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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2

Bollnow 2024. 3. 8. 20:06

2

 

조과

때로는 악마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수탉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미덥지 못한 동물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날 새는데도 울지 않는 게으른 수탉을 믿지 않는다. 각설하고, 특히 겨울철에 해당하는 이야긴데, 조과 성무는 사방이 아직 칠흙 어둠이고 만물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시작된다. 수도사라면 마땅히 어두울 때 일어나 어둠 속을 믿음으로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례상 수도원에는 찰중 수도사가 있기 마련이다. 대중이 잠자리에 들어도 이 찰중 수도사만은 잠들지 않은 채 밤을 밝히며 운율에 맞추어 [시편]을 낭송함으로써 시간을 재고, 수면 시간이 그만하면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면 신호로 대중을 기침시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날 새벽에 요사와 순례자 숙사 사이로 종을 울리고 다니는 수도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한 수도사가 독실 사이를 다니며 <주님을 찬양할지라>를 외치고 다니면 그 소리를 들은 수도사들이 일제히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하면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와 나는 베네딕트 회 관례를 따랐다. 우리는 찰중 수도사가 순을 돈 지 약 반 시간 만에 새날 맞을 차비를 하고는 교회로 내려갔다. 수도사들은 교회 바닥에 부복한 채 [시편]을 음송하면서, 스승을 필두로 수련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 찬송가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가 시작되었다. 찬송 소리가 궁륭형 교회 천장으로 오르는데 듣기에 흡사 어린아이들의 옹알이 소리 같았다. 두 수도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시편] <오라, 우리가 야훼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를 낭송하자 대중이 대구로 화답했다. 나는 새로 솟아오르는 믿음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수도사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벽 위로는 예순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법의의 두건 때문에 그 그림자의 임자를 알아보기는 불가능했다. 삼각대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등잔 불빛도 두건 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예순 가닥의 목소리는 제각기 전능하신 분을 찬양했다. 이 감동적인 화음, 천상적 기쁨의 문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그 수도원이 수수께끼와 그 수수께끼를 풀겠다는 은밀한 기도와 음산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과연 이 수도원이 그런 수도원이란 말인가... 이렇게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 까닭은, 그 시각의 수도원은 바로 성인들의 처소, 미덕의 보금자리, 학문의 그릇, 분별의 방주, 지혜의 탑, 자비의 원류, 힘의 요새, 성성의 향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섯 장의 [시편]에 이어 성서의 봉독이 시작되었다. 몇몇 수도사들은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입승 하나가 조그만 등잔을 들고 회중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졸고 있는 수도사들을 깨웠다. 만일 한번 깨워 놓은 수도사가 다시 수마에 굴복하고 말면, 그는 그 벌로 번을 돌아야 했다. 또 다시 6편의 시편이 계속해서 봉독되었다. 이윽고 수도원장이 축복을 내리자 주번이 기도를 인도했다. 기도 순서가 되자 모두가 명상에 잠긴 채로 제단 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 신비로운 정열과 강렬한 내적 평화의 순간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에 견주어질 만한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침내 수도사들은, 일제히 두건을 내리쓰고 자리에 앉아 엄숙하게 <주여, 찬미하나이다>을 불렀다. 나 역시, 첫날 수도원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마음에서 일단 의혹을 말끔히 걷어 주시고 거북한 생각에서 풀려나게 해주신 주님을 찬미했다.

... 우리 모두, 불면 날고 쥐면 꺼질 연약한 존재... 이 신심 깊고 학식 있는 수도사들 중에도 악마가 있어서 미움을 퍼뜨리고 적의를 도발하는구나. 허나 이들 모두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순간 믿음의 강풍에 흩날리는 연기 같은 존재... 이윽고 그리스도께서 내리셔서 그들 사이에 임재하시리... 나는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날이 새지 않았더라도 조과가 끝나고 찬과가 시작되기까지 수도사들은 독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수련사들은 그 스승을 따라 강론실로 [시편]을 공부하러 들어갔다. 몇몇 수도사들은 교회에 남아 교회 안의 치장을 손질했으나 대부분은 회랑으로 나와 묵상에 들었다. 윌리엄 수도사도 나도 명상에 잠겼다. 불목하니들은 자고 있었고, 여전히 하늘은 어두었으며, 우리가 찬과 성무에 참례하러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 자고 있었다.

[시편]의 낭송, 특히 월요일에 낭송될 부분인 한 구절이 다시 나를 전날의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의 사악한 죄악이 나에게 이르기를, 제 눈앞에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다고 하나, 그 입이 하는 말이 공정하지 못하더라>는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나에게 교단의 회칙이 바로 그날 있을 사건의 불길한 징조로 들렸다. 찬미가 끝나고 [요한의 묵시록]의 봉독이 시작되었지만 내 마음은 개운하지 못했다. 문 위에 있던 양각의 부조, 전날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던 그 심란한 환상이 다시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응답 성가와 찬양과 창화가 끝나고 복음 찬미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눈을 들어 제단을 보았다. 성가대석 너머로, 그때까지 어둠에 잠겨 있던 채색 유리가 창백한 새벽빛에 빛나기 시작하고 있엇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는 1시과 성부에서 <성인들의 놀라운 빛이신 하느님><이윽고 빛나는 별은 떠오르고>를 부를 때쯤 뜨게 될 터였다. 미명은, 겨울 새벽빛의 희미한 전령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넉넉했다. 미명이 회중석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편케하기는 족했다.

우리는 거룩한 책에 기록된 말씀을 노래했다. 만민을 깨우치기 위해 내리신 말씀을 증언하고 있었을 때는, 샛별이 그 광휘를 거느리고 교회로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전히 밝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시시각각으로 밝아오는 빛은, [아가]의 말씀과 신비와 천장에 활짝 피어 있는 향기로운 백합을 비추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 주님, 이 견줄 데 없는 기쁨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나 자신을 타일렀다.

'바보 같으니,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그때였다. 북쪽 문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불목하니들이 어째서 저희 일이나 하지 않고 이 거룩한 명상을 훼방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수도원장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속삭였다. 원장은, 처음에는 성무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손짓으로 그들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다른 불목하니들도 교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죽었다! 죽었다! 수도사님이었어. 신발 봤지?'

기도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수도원장은 식료계 수도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먼저 뛰어나갔다. 윌리엄 수도사도 그들을 따라 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사 전부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이 훤했다. 땅 위에 눈이 쌓여 있어서 경내가 더욱 밝아 보였다. 교회 뒤 담벽 앞에는 전날부터, 돼지 피를 채운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항아리 위로 이상한 물체가 불쑥 솟아 있었다. 흡사 재를 쫓으려고, 넝마를 주렁주렁 단 막대기를 두 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막대기가 아닌, 사람의 다리, 머리를 항아리의 돼지 피에다 박고 거꾸로 선 사람의 다리였다.

수도원장은, 얼른 그 몸서리치는 항아리 안에서 시체(산 사람이 그런 자세로 배길 수 있었을 리 없었으니)를 끌어내라고 명했다. 돼지치기 몇 명이 머뭇거리다 항아리로 접근하여, 온몸에다 피를 묻히며 시체를 끌어냈다. 설명에 따르면, 돼지 피는, 뽑아낸 즉시 잘 저은 다음 기온이 찬 데 내어놓으면 엉기지 않는다고 했으나 시체를 적시고 있는 피는 이미 엉기고 있었다. 피는 법의뿐만 아니라 얼굴에까지 엉겨 있어서 수도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불목하니 하나가 물 한 양동이를 길어와 시체의 얼굴에다 끼얹었다. 다른 불목하니 하나는 걸레를 가져다 시체의 얼굴을 닦았다. 이윽고 우리 눈 앞에, 전날 오후 아델모의 서안 옆에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리스 학자,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의 얼굴이 드러났다.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 옆으로 다가왔다.

'윌리엄 수도사님, 보시다시피, 이 수도원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어른의 지혜가 몹시 필요한 상태입니다. 원컨대 한시바삐 손을 써 주십시오.'

'이 수도사는, 성무에 참례했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시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아닙니다. 자리가 비어 있더군요.'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성무에 빠진 수도사는 이 사람뿐입니까?'

'성무에 빠진 수도사가 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질문을 망설이다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베렝가리오는 제자리에 있었습니까?'

수도원장은 놀란 얼굴로 사부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몇 가지 이유에서 베렝가리오를 의심했는데, 사부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놀란 듯한 눈치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리에 있었습니다. 맨 앞 열, 내 오른손이 닿을 만한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당연하겠지요. 그저 여쭈워 본 것뿐입니다. 교회 후진을 지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체는 적어도 모두가 잠든 시각부터 몇 시간 이렇게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목하니들은 동틀 녘에야 일어납니다. 시체가 이제야 발견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시체 다루는 데 이골이 난 사람처럼 그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양동이 속의 걸레를 꺼내어 베난티오의 얼굴을 차근차근 닦아 내었다. 그동안 수도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는, 시체를 둘러싼 채 수군거리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주의를 들었다. 잠시 후 수도원 내 수도사들의 위생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세베리노가 들어왔다. 세베리노 역시 사부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 분의 대화 내용이 궁금했는 데다, 사부님에게 다른 물걸레를 건네주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두려움과 구역질을 참고 두 분 옆으로 다가섰다.

'익사자를 보신 적 있소?'

사부님이 세베리노에게 물었다.

'많이 보았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익사자의 얼굴은 이렇지 않습니다. 이 얼굴은 부어 있지를 않습니까?'

세베리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항아리에다 처박았을 때, 이 가엾은 수도사는 이미 죽어 있었다는 말이겠군요?'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우리는 시방, 마음이 어딘가 몹시 뒤틀려 있는 자의 소행을 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이 시신의 어디에 상처나 멍이 있는지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욕장으로 옮겨 옷을 벗기고 씻긴 다음에 조사해 보았으면 좋겠군요. 내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세베리노가,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돼지치기들에게 시신을 옮기게 할 동안 사부님은 수도사와 불목하니들에게, 경내를 새 발자국으로 어지럽게 하면 안 될 터이니 돌아갈 때는 반드시 오던 길을 이용하라고 일렀다. 사부님과 나는 이렇게 해서, 시신을 꺼내느라고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진 항아리 옆에 둘만 남을 수 있었다. 항아리 주위의 눈은 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물이 엎질러진 곳곳에는 눈이 녹아 있었다. 잠시 시신을 눕혔던 곳에도 사람의 몸 형상으로 눈이 녹아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사들과 불목하니들이 남긴 어지러운 발자국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뒤죽박죽이로구나. 보아라, 아드소. 눈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믿을 만한 양피지이니라. 사람들은 제 몸으로 저 눈 위에다 글씨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양피지에는, 썼다가는 지우고 썼다가는 지우고 하는 바람에 뒤죽박죽이 되었구나. 그래서 내 눈으로도 이 재미난 글씨를 읽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이곳과 교회 사이엔 수도사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다. 이곳과 창고, 그리고 외양간 사이로는 불목하니들이 무수히 오갔다. 따라서 온전한 곳은 창고와 본관 사이뿐이다. 어디 가서 살펴보자꾸나. 쓸 만한 게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무엇을 찾으시려는 것입니까?'

'희생자가 스스로 항아리에다 머리를 처박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이미 죽은 시체를 끌어다 여기에 처박았을 터... 다른 사람의 시체를 운반하는 사람은 눈에다 발자국을 남기는 법이되 남보다 더 깊고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찾아보아라. 우리 양피지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오합지중 수도사들 것과 어딘가 좀 다른 발자국이 혹 있는지...'

우리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나는, 하느님 은덕으로, 항아리와 본관 사이에서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발자국을 찾는 데 성공했다. 발자국은, 다른 사람이 오가지 않은 듯한 곳에 찍혀 있었다. 사부님은, 그 발자국이 수도사나 불목하니들의 발자국보다 희미한 것은, 이 발자국이 찍힌 다음에 눈이 더 내린 증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에, 발자국 임자가 무엇인가를 끌고 갈 때 생긴 것인 듯한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발자국은 항아리에서 동쪽 탑루와 남쪽 탑루 사이에 있는, 본관의 식당까지 이어져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식당, 문서 사자실, 장서관... 장서관이 또한 번 문제가 되는구나. 베난티오는 본관에서 죽었다. 본관 중에서도 장서관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어째서 장서관이라고 잘라 말씀하시는지요?'

'나는, 살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있다. 만일 베난티오가 식당이나 주방이나 문서 사자실에서 죽거나 살해당했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야 해. 무슨 까닭이냐? 그냥 두어도 오늘 아침에는 저절로 발견될 것이 아니냐. 그러나 장서관에서 죽었다면, 어딘가로 옮겨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장서관에 그대로 두면 시신이 남의 눈에 뜨일 일이 없지. 모르기는 하지만 살해자는 이 시신이 남들의 눈에 띄기를 바랐던 모양이구나. 어쩌면 살해자는 장서관에 중인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면, 살해자는 왜 이 시신에 중인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바랐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몇 가지로 가정해 볼 수 있기는 하다. 범인은 베난티오를 죽였지만 반드시 베난티오가 미워서 죽였다고는 볼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아닌 베난티오라는 특정인을 죽였다는 것은, 이로써 어떤 표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글이나 문자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면 그 표적은 대체 무엇을 위한 표적이겠습니까?'

'글세, 아직은 그걸 모르겠다. 허나, 아무 의미 없는 말에도 이로써 드러나는 의미 밖의 의미가 있다는 건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표적으로 삼으려고 수도자를 죽이다니, 어지간히 극악하질 않습니까?'

', <우리는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주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봐야지.'

사부님이 이 말 끝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세베리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시신을 씻고, 주의 깊게 시신을 관찰하고 온 그는, 시신에 상처나 멍든 곳은 없더라고 말했다.

시약소 쪽으로 걸으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 시약소 실험실에 독약이 있던가요?'

'없는 것이 없는 것이니 독약인들 왜 없겠습니까만, 제 대답은 독약이라는 말씀의 의미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량일 때는 보약일 수 있으나 과복할 경우에는 치명적인 것도 있기는 합니다. 본초 제약사들이 그렇듯이 저 역시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처방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가령 제 시약소 뜰에서는 쥐오줌풀도 자랍니다. 심장의 박동이 고르지 못한 사람에게, 다른 약초와 함께 달여 먹이면 효험이 있습니다.'

'시신에, 특정 독물은 음용한 흔적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만 대부분의 독극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시약소에 이르렀다. 욕장에서 말끔하게 씻긴 베난티오의 시신은 그곳으로 운반되어, 세베리노의 실험실에 있는 널찍한 탁자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세베리노의 실험실은, 증류기, 유리나 토기류로 만든 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내 보기에는(실제로 본 적은 없고, 따라서 그러려니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지만) 흡사 연금술사의 방 같았다. 문 옆 벽에 걸린 긴 시렁에는 색깔이 가지각색인 물건이 담긴 병, 단지, 항아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약재 수집이 대단합니다. 모두 뜰에서 재배한 약초에서 추출한 것들인가요?'

사부님이 물었다.

'그렇질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희귀한 약재나, 이 기후대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한 게 대부분입니다. 오래전부터 세계 각처의 수도사들이 가져다 준 것이지요. 보기 드문 희귀 약재도 있고, 이곳에는 분포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아갈링고 가루는 멀리 카나이에서 온 것입니다. 어느 아랍인 학자로부터 입수한 것이지요. 인도산 침향도 있습니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덴 선수지요. 살아 있는 아리엔트는 기사 회생의 영약, 감각이 마비된 사람을 깨우는 묘약이고, 비소는 마시면 큰일나는 극약입니다. 유리지치는 폐를 다스리는 본초입니다. 곽향초석잠은 두골의 열상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유향수지는 폐 질환과 돌림감기를 다스리며 몰약은...'

'동받박사의 예물 말씀이신지요?'

내가 물었다.

'그렇다네. 허나 지금은 감람과 발삼나무에서 채취하는 이 몰약은 유산 방지에 특효가 있다네. 이 목내이 방부제로 말할 것 같으며, 미라를 해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영약을 제조하는 데 쓰이고 만달라화는 수면제로 쓰이며...'

'육욕을 일으키게 하는 최음제로 쓰이기도 하지요...'

사부님 말슴에 세베리노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렇게들 말씀하십니다만, 공부 닦는 수도자들 사이에서야 그렇게 쓰일 까닭이 있겠습니까? 이걸 좀 보십시오...'

세베리노는, 단지를 하나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용광로 연도에서 얻은 산화아연인데, 안질에 특효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요?'

사부님이, 선반에 놓은 돌에 손을 대면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 말씀이십니까? 몇 년 전에 구한 것으로 무슨 치료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지만 저는 아직 그걸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다마다요. 하지만 약은 아닙니다. 보시지요.'

윌리엄 수도사는 법의 안 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어 그 돌 앞으로 가져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자 주머니칼은 그의 손을 떠나 돌 앞으로 다가갔다. 윌리엄 수도사가 손을 움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칼날은 내 눈앞에서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떨리는 것도 잠깐, 칼날은 희미한 금속성을 내면서 그 돌에 달라붙었다.

'보았지? 이 돌에는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

윌리엄 수도사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디에다 쓰는 것입니까?'

'쓰이는 데가 많지. 내 다음에 소상하게 일러주마. 세베리노 수도사, 여기에 사람을 죽일 만한 게 있는지 그게 궁금하군요?'

세베리노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아니, 잠시가 아니라 내 보기에는 지나치게 오래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많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입니다. 그리스어로 <파르마콘>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일컫는 말이지요.'

'최근 들어, 없어진 약은 없습니까?'

'... 최근에는, 없습니다.'

'하면, 과거에는?'

'글쎄올습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저는 이 수도원에 30년 있었는데, 그중 이 시약소에서 일한 것만도 25년이나 되니까요.'

'사람의 기억이 두루 미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군요...'

윌리엄 수도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하다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 어제 우리는, 환상을 유발하는 본초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게 대체 어떤 겁니까?'

몸짓이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으로 보아 세베리노는 되도록 빨리 이 화제에서 비켜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좀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여기에는 별 희한한 물건이 다 있으니까요. 그보다 베난티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좋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도 좀 생각을 해보아야겠소.'

사부님의 응수였다.

1시과

이 끔직한 사건은 수도원 경내의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시체 발견으로 야기된 혼란이 성무 일과까지 뒤흔들어 놓고 만 것이었다. 수도원은 서둘러 수도사들을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형제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일렀다.

수도사들의 목소리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주름들이 잡혀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와 나는, 성무 일과 중에는 두건을 내리지 않는 것을 감안하여 그들의 표정을 관찰할 만한 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우리 눈에 베렝가리오의 얼굴이 들어왔다. 창백하고 일그러진 데다 땀으로 번쩍거리는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말라키아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양 그지없이 침착해 보였다. 말라키아의 얼굴 옆으로는 역시 침착해 보이는 장님 수도사 호르헤의 얼굴이 있었다. 몹시 짜증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웁살라 사람 베노의 얼굴도 보였다. 전날 우리가 문서 사자실에서 만났던 바로 그 수사학도였다. 우리는 말라키아를 힐끔거리는 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사들의 표정을 일별하고 나서 속삭였다.

'베노는 짜증이 잔뜩 나 있고 베렝가리오는 겁을 먹고 있다. 곧 불러서 까닭을 물어보아야겠구나.'

'지금 그러실 필요가 있을는지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조사관의 일이라고 하는 게 원래가 지난한 일인 게야. 가장 허약한 이를 찌르되, 가장 허약한 순간에 찔러야 한다.'

성무가 끝난 직후, 우리는 교회를 나와 장서관 쪽으로 가는 베노를 따라잡았다. 이 젊은 수도사는, 윌리엄 수도사가 불러 세우자 찔리는 데가 있었던지 긴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어물쩍 자리를 피하려 했다. 문서 사자실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자신이 수도원장을 대신해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된 것을 상기시키고는 베노를 회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우리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안벽 앞에 앉았다. 이따금씩 본관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하면서 베노는 윌리엄 수도사의 질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간 뜸을 들이면서 베노의 분위기를 관찰하고 있던 윌리엄 수도사가 말문을 열었다.

'대답해 주게. 베렝가리오, 베난티오, 말라키아, 그리고 노수도사 호르헤 노인과 더불어 아델모의 채식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어제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호르헤 노수도사께서는, 진리가 담긴 서책을 채식하는 데 요상한 형상을 쓰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난티오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진리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재담이나 말장난도 그리 큰 허물이 되지 않으며, 재담이나 말장난이 진리를 나르는 수레일 수 있다면 웃음 역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자기가 기억하는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은유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 서책이 그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고 말했습니다. , [시학], 하느님의 뜻이 그래서 그랬을 테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세계에는 소개되지 못하다가 이교도인 무어인들의 손을 통해서야 겨우 기독교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친구분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지 않았던가?'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베노가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말을 계속했다.

'제가 바로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저는 그리스어가 서툴러 모르베카 사람 기욤의 역몬을 통해서야 겨우 이 서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바로 이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호르헤 노수도사는 이 서책의 의도를 비방하면서, 스타게이로스 사람이 비록 이 서책에서 시를 말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쓸모 없는 가르침>이어서 허구의 세계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난티오가, 성서의 [시편] 역시 시인의 작품이 아니냐, 여기에도 비유가 사용되고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호르헤 노수도사는 화를 내시더군요. 호르헤 노수도사의 말씀에 따르면, [시편]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에 오로지 진리를 전하는 데 필요한 비유법만 쓰여지지만, 이교도 시인들은 거짓을 전하거나 쾌락을 좇기 위해 비유법을 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나니 몹시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화를 내었습니다.'

'화가 난 까닭, 화를 낸 까닭은?'

'화를 낸 것은 제가 바로 수사학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사학도 이기 때문에 이교도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읽습니다. 저는 이교도의 작품이라 해도 기독교의 진지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아무튼,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베난티오는 다른 서책 몇 권의 이름을 들먹거렸고, 호르헤 노수도사는 베난티오의 말에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어떤 서책의 이름이 등장하던가?'

베노가 머뭇거렸다.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만, 이 일과 그 서책의 제목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있어도 적지 않게 있지. 우리는 지금 서책 사이에서, 서책과 함께, 서책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납득하려고 이러고 있네. 이런데도 서책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베노는 처음으로 웃었다. 처음과는 달리 표정도 밝아졌다.

'하긴 그렇기도 합니다. 저희들은 서책을 위해서 삽니다. 무질서와 부패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딴에는 가장 귀한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르신께서도 전후 사정을 대략 헤아리실 테지요. 그리스어에 능통한 베난티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부에서 웃음의 문제를 특히 마음을 다하여 다루었다면서, 그렇게 위대한 철인이 서책 한 권을 웃음에 바쳤다면 필시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만치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많은 교부들이 죄악 이야기만으로 책을 썼는데, 이거야말로 죄악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베난티오는, 자기가 아는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 삶에 바람직한 것일 수 있으며 진리의 도구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습니다. 호르헤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문제의 책을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고, 베난티오는, 자신이 읽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르는 책이기 때문에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모르베카 사람 기욤의 수중에도 이 책만은 없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는 그것이 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신의 섭리가 헛된 것을 영광되게 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두 분의 의론을 진정시키고 싶었습니다. 호르헤 노수도사는 불같이 화가 나 있었고, 베난티오는 묘하게 호르헤 노수도사의 성미를 긁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가 아는 [시학][수사학]의 한 부분을 예로 들면서, 여기에 아주 기발한 수수께끼에 관한 대단한 통찰이 엿보인다고 넌지시 말했더니 베난티오가 제 말에 찬성하고 나서더군요. 그 자리에는 이교도의 시를 많이 아는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기발한 수수께끼에 관한 한 아프리카의 시인들을 당해 낼 장사는 없다고 하더군요. 그는 실제로 물고기에 관한, 심포시우스의 시를 인용해 보였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상에는, 맑은 소리를 내는 집이 있다.

그 집 자체는 소리를 내지만,

손님은 침묵하여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집도 손님도 함께 흐른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호르헤 노수도사는, 이야기를 길게 해보았자 어차피 악마의 이야기일 테니까 예수님께서 가부를 가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고기를 언급하려면 거짓된 소리 밑에 개념을 숨기지 말고 <물고기>라고 말하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프리카 인 운운하는 것부터가 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런데 이때 저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렝가리오가 웃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호르헤가 꾸짖자 베렝가리오는 웃음을 터뜨린 까닭을 설명했습니다. 베렝가리오의 말에 따르면, 아프리카인의 수수께끼를 듣고 보니, 물고기 이야기만치 쉽지는 않지만 역시 그만큼 재미있는 다른 수수께끼가 하나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베렝가리오의 석명을 듣고 있던 말라키아가 화를 버럭 내면서 베렝가리오의 덜미를 잡아 떠밀어 버리면서 헛 짓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시겠지만 베렝가리오는 말라키아 사서 수도사의 조수입니다.'

'그다음에는?'

'호르헤 수도사가 자리를 떠 버리는 바람에 입씨름은 그것으로 끝나고 모두 제 할 일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베난티오와 아델모를 눈여겨보았는데, 두 사람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것 같았습니다. 베렝가리오는, 두 사람의 부탁이 들어주기 힘든 것인 양 자꾸만 꽁무니를 빼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그런 베렝가리오를 물고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게 했고요. 그날 밤 저는 베렝가리오와 아델모가 식당으로 들어가기 직전 회랑에서 정답게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는 걸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게 전붑니다.'

'자네의 말을 요약하면, 최근에 기묘한 상황에서 묵숨을 잃은 두 수도사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는군.'

베노는 기분이 상한 듯한 얼굴을 하고 윌리언 수도사의 말에 응수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자꾸만 캐어 물으시길래 그날 있었던 일, 그날 제가 받은 인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굳이 제 의견을 듣고 싶어 하신다면 말씀드리지요. 베렝가리오는 두 사람에게 장서관에 있는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꼭 조사해 보아야 할 곳이 있다면 그건 장서관입니다.'

'왜 장서관이라고 생각했는가? 베렝가리오는 왜 아프리카 시인 이야기를 하였던가? 아프리카 시인의 시가 더 널리 읽힌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그렇 것입니다. 아니,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말라키아 수도사는 왜 화를 냈을까요? 결국, 장서관으로부터 아프리카 시집을 내어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말라키아입니다. 말라키아가 장서관의 사서이니까요. 저도 한 가지는 압니다. 장서 목록을 뒤적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문 가운데서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발견할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거기에서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에게는, 이 장서 목록에 속하는 서책의 대출을 요구한 적도 있습니다. 제목이 몹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뿐,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라키아는 목록에 그런 표시가 되어 있는 서책은 분실된 것이어서 장서관에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올리는 말씀입니다만, 베렝가리오에게 물어보시되 베렝가리오가 장서관으로 올라갈 때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 들으신 것으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 들은 걸로 하지.'

윌리엄 수도사는 베노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노를 돌려 세운 뒤 나와 함께 회랑을 걸으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말했다.

'베렝가리오는 이미 도반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베노는, 우리의 주의가 장서관으로 쏠릴 것을 바라고 있는 눈치가 아니더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부님의 주의가 장서관으로 쏠리기를 바라는 것은 사부님을 통하여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바를 대신 알아내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일리가 있기는 하다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 가령 우리의 관심을 장서관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자기가 관심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는지도 모르지 않겠는냐?'

'그럼 베노 수도사는 어떤 일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모르지. 문서 사자실인지, 주방인지, 교회인지, 숙사인지, 시약소인지...'

'사부님께서는 장서관에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찾아서 가지는 관심이지 남의 제보를 받았거나 충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장서관을 계속해서 주목해 본 필요가 있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야.'

사부님 말씀은, 사정이 급변한 덕분에 명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장서관 침임은 물론 위법일 것이지만,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베네딕트 교단과 수도원의 규칙에 대해 변명할 여지, 최악의 경우에는 억지를 써 볼 언덕이 생겼다고 판단한 셈이었다.

우리는 회랑을 벗어났다. 미사가 끝났는지 불목하니들과 수련사들이 교회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 서쪽 벽을 따라 걷다가 베렝가리오를 발견했다. 베렝가리오는 교회 수랑문을 나와, 본관 쪽으로 가려는지 묘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베렝가리오의 매무새는, 교회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흐트러져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베노의 경우에 그랬듯이 베렝가리오도 정신 상태가 흐트러져 있을 때를 노려 한번 심문해 보기로, 말하자면 허를 찔러 보기로 작심했던 모양이었다.

'생건의 아델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자네였던 것 같은데?'

베렝가리오를 불러 세운 윌리엄 수도사는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베렝가리오는 이 질문에,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쓰러질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제가...?'

베렝가리오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지는 않다. 베노로부터 베렝가리오와 아델모가 회랑에서 정담을 나누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어서 에멜무지로 던져 보았던 질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질문이 정곡을 찔렀던 모양이었다. 베렝가리오의 음성이 몹시 떨렸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자기만 아는 아델모와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저 역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델모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델모를 만난 것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순간 윌리엄 수도사는 베렝가리오를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말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만에, 자네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났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자네는 뭔가를 알고 있어. 이곳에서 수도사가 둘이나 죽었다는 걸 자네도 알 테지. 따라서 자네도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어.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말을 시키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바보가 아닌 자네가 모를 리 없겠지.'

윌리엄 수도사는 틈날 때마다, 비록 자기가 종교 재판과 이단 심판의 조사관으로 있었지만, 고문만은 되도록 피하는 주의였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베렝가리오가 윌리엄 수도사가 그런 분이었다는 걸 알 리 없었다. 말하자면 베렝가리오는 윌리엄 수도사를 오해한 것이었다. 아니, 윌리엄 수도사가 자신이 베렝가리오로 하여금 자신을 오해하게 만든 셈이었다. 어쨌든 윌리엄 수도사의 으름장은 즉석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윌리엄 수도사의 장난기 어린 협박에 베렝가리오가 금방 눈물을 줄줄 흘린 것이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밤에 아델모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죽어 있던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있던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여기 이 묘지에서 아델모를 만났습니다. 제가 만났을 당시의 아델모는 사람 꼴이 아니었습니다. 유령처럼 이 묘지를 방황하고 있는 아델모는 도무지 산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송장의 얼굴과 다를 바 없었고, 눈은 이미 받아야 할 천벌은 다 받은 듯했습니다. 제가 그다음 날 그의 죽음을 부고 받고, 전날 밤 이 묘지에서 제가 본 것은 아델모가 아니라 아델모의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하고 있을 당시에도, 저주받은 영혼, 혹은 유령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맙소사,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흉측했던지 제 입으로는 차마 그려 낼 수 없습니다.'

'자네에게 뭐라고 하던가?'

',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 이렇게 보고 있듯이, 그대 앞에 선 나는 지옥에서 온 자이다, 나는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 그래서 제가 소리쳤습니다.

<아델모, 정말 지옥에서 왔더냐? 지옥의 고통이 어떠하더냐?>

... 두려움을 이길 수 없어서 온몸이 마구 떨렸습니다. 종과 성무를 마치고 나온 참인데, 그때 봉독한 성서 구절이 바로 주님의 분노를 그린 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델모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어찌 필설로 그려 낼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까지 내가 걸치고 있던 궤변의 너울에 마침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 궤변의 너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아니면 이 땅의 산 한 덩어리를 짊어진 듯한 무게로 나를 내리누른다. 허나 나는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 이 고통은 하느님이 내리신 벌인데 내 죄목인즉 내 허영심, 내 육체를 쾌락의 거처로 믿은 허물,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 죄, 내 상상 속에 둥지를 틀고 있던 괴이한 형상을 즐겼다는 것이다. 어이하랴, 이제 이 괴이한 형상은 내 영혼 안에도 전보다 더 괴이한 형상을 슬었으니... 이제 나는 영원히 이들과 살아야 한다. 그대 눈에도 이 법의가 보일테지. 이 법의가 벌겋게 단 숯 덩어리나 불길이 되어 내 몸을 태우고 있다. 이 징벌은, 알면서도 저지른 육신의 정결하지 못한 죄악에서 비롯되어 이제는 불길로 쉴 새 없이 나를 태우는구나. 손을 주게, 내 아름다운 스승이여. 그대와의 만남은 참으로 유익하였으니, 그대와의 만남은 그대가 내게 베푼 여러 유익함 가운데 하나였다. 손을 주게. 내 아름다운 스승이여.>

아델모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불타고 있다고 하던 바로 그 손입니다. 그때 제 손 위로 그의 땀이 한 방울 떨여졌는데, 어찌나 뜨거운지 그 땀방울이 제 손을 꿰뚫는 것 같았습니다. 이 징표를 며칠간이나 제 손에 남아 있었습니다만, 저는 사람들로부터 이를 숨겨 왔습니다. 아델모는 이 말을 남기고 무덤 사이로 사라졌는데, 놀랍게도 저는 그다음날, 그의 시신이 벼랑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입니다.'

베렝가리오가 시종 울먹이면서 말을 끝내자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왜 아델모는 자네를 <아름다운 스승>이라고 불렀을까? 자네와는 동년배가 아니었는가? 혹 자네가 그 친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 것이 아닌가?'

베렝가리오는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덮고는 털썩 주저앉아 윌리엄 수도사의 다리를 껴안았다. 그의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해 있었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두렵습니다. 수도사님, 수도사님께 고백하고 싶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악마가 제 오장육부를 파먹고 있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베렝가리오를 떠밀었다가 다시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 된다. 베렝가리오. 나에게 고해를 청하지 말라. 네 입을 여는 것으로 내 입을 봉하려 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네 입을 열게 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네가 기어이 입을 열지 않으면 내 스스로 그 방법을 강구하고 말겠다. 네가 원한다면 내 자비를 구하는 것은 허락하겠다만 침묵은 구하지 말아라. 이 수도원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침묵이 너무 흔하다. 그러니 먼저 내 말에 대답하여라. 칠흑 어둠이었다면서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으며 눈과 진눈깨비와 비가 몹시 내리는 밤이었는데 어떻게 그자의 땀방울이 네 손을 태울 수 있었느냐? 그리고 그 밤에 너는 묘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느냐...'

윌리엄 수도사는 그의 어깨를 잡아 사정없이 흔들었다.

'...어서 말하여라, 이것만은 말하여야 한다.'

베렝가리오는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묘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그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횃불이... 아니, 아델모에게 횃불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든 횃불의 불빛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와 눈이 몹시 내렸을 텐데 그 친구는 어떻게 횃불을 들고 있을 수 있었더냐?'

'종과 성무 직후였기 때문에, 그때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은 그 뒤에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제가 요사로 가면서 첫 눈발을 보았던 듯합니다. 저는... 숙사로 도망쳤고, 망령 같은 아델모는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그 위로는 모르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에게 고해를 허락하지 않으시려면, 더 이상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오냐, 그럼 가거라. 교회로 가서 주님께 말씀드려라. 너는 사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아니면, 야밤에 은밀히 성소에 접근하는 죄를 짓고도 아직 고해하지 않은 모양이니, 입이 무거운 수도사를 한 분 찾아 죄를 고백하도록 하여라. 나중에 내 다시 너를 만나리라.'

베렝가리오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윌리엄 수도사는 두 손을 마주 비비고 있었다. 만족스러워 할 때마다 나오던 그의 버릇이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오냐, 이제야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사부님, 보이기 시작한다고 하셨습니까? 아델모의 망령이 하나 더 나타난 것 같은데요?'

'잘 들어라, 아드소. 내 보기에는 그 망령이라는 게 그리 무서운 망령 같지는 않구나. 더구나 베렝가리오는, 설교자들의 필독서를 읽고 거기에서 몇 구절을 외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 수도사들은 독서량이 지나쳐, 흥분하면 읽은 것을 줄줄 읊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델모가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베렝가리오가 저에게 필요한 말이니까 아델모에게서 들었다고 하는지, 지금으로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내가 세운 가정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델모가 자살했다고 가정해 보자. 베렝가리오는, 아델모가 죽기 전에 몹시 흥분해 있었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뼈아프게 통한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아델모는, 누군가가 겁을 주었기 때문에 흥분해 있었고 그래서 제 지은 죄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아델모에게 지옥의 허깨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 모른다. 이 지옥의 허깨비 이야기는 바로 아델모 자신이 베렝가리오에게, 완전한 광란 상태에서 해 준 것이지. 아델모는, 교회를 나와 묘지로 향했을 텐데, 교회에서는 무엇을 했을까? 누군가에게 제 의중을 털어놓았거나 고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흥분과 통한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야. 베렝가리오 말에 따르면 아델모는 요사와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본관 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관일 수도 있고 외양간 뒤의 수도원 외벽일 가능성도 있다. 내 이미 아델모가 투신자살했다면 투신한 곳은 그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 않더냐? 결국 아델모는 폭설이 내리기 전에 그곳에서 투신하고 외벽 밑에서 죽었는데 뒤에 산사태로 이 시체는 북쪽 탑루와 동쪽 탑루 사이로 밀려 내려갔던 것이야.'

'뜨거운 땀방울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인지요?'

'이것은 베렝가리오가 어디에서 듣고 그대로 주워섬겼거나, 흥분 상태에서 상상해 낸 것일 게다. 왜 그러냐 하면, 너도 들었을 테지만 아델모의 회한과 베렝가리오의 회한은 역반복 관계에 있다. 만일에 아델모가 교회에서 나왔다면 분명히 양초를 들고 있었을 것이야. 그렇다면 베렝가리오의 손등에 떨어진 것은 눈물이 아니라 촛농일 수 있다. 그러나 베렝가리오는, 아델모가 자기를 스승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촛농을 훨씬 뜨겁게, 살갗을 태울 만큼 뜨겁게 느꼈던 게야.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아델모가 베렝가리오에게 뭘 잘못 배워 그 때문에 절망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고 베렝가리오를 질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베렝가리오 역시 이것을 알고, 아델모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게 했기 때문에, 그래서 아델모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들어보아라, 아드소, 우리가 저 사서 조수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아내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사부님의 짐작을 헤아려 보았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저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부님, 수도자는 모두 하느님 자비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부님께서는, 아델모가 교회에서 고해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왜 아델모는 죄악을 저지르고, 이 죄악보다 더한 죄악으로 자신을 다스렸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아델모에게 아주 절망적인 말을 했을 테지. 조금 전에 일렀듯이, 요즘 나도는 설교집을 보면, 아델모 같은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한 구절이 나온다. 아델모는 같은 방법으로 베렝가리오를 위협했을 것이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는데 근자에 들어 설교자는, 대중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이로써 신앙심과 믿음에의 열의를 부추기고, 인간의 법과 하느님의 법을 공히 준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답시고 공공연히 극언은 물론 끔찍한 위협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있다. 우리 시절에는, 그리스도 성모님의 슬픔을 묵상해야 마땅한 성무 시간에 채찍으로 제 몸을 치면서 고행하는 이른바 편타 고행자의 무리가 횡행하지는 않았고, 오늘날처럼 평신도의 신앙을 연단한답시고 지옥의 불길로 을러메는 일도 없었다.'

'참회하게 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아드소, 오늘날만큼이나 참회라는 말이 난무하던 시대도 나는 알지 못한다. 옛날에는, 설교자는 물론, 주교도, 엄격주의파 수도사들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회는 그런 것으로는 유도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들 믿었다.'

'그렇다면 제3의 시대, 천사 같은 교황이 주재했다는, 페루지아 회의 때는 어떠했습니까?'

'공연한 향수지. 위대한 참회의 시대는 갔다. 그래서 회칙 대헌장이 참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야. 백 년, 이백 년 전에는 엄청난 개혁의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성자들, 이교도든, 참회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화형을 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합 대중이 저마다 참회를 입에 올리고 있으니 민망하구나. 교황까지도 이 말을 입에 담지 않더냐? 교황청이 말하는 인간의 거듭나기란 믿을 바가 못 되는 게다.'

'그렇지만 돌치노 수도사는...'

나는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는 이 이름에 대한 사부님의 의견이 궁금하던 참이어서 감히 여쭈었다.

'돌치노 수도사는 사는 것도 끔찍하게 살았고 죽을 때도 끔찍하게 죽었다. 너무 늦게 왔던 탓이다. 그것은 그렇고...너는 돌치노 수도사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쭈운 것입니다.'

'그 사람 이야기는 네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대신 자칭 <사도회> 혹은 <사도파>이야기나 할 거나? , 가까이서 보아서 잘 알지. 슬픈 이야기다. 들으면 네 기분 역시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판단하지 못하니 더욱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사도파 이야기는, 많은 성인들이 가르친 바를 체현한답시고 미친 짓거리를 일삼던 사람들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나 역시 그게 어느 쪽 잘못인지 모르겠다. 나는, 흡사 참회를 가르치는 성자와 대개는 이 성자들의 수고를 빌어 참회를 실천하는 죄인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진영 사이에 놓인 것 같다 싶을 때가 이따금씩 있다. 아니다, 내가 말하려던 것은 이것이 아니야...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지... 참회의 시대는 갔으니, 참회의 시대에는, 참회자에게 참회의 욕구는 곧 죽음에의 욕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회해야 마땅할 자들이, 광적이 참회자들을 죽였다. 무슨 말이냐? 죽음을 부르는 진정한 참회를 중지시키기 위해 죽음의 짐을 지운 자들, 다시 말해서 광적인 참회자들을 죽인 자들은, 영혼의 참회를 상상의 참회로 대치시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고통과 피를 진정한 참회의 거울이라고 부르면서, 고통과 유혈이 낭자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범용한 평신도들의 상상력 안에서는 물론, 때로는 식자들의 상상력 안에서도 이 참회의 거울은 지옥의 고문을 일깨운다. 지옥이 이러이러하니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기는, 공포를 상기시킴으로써 영혼을 죄악으로부터 떼어놓자는 것이다. 그들은 반항의 자리에 공포를 들어앉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이제 죄를 짓지 않겠군요?'

'아드소, 네가 무엇을 죄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만 내 대답은 네 대답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수년 동안 몸 붙여 산 이 나라 사람들을 헐뜯고 싶은 것은 아니다만, 우상에 능히 성자의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서도 우상에의 공포가 죄악을 경계하리라고 믿는 게 서푼 어치도 안 되는 이탈리아 인의, 서푼어치도 안 되는 미덕의 표본이 아닐까 싶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리스도보다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토니오를 더 두려워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개가 그러듯 아무 데나 오줌을 잘 누는데, 네가 만일 한 자리를 정하게 지키고 싶으면 나무 작대기로 그 자리 위에다 성 안토니오의 형상을 그려 놓아 보아라. 그러면 아무도 거기에 오줌을 누지 않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냐?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설픈 목회자들 덕분에 고대의 미신으로 뒷걸음치는 것도 마다히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육의 부활은 믿지 않고 육신의 상해와 불행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그리스도보다는 성 안토니오가 더 두렵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베렝가리오 수도사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를 게 없다. 자는 지금 이 반도를 풍미하고 있는 교회와 설교의 분위기를 이르고 있음이야. 이러한 분위기가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신심과 학식 있는 수도사들이 많은 이 수도원까지 퍼져 오지 않았느냐?'

'하지만 죄를 짓지 않으면요?'

나는 사부님에게 매달리고 싶었던 나머지 억지를 부렸다.

'수도원이 세상의 거울이라면 해답은 자명해졌을 테지.'

'사실이 그렇습니까?'

'세상에 거울이 있으려면 먼저 세상이 모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철학적인 윌리엄 수도사의 결론이었다.

3시과

문서 사자실로 올라가기 전에 우리는 잠시 주방에 들러 목이라도 축이기로 했다. 해 뜬 이후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마셨다. 곧 몸이 풀렸다. 남쪽 화덕은 대장간 용광로처럼 달아 있었고, 가마 안에서는 점심거리 빵이 익고 있었다. 양치기 둘은 갓 잡은 양을 굴리며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나는, 요리사들 사이에서 살바토레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예의 그 늑대 입으로 푸짐하게 웃었다. 나는 그가, 전날 밤부터 식탁 위에 남아 있던 닭 요리 부스러기를 그러모아 은밀히 양치기들에게 건네주는 걸 보았다. 양치기들은 엉큼하게 웃으면서 그 닭고기 요리를 양피 저고리 안으로 감추었다. 그러나 요리장 수도사가 그 광경을 보고는 살바토레를 나무랐다.

'이것 보아, 식료계 수도사를 자칭하시면서 수도원 음식을 잘 건사해야지 턱없이 낭비해서 쓰나?'

살바토레가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응수했다.

'이들은 하느님의 자식이 아닌가 뭐? 예수님께서는, 이 어려운 사람 대하기를 당신 대하듯 하라고 하셨다.'

요리장 수도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더러운 프라티첼로 소형제회, 소형제의 똥 같으니라고! 시방 네가 있는 곳은 이제 거러지 걸승 패거리의 천막이 아니야. 하느님의 어린 양을 고루 먹이려고 노심초사하시는 수도원장이 기어이 자네 죄를 물을 것이야!'

살바토레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면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소형제의 걸승 패거리가 아니라 <성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다! 이 더러운 놈, 보고밀 파의 똥 덩어리 같은 작자야!'

'뭐라고, 이런 돼지 같은 자여? 누구를 보고밀이라고 부르느냐? 야밤에 네놈이 희롱하는 갈보나 보고밀이라고 부를 일이지 누구 보고 보고밀이라고 하느냐?'

살바토레는 양치기들을 문밖으로 내쫓고 나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윌리엄 수도사를 보자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어르신, 제가 속한 교단은 아닙니다만, 어르신께서 나서시어서 저를 좀 변호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프란체스코 회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좀 해주시면 저자에게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내 귀에다 입술을 댈 듯이 하고 <저 거짓말쟁이, !>하고 속삭이고는 침을 탁 뱉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요리장 수도사가 급히 달려 나와 살바토레를 문밖으로 떠밀어 낸 뒤 문을 닫으면서 윌리엄 수도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수도사님, 저는 귀 교단이나, 귀 교단에 속하시는 신성한 분들을 욕되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걸승 패거리와 가짜 베네딕트 회 수도자들을 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 전 그 사람이 속하던 문중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는 자네와 같은 사제 신분이니 마땅히 법도에 따라 예우해야 할 것이네.'

'하지만 어르신, 저자는 식료계 수도사의 비호를 받는 것을 기화로 이제는 아예 내놓고 식료계 행세를 하면서 제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광대뼈를 내밀고 다닙니다. 요컨대 이 수도원이 제 것인 양 설치는 것입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요.'

'밤에는 어떻게 설치는가?'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요리사의 표정은, <향기로운 이야기가 못 되어서 구태여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윌리엄 수도사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시던 우유잔을 비웠다.

나는 호기심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우베르티노와의 만남, 살바토레 및 식료계 수도사의 과거에 관한 소문, 당시에 사람들 입에 유난히 자주 오르내리던 탁발승 무리 및 이단적인 소형제 수도사들, 돌치노 수도사에 대한 사부님의 기이한 침묵... 일련의 영상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수도원으로 오는 도중 우리는 두어 차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편타 고행자 수도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이들 대하기를 성자 대하듯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시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편타 고행자 무리는 두엇씩 짝지어, 사타구니만 가린 채 도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사람들은, 이들이 그런 차림으로 다닐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모두 가죽 채찍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면서 피가 나도록 이녁의 어깨를 쳤다. 그들은 또 구세주의 고난을 친견이라도 한 양, 그 고난의 순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가 하면, 주님의 자비와 성모의 대도를 눈물로 노래하기도 했다. 대낮에는 물론, 한겨울 한밤중에도 그들은 촛불을 들고 떼거리로 몰려 이 교회 저 교회로 들어가, 양초와 깃발 든 사제를 필두로 제단 앞에 부복하고는 했는데, 이 무리에는 평신도 남녀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귀부인이나 부호들도 있었다. 이럴 때면 종종 참회의 대제전이 연출되고는 했는데, 이 집회가 절정에 이르면 물건을 훔친 자는 그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고, 죄지은 자는 그 죄를 고해하는 등의, 반드시 그르다고는 할 수 없는 일도 더러 생겨나고는 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이러한 의식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에게, 그런 참회, 그런 고해는 진정한 참회나 고해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날 아침 교회에서 참회의 정화 의식이 끝났을 때 윌리엄 수도사는 나에게, <이거야말로 그리스도라는 정점을 중심으로 설교자가 대중의 신앙을 결집시키는 의식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대중에게 이단적인 참회의 욕구에 굴복하지 않게 한다. 말하자면 그런 참회 의식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참회와 이단적 참회 의식에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 차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러이러한 행위에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은, 행위 자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이러한 행위를 판단하는 교회의 자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베르티노와 사부님 사이에 있었던 입씨름을 되씹어 보았다. 사부님은 분명히, 우베르티노의 신비주의적(그리고 정통파적) 신앙과 이단자들의 왜곡된 신앙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사부님은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우베르티노를 설득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분명히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을 공격했다. 두 분의 입씨름을 가까이서 보고 내가 느낀 것은, 다르다고 보는 우베르티노에게는 분명히 다른 것이고, 같다고 보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 차이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사부님은 이단 심판의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부님은 나에게 저 수수께끼의 인물 돌치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문득 내게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부님은 주님의 도우심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자꾸만 다르게 느껴진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양자를 다른 것으로 보고 한 입장에서 다른 입장을 단죄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베르티노와 몬테팔코의 성녀 키아라(죄인에 둘러싸여 있었던)는 분별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 양자가 같은 것임을 납득했기 때문에 오히려 성자 성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이것, 오직 이것만이 성성이 아닐지... 그렇다면, 견줄 데 없이 명민하여 사물의 본질에 관한 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사물과 사물의 미세한 어긋남이나 미세한 관련성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윌리엄 수도사에게는 왜 이런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눈을 들어보니, 사부님은 여전히 우유 잔을 비우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사부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전날 문서 사자실에서 만났던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였다. 나에게, 그의 인상은 충격적이었다. 웃는 모습을 바로 보고 있노라면, 아이마로라는 사람은 인간의 어리석음과는 죽어도 화해하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인간도 어리석을 수 있다고 하는 우주적인 비극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윌리엄 수도사에게, 예의 그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윌리엄 수도사님, 벌써 이 광인들의 소굴에 익숙해지신 모양이군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는가? 나는 이 지극히 점잖고 학식 있는 분들이 모이신 곳을 광인의 소굴이라고 한 적 없네.'

윌리엄 수도사가 점잖게 응수했다.

'옛날에는 그랬습지요. 수도원장이 수도원장 같고, 사서가 사서같이 굴었들 때엔 그랬습지요. 이 윗동네를 보셨겠지요...'

그는 턱으로 본관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 윗동네에 관심하셨으면 보셨겠지요? 장님 눈깔을 한 빈사 직전의 게르만인 말입니다. 이자는 시체의 눈을 한 스페인 장님의 헛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니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꼴이 이 모양이니 가짜 그리스도가 아침마다 나타날 수밖에요? 장서관 관리를 제대로 해내기나 합니까? 이들은 죽자고 낡은 양피지만 긁어대었지 새 서책이라고는 제대로 들여놓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위에서 이러고 있을 동안에, 저 아래 도시에서 그들은 행동합니다. 한때 우리 수도원은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되어 가는 꼴을 좀 보십시오. 황제는 우리를 이용하되, 여기에다 자기 친구를 보내어 원수를 맞게 합니다. 저는 수도사님께서 맡으신 임무를 어림으로 헤아립니다. 다른 수도사들이야 입방아에만 부지런할 뿐 그런 걸 보아 낼 눈이 있을 리 없습지요. 각설하고... 그러나 황제의 친구분이 만일에 이 나라의 문제를 제대로 수습할 양이면 이리로 올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도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곡식을 거두고, 잡아먹을 가축을 기르는데 코를 박고 있지만 저 아래 세간 사람들은 한 필 비단을 한 치 린네르로 바꾸고, 한 치 린네르를 한 자루 양념과 바꾸는 등 부산하게 교역하여 떼돈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우리 재산을 지키는 데만 골몰하나 세간의 사람들은 나날이 재산을 불립니다. 서책인들 다를까요? 서책의 문화를 교역의 문화에 견준다면 세간 사람들에게 귀한 책이 많다는 것이야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테지요?'

', 세간에 새로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건 사실이네만, 어째서 이 때문에 수도원장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야 장서관을 외국인에게 맡기고, 수도원을 온통 장서관 지키는 성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이탈리아 땅에 있는 베네딕트 회 수도원은 마땅히 이탈리아 인이 이탈리아 문제를 결정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황 한 위 내어 보지 못한 주제에 대체 이탈리아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거래를 일로 삼고, 공산품을 넉넉하게 지어내다 보니 지금은 프랑스 왕보다 더욱 배가 불러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수도자들도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좋은 책을 만들 줄 압니다. 그러니 마땅히 좋은 책을 만들어 대학에 배포하고,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를 기울여 수도원의 문화를 살찌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님, 수도사님의 귀한 임무를 빗대어 황제를 비아냥거리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볼로냐나 피렌체 사람들만큼은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탈리아와 프로방스를 오가는 순례자 및 상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장서관을 이런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반드시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올라와서 자유로이 이용하게 했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기가 무슨 끌뤼니 수도원의 오딜로네 원장이라고, 우리 원장은 죽자고 이 장서관을 틀어쥐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저 외국인 무리에게 당하고 있으니 이 아니 한심한 일입니까?'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탈리아 인이지 않은가?'

사부님의 질문에 아이마로는 냉소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곳 수도원장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머릿속에는 서책 상자만 가득 들어앉아 있지요. 케케묵었다는 것입니다. 대체 원장이 무슨 일은 어떻게 하는지 아시기나 하십니까? 원장은, 교황의 부아를 돋운답시고 이 수도원을 탁발승 패거리(수도사님, 저는 귀 교단의 신성한 회칙을 피폐케한 이단자 무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의 소굴로 만드는가 하면,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북방 사람들이면 마구잡이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뭐 필사사도 없고, 그리스어나 아랍어를 하는 사람도 없답니까? 돈 많고 점잖은 부호의 아들이 피사나 피렌체에는 없답니까? 이들을 교단으로 맞아들여 그 배경의 권력과 금력을 쓰면 안 된답니까? 그러나 한심하게도 게르만인이 아니면 안 된답니다. 이곳에서는 게르만인의 인정을 받아야 세간 소식을 귀동냥이라도 할 수 있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수도사님... 아이고, 이놈의 혀, 온당하지도 못한 소식을, 어쩌자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지...'

'수도원 안에 온당하지 못한 일이 있다는 말씀이신가?'

윌리엄 수도사가 우유를 조금 더 다르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수도사도 사람입니다... 허나 이곳에는 사람 축에 들지 못하는 사람 또한 어떤 곳보다 많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잊지 마셔야 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지금 곧 잊으셔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군. 그래 이건 자네 개인의 의견인가, 아니면 자네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수도자들을 대표하는 의견인가?'

'저와 의견이 비슷한 수도자... 많고 많습니다. 가엾은 아델모를 잃고 상심하는 수도자가 많습니다. 허나 심연으로 떨어진 게 아닌 사람이었다면, 아델모 이상으로 장서관 주위를 서성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저자들의 기분도 별로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망언이 지나쳤습니다만, 진작 아셨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말들이 좀 많습니다. 이제 이곳에, 침묵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른 데서는 침묵을 귀하게 여기는 게 지나치기는 하지만요. 이곳에 머무는 우리는, 수다를 떨어서도 침묵해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교단의 황금기에는, 수도원장이 수도원장답지 못할 경우, 독을 탄 포도주 한 잔으로 후계의 자격 여부를 물었답니다. 윌리엄 수도사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수도원장이나 다른 수도사 형제들의 흉을 더 이상 잡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은덕으로, 저는 아직 남을 펌하하는 버릇은 익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이 수도사님께, 저 아이마로,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 혹은 산탈바노 사람 피에트로의 조사를 의뢰했다면 기분이 덜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장서관 문제를 더불어 논해 본 적이 없습니다. 허나 조금 논하고 싶은 생각이 저에게는 없지 않습니다. , 원컨대 이 뱀굴을 백일하에 밝히 벗기십시오. 수많은 이단자들을 화형대로 보내신 분이시니 능히 해 내실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아, 사람을 화형대로 보낸 적이 없네.'

윌리엄 수도사가 발끈하면서 그의 말꼬리를 낚아챘다. 아이마로는, 아이마로답지 않게 사람 좋게 웃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잘해 보십시오, 윌리엄 수도사님. 하지만 밤에는 조심하십시오.'

'낮에는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육신은, 낮에는 좋은 약초에 길이 들어 있고, 밤에는 정신을 사악하게 하는 약초에 길이 들어 잇기 때문입니다. 행여 누군가가 아델모를 심연으로 밀어 넣었고, 베난티오를 되지 피 항아리에 처넣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곳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서책을 읽어야 할지, 수도사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귄세, 혹은 지옥의 사촌인 요술사의 권능이 수도사들의 죄 없는 호기심을 누르는 데 동원되기도 합니다.'

'자네 본초학자 수도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는 좋은 사람입니다. 말라키아가 게르만인이듯이 그 역시 게르만인이기는 합니다만...'

아이마로는 이렇게 말하다가 다시 한번, 자기는 남의 허물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그곳을 떠났다.

내가 사부님께 물었다.

'아이마로 수도사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던 것입니까?'

'모든 것을 말하려 하는데도 언외로는 한마디도 넘쳐나지를 않는구나. 수도원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어떤 수도원을 막론하고, 수도사들이 주도권은 놓고 추잡한 드잡이 벌이는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너의 친정인 멜크 수도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야. 다만 수련사인 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너희 나라에서는, 수도원의 주도권은 곧 황제와 언로를 트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황제가 로마까지 내려온다고 해도 거리가 너무나 멀다. 그래... 로마라고 해도 이제 그 도시에는 교황청도 황실도 없다. 보았겠지만, 도시만 있을 뿐이다.'

'저에게도 로마라는 도시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는 제 나라 도시와는 어딘가 다른 도시 같아 보였습니다. 살기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결정하기 위한 장소 같다는 인상, 광장에 모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황제나 교황보다는 시장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눈에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는 수많은 왕국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의 왕은 모두 상인이다. 따라서 돈이 무기 노릇을 한다. 이탈리아에서 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나 너희 나라에서와는 전혀 다른 노릇을 한다. 다른 나라에는 돈이라는 것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거래를 돕는 역할만 할 뿐 닭, , , 마차 따위의 거래는 거의 물물 거래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어디에 가나 돈이 거래의 수단이 된다. 너도 보았듯이 다른 나라에서는 돈이 물건을 섬기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물건이 돈을 섬긴다. 따라서 사제이든 종단이든 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에 저항할 때 가난에 호소하여 무리를 규합하는 것은 당연지사.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은 대개 돈과 인연이 별로 없는 법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 대한 선동이 상당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 또한 당연지시다. 그래서 모든 도시에서 주교나 시장 같은 권력자들은, 가난에 대해 너무 깊은 문제를 건드리며 설교하는 사제를 자기 적으로 보는 법이다. 종교 재판이나 이단 심판의 조사관들은 누군가가 악마의 똥 구린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에서 악마의 냄새를 맡아 내는 것이다. 이제 아이마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겠느냐? 베네딕트 수도회가 황금시대를 구가할 때, 베네딕트 수도원이라면 의당 목자가 성도의 무리를 제대로 간수하는 곳으로 통했다. 아이마로는 이 전통을 되찾고 싶은 것이야.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바뀌었으니, 수도원이 옛날의 전통을 되찾는 길은(즉 그때의 영광, 그때의 권세를 다시 누리는 길은) 수도원이 성도의 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함께 변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곳의 성도들을 지배하는 것은 무서운 무기도 장엄한 의식도 아닌, 바로 돈의 힘이기 때문에 아이마로는 수도원 건물 전부와 장서관까지 공장, 즉 돈을 버는 공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이것과, 수도원에서 있었던 범죄 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허나 지금은 위층으로 올라가 때이다. 그러니 따라오너라.'

수도사들이 공부를 시작했을 시각이었다. 문서 사자실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으나, 모두가 공부나 일에 열중하는 데서 오는 침묵은 아니었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문서 사자실로 올라갔던 베렝가리오는 거북살스러운 얼굴을 하고 우리를 맞았다. 다른 수도사들은 각자 자기 서안 앞에 앉은 체 우리를 돌아다보았다. 모두, 베난티오 사건의 납득에 필요한 실마리 때문에 문서 사자실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간 곳은, 8각형의 안뜰로 열린 창 아래쪽의 빈 서안이었다.

꽤 추운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문서 사지실의 온도는, 따뜻하다고 해도 좋으리만치 높았다. 문서 사자실이 주방 위에 있어서 주방의 열기를 덤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묘하게도, 주방의 두 빵 가마 굴뚝이, 서쪽 및 남쪽 탑루를 오르는 두 개의 계단층 기둥을 통하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서 사지실 반대쪽, 그러니까 북쪽 탑루로 오르는 곳에는 계단이 없는 대신 벽난로가 있어서 주위를 쾌적한 온도로 덥혀 주었다. 쾌적한 것은 온도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짚까지 깔려 있어서 우리가 걷는데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문서 사자실은 밝고 따뜻하고 조용한 곳인 셈이었다.

문서 사자실 중에서 난방이 가장 허술한 곳은 동쪽 탑루 부근이었다. 사실상, 일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숫자를 보면 빈자리가 거의 없었는데도, 모든 수도사들이 그 자리에 있던 서안을 기피하려 했음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로 이 자리, 즉 동쪽 탑루로 통하는 계단과 가장 가까운 이 자리만이 아래로는 식당, 위로는 장서관으로 통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 자리의 난방이 가장 허술한 까닭을 납득했다. , 가장 중요한 통로 근방의 난방을 허술하게 함으로써 거기에 앉는 수도사들의 기를 꺾어, 장서관 접근을 저지하자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었다.

베난티오의 서안은, 커다란 벽난로를 등지고 있었다. 따라서 문서 사자실 안에서는 상석인 셈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문서 사자실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후일 문서 사자실을 자주 출입하면서, 혹은 문서 사자실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학승, 필사사, 주서사들에게 추위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추우면 우필을 쥔 손가락이 마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평상 기온 아래서라도 6시간 정도 계속해서 쓰고 있으면 손가락에 경련이 이는데, 특히 엄지손가락은 누구의 발에 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해지는 법이다. 옛 필사본의 여백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 어둠이 빨리 내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 질 좋은 포도주 한잔이여>, <날씨는 춥고, 방안은 침침하다, 오늘따라 양피지에는 잔털이 왜 이리도 많은가> 따위의 낙서는 다 문서 필사사들의 이러한 고통의 호소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우필 잡는 것은 손가락 세 개라도 일을 하는 것은 온몸이다. 그래서 온몸이 쑤시고 뒤틀리는 것이다.

각설하고, 베난티오의 서안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8각형 뜰을 내려다보며 동그랗게 배치된 다른 서안과 마찬가지로 베난티오의 서안도 비교적 좁았다. 학승용 서안이기 때문이었다. 외벽을 면한 창가의 큼직큼직한 서안들은 대개 채식사나 필사사 전용이었다. 베난티오 역시 독경대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수도원 장서관에서 원서를 빌어 번역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안 아래엔 나지막한 선반이 있었는데, 칸막이 안에는 양피지 묶음이 있었다. 라틴어가 씌어진 양피지를 보면서, 나는 베난티오가 최근 들어 번역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번역이 끝난 양피지는, 필사사와 채식사의 손으로 넘어가서 작업이 끝나야 서책 꼴이 되는 법이다. 필사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그의 원고는 읽기가 어려웠다. 그리스어로 된 책도 몇 권 있었다. 독경대 위에도 그리스 책이 있었다. 베난티오가 번역가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쳐 보이게 한 원서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리스어를 몰라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사부님은 제목만 읽고도 루키아노스라는 사람이 쓴, 사람이 당나귀로 둔갑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풀레이우스의 비슷한 우화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풀레아우스의 책은, 수련사들에게는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금서였다.

우리 곁으로 베렝가리오가 다가왔다. 윌리엄 수도사는 베렝가리오에게 물었다.

'베난티오는 왜 이 책을 번역하고 있었을까?'

'밀라노의 영주가 우리 수도원에 번역을 의뢰했습니다. 반대급부로 수도원은 여기서 동쪽에 있는 몇몇 농장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반입의 우선권을 갖게 됩니다.'

베렝가리오는 멀리 밀라노 방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그런 타산적인 반대 급부 때문에 이 일을 맡은 것만은 아닙니다. 밀라노의 영주는,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이 책을 빈 베네치아 총독의 호의에 힘입어 이 책을 접했지만, 워낙 귀한 물건이라 다루기가 몹시 어려웠던 참에 우리 수도원에 번역을 의뢰했던 것입니다. 베난티오가 번역을 끝내면 우리는 두 권의 필사본을 만들어 한 권은 밀라노 영주에게 주고 한 권은 우리 장서관에 비치하게 됩니다.'

'이 요상한 이교도의 우화집을 갖다 놓아도 이 장서관 장서에는 흠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렸다?'

윌리엄 수도사가 짓궂게 물었다.

'장서관은, 진리도 증거하고 허위도 증거하는 곳이오.'

우리 뒤에서 엉뚱한 목소리가 응수했다. 호르헤 노수도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두 번째로, 호르헤 노인이 뜻밖의 순간에, 뜻밖의 장소에서 불쑥 나타나는 데 놀랐다(우리는 뒤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놀라게 된다). 호르헤 노인은, 우리의 눈 밖에서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뜻밖에 호르헤 노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장님이 문서 사자실에 무슨 볼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도원 경내에 관한 한 호르헤 노인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있을 수 없었다. 요컨대 수도원 경내에서는, 호르헤 노인은 무소 부재하는 셈이었다.

호르헤 노인의 자리는 벽난로 옆에 놓인 의자였다. 그는 그 의자에 앉아, 문서 사자실에서 나는 소리라는 소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듣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벽난로 옆 의자에 앉은 채, 문서 사자실 바닥의 짚을 소리나지 않게 밟으며 장서관으로 올라가는 말라키아를 향해, <누가 2층으로 가고 있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고 한다. 수도사들은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단어도 묻고, 성자의 이름이나 동물의 이름 읽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질문을 받으면 그는, 있지도 않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느 책 어느 쪽을 읽고 있는 것처럼, 가짜 선지자는 차림새로 말하면 주교와 흡사하나 자세히 보면 입에서 예언 대신 개구리가 나온다거니, 신성한 예루살렘 성벽은 돌로 되어 있다느니, 아리마스포이가 사는 산을 찾으려면 사제왕 요하네스가 통치하던 땅 근방의 지도를 보아야 한다느니, 괴물을 그릴 대는 상징적으로 알아볼 만하게 그리면 그만이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웃게 만들면 안 될 것이라는 등의 조언을 들려주고는 했다.

언젠가는 고전 주해자에게, 번역에 관한 조언을 들려주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호르헤 노인은 튀코니우스의 원전은 성 아우구르티누스의 사상을 좇아 해석해야 도나투스파의 이단에 논파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언젠가는 주석을 놓는 수도사에게, 이단과 교회 분리주의를 구별하는 법을 이로 정연하게 가르치는 걸 본 적도 있다. 뿐만 아니었다. 목록 색인의 무슨 책은 장서관 어디에 있고, 어떤 주장을 논증하려면 어느 어느 쪽을 보아야 하는데, 그 서책은 하느님 뜻에 따라 씌어진 것이니까 사서 수도사가 틀림없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묻는 수도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는, 특정 서책의 이름을 들을 경우, 그 책이 서명 목록에 들어 있기는 해도 반세기 전에 생쥐가 쏠아 버리는 바람에 지금쯤은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솔솔 부스러져 내릴 것이라는 식으로 대답하기도 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장서관의 기억이었고 문서 사자실은 영혼이었다. 수도사들이 문서 사자실에서 잡담이라도 하고 있을라치면 난데없이 그가 나타나, <서둘러, 이 사람들아, 진리를 증언하되, 때가 가까워졌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는 가짜 그리스도의 임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호르헤의 일갈이 날아든 것이었다.

'장서관은 진리도 증거하고 허위도 증거하는 곳이오!'

윌리엄 수도사가 아랫배에다 힘을 넣으면서 응수했다.

'아풀레이우스와 루키아노스를 마법사라고 하는 데엔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허구라는 너울을 썼을 뿐, 그들의 우화가 우리 인류에게 마땅히 좇아야 할 도덕률을 제시했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의 우화는, 인간이 자기 허물의 값을 어떻게 치르는가를 가르칩니다. 나는, 나귀로 변한 인간 이야기는 죄악에 빠지는 영혼을 은유하는 이야기라고 믿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호르헤가 뜻밖에도 시답잖게 대꾸했다.

'어제 모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나는 이제야 베난티오 형제가 왜 희극이라는 문제에 흥미를 느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풀레이우스와 루키아노스의 우화는, 고대 희극의 사촌쯤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테지요. 비극과는 달라서 우화와 희극은, 실존했던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이시도루스가 <시인은, '말하는 것' 자체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라고 명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말에서 솟아난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했듯이, 우화나 희극은 모두 그렇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왜 사부님이,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그것도 학식을 겨루는 듯한 논쟁을 자청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르헤 노수도사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사부님이 펼치는 일종의 유도 신문이 얼마나 절묘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어제 우리가 토론한 것은 희극의 문제가 아니었지요. 웃음이 과연 온당한 것이냐, 아니면 온당하지 못한 것이냐, 이 문제가 아니었나요?'

호르헤의 반응은 더 이상 시답잖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전날 베난티오가 그 토론을 상기시키자 호르헤 노수도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던 일을 떠올렸다.

윌리엄 수도사의 기억력이 나만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 그랬군요. 나는, 시인의 거짓말과 교활한 수수께끼 이야기를 하신 줄만 알았군요.'

윌리엄 수도사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반응에 호르헤 노수도사가 목청을 높였다.

'암요, 우리는 웃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요. 희극이라고 하는 이교도들의 행동은 온당한 행동이 못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희극이나 우화를 입에 담으시는 대신, 천국에 이르는 길을 바로 빗댄 명쾌한 비유법을 쓰셨을 뿐입니다.'

'글쎄요, 내게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예수님이 웃으셨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쌍수를 들고 논파하려고 하시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웃음이라는 것은 좋은 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웃음은 목욕과 같은 것이지요.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바꾸어 주고, 육체에 낀 안개를 걷어 줍니다. 우울증의 특효약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목욕이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퀴나스 성인 토마스께서도, 비탄을 가시게 하는 한 대증 방편으로 목욕을 권했지요.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이지 않으면 비탄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악마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니까요. 목욕은 흐트러진 기분을 올곧게 세워줍니다. 다만 웃음이란 육체를 뒤흔들고 얼굴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게 함으로써 인간을 잔나비로 격하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잔나비는 웃지 않습니다. 웃음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그것은 그의 이성성의 기호입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응수에 흐르헤 노인의 음성이 높아져 갔다.

'말은 인간이 지닌 이성의 표징일 수 있으나, 인간은 말로써 하느님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 온당한 것이라는 법도 없지요. 웃는 자는, 자기가 웃는 대상을 믿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악한 것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요, 선한 것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선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드러내는 선의 권능을 부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칙에, <어리석은 자는 웃음 속에서 제 목청을 높인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열 번째 미덕은, 웃음이 헤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부님은, 호르헤의 이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퀸틸리아누스는, 웃음이란 위엄을 차리고 칭찬해야 할 자리에서는 삼가되, 그 밖의 경우에는 장려해서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 플리니우스는, <인간이기에 나는 때로 웃고 때로 익살을 부리고 논다>고 썼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이교도들이 아닌가요? 우리 회칙은 경거와 망동을 다음과 같은 엄한 계율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읊어 볼까요? <거룩한 곳을 소란케 하는 희롱과 잡담과 웃음은 어느 곳에서든 금하며 이러한 언사에 제자들이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허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땅에 넘치자 퀴레네의 쉬네시우스는, 신성이란 능히 희극과 비극을 두루 조화롭게 꿸 수 있는 것이라 했고, 아엘리우스 스파르티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일러, 엄격한 제왕이 행신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즐거울 때와 엄숙할 때를 가림에 모자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뿐입니까? 아우소니우스는, 진지한 태도와 익살스러운 여유를 고루 가질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래도 놀라 사람 파울리누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 클레멘스는, 웃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고 했고,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성 마르티누스를 보았으되, 그분이 화를 내고 있거나 웃고 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성인이 기뻐하시더라고 술회한 적은 있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지혜로워 보이는 모습이지 결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기뻐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 에프라임은 수도사의 웃음을 엄중하게 경고했는데 그분이 쓰신 [수도사의 행실과 대화에 관하여]에는, 음담과 우스갯소리를 코브라의 독으로 알고 피하라는 구절이 있다는 건 모르셨던가요?'

'허나 힐데베르투스는, <특정의 품격을 지닌 경우에는 농담이 가하나, 이 역시 그 품격에 어울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또 조금 전에 어른께서 회칙 이야기를 할 때 인용한 [전도서]에는, 웃음이란 바보들의 전유물이기는 하나 조용한 웃음이면 온전한 사람이 웃어도 좋다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정신이란, 진리를 묵상할 때, 선행을 기뻐할 때만 온전한 법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선행은 웃음의 대상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웃지 않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웃음은 의혹을 일으킬 뿐입니다.'

'허나 때로는 의혹도 약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아요. 의혹이 일면 사람은 권위자를 찾거나, 아버지에게 묻거나, 박학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면 의혹은 사라집니다. 내 보기에 당신을 파리의 논리학자들처럼 퍽이나 교리 토론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오만, 성 베르나르는 고자가 된 아벨라르를 다룰 줄 아셨습니다. 아벨라르는 아시다시피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차갑고 생명이 없는 이성의 검증에다 모든 문제를 끌어다 붙이고, 제멋대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이렇지 않다는 식으로 칼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위험한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과 만고의 명언이 된 도리를 비웃는 사람의 웃음을 가려들을 줄 압니다. 바보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법입니다.'

'호르헤 어른, 아벨라르를 고자라고 하시는 것은 마땅한 말씀이 아닌 것 같군요. 아시다시피 그분은 사악한 자들의 손에 그 지경이 되지 않았던가요?'

'자업자득이지요. 인간의 이성뿐인 제 신앙의 자만 때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범인은 조롱감이 되었고, 하느님의 신비는 외람되이 드러나고 말았으며(어쩌면 바보들이 드러내려고 한 데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만) 사소한 일에 관한 질문에는 이치에 닿지도 않는 해답이 속출하였으며, 성직자들은 그러한 질문은 드러나기보다는 감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죄로 놀림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호르헤 수도사, 내가 그런 말씀에 찬성할 줄 알았던가요? 하느님께서는, 성서가 우리에게 <스스로 결정하라>고 여지를 남겨 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발동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혹자가 당신에게 어떤 명제를 믿으라고 할 때 당신은 먼저 그 명제가 과연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의 여부를 가늠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킨다고 해서 하느님의 이성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도 해보고 때로는 부정도 해보면서 유추와 부정에 의한 우리 자신 이성의 과정으로부터 추론한 것만을 알 뿐입니다. 아시겠지만,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명제의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웃음을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웃음이란 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 마우루수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이교도들이 이 성인을 끓는 물에다 넣었을 때 이분은 목욕물이 어째서 이렇게 차냐고 불평했습니다. 이교도 형리는 그 말을 믿고 거기에다 손을 넣었다가 그만 병신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적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신 순교 성인의 쾌거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성인의 행적에도, 안방마님의 입맛이나 어울릴 만한 일화는 얼마든지 있어요. 끓는 물에 들어간 성인이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입을 삼갔어야 할 것을. 어쩌자고 이교도들을 상대로 치기만만한 장난질을 했을꼬.'

그 말의 꼬리를 잡고 윌리엄 수도사는 호르헤 수도사를 막바지로 몰아갔다.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는, 이성으로 헤아릴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테고, 그래서 당신은 이 이야기를 치기만만한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비록 이성으로 입을 자제하고 있기는 하나 당신은 교묘하게, 나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엇인가를 비웃고 있어요. 당신은 웃음을 비웃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웃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요?'

호르헤는 몰리면서 짜증스럽다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

'웃음을 비웃어요? 당신은 시방 나를 한가한 말놀이 마당으로 끌어내고 싶은 모양이나, 그리스도가 웃지 않았다는 것 모르지 않겠지요?'

'글쎄요. 나는 그렇게 안 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 화폐는 거기에 새겨진 형상의 임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 재담하시면서, <너는 반석이다>라고 하셨을 때, 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황케 하고 제자들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시려고 우스갯소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가야파에게 <그것은 네 말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재담을 하신 것이지요. 끌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호의 대립이 첨예하던 때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끌뤼니 수도회에서는, 시토 수도회를 능멸한답시고,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공격한 것을 아시지요. 우스개가 아니던가요? [바보들의 거울]에서 보면, 당나귀 브루넬로가, 한밤중에 부는 바람이 수도사들이 덮고 자던 담요를 홀랑 걷어 버리면 수도사들은 저마다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할까, 하고 궁금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주위에 있던 수도사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호르헤는 서슬이 시퍼렇게 호령했다.

'당신은 지금 내 수도원 대중들을 얼간이의 축제로 인도하고 있구려! 내 일찍부터, 프란체스코 수도회에는 이따위 얼빠진 객담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못된 풍조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남의 수도원에서 이렇게 방자할 수는 없소. 이런 속임수에 대해, 내 당신에 수도회 목회자로부터 들었던 말 한마디를 들려드리리다. <그때 사타구니에서 무시무시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호르헤의 호통은 누구의 눈에도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가 약간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나 호르헤는 다른 곳도 아닌 문서 사자실에서 대갈 호령을 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노수도사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서도 우리에게, 문서 사자실에서 나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선배 수도사를 준열하게 나무라던 윌리엄 수도사가 갑자기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데 다시 한번 놀랐다.

윌리엄 수도사는 호르헤 노수도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실언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내 입이 그만 내 생각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무례가 내 본의 아니었던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의 이 병통이 한심스럽습니다''

호르헤는 순식간에 달라진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하고 신음을 토했을 뿐 더 이상은 쓰다 달다 하지 않았다. 그의 신음 한 마디는, 사과가 만족스럽다, 허물을 용서한다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입씨름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수도사들도 각기 자기네 서안으로 돌아갔다. 윌리엄 수도사는 다시 베난티오의 서안 앞에 앉아 양피지를 뒤적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호르헤에게 사과하고 나서 겨우 몇 초를 거기에 앉아 있었을까?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과 몇 초...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의 입씨름을 가까이서 듣고 있던 베노가, 필기도구를 찾으러 온 양 윌리엄 수도사에게로 다가섰다. 베노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욕장 뒤에서 좀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먼저 나가면 곧 따라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곧 말라키아를 불렀다. 장서 목록 상자 옆의 사서 서안 앞에 앉아 있던 말라키아도 윌리엄 수도사가 앉은 쪽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원장의 각별한 조사 의뢰가 있었으니만치(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그 특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누군가를 데려다가 베난티오의 서안을 지키게 하여 그 현장을 보존하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사건 조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생각에서, 돌아올 때까지 어떤 수도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말을 일부러 아주 큰 소리로 했다는 점이다. 윌리엄 수도사의 목소리가 어떻게나 컸던지 말라키아는 흠칫 놀라 다른 수도사들을 둘러보았고, 수도사들도 일제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말라키아는, 많은 수도사들 면전에서 그러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뜰을 지나 시약소 건물 앞으로 다가가면서 사부님이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내가 베난티오의 서안 위나 아래에서 뭘 찾아낼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가 아니더냐?'

'... '

'겁들을 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 베노 수도사는, 사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사부님을 문서 사자실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곧 알게 될 테지.'

그 직후에 우리는 베노를 만났다.

 

6시과

베노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듣기 어려운 참으로 민망한 사연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베노는 문서 사지실로부터 사부님을 유인해 내기 위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욕장 뒤에서 만나자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냥 빈 입으로 돌아서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그는 우리에게 그가 아는 것보다 넓은 차원의 진리 조각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오전에는 윌리엄 수도사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지 못한 것을 시인하고, 기억나는 대로 일러 진실을 알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웃음에 관한 저 논쟁에서 베렝가리오는 <피리느 아프리카에>이야기를 했는데, <피니스 아프리카에>, <아프리카의 끝>은 장서관 비서의 보고, 특히 수도사들에게는 금서로 되어 있는 서책의 보고였다. 베노는, 명제의 이성적인 명확성에 관한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는 수도사라면 장서관에 소장된 자료를 모두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벨라르를 단죄한 수아송 회의를 비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학문의 자유에 목말라 있는 한 젊은 수사학도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가로막는 수도원 규율 앞에서 경험하는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기로 그러한 호기심은 수도자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것, 따라서 타기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태도는 달랐다. 사부님은 베노의 입장을 동정하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베노는, 자신은 아델모, 베난티오, 베렝가리오 이 세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어떤 은밀한 사연이 있음을 공개하는 일이 장서관의 앞날에 보탬이 된다면 자기는 떳떳하게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베노는 또, 필경은 수도원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사부님이, 수도원장을 타일러 지적인 호기심에 목말라 있는 수도사를 탄압하는 폭력을 포기하게 하기 바란다면서,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수도사들은, 그 수도원 장서관이라고 하는 거대한 모태 안에 들어 있는 지식으로 영혼을 살찌울 목적으로 참으로 먼 곳에서 온 사람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했던 말로 미루어 베노는 사부님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부님은. 우리가 베난티오의 서안에 손을 댈까 두려웠던 나머지 우리의 주의를 그곳에서 돌릴 목적으로 불러내어 정보를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분이 아니었다. 베노가 우리에게 준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다.

베노는, 수도원의 많은 수도사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베렝가리오는 아델모에 대해 참으로 입에 담기 민망한 정욕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베렝가리오가 아델모에게 품었던 정욕은 어떤 정욕이던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만판으로 놀아나다가 하느님을 진노케 하여 결국은 불바다 속에서 절멸한 것은 바로 이 정욕 때문이 아니던가? 베노는, 내 나이가 어리다는 것도 잊었는지 자기에게도 그런 정욕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사춘기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내는 수련사들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지키고, 이런 종류의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하여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녁의 뜻과는 달리 이러한 정욕에 얽힌 이야기가 풍편으로 들리는 것이야 어쩌랴. 나 역시 멜크 수도원에 수련사로 입문하고 오래지 않아 어느 나이 든 수도사로부터, 속인이 여성에게 보내는 듯한 이상한 사연이 든 두루마리를 받은 바 있다. 수도사로 서원을 세운 사람이, 여체라고 하는 악덕의 덩어리를 경계하게 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도사라고 하는 직분은, 바로 이러한 계율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따금씩 엉뚱한 죄악에 물들고는 한다. 벌건 대낮에, 성가대석에 앉아 있던, 살결 희기가 처녀 같고 얼굴에 수염 한 올 나 있지 않은 앳된 수련사를 보면서 가슴을 두근거리던 일을, 내 이 나이가 되었으니 감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수도사의 삶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때로는 이 거룩한 사명을 너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한 나머지 죄악인 줄 알면서 저지를 수도 있는 허약하고 인간적인 수도사들을 변호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베노의 말에 따르면, 이 베렝가리오라는 수도사는 이 악덕을 좇되 그 방법이 사악하고 치사하기가 그지없다. 베노는 베렝가리오가, 미덕과 품위를 두루 갖춘 자라면 마땅히 타기할 만한 것을 얻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그 무기로 썼다고 말했다.

베노의 말에 따르면, 많은 수도사들은, 베렝가리오가, 미모 수려한 아델모에게 수상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던 아델모는 베렝가리오의 그런 칙칙한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 쌓느 데만 기쁨을 누리며 정진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니, 누가 알았으랴, 아델모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데 아델모의 영혼은 은밀히 이 사악한 유혹에 이끌리고 있었음을...

아델모가 이러한 지경에 이를 즈음 베노는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대화를 엿듣는다. 아델모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자 베렝가리오는,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기 요구도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베렝가리오가 장서관의 사서 조수였으니, 아델모가 베렝가리오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는 자명해진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외견상으로 아델모는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대단히 위험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베노의 생각은 달랐다. 베노는, 오히려 아델모가 덫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아델모는 베렝가리오가 어떤 반대급부를 요구할 것인가를 알고 장서관과 관련이 있는 청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아델모는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육욕에 대한 나름의 핑계를 마련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베노는 웃으면서 자기에게는, 마음에도 없는데도 남의 육체적 욕망을 받아들일 만큼 강렬한 지적 욕구가 없는 것이 한심해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베노가 윌리엄 수도사에게 물었다.

'물론 몇 년 동안 읽어 보고 싶어 했던 서책이 바로 장서관에 있었으니 오죽이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부끄러운 짓을 해도 좋은 것인지요?'

'몇 세기 전, 현명하고 점잖기로 유명한 실베스테르 2세는, 귀중한 천구의를, 스타티우스나 루카누스의 원고와 바꾸었다네...'

윌리엄 수도사는 이어서 정색을 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 허나 그것은 천구의였지 체면은 아니었네.'

베노는, 이야기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잠시 자기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을 사죄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베노의 이야기는 이렇다.

아델모가 죽기 전날 밤, 베노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아델모와 베렝가리오를 미행한다. 종과 성무가 끝난 다음 두 사람은 요사쪽으로 간다. 베노는 그들의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잡고 한동안 기다린다. 수도사들이 모두 잠들어 요사는 적막한데, 아델모와 베렝가리오는 베렝가리오의 방에 든다. 베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둘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런데 돌연 베렝가리오의 방문이 열리면서 아델모가 도망쳐 나온다. 베렝가리오가 그 뒤를 쫓는다. 베노는 방에서 나와 다시 두 사람을 미행한다. 그러나 베노는 두 사람을 놓치고 만다. 한참 뒤에야 베노는, 베렝가리오가 요사 모퉁이에 몸을 감추고 한 수도사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베렝가리오가 바라보고 있는 방은 호르헤 노수도사의 방이다. 그래서 베노는 이렇게 추리한다. 아델모는 자기 죄악을 고해하기 위해 원로 수도사 호르헤의 방으로 들어갔다. 베렝가리오는, 고해라는 것이 누설될 리 없는 성사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혹 자기 비밀이 드러날까 전전긍긍 떨면서 호르헤 수도사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아델모가 파리한 얼굴로 호르헤 수도사의 방을 나와 교회 쪽으로 간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가 따라가면서 말을 거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밤에도 늘 열려 있는 북문을 통하여 교회로 들어간다. 아델모는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갔을 거라고 베노는 생각한다. 베렝가리오는 아델모의 뒤를 쫓았으면서도 교회 안으로는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손을 비비면서 묘지를 서성거린다.

이때 베노는, 주위에 제4의 인물이 있는 것을 알고는 몹시 당황한다. 이 제4의 인물 역시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뒤를 따라 묘지 근방까지 와 있다. 그러나 이 인물은, 묘지 한쪽의 늙은 참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베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이 제4의 인물은 바로 베난티오이다. 베렝가리오는 베난티오를 보자 묘지의 묘석 사이로 숨는다. 베난티오는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베노는, 이 대목에서 들키면 입장이 난처해진다고 판단하고 요사고 돌아온다. 그런데 아델모는 다음날 벼랑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베노는 이야기 끝에, 자기는 맹세코 거기까지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부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베노는 우리를 떠났다. 사부님은 한동안 욕장 뒤에서 서성거리다가 뜰로 나섰다. 생각에 잠긴 채로 뜰을 산보하던 사부님이 앙상한 관목 위로 허리를 구부리면서 중얼거렸다.

'협죽도로구나. 줄기를 달이면 치질에 특효하다. 저기 있는 것은 아르크티움 라파인데, 뿌리를 삶아 그 물을 습포에 적셔 찜질하면 습진에 탁효가 있지.'

'사부님께서는, 본초학자 세베리노 수도사보다 본초에 더 박학하신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들으신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사부님의 말머리를 돌려 보려고 했다.

'아드소, 네 머리로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허나 네가 물었으니까 내 생각을 말해 주마. 베노가 한 말은 사실인 듯하다. 베렝가리오가 환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만 빼면 베노의 말은 대강 베렝가리오의 말과도 일치하고 있다. 베렝가리오와 아델모는, 우리가 진작부터 미루어 헤아리고 있었듯이 아주 못된 짓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은 모르고 있다만 베렝가리오는, 무엇인가를, 다시 말해서 아주 은밀한 것을 아델모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그것 때문에 베렝가리오의 요구에 따라 제 순결의 서원과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르고는 오로지 자기를 사면해 줄 만한 사제에게 이를 고백하히하고 벼르다가 결국 호르헤에게 달려간다. 우리가 겪어 봐서 알았다시피 호르헤는 교리에 여간 엄격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호르헤는 분명히 아델모를 몹시 나무랐을 것이다. 호르헤는 어쩌면, 사면을 거부했거나, 참회로는 닦을 수 없는 죄악아리고 아델모를 몰아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것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고, 금후로도 호르헤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것 가지도 않다. 확실한 것은 아델모가 교회로 들어가 제단 앞에 오체투지하고 참회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델모는 이러써는 양심의 짐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때 베난티오가 아델모에게 다가간다. 이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도 우리로서는 알 길 없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로부터 선물로 받은, 혹은 반대급부로 얻은, 지금으로서는 정체가 불명한 비밀을 베난티오에게 들려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도 알다시피, 아델모는 사제로서는 저질러서는 안 될 죄를 지었다. 아델모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비밀이 어디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아델모에게, 베렝가리오로부터 얻은 비밀은 더 이상 의미 있는 것이 못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시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만, 베난티오는 베노처럼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던 나머지 비밀을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아델모를 교회에 둔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홀로 교회에 남은 아델모는 세상으로부터, 모든 사제들로부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가갛고는 자살을 결심, 절망에 사로잡힌 채 묘지로 나왔는지도 모른다. 만일에, 묘지에서 아델모를 만났다는 베렝가리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렝가리오는 바로 이런 상태에 빠진 아델모를 만났을 것이다. 아델모는 베렝가리오를 욕하고, 자기가 그렇게 된 책임을 베렝가리오에게 돌리는 한편, 반어법으로 그를 스승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베렝가리오의 이야기는, 환상 어쩌고 하는 부분만 빼면 대체로 정확한 것 같다. 아델모는, 호르헤로부터 들었던 절망적인 이야기를 거기에서 되풀이한다. 여기에서 베렝가리오는 겁을 먹은 나머지 묘지를 떠나고 아델모는 자살을 결행하기 위해 반대쪽으로 간다. 이어서 우리가 알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아델모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베난디오는, 장서관의 비밀이 자기가 믿어 오던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고는 혼자서 이 비밀을 캐어 내고자 한다. 베난티오의 이러한 행위는 누군가의 손에 저지당할 때까지 계속된다. 다시 말해서 이 누군가에 해당하는 자는, 베난티오가 무엇인가를 손에 넣은 뒤에 저지했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저지했을 수도 있다. 저지... 이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누가 베난티오를 죽였습니까? 베렝가리오입니까?'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말라키아의 짓인지도 모르겠고... 본관을 지켜야 했던 말라키아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일 수도 있다. 내가 베렝가리오에게 혐의를 두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베렝가리오는, 자기가 관련되어 있는 비밀이 드러날까봐 몹시 겁을 먹고 있었는데다, 그 비밀이 이미 베난티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라키아아게도 혐의가 있다. 장서관 신성불가침의 파수꾼인 말라키아는, 누군가가 이 원칙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경우 죽임을 통하여 비밀을 지키는 것도 불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르헤는, 우리의 추리에 등장하는 모든 수도사들의 비밀을 두루 알고 있다. 아델모의 비밀까지 알고 있는 호르헤는, 베난티오가 입수하게 된 비밀이 내 귀에 들어오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호르헤를 가리키고 있다. 장님인 그가 어떻게 사람을, 그것도 장골인 젊은이를 죽일 수 있겠느냐? 죽였다 치더라도 무릎이 귀를 넘는 노인이 어떻게 이 시체를 메고 가서 항하리에 처박을 수 있겠느냐? 글쎄다. 마지막으로, 베노에게는 혐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까닭일까? 베노는 고백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내 머리를 맴도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우리는 웃음에 대한 논쟁과 관련된 사람에게만 혐의를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범죄의 동기는 어쩌면 장서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혀 엉뚱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다. 무엇이냐? 우리는 야밤에 장서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자면 등잔이 필요하다. 등잔은 네가 구하거라. 저녁때 주방에 들어가거든 벽에 걸린 놈으로 하나 챙겨 법의 속에 숨겨 두어라.

'훔치라는 말씀이신지요?'

'주님의 영광에 의지해서 잠시 빌어 놓으라는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문서 사자실로 들어가는 게 우선 문제다. 어젯밤 말라키아가 나오는 걸 눈여겨보았느냐? 내 오늘 교회로 들어가 보겠다. 한 시간 뒤면 저녁 식사 시간이다. 식사가 끝나면 원장을 만난다. 너도 나를 따라가게 될 게다. 내 진작, 나와 원장이 이야기를 나눌 경우에는 받아 적을 서기가 하나 있어야겠다고 해두었으니까.'

이 말끝에 사부님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9시과

우리는 교회 제단 앞에 있는 수도원장을 발견했다. 그는 은밀한 곳에서 내어온 제기, 성배, 접시, 성체 안치기, 그리고 십자가 같은 보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거의가 수련사들의 공예품으로 상당히 값진 것으로 보였다. 오전 성무에는 나온 적이 없던 듯한 성물들이었다.

나는 이들 성물을 보는 순간 어찌나 아름답던지 한숨을 숨길 수 없엇다. 정오여서 빛줄기는 교회 창을 통해 푸짐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창뿐만 아니라 교회 정면에서도 빛이 쏟아져 들어와, 하느님을 상징하는, 신비스러운 물결 같은 하얀 빛의 분류를 이루어 제단을 적시고는 교회 안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병과 접시... 이 모든 성물의 재료는 모두 귀물이었다. 황금의 노란 색깔, 상아의 흰 빛깔, 수정의 투명한 형체 속에서 나는 갖가지 색깔... 나는 갖가지 크기의 보석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풍신자석, 자수정,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귀감람석, 줄마노, 홍옥, 벽옥, 그리고 마노 정도는 내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 성물이 오전에도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전에는 기도에 정신을 쏟고 있었는 데다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고 거기에 있는데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오전 성무 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은 성물뿐만이 아니었다. 제단의 전면과 제단의 세 측면은 완전히 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단 전체가, 어느 방향에서 보건 모두 금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혀를 내두르면서 한숨을 거푸 쉬자 수도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사부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보고 계신 성물과 앞으로 보시게 될 성보는 수 세기 동안의 신앙과 헌신을 증언하는 귀한 유산이며 본 수도원이 떨치는 권능과 성성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왕후 장상들, 세계의 주교와 대주교들이 이 제단과 그들의 서임을 증거할 성물을 기증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네들 귄위의 징표인 황금과 귀물을 녹여, 보다 크신 하느님 영광과 하느님 처소인 이 성전에다 바친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본 수도원은 유감 천만인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어려움을 맞고 있기는 하나, 우리는 잠시도 우리 인간의 허약함과 전지전능하신 분의 힘과 능력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께서 강탄하신 날이 옵니다. 하여, 우리는 지금 이 성기와 성물을 닦고 있습니다. 그래야 구세주의 강탄이 화려한 집기와 장엄한 예식으로 빛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려한 집기와 장어한 예식은 이 강탄일에 합당한 것이고, 또 이 강탄일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물은 성장한 모습으로 강탄일을 맞아야 합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며...'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는데, 나는 뒷날에 가서야 왜 그가 자기 행동을 그렇게 장황하고 화려하게 변명했는지를 이해했다.

'... 우리는 이 강탄의 예식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따라서 감출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하느님의 영광과 자비를 널리 보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정중하게 응수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원장 어른께서 주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귀 수도원은 최고의 칭송에 값하는 큰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선지자들의 명에 따라 믿음이 독실한 사람들이 솔로몬 성전의 양이나 송아지나 어린 암소의 피를 받을 황금 항아리와 황금 병과 황금 절구를 바친 관례를 아시겠지요. 따라서 황금 병이나 보석이 창조된 데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귀물은, 그리스도의 피를 받는 데 쓰이는 등, 귀한 일에만 쓰여야 할 것입니다. 거듭 창조될 때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성전의 거룹이나 스랍이 될 것이라면, 그런 귀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 또한 더없이 귀중할 것입니다.'

'아멘.'

'많은 사람들은 언필칭, 믿음이 돈독한 마음, 청결한 신앙, 믿음으로 인도받는다는 의지만 있으면 성무는 그것으로 넉넉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합니다. ,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부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쳐야 할 터입니다. 허나 나는 하느님을 경외하되, 성물을 통한 외적인 모양새를 통해서도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하여 구세주를 예배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고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구세주께서는 무엇 하나 유예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베푸시되, 아낌없이 베푸시기도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귀 문중에서 나오신, 뛰어나신 분들의 의견일 터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위대한 수도원장 쉬제가 교회 장식에다 쓴 아름다운 글씨가 생각나는군요.'

'지당하신 말씀. 이 십자가를 보시지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만...'

수도원장은 십자가를 하나 집어, 더없이 밝은 얼굴, 지극한 사람이 담긴 눈으로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엇다.

'... 여기에는 아직, 제대로 박혀야 할 진주가 빠져 있습니다. 크기가 적당한 진주를 아직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드레아스가 골고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그 십자가를 장식한 것은 진주와 그리스도의 사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 위대한 기적의 <시물라크룸>에는 의당 진주가 박혀야지요. 그러나 여기 구세주의 머리 부분에 얹을 금강석은 구해 두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아름다운 금강석은 구경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이 신성한 생명 나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재질인 신성한 상아의 귀한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 이 하느님 처소의 아름다음을 두루 누리고 보니, 다채로운 보석의 마력이 나를 외부의 관심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가치 있는 명상이, 물질적인 것에서 신성한 미덕의 다양함 위에 있는 비물질적인 것으로, 나를 반성으로 이끕니다. 이제는 더 이상 대지의 진창에만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천상적인 순수에서 완전히 놓여나지도 않은, 말하자면 참으로 신묘한 우주의 한 영역을 발견했다고나 할까요? 하느님 은덕으로, 나 자신이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이 하계에서 천계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올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회중석으로 얼굴을 돌렸다. 천장에서 쏟아져 내린 빛줄기가 그를 비추었다. 그의 모습은 낮별인 태양의 자비 앞에 완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다시 열정을 느꼈던지, 십자가 모양으로 어긋나게 놓아두고 있던 두 손을 거두어 잡았다.

'보이는 것이든 아니 보이는 것이든, 모든 피조물은 빛이 아버지에 의해 존재로 형상화한 빛입니다. 이 상아, 이 마노뿐만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돌은 빛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들 자신의 비례 규칙에 따라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다른 종과 속과는 그 종과 속이 다르다, 그것들은 자신의 수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은 그 질서 안에서 참되다, 이것은 그 무게에 따라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낸다... 이렇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밀이 내 앞에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나는 이 귀한 물건의 속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내가 결과의 장대함을 통해서 그 충만함에서 접근할 수 없는 사태의 장대함을 파악해야 한다면, 그리고 분변과 버러지가 그것을 내게 일러줄 수 있다면 황금이나 금강석 같은 귀한 결과로 하느님의 우연은 얼마나 쉽게 이 도리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러한 돌을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노라면 내 영혼은 기쁨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고는 합니다. 지상의 허무 혹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통해서가 아니고 귀한 것에 대한 순수한 사랑, 신이 불러일으킨 것을 통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이야말로 신학에서도 가장 감미로운 부분이 아닐는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더할 나위없이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그가 수사법에서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음흉한 어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수법을 쓸 때는 어법을 예감하게 하고, 논리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윌리엄 수도사는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기의 연설에 취한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의도를 뚫어 읽지 못하고 여전히 수도원 재물에 대한 법열에 들뜬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 신학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자 하느님께서 현현하시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

윌리엄 수도사는 점잖게 마른기침을 했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어 할 때마다 나오는 사부님의 버릇이었다. 사부님은 화제를 돌리되, 대화의 상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데 능했다. , 화제를 돌리고 싶을 때마다,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기가 몹시 힘들다는 듯이 마른기침을 연거푸 해대면서 서론을 길게 늘여 진행 중인 대화의 김을 빼버리고는 했다.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부님의 마른기침이 잦으면 잦을수록 본론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만큼 큰 것이 보통이었다.

'..., 그러니까... 이번에 있을 회담과 청빈 논쟁에 대해서도 오늘 이렇게 뵌 김에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만...'

'청빈이라...'

수도원장은 여전히 자기 생각에 취한 채 중얼거렸다. 눈앞의 귀한 보석이 데려다 준 저 아름다운 우주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기가 몹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덧붙였다.

'..., , 해야지요.'

이로써 두 분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논재으이 내용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게 태반이었다. 나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의미를 꿰어서 헤아리려고 애썼다.

이 책 머리에서 쓴 바 있지만, 두 분의 논쟁이란 이중의 반목, 즉 황제 대 교황, 교황 대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분쟁에 관한 것이다. 황제와 교황이 대립하게 된 내력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고,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반목하게 된 까닭은, 프란체스코 회가 페루지아 총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프란체스코 회 엄격주의파의 주장(교황권을 깡그리 부정하는)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란체스코 회가 황제 편에 가담하면서 한층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복잡한 이 3파전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장들이 가세하면서 4파전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자체가 엄격주의파와의 의견 일치를 보이기 전부터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엄격주의자들을 비호하거나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유를, 나로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엄격주의파는 이 세상의 재물은 일체 부정하는데 견주어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원장들은, 덕성에서 반드시 뒤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재물에 관해서는 엄격주의파와 정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들이 재물에 뜻을 두거나 교황의 편에 서는 까닭은, 어쩌면 교황권이 강대해지면 도시나 수도원도 함께 강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베네딕트 수도회는, 천상과 지상의 직접적인 매개자, 군주에 대한 조언자를 자임하고 속세의 성직자들과 도시 상인들과의 투쟁의 와중에서 몇 세기에 걸쳐 그 권위를 고스란히 지켜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러 차례 걸쳐 들은 바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은 양치기(즉 성직자)와 수양견(즉 군대)과 양(즉 대중)으로 나뉜다. 나는 이런 견해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이 하느님의 백성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지 않고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 하느님의 백성을, 지상의 일을 관장하는 부류와 천상의 일을 관장하는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의 일에 관한 한 성직자와 세속 군주와 민중이라는 3분법이 유효하게 된다. 하면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무엇인가? 수도사는 하느님의 백성과 천상의 일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수도사는 재속하는 성직자들과 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수도사들은 재소의 양치기(성직자)들과 같지 않게 된다. 베네딕트 회의 견해에 따르면 속세의 양치기들은, 도시의 이해 문제에 끼어들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어리석고 부패한 무리에 속한다. 더구나 도시에 사는 양들은 선량하고 충직한 농민이 아니라 약삭빠르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상인 아니면 장인들이다. 베네딕트 회의 경우, 평신도에 대한 관리는 재속 성직자들에게 맡겨 버리고, 천상적인 권력의 원천인 하느님과 지상적인 권력의 원천인 황제와 직접 접촉하고 이 관계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을 수도회에 맞길 수만 있다면 문제는 없어진다. 이렇게 하자면 베네딕트 회 수도원은, 천상적인 권력을 지닌 교황권과 지상적인 권력을 지닌 황제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때문에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들의 대부분이 도시 정권(재속 성직자와 상인이 결탁한)에 대항하여 황제의 권위를 옹호하는 데 동의하는 한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염격주의파 수도사들까지 보호해 온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엄격주의파가, 막강한 세력으로 자라나는 교황권에 대항하여 황제권에다 훌륭한 공격의 구실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그들의 교리 자체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대단히 쓸모 있는 존재로 보고 그들의 피난처 노릇을 해온 것 같다는 것이다.

나의 추론에 따르면,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이, 황제가 파견한 윌리엄 수도사와 손을 잡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교황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려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이즈음, 교회의 통일을 위협하는 분쟁의 와중에서, 교황 요한으로부터 누차 아비뇽으로 소환 명령을 받은 바 있는 체제나의 미켈레도 결국은 그 소환에 응하여 출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총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단과 교황청과의 결정적인 충돌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체제나의 미켈레에게는, 한 수도회의 최고위직에 남아 있으려면 밉건 곱건 교황의 합의를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단 프랑스로 불러들인 뒤에 붙잡아 이단으로 몬 다음 이단 심판에 회부하기 위해 교황 요한이 자꾸만 프랑스에서 미켈레를 부른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우려하는 사람들은, 미켈레가 아비뇽으로 가기는 가되, 그 시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충분한 협상이 있은 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즈음 마르실리오가 한 가지 복안을 마련했다. 마르실리오의 복안에 따르면 미켈레를 교황에게 보내기는 보내되 황제 지지자들의 견해를 전하는 황권의 특사를 뽑아 미켈레에게 딸려 보내자는 복안이었다. 이 복안은, 이렇게 될 경우 미켈레의 신변을 교황 요한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켈레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는 의미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실현될 수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렇게 속이 보이는 복안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일 리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검토된 것이 교황 측 사절과 황제의 사절이 한 곳에 모여 사전에 협상하는 자리를 갖자는 복안이었다. , 협상을 통하여 양자의 실세를 서로 인정하고, 차후의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 인이 프랑스로 들어갈 경우에는 교황 측으로부터 신변 안전의 보장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이 첫 모임을 주선하기 위해 선발된 분이 바로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사였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무 일 없이 여행을 끝낼 경우 아비뇽의 교황 앞에서 황제 측 신학자의 대표로서 자기 견해를 밝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간 위험한 임무가 아니었다. 그 까닭은 오직 미켈레 한 사람만 붙잡아 족칠 마음을 먹고 있는 교황 요한이 황제 측 신학자들의 이런 생각을 사전에 알아낸다면 은밀히 이탈리아로 사람을 보내어 윌리엄 수도사의 여행을 방해함으로써 윌리엄 수도사의 아비뇽 방문을 봉쇄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수많은 베네딕트 회 수도원을 순유하면서(우리가 수많은 수도원을 돌아보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수도원의 협상 회의장 가능성을 타진한 끝에, 내가 말하고 있는 바로 이 수도원에 이른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이 수도원을 협상 회의장으로 고른 것은 수도원장이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충성하면서도 양다리 외교 수완이 대단해서 교황청으로부터도 별로 미움을 받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수도원은 위치상으로도 황제 측 신학자들과 교황 측 신학자들이 만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형편이, 겉으로 보면 황제 측 신학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교황 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교황 측에서는 교황청 사절이 일단 수도원 경내로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그 수도원장의 사법권 아래로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교황 측 사절단 중에는 주로 수도사들로 구성될 터이지만 개중에는 재속 성직자도 있을 수 있었다. 아무리 교황의 사절이라고 하더라도 재속 성직자들은 수도원장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교황 측 사절이 협상 회의장으로 쓰는 수도원 원장의 사법권에 영향을 받는다면 회담은 공정하게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이 교황 측의 견해였다. 일리가 있는 견해였다. 만일에 협상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의 원장이 황제 측을 옹호하고 나서는 경우 교황 측 사절들은 설 자리를 잃는 셈이었다. 그래서 교황 측은 수도원장의 관할권, 즉 사법권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수도원장의 사법권을 용인하지 않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 사절의 신변 경호는, 교황이 임명하는 지휘자 휘하의 프랑스 왕실 궁병대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나는 윌리엄 수도사가 보비오에서 교황 측 특사와 이 문제를 상의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의제는, 이 궁병대 임무를 어떤 범위로 한정시키는가, 즉 교황 측 사절의 경호 임무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지니는가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때 윌리엄 수도사는 아비뇽의 교황청이 제안한 조건이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 무장 궁병대와 그 지휘관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교황청 사절단 전원의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자에 대하여, 폭력 행위를 통하여 사절단의 행동이나 의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자에 대하여> 사법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러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당시 내 눈에는 이 합의 자체가, 체면을 지키기 위한 대단히 형식적인 요식 행위로 보였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터진 시점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수도원장이 초조해진 나머지 윌리엄 수도사의 옷깃을 잡고 늘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일 이 두 범죄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절단이 수도원에 도착하게 될 경우 수도원장은 자기네 수도원에, 교황 측 사절단의 의견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만한 자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터였으니 수도원장으로서는 속이 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러나 그 전날 수도원장의 속이 타는 정도는 그다음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바로 그다음 날 수도사의 주검이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기왕에 터진 사건을 미봉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다음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고, 다음 사건이 터질 경우 교황 측 사절은 사건 차제를 황제 측의 음모로 단정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해결 방안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 교황 측 사절단이 산문에 들어오기 전에 읠리엄 수도사가 범인을 찾아내는 방법(수도원장은 사부님에게 사건의 수사를 재촉하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다)과 수도원장이 사절단에게 솔직하게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협상 기간 동안 수도원 경내의 감시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두 번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위험 부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는 하지만 결국, 교황 측 사절의 신변에 아무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지레 자기 수도원의 사법권을 프랑스 궁병대에 넘기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수도사와 수도원장은 사태의 추이에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으나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절단의 도착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만큼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수도원장으로서는, 사절단이 도착할 때까지 하느님의 자비를 빌거나 윌리엄 수도사의 두뇌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 어른, 가능한 방법을 다 써 보기는 하겠습니다. 이 사건이 이번 회담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황청 사절로 뽑힌 분들이라면, 미친 자의 소행, 혹은 폭도의 소행, 혹은 마음의 길을 잃은 자의 소행과 정신이 말짱한 신학자들이 마주 앉아 의논하는 대사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쯤은 헤아릴 테지요?'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를 바라보면서 반문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것만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비뇽에서는 틀림없이 소형제파 수도사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분별없는 자들, 범죄로 손을 더럽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단자와 관계가 있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목소리를 떨어뜨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교황 측 사절들이 생각하는 소형제파 수도사에 견주면, 여기에서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은 벌건 대낮의 안개만큼이나 시시한 존재들일 테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정색을 하고 항변했다.

'당치 않은 말씀, 소형제파 수도사들은, 범죄로 손을 더럽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단자로 보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페루지아 총회가 정의하는 소형제파 수도사와 복음서의 뜻을 곡해하여 부를 적대한 나머지 청빈을 일련의 개인적인 보복과 유혈의 광기로 변질시킨 저 이단자들을 동일시하셔서는 안 됩니다.'

'윌리엄 형제께서 말씀하시는 그 무리가 베르첼리 주교관과 노바라 지방 산간을 불바다로 만든 것은 오래된 일도 아니고, 그런 피해를 입은 곳이 여기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닙니다.'

'돌치노 수도사와 <사도회> 이야기를 하시는 모양인데요...'

'<사도회>가 아니라 <가짜 사도파>라고 하셔야지요.'

수도원장의 응수가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돌치노 수도사와 <가짜 사도파>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었다. 돌치노의 이름이 나오고부터 두 분의 이야기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가짜 사도파>라고 하지요. 그러나 소형제파 수도사들은 이들과 무관합니다.'

'그러나 칼리브리아의 요아킴을 섬겼다는 뜻에서는 같습니다. 내 말이 옳게 들리지 않으시다면 우베르티노 형제에게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원장 어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베르티노가 이제 귀 교단, 귀 문중에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우베르티노 같이 대단한 인사가 베네딕트 수도회 문중에 들었으니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냐, 우베르티노를 비방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 이런 의미가 숨어 있었다.

수도원장도 웃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윌리엄 형제에게도 분명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교황의 눈 밖에 난 엄격주의파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교단이 워낙 관대하고 오지랖이 넓기 때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지금 우베르티노 한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격주의파 문중에서 우리 교단으로 들어온 형제들 중에는 그간의 행적이 분명치 못한 형제들, 우리가 앞으로 반드시 그 뒤를 한번 알아보아야 할 형제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소형제파 수도회 법의를 입은 도피자들이라면 형제로 대접하여 모두 받아들였습니다만 뒤에 알고보니 곡절이야 있었겠지만 한동안 돌치노 패거리에 몸담았던 형제들 또한 없지 않더이다.'

'하면 여기에도 있다는 것입니까?'

'여기에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나는 지금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있는 대단히 위험한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특정한 형제를 비난할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형제께서는 지금 이 수도원에서 벌어진 일을 조사하고 있으니만치 이런 것도 알아 두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내가 들은 바, 내가 유추한 바에 따르면 식료계 수도사의 분명치 못한 행적에도 미심쩍은 데가 많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지 미심쩍다는 정돕니다만,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바로 소형제 수도사들이 지하로 잠적할 당시 우리 수도원에 몸 붙였습니다.'

'식료계 수도사라고 하시면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 말씀인가요? 레미지오가 돌치노 패거리였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본 보로는 온건한 사람, 청빈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던데요? 청빈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아서 귀 수도원의 살림을 맡긴 게 아니던가요?'

'나는 이 사람을 험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이 사람 덕을 많이 보고 있고 수도원 전체가 이 사람의 수고를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내 말을 길잡이로 삼으시면 우리 교단 수도사들이, 탁발 수도사들 및 소형제파 수도사들과 어떻게 다른지, 소형제파 수도사들이 어떻게 탁발 수도사들이 되어 갔는지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어른, 지나친 말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원장 말씀은 정확하지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 돌치노 무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소형제파 수도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형제 수도회가 워낙 종류가 다양한 형제들의 집단이니까 다소 조잡하게라도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소형제파 수도사들을 폭도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소형제 수도회의 엄격주의파 무리에게, 하느님의 참사랑에 감복한 나머지 그것을 경솔하게 실천하려고 한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미묘한 점에서 오해받을 소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돌치노 무리에 견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항변에 대한 원장의 반응이 의외로 완강했다.

'아니지요. 소형제파는 이단이지요. 소형제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청빈을 실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회에다 이것을 강요하지 않았던가요? 물론 내가 그들의 이론 자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비뇽 교황청의 오만에 맞섰다는 것만은 나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소형제파 수도사들은 바로 이 이론에서 실천적인 삼단 논법을 끌어내고는 폭동과 약탈과 풍기 문란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대체 어느 소형제 수도회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소형제 수도회 분파는 대개 오십 보 백 보 아니던가요?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죄악에 물들어 있는가 하면, 혼인을 인정하고, 지옥을 부정하고, 남색을 자행하고, 불가리아 교단이나 드라고 비차 교단의 보고밀 파 이단들 신봉하고...'

'바라건대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듣자니 원장께서는 소형제 수도회, 파타리니 파, 발두스 파, 카타리 파, 불가리아의 보고밀 파, 드라고비차의 아딘자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알고 있던 모양입니다그려.'

'한통속이 아니던가요? 모두 이단이라는 뜻에서 한통속이고, 윌리엄 수도사가 이렇듯이 애써 지키고자 하는 제국의 질서, 문명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게 했다는 뜻에서도 한통속이지요. 백년도 더 된 일입니다만, 브레시아 사람 아리날도의 추종자들이 귀족과 추기경들의 집에다 불을 질렀던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그자들이 누구던가요? 파타리니 파에 속하는 롬바르디아 떨거지들이 아니던가요?'

윌리엄 수도사가, 잠시 생각과 목청을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원장, 원장께서는 세상의 사악한 풍물에서 멀리 떨어진, 이 엄장하고도 신성한 수도원에 기거하십니다. 도시의 삶은 원장께서 미루어 헤아리시는 것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허물과 죄악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도 잘 아시겠지요. 나쁜 생각, 가령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에 대해 나쁜 생각을 품는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지요. 이런 사람을 죄인이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까? 베드로의 배반을 유다의 배반에 비겨서는 아니 되지요. 베드로는 용서를 받았지만 유다는 용서를 못 받지 않았던가요? 원장, 파타리니 파와 카타리 파를 같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배반과 유다의 배반을 같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파타리니 파는 교회의 율법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손된 성직자들의 행동을 개혁하려고 한 이들이 어떻게 이단일 수 있습니까?'

'하면 성사가 부정한 성직자들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파타리니 파에 허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교리의 해석에 잘못이 있었을 뿐, 결코 하느님의 율법을 바꾸려 한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에서 브레시아 사람 아르날도의 교리를 전파하던 파타리니 파가 폭도들을 교사하여 귀족과 추기경들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은, 그러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르날도는, 로마의 관료들을 이 개혁 운동에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르날도의 제안을 거부했지요. 우리는 그 폭력 사태의 책임이 아르날도에게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만, 사실은 아르날도가 가난한 자, 버려진 자들의 지지를 얻은 것뿐, 사태의 책임 자체가 아르날도에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부패한 도시의 개혁을 부르짖는 아르날도의 호소에 폭력과 분노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도시라고 하는 것이 원래가 그 모양인 게지요.'

'도시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의 백성이 사는 곳입니다. 원장이나 나는 바로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어야 하는 목자가 아닙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도시라고 하는 곳은, 돈 많은 성직자들이 가난한 자, 배고픈 자들에게 미덕을 가르쳐야 하는 참으로 말 많은 곳입니다. 파타리니 파 사건은 이런 상황의 산물입니다. 그런 동아리가 생겨났다는 것은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일지언정 지탄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카타리 파는 다릅니다. 카타리 파는 교회의 교리밖에 있는 동방의 이단입니다. 그들이 죄악을 저지르는지, 혹은 저질렀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교를 부정하고 지옥을 부인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압니다. 글쎄요,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 그래서, 어쩌면 저지르지도 않는 수많은 죄악을 저지른 것인양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나 아닐는지요.'

'어이가 없군요. 윌리엄 형제 같은 분이, 파타리니파와 가타리파가 한통속이 아니라고 하시다니... 똑같은 악마적 현상의 두 가지, 아니,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얼굴 중의 두 얼굴이 아니라고 하시다니...'

'내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지금 교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이러한 이단적인 교파들이 무식한 민중의 계층에서, 우리는 우려합니다만,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성공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들이 무식한 사람들에게, 기왕에 살아온 것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무식한 사람들 중에는 교리를 아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내 말은 무식한 사람들일수록 파타리니파, 카타리파, 엄격주의파를 혼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원장, 무식한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들의 분별력이나 학식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가난, 그리고 무지로 인한 눌언과 더불어 삽니다. 그래서 그들 중 상당수에게는, 이단자들의 동아리에 끼는 것이, 그들의 절망을 외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직자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기경의 사저에다 불을 지를 수도 있는 겁니다. 물론 성직자가 가르치는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불을 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어 내야 하는 것은, 이 땅에 이미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저질러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목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가리아 교회와 리프란도 사제의 추종자를 구분하지 못하듯이 제국의 성직자들과 이들의 추종자들 역시 엄격주의파와 이단을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국이, 그 반목하는 세력과 싸우기 위해 대중이 지니고 있는 카타리적 성향을 자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더이까? f말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 더욱 위험한 것은, 이 세력이 위험하고 불안하고 무식하다고 해서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에 세우는 일입니다. 원장,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맹세코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착한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 청빈과 정결의 교리를 따르던 사람들이 단지 주교의 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속권에 넘겨지는 것을 무수히 본 사람입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한답시고 자유로운 도시를 위한답시고 무고한 이들에게 혼음과 수간과 파렴치한 죄악의 허물을 들씌웁니다. 내가 알리고 이러한 죄값의 임자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와 같습니다. 적대 세력과의 분쟁을 야기시킬 때 이용되고는, 이용이 끝나면 희생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원장의 눈가로 심술궂은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 하면, 돌치노 수도사와 그의 미친 조개들, 게라르도 세가렐리와 피에 굶주린 무리들은 사악한 카타리 파라는 것입니까, 고결한 소형제파라는 것입니까, 수간을 일삼는 보고밀 파라는 것입니까? 윌리엄 형제, 이단에 너무 박식해서 그런지 내 눈에는 이단자로 보아는 윌리엄 형제께서 좀 가르쳐 주시지요. 진리는 어디에 있답니까?'

'진리는, 때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 윌리엄 형제께서 이단과 참 교파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에게는 적어도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하느님 백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이단입니다. 내가 황제에게 믿음을 두는 것은 제국이 이 질서를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황을 곱지 않게 보는 것은, 교황이 상인과 결탁한 도시의 주교들 위에 군림할 줄만 알았지, 더 이상 질서를 지켜 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세기 동안 이 질서를 지켜 왔습니다. 이단에 관해, 나에게 원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단 혐의를 받고 있는 베지에 시민들을 놓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속권의 질문에 시토 회의 수도원장 아르노 아말리끄가 했던 대답이 그것입니다. , <죽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신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눈길을 떨어뜨리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스스로 그 침묵을 깨뜨렸다.

'베지에 시를 함락시킬 당시 우리 군대는 귀천도, 남녀도, 나이도 가리지 않고 2만 명을 베어 죽였지요. 학살을 끝내고 도시를 유린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다시 거기에 불을 질렀지요.'

'성전은 결코 전쟁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성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내가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지금 이탈리아를 그렇게 불바다로 만들고 싶어 하는 루드비히 황제의 권리를 지키려고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상한 동맹군의 동아리가 된 셈이군요. 엄격주의파 제국의 이상한 동맹, 제국과 제 백성의 주권을 찾아 주려는 마르실리오와의 이상한 동맹... 그리고 이상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원장과 나와의 이상한 동맹... 허나 우리는 두 가지 임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회담을 성공시키고 살인범을 뒤져내는 것이 그것입니다. 평화롭게 나아갑시다.'

수도원장도 손을 내밀었다.

'윌리엄 형제, 나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윌리엄 형제같이 학식 있는 분과 함께하면 끝없이 신학과 도덕을 의논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학자들처럼 남을 비방하는 것을 재미로 삼는 짓은 절대로 맙시다. 윌리엄 형제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앞에는 대사가 기다리는 만큼 마땅히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과 조금 전에 내가 언급한 여러 교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교단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우리가 아비뇽 측의 의혹을 일소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장께서, 나의 조사에 도움을 주신 것으로 이해해도 좋은 것이군요? 저간의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수도사들의 이단 이력을 들추는 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할 거라는 말씀이겠군요?'

수도원장은 말없이 윌리엄 수도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텅 빈 표정이었다.

'이 슬픈 사건의 조사관은 바로 윌리엄 형제입니다.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의심하는 것은 윌리엄 형제의 권리입니다. 여기에 있는 나는 일개 사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 문중의 어떤 수도사에게 혐의가 갈 수 있다면 이 건강하지 못한 나무는 자르시되 뿌리까지 잘라 주시기를 바립니다. 내가 아는 것은 형제도 아십니다. 바라건대 내가 모르는 것은 형제께서 지혜로 밝히 보여 주십시오.'

그는 이 말끝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회를 떠났다.

윌리엄 수도사가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어렵게 꼬이는구나. 우리는 원고를 쫓았다. 호기심이 지나친 수도사에게 관심이 가더니, 그다음에는 욕심이 지나친 수도사에게 관심이 가고... 이제 별별 이야기라 다 나오니 갈수록 태산 아니냐? 뿐이냐? 식료계 수도사도 등장하고... 저 괴물 단지 같은 살바토레는, 식료계 수도사와 함께 이 산으로 올라왔다지? 아니다, 아니다, 우선을 좀 쉬도록 하자. 밤에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사부님, 아직도 장서관에 들어가시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첫 번째 단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포기라니, 당치 않는 말이다. 단서에 첫 번째, 두 번째가 있을 수 있느냐, 원장이 식료계 수도사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잠시 헷갈렸던 것뿐이다.'

그는 순례자 요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조금 전에 한 말을 계속하듯이 중얼거렸다.

'정리해 볼거나? 수도원장은, 젊은 수도사들 사이에서 건강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나에게 아델모의 죽음에 관한 진상 조사를 의뢰했다... 헌대, 베난티오의 죽음이 또 하나의 문제를 던진다. 수도원장은, 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장서관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사코 장서관만은 조사의 대상으로 삼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서 원장은 내 관심을 본관 장서관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 이야기를 한 것일 게다.'

'하지만 원장님께는 장서관 조사를 바라시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듣고도 모르느냐? 처음부터 원장은 장서관을 신성불가침이라고 하지 않더냐? 이유가 있을 테지. 아델모의 죽음은 모르겠다만 적어도 베난티오의 죽음에는 원장 자신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이야기가 확대되면 자기가 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원장은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일까... 적어도 내 손에 의해 밝혀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 장서관이, 하느님께서 버리신 곳, 하느님께서도 편하시지 못할 곳이라는 말씀이신지요?'

맥이 빠지는 기분에서 내가 여쭈었다.

'하느님 거하시기에 편할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

윌리엄 수도사가 그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반문했다.

사부님이 숙사로 드신 뒤 나도 자리에 누웠지만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로 내보내신 선친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배우기에 벅찬 것들이 너무 많은 세계가 싫었다.

<가련한 이 몸을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잠들기 직전에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만과 이후

나는 저녁 식사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개운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 비몽사몽 간을 헤맸던 모양이었다. 옳거니... 자면 잘수록 더 자고 싶을 터이니... 그래서 낮잠을 육욕의 죄악이라고 하였겠거니.

사부님은 방에 계시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일어나셨던 모양이었다. 잠깐 찾은 뒤, 본관에서 나오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사부님은, 문서 사자실에서 장서 목록을 열람하고, 수도사들이 공부하는 양을 지켜보면서 베난티오의 서안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 보았으나 수도사들이 갖가지 구실을 달고 다가와 성가시게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처음에는 말라키아가 와서 귀중한 채식 견본을 보여 주겠노라고 했고, 다음에는 베노가 와서 갖가지 구실을 달아 사부님의 주의를 흐트렸으며, 겨우 자리를 조사를 시작할 무렵에는 베렝가리오가 다가와 일을 돕겠다면서 앞을 알랑거렸다는 것이었다.

사부님이 수도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베난티오의 자료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려 하자 이번에는 말라키아가 다시 다가와서는 노골적으로, 죽은 수도사의 유품을 조사하려면 수도원장의 인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서관 사서인 자신도, 사자에 대한 예의와 수도원의 규칙 때문에 유품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노라면서, 사부님이 원한다면, 수도원장의 인가가 있기까지는 어떤 수도사의 접근도 막겠노라고 호언했다. 사부님 같은 분이 말라키아와 같은 조무래기와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을 낭비했을 리 없다. 그러나 사부님에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서관과 관련된 수도사들이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사부님에게는 소득이었다. 결국 수도사들은 그런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부님에게, 베난티오의 죽음이 장서관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 셈이었다. 사부님은 이런 말로, 장서관 이야기를 끝마쳤다.

'글세, 방법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만 녀석들이 괘씸해서라도 오늘 밤에는 기필코 거기에 들어가 보아야겠다고 작심했다. 녀석들의 태도에서 구린내가 났어. 진리 어쩌고 하지만 이건 진리와는 상관없다는 냄새를 맡았다. 녀석들에 대한 나의 앙갚음이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찬 공기로 머리를 맑게 할 겸 회랑 안을 좀 걸었다. 몇몇 수도사들은 그때까지도 명상에 잠긴 채 회랑 안을 걷고 있었다. 회랑으로 열린 뜰에서 우리는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를 발견했다. 연로해서 근력이 많이 떨어진 그는 교회에서 기도하지 않을 때면 늘 나무 사이를 거닐다가 뜰에서 묵상하고는 했다. 그 날씨에 바깥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연로해도 별로 추위는 타지 않는 모양이었다.

'참 평화로운 날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인사를 건네자 노인은 시간을 함께 보내줄 사람을 만난 것을 몹시 반가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다 하느님 은혜를 입었음이지요.'

노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늘이야 하느님 은혜로 평화로운 터입니다만 사람의 일은 그렇지 못하니 답답합니다. 혹시 베난티오를 가까이 아셨습니까?'

'베난티오가 누구더라...'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제서야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오라, 죽은 친구 말씀이시군. 이 수도원 안을 나다닐 때는 조심할 일이오. 별별 괴물이 다 발치에 거치적거리니까.'

'무슨 괴물 말씀이신지요?'

'바다에서 나온 괴물이지 뭐... 대가리가 일곱 개, 뿔이 열 개, 그리고 뿔 위에는 열 개의 볏이 있고, 머리에는 세 개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닮기는 표범을 닮았고, 발은 곰 발이요, 입은 사자 입이랍니다. 나도 본 적이 있어.'

'어디에서 보셨습니까? 장서관에서 보셨습니까?'

'장서관이라니! 왜 거기에서 봅니까? 문서 사자실에 들어가 본 지가 몇 년은 좋이 되었어. 장서관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고... 장서관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요. 내가 장서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말라키아 아니면 베렝가리오겠지요.'

노인은 어린아이같이 웃으면서 응수했다.

'아니오. 말라키아가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사서를 말하는 거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지.'

'그때의 사서는 누구였는데요?'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말라키아가 아주 젊던 시절에 죽었거든... 나는 말라키아의 은사의 은사 사서도 알아요. 나도 소시적에는 사서 조수였답니다. 하지만... 나는 장서관에는 발을 안 들여놓았어요. 그 미궁에 들어갔다가 어쩌게?'

'장서관이 미궁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이 미궁은 이 세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들어가는 자에게는 넓지만 나오려는 자에게는 한없이 좁답니다...> 장서관은 거대한 미궁이며, 세계라고 하는 미궁의 기호지.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오는 건 장담 못 해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범하는 것이 아닌 법.'

'그렇다면, 본관 문이 잠기면 장서관으로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말씀이시군요.'

'... 하지만, 납골당을 통해서 들어가는 수가 있기는 있어요. 아는 사람이 많을걸. 그러나 납골당은 지나고 싶지 않을걸. 죽은 수도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죽은 수도사들이 지키다니요? 밤에 등잔을 들고 장서관을 서성거린다는 분들이 바로 세상을 떠난 수도사들입니까?'

노인은 약간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등잔을 들어?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인 걸. 죽은 수도사들은 장서관에 있는 게 아니라 납골당에 있어요. 묘지에 뼈만 수습해서 거기에다 모셔 놓은 거지. 이 뼈가 길을 지켜요. 교회 부속실에서 납골당으로 통하는 문, 못 보셨구나.'

'수랑을 지나 왼쪽으로 세 번째 문 말씀이신가요?'

'세 번째? 그럴게요. 그 부속실 계단은 수천 개의 뼈로 만들어진 거요. 오른쪽 네 번째 해골... 그 해골의 눈을 누르면 납골당으로 들어가게 되지. 하지만 가지 마오. 나도 가보지 않았어. 원장이 안 좋아하거든.'

'괴물은요? 어디에서 괴물을 보셨습니까?'

'괴물? , 가짜 그리스도 말이군... 앞으로 올 테지. 천년이 지났으니까. 우리 모두 가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지.'

'그렇지만 그 천 년은 벌써 3백 년 전에 지나갔어요. 그래도 안 왔잖습니까?'

'가짜 그리스도는 딱 천년 만에 오는 게 아니에요. 천 년이 지났다면 다음 천년기가 시작될 테지요. 가짜 그리스도는 그때 와요. 의인을 핍박하러 오지요. 마지막 싸움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의인이 천 년을 다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첫 번째 천년기가 끝나기까지 다스린다든가. 가짜 그리스도는 그때 오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직 의인이 다스린 적이 없으니 가짜 그리스도가 올 때도 아직은 요원한 것이지요.'

'천년기는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계산하는 게 아니에요. 그로부터 3세기 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눈을 떴을 때부터 계산하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이 바로 천 년이 된 때야.'

'그럼 의인의 통치가 끝난 것입니까?'

'나는 몰라... 더 이상은 피곤해서 말 못 하겠어. 계산하자면 힘이 들어요. 리에바나 사람 베아토가 계산을 해냈지. 호르헤에게 물어봐요. 호르헤는 아직 젊으니까 기억력이 좋을 게야... 하지만 때가 익었어. 당신 귀에는 일곱 개의 나팔 울리는 소리라 안 들렸어?'

'왜 하필이면 일곱 개립니까?'

'또 한 녀석... 채식하던 녀석이 죽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 첫 천사가 나팔을 불었어. 우박과 불덩어리가 떨어져 피와 범벅이 되었지. 두 번째 천사가 두 번째 나팔을 부니까, 바다의 3분의 1이 피로 변했어. 두 번째 시체는 핏속에 처박혀 있었다면서? 세 번째 나팔소리가 또 들릴 게야. 그러면 바다에 사는 것은 3분의 1이 죽겠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게야. 수도원 땅은 이단자들 손으로 들어갈 게고. 듣자 하니 로마에 사술을 부리는 고약한 교황이 있어서 이단자를 잡아 제 애완용 곰치에게 먹인다며? 이 동네에서는 누군가가 금기를 어기고 미궁의 봉인을 떼었어.'

'어디에서 들으셨습니까?'

'다 들었지. 수도원에 악마가 들었다고 다들 수군거리고 있어. 자네, 젊은이, 병아리콩 가진 거 있어?'

나에게 한 질문이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고 있다가 얼떨결에, <병아리콩은 하나도 없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다음에 올 때 좀 가져다줘. 입에다 넣고 우물거리게. 내 이빨 봐. 하나도 없지. 입에 놓고 오래 있으면 병아리콩이 부드러워지면서 침이 생기지. 침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이야. 내일 좀 가져다주겠니?'

', 내일 병아리콩을 좀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고 보니 노인은 벌써 졸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떠나 식당 쪽으로 걸었다.

 

종과

저녁 식사는 무미건조하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베난티오의 식사가 발견되고 나서 열두 시간 만에 있었던 식사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비어 있는 베난티오의 자리에 흘끔흘끔 시선을 던지고는 했다. 종과 시간이 되어 교회로 들어가는 수도사들의 행렬은 흡사 장례 행렬 같았다. 우리는 회중석에 서서 성무 시간 내내 제3 부속실 쪽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교회 안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래서, 말라키아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자기 자리로 왔는데도 정확하게 어디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슬금슬금 그림자 속으로 자리를 옮겨 회중석을 벗어났다. 성무가 끝났을 때, 우리가 회중석을 벗어나 있는 것은 본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내 법의 자락 안에는 저녁 식사 시간에 주방에서 잠시 빌어 놓은 등잔이 들어 있었다. 성무가 끝나면, 밤새 불이 켜져 있을 터인 삼각대 위의 청동 등잔에서 불을 옮겨 붙일 참이었다. 심지도 새것으로 갈고 기름도 듬뿍 채워 놓은 터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미리 해둔 준비였다.

나는 장차 경험할 모험에 긴장하고 있었던 터여서 성무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무는 얼떨결에 끝나 주어서 좋았다. 성무가 끝나자 수도사들은 얼굴 위로 두건을 내려쓰고는 교회에서 나가 각자의 독방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삼각대 위의 등잔만이 홀로 교회 안의 적막을 비추었다.

'시작하자꾸나.'

윌리엄 수도사가 속삭였다.

우리는 제3 부속실로 들어갔다. 제단의 바닥은, 아닌 게 아니라, 그대로가 온통 하나의 납골당이었다. 제단 자체가, 동공이 움푹움푹 패인 수많은 해골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았다면 섬뜩했을 터였지만 그렇게 쌓여 있고 보니 오히려 이상하게 미더워 보이기도 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알리나르도 노인은, 오른쪽에서 네 번째 해골의 눈을 누르라고 했지...>하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끔하게 육탈된 해골의 눈에다 손가락을 넣고 누르자 귀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이상한 소리와 함께 제단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빙그르르 돌자 눈앞에 시커먼 공동이 나타났다. 등잔을 내밀자 축축한 계단이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는, 은밀한 장치를 통해서 열린 문을 닫아야 할지, 열어 두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대로 열어 두기로 마음을 정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닫아 버리면, 우리로서는 여는 방법을 모르니까 안에서는 열 수 없지 않느냐... 어차피 누가 들어온다고 해도 여닫는 방법을 아는 자일 터이니, 우리가 열어 놓든 닫아 놓든 그자에게는 아무 장애 거리가 될 수 없지 않겠느냐... 윌리엄 수도사의 표정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남은 단이 좋이 되는 계단을 따라 내렸다. 곧 복도가 나왔다. 복도 옆으로는 벽감이 총총 뚫려 있었다. 훗날 내가 보았던 전형적인 지하 납골당의 모양 그대로였다. 그러나 당시의 납골당은, 나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몹시 무서웠다. 거기에 수습되어있는, 수 세기에 걸쳐 육탈이 끝난 수도사들의 유골은 각기 원래 모양대로 재구성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북수북이 쌓여 있었다. 벽감 중에는 안에 가느다란 사지 뼈만 들어 있는 곳도 있었고, 두골만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두골은, 피라미드 꼴로 쌓여 있어서 웬만한 외부의 충격에는 흘러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쌓여 있는 유골을, 등잔 불빛, 그것도 우리가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끊임없이 일렁거리는 등잔 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참으로 끔찍했다. 두골이 쌓인 벽감을 차례로 지나자, 손뼈, 손가락뼈만 쌓인 벽감이 나타났다. 등잔 불빛에 드러난, 이 사자들의 납골당에서, 머리 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듯한 발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새앙쥐일 것이야.'

윌리엄 수도사가 지긋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위로라도 하듯이 속삭였다.

'여기에 쥐가 있을 턱이 있습니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처럼 이렇게 지나가는 과객일 테지. 납골당은 본관으로 통하는데, 이 지하 통로의 끝이 곧 주방일 것이다. 장서관의 서책도 생쥐에게는 좋은 심심풀이가 될 수 있을 게다. 말라키아가 왜 항상 돌 씹은 얼굴을 하고 교회에 나타나는지 알겠느냐? 하루에 두 차례씩 이 통로를 지날 테니 무리도 아닐 것이다. 웃음이 나올 턱이 없지.'

'그런데 사부님, 어째서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웃으셨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결국 호르헤 노수도사님의 말씀이 옳은 것인지요?'

나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엉뚱하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웃으셨다거니, 안 웃으셨다거니, 수많은 학자들이 찧고 까불어 댄다만, 백가쟁명일 것이야. 내게는 관심이 없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으니까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느라고 아마 안 웃으셨을 게야. 하지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리 있는 곳 일이나 생각하도록 하자꾸나.'

다행히도 복도가 끝나고 또 하나의 계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쇠 손잡이가 달린 문이 하나 나타났다. 위치를 곰곰이 따져 보니, 문서 사자실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 바로 아래, 그러니까 주방의 화덕 바로 뒤였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들려 왔다.

사부님과 나는 숨을 죽이고, 비슷한 소리가 다시 들려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 앞질러 이곳에 왔을 수도 있습니까?'

'본관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이것뿐인 줄 알고 있구나.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몇 세기 전에는, 이 건물이 요새로 쓰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르는 비밀 통로는 또 있을 것이야. 천천히 오르자.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진퇴유곡 아니냐? 등불을 꺼버리면 우리가 앞을 못 볼 테고, 그대로 켜두자니, 먼저 오신, 머리 위의 손님의 표적이 될 것이고... 우리 머리 위에 정말 누가 있기는 있되, 우리를 보고 겁을 먹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우리는 남쪽 탑루를 통해 문서 사자실로 들어갔다. 베난티오의 서안은 방 저쪽에 있었다. 방이 워낙 넓어 등잔 불빛은 방의 일부분밖에는 비추어 내지 못했다. 우리는 수도원 경내를 어슬렁거릴 터인 사람들이, 창에 비치는 우리 등잔의 불빛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서안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서안 밑을 들여다보다가는 혀를 찼다.

'무엇이 없어졌습니까?'

'오늘 나는 여기에 서책이 두 권 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 한 권은 그리스어로 씌어져 있더라. 그런데 한 권이 없어졌어. 누군가가 이걸 가져간 게야. 그것도 허겁지겁... 보아라, 서책의 한쪽이 여기 바닥에 이렇게 떨어져 있지 않으냐?'

'하지만, 수도사님들이 이 서안을 지키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를 말이냐? 하지만 누군가가 가져갔으되, 조금 전에 가져갔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것을 가져간 자는 아직 이 본관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부님은 돌아서서 어둠을 노려보면서 꾸짖었다. 그의 목소리가 기둥 사이로 메아리쳤다.

'네 이놈! 여기 있거든 몸조심하여야 할 게다!'

사부님 생각이 옳았다. 사부님께서 언제 이르신 적 있듯이 우리에게 겁을 주는 자가 있다면 우리 역시 그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사부님은 조금 전에 서안 아래서 주운 쪽지를 들고 앉아 얼굴을 갖다 대면서 등잔을 좀더 가까이 들이대라고 말했다. 나는 등잔을 갖다 대면서 그 쪽지를 보았다. 윗부분 반은 공백이었고 아랫부분 반에는, 나로서는 읽어 내기 어려운, 잔글씨가 빼곡이 씌어져 있었다.

'그리스어입니까?'

'그렇다면 판독이 쉽지 않겠구나.'

사부님은 법의 자락을 열고 예의 그 안경을 꺼내어 코에다 걸고 다시 쪽지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그리스어로구나. 필체가 좋기는 한데 급했는지 너무 날려 썼어. 그래서 안경을 써도 읽을 수가 없구나. 어두워서 그런가... 등잔, 등잔을 더 가까이 대어 보아라.'

그는 양피 쪽지에 얼굴을 들이대다시피 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불을 비추어야 할 터인데도 등잔을 그의 머리 위로 치켜들고 그의 앞에 선 꼴이 되고 말았다. 사부님은 나에게, 비켜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비켜서면서 그만 등잔의 불꽃으로 양피지 뒷면을 스치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태워 먹고 싶으냐?'

사부님이 나를 밀어내면서 꾸짖었다. 그러나 꾸짖는 것도 잠깐, 사부님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내 눈에도, 아무것도 없던 쪽지의 윗부분에, 희미한 황갈색 부호가 나타나는 게 보였다. 사부님은 내 손에서 등잔을 빼앗아 들고는 양피지 뒤를 쬐기 시작했다. 불꽃이 양피지 뒷면에 다가갔지만, 양피지를 태울 정도로 가까이 가게 한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씌어진,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이 벽 위에 나타났던 것처럼, 양피지 위에서도 이상한 부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부님이 등잔을 갖다 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부호를 바라보았다. 보호는 부적 같았을 뿐, 어디로 보나 알파벳 같지는 않았다.

'놀랍구나 놀라워, 점입가경이로구나...'

사부님은 어둠에 싸인 사방을 한차례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 어느 녀석이 이 방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그자에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

사부님은 말 끝에 안경을 벗어 서안에도 놓고는, 조심스럽게 그 양피지를 접어 법의 안에 숨겼다. 사부님은 예사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본 느낌이었다. 나는 사부님에게 설명을 여쭐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다시 들렸다. 장서관으로 통하는, 동쪽 탑루의 계단 아래에서 난 소리 같았다.

'그자가 저기 있다. 따라잡아!'

사부님이 소리쳤다. 우리는 그쪽으로 내달았다. 사부님은, 등잔을 든 나보다 달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나는 누군가가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힘을 다해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소리가 들렸던 곳에 사부님이 서 있었다. 그는 계단 아래서, 금속테로 장정한 묵직한 책 한 권을 펼쳐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귀에 누군가가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던 소리가 사실은, 그 서책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 우리가 있었던 곳, 그러니까 베난티오의 서안 쪽에서 또 인기척이 들렸다. 윌리엄 수도사가 혀를 찼다.

'아뿔싸, 내가 헛짓을 했구나! 서둘러라! 베난티오의 서안이 있던 곳으로 어서 가자!'

나는 그제서야 사부님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따돌리기 위해 일부러 그 책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이번에도 나보다 빠른 속도로 베난티오의 서안 쪽으로 달렸다.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기둥 사이로 빠져 서쪽 탑루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나는 그 순간 투사라도 된 양, 윌리엄 수도사의 손으로 등잔을 건네주고는 괴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계단 쪽으로 내달았다.

지옥의 군단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병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괴한을 붙잡아 사부님에게 넘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욕망이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내 법의 자락에 걸려 그대로 계단 위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맹세코 말하거니와, 내 평생 수도자의 사문에 든 것을 그때만큼 후회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앞에서 달아나던 자 역시 나와 같은 차림이었을 터... 게다가 그가 만일, 베난티오의 서안에서 훔친 책을 들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 입장은 나보다 불리했을 터였다.

빵 가마 뒤에서 나는 주방 쪽으로 돌진했다. 주방의 입구를 밝히는 희미한 등 불빛으로, 나는 괴한이 식당으로 들어간 다음 뒤로 문을 닫는 걸 보았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가 온몸 무게를 실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바깥문은 닫혀 있었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그때 주방 쪽에서 불빛 하나가 다가왔다. 나는 벽에다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주방과 식당 사이의 통로에 나타난, 등잔 든 사람은 바로 사부님이었다.

'아무도 없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아는 문으로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납골당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쪽으로 나갔습니다만, 어디를 통해서 나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길래 내 뭐라고 하더냐? 다른 통로가 있을 거라고 하지 않더냐? 여기에서 두리번거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쫓던 괴한은, 우리가 모르는 문을 통하여 진작 나갔을 게다. 내 안경을 훔쳐 가지고 말이다.'

'안경이라니요?'

', 괴한은 양피지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바꾸어 먹고 내 안경을 가지고 가버렸구나.'

'왜 안경을 가지고 갔겠습니까?'

'이자는 바보가 아니야. 아니, 바보이기는커녕 우리가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똑똑하다. 이자는, 내가 너에게 양피지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는 양피지를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양피지는 기왕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 안경을 가져가 버린 게다. 안경이 없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양피지를 해독하겠느냐? 이자는 어쩌면, 내가 이 양피지 해독을 남에게 의뢰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게다. 내 비록 양피 쪽지를 가지고 있으나 안경이 없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면 좋으냐...'

'사부님께 안경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런 아둔패기. 어제 유리 세공사와 안경 이야기를 한 데다, 문서 사자실에서 베난티오의 유품을 뒤적거릴 때도 그 안경을 꺼내 쓰지 않았더냐? 그랬으니, 그 물건이 내게 얼마나 요긴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안경 없이도 여느 서책은 읽을 수 있다만 아무래도 이건 어려울 것 같구나...'

사부님은 법의 속의 양피 쪽지를 가리키다가 법의 자락을 열고 그 양피지를 꺼냈다.

'... 그리스어로 씌어진 부분은 선명해서 알아먹기가 쉬우나 윗부분의 부호는 너무 흐려서 도무지 판독할 수가 없구나...'

그는 나에게, 등잔불의 열기를 받고는 흡사 기적처럼 나타난 수수께끼의 부호를 보여 주었다.

'베난티오는, 중요한 비밀을 감추고 싶었던 나머지 묘한 잉크를 사용했던 것이다. 여느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에다 쬘 경우에만 글씨가 나타나게 하는 그런 잉크가 있다. 어쩌면 구연즙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글쎄다, 베난티오가 무슨 잉크로 썼는지도 모르겠고, 여기에 나타나 있는 부호가 언제 사라져 버릴지, 그것도 모르겠구나. 너는 눈이 밝으니까, 이걸 깨끗이, 큼직큼직하게 베껴 다오.''

나는 무슨 부호인지도 모르고 사부님 시키는 대로 베껴 드렸다. 너댓줄에 이르는, 부적 같은 이상한 부호였다. 독자에게, 내가 당시에 얼마나 당혹하고 있었던지는, 다음의 첫 줄의 부호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내가 베낀 것을 내밀자 사부님은 눈을 멀찍이 뗀 채 그걸 들여다보았다.

'무슨 암호 같은데... 어떻게든 해독해 보아야겠구나. 쓴 솜씨가 시원찮았는지, 네가 베낀 솜씨가 단정치 못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게 무엇이냐... 12궁도에 쓰이는 부호인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보이지 이 첫 줄?'

그는 눈의 초점을 모으느라고 연신 눈살을 찌푸리고는 덧붙였다.

'사기타리우스(반수인좌, 즉 토성)... 태양... 메르쿠리우스(수성)... 스코르피오(전갈 좌)...'

'무슨 뜻이지요?'

'베난티오가, 약간 머리가 돌아가는 자였다면, 틀림없이 12궁도의 부호를 썼을 것이다. <A>는 태양, <B>는 목성... 그렇다면 첫줄은 이렇게 된다... RAIQASVL... 의미가 없겠어. 무의미한 글자의 나열에 지나지 않아. 따라서 베난티오는, 이 방법으로 부호를 만들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부호를 다른 방법으로 배열했을 텐데... 어디 좀 생각해 보기로 하자.'

'푸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아랍어를 조금만 알면... 암호 조립과 해독에 능한 사람들은 대개가 이교도 학자들이다. 나도 옥스퍼드에서 암호 공부를 좀 했지, 지식의 정복은 언어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야 가능하다는 베이컨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나는구나. 아부 바크르 아마드 벤 알리 벤 아시야 안 나바티는 몇 세기 전에 [고대 문자의 해독에 발심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쓴 일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군대와 군대, 왕과 그 사절 간에만 통하는 밀서의 조립 및 해독에 필요한 갖가지 암호문의 실례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암호는 나도 아랍어 서책에서 본 적이 있다. 암호문 쓰는 방법에는, 문자를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바꾸어 쓰는 방법, 한 자씩 빼어 먹고 쓰는 방법, 낱말을 거꾸로 쓰는 방법, 글월을 거꾸로 쓰는 방법이 있다. 각설하고... 이 암호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것을 글자 대신 12궁도의 부호로 쓴 것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부호가 지니는 숫자적인 의미에다 눈을 대어 보아야 할 모양이구나...우선 숫자로 보자...'

'과연 베난티오 수도사가 그런 방법으로 암호를 조립할 줄 알았을는지요?'

'그러니 이 방법 저 방법을 두루 고려해 보아야지. 허나 해독의 첫걸음은 역시 의미를 가정해 보는 것이야.'

'의미를 가정할 수 있으면 해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되잖게 사부님 앞에서 웃고 말았다.

'그렇지 않다. 첫 낱말의 해석에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이 가설이 나머지 낱말에도 유효한 것인지 검증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보기에, 베난티오는 이 암호문에다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말을 감추어 놓고 있는 것 같다. 이 세 낱말을 읽어 보되, 암호 자체는 보지 말고 암포의 숫자만 세어 보아라... IIIIIIIIIIIII. 첫 낱말은 모르겠고, 다음과 그다음 낱말을 소리내어 한번 읽어 보면 따... 따따따따, 따따따따따따따... 짚히는 게 없느냐?'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럴 테지. 내게는 생각이 났다. <세크레툼 히니스 아프리카에>...이렇게 된다. 그러나 이게 맞다면 마지막 낱말의 첫 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같아야 한다. 마지막 낱말 <Africae>를 보아라. 첫 자인 <A>와 여섯 번 째 글자인 <a>가 같지 않느냐? , 이 낱말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글자 <A>가 두 자나 들어가 있다. 그리고 첫 번째 낱말의 첫 글자 <S>는 두 번째 낱말의 마지막 글자와 같아야 한다. 보아라, 같지? 그리고 이 두 번째 낱말에는 처녀좌를 상징하는 글자가 두 번 들어가 있다. 아무래도 제대로 짚은 것 같구나. 그러나 이것 또한 단지 정합성의 연속일 수 있다. 대응법칙이 발견되어야 해.'

'어디에서 발견합니까?'

'머리로 해야지. 머리로 하되 이걸 검증해 내어야 한다. 허나, 찾아내고 검증하자면... 이걸로도 하루가 좋이 걸릴 것 같구나. 명심하여라. 끈기 있게 달라붙을 경우, 해독되지 않는 암호는 세상에 없는 법이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은 시간이 없구나. 우선은 장서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게는 안경이 없고, 네 눈으로는 이게 해독될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저는 그리스어를 몰라서... 장님 단청 구결하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베이컨 사부님 말씀이 옳지. 공부할 일이다! 허나 의기소침해 할 것은 없다. 우선 이 양피지와 네 필사지를 집어넣고 장서관으로 올라가 보자. 오늘 밤에는, 지옥의 군단 열 개가 앞을 막고 나선 데도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야.'

'조금 전의 그 괴한은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베노 수도사였을 것 같습니까?'

'베노는, 베난티오의 유품이 보고 싶어서 눈에서 손이 하나 튀어나올 지경일 게다. 그러나 이자에게, 야밤에 본관에 숨어들 용기까지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 베렝가리오 수도사, 아니면 혹 말라키아 수도사는 아닐는지요?'

'베렝가리오라면 그럴 만한 용기는 있을 테지. 게다가 베렝가리오는 장서관의 비밀을 지킬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는 참이어서 지금쯤, 그 비밀의 일부가 누설된 걸 알면 땅을 칠 터이기도 하고... 베렝가리오는, 베난티오가 그 서책을 가져 갔다고 생각하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서관 업무를 보고 있기는 하나 사서 조수 신분이어서 위층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 책을 어디에 감추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동기라면, 말라키아 수도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고 달리 보아. 말라키아는, 베난티오의 서안을 뒤지고 싶다는 생각만 있으면 언제든지 뒤질 수 있다. 말라키아는, 본관 문을 잠근 뒤에도 얼마든지 문서 사자실에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진작부터 이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말라키아의 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잘 생각해 보아라. 베난티오가 장서관으로 숨어 들어가 뭔가를 훔쳐내었을 것이라는 가정, 말라키아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성립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베렝가리오와 베노도 알고 있고, 너와 나도 알고 있다. 아델모의 고백을 듣고 호르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허나, 호르헤는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베렝가리오 수도사나 베노 수도사라는 것입니까?'

'너는 어째서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나,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보았던 수도사들 중 하나라는 생각은 못 하느냐? 유리 세공사 니콜라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내 안경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 자 역시 니콜라 뿐일 터이다. 밤이면 혼자서 여기저기 어슬렁거린다는 저 괴승 살바토레는 어떠냐? 베노의 고백이 우리에게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해서 우리 혐의가 어느 한 곳으로 치우쳐 가서도 아니 될 것이다. 베노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베노 수도사는 사부님께 진실을 말씀드린 것 같았습니다.'

'그랬을 테지. 하지만 유능한 조사관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도,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에서 혐의를 두는 법이다. 너도 명시하도록 하여라.'

'조사관들께서 하는 일... 사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으시다면, 정말 할 게 못 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집어치운 것 아니냐? 어쩌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만... , 어서 장서관으로 올라가 보자.‘

 

한밤중

우리는 다시 문서 사자실로 올라갔다. 역시 금단의 방으로 이어지는 동쪽 계단을 통해서였다. 이 미궁 같은 장서관에 대해서는 노수도사 알리나르도로부터 들은 말이 있는 참이어서 나는 무서운 일을 당할 것을 각오했다.

금단의 방으로 첫발을 들여놓고 보니 놀랍게도 창이 하나도 없는, 그리 크지 않은 7면벽실이었다. 방에서 곰팡이 냄새 같은, 쾨쾨한 냄새가 났다. 당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던,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방을 이루고 있는 7면벽 중 네 벽에는 문이 있었다. 문 양 옆에는 조그만 기둥이 하나씩 서 있었다. 문은 꽤 넓었고, 기둥 위의 꾸밈새는 아치 모양이었다. 문이 없는 벽 앞에는, 서책을 가지런히 채운 커다란 궤짝이 놓여 있었다. 각 궤짝과 서가에는, 번호가 매겨진 두루마리가 각각 하나씩 들어 있었다. 서명 목록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숫자인 모양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에도 서책이 쌓여 있었다. 서책 위에는 먼지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자주 청소하는 모양이었다. 바닥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치 모양으로 꾸며진 상인방 위에는 커다란 두루마리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글씨는 고체였으나 두루마리 그림 자체는 오래된 것이 아닌 듯했다. 뒤에 다른 방에서도 이런 두루마리 그림을 보고 안 것이지만, 그림은 돌에다 꽤 깊이 새긴 것으로, 벽화를 그릴 때 화가들이 자주 쓰는 기법이 그렇듯이, 일단 음각하고 나서 그 홈에다 물감을 채운 것이었다.

문 하나를 지나자 또 하나의 방이었다. 이 방에는 창이 하나 있었는데, 창에는 유리가 있을 자리에 설화 설고 석판이 끼워져 있었다. 방의 나머지 두 면은 그저 밋밋한 벽이었고, 또 하나의 벽에는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온 것과 똑같은 통로로 통했다. 물론 통로는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통로를 지나 우리가 이른 방 역시 밋밋한 벽 두 장, 창이 있는 벽 한 장, 그리고 문이 있는 벽 한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문 역시 정면 통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두 방문의 상인방에도 처음 우리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두루마리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두루마리 그림은 같지만 거기에 새겨진 글귀는 달라서 첫 번째 방의 출입구 상인방의 글귀는 <높은 좌석 스물네 개>, 두 번째 방의 출입구 상인방 글귀는 <그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이 두 방은, 맨 처음 장서관으로 들어오면서 본 방보다 작았지만 내부의 모양은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맨 처음 장서관으로 들어오면서 본 방이 7면벽실인 데 비해 4면벽실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에는 서책도 없고 두루마리 그림도 없었다. 창 밑에는 조그만 석조 계단이 있었다. 문은 모두 세 개였다. 세 문 중 하나는 조금 전에 우리가 들어왔던 문, 또 하나는 우리가 지나왔던 7면벽실로 통하는 문, 나머지 하나는 새로운 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이 방 역시 우리가 지나 온 방과 다를 바 없었으나 두루마리에 새겨진 글귀가 달랐다. 이 방 두루마리의 글귀는, <햇빛과 대기가 어두워지다>였다. 이 방 역시 또 다른 방으로 통했는데, 또 하나의 방 상인방 두루마리에 새겨진 글귀는, 대혼란과 화재를 경고하는, <우박과 불덩어리가 떨어지다>였다. 이 방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어서 일단 들어갔다가는, 들어간 문을 통하여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창이 각각 하나씩 달려 있고, 벽이 4, 혹은 부등 4변형으로 되어 있는 방이 다섯 개 있었는데, 이 다섯 개의 방 한가운데에, 계단과 이어지되 창문이 하나도 없는 7면벽실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우리는 시방 동쪽 탑루에 와 있다. 밖에서 보면 각각의 탑은 5면형이고 각 면에 창이 하나씩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방은, 동향이기가 쉽다. 그렇다면 교회의 성가대석과 같은 방향이 아니겠느냐? 교회 제단은, 이른 아침의 햇빛이 비치게끔 정위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설화 석고석을 박은 창을 생각해 보아라. 이것은 머리가 여간 좋은 사람의 고안이 아니다. 설화 석고석이라고 하는 것은 낮 동안 햇빛을 통과시키기는 하지만 밤의 달빛은 한 줄기도 들여보내지 않는다. 말하자면 설화 석고석 창은 낮에는 창 구실을 하지만 밤이면 무용지물이 되는 게다. , 7면벽실의 나머지 문 두 개가 어디로 통하는지 한번 조사해 보자.'

그러나 사부님 말씀은 옳지 않았다. 장서관 설계자는 사부님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교활했다. 그때의 정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일단 그 탑루에서 나온 뒤에 보니 방의 순서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 중에는 문이 두 개인 방도 있었고 세 개인 방도 있었다. 창은 모두 하나였다. 본관으로 들어간다고 들어갔을 때도 본관은 나오지 않고 창이 하나뿐인 작은 방이 나왔다. 방에 놓인 궤짝과 탁자도 모두 같은 것이었는 데다 그 위에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책도 모두 똑같아 보였다. 따라서 궤짝이나 탁자나 책으로 이방 저방을 구분해 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두루마리의 글귀를 방향잡이로 삼아 각 방이 면한 방향을 알아내려고 해 보았다. 우리는 두루마리의 글귀가 <그 즈음>인 방을 지나 한동안 방황하다가 다른 방을 찾아 들어갔는데,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두루마리 글귀가 <죽은 자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난 자>가 분명할 터인데도 들어가 보니 뜻밖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였다. 게다가 두루마리의 글귀만 같았을 뿐, 우리가 맨 처음에 지난 7면벽실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두루마리의 글귀가 다른 방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본 것만 해도, 두루마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은 두 개였다. 그러나 그중 한 방의 옆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이었다.

두루마리의 글귀가 암시하는 의미도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글귀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런 글귀를 상인방에다 새긴 까닭, 그 글귀가 의미하는 바는, 논리적으로 줄거리가 잡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힌 것은, 많지는 않았지만, 그중 몇 개의 두루마리는 검은색이 아닌, 붉은색으로 채색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처음의 그 7면벽실에 당도해 있는 것이었다(이 방에만은 계단이 있어서 알아보기가 쉬웠다). 우리는 이 방의 오른쪽 문을 통해 일단 밖으로 나가 각 방을 다시 뒤져보기로 했다. 우리가 방 세 개를 지나고 보니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입구를 찾아내어 그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통로로 빠져 네 개의 방을 지나니 다시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이미 지났던 방으로 되돌아와 두 개의 출입구 중, 한 번도 지난 적이 없는 출입구를 통해 새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보니 뜻밖에도 처음에 우리가 만났던 7면벽실이었다.

'우리가 되짚어 나온 마지막 방 두루마리에는 뭐라고 씌어져 있더냐?'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흰 말 한 마리가 내 기억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흰 말>이라고 대답했다.

'좋다. 그 방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

그 방을 다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그 방에서는, 조금 전처럼 되짚어 나오는 대신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을 지났다. 그런데, 분명히 새로운 통로로 나왔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그즈음><죽은 자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난 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방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기에 이 두 방은 우리가 지나왔던 방 같았다. 우리는 이 방에서 다시 처음 보는 방, <땅의 삼분의 일이 타다>에 이르렀다. 땅의 삼분의 일이 탔다는 걸 알았을 때조차 동쪽 탑루 속에서의 우리 위치는 종내 짐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등잔을 높이 쳐들고 다음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턱에 발을 대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거대한 물체가 흡사 유령처럼 일렁거리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귀신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윌리엄 수도사가 뒤에서 나를 껴안지 않았더라면 등잔을 떨어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나를 뒤로 밀친 다음 등잔을 빼앗아 들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분 역시 주춤,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보아 그 무서운 형상에 잠시나마 놀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등잔을 앞으로 내밀어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절묘하구나, 거울이다!'

'거울이라뇨?'

'그래, 거울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거라, 이놈아! 조금 전 문서 사자실에서는 금방이라도 원수의 덜미를 잡아 무릎을 꿇릴 기세이더니, 여기에서는 제 모습에 기겁을 하고 혼비백산을 해? 거울이 네 모습을 확대시키고, 찌그러뜨려 되 쏜 것이다. 보아라.'

사부님은 내 손을 끌어 방 입구에 서 있는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나는 등잔을 높이 치켜들고, 주름이 잔뜩 잡혀 있는 유리를 비추어 보았다. 기괴하게 찌그러진 두 개의 형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일그러진 이 기괴한 형상은, 우리가 다가서고 물러서는 데 따라 커지거나 작아지고는 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짓궂은 어조로 나를 힐난했다.

'광학 논문 줄이라도 읽어 보아야겠구나. 아무래도 너는 광학이라는 것에 도통 무지한 것 같다. 그런데 광학에 관한 논문 중의 백미를 역시 아랍인들이 쓴 것이다. 알 하젠의 [시각론]이 그중의 하나인데, 알 하젠은 이 논문에서 정확한 기하학적 실례까지 들어가면서 거울의 쓰임새를 소개하고 있다. 이 양반의 주장에 따르면, 거울이라는 것은 표면을 깎는 데 따라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할 수도 있고(내 안경을 보았으니 너도 잘 알 것이다). 형상이 거꾸로 보이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흐리게 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이냐? 두 개의 형상을 한 곳에 모을 수도 있고, 두 곳에다 네 개의 형상을 모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거울을 이용해서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듯이, 난쟁이를 거인으로, 거인을 난쟁이로 보이게 하는 것쯤이야 실로 여반장일 터이다.'

'아이고, 우리 주님 마시옵소서. 그렇다면 사부님, 이곳 사람들이 장서관에서 보았다는 허깨비가 바로 이것입니까?'

'그럴 테지. 아주 영리한 자들의 짓이다...'

그는 거울에 비친, 두루마리의 글귀를 읽고는 말을 이었다.

'... <수페르 트로노스 비긴티 쿠아투오르>, <높은 좌석에 앉은 스물네 원로>라는 뜻이다. 이런 글귀라면 아까 어느 방에서도 보았다. 그러나 그 방에는 거울이 없지 않더냐? 이 방에는 거울은 있지만 창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방 자체도 7벽면실이 아니구나. 도대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아드소, 안경이 없어서 서책의 제목을 읽을 수가 없다. 어디, 내 눈이 되어 제목이나 읽어다오.'

사부님이 궤짝 앞으로 다가가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서책을 한 권 뽑았다.

'사부님, 씌어졌다기보다는..''

'무슨 소리냐? 글씨가 보이는데도 그러는구나. 뭐라고 씌어져 있느냐?'

'씌어졌다기보다는 그려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읽을 수가 없습니다. 라틴어 알파벳도 아니고, 그리스어 알파벳도 아닙니다. 조금 더 보아야 알겠지만, 꼭 벌레, 배암, 아니, 파리가 기어간 것 같습니다.'

'아랍어다. 다른 서책도 모두 그 모양이냐?'

', 몇 권은요. 라틴어로 된 것도 있기는 합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알 쿠와리즈미의 [성좌표]라는 책입니다.'

'오냐, 알 쿠와리즈미의 천문 도판이구나. 바드 사람 아델라드가 번역한 것일 게다. 희본이다. 계속 읽어 보아라.'

'이사 이븐 알리의 [안구에 대하여], 그리고 알 킨디의 [별빛에 대하여]...'

'이번에는 서안 위를 좀 보거라.'

나는 서안 위에 있는 엄청나게 큰 책, [괴물 도감]을 펼쳤다. 마침 펼쳐진 쪽에는 정교한 일각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걸작이로구나. 글씨는 씌어져 있지 않느냐?'

안경 없이는 그림밖에 볼 수 없었던지 사부님이 물었다.

'<여러 가지 괴물에 관한 책>입니다. 역시 그림이 아름답습니다만, 앞의 서책들보다는 시대가 앞선 듯합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그 책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5세기 전, 히베르니아(아일랜드의 옛 이름) 수도사가 채식한 것이구나. 일각수는 최근에 그려진 것이고... 제책한 솜씨를 보니 프랑스식이로구나.'

나는 사부님의 박학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 방을 지나 방 네 개를 두루 거쳤다. 방방에는 모두 창이 있었고 서안이나 궤짝에는, 초자연 과학 서적과 정체불명의 문자로 기록된 서책이 산적해 있었다. 이윽고 문과 통로가 다하면서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다섯 개의 방은 서로 통해 있었지만 마지막 방에는 출구가 없었다. 우리는 문과 통로를 되짚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벽의 각도로 미루어 봐서 우리는 다른 탑루의 5면벽실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운데에 마땅히 있어야 할 7면벽실이 없으니, 우리가 잘못 짚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창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창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습니까? 모든 방이 밖을 조망하게 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너는 가운데 있는 계단 통로를 잊어버리고 있구나. 우리가 본 대부분의 창은 8면벽의 계단 통로에 면해 있을 것이야. 지금이 낮이면 빛줄기로 미루어 밖에 면한 창인지 내부에 면한 창인지를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의 위치로 미루어 방의 위치도 어림하여 헤아릴 수 있을 게다. 그러나 밤이라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구나. 되돌아가자꾸나.'

우리는 거울이 있던 방으로 돌아와 세 번째 문의 문턱을 넘었다. 이 방은 우리가 가본 적이 없던 방인 듯했다. 우리 앞으로 서너 개의 방이 더 보였다. 마지막 방에서는 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 저기에 누가 있습니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름이 잡히는 바람에 내 목소리는 다행히도 고함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소리를 죽일 것 없다. 누가 거기에 있었다면 우리 등잔 불빛을 진작부터 보고 있었을 게다.'

윌리엄 수도사가 등잔을 손으로 가리면서 속삭였다. 우리는 잠시 움직임을 읽고 망설였다. 불빛은 가볍게 일렁거릴 뿐,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에 놓인 등잔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사들에게, 사자의 영혼이 이 장서관을 지키고 있다는 것 시위할 요량으로 말이다. 하지만 확인해 볼 일이다. 내 조심해서 다가가 볼 터이니 너는 여기에서 등잔을 잘 가리고 기다리거라.'

거울 앞에서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였던 게 내심 몹시 부끄러웠던 나는, 사부님 앞에서 구겨져 버린 내 명예를 되찾고 싶었다.

'아닙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제가 조심해서 가볼 터이니 사부님께서 여기에 계십시오. 저는 사부님보다 몸집도 작고 눈도 밝습니다. 별 위험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 사부님을 불러 뫼시겠습니다.'

사부님은 그러라고 했다. 나는 벽에 바싹 붙은 채로, 고양이처럼 날랜 걸음으로 세 개의 방을 가로질렀다(식품 저장실의 건락을 꺼내 먹으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숨어드는 장난꾸러기 수련사의 발걸음이 꼭 그랬다. 멜크 수도원에서 나도 하던 짓이었다). 나는 불빛이 일렁거리는 방문턱까지 다가갔다. 왠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는 그 방의 오른쪽 문설주인 기둥까지 접근하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등잔 하나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등잔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연기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들고 들어갔던 등잔과는 달리 갓이 없어서 향로 비슷해 보였다. 불꽃도 없었다. 하얀 재가 옆으로 소복하게 쌓인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가 그 안에서 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 향로 옆에는 밝게 원색 그림이 그려진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한 면에 각각 다른 색깔로 그려진 네 개의 줄을 보았다. 노랑, 주홍, 청록, 적갈색 줄이었다. 그 옆에는 보기에는 끔찍한 괴수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머리가 열 개인 거대한 용이었다. 용의 뒤로는 하늘의 별들이 따르고 있었다. 용은 꼬리를 땅에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용의 수효가 무수하게 불어나는 걸 보았다. 용의 가죽은 반짝거리는 사금파리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 사금파리가 서책에서 나와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나는 물러서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휘어지면서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내 귀에 수천 마리의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나를 위협하기보다는 유혹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어서 한 여자가 찬란한 빛줄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나타나 내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 대고는 숨결을 내뿜었다. 나는 여자를 밀쳤다. 그러나 손은 이상하게도 방 건너편에 있는 궤짝에 가 닿았다. 나는 내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하늘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눈에, 방 한가운데 선 베렝가리오가 보였다. 베렝가리오는, 증오와 정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느새 내 손은 두꺼비 발처럼 끈적끈적해진 데다 손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까지 나 있었다. 이때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입안에 신 침이 돌았다. 그래도 영원히 어둠 속으로 꺼져 가는 것 같았다. 어둠이 내 발치에서 시시각각으로 깊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모르겠다.

나는, 몇 세기가 좋이 됨직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머리를 때리는 소리와 충격에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내 뺨을 몇 대 갈기고 있었다. 향로가 있던 방이 아니었다. 내 눈에, <수고를 그치고 쉬리로다>라는 글귀가 든 두루마리가 보였다.

'정신 차려라, 이놈! 아무것도 없으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내 귀에다 입술을 댈 듯이 하고 꾸짖었다.

'있습니다... 저기에... 괴물이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혼수 상태를 헤매면서 중얼거렸다.

'이놈아, 괴물이 어디에 있느냐? 너는 탁자 위에 놓인, 아름다운 [모자라브의 묵시록]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느니라. 마침 용과 맞서는 <태양을 입을 여자>가 그려진 데가 펼쳐져 있더구나. 허나 냄새로 보건대 너는 위험한 물질의 연기를 맡은 것이 분명해서 내 너를 이리로 옮겨 왔다. 독한 것이었구나. 내 머리까지 다 지끈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러면 제가 본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마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 거기에서 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냄새를 안다. 아랍 것인데, 산노인이 자객을 떠나보내기 전에 맡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냄새였을 것이다. 환상의 수수께끼를 우리는 이것으로 설명한 바도 있다. 누군가가 밤에 여기에다 약초를 얹었을 게야. 침입자에게, 초자연적인 존재가 장서관을 지킨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꾸민 수작이기가 쉽다. 그것은 그렇고, 너는 여기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것이냐?'

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애써 가누고 내가 본 것을 되는대로 설명했다. 그러자 윌리엄 수도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허깨비의 절반은 네가 서책을 통해 본 것을 네 나름대로 튀기로 불리고 해서 만들어 낸 것이고, 절반은 네 욕망과 공포가 만들어 낸 것이다.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은 필시 마약초의 장난일 것이야. 날이 밝으면 세베리노와 의논해 보아야겠구나. 세베리노라면 속 시원하리만치 자세하게 일러 줄 게다. 그래,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것은 마약초의 장난임에 분명하다. , 유리세공사가 말하지 않더냐? 장서관 안에서 누군가가 무슨 장난을 치고 있다고... 약초, 거울... 금단의 지식이 소장된 것이 이런 얄팍한 속임수로 지켜지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구나. 지식이 우둔한 자를 밝히는 데 쓰이지를 않고 다른 지식을 은폐하는 데 쓰이고 있으니 이 아니 한심한 일이냐? 마음에 들지가 않아... 장서관 지키는 신성할 일을 사악한 자들의 머리에 맡겨 두다니. 어쨌든 끔찍한 밤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다. 너는 몸도 마음도 다 말짱하지가 못해. 시원한 물도 좀 마시고, 맑은 공기도 좀 쐬어야 한다. 창을 열려고 애써 봐야 헛일이기가 쉽다. 너무 높은 데 달려 있는 데다가, 어차피 수십 년 동안 열려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런데 아델모가 어떻게 저 높은 것까지 올라가 아래로 몸을 던졌겠느냐?'

윌리엄 수도사는 장서관을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우리는 장서관에 이르는 길은 하나, 즉 동쪽 탑루를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거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날을 밝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피를 말려 가면서 방방을 방황했다. 게다가 나는 토기까지 억누르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판단 착오에 혀를 차던 윌리엄 수도사는 내 걱정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더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고진감래... 이 방황은 우리에게, 아니면 적어도 그에게 다음날에 필요한 대단히 요긴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었다. 우리는, 일단 거기에서 나가는 데 성공하면 다음에는 관솔숯이나, 벽에다 표를 할 만한 것을 구해 가지고 장서관으로 잠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미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처음 보는 문마다, 우리가 지난 곳마다 세 개의 기호로 나누어 표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한 번 지나간 곳은 쉬 알아볼 수 있어서 두 번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게다. 어떻게 표를 하는가 하면... 한 번도 지난 적이 없는 분기점을 만날 때마다 들어가는 통로에다 기호를 그린다. 만일에 그 분기점의 출입구 어느 한쪽에, 이미 기호가 그려져 있으면, 한 번 와 본 분기점이기 때문에 입구가 되는 통로에 기호를 하나 더 그린다. 만약에 모든 분기점의 출구에 기호가 다 그려지게 되면 완전히 되돌아서서 기호가 그려진 통로만을 되짚어가야 한다. 그러나, 출구에 하나 내지는 두 개의 통로에 기호가 이미 그려진 분기점을 만나면 어느 출구로 나와야 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때 우리가 선택한 출구에는 두 개의 기호를 그린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기호가 하나뿐인 통로만 택해야 한다. 만일에 어쩔 수 없이 기호가 두 개 그려진 통로를 지나야 할 경우에는 이 통로에 기호를 세 개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해나가면 이 미궁의 분기점에는 기호가 없는 출입구가 하나도 없게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기호 없는 출입구가 하나도 없게 될 경우 세 개의 기호가 그려진 출입구를 통하면 장서관의 미궁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해 내셨습니까? 사부님께서 미로에까지 달통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달통이라고 할 것은 없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고본의 몇 구절을 왼 것뿐이다.'

'그렇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만하지는 않다. 밑져야 본전이니 해 보는 수밖에. 그리고 며칠 뒤에, 안경이 마련되는 대로 서책을 좀 조사해 볼 생각이다. 두루마리 그림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성서 구절, 혹은 서책의 분류법이 어떤 실마리가 되어 줄 것 같다.'

'안경이 마련되다니요? 어떻게 되찾으실 생각이신지요?'

'마련하겠다고 했지, 되찾는다고 했느냐? 새것을 만들게 할 생각이야. 우리 세공사에게 새것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할 참이다. 불감청이되 고소원이라고 할 게다. 유리를 갈아 내는 연모만 있으면 가능하다. 유리라면 그 사람 일터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출구를 찾으려고 방방을 헤매고 다니는데 어느 방 한가운데서 문득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뺨을 더듬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질겁하고 말았다. 흡사 유령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이 방으로 옮겨 다니는 듯, 인간의 소리도 짐승의 소리도 아닌 괴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장소가 장서관이니만치 웬만한 것은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만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사부님도 같은 일을 당하신 듯, 뺨을 문지르면서 등잔으로 사방을 비춰 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사부님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사부님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맞은편 벽, 사람의 키 높이쯤이었다. 거기에 두 개의 좁은 틈새가 있었다. 손을 거기에 갖다 대자 밖에서 불어온 것인 듯한 찬바람의 냉기가 느껴졌다. 귀를 갖다 대어 보았다. 그제서야 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임에 분명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장서관의 환기 시설 노릇을 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여름에는 공기가 쉬 혼탁해질 터이니... 습기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양피지가 마르지 않는다. 허나 이 건물을 설계한 자는 환기와 보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구나. 보아라, 환기구를 교묘한 각도로 배치해 놓으면, 한쪽 구멍으로 들어온 바람이 방을 돌고 나가면서 조금 전에 우리가 들은 요상한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장서관에 침입한 자는, 거울에 당하고, 약초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에 당하고, 이 소리에 정신이 혼비백산을 하고 말 게다. 우리만 해도 조금 전에는 귀신이 우리 얼굴에다 숨결을 내뿜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바깥 바람이 세어, 바깥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이제 이 수수께끼도 풀린 게야. 그러나 이런 수수께끼만 풀면 뭣 하나? 나가는 길을 못 찾고 있는데...'

사부님은 이런 말을 하면서 미궁 안의 방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두루마리의 글귀는 비슷비슷해서 읽어 봐야 별로 길잡이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새로운 7면벽실에 이르러 옆방을 지났지만 거기에도 출구는 없었다. 우리는 들어간 길을 되짚어 근 반시간을 헤맸지만 여전히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어떤 점에서 사부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사부님까지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침에 말라키아가 우리를 발견하기까지 거기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모험의 종말은 비할 바 없이 비참해지는 셈이었다. 천우신조, 내려가는 계단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우리 모험의 비참한 종말을 예견할 즈음이었다. 우리는 하늘에 감사하면서 의기양양 그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주방으로 내려온 우리는 벽난로를 통해 납골당 복도로 들어갔다. 맹세코 하는 말이지만, 육탈이 된 해골의 표정이 그날따라 그렇게 다정한 친구의 미소 같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교회를 지나고 교회 북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다음 묘석에 앉아 숨을 돌렸다. 시원한 밤공기는 그것만으로도 하늘이 베푼 방향이었다. 별빛이, 장서관에서 보았던 환상의 공포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장서관은 어떻게 그렇듯이 추악할 수 있습니까?'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사부님이 대답했다.

'장서관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으면 세상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게다.'

우리는 교회를 왼쪽으로 돌아 정문 앞을 지났다. 나는 교회 정문에 양각된, [묵시록]<높은 좌석 스물네 개>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회랑을 지나자 순례자 요사는 지척이었다.

요사 입구에는 뜻밖에도 수도원장이 서 있었다. 원장은 캄캄한 얼굴을 한 채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밤새 찾았습니다. 대체 어디에 계셨는지요? 방에도 안 계시고 교회에도 안 계시더군요.'

원장의 어조는 기분 나쁠 정도로 낮았다.

'이것저것 좀 뒤적거리고 다녔지요.'

말투는 여상스러웠어도 사부님의 표정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원장은 한동안 사부님의 표정을 읽고 있다가 천천히, 그러나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과 성무 직후부터 찾아다녔습니다. 베렝가리오가 제자리에 없습니다.'

'제자리에 없다니, 대체 무슨 뜻인지요?'

사부님 음성에 생기가 돌았다. 이로써 문서 사자실에서 우리가 만났던 괴한의 정체는 분명해진 셈이었다.

'베렝가리오는 종과 성무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무 시간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 있어야 할 곳에도 없었고요. 제 방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조금 있으면 조과 성무가 시작되니까 두고 봐야지요만, 조과 성무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가가 또 터진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과연 베렝가리오는 조과 성무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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