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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변주곡 1

Bollnow 2024. 3. 9. 12:51

죽음의 변주곡

김용원

 

1 썩은 이빨

 

도약사(도민구, 都敏求)는 고개를 잦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수한 별들이 우수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밝고 주먹만 한 별들이었다. 산 위에 올라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쭉 뻗으면 두서너 개는 손에 잡힐 듯 머리 가까이 낮춤하게 뿌려져 있었다. 도심의 인간 악취를 피해 도망쳐 나온 것들!

도약사는 내내 갈등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만두라고 설득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 심정은 직접 경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성한 이빨을 온전히 보전키 위해서는 썩은 이빨은 뽑아버려야 한다는 논리.

애초 신경식이라는 그 사람을 알게 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 이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새삼스레 옛날의 그 사건을 떠올리며 이토록 괴롭지는 않을 거였다. 세월이라는 마약에 의해 가까스로 아물어 있던 상처가 아가리를 따악 벌리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신경식을 처음 만나게 된 곳은 포장마차로, 사흘 전이었다.

그날, 도약사는 약국 가까이에 있는 포장마차 안에서 안터장(안돈요, 대웅심부름센터 사장)이 좋아하는 꽁치구이를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출입구 쪽을 향해 앉아 있던 안터장이 갑자기 외치듯 말했다.

"어이구 신형사, 참말 오랜만이오!"

도약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떡 벌어진 어깨에 키도 큰 편이었고, 약간 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얼굴- 사내다운 풍모를 갖춘 삼십 대 중반쯤의 사내였다. 눈에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머리손질을 하지 않아 꺼벙한데다 옷차림새가 꾀죄죄했고, 그리고 무척 우울해 보였다. 과로보다는 심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런 인상이었다.

사내는 이미 얼근하게 취해 있었다. 그는 동자가 풀린 눈으로 한동안 안터장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낸 듯 투박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받았다.

", 오랜만이군요."

"어떻게 예까지 출장이우?"

"출장이 아니라 출정이오."

안터장이 동석을 권유하고 나서 도약사와 신형사에게 각각 상대방을 소개했다.

"도민구라고 합니다. 돌파리 약사지요."

"난 신경식이오. 나 또한 별볼일없는 포졸이었지요."

도약사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포졸이었지요'라는 대목에 억양을 높여 강조하는 게 귀에 걸렸다. 과거형을 굳이 강조하는 것은 이제 직장에서 손을 떼고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과, 그렇게 된 데에는 어쩔수 없는 사연이 담겨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들렸다. 독직사건이라든지, 아니면 직무상 잘못으로 쫓겨났다는 의미일까? 그러고 보니 우울해 보이는 그의 표정과 맞아떨어지는 무엇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서너 순배 술잔이 돌 때까지 도약사는 안돈요와 신경식이 나눈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가까이 사귀어오던 사이로, 어느 사이 자연스레 말을 놨다.

그러던 중 도약사의 귀를 번쩍 열리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그래 아직까지도 놈들을 잡지 못했단 말인가?"

안터장의 말에, 신경식은 침울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잡았다면 이미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큰 뉴스거리가 돼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테지. 이렇게 안형과 술자리를 같이하지도 못했을 테구."

"하긴, 대번에 유명해졌을 거야."

"그런 뜻이 아니고, 이미 내 자신이 살인자가 되어 원숭이 장에 갇혀 있을 거라는 뜻이라구."

신경식은 괴로운 듯 술잔을 들어 단박 입안에 털어 넣고는 탁 소리가 나게 탁자에 잔을 놓으며 덧붙였다.

"그걸 잊어버리려고 예까지 왔는데......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고 술이나 들자구."

그제부터 세 사람은 술 얘기만 하며 술만 마셨다. 그런 뒤 포장마차를 나와 방향이 같은 안터장과 신경식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도약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약국에서 며칠 전 구입한 추리소설 '흑장미의 미소'를 읽고 있는데, 출입문에 매달아 놓은, 모 제약회사의 심벌마크 모양의 구리 종이 땡그렁 울렸다. 도약사는 버릇되어진 대로 평소처럼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어서오세요."했다. tk말을 던지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제서야 도약사는 들어선 사람에게 눈길을 보냈다. 뜻밖에도 신경식이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독서광이신 것 같군요."

"'' 정도는 아니고, 대체로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어디 불편하셔서 오셨나요?"

그는 두통이 심하다고 했다. 제산제를 곁들여 달라고 했다. 드링크제로 목을 축이며 약을 복용하고 나서 그가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택시 타고 가면서 안사장한테 도약사 얘기 들었소."

도약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여 잠자코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작년에 '강수희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시라고요?"

"내가 해결한 건 없습니다. 진짜 주인공은 모여사라는 가정주부지요."

"그 얘기도 들었습니다. 사실 작년에 본서에서 근무할 때 용감한 시민상을 탄 도약사님의 얘길 듣긴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요. 본서 내근 근무 할 땐데......암튼, 도형을 알게 돼서 기쁩니다."

대화가 진전되어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어색함이 불식되었을 즈음, 마침내 신경식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범인들에 의해 아내를 잃었고, 그 범인들을 잡으려고 집착하다가 좌절되자 근무는 저참이고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다 이제는 사표를 내고 점점 벼랑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는 형편이라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위로 아내를 잃었는지,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도약사는 태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중지와 엄지 사이에 끼고 튕겼다. 어둠 속에서 포물선을 그으며 제방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차를 세워둔 쪽으로 돌아서면서 도약사는 중얼댔다.

"그래, 나서자. 이건 신경식 그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고, 그리고 나의 일이다!"

 

 

2 사랑의 바퀴벌레

 

신경식이 안돈요와 도민구를 포장마차에서 만나던 날은 옥니에 대한 뒷조사로 닷새 동안 꼬박 뛰어다니고 난 바로 그날이었다. 비로소 그날 경식은 그 일을 끝냈던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많다고 가늠되었다.

옥니의 별은 두 개뿐이었다. 공갈죄로 6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1, 그리고 상해죄로 10개월 징역형.

신통치 않은 놈의 전력은 경식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 정도로 잔인하고 파렴치하다면 적어도 전과 대여섯 건에 실형을 받을 정도의 범죄형쯤 되리라 예상되었었다. 그래서 그 허탈감을 불식시키려고 포장마차에 들렀고, 안터장과 도약사를 만나게 됐던 것이다.

어쨌든 옥니 그자는 전과자였다. 미루어봐, 그날 집에 침입하여 아내로 하여금 오물을 쥐어먹게 한 범인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붉은 반점 패거리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높아졌다.

이제 경식에게는 기회를 만들어 옥니를 옭아챌 일만 남았다. 그다음 취해야 할 행동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유동적인 상황일 것이어서, 그때 그때마다 융통성과 결단을 내려야 할 터였다. 다만, 원칙은 세웠다. 자신이 당한 만큼,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

도약사와 같이 해장국집에 들러 숙취를 해결한 경식은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경식이 살던 집은 지금 하숙하고 있는 집에서 남쪽으로, 정반대 쪽에 위치해 있었다. 517, 아내를 잃고 나서 보름쯤 지나 집을 전세주고 본서 근방인 그곳에서 하숙을 했다. 그러다 사표를 내고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전세 계약 기간이 있으므로 하숙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전세를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아내를 잃은 그 집에 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아내를 떠올리게 하는 것과는 멀어지고 싶었다. 아내를 회상하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기에.

하숙집이라기보다는 간판을 걸지 않은 여인숙이라고 해야 말이 맞을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아홉 칸 방 거의가 장기 하숙생을 치르고 있는 곳이었다. 대개 떠돌이 공사판 노동자거나 빚쟁이에게 쫓겨 숨어다니는 자, 불륜 관계를 지속하려고 밀월 장소로 택한 자, 정액 처리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갈보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식이 비틀대며 골목을 들어서 하숙집에 가까이 가자, 봉고차 백미러를 닦고 있던 남기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어이구, 신형사님 오십니까? 벌써 주첨지한테 한방 얻어맞은 것 같군요. 헤헤헷."

"난 이제 신형사가 아니야. 앞으로 신형이라든지, 그렇게 불러. 신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이면 듣기가 훨씬 낫겠지."

"에이 형님두. 아직 사표가 수리된 건 아니잖습니까?"

"어쨌든 그런 줄 알라구."

딱 자르듯 말하고 돌아서던 경식은 서너 걸음 놓다가 말고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려 덧붙였다.

"그리고 말야, 조만간 여기서 이사갈 거니까 그리 알라구."

"어이구, 그럼 우리하고 인연 끊는 겁니까? 서운해서 어쩌지요?"

"그렇게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을 놓고 난 경식은 재빨리 하숙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온 경식은 일단 한숨 자놓고 따지기로 했다. 옥니를 옭아 챌 날짜는 이튿날 저녁이나 사흘 후로 잡아놓았다. 이미 소재 파악도 해놓았고, 그리고 비장의 카드도 마련돼 있었다. 오늘 밤 행동으로 옮겨도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웬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피곤했다. 그리고 비가 오려는 듯 몹시 후덥지근했고......어쨌든 쉬고 싶었다.

경식은 들고온 비닐봉지에서 소주 한 병과 훈제 오징어 한 마리를 꺼내 당장 먹어치웠다. 아내를 잃고 난 뒤로 늘 해왔던 버릇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몸이 고단해도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데, 흔히 말하듯 비몽사몽 간에 아내가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어 목소리까지 환청으로 들려왔다.

"뭘 가지고 그래?"하고 경식이 다가가 물었다. 아내는 주방과 거실 사이의 문턱 밑을 가리키며 여전히 웃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벌건 대낮에 바퀴가 연애를 하고 있잖아요 글쎄. 호호홋!"

"연애라니?"

아내는 낄낄거리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바퀴벌레 자웅이 꼬리를 맞대고 붙어 있었다.

"관둬. 아무리 미물이지만 사랑 행위를 하고 있을 때만은 봐주자구."

"그래도 그렇지, 저것들이 까놓은 새끼들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샘나면 우리도 그 작업을 하면 되잖아?"

"무슨 말이예요?"하고 되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내의 입은 경식의 입술에 의해 봉함되고 말았다. 출장에서 사흘 만에 돌아온 경식과, 지하 상가에서 양품점을 운영하고 있는 아내의 휴일과 맞아떨어지는 날이었다. 거실 바닥에 뉘여진 아내는 손가락으로 현관문을 가리키며,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현관문이 따져 있어요."

"상관없어."

"대문도 잠겨있지 않은 걸요."

"까짓, 잠겨있지 않으면 대수야? 우리 둘뿐인데."

"그래도......"

"무슨 팬티 고무줄이 이리도 탄탄해."

한창 진행 중인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 갈무리를 하려 했지만, 이미 현장은 적나라하게 공개된 뒤였다.

"어머, 흉칙해라!"

문을 쾅 닫고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여자는 아랫집 아낙네 숙희 엄마였다. 평소 제 집 드나들듯 하던 버릇대로 현관문을 열어 젖혔던 것이다.

아내는 덮친 경식을 밀어내며 가뿐 목소리로 중얼댔다.

"이를 어쩌지......그러잖아도 입이 싼 여잔데."

경식은 아내를 더욱 찍어누르며 중얼댔다.

"걱정하지 마. 그 아줌씨 말만 이혼녀지 멋진 애인이 있더라구."

"보셨어요?"

"먼빛으로, 딱 한 번."

"칠보제화점 지배인이래요. 주먹세계 출신이래요."

"칠보든 팔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봐, 날 기다리고 있잖아."

"오늘 따라 이이가......!"

 

문득 경식은 울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것 말고도 아내와의 행복했던 몇 장면들이 생생하게 겹쳐 머릿속을 스쳤다.

경식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놈들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분노의 불길이 가슴속에서 모닥불처럼 일렁였다. 팔소매로 눈자위를 쓰윽 문지르고 난 경식은 옥니를 족칠 때 사용할 소품들을 챙겨 넣은 손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오후 4시 조금 넘어있었다. 경식은 택시를 대절하여 N읍으로 내달았다.

N읍은 인구 3만 남짓의 전형적인 농촌도시였지만, 근방에 군 주둔부대가 들어서면서 기지촌으로 바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군인들의 배설 욕구를 처리해주고 대가를 받아 호구지책을 해결하는 갈보들이 날로 늘어났다. 애초 발전하고는 거리가 먼 도시였지만, 지금은 그 정액 처리 댓가로 받아들인 돈과 유흥가 수입이 일조를 하여 형편이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에 따라 그곳에는 그런 과정에서 떨어지는 고물을 주워 먹고 사는 기생인들이 날이 갈수록 불어났는데, 옥니도 그 기생 인간 부류의 한 족속이었다.

옥니는 사창가 뒷골목에서 나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구린내, 비눗내, 시궁내 따위 악취가 풍기는 도랑과 창문이 접해 있는 그런 집이었다.

경식은 도랑 가 축대를 따라 거니는 척하며 옥니가 살고 있는 집 창문을 통하여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른아른한 나일론사 방충망이 가려져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아무리 눈 여겨봐도 방안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단 축대를 지나 기차 역전 쪽으로 이어진 길에서 골목을 돌아 다시 옥니가 사는 집으로 다가갔다. 낡은 양철 대문은 반쯤 열려져 있었다. 안채는 토담에 시멘트를 바른 슬레이트 한옥이었다. 안채와 등을 돌리고 있는 문간방이 옥니가 거처하는 방이었다. 방문에는 놋쇠로 된 잠울통이 굳게 매달려 있었다.

몸을 돌리며 경식은 중얼댔다.

"서둘러서 좋을 것도 없고, 서두를 이유도 없지......"

읍내 중심부로 나가 저녁을 먹고 술까지 한잔 곁들인 경식은 다시 옥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다가갔다. 저녁해가 뉘엿했다.

여전히 옥니의 방문에는 놋쇠 잠울통이 완고하게 매달려 있었다.

읍내 중심부로 도로 나온 경식은 다방 구석에서 하릴없이 앉아 시간을 죽인 뒤 다시 옥니가 사는 곳으로 갔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9시 반에 막버스가 있었다.

"그래, 무리할 이유는 없어. 기회는 내일도, 모레도 있지 않는가......"

중얼대며 경식은 시외버스터미널을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3 옥니의 팔뚝

 

그 이튿날, 경식은 다시 N읍을 겨냥하고 하숙집을 나왔다.

불볕 햇살이 지상의 물기를 몽땅 기화시켜 하늘로 끌어올리는 중이라서 온 누리는 끓는 국솥처럼 부연 수증기로 들어차 있었다.

옥니에게 혐의를 두게 된 것은 정목사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경식은 종교하고는 멀었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세상일이 바빠 저쪽 세상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랬는데, 아내가 범인들에 의해 사건을 당하고 난 뒤로 정신착란 증세가 심해져 옆집 숙희엄마의 주선으로 신앙의 힘을 빌게 되었고, 그때 정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제일교회와, 그리고 제일기도원과 연관을 갖게 되었었다.

그 뒤 아내가 교회 안에서 벌인 광기어린 추태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자살한 후,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주관해준 사람은 바로 정목사였다.

그런 후 살던 집을 전세 놓고, 대충 주변 정리를 마치고 났을 때서야 경식은 정목사에게 그 동안 지은 신세를 사례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경식은 그간 찾아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정목사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그 와중에 찾아와준 것만도 고맙다는 말끝에 덧붙였다.

"그러잖아도 그동안 자매님의 영혼을 위해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님의 안녕과 영혼의 평화를 위해서도요."

그 미끌미끌한 말투가 전과 다름없이 귀를 간지럽혀 내키지는 않았지만, 심란증을 달래는 데는 상당히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달리 사은할 계획이 떠오르지 않아 망설이고 있던 중, 마침 점심때라는 것을 깨닫고는 말했다.

"조촐하게나마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거절할지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정목사는 얼굴에 희색까지 띠며 경식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

"좋죠. 전 늘 가난한 이웃 형제들을 생각하며 악식을 하는 편이라서 웬만하면 외식은 피하고 있지만, 형제님이 모처럼 부탁하시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고는 제일교회 담벼락에 바짝 붙여 세워진 그의 승용차로 다가갔다.

그러던 정목사는 갑자기 걸음을 세웠다. 그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고, 얼굴은 핏물로 벌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경식은 그의 시선이 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헝크러진 곱슬머리에 턱이 튀어나오도록 지독한 옥니, 이십 대 후반이거나 삼십 대 초반쯤으로도 보이는 사내가 그의 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그는 긴팔 남방을 입고 있었다.

차에 먼저 다가간 옥니는 정목사를 향해 빨리 오라는 시늉으로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보였다.

옥니를 노려보며 정목사는 중얼댔다.

"저어......씨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경식은 정목사에게 나직이 물었다.

"누굽니까 저 잔?"

"걸핏하면 나타나 날 괴롭히는 사탄의 자식이랍니다. 차는 두고 가까운데 가서 간단히 합시다."

"그러죠 그럼."

"내 입장을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그러나 정목사는 더욱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다. 옥니가 그의 등에 대고 큰소리로 떠벌였다.

"어이, ! 형제간에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성경에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구절이라도 쓰여 있나요? 아무리 배다른 형제간이지만 말입니다. 안 그래요?"

정목사는 주먹을 불끈 부르쥐며 양어깨를 조브라뜨렸다.

등 뒤로부터 직직직직- 자발맞게 구두 뒷축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정목사는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서며 쏘아붙였다.

"도대체 너 왜 이러는 거야! 손님하고 같이 있는 거 눈에 보이지도 않니 넌?"

다가오며 옥니가 중얼댔다.

"형이 한참동안 약속을 어겼으니까 바쁜 이 몸이 손수 왕림한 거 아니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목사는 경식의 눈치를 흘끔 살피고는 타이르듯 나직하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집에 우선 가 있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말야."

"형네 집으로?"

"그래."

옥니는 완연하게 비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목사 형님, 이러시는 게 아닙니다."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했잖아!"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옥니는 두 손을 옆구리에 척 얹고는 껌을 짝짝 씹으며 말했다.

"제 인터뷰 신청을 요리조리 피해온 건 형님이십니다. 안 그래요?"

"제발, 할 얘기 있으면 이따가 하자. 여기 손님이 계시잖아!"

"헤헤, 우리 이러지 맙시다. 목사님께서 하도 노랭이짓을 하시니까 형수씨가 무슨 권한이 있어야 말이 되지요.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후처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렇지 맘씨야 형님보다 백배는 낫다는 거 잘 알고는 있지만, 돈이 없는 걸 어떡합니까? 빚좋은 개살구 사모님이시지요. 그러니 천상 내가 이렇게 형님하고 직접 아다리칠 수밖에요. 안 그렇습니까. 목사 형님?"

그때 경식은 옥니가 거론하고 있는, 그의 형수라는 여인을 떠올렸다. 스무서너 살쯤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자였다. 흰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아내의 얼굴과 매우 닮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아내 때문에 정목사의 집을 찾았을 때 처음 대면하자마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상을 주던 여자......낯이 익어서일까? 대뜸 정감이 갔다. 그녀 또한 경식이 그런 속내를 드러내선지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인가를 꺼낼 듯한 그런 의문의 표정을 지었었다.

정목사가 중얼댔다.

"이 개망나니, 또 날 모욕주려고 작정을 하고 나섰구나!"

"우리 이러지 말자니까요. 난 어차피 개망나니로 정평이 났는데 굳이 밝힐 필요가 있습니까? 괜시리 손님도 계신데 내 주둥이에서 더 험악한 말이 튀어 나가기 전에 얼른 제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게 여러모로 형님한테 이로우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헷헷."

정목사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 빛깔이었다. 그는 당장 쥐어박을 듯이 주먹을 불끈불끈 쥐곤 했다. 그러는 중에도 경식에게 시선을 보낼 때는 길들여진 인자한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그의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마다 작은 눈에 입술이 유난히 두터운, 대체로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그의 얼굴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졌다.

마침내 그는 경식에게 정중한 몸가짐을 갖추며 말했다.

"신사장님, 미안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서 계십시오. 동생놈 돌려보내고 곧 돌아올 테니까요."

하고는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하는 의미를 눈에 담아 경식을 바라보았다.

경식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신사장님'이라는 말이 무척 희극적으로 들렸다. 그의 입장이 이해되기는 하지만, 어쩐지 순발력 있게 튀어나온 임기응변과 성직자라는 신분하고는 어딘가 걸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시죠."

"죄송합니다."

옥니에게 다가간 정목사는 그의 등을 돌려세우려 하자, 옥니는 막무가내며 큰소리로 떠벌였다.

", 또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조지려구? 여기서 말할 거야 씨이-"

"저쪽 다방으로 가면 되잖아!"

"에이 씨- 안 간다니까 그러시네. 여기서 말을 끝내자구."

"귀뺨이라도 맞고 싶어 환장을 한 거야?"

"그러면 바른쪽 뺨도 내놓지요. 헤헷!"

"이 자식이 정말!"

"형님, 신분에 맞게 말씀을 하십시오. 욕하기로 따지자면 제 입은 왕걸레지만, 이렇게 참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게 확!"

허공에 뜬 정목사의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옥니도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맞대들었다.

"하이고, 그러잖아도 근질근질하던 판에 잘됐는 걸. 형이 좀 긁어주려우?"

그들의 작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경식은 어느 순간 움찔하고 놀랐다. 정목사가 좀 지나치다 싶었던 마음이 싸악 가셨다. 정목사의 입장이 안타까웠다. 베드로가 부활했다 해도 옥니 녀석을 용서할 수는 없을 거였다. 그의 팔뚝 안쪽에는 무수한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다.

뒤늦게 경식의 눈길을 의식한 듯 옥니는 재빨리 걷어쳤던 팔소매를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서두르는 투로 주절거렸다.

"미안, 미안해 형. 감히 목사님께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달라진 옥니의 태도에 정목사도 목소리를 다소 눅였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임마."

"암튼, 선처를 바랍니다요 형님. 내 심정 누구보다도 형이 잘 알잖아요?"

"좋아. 반 장만 줄께."

"반 장요? 너무 적은 액수 아닙니까?"

"맘대로 해!"

"좋아요 좋아!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머지 반 장은 심부름꾼 통해서 내일까지 보내주기로."

"닷새 안으로."

"너무 멀어. 사흘 안으로."

"나흘로 하자."

"좋았어 형. 헤헷, 형과 나는 옛날부터 타협의 명수라니까."

정목사는 몸을 돌려 등으로 옥니의 시야를 가리고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거냈다. 수표 한 장을 꺼내 들려주며 말했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알았습니다요. 저 손님한테 실례 많았다고 대신 사과 좀 해주십시오."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큰소리로 조롱하듯 덧붙였다.

"그럼 이 몸 가지고 떠납니다요. 부디 건강하십시오-"

정목사가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경식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집안의 암덩어리지요."

"어느 집안이고 그런 골칫덩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 아닙니까?"

"주님이 내게 안겨주신 시련으로 여기고 극복하고 있습니다."

"성직자시니까......"

말은 그렇게 받아주면서도 경식은 옥니의 팔뚝에 있던 주삿바늘 자국을 내내 그려내고 있었다.

정목사와 경식은 차에 올랐다.

정목사가 시동을 걸고 공회전을 시키는 사이, 경식은 그때껏 속에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중증 같더군요?"

머뭇거리며 심각하게 꺼낸 경식의 말은 무시한 채 정목사는 이렇게 되물었다.

"개장국 좋아하십니까?"

경식은 황당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동생에 대한 말을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경식으로서도 굳이 그 말을 재차 꺼내어 그의 상한 심사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옛날 우연한 기회에 두어 번 먹어 보긴 봤는데, 양념 맛으로 그저 먹을 만은 하더군요."

"여름엔 최고죠. 그래서 보신탕 아닙니까? 헛헛."

"어쨌든, 난 아무거나 잘 먹는 잡식성이니까요."

그의 말을 받아주면서도 어쩐지 보신탕하고 목사라는 신분하고는 어딘가 어긋난 것 같은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차는 외곽도로로 접어들었다.

정목사는 일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똑바로 세운 채 앞만 보고 차를 몰았다. 물론 그의 심정을 이해는 하고 있지만, 경식으로서는 당황되고 참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다행히 카스테레오에서 찬송가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으므로 어색함과 무료함을 그것으로 다소나마 눅였다.

보신탕집은 풍광이 좋은 야산 자락에 세워진 집이었는데, 집 앞은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은 고풍스런 영국의 고옥을 연상시키는 그런 풍모를 가진 집이었다. 동물 보호론자들을 앞세워 개를 잡아먹는다고 극성스럽게 외교적 시비까지 벌이는 영국인들인데, 그들의 건축구조로 지은 집에 보신탕집을 차렸다는 게 농담처럼 여겨졌다.

네온관으로 '그린랜드'라는 글자가 만들어져 출입구 이마에 커다랗게 붙여져 있었다.

대형음식점이었다. 승용차 스무 대쯤은 너끈히 들어설 수 있는 널따란 주차장이며, 대기 중인 그린랜드 상호가 쓰여진 봉고차 세 대, 요모조모 돈들여 꾸며진 정원과 분수대, 그리고 실물 크기의 장식용 물레방아-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올갠에 오디오 시스템까지 갖춰진 홀을 지나 특실로 안내되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창문에 들러붙어 굼실대고 있었다.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시킬 때까지도 정목사는 시종 시무룩했다. 기분이 상해서라기보다 그제껏 내면에 침잠하여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골똘해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경식은 죄어드는 듯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속셈으로 언젠가 들은 바 있는, 보신탕과 연관이 있는 얘기를 꺼냈다.

"한 서양인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왔었는데, 신자들이 장난삼아 보신탕집에 데리고 갔었다는군요."

정목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경식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시늉이 아니라 단순히 습관화된 버릇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경식은 무성의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말을 계속할지 어떨지를 결정하지 못해 잠시 망설였다. 계속하기로 했다.

"그 선교사 양반, 일단 먹어 보고는 좀 매워서 그렇지 맛이 일품이라며 무슨 고기냐 묻더랍니다. 신자들은 곧이곧대로 대답하기가 곤란하여 한국 특산인 건오리 고기라고 둘러 붙였답니다. 닭처럼 땅에서만 사는 오리라는 설명을 덧붙여서 말입니다. 헛헛."

어색함을 불식시키려고 말끝에 덧붙인 웃음이었지만, 정목사의 반응이 없어 공허하고, 겸연쩍었다. 그제는 말을 멈추고 정목사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경식은 기분이 상했다.

"무척 피곤해 보입니다?"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지자, 그제서야 정목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움찔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받았다.

", 그래요? 신부라고 했던가요? 그래서 어떻게 했답니까?"

"그 뒤로는 외식할 기회만 있으면 그곳에 가자고 하더랍니다. 그때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면서."

"그래서요?"

"신자들은 더 이상 거짓말하기가 민망하여 실은 개를 잡아 만든 음식이었다는 것을 실토할 수밖에요."

"핫핫, 그래서요?"

"우려와는 달리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말하기를, 자기 나라에서는 바캉스 철만 되면 개를 방치하고 놀러가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개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말을 하면서, 따지고 보면 그게 더 큰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랍니다."

"하아, 거 재밌군요. 그래서요?"

"3년 만에 그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공항에서 신자들에게 그러더랍니다. 왜 그렇게 좋은 음식을 꼭 여름에만 먹느냐구요."

"요사이는 한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데......"

"그러면서 말하길, 앞으로는 통조림을 만들어 사철 먹으면 좋을 거라고 조언을 하더라나요."

"흐응-"하고 정목사는 말 울음소리 비슷한 비음을 흘렸다. 그러나 진심으로 우스워서 웃는 웃음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경식은 느낌으로 알아챘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어떤 생각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표정으로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개장국 두 그릇에 수육 한 접시가 들어왔다.

경식은 추가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종업원 아가씨가 정목사 앞에 소주잔을 놓자, 경식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분은 술을 못 하는 분이니까 잔 하나는 도로 가져가요."

정목사가 재빨리 말꼬리를 잡아챘다.

"무슨 말이오? 내 입은 입이 아니란 말입니까?"

종업원이 나가자, 경식이 정목사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들었다놨다만 하십시오."

정목사는 대꾸 없이 경식의 잔을 채워줬다.

"목사님, 건강하십시오."

"형제님도."

술잔을 부딪치자마자 정목사는 스스럼없이 금세 술잔을 비웠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경식을 의식한 듯 그가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예수님도 꽤나 술을 좋아하셨지요. 그 시절에는 포도주였지만."

"하긴, 먹고 마시고 배설해야 하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니까......"

개장국이 들어오자, 정목사는 두 손을 모으고 아주 짧게 식사 전 기도를 올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다. 소주 한 병을 추가 주문했다.

어느덧 정목사의 얼굴은 단호박 색깔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혀가 꼬부라져 발음도 어눌했다.

경식이 담배를 태워 물자, 머뭇거리던 정목사도 담배 한 개피를 뽑아 물며 혼잣말이듯 중얼댔다.

"2천 년 전 당시 담배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아마 골초이셨을 겁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니까......"

"그래요, 독생자이기 전에 인간이셨죠."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잘은 모르지만......"

경식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진심을 빗대서 그렇게 말했다. 성직자라는 족쇄가 채워져 인간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 입장에 있다면 경식도 별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참에 짚고 넘어가 그에게 위로라도 하자는 뜻에서 덧붙여 말했다.

"아까 만난 이복동생 때문에 몹시 괴로우신 거지요?"

"왜 아니오. 오죽하면 내가 이러겠습니까.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게 피붙이 때문에 겪는 시련일 겁니다."

"이해합니다. 더구나 동생분의 팔뚝을 보니까 주삿바늘 자국이......남의 일 같지 않더군요."

말해 놓고 경식은 괜히 그 말을 꺼냈다 싶어 후회했다. 아픈 상처를 건드려 당황하거나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 높여 절대 그런 일은 없노라, 오해하지 말라 반발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정목사의 태도는 의외였다. 그는 마치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제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보셨군요......역시 다르십니다."

"어떡하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마약처럼 신의 저주를 받을 피조물은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살인보다 더한 죄악이라고 보는 입장이지요."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입장'이라는 단어를 거듭 두 번씩이나 구사하여 말의 흐름을 어색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내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라고 경식은 생각했다. 그는 혼돈 속에 빠져 허위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단순히 이복동생 때문에?

그때,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얼핏 경식의 머릿속을 스쳤다. 똥은 똥끼리 통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마약에 손을 대는 자들은 그런 부류의 자들과 끈이 이어져 있는 수가 많다. 그날 일을 돌이켜보건대, 아무리 강심장을 가지고 있고 성정이 악랄하다 하더라도 마약 따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경식이 옆에 있고, 구린내가 진동하는 그런 곳에서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구사하지는 못하리라......!

'범인과 단서는 바로 내 곁에 있다!'

속으로 뇌이며 경식은 신경줄을 팽팽히 당겼다. 그리고는 정목사의 표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일단 사정기관에 고발 조치하고 격리소로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직접 나서기 곤란하면 내가 주선해 제반 절차를 밟아드리지요."

정목사는 펄쩍 뛸듯이 놀라며 받았다.

"그건,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요?"

"놈은 보통 녀석이 아니거든요. 배는 다르지만......살아있는 사람 중에 녀석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납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잠깐 소연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시 후 경식이 다잡듯 물었다.

"행패를 부릴까 봐서 그러는 겁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그 문젠 간단합니다. 일단 수용소에 들어가면 절대로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퇴원했을 때는 멀쩡한 정상인이 돼 있을 거구요."

"그야 나도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왜지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뒤따를 겁니다."

"심각한 문제라뇨?"

"패거리가 뒤에 있거든요."

"패거리라면......?"

"몇 차례나 우리 집까지 몰려와 아랫목을 차지하고는...... , 이 말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뭔가 있다!'하고 경식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자세를 똑바로 고쳐앉았다.

"놈들의 행패가 심했단 말이군요? 몇 놈이나 되지요?"

"대개는 넷, 어떤 땐 예닐곱 명까지 떼거지로 몰려오곤 했지요."

"범죄 조직단 같은, 그런 냄새를 풍기지는 않고요?"

"왜 아니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놈들을 두고 고민하고,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경식은 조급해졌다. 눈치로 봐 경식의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으므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세히 좀......괴로우시겠지만 말입니다."

정목사는 알코올 기운에 의지하여 용기를 돋우려는 듯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잠깐 틈을 두고 나서 말했다.

"그놈들은 예사로 강도질까지 저지르고 다니는 놈들 같았습니다. 아니, 틀림없습니다."

"무슨 근거라도 있나요?"

"근거요? ......있지요. 우연찮게 놈들의 말을 엿들은 적이 있었는데, 제들끼리 키득대며 그러는 겁니다. 부부간 발가벗고 자는 것을 깨워 무슨 짓을 벌였을 때 진짜 신바람이 나더라는 둥, 어디에 갔을 때는......아아! 나로선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군요!"

경식은 술기운이 싸악 가시며 으스스한 한기까지 느껴지도록 긴장감이 팽배했다. 거의 동시에 그의 뇌리막에는 그날 밤 점백이 놈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혹시 놈들 가운데 왼쪽 턱 밑, 그러니까 요 부분에 빨간 반점 같은 게 있는 녀석은 없던가요?"

정목사는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부르짖었다.

"주여, 저로 하여금 거짓 증거가 되지 않게 하소서!"

경식은 온몸의 핏물이 정수리를 향해 치솟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소리쳤다.

"이건 거짓 증거 차원이 아니에요!"

"아아, 주여!"

경식은 교자상을 탕 치며 거푸 외쳤다.

"주여고 나발이고, 그런 건 예배당에나 가서 찾으시라구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경식은 경식대로 내부로부터 휘몰아치는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그랬고, 정목사는 그이대로 고통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했다. 경식은 속으로 뇌이고 또 뇌였다. '이 자가 입을 닫으면 그마저 희망은 사라진다. 어떡하든 그가 입을 열도록 참을성 있게 유도해야 한다!'

마침내 감정 제어 기능을 회복한 경식은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요. 내일 일찍 수사기관에서 찾아오면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됐습니까 목사님?"

비로소 정목사는 경식을 향해 똑바로 눈길을 보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보다도 돌아가신 자매님의 사건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저 아닙니까?"

"그래서요?"

"신형사, 아니 신선생의 심정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고요."

"......?"

"그래서 더 괴로운 겁니다."

"뭔가 내게 말해주지 않은 부분이 있단 말이군요?"

정목사는 입을 꾹 다물고 어둠이 깃든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식은 입술을 깨물며 그가 입 열기를 참을성을 끌어내 기다렸다.

마침내 정목사가 입을 열었다.

"난 그자가 범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요?"

"수사상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할 수 없이 털어놓는 겁니다."

눌러 참고 있던 조급함이 마침내 한계를 벗어나 버렸다.

"그놈들 가운데 점 박인 놈이 있다는 말이군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요?"

"말하자면 그런 거지요. 딱 한 번 같이 온 녀석들 가운데 왼쪽인가 오른쪽인가는 기억에 없지만, 어쨌든 턱 밑에 반창고를 붙인 자가 오긴 왔었는데......분명히 말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점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로 반창고를 붙인 것 같다 이 말씀이군요?"

"글쎄요, 내가 직접 떼어보지 않은 이상......"

", 확실히 좀 합시다!"하고 경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은지 종업원이 뛰어와 고개를 디밀고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조정기를 거쳤다. 경식은 경식대로 후회했다.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설득이 중요했다. 그가 입을 다문다면, 아니면 그 좋은 머리와 언변술로 적당히 핵심을 피한다면 일은 어긋나고 말게 분명했다.

잠시 후 경식은 화낸 걸 사과했다. 정목사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며 없었던 걸로 하자고 받아들였다.

경식이 사정하듯 말했다.

"제발,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언젠가 그 사람들끼리 하는 말 중에 점백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전붑니다."

"점백이......점백이라......"

중얼대며 경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목사는 그의 태도를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들은 것 같다고 했지 확실하게 들은 건 아닙니다."

"어쨌든......키가 크던가요?"

"보통보다 약간."

"그자가 어디 사는지 혹시 아나요?"

"전혀요."

경식은 정목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작하여 술 한 잔을 들이키고는 물었다.

"동생분이 살고 있는 그 어디쯤에 살고 있겠군요?"

"글쎄요-"

"동생분을 직접 만나면 알 수 있는 길이 있겠군요?"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 주여!"

경식은 빨리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뭔가 숨기고 계신 게 또 있군요?"

"숨기다니요?"

"점백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다고 하면서도 그자의 턱 밑에 반창고가 붙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보통 키보다 좀 크다는 말까지 했잖습니까?"

"몰라요-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혀 아무것도! 주여-"

부르짖으며 정목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탁자 위에 엎드렸다.

이튿날, 경식은 동료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옥니의 전과 사실과 거주지를 알아냈다.

 

 

4 아내의 제단

 

삐딱하게 열려진 양철대문 틈새로 옥니의 방을 살폈다. 방문 앞에는 댓돌과 비슷한 시멘트 발판이 있고, 그 위에 남자 구두와 빨간 살롱화가 한 켤레씩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같이 있는 여자는 바람난 어느 계집일지도 모르지만, 옥니가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갈보일 가능성이 컸다.

냇가 석축으로 다가가 창문을 통하여 확인할까 망설이던 경식은 곧 그만두었다. 주위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리 없고, 또 옥니에게 직접 들킬 염려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인내! 50프로의 인내와 50프로의 행운- 그렇다! 이미 행운의 여신은 정목사를 통해 입맞춤을 해왔지 않는가!'

계집은 해가 지면 일터로 나갈 확률이 크다. 아니면 집으로 가든지-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자.

오후 3, 아직 해가 지려면 다섯 시간은 좋이 기다려야 했다. 여름이라서 옥니의 방을 어렵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좋지만, 밤이 짧다는 것은 일을 해치우는 데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경식은 일단 간이음식점에 들러 냉면 한 그릇으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는 시간 죽이기에 안성마춤인 장소- 다방으로 들어갔다. 조급증이 일면서 마구 헝크러진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죽일 수 있었다.

각본은 치밀하고도 완벽하게 짜여져 있었다. 다만 장소에 문제가 생겼을 뿐이었다. 애초 각본은 옥니가 기거하는 방으로 정했지만, 현지 답사 결과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붉은 반점의 사내를 알아내는 선에서 그칠 계획이었지만, 막상 일을 처리하다 보면 감정이 개입돼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경식은 가까스로 감정을 자제하고는 있지만, 언제 어떤 동기에 의해 폭발할지 자신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럴 경우, 그것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고심 끝에 장소를 옮기기로 작정하고, 마땅한 곳을 물색하고자 다방을 나왔다.

시내를 관통하는 신작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걸을수록 건물이 차츰 낮아지더니, 이윽고 주택가에 접어들었다.

담배가 떨어져 골목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담배 간판이 붙은 구멍가게를 찾아내고 그곳에 들어섰다.

사십 대 중반쯤의 뚱뚱한 아낙이 비닐봉지에 라면을 집어넣으며 열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엄마는 좀 어떠시니?"

"아직도 못 일어나세요."

"저런, 쯧쯧!"

"죽고 싶다고 울기만 해요."

"그럴 테지. 하지만 그만하길 다행이지 뭘. 천만다행이야 정말."

"저 갈께요."

"그래, 어이 가거라. 엄마한테 내일이나 모레쯤 한번 들린다고 말씀드려 응? 그리고 동생들 좀 잘 돌봐주구. 알었지?"

"안녕히 계세요-"

한쪽 손에는 라면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다른 팔로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남방 소매로 눈자위를 비비며 소녀는 나갔다.

소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주인 아낙이 늦게사 눈길을 거두어 경식에게 향하며 뭘 드릴까요? 물었다.

"팔팔디럭스 한 갑요."

담배를 건네고 거스름돈을 챙기며 아낙이 혼잣말이듯 중얼댔다.

"세상 무서워서 어디 맘 놓고 살겠나 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낙은 그렇게 묻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시 빠른 말투로 받았다.

"글쎄, 저 애 말예요. 즈이 아버진 재작년에 뺑소니차에 치여 죽고, 즈이 엄마가 보험회사에 다니며 근근하게 삼남맬 길러왔는데, 며칠 전에 강도를 당했지 뭐우. 잔돈 여기 있수. 이백 원 맞지요?"

"그래서요?"

"수금한 돈 죄다 뺏기고, 애들 보는 앞에서 몸까지 당했다나 봐요."

"저런! 그래서 범인은 잡았습니까?"

"옆집 사람이 신고는 해줬는데, 내 일처럼 관에서 신경을 써주나요."

"집안이 말이 아니겠군요."

"말하면 뭣하우. 우리 세금 걷어다 먹고사는 관사람들은 다들 뭐하고 있는지 원! 쯧쯧쯧!"

경식은 얼굴이 화끈했다. 자신의 전직을 알아보고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직접 당하기 전인 그때는 정말이지 당사자의 그 절실함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저 봉급을 받아먹고 사는 만큼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또는 타성에 젖어 그럭저럭 공직생활을 꾸려나갔었다.

"많이 파세요."

말을 놓자마자 경식은 도망치듯 구멍가게를 빠져나왔다.

골목길을 걸으며 그는 문득 이른바 어느 인권변호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폐앓이를 앓는 사람처럼 희멀건 한 얼굴에 사이다병 밑바닥 같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동료직원의 피의자 가혹행위에 대해 캐묻고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한바탕 설교를 했었다.

경식은 당시를 떠올리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인권? 존엄성? 먹물이나 빨아라! 느이 마누라가 겁탈당하고 느이 가정이 파괴돼도 인권 찾고 존엄성 찾을래?'

벽돌 더미가 경식의 가는 길을 막았다. 그것을 비켜 가려고 옆으로 돌았다. 그러던 경식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외쳤다.

'바로 저기다!'

맞은편에 단층 슬래브집이 있었다. 열려진 현관문을 통하여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수리 중이었다. 방 칸수를 늘리려고 가장자리 벽에 잇대어 두어 평 남짓한 부엌을 들이고, 그 방향으로 쪽문을 내는 중이었다. 문틀만 휑하게 붙박혀 있었다.

안방은 보일러 배선을 마치고 시멘트를 발라놓은 상태였다. 방 가장자리 군데군데에는 아직껏 축축하게 물기 밴 얼룩이 있었다. 그 외 가구라든가 집기 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웃방에는 낡은 비닐장판이 깔려 있고, 일꾼들이 새참을 먹은 듯 라면 봉지며 빈 술병, 녹슨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냄비 따위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 모든 점으로 미루어봐 전에 살던 집주인은 이사를 했고, 새로 들어올 사람이 집을 개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뜯어 젖힌 주방까지 돌아보았다. 개수대며 붙박이 찬장까지 모두 뜯겨져 있었고, 새것으로 교체된 보일러와 안방과는 아직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집주인이 기거하고 있을 가능성은 백프로 사라졌다.

"완벽해!"하고 경식은 신음처럼 중얼댔다.

서너 평 남짓한 마당으로 나온 경식은 집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새로 지은 집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랫집은 아직 입주자 없이 비어 있었고, 윗집은 높다란 담벽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완벽해. 아주 완벽하다구!"

쾌재를 부르며 경식은 골목을 돌아 도로로 나왔다.

시내 중심부와 이어지는 널따란 6차선 도로에 이르렀다. 걸어온 길을 눈 안에 담아두려고 뒤돌아보았다. 점찍어 놓은 그 빈 집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눈에 완벽하게 익혀두려고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표적될 만한 것들- 길가에 있는 높은 건물이며 샛길 따위를 하나 하나 사진 찍듯 뇌리막에 새겨넣었다.

끈적한 바람이 시익 불어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제길헐, 비가 올 모양이야!"

불안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곧 회심의 미소로 바뀌었다.

"비는 모든 증거를 씻어준다. 발자국과, 소리까지도......!"

시내 중심부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시킨 짬뽕은 국물만 마셨다. 긴장과 흥분이 교차되어 허기나 입맛 따위는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강심장을 타고나지 못한 경식이었다. '신형사'라는 칭호를 들을 때마다 경식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수사과 조사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서나 받는 신분으로, 형사라는 칭호를 듣는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물론 강력사건이 터지거나 사건이 많아 외근형사 근무에 지원을 나갈 때도 종종 있긴 있었다. 그럴 때면 경식은 사건보다 주위의 새로운 사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시 외곽이나 강변, 산행을 하다 새롭고 감각에 맞는 전경이 보이면 그는 거의 습관적으로 경찰 수첩에 스케치를 하곤 했는데, 그러다 상관에게 목격돼 질책을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자네는 환쟁이나 되지 뭣하러 경찰은 들어왔어!"

그러나 글씨체가 좋고 타이핑이 빠르고, 또한 남다른 재치가 있어 조서를 받아 올리면 상관은 물론 검찰 측에서도 그의 실력을 인정해 주던 터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수사 능력이 아니라 요령과 격식에 맞춘 기술에 불과했다. 눈썰미가 있고 평균 수준 이상의 아이큐와 성실성만 갖추면 누구고 해낼 수 있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경찰복을 입게 된 동기 자체도 자신이 원해서거나 소명의식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군 복무 중 홀어머니마저 돌아가 제대하자마자 천애고아가 돼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다 복학하려면 여러 가지 난제가 걸려 있어 방황하고 있는데, 군에서 만난 동기 녀석이 찾아와 말했다.

"재미로 경찰시험이나 보자."

그의 말마따나 재미로 시험을 봤는데 녀석은 낙방하고 경식은 합격했다. 그 뒤로는 코뚜레에 매달린 소처럼 끌려다니는 세월을 보냈다.

중국음식점을 나와 한동안 서성였다. 아직 6시 반, 앞으로 세 시간 이상 남은 시간을 어디서든 죽여야 했다. 긴장과 흥분, 그리고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흥분 상태를 눅일 셈을 대고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술집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과음하게 되면 실수가 따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든 흥분 상태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차가운 이성, 뱀의 지혜가 필요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성실 하나로 상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리고 동료들 간에도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다. 체질에 맞지 않는 경찰 생활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꾸려나갔었다.

그랬는데, 아내의 사건을 당한 뒤 석 달 동안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지 않는가. 걸핏하면 지각을 하거나 결근도 했다. 상관들은 경식의 처지를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공무 수행상 차질을 빚고 있는 이상 관용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경식은 변두리 파출소 외근으로 전보되었고, 근무한 지 닷새 만에 사표를 내던지고 말았다.

어떡하든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래야만 뱀의 지혜를 유지할 수 있을 터.

문득 여자를 사서 시간을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를 잃고 난 뒤부터 여자를 생각할 여유마저 없었다. 갑자기 성욕이 충동질 쳤다. 하필이면 왜 이런 중요한 시기에 여자 생각을 떠올렸을까?

천만에! 그럴 수는 없었다. 바야흐로 지금 하려는 행동은 아내의 제단 앞에서 의식을 치르는 경건함을 가져야 했다!

경식은 사우나탕을 겨냥하고 걸음을 옮겼다. 목욕재계하는 심정으로.

9시경.

그리도 후덥지근하더니, 마침내 장대비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받쳐 든 비닐우산에 구멍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가는 도중, 미리 짜놓은 스케쥴에 따라 천씨씨 생맥주 두 잔을 억지로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호프집을 나오는데, 벌써부터 요의가 치밀어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야 했다. 아내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면.

옥니가 사는 집 대문은 삐딱하게 열려져 있었다. 난감했다. 들어올 사람이 있어 일부러 열어놓았지 싶었다.

'침착하자! 치밀해야 한다!'

경식은 속으로 뇌이며 대문을 살폈다. 희망적이었다. 다소 안심이 되었다. 대문을 잠그려면 두 쪽의 대문짝 이를 꼭 맞춰야 될 테고, 그러다 보면 각목으로 된 대문틀은 삭을대로 삭아 지딱 부러질 것 같았다. 하긴 안집이나, 옥니의 하고 사는 꼬락서니를 봐서 훔쳐갈 만한 살림살이를 지니고 살 형편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저래 대문은 항상 열려져 있는 게 당연했다......결심이 선 이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

옥니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경식은 마당으로 써억 들어섰다. 그리고는 주변부터 꼼꼼히 살폈다. 안채 정면에 있는, 담벼락에 붙여 지은 변소에 꼬마 알전구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음에 걸려 한동안 변소를 살폈다. 별다른 건 없었다. 신경줄을 한껏 당겨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만 귓구멍을 가득 채울 뿐, 인기척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완벽해!'

옥니의 방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달랑 구두 한 켤레만 놓여져 있었다. 짐작한 대로 옥니의 계집은 제 갈길로 간 모양이었다.

, , .

세 번째 가서야,

"누구야?"

귀에 익은 목소리- 폐결핵 말기 환자거나 소릿꾼, 무당, 부흥 목사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쉰 목소리였다. 가슴이 들뛰며 말문이 막혔다. 뒤따라 요의가 급작히 상승했다.

"어떤 자식이야!"하고 옥니가 중얼댔다.

경식은 잠자코 기다렸다.

문이 열렸다. 형광등 반사광을 얹은 곱슬머리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떤 자식이 장난치고 있는 거야? 바가지를 확 깨기 전에 알아서 해!"

문 옆 바람벽에 바짝 붙어 있던 경식이 앞으로 써억 나섰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똥덩어리야?"

불빛을 받아 훤히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경식은 일단 안심했다.

"정목사님 심부름이오."

녀석의 얼굴에 하얀 옥니가 드러났다.

", 부탁한 걸 갖고 오셨군. 들어오지 그래?"

"발도 젖고 해서......"

", 그렇군. 그럼 그것만 주고 가면 되겠네. 들어온다고 해도 방이 워낙 엉망이라서 쪽팔리는데 잘됐지 뭐. 안그렇소 형씨? 헤헷."

"목소리 좀 낮출 수 없나?"

"? 무슨 일이 있었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이대로 돌아가 버릴 거야!"

"안 돼!"

외치며 옥니는 경식의 팔소매를 감아쥐었다. 손이 몹시 떨리고 있는 것으로 봐 금단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서둘러야겠군! 경식은 조급해졌다. 들고 있던 손가방을 들어 보이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한 건 이 가방 속에 있어."

"빨리 줘."

"여기선 안 돼."

"?"

경식은 연기에 효과를 더하려고 잠깐 시간차를 두고 나서 대꾸했다.

"누가 내 뒤를 밟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넘겨주고 빨리 가면 되잖아?"

"내 팔목에 은팔찌를 채우려고 작정을 했어?"

"그런가? 그럼 어떡하란 말야 씨!"

"넘겨주기 전에 할 얘기도 있고,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어떨까?"

"안전한 곳?"

"따라와."

"수작부리는 건 아니지?"

"오기 싫으면 관둬."

퉁명스레 내뱉고 경식은 접었던 우산을 펼쳤다. 서너 발짝 떼자, 녀석이 굴러떨어지듯 문밖으로 다급히 쫓아 나오며 말했다.

"갈께. 같이 가자구."

"진작 그럴 것이지."

경식은 비틀대는 옥니를 부축해 우산 속으로 끌어들였다. 녀석은 온몸의 체중을 경식에게 실리고 비틀대며 걸었다. 불거진 뼈가 경식의 옷을 비집고 쿡쿡 찔렀다.

"가시만 남았군?"하고 경식은 혼잣말이듯 중얼댔다.

"가시?"

"고양이가 안 물어가기 다행이야."

"고양이? 무슨 말이야?"

"너무 말라비틀어져 내 옆구리를 가시가 쿡쿡 찌르고 있단 말이야."

"헤헤, 난 무슨 말이라구. 그래서 내 별명이 쥐갈비였어."

"그 몸뚱일 가지고 건달 노릇을 해냈어?"

"사람 무시하지 마. 이래 봬도 칼침 하나는 끝내준다구. 눈 깜짝하는 사이 눈썹 한 개를 잘라내는 기술이니까."

"흐응, 그래? 그렇담, 늘 칼을 지니고 다니겠군?"

"미제 재크나이프지. 보여주까?"

미리 계획한 대로 먹혀들어 가는 것에 쾌재를 부르며 경식은 태연한 척 가장하는데 신경을 온통 그러모았다.

"터키제가 더 좋다던데?"

"보여주지."

녀석은 몸을 굽혀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렸다. 종아리에서 칼을 빼어 찰칵 하고 펴 보였다. 경식은 과장되게 놀라는 척하며 놈에게서 훌쩍 물러났다.

녀석이 흐흥, 코웃음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 겁나? 삐딱하게 나오면 이걸로 뱃가죽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빼앗을 수도 있어."

"안 집어넣을 거야?"

"알았어."

녀석이 바짓가랑이를 걷어치려고 몸을 구부리자, 경식은 재빨리 뒷덜미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비 맞잖아. 대충 아무데나 넣어."

녀석은 접은 칼을 남방 새끼호주머니에 찔러넣고는 물었다.

"근데, 왜 다른 사람이 왔지? 그 구렛나룻 새낀 깜방 갔나? 아님, 뒈졌어?"

'구렛나룻을 통해 마약을 공급받아왔다?'

경식은 쾌재를 불렀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을 때 협상 카드로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 구렛나룻의 사내?

"구렛나룻 새낀 어떻게 됐냐고 물었잖아!"하고 녀석이 다그쳤다.

그제서야 경식은 골똘하던 생각에서 벗어나며 어눌하게 대꾸했다.

"나도 잘은 몰라. 아마 물건 땜에 홍콩에 갔을 걸."

"에에- 뭔가 속이고 있는 거 아냐? 앞뒤가 안 맞아. 구렛나룻 그 자식은 수배 중인걸."

경식은 움찔했다. 잘못하다간 산통 다 깨질지 모른다는 생각.

"암튼 잘 모른다고 했잖아! 그리고 지금부턴 더 이상 말 시키지 마. 날 미행하던 놈이 지금까지 따라오나 살펴야 되니까. 알았어?"

"알았어."

마침내 시내를 관통하는 6차선 도로를 건넜다.

녀석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어디 가서 그걸 주겠다는 거야? 여기서 멀어?"

경식도 걸음을 세우고 녀석을 똑바로 쏘아보며 받았다.

"너 정말 이렇게 말이 많을 거야? 그냥 가 버릴까?"

그리고는 걸음을 재게 놀려 훌쩍 앞서 나섰다.

", 안 돼!"하고 외치고 난 녀석은 다급히 따라붙어 경식의 팔소매를 잡고 애원하듯 덧붙였다.

"알았어, 알았다구. 하자는 대로 할께. 정말여. 하자는 대로 할 거라구."

경식은 자신의 말을 정당화시키려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잠깐 잊었던 요의가 다시 치밀어 고통스러웠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여전히 빗물은 주룩주룩 쏟아져 내렸다. 아스팔트에 떨어지면서 비산되는 빗방울의 파편가루와 빗줄기끼리 부딪치면서 으깨진 가루비가 안개처럼 부옇게 시야를 가렸다. 그것이 그들을 은폐시켜주는 데다, 거리에 행인도 뜸해 경식은 한껏 고무되었다.

 

 

5. 0.25그램

 

마침내 빈집에 다다랐다.

경식은 움찔했다. 대문이 닫혀 있었다. 누군가가 다녀간 게 틀림없었다. 집안에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난감했다. 그러나 옥니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했다.

'밀고 나가자!'

대문짝을 몸으로 밀었다. 쉽게 열렸다. 안으로 빗장이 걸려 있지 않았다는 것은 곧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허세롭게, 헛기침까지 하며 당당하게 마당으로 들어섰다. 옥니는 따라오지 않고 대문 밖에서 머뭇거렸다.

"안 들어올 거야?"

"이상하다? 설마 날 여기서 해꼬지하려는 건 아니지?"

"짜아식, 여긴 내 집이야 임마. 요번에 새로 샀는데, 수리 중이지."

"그래? 쐬가루 좀 만진 모양이지?"

"홈런 한 방 날렸지. 앞으로 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이 집으로 와서 그걸 가져갈 수 있어."

", 거 괜찮은데. 목사형도 알고 있어?"

"?"

"여기 집 산 거 말야."

"물론이지. 느이 형이 모자란 돈 보태주기까지 했는 걸."

"그 짠돌이가?"

"다 널 위해서야."

"천당은 맡아놨군. 헤헤헷."

그제부터 녀석은 순순히 경식의 뒤를 좇았다.

경식이 앞서 방에 들어가 불을 켰다. 천장에 매달린 산데리아에는 네 개의 장식용 전구가 꽂혀 있었다. 스위치 하나에 두 개씩 켜지게 돼 있었는데, 경식은 스위치 하나만 올렸다.

암순응 충격에 현기증을 일으키며 오줌을 지렸다. 방광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뒤따랐다. 이를 악물어 참았다.

뒤따라 들어온 옥니는 아예 한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벽을 짚으며 비트적거렸다.

정신을 가다듬은 경식은 현관문과 방문을 차례로 닫았다. 도아락 배꼽까지 확실하게 눌러놨다.

늦게사 녀석도 정신을 차린 듯 찡그려붙인 눈을 들어 경식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댔다.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그럴테지. 정목사하고는 형제간처럼 가까이 지내는 사이니까."

잠시 긴장하는 눈치더니, 녀석이 외치듯 말했다.

"- 그날 목사형하고 같이 있던 자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식은 잽싸게 녀석의 팔을 비틀어 등 뒤로 돌렸다. 녀석도 만만치는 않았다. 순발력을 발휘하여 날렵하게 몸을 굽히며 비틀리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바른쪽 다리를 더듬었다. 경식은 서둘러 녀석의 남방 호주머니에서 재크나이프를 꺼내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하고 녀석이 당황해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새끼호주머니에 재크나이프를 넣었다는 것을 깜박 잊고 평소의 습관대로 바른쪽 종아리를 더듬었던 실수를 늦게사 깨닫고 있었다. 녀석은 이빨을 으드득 갈면서 소리쳤다.

"X, 죽여버릴 거야! ."

경식은 왼쪽 눈 언저리에 날아와 붙은 녀석의 가래침을 손등으로 닦고 나서 주먹을 높이 들었다.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 문득 저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충고의 목소리가 있었다.

'단서! 침착! 완벽!'

경식은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내렸다.

"이거 놔......으으, 팔 부러져!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잠자코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냉랭하게 경고한 경식은 손가방 손잡이를 입에 물고 지퍼를 내린 뒤 붕대를 꺼냈다. 그리고는 놈의 나머지 팔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놈은 잡히지 않으려고 팔을 휘휘 내두르며 반항했다. 경식은 잡힌 녀석의 팔을 더욱 머리 쪽으로 밀어 올렸다. 뚝하고 관절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진짜 부러져 새꺄!"

"얌전하게 있을 거야?"

"그럴께. 알았다구."

놈은 순순히 다른 팔을 잡혀줬다. 경식은 붕대를 풀어 놈의 팔을 X자로 교차시킨 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놈의 엉덩이를 밀어내며 말했다.

"무릎 꿇어!"

"소리 지를 거야."

"맘대로 해."

"사람 살려! 강도야!"

경식이 녀석의 눈앞에 주먹을 휘둘러 보이며 말했다.

"더 크게!"

"사람 살려! 아무도 없어요!"

"한 번 더!"

"그래, 계속 소리쳐주지. 강도야! 사람 살려!"

"다시 한번 더. 그러고 나면 그 징그런 옥니를 몽땅 뽑아줄께."

한동안 험악하게 일그러진 경식의 얼굴과 주먹을 번갈아보던 옥니는 이윽고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말했다.

"좋았어. 무릎 꿇을게"

"이제 알았군, 아무리 소릴 질러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다는 걸."

"그것도 그거지만, 난 원래 타협을 좋아하지. 존게 존거 아냐?"

"제대로 꿇어앉아."

"알았어. 이렇게?"

놈이 바로 꿇어앉자마자 경식은 녀석의 발목을 모아 붕대로 묶었다.

"근데, 왜 이러는 거야? 형이 이렇게 하라고 시킨 거야?"

경식은 머뭇거렸다. 헷갈렸다. 녀석의 말투는 순진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문제의 심각성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면 그간의 행실로 봐 경식의 마음다짐을 흐트리기 위한 교활한 수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놈을 완벽하게 손아귀에 넣었으므로 그제부터는 침착하고 치밀하게 요리해 나가기로 했다. 우선은 정목사에 대해 그간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그것은 일이 잘못 꼬였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 알고 싶어?"

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지. 느이 형이 말야, 혼 좀 내주고 약속을 받아오랬어."

"약속?"

"앞으로 교회하고 형네집 근처는 얼찐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

"그래? 약속 안 하면?"

경식은 바닥에 놓은 손가방을 구두코로 가리키며 대답을 주었다.

"그땐 이것도 없고, 여기서 끝장을 내야겠지."

녀석이 피식 웃고는 받았다.

"날 죽인다고? 잘 될까?"

"그야 간단하지. 우선 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고, 시체는 요 밑에 있는 비밀 지하실에서 처리해 버리면 되니까. 단 한 시간 만에 물로 만들든지 재로 만들든지, 결정은 그때 가서 내리지."

무턱대고 뱉은 말인데, 기대 이상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놈은 대번에 얼굴색이 파랗게 변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안 돼! 그 새끼, 형 말야, 그러고도 남을 자식이야! 나쁜 자식, 지옥에나 떨어져라!"

"형한테 그게 무슨 악담이야? 그분은 성직자이셔 임마."

"성직자? 목사를 말하는 거야?"

"그래."

"순 가짜야, 가짜!"

옳다구나, 하는 맘으로 호기심이 바짝 동하였다.

"가짜라니?"

대답하려던 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경식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는 되물었다.

"형제처럼 지냈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

경식은 움찔했다.

", 그저......교회 건물 짓는 거 내가 맡으려고 사귀다 친하게 된 것뿐이야."

"그렇군. 그 자식 말야, 진짜 도적놈에 사기꾼이야!"

"도적놈에 사기꾼?"

"좋았어! 저 그렇게 하나 내가 다 까발리나 피장파장이야."

"그래, 이해가 가는군."

"그 자식 고등학교 가짜 졸업장 내가 만들어준 거라구. 그 은혜도 모르고 날......"

"그래서?"

"내가 머리 안 돌려줬으면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주제에 신학대학 갈 수 있어? 엉터리 신학대학이지만 말야."

"그리고는?"

"그런데 씨앙, 목사 자격증 따니까 같이 고생했던 형수 발로 차고......그리고 어땠는지 알아?"

놈은 계속 외치듯 떠벌였다. 물론 정목사에 대한 험담 일변도였다. 비행을 낱낱이 까발리기도 했다. 심심찮게 매스컴을 통하여 성직자가 어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충격을 주곤 했던 수준의 그런 것들이었다.

호기심은 바짝 동했지만, 더 이상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요의가 치밀어 이미 몇 차례나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됐어. 그만해."하고 경식은 일단 말을 끊었다.

"나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 어떡할 거야? 목사형한테 또 갈 거야 안 갈 거야?"

"내가 약속하고 또 가면?"

"흐음, 약속하지 못하겠단 말이지?"

경식은 손가방에서 흰 면장갑부터 꺼냈다. 그리고는 증류수와 주사기, 백색 가루약이 든 비닐봉지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녀석의 눈알이 툭 튀어나오며 금세 금단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으으, 그거구나! 빨리 어떻게 해줘!"

"약속을 하지 못하겠다면서?"

"내가 언제 그랬어? 할께. 약속할께. 정말입니다요 형님!"

"못 믿겠는데?"

"믿으세요 형님. 난 안 한다면 머리가 두쪽나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요. 으으, 미쳐!"

경식은 녀석의 등을 철썩 갈기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믿어주지."

"아이구 형님, 감사합니다요!"

경식은 일부러 느긋한 손놀림으로 꺼낸 것들을 녀석의 눈앞에 늘어놓았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구토증을 일으켰다. 경식은 입술이 비틀리도록 회심의 미소를 마음껏 머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금 이 순간을 별러왔던가!

그러나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놔주기 전에 네가 또 한 가지 해야 될 일이 있어."

"뭔데? 말만 하라구. 뭐든지 말만 하시라니까!"

"너 패거리 지어 나쁜 짓 온통 저지르고 다녔지?"

"나쁜 짓? 무슨 나쁜 짓?"

"이 짜식이 시치밀 뗄 작정이군. 화나면 이거 콱 밟아버릴 거야!"

경식은 놈의 앞에 놓인 주사기와 비닐봉지를 향해 구둣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놈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안 돼! 말할께. 다 털어놀 테니까 그것만은 제- !"

"좋았어. 만약 실토 중에 수작부리면 그땐 사정없이 짓밟아 버릴 거야!"

"으으, 제발! 으웩, 아아 목타!"

"어서 말해. 어떤 나쁜 짓을 벌이고 다녔는지."

"우선 그것부터 한 대 맞아야 해. 지금 말할 기운도 없단 말야. 정말야. - !"

"알았어. 적선부터 조금 해주지. 우선 맛만 봐. 진짠가 가짠가."

"고마워요 형님. 감사해요."

"이제사 고분고분하군."하면서 경식은 엄지와 검지로 가루약을 집어 들고 덧붙였다.

"입 벌려."

"-"

"혓바닥 쭈욱 빼."

"-"

가루약을 혓바닥에 문질러주고 나서 경식이 물었다.

"어때?"

"좋아. 아주 좋아."

"진짜야?"

"진짜야. 빨리 주사도 놔줘 형님."

"알았어, 기다려."

경식은 증류수병 모가지를 카터로 잘라내고, 그 속에 필로폰 가루를 희석시켜 놈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오줌보가 터질듯이 고통스러웠다. 지린 오줌물로 사타구니와 허벅지까지 축축해졌는데도 조금도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에 들뜨며 통쾌하게만 느껴졌다.

놈이 눈을 좁혀 주사기를 응시하며 주절댔다.

"너무 많은 거 아냐? 일회용 주사기에 든 것이 정량인데......"

", 말이 대단히 많은 놈이구나.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잖아 임마!"

"알았어요. 반만 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가 버릴까?"

"아냐! 잘못했어요 형님. 암말 않을께."

순간, 경식의 머릿속에 그날 밤의 한 장면이 그려졌다. 범인은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 장롱 옆에 싸놓은 인분덩어리로 끌고 가 얼굴을 처박으며 다그쳤었다. 먹어 쌍년아! 넌 우릴 애먹인 만큼 그만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구! 아내는 반항했다. 그때 경식의 목에 생선회칼을 대고 있던 두목이 쓰윽 저미며 말했다. 봤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느이 남편 모가지는 댕강 잘라지는 거야. 알아서 하라구! 으으, 알았어요.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우리 그이한테만은...... 외치고 난 아내는 놈들이 내장에서 쏟아놓은 인분을 손으로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뒤로 일어났던 일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옥니를 노려보는 경식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쓰레기 인간!"하고 낮게 읊조리고 난 경식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멀뚱이 건너다보고 있는 옥니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고개 돌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뒤통수 치려구?"

"너같은 쓰레기로 내 손 더럽히고 싶지 않아."

"가만히 보고만 있을께."

"고개 돌리라고 말했어!"

"보고만 있는다니까."

경식은 벌떡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구둣발을 높이 들어 단번에 주사기를 박살냈다. 놈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아아, 안 돼요 형님! 난 어떡하라구!"

", 이제 나머지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난 돌아갈 테니까."

"그건 안 돼! 나 좀 어떻게 해주고 가라구!"

시간을 두고 느릿하게 세 걸음째 발짝을 떼던 경식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말 고분고분 잘 듣는 거지?"

"물론이지요 형님. 물론 듣고 말고요. - !"

"알았어."

경식은 그때를 대비해 여벌로 가져온 주사기를 손가방에서 꺼냈다. 녀석의 풀어진 눈에서 빛이 뿌려졌다.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고개 돌려."하고 경식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근데 왜 사뭇 고개를 돌리라고 하는 거지?"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지? 요번 게 마지막인데, 아까처럼 콱 밟아버릴까?"

", 아니요. 알았어요 알았어."

놈이 고개를 돌렸다.

0.25그램 정도가 일회분 정량이라고 했다. 그것은 대충 귀이개로 두 개 정도의 양이었다. 하지만, 놈에게 봉사하고 싶어서 온 경식은 아니었다. 경식은 증류수병에 가루약을 움큼 더 넣어 흔들었다.

"너무 많이 넣은 것 아냐? 죽는 수가 있다구."

그러고 보니 녀석은 곁눈질로 경식이 하는 행동을 일일이 엿보고 있었다. 경식은 화가 났지만, 닥달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대만제라서 약효가 약한 거야. 네가 죽으면 가장 곤란한 건 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말해놓고 경식은 움찔했다. 나오는대로 지껄인 말인데, 대만제가 약효가 적은지 어쩐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약효는 어떤 것이나 같지 싶었다. 하지만, 무식한 말 한마디가 오히려 녀석에게 신뢰감을 주고 있었다.

"그래? 대만제는 약효가 적대? 전문가라 틀리군."

"이 장사 십 년이 넘었으니까."

"도사겠군."

"도사는 못돼도 박사 정도는 되지."하면서 증류수병을 흔든 후 잠깐 시간차를 두고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원래 흥정을 좋아하지. 내가 너한테 봉사하는 대신 넌 내가 묻는대로 대답만 해주면 그걸로 다 되는 거야."

녀석은 무슨 말인가 싶은지 긴장한 얼굴로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감정을 억제하며 경식은 이어 말했다.

"내 요구사항을 들어줄 거야 말 거야?"

"헤헷. 난 타협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전 세계 인류 평화를 위해서."

"좋아. 그럼 내가 묻는대로 솔직하게 모두 대답해 주겠다 이 말이지?"

"근데, 왜 심부름을 왔다며 그렇게 상관없는 걸 자꾸 묻고 그래?"

"간단하지. 나중에 네가 날 물고 늘어질 때를 대비해서 코를 꿰둬야 하거든. 내 말 이해가 가나?"

그제서야 놈은 조금 안심이 되는 듯 굳었던 표정을 다소 풀며 받았다.

", 물귀신 작전......조오치. 인생은 어차피 비지니스니까."

"주둥이 한번 잘 놀리는군."

"나도 왕년에는 책깨나 읽은 사람이었다구."

요의가 갑자기 또 치밀었다. 이제는 서둘러야 했다.

", 말해 봐. 어떤 짓거리를 저지르고 다녔지?"

"춤을 췄지. 춤 하나는 끝내주거든."

"지금부터는 경어를 붙인다.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지?"

"경어라니?"

"반말하지 마란 말야 임마!"

갑작스런 말에 녀석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짐짓 도끼눈으로 변했다. 그러나 눈길이 주사기에 와닿자 표정은 누그러지고, 아첨의 미소까지 띠었다.

"알았어- ."

"알았으면 좀 전에 물은 것 대답해."

", 춤을 췄다는 것......나도 그땐 끝내줬지."

"!"

"."

"계속해."

"돈푼깨나 만지는 과부, 바람난 여편네, 늙다리 사장족 마누라, 걸리는 대로 꼬셔서 주워먹었지요. 헤헷."

"그리고는?"

"한창 돌아갈 때 귀거리 따고 침발라 반지도 빼고, 그리고 목걸이는 이빨로 끊어 챙기기도 하고, 대충 그랬지요. 그년들 춤에 취하면 무슨 짓을 해도 모르니까. 붕대로 칭칭 감은 연장으로 그년들 사타구니에 대고 슬슬 문지르는데 미치지 않고 배겨나나요......대충 그렇습니다. 헤헷."

경식은 말없이 주사기를 땅에 놓고 구둣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지긋이 밟아 비틀었다.

"아이고 형님! 왜 갑자기 이러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나? 넌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 장난을 걸고 있어."

"이러지 마세요 형님! 전 절대로......"

놈이 외치며 자신의 손과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경식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동작을 취하다 제풀에 앞으로 폭 고꾸라졌다. 그리고는 버러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가까스로 상체를 일이키고는 주사기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알고 싶은 거요 형님. 제발 사람 놀래키지 말고 말씀만 하시라구요. 권사장님 딸 따먹고 돈 우려낸 거 말이오? 그건 권사장이 없었던 걸로 하자고 사정해 합의를 봤습니다요. 지금은 치과의사한테 시집가 잘 살고 있잖아요? 난 타협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거 잘 아시면서."

"이 자식, 여전하군!"하면서 경식은 주사기를 발로 툭 차 방구석으로 둥굴어가게 했다.

"아이구 형님,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녀석은 상체를 기울이며 그것을 줍는 동작을 취하다 또다시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찧어 껍질이 벗겨지고, 대번 핏물이 솟았다. 경식은 아차 싶었다. 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스스로 제몸을 책임질 수 없는 폐인이었다.

당장 닥달을 그만두지 않으면 머리통이 깨져도 주사기에 집착하며 나뒹굴 터였다.

"좋아, 됐어. 이제부터는 내 말 순순히 듣는 거지?"

"물론이죠 선생님."

"너하고 어울린 패거리 조직 이름이 뭔지 솔직히 대봐."

"특별히 만든 단체 같은 건 없지요. 그저 필요할 때 모여서 그때그때 일을 꾸몄을 뿐이었으니까. 아아, 목타!"

"그 패거리 가운데 턱 밑에, 바로 여기쯤에 빨간 점 있는 놈이 있지?"

"글쎄- 누굴 말하는 건지 원......근데 왜 그런 걸 자꾸 묻는 거야? 그런 놈하고 한판 붙었었어?"

"경어!"

"아참, 경어! 안 반말."

"빨간 점 있는 놈이 있었지?"

"글쎄- ."

"그런 놈이 있었잖아 임마!"

그제서야 옥니는 생각이 난다는 듯 희색을 띠며 외치듯 말했다.

", 종관이형!"

"종관이? 점이 큰가?"

"크죠."

"얼마나?"

"안경알만하게."

"무슨 안경?"

"조금 작은 안경......하여튼 큰 점입니다."

"붉은 점이야?"

", 그렇지요. 처녀 젖꼭지처럼 약간 불그스름......아니, 빨갛지요. 홍시감처럼."

"목사형네 집에 자주 왔구?"

"자주 왔지요. 옛날에 그 형하고 한때 동업한 적이 있었으니까."

"무슨 동업?"

"에이, 형님두, 잘 아시면서 묻습니까? 그 뒤로 종관이형한테 쇳가루 좀 빼앗겼지요. 나발 안 부는 조건으로."

', 이제 꼬리가 보이는구나!'

경식은 눈자위가 화끈했다. 서럽고 분통이 터져 당장 주저 앉아 엉엉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야 해결이 나겠구나......그 처절한 방황과 좌절! 하지만 이럴수록 침착하자. 아내에게 오물을 먹였던 놈, 아내의 음부를 장난감 갖고 놀듯 하면서 제 성기를 삽입시키던 놈, 그리고 또 다른 놈, 그 세 놈까지 찾아내 하나 하나 그만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려면 더욱 치밀하고, 침착해야 했다.

"그 종관이라는 자와 같이 어울려 다니던 똘만이들도 있지?"

"그야 물론이지요."

"누구누군가? 지금도 어울리나?"

"모르지요 그건. 서로 소식이 끊긴 지 꽤 오래됐으니까."

", 그래? 요 주사기 맛을 보고 싶지 않다 이거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아아, 목타!"

녀석은 몸을 뒤틀며 구역질을 했다. 창백한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칼, 유령을 보고 있는 듯했다. 경식은 더욱 고통스러워하도록 시간을 끈 뒤 물었다.

"종관이라는 놈,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만 알려주면 돼."

"요 시내요. 됐어요 형님? 약속대로 다된 거지요?"

"아니, 한 가지 더 남았어."

"차라리 날 죽여버려 짜식아!"하고 옥니는 빼락 소리치며 발악을 했다.

경식은 동요없이 잠시 시간을 끈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만 자세히 실토하면 그것으로 끝이야."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이무기 그 새끼 꺼 봉고차 몰고다니며 둥굴어 다니는 계집 맛도 보고, 돈이 아쉬우면 가방도 뻑치고......대충 그랬어요. 제에발!"

"그뿐이야?"

"없다니까!"

"그래?"

경식은 시간을 두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독기를 품고 맞바라보던 녀석은,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경식의 얼굴과 주삿바늘을 번갈아 보며 얼굴에는 차차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하고 경식은 냉랭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알았어요. 말할께요. 따악 세 탕 뛴 적이 있었지요."

"어떻게?"

"밤에 실례하러 들어간 거, 그런 거 있잖습니까? 하지만 오래된 일이지요. 아주 오래된."

"종관이하고?"

"아니요. 그 형은......"

"계속해!"

"그 형하고는......"

"이 짜식이!"

경식은 주사기를 집어들어 벽 쪽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놈이 다급하게 외쳤다.

"했어요 아저씨, 아니 형님. 같이 했다니까요."

"어떻게 했는지 한대로 자세히 말해."

"꼼짝마라고 겁주고 나서......한 집에서는 알아서 다 꺼내 주어 봐줬고, 다른 한 집에서는 반항하길래 좀 주물러줬고......"

"오물을 주워먹게도 하구?"

"오물이라뇨?"

"흉물 떨지 마! 나 지금 화나고 있어!"하고 경식은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가라앉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느이들이 똥을 싸놓고 먹게 했지? 그렇지? 그 집 여자한테 말야."

"아뇨. 그런 일은."

"솔직한 게 신상에 좋을 거야."

"......그걸 물고 있게만 했지요, 장난으루."

"목에 칼을 대고?"

"그런 거지요 뭐. 이제 그만하고 나 좀 어떻게 합시다 형님. , 나 죽어!"

"다시 묻겠는데, 느이들이 똥을 싸놓고 그걸 주워 먹게 했지?"

"아닌데요......그야 모르지요. 그 뒤로 그 자식들은 나 빼놓고 제들끼리 몇 탕씩 해먹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너하고는 영 말이 안 되겠다. 넌 이거 서비스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야."하고는 주사침을 빼고 내용물이 위로 솟구치도록 피스톤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놈이 외쳤다.

"했어요 형님. 먹게 했지요. 똥도, 오줌까지두. 정말이라니까요. 정말입니다 형님요!"

녀석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럴수록 경식의 마음은 더욱 차가워져만 갔다. 아니, 모든 감정이며 이성, 몸뚱이까지도 굳어져갔다.

"사실이야?"

"사실이라니까요 형님. 흐윽!"

놈의 눈알은 죽은 자의 그것처럼 아예 휑하니 열려 있었다. 금단현상이 극도로 발작돼 구역질을 하고,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놈은 계속 울부짖었다.

"정말입니다요 형님. 똥도, 오줌까지도, 으웩, 다 먹였는데......사실이라니까요. 빨게도 했지요. 거짓말이면 내 목을 따라구요......나 좀, 제에발 형님!"

갑자기, 정말 갑자기, 휴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가스와 함께 용암을 토해내듯 경식의 분노가 폭발했다. 당장 놈의 턱주가리를 차올려 나뒹굴린 뒤 구두 뒷굽으로 두개골을 찍어 두 쪽을 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구둣발이 놈의 턱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지난 34년간 나름대로 스스로를 다듬어오면서 다져진 이성이 가까스로 결정적인 행동을 멈추도록 작용했다.

'쓰레기! 쓰레기인간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 내 손까지 더럽히지는 말자!'

경식은 심호흡을 하며 놈을 한동안 노려봤다. 어느 사이 다시 오줌을 지려 사타구니가 질척함은 물론, 오줌물이 발목을 타고 양말까지 흘러내려 구두 속까지 질펀했다.

손가방에서 증류수와 필로폰 가루를 꺼내 섞었다. 아직 식지 않은 분노가 눈앞을 가려 적당량을 가늠할 정신이 아니었다.

옥니는 녀석대로 극도의 피로와 금단현상 후유증으로 혼절 직전까지 다가가 있었다.

희석시킨 필로폰액을 주사기에 흡입시켰다. 그것을 방바닥에 놓곤 일어섰다. 바지 앞지퍼를 끌어내리며 냉랭하게 한 마디 던졌다.

"이제 한 가지 일만 남았어."

놈은 풀어진 눈으로 멀거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경식은 성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역시 차가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입 따악 벌려!"

놈은 멀뚱이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경식은 느릿하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좋게 말할 때 입 벌려. 주사기 박살내 버리고 모가질 비틀어버릴 테니까!"

그제서야 놈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고갤 뒤로 젖혀!"하고 경식이 목소리를 높였다.

놈은 그대로 있었다. 기진하여 경식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싶었다. 구두코로 놈의 이마를 밀었다. 고개가 젖혀졌다. 경식은 놈의 입을 겨냥하고 오줌 줄기를 뻗쳤다. 처음에는 조준이 잘되지 않아 얼굴 전체에 뿌려졌다. 놈이 푸푸 거리며 고개를 내둘렀다. 오줌 줄기를 잠깐 멈추곤 말했다.

"가만있어. 움직이면 주사길 깨버릴 거니까."

놈은 고개를 고정시켰다. 오줌 줄기를 뻗쳤다. 놈의 입에 정통으로 꽂혔다. 놈은 삼키지 않고 푸푸거리며 도로 뱉아냈다. 다시 오줌줄기를 멈추곤 다그쳤다.

"삼켜!"

오줌 세례에 다소 정신이 든 듯 녀석이 중얼댔다.

"알았어. 하라는 대로 할께 빨리 끝내. 죽을 지경이야."

"그래, 잘 생각했다. 이건 네가 옛날에 했던 대로 당해보는 거야."

인과응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만, 녀석이 그 말을 이해할지 의문이었다. 놈은 오로지 필로폰 주사액이 혈관 속으로 들어올 것에 대한 기대감만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을 뿐이어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아니, 생각이라기보다는 본능이리라.

경식은 녀석의 열린 입을 향해 오줌 줄기를 뻗었다. 놈은 구역질을 하며 삼켰다.

무척 통쾌할 줄 알았었는데, 알 수 없는 비애가 콧잔등을 울리며 가슴을 저리게 했다. 놈이 오줌물을 삼키듯, 경식 또한 구역질을 하며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마침내 방광을 비웠다. 힘을 다해 요의를 참은 뒤끝이라서 상채기라도 난 듯 쓰리고 아팠다.

성기를 집어넣고 지퍼를 끌어 올렸다.

놈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두덩을 치켜 올렸다가 다시 감곤 했다. 오줌물 때문에 눈이 따가워서이리라.

경식이 혼잣말이듯 나직이 읊조렸다.

"수고했다......쓰레기인간! 이제부터 넌 자유야. 그래, 자유야!"

그리고는 녀석의 팔과 다리에서 붕대를 풀어 손가방 속에 우겨넣었다.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재크나이프도 꺼내 녀석의 종아리에 장치된 가죽케이스에 찔러 넣어주었다.

옥니는 한동안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경식이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거내 녀석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비로소 옥니는 눈을 떴다.

", 네 몫이다."

경식은 바닥에 놓인 주사기를 집어 들어 놈의 손에 들려주었다. 동태눈처럼 희멀겋던 옥니의 눈은 금세 생기로 반짝였다.

녀석은 떨리는 손으로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근육에 주삿바늘을 가져갔다.

마침내 주사액을 모두 삽입시킨 옥니는 나무토막이 쓰러지 듯 옆으로 픽 자빠졌다. 잠시 후 새하얗던 얼굴에 핏기가 감돌았다. 떨고 있던 손과 발이 잠잠해졌다.

놈을 내려다보고 있던 경식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래, 잠깐만이라도 편안하거라. 너는 너대로 한때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자신의 장래에 대해 많은 고민도 했겠지. 좀 더 성실하게,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마음 다짐도 하고 설계를 꾸미기도 했겠지......!'

움찔, 정신을 가다듬은 경식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132. 이제는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었다.

방바닥부터 꼼꼼히 살폈다. 깨어진 주사기와 증류수병 따위를 주워 손가방 속에 챙겼다. 그 나머지는 별다르게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번갯불이 검은 휘장을 쫘악 갈랐다가 감쪽같이 깁곤 했다. 이어 구루루릉, 무수한 북채로 지구를 북 삼아 마구 두들기는 듯한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아스팔트 길이 벙벙하도록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경식은 인도로를 걸으며 울고 또 울었다.

 

 

6 백합꽃 한 송이 (1)

 

그 이튿날, 경식은 골이 터져나가는 듯한 두통에 잠이 깨었다. 택시를 전세 내 돌아온 그는 편의점에 들러 국산 위스키 한 병을 사 들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병째 나발을 불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웃목으로 팔을 뻗었다. 물 주전자와 컵이 얹혀져 있는 쟁반이 만져졌다. 약봉지를 집어 펼쳤지만 상용하다시피 하는 진통제는 한 알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진통제를 떠올리자마자 자연스레 도약국이 연상됐다. 아니, 도약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고, 만난 횟수도 세 번밖에 되지 않지만, 매우 오랫동안 사귀어온 것같이 정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경식이 불행을 당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어땠는가? 그들은 겉으로는 분노를 표시했고, 위로의 말을 던져주었지만, 뒤로는 그 사건을 얘깃거리로 삼아 껌처럼 씹고 씹어 단물을 빨아 마셨다. 마치 경식의 불행은 곧 자신의 행복이라는 듯이......동료 직원들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도약사는 진심으로 경식을 이해하고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읽을 수 있었다.

주전자에 든 냉수를 입에 대고 꿀꺽꿀꺽 들이킨 경식은 비틀대며 방을 나섰다.

전날 비를 퍼붓고 난 뒤끝이라서 햇빛이 유난히 강렬했다. 공기 중에 있는 먼지며 매연 따위가 말끔히 가셔진 뒤라서.

차 백미러를 닦고 있던 남기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서며 경식에게 어디 가느냐 물었다. 경식은 성가신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까이 할 이유가 없는 그가 경식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게 싫었다. 이미 경식은 제복을 벗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이 없는 볼펜을 버리듯이 그는 이제 경식을 버려야 했다.

"어디 가시느냐 묻잖습니까?"하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기사는 다시금 말을 붙였다. 어찌 들으면 시비조였다.

"약국에."

"제가 잘 아는 약국이 있는데......"

"나도 단골 약국이 있어."

"어딘데요?"

"좀 멀어."하고 퉁명스레 대답을 주고 난 경식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갈 길을 재촉했다.

이른바 향정신성 의약품에 관한 범죄를 다루려면 다소 전문적인 의학 상식을 필요로 했다. 경식은 그 방면에 특별히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몇 건의 범죄인지 조서를 꾸미다 보니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 전문가가 돼 있었다. 흔한 범죄가 아니었고, 또한 동료들이나 상관들은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엘에스디며 각성제 구실을 하는 암페타민, 또는 습관성이 있는 바르비탈 따위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문외한들이었기 때문에 습관성 의약품에 대한 범죄, 하면 경식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 방면에 활동하는 외근 형사와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하여 그쪽 방면의 전과자나 패거리들과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남기사는 그게 인연이 되어 알게 된 사이였다. 그는 두 번의 밀매 행위 전과가 있었는데, 그 동네 사정을 제보하는 대가로 웬만큼의 마약 범죄는 눈감아주고 있는, 상호부조 관계를 유지했었다.

결국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범죄의 온상지에서 파수꾼 노릇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자 경식은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녀석들로 하여금 범죄꾼들을 생산하게 하고, 그것을 미끼로 봉급을 받아먹으며 살아온 모순.

도약사는 조제실에 있었고, 판매대를 사이에 두고 한 여자가 두 명의 여자 손님과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하고 경식을 맞는 그녀를 눈여겨보면서 경식은 그녀가 도약사의 아내라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우선 외모부터가 도약사는 키도 작은 편이고 이목구비가 다소 자유분방하게 배치돼 있어 좋게 말하면 개성 있는 얼굴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범죄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의 키로는 꽤 큰 편이었으며 빼어난 미모였다. 그리고 외양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도약사는 어딘가 빈 듯하고 야성적인 면이 엿보이는 반면, 그녀는 잘 다듬어지고 귀티가 서려 있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그녀가 묻는 말에 대꾸하려는데, 때맞춰 도약사가 조제실을 돌아 나오며 대뜸 경식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오셨습니까?"

"수고 많으십니다."

"무슨 일로......?"

"골이 터질 것 같소."

"어젯밤에도 과음하셨군요."

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신 일 없지요?"

경식은 또 고개를 끄덕여 대답에 갈음했다. 그러면서 그의 억양과 눈짓에서 나눌 얘기가 있으니까 기다려 달라는 뜻을 건네받았다.

조제약을 손님들에게 내밀며 약을 복용하는 방법과 유의사항을 설명하는 동안 경식은 모 제약회사의 상표가 커다랗게 찍힌 나무 벤치에 엉덩이를 내렸다.

손님들을 보내고 난 그는 판매대를 돌아 경식에게 다가왔다. 담배를 빼어 타려 물고 경식의 옆에 앉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술을 삼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내 처지를 잘 알면서 그러슈?"

"그야......하지만 알콜중독 증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안색도 정상이 아니고, 수전증 증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여기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뒤에 따른 침묵으로 그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도약사는 말없이 일어나 판매대 안으로 들어갔다. 약장에서 꺼낸 약들을 봉지에 담아 건네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침 식사는 했습니까?"

"아침을 챙겨 먹은 지가 하 오래돼서...... 이제는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잘됐군요. 나도 마악 식사 교대를 하려던 참인데, 같이 가시죠. 아침 식사라는 게 뭔지 가르쳐드리리다." 하면서 도약사는 흘긋 그의 아내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도약사와 경식의 대화에는 전혀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약국 측면 바람벽에 부착된 텔레비전 화면에 열중해 있었다. 그들은 해장국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경식은 대뜸 장국밥 두 그릇을 시켰다. 그리고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다른 음식은 몰라도, 된장국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끓였지요."

"누가요?"하고 거의 반사 행위에 의해 되묻고 난 도약사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경식의 표정을 살폈다. 회상에 빠져든 그의 눈은 먼 옛날 기억의 다락방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초점 잃은 맹한, 텅빈 눈망울......그는 혼잣말이듯 중얼댔다.

"대개는 콩나물을 넣지만, 배추 겉잎을 삶아두었다가 된장국을 끓이면 일품이지요. 아무리 전날 밤 과음을 했어도 밥 한 공기 꾹 말아서 삼키고 나면 아이스크림 녹듯 뱃속이 사르르 가라앉으며 편안해지거든요. 정말 일품이었는데......!"

경식은 말끝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울먹임으로 여운을 끌었다. 잠시 소연한 침묵이 지나갔다. 그 소연함은 국솥에서 얼굴을 들던 주인 여자가 갑자기 문을 열며 밖에 대고 큰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다소 불식되었다.

"손님, 들어오세요. 뼛국 우려낸 해장국 기찬 것 있어요. 아침 식사도 되고요."

그러나 그녀의 호객 행위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문을 닫고 화덕 쪽으로 걸어가며 혼잣말로 중얼댔다.

"들어오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젠장!"

주문했던 장국밥이 나왔다.

"나 때문에 괜히 분위기만 망쳤군요."

경식이 사과하는 의미를 담아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억지로 지어 보이는 미소 뒤에 감추어진 아픔이, 비애가 도약사의 가슴에 울림으로 와 닿았다.

"듭시다."하고 도약사가 먼저 수저를 들었다.

"먹음직스럽군요."

그러나 두 사내의 식사 속도는 한없이 느렸다. 결국 그들은 반도 먹지 못하고 거의 동시에 수저를 놓았다. 그러나 서로는 왜 더 먹지 않느냐 묻지 않았다. 몇 수저 뜨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내는 각기 자신의 생각에 몰입돼 있었다. 묘하게도 두 사람 모두 된장국과 연관된 아픈 회상에 연연하고 있었다. 도약사는 그이대로 어렸을 적 된장국을 끓여주던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다. 동네에서 나우 떨어진 독립가옥 과수원 집......냉이 냄새가 향긋한 한겨울의 된장국과 오봇한 다섯 가족......어느 날 밤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행......그 후 백부댁에서의 서럽고 외로운 성장과정과 오늘이 있기까지의 뼈아픈 수난.

경식은 경식대로 햇된장 내음이 진동하는 어느 날 아침의 식사 때를 떠올렸다. 경식은 특별히 된장국을 좋아했다. 고된 업무에 시달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뱃속은 더부룩하고 입속에서는 쓴내가 났다. 밥을 입에 퍼넣으면 모래알을 씹는 듯 서걱거리며 겉돌았다. 그런 경우 몸이 요구하는 냉수나 한잔 들이키고 출근하고 싶은 유혹이 앞섰지만, 언제나 주방에서 풍겨오는 된장국 내음 때문에 결국 아침밥을 먹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품속 같은 푸근한 내음을 풍겨 어렸을 적 추억과 연관지어진 식욕을 일깨웠고, 된장국 맛은 아내의 손길처럼 부드러워 유리가루를 씹는 듯한 입속과 말라붙은 식도를 회복시켰다.

경식네가 먹는 된장은 전부를 아랫집에 사는 숙희엄마가 대주었다. 그녀는 이혼녀로, 이혼위자료로 경식의 집과 구조가 똑같은 그 집을 마련했다는 말이었다. 애초 경식이 사는 집을 매입하게 된 것도 아내의 여고 2년 선배인 숙희엄마가 주선하여 시세보다 조금 싸게 샀었고, 그 뒤로도 그녀와 경식의 아내는 남매간처럼 절친하게 지냈다. 된장은 그녀가 담근 게 아니라 광주에 사는 올케가 해마다 단지째 보내준다고 했다. 시누이와 사이가 좋은 듯 이혼 당시 부양 책임을 떠맡은 딸 숙희도 지금은 그녀의 오빠네가 기르고 있고, 대신 숙희엄마는 매달 양육비를 송금하고 있는 것으로 경식의 아내는 말했다. 숙희엄마가 혼자 살면서 딸의 양육을 그녀의 올케에게 맡기게 된 것은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는 듯싶다고 아내는 말했었다. 애인이라면 애인이고 정부라면 정부인 사내가 가끔씩 찾아오곤 했는데, 생활비 대부분을 대주고 있는 남자측에서 그걸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회사원인 그녀의 여동생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남매는 둘 다 남자들의 호감을 살 만하게 빼어난 외양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된장국 맛이 형편없어졌다. 구린내 비슷한 역겨운 내음이 맡아졌고, 맛은 시큼하고 짰다. 그의 아내가 정신적 파탄을 일으키기 한 달 전쯤의 일이었다.

"저번 된장국 맛이 아닌데, 잘못 보관해서 변질된 거 아니오?"

경식의 투정에 아내는 짐짓 당황하는 눈빛이면서 대꾸했다.

"시장에서 산 거라 그래요."

"숙희엄마가 준 된장은 다 먹은 거야?"

"그렇게 됐어요."

말하는 투가 무척 퉁명스러웠다. 어두운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그제서야 경식은 그 즈음 숙희엄마의 내왕이 뚝 끊어진 것이며 그의 아내도 그녀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소?"

"그럴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심각한 얼굴로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하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몸을 돌리며 대꾸했다.

"여자들끼리 흔히 있는 일이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경식은 피식 웃으면서 혼잣말이듯 중얼거렸다.

"그저 여자들 하는 짓이란, 나이 어린 계집아이나 나이든 아줌씨들이나 소견머리가 똑같구먼."

그 뒤 쭉 된장국 맛을 보지 못하다가 그날에서야 그런 계제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 도약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경식은 설운 회상을 떨쳐내려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노라는 말을 놓고 자리를 떴다. 경식이 화장실에 간 사이 국밥값을 건네던 도약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좀 전에 들어오려다 말았던 사람들, 아주머니하고 안면이 있던가요?"

"첨 보는 젊은이었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없었고요?"

"뭔 말이우?"하고 아낙은 몸뻬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쑤셔넣고 천 원짜리 잔돈을 꺼내다 말고 뜨악하게 눈을 떴다.

"우리 뒤를 밟는 것 같은 그런 낌새가 없었냐는 걸 묻는 겁니다."

그녀는 멈칫했다.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이 황급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께......뭔가 수상쩍다 싶었수."

"그래요?"

"스무너덧 살쯤 돼 보이는 청년 둘이었는데, 유리창으로 들여다보고 가길래 끌어들이려고 문을 열었더니 뒤따라 가는 녀석이 앞엣놈 보고 그럽디다. '약장사 그 자식이랑 같이 있어'라고 말이우."

"!"하고 도약사는 짧게 신음했다.

", 무슨 일이라도 있수?"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국밥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말을 놓고 밖으로 나선 도약사는 경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혼잣말로 중얼댔다.

"어쩔 수 없이 말려들었군......별수 없이 발을 빠뜨렸어."

 

도약사와 헤어진 신경식은 거리를 거닐며 한동안 옥니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녀석은 어떻게 됐을까? 한참은 즐거웠을 테지......불쌍한 녀석!'

약물을 미끼로 녀석이 범인임을 스스로 자백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요에 의한 허위 자백에 불과하다는 것을 경식은 잘 알고 있었다. 옥니 그 녀석은 현장에 없었다는 것도 확실했다. 놈들 네 명은 모두 머리에 검정 스타킹을 뒤집어쓰고는 있었지만, 전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 그중에는 분명코 옥니처럼 쉰 목소리는 없었다. 덩치 또한 옥니처럼 비린내 나도록 삐쩍 마른 놈도 없었다.

일단은 옥니의 일을 잊기로 했다. 그날 일은 점백이 종관이란 자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족했다. 쓰레기 인간을 향한 분풀이도 그쯤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다만 옥니 녀석이 그 일을 계기로 개과천선의 길을 걷게 된다면 좋겠지만,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마약에 빠졌던 놈들은 대개들 구제불능이니까. 문득 그날 하루는 죽은 아내를 위해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식은 아내가 묻혀 있는 공원묘지로 향했다. 고르지 못한 귀가- 대개는 경식이 늦게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숙직이다 뭐다, 일주일에 사흘 꼴은 또한 외박이었다. 어쨌든, 현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경식을 맞는 것은 코끝에 와닿는 백합꽃 향기였다. 다시 말하자면, 된장국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백합꽃 향기로 하루가 마감되는 격이었다. 식탁 한가운데에 꽂혀 있는 딱 한 송이의 백합꽃은 항상 싱싱하게 향기를 내뿜었고, 백합꽃 향기만큼이나 그윽한 행복이 늘 울안에 감돌았다. 아내 또한 백합꽃만큼이나 싱싱하고 향기롭게 그를 맞았다.

"늦으셨네요. 저녁 식사는요?"

"당신이 없는 저녁을 무슨 맛으로 먹었겠어?"

그러면 아내는 "여보-" 쑥스러운 듯 낮게 읊조리며 경식의 가슴에 포근히 안기곤 했다. 그럴 적이면 아내의 얼굴에는 안에서 불을 켜놓은 것처럼 발그레한 홍조가 감돌고, 눈망울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빛을 냈다. 그렇도록 정겹고 사랑스럽던 아내- 그녀가 지금 이곳에서 무기물로 서서히 해체되고 있는 중이었다. 막상 묘 앞에 서자 망연할 뿐, 생각보다 슬프거나 애절함이 절실하게 와닿지 않았다. 경식은 봉분에 듬성듬성 돋아난 잡초를 뽑고, 요번 비로 파여진 곳은 손으로 흙을 파서 메꿨다. 그리고는 가져간 술을 묫둑에 부으며 속삭였다.

"미안해......되도록 자주 올께!"

산을 내려오면서도 별다른 감동은 없었다. 가슴이 텅 빈 상태,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 전야의 고요 같은 거였다. 모처럼 아내가 좋아하는 백합꽃을 사들고 들어갔던 그날, 그 꽃들이 범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으깨지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그는 끝내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린아이처럼 소나무 둥치를 끌어안고 엉엉 목을 놓아 울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연신 눈시울을 닦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슬픔은 곧바로 범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전이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황량한 도심 한복판에 버려지자, 경식은 갑자기 고독감이 엄습했다. 누군가 필요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그런데, 왜일까? 갑자기 도약사가 떠올랐다. 절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도 많고, 나름대로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시내에 꽤 있었다. 고향 친구도 있고 학교 선후배도 많았다. 그런데 만난 지 멀마 되지 않는 도약사가 왜 갑자기 만나고 싶어질까? 뭔가 끌리는 자력 같은 힘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범인을 뒤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에? 경식은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 도약국입니다."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경식은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며 목이 메었다.

"말씀하세요."하고 도약사가 재촉했다.

", 신경식이오."

경식의 목소리만으로도 심정을 헤아린 듯 도약사는 대뜸 장소를 지정하고 그곳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도약사가 먼저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한동안 말을 잃었다. 마침내 경식이 나직하게 입을 떼었다.

"아내 묘소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군요?"

경식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옥니와의 문제며 점백이 관식에 대한 말을 꺼내고 말았다. 혼자 지니고 있기에는 너무나 벅찬 무게의 비밀, 경식은 누구에겐가 그 말을 털어놓아 다소나마 힘겨움을 덜고 싶었고, 도약사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7. 오월동주

 

아내의 묘소를 다녀오던 날 밤 경식은 밤을 하얗게 지샜다. 분노와 회한- 범인들을 향한 분노와 아내에 대한 회한이 교차하면서 부침이 연속되는 밤이었다. 새벽 동이 트자 N시에 내닫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당장 내달아 점백이 관식이라는 자를 만나 결판을 내고 싶었다. 실제로 그는 옷을 입고 문 밖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이 곧 그의 충동적인 행동을 제어하고 나섰다. 침착하자. 좀더 확실하고 철두철미한 사전 검색과 준비가 필요하다! 아내를 잃은 뒤 매일 그렇게 해왔던 대로 경식은 해장술을 마시고 나서야 떨리던 손과 물먹은 종이쪽 같은 몸뚱아리, 그리고 뒤엉킨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었다. 밖으로 나오면서 경식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점백이 관식을 알게 된 동기 부여자는 정목사였다. 더구나 관식이라는 자와 정목사는 옛날 어떤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옥니는 말하지 않았던가. 점백이 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정목사를 필히 만나야 했다. 몰론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옥니에 대한 뒷소식이지만......어쩐지 불길한! 제일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11시 반이 다돼가고 있었다. 정목사는 신자 여섯 명과 가건물로 된 교회를 손가락질하며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높여야지요. 주님께서 계실 성전을 세우는 일 아닙니까? 문전도사님 말씀대로 2층으로 짓긴 짓되 아랫층을 높이고 지하실을 만들어 교육관으로 쓰든지, 아니면 수양관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을 때는 임시 피로연장으로 활용할 수도 있어 좋지 않습니까? 또 한쪽 켠에는 성물판매점을 낼 수도 있고 말이지요. 그렇게 하면 신자들 개개인이 혜택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부인회에서 수입도 올려 하나님 사업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잖습니까?"

"돈이 문제지요 목사님."하고 옆에 서 있던 대머리가 말을 받았다.

"김장로님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군요."

"이건 믿음 문제가 이니라 현실 문제지요. 부지 매입도 간신히......"

그러자 정목사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문규복이 김장로의 말을 중동내며 끼어들었다.

"장로님은 하찮은 우리 인간의 머리를 믿는 겁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주를 믿는 겁니까?"

잠시 소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말이 그렇게 돌아가자 김장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모두들 가건물로 되어 있는 교회를 향해 서 있었으므로 그들의 모습을 전면에서 볼 수는 없었지만, 보나마나 그 표정은 뻔했다. 갑자기 정목사가 억양 높여 말했다.

"이건 믿음의 문젭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짐을 모르십니까? 가나안의 기적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주 예수님 역사하심의 증거를 보고도 아직도 하찮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려 합니까?"하고는 즉시 정목사는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리며 더욱 드높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여러분, 더욱 굳건한 반석 위에 믿음을 세우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린다는 말씀을 왜 잊으셨습니까? 다같이 우리 주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심을 우리 스스로가 지켜봐 왔지 않습니까?"하고는 감격 어린 눈으로 조립식 교회 건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전도사 문규복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울부짖는 목소리로 뇌였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유혹의 골짜기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비록 사망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 어린 양들을......"

길고도 질척거리는 문규복의 기도 소리가 이어지자 하나 둘 무릎을 꿇고 주여, 할렐루야, 아멘- 기도소리에 박자를 넣듯 신자들은 읊조렸다. 뒤이어 정목사의 기도가 있었다. 그야말로 애절하고 침통한 통회의 기도 자리였다. 마침내 열광의 도가니에서 들끓던 기도가 끝났다. 신자들은 얼떨떨하면서도, 변비로 끙끙거리다 마침내 배설행위가 이루어져 만족해하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비로소 멀찍이 서서 무료하게 기다리던 경식이 정목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러나 정목사는 그때껏 앞으로 세워질 거창한 교회 건물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맹한 눈이었다. 문규복이 재빨리 다가와 끼어들었다.

"어이구, 신형사님이 웬일이십니까?"

"난 이제 형사가 아니오."

"아참, 사표를 내셨다구요? 전전말로 들었지요. 그래요. 원래 신형사님은 포졸 체질은 아니셨지요. 학자나 예술가, 그래요, 예술가 타입이셨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소."

그제서야 정목사는 환상에서 헤어나온 듯 경식에게 눈길을 보내며 반기는 기색을 만들어 보였다.

", 난 누구시라구. 웬일이십니까?"

"지나가다 마침 계시기에 들렀지요. 그날 밤 너무 과음......"하던 경식은 재빨리 뒷말을 사려물었다. 긴장한 얼굴로 경식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정목사는 경식이 뒷말을 잇지 않자 안심한 듯 웃음꽃을 피워물며 모든 신자들이 들으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잖아도 궁금했었지요. 그날 정말 고마웠습니다."하고는 둘러선 신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 오늘은 이만들 돌아가시지요. 정말 유익한 자리였습니다. 할렐루야!"

신자들도 뒤따라 할렐루야, 외치고 짝을 지어 자리를 떠났다. 뒤에 남은 문규복이 정목사의 눈치를 살폈다.

"전도사님도 들어가시지요. 오늘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럼, 두 분이 천천히 얘기 나누십시오."

그들의 모습이 교회 마당에서 모두 사라질 때까지 정목사는 천사의 미소를 얼굴 가득 피워내고 있었다. 경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옥니에게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아무리 그런 자리라도 그렇게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마침내 신자들을 모두 보내고 몸을 돌리는 순간, 경식은 움찔했다. 그의 눈길은 정목사의 왼쪽 가슴에 가 있었다. 정목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경식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상장은 웬 겁니까?"

", 이거요?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럴 일이라뇨?"

"내 동생이 죽었거든요......불쌍한 녀석이지요."

"어떤 동생이......?"

"어떤 동생이 따로 있나요. 하나밖에 없는 이복동생인데......아참,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그......"

정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면서 굳이 물을 필요가 있느냐 반문하는 시늉을 만들어 보였다.

<일이 터지고 말았구나!>

경식은 속으로 외치며 태연한 척하려고 애를 썼다. 정목사는 그이대로 경식의 행동을 찬찬히 눈여겨보며 살피고만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한동안 헝크러졌다.

"안됐습니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하고

비로소 경식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운명인걸요."

"어떻게 그런 변을......?"

"익사였습니다."

"익사라니요?"

"그럴 일이 있었답니다."

경식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익사라면 그 <빈집>에서 죽은 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취했던 행동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건 아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경식의 행동을 여전히 주시하며 정목사가 말했다.

", 그럼 우리 다음에 뵙기로 하지요. 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목사님."

막상 말은 그렇게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은 발걸음 뗄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방의 표정을 읽고만 있었다. 특히 경식은 꼭 짚고 넘어갈 말이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오늘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기회가 올지 의문이었다. 하긴, 그러긴 정목사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도 경식에게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정목사가 먼저 교회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얘기가 우리 사이에 있는 것 같군요?"

"글쎄요. 아무튼......"

"잠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럴까요."

 

예배당 안은 철제 접의자가 촘촘히 놓여져 있었다. 앞 정면에는 <축 여름성경학교>라 은박지로 오려 붙인 글씨가 아치형으로 모양새 있게 걸려 있었다.

"저 창 쪽이 좋겠지요?" 하면서 정목사는 출입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그쪽이 밝아서 좋겠군요."

"능소화가 멋지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두 사람은 의자에 마주앉았다. 잠깐 조정기간을 가진 후 경식이 먼저 입을 떼었다.

"정말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정목사는 경직됐던 표정을 순발력 있게 슬픈 표정으로 바꾸며 말을 받았다.

"다아 주님의 뜻이죠. 본심은 착한 애였습니다......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장례식은 바로 치렀습니까?"

"장례식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 손으로 직접 마지막을 돌봐줘 퍽 다행이었습니다."

잠깐 동안 다시 어색한 침묵이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나눌 얘기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똑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증표였다. 그런 인삿말은 이미 교회 마당에서 나누고 난 뒤가 아닌가.

"어떻게 된 겁니까?"하고 이윽고 경식이 물었다.

"뭘 말이오?"

"동생분이 죽게 된 경위 같은 거 말입니다."

정목사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애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다리가 있지요. 그 다리 교각에 시체가 걸려 있었답니다. 그날 비가 억수로 왔거든요."

경식은 그날 밤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지우려고 애쓰며 말을 받았다.

"시내에서 집으로 오다가 그렇게 됐나 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사인은 정확히 밝혀졌습니까?"

"익사라고 했잖습니까?"

"아참, 그렇군요."

정목사는 잠시 시간을 갖고 경식의 얼굴을 이윽이 건너다봤다. 그 눈길은 상대방의 속내를 훤히 읽으면서 그것을 표출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즐기는 그런 태도가 역력했다. 경식은 절대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다리 난간이 얕았나 보지요?"

"무릎 정도 높이는 되지요. 왜요, 경찰 생활을 하신 경험이 있으셨으니까 말인데, 다른 혐의 같은 게 만져지는 게 있나요?"

경식은 당황하면서 말려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속으로 다시금 부르짖었다. 어쨌든 넘어온 공은 받아쳐야만 했다.

"글쎄요......누군가가 떠다밀었다는 혐의를 배제할 수는 없지요."

문득 정목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표정을 경식은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챙겼다. 그래, 너도 구린 구석이 있는 것 같구나. 두 사람은 잠시 긴장된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서로는 더 이상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는 게 피차 이득이 되는 길이라는 걸 확인했다. 당연히 경식이 입을 여는 게 수순이었고,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안겨졌다.

"검찰의 매장 지시가 있었겠군요?"

"당연하지요. 단순한 실족사였으니까."

"다리 난간을 좀더 높였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아직도 우리 행정은 후진국 수준이라니까요."

"왜 아닙니까. 왜정 때 놓은 다리라니까 햇수로 벌써 얼맙니까. 안 그래요?"

"그렇군요."

이제 마감이 되었다 싶었다. 긴장감이 풀리자 경식의 손은 자연스레 버릇되어진 대로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가 이끌려나왔다. 두 모금째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던 경식은 흠칫하며 그제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예배당 안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성전 안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괜찮습니다. 더 태우고 저쪽 창틀에 비벼끄세요. 내가 나가면서 치우면 되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경식은 생각해 뒀던 말을 꺼낼 계제라고 가늠되었다. 담배 한 모금을 더 맛있게 빨아 마시고는 입을 떼었다.

"그러잖아도 괴로우실 텐데, 이런 거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이미 괴로울 만큼 괴로웠으니까요......"

경식은 머리를 굴렸다. 정목사에게 궁금증을 던져서 그 반응을 살핌으로써 그가 이 사건에 관련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림없는 생각, 말려들 위인이 아니었다. 경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낙담한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다음 기회로 미루지요."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말을 꺼낸 김에 서로 탁 털어놔 끝을 맺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잠깐 긴장했고, 그 긴장은 서로 야릇한 미소를 교환하는 것으로 풀었다. 경식이 말을 꺼냈다.

"혹시 점백이라는 자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정목사는 움찔했다. 확실하게! 그러나 일순간일 뿐,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주었다.

"점백이라니요?......아아 참, 언젠가 내가 말했던 그 사람을 두고 말하는 거군요?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이것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갑시다. 난 절대로 점백이라는 자를 보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턱 밑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니는 녀석을 봤다는 말을 했을 뿐이지요."

경식은 부아가 치밀었다. 모른다는 데야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그렇다고 옥니에게 자세히 들었노라 말할 수는 없는 일, 별수 없이 정공법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목사님, 우리 이러지 맙시다. 난 나대로 알아본 게 있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염두에 두십시오."

"그야, 전직이 그러시니까......"

"그 점백이라는 자, 동생분이 살고 있던 같은 시내에 있지요?"

"글쎄요......"

"그리고 이름은 종관이고요. 안 그렇습니까?"

깜짝 놀랄 줄 았았는데, 정목사는 오히려 담담한 얼굴로 경식을 넌즈시 건너다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내심을 읽을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경식은 일순 그가 두려워졌다. 괜히 그 말을 꺼냈다고 후회됐다. 계산속으로는 이미 정목사의 약점을 잡고 있으니까 그것을 빠다제로 정보를 얻으려던 속셈이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은밀히 종관이라는 자의 뒤를 캐내도 될 것을, 쉬운 방법을 택하려다 오히려 발목을 잡힌 꼴이 되고 만 거였다. 낭패감과 함께 그만한 걸 미리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경식은 풀죽은 목소리로 뇌였다.

"그만둡시다, 지나가는 말처럼 그냥 물어본 것에 불과하니까."

완벽한 패배였다. 그와의 한판 겨루기에서 보기 좋게 손을 든 꼴이 돼 있었다. 그에 걸맞게 이윽고 정목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솔직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우리 두 사람은 오월단주 입장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풍랑이 닥치면 우리는 둘 다 빠져 죽을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경식은 속으로 외쳤다.

<되치기당했구나!>

경식의 속내를 고스란히 읽고 난 뒤라는 듯 정목사는 이젠 완연하게 얼굴 가득 비웃음을 피워물며 덧붙였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으로 아는데요?"

경식도 이젠 막판이었다.

"쉽게 말합시다, 지금부터."

"그러는 게 시간 절약도 되고, 그리고 서로에게 부담이 덜 가겠죠?"

"물론이지요."

"그럼 내가 먼저 말하지요." 하면서 정목사는 시간을 갖고 경식의 눈치를 살폈다.

"계속하세요."하고 경식이 재촉했다.

"그러지요. 장례 치르고 동생의 방을 정리하는데 그 집 주인 할머니가 그러더군요. 그날 밤 변소에서 나오는데 내 동생 녀석과 같이 우산을 받고 나가던 사람이 있었다구요."

그제서야 경식은 빨간 꼬마 등이 켜져 있던 변소와, 귀만 기울였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요?"

"그 사람은 내 동생보다 건장해 보이고, 얼룩덜룩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지요?"

경식은 흠칫 놀라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갈아입은 옷은 회청색에 체크 무늬가 있는 남방이었다. 다행히 다 싶은 생각을 하며 눈길을 드는 순간, 자신의 태도를 꼼꼼히 살피고 있는 정목사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정목사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 우러나와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사람이 있더군요."

이쯤에서는 경식으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동생분은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자를 구렛나룻 녀석으로 착각을 합디다."

"구렛나룻 녀석요?"

"목사님이 자주 심부름을 시켰던 자 말입니다. 뭘 전달해주곤 했던 것 같더군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침내 자신을 챙길 시간을 갖고, 감정의 조정 기간이 지나자 거의 동시에 미소를 나누었다. 정목사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오월단주를 인용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군요."

"좋아요!"하고 정목사는 힘있게 대답을 주었다.

"종관이라는 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군요?"하고 경식이 서두르는 투로 물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따로 있는 데요."

"말씀하십시오."

"우리 관계는 오늘 이 자리를 끝으로 애초 없었던 걸로 하자는 데 동의를 받고 싶습니다."

"물론이지요.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

"협정은 이루어진 겁니다?"

"이루어진 겁니다."

"그럼 말해드리지요. 육팔장이라는 간판만 찾으세요. 그 집 주인 여자 기둥서방 노릇으로 지내고 있으니까 쉽게 찾을 겁니다."

"육팔장이라......짓고땡할 때 쓰는?"

"육팔일공, 전화번호를 따서 그런 간판을 걸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더 나눌 말이 없는 것 같은데요?" 하면서 정목사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같이 일어서던 경식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어정쩡하게 서서 말했다.

"딱 한 가지, 할 말이 아직 남아있는데......"

"약속 위반이군요?"하고 정목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경식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이미 경식이 말하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경식이 말했다.

"나한테 말한 것하고는 다르게 목사님은 점백이 종관이라는 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더군요?"

정목사는 피식 웃고 나서 가벼운 목소리로 받았다.

"그래요? 내 동생 녀석이 그 말을 하던가요?"

"그런 셈이지요."

"수리 중인 그 빈집에서요?"

경식은 경악하여 입조차 열지 못했다. 정목사는 역력하게 비웃음을 베어 물며 덧붙여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나는 그날 밤 부흥회 목회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묻고 싶을 테지요? 그자가 신선생의 집에 침입한 그 범인 중 한 녀석이었느냐구요.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나는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놈의 턱 밑에 붉은 반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

그리고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대여섯 걸음 발짝을 떼던 그는 문득 몸을 세우고 상의 안주머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내 마이크로 녹음테이프를 빼어 경식에게 건네주며 덧붙였다.

"갖다버리세요. 별다르게 내게 불리한 대화는 없는 것 같군요."

문고리를 푸는 정목사에게 경식이 다가가 나직하게 한 마디 던졌다.

"오월단주가 아니라 오월동주요."

정목사는 씨익 웃어 보였다.

 

 

8 외로운 분노

 

옥니사건이 있은 뒤로 10여 일간 경식은 방황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게 무척 충격적이었다.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위축시켰다. 경식은 정목사를 증오했다. 마치 그의 장단에 놀아난 것 같았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정목사에 의해 파멸이 닥쳐올 것만 같은 예감이 끊일새없이 붙당겼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정목사도 온전하지는 못할 거라는 약점을 쥐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약소지 및 알선 정도의 책임만 있었다. 하지만 경식 자신은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살인과 연계된 혐의를 모면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경식은 옥니사건을 두고 자수를 택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점에 있어서 미심쩍은 구석이 만져졌다. 옥니가 그 빈 집에서 죽었다면 필로폰 과다 투여로 인한 죽음이 분명할 거였다. 그러나 옥니는 어떻든 자신이 거처하는 집 가까이까지 와서 죽었던 것이다. 경찰측 검증대로 실족사일 수도 있었다. 또는 누군가에 의해 다리에서 떠밀려 죽었을 수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 배후에는 어쩐지 정목사의 입김이 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옥니를 옭아채 빈집에서 닥달했던 것을 어떻게 그자가 알고 있단 말인가? 하는 게 경식을 괴롭히면서 동시에 양심의 가책에서 다소 헤어나게도 하는 이중구조로 작용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시켜 뒤를 밟았다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죽는 현장도 목격했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이 옥니를 다리에서 떠밀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점을 대입해 본다면 정목사는 대담한 카드를 던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목사의 말대로 경식과 그는 오랏줄로 두 사람이 꽁꽁 묶인 채 화약 앞에 놓여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둘 가운데 누군가가 불을 붙인다면 두 사람은 똑같이 폭사하고 만다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누구보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정목사가 대담한 대시를 시도했다? 뭔가 께름칙하고,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단락짓기로 경식은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자포자기한 경식인 바 정목사의 생각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졌다. 마침내 경식은 마음을 정했다. 자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동 형태가 죽은 아내가 바라는 것일까에 대해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일단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그가 살던 집에서 받은 전세금으로 한적하고 전경 좋은 변두리 주택 2층 어딘가에 방을 얻기로 했다. 자신의 목적이며 동시에 죽은 아내가 원했던 것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겠지만, 차차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주변 정리도 될 것이라 확신했다. 사표는 수리됐지만 아직 퇴직금을 수령하지 않은 게 있고, 또 아내가 예금과 적금을 들어놓은 게 있으므로 당분간은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하지만, 그 결심은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작정하고 이튿날 아침이면 깨어지곤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 과음 후유증으로 심한 조갈증과 함께 무력감이 찾아왔고, 그로부터 비켜나기 위해 해장집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나면 이내 좌절감에 빠져들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 고통을 이기려고 또 술을 마시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곤 했다. 718, 처제가 찾아왔던 그날도 경식은 정오까지 아침도 먹지 않은 채 내처 잠만 자고 있었다. 잠을 잤다기보다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거였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두 번 세 번, 주먹으로 쾅쾅 두들켜 패는 듯한 노크소리에 경식은 가까스로 눈을 뜨며 꽥 소리쳤다.

"누구야!"

"손님이 오셨는데요."

"알았어요."

퉁명스레 말을 받고 나서 비틀대며 일어나 손갈퀴로 아무렇게나 머리칼을 빗었다. 보나마나 도약사 아니면 대웅 심부름센터 안사장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던 경식은 움찔하고 놀랐다.

"형부, 저예요"

금방 울어버릴 듯한 목소리, 경식은 말을 잃었다. 아내에 대한 환상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동안 그렇게 마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예까지 찾아왔어?"하고 비로소 경식은 입을 떼었다.

처제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갑자기 언니 생각이 났어요. 집에 갔더니 세를 주었더군요. 경철서로 갔더니 사푤 냈다고 하고…… 물어물어 찾아왔죠."

"잘했어. 그러잖아도 처제가 궁금했었는데……."

뭔가 많은 말이 쏟아져나올 것 같은데, 더 이상 이을 말이 없었다.

"감자탕 잘하는 델 아는데, 같이 갈까?" 하는 말을 꺼내기까지 경식은 복받쳐오르는 설움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음식점은 붐비는 편이었다. 경식과 처제는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방서방은 잘 있구?"

"여전하죠."

"한번 다녀가지 않구……."

"제가 가지 마랬어요. 형부 마음이 좀 더 가라앉으면 그때 가라구요."

경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털며 물었다. 잠시 소연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가로놓였다. 처제는 그 어색함을 불식시키려고 젓가락과 수저를 경식의 앞에 시간을 두고 놓았다. 잠시 후 경식이 물컵을 들며 물었다.

"병선이던가…… 잘 크구?"

"덕분에요. 요샌 글씨를 좀 깨우쳐노니까 날마다 새 그림책 사달라고 졸라대 귀찮아 죽겠어요. 둘째 녀석 의선이는 걸음마 배우느라 야단이구…… 매일 사는 게 그래요."하고는 경식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식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핑그르 돌고 있었다. 쌍둥이 남매인 처제는 결혼하자마자 열 달도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경식의 아내는 기반을 닦기 전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노라는 선언을 끝까지 지켰다. 그러다 집을 사고, 다소 안정이 되자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속사정을 처제는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형부!"하고 경식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처제는 사과했다.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했다. 잠시 후 처제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형부를 확인하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식사는 어떻게…… 손수 해드시나요?"

경식은 경식대로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처럼 찾아온 처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대꾸했다.

"적당히…… 식당 같은 데서 신세 지고 있지."

"식당 음식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요? 그러잖아도 옛날보다 건강이 무척 나빠 보이는데."

"아직은 젊으니까……."

"말도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언니가 얼마나 위해주던 형분데……!"

말끝에 처제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울먹였다. 해물잡탕이 나왔다. 종업원이 요리 재료가 담긴 냄비를 가스불에 올려놓고, 먹기 좋게 해물들을 가위로 조각내는 동안 경식은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임신 5개월째의 아내, 그녀를 죽게 만든 놈들! 옥니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사라지고 다시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놈들을 찾아내야 한다! 찾아내 그만큼, 아니 몇 배로 앙갚음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내가 바라는 행동일까? 그래, 우선은 내가 결심했던 걸 당장 내일부터라도 실행에 옮겨야 해. 이대로 좌절하고 타락할 수는 없어. 아내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내 아내를 죽게 만든 그 놈들은?

"형부,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하는 처제의 목소리에 비로소 경식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넌즈시 건너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린 후 처제는 말을 이었다.

"언니를 생각해서 이런 말 해서는 안 되지만…… 어쨌든 언니는 저 세상 사람이 됐고 형부는, 앞날이 창창하잖아요?"

경식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다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형부, 굿굿하게 사셔야 해요. 그게 돌아간 우리 언닐 위하는 길이예요."

바로 경식이 결심했던 것을 처제가 그대로 꺼내놓고 있었다. 남남 간이 된 자신을 찾아와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마음 상하게 만들어 보낼 수는 없는 일-- 생각이 그에 이르자 경식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벼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날 처제 내외하고 우리하고 같이 바다낚시 갔던 일 생각나?"

"그럼요. 그날은 정말 즐거웠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꿈 같아요." 하고 말을 받는 처제의 말투도 한결 명랑해져 있었다.

"언닌 줄 알고 처제를 끌어안았었지? 핫핫."

"호홋. 전 그때 얼마나 당황했던지…… 쌍둥이가 죄라면 죄였지요."

"그러니까 똑같은 옷을 사 입지 마라고 했었잖아?"

"언니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서……" 하고 말 마무리를 짓지 못하며 처제는 다시금 목이 메었다.

경식도 가슴이 뭉클했지만, 밝은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방서방도 그 비밀 알아?"

"죄지은 것 같아서 제가 먼저 솔직히 털어놨어요."

"그랬더니?"

"호호홋! 그이도 전 줄 알고 언닐 그런 적이 있었대요."

"와핫핫! 피장파장이 돼버렸네!"

"그러게 말예요. 호호호홋!"

대화가 그렇게 진척되자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해물잡탕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들자구."

"제가 퍼드릴께요."하고는 국물과 건더기를 퍼 경식 앞에 놓으며 처제는 말을 이었다.

"많이 드세요. ……몰라보게 수척해지셨어요."

"……술을 끊어야겠어."

잠시 시간을 두고 나서 처제가 물었다.

"앞으로 어떡하실 거예요?"

"글쎄우선은 하고싶었던 일을 시작하려고 해."

"그림요?"

경식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에 갈음했다. 자기 몫의 음식을 그릇에 담아 놓고 젓가락을 들며 처제가 물었다.

"그림도 좋지만…… 우선은 생활 대책을 세워야잖아요?"

"차차…… 그러기 전에 꼭 해야 될 일이 남아 있어서 말야……."

"범인……?"하던 처제는 냉큼 뒷말을 사려 물며 당황한 눈으로 경식의 눈치를 살폈다.

경식의 표정이 짐짓 굳어졌다. 처제는 불안했다.

"무리하진 마세요. 형부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예요."

"고마워."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먹이는 처제를 보면서 경식도 끝내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잘 참아냈다.

택시가 떠났다. 아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경식 혼자만이 남았다.

"그래!"하고 경식은 이빨을 앙다물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부르쥐며 중얼댔다.

"육팔장 점백이…… 기다려라!"

곧장 택시를 탔다. 막상 버스터미널에 다가가자 복받쳤던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면서 감정에 눌려 맥을 못 쓰고 있던 이성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오후 3시도 되지 않은 한낮이었다. 적어도 8시는 돼야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할 터였다. 긴긴 여름 해가 원망스러웠다.

 

 

9 붉은 반점

 

경식은 밤 8시 조금 넘어 N시에 들어섰다. 육팔장 술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목사의 말대로 '육팔장' 간판 글자 밑에는 '6810' 전화번호가 국번호 뒤에 쓰여져 있었다. 집 구조로 봐 애초에는 가정집이었으나 개조하여 가게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잠깐 서성거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해!'

경식은 호주머니에서 굵고 검은 테의 갈색 색안경을 꺼내 썼다. 안으로 들어섰다.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대형 사이키 조명과 고급 전자 올갠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접대부 아가씨들도 꽤 많았다. 얼핏 헤아려 예닐곱은 되지 싶었다. 가게 규모로 봐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만져졌다. 불경기인데다 인건비 비싼 요즘 판에 그만한 아가씨들을 두고 술장사를 해서 타산이 맞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더불어 또 한 가지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은 스물 안팎의 나이 어린 계집아이가 대부분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고막을 찢는 음악 소리에 혼란한 조명이 판단을 흐리게는 할 수 있겠지만, 몸 균형이며 짙은 입체 화장 밑에 숨겨진 앳된 얼굴을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었다. 홈 테이블에 앉아 술을 시켰다. 술과 안주에 아가씨 하나가 얹혀왔다. 경식의 옆에 엉덩이를 내리며 그녀가 말했다.

"안 양이라고 불러주세요."

비린내 나는 계집아이와 노닥거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거부감 갖지 않도록 순순히 받아주는 게 좋을 터였다.

"경기도 안양을 말하는 게야?"

"그러잖아도 고향이 안양이에요. 여고 2학년 때까지 거기서 살았었거든요."

"그래? 한때 나도 그곳에서 살았지."

경식의 의도대로 계집아이는 대번에 친밀감을 갖는 듯싶었다. 그녀가 달뜬 목소리로 받았다.

"그러세요? 박석교 지나 박달시장 옆에 있는 신한아파트 아세요?"

"알다마다. 그 동네에서도 살았었거든."

"어휴, 그래요? 저도 그 근처에서 쭉 살았어요."하고는 왕궁예식장 뒷골목이며 삼원극장, 중앙시장, 뉴코리아호텔, 벽산쇼핑센타 따위를 들먹이며 혼자 떠들어댔다. 그 사이 경식은 종관을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유인하여 물속에 처박아버려? 아니, 어디에 연못이 있는지 모르잖는가. 절벽으로 유인하여 스스로 떨어져 버리게 유도해? 지형을 모르지 않는가……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는 방법이 없을까? 그때 거의 영감과도 같이 '바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강 반장이 했던 말인간처럼 강한 듯하면서도 허약한 동물은 없다네. 뒤통수에 바늘 하나만 때려 박아도 절명해 버리거든…… 두개골을 가루내기 전에는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어렵지! 경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저리를 쳤다. 바늘은 지갑 속에 간직돼 있었다. 아내가 정신질환으로 주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된 이후 경식은 떨어진 단추를 달고 튿어진 옷을 꿰맬 때가 많아 아예 바늘과 실을 늘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게 습관이 돼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상대는 내 아내, 내 아내를 앗아간, 내 인생을 구렁텅이로 처박은 놈이야!

"술값 걱정이 돼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거예요?" 하는 안 양의 말에 경식은 흠칫 정신을 가다듬었다.

"네 몸뚱이 하나 살 만한 돈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구."

"내가 얼마짜린 줄이나 아세요?"

"기껏해야 기백만 원이겠지."

말을 받아주면서 아무래도 종관이란 녀석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된다고 생각됐다.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어떨까? 너무 시끄러워서 말야."

경식의 말에 계집아이는 아주 잘 됐다는 듯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홀 뒤켠에 나란히 꾸며진 룸 한 칸을 차지했다. 제법 탁자며 소파, 전등갓 따위는 고급이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실속이 있군?"

"실속이라뇨?"

"건물은 허술한데 장사는 잘되고 있다는 뜻이지."

"그럼요. 아가씨만 해도 열한 명인데요. 두 명 빼놓고 나머지는 죄다 신마이죠, 나같이."

이제 뭔가 말이 돼가는군, 하고 경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럴수록 어수룩한 체하는 게 효과적일 터였다.

"신마이라니?"

"우선 술부터 시켜요. 뭘로 하시겠어요?"

"아가씨 마시고 싶은 걸루."

"그야 당연히 배부르지 않고 뒤끝 깨끗한 양주죠."하고는 경식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대뜸 웨이터를 불러 스카치와 과일 안주를 시켰다. 경식은 시계를 보았다. 9시 반, 서둘러야 했다.

"아까 말한 신마이라는 거, 뭘 말하는 거지?"

"자기도 차암, 아직 딱지도 안 떨어진 영계라는 뜻이지요."

"영계?"

"재수 좋으면 진짜 숫처녀도 맛볼 수 있다구요. 호호홋. 나도 아직은 숫처녀나 마찬가지고요. 연습으로 남자가 뭔지 조금 실험을 해보긴 했지만, 단물이 철철 흐르는 꿀통이라구요. 한번 체크해 볼래요?"하고는 경식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 갔다. 이제 마악 부푸는 중으로, 서글프도록 빈약했다.

"절벽이군."

"그야 영계니까 그렇죠. 그럼 여길 탐색해 봐요, 거기도 절벽인가."하곤 이번에는 자신의 사타구니로 경식의 손을 이끌었다. 경식은 흠칫 놀랐다. 당연히 있으리라 믿었던 팬티 대신 손가락 끝에는 찰고무 같은 느낌의 육질이 만져졌다. 경식이 손을 빼내려 하자, 그녀는 한사코 놓아주지 않으며 말했다.

"더 좀 화끈하게 더듬어 보란 말야, 자기."

계집아이는 아예 경식의 손가락 끝을 자신의 은밀한 곳에 밀어 넣고 있었다. 문득 성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했다.

"율동 좀 해주시지......어때, 꿀통 맞지? 살살해, 아퍼."

성충동으로 몽롱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고 나서 경식이 물었다.

"이 집 주인은 사업 수완이 고단수 같군 그래."

"무슨 말?"

"어떻게 이런 예쁜 영계들만 골라올 수 있는 거지?"

"다 골속이 있지요. 소개소 거치지 않고 뒷구멍으로 빼오거든. 직접 사냥도 하구."

경식의 귀가 번쩍 틔였다.

"직접 사냥?"

"아이- 자기 술이나 들자. 무슨 형사 나리처럼 꼬치꼬치 캐묻길 좋아해? , 부라보하고 단숨에 들이키기예요. 자기 건강과 멋진 이 밤을 위하여, 부라보!"

"그래, 부라보."

받아주며 경식은 그녀가 술에 취하도록 유도할 필요를 느꼈다. 두 잔, 석 잔, 넉 잔째거푸 술잔을 그녀에게 돌렸다. 그러면서 경식 자신은 술잔에서 입술을 떼어 술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남방 속으로 내려가도록 조작했다. 마침내 경식의 의도대로 계집아이는 헤롱대기 시작했다. 경식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근데 말야, 어떤 경로를 통해 이렇게 예쁜 영계들만 빼올 수 있는 거지? 나도 그 방법 좀 알 수 있을까?"

취한 중에도 계집아이는 뭔가 걸쭉거리는 게 만져지는지 눈을 뜨악하게 뜨며 되물었다.

"자기, 참 이상하다. 아까부터 왜 이러지? 나같이 아저씨 여동생이라도 이런 곳에 끌려왔나요?"

경식은 일부러 헤벌쭉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만 원권 지폐 두 장을 꺼내 들어 보였다. 계집아이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 그 돈을 그녀의 브레지어 속에 밀어 넣고는 사정하듯 나직이 말했다.

"실은 말야, 나도 이런 장사를 하고 있거든. 젠장할, 직업소개소 통하고는 개뿔이나 돈벌이가 돼야지. 맨날 단물 쭉 빠진 늙다리나 보내주고 말야."

"이제 보니 아저씨 순 악당이다. 호호홋. 하긴 그래요. 요새 나이든 늙은이들일수록 우리같이 젖내나는 꼬마들을 엄청 좋아하지요."

"그래서 이렇게 돈 들여가며 술 마시고 아가씨한테 사정하는 거 아냐? 누굴 통하면 서너 명 분양받을 수 있을까?"

"그야 영계 사냥에 도가 튼 우리 도사 오빠가 있지만, 요샌 정년퇴직했으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보는 게 나을 거예요."

경식은 바짝 긴장하며 물었다.

"도사 오빠라니, 누군데?"

계집아이는 커튼이 드리워진 출입문 쪽을 흘끔 곁눈질하곤 나직하게 대꾸했다.

"종관이 삼촌이라고, 그런 사람이 있어요. 우리 주인 언니 애인인데, 아니 기둥서방이죠. 끄윽, 맘만 먹었다 하면 하루에 트럭으로 한 차는 끌고 올 수 있었는데…… 그 자식 땜에 엄청 많은 애들 눈물깨나 흘렸지요…… 나도 그랬지만."

경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종관이, 백종관! 점백이 백종관! 마침내 네 마각이 드러나고 있구나!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 줄 테다, 기다려라!

"왜 인상을 쓰고 그러세요?"하고 안양이 뜨악하게 눈을 뜨고 쳐다봤다.

", 아니야. 아랫배가 갑자기 사르르 아파서."

"비상용 소화제가 있는데, 대령하라고 할까요?"

"아니, 됐어. 더 좋은 소화제가 있는 걸 뭐."하면서 거의 습관에 의해 경식은 앞에 놓인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싸한 알코올을 느끼면서 경식은 속으로 아차했다. 절대로 술에 취해서는 안 된다. 얼마나 벼르고 벼르던 오늘이었던가. 결정적인 순간에, 범인을 눈앞에 두고 실수할 수는 없다! 경식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빈 잔을 안양에게 건넸다.

", 내 잔."

"아직도 속이 안 좋아 보이네요?"

"아니, 금세 나았어."

"얼굴 보니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내 잔 받고 나서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구."

"에이, 재미없어."

중얼대며 안양은 잔을 비우고 경식에게 빈 잔을 건넸다.

"하지만, 잘만 삶아놓으면 한 껀 해줄 수도 있잖을까?"

"뭔 얘기예요?"

"종관인가 그 사람 얘기야."

", 그 얘기!"하면서 그녀는 건네준 잔을 비우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주절거렸다.

"아까 말했듯이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열중쉬엇하고 있는 중이니까 기대하지 마시라니깐요."

경식은 흘긋 시계를 보았다. 10시 반,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그 종관이라는 사람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이 아저씨, 참말 이상하다. 그 동네서 손을 뗐다는데 왜 이래요?"

"만나고 싶어서 그러지."

"몰라요. 나 급한 일이 있으니까 이따가 얘기해요."하면서 계집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식은 재빨리 한 손으로는 계집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다른 손으로는 호주머니에서 만 원권 석 장을 꺼내 그녀의 가슴 속에 밀어넣으며 다잡듯 말했다.

"나도 바쁜 사람이야."

"저녁 때 봤었으니까 요 근방 어디에 있겠지요. 이 손 놔요, 급하다니까 그러네."

경식은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서둘러 물었다.

"아까 들어오다 얼핏 봤는데, 혹시 턱 밑에 점이 있는 자 아냐?"

"그러니까 별명이 점백이죠."

"빨간 점이지?"

"빨갛건 파랗건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나 급하다니까요!"

"빨간 점 맞지?"

"봤다면서 왜 자꾸 물어요? 그래요, 빨개요 빨개, 원숭이 똥구멍처럼 빨갛다구요. 알았으면 이 손 놔요."

그녀는 경식의 손을 뿌리치고 비트적거리며 룸 밖으로 나갔다.

'이제 모든 건 명명백백해졌다!'

경식은 거푸 같은 말을 속으로 뇌이며 카운터로 갔다. 술값을 계산하고 냉수를 부탁해 벌컥벌컥 네 컵을 들이켰다. 첫 번째는 목이 타서였고, 나머지 석 잔은 위장 속에 고여있는 알코올 농도를 희석시키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과음은 하지 않았지만, 완벽한 실행을 위해서는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다.

 

 

10. 오오, 쌔드 무비

 

경식은 육팔장 길 건너 골목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새벽 1시가 다됐는데도 점백이는 나오지 않았다. 육팔장 네온 간판 불은 꺼진 지 오래였다. 두터운 구름이 밀려가면서 하늘에는 별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눅진한 바람이 길바닥의 휴짓조각들을 희뜩희뜩 휘날려 도깨비불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골목 안쪽으로부터는 지린내가 풍겨와 구역질 나게 했다. 2시가 다돼서야 점백이는 비틀거리며 육팔장에서 나왔다. 스스로 나온 게 아니라 주인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제발, 제발 도로 들어가진 말아라.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구!'

경식은 속으로 뇌이며 발을 굴렀다. 점백이는 육팔장 앞에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악을 썼다.

", 왕년의 백종관이를 국으로 봤어! 죽여버릴 거야!"

! 하고 경식은 자못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틀림없이 목쉰, 허스키한 목소리, 그날 밤 듣던 그 목소리였다. 경식은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몸을 떨었다. 아무 반응이 없자, 녀석은 체념한 듯 몸을 돌려 게걸음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중얼댔다.

"날 무시해? 까불지 마 짜식들아! 이래봐도 왕년에 대학물까지 먹어봤던 놈이라구. 통기타 메고, 청바지 입고, 좋았지. , 좋았고 말구. 꼰대가 첩만 안 얻었어도…… 교통사고로 죽길 잘했지. 헤헤, 잘 죽었다구…… 그런데 난 이게 뭐야! 꺼억, 엿공장에 불만 나지 았았어두…… 첩년이 재산만 빼돌리지 않았어두…… 으윽 꺽, 오줌이나 누고 가자."

녀석은 길가 가정집 대문에 대고 오줌을 갈겼다. 입으로는 여전히 중얼댔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소변을 보고 난 놈은 비틀거리며 주택가 골목으로 꺾어 들었다. 그제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스탓 투 크라이- 오오오, -드 무비, 얼 웨이스 메익 미 크라이…… 루빌루비루비루비- 오오오, - 드 무비……

마침내 시 외곽에 위치한 언덕받이에 이르렀다. 육팔장에서 1킬로 미터 남짓 떨어진 지역이었다. 그때껏 녀석은 중얼대거나 누군가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하고, 그러다 케케묵은 팝송을 흥얼대면서 걸었다. 한 차례 오줌을 더 누기도 했다. 언덕길은 가파랐고, 시멘트 포장이 돼 있었다. 바닥은 미끄럼 방지를 위해 거칠게 가로홈이 파여져 있었다. 녀석은 이따금 그 홈 틈서리에 발이 채여 비틀거렸다. 그때마다 담벼락에 기대어 한참씩 중심을 잡곤 했다. 때문에 시간이 자꾸만 지체됐다. 경식은 조급했다. 으르렁거리는 개소리가 나자, 놈은 그 집의 대문을 발로 쾅쾅 차곤 중얼댔다.

"어이, 친구. 우리 개새끼들끼리 이러지 말자구…… 그래, 잘해 보자구 개새끼야. 헤헤헷…… 어떤 자는 나 보고 의리 있는 사내 녀석이라고 말합죠. 하지만 대부분 놈들은 나 보고 개새끼라고 한 대요. 헤헤헷!"

놈은 골목 비탈을 올랐다. 술이 깨는 듯 갈수록 비틀거림은 덜했다. 갑자기 엄청 커다란 물체가 경식의 머리 위로 덮쳐왔다. 종관의 행동에만 집착해 있던 경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걸음을 세웠다.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구름이 걷힌 청회색 밤하늘을 배경으로 무겁게 십자가를 이고 서 있는 교회 건물이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놈은 예배당이 게워내고 있는 층계참을 힘겹게 올랐다. 마침내 놈은 언덕받이 정상인 층계참 끝에 다다랐다. 좌측에는 흰 여인상이 세워져 있었다. 놈은 숨을 돌리는 듯 성당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 양팔을 던지며 떠들어댔다.

"사랑하는 성모 마리아, 예수님, 천사님, 기타 등등- 내 말씀 좀 들어보소. 여기 불쌍한 대천사 미카엘이 오늘도 코가 삐뚜러지게 술을 퍼마시고 지나가고 있습니다요. 헤헷, 어떻습니까?……오늘도 십자가에 피뢰침이 그대로 꽂혀 있구만요.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지요. 꺼억, ! 십자가마다 피뢰침이 없어지는 날, 그때부터 당신을 믿을 거라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으으, 추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렇지, 사생아! 내가 당신 보고 사생아라고 모욕을 주면 벼락을 때리기로 한 약속도 있잖습니까? 하지만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단 말씀이야. 헤헤헤……하지만 여기 있는 나는 분명히 아버지를 갖고 있었지요. 비록 너저분하게 살다 갔지만…… 헤헷, 미안합니다요 예수님. 난 원래 이런 놈 아닙니까. 꺼억, 엣취."

놈의 음영이 점점 땅속으로 꺼져들고 있었다. 성당 마당을 가로 질러 언덕 너머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경식은 자못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세를 낮추며 서둘러 층계를 올랐다. 마지막 층계 세 개를 남겨놓고 경식은 문득 걸음을 세웠다. 놈은 앞에 놓인 벤치에 엎드려 흐느끼듯 주절대고 있었다.

"……나 어렸을 적에는 착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답니다. 영세도 받고 ……그런데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이오? 내가 나쁜 길에 빠져들 때 당신이 내 귓구멍에 대고 이노옴, 소리 한 마디만 해줬다면 내가 이렇게 됐겠습니까? 양심? 양심으로 말해준다구요? 엉터리, 사기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경식은 재빨리 층계를 올라 정원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녀석이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하고 저 갑니다. 내일 또 만나요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 실례 많았습니다. 헤헤헷."

성당 앞마당을 가로질러 언덕 등성을 넘어가며 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노래를 흥얼거리고, 때로는 누구를 향한 욕지거리를 섞어 중얼대며 걷고 있었다. 고갯마루 뒤편은 가파랐다. 낙석과 흙더미의 사태를 막기 위해 두 군데 시멘트 방벽이 설치돼 있었다. 비탈 기슭에는 고만고만한 가옥들이 어깨를 비비며 늘어서 있었다. 밤이지만, 어림 짐작으로 이층집 서너 채 빼고는 대체로 시내에서 밀려난 빈민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가늠되었다. 변두리 중에서도 언덕 너머라서 관의 행정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가로등은 동네 앞 신작로에 딱 두 개 전봇대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바로 여기야!'

경식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행 의지를 다짐했다. 내리막길이라서 녀석은 위태롭게 맥을 못추고 비틀거렸다. 마침내 떽데굴 나뒹굴었다.

"더러워서! X같은 놈의 동네!"

놈은 가까스로 비탈길 옆 나무둥치를 잡고 악을 썼다.

"어떤 새끼 없나? 나 좀 잡아줘 짜식들아!"

'그래, 도와주마! 도와주고 말구, 쓰레기 같은 자식!'

경식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비탈을 내려갔다. 녀석에게 다가가자, 놈이 고개를 쳐들고 으르렁거렸다.

"? 넌 누구야! 어떤 자식이냐구!"

놈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겁을 먹은 듯 몸을 버둥댔다. 경식은 허리를 꺾고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머리통을 향해 일격을 가하려던 경식은 팔을 내려뜨리며 뇌였다. 이렇게 쉽사리 끝내줄 수는 없어…… 아내가 당했던 고통만큼, 딱 그만큼만 녀석도 겪어야 한다!

"넌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야?"하고 놈이 연신 으르렁거렸다.

경식이 놈의 귀에 바짝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해 줬다.

"널 잡아가려는 저승 사자시다."

"뭐라구? , 내가 누군지나 알고 까불고 있는 거야?"

"알지. 네가 말했듯이 개새끼, 아니 개새끼만도 못한 쓰레기 인간!"

"죽여버릴 거야!"

놈은 끙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나무 둥치를 놓고 상체를 일으켰다. 뿌드득 소리가 나게 이빨을 갈며 다리를 세우려 안간힘을 썼다. 경식이 놈의 어깨를 잡아 도로 주저앉혔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빳빳하게 펴 놈의 귀뺨을 후렸다. 찰싹,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골짝을 울린 뒤 반향되어 되돌아왔다. 털썩 주저앉은 놈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으르렁거렸다.

"X으로 빠진 XX! 뼉다귀를 몽땅 부러뜨려 버릴 테니까 기다려! 정말 죽여버리겠어!"

이번에는 주먹을 쥐고 놈의 머리통을 향해 내려치려던 경식은 흠칫하고 놀라며 서너 걸음 뒷걸음쳤다. 소리는 고갯마루 등성 쪽에서 들려왔다. 해오라기 같기도 하고, 올빼미 소리 같기도 했다. 그사이 일어선 놈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찰칵 소리와 함께 희미한 초승달 빛를 받아 쇠붙이가 번뜩였다.

"뱃대지에 바람 구멍을 내줄 거야!"

"그날 밤에도 넌 내 목에 칼을 대고 그런 말을 했지?"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새꺄?"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 그때 그 자식이구나! 헤헷, 병신같은 자식! 이제 나타난 거야?"

"내가 보는 앞에서 네 부하들이 내 아낼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겠지?"

"그건 네 마누라가 신고하려고 수화길 들어서 그랬지 임마!"

"변명하지 마. 내 아낸 수화길 들 여유도 없었어."

"그럼 샛터 별장 그 자식인가? 근데, 그 얼간이는 늙은이였는데?"

"이 자식, 내가 누군지 아직도 헷갈리고 있군! 쓰레기…… 인간 쓰레기 백종관!"

"너 그 말 다했겠다?"

"백종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줄 가치도 없는 자식이야 넌."

"이 짜식, 맘잡고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늦었어. 네가 진 빚은 갚아야지 임마."

"? 임마?"

"개만도 못한 자식!"

"죽여버릴 거야!"

끙 소리를 내며 놈은 경식을 향해 돌진해왔다. 경식은 옆으로 몸을 비켜 산사태 방지용 석축 위로 풀쩍 올라섰다.

"잡히기만 하면 정말 죽여버릴 거야!"

놈은 이빨을 부드득 갈며 석축 위로 기어올랐다. 경식은 석축 중간쯤으로 발을 옮겼다. 옆은 방벽 낭떠러지였다. 놈이 으르렁거리며 재크나이프를 앞에 하고 덮쳐왔다. 서로 맞닥뜨리는 순간, 경식은 놈이 든 칼을 행해 발을 날렸다. 허둥대던 놈은 비탈 쪽 허공을 밟고 비틀거렸다. 금세 굴러떨어질 듯했지만, 역시 왕년의 어깨붙이답게 허공을 할퀴며 헛디딘 발을 석축에 붙이고, 자세를 낮춰 한쪽 팔과 한 손을 난간에 걸쳤다. 고양이처럼 가볍고 날쌘 동작이었다. 몸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과음 후유증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나 좀 도와줘. 지금까지 했던 것 용서해 줄게."

놈이 끙끙대며 사정하자, 경식이 나직하게 대꾸해 줬다.

"넌 죽어야 해."

"죽이고 싶으면 그때 나타났어야지 임마!"

"널 찾아다녔지."

"오랫동안 찾아다녔군."

"이젠 널 죽여버리는 일만 남았어."

"내가 죽는다구?"

"넌 살인자야!"

"난 사람을 죽인 일은 없어."

"쓰레기 같은 놈!"

그 사이 힘을 축적해 놓은 듯, 순간 놈은 끙 소리를 내며 석축 위로 몸을 솟구쳤다. 경식은 재빨리 발을 뻗어 놈의 정수리를 눌렀다.

"이러지 마. 떨어지면 죽어."

"당연하지."

"나 지금은 모든 걸 청산했어…… 정말야!"

"끝났어. 너나 나나 다 끝났다구!"

"X! 그래, 나도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지옥에 가서 해."

"자수하께. 깜방에서 썩어주께 제발!"

솟구쳤던 놈의 상체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석축 밑으로 머리통이 내려가고, 두 손만 난간에 걸쳤다.

"살려줘! 하라는 대로 할게."

"하라는 대로 한다고 했겠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의리도 있구."

"네 스스로 손을 놔!"

잠시 침묵하고 나서 놈이 말했다.

"더러워서! 어차피 가려고 했었어."

곧 놈의 손이 사라졌다.

아래쪽 어둠 속으로부터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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