 배워야 해."

"''은 그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기술을 쓰나요?"

"''은 늙으면 앞을 못 본다네. 그때가 되면, 뱀은 다시 젊어지고 싶어서 용기를 내지. 껍질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40일 밤낮을 아무것도 멀질 않는 거야. 그런 다음, 돌 속으로 좁은 틈새기가 보이면,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서 낡은 허물을 뒤에 남겨두고 빠져나온다네."

"그러면 독은 어떻게 합니까?"

"''은 갈증을 풀기 위해 샘물을 마시고 싶을 때면, 동굴에든 어떤 구멍에든 독액을 쏟아버린다네. 자네도 목마름을 해소시켜 줄 공동체의 구도 생활에 참여하고 싶다면 그와 똑같은 식으로 해야 할 걸세. 사원에 다가선 사람이라면 모든 독을 몸 박으로 배출시켜야만 해. 그것이 증오심이든, 경멸심이든, 시기심이든 전부 다."

"제가 원죄인의 독이 깃든 허물을 벗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악마적인 뱀은 제 앞에서 달아나버리겠군요. 그리고 다른 '', 그러니까 연금술의 ''이 저를 인도하겠군요."

"그렇게 되길 바라네. 하지만 치열한 싸움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자네의 내면에서 원죄인이 치솟아 올라온다 싶으면, 얼른 변신의 동굴로 물러나 숨게나. 날마다 시련을 겪더라도 자네의 구도 의욕에 변함이 없다면, 자네는 샘까지 갈 수 있을 걸세."

"이제는 시험에 빠지게 하는 악마적 뱀과는 거리가 아주 멀어졌군요."

"'''코끼리'와 형제라네. 수용적 지성과 능동적 지성이 서로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이지. 하지만, 조심하게나. 가장 어려운 시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니까. 지성은 지식과 학식을 축적하는 능력이라든가 능란하게 머리를 굴리는 기술이 아니라, '지혜'에 마음을 여는 자세를 의미한다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흩어져 있는 것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네. 지금 이 단계에서, 자네는 그러한 능력을 부여받았네. , 그 능력이 ''에 의해 소멸되지 말아야 할 텐데..."

 

 

17단계 검-빛의 축에 대한 인식

 

"그 두 지성에 대한 인식은 이것을 위해서였군요? 양날 검을 든 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군요?"

피에르 들뢰브르가 대답했다.

"맞네. 저 사람은 검의 두날이라는 이운성을 해결하는 가운데 축을 쥐고 있거든. 정확히 한가운데를!"

"진정한 정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요즘은 '정의'라는 말이 그 본래 의미를 잃은 세상이니, 구도 여행길에서는 정확함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네. 사람과 지적 원리 사이의 역학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확함 말일세."

"저 양날 검이 우리가 정확함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까?"

"자네가 보고 있는 저 석조상은 '성배' 이야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네. 여행에 나선 란슬로트(아서 왕 이야기에 나오는 기사 중 한 사람. 아서 왕의 왕비에 반한 그는 왕비를 위해 온갖 시련을 겪어 낸다.)는 검의 날로 만들어진 다리 위를 지나가야만 했다네. 인간의 삶은 그런 칼날에 비유될 수 있네. 칼날 양쪽 아래에 두 개의 깊은 구렁텅이가 있어서 균형을 잃으면 곧바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런 칼날의 다리 말일세. 한쪽 구렁텅이에는 자기가 영성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자의 허영심이 있지. 그리고 다른 한쪽 구렁텅이에는 구도의 길로 들어서기를 겁내는 자의 나약함과 나태함이 있어. 한가운데 길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라네."

"''은 자신을 방어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적을 공격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이 없으면 침략자들과 싸워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상징의 ''은 핏자국을 내지 않고 적의 몸을 가르지. 그런 ''은 영영 돌이킬 수 없이 가른다는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네. 적의 몸뚱이가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남게 되니까 말일세. 상징의 ''은 하늘의 쇠로 만들어져서, 우리의 결함과 조화롭지 못한 정신 자세를 도려내는 데 쓰인다네. 일찍이 장자는 세상에는 빛을 밝히는 검이 있는가 하면 사물을 파괴하는 검이 있음을 구분하여 현자의 세 검을 이렇게 이야기했네. '천자의 검은 무엇인가? 앞으로 찔러도 걸리는 것이 없고, 위로 올려치거나 아래로 내리쳐도 아무것도 잘리지 않으며, 양옆으로 휘둘러도 잘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천자의 검은 위로는 나부끼는 구름을 가르고, 아래로는 땅의 맥을 끊는다."

"그런 ''을 지니고 있으면 어떤 갈등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겠군요?"

"''의 칼날과 날밑을 잘 보게. 칼날과 날밑이 십자 모양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땅에 검을 꽂았다가 칼끝으로 허공을 겨누고, 펄쩍 뛰었다가 가슴에 칼끝을 댄 채로 수평으로 내려앉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영웅처럼, 자네도 내면의 공간을 잘 조직해야 하네"

"''을 통해서, 소유자의 뜻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십자가가 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이군요."

"손에 양날 검을 쥐는 것은 곧 빛줄기를 움켜쥐는 것이라네. 십자군 병사들에게 칼날은 빛을 발하는 십자가의 한 부분이었으니까."

"''은 또한 서약이기도 했습니다. 불꽃이 ''을 에워싼 형태를 그리고 있는 성당용 인장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을 쓰기는 정말 어려울 것 같군요! 무기로 쓰는 칼날처럼 예리한, 빛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겠어요."

"'지식욕'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미 저 빛의 ''을 쓰고 있는 셈일세.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인식하게 됐으니까. 자네, 거석 얘기 생각나나? 검이 박힌 채 광장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는 돌 말일세. 그 돌에는 검이 날 밑까지 깊숙이 꽂혀 있었지. 이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대주교가 성수를 갖고 와 성수를 돌에 뿌리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그는 돌에서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어. 이 검을 뽑는 자는 신이 선택한 왕이 되리라. 그러더니 검에서는 불 켜진 두 자루의 커다란 양초처럼 환한 빛이 퍼졌다네."

"적절한 때에 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왕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건축가가 손에 ''을 쥐었다는 것은 구도 입문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을 알았으니, 이제 자네는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올곧음(직선), 빛의 축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셈이네. ''의 과정을 통해, 이제는 ''의 사원에 도달하게 될 걸세."

 

 

18단계 달-의식의 수용성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구도 여행 제1부는 ''과 더불어 끝난다네. 건축가는 자기가 지금까지 건너온 정신의 상태를 요약해 보고서, 자신의 힘과 의지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벌써 먼 길을 달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은 그것을 확인하는 기회입니까?"

"그것뿐만은 아니야. ''은 새로운 단계를 나타낸다네. 이집트인들은 ''에 관해서 어떤 말을 했나?"

그가 짓궂은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은 토트신과 연관이 있습니다. 따오기 머리를 한 신 말입니다. 상형문자는 신들이 계시한 언어인데, 그 상형문자의 위대한 지배 신으로서, 토트 신의 역할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젊은 서기관들에게 서기 이를 가르치는 것도 토트 신이었습니다. 커다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다 제식서를 쓰는 일도 했고요. 고대의 전설에 따르면, '태양'은 밤 동안에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밤의 천체인 ''을 수호하는 일을 토트 신에게 맡겼답니다."

"''은 우주를 수용하기도 하고, 우주를 점진적으로 동화시키기도 해. ''은 태양 광선을 반사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태양 광선을 제 성격에 맞도록 변모키니 말일세. ''처럼, 스승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건축가 역시 앵무새처럼 모방만 하지는 않아. 자기에게 주어진 상징물들을 자기 영혼의 빛깔로 물들이지. '''태양'에게 굴하는 것이 아니야. '태양'''은 상호보완적으로 생명을 유지시킨다네."

"<하늘의 암소의 책>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고대 이집트 문서에는 토트 신이 상징하는 ''의 신비로운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태양'은 자기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배은망덕함에 성이 났답니다. 그래서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학살에 굶주린 여신 세크메트를 인간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대참사의 처참한 광경 앞에서, '태양'은 자신의 경솔한 결정을 뉘우치고서 남은 사람들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광분한 암사자 여신 세크메트의 이빨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세크메트는 그만 절제하라는 권고를 더 이상 듣지 않았습니다. 토트는 세크메트의 격노를 가라앉힐 꾀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토트는 식물을 주성분으로 한 물약을 준비해서 그것을 지표면 전체에 뿌렸습니다. 물약의 색깔이 붉었기 때문에, 암사자는 그것이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피인 줄 착각하고 실컷 들이마셨습니다. 암사자는 이내 취기에 빠져들었다가, 증오감 없이 깨어났습니다. '토트 신의 달'이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지요." 토트 신은 태양이 가하는 불가피한 징벌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 징벌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대참사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보살펴준 것입니다."

"''이라는 문을 넘어설 때, 건축가는 자신의 구도 정신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충만하게 체험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지. ''은 건축가의 발길을 인도하는 이상을 구체화 시켜 준다네. 하늘과 땅이 내린 결정을 ''이 확정시키지. 후보자를 심판하기 위해 모인 건축가들처럼, ''도 심판을 내린다네."

"그 심판에는 어느 정도의 숙명도 포함됩니까?"

"우리 선배 건축가들은 인간이 운명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허영심은 갖고 있지 않았네. 그렇다고 신이 모든 일을 정해놓았다고 주장하는 철저한 예정설을 신봉하지도 않았어. 물질주의적인 인간과 동물적인 인간은 사실 우주의 법칙에 예속되어있는 셈이야. 그러나 스스로 자아를 실현하려 하는 사람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네."

"구도 입문의식의 현 단계에서, ''이 등장한 것은 좋은 징조입니까?"

"13세기에 몽 코르미용 수도원의 여수도원장이었던 성쥘리엔은 환하게 빛나는 ''을 보았는데 그 한쪽 부분이 검고 어둡더라는군. 그때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설명하기를, 그것은 그 해가 성스러운 해임을 상징한다고 했네. 검은 부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는 축제가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1년이 충만하고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그런 축제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말이었지."

"그러면 ''은 구도의식 전체에 해당한다는 말씀인가요?"

"자네가 지금까지 경험한 의식의 첫 부분에 해당하네. 자네도 지금까지의 여행길 동안 본 상징물들이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군. 그 상징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 거야."

"''은 때로 차오르기도 하고 이지러지기도 하면서 여행자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그 두 양상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네. 정신적인 삶과 물질적인 삶을 서로 융합시키지 않고 분리시키는 자는 깨달음의 길을 멀리 가지 못하지. ''의 심판에 직면한 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네. 하나는 자아도취에 빠져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공동체가 자신에 대해 내리는 평가를 거부하는 거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원 문 앞에다 건방진 아집을

버리고서 맡은 분야에서 달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네."

"''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로군요. 구도 과정의 지금 단계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면 우리를 인도하는 목소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군요? 정말 ''의 목소리가 우리를 인도합니까?"

"''은 천지 창조를 본 최초의 인간들의 비밀과 신의 신비를 담은 움직이는 궤짝이나 배에 비유된다네. '달의 신'의 사원은 세속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성지였어. 오직 신관과 왕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네."

"''''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겠지요? 건축가 공동체, 공동체의 비밀과 법칙 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네. 허나 ''에는 여전히 밤의 이미지가 남아있어. 건축가들의 얼굴은 어슴푸레한 달빛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구도자의 눈에 그다지 뚜렷하게 보이질 않아. ''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아나? 이렇게 말하게나. '달님의 말씀이 바람에 휘날리듯 하늘에도 휘날리게 하소서. 그러면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온 누리에 쌓일 것입니다. 달님의 말씀이 이 땅에 내려져, 목초지의 풀을 자라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외양간과 양우리에 널리 퍼지게 하소서. 그리하면 생명의 숨결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 말을 언제 해야 할까요?"

"공동체 앞에서 참여를 선언할 때 하게나. ''은 맹세의 지배 신이야. 구도 여행의 제1부는 맹세로 완성되네. 자네를 맞이하는 구도 공동체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고, 상징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항상 발전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또한 전수받은 비밀들을 간직하겠다는 약속도 하게. 그것은 유치한 숨김이 아니라, 누구도 배반할 수 없는 구도의 삶에 대한 비밀들을 지키는 것일세."

"그러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은 제가 동참하게 도리 공동체의 정신을 손과 머리에 받아들이는 일이로군요. 그 순간은 이기주의적 인간에서 공동체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순간이 되겠지요?"

"그 전에, 한 가지 위험한 여행이 남아있네."

"어떤 여행입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사이에, 벌써 다음 단계인 '태양'이 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공허라네."

피에르 들뢰브르가 대답했다.

 

 

19단계 ''에서 '태양'으로

 

"자네에겐 지금이 가장 위태로운 시점일세. 보다시피, ''로 끝나는 세계와 '태양'으로 시작되는 세계가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어."

"한쪽 벽에서 다른 쪽 벽으로 건너가야 하는군요. 진공 상태를 넘어서요."

"맨 처음 의식의 자각이 이루어지고 난 후로, 자네는 자네 혼자서는 신의 법칙에 따라 자아를 정립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네. 그리고 자아 성찰을 통해 자네는 스스로의 잠재적인 특질들을 파악하게 되었고, 계속 발전되는 구도의 길로 결연하게 들어섰어. 지금까지 구도 여행길의 여러 단계를 지나왔네. 자네에게는 상징물들이 공염불이 아니었어. 자네 내면의 돌을 갈고 닦음으로써, 자네는 스스로를 얽매었던 장애물과 조건들로부터 점차로 벗어났네. 석조상들 속에 숨겨져 있던 수수께끼들이 목소리를 들려준 거지."

"제가 느끼고 깨달은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제 내면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제 인간관과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아마 제 자신을 더 이상 천지 만물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만물의 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를 참사람으로 만들어줄 지식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길도 여러 가지가 그려졌네. 그러나 최종적인 지식은 아직 윤곽만 그려졌을 뿐이야. 어느 정도의 조화를 체득할 수 있게 해줄 작은 신비들의 발견 과정은 끝나가고 있네. 그러나 자네도 상징물들의 목소리를 듣고 벌써 알았겠지만, 큰 신비들이 남아있다네. 그리고 자네는 보다 광범위한 조화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해야 하네."

"석조 사원인 이 성당이 살아 있는 돌로 이루어진 또 다른 사원의 결실로 느껴지는군요. , 건축가 공동체의 결실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상당히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우너인을 알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 다시 빠져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길을 계속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자네의 요구가 클수록 우리가 자네에게 요구하는 바도 크네. 이제 자네는 결정적인 '도약'을 해야 해. ''에서 '태양'으로 넘어가야 하네. 껍질을 완전히 떠나 알맹이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야 해. 앞으로 닥칠 시련들이 지금까지 겪은 시련들보다 더 어려우리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원한다면 생각을 돌이켜도 괜찮네."

"저는 맹세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무릎 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노정의 끝에 있는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정 그렇다면, 성당 문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세나. 구도의 삶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허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긴장을 풀게나. 그저 맛있게 점심을 먹자는 얘기였어."

우리는 깨달음의 문을 한 시간 동안 떠나 있었다. 피에르 들뢰브르는 자기 친구들이 주로 찾는 음식점의 주인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음식점 주인은 포도주가 듬뿍 곁들여진 든든한 식사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다시 여행길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기운이 솟구쳤다. 추위와 비바람에 맞설 준비가 된 기분이었다.

 

 

큰 신비들 '태양'에서 '꽃핀 나무'까지

 

20단계 태양-영원한 창조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큰 신비' 속으로 가는 길은 저 '태양'을 통해서 열린 다네."

"'태양'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온기와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의 원천 아닙니까?"

"빛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또한 눈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빛들이 무수히 숨어 있기도 하다네. 옛날에는 '태양'이 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장되는 하나의 직선을 따라 지구 위를 지나간다고 가르쳤네. 그러니까 그날그날의 '태양'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배웠지. 날마다 새로운 '태양'으로 대체된다는 거였어."

"고대 이집트의 개념도 그랬습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태양'을 아침마다 하늘의 암소가 이 세상에 내놓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것이 꼭 물질적인 '태양'과 구체적인 태양 표면을 말한 거라고 생각하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태양의 아버지이며 원칙인 다른 '태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형태의 생명체들을 탄생시킨 하느님이라고 일컬어지는 '태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 마음속에 탄생시켜야 하는 '태양'을요?"

"그런 비밀스러운 '태양'이 탄생하는 것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횃불을 켜는 구도의식 순간에 해당한다네. 옛날 사람들은 큰 신비들의 실재성을 주시할 수 있는 사람들 눈에는 한밤중의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도 '태양'이 보인다고 생각했어. 그런 사람들에게는 밤도 대낮처럼 환했단 말일세."

"구도 입문자는 정말로 또 하나의 '태양'이 될 수 있습니까?"

"헤르메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자. 웅변가, 상인, 장인, 도둑의 수화신. 로마 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함)는 이렇게 말했네. 인간의 '태양'의 모습이고, 태양은 세상의 모습이며, 세상은 영원의 모습익오, 영원은 신의 모습이라고. 구도 과정이라는 대장정에서 맨 첫걸음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밝히는 '태양 인간'을 탄생시키는 것이야."

"그래도 성전에 나오는 위대한 왕들이나 파라오들처럼 그리스도도 별에서 생겨난 '태양'에 비유되었군요. 결코지지 않는 태양..."

"'태양'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났네. 그것이 구도 정신의 시장이었지."

"파라오 아케나텐이 숭배했던 '태양'광선들의 끝부분은 빛의 움직임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 손 모양으로 그려졌습니다."

"자네 내면의 어둠 속에서는 '태양'이 점점 커지고 있네. 자네는 상징물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 '태양'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나가야 하네."

"제 몸을 그냥 단순한 몸이 아니라 '태양'이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성소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자네의 몸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단체가 그렇다는 말일세. 진정으로 직관적인 의식을 소유한 것은 오직 공동체뿐이야. 진리의 태양으로, 지성의 불길로 풍성해지는 직관적인 의식 말일세. 신화에 따르면, 왕권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태양들의 '태양'이 조화롭게 기능하는가 못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네. 사람을 수호하는 목자하고 할 수 있는 '신관 왕'은 지상에서 우주의 질서가 지켜지도록 한다네. '신관 왕'이 상징하는 '태양'은 항상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하고 할 수 있네. 왕이 신민의 행복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해주니 말일세."

"내면의 '태양'을 창조하라...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빛을 노래하는 하프 주자가 생각나는군요. 변화의 과정에 있는 구도자는 하프 주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창조자는 또 그 목소리에 응답을 해줍니다. 구도자의 가슴속에는 '태양'이 넘쳐흘러서 그 내면의 사원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바람이 그를 정화시켜 줍니다. 이제 구도자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바로 구도 입문의식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네."

"'태양 빛'을 먹고 사는 사람은 태연히 물 위를 걷고, 축복받은 자들의 빛과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태양'의 단계를 넘었으니, 구도 입문자는 이제 자유의 의무에 눈을 뜬 셈이야. 황금률을 따르는 가운데, 진정으로 공동체 안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걸세. 이제 입문자에게는 실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자질이 필요해졌네. 그건 다름 아닌 '절도'라네."

 

 

21단계 절도

 

"한 남자가 그릇에 담긴 액체를 다른 그릇에 쏟아붓고 있군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유량을 잘 조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저 상징적인 형상의 숨겨진 이름이 바로 '절도'하네."

"저런 조각상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의 타로 지방에서도 본 적이 있구요. 그런데 저 액체의 정확한 성격은 무엇입니까? '''태양' 다음에 '절도'가 등장하는 겁니까?"

"'절도'가 구두쇠들의 검소함을 일컫는 게 아니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검소함과 금욕은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결국 사람을 타락시키고, 또 결국 일상생활의 균형을 잃게 만드니까요. 일상생활에 균형이 깨지면 그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자네 얘기는 백번 지당하네. '절도'는 단순한 실천윤리의 범주를 초월하는 거라네. '절도'는 우리를 가상에 휩쓸리지 않게 해주고, 외적 자극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해준다네. 우리 스스로를 추스리도록 해주고, 우리의 삶을 확실하게 지배하도록 해준다네. 겉모습을 절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실재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될 걸세."

"자아를 억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 이상을 해야 하네. '절도'는 우리에게 마시라고 권한다네.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순수한 액체, 지혜의 샘에서 나온 음료를 마시라고 권하는 것이지."

"저 두 그릇 사이를 흐르는 액체는 생명의 에너지이겠지요?"

"자네 마음속에서, 액체가 가장 많은 그릇과 가장 적은 그릇, 두 그릇의 활동을 잘 조화시켜야 하네. 저것은 양극단 사이를 영원히 오가는 에너지이니 말일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종합이라네. 단순히 덧셈을 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셋 속의 '하나'라는 말일세. 물질 속에 정신이 도입된 것이 '절도'라네. '절도'는 우리 인격 속에 흩어져 있는 모든 양상들간의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네. 넉넉하게 쏟아 부어지는 저 액체는 물론 생명의 에너지이고 지혜의 표현일세."

"한 동작으로 물질을 정신화하는 동시에 정신을 구체화하라는 말씀입니까?"

"우리 마음속의 어떤 지식도 높거나 낮지 않다네. 중요한 것은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의 쉼 없는 운동이네."

"연금술에서 하는 말로 '융해''응고', 즉 집중과 분산, 분산과 집중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말씀이로군요."

"무엇보다도 그 둘 사이의 운동을 실행시켜야 하네. 우주의 유일한 빛도 '태양'''로 분리되었어. '태양'''은 창조주의 두 눈이라네. 그러나 그 둘의 시선은 오직 하나일세. 이제는 자네 스스로 빛의 망을 짜게나."

"그러니까, '절도'를 통해서 그 두 광선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가 있군요. 제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라면, '절도'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제3의 눈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길이로군요?"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네. 높은 곳에 있는 자에게 사람들은 내려오라고 말한다. 낮은 곳에 있는 자에게는 올라가라고 말한다. 만일 자네가 낮은 곳에 있고 자네와 함께 살고 싶다면, 나는 자네가 있는 쪽으로 내려가야 하네. 그것이 바로 창조주가 하는 일이야. 자네가 겸손해지면, 창조주는 신의 집에서 내려와 자네의 마음속에 자리한다네. 땅은 하늘에서 가장 거리가 먼 곳이야. 땅은 웅크려 엎드린 채 하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그러나 그러려면 어디에 있어야 할까? 아래로 달아나도 하늘에 도달하고, 위로 달아나도 땅은 역시 하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왜 그럴까? 저 석조상을 보게나. '절도'를 보게나. 위에 있었던 것이 안에 담기기 때문이야."

", '절도'의 두 그릇은 '태양'''이로군요. 하지만 그러고 보면 '태양'이 능동적이고 ''이 수동적이라는 말은 제가 보기에는 틀린 말 같습니다."

"'석공장''절도'를 통하여 그 이원성을 초월한다네. '석공장'은 자네가 가면 단계에서 배운 '황금률'의 법칙에 따라서 태양 빛과 달빛의 균형을 이룬다네. 더욱이, 어떻게 낮을 거부하고 밤을 취할 수 있으며, 밤을 거부하고 낮을 취할 수 있겠는가?"

"함부로 택하다가는 무지에 이를 수도 있겠군요."

"무지라... 골목길을 돌 때마다 무지가 우리를 노리고 있지. '눈가리개를 한 사람'에게 물어보세.“

 

 

22단계 눈가리개 한 사람-신성함에 대한 내적 관조

 

"눈가리개를 하고, 왼손으로는 왼쪽 무릎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신성과 봉헌의 제스처를 해 보이는 사람이 보이는군요. 저것은 대개 주교가 취하는 동작 아닙니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조각가가 이 세상의 실체를 못 보는 가짜 주교를 저렇게 조각해서 성직자의 권한을 조롱하려 했다고 생각하나?"

"구도 입문의 현 단계에서, 그럴 필요는 별로 없었을 것 같군요."

"우리 선배 건축가들은 이유 없는 비판은 하지 않았네. 강인축제라든가, 합당한 이유 없이 이른바 '난잡하다'고 칭해지는 여러 관습들 속에는 다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었어. 그런 의식들은 인간의 모든 양상을 설명하는 종합적인 예전에 속하는 것들이었거든. 중세의 건축가는 웃을 줄 알았다네. 호탕하게 우리의 모든 결함을 드러내 놓았지.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가 아닐세."

"저 구도자의 눈엔 왜 눈가리개가 씌어져 있습니까?"

"저 눈가리개는 불투명한 베일이 아닐세. 옛날의 머리띠와 같은 것이라네. 이마에다 묶어 매는 작은 띠였는데, 시야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지."

"(사자의 서)에는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구도 입문자들이 살아 있기 위해 되뇌이는 이상한 말들이 나와 있습니다. 입문자는 자신을 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갈라놓고 있는 문을 향해, 그 문이 권한을 갖는 것은 눈가리개 덕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눈가리개를 한 채, 자네를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바로 구도 생활의 문이라네. 그런대, 입트의 입문자는 문을 건너 구도의 세계로 간 다음에 어떻게 되나?"

"'지식'이라는 이름의 띠를 두릅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그 띠는 가능성의 '바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입문자의 이마에 매인 그 띠는 입문자가 어둠을 만나게 되면 그 어둠을 밝혀줍니다."

"자네도 알았겠지만, 눈가리개를 두르는 것은 구도의 왕국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이 지니는 특권이었어. 저 봉헌의 동작은 저기 보이는 저 사람이 지식의 길을 벌써 여러 단계 거쳐온 입문자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네. 의식서에 나오는 이 말은 저 사람에게 꼭 맞아. '저는 저의 왕관을, 대관식의 띠를 부여받았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옥좌에 대신 앉았습니다.'"

"주신 바쿠스는 흔히 이마에 띠를 두른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고대의 조각가들은 왕관이 본래 이마에 두른 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헤브라이의 신관과 에트루리아의 제사장도 이마에 띠를 둘렀지요. 우리의 성전에서도 띠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도 훨씬 더 이상한 얘기를 해주지. 아르메니아의 어느 문헌에 있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일세. 동방으로 돌아온 세 동방 박사는 불 속에 그 '아기신'의 배내옷을 던져넣었다고 하네. 불이 꺼져서 그들이 불에서 배내옷을 꺼냈더니, 배내옷은 눈처럼 하얗고 전보다도 더 멀쩡하더라는 거야. 동방 박사들은 배내옷에 입을 맞추고서 그 옷을 자기들 눈에 갖다 댔다는군! 그들은 그 배내옷이야말로 신 중의 신의 옷이라고 말했다는 거야."

"띠가 불의 시련을 겪고 나서 동방 박사 세 사람에게 선사되었군요. 그 띠를 통해서 그들이 별을 따라 여행할 때 발견했던 진리를 되새긴다는 뜻일까요?"

"그리스도의 두 눈도 가려져 있었어. 그리스도의 눈이 안 보인다고 생각한 군인들이 '누가 그래를 때렸겠소?'하고 물었다네. 모든 입문자도 빛을 부여받기에 앞서서 그런 식으로 눈가리개 과정을 거친다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 왜 시각을 잃어야 합니까?"

"눈가리개를 했다고 해서 시각을 잃는다고 누가 그러던가? '달인'이 입문자의 눈에 두 손을 얹어주기만 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네. 그렇게 되면 입문자는 마음의 눈을 뜰 수 있게 되지."

"또 다른 시각을 탄생시킬 수 있군요..."

"빛의 문처럼 눈가리개를 두르면, 피상적인 호기심에는 시선을 닫게 되네. 아직 이것을 잊지 않는 교단들이 있지. 승려가 명상을 할 때 이마에 두르는 면 띠는 시간을 초월한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 중 하나라네."

"요즈음 광고 포스터에서 보면, 눈을 가린다는 것은 그저 확률에나 기대를 건다는 뜻으로 치부됩니다."

"비록 의미가 그렇게 퇴색하기는 했어도, 눈가리개의 성상학은 운명의 여신의 두 눈이 가려져 있었다는 저 옛날의 상징적인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라네. 운명의 여신은 인간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거든. 운명의 여신은 자신의 법칙에만 충실해서 빈자에게든 부자에게든 가리지 않고 들이닥쳤고, 우리가 어느 쪽을 선호하든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행복과 불행을 나누어주었다네. 우주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아. 우리가 우주 속에 들어 있을 뿐이네. 운명의 사슬에서 빠져나오려면 우주를 발견해야 하는 것도 바로 우리란 말일세."

"눈가리개라고 말할 수 있는 깨달음이 사라지고 있는 현대사회가 염려되지 않으십니까?"

"깨달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야. 상황에 밀려 소흘히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지. 앞으로는 보다 널리 알려질 테고, 시간이 다 잘 해결해 줄 걸세. 그러니 시간도 장소도 염려하지 말게. 자네의 눈에 눈가리개를 둘러서, 쓸데없고 피상적인 것을 가리게나. 자네를 발전시켜 줄 자질들을 내면의 시선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하네. 무지에는 눈을 담고서, 새로운 세계를 탐사하듯이 자네 내면의 시각을 탐구해 보게나. 그래서 진정한 내성을 이룩하고, 바깥에 흩어져 있던 것을 재구성하게. 그러면, '펠리컨'이 나타나는 모습을 눈앞에 보일 걸세."

 

 

23단계 펠리컨-믿음, 소망, 사랑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펠리컨' 단계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걸세. '펠리컨'은 우리에게 상징들과 신비들을 꿰뚫어 보라고 권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펠리컨'은 우리의 한계 앞에 놓인 절망을 나타내는 표식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정반대일세. 우리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 한계를 넘자는 것이네. 비록 신비는 어디까지나 신비로 남으리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야. 그렇지만 신비를 체험할 수는 있네. 중요한 건 그거야. 누구도 절대로 삶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자네는 '펠리컨'을 보면 뭐가 떠오르나?"

"'펠리컨''이웃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이라는 이 말이 어쩐지 의미 없는 공허한 말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웃 사랑'이란 말은 알맹이가 빠져버렸지만, 구도의식에서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있네. 그럴 필요가 있으니 당분간 이 말은 잊고 샛길로 빠져보기로 하세."

"'펠리컨'... 무엇보다도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상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 파라오들의 부활용 제식서인 (피라미드 문서)에서 알게된 이야기인데, 주술사가 땅에게 '펠리컨' 폐하에게 물에 빠졌으니 땅이 만든 괴물들을 집어삼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불쑥 나타난 뱀 앞에서 주술사가 외칩니다. 물러가라, 몸을 숨겨! 내가 있는 곳으로 오지 마라, 사라져라, 기어가! '펠리컨' 폐하께서 나일강에 빠지셨다."

"이상한 이야기로군. 자네가 해석한 뜻은 무엇인가?"

"물에 빠져 익사한 새는 동생 세트에게 살해당한 오시리스 신을 말합니다. 세트는 형을 잔치에 초대해서는, 소문처럼 관이 정말로 그렇게 큰지 확인해 보자며, 형에게 관속에 드러누워 보라고 청했습니다. 오시리스는 수락했지요. 오시리스가 관 속에 드러눕자마자, 세트와 그 일당은 관 뚜껑을 닫아버리고는 관을 나일강에 던졌답니다."

"지상의 나일강이 아닌 또 다른 나일강을 말하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이집트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땅을 기름지게 해주었던 나일강은 그냥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강, 은하수를 반영하는 강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에너지 저장고를 손안에 넣어 두고 있었던 것이죠."

"자네 말대로라면, '펠리컨'을 강물에 던진 것은 붙잡힌 오시리스를 하늘에다 던져올린 셈이로군. 강물에 빠진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 되겠어."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석관에 새겨졌던 또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거기서 주술사는 제 살로 한배의 새끼들을 먹여 살리는 '펠리컨'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중세에도 이와 똑같은 전설이 발견되었습니다."

"세월과 속인들은 '펠리컨'의 새끼들을 지워버리려 하지. 때로는 '펠리컨'이 제 새끼를 학살하는 가증스러운 새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아무리 중상모략과 거짓말을 갖다 붙여도 '펠리컨'의 진정한 성격은 조금도 달라질 수가 없네."

"왕으로서의 성격 말씀입니까?"

"어떻게 알았지?"

"제가 아는 어떤 글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펠리컨은 죽은 왕의 어머니이고, 왕은 펠리컨의 아들이다.' 왕의 어머니는 날마다 세상에 별들을 탄생시키는 하늘의 여신입니다. 파라오는 죽으면 이 땅을 떠나 역시 별이 됩니다."

"왕은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에게서 기능을 부여받는 완전한 존재라네. 하지만 이 모든 내용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는 건가?"

"'펠리컨'은 오시리스입니다. 또한 왕의 어머니인 하늘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펠리컨'의 이집트 이름은 이 세상의 운명을 책임진 아홉 창조신들의 단체인 에니아드(구신계)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펠리컨'이 말을 하거나 예언을 할 때면 '일체성'이 생겨서, 국경들이 합쳐지고 국가들이 하나로 통일된다고 합니다. (피라미드 문서)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펠리컨'의 비밀을 파악하고 나면, 파라오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파라오는 자기를 위해 하늘과 땅의 문이 열렸고, 자기를 위해 '땅의 신'의 빗장이 열렸으며, 자기를 위해 하늘의 둥근 천장이 열렸노라고 합니다. 자기를 가두었던 자기 풀어주었으며, 자기를 위해 '펠리컨'의 입이 열렸고, 그 입은 밝은 곳으로 나가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내보내 주었노라고 합니다."

"지금 자네가 말하는 내용은 의식 단계에서 중요한 부분일세. 건축가의 모험이나 파라오의 모험이나 다 한 가지로, 지금까지는 '친절한 팔'이 건축가를 인도해 왔네. 헌데 이제는 '펠리컨'덕분에 건축가는 사원 안에서 완전한 자율을 획득한 거네."

"'펠리컨'에 대한 조소 섞인 이야기들은 왜 있는 겁니까? 예를 들면, '펠리컨'은 무분별하거나 경솔한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사실, 다른 새들처럼 상당히 높은 곳에다 알을 낳을 수 있음에도, '펠리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흙을 파고서 그곳에 새끼를 놓아둡니다. 그걸 하는 사냥꾼들은 거기에다 말린 소동을 놓고서 불을 피우지요. 연기를 본 '펠리컨'은 날개를 퍼덕거려서 불을 끄려 하지만, 오히려 바람이 일어나서 마침내 불은 활활 타오르고, '펠리컨'의 날개마저 불타버리고 말지요. 그렇게 되면 사냥꾼들은 '펠리컨'을 쉽게 잡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펠리컨'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이 있답니다. '펠리컨'이 새끼들을 위해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속인들은 '펠리컨'의 싸움 방식이 경솔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에 '펠리컨'고기를 먹습니다."

"자넨 자문자답을 하고 있군 그래. '사제들'은 지식을 얻고, 세속인들은 심판을 하지. 사람들이 '펠리컨'을 비난하는 이유는 '펠리컨'이 주는 신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병적인 질투심을 자극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해. 성서에 보면, 고립무원의 고뇌에 빠져 여호와를 부르는 사람이 자신을 사막의 '펠리컨'에 비유하는 장면이 나오네. 그의 하루하루는 연기가 되어 날아 가버리고, 뼈는 숯불처럼 타오르며, 심장은 바싹 마르고, 더 이상 먹을 것도 하나 없어. 하도 소리쳐 탄식을 하다 보니 피골이 상접해 버렸지."

"그런 고통, 그런 절망을 거쳐야만 하는 겁니까?"

"겁쟁이나 소심한 자들은 큰 신비에 다가갈 수 없다네. 만일 그런 고통과 절망을 만나게 되면, '펠리컨'에게 답을 구해보게나. 오직 '펠리컨'만이 고뇌에서 꺼내줄 수 있네. 제 새끼들을 죽이고 사흘 동안 그들을 위해 울다가 자해하는 것이 바로 '펠리컨'이야. '펠리컨'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자기가 한없이 사랑하는 새끼들이 자신을 정면으로 해쳤기 때문이네. '펠리컨'은 모욕을 참지 못한다네. 그래서 주이고, 또 되살리는 걸세."

"다윗 왕도 '펠리컨'에 비유되지 않았습니까?"

"또 왕 얘기로군. 전하는 말에 따르면, 때로는 아비 펠리컨이, 때로는 어미 펠리컨이 피를 쏟아서 새끼들을 소생시킨다고 하네. 자네는 하느님을 비난하고 모욕한 적이 없는가?"

"글쎄요...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가령,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피조물을 사랑한다든지, 혹은 원을 알아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판단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일세. 기사 보호르의 모험을 생각해 보게. 보호르가 양털처럼 햐얀 새 한 마리를 보았다지. 훨훨 날개를 치며 나무 위에 올라앉은 그 새는 나무 위 둥지에서 싸늘하게 죽어 있는 새끼들을 발견하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네. 그러더니 뾰족하고 날카로운 부리로 제 가슴을 쪼아대더라는 군. 너무나 거칠게 쪼아댄 나머지 피가 솟구쳤다고 하네. 새끼들이 뜨거운 피에 적셔져 되살아나는 동안, 아비는 새끼들 가운데서 숨을 거두었다네."

"새끼를 살리는 데 왜 아비가 죽어야만 합니까?"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중세 최대의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음. 주저는 신학대전)는 훌륭한 '펠리컨'은 피로써 더러운 것을 씻어냈으니 주 예수 그리스와 같다고 말했네. 단 한 방울의 피가 온 세상을 모든 죄악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어. 자네도 이 세계의 아들이야. 자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지니고 있네. 자네를 깨달음으로 인도할 자는 자신의 에너지를 자네에게 주어야만 해. 그리스도와 부활의 상징이었던 '펠리컨'은 또한 나사로의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어. 우리의 형제 단테(1265-1321. 중세와 근세의 분수령에 위치한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시인. 신곡은 단테가 온 정력을 기울여 완성한 장대한 종교 서사시이며 세계문학의 고전. 요절한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첫사랑이다.)도 베아트리체가 요한에 애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네. '우리 펠리컨의 품에 안겼던 분이군요, 빛나는 성무를 위해 십자가 꼭대기에 선택된 것은 펠리컨이었어요.'"

"사도 요한 말씀이로군요! 선생님께서는 요한을 자수 언급하시네요."

"세례 요한가 사도 요한, 이 두 요한은 한 기능을 가진 두 양상일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 요한이 '펠리컨'과 연관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석공장'들은 사도 요한을 모델로 여겼네."

"그럼 연금술에서는 어떤가요? 연금술에서는 '펠리컨'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까?"

"'펠리컨'은 화금석의 상징일세. 화금석은 제 내부에서 힘을 길러냄으로써 불어난다네. 새끼들에게 제 피를 먹여서 번식하는 새처럼 말이야. 연금술은 건축가로 하여금 그가 가진 최선을 바치게 함으로써 지각력을 '배가'시킬수 있게 한다네."

"그런데 희생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요즘에는 희생이란 말을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거의 하나의 도전과 같습니다. 모두들 빼앗거나 얻고 싶어 하지, 희생을 생각으로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만나기가 어렵잖습니까."

"자네도 알겠네만, 미래의 건축가로서는 자기 자신을 작품에 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헌신이라네. 헌신하는 자는 흩어져 있는 에너지를 순식간에 집중시킬 수 있다네."

"제가 알기로, 제단에 제물을 올리던 고대 종교의식이 어떤 가학 취미에서 생겨난 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의식 집행자들은 물질을 신성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극동 지방에서는 신도가 신의 조각상 발치에 꽃을 놓아 봉헌했습니다. 신에게 중요한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향기였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무게도 없는 꽃의 그 특질이 중요했던 것이지요.'

"'펠리컨'처럼 헌신하면 자네도 자아와의 합일을 이룰 수 있네. 지금은 '자선 사업'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어 버렸네만, 중세 기독교에서 말하던 저 유명한 '종교적, 도덕적 차원의 행위'는 우리가 행하는 일을 신성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 즉 연금술상의 용어로 말하자면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는' 것이었어."

"위험한 건 희생을 영혼이 쪼그라들고 비틀린 연극의 한 장면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상징들을 알고 실천해야 하네. 과거에 우리 선배 건축가들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네. 상징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형식에 덜 사로잡히게 되고, 구도에 더욱 헌신하게 되지. 내 친구 그리올은 아프리카 도곤족의 현자와 오랜 대화를 나눈 끝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네. '희생의 힘은 사람의 몸속에서 들어가고, 동과하고, 다시 빠져나간다.' 사람들 사이에는 계속 적인 상호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쉼 없이 이동하고 있어. 우주의 질서가 지속되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네."

"제 생각에 자기 헌신이란 고행이나 금욕이 아니라 보다 치열한 삶입니다."

"진정한 희생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생명력의 계속적인 움직임을 말하네."

"야곱(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이삭의 아들로서,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를 꿈에 보고 천사와 격투하여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음. 그의 열두 명의 아들은 각기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조상이 되었음)의 사라리를 말씀하시는군요?"

"맞네. 경탄에 찬 족장이 제단을 세울 때 그 앞에서 천사들이 끊임없이 사다리를 오르내렸지."

"구도 입문의 이 단계에서, 희생을 거부하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그의 삶은 위험한 돌풍에 휩쓸리고, 생각의 고삐도 놓치게 되지. 희생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한 옛날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매우 진전된 사고를 갖고 있었던 셈이야. 희생하지 않는 자는 아직 탄생하지 못한 자라네."

"희생의 끝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구도의 길에서 사사로운 이득을 기대하는 자, 일시적인 영광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희생정신을 왜곡시키는 자가 될 걸세. '펠리컨'이 제 새끼들에게 생명의 숨결을 다시 불어넣어 주는 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끼들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네. 오직 희생을 중심으로 삼는 행동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네. '펠리컨''사랑'을 위한 사랑에서 사랑을 한다네. 오로지 천지 만물에 대한 사랑에서 사랑을 해. 그 밖에는 다른 어떤 이유도 없어."

"지금까지 본 거의 모든 장면에서 느꼈는데, '펠리컨'의 새끼도 세 마리더군요. 구도의 견지에서, 3은 중요한 수입니까?"

"'펠리컨'과 세 마리 새끼들과의 관계는 하느님과 '믿음''소망''사랑' 등 천지 창조 당시의 세 덕목과의 관계와 똑같아. 이 세 가지 미덕은 천지를 창조한 '건축가'가 측량용 먹줄로 그린 신성한 세 정점이라고 할 수 있네."

"고상한 학문인 기하학으로 얘기의 방향이 틀어졌군요. 성당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바로 기하학이지요.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기하학에서 가장 중요한 도형이 바로 삼각형, 3의 공간 아닙니까?"

"천지 창조 당시에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 바로 3원이라네. 이 세 미덕이야말로 신성한 건축술의 기둥이고 모든 입문자가 내면에 지닌 건축술의 기둥이지."

"여기서도 용어가 좀 걸리는군요. 가령 '믿음'이란 단어는..."

"'펠리컨'이 되게. 자네는 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네. 이제는 질문에 대해 더 이상 논리적인 답변을 추구하려 해서는 안 되네.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게. 그러면 구도 세계에서 말하는 '믿음'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걸세. '믿음'은 이해되지 않는, 앞으로도 결코 이해되지 않을 하나의 확신이라네. 머리로 이해되는 지성을 초월해서 마음으로 느끼는 지성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현재 문명은 그러한 사고작용을 거의 전개하지 못하고 있네."

"'믿음'은 무엇보다도 충실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계시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충실함으로 생각한다면 그렇네. 자네가 공동체에서 얻은 빛은 자네의 것이 아니네. 그 빛이 자네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두게. 불투명한 방어막으로 그 빛을 가로막지 말고, 그 빛에 충실하게나.'

"'믿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구도자와 지혜 사이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로군요."

"또한 자네의 '형제'를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고, 자네의 '형제'가 자네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지. 어떤 행동에서든, 그 무엇에도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 법을, 어느 단계에서도 중단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나, 구도의 삶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중단도 있을 수 없네. 완벽을 향해 아무리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 하더라도, 구도 입문자에게 중단이란 결코 없었네."

"구도 입문에서 '믿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활력이로군요."

"'믿음'의 비결은 지식이네. 지식은 건축가 공동체와 구도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전달 과정에서 탄생한다네. 스승과 제자가 모두 자네의 마음속에 들어 있어. 자네는 귀를 엶으로써 '믿음'에 다가서게 돌 걸세. 자네의 귀는 자네를 내면의 진리로 이끌어주는 통로가 될 테고, 그 진리는 또한 자네에게 타인의 진리와 믿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걸세."

"그럼 '소망'은 어떻습니까? 저는 '소망'이 삶에 대한 의지라고, 인간 조건이 언제나 향상될 수 있다고 믿는 확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소망'과 희망을 혼동하지 말게. '소망'은 시작도 끝도 없는 움직임이라네. 끊임없이 손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엔진'과도 같은 것이지."

"'소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숨결로 여겨지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숨결이 마음의 지성을 살찌우지. '소망'을 간직하게 되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기대할 필요가 없고, 일을 끝마칠 때 성공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지. 때로 우리의 희망은 무너져버리고,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과 성공도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소망'은 가장 굳게 닫힌 문까지도 열 수 있네. 비록 지금 우리는 구도의 삶에 몸 바치는 사람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쓸모없고 중요치 않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소망'이 빚어낸 정기가 소생하는 날, 우리는 구도의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있네."

"신성에 대한 사랑은 왜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마음속에 항상 현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런 사랑을 갈구하는 열정이 바로 '소망'일세. 깨달은 건축가는 창조주의 의지에 따르고 '소망'이 자기를 관통하게 둔다네."

"사실, '소망'이 없는 자는 깨달음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자아를 성취하는 사람들, '소망'이 곧 법칙이고 지력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일들은 나타나게 되어 있네. 이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도리 걸세.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이들은 늙지 않게 해줄 시간을 그들은 경험하게 될 걸세."

"'소망''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겠지요?"

"이제 다시 이 이상한 말로 되돌아왔군. 구도 입문에서 '이웃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기까지는 오랜 과정을 거쳐야만 했네. '이웃 사랑'이란 말은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가장 퇴화하고 가장 왜곡된 개념 가운데 하나라네."

"요즘에는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대개 자선활동을 지칭할 뿐입니다."

"구도 입문자에게 '그대가 모르는 자가 죽도록 빈곤해서 도움을 청해오면 그 청을 거절하지 말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 혹시 '이웃 사랑'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아나?"

"제가 알기로는 라틴어의 '카루스'라는 말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귀한, 값이 비싼, 귀해서 많은 가치가 부여되는'이라는 뜻이지요. 이 라틴어는 원래 그리스어의 아가페에서 파생된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간의 사랑, 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관례적으로 치러지는 회식인 애찬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세계의 애찬을 여전히 아가페라고 하네. 애찬은 구도 입문 과정상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이지. 이 회식에 참여하려면 부당하게 얻은 부에서 해방되어야 하네. 그런 부는 소유자를 구속하기 때문이지. 회식의 '자비', '선행'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하게나."

"회식 때 모인 '형제' 사이를 지배하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들은 구도 과정에서 획득한 내용과 구도 여행길에서 얻은 발전도 서로 주고받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불길을 타인의 내면의 불길에게 선사함으로써 진정한 선물을 하는 것이라네."

"'이웃 사랑'을 통해서, 건축가는 미래 '석공장'의 넉넉한 사람됨을 엿볼 수 있고, 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지. '그대는 일의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 그렇게 행동하면, 그대의 작품은 영적인 차원의 것이 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 그리고 오직 작품을 이룩할 것과 작품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이며, 일에 있어서도 돈벌이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눈꼽 만큼이라도 자신의 잇속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웃 사랑'은 가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하느님의 마음은 정신과 깨달음이 빈곤한 자에게 쏠리기 마련이네. 자신의 빈곤을 너무나도 처절하게 느껴 온 마음으로 '지식'을 간구하는 자에게 말일세."

"'이웃 사랑'은 빛을 향해 돌아섰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이웃 사랑''달인'의 법칙일세. 공동체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야. 태양이 타오르는 빛깔로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석양이 사원과 성당과 수도원의 벽면을 황혼빛으로 물들일 때, 자애로운 신의 존재를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의 고즈넉한 기쁨 속에 신은 발현한다네."

"'믿음''소망''사랑', 세 가지 미덕... 역시 셋이로군요. 구도 여행길 내내 이 3이라는 숫자 속에 들어있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3은 집합된 사람이나 사물이 어떤 일관성 속에서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떤 일에 필요한 자질들의 총체를 말하고자 할 때, 그가 세 가지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물고기의 전체 종류를 나타내고 싶으면, 세 가지 물고기를 그리는 겁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하느님이 날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할 때에도 세 걸음을 걷는다네."

"입문자가 완수해야 하는 것도 세 걸음입니까?"

"깨달음의 맨 처음 외면이 세 방향에서 정의되었네. 오직 세 요소로 짜여진 그 외면을 통해서나마 전체를 이해할 수 있네."

"그리스의 플루타르코스는 천지 창조 시대의 삼각형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삼각형은 오시리스와 이시스와 호루스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시리스는 수직선이고, 이시스는 밑변이며, 호루스는 빗변이었지요."

"하느님은 셋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일세. 볼 줄만 안다면, 3이라는 숫자는 어디에나 있네."

"제 생각에 저 유명한 성부, 성모, 성자 삼위일체는 원래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바람의 신 슈는 생명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습기의 여신이며 슈의 아내인 테프누트는 그 원리를 받아서 자연을 초록으로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신인 오시리스는 자기가 수난을 겪음으로써 인간을 구원했습니다."

"'펠리컨'의 알도 나름대로 중요하지 않습니까?"

"트레브 사원에서처럼 장인들이 모자이크로 제단을 만들어놓은 경우가 있네. 그런데 이 제단에는 연금술의 '3'을 뜻하는 세쌍둥이 알 하나가 놓여 있어, 그것은 사원의 설계를 구상하고, 일꾼들을 지휘하고, 건설에 직접 참여해야 하는 '석공장'의 세 가지 활동을 의미한다네."

"입문자는 조금씩 '3'의 사상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게 되겠군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이 사상을 실천해야 하네. 고대의 현자들은 그들이 경험한 바를 전하는 데 즐겨 3의 형식을 택하곤 했어. 창조와 노동의 원칙을 제시한 노자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소유하지 말고 창조하라.

보유하지 말고 노동하라.

지배하지 말고 생산하라.

"중세에는 이 세상이 세 가지 힘에 의해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구상하는 힘, 둘째는 관조하는 힘, 셋째는 사랑하는 힘이었습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구도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도 분명 그 세가지 힘이라네. 건축가는 동시에 세 가지 입장을 취해야 하지. 사고는 현상을 초월해야 하고, 인격은 끊임없이 생성, 발전해야 하며, 끝으로 작품은 창조의 최종 '산물'이 되어야 하네. 하지만 이제는 자네도 ''의 시련을 거칠 때가 되었군.“

 

 

24단계 불사조-영원불멸의 불

 

피에르 들뢰브르가 내게 말했다.

"'불사조''펠리컨'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네. '불사조' 단계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계이지."

"이집트, 그리스, 중세, 이슬람교,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불사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불사조'에 관한 전설로 어떤 것이 있나?"

"나일강물이 이집트 땅에 범람했을 때, 도가 머리 모양을 한 신기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답니다. 동이 트자, 새는 천지가 창조된 첫날 아침에 그랬듯이 태초의 물 밖으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새가 택한 도시는 '기둥의 도시'였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도시를 '태양의 도시'를 뜻하는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렀습니다. 성서에는 '(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도시지요. 그 도시에서 새는 신성한 나무인 버드나무에 내려앉기도 하고 천지 창조 때 생긴 초석 위에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불사조'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새가 모습을 나타내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은 '불사조가 돌아왔다'고 외쳤습니다. '불사조'가 있으면, 태양 광선도 새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불사조'는 태초의 바다에서 혼자 힘으로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불사조'는 길라잡이 새가 아닌가?"

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늘로 가는 새길을 열어주니까요. (사자의 서)에 보면, 입문자가 길을 터 달라고 별들에게 청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송골매의 형태로 땅속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불사조'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불사조'라는 신비로운 돌은 바로 '사원'의 주춧돌이라네. 자네도 '불사조'가 되면 그 돌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게 될 게야. 건축가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테고, 조잡한 벽돌과 ''의 돌을 더 이상 혼동하지 않을 수 있을 걸세."

"'불사조'는 현자들에게 말을 했답니다. '불사조'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현자들은 사람들의 소생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군요."

"'불사조'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불사조'는 향고 몰약과 기타 희귀한 향으로 제 집을 짓는다네. 시간이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집과 함께 아라비아를 떠나 이집트로 간다네. 정오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눈에 '불사조'가 보이면, '불사조'는 태양의 제단 위에 제 집을 내려놓지. '불사조'는 깃털을 벗고는 깃털에 불을 붙여 제 몸을 제물로 바치네. '불사조'가 불에 타서 소멸해 버리면, 그 재에서 일종의 애벌레가 생겨난다는군. 이 벌레가 조금씩 자라서, 날개가 생기고, 다시 한 마리의 '불사조'가 된다는 거야."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불사조'가 단 한 마리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가 한 얘기도 비슷합니다. 나이를 먹어 늙으면, '불사조'는 계피 나무와 향나무 가지로 둥지를 짓는답니다. '불사조'는 둥지를 향으로 가득 채우고는 그 안에서 죽습니다. 새의 뼈와 골수에서 처음에는 유충이 태어나고 유충은 새끼 새가 됩니다. 새끼 새는 죽은 '불사조'에게 절을 하고, 그리고 나서는 태양의 도시로 둥지를 옮겨, 제단 위에다 둥지를 내려놓는답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런 이상한 현상에 충격을 받았다네. 클레망 드 롬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 그 역시 '불사조'의 썩은 살이 탄생의 배경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있네. 벌레는 썩은 새에게서 영양분을 취하고, 몸에 깃털이 덮이면, 그다음에는 조상의 유골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관을 들어 올린다는군. '불사조'는 동쪽을 향해 날아가서, 한낮에 태양의 제단 위에다 원래 '불사조'의 관을 내려놓는다는 거야."

"작가 락탕스가 전한 위대한 상징시에서 보면, 영원한 하늘의 문이 열리는 신의 축복을 받은 동방의 어느 곳에서, 해마다 열두 번씩 인근 수풀 전체에 물을 대주는 풍성한 샘물이 흐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는 풍성한 샘물이 흐른다고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불사조'가 살고 있답니다. '불사조'는 수풀의 사제이며, 유일한 태양 신비 입문자이고, 죽음을 거쳐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랍니다. '불사조'는 한 시간마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노래로 시간을 알려줍니다. 천 살이 되면, '불사조'는 그 신성한 곳을 버리고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사막을 통해서 아무나 모르는 숲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키 큰 종려나무 한 그루를 택한답니다. '불사조'는 둥지를 짓습니다. 죽어서 제 스스로를 창조하는 것은 결국 살기 위해서이니까요. '불사조'는 깃털들을 그러모은 다음에 제 무덤 속에 드러눕습니다. 새의 몸속에서 퍼지는 열기에서 불꽃이 생겨나고, 그 불꽃은 새를 불태웁니다.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는 벌레가 솟아 나오고, 그 불꽃은 새를 불태웁니다.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는 벌레가 솟아 나오고, 벌레는 매끈한 알의 형태로 응축됩니다. 새롭게 태어난 '불사조'는 향기로운 이슬을 마시고, 타다 남은 부분으로 몸을 재구성합니다. '불사조'는 제 자신의 아들이고 아버지이며 계승자가 되는 셈입니다. 제 자신 이외의 존재이기도 한 셈이지요. '불사조'가 둥지를 지었던 신성한 제단은 아마 태양의 영혼이 안식을 취하는 오벨리스크였겠지요. 이런 성전은 대대손손 전해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나무 십자가에 나타난 '불사조'를 보게 되거든요."

"종려나무 얘기도 있네. 그리스어로 '불사조''종려나무'는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우리의 에세네파 건축가 '형제'들은 '종려나무 사회'에서 살았는데, 그 속뜻이 바로 '불사조 공동체'였네. 우리의 구도 입문계에서 보면, 이 공동체가 바로 지금 자네처럼 '불사조' 단계에 들어선 건축가들의 공동체라네."

"'불사조'는 새로운 황금시대를 예고하는 새가 아닙니까?"

"한 해가 저물면서 곧이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 모든 것은 새로워지고 황금시대가 시작되네. '불사조'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생명이 길어. 언제까지나 새로 태어나기 때문에 수명이 무한하지. 나는 황금시대란 다름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불사조'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아벨의 제물을 불태울 때 그 불은 '불사조'도 함께 태웠고, '불사조'는 사흘 뒤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 '불사조'는 헬리오폴리스 신전 위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탄생했을 때에는 예루살렘 신전 위에서 스스로를 불태웠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들은 아니지만 중요한 사건들이지. '불사조'는 불을 지켜본 새야. 인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따라서 우리들 하나하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정신적 사건들을 지켜본 새란 말일세."

"'불사조'는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습니까?"

"육체적인 소멸만 생각하는 한, 인간은 사원 바깥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네. '불사조'가 되어야만 사원 안으로 들어가서 부활의식에 참여할 수 있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사조'의 비밀이겠지?"

"'불사조'는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죽는 법도 없네. 세상 사람 누구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네."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나 그런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겠군요?"

"불꽃이 에워싸고 있어도 '불사조'를 만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 불의 시련을 거칠 때, 새 입문자에게 건축가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간 모두가 잠재적으로 그의 안에 들어 있다느 것을 알려준다네. 만일 자네가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자네의 '자아'를 버린다면, 인간의 모든 일들을 알 수 있게 될 걸세."

"새로 태어난 '불사조'와 그 '아비'는 하나의 존재 아닙니까?"

"어떤 구도 의식서에는 선생 '불사조'가 가장 먼저 돌보는 일은 아비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라고 명시되어 있네. 신생 '불사조'는 아비의 시신을 짊어지고서 그것을 빛에게 바친다네. 건축가 공동체와 신입 달인 간의 정기전달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이지. 신입 달인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불사조'와 동일시되니까 말일세. 공동체는 신입 달인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네. '그대의 늙음은 멸하나, 그대는 남는다. 그대의 눈은 과거의 모든 모습을 보았다. 그대의 시선은 모든 시대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불사조'가 탄생하는 방식도 정말 놀랍습니다! 어미의 뱃속에 수태된 태아처럼 생산되는 게 아닙니다. '불사조'는 제 아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제 아들이기도 합니다. 타자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다시 살아납니다."

"'불사조'에게는 비밀스러운 특질이 하나 있네. 바로 암수한몸이라는 점이지. 하지만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암수한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불사조'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아비도 아니고 어미도 아니라네. 천지 만물의 '아버지'이면서 '어머니'라는 의미이지."

"창세기에서 보면, 하느님은 먼저 남성이면서 여성인 인간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에 인간을 '남자''여자' 즉 아담과 이브로 분열시키지 않았습니까?"

"물론이지. 헤르메스 트리스메게스투스가 말하는 바도 그와 다르지 않네. 그는 참된 지성은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그리고 또, '불사조'는 시간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사조'는 존재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영원성과 영속성까지 지배합니다. 낯은 영원하고 밤은 영속합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두 가지 형태의 영원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성이며 낮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며 밤이었지요. 이 두 가지가 '불사조'로 합쳐졌습니다."

"생명의 나무와 불가분의 관계인 '불사조'야말로 어둠을 밝히는 빛의 영혼일세. 그래서 그것을 깨닫는 인간을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빛을 발한다네. 그의 눈은 신비로운 섬광으로 빛나게 되지. 환하게 타오르는 광채가 그의 머리 부분을 둘러싸고, 그 밝은 빛은 어둠을 가른다네."

"때로는 말 자체가 지혜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어인 'phonix''자줏빛' 황금빛이 도는 '붉은빛' '강렬한 빛'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불사조'를 상징하는 빛깔에 딱 들어맞는 뜻이지요."

"그렇지. 아침마다 '불사조'는 태양이 지나치게 뜨거운 광선으로 우리의 대지를 불태워버리지 못하도록 태양의 운행 길을 따라 다닌다네. '불사조'는 태양의 열기를 완화시켜 주고, 각 지역의 필요에 맞게 열기를 고루 분배해 주지."

"'불사조'가 변신할 수 있는 것도 불 덕분이 아닙니까?"

"''이야말로 '불사조'의 진정한 어버이라네. 어느 계시록에서 보면, 한 천사가 예언자 바룩에게 '불사조'의 오른쪽 날개에 새겨진 커다란 황금 철자들을 읽어보라고 했지.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씌어 있었어. '땅도 하늘도 나를 낳지 못하노니, 나를 낳는 것은 불의 날개들'"

"하늘과 땅보다도 더한 힘을 지닌 그 신비로운 불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미셜 마이어라는 한 연금술사 '형제''불사조'와 불사조의 ''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 바 있네. 그가 '불사조'의 비밀을 노래한 것이 있는데, 내 자네에게 전해주지. '불사조는 불에서 새 생명을 얻으니, 불사조에게 요람이면서 화장대인 불의 성질과 특질을 노래하리. 내 노래에 정성껏 귀를 기울이시고, 조용히 해주오. 이 불은 에트나 화산의 깊고 깊은 불구덩이 속에 갇혀 있는 불도 아니요. 베수비오 화산의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키워내는 불도 아니며, 헤클라산이 토해내는 불꽃이 키워내는 불도 아니며, 헤클라산이 토해내는 불도 아니라오... 이 불의 원리는 전혀 다르다오. 이 불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 꽃과 계피와 사프란과 여러 방향성 풀만이 자라나는 산에서 유래합니다. 이 불은 넓고 넓은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모든 빛의 원천이라오. 모든 존재에게 온기와 생명을 주는 것도 바로 이 불입니다. 그 뜨거운 불꽃은 빛을 발하나, 결단코 태워버리진 않습니다. 이 불은 화장용 장작불을 만드는 데 쓰이니, 장작불을 손수 마련한 우리의 새는 화장대로 제 종말과 죽음을 맞이하러 갑니다. , 이 신성한 불은 조심스럽게도 숨겨져 있어라! , 이 신성한 불은 조심스럽게도 숨겨져 있어라! , 현자들은 이 경이로운 불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구나! 이 불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 학문의 풍요로운 원천을 퍼내고자 하는 그대여, 이 신성한 불이 부디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시오.'"

"물질적이고 겉으로 드러난 불과 정신적이고 안으로 숨겨진 불을 혼동하지 말아야겠군요, 작품을 이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정신적이고 숨겨진 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불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그 불은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는 방시고 느낄 수 있게 되네."

"왜 그리스도가, 묵은 찌꺼기들을 정화시키고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건축가들의 수호자인 도마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고, 불이 탈 때까지 그 불을 간직한다. 내 곁에 있는 자는 곧 불 곁에 있는 자이다.' 구도 공동체는 곧 하느님의 나라이니, 시련은 우리를 그리로 인도한다네."

"숨은 ''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고 식물을 자라나게 하며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그 ''입니까?"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신의 증인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입문자들은 '순교자'이고 증인인 셈이로군요?"

"그렇지. 순교자라는 말에 증인이라는 애초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말이 맞네. 순교자들의 불꽃은 그들을 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젊어지게 해.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는 사라리라네."

"'석공장'은 그 ''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하느님이 우주라는 성당을 지으실 때 쓰신 시공도를 재현시키지. '''자질들'을 만들어낸다네.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빛을 발하는 ''이 우리의 고유한 성격들을 결정짓는다는 말일세."

"''이 우리의 내면세계를 형성하는군요? 논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늘 지대에 그 ''이 빛을 던지는군요?"

"분출되는 빛을 통해 '불사조'''은 우리의 정신을 통일로 이끈다네. ''의 뱃속에서, 정신과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통일된 입문자들이 나오는 거네. 건축가들은 입문의식 동안 이런 말을 하지. '불이 되기 위해서는 저항과 고통과 동요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이 된다는 것은 시간의 한정을 완전히 벗어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기쁨이다.'"

"디종의 수도원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원주 모양으로 된 성서대의 꼭대기 부분이 '불사조'로 장식되어 있더군요. '불사조'가 네 복음자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셈이지요!"

"'불사조'야말로 다섯 번째 원소야. 라블레와 연금술사들이 말한 바대로 그 유명한 제5원소란 말일세. '불사조'가 된 건축가에게 석공장은 그의 변신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준다네. '형체도 없는 신성한 불길이 빛을 발하며 온 세상의 구렁텅이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거든, 그 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자네는 '' 속을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나?"

"선생님께 의지하겠습니다. 저는 모험에 나설 각오가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도 변신 과정의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해.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자네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걸세. '똑같은' 사람이면서, 만물을 합치시키고 만물의 심오한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허나 자네가 만일 '독수리'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변신도 다 쓸모가 없네.“

 

 

25단계 독수리-하늘의 제왕

 

피에를 들뢰브르가 말했다.

"''을 통한 소생과정을 거쳤으니, 이 구도 여행길도 끄트머리에 도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 허나 아직도 거쳐야 할 어려운 단계들이 남아있어. 독수리가 스승인 이 단계는 특히나 까다롭다네. '펠리컨''불사조''독수리' 등 세 상징조는 '독수리'로 완결되네. 빛의 삼각형에서 본다면, '펠리컨''불사조'가 아래 두 끝점을 차지하고 '독수리'가 정점을 차지하지."

"어떻게 해야 '독수리'에 도달하게 됩니까?"

"'독수리' 단계는 구도 입문의식에서 의식을 주관하는 '달인'이 입문자에게 빛을 노출시켜 보여주는 순간에 해당한다네. '독수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려면, 이제 온 힘을 모으고 자신의 삶과 정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네."

"호루스가 하나만 존재하는가?"

"아닙니다. 셋이 있습니다. 천지가 창조될 때 탄생한 태초의 위대한 송골매 호루스, '파라오'가 상징하는 왕 호루스, 그리고 이시스와 오시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어린 호루스가 있습니다. 이 어린 호루스를 그리스인들은 하르포크라테스라고 불렀습니다."

"태초의 위대한 송골매 호루스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송골매는 날개로 온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날개의 크기가 수천 쿠테나 되었답니다. 이집트인들은 송골매가 현자이고 수호자이며 아버지이고 형제라고 했습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 그 송골매였고, 신들도 송골매를 섬겼답니다. 송골매는 눈으로 수많은 것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그 태초의 호루스가 '파라오'로 구현되었군?"

"호루스가 하늘에서 하던 활동을 '파라오'는 지상에서 계속해야 합니다. '파라오'가 신전을 건설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럼 그 세 번째, 어린 호루스가 하는 일은 무엇이지?"

"프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호루스는 끊임없는 생명의 재생, 영원토록 젊어지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어린 호루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기적입니다. 죽은 오시리스에게서 태어났거든요.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의 흩어진 시신들을 그러모아 새의 형체를 만들어, 비록 소생하지는 못했지만 몸은 다시 하나로 통합된 오시리스를 통해 수태했지요."

피에르 들뢰브르가 물었다.

"세 번째 호루스는 전사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어린 호루스가 가장 먼저 수행해야 했던 임무는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야만적인 생명력인 세트를 무찌르는 일이었으니까요. 배반자 세트는 어린 호루스를 중상모략하여 '판관 신'들 앞에서 깎아내리려고 했습니다. 어린 호루스가 사생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요! 그러나 어린 호루스는 토트 신의 도움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판관 전원의 찬동을 얻어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어린 호루스는 바로 자연이라고 합니다. 세트가 그를 사생아라고 비난한 것은 아버지인 오시리스가 정신적인 신이었던 반면에 자연인 어린 호루스는 물질세계에 속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토트로 상징되는 지성이 이 이론의 오류를 증명합니다. 사실, 자연은 신의 세계를 재현하고 우리에게 그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거든요."

"그러니까 어린 호루스는 건축가 공동체에서 거듭나는 구도 입문자와 비슷한 존재로군. 파라오와 '석공장'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이 땅을 조화롭게 유지해 주는 위대한 송골매의 존재도 몰랐을 테지. 빛을 경험할 수도 없었을 테고."

내가 말했다.

"중세의 '독수리'처럼, 고대 이집트의 ''도 제3의 눈을 가진 덕분에 '태양'을 정면으로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3의 눈이란 파라오의 이마에서 나오는 불의 뱀으로서, 파라오의 시야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불태워버렸거든요."

"'원탁의 기사'시리즈에 나오는 '성배' 이야기의 기사 갤러하트가 바로 왕 호루스에 해당되는 인물이라네. 갤러하드는 왕인 아서, 마법사인 멀린, 그리고 형제 기사들의 특질들을 자기 몸 속에 모았기 때문에 '성배'를 발견해낼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자네, 하늘의 송골매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아나?"

"하늘의 송골매는 빛이 강렬한 동방의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자의 서)에서 보면, 입문자는 송골매를 만나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진리를 먹고 삽니다. 진리에 의해 존재하는 자입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는 호루스이며, 사람들의 몸 속에서 사는 내면의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신적인 부분인 호루스는 '태양'과 함께 끊임없이 형상을 한, 제신들의 빛이지."

"더욱이, 왕의 머리 위에 눈부신 왕관을 씌어줌으로써 왕을 신성하게 해주는 것도 송골매입니다."

"이 얘기는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왔네. 다만 그 형식만이 약간씩 달라졌지. 이집트인들이 말하는 송골매는 그 모습 그대로 성당 건축가들의 세계를 지나온 게 아니네. 조금씩 조금씩, 독수리로 변신을 했네. 제제바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안티노에의 콥트식 기둥머리가 생각나는군. 그 기둥머리에는 두 마리 숫양 사이에 한 마리의 '송골매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어. 내 생각에는 호루스가 '독수리'의 모습으로 계속 살고 있는 것 같네."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델포이에 수직으로 정지해 있던 그 '독수리'를 말씀하시는군요."

"'독수리'는 하늘의 불을 지배하는 새였지 않은가?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독수리''올림푸스'의 지배 신인 제우스에게 먹이기 위해 날마다 바위 위에 감로를 내려주었다고 하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네. 건축가들을 먹여살리는 것은 여전히 '독수리'의 의무야."

"'독수리'는 메신저이기도 하지요? 다를 잘 아는 신데렐라 이야기도 원래 고대 신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체 높은 숙녀 로도피스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송골매 독수리'가 그녀의 신발 한 짝을 훔쳐 갔답니다. 새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로 신발을 물고 가서, 재판을 주관하는 왕 앞에다 떨어뜨렸죠. 왕은 신발의 주인을 찾도록 했고, 로도피스의 미모에 매혹된 왕은 그녀와 결혼했답니다."

"'독수리'가 왕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갖다 주어, 능동성의 원칙과 수용성의 원칙이 하나로 합쳐지는 신성한 결혼을 성사시켰군."

"켈트족은 '독수리'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짐승이라고 했죠."

"수다스런 티티새 한 마리가 두 나그네에게 그 비밀을 누설해 버렸다네. 나그네들이 마침내 '독수리'를 만났을 때, '독수리'는 하는 수 없이 자기가 바위 꼭대기에서 살며, 그곳에서 매일 저녁 부리로 별들을 쫀다고 털어놓았다는군."

"'독수리'야말로 이 우주와 직접 접촉한 최초의 새가 아니었습니까?"

"'독수리'는 천지 창조 때의 에너지를 갖고 있네. 그래서 '독수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독수리'를 두려워하지. '독수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그들은 '독수리'에게서 벗어날 가망이라곤 전혀 없는 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네."

"'독수리'가 그렇게 잔인합니까?"

"어떤 기독교 전통에서는 '독수리'를 영혼를 앗아가는 악마로 취급한다네. 추악한 새로 취급하지. '독수리'가 무서운 맹금이라서 무자비한 폭군 같다는 거야."

"선생님께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깨달음의 단계, 구도의 상태를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암흑 속에 안주해 깨달음을 거부하는 구태의연하고 타성적인 태도 때문이지."

"기독교 내부에 더 여러 가지 다른 사상 조류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내부에도 구도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진술들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잖습니까"

"그렇네. 암브로시우스같은 기독교도는 '독수리'를 지식의 하늘로 올라가는 순수한 영혼들의 왕이라고 청했네. 심지어 '독수리'를 물질 편향성을 멀리하도록 해주는 구도주로까지 취급했어. 수면에 보일 듯 말 듯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 '독수리'는 덤벼들어서 물고기를 잡아 올린다네. 이야말로 '구세주 독수리'이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의 '지옥 하강' 이야기에서 보면, 그리스도 덕분에 해방된 나사로도 '독수리'로 변신합니다!"

"맞아. 날쌘 '독수리'가 된 덕분에 나사로는 사탄들에게서 벗어났고, 나사로를 놓친 사탄들은 몸을 떨었지. '나사로 독수리'는 빛을 본 인간을 의미하네. 보통 때에는 진리의 말을 뒤집어엎는 어둠의 왕도 더 이상 나사로를 털끌만치도 해칠 수 없었네."

"고대 이집트의 사자는 무덤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가기 위해 송골매가 된다고 했습니다."

"낙원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것도 '독수리'의 중요한 역할이지. '독수리'는 날개를 향기로 가득 채우고는 그 향기를 입문자들에게 전해준다네."

"향기를 선사한다는 것은 만물의 미묘한 면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고, 물질이 아닌, 만져서 느낄 수 없는 것을 선사하는 것이며, 우리의 내면에서 그것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겠죠."

"달리 말하자면 그것을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성서대, 그러니까 찬송가 책을 얹어놓는 높은 받침대는 흔히 날개를 펼친 독수리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네. '독수리처럼 노래 부르다'라는 말도 여기서 생겨난 거야.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뜻이지. 중요한 의식 때면 사제들은 독수리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기들을 창조해 준 '원리'에 경의를 표했다네."

"그렇게 해서 공동체 전체가 '독수리'의 은총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런데 '독수리'는 왕들의 영혼을 땅에서 하늘로 인도해 주었을뿐더러, 불도 날라다 주지 않았습니까?"

"여러 가지 탈선한 교리가 생겨나기 이전의 원시 기독교 사회에서는 막 세례를 받고 교리를 습득해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을 '수리'라고 불렀다네. '수리'는 빛으로 된 몸을 입고서 하늘의 공동체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거지."

"'자기가 독수리인 줄로 착각하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말이 완전히 틀린 표현은 아니군요!"

"사람이 자기를 독수리로 착각하면 높은 하늘에서 추락하게 될 테고 그러면 죽게 될 테니, 사실 그 말은 그런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인 셈이지. 구도를 하는 '형제'들만이 자네게 아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정해 줄 것이네. 이건 자네를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정진하라는 뜻에서 하는 말일세."

"'독수리'는 왕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고독하지는 않습니까?"

피에르 들뢰브르가 인정했다.

"구도의 이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은 '원리' 앞에서 어느 정도의 고독감을 겪게 되는 것이 사실일세. 하지만 더 이상 구실이나 변명을 찾으려 하지는 않네. 오직 혼자서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 경우에 고독이란 말이 적합한가요?"

"아니, 단일성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걸세. 건축가의 단일성과 심리적인 고립을 혼동하지 말게. 입문자는 외로다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 정신을 고양시켜 줄 수 없으니. 입문자는 혼자라고 해야겠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제각기 자신의 성격을 특징짓는 불멸의 황금수를 나름대로 하나씩 갖고 있다네."

"'황금수'를 실현하면 저도 '독수리'처럼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저 조각상을 보게. 조각가는 태양광선 쪽을 바라보고 있는 위풍당당한 '독수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 '독수리'는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높이 나는 짐승이고, 감히 태양을 직시할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야."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독수리' 덕분이 아니었습니까?"

"요한이 이런 말을 했네. '독수리를 보라. 본성에 따라 지상으로 내려오기도 하지만, 독수리는 그 어떤 새보다도 더 높이 날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본다. 사람의 정신도 그와 같다. 잠시 명상에 태만하다가도, 더더욱 열심히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그런 노력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수리' 상태가 결정적인 단계는 아니군요?"

"'독수리''태양' 앞에서 물러서서는 안 되네. '독수리'에게 직관을 요구하게. 사물을 꿰뚫을 수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고, 창조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능력을 요구하라는 말일세. '독수리'는 만물을 정확히 꿰뚫는다네. 빛을 향해 순례를 떠나도록 신도들을 고무하는 것도 바로 '독수리'라네."

"파라오의 목덜미에 내려앉아 기운을 불어넣어 주던 것도 독수리였다는 것이 생각나는군요."

"'독수리'는 거룩한 신의 계시를 알려주네. '독수리'는 피타고라스에게 우주의 비밀을 말해주었고, 요한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복음서를 받아쓰게 했어."

"저도 '독수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자네도 '독수리'처럼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 '독수리'는 늙으면 날개가 무거워지고 시야갸 어두워진다네. 그때가 되면 '독수리'는 바람 속을 떠돌면서 샘물과 강을 찾아다니지. 그럼 오래지 않아 태양의 열기에 날개가 따뜻해지고 눈도 밝아진다네. 샘물 근처에 내려온 독수리는 샘에서 세 번 목욕을 하지. 그러면 점점 젊어져서 그러기 위해선 자네가 지금껏 체험한 깨달음을 내면에 지니고 있어야 하네. 만일 시야가 어두워지거든, '독수리'의 샘을 찾아보게나."

"생명의 샘을 찾기에 앞서, '독수리'는 불에 의해서도 젊어지지 않습니까?"

"늙은 '독수리'가 태양 가까이로 가게 되면, 깃털이 불에 탄다네. 불은 '독수리'의 지나치게 두텁고 무거운 깃털을 돌려주지. 그리고 나면 '독수리'는 샘물로 뛰어들고, 그 즉시 다시 젊음과 활력이 넘치게 된다네. 늙어가면서 부리가 뭉툭해져 먹잇감이나 겨우 물 수 있을 따름이었는데, 이제는 부리를 돌과 바위에 대고 갈아서 다시금 힘을 갖게 되는 거지."

"그 돌과 바위가 바로 건축가들이 건축물을 짓기 위해 원자재를 구하러 가는 채석장이 아닙니까?"

"건축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에 참여하면, 자네도 조금씩 '독수리'의 시선을 느낄 수 있게 될 걸세."

"'독수리'의 눈은 또한 호루스의 눈이 아닙니까? 송골매의 눈에서, 우리는 수와 무게와 크기 따위를 알아냈습니다."

"맞네. 이 세상은 그 '제왕새'의 눈에서 비롯되고, 다시 그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니까"

"구도의 삶은 어떤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시각의 변화라는 말씀인가요?"

"자네, 독수리석이 뭔지 아는가?"

"수산화철의 변형으로 소위 취석이라고 하는, 고대 박물학자들이 말한 그 돌 말씀입니까? 그들의 말에 따르면, '독수리'는 그 돌로 둥지를 짓는다지요."

"참 이상한 돌이라네. 임신한 배 같은 모양을 한 돌이야. 흔들어보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돌이 울리는 소리가 들란다네. 마치 광물질로 된 자궁처럼 말일세. 하지만 그돌은 '독수리' 둥지 안에서 집어 들 때만 그런 소리를 낸다네."

"'독수리' 둥지는 그 자체가 사원 아닙니까?"

"그리스도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했네. '동방의 건축가여, 너의 믿음은 온 누리의 상공을 선회하는 빛의 독수리가 될 것이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독수리''석공장'을 상징하는 새가 아닌가."

"'독수리'는 초심자들에게는 무자비하지 않습니까? 전하는 말에 따르면, 새끼들을 태양 광선에다 노출시켜서 '독수리'의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다고 하던데요. 새끼들이 하늘의 불을 견뎌내지 못하면, '독수리'는 가차 없이 새끼들을 허공에서 떨어뜨려 버린답니다."

"'석공장'에게는 건축가들을 시험하고 쉼 없이 그들의 자질을 확인할 의무가 있네. 성당 건축에 참여할 자격에 미달한다고 판단되면, 석공장은 그들을 가차 없이 세속 생활로 되돌려보낸다네. 평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보면 이런 태도가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 그 평등주의가 아무리 위선적이고 거짓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일세. 그냥 하는말이 아니야. '독수리' 옆에, 첫 번째 '사자'가 있네.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의 시선을 통해, 자네가 모쪼록 저 야수의 시선에 당당히 맞설 수 있기를 바라네.“

 

 

26단계 첫 번째 사자-지상의 제왕

 

"'사자'의 어떤 점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중세의 그림 중에, '사자' 위에 올라타 한 손에 '독수리'를 쥐고 있는 왕 그림이 있네. 모랄리스트들은 그것이 오만을 풍자적으로 비유한 그림이라고 했지. 흔히 허영과 혼동되는 그 오만 말일세."

"두려워해야 할 것이 그것인가요? 하지만 허영심은 '마른 나무' 단계 이전의 여러 시련에서 이미 극복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허영은 성격이 달라. 여기서의 허영은 건축가로 하여금 구도 과정에서 발견한 보물을 가지 개인의 용도로 쓰도록 유혹하는 허영을 말한다네. 그렇게 되면 건축가는 과오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과오를 저지르는 거야. 무지한 자의 드러난 실수는 대수롭지 않지만, 현자의 허영은 치명적이기 때문일세. 모름지기 사람은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책임은 더더욱 늘어나고, 자만할 권리는 점점 줄어드는 법이네."

"저 못된 사자는 이미 얻어놓은 것에 만족하고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군요. 독수리의 명석함을 상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입문자는 지식을 거머쥐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네."

"'사자'는 제게 어떤 힘을 가져다주게 됩니까?"

"'사자'는 우리와는 너무 멀리, 구름 속에 남아있는 '독수리'의 빛에 무게와 밀도를 부여해 준다네. 이른바 오만이라고 불리는 고결한 힘의 비밀을 제시해 주지."

"또 다른 위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말이란 무서운 힘을 가지지. 교회는 우리가 신성에 대해 믿음을 갖게 하지 않고, 그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놓았네. 인간의 비전에 대한 호기심을 용납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강요했지."

"하지만 교회 내부에도, 포기와 다를 바 없는 무조건적인 순종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리게네스와 같은 신학자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오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현자는 자신의 지혜에 오만하지 말아야 하고, 강자는 자신의 힘에 오만하지 말아야 하며, 부자는 자신의 부에 오만하지 말아야 한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는 오만을 가져야 합니다."

"올바른 자세는 겸허하게 사원 건축가로서의 긍지를 느끼는 것이겠지. 허영심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오만함을 가질 때, 기쁨이 솟구치니 말일세."

"구도 공동체에 대해 교회가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고결한 오만함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서양의 교회가 신성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일에 있어서 더 이상 구도에 입문한 건축가들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 뒤로, 교회는 점점 상징들의 실체를 상실하고 말았네."

"그렇지만 '석공장'이 때로는 자화자찬을 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생드니 대성당의 이곳저곳에다 자신의 모습을 묘사해 놓은 쉬제르 신부만 해도 그렇습니다."

"다른 '석공장 형제'들도 마찬가지지만, 쉬제르도 직접 자기 자신을 묘사해 놓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네. 그가 그것을 통해 찬양한 것은 '석공장'으로서의 기능과 자질이었지, 그 기능을 수행한 개인이 아니었어. 사원은 '석공장''자아'를 흡수해 버리는 법이야, 따라서 건물이 완성되어 갈수록 '석공장'의 자아도 커간다네."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도 바로 그런 결과에 도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첫 번째 '사자'가 구성원 하나하나에게 요구하는 바도 바로 그것일세. 자네의 인격을 공동체가 건설한 사원의 차원으로 넓히고 싶은가? 공동체는 다름 아닌, 돌 안에 재구성된 '석공장'의 몸일 뿐이야. 저기 저 '사자'는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왕권을, 즉 지상의 지혜를 상기시키네. 그것을 통해서, 건축가는 '독수리'의 신성한 왕권을 즉 하늘의 지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어. 저 야수는 '독수리'를 보완하고, 파악이 불가능한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네. 그런데 자네는 선배에게서 받은 것을 후배에게 전달해줄 수 있겠는가?"

 

 

27단계부터 제30단계까지 항아리를 든 네 사람

 

내 눈앞에는 각기 다른 자세로 항아리를 든 네 인물의 형상이 펼쳐져 있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만일 사람이 안에 들어있는 부를 밖으로 파급시키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핵심에 도달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저 조각상들은 우리가 심각한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도와줄 걸세. 첫 번째 인물을 보게나."

"자세가 해이해져 있군요.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오른팔에다 몸을 기대고서 허공을 보고 있습니다. 관심 없이 왼쪽 어깨에 얹고 있는 항아리에서는 물이 쏟아지고, 그 물은 아무렇게나 마구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저것이 '방심한 전달'의 이미지일세. 저 남자는 자기가 발견한 보석 같은 생각들을 획득한 것에 만족할 뿐, 그것을 남들과 공유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 저 태평스러운 태도를 보면, 저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것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 상징 앞을 지나가면서도 상징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일세."

"깨달음과 호기심을 혼동한 것이 아닐까요?"

"저 사람은 신성한 항아리에 들어 있는 귀중한 내용물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걸세. 그래서 신성한 액체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고, 그 부주의로 인해 액체는 아무 데로나 함부로 흐르고 있어."

"저 사람이 자기 동료들과 대화할 때 하는 말은 창조주의 '말씀'과는 매우 거리가 먼 객설일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은 조리에 닿게 생각할 줄 모르고, 대부분 쓸데없는 말이나 마구 떠벌이겠지요."

"교훈담에 무신경했던 시종처럼, 저 사람도 자기가 얻어낸 황금에서 소중한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어.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낭비하고 있다는 거야. 상징이 마치 스며들지 못할 표면에 떨어진 것처럼,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미끄러져 버리고 있네.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이 있는 사람인데도, 그의 몸 안으로 뚫고 들어가질 못하고 있어. 저 섣부른 '물 운반자'는 신성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네. 전달되지 못한 이상은 말라 죽어서, 방심한 자를 죽음으로 잡아끌게 되지. 두 번째 인물은 어때 보이나?"

"두 번째 인물은 오른손에 버팀점, 기준점의 구실을 하고 있군요. 그러나 항아리의 밑 부분만 붙잡고 있을 뿐, 항아리 자체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역시 물이 함부로 쏟아지게 놓아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보다는 덜 방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자기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막연하게나마 뭔가 중요한 것임을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저것은 '문자 그대로의 전달'이라네. 상징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달자는 그 외적인 형태에만 만족하고 있어. 시선을 멍하니 아득히 먼 곳에다 두고 있다는 것은 주의가 부족함을 나타내주네. 자신이 경험한 것을 전달할 때, 저 사람은 기존에 만들어진 틀에 박힌 말을 사용할 뿐이네.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복할 따름이네."

"왜 문자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일까요?"

"고정된 가치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가치체계, 즉 고유한 기호체계에서 벗어날 줄을 몰라서 그래. 지적 원리를 전달하려면 새들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때, 그때 상대의 수용 능력에 따라 알맞은 때에 알맞은 말을 골라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저 사람도 어느 정도는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나요? 상징과 의식의 가치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에게는 그것들의 '원인'을 파악할 능력이 없어. 오로지 형식에만 집착하고, 외관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참지 못하는 거지."

"그런 자세가 항상 쓸모없는 것은 아닐 텐데요. 내용이 이해되지 못한 수많은 성전도 그런 식으로 우리 시대에까지 전해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당장 이해하지는 못해도 언젠가 되살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가치들을 보관해 온 거죠."

"자네 말이 맞네. 그러나 물질적인 외형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거나,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는 그런 태도는 긍정적이지 못하네. 문자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분파주의자가 되기 마련이고,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왜곡시키게 되네. 세 번째 인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현학적이고 위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아리에 대해서는 좀 더 확고한 통제력을 보여주고 있군요. 항아리의 목 부분에 손을 얹고 있기 때문에 유출되는 내용물이 좀 더 잘 조절되지만,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시선이 머물러 있지를 않군요. 너무 자기 자신에게 신경이 쏠려 있는 것 같습니다."

"저것은 '겸손하지 못한 전달'일세. 저 인물이 생각하기에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위대한 진실이지. 자기 생각에 절대로 의문을 품어보는 법이 없어. 남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사람일세. 자신을 유일무이하고 타인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하느님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선택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어."

"아느 정도의 지혜에는 도달한 사람 아닙니까?"

"저 사람은 노력을 통해 엘리트로 입증되었고, 자기 스스로도 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고 있어. 그래서 자기가 소유한 항아리를 과시하면서, 아무도 자기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거라네. 그러나 불행하기도 그 내용물을 소홀히 다루고 있네. 저 사람은 얼마 안 가서 허영에 빠지게 될 걸세. , 이제 네 번째 인물의 차례가 되었군."

"저 사람은 주의 깊기도 하고, 맡은 바 임무에 완전히 몰입해 있군요. 항아리 밑 부분을 꼭 붙들고 있어서 내용물의 유량도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얼굴에는 완전한 평온감이 드러나 있군요."

"저 사람은 '지적 원리의 전달'을 상징한다네. 형식도 문자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 두 가지 모두의 핵심에 도달해 있어. 생각을 전달하기 좋은 때를 잘 택했고, '형제'들의 수용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수용성도 참작하지. 그렇기 때문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서 상징의 진수를 전달할 수 있다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각자에게 알맞은 언어로 말을 하지. 그들에게 충격을 준다거나, 자기 개인의 개념을 강요한다거나, 중요한 사상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애쓰면서 말일세. 매우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굴종은 아니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네. 살아있는 지상의 사람들이여,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여, 이리로 오시오. 내가 그대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겠소. 그대들은 사고 없이 상서로운 바람을 맞으며 항해할 것이고, 그대들이 대대손손 살게 도리 도시의 항구에 닿게 될 것이오. 만일 그대들이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그대들은 그 유용성을 느끼게 될 것이오."

"고대인들은 깨달음을 전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학문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수사학 말씀입니다. 요즘에는 수사학의 본뜻이 턱없이 왜곡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원래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만물에 대해 이해한 바를 올바로 전달하는 것을 뜻한다네. 입문한 건축가들도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임무를 이해해왔던 것일세. 특별히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들은 물론 걸작을 빚어낼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자질을 가진 조각가이면 비록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메시지의 본질이 함유되어 있는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써 맡은 바 의무를 수행했다네. 우리의 취향은 중요한 게 아니지."

"작품 양식이 깨달음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면, 하나의 문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피라미드, 룩소르, 북경의 자금성, 샤르트르... 등등이 창조된 것도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건축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시대 저편에서부터 전수되어 온 지식을 다시금 체험할 수 있을까요?"

"최초의 '석공장'은 삼라만상을 보았다네. 보았기 때문에 이해했지. 이해했기 때문에 노출시키고 보여줄 수 있었어. 그는 체험한 일들을 새겨 놓았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네. 그래서 새겨 놓은 것들을 감추어놓았어. 새로 생겨나는 온 세상의 건축가들이 대대손손 그것들을 가슴속에서 되찾을 수 있도록, 침묵을 지키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지적 원리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 저 사람을 잘 살펴보게. 저 사람에게는 상투적인 비밀이라든가 '속임수' 따위가 없어. 본원적인 비밀의 의미를, 찬란한 지식의 미소를 제공해 주고 있네. , 자네는 여행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저 위압적인 '사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네."

 

 

31단계 날개 달린 사자-불꽃 속의 왕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이 '사자'를 죽이려 했네. 그런데 다친 야수의 상처에, 벌들이 몰려와서 꿀을 만들었다네. '사자'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왕의 의식을 어둡게 하고 왕을 해치는 것을 뜻하지. 그러나 버링 개입해서, 다친 짐승의 몸에다 불멸의 실체를 재현시켰네."

"깨달음은 절대로 손상을 입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문명에서라도, 깨달음을 갈망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서 신들의 황금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마음의 양식을 얻게 마련이라네."

"양피지, 두루마리를 든 저 날개 달린 '사자'는 우리를 지식으로 인도하는 욕망의 불길이며 힘이겠군요?"

"저 불을 통해 자네는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네. 허나 만일 자네가 자신을 신의 불로 생각하는 허영심을 보인다면, 노한 '사자'가 나타나서 발톱으로 자네에게 상처를 입힐 걸세."

"'사자'를 어떻게 길들이지요?"

"사자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신과 인간을 하나의 빛 속에서 조화시켜야 하네. '사자'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자네는 '사자'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걸세."

"저 야수를 보니, 고대 신전에서 본 불꽃 같은 눈과 불길 같은 얼굴을 한 사자상이 생각나는 군요. 그 이무기돌(석루조. 성문 같은 데에 물이 흘러 내리게 하기 위하여 성벽 위쪽에 끼운 물건.)은 비바람을 막아주었고 소란스러운 하늘의 일기를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카르낙에 있는 돌사자상의 받침돌 위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악을 물리치는 사자. 신의 섭리를 저버리는 자의 발길을 거부한다.'"

"'사자'의 시선이 매혹적이지 않나? 저 시선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정신적 발전의 장애물과 결함들을 불태워 준다네."

"우리 내면의 사원을 지켜주는 수문장이로군요?"

"'사자'의 역할은 우리의 의식 속으로 어떤 불건전한 생각도, 어떤 파괴적인 감정도 뚫고 들어오게 못 하게 하는 것이네."

"우리 태양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것도 저 '사자'이겠지요?"

"'사자'의 갈기는 태양이고 얼굴은 빛이라네. '사자'의 힘은 신적일 수도 있고 인간적일 수도 있네. 신적인 힘은 생명과 움직임을 야기시키는 에너지라네. 반면에 인간적인 힘은 구도 정신을 모든 단계에 적응시키는 힘이네."

"하지만 '사자'의 태양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천체가 아닙니까?"

"그 태양은 진정으로 달라진 의식의 정점에서만 빛을 발하지. 그 태양이 가진 불을 통하여, '사자'는 우리 내면의 돌에서 조금이라도 거친 부분이 있으면 갈고닦아 준다네. 구도 입문의 이 단계에서, 자네는 다시 한번 허영심을 극복해야 해. '사자'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지 말게."

"<사자의 서>에서 보면, 입문자가 사나운 야수와 대적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야수를 물리쳐야 하는데, 그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나는 창조주다! 물러서라, 아가리에 하얀 거품을 문 사자야! 내 힘 앞에서 물러서!'."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사자'를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사자' 자체가 한 예가 아닌가. 절대로 잠들지 않는 동물이니까 말일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사자'가 마치 신들처럼 잠들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했네."

"'사자'라는 말을 그리스어의 '라오', '나는 본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 아닙니까? 이집트어에서는 '사자''보다'라는 말이 똑같은 기호로 사용됩니다."

"그렇게 줄곧 깨어 있는 상태가 꼭 필요하네. 언제나 삶에 주의 깊은 자세를 가질 수 있는, '보는' 능력이."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들을 피하기 위해서겠지요?"

"'사자'는 깨어 있는 자, 지키는 자야. 그래서 사람들은 사원의 자물쇠를 '사자'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던 걸세. 그러나 '사자'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네.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재창조하지. '사자''태양'에게 생명력을 부여해서 아침마다 우리 내면의 태양을 되살아나게 하네. 그리고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건축가를 현혹시켜서 잡아먹고 만다네. 입문자들로 하여금 순수한 상태에서 사원 문을 넘게 해주는 것도 바로 '사자'이고 말일세."

"'사자' 새끼들은 눈을 뜬 채로 태어나고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올바른 행동, 우리의 빛의 활동을 상징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입문자는 '사자'여야 하고, 지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순례자여야 하네."

"저 두 번째 '사자'는 사막 횡단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고대 이집트에서 왕은 광활한 사막을 평정하기 위해 사막을 두루 돌아보는 무서운 시선을 가진 '사자'였습니다. 현자가 창조신에게 물었답니다. 왜 물도 없고 바람도 없으며 어둡기만 하고 어디를 보아도 끝이 없는 사막으로 데려왔느냐고요. 창조신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곳에서는 물 대신에 정신의 빛을 마시고, 또 바람 대신에 의식의 진리를 들이마시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자네의 지금 구도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그것일세. 복음서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사막에서 사탄을 물리치지 않나. '사자'가 되게나. 악과 대적하게. 하늘과 왕국이 자네 마음속에서 사막이 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되네."

"사막이라는 미지의 땅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사막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영역, '가능성'의 영역일세. 입문자가 악마를 만나게 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라네."

"고대 이집트의 세트 신은 훗날 기독교 세계의 악마가 되는데, 붉은 머리의 그 세트 신이 왜 사막 지대의 지배 신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본능의 힘, 제어되지 않은 힘, 변형시켜야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한 신이기 때문이지요."

"잊지 말게나. 사탄은 사막에서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말했다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이 빵으로 바뀌도록 명하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렇게 대답했지. '사람은 빵만으로는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고대인들은 암사자가 새끼를 두 번 이상 배지 못하고, 또 단 한 마리밖에 배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오직 한 가지 가르침만을 전달한다는 뜻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까?"

"필시 그럴 걸세. 그러나 자네의 깨달음은 하나인 동시에 여럿일세. 여럿인 이유는 지혜의 길에는 재검토할 일이 많기 때문이야. 그리고 하나인 이유는 건축가가 평생동안 지향하는 특별한 한순간, 즉 은총의 한순간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지. 자네가 도를 닦아 자아를 성취하고 싶다면, 여기서 그리고 지금 당장 시작하게."

"'사자'는 두 왕국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의 왕국과 땅의 왕국을요?"

"길들이 서로 엇갈리는 교차로인 셈이지. '사자'의 앞부분은 하늘과 연결되고, 뒷부분은 땅과 접촉하고 있지 않은가."

"상반되는 것들을 마음속에서 화합시키라? 선생님께서는 제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거로군요?"

"시작과 끝이 되게나. 알파와 오메가가 되게. 그러면 봉인이 뜯겨질 테고 책이 열릴 걸세. 그러면 자네는 저 날개 달린 '사자'가 지니고 있는 두루마리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네."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겠군요?"

"부활이야말로 구도 과정에 있어서의 대관식이라고 할 수 있네. 그러나 사람이 단 한 번만 부활하는 것은 아니라네. 사냥에 나선 사자는 꼬리로 원을 그려서 경계를 정해 놓는 놀라운 습관이 있네. 원은 신성한 세상을 뜻하고, 야수의 꼬리는 그 원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내면의 정확성을 의미한다네."

"기하학적인 면을 지닌 '사자'로군요?"

"'석공장'의 상징인 '사자'가 땅에 하늘 도시의 설계도를 그린다네. 그러고 보면, '사자'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존재야."

"하늘에서 물을 쏟아 내려주던 고대 신전의 사자들도 그랬어요!"

"'사자'는 그렇게 해서 천지 만물의 뿌리에 물을 먹여 주었다네. 숨겨진 빛을 유지시켜 주었다네."

"'사자'의 흔적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산에서 계곡으로 내려오다가 사냥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후각에 감지되면, '사자'는 꼬리를 흔들어 자신이 지나온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버린다네. '사자'는 결코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동물이 아니야. 우리 공동체의 정신도 그와 똑같네. '사자'를 어르거나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게나. '사자'에게는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해. 이건 자네 내면의 미래가 걸려 있는 일이야. 저 두 번째 '사자'는 거칠기는 하지만 충성스러운 전사라네. '사자'에게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은 '사자'가 하늘의 메시지를, '천사'의 메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32단계 천사-신의 형상을 한 인간

 

"'천사'... 저로서는 좀 놀랐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피에를 들뢰브르가 말했다.

"우린 더 이상 인간을 저런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네. 이제 천사는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져 버렸어! 하지만 고대인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천사를 즐겨 저렇게 형상화하곤 했네."

"사람 머리를 한 고대 이집트의 새가 생각나는군요. 대개 무덤 벽면에 그려지곤 했던 ''라는 그 새의 이름은 '발현한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이 새는 하늘로 훨훨 날아갔다가 다시 하늘에서 돌아와, 부활의 집인 석관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새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에로스도 원래는 심오한 의미가 있었다네. 에로스는 입문자가 창조주와 일체가 되기 위해 주고받는 사랑을 구체화한 것이지."

"천사에 대해서는 이 이상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천사가 남자냐 여자냐 하는 입씨름이 벌어졌던 적도 있었고, 바로크 시대에는 천사가 우스꽝스럽고 볼이 통통한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천사 하면 그저 농담거리로나 생각하게 되지요."

"천사가 표현하는 진리를 흐리는 인간의 태도 따위는 잊어버리게. 다른 시각을 받아들여 보게. 건축가에게 있어 천사는 고대세계의 신과 다름없네. 자네 마음속의 천사는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다시금 일깨워진 생명력을 의미한다네. 천사는 또한 이제부터 영원한 빛 속에 살면서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입문자들을 상징한다네. 천사는 신의 조화와 인간의 조화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아라아드네의 실'의 상태가 양호한지 어떤지 보살피는 임무를 맡고 있네."

"고대 그리스에 아레오파고스학파 데니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고딕미술에 빛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비로운 작가였지요. 그는 천사의 상징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설명하기를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반영이며, 완벽하게 투명하고 결점도 없고 혼합물도 없고 흠도 없고 순수해서 신의 형태를 고스란히 생생하게 반영해 줄 수 있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자네도 성당을 설계하는 '석공장'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세력이 '천사'라는 걸 깨달은 게로군. 자네가 '천사처럼' 되면 지혜는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걸세. 우리 선조에게 이 세상의 조화와 신비를 밝혀 준 것도 바로 천사라네."

"'천사'야말로 최고의 입문 지도자로군요? 큰 신비들에 대한 최후의 열쇠를 가진 존재로군요?"

"'신의 형상을 본 따 만든 인간'이란, 천사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석공장'이라든가 왕을 지창하는 말일세. 자네 마음속에 있는 '천사'는 천지를 창조했던 '건축가'의 생각을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표현하는 존재야. 항구적인 천체 순환을 촉진시키고 창공의 회전을 보장하며 천공의 운행을 유지하는 것이 천사의 일이라네."

"'천사'를 통해서 하늘을 발견하라는 말씀이로군요? '수호천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겠군요! 우리의 사소한 개인차를 보호해 주는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석공장'으로서 이해하면 되겠군요."

"야곱의 사다리에 나오는 천사들은 여원토록 하늘에서 땅으로 그리고 땅에서 하늘로 오르내리지 않는가?"

"'천사'는 인간 조건을 초월하여 떠도는 정신적인 존재인가요, 아니면 자기의 삶을 숭고화 시킨 '날개 달린' 인간인가요?"

"이 땅 위에서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 스스로 시련에 뛰어든 우리인데, 이 땅을 거부해서 무얼 어쩌겠는가?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고 우리의 모험이 감행되는 곳도 바로 이 세상이 아닌가. 우리가 신성한 지혜에 도달하느냐 못하느냐도 다 이 세상에서의 일이네."

"그 신성한 지혜가 우리로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인간을 초월하는 곳에 있는 것은 아닌가요?"

피에를 들뢰브르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천사'는 자네가 추구하는 목적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고 자네가 지금까지 기울인 모든 노력이 무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이제는 대성당을 파괴하고 조각상들을 깨부수는 일만 남은 것 아니겠는가. 나는 '석공장'들이 우리에게 좀 더 미묘하고 심오한 다른 대답을 남겼다고 믿네. 우리가 도달하게 될 진리는 결정적인 최후의 진리가 아닐 걸세. '천사'는 우리가 거두는 성공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절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하늘의 세력일세."

"'천사'는 우리가 성공을 이룩하고 참된 삶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는 '스승'이지 않습니까?"

"천지를 창조한 '건축가''천사'를 입문자에게로 보낼 때, '천사'의 사명은 그 입문자가 처음에 떠나왔던 '본래의 지적 원리'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네. 구도 의식에 있어서 이 '천사' 단계의 체험을 통해, 자네는 이른바 '달인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네."

"'천사'와 더불어서, 이른바 '사형상단'이라고 할 조각상 그룹이 완결되는군요. '황소''독수리''날개 달린 사자' 그리고 '천사'로 이루어진 네 조각상들의 그룹 말입니다."

"그것은 구도 과정 중 별개의 한 단계가 아니네. 이 상징물들이 단지 서로 특별한 관계로 얽혀 있을 뿐일세. 다른 의미 관계를 수립해 볼 수도 있을 걸세. 자네의 최종적인 깨달음은 가령 '돌고래' '코끼리' '사자''독수리'의 단계를 거쳐서 성취될 수도 있네."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사형상단'은 중세의 예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회화뿐 아니라 조각으로도 자주 묘사된 바 있습니다."

"'사형상단' 에 관해서 그 밖에 또 무엇을 알고 있나?"

피에르 들뢰브르가 물었다.

"대개의 경우 그 '사형상'의 배치는 이렇습니다. 후광에 둘러싸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네 명의 복음자들이 사각형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자들에게는 각기 상징물이 하나씩 주어져 있는데, 그 상징물은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에게는 '독수리', 마가에게는 '사자', 누구에게는 '황소', 마태에게는 '천사'가 상징물로 부여되어 있지요. 이들 네 복음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말하는 호루스 신의 네 아들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판입니다."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었지?"

"죽은 자를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간, , , 내장을 언제까지나 양호한 상태로 보존했습니다. 물질인 이들 신체 기관 각각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질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간은 내적인 힘, 폐는 의식, 위는 에너지, 그리고 내장은 창조력이었지요. 이들 넷 외에 다섯 번째 인물이었던 오시리스는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신이었습니다. 오시리스와 그리스도 모두 그들의 네 동료가 보살펴준 덕분에 부활하게 되지요."

"사실 그 네 인물은 구도입문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이라네. 폭풍우 속에서든, 북쪽 세계에서 불어오는 미풍 속에서든, 빛으로 둘러싸인 구름 속에서든, 그들은 나타나게 되어 있어. 생생하게 살아서, 하늘 한가운데의 옥좌를, '석공장'이 앉은 사원 안의 옥좌를 둘러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될 걸세. 그들이 '달인의 경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건축가들이 건설하는 사원의 설계도를 가르쳐줄 걸세."

"동정녀의 인도를 받아 기사들이 예배당에 도달했다는 '성배' 이야기가 기억나는군요. 기사들은 흰 사슴 한 마리와 사자 여러 마리를 따라 예배당으로 들어갔지요. 예배당 안에선 한 수도사가 마악 예배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자마자, 기사들은 사슴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도자는 제단 위 설교단에 섰고, 그러는 동안 사자들이 한 마리는 사람으로 한 마리는 독수리로, 또 한 마리는 날개 달린 사자로, 마지막 한 마리는 황소로 변신했습니다. 이윽고 사자 네 마리 모두는 '사람'이 서 있는 설교단을 들어 올리더니, 유리 하나도 깨지 않은 채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을 뚫고 날아갔습니다."

"옛날에는 사순절의 네 번째 주 수요일이 되면, 세례받을 사람에게 목사가 이 전설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지. 그런데 종교는 종교가 구도의식 소산이라는 점을 자주 망각해 왔어. 종교는 소멸도 하고 변화도 하지만, 구도의식은 언제까지나 남은 건데 말이야. '천사'를 통해서, 자네의 구도 체험에 생명력을 부여하게나. 자네가 지금껏 올라온 구도의 단계들을 참된 것으로 만들게. 그리하면 자네에게도 '꽃 핀 나무'가 보일 걸세.“

 

 

33단계 꽃 핀 나무-건축가 공동체

 

성당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 시야에 '꽃 핀 나무'가 들어왔을 때, 나는 피에르 들뢰브르가 여러 번이나 말한 그 ''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확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 빛이 통과함으로써 속인의 시선은 살아 있는 시선이 되는 것이었다.

'낙원''하늘의 정원'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저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올바른 현실관, 혹은 그릇된 현실관 속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구도 입문은 예술이고 과학일세. 자네의 손과 생각으로, '꽃 핀 나무'가 자라나는 비밀이 정원을 재창조해 보도록 하게나."

"저 나무가 득도한 '달인'의 모습입니까?"

"저 나무는 기운찬 수액과 풍성한 과실이 달린 과실수라네. 생명의 나무이면서 지혜의 나무이지."

"보기만 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나무의 지혜를 흡수하려면 그 과실을 먹어봐야 하네. 과실의 맛은 자네에게 달려 있네. 자네가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쌓은 성숙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일세."

"고대 이집트의 현자는 말하기를, 신전 안에서 화를 내는 자는 순식간에 잎사귀를 잃고 마는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침묵할 줄 아는 자는 정원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지요. 잎사귀도 푸르르고 과실의 수도 늘어갑니다. 그늘도 아늑하고요. 정원 안에서 충만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속인의 입을 봉하고 구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나. 그 목소리가 태초의 정원에 있는 저 나무처럼 자네를 성장시켜 줄 테니. 생명의 나무 공동체로 들어서게."

"저 나무는 우주의 축이 아닙니까? 최초의 나무는 세상이 창조될 때 혼돈에서 생겨나온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태초의 '나무'는 모든 천공을 가로지른다네. 세상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이 다시 일어서면, '나무'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꽃을 피운다네."

"지옥과 땅과 하늘을 가로지른다면, '나무'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서로 연결해 주는 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꽃 핀 나무'는 위와 아래를 한없이 먼 것과 한없이 가까운 것을 서로 결합시켜 준다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를 벤다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소통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에너지의 순환을 차단하는 것이었네. 나무를 베는 이유로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미 잘린 나무로 건축을 하는 것뿐이었네. 그것은 나무를 꽃 피우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으니까. 교회의 기둥들은 돌로 만든 나무라고 할 수 있었지. 그래서 교회 기둥을 파손하는 자는 엄벌에 처해졌다네. 자네도 꽃 필 수 있는 나무를 절대로 훼손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게르마니아에는 이그드라실이라는 커다란 서양 물푸레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문명이 종말을 맞이하고 다른 문명이 빛을 볼 때면, 이 나무가 전율하고 진동했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나무처럼 '이단적'이라고 판단되는 큰나무를 많이 파괴해 왔지요."

피에를 들뢰브르가 말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기독교는 전적으로 생명의 나무를 그 바탕으로 한다네."

"'생명의 나무'... 기독교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표현이군요. 고대 이집트 문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생명의 나무로 채워져 있다.'고 씌어져 있었죠. 한 위대한 여신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생명의 나무를 창조해 냈답니다."

"그리고 오벨리스크도 창조해 냈겠지? 오벨리스크도 생명의 나무라고 생각되지 않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벨리스크의 키가 높은 나머지 하늘을 찌르며, 태양처럼 이집트를 환하게 밝혀준다고 했습니다. 비바람을 흩어져 우주의 모든 혼란을 방지해 준다고도 했군요."

"입문자가 입문의식이 펼쳐지는 사원의 맨 마지막 성소에서 불꽃 앞에 도달하게 되면, 지금까지 무엇으로 삶을 지탱해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네. 그는 대답하지. '저 존경스러운 나무로 인해 살았습니다.'라고. 그러면 그를 비롯한 '형제'들이 모인 앞에서, '석공장'은 고대인들이 성소의 기둥에 새겨 놓은 말을 선언한다네. 이 돌 나무의 기르침을 통해, '석공장'은 입문자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걸을 수 있도록 입문자의 눈 속에 빛을 넣어준다네."

"저 나무가 곧 우주로군요. '달인'은 바로 저 나무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 나무는 지혜롭게 세워져 땅속 한가운데까지 뿌리를 뻗고서 아홉 세계를 덮고 있다네. 나무를 알려면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해. 꼭대기에서는 우주의 정경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페로의 동화 얘기로군요? 보단 신의 먼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엄지 왕자'가 뭐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없을까 해서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지요.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엄지 왕자'의 눈에 작은 섬광이 보였습니다. 수풀 저 너머에서 신이 단편을 발견한 것입니다."

"반면에, 보단 신은 9일 밤 동안 나무 꼭대기에 머물러 있었고, 룬 문자를 창제했지. 자기 백성이 쓸 신성한 언어를.“

내가 지적했다.

"'꽃 핀 나무'는 다른 서양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낙원'과 그곳에 있던 나무 말이군? 사탄이 '낙원'에 몰래 스며들어 갔을 때, 나무들에서는 아직 달콤한 냄새가 났다네. 그랬는데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난 후로는 그 달콤한 냄새가 사라져 버렸다지. 나무 잎사귀들도 떨어져 버렸고."

"신의 존재가 사라졌군요?"

"만약 아담이 조금만 참고 기다렸더라면, 하느님이 아담에게 나무의 과실을 먹으라고 권했을 거야. 자네 그거 아나?"

"말하자면, 구도 입문에 꼭 필요한 준비 과정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생명의 나무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말씀이로군요."

"아담은 조급하게 서두름으로써, 그리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부를 원함으로써 구도 정신을 위배했어. 우리의 '스승'들은 항상 오랜 구도 과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여겨왔네. 구도 과정을 체험함으로써, 옛날 사람들은 만물의 진정한 맛을 만끽하는 법을 배웠네. 의식도 없이 욕구의 대상을 향해 덤벼들지 않았어. 조각품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도 걸작품이 되어야 해. 걸작품은 그저 몇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지금 그 '낙원'의 나무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소는 달라지지 않았어. 여전히 '낙원'에 숨어 있지. 기독교인들이 '동정녀'라고 부르는 존재 속에서 계속해서 커가고 있다네. '낙원'의 나무는 자궁에서 나와, 세상 위에 그 그늘을 드리웠다네."

"그늘이면서도 빛의 결핍 상태는 아니로군요?"

"빛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으로서의 그늘일세."

"옛날 여러 전설에서 보면, 나무와 '동정녀'가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도시 헤르모폴리스에, 기적적인 치유력을 가진 껍질을 지닌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답니다. 성가족이 이집트를 순례할 때 저 유명한 토트 신의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신'을 본 순간, 나무가 그 앞에 엎드렸답니다. 그 나무가 바로 불의 섬에서 자란 '순수한 가지들'이 달 린 아카시아 나무의 마지막 후손이었답니다."

"중세에는 그리스도를 한 그루의 나무로 보았다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나무라고 칭했어. 보기에 아름답고, 탐닉할 가치가 있는 나무."

"나무는 항상 위대한 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져 왔지요."

"우리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네. '돌을 들어 올려라, 내가 보일 것이다. 나무를 쪼개라, 내가 그곳에 있다.' 옛날에는 생명의 소멸과 거듭남이 모두 나무에 의해 이루어졌다네."

내가 지적했다.

"'천사' 단계는 건축가를 '달인의 경지'에 다가서게 해주는 건축가 최후의 변신 단계였습니다. 그럼 '꽃 핀 나무'에는 어떤 특질이 있습니까?"

"입문자에게 척추, 즉 구도 입문의 척추를 제공해 주네. '꽃 핀 나무'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이야.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선을 중심으로 짜여지지. 옛날 중국인들은 이렇게 말했네. 득도한 사람은 가지가 구름 속에 스며들어 있고 저 높은 하늘과 교신하는 나무와 같으리라고. 생명의 나무는 하늘과 땅 한가운데서 자라나네. 그 나무 속에는 인간 성질의 온갖 빛깔이 다 들어있어."

"저도 나무처럼 스스로를 향상시켜야겠군요?"

"자네뿐만이 아닐세. 나름대로 소명이 있으니, 사회 전체가 다 그래야지. 참된 문명은 나무로 간주할 수 있네. 뿌리는 우주의 법칙이고, 밑둥은 직업단체이고, 잎사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완성이며, 과실은 건축가 공동체가 이룩한 작품이어야 해. 자네에게도 자네 고유의 나무가 자라나 있네. 이젠 자네를 맞이하는 공동체에 그 나무를 선사하게. 오직 공동체만이 그 나무를 성장시켜서 거대한 숲이 되게 할 수 있을 걸세."

"다시 태초의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원죄인인 아담의 청을 받고 세트가 '낙원'으로 성유를 구하러 갔을 때, 세트는 세 번을 둘러 보았네. 세 번째에서, 세트는 나무가 하늘까지 자라는 것을 보았지. 그런데 나무 맨 꼭대기는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네."

"2의 탄생을 이룩한 입문자였군요?"

"최초의 '석공장'의 무덤 위에는 언제나 '꽃 핀 나무'가 있네. 이 나무는 언제라도 발견할 수 있어. '꽃 핀 나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구도 공동체가 활동을 계속하니까."

"'꽃 핀 나무'가 혼자서 공동체를 상징합니까?"

"공동체는 나무이고 사원일세. 그리고 '석공장'은 어떤 개별적인 달인이나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을 말한다네."

이리하여 구도의 33단계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화를 계속하고 싶었다. 피에르 들뢰브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직 너무나도 많았다.

"저는 아직 여쭈어보고 싶은 것들이..."

"좋도록 하게나. 하지만 맛난 저녁을 먹으면서 하세."

 

식탁에서

음식점의 벽난로 안에서는 굵직한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난 후였다. 우리의 몸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영혼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담을 나누었고 여러 가지 추억을 돌이켜 회상했다.

내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상징적인 조각상들을 설명해 주셔서, 제가 구도 입문단계를 섭렵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말해주지 않을 것을 밝혀주셨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일세. 자신이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피동적으로 '살아지고'있는 거지. 다분히 혼돈에 빠져 있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의 참된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사실은 뿌리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알지. 그래서 나는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네."

"구도 단계를 하나씩 거치면서, 때로는 실마리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은 갈라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라든가 만남이라든가 큰일이 생길 때면, 사람은 어둠이 갈라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어둠 뒤에 뭔가가 있다는, 깨달아야 할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최초 의식의 자각을 자네는 그렇게 묘사하는군. 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워버릴 수 없는 깊은 인상이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런 인상을 받게 돼."

"결실 없는 고독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모든 속박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그런 고독을 성찰해 보고 거부함으로써 정적인 자세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저는 사원이 건설되는 현장을 찾아보았습니다."

"구도자들을 받아들이는 건축가에게 그렇게 자네의 마음을 열면, 건축가도 자네를 거부하지 않느다네. 건축가는 동요를 가라앉히라고 말하지. 자네는 말도 더듬거리고 마음이 메말라 있고 허영심도 있었어. 그러나 자네는 하늘의 땅에 뿌리를 내려서, 한 그루의 위대한 나무처럼 꽃을 피우게 되었네."

"건축가가 제게 '마른 나무'를 보여주었지요."

"그리고 자네 귀에는 이런 말이 들렸지. '그대는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빛이 너무 눈부셔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른 나무'속에는 모든 것이 있지만, 자네는 볼 수가 없었네. '꽃 핀 나무'까지 도달하기 위한 시련은 어려웠을 걸세. 하지만 자네는 지금 그대로 머무는 안락함을 포기하고 시련에 맞서서,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모험을 시도해 보겠다고 했지?"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네는 구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원리가 노출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네. 하나는 빛의 직관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의 직관이었지."

"드디어 본격적인 진짜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가장 큰 가르침들과 가장 작은 가르침들을 똑같이 주의깊게 동시에 파악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자넨 삶의 가장 작은 부분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했어. 자네가 해야 하는 본질적인 변신은 바로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네. 변신을 거쳐서 자네는 진정으로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되었네."

"저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재료가 자네의 실수를 고쳐주었네. 돌은 돌을 잘 다룰 줄 모르는 손을 다치게 하니까. 자네의 행동이 살아 있는 사고로 변하고, 자네의 사고가 올바른 행동으로 변하면, 자네는 수수께끼들을 매일매일 하나씩 이해하게 될 걸세."

"다른 어떤 이유에서도 아니고, 창조에 대한 사랑에서 창조하라... 제가 건축 현장에서 깨달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 하나하나를 파악하는 일도 그렇네만. 만일 자네의 마음속에 이미 알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어찌 건축가의 길을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이상한 가면들을 만났을 때에도 저는 몹시 놀랐습니다. 사원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으니까요. 입문의식 초기의 환했던 빛이 불안스러운 동요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회오리바람 속에 들어선 듯이 흔들렸습니다. 균형을 잃을까 봐 겁이 났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손에 넣었다고 믿었던 훌륭한 조화를 포기해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낮과 밤... 이런 상반되는 것들이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생각을 혼라스럽게 했습니다. 저를 당황하게 하는 이 이원성들을 제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차츰차츰 고요가 돌아왔네. 자네는 이원성의 시련을 극복해 냈어. 자네는 구도 여행을 계속하기를 원했어. 다시 평온을 되찾았네. 자네의 가면들은 땅바닥에 떨어졌지. 조각조각 짜 맞추어졌던 자네의 잘못된 성격들이 자취를 감춘 거야."

"그렇습니다. '신율'의 법칙을 배웠으니까요. 제 몸속에서도 그 법칙을 확인했습니다. 이젠 그것을 제 세계관과 사고방식에 적용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대립의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돼. 상반되는 것들을 화합시킬 수 있게 되네. 헌데, 자네는 신성한 기하학의 열쇠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구도 과정의 끝에 도달했다고 잠시 착각을 했지. '신율'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을 수 있게 해주는 황금률이 아닌가? 자네는 인생의 곳곳에 펼쳐져 있는 건축 현장에다 그것을 적용시킬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불쑥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래. 사납고 성난 용 한 마리가 자네 앞에 나타났어."

"용의 입에서 불의 말들이 나왔습니다."

"허나 자네는 그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그 불을 친구로 만들었어. 자네는 용에게 새의 혀가 지닌 비밀을 물었지. 새의 혀는 만물 하나하나의 깊은 의미를 존중하면서 사는 모든 자와 대화할 수 있게 해주니까."

"용은 자기가 가진 보물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사원의 건축 자재가 바로 그 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물은 건축가의 손과 영혼에 들어있네. 하늘에서 '거룩한 도시'의 돌들이 떨어져 땅 위에 흩어졌네. 잘 찾아보게나, 그 돌들을 그러모으면 '원자재'가 될 테니. 그 자재를 자네의 연금술적인 변신에 사용하게나."

"그때부터 저의 '믿음'은 더 이상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제게 드넓은 시야를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입문자가 정말로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꿈꾸고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의 시련을 통해 자네는 눈앞의 현재를 생각하게 되었네. 자네가 건너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바다였어. 별의별 불길한 함정이 스며있는 바다. 갖가지 신기루에 빠져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혼란에 부딪혔습니다."

"그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네는 실제로 벗어날 게야. 익사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해낼 수 있네. 미적미적하게 굴지 말게. 감각이 바다 위로 올라가게나."

"저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진실은 그 안에 들어가 보고 그 위에서 보아야만 진정으로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제게 자신을 순수하게 정화하라고 하셨는데요..."

"순수하다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일세. 일관성을 재창조하는 거야."

"저는 저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을 잠재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네의 지성은 우주의 움직임들을 수용하게 되었지. 자네의 지성은 자네가 이성과 논리의 함정들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고, 거짓된 산물과 진정한 작품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었어."

"내면의 귀가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각이 통일되고, '작품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활발한 지성의 활동을 통하여, 자네는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하나로 모았네. 자네는 늙은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 걸세."

"저는 더 이상 고정관념을 갖거나 심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시각과 인식을 변모시키려고 애썼지요."

"자네가 능동성과 수용성을 합치시켜 내고 나자, 자네에게는 상징적인 ''이 주어졌네. 자네는 빛의 축을 중심으로 자네의 존재를 정비했어. ''의 힘은 상처를 입히지도 않고 퇴락시키지도 않네. ''이 닿는 모든 것에는 창조의 충동이 생겨나지."

"''은 제게 꿋꿋함을 주었습니다."

"자네의 삶이든 내 삶이든, 삶이란 양쪽에서 깊고 깊은 두 구렁텅이가 에워싸고 있는 ''의 날에 비유할 수 있었네. 두 구렁텅이는 바로 무기력과 허영이었지. 이 두 괴물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결함이 생기기를 노리고 있었어."

"저는 ''을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네는 마음속의 빗나가 있던 것을 바로 잡았어."

"그랬더니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제시된 상징들의 속뜻을 이해하고 주위 건축가들의 의도를 보다 잘 파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제 자신이 건축가들의 작업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허나 빛의 원천에 비해본다면, 자네는 아직 반사된 빛에 지나지 않았어. 구도의 삶의 중심부에 도달하기까지는 작은 신비들에서 큰 신비들로 넘어가고, 표현에서 원리로 넘어가며, 아침마다 다시 태어나는 태초의 '태양'광선을 체득해야만 했네."

"그러한 수용성은 참된 침묵이었습니다. 공허가 아니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자네는 자네의 진정한 성격을 깨달았네. 그러나 그다음 구도 단계는 가장 어려운 단계였네. 바로 개인의 실현에서 공동체의 실현으로 이행하는 단계였지. 이젠 결정적인 걸음을 내디뎌야 했네. 자네 앞에는 낮고 좁은 문이 열려 있었네. 그 문을 통과해서 새로운 시련과 맞서야 했어."

"저는 '태양'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마음속에 '태양'을 다시 솟아나게 하여 매일 아침 '태양'과 함께 다시 태어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창조는 결코 휴식을 모른다네. 창조는 끊임없이 세계를 낳는다네. 건축가는 '태양'처럼 자신의 사고를 창조하니, '태양'과 건축가는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지."

"다시 어두워졌지만,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을 보니, 제가 처음으로 의식을 자각하던 때의 희미한 빛이 생겨났습니다."

"자네가 한밤중에도 태양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네. 직사광선과 반사광선의 두 빛을 잘 조화시키게나, 그러면 높은 곳에 있는 것과 낮은 곳에 있는 것이 똑같이 다 보일걸세."

"이제 제게는 '높은 것''낮은 것'에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의 두 양상을 결합시키는 조화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건축가 한 분이 제 눈에 눈가리개를 돌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암흑으로 되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눈가리개가 평온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제게 내면의 시선을 추구하고 안개를 흩어버리라고 격려했습니다."

"자네는 내성을 통해 정신을 집중시켰어. 아니 차라리, 가로막히지 않도록 자신의 빛을 집중시켰다고 해야겠군."

"눈가리개를 떼고 나자, 제 시선은 어떤 삼각형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삼각형이었지. '하나' 속에 들어있는 ''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자네 행동의 결실을 창조 활동에 바치게."

"제가 가려는 길은 사고와 행동을 신성하게 해주는 '작품 활동'의 길이었습니다. 저는 그 '활동'을 사람을 조화롭게 유지해 주는 움직임으로 느꼈습니다."

"그렇네. '사랑'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랑하게. '믿음'은 마음의 지성을 탄생시킬 테고, '소망'은 그 마음의 지성에 실재성을 부여해 줄 것이며, '사랑'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지성이 있음을 알아볼 게야. 동시에 어제도 되고 오늘도 되고 내일도 되게나."

", 불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외부의 도움 없이, 자네 자신의 불을 생성해야 하네."

"고독으로 되돌아갔지요..."

"자네는 혼자가 되었네. 허나, 그것은 혈혈단신이 느끼는 그런 고립무원이 아니었어. '원리' 앞에서 혼자가 된거였네. 비록 혼자였어도, 자네 마음속에는 구도의 길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항상 깃들여 있었네."

"정신적으로 아무리 높이 고양되었다 해도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중요한 건 깨달은 바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전달할 모든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네. 태만하거나 독단적이지 않도록 조심하게. 의미를 무시하고 형식에 갇혀서는 안 되네. 자신을 현자라고 믿는 자의 허영심은 치료법이 전혀 없는 치명적인 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상징물들의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삶의 기술과 건축 기술의 정신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과학 중의 과학이며 으뜸가는 예술일세. 모든 노력을 거기에 기울이게나."

"그런 길로 접어들면, 현재 우리 세계의 수많은 거짓된 가치들을 그늘 속에 저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삶의 모든 양상들의 결합을 추구하도록 노력하게. 자네가 아무리 큰 성공을 해도 그 성공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네. 우리가 건설하는 '인간'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걸세."

"건축가 공동체 한가운데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되었습니다."

", 그 나무는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건축의 이유인 지식의 상징이었네. 이제 자네에게는 더 이상 나무 주위에 그늘은 없을 걸세. 그 나무의 뿌리처럼 자네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릴 테고, 자네의 꼭대기는 하늘로 올라갈 게야. 그 나무의 꽃과 과실이 바로 우리가 이룩한 작품들이라네. 건축가 세대 하나 하나에게 살아 있는 양식을 제공해 주는 작품들."

"바로 그때 저는 한쪽은 '마른 나무'이고, 다른 쪽은 '꽃 핀 나무'인 나무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무는 꼭 한 그루일 뿐입니다. 제 시각이 그 두 나무 사이에서 달라질 뿐이지요."

"이 세상의 상이점들과 달리 표현된 점들과 각기 다른 빛깔들을 아는 것은 저녁의 앎일세. 세상의 단일성을 아는 것은 아침의 앎이고. '마른 나무'이면서 동시에 '꽃 핀 나무'가 되게나. 하지만 이젠 밤이 늦었군.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피에르 들뢰브르가 말했다.

"저는 좀 더..."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게야. 틀림없네."

나는 피에르 들뢰브르와 악수했다. 어둠 속에서 성당을 향해 좁은 골목 안으로 사라져갔던 그의 딱 벌어진 어깨.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