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극(The Demetrios Virgin)
작은 연극(The Demetrios Virgin)
Penny Jordan
새스키아는 남자친구를 시험해봐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야한 차림으로 술집에 가 처음 본 남자를 유혹한다. 하지만 그녀가 접근한 남자는 사실 새로 온 사장 안드레아스였고...
1장
"4시 45분"
새스키아는 건물 로비를 부지런히 지나 급하게 출입구로 향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미 약속 시간에 늦은 터여서 안내원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도 대꾸할 틈이 없었다.
"일찍 빠져나가네. 잘해 봐!"
안드레아스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임원용 승강기 앞에 서 있던 그는 어딘가로 바삐 빠져나가는 여자를 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짙은 금발에 다리가 미끈한 아가씨였다. 그는 즉시 자신의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복잡하게 얽힌 남녀 관계야말로 지금 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현재 그가 경영하는 호텔 체인 사업에서 마지못해 물러난 할아버지는 안드레아스에게 사촌과의 결혼을 설득하고 강요까지 하고 나섰다. 할아버지가 볼 때 그 결혼이야말로 두 집안의 결합일 뿐 아니라 그의 사촌이 물려받은 집안의 해운회사와 호텔 체인의 재산을 결합시키는 바람직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안드레아스는 할아버지가 인정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당신의 감정에 더 좌우되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의 딸, 안드레아스의 어머니가 영국 남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셨으니까.
안드레아스와 그의 사촌 아테네의 결합을 조장하는 다소 서툰 시도들은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 다시 말하면 아테네 자신이 할아버지보다 이 결혼에 더 열은 내고 있다는 사실만 아니면 그저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아테네는 자신의 의향을, 아니 욕망을 아주 뚜렷이 비쳤다. 그녀는 그리스 갑부와의 첫 번째 결혼에서 두 아이를 둔, 그보다 여섯 살이나 더 많은 미망인이었다. 안드레아스는 애초에 할아버지의 머리 속에 두 사람의 결혼이라는 터무니없는 발상을 심어놓은 장본인이 혹시 아테네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들었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안드레아스가 승강기에서 내렸다. 개인적인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2주일 이내에 할아버지 소유의 에게해 섬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가족 휴가를 보내면서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할아버지는 지금, 최근에 사들인 쇠퇴 일로의 영국 호텔을 그들이 일궈 놓은 다른 호텔들처럼 성공적인 사업체로 전환시키기 위한 그의 참신한 제안을 더 듣고 싶어 하셨다.
안드레아스가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사업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래도 이번 인수는 어쨌거나 잘한 일이다. 이 체인 소유의 호텔들의 경영 상태는 좋지 않고 구식이지만 위치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이 체인의 본점에 도착하는 날짜는 내일이었다. 그런데 예정을 하루 앞당겨 오늘 오후에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방금 본 아가씨처럼 모든 직원이 <몰래 빠져나가는>습관이 있다면, 적어도 수익성을 개선할 한 가지 방법은 확실해졌다고 그는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찍 빠져나가다니!"
새스키아는 빈 택시를 소리쳐 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기도 하겠다! 지난 한 달 내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7시 반에 출근한 데다 점심시간도 없이 일했는데....하지만 새로 인수한 데메트리오스 호텔이 비용 삭감에 가차없다는 소식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새 사장과 처음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새스키아는 그 일조차 전혀 달갑지 않았다. 감원에 대한 얘기가 분분했고 안드레아스 라티메르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에 대한 소문도 무성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노인네도 엄격한 경영으로 평판이 나 있지만 손자는 한술 더 뜬다는군"
"주위 사람 말은 다 틀려도 손님은 항상 옳다는 방침을 신봉하고 있고, 그걸 잊어버리는 고용인들은 화를 면치 못한다더군. 물론 그래서 그들의 호텔이 그렇게 유명하고....이익을 많이 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그것이 새스키아가 들었던 소문의 요지였다.
택시는 그녀가 일러준 식당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녀는 서둘러 요금을 지불한 뒤 식당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오, 새스키아. 이제 오는구나. 우린 네가 오지 못하는 줄 알았어."
"미안해" 새스키아는 친구들에게 사과하며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요즘 회사가 난리 통이라서 말야. 내일 사장이 새로 오거든"그녀는 고운 콧잔등을 찡그리고 숱 많은 속눈썹의 청록색 눈을 가늘게 뜨며 해명했다. 그런데 친구가 별로 귀담아듣지도 않을 뿐더러 평소처럼 행복하고 상냥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긴장되고 불행해 보이자 그녀는 얘기를 중단했다.
"왜 그러니?"
"방금 로레인 언니에게 내 기분이 얼마나 혼란한지 말하던 참이야"메건은 삼인조의 세 번째 인물로 그들보다 나이가 많고, 사무적인 표정에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지닌 사촌 로레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혼란스럽다니?" 새스키아는 긴 머리를 뒤로 밀친 다음. 우아한 타원형의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허겁지겁 롤빵으로 손을 가져가면서 반문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마크 말야" 메건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고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마크?" 새스키아는 다시 되물으며 롤빵을 내려놓고 친구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곧 약혼 발표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 그랬지. 그럴 거야. 적어도 마크는 그러고 싶어하지" 메건이 말을 잇지 못하자 로레인이 대신했다.
"메건은 아무래도 그 친구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대...." 그녀가 새스키아를 향해 냉혹하게 말했다. " 이 애를 배신하고 있는 거지"
메건과 새스키아보다 열 살이나 많고 결혼에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로레인은 남자를 몹시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 그럴 리가 있니? 네 입으로 마크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고 했잖아" 새스키아가 반박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지. 특히 청혼했을 때는. 하지만 요즘 이상한 전화가 자꾸 걸려오는 거야. 내가 전화를 받으면 그냥 끊어버리고,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세 번이나 그런 전화가 왔는데,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냥 잘못 걸린 전화라고만 해"
"뭐, 그럴 수도 있지" 새스키아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메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게 아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크는 계속 전화기 옆을 서성거린단 말야. 어젯밤에는 자기 휴대폰으로 통화하다 내가 나타나니까 바로 끊어버리던 걸"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어?" 새스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는 내가 그냥 상상하는 거래" 메건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남자들의 고전적인 수법이지" 로레인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이 강경하게 말했다.
"내 전남편도 내가 과대망상이 되어간다면서 갖은 말을 둘러대 놓고는 어떻게 한 줄 알아? 글쎄, 자기 비서와 살림을 차린 거 있지!"
"나는 다만 마크가 솔직했으면 싶을 뿐이야" 메건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 만약 다른 여자가 있다면...그...그가 이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랑할 거야" 새스키아가 친구를 위로했다. 메건의 새 애인을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가 말해 준 대로라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짝인 듯했다.
"그걸 알아내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지" 로레인이 단언했다. "그런 일을 대신해 주는 회사가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 애인의 정절이 의심스러울 때 문의하면 그 남자를 유혹할 여자를 보내 준다는 거야. 어때, 너도 한 번 해보는게?" 그녀가 메건에게 권했다.
"오, 싫어요. 그렇게는 못해요." 메건이 거부했다.
"해야 돼" 로레인이 강력하게 우겼다 "그 남자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나도 결혼하기 전에 그랬더라면 후회되는 걸. 그 방법밖에 없어. 마크는 자기 사업을 시작한 뒤로 수지를 맞추느라 고전하고 있잖아. 그런데 넌 대고모에게 물려받은 돈이 있고"
얘기를 듣고 있던 새스키아는 낙담했다. 메건을 무척 사랑하지만 친구가 자기보다 나이 많고 세속적인 사촌의 말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레인에게 전혀 반감은 없지만, 실은 좋아하지만, 그 동안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로레인이 일단 우기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어코 자기 식대로 밀고 나가야 했는데, 새스키아가 보기에는 그 점이 그녀의 결혼이 실패한 부분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메건의 불행에 동정을 느끼긴 하지만 지금 당장 새스키아는 배가 고팠다. 너무 고팠다. 그녀는 메뉴판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글쎄, 현명한 생각 같긴 하네요. 하지만 이곳 힐포드에 어디 그런 대행사가 있어야죠."
메건이 마침내 인정했다.
"그런 곳이 왜 필요해? 마크와 만난 적이 없으면서 그를 유혹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친구만 있으면 되는데. 만약 그가 반응을 보인다면...." 로레인이 응수했다.
"아주 매력적인 친구요?" 메건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새스키아처럼 말예요?"
두 여자의 시선이 허기를 못 이겨 롤빵을 뜯어먹고 있는 새스키아에게 향했다.
"그렇지. 새스키아라면 완벽하지" 로레인이 열광적으로 속삭였다.
"뭐라고요?" 새스키아는 빵이 목에 걸릴 뻔했다. "농담이겠죠. 오, 싫어요. 싫어...." 로레인의 결의에 찬 눈빛과 메건의 호소 어린 시선을 묵살한 채 그녀가 대꾸했다. "어림도 없어. 메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걸 알아야 돼." 그녀는 친구의 상식과 양심에 호소하면서 애교 있게 덧붙였다. "마크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니? 무엇보다 넌 그를 사랑하잖아"
"믿을 수도 없는데 그에게 모든 걸 바치는, 그런 모험을 할 수 있겠니?" 로레인이 날카롭게 끼어들더니 못을 박듯 덧붙였다. "좋아, 그건 정해졌고, 이제 새스키아가 마크를 어디서 우연히 만나 작전을 펼칠 건지 정해야 돼"
"난 못해. 이...이건 부도덕한 짓이야" 새스키아가 단호히 말하면서 메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메건, 미안하지만 이 일만은..."
"난 네가 메건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새스키아, 특히 너를 위해 해준 일도 있는데..." 로레인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새스키아는 가지런한 하얀 이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잠겼다. 로레인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메건에게 아주 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반 년 전 그녀의 회사가 데메트리오스 사의 인수 시도를 물리치기 위해 주말뿐 아니라 매일 저녁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즈음 부모의 결혼 파경을 맞은 뒤부터 그녀를 키워온 할머니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위독하셨는데, 간호사인 메건이 자신의 여가 시간과 휴가까지 반납해 가며 할머니를 간호해 주었던 것이다.
메건이 돌봐주지 않았다면 할머니의 병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됐을지 새스키아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 후로 친구에게 크나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늘 의식 속에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가장 필요한 때 사랑과 애정이 깃든 안정적인 가정을 제공해 준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열아홉살에 새스키아를 낳은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인생에서 소원한 인물이었고, 할머니의 아들인 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낯선 이방인이 되어 현재 중국에서 두 번째 부인과 새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거 알아. 새스키아" 메건이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크를 믿을 수 있는지 알아야 돼. 그는 내가 남자로서 바라는 전부야. 하지만...그는 날 만나기 전에, 여기로 이사 오기 전에 런던에 살 때 많은 여자들을 사귄 것 같아" 그녀가 잠시 말을 중단했다.
"그들 중 아무하고도 심각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날 사랑한다고 맹세하고 있지만...."
속으로도 새스키아도 상대를 믿을 수 없고서는-그것도 정절을 시험하기 위해 은밀한 방법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믿을 수 없고서는-남자와의 관계에 자신의 모든 걸 바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기야 그녀가 친구보다 세 배는 더 사랑에 신중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의 부모는 서로 사랑한다고 믿고 함께 가출까지 해서 결혼을 해 그녀를 가졌건만 2년 만에 헤어져 할머니에게 그녀를 키우는 책임을 떠맡겼으니까.
할머니! 눈물로 얼룩진 메건의 얼굴을 보니 로레인의 계획대로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 할게" 그녀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다.
메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은 위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나에게 마크의 인상 착의에 대해서나 설명해 줘, 메건. 안 그러면 그를 알아보지도 못할 테니까"
"오,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메건이 황홀한 한숨을 내쉬며 열을 내서 말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일 테니까. 매력적이고 숱 많은 짙은 머리에 네가 본 남자 중에서 가장 섹시한 입술을 가진 굉장한 미남일 거야, 오. 그리고 청색 셔츠를 입고 있을 거야. 눈 색깔에 맞춰서. 늘 그렇게 입거든. 내가 사준 거야"
"몇 시쯤 거기에 가는데?" 새스키아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메건에게 실질적인 것을 물었다. "내 차는 지금 자동차 수리소에 있는데, 할머니 집이 시외에 있어서..."
"그건 걱정 마. 내가 태워다 줄 테니까" 놀랍게도 로레인이 자청했다. 로레인은 어떤 일에도 이렇게 후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 로레인 언니가 널 이따 집까지 태워줄 거야. 그래줄 거지, 언니?" 메건이 뜻밖에도 단단히 강요했다. "그 와인바 근처에 택시 승강장도 없는데, 그렇다고 콜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을 수도 없잖아"
주문을 받으려고 웨이터가 주위를 서성거렸지만 로레인이 고개를 저으며 메건과 새스키아에게 단호히 말했다. "여기서 식사할 시간 없겠다. 새스키아는 집에 가서 준비를 해야지. 마크가 와인 바에 몇 시쯤 간다고 했지, 메건?" 그녀가 사촌에게 물었다.
"8시 반쯤일 거예요" 메건은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9시에 거기 도착하면 되겠다. 새스키아" 로레인이 그녀에게 일렀다. "내가 정확히 8시 반에 태우러 갈게"
두 시간 뒤 새스키아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할머니는 몇 주일간 배스에 있는 동생 댁으로 다니러 가시고 집에 안 계셨다. 새스키아는 다소 불안하게 정장 치마를 쓸어내리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밖에는 로레인 혼자 서 있었다. 메건이 얼씬거리다 들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새스키아는 자신을 훑어보던 로레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걸로 갈아입어야겠다" 로레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 옷은 너무 사무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워보이잖아. 마크가 너를 사귀기 쉬운 상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 그리고 립스틱도 빨간색으로 바꾸도록 해. 눈 화장도 짙게 좀 더 해야겠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이걸 읽어봐" 로레인은 잡지를 펼치더니 새스키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새스키아는 마지못해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그런 일을 하는 대행사가 고객이 의뢰한 남자들의 정절을 시험하는 여자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내용을 쭉 읽어보았다.
"난 이 잡지에 나오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옷은..." 그녀가 로레인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로레인은 아예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새스키아 앞에 강경하게 버티고 섰다. "해야 돼, 메건을 위해서. 그 애에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니? 그 애가 처한 위험을 몰라? 메건은 그 남자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단 말야. 사귄 지 몇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유산으로 물려받은 걸 다 주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갖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잖아. 대고모가 메건에게 얼마를 물려줬는지 알아?" 로레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냉혹해졌다.
새스키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대고모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단독 상속인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메건이 얼마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지만, 금액에 대해서는 전혀 물어보지 않았었다.
로레인은 그런 걸 말하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듯했다.
"거의 3백만 파운드를 물려받았단 말야" 그리고는 새스키아의 놀란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 애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알겠지? 그 애의 소중한 마크가 보기와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수도 없이 경고했지만. 어디 들으려고 해야지 말야. 다행히 메건이 그 자를 간파할 수 있도록 녀석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고 있거든. 그러니까 새스키아, 우리 메건을 위해서라도 그 자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지 증명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 녀석이 그 애를 비탄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돈까지 다 빼돌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봐. 그럼 메건은 알거지가 되는 거야"
그 정도는 새스키아도 능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적은 연금으로 생활하면 서도 손녀딸이 또래들과 차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있는 새스키아는 두 사람의 작은 살림에 금전적으로 최대한 보태왔다. 스스로 돈을 벎으로써 갖게 되는 재정적인 자립심과 안정감을 잃는다는 건 정말 싫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겨났다. 메건, 사랑스럽고 상냥하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메건, 유산을 물려받았으면서도 간호사 일을 계속하는 그녀는 정말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배우자를 찾을 자격이 있었다. 만약 마크라는 남자가 그렇지 못하다면...뭐, 그렇다면 더 늦기전에 그걸 알아내는 게 최선이겠지.
"그 정장 재킷은 벗는 게 낫겠다. 섹시한 여름 상의나...아니면 그냥..." 로레인이 재차 다그쳤다. 그러나 새스키아의 표정이 굳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여름 상의...좋아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하지만 섹시니 뭐니 하는 말은 정말 싫군요!"
새스키아가 어쩔 수 없는 말투로 동의 했다.
새스키아는 로레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모가 양면성을 지닐 수도 있음을 아주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고 로레인 같은 여자에게 설명해 봤자 무슨 소용 있으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자들이-새스키아의 경험상-그녀를 두 번 쳐다보게 만드는 데 <섹시>한 옷까지 걸치는 이중 자극은 필요 없다는 것을. 게다가 단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하고 싶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뭔가 있을 텐데...그래 맞아. 카디건, 카디건은 있겠지. 단추를 풀고 그걸 입으면 되겠다." 로레인은 물러서지 않고 몰아붙였다.
"카디건요? 네, 있어요" 새스키아가 시인했다. 봄에 사무실에서 절약 운동 차원으로 난방을 꺼버려 쌀쌀했을 때 산 것이 있었다. 하지만 단추를 풀러 입어야 하다니!
"그리고 빨간색 립스틱과 눈 화장도 좀 더 하도록 해. 네가 마크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걸 그도 알아야 하거든" 로레인이 박박 우기다 새스키아가 기분이 상해 양 눈썹을 치켜 올리자 슬며시 얼버무렸다. "메건을 위해서야"
평소보다 화장을 좀 더 진하게 해야 한다고 로레인이 우기는 바람에 결국9시가 다 되어서 야 두 사람은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새스키아는 마음이 언짢아 복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지 않았다. 립스틱 색깔이라니!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느낌이 싫어서 로레인이 힐포드를 향해 차를 모는 동안 싹싹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정장 재킷 밑에 입고서 단추를 푼 카디건은, 일단 와인 바 안으로 들어서 로레인의 시야를 벗어나면 단추를 죄다 다시 채워 버릴 작정이었다. 사실, 젖가슴 사이의 그늘이 살짝 엿보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새스키아가 평소에 허용하는 자극보다 훨씬 도가 지나쳤다.
"다 왔어" 로레인이 와인 바 밖에 차를 갖다 세우며 말했다. "11시에 데리러 올게. 시간은 충분할 거야. 잊지 마" 새스키아가 차에서 내리자 로레인이 입술 한가운데 손가락을 가져가 쉿 소리를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우린 메건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우리? 그러나 새스키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로레인은 벌써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한 남자가 보도 위에서 잠깐 멈춰서더니 그녀를 감탄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새스키아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서 와인 바의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로레인이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는데, 대부분이 새스키아를 움찔하게 만드는 것이어서 벌써부터 용기가 사라지려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 로레인이 시킨 대로 입을 삐죽 내밀고 유혹적으로 알랑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엾은 메건이 결국은 비탄에 빠지고 유산을 모두 사기당할 수 있었다.
새스키아는 심호흡을 하고 와인 바의 문을 열었다.
2장
안드레아스는 안으로 들어서는 새스키아를 보았다. 그는 그녀보다 한 발 앞서 들어온 젊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바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무실 건물의 펜트하우스 아파트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아니면 새로 인수한 호텔 근처로 가거나-받지 말았으면 싶은 긴 전화를 오늘 저녁에 벌써 두 통이나 받았던 터였다. 한 통은 할아버지였고, 다른 한 통은 아테네였다. 그래서 휴대폰을 가져오는 것도 일부러 <잊어버린 채> 두 사람 다 그에게 연락할 수 없는 곳으로 나온 거였다.
와인 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이런 곳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안드레아스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생각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에서 제공되는 훌륭한 음식을 선호했고, 또한 그리스 사람답게 보다 가족 중심적이고 여자들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곳을 좋아했다.
여자들 생각을 하자 그의 입매가 굳어졌다. 아테네는 점점 더 뻔뻔스럽게 두 사람이 맺어져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열아홉 살 때부터 아테네의 성적 공세에 노출되었는데 그녀는 당시 스물다섯으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새스키아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문 앞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바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불빛이 그녀의 매끄럽고 윤기 나는 입술을 비췄다. 안드레아스는 숨을 헉 몰아쉬고 그녀에 대한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여자는 의도가 빤히 드러나는, 눈에 확 띄는 진홍색에 가까운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이럴 때 웃어야지 이렇게, 이렇게 뭐? 그는 모질게 자문했다. 이렇게 갈망할 게 아니라.....
심한 자기 혐오감이 그를 강타했다. 그는 당연히 그녀를 알아보았다. 오늘 오후에 안내원이 이른 퇴근을 축하해 주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때는 화장도 거의 안 했었는데, 지금은.... 그는 여자의 립스틱 바른 입술과 먹칠을 한 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주 짧은 치마 정장을 입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색 얇은 스타킹을 신은 긴 다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아주 짧은 치마였다! 예전에 입던 무릎까지 오는 치마의 허릿단을 접은 것이 의식되자 새스키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일단 마크를 찾아내면 화장실로 들어가 원래대로 내릴 생각이었다. 물론 길이를 줄여야 한다고 우긴 건 로레인이었다.
"이렇게 입고는 나갈 수도 없어요" 새스키아가 소리를 질렀다.
"바보같이 굴지 마 별 것 아냐. 60년대 사진들도 못 보았어?" 로레인이 그녀를 비웃었다.
"그땐 그때고요"
더 뭐라고 하기 전에 단호히 못을 박았지만 로레인이 굴복하지 않아 결국 새스키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일단 로레인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치마를 맘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랬다. 카디건 역시 너무 불편하게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끌러진 첫 단추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안드레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상에, 저렇게 해서 가슴 쪽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저 가슴이라니! 안드레아스는 이를 갈면서도, 새스키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선을 받고 있다는 걸 느낀 새스키아는 돌아섰다가 안드레아스의 엄한 눈길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잠시였지만 새스키아는 심한 멀미를 느꼈다. 그의 원색적인 남성미 때문이었다. 가슴이 뛰고, 입이 마르고, 몸이....속수무책으로 그 자리에 못 박힌 새스키아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묘한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그는 메건의 마크니까. 그가 틀림없다. 이런 기분을 느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녀는 허둥지둥 부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남자에게, 메건의 남자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그만큼이나 메건의 묘사에 일치하는 남자는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조금 전까지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로 치부했던 메건의 도취된 묘사를 확인해 보았다. 매력적이고 굉장한 미남에, 섹시하고....오, 그리고 청색 셔츠를 입고 있을 거야, 눈동자 색깔에 맞춰서. 메건은 그렇게 말했었다. 글쎄, 둘 사이의 어두컴컴한 거리로 인해 그의 눈동자 색깔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다른 점은 모두 메건이 말한 대로라는 걸 확신하고 새스키아는 낙담했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메건의 마크인 것이다. 자기에게 충실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녀가 조바심을 내며 걱정할 만했다. 저렇게 생긴 남자는 여자들이 떼를 지어 주위를 맴돌 테니까. 이상하게도 메건은 가장 중요한 점은 언급하지 않은 듯했다. 그건 바로 그가 성적 매력이 넘치는 남자일 뿐만 아니라 오만에 가까운 깊고 강렬한 권위적인 분위기를 지녔다는 점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새스키아는 뭔가를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신중히 탐색하는 눈빛에 이어 경멸 섞인 비난의 표정으로 바뀌는 그의 얼굴을 보니, 더더욱 그랬다. 저 모습, 어떻게 감히 저런 식으로 여자를 쳐다볼 수 있지? 갑자기 그녀가 하겠다고 한 일에 대해 품었던 모든 의심이 일시에 사라졌다.
특히 메건같이 순진하고 유순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여자에게 접근하는 남자의 동기가 의심스럽다는 로레인의 말이 옳았다. 새스키아는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메건에겐 그녀의 상냥함을 높이 사고 그에 맞도록 대접해 줄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이 남자는 강하고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적인 욕망을 느끼게 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이 남자가 너무 싫어서일 뿐이야, 그녀는 얼른 자신을 납득시켰다. 메건에 대한 그의 충실성을 시험해 봐야 한다는 로레인의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새스키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결연히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한 뒤 로레인이 코앞에 들이밀었던 잡지의 기사 내용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들의 사냥물을 유혹해 스스로 폭로하게끔 몰아가는 역할을 맡은 대행 기관에서 고용한 아가씨들의 행동에 질려 겁을 먹었다. 어떤 남자도 그런 여자들이 제공하는 고의적인 유혹에 저항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달콤한 감언부터 시작해 노골적인 섹스 제안까지, 다행히 제안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남자는 여자들이,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여자들이 기꺼이 몸을 던지는 데 익숙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날 만나기 전에 아주 많은 여자와 데이트를 해보았대" 메건은 순진하게도 그렇게 말했었다.
새스키아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건은 사랑스러운 여자였고 새스키아 역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이런 남자가 한눈에 끌릴 만한 매력이 메건에게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메건을 사랑하는 건지도 몰랐다. 수줍음 많고 수수한 면 때문에. 만약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면...그래, 그건 내가 증명해 보일, 아니면 반증해 볼일 일이야. 안 그래?
전의에 불타는 눈으로 새스키아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안드레아스는 호기심과 실망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가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뿐만 아니라 거의 알아채지도 못하는 듯한 냉정한 거만함은 그녀가 입은 상의의 끌러진 단추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웠다. 틀림없어! 안드레아스는 저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지. 아테네 역시....
"오 미안해요"
안드레아스의 옆으로 다가와<우연히> 부딪치는 척하며 새스키아는 그렇게 사과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바 앞에 있는 그의 곁에 서서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체취가 느껴지도록 가까이 접근했다. 그녀에게서는 가벼운 플로럴 향의 향수대신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향수가 진동했다. 안드레아스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바보처럼 그녀의 향을 흠뻑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감각들이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도 않고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새스키아는 로레인이 가르쳐 준 최상의 접근법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기면서도 혐오감과 역겨움에 얼굴을 찡그렸다.
안드레아스는 억지로 그녀에게서 물러나 거리를 두었지만 바 옆에 사람들이 붐벼 완전히 떨어지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그녀에게 쌀쌀하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나를 아시오?"
그의 말투와 태도는 그녀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걸 확실히 전할 만큼 날카로웠다. 이렇게 생긴 여자가 왜 남자를 찾아 바 안을 어슬렁거리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시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돈을 위해서라면 아무나와 무슨 짓이라도 할 여자가 세상에는 많으니까.
새스키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립스틱이 반들거리는 입술을 벌려 그가 보기에도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어, 아뇨. 실은 모르지만...곧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새스키아는 바안이 어두워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얼굴의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실제로 이럴 수 있는 것은 고사하고, 남자에게 이렇게 접근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녀는 유혹적이고 도발적으로 보일 작정으로 입술을 벌려 혀끝으로 감미롭게 핥으며 서둘러 다음 말을 준비했다.
우엑! 립스틱 감촉이 몹시 불쾌했다.
"저한테 술 한 잔 권하지 않으실래요?" 적절히 유혹적인 자태이길 바라며 그녀는 속눈썹을 깜박거리면서 짐짓 부끄러운 듯이 물었다. "당신이 입은 셔츠 색이 마음에 드네요" 좀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그녀가 목쉰 소리고 덧붙였다. "눈동자 색깔과 같은 게..."
"그런 생각을 하다니 색맹인가 보오. 내 눈동자 색은 회색이오" 안드레아스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이 여자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그녀의 명백한 의도가 그의 경멸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어처구니없는 반응만큼은 아니었다. 너 뭐야? 열여덟 살짜리 소년? 그는 어른이어야 했다. 성숙하고, 경험 많고 세상 물정에 밝은 어른, 그런데 애처롭게도 진부하고 넌더리나는 성적수법에 그의 몸은 열렬히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마치 뭐? 당장이라도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가 뜨거운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가 그의 이름을 외치는 걸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봐요"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바람직하지 못한 공상을 차단시켰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 당신에게 큰 실수를 범하는 것 같소"
"오, 아니에요." 그가 돌아서자 새스키아는 마음을 졸이며 반박했다.
원래의 의도대로라면 지금 당장 메건에게 돌아가 사랑하는 마크가 그녀의 전부가 될 만하더라고 말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본능이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음이 당겼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어떤 남자라도 마음이 당길 수는 있지, 그녀는 당당히 자신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안의 뭔가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 하게 만들었다.
"당신 같은 남자가 실수할 리가 없죠. 그 어떤 여자에게도...." 그녀가 도발적으로 가르랑거렸다.
얼빠진 얼굴로 안드레아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놓고 유혹하는 여자를 갈망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아주 질색이었다. 어떻게 저런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끌릴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짙은 화장과 노골적인 유혹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설명할 길 없는 갑작스런 충동을 따라 그녀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싶기도 했다.
평소의 그가 경멸하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여자들이었다. 그렇다고 새침을 떨거나 처녀인 척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자존심 있고 남자에게 자기 권리를 내세울 줄 아는 여성이었다. 성적 노리개로 자신을 제공하는 것 같은 행동을 반사적으로 피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남자에게 단호히 등을 돌릴 수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이 여자는....
"미안하지만" 그는 싸늘하게 말해 자신이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했다.
"지금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소. 당신 같은 여자에게는 무엇보다 시간이 돈일 테니, 저리 가서 나보다는... 그... 당신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을 찾아보시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새스키아는 그가 발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해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가 거부했어. 거절했어. 그가... 그녀는 패배를 인정하며 아프게 침을 삼켰다. 메건에게 충실하다는 걸 입증하고... 그녀를 마치...
립스틱 바른 입술을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훔친 새스키아는 선명한 색상의 흔적을 보고 새삼 얼굴을 찌푸렸다.
"어이, 예쁜 아가씨, 내가 한 잔 살까?"
그녀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접근해온 남자가 뚱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도 무시한 채 그가 사라진 문 쪽을 주시했다. 메건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새스키아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했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당장 메건과 로레인을 찾아서 마크가 넘어가지 않았다는 말을 기쁜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 새스키아는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낙담했다. 로레인과 약속한 때까지 아직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아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끌면서 바 안에 혼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얼른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그녀는 카디건의 단추를 잠그고 남아 있는 빨간 립스틱과 먹칠을 한 눈 화장을 지운 뒤 평소처럼 회색 아이새도와 부드러운 립스틱 색깔로 화장을 고치고 긴 머리를 말아 올려 단정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시계가 나가도 좋다고 알려줄 때까지 화장실에서 기다렸다.
사람들로 붐비는 바를 지날 때 감탄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표정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다행히 로레인은 밖에서 차를 세운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새스키아가 문을 열고 올라타자 그녀가 다그쳤다.
"아무 일 없었어요" 새스키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어요."
"뭐라고?"
"언니, 조심해요..."새스키아는 로레인이 놀라서 뒤에 오는 차와 거의 부딪칠 뻔하자 소리쳐 경고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나 보네" 로레인이 두목 행세를 하며 못마땅해했다.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새스키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변명했다.
"그 친구가 메건 얘기를... 증거가 될 만한 얘기를 했어?" 로레인이 물었다.
"아뇨!" 새스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맹세코 내게 관심이 없다는 걸 분명히 밝혔어요. 나를 보고는...
그녀는 메건의 애인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는 건 고사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어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그의 눈에서 싸늘한 경멸을 보고 분노와 고통으로 몸을 떨었던 기억을 웬일인지 자세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메건은 어디 있어요?" 그녀가 로레인에게 물었다.
"갑자기 임시 교대조로 근무하러 간다고 전화로 알려왔기에 그 애 집에서 만나기로 했어"
새스키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되었으니 행복한 기분이어야 했다. 마크가 그녀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했다는 걸 알고 진심으로 기뻐할 사람은 메건뿐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녀의 마크. 메건의 마크. 새스키아는 뒷맛이 썼고 가슴 안에 납덩이가 든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왜 이러는 거지? 메건을 질투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럼!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 안 되지!
"정말 열심히 노력하긴 한 거야?" 로레인이 다시 엄하게 물었다.
"언니가 시킨 대로 다 했단 말이에요" 새스키아가 사실대로 말했다.
"그런데도 전혀 반응이 없더란 말이지?"
새스키아는 로레인이 믿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오, 반응은 있었죠. 그런 종류가 아니라서 그렇지.."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어요 언니. 메건을 정말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요"
"그래, 너보다 그 애를 더 좋아한다면 틀림없는 것 같구나" 로레인이 퉁명스럽게 인정했다. "그가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았지? 그가 알아챘을 리는 없겠지?"
"그럼요" 새스키아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제는 혼자 있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로레인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크를 믿어도 좋다고 메건을 안심시켜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이 탄 차가 메건의 집 앞에 멈춰 섰을 때 새스키아는 친구의 차가 밖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았다. 로레인의 차에서 내려 마당을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배가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메건과 마크, 두 사람의 이름까지도 아늑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나고 부부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 중에서 가정적이지도, 아늑하지도 않은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메건의 마크였다. 그에게서는 원시적이고 원색적인 남성미가, 힘 있고 성적인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그의 품에서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서 맛볼 수 없는 환희와 만족의 극치에 이를 수 있을 거라는, 아니 이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새스키아는 긴장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마크는 메건의-가장 친한 친구이자 할머니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준-남자였다. 메건은 그들이 오는 걸 보았는지 두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기다렸다.
"괜찮아. 마크는..." 새스키아가 공허하게 말했다.
"알아, 알고 있어...."메건이 밝은 얼굴로 두 사람을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이가 병원에 찾아와서 다 설명해 줬어. 오,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굴었으니... 그가 나 모르게 일을 꾸미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우리는 다음 주에 떠나. 회사에 이미 자기 계획을 다 말했대. 그래서 그런 전화를 했던 거야. 게다가 여행사 여직원의 전화까지. 오, 새스키아. 꿈만 같아. 늘 카리브해에 가보고 싶었는데 마크가 그런 멋진 휴가를 예약해 뒀다니...우리가 갈 곳은 특히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래. 저녁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 미안해. 집에 전화해 보니까 벌써 출발했지 뭐야. 아무튼 마크가 그 와인 바에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는 사촌 언니와 새스키아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왜 그래"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물었다.
"마크와 얘기를 나눴다고 했잖아?" 로레인이 새스키아를 돌아보며 쌀쌀하게 물었다.
"그랬어요..." 새스키아가 고집스럽게 메건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해 준 대로였어..."
메건이 단호히 고개를 젓자 그녀는 말을 멈췄다.
"마크는 거기 가지 않았어, 새스키아. 그는 나와 함께 병원에 있었어. 8시 반에 왔는데, 수간호사가 시간을 내줘서 함께 얘기를 나눴어. 내가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알고는 자기 계획을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대. 어쨌거나 그렇게 오랫동안을 비밀로 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알고 있었대" 메건은 재차 확인시켜 주며 로레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비용은 마크가 다 부담한데요"
새스키아는 힘없이 벽에 기댔다. 그녀가 만난 남자가 메건의 마크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그녀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모르는 남자에게 접근했다는 얘기인데...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행동과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욕지기가 나는 걸 삼켰다. 낯선 사람인 게 다행이었다. 그 남자를 다시는 볼일이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새스키아, 안색이 안 좋다." 메건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그녀가 악의 없는 거짓말을 했지만 로레인이 이미 그녀의 생각을 읽고 날카롭게 물었다. "바에서 만난 남자가 마크가 아니라면 누구였던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누구였을까?" 새스키아가 공허하게 물었다.
3장
새스키아는 출근하는 길에 시청 시계가 오전 8시를 치는 소리를 들으며 난감해했다. 오늘 아침에는 특별히 일찍 출근하려고 했는데 불행히도 늦잠을 자버렸다. 어젯밤 사건과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다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공식적으로는 9시까지 출근하면 되지만 세상이 그런 식으로 만만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특히 그 자리를 지키기가 위험할 정도로 불안한 경우에는.
"감원이 있을 거야, 잉여 인원을"
새스키아는 근무하는 부서장이 모두에게 그렇게 경고했고, 그의 말대로라면 팀에서 제일 신참인 그녀가 감원 1순위라는 걸 뚜렷이 알아챌 수 있었다. 힐포드에서 이런 조건의 일자리를 다시 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만약 그녀가 런던으로 가면 할머니만 혼자 남을 것이다. 올해 예순다섯 살인 할머니는 그렇게 늙으신 것도 아니고, 아직 멀었고, 친구 분들도 많지만 병을 앓으신 후로 새스키아는 할머니 걱정을 많이 했다. 어릴 때부터 키워주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할머니에게 새스키아는 아주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 로비로 들어서며 안내원인 엠마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도착했어요?" 누구를 뜻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엠마는 약간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실은 어제 도착하셨는걸. 지금 위층에 계셔" 그녀가 젠체하며 덧붙였다.
"모두와 면담 중이시지" 잘난 체하고 우쭐해하던 표정이 지극히 여성스런 은밀한 미소로 바뀌더니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직접 봐야 돼 얼마나 멋있는지...아니, 멋있는 정도가 아냐"
풍부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는 그녀에게 새스키아는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는 멋있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만의 특별하고 개인적인-지극히 개인적인-청사진을 갖게 되었기에 새로 온 그리스인 사장이 그에 견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빨리 사무실로 가고 싶어 하는 새스키아의 심정도 모르고 안내원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벌써 임자가 있는 몸이래. 아니, 적어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했어. 본사 안내원과 통화했는데, 그 사람 할아버지가 그를 사촌과 결혼시키려고 한대. 여자가 아주 부자에다..."
"미안하지만 엠마, 가봐야겠어요"
새스키아가 단호히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회사 정책처럼 사내 가십은 새스키아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새 사장이 벌써 사람들과 면담 중이라는데, 그가 부를 때 자리에 없어서 벌점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새스키아의 사무실은 3층에 있었는데, 트인 공간에서 다섯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의 부서장은 유리 칸막이가 쳐진 자기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곳과 나머지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하나, 잠깐 망설이는데 바깥 문이 열리더니 부서장에 이어 동료들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 새스키아. 이제 왔군" 부서장이 그녀를 맞았다.
"네,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고든 자르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설명할 것 없고, 사장실에 올라가 보도록 해. 라티메르 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보아하니 전 직원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같은 부서원들과도 면담을 가질 생각 같더군. 자네가 없어서 영 언짢아하는 것 같았어"
자근자근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녀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고든이 발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새스키아는 천천히 승강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카롭게 말하는 게 영 고든답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주 느긋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새스키아는 고용인들에 대한 안드레아스 라티메르의 태도가 침착한 부서장까지 안절부절못하게 바꿔놓은 걸 보고 점점 더 속이 불편해졌다.
사장실은 새스키아에게 낯선 구역이었다. 전에 면접할 때 한 번 들어가 보았고, 최근 들어 데메트리오스 사가 이 호텔을 인수했다고 전달받을 때 전직원과 함께 올라와 본 게 전부였다. 다소 불안정한 걸음으로 승강기에서 내린 그녀는 <사장 비서실>이라는 표찰이 걸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전 사장의 비서인 마지 필딩은 인수가 발표됨과 동시에 퇴사해 버려 마지 책상에 앉은 우아한 옷차림의 검은머리 여인을 보는 순간, 새스키아는 새로운 사장이 데메트리오스 본사에서 비서를 데려왔음을 짐작했다. 그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밝히고 고든 자르먼 밑에서 일한다고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비서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일축한 뒤 앞에 놓인 명단을 검토해 보고는 고개도 들지 않고 쌀쌀하게 말했다.
"새스키아 양? 늦었네요. 사장님이...." 그녀는 말을 멈추고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지금 면담할 시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전화기를 들어 새스키아에게 말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말투로 사장에게 보고했다. "로저스 양이 와 있습니다. 사장님. 만나보시겠어요?" 잠시 후 그녀는 새스키아에게 말했다. "들어가 봐요. 저쪽 문이에요"
말 안 듣는 아이가 꾸중 받는 기분으로 새스키아는 응수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비서가 가르쳐 준 문으로 걸어가 가볍게 노크한 뒤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밝은 햇살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찔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등을 돌린 채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아련한 윤곽뿐, 햇살에 눈이 부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드레아스는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동료들보다 늦게 출근한 사실은 그로서는 놀랍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가 저녁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아니까.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직속 상관과 동료들이 그녀를 아주 높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초과 근무할 일이 생기면 동료를 위해 무슨 일이든 새스키아가 제일 먼저 나서는 듯 보였다.
"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친구치고는 의외라고 할 수 있죠" 안드레아스가 새스키아를 칭찬하는 것을 의문시했을 때 그녀의 상관이 인정했다. "어쩌면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의 가치 기준이나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 나이든 세대의 그것과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에 대한 제 보고서에서 보셨듯이 업무 능력도 아주 뛰어나고 자격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할 수 없는<자산>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혀를 내두를 만큼 잘 알고 있는 매력적인 아가씨이기도 하지. 안드레아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고든 자르먼은 새스키아의 일에 대한 열정이며, 동료 직원들에 대한 따뜻한 헌신과 팀워크를 이뤄 어떤 과제가 주어지더라도 부지런히 일해내는 능력과 직원들 사이에서의 인기에 대해 열심히 늘어놓았다.
동료 팀장과 고든이 그녀에 대해 작성한 경과보고서와 그녀의 신상명세서 속의 사진을 훑어본 뒤 안드레아스는 어젯밤 새스키아가 어떻게 보였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직접 보지 않았다면 고든의 열렬한 보고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비록 그에게는 판단 착오를 보였지만 남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확실히 아는 여자임이 분명했다. 가령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는 단정한 옷차림에 머리는 우아하고 깔끔하게 보이도록 위로 말아올리고 가볍게 화장을 해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헌신적인 젊은 여성으로 완전히 변모해 있었다. 안드레아스의 몸이 갑자기, 아주 절박하게 그리고 이례적으로 단정한 남색 정장 밑에 조심스럽게 감춰진 그녀의 여체를 떠올리며 흥분했다. 그는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문제는 충분하잖아? 어젯밤 와인 바에서 돌아온 뒤 안드레아스는 할아버지가 벼르고 있다고 걱정스레 일러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젯밤에 친구분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셨는데, 보아하니 모두들 근래에 따낸 거래에 대해 자랑들을 하셨나 보더라. 그분들이 어떤 줄 너도 알잖니?"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다 한 분이 네 할아버지에게 자기 아들이 아테네에게서 약혼 승낙을 받아내길 바란다는 얘기를 했나 봐...."
"그 친구의 행운을 빌어줘야겠네요" 안드레아스는 어머니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럼 적어도 그녀와 할아버지 성화에서 벗어날 순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그렇겠지" 그의 어머니가 자신 없는 말투로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너희 두 사람의 결혼을 더욱 밀어붙여야겠다는 결의를 할아버지께 심어 드린 것 같더구나. 게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계시니 그걸 계획하고 들볶을 시간이 더 많으시고....네가 아직 약속한 사람이 없다는 게 딱할 뿐이야." 어머니가 다시 한숨을 쉬고는 킥킥 웃으며 덧붙였다.
"증손자를 보게 됐다는 걸 아시면 너무 감격하셔서 너와 아테네의 결혼에 대해서도 곧 잊어버리실 텐데 말이야!"
약속한 사람이라고? 그게 정말 새 합병과 함께 그의 앞에 놓인 견딜 수 없는 골칫거리라서 일생일대의 경솔한 선언을 어머니 앞에서 불쑥 한 걸까? "제가 약속한 사람이 없다고 누가 그래요?"
깜짝 놀란 어머니가 잠시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속으로 자신을 저주했다. 하지만 미처 둘러댈 말을 찾기도 전에 어머니가 흥분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사귀는 아가씨가 있단 말이니? 오, 안드레아스! 누군데? 언제 소개시켜 줄 거니? 어떤 아가씨야? 오, 얘야. 정말 잘됐구나. 네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시겠다. 올림피아, 알아맞춰 보려무나...."
안드레아스는 어머니가 여동생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는 걸 잠자코 듣고 있어야만 했다.
흥분한 두 사람에게 제동을 걸고<만약>과 <하지만>을 얘기했을 뿐이라고 경고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의 변명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늘 새벽 5시에 전화를 걸어 언제쯤 약혼녀를 만나볼 수 있냐고 물어온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혼녀....어머니와 여동생은 홧김에 지어낸 즉흥적인 얘기만 듣고서 진짜 약혼녀를 상상하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안드레아스로서는 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미지의 인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곤란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점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아가씨를 당장 섬으로 데려와라" 할아버지의 말은 곧 명령이고,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앞으로 8일 동안 거짓 약혼녀를 구해서 두 사람의 <약혼>이 편의상 지어낸 얘기에 불과하다는 걸 확실히 해둬야 했다. 단 8일뿐이지만 그의 할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속아넘어가게 할 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여자라야 하리라.
그가 창을 등진 채 휙 돌아서는 바람에 새스키아는 새로운 사장의 실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얌전한 색깔로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당신!" 숨 막힌 소리로 외치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문을 향해 뒷걸음질했다. 어젯밤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는 확실한 사실도 깨달았다. 정말 훌륭한 연기야,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 점을 인정했다. 오늘 아침 그녀의 태도는 어젯밤에 보여줬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하기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유혹했던 남자가 새로운 사장임을 알았으니 기겁할 만도 했다. 그렇다 해도 경악으로 어두워진 눈과 애를 쓰는 데도 불구하고 파르르 떨리는 보드라운 입술이라니....오, 그래. 저 여자는 일류 배우야. 일류 배우!
별안간 안드레아스는 자신이 처한 문제의 어두운 터널 끝으로 서광이 비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 그렇다. 정말이지, 확실한 서광이었다.
"그래, 로저스 양" 안드레아스는 피부와 힘줄과 뼈를 한층 한층 솜씨 좋게 절개하는 외과의처럼 신중한 솜씨로 이미 갈가리 찢어진 새스키아의 자신감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고든 자르먼이 당신에 대해 쓴 보고서를 읽어봤는데, 우선 축하하오. 당신을 높이 평가하도록 그 친구를 잘 구워삶은 것 같더군. 젊은 신입사원으로선 대단한 업적이야. 특히 시간엄수에 대해 그렇게 자유롭고, 탄력적인 태도를 가진 여자치고는 말이오. 저녁에 동료들보다 일찍 퇴근하고 아침에는 늦게 출근하는...."
"일찍 퇴근해요?" 새스키아는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며 그를 노려봤다. 어제 내가 일찍 퇴근한 걸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았지?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갈 때 나도 로비에 있었소. 공식 퇴근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나갈 때 말이오."
"하지만 그건..." 새스키아가 분연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쌀쌀맞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변명은 그만두시오. 고든 자르먼한테는 그런 게 통할지 몰라도 불행히도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아무튼 근무 시간 외에 당신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는 알게 된 셈이지. 혹시...."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경직된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훑어보았다. "혹시 퇴근 후의 당신에게 혼이 나간 그 친구가 음흉한 속셈으로 훌륭한 평가를 내린 건 아니요?"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 어젯밤 일은 실수였어요" 새스키아가 즉시 부인했다. "난..."
"물론 적어도 어젯밤 일은 그렇겠지" 안드레아스가 인정하고 은근히 덧붙였다. "당신이 받는 보수가 그리 충분치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고용인들 중 하나가 회사에 극히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부적절한 방법으로 소득을 늘린다는 걸 아시면 몹시 언짢아하실 텐데.." 엷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현혹시킬 만큼 친절하게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그...장사를 하던 곳이 우리 호텔 중 하나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어떻게 그런 말을?" 너무나 격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술이 활 모양으로 완고하게 휘어진 채 새스키아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눈에는 자존심이 반항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은 하냐고?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요. 당신이야말로 어떻게 그럴 수 있소?" 그는 날카롭게 반박하고는 조금 전까지 유쾌했던 태도를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단호한 얼굴로 바꾸고 냉혹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행동이, 정확히는 그렇게 하려 했던 시도가 불러올 비도덕적인 결과는 제쳐두고라도 자신이 처할 신체적 위험에 대해서 생각 해 본 적이 없소? 당신 같은 여자는...." 안드레아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가 허를 찔린 틈을 타 방침을 바꿔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 상관 말로는 이곳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던데, 그렇소?"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인정했다. 새로운 사장이 지금 한 말들을 부인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잉여 인원이라는 점에 대한 심정과 두려움을 이미 고든 자르먼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그런 얘기들을 기록해 뒀다가 안드레아스에게 전한 듯 했다. 이제 와서 그런 사실까지 부인한다는 건 그녀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확인시켜 주는 일밖에 되지 않으리라.
"제발...부탁입니다. 어젯밤 일에 대해서 설명드릴 기회를 주세요." 두려움 때문에 자존심도 접고 그녀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어떻게 보였을지 충분히 알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라,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말을 믿는 것은 고사하고 들을 생각도 없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로레인과 메건을 지금 당장 이 사무실로 끌고 오기 전에는 그를 탓하거나 납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자존심상 도저히 그런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메건은 마크와 함께 할 카리브해 여행 외에는 어떤 일도,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고, 로레인은....그래, 그 나이 든 여인이 새스키아가 지금 처한 상황을 안다면 얼마나 신나 할지 안 봐도 훤하다.
"현명한 판단이오" 그녀가 말을 멈추자 안드레아스가 조용히 말했다. "난 거짓말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거든. 그런 여자보다 더..." 이번엔 그가 말을 멈췄지만 새스키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를 향해 그가 불쑥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제안할 게 한 가지 있소"
새스키아는 깜짝 놀라 숨 막힌 소리를 냈다. 그는 손가락을 뾰족하게 모아 세운 채 털에 윤기가 잘잘 흐르고 영양 상태가 좋은 맹수가 고통에 떠는 작은 먹이감을 노려보듯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제안인데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무거운 대형 쇠망치로 치듯이 갈빗대에 부딪히는 심장 박동소리는 어쩌면 그녀 자신도 벌써 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놀랍도록 흥분되고 극도로 불쾌한 기분이 드는지 그 이유를 알고나 있는 것처럼.
"오, 당신에게 아주 익숙한 그런 종류의 제안은 아닐 지도 모르겠소." 안드레아스가 조용히 말했다. "매춘부 일을 하는데서 자극을 받는 젊은 전문직 여성들에 관한 기사를 나도 읽은 적이 있소."
"어제 난 그런 일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새스키아가 발끈해 말을 꺼냈지만 그가 중단시켰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소. 생각 안 나오?" 그가 모질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당신의 그런 행동을 알게 되면 즉각 해고하라고 하실 거요." 할아버지가 사업에 관한 대부분의 경영권을 그에게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표정에서 할아버지의 영향력을 그녀가 아직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분께 말씀드릴 필요는 없잖아요"
자존심을 접고 마지못해 <부탁이에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드레아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 하지만 내가 그러느냐 마느냐는 당신이 내 제안에 어떻게 나오는가에 달려 있소."
"그건 협박이에요." 새스키아가 항의했다.
"당신이 어젯밤에 한 일만큼이나 협박은 내게 아주 숙달된 일이지" 안드레아스가 나직이 내뱉었다.
새스키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그녀에게서 바라는 건 단 한 가지밖에 없는 듯했다. 아무튼 어젯밤 자신의 행동은 그에게 엉뚱한 추측을 불러일으킬, 그렇게 믿을 여지를 모두 제공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가 마크인 줄 알았을 때의 일이었기에 해명할 기회를 준다면...
겁이 덜컥 난 새스키아는 더욱 당황해 무모하게 공격적으로 나갔다. "사장님 같은 분이 섹스를 위해 여자에게 협박할 필요를 느끼다니 놀랍네요. 난 절대로...."
"섹스?" 그가 되묻더니 머리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어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웃음을 그치고 그가 다시 반문했다.
"당신과 섹스를?" 그리고는 깔보듯이 냉랭하게 덧붙였다. "무슨 소리! 내가 원하는 건 섹스가 아니오"
"섹스가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뭐죠?" 새스키아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안드레아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내 약혼녀 행세를 하기 위해 당신이 내줄 수 있는 시간과 동의요."
"뭐라고요? 미쳤군요." 새스키아가 그를 노려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미친 게 아니지" 안드레아스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강제로 정해 주신 결혼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것뿐이요. 그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 어머니가 적절히 힌트를 주신 대로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할아버지를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고, 이게 터무니없는 할아버지의 압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나더러...당신의...약혼녀 노릇을...해달라는 건가요?" 그녀는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듯 조심스럽게 시간을 두고 되물었고, 이어 그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강경하게 거부했다. "아뇨, 싫어요. 절대로!"
"싫다고?" 안드레아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렇다면 유감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감원의 일환으로 당신을 내보낼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수밖에 없겠군.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기를 바라겠소"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새스키아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가 그의 냉소적인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금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믿는 건 고사하고 그가 귀를 기울여 줄 리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를 믿는다는 건 그의 계획에 맞지 않았다.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그가 협박을 그대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새스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달아날 방법도 없이 완전히 덫에 걸린 것이다.
"자아, 아직 대답을 안 했는데,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아니면?" 안드레아스가 놀리듯이 물었다.
새스키아는 쓰디쓴 기분과 목에 걸린 패배를 삼켰다. 다듬어지지 않고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말하는 데 목이 아플 정도였지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비참한 대답을 했다. "받아들이죠"
"잘 생각했소. 형식상 사전에 우리 두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기를 지어내야 할 것 같소. 내가 인수 작업차 힐포드에 왔을 때라고 해두는 게 좋겠군. 인수에 관한 협상 때문에 우리 관계를, 서로에 대한 사랑을 비밀로 해뒀던 거요.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비밀로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솔직히 털어놓고 우리가 자유로워진 걸 자축하기 위해 오늘 당신을 데리고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갈 생각이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잠시 말을 중단했다. "다음 주 주말에 에게해로 날아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서로의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을 테니까!"
"어디로 간다고요?" 새스키아가 숨 막힌 소리로 물었다. "싫어요. 우리 할머니께...."
안드레아스는 그녀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고든 자르먼에게 들어던 터라 한 쪽 눈썹을 찡긋 올리고 나긋하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나와 약혼한 사람이오, 달링. 당연히 할머니보다는 내가 더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겠소? 할머니께서 우리 관계를 알게 되면 놀라실 테지만, 우리가 왜 서로에 대한 사랑을 숨겼는지 그분도 분명 이해하실 거요. 할머니께 설명드릴 때 기꺼이 같이 가줄 의향도 있으니까...."
"안 돼요!" 새스키아가 허둥지둥 거절했다. "아무튼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할머니는 지금 배스에 사시는 이모할머니댁에 가 계세요. 앞으로 몇 주일간은 거기 계실 거예요. 게다가 우린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흥분해서 말했다. "당신 할아버지께서 우리 사이가 어색하다는 걸, 우리가 당신을 속이려 했다는 걸 알아채실 거예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짐작하실 여지도 없을 거요" 안드레아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당신은 아주 훌륭한 배우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할아버지께 납득시킬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테고, 그러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의 눈빛이 어두워지자 새스키아는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당황해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주 잘했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처녀인 척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닌지도 모르겠소. 우리 할아버지는 바보가 아니시거든. 내 나이의 남자가 그와 동등한 성적 자각이 없는 여자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으실 거요. 난 어쨌거나 반은 그리스 사람이고, 그리스 남자의 성격과 정신에서 열정은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으니까"
새스키아는 돌아서 달아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그의 표현과 달리 그녀에게<성적 자각>이 없으며, 사실 성과 열정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몇 번의 가벼운 키스와 서툰 포옹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안드레아스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경솔한 부모 덕분에 그녀는 자유분방한 성적 실험이 행해졌던 십대 때 신중할 수 있었다. 부모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을 그녀 자신도 되풀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안드레아스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10시가 다 돼가는군" 시계를 들여다보며 안드레아스가 기운차게 말했다. "이제 당신 자리로 돌아가시오. 1시에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함께 점심 식사를 합시다. 이제 우리 관계를 가능한 빨리 공개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그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가 손을 뻗어 여린 팔목을 꽉 움켜잡는 순간,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깜짝 놀라서 숨 막힌 소리를 질렀다. 그의 살결은 거뭇하게 햇빛에 그을리긴 했지만 자동적으로 그리스 혈통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동자는 회색으로 어젯밤에 그녀가 낯 뜨겁게 시사했던 파란색이 아닌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국적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인 반면, 머리는 아주 짙은 색으로 올을 굵고 곧았다. 그래도 높은 광대뼈와 깎아놓은 듯한 고전적인 턱과 메부리코에서는 고대의 혈통이 엿보였다. 오만하고 당당한 고대 그리스 귀족을 연상케 하듯이 그 역시 주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그리고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권위를 휘두르는 경향이 다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사장님" 자신의 상사가 새스키아를 가까이 끌어당겨 안은 것을 보고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할아버님께서 계속 전화를 주셔서요. 두 번씩이나!"
"곧 전화를 드리겠소" 안드레아스가 상냥하게 대답하고는 역시 나긋하게 덧붙였다.
"오, 그리고 오늘 1시부터 2시 반까지 약속이나 다른 스케줄은 잡지 말도록 해요. 내 약혼녀를 데리고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갈 거니까"
그는 새스키아 쪽으로 돌아서 아주 잠시, 거의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녀에 대한 욕망을 통제할 길 없는 성급한 연인처럼 녹아내릴 듯 관능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젯밤에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면...그만해. 그녀는 예기치 않은 생각에 놀라서 즉시 자신을 꾸짖었다. 그의 행동이 새스키아를 놀라게 했다면 그의 비서는 그보다 더했다. 그녀가 숨 막히는 듯 나직하게 꼴깍거리는 소리를 냈다가 안드레아스가 왜 그러냐고 묻자 고개를 젓는 걸로 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냥...그게...아뇨...아닙니다."
"다행이군. 오, 그리고 한 가지 더 해주시오. 다음 주 아테네행 비행기에 좌석 하나를 더 예약해 둬요. 내 옆자리로. 새스키아를 위해서..." 비서에게서 돌아선 그가 새스키아를 향해 목쉰 소리로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당신을 우리 가족에게 소개시키고 싶소. 특히 할아버지에게. 하지만 우선은..."
새스키아가 그의 의도를 짐작하기도 전에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따뜻한 숨결이 살갗에 스치는 게 느껴지자 그녀의 호흡이 얕아졌다. 의기양양하고 흥분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면서 어지럽고 숨가쁜 게 자신을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다른 인생에-그녀 자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인생에, 지금까지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위험하고 이상하고 놀라운 인생에-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귀에 안드레아스가 목쉰 소리로 말하는 게 아련히 들려왔다. "우선은, 달링. 이 허전한 손을 장식해 줄 예쁜 반지를 하나 찾아봐야겠소. 내 뜻을 아주 분명히 전달해 줄 반지조차 없이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면 할아버지가 승낙하지 않으실 테니까"
비서가 놀란 숨을 급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엔 그녀만큼 놀라지 않았을 터였다. 안드레아스는 그녀더러 훌륭한 배우라고 했는데, 그 부분에서 그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한 말들은 물론이고, 지금만 해도 그녀를 바라보는 표정은 전문 배우 뺨칠 정도였다.
그의 비서가 허둥지둥 문을 닫고 나간 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점심때쯤이면 이 소식이 사내에 쫙 퍼질 거라는 걸 알고 계시죠?"
"사내에?" 그가 들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 소식이 그보다 훨씬 멀리 퍼져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실망스러울 거요."
그녀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점심때쯤엔 적어도 아테네까지 전해지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소"
"당신 할아버지에게요?" 새스키아가 추측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안드레아스가 냉정하게 입을 다물었다.
뜻밖에 그녀는 갑자기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졌다. 그의 할아버지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 대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섬에 대해, 그의 할아버지가 결혼을 종용하는 여인에 대해. 그리스 사람들은 집안의 이익을 지키는 데 아주 관심이 많다고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엠마의 말에 따르면 그의 사촌이 안드레아스처럼 큰 부자라고 했지. 어쨌든 그녀는 안드레아스가 어느 틈엔가 손을 놓아줘 그가 열어준 문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준비 됐소, 새스키아?"
그녀는 안드레아스가 자신의 책상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당황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동료들이 내놓고 쳐다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는 있었지만 두 사람이 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걸 너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고든 새스키아의 점심 시간이 좀 길어질 것 같소." 자기 방에서 나오는 어리벙벙한 표정의 그녀의 상관에게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우리 소식을 얘기해 줬소, 달링?" 안드레아스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아뇨..." 새스키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새스키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솔직히 털어놓으면 더욱더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새스키아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아주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을 속인다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달리 어쩐단 말인가?
"새스키아를 나무라지 말아요"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옹호해 주었다.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으니까. 인수 결과가 공개될 때까지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한다고 내가 우겼소. 새스키아의 애사심을 의심받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이 말을 꼭 해야겠는데, 고든, 그녀는 우리 사이에 인수에 대한 어떤 얘기도 하지 말자고 주장했소. 알아둬요. 새스키아,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업무 얘기는 전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걸" 안드레아스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고백하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녀의 여성 동료들은 부러움이 깃든 숨소리를 조심스럽게 토해냈다.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안 들리는 곳으로 나와 둘만 있게 되자 그녀가 화를 내며 따졌다.
"어떤 식 말이오?" 안드레아스가 시치미를 떼며 응수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알잖아요. 다른 데서 만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새스키아가 반박했다.
"비밀리에?" 그가 이제는 더 이상 호색적이지 않은 지루한 표정으로 양미간을 모으고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보다 훨씬 더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자니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와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서 걷는 것도 불편했다. 왠지 그녀에게는 익숙치 않은 여자로서의 자신이 의식되자 더욱더 긴장되고 어색했다.
"이런 연습을 하는 목적이 우리 관계를 공개된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소? 그래서...." 그가 징그럽게 웃으며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그 와인 바에 점심 예약을 해뒀소. 어젯밤에 거기서 식사를 했는데 음식이 아주 훌륭하더군.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그리 입에 맞지 않았지만...."
새스키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어젯밤 일은 실수였어요. 전..."
"나도 전적으로 당신 말에 동의하오"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건 실수였소, 당신의 실수...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나도 한 가지 경고해 두겠소. 새스키아, 나와 약혼한 동안에는 어제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거나 다른 남자를 쳐다보는 날엔..." 그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보고 말을 멈췄다. "난 반은 그리스 사람이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내 여자에 관해서는 영국인보다 그리스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소."
"난 당신 여자가 아니에요" 새스키아는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그가 냉소적으로 시인했다. "당신을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남자의 여자지, 실제로는 안 그렇소? 하지만..." 그는 그녀가 감정을 자제할 수 없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벌개지며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자 다시 말을 멈췄다.
"당신은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자격이 없어요." 새스키아가 거칠게 소리쳤다.
"자격이 없다고? 하지만 당신의 약혼자로서 내게는 분명 모든 권리가 있소" 안드레아스가 그렇게 비웃고는 그녀가 미처 저지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래 속눈썹을 따라 방금 떨어진 분노와 굴욕의 눈물을 모았다. "눈물? 세상에,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배우요." 그가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와인 바에 도착했고 새스키아는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이끌자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자리로 안내되어 앉고 나서 그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삐쳤소?" 그가 간결하게 물었다. "억지로 먹으라고는 않겠소. 난 훌륭한 식사를 즐기는 기쁨을 마다할 생각이 없으니까. 함께 상의해야 할 일들이 있소." 그녀가 무시한 메뉴를 집어 들고 읽으며 그가 냉정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신상명세서를 보고 당신에 대한 대부분의 개인 정보는 알고 있지만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가족에게, 특히 할아버지에게 납득시키자면 내가 그 외 알아야 할 것들이 많소. 당신도 나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을 테고"
연인! 새스키아는 진저리가 쳐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의 협박에 응하려면 그의 규칙에 따라 게임을 풀어가는 법을 익혀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에 의해 완전히 분쇄될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연인이라고요? 그리스 사람들은 결혼 전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그녀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딸에 대해서는 그렇지." 그가 덤덤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 사람이 아니고 나도 반은 영국인이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관대하게 나오시리라 믿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 사촌과 약혼해도 관대하지 않으실까요?" 새스키아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그의 사촌 생각에 왜 이다지도 괴롭고 적대적인 감정이 생겨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사촌 아테네는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미망인이라서 자연히 할아버지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냉담하게 계속했다. "게다가 아테네 자신도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면으로든 자기 인생에 개입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주 대단한 여자거든"
"미망인이라고요?" 무슨 이유에선지 새스키아는 그의 사촌이 젊은 아가씨인 줄 알았다.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일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미망인이오. 아이가 둘 딸린" 안드레아스가 확인했다.
"둘이나요!"
"스물다섯 살 때 결혼했지" 안드레아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10년 전 일이오"
셈을 해보는 동안 새스키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테네가 안드레아스보다 나이가 많은 게 확실했다. 외롭고, 어쩌면 원치 않는 재혼을 강요당하는 힘없는 여인일 거야. 새스키아는 측은한 마음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테네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소. 당신이 그녀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살거든. 아테테, 뉴욕, 파리에 집을 갖고 있어 세 곳을 돌아다니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데다 물려받은 해운 회사도 경영해야 하니까"
해운 회사와 호텔 체인. 안드레아스의 할아버지가 두 사람의 결혼을 그렇게 밀어붙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안드레아스가 그 결혼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놀라웠다. 특히 이번 인수를 성사시키는데 고전했으면서도.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당신과 달리, 난 내 자신을 팔고 싶지 않거든."
"난 내 자신을 팔고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새스키아는 발끈해서 부인하다가 웨이터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두 접시의 음식을 들고 다가오는 걸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난 음식을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웨이터가 하나는 그녀 앞에, 나머지 하나는 안드레아스 앞에 내려놓는 걸 보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대신 주문했소. 난 내 여자가 굶주린 토끼처럼 바싹 말라 보이는 건 싫거든. 그리스 남자에게 자기 아내를 때리는 건 허용될지 몰라도 아내를 굶기는 짓 따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으니까"
"아내를 때려요?" 새스키아는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고 상대의 수에 넘어가기 시작한 자신을 발견하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난 새스키아. 당신이 보통 남자는 말할 것도 없이 성자를 유혹해 당신을 정복하게 만든 다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던 걸 후회하게 만들 여자라는 생각이 드오."
새스키아는 그가 하는 말의 생생한 관능성이 강력한 전류처럼 전해지자 온몸을 떨었다. 그의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렇게 예민하게 그를 의식하게 만들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새스키아는 무엇보다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녀가 처녀처럼 경험 없는 순진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성적인 것에 대한 아주 단순한 언급에도 그녀가 전율하며 반응을 보이고 그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게 연극이라는 걸 알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안 그랬으면 뭐? 안 그랬으면 그가 말할 때 그녀가 보인 것처럼 손을 댔을 때도 그렇게 기분좋게 전율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기분을 떨치기 위해 안드레아스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투로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께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납득시키자면 우리 가족에 대해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게 몇 가지 있소."
그는 자신의 직계 가족에 대해 그녀에게 알려주고,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얘기해 줬다. "그렇다고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는 분이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은 일을 못 하게 돼서 내 생활에 더욱 지독하게 간섭하기로 작정하셨으니까. 내가 증손자를 안겨드리기 전에 죽게 될까 봐 겁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오. 그게 협박이 아니고 뭔지" 안드레아스는 노골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집안의 악습인가 보네요" 새스키아는 상냥하게 비아냥거리고서는 돌아온 시선에 기죽지 않았다.
"결국에 가서 우리 약혼은 물론 깨져야 하오." 안드레아스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 "섬에서 머무는 동안 어떤 성격적인 면이 드러나 서로에게 매력을 잃게 돼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혼하는 거요. 어쨌든 난 얼마간의 시간을 벌게 될 테고....아테네는 우리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되지 못해 안달이 난 수많은 구혼자들 중 한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될 거요."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새스키아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녀나 내가 우리 누나나 여동생이 증손자를 안겨 드릴 수도 있다고 할아버지를 설득시킬 대안책을 찾아낼 때까지 우리의 약혼을 끝내지 않고 지연시키는 수밖에"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 거예요?" 새스키아는 놀라서 물었다.
"글쎄,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곁에 없으면 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여길 만한 여자를 못 만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소. 사랑은 남자에겐 사치요. 서른이 다 돼가는 남자에게 그건 헛된 짓이오."
"우리 아버지는 열아홉 살 때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어요" 새스키아는 그 말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죠. 그게 실수였어요. 두 사람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었어요.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생명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을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어린애에요."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당신을 버린 거요?" 안드레아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두 사람 다 그랬죠. 우리 할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전 아마 고아원에 보내졌을 거예요."
새스키아가 침울하게 말했다.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서 남자를 찾아 술집을 기웃거리는 걸까?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했다고 느낀 남자의 사랑을 찾고 있는 걸까?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마음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왜 그녀를 옹호하려 드는 거지? 설마 좀 전에 그녀가 보인 눈물에 속아 넘어간 건 아닐 테지?
"이제 가봅시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4장
누군가 2주일 전에 낯익은 것을 뒤에 남겨두고 약혼한 사이로 돼 있는 미지의 남자와 미지의 그리스 섬으로 여행하게 될 거라고 말해 줬다면 새스키아는 거부감과 즐거움에 고개를 저었으리라. 그것이 방금 입증되었다! 거기에 남자의 오만과 믿음과 결의가 결합되면 어떻게 되는지 방금 입증되었다. 특히 특정한 한 남자가 그녀에 대해 가하고 있는 지배까지 합쳐질 때는. 새스키아는 막연히 초조해졌다. 이제 15분만 지나면, 그의 할아버지가 아내를 위해 구입해 사랑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아프로디테 섬으로 출발하기 위해 안드레아스가 메르세데스를 타고 그녀를 태우러 올 것이다.
"두 분은 연애결혼을 하셨지만, 양가의 허락을 받고 성사된 거요." 안드레아스가 자기 배경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줄 때 그렇게 말했었다.
연애결혼....두 사람의 가짜 약혼과 달리.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종의 사기 행각에 가담한다는 것이 새스키아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할머니에게 전화해 출장을 떠난다고 거짓말을 할 때 느꼈던 편치 않은 마음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할머니에게 두 사람의 약혼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스키아는 거절했다.
"당신은 가족에게 우리의 가상 관계에 대해 거짓말하는 게 즐거울지 몰라도" 그녀가 분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난 우리 할머니에게 그런 거짓말은 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녀가 사랑도 없이 한 남자에게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바쳤다는 걸 할머니가 믿지 않으실 거라고 고백해 안드레아스에게 본심을 드러내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 새스키아는 더 이상 말은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약혼 소식이 몰고 온 파장이 사내에서 일단 가라앉자 그녀의 동료들은 조심하면서 거리를 두고 그녀를 대했다. 그녀는 이제 사장의 약혼녀로, 더 이상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새스키아는 점점 더해가는 고립감과 두려움 속에서 한 주일을 보냈지만 지존심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생긴 컴플렉스가 아닌가 싶은데, 그녀가 할머니에게 떠넘겨진 과정과 함께 그녀의 부모 얘기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 새스키아는 정상적인 부모를 둔 친구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할머니처럼 그녀를 사랑해 준 사람은 없었다. 새스키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할머니만큼. 그녀의 가정환경은 실제로 또래 친구들 못지않게 애정이 넘치고 안정적이었다.
새스키아는 몰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5분도 안 남았다. 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꾸려놓은 가방이 복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어떤 옷을 입을까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3년 전 메건과 함께 포르투갈에 갔을 때 샀던 여름 나들이옷으로 결정을 보았고, 사무실에서 입는 가벼운 옷 몇 벌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이후로 그녀는 안드레아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번 인수에 앞서 위기에 처해 있던 이 호텔 체인의 문제점들을 과감하게 처리해 나가며 빡빡한 일정의 회의에 참석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했다.
"우리 호텔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다닌대" 새스키아는 소식통으로부터 감동스런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경영 방식 하나하나를 꼼꼼히 점검하고 있대. 또 무슨 일을 했는지 맞춰 볼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새스키아는 수지가 안 맞는 대량의 지출을 중지시키기 위해 안드레아스가 대량 감원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아닐까 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숨을 죽였지만,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그가 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하기만 하면 감원은 없을 거라고 말했대. 가는 곳마다 직원들에게 격려 연설을 해 사기를 진작시키고 자기 그룹이 이뤄낸 이번 인수에 얼마나 가치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면서, 만약 이 호텔 체인을 이윤이 남는 자산으로 만들지 못하면 이사회에 책임질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는 거야."
가십에 의하면 안드레아스는 사람 다루는 법을 알아서 새로운 고용인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뿐 아니라 그를 극구 칭송하는 분위기 같았다.
글쎄, 내가 보았던 그의 일면을 다들 보지 못했나 보네. 새스키아는 모두가 그에게 도취되어 열심히 칭찬하고 있는 것을 약간 씁쓸한 기분으로 들으며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10시 반인데 그가 아직....새스키아는 커다란 메르세데스가 할머니 집 앞에 와 서는 걸 보고 긴장했다. 정각에 왔군! 하기야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안드레아스가 소중한 자기 시간을 일초라도 낭비할 리가 없지, 특히 그녀에게는!
그가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문을 열고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열쇠를 들고 서 있었다.
"그건 뭐요?"
새스키아는 자신의 값싼 가방을 향해 그가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고는 자존심이 상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가방이에요"
"이리 줘요" 그가 짤막하게 지시했다.
"혼자 들고 갈 수 있어요" 새스키아가 이를 갈면서 대답했다.
"물론 그러실 테지" 안드레아스가 똑같이 냉혹하게 응수했다. "하지만..."
"하지만 뭐요?" 새스키아가 발끈해서 따졌다. "하지만 그리스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걸 용납하지 못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안드레아스의 입술이 팽팽하게 조이는 걸로 봐서 그녀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고약한 이유에선지 그녀는 대들고 싶었다. 비록 그의 눈에 널름거리는 위험한 신호에 한편으로는 움찔하기는 했지만.
"이 경우엔 나의 그리스인 어머니보다 영국인 아버지를 탓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아버지가 권한 영국의 사립학교에서는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구식으로 여겨지는 예법을 가르쳤으니까" 그가 싸늘하게 말하며 냉담한 미소를 엷게 지었다. "한 가지만 경고해 두겠소.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점에 있어선 구식이오. 차별을 배제하는 당신의 신세대적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실 테니까 섬에 있는 동안은...."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새스키아가 그를 대신해 신랄하게 말을 맺었다.
만약 앞으로 있을 몇 주일이 이런 식이라면 그 살람들을 어떻게 견뎌낼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서로에 대한 명백한 적의가 적어도 한 가지 이점은 있었다. 둘이 함께 있는 걸 본 어느 누구도 그들이 약혼을 파하기로 했을 때 놀라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탈 비행기가 내일 아침 9시에 히드로 공항에서 출발하니까 아파트에서 일찍 나서야 할 거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안드레아스가 알려 주었다.
"아파트요?" 새스키아가 즉시 경계하며 물었다.
"그렇소. 런던에 내 아파트가 있소. 오늘밤 거기서 지낼 거요. 오늘 오후엔 쇼핑을 할 거고" 그가 설명했다.
"쇼핑을 한다고요?" 새스키아가 끼어들려고 했지만 안드레아스가 제압했다.
"그렇소, 쇼핑. 당신 약혼반지도 사야 하고. 또...." 그가 그녀를 경멸 섞인 표정으로 평가하듯이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당장 차를 세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오, 그에게 마음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협박에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좀 더 적당한 옷이 필요하오."
"외출복을 말하는 거라면" 새스키아가 말을 꺼냈다. "가방 안에 들어 있으니까..."
"아니오. 외출복을 말하는 게 아니오" 안드레아스가 냉혹하게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난 개인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이오, 새스키아.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알 거요. 인수 전에 당신 부서에서 조사했을 테니, 내 자산 가치가 거의 백만 파운드에 가깝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거요. 할아버지는 그보다 몇 배 더한 대부호이시지.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은 세계 일류 디자이너 옷들만 입고 다닌다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패션의 희생자나 쇼핑 중 독자들로 취급당하지 않소. 그러니 자연히 내 약혼녀로서...."
그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새스키아는 성난 숨을 깊숙이 들이쉬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내 옷을 사주게 놔둘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주 잠시 멈칫했을 뿐 안드레아스는 이내 그녀에게서 통제권을 인수해 느긋하게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어쨌든 당신은 내게 몸을 팔 준비가 돼 있었잖소. 나 아니면,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아무 남자에게나...."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새스키아는 놀란 숨을 급히 몰아쉬며 부인했다.
"그렇다면 무척 다행이군" 안드레아스가 빈정거렸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위해 특수 효과는 준비 안 해도 될 거요. 난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그리고 내가 사주느 옷들은 이번 일을 해준 데 대한 팁으로 생각해요" 그가 냉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신이 사고 싶어하는 것이 뭐든지 내가 심사 할 거라는 얘기도 해둬야겠군. 당신이 내 약혼녀로서 우리 가족에게 보여줬으면 하는 인상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새스키아가 격분해 언성을 높였다. "내 맘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내가 혹시?" 새스키아는 머릿속에서 낙인찍힌 듯한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중단했다.
뜻밖에도 그 역시 그녀의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을 하는 대신 침착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당신은 비싼 옷을 사는 데 익숙지 않을 테지만, 바보같이 쓸데없는 절약 정신을 발휘해 이번 일의 주목적을 무효로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엄청난 부자의 약혼녀보다 박봉의 아가씨에게 더 적합한 옷을 사는 일은 없도록 하란 얘기요"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봐 그가 무뚝뚝하게 설명했다.
처음으로 새스키아는 할 말은 잃었지만 속으로는 분노와 수치심이 들끓었다. 자기 계획대로 밀고 나가려는 안드레아스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쓴 돈을 모두 기억해뒀다가 나주에 갚을 생각이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 애써 모아온 얼마 안 되는 비상금이 다 날아가 버릴 테지만.
"더 이상 반대 사항 없소?" 안드레아스가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새스카아,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내 뜻대로 하는 사람이오. 내 맘대로 당신에게 옷을 입히고 벗겨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매사에 실수 없이 잘하시요. 아프로디테에 도착했을 때부터는 당신은 내 약혼녀로 행세해야 하는 거요."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차는 무서울 만큼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새스키아는 이런 속도로 달리는 동안 그와 언쟁을 벌인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새스키아는 그로부터 30분 뒤에야 그녀가 뭘 입어야 하는지 결정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단언한 안드레아스의 제의에 항의하느라 바빠서 정작 오늘밤을 그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더욱 중요하면서도 난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뭘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안드레아스로부터의 성적 유혹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의 성 윤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창피할 정도로 명백히 밝혔으니까.
그와 아파트에 단둘이 있다는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고 걱정이 된다는 얘기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섬에서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그곳에는 그의 가족도 있고, 할아버지가 샀다는 큰 별장을 관리하는 집안 일꾼들도 함께 지낼 테니까.
그래, 그를 못 믿겠다는 촌스러운 감정을 드러내 조롱 섞인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이를 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할 거야.
임대한 리무진 트렁크에 기사가 가방을 싣는 동안 아테네는 비싼 구두를 신은 날씬한 한 쪽 발로 땅을 톡톡 치며 조급함을 드러냈다.
안드레아스가 약혼을 했고 그 약혼녀를 데리고 아프로디테섬으로 가 가족에게 정식으로 인사시킬 거라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녀는 얼른 행동 개시에 나섰다. 다행히 약혼은 결혼이 아니니까 기필코 이 약혼이 결혼까지 이르지 못하게 할 참이었다. 물론 안드레아스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도 결국은 뼛속 깊은 그리스 사람이라는-자신의 영국 형통을 인정해 주기를 고집하기는 하지만-그리스 남자답게, 참으로 남자답게 그도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타고난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의 주장은, 할아버지와 그녀에게 소중한 두 사람의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그 주도권을 과시해 보려는 자기 식의 투정에 불과했다.
리무진이 연석을 내려가 출발하자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기사에게 템스 강이 내다보이는 유명한 아파트 건물의 주소를 알려줬다. 그녀는 런던에 집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 뉴욕의 사교 생활과 파리의 가게들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스는 불감증일 게 틀림없는 영국인 약혼녀와의 약혼 발표로 그녀의 허를 찌를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곧 그 약혼을 깨고 그의 진짜 관심이 어디 있는지 알게 만들리라. 그가 어떻게 감히 그녀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가 바랄 수 있는 전부를 가졌고, 그 역시 그녀가 바라는 모든 걸 갖고 있었다. 이번 인수에서 그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부르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다. 솔직히 말해 호텔 소유 그 자체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가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걸로 보아 그의 코앞에 들이밀고 흔들어댈 멋진 미끼는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녀로서는 안드레아스의 그런 태도가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긴 그에게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아주 많았다. 바로 그런 점이 그를 몹시 탐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아테네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몹시 열망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안드레아스를 원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열아홉 살이었고,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핥으며 음탕한 미소를 지었다. 열아홉 살의 안드레아스는 아직 소년이긴 했지만 성인 남자만큼 큰 키에 잘빠진 젊은 육체를 지녔고, 형언할 수 없이 잘생긴 외모가 그를 쳐다볼 때마다 욕망으로 그녀를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그를 유혹해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안드레아스는 용케도 그녀를 거부했다. 그를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지 한 달 만에 그녀는 결혼했다.
스물다섯 살의 그녀는 그리스 사람들의 기준으로 봐서는 결코 어린 신부가 아니었다. 아테네는 장래 남편감을 한동안 조심스럽게 추적했다. 그녀보다 열 살이나 많고 엄청나게 부자인 그는 거의 1년 넘게 그녀를 골리다가 결국은 항복하고 말았다. 어린 소년이었던 안드레아스에 대한 열정 때문에 공들인 결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뜻밖의 운명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남편이 죽는 바람에 그녀는 미망인이 된 것이다. 돈 많은 미망인, 부유하지만 성에 굶주린 미망인....그 동안 안드레아스는 어른이 돼 있었다. 그것도 멋진 남자가! 두 사람을 갈라놓는 유일한 장애물이 있다면 그건 안드레아스의 자존심이었다. 아테네는 그렇게 믿었다. 그것 말고 그녀의 유혹을 거부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리무진이 그녀가 가르쳐 준 주소의 건물 앞에 서자, 아테네는 아담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작년에 미국 성형 외과의에게 왕자의 몸값에 버금가는 돈을 주고 대대적인 성형 수술을 했다. 이제 이십대 후반이라고 해도 곧이 봐줄 터였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는 세계 최고의 헤어 디자이너가 다듬었고 피부엔 비싼 크림을 아낌없이 발라 윤기가 흘렀으며, 완벽한 눈 화장은 그녀의 짙은 눈을 강조했고 발톱과 손톱은 진한 빨강색으로 광택이 났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안드레아스의 따분하고 별 볼 일 없는 약혼녀 따위는 -그 호텔 체인을 사기 위한 협상 중에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여직원 따위는-그녀와 비교될 리 없었다. 아테네의 눈빛은 단호했다. 어떤 여자든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넘보려고 한 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이제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실수였는지!
아테네가 리무진에서 내릴 때 그녀를 위한 파리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된, 관능적이고 진한 사향 향기가 따라나왔다. 딸은 그걸 너무 싫어해 바꾸라고 계속 성화를 부렸지만 아테네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건 그녀의 특징이었다.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그녀만의 향수. 안드레아스의 영국인 약혼녀는 틀림없이 흐릿하고 김빠진 라벤더 향수 같은 것을 뿌리고 있을걸!
"차를 여기에 세워두겠소"
메르세데스를 시내 중심가의 다층식 주차장으로 몰고 들어가며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방벽 옆에 적힌 주차비를 보고 새스키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로서는 차 한 대를 주차하는 데 이렇게 많은 돈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 말처럼 부자들은 역시 달랐다. 얼마나 다른지는 오후 내내 안드레아스에게 이끌려 그녀로서는 있는지도 몰랐던 여러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더욱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그의 존재가 점원들에게서 존경어린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서 새스키아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의 심사를 받기 위해 일련의 의류들을 선보일 때마다 점원들의 입에서 그의 안목에 대한 놀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아닌, 그의 심사를 받기 위해 가게를 옮겨 다닐 때마다 새스키아의 무력한 좌절감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난 인형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니에요" 점원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잘 어울린다고 추천한 크림색 바지 정장을 입어보지도 않고 나온 어느 가게 앞에서 결국 그녀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인형도 어린애도 아니라고? 글쎄, 아주 기막힐 정도로 유치하게 행동하던데." 안드레아스가 냉혹하게 응수했다. "그 정장은...."
"그 정장은 백 파운드가 넘었어요" 새스키아가 이를 갈며 그의 말을 잘랐다. "나로서는 옷 한 벌에 그만한 돈을 지불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게 설령 내가 입을 웨딩드레스라 해도 말이에요!" 안드레아스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따졌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새스키아, 천 파운드 밑으로 나가는 웨딩드레스가 어떨지 생각해 본 적이나 있소?" 그가 강경하게 말했다.
"아뇨, 없어요. 하지만 작은 나라를 먹여 살릴 정도의 비싼 옷을 입고는 절대로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 게다가 고급스런 웨딩드레스가 행복한 결혼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죠" 새스키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오,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야겠군. 모두가 당신처럼 싸구려 옷을 걸치고 다니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지 생각해 보았소?" 안드레아스가 격분해서 말했다.
"그건 말이 안돼요" 새스키아가 반박했다.
그녀 역시 좋은 옷을 탐내고 최상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별수 없는 여자였고, 그 바지 정장을 입으면 틀림없이 멋져 보이리라는 걸 그녀도 속으로는 인정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위해 쓰는 돈을 나중에 모두 갚아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일에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네요." 그녀가 안드레아스에게 반항적으로 말했다. "난 옷 같은 건 필요없어요. 내가 이미 말했잖아요. 그리고 내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돈을 뿌리고 다닐 필요도 없다구요."
"당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라도 그렇게 할 거요." 그녀로 인해 화가 났다는 걸 알려주려는 듯이 얼굴이 검붉어지며 안드레아스가 신랄하게 말했다. "난 사업가요, 새스키아. 아무 이유 없이 돈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요. 특히 그 정장의 절반 값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여자에게는 더더욱. 오, 그러면 안 되지." 그녀가 저도 모르게 들어 올린 손을 붙잡으며 그가 주의를 주었다.
그가 손목을 너무 세게 잡는 바람에 손가락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보일 정도였지만 새스키아는 자존심 때문에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고통과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녀가 갑자기 비틀거리기 시작하자, 그제야 안드레아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챘다. 그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으며 팔목을 놓아주자 그녀의 손에 다시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아프다는 얘기를 왜 안 했소? 뼈가 아주 여리군" 그가 으르렁거렸다.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저린 팔위로 고개를 숙인 채 능숙하게 마사지를 해 피가 통하도록 만들어주는 동안에도 새스키아는 그의 동정을 구하는 나약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날 아프게 만드는 걸 확실히 즐기는 것 같더군요." 그녀가 모질게 말했다. 새스키아는 그가 손을 완전히 놓아주며 욕하는 소리를 듣고 긴장했고, 엄한 말투와 단호한 눈빛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듣고 다시 긴장했다.
"이쯤 해두시오. 당신은 어린애처럼 굴고 있소. 처음엔 매춘부였다가 이젠 어린애라니! 지금부터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연기는 딱 한 가지뿐이고, 그건 우리가 이미 합의한 역할이오. 경고해 두겠소.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우리 가족 앞에서 보이는 날에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요. 내 말 알아들었소?"
"네, 알아들었으니 그만해요" 새스키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오" 안드레아스가 경고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당신이 일하지 못하게 될 곳은 데메트리오스 체인만이 아닐 거요. 날 모욕하면 다시는 어디에서도 일을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거요. 신뢰할 수 없고 절도 의심까지 받아 해고된 회계사는 아무고 고용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새스키아는 하얗게 질린 채 작은 소리로 외쳤지만 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새스키아는 그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가 끌고 들어간 다음 가게에서 점원 아가씨의 눈이 숨막히는 성적 관심으로 커지는 걸 보고 다른 여자는 그를 반긴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혹시 숨은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후 늦게야 안드레아스는 새스키아가 자신의 약혼녀로서 적당한 옷들을 모두 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에서 그가 고객 상대 구매 상담원에게 도움을 청하자, 상담원은 아주 능숙한 태도로 새스키아가 잡지에서나 보았던 옷들을 내놓았다. 그녀는 상담원이 보여주는 옷을 모두 거절하려고 했지만 매번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제압했다. 두 사람이 유일하게 일치를 본 게 있다면 상담원이 새스키아의 살색과 목적에 딱 맞는다면서 가져온 비키니 수영복이었다. 신체 주요 부위를 가려주게 되어 있는 아주 작은 세 개의 천 조각을 보고 새스키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심스럽게 가격표를 훔쳐보았을 때는 그 눈이 더욱 커졌다.
"이걸 입고는 수영할 엄두를 못 내겠네요" 그녀가 무심결에 그런 말을 던졌다.
"수영을 해요?" 상대 여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물론 이건 수영하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니죠. 자, 한번 보세요. 이건 이것과 한 벌인 랩 치마예요. 정말 예쁘죠?" 작은 금속 장식이 달린 얇고 부드러운 천을 내보이며 여자가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랩 치마에 붙은 네 자리 숫자의 가격표를 보고 새스키아는 기절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리고 놀랍게도 안드레아스 역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약혼녀에게 입히고 싶은 옷이 아니오" 그가 상담원에게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녀가 자기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덧붙였다. "콜걸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이런 옷으로 꾸미지 않아도 새스키아의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단 말이오"
눈치 빠른 상담원은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고 돌아가 여러 벌의 수영복을 가져왔다. 새스키아는 그 중에서 가장 값싼 걸로 골랐고, 안드레아스가 그에 어울리는 랩 치마를 추가시키는 것을 마지못해 허용했다. 그가 계산을 마친 물건들을 강변의 자기 아파트로 배달시키는 동안 새스키아는 상담원이 갖다 준 커피를 마셨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조마조마한 거야. 새스키아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이제부터 그의 아파트에 가서 단둘이 있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건 결코 아닐 터였다. 안 그런가?
"내 아파트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소" 그의 아파트가 있는 선창가 쪽으로 차를 몰면서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식사를 보내 달라고 시키고...."
"아뇨, 밖에서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새스키아가 즉시 반박했다.
그녀는 안드레아스의 찡그린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소. 여자 혼자는, 특히 당신 같은 여자는 남의 시선을 끌기 쉬운 데다가 보아하니 너무 피곤해 보이는군. 난 외출을 해야 하는데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드레아스가 외출을 한단다. 새스키아는 마음이 놓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익숙지 않은 보행으로 발이 아팠고, 머리는 안드레아스가 쓴 돈을 계산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결국 자신이 갚을 돈이지만.
이미 그녀가 쓰고 싶었던 금액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안 좋을 만큼 큰 액수였다. 힘들게 모은 얼마 안 되는 비상금은 안드레아스가 사준 것을 다 갚고 나면 거의 남는 게 없을 정도였다.
새스키아는 힘없이 안드레아스를 따라 지하 주차장을 지나 아파트 로비로 향했다. 승강기를 작동시키는 데 특별한 열쇠가 필요했는데, 얼마나 매끄럽게 올라가는지 승강기가 멈춰 섰을 때 새스키아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움직이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이쪽이오"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팔을 잡고 현관 로비에 난 네 개의 출입구 중 하나로 이끌었다. 그는 들고 있던 그녀의 가방을 내려놓고 문을 연 다음, 그 너머로 펼쳐진 우아한 공간 속으로 먼저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다.
5장
안드레아스의 아파트로 들어선 새스키아가 최초로 놀란 것은 현관 벽에 걸린 고가의 현대 미술 작품이 아니라 지독한 향수 냄새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사향내가 코를 톡 쏘는 것이 그녀를 긴장시켰다. 안드레아스도 그걸 느낀 듯했다. 새스키아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냄새를 맡는 표범처럼 고개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젠장...빌어먹을"
그가 나직이 거친 욕설을 내뱉더니 넓은 복도를 지나 커다란 창문이 난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고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보드라운 팔 살에 박히면서 그녀의 입술 위로 거친 숨결을 토해 경계의 속삭임을 전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놀란 새스키아의 온화한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이 흑요석처럼 검고 돌처럼 단단하고 위압적으로 그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드디어 단둘이 있게 됐군. 오늘 날 놀리느라 얼마나 재미있었소. 달링, 이젠 내 차지가 됐으니 당신에게 내리고 싶은 벌을 실행할 수 있겠군"
부드러운 손길만큼이나 나직이 읊조리는 그의 음성이 남아있던 그녀의 이성을 흩뜨려 놓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윽고 그의 입이 그녀를 덮쳐 저항의 소리를 잠재우더니 능숙하게 그녀의 입술을 가두고 어르고 유혹해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효과로 그녀의 방어막을 허물어 놓았다.
자제력을 잃은 새스키아는 그를 밀쳐내고 그한테서 뭔가 해명을 받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모든 감각은 관능적인 자극에 익숙치 않아 그 외 모든 생각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충격이 안드레아스의 굶주린 듯 열정적인 기교가 안겨주는 쾌감의 열기에 스르르 녹아내린 것이다. 이제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거침없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에게로 바싹 다가서 뒤꿈치를 들고 그의 키스가 주는 기분 좋은 감촉을 음미하기 위해 힘껏 매달렸다. 그의 팔에 얹은 손 밑으로 크고 단단한 근육이 느껴지자, 그 강렬한 촉감이 너무도 생소하고 충격적이라 그녀
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압도적인 사향내의 여자 향수보다 안드레아스의 체취가 더욱더 강하게 전해져 왔다. 그의 열기와 열정과 남자다움이. 그리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뭔가가 그녀의 입술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 그가 좀 더 꼭 끌어안도록 온몸으로 재촉했다. 그래서 남자의 힘이 느껴지는 나머지 부분도 동시에 맛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의 입술이 처음 닿는 순간, 감았던 눈을 몽롱하게 뜬 새스키아는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원색적인 관능의 불꽃을 발견하고 전율했다. 위험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왠지 안전하다는 기분이 드는, 머리가 어찔하고 시간이 멈춘 곳에서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순진한 처녀처럼 구는 걸 좋아하는군" 안드레아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 속에서 강렬한 불꽃이 일어났다. 마치 그녀의 그런 점이 만족스럽다는 듯. 새스키아는 무력하게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놀랍도록 낯선 저릿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것은 그가 만져줬으면 하는, 그의 손이 천천히 몸을 쓰다듬어 그 낯선 저릿함이 시작된 곳까지 이르러 그곳을 감싸고 달래줬으면 하는 육체적 욕구였다. 웬일인지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생각만 해도 가슴 저림이 쿵쾅거리는 맥박으로 거칠고 원초적인 고동으로 증대되어 그녀를 신음하게 만들고 그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했다.
"그걸 좋아하는군. 나를 원해...."
그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을, 그가 자극 받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스키아는 맹렬하게 그에게로 몸을 밀착시키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를 듣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드레아스? 날 소개시켜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즉시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고 수치심이 들었지만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떼려고 했다. 안드레아스는 그런 그녀를 붙잡고 그대로 있게 만들면서 더욱 자기 쪽으로 밀착시켜 자기 몸에 기대게 했다. 마치..마치.. 다리 사이에 그의 억센 다리가 밀고 들어온 것이 느껴지자 두 사람의 자세가 연상시키는 성적인 의미를 깨닫고 당황해 그녀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들을 보고 있는 여자는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볼 수 있도록 안드레아스가 여유를 만들어주자 새스키아는 숨을 죽였다.
여자는 키가 컸고 검은머리에 모든 것이 단색으로 치장되었지만 따뜻한 올리브색 피부와 진하게 칠해진 입술, 손톱 색깔에도 불구하고 새스키아는 그녀의 내재적인 싸늘함을 느끼고 몸서리를 쳤다.
"아테네,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안드레아스가 냉랭하게 따지듯이 물었다.
"열쇠가 있잖아. 잊어 버렸어?" 여인이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내 것이라는 듯이 안드레아스를 바라보는 눈길과 두 사람의 대화에서 새스키아를 제외시키고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커 재혼의 압박도 물리치고 망연자실하게 넋 놓고 있을 미망인을 상상했던 새스키아의 믿음을 비참하게 되씹게 만들었다. 어느 누구도 이 여자에게 압박을 가할 수 없을 듯했다. 슬픔에 잠겼으리라고 상상했던 그녀의 검은 눈에서 새스키아가 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감정뿐이었고, 그것은 슬픔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테네가 안드레아스에게 던지는 응축된 욕정을 보고 갑자기 목을 뜨겁게 태우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삼켰다. 새스키아는 여자가 남자를 탐욕스러운 성적인 눈길로 쳐다보는 것을 본 적은 고사하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안드레아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짜 약혼녀가 필요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녀의 욕망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 점은 새스키아로서도 의문이었다. 상대 여자에겐 사람을 현혹시키는 관능적인 매력이 있었고, 안드레아스를 원하는 게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분명 그것은 모든 남자가 꿈꾸는 일일 터였다. 자기를 향한 성욕이 결코 식을 줄 모르는 여자.
순진한 새스키아는 여자만이 아테네의 내재적인 싸늘함과 그녀의 화장에 진정한 애정이 깃들지 않은 것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는 아테네가 자신의 아파트에 들어와 있는 걸 이미 눈치 챘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새스키아에게 키스를 했던 것이다. 아테네와 마주한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풍기는 사향내는 아무런 호소력도 없이 사람의 코만 자극했다.
"날 만나서 기쁘지 않아?" 아테네가 안드레아스에게로 다가서며 샐쭉거렸다. "할아버지가 자기 약혼 소식을 듣고 무척 충격이 크셔. 그분이 뭘 바라는지 자기도 알잖아"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이고는 새스키아를 돌아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오, 미안해요. 아가씨 감정을 상하게 하려는 뜻은 없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로 이 사람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안드레아스가 분명히 경고해 줬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특히 이 사람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아테네" 안드레아스가 경고하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만약 안드레아스와 진짜 약혼한 사이일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새스키아는 그때의 비참함이 너무도 실감났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아테네가 굽히지 않고 계속 말을 이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동작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으로 시선을 쏠리게 했다. 얇은 면 셔츠 밑으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을 새스키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뽐내듯 빳빳이 서 있는 아테네의 젖꼭지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감히 안드레아스 쪽을 바라볼 수는 없었다. 저런 유두가 그의 시선을, 그 완벽함과 관능미에 대한 감탄을 요구하는 것을 남자들은 결코 거부하지 못할 터였다. 새스키아의 가슴은 모양이 좋고 단단하긴 했지만 유두는 상대 여자만큼 현란하게 충만하지 못했고, 설사 그렇다 해도 저 여자처럼 과감하게 드러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기야 아테네의 저런 과시는 오직 안드레아스만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에게 두 사람이 이미 나눴을 법한 사랑의 행위를 연상시키게 하기 위함인지도. 어쨌거나 그녀는 이 아파트의 열쇠도 갖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아주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새스키아에게 주입시켜 놓으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새스키아의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아테네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매니큐어가 발린 한 손을 안드레아스의 얼굴에 대고 교묘하게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요염하고 자극적인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나한테 키스해 주지 않을 거야? 평소에는 그렇게 하잖아. 자기 약혼녀도 그리스에서는....집안간의 결속이 아주 중요하다는 걸 이해할 거야"
"새스키아가 이해하는 건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내 아내가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거요"
안드레아스가 아테네를 향해 냉랭하게 대답하고는 그녀에게서 물러서 새스키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 앞에 붙잡아 두 팔로 둘러 안고는 그녀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묻게 했다. 새스키아는 그가 왜 이러는지, 자신의 역할이 뭔지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다정하기도 해라!" 아테네는 새스키아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다시 안드레아스를 돌아보며 성의 없이 말했다. "당신 행복에 그늘을 드리우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네. 안드레아스. 지금 할아버지는 당신 때문에 영 기분이 안 좋으셔. 이번 인수를 처리하는 방법이 얼마나 걱정되는지 모른다고 나한테 말씀하시더라고. 물론 이 분야에서 본인의 입지를 세우는 것이, 자신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당신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이해는 해. 하지만 이번 호텔 체인 인수는 정말 무모한 짓이었어. 현재 일하는 직원들을 그대로 껴안고 간다는 결정도 그렇고 말야.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이윤을 낼 수 없을 거야." 그녀가 놀리듯이 상냥하게 그를 나무랐다. "그 체인의 재정 상태를 심도 있게 검토해 볼 기회가 있었던 탓에 그나마 내가 그 인수에서 발을 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물론 백만 파운드 정도 잃는 것쯤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 대신 해운 회사를 경영해 달라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다니 당신 할아버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것보다 당신에게 훨씬 더 전망이 있었을 텐데 말야"
새스키아는 아테네가 방금 가한 모욕의 의미를 깨닫고 긴장했지만 놀랍게도 안드레아스는 전혀 동요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주 단순한 견해를 피력했기에 그는 분연히 반격에 나섰다.
"이미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아테네" 그 역시 웃는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그 영국 호텔 체인을 사기로 결정을 내린 건 우리 할아버지셨고, 난 찬성만 했을 뿐이오. 미래의 이윤 문제는...내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국에는 고급 호텔 체인에 대한 수요가 아주 크다고 하오. 특히 일급 수준의 레저 시설과 일류 요리사까지 갖춘 호텔은. 그래서 우리 체인을 그렇게 만들 작정이오. 현재 직원들을 껴안고 가는 데 대한 재정적인 영향은 새스키아가 회계사니까 당신에게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거요. 물론 당신 자신도 사업가로서 잘 알 테지. 장기적으로 직원들을 내보내느라 드는 퇴직 수당이 그들을 계속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클 거라는 사실 말이오. 자연발생적인 소모액과 미결 퇴직은 앞으로 몇 년간 그 수치가 현격히 줄어들 테고, 적절한 수준에 이르면 자의로 남아 있기로 한 직원들에게는 재교육 받을 기회가 주어질 거요. 또한 우리가 호텔마다 개설할 예정인 레저 클럽만으로도 직원 규모 차원에서의 부진을 모두 만화할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미리 경고해 두지만, 아무리 당신이 방해해도 새스키아와 난 내일 아테네로 떠날 거요. 오늘은 우리 둘 다 무척 바쁜 하루를 보냈소.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만 가줬으면 좋겠소. 오늘밤은 아주 특별한 밤이 될 것 같으니까" 새스키아가 긴장하자 안드레아스가 경고하듯 그녀를 바싹 끌어안더니 말했다. "아주 특별한 밤이라고 말하고 나니까 생각나는 게 있군"
한 손으로 여전히 새스키아를 안은 채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보석 상자를 꺼냈다.
"이걸 골랐소. 지금으로선 너무 약소한 거지" 그는 새스키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상자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나중에 껴보기로 하고...."
복도 너머로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놓아주고 안드레아스가 전화를 받으러 가자, 새스키아 혼자서 아테네를 상대하게 되었다.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예요" 새스키아 옆을 지나쳐 문을 향해 걸어가며 아테네가 악의에 찬 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그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와 난 맺어지게 운명 지어진 사람들이라고요. 자존심 때문에 그는 지금 운명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당장 그를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난 전혀 그럴 의사가 없으니까"
진심이야, 새스키아는 그걸 알 수 있었고 처음으로 안드레아스가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드레아스처럼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남자를 동정해? 게다가 그녀를 오해하고 있는 남자를? 미쳤나 봐. 새스키아는 냉혹하게 자신을 비웃었다.
새스키아는 새 옷들로 조심스럽게 채워진 가방이 수하물대에 올려지는 걸 근심스럽게 지켜보았다. 항공사 직원이 그들의 여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안드레아스가 어제 저녁 준 반지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요즘은 모조 다이아몬드도 진짜처럼 보이는 게 정말 놀랍죠?" 안드레아스가 보석 상자에서 반지를 꺼낼 때 그녀가 너스레를 떨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받은 반지만을, 그녀가 영원히 간직할 반지만을 끼게 되리라고 꿈꿔왔던 손가락에 그런 반지를 낀다는 게 얼마나 안절부절못하고 비참한 기분인지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다.
"그렇소? 난 모르겠던데" 안드레아스가 얕보는 투로 응수했다.
그의 말이 머릿속에 경보의 종을 울리자 새스키아는 불안하게 물었다. "이거, 진짜 아니죠?"
그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진짜군요!" 그녀는 한 개의 보석이 박힌 고상한 반지가 발하는 눈부신 광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놀란 숨을 삼켰다.
"가짜였다면 아테네가 금방 알아챘을 거요" 이렇게 비싼 것을 낄 수 없다고 거절하려는데, 안드레아스가 이렇게 일축했다.
"가짜 약혼녀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텐데요?"
"아테네는 아주 현실적으로 문제를 다루거든.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스의 대답이었다.
현실적으로, 새스키아는 그때의 짧은 대화를 떠올리며 그 말을 되씹었다. 아테네가 지켜보는 줄 알고 어젯밤에 했던 키스처럼 말이지. 안드레아스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새스키아는 그가 전화를 끊은 즉시 아파트의 공기 조절 장치를 켜며<환기를 좀 시켜야 할 것 같군>하고 무표정하게 말했을 때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중에 안드레아스는 자기 말대로 외출을 했고 그가 주문해 준 음식을 조금 먹은 뒤 새스키아는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아프로티테까지 얼마나 걸려요?"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새스키아가 안드레아스에게 물었다.
"이번 경우엔 평소보다 좀 더 오래 걸릴 거요."
안드레아스가 그런 대답을 하는 동안 스튜어디스가 그들의 자리인 일등석으로 안내해 주자 새스키아는 경외심에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일등석에 타본 적도, 안드레아스와 그의 가족이나 익숙할 듯한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아테네에 도착하면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당신 혼자 몇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소. 어젯밤 전화는 할아버지가 주신 거였소. 나를 만나자고 하시더군"
"그분은 섬으로 오시지 않을 건가요?" 새스키아가 물었다.
"당장은 그럴 수 없소. 심장 때문에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하거든. 다행히 예방 차원일 뿐이긴 하지만 며칠간 아테네에 계셔야 하오"
"아테네가 우리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당신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결합되어 있대요" 새스키아가 그녀의 말을 전했다.
"그건 당신에게 위협을 주려는 거요" 세심한 스튜어디스를 향해 짓던 미소를 거두고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안드레아스가 대꾸했다.
감정에 이끌려 새스키아는 어젯밤 그에게 느꼈던 뜻밖의 동정이 다른 감정보다 우위에 오게 내버려두었다. 그를 향해 몸을 틀고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 당신의 기분을 설명하면 그분도 이해하시고 당신이 맘에 없는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실 거예요."
"할아버지는 고집이 무척 세신 분이오. 또한 본인이 생각하고 계신 것보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약한 분이기도 하시고, 심장 상태가...." 그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안정적이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본인이나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오. 내가 만약 당신을 대안책으로 제시하지 않고 아테네와 결혼하기 싫다고 하면, 할아버지는 그 즉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실 거요. 당신 바람대로 아테네와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재산을 우리 것으로 소속시키는 것뿐 아니라 할아버지는 남자 후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소. 우리 누나에게 벌써 두 딸이 있고 아테네도 아이가 둘이라오. 할아버지는 당신의 직계 남자 후손인 내가 다음 세대를 ....증손자를 생산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오"
"하지마 아테네와 결혼하더라도 아들은 물론이고 아이를 가질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새스키아가 이의를 제기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그녀는 유쾌하게 주름이 잡힌 안드레아스의 눈가와 그녀의 말이 몹시 재미있다는 듯한 커다란 웃음소리에 분개해 그렇게 따졌다.
"새스키아, 당신같이 경험 많은 여자가 정말 너무 순진하군. 남자에게, 그것도 그리스 남자에게 아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감히 하는 게 아니오!"
기체가 갑자기 상승하는 바람에 새스키아는 자동으로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단단하고 남성적인 온기가 느껴지는 안드레아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자 그녀가 잔뜩 긴장했다.
"비행이 무섭소?"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그럴 것 없소. 이건 가장 안전한 운송 수단이니까"
"알아요. 그냥...그냥 하늘을 난다는 게 좀....자연 법칙에 반하는 일 같아서요. 그래서 만약.." 새스키아가 뚱하게 응수했다.
"만약 신이 인간을 날 수 있게 만들 작정이었다면 날개를 달아줬을 거요" 안드레아스가 짓궂게 말했다. "이카루스가 그런 선택을 시도했었지"
"아주 슬픈 얘기예요. 특히 그의 불쌍한 아버지 얘기는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새스키아가 몸서리를 쳤다.
"으음..." 안드레아스가 그렇게 동의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리스 신화를 공부한 적이 있는 것 같군."
"공부까지는 아니고요" 새스키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을 읽어 주셨는데, 아주 멋진 얘기들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늘 눈물을 흘리곤 했지만"
문득 그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하나는 이제 그들이 탄 비행기가 완전히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안드레아스의 큰손에 잡혀 있는 기분이 사실 너무 좋다는 걸 멍하게 자각한 것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따끔거릴 지경이라 그녀가 얼른 손을 빼는데, 스튜어디어스가 두 사람에게 샴페인을 갖다 주러 왔다.
"샴페인이에요!" 새스키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드레아스가 내미는 잔에서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맛있는 거품이 혀끝에 닿아 터지자 놀란 숨을 몰아쉬었다. 샴페인 때문에 이렇게 긴장이 풀리고 몹시..몹시 나른한 거야. 새스키아는 약간 몽롱한 기분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기장이 곧 착륙한다는 방송을 하자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간 것을 깨닫고 -그리고 안드레아스와의 대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깜짝 놀랐다.
그녀는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고 속력을 늦추기 위해 역추진을 넣는 순간, 안드레아스의 든든한 손 안으로 자신의 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밀어넣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기사를 시켜 아테네에 있는 우리 가족 아파트에 데려다 주라고 할 테니,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동안에 거기서 쉬도록 하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차로 관광을 시켜주라고 이르겠소." 수하물대에서 그들의 가방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안드레아스가 제안했다.
그는 연한 색 바지에 시원하고 촉감이 좋은 흰색 반팔 셔츠 차림이었다. 가방들을 땅에 휙 내려놓을 때 그의 팔 근육이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자 새스키아는 온몸이 떨리는 묘한 자극을 받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녀는 혼자 여행하는 여자 승객이 은밀하게 유혹적인 미소를 짓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내 남자라는 듯이 안드레아스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샴페인 때문인 게 틀림없어. 아니면 더위 때문이거나. 어쩌면 둘 다이거나! 그래. 그 때문이야. 그녀는 자신의 낯선 행동에 분별 있는 이유를 찾아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그런 결론을 내렸다. 여하튼 안드레아스에 대해서 소유욕을 느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그를 증오하고 혐오했는데...사실 그의 약혼녀로서 강요된 시간들이 두려웠고, 물론 아직도 그랬다. 당연하지! 그냥 그 때문인 거야. 아테네를 만나고 나서 그에 대해 약간의 동정을 느낀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그가 자신의 그리스 집안 어른들께 들은 것으로 신화와 민속학이 멋지게 결합된 이야기에 매혹되기도 했다. 게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끙끙댈 필요가 없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지 몰랐다. 보통은 여행을 떠날 때 친구들과 함께이거나 할머니와 함께여서...
"새스키아?"
안드레아스가 아직도 자신의 질문에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난 새스키아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 시내를 둘러보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넉넉하진 않을 거요. 우리 조종사가 이미 비행 계획을 제출했을 테니까" 안드레아스가 말해 주었다.
섬까지는 그의 할아버지 소유인 소형 비행기를 타고 갈 거라는 말을 새스키아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비행기에 대한 안드레아스의 무심한 언급보다 그녀에게 훨씬 강한 인상을 줬던 것은 그에게 비행사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행히도 그걸 포기해야 했지. 이제 속도도 적응하고 연습에 필요한 시간을 내기도 힘들었거니와 보험 회사가 날 보험에 가입시켜 주길 몹시 꺼려해서 말이오." 그가 침울하게 덧붙였다.
"이쪽이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오른쪽으로 돌려세웠다.
새스키아는 거울이 달린 기둥에 두 사람의 모습이 언뜻 비친 걸 보고서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렇게 안드레아스에게 기대어 뭘 하는 거지? 마치 이러는 게 좋은 것처럼, 그의 강한 남성다움에 기대어 힘없고 연약한 여성의 역할을 즐기는 것처럼.
그녀는 즉시 그에게서 몸을 떼고 어깨를 활짝 폈다.
"당신이 그러는 걸 보면 아테네가 무척 좋아할 거요." 못마땅함이 역력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그가 호되게 질책했다.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오. 새스키아....기억나오?"
"아테네가 여기 없잖아요." 그녀가 얼른 응수했다.
"없지. 다행히도. 하지만 우연히 누가 우리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우린 약혼한지 얼마 안 된, 서로 많이 사랑하는 연인이란 말이오. 당신은 지금 우리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자연스럽게 보이자면 우리가 어찌해야겠소?"
"당신 가족이 내가 당신에게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초조하고 겁나고 걱정되는 모습이어야 하겠죠." 그의 제안에 자존심이 상해 새스키아가 화를 내며 가로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분들의 거부가 두려워....당신을 잃을까봐 두려워 필사적이고 자포자기한는 심정으로 당신에게 매달려야..." 그녀는 안드레아스의 성마른 표정을 보고 말을 중단했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가까이 끌어안고 당신도 그런 친밀한 행위를 원해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냐는 뜻이었소. 연인이라면 늘 신체적으로 접촉하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그가 잠시 쉬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방금 한 말에 대해서인데, 난 내가 뭘 하든지, 누구를 사랑하든지 어른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나이가 한참 지난 스물아홉 살 난 성인이오."
"하지만, 당신은...." 새스키아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깨닫고 이내 멈췄다.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그녀에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뭘 말이오?" 그가 다그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먼저 아크로폴리스를 보고 싶소?" 안드레아스는 기사에게 그리스어로 지시를 내린 뒤 리무진에서 내리기 전에 새스키아의 의향을 확인했다.
"네" 새스키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스피로스에게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하도록 일러놨소. 저 친구가 알아서 할 거요. 당신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미안하오." 안드레아스가 정중하게 사과해 새스키아로 하여금 그의 혼혈 문화 유산을 새삼 깊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가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지, 도한 주위의 다른 남자들에 비해 얼마나 돋보이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안드레아스는 그들보다 훨씬 키가 컸고, 햇빛에 그을리긴 했지만 그다지 검지 않은 살결에, 회색 눈동자 역시 북유럽 혈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새스키아는 감탄의 한숨을 나직이 내쉬며 마침내 아크로폴리스를 등지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무사할 거라고 거의 우기다시피 기사를 설득시킨 끝에 그녀는 홀로인 것을 즐기면서 고대 건물이 발하는 경이로운 기운을 흡수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예상했던 장소에 리무진이 서 있는 걸 발견했지만 기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차 근처에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몸이 아픈지 한 손으로 옆구리를 누르고 어딘지 괴로운 듯 보이자 새스키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거리를 잠깐 둘러보니 노인과 그녀 외엔 아무도 없었다. 새스키아는 무의식적으로 노인의 건강이 걱정돼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노인에게로 다가서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다행히도 노인은 영어로 대답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별일 아니오. 더위 때문에 약간 통증이 있어서. 내가 좀 무리해서 걸었나 보오."
새스키아는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날씨가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노인의 안색이 안 좋아 이대로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기사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주위에는 보이지 않았고, 여기서 공항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그녀로선 알 길이 없었다.
"정말 덥네요" 노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이런 날씨에 걷게 되면 쉽게 지치죠. 저한테 차와 기사가 있는데 저희가 태워 드릴까요?"
그런 말을 하면서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기사는 어디로 간 거지? 비행기 시간에 늦으면 안드레아스가 화를 낼 테지만 노인이 무사한지 확인하지 않고는 떠날 수가 없었다.
"차가 있소? 이 차요?" 주차된 리무진 쪽을 가리키며 노인이 물었다.
"네, 제 차는 아니고요" 새스키아는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아는 사람의 차예요. 사시는 곳이 여기서 먼가요?"
노인은 그제야 옆구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혈색이 한결 좋아지고 숨결도 편안해진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친절한 아가씨로군. 하지마 나도 차가 있고, 기사가 있다오."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가 환해지자 무슨 이유에선지 새스키아는 노인이 자신을 약간 비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늙은 사람을 이렇게 걱정해 주다니, 아가씨는 정말 마음씨가 고운 것 같소."
새스키아는 길 아래쪽으로 저만치 차 한 대가 서 있는 걸 발견했지만 거리가 꽤 멀었다.
"저 차인가요? 제가 기사를 불러올까요?"
"아니요. 이젠 걸어갈 수 있다오" 그가 즉시 거절했다.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새스키아는 노인 옆으로 다가서 상냥하게 말했다. "저기까지 함께 걸어가는 건 허락해 주실 거죠?" 그녀는 곧바로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래야겠군" 노인이 굴복했다.
차까지 가는 데는 새스키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노인이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차 있는 곳까지 도착하니,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기사가 얼른 내려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기사와 빠른 그리스어로 얘기를 나누는 노인을 보면서 새스키아는 비로소 안심했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노인은 똑바로 서서 엄격한 목소리로 기사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이 친구가 마누라처럼 잔소리를 해대는군" 노인이 새스키아에게 영어로 불평하고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고마워요. 아가씨. 만나서 아주 반가웠소. 하지만 아테네 거리를 혼자 걸어다니지 말아요. 그리고 나도..." 노인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기사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거리 아래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야니가 아가씨 차까지 함께 가서 기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거요"
"아니에요. 그러실 것까지는 없어요" 새스키아가 반대했지만 그녀의 새 친구는 단호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말 데려다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그랬어요" 노인네가 듣지 못하는 곳으로 벗어나자 그녀가 기사에게 말했다. "당신 고용주 곁에 남아 있는 게 더 나을 텐데요. 거리에서 처음 뵈었을 때는 영 안색이 안 좋아 보였거든요."
다행히도 그 말을 마치는데 그녀의 기사가 안드레아스의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보셨죠? 이젠 돌아가셔도 될 것 같네요." 그녀는 안도의 미소를 짓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기사에게 말했다."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당신 고용주께선 아무래도 의사를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모호하게 말을 맺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기사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분은...뭐랄까요,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시거든요."
그의 침착함이 새스키아의 근심을 가라앉히고 노인을 놔두고 떠나왔다는 양심의 가책을 한결 덜어줬다. 확실한 사람에게 노인을 맡겼으니 이젠 안심해도 되리라. 멀리서 그녀의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6장
비행기의 창밖으로 청록색 에게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스키아는 얼른 숨을 몰아쉬고 안드레아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는 공항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지, 시내 관광이 재미있었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가족이 있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긴장되었다.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게 될 날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이토록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건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되고 보니 제대로 감상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를 향해 물었다. 사실 걱정되어서라기보다는 예의상이라고 그녀는 얼른 자신에게 변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안드레아스가 더욱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헌신적인 약혼녀 역할을 연습하는 중이오? 혹시 보너스를 바라고 이러는 거라면 헛수고하는 거요."
새스키아는 그를 향한 적의가 되살아났다. "당신과 달리 난 최대한의 이익을 기대하며 행동하진 않죠." 새스키아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할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일이 잘되지 않은 것 같아 걱정되어 물어본 것뿐이라고요"
"내가 걱정된다고? 당신이 여기 온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오. 새스키아. 그런데 우리 둘 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그는 뭘 기대했단 말인가? 새스키아는 씩씩거리며 가시 돋힌 반박을 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아무튼 그는 그녀를 협박해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 목적을 위해 그녀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행동에 대해 변호하거나 설명할 기회는커녕 그녀를 아주 저급하게 판단한 뒤 자기에겐 좀 더 고매한 도덕적 명분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에게 동정을 느꼈단 말인가? 그와 아테네는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만 화를 낼 뿐 자신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새스키아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물론 아테네에게서 뼛속 깊이 냉혹한 이기심을, 남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데도 따뜻한 면이 엿보였다. 게다가 아테네 때문에 펼친 연기에 불과한 키스인데도 그녀에게는 실제처럼 아주 은밀하고 열정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지금도 단단하게 압박해 오던 그의 입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실은 일이 제대로 안 풀렸소"
안드레아스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고백에 놀란 새스키아는 눈을 번쩍 떴다.
"우선 할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안 계셨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계셨던가 보오. 불행히도 내게 그걸 설명해 주시거나 메시지를 남기지 않아서 30분 이상이나 기다려야 했소.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날 만날 기분이 아니라는 뜻을 확실하게 전한 셈이오"
"나 때문인가요?" 새스키아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걸,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시오. 할아버지 당신도 연애결혼을 하셨고, 우리 부모님도 그랬으니까. 물론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기 위해 가출하겠다고 협박하다시피 하긴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는 당신이 그를 얼마나 훌륭하게 생각했는지 고백하셨소. 아버지는 측량 기사였었는데 할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생활을 하셨지"
"아버지가 보고 싶겠어요" 새스키아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소. 아주 오래 전이지. 하지만 당신과는 달리, 적어도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알고 있소"
새스키아는 그가 일부러 고약하게 군다고 생각해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가 뜻밖에도 자신의 손을 감싸쥐자 그의 말을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부모님한테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 넘치게 해주셨죠" 그녀가 단호한 어조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안드레아스는 아직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다시 마음이 설렜다. 잘 손질된 구리빛의 긴 손가락은 정말 남자다웠다. 그의 커다란 손은 그녀의 두 손을 다 덮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힘들이지 않고도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 맬 정도였다. 참으로 믿음직한 손이었다. 자신의 식솔이 안전하게 생활하도록 보살펴줄 수 있는 남자처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새스키아는 그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쑤석거려 살며시 빼냈다.
"정말 이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이유만 생각하며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약혼을 승낙하지 않으신다면....."
그녀의 말에 화가 난 사람처럼 그는 한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이 그녀가 아니라 아테네임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도 입에 발린 말인 줄은 알지만, 불행히도 아테네는 할아버지와 같은 핏줄임을 주장하고 있소. 할아버지의 형님인 아테네의 할아버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시자 아테네는 아무도, 특히 우리 할아버지가 자기 사업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때로는 옳지 않은 쪽으로 판단을 내리도록 할아버지를 유도하고 있소. 어머니는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져 결국 할아버지가 아테네의 간계를 꿰뚫어보실 거라고 단언하시지만...."
"하지만 그녀도 당신이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나요?" 새스키아가 약간 불쾌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누군가 억지로 관계를 맺도록 강요한다는 것이 그녀와는 맞지 않았다. 따라서 아테네가 왜 그렇게 밀어붙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당연히 알고 있지. 하지만 아테네는 결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부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도....."
"그래서 당신을 원하는군요" 새스키아가 그를 대신해 말을 맺었다.
"그렇소. 그리고 그녀의 바람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오" 안드레아스가 침울하게 대꾸했다.
그는 기체가 조금씩 부력을 덜기 시작하자 말을 멈추고 창밖으로 그들의 목적지를 내려다보는 새스키아의 표정을 살피며 입가에 미소를 살짝 지었다.
"설마 조종사가 이 비행기를 저 작은 땅 위에 착륙시키려는 건 아닐 테죠?"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숨 막히는 소리로 물었다.
"음, 그럴 거요. 보기보다 아주 안전하거든"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안심시키고는 장관을 이루며 펼쳐진 자신의 별장과 주위를 둘러싼 땅을 가리켰다. "저길 봐요"
"온통 녹색이네요" 타원형에 가까운 작은 섬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소리쳤다. 그곳은 해변의 모래사장과 청록색의 에게해와 대비되어 더욱 푸르게 보였다.
"섬 자체에 용수 공급이 충분한 탓이지. 경작을 하거나 가축을 기르기에는 너무 땅이 좁아서 상주하는 주민들은 없소. 보다시피 다른 섬들과 꽤 떨어져 에게해 쪽으로 가장 멀리 나와 있는 섬이지"
"진주처럼 완벽해 보여요" 새스키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속삭였다.
그녀의 찬탄에 안드레아스가 슬며시 웃자 새스키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우리 할머니도 그렇게 표현하셨지" 그는 정감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때였다. 기체가 갑자기 활주로에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제야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가 일부러 주의를 딴 데로 돌렸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아주 재미있게 만들고,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었다. 만일 두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그녀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좀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생각을 추스린 다음, 터무니없는 공상에 빠져들어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난감한지 스스로를 일깨웠다.
비행기 출입구 쪽으로 새스키아를 이끄는 안드레아스의 눈빛이 냉혹하게 반짝였다. 새스키아의 지금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하지만 그로서는 오히려 그녀가 처음 인상 그대로 남아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스키아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분명 아테네의 이기적인 태도와는 달랐다. 그 점이 안드레아스를 감동시켰다. 여성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돋보이는 새스키아 때문에 그의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안드레아스는 그녀에게 키스했을 때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테네가 그의 아파트에 와 있다는 걸 알아챈 그는 느닷없이 새스키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지독히도 강렬한 아테네의 향수 냄새는 복도까지 진동했다. 아마 아테네는 그의 할아버지를 구워삶아 아파트 열쇠를 얻어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아테네의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새스키아에게 키스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새스키아가 못 이기는 척 응해 왔던 것이다. 그는 결코 새스키아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를 보호하거나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곳 섬에 도착하자 향기 그윽한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댔다.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아테네보다 훨씬 나았다. 새스키아는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린 채 기내에서 내려오며 마중 나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새스카아의 눈빛이 약간 불안하게 흔들렸다.
"자기, 이걸 갖고 가야지" 잠시 후 안드레아스가 뒤에서 쉰 목소리로 선글라스를 건네주었다.
새스키아는 그의 말투에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다정하게 팔을 두르고 끌어당겨 안는 능청스러운 태도에 비하면 그의 친절한 말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 그리스의 햇볕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켈트족에게는 너무 강렬하거든"
그에게서 선글라스를 건네 받기 위해 내민 새스키아의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선글라스에는 디자이너 로고가 새겨 있었다. 물론 그녀가 지금까지 끼어 본 어떤 선글라스보다 값비싼 것이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눈치챈 안드레아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선글라스를 끼워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얼굴에 꼭 맞았다.
"런던에서 깜박 빼먹었더군" 그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한 팔로 그녀를 안은 채 나머지 팔로는 좀 더 가까이 끌어당기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구경꾼에게 아주 친밀하게 보이겠군. 새스키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도 좋은 수가 있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새스키아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젖혀 그와 똑같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자기. 자기는 정말 생각이 깊다니까!"
안드레아스의 놀라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쾌감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의 남성적이고 위협적인 그 뭔가를 느끼자, 서둘러 몸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멀리 가도록 내버려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새스키아의 손을 붙잡고 마중 나온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니, 여긴 새스키아예요" 그가 두 여인 중 나이 많은 부인에게 먼저 그녀를 소개시켰다.
만약 안드레아스와 사랑해서 약혼한 사이라면 자신과 그의 어머니가 진정한 유대를 맺을 수 있을지 알아보느라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으리라. 새스키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여인을 살펴보았다. 부인은 외형적으로 아테네와 무척 닮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보다 나이가 많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테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따스함을 그 여인의 눈에서 볼 수 있었다. 안드레아스의 어머니에게선 온화함과 상냥함, 게다가 수줍음까지 느껴졌다.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순정파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티메르 부인" 새스키아가 인사를 건네자, 부인은 나무라듯이 고개를 저었다.
"새스키아, 이제 곧 내 며느리가 될 테니까 좀 더 자연스럽게 부르도록 해요. 내 이름은 헬레나예요. 괜찮다면 안드레아스나 우리 딸처럼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부인은 앞으로 몸을 기울여 새스키아의 팔을 다정하게 잡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나서 아들에게 정다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정말 예쁜 아가씨구나, 안드레아스"
"그렇죠, 어머니?" 안드레아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외모뿐 아니라 속도 그렇다는 얘기야"
"물론이죠" 안드레아스가 선선하게 동의했다.
세상에, 명배우가 따로 없군 새스키아는 몸서리를 쳤다. 실제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다면 저토록 다정하고 애정 어린 표정에 분명히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같은 남자는 유혹에 약한 여자에게 저런 표정을 지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새스키아는 새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이쪽은 올림피아, 내 여동생이고"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젊은 아가씨 쪽으로 돌려세우며 인사시켰다. 어머니처럼 피부색이 거뭇하긴 했지만 그녀 역시 밝은 색 눈동자와 명랑하고 환한 미소가 일품이었다. 새스키아는 즉시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우, 여긴 너무 더워. 새스키아 언니가 녹아 내리겠어" 올림피아가 안쓰러운 듯 너스레를 떨었다.
"집에서 기다리지 왜 나와 있어? 기사를 시켜 차만 보내주면 될 텐데" 안드레아스가 동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어" 올림피아가 뚱하게 대꾸했다.
그때 어머니가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그의 여동생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어머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뭐, 오빠도 알아야죠"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 안드레아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테네가 여기 와 있단다. 너보다 앞서 도착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거북하게 말을 꺼냈다.
"도착해서 뭐라던가요?"
"네 할아버지가 자기를 초대했다고 하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이어 말해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오빠도 알지?" 올림피아가 흥분해서 끼여들었다. "틀림없이 할아버지를 들볶아서 여기 있게 해 달라고 했을 거야.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올림피아!" 그의 어머니가 나무라듯이 저지했지만 올림피아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 구역질나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데려왔다니까. 지금 중요한 거래를 준비 중인데, 그가 자기 회계사라서 옆에 있을 필요가 있다나.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여기까지 올 시간은 어디서 났대?" 올림피아가 불퉁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정말이지, 그래서 싫다니까. 오늘 아침만 해도 할아버지가 사업에 대해서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른다면서, 오빠가 걱정이 돼서 자기한테 조언을 구한다는 얘기를 끝없이 늘어놓는데..."
"올림피아!" 어머니가 다시 저지하자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할아버지가 왜 그 언니에게 그렇게 속아넘어가 주시냐는 거야" 올림피아는 마침내 분통을 터뜨렸다. "그 언니가 왜 이러는지는 뻔하잖아. 오빠가 결혼해 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오빠를 공략하려는 거지 뭐"
"이렇게 돼서 미안해요" 어머니가 새스키아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아가씨에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아직 아테네를 만나 보지 못했을 테지만...."
"아뇨, 만났어요" 안드레아스는 어머니의 말을 가로채 영문을 몰라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설명해 주었다. "런던에 있는 제 아파트 열쇠를 어떻게 손에 넣었나 봐요"
"정말 지독한 여자죠?" 올림피아가 새스키아에게 말했다. "전 그녀를 검은 과부 거미라고 불러요"
"올림피아!" 안드레아스가 날카롭게 동생을 나무랐다.
"엄마가 솔직히 말해 주지 못한 것도 있단 말야" 올림피아가 그렇게 반박하고는 어머니를 두둔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테네는 엄마가 언니를 위해 준비해 놓은 방을 자기가 쓰겠다고 마구 우겼어? 오빠 방 옆에 있는 건데...."
"막으려고 해보았다. 안드레아스" 헬레나가 딸의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너도 그 애가 어떤 줄 알잖니?"
"그녀 말이, 새스키아 언니는 복도 끝에 있는 방을 쓰면 된다는 거야. 알지 왜,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여분으로만 쓰는 방 말야, 제대로 된 침대도 없잖아"
"네가 아테네에게 뭐라고 좀 해봐라, 안드레아스. 그 방은 새스키아가 써야 하니까 다른 방을 골라 보라고 알아듣게 얘기 좀 해보렴"
"아뇨, 괜찮아요" 안드레아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한 팔로 새스키아를 단단히, 거의 가두다시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 그녀의 얼굴을 시야에서 가리며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말했다. "새스키아는 제 방에서 제 침대를 같이 쓸 거니까요"
새스키아는 비록 얼굴을 볼 수 없다 해도 그들이 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그가 왜 이렇게 꼭 끌어안고 얼굴까지 가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저항하는 소리조차 그의 면 셔츠에 막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도 못한 상태였다. 예상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에게 말하려고 고개를 들 때마다 그와 더욱 친밀한 접촉만 이끌어낼 뿐이었다. 주의를 끌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해 그가 보인 반응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그녀가 하는 얘기를 열심히 들으려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숙였을 때 그녀의 입술이 그의 턱에 스쳤던 것이다. 새스키아는 더위와 충격 때문에 온몸이 힘없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틀림없다고 결론을 억지로 내렸다. 자신의 입술에 닿은 안드레아스의 살결이나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에서 본 위험한 광채 때문은 분명 아닐 터였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서 이제는 젖가슴 바로 밑까지 과감하게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에 닿았다.
"새스키아 언니가 오빠와 한방을 쓴다고?" 올림피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새스키아가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려 그렇게 물었다.
"우린 약혼한 사이고....이제 곧 결혼할 거니까" 안드레아스는 여동생에게 솜씨 좋게 설명한 뒤 등줄기가 저릿할 정도로 원색적인 소유욕을 드러내며 덧붙였다. "새스키아는 내 사람이고 모두에게 그 점을 분명히 해둘 생각이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이지. 아테네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견디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녀가 몸서리를 치며 계속했다. "그는 뱀같은 사람이에요, 언니. 싸늘하고 끈적끈적하고, 소름끼치는 작은 눈에 끈끈한 손하며..."
"아테네는 그 자의 창조적인 회계 솜씨 때문에 그를 견뎌내지" 안드레아스가 냉랭한 표정으로 동생에게 말했다.
"아,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구나" 올림피아가 간단하게 풀이했다.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안드레아스가 동생에게 경고하며 주차장 쪽으로 세 사람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사는 차에 짐을 실었다. 안드레아스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그녀가 차에 타도록 문을 열어주면서 기사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기사는 대학에 다니는 자기 아들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오빠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돈을 집안 고용인들의 교육비로 쓰고 싶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죠." 올림피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올림피아, 할아버지 없는 데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못한 일 같구나" 그의 어머니가 나무랐다.
안드레아스가 그런 일을 했다고? 새스키아는 그의 따스한 마음씨에 넘어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둘이 한방을 쓸 거라는 말이 진심일까? 그럴 수는 없어, 안 그래? 개인적으로 그녀는 어디서 자든 상관없었다. 평소에는 익숙지 않은 침대 없는 방이라 해도, 혼자만 쓸 수 있다면.
"우리 둘 다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까, 저녁 식사 전에 새스키아를 좀 쉬도록 해주는 게 좋겠어요" 공중으로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가 한가운데 놓인 정원 안으로 랜드러버가 들어서자 안드레아스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두마. 하지만 새스키아에게 우선 가벼운 식사라도 들게 해야지" 어머니가 다정하게 일렀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안드레아스가 얼른 대답했다.
그리고는 새스키아의 팔꿈치를 잡고, 그녀에게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은근한 투로 덧붙였다. "이쪽으로, 새스키아..."
7장
"이 방에서 당신과 함께 잘 순 없어요!"
안드레아스가 미로 같은 복도로 새스키아를 이끌자 그녀는 강하게 항의했다. 그 역시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감지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우아한 큰방으로 들어서서 문이 닫힐 때까지 용케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고상한 주위 환경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새스키아는 휙 돌아서 안드레아스에게 단호한 태도로 대들었다.
"그건 우리 거래에 없던 부분이에요"
"물론 우리 거래는 당신이 내 약혼녀 노릇을 한다는 내용이었지. 하지만 거기엔 우리의 연극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은 뭐든지 한다는 게 포함되어 있소" 그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당신과 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새스키아가 고개를 저으며 항의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난 그런..."
갑자기 공포감이 휘몰아치면서 그녀는 도저히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데다가 무더위로 인해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이러다가는 자신의 감정이 언제 폭발할지 몰랐다. 그녀는 거대한 킹사이즈 침대에서 얼른 고개를 돌리고 안드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아스는 뻔뻔스럽게도 태연자약했다. "난 샤워부터 해야겠소. 당신도 샤워를 하는 게 좋을 거요. 그러면 우리 둘 다 이 상황을 좀 더 이성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지"
샤워? 안드레아스와? 새스키아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한 채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그는 내가 그럴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당신부터 먼저 욕실을 쓰시오"
먼저! 그러니까 같이 하자는 뜻이 아니었군. 그녀는 한시름 놓았지만 금세 지독한 분노가 뒤따라 올라왔다.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 내 욕실이 있고, 내 침대가 있는 우리 집 말이에요. 한시라도 빨리 이 바보 같은 연극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 건...."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잠시 말을 중단했다.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당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우리가...." 그녀는 차마 말로 내뱉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밝힌 것 말이오? 그럼 두 사람이 달리 어떻게 생각하겠소? 난 남자요, 새스키아. 그리고 당신과 약혼한 사이고,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단 1분이라도 어떻게...."
"물건을 사기 전에 써보고 싶지 않겠냐고요? 그렇죠. 당연히 당신 같은 남자는 그러고 싶겠죠" 새스키아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거야말로 당신 같은 여자가 할 수 있는 말이군. 모든 걸 돈으로 연결시키는 것 말이오. 글쎄, 이런 말을 해야..." 그가 화난 음성으로 비아냥거렸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새스키아가 얼른 그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자 안드레아스가 즉시 그녀의 말을 자르며 설명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제로 우리가 사랑한다면 나나 혹은 당신이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할 거라는 뜻이오. 난 물론 당신을 내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테지. 밤새도록 그렇게 할 거요"
새스키아는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여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깃들인 갈망을 끌어올리는 듯한 말이었다. 갑자기 이성은 사라지고 공포감이 엄습해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마음이 변했다고, 집으로 가고 싶다고, 당신이 어떤 협박을 가하더라도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공포감은 그를 두려워해서 생긴 게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두려워하는 건 그녀 자신이었다. 그건 지금 느끼기 시작한 감정이었고, 지금 들기 시작한 생각이었다. 그에 대해 이런 식의 기분이 들게 놔둘 순 없었다. 그에게 마음이 끌려선 안 되었다. 그는 전혀 그녀의 타입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대했던 행동이, 자신을 판단했던 태도가 몹시도 싫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바람을 설명했을 때 느꼈던 갈망은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어요"
새스키아가 가까스로 거절하자, 안드레아스가 그만두라고 경고하듯이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나이 든 노인이 그들의 짐을 들고 들어왔다. 새스키아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노인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키 작은 노인은 안드레아스와 그리스어로 말을 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새스키아와 그를 번갈아 쳐다본 뒤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무슨 얘기였어요?" 노인이 떠나고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새스키아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스타브로스는 내가 아내를 맞아야 할 때라고 얘기해 주면서 서둘러 멋진 아들을 만들라고 하더군" 그가 거리낌 없이 대꾸했다.
새스키아는 머리끝까지 빨개지는 걸 느끼며 방 한가운데 놓인 킹사이즈 침대 주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방안의 냉방 장치가 돌아가는데도 그녀는 숨쉬기조차 힘들만큼 갑갑했다. 하지만 달아날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었다.
"난 샤워를 해야겠소" 안드레아스가 방안에 나 있는 세 개의 문 중 하나로 걸어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새스키아는 복도로 향한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저 문으로 걸어나가 즉시 아테네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그렇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자리를 잃을 것이므로, 안드레아스는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새스키아는 다른 것에, 자신이 처한 이 지독한 상황 말고 다른 것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녀는 안드레아스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일이 싫었다. 안드레아스라는 남자조차 너무 싫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울타리가 쳐진 정원으로 이어진 곳에서 거품이 나는 스파 풀장까지 갖춘 수영장이 있었다. 주위는 녹색 식물들이 우거져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느긋이 햇빛을 즐길 수 있도록 일광욕 의자에는 파라솔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이 고급 휴양지의 안내 책자에서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새스키아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호화로운 공간이어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정작 그녀가 있고 싶은 곳은 바로 그녀 자신의 집이었다. 안드레아스가 정말로 그녀와 방과 침대를 함께 쓸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이제 욕실을 써도 되오"
새스키아는 얼어붙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안드레아스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안드레아스의 몸에서는 방금 샤워를 해 상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가서 간단한 식사를 갖다 달라고 일러 놓겠소. 저녁은 아직 몇 시간 더 있어야 하니까, 내가 말한 대로 그 동안 좀 쉬도록 해요. 그리스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고 잠자리도 늦게 드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방을 쓰는 줄 알았는데요" 새스키아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 오겠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싫어요! 나에게 손대지 말아요" 그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자 그녀가 저항했다.
그가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가.....
새스키아는 정신없이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안드레아스가 먼저 앞을 가로막고는 그녀의 연약한 팔을 힘껏 움켜잡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이렇게 겁먹은 것처럼 구는 이유가 뭐요? 바로 이것 때문이오? 당신 같은 여자가!" 그가 사납게 이를 갈며 쏘아붙였다.
새스키아는 그가 두 팔로 둘러 안고 입술을 덮쳐오자 숨을 몰아쉬며 전신을 떨었다. 그녀가 벗어나려고 버둥거릴수록 그의 맨살 감촉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축축하고 검은 털이 무성한 단단한 가슴이. 그녀는 그의 맨살과의 예기치 않은 은밀한 접촉에 놀라 그를 밀쳐낼 뭔가를 찾아 버둥거렸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안드레아스는 성난 듯 맹렬히 키스를 퍼부어 온몸의 힘을 빼놓았다. 새스키아는 전신을 태우는 듯한 남자의 욕망을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진한 풋내기 시늉은 그만두시지"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혀를 들이밀면서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남성을 세게 밀어붙였다. 새스키아는 문에 기대서서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다. 이미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지나 젖가슴을 향해 거만하게 올라왔다.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가슴을 감싸쥐고 엄지손가락으로 젖꼭지 주위를 쓰다듬으며 자극했다. 그러자 음탕한 쾌감과 함께 유두가 솟아올라 그녀는 새삼 충격을 받았다. 이제 그의 몸이 흥분한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호기심과 흥분만이 소용돌이치듯 솟아올랐다. 그 순간 새스키아는 그와 공모하고 싶은, 그래서 이 은밀한 포옹을 더욱 강렬히 체험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녀는 입을 벌리고 서둘러 그를 받아들였다. 키스의 달콤함에 취한 그녀는 수줍고도 유혹적인 그의 혀에 얽혀들었다.
"안드레아스? 자기 거기 있어? 나야, 아테네. 자기한테 할 말이 있어"
새스키아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테네의 목소리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는 당황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꼭 끌어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테네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안 되겠소, 아테네. 보시다시피 새스키아와 난 무지 바빠서...."
"둘이 같이 있잖아!" 아테네의 싸늘하고 원망에 찬 시선으로 새스키아를 노려보았다.
"왜 이 아가씨는 자기 방에 안 가고 여기 있지?"
"자기 방에 있는 거요. 내 방이 새스키아의 방이니까. 내 침대가 새스키아의 침대고, 내 몸이 새스키아의..." 안드레아스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할아버지가 절대로 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아테네가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안드레아스는 이미 그녀를 무시한 채 문을 닫고 있었다.
"안드레아스, 놔줘요" 새스키아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자신이 그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를 어떻게 부추겼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각하기 싫었다.
안드레아스가 비웃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됐소, 새스키아. 이쯤 해둡시다. 당신에게 충실한 약혼녀 노릇을 해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경험이 전혀 없는 순진한 처녀인 척을 할 필요까지는..."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린 채 새스키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쓸데없는 의심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뭔가 이상하다. 그가 놔줬는데도 새스키아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키스하고 만질 때는 왠지 자신이 그녀의 첫 남자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며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버렸다. 새스키아가 경험이 없을 리가 없다. 절대로, 그리스인들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로 처녀성을 꼽았다. 그에게도 다분히 그런 기질이 있었지만, 영국인 아버지와 학교 교육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그런 낡은 생각을 비웃고 개탄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자기를 만날 때까지 남자가 순수하길 기대할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여자는 달라야 한단 말인가? 성숙한 남자로서 그는 여자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존중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에게도 애인과 남편으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유일한 남자이길 갈구하는, 그녀에게 관능적인 사랑의 기쁨을 가르쳐 주고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깊고 비밀스런 열정과 독점적인 면이 있었다. 새스키아의 반응을 보니 그 동안 억눌러 왔던 안드레아스의 그리스인 기질이 나타났다.
"난 이 방에서 당신과 자지 않을 거예요. 난..." 새스키아가 무감각하게 되풀이해 말했다.
그녀가 지금 연기를 하는 거라면 오스카상 감이야. 안드레아스는 냉혹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겁에 질려 버리는 약혼녀는 필요 없었다. 그녀를, 둘 다 진정시켜야 했다.
"이리 오시오"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안에 나 있는 문들 중 하나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서 문을 연 다음, 첨단 기계 장비를 갖춘 사무실을 보여주었다.
"내가 저기서 잘 거라고 하면 당신 기분이 좀 나아지겠소?"
"저기서요? 하지만 저긴 사무실이잖아요. 침대도 없고...." 새스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일광욕 의자를 가져와서 자면 되오" 안드레아스가 성마르게 말했다.
"정말이죠?" 새스키아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안드레아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왜 이렇게 우스꽝스런 상황까지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내숭을 떨고 있지만 새스키아는 절대 겁에 질린 순진한 풋내기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의자를 옮기는 걸 다른 사람이 볼지도 모르잖아요?" 그녀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내 방만 수영장 쪽으로 문이 나 있소. 여긴 내 전용 공간이오. 모두가 사용하는 큰 수영장은 별장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있고....."
그의 전용 수영장.
새스키아는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의 성마른 표정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이런 자랑을 늘어놓으며 여자를 꼬드기는 술책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소, 새스키아. 우리 할아버지가 백만 장자일지는 몰라도 난 전혀 아니니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는 새스키아의 눈빛이 자신을 하루종일 수영장 주위나 어슬렁거리는 한가한 바람둥이로 여기는 것 같아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이 곳 별장에 있을 때 나는 늘 새벽에 수영하는 걸 좋아했소. 하지만 누이들이 나 때문에 잠을 깬다고 불평하기에 이 수영장을 나만 쓸 수 있도록 만들었소. 수영을 하면 운동이 될 뿐 아니라 머리도 맑아지니까!"
새스키아는 그의 말을 얼른 이해했다. 자신도 걸어 다닐 때 똑같은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걱정스러운 일이 있거나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을 때 그녀는 걸었다.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왜 이런 고생까지 해가면서 그녀를 진정시키고 안심시켜야 하나 냉정히 자문해 보았다. 그의 몸에 닿아 쿵쾅거리던 그녀의 심장 박동은 거짓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는 표정처럼.
새스키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사무실에서 자겠다는 안드레아스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두 사람의 잠자리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방금 전에 그와 키스할 때 겪었던 일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안드레아스가 키스 해 주기를 은밀히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정말이지 불가능했다. 바보처럼 순진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그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그녀의 양심이 단호하게 책망했다.
"일단 잠자리 문제는 해결됐으니, 난 가서 볼일을 보겠소. 당신은 뭘 좀 먹고 쉬시오"
안드레아스가 냉랭하게 마무리하듯 말했다.
"짐을 풀어야 해요" 새스키아는 짐 가방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쉬는 동안 하녀가 그 일을 해놓을 거요"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자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오, 새스키아. 당신이나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거요"
"어머, 언니 미안해요.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죠?" 올림피아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곧 저녁식사 시간인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잠에서 깨어난 새스키아는 침대에 일어나 앉으면서 예기치 않은 방문자가 안드레아스의 여동생 올림피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심했다.
올림피아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여기선 정장을 하지 않지만, 아테네는 분명히 인상적인 옷차림을 하고 나타날 거예요"
새스키아는 그녀의 다정함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어디?" 그녀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가 어디 있냐고요? 할아버지와 통화하고 계세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올림피아는 그녀의 안색이 변하자 얼른 안심시켰다. "그건 언니 때문이 아니에요. 아테네 때문이죠. 그녀가 이곳에 자기 회계사를 데려와서 오빠가 화를 내는 거예요. 아테네는 할아버지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 초대했다고 우기네요"
올림피아는 쏜살같이 걸음을 옮겨가 램프를 켰다. 새스키아가 침대에서 내려서며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보았다. 옷을 입은 채로 잤기 때문에 단정치 못하고 어수선한 기분이었다. 아테네와 함께 식탁에 앉는 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옷을 차려입어야 한다는 올림피아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안드레아스는 틀림없이 그러길 바라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가 사준 새 옷들이 가방 속에 가득한데, 그렇게 하지 않을 구실이 없었다.
"마리아가 벌써 가방을 다 풀어 정리해 놓았어요" 올림피아가 알려주며 덧붙였다. "제가 좀 거들었죠. 짧은 검은색 옷이 맘에 들던데....정말 예뻤어요. 옷들이 모두 너무 멋져요. 아참, 오빠가 수시로 들어와서 언니가 자고 있으니 소란 피우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위를 줬는지 몰라요. 언니를 아끼는 게 틀림없어요. 엄마와 난 오빠가 언니 같은 분을 만나서 너무 좋아요"
그녀가 따뜻한 시선으로 신뢰가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새스키아는 즉각 죄책감이 들었다. 올림피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 두 사람 다 오빠를 무척 사랑하니까 편견이 없을 순 없겠죠. 사실 우리는 오빠가 할아버지 뜻에 굴복해 아테네를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물론 오빠가 그녀를 사랑할 리 없다는 건 알지만요. 오빠가 어렸을 때 얘기를 해주었죠? 아테네가 오빠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예요"
새스키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올림피아는 계속해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사실 오빠는 내가 아는 줄도 몰라요. 리디아 언니가 비밀로 하라면서 말해준 건데, 오빠가 언니한테는 털어놨을 테니 괜찮겠죠. 뭐. 당시 오빠는 열아홉 살로 아직 애나 다름없었죠. 아테네는 오빠보다 나이가 많았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어요. 물론 성인 남녀 사이에서 나이차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오빠는 학생인데, 아테네가 오빠를 유혹한 거라구요. 오빠가 물리쳐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정말 큰일날 뻔했어요. 그 외 다른 얘기도 알아요? 아테네가 오빠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얼마간은 오빠를 벌주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그때 뭐, 말 안 해도 알 거예요!"
안드레아스가 학생일 때 아테네가 그를 유혹하려 했다니!
새스키아는 올림피아의 말을 듣고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 물론 나이가 여섯 살 차이가 난다는 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20대 여자가 열아홉 살짜리 남자애를 유혹하려 했다니...거의 성폭행 수준 아닌가? 새스키아는 차가운 손이 몸에 닿은 것처럼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런 일까지 하려고 마음먹은 여자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가로막고 있는 가짜 약혼녀를 용납할까? 아테네는 정말 안드레아스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녀로서는 안드레아스처럼 남성적인 사람이 여자를 쫓아다니는 입장이 아니라 쫓겨다니는 입장이라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안드레아스는 진취적이고 오만하며 욕망이 강한 남자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싸늘함과 강박에 가까운 탐욕스러움으로 똘똘 뭉쳐 있어, 같은 여자 입장에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존재였다. 안드레아스와 결혼하겠다는 아테네의 결심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할 정도였다.
"물론 할아버지의 건강만 아니면 문제될 게 없죠.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빠가 당신 밑에서 일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당신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언니, 검은색 옷을 입을 거죠? 그걸 입은 모습을 정말 보고 싶어요. 피부색과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 내 피부에는 검은색이 우중충해 보이거든요. 물론 아테네는 그걸 입을 테지만. 어이쿠!"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오빤가 봐요. 눈치 없이 이러고 있다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잠시 후 안드레아스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서부터 방구석에 서 있는 새스키아까지 죽 훑어보았다.
"올림피아, 내가 그만큼...." 그가 대뜸 험악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들어왔을 때 이미 깨어 있었어요"
새스키아가 얼른 올림피아를 두둔했다. 그녀는 안드레아스의 여동생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할 사이라면, 이렇게 다정하고 꾸밈없는 젊은 여성과 시누이 올케사이를 떠나 친구처럼 지낼 수 있어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올림피아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곤 그를 끌어안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봤지? 오빠가 틀렸어. 나한테 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으스대면 새스키아 언니가 오빠와 결혼하기 싫다고 나올지도 모른단 말야. 언니를 이렇게 직접 만나 보니 꼭 우리 새언니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우린 오늘 저녁 식사에 뭘 입을지 얘기하던 중이었어. 그리고 아테네가 폼나게 입고 나타날 거라고 언니에게 경고해 줬지!"
"우리가 준비할 테니 넌 당장 네 방으로 가. 안 그러면 아테네만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나는 사태가 발생할 거니까" 안드레아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올림피아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서둘러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다 말고 멈춰 서서 새스키아를 향해 장난스럽게 싱긋 웃고는 한 마디 했다. "검은 걸로 입어요!"
"미안하오.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동생이 나가고 나자 안드레아스가 먼저 사과했다.
그러니까 그는 여동생의 악의 없는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괜찮아요. 난 당신 동생이 맘에 들어요" 새스키아는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음..., 올림피아의 쾌활한 성격은 이따금씩 넘치지만 않으면 아주 좋지. 막내라서 제멋대로 하는 데는 아무도 당해낼 재간이 없소" 까 약간 침울하게 말하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30분 안에 준비하도록 하시오"
새스키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올림피아의 말을 듣자, 그녀 안의 뭔가가 꿈틀거렸다. 아마도 그건 타인에 대한 깊은 동정심이리라. 어느새 안드레아스는 그녀가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압제자와 관리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그녀의 옹호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로 변해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일만 남았다.
"30분이라고요? 그렇다면 욕실을 내가 먼저 써야 할 것 같네요" 그녀는 가능한 한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8장
"그러니까 새스키아, 그리스 남자의 아내로 어떻게 적응할 생각이에요? 만약 당신과 안드레아스가 실제로 결혼하게 된다면 말이에요"
새스키아는 아테네의 질문에 올림피아가 분개해 급한 숨을 몰아쉬는 걸 들었지만, 자신은 속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저녁 식사 때 모두 자리에 앉은 뒤로 새스키아는 아테네가 자신을 기죽이려 단단히 작정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안드레아스가 대신 그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 점에 관한 한 만약이란 없소, 아테네. 새스키아는 내 아내가 될 거니까!" 그가 가차 없이 말했다.
이번엔 새스키아가 놀라 숨을 삼키며 식탁 너머의 안드레아스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약혼이 깨졌다는 사실을 고백할 땐 어쩌려고 저러지? 하긴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뭔가 이상한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오늘 저녁 일찍 그들의 방에 달린 사무실에서 걸어나온 안드레아스는 그녀 앞에 멈춰 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한 번이라도 본 남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자기 여자였으면 하고 바랄 거요. 새스키아"
그녀는 그 순간부터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안드레아스의 약혼녀가 되었으며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 아니라 마땅히 여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눈에 담긴 근심은 이제 그를 위한 것이었다.
"아내라.., 아내 좋죠" 아테네의 회계사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음흉하게 씩 웃고는 새스키아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즉시 그를 외면했다. 세스키아는 아테네의 회계사에 대해 올림피아와 전적으로 의견이 같았다. 키가 꽤 크긴 했지만 육중한 몸 때문에 땅딸막하게 보였다. 숱 많은 검은머리는 기름으로 떡칠을 했고, 검은 셔츠 위에 입은 흰색 양복은 새스키아가 보기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반면 안드레아스는 시원한 흰색 면 셔츠와 고상한 맞춤 양복바지 차림이 섹시하고 편안해 보였다.
새스키아는 속으로 자신의 검은 드레스가 좀 지나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테네의 옷을 보고 나면 주저 없이 그걸 입을 거라고 한 올림피아의 말이 옳았음을 금세 깨달았다. 은밀하게 몸에 착 달라붙는 그녀의 흰색 드레스는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특별히 나를 위해 제작된 거야" 아테네는 요염하게 웃으며 안드레아스에게 말했다.
"내가 가장 입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맨몸에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 이번엔 새스키아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말했다. "그러니까 생각나네. 자기 약혼녀한테 내가 아침에 자기 수영장을 함께 쓸 거니까 너무 놀라지 말라고 미리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안드레아스도 나처럼 알몸으로 수영하는 걸 좋아하죠"
알몸으로! 새스키아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안드레아스 쪽을 돌아보았다. 아테네는 새스키아의 표정을 보고, 다른 여자가 알몸으로 자기 약혼자와 수영하겠다는 말에 그녀가 질투하는 거라고 고소해했다.
새스키아가 속으로 화를 삭이는 동안 안드레아스가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신이 딱 한 번 나와 함께 수영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그리고 그때 내 평온한 아침 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해 전혀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고."
"오, 저런!" 아테네가 태연하게 샐쭉거렸다. "자기 약혼녀가 몰랐으면 하는 얘기를 내가 솔직하게 털어놨다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안드레아스..." 그녀가 쉰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자기같이 매력적이고 사내다운 남자라면 당연히 애인이 있다고 그녀도 생각할 거야"
아테네의 뻔뻔스러움에 새스키아는 놀라서 움찔했다. 안드레스가 정말 그녀의 약혼자였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갔다. 아테네의 말에 얼마나 질투가 나고 불안할까. 자기 이전에 사랑하는 남자와 은밀한 관계를 가졌을 다른 여자들을 떠올리고 싶은 여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아테네의 폭로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그녀의 팔을 치우고 대신 새스키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기 쪽으로 너무 바싹 끌어당기는 바람에 새스키아가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걸 그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의 가는 손가락이 그녀 어깨의 매끄러운 맨살을 어루만졌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진동으로 변한 떨림을.
"새스키아는 자신이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소. 물론 내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여자란 것도!"
아테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새스키아는 아테네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는 올림피아의 말에 더욱 동조하게 되었다. 이따금 아테네는 안드레아스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말겠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인지, 본인이 새스키아에게 그렇게 불러줬으면 한 대로<아리>인지는 여전히 그녀의 주의를 끌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새스키아는 일부러 그런 사실을 모른 척했다. 그는 너무나 역겨워 그 뜨겁고 축축한 손이 자신의 팔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예의상 그의 질문에 가능하면 공손하게 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견딜 수 없고 주제넘은 질문일지라도, 그는 자기가 안드레아스의 회계사라면 이 결혼이 깨질 경우를 대비해 안드레아스의 돈이 안전하도록 혼전 계약을 하게 만들겠다고 새스키아에게 말했다. 놀랍게도 안드레아스가 그 대화에 끼어들어, 자기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절대로 그런 합의를 하도록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돈은 사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의 말이 너무 사실 같아 새스키아는 그의 얘기를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새스키아는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으며 그가 속으로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리곤 뒷맛이 썼다. 그와 동시에 그가 얼마나 틀렸는지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올림피아는 자기 언니 역시 안드레아스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식에 똑같이 기뻐했으며, 이 달에 남편과 두 아이들과 함께 이 섬을 찾을 때 새스키아를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형부가 외교관이라서 현재 브뤼셀에 살지만 언니를 정말 만나보고 싶어해요" 올림피아는 그렇게 전했다.
안드레아스의 가족이 그녀를 좋아하고 반기지 않았다면 그가 더욱 싫었으리라. 갑자기 새스키아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녀는 지금 안드레아스 약혼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아테네가 안드레아스를 잡으려고 쳐놓은 덫에서 그가 벗어날 수 있도록 지어낸 거짓,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녀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약혼이 그가 그녀를 속이고 협박해 공모하도록 만든 거짓말이라는 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녀에게 정원을 구경시켜 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가 분노와 경고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보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지?
"새스키아는 오늘 무척 피곤할 거요. 우린 이만 자러 가야겠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불쑥 말했다.
새스키아는 잠시 식탁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드레아스의 결정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 지 사람들의 표정에서 이미 읽을 수 있었다. 새스키아는 목까지 벌개진 자신이 그들의 의심을 더욱 확신시켜 준다는 걸 깨달았다.
"안드레아스, 난 괜찮아요"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의자 뒤로 돌아와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새스키아 언니" 올림피아가 키득거리며 덧붙였다. "왜냐하면 우리 오빠는 분명히 괜찮지 않을 테니까요! 오,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쳐다보지마, 오빠. 내가 장담하는데, 오빤 내일 새벽에 수영을 못하게 될 걸"
"올림피아!" 그녀의 어머니는 뺨을 붉히며 딸을 저지했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의 증오에 가득 찬 얼굴로 새스키아를 노려보았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새스키아는 역시 같이 일어난 아리스토텔레스가 탁한 목소리로 던진 제의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집안 친구로서의 특전으로, 새 식구에게 밤 인사로 키스를 하고 싶군요." 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다가와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기려 했다.
그러자 안드레아스가 그를 가로막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내 약혼녀가 키스하는 사람은 오직 한 남자뿐이오."
"내 충고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멀리 하도록 하시오. 그자는 여자에 관한 한 평판이 몹시 안 좋은 인간이요. 전 부인이 폭행 혐의로 그를 고소했고...."
새스키아는 방으로 들어서다 성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죠? 설마 날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니겠죠?" 안드레아스가 문을 닫는 동안 그녀가 딱딱거렸다. 어떻게 그 따위 회계사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모욕이었다.
"내 말 명심하시오, 새스키아. 당신은 한 가지 이유,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거요. 바로 내 약혼녀 노릇을 하기 위해서란 말이오. 당신 같은 여자가 돈도 벌고 자신의 특기인 일을 하고 싶다는 유혹을 떨쳐 버리기 힘들다는 건 알겠지만, 섣불리 그런 짓에 응하지 말라고 경고해 두겠소. 만약 실제로 그런다면..." 안드레아스는 협박조로 말했다.
만약 그런다면...흥,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남자가 접근하게 놔두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새스키아는 생각했다. 사실 아까 식당에서는 안드레아스에게 동정을 느껴 그를 보호해 주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가 치밀어 맹렬하고 위협적인 그녀의 자존심을 일깨워 놓았다.
"내 마음을 알고 싶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만큼이나 아주 불쾌하고 역겹다는 걸 밝혀두죠" 그녀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나와 그 비열한 인간을 똑같이 취급한다고? 어떻게 감히 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안드레아스는 그녀 못지 않게 분개하며 그녀를 꽉 움켜잡았다.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자제력을 잃을 것처럼 격한 감정으로 타올랐다. "그 자는 짐승이오. 아니, 짐승보다 못한 놈이란 말이오. 작년에만 해도 기소를 당할 뻔했다가 간신히 모면했지. 아테네에게 왜 그런 인간을 곁에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테네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있지"
"당신을 질투하게 만들고 싶은가 보죠" 새스키아가 대뜸 말을 뱉어놓고 나서 그의 눈빛이 거센 분노로 타오르는 걸 보고 즉시 후회했다.
"그녀가 그렇다는 거요, 아니면 당신이 그렇다는 거요? 오, 그래, 저녁 식사 내내 그 자가 당신을 쳐다보고 어루만지는 걸 보았지."
"그건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새스키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
하지만 그런 말이 그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그녀는 그러한 말들이 그를 더욱더 분노하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역겹다고?" 안드레아스가 이를 갈며 핏대를 세웠다. "이런 말을 하는 건 기사도 정신에 위배된다는 걸 알지만, 아까 당신 눈빛에서 본 것은 역겨움이 아니던데? 당신 목소리에서 들은 건, 당신 몸에서 느낀 건 분명히 역겨움이 아니었지. 안 그렇소?" 그가 사정없이 쏘아붙였다.
새스키아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모르겠어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녀가 정신 없이 둘러댔다.
그건, 잠시 뒤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녀가 오늘 저녁에 했던 말들 중에서 최악의 말이었다. 왜냐하면 안드레아스가 즉시 달려들어 은근하고 잔인하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내가 기억나게 해주지"
새스키아는 저항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안드레아스가 듣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입술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래, 내가 그렇게 역겹다는 걸 발견한 게 정확히 언제였소, 새스키아?" 안드레아스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 팔로 껴안으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아니면 이렇게 했을 때?"
그는 그녀의 입술을 간질이고 지분거리며 애를 태웠다. 그녀의 몸에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느끼고 싶지 않은 뜨거운 흥분이 일었다. 그의 혀끝은 그녀의 입술을 억지로 벌리더니 부드러운 선을 따라 애무를 계속했다. 새스키아는 어쩔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내며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하지만 안드레아스는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듯 했다.
"뭐요? 아직도 모르겠소? 이유를 모르겠군" 그가 비웃으며 모질게 덧붙였다. "아니면 그런 의문은 가질 필요도 없는 거요? 당신은 남자에게 몸을 던지는 데 익숙한 여자지. 쾌락을 즐기는 데 익숙한 여자이고. 지금 이 순간은 나한테서 그런 즐거움을 원하는 거고!"
"아니에요" 새스키아는 가까스로 부인하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벗어나려 했다.
"내 말이 맞다니까!" 그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어서 인정해요, 새스키아. 날 원한다는 걸....당신 몸이 내 몸을 원한다는 걸. 익숙한 성적 만족을 원한다는 걸...애타게 갈망한다는 걸"
새스키아는 그의 말이 의미하는 걸 깨닫고 몸서리치는 충격을 느꼈다. 그를 원했지만 그가 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원할 뿐이었다. 연인으로서 그를 원할 뿐 단순한 섹스 상대로서는, 그가 잔인하게 말한 대로 원초적인 욕구를 풀기 위한 상대로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했다.
새스키아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었지만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남자라고,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더 이상 메건이 장애물은 아니지만 안드레아스에 대한 생각은 확실하게 정리했다고 믿고 싶었다.
"놔줘요, 안드레아스" 그녀가 요구했다.
"내 말대로 날 원한다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싫소" 안드레아스가 거절했다. "아니면 지금 나더러 내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해 보이라고 부추기는 거요?"
새스키아는 숨막히도록 위험한 두려움과 흥분이 몸 안에서 갑작스럽게 퍼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올바른 반응을, 현명하고 제정신이다 싶은 반응을 생각해 내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날 너무 밀어붙이지 마시오, 새스키아. 당신을 원하오. 이미 그걸 알고 있겠지? 당신 같은 여자가 그걸 모를 리가 있나? 내 몸에서 그걸 느낄 수 있잖소, 안 그렇소? 여기서 우리가..."
그가 그녀를 몰아세웠다.
새스키아의 손이 은밀하게 고동치는 그의 단단한 남성 위에 강제적으로 닿았다. 잠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기댄 채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에게서 손을 뗄 힘만 있다면, 그가 강요하는 은밀한 행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 줄 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절망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그를 만지고 음미하고 그를 알고 싶은 욕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스키아는 나직이 신음하며 강렬한 욕망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의 심장이 세차게 뛰어 그녀의 몸 안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오늘 저녁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을 때, 사랑하는 연인으로 인정받는 손짓일 때는 기쁨에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그녀가 느끼는 흥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를 갈망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테네가 감질나게 묘사했던, 당당하게 알몸으로 물살을 가르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드레아스가 뜨겁게 누르는 입술 사이로 그녀가 이번엔 높고 날카로운 소리로 신음했다. 그는 열정적으로 그녀의 전신을 애무하면서 놀랍고 관능적인 세계로 이끌었다 이제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 아래서 적당히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얽히는 그의 혀를 그녀의 혀로 감아 말면서 날카로운 쾌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신은 날 원해. 날 필요로 해..."
새스키아는 키스를 통한 그의 입 모양으로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부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무방비 상태로 그를 향한 격렬한 반응을 나타냄으로써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갑자기 그 밖의 모든 것은 잊혀지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외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이, 그리고 원하는 것이...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곳에 있었다. 안드레아스의 손이 단단하게, 갈구하는 애태우듯 위험할 정도로 남자다운 감촉으로 느껴지자 그녀는 신음하며 전율했다. 이제 그녀는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발을 들여놓은 이 새로운 세계에는 이성이 자리할 곳이 없었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 당신을 보고 싶소. 당신을 지켜보고 싶소." 안드레아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나를 보았으면 하오. 오, 이제야 왜 수많은 남자가 당신의 제물이 되는지 알겠군. 당신에게 뭔가가, 마력이....왜 그러오?" 갑자기 새스키아의 몸이 굳어지자 그가 놀라서 물었다.
새스키아는 차마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몇 마디의 경멸 섞인 말로 그는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그녀의 멋진 신세계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 예전의 세계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속이 메슥거렸다.
"싫어요. 싫어요! 이러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정신없이 저항하며 안드레아스를 밀쳐냈다.
"도대체 왜?"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지만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게 단순한 장난이라면...세상에, 아무튼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군. 이런 일은 생각할 수조차...아무래도 남자가 독신생활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소."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모질게 내뱉었다. "내가 이 정도로 어리석다니..." 그는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가 새스키아가 움찔하는 걸 보고 말을 멈췄다.
"당신은 안전하오. 당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거요. 절대로 그런 일은..." 그가 냉혹하게 말한 뒤 고개를 젓고는 얼른 걸음을 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보겠소."
새스키아가 깨어났을 때 방안은 아직 어두웠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수영하는 소리를 다시 들었다. 수영장으로 나가는 안뜰 문이 열려 있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안드레아스가 수영을 하고 있어.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3시에 안드레아스는 수영을 하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수영장을 오가며. 그녀는 반대편으로 헤엄쳐 가는 그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가 방향을 틀자 그녀는 다시 누웠다. 지켜보는 걸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시트 밑으로 그녀는 작은 팬티만 걸친 채 알몸이었다. 안드레아스가 그녀에게 잊어버리고 사주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잠옷이었다. 그 사실을 발견한 그녀는 거의 15분 동안이나 문을 잠근 욕실 안에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결국은 용기를 내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나와 침대를 향해 정신없이 돌진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안드레아스는 이미 자기 사무실에 콕 처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사무실이 아니라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시트 밑에서 새스키아의 머리가 분주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밤에 혼자 수영을 하고 있을까? 안전할까? 혹시? 물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이불 밑으로 들어가 마음 졸이며 수영장 쪽을 쳐다보았다. 물이 고요하고 잔잔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안드레아스, 어디 갔어요? 이불을 붙잡고 흘낏거리던 새스키아는 한참 후에야 물 속에서 완전 알몸으로 나오는 그를 발견했다. 완전히 알몸으로! 그의 몸에서 시선을 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여자의 욕망 어린 시선이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그의 남성미 넘치는 알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이지 어떤 여자라도 안드레아스의 모습에 깜짝 놀랄 거야. 새스키아는 타일 바닥 위를 걸어가는 그의 육감적인 뒷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피부는 아직 물기가 남아 매끈하게 반짝거렸고 그 밑으로 불끈거리는 근육은 그녀의 몸에 놀랍도록 당혹스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순진하게도 새스키아는 남자의 나체상이나 그림을 보는 것과 실물을 보는 것과는 거의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런 차이를 알게 만든 건 어쩌면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안드레아스가 갑자기 돌아서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내가 보일까?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새스키아는 꼼짝 않고 그대로 누워 그가 눈치채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만약 이쪽으로 다가와 빈정거린다면 굴욕감을 견디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새스키아는 열망의 소리를 용케 억눌렀다. 그가 지금 이곳으로 와 그녀를 안고 만지고 키스하고....그녀가 바라는 대로 그녀를 취한다 해도 그건 사랑에서가 아니라 욕정 때문일 것이다. 정말 그걸 바라는 걸까? 그녀는 자신에게 엄정하게 물었다. 아니었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건 그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무의식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이윽고 안드레아스가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불빛에 그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녀가 지닌 모든 여성적인 본능과 욕망이 그걸 통제하려는 시도를 괘씸하게 무시하자 그녀는 날카롭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모습은 완벽했다. 처녀다운 순진한 상상으로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직이 감탄하며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다시 한 번 방 쪽으로 돌아보자 새스키아는 숨을 죽이고 기도하고 바라고 기다렸다. 그가 가운을 집어들어 몸에 걸친뒤 그녀가 있는 방의 반대편으로 걸어가자 새스키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로 가는 거지? 사무실로 돌아가나?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오랜 시간 동안 새스키아는 움직일 수도, 잠을 이룰 수도, 심지어 생각할 수도 없어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자신을 헤픈 여자로 대하고, 협박하고 위협하고, 사실을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새스키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감정이, 가슴이, 아주 깊은 자아가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외치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일광욕? 살다 보니 오빠가 한가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날도 다 있네"
새스키아가 지금껏 본 수영복 가운데 가장 작은 비키니를 입고 별장에서 뛰어나온 올림피아가 그녀 옆자리에 와서 누우며 안드레아스를 놀렸다.
"새스키아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좀 쉬어야 하는데 무리를 하거나 강한 햇빛 아래 너무 오래 누워 있을까 봐 그래" 안드레아스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동생에게 거짓말을 했다.
"오, 저런!" 올림피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백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양심에 찔린 새스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지쳐 보이는 건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옆에 누운 남자를 생각하느라 자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솔직히 고백할 수는 없었다. 너무도 개인적이고 은밀한 상상을 낮에는 감히 떠올릴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퀭한 눈과 핼쑥한 얼굴을 여독 탓으로 돌렸다.
"이렇게 되면 벌써 우리 오빠의 생활 방식을 한 가지 고쳐놓은 셈이 되네요. 새스키아 언니" 올림피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별장에 올 때면 보통은 자기 사무실에서 나올 줄을 모르거든요. 할아버지는 언제 오신대?" 그녀가 안드레아스에게 물었다.
"지금으로선 할아버지가 이 섬에 오실 의향이 전혀 없으시다니 놀랍다고 해야겠네" 아테네가 자기 회계사와 함께 집 안에서 나와 합류하며 안드레아스를 대신해 대답했다.
새스키아는 그들을 보고 좀 낙담했다. 아침 식사 내내 아리스토텔레스가 집요하게 찬사를 늘어놓고 성적으로 자극해대는 통에 그를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던 것이다.
올림피아가 얼굴을 찡그리자 아테테가 심술궂게 덧붙였다.
"할아버지는 지금 자기를 마음에 안 들어하셔, 안드레아스"
"할아버지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안 들어 하시지. 성미도 급하시지만 다행히 금방 잊어 버리셔서...." 안드레아스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안드레아스는 새스키아더러 피부가 하얘서 파라솔 밑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랩 치마를 끄른 아테네가 올림피아보다 더 작은 비키니를 입은 걸 본 새스키아는 그녀의 짙은 금색 살결이 부러웠다.
"그늘에만 누워 있어야 하다니 귀찮겠어요" 아테네가 비아냥거리듯 내쏘고는 고약하게 덧붙였다. "난 하얀 피부가 싫더라. 너무....하여튼 새스키아의 피부를 볼 때마다 맑은 설화석고를 연상했거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안드레아스가 끼어들었다. "설하 석고라? 하지만 그건 너무 차가운데!"
아테네가 새스키아를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안드레아스를 향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따끔거리나봐. 그럴 때 좋은 치료법을 알고 있지. 내가 오일을 발라줄게. 안드레아스. 그럼...."
새스키아는 저도 모르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거라면 내가 해줄게요. 달링" 그리고 나서 아테네를 돌아보며 대담하게 덧붙였다. "약혼녀의 특권이죠"
새스키아는 올림피아가 잘했다는 표정으로 건네주는 오일병을 받아들고 안드레아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가볍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새스키아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손에 오일을 묻힌 다음, 그와 아테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드레아스의 납작 엎드린 몸에 천천히 오일을 발라주었다. 아테네는 풍만한 가슴을 과시하는 자세로 누워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안드레아스의 어깨에 오일을 바르는 동안 그녀의 머리가 얼굴 위로 흐트러졌다. 손 밑으로 느껴지는 그의 피부는 따뜻하고 매끈했다. 어젯밤에 보았던 것처럼 매끈했다. 새스키아는 심하게 손이 떨리자 잠시 멈췄다. 어젯밤! 지금 그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꾸 그 생각이 떠올랐다. 웬일인지 그녀의 손길까지 그의 몸 위에서 관능적으로 움직이며 쓰다듬고, 매만지고, 본능적으로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러자 손 밑으로 그의 근육들이 뭉치는 게 느껴졌다.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불쑥 말했다. "됐소. 어차피 수영을 하려던 참이니까"
그러면서도 몇 초가 지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장 끝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입수해 한참을 물밑에서 헤엄치다가 마침내 밖으로 나오더니 힘차고 빠른 포즈로 수영장을 오가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수영할 때면 늘 그렇듯이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싹 비워 버리려고 노력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아니, 적어도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전혀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눈을 감지 않고도 새스키아의 손이 부드럽게 애무하듯이 자신의 몸 위에서 움직이던 때의 느낌을 정확히 되살릴 수 있었다.
그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욱신거리는 몸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갈구했다. 누군가에 대해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누군가를 이렇게 강렬하게 필요로 해본 적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본 적이 그는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알 것이다. 그녀처럼 경험 많은 여자는....밤에 남자를 찾아 술집을 기웃거리는 여자는 당연히 알 터였다. 너무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성적으로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그의 품에 안겼을 때의 느낌이나 부드럽고 뜨겁고 달콤한 키스나 욕망으로 흐릿하다가 금세 놀라는 눈짓을 하곤 하던 그녀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던 것도 그의 허를 찔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소유욕을 지닌 남자로서의 강렬한 성취감과 자존심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물론 실제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안 그런가? 그녀는 그저 연기를, 그가 억지로 시킨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을 뿐이다.
안드레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속으로<억지로>라는 말을 쓴 것과 그것이 불러온 인정이 그의 양심을 사포처럼 문질러댔다. 전혀 그답지 않은, 누군가에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킨다는 건 철저히 지켜온 그의 신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현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두려움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금 해명을 하는 거지, 변명하는 게 아냐. 그는 엄하게 자신을 훈계했다. 하나의 위험을 잠재적으로 더욱 위험한 것과 바꿔버렸다는 걸 지금 발견했다 해도 본인 외에는 비난할 사람이 없었다.
자리를 뜨기 전에 의지대로 되지 않고 솟구치던 그의 몸을 새스키아가 보았을까? 아테네는 보았다. 아테네는... 안드레아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열아홉 살에, 그것도 아직 학생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어머니와 누이들을 부양할 만큼 강해졌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일부는 여전히 어린애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원통해하며 혼란스럽고 화도 나고 아버지가 그리워 밤이면 가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때가 분명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를 잃고 그를 유혹하려고 아테네가 끊임없이 시도하던 그때가. 그 두 사건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를 성인이 되게 했고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를 향한 아테네의 욕망은 <채털리 부인>에 나오는 고전적인 방식의 유혹이 아니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안드레아스가 집에 돌아와 있을 때 그녀는 번번이 저돌적으로 돌진해 왔다. 하지만 아직 학생인 그로서는 그녀가 성인 여자들이 하는 이상한 놀이를 즐긴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방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길을 돌려 달아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이나 달아나는 거니까. 안드레아스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가 원하셨던,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필요로 하는 성인 남자이고 싶었다.
"이 방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녀의 알몸을 쳐다보지 않고 그가 무뚝뚝하게 따졌다. "당신은 약혼한 몸으로, 곧 결혼할 사람이잖아요?"
아테네는 어린 그를 비웃었지만 나중에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가라고, 나가지 않으면 집안 일꾼들을 시켜 강제로라도 끌어내겠다고 말하자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의 마음을 돌려보느라고 즉시는 아니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방에서 나갔다.
"넌 어른의 몸을 가졌어" 그녀가 화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바보처럼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지. 내가 그걸 가르쳐주면 안 될까?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난 두렵지 않아요" 그는 냉철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가 제의하는 것을 거절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와 혐오감이었다.
아테네는 남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견딜 수 없어하는 여자였다. 끈질겼다. 그러나 아테네의 뜨거운 감정이 그에게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와의 일은 할아버지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굳이 건강 문제가 걸려 있지 않더라도 안드레아스는 할아버지와 다투기 싫었다. 노인네가 완고하고 다루기 힘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아테네로부터 얼마나 많은 비난이 가해질지, 늙어 가는것과 앞날에 대한 할아버지의 조심스런 두려움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지울지 안드레아스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선택한 방법이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을 뿐이라는 게 정말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새스키아가 좋아한다고 했던 고대 그리스 신화가 남긴 현대 윤리성의 한 예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리스 신화를 사랑할지는 몰라도 그를 절대 사랑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들이 싫어 안드레아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주 예쁜 반지를 끼고 있네" 아테네가 일광욕 의자에서 일어나 새스키아 옆으로 다가와 서며 깔보듯이 말했다.
그곳에는 두 사람뿐으로, 아테네의 회계사는 전화를 한다고 자리를 떴고 올림피아는 어머니를 도와 드린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해서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약혼반지가 결혼을 보장해 주는 건 아냐. 보아하니 현명한 아가씨 같은데, 새스키아. 안드레아스는 아주 돈도 많고 경험도 많은 남자야. 그는 쉽게 싫증을 내지. 아가씨도 알고 있을 거야. 아가씨가 실제로 안드레아스와 결혼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안드레아스의 할아버지가 도착하시면 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거고, 그분은 안드레아스가 아가씨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으시거든. 구식 사고방식을 지닌, 지극히 그리스적인 분이라서 말야, 하나밖에 없는 손자와 본인이 이룩해 놓은 사업의 미래를 위해 다른 계획을 세우고 계시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새스키아를 평가하듯이 바라보았다. 새스키아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테네 역시 안드레아스의 미래에 대해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가 정말 안드레아스를 사랑하신다면 본인 감정보다 그가 훨씬 더 중요할 테지. 안드레아스는 할아버지에게 아주 헌신적이야. 아가씨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면 금전적으로는 두말할 것도 없고 감정적으로 그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 곰곰히 생각해 봐. 안드레아스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금전적으로 다들 할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있는데, 그분이 안드레아스를 멀리하면 안드레아스는 어머니와 누이들로부터도 멀어지게 되는 거야"
아테네는 깊이 한숨을 내쉰 뒤 일부러 상냥하게 물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 안드레아스가 아가씨를 원할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거든. 새스키아, 자기도 알고 있겠지? 할아버지는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 주시거든. 아, 물론 내 사업과 당신 사업이 결합되길 원하시기 때문이지. 그게 그리스 식 일처리 방법이야"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새스키아를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만장자가 자기 상속자를 가난한 외국인과 결혼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그리스 식이 아니지. 하지만 우리 좀 더 기분 좋은 얘기를 하도록 하지. 아가씨와 내가 서로에게 좋은 합의점을 찾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난 가만히 앉아서 안드레아스가 아가씨 곁을 떠나는 걸 지켜볼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게. 난 안드레아스에게 그의 아들을 안겨주기 힘들어질 나이가 되어가고 있어. 그러니 우리 둘 다를 위해 제안 하나 하지. 안드레아스의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준다면 그 대가로 백만 파운드를 주지"
새스키아는 충격으로 얼굴에서 핏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일광욕의자에서 일어나다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꼿꼿이 일어선 그녀는 아테네와 마주보고 섰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나도 살 수 없고요. 백만 파운드로도, 1억 파운드로도! 아무리 많은 돈이라 해도 그럴 수는 없죠" 강경하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언제라도 안드레아스가 우리 약혼을 깨고 싶다면, 그건 그가 결정할 일이지..."
"이제 보니 바보로군. 그걸 알고 있어?" 분노와 악의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테네가 말했다. "안드레아스가 혼전 합의를 할 뜻이 없다고 했지만 그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 하! 설령 그가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의 할아버지가 혼전 합의를 하도록 시킬 거야. 그러나 그가 아가씨에게 싫증을 내게 되면, 틀림없이 그럴 테지만, 아가씨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의 아이조차도 가질 수 없어. 그리스 남자들은 절대 아이를 포기하지 않거든. 그리스 집안에선 자기네 상속자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단 말야"
새스키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랩 치마를 챙기지도 않고 달려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집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스키아가 집안에 도착했을 때 올림피아가 안뜰 문으로 막 나오던 중이었다.
"언니...."
그녀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새스키아는 아무하고도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고개만 젓고 그냥 지나쳤다. 그녀는 아테네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 어떻게 감히 아테네는 그녀가 돈을 받고 사랑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돈이 그녀에게 안드레아스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그녀가 행여 그럴 거라고....
새스키아는 불쑥 걸음을 멈췄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녀는 돌아서 다시 밖으로 나와 수영장 쪽이 아닌 그 너머, 섬과 절벽을 따라 나 있는 길로 향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테네와 새스키아의 대화를 엿듣고 화가 난 올림피아는 아테네가 혼자 일광욕을 하는 곳으로 서둘러 쫓아갔다. 자신이 새스키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에게 말해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새스키아 언니에게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돈을 주고 오빠 곁을 떠나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오빠!
올림피아는 갑자기 멈춰 섰다. 어쩌면 아테네가 한 짓을 오빠에게 일러서 오빠가 직접 그녀를 상대하도록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스키아는 아주 괴로워 보였는데, 그럴 만도 했다. 아네네를 상대할 권리를 빼앗으면 오빠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내부의 경고에 올림피아는 마지못해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오빠를 찾아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9장
섬 주위로 난 길을 세 바퀴째 돌고 있던 새스키아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계속 이렇게 걸을 수는 없었다. 이미 충분히 걸은 터였다. 그녀는 천천히 별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에 대한 사랑이, 그를 향한 열망이 그녀의 마음을 헤집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안드레아스에게 자비를 구해 이제 그만 <합의>를 풀어달라고 사정해야 하나? 아테네가 한 짓을 굳이 그에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일단 그가 알게 되면, 안드레아스도 바보는 아니니까, 기민하고 빈틈없는 사업가니까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그가 안다는 게 새스키아로서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별장에 도착한 새스키아는 곧장 <그녀>방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방엔 아무도 없었다. 하녀가 다녀갔는지 침대가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얼른 수영복을 벗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안드레아스!" 아테네가 할아버지 사무실에서 나오는 그를 보고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유혹하듯이 불렀다.
"지금은 안 되겠소, 아테네" 안드레아스가 퉁명스레 그녀의 접근을 차단했다.
지난 두 시간 동안, 갖고 싶은 것은 고사하고 갖게 되리라 예상도 하지 못한 감정을 수습하던 그는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겨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더 이상 자신에게 진실을 숨겨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는 새스키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떻게? 왜? 언제? 아무리 분석적으로 파헤쳐 봐도 그런 질문에 대한 이성적인 대답을 전혀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과 몸과 영혼이 계속해서 그녀를 원한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녀를 갈망한다고, 이미 필사적인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던 이성적인 부분이 감히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의 인생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그의 감정이 맞서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똑바로 보라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보았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듣지 않았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과거의 판단 착오와 모든 것을 사랑했다. 판단 착오? 술집에서 남자들을 물색하고, 그들에게 거의 자신을 파는 단계까지 갔던 것은....돈 때문이 아니라면 분명 그들이 제의하는 거짓 사랑을 위해서겠지!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냐! 그의 마음은 그녀를 열심히 두둔하고 있었다. 새스키아는 어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단지 그걸 보상받으려는 것뿐이었으리라. 사랑으로, 자신의 사랑으로 그녀는 완전히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지금 당장은 두 사람이 함께 할 미래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금의 그에게는 어떤 미래도 그녀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일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안드레아스의 머릿속에는 그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결국 굴복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결국 새스키아를 찾아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자는, 필요하다면 애원이라도 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새스키아가 아직 밖에 있소?"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감정을 새스키아에게 전하고 싶어 그가 아테네에게 물었다.
아테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의 눈빛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새스키아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면 그가 그녀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테네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오...." 그녀는 태연하게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랐어?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산책 나갔는데...안드레아스,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싫어하는 줄은 알지만 말야.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 둘 다 잘 알잖아. 게다가 새스키아도 그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있고 말야. 물론 자기가 주위에 없는 동안..."
"오빠"
몇 분 뒤 올림피아가 오빠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얘긴지 나중에 듣도록 하자, 올림피아"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자기 방으로 난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쩌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은데!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올림피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글쎄, 자신이 하려는 말이 오빠의 안 좋은 기분을 밝게 해주진 못하겠지만, 오빠가 알아야 할 일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그걸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뒤로 문을 꽝 닫은 안드레아스는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었다.
"새스키아?"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큰 걸음으로 욕실쪽으로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새스키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젖은 몸에 수건을 두른 뒤였다. 다행히도.
"왜 샤워를 하고 있소?" 안드레아스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던 그녀가 잠겨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산책을 했는데 날씨가 더워서..."
안드레아스는 전신을 타고 갑자기 솟구쳐 올라온 질투심 때문에 온몸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 질투심은 새스키아가 지금 목욕을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아주 생생하고 지극히 성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서서 질투심에 이를 갈았다. "기다릴 수 없었던 거지, 안 그렇소? 그자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 갔었소?"
"그 자라뇨?" 새스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라 따지기 시작했다."도대체 무슨"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듣고 있지 않았다. "바깥이었소, 아무나 볼 수 있게? 그런 걸 좋아하오, 새스키아? 그렇게 철저히 자기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을? 당연히 그러실 테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까. 당신은 함부로 취급당하고, 이용당하고, 그러다가 버려지길 바라지. 마치...아, 그만둡시다. 어쨌든 그런 걸 좋아한다면 어디 내가 당시의 기대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지 알아볼까? 당신이 그렇게 내놓고 바라는 걸 내가 줄 수 있는지...."
안드레아스는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다른 남자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몰아내고 싶은 열망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냉정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이 남자를 지금처럼 터질 듯한 분노와 열정을 지닌 남자로 바꿔 놓은 걸까? 새스키아는 어리둥절했다. 아주 강렬하게 와 닿는 열정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어질어질한 머릿속을 찔러왔다. 그에게서 발산된 열기는 그녀의 신중하고 견고한 방어막을 깡그리 녹여내고 있었다. 그녀의 일부가 속으로 은밀히 바라는 일 아니던가? 그가 저렇게 맹렬하고 원초적인 욕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거의 자제력을 잃어 가는 안드레아스의 모습이 그녀의 감정과 갈망을 자유롭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 거야" 안드레아스가 원색적으로 속삭이며 그녀를 자기 쪽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내 거야. 새스키아. 그리고 내 것이라는 건 그걸 만끽해 본다는 뜻이지" 그가 목쉰 소리로 덧붙였다.
새스키아는 그가 만지고 있는 곳의 살이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아주 유유히, 그녀의 팔뚝과 어깨를 지나 목덜미 뒤를 애무해 왔다. 그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등을 젖히고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키스해 줘요, 안드레아스..."
그녀가 정말 그런 말을 했나? 쉰 목소리로 낯설고 요염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요구는 안드레아스의 눈빛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키스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한 것도 해줄 생각이오" 안드레아스는 여유 있는 손길로 그녀의 몸에서 수건을 벗겨냈다. "훨씬, 훨씬 더한 것도" 육감적인 목소리로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게 키스라면...."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쇄골과 목에 손을 뻗어 엄지로 여린 골격을 어루만지면서 미친 듯이 팔딱이는 그녀의 맥점에 뜨거운 숨결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디에 키스해 줬으면 좋겠소, 새스키아. 여기? 여기? 여기?"
그의 입술이 애태우듯 그녀의 목에서 턱으로, 그리고 입술을 제외한 온 얼굴을 누비고 다니자 새스키아는 열망에 찬 신음을 나직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분 좋은 고문을 견딜 수 없게 된 새스키아는 그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려 그토록 애타게 갈구하던 강렬한 흥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황홀한 안도의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었다.
"안드레아스...안드레아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속삭이며 그의 머릿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혀끝으로는 그의 단단한 입술 윤곽을 정신없이 더듬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안드레아스는 거울 속에 비친 두 사람의 엉킨 몸을 보았다. 새스키아의 발가벗은 뒷모습은 고전적인 조각상처럼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살아 숨 쉬는 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의 달콤한 혀가 가하는 맹렬한 공격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에게 압착된 단단한 젖가슴이 그녀를 느끼는 것 외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잊게 만들었다. 그녀의 곱고 흰 켈트족 피부에 비해 놀랍도록 남자답고 거뭇한 손을 지닌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는 자신의 몸에 그녀를 꼭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의 남성을 느낀 새스키아가가 흥분에 떨며 육감적인 소리를 내지르는 걸 음미했다. 그의 옷은 더없이 불필요한 장애물이었지만 요염한 고문으로 자제력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그녀의 혀를 벌 줄 때까지 미처 그것들을 벗을 여유조차 없었다.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입술을 벌려 완벽한 주도권을 잡았다. 새스키아는 깊고 강렬한 쾌감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 새스키아는 숨을 몰아쉬고 전율하면서 달콤하고 은밀한 혀와 부드러운 살결의 알몸을 안드레아스에게 모두 내맡겼다. 둘 사이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녀의 전 생애에서 절정의 위치를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안드레아스의 품에서 그녀는 사랑과 욕망이 완벽한 모습으로 화해하고 있음을 비로소 발견했다. 새스키아는 그에게 하려던 말을, 자신이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말끔히 잊어 버렸다. 이것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안드레아스가 취할 듯이 관능적인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전에 어떤 여자였는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녀는 그의 여자였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새스키아가 쳐놓은 큰 창문의 천연 린넨 커튼이 햇빛을 산광시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은은한 기운이 방안 전체에 떠돌면서 그녀의 흰 피부를 영묘한 반투명 빛살로 감싸주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팽팽하게 긴장해 있는 그녀의 젖꼭지를 그가 조심스럽게 음미하자, 그녀의 온몸에서 격렬한 전율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오, 난 서두르지 않을 거요" 정신없이 몸부림치며 애원하는 그녀의 몸을 거부하자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안드레아스는 쉰 목소리로 겨우 그녀의 요구를 물리쳤다. "천천히 모든 걸 음미하고 싶소!" 그는 빨고 있던 그녀의 유두 주위를 엄지 끝으로 에로틱하게 원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당신을 원해요" 새스키아가 속삭이는 소리로 애원했다. 자신이 무심결에 내뱉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멈칫했다. 닥쳐올 위험을 감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그 역시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었던 것이다. 옷을 벗던 손길을 잠시 멈춘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몸 위로 내려오더니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곳에서 날 원하오. 새스키아? 어서 말해 봐"
그는 손 하나를 들어 그녀의 몸 중앙을 부드러운 손마디로 쓸다가 보드랍게 부풀어 오른 은밀한 중심부로 가져갔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새스키아" 안드레아스가 손끝으로 민감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새스키아는 그의 손이 일깨워 놓은 뜨겁고 강렬한 열망 때문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말해 봐. 당신이 뭘 원하는 지 말해 봐요" 안드레아스는 녹아내릴 듯 황홀하고 감미로운 키스 사이사이로 한마디씩 끊어가며 끈질기게 물어왔다.
그녀만의 은밀한 세상에서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끌어당기는 천연 자석이 되었고, 그녀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그녀가 되려했다. 그리고 그녀가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자 했으며, 마침내 그녀의 세계를 떠받히는 축이 되었다.
"당신을 원해요. 당신을 원해요. 안드레아스, 당신만을..." 그녀가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가 입술을 덮고 낙인을 찍듯 뜨겁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두 팔에 감긴 채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그의 옆얼굴을 어루만졌다.
"날 쳐다보시오" 그가 요구했다.
맹렬하게 번득이는 눈길에 사로잡혀 그녀는 순종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안드레아스가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새스키아는 마치 온몸이 그를 향한 갈망으로, 그를 향한 욕구로 녹아 내리는 듯했다. 손을 뻗어 그의 맨 어깨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입술을 그의 목에다 댄 채 저도 모르게 욕구가 담긴 긴장된 작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손 밑에서 그녀의 몸은 부드러워지고 마술에 걸린 듯 열렬히 반응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 수 없을 것 같군. 당신을 너무 갖고 싶거든!" 그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뒤 또다시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애타게 입술을 들어 올리면서 욕망으로 몸부림쳤다. "다음번에는 좀 더 천천히 즐길 수 있을 거요" 그가 그녀의 젖가슴에 대고 목쉰 소리로 말했다.
다음 번...새스키아는 행복해 죽을 것 같았다. 다음 번이라는 건 그 역시 그녀와 같은 감정을, 그녀가 느끼는 식으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맹렬한 열정에, 진짜 연인들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두 육체의 완벽한 결합에 새스키아는 자신들을 에워싼 공기가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탄성을 지를 때마다, 놀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심장이 고동 칠 때마다 새스키아는 육체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점점 그에게 구속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마침내 <지금이오. 새스키아...오오, 지금!>이라고 속삭였을 때 그녀는 몸이 먼저 그에게 열렬한 동의를 허락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가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고서 그와 만나기 위해, 그를 느끼기 위해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를, 고통과 성취의 소리를 지르는 걸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만이 갖고 있는 은밀하고 묵직한 체온으로 그녀의 몸속을 채우자 새스키아는 첫 경험이 안겨주는 충격으로 잠시 긴장했다. 그러나 곧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순간, 새스키아의 육체가 예기치 않게 저항하는 걸 느낀 안드레아스는 머리와 감정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런 사실에 반응하길 애써 거부했다. 그의 몸은 그녀가 뜨겁게 은밀히 그를 에워싼 채로 자신을 달래면서 방금 체험한 것을 잊게 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녀의 여성이 그의 남성에게 원하는 아주 오래된 요구를 충족시켜 달라고 조르길 바랐다. 더 깊게, 더 단단히, 더 강하게, 가장 깊은 곳에 이를 때까지....안드레아스를 에워싼 그녀의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이 뜨겁게 수축하며 그를 재촉했다. 더 깊게, 더 강하게, 더 확실하게, 거기에 이를 때까지, 그래요. 거기....거기..... 그들이 마침내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안드레아스는 심장과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새스키아는 진짜 성취가 어떤 것인지, 그것이 여자에게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찌를 듯 강렬하고 뜨거운 행복의 물이 충만한 그곳으로 올라가자 달콤한 충격을 느끼며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가 떨고 있었다. 그녀였나? 아니면 두 사람 다인가? 안드레아스는 그 믿을 수 없는 순간에 탄성을 내지르더니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무한 속을 질주하며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잠시 뒤 숨을 고르고 정신을 가다듬은 안드레아스는 새스키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커다란 눈에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아파서? 자기 때문에....자신이 한 짓 때문에?
안드레아스의 사고는 여전히 현실에서, 그의 머리가 강요하는 진실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가 처녀일 리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 분노와 죄책감이 그렇지 않다고, 그녀가 처녀였다고 말해 주었다. 용서할 수 없게도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순결을 짓밟으면서 이기적인 만족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제 기분을 이기지 못해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어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마침내는 그녀를 울게 만들었다. 자신의 행동이 혐오스러워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거두었다.
"안드레아스..." 새스키아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왜 물러나는 거지? 왜 안고, 어루만지고....사랑해 주고 안심시켜 주지 않는 거지?
"왜 그래요? 뭐가 잘못 됐나요?" 그녀가 애원하듯 물었다.
"그걸 꼭 내게 물어봐야겠소?" 안드레아스가 쌀쌀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왜 말하지 않았소. 멈추라고"
그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가 그녀에게서 달콤한 기쁨의 안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불안과 절망감을 들여놓았다. 그녀에겐 그토록 굉장하고 완벽하고 불가사의했던 것이 안드레아스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안드레아스는 통찰력이 없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처녀였는데, 빌어먹을 자신은 사실상 그녀를 강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이 역겨웠다.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만하라고 했어야지" 그는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몸에 수건을 두른 뒤 자신의 목욕 가운을 들고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가 가운을 입는 걸 조용히 기다렸다.
멈추라는 말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새스키아는 비참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손이 떨려서 옷을 여미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입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성마르고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대신 옷을 입혀 주었다.
"혼자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하다는 말이오. 당신도 그걸 알고 있잖소?" 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새스키아의 목소리와 눈에 역겨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열을 내서 말했다. "아뇨, 절대로, 그렇게 불쾌한 사람과는..."
"하지만 그와 함께 산책을 나갔잖소?"
"아뇨, 그러지 않았어요" 새스키아가 부인했다.
"아테네 말로는 당신이 산책을 나갔다고 하던데..." 안드레아스가 집요한 추궁을 계속했지만 새스키아는 그가 말을 끝내도록 놔두지 않았다.
"네, 그랬죠. 혼자서....부탁할 게 있었어요" 그녀는 말을 멈춘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안드레아스. 더 이상......"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말고! 안드레아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그런 짓을 했으니....그렇게 행동했으니....당연히 새스키아는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것 같았다.
"내게 진작 말해 줬어야지" 그가 날카롭게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당신이 처녀인 줄 알았더라면..."
안드레아스는 그녀의 순결을 취한 건 염려되어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새스키아에게는 육체적 순결을 잃는 것보다 감정적인 순결의 상실이 훨씬 더 큰 상처로 자리 잡았다. 그녀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어쩜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미쳤던 거야! 그녀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거야!
"나는 당신이..." 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그녀가 중단시킬 차례였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아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신 입으로 똑똑히 밝혔잖아요. 돈 때문에 몸을 던진 어리석은 싸구려 여자로 말이에요. 그것에 대해 내가 해명하려고 했지만 당신은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당신은 날 최악으로 생각하고 싶어 했어요. 그리스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거죠"
안드레아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질투심이 이런 상황까지 몰고 온 것이다.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그녀를 대한 것이다. 그녀를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키스로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의 흔적을 닦아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를 안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고, 얼마나 그녀를 보호하고 돌봐주고 싶은지 모른다고, 자신이 저지른 옳지 못한 짓을, 그녀에게 안겨준 고통을 얼마나 씻어버리고 싶은지 모른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또한 그녀를 곁에 눕히고 그녀가 입고 있는 목욕 가운을 벗긴 뒤 실크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사랑스런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솔직히 말해 주고,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복잡한 감정을 떨치기 위해 안드레아스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해명해 보시오"
새스키아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고 난 다음에 떠나도 늦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이 떠나는 이유만은 밝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새스키아는 이성이 마비된 어리석은 여자처럼, 그가 듣고 싶지 않은 얘기로 상처를 주는 일 따윈 집어치우고 다시 한 번 그가 자신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 역시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혼란스런 마음이 다시금 믿을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다행히 자존심을 차릴 본능은 남아 있어 그렇게 유치한 말을 내뱉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메건과 마크와 로레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당신에게 무슨 일을 시켰다고?" 안드레아스가 화를 내며 되물었다.
로레인이 그녀에게 섹시하게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을 머뭇머뭇 말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올림피아가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두 사람을 만나고 싶으시대요"
"전 옷을 입어야겠어요" 새스키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올림피아는 그녀가 당황해하는 걸 알아채지 못한 듯 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오빠, 오빠에게 할 말이 있어. 할아버지 뵈러 가기 전에!
"용돈을 앞당겨 달라는 부탁이라면...." 안드레아스는 동생과 함께 문을 나서면서 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면서 새스키아에게 욕실로 달아날 기회를 주었다. "때를 잘못 고른 것 같구나!"
10장
새스키아는 거울 속에서 빛을 발하는 자신의 모습을 꾸짖듯이 노려보았다. 관능의 향연을 맘껏 즐기고 세상에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포하는 여자 같은 모습이었다. 안드레아스의 할아버지를, 그녀가 여기 와야 했던 궁극적인 이유였던 분을, 그녀가 자기 손자에게는 부족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분을, 손자가 아테네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분을 만날 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안드레아스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새스키아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의문들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바보 같은 몸은 지금 누리는 기분 좋은 충족감 너머를 왜 내다보지 못하는 걸까? 들뜬 감정은 닥쳐올 외로움과 고통을 왜 짐작조차 못하는 걸까?
안드레아스는 올림피아를 돌려보낸 뒤 대충 샤워를 하고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새스키아를 할아버지에게 소개시키기 전에 먼저 그 분을 만나 뵙고 단둘이서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그는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새스키아는 그가 급히 나가는 바람에 당장 그에게서 멀리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그가 돌아오면 그녀를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 줄 것이다. 새스키아는 아직도 화색이 도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고 성난 표정을 지었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이었다. 눈빛마저 뭔가 굉장하고 특별한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새
로운 광채를 발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자신에게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소리쳤지만 헛된 메아리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 요란한 소리로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안드레아스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방문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잡고 있었다. 올림피아는 새스키아 일로 몹시 분개하고 그녀를 두둔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 몇 분간 마음을 진정시킨 뒤에야 아테네와 새스키아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오빠 앞에서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아테네가 새스키아 언니를 돈으로 매수해 오빠 곁을 떠나라고 충동질했어. 그렇게 하면 백만 파운드를 주겠다면서 말야. 물론 새스키아 언니는 거절했지만 아테네가 그렇게 모욕적이고 무례한 행동을 하도록 마냥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 같아. 아무래도 할아버지에게 그녀의 실체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오빠가 못하겠다면..." 올림피아가 넌지시 위협했지만 그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커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빠?"
그 순간 안드레아스는 자신이 새스키아에게 이미 저지른<모욕적>이고 <무례한> 행동과 여전히 타협 중이었다. 올림피아의 말을 통해 아테네가 새스키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당당히 행동했는지 알게 되니 더욱 참담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오해하고 비판하고 편견을 가질 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해답이 나왔다고 일깨워 주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억누르려고 했던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지독한 자존심은 그렇게 뻔한 여자와 자신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분개했다. 결국 그는 마음이 아니라 자존심을 따랐기 때문에 그의 일생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소중한 부분을 어리석게도 망쳐 버린 것이다. 새스키아가, 새스키아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기회를 그녀가 주든 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이, 이루어져야할 보상이 있었다. 그녀가 그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일이 생기기 전에 새스키아가 그의 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그는 보수적인 그리스인이었다. 그녀가 순결을 줬으니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안드레아스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계획을 정확히 밝혔고 새스키아가 돈이나 지위보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관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는 점을 사실대로 덧붙였다. 처음에 새스키아에게 혹시나 가해질 상처나 고통 때문에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게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부족한 여자라는 점이 두려워서 새스키아를 숨기고 있다고 할아버지가 생각하실까 봐 그럴 수는 없었다. 부족하다니! 그녀는 너무 과하고, 너무 훌륭하고, 너무 소중했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아테네에게 즉시 이 섬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남아 있게 해달라고 할아버지를 설득할 생각은 꿈에도 마시오,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까" 그가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새스키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열망과 사랑이 왈칵 밀려와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기 있게 반짝이는 눈하며 순수한 기쁨과 새롭게 발견한 은밀한 여성스러움이 섞인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신부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의 모습은, 사랑하는 남자의 품과 침대를 방금 벗어난 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를 보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빛이 어두워지고 몸은 긴장하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안드레아스는 사랑과 죄책감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세상으로 향한 문을 닫고 그녀를 끌어당겨 용서를 구하고,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남은 일생 동안 그녀에게 보여줄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며 영원히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겐 책임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할아버지에게 새스키아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현재로서는 새스키아에게 다정하게 대해 달라는 자신의 부탁을 할아버지가 들어주시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안드레아스가 새스키아의 손을 잡았다. 새스키아는 그의 체온만으로도 전신이 떨렸기에 감정이 드러날까 봐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하기로 한 역할에 대해 속을 긁어놓는 소리를 하러 온 줄 알았던 그가 가만히 손을 놓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오. 새스키아...."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건데요 뭐" 새스키아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모질게 그를 상기시켰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들이 방을 나서는데 어린 하녀가 들어와 안드레아스에게 뭔가를 그리스어로 얘기했다. 그 뒤 두 사람은 복도로 나섰다.
널찍한 안뜰을 통해 시원스럽고 단순하게 꾸며진 방으로 들어설 때 안드레아스가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것은 상황상 깊은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연극일 뿐이라는 걸 새스키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덜 자연스럽고 현명하지 못한 일은 따뜻한 감촉과 그가 이렇게 가까이 있음으로써 받게 되는 안정감이었다. 안드레아스가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스키아는 그의 할아버지임에 틀림없는 백발의 노인과 얘기를 나누며 서있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다가서자 노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안드레아스가 격식을 차려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새스키아를 소개해 드릴게요"
새스키아는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에 초점을 맞춘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노인은 그녀가 아테네의 거리에서 만났던 바로 그 분,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 그녀가 많이 걱정했던 바로 그 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새스키아의 손을, 그의 손자가 잡았듯이 힘 있게 꽉 잡았다.
"나한테 소개시켜 줄 필요 없다, 안드레아스. 네 아름다운 약혼녀와 난 이미 만난 적이 있으니까"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인은 자신의 선언이 가족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지켜보는 걸 즐기는 듯했다. 숱한 일과 많은 사람을 통제하기 좋아하는-그들에게 도전하고 그들을 놀라게 해주기를 좋아하는-인물임에 틀림없다. 물론 안드레아스에게도 그런 특징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새스키아를 화나게 만드는 반면, 그의 할아버지는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와 새스키아가 이미 만난 적이 있다고요?" 안드레아스가 그렇게 되물으며 깊게 눈살을 찌푸리고 할아버지와 새스키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 아테네에서" 새스키아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그의 할아버지가 확인해 줬다.
"어떤 노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많이 걱정해 줬지. 내 운전기사가 그러는데, 내 건강에 대해 무척 마음을 썼다고 하더군" 노인이 밝게 웃으며 새스키아에게 귀엣말을 했다. "더운 날씨에 그렇게 걸어 다니고 아크로폴리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는 일은 꽤 힘들었지. 하지만 내 사무실에 도착해 우리 만남이 취소됐다는 걸 뒤늦게 안 안드레아스만큼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노인이 킥킥거리며 덧붙였다.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결혼시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지?" 노인은 이렇게 으름장을 놓아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애써 감췄다.
노인은 몹시 그리스적이고, 지극히 남자다웠다. 새스키아로서는 화를 내야 마땅했지만 노인이 너무 즐거워하고 있어 그걸 망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사태 파악을 한 안드레아스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새스키아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고요?" 그가 할아버지를 험악하게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네가 옳은 선택을 했더구나, 안드레아스" 할아버지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주 예쁘고 친절한 아가씨야. 젊은 아가씨들은 낯선 노인네를 돌봐줄 시간을 좀처럼 못 내는 법이거든. 난 이 아가씨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안드레아스, 너를 알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새스키아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신 거예요"
안드레아스가 냉랭하게 할아버지의 말을 가로채자 새스키아는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안드레아스가 나를 옹호하고 보호해? 이건 뭐지? 그러다 문득 그가 단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애정을 갖고 약혼녀를 두둔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상기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할아버지" 안드레아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승낙하시든 안 하시든 제겐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항상 그럴 것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어떤 협박도, 뇌물도, 감언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새스키아 같은 여자는 남편의 마음과 인생에서 중심이 될 만하지. 너희 할머니 엘리자베스를 연상시키는 아가씨야" 노인이 눈이 갑자기 촉촉해졌다. "네 할머니도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가 깊었지"
바로 그 순간 새스키아가 낀 반지를 발견한 노인을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아가씨가 끼고 있는 게 뭐냐? 데메트리오스 가의 신부에게 적합하지 않구나. 정말 놀랍다, 안드레아스. 시시하게 보석이 하나 박힌 반지라니. 네 할머니 반지를 끼게..."
"아뇨" 안드레아스가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 순간 새스키아는 긴장했다. 이게 전부 거짓말이라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려고 저려나? 돌아가신 할머니의 반지처럼 그의 가족에게 고결한 의미가 있는 반지를 내가 낀다고 생각하니 너무 지나치다 싶어 견딜 수 없는 걸까?
"그러기 싫습니다. 새스키아가 다른 반지를 원한다면 본인이 직접 선택할 거예요. 지금으로선 제가 골라준 반지를 끼고 있었으면 합니다. 그녀처럼 순수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거든요."
새스키아는 뜻밖에 그의 다정하고 시적인 표현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안드레아스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반지를 내려다보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름다웠다. 이걸 낄 깨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새스키아에게 이 반지처럼 소중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그만한 가치를 주는 서약과 함께 주어진 반지라야 의미가 있었다. 그건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러나 안드레아스의 할아버지는 그런 당치않은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유쾌하게 물었다.
"좋다. 하지만 네가 언제 결혼할 계획인지는 알고 싶구나. 난 영원히 살지 못해, 안드레아스. 그러니 네 아들들을 보자면..."
"할아버지....." 안드레아스가 경고하듯이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을 축하하는 점심 식사와 오래 묵힌 포도주를 마신 뒤 새스키아는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충실하게 그녀를 보호하는 약혼자 역할에 걸맞은 행동을 보이며 안드레아스가 동행했다. 방 밖에서 그가 가볍게 팔을 붙잡자, 새스키아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
봐야 했다.
"아테네에서 있었던 일은 미안하오"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이내 화를 내며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실 권리는 없는데...."
"당신도 그 분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거예요" 새스키아가 조용히 그의 말을 가로채고는 즉시 할아버지를 두둔했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어요. 내가 처음 데이트를 나갈 때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하셨는지 아직도 생생하거든요" 그녀는 소리내어 웃다가 안드레아스가 고개를 젓는 걸 보고 멈췄다.
"당신 할머니가 당신을 보호하신 건 당연한 일이지"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당신이 처할 수 있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셨단 말이오. 당신과 우연히 마주칠 시간을 놓쳤으면 어쩔 뻔했소? 당신은 낯선 도시에 혼자 있었단 말이오. 내가 기사에게 내린 지시를 취소시키고 할아버지 자신이 차로 돌아갈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단 말이오.
"대낮이었어요. 안드레아스" 새스키아가 차분히 지적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뭐, 적어도 할아버지가 아테네와 결혼을 강요하시진 않게 됐잖아요"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녀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녀는 이번 여행을 위해 안드레아스가 사준 가방들이 방 한가운데 놓인 걸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무슨..." 그녀가 불안하게 말을 꺼냈지만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마리아에게 우리 두 사람의 짐을 싸두라고 일렀소. 히드로행 내일 아침 첫 비행기를 예약해 뒀소"
"떠나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그 앞에서 놀라는 모습을 보이는 건 지극히 어리석다는 걸 새스키아도 알았다. 당연히 그들은 떠나야 했다. 안드레아스가 더 이상 그녀를 여기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앞으로는 아테네를 절대 이 집에 들이지 않을 거라고 못 박으셨던 것이다.
"방법이 없소" 안드레아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우리 할아버지 말씀을 당신도 들었잖소. 이제 아무 이상 없다는 건강 증명서를 받으셨으니 마음을 쏟으실 뭔가를 찾아내고 싶어서 못 견디실 거요. 우리 결혼식을 계획하고 그걸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호화로운 행사가 되게 하는 동시에 사업가인 당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일 기회로 삼으려고 하실 거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와 여동생도 그에 못지않을 테고" 그가 얼굴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옷들에, 만드는데 여러 달이 걸리는 웨딩드레스에,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손꼽아 기다리시는 우리 사이에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별장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실 거요"
새스키아는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열심히 들었다.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더 없이 행복한 그림이 그의 말과 함께 점점 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몽롱한 상태로 불가능한 꿈을 꾸다가 안드레아스의 다음 말에 깜짝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지금 당장 결혼식을 올려야겠소. 가족에게 이끌려 결혼식을 지연시킬 시간이 없소. 만약 당신이 이미 내 아이를 가졌다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새스키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항의했다. "농담하지 말아요. 그것 때문에 결혼할 순 없어요."
"그럼 뭐가 또 있단 말이오?" 안드레아스가 가차 없이 따지고 들었다. "당신이 한 번도 남자 경험이 없는 순결한 처녀라는 것? 난, 난 고지식한 그리스 사람이오. 그래서 내 아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소. 이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소."
"당신은 반만 그리스 사람이에요" 새스키아는 당황해서 얼른 그를 상기시킨 뒤 덧붙였다. "그리고 어쨌거나 임신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요. 아니, 임신하지 않은 게 확실해요"
안드레아스가 거의 기를 꺾어놓을 듯한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맞아. 당신은 그런 일엔 전문가지. 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늘 그렇지는 않다고 들었어요. 처음에는...." 새스키아는 불안하게 말을 꺼냈지만 그의 표정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설 따위는 그녀만큼이나 믿지 않는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난 이러는 게 싫어요, 안드레아스"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하고 그녀가 주장했다.
안드레아스가 하려는 일에 놀라서 목소리와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령 내가 아이를 갖게 되더라도 나 혼자 키울 수 있어요"
"어떻게? 아테네에게 거절한 백만 파운드를 탐내는 건 물론 아닐 테고" 그가 따졌다.
갑자기 허를 찔리자 새스키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에겐 돈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걸 필요로 한다고요" 그녀가 얼른 둘러댔다. 아테네의 제의를 그가 어떻게 알고 있지? 아테네 본인이 얘기해 주진 않았을 텐데. "아이에겐 사랑이 필요해요"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안드레아스가 받아쳤다. "난 당신보다 그걸 알 수 있는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소, 새스키아. 난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내 아이가 절대로 사랑 없이 자라게 하진 않을 거란 말이오."
그녀가 괴로운 숨을 몰아쉬자 그는 후회 어린 눈빛으로 얼른 말을 멈췄다. "새스키아, 달링. 정말 미안하오.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라 당신은 물론 내 아이에게도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한 얘기였소."
새스키아는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그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열광적인 선언을 들었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을 이렇게 듣고 있자니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새스키아는 그가 준 반지를 정신없이 잡아당기며 빼기 시작했다. 안드레아스는 점심 식사 때처럼, 그 후로 오래된 포도주가 그녀의 긴장을 풀어놓는 걸 지켜보던 때처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어두운 그녀의 눈이 자존심과 고통의 눈물로 반짝이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테네가 새스키아 언니에게 그 돈을 제의했을 때 너무 화가 났어" 올림피아가 열을 내서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웠고. 언니는 오빠를 많이 사랑해. 오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가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어. 오빠가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게 확실한 것만큼이나 언니도 오빠를 분명히 사랑해. 언젠가 나와 결혼할 남자를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처럼...."
"너에게 완벽한 아가씨구나. 얘야" 그의 어머니도 그렇게 속삭였었다.
"미모에 마음씨까지 예쁜 아가씨야" 그의 할아버지가 감정에 겨워 말씀하셨다.
점심 식사 후에 한 차례 방심한 순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뭔가에 대해 그녀를 놀리자 그녀가 도와달라는 듯 그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그 눈빛에 그는 그녀를 낚아채 혼자서만 그녀를 갖고, 계속해서 그런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침내 그녀가 반지를 빼 그의 앞에 내밀고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말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어요"
안드레아스는 눈을 감고 그 말을 되새기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다음, 다시 눈을 뜨고 의미심장하게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생애 최대의 도박을 해볼 참이었다.
그가 진다면 모든 걸 잃을 터였다. 하지만 이긴다면....
안드레아스는 심호흡을 하고 새스키아에게 조용히 물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해야 옳은 것 아니오?"
새스키아는 얼굴이 하얘졌다가 이내 발그레해지며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내...내 말은 그런 뜻이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가 이내 멈췄다.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안드레아스" 순간 그는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노련하게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난 당신을 놔주지 않을 거요, 새스키아" 그가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 때문에....아이가 생겼을지도 몰라서요?" 그녀가 반박했다. 하지만 안드레아스가 너무 꼭 끌어안고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목에서 턱으로 그리고 입술로 점점 다가오는 통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그리고 이것과 당신 때문에...."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나요?" 새스키아는 벗어나려 했으나 안드레아스가 놔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로움으로 침통하고, 후회로 침울하고, 사랑과 욕망으로 강렬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애원했다. "제발,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지 당신에게 보여줄 기회를 줘요, 새스키아.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좋을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새스키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은 채 안드레아스가 말했다. "내 감정이, 내 가슴이, 내 마음이 이미 당신에게 했던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거요, 내 소중한 사랑.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당신도 분명히 알 테지?"
새스키아는 고개를 들어 지금 듣고 있는 말을 믿어도 좋을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새스키아는 취할 듯한 기쁨과 흥분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도 안드레아스가 지금 그녀를 쳐다보는 식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걸로 충분치 않은지 그의 몸이 아주 확실하고 은밀한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의 흥분된 몸에 자신의 몸도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 그냥 섹스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그녀가 과감하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 한 거죠?" 안드레아스가 웃기 시작하자 그녀가 당황해서 물었다.
"내 사랑" 그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순결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 말이 먹혀들었을 거요. 섹스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여자는 즉시 그걸 알아챌 수...." 그가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니지. 왜 내가 그걸 설명해야 하지? 섹스가 어떤 것인지 당신이 알 리가 없을 텐데 말야. 새스키아, 당신과 나는 평생 사랑을 나누고 서로에게 사랑을 주면서 살게 될 거요"
"오, 안드레아스" 새스키아는 그가 꼭 끌어안자 기쁨에 겨워 속삭였다.
"안 돼요, 안드레아스. 이러면 안 돼요" 5분 뒤 그가 침대 쪽으로 이끌어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그녀가 저항했다.
"옷을 모두 싸뒀기 때문에...입을 것도 없고...."
"잘됐군" 안드레아스가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도망갈 염려가 없도록 당신을 발가벗겨 내 침대에 잡아두고 싶은 생각밖에 없으니까"
"으음....묘하네요.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새스키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필로그
"글쎄요, 할아버지께서 우리 결혼식은 당신 뜻대로 못하셨지만 가족들끼리의 조촐한 세례식만은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셨던 게 분명하네요!" 최근에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한 그룹 내 영국 호텔 본점의 특별 행사용 스위트룸을 꽉 채운 엄청난 사람들을 보며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와 함께 웃었다.
"음, 로버트를 할아버지께 맡겨둬도 정말 괜찮을까?" 안드레아스가 아버지답게 근심어린 눈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3개월 된 증손자를 친구들과 사업가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방 저편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글쎄요. 본인께서 평생 당신이나 나보다 훨씬 많은 아기들을 안아 보셨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잖아요." 새스키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도 우리 아들은 아니었잖소" 안드레아스가 즉각 응수한 뒤 덧붙였다.
"아무래도 가서 녀석을 데려와야겠소, 새스키아. 금방이라도 떼를 쓸 것 같은 얼굴인데, 아까 젖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사랑이 너무 지나친 아빠라니까" 안드레아스가 서둘러 아들을 빼앗기 위해 걸어가는 걸 보고 올림피아가 흉을 보았다.
"하지만 난 오빠가 좋은 아빠가 될 줄 진작에 알았어요"
새스키아는 남편이 그들의 아들을, 두 사람의 조촐한 결혼식이 있은 지 정확히 아홉 달하고 하루 만에, 눈치 있게 예정일보다 3주일 늦게 태어난 아들을 요령 있게 안고 있는 걸 보고 시누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녀와 안드레아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녀석이 첫 돌이 되면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보게 되리란 것도 아직 둘만 알고 있는 것처럼.
"너무 빠른 거 아니오?"
그녀가 처음 그런 의심을 털어놓자 안드레아스가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새스키아는 안드레아스뿐 아니라 그녀 자신도 알고 있듯이 로버트가 태어난 뒤로 처음 관계를 부추긴 사람이 그녀 자신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안드레아스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아빠였고 그보다 훨씬 훌륭한 남편이고 연인이었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새스키아의 눈빛이 몽롱해지자 안드레아스가 즉시 알아챘다.
아내와 조용히 상의할 게 있다며 안드레아스가 갑자기 아기를 건네는 바람에 깜짝 놀라면서도 그의 어머니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이미 가까운 사이가 된 새스키아의 할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안드레아스! 안 돼요. 이러면 안 돼요." 안드레아스가 새로 단장한 호텔 방들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으로 그녀를 이끌고 들어가 문을 잠그자 새스키아가 저항했다.
"왜 안 되지?" 그가 놀리듯이 말했다. "이 호텔은 우리 거고 우린 결혼한 사이인데, 그리고 지금 당장 당신을 너무 원하고..."
"음, 안드레아스...." 달콤한 입술 고문에 언제나 영락없이 반응을 보이는 목 부분의 부드러운 인대를 그의 입술이 기막히게 찾아내자 새스키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음, 안드레아스...뭐?" 그녀의 살에 입술을 대고 그가 물었다.
그러나 새스키아는 말로 대답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그의 입을 향해 애교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처음 본 순간 난 당신이 음탕한 여자인 줄 알아보았지" 안드레아스가 다정하게 웃었다. "나의 음탕한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