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가시 2
16
영국의 가장 위대한 왕을 만나고 싶냐고? 로즈린은 너무나 놀라운 질문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 동안 소온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우스꽝스러운 질문은 모두 그 놀라움 때문이었다.
"당신은 노르만디 윌리엄의 유령을 이곳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오. 그러나 난 당신을 그에게로 데리고 갈 수 있소. 살아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흥분과 실망을 반복하는 데에 진저리가 났다. 나를 월리엄에게 데리고 간다고? 어떻게? 그의 제안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건 불가능……."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 곧 다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소온이 여기에 있는 것 역시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거대한 몸집의 살아있는 바이킹은 자기 서재 안에 있었다.
로즈린은 숨을 죽인 채 얼른 말을 바꾸었다.
"좋아요, 어떻게 하는 거죠?"
"<흡혈귀의 저주>를 내 손으로 들어야 하오."
"검을? 당신이 말한 또 다른 힘이 그건가요? 시간을 거슬러서 여행할 수 있는 힘?"
"그렇소."
"어떻게요?"
"난 단지 내가 가고 싶은 장소를 상상하면 되는 거요. 그러면 난 거기에 가 있게 되죠."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또다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할 수 있겠군요."
"아니오. 그 검은 나와 연결되어 있소. 내가 없으면 그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거요."
로즈린은 조금 큰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그녀에겐 증거가 필요했다. 그는 검을 되찾기 위해 그럴싸한 말이나 행동을 꾸며댈 수도 있으리라.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난 당신에게 내 검을 빌려주어야만 하고, 당신과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 한 검은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오."
어째서 그의 말이 귀에 익은 것처럼 들린다지? 아, 전에도 한번 했던 말이었다. 글쎄, 적어도 그의 허풍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좋아요. 내가 당신에게 검을 주고 또 내가 함께 간다고 가정해 봐요. 그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나에게 힘이 돌아온다오. 나는 이전에 가보았던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거요."
"선택에 한계가 있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내가 몇 번 불려왔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소."
그가 설명했다.
"시간은 같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그것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라가는 거요."
"얼마나 많은 시간의 여유에 대해 말하는 거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 주일, 일 년, 백 년. 또다시, 그것은 내가 어떤 시대, 어느 장소를 상상하느냐에 달려있소. 해안가나 사람이 살지 않은 들판은 도시의 거리보다는 덜 변할 테니까."
"만약 당신이 가본 적이 없는 시간대로 가려고 한다면,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불려갔던 때보다 일 년 뒤로 가려고 한다면, 그런데 그 장소가 변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죠?"
"나는 두 시간대 사이 어딘가에,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남아 있는 때로 가게 되는 거요."
"지금으로부터 한 주일이나 한 달 후로 갈 수는 있나요?"
"아니오. 검은 미래로 가지는 못하오. 단지 과거로만 갈 수 있을 뿐이오. 그러나 돌아올 때는 항상 현재로 돌아오게 되어 있소. 얼마나 변했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오."
그들이 돌아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로즈린은 미래로의 여행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닥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를 사로잡는 것은 과거였기에, 즉시 그 화제로 되돌아갔다.
"만약 과거에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당신은 날짜까지 정확히 골라 갈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소. 내가 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말이오."
그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또 내가 본 어떤 전쟁에서도 싸울 수가 있소. 오딘은 나에게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확인을 해주었다오."
오딘? 그녀는 속으로 신음소리를 내었다. 오, 물론, 바이킹 신의 말에 의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녀가 바이킹의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비위를 맞추는 대신에 말을 막았어야만 했다.
"잠깐만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시간 여행을 해본 적이 있나요?"
"아니오, 그런 기회들은 늘상 거절당했다오. 그렇게 되면 내 검을 가진 여자가 나와 함께 가야만 하는데, 그들 중의 아무도 거기에 동의한 사람이 없었소."
"어쨌거나 그것이 가능한지 당신도 확실히 모르는 거군요."
"오딘은……,"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가 당신에게 확실히 그렇게 말했다는 거지요?"
로즈린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섬기는 신을 모독하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고, 비록 그가 검을 빼앗기 위해 그녀를 속이려고 할지라도 그와 평화스럽게 지내고 싶었다.
"좋아요, 정확히 말해 봐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만약 당신의 손에 검이 쥐어진다면 우리는 윌리엄 왕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윌리엄 왕? 당신은 윌리엄 공작을……."
"그를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어요. 우리가 그를 만날 수 있나요?"
"그렇소."
"혹은 다른 시대의 다른 왕들을 만날 수도 있는 건가요?"
"그렇소, 또한 나는 어떤 전쟁이든 참가할 수 있소."
로즈린은 얼굴을 찡그렸다. 소온은 전쟁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다른 거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전쟁이라니! 그녀는 그가 싸움이라면 무턱대고 뛰어들고 싶어할 정도로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얼굴 가득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설마 그녀에게서 검을 되찾기 위한 계략은 아니겠지?
또다시 한무더기의 흥분이 몰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소온이 방금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다는 말은 곧 역사를 바꾸어 놓은 장본인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됨을 의미했다. 그녀가 어찌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낸단 말인가. 로즈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소온에게 자기가 한 말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주게 될 거야.
그러나 우선 소온에게 그녀의 검을 주어야, 혹은 적어도 빌려주어야만 했다. 내가 과연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한번 해보고 싶어. 만약 내가 과거를 방문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기만 하다면,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직접 보고 연구를 위한 자료를 수집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기다려요, 검을 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말했다.
그는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재에서 나갈 때 소온은 바싹 뒤를 따라왔고, 그녀가 계단에 발을 올려놓을 때에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느낌 때문에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검을 손에 들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그녀는 또 한 번 망설였다. 시간을 거스를 능력은 이해하기도 힘들었지만 받아들이기는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그 증거를 보고 싶었다. 또, 검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것을 나에게 주시오, 로즈린."
로즈린은 눈을 감았다.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의 낮고 은근한 목소리가 떠올리는 것은 결코 검이 아니었으나, 그는 지금 검에 대해 말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그는 그녀가 생각했던 만큼 가까이 서 있지 않았다. 이제 그는 손을 내밀면서 검을 달라고 그녀에게 소리없는 요구를 보내왔다.
소온의 행동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녀는 그의 요구대로 했다. 사실, 로즈린은 그에게 검을 던지다시피 했다. 그리고 너무나 근심스러운 나머지 소온의 손가락이 칼자루를 감았을 때 <흡혈귀의 저주>가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날에 파인 작은 흠집들이 사라지고 오래되어 검게 변한 금속은 은색으로 반짝거렸다. 그 길다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다 가려지지 않은 호박도 더 이상 음울한 색을 띠지 않을 뿐 아니라 밝고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이 모든 현상은 분명히 환각이어야만 했다. 빛의 장난이자 그녀의 검과 바이킹이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일어난 환상이어야 했다. 어쨌거나 기적 같은 일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녀가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을 때 다른 시대로 이동해 있을지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 남아있었다.
이제 로즈린은 그에게 자신의 말을 증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눈을 감았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침실 시계가 째깍이며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열려진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향기로운 여름의 산들바람을 느낄 수…….
"우린 떠날 수 없소."
소온이 말했다.
"당신이 동의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한 말이오. 당신은 스스로가 선택한 자유의지에 의해 내가 가는 곳까지 따라가겠다는 말을 해야만 하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들은 아직도 그녀의 침실 안에 있었다. 그가 아직 떠날 수 없다고 말했으니,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흡혈귀의 저주>를 손에 든 채 거기에 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였을까? 그는 정말로 그녀의 협조 없이는 떠날 수 없는 것일까?
시간 여행에 대한 로즈린의 갈망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심지어 검을 돌려달라고 할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가 또다시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원인을 제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그녀 자신도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자신은 소온이 정말로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을 생각이었지만, 그는 곧 오딘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실망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먼저 그녀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지금 그녀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둘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지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먼저 그녀 자신을 위해 다짐을 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해요. 난 당신에게 나의 검을 빌려주는 것이에요, 소온. 그 점은 분명히 하고 싶어요. 언제라도 내가 원할 때 당신은 검을 돌려주어야 해요, 알았죠?"
소온은 한참만에 대답을 했으나 그것도 말로 하지 않았다. 단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끄덕거림을 억지로 쥐어짜낸 듯이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내가 원할 때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해줘요."
이 대답은 아까보다 조금 쉽게 나왔으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알았소."
"좋아요."
그녀는 약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겠어요. 물론 내 자유의지에 의해서요."
소온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마자 미소를 지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로즈린은 다시 눈을 감을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그들 앞이 새까맣게 어두워지고 허공으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몇 초 후, 아니, 그보다는 더 후에, 쨍그랑거리는 금속음과 말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서로를 죽이려고 아우성치는 쇠비늘 갑옷을 입은 수천 명의 전사들이 나타났다.
17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전투의 한가운데에 선 로즈린은 오직 공포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충격이 먼저였다. 로즈린은 온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서서 멍청하게 바라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의 이성은 필사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해 받아들여질 만한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즉시 마약이 유발시킨 환각이나 입체 사진술이 만들어 낸 영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는 단순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온에게 설명하려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순간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녀는 꿈속에선 실제로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하지만 로즈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꿈이라고 믿을 수 없는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피와 말의 분뇨에서 풍겨나오는 불쾌한 냄새 - 그런 악취를 예상하지 못했던 꿈꾸는 사람에게 - 를 맡을 수 있었다. 주위에 악취 투성이의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또한 칼날이 부딪히며 내는 쨍그렁대는 소리를 듣자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소온은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다. 사실상, <흡혈귀의 저주>는 이 꿈이 시작하던 처음 순간부터 잠시도 정지하지 않았다. 햇살에 칼날이 번쩍이며 자르고 또 자르고…… 베어 대었다.
로즈린은 남자들과 말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옷에 튀긴 피를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옷에 묻은 피도 더 이상 보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 꿈을 지금까지 겪어본 중 가장 끔찍한 악몽으로 분류해 놓을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생생하고, 이토록 무시무시한 꿈을 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말이 그녀의 어깨에 부딪히며 그녀를 소온을 향해 떠밀었다. 그녀가 균형을 잡고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건장한 팔에 들려 있는 피 묻은 칼이 그녀의 목이 있는 방향으로 내리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현실이 아니었으며 꿈속에서 죽는 것은 곧 꿈에서 깨어남을 의미하는데, 그녀는 간절히 깨어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또 다른 칼이 로즈린의 목으로 내려오는 칼을 막아 옆으로 밀치더니 공격자의 가슴으로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더 많은 피가 그녀에게 튀겼다. 문득 이것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녀는 점점 불쾌해졌다. 누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걸까? 그리고 소온이 나를 구했……? 만약 이것이 현재 상황이라면 난, 기절하고 말 테야.
물론 소온이 그녀를 구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부터 말이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꿈을 연장시켜 주어서 얼마나 감사하는지 말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으나 그는 기다릴 겨를이 없었다. 세 명의 무장한 사내들이 말에서 떨어진 기사를 둘러쌌고 소온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로즈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기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치명적인 무기들로 난장판을 이루는 곳으로 뛰어들어야만 그들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을 할 만큼의 시간 동안 소온의 주의를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다. 소온은 이미 세 명의 남자들을 처치하고 이제는 두 명의 말 탄 기사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꿈은 계속 길어지는 중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좀 더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야만 했다. 사실상, 이런 끔찍한 장면만 아니라면 어느 곳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또 다른 악몽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흡혈귀의 저주>가 가진 양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충분히 보았다.
로즈린은 그를 향해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소온 뒤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또 다른 보병을 밀어 버렸다. 그리곤 칼을 들지 않은 나머지 한쪽 팔을 꽉 잡고 소온을 마구 잡아당겼다.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평화로운 상황이라고 해도 그의 몸을 뒤흔드는 일은 불가능했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욱 그랬다. 그러나 소온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이 잡아당기고 있음을 뒤에 눈이 달려 있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놀라우리만치 조용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말고, 로즈린."
평정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로즈린은 신경질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녀가 밀어젖힌 병사는 다시 중심을 잡고 소온의 등과 그녀의 복부를 번갈아 쳐다보며 자신의 길다란 창으로 어느 쪽을 먼저 찔러야 하는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화가 난 채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소온의 등을 한방 갈겼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떠들썩한 소음 속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큰소리를 질러 댔다.
"지금이에요! 난 당신과 함께 가거나 말거나, 이 악몽 속에서 벗어나야겠어요. 당신에겐 즐거운 일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의 등짝에 구멍이 나기 직전이라구요!"
마치 그는 처음부터 창을 휘두르던 사내를 눈여겨보았던 것처럼 하나 남은 기사를 상대로 <흡혈귀의 저주>를 휘둘렀다. 기회를 잡았던 - 물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긴 했지만 - 그 병사는 천천히 땅위로 쓰러졌다.
로즈린은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오, 물론 머리 몇 개를 더 베고 싶겠죠? 난 상관 안 해요. 그냥 여기에 서서 당신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손가락이나 비틀면서 서 있을게요. 그렇지만 다음번에 날 당신의 꿈속으로 끌어들이려면 좀 더 근사한 곳이 좋지 않을까요? 촛불과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이젠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침대?"
그녀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단지 꿈에 불과하는 한……,"
로즈린은 말을 멈추었다. 그를 불러들인 것은 분명 그녀일런지 모른다. 그리고 사악하면서도 자극적으로 빙그레 웃는 모습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무마시켜 줄 수 있게, 그에게는 아직 상대해야 할 기사가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그녀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또한 불행하게도, 마지막 기사를 해치우는 데에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다시 덤벼든 또 한 명의 병사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그런 다음 그는 주인 잃은 말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타고 그녀를 끌어올렸다.
마침내 자신을 그곳에서 끌어내어 주자 그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약간 누그러들었다. 그는 자주 멈추어 서서 떠나는 그들을 막아서는 칼과 투창을 밀어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전쟁터 가장자리쯤에 있는 나무에서 멈추어 서서 그녀를 가장 낮은 가지 위에 올려놓자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으면 일단 안전할 거요."
그는 그녀에게 말하고서 뻔뻔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에 띄지 않게 소리 내지 말고 있으시오, 로즈린.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끄는 행동을 하면 난 아마 당신에게 화가 날 거요."
"그런가요?"
그녀가 발끈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없이 말에 올라타고 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아직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으며 아마도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로즈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이라고 소리 지르던 간에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소온은 그토록 고대하던 전쟁을 발견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차지한 새로운 자리에서 보니, 전투에 임한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생각처럼 수천 명이나 되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양편의 사람들을 외모상으론 구분하기가 힘들었는데, 한쪽은 약 40명,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50명 가량 되어 보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바로도 중세의 싸움은 이 정도의 숫자나 심지어 더 작은 숫자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만약 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 살아 있는 전사들은 많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몇몇은 그들의 운명을 크게 탄식하는 중이었고 대부분은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즈린은 그녀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몸을 떨었다. 이것은 남자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환상이었다. 현대의 여자들은 중세의 전투를 보게 될 거라는 꿈 따위는 꾸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악몽은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다른 꿈으로 바뀌기까지 너무 오래 지속되는 중이었다.
로즈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꿈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통제한 적이 있었을까? 물론 대부분의 꿈들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룻밤 내내 꾸었다고 생각되던 꿈도 잠에서 깨고 나면 그 순간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지금 그녀가 하는 생각들은 매우 깊고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데다 논리적인 설명까지 시도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꿈은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어떤 꿈과도 달랐다.
그에 반해 소온은 바보스럽게도 꿈을 지속시키려고 들었다. 하긴 꿈속에서 보통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었다.
로즈린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그녀는 악몽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심상치 않은 공포가 그녀에게 몰려왔다. 시간 여행에 대해 소온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녀는 만약 자신이 나무에서 뛰어내려 어딘가가 부러진다면 고통을 느끼게 될는지 아니면 잠에서 깨어나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동안 그녀는 2미터가 좀 못 되는 아래에 펼쳐진 땅바닥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좀 더 쉽고 덜 위험한 방법으로 통증을 느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마음먹고서, 눈에서 눈물이 날 때까지 손가락을 깨물었다. 두려움이 그녀의 몸을 모두 채웠다.
오, 하나님. 로즈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꿈을 꾸는 중이 아니었어. 소온은 자신이 말한 대로 나를 데리고 아주 먼 과거로 온 거야. 게다가 소온이 죽인 누군가는 그만 끼어 들지 않았다면 혹시 살아남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어. 그녀는 소온이 역사를 바꾸어 놓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막아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냥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역사가 바뀌어 사진에서 사람이 사라져 버리는 내용을 담은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아까보다 더 커다란 공포가 밀려오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로즈린은 소온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당장 주의를 기울이기엔 너무나 바쁠 것이다. 그는 싸울 상대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전사들은 대부분 짝을 지어 그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커다란 몸집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아무도 그를 혼자서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그가 다칠까봐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소위 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에 의하지 않고서는, 혹은 영원한 저주 속에 묶인 그를 쫓아다니는 울프스탄이라는 작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로즈린은 목이 아파옴을 느끼곤 소리 지르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여행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이 싸움터 한복판에 내려앉게 된 것은 바보스럽게도 그녀가 소온에게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라고 동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 불려왔을 때부터 호시탐탐 그럴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부주의하게도 그가 원하는 전쟁터를 찾아갈 힘을 주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만약 그가 가고 싶어하는 과거의 전투마다 그녀가 따라다닐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실수를 한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로즈린은 가지를 딛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약 스물다섯 명의 전사들이 좀 전보다는 열기가 식은 전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 여덟 명은 말을 탄 기사였는데, 현재 한 명이 전쟁터에서 주운 말을 타고 있는 소온과 칼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의 시대에서 군마는 보통의 말보다 훨씬 컸다. 전쟁을 위해 특별히 사육된 크고 거친 말로서, 그녀가 가까이 갈 만한 것이 못 되었지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와 소온 사이에는 몸뚱아리 네 개가 있어서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말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뒤에서 무엇인가가 뒤따르고 있다는 생각은 그녀의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짓밟히거나 전사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한 번 더, 그녀는 소온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에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 그는 적의 칼날에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짧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행동이 생명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즈린은 자신을 못 본 척하는 그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그가 이 전투에서 죽지 않기로 되어 있는 남자들을 죽임으로써 앞으로 태어나야 할 세대까지, 심지어 그녀 자신의 조상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를 막아야 했다. 로즈린은 필사적으로 지금 싸우고 있는 사내로부터 소온을 떼어낼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들릴 만큼 오랫동안 소리를 질러 대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 가까이 다가온 군마를 잡아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안장 아래로 등자가 있었으나 너무 높이 매달린 것으로 보아 그 말을 소유했던 사내가 그녀보다도 키가 작았음이 분명했다. 한껏 팔을 뻗었으나, 그녀의 손에 등자가 잡히지 않았다. 만약 뒤를 따라오는 말을 붙잡아 세울 수만 있다면 펄쩍 뛰어서 안장 위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리라. 그러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소온의 무릎 위에 앉혀지고 강철 같은 팔이 그녀의 허리를 둘러쌌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그가 무섭게 다그쳤다.
"그 야수가 얼마나 쉽게 당신을 죽일 수 있는지 알고나 있소?"
로즈린은 소온의 눈길 속에 담긴 화난 기색을 무시한 채 마구 쏘아붙였다.
"알려줘서 고맙군요. 그렇지만 당신은 내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았잖아요? 난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소온, 조금도 지체하지 말아요. 지금 당장요! 그리고 내 검을 돌려주어요. 그런 다음에는 여기 있는 기사들이 당신을 바늘집으로 만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가 솟구쳐오른 화를 누를 길이 없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는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아할 겨를이 없었으며 그의 무서운 표정에도 동요하지 않을 참이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 적이 쓰러졌는지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더 이상의 적들이 있지 않기만을 원했다.
소온은 그녀의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도착할 때만큼이나 빨리, 그는 그녀를 데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18
"당신은 역사를 함부로 바꾸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이 오늘 죽인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의 조상이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만약 그 사람이 아이를 낳기도 전에 당신이 죽여 버린 것이라면……."
소온과 함께 다시 돌아온 뒤, 로즈린은 자신의 침실 안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녔고, 그는 팔짱을 낀 채 방 한가운데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즈린은 솟구치는 노염을 삭이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그렇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준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한방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재미있는 장난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로즈린은 마침내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질을 가라앉혔으나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당신은 너무 사소한 일까지 걱정을 하는군."
사소한 일? 그녀는 기겁을 했다. 역사가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는 마당에, 사소한 일이라니.
그녀는 그를 쏘아보면서 다그쳤다.
"그건 대체 어떤 전쟁이었죠? 역사에 기록되었나요?"
"두 이웃부락 끼리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일어났을 뿐,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오."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그의 태도가 로즈린을 정말로 화나게 했다. 바이킹에게 전쟁은 찬미의 대상이며 최고의 가치였다. 그들은 전쟁을 위해 살았다. 자신들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쓰러진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심지어 전쟁이란 두고두고 말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죽은 목숨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이긴 자들의 자존심과 만족만이 의미 있게 여겨졌을 뿐이었다.
"당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게 있어요, 소온. 그 전투는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거예요. 이미 일어난 일이고 결과도 나와 있죠.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결과는 다른 결과를 낳게 돼 있어요. 그러나 만약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러니까 원래의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게 되어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죽지 말았어야 될 사람을 죽인다면……."
그는 또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설명조였다.
"로즈린, 오딘은 죽기로 운명 지워진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해 나에게 경고를 했고, 또한 나 자신과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오."
"당신 자신과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구요?"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듣자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녀가 듣고 싶어하던 대답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신의 충고를 듣지 않은 건가요?"
"난 그의 충고를 지켰소. 그 전투는 너무나 오랫동안 끌어오던 것이오. 아까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오. 그런데 두 부족을 모두 미워하던 세 번째 부족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살아남은 전사들을 모두 해치워 버리기 위해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끝날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소. 그 전투에서는 모두 죽게 되어 있었단 말이오, 로즈린. 따라서 내 손에 죽으나 다른 사람의 손에 죽으나 뭐가 다르겠소?"
"왜 나에게 빨리 말해 주지 않았죠? 그리고 당신을 그것을 어떻게 알았죠?"
처음으로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날 세 번째 부족들과 함께 말을 탔소. 그들은 내 검을 소유한 사람의 신하들로 매우 잔인한 심성을 가진 자들이라오. 그들은 자기네 희생자들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오."
"당신도 거기에 끼어 들었나요?"
"아니오. 난 보기만 할 뿐 그것을 막지는 못하오. 적어도 내손에 죽은 몇몇의 사람들은 그나마 빠르게 그리고 당당하게 죽은 거요."
죽음에서 무엇이 당당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생명의 존귀함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그의 말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또다시 내말을 듣지 않을 거요, 로즈린. 내 생명은 위험에 처하지 않았고 당신은 나처럼 저주를 받지도 않았소. 당신이 다가갔던 군마는 순식간에 당신을 짓밟아 버릴 수 있었소."
그녀는 화난 그를 달래기 위해 빙긋 웃었다.
"그 야수는 날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녀의 미소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누가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고 있는 거요?"
"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었어요."
그녀가 비꼬았다.
"당신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았어요 - 난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구요 - 그리고 그 전장에 짐승의 먹이가 가득 차게 될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만약 당신이 빨리 말해 주었다면, 난 뒤로 물러앉아서 전투를 감상했을 거예요. 물론 팝콘을 먹으면서 즐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에요."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스쳐지나갔다.
"팝콘?"
그러나 화를 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렬했다.
"만약 당신이 말한 대로 내가 했다면……."
"넘겨짚지 말아요, 바이킹 씨."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 같은 중세의 남자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겠지만, 현대의 여성들은 더 이상 남자가 뛰라고 할 때 뛰지 않는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죠. 그리고 우리는 복종하지…… 맙소사, 난 그런 단어를 싫어해요. 우리에게 상관 노릇을 하려는 독선적인 남자들은 아마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예요."
"당신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할 거요."
그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차라리 그가 소리를 지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그의 주장이 정당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렇게 화가 난 상태만 아니라면, 아마 그녀 자신도 그가 옳다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면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왕이나 대통령같이 사회의 전체 조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의 선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좋았을 테구요. 당신은 내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했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나요?"
"대통령?"
"다른 나라에서는……."
그녀는 설명을 시작하다가, 거만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냥 잊어버려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불려왔을 때도 민주주의라는 것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다시 시간을 거슬러 간다면……."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앞으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말해 준다면 대단히 고맙겠어요. 그리고 윌리엄 공을 만나는 일은 어떻게 된 거죠? 난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과 동행하는데 동의를 한 거라구요."
이제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보았다.
"윌리엄 공은 내가 자신의 지지자들과 벌였던 싸움에 대해 알게 되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요. 그래서 아까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한 거지. 이제는 안전하게 그를 방문할 수 있소."
"오, 우리가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녀는 조금 화가 났다.
"정말이지 내가 하루에 두 가지의 대 변동을 참아낼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군요. 영국의 유명한 정복자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할 거에요. 당신의 살인 잔치에서 회복되려면 난 지금 당장 침대에 들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침대라니, 참 반가운 소리군. 하지만 난 먼저 당신의 '샤워기'를 사용하고 싶소."
그녀는 그가 그렇게 안달 부리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이 정말 단지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분명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당신은 홀 아래쪽의 욕실을 사용하세요. 내 오빠는 항상 거기에 옷들을 놓아 두죠. 그리고 샤워기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물의 온도를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당신은 날 위해 물 온도를 맞추어 줄 수 있을 거요, 로즈린. 오늘 밤 당신의 침대를 나누어 쓰는 것처럼 당신의 샤워기를 사용할 거요."
19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이 로즈린의 머릿속엔 달콤한 환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소온과 그녀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실 안에 서 있고, 비누 묻힌 그녀의 손이 그의 넒은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손은 아직 젖어 있는 그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
로즈린은 숨을 멈추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열기가 소용돌이 치자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갑자기 무릎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면서 몸이 흔들거렸다. 그녀는 앉아야만 했다. 그 환상들을 머릿속에서 내몰아야만 했다. 그러나 원했다…… 맙소사, 그녀는 그를 너무나 원했다.
눈을 떴을 때, 로즈린은 바로 앞에 산처럼 우뚝 서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소온은 그녀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알았다. 만약 그가 자신이 던진 말로 갑작스레 달아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그녀는 그날 밤 혼자서 침대에 들고 싶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으리라. 또, 그를 확신시킬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님이 아니었고, 부풀어만 가는 자신의 감정과 싸우기엔 그녀는 퍽 지쳐 있었다.
소온이 단순하지만 결연한 태도로 그녀를 안아올렸을 때, 로즈린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아래에 내려놓을 때까지 한 일이라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죽 칼집과 부츠, 그리고 단검을 차례로 벗어 놓고 작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결코 샤워기 물이 아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의지로, 그의 몸 안으로 녹아들 듯 바싹 매달렸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그들은 거기에 서서 혀과 입술을 주고받고 서로의 몸뚱아리를 미친 듯이 더듬었다.
로즈린은 점점 달아올랐고 점점 더 흐느적거렸다. 뼈와 근육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감촉만 남은 듯했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아 뵈는 소온의 모습이 한기 같은 떨림을 등으로 흐르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닿아 있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몸은 정반대의 사실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그가 지닌 유혈에의 욕망이 성적인 것으로 바뀐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는 완전히 욕망에 사로잡혀 버린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평정을 잃지 않은 듯했고 단호한 결의가 엿보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뜨겁고 진한 키스를 그녀에게 퍼부어 대는 중이었다.
"당신은 지금 샤워를 할 수 있을 거요, 로즈린. 그리고 그 '온도'라는 것을 봐주시오."
할 수 있을까? 현기증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런 반대 없이 그녀는 그의 말에 따랐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물이 쏟아지면서 수증기가 피어오르자 둘 다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이상하고 못마땅했다. 옷 아래서 살갗이 불타는 중이었다. 한시바삐 살과 살을 맞대고 서로의 열기를 사르며 재가 되고 싶어졌다.
로즈린은 함께 하는 샤워란 대부분 사랑을 나눈 뒤에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었다. 경험은 없지만 읽은 바에 의하면 말이다. 물론, 바이킹의 행동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를 테고, 특히나 이 바이킹에게서는 아직도 전쟁터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얼굴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한껏 즐겼다. 부끄러움을 느낀 그녀가 뒤로 돌아서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손으로 가슴을 감싸쥐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서 맴돌면서 귓볼을 애무했다.
"난 당신 옷을 찢어 버리고 싶지만, 그 간단한 방법을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번에는 내가 참겠소.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리다."
"지금 나더러 당신의 옷을 찢으라는 말이에요?"
그녀는 숨을 죽이며 되물었다.
"만약 그렇게 하고 싶으면 말이오."
만약이라고? 로즈린은 순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안 돼, 안 돼! 이것은 미친 짓이야. 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소온은 야만적인 행동을 강요하며 그녀를 타락시키는, 혹은 그럴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옷을 벗거나 혹은 상대방의 옷을 벗겨 줄 수 있었다. 옷에는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고 말이다.
그녀가 대답을 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 이제는 물에 젖어 그의 가슴에 찰싹 달라붙은 튜닉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소온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고, 로즈린은 부끄러움도 잊고서 달뜬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의 옷을 찢고 싶다는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한참 동안 끙끙대다가 마침내 포기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평소 그녀가 보이던 반응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하지 못했을 때, 그녀는 자신을 향해 짜증을 내곤 했었다.
"도움이 필요한 거요?"
그가 제의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심각했다.
"아니, 아니에요. ……좋은 옷을 망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요."
"옷은 쉽게 수선할 수 있는 거요."
"당신은 바느질도 하나요?"
그녀가 빙긋 웃으면서 물었다.
"아니오, 당신이……."
"오, 아녜요. 난 바느질을 하지 않아요."
그녀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모든 도시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옷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요. 요즘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는답니다, 소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을 사서 입어요. 그리고 비록 우리들이 옷감의 조각을 좀 더 많이 사용하기 위해 바느질을 할 수 있고, 자르거나 찢기 위해 선을 그린다고 해도 항상 너덜너덜해진……."
소온은 또다시 키스를 했다. 아마도 긴장을 이기지 못해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그녀의 수다를 끝내고 싶어서일 게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로즈린은 약간의 긴장을 예상했다. 글자 그대로 그녀 앞에 우뚝 선 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몸에서 물방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기들이 샤워를 끝내자마자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벗겨 주시오, 만약 찢을 수 없다면."
그는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물론 그녀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곧 말이다. 무엇을?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그가 아직도 튜닉에 대해 말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머릿속으로 막 떠오른 침대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녀가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동안, 그의 입술은 그녀의 목과 뺨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자신의 히프에 닿은 그의 손길을 느꼈다. 갑자기 그녀의 젖은 치마가 다리 아래로 미끄러져내렸다. 그들이 사랑을 나눌 곳이 침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순간 그녀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야릇한 전율을 느꼈다. 샤워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녀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싫지는 않아. 사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나을 거야. 난……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어.
그러나 만약 그녀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처음 하는 경험을 위하여 묵직한 그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침대를 택했으리라. 그 무게가 주는 좋은 느낌을 사양치 않았으리라. 문득 그의 몸 아래 눕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면서 그녀의 입에서 거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올 뻔했다.
로즈린은 샤워를 급히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곤 그를 침대로 유도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급한 손길로 그의 튜닉을 들어 올려 머리 위로 벗겨 내었다. 튜닉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마자 그녀는 비누를 집어들어 그의 어깨와 가슴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좀전에 했던 상상이 다시 떠올라서는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했던 어떤 것보다도 더 좋았다. 보다 짜릿하고 어지러울 만큼 황홀했다.
"이건 매우 부드럽군, 당신의 비누말이오."
그의 손이 블라우스 아래로 들어와 조금씩 위로 올라오다가 그녀의 가슴 위에서 멈추었다. 로즈린의 숨이 일시에 정지하고 움직이던 손도 멈추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는 그를 보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근사한 느낌이었다.
로즈린은 소온 같은 남자와 즐거움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는 사랑을 나누는 것과 즐거움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을 때 웃음이 나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바로 지금,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좋은 기분이었다.
로즈린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뒤쪽으로 돌아가 등을 씻어 주었다. 그녀는 그가 간지럼을 아주 많이 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 역시 그녀에게서 같은 점을 발견했다. 나머지 옷을 벗는 동안 그들은 턱없이 많이 웃었고, 그녀는 킥킥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한참 후에, 소온은 다시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가 곧장 침실로 향했을 때, 그녀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야 한다는 말을 할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던 스스로의 생각대로 행동할 사람이고, 그녀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소온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 한가운데에 내려놓고는 자기 또한 부드럽고 조심스런 몸짓으로 그녀 위로 올라왔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그녀를 데려다 놓아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로즈린도 흡족했다. 오랫동안 스스로 지녀왔던 도덕율에 대한 가책을 그렇게 쉽게 극복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아마도 나중에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견고하게만 느껴졌던 그 울타리를 쉽사리 넘어서고, 즐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대해. 하지만 지금은 그저 기쁠 뿐이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몸에 닿은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느끼면서,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우리 때문에 침대가 몽땅 젖어 버릴 거예요, 그렇죠?"
"곧 마르게 될 거요."
아마, 그렇겠지. 그녀가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내가 당신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 주지."
소온은 혀로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몸을 애무하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이건 너무 너무…… 자극적이야. 그녀는 약간 간지러운 듯하면서 관능적인 감각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머리를 마구 흔들어 그녀의 몸 위로 물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의 애무가 불 같은 키스로 바뀌었을 때 로즈린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세의 남자에 대한 그녀의 선입견이 영원히 바뀌었다.
그녀가 수집한 자료와 연구에 의하면, 그 당시 남녀 관계란 성가신 것이며 교회에 의해 통제되는 의무에 불과했다. 더구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끝나는 의무인 데다, 여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재산처럼 취급되었다. 따라서 남자들은 여자를 조심스럽게 혹은 부드럽게 다루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로즈린이 받은, 관능적인 전율을 일으키는 전희 같은 것은 확실히 기대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런데 소온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는 교회가 침실까지 간섭하기 전의 시대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들에 대한 바이킹의 나쁜 명성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강간자와 약탈자로 그려지기 일쑤인 바이킹에 대한 인상은 그녀의 바이킹이 방금 보여 준 부드럽고 관능적인 연인의 그림과는 맞지 않았다.
그의 혀는 자극적이고 키스는 믿기 어려우리만치 뜨거웠다. 혹은, 그녀의 살갗이 뜨거운지도 모른다. 그녀는 열에 들떴다. 이렇게 몸 속이 뜨겁다고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안다. 욕망. 그것은 그녀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욕망은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그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깊고 원시적인 욕망이 그녀를 소진시켰다. 그가 입술로 그녀의 가슴을 빨아들였을 때 그 욕망은 더욱 강렬하게 자라났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과 귀를 더듬었을 때에는 더욱 더 커져 전신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작은 귀 속으로 밀려듬과 동시에 그의 손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긴장감이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소온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열정으로 그녀를 녹이고 싶다는 욕망을 참기 위해 마지막 한방울 남은 의지까지 모두 짜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참는 바람에 그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만적인 본성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를 미친 듯이 부여잡고 있던 때가 그녀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심장박동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여전히 헐떡였다.
"놀라기 전에 미리 말해두겠는데요, 난 처음하는 거예요."
"나도 알고 있소."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새치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 어떻게 알죠?"
이제 그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무엇이 다른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은 나에게서 보화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고, 내가 애인이 되어 주길 원하지도 않았소. 따라서 당신은 처녀가 분명하오."
"알았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아주 논리적인 결론이군요. 그러나 이 시대의 여자들 모두에게 그런 논리를 적용하지 말아요. 오늘날의 여자들은 그렇지가……."
그는 그녀에게 다시 키스를 했다. 그들의 시대가 각기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그녀의 지루한 장광설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로즈린은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여자들보다도 잔소리를 많이 늘어놓는 여자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여자였다. 그를 비난하는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비록 검을 통해 그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여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키스를 하고 팔로 목을 감은 다음 몸을 활처럼 뒤로 휘면서 유혹적인 자세를 취했다.
소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보드랍다. 한순간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사랑의 액체로 매끄러워진 그녀의 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그녀가 지니고 있던 순결의 장막 안으로 돌진했다.
로즈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보려고 잠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넘치도록 뜨거운 그녀의 열정뿐이었다. 그를 쾌락의 늪으로 이끌고 가는 그 열정만이.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자제력을 발휘하며 그녀가 지칠 때까지 거세게 사랑의 파도를 탔다. 솟아오르다 뚝 떨어지고 다시 솟아오르며 그 중심을 가르는가 하면 그 물결에 순순이 몸을 맡기고 다시 도약을 하는 동안 그 자신이 파도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드디어 그녀가 또다시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역시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는 이제 그의 것이다. 그의 검을 소유한 여자는 끝내 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20
잠에서 깨어난 로즈린은 기지개를 쭈욱 켰다. 마치 며칠 동안 푹 자고 난 사람처럼 놀랄 만큼 상쾌했다. 또한 그녀가 받은 느낌은…… 너무 좋았다. 믿기 어려우리 만치 행복했다. 사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좋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급히 일어나 그날과 대면하기 전에 잠시 동안 그 느낌을 만끽하기로 마음먹었다.
히힝거리는 말울음 소리와 콧김 소리 그리고 마구들이 부딪히며 내는 딸랑거림이 귀에 들려왔다. 곰팡내같이 퀴퀴한 냄새도 풍겨왔으나,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해 기분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배긴 자국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의 부드러운 린넨 모포가 아닌 울로 만든 군용 담요가…….
말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을 믿을 수 없어 연신 눈을 깜박거렸다.
맙소사, 내 침실이 아니야. 아니, 비슷하지도 않아. 대체 어찌 된 일이지? 그녀는 어떤 텐트 안에 누워 있었다. 매트리스와 베개에서 곰팡내가 풍겼고, 몸에는 거친 시트에서 배인 자국들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트윈 베드보다도 크지 않은 매트리스는 - 만약 그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 침대 틀도 없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텐트와 똑같은 캔버스 천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마치 조각 카펫처럼 보이는 털짐승의 생가죽이 놓여 있다. 한쪽 벽에는 맹꽁이 자물쇠가 달린 아주 오래된 트렁크가 열려진 채 서 있고, 비슷한 모양의 궤짝 두 개가 양옆에 놓였는데 역시 쇠로 만든 자물통으로 단단히 잠궈놓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녹이 슨 사슬로 묶어놓기까지 했다. 또한 철로 만든 냄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마솥 하나가 가느다란 막대기로 만들어 놓은 장치 위에 앉아 있고 그 아래에는 새까맣게 탄 나무토막이 놓여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니, 그녀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온은 아마도 안에서 자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밤 사이에 바깥으로 그들의 잠자리를 옮겨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서 이런 텐트를 구했을까?
시트를 걷고 옷을 찾기 위해 침상에서 빠져나오던 로즈린은 완전히 벗은 자신의 몸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지난밤의 기억들이 몰려들어와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녀가 그를 발견했을 때, 적어도 죽이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다음 번 캠핑을 하고 싶을 때에 먼저 귀띔을 해주면 좋겠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한밤중에 그런 텐트를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그녀는 다시 옷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열린 트렁크 쪽으로 막 다가서려는데 텐트가 펄럭 열리면서 열넷이나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그가 기분좋게 말했다.
로즈린은 무어라 대답은커녕 침상으로 뛰어들어 시트로 몸을 가리기 바빴다. 그녀는 정말로 소온을 죽이고 싶었다. 맨발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튜닉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찬 낯선 소년의 모습으로 미루어 잠든 사이에 시간의 터널을 뛰어넘는 여행을 한 듯했다. 무엇보다 소년의 차림새가 소온이 그들의 침실을 뒷뜰이 아닌 다른 시대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잖은가.
머릿속이 쿡쿡 쑤시는 것을 느끼면서 침상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아직도 거기에 그대로 서 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는 나신의 그녀를 보고도 그리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단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로즈린은 중세엔 벌거벗는 일이 그처럼 야단을 떨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벌거숭이 몸으로 잠을 잤고, 열두 명의 사람들이 한방에서 자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여자들과 집안일을 하는 하녀들은 정중함과 환대의 표시로서 낯선 사람의 목욕을 도와주었다. 여섯 명의 하인들이 주인과 안주인의 옷시중을 들었고, 더위를 참을 수 없을 때에는 쉽사리 옷을 벗어던졌던 시대였다. 그 시절엔 수줍음이라는 게 없었다. 벌거벗은 몸에 대한 부끄럼은 근대에 와서야 생겨난, 말하자면 문명의 산물인 셈이다.
얄궂게도 로즈린은 그들의 시대가 아닌 그녀의 시대에서 태어난 사람인 데다, 남달리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지워 버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지금 눈앞에 대놓고 물어볼 수 있는, 자신에게도 익숙한 노르만 프랑스 어를 사용하는 중세의 젊은이가 서 있건만 그녀의 혀는 뻣뻣하게 굳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저 사람이 나가 주기만 하면 당황스러움도 사라질 텐데…… 왜 계속 버티고 있담.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는 뭔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마침내 로즈린에게도 그의 팔에 걸쳐진 여자 옷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위한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는 옷을 입으라고 제의를 하거나, 혹은 다른 행동을 취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몸에 옷부터 걸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우선 자신의 바이킹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원했다.
"소온 블러드링커, 그가 누구인지 아세요?"
"물론입니다.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로즈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미심쩍은 듯 다시 물었다.
"그는 귀족인가요, 신인가요?"
"무슨 말씀인지?"
어리둥절해진 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싶어하는 사항에 대한 대답이 되었지만,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가 어떻게 당신의 주인이 되는 건가요?"
"내 누이인 블리스가 나를 그분에게 보내 주었죠."
그가 대답했다. 그리곤 가슴을 쑥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제대로 훈련이 되면 그의 시종이 될 거예요."
그녀와 소온은 막 이곳에 도착했다. 대체 어떻게 해서 모든 것이 이렇게 자리가 잡혀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블리스라는 여자가 <흡혈귀의 저주>를 소유했던 여자들 중의 하나라면…….
소온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당신은 얼마 동안 소온을 주인으로 모셨죠?"
"거의 2년 가까이 됩니다."
로즈린은 정말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소온은 과거에로의 여행에서 자기 자신과 부딪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오딘의 경고만을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소온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가능한 빨리 말이다.
"소온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당신은 알아요?"
"에, 아직은 이른 시각이죠. 겨우 동이 텄으니까요. 그렇지만 주인님은 윌리엄 공작과 의논차 부둣가로 나가셨습니다."
소온은 드디어 월리엄을 만나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이 시대로 왔다. 그러나 그녀를 텐트에 홀로 남겨두고 갔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흥분은 신경질과 뒤섞여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그는 나가기 전에 그녀를 깨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왕이 된 첫번째 노르만인을 만나러 함께 갈 수도 있었다.
"소온 주인님은 아가씨에게 옷을 가져다 드리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옷을 입는 것을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녀가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죠."
오, 그가 그랬다고? 너무나 고마워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물론 이 젊은이 앞에서 화를 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더 큰 목표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예의바른 어조로 물었다.
"어쨌거나,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난 로즈린이에요."
"저는 앙쥬의 가이라고 합니다."
"아, 고마워요, 가이, 옷을 가져다주어서요. 그렇지만 옷시중은 필요 없어요. 난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전 당신을 도와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 항상 소온 님이 제게 내리신 명령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답니다."
그가 갑자기 지어 보이는 노새같이 고집스러운 표정을 본 그녀는 시중을 물리치려면 그와 말씨름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엄격한 얼굴로 다시 한번 시도를 했다.
"만약 내가 도움이 필요하면, 당신을 부를게요. 그러니까 밖에서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빙긋 웃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아가씨. 이 슈미즈에는 묶어야 할 부분이 적어도 백 개는 되니까요."
"백 개나?"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에게 좀 보여 줘요."
가이는 두 개의 의복을 들어 올려 그녀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노란색 블리오에는 없었으나 짙은 청색 슈미즈에는 스무 개쯤으로 보이는 - 적어도 백 개는 안 되는 숫자였다 - 매듭이 보였다. 게다가 모두 등 쪽에 나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 해도 그녀는 그 젊은이의 시중을 받으면서 옷을 입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아요. 도움이 필요하면 청하겠어요. 그러나 먼저 필요한 것은 몸을 씻을 물이에요. 물을 날라 오기가 어려운 가요?"
"아닙니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가이는 이제야 그녀가 자신에게 협조한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빛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것들은 여기에 놓아두어요."
그녀는 그가 들고 나가는 옷가지를 보고 놀라서 커다랗게 외쳤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가이는 텐트 안으로 들어와 침상 위에 옷을 내려놓은 다음 서둘러 나갔다.
로즈린은 그가 물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에 슈미즈를 입어 두려고 재빨리 움직였다. 그것은 입을수록 꽉 조여들고, 길다란 소매가 마치 피부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자신보다 더 작은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옷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그녀의 몸매와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런 다음 소매가 달리지 않는 블리오를 그 위에 입었는데 옆으로 길게 터진 스커트 아래로 잔뜩 달린 레이스가 드러났다. 비로소 로즈린은 그 옷의 스타일을 깨달았다. 놀랍지만, 정말로 10세기 혹은 11세기에 입던 옷이었다. 그리고 만약 윌리엄 왕이 아직도 윌리엄 공작으로 불리운다면, 소온은 그녀를 노르만의 영국 정복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가이는 물 한 동이를 들고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에 기척을 내지 않은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할 순 없었다. 두드릴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왜 텐트 안에 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나에게 말해 주어요, 가이. 소온이 갔다는 부둣가는 여기에서 얼마나 멀죠?"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아가씨. 말을 타고 몇 걸음만 가면 되지요."
가장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 경우에도 오직 말에만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몇 걸음만 가면 된다는 표현은 얼마나 먼 거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그 당시엔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할 때 보통 며칠씩 걸리기 마련이었다.
"이곳에는……."
로즈린은 11세기에 여관을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
"부둣가 근처에 묵을 만한 곳이 없나요?"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6천 명의 군사들을 재우기엔 충분하지 않죠."
군사? 부둣가 근처에 진를 쳤다고! 오, 하나님 맙소사,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소온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의 하나를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라면? 노르만의 군대가 피벤시 만 해협을 막 건너려는 순간이라면?
로즈린은 가이에게 오늘이 며칠인지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혹여 그가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그는 이미 노르만 프랑스 어를 서툴게 구사하는 그녀를 수상쩍게 보는 중일 수도 있다. 그녀가 질문을 던져야 할 대상은 소온이고, 그가 있는 곳을 찾아낼 때까진 무사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옷을 입자 마자 그를 찾아 나설 참이었다.
결국, 달아오른 뺨에서 느껴지는 뜨끈뜨끈한 기운을 무시하고선 그녀는 몸을 돌려 가이에게 맨 등을 들이밀었다.
"당신이 그렇게도 손대고 싶어 하던 매듭들을 해결해 주실래요?"
"……아가씨?"
그녀는 얼른 말을 고쳐 다시 부탁을 했다.
"매듭을 묶어 주세요, 가이. 난 소온을 찾으러 가야 해요."
그녀는 슈미즈가 막 여며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는 곧 손을 놓아 버렸고 옷은 다시 벌어졌다.
"오, 그건 안 돼요. 난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아가씨의 안전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의 말을 반박하려던 그녀는, 만약 그럴 경우 슈미즈를 여밀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 건가요?"
"네."
"그는…… 정말로…… 현명하군요."
로즈린의 대답이 가이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그의 손이 다시 돌아와 끈을 묶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이가 모든 매듭을 다 여밀 때까지 십여 분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매듭이 다 묶이자 그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옛날 여자들이 평생토록 이런 옷들을 입고 잘도 살아냈었군.
"됐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로즈린은 즉시 머리 위로 블리오를 뒤집어 쓴 다음 슈미즈 위로 잡아당겼다. 헌데, 너무 길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으면 좀 나을 터이지만, 하이힐은 이 시대의 패션이 아니었다. 그녀는 벨트를 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미심쩍은 눈길로 다시 가이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신발하고…… 허리띠를 가져다 줄 수 있어요?"
"네."
그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이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담겨진 자신의 튜닉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발바닥만 겨우 가릴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신발 한 켤레와 장식이 달린 길다란 끈을 꺼내었다.
"아주 좋아요."
그녀는 그를 칭찬하며 끝이 뾰족하게 생긴 신발을 신기 위해 매트리스에 앉았다.
로즈린이 분명 보통의 중세 여자들보다 몸집이 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기하게도 모든 게 잘 맞는 편이었다. 다만 허리가 너무 꼭 맞아 허리띠로 긴 치마를 올려 묶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불편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걸을 때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고 뒷 부분은 원래의 형태대로 땅에 끌리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물은, 아가씨?"
가이가 그녀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조금 후에요. 그렇지만 먼저……."
로즈린은 말끝을 흐리면서 잽싼 걸음으로, 그가 막아설 틈도 주지 않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외쳤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염려가 담겨 있는 듯했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가까이 있다면 어떻게 부둣가를 찾아가야 할까? 바다 냄새가 그녀에게 방향을 알려 줄 것이다. 혹은 배가 보일 수도…… 문서에 의하면 7백대 이상의 범선이 있다고 했다.
로즈린은 빨리 걸으면서도, 실제론 뛰다시피 하면서, 커다란 돛대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군대용 막사들만이 시야가 넘치도록 들어 올 뿐이었다. 사방팔방에 수백 개의 막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타고 조금만 가면 된다는 가이의 말이 실상은 몇 시간 정도 달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많은 남자들이, 글자 그대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말을 주고받거나 앉아 있고, 도박을 하고, 피워 놓은 불 위에서 아침을 짓고, 무기를 점검하고 닦는 중이었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여자들도 몇몇 눈에 띄었는데 다 떨어진 옷하며 거친 행동들로 보아 잡일을 하는 계급의 여자들이 분명했다. 중세 시대에서 옷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귀족들만이 좋은 의복을 입을 수 있었기에 겉모습만으로도 각기 다른 계급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로즈린은 새삼스레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옷은 매우 좋은, 높은 신분의 여자들이나 입을 수 있는 것이긴 해도 막연히 덮쳐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구어낼 순 없었다. 로즈린은 그 옷이 수많은 군인들 사이에서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 주지 못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모름지기 군대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계급에서 모여든 사람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귀족들과 평민들은 비슷한 계급을 차지했고, 어쩌면 범죄자들이 끼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즈린은 소온의 텐트로 되돌아가 기다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렸으나 불행히도 텐트들이 모두 엇비슷해 보였고, 가이를 피해 달아나고자 뒤도 돌아다보지 않았기에 어디가 어딘지 구별할 수 없었다. 단 하나 남은 희망은 그가 그녀의 뒤를 따라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몇 발자국 가기도 전에 억센 팔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홱 뿌리쳤으나 꽉 잡힌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므로, 부질없는 몸부림으로 그쳤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돌려 흘깃 쳐다본 로즈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보다도 크지 않은 병사였으나 몸집은 훨씬 크고 무거워 보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히죽 웃는 입 안으로 듬성듬성 빠진 이빨들이 보였고 무성하게 난 턱수염에는 음식 찌꺼기가 들러붙어 있는 지저분해 보이는 사내였다. 저 턱수염엔 어쩌면 이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다음 순간 그와 비슷하게 생긴 세 명의 남자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내는 로즈린을 그들을 향해 끌고 갔다.
21
로즈린은 너무 늦게서야 젖은 채로 자고 일어난 후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은 - 텐트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 숙녀의 복장으로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누구라도 그녀가 침대에서 막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호원 없이 군대 막사 사이를 걸어서 통과하는 여자란, 지난밤 어떤 병사와 몰래 만났다거나 혹은 그들 중의 하나와 밤을 지샜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로즈린은 자신의 주위로 모여드는 남자들이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히죽거리는 웃음이 거침없이 쏟아졌고, 그녀는 자신의 바람이 가망 없는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더구나 지금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 사내들은 그녀가 그들의 실수를 지적했을 때 사과를 하면서 물러서는 20세기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작의 야망을 위해 자신들의 집에서 끌려온 거칠고 무례한 소작농들이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생활 속에 찾아오는 우연한 쾌락의 기회에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이 곧 죽음과 대면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르만 인들은 헤이스팅스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녀를 모처럼 굴러 들어온 희롱거리로 삼을 마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으리라. 그들의 표정은 자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실하게 드러내 주었다. 벌건 대낮도 소용없었다. 이 남자들은 상당히 필사적이었고, 어떠한 상황도 개의치 않을 그런 사람들이었다.
로즈린은 무엇이든 따라오도록 하기 위해 크게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러나 단지 조용히 경고를 했을 뿐이었다.
"난 소리를 지를 거예요. 만약 날 즉시 놓아 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 끌려나가게 될걸요."
그들 중의 하나가 그녀의 위협을 듣고 즉시 웃음을 터트렸다. 또 한 명은 그녀의 긴 머리채를 잡더니 그의 더러운 손가락 사이에 넣고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팔을 그녀의 어깨에 두르고 힘을 세게 주며 끌어당겼다. 씻지 않은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그녀의 입을 꽉 틀어막을 만큼 심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가슴에 손을 바싹 붙인 남자의 말을 듣자 그녀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만약 더 많은 사람들과 놀고 싶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소리를 질러보라고. 우린 상관없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강간을 당한단 말인가? 로즈린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아니, 사양하고 말고. 그것은 아마도 맞는 말일게다. 그 주위에는 용감하게 간섭하려 들 만큼 지체가 높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계급이 조금 높은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자기들의 부하들처럼 잔인한 사내들로 단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이킹들은 전쟁에서 얻은 여자와 약탈품을 독점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전쟁을 준비했고, 강간은 중세의 전쟁 중에 흔히 일어나는, 이긴 자를 위한 보상이며 패배한 자에 대한 벌이었다.
윌리엄 공작은 자신의 재력과 명성을 가지고 수 개월 동안 군대를 유지하며 해협을 건널 때를 기다리면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왔다. 그러나 영국에 도착했을 때, 금기는 깨어지고 그의 군사들은 약탈과 강간을 시작했다.
로즈린이 몸을 빼내려고 시도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가슴을 쥐고 있던 사내를 후려쳤다. 그러나 고맙다는 인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순서가 바뀌었다는 표시를 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내가 먼저 봤어."
그는 친구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니 내가 먼저 가질 거야."
로즈린은 그 친구가 그의 말을 거절해 주길 간절히 원했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 사이에 살짝 빠져나갈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친구는 단순히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녀를 친구들과 나누는 것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로즈린은 지금이 거짓말을 하면서 몇몇 이름들을 들이대어야 하는 순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이 근방에 널리 알려진 그 이름들을 무시하지 않게 되길 바랐다.
"난 윌리엄 공작의 손님으로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그의 이복형제인 베이오의 주교 오도가 함께 왔는데, 그만 길을 잃은 거예요. 만약 당신이 날 공작에게 데려다 주면 아마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데려다 주지……, 우선 내가 즐긴 다음에 말이야."
그녀를 잡고 있던 사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면 아마 토해 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그를 멈추게 할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적절한 대안이 아니었다. 살아오는 동안에 어느 누구와도 다투어 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과 싸우면 그녀를 강간하기 위해 덤비는 사내들을 더 끌어모으게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 기대하는 효과는 나지 않을 테고, 지금 모여든 사내들로 이미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젖은 입술이 파고들자 그녀는 무릎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세게 쳤다. 그것은 빗나갔지만, 또 다른 무엇이 그의 다리를 꺾어놓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넘어질 뻔했으나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그의 품에서 빼내었다.
로즈린을 강간하려던 사내는 신음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손으로 감싸 쥔 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는 쇠로 만든 장갑을 낀 손으로 맞은 것이다.
몸을 돌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주먹에도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또한 강철 갑옷을 입은 꽤 멋진 한 기사의 주먹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아침 햇살을 맞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갑옷을 보면서, 로즈린은 선글라스가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는 큰 키, 넓은 어깨, 노르만 인 특유의 모양으로 짧게 다듬어 놓은 금발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에머랄드색 눈동자는 이제 슬금슬금 기어서 꽁무니를 빼고 있는 사내가 아닌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까 그 사내의 친구들은 이미 여러 갈래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녀는 기사와 단둘이 남았다. 그리고 앙쥬의 가이도.
어깨가 넓은 기사 뒤편에 서 있는 가이를 발견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를 구해 내기 위해 그 기사를 데려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가이는 혼자서 억센 병사들을 쫓아 버리기에는 그녀보다도 더 나을 바가 없는 소년이었다. 어쨌든, 그는 생각보다 바싹 뒤를 따라오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고 그녀를 구출할 수 있는 누군가를 데리러 갔던 모양이다.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또한 키가 큰 기사의 시선을 느끼자 몸이 약간 떨려왔다. 지금 막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그는 아주 잘생겼고 온몸을 감은 빛나는 갑옷은 그의 모습을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거의 웃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이 상황에선 마땅치 않은 행동이란 생각으로 그런 충동을 누르는 데 안간힘을 썼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진짜 기사'에 의해 구출되다니, 기념할 만한 일이야. 그것도 아주 잘생긴 기사라니……. 웃음을 참기가 정말로 어렵군.
갑옷을 입고 달려온 구원의 기사를 만난다는 것은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던 환상이었다. 하지만 20세기의 여자들은 더 이상 그녀들의 꿈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았다. 물론 그녀들이 로즈린처럼 과거로의 여행을 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저주를 받은 검과 소온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로즈린은 저주에 대해 그에게 물어보아야만 했다. 또, 무슨 일로 건힐다라는 마녀에게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없고, 우선은 눈앞의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주 적절한 때에 와주셔서 매우 감사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가이, 이 훌륭한 기사분을 데리고 와주어서 말이에요."
"네, 하지만 이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어요."
가이가 투덜거렸다.
"만약 아가씨가 있던 곳에 그냥 머물러 있……."
"알아요, 알아요."
그녀는 그의 비난이 쏟아지기 전에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날 믿어줘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게요. 이곳에 이렇게 많은 군사들이 있는지 몰랐단 말……."
로즈린은 그들이 그녀를 완전히 멍청이로 생각하거나 다른 시대에서 왔다는 의심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냥 말꼬리를 흘려버렸다. 그 시대의 여자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대해 잘 알았다. 남자의 소유물로, 아이들의 어머니로 순종하고 살면서 사회구조에 반항하는 여자도 거의 없었다. 그네들은 만약 호위병 없이 군대의 막사 사이를 걸어다닌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야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오. 숙녀에게 다가가 말만 거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거요."
기사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다.
오, 물론, 그 한패거리의 사내들은 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서 본다면 그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 사내들은 자신들의 성적인 욕구를 손쉽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아내 없이, 그리고 여자를 살 만한 몇 푼의 동전도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냈을까? 물론 숙녀는 그러한 말들을 입에 담지 않을 터이므로, 그녀 역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녀를 도와주었고, 그녀는 인사를 해야 했다.
"당신 때문에 살았어요."
"내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드무아젤(아가씨)." 그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만약 호위가 필요하시다면……."
"그녀는 소온 블러드링커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가이가 끼어 들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보호는 필요하지 않겠군."
기사는 대답하고 나서 한숨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유감이야."
순간 로즈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를 바라보는 기사의 시선이 너무나 솔직했다. 마치 달아난 사내들이 하려던 일을 자신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그럴 리 없다는 점을 자신에게 주지시켰다. 기사는 자신이 구해 준 신분이 높은 여자에게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할 만한 일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가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었는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거기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갈 수 있게 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가로막고 선 기사 옆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가이가 떠나면서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로즈린은 가이의 무례함을 나무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잡힌 팔을 뿌리치며 얼른 인사를 했다.
"잘 가세요, 기사님.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언젠가 은혜를 갚을 날이 올 거예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터트리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22
"내 작별인사가 그렇게 우스웠나요?"
로즈린은 막사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따라 급히 걸어가는 가이에게 물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마치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아가씨가 그를 구해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녀가 발끈했다.
"아니, 아가씨는 그랬어요."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아가씨를 도와 준 대가를 어떤 식으로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게 아니라면……?"
가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보자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역시 붉어진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적어도 그 기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랬을까? 그래서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린 것일까?
발갛던 로즈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불쾌감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삶의 모든 면을 경험해 온 현명한 여성이었다. 사실상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여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사교 생활을 희생시키면서 오랜 시간을 공부에 매달린 끝에 갖게 된 지위는 놀랄 만큼 커다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선 자신의 지적인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색다른 생각들은 그 순간 그녀를 괴롭히는 골치 아픈 일들과 당황스러움의 정도를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도록 도와주었고, 자신을 경호하는 젊은이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게 용기를 주었다.
"함께 온 기사는 누구죠? 이곳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인가요?"
"중요한?"
그가 되물었다. 그의 어조는 이제 공손하게 바뀌었다.
"공작의 주의를 끄는 사람은 누구나 중요하죠, 아가씨. 그리고 레이날드 드 모르빌은 모르탱의 로베르트와 매우 가까운 친구사이랍니다."
가이가 모르탱의 로베르트가 누구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물론, 그녀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윌리엄 공작의 이복형제들 중의 하나로 오도와 함께 이번 전쟁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만약 레이날드 경이 로베르트의 친한 친구라면 그는 상승일로를 걷는 중일 것이다. 설령 그의 존재가 지금 당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해도 영국의 영토를 분할할 때, 그는 윌리엄의 후원자로서 배당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가 앞으로 치르게 될 전투에서 목숨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생각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로즈린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아보기 위해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수많은 윌리엄 휘하의 남작들은 영국에 정착한 뒤에 이름을 바꾸었으므로, 그들의 본래 이름은 문서상에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막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가이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진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의 주인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님? 소온은 그녀의 주인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가이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소온의 친척이라고 여기는지 혹은 소온이 그녀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궁금해졌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을 참이다. 왠지 그의 대답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 것만 같았고, 당황스러운 일은 지금까지 일어난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러나 명령하듯 말하는 그의 어조는 로즈린을 화나게 만들었다. 겨우 열네 살짜리 '소년'이 스물아홉 살이나 먹은 여자에게 명령을 내리다니. 이곳에서는 십대의 청소년이 어른이 된 여자보다 많은 권리를 지니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시대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 동안 그녀에게 지워질 다른 제약들 중 가장 커다란 항목임이 분명한 그 사회의 편리를 묵묵히 받아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로즈린은 아무런 반대 없이 참고 견디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히 들어간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이곳에 머무를 거예요, 가이.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유모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어서 가서 소온을 당장 이곳으로 데리고 와요. 가능한 빨리 말이에요."
가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화가 난 듯했다. 그녀가 고른 말투는 아마도 그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도록 했을 것이다. 어머니란 여성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어떤 여자도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감히 지시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중세의 소년들은, 그리고 그와 같은 계급의 소년들은 어린 나이에 다른 집으로 보내어져 기사들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는 그녀의 명령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로즈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알게 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그를 성나게 만들어 멀리 함은 그닥 현명치 못한 행동인 줄을 잘 알았다. 또, 자신의 과민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병사들과의 사건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그녀를 화나게 만든 듯했다. 그러나 가이의 행동이 중세 시대에선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녀마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선생으로서 그녀는 젊은 사람들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나 있지 않은가.
지금 바이킹을 기다리며 막사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불쾌감은 소온이나 가이를 향한 것만큼이나 컸다. 긴 치마를 입고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녀는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치맛자락을 발로 차야만 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자신이 말한 대로 가이가 소온을 데리러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그녀가 아침내내 속을 부글부글 끓이도록 내버려두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바싹 굽는다'가 더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이 막사 안을 오븐처럼 달구어 놓았으니 말이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 로즈린은 땀을 뻘뻘 흘렸고 심한 허기마저 느꼈다. 그 두 가지 불만이 결합하여 그녀의 기분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소온을 보자마자 분노를 폭발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녀는 막사의 천 자락을 들추고 머리부터 들이민 그에게 몸을 바로 세울 기회도 주지 않고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어떻게 감히 날 여기에 내팽개쳐 둘 수 있었나요? 만약 내가 역사에 대해 잘 몰랐다면, 오늘 아침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뻔……."
소온이 그녀의 어깻죽지를 쥐고 위로 들어 올리는 바람에 그녀는 줄줄이 늘어놓으려던 지리한 장광설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여러 번 세차게 뒤흔들고 나자,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는지 모조리 잊어버렸다. 다음 순간 나온 그의 말은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어떻게 감히 당신은 이 막사에서 나갈 수 있었단 말이오? 그러지 말라고 분명히 일렀건만! 자신의 안전에 대해 생각을 한 거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라도……."
"잠깐 기다려요!"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만약 그 멋진 레이날드 경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아침에 깨어났을 때 당신이 옆에 있었더라면 그런 불쾌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함께 이곳에 왔어요, 소온, 기억해요? 그런데 내가 여기 앉아서 엄지손가락을 비틀고 있는 동안 당신은 나가서 마음대로 돌아다녔죠. 그리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나에게 소리를 질러 댔다구요, 그거 알아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
"그 '틴에이저' 말이에요, 가이라고 하는."
그녀는 좀 더 냉담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내가 그 젊은 애의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한 건가요?"
소온은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또다시 그녀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버둥거리면서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그녀에게 마치 아이가 되어 버린 기분이 들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몸집이 그녀나 현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킹답게 말이다. 적어도 현대에서 그가 그녀를 다루는 방식으로 다 큰 여자들을 다루었다면, 경을 칠 각오를 마친 다음이었으리라.
비록 '틴 에이저'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그는 그녀가 가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난 당신이 그렇게 할 정도의 지각은 있는 여자라고 기대했소."그가 계속 말했다.
"가이는 당신의 안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지시받았소. 그가 이 막사에 남아있으라고 경고하지 않은 거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말하더군요."
그의 찡그린 얼굴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그녀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불편했다. 드러내어 인정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녀가 막사를 떠나면 안 되는 줄을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간단하고 단호한 말투로 명령하다시피 말했다.
"로즈린, 또다시 내 말을 어겨서는 안 되오. 누가 당신에게 그 말을 전달했는지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오. 당신이 제멋대로 하는 바람에, 난 신세지고 싶지 않은 한 남자에게 빚을 지게 되었단 말이오."
바로 그 때문에 지금처럼 화를 내는 건가? 하마터면 그녀가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로즈린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화가 난 그녀는 조롱하듯 쏘아붙였다.
"글쎄, 그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로즈린의 몸이 다시 한번 세게 흔들렸다. 그녀는 조롱의 말을 던지기 전에 그가 자신의 몸을 내려놓길 기다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자신의 몸을 내려놓아야 할 때라고 말하려는 참인데…… 그녀에 대한 그의 응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너무 나쁜 일이오. 그는 당신이 나의 여인이라기보다 나의 레먼(정부의 옛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오."
그녀는 '레먼'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중세에 사용되던 '정부'라는 단어와 동의어로서, 20세기 못지 않게 아무렇게나 취급되던 여자들의 부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참아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뭐라구요? 어떻게 감히……?"
"그는 이제 당신과…… 그러니까 그것을 할 때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 물어볼지도 모른다오."
"그는…… 그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감히!"
그녀는 침을 튀기며 흥분했다. 그리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만약 그가 그런다면 당신은 나를 그에게 줄 건가요?"
"아니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난 그를 죽여 버리고 말 거요."
그녀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오, 물론이겠죠. 나를 구해 준 사람인데, 당신은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다는 거군요. 그냥 말로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 세상에 그런 감사의 표시도 있나요?"
"그런 모욕은……,"
"잘난 척하는 장담은 듣고 싶지 않아요, 소온.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가 당신의 정부라고 말한 거죠?"
"당신을 윌리엄과 만나게 해주려고 지어낸 말이었소. 저번에 그가 물었을 때, 내가 아내가 없다고 대답했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왜 나를 고통을 받고 있는 신분 높은 숙녀이며 당신과는 우연하게 만난 사이라고 하지 않은 거죠? 혹은 당신을 만나러 온 여동생이랄지 혹은 단지 친구랄지……."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을 그가 보았을 때 어떻게 하라고 그러는 거요?"
격분한 로즈린은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바닥으로 내려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헛된 시도에 불과했다.
"날 내려놔요!"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를 내려놓고 툴툴거렸다.
"당신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마치 그녀가 귀찮은 존재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날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이 시대에 대해 좀 알고 있으면서도, 여자들이란 그녀들의 아버지나 남편 혹은 군주의 통제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오? 남자들의 보호 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가 없는 그런 존재란 걸 잊었소?"
물론 로즈린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다. 낡고 광신적이며 불공평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중세가 끝날 때까지 남녀의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황송하게도, 남자들은 그것을 보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녀는 노예제도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을 만한 꼬투리를 잡아 그쪽으로 말을 돌렸다.
"다음 번 시간 여행을 할 때는 말이죠, 소온, 나에게 미리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눈을 떠보니 이상한 낯선 곳임을 알게 되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란 말이에요."
"난 미리 알렸소."
"아니오,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녀가 정정했다.
"게다가 내가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이곳에 없었어요. 지금 내가 이런 기분에 빠진 건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느라고 여기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들은 말이라곤 당신이 공작과 의논을 하러 갔다는 것이었어요. 도대체 왜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거죠?"
"내가 떠날 때는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이었고,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했으니 말이오. 어젯밤 이후……."
로즈린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전날 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기시켜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도록 만들었다. 닳아빠진 술수를 쓰다니,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삽시간에 부드럽고 달콤하며 관능적인 기억들이 그녀의 분노 속으로 밀려들어와 신경을 마구 들쑤셔 놓았다. 그녀는 그 따스한 기운들이 퍼지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소온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재빨리 몸을 돌려 저쪽으로 쿵쾅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긴 치마가 걸리지 않도록 발로 차는 것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치맛자락을 밟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잔뜩 불평을 늘어놓은 다음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준 격이었다. 게다가 그가 일으켜 세워 줄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온의 생각은 달랐다. 한손으로 그녀의 몸을 돌려 눕히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막 일으켜 주려는 순간 마음을 바꾼 게 틀림없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다음 순간 갑자기 그의 가슴이 그녀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는 자신이 그의 키스법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평과 치솟는 분노, 그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없애 버렸다. 로즈린이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아주 잠시뿐, 이윽고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있었다.
23
"당신은 정말 잘하는군요."
로즈린은 소온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더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소온은 이미 그녀가 자신과의 잠자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는 그를 보며 로즈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20세기의 솔직함에 익숙한 남자가 아니었다. 로즈린도 현대 여성답지 않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에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에요. 당신을 빼고는요."
그녀는 빙긋 웃었다.
"겨우 몇 분 사이에 두 번이나 강한 쾌감을 느꼈어요. 그런 능력이 있는 남자들은 아주 드물 거예요."
"여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오."
그가 투덜거렸다.
그의 얼굴이 더 붉어졌단 말인가? 로즈린은 거의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처럼 크고 대담무쌍한,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바이킹이 그런 이야기에 얼굴을 붉히다니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행위를 당신은 어떻게 꼴사납다고 말할 수 있죠?"
"그것은 행동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은 아니오."
"왜요?"
소온은 그 화제를 피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들은 아직도 아름다운 일이 벌어졌던 마루에 그냥 누워 있었고,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대며 붙잡았다. 그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나 상당히 심술이 난 표정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번에는 기어코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해요. 날 뻔뻔스러운 여자라고 불러 보라구요. 그렇게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소. 당신은 정말 뻔뻔스럽소."
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한 말은 매춘부들과……."
그는 그쯤에서 끝내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정부?"
그녀가 대신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단어를 입 밖에 내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고, 심지어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가 방금 한 짓은, 날 당신의 정부로 만든…… 혹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그건 당신을 내 여자로 만드는 행동이었소."
"그게 다른 건가요?"
"그렇소."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오, 뭐가요?"
"남자는 정부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로즈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공포가 느껴지고, 더불어 느껴지는, 부정하고 싶지만 즐거움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따스한 감정이 밀려왔다.
소온 블러드링커와 결혼이라고? 물론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천 년 전에 살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음대로 그녀의 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녀는 그와의 모든 경험들을 기억해내며 거의 미쳐 버릴 것이다. 추억만을 부둥켜안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나와 결혼할 생각을 하는 건가요?"
"물론."
그녀는 숨을 죽이며 다시 물었다.
"나에게 결혼신청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당신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소, 로즈린."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결혼신청도 하지 않을 건가요?"
"당신을 좋은 아내로 만들기 전에 먼저 길을 들여야 할 것 같군."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무릎으로 기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진한 밤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소리를 질렀다.
"길을 들인다구요? 난 당신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그런 짐승이 아니에요. 아까 당신에게 한 말에서 그 점을 분명히 했다고 생각해요.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로즈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등은 바닥에 닿고 그의 몸이 그 위를 덮었다. 그의 행동은 두 사람이 아직 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랑을 나누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당신은 길들여질 필요가 있소, 아가씨. 당신은 정말로 잔소리가 심한 여자요."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난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가 반박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소리를 지르지 않았단 말이오? 당신이 잘못한 일조차도 나에게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고 믿다니, 정말 대단한 성질이오."
로즈린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저리로 가요, 이 바보 같으니."
그 커다란 몸집의 바보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난 지금이 가장 편안하오. 게다가 또다시 당신이 시끄럽게 떠들 때 금방 멈추게 할 수 있으니 가까이 있는 편이 낫소."
소온은 지금 키스를 해서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중이었다. 전에도 효과를 보았으니 - 아마도 매번 비슷한 것을 기대할 테지만 - 지금 다시 시험해볼 생각이라면, 그는 아마 뭔가 다른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로즈린은 벌떡 일어나 그를 확 떠다밀고 싶었다. 방금 받은 모욕에 숨이 턱 막혀 버릴 듯했다. 하지만 그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녀 자신의 힘만으론 크고 무거운 몸뚱아리를 움직이지 못할 테고, 그 순간 그는 그녀에게 도움을 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좋아요, 어떻게 하면 당신을 물러나게 할 수 있죠?"
그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내가 물러서길 바라는 거요?"
"지금 당장요."
소온이 몸을 움직였으나 로즈린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가 비켜 주는 대신 그녀의 몸을 완전히 덮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체중이 그녀의 몸 위에 실리면서 그의 머리가 그녀의 가슴 위에 놓여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방법대로 밀고 나갈 작정이라면, 자신의 바이킹이 결코 횡포만은 부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까 그 옷을 입은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 내가 말했소, 로즈린?"
로즈린은 그녀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화제를 돌리는 소온의 의도를 눈치챘고, 잠시 동안은 효과를 발휘했다. 옷에 대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소온이 지난밤 샤워를 하면서 벗은 옷이 아닌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또한 그 밤색의 긴 튜닉과 십자형으로 묶게 되어 있는 각반이 잘 맞는 것으로 보아 빌린 옷도 아니었다.
"당신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발할라에 갔었나요?"그녀가 무심코 물었다.
그는 몸을 들고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빙그레 웃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소? 당신이 날 불러오지 않았는데 말이오."
정말로 바보스러운 질문을 했군.
"좋아요, 그럼 어디서 그렇게 잘 맞는 옷을 구할 수 있었죠? 당신은 보통의 중세 남자보다 훨씬 더 크잖아요."
"이 옷은 내가 전에 이곳에 왔을 때 가졌던 내 옷이오. 저기에 놓인 트렁크에 더 들어 있소."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려고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몇 개의 질문은 미루어놓기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었다. 특히…….
"만약 여기서 당신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 위험하지 않나요?"
"그렇소."
"하지만 가이라는 젊은이는 마치 당신을 오랫동안 알아왔던 것처럼 말했어요."
"맞는 말이오."
"오늘 내 머리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나 보군요. 소온,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소온은 그녀가 빈정대고 있는 줄은 알면서도 왜 그런지는 몰랐다.
"나 역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소."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가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마 혼자서 알아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당신이 설명을 해줘야 해요. 당신은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어요. 가이가 당신을 아니까요. 그렇다면 저번에 온 당신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아니오. 바로 그 시점에서 난 이곳을 떠났으니까. 내 검의 소유자가 죽던 바로 그날로 당신을 데려온 거요. 따라서 난 당신 세계의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나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거요."
"죽었다고요?"
"나의 추측이오. 당신이 <흡혈귀의 저주>를 받기 전에 이 세상으로부터 내가 놓여날 수 있었으니 말이오. 나에게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게 해준 검의 소유자는 당신뿐이오. 나머지 사람들은 날 자신들의 세계에 묶어 두려고만 했소. 그들은 검을 떼어놓으려고도,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들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렇지만 그녀가 죽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잖아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죠, 그렇죠?"
"그렇소. 그녀는 앙쥬에 살았다오."
로즈린은 훈련을 받기 위해 소온에게 왔다고 했던 젊은이의 말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그녀는 가이의 누나가 아닌가요?"
그녀가 물었다.
"블리스?"
"가이가 그녀 이름을 언급했소?"
"네, 오늘 아침에요."
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블리스와 가이는 모두 윌리엄 공의 보호를 받고 있다오. 군주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은 감탄할 만한 것이지요. 난 윌리엄을 호위하고 그를 도와주라는 그녀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소."
"당신은 왜 동의를 한 거죠? 반드시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대답하지 말아요."
그녀는 약간의 혐오감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요. 당신은 어떤 전쟁이든 참가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테니까요."
그의 미소는 노골적인 웃음으로 바뀌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소, 그렇지 않소?"
"싸움에 관한 한 말이죠."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그래요, 난 아주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당신을 보게 되겠죠. 보나마나 뻔해요."
그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거예요. 난 이런 화제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아요."
"어쩌면."
그가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소. 윌리엄은 영국의 왕이 될 자격이 있소. 영국이 해롤드 구드윈슨을 골랐다면 아마 후회를 했을 거요."
소온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그녀는 노르만 인에게 영국의 왕관을 씌움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윌리엄은 단지 그 시대에서 야망이 컸던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였고, 그것을 후대의 역사가 반박할 순 없었다. 영국의 왕위에 올랐던 첫 번째 노르만인은 그의 자손들로 나라를 묶어 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맞다, 영국은 그의 명령을 거부한 대가를 치루었다.
로즈린은 그런 문제로 소온과 말씨름을 벌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논쟁에 관한 한 로즈린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다. 소온의 시대는 논쟁을 벌이는 시대가 아니었다. 신화와 본능의 시대에서 난, 논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르는 소온의 약점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노르만 인들이 영국을 공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가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축배를 위한 날이오."
그가 빙긋 웃었다.
"여름 내내 모아온 함선들이 마침내 군대 전체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고 우리는 해롤드 구드윈슨이 남쪽 해안에 세운 경계망을 거두어 들였다는 소식을 갖게 되었소. 우린 내일 아침에 출항할 거요."
"그렇다면 윌리엄은 이미 해롤드가 식량 부족으로 인해 그의 군대를 해산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줄 알았다는 뜻인가요?"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문서에 의하면, 물론, 해롤드는 군대의 일부를 내보내 주어야 했다고 되어 있어요. 수확기가 다가와서 농민들을 그냥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윌리엄이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씌어져 있지 않아요."
소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오."
"물론 그건 커다란 사건이에요. 소온, 바로 그런 게 이곳에 와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이에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알아내는 거죠."
로즈린은 아직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아까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어요. 오늘 날짜를 말해 주세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윌리엄은 해롤드가 런던으로 돌아올지 어떻게 알아내었죠?"
"영국인 스파이를 심문하여 알아냈다오."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적에게 중요한 기밀을 누설해야 하는 불쌍한 남자를 상상하자, 그녀는 저절로 몸이 움찔해졌다.
"놀랍군요. 그리고 물론, 그것은 윌리엄이 2주일 동안 세인트발레리에서의 출항을 막아 섰던 북풍에 대해 조바심을 쳐 댄 이유로군요."
"세인트발레리? 우리는 함대가 집결한 다이브의 입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출항할 거요."
"그래요, 나도 알아요."
로즈린은 모든 사실에 대해 미리 알고 있다는 데에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급습을 하기 위해서 함대는 세인트발레리로 이동할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무슨 이유로 우리가 아무런 경계도 없는 영국의 남부 해안가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곳에는 교차되는 지점이 짧아 영국 함선과 마주칠 수 있는 기회가 적기 때문에…… 잠깐만요!"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만약 해롤드가 런던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윌리엄이 안다면, 그는 또한 영국의 함대가 흩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그게 바로 윌리엄이 곧장 함대를 출발시키는 이유라면…… 아니, 그건 상관없어요. 기록에 의하면 그는 9월 12일에 세인트발레리로 함대를 이동시켰다고 해요. 영국군대의 움직임에 대해 그가 어떤 것을 알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에요."
"로즈린, 당신이 그 기록을 바꾸는 게 좋을 거요."
소온이 말했다.
"왜냐면 오늘은 9월 1일이고, 함대는 내일 영국을 향해 출발할 테니 말이오."
로즈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럴 수 없어요! 오, 소온,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에요!"
24
로즈린은 공포에 질리기 전에 일단 자초지종을 알고 싶었다.
"날짜를 잘못 안 게 아닌가요?"
그녀는 소온을 다그쳤다.
"당신은 우리를 다른 날짜로 데리고 왔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또 다른 당신이 이곳에서 돌아다니다가 우리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아니, 날짜는 정확하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굳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가 슬며시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사는 누군가에게 날짜를 물어보았나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오늘이 9월 1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윌리엄 공이 직접 한 말이오."
소온이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아침 조수가 밀려오면 출항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말이오."
로즈린은 고개를 흔들면서 필사적으로 걱정스러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한참 동안 골머리를 앓은 끝에 한 가지를 생각해내었다.
"잘못된 출발! 물론,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아마도 공작은 내일 영국을 향해 출발하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서 출항을 무산시킬 거예요. 그리고 기록에 남겨지지 않을 수도 있죠. 그는 기록에 쓰여진 대로 12일에 출항하게 될 테고…… 고개를 젓지 말아요, 소온. 아마 앞으로 그렇게 될 거예요."
"무엇이 우리의 출발을 막을 수 있단 말이오. 기회가 이렇게 좋은데. 그리고 함대는 모두 준비가 끝났단 말이오."
"또 북풍이 몰아닥칠 수도 있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12일까지 윌리엄의 함대가 출발하지 못할 수 있죠. 그리고……."
로즈린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은 알맞은 추론이 아니었다. 만약 한 번의 북풍이 기록으로 전해졌다면, 또 다른 북풍은 왜 기록되지 않았단 말인가? 아주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스파이 때문일 수도 있다. 잡혀온 스파이가 해롤드 왕에게 돌아가 윌리엄이 일 년 이내에는 영국을 침략하지 않을 거라며 거짓 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해롤드는 윌리엄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기에 대한 언급은 없는 걸까?
"잠시만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오늘이 9월 1일이라면, 그 스파이에게 알아낸 정보는 사실일 리가 없어요. 해롤드 구드윈슨은 9월 8일까지 영국의 남부 해안에서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니까요. 만약 내일 출항을 하게 되면 윌리엄은 영국의 왕관을 그 대가로 치루게 될 거예요."
"스파이는……."
"틀린 정보를 흘리기 위해 일부러 붙잡혔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죽기 위해서?"
그녀는 움찔했다. 그녀는 그 스파이의 운명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회의적으로 말하지 말아요. 어떤 이유에서든 그러한 희생양은 예전에도 많이 있었어요.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 자원해서 나서기도 하지만, 죄를 지었다거나 병에 걸려 곧 죽게 될 사람이 자기 가족의 미래를 보장받고 그런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죠."
"확실한 거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오, 물론 아니에요. 그러나 이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해롤드는 아직 전쟁 물자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노르만 군이 도착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거죠. 윌리엄보다 군대의 숫자도 훨씬 많구요. 왜냐면 노르웨이와 싸우고 있는 그의 형제인 토스티그가 아직 그에게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거든요."
"노르웨이와의 싸움? 노르웨이의 해롤드 하드라다가 마침내 공격을 한단 말이오?"
로즈린은 소온이 그 격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전쟁은 바이킹의 마지막 전투로서 매우 컸고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녀는 소온이 바로 오늘, 9월 1일 이 시간에 이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윌리엄이 영국을 향해 출항하기 며칠 전에 일어났다. 많은 학자들은 만약 바이킹의 왕이 그때 영국을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토스티그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윌리엄 공작은 헤이스팅스에서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에 동의를 표시했다.
분명 소온은 그 전쟁들이 어떻게 끝났는지 결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역사책을 읽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로즈린은 지금 역사 강의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소온은 아직 그녀의 몸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윌리엄에게 말을 하여 결정을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너무나 편안히 놓여진 그의 벌거벗은 몸의 무게를 온몸으로 즐기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래요. 하드라다는 공격을 했고 패하게 되었죠.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을 했던 해롤드 구드윈슨의 군사들은 매우 지쳤고, 노르만 인들이 상륙했음을 깨달은 그가 윌리엄과의 전쟁을 위해 남쪽으로 다시 오면서 군대를 불러 모았을 때는 이미 그 숫자가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고 해요. 그는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없었던 거죠. 게다가 급하게 남쪽으로 내려오느라고 피곤한 군대의 사기는 엉망이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금부터 한참 후에나 일어나야 하는 일이에요. 윌리엄이 내일 출항하지 않는 한……."
"그가 왜 출항하지 않는지 말해 주오."
"우리가 그에게 가서 스파이가 실토한 정보는 거짓이며, 해롤드 왕은 그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아직 영국의 남부 해안을 지키고 있다고 말을 할 테니까요."
"우리가 보여 줄 증거는 무엇이오?"
로즈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윌리엄에게 그것은 함정이라고 알리는 일은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그에게 내밀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뻔했다. 만약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노르만디의 윌리엄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에게 마녀라는 딱지를 붙여서 교회에 의해 화형을 당할 때까지 가장 가까운 지하 감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일 아침 영국을 향해 출항하는 노르만의 함대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좋아요, 우린 이 문제에서 물러나 있기로 해요."
그녀가 말을 바꾸었다.
"여기에 있는 누군가에게 미리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쓸데없는 참견이나 마찬가지고, 우리는 감히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돼요. 그러나 이번 전쟁을 지연시키는 무슨 일이 일어나야 적절한 순서에요. 우리는 기다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아야만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말은 하지도 말아요."
그녀가 가로막았다.
"역사는 여기서 바뀌지 않을 거예요. 단지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실패했을 뿐일 테죠. 이제 좀 비켜주실래요? 난 옷을 갈아입고서 그 위대한 남자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그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잖아요, 기억해요?"
그러나 그는 몸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대답만 했다.
"윌리엄 공을 만나려면 좀 기다려야 하오, 로즈린. 오늘은 출항 준비를 하느라고 너무 바쁘단 말이오."
그녀는 실망하는 모습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일은 출항을 취소시키느라고 바쁠 테지요."
"대신 그는 항해를 하지 않을 것 아니오."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그를 보자 그녀는 약이 바싹 올랐다. 역사가 바뀌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재미있게 느끼는 것일까? 그는 그녀의 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고 저주로 인해 불려올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한두 해 정도 살 뿐이었다.
그는 이 시대 이전에 태어났으나 그녀는 아니었다. 11세기의 역사가 변하면 그녀와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죽을런지도 몰랐다. 그러면 소온은 자유의 몸이 되어 발할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빙그레 웃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노르만 군이 내일 아침 출항하기를 바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출항한다면…… 아니, 그런 일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결코 역사가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노르만 인들을 가로막은 장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녀가 쓸 책을 위해 좋은 자료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기다리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녀는 미스테리를 좋아했지만 자신이 관련되었을 때는 질색이었다.
"그럼 우리는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야 하는군요. 나에게 부둣가를 구경시켜 주실래요?"
그녀가 제안했다.
"난 윌리엄의 아내가 이번 원정을 위해 선물했다는 모라 호를 보고 싶어요."
"먼저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말해 주시오."
"그건 단지……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 시간이 많으니까 다른 할 일이 없으면……."
"당신은 앞으로 부둣가를 실컷 보게 될 거요, 로즈린. 나에게 다른 생각이 있소."
소온은 이미 자신이 가진 '다른 생각'을 증명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라 그녀에겐 생각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25
로즈린은 소온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꼬박 하루 동안 지칠 줄도 모르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남자였다. 그녀는 마치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이끌어 준 까무라칠 듯한 절정의 순간을 몇 번이나 맛보았는지 세는 일은 이미 포기해 버린 지 오래였다. 단지 저녁의 어떤 시점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것만이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아침이 되어서도 그녀는 몸을 혹사했다거나 기진맥진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부드럽게 대했고 남은 것은 온몸에 넘치는 살아 있는 감각과 즐거운 기억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화를 내야만 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호기심을 지워 버리고자 하루 종일 사랑을 나눈 건 아닌지 의아스러웠다. 그녀는 관능적인 방종에 빠지는 대신 차분히 상황을 분석하고 모든 가능한 결과들을 생각해내는 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동이 트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잠깐 동안 빠져든 잠으로 그녀의 이성이 다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지금, 그녀는 군대의 막사들이 철거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밤 사이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막사 밖을 흘끔 내다보았을 때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함선을 향해 행군 중인 윌리엄의 군대는 곧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할 모양이다.
그녀는 공포에 질리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소온을 다그쳐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가이는 막사를 철거하고 소온의 모든 짐을 꾸려서 짐수레에 넣는 일을 떠맡았다. 비록 몇 명의 소작농들이 거들긴 했으나, 가이의 임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그들이 어느 배를 타야 하는지 미리 알아놓은 다음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로즈린은 가이에게 짐 꾸리는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게 될 테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소온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해안가로 급히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너무 빨리 발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순 없었으나, 하여간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로즈린은 또다시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깜박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핑계거리가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으로 머릿속이 나른했기 때문이라는. 하지만 시간 여행은 심각한 일이므로 어떠한 종류의 핑계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주지시켰다. 한 번의 작은 실수가 수백만 명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고, 커다란 실수 한 번으로 그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의 흔적을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이 아직 사람들로 붐비는 부둣가에 도착했을 무렵 다행히도 태양이 수평선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로즈린은 수백 대의 함선이 강의 입구에서 사람과 짐을 싣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현재 정박한 모든 배들은 군사와 말들을 싣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중이고, 다른 함선들은 단지 그들의 갈 길을 돕기 위해 밀려들어 올 조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분명히 윌리엄이 지휘하는 군대의 조급한 출발을 중지시킬 만한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출항한다면……. 아니, 아직도 군대를 야영지로 되돌아오게 할 만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갑작스런 폭풍우가 그것이었다. 치명적인 바람이 북쪽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혹은 마지막 순간에 공작의 스파이들의 하나가 나타나 해롤드 왕의 군대가 있는 진짜 위치에 대해 알려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말이다. 로즈린은 고집불통인 그녀의 바이킹에 떠밀려 배에 오르고야 말았다. 소온은 - 이미 예상했던 바이지만 - 전쟁의 뒤편에 머물러 있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아직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로즈린은 지금 타고 있는 옛날식 범선은 물론이고 현대식 배조차도 타본 적이 없었다. 지금, 배멀미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는지 살피고, 돛을 보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아보았다. 불행히도, 그날은 항해를 위하여 더없이 좋은 날이었고 바람은 아주 꾸준하게 불어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잘못된 방향, 그녀의 의견에 의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말이다.
로즈린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해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심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동시에 영국의 범선들이 북쪽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의 측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만약 역사가 제대로 된 진로로 나아간다면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범선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로즈린이 알고 있는 역사와 달랐다. 이대로라면, 노르만 군은 육지에 닿기가 무섭게 대단한 전세를 지닌 영국군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최소한 어떤 기적이 일어나게 될 거야. 저간의 과정이 조금 바뀌었을 뿐, 마지막 결과는 변함이 없을 게 틀림없어. 그래야 해.
어쨌거나 로즈린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온과 함께 전쟁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역사책을 볼 수 있다면 그 결과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역사책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녀는 항해가 시작된 이래로 곁에서 떠나지 않았던 소온에게로 몸을 돌렸다.
"날 집에 데려다 줘요."
그가 자신들이 배를 타고 나아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얼른 덧붙여 말했다.
"노르만디로 가자는 말이 아니에요. 나의 집으로 말이에요. 현재의 시간으로요."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떠나자는 말이오?"
"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는 그를 향해 얼른 덧붙여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이 전쟁에 참가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말을 하면 역사가 바뀔 수 있어요. 여기에서 해전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저쪽에는 분명히 배들이 있을 거예요. 윌리엄 공작은 지금 이 시점에선 절대로 이길 기회를 잡지 못할 테고, 주변 여건상 다음 달에 싸움을 벌이면 유리하단 말이에요. 지금은 해롤드 왕이 우세해요."
"만약 한 가지가 바뀐다면 다른 것들도 연달아서 바뀌지 않겠소?"
로즈린은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역사를 다시 쓰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요. 그리고 내가 모아놓은 연구 자료들을 볼 수 있다면 곧 알게 될 거예요. 그게 있으면 난 여기서 무슨 일이 잘못되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날 돌려보내 줘요, 소온. 현재의 시간으로 말예요."
소온은 마치 그들이 돌아갈지 혹은 남아 있을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자신인 것처럼, 더구나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눈앞에 보이는 영국의 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약속할게요, 소온. 우린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이제 가요. 신속하게요."
"'신속'이 무슨 뜻이오? 당신은 계속……."
"그건 '지금 당장'이라는 뜻이에요."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어제처럼…… 바로 그렇게요."
소온은 그렇게 했다. 깊은 곳에서 토해낸 짧은 한숨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불만을 알리면서 검을 끄집어내었고, 다음 순간 그들은 현대의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녀가 유산으로 받은 카베노프 별장의 그녀의 침실이나 다른 사랑스런 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바람이 씽씽 부는 벌판에 서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벌판에는 몇 그루 나무들이 외롭게 서 있을 뿐, 집 한 채 하다못해 허름한 헛간 한 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길이나 전신주도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회색 구름들은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가면서 어느 순간이라도 비를 퍼부을지 모른다는 협박을 보내왔다.
공포에 질린 로즈린이 작게 속삭였다.
"우릴 어디로 데리고 온 거죠, 소온? 그리고 제발 나에게 이건 실수라고 말해 주세요."
그러나 소온의 대답은 그녀가 듣고 싶어 하지 않은 바로 그것이었다.
"난 당신의 집, 당신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온 거요. 그런데 여기는 전의 그곳이 아니군."
26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니, 이곳은 카베노프 별장이 아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로즈린은 궁금했다. 만약 무슨 이유로 파괴되었거나 처음부터 아예 세워지지도 않았다면? 이것은 단지 하나의 변화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뜻일까?
로즈린이 알고 있던 세상은 바뀌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이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조상은 분명 살아남았다. 소온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 짐작컨대 생김새도 변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나의 조상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미국으로 이주했을까? 나는 지금 영국인일까, 혹은 아직도 미국인일까? 아니, 미국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을까?
수많은 가능성과 질문들이 끝없이 그리고 어지럽게 떠올랐다. 로즈린은 전화기를 발견하기 전까진 어떠한 대답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비드나 게일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그들이 그녀의 질문들을 듣는다면, 필경 그녀가 미친 모양이라고 생각할 터이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세상의 역사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 분명히, 그녀가 수집한 자료집에도 거기에 대한 대답을 제공해 주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 근방 어딘가에 있는 여관에 머무른다고 해도, 그 자료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달라진 세상에서는 그녀에게 아예 그런 것이 없을런지도 몰랐다. 그녀는 여기에서 교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학에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전화기를 찾아야만 했다. 또한 도서관도.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두려움과 공포를 서둘러 가라앉혀야 했다.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로즈린?"
그녀가 느끼는 공포지수는 거의 위험수위에 도달한 데 반하여 소온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호기심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경고한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그 전쟁이 일어날 때와 장소를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일은 벌어졌고 그 이후의 역사에까지 연쇄반응으로 영향을 미친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나도 무슨 일이지 모르겠어요. 내가 알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오, 하나님 맙소사,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것이 단지 보잘것없는 스파이 한 사람의 거짓 자백으로 인한 것이라니요!"
소온은 갑자기 그녀의 몸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의 울음에 대비라도 하듯이 그의 넓은 가슴이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의 간단한 몸짓이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로즈린은 그녀의 바이킹이 무엇에든 누구에게서든 그녀를 다치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그녀가 안전함을 느끼도록 보호해 주고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다른 비관적인 기분들을 가라앉혀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전해 오는 힘을 느끼면서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야 해요. 그런데 이 근방에는 전화가 없나 봐요. 우리가 현대로 돌아온 것이 확실한가요?"
그녀는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혹시 2백년쯤 차이가 나는 건 아닌가요?"
"아니오, 전에 내가 말했듯이 이 검은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오. 현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오."
"좋아요. 돌아온 시점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소온, 우리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까운 전화 혹은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한참 동안 걸어야 할까 봐요.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면 말이죠."
좀 더 커다란 공포가 밀려오기 조금 전, 그녀의 머릿속에 불현듯 제법 괜찮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잠깐만요!"
그녀가 외쳤다.
"아마도 이 나라에 무언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당신은 전에 가본 곳은 어디든지 되돌아갈 수 있다고 그랬죠, 소온? 그게 어떤 나라인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렇소."
"그렇다면 날 다시 내 강의실로 데려다 주어요. 내가 당신을 처음 불러왔던 그날 밤으로 말이에요. 만약 그 대학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우리가 필요한 역사책도 거기에 있을 거예요."
"당신을 거기에 데려다 주면, 로즈린, 당신은 또 다른 자신과 만나야 하오."
그가 지적했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의 오딘은 그럴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나요?"
"아니오. 오딘은 단지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만 했을 뿐이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불러낸 그 다음날로 갈 수 있잖아요? 난 다음날에는 강의실에 가지 않았어요. 휴가를 냈었거든요.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없었어요."
"그건 확실하오."
그가 대답했다.
"내가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는 이렇게 정신없는 순간에서 그녀가 시간 여행에 대한 아주 작은 사항까지도 기억해 주길 기대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여행길에 올랐다. 교실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로즈린의 강의실이 아니었다. 원래보다 훨씬 더 작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같았으나, 토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짐작으로는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소온을 처음 불러낸 다음날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기 시설이 되어 있었고 밖에서 흘러드는 불빛은 교실의 전기 스위치를 찾을 수 있을 만큼 환했다.
"좋아요, 그래도 비슷한 편이군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소온에게 말했다.
"분명히 웨스터리 대학은 아직 있어요."
"그렇지만 같은 것은 아니오."그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그녀는 자신의 책상이길 바라는 물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맙게도 이런 정도의 작은 변화라면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아마도 재단의 기금이 줄어든 정도일 거예요. 강의실의 크기를 줄여야 할 정도의……."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시오, 로즈린."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투는 매우 퉁명스러웠다.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는 윌리엄의 포스터가 붙어 있어야 하는 벽을 응시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포스터가 없어졌고 그가 동요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실토했다.
"윌리엄 공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 같소."
그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노르만 군이 그때 진격을 하면 안 된다고 이미 말했잖아요.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았죠?"
"우리는 숫자에서 우세했소."
"해롤드 구드윈슨은 더 많은 군대를 거느렸어요."
그녀가 그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윌리엄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요, 로즈린?"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다그쳤다.
"당신은 그가 왕이 될 거라고 말했소."
"그래요. 순서가 제대로 됐다면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목격한 대로 노르만 군이 조급한 공격을 하는 바람에 그 순서에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해요. 그리고 그 공격이 영국인 스파이의 가짜 자백을 근거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잘못된 출발, 바로 거기서 순서가 틀어진 거예요."
"어디에서?"
"스파이 말이에요. 아마도 그는 붙잡힌 것이 아닐 거예요.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는 감쪽같이 거짓말을 한 거구요. 그렇지 않았다면 윌리엄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요. 혹은……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 역사책이 있어야만 해요. 난 첫 번째와 두 번째 학기 때 사용했던 책들을 책상의 제일 아래 서랍에 보관해 두었어요. 우리에게 운이 따른다면……."
그녀는 제일 아랫 서랍을 홱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두 권의 책이 있었으나, 물론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중세의 역사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크기와 지은이가 달랐다.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이름은…….
"믿을 수 없어요!"
그녀가 비명을 올렸다.
"로즈린 홀톤? 로즈린 홀톤이라고? 내가 그 거짓말쟁이, 싸구려에다가 교활한 개자식과 결혼을 했단 말이야?"
"누구?"
"배리 홀톤"
그녀는 비탄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 기억해요? 그 블루베리 말이에요."
"당신이 없애 버리고 싶다는 그 사람 말이오?"
"바로 맞혔어요. 나는 그를 혐오해요. 그는 나에게서 도둑질을 해갔어요. 이 뒤바뀐 세상에서의 나는 그와 결혼할 정도로 바보 같은 여자임이 분명해요."
"당신이 결혼을?"
스스로의 동요를 이기지 못한 그녀는 그의 목소리 속에 들어 있는 날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원히는 아니에요."
그녀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정상으로 되돌아갈 방법이 있을 거예요. 만약 내가 배리와 함께 부부로서 살아야한다면, 난 아마 미쳐 버릴 거예요. 우리는 잘못된 것을 되돌려 놓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야만 해요. 지금 당장요. 의자를 끌어와요, 소온.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만약 저자가 각 장의 요약을 그토록 구구하게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훨씬 시간이 절약되었을 것이다. 두 개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지 알아보는 게 로즈린의 다급한 관심사였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 적어도 지금을 새로운 현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모든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 짧게 적어놓았다.
그녀가 두 번째 책을 덮기까지는 족히 두 시간이 지나야 했다. 게다가 전부가 아니라 두 권의 책에서 요약된 부분만 읽은 데에 걸린 시간이었다. 소온은 보통의 남자들도 보이기 어려운 인내력을 발휘하여 두 시간 가까이를 오직 그녀의 책 읽는 모습만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물론, 소온은 어느 모로 보나 '보통' 이상의 남자였고, 그녀는 처음부터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 로즈린은 그에게 나쁜 소식을 알려야만 했다. 그의 영웅이자 군주는 원래 그래야 했던 시점보다 훨씬 일찍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또한 방금 읽은 모든 믿을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해 말을 해주면서 그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나의 짐작이에요, 소온. 처음에는 윌리엄 공작이 유리했어요. 해롤드 구드윈슨은 다른 군대와의 싸움에서 곧장 내려왔어야 했지요. 그런데 대신 해롤드 하드라다가 우세해진 거예요. 노르웨이의 왕은 영국을 쳐부수고 새로운 왕이 되었어요."
로즈린은 차분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의 가문은 백 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영국을 다스렸어요. 그런 다음 스칸디나비아의 대전투라고 불리우는 전쟁이 터진 거예요. 영국의 군사력은 노르만의 윌리엄으로부터 받은 힘으로 더 강해지기는커녕 끝까지 버티는 북쪽의 여러 나라들과의 싸움을 위해 군대를 보내는 가운에 힘은 점점 약해졌어요. 미국은 원래 그래야 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발견되었고, 내가 지금 입에 다시 올리기도 싫은 해괴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요."
그 대목에서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곳은 전제 군주들이 다스리는 나라들로부터 온 사람들이 섞여 나라를 이루었지만, 1820년에야 비로소 독립을 하게 되었어요. 유럽은 봉건시대의 상태로 되돌아갔어요. 당신에게 친숙한 제도죠. 새로운 나라 '미국'은 마침내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어요. 비록 백 년 정도가 늦어지긴 했지만요.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해요. 크고 작은 모든 전쟁들은 너무 많아서 내가 일일이 셀 수도 없어요. 발명의 시대가 그냥 지나간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죠. 내가 살던 시대에 사용하던 놀라운 물건들 중 불과 몇 개만이 이 새로운 시대에서 볼 수 있어요. 이런 추세로 본다면 기술의 발달 정도가 본래의 그래야만 하는 정도에 이를 때까지 적어도 몇 백 년은 더 지나야 해요."
로즈린은 긴 설명을 끝내고 숨을 크게 쉬면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온은 그녀만 지긋이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즈린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는 대답하기 전에 윌리엄의의 포스터가 걸려 있어야 하는 빈 벽을 바라보았다.
"그 책에 영국인 스파이에 대한 글이 씌여 있소?"
로즈린은 한숨을 쉬었다. 노르만디의 윌리엄이 때 이르게 사망했다는 소식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스파이의 자백은 거짓이라고 적혀 있고, 그것은 노르만 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되어 있어요. 거기까지 보았을 때 나머지 것들은 본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내가 아는 역사와 똑같이 진행되었어요."
"본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말을 되뇌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스파이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오?"
"네. 적어도 그런 것은 문서에 나타나 있지 않았거든요. 그가 원래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문서에 언급될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혹시 나와 당신이 거기에 갔기 때문에 이 문서에도 없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스파이와 관련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잖아요. 난 그런 사람을 만난 적도 없구요. 당신은 어땠죠? 어제 아침 윌리엄을 만났을 때 말예요."
"아니오. 그는 이미 스파이에게서 자백을 받은 다음이었소."
"그렇다면 그 일은 우리가 거기에 가기 전에 일어난 거예요…… 잠시만요! 또 다른 '소온'은 어떠했죠?"
"또 다른 '소온'?"
"당신이죠."
그녀가 즉시 대답했다.
"당신이 검에 의해 11세기로 처음 불려왔을 때 말이에요. 당신은 원래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지만 '검의 저주'라는 괴상한 이유로 그곳에 가게 됐잖아요. 그때 당신은 스파이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닌가요? 그를 잡아서 심문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 아니었나요?"
"아니오. 난 존 드 프리엘 경이 그에 대해 말할 때까지 스파이가 있는 줄도 몰랐소."
"존 경?"
"그는 스파이가 자백을 할 때 거기에 있었소. 그는 자신이 심문을 주도하게 된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는데, 그 다음날 아침 잡힌 남자에게 한 번 더 질문을 할 생각이었소. 그런데 나와 황혼 무렵까지 술 마시기 시합을 해서 그가 졌다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곯아떨어졌을 거요."
로즈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날 아침이란 바로 어제 당신이 그곳에 있을 때겠죠, 맞나요? 공작이 출항을 결심했을 때 말이에요."
"그렇소."
"그렇다면 스파이의 일은 존 경이 그를 다시 심문하기 전에 끝나 버린 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소온! 그 존 경이라는 사람이 스파이에게서 사실을 알아내야 했어요. 그러면 모든 것은 순서대로 흘러갔을 거예요. 즉 두 명의 해롤드가 먼저 싸움을 벌이고, 윌리엄은 9월 말에야 비로소 영국으로 출항을 하는 거죠."
"이제 어떻게 그것을 바꿀 수 있소?"
그가 질문했다.
"내가 그곳으로 처음 갔을 때 일은 바꿀 수가 없단 말이오, 로즈린."
"아뇨,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로즈린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우리는 당신이 발할라로 사라지기 바로 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당신'이 존 경과 벌이게 될 술 마시기 내기를 막는 거죠."
그는 마치 그녀가 자기 머리를 잘게 부수어 버리기라도 한 듯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나 자신과 마주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절대로……."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말아요."
그녀는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 난 당신더러 자신의 분신과 만나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당신은 그저 존 경이 그날밤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만 하면 되는 거예요."
소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위협적인 태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무슨 일 때문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이킹은 분명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어떻게 당신이 그 일을 처리한단 말이오, 로 즈 린?"
비난하듯 천천히 나오는 그의 물음을 듣자 그녀는 울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왜 날 비난하는 거죠, 소온? 솔직히 내가 당신과…… 아니, 또 다른 당신을 해치……."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면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냈음을 깨달았다.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소."
"그럼 무엇 때문에……?"
로즈린은 또 다시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리곤 갑자기 떠오른 다른 이유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지금 질투를 하는 중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그건 부당한 일이지만 동시에 가슴 두근거리는 흥분을 안겨주었다. 그녀 때문에 질투를 하는 사람을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재미있는 일이 아니오."
그가 으르렁 댔다.
"아니, 물론 아니죠."
그녀는 얼른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서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생각은 당신이 존 경을 잠자리에 들도록 만들 때까지 또 다른 '소온'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그의 관심을 끌 생각이란 말이오?"
"당신은 대화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나요?"
"그의 관심은 오직 두 가지 뿐이오. 그리고 단언하건대, 대화에는 관심이 없소."
"싸움 그리고…… 여자?"
그녀가 넘겨짚었다. 그리고 그의 욕구에 관하여 저번에 오고갔던 대화를 기억해내면서 또다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리고 당신에겐 한 가지가 더 있죠. 식욕이요."
그는 재미있어 하는 그녀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아니, 지금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소. 내 여자를 적절하게 훈련시키는 것 말이오."
로즈린은 소온의 말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여 화를 돋우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었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발끈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가 한 것처럼 책상 위로 몸을 내밀고 거의 코를 마주칠 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었다.
"지금 아슬아슬한 농담을 한 거예요, 거인 아저씨. 내가 알기론 훈련이라는 단어는 직업과 관련된 거라구요."
"만약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증거가 있다면 지금 나에게 보여 주시오."
그가 반박했다.
"난 근육의 힘이나 크기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점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아니, 잘 모르겠소. 어떤 점에서 동등하다는 거요?"
로즈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혹시라도 무의식중에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암시를 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소온이 그녀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이 그녀로 하여금 그가 똑똑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품도록 만들었다면? 그의 사고에서 아주 일부만이 야만적이라고 느꼈었다. 여자에 관한 것 말이다. 더구나 그가 마지막으로 불려온 시기에서 2백 년도 더 지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정도는 완전히 정상이었다. 1700년대에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소온에게 사과를 해야 할까봐…….
무심결에 한 일이겠지만, 로즈린 자신이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자존심을 비틀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내뱉었던 '훈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로즈린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나 주는 것도 그녀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만약 그가 그녀의 네메시스(복수의 여신)인 배리 홀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27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로지? 오늘 집에 있으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비록 로즈린이 책 위에 쓰여진 이름을 보긴 했어도, 달라진 세상에서 이 남자와 실제로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순 없었다. 또한 그는 그녀가 알고 있는 배리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회색 눈동자는 같았으나, 길게 기른 옅은 금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그의 옷은 평상시의 단정한 차림보다 훨씬 너저분했다. 적어도 그가 항상 노력하던 세련된 학자풍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참으로 난감했다. 대답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단지 '당신이 바쁜 것 같으니 다음에 이야기 합시다'라며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다. 정말이지, 옛날의 배리가 더 나았다. 그녀는 강압적인 그의 말투를 듣자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로즈린이 딱딱한 어조로 되물었다.
"난 기억나지 않아요."
다음 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쏘아붙였다.
"만약 당신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배리, 정말로 내가 그렇게 할 거……."
"순종에 관한 강의가 좀 더 필요한 모양이군."
배리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다가왔다.
말투는 물론이고 그의 표정은 글자 그대로 위협적이었다. 또한 방금 그가 한 말은 그녀가 예전에도 그런 훈계를 받은 적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었다. 맙소사, 갈수록 믿기 어려워지는군! 여기에선 배리 홀톤이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로 바뀌었단 말인가? 게다가 소온이 보는 데서 거침없이 해대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이 아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나 봐. 그래, 분명해.
그는 마치 소온이 거기에 없기라도 한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중세의 복장에 대해서조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노란색 드레스는 각반을 대고 검을 지닌 소온보다 더 이상한 차림인 데도 배리는 늘 하던 것처럼 비웃는 말을 하지…….
어라, 마치 소온이 여기에 없는 것처럼 취급하다니?
로즈린은 소온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전에도 한때 그녀의 시대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흄스 부인은 별장에서 두 사람 몫의 저녁식사를 준비했지만, 로즈린은 그녀가 소온을 바라보거나 말을 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라는 부탁을 들었음에도 반대편 의자에 앉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물어볼 여자가 아니었다. 미국인 가정부라면 주저없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혼자 드실 건가요?'라고 말이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흄스 부인은 그것을 미국인의 괴팍스러운 버릇 정도로 생각하며 나중에 자신의 남편과 쑥덕거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주인에게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소온의 모습을 본 것은 과거에서의 일이었다.
소온 블러드링커는 매우 위협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였고 특히 허리에 찬 검에 의해 더욱 그렇게 보였다. 제정신을 가진 현대의 남자라면 그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을 터이며, 마치 그가 거기에 없기라도 한 양 무시해 버리는 것도 그를 피하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로즈린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리에게 직접 소온이 보이는지 물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그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주먹을 치켜드는 그를 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그의 주먹을 피할 시간이 없었기에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좋은 생각이 났거나 집으로 돌아가 단둘이 남을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꾼 게 분명했다. 혹은 폭력을 휘두르는 시늉만으로도 그 시대의 그녀에게 효과를 발휘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지금 일부러 순종하는 시늉을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녀는 방금 받은 위협에 의해 무척이나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모든 추측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배리가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소온이 그의 주먹을 잡았고 배리는 온 힘을 다해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소온은 한손으로 가볍게 잡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소온의 모습을 보게 된 배리는 그녀를 때리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배리는 무기력한 눈길로 로즈린을 보면서 명령했다.
"이 바보 녀석을 가라고 해, 로지. 안 그러면 후회할 일이……."
"내가 당신이라면, 지금 그런 협박 따위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팔짱을 끼며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여기에 있는 내 친구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난 상관없어……."
그녀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다가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배리! 그를 바보 녀석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해요. 바이킹들은 바보로 비유되어지면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거든요. 비록 당신은 정말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배리는 뒤로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변했다. 사실상, 소온은 그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았고 또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로즈린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소온은 배리가 그녀를 때리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만으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맞을 만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배리는 거기에서 용기를 얻은 게 틀림없는지 다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좀전과 마찬가지인, 바뀌지 않은 그의 어투에서 로즈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군, 맞지?"
"물론 제정신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에게 말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에서 당신 볼일을 다 보았으면 어서 나가요. 아니면 또 뭔가를 훔치러 왔나요? 아직 남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은 몰랐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 그의 모습은 매우 불안하게 보였다. 만약 그녀가 그의 정곡을 찌른 것이라면?
"당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비록 힘이 빠진 목소리이긴 해도 그는 끝까지 우겼다.
"물론 당신은 모르겠죠. 나는 내 조사 자료들을 여기에 놓아두지 말았어야 했어요. 당신은 그것들을 훔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고, 이번에도 그런 것이겠죠?"
"이번에도라고? 난 한 번도……."
"오, 입 닥쳐요, 배리!"
그녀는 또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예전처럼 이 일을 처리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당신은 현명하게도 이번에는 나와 결혼할 때까지 기다렸군요. 만약 내가 원한다면 당신을 막을 기회가 있을 테지만, 난 다르게 할 거예요. 난 당신과 결혼하지 않은 곳으로 돌아가는 쪽을 택할 테니까요."
물론 그는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로즈린은 얼마나 거기에 아내를 구타하는 대역이 아닌, 그녀가 알고 있는 원래의 배리가 서 있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두 명의 배리는 모두 정말로 바보 같은 남자였다.
"이혼?"
배리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만약 내가 승낙하리라고 생각했다면……."
"이혼을 할 필요도 없어요."
그녀는 차갑게 웃었다.
"당신을 내 인생에서 쫓아내기 위해 훨씬 더 빠른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다음 그녀는 소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우리가 결정했던 그날로 돌아가요. 내가 필요한 것은 모두 가졌어요."
소온은 언제나 그랬듯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온이 배리를 놓고 <흡혈귀의 저주>를 끄집어내었을 때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아마도 배리는 그녀가 말한 '빠른 방법'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게 틀림없었다. 애석하게도 그 순간은 아주 짧았다. 소온이 팔을 뻗고 그녀는 잡았다. 그 장면은 더 재미있는 순간으로 대치되었다. 그들이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배리의 표정이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