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Umberto Eco
서문
1968년 8월 16일. 나는 발레 라는 수도원장이 펴낸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 1842년 파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가 펴낸, [마비용 수도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베네딕트 회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였다. 이 책에는, 책이 편찬된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베네딕트 수도회의 역사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알려진 18세기의 석학 마비용이, 멜크 수도원에서 발견한 14세기의 수기를 충실하게 복원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대단한 학문적 발견(연대순으로 따지자면 세번째의 학문적 발견에 해당하는)은, 친구를 기다리며 불행한 도시에 머물고 있던 나는 몹시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불과 엿새 뒤에 소련군이 이 프라하를 침공해 왔다. 나는 신고 만난 끝에 오스트리아 쪽 국경선을 넘어 린츠로 갔고, 거기에서 다시 빈으로 올라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친구를 만난 다음, 함께 다뉴브강을 오르는 배를 탔다.
일종의 지적인 흥분 상태에서,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이 엄청난 이야기를 독파한 나는 실로 '단숨에', 조셉 지베르 문방구의 대학 노트 몇 권에다 이 책을 번역해 버렸다. 나에게, 펜 끝이 매끄러운 대학 노트에다 문자를 수놓아 가던 일은 참으로 즐겁고도 신명 나는 경험이었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고 있을 동안 배는 멜크에 이르렀다. 수 세기에 걸쳐 몇 차례의 보수와 복원을 거듭한 아름다운 멜크 수도원은 구불구불한 강을 내려다보면서 의연하게 서 있었다.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차렸을 테지만 나는 멜크 수도원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드소의 수기와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잘츠부르크에 이르기 전, 우리는 몬트제 호반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서 일박했는데, 이 하룻밤이 나에게는 비극적인 밤이었다. 나와 동행하던 친구가 발레 수도사의 책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가 발레 수도사의 책을 가지고 가버린 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남에 따라 경황이 없는 참에 그 책이 그만 그의 짐에 휩쓸려 들어갔을 터이다. 말하자면 그는 내 가슴에 휑하니 뚫린 구멍 하나와 한 뭉치의 번역원고를 남긴 채 책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파리에서, 나는 그 책의 족보를 샅샅이 캐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는 앞서 불어판에서 메모해 놓은 약간의 자료가 있었다. 자료 중에는 다음과 같은 참고 도서 목록도 있었다.
[고문집성], 별칭 [고문서 전집] 및 짧은 저작, 시작, 서한, 문서, 비문 모음. [게르만 여행기]가 부록으로 딸려 있음. 설명과 주석은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자이자 생 마우로 출신 신부 장 미비용에 의함(신판). [마비용 전] 및 몇 권의 소책자, 즉 위대한 추기경 보나에게 헌정한 [유교 성체와 무교 성체에 관한 논의]가 추가된다. 같은 주제에 대한, 히스파니아의 주교 엘데폰수수의 소론과 갈리아의 테오필로스 앞으로 쓴 에우세비우스의 서한 [무명의 성인 공경론], 파리, 생 미셸 교 부근에 있는 르베끄 출판사에서 1721년에 발행됨. 부록 있음(왕실의 허가를 필한 것임).
나는 생뜨 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고문 집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찾아낸 판본은 발레 수도사의 참고 도서 목록과 두 가지 점에서 달랐다. 첫째는 이 책의 발행인이 아우구스티누스 회 수도회(생 미셸 교 부근)의 몽딸랑이라는 점에서 발행인이 달랐고, 2년이나 늦다는 점에서 출판 연도가 달랐다. 뿐만 아니었다. 내가 찾아낸 판본에는 멜크의 아드소, 혹은 아드송의 원고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 발레 수도사가 필사한 이야기가 중간 분량의 텍스트로 실려 있었다. 나는 나와 절친한 사이였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에띠엔느 질송 같은, 유명한 중세학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내가 생뜨 주느비에브에서 본 [고문집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 파리 근교에 있는 라 수르스 수도원으로 달려가 친구인 아르네 라네슈테트 수도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발레 수도사라는 사람이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에서 책을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수도원에서 출판부라는 것조차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프랑스 학자들은 믿을 만한 서지학적 지식의 제공에는 별 관심이 없기로 악평이 나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때부터 내가 읽었던 그 책이 어쩌면 위조된, 유령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발레 수도사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그 책을 돌려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더구나, 그 책을 가져간 사람에게, 돌려 달라고 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내 손에 남은 것은 노트와 번역원고뿐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조차 미심쩍어 보이기 시작했다.
상당한 정신 것 피로와 견디기 어려운 운동 신경의 흥분 뒤에는, 옛날이야기에서 그러하듯이 허깨비 같은 게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상세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데도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때가 있다). 책의 내용을 훑어보면서부터는 정말 내가 그 책을 번역했던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후일 뷔꾸아 수도원의 원장이 쓴 책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씌어진 적이 없는 책에 대한 환상도 존재한다.
만일에 새로운 전기가 될 만한 그 희한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희한한 일이란, 바로 197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그 유명한 파티오 델 탕고 거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코리엔테스 거리의 소서점 서가를 뒤지다가 우연히 밀로 테메스바르라는 사람이 쓴 카스틸리아 어판 소책자 [장기 놀이에서의 거울 이용법]을 찾아내게 된 일을 말한다. 이 저자를, 나는 [묵시록의 판매인]이라는 최근작을 졸저 [묵시파와 통합파] 가운데서 서평했을 때(다른 책에 인용된 것을 다시) 인용한 적이 있다. 원서는 1934년 그루지야의 뜨빌리시에서 발행된 것이어서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내가 찾아낸 것은 그러니까 이탈리아어판이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책에 아드소의 수기로부터 인용된 대목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용문의 출처가 발레도 마비용도 아닌,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신부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인용문의 출전은 미상). 후일 어느 학자(이름은 여기에서 밝히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신부의 저작 목록을 줄줄 외면서, 이 위대한 예수회 신부가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이름을 입에 올릴 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테메스바르의 책은 분명히 내 앞에 있었고, 그가 인용한 일화는 발레 수도사가 불역한 수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궁 같은 장서관의 묘사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벤야미노 플라치도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지만, 수도원장 발레는 어디까지나 실존 인물이며, 마찬가지로 멜크의 아드소도 틀림없이 실재한 인물인 것이다.
나는 아드소의 회고담을 읽으면서, 아드소 자신이 그 사건을 체험한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저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도입부를 비롯, 수도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는 대목, 그리고 저자가 밝힐 수 없는, 베일에 가려진 수많은 사건에 관한 묘사에 이르면서 나의 확신은 더욱 굳어져 갔다. 짐작컨대 문제의 수도원 위치는 피에몬테 지방과 리구리아 지방, 그리고 프랑스 접경에 있는 아페니노 산맥 중앙부 기슭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폼포사와 꽁끄 사이가 아닌가 싶다. 이 사건이 있었던 시기는 1327년 11월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밝히고 있는 시기는 불분명하다. 1327년에 자신이 수련사였다는 것. 그리고 기억에 의지해서 이 글을 쓸 때가 죽음에 임박해서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역산하면 이 원고가 만들어진 시기는 1390년대, 혹은 1380년대로 짚어 볼 수 있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14세기 말 프랑스 수도사가 라틴어로 쓴 17세기 라틴어판의 신 고딕 불어 번역판을 다시 이탈리아어판으로 출판하려는 이유로 내세울 만한 건 별로 없다.
이것을 출판하려고 하고 보니 먼저 문체부터가 걱정거리였다. 당대의 이탈리아 문체를 따르고 싶다는 유혹은, 부당하다는 이유에서 억눌러야 했다. 아드소가 라틴어로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서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교양(혹은 그에게 영향을 미쳤음직한 수도원의 교양 수준)이 그 이전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교양 수준으로 말하자면, 중세 말의 라틴적 전통와 무관하지 않은, 수 세기에 걸친 학문과 문체상의 일대 궤변론적 총화이다. 아드소는 그 시대 속어의 혁명적인 풍조나 사고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도서관 장서의 수준에 밀착하고 있으며, 자신을 신학과 스콜라 철학 교본에 길든 수도사로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복잡한 기억에 의지해서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이 사건이, 14세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언어나 무불통지한 인용문까지 싸잡아 본다면 12세기나 13세기에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토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드소의 라틴어를 자기 모국어인 신 고딕 불어로 번역하면서 발레 수도사는 몇 가지 자유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 문체상의 자유뿐만이 아니다. 가령 작중 인물은 종종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아류의 비전을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갖가지 약초 이름을 들먹거린다. 이 비전은 수세기에 걸쳐 갖가지 판본으로 중간된 책이다. 결론적으로 아드소는 이런 책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인용하는 구절이 파라켈수스식의 처방이나 튜더 왕조 시대의 판본임에 분명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저서의 증보판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뒷날, 발레 수도사가 아드소의 필사본 수기를 베껴 쓸(?) 당시 파리에는 구제불능인 상태에 이를 정도로 엉터리인 18세기 판 [그랑 알베르], [쁘티 알베르]가 나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바 있다. 물론 이런 판본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어쨌든 아드소나 아드소가 묘사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회화에, 후대의 해설이나 난외 주석의 부록이 될 만한, 말하자면 금후의 학문을 살찌웠음직한 요소가 들어 있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랴?
발레 수도사가 아드소 시대의 분위기를 보존하고 싶었던 나머지 번역을 기피했던 구절은 라틴어인 채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번역해야 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꼭 그렇게 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원전에 대한 내 양심의 가책, 어쩌면 터무니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양심의 가책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 나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과장은 되도록이면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레 수도사의 번역상의 해석은 여기에 그대로 살려 놓고자 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프랑스인 등장인물을 소개할 때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여자는 참 어쩔 수 없는 동물이야' 따위의 대사를 맡기는 삼류 소설가 흉내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의 가슴속에는 온갖 의혹이 다 소용돌이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내어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의 필사본 수기를, 그것도 역사적 전거가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재현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애정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갖가지 끈질긴 망상에서 놓여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책을 낸다고 이해해도 좋겠다.
나는 이 원고를 만들면서 적시성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발레 수도사의 불역판을 읽은 1968년 당시에는, 작가가 이 세계를 바꿀 목적으로 글을 쓴다면 모름지기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만 매달려, 현재에 대한 복무로서만 글을 써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식자들(식자들 고유의 권리를 되찾은)은 쓴다는 작업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편안한 마음과 화자가 누리는 기쁨을 고스란히 누리면서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우리 시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확신과는 시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바로 이 깨달음이 내 꿈속에 나타나던 허깨비를 몰아내어 주었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누항의 일상 잡사가 아닌, 책에 얽힌 이야기여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저 모방의 도사 아켐피스의 다음과 같은 명언이 한숨에 섞여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1980년 1월 5일
노트
아드소의 원고는 모두 7일 동안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고, 하루하루는 전례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대로 나누어져 있다. 3인칭으로 되어 있는 부제는 발레 수도사가 붙인 것인 듯하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터이나 독자들에게 혹 지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또 이러한 형식이 당시의 문학에서는 별로 자주 씌어지지 않던 것이라는 점에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성무 공과의 기도 시간에 대한 아드소의 묘사가 필자를 당황하게 했다. 지역이나 계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모르기는 하지만 성 베네딕트가 회칙으로 내린 규정이 14세기에는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편의상 이 시간대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좋을 성싶다. 다음의 공과 시간은, 이 책의 묘사와 원래의 회칙과 에두아르 슈네데르의 저서 [베네딕트 수도회의 성무 공과 시간](파리, 그라세, 1925)을 서로 견주어 가면서 산출해 낸 것이다.
조과: 성무 일과의 시작. 새벽 2시 30분부터 3시(아드소는 고풍스러운 표현으로 경야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찬과: 오전 5시부터 6시. 날이 새기 전에 끝난다.(옛날에는 <새벽기도>, 혹은 조과로 불리기도 했다).
1시과: 7시 30분(해뜨기 직전).
3시과: 9시 전후.
6시과: 정오(수도사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는 시각. 겨울철에는 수도원의 점심시간).
9시과: 오후 2시부터 3시.
만과: 해질녘인 오후 4시 30분(회칙은, 해지기 전에 저녁 식사를 마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종과: 오후 6시 전후(수도사들은 7시 전에 잠자리에 든다).
이 계산은, 북부 이탈리아의 경우 11월에는 오전 7시 30분 전후에 해가 뜨고 오후 4시 40분 전후에 해가 지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프롤로그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이로써 하느님이 비롯되시고, 신심 깊은 수도자의 본분이 비롯되니, 수도자는 날이면 날마다 영원불멸의 진리로 화신하는 저 불멸의 성사를 겸허하게 찬미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이 볼 수 있을 뿐이다(아, 이 또한 알아보기가 얼마나 어렵더냐?). 우리는 사악한 의지에 물들어 가려 보기가 쉽지 않더라도 이제는 이 진리의 표적을 가려 볼 수 있어야 한다.
가련한 죄인의 삶이 이윽고 막바지에 이르고 보니 이제 내 머리는 백발... 바야흐로 바닥 모를 침묵의 심연과 신성이 떠난 암흑에서 미아가 될 날을 기다리는 한편 천사의 은혜인 지성의 광명에 의지하고 세상과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늙고 병든 육신을 여기 안온한 멜크 수도원의 독방에 가둔 나는 지금 소시적에 우연히 체험하게 된 저 놀랍고도 엄청난 사건의 기록을 이 양피지에다 남겨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나는 보고 들은 바를 한순간 한순간,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옮기되 굳이 어떤 구상의 형식을 세우지 않으려 한다. 뒤에 오는 이들(가짜 그리스도가 먼저 오지 않는다면)에게 표적을 표적으로만 남기는 뜻은 글을 아는 교우로 하여금 이를 음미하게 하기 위함이다.
원컨대 주님께서, 이름이야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편이 온당하고 크신 뜻에 합당할 터인 저 대수도원 일을 투명하게 그려 낼 권능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때는 주후 1327년 말, 루드비히 황제가 전능하신 분의 뜻에 따라, 아비뇽에 진치고 앉아 사악한 왕위 찬탈과 성직 매매를 일삼으려 사도를 욕되게 한 저 사교의 우두머리를 척결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온 해이다(죄 많은 사교의 우두머리가 누구던가? 믿음이 없는 자들이 교황 요한 22세라고 부른 까오르의 자끄 바로 그 사람이다).
나도 경험했던 그 일의 전모를 소상하게 밝히려면 당시에 내가 이해하고 있던 것들, 후일에야 내가 깨닫게 된 것들, 그리고 뒤에 내가 들은 이야기들(아직 내 기억력이 그 복잡다단했던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잇댈 수 있을 경우에 한할 터이지만)을 여기에 고스란히 되살려내야 한다.
세기 초에 교황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자, 로마는 그 지역 군주들의 야심의 표적이 되었다. 이로써 끝없이 거룩하던 이 기독교의 성도는 그 지역 수장들이 벌이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혹은 곡마단으로, 혹은 창가로 변모해 갔다. 이름이 좋아 공화제였을 뿐, 정치 체제가 사실은 공화제와 거리가 멀었던 이 성도는 시도 때도 없이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무장 폭도들의 과녁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디 무장 폭도들뿐이던가? 속권으로부터의 다스림에서 면제된 교역자들까지도 교구 관할권을 벗어나 악당의 무리를 규합, 지휘하여 노략을 일삼는가 하면 파계와 사악한 무리 짓기까지 서슴지 아니했다. 이러했으니 이 <세계의 수도>가 어떻게 세계의 머리가 될 수 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왕홀을 주어 일찍이 카이사르의 것이던 세속의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만인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
1314년, 이 와중에서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독일 제후들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를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를 어쩔꼬? 마인강 저쪽에서는 라인의 영주과 쾰른의 대주교가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를 동시에 최고 통치자로 선출했으니... 바야흐로 한 보좌에 두 황제, 두 제국에 한 분의 교황이 앉게 되었다. 자연히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아닌가.
2년 뒤, 아비뇽에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까오르의 자끄라고 하는, 일흔두 살의 노옹이 교황으로 뽑혀 요한 22세를 참칭하니, 하늘이 보우하사 이 뒤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거역스러울 터인 이 이름을 다시 쓰는 교황이 없게 되었다. 프랑스 왕(이 타락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늘 제 나라 백성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웠지 전 세계를 영혼의 고향으로 볼 줄을 모른다)을 섬기는 이 프랑스인 교황은 일찍이 공정왕 필립을 도와 성당 기사단을 박해한 바 있으니, 공정왕(내가 보기에는 별로 공정하지 못한)은 일찍이 성당 기사단을 파렴치한 범죄 조직으로 매도하고 타락한 성직자들과 손을 잡아 그들의 재물을 가로챌 수 있었다.
1322년 바이에른 루드비히 황제는 정적이었던 프리드리히를 거세했다. 황제가 둘일 때부다는 하나 있을 때를 더욱 두려워한 교왕 요한은 승리자인 루드비히 황제를 파문했고, 우리 황제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배교자로 비방했다. 바로 이 해에 프란체스코 참사회가 페루지아에서 소집되었고 총회장이었던 체체나의 미켈레는 엄격주의파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고, 신앙과 교리에 관련된 문제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해, 그리스도가 사도들과 더불러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사용권, 이용권>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회칙의 미덕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이 귀중한 헌장은, 교황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했다. 이는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주교를 임명하는 황제의 권리는 부인하고, 교황이 황제에게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했던 교황 자신의 주장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요한 22세는 1323년 회칙 <쿰 인테르논눌로스>를 통하여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선언을 묵살해 버렸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루드비히가 교황의 적이 되어 버린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잠정적인 자기의 동맹으로 보기 비롯한 것은 이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긍정하면서 신학자들, 이를테면 파도바의 마르실리오, 장뎅의장 같은 사람들의 학설을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사건이 나기 몇 달 전 루드비히는 거세당한 프리드리히와 제휴하고 이탈리아로 내려와 밀라노에서 대관했다.
멜크 수도원의 젊은 베네딕크 회 수련사였던 내가, 루드비히 황제의 적신이었던 선친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의 평화로운 독방에서 나올 때의 사정은 대강 이러했다. 선친께서는 이탈리아도 두루 견문케 하고 황제 대관식도 직접 보게 할 요량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그러나 피사가 포위되자 선친께서는 전투에만 몰두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선친의 손에서 풀려난 나는 반은 좀 한유하고 싶어서, 반은 마땅한 스승 밑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욕심으로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를 방랑했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이 방만한 자유가, 사색의 삶에 평생을 던져 넣은, 한창 나이의 젊은 나에게는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셨던 모양이다. 선친께서는 전부터 나를 눈여겨보시던 마르실리오와 이 문제를 상의, 결국은 나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인, 바스커빌 사람 윌리엄의 수하에 넣기로 작심하시게 된다. 당시 윌리엄 수도사께서는 모종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큰 도시 및 큰 수도원을 차례로 순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윌리엄 수도사의 필사 서기 겸 시자로 시봉하게 되었으니, 그 뒤로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분과 더불어 나는, 지금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후세 사람들에게는 좋은 마음의 양식이 될 터인 저 놀라운 사건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나는 윌리엄 수도사다 무엇을 구하러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께서도 몰랐는지도 모른다. 내 보기에 그분은, 진리에의 갈증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쫓기면서 유럽을 주유하는 것 같았다(나는 그분이, 미심쩍은 일에 유달리 집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성직자의 의무 때문에, 천성적으로 좋아하던 공부에 굶주려 있던 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함께 다니면서도 윌리엄 수도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윌리엄 수도사 자신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지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머무는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윌리엄 수도사가 나누는 대화를 귀동냥하고, 그것으로서 윌리엄 수도사가 맡은 임무의 성격을 어림하여 헤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테지만, 문제의 수도원에 이르기까지는 그 귀동냥조차 시원하지 못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북쪽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장 북쪽으로 가지 않고 객승으로 유숙하면서 별의별 수도원을 다 순유했다.
문제의 수도원은, 피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옛 순례자들의 여로인 산길을 따라, 목적지를 동쪽으로 두고 서쪽으로 구부러져 한동안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여기에서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 땅의 영주들은 모두 제국 황제의 총신들이었고 우리 교단의 수도원장들은 모두 저 이단적이고 부패한 교황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곳이라는 것만 밝힌다. 우리의 여행은 파란곡절 속에서 약 두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동안 새로 모시게 된 사부님의 면면을 접하고 내 나름으로 그분의 위인됨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글을 쓰되 개인에 관한 묘사(얼굴의 표정이나 몸짓이 침묵의 웅변일 경우에는 제외하고)는 되도록 피하고자 한다. 이는,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보에티우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고말고. 수도원장이나 그 측근은 이미 썩어 흙이 되었고 육신은 한 줌의 잿빛 바람이 되어 부는 데 그 양반들의 눈길이 어떠했느니, 창백하던 뺨이 어떠했느니 낱낱이 묘사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하느님 은혜로 그들의 영혼만은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빛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풍모만은, 그 비범한 모습이 크게 내 마음을 흔들었기로 여기에다 자세하게 그려 남기고 싶다. 젊은이들이란 노인과 현자의 언변이나 명민한 정신에는 물론이고 아버지의 모습 같은, 그들의 예사롭지 않게 자애로워 보이는 외양에도 반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육체적 사랑의 형식에(어쩌면 이것만이 순수한지도 모른다) 한 점 의혹도 품지 말고 그 몸짓을 고구하고 그들의 찡그린 표정과 미소뒤에 숨은 의미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내들이 외모도 준수하고 크기 또한 엄장했다. 요새 사내들은 능히 아이나 난쟁이에 견주어질 만한 정도로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세상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타내는 수많은 재해의 징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공부하려 하지 않아 배움은 사양길에 들었다. 뿐인가? 세상이 거꾸로 걷는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여 시궁창에다 처넣고, 새들은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둥지를 떠나며, 나귀는 풍악을 잡고 황소는 어깨춤을 춘다. 이제 마리아는 더 이상 명상의 생활을 사랑하지 않고, 마르타는 더 이상 시중드는 일에 골몰하지 않으며, 레아는 불임이고 라헬은 색욕의 눈길을 번뜩인다. 뿐인가? 카토는 창가로 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여자 노릇을 한다. 만상이 엇길로 들어서 있던 이런 시절에 나는 하느님 은혜로 윌리엄 수도사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배움에의 욕구를 채우고 사물을 바로 보는 감각을 익혔으니, 내가 험로를 헤맬 때도 스승의 교훈이 나를 인도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의 외모는 남의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시선도 능히 끌 만큼 준수했다. 키는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러나 몸매가 호리호리한 탓에, 그 큰 키는 실제보다도 더 커 보였다. 그의 눈은 매섭고 형형했으며, 가늘고 매부리처럼 살짝 아래로 기울어진 코 때문에 그의 얼굴은 파수 보는 사람처럼 늘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표정 때문에 그분 앞에서 말을 머뭇거릴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히베르니아 사람들이나 노덤브리아 사람들의 얼굴이 대개 그렇듯이 주름살로 뒤덮인 그의 긴 얼굴도 주저와 당혹을 숨기기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그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배짱이 별로 두둑하지 못한 분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할 때마다 그런 얼굴을 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표정이 지니는 매력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내가 그 호기심이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격정으로 받아들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응 이성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마땅히 그런 격정을 경계하고, 진리에만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마음이 어리던 나는, 그의 귓속에서 비죽이 비어져 나온 노란 털 무더기와 짙은 금빛 눈썹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는 꽃 피는 봄을 쉰 번이나 본 분이어서 당시 이미 노경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격정의 충동을 받으면 그의 정력은 고갈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뒤로 물러앉아 가만히 정관만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그의 정신은, 가재가 되어 살금살금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상태에 들 때마다 그의 눈에는 공허하고 정신이 아가 버린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 환상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환상을 즐기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나날의 삶에서 보여 주는 그의 절제하는 모습은, 환상을 즐길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을 도무지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그는 여행 중에 이따금씩 풀밭 가에서나 숲 어귀에서 발길을 멈추고 풀잎(늘 같은 종류의 풀이었던 것 같다) 같은 것을 뜯어 가만히 씹으면서 그 맛을 음미하고는 했다. 때로는 그 풀잎을 뜯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절박한 사태를 맞아 긴장할 때 그것을 씹고는 했다(우리가 문제의 수도원에 있을 동안에는 풀잎을 씹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게 도대체 무슨 풀이냐고 물은 것이 있었다. 그때 사부님은 웃으면서,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맛보게 해 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사부님은, 늙은 프란체스코 수도사에게 이로운 풀이라고 해서 베네딕트 수련사에게 반드시 이로울 리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부님을 모시고 있을 동안, 우리에게는 반드시 규칙적인 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남의 수도원에서 객승으로 머물 동안, 사부님과 나는 밤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침상에 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정례적인 성무 일과에 참석하지 않을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여행 중에는 그런 게으름을 누릴 수 없었다. 사부님이 종과 시간을 넘길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을 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습관은 그만큼 실질적이었다. 남의 수도원에서 객승으로 머물 때면 그는 하루 종일 채마밭을 거닐면서 거기에서 자라는 채소를 녹옥수나 에메랄드 보듯이 자세히 관찰하고는 했다. 그러나 막상 수도원 지하보고에 있는 녹옥수나 에메랄드로 가득 찬 성보 상자를 들여다볼 때는 그저 덩굴장미를 바라보듯이 심드렁하게 바라보고는 했다. 그런가 하면, 수도원 장서관에 붙박혀, 꼭 뭔가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심심파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하루종일 필사본 원고를 뒤적거릴 때도 있었다(수도원에서, 참혹하게 살해되는 수도사들의 시체가 늘어 갈 때도 그는 그렇게 한가하게 우너고만 뒤적거리고는 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아무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글자 그대로 무심하게 화단을 걸을 때도 있었다. 우리 베네딕트 교단에서는 수도사들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사부님은, 우주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양한 가운데에도 통일된 하나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그의 대답을, 영국인들의 뻔한 상식 정도로만 이해했다. 사부님을 비롯해 사부님의 동향인들은, 이성적으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관념까지도 신통하게 정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그 수도원에 함께 있을 동안 그의 손에는 늘 책 먼지, 새금박 필사본에서 떨어져 나온 금박 가루가 묻어 있고는 했다. 어쩌다 진료소에서 나올 때는 노란 시약 가루가 묻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는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손길이 거칠게 부지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은 기계보다 정교했다. 부서지기 쉬운 것들, 가령 갓 금박을 입힌 성서 사본, 혹은 오래되어 무교병 껍질처럼 날강날강해진 책장을 만질 때도 그의 손길은 더없이 섬세했다. 기계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여기에서 이 수수께끼 같은 분이 늘 가방에 넣고 가지고 다니던 기계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그 기계를 놓고 사부님은 <놀라운 기계>라고 불렀다. 그는, 기술의 소산인 기계는 자연을 모방한 것이지만, 이 모방은 형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능에까지 미친다고 말하면서 시계, 천체 관측의, 그리고 자석의 신비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물건은 못된 마술에나 쓰이는 연장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그런 기계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말짱한 어느 날 밤 사부님은 손에 이상한 삼각형 기구를 들고 별들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일부러 자는 척 한 적도 있다. 내가 이탈리아나 내 조국에서 만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은 대개가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박학다식에 대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자기가 태어난 섬나라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은 좀 다르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사부님으로 시봉하던 로저 베이컨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언젠가는 기계 과학을 성취시키실 터이므로 기계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고 건강한 마술이라고 가르치신다. 언젠가는 자연을 본뜬 기계가 만들어질 터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기계를 쓰면 배는 <오로지 인간의 지배력>만으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달리는 배는 돛이나 노를 쓰는 배보다 훨씬 빠를 게다. 뿐이냐? 스스로 달리는 수레, 사람이 앉아서 장치만 조작하면 인공 날개를 펄럭이면서 <새처럼 날개짓하는> 날틀도 만들어질 것이야. 이렇게 되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조그만 장치도 만들어질 게고, 바다 밑을 달리는 탈것도 만들어질 테지.'
내가, 그런 기계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이자 사부님은, 이미 옛날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우리 시대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날틀을 아직 아무도 만들지 못한 모양이야. 나도 본 적이 없고,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걸 생각해 낸 사람을 알아. 그리고 기계가 발달하면, 기둥이나 버팀대를 세우지 않고도 강과 강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가 있다.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기계를 만드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 지금 이런 게 없다고 과히 상심 말 일이다. 지금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너에게 말해 두고 싶은 것은, 하느님께서도 이런 기계가 만들어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의중에 벌써 옛날부터 이런 기계에 대한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내 친구인 오캄사람 윌리엄은, 하느님 의중에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는 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러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뜻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어디어디까지가 하느님 뜻이라고 우리가 울타리를 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
내가 그에게서 들은 말 가운데 허무맹랑하게 들리던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다. 내 나이 이제 지긋해지고, 그래서 그때보다는 머리가 훨씬 잘 여물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가 어떻게 해서 오캄 사람 윌리엄이라는 친구분의 생각을 그렇게 잘 알 수 있는지,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로저 베이컨을 어떻게 해서 그토록 열렬하게 신봉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암흑시대에, 현자라고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네 무리들과 서로 모순되는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온당하다.
처음부터 파악하기가 쉽지 않던 그분의 인상(당시에는 사실이 그러했다)을 정돈해 본답시고 윌리엄 수도사에 대해 무분별한 발을 지나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여,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는, 그가 수도원에서 앞으로 하게 되는 일, 보이게 되는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세련된 구성을 약속하지는 않겠다. 단지 저 놀랍고도 무서운 사건(그렇다)을 여기에 기술할 뿐이다.
아무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하루가 다르게 사부님의 참모습을 깨쳐 나갔다. 대목대목 그런 모습을 소개하게 될 테지만, 좌우지간 우리는 긴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여행한 끝에 이윽고 그 문제의 수도원이 터 잡고 서 있는 산기슭에 이르렀다. 우리가 당시 그 산기슭에서 수도원으로 다가가고 있었듯이 이제 내 이야기도 본론으로 접어든다. 바라건대 이 이야기를 준비하는 나의 손끝이 끝내 침착해 주기를...
제1일
1시과
11월 말의 청명한 새벽이었다. 밤사이에 눈이 내렸지만 양이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대지는 손가락 세 마디 높이의 서늘한 융단에 덮여 있을 뿐이었다. 찬과를 조금 지난 터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계곡에 있는 마을의 미사 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해가 뜨자마자 산을 바라보고 출발했다.
산허리로 감겨드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수도원을 보았다. 그리고는 놀라고 말았다. 기독교 세계에서 흔히 보아 왔던, 수도원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벽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벽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에 놀란 것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그 건물은 바로 수도원의 본관이었다. 이 본관은 8각 기둥 건물이었지만, 멀리서는 4각 기중 건물(성도의 위엄과 금성철벽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였다. 남쪽은 수도원이 앉은 고원과 닿아 있었고, 북쪽은 산이 갑자기 가파른 사면에서 솟은 듯이 불거져 있었다. 아래쪽에서 본 광경도 소개해야겠다. 색깔이나 재질이 한결같은 이 석벽의 정점은 그대로 탑과 관망대(하늘과 따들 두루 아는 대가의 작품임에 분명한)였다. 세 줄로 나 있는 창문은 건물 전면 삼위일체의 조화를 표상하고 있어서, 땅에서는 물리적인 정방형 형태가 하늘에서는 정신적인 삼각형 형태로 변전된 형국이었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그 사각 형태 안의 모서리마다 7각 기둥 탑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탑의 다섯 면은 밖에서도 보였다. 즉 네 개의 작은 7각 기둥을 사방으로 거느린 큰 8각 기둥의 여덟 모서리 중 네 개가 밖에서는 5각의 건조물로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장관은, 각각 정신적 의미를 드러내는 신성한 숫자의 놀라운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8은 4각형이 완성된 숫자이고, 4는 복음서의 수를 나타내는 숫자, 5는 이 세계를 나눈 지대의 수, 7은 성령이 내린 은혜의 수가 아니던가? 크기나 형태로 보아 본관은 뒷날 내가 이탈리아반도 남부에서 보았던 카스텔 우르시노, 카스텔 델 몬테와 흡사했다. 그러나 그 범접하기 어렵게 하는 위용이나, 거기 다가가는 행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위구심으로 말하면, 후일에 내가 보게 되는 어떤 수도원이나 성채도 이와는 같지 못했다. 때가 활짝 갠 겨울 아침이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그 본관 건물을 처음 보았더라면 내 기가 크게 꺾였을 것임이 분명했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건물이 내게 유쾌해 보였다고는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건물에서 느꼈던 것은 두려움과 거북살스러움이었다. 덜 여문 내 정신의 허깨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은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나는 거장들이 역사를 시작한 날, 그리고 망상에 사로잡힌 수도사들이 뜻을 모아 그 건물을 감히 하느님 말씀을 지키는 성채의 표징으로 성별하기 전에 이미 그 돌에 새겨진 불길한 사건의 전조를 제대로 읽어 내었던 것이다.
사부님과 나를 태운 두 마리 노새가 산 위로 올라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모퉁이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그중 둘은 곁가지 오솔길이었다. 사부님은 이따금씩 노새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했다. 길옆, 그리고 길 위로 늘 푸른 소나무가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천연의 차양처럼 길을 덮고 있었다.
'기름진 수도원이로구나. 그런데 원장이 공공연히 대중의 기를 죽이고 있으니 안 될 일이지...'
사부님 말씀이었다.
워낙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을 자주 하시는 분의 말씀이라, 나는 그렇거니 여겼을 뿐 따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니, 질문할 여유도 없었다. 노새가 두어 걸음 더 떼어놓았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길모퉁이에서 잔뜩 흥분한 수도사와 수도원의 불목하니 떼거리가 나타났다. 우리를 발견하자 수도사 가운데 하나가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오신다는 기별을 앞질러 접한 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도원의 식료와 요사를 담당하는 식료계 수도사,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라고 합니다. 원장님께서 말씀하시던 바스커빌 윌리엄 수도사이실 테지요?'
수도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리에게 명했다.
'먼저 올라가서, 손님께서 곧 수도원으로 드신다고 이르게!'
수도사의 말이 끝나자 윌리엄 수도사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고맙소, 식료계 수도사. 친절하게 맞아 주시니 고맙기 한량없소. 더구나 급하게 무얼 찾아다니시는 모양인데 그 일까지 이렇게 작파하고 말이오. 허나 걱정은 마시오. 말은 이 길로 와서 오른쪽 오솔길로 접어들었소. 모르기는 하지만 그리 멀리는 못 갔을 것이오. 거름더미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기가 쉬울 겝니다. 그놈 역시 머리가 있으니까 저 가파른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언제 그 말을 보셨습니까?'
식료계 수도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짓궂은 표정을 하고 나를 돌아다보면서,
'본 것은 아니오, 그렇지 아드소?'
이렇게 묻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이 찾는 말이 <브루넬로>가 분명하다면 이놈은 내가 방금 말한 곳에 있을 것이오.'
식료계 수도사 레미지오는 머뭇거리다가 윌리엄 수도사를 일별한 뒤 오른편 길 쪽으로 시선을 잠깐 던지고는 물었다.
'<브루넬로>라고 하셨는데... 말 이름이 <브루넬로>라고 라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허허, 이것 보세요. 형제들은 분명히 원장이 가장 아끼는 말 <브루넬로>를 찾고 있을 게요. 키는 열다섯 장, 털은 검은색, 꼬리는 탐스럽고 발목은 잘쏙할 것이오. 수도원 외양간에 있는 말 중에서 걸음이 가장 빠른 말일 것이오. 머리는 작고 귀는 뾰족하고 눈은 클 테지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그놈은 오른쪽 길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조금 서둘러야 할 게요.'
식료계 수도사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함께 온 수도사들, 불목하니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는 오른쪽 오솔길로 내달았다. 우리가 탄 노새도 산 위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을 수 없어서 질문을 던지려고 하자 윌리엄 수도사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오른편 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후, 환호성과 함께 수도사와 불목하니들이 재갈 물린 말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그들은, 참 신통한 사람 다 본다는 듯한 눈길로 사부님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앞질러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내가 보기에, 윌리엄 수도사는 일부러 시간을 끌어 수도사 패거리를 먼저 수도원으로 올려보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수도사 일행으로 하여금 수도원장에게, 자기가 드러내 보인 통찰의 기적을 소상하게 보고할 시간 여유를 주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부님같이 귀한 덕성을 고루 갖춘 분도, 자기의 명민한 통찰력을 과시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더러 허영심의 유혹에도 기꺼이 굴복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닌 천성적인 외교관으로서의 재능을 능히 알고 있는 터라서, 우리가 수도원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참으로 박학 다식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더라는 평판이 미리 퍼져 있기를 바라는 그의 태도를 이해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을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저에게도 좀 들려주십시오.'
사부님은 소리 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것 보아라, 아드소. 내 너에게 뭐라고 하더냐? 우리 같은 운수 행각승은, 세상이 위대한 책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사물의 정황을 유심히 관찰하는 법이라고 하지 않더냐? 일찍이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는 이렇게 노래하셨느니라.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
그분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끝없는 영생의 상징 속을 거니셨느니라. 허나 우주는 알라누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수다스럽다. 우주는 궁극적인 것(그것은 언제나 희미하게만 나타나는데)뿐만 아니라 비근한 것까지 드러내되 그 드러냄이 참으로 분명하다. 궁극적인 것은 어려울 뿐 비근한 것과 다르지 않은 법이다. 네가 홀로 깨쳐야 할 것을 이렇게 일러주어야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구나. 저기 갈림길, 쌓인 눈 위에 말발굽이 찍혀 있지 않더냐? 말은 우리 앞의 왼쪽 길로 갔더구나. 발자국의 간격이 아주 일정치 않더냐? 이 말발굽의 자국을 보면, 발굽이 작고 둥글며, 보조가 규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의 성격을 알아낸 것이다. 말하자면 미친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말의 보조는 이럴 수가 없는 것이야. 소나무 가지가 지붕처럼 길 위쪽으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걸 자세히 보았더니 약 열다섯 장쯤 되는 높이에서 가지가 군데군데 부러져 있더구나. 이놈이 꼬리를 치면서 오른쪽으로 꺾어 든 지점의 검은 딸기나무 덩굴에는 검은 털오라기가 걸려 있었다. 자, 그 길이 거름더미 쪽으로 나 있는 길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느냐고는 묻지 않을 테지? 저 아래 길모퉁이를 돌면서 보니까 동쪽 탑 아래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쓰레기 버린 자국이 눈을 아주 지저분하게 녹여 놓았더구나. 우리가 지나온 갈림길 위치로 보면 오솔길이 그 벼랑 끝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어디로 이어지겠느냐?'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머리가 작고, 귀끝이 뾰족하고, 눈이 크다고 하신 말씀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난들 알겠느냐만 수도사들 표정을 보니까 내 말을 수긍하는 것 같더구나. 세빌리아 사람 이시도루스에 따르면 명마의 정의는 이렇게 되더구나. 즉 작은 머리, <뼈에 달라붙어 있되 건조한 가죽>, 뾰족한 귀끝, 큰 눈, 푸짐하게 벌어진 콧구멍, 꼿꼿한 목, 무성한 갈기와 꼬리털, 둥글고 단단한 발굽... 여부가 있겠느냐? 그런데 아까 내가 말하던 그 말이 수도원 외양간에서 제일 잘난 놈이 아니었다면 마부가 나오지 수도원의 중책을 맡고 있는 식료계 수도사가 몸소 찾으러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냐? 너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도 모르느냐? 제 말의 생김새가 어떻게 생겨 먹었건 수도원의 말 주인은 마사의 권위자들이 훌륭한 말의 조건으로 내세운 조항을 모두 자기 말에서 보는 법이다. 더구나...'
윌리엄 수도사는 베네딕트 회 수도회 수련사인 나를 보고 짓궂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서술자가 유식한 베네딕트 회 수도사인데 여부가 있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 말의 이름이 <브루넬로>라고 단언하셨습니까?'
'떽, 성령을 받고도 머리가 그렇게 아둔할 수가 있더냐? 다른 이름을 붙였을 리가 있겠느냐? 목하 파리 대학 총장이 되어 세도로 말하자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뷔리당이 논증의 실례로 말을 인용할 때마다 그 말을 <브루넬로>라고 부르는 데 여부가 있겠느냐?'
사부님은 만사가 이런 식이었다. 그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을 읽어 내는 방법에 정통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이 성서를 읽는 태도, 그리고 성서와 성서를 통해 갖게 되는 수도사들의 사고방식에도 정통했다. 독자들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그의 이러한 재능은 오래지 않아 찬연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설명하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설명 또한 명료해서 알아듣기가 쉬웠다. 따라서 내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해도 크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호기심이 생기더라도 조금만 참고 있으면 그분이 찾아서 설명하시기 때문에, 소갈머리 없이 질문부터 했다가 코를 떼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런 것을 알아차린 나 자신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진리의 힘도 이와 같은 것일까? 진리도, 스스로를 전파하고 설명하는 힘이 있다는 뜻에서 사부님의 설명과 같은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놀라운 이치를 드러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할진저.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다. 나잇살이나 훔친 이 늙은이가 사설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으니 실로 한심한 일이다. 각설하고, 이윽고 우리는 수도원 정문에 이르렀다. 수도원 원장은 황금 세숫대야를 든 두 명의 수도사를 거느리고 정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나귀에서 내리자 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손을 씻긴 뒤 덥석 껴안고는 입을 맞추고 원로의 안부를 물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원장의 환영 인사에 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원장님. 덕이 높으신 원장님의 수도원에 발을 들여놓은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 수도원의 이름은 산 너머 물 건너 사는 사람들까지도 두루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 이름을 빌린 순례자로서 이곳에 왔을 뿐인데도 원장께서는 순례자에게는 과분한 대접을 해주시는군요. 그러나 이제 내가 드리는 서한으로 아실 테지만, 이 땅의 통치자 또한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보내었습니다. 그 이름으로도 원장의 환대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원장은 황실 인장이 찍힌 공한을 받아 들고, 윌리엄 수도사의 방문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온 편지로 진작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고는(이 대목에서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누가 우리 베네딕트 회 수도원장을 기습할 수 있을까 보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베네딕트 회 수련사인 내 자신의 자존심을 가누었다) 식료계 수도사에게 우리의 숙사를 가르쳐 주라고 일렀다. 마부들이 달려와 우리 노새를 끌고 돌아가자 원장은, 노독이 풀리는 대로 우리를 만나겠노라고 말했다. 사부님과 나는 수도원 마당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 마당에서 수도원 건물은 부드러운 쟁반(혹은 목장) 같은 산꼭대기의 평원 위에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틈나는 김에 수도원 건물의 배치 상태를 소상하게 소개해 두는 편이 좋을 성싶다. 정문(외벽에 딸린 유일한 출입구) 뒤, 양옆으로 나무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길은 원내 성당으로 통한다. 이 길 왼쪽에는 두 채의 건물, 즉 욕장과 시약소, 식물 표본실 건물이 있다. 이 식물 표본실은, 채마밭과 식물원에 둘러싸여 있다. 이 두 건물 뒤, 그러니까 성당 왼쪽으로는 수도원 본관이 우뚝 서 있고, 교회와 본관 사이에는 묘지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북쪽 문은 본관의 남쪽 탑과 마주 보고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는 방문객에게는 서쪽 탑이 먼저 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 건물은 벽에 붙어 있어 탑으로부터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으며 그 위로 북쪽 탑은 비스듬히 튀어나와 있다. 교회 오른쪽에 회랑을 중심으로 서 있는 건물은 숙사, 수도원장 공관, 그리고 객승들의 요사이다. 우리가 가는 곳도 바로 그 요사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화원을 지나 그 요사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로 부드러운 잔디밭 건너, 남쪽 벽에서 성당 동쪽에 이르는 곳에는 불목하니들의 거처, 외양간, 방앗간, 착유소, 곡물 창고, 식료 창고, 그리고 수도사들의 거처인 듯한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약간 경사져 있기는 했지만 지형 덕분에 이 수도원을 건설한 고대의 건축가들은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니엔시스 혹은 기욤 되랑이 요구한 이상으로 수도원 정위에 성공하고 있는 셈이었다. 해가 뜬 직후인 그 시각에 나는 서쪽으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동쪽을 향하고 있는 성가대석과 제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떠오르는 태양은 숙사의 수도사들과 외양간의 가축을 깨울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그전에도 그 뒤에도 많은 수도원을 구경했지만 이 수도원만큼 아름답고 정위가 잘 된 수도원은 본 적이 없다. 장크트 갈렌 수도원, 끌뤼니 수도원, 퐁뜨네이 수도원도 크기에서는 앞섰지만 건물의 배치나 공간 배분은 이 수도원만 같지 못했다. 다른 수도원들과는 달리 이 수도원의 본관은 주변 건물에 견주어 엄청나게 컸다. 본관을 축조한 거장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지만 나는 곧 이 건물이 주변 건물보다 훨씬 오래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원래 이 본관 건물은 다른 용도로 축조되었는데 수도원이 들어서면서 이 건물을 본관으로 삼고 주변 건물은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되, 이 거대한 건축물과 교회의 상호 정위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 어려운 일이 아닌가. 모든 예술 가운데서 우주 질서(고대인들의 이른바 코스모스)를 체현하는 데 가장 큰 힘을 기울여야 하는 예술이 바로 건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식 행위의 산물인 건축물은, 자기가 속한 종의 완성미와 균형미를 대표하는 한 마리의 동물과 같다. 수와 무게와 치수를 주관하시는 우리 창조주를 찬영할진저.
3시과
식료계 수도사는 땅딸막한 사람으로 생김새가 험상궂어 보였으나 뜻밖에 싹싹했고, 머리카락은 백발이되 아직 근력이 좋아 보였으며, 몸집은 작되 거동이 민첩했다. 그는 우리를 순례자 숙사로 안내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사부님께서 거처하실 방으로 안내하고, 나에게는 다음날 방 하나를 비우고 치워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나는 수련사여서 품계로 따져 독방 차지를 할 처지가 못 되었지만, 그 수도원의 손님인지라 기거에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배려해 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수도사 독방의 길고 널찍한 벽감 위, 식료계 수도사가 사람을 시켜 깔아 놓게 한 향긋한 마른 짚 위에서 잘 수 있었다.
이어 수도사들이 우리에게 포도주, 건락, 감람, 질이 좋은 건포도를 가져다주고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는 물러갔다.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사부님은, 엄격한 베네딕트 회 규율에 묶이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묵언계에 구애됨이 없이 식사 때마다 늘 옳고 바른 말을 들려주어서 흡사 옆에서 한 수도사가 성자의 성행록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식사 중에 아침에 보았던 예의 그 말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여쭈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부님께서는 눈 위의 발자국과 가지에 남은 흔적을 읽으실 때는 그 말이 브루넬로라는 것은 모르셨습니다. 그 발자국은 <말>이라고 불리는 모든 종류의 발자국, 혹은 특정 종류에 속하는 말의 발자국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이라는 책이 반드시 사물의 본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고는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선학들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신 것으로 압니다.'
사부님이 대답했다.
'에끼, 선학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하는 말이다만, 그 발자국이, 그 발자국 임자가 <정신의 언어>로서의 <말>이라는 것만 가르쳐 주고 있다는 네 말은 맞다. 뿐만 아니라 그 발자국은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발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각, 그 장소에 난 발자국을 보고 나는 그곳을 지나간 모든 말 중에서도 적어도 어떤 특정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이라고 하는 말의 개념에 관한 지각과 개별적인 말에 대한 내 지식 사이를 오가면서 이것저것 추론하게 된다. 그런데 발자국을 보니까 내가 아는 모든 종류의 말 중에서 한가지 말이 떠오르더구나. 당시 나는 나의 무지와 발자국의 특이성 사이에서 망설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무지는 아주 투명한 보편 관념의 형태를 전제한 것이었다. 어떤 사물을 먼 거리에서 볼 경우,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는 그게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로 정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야. 조금 더 가까이 가면, 글쎄, 그게 말인지 당나귀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게 될 테지. 자, 조금 더 다가가면 어떻게 될까? 조금 더 다가가면 그게 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그 말이 브루넬로인지 니게르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어. 자, 여기에서 또 조금 더 다가간다. 그러면 비로소 그게 브루넬로인지 니게르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말의 고유 명사인 이름까지 알게 되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게 된 셈이 아니냐. 만일에 그 말의 이름이 정말 브루넬로라면 말이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끌로 올지 몹시 궁금했다. 무슨 까닭이겠느냐? 말에 대한 내 지식의 방대함 때문이 아니라 추리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나의 지적 갈증은, 수도사들이 재갈을 물려 끌고 오는 말을 보는 순간에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내 추리가 사실에 가깝게 접근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야.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을 상상하면서 이용한 것이 바로 순수 기호라는 것이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남은 흔적은 <말>이라고 하는 동물을 나타내는 기호였다는 말이다. 기호, 그리고 기호의 기호는 우리가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분이, 보편적인 관념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인 견해를, 개별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대단한 존중을 피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사부님의 이런 경향은 이분이 브리튼 사람인 데다 프란체스코 수도사인 데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이분에게는 이야기를 신학적인 논쟁으로 비화시킬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몫으로 허락된 벽감으로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누가 들어오면서 내 누운 꼴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으로 알기보다는 그냥 짐 보따리쯤으로 알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3시과쯤에 윌리엄 수도사를 예방한 수도원장도 나를 그렇게 보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수도원장 모르게 두분의 첫 번째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각설하고... 수도원장이 들어왔다. 그는 먼저 사부님의 휴식을 방해하게 된 것을 정중하게 사과하고, 아침에 했던 환영 인사를 되풀이한 뒤, 극히 중요한 일로 윌리엄 수도사와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원장은 말머리에, 도망친 말은 붙잡는 과정에서 사부님이 보여준 놀라운 통찰력을 치하한 다음, 어떻게 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짐승을 그렇듯이 정확하게 뚫어 볼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사부님이, 길에서 본 흔적과 발자국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 원장은, 믿어지지 않는 혜안이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서 원장은, 지혜로우신 분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누누이 치하한 다음, 파르파의 수도원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를 통해 사부님이 황제로부터 밀명을 받고 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하기로 하자)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종교 재판에 조사관으로 참여할 때 보인 겸양의 미덕과 놀라운 통찰력으로 칭송이 자자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원장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많은 사건을 심리하시면서 수도사께서는 기소된 자의 무죄를 증명하셨다는 소문이 참으로 듣기에 좋았습니다. 저는 인간이 하는 일에는 늘 악마가 끼어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만 이 믿음이 요즈음의 슬픈 날들만큼 절실한 적도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수도원장은 누가 그 방으로 숨어들어 엿듣기라도 하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 뿐만 아니라, 악마는 제2의 원인을 통해서도 역사합니다. 제가 알기로, 악마는 희생자를 하나 골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일을 대행케 하고 그 허물을 그 희생자에게 씌웁니다. 그리고는 의로운 희생자가 악마의 제자를 대신해서 화형을 당할 때 희희낙락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사관은, 속죄양을 찾아내는 일을 재판을 마무리 짓는 일로 그릇 알고 갖가지 수단을 두루 동원하여 기소된 자로부터 자백을 얻어내고 자기 믿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조사관 역시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윌리엄 수도사의 말이었다. 수도원장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수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전능하신 분의 뜻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까요. 허나 조사관같이 귀한 분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진다는 것은 저같이 하찮은 위인이 감히 할 짓이 못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른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수도원에서 무슨 변고가 있었습니다만 어른같이 명민하시고 사려 깊으신 분의 혜안과 분별이 도우셔야 능히 이 일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드러내는데 명민하시되(필요하다면) 덮어두는 데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한 목자에게 허물이 있으면 다른 목자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터이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양떼가 목자를 불신하기 시작했다면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러 번 보아서, 이분이 즉석에서 정중하게 자기 의사를 나타내면, 속에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반대 의견이나 의혹을 담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장이 말을 이었다.
'이런 까닭에서... 저는, 목자의 허물이 관련된 이 사건은 어르신 같은 분께 부탁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선악은 물론이고 드러내어서 좋을 것과 드러내지 않아야 좋을 것을 능히 분별하실 테니까요. 듣건대 어르신께서 유죄를 선고하시는 것은...'
'기소된 자의 범죄 행위가 독살 행위, 미성년자 오손 행위 및 감히 인구에 회자될 수 없는 그 밖의 파렴치 행위에 이를 때...'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어르신께서는... 어느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악마의 소행임이 분명하여, 훈방하면 범죄 사실 이상의 물의를 빚을 것이 분명할 때만 형을 선고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속권에 넘겨도 내 양심 어느 한구석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중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죗값을 물립니다.'
수도원장은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물었다.
'아니 어째서 어르신께서는, 범죄 행위 자체가 안고 있는 악마적인 동기를 차치하시는지요? 악마의 역사가 없는 범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야 인과를 논증하기가 지난한 노릇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나는 하느님 한 분만이 이 이치를 따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카맣게 탄 나무라고 하는 <과>와 거기에 불을 붙인 번갯불이라고 하는 <인>의 관계를 인증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인과의 끝없는 고리를 더듬어 낸다는 일이 나에게는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독살을 당했다고 치지요. 이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표적이 있다면, 독살한 사람은 물론 제2의 인물일 테지요. 이 정도는 나도 논리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습니다. 인과의 고리가 이 정도로 간단할 경우에는 내 머리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범행이 저질러진 배후에 인간의 힘이 아닌, 악마의 힘이 개재했다고 상상하고서야 어떻게 인과의 고리를 더듬어 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장의 말 브루넬로처럼 악마 역시 제가 간 길에다 분명한 표적을 남겨 놓을테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증거에 혈안이 되어야 합니까? 범인이 저 사람이라는 걸 알고 그를 속권에다 넘겨주면 내 임무는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은 사형을 당할 테고 하느님께서는 그자의 죄를 용서하실 테지요.'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3년 전 킬케니에서 열린 종교 재판에서 몇 사람이 파렴치범으로 기소되어 왔을 때 어르신께서는 악마적인 권능의 개입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전에 확인된 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만...'
'그렇습니다만, 나는 그걸 공개적으로 장황하게 확언하지도 않았다는 데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문득, 해명의 필요를 느꼈던지 다소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악마의 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사관들, 주교, 시 행정관들, 방청객, 심지어는 기소된 당사자까지도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 하는 판국인데 내가 어떻게 악마의 소행을 빌미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악마가 존재한다는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는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수도원장이 딱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면... 재판에서 악마는 혐의자들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에게도 그 권능을 행사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글쎄요. 내가 어떻게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는 잠시 후퇴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수도원장이 머쓱해지는 것 같았다.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원장이 궁한 입장에 몰린 틈을 타서 화제 바꾸기를 시도했다.
'... 그렇거니 다 옛날 이야깁니다. 나는 이미 그 직분을 떠났습니다. 떠났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었을 테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도원장이 까닭 모를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는 아주 미묘한 문제에다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틈이 없기는 합니다만 원장께서 자초지종을 들려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원장님의 심기를 사납게 하는 문제에도 한번 눈을 대어 보기로 하지요.'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관심이 밑도 끝도 없는 관념 논쟁에서 자기 문제 쪽으로 돌아온 것을 몹시 다행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원장은, 조심스럽게 낱말을 골라가면서, 며칠 전에 일어나 수도사들의 공부를 크게 방해하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장은 윌리엄 수도사가 인간의 정신과 악마의 간계를 능히 꿰뚫어 볼 수 있는 현자이니까 숨김없이 털어놓겠다고 말하고는, 모쪼록 수도사께서 귀한 시간을 나누어 이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푸는데 할애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원장이 말한 사건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장서관 원고를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미던, 젊지만 유능한 채식장인 수도사인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가 어느 날 본관 옆 벼랑 아래에서 염소치기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종과 기도 시간에는 성가대석에서 그를 본 수도사가 있었으나 이튿날 조과 기도 시간에는 본 사람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한밤중에 벼랑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원장은 덧붙였다. 사건 당일 밤은, 우박을 방불케 하는 칼날 같은 눈보라가 남풍과 함께 몰아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체는, 표면만 녹아 가볍게 언 눈에 묻힌 채 가파른 벼랑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혔는지, 갈가리 찢겨 있었다고 했다. 연약하고 가엾은 목숨... 떨어지면서 얼마나 바위에 부딪혔던지 부딪힌 곳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장은, 벼랑에 면한 탑의 세 면 중 어느 한 면의, 3층 어디쯤에 있는 창문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그 불쌍한 수도사의 시신은 어디에다 묻으셨습니까?'
'당연히 묘지이지요. 수도원으로 들어오시면서 보셨을 겁니다. 묘지는 성당 북쪽과 본관, 채마밭 사이에 있습니다.'
원장의 말에 윌리엄 수도사가 다짐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원장께서 처한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이 불쌍한 젊은이가... 하느님 이 젊은이를 용서하소서... 자살이라도 했다면, 다음날 창문 중 어느 창문인가가 열려 있었을 터인데... 창문이라는 창문은 모조리 제대로 닫혀 있었고, 창틀에 물 묻은 자국도 없었던 것이겠지요.'
이 수도원장은, 고급 외교관이 그렇듯이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놀랐던 모양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아리스토텔레스같이 진중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보이던 원장 특유의 풍채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원장이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물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누가 그러기는요... 원장께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만일에 창문이 하나라도 열려 있었다면 원장께서는 그 수도사가 바로 거기에서 투신한 것으로 단정했을 테지요. 밖에서 언뜻 보았더니, 불투명한 유리가 박힌 큼직한 창이더군요. 이런 종류의 창이 사람의 키 높이에 나 있는 경우는 드물지요. 특히 이 정도 규모의 건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설사 창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가련한 친구가 거기 올라가 제 몸을 아래로 던졌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자살로는 설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자살한 시체를, 성별된 묘지에다 매장했을 턱도 없고요. 그러나 원장께서 이 수도사를,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 주신 걸 보면,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을 수밖에요? 만일에 문이 닫혀 있었다면(나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악마의 소행 아닌 바에야 죽은 자가 하느님의 힘이든 악마의 힘이든 빌려 벼랑을 기어 올라가 자기 비행의 증거를 인멸할 수는 없을 테지요) 이 시체는 분명히 사람의 손이나 악마의 권능에 의해 떠밀린 것입니다. 누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고 하시겠습니다만, 나 역시 누가 그를 벼랑으로 밀었다는 말은 않겠습니다. 하지만 누가 창틀에다 세우기는 했겠지요. 지금 원장께서 고민하시는 것은,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간에 악마의 권능이, 이 수도원 안에서 역사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만...'
수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긍정한다는 것인지, 윌리엄 수도사가 그처럼 명석하게, 이로 정연하게 전개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내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수도원장이 말을 이었다.
'... 창틀에 물 묻은 흔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동쪽에 면해 있는 창으로는 비가 들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모자랍니다. 명불허전은커녕, 전하는 자들도 어르신의 높으신 재능을 다 헤아리지 못했군요.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창틀에 물 묻은 흔적이 없었습니다. 저도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네...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이제 어르신께서는 제 걱정을 이해하셨겠지요. 저희 수도원 수도사가 자진의 죄악으로 제 영혼을 더럽혔다고 한다손 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문제는 적잖게 심각합니다. 그러나 저에겐 수도사 가운데 또 하나가 이미 같은 정도로 사악한 죄악으로 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뿐이라면...'
'먼저 여쭙고 싶군요. 왜 수도사 가운데 또 하나라고 하십니까? 수도원에는, 다른 사람들, 예컨대 마무도 있고 염소치기도 있고 불목하니도 있을 텐데요?'
수도원장은 죄라도 자백하고 있는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이 수도원은 규모에 견주어 재물이 많습니다. 수도사 60명에 불목하니가 150명이나 되니까요. 그러나 모든 것은 이 수도원 본관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본관 1층은 주방과 식당으로 쓰고 있으나, 2, 3층은 문서 사자실과 장서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본관 문이 잠기는데, 규칙이 엄격해서 이 시간 이후로는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됩니다...'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의 다음 질문을 지레짐작하고 재빨리, 그러나 거북살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덧붙였다.
'...물론 수도사들에게도 제한됩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불목하니가 야간에 거기에 침입할 가능성은 절대로(아시겠지만 글자 그대로 절대로)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눈꼬리에 방약무인한 웃음기가 자리 잡았다가는 사라졌다. 섬광이 번쩍이는, 혹은 유성이 떨어지는 시간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런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원장이 덧붙였다.
'무서워서 못 들어간다고 해도 좋습니다. 규칙도 규칙이지만 사고방식이 단순한 머슴들에게는 규칙 위반자에 대한 위협도 효과가 있고, 규칙 위반자들이 초자연적인 변고를 당한다는 소문도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알겠습니다.'
'수도사가 이 금단의 구역을 범하려 한다면 다른 이유에서일 테지요.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규칙은 이를 금하고 있지만...'
윌리엄 수도사는 원장이 거북살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화제를 돌릴 요량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으나 이 질문이 원장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았다.
'타살의 가능성을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그것뿐이라고> 하셨는데 대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요?'
'제가 그랬습니까? 그렇지요.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동기 없이는 살인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반 수도사를 살해할 만한 그 동기의 사악함에 치를 떠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그것밖에는 없습니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장께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은 다 하셨다는 뜻이겠군요?'
'바라건대 윌리엄 형제, 윌리엄 형제여!'
수도원장은 <형제>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대는 영원한 사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도원장이 속삭였다.
바로 이 순간에 두 선학께서 무심결에 내보인 그 거동의 경솔함이라니! 한 분은 근심과 걱정 때문에, 또 한 분은 호기심 때문에 후학에게 차마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하느님의 신성한 사제의 비의에 다가서는 수련사로서의 경륜은 비록 일천하나, 나는 두 선학의 언중에서 내비치는 언외언을 읽을 수 있었다. 수도원장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나 고해 성사에서 알아낸 것이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장은 아델모 수도사의 비극적인 최후와 관련된 이야기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음이 분명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고해자를 보호하는 지엄한 계율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비밀을 밝혀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부님이 그 뛰어난 지력으로 사건의 전모를 꿰뚫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윌리엄 수도사가 두 분 사이를 흐르는 침묵을 깨뜨렸다.
'좋습니다. 수도사들에게 질문은 해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수도원 안을 자유로이 나다녀도 좋습니까?'
'권한을 드리지요.'
'<수도사의 면전에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바로 오늘 저녁부터.'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수도사들이, 내가 이 조사를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수도원의 장서관을 구경하고 싶던 참입니다... 여기에 온 까닭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뭇 기독교국의 수도원이 선망하는 장서관이니까요.'
사부님의 이 말 한마디에 수도원장은 발길에 엉덩이를 차인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수도원 안에서는 어디든 나다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관 맨 위층, 그러니까 장서관은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미리 설명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장서관은 여느 수도원의 장서관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기독교국 수도원의 장서관보다 장서가 많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장서관과 비교할 때 보비오나 폼포사, 혹은 끌뤼니나 플뢰리의 장서관은 더하기 빼기를 갓 시작한 아이의 공부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도한 내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백 수십 년 전부터 노발레사의 자랑거리였던 6천 책의 필사본 고전도 귀 장서관에 견주면 하찮은 장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 필사본 고전의 상당수가 여기에도 고스란히 소장되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귀 수도원 장서관은, 바그다드에 있는 서른여섯 개의 장서관, 비지르 이븐 알 알카미의 1만 권의 책 필사본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도 알고, 귀 장서관의 성서 필사본의 수가 카이로의 자랑이 2천 4백 권 책에 이른다는 코란의 수에 필적한다는 것도 나는 압니다. 연전에, 이교도들은 트리폴리 장서관이, 장서가 6백만 책이고 주석학자가 8만 명, 서기가 2백 명이라고, 거짓말의 고수들답게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나는 귀 장서관이야말로 이러한 이교도들의 자신에 찬 선언에 대항할 수 있는 명백한 실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일입니다.'
'나는, 이 수도원의 수도사 대부분이 세계 전역의 수도원으로부터 유학 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중에는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이곳밖에는 없는 고본의 필사본을 만들어 돌아가는 수도사도 있겠지요. 이곳에 없는 사본을 가져와 이 장서관의 장서를 늘려 줄 생각은 않고 말이지요. 개중에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공부하는 수도사도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장서만이 그들이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한 연구에 도움을 끼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게르만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키아 사람, 스페인 사람, 프랑스 사람, 그리스 사람도 있을 겁니다. 나는, 예전에 페데리코 황제께서 이 장서관으로부터 멀린의 예언서를 빌러 아랍어로 번역, 이집트의 술탄에게 보낼 선물로 삼았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매우 슬픈 시대에는 무르바흐 수도원 같은 은혜로운 수도원에도 서기가 하나 없고, 장크트 갈렌 수도원에도 필사에 능한 수도사 하나 없으며, 각지의 도시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합이나 만들고 길드나 조직하는 이런 시대에 오직 귀 수도원만은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귀 교단의 영광을 날로 드러내고 있으니 이 아니 고마운 말입니까?'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수도원장이 나직한 어조로 응수했다.
'<책이 없는 수도원은... 재산이 없는 도시, 군대 없는 성채, 그릇 없는 부엌, 먹을 것 없는 밥상, 풀 없는 뜰, 꽃 없는 목장, 잎 없는 나무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 수도사께서도 익히 아시겠지요? 공부와 기도라는 두 가지 소명 아래 날로 그 모습을 달리하던 우리 종단은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의 빛, 지혜의 보고, 화재와 약탈과 지진의 위협을 받는 고대 학문의 구원이었으며 새로운 저술과 고대 필사본 증보의 용광로였습니다. 익히 아시는 대로 지금 우리는 암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만 몇 년 전에 비엔느 총회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재천명해야 했습니다. 2백 년 전만 하다라도 위엄과 은혜로 영광을 누리던 수도원 중 지금 나태한 자들의 소굴이 되어 있는 수도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평의회의 명령은 여전히 지엄합니다만 도시의 좀이 우리의 성역에 슬고 있고 하느님 백성은 장사와 전쟁에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저 아래, 신성이 머리 둘 곳 없는 속세 사람들은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글로 이를 기록하기까지 아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성직자들도 예외가 아니라니 대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필경은 이교도들을 선동할 터인 이러한 서물은 한 책도 우리 수도원으로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값으로 세계는 지옥의 심연 언저리에서 기우뚱거리니 머지않아 이 심연이 인간의 무리 안에 자리할 것입니다. 호노리우스가 일찍이 내다보았지만, 지금의 우리가 고대의 인류보다 체구가 작듯이 미래의 인류는 지금의 우리보다 체구가 작을 것입니다. <세계는 늙어간다>라는 말로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소임을 맡겨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 교부들이 물려준 지혜의 보고를 관리하고, 거듭해서 고구하고, 이를 지킴으로써 심연으로 향하는 인류의 앞을 막고 나서는 일일 것입니다. 태초에 동방에 있던 사해 동포 정보가 그 뜻이 이루어질 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서진하는 것은 하느님 뜻입니다. 이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하느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작금의 사태로 미루어 이미 세계는 종말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복 천년이 올 때까지, 가짜 그리스도가 한순간 덧없는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하느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이르셨고, 교부들이 한 자 한 획도 틀림이 없이 이를 기록했고, 비록 어제오늘의 학계가 뱀굴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학자들이 주석을 놓아 왔던 하느님의 말씀과 기독교 세계의 보물을 지키는 사명은 우리 머리 위에 머뭅니다. 날이 저물고 있기는 하나 우리는 아직 지평선에 남은 횃불이며 등잔입니다. 이 수도원 장서관의 벽이 성한 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수호자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것은 그렇고, 이것과 장서관 출입 통제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윌리엄 수도사님? 이 엄장한 건물을 살찌우는 막중하고도 거룩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이 대목에서 수도원장은 수도사 독방 창에서 내다보이는, 교회 위로 불쑥 솟은 본관 건물을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 수 세기 동안이나 신심 있는 분들이 엄한 규칙을 고루 지키며 애써 왔습니다. 장서관은 수 세기 동안 외부로는 드러나지 않은 계획 아래 운영되어왔습니다. 수도사들은 알 도리가 없지요. 오로지 사서계 수도사만이 전임 수도사로부터 전수받습니다. 사서계는 살아 있을 동안에 보조사서에게 이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서계가 세상을 떠나도 장서관 운영의 비밀은 고스란히 다음 대로 전해집니다. 이 수도사들은 비밀을 누설할 수 없습니다. 서책의 내용을 알고, 서책의 미로 사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 어느 서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돌아온 서책을 어디에 꽂을지 아는 사람, 이 엄청난 장서를 안전하게 보관할 책임을 가진 사람은 오직 이 사서계 수도사뿐입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는데 이들이 혹 장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의 목록을 아는 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목록만 보고는 내용을 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서계 수도사만이 보관되어 있는 책의 위치로, 그 접근의 난이도를 통하여 그 책이 안고 있는 비밀이나 내용의 진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대출을 요구하는 수도사에게 그 서책을 내어 줄 것인지, 말하자면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다 사서계의 소관입니다. 혹간 저에게 물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라고 해서 모든 것에 다 유익한 것은 아니고, 허위라고 해서 모든 눈에 다 거슬리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사란 사자실에서 무엇을 쓰고 무엇을 읽든 하나도 틀림이 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자면 꼭 필요한 서책을 읽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적인 약점이나 자만심이나 악마의 꾐에 의한 바람직하지 못한 호기심에서 지켜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서관에는 허위를 기록한 위서도 있다는 것입니까?'
'악마는 신성한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존재하며 그 같은 악마의 추악한 모습 속에서도 창조주의 힘이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마법사가 쓴 책, 유대의 신비주의, 이교도 시인의 우화, 불신자들의 허언 역시 하느님 뜻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을 세우고 수 세기 동안 수도원 살림을 꾸려 온 분들은, 아무리 거짓을 기록한 서책이라도 현자의 눈으로 보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지혜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실답게 믿었습니다. 확고하고도 신성한 신념이었던 것이지요. 장서관이란 거짓을 기록한 서책까지 고루 실은 방주인 셈입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장서관을 아무나 드나들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수도원장은, 자기의 마지막 주장이 억지에 가깝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태도는, 그래서 그런지 기가 죽어 보였다.
'... 서책이란 참으로 튼튼하지 못한 물건입니다. 세월이 가도 삭아 버리고 좀이 슬면 해어지고 서툰 손에 걸리면 부서집니다. 수 백 년 동안, 누구든지 마음대로 들어가 우리의 귀중한 필사본을 만졌다고 한다면 지금은 상당수가 이 장서관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서관 사서계 수도사는 인간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서책을 지켜야 합니다. 그는 진리의 원수인 건망과의 전쟁에 삶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본관의 맨 위층에는 올라갈 수 없는 것이군요?'
수도원장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고, 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장서관은,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진리 그 자체처럼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그 안에 소장되어 있는 허위처럼 교묘하게 스스로를 지켜 냅니다.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인 것입니다. 혹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오는 것은 뜻 같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이 수도원의 이 같은 규칙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원장께서는 아델모가 장서관의 창 가운데 하나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델로 이야기가 시작된 곳일지도 모르는 장서관을 보지 않고 어떻게 이 사건의 가닥을 풀어나간다는 것입니까?'
수도원장은 애원이라도 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윌리엄 수도사님, 보시지 않고도 저의 말 브루넬로의 모습을 그려 내시고, 아무 이야기도 들으신 바 없이 아델모 사건의 정황을 상상할 수 있는 분이라면, 들어가 보지 않으셔도 그곳을 손바닥 보듯 하시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가사 머리를 조아렸다.
'원장께서는 현명하시면서도 엄격하십니다. 바라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현명하다면 그것은 엄격할 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우베르티노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 어르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성당에 가시면 만나 뵈실 수 있습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언제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셔야 합니다. 박식한 분이시기는 하지만 그분 역시 장서관에 대해서는 아시지 못합니다. 장서관을 속세의 유혹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소일하십니다.'
'근력은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세상사에는 오불관언입니다. 올해 예순여덟이시지요. 그러나 정신만은 소시적 그대로 카랑카랑할 것입니다.'
'지금 찾아가 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원장님.'
수도원장은, 가더라도 점심이나 하고 6시과 이후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으나 윌리엄 수도사는 점심 생각이 없다면서 바로 우베르티노를 만나겠다고 대답했다. 수도원장은 자리를 뜨기 위해 돌아섰다.
수도원장이 막 방문을 나서는데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 왔다. 치명상을 입었음직한 사람이 지를 법한 비명이었다. 비명은 몇 차례 계속되었다.
'무엇이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당황해서 물었다.
원장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돼지를 잡지요. 돼지치기들이 나선 모양이군요. 피는 피이되 어르신께서 관심 두실 피는 아닙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평판에 어울리지 않는, 경솔한 말을 한 셈이었다. 이유인즉 다음 날... 아니다, 나까지 경솔하게 주책을 부릴 일이 아니다. 다음날의 이야기를 잇기에는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6시과
교회는 뒷날 내가 슈트라스부르크, 샤르뜨르, 밤베르크, 그리고 파리에서 보았던 다른 교회만큼은 웅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탈리아에서 그전에 구경한 적이 있는 교회와 흡사했다. 이를테면 하늘을 향해 아찔할 만큼 솟아 있다기보다는 대지를 그러안고 있는 듯한 양식으로, 높이보다는 너비를 중시하는 경향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 건물 1층은 사뭇 달랐다. 정방형 흉벽이 연이어 있어서 요새를 방불케 하는 것이 다른 접이었다. 흉벽 위에는 또 하나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견고하기로 말하자면 첨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제2의 교회였다. 이 교회 지붕에는 역청칠이 되어 있었고 사방으로는 창이 인색하게 뚫려 있었다. 선조들이 프로방스와 랑그독에다 세운 것 같은 튼튼한 수도원 교회는 현대적인 건축 양식을 특징짓는 호방하고 화려한 장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대 양식은 최근 들어 훨씬 화려해졌는데, 내 보기엔 성가대석 위로 천장을 향해 불쑥 치솟은 첨탑이 그 일례일 것 같다.
열려 있는 정문 양쪽에는 곧고 밋밋한 두 개의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첫눈에는 거대한 하나의 아치 같았다. 그러나 이 기둥에는 각각 두 개의 나팔꽃 모양의 구멍이 나 있었다. 여러 개의 아치에 둘러싸여 있어서 별나게 시선을 끄는 이 구멍은 거대한 박공의 삼각 면에 덮여 있는 문, 즉 바닥없는 심연의 중심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박공의 삼각 면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홍예 받침대였는데, 이 받침대와 받침대 사이에는 무늬가 양각된 또 하나의 기둥이 있었다. 이 기둥 양쪽으로 금속 보강제를 쓴 참나무 문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시각이 시각이어서, 기가 한풀 꺾인 햇빛은 거의 수직으로 지붕을 쬐면서 박공의 삼각 면은 건드리지도 않고 비스듬히 정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두 개의 기둥을 지나고 보니 어느 틈에 흉벽을 떠받치고 있는, 작은 주열 위로 불쑥 솟은 무수한 아치 밑에 와 있었다. 눈이 그늘에 익자 다듬어진 석재가 내는 침묵의 소리라 들리는 것 같았다. 우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바라보면서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문외한들의 문헌이 아니던가). 순간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날 이때까지도 제대로 묘사하기 어려운 기묘한 환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하늘에서 만들어진 옥좌와 거기 앉으신 분을 보았다. 앉으신 이의 얼굴은 엄격하면서도 침착했다. 그는 두 눈을 화등잔같이 뜨고, 그 꼭대기까지 올라온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얼굴 주위와 가슴 위로, 사이 좋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머리에 쓴 관은 법랑과 보석을 넉넉히 들여 치장한 것이었고, 보라색 용포는 금은사로 자수한 것으로 무릎 위에서 넓은 단으로 접혀 있었다. 그분이 무릎에다 놓고 있는 왼손에는 봉인이 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분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려고 그러는지 징벌의 불길을 내리치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이 들려 있었다. 얼굴은 십자가와 꽃이 어른거리는 아름다운 광륜의 빛을 받고 있었다. 옥좌 주위, 그리고 앉으신 이의 얼굴 위로, 나는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무지개를 보았다. 옥좌 앞, 그러니까 앉으신 이의 발밑으로는 수정 바다가 넘실거렸고 앉으신 이의 주변, 말하자면 옥좌 옆과 위에서는 네 가지 무서운 형체를 보았다. 보고 있자니 몹시 겁이 났다. 앉으신 이에게는 더없이 유순하고 사랑스러운 추종자들일 터인 이들은 쉼 없이 앉으신 이를 찬양했다.
아니다. 모두 다 무서워 보였다고는 할 수 없겠다. 나의 왼쪽(그러니까 앉으신 이의 오른쪽)에 있던 이는 책을 한 권 내밀고 있었는데 내 보기에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성미가 온화할 듯했다. 그러나 반대쪽에는 놀랍게도 독수리가 있어서 등골이 오싹했다. 딱 벌린 부리, 흉갑 같은 깃, 무시무시한 발톱...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있었다. 앉으신 이의 발치, 즉 앞의 두 형상 아래에는 황소와 사자가 발로 책 한 권씩 그러쥐고, 옥좌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옥좌를 향하고 있었으며 어깨와 꼬리는 강렬한 충동 때문에 뒤틀린 것 같았고 옆구리는 긴장해 있었으며, 사자는 죽어 가는 동물의 다리 같았다. 입은 벌리고 있었다. 뱀 같은 꼬리는 꼬이고 뒤엉킨 채 불꽃의 혓바닥 속에 감겨 있었다. 두 짐승 모두 날개가 있었고 뒤에는 후광이 있었다. 꼴이 험상궂은 것과는 달리 이 네 형체는 지옥의 사자가 아닌 천국의 사자였다. 그들이 무서워 보이는 것은,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이를 증거하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좌 주위, 정확하게 말하면 네 형상의 옆, 앉으신 발치에는 마치 수정 바다의 투명한 물을 통과해 보이듯, 전 시야를 꽉 채우는 듯한, 3각면의 3각형 틀에 의해 장치된 기층부가 있었다. 처음에는 7 더하기 7미터 길이의 기층부에서 3 더하기 3, 급기야는 2 더하기 2미터 폭으로 솟아오른 기층부가 있었다. 박공의 삼각면 공간을 환상으로 가득 채우듯이 거대한 옥좌 양편에는 24개의 작은 옥좌가 더 있었는데 여기에는 흰 옷차림에 금관을 쓴 스물네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몇몇 노인들은 류트를 들고 있었고, 한 명은 향수병을 들고 있었으며, 단 한 명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 듯한 얼굴을 앉으신 이쪽으로 돌리고, 앉으신 이를 찬양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지는 모두 앞의 네 형상처럼 뒤틀려 있었다. 앉으신 이의 모습은, 사방 어느 쪽에서도 보일 수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법열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았다(다윗이 성약의 궤 앞에서 춤을 출 때도 그렇게 추었으리라). 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육신이라는 상식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건 시선은 항상 찬연히 빛나는 중앙의 옥좌를 향하고 있었다. 아, 기적적으로 육신의 무게에서 풀려나 새로운 질료와 양감으로 자유로워진 신비스러운 사지의 언어 안에서 자포자기와 충동과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은혜로운 자세가 빚어낸 오묘한 조화여! 이 신성한 악단은 흡사 일진광풍, 생명의 숨결, 환희에의 열광, 소리에서 형상으로 변용된 찬송의 기쁨에 들려 있는 것 같았다.
마디마디 성령이 깃들어 있고 구석구석 계시의 세례를 받은 몸, 경이로움에 길든 싱싱한 얼굴, 열의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 사랑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 환희에 젖은 동공... 환희로운 경이감에 사로잡힌 이가 있는가 하면, 경이로운 환희에 젖어 있는 이도 있었고, 기적에 의해 모습이 바뀐 이가 있는가 하면 천복의 은혜로 회춘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옷자락을 펄럭거리면서, 사지를 흔들면서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여 미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만은 똑같았다. 이 노인들 발치 아래, 그들의 머리 위, 옥좌 위, 그리고 4복음서 저자들의 형상 위에는 또 한 무리의 악단이 있었다. 장인은 이들의 형상을 빚되 상호 균형에 어찌나 충실했던지, 분명히 서로 달라 보이는데도 다른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요컨대, 형상의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되 통일된 분위기 속에서 다양성을 부여하고 각양이 각색이되 전체적으로 보아 하나의 질서 안에 특이한 형태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인데, 갖가지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된 부분을 조화시키고 서로가 내는 갖가지 다른 소리를 협화시키는 솜씨는 가히 신묘에 가까웠다. 한 무리의 치타 현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악단, 예사롭지 않은 저력으로 다의적인 악곡을 하나의 음조로 표출해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독려하는 듯한, 화기애애하면서도 서로 공모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 다양성을 단순화시키고 단순성을 다양화시킨 대상물의 장식과 구성, 천상과 지상의 법칙(평화, 사랑, 미덕, 정치, 권력, 질서, 근본, 삶, 빛, 영광, 종류, 형태의 안정된 유대)이 망라된 다정스러운 기법, 물질을 다루되 형태를 고루 빛냄으로써 거기에다 부연한 보편적 대등성,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꽃과 잎과 덩굴과 덤불이 두루 엉켜 있고, 천상과 지상의 동산을 꾸미는 온갖 본초, 이를테면 오랑캐꽃, 백리향, 백합, 쥐똥나무, 수선화, 토란, 나도엉거시, 아욱, 몰약수, 그리고 메카 발삼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내 영혼은 능히 천상적이라고 이를 만큼 아름다운 악단의 음악과 초자연적인 장엄한 표적에 길을 잃고 환희의 송가에 묻혀 방황하고 있었으나 내 눈은 노인들의 발치에 피어난 창가의 장미꽃 리듬에 따라 박공의 삼각 면을 떠받치고 있는 중앙 기둥에 인각된 무늬에서 떠나지 못했다.
무엇이었을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듯,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세 싸으이 사자가 전하려는 상징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들 사자는 뒷발을 대지에 박고 앞발로는 동료의 곱슬곱슬한 갈기를 그러쥔 채 포효하는 형태로 기둥의 몸체에 붙어 있었다.
이들 사자의 인각은, 악마적인 사자의 본성을 순치하여 보다 나은 존재로 변용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한 내 정신을 달래 주려는 듯, 기둥 옆에는 두 사람의 형상이 서 있었다. 기둥 높이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두 사람의 형상 말고도 두 개의 참나무 문 곁기둥인 홍예 받침대 양쪽에는 두 형상이 더 있었다. 이 네 형상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몸에 지닌 장신구로 미루어 나는 이 네 노인을 베드로와 바울로, 그리고 예레미야와 이사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춤이라도 추듯이 몸을 비틀며, 그들은 손가락을 날개처럼 활짝 벌린 채 길고 앙상한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날개 같기는, 예언의 바람에 흩날리는 그들의 수염과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긴 다리 때문에 발치까지 치렁거리는 그들의 옷자락은 생명을 얻어 출렁거리는 것 같았고 방향은 사자와 반대쪽을 향하고 있되 그 기세는 사자를 방불케 했다. 이윽고 이 성별된 사지와 몸서리치는 근골의 불가사의한 다성곡에 넋을 잃고 얼굴을 돌린 내 눈앞에서 감피 여기에다 형용할 수 없는 환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문 옆, 그리고 아치 밑, 때로는 흉벽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사이사이에, 그리고 기둥머리의 무늬에, 각 기둥에서 가지 쳐 임립한 곡부에 갖가지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런 형상이 그런 곳에 새겨진 연유를 이 형상이 지닌 비유적, 우화적 설득력, 혹은 도덕적인 교훈의 의미로 풀이해 보았다.
내가 본 것은, 발가벗기운 음녀였다. 살점 하나 없는 이 음녀는 두꺼비에게 빨리고 뱀에게 물리고 있는가 하면 빳빳한 털로 뒤덮인 장구배 사튀로스와 뒤엉켜 있었다. 사튀로스는 음녀와뒤엉켜 있으면서도 추악한 목소리로 음녀를 저주하고 있었다. 네 기둥을 호화롭게 꾸민 침대 위에 뻣뻣하게 죽어 있는 구두쇠도 보였다. 이 구두쇠는 악마 군단의 공격 앞에 무너지고 있었는에 그중의 악마 하나는 사자의 입에서 아이 모양의 영혼을 찢어 내고 있었다(다시 영생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나는 악마의 공격을 받고 있는 자만심이 강한 사내도 보았다. 악마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손톱으로 사내의 눈을 후벼 눈알을 파내고 있었다. 두 아귀가 일 대 일로 드잡이하면서 서로를 찢어먹는 광경, 화염 지옥에 빠진, 염소 머리에 사자 털, 표범 턱을 한 짐승 무리도 보았다. 화염의 숲에서 모든 수형자의 그을린 숨을 거의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주위, 머리 위, 발치 아래엔 수많은 얼굴과 사지가 보였다. 서로 머리채를 잡고 있는 남녀, 희생자의 눈알을 뽑아 먹고 있는 두 마리의 이집트 코브라,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 휘드라의 강장을 가르며 웃고 있는 사내, 한자리에 모여 왕관을 지키다 이윽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악마, 우화집에 나오는 갖가지 동물들도 보였다. 파운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레네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퓌아이, 인쿠부스, 용어무리, 미노타우로스, 시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뤼핀,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용,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 도마뱀, 쌍동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오시어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실 때를 기다리며 박송의 삼각 면에 앉으신 이 앞에서 우글거리는 이 지옥의 동물들, 하르마게돈의 패배자들은 모두가 절망의 황무지에 떨어질 영혼을 처단하기 위해 그렇게 우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친숙하게 버릇 들여진 곳이라고 생각했는지, 최후의 심판이 벌어질 저 무서운 계곡에 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광경에 정신을 거의 잃은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젊은 수련사로 공부하면서부터, 아니 성서를 처음 읽는 순간부터, 그리고 멜크 수도원에서 묵상과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익히 버릇들인 무서운 환상을 본 것 같았고 무슨 소리인가를 들은 것 같았다(아니면 실제로 들었던 것일까). 오감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절망 상태에서 나는 나팔소리만큼이나 우렁찬 소리를 들었다. 내용인즉, <지금 본 것을 기록하여라>라는 것이었다(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나는 일곱 개의 황금 촛대와 그 촛대 사이에 자리하신, 사람의 아들과 비슷한 분을 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황금 띠가 둘러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양털처럼 순백색이었으며, 눈은 불꽃과 같았고 발은 불타는 가마 속에서 하얗게 달아오른 놋쇠 같았으며 목소리는 어우러지는 물소리 같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일곱 개의 별을 잡고 있었는데 입안에서는 양날이 선 칼이 널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앉으신 이의 모습은 내 눈에 벽옥이나 마노로 보였다. 옥좌 뒤로는 무지개가 널려 있었고 천둥과 번개가 거기에서 새어 나왔다. 앉으신 이께서 낫 한 자루를 잡고 이르셨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낫을 들어 추수하십시오.>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니 땅이 버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본 환상은 바로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수도원장의 과묵한 입을 통해 들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건대, 그날부터 내 이 교회 문간으로 달려와 내 체험이 이 문간의 예언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무릎을 친 것이 무릇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저 측량할 길 없는 천상적 학살을 목격하기 위해 그 수도원으로 올라왔음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한겨울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때 내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내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목소리의 임자도 뜻밖이었다. 환상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아니라 땅 위에서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 소리가 내 환상을 깨뜨렸다. 그때까지 명상에 잠겨 있던 윌리엄 수도사(나는 그제서야 그분의 존재를 다시 의식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리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수도승은 분명하나 해진 범의 와 꾀죄죄한 행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걸승 같았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기둥머리의 인각에서 보았던 수도사들과 어딘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도반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악마를 대면한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혹 모월 모일에 악마가 내게 나타난다면, 나타나되 하느님 뜻에 따라 본디 모습을 숨기고 인간의 모습을 취한다면 이 순간 우리의 명상을 깨뜨린 틈입자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머리에는 털 오라기 하나 없었다. 그러나 참회하느라고 삭발해서 그런 게 아니고 과거에 못된 병을 앓았기 때문인 듯했다. 눈썹은 어찌나 검고 숱이 많은지 머리털이 있었더라면 맞붙어 버렸을 터였다. 눈은 둥글고 눈동자는 작았지만 그 시선이 순진해 보이는지 심술궂어 보이는지는 얼른 가늠할 길 없었다. 모르기는 하지만 나는, 순진해 보이면서도 심술궂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글세, 그런 것도 코라고 할 수 있을지... 코라고 생긴 것은 눈 사이에서 뼈가 잠깐 솟았다가는 금방 다시 가라앉으면서 구멍만 두 개 남겨 놓은 게 고작이었다. 꼴에, 휑하니 뚫린 콧구멍 안에는 코털이 더부룩했다. 코와 흉터 하나를 이웃해 있는 입술은 길쭉하고 흉했다.
왼쪽으로 조금 더 길게 찢어진, 있으나마나 한 윗입술과 두툼한 아랫입술 사이엔 개 이빨같이 날카롭고 시커먼 이빨이 들쭉날쭉하게 솟아 나와 있었다.
그 수도사는 싱긋 웃으며(적어도 나는 그가 웃었다고 믿는다) 설교라도 한 자루 하려는 듯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말했다.
'회개하라! 그대의 영혼을 쏠기 위해 공룡이 이 땅에 내릴 터인즉 회개하라! 죽음은 우리 위에 있으니 어이할꼬. 오시어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그리고 죄로부터 구하시도록 거룩한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하,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신술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니까 기쁨도 고통이고 쾌락도 고통이지.
악마를 조심할 일이다! 악마는 숨어서 기다리다가 뒤꿈치를 무는 법이다! 살바토레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좋은 수도원이며 여기는 식당이니 우리 주님께 기도할 일이다. 그 밖의 일은, 말라빠진 무화과만도 못하니. 아멘, 내 말이 틀렸는가?'
이야기를 들어 보았으니까 아셨겠지만, 이 괴상한 사람의 면면과 말투에 대해서는 뒤에 소상하게 소개하게 된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쓰려 해도 쓸 수가 없었다. 그가 쓴 말은 당시 수도원의 식자들이 흔히 쓰던 라틴어도 아니었고 라틴어권의 사투리도 아니었다. 요컨대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저 괴상한 말의 족보를 제대로 알 수 없었으니 여기에다 들은 그대로 옮겨 놓을 수밖에 없다. 뒷날,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산 여러 나라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살바토레가 모든 나라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은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는 나름대로 말을 하나 만들어 자기표현의 뼈대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거야말로 창세 적부터 바벨 탑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두루 쓴 아담 시대의 언어, 혹은 언어의 사분오열 뒤에 생긴 방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응징이 떨어진 바로 그날의 바벨 언어, 즉 혼란이 시작된 날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살바토레의 수작을 언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언어에는 규칙이 있으며 모든 용어는 합의된 불변하는 법칙에 따라 사물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약속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한때 개라고 부르던 놈을 고양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고, 사람들이 더불어 그 뜻을 정의하지 않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는 일도 없다. 그렇기는 하나 나는 이리저리 꿰어맞추어 살바토레가 한 말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던 것으로 안다. 그는 한 가지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도 여기에서 한 단어, 저기에서 한 문장씩 취하는, 이를테면 만국어를 하는 셈이었다. 뒤에 나는 그가 처음에는 라틴어로, 뒷부분은 프로방스 어로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기 자신의 문장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다른 문장의 흩뿌려진 파편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현재 상태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언제 어디에서 들었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곤 했다. 예컨대 음식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함께 그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자기도 몹시 흥겨웠다고 생각되던 자리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문장을 인용함으로써 자기 흥겨움을 나타내는 식이었다. 그의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에서 한 부분씩 떼어다 맞춘 것 같다는 의미에서 그의 얼굴과 흡사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성물함에서 가져온 보석으로 채워진 성보 상자 같기도 했다(위대한 것을 비속한 것에다 견주는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다면, 천상적인 것을 악마적인 것에 견주는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처음 만난 순간의 살바토레는, 외모로 보나 말하는 투로 보나 교회 정문의 인각에서 보았던 잡종적인 괴물 무리와 다르지 않았다. 훗날 나는 그 역시 착하고 다소 익살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는... 아니다, 이야기를 너무 앞질러 하지 말아야겠다.
각설하고, 살바토레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사부님께서 궁금했던지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회개하라는 말을 '페니텐치아지테'라고 하시는고?'
살바토레가 머리를 가볍게 조아리며 대답했다.
'주님을 섬기는 위대하신 수도사 어른, 예수께서 곧 오실 터인데, 사람은 회개해야 마땅하지요. 아닙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험악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소형제 수도회에서 온 게로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성 프란체스토 수도회에 있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를 자칭하는 무리도 알고 있으렷다!'
살바토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니, 시커멓게 그을린 험악한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고 해야 옳겠다.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다음,
'물러갑니다.'
하고 중얼거리고는 성호를 긋고 달아났다. 그는 달아나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사부님께 여쭈었다.
잠시 미간을 만지고 있던 사부님이 대답했다.
'별 것 아니다, 내 나중에 일러줄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우베르티노를 만나고 싶구나.'
제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창백한 햇빛이 서쪽에서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단도, 손바닥만한 넓이로나마 햇살을 받고 있었다. 제단의 앞부분이 금빛으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회중석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제단 앞, 회중석 오른편에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여기엔 성모가 양각되어 있었다. 현대식 기법으로 표현된 성모는 조그만 보디스가 달린 깨끗한 옷차림으로 아기를 안은 채 그윽하게 웃고 있었다. 성모의 발치에는 누군가가 부복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복색으로 보다 끌뤼니 교단 출신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부복하고 있던 사람은 발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대머리 노인이었다. 터럭 한 올 보이지 않는 반질반질한 얼굴, 크고 시원한 눈, 얇고 붉은 입술, 흰 살결... 살갗에 싸여 있는 그의 앙상한 머리통은 흡사 우유에 담갔다 꺼내 놓은 미라 같았다. 그의 손은 창백했고 손가락은 길었다. 가까이서 보니, 요절하여 말라비틀어진 처녀 같았다. 처음에 그는 법열 삼매를 방해받아 짜증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곧 밝아졌다.
'오, 윌리엄! 사랑하는 나의 형제!'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힘겹게 일어나 우리 앞으로 걸어와 사부님을 얼싸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윌리엄'을 외치는 그의 두 눈은 눈물로 반짝거렸다.
'...윌리엄,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그래도 내 그대를 알아볼 수는 있지. 흐른 세월이 짧지 않으니, 그간 있었던 일 또한 적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
그는 울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한참 뒤에야 그의 포옹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우리는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 수도사 앞에 선 것이었다.
나는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다. 심지어는 이탈리아로 오기 전에도 들은 적이 있고, 황실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교우하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자는, 근자에 세상을 떠난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인 피렌체의 단테 알리 기에리가 수많은 시편을 남겼지만(토스카나 속어로 씌어진 것이어서 나는 읽을 수 없었다), 그 중의 상당 부분은 우베르티노가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나무]에 쓴 시구에다 주석을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걸물을 소개하기에 이 정도 일화는 넉넉하지 못하다. 이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중부 이탈리아에 잠시 머물 동안 직접 이야기로 들었고, 함께 여행하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원장이나 다른 수도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우베르티노 수도사의 위인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간 내가 듣고 알아낸 바를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멜크에서 내가 섬기던 스승들은 종종 북유럽 사람에게, 이탈리아인들의 종교적, 정치적 부침을 명확하게 묘사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말하고는 했다.
성직자의 귄력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드세던 곳, 또 그 행사가 두드러지던 곳이던 이탈리아반도에서는 지난 2세기 동안 가난한 자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은 부패한 성직자들에게 성사 맡기는 것도 마다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독립된 지역 사회를 만들었으니 봉건 군주, 제국의 황제, 그리고 도시의 행정 장관들이 이들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이윽고 성 프란체스코가 나타나 교회의 계율과 모순되지 않는, 청빈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다. 그분의 이러한 노력이 있은 다음 교회는 부패한 성직자들을 질책하는 그분의 설교를 용인하고, 오손된 성직자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던 분열의 징후를 일소했다. 당연히 온순함과 신성한의 시대가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교세를 넓히고 눈 밝은 회중의 주의를 끌어감에 따라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그 세력을 지나칠 정도로 확대시켰고 그만큼 세속적인 일에 묶이게 되자, 많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인들은 종풍을 초장기의 그 순수하던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했다. 내가 수도원에 있을 당시 전 세계에 산재하는 수도회 수도자 수가 3만을 넘을 정도로 웃자라 있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였으니 이것은 이미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많은 수도사들은 수도회가 만든 회칙에 반대하는 한편, 세상을 개혁하러 이 땅에 태동한 교회 제도를 대표하는 것은 오직 수도회 자체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것은 성 프란체스코 생전에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의 언행과 구도적인 겨냥은 오래전에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수도사들은 주후 12세기 초, 시토 수도회의 수도사 요아킴이 쓴 책을 재발견하게 된다. 요아킴은 선지자로 칭송받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거짓 선지자 때문에 오랜 영락의 길을 걷던 그리스도의 정신이 새 세대에는 다시금 이땅의 빛으로 찬연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누가 읽어 봐도 그 뜻이 자명한 한 미래 종파의 출현을 예고했는데, 그라 말하고 있던 종파가 바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였다. 당시, 세기 중엽에 소르본느 학자들이 요아킴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나서던 참이어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은 이 예언을 크게, 혹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겼다. 소르본느 학자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비난하고 나선 까닭은 이 수도회(그리고 도미니크 수도회)가 파리 대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소르본느 학자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그리고 도니미쿠스 수도회) 학자들을 이단으로 몰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교회 쪽으로 보아서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이 일에 이어 교회는, 누가 보나 이단이 아님에 분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바뇨레지오의 보나벤투라의 저서를 배포하게 했다. 이즈음 파리에서도 종교적 이념 논쟁의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생각이 있어서 이런 혼란을 야기시켰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교 이념 논쟁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네 이념을 지키는 종교 재판의 조사관이 되라고 부추김으로써 기독교인을 괴롭힌 이단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이들이 그런, 악마에 견주어질 만한 자들이었다. 당시 나는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망하며, 종교재판의 조사관들이 이단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조사관들은, 있지도 않은 이단자를 상상할 뿐만 아니라 이단 쪽으로 약간 기운 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함으로써 실제로 저쪽으로 돌아서게(이단 심판관에 대한 증오 때문에)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거야말로 악마가 고안한 악순환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아킴 일파의 이단(실제로 그랬다면) 이야기가 옆길로 나가고 말았다. 각설하고, 토스카나의 보그로 산 도니노에는 제라르도라고 하는 한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있었는데 이 제라르도는 요아킴의 예언을 상기시킴으로써 소형제 수도회 수도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 수도사들 가운데서 옛 회칙을 지지하는 무리가 나타났다. 보나벤투라가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재조직하고 수도회 우두머리가 된 데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다 12세기 말, 그러니까 1170년대부터 리용 회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불법을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수도회를 지키고, 사용 중인 모든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했다(당시 이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케의 몇몇 수도사들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사유든 수도원 소유든 교단 소유든 일체의 재산 소유가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회칙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반기를 들었던 수도사들은 종신형을 받고 투옥당했다. 그들이 교리에 어긋나게 설교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속적인 재산 소유가 문제로 제기될 경우 인간이 여기에 줄거리를 타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뒷날 듣기로는, 교단의 새 지도자 라이몬도 가우프레디가 앙코나 감옥에 수감된 이들을 발견하고 모두 방면하면서,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그런 죄악이 묻어 있지 않은 인간이나 교단은 없다'고 했다 한다. 이단자의 말을 변호하지 않으면서도 미덕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방면된 수도사 중에 안젤로 클라레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프로방스에서 온 수도사 페이르 올리외와 만났고, 올리외 수도사는 요아킴의 예언을 전파하는 가운데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와 만났다. 엄격주의파 운동은 이렇게 해서 태동한다. 이즈음 참으로 고고한 은자인 모로네 사람 피에트로가 대관하는데 이분이 곧 켈레스티누스 5세이다. 엄격주의파에서는 이분의 등장을 크게 환영했다. 그들은 이르기를, '성자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천사의 길을 가실 것인즉, 두고 보자, 썩은 목자들아!'라고 했다.
천사의 길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는지, 주위의 성직자들이 너무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교황 켈레스티누스는 황제와 유럽의 제왕이 반목하면서 생겨난 그 엄청난 긴장을 견뎌내지 못했다. 교황 켈레스티누스는 관을 벗고 다시 은자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 년이 채 못된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엄격주의파의 희망은 성취된 셈이었다. 그들은 켈레스티누스를 찾아갔고, 켈레스티누스는 이들과 더불어 [은수사 켈레스티누스의 가난한 형제들] 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한편 교황은 로마의 막강한 추기경들의 중재자 노릇을 맡고 있었는데 이 추기경들 가운데엔 콜로나 추기경, 오르시니 추기경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은밀하게 이 무소유 탁발 운동을 지원했다. 부와 사치를 두루 누릴 수 있는 실력자들로서는 미묘한 선책을 한 셈이었다. 이들이 단순히 정치적 목적 때문에 엄격주의파를 지원했는지, 아니면 엄격주의파를 지원함으로써 자기네들의 세속적인 영달을 합리화하려고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로 짐작컨대, 두 가지 견해가 다 합당할 듯하다. 추기경이 엄격주의파를 비호한 예를 한 가지 들자면, 우베르티노와 오르시니 추기경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르시니 추기경은 우베르티노가 엄격주의파 안에서 최강자로 나서자 그를 정식 대표자로 치인했다. 우베르티노는 뒷날 이단자로 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전도에 힘을 쏟았고, 막상 이단자로 몰렸을 때는 추기경이 몸소 나서서 아비뇽에서 그를 변호했다.
당연히 안젤로와 우베르티노는 교리에 따라 전도를 계속했고, 엄청난 수에 이르는 평민들은 이들의 선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갖가지 제재와 박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교리를 확장시켜 갔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는 소형제 수도회의 탁발승 천지가 되었지만, 이들을 위험한 수도승 무리로 본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교단 당국이 인가한 엄격주의파 사제들과 무소유로 탁발을 일삼으로 교회의 행정 체계와는 무관하게 사는 일반 교인을 구별할 길이 없었다. 이런 일반 교인이 바로 <프라타첼리>, 즉 소형제 수도회 탁발승들인데, 삐에르 올리외의 영향을 받고 생겨난 프랑스의 <베가르>, 즉 반승 반속 수도사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켈레스티누스 5세에 이어 교황에 오른 분은 보니파티우스 8세인데, 이분은 즉위하자마자 엄격주의파 수도사들과 소형제 수도회 탁발승 무리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2세기가 저물어 갈 즈음, 그는 교황 회칙 <피르마 카우텔라>를 발표, 일거에 반승 반속의 탁발승, 프란체스코 교단 말단에서 얼쩡거리는 떠돌이들, 그리고 교단생활을 떠나 은자로 돌아간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보니파티우스 8세 사후, 엄격주의파는 누차 복권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히 좌절되다가 클레멘스 5세에 이르면서 이 교파를 방관하라는 회칙이 내려지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이 교파의 복권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만일 요한 22세가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이 교파는 크게 빛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 33세의 출현은, 적어도 이들에게는 희망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전기였다. 1316년 교황으로 선임된 요한 22세는, 시칠리아 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곳에 몸붙이고 있던 수도사들을 깡그리 몰아낼 것을 요청했다. 그는, 여기에서 철퇴를 거두지 않고 안젤로 클라레노와 프로방스의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감옥으로 옭아 넣기까지 했다.
만사가 누구에겐들 여의할까? 각 지역에서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속출했다. 그 결과 우베르티노와 클라레노는 교단 이탈 허가를 얻고, 전자는 베네딕트 수도회고, 후자는 켈레스티누스 은자들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뜻을 어기고 자유로운 삶을 고집하는 자달에게는 가차가 없었으니, 조사든으로 하여금 이들을 박해하게 하는 한편 상당수를 화형주에 매달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한은, 교회의 귄위를 바닥째 위협하는 이 탁발승 무리의 뿌리를 자르려면 이러한 믿음이 뿌리를 대고 있는 이론적인 바탕을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론가들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에게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으로든 소유한 재산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교황은 이런 믿음 자체를 이단으로 몰았다. 그리스도가 가난했다는 믿음 자체는 이단으로 몰고 싶어도 몰 근거가 희박했으나 교황으로서는 입장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1년 전, 페루지아에서 나온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헌장이 이러한 믿음을 지지하고 나선 터여서 교황으로서는 입장이 더욱 궁색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헌장은, 황제와 싸우고 있는 교황 자신의 입장을 크게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때문에 교황은, 황제가 무엇인지 페루지아 헌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탁발승들을 무수히 태워 죽였다.
이상이, 우베르티노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앞에 두고 내가 떠올린 생각이고 그에 관한 내력이다. 사부님이 나를 소개하지 이 노인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타는 듯이 뜨거운 손이었다. 그의 손을 촉감하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들어 왔던 그의 행적,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 나무]에서 읽었던 내용을 온전하게 납득했다. 나는, 파리에서 공부했지만 신학적인 사색을 그만두고, 갱생한 막달레나로 거듭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정도로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신비의 불꽃을 이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신비주의적 삶과 십자가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이끈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와 그와의 질긴 관계, 그리고 설교하는 열도에 놀란 교단이 피신시킬 겸 그를 라 베르나 수도원으로 보낸 까닭도 이해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 모습은, 그와 형제가 되어 심오한 심령의 사상을 주고받은 성녀의 얼굴처럼 다정스러워 보였다. 1311년 비엔느 총회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고위 성직자들을 사주하여 엄격주의파를 박해하는 한편, 온건책으로 자유롭게 살게 하되, 회칙에서는 벗어나지 말기를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투사 우베르티노는 약삭빠른 절충안을 거부하고 극도로 엄격한 교리를 바탕으로 한 별개의 교파를 고집하면서 그들과 싸웠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과연 투사라는 별명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위대한 투사도 싸움에서는 패배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삐에르 올리외의 추종자들(우베르티노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에 대한 반격 세력을 옹호하는 한편, 나르본느와 베지에의 수도사들을 매도했다. 그러나 우베르티노는 교황에 대항하여 친구의 추억을 지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서슬에 기가 죽은 요한 22세는 다른 사람들을 매도하는 데는 망설이지 않으면서도 우베르티노의 이름만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 뿐인가. 교황은 그에게 자구책을 세워 주는 뜻에서 처음에는 좋은 말로 달래어 보다가 급기야는 끌뤼니 수도원으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우베르티노는 기진해 있었다. 그는 투사는 투사이되 강골 투사는 못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교황청에서 보호자나 협력자를 찾아내는 재주는 있었던 모양이다. 우베르티노는 협력자들을 통한 절충을 거쳐 플랑드르의 젬블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간 곳은 젬블르 수도원이 아니었다. 그는 오르시니 추기경의 비호를 받으며 아비뇽에 남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래 아비뇽에 머물 수 없었다. 교황청에서 빛나던 그의 성호 성좌의 빛이 날로 바래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황이 방랑자처럼 세상을 떠도는 이 백절불굴의 사나이를 이단자로 규정, 그 뒤를 쫓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소문의 근거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교황이 손을 쓰려고 했을 때 우베르티노는 이미 아비뇽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러던 우베르티노를 나는 그 수도원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설적인 사나이 우베르티노는 바로 그 수도원에 몸붙여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 앞에 선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사부님 앞에서 울먹였다.
'윌리엄, 그자들이 나를 찾아 죽이려고 했네, 그래서 밤을 도와 도망쳤던 것이네.'
사부님은 그의 손을 잡은 채 반쯤은 다정하게, 반쯤은 힐난하는 어조로 물었다.
'누가 죽이려고 했나요? 요한인가요?'
'아니... 나를 좋아한 적은 없어도 요한은 나를 경원했네. 미우나 고우나, 10년 전에 날 베네딕트 수도원에다 처넣어 내 정적들의 입을 막고, 불리한 재판을 면하게 해 준 사람도 바로 요한이네. 내 정적들은 저희들끼리 쑥덕공론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나같이 가난한 투사는 재산 많은 수도원으로 보내거나 오르시니 추기경의 관사에서 살게 해야 한다나. 윌리엄,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본래 세간사라면 아무 욕심이 없는 사람이네만, 아비뇽에 남아 내 형제들을 지키려니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교황은 오르시니 추기경을 두려워하니까 거기에 몸붙이면 아무도 내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못할 것이거든. 그런데 3년 전에 오르시니 추기경은 아라곤 왕에게 보내는 사신으로 나를 보냈네.'
'대체 해치려고 하던 자들이 누굽니까?'
'모두 다. 특히 교황청 무리들이 그랬고. 암살 기도가 두 번이나 있었다네. 내 입을 막고 싶었던 게지. 5년 전 일을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네. 나르본느의 탁발승 무리는 그보다 2년 전에 이미 도마 위에 올랐고, 베렝가리오 탈로니는 재판관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도 교황에게 탄원했던 것이네. 아주 어려웠던 시절이었네. 요한은 이미 엄격주의파를 때려잡을 회칙을 둘씩이나 준비하고 있는 중이고, 체제나의 미켈레는 손을 들었고. 그렇거니 미켈레는 언제 오는가?'
'한 이틀 있으면 올 겁니다.'
'미켈레... 이 사람과 나와는 오래 격조했네. 이제 정신이 들었을 테니 우리가 바라던 게 뭔지, 페루시아 헌장이 왜 우리를 복권시켰는지도 알고 있겠지. 그러나 1318년에 이 친구는 교황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교황에게 저항하는 프로방스의 엄격주의파 수도사를 다섯이나 교황 손에 넘겼다네. 윌리엄... 모두 화형을 당했네. 목불인견... 끔찍한 일 아니던가...'
노인은 두 손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탈로니가 탄원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한은 공청회를 다시 열어야 하게 되었네. 열지 않을 수가 없었네. 교황청 안이라고... 의심 많은 자가 없으라는 법이 없으니.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속해도 교황청에 있는 자들은 성직록을 먹기 위해서는 저 자신까지 팔아먹을 바리새인이며 화칠한 무덤이라네. 그러니 의심 많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요한이 나에게 빈자 구휼 청원서의 재고를 종용한 것도 이즈음이었네. 명문이었는데.. 내 부러진 자존심이여, 하느님 용서하소서.'
'읽어 봤어요. 미켈레가 보여 줍디다.'
'우리 쪽에도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었네. 가령 아끼뗀느의 대주교, 산 비탈레의 추기경 카파의 주교 같은 사람들이...'
'카파 주교? 그 멍청이가 말안가요?'
'명복이나 비세. 2년 전에 하느님께서 수습해 가셨다네.'
'하느님이시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다 자비를 베푸시는 게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넘어온 보고서는 가짜였어요. 그자는 아직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곧 사절단의 일원이 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 팔자가 어째 이 모양입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페루지아 헌장에 동의한다는데...'
'암요, 적군의 투사가 되기를 놓아하는 족속에 속하니까요.'
'사실 말이지만, 그때도 그 사람이 우리 거사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네. 결국 무산되고 말기는 했지만, 그 이념 자체가 이단으로 판정되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중요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일세. 그래서 더 더욱 사람들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네. 그자들은 나를 해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황제가 요한을 이단으로 몰 당시에는 내가 작센하우젠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더군. 그러나 내가 그해 7월에 오르시니 추기경에게 몸붙인 채 아비뇽에 남아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네. 그자들은 황제의 포고문에 반영된 내 생각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지. 이게 다 무슨 미친 수작들인지...'
'다 미쳤던 것은 아니지요. 내가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줬던 겁니다. 당신의 아비뇽 선언문과 올리외의 저서 몇 군데에서 뽑아내어 보여 줬던 겁니다.'
'그대가 말인가?'
우베르티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대는 나와 뜻이 같지 않았던가?'
윌리엄 수도사는 약간 당혹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정면에서 살짝 비켜서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시로 봐서는 황제 쪽으로 유리한 사정이었으니까요.'
'그대가 그들을 믿은 것은 아닐 텐데?'
'그건 그렇고... 그래, 무슨 수로 그 주구들 손에서 목숩을 부지할 수 있었지요?'
'암, 그대 말이 옳으이, 주구들이었고말고. 주구라도 여느 주구들이 아니었네. 그대들 혹 아시는가? 좌충우돌하다가 보나그라치아와도 얼굴을 붉혔다는 걸?'
'보나그라치아는 우리 편이 아니던가요?'
'지금은 그렇지. 내 설교 들은 뒤로. 당시에는 대가리가 헛 여물어 가지고, 회칙의 창시자에게를 상대로 핏대까지 올렸다네. 교황은 이 친구를 감옥에 처넣어 일 년은 좋이 썩혔고.'
'들리기로는, 지금 교황청에 있는 내 친구 오캄 사람 윌리엄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고 합니다.'
'오캄의 윌리엄이라는 사람, 나는 조금밖에 몰라.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뜨거운 데가 없어. 가슴은 없고 대가리만 있는 위인, 바로 그런 위인이 아닌가 하네.'
'하지만 그 대가리라고 하는 게 아주 쓸 만합니다.'
'암,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갈 거고.'
'지옥에 내려가면 만나겠군요. 만나면 한번 따져 보지요. 그것 때문에 지옥으로 내려온 게 사실이냐고...'
'윌리엄 이 사람! 그대는 우리들 주위의 철학자들보다 나아. 그대에게 그럴 생각이 있기만 하다면 말이지만...'
'무슨 말입니까?'
'움브리아에서 우리 처음 만나던 당시의 일이 생각나는가? 나는 당시... 그 누구야, 그 놀라운 여자의 대원으로 미양을 치료하고 있었지. 누구였더라... 그래, 몬테팔코의 키아라였네. 키아라. 마라라고 하는 여자의 속성도 성성으로 정화되기만 하면 능히 은혜를 나르는 수레 노릇을 할 수 있는 법일세. 윌리엄, 순수 무구한 동정이 내 삶을 얼마나 빛나게 했는지 그대 아는가? 어디 대답을 한번 해 보게. 암, 나는 알지. 내 육신의 동계를 잠재우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사랑 앞아서 자신을 비우려던 내 고행이 얼마나 뜨거운 용맹정진이었던지, 그래 용맹정진이라는 말 제대로 찾았네. 그대는 알아. 그러나 어쩔꼬. 살아오면서 내가 만난 세 여자는 하늘에서 온 심부름꾼이었네. 폴리뇨 사람 안젤라, 치타 디 카스텔로 사람 마르게리타(이 사람은 내가 겨우 3분의 1을 썼을 때 이미 내 책의 결론을 알았네), 그리고 몬테팔코의 키아라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심부름꾼들이었네. 키아라의 기적을 조사하고 성모님 교회 앞의 대중 앞에서 그 성성을 밝히는 내 소임은 하늘에서 받은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윌리엄, 그대도 거기에 있었지 아마? 그대가 내 성사를 도울 수도 있었네만...'
'그렇지만 당신이 도와 달라던 그 성사라는 게 벤티방가, 야코모,, 지오반누치오를 화형주에 매다는 일이 아니었던가요? 세상에, 도울 일이 따로 있지...'
'이자들이 키아라의 추억에다 때를 묻히지 않았던가? 그대는 이런 자를 능히 화형주에 매달 수 있는 종교 재판의 조사관이었고...'
'마침 내가 그 자리에 신물이 나서 의원 해직을 요구하고 있을 때가 아니던가요? 그래요, 마음에 안 듭디다.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이 벤티벵가를 꼬드겨 잘못을 자백하게 하는 그런 방법도 싫었고. 그걸 교단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 합류하고 싶어하는 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비밀을 캐내어 가지고는 그자를 고발했던 거 아닙니까? 세상에...'
'그리스도의 원수를 잡아내는 데 다른 방법이 또 있던가? 그자들은 이단자들이었네. 가짜 사도들이었네. 돌치노 수도사의 유황 냄새를 피우지 않았던가?'
'그래도 키아라의 친구들이었어요.'
'큰일날 소리! 윌리엄, 결단코 키아라의 추억에 한 점 의혹의 그림자를 던져서는 아니 되네.'
'어쨌든 그들과 키아라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아요?'
'그자들은 자칭 소형제 수도회에 속하는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이었지만 사실은 세간의 수도자들이었네. 종교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구비오의 벤티벵가는 스스로 사도를 참칭했고 지오반누치오와 공모하여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있지도 않고, 육욕이 반드시 하느님을 진노케 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주여, 용서하소서)은 한 남자와 수녀의 동침으로도 받을 수 있고, 주님 보시기에 막달레나는 처녀 아그네스보다 나았으며, 악마는 지식이고 신 역시 정의하건대 지식이니, 사람들이 악마로 부르는 것이 신 자체라는, 당치 않는 망발로 수녀를 유혹하지 않았던가? 하느님께서 환상을 보이시어, 이자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사악한 추종자들임을 일러주셨으니, 이 영광을 입은 이가 바로 이 당치 않은 말을 들었던 우리 축복받은 키아라가 아니었던가?'
'소형제 수도회 수도사들의 마음 역시 키아라가 본 환상과 같은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지요. 법열의 환상과 사악한 광란은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베르티노는 다시 윌리엄 수도사의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은 다시 눈물로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말 마시게, 윌리엄 형제. 어째서 그대는 뇌수를 향과 함께 태우는 저 법열의 순간과 유황 냄새가 나는 오감의 광란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는가? 벤티벵가는 사람을 꼬드겨 제 사지의 맨살을 만지게 했네. 이자는 이것을 오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네. 벗은 사내가 벗은 여자 옆에 누워...'
'허나 나눌 것은 나누지 않고 ... 그러나 이와는 관련이 없어요.'
'망발일세! 그자들은 쾌락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그걸 찾았네. 육체적인 충동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눕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육신을 구석구석 만지고 입 맞추고 이윽고 벗은 배와 벗은 배가 서로 맞기만 한다면 그것을 죄악으로 생각지 않았네!'
솔직하게 말해서, 우베르티노가 다른 이들의 악덕을 비난하는 것은 나의 도덕적 사고에 영감을 주지 않았다.
사부님은 내가 흥분하고 있는 걸 눈치챈 듯이 서둘러 노인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베르티노, 당신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도 뜨겁더니 죄악을 증오할 때도 그에 못지않게 뜨겁군요. 내 말은, 양자가 공히 의지의 극단적인 발화 상태에서 유래하는 것이라서, 세라핌에 대한 사랑이나 루치페르에 대한 사랑이나 그게 그러라는 겁니다.'
'이 사람아, 차이가 있네. 나는 알아. 그대는, 의지 작용의 방향을 문제 삼아 선에의 갈망과 악으로의 치우침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모양인데, 이건 옳아. 그러나 대상은 달라. 대상은 누가 보아도 다르네. 하느님은 이쪽, 악마는 저쪽일세.'
'우베르티노,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네요. 어느 날 이녁의 영혼이 어디론가 둥둥 떠가길래 정신을 차려 보았더니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 있더라고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말하는 폴리뇨의 안젤라 아니었나요? 안젤라가 당신에게 뭐랍디까? 처음에 가슴에다 입 맞추고 보았더니 예수님은 눈을 감고 계셨고, 입술에다 입 맞추었더니 입술에서 향기가 났고, 조금 있다가 예수님 뺨에다 제 뺨을 갖다 대었더니 예수님은 제 뺨을 지그시 당겼고... 그래서 참 좋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오감의 충동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안젤라의 경우는 신비 체험이었네. 그 몸은 바로 우리 주님 몸이었고.'
'내가 옥스퍼드 물을 너무 먹은 건가? 옥스퍼드 사람들은 신비 체험 역시 일종의...'
'역시 대가리뿐이로군.'
우베르티노는 짓궂게 웃었다.
'눈은? 하느님은 빛으로도 나타나시지요. 햇빛으로, 거울에 나타난 형상으로, 가지런히 늘어선 질료 위에서 일어나는 색깔의 확산 현상으로, 젖은 잎새 위에 비친 대낮의 형상으로... 이 사랑이야말로 꽃, 풀, 물, 공기 같은 피조물로 하느님을 찬양한 프란체스코의 사랑에 가깝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 올가미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의심스럽기는, 전능하신 분과의 대화가 된다는 그 사랑 쪽이랍니다.'
'이런 독신자 같으니! 이 사람아, 그건 달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법열과 몬테팔코의 가짜 사도들이 체험하는, 썩어빠진 무아지경 사이에는 심연이 하나 가로놓여 있네.'
'그 사람들이, 어째서 가짜 사도들이오? 자유 정신을 소유한 형제들이라고 당신 입으로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대는 그 재판 과정을 샅샅이 들은 바 없고, 나는 키아라가 그곳에 채워 놓았던 신성한 분위기에 한순간이라도 악마의 그림자가 지나갈까 봐 그자들의 자백을 기록해 놓을 수가 없었는데. 윌리엄, 그러나 나는 알았네. 분명히 알았네. 그자들은 밤이면 지하실에 모여 갓난아이 하나를 공중으로 던지고 받고 했다네. 아이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리하였다네... 이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산 아이를 마지막으로 받은 자, 아이가 죽는 순간에 받은 자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네. 그자들은 아이의 시체를 찢어 밀가루에 버무렸네. 그걸로 독신군을 만든답시고 산 아이를 그렇게 했다고 하네.
'우베르티노!'
우베르티노의 이름을 부르는 윌리엄 수도사의 음성에는 노기가 차 있었다.
'이건 수 세기 전부터 아르메니아 주교들이 파울리치아 교파를 경계하면서 써먹은 이야기가 아니던가요? 그리고 보고밀파에 대해서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악마의 고집이 어디 여간 세던가? 악마에게는, 유혹할 때나 올무에다 걸 때나 단골로 쓰는 수작이 있다네. 천년 세월이 흘러도 악마의 의식은 변하지 않아. 우리가 악마를 쉬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네. 내 서원을 세우고 하는 말이네. 놈들은 부활절 밤에 촛불을 밝히고 처녀들을 잡아다 지하실로 끌고 들어가네. 그리고는 촛불을 끄고, 무슨 질긴 인연의 줄에라도 묶인 듯이 처녀에게 달려드네... 그러다 처녀에게서 아기라도 태어나려면 지옥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모두 포도주 통 가에 둘러앉아 취하도록 마시고는 아기를 벤다네. 피는 술잔에 쏟고, 아기의 육신은 산 채 불길 속으로 던지는데... 놈들은 아기의 피와 재를 섞어... 둘러 마신다네.'
'미켈리 프셀로가 3백 년 전에, 악마의 축제를 소상하게 소개하느라고 써먹은 이야기가 아닌가요?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었어요?'
'놈들이 그러더군. 벤티벵카 일파가... 고문에 못 이겼는지...'
'동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쁨보다 유효한 게 딱 하나 더 있지요. 바로 고통이랍니다. 고문을 당하면 몽환 약초를 먹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고문을 당하면, 어디서 들었던 것, 어디에서 읽었던 게 고스란히 머리에 떠오르지요. 흡사 천당이 아닌 지옥으로 실려 가고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고문을 당하면, 조사관이 알고 싶어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사관을 기쁘게 할 만한 것까지 모조리 말하게 됩니다. 고문당하는 자와 고문하는 자 사이에 어떤 유대(이거야말로 악마적인 유대가 아니겠어요)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우베르티노, 나는 알아요. 하얗게 단 쇠붙이로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서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알아 둬야 합니다. 자백을 강요하는 그 쇠붙이는 바로 강요하는 자들의 불길에서 달구어졌다는 것을... 고문을 당하면서 벤티벵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는지도 몰라요. 왜냐? 말하고 있는 것은 벤티벵가가 아니라 벤티벵가의 열망, 즉 벤티벵가의 영혼 안에 자리 잡은 악마였을 테니까요.'
'열망이라?'
'그래요, 사랑에의 열망, 겸손이라는 미덕에의 열망이 있듯이 고통을 향한 열망도 있는 법입니다. 반골에게는, 허영과 저항을 향한 신앙과 겸손의 미덕도 있는 법이지요. 이것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제야 아셨겠지요? 조사관 시절에 나를 괴롭혀 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그래서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고 만 것이랍니다. 내게는 사악한 자들의 약점을 조사해 낼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우베르티노는 기가 막혀서 그랬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이 잘 안 가서 그랬는지 가만히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러나 노인의 표정에 연민과 애정이 어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윌리엄 수도사가 책잡힐 궤변을 농하고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우베르티노는 격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네. 그대 느낌이 그랬다면, 아니 그랬기 때문에 이야기는 이쯤 해두는 게 좋을 성싶네. 유혹이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지 분석의 대상은 아니라네. 그대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네만 우리는 그 반골의 뿌리를 뽑을 수 있었네. 내가 이단의 의심을 받은 것은 그대도 알잖는가? 그들을 사려 깊게 대한 것이 오히려 나의 허물이 되지 않았던가? 윌리엄, 그대 역시 악마와 싸우기에 넉넉할 만큼 튼튼하지는 못하네. 그래, 나는 악마라고 했네. 악마에 대한 단죄, 이 오욕의 수렁, 이 음영이 뿌리째 일소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성한 원천에 이르지 못할 걸세...'
우베르티노는 누가 엿들을 게 두려운 듯이 사부님 앞으로 바싹 다가와 말을 이었다.
'...여기에도... 기도자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성별하신 이곳에도 악마는 있을 것이네.'
'알고 있어요. 원장이 한 말이 있으니까. 원장은 나더러 그걸 그늘에서 날빛으로 좀 끌어내라고 합디다.'
'그럼 관찰하고 조사하게. 살쾡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게.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 찬 언필칭 이 은혜로운 수도원을...'
'욕망이라니요?'
'암, 욕망이지. 죽은 젊은이에게는 뭐라고 할까... 여성적인... 그래서 악마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네. 그 친구의 눈은 인쿠부스를 기다리는 처녀의 눈 같았다네. 지적 허영. 이 수도원 안에서는, 지혜의 환상을 겨냥한 언어에 대한 허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아는 게 있으면 좀 도와주시지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허나 내 가슴은 무엇인가를 감지하지. 가슴으로 말하고 얼굴에 묻되, 남의 혀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게... 아니, 왜 우리가 이런 우중충한 이야기로 그대가 데리고 온 이 젊은 친구를 겁주고 있는게지?'
그는 파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그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물러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썩 잘한 일 같았다. 그의 의도는 순수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사부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그대 이야기나 좀 들려주게. 그동안 뭘 했는가? 가만 있자... 얼마나 되었다라?'
'18년이나 되었군요. 고국으로 돌아가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좀 했지요. 자연 공부를요.'
'좋지. 자연도 하느님의 딸이 아니던가.'
'하느님은 역시 참 좋으신 분이지요, 자연을 낳으셨으니...'
사부님은 이녁 농담에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공부하면서 눈 밝은 사람들을 좀 만났지요. 마르실리오라는 사람도 사귀었는데, 제국과 신민, 그리고 이 땅 왕국의 새 헌법에 대한 그 사람 생각이 퍽 마음에 듭디다. 어쨌든 공부를 마치고 나서 황제를 자문하는 무리에 끼게 되었지요. 편지를 쓴 적이 있으니까 이건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보비오에서,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반갑더군요, 영 종적을 감춘 줄 알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그렇습디다. 이제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날 좀 도와주세요. 미켈레도 미구에 올 겁니다. 베렝가리오 탈로니와의 싸움은 심상치 않을 조짐이 보여요. 아마 재미있을 겁니다.'
우베르티노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사부님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어느 세월이 되어야 영국인들이 말을 좀 진중하게 할꼬. 이 사람아, 문제가 이 지경인데 재미있을 사이가 어디 있는가? 교단의 운명이 화형주에 걸려 있지. 그대들 교단 아닌가? 내 그대에게 말하네만 이건 내 교단이기도 하고 그대 교단이기도 하네. 하지만 나는 미켈레를, 아비뇽으로는 못 가게 할 요량이네. 요한은 미켈레를 부리고 싶어 줄창 졸라대는 판국이네. 하지만 저 프랑스 늙은이를 믿으면 못써요. 아이고, 주님, 주님 교회는 대체 어느 놈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것입니까?'
그는 제단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 사치와 허영에 골병이 들어 사창가로 변해 버린 이놈의 교회는 불 맞은 배암처럼 자반뒤지기를 하고 있나이다. 십자가가 그랬듯이 나무로 된 베들레헴의 순수 무구한 구유는 주신제의 금준 옥반이 다 되고 말았습니다. 윌리엄, 그대 교회로 들어오다가 보았지? 형상의 허영에 빠지면 약도 없네. 가짜 그리스도의 날이 목전에 왔는데, 나는 그게 두렵네.'
그는 가짜 그리스도가 들어와 자기를 노려보고 있기나 한 것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회중석을 둘러보면서 하던 말을 계속했다.
'... 가짜 그리스도의 사자는 이미 여기에 와 있네. 그리스도가 세상으로 사도를 보냈듯이 가짜 그리스도의 사자도 그렇게 온 것일세. 이 사자들은 사기와 위선과 폭력으로 꼬드기며 하느님 도시를 짓밟고 있네. 하느님께서도 엘리야와 에녹을 보내셔야 할 것이네. 하느님께서는 가짜 그리스도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이 종들을 이 땅의 낙원에다 두시지 않았던가? 하느님 종들은 통자루 옷을 입고 예언하러 올 것이네, 말씀과 본보기로 회개를 외칠 것이네.'
'우베르티노, 벌써 여기에 와 있지 않아요?'
윌리엄 수도사는 자신의 프란체스코 수도복을 가리키며 응수했다.
'허나, 하느님 종들이 아직 승리한 것은 아니야. 머잖아, 가짜 그리스도는 분기탱천, 에녹과 엘리야를 죽이고, 그 목을 효수할 것이야. 선지자의 말로를 대중에게 보일 것이라는 말일세. 놈들이 나를 해치듯이 가짜 그리스도 역시 선지자들을 죽일 것이라는 말일세.'
무서웠다. 우베르티노가 법열에 들어 예언을 부르짖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까닭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한참이나 흘렀지만 내 두려움은 여전하다.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 게르만의 어느 도시에서 정체불명의 괴한 손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결국 우베르티노는 그날 밤 자기 장래를 예언하고 있었던 셈이다.
'요아킴의 말이 옳았다. 인류의 역사가 제6기에 접어들었으니 바야흐로 두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이다. 하나는 수상한 가짜 그리스도, 또 하나는 명실상부한 가짜 그리스도가 바로 이 시대에, 바로 이 역사의 제6기에, 프란체스코 성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다섯 상흔을 이녁의 육신으로 받은 이 시대에, 가짜 그리스도는 이미 와 있는 것이다. 보니파티우스는 수상한 가짜 그리스도였으니 켈레스티누스의 양위는 만시지탄이 아니던가? 보니파티우스에 따르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한 마리 거대한 괴물이 있는데, 이 괴물의 일곱 머리는 일곱 대죄를 나타내고, 열 개의 다리는 십계명의 모독을 나타낸다네. 이 괴물을 둘러싸고 있는 새우 떼는 추기경들이요, 이 괴물의 몸이야말로 아폴리욘이다. 괴물의 숫자, 그리스어로 이름을 읽으면 베네딕티...'
알아듣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던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 베네딕쿠스 11세는 명실공히 가짜 그리스도이며 이 땅에서 솟은 괴물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후임자를 드러내시려고 이 괴물의 악덕을 방관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수도사 어르신 ... 후임자는 요한입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죽을 각오를 하고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우베르티노는, 악몽이라도 쫓는 듯이 손을 미간에다 대고 지그시 눌렀다. 호흡도 거칠었다. 지친 모양이었다.
'암, 계산이 빗나갔던 게야. 우리는 아직도 참 교황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그동안 프란체스코 성인과 도미니크 성인이 나셨다.'
그는 교회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도하듯이 읊조렸다(자기 저서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나무]를 인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번째로 오는 자는 치품천사의 이글거리는 숯불에 정화되니, 하늘의 불길이 옮겨붙어 온 세상을 태울 듯하다. 두 번째로 오는 자는 예언의 말씀으로 충만하니, 어듬의 세상을 밝게 비추는도다>... 암, 이것은 약속이야. 참 교황은 반드시 내리시네.'
윌리엄 수도사가, 우베르티노가 지어낸 분위기를 깨뜨렸다.
'우베르티노,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그러나 나는 땅의 황제를 지키려고 여기에 와 있어요. 돌치노 수도사도 당신처럼 예의 그 참 교황이 내릴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배암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마시게!'
우베르티노가 소리쳤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걸 보았다.
'... 그자는 칼라브리아 요아킴의 말씀을 더럽히고, 이 말씀을 죽음과 타락의 그릇이게 했네. 가짝 그리스도의 전령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자일 것이야. 한데, 윌리엄, 그대 말투가 왜 그 모양인가? 그대는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을 믿지 않는 모양인가? 옥스퍼드의 훈장들은, 심정의 예언 능력을 고갈시켜 가면서까지 이성을 우상화하라고 가르치던가?'
'잘못 짚었어요. 당신은 아시잖습니까? 저 로저 베이컨을...'
'<날틀> 어쩌고 했다는 양반 말인가?'
'하나만 아시는군, 로저 베이컨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짜 그리스도를 입에 올리시고, 부패의 만연과 배움의 사양을 걱정하시는 분이오. 그분은 또 가짜 그리스도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셨어요. 자연의 비밀을 배우고, 지식으로 인류를 깨우쳐 나가는 것이오. 그분은, 약효가 있는 초목과 돌의 성질을 연구하고, 당신은 웃겠지만, 이런 날틀을 연구해야 가짜 그리스도와 싸울 수 있다고 했어요.'
'그대 베이컨의 가짜 그리스도는, 지적 허영을 채우자는 구실인 모양이군.'
'거룩한 구실이지요.'
'이 사람아, 거룩하다는 말을 어디에다 붙이나? 윌리엄, 알지?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는 걸? 나는 그대를 믿고 있네. 지적 허영을 잠재우고 주님께서 입으신 상처를 보고 우는 법을 배우게. 책에다 불을 싸지르라는 말이네.'
'어디 그렇게 해 볼까요?'
윌리엄 수도사는 웃었다.
우베르티노는 따라 웃다가 윌리엄 수도사가 웃는 의미를 깨달았는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아둔한 영구치 같으니. 동도의 도반을 비웃지 말게! 사랑할 줄 모르면 두려워할 줄이나 알아야지. 그리고 이 수도원에 있을 동안은 조심하게. 이놈의 수도원,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것을 더 잘 알고 싶습니다. 가자, 아드소.'
윌리엄 수도사는 발길을 돌리려 했다.
우베르티노는 윌리엄 수도사의 손을 잡으면서 코웃음 쳤다.
'좋지 않다고 했더니, 뭐? 더 잘 알고 싶다고?'
윌리엄 수도사는 회중석 사이로 나오다 말고 뒤를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바벨 말을 하는 저 짐승같이 생긴 친구는 누군가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던 우베르티노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대답했다.
'살바토레 말인가? 이 수도원에서 마음에 드는 놈은 그놈과 식료계 수도사뿐이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복을 벗어 던지고 나는 카잘레에 있는 우리 수도원으로 돌아갔는데, 가서 봤더니 수도사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더군. 그 지역 주민이 그 수도사를 우리 엄격주의파 소속인 줄 알고는 집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자들의 프란체스코 수도복을 벗겨 버렸지... 그런데 지난 해 여기 와서 보니, 살바토레와 레미지오가 와 있더군. 살바토레... 아닌게 아니라 짐승 같기는 하지. 하지만 쓸 만한 친구라네.'
윌리엄 수도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페니텐치아지테(회개하라), 어쩌고 하던데요?'
우베르티노는, 귀찮은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손을 내젓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워낙 위인이 촌놈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떠돌이 수도사로 설교를 기웃거리다 귀동냥하고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것일 테지. 내 살바토레 이 녀석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아주 욕심이 많은 놈이기는 하지만 그것뿐, 정도를 모르는 놈은 아닐세. 다시 말하네만 이 수도원, 구역질깨나 나는 곳이네. 아는 놈을 잡고 물어 봐야지 모르는 놈 잡고 물어봐야 헛수고일 뿐이야. 남의 말 한마디 믿고 만리장성 쌓지는 말게나.'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남의 말만 들으면서 사는 게 싫어서 조사관 노릇을 작파한 나 아니오. 하지만 들을 말은 들어야겠지요. 들어보고 생각해 봐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게 아니겠어요?'
'윌리엄, 이 사람아, 그대는 잡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네...'
우베르티노는 말을 잠시 끊고,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젊은 친구, 은사의 본을 보는 것이 좋지만 너무 많이는 보지 않도록. 한 가지 더 유념하게. 무엇이야... 나도 이제 깨쳤는데,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이야. <죽음은 나그네의 휴식... 모든 수고의 끝>... 잘 다녀오게, 나는 기도나 해야겠네.'
9시과까지
우리는 회중석 중앙을 지나, 들어갔던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우베르티노의 말은 밖으로 나와서까지 내 귀에서 윙윙거렸다.
'좀 괴짜이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여쭈어보았다.
'여러모로 보나 대단한 분이시다. 지금 대단한 분이 아니시라면 전에 대단한 분이셨거나... 이런 이유에서라며 ,<괴짜>라는 네 말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지. 반반하고 동그란 위인들은 대개 소인배들인 경우가 많다. 우베르티노는, 자기 손으로 화형대로 보낸 이단자들과 똑같은 자가 될 수도 있었고, 신성 로마 교회의 추기경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다. 이단자의 악덕과 추기경의 악덕 또한 고루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나는 우베르티노와 노닥거리면서 지옥이 다른 각도에서 본 천국이라는 인상을 받았구나.'
나는 사부님의 말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설명을 구했다.
'어떤 각도에서 말씀이신지요?'
'물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말이 모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설명해 보자. 사물의 여러 측면이 있는지, 아니면 전체만 있는지를 아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그리고 교회 문간 구경도 너무 하면 해로울 것이야.'
윌리엄 수도사는, 교회로 들어가면서 넋을 놓고 보던 조상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내 목덜미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 ...저것들이 오늘 너에게 겁을 준 모양인데, 그만 보아라, 그것으로 족하다.'
출구 쪽으로 돌아서다가 나는 내 앞에 선 수도사를 발견했다. 사부님 연배였다. 그는 웃으면서 공손하기 인사를 차리고는, 욕장과 시약소와 채마밭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본초학자,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는 또, 수도원 경내를 돌아보는 사부님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부님은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들어오면서 잘 가꾸어진 채마밭을 보았는데, 눈에 덮여 있어서 잘 알 수 없기는 하나 채소뿐만 아니라 약초도 있는 것 같더라고 했다.
본초학자 세베리노가 약산 신이 난 듯한 어조로 말대답을 했다.
'가지 수야 많습니다만 봄이나 여름이면 채마밭 하나 가득 꽃으로 치장하는데, 창조주를 찬미하는 노래로 말하자면 꽃의 찬양도 우리 찬양에 못지않습니다. 하지만 본초학자의 눈은 겨울의 마른 가지에서도 봄이면 다시 피어날 잎을 봅니다. 시생은, 이 채마밭이 어느 수도원의 채전보다 더 기름지고 다채로우며, 어떤 필사본의 채식보다 더 아름답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뿐입니까? 좋은 약초는 겨울에도 자랍니다. 이런 약초는 미리 분에다 거두어 제 실험실로 옮겨 놓았답니다. 그래서 저는 괭이밥 뿌리로는 유행 감기를 치료하고 무궁화 뿌리를 달여 만든 고약으로는 피부병을 고칩니다. 피부 습진에는 규석이 좋고, 쥐방울풀 뿌리를 짓이겨 뽑아낸 즙은 설사와 부인병에 효험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고추는 특효 소화제요, 머위는 기침을 가라앉힙니다. 여기에는 또 소화제로 좋은 용담도 있고, 감초도 있는가 하면, 즙을 짜낼 수 있는 노간주나무도 있습니다. 달여 먹으면 간에 좋은 잎딱총나무 껍질, 찬물에 우려 놓았다 물을 마시면 감기에 좋은 비누풀, 말씀 안 드려도 익히 아실 쥐오줌풀도 있습니다.'
'정말 약초가 다양하군요. 자라는 기후대 역시 다양할 터인데 대체 이걸 어떻게 관리하시지요?'
'첫째로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입었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 수도원을, 남쪽으로는 바다를 면하게 하시어 따뜻한 바람을 받게 하시고 북쪽으로는 놓은 산을 지게 하시어 삼림의 향기를 듬뿍 쏘이게 하셨지요. 둘째로는 저의 기술입니다. 별것은 아닙니다만 은사로부터 대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합니다만, 나무란 대체로 주위 환경과 영양과 재배에 주의를 기울여 주면 기후 조건이 달라도 곧잘 자라는 법입니다.'
'수도사님, 식용 식물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내가 물어보았다.
'아, 이 젊은 행자께서는 배로도 곯으셨는가? 적당히만 먹는다면, 먹어도 좋은 식물에 약 아니 되는 식물이 없다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같지 못하니,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일세. 호박을 좀 보실까? 호박이란 본시 냉하고 습한 것이네만, 썩은 놈을 먹으면 설사가 나기 때문에 소금물과 겨자로 내장을 보해 주어야 해. 양파? 온하고 건한 식품으로 소량을 먹으면 방사의 질을 높여 주나(물론 세간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일세만) 과복하면 머리가 무거워져. 이때엔 우유와 식초를 복용하면 다시 개운해지지...'
그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뚝 떨어뜨리고는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젊은 수도사들이 양파 같은 신채를 삼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네. 대신 마늘을 먹게. 온하고 건해서 해독에 그만이야. 허나 이것도 과하면 못써. 체액이 너무 빠져나가 머리가 휑하니 비어 버리거든. 콩은 반대로 배뇨를 촉진하고 몸을 기름지게 하니까 좋다고 할 수 있으나 너무 먹으면 꿈자리가 나빠. 하지만 다른 약초에 견주면 별 것은 아니라네. 약초 중에는 실제로 몽환에 빠져들게 하는 것도 있으니까.'
'어떤 약초가 그렇습니까?'
내친김에 던져 본 질문이었다.
'아하, 우리 젊은 행자께서는 아시고 싶으신 것이 너무 많아. 이건 본초학자 이외의 사람들은 함부로 알 게 못 돼. 멋모르는 사람이 과용했다가는 큰일이거든. 중독의 위험이 있어요.'
윌리엄 수도사가 그 말을 받았다.
'그럴 땐 쐐기풀이 좋지요. 로이브라 혹은 올리에리부스 역시 효험이 있고, 이런 약초도 여기에 있겠지요?'
세베리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본초학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아주 조금...'
윌리엄 수도사가 겸손하게 말을 이었다.
'...우연히 발다흐 사람 우붑하심이 쓴 [건강론]을 접한 정도이지요.'
'이불 아산 알 묵타르 이븐 보틀란의 책도 읽으셨습니까?'
'저자를 그렇게 부르는 것보다는 <엘루카심 엘리미타르> 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요. 혹 이 수도원에 그 양반 책의 필사본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주 예쁜 놈으로 있습니다. 삽화가 많습지요.'
'아이고 고마우셔라. 플라테아리우스의 [약초의 효능에 대하여]는요?'
'그것도 있습니다. 사레셸 사람 알프레도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식물에 대하여]도 있습니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집필한 책이 아니라는 설이 있습니다. 밝혀진 대로, 그 양반이 [원인에 대하여]의 저자가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어쨌든 대단한 책이지요.'
세베리노의 말에 사부님은 어느 책을 말하는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책 중 어느 것도 읽은 바 없지만 오가는 이야기로 대단하기는 대단한 책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르신과 약초 이야기를 좀더 했으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만...'
세베리노의 말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소만, 이 수도원이 속한 교단의 묵언계를 벙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군요.'
사부님 말씀에 세베리노가 설명했다.
'우리 교단의 회칙은, 각기 서로 다른 종중 단체의 요구에 따라 수 세기에 걸쳐 변모해 왔습니다. 회칙은 끊임없이 <성서 봉독>에 매진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나 공부하는 방법까지 간섭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교단이 하느님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는 것은 어르신도 잘 아시겠지요. 아울러 회칙은 수도사들의 공동생활을 규정하고 있되, 수도사들이 밤이면 자기 독방에서 혼자 묵상하는 것도 묵인합니다. 회칙이 묵언계를 엄격하게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기는 합니다. 잡역에 종사하는 수도사는 물론, 읽고 쓰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수도사도 옆에 있는 수도사와 이야기를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어 제 학문의 보고에 보물을 늘려나가는 것이 오히려 본분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는지요. 식당에서나, 성사 시간 중이 아니면, 공부에 필요한 대화는 큰 허물로 치지 않는 것이지요.'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와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셨던가요?'
세베리노는, 이 질문에 별로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원장께서 이미 어르신께 말씀 올리셨군요. 아닙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고 새면 사본의 채식만 하고 있었으니까.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 같은 수도사들과 자기가 맡은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러 본 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문서 사자실에는 잘 가지 않고 대개의 시간을 이 시약소에 머뭅니다.'
그는 이 말끝에 턱으로 시약소 건물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델모에게 환상 체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시겠군요.'
사부님은 유도 신문을 시작하고 있는 것같았다.
'환상 체험이라고 하시면...'
'예컨대, 약초를 먹으면 헛것이 보이는 것 같은, 그런 환상 말이지요.'
세베리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위험한 약초 간수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세베리노가 보이는 뜻밖의 반응에 약간 당혹해하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닙니다.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환상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세베리노는 좀처럼 윌리엄 수도사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수도원장의 허가를 얻었다고 하더라고 수도사가 밤에 본관 주위를 배회하면 괴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늦은 시각에 본관으로 들어가면 말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환상에 쫓기다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서책이 필요할 경우가 아니면 문서 사자실에는 가지 않습니다. 서책이 필요한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식물 표본이 제 시약소에 있으니까요. 조금 전에 드린 말씀입니다만, 아델모는 호르헤, 베난티오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베렝게리오와는 물론이고요.'
세베리노의 목소리에 묻은, 다소 대답을 망설이는 듯한 낌새는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사부님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베렝가리오와는... <물론>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아룬델 사람 베렝가리오는 보조 사서이니까요. 아델모와는 동년배인 데다 수련사 시절을 같은 문중에서 보냈으니까 배짱이 잘 맞는 게 당연하지요. 이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 그랬군요.'
사부님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놀랍게도 그는 이야기를 더 이상 몰고 나가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는 말머리까지 돌렸다.
'아, 본관에 가보아야할 것 같군요. 안내 좀 부탁 드릴까요?'
'기꺼이 그러지요.'
세베리노가 대답했다. 궁지를 벗어난 사람 특유의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채마밭을 지나 본관 정문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가 설명했다.
'채마밭에 면한 문이 바로 주방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주방으로 쓰는 쪽은 1층의 서쪽 반뿐이고 나머지는 식당입니다. 교회 성가대석 뒤쪽으로 통하는 남쪽 입구에는 문이 둘 있는데 하나는 주방, 하나는 식당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이 문으로 들어가시지요. 주방을 통해 식당으로 나가는 수도 있으니까요.'
엄청나게 넓은 주방으로 들어선 우리 눈앞으로는 분관의 8각형 안마당이 보였다. 뒤에 알았지만, 출입이 금지된 마당이었다. 각 층에는 이 마당 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주방은 본관 1층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많은 수도원의 불목하니들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탁자에서 두 요리사는 보리, 오트, 호밀에다 순무, 샐러드용 개구리 다리, 무, 당근을 갈아 넣어 파이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운 탁자 앞에서는 다른 요리사 하나가 생선 위에다 포도주와 물을 뿌리고 샐비어, 파슬리, 백리향, 마늘, 고추, 그리고 소금을 버무려 만든 양념을 끼얹고 있었다.
주방 서쪽에서 큼지막한 가마가 빵을 굽고 있었다. 가마 안에서 불꽃이 혀를 날름거렸다. 남쪽으로는 큰 화덕이 있었는데, 요리사들이 이 화덕 앞에서 꼬챙이에 꿴 고깃덩어리를 돌리고 있었다.
교회 뒤 창고 쪽으로 열린 물을 통해 돼지치기들이 그날 잡은 돼지고기를 안으로 날라 왔다. 우리는 바로 그 문으로 나갔다. 뜰이었다. 공터의 서쪽 끝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세베리노는 첫 번째가 창고, 이어서 차례로 말 외양간, 소 외양간, 계사, 그리고 양 우리라고 설명했다. 돼지우리 밖에서는 돼지치기들이 커다란 항아리에다 부어 놓은 돼지 피를 젓고 있었다. 그냥 두면 굳어지기 때문에 그런다고 세베리노가 설명해 주었다. 제대로 저어 주기만 하면 날씨 덕분에 며칠을 굳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피떡 만들 때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본관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가면서 식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식당은 본관을 끼고 서 있는 두 개의 탑 사이에 있었는데, 북쪽 탑 밑에는 난로, 남쪽 탑 밑에는 둥근 계단이 있었다. 위층 문서 사자실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수도사들은 이 계단 끝에 있는 문을 통해 문서 사자실로 올라간다고 했다. 이 밖에도 나선형 계단이 두 개 더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주일인데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는 수도사가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세베리노는, 공부가 곧 베네딕트 회 수도사들의 직분 아니겠느냐고 대답하면서 주일 성사는 여느 때보다 좀 길지만 책과 씨름해야 하는 수도사들은 그 시각에도 문서 사자실에서 성서를 읽거나, 토론하거나, 명상한다고 설명했다.
9시과 이후
문서 사자실로 오르며 윌리엄 수도사는, 계단으로 빛줄기를 들여보내고 있는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문의 위치로 보아 사람이 올라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윌리엄 수도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식당의 유리창도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벼랑에 면한 유리창은 1층의 유리창뿐이었다). 더구나 유리창 아래에는, 놓인 가구가 없었다.
계단을 다 오른 우리는 동쪽 탑루를 지나 문서 사자실로 들어갔다.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층은 1층처럼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우선 그 넓이가 엄청났다. 그리 높지 않은 천장(교회 천장만큼은 높지 않았지만 내가 본 어떤 방의 천장보다는 높은)은 굵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인데도 내부는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각 탑루에 면한 5면 벽에 난 작은 창을 통해 8각형의 중앙 공터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창이 그렇게 많았으니 한겨울 오후에도 빛이 고루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창유리는, 교회의 경우와는 달리 채색 유리가 아닌, 납틀에 박힌 정방형 유리였다. 그래서 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인공으로 변조된 빛이 아닌, 순수한 자연광 그대로였다. 따라서 자연광이 수도원 학승들의 독서와 필사를 밝혀 주고 있는 셈이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구경한 문서 사자실은 적지 않으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방을 밝히는 자연광이 그처럼 현란한 문서 사자실은 본 적이 없다. 빛이 연출하는 영적인 원리의 광휘와 아름다움과 학문의 본디 모습은 그 방이 체현하는 조화로운 분위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방에서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세 가지 현상이 돋보이고 있었다. 첫째는 불완전한 것을 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완전성 혹은 무류성, 두 번째는 고유의 조화 혹은 일치, 마지막으로는 특정 색깔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하는 청징스러움과 빛 자체의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것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는 법... 그리고 우리의 욕심은, 평화로운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앞에서 차분히 가라앉는 법... 그래서 나는 그 분위기 앞에서 위안을 느끼는 동시에 그런 곳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워 보였던 기억이 새롭다. 내 눈이 그 방의 밝기에 익어 감에 따라 오후의 햇살에 화사해진 그 방은 더할 나위 없는 학문의 전당으로 보였던 것이다. 후일 장크트 갈렌 수도원에서, 장서관과는 분리되어있는, 비슷한 크기의 문서 사자실을 본 적이 있으나 꾸며진 상태와 간추려진 상태로 보아 그 수도원 문서 사자실과 같지 못했다(장크트 갈렌 수도원의 경우 수도사들이 장서가 있는 곳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고문헌 연구가, 사서, 주서사들은 모두 각자의 서안 앞에 앉아 있었는데, 이 서안은 하나씩의 유리창 앞에 면벽하고 있었다. 유리창이 40여 개여서(4주덕에 10계명을 곱한 듯, 4의 10배수로부터 나온 완벽한 숫자) 40명의 수도사가 동시에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내가 보았을 당시에는 30여 개의 서안 앞에만 수도사들이 앉아 있었다. 세베리노는,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는 수도사들은 3시과, 6시과, 9시과의 성무를 면제받고 있어서 낮에는 그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수도사들의 공부가 끝나는 시각은 만과가 시작되는 일몰 즈음이 되는 셈이었다.
가장 밝은 곳은 고문서 연구가, 채식 전문가, 주서사, 필사사의 자리로 되어 있었다. 각 서안에는 채식과 필사에 필요한 도구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뿔로 만든 잉크병, 수도사들이 예리한 칼날로 끊임없이 다듬어다 준 우필, 양피지를 펴는데 필요한 부석, 줄을 긋는 데 필요한 자에 이르기까지, 준비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각 필사사들 옆, 경사진 서안 위에는 독경대도 있었다. 필사사들은 필사할 고문서를 이 독경대에다 올려놓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유리를 그 위에다 대고 한 면씩 필사해 나갔다. 수도사들 중에는, 문서를 읽으면서 미리 준비한 공책이나 평판에 주석을 놓아 가는 수도사도 있었다.
마침 사서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서 더 이상 접근하여 이들의 작업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 사서가 힐데스하임 사람 말라키아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사서는,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우리를 환영하는 척했지만, 그의 독특한 모습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베네딕트 교단의 법의를 펄럭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그는 키가 몹시 큰 데다 깡말라서 사지가 그렇게 길어 보일 수 없었다. 분위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기를 죽이는 구석이 있었다. 밖에서 들어온 참이라 그는 두건을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 두건이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그의 얼굴에 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큰 눈에서는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만만하지 않은 관상이었다. 표정으로 보아 그는 의지로써 격정을 잡도리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표정이 얼어붙은 듯힌 것으로 보아 별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 윤곽에는 수도 생활의 비애와 혹독한 수도의 흔적이 묻어 있었고,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어 일별에 상대하는 사람의 마음과 의중을 읽어 두 번 다시 마주 쳐다볼 마음이 내키지 않게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사서 말리키아는, 문서 사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도사들을 일일이 우리에게 소개했다. 아울러, 그들이 하고 있는 공부의 내용도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나는 지식의 보고와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그들의 면려와 정진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번역하는 살베메크의 베난티오를 알게 되었는데, 베난티오는 인류 가운데에서는 가장 미더운 현자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이로써, 수사학을 공부하는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수도사인 웁살라 사람 베노, 장서관에서 몇 개월 장기 대출한 고문서를 베끼고 있는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를 비롯, 가령 끌롱마끄누아 사람 파트리치오, 톨레도 사람 라바노, 이오나 사람 마르누스, 히어포스 사람 월도 같은,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채식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섬기자면 얼마든지 더 있다. 이름을 헤아리면서 그 모습을 그려 보는 것보다 더 은혜로운 일이 있을까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니까 우리가 거기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내가 들었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수도사들 사이의 거북살스러운 분위기, 표면으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의 대화를 짓누르고 있던 몇 가지 관심사가 이로써 드러날 터이기 때문이다.
사부님은 우선 말라키아와 담소하면서 문서 사자실의 아름다움과 면학 정진하는 분위기를 상찬하고, 곳곳에서 이 장서관의 이름을 익히 들었는바, 장서를 한번 열람하고 싶다면서 어떻게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말라키아는, 수도원장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즉, 수도사가 사서에게, 보고 싶은 책의 이름을 적어 제출할 경우, 그 요구가 정당하고 수도사 본분에서 넘어서지 않으면 사서가 위층 장서관으로 들어가 책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사부님은 이어서, 위층에 있는 책의 제목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말라키아는 자기 서안에 금사슬로 묶여 있는, 두꺼운 서명 색인부를 보여 주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법의 안으로 손을 넣어 조그만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이 주머니를 열고, 여행 중에 내가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는, 그래서 낯익은 물건을 꺼냈다. 그 물건은, 다리가 두 개 달려있어서, 기수가 말잔들에 올라타듯이, 새가 홰에 앉듯이 그렇게 사람의 코 위에 올라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사람의 코라고 하지만, 사부님의 뾰족한 코야말로 이 물건이 올라앉기에는 더없이 적당했다). 두 갈래로 나뉜 다리가 만나는 곳, 그러니까 눈과 맞닿는 곳에는 둥근 쇠테가 있고, 쇠테 안에는 술잔 바닥 두께의 편도꼴 유리가 박혀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글을 읽을 때마다 이 물건을 눈앞에다 대기를 좋아했는데, 까닭인즉, 햇빛이 기가 꺾일 때는 이 물건을 이용해야 자연이 그 연세에 허락한 것 이상으로 밝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물건은, 먼 곳을 보는 데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먼 곳을 볼 때에는 별 장애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가까운 것을 선명하게 보는 데엔 대단히 요긴한 물건인 셈이었다. 이것을 코 위에 올려 놓은 윌리엄 수도사는, 나도 알아보기 어려운, 희미한 글씨까지도 읽어 내곤 했다. 그는 나에게, 중년을 넘기면 시력이 좋던 사람도 눈이 어두워지고 동공이 굳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50을 넘기면, 아무리 유식한 사람도 쓰고 읽는 일에 관한 한 명이 다한 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식의 산물을 죽을 때까지 펴고 닦지 못한다는 것은 식자에게는 예사 불행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할지라, 누군가가 이런 물건을 고안하고 만들었으니... 윌리엄 수도사는, 배움의 목적은 또한 인간의 삶을 연장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 로저 베이컨의 뜻이 이 물건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다른 수도사들은 침을 삼키며 윌리엄 수도사와 이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히 이 물건에 대해 질문하는 수도사는 없었다. 나는, 그 많은 수도사들이 읽고 쓰는 일에 세월은 보내는 수도원 문서 사자실에도 아직 그 물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지혜로 말하자면 세계를 찜 쪄 먹을 만한, 내로라하는 사람들조차 감히 질문할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어마어마한 물건을 가진 분 옆에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윌리엄 수도사는 그 물건을 눈에다 대고 목록 색인부에 씌어진 서명을 읽어 내려갔다.
나도 그 색인부를 훑어보았다. 유명한 서책도 있었고, 금시초문인 서책도 있었다.
사부님은 서명을 읽어 내려갔다.
'히어포드 사람 루제로가 쓴 [솔로몬의 오릉보에 대하여, [히브리어의 웅변술과 이해술], [금속에 관하여], 알 쿠와리즈미가 쓰고 로베르투스 앙글리쿠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대수학], 실리오 이탈리코가 쓴 [포에니 전쟁], 라바노 마우로가 쓴 [프랑크족의 사적], [거룩한 십자가 찬미론],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르다누스에 의한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로 배열한, 세계와 인간의 연령에 관하여]... 대단한 명저들이고말고. 그런데 이런 서책의 목록은 무엇을 근거로 짜여진 것이지요?'
사부님은 여기에서, 어떤 책에 나오는 듯한 한 대목을 외는 것 같았다.
'<사서는 마땅히 주제별, 저자별로 분류된 도서 목록을 비치하되, 그 많은 서가에다 두려면 숫자적인 지침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래, 수도사들이 대출을 원할 경우 그 서책은 무슨 원칙을 근거로 찾아냅니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사서 말라키아 수도사는 그 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말라키아는 각 서명 옆에 붙어 있는 글귀를 가리켰다. 나는 그 주석을 읽어 보았다.
'<그리스인 1류 저자의 저서가 있는 다섯 번째 방, 네 번째 서가의 세 번째 칸에 있는 책... 영국인 3류 저자의 저서가 있는 일곱 번째 방, 다섯 번째 서가의 두 번째 칸에 있는 책...>'
이런 식이었다. 나는 첫 번째 숫자는 서가, 혹은 서가의 특정 층에 있는 서책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숫자는 차례, 세 번째 숫자는 그 서책이 든 궤짝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나머지 글귀는 장서관의 방이나 복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용기를 내어, 서책을 찾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말라키아 수도사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오로지 사서 수도사만이 장서관을 출입할 수 있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네. 이 글 뜻은 사서나 제대로 알면 그만인 것이네.'
그러나 사부님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내게는 족히 무안풀이가 되어 주었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서명 목록이 무엇을 근거로 작성되었는지 궁금하군... 주제별은 아닌 것 같고.'
그러나 사부님은 이어지는 서명을 훑어보았을 뿐, 저자명에 따른 분류법에 관해서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저자명에 따른 분류법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에는 이를 채택하는 장서관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말라키아 수도사가 대답했다.
'본 장서관의 역사는 아주 깁니다. 따라서 서책은 모두 장서관이 이를 구독한 순서로 서명 목록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장서관에 들어온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찾기가 몹시 까다롭겠군요?'
윌리엄 수도사가 말라키아를 유도 신문하고 있었다.
'장서관 사서 수도사는, 서명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서책이 언제 이 장서관으로 들어왔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사서의 기억력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가 듣고 있는 수도사들에게, <너희들도 나의 기억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짐이라도 주듯이 말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많은 선배 사서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아서 처리하고 있는 자기의 업무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윌리엄 수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령 내가, 책 이름을 정확하게 모르지만, 솔로몬 왕의 오릉보에 관한 걸 좀 찾아보겠다고 한다 칩시다. 그러면 당신이, 조금 전에 읽은 서명을 알아내어 위층에서 가지고 온다는 것이군요.'
'수도사께서 꼭 솔로몬의 오릉보에 대한 것을 아시고 싶어 할 경우, 저는 그 서책을 가져오기 전에 먼저 수도원장의 의향을 여쭈워야 합니다.'
말라키아가 대답했다.
'내 듣기로는,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채식사가 세상을 하직했다는데요? 원장께서는 누누이, 그 형제의 재주가 아깝다는 말씀을 하십디다. 혹 그 형제가 생전에 채식하고 있던 사본을 볼 수 있겠는지요?'
말라키아는 수상쩍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윌리엄 수도사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난외 채식만을 맡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상상력이 풍부해서, 해 놓은 일을 보고야 알았습니다만, 전혀 엉뚱한 그림을 자주 그려 내고는 했습니다. 가령 인두마를 그리거나 마두인을 그리는 식이지요. 그 사람이 채식하던 서책은 저기에 있습니다. 아직 그 사람 서안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지요.'
우리는 생전에 아델모가 일했다는 서안 앞으로 다가섰다. 거기에는 다채롭게 채식한 성서의 [시편]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표지는 양피지 중에서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송아지 피지로 되어 있었다. 뒤표지는 아직 서안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부석으로 문지르고 백악을 칠하여 부드럽게 한 다음 대패로 마름질한 이 피지가, 날카로운 송곳에 의해 양면에 구멍까지 뚫린 것으로 보아 이 재주꾼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았다. 시편의 전반부는 이미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이 채식 수도사는 난외에다 채식화의 초벌 그림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러나 앞부분은 이미 채식이 끝나 있었다. 나는 사부님 옆에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나도 사부님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시편]의 난외에는 우리의 오감에 버릇 들여진 것과는 정반대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의 경계선에 와 있는 듯, 정체불명의 놀라운 풍자를 통해, 진짜 이야기의 세계와 우주가, 거꾸로 뒤집어진 터무니없는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 거꾸로 뒤집어진 세계란, 가령 사냥개가 메토끼에게 쫓기고, 사자가 사슴의 먹이가 되는 세계였다. 발 모양의 머리를 가지 조그만 새, 등에 인간의 손이 달려 있고 털북숭이 정수리에서 발이 비어져 나와 있는 동물, 얼룩말 무늬가 있는 용, 수없이 매듭지고 꼬인 뱀 모가지의 네발짐승, 사슴뿔이 달린 원숭이, 피막 날개를 가진 수탉 모양의 세이렌, 곱사등에서 또 한 인간의 육신이 솟아오르고 있는 사지가 없는 인간, 배에 이빨이 총총히 난, 입이 무수히 많은 동물, 마 대가리 인간, 인간의 다리를 가진 말, 새 날개를 가진 물고기, 물고기 지느러미를 가진 새,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괴물, 혹은 목 하나에 몸이 둘인 괴물, 수탉 꼬리에 나비 날개를 가진 암소, 머리에 물고기 비늘이 돋아난 여자, 도마뱀 주둥이의 잠자리 떼와 뒤엉켜 있는 키마이라,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켄타우로스, 용, 코끼리, 만티코라, 꼬리가 전궁으로 변해 있는 그뤼폰, 목이 끝없이 깉 악마적인 괴물들, 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전원의 풍경 속을 뛰노는 신인동형 동물과 난쟁이 수형신들, 이들과 함께 그려져 있는, 밭 가는 사내, 과일 거두는 사내, 추수하는 사람, 실 뽑는 여자, 여우 옆에서 씨 뿌리는 자, 원숭이 무리가 지키는 성벽을 활로 무장하고 기어오르는 담비 떼... 아랫부분이 용 모양으로 그려진 두문자 L, 나무 모양으로 그려진 V... 이 나무에서는 수천 겹으로 똬리 튼 뱀이 나오고 있는가 하면, 잎이나 열매도 모두 뱀으로 그려져 있었다.
[시편] 옆에는, 죽기 전에 완성한 것인 듯한 성무 일과서가 한 권 놓여 있었다. 어찌나 작은지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책이었다. 글씨는 깨알처럼 작았고, 테두리 그림은, 눈을 갖다 대어야 알아볼 수 있으리만치 미세했다. 나로서는, 무슨 연장을 쓰면 그런 세필화를 그릴 수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책 가장자리에는, 공들여 쓴 본문 글자에서 번식해 나오기라도 한 듯한 수많은 소문자가 그려져 있었다. 바다의 세이렌, 하늘을 나는 수사슴, 키마이라, 그리고 사지가 없는 인간의 토르소 모양을 한 이 미세한 소문자들은 흡사 본문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 같았다. 한 곳에서 세 행에 걸쳐, 삼성창 비슷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글씨에는 인간의 머리를 가진 세 마리의 우스꽝스러운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 두 개 중,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향하고 있어서 흡사 입을 맞추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하지는 않을지라도, 심오한 정선적 의미가 반드시 그 자리의 그림을 정당화하였으리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음란하다는 느낌을 금치 못하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몇 쪽을 훑어보면서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표정 간수하기가 어려웠다. 성스러운 성무 일과서에 그려진 그림이기는 하나,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그 그림을 보다 말고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베이브윈이군요. 우리 영국에서는 이걸 <베이브윈>이라고 한답니다.'
사부님의 말에 말라키아가 응수했다.
'바부앵이지요. 갈리아 사람들은 <바부앵>이라고 한답니다. 아델모는 프랑스에서도 공부했지만, 그림은 귀국에서 배웠습니다. 아프리카의 원숭이, 즉 <바분>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집이 뾰족탑 위에서 서고, 땅이 하늘 위에 있는 거꾸로 된 세계에서 온 동물입니다.'
문득 내 고국 말로 된 시 한 수가 생각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적에 대해서 말하려고 말아라.
땅이 천상에 올랐으니
이보다 더한 기적이 있을 것인가
그러자 말라키아가 같은 시집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읊었다.
땅은 위에, 하늘은 아래에,
이보다 더한 기적이 있을 것인가,
기적 중의 기적이로다.
말라키아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반갑소, 아드소. 아닌 게 아니라 여기 있는 그림은, 파란 거위를 타고 가야 닿을 수 있는 나라의 풍물을 그리고 있는 게 사실이네. 매가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 곰이 하늘에서 솔개를 쫓고, 가재가 비둘기와 함께 하늘을 날고, 세 거인이 덫에 걸려 수탉에게 쪼이는 나라말일세.'
그의 입가로 창백한 미소가 번졌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도사들은 그가 웃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사서 말라키아는 남들이 웃고 있을 동안 눈살을 찌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아델모가 얼마나 재주 있는 채식사였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채식본을 든 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등위에서, 점잖으면서도 준엄한 호통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공허한 말,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지어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통을 친 사람은, 세월의 무게에 찌들려 피부뿐만 아니라 동공까지도 눈처럼 하얗게 바랜 노인이었다. 첫눈에 나는 그가 장님이라는 걸 알았다. 몸은 세월의 풍상에 찌들려 무수히 무너진 모습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사지는 튼튼해 보였고, 음성의 위엄도 추상같았다. 그는 눈이 온전한 사람처럼 우리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장님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음성에는 권리와 위엄이 묻어 있어서 그의 말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들리게 했다.
말라키아는 노인을 가리키며 윌리엄 수도사에게 소개했다.
'지금 앞에 계신, 연세로 보나 지혜로 보나 대덕으로 일컬어 마땅하신 분은 부르고스 어른 호르헤 수도사님이십니다. 고해 성사로 죄짐을 덜어 주는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를 제외하고는 이 수도원에 계신 분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십니다...'
말라키아는 이어서 노인 쪽으로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
'... 앞에 계시는 분은 저희 산문의 손님이신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사이십니다.'
호르헤 노인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인사에 응했다.
'시생의 아래위 모르는 일갈이 손님의 심사에 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대중이 우스운 것을 웃는 소리가 들리길래 잠깐 우리 교단의 계율을 깨우쳐 주고 잠시 율기하느라고 그랬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썼듯이, 수도자는 침묵의 서원을 했으면 마땅히 쓸 말도 자제해야 하는 법인데, 몹쓸 말이야 여부가 있습니까? 몹쓸 말이 있는 바에는 몹쓸 형상도 있는 법입니다. 항간에는 하느님 피조물의 형상을 거짓되이 일컫는 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세계와는 반대되는 세계를 외람되이 그리는 자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런 자들은 다함 없이 나타날 것입니다. 허나 손님께서는 다른 교단에서 오시었습니다. 내 듣기에 그곳에서는 때가 때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 유쾌한 웃음은 허물이 아니 된다고 하더군요.'
그는 아시지의 성인 프란체스코의 기행, 프란체스코회의 곁가지라고 할 수 있는 탁발승 및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의 상궤를 벗어난 행위에 대한 베네딕트 회 측의 견해를 나름대로 피력했다. 말이 견해의 피력이지 사실은 비아냥거림을 알아들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는 나름의 포석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난외의 채식한 형상 중에 마땅치 못한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읽는 자, 보는 자를 계도하기 위해서 그리하는 것이겠지요. 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심 있는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따금씩 우스꽝스러운 예화가 등장하는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따라서 채식이 시도하고 있는, 형상을 통한 이야기 또한 용납되어야 마땅하지 않을는지요. 우화집에는, 미덕도 사례로 다루지만 죄악 또한 사례로 다룰 수 있습니다. 까닭인즉, 집승이 인간 세계의 본을 보일 수 있음입니다.'
호르헤 노인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그러나 웃지는 않았다.
'아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피조물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교만한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필경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 말아요. 이래서 하느님 말씀이 거문고 뜯는 나귀, 방패로 밭을 가는 올빼미, 스스로 멍에를 쓰고 일하는 황소, 거꾸로 흐르는 강, 불붙는 바다, 은자로 변신하는 늑대 따위로 그려지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황소를 데리고 토끼 사냥을 나가고, 올빼미가 문법을 가르치고, 개가 벼룩을 파먹고, 애꾸가 벙어리를 지키고, 벙어리가 떡을 달라고 하고, 개미가 송아지를 낳고, 구워 놓은 닭이 날고, 지붕 위에서 과자가 익고, 앵무새가 수사학을 가르치고, 암탉이 수탉에게 종란을 낳게 하고, 수레가 소를 끌로, 개가 침상에서 자고, 사람이 대가리를 땅에 댄 채로 걷고... 도대체 이런 장난을 왜 합니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친다는 핑계 아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과 거꾸로 된 놈의 세상이 있어도 좋다는 것입니까?'
호르헤의 말에 윌리엄 수도사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아레오파고의 재판관이 가르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가장 왜곡된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생빅또르의 후고가 일렀듯이, 유사한 것일수록 사실은 상이한 것이고, 진리가 끔찍하고 상식을 벗어난 모습으로 드러날수록 인간의 상상력은 세속적인 재미를 누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괴한 형상에 깃든 비밀은 체득이 빠른 법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이 늙은이도 압니다. 고백하기 부끄럽습니다만, 끌뤼니 수도원 원장들이 시토 수도회 원장들과 싸울 때 우리 교단이 옥신각신했던 게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르나르 성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성인께서는, 하느님을 드러낸답시고 형상으로든, 수수께끼로든 괴물과 기물을 그리는 사람은 곧 자기가 그런 기괴한 것들을 즐기게 되고 급기야는 오직 이러한 것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게 된다고 하셨지요. 아직 시력이 좋으시니까, 우리 수도원 회랑 문설주에 양각된 것 좀 보시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청문 너머 교회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사색하고 명상해야 마땅한 수도사들 눈에 무엇이 보이고 있습니까? 저 우스꽝스러운 기물, 기이한 형상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저 탐욕스러운 잔나비를 도대체 어쩌자는 것입니까? 저 사자, 저 켄타로우스, 배에 입이 달리고, 외발에 귀는 꼭 돛 같은 반인수는요? 점박이 호랑이, 맞붙어 싸우는 전사들, 뿔피리 부는 사냥꾼, 머리 하나에 몸이 여럿인 괴물, 몸 하나에 머리 여럿인 괴물은요? 뱀 꼬리를 단 네발 동물, 몸은 물고기이되 머리는 네발 동물의 머리인 괴물, 앞은 말이요, 뒤는 영양인 동물, 뿔 달린 말을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지요? 오호라, 공부한다는 수도사들이 책보다는 대리석 부조를 더욱 탐하고, 하느님 율법보다는 사람이 한 일을 더욱 상찬하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요, 이 허울만 좋은 교언영색을 도대체 어쩌지요?'
노인은 숨이 가빴던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의 놀라운 기억력(장님 특유의)에 탄복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사악하다고 통탄하면서도 그 형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형상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한때는 그 자신도 거기에 들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매력적인 묘사가 이러한 행위와 그 파급 효과를 단죄하는 점잖은 사람들의 책에도 실려 있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필자가 진리의 증언에 열중한 나머지, 유혹의 탈을 빌어 쓴 죄악의 도움을 비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증좌였다. 작가는 이로써 사람들에게 악마가 어떻게 인간에 접근하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호르헤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회랑의 호랑이와 원숭이의 부조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호르헤는 내 생각의 허리를 자르고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어리석은 것들의 힘을 빌지 않고도 우리에게 곧고 좁은 길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우화는 우스운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델모는(그 죽음을 우리 모두 애도하고 있습니다만), 자기가 그린 괴물을 즐기던 나머지, 마땅히 그려야 할 궁극적인 형상에 대한 눈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사롭지 않은 길을 따라가고야 말았습니다...'
호르헤는, 목소리를 뚝 떨어뜨리고는 덧붙였다.
'... 하느님께서는, 여기에 합당한 벌을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호르헤 수도사님께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감히 여쭙거니와, 덕이 과하셔서 그러한지 수도사님의 말씀은 조리에 닿지 않습니다. 아델모가 죽기 이틀 전에 수도사님께서는 바로 이 문서 사자실에서 있었던 토론회에 자리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델모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형상에 몰두하는 자기 예술을 변호하여, 형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예술로써 천상적인 것들을 드러내 보인다고 했던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께서는 방금 아레오파고 재판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만, 이 재판관 역시 왜곡된 것으로 바른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날 아델모 역시 아퀴노의 석학을 인용했습니다. 신성한 것은 귀한 몸보다 천한 몸을 그 형상으로 취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인간의 영혼은 실수의 용납에 인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한 육신으로 그려지면 그 속성은 신성한 것에 닿지 못하고 그 뜻이 흐려지고 맙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겸허한 표현이야말로 이 땅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가진 지식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을 통하여 당신을 더 많이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 이 형상은 가장 정확한 개념으로서의 하느님에 접근시킵니다. 이유인즉, 하느님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이상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까닭은, 이렇게 해야 하느님에 속한 사상이, 긴히 알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눈에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그날 우리는 진리가, 짓궂은 형상과 수수께끼 같은 형상이라는 이 놀라운 표현법으로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느냐는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저는 그날 아델모에게, 저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는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보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즉...'
호르헤가, 베난티오의 말허리를 잘랐다.
'기억이 안 나네. 너무 늙었나 보아. 전혀 기억에 없으니까. 어쩌면 내가 그날 과하게 사나웠는지도 모르겠네. 늦었군... 가야겠어.'
그러나 베난티오는 호르헤 노인을 물고 늘어졌다.
'기억이 안 나신다니 이상합니다. 참으로 요긴한 토론이 아니었습니까? 베노와 베렝가리오도 동석했습니다. 문제는 시인이 장난삼아 만들어 낸 은유와 말장난과 수수께끼가 사물에 대한 참신하고 기발한 명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저는 현자라면 마땅히 그런 것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말라키아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수도사 하나가 말을 거들었다.
'호르헤 수도사께서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이는 마땅히 연세로 인하여 근력이 떨어진 탓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기억 못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상당히 흥분한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막상 말을 시작하고 보니 호르헤의 방패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가 두려웠던 모양인지 어물쩍 말꼬리를 흐렸다. 말한 사람은 사서 조수인 아룬델 사람 베렝가리오였다. 베렝가리오는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우베르티노가 하던, 아델모에 대한 말을 떠올렸다. 베렝가리오의 눈은 음녀의 눈 같았다. 중인환시가 부담스러웠던지 베렝가리오는 하릴없이 자기 손가락만 비틀었다.
베난티오는, 쏘는 듯한 눈으로 베렝가리오를 노려보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암상스러운 사내 베렝가리오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지 자기 눈길을 떨어뜨렸다. 베난티오가 소리쳤다.
'좋네, 베렝가리오 형제. 만일에 기억력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선물이라면, 건망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일 터인데 어찌 경솔하게 우리가 일컬을 수 있겠는가. 내 조금 전에 한 말을 접고, 노 수도사님께 사죄드리겠네. 허나 그대에게는 아주 정확한 기억을 요구하는 바이네. 우리가 그대의 그 사랑하는 형제와 여기에서 함께했을 때의 기억 말일세...'
베난티오가 왜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썼는지 그 당시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그 분위기에서 이상한 낌새를 읽어 내고는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다. 문서 사자실에 모인 수도사들 모두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베렝가리오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베렝가리오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말라키아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역전시키려고 그랬는지 윌리엄 수도사에게 말을 붙였다.
'가시지요, 윌리엄 수도사님. 재미있는 책을 좀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뿔뿔히 흩어졌다. 나는, 베렝가리오가 베난티오에게 적의에 찬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베렝가리오의 그런 눈길을, 베난티오가 조용하면서도 상당히 전투적인 눈길로 맞는 것도 나는 보았다. 호르헤 노인도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는 호르헤 노인에게 다가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등에다 입을 맞추었다. 노인은, 경의를 표하는 내가 기특했던지 내 머리에 손을 얹고는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대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아주 대단히 듣기 좋구나. 혹시 몽띠에르 앙 데르 사람 아드소를 아느냐?'
내가 모른다고 하자 호르헤 노인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가짜 그리스도에 대하여]라는 아주 무시무시하면서도 대단히 재미있는 책을 쓴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앞으로 있을 일을 예언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들이 들은 척이라도 하더냐.'
윌리엄 수도사가 대신 응수했다.
'10세기 이전에 씌어진 책이 아닙니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요.'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겠지요. 하지만 가짜 그리스도는 천천히 옵니다. 천천히 오되 그가 미치는 효과는 대단히 무섭습니다. 그는, 우리의 뜻 밖에서 오지요. 오지 않았다고요?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요? 그렇지만 옵니다. 사도들의 계산이 빗나갔기 때문이 아니고, 사도의 계산법을 제대로 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는 문서 사자실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천장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오고 맙니다. 꼬리가 뒤틀린 요상한 점박이 괴물이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러다 최후의 날을 맞지 않도록 하세요. 마지막 이레를 빈둥거리지 마시라는 뜻이외다!'
만과
만과를 알리는 종소리에 수도사들은 서안에서 일어날 준비를 서둘렀다. 말라키아는, 사부님과 나 역시 문서 사자실을 나가야 한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보조 사서인 베렝가리오와 둘이 남아서 서책을 읽던 자리에 정리하고, 장서관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윌리엄 수도사는, 손수 문을 잠그느냐고 물었다. 말라키아가 대답했다.
'주방이나 식당에서 문서 사자실로 들어오는 걸 막는 문은 없습니다. 문서 사자실에서 장서관으로 들어가는 걸 막는 문도 없습니다. 원장님의 금지령보다 훨씬 튼튼한 문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수도사들은 종과 때까지 주방과 식당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외부인이나 짐승이 꼭 본관으로 들어오겠다면 별수가 없습니다. 외부인이나 짐승에게야 금지시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방과 식당으로 통하는 문은 제 손으로 잠급니다. 이 시각부터 본관에서는 인적이 끊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도사들은 교회의 성가대석 쪽으로 걸어갔고, 사부님은, 우리가 성무에 참례하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것으로 믿었는지(이날부터 하느님은 우리를 여러 차례 용서해 주셔야 했다) 나에게 함께 좀 걷자고 했다. 사부님 말씀으로는 그래야 수도원 경내에 익숙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었다. 찬바람이 잠시 기승을 부리는가 싶더니 하늘에는 구름이 덮이고 있었다. 그래도 채마밭 위로 지고 있는 태양을 가릴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교회의 성가대석을 옆으로 끼고 돌아 뜰 뒤쪽으로 갈 즈음 동쪽에서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수도원 외벽에 면해 있는 건물, 즉 본관의 동쪽 탑루와 만나는 건물은 외양간이었다. 돼지 사육사들은 돼지 피가 든 항아리를 덮고 있었다. 외양간 뒤로는 외벽이 낮아 밖을 굽어다 볼 수 있었다. 벽 너머로는 급경사를 이루는 사면이 있었는데, 눈도 그 사면만은 덮지 못했던지 지저분한 흙이 드러나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흙이 아니라 썩은 짚더미였다. 낮은 외벽 너머로 집어 던져진 짚으로 이루어진 짚더미는, 브루넬로가 도망쳤던 길모퉁이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까운 외양간에서 사육사들은 가축을 구유 쪽으로 몰고 있었다. 우리는, 외벽 쪽으로, 갖가지 가축 우리를 따라 걸어 보았다. 오른쪽, 그러니까 교회 성가대석 반대쪽에는 수도사들의 숙사와 뒷간이 있었다. 여기에서 동쪽 담이 북쪽으로 꺾이고 있었는데, 이 모퉁이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성무 일과에 참례하러 가려고 그러는지,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연장을 챙긴 다음 불을 끄고 있었다. 윌리엄 수도사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던지, 다른 작업장과는 좀 떨어진 외딴 작업장 쪽으로 다가갔다.
수도사 하나가 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갖가지 색깔의 유리 조각 견본이 있었고, 벽 앞으로는 꽤 넓은 판유리가 놓여 있었다. 수도사 앞에는 미완성 성보 상자가 은제 뼈대 모양으로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수도사는 그 위에다 유리와 광물은 맞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연장이 닿으면 그 미완성 상자는 성보 상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은 수도원의 유리세공사인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였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가 노 뒤쪽에서 유리를 불면, 대장장이가 유리를 납틀에 끼워 유리창을 만든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자기네들이 유리창을 만들기는 해도 교회와 본관의 장식 유리는 자기네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그만치 2세기 전에 만들어진 명품이라고 말해 주었다. 니콜라 자신과 거기에 있는 대장장이들은, 유리에 관한 한 허드렛일을 하거나 오래되어 손상된 부분을 고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겨우 고치는 정도인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옛날의 그 색깔을 낼 수 없거든요. 성가대석 위에 있는 파란 유리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유리는 어찌나 맑은지 해가 중천으로 솟으면 천국의 빛줄기가 회중석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답니다. 회중석 서쪽에 있는 유리는 얼마전에 바꾸어 끼웠습니다. 그래서 질적으로는 원래 있던 것만 같지 못합니다. 여름에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지요. 맥이 빠집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옛날 사람들 같은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거인의 시대는 가버린 것이지요.'
윌리엄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수했다.
'그래요, 우리는 난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난쟁이는 난쟁이이되, 거인의 무등을 탄 난쟁이랍니다. 우리는 작지만, 그래도 때로는 거인들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답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말에 니콜라가 자신 있게 대들었다.
'아니, 우리가 그분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수도원의 보물이 보관된 교회 지하실로 내려가 보시면, 아주 굉장한 성보 상자를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보 상자를 한 번이라도 보시면... 저 같은 유리장이가 꼼지락거리며 주무르고 있는 이것은... 호작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유리 세공사가 줄곧 유리창만 만들라는 법은 없어요. 대장장이라고 해서 줄곧 성보 상자만 만들라는 법도 없고요. 옛날의 거장들이 다행히도 몇 세기를 너끈하게 견딜 만한, 아주 튼튼하고 예쁜 놈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온통 성보 상자로 가득 차 버리게요? 그때쯤이면 성보 상자를 아무리 뒤져 봐야 유물이 될 만한 성자의 유골은 아주 드물어질 테지요. 그렇다고 해서 평생 깨어진 유리창만 땜질하고 있을 수도 없지요. 여러 나라에서 나는 유리 제품을 많이 보았는데, 그걸 보니까 장차 세상에서는 유리가 신성한 사업에 쓰여지는 것은 물론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 같습디다. 우리 시대에 만들어 진 거라도 하나 보여 드리고 싶군요. 나는 복이 많아 이 요긴한 견본을 하나 가질 수 있었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말끝에, 법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는 예의 그 렌즈콩처럼 생긴 유리알 한 쌍을 꺼냈다. 우리의 말 상대가 되고 있던 양반의 안색이 달라졌다.
니콜라는, 몹시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윌리엄 수도사가 내민, 유리알이 두 군데 박힌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테 안에 든 유리 눈이로군요! 그것 참 대단한 물건입니다! 피사에서 조르다노 형제를 만났을 때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발명된 지가 20년이 넘었다더군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자그만치 20년 전의 일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발명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리 세공의 도사 중에서도 도사라야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시간도 엄청나게 들고 공도 엄청나게 듭니다. 10년 전, 눈에다 대는 이 유리알 한 쌍이 거금 6볼로냐 크라운에 팔렸답니다. 나는 위대한 장인, 아르마티 사람 살비노로부터 이걸 얻었지요. 10년도 넘은 일입니다만 나는 이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품고 다닌답니다. 내 몸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지요. 하니, 지금은 아주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답니다.'
'언제, 좀 자세히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이런 거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좀 좋겠습니까?'
'물론 입니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유리의 두께는 쓰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유리알 여러 개를 시험해 보아야 한답니다. 특정인에게 적당한 두께가 찾아질 때까지 말이지요.'
'기적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혹자는 마법이니, 악마의 연장이니 할 터이니...'
윌리엄 수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건을 두고, 마법 어쩌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허나 마법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마의 마법인데, 이 마법은 말로 나타내기 어려우리만치 아주 교묘하게 인간의 타락을 획책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마법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마법은 자연을 변형시키는 일을 하는 데 그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의 생명 자체를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성한 마법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은가요. 따라서 배운 사람들은 이 마법을 고구하되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데 그치지 말고, 하느님께서, 히브리 인, 그리스인, 고대인, 심지어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허락하셨던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어야 합니다.(이교도들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눈과 시력의 과학은 얼마나 방대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기독교도의 지식은 불신자나 이교도들 손을 떠나 다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면, 이런 것과 관련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째서 이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지식으로 널리 펴지 않는답니까?'
'하느님 백성이라고 해서 모두 이 어마어마한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 데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악마와 결탁한 요술쟁이로 오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지식을 남과 더불어 나누겠다고 한 이유로 목숨을 잃은 적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나부터도, 저 종교 재판과 이단 심판 시절에 악마와 거래한다는 의심을 받았던 나머지 이 렌즈를 감히 코에다 걸지 못했던 때가 있답니다. 이 때문에 꼭 읽어야 할 문건도 직접은 읽지 못하고 공연히 서기들로 하여금 대독하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단 심판관 시절이라면, 악마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시절, 누구나 코로 유황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건 시절이랍니다. 한번 걸리면 악마와 손을 잡은 혐의로 기소되기가 십상이었지요. 위대한 로저 베이컨께서 경고하셨듯이, 과학의 비밀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고약한 일에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식자는, 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지극히 범용한 과학 문건을 일부러 마법과 관련된 문건으로 보이게 합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그래야 불순한 사람들이 이를 넘보지 못할 게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어른께서는, 범용한 사람들이 이 비밀을 그릇된 목적에 쓸까 봐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범용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을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그들은 이런 비밀을 무서워하는 나머지, 목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악마의 소행으로 혼동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유연히 약 만드는 데 대단히 재주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양반은 단기간에 질병을 조복시킬 만한 단방 영약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이 양반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이렇게 만든 약을 범용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그들은 약을 쓰면서 주문 비슷한 기도문을 읊조리더랍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들은 단방 약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 비슷한 기도문이 병을 낫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용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은, 이 약이 지닌 효능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않고, 주문을 통한 치유의 기적에만 의지하고는 바르거나 복용하더랍니다. 하기야, 경건한 믿음으로 무장되었다고 하는 상태 자체가 이미 병 나을 준비가 된 상태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것은 이렇게 범용하고 단순한 사람으로부터도 지켜져야 하지만 식자들의 편견으로부터도 지켜져야 합니다. 내 언제 다시 말씀드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만, 영약은 자연의 법칙을 미리 앞질러 아는 이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이, 자신의 지상적 권력을 키워 나가려 하거나, 소유를 늘이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 손으로 들어가면 큰일입니다. 내 일찍이 카타이에서 한 현자가 무슨 약을 만들었는데, 이 약은 불과 접촉하면 엄청난 폭음과 불꽃을 일으키면서 사방 수십 자 이내에 있는 것은 모조리 부수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참 놀라운 발명품입니다만... 그렇지요, 강의 흐름을 바꾸거나, 경작할 땅에 박힌 바위를 부수는 데 쓰여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자기 적을 궤멸시키는 일에 능히 이 약을 쓸 만한 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만 같지 못하지요.'
'그 적이라는 자들이 하느님 백성의 원수라면 이 아니 좋겠습니까?'
'좋다마다요. 하지만 오늘날 하느님 백성의 원수는 누군가요? 황제 루드비히인가요? 교황 요한인가요?'
윌리엄 수도사의 질문에 니콜라가 목을 움츠리면서 대답했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난문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실 테지요. 비밀 중에는 모호한 말의 뚜껑을 덮어 둘 필요가 있는 법. 자연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양피지나 염소피지에 씌어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밀의 서에서, 자연이나 예술의 비밀을 너무 밝히 드러내는 것은 천상의 봉인을 뜯는 짓이며, 따라서 악마에게 끼어들 기회를 주는 짓이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곡해하면 안 됩니다. 그분은,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고, 그 드러내는 시기와 방법을 식자가 온당하게 가려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그러하시면 서책이 읽는 자들의 손 밖에 있는, 이 같은 곳을 두둔하시는 것입니까?'
니콜라가 물었다. 니콜라가 드디어 사부님의 미끼를 문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문제지요. 과언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만, 과언 또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못합니다. 나는, 지식의 보고하고 하는 것은 반드시 감추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내게는 이곳의 풍습이 죄악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 말은,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는 비밀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식자들이 동류끼리만 통하는 말로 이를 지키고 막는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식자들이 이를 지키고 막는 것을 보면 여기에 무엇인가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배움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선악을 구분하는 일 또한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리 시대의 식자들은, 대개 난쟁이의 무등을 탄 또 하나의 난쟁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부님의 대담무쌍한 말투가 니콜라의 마음을 아주 편하게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니콜라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은근하게 수작을 걸었다. '어르신과 나는, 같은 종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를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턱으로 본관을 가리키면서 속삭였다.
'저기 말씀인데요... 저기에서는... 학문의 비밀이 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짐짓 무관심한 척하면서 물었다.
'호, 그래요? 어떤 마법이 학문의 비밀을 보호하나요? 철장, 금제, 뭐 이런 것이겠지요.'
'천만에요. 그 이상이랍니다.'
'가령?'
'저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제 관심의 과녁은 유리이지 서책은 아니니까요. 허나 수도원에는 소문이 돕니다... 아주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답니다.'
'궁금하군요, 어떤 소문이지요?'
'참으로 괴이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어떤 수도사가 말라키아에게 서책을 부탁했다가 그만 거절당했답니다. 이 수도사는 그 서책을 훔쳐보기로 말라키아 몰래 야밤에 장서관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뱀, 머리 없는 사람, 머리가 둘인 사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수도사가 어찌어찌 해서 그 미궁을 헤어나왔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더라지요, 아마?'
'하면, 악마나 허깨비의 소행이라고 해야 할 일이지 어째서 마법 운운하게 된 것이지요?'
'제 비록 미천한 유리세공사에 지나지 않으나, 본시부터 바탕이 미욱한 것은 아닙니다. 악마는(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수도사를 시험하되, 뱀이나 머리 둘 달린 인간의 모습으로 수도사를 시험하지는 않습니다. 광야에서 일찍이 교부들이 당했듯이 악마는 음란한 환상을 통해 시험하기를 즐깁니다. 더구나 모모한 서책을 보는 것이 죄악이라면, 어찌해서 악마가 나서서 그런 죄악에 빠지는 수도사를 혼낸답니까. 악마라면 그런 죄악을 조장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거 훌륭한 추리 같소.'
'시약소 창문을 고치면서 저는 세베리노의 서책 몇 장을 떠들쳐 본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더군요.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금서로 꼽히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이 아니었던 가 싶습니다. 특히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진 쪽인데, 그것은 심지를 다듬는 법, 환상을 유발시키는 향수 제조법...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관 2층의 조명은 보셨을 겁니다만 한밤중에는 못 보셨을 겁니다. 이 수도원에서 밤을 지내보시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많은 수도사들은 그 불빛을 놓고 자주 수군거립니다. 도깨비불이라는 수도사도 있고, 제바닥을 찾아온, 죽은 사서의 영혼이라고 하는 수도사도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수도사의 영혼이라니, 그게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여기 있는 수도사들은 대개 이런 것을 믿습니다. 저는, 환상을 지어내는 마법의 등잔 불빛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곧잘 하고는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개의 귀에서 뽑은 기름을 등잔에 부어 놓으면 그 등잔 연기를 쏘이는 사람은 지기 머리를 개 대가리로 믿는다지 않습니까? 누구와 함께 있을 경우에는 서로 상대의 머리를 개 대가리로 여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고약 중에는 별별 고약이 다 있는데 개중에는 바르고 등잔 옆에 서면 자신을 코끼리 같이 거대한 짐승으로 느끼게 되는 고약도 있다고 합니다. 뿐입니까? 박쥐 눈,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무슨 물고기, 그리고 늑대의 독물로 심지를 만들어 등잔에다 꽂아 놓으면 그 심지가 타는 동안에는 바로 눈앞에 그런 동물이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도마뱀 꼬리로 심지를 만들어 태우면 주위의 모든 사물이 은으로 보이고, 검은 배암의 기름이나 수의로 심지를 만들어 태우면 방안에 뱀이 가득 찬 것으로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는 압니다... 장서관에서 누군가가 아주 꾀를 써 가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수도사의 영혼이 장서관으로 들어와서 그런 마술을 부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니콜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만...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 주시겠지요. 늦었습니다. 벌써 만과가 시작되었을 테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니콜라는 이 말을 남기고는 교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남쪽 벽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는 순례자 숙사와 회의장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올리브 압착실, 연자 방앗간, 곡물 창고, 식품 창고, 수련사 숙사가 있었다. 수도사들은 모두 잰걸음으로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물어보았다.
'니콜라 수도사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모르겠다. 장서관에 무엇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만, 글쎄다, 죽은 사서의 영혼 어쩌고 하는 것은 빈말일 듯하구나.'
'빈말이라고 하시면...?'
'죽은 사선 수도사들 말이다만... 맡은 의무에 충실한 학승들이었으니 만치 지금쯤 하느님 나라에 머물면서 하느님 뜻을 묵상하고 있어야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 대답이 되었느냐? 등잔 말인데, 장서관에 등잔 같은 게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 봐야 할 일이다. 유리세공사가 귀띔하던 고약 말인데... 침입자 앞에 허깨비를 어른거리게 하는 방법 중에는 고약을 쓰는 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있다. 너도 오늘 들었으니 알 것이다만, 세베리노 같으면 잘 알고 있을 게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는 시기상조.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수도원은 야간의 장서관 출입을 바라지 않는 반면에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침입을 시도해 왔고 지금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맡아 하시는 일과 이 일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델모는 자진했기가 쉽겠구나.'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오늘 아침에 나는 짚더미를 유심히 보았다. 동쪽 탑루 아래에서 모퉁이를 따라 올라오면서 산사태 자국을 보았느니라. 산사태가 아니라면, 탑 아래의 담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거나 쓰레기가 흘러내린 것일 테지. 그래서 나는 오늘저녁 위에서 이 지점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짚더미 위에는 덮인 눈이 별로 없었다. 무슨 말이냐? 그 눈은 최근에 내린 눈, 다시 말해서 어제 내린 눈이지 그전에 내린 눈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델모의 시신에 대해, 수도원장은 바위에 갈가리 찢겨 동쪽 탑루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지 않더냐? 동쪽 탑루 아래라면 절벽과 건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래엔 소나무가 자라 있고... 그러나 바위는 벽이 끝나는 지점 바로 아래에서 계단을 이루고 있다. 결국 짚더미는 계단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라고 할까... 이유는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아델모가 벽의 난간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고, 이어 바위에 부딪히면서, 죽었든 부상했든 간에 짚더미 위로 떨어졌다... 이렇게 말해 버리면 머리가 덜 아플 테지. 그렇다면 그날 밤 폭풍으로 인한 산사태는 짚더미와 담벽 일부와 이 젊은이의 시체를 동쪽 탑루 아래로 밀고 내려갔을 것이야.'
'어째서 사부님께서는, 조금 전에 하신 추리를, 머리가 덜 아플터인 추리라고 하시는지요?'
'이것 보아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한번 추론한 원인이나 진상은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닌 법이다. 만일에 아델모가 동쪽 탑루에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아델모의 몸은 장서관으로 들어갔을 것이 아니냐? 장서관으로 들어갔다면 누군가가 아델모를 침입자로 오인했을 테지? 따라서 아델모는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 장서관에 있던 자는 변변히 저항도 못하는 아델모를 죽이고는 시신을 짊어지고 유리창 있는 곳까지 올라간 뒤, 유리창을 열고 이 가엾은 친구를 아래로 던졌을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내 추리에서 모자라는 것은 아델모, 아델모의 결심, 그리고 작은 산사태...를 한 줄로 잇는 동기다. 원인, 다시 말해서 동기만 있으면 모든 게 설명이 가능할 터인데.'
'아델모 수도사는 왜 자진하려고 했을까요?'
'누가, 왜, 아델모를 죽이려고 했을까? 어떤 질문을 제기하든 먼저 동기를 찾아내어야 한다. 내 보기에는 여기에 반드시 이유, 혹은 동기가 있었을 것 같구나. 본관에는, 말을 조심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더구나. 모두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에게도, 별 것은 아니다만, 소득이 있기는 있었다. 아델모와 베렝가리오의 이상한 관계를 알아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따라서 당분간 이들에게 눈을 대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야.'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만과가 끝났다. 일꾼들은 저녁을 먹기 전에 제각기 맡은 일이 기다리는 일터로 돌아갔고 수도사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눈발이 날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천지가 하얀 융단에 덮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눈은 밤새 내렸던 듯하다.
몹시 시장하던 참이어서 식탁 앞에 앉는다는 게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었다.
종과
식당에는 커다란 횃불 몇 개가 밝혀져 있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석을 좌우로 각각 한 줄씩 앉아 있었다. 원장의 자리는 수도사들의 자기와는 직각을 이루는 넓은 단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반대편에는 강단이 있었는데, 식사 중에 성서를 봉독할 수도사가 이미 거기에 자리 잡고 서 있었다. 원장은 성 파코미우스의 권고에 의한 오랜 관례에 따라 세수식을 끝낸 우리들의 손을 닦아주려고 흰 수건을 든 채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수식과 손의 물기를 닦는 순서가 끝나자 원장은 윌리엄 수도사를 옆자리로 모시면서 나에게는, 역시 손님 중 한 사람이니만치 베네딕트 회의 품계를 무시해서 나의 위계가 수련사임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수도사에 준하는 특권을 허락한다고 말했다. 원장은 친절하게도, 다음날부터는 수도사들과 같은 자리에 앉되, 혹 사부님을 시봉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식사 전후에 주방을 들르면 요리사들이 편의를 보아 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수도사들은, 두건을 얼굴 위로 드리우고, 두 손을 겉옷 안에 넣은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수도원장이 자기 식탁 앞으로 다가가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강단에서는 선창자가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로>를 선창했다. 원장이 축복을 내리자 수도사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우리 교단의 회칙은, 수도사의 식사는 검약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수도사들에게 필요한 음식의 양을 원장이 정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수도원의 경우 수도사들은 식탁의 즐거움을, 탐닉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잖이 누리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습이 무슨 식도락의 잔치로 변형되어 버렸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수도사들의 본분인, 참회와 덕행의 모범을 좇는 수도사들은,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실질적인 영양을 섭취하면서 지적인 노동의 값을 삼는다. 그러나 수도원장의 식탁은 늘 기름지다. 귀한 손님이 거기에 앉기 때문인데, 원장은 이로써 수도원 땅의 소출과 요리사의 솜씨를 과시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의 식사는 관례상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꼭 할 이야기가 있으면 손가락 신호로 알파벳을 그려서 전한다. 수련사의 젊은 수도사들은 원장 다음으로 배식을 받는다. 이들의 자리가 바로 원장의 옆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원장의 식탁에 앉은 수도사는, 말라키아, 식료계 수도사, 그리고 두 분 노수도사, 즉 우리가 문서 사자실에서 만났던 호르헤 노인과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였다. 최연장자인 알리나르도는 거의 백 살이 다 된 노인으로, 몸이 가냘픈 데다 다리까지 절어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 흡사 송장 같은 느낌을 주고는 했다. 수도원장의 말에 따르면 알리나르도 수도사는, 수련사 시절에 그 수도원으로 들어와 자그마치 80년 동안이나 그곳에 붙박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하게 기억하는 노인이다. 원장은,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조용조용하게 했다. 우리 교단의 회칙이 그렇게 되어 있는 데다가 강단 쪽에서 조용하게 성서를 봉독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장의 식탁에서는 약간의 융통성이 있었다. 원장이 자기네 수도원에서 만든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자랑할 때마다 합석한 손님들이 장단을 맞추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포도주를 부어 주면서, 포도주와 관련된 회칙의 조항을 인용했다. 즉, 수도사에게 포도주가 꼭 합당한 음식은 아니나, 우리 시대 수도사들에게 이를 금지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니, [전도서]에서 일렀듯이 술은 현자를 배교자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마시되 양은 채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네딕트는 지금의 우리 시대와는 거리가 먼 그 자신의 시대를 <우리 시대>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어떤가?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 시대의 멜크 수도원 수도사들 중에는 맥주 맛을 즐기는 수도사들도 있다는 말로 <우리 시대> 이야기를 대신하기로 하자. 요컨대 우리는 과하지는 않았지만, 맛을 즐기는 데는 과히 인색하지 않게 마셨다.
우리는 꼬챙이에 꿰어 구운 갓 잡은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나는 그들이 요리하는 데 쓴 기름은 동물의 지방이나, 포도 찌꺼기 기름이 아니라, 수도원이 바다를 면한 산기슭 올리브밭에서 거둔 싱싱한 올리브에서 짠 기름임을 알았다. 원장은 우리가 주방에서 요리 과정을 지켜보았던 닭 요리를 권했다. 원장 식탁의 삼지창은 금속제였다. 당시로는 희귀한 물건이라서 나는 그 물건을 보면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있는 사부님의 안경다리를 생각했다. 귀족 출신인 원장은, 음식에다 손을 대지 않고 그 삼지창을 써서 큰 접시에서 우리 접시로 음식을 덜어 주었다. 나는 황송스러웠던 나머지 원장의 친절을 사양했다. 그러나 일리엄 수도사는 그 음식을 받아 대단히 귀족스러워 보아는 연장인 삼지창으로 능숙하게 음식을 다루었다. 사부님은 원장에게, <보시라,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라고 해서 모두 무식쟁이에 천민 태생인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해진미 앞에 앉았는데도(여행 중에는 얻어걸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먹어 왔던 우리가 아니던가) 나는 강단에서 들리는, 성서를 봉독하는 소리 때문에 음식에 정신을 쏟을 수 없었다. 나는 헷갈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호르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까지 쳤다. 나는 한동안 듣고서야, 강단에서 봉독하고 있는 것은 성서가 아니라 우리 베네딕트 회의 회칙이라는 걸 알았다. 오후에 호르헤 노인이 말끝마다 토를 달고 나서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강단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선지자의 본을 따르게 하소서. 선지자들은, <나는 마음을 정했고, 재 길을 지켜 혀끝으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할 것이며, 입에는 재갈을 물리었고, 자신을 낮추어 벙어리가 되었으며 쓸 말까지도 자제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고 하였나니, 이 구절에서 선지자가 우리에게 침묵에의 사랑은 정당한 말까지도 자제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 죄에 대한 응징을 피하는 덴 대체 정당한 말을 얼마나 자제해야 하겠느뇨? 어디서건 욕설이나 실없는 말이나 농담을 영원히 물리치되, 후학으로 하여금 이런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
호르헤가 표정을 활짝 밝히며 나지막하게, 그러나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거야말로 낮에 우리가 했던 토론의 주석이 되겠구료.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웃지 않으셨답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그 말을 받았다.
'그분의 인성이 이를 금하신 적도 없지요. 신학자들이 이르듯이, 웃음이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아들은 웃을 수도 있었소만, 그분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호르헤는, 피에트로 칸토레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드시지요, 이는 잘 익었음입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윌리엄 수도사가 앞으로 갓 날라져 온 음식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있다가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던지 호르헤가 물었다.
'암브로지오에 따르면 이것은 로렌초 성인이 화형대 위에서 형리들에게 하신 말씀이랍니다. 프루덴티우스도 [순교가]에서 쓰고 있지요...'
울리엄 수도사는, 성자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을 이었다.
'... 따라서 로렌초 성인은, 비록 원수를 능멸하기 위함이었어도 웃을 줄을 아셨고, 우스갯소리를 하실 줄 아셨음이라.'
'거보세요,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육체의 파멸에 아주 가깝게 있는 것이 아닌가요?'
호르헤가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아닌 게 아니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원장은 점잖은 몸짓으로, 더 이상 진행시키지 말자는 눈치를 보였다. 식사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에 모인 수도사들에게 윌리엄 수도사를 소개했다. 그는, 사부님의 지혜로운 통찰력을 칭송하고 사부님의 명성을 다소 과장되게 전한 다음, 원장 자신이 아델모의 죽음에 관련된 조사를 부탁한 것인 만큼 수도사들은 마땅히 그의 질문에 응답하되 동석하지 못한 수도사들에게 널리 알려 행여 손님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시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수도사들은 종과 성무를 앞두고 교회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다시 두건을 내리고 문 앞에 한 줄로 섰다. 이윽고 정렬을 끝낸 수도사들은 묘지를 지나 북문을 통해 교회로 들어갔다.
우리는 원장과 함께 식당을 나왔다. 윌리엄 수도사가 물었다.
'본관 문을 잠그는 시각이 지금쯤입니까?'
'일꾼들이 식당과 주방을 청소하면 사서가 문을 모두 닫고 안으로 잠근답니다.'
'안에서 잠그다니요? 그러면 잠근 사서는 어느 문으로 나옵니까?'
수도원장은 잠시 윌리엄 수도사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주방에서 자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말을 마친 원장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윌리엄 수도사가 나에게 속삭였다.
'그럴 테지. 나오는 문이 있기는 있지만 나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렸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사부님의, 예의 그 명민한 추리력이 발동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의 질책이 떨어졌다.
'웃음이 그렇게 헤퍼서 쓰겠느냐? 보고 듣지 않았느냐? 이 수도원 울안에서 헤프게 웃다가 어디 제대로 대접을 받겠더냐?'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키 높이의 갑절쯤 되는 청동 삼각대개 등잔을 하나 달고 교회 안을 밝히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지 선창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주여,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원장이 여기에 화답했다.
'저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니.'
모두가 한목소리로 응답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이라.'
이어서 찬송가 <정의의 하느님, 찾을 때 화답하소서>, <온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나이다>, <주여 축복하소서, 주의 종들을 축복하소서>가 이어졌다.
우리는 회중석에 앉지 않고 중앙의 통로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때 우리 눈에, 교회 옆 부속실의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말라키아가 보였다, 사부님이 나에게 속삭였다.
'잘 보아 두어라. 어쩌면 본관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묘지 밑으로 말씀입니까?'
'있으면 안 되느냐? 내 방금 그 생각을 했다. 어딘가에 공동이 있을 게야. 수 세기 동안 이곳에서 죽어 나간 수도사들을 모두 마당 묘지에 묻었을 리는 없지 않겠느냐?'
'정말 밤에 장서관으로 들어가실 의향이십니까?'
'수도사의 시신과 뱀과 신비스러운 빛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아드소... 아서라, 말아라. 내 오늘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만, 호기심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고, 아델모가 죽은 경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너에게 일렀듯이, 우선은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어야겠으나 이곳의 관례도 깔끔하게 지켜 줄 생각이다.'
'이곳의 관례를 지켜 주신다면... 알려고 하시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닌지요?'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부님은 이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무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