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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의 일기

Bollnow 2024. 3. 9. 05:37

1015

깊은 가을 바람, ,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첫번 석탄을 샀다. 따뜻한 속바지와...... , 따끈한 군밤을 파는 할아버지의 구르마가 레오폴드 가에 보일 것이다. 새빨간 사과가 4파운드에 85페니, 버터, 배가 3파운드에 85페니, 레기나 포도가 2파운드에 1마르크 10페니...... 올해는 실과의 풍년이다. 결혼이란 확실히 인간을 좁힌다. 벽난로 앞의 단란과, **주의 안정과, 안락 이외에 아무 엠비션도 안 남기고 만다. 둘만의 평안과 행복,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 남기고 만다.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인류의 미래, 원자(Atom), 비행기, 달 로켓, 대만의 앞날, Papst의 서거...... 이 모든 것이 의식의 가장 바깥을 가깝게 스쳐 지나가 버리고 아무 것도 안 남고 만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결코 자랑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쿠션 위에 길게 몸을 펴고 누워 있고 싶어하는 고양이의 본능 이외에 무엇이라! 이기(Ego) 여자의 작고 비소한 이기심 날카로운 손톰과 교태. 자기 자신에게도 교태와 분장 없이는 허할 수 없는 비본질적인 존재가 여자다. 여자의 생은 모방이지, 참 생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를 잊을 수도, 초월할 수도 없으므로 위대함에는 부적당하다. 커다란 우, 위대한 무심, 부작위가 너무나 여자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생활에의 작은 기술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참과는 더 멀어지고 본질을 등지게 되는 것이 여자다. 따라서 위대한 사랑조차도 여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를 타인 속에 초극하고 또 세계 속에 초극해 가야 하는 것이 참사랑이면, 여자는 사랑에는 너무 본능이 앞서는 종족인 것 같다.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 나를 절망케 한다.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나간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또는 폭풍우가 아프게 뼈까지 때리는 것 같은......, 그러나 때로는 은빛 안개에 잠긴 낙엽에 깔린 아침 길과 같은, 또는 파란 하늘에 둥둥 분홍 구름이 떠 있는 황혼과도 같은......, 이런 여러 개의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돼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쉽지만도 또는 즐겁지만도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죽음을 부르게 할 생각은 없다. 싹이 트고 있는 나무의 기둥처럼 나의 몸에는 생의 의지, 아니 단순한 생이 시작되었다. 밤에 문득 달 로켓을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언제까지든 실패하기를 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또 침묵에 갇혀 있는 달이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들이 동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 차가운 은빛의 월광, 창백한 얼굴의 달을 보라, 나에겐, 그리고 누구에게도 영원히 신비롭게 남아 있어 주길! 과학이란 쓸 데 없는 간섭을 하고 기계를 주무르며 인간의 꿈을 파괴하고 만다는 대명사인가! 나는 알고 싶지도 않다. 달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리워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꿈을 갖고 싶다.

 

1020

암흑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비가 그칠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긴다. 벽난로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독서에 피곤해진 눈을 쉬게 하려고 책상 앞에 하염없이 앉았노라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절절한 고독감뿐. 이웃 방에서 도란도란 들려 오는 독일어도 나의 쓸쓸한 심정을 한층 복돋을 뿐이다. 마치 두더쥐가 땅 속의 온기를 탐내듯, 인간은 한 줌의 친절함과 인정의 필요를 느끼는 생물이었던가, 모든 것이 나에게 무관심하구나, 하는 생각은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서러움이다. 따스함을, 이해를, 건강을 갖고 싶다. 살고 싶은 의욕을 갖고 싶다.

 

1021

 

볼가강

루이 앙드레 살로메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난 너를 볼 수 있다.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넌 내게 머물러 있다.

표백될 수 없는 현재처럼, 나의 풍경처럼,

내 생명을 감싸고 있구나.

네 기슭에서 내 한번도 쉬지 않았더라도

네 광막함을 난 알 것만 같다.

꿈결(Traumeflut)은 항상 네 거대한 고독에

날 상륙시킬 것만 같다.

울기는 쉽지

루이스 휘른베르크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아서 날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찢어지는 가슴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꼭꼭 악물고

그리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115

돈이 떨어지다. 배는 다소 고프지만 나는 즐겁다. 오늘은 가을 하늘이 멋이 있었고, 나의 머리는 니체와 루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나의 텅 빈 추운 방에서 나는 벌레처럼 틀어 박혀서 나의 꿈을 기르고 싶다. 닫힌 문과 마음 속에 끝없이 펼쳐 가는 환상의 세계의 크기와 니체, , 릴케, 튜린, 질스 마리아......

 

1113

! 신경이 불협화음의 심포니를 쉴 새 없이 연주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유리 상인>의 시에도 표현되지 않았던 그 닥치는 대로 부수고 싶은 심정이다. 암흑 속에서 메피스토(Mephisto)에서 오는 무드인가. 틀림없이...... '모든 불행의 시초는 부모 자식이 된 인연에서 시작된다'는 아쿠타가와의 말이 머리 속을 맴돈다. 그러나 나는? 나는?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자격이 있을까? 내겐 이미 없다.

 

1114

무서운 꿈이었다. 잠이 깬 것이 기쁘다. 요즘 나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오토 프랑크(Otto Frank). 근본적으로 예의바른 성질, 솔직, 친절, 겸허, 희생심 등등...... 그들 가운데는 아주 비슷한 특징들이 있다. 한번 거짓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솔직하다. 비루하고 심술궂은 짓을 결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 내내...... 그가 그러리라는 것을 능히 추측할 수 있다.

 

1115

어둡고 무서운 하늘. 차갑고 축축한...... 그것이 시월이다. 집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1127

밖에는 회색 어둠과 함께 눈에 안 보이고 소리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뮌헨 특유의...... 비라기보다는 젖은 공기가 내린다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 같은...... 아무 것도 눈에는 안 보이는데도 머리카락과 아스팔트가 촉촉하게 골고루 젖는다. 벌써 노란 가스등이 켜졌다. 거리에는...... 잎이 없는 나무만 서 있는 빈 마당에서 누가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새빨간 불꽃과 하늘 높이 올라가는 보랏빛 연기가 어둠 속에서 무슨 그림같이 뚜렷하다.

 

햄릿

 

떠드는 소리가 그쳤다. 나무 무대로 나선다.

문기둥에 기대서서

멀리 울리는 산울림으로

내 생애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본다.

수많은 오페라 글라스의 시야를 따라

밤의 어둠은 나를 겨누고 있다.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내게서 이 잔을 넘치게 하소서.

나는 당신의 완강한 목적을 좋아하고,

내 역을 맡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여기 나를 한번 나오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연기의 순서는 이미 계획되어

피할 수 없는 길의 종말에 이르렀다.

나는 혼자서 모든 것이 바리새교의 위선에 빠진다.

제 목숨대로 살기란 들을 건너듯 쉬운 일이 아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

 

121

12월과 함께 첫눈이 왔다. 이제는 정말로 크리스마스 기분이 난다. , 벽난로, 촛불, 전나무 가지...... 한 달, 한 해...... 늙어간다는 생각도 잊고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가, 설이, 그러고는 봄이 기다려지는 마음. 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커다란 덩어리로 내리는 따스한 날에는 왜 그런지 마음이 뛰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아마 롱펠로우(Longfellow)도 그래서, 'My heart leaps up when behold a rainbow in the sky!'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 William Worthwords의 시)를 썼을 것이다...... 무지개나 눈뿐 아니라, 도대체 자연이란 늘 같으면서도 틀리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괴롭거나 고독에 의해서 모든 것을 좀 더 깊이 보게 된 사람, 자기를 응시하게 된 사람, 그리고 죽음을 멀리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연이란 별다른 감동과 정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소비에트 실화 소설(Schlusselromane)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회주의적 실화 소설. (Sozialistische Schlusselromane) 1. 해빙기 2.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3. 전설의 계속. '쿠즈니초프', '아나톨리' 매일매일 똑같은 무대다. 빅톨 Halbstarke...... 모터의 역할, 유행 등. 미성년 문제(사회 고위층의 자제들) 사치스럽고 방임된 청년들의 문제 4. 1225일 전에 슈테판 게오르게(Stephan George)가 죽었다. 정신의 예언자. 그는 사람을 잡아 끄는 자석이었다. 1890~1930 : 게오르게 시대 문학 : 선택 * 절제 * 울림 엘리트 귀족 정신 외관 형식 유켄트 식 그로테스크 '송가(Hymnen)' '인생의 융단 가운데서' '약속의 별(Stern des Bunds)' '날은 저물고 별이 돋았다. 오늘도 아니 오는 이는 내내 멀리 있으리' 그는 한 번도 집을 가져 본 적이 없고 주소도 없었다. 'Kuppen' 두 권으로 된 전집 'Dundruck' 그는 랭보, 보들레르, 셰익스피어, 로제티 등의 가장 위대한 독일 번역자였다.

 

1219(금요일)

매일매일(day by day) 점점 괴로워진다. Colette'임신의 위대한 축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여자는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남편과 하인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다 건강까지도...... 반면에 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옥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지옥이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의 잔인함과 추잡함, 비열함이 나를 질식시킨다. 빠져나가고 싶다. 그러나 이런 몸을 가지고는 할 수가 없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 후회가 된다!

 

1222

어젯밤 나는 죽음을 보았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가없는 암흑의 심연 한가운데에 유배된 것 같은 심정 천정과 벽과 모든 대상이 무한한 피안으로 떨어져 가버린 공포감, 심장이 죄어들고 호흡이 가빠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끙끙 앓으면서 불을 켰다. 같은 시각에 죽음은 이 집에, 나의 방이 아니고 크라미 씨의 방으로 찾아 들었던 것이다. 아침, 갈색의 염소를 보았다. 자그마한 동제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는...... 일흔 여섯에 맞이한 죽음은 비극이라기보다 다만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이라 보일 뿐. 그러나 어젯밤 빙글빙글 웃으며 수프를 먹고 있던 그를 본 나에게 뜻밖에 쇼크를 주지 않고 배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의 나의 예감과 공포, 나에겐 그것들이 모두 우연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1224()

크라미 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북공동 묘지(Nordfriedhof)의 시체실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희고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더이상 그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눈이 왔다. 오늘...... 정말 하늘에서 온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정말 멋있었다. 레히너, 샬크, 휫셔 씨 댁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2미터 높이의 멋진 청색 전나무(blau Tanne)로 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값이 쌌다. 우리는 수많은 색색의 유리공, 빨간 양초, 금실 등으로 트리를 장식했다. 트리는 아주 멋져 보였다. 그림 속에서처럼 아주 균형이 잡혔다. 저녁에 우리는 전등을 끄고 트리의 양초에 불을 켰다. 아주 동화 그대로였다. 우리는 닭 요리와 쌀밥을 먹었고 56년 산 헝가리 포도주를 마셨다. 모든 것이 찬란했다. 식사 후에 성 질베스터 교회에 가서 잠시 동안 우리는 기도를 드렸다. 교회는 어두웠으나 향불 냄새가 그윽하게 풍겨 왔다. 모든 일이 잘 되어 줄 것을, 많은 일을 하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신께서 내게 충분한 힘을 주실 것을 기도드렸다. 또한 우리가 너무도 많이 곤궁을 참아 내지 않아도 될 것과, 우리들 사이에 항상 조화가 유지될 것을...... 경건하게, 아니 형이상학적으로 도시는 수많은 불을 달고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엊저녁에 라디오에서 디킨즈(Dickens)<크리스마스 송가>를 들었다. 정말 아름답고 소박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였다. 무엇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 축제에, 눈에, 꽃 한 송이에...... 그 무엇에든지. 그렇지 않으면 잿빛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몹시도 가난하고 꿈이 메말라 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쉽사리 자기의 동심을 잃어버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스크루지(Scrooge)가 되어 버린다. 내가 받은 것' 에카르트 부인에게서 양말 주머니와 손수건. 암르하인 양에게서 책 두 권 (<죽음의 면전에서> 훔볼트 총서 30, 그리고 <채색 크리스마스 그림책>)과 과자 한 상자. 레히너 씨 댁으로부터 30장의 그림이 든 뮌헨. 샬크 씨 댁으로부터 독일의 천연색 사진이 든 달력과 큼직하고 멋진 초 한 자루. 휫셔 씨 댁으로부터 쌀 한 봉지, 과자, 사과 두 개, 통조림 된 사과 젤리 한 병, 종이 접시에 담긴 정어리, 통조림 한 개. '내가 보낸 것' 에카르트 부인에게 오 드 콜로뉴(콜론 산의 향수)와 코티 비누가 든 상자 하나, 그리고 시가 한 상자. 암르하인 양에게 릴리아의 향수 한 병과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레히너 씨 댁에 서류 가방 속에 편지와 봉투를 넣어서, 친자노(이탈리아 산 술) 한 병. 샬크 씨 댁에 오래 묵은 라멘델 향료(오 드 콜로뉴와 비누), 주소록. 엥기쉬 교수에게 큼직한 초콜릿 봉봉 한 상자. 마르가레타 수녀에게 채색 묵화가 들어 있는 캘린더. 크라미 부인에게 초콜릿 봉봉 과자 한 상자, 담배 한 갑.

 

 

1959

 

11(오전 0)

지금 막 새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크래커 봉봉(의 양 끝을 잡아당기면 큰 소리를 내면서 찢어져 안에서 장난감이 나옴)과 꽃불과 함께...... 불꽃은 정말 멋지다. 그들은 혜성처럼 치솟아서는 펑 하고 폭발하고 초록, 빨강, 노랑......의 수많은 별이 되어 흩어진다. 정말, 정말 멋지다! 12시 정각에 우리는 건강을 빌며 축배를 들었다. 철수와 단둘이서 섣달 그믐날(Silvester)을 즐기는 것은 멋진 일이다. 오늘 철수는 나에게 자그맣고 예쁜 손목 시계를 선사했다. 그것은 아주 내 맘에 꼭 들었으나 나에겐 어딘지 좀 사치스런 것이었다. 또 하나 기꺼운 놀람 하와이에 계신 고모님한테서 항공 소포를 받았다. 그 안에는 철수의 것으로 내의 한 벌과, 내 것으로 모직으로 된 흰 재킷이 들어 있었다. 정말 기뻤다. 철수는 그 외에 나에게 값비싼 빨간 장미 한 송이와 예쁘장한 카드를 선물로 주었다. 정말 말할 수 없이 그가 고마웠다. 새해에 내가 바라는 것은, 1. 건강, 건강, 건강! 2. 좋은 과제와 성공 3. 철수의 성공 4. 건강하고 영리한 아이 5. 약간의 돈

 

14(일요일)

5분 동안 산보를 했다. 영국 공원은 온통 눈 속에 하얗게 파묻혀 있었다. 허파 가득히 상쾌하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파스테르나크의 문장들은 아주 번역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난 그를 미치게 좋아한다.

 

11(오후 11)

오늘 아침 헤르만 헤세의 편지를 받고 즐겁게 놀랐다. 그 속에는 석 장의 그림 엽서와 헤세의 축하 인사가 들어 있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의 크리스마스 카드에 답해 주다니, 정말 그의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설날 아침 헤세한테서 편지를 받았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의 기운을 복돋아 준. 난 그것을 무조건 1959년 새해의 길조로 여기고 싶다. 그것은 틀림없이 커다란 기쁨을 내 일에 가져올 것이다. 난 그걸 믿는다.

 

17

잎이 말끔히 떨어진 나무 사이로 푸른 것이 보인다. 잉글리셔 가르텐(* Englischer garten)의 호수이다.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고 썰매 타는 아이들로 번잡했던 호수가 오늘은 깨끗이 녹아서 푸르디푸른 물이 출렁인다. 백조는 언제 돌아올까? 바람이 몹시 분다. 차지 않다. 그러나 허파 속으로 파고드는 매운 바람이다...... 온갖 꿈을 꾸다. 환각과 예상과 또 예상하지 못한 것을...... 괴롭게 줄타기하는 꿈을 어젯밤에 꾸었다. 오늘은 한 페이지밖에 번역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프고 땀이 쏟아져서. 정말 유감이다. 오늘 난 과로를 했다. 너무 많이 걷고 불규칙적이고 불충분한 식사를 하고 좀더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나는 모든 피상적인 것을 증오한다. 나는 모든 경박한 것을 증오한다. 성숙을 나는 동경한다. 과일의 무거운 황금빛 성숙을...... 생각이 깊고 눈이 날카롭기 때문에, 직관으로 모든 사람을 꿰뚫어 보면서도 마음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동생을 사랑한다. 내면의 고요와 명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피상적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천성이 성실하고 경외심에 가득 차 있고 경건하기 때문에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 그 애는 참으로 나의 보석,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나의 보석이다. 모든 철면피한 것, 둔한 것, 무례한 것, 조야한 것, 소란하고 시끄러운 것 등등을 나는 증오한다. 사랑이란 두 영혼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이어야 한다. 전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정신적인 것, 순수한 정신(Nur-Seele)을 나는 추구한다. 창백하고 순수한 달의 그 무감각한 냉정을 나는 갈망한다. 나는 끈끈한 것, 숨이 뜨거운 것, 야비한 것, 친숙한 것을 증오한다. 나는 평범한 것(Gewohnliches)을 증오한다.

 

18

나는 생활하고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싶다. 고요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내 생활 속의 정적과 질서가 없이 어떻게 내가 나무와 새들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내 아이와 나를 위한 생활의 단순함, 생활의 정적, 그리고 내 자신 속의 하모니, 이것들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디아나 봐르지 17일 전부터 집에서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목을 빼고 그것을 기다린다. 오늘 몸이 좀 아팠다. 열이 좀 나고 몸이 불편했다. 저녁에 철수의 셔츠 한 개와 내의 몇 개를 빨았다. 오늘 점심때부터 멋진 눈보라가 날렸다. 유감스럽게도 금방 멎고 말았지만, 그러고는 포근한 날씨...... 영국 공원의 연못은 얼음이 풀렸다. 그것은 앙상하고 시커먼 나무들 사이에 연푸른 색을 띠고 있다. 장미를 어제 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카네이션은 아직도 싱싱하게 피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 준다. 만일 외출을 하지 않고, 더 이상 외계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면, 훨씬 많이, 훨씬 날카롭게 보게 될 것이다. 매일매일 기뻐할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밤엔 번역을 좀 했다. 이중창인데도 바람 소리가 들린다. 먼바다의 파도 소리.

 

19

<지바고>를 읽었다. 아름답지만 역시 어렵다. 내가 꼭 사야만 하는 것은, 1. 아기의 배내옷. 2. 아마도 요람과 잠재우는 바구니 하나. 3. 평상복. 4. 코르셋 한 벌도 아마......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크라미 부인은 요즘 점점 더 침울해진다. 자기 남편이 죽은 후로는 얼굴에 미소 한 번 볼 수 없다. 무섭게 고독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여자는 용감하다. 결코 울지 않고, 더 많이 일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망각을 찾으려 한다. 그이가 내게 말하길, "당신은 전생에 쥐였을 거야. 왜냐하면 잘 때 이를 갈고, 게다가 개와 고양이를 지독하게 무서워하거든." 그 말이 나에게 생각을 하게 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뜻한 아궁이로, 가족에게로, 엄마의 젖가슴으로...... 어느 곳이든, 세상의 어느 곳이든 그를 위한 사랑과 기도가 있는 곳이면...... 그것은 인간에게 내면의 평안과 외면의 자신을 준다. 사랑 없이 자라고 돌아갈 아무 곳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람은 괴팍스레 고독해진다. 그러면 아주 쉽사리 당황하게 되고, 기분이 극에서 극으로 달리기만 하여 결코 침착과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된다. 모성애! 난 그것을 얼마나 미칠 듯이 아쉬워하는가! 난 그것을 받아 보지 못하고 자라났고 그래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모성애에의 동경은 내 가슴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화를 내거나 불만일 때면 그것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를 도와 줄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난 극단으로 기울어져 있다. 죽고 싶도록 내 자신이 부끄럽다.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모차르트(Mozartische)적인 명랑과 고요와 조화의 순간을 내 속으로 체험해 보았으면. 모든 격정적(Pathetisch) 음악을 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인생이란 우리가 전 심장으로 사랑하는 그 무엇으로써 채워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공허하고 불만족한 것이 될 것이다. 난 좀 슬프다. 기도를 드리고 싶다. 나는 가시를 하나 품고 있다. 내 가슴의 가장 깊은 곳에. 때때로 난 그곳이 아픈 것을 느낀다. 그러면 난 아주 아주 홀로 가장 어두운 방 속에 있고 싶어진다. 거기서 촛불이 타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그러나 난 또한 뜨겁게 갈망한다. 사람을! 인간의 사랑과 따스함을. 내가 가장 동경하는 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그래야만 하듯이 사랑에 충만하고 오직 사랑뿐인......

 

110(, 흐림)

지난해는 나에게 대체로 만족할 만한 해였다. 한 번도 심한 경제난에 봉착한 일이 없었고, 세계 박람회를 구경했고, 몇 권의 책과 외투, 시계를 살 수 있었고, 나의 번역이 빛을 볼 수 있었으며, 나와 가족 사이엔 기쁨이 지배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현상 모집에서 도합 백 불을 벌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난 신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금년에도 만사가 잘 되어 나갔으면!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시고 버리지 마시옵소서! <지바고>를 읽다. 훌륭한 책!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 속에 단 한번 전재 미문의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전 러시아가 격렬한 폭풍의 와중에서 어떻게 그 머리 위의 지붕을 잃어버렸는지를, 그리고 이제 모든 민중과 더불어 노천에 서 있다는 것을 누구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감시하지 않습니다. 자유! 진정한 자유, 요구만의 자유가 아니고 모든 기대와는 반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자유, 동시에 시구로부터, 오해로부터 풀려 나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그 자유의 와중에서 모든 사람들은 얼마나 거인처럼 자신을 느끼는 것입니까! 혁명은 우리의 의지에 어긋나게 너무도 오랫동안 억제되었던 호흡처럼 모든 사람이 부활하고 중생했다! 가는 곳마다 변화요, 혁명이다! 모든 사람이 두 개의 혁명 개인적인 혁명과 공동적인 혁명 에 참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Da Sozialismus)는 모든 개인적 혁명들이 동시에 급류를 쏟아 붓는 바다, 색과 자유의 태양, 창조력이 풍부한, 천재에 의해 영감을 받은,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계시되는 생의 바다, 바로 그것인 것처럼 나에게는 생각된다. 이제 인간은 이 생을 책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 속으로부터, 추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경험하기로 결심하였다. 오랜 중단 후의 첫 번째 중요한 사건은 상한 곳 없이 남아 있는 집 그것의 모든 돌멩이 하나 하나가 그에게는 귀중하게 보이는 으로의 숨막히는 기차 여행이었다. 그것만이 진정한 생이고 모든 시험과 모험의 목표였으며, 예술이 작품 속에 표현해야 할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 가족에로의, 자기 가정으로의, 자기 자신에로의 귀환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비롯되기 위해.

 

마야코프스키(Majakowsky) <전쟁과 평화>, <나선 피리>, <인간> :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은 전적으로 내 맘에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도스토예프스키의 계속이거나 좀더 솔직히 말하면, '이뽀릿트''라스콜리니코프' 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젊은 반항적 주인공들 중의 하나에 대해, 혹은 '미성년'의 주인공에 대해 쓰여질 수 있는 하나의 서정시이다. 얼마나 넘치는 재능인지! 얼마나 멋지게 그는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단연코 확실히 힘차게, 직선적으로 말하는데 성공하고 있는지! 얼마나 대담하게 그는 자기 논거를 세상 사람들의 면전에, 그리고 공중 멀리 집어 내던졌는지! 그는 어느 한 그룹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한 쪽 기슭을 떠났으나 맞은 편 기슭에 그는 상륙하지 않았다. 지옥과 파멸과 죽음은 그를 건드릴 수 있어서 기뻐한다. 그러나 봄과 생도 그를 건드릴 것을 갈망한다. 온 세계는 깨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2(큰 눈)

아침, 동화 속에서처럼 눈이 내린다. 세상은 온통 10센티미터 두께의 흰 융단으로 덮여 있다.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눈에 싸인 채 자꾸 걷고 싶다. 그렇게 해선 안 될 테지만...... , 푸른 하늘에 별이 총총, 흰 눈이 덮인 거리, 가로등, 차고 신선한 공기...... 영국 공원의 실개천이 가로등과 별빛 아래 검게 빛나며 재잘거린다. 자연은 정말 언제나 아름답고 조화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언제나 근심과 불안과 공포에 가득 차 있고...... 우리는 항상 남의 자유를 생각해야 한다.(wir mussen immr an die Freiheit der anderen denken.)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빌헬름 헤르초크(Wilhelm Herzog) 베데킨트 술집의 삼류 가수로, 문학적 어릿광대로 가장. 1910년대, 봄의 소생, 아동 비극(Kindestrgodie). 앙드레 지드 모든 허영의 결핍, 약간 싸늘한 겸손. 일흔 살의 마스크 문제의 안정, 매끄럽고 침착한 고정성. 그와 피카소와의 유사성은 정열적인 배우라는 것, 지나치게 솔직한......

 

115(큰 눈)

아침잠이 깨어 덧문을 걷어 올렸을 때 눈앞에 나는 동화의 세계를 발견했다. 세계는 온통 사치스레 풍성한 눈으로 깊이 덮여 있다. 눈은 그치지 않고 자꾸자꾸 퍼붓는다. 올 겨울 들어 가장 큰 눈이다. 음울한 회색의 앙상하고 가난한 풍경은 반짝이는 흰색의 꿈이 가득 찬 동화의 무대로 바뀌었다. 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게으른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 것, 비굴한 것을 나는 증오한다! 자기 성장에 대해 아무 사고도 지출하지 않는 나무를 나는 증오한다. 경멸한다. 모든 유동하지 않는 것, 정지한 것은 퇴폐(Dekadenz). 저열한 충동으로만 살고 거기에도 만족하지 않는 여자를 나는 증오한다. 나무는 하늘 높이 높이, 치솟고자 발돋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에까지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것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동경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에로스 닿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의 추구 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그저 좀 교활한 동물일 뿐이다. 오늘은 열심히 번역을 하였다. 8시간 동안. 죽고 싶게 피곤하다. 번역이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역이다. 그것은 많은 신경의 소모와 육체적인 지속성을 요구한다. 매일 약 4시간만 일을 해도 되고 휴식 속에서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러나 매일매일 내게는 똑같은 열이 찾아올 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처럼 과도한 요구를 받고 혹사당한다면 어떻게 훌륭히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유감, 또 유감이다. 나에게도 결국 그 책을 사 볼 독자들에게도...... 오늘 파스테르나크의 멋진 시를 발견했다.

 

모든 일에서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일에서나, 길에서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재빠른 나날의 핵심에까지

그것들의 원인과

근원과 뿌리

본질에까지.

 

운명과 우연의 끈을 항상 잡고서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발견하고 싶다.

 

, 만약 부분적으로라도

나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여덟 줄의 시를 쓰겠네.

정열의 본질에 대해서

오만과 원죄에 대해서

도주나 박해,

사업상의 우연과

척골(Elle)과 손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법칙을 나는 찾아내겠네.

그 본질과

이니셜(Initial)

나는 다시금 반복하겠네.

 

B. 파스테르나크, 1954

 

120(따스하고 맑음)

크게 놀랄 일은 우리의 희곡 안네―≫가 결코 출판되지 못하리라는 것. 오늘 최후의 거절을 당했다. 자신을 질책했다. 집에 오는 길에 질베스터 교회에 들러 잠시 기도를 드렸다. 신께서 다시 한번 나를 도와 주신 것을 감사 드리고 또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을......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어린애에게 충분한 힘을 주실 것을! 가슴이 몹시 뛴다. 틀림없이 목욕 때문이다. 달 밝은 밤. 이제 막 하루의 과제를 끝마쳤다. , 11페이지를 번역했다. 오늘 제10장을 마쳤다. 그러나 같은 한국 사람 하나가 이미 여권을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미 3분의 2를 번역했다고 한다. 유감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나대로 번역하는 것이고 그는 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다. 내버려두자!(Laisser-faire) 모든 사람은 자기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여타의 것은 자기 별에 이미 적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다. 평온하다. 오늘 채린이 생각을 많이 했다. 전 심장으로 난 그 애를 사랑한다. 그 애는 정말로 인간들 중의 한 영혼, 여자들 중의 참 진주다. 그 애는 나에게 보석처럼 소중하다. , 나는 얼마나 사소한 것, 추잡한 것, 사치한 것, 조잡한 것, 잔인한 것, 조야한 것을 증오하는가! 완벽, 무거운 황금빛 성숙과 수정같이 맑은 정신성을 추구한다. 그것은 진리. '나는 해야만 한다(Ich soll)'는 것...... 그것에 의해 살고, 그것에 의해 나의 생과 정신을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싶다(Ich will)'가 아니라 '......해야만 한다'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결정해 줘야 한다. 자기 훈련, 목적 의식, 겸손하고 자기의 환경을 의식한 일에 대한 인내, 인생에 다르게 마련인 가지가지 불쾌감에 대한 관용...... 행복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밤낮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만하고 완벽한 순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신으로의 복귀한 당위적 자아(soll-ich)로의 복귀, 진정한 자아로의 복귀, 본질에로의, 근원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거의 모든 긴장이나 만족 없이, 난 요즘 권태를 느낀다. 매일같이 똑같은 나날의 경과, 요리를 만들고, 먹고, 세탁을 하고, 번역을 하고...... 깊은 밤중까지 똑같은 피곤과 똑같은 기이한 만족...... 그것이 나의 생활이다(Cest ma ire), 그것이 전부이다(Cest tout). 난 신문이나 잡지를 전혀 읽지 않는다. 그러기엔 내 눈과 손이 너무도 피곤하고 맥빠져 있다.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다. 아마도 난 지루해 할 시간이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로 가득 차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에는 단 한 번 부활절이 있다. 운명과 속죄, 사랑! 어둠 속, 아름다운 촛불 앞에서 글을 쓰고 있다. 크레센도(Cresendo)로 점점 커져 가는 이 피아노 소리는 어디서 들려 오는 것일까? 별들은 검은 바다 속에 침몰하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바다 냄새...... 가로등처럼 어두운 골목길에서 타오르는 별들...... 그들의 모든 것은 봄과 동경을 숨쉰다. 수정같이 맑은 별, 지상적인 것을 증오하고, 모든 육체적인 것을 멸시하며, 창백한 영상으로 정신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 여명 속 나르시스의 숨결에 불과한...... 별아, 네가 있는 것을 알기에 나는 행복에 겨워 울고 있다. 별아, 결코 너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동경으로 자신을 소모시킨다. 별아, 자아의 진정한 모습아.

 

122

저녁 영국 공원 쪽에서 안개 속에 묻혀 베일을 쓴 불그레한 달. 검푸른 하늘과, 흰 눈에 덮인 대지. 드디어 오늘 번역을 끝마쳤다. 미치게 기쁘다. 내일 교정을 보면 그걸 부치는 것이다. 그것이 책이 돼 나온 걸 보고싶다. 이제 며칠간 긴장을 풀 수 있다. 책을 읽고, 평온 속에 모든 것을 반성해 보고 싶다. 깊은 감정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을 나는 증오한다. 피상적이고 자신에게 진지하지 못한 사람들...... 파스테르나크가 묘사했듯이 '공공연한 의태에서 생겨나서 인생을 감각의 연쇄로 보는' 사람들을...... 여권의 클라이맥스(Climax)는 마야코프스키의 죽음이다. 마야코프스키의 어린 동생의 비탄하는 장면을 읽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1: 유년 시절, 음악 스크리야빈. 2: 청년 시절, 철학, 코헨(Cohen), 마루부르크, 베니스. 3: 문학, 마야코프스키, 그의 죽음. 비가 오고 따뜻하다. 오늘 여권3부를 보냈다. 비용은 7마르크 40페니...... 멸치(건조된 작은 생선)를 받았다. 오늘...... 19581025일에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오는 데 석 달이 걸린 셈이다. 너무하다! 긴장이 탁 풀리고 피곤하다. 저녁 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몹시 슬퍼졌다. 인생이란 고되고 이익 없는 일만으로 이루어지고, 최후?이 휴식을 주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래, 오래 발을 끌며 걸어야만 하는 잿빛의 암담한 풍경처럼 나에게는 보였다. 좀 신경 과민이다. 아마도 신체적 상태 때문에...... 내 자신이 텅 빈 느낌이다. 요즈음 채린이의 꿈을 자주 꾼다. 내가 갑자기 날개가 생겨서 그걸로 그 애한테 날아가서 1~2분 동안 재잘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내가 새가 되어 아무 데나 날아다닐 수 있고 아무나 방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희극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오렌지 껍질을 씹으며(그것은 한 달 전부터 내 취미가 되어 버렸다) 생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본다. 그것은 하나의 캐리커처, 생이란 요컨대 캐리커처이다. 인간이란 가면(maske)과 의태를 소유한 원숭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메피스토의 미친 듯한 홍소의 의미를 나는 아주 훌륭히 이해할 수 있다. 나 자신도 때때로 이런 홍소를 터뜨리고 싶다. 만일 원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느끼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절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생은 나에게 평범과 피상의 것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중세와 대리석을 동경한다. 그릴파르처(Grillparzer)'절대 세계'를 나는 동경한다. 무섭게 깊은 사랑, 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 죽고 싶은 환멸 등등...... 일상 생활의 평면성이, 내용 없는 인간들이 나를 질식시킨다. 나를 절망으로 몰아 넣는다. 깊은, 핵심을 뒤흔드는 체험, 그것을 이제 곧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생명을 세계로, 눈부신 햇살 속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무겁게 책임감을 느낀다. 그 작은 생명에게 맹렬한 의무감을 느낀다. 난 그 애에게 완벽하게 행복한 생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저 그 애가 최소한도 사랑에는 굶주리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도록 노력하길 다짐할 뿐이다. 그밖에는 어쩌면 좋을지 난 알지도 못하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교육? 아니다. 난 나 자신을 교육시키고 형성시켜야 한다. 난 정말 아직 너무도 불완전하다. 내가 어떻게 한 생명을 명령하고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안 된다. 안 된다! 그저 난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병이 들면 기도를 드리고, 괴로워하면 울고...... 난 착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 아무런 요구 없이 희생만 치르며 난 사랑할 것이다. 그렇다. 지바고가 옳다. 진정한 세계는 가족이 세계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 라고 말한 그가 옳다. 그것은 우리 전 인생 중의 가시적, 현실적 요소이다. 그 외의 일체는 창백하고 유령 같다. 아쿠타가와는 말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단지 3분의 1만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3분의 1은 유산, 3분의 1은 환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이란 단지 하나의 상황일 뿐이고...... 자기의 계급과 자기의 월급, 자기의 일의 성격에 의해 완전히 자기의 정서와 사고까지도 규정지어진...... 지금 무릎(오른쪽)이 쑤시고 이빨(왼쪽)이 아프다. 그리고 열이 좀 난다. 잘 되겠지...... 그 외에는 아무 이상 없다. 이런 모든 과로 후에도...... 내 건강에 대체로 만족이다. 33(나의 출산 예정일)까지 39일 밖에 남지 않았다. 상당히 불안하다. 하지만 거의 태연하게 견뎌내고 있다. 참을성 있게 정지하여 절약하고, 절약하고, 절약하고, 또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아주 형편없이 먹는다. 그러나 칼슘 정제와 비타민으로 어린애는 별 이상 없을 것이다. 최소한도 그것을 바란다. 이제 자야만 한다. 12시 반. 오늘밤은 더 이상 번역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일이면 다시 고된 일이 시작될 것이다. 안녕. 나의 일기장아. 넌 내 친구가 되어 버렸어. 고독 속에서 키티가 안네 프랑크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난 너에게 내 가슴을 샅샅이 털어놓을 수 있다. 내가 괴로워할 때 넌 나를 비웃지 않고 내가 기뻐할 때 넌 날 시기하지 않는다. 난 미치게 너를 사랑한다.

 

124(아침에 눈)

열이 났다. 오늘은...... 난 번역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하루 동안의 휴식을 허락 받았다. 어두운 동경을 읽었다. 아주 매력적으로 아주 흥미 있게 씌어졌다. 단지 여권때문에 우리는 크라머(Kramer) 부인한테 10마르크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제 그 돈을 갚을 수 있을지 아직도 막막하다. 상당히 우울하다. 그러나 머리를 쳐들어라! 언젠가 너를 도와 주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다시 한번 너를 도와 주실 것이다. 모든 일이 그분에 의해 결정된다. 그분만이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우리의 생사를 지배하신다. 기도를 드려야겠다. 기도를, 기도를...... 모든 것이 잘 되도록.

 

129

흔히 주장하듯이, 나와 똑같은 환경에서도 훨씬 많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여자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나보다 더 건강하고, 더 강한 체구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임신 중에 육체적 과로는 출산과 산후에 극히 나쁜 영향을 준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아무도 그걸 고려해 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정말 내 힘이 미치는 한 일을 하려고 했고 또 해왔다. 늘 충분하지 못한 시간 내에 책을 번역했다. 그러나 이젠 정말 더 이상 해낼 수가 없다. 어젯밤 <툴라에서 온 편지>를 번역할 때, 그리고 후기를 쓸 때 난 내 몸이 얼마나 쇠약해졌는지 알았다.

 

마야코프스키의 '이별의 시'

 

사람들이 말하듯

사건은 끝났다.

사랑의 범선은

인생에 좌초했다.

인생에 아무런 책임도 묻지 말자.

하나 하나 헤기엔

너무도 많아

 

고뇌와

고통,

존재의 괴로움......

안녕히!

 

131

정월도 이제 다 가 버렸다. 그때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다. 몹시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또 약간 호기심이 머리를 쳐들기도 한다. 어린애의 작은 재킷과 구두 등을 보면 미지의 생명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다정함을 느낀다. 예쁘고 영리하고 착하게 어서 이 세상으로 오너라. 꼭 와야만 해! , 어서! 나는 이기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좀 더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항상 자신을 다른 사람의 처지에 바꿔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행동에 난 더 자제심이 있어야 겠다. 그렇지 않으면 난 지고 마는 거다. 난 자신을 훈련시키고 단련시켜야 한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모든 잘못과 인간의 불행을 반사하는 정직한 거울이다. 매일매일 향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다른 사람의 증오, 혐오로부터 구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고 남을 존중하고 자신이 또 존경받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현존을 감사한다는 건 훌륭한 체험이다. 이 달에 나는 여러 번 그것을 감지했었고 자신을 강제하지 않고 아무 위장 없이 신을 성찰하고 기도하였다. 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차로 믿고 있다.

 

22

학교 점수는 아이의 장래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들의 우스꽝스런 허영이다. 그것을 나는 증오한다. 나도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부모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왔다. 공부가 나에겐 맘에 들었고 좋은 점수를 받는 건 우선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에서 지금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차라리 요리, 세탁, 다리미질, 뜨게질을 배웠어야만 했다. 도대체 역사, 지리, 영어, 국어 등의 좋은 점수와 세상의 비실제적인 것들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나는 차라리 성경이나 요가를 공부했어야만 옳았다. 혹은, 재능이 있다면 그림을 공부했어야 했다. 난 내 아이에게 좋은 점수를 받으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짓이다. 대부분 가장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부모들이 특히 그런 짓을 한다. 오늘 오후에 에카르트 교수와, 철수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난 지금(거의 새벽 2) 잠을 이룰 수 없다. 지독하게 춥고 떨린다. 잠이여, 빨리 와서 너의 부드럽고 검은 커다란 외투로 휘감아다오! 어젯밤 꿈속에서 동경에 대한 멋진 시를 썼었다. 깨어났을 때는 유감스럽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23

S한테서의 편지 부정적인 대답. 그는 다시 화초의 구근을 요구해 왔다. 난 그럴 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

 

24

악몽에서 깨어나 몹시 침울한 기분이다. 깰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몽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누가 알랴? 영원히 계속되는 악몽이 바로 인생인지...... 거기서 깨어날 수 없다. 더 이상 느끼지 않고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몰하지 않는다면......

 

210

오늘 행복(Gluck) 하나가 나를 찾아들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나의 친구 주혜한테서 아주 예쁜 카드를 받은 것이다. 그는 그 속에다 나에 대한 그의 우정과 나를 향한 그의 공경을 적고 있다. 내가 아직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 그를 실망시키게 될지 어떨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죽고 싶도록 사랑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일찍이 안 가장 순수한 인간이다. 나는 그를 존경하고 있다. 그러나 불안하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나의 상(Bildnis)이 나와 너무나 닮을 수 없음을 불안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웃고, 또 울고 싶다. 우리 사이의 우정은 하나의 성스럽고 숭고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다. 우리의 <띠보가의 회색 노트(Graues Heft)>, 논어 공부, 국어 문법 공부 등 우리는 많은 것들을 둘이서 시도했었다. 내 생의 일 장을 나는 주혜 없이 회상할 수 없다. 1950년대 부산에서, 나는 서울이 북괴군에 점령되어 폭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쓰라리게 울었던지, 나는 참상을 그렸고 주혜가 죽었을 거라고 울고 또 울었었다. 그는 정말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한 사람이다. 오늘은 참죄절(Fast-nacht)이라고 한다. 거리에는 아이들만이 가장복과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피에로, 기사, 카우보이, 인디언 추장, 악마(Tejfel) ...... 제과점에서는 무더기로 갖고 온 과자들을 사고 있다. 날씨는 지독하게 춥지는 않지만 눅눅하다. 철수는 광범위한 재료(오려낸 신문 조각, 정기 간행물 등)를 가지고 매우 부지런히 <독일의 재통일과 평화 협정(Wiedeneinigung von Deutschland und Friedens-vertrage)>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나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정신적인 나의 욕망이 너무나 희박하다. 한 군데 집중할 수가 없고, 동물적 태만(animalische Tragheit)과 무위 속에 나는 빠져들어 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허튼 소리를 지껄이고, 빈둥거리며 나는 기다리고 있다. 위대한 체험을...... 내 생의 그 체험(Erlebnis)...... 철수는 선량하고, 끈기 있고, 무욕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그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량하다고 해서 그를 악용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된다. 얼어붙은 별들과 누런 가로등의 푸른 밤. 밤은 고요하고 달콤하다. 동화의 무대처럼 나의 오직 하나 가장 소중한 친구 주혜, 너를 나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 나의 가장 깊은 잠재 의식(Unterbewuβtsein) 속에 너의 이름을 나는 써 왔다. 너는 나의 영혼의 쌍둥이다. 너와 너의 고귀한 현존(Gegenwart)을 잃어버리고 나는 얼마나 너를 갈망해 왔던가! 이국에서 친구 하나 없이 적과, 질투자와, 개인의 영달과 안락만을 생각하는 동물적인 사람들만을 발견할 수 있었을 때, 나는 너를 얼마나 목말라 했던가! 너와 비교하면 모든 사람들은 너무도 비소하고 야비하고 불결했다. 얼마나 자랑스럽게 얼마나 경외심에 넘쳐 나는 너의 이름을 마음 속에 소리쳐 불렀던가! 도대체 네가 존재한다는 일이,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너와 같은 여자가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벌써 내게는 하나의 커다란 위안이었다. 너의 우정에 나는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부끄럽다. 미래의 나의 생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한결같이 너를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세 사람, 철수, 채린 그리고 주혜. 세상에 이 세 사람과 나 외에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남김 없이 행복할 것이다. 우리를 방해하고 화(Unheil)만 끼치는 다른 사물이나 인간들이 너무도 많다. 만일 내가 도박(Toto)을 걸어 이긴다면 이 세 사람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한 번 해보고 싶다! , 그것은 얼마나 멋질까? 적어도 그런 꿈 정도는 꿀 수가 있다. 그러나 유감히도 나는 도박을 싫어한다. 그것에 맞는 소질이 내게는 정말 없다. 게다가 나는 낙천주의자(Optimist)가 못 되고 나의 성향은 검은색이다. 반대로 철수는 상당히 낙천적이고 모든 것을 상당히 파랗게 그린다. 그 때문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 미칠 듯이, 그의 혈기 왕성한 무구속성(Unbefangenheit)과 오만(Ubermut)을 진정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와 같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나에게 매혹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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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로부터 불쾌한 편지. 또다시 구근과 성장 촉진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내가 유복하다고 생각할까? 나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지. 그는 무분별(rucksichtlos)한 에고이시트다. 채린이한테서 카드 한 장, 그 속에 특별한 건 없으나 그 애는 언제나 귀엽다. 오늘 잘못하여 찬물에 머리를 감아서 감기에 걸렸다. 종일 식욕도 없이 구토에 몇 번이고 엄습 당했다. 불쾌한 일이다. 아마도 이런 일이 결국 언제나 끝날 것인지...... 배가 고프다. 한 조각의 음식도 나는 삼킬 수 없다. (feiber)도 나고...... 내일 무조건 목욕을 하고 나서는 카로리눔 병원 의사한테 가야 한다.

 

213

채린이한테서 매우 멋진 편지를 받았다. 그 애는 정말 귀여운 애다. 그러나 '랭보(Rimbaud)'가 행방 불명 되었다니 유감이다. 그 외에 '티지(Tigi)'도 유감 천만! 정말 한심스러운 노릇이다. 모든 것이 나를 그처럼 압박한다.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 절망적(hoffnungslos)으로 보인다. 저녁에 나는 카로리눔(Carolinum) 병원의 의사한테 갔다. 날카로운 약 냄새가 풍기는 산뜻한 병원...... 나는 거기서 아마 해산(Entvindung)을 할 것이다. 그 의사는 비 바이에른(unbayerisch)적 익살맞은 사투리를 쓰는, 나이가 지긋하고 몸집이 큰 건장한 분이다. 상처와 메스 앞에도 찌들지 않는 전형적인 외과의 거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뢰할 수 있는 건 그의 능력 때문이다. 20일 후면 나는 거기로 가야만 할 것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비명을 참으며...... 의사는 내가 젖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젖에 좋은 것을 나는 더 많이 먹어야 한다. 이 만년필이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왜 잉크가 새어 나올까? 불결하다. 휘규와 바로메타는 이제 짙은 청색을 띠고 있다. 두 명의 타인이 공존한다는 일은 원래 골치 아프고 복잡한 문제이다. 이론적으로 봐도 내게 불가능한 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의 시도를 강행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거기에다 또 하나의 존재(3의 타인)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될까? 아무도 그걸 부수어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가히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가능한 한 재난만 대수롭지 않다면...... 오늘은 모든 것이 야릇하게 아득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에 나는 덧문을 내리고 어스름 속에서 사념에 잠겼다. 이 하루를 늙고 병든 암탉처럼 그렇게 꺼벅꺼벅 졸면서 나는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는 보통 아빠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 부담이 되고 속박이 되고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엄마되는 이에 대한 배려와 관심도 있어야 한다. 거기다 그는 너무 젊고 너무나 활기에 차 있는 것이다. 가능한 한 거기에 관계하지 않으려고만 한다. 되도록이면 거기에다 별로 지출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 외의 생각은 없다. 이것은 그의 탓일까? 아니다, 결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것은 대부분 할머니들이나 할 일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의 쌍방 어머니들은 너무 젊고 슬하에 자식이 많다. 때문에 거의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걸 객비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것 또한 너무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다.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또한 그걸 가끔 후회하기도 한다. 생이란 정말 살아갈 가치가 없다.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타인에게 생(Leben)을 선사하려고 하는가? 어떠한 권리로? 그것을 하는 나는 무엇일까? 하나의 견본(Vorbkld)이 나일까? 아니다! 아니다! 그 일과 미래를 생각하면 대개는 몹시 슬프다는 느낌이다. 그러한 의지(Wille) 없이 세상으로 그것을 내보내게 된 것을 제발 용서해 주었으면. 나의 책임은 엄청난 것이다. 동시에 소름끼치는 속박을 받고 있다. 나는 산욕 중 자살을 한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겠다. 직접적인 동기 없이 말하자면 세계고(Weltschmerz)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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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나에게 불안이 엄습(Unfall)해 왔다. 끔찍스러웠다. 모든 것을 삼키려 드는 죽음의 크고 말 없는 검은 입에서 빠져 나와 나는 도망치려고 했다. 달리고 또 달렸지만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더이상 보고, 느끼고, 읽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 흙이나 돌이 될 것이고 세상은 그래도 지금같이 꼭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나는 무(nichts)에로 녹아들 것이다. 끔찍하다(Schrecklieh)! 나는 나의 사고(Gedanke)를 전향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를 거기에서 전향시킬 수 없다. 밤마다 몇 번이고 나는 깨어나서 불안의 엄습을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왜 그것을 육체적으로 통렬하게 느끼고 괴로워해야 할까?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이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인간은 거기 대항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단지 가공할 죽음이 그를 데려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나는 인간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겠다. 그들은 돌로 머리를 쳐서 자살을 하지 않도록, 어떠한 미혹(Jauschung)이 무조건(unbedingt) 필요하다. 종교와, 술과 사랑과, 혹은 일종의 자기 찬미(Selbstverherrlichung), 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자신을 미혹시킬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파스칼(Pascal)도 불안을 가졌었다.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불안에 떨게 한다(Der ewige Schweigen des endlichen Raumes Jagt mich Furcht).' 그렇다. 이 침묵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미래 앞에서의 이 무지. 무엇 때문에, 정말 무엇 때문에 우리는 태어난 것일까? '하나의 식물이 자라듯 맹목적인 우연(Blinder Zufall)' 이외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보다 높은 원인을 의식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적어도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오오, 내가 차라리 새나 조갑지라면! 죽음이나 생에 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살기만 하고, 노래만 부르고 있게 된다면(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얼마나 좋을까! 하필 인간으로 이 세상의 빛을 바라보도록 그 누가 나를 초대한 것일까. 나는 이러한 발작이 곧 종식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나는 나의 공포에 질식한다. 불합리(Absurde)와 자살(Selbstmord). 철학의 본질(Grundlage)은 생이 보람된 것인지 아닌지 해결해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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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순의 벽으로 밀쳐져 있다. 내 속에는 무의 황량하고 차가운 영지가 있다. 나는 생과 세계에 소외감을 느낀다. 옛날에는 자명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불가해하고 모순되게만 보인다. 나는 왜 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가, 알고 싶어 못 견디겠다. 생이란 살아질, 지켜나갈 만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떠한 권리로 나는 하나의 생명을 세상으로 보내는가? 십 년 후에는 나와 꼭 같이 그것은 무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애를 쓴다는 일은 절대로 보람 그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마찬가지다.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시공에 비하면 모든 것은 그렇게도 헛된 일이다. 요컨대 인간의 생은 추구할 만한 게 못된다. 가깝든 멀든 미래에는 죽음이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행동하고 있다. 그것은 회피하고 있다. 모든 것, 모든 다른 것은 끔찍이도 생각하지만 죽음만은 조금도 생각질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인간에게는 터부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이기 때문에...... 스케줄에 따라 일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연구하고, 사랑하고 엔조이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에겐 종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인간의 생의 방식이란 얼마나 그릇되고 자기 기만인 것인가! 사람은 사고하기 싫어한다. 단지 살고 싶어할 뿐이다. 그가 살고 있다는 육체적 확실성(Korperliche Gewiβheit)만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얼굴을 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으니 태양과 죽음이 그것이다' 라고 한 라 로쉐푸(La Rochefou)의 말은 정말 옳았다. 사람은 순간만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옳지 않을까? 아무 계획도 하지말고 오직 하루 하루를 살아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망각하도록 모든 수단을 써서 감각을 무디게 해야 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죽음은 불가피한 불청객으로서 매일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머리가 몹시 혼란하다. 내 자신이 몹시 낯설고, 버림받은 느낌이다. 나는 인간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느냐고, 피안의 소망(Goffnung des Jenseits)을 가지고 있느냐고, 인생이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느냐고...... 나는 모든 사람에게 솔직히 대답해 달라고 묻고 간청하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원컨대 죽음의 생각을 회피하지 마시길! 죽음은 매일같이 점점 가까이 우리를 향해 다가와서 끝내는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시기를! 제발 우리 함께 그것에 대한 방편을 숙고해 보자고! 서로서로 돕자고...... 그저께 이후 나는 완전히 달라진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 시시하고 낯설고, 창백하게만 보인다. 나는 즐거워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고, 너무도 무감각하다. 나는 인간 감정의 온갖 고락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내게는 헛되게 생각된다. 죽음만이 내게 큰 의미를 가진다. 인간이 일생 내내 포착해야 할 오직 하나는 죽음이다. 죽음만이 사고되고 논쟁되어질 가치가 있다. 그 외의 일체는 중요하지 않고, 무형적이며 허위이다. 나는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진종일 죽음만을 생각하였다. 그래야만 했다.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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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탈리아 여자는 아주 건강하다. 그 여자는 돌아다니고, 기저귀를 빨고, 전화를 걸고...... 그 여자의 활동력은 초인적이다. 해산한 지 꼭 8, 드물게 축복 받은 건강체의 여자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여자를 부러워한다. 4시간의 진통을 집에서 치른 뒤에 병원으로 달려가 5분 후에 아기를 낳은 것이다. 나도 꼭 그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산을 해 주십사고 신께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해산 후 속히 회복할 수 있기를 빌고 있다. 그 이탈리아 여자의 일이 내게 무엇인가 위안을 준다. 인간의 사고는 단절된다. 그렇지 않다면 배겨내질 못하는 것이다. 사고를 멈추지 않고서는 가스 마개(Gashahn)를 돌리거나, 목매어 죽을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질식시킬 때까지 이 조그마한 생을 살아내기 위하여 인간의 사고는 단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물을 근본에까지 사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능한 한 피상적으로, 가능한 한 지엽적인 것, 공허한 것, 진부한 것을 사고해야 하리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마비시킬 수 있기 위하여. 그렇지 않고서야 살아내지를 못할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하면, 그것이 이상적이리라. 인간이 더 사고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게 낙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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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M으로부터 항공 전보를 받았다. M29일에 나에게 돈을 부쳤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50불을 G. K. Lee 씨에게 부쳤다. 그가 한 달 동안 돈을 쓸 수 있게. 그 돈이 도착하게 될 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저께 장양한테서 온 튤립 가운데 두 송이는 샬크 양에게 한 송이는 살비오(Salvio)한테 선사했다. 샬크 양은 약 1주일 전부터 아프고, 살비오 양은 어린애를 낳은 것이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어린애를 보았다. 그 애는 어찌나 조그마한지! 나는 경악했다. 인자한 가족들과 이 살비오! 친절하고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한 진지한 남편(이탈리아인답지 않게)과 유쾌하고, 언제나 기분이 좋고 건강하고 부지런한 아주 쾌적한 음성의 부인, 가난하지만 4명의 그 가족은 행복해 보인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지껄이기 위해서 지껄이는 사람, 천박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 철두철미하게 판에 박은 사고만을 가진 사람, 우쭐하고 유치하며 책임감이 없는 사람, 굴욕 앞에 치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간단히 말해서 정신의 품격이 없는 사람이다. 가난하지만 자랑스러워야 한다. 자기의 긍지를 지녀야 한다. 개성이 없는 사람은 정말 하나의 캐리커처(karikatur)이다. 그가 행하고 말하는 전부가 우스꽝스런 냄새를 풍긴다. 그 자신만이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성격이 없는 사람, 규율이, 이상이, 사물에 대한 직관이 없는 사람을 나는 얼마나 증오하고 경멸하는지. , 신이여! 인간의 좋은 점만을 내가 깨닫고, 나쁜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도와 주옵소서! 모든 것이 나를 격동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소한 약점과 부담이 나를 너무도 미혹시켜서 생의 맛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나는 황야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앞에도 뒤에도 광활한 황야가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너무나 쓸쓸하고, 너무나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음을 느낀다. 생이며, 인간의 영혼이며...... 모든 것이 그렇게도 불결하다. , 소름 끼치도록 불결하고 비천하다. 신이여, 내가 더 살아내기를 바라게 구원하소서. 제발, 나에게 생에의 의지와 욕망을 베풀어주옵소서. 모든 것이 너무도 망가졌다. 수선할 수 없도록 망가졌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것도 더 이상 나를 매혹시키지 않는다. 의지 없이 존재할 뿐인 하나의 돌, 혹은 나무에서 떨어진 하나의 잎사귀가 나다. 재즈, 재즈, 재즈 트럼펫, 클라리넷...... 미칠 듯한 소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근심을 불어 꺼 버릴 수 있기 위해? (pourquoi)? 깊고 깊은 밤 2시 반. 무서운 정적. 나는 망실되었다. 우리 안의 한 마리 야수처럼 어딘가에 있을 인간과 자유와 빛. 내 뒤에는 추적자가 고함을 지르고 내 출구는 봉쇄되었다. 파스테르나크

 

221

어둡고 비라도 쏟아질 듯한 날, 무겁게 구름에 덮인 하늘과 영혼. G. K. Lee 씨는 소식이 없다. 혹시 <여권(Geleisbrief)>을 출판할 것인지? <안네 프랑크>의 원고를 돌려 줄 것인지 모든 것이 몹시 궁금하다.

 

222

...... 전과 다름없는 일요일. 눈이 무섭게 쏟아졌다. 지금은 저녁. 슈베르트(Schubert)<미완성......(Unvollendete)>을 듣고 있다. 어둡고 우수에 잠긴 선율 어두운 예감에 가득 찬...... <춘희>를 재독했다. 감동적인 이야기다. 좀 울었다. 소 듀마(Allexandre Dumas fils)는 화류계나 완전히 창녀가 아닌 여자의 사랑을 대단히 잘 이해하고 있다. 그 여자보다 훨씬 추한 영혼을 가지고서 뽐낼 줄만 알고 있는 속물과 위선자보다 나는 그런 여자들을 동정한다. 세계와 세평만 두려워하는 그들. 평상시의 행동이란 꼭 그대로거나 훨씬 추한 것이다. 법률과 세상의 눈앞에서만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이나 신성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나는 증오한다. 난로가 빨갛게 타고 있다. 그런데도 춥다. 그 이탈리아 여자는 몹시나 건강하다. 작은 소리로 유행가를 부르고 종일 기저귀를 빤다. 얼마나 억세고 튼튼한 여자인지! 한없이 그 여자가 부럽다. 건강이란 정말 신의 선물(Gotts-geschenk)이다. 극도로 건강한 아이를 하나 가져 봤으면! 이것이 나의 유일한 야심(Ehr-geiz)이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어떤 변명이나 회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무위와, 무기력과, 무능 등등에 대한 하나의 구실로써 그들이 여자라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는 많은 여자들이 있다. 여자가 된다는 어려움에 자기를 상실한 많은 젊은 여성들, 너무나도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결혼을 결승점, 하나의 최종적 안식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력과 진지함과 끈기가 부족하다. 사람은 전력을 기울여 도박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쾌활하게 내기를 할 뿐이다. 득실이 그리 생기지 않도록...... 결국 결혼이라는 피난처가 어쨌든 시민적 안전을 배려해 준다. 때문에 훌륭한 여자의 출현이란 극히 희귀할 따름이다. 여자가 훌륭해 지려면 여러 가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그걸 방해하고 있다. 튤립에서 정말 맥빠진 술 냄새가 난다.

 

죽음 오토 프리드리히 볼로프 :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할 때 압도되고 전율하는 불안이다. 거기에는 육체적인 불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Nichtmehrsein)것을 생각할 때 엄습해 들어오는 어지럽고 섬뜩한 감정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생명적인 존재(Dasein)의 존속에 대한 공포, 벌거벗은 부재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존재의 존속에 대한 불안은 또한 다른 어떤 것, 죽음에 의해 위협적으로 제기된 문제, 즉 이제까지 살아온 생이 조속한 종말의 가능성 앞에 직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연결된다. 야스퍼스는, 이보다 깊은 불안을 단순한 '존재의 불안'으로부터 '실존의 불안'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영향은, 그것이 항상 자기 일상 생활의 확실성의 껍질에서 인간들을 자꾸 자꾸 끌어내어 인간의 눈앞에다 모든 자기의 계획과 기도의 불확실성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실존한다(Existieren)는 건 죽음의 면전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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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따뜻한 날씨. 저녁 때 암르하인(Amrhein) 양의 생각지도 않던 방문을 받고 기뻐서 깜짝 놀랐다. 그녀는 어제 구두 시험을 통과해서 이제는 박사라고 불러야만 되게 되었다. 우리는 충심으로 그녀를 축하했다. 그녀와 함께 우린 멋진 저녁을 보냈다. 먼저 브라텐들(Brathendl)이라는 음식점에 가서 각자 닭 반 마리씩 먹고 그녀의 성공을 축하하여 54년도 오펜하임 주를 마셨다. 그 후 안개가 자욱한 레오폴드 가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녀는 레오폴드 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녀는 뷔르츠부르크(Wurzburg)에서 그 거리에 향수를 품었던 것 같다. 그런 다음 개선문 곁의 카페에 앉아서 커피와 홍차를 마셨다. 930분 경에 우린 헤어졌다. 그녀는 17번 전차를 타고 숙모집으로 갔다. 그녀는 탁월하고 유능하고 착한 여자이다. 조용하고 조화된 그러면서도 민감한...... 나는 그녀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좋은 남편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녀는 틀림없이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더 이상 생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동물적이고도 적나라한 공포에 불과했었다. 나는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야기시키는 본질적 기분(우울 * 권태 * 공허 * 자포 자기) 등과 싸워야만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생을, 이 생을 긍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 일회적인 생을 열망해야만 한다. 나는 이 내적 기분을 극복해야만 한다. 아니면 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밤에 라디오에서 현대 음악을 들었다. 불협 화음의 기이한 금속성의 톤, 그것은 나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해 준다. 전율할 만큼 쫓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를...... 그런 음악을 듣는 것은 불안했으나, 잘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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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보낸 소포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들은 나에게 그렇게 친절하니 나는 참으로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오늘 대학 병원에 마지막 수속을 할 수 있었고 짐도 챙길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언제고 갈 수 있다. 나는 더욱 진통을 기다릴 뿐이다. 두렵고도 깊은 감동을 줄 경험을...... 어제 오후 전통 깊은 뮌헨 미술관에서 끔찍스런 사고가 발생했다. 정신 착란을 일으킨 한 남자가 루벤스(P.P.Rubens)의 세계적인 명화 <위대한 지옥>의 그림을 가공하게도 산을 뿌려서 파손시켰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과 인상을 기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체포되지 않았다. 비록 그를 죽이거나 벌한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그림은 루벤스가 애초에 그린 것과 같이는 결코 되지 않는다. 유감스럽다! 천만 번 유감스럽다! 내가 그 그림이 파손되지 않았을 때 그 그림을 세 번이나 보고 경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것은 공포로 가득 찬 감동적인 그림이었다. 만일 루벤스가 천당에서건 지옥에서건 이런 음모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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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정화 아버지)와 함께 장보기를 한다. 싸구려 트렁크 하나, 나와 아기를 위한 약들, 아기 내의 등...... 이제 정말로 더욱 더 진통을 기다린다. 오늘 방을 해약했다. 마틸드 샬츠 양은 선량하고 친절하나 너무도 수다스럽다. 그녀는 참으로 잠자코 있지 못한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온갖 것에 대해 수다 떠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선량함에도 그녀를 경멸한다. 쿠바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이 총살당하고 있다. 혁명 후에는 언제고 인간은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불탄다. 이 세상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많은 불쾌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신 이상으로 비정상적인가? 내가 미친 것일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에 종막을 고한다는 것에 그렇게도 자주 희열을 느낀다. 나는 내 자신과 온갖 것에 계속해서 몰두하고픈 마음은 없다. 너무도 지치고 지쳐서 진절머리가 난다. 많은 곳에 밑줄이 그어진 내 책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그 누군가 정신적인 욕구가 없는 무미 건조한 인간일 경우에...... 나는 분명 까다롭다. 나에게 완전히 낯선 사람이 내 책을 샅샅이 뒤지는 것이 싫다. 오늘 저녁 나는 분명 신경과민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내 책을 몹시도 사랑한다. 그것은 내 관념의 일부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혐오감으로 인해 전율한다. 분개한다. 어두운 밤 자욱한 안개, 별들과 냄새. 얼음이 녹는다. 아주 얄팍한 얼음 밑으로 물이 속삭이며 흐른다. 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빨려 들어가듯이......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어둡고 숨막히는, 그리고 한계가 없는...... 나는 가고 또 갔다. 내 발 밑에서 빙판이 깨어졌다. 그러나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집들과 거리에서는 불빛이 타고 있었다. 나는 내가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감미로운 고통이 집에 대한, 따뜻한 침대에 대한, 인정에 대한 동경이......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방은 어두웠고 황무지와도 같이 텅 비고 황량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정신을 차렸고 내 이성에 명했다. 내 마음을 돌렸다. 모든 것은 그렇게 무의미하다. 나는 내 자신과 분노를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느 책으로 인해 죽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바로 이와 같은 무의미한 감정으로 인해 헐값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조차도 기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러 번 그것을 갈망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무의미하고 진부하기 때문에...... 아이는 내 몸 안에서 매우 힘차게 태동한다. 그것이 몹시 싫다. 아이는 벌써 빨리 세상을 보자고 이젠 보챈다. 그러나 도대체 인생이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사랑? 기막히게 빨리 사라져 가는 달콤한 꿈과 환멸에 불과한 것이다. 하루하루는 위대한 사랑을 죽여 버리고 하찮은 사랑을 묵살한다. , 참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온갖 것을 알고, 반대로 그도 다른 사람에 대해 온갖 것을 안다는 것을. 영원한 불변, 습관, 생은 신속히 사랑을 위해 무덤을 판다. 그리고 나에겐 아직도 타산과 이성이 남아 있다. 인간이 이런 변화에 중점을 두고자 하지 않고 사랑에 집착한다면 그는 반드시 생을 파괴하게 되리라. 사랑한다는 것이나 산다는 것, 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사랑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지속하기엔 불가능한 것이다.

 

310

우르슬라 암르하인 양에게서 아주 예쁜 카드가 하나 왔다. 그녀는 특별히도 몹시 내 마음에 든다. 아이는 아직까지 아무런 징후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나는 시시각각 기다린다. 그동안 아이가 너무 크게 자라서 난산이 될까 두렵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운명이다. 각자는 각자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운명을 납득해야만 한다. 내가 분만 중에 죽는다 해도 그것이 내 운명이고 비운인 것이다. 나는 요즈음 기이하게도 나도 모르게, 그리고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밤중에 자주 내 가까이에서 죽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전율한다. 나는 죽음에 대비하여 내 몸을 보호하고 내 마음을 돌린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고 되돌아온다. 내가 허심 탄회하게, 분별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지금 죽거나, 20년 후이거나, 30, 혹은 50년 후에 죽는다 해도 결국 마찬가지다. 꼭 같은 것이다.

 

311

어머니에게서 멋진 편지가 왔다. 극평론가 Y씨에게 희곡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접수돼서 빠른 시일 내에 출판되리라는 소식이다. 나는 안심했고 기뻤다. 그러나 슬퍼할 소식이 있다. 미스터 리가 우리의 <여권>을 인쇄도 하지 않고 아무런 해명도 없이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여원사>에 대해 상담해오셨다. 어머니는 그것을 문고판으로 발행했으면 하신다. 그러나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첫째, 이미 너무 늦었다는 점(경쟁상으로). 둘째, 여원사에서 사실상 인쇄할지 의문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문고판에 끼일 수만 있다면 난 몹시도 행복하리라! 나와 T와 우리 아기를 위해서 모든 일이 꼭 성공하리라! 나는 많은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 나는 전속력으로 일해야만 한다. 함부르크에서 온 미스터 정이란 분의 방문을 받았다. 장미 다섯 송이를 가져왔다. 꽃은 기뻤으나 사람은 별로...... 점심을 먹고 거의 6시간이나 수다를 떨다 가 버렸다. 저녁 때 내 고착 관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베토벤의 <9번 교향악>을 들었다. 장엄한 음악(합창). 나는 스스로를 극복해야 한다. 나는 심연에서, 허공에서 들려 오는 소리를 흘려버려야 한다. 아니면 나는 자신을 상실하리라. 아니면 곧 신경 쇠약에 걸려서 분명 정신 병원으로 가야 하리라...... T가 머리를 감았다. 그는 내게 단 하나의 사랑스런 사람이다. 우리의 생존에 한계가 있더라도 아니 오히려 우리의 생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그를 몹시 사랑한다. 그렇게 간절히 그를 사랑한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한다. 어머니는 사랑스럽고 선량한 분이다.

 

313

모든 것은 꿈과 같이 지나갔다. 모든 것은 그렇게 돌변했고 압도적이었다. 13일 저녁에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1961

 

11

지금은 밤 12시 정각, 막 새해에 들어간 시각이다. 흥분이 된다. 체념에 넘친 1960년은 지나가 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새해가 잿빛일지 파란색일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좀더 애쓰고 모색하면서 괴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것뿐이다. 인생이란 어린이 놀이터가 아닌 것이며, 우리는 웃고 뛰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서, 단 한 번인 이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맨 끝을, 맨 속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 데까지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죽는 것 애써서 노력하다 쓰러지는 것, 이것이 삶의 참 모습이다. 그 이외의 지식이나 생활이란 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가장 긴급하고 근본적인 유일한 생의 테마는 우리의 현존재의 비밀과 유한성의 고뇌의 극복을 탐지하는 것뿐이다. 정말로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괴로움을 같이(mit-leien)하는 데서 오는 이해(Verstehen)인 것 같다. 죽음을 씨로서 속에 지닌 과실로의 삶을, 우연적, 일회적으로 주어져 있는 우리들 누구나의 공통 운명이고 괴로움인 죽음을 갖고 사고의 거리에 놓고 거기에서 파생한 모든 허무감을 나누어 느끼고 동정하는 것 이것은 약함은 아닌 것 같다. 이 공감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실존에의 돌입을 용이케 하도록 도와주고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식하는 나와 생활하는 나, 내 손의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 내 의식 속의 남의 의식, 남의 의식 속의 나의 의식, 커뮤니케이션의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짧은 데서 오는 단절감, 비애, 영혼과 영혼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맞부딪치는 해후만이 진실한 것인 타자와의 관계(Bezog)의 어려움, 쉬운 길, 만인의 길, 자기를 내던지고 유한성과 탁월성에 눈감는 길의 크나큰 유혹, 나만이 어떤 오식 활자같이 거꾸로 박혀 있는 것 같은 콤플렉스...... 기타 삶의 메카니즘이 요구하는 의무(Devoir)반감 및 무력이 모든 갈등(Konflikt)에 넘친 가시밭 같은 길이 우리의 삶의 길이다. 매일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땀과 피를 흘리는지 모른다. 공동 사회는 우리의 의식이 실존하는 것에 반대밖에 되지 못하고 세계는 개체와 분쟁 상태로 대립해 있는 것이고 또 우리는 타자 존재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세계 속의 존재인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모순에 넘친 가엾은 존재(Dasein)가 인간인 것일까?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소제기 같이 우리를 분말화하는 것에 불과하고 삶이란 풍화작용의 일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이 무서운 허무감에 눈을 뜨고 응시해야 한다. 무를 견딜 수 있는 경지를 내 속과 내 주변에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부단히 나에 이르는 길 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올해는 보다 나에 성실하게, 보다 진정한 실존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나와 내 죽음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모색하고 싶다. 온갖 정신의 게으름이나 낭비를 두려워하자. 무엇보다도 속화에의 그것은 방지되어야 한다. 나의 생활을 시작하면 곧 등장할 내 속의 속물을 미리 공포스럽게 혐오하고 멀리 하자. 언제나 언제나 너 자신이어야 한다. 아무 앞에서도 어디에서도...... 우리의 일회성을 명심하고 일순간을 아끼자. 미친 듯이 살자. 이성이 선이라는 것은 더욱 더 믿어진다.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속인의 경우가 아닐 때에는...... 철저하고 싶은 의지, 완성에의 의지가 우리의 내부에는 주어져 있는 것이니까...... 1961년은 좀더 성실하게 생을 살기 위해서 철학을 더욱 공부할 것을 자정에 맹세한다. 나를 찾자. 나에게로 돌아가자! 아침 7시다. 엄숙하리만큼 찬 아침 공기 속에서 새해를 실감한다. 모든 새로운 시작과 마찬가지로 한 해의 시작도 몹시 어렵고 고난에 찬 것임을 예감시켜 준다. 1961년이 품고 있는 무언지 어둡고 무시무시한 새 맛, 긴장미가 새벽의 냉기와 함께 심장부를 압박한다. 필연코 행복이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지없는 성실한 노력을 바친, 후회도 애석함도 없는 일념으로 만들어야겠다. 생명이 타오르는 실감이 있는 팽팽한 활줄같이 귀중한 순간들의 연결선으로 된 1년을 만들어야겠다. 과감할 것, 견딜 것, 그리고 참 나와 참 인간 존재와 죽음을 보다 깊이 사색할 것을 계속할 것,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가장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기 성실을 지킬 것, 언제나 의식이 깨어 있을 것, 이것만이 어떤 새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나의 의무(Sollen)인 것이다. 1030분이다. 즐거운 하루였다. 무엇에도, 무엇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이 내 가슴을 덮고 있다. 깊디깊은 안도감과 따쓰한 정다움이 나를 즐겁게 한다. 모두가 외계나 타자 의식까지도 나를 따스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고, 나에게 몇 명의 정다운 사람의 심편이 내려 덮어 나를 미소케 하는, 이유 없이 즐겁게 만드는 날...... 아무에게나 다정하게 부드럽게만 대하고 싶고 거지 아이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내려앉은 마음......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는 정말로 표현적이다. 그 중에서도 <기분 잡쳤어요!(I got a dirty, dirty feeling)>는 멋있고 피가 약동하는 느낌이나 폴 앵카의 <다이아나(Diana)>는 실감이 있는 유니크한, 박력 있는 노래다. 재즈가 정말로 점점 좋아진다. 지금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음악에만 열중시키는 절대적인 무엇(etwas), 그것은 갖고 있는 것이니까. 오늘같이 모두가 웃고 즐거워하면서 마음 너그럽게 올해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갈등 속의 존재'인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나와 남의 의식간엔 대립이 있음을 생각할 때 정말로 오늘 같은 쾌감으로만 점묘된 하루가 귀중히 느껴지는 것이다. 담담하고 따사한, 정답고 건강한 한 해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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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는 좀 따스한 날이다. 오후에 채린이와 같이 단성사에 가서 <협잡꾼들(Les Tricherus)>을 보았다. <서양의 붕괴(Untergang des Abendlandes)>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한국이 물질 문명에서 아직 봄이나 여름의 단계임을 축복하고 싶어졌다. 극도의 테크닉의 완성과, 개인주의의 모럴의 세련과, 보다 건강하고, 영양 좋은 육체를 가진 그들의 광분은 우리의 하이틴의 그것과의 사이에 몹시 거리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동물적 성실성(Tierischer Ernst)을 가지고 있다. 무언지 애쓰고 일하고 당연히 고생하고도 가난하게 사는 운명을 수락하는 체념의 전통과 약간의 물질, 경멸 내지 초연주의가 남아 있다. 재즈와 춤과 스피드와 섹스의 엔조이만이 전 심신을 채울 수 있는 세대(Generation)가 앞으로는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모럴이 높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얕아서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편을 축복해야 좋을지 모른다. 카르네의 술회 '어떤 시대에도 공부하는 소수는 있다. 다만 강한 자만은......'에는 실감이 있었다. 약한 자는 결국 현실(Realife)을 직면 못하고 샛길로 도피하게 되고 그곳에서 허세와 콤플렉스와 순간적인 망각의 추구로 소일하게 되는 것이다. 대지처럼 질기고 건전한 젊은이는 필히 구식(Old Fashioned)이어야 한다. 모세(Mose) 때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니까...... 현대의 돈키호테만이 참으로 실존하는 자이다. 현대인에게 조소와 경멸을 사고 대열에서 빠져 나오는, 멋이 조금도 없고, 우스꽝스럽고, 순정파인 젊은이...... 이런 캐리커처도 풍자로만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구라파의 일반적인 젊은이의 동향(Tendenz)은 이 영화가 파악하고 있는 것과 대동 소이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구라파에는 한국의 전 심각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 심각한 사고와 의식으로 살고 있는 극히 순수한 몇 개의 두뇌가 있는 것이다. <장 크리스토프(Jean Chritope)>에도 나오는 다락방에서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과도 같은 타입이......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구라파의, 세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구라파인보다 심각한 생활 방식을 우리는 결코 자랑할 수 없다. 결국은 무에 이르는 심각과 노력과 행동이라면 무가치한 것이니까...... 가치 창조적인 것인 아닌 고통이란 부인될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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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베니스에 가서 다니엘리 호텔에 유람객으로 투숙했다. 기막힌 꿈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 기분 좋았다. 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크고 습기에 찬 눈이 많이 내렸다. 어수선히 눈 속을 거닐어 보았으나 마음은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 고독은 어떤 벗이나 육친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상호전달과 이해가 불가능한 단절의 상태임을 생각할 때 정말로 뼛속까지 외로웠다. 내가 혹시 유명해지고 지위나 돈이 있는 인간이 되고 저오하가 내가 바라는 대로 예쁘게, 곧게 자라난 후일지라도 이 고독은 내 손에 그대로 머물러 떠나지 않을 것을 생각할 때 정말로 피투성이로서의 나의 존재를 실감했다. 살고 있는 것이 나인 것처럼 죽는 것도 나밖에는 없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친자, 부부, 형제, 애인 등 모두 나무와 나무 사이만큼의 관계밖에는 없는 것이리라. 같이 비를 맞고 햇빛을 쬐면서 자라 이윽고 고갈하는 나무라는 공동 운명의 테두리 속에서 좀 가깝게 던져져 있는 나무들은 서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서로 미소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결코 지속될 수 없는 불꽃이고, 대화인 줄 착각한 환영은 독백으로 에코하는 것이다. 갈수록 깊어가고 다양적으로 넓게, 깊게 뿌리를 뻗는다. 몇 겹의 고독이 나를 에워싸는지 모른다. 찰나에만 가능한 이해나 찬미나 친화력...... 그에 뒤따르는 보다 강한 고독의 쓴 맛, 사람은 결국 '고독한 존재'인 것을 생이 나날이 나에게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욕심쟁이어서는 안 된다. 고독을 초극시켜 준 것같이 느낀 일순간을 우리는 언제나 감사해야 한다. 그 뒤에 온 공허나 허무감은 인간의 던져져 있는 상태에서 온 본연의 감정이지, 누구의 과오나 악의는 아닌 것이니까. 이해, 공감, 감사, 이것만이 우리와 타자 존재 사이의 감정이어야 한다. 깊은 애증이나 분개는 결국은 극단적(Bodenlos)인 것이고 불합리(Absurd)한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것은 자기의 죽음에의 길을 걸어가는 것뿐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보다 관대해질 수 있다. 누구나를 따뜻이 포섭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훌륭하고 위엄 있는 교훈적인 인간은 못 되더라도 되고 싶지도 않지만 동정에 있어서 참 의미로 풍부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다. 위선 비판은 안 하고 싶다. 아무도, 언제든지라도. , 눈이 멎었다. 실존에의 돌입은 필연적으로 개개의 영혼의 고독 속에서 성취된다. 이 경우에 공동 사회는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없으며 다만 방해가 되기 쉬울 뿐이다. 야스퍼스(Jaspers)는 어떤 다른 한 개인과의 접촉이 우리의 실존을 각성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지적하고 있으나 그것은 언제나 한 영혼과 다른 한 고독한 영혼과의 만남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친 지속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짧은 접촉에서만 가능하다. 즉 실존 자체가 지속 상태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드물고 적은 특수한 순간에만 제한되어 있듯이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에게 선물 주어진 매우 드문 순간에만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극단으로 말하면 각 순간에 있어서의 실존적인 공동 관계는 그 순간에 헌신함으로써 완전하며 절대적인 것이다. <볼로프(Bollnow)>에서 우리의 고독은 그러니까 '마음의 전달(Kommunikation)'이 불가능한 데서 나오는 불안과 회의에 싹트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고 우리의 실존과 마찬가지로 매순간마다 선택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것, 이 발아들임, 선택함에 있어서의 결단성과 긴장성, '어떻게(wie)?'가 우리를 결정하는 전부라는 것을 안다면 사랑이나 기타 대인 관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시원한 맑은 관계가 될 것인가? 우정이나 사랑은 '무엇(etwas)'에 있어서(본질에 있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나의 의식을 내가 나날이 선택하는 내 태도, 즉 내 의식의 강도(Intensitat)에 의해서만 그러한 것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지에서 보면 질투나 후회 같은 감정은 토대도 없는 망상(정신 착란, )에 불과한 것이며 선택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다. 고귀한 순간, 가득 찬 순간이란 자기 의식과 타자 의식이 완전히 융합되어 하나가 된 '대자 즉자 존재'의 상태인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Fata Morgna', 환상(Illusion)에 불과한 것이다. 그 순간만이 바랄 가치(Erstrebenswert)가 있고, 그 순간은 포착되고 응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의 가치의 전부인 것이다. 마치 생 그 자체처럼 허무한...... 정화의 살구 같은 뺨과 분홍빛 몸과 동그란 입, 동그란 눈, 빳빳한 속눈썹,...... 그리고 종알종알 하루하루 더 배워 나가는 말...... 노래...... 이런 것은 정말로 사랑에 의해서, 사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걔에게 쾌적한 생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심신이 곧게 자라게 하는 것, 온갖 편견이나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운 태양과 같은 아이로 만드는 것......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과제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말을 빌리면 '외부로 뻗어 나가려는 생과제(eine auβerst ausstrengende Lebensaufgabe)' 이리라. 회고해 보아도 또 앞을 전망해 보아도 내 일생은 불행이다. 다만 그곳에 은총의 자국이 있다면 그것은 엘리자(정화)가 나에게 주어진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신의 섭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위태로운 선물이었다. 기적이었다. 따라서 나는 엘리자를 통해서 신을 보아야 하고 신에 이르러야 한다. 엘리자는 나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신의 사랑(sichtbar gewordene Liebe des Gottes)'이고 은총인 것이다. 엘리자 없는 나의 생은 지금은 상상도 안 된다. 황무지(Wasteland)보다 더 황폐하고 삭막하고 공허하고 가난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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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지 즐거운 기대가 예감되는 즐거운 아침이다. 무겁게 잿빛으로 꽉 잠긴 하늘조차 유쾌한 강설의 약속으로밖에 안 보인다. 긍정과 악황에 넘친, 이런 새벽의 감상이란 나에게는 희귀한 것. 어젯밤 화장실 유리창을 통해 아스토리아 호텔이 보였다. 훤한 노란빛으로 빛나는 몇 개의 창. 그 사이사이에 앓는 이처럼 검은 창들...... 창가에 떠오르는 실루엣(Silhouette)...... 나이프와 포크 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 가볍게 웃으면서 하품하듯 소일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들에게 있어서는 계산 밖의 일, 사고 밖의 일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로 죽을 수가 없는 재인들이다. 우연히 S라는 아이를 길에서 보았다. 얼마 전에 미국서 온 아이다. 그 애의 우월감(이유 없는)과 초연함, 머리 * 화장 * 복장에서만 과시하려는, 그곳에만 미국 갔다온 사람의 특성을 가냘프게 유지하려는 초조하고 혼자 거만하고 일반적으로 무례한 태도는 불과 몇 분 사이에도 완전히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 애가 나를 못 본 것을 요행으로 알고 나는 얼핏 피했다. 구토를 누르면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조금이라도 저런 냄새가 날까 봐 겁내면서...... 전에는 순수하고 소박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 애가 저렇게 속화된 것, 완전히 속물이 된 것은 미국 때문일까? 또는 나이 때문일까? 문화나 문명이 발달시켜 놓은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 자기도 모르게 물질 숭배자, 따라서 배금주의자가 돼 버린 것이 구미인이다. 아주 극소수만이 아직도 정신의 편이다. 외국에 가서 물질만 배워 온다면 정말로 안 가는 편이 낫다. 여기서도 밍크와 다이아몬드, 자가용, 악어 백 등은 얼마든지 사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니까. 가능한 사람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보다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은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생전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가 정신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끔찍한 것에 불과하다고. 나는 내 생각에 더 이상 잘 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글이 아닌 것은 도저히 갖다 줄 수가 없다. 당신은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실 겁니다. 정신이 배고픔이나 더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라는 것을, 정신에 쫓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를 자신의 경험에서 아실 것입니다.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사람이 완전히 고독하게 앉아서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느끼고 영원히, 다시는 한 사람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옥일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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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루 앞에서 어떤 젊은 청년하고 같이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동무를 만났다. 몹시 마르고 빈상해져서 기이할 지경이었다. 눈은 더 나빠진 모양...... 나이가 어려 보이는 청년과 같이 들어가는 게 아마 직장의 동료인 듯했다. '독신 직업 여성'이라는 한 개의 문제를 안전에 본 감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직업이란 생활의 쾌적은 커녕 필요한 것(das Notwendige)도 해결해 줄 수 없을 지경이니 더욱 기가 막힌다. 그렇다고 결혼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최선의 바람직한 상태(bester und wunschenswerter Zustand)일 수도 또 없는 것이고...... 무에의 과정으로써 생물적으로 생을 파악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많은 노고와 땀과 눈물과 피가 필요한가? 하고 묻고 싶어진다. 정말로 '정신' 속에 우리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살아질 가치가 없는 무엇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되풀이해 보아도 인간이 순수 상태, 최고도로 승화한 상태란 의식이며, 단순히 인간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의식을 매 순간마다 지키고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인간에게 적합하고 당연한 생과제인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신에 의해서 빛나게 된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하다. 우리가 뜨겁게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 순수한 사랑이란 세상에서는 순간으로밖에 선사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거기에 어떤 다른 무엇이 섞인, 혼합물(Mischung), 때때로는 싸구려 혼합물(billige Mischung), 심지어는 대용품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순수뿐인데도 그것이 존재 내에서 존재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너무나 모험적(riskant) 고독한 경주를 필요로 한다. 일상 생활과는 필연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다. 순수의 반대의 타협(Kompromiss), 속물주의다. 정말이다. 지혜의 여신(Minerva)의 부엉이는 밤에 난다. 어둠 속을...... 즉 미학이 단념하는 곳에서부터 도덕이 비롯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대상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냉정(stoic)해질 수 있는가만 생각해 보라! 비겁하게도 도덕에 두 팔을 들게 되는 우리들! 온갖 부덕은 미와 미에의 우리의 숭배에 기인하고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 * 시간 * 햇빛...... 이런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육체, 그것도 때로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더 참되게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육체에의 우리의 이러한 편견(미나 추의 개념도 하나의 편견이요, 경향인 것이니까)과 고착(Klammern)은 모두 우리가 육체를 하나의 비유로 보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두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의 영혼을, 의식을 우리는 그의 육체를 통해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때에 육체는 언어가 된다. 프리즘이 된다. 우주를 반영하는...... 그리고 우리의 매혹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순수한 매혹, 대상도 없이 자족한 매혹의 상태는 바로 나르시스의 상태다. 즉 불모 * * 죽음의 숭배인 것이다. 자기의 육체와 자기의 의식은 필경, 초극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초극의 과정은 순간적으로만 가능한 단편(Fragmento)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삶은 기나긴 거리의 대부분의 무용성을 느끼게 된다. 니힐을, 불합리를, 물거품, 무지개, 하루살이, 갈대...... 비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한 허무의 비유는 우리의 저서다. 우리의 움직이기 쉬운 마음, 찰나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감동, 공감, 찬미, 사랑이다. 숫제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리는 것이(기쁜 추억이든지, 슬픈 추억이든지) 우리의 허무의 가장 큰 징조일 것이다. 왜 모든 지적 발견, 인식은 나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부정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지상에는 전적으로 완전히 무조건 영원히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까닭이다. 모두가 순간적으로만, 그리고 조금씩 큰 가마에서 한 숟갈씩 밖에는 체험될 수 없는 까닭이다. 모든 것이 다 암시적이고 가상적이고 대용품격(대상도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보아 신의 대용인 것이다)인 까닭이다. 생각할수록 슬프기만 하다.

 

저녁 기도

 

조용하거라, 공포여, 고통이여.

곧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눈만 감고 가만히 있으면

너는 반드시 가루가 되어 부서질 터이니,

기다리거라, 분노여, 불안이여.

세계가 끝났다고 네가 생각하는 날,

참으로 끝나는 것은 다만 너의

작디작은 심장의 움직임뿐일 것이니,

나를 떠나거라, 애정이여, 동정이여.

네가 집착한 온갖 대상은

손가락으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보다

더 순간만의 것이고 더 무인 것이니,

잠자자, 내 감각, 내 피부......

우주의, 신의, 사람들의 고통을

인공적으로라도 덜 느낄 수 있도록!

 

 

마치 현실에서의

나의 무용성을

반증하려고

내 잠재 의식이

기를 쓰고 활동하는 것같이

내 수면은 반드시 꿈을,

그것도 특이한, 찬란한,

무서운, 달콤한, 뜻밖의,

무수의 에피소드를 담은

총천연색 대형 스크린의 꿈을,

수반하는 것이다.

 

대상에의 기도

 

앞으로 네가 있을지 나도 모른다.

다만 네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나는 너의 존재를 알고 있고, 내가

너의 존재에 무한한 감사를 빚지고 있음을

네가 있었으므로 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나르시스가 죽은 뒤, 님프들처럼,

당신이 없음을, 없는 존재 세계의 무목적성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풀고 울며 외친다.

우리는(신이여! 신이여!) 심연에서부터,

신이여, 우리를

이 뼈를 깎는 공포로부터 놓여나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신이여.

당신이 없다면 우리는 옛날에

기절했을 것입니다.

 

그리움

 

거리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깝게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배반

 

내 눈처럼 마음속처럼

암담했던 저녁

내 생각은 줄달음질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기정사실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

확증된 일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

그때 나는 내 의식이

내 옆에서 소리를 죽이면서

우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어떤 저녁에

 

형제

 

너희도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나도 너희를 선택하지 않았고, 내 부모도 우리를, 우리도 부모를 각각 선택하지 않았다. 단편적인, 엄연한 사실만의 집합체가 우리다. 체계 없는 아마 의미도!

그럼 누가 우리를 모아 놓은 것인가?

묻지를 말라.

 

오늘 저녁은 유난히 파토스(Pathos)가 넘치는, 터질 것같이 감정(Emotion)이 충만한 저녁이다. 무엇의 자극이었을까? '마틸다?' 또는 엘비스의 <당신은 오늘 밤 고독하십니까?(Are you lonesome tonight?)>, 또는 포도주?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안개가 깊이 덮여 달도 없고 별도 없고 가로등만 있는 저녁이다. 마치 어딘지 정처 없이 가는 집시같이 남김 없고 숨김없이 방랑하는 느낌! 고독! 생이 지나가는 것을 첨탑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 모험과 뜨거운 센세이션, 과감한, 순수한 체험에의 갈망이 조수처럼 뜨겁게 밀려 왔다가는 다시 싸늘하게 식는다. 무언지, 무언지 이룩해야겠다. 이 모래를 가지고....... 이 나에게 주어진 시각성을 가지고....... 그렇지만 무엇을? 지금 나의 내면의 순수한 명령은 <<생의 한가운데>> 같은 책을 쓸 것을, 아니면 번역할 것을 명한다. 그렇지만 인쇄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일본 소설 붐인데! 무엇이든 좋다. 직접적이고 수공업적인 나날의 땀, 집중과 하루에 적어도 7, 8시간이라는 노동 시간을 요구하는 그런 일을 맡고 싶다. 노동하고 싶다. 꿈꾸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인텔리는 되고 싶지 않다. 땀을 흘리고 입수한 빵은 반드시 더 달지는 않다. 미각상으로 보아....... 그러나 그것은 확신(내면적인)과 안전을 준다. 세계에서의 나의 위치를 의식하게 해 준다. 마치 한 개의 의자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대해서 이론이 없듯,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명확한 무엇이 된다. 모든 것이 다 단순해진다. 내 시야는 몹시 좁고 낮고 아늑해져서 나는 일상성 속에 네 활개를 펼 수 있는 것이다. , 일상성, 일일(하루)의 노동이 그립다! 내 의식을 파헤치고 내려가도 대답은 제로일 것이니까! 내 존재나 바로잡고 내가 어디에 현실적으로 속해 있는가는 이론의 여지없이 알고 싶은 것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싫다. 첫째, 학생의 순수성이나 지성에 신뢰가 안 간다. 둘째, 가르치는 사실이 나에게 우선 흥미가 없다. 학생한테도 따라서 물론....... 셋째, 나보다 낫게(더 알기 쉽고, 외기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확신에서 나오는 불안(Unsicherheit)과 콤플렉스. 넷째, 어려서부터 선생과 교사의 직업을 나는 경멸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나의 소망의 직업이 있다면 역시 쓰고 싶은 것뿐! 나의 소망의 생 방식은 사색(Philosophieren)이고....... 아무리 보아도 공명심이, 생에서 어떤 확실한 한 자리에 도달하려는 더러운, 또는 가엾을 것인 욕망으로 밖에는 나에게는 안 보인다. 모든 것에 도달하고 나도 나에게 남은 것은 역시 유한성 시간, 죽음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니까! 황소같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 야심적인 사람에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멀리 하는 수밖에 없다. 정치에 의한 사회 기구 개혁과 사회와 인간의 개선도 나에겐 결국 헛된 노고로 달리는 길로 밖에는 안 보인다. 온갖 지성의 최고 영역으로, 가령 내가 답사하고 난 후 일지라도 나에게 낙인(Zeichen)처럼 남은 건 회의론뿐일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 부모의 사랑도 못 믿고(그리고 그 불신은 정당한 근거 위에 있다) 내가 어떻게 신의 사랑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왜 파스칼에 있어서처럼 나에게도 구현해 보여 주시지를 않는 것일까? 그의 조카의 옴병이 면류관을 만지자마자 사라진 것 같은 그런 이적이 왜 나에게는, 내 눈앞에는 안 일어나는 것일까? 신의 총아(favarte)는 다만 구파라인인 것일까? 아시아, 아프리카는(회교도도 물론) 잊혀진 잃어버려진 대륙(vergessene, verlorene Kontinente)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울 뿐이다. 마치 지혜의 사과는 나 혼자 먹은 양 왜 나만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가? 그것도 스스로 사서? 단순한 어린애만이 행복하다는(천국에 간다는 확신은 즉 행복이니까) 예수의 말은, 그럼 우리는 유년기에 있어서만 무죄하고, 무죄에 있어서만 불행하지 않다는, 즉 무와 죽음의 의식이 주는 강박관념과 공포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인가? 그림책같이 한없이 길게 느껴진 어린 시절! 세상이 이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하루하루가 신비스럽고 기대되었던 때! 즉자 존재(Ansichsein)! 일단 자기의 내던져진 상태를 반성해 보고 자기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루 알게 되었을 때부터, 즉 자기가 자기의 흥미거리가 되고 연구 대상이 되었을 때부터, 즉 우리에게는 풀 수 없는 모순과 상처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지옥(Holle)은 시작된 것이다. 즉 우리의 지옥이란 우리의 대자 존재(Fursich Sein)이고 우리의 의식성(Bewu βtsein)이고 우리의 지성(Intellekt)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다시 즉자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즉 미치거나 백치가 되는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불행한 것이다. 대개의 작가의 창작 의욕이란 이 불행을 의식 속에서 만이라도 종이에라도 초극해 보려고 한, 다시 즉자로, 유년기로 돌아가려고 한, 무리한 또는 다만 순간적인 발버둥치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 보수는 불행의 의식과 고통이 평인보다 수 배로 강하게 깨어나고 계속된 것밖에는, 생각할수록 불행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우리 인간이다. 가끔 무지개처럼 주어지는 짧은 매혹(Verzauberung), 환상(Illusion), 만남...... 이런 선물은 너무 드물고 너무 찰나적이고 그 외에는 인생은 길고 긴 항로이다. 의식의 이 팽팽한 긴장과 심장의 이 아픈 충일과 예지의 이 텅 빈 공허, 그게 전부다. 양심 있는 성인이 획득할 수 있는 인생 수학은...... 따라서 인간에게 가능한 전부는 태도(Haltung), 즉 포즈(Pose)뿐인 것이다. 시지프(Sysiphe), 또는 랭보, 또는 보들레르(Baudelaire), 또는 니체(Nietzche), 또는 릴케...... 아무튼 양심 있게 용감하게 운명과 대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새로운 공포가 솟아난다. 새로운 허무와 공허감이! 결국 생은 무이고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포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할 때......

 

18

미래와 연결되지 않은 과거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무다. 밤이 왔습니다. 이제 모든 샘솟는 우물들은 큰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도 하나의 샘솟는 우물입니다. 밤이 왔습니다. 이제야 모든 연인들의 노래 소리가 커져 옵니다. 그리고 내 영혼도 하나의 연인의 노래 소리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가라앉지 않는, 어떤 것이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큰 소리를 내려고 합니다. 사랑을 그리는 내 욕망이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로 말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

나의 모든 과오와 죄악은 한마디로 태만인 것 같다. 의식과 정신과 감각이 하나같이 무의욕과 게으름의 늪에 빠져 있다. 내 영혼을 완전히 점령하는 나의 24시간의 심신을 충만시킬 그 무엇은 없는 것일까?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다. 못견디게 공허와 싸우고 지쳐서 잠자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das ewige Weibliche)이라는 것은 조소할 만한 개념만은 아닌 것 같다. 어머니가 유명하거나 바쁜(외형적으로) 아이들, 즉 등한시되고 있는 아이들은 온갖 물질적 혜택과 사치에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모자간의 원적의는 무엇에 기인하고 어디에서 끝날 수 있는 것일까? 여자도 남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긴장한 일 끝에는 자연스런 긴장 완화(Entspannung)에의 욕망이 있고 그것은 만족스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일까? 루이제 린저와 지 샌드는 그렇다고 하고 보브와르는 아니라고 한다. 엄밀한 의미로 모럴이나 지조(Constancy)의 한계 여하? 또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되는 아버지가 몹시도 부럽다. 콜로라도, 네바다, 멕시코......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고 너무 불가능하다. 아무 의미나 돈의 제한 없이(비교적) 그저 관광 여행을 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것일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8형제의 한 명으로서, 외국에서 4년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부모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그리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보은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미정이지만...... 거리가 그리움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잊었던 모든 결점, 약점, 불쾌한 에피소드들, 학대 등이 생생히 상기되고 고정되는(의식 속에) 수도 있다. 거리는 때로는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Entfremdun-gseffekt)와 같은 작용을 한다. 온갖 우정이나 애정의 토대는 존경(그의 야심, 의욕, 능력에 대한)과 신뢰(도덕적인,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이 두 개만 있다면 육체적 매력이나 소위 성적 매력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 거리는 공포다. 지옥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공포다. 그리고 이 공포는 우리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 사랑도 받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범속화에의 강렬한 욕망이 때때로 질식할 듯이 엄습한다. 모든 즉자 존재를 부러워하는 것은 그런 순간이다.

 

110

인간 속에 있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좁은 생활 범위 내에서 나날이 폭로되어야 하는 체계(System)가 가정인 것 같다. 모든 인간이 늑대로 보인다. 고독한, 완전히 홀로 자기의 생존과 모이를 찾아서 으르렁 으르렁 헤매고 있는 방랑하는 늑대, 그것이 인간이다. 사랑 같은 건 인생의 첫번 언덕(분홍빛 유년기)에서 피었다가 어느덧 꺼져버리는 안개 같은 것, 환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짧은 일순간을 빼놓고 인생은 지루하고도 무섭게 짧은 가시밭이다. 이 가시밭을 또 영원히 갈망하는 인간의 생명에의 애착이야말로 온갖 비참보다 더 비참한 것이고...... 끝없는 불신, 대자와 신에 대한 이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는 허망한 느낌, 공포가 이윽고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가? 모든 것 속에서 악의 씨를 본다. 비극의 싹과 끝없는 무를 본다. 너무나 불가능한 과제가 삶이다. 마치 어디에 굳게 의지할 무엇이 있기나 한 것처럼 자기의 삶을 건설하고 하루하루를 조각하듯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것, 모래로 해안에서 집을 만드는 데 가장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것과 같은 것, 이런 과제, 이런 나날의 초극과 자기 극복과 어떤 눈가림을 요하는 작업이 삶이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유한한데 무엇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과 인간의 영혼이 부딪치는 것은 어떤 귀하고 드문 순간에만 제한되어 있을 때 우리의 정서의 정주란 가능한 것일까? 신앙이란? 회의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검은 무하고...... 괴로울 만큼 터무니없는 깨달음을 위해서 약 30년이나 이미 살아온 것일까? 밝음이란 언제 가능한 것일까? 정말로 나의 상황은 오스왈드(Oswald)<나에게 태양을 다오>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하게 시민적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을 볼 때 그 속에서 안분하는 지성과 깨달음과 겸허, 인간의 근본적인 따스함을 볼 때 부럽고 존경의 염이 일어난다. 나는 영원히 그런 사회로의 문이 닫힌 것 같은 어두운 체념과 절망과 함께...... 니체의 <밤의 노래>는 맑고 차갑고 투명한 고독의 극치에서 외친 탄성 같다. 감탄할 만한 언어의 구사, 이미지의 맑음, 표현의 매력, 도취시키는 법......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의 하나다. 니체도 역시 외로웠던 것이다. 한 여자와 부엌, 식탁, 아이...... 이런 시민적인 영상이 그의 뇌리를 아마 잠시도 안 떠났을 것이다. 그것을 안 했으니까 니체가 있는 것이지만 그가 그만큼 무서운 고독의 대가를 지불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엇에도, 무엇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 쌍의 남녀가 만나서 자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생활 분위기를 구성하면서 일생을 보내도록 되어 있는 동물인 것 같다. 그것이 정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즉 어딘지 병적일 때, 그 인간과 세계와의 대립은 극단화되고 그 대립의 고뇌에서 예술이나 철학이 창조되는 것이고,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사람의 나날은 몸서리치는 고독감에 뒤덮여 있을 것이다. 몇 개의 개념이나 작품을 남기는 것과 태고 때의 사람과 똑같이 순박하고 선량한 인간으로서 삶의 자국을 남기고 죽는 것은 어느 편이 보다 옳은 것일까? 생도 작품도 다 소멸해 버리는 것임에는 다름이 없는데...... 자기 탐구며, 진정시킬 수 없는 인식욕과 철학적 고뇌 같은 것은 결국 한 푼의 값어치도 없고, 자기에게도 타의 아무에게도 이득이 없는 시간 낭비 내지는 우주에 대한 부당한 거만, 분수를 지킬 줄 모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결국 깨끗하게 살려면 캐러밴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지옥의 계절(Saison en Enfer)>도 쓰여질 가치가 없었던 책인가? 분명히 그 책은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랭보라는 인간의 일회적 삶 속에서 그것은 어떤 역할을 연기했던 것인가? 가능하면 목판 장사를 하고 싶다. 그래서 번 돈으로 가족과 굶지 않을 만큼 먹고 살고 싶다. 그게 제일 깨끗할 것 같다. 모든 전달 불가능(nicht Kommunikation-konnen)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만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일까? 만남의 짧은 매혹 끝에는 기나긴 상처의 길밖에 남겨져 있지 않음에도 왜 인간은 만남에 황홀해 하는 것일까? 인간은 거의 만남에 의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 불가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언제나 가능한 것은 독백뿐이다. 대화의 메아리(Echo)는 언제나 독백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언제나 ''를 찾으려던 우리의 시도는 ''를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고독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무섭게 어두워진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Seele)은 몹시도 목말라 있다. 한 개의 자매혼(Schwester-seele), 이해하는 마음에, 눈에 그것은 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부딪칠 때, 그 찰나에 우리는 영원을 본다. 시간성을 느낄 수 없게 꽉 찬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감득될 수 있는 유일한 영원이다. 그 영원의 순간을 위해서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목말라 있는 것이다. 새 출발, 새 결심, 새 일기장, 새 해, 그러나 새 습관은 너무나 빨리 헌 습관에 합류하고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 그랬듯이 똑같아진다. 삶에서 큰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건방진 착오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요즈음의 삶은 너무나도 자잘한 불쾌나 불안과 공포에 모자이크되어 있다. 좀 큰 날은 없을까? 큰 대낮은? 정화는 병아리같이, 참새같이, 인형같이 귀엽다. 지금이 제일 예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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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한 듯한 나날들, 태엽을 잃은 기계 같다. 꼭두각시들...... 샴페인이 펑 터지는 것 같은 나날은 영원히 다시 없는 것일까? 매일매일이 마개를 일은 지 오래되는 사이다같이 맛 없이, 흥분 없이, 열정 없이, 비약 없이 흘러가고 없어지는 것일까? 인공적으로라도 열정을 만들고 싶다. 억지로라도...... 인공적인 열정(Elan artificiel), 강요한 열정(Elan force)...... '그리고 너의 사랑의 발작을 주의하라! 고독한 자는 그가 만난 자에게 너무도 빨리 손을 내민다.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되고 단지 앞발을 내밀어라. 그리고 네 앞발에 발톱도 있기를 바란다.'

 

114

생의 카펫은 때때로 극도로 불쾌한, 때로는 기분 좋은 실을 섞어서 무늬를 짠다. 오늘 같은 날은 후자에 속한다. 자살에의 욕망을 조금 감퇴시킬 만한 생에의 약간의 집착을 순간으로나마 느낄 만한 날은 나에게 있어서는 길일인 것이다. 정신 속에서 나를 구제하지 않는다면 생이란 제로인 것이다. 존재에, 욕망에, 매커니즘에 빠져서 응결되어 흐름이 없는 생이라면 계속할 이유가 없다. 어떤 순간에라도 정신의 비약이 느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의식 속에 있는 내 의식을 문득문득 생각해 보면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어떤 형태로 그것이 있든지 간에 최량의 경우라 해도 그것은 한 오해한 만화, 한 희화일 것이 명백하니까! 나는 어딘지 사람에게 쉽게, 또는 관대하거나 너그럽게, 부드럽게 보이는 데가 있는 것 같다. 별로 가깝지 않은 친구 중에도 신상의 깊은 일까지 의논해 와서 나를 당황케 한 케이스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에 익숙해져서 누구의 신상 상담도 담담히, 예사롭게, 그러나 친절한 관심을 보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럴수록 내 내면의 마음의 갈등, 나의 괴로움이나 초조는 아무에게도 말 못 하게 되고 만다. 누구나 다 괴롭게 사는 것인데 나까지 사람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고 또 오해받을까 봐 두렵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겁쟁이(Coward)인 것일까? 내가 아주 아주 부자가 되면 살롱을 열고 싶다. 19세기 중엽의 그것과 같은 것, 언제나 맛있는 음식과 음료와 모든 것을 손님의 쾌적을 위해서 설비해 놓고, 수많은 방에 맘대로 가서 자유스럽게 앉게 설비해 놓고, 크디큰 수풀과 노래하는 분수가 있는 정원도 해 놓고, 정신의 귀족들, 아름다운 영혼(schone Seele)들을 전부 모아서 드나들게 하고 싶다. 대화에 의해서 우리의 의식이 잠드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완존에 돌입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의 신상 상담이나 하소연을 다 듣고 같이 괴로워하면서 타개책을 생각해 보고 싶다. 아무튼 풍요한 생활, 손님을 초대하고 즐기는 것, 남에게의 봉사...... 이런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기분 좋은 분위기에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욕망인 경우에는...... 1시다. 정화가 울어서 깼었다. 착한 아이인데 왜 울까? 밤에 종종 같이 놀고 있다. 지금 그림책을 보고 그 설명이 걸작이다. 요새는 전기불을 구경하기가 힘들다. 지금도 촛불 밑에서 쓰고 있다. 다시 잠들게 해야겠다.

 

116

새벽 같은 추위와 파란 공기지만 사실은 지금이 오전 7시다. 내 속에는 커다란 모험의 정신과 또 가장 진부한 타협의 정신이 언제나 싸우고 있다. 질서와 무질서, 혼돈과 맑음, 대자와 즉자,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비유는 많을 수 있다. 아무튼 어떤 환희나 즐거움의 찰나에도 내 의식은 그러한 것이 근본적으로 보아서 무가치한 것이고 모래에 모래를 더한 것만한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중 략> 어떤 내 형제와 나 사이에도 빙하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연했다. 그 빙하의 이름은 이기주의(Egoism), 생존 경쟁(Strugle for existence) 등일 수 있다. 빙하 없는 우정, 빙하를 용해할 만큼 더운 동정(Sympathie)은 온갖 커뮤니케이션과 마찬가지로 순간에만 가능한 것, 형제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모자 사이에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117

어둠이 다가오면서부터 무섭게 마음이 불안해진다. 미칠 듯한 공포(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심장이 터질 것같이 압축되어 고통을 느낀다.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고 어느 책도 눈에 안 들어온다. 미칠 것같이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무엇보다도 무섭다. 시간이, 영원이, 헛됨(Neant), 죽음(la Mort)...... 모든 것이 나를 놀라게 하고 나를 매혹케 했다. 왜 나는 태어난 것일까? 인간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태어나야 하고 그리고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 후엔 무엇이 올 것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신을 알 수 있을까? 도대체 삶이란 의미를 지닌 것인가? 언제, 어디로? 이 모든 의문은 나를 떨어지지 않고 추격한다. 괴롭힌다. 나는 너무도 깊게 슬프다. 나를 가득 채우고, 취하고, 끓게 하는 한 과제가, 완전한 과제가 없는 데서 나의 이런 니힐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쁘고 숨막히는 생활을 굴레 바퀴 속에 깔리운다면, 의식은 까무러쳐서 치인의 흰 잠을 자게 될 것이고 나는 미소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속이면서 눈감고 사는 것보다는 미쳐도 괴로워도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면서(현실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방식 속에 인간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결국 제일 쉽고 제일 행복한 상태는 온갖 의욕이 없는 것(삶의 의욕조차도), 즉 정지, 죽음의 상태인 것 같다. 의욕이 있는 곳에는 아픔도 있는 것이니까! 의욕, 발전, 움직임, 흐름...... 이 모든 것은 필경은 고통의 어머니다. 고통이 없어지려면 우선 생각하는 내가 없어지든가, 내 속의 사고가 없어지든가, 그 중의 하나밖에 길이 없다. 그 둘 다 극단의 길이고 따라서 실행해 들어가기가 곤란한 길이므로 그 중간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로 타협한다. 관조 인생을 미학적으로 정관한다.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으로 본다. 소설을 보듯 이데아를 추출해서 본다. 아나톨 프랑스(서재의 창에서 인생을 본다), 상아탑, 순수시, 순수미의 절대치의 탐구에서 의욕이나 고통을 잊는다. 도취 디오니소스적 생의 구가, 우선 술이나 기타 마취제로 고통의 의식을 진정시키고 거세한다. 정치(사회주의, 공산주의, 나치스 등), 연애, 도박, 알콜 중독, 아편, 마취제 등등. 결국은 중추 신경이 마비돼서 백치나 광인으로 행복하게 일생을 문닫게 되는 길. 의 길을 걷기에는 두뇌가 모자라고 의 길을 걷기에는 매개물이 모자라는 것이 범인이 아닐까? 아무 것에도 철저할 수 없는 것, 그게 범인의 이명인 것이니까. 재즈는 의 길을 암시하고 약속하기는 하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언제나 길 어귀에까지 밖에 못 갖다 준다. '재즈의 장막(Jazz curtain)' 은 싫다. 이왕 장막일 바에야 '철의 장막(Iron curtain)' 이어야지. 수일 전 신문에는 법대생(바로 내가 독어를 맡은 반) 10명이 한라산에서 조난되고 1명은 사망한 기사가 나 있었다. 처음 등산에 안내도 없이 올라간 무모는 비난받고 있으나 역시 소년다운 맑은 대담과 우주에의 거만한, 그러나 악의 없는 도전이 아닐까? 죽은 아이의 최후의 말이 '여기가 만주 같다......' 였다고. 안데르센의 동화에 있듯이 인간은 동사 직전에 기상 천외의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죽어가는 것인 것 같다. 역시 죽는다면 빙산에서의 동사가 제일 기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추위와 얼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들이 산정에서 받은 센세이션과 경치의 장관은 아무도 그네들한테서 뺏을 수 없는 그들의 재산인 것이다. 역시 위험한 체험이 가장 귀중한 체험인 것이며 체험만이 우리의 영혼의 양분이 되는 것이다.

 

119

한 가정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아이이고, 아이여야 한다. 다음 세대, 내가 죽은 뒤에 다시 살 내 생명으로 알고 다듬고 가꾸는 길보다 중요한, 보다 절대적인 것이 있겠지만 피안만을 믿는 보통인에게는 아이밖에는 신앙의 대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부도 귀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가 아니며, 잔인하게 보아서 대체 가능한 관계이다(죽음이나 다른 원인에 의해서). 그러나 아이만은, 나의 피와 생명으로 내 몸 속에서 만들어 낸 이 작은 생명만은 절대적인,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파고든 존재론적 의문에 부딪침 없이도 다행히 우리는 이 새 생명을 사랑하도록 본능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분홍색 육체와 영혼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눈동자와, 천사와 교환하는 것 같은 잠자면서 혼자 짓는 미소...... 이 귀여운 것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커서 자기의 길을 찾아도 그리고 그 길이 종종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길일지라도 우리는 그 생명 속에 계승되는 나의 현재 때문에, 나의 생명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거나 거부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마리 다골은 여자의 모성애를 여자 속에 있는 암컷(Tierweibchen)이 승리하는 것으로 보고 경멸하고 거부했다. 다산이었고 모성애가 전연 없었던 가엾은 마리, 그 여자는 리스트에 미쳐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차가운 여자, 자기딴에는 논리적인 줄 아는 원시적 이기주의자를 열정의 리스트가 오래 참을 리가 없었고, 마리의 이런 왜곡된 생활 태도의 결과가 별리로 끝났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온갖 아이에 냉담한 어머니, 아이를 학대하는 어른들같이 내 속에 뜨겁디 뜨거운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는 존재는 없다. 길에서도 그런 장면을 보면 거의 미쳐 버린다. 객관이나 냉정을 곧 잃고 만다. 내가 차가운 유년 시절 모성애에의 굶주림에 물들여진 추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그것이리라. 의무를 포기한 어머니만큼 비참하고 가련한 존재가 또 있을까? 자기가 없고, 세계 속에 타락해 있고, 속인으로서 공담과 호기심과 허영심으로 시간을 쫓고 있는 가련한 피조물(Kreatur)!

 

122

한 어머니는 그의 남편이 싫어졌을 때 그의 아이도 미워하게 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아이 속에서도 남편을 보는 까닭에......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아이는 무력하고 어머니 밖에 아이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는 것이니까. 아버지라는 것은 우연적일 수도 있다(요셉과 마리아의 전설을 보라).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에게 절대인 것이다. 지구가 열 번 뒤집혀도 이것은 진리임을 계속할 것이다.

 

125

너는 마땅히 그것에 도달해야 한다(Du muβes erreichen)!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지금 이 현상유지는 아닌 좀더 다른 것, 좀더 생동하는,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사색하는 것, 좀더 '철학하는 것', 근원(Ursprung)의 향수를 가진 생활 태도가 필요하다. 환경이나, 모두 다 어느 퍼센트까지는 구실이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자기의 최대 한도를 다 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니까. 게으름(Idlness), 이것이야말로 너의 적이다. 어제 야스퍼스의 책을 조금 읽고 감동했다. 철학하는 생활 태도는 명상과 초월성의 욕망과 전달(Kommunikation)에 의해서 우리의 나날과 연결되고 그 태도가 매일매일 반복됨으로써 하나의 생활 분위기(Lebensstimmung)를 낳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이 결국 반복의 의욕과 그것을 견디는 것일 줄이야! 정말로 권태가 들어올 여지없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는 혼자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필연적으로 전달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있어서 우리의 순수성과 영혼의 대담성은 나날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의해서 24시간 통일된, 정돈된 생활을 갖는 것, 근면할 것, 그것밖에 내가 할 최고의 것은 결국 없는 것이다. 반복(Wiederholung), 똑같은 고통스러운 작은 일, , 일의 똑같은 반복을 견디자. 아니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자. 거기에 네가 있다! <고관들(Mandarins)>을 다시 조금 읽어보았다. 루이(Lewis)와 로벨(Robert) 같은 사람, 그런 관계란 존재 가능한 것일까? 내 마음은 워낙 다감했던 것 같다. 그것을 가정 교육과 환경이 굳게 굳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이제의 나는 아무 것에도 감동이 약하다. 어떤 고통에도 곧 이긴다(잊으니까). 행복에도 불행에도 도대체 집착이 안 가는 것이다. 인간에의 동경(Sehnsucht)은 가끔 일어난다. 동생들과 맘이 안 맞을 때 누구든지 같이 얘기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그래도 정화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 것과 안아 주는 것으로 곧 그런 슬픔은 사라지고 나는 충족하게 된다. 끈기 있게 반복하자. 나의 평범한 사색과 노력을 좀더, 좀더 깊게 본질에 닿는 것 같은 태도로 살자. 경박이나 천한 것은 소름끼치게 싫다. 어느덧 나도 정신의 귀족 사상이 머리에 밴 모양이다. 손소희의 <리라기>에 좋은 말이 꼭 하나 있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특히 미사(리라의 딸이름)의 어머니는......" 나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특히 정화의 어머니는......" 이라고!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행복이냐! 내가 정화를 낳았다니! 이렇게 크고 예쁜 정화를!

 

131

벌써 말일이다. 그리고 보름달이 떠 있다. 음력 12월의...... 새파란 하늘, 노란 공 같은 달, 몇 개의 별, 싸늘한 냉기...... 인간보다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학교에 나갔었다. 강의는 없었다. 이제는 4월에야 개강할 것이다. , 1,2,3월은 경제적으로 영(Null)임을 뜻한다. 그렇지만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에 회의가 더욱 더 커 가는 나에게는 그 공백 기간이 오히려 다행이다. 학교 선생이란 지식 외에도 어떤 사명감을, 전인격적으로 무엇을 주려고 하고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졌어야 한다. 어떤 선생 속에도 공자나 페스탈로치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인간은 학교와는 무연지사인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지난 일 년 반 동안 뼈저리게 체험했다. 지식의 소매 상인보다는 내의의 소매 상인이 낫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Geist)은 더럽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학문이나 학생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생활 수단)으로 아는 모든 사람은 소매 상인이며 대상을 비하함으로써 사실은 자기가 내려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몹시 반성이 된다. 내가 학생을 목적으로 할 수가 있을까? 하나 하나를 한 개의 영혼으로 보고 대할 수가 있을까. 의식이 서로 만나 이해하는 전달이 없는 빈 관계라면 그것은 아무도 아닌(Niemand) 자의 아무도 아닌 자와의 관계이고 거기서 생겨나는 것은 수다(Gerede), 호기심(Neugier) 등의 붕괴의 징후(Symptome)뿐일 것이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은 결국 현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것 뿐이다. 그것의 과정 속에 항상 자기를 두는 것 뿐이다. 그외에 모든 것은 본질에 부가되는 형용사에 불과한 것이다. 크리스트나 루터와 똑같은 생의 목적 이외에 우리는 가질 수가 없다. , 이 비참한 지상에 묶여 있는 몸을 정신 속에서 규제한다는 과제밖에는...... 다만 범인인 우리는 그들처럼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무아할 수가 없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은 육체를 걷어차고 영생을 택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과 천 사이에 타협하고 있다. 거기에서 모든 갈등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것은 더 깊어질 것이다. 크리스트처럼 하나의 이념(Idee)과 정신과 의식에 소진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지상은, 가족과 애기는 너무나 감미롭게 따스하고 정답고, 육체는 슬프다. 모든 책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고 모인다면 작은 장사를 시작하겠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생각하고 살겠다. 사명감 없이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자기를 두는 것보다는 나 자신을 좀더 알아야겠다.

 

211

며칠간의 흐리고 어두운 날씨를 끝맺는 것같이 오늘 저녁에는 어둠이 덮인 후부터 눈이 펑펑 내려 덮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벌써 발이 묻힐 정도다. 훤한 눈이 밝음 속에 흰 수목들과 엷은 곤색 하늘과 전등불을 바라보면 문득 동경(Sehnsucht)을 느낀다. 누군지 마음 속을 다 터는 것 같은 뜨거운 침묵의 공감 속에 같이 눈 속을 거닐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립다. 어린 애 같은 마음으로 순수해질 수 있을 것이다.

 

212

사랑이란 끝없는 겸손과 신뢰와 회의, 투쟁(패배와 승리)과 오해의 총체인 것 같다. 그것을 감정적으로 본다면 '불안'일 것이다. 콕토(Cocteau)의 말대로 한 얼굴이 나를 불안케 하는 상태가 사랑인 것 같다. 한 이념이 나를 공포케 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는 그것의 실체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먼 발치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관념뿐일 것이다. 끊임없는 공포의 시련 속에 내던져져 있는 상태, 죽음에의 과정이 인간이다. 정말로, '이 무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허공에 꽃씨를 뿌리듯 내 속에서 번식하는 의식.' '한 사람 한 사람씩 커다란 죽음 앞에 향불을 피워 놓고 얼굴을 가리고 돌아서는 것은 웬일일까?' '땅에서 하늘로 뚫린 비밀의 운하엔 지금은 물이 없고 물이 차기엔 만 년을, 억 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라고 밖에 인간은 표현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상태를 한 장의 그림으로 묘출한다면 뭉크의 <외침> 밖에는 없다. 무서운 공동의 무한대한 원 속에서 두 귀를 막고 눈을 부릅뜨고 외치고 서 있는 작은 인간, 어렸을 때는 인생이 그림책같이 끊임없이 보였고 하루하루가 길었는데(억 년보다도 어른이 되는 날이 멀어 보였는데) 지금은 인생이 검은 장부로밖에 안 보인다. 곧 끝장에 와 있고 곧 마지막 날이 예기되는...... 사랑은 의지이고 이성임을 더욱 더 명석히 의식한다. 불꽃은 무수히 가능하다. 다만 불꽃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나의 내면의 의지, 성실에의 의지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촛불같이 한 대상만을 향하는 것이다. 정열을 꺼버리는 것은 정열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용이하다. 사랑, 물질, 이 중에서 어느 하나가 빠진 가정에서는 어린 아이란 다만 불평을 참거나 투덜대면서 참고 양육될 부담에 불과하다. 과연 몇 개의 가족(세계에서)이 자기의 아이를, 일생 미혼인 채 요절한 노바리스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 있는 사랑(die sichtbar gewordene Liebe)'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의심하다. 어떤 순간적인 감정의 고조나 자기 만족이나 마약자적 관대의 배화 작용 없이 정상적인 관계에서 그 말을 자타 앞에서 할 수 있는 '영웅'이 과연 세계에 몇 사람이나 될까? 부모가 아이에게 품는 기본 감정은, 첫째, 그릇된 의식 둘째, 책임감 셋째, 감사의 마음 넷째, 어떤 근본적인 안정감(생명에 대한) 남편이 아내에게 품는 감정은, 첫째, 그릇된 의식 둘째, 의무감 셋째, 어떤 압박감과 중량감 아내가 남편에게 품는 감정은, 첫째, 불안 둘째, 의무감 셋째, 그릇된 의식 긴 소설(또는 짧더라도 소설)을 쓰고 싶다. 올 해 안에 꼭 한 개는 써 보겠다. 희곡이라도...... 또는 방송극......

 

219

온갖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근심들을 안고 초조히 길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은 저녁.

 

221

몹시 우울에 잠긴 하루였다. 저기압 때문인지? 오후 5시 넘어서부터야 생기가 나고 정신이 밝아지니...... 하루 종일 헌 신문을 뒤져보고 스크랩했다. 어떤 새 사건도 나를 이미 더 기쁘게, 또는 더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 납처럼 가라앉은 마음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뿐이니까...... 눈에 안 보일 만큼만. 오늘 같은 날은(요새는) 죽음의 공포 대신 삶의 공포를 느낀다. 계속해야 되는, 이 끝날 것이 결정적인 생의 지속이 무섭고 귀찮아서 콱 내던져버리고 증기가 되고 싶은 무에의 갈망이 순간적으로 성냥불같이 켜졌다가는 꺼졌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양극은 생의 갈망과 사의 갈망이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와도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80 퍼센트를 점하고 있다. 나의 일상 생활에서...... 생각할수록 생각할수록 엘리자가 불쌍한 아이로 생각된다. 동시에 엄마의 말, '기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안 낳아야 한다'가 생각난다. 밥 먹이고 학교 보낼 수 있었던 능력과 기르는 능력과는 차이가 있다. 교육이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심*신 양면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주었다. 변덕(Laune)과 방임과 새디즘(Sadism)의 계속에 불과했고 그 기조는 냉혹한, 금속 소리나는 에고이즘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참으로 부모다운 부모가 몇 있는지 의심스럽다. 확실한 것은, 만약 부모의 능력이 있는 자만이 애기를 낳는다면 인류가 곧 종말을 고하리라는 것(3차 대전의 도움 없이도) 뿐이다. 근본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에게 끌리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에 있어서 뿐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떤 미모나 매력도 순간 외에는 내 마음을 잡지 못한다. 정신, 영혼, 지성이 결여된 곳에서는 곧 이윽고 미도 끝나버리는 까닭에...... 지가 시작하는 곳에 미가 그친다고 누가 말했다지만, 그 지가 계산이나 처세술을 뜻하는 게 아닌 다음에는 나에게 있어서는 맞지 않는 재담이다. 또한 미란 반드시 루벤스의 물기에 찬 장미 빛 고깃덩어리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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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지속의 과정으로밖에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에의 의지가 끊임없이 밖으로 표현되어 있을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 의지의 침묵 속에 신뢰는 종말을 고한다. 온갖 모녀간의 대화 중 가장 원시적인 모가 자식에 대하여 부양을 근거로 압박하려 할 때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부모는 아이에 진다. 왜냐하면 아이의 의견도 안 묻고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그들의 과실 때문에...... 큰 절망은 이미 내 것은 아니다. 큰 환희가 내 것이 아니듯이, 다만 잔잔한 나의 신경의 파동에 불쾌나 쾌의 잔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할 뿐, 오늘 같은 날은 전형적인 전자였다. 온갖 폭력적, 독재적, 고압적, 즉자적 인간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구토를 일으킨다. 탄광의 불 없는 검은 아궁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이런 나날은 언제 지나가 버릴 것인가? 존재의 이러한 형식으로 계속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역이다. 내 주위의 온갖 것은 나에게는 낯설고, 적의 있고 탐욕적이다. 길은 십자로로 갈라져서 나에게 손짓한다. 크게 사는 길과 위축해서 사는 길의 두 갈래가...... 대상을 경멸할 때(그 근거가 있을 때)처럼 큰 비애의 시간은 없다. 아무리 후회해봐도 내가 한 일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결단뿐이다. 무거운 내 존재를 나 혼자의 몸에 짊어지고 쓰러질 때까지 걸어가 보겠다는 의지뿐이다. 정화는 영원히 나의 것, 나만의 것. 이 작은 영혼을 담은, 이 곧 끝나 흔적도 안 남을 형태는 왜 이리도 무거운 근심에 차 있는 것일까? 심장이 위축되는 아픔을 느껴야 할 만한 이 쇼크는 무슨 의의를 가진 것일까? 나 자신과 그 주변을 부단히 객관하는 것, 사건의 핵심과의 사이에 광조하는 거리를 갖는 것, 이것이 교양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일은 자기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요청된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은 지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엄습해 오는 긴박한 추억이 나를 질식케 한다. ,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달디단 젊은 육체여! 심장이여! 모든 사람에게 있는 일회적인 어떤 것은 그의 유산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운명 자체보다도 그의 운명에 대하는 그의 자세를.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도주를 시도했다. 내가 자유로울 때 나는 밤에만 방을 떠났다. 나는 산보하는 도중이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내 존재를, 내 자신을 괴로워했다.

 

223

화려했던 59, 60년에 이어서 올해는 무척 침울하게 열려 간다. 어떤 재앙(Katastrophe)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새해 처음부터 어떤 암울한 예감 같은 압박이 느껴졌고 그것은 매일매일 더해갔다. 어떤 무서운 압박감, 또 나를 비소화해야 될 필연성 같은 것이 각일각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것이...... 누구나가 하는 짓을 하기에는 나의 교육에 여태까지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을까(패러독스이지만)? 1961, 나의 젊음의 매장의 해가 비롯되는 느낌이다. "분별과 사려와 결단만이 너의 벗이리라! 온갖 꿈이여, 낭만이여, 정열이여, 물러가거라!" 무척 평온한 기분의 저녁이다. 시간이야말로 고뇌에 대한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의 치료법임을 느낀다. 부드러운, 아늑함을 주는 오늘 저녁이 기적과도 같다. 아무 것도 나를 더 이상 상처 입힐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더 느낀다. 모든 사랑이 원한으로 번져가는 새벽에 나는 단 하나의 얼굴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파온이여! 아름다운 젊은이여! 너의 찬탄과 공손과 정열은 나를 도취시켰다. 나를 다시 나에게로 높여 주었고 내 손에 하프를 들게 해줬다. 내가 부른 아폴로의 노래는 너를 위한 시였다. 너의 검은 속눈썹과 뜨거운 시선, 너의 건강한 젊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아프로디테의 높은 신전에서 내가 시녀들에게 교시한 것은 바로 너의 찬미였던 것이다. 죽음의 래스로스의 바위에서 나에게 손짓했을 때까지, 내가 사랑한 것은 다만 한 젊은이, 파온이었다. <사포의 독백> 파온! 너 같은 희유의 소년이 어찌해서 멜리타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이냐? 너는 희귀하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까닭에...... <사포의 탄식> 사포! 그대는 나만의 여자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너무 컸다. 너의 명성과 너의 재능은 나를 눌렀다. 나는 천하에 나 하나만을 남자로 알고 주인으로 아는 어리석고 가난한 어린 계집이 사랑스러워진 것이다. <파온의 변명> 처음으로 안 분이었어요. 그리고 태양같이 높은 존재인 사포의 총애를 받는 분이었어요. 눈이 부셔서 올려다 볼 수도 없었던 그가 저를 불렀을 때 저는 모든 것을 잊고 말았어요. <멜리타의 말>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파온이여! 멜리타여! 내가 죽는 것은 생에 지친 까닭이다. 더 이상 살 의욕을 잃었고 이런 무의욕한 상태에선 한 줄의 시도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녹슨 하프와 갈라진 심장을 내던지고 피안으로 나의 영혼의 고향에 휴식하러 돌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너희와 나는 다른 고향의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의 죄의 전부이다. 따라서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잘 있거라! <사포의 유언>

 

311

어떤 자연도 그것이 우리의 내면의 풍경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런 감정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베니스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베니스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봄도 해마다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우리에게 감득된다. 우리 속에 꽁꽁 언 빙산의 풍경이 들어앉아 있을 때에 봄은 캐리커처로 밖에 안 느껴진 것이다. 해마다 지구는 따뜻해지고 사람의 심장은 굳어진다. 냉기에 응결되고 석화된 무엇을 심장 대신에 갖고 있는 것이 평인의 대부분일 것이며 그들에게는 계절의 추이와는 관계없는 겨울이 내면에서 지속되고 있다.

 

324

산다는 것의 의미를 매일 더 잃어가는 느낌이다. 모든 행위가 불가능하고 모든 인간이 괴이하게만 보이는...... 온갖 것에 있는 근본적인 허위의 냄새만이 내 코를 찌른다. 극도로 취해서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에서 탈주하고 싶다.

 

516

새벽 4시경 간간이 계속되는 총성에 놀라서 들어 보니 매우 격렬해져서 온 집안이 깨고 온 마을과 도시가 깨었다. 20분 가량 격렬했던 총성이 멎고 방송에서 육 * * 공군, 해병대 등이 합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음을 육군 참모 총장 장도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그리하여 '3공화국'은 탄생한 것이고 아까의 총성은 그의 진통이었던 것이다.

 

519

온갖 슬픔과 절망 속에서 꽃은 크나큰 위안이 되어 준다. 지금 책상 위에 붉은 카네이션과 연분홍 카네이션 한 송이씩에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이고 마거리트를 네 송이 섞어 꽂아 놓았더니 몹시도 아름답다. 자꾸자꾸 시선이 그리로 간다. 그리고 꽃을 보고 있는 순간만은 가슴의 아픔이 좀 가시는 것 같다.

 

527

무더운 흐린 저녁. 방안에 거의 검은 빛의 심홍 장미가 미묘한 향기를 발하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개화할까봐 두려운 6분 가량 열린 봉오리와 단단히 맺어진 어린 봉오리, 이렇게 두 송이의 장미를 화병에 꽂아 놓았다. 말할 수 없는 미인의 혼이 꽃이 된 것 같다는 생각조차 문득 난다.

 

528

새벽부터 무섭게 소낙비가 퍼붓는다. 붉은 장미 두 송이에 흰 장미 한 송이를 또 부가했다. 굳은 봉오리를, 그리고 작은 꽃병에 분홍 월계 세 송이를 꽂아 놓았다. 비가 오니까 더 향기와 빛이 짙은 꽃들...... 꽃에 가득 에워싸여서 살고 싶다. 마당의 꽃보다는 방안의 꽃이 마음에 든다.

 

66

새파란 새벽 하늘에 빛나는 눈썹같이 가느다란 달과 별 한 개가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모양이 변해서 달이 없어지고 별이 여러 개 생겨나서 그것이 전체로 별 하나를 이루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어젯밤은 스리나를 안 먹고 자서 간헐적으로 약 한 시간 내지 두 시간마다 깨면서 잤다. 깰 때마다 파스테르나크를 2페이지쯤 읽으면 다시 잠이 왔다. 그것은 오늘 아침까지 반복했다.

 

616

오랜만에 흐린 날씨, 아침 일찍부터 비가 오고 있다. 어두운 쥐빛 포트 라이트가 방안과 신록이 짙게 번진 마당을 뒤덮고 있다. 초하에서 성하에 이르는 이 시즌에 제일 인간으로부터 '생의 기쁨' 을 빼앗아 버리는 것 같다. 매미 소리도 멎은 정오 같은, 구제할 길 없는 혹서와 권태는 동일한 뉘앙스의 것인 것 같다.

 

617

부부 싸움이란 권태의 한계를 밀어가기 위한 공동의 액션인 것 같다. '행복'이라는 막연하고 불가능한 것에 지향하는 소치도 결국은 곧 사라질 한 개의 생명의 젊음의 발광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란 등불 및, 흐린 벽에 마주앉아 무언의 대치를 지속하는 우리도 얼마 안 있어 흔적도 없어질 약하고 우연한 생명체인 것이다. 얼마 동안 서로 만나서 한 솥의 먹고 한 방에 숨쉬도록 우연에 의해서 정해진 우리인 것이다. 결코 흔하거나 쉬운 일로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공존이 가져오는 여러 마찰과 불쾌는 어떤 타인과도 장시간 있을 때 느껴지는 불쾌감의 한 긴밀화된 상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건도, 대인 관계도 수선이 불가능한 데까지 성실하게 고쳐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선 가능성의 한계의 절반은 자기 책임에 귀속하는 것이고 모든 것에 눈을 감자.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휴식과 위안을 요하는 한 피곤한 나그네임을 잊지 말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어리광을 모르고 살아온 나니까, 웬만한 박해는 견딜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구박당함은 내 생리의 일부를 이룬 것이니까. 정화가 약하디 약한, 가엾디 가엾은 내 애기임을 잊지 말자. 어떤 좀 더 큰 과제(Aufgabe)에 불타고 싶다. 이런 사소한 부부간의 감정의 갈등(Konflikt)쯤은 초극할 수 있도록. 언제나 이런 데 걸려 있어 가지고는, 언제나 진흙에 발을 담그고는 나는 영영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혼만이 충만한 공간, 조금도 외롭지 않은 가득 찬 고독, 모든 것이(나의 외면도 내면도) 접촉하지 않은 훈련된 감수성, 이러한 것들이 지금 나의 동경의 초점이다. 내가 아니고 싶다. 생이란 24시간의 의식적인 구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623

가끔 몹시도 피곤할 때면, 기대서 울고 위로받을 한 사람이 갖고 싶어진다. 나는 생후 한 번도 위안자를 갖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왔다. 고독이 가슴속에서 병균으로 번식했다. 모든 것에서 거짓을, 모든 사람에게 극단의 이기주의(Egoismus)밖에는 볼 수가 없다. 꽃향기만 무섭게 공기에 얽혀 있는 밤, 온갖 겪지 못한 생과 격동과 정열의 회한이 나를 엄습한다. 다르게 살고 싶다! 좀 더 숨쉬면서! 좀 더 나와 가깝게!

 

624

한 마디로 불쾌한 하루(학교에서의)였다. 배구 연습하는 학생의 볼이 하필 나한테 맞아서 핸드백, , 시계, 모두 떨어져 흩어지고 핸드백 끈과 시계 줄 등이 끊겼다. 겨우 다시 고치고 귀가했으나 불쾌감은 비길 데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게 더욱 싫었다.

 

627

어제 <버터훨드 8 (Butterfield 8)>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별로 감명이 없었다. 얄팍한 심리 묘사와 어설픈 사회 풍자와 리즈의 무섭게 살찐 가슴과 엉덩이 이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찌는 듯이 덥다. 한국의 무서운 여름이 닥쳐온 것이다. 언제나 생각나는, 그리고 언제나 그리운 '나의' 도시는 내가 만 4년을 살았던 뮌헨이고 그 중에서도 내가 만 3년을 기거했던 뮌헨의 일구 슈바빙이다. 슈바빙에서처럼 내가 자유로운 느낌으로 숨을 쉬고 활보할 수 있는 장소는 아마 세계 아무 데도 없을 것 같다. 고향 도시인 서울은 더구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뮌헨에서는 여름의 감각을 여기서처럼 혹독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느낀 일이 없다. 언제나 절도 있게 더웠고 충분한 습기가 공기를 무겁게 축이고 있어서 한 주일 중 엿새는 흐리거나 비가 내렸으니까. 그래서 학생들은(가난한 학생들) 일 년 내내 같은 옷으로 지내는 것을 멋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이 생리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어느 도시의 여름의 시초도 같겠지만 뮌헨의 여름은 백화점의 쇼윈도에서부터 왔다. 온갖 해변을 연상시키는 장치와 복장, 모자, 밀짚 주머니, 코르크 샌들...... 등이 진열장을 장식하기 시작하면 뮌헨의 대담한 아가씨들은 아직도 싸늘하게 시원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경주용 요트를 연상시키는 멋지게 바람을 머금은 우산형 베티 코트와 원색이 혼돈한 개성적인 도안의 넓은 치마를 받쳐입고, 관대하게 깊숙이 패인 얇은 스웨터를 찰싹 입고 넓은 금속 벨트로 허리를 맨다. 그러고는 밀짚 백에 밀집 샌들이나 옛날 로마 사람을 연상시키는 납작한 가죽 짚신(?)을 신고 여름의 예고편을 시위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온갖 카페(Cafe)에서는 좌석을 보도에까지 확장시키고 작은 테이블 곁에는 해변용 파라솔을 펴서 세워두는 것이다. 예쁜 색채의 메뉴 종이에는 '오늘의 특별 요리'란에 십여 종의 아이스크림을 여봐라는 듯이 인쇄해 놓는다. 그러나 학생들이 먹는 것은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게미쉬테스 아이스크림(혼합 아이스크림)이다. 그게 제일 싸니까. 그리고 그걸 먹어 봐야 그 집의 아이스크림의 표준을 알게 되니까. 한국의 삼복 더위에 해당되는 7,8월도 뮌헨은 서울의 5월 정도의 기후를 지키고 있다. 그 관계로 부채, 냉방 장치, 얼음, 이런 풍경이 전연 보이지를 않아서 가끔 한국의 발, 주렴, 태극선, 모시 적삼, 모기장, 냉면, 빙수, 배탈, 땀띠 등으로 상징되는 여름이 그리워질 때까지도 있었다. 그처럼 비오는 뮌헨의 여름 밤은 추웠고 쓸쓸했다. 방의 난로에는 불을 지펴야 했고 서늘한 맥주보다는 곧 몸이 더워지는 와인이 더 구미에 맞을 정도였다. 방학을 뮌헨에서 보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모두 귀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행을 떠났다. 돈이 없어도 뮌헨에서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남녀 학생들은 싸고, 헐어빠진 1920년제 자동차(아마 한국 박물관에 두는 것이 훨씬 제격이리라)를 색색가지로 칠을 해서는 타고 밀고 교외로 놀러 나갔다. 물론 합해서 1백 불을 모을 수 없는 학생에게는 그것도 큰 재산이기에 그냥 엄지손가락으로 여행한다. 그건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엄지손가락으로 세워서는 목적지까지 갈아타는 것을 말한다. 오토 스톱(Auto stop)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먼 함부르크며 북해에 간 사람도 많고 또 빈이나 로마까지 무일푼으로 여행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남녀 학생이 여행할 때면 으레 여자만이 주차장 입구에 서서 차를 세우고는 남자를 데리고 가서 태워준다. 그래서 그들은 무전으로 여름 여행을 즐긴다. 목적지가 없는 이런 여행에서 그들이 어디에 바다에, 산에 도착하면 젊은이들의 값싼 숙박소(Jugend Herberge) 신세를 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캠프 생활을 한다. 이 값싼 숙박소는 독일의 철새(Wandervogel)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여기에는 엄격한 소장이 있어 밤 10시까지는 들어와서 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을 넘고 유리창을 넘어서 재미있게 지낸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의 단체 여행이다. 대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꾸민 단체 여행 프로그램이 전시되어 있다. 아주 싸구려 여행이나, 정부나 학교가 많은 보조를 해주기 때문에 10불로도 1주일간의 국내 여행을 할 수 있게 조직되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독일 학생과 외국 학생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원래 목적이었으나, 이 단체 여행은 특히 재미있다. 숙소는 대부분 학생 기숙사나 작은 여관이지만 그들은 이 여행에서 서로가 친해져서 즐겁게 일 주일을 즐긴다. 오늘은 이 도시, 내일은 저 해수욕장으로 몰려 다니면서 학생들은 학기 내의 공부에 시달린 몸을 푼다. 그들은 버스에서나 거리에서나 합창을 좋아한다. 남성과 여성의 합창으로 철새의 노래며, 기타 학생들의 노래, 또 술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한다. 이러한 단체 여행은 독일 각지에 걸쳐 있을 뿐 아니라 10불이면 1주간의 빈 여행, 파리 여행이 가능하고, 20불이면 2주간의 이탈리아 여행(1주간 로마 체재 포함)이 가능하므로 학생들의 천국을 이루어 준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이렇게 방학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먼 푸른 리비에라의 바다를 그리워하면서 다음 학기의 등록금을 걱정하는 나머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 수도 상당하며 그들은 대개 시 소년과에 임시 취직되어서 도시의 소년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며 그들에게 즐거운 여행을 마련해 주고 또 알프스 산중에 있는 저 많은 산정에 관한 역사, 전설을 이야기해 주며 어린애들과 즐거운 생활을 보낸다. 물론 이 소년들의 여행비용은 국가에서 전담하는 것이고 또 지도 학생에게는 숙식이 제공되는 외에 80불 정도의 월수입이 있다. 미국처럼 노동력은 비싸지 않으나 그래도 물가가 싸기 때문에 다음 학기의 수업료가 마련된다. 그들도 물론 일요일이나 토요일 주말에는 단기 소풍을 간다. 어쨌든 여름은 학생들의 천국이다. 무릎을 다 내어놓은 털보 학생들이 가죽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다녀서 여학생들에게 난처한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이때이고, 거리마다 미국이나 외국 관광객이 뮌헨으로 몰려들어서 쇼트의 범람을 보여주는 때, 이것이 뮌헨의 여름이기도 하다.

 

79

글라디올러스의 계절이다. 흰 것과 오렌지 빛의 꽃을 꽂아서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멋진 굴곡을 이루고 있다. 무언지 호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꽃이다. 저녁 때 <전쟁과 애욕>이라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프랑크 시내트러의 영화를 보았다. 인도네시아 달밤의 검은 그림자의 대열이 강을 건너는 모습. 돌격, 고함 소리, 중국군, 낙하산 보급, 방갈로, 화려한 집, 아무 데나 수두룩한 오랑캐 꽃, 기타 진기하고 수없이 많은 꽃, (gin). 무거운 천을 드리운 옷을 입은 여인들. 갈색 피부와 커다란 눈, 여윈 뺨, 붉게 칠한 관골, 뾰죽한 입술, 우아한 갈색 여우와도 같은 지나 롤로브리지다...... "나하고 결혼해서 애를 많이 갖고 가난하게 살자."(프랑크) "나는 당신을 가두어 둘 거예요. 하루 종일. 그리고 감시하겠어. 질투를 가지고......"(지나) 이것이 결국 리얼리티에 있어서의 남녀의 사랑의 대화(Love dialogue)가 아닐까?

 

721

남자와 비교할 때 여자는 보다 일반적이며 본능적, 숙명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이 인간의 자연, 감정, , 수면, 출생, 죽음 등, 우리를 포괄하고 있고 우리의 경적인 생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온갖 현상과의 관련을 대표하고 있다(여자의 모습). 금일의 여성은 자연적인 운명을 완화하거나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과학과 사회가 제공하는 온갖 기회를 포착한다. 출산 과정과 육아와 노령과 사랑과 육욕의 견해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럼으로써 여자는 일반과의 연관에서 풀려 나와 원래는 남자의 본질에 속해 있던 개인적인 고립에 서서히 빠지게 되었다. 금일의 남자가 점점 지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점점 원시적으로, 그리고 어린 아이 같은 영혼 상태로, 추상적으로, 무정신적으로, 무의식적, 무개성적으로 되는 데 반해서 여자에게는 그와 정반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자는 시대 정신에 의해서 찬미되는 이상형으로서 점점 의식적으로 되고 개인적으로 되고 감정적으로 되어 고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남자로부터 라이벌이나 생존 경쟁에서의 결혼적 지주로서 인정받기는 하나, 남자의 본질의 대칭이나 보충으로서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양성간의 관계의 즉물성은 진보가 아니라 다만 온갖 존경의 제일 전제인 수치심이 얼마나 많이 잃어졌는가 하는 표시가 될 뿐이다. 기술적 세계는 '비기술적'이고 찰나에 의해서 지배되고 우연에 의해 규정된다. 여자가 그의 본질과 세계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남자와 판이한 존재임을 보일 수 없다면, 여자가 남자의 존경을 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영혼의 희생의 가능성을 합리적인 사고와 물질적인 안정 요구와 바꾼다면, 여자에게 있어서도 에로스가 깊고 소원을 지우는 생의 심각한 면이 아니라 하나의 모험이라면, 남자는 자신을 완전히 사업인이나 기술자로 타락시키지 않기 위한 유일의 치료제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을 계기를 잊게 될 것이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는 여자와 신의 태도에 의해서 좌우된다. 여자의 태도는 미리부터 남자의 그것에 맞추어져 있어서는 안 되고 여자 자신의 견해와 자기 존중 속에, 그 태도의 첫번 뿌리와 신비스러운 근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요청은 현대의 노동 기식이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에게 훨씬 부자연하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부인될 수 없다. 직업과 개인의 틈새를 다시 극복하고 매번 새로 하나의 전적인간이 되는 것은 한 여자로부터 그 여자의 전 발전사의, 어떤 때보다도 강한 영혼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행복 중에 내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다하지 못하는 행복이 있다. 그것은 정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정화라는 모습을 통해서. 정화같이 끝없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에게 주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는데 주어진 것은 인생의 ''으로서의 우연이거나, 또는 높은 질서에 속하는 우주의 의사였으리라. 정화의 늘 웃음에 가득 찬 빛나는 검은 눈, 빳빳하게 긴 자랑스러운 속눈썹, 온갖 표정이 풍부하게 나타나는 귀여운 장미빛 입술, 꽤 긴 솜털이 소복히 덮인 살구빛 뺨, 얕게 볼우물이 패이는 미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모든 것에 대한 한없는 식욕, 싱싱한 생기, 생명감, 지상의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정화가 중요하다. 고귀하다. 정화는 나의 생의 질서요, 근원이요, 목적이다. 어떤 고귀한 이데아보다도 정화의 끝이 살짝 올라간 몹시도 작은 귀엽디 귀여운 코가 나에게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 내가 만약 근년에 죽게 된다면, 그리고 후에 정화가 이 글을 읽게 되면 얼마나, 얼마나 웃을까? 정화는 내가 죽어도 침울해질 아이 같지 않다. 태양 같은, 해바라기 같은 아이다.

 

722

죽음은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만약 사람의 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적 지속과 성공의 도달에는 관계없고 순간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 일정한 어떤 내용도 죽음의 작용 밑에 붕괴되어 버린다.

 

726

비늘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노을이 장미빛으로 하늘을 붉히고 있다. 무언지 허전하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난다. 나무라도, 돌이라도 굳은 것을 안고 엉엉 울거나 막 취해 웃고 싶은 느낌!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데서 나오는 허망.

 

82

긴 황혼이다.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태양의 여명이 환하다. 늦은 오후보다 조금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듯한, 음영 띤 아름다움이다. 하루종일 바람이 몹시 불었다. 태풍 '헬렌 호'라고...... 마루에 발을 올리고 앉아서 푸르른 마당을 바라보고 솩 솩 나무줄기가 휘게 부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까 사는 것도 과히 싫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꽤 큰 파초 나무잎이 흔들리는 것이 보기에 유쾌하다. 점점 노랗게 변색하고 저녁의 빛과 엷게 푸른 하늘과 그 위의 연분홍 보트들, 구름이 아름답게 보인다.

 

86

문득문득 격렬한 충동을, 투쟁 의욕을 느끼곤 한다. 무엇에나, 아무에나. 그럴 때 나는 혼자서 동굴 속에 있고 싶다. 지금은 저녁, 창 위로 거짓말같이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사파이어같이 검게 새파랗다.

 

87

몇 방울의 알코올...... 그리고 내 세계는 새로워진다. 확 트이는 지평선, 흰 새벽, 닭 우는 소리, 솟아 흐르는 샘의 물소리로 그것은 가득 채워진다.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강렬하게 내 시야에 들어오는 녹음, 대낮. 나는 나와 전 세계와 악수를 한다. 아무 것도 나에게 불만이 없다. 마치 이 새 주정을 담는 주머니가 낡은 것임을 잊은 듯. 아무 어둠도, 회의도 없이 피어나는 마음의 오후다. 오늘은 하루 종일 식욕이 컸다. 조반, 점심, 저녁 다 내 밥사발 이상을 먹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뱃속이 회충이나 촌충으로 찬 모양이지? 저녁 때 <폼페이 최후의 날>을 보았다. 크리스티네 카프만의 물망초 빛 눈의 매력과 가련함은 상당히 강렬한 인상이었다. 뉴스와 예고편 영화에서 두 명의 고인을 보았다. 란자와 헤밍웨이.

 

101

오늘이 '국군의 날'이라고 한다. 라디오를 틀면 '조국 행진곡', '반공 행진곡', '주부의 노래', '건설의 노래'...... 모두 하나같은 가사의 곡으로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 하늘은 아주 푸르고 공기도 깨끗하고 시원한데 마음만은 따분하다. 무일푼이니...... 마당을 수리하는 탁탁 치는 소리나 '나가라! 나가라!' 하는 것처럼 들린다. 동생들과도 별로 말을 주고받고프지 않고 따스한 회신만이 느껴진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또 친척들, 시집 전부에 이렇게 조마조마 눈치만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 언제 끝날까? 좀더 맘 편히 푹 살고 싶다. 그 이외에 아무 야심도 없다. 독일에서 4, 한국에서 2년은 나로서 완전히 온갖 것에의 의욕을 빼앗아 버렸다. 그저 오막살이라도 다리 뻗고 아무도 없는 데서 있고 싶을 뿐, 글을 쓴다니, 번역을 한다니, 학교에 나간다니...... 모두가 긴치 않은 나의 방해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나의 퇴화를 뜻할 것이다. 아니 나의 종말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 것도 하고프지 않다. 누가 죽인대도 모든 것이 귀찮다.

 

1013

끝없는 회의의 숨가쁜 교차, 그리고 둔중한 단조(Monotenie), 이것이 생활의 리듬인 것 같다.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은 질식시켜 버릴 것, 오로지 맑은 지혜와 의지의 힘에만 기댈 것, 이것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곡예사(Akrobat)인 것 같다. 그 상태에만은 야심(Ambition)을 느낀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물같이 맑은 의식의 세계에서 늙은 잉어같이 살고 싶다. 니체의 말,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가 얼마나 숨막히게 무서운 말인가를 느낀다. 온갖 싫은 일들, 너저분하고 후줄그레한 일들, 시시하고 따분한 일들이 깔려 있는 운명의 아스팔트지만 이 길이 끝이 안 났으면 하는, 또는 또 한번 하는 의욕을 실로 무겁고 기름진 삶의 욕구(Leben-wollen)의 사고일 것이다.

 

112

새벽 3. 요새는 늘 새벽에 잠이 깨인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 의욕도 안 느끼는 무기력의 극치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알코올에의 욕망만이 강하게 치솟는다. 아무 것도 아무 곳에도 안주 못 하는 내 마음이 개탄스럽다. 아무 직업에도 질긴 욕망을 못 느낀다.

 

119

오늘 내년도 토정비결을 보았다. 무시무시하게 나빴다. 끔찍한 소리뿐이었다. 아무 의욕도 없다. 낮에는 끔찍하고 저녁은 무섭고 밤에는 공포의 고함만 지르게 된다. 술이든지 뭐든지 나를 이 무서움에서 놓여나게 해 주었으면 다행할 것을...... 아내는 남편에게 있어서 언제까지나 필연적인 무엇에 불과하다. 마치 아버지가 아이에게 언제까지나 그렇듯이. 모든 여자가 남자에게는 아내로 생각될 수 있는데 왜 여자에게는 보통 한 남자밖에 남편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상태의 완화, 또는 감정의 예리함이 무디게 죽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맨 의식 밑에서 우리는 결코 있었던 일을 잊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세계와 인간이 나에게 적대 감정을 품고 있다.

 

1110

우리의 성격이 좋아질 수 있는 유일의 찬스는 행복(또는 행운)뿐이다. 불행은 우리의 성격을 보다 더 악화하는 데만 도움이 된다. 정화라는 선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는 정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정화조차도 종종 미워 죽겠으니까. 신이여! 내 마음에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내 마음을 자유로운 온갖 원망이나 회한에서부터 보호해 주십시오.

 

1113

사람과 사람을 빙벽이 갈라놓고 있다. 그 빙벽을 뚫을 길은 없다.

 

1114

하루 종일 회색 하늘과 습기 있는 추위가 내려 덮여 있다. 뮌헨을 연상시키는...... 오늘 내 손거울이(뮌헨에서 산 셀룰로이드 뒷판의) 깨져서 방석 밑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길한 암시와 예감을 느낀다. 이 싸늘한 가을의 냉기가 점점 더 우리 사이에 스며들고 막을 두텁게 해 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갈수록 삶은 힘든 것이다. '다만 늘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만이 우리를 희극(제삼자 눈에)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마스크를 쓰고 고독을 내보이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1115

일상성의 막이 번개에 뚫린 듯 찢겨져 벗겨지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내가 잘 알고 있는 줄만 안 사람이 다른 육체와 다른 생활 질서와 사고 원리를 지닌 전연 생소한 덩어리로 되어 나를 경악케 한다. 먼 불쾌한 추억의 하나하나가 뚜렷이 나타나게 되는 건 그럴 때다. 사람에게는 망각이란 행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누가 그런 말을 주장한다면 그는 위선자일 것이다. 나는 잊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길을.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두꺼운 안개처럼 덮어씌우는 이 심장의 냉각이 굳어져 응고해 버리면 아마 나는 더 이상 아픔도 고독도 느끼지조차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혼자 낳아져서 혼자 죽어가는 것이다. 고독이야말로 본연의 생의 자세인 것이다. 허위와 무리에 너친 불안한 두 존재(Zwei-sein)의 사회 습관적인 의무 같은 것은 우리의 영혼을 무시한 자의의 습성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된다. 어떤 끈을(마음의) 끊을 때도 아픔과 허탈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감상주의적인 무엇에 불과한 것이다. 너는 혼자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슬픈 상태가 아니라 당연한 상태라는 것을 나는 내 마음에 부각시켜야 한다. 통속 소설적인 가정의 목가적 생활 같은 건 믿지 말 것. 누구나가 불행한 것이다. 괴로운 것이다. 고독한 것이다. 부부 사이에는 암묵의 규칙이 있다. 제삼자 앞에서는 공동 마스크를 지닌다는...... 그것을 한 파트너가 안 지켰을 때의 배반당한 느낌, 양심과 증오는 정말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으니만큼 더욱더 크다. 지금 나는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개미가 모래 위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아무 것도 아닌 일. 무가 아닐까? 나를 집어삼킬 절무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어둠과 함께 다가오는 이 허망, 이 무서움, 생생한 공포! 공포는 황혼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매일매일 언제나 언제나 그것은 되풀이된다.

 

1117

개개인은 그의 열등 감정을 보상할 목적에 따라서 그의 '사는 방법', 그의 성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열등 감정에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우월적인 위치를 향해서 가려는 것을 뜻한다(Adler의 말)." 건강하기 위해서는 이타의 감정을 길러야 한다. 언제나 자기를 넘고 나올 것, 용기와 합리적인 낙천주의로. 행위에의 공포, 생활에의 공포. 아들러(Adler) 열등성, 자네트(Jannet) 신경 쇠약. 프로이드(Freud) 거세 콤플렉스, (Jung) 내향성. 열등 감정은 소수 민족에 있어서도 발견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보다 조금 더 재능이 있는 동배다. 열등 감정은 감정적으로는 공포로 표시된다.

 

열등성 : 사회적 결과 중상, 질투,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욕망, 간계, 또는 공격성. 도덕적 결과 성의 현실에 대한 용기의 결여, 직업의 선택에 대한 용기의 결여. 열등자는 자기의 예민한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자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급격한 자극, 예를 들면 알코올이나 성적 충동이나 마취제 등으로 달려가는 일이 있다. "약간 구라파적으로 세련된 미개인들에 있어서는 유럽 * 콤플렉스(Europa-komplex)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과, 그들의 피부색에 의한 열등 감정을 볼 수 있다(Jung의 말)." 열등 감정의 분위기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라는 두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지식' 속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과 우리에 적합한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몸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찬탄하는 것 같은 류의 사람을 우리는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열등 감정의 2,3의 동의어 죄책의 감정, 무력의 감정, 불안정의 감정. 열등 콤플렉스는 외적인 속박(입장이 거북한 것, 몰이해, 박해 등)의 무의식적 고정 관념에서 생겨 나온 억압의 한 방법이다. 자기 신뢰의 결여. 내면적 생활에의 도피, 내적으로는 맘대로이고 외적으로는 습관에 따른다. 열등자에 있어서 타인과의 협동은 심리적인 절도의 실마리가 된다. 어떻게 나를 현실에 대해서 적합시키고 그를 직면해 가야하나?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냉정함과 현실적인 사고 방식이다.

 

우리의 기질적, 심리적 결함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자기 수련, 외적 성공의 가능성의 확정, 그 가능성에 대응하는 체계적인 목표를 세우고 언제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 자신이 하는 마음의 수련과, 정연하게 한 방식에 따른 노동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우리는 유유히, 그러나 확실히 목적에 가까이 간다. 나의 주위와 활동을 나의 적극적인 징후에 집중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최고의 능률을 끌어내도록 결심한다. 규칙적 생활, 일정의 성과, 책임을 갖는 것, 열등자에게는 기쁨의 분위기를 주고 기쁨을 다시 배우게 해야 한다. 기쁨은 생명력을 발산하고, 정신과 육체의 진환 활동에 자극을 주어 행동에 임하게 하고, 비애 속에 들어가 있던 인간을 외광으로 향하게 하고 수많은 억압을 치워 없애는 것이다.

 

1120

오늘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 of Pompeii)>의 시를 완역. 강신재 씨 사진이 큰 것이 입수되어서(인쇄된 것이지만) 책상 앞에 세워 두고 늘 본다. 소녀같이 섬세하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특히 검고 큰 눈이......

 

1129

아침 안개가 짙게 껴 있다. 회색 연기 같은 수중기가 꽉 피어올라 모든 것을 가리고 있고 그 속을 뚫고 비치는 전등이 문득 뮌헨을 상기시킨다.

 

1212

, 따뜻한 날씨, 12월답지도 않은...... '박귀희'라는, 명창이라는 기생을 만났다. 한국식 여관 속에 있는 한국집 집이었다. 으리으리한 자개 장농...... 30대 중간쯤 되어 보이는, 좀 잔인해 보이는 섹시한 자그마한 여자. 초록색 치마 저고리, 잘끈 동여맨 가는 허리, 쉬어 빠진 굵은 목소리, 대구 사투리...... 이수재 씨가 그림을 한 장(수채화) 선사해 주었다. 조용한 갈색과 오렌지색이 조화된, 아담한 반 추상화다. 너무 의외였고 고마웠다. 결국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정신에서 뿐이고 정신의 자유란 예술을 뜻하는 것 같다. 언제나 자기의 성실한 생활, 가면이나 기만이 최소한도로밖에 스스로에 의해서 허용되지 않는 생활을 예술가는 해야 하니까.

 

1215

오전 3, 잠이 안 오는 밤이다. 단어장, 공부한 자국이 역력한 공책, 이러한 10년 전의 유물을 바라보고 느꼈다. 결국 이 속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그 때같이 또 한번 맑아지고 싶다. 인식욕에 불타고 싶다. 다만 아는 것을 위해서 아는 생활을 해 보고 싶다. 또 한 번만.

 

1219

벌써 며칠째 못 먹고 못 잔다. 철저히 굶고 지내고 있다. 사고가 연결을 잃고 있다. 아무와도 얘기를 못 하겠고, 글도 못 쓰겠고, 번역도 못 하겠다. 땅 속으로 온몸이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무거운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극도로 불건강한 상태다.

 

 

1962

 

827

우울한 날씨. 우울한 과제가 머리와 전신을 누른다. 모든 걸 집어 내던지고 새파란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 화가 나서 미칠 정도로 짜증이 솟아난다. 이유도 없이...... 과제 그 자체보다는 과제를 초극 못 할까 하는 공포가 우리의 심신을 누른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다. (Nicht Aufgabe selbst sondern der Angst, sie nicht uber-Wultigen zu konnen, bedruchtnus.) 밤이다. 이상한 방송극이 들린다. TV 예술 극장, 전차 소리, 탑의 시계 소리, 거리의 소음, 여자의 돌연한 비명, 이유 없는. "너는 내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는 어디서 왔는가? 오는가? 가는가?" 등의 말을 목 쉰 얕은 목소리로 지껄이고 무섭게 소름끼치게 웃어 제친다. 돌연 브레이크하는 자동차 소리, 물론 스토리는 없고 단편적이다. 고데아니, 메르헨이니, 거부니, 포옹이니, 전쟁이니, 굉장치도 않은 단어가 자꾸 쏟아져 나온다. 그러고는 도중에 뚝 끊어지고 말았다. 돌연한 시작과 발작적인 끝.

 

829()

현대인, 전제주의의 희생자. 발음이나 개념의 정의에 있어서의 뚜렷하지 못한 것, 모호한 것은 악보다도 더 싫다. 개성이나 뚜렷한 자아의 길이 없는 인간은 무엇에 있어서 뛰어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시골에서 학교를 나오고, 서울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는 일생 소시민 근성이 따라 다닌다. 도덕, 개성, 발음, 행동 전부가 어중간하다. 선에도, 악에도 불철저하고 다만 얼치기, 얼절이, 엉터리다. 무섭게 강한 것은 칭찬과 명예욕뿐. 정화가 좋은 점은 그 애의 생활 방법에 많은 연극과 게으름과 아양과 고집과 귀여운 거짓이 있는 점이다. 그것이 그 애를 참새로, 나비로, 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 애가 외삼촌을 좋아하는 것은 정말로 진심에서부터인 것 같아 보기에 좋다. 외삼촌도 그 애를 사랑하고 있고...... 물고기(Fisch)니까 정화는 아마 귀염받고, 몽상을 좋아하고 애정이 풍부하고, 인정이 많은 여자로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부부가 이상과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와 취미의 방향과 신앙이 다른데도 같이 살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때 그때의 충돌 때마다 헤어졌다면 이 세계는 이혼 남녀로 들끓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의 단계로는 외국서도 이혼이란 어디까지나 카인의 이마의 흔적이다. 지워질 수 없는 상처다. 한 사람과, 그의 아이와, 그의 온 집안을 해치는...... 아이가 있는 사람은 적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해서는 안 된다. 유머의 센스가 나에게는 너무나 없다. 나 자신과 대상과 모든 것을 동물적인 진지함을 가지고 파악하니까 과제의 무게에 짓눌릴 뿐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한다. 유희의 정신같이 나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있어야만 창조(어떤 작은 일에도)가 가능한 것이다. 내일이 음력 81일이다. 토정비결에 의하면 가인화합, 일가화기, 이재남방, 물실차기, 약이기인, 반유피해 그리고 점성은 96일까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seien Sie besonders vorsichtig)' . 그 후 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는 유난히 행복한 때란다.

 

830()

지금은 새벽 430분경, 통금 해제 사이렌이 분지도 한참 됐다. <성균>지에 낼 <현실에서의 도피(Hesse)> 61매를 막 쓰고 난 뒤다. 어지럽고 힘이 없다. 그래도 다 쓴 게 기쁘다. 여학교 때 늘 겪던 것, 밤새고 난 후의 어질어질하고 뱃속과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가벼운 흥분을 느끼는 내면적 만족감을 오래간만에 맛본다. 내적, 외적인 불협화가 나를 괴롭히고 내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룰이 틀리는 경기는 용서할 수 없다. 허위가 파렴치보다는 낫다. 그리고 니나의 경우처럼 매우 괴로운 한 가운데서도 기묘한 고요와 만족이 없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내가 늙은 것일까? 그래서 기쁨에만이 아니라, 슬픔에도 둔감해진 것일까? 또는 나에게 내적인 힘이 생긴 것일까? 4시간도 채 못 자서 그런지 아주 다운이다. 머리가 전후 다 지글지글 쑤시고 안색은 국방색+초록색. 내가 보아도 무서울 정도다. 희원 언니가 정화에게 예쁜 원피스를 두 벌 주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빨갛다. 흰 것은 꼭 맞고 빨간 것은 내년에 맞는 사이즈....... 순천에서 돌연 홍수가 나서 많은 사상자와 떼거지를 낸 모양이다. 웬일일까? 순천은 옛날부터 수난의 도시인 것 같다. 사랑은 헤세의 말처럼 앗시시의 프랑시스처럼 천재에게만 가능한 것인 것 같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 지상에서 사랑을 성취할 수 없으니까.......

 

831()

정화랑 T랑 셋이서 김기선 교수댁에 갔었다. 약 한 시간 있다가 왔다. 이진구 교사가 전화로 이대에 6~8시간(50, 1시간) 맡으라는 말이었다. 응락했다. 피곤하다. 극도로....... 만성 수면 부족이고 식욕도 없다. 학기가 시작되면 좀 나을지.......

 

92()

비가 오고 추운 날씨가 어제부터 계속된다. 완전히 가을이다. 정화 부가 법대에서 학생 과장이 될 모양이다. 귀찮아질 것 같다. S는 귀대했다. 10일 휴가를 마치고...... M,T,U, 채린 이렇게 나가서 남창에 가서 T의 세비로 맞추고 국제에 가서 내 투피스를 맞추었다. 감도, 모양도 MT가 정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정화의 추석 옷을 샀다. 분홍 치마에 연두 회장 달린 치마와 흰 저고리에 분홍 회장 달린 것으로...... 엽량도 하나, 같은 갑사천으로 만든 게 있기에 샀다. 도합 4백 원, 저고리는 좀 크다. 내년을 예상하고 큰 걸 샀더니.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미 고전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화났을 때 타인에게 그걸 옮겨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부 사이에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예의도, 감사도 우러나오는 것이다. 저녁 때 온 세계가 금빛으로 보이는 노을로 덮였었다. 내일은 날씨가 좋을 모양. 저녁때부터 땅 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우울에 눌리고 있다. 이유 없는 무거움이 전 심신을 누른다. 무슨 나쁜 전조일까?

 

94()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이대와 법대에 나가서 강의하고 왔다. 조반도, 점심도 굶고...... 완전히 삶은 해삼같이 녹초가 되어 버렸다. 점점 직업 의식이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랑스럽지도 않은, 그러나 체념한...... 정화는 내 생의 나비고 꽃이고 천사다. 지금 이모들이 이발하러 가는데 조롱조롱 따라 나간 그 모습! 노란 긴소매 원피스(Elli의 선물)를 짧게 입고 흰 반양말을 신고 흰 구두에 노랑머리 수건의 그 모습은 뜯어먹고 싶을 만큼 귀엽고 달콤하고 앙징맞다. 귀여운, 귀여운 내 애기! 내 정화!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애모한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었더니 더 그립고 귀엽고 살뜰하다. 그 크게 뜰 때의 눈의 표정, 속눈썹, 그 입매...... 보송보송 솜털이 덮인 복숭아뺨, 고사리같이 가느다란 팔과 다리, 나의 귀여운 로리타, 롤로(Ma Petre Lolita, Lolo)! 어제 주혜한테서 몹시 예쁜 편지지에 편지가 왔었다. 채린이 건으로...... 동무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가깝게 느끼고 얘기할 수 있는 동무가...... 주혜와의 우정 '회색 note', 영도 가교사에서의 산보, , 바다, 부두...... 그리고 서울서의 같이 보낸 시간, 산 집, 해바라기를 한 송이 큰 저자바구니에 넣어서 나의 동굴 같은 방에 갖다 주었던 주혜...... 그리고 주혜가 떠날 때 떠나던 날의 나의 마를 줄 몰랐던, 한없이 흐르던 눈물, 결국 그때가 영별이었던 모양이다. 편지는 아무 소용없다. 아름다운 꽃이나 손수건 같은 힘밖에는 없다. 주혜가 보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 실망하더라도...... 그래도 꼭 만나고 싶다. Before I shall die......(내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이 나에게서 멀어진다. 직업만이 나에게 남겨져 있다. 의무적인 흥미로 나를 묶고 있다. 그 이외의 나의 독특한 취미는 없어져 버린 지 오래다. 옛날에는 미칠 듯이 좋아한 물건들도 많았다. 비 오는 날, 무거운 커튼! 탱자, 오렌지, 아름다운 눈동자, 바다를 그린 그림, 따끈한 커피 등등...... 나의 마음이 애착을 느꼈던 물건들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불안을 느끼고 있어 아무 것도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한다. 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채 나와 무관한 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그리고, 몽상하고, 바라던 생과는 다른 생을 살아가고 있다.

 

96()

하루 종일 비가 온다. 슬픈 비같이 어둡게 온다. 나영균 선생님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온화하고도 특이한 성품의 여자다. 다른 사람이 담배와 커피와 혹은 알코올을 필요로 하듯이 그는 자기 기만을 필요로 했다. <헤렌>에서. 나는 말한다. 내가 마치 낯선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나는 단지 그렇게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집에서 나는 타인이다. 내가 타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굳어진 일상 행동을 억지로 하지 않겠다. 사람들이 일정한 상황에서 웃으니까 웃고, 일정한 시간에 먹으니까 먹고,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으니까 믿고, 단지 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나도 또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내가 되겠다. 이해하겠니? 정화가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다. 문소리가 날 때마다 "엄마 왔나 봐......" 하면서 뛰어 나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병원에 갔다 빨리 온다고 했는데 왜 안 올까 하면서 기다렸다고 한다. 이대 앞에서 하드 아이스케이크를 두 개 사 들고 갖다 주었다. 무사히 안 녹히고...... 귀엽게 먹었다. 춘미가 머리를 감겨 주어서 머리를 감았다. 감기나 안 들지...... 오늘 저녁 방송극에 송숙영이라는 작가가 쓴 노 교수와, 젊은 제자와, 노이로제 아내와의 사이의 무사히 끝난 갈등의 에피소드, 답답한 대사가 끝없이 잇달아 나오고 시 낭독이 간간이 이어지나, 구식이었다. 아무런 해결도 없고, 특히 늙은 아내의 젊은 모습과 꼭 같은 여제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구식이다. 여자는 몇 살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동경의 불길이 가슴속에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 무엇을, 무대상을 그리고 있다. 사업이나 직업만으로는 결코 이 동경은 채워지지 않고 또 남자에게서처럼 일시의 모험으로 그 불길이 꺼질 수 없다. 영원한 몽상가가 여자다. 비가 성하의 '소낙비'처럼 세차게 내려 붓고 있다.

 

98()

Wie bringe ich weinen Maon nicht um? 중요 원인은 5개의 정신적 요소로, 언제나 돌아온다. 해결 못한 분쟁의 상황, 주위 세계와의 긴장, 실망, 불안정감, 그리고 무목적성이 그것이다. 자율 신경 장애의 심장의 방해, 혈액 순환 장애, 위병, 호흡 곤란, 신진 대사 장애 등의 병이 아무리 무서운 것일지라도 내적인 핵심은 언제나 공포다. 이 공포는 당장에 생존의 공포나 생의 공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종의 공허로 표현될 수도 있다. 오늘날에 대개의 인간들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전진하려고 그렇게도 공포에 차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유감인가.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를 명백히 알고 있지 않으면서...... Hans Selgs 그처럼 많은 주부들이 일을 부지런히 맡아서 하고 밖으로 돈벌이 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급한 냉장고 때문에, 나중에는 비싼 냉장고를 사기 위해서. 모든 직업을 가진 주부는 언젠가 한번 자기 스스로에 묻게 된다. 그들이 만약 집에 머물 것 같으면 남편에 아무 소용이 되지 않을까, 하고. 저녁 때 피곤한 사람이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우울하기에 충분하다. 두 사람이 다 그렇다면 한 결혼에는 너무 지나친 부담이다. 영리한 의사는 신경질적으로 잘못 조성된 '장애자'를 벌써 외모를 보기만 해도 알아낸다. 그들은 모두 '중점'을 잃어버린 사람으로서 ''있다. 그들은 신앙에 구조받은 아늑함을 못 얻고 있고, 가정에서도 그것을 얻지 못 하고 있으며, 그 원인이 모두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 외적 가치는 단지 짧은 기간만 행복을 준다. 요구가 더 빨리 는다.

 

Henz(심장)

Streβ(긴장) Magen()

Nerven System(신경 조직)

 

전체적으로 인간은 그가 가장 피로하게 만들고 있는 육체의 기관과 꼭 같이 강하고 건강하다. , 그의 가장 약한 기관이 생명을 결정한다. 40대의 남자가 60대의 심장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 심장이 그를 갑자기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육체의 다른 부분은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로 갑니까? 그들은 자신에 대한 괴로운 불안 속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취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가 아니고 여자와 함께입니다. 치루어야 할 대가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는다면 생은 참을 수 없이 됩니다. 당신은 애정을 몰랐고 절망하였기에, 생을 살아갈 수도 참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감각의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관능의 추구로 될 것입니다. <프랑스에서의 사랑>

 

99()

, 커다란 굴(Anstee)을 해면(Kamakura)의 그물에서 꺼내서 먹었다. 조갑지같이 양쪽이 껍질로 닫힌 굴이었다. 박인수 선생님과 교과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황 판사를 보았는데 강 대령 부인과 비슷한 미인이 되어 있었다. 피부가 한기를 느끼는 계절에 들어오면서 마음도 냉기에 민감해졌다. 무언지 따스한 것이 몹시 그리워진다. '그리움' 자체가 그리워진다. 잊었던 마음의 열정이 모두 생각난다. 그리고 자기의 현재의 생이 무엇 때문인지 묻게 된다. 내 생명이라는 일정액의 은행 예금을 헐어 쓰기만 하고 공연히 쇄진과 피로가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 내 현재 생활 같다. 내 주변에는 내 목숨의 적인 긴장을 만드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M,F,형제, 남편, 식모(가장), 동료, 학생, 상사...... 모든 것, 모든 것이(alles, alles). 거리의 행인들, 모든 것이 다 나에게는 긴장의 원인이다. 몬로도, 황 판사도 다 자연사인 것이다. 그들의 생명이 자연히 파산을 선언한 것뿐인 것이다. 박 교수님 방문, 체계(System)를 가진 인간, 한국에서 극히 드문 개성. 박 교수님한테서 받아온 보랏빛 꽃 이름은 잊었다. 커다란 항아리 같은 꽃병에 꽂고 조금 짧게 잘라서 모자이크 꽃병에 꽂았다. 꽃빛도 모양도 그리고 그윽한,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향기가 몹시 마음에 든다. 리라 빛이고 모양은 등꽃과 샐비어 꽃 중간 같다. 라일락과도 닮았고......

 

910()

가을! 가슴 설레는 계절, 두꺼운 옷과 뜨거운 술 의 계절, 그리고 모험의......! 잊을 수 없는 모든 일은 나에게는 가을에 일어났다. 그리고 겨울에 끝났었다. 언제나 추동이 나의 계절이다. 내가 1월생이요, 건조한 냉한 인간이어서인지 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일은 모두 겨울과 가을에 일어난다. 지루한 하루를, 그러나 정성껏 맺고 난 후 매우 강하게 긴장 완화의 욕구를 느낀다. 티없이 모험을 구하는 마음,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너무도 멀다. 가까이 오는 겨울에 나는 빌고 싶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가슴 뛰는 일, 새로운 일이 있을 것을!

 

916()

하루 종일 비, 그리고 춥다. 벌써 방안에 벽난로라도 있고, 불이 빠작빠작 타는 소리를 듣고 싶다.

 

917

비오는 밤 11시 반, 갑자기 라디오에서 <미완성>이 흘러나온다. 어렸을 때 내 소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역시 그것은 변함 없는 것 같다. 무명으로 남을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무엇인가 뛰어난 것을 나에게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 역시 내 큰 관심이다.

 

922

토요일은 언제나 나에게는 싫은 날이다.

 

926

* * * , 이렇게 액일들만이 장례 대열처럼 내 앞을 지나갔다. 정말로 지독할 만큼 불쾌하고 긴장에 넘친 나날이었다. 박인수 교수님의 호의로 서류만은 내놓아 보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교육 경력 미달, 졸업증서, 또 논문 심사원에 누가 될지) 절대로 안될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안 되면 죽어 버리고 싶다. 귀찮아서......

 

929

, 웬 남자와(애인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가 물에 빠져서 간신히 헤엄을 쳤다. 중국이었다. 이상한 집들(간판만 큰), 절간과, 변소를 보았다. 다방이 즐비해 있었는데 이름이 '', '사탕', '' 등이었다.

 

102

손금을 보았다. : 머리가 비상하고 재주가 많다. 마음이 너무 좋고 이해가 많아서 남을 나쁘게 생각할 줄 모른다. 가정 생활에는 안 맞고 직업에 맞는다. 가정 살림은 식모를 두 서넛 두는 환경이어야 한다. 돈이 매우 헤프고 마음 속 말을 잘 해서 손해다. 인덕이 없다. 부모와 멀다. 외국갈 수다. 부부운이 나쁘다.(재취 자리나 재혼이 아니면 남편이 이중 생활한다). 아이는 하나나 둘밖에 없다. 신경질적이다. 명은 90, 무병 등.......

 

103

이 세상 사람이 다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날이다.

 

111

무섭게 좋은 계절, 독일의 오월처럼 파란 빛과 금빛이 쏟아지고 춥지도 덥지도 않다. 어젯밤 <여원>사의 잡문 때문에 1시경에 자서 매우 피곤하다. 조반도 안 먹었고 매우 '다운'이다. 지금 이대 교수실에 앉아 있다. 손이 떨려서 글이 잘 안 쓰이고 사고도 집중되지 않는다.

 

114

첫째, 뮌헨의 몽마르트르 둘째, 뮌헨이라는 곳 셋째, 다시 가고 싶은 슈바빙 넷째, 뮌헨의 봄 다섯째, 가을에 생각나는 뮌헨 여섯째, 독일의 추억 일곱째, 독일의 12월 여덟째, 푸른 도나우 강 아홉째, 만년설의 신비경 열번 째, 교외의 추억 열한 번째, 독일 문단 열두 번째, 뮌헨 대학을 찾아 열세 번째, 독일 가정의 여성의 지위 열네 번째, 독일 여성의 가정 생활 열다섯 번째, 헤세의 수채화

 

116

새벽 4시 반, 꿈에서 깨어났다. 자꾸 반복해서 한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 화면에 나온다. 이상한 꿈. 이상한 생. 모든 게 우연과 만남으로 얽혀 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자유롭지는 못하다.

 

 

1110

구토가 나는 생. 진부하고, 좁고, 수다스럽고, 귀찮고, 권태롭다. 모든 것이. 그리고 내 직업이 혐오스럽다. 정화랑 같이 희원 언니 집에 갔었다. 2시 반부터 810분까지. 지독히도 오래 있었다. 비가 온다. Schule der diktatoren 겨우 삼경을 끝냈다. 아직 육경이 남아 있다. 숙제투성이다. 언제나...... 첫째, Schule der Diktatoren 둘째, Boll-Horspiele(뵐의 방송국) 셋째, 객관식 문제로 1백 개 넷째, 잡문 두 개 T7일에 3년 학생과 같이 해인사로 수학 여행 떠났다. 오늘 올 예정인데 안 온 것을 보니 칠곡에 간 모양이다.

 

밤안개

 

밤안개가 가득히 흐르는 밤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님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가득히

하염없이 간다.

님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

 

검은 상처의 블루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가슴의 상처

잊을 길 없네.

사라진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자

정열의 장미빛

사랑도

검은 상처의 아픔도

내 맘 속 깊이

슬픈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여 우네.

사라진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자.

정열의 장미빛 사랑도

검은 상처의 아픔도

내 맘 속 깊이

슬픔 남겨 논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여 우네.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여 우네.

 

622(, 수유리)

비가 몹시 온 하루다. 강우량이 168미리미터인 모양. 예의 축대와 집이 무너지는 소동, 압사한 어린 애, 집을 잃은 사람들의 비극이 또 등장했다. 보리도 7할이 감수라고 떠들고 적미병(?) 때문에 쌀도 없고, 사탕가루, 밀가루 다 없다고 한다. 그러고도 선거만 하겠다고 벼르고들 있다. 권태롭기만 하다.

 

722()

. 유선생과 또 그 선생의 연극 단체와 같이 비행기로 여행했다. 호화스러운 연극 학교, 유 선생의 자가용 비행기(Privat-flugzeug)...... 꿈의 꿈이랄까, 깨고 싶지 않아서 인공적으로 자꾸 꿈을 연상시켰다. 하루 종일 바람과 비가 심했다. 이유 모를 동경에 하루 종일 내 영혼이 뒤흔들렸었다. 지치도록 후덥지근한 더위......

 

 

1964

 

115

나의 일과와 일상성의 의식을, 그리고 뒤덮고 있는 흐린 불투명한 안개를 오렌지 껍질을 씹듯이 한 번이라도 놀라게 하고 싶다.

 

118

그러나 끝났다. 왜 끝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는 모양이다. 결별은 돌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어느 감정인 것 같다. 나 자신으로 파고 들어가고 나를 이룰 계절이 온 셈인가?

 

119

권태와 어느 안정감 소시민성 속에 자기를 고정시키려는 의도와, 또 그 의도의 무용함과 번거로움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텅 빈 공허감이 내 가슴을 찬 바람 불 듯 지나간다. 감정도 애증도 다 멀어진 느낌. 가정, 직장, , 국가, 사회...... 이런 단어들이 아무 연결도 없이 내 머리를 지나갔다.

 

120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사고는 항상 사실적인 힘임을 믿고 있다. 끊겠다는 의지가 끊는 행위와 같은 것을 뜻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 미소나 한 눈동자, 한 목소리를 기억의 표면에서 말살해 버리는 것은...... 많은 극기와 시간의 풍화 작용의 도움이 필요하다. 잊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관념이 긍정한 행위를 우리의 감정이 받아들이기에는 또 하나의 훈련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한 '자유 의지'는 아닌 것 같다.

 

121

그렇다. 나는 나와 연기를 일치시킬 수 없는 순간을 종종 갖는다. 그럴 때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를 혐오해서라기보다 혼자 있는 것이 필요해서인 것이다.

 

221

네가 나의 상황(예컨대 나이) 같은 것 때문에 나를 불신하느냐? 그와 똑같은 이유로 내가 너를 불신한다면? 그것은 원을 긋고 도는 달팽이의 논리가 될 것이니 그만두자.

 

226

너무 큰 행복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그것을 상실할 예감으로 자꾸 불안해지는 모양이다. 오늘 내가 종일 이상스럽고 괴로웠던 이유를 지금에야 알았다. 마당에 나가보니. 열 나흘 달이 차 있었다. 고교하다. 만월에 네게 오는 달 병.

 

227

사람으로부터 고독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온갖 직업은 가질 만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불로의 고독이라도 그걸 지키고 싶다. 그것만이 자기 모독에서 자기를 가장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34

버스 타는 데서 말했다. "악몽을 꾼 줄 알아? 그래도 나는 악의는 없었어. 가짜 게임은 안 했어."라고.

 

36

그는 애정을 받아 본 것은 여덟 살 때 이후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애정의 구두쇠가 됐는지 모른다.

 

330

엘리자가 내 세계의 축이다. 그 외에는 모두 방해물...... 내 의무를 다하자. 우스운 비유지만 맥아더처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분이다.(Old affection never dies but it just fade away)." 조용히, 아주 조용히 모든 것이 지금 사라져 가고 있다.

 

41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든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만큼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여자는 체계화된 생, 또는 이성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재능을 일상 회화 속에다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규제(control)된 광기. 가정, 직업. 진정한 자기 규제

 

422

그의 에고이즘과 나의 그것, 그의 독점욕과 나의 그것, 그의 자유로우려는 성격과 나의 그것, 그의 이성적인 면과 나의 그것이 항상 부딪쳐 만나면 싸움이다. 그가 너무나 나와 똑같아서 싸우게 된다. 나와 너무나 달라서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약간 희극적이다.

 

59

성이란, 화폐처럼 중성적일지 모른다. 거기에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인습 같다.

 

510

나는 아직 잠자고 있나? 태어나고 있지 않나?

 

513

매순간마다 확인시키고 싶다. 도대체 내구성이 없는 언어로가 아니라 언어 따위는 초월한 무엇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528

공동 관계(공동 작업 따위)에 서는 것이 뗄 수 없는 지속을 유지하는 근본책 같다.

 

67

방안에 들어가면 서신함을 보고 편지가 없으면 전쟁통에 오래 소식이 두절된 것 같다.

 

610

해면 같은 어떤 층이 나와 외부 사이를 막고 있어서 모든 생기(삶에의 흥미 일체)를 빨아들여 나를 일층 기묘한 절연 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613

어떤 획득의 감정에 포만해진다. 완전히...... 확보 의식. 새로운 출생.

 

616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 그리고 헌책방 돌기, 봉투 만들기, 맛있는 것 먹기.

 

620

가장 큰 고통은 서로 어긋남을 갖는 것이다. 순서가 일치하지 않고 혼동된다.

 

623

대중들은 나의 눈에서 어떤 공범을 발각할 수 있을까?

 

74

말은 일단 발언하면, 그 말이 사람을 지배하고(나쁘게 지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또 이끌고 간다.

 

721

조화하려면 서로 어린애가 되는 차례를 알아서 떼를 써야 될 것이다.

 

723

언젠가 그에게서 왔던 참 즐거웠던 편지 하나가 기억났다. 그것은 단지 흰 종이 위에 '죽었니?'라고 씌여 있었다.

 

725

기차가 굴속에 들어가서 잠시 보이지 않는다고 가지 않는 건 아니지.

 

88

가끔 그가 나에게 구체적인 인물로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으로 엄습할 때가 있다. 아픔, 슬픔, 그리움 등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그때마다 느낀다. 어떤 신화적인, 또는 유년 시절의 죽어 버린 친구의 망령 같은. 어떤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지어진 갈망을 느낀다.

 

97

귀가 멍해지는 소음 속에도 완전히 정지된 내면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뼈 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때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떼어 버려야겠다.

 

919

미래 완료의 시간 속에 산다. 일루전(Illusion). 모든 것은 환상. 미래까지도 이미 완료된 시칭 속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930

모든 의무는 왜 이렇게 끔찍한 맛을 지니고 있는가? 의무 완수가 주는 상쾌감은 정신적 카타르시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깜짝 놀랄 일, 우주가 새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으로 가득 찬 생이란 책 속에서 가능하리라. 책과 나, 생과 나, 여자와 나와의 관계를 좀 더 생각해야겠다.

 

105

왜 보들레르는 일생 동안 쟌느 듀발(Jeanne Duval)을 사랑한 것일까? 백인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고 오욕의 생활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마음까지 극악했다는. 또 릴케는 왜 자기보다 열 네 살이나 위인 남편 있는, 남성적인 루우(Lou)를 사랑했던가? 니체가 '수세기에 한번 구라파에 나타나는 두뇌를 가진 여자'라고 평한 루우의 총명 때문에? 릴케의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정의할 수 없는 정의보다는 보다 높은 법칙 밑에 놓여 있어, 운명이니, '만남'이니 라는 말로 그 편린을 알 수 있는자 이외에는 전모를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밤이 깊었습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추악하고 권태로운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베일을 씌우고 약간의 안개로 가리고 삶을 볼 때 삶은 아름다워지고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무엇으로 변형됩니다. 덜 냉혹하게 덜 권태롭게 느껴집니다. 저녁때 푸른 어둠 속을 형광등이 일제히 켜지는 시간부터 신비는 비롯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기적을 낳습니다. 어둠 속에서 우연히 만나 옛날에 알던 사람과 우리는 곧 핵심에 와 닿는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낮은 적나라한 일광으로 모든 낭만을 박탈해 버리는데 비해서 밤은 우리를 꿈 속같이 막연하고 불투명하게 부드러운 낭만으로 감싸줍니다. 우리들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기가 대낮을 외치고 ''이기만 하고 어둠일 줄 모르는 슬픔을 노래한 니체 보다는 우리는 "오 밤이여, 나는 또 코카인을 먹었다!" 라고 시를 쓴 벤에 더 동정이 갑니다. 그만큼 니체의 시대보다 현대는 생활이 복잡해지고 낮의 부담이 더 무거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신비화하기 위해서, 또 일상생활의 기계적인 궤도가 주는 피로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또 정말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 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밤은 우리를 포근히 안아줍니다. 모든 괴로운 사람에게도 다 밤은 부드러운 이불이 되어주고 감싸줍니다. 마치 우리는 어머니의 태() 안에 있는 것 같은, 완전히 모순 없는 내재(內在)의 의식이 주는 하모니를 심신에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몸을 밤에 내어 맡깁니다. 고독하게 어둠 속에 누워있을 때 우리는 사물이 돌연 그의 일상성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온갖 물체가 입체성을 잃고 마치 유동체처럼 우리의 의식속에 흘러 들어오고 외계와 우리가 기묘한 새로운 관계에 서게 됩니다. 낮 동안에는 관찰이나 평가의 대상이었건 대상이상으로서의 외계가 불시에 그 한계를 넘고 우리와 '너의 관계' 즉 아무런 제 3 조건이 개입할 수 없는 단 둘만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외계와 완전히 합일될 수 있는 완전한 순간을 우리는 그때 체험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모든 일이 불시에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일상성의 테두리밖에 있는 것이니까... 그때 우리는 정말로 우리들 자신일수가 있습니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것, 더 부드러운 것 그리고 더 순수한 것이 있을까? 모든 조잡과 부조화와 추악의 원색은 추상해 낸 검은 빛, 누비아 여인의 몸의 빛과 같이 매끈한 암흑이 지금 훈훈하게 우리를 안고 있습니다.

어둠에 몸을 맡기십시오. 밤의 품 안에 안기십시오. 낮의 생활의 소용돌이가 남겨놓은 원색 자갈들을 어둠으로 덮으십시오. 암흑을 포옹하십시오. 순수를 갈구하십시오.

우리의 생은 투쟁과 갈등의 끊임없는 반목의 지속상태입니다. 꿈과 현실, 예술과 생활, 생과 사, 이런 반대 개념들이 우리의 생의 순간 순간 갈등과 결단으로 몰아넣고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우리의 의식의 결단 없이는 흘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간의 총체가 우리의 생이며 우리는 우리의 생에 책임이라는 무거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유라는 날개가 우리의 등에 달려 있는 것도 우리의 발에 묶인 쇠사슬의 대가인 것이니 결국 우리는 일생동안 꿈속에서 밖에는 날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순과 갈등, 그리움과 환멸의 불연속선 인생에 대해서 죽음은 휴식과 모든 투쟁의 종언을 뜻합니다. 생이 위대한 대낮이라면 사()는 밤일 것입니다.

모든 모순과 분규를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 채 포근히 감싸 덮고 마는 포섭력과 유화력의 소유자가 밤입니다. 괴로운 사람일수록 밤을 사랑합니다. 햄릿도 "죽는다는 것은 잘 자는 것...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밤을 갈구해왔고 종래는 덴마크 왕국의 기나긴 밤 - 깨어남 없는 잠을 가져오는 영원한 밤을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생각하는 사람,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밤의 인간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낮보다는 밤에, 생보다는 사에 그의 관심이 가 있던 인간이었습니다. 밤은 그러니까 일상성으로부터의 탈피에서부터 생명으로부터의 초절(超絶)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힘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괴로울 때 우리는 밤을 바랍니다. 밤을 그립니다. 그리고 밤이 되고자 우리를 파괴해버리는 일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차 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멎었고 바람 소리가 별과 섞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암흑의 마력이 분수처럼 소리높이 우리 속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솟아나고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시간입니다.

내 마음도 밤입니다. 모든 연인들의 마음처럼 밤입니다. 그리고 분수처럼 소리높이 내 마음은 깨어납니다. 낮 동안 모든 굴레와 생활이 주는 오욕에 눌려져 있던 내 마음이 비로소 크게 노래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낮 동안 우리는 얼마나 밤에 굶주렸었는지 모릅니다. 거칠고 손때 묻은 석회벽 속에서 손을 더럽히는 노동에 종사해야 했던 우리의 영혼이 한 송이의 리라꽃으로 변신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마술의 시간, 도취의 시간, 사람을 위한 시간입니다. 낮 동안 잠들었던 우리의 마음이 활짝 깨어나고 그리움에 몸부림치면서 순수를 찾는 때입니다. , 영혼으로만 가득 찬 밤 속에 있고 싶습니다. 산문 대신에 시를, 계산 대신에 낭만을, 현실 대신의 꿈을 우리에게 갖다주는 것은 다만 밤뿐입니다. 어떤 애인보다도 부드럽고 감미롭고 짙은 밤 뿐입니다. 밤이 없다면 우리의 생은 살만한 것일까요? 계속적인 권태와 피곤에 질식해버릴 것이고 애인과 만나는 일도 없어지게 되고 말지 않았을까요? 밤이 없었다면...

밤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의 생은 생기를 얻습니다. 우리의 애인은 매혹을 얻습니다. 밤처럼 우리를 도취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요? 우리들 누구나를 마술사로 만들어 버리고 동화의 주인공으로 착각시키는 것은 밤이 가진 힘입니다.

밤에 우리는 낮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비약을 합니다. 우리는 미칠 듯이 불타고 흐르고 불길 속에 뛰어듭니다. 한없는 불길 속에, 목숨 속에 우리는 마음을 던져넣고 몸을 내어 맡깁니다. 누구나가 누구나에 대해서 애인일 수 있는 순수한 순간을 밤은 만들어냅니다. 어떤 낮의 일광보다도 우리의 밤의 영혼은 뜨겁고 열광적이고 맑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가슴을 더듬듯 우리는 밤의 유방에 얼굴을 파묻고 밤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꿀을 빨어드립니다. 연인을 위한 시간! 우리 모두가 참다운 연인으로 변신하는 시간! 가슴속에서부터 맑은 샘물이 소리를 내면서 쏟아져 나오는 시간입니다.

누구나에게 밤은 연인이 되어줍니다. 우리의 작열하는 영혼과 신비하게 비약하는 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검게 무겁게 포옹해 주는 애인이 밤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순결한 육체를 우리는 어둠속에 내어 맡깁니다. 그리고 뜨겁게 뜨겁게 땅과 포옹합니다. 우리는 흙의 습기와 암흑에서 모성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낮 동안의 노동이 창백하고 입체감 없이 평평한 무엇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낮을 관념이라면 밤을 땅이라고, 육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념에만 없는 망혼에 불과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향수가 향하고 있는 것은 밤입니다. 무엇보다도 밤입니다.

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밤이 우리에게 주는 충일감과 보호되어있는 느낌이 자기의 것이 아닌 사람은 정신의 불구입니다. 절름발이입니다. 생에 열광하는 사람이 동시에 죽음을 열애하고 있듯 우리는 낮과 밤을 모두 사랑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제일 밑에 고여 있는 샘물을 끌어내어 솟아오르게 하는 것은 낮이 아니고 밤입니다. 낮을 일에, 밤을 휴식에 할당하신 하나님은 과연 예지로운 분입니다. 낮은 투쟁과 모순 밤은 조화와고요, 낮은 생활, 밤은 사랑, 낮은 산문, 밤은 시, 이렇게 분류되는 것도 모두 그것에 비롯하는 것이니까요.

밤입니다. 바람소리가 별들과 혼합되는 시간, 신비가 탄생하는 시간, 마술이 이루어지고 연금술이 증명되는 시간, 애인들의 침대가 딸기빛으로 불타는 시간입니다. 어둠의 두터운 포옹 속에 우리의 그림움들 모두 쏟아버리는 시간입니다. 질식을 위한 시간 환희와 도취를 약속하는 시간입니다.

카아텐이 두껍게 가린 창은 어둠을 더 질게 몰아다주고 있습니다. 완전한 암흑속에서 당신의 영혼을 라일락꽃으로 변형시키십시오. 지금이 바로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당신의 애인은 침대 속에 당신 대신에 한 송이의 흰 라일락 가지가 놓여있는데 놀랄 것입니다. 밤입니다. 모든 연인들의 시간입니다. 내 마음도 지금 분수처럼 소리를 내면서 밤을 향해 솟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저녁때 어둠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공포가... 어렸을 때 나의 머릿속은 무섬과 우울과 별이 쏟아지는 마당에서의 유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붉고 노랗고 녹색빛 나는 은하수가 어둠 속을 흘러서 나의 의식 속까지 파고 들었고 눈을 뜨면 유령 같은 물체가 나를 응시했습니다.

나는 갑자기 마당을 달리고 있는 들쥐의 모습을 생각해냈습니다. 푸른 거울 속에서부터 아름다운 공주가 나타났고 나는 죽음과 같은 암흑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밤의 입술은 붉은 과실같이 열렸고 별들은 밤의 가슴에 감추어진 비애 위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어둠 속을, 나의 환상은 무덤가를 거닐었습니다. 시체를 바라보았습니다. 병풍 뒤에 눕혀졌던 할머니의 주검이 주었던 기묘한 착란을 느끼면서... 할머니의 아름다운 손에는 부패의 녹색 반점이 떠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은 산속을 헤매었고 절간의 문전에서 한 조각의 떡을 애걸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리의 검은 말이 돌연 옆에서 튀어 나와 길을 막는데 놀라면서.

다시 한 이부자리 속에 혼자 누워있는 자신을 알고 이유 모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시 나는 환상 속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 들판에 넘친 어린애들의 환성, 누렇게 익은 보리 이삭을 노래한 마음, 불처럼 타오르는 경건한 두려움, 나는 조용히 개구리 같은 별의 눈을 보았습니다. 떨리는 손에 낡은 돌의 차거움을 느꼈고 푸른 샘의 전설을 들었습니다. 은빛 나는 생선떼 허리 구부린 나무에서 떨어지는 과일, 나의 걸음걸이에서 울리는 음향, 어린 마음은 어른을 경멸하는 마음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의 어린 영혼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성 곁을 지났습니다. 지쳐버린 대리석상이 슬픔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저녁의 어둠 속에 서서 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늑대같이 어두운 동굴에서 날을 보내고 의식의 박명(搏明) 속에서 증오하면서 밤을 기다렸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훔치고 엄마의 흰 얼굴에서 몸을 숨겼습니다. 폭풍우 속의 숲길, 내가 걷는 광란의 샛길을 피해 달아나는 검은 짐승, 증오는 나의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초록빛 여름의 마당 속에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아이에게 가했던 폭력,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에서 나의 착란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을 때의 환희, 그것은 새빨간 꽃에서 잿빛을 띈 해골이, 죽음이 나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 어린 시절의 창가의 어둠은 서글픈 것이었습니다. 탑과 종, 그리고 나의 우에 돌처럼 떨어져 내린 죽음의 그림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감긴 방 속에서 허위와 음탕이 나의 어린 머리를 태웠습니다. 파란 옷의 스치는 소리가 나의 몸을 굳게 했습니다. 문간에 엄마의 밤의 모습이 서 있었습니다. 나들이옷의 향기, 비단 스치는 소리, 흰 털외투, 그리고 천사의 날개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서 이마를 만지는 어둠의 손길. 나는 엄마를 소리높이 부르는 대신 굳은 몸으로 잠을 가장하고 어머니가 바쁜 걸음으로 나간 뒤의 향기와 비단 스치는 푸른 음향에 굶주렸었습니다. , 밤이여, 어둠과 별들이여, 나는 어둠 속의 불구자들과 함께 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얼어붙은 산정에는 오로라 빛이 덮여 있었고 나의 마음은 어둠 속에서 가냘픈 소리를 냈었습니다. 거치른 나뭇가지가 내 위에 무섭게 가라앉았고 붉은 수인(囚人)들이 숲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어린아이의 간을 빼어 먹는다는 붉은 남자들이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밤마다 수정으로 되어서 깨어져 흩어졌고 어둠이 나의 이마를 때렸습니다. 잎이 없이 앙상한 느티나무 밑에서 나는 얼어붙은 손으로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목졸라 죽였습니다. 그때 슬픔의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왼손 편에 한 천사의 흰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붉은 남자들의 모습이 커져 갔습니다. 그러나 내가 돌을 집어서 그 그림자에 던졌더니 신음소리와 함께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느티나무 그늘에서 천사와 흰 얼굴이 한숨을 짓고는 사라졌습니다. 나는 돌 밭에 누워서 별들이 수놓은 금빛 포장을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박쥐 떼에 물려서 나는 어둠 속에, 완전한 암흑 속에 다시 떨어져 버렸습니다. 허물어진 집 속에 걸어 들어가서 나는 야수가 되어 깊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밤이 왔습니다. 밤은 때로는 두려운 무엇이기도 합니다.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늙은 사람에게는. 특히 겨울밤은 그렇습니다. 바깥은 검은 추위가 꽉 채우고 있고 대지는 딱딱하고 공기는 싸늘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별들까지도 무슨 나쁜 전조를 알리고 있는 듯 슬프게만 보입니다. 외로운 우리는 돌같이 무거운 다리를 끌고 언 가도를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우리의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새파란 얼음 같은 소리가 나고 우리의 얼굴은 비애로 석화(石花)됩니다. 돌로 덮인 언덕, 철로가의 제방, 금빛 눈과 얼음 속에서 고요하게 해체되어가는 차가운 육신, 찬 바람만이 점령하고 있는 방 속에서 가구는 부식되어가고 있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유년 시대를 탐지해 보지만 살찐 쥐 떼들의 장롱을 갉아 먹는 소리에 부딪쳐 무너지고 맙니다. 암흑 속에서 굶주림의 저주가 붉게 피어오르고 허위의 검은 칼이 먼 청동색 문울 때려 부수는 메아리 소리도 들립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 허무와 비애와 추위와 기아만이 지배하고 밤의 마력의 권위에 놓은 부록 같은 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많이 갖게 될지 모르는 소망되지 않는 밤. 견디는 것이 전부인 밤... 이런 밤은 정말로 우리를 미치게 합니다. 자기가 할 일, 이러한 일에 대한 후회 그리고 모든 것을 일어난 그대로 놓아 둘 수밖에 없고 교정이 불가능한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늪 속 같은 쓰디쓴 밤의 비애입니다. 우리가 검은 독을 마시고 죽음의 미각을 알고 싶어지는 곳은, 또 한 번만 머리를 검게 만들고 지나간 해들은 다시 고쳐 살고 몰락하기 전에 다시 한번만 활짝 피어 보고 싶어서 흰 가루를 먹는 것은 이런 밤입니다. 옛 시인들이 술 항아리를 끌어내 지하실로 내려간 것도 이런 밤입니다. 불기도 없는 방, 열도 없는 마음과 몸, 아무 그리움도 채울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우리는 그저 아침에 올 것을 기다립니다. 이때 텅 빈 가슴에 호수처럼 밀려와서 꽉 차는 감정이 있습니다. 공포, 존재의 공포 또는 죽음에의 공포가 그런 것입니다. 물끄러미 어둠을 응시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은 자기의 생과 사뿐입니다. 고정관념처럼 공포가 가슴에 붙어버립니다. 자기가 지난날 자기 자신이었던 어느 특정의 존재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그 피부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을 자신이 깨닫는 데서 오는 숨 막히는 공포감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이고 다른 것일 수 없는가? 의문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택할 최선의 방법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일일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일어났고 안 일어나며 앞으로 일어날 수 없는데 이 생을 무엇 때문에 일 초라도 더 견딜 필요가 있단 말인가?"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가슴 속에 들릴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막도록 애써 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경험 중에서 그것을 상기함으로써 잠시 동안의 기쁨을 가질 수 있고 사건들을 생각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체험이 적은 생에서 특히 작은 공간을 차지했던 일들- 표현도 거의 되지 않고만 우정 또는 망쳐버릴 시간이 주어지지 않고 끝난 애정- 이 감미로움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젊음의 전장에서 우리가 거치고 지나간 시체들 중에 불쾌감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둘의 애정이 끓어오르기도 전에, 따라서 식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어떤 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이별해야 했던 사람은 그 중에 들어가겠지요. 먹지 않고 놓아둔 과자를 어린애가 언제라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서양 할머니들 중에는 갖가지 리본으로 묶어 놓은. 젊은 시절에 받은 연서(戀書)를 고이 간직해두고 그것을 잠 안오는 밤에 읽다가 잠드는 분들이 흔히 있다고 합니다. 외로울 때 옛 편지나 옛 일기를 읽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너무나 시간적 거리가 있어서 소설보다는 그 연문들은 남의 얘기 같이 들리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결국 졸리게 만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잠이 안 오는 사람, 또는 최면제가 될 염문도 안 모아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공상 속에서 별을 세어 보십시오. 천까지 세고 또 천까지 세고... 또 만약에 당신이 박카스와 조금 친한 분이라면 주저 마시고 포도주병을 꺼내오십시오. 밤이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