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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The land of the Incas)

Bollnow 2024. 3. 8. 07:20

잃어버린 도시(The land of the Incas)

Kay Thorpe

 

1

비행기가 착륙 태세로 들어가자, 온통 빛을 뿌려놓은 듯한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도나는 시계 바늘을 3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20살에는 페루의 수도 리마의 이같은 풍경이 그녀에게는 숨 막힐 듯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많은 것을 잃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도나의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잉카붐 때문이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었다. 그 설렘은 아직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느낌이 달랐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도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들 부녀는 친밀했던 것이다. 그녀가 브레이크와 헤어진 뒤에는 특히 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지금 가장 생각하기 싫은 것은 브레이크에 관해서 였다. 언젠가는 자신의 결혼에 어떤 결말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그와의 문제는 접어두고 당면한 일에 열중하고 싶었다.

"예정보다 15분 늦었군." 옆에 앉은 금발의 사나이가 말했다. "출발이 35분 늦은 것을 생각하면 빨리 온 셈이지만. 숙소는 도심지 반대편이오. 아래 상태를 보니 아주 천천히 드라이브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군가 '리마는 밤에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도나는 비꼬듯이 말하고는 눈에 익은 개암나무빛 눈동자에 미소를 보냈다.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도착할 수 있겠죠. 기분 어때요?"

"당신의 반만큼도 좋지 않소." 이렇게 말하며 그레엄은 그녀의 윤이 나는 금발과 생기 있는 안색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시차에도 끄덕 않는군. 어쩜 그럴 수 있지?"

푸른 눈이 웃었다.

"그것은 기력과 그리고 머리빗과 립스틱 덕택이죠. 아직 취침 시간까지는 서너 시간의 여유가 있어요. 브링크맨 박사와 만나는데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당신 추천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순전히 당신 자신의 실력 때문에 채용된 거요." 즉시 그는 대꾸했다. "브링크맨은 제임스 캠벨의 딸을 발굴단에 끌어들이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소. 특히 당신은 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으니까."

"그때는 일개 아마추어였어요." 도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부정했다. "미술학교를 나왔을 뿐 달리 내세울 것은 없어요. 그 뒤에는 얼마간 고고학 작도법을 공부했지만, 아직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아무 탈없이 큰일을 해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문제없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지난번, 아버님과 함께 발굴 작업에 참가했던 것이 좋은 경험 아니겠소. 우리는 유명해질 거요. 당신과 내가 콤비가 되면."

사진에 관한 한 그레엄은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도나는 그것을 가벼운 자조 속에서 인정했다. 지금부터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분야에서의 내 자신의 능력인 것이다. 주위의 기대가 크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고고학자의 딸이라는 것은 불리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고는 있지만 학계의 인정을 받으려면 몇 년이고 꾸준히 연구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자신이 그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수한 고고학 작도가의 수요는 항상 있게 마련이라고 말씀하셨다. 1년 전 유콘에서의 발굴은 좋은 경험이었지만, 육친과 일하는 것과 전문지식을 가진 타인과 공동 작업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었다. 그러나 브링크맨 박사가 그레엄이 보낸 자신의 작업 견본을 높이 평가한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은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발굴단에 끼게 된 것은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이다. 그레엄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이 기회를 한껏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내 안내방송에 따라 좌석을 똑바로 세운 그레엄의 얼굴이 흐릿한 조명 탓에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유리창에 비쳐 보였다. 처음 만난 이래의 반 년 사이에 도나와 그레엄 호즐리는 급속히 친해졌다. 나이는 겨우 4살 위였지만, 지금까지 만난 남성 중에서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언젠가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에서 보다 깊은 사이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자신의 일상생활에 공백이 있고, 그가 그 공백을 채우기 시작했다고 하는 정도로밖에는 생각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어떤 형태로든 장래를 함께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그녀의 마음자세가 전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착륙은 원활했지만 입국 수속이 지체되어 지겨웠다. 이윽고 택시를 탄 도나는 좌석에 기대어 앞으로 닥쳐올 일, 발굴 작업에 대해 생각했다. 새로이 이 <잃어버렸던 도시>가 발견된 뒤 2년 동안에 단 한 번 예비조사가 행해졌을 뿐 자금 부족으로 깊은 연구를 할 수는 없었다. 이제 린덴 재단의 지원을 받은 존 브링크맨은 우수한 전문가로 구성된 팀을 인솔하고 적어도 수개월에 걸쳐 발굴에 전념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3년만에 보는 도시는 표면상 거의 변화가 없었고, 고층 건물이 늘어서 있는 도심에서 점점 멀어져 감에 따라 좁은 골목에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숙소는 미라프로레스 근처의 고급 주택가에 있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스페인 풍의 대저택이었다.

브링크맨 박사가 선발한 대원들의 집합 장소로 쓰기 위해서 재단이 이 집을 빌린 것이라고 알고 있는 도나는 의외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사치스러운 내부에 놀라고 말았다. 이곳에서 모여 험난한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긴 복도에 잇대어 있는 방이 할당되었다. 어느 방이나 똑같이 검은색 나무로 내장이 되어 있었으며 발코니의 창으로 정원이 보였다. 복도의 맞은편에 욕실이 있는데,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도나는 먼저 사용하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여행 가방을 열고 청결한 내의와 두 벌 있는 드레스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가져온 옷은 거의가 산간지방의 낮은 기온을 예상하여 스웨터나 바지뿐이었다.

샤워를 하고 크림색 린넬의 단순한 디자인의 드레스로 바꿔 입자 평상시의 생기가 되살아났다. 이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흥미와 야심이 일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맹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그녀도 나름대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레엄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는 체격이 좋기 때문에 검은색 바지에 얇은 흰 스웨터 차림이 잘 어울렸다.

이야기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아치를 빠져나가자 멋진 가구가 놓여 있는 살롱이 나왔다. 예닐곱 명이 제각기 서 있기도 하고 앉아있기도 했는데, 여성은 두 사람뿐이었다. 50대 초반의 여성이 일어서더니 잔주름이 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그레엄. 또 뵙게 되어 기쁘군요."

미국인임에 틀림없다한눈에 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그녀는 미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 아디스 레밍턴일 것이다. 그렇다면 존 브링크맨은 치밀한 판단으로 대서양에서 우수한 학자들만 뽑아 모아 학술조사단을 구성한 것이었다. 도나는 자신이 그런 팀의 일원으로 뽑힌 것이 더욱더 영광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레엄은 한 손으로 도나의 팔을 잡아 앞으로 밀어내듯이 하며 그녀를 소개했다. 도나의 예측이 맞았음도 아울러 입증해 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임스 캠벨의 따님이군요." 드러내 놓고 감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으로 도나를 훑어보며 레밍턴 박사는 말했다. "아주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당신의 아버님과 나는 함께 일한 적이 있어요.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훌륭한 고고학자면서 인간적으로도 좋은 분이셨어요. 이리와요,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죠."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소개받았으므로 도나는 잠시 동안 이름과 얼굴을 일치시키지 못했다.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한 여성의 이름뿐이었다. 재닌 미드. 이십대 후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그 점이 그녀를 고고학계에서 두드러진 존재로 만드는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회색 머리를 뒤로 바싹 빗어 넘겨 우아한 얼굴이 한층 돋보이는 눈이 차가운 여성이었다.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어떤 발굴의 경우에도 정확한 기록은 필요하니까요."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어요." 보다 신랄한 말을 해주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도나는 대답했다.

"브링크맨 박사는 저녁식사 때까지도 오시지 않으려나?"

잠시의 침묵을 깨듯 그레엄은 독백처럼 내뱉고는 도나의 팔을 살짝 밀어 떨어져 서게 했다.

"글쎄요." 아디스 레밍턴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 연락도 없는게 이상하지만, 마지막 비행기편으로는 오시겠죠. 비행기편 연결이 잘 안 되면 아침이 될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그분은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겠는걸."

"천만에요. 시간은 충분히 있어요. 적어도 사흘간은 쿠스코에 머물러 고도(高度)에 익숙해진 후 발굴 현장으로 가도록 계획되어 있는걸요. 또 장비도 거의 그곳에 두게 될걸요. 30킬로미터 정도까지는 랜드로버로 접근할 수는 있지만 그 뒤는 걸어야 해요. 자재 운반은 라마로 할 거고요. 가까이에 인디오의 부락이 있어요."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자 인류학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녁식사 준비가 된 것 같군요. 어디까지나 용의주도하군요. 쿠스코에서도 이렇다면 좋겠는데."

스페인 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웨이터가 시중을 들었다. 푸짐한 음식에 포도주 탓인지 식탁에서는 얘기꽃이 만발했다. 도나는 조심스럽게 포도주를 마시면서 수준 높은 대화들을 듣는 동안에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우수한 두뇌와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들뿐이었다.

"낙담할 것까진 없소." 두 시간 후, 방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그레엄이 위로했다. "나 역시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소. 그림이나 사진에 대해서는 우리가 전문가라는 걸 잊지 말아요."

그는 아쉬운 듯한 여운이 있는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앞으로 수주일 간은 그와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을 것 같았다. 도나는 자기들의 교제가 직무상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을 눈치챈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해도 상관은 없지만, 두 사람 다 자기들의 개인적인 감정을 일에 개입시킬 마음은 없었다.

잠자리에 든 후 한 시간이 지나자 도나는 마침내 뭔가의 도움 없이는 잠들 수 없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아래층의 살롱에 책장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뭔가를 읽으면 졸릴지도 모른다영문판이 있어야겠지만. 도나는 얇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향했다.

아래층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살롱의 불도 꺼져 있었다. 입구 가까이의 스탠드를 켜고, 그 빛을 의지하여 방을 가로질러 창가에 놓여있는 정교한 장식이 달린 책장으로 향했다. 제목을 쓱 훑어보니 스페인어책들 가운데 영문판 책이 몇 권 끼어 있었다. 도나는 0. 헨리의 단편집을 뽑았다. 그때, 현관 앞의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도나는 긴장했다. 틀림없이 브링크맨 박사일거야! 차가 멈춰 서자 그녀는 천천히 자기의 모습을 훑어보고는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발굴단장과 처음 만나는데 걸맞은 차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잠든 웨이터를 깨우는 것을 곁눈질하며 이층으로 도망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도나는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문을 반쯤 열었다. 순간, 충격이 전신을 꿰뚫었다. 검은머리의 키 큰 남자를 본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브레이크!"

쇼크를 받은 것은 그녀만이 아니란 건 그의 굳어버린 표정에서도 역력했다. 그는 화석이 된 듯,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한 손으로 문을 더 활짝 열자 다른 손으로 발치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었다.

"얘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는 편이 좋겠군."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였다. "설마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가 문안으로 들어서자 도나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2년 만에 우연히 남편과 맞닥뜨린 쇼크에서 어떻게 헤어나야 하는 것일까.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내심의 격렬한 동요와 싸우면서 가까스로 말했다. "틀림없이브링크맨 박사인 줄 알았어요."

"브링크맨 박사는 못 와요, 내가 대신 왔으니까."

그녀의 눈에 나타난 공포의 빛을 보자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또다시 충격을 받은 것 같군. 그 이유를 알고 싶군."

"그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가까스로 그 말만 했다.

"공교롭게도 사고를 당했어. 발목이 부러졌어. 사정이 사정인지라 내가 대리로 오게 되었소. 발굴 기간이 길어지면 교대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을 끝내고는 실눈으로 도나의 숱많은 금발과 그늘진 눈, 그리고 얇은 면직 잠옷 밑에 감추어진 날씬한 몸매를 바라보았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눈길이었다.

"아직 내 물음에는 대답을 안 했지? 이곳에서 당신은 무얼 하고 있는 거요, 도나?"

"발굴단의 일원이에요."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썼다. "전속 아티스트인 셈이죠."

"어떤 자격으로?"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고고학연구소의 정식과정을 밟았죠. 현장 실습도 했고요. 유콘 발굴 때 아버지와 함께 일했죠." 마음과는 달리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브링크맨 박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그럴테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이곳에 왔을리가 없지." 그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옮겨 놓았다. "뭔가 마실게 없을까? 하루종일 뛰어다녔더니 목이 말라서."

"살롱에 위스키가 있어요. 식사는?"

"배는 고프지 않소."

그는 살롱으로 향해 가다가 도나가 뒤따라오지 않는 것을 느끼고 돌아섰다.

"당신도 이리 와요. 얘기를 좀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경계하며 그녀는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가 위스키를 잔에 따르고 단숨에 그 반을 마시고 나자, 도나는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 밖에 내었다.

"하필이면 왜 당신이 왔죠, 브링크맨 박사와 당신은 사고방식도 다른데?"

"재단은 개인의 사고방식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소.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중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때마침 내게 시간이 있었다는 것뿐이오."

그는 잔을 들고 뒤돌아서서 도나와 마주앉았다.

"처음의 화제로 돌아가야겠소. 당신의 경력을 무시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당신을 함께 데려갈 수는 없소."

"데려가지 않을 수도 없을걸요. 내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찾아봐야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죄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도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소. 당신 스스로 단념하도록 해요."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단념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누가 우리 일을 알고 있단 말인가요?" 신랄한 어조로 그녀는 물었다. "우리 결혼이 톱기사로 다루어진 적은 없어요. 당신은 그것이 우리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소?" 피로에 지친 듯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당신 아버지는 당신을 미첼 가의 일원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어. 사랑하는 딸을 훔친 날로부터 나는 그의 적이 되었지."

"아버지는 당신을 적으로 생각하시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계셨어요. 당신과는 공통점이 많았죠."

"일에 한해서는 모두 그랬었지. 제임스 캠벨과 함께 일하는 것이 대학 졸업 후의 내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당신과의 결혼이 그것을 깨뜨려버린 거요. 그걸 깨달았을 때는 처음으로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더군."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알았더라면 당신은 결혼신청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인가요?"

브레이크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천천히 어깨를 움츠렸다.

"아마 그랬을 거요. 얼마 지속되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수지가 안 맞는 교환이었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집착하지 않으셨어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 뒤에사고가 난 뒤"

그와 더 이상 말을 해봐야 헛일이었다. 도나는 감정의 배출구가 없는 불만의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 먼저 살롱을 나왔다. 모든 게 잘 되가고 있는 터에 어째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브레이크와 재회하는 것만도 싫은데 이런 상황으로 만나다니, 최악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복수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년 전에는 내가 그를 버렸으니까. 이번에는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를 똑똑히 알게하려 할 것이다. 방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눈물은 이미 말라 버렸다. 눈물을 흘린다 해서 어떻게 될 일도 아니었다.

그제서야 도나는 자신이 아직 책장에서 뺀 책을 쥐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침대 곁의 테이블 위에 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 아래층에서 헤어지고 온 남자가 예전에 자기에게 다정하고도 정열적인 키스를 해준 적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다. 6개월. 이렇게 되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종말을 맞다니

 

강연은 성황리에 끝나 호평을 받았다. 강연이 끝난 뒤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사와 축하를 받고 있는 아버지의 곁에 서서, 도나는 30분 전 슬라이드 설명 때 처음으로 본 남자의 모습을 인파 속에서 찾고 있었다. 마침내 강연회장의 출입구 가까이에 서 있는 그를 보게 되었다. 32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 미첼은 이미 고고학계에서 확실한 지위를 굳히고 있었다. 도나는 잡지에 실린 사진을 두어 번 본적은 있지만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학계에서의 평가는 물론이고, 거의 음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어두운 표정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을 도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라이터의 불꽃에 얼굴을 갖다 대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들자 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계속 자기를 주시하고 있었던 걸 느꼈는지 가볍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나는 그의 시선을 잠시 맞받고 있다가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자신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매력 이상의 그 뭔가가 있었다. 자력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 그녀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그만 돌아가려고 그녀의 팔을 잡고 웃는 얼굴로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강연회장을 빠져나갈 때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출입구 가까이에 서 있던 그는 자세를 고쳤다.

그것을 보고 도나는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푸른기가 도는 회색 눈동자는 아버지 쪽을 보기 전에 흘깃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축하합니다. 훌륭한 강연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임스 캠벨은 그 찬사를 당연한 것처럼 받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약간 공손하게 연하의 남자 쪽으로 기울였다.

"어쨌든 시간에 맞춰 와주어 고맙네. 언제 도착한 건가?"

"강연 시작 전에요. 비행기로 겨우 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데 지나지 않았다.

"숙소는?"

"아직. 공항에서 곧장 여기로 달려왔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노교수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거 마침 잘됐군. 시간이 늦었으니 당신은 도나와 함께 먼저 우리 집에 가도록 해요.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러고 나서 거침없이 덧붙였다.

"자세한 것은 내일 아침 박물관에서 얘기하지. 있을 곳은 그때 어떻게 해보겠네.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머물게나."

도나가 한마디 이의를 제기할 새도 없이 아버지는 곧 자리를 떠났다. 일방적으로 용건만 말하는 것은 언제나와 같았다.

"아버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소개해 주시는걸 잊으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저는 브레이크 미첼입니다."

"알고 있어요." 도나는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하버드 대학에 계셨던 브레이크 미첼 교수시죠.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일이 잘되어 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는 일에 관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열성이시니까요."

상대방은 미소 지었다.

"잉카와 마야 문명의 권위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료에게 많은걸 요구하는 건 당연하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영광인 셈이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누구나 부러워하는 하버드 대학 교수 자리를 팽개친 것이다. 꽤나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다고 도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미첼 교수에 관해서아마도 당사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옥스퍼드에서 받았고, 산타페의 미국 고고학 연구소에서 2년 간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그 뒤로도 계속 미국에 머물며 연구생활을 했다. 그리고 페루와 볼리비아의 대대적인 발굴 작업에 세 번 참가했고, 하버드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기 전에도 몇 번이나 주목을 끌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 등.

이렇게 유능한 젊은 고고학자가 이제까지 아버지의 발굴 작업에 동행할 기회가 없다는게 유감스럽게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앞으로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 자금 조달이 잘되면 아버지는 내일이라도 페루로 되돌아가실 것이다. 잉카의 흙냄새가 몸에 밴 사람아버지는 예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요. 이곳도 곧 문닫을 테고. 만약 30분쯤 기다려 주실 수 있다면 돌아가서 간단한 식사를 준비할 수 있어요. 저희 집은 차로 10분 거리에 있어요."

"그러죠." 브레이크는 동의했다. "짐은 포터에게 맡겨 놓았소."

집으로 돌아오자 도나는 널찍한 홀에 불을 켰다. 도나는 하얀 벽에 진홍빛 카페트의 조화를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9월도 끝나갈 무렵이라 밤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객실은 이층의 오른쪽 둘째 방입니다. 짐을 옮기시는 동안 식사 준비를 하겠어요."

"아무거나 간단한 것이면 되겠어요, 비행기 안에서 가벼운 식사를 했으니까요. 옷 갈아입을 시간이 있을까요"

"충분해요. 이십 분이면 되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생각했다. 계란은 많이 있고 닭고기와 햄도 조금 남아 있었다. 새우와 버섯을 곁들이면 만들 수 있겠다. 그리고 모자라면 어제 만든 애플파이를 먹으면 된다.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그의 위장부터 공략해야 해. 도나는 주방으로 가면서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브레이크는 회색 신사복을 벗고 청바지에 하늘색 스웨터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도나는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갑자기 생각이 나 포도주병을 꺼냈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 페루에 대해 얘기했고, 이미 조사가 끝난 지역의 메모를 비교하기도 했다.

도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도 '잉카 열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고대 민족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은 아버지와 똑같았다. 이 사람과 같이 한번 그 장소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의 협조를 얻어 쓰기로 되어 있는 논문을 완성하려면 1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기도 어느 정도 전문 기술을 터득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것을 꿈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리를 거실로 옮기자, 창에 커튼을 쳐서 바깥의 어둠을 밀어내고 스탠드를 켰다. 푹신푹신한 커다란 소파에 나란히 앉자, 도나는 그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했다. 이 남자가 던져 준 충격에 대한 대책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저 멍하고 황홀할 뿐, 뭔가를 조리 있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한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지금 사랑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는 달리 그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얘기를 멈추고 이쪽을 쳐다본 채 잠자코 있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며 그냥 마주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지금 같은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의 그 입술은 키스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 수치심과 체면도 잊은 채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이 비참한 심정에서 나를 구해 주세요."

무너지듯 그의 팔에 안기고, 그녀는 팔을 뻗어 상대방의 목에 걸고 널찍하고 힘찬 가슴에 몸을 바싹 밀어붙였다. 생각했던 대로 그의 입술은 탄력이 있고 탐색적이었다. 미묘한 압력이 가해지자 그녀의 입술은 열렸다. 그녀는 주저하듯 그의 등에 손을 돌렸다. 그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고 즉각 그 손을 뗐다.

"작은 악마 아가씨." 입술을 포갠 채 그가 중얼거렸다. "나를 애태우고 있군."

그의 손이 치마에서 블라우스를 잡아 빼도 그의 애무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한 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번 키스 경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기분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브레이크 미첼 같은 남자로 하여금 냉정함을 잃게 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그와 이러고 있는 이유나 원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내면의 욕구가 아무리 강해도 도나는 이보다 더 나아갈 작정은 아니었다. 여자로서 유희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은 상대가 바로 브레이크인 것이었다.

두 사람 일에 대해 아버지는 처음부터 반대였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해서 말했다. 너는 매력과 사랑을 혼동하고 있다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 말에 포함되어 있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알고자 하지도 않았었다. 브레이크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만을 가슴에 품고 있던 그 당시에는.

신혼여행은 짧았지만 평온했다. 그러나 신혼생활은 그렇게 평온한 편이 못되었다. 아버지와 달라서 브레이크는 극히 외면적인 일 이외에는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세낸 아파트를 깨끗하게 꾸미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많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지루해지고 마음이 들뜬 그녀가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자 브레이크는 그 제안을 일축해 버렸다.

"나와 결혼했을 때,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선택한 게 아니겠소."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아내지 동료는 아니오."

"나를 당신의 그룹에 넣어 주세요. 장차 발굴 작업에 따라갔을 때, 난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었으면 해요!" 도나는 항의했다. "당신이 집필을 계획하고 있는 책의 삽화를 그릴 수도 있어요."

"어떤 발굴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감정적인 부담이야." 그의 어조는 차분했다. "남편과 아내가 맞벌이를 한다든지 공통된 문제에 흥미를 갖는다는 등의 말조차도 나는 믿지 않아. 어쨌든 빨리 아기를 갖자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난 스물 셋이나 넷이 된 후에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럴 수 없어, 곧 서른둘이 돼. 이 이상 늦어지는 건 원치 않아."

침실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큰 더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더니 그 광경이 싫지 않은 듯 그는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도 나쁘지는 않지! 나는 아기를 안고 싶어, 도나. 가정에는 아이가 필요해."

그로부터 수주일 후에 임신이 확인되자 도나의 심경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이 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를 속박하기 위한 브레이크의 술수인 것이다. 아기를 키우고 있다가는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할 수 없게 된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더니 화를 내며 실망의 빛을 나타냈다.

"좀 더 기다려도 좋았을 텐데." 그는 못마땅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제 겨우 스물 하나야! 너와 내가 손잡고 하려던 여러 가지 계획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브레이크에게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겠죠." 도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또다시 부부 사이가 다정해질지도 몰라요."

"그렇게 안 될지도 몰라, 도나. 그를 단념하고 내게로 돌아오는 게 어떠냐? 적어도 네 인생은 또다시 너를 위한 것이 될 테니까."

"아기를 데리고요?"

"만약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누구에게 돌봐달라고 하면 돼."

"아빠와 브레이크의 공동연구는요? 그건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되고 말고도 없는 거지 뭐." 제임스 캠벨은 자조하듯 어깨를 움츠렸다. "요 몇 개월 간의 공동 작업에서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그는 머리도 좋고 지식도 있어. 그러나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네 일이다. 예전의 딸로 돌아와 줘, 도나. 함께 할 일이 너무 많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도나는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결혼생활 6개월도 채 안 되어 벌써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었다. 이 아기는 진정한 의미의 문제 해결의 열쇠는 아니었다균열은 너무도 깊은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아버지가 말한 대로였다. 자신이 그에게 끌렸던 것은 사랑에서라기보다는 매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브레이크는 육체적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으며,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뿐인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는 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급브레이크 소리. 차의 펜더가 부딪쳐 왔을 때 느꼈던 찢어지는 듯한 통증. 그것을 생각하면 도나는 지금도 몸이 오므라드는 것 같다. 사고의 원인은 완전히 도나의 부주의에 있었다. 안전을 확인하지도 않고 갑자기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서는 그녀를 본 사람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행운이었다. 허리와 다리를 심하게 부딪힌 것 외에는 별로 다친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기를 잃었던 것이다

닷새 후, 브레이크가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창가에 서 있었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녀는 말했다. "끝났어요, 브레이크. 서로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 그 자리에 선 채 그는 태연히 대꾸했다. "당신은 타격을 받았지만 곧 잊게 될 거요.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니까."

"나는 우리 집으로 가겠어요, 친정으로요."

"좋도록 해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표정은 험악했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겠소.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나에게 돌아오도록 해."

도나는 브레이크를 쳐다보았다.

"언제 그렇게 결정하셨나요?"

"말하자면 당신 아버지가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지."

말하면서 벌써 문을 열고 있었다.

"강제로 하지는 않겠어, 도나.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생각해봐. 나는 일요일에 떠날 거요. 전화 기다리겠어."

 

누군가가 방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있었다. 도나는 현실로 돌아오자 사이드 테이블 위의 시계를 보았다. 벌써 3시가 가까웠다. 믿을 수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점점 더 잦아졌다. 이 시각에 그녀 외에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면 브레이크뿐이겠지만, 지금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방문자는 끈질기게 체념하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문을 열자, 역시 코듀로이 상의에 바지 차림인 브레이크가 서 있었다. 그의 험악하던 입가와 얼굴의 선이 다소 부드러워져 있었다.

"얘기할 게 있소."

도나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똑바로 상대방을 쳐다봤다.

"모든 이야기는 이미 끝난 게 아닌가요?"

"난 쇼크를 받았어. 당신 역시 마찬가지겠지.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았소."

쫓겨나지 않으려는 의도에선지 브레이크는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으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자 그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당신을 함께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한 말은 잊어 줘.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개인감정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

몸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천천히 녹기 시작하고, 온기가 혈관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당신이 후회하지 않게끔 행동하겠어요."

"좋소. 어쨌든 서로 최선을 다합시다. 지금은 그 길밖에 없소."

 

2

어젯밤 예기치 않은 사건 때문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나는 7시에 일어나 옷을 입었다. 아침식사 때까지 방에 있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문을 통해 축축한 잿빛 아침 안개 속으로 나갔다. 미라프로레스 저택의 부지는 상당히 넓어, 태평양을 굽어볼 수 있는 벼랑까지 이어져 있었다.

도나는 모순되는 감정을 정리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안개 속을 걸어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하지만 브레이크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레엄은 우리가 별거한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 브레이크 미첼의 이름을 듣게 되면 가만히 덮어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그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뉴스가 전해지지 전에. 숙소로 돌아오니 마침 그레엄이 베란다에 서 있었다. 그는 재빨리 내려와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정스레 키스했다.

"일찍 일어났군. 어째서 깨우지 않았소?"

"혼자 있고 싶어서요."

그의 어깨에 기대어 힘이 약간 솟아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었다. "그레엄, 팀에 변경이 있어요. 브레이크가 여기에 와 있어요."

"당신 남편 말이오?" 얼른 납득이 안 가는 듯했다. "어째서? 팀에 결원은 없었는데."

"그가 브링크맨 박사 대신 팀을 인솔하게 되었대요. 브링크맨 박사가 발목이 부러졌대나 봐요."

도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 새벽에 내가 살롱에서 책을 찾고 있을 때, 그가 왔어요. 정말 놀랐어요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그랬을 테지."

그레엄은 상황을 미루어 보는 듯 잠시 동안 침묵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어조가 달라져 있었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과히 유쾌하진 않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이 기회에 이혼 의사를 그에게 전하면 되지."

"그건 안 돼요, 하필 이런 때. 개인적인 감정의 갈등을 보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았어요, 어젯밤."

"당신들이 그러고 싶어해도 무릴 걸. 될 수 있는 대로 문제를 빨리 처리하는게 좋을 텐데."

"2년이나 내버려두었는데, 고작 2, 3주 더 기다리는 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죠."

"내게는 그렇지 않소."

뭔가 묻고 싶은 눈길로, 그녀의 얼굴에 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도나. 이런 말을 하기는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아. 내 심정은 알 테지?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어. 내 생각이 틀렸소?"

이런 고백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므로 도나는 순간 동요했다.

"당신에게 호감은 갖고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당신에게 많이 의지해 온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유가 불충분한 것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그 말은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오? 문제를 회피하려는군."

그레엄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도피하는 태도로 일생을 보낼 수는 없지. 당신과 브레이크의 파탄은 성격이 맞지 않았던 탓이오. 그러나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 어떤 의미로든 우리는 좋은 콤비가 될 거야. 일을 하든 여행을 하든."

"어린애는 어때요?"

혼란스러운 마음과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하면서 도나가 물었다. "가족은 필요치 않아요?"

"물론 필요하지. 그러나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어린애에게 늘 매여있을 필요는 없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 한."

브레이크와의 결혼 실패 원인은 여자는 가정을 지키며 아이를 기르는데 전념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레엄의 태도가 도나에겐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일까? 어느 점에서나 더할 수 없이 대등하게 받아들여 주고 있는데.

"당분간은 지금 상태대로 두는 수밖에 없어요. 24백 미터나 되는 고지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잖아요!"

도나는 그레엄의 팔을 잡고 간청하듯 그를 올려다봤다.

"이 일이 끝난 후에 이혼을 하면 안 되겠어요?"

그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침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도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레엄 때문에 문제가 하나 더는 것이다.

그들이 식당에 도착해 보니, 브레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나가 모두에게 뉴스를 알리려 할 때, 그가 들어왔다. 청바지와 순면 셔츠로 늠름한 몸을 감싸고 있는 그의 태도에는 부드러움이라곤 없었다. 사정 설명이 끝나자 잠시 장내가 웅성거렸지만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누가 팀을 인솔하든 목적은 변함없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재닌 미드뿐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인사를 교환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도나는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는걸 의식했다.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두 사람 사이는 직업상 관계 이상의 것인 듯 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입증하듯 재닌 미드는 브레이크를 자기의 곁에 있는 의자로 안내했다. 브레이크의 태도는 어젯저녁에 도나의 방으로 찾아왔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은 푸른 기가 도는 회색 눈동자를 보았을 때였다. 표정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사이에 그에게 그런 변화를 가져다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떤 일일까? 그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침식사 후, 전원이 살롱에 모여 작업 진행에 있어서의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일행이 쿠스코에 머무르는 동안 그레엄이 전세비행기로 공중에서 그 부근을 촬영하게 되었다.

12시 정각에 점심, 1시 반에는 공항으로 출발.

의견교환이 끝나자 구성원의 대부분은 장비의 최후점검을 위해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도나 역시 같은 구실로 그레엄에게서 도망쳐 잠시 의자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늘 아침 브레이크로 하여금 그 같은 태도를 취하게 한 원인은 무얼까? 그걸 알아내야만 한다. 설마 새벽에 한 말을 벌써 후회하는 건 아닐 테지. 브레이크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그녀가 마침내 복도를 따라 그의 방으로 향했을 때, 주위는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노크에는 즉각 응답이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도 그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그녀의 방문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해두는 것에 열성적인 당신으로서는 꽤나 모험을 한 셈이군."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들어오는 게 어떻겠소?"

"비밀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한 설명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브레이크의 말에 따르면서 도나는 대꾸했다. "누구에게도 우리의 관계를 알릴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 애인과의 일도 말이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가시가 돋쳐 있었다. "호즐리는 당신이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거요?"

"알고 있어요." 순간 도나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곧 뺨이 상기되었다. "그레엄은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애인은 아니에요."

"아까 창을 통해 본 바로는 그렇지 않던데. 어제오늘 사귄 사이가 아닌 것 같은 키스를 하던데.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사귀어 온 사이라는 건 부정하지는 않겠지?"

"물론 부정은 않겠어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죠?"

"동기의 문제가 의심스럽기 때문이지."

도나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으나 그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혹시 당신이 이 일을 하게 된 것이 그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게 아니오?"

도나는 망설였다. 어떤 얘기가 될 것인지 뻔했다.

"근본적으론 관계가 없어요. 브링크맨 박사가"

"관계가 있는 거요, 없는 거요?" 브레이크가 다그쳤다. "솔직하게 대답해 줘."

크게 숨을 들이마셔 마음을 진정하고, 그녀는 똑바로 부딪쳐 나갈 결심을 했다. ", 그레엄이 제 작품 견본을 브링크맨 박사에게 보냈고 조언해줬어요."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일의 질이 아니오. 발굴 작업에 다른 사람의 연인을 데리고 가는 것은 싫다는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브레이크!" 분노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만약 내가 그의 연인이라 해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어요! 그레엄은 예술가로서의 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지 밤중에 자기를 따뜻하게 해줄 상대가 필요해서 날 추천한 건 아니에요! 우리는 순수한 사이예요."

"오늘 아침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그는 내게 청혼을 했어요." 그가 비위를 건드리는 바람에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구든 감상적이 되기 쉽죠. 어쩜, 당신은 그런 일은 다 잊었나 보죠?"

"잊지는 않았어." 브레이크는 감정을 잘 억제하고 있었지만, 그런 만큼 무섭기도 했다. "그에게 뭐라고 대답했소?"

"잘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발굴 작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대답하겠다고요."

"사소한 일이지만, 당신들 두 사람이 잊고 있는 게 있어. 당신에게는 엄연히 남편이 있다는 것. 당신들은 그런 건 문제가 안 되나 보지!"

"아뇨." 도나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이혼 소송을 제기하겠어요, 브레이크.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요.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영국으로 돌아가면 곧 수속을 밟겠어요."

"내 동의를 전제로 하고 말이지?"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입술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남이 한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잘해. 언제나 그랬었지."

이 남자는 정말로 날 사랑했던 적이 있는 걸까? 굳은 의지를 담은 턱의 선, 싸늘하고 가늘게 뜬 눈.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도나는 사고력이 마비되어 버린 듯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는 고의로 이러고 있는 것이다내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

"동의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그의 진심이 알고 싶어졌다. "일을 어렵게 하여 당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는 거예요?"

"방법은 약간 틀리지만, 2년 전에 내가 겪은 고통을 당신에게도 조금 맛보게 하고 싶어서지.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아픔이 어떤 건지 당신은 알기나 해? 오지도 않을 전화를 기다리며 나는 그 아파트에서 사흘을 더 기다렸었지."

"당신은 일요일에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미국으로 돌아가게 하면 당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당신 아버지에게 말했지. 그 때문에 나는 미국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그것은 틀려요!"

"틀려?" 그녀의 무방비한 입술을 쳐다보면서 빈정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영국을 떠나 사는 게 싫다고 하지 않았어?"

"언젠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호소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어쨌든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예요. 당신이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전에 우리의 별거는 결정되었잖아요."

"적어도 화해할 기회는 있었을지도 모르지, 만약 당신 아버지가 즉각 내게 해고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브레이크, 그만 해요!" 도나는 이제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때 나는 몹시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당신은우리의 결혼은 너무 일렀어요. 좀 더 기다렸어야 했어요."

"무엇을? 당신이 성장하기를 말이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기다리게 해줄 여성이 아니었어. 그렇지 않소?"

"그래서 달리 날 손에 넣을 방법이 없어서 결혼했다는 건가요?"

모멸은 구원의 신으로 자기합리화의 사치를 허락해 준다.

"당신은 12살이나 연상이었어요. 내가 단지 당신에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었어요. 아니, 성숙했어야만 했어요. 하지만 달랐어요. 당신은, 당신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진 거죠젊고 남자를 모르는 육체를! 위대한 섹소러지스트 미첼 교수! 당신의 여자 제자들 중 몇 명이 당신의 과외수업 은혜를 입었는지 흥미진진하군요!"

너무도 재빠른 동작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도나의 팔을 움켜쥐자 난폭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거친 키스는 강제로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도나는 뒤로 밀려서 오금이 침대 가장자리에 닿는 것을 느끼며 균형을 잃었다. 그의 체중이 실리자 그대로 침대에 자빠졌다. 셔츠가 너무도 어이없이 찢어지고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구원을 청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달려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브레이크는 그녀를 밀치며 거칠게 일어났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겠어, 가능한 한 빨리!"

낮게 신음하듯 말했다. 찢어진 셔츠를 여미며 도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입술은 터져서 부어올라 있었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당신에 대한 애정이 조금은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완전히 말라 버렸어요." 혐오감에 몸을 떨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자기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죠, 브레이크?"

"방금은 자제심을 잃을 뻔한 남자였지. 당신이 도발한 사실은 빼고 말이오." 일어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스스로 나갈 거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동댕이쳐 주길 바라는 거요?"

"이런 일을 당하고도 난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요?"

"아니야." 의도적인 차가운 눈길이 되었다. "기억해 줬으면 해, 그것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이제 그만 하고 나가 줘, 그러지 않으면 내가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일어서려 했다. 아직 다리에 힘이 없어 일어설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레엄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레엄이 까불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특히 당신에게는. 일을 떠나서 조금이라도 사적으로 접촉하는 기미가 보이면 그 즉시 그 자를 비행기로 쫓아버릴 거야!"

도나는 턱을 쑥 내밀었다.

"당신에게 그럴 권한이 있는지가 의문이군요."

"시험해 보지 그래. 이혼하고 싶으면 다소의 욕구불만은 참고 기다려야지. 당신 남자친구 역시 마찬가지야. 유능한 사진작가지만 그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생각해보니 우스운 일이군요. 당신이 뱀처럼 교활하고 집념이 강한 사람이란 건 몰랐어요.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좋은 증거군요."

브레이크는 그녀의 가시돋친 말에 더 이상 대꾸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도나는 찢어진 셔츠를 벗어 여행가방 구석에 쑤셔넣었다. 두번 다시 이 옷을 입을 마음은 없었다. 다른 단순한 디자인의 순면 셔츠와 짙은 베이지색 코듀로이 바지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계속 손이 떨렸다.

옷을 갈아입으니 그의 공격에 대해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두 번 다시 브레이크에게 자신을 욕되게 할 구실을 줄 마음은 없었다. 거침없이 자신의 살갗을 더듬던 그의 손길이 되살아나 견딜 수 없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애무에는 다정함이란 전혀 없었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잠자던 감정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한순간이긴 했지만, 그가 계속해 주기를, 욕구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원한 순간이 있었다. 점심식사 때의 브레이크는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니, 도나는 두세 시간 전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입술과 가슴께의 얼얼한 느낌이 증명하고 있었다. 내일은 틀림없이 멍이 나타날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던 곳에 이미 파랗게 멍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레엄이 알아채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그는 멍이 들만큼 거칠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의 다정함은 도나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 사랑! 이제 슬슬 그가 나에게 환기시키고 있는 감정에 이름을 붙여줘도 될 것 같았다. 일행은 몇 대의 택시에 나누어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브레이크는 재닌 미드와 아디스 레밍턴과 함께였다. 뜻밖에도 그는 도나와 그레엄을 떼어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3시경에 그들은 비행기의 창을 통해 안데스 산맥의 장관을 내려다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장엄한 느낌이군요." 통로 건너편에서 아디스 레밍턴이 얘기를 걸어왔다. "전에도 본 적이 있으시죠?"

", 3년 전에요. 그때는 아버지와 함께였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도나는 곁의 그레엄에게 이번에는 당신과 함께 오게되어 기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20분쯤 후면 도착할 거예요."

그들은 북쪽에서 안타에 있는 유명한 잉카의 옛 싸움터를 가로질러 목적지에 다가갔다. 멀리 돔과 뾰족탑이 산재해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시가지가 보였다. 거대한 바위를 쌓아올린 요새와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거대한 하얀 크리스트 상().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고도 33백 미터라 산소가 희박하고 공기는 찼다. 금세 숨이 가빠왔다. 거리에는 각국에서 온 여행자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거무튀튀한 옷에 펠트 모자를 쓴 쿠스코인과 손으로 짠 판초를 입은 케추아 인디오. 한떼의 학생들이 왁자지컬하게 떠들며 시의 중심부인 알마스 광장을 향해 햇빛 찬란한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3년의 세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에 익은 건물을 보며 도나는 생각했다. 이곳에 온 것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일행에게는 카빌드 광장 곁에 있는 고고학협회 부속의 숙소가 배당되었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핑크빛 도는 화산암으로 지은 바로크 양식의 멋진 현관이 장관이었다. l950년의 지진으로 이곳 대부분의 건물이 손상 입은 것을 도나는 알고 있었지만, 이 건물은 말끔히 복원이 되어 있었다. 리마의 숙사에 비하면 내부는 검소했지만 설비는 완전히 현대화되어 더없이 쾌적했다. 사용할 수 있는 방수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한 방을 쓰기로 되었다.

여성은 세 사람이었으므로 도나는 아디스 레밍턴과 한 방을 쓰기를 원했지만, 연장자라 해서 레밍턴에게는 독방이 주어졌다. 재닌도 이러한 결정이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체념한 표정으로 좁은 방안에 놓인 두 개의 침대 중 출입구에 가까운 쪽에 백을 집어던졌다.

"이런데서 사흘씩이나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녀는 한탄했다. "전에 이 고도(高度)를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이런 적응 훈련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래도 처음인 사람에게는 필요하죠." 나머지 침대를 차지한 도나가 말했다. "산에 취하게 되면 보통 일이 아니죠. 어쨌든 장비 점검도 해야 할 테고."

"그렇다 해도 사흘씩이나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도나는 대꾸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확실히 사흘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도나는 존 브링크맨 박사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모두에게 여유를 주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굴 현장까지는 직선 거리로는 160킬로미터 남짓하지만, 교통편이 나빠서 사소한 일로 시내에 나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 몇 주일 동안은 천막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밤낮 똑같은 얼굴, 똑같은 환경일테니 기분전환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재닌은 입고 온 옷을 벗어 던졌다.

"샤워하고 오겠어요. 오늘 밤은 푹 쉴 수 있도록 저녁 시간이 당겨질 모양이니까."

재닌은 입구에서 멈춰서더니 여행 가방을 열려고 애쓰고 있는 도나를 뒤돌아보았다.

"참고삼아 묻겠는데, 당신과 우리 카메라맨은 함께 왔나요?"

"오기는 함께 왔어요." 도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달리 또 묻고 싶은게 있나요?"

"당신은 이 팀에서는 중요한 멤버는 아니니까 간단히 교체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오늘 아침 미첼 교수의 방으로 가는걸 봤어요. 어찌 된 셈이죠?"

"개인적인 용무였죠." 도나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또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면 미첼 교수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그래야겠군요. 그에게 가장 필요없는 것은 아마추어의 짐이니까요."

"그런 것을 허용할 사람이 아니죠." 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 팀의 단장인 그가 하는 일을 일일이 걱정하진 않아요. 그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1차전은 도나가 이긴 것 같았다. 재닌이 문을 탕 닫고 나간 뒤 도나는 생각했다재닌은 자신의 중요성을 약간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달리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재닌은 이 발굴 작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존재다. 지식도 경험도 풍부하므로 그녀는 이 조사단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래서 저토록 뽐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도나가 맡고 있는 미술 방면의 일 역시 독자적인 영역이므로 필요불가결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쪽이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못하도록 이를 철저히 해내는 한에는.

하지만 내가 브레이크의 방에 가는걸 본 사실에 저토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진짜 이유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재닌은 내가 그와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경고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브레이크에게 눈독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만큼 명백한 이유는 없었다. 브레이크와 나에 관한 모든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되면 그녀는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저녁식사는 7시 반이었다. 흰 벽의 길쭉한 식당에는 전면에 조각으로 뒤덮인 거무튀튀한 목제 가구가 놓여 있었고, 온통 금박을 입힌 종교화가 걸려 있었다.

"베르나르드 비치군."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마리아를 그린 그림을 보자 그레엄이 중얼거렸다. 예수는 인디오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조품일 테지. 정품이라면 엄청나게 비쌀텐데."

"당신이 페루의 미술에 조예가 깊은 줄은 몰랐어요."

도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싱긋 웃었다.

"조예가 깊은 정도는 못 돼. 어쩌다 살롱에서 화집을 들여다보곤 했었지. 외관보다 마음의 화장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당신의 노력을 따라갈 수는 없을 거야. , 여성의 다리를 보는 것은 남은 이틀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앞으로 몇 주간의 계획표를 보니."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만 말이죠."

그녀는 맞장구를 쳤다.

"내일 쿠스코를 안내하겠어요. 내가 당신보다 우위에 있는 건 그 것뿐이니까요."

"아니,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위에 서 있는걸."

그는 조용히 대답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발굴 작업이 끝날 때까지 키스도 못하는 건 아닐 테지? 그렇게 되면 이 몸과 피가 견뎌내지 못할 거야!"

도나는 집어삼킬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브레이크 쪽, 테이블 상석을 힐끗 쳐다보고는 거침없이 그레엄의 눈을 쳐다봤다. 보고 싶으면 보라지. 뭣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이제 브레이크의 위협 따위는 겁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레엄의 얼굴만 쳐다보며 그녀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나 역시 그럴 거예요, 틀림없이."

식사를 끝낸 뒤에 시내 구경을 하러 나가려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아직 초저녁인데도 주체할 길 없이 달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전원 모두가 금세 자기 방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도나는 두통을 느꼈으나, 자기만 이런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식후에 마테 데 코카를 마셔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희박한 산소에 대처하기 위해 이 지방 사람들이 즐기는 코카잎으로 만든 홍차 비슷한 것이었다. 첫 경험이므로 그레엄은 도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도나의 방 앞에서 헤어질 때, 그는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

"아침이 되면 좋아질 거예요." 동정하면서 그녀는 격려했다. "누구든지 그래요. 호흡하는 방법에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될 거예요."

발돋움을 하여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레엄."

"한 번 더 부탁해요, 도나." 자조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오늘밤에는 뭔가 위로가 필요해."

도나가 잠자리에 든 뒤 한 시간쯤 지나서 재닌이 돌아왔다. 눈을 감은 채 있으려니 그녀가 복도에서 누군가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신경쓰지 말아야지.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도나는 잘 알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아직도 육체적으로 그녀를 뒤흔들어 놓을 힘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재닌과 어울렸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질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어쩌면 자기가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심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아직 이혼 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3

리마의 기후와는 달리 맑고 햇살이 따뜻했다. 기분 좋은 영국의 여름 날씨와 비슷했다. 전원이 일찍 일어났으며 대부분이 기분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했다. 도나는 그레엄과 단둘이서 알마스 광장까지 나가 봤다. 광장은 이미 혼잡했다. 곳곳에 토산품이 수북이 쌓여 있고, 장사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손님을 부르는 떠들썩한 소리와 번잡스러움, 독특한 바지와 판초에 펠트 모자를 쓴 두 사람의 인디오가 17세기 사원의 층계에 걸터앉아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레엄은 프로 사진작가답게 연달아 셔터를 눌렀다.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찍어댔다. 그들은 광장을 떠나 고대 잉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우중충한 갈색의 큰 바위들만 포개져 있을 뿐이었는데, 이곳은 지진에도 끄덕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태양의 사원 유적지에서 두 사람은 길이 어긋나고 말았다. 죽은 제왕의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는 방을 들여다보려고 도나는 잠시 그의 곁을 떠났다. 뒤돌아보니, 밀어닥치는 인파 속에 휩쓸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헛일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잠시 그를 찾다가 단념했다. 그레엄은 혼자서 숙소로 되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에 가까와 있었다. 지금은 승원(僧院)이 되어 있는 유적을 떠나려고 할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브레이크가 다가왔다.

동행한 사람은 없고, 도나와 마찬가지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미행했나요?" 브레이크가 가까이 오자 그녀는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별로 수확은 없었던 것 같군요."

"이곳에서 발굴 작업 중인 옛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이오. 우연히 당신과 마주친 것뿐이오."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자요?"

"이 인파 속에서 말인가요?" 도나의 목소리는 쌀쌀맞았다. "보시다시피 많은 사람과 함께 있어요."

"당신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요. 그와 함께 오지 않았소?"

"과연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의 곁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즉각 팔을 잡혔다. 노여움보다 심한 뭔가에 몸을 떨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말아요! 어제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생각은 없어." 그의 어조는 험악했다.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하면 당신은 그런 벌을 받아야 해. 그런데 점심은 먹었소?"

"아뇨, 하지만 당신과 함께 먹을 마음은 없어요."

"그래도 명령대로 하도록 해. 그렇게 하기 싫으면 즉각 숙소로 돌아가든지." 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참고로 말하겠는데, 이곳에서는 내가 고삐를 쥐고 있소. 그러므로 당신은 내 말에 따라야 해."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군요. 그건 사실이에요.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을 상대했는지 기억해 낼 수 있어요?"

그가 턱을 긴장시키며 위험신호를 보내는 걸 무시하고, 숨도 돌리지 않고 계속했다. "예를 들면, 미드 박사. 설마 그녀와는 업무상의 관계일 뿐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죠!"

브레이크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끌고 건물을 나왔다. 자신들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 도나는 저항을 중지하고, 노상에서야 그도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생각에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하고 천박스럽다. 하지만 도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이 도시를 잘 모를 것이라고 여긴 도나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브레이크가 도나를 끌고 간 좁은 골목에는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꺼슬꺼슬한 돌벽에다 힘껏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아주 간단히 그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누르고 골려주듯 키스했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빈정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을 텐데." 내뱉듯 말했다. "그런 말을 할 때는 단단히 각오를 했을 테지!"

"그레엄과의 일을 비꼬아 말한 것은 어떻고요?"

아리는 입술로 헐떡이듯 도나는 말했다.

"뭐가 다르다는 건가요?"

"뭐가 다르고 그렇지 않은지 하는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야!"

브레이크는 여전히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탄탄한 몸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잊고 싶었던 기억마저 되살아났다.

"브레이크, 놓아줘요." 그녀는 속삭였다. "이러면 서로에게 좋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놀랍게도 그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입술을 약간 내민 채 그는 말했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 내가 변한 것을 감사해야 해. , 뭘 좀 먹으러 갈까?"

그녀도 그 이상 거역하지 않고 그의 말에 따르며, 마지막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어떻게 변했다는 것일까? 그는 이제 내게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게 되었다는 말인가? 몸과 몸이 닿았을 때, 적어도 자신의 육체가 반응한 것만은 확실하다. 어제의 일은 또 얘기가 다르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도나는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미워하고 있는 남자의 폭력에 반응하다니, 나는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레엄도 나에게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는 한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는 이곳에서,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들은 아담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메뉴는 입구에 걸려있는 작은 칠판에 씌어 있었다. 도나는 바싹 튀긴 돼지고기와 향신료를 듬뿍 친 감자요리를 먹고 디저트는 사양했다. 그 대신 마테데 코카를 두 잔이나 마셨다. 두 사람은 식사하는 동안에는 거의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브레이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에 기대어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소?"

도나는 그가 일부러 자기를 자극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뒷골목에서의 나의 반응을 눈치챈 게 틀림없다. 그래서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상대방의 조소 띤 눈을 쳐다보았다.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난 전에 이곳에 온 일이 있어요. 때문에 산소가 희박한 데는 누구보다 빨리 익숙해져요. 잉칸타로 출발하는 건 언제죠?"

"계획대로 잘되면 목요일이지. 내일은 연습삼아 전원을 마추픽추로 데리고 가려고 해. 레이아우트는 잉칸타와 비슷해, 규모는 조금 크지만."

"관광객과 함께요?"

"그들은 무시하도록 해야지."

그는 커피를 마시고 그녀가 자신의 컵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코카인의 원료라는 것을 알고나 있소?"

"하지만 이 정도라면 마약은 아니죠, 단지 가벼운 자극을 주는 천연의 음료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꾸했다. "내게 보호자가 필요하던 시절은 지났어요. 이제 자신의 건강관리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 안에 분별이 깃들여 있는지 어떤지 의문이야. 이런 식으로 항상 내게 대드는 짓은 이제 그만 하는게 좋을 텐데, 도나. 도전에는 언제든지 응해주지."

그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광선이 윤곽 뚜렷한 얼굴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도나는 문득 브레이크의 얼굴이 잉카의 유적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잉카족의 표정은 바로 이랬을 것 같았다. 한순간 과거, 그와의 결혼생활이 떠올랐다, 자기의 감각과는 이질적인 소리와 냄새와 전신을 떨게하는 분위기가 함께. 도나는 냉정함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레이크의 말대로 도나는 코카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었다.

"어째서 이미 끝난 사실을 끝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시죠?" 애써 이성적으로 들리도록 어조를 꾸미며 물었다.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이 누구의 잘못이었든, 지금에 와서 서로를 미워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에게는 당신의 인생이 있고 내게는 내 인생이 있어요."

"무척 간단하군." 냉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직 내게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어, 도나. 그걸 청산해 줘야지. 어차피"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뭐가 어떻다는 거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당신은 내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벌주겠다는 말인가요?"

"물론이지. 당신의 이혼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그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

헤아릴 수 없는 묘한 빛을 띤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는 순간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난 아직 당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그건 사실이더군요. 방금 전에"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다.

"눈치챘나 보지? 아까는 장소가 적당치 않았던 것뿐이야.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실천형이거든. 앞으로 몇 주 동안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이곳의 밤은 혼자 자기에는 추우니까."

그가 놀리는 거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그의 말투는 남성으로서의 말투였지 고고학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한 말과는 아주 판이하군요." 상대방의 기억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발굴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사적인 문제는 일체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하시지 않았던가요?"

"그건 내가 쇼크를 받아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한 말이야. 지금은 달라. 난 완전히 냉정을 되찾았으므로 일에 지장은 없어."

도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일단 발굴 현장에 가면 그의 지식에 대한 갈증이 일체의 다른 문제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도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그가 그렇게 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의 기술에 있어서는 브레이크를 따를 사람은 없다. 그레엄은 착하고 인정이 많을 뿐이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행복한 결혼을 원한다면 그레엄 편이 나은 게 아닌가? 정열은 쉽게 식어버리게 마련이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가 됐죠? 모두들 우리가 어디 갔나 궁금해하기 시작할 거예요."

"특히 호즐리가 그럴 거라는 거지?" 브레이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추슬렀다. "그자는 사정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못할걸."

"재닌은요?" 그녀는 온화하게 물었다. "그녀는 말할 권리가 있나요?"

"있다손 치더라도 마음속에 접어둘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지폐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섰다. "그럼 돌아가도록 할까?"

숙소까지 걸어서 돌아가는 동안 그들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나는 그 동안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들이 실내로 들어가자, 그레엄이 살롱에서 나왔다. 도나와 함께 있는게 누군지를 알아채고 약간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벌써 돌아와 있었어.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요?"

"아내를 식당에 데려갔었소." 도나가 대답하기 전에 브레이크가 먼저 말했다. "당신이 흥분할 일은 아닐 거요. 만난 김에 미리 말해 두겠는데, 계획된 공중 촬영은 내일 하기로 했소. 2시까지 공항으로 가서, 고바 씨를 만나도록 해요. 그가 당신을 태우고 현장 상공을 비행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내일은 전원이 마추픽추에 간다고 했잖아요?" 의아하여 도나가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할 거요."

"재닌 미드가 조금 전에 당신을 찾더군요." 브레이크가 층계로 향하자 그레엄이 말했다. "당신과 만날 약속이 있었던 것 같은 눈치더군요."

"고맙소."

브레이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도나는 그레엄의 옆을 지나 살롱으로 향하며, 그가 질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 느꼈다.

"미안해요, 길이 어긋나서" 어깨너머로 사과의 말을 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돈 것 같아요."

"어떻게 브레이크와?"

도나를 따라오며 그가 물었다.

"우연히 만났어요. 승원의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누군가를 찾아갔었나 봐요."

조그만 테이블 위에서 책을 집어 들어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제목을 훑어보았다.

"이걸 읽고 있었어요?"

"당신을 기다리면서 책장만 넘기고 있었어."

그가 그녀의 팔을 잡자, 도나는 무의식중에 흠칫 놀라며 팔을 뺐다. 그러자 그는 걱정스런 눈초리가 되었다.

"웬일이요, 도나? 신경이 몹시 예민해진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도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단지 점심을 함께 먹었을 뿐이에요."

"예의바르게?"

그녀는 발끈하여 쏘아보았다. "그런 빈정거리는 말투는 당신답지 않아요."

"알고 있소." 후회하는 듯한 어조가 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견딜 수 없어서 그래. 이쯤에서 그에게 당신 생각을 말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되는데?"

"사실은 벌써 말했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그다지 협조적이 아니었어요."

"어째서, 그도 원하던 일이었을 텐데?" 그레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어조를 바꾸어 물었다. "설마 옛날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진 않았을 테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레엄이 그렇게 질문한 의도를 알면서도 도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브레이크가 아직도 아내로서가 아닌 여자로서의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때가 좋지 않다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인내심을 다해서?"

그레엄은 그녀를 끌어당겨 그 머리에 뺨을 묻었다.

"사랑하고 있소, 도나. 이것만은 잊지 마. 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요."

그녀는 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매달리고 싶었다. 어디를 봐도 그레엄은 믿음직한 남편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정말 그레엄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결혼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은 여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점을 어떻게 그레엄에게 납득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그날 오후는 비교적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끝낸 전원에게 내일 아침 일찍 마추픽추로 출발한다는 계획이 전달되었다. 식사 중 줄곧 재닌은 브레이크를 독점했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나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특별한 개인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재닌은 점심때 브레이크가 약속을 어긴 것을 용서한 것 같았다.

브레이크가 말한 대로였다. 재닌은 확실히 분별력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꽤나 잘 알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속상하다는 듯한 느낌을 받고 도나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5시 반의 기상은 별로 괴롭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일찍 일어났으므로 도나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일찍 일어났었기 때문이었다. 샤워를 하고 코듀로이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고 침실로 돌아왔다. 재닌은 그제서야 겨우 눈을 떴다.

"나는 안 가겠어요." 눈이 부신 듯 손을 눈두덩이에 얹고 돌아누우며 말했다. "마추픽추는 이미 보았고, 혼잡한 인파도 싫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다시 돌아누우며 회록색의 눈동자에 위협의 빛을 띠고 쏘아보았다. "당신 앞으로는 자기 분수를 알고 행동하는게 좋을 거예요. 브레이크 미첼을 따라다녀 봐야 좋은 일은 없을걸요!"

내기하겠어요? 도나는 이렇게 응수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지만 참았다. 사실을 말하면 상대는 잠잠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도나 자신은 순간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태를 더욱더 까다롭게 만들 것이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도나는 스케치 도구를 집어들고 말없이 방을 나와 버렸다.

자동차는 7시에 산타나 역을 출발했다. 도나는 아디스 레밍턴과 나란히 앉았다. 브레이크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아서 남성 멤버 두 사람과 계속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별달리 그녀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있을 리 없을 거라고 도나는 마음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의 머릿속은 일로 꽉 차 있을 테니.

우기(雨期)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초원이나 산기슭은 아직 파릇파릇했다. 그러나 초원의 군데군데에 자라고 있는 용설란이나 선인장은 이곳의 기후가 건조하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 일어난 이변처럼, 이곳도 계절의 경계가 점점 뚜렷하지 않게 되어간다는 걸 도나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7월 중순경에 쿠스코에서 비가 내렸다는 기록까지 있다. 그런 상황이니 밤의 저온을 견뎌내기 위한 방한 용구가 꼭 필요할 것 같아, 도나는 우주비행에 사용된 단열 시트를 준비했다. 그것이 마음 든든했다. 갈색 급류가 흐르는 연변에 있는 마추픽추 역에 도착하자, 가파른 고갯길 너머까지 일행을 태워다줄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나는 여태껏 은근히 기대했던 가파른 산행의 즐거움이 깨어지는 것 같아 섭섭했지만, 정상에 도착하고는 그런 조처를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소가 희박한 450미터의 산길을 걸어서 오른다는 것은 무리라는걸 깨달은 것이다. 쿠스코보다 표고가 낮긴 했지만, 이곳에서도 역시 호흡곤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근대적인 호텔과 그 맞은편의 대지(臺地)를 보았을 때는 약간 낙담했지만, 일단 중세풍의 요새 입구를 빠져나와 요새 그 자체에 들어서자, 그것은 잉카의 세계 그대로였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 양, 라마와 알파카가 페허의 광장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일행이 흩어지자 도나는 예전에는 산 제물을 바쳤던 제단이었을 것 같은 거대한 돌에 걸터앉아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 아래의 장대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에 몰두한 지 15분쯤 되었을 때, 브레이크가 그 곁을 지나쳤다.

"당신은 풍경화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어깨너머로 들여다보고 그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왜 시간을 낭비하는 거지?"

"지금은 자유시간이기 때문이죠."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절실히 느끼면서 그녀는 말했다. "게다가 그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고 싶기 때문이죠. 걱정하지 말아요, 잉칸타에 도착하면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전력을 쏟을 테니까요."

"그거 고맙군."

그녀의 곁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다 팔을 축 늘어뜨렸다.

"어때, 믿어져? 처음으로 산허리를 기어올라와 이 유적을 발견했을 때의 H. 빙엄의 감동을 상상할 수 있겠지?"

"무척 감동적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맞장구를 쳤다. 연필을 잡은 손은 멈춰 있었다. 모처럼의 홀가분한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괘씸한 브레이크, 어째서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지!

"걱정 말아요, 당신은 잘 견뎌낼 테니까."

일찍이 곧잘 그랬듯이 이번에도 도나의 생각을 환히 꿰뚫어본 듯이 말했다. "요는 시간 문제일 뿐이지."

도나는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구름 사이로 내비친 햇빛이 반사되어 그의 검은 머리는 윤이 나고 있었다. 낡은 기억을 더듬는 듯한 빛을 띠며 그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지자 그녀는 가슴 설렘을 느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욕망이 눈을 뜨더니, 급속도로 농밀하게 부풀어 올랐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옛날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결혼생활이 순탄했었다면 자기는 지금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 보는 것처럼 사물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발굴단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여 나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영영 없었을 것이다.

"이제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행동은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녀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내겐 당신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나를 안고 싶은 마음은 없을 텐데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겠지. 알게 된다 해도 대부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을걸. 고고학자 역시 인간이니까. 눈앞에 좋은 기회가 있는데 일부러 그걸 피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기회는 우연히 생기는게 아니에요. 당신은 의도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그러고는 우연인 체, 내가 그렇게 믿도록 하려는 거죠."

"어째서 내가 일부러 그런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목소리는 낮았으며 비웃는 듯한 어조였다.

"신혼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당신이 그 일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나를? 당신이 구하고 있었던건 육체적인 쾌락뿐이었지!"

도나는 너무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시 도나의 육체에 탐닉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도.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신은 나와 결혼하지 않아야 했어요. 나와의 결혼생활에서 당신이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했어."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알고 있었던걸 생각하면, 선견지명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때 당신은 아직 어렸으므로 완전히 성숙하게 되면 날 이해해 주리라 기대했었지. 정말 어리석었던 건 당신에 대한 당신 아버지의 영향력을 전혀 고려치 않았던 점이야. 제임스 캠벨의 질투를 말이오."

"질투?"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아니, 그는 분명히 질투하고 있었어. 모든 의미에서 당신은 당신 어머니 대역을 해내고 있었던 거야. 특히 정신적으로 말이야. 그는 당신이 자기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게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아요." 도나는 필사적으로 상대방의 오해를 풀려고 애썼다. "아버지의 희망은 내 행복뿐이었어요. 당신 말대로 질투를 느꼈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단둘이 될 기회를 만들어주셨겠어요?"

"그는 당신을 잡아 둘 자신이 있었거든."

그녀의 험악한 표정을 눈치 채고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얼굴을 하지마. 어쨌든 육체적인 욕구는 어쩔 수 없지.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당신 친구인 사진작가는 당신을 만족시켜 주나?"

"말했잖아요" 자제심을 잃지 않도록 애쓰느라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우린 연인 사이가 아니에요."

"그거 믿어지지 않는데. 그렇다 해서 별로 달라질 건 없지만, 어쨌든 내가 함께 있는 동안은 그는 당신을 안지 못하리란 것만 명심해 줘."

도나는 잠시 동안 묵묵히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복수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진정으로 날 사랑했었다면"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마세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고 하진 않을 테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잔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신은 나의 선의에 호소하고 있지만, 허사요. 그런 것은 이미 갖고 있지 않으니까, 당신에 관한 한은."

"교수님!"

페루 정부를 대표해서 파견된 후안 프리에트가 아래층의 테라스에 서 있었다. 용건이 있는 듯 까만 눈동자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의견을 여쭙고 싶은데요?"

"아니, 괜찮소. 얘기는 방금 끝났으니까요."

브레이크가 프리에트가 있는 곳으로 뛰어 내려가자 도나는 차가운 바위 위에 혼자 남겨졌다. 그녀는 그들이 왕가의 분묘 쪽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체격이 늠름했으며, 또 한 사람은 땅딸막했다. 브레이크가 한 말은 모두 그의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에 항상 발굴대원들이 있을 테니 완력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은 그녀의 행동 나름이었다. 의연한 태도로 묵묵히 맡은바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점심식사는 호텔의 카페테리아 식의 식당에서 먹게 되었다. 식당 안은 세계 각지로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혼잡을 이루었다.

"적어도 잉칸타는 아직 저 사람들에게 점령되지 않았군요." 도나의 시선을 눈치 챈 아디스 레밍턴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덧붙였다. "고산병이 아니어야 할 텐데." 브레이크의 눈을 피해 도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다행이군요. 오늘 밤에는 마음껏 즐기고 내일은 여행에 대비해서 휴식을 취하기로 돼 있어요. 후안이 밖에서 식사하기 좋은 장소를 알고 있대요. 댄스도 할 수 있대요!" 그녀는 웃었다. "여섯 명 남자를 상대하려면 당신과 자닌은 틀림없이 아주 바쁠 거예요." "다섯 사람이죠."

그녀 곁에 앉아 있던 남자가 정정했다. 도나는 아직 그와 한두 마디밖에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댄스하기에 너무 나이가 많은 것 같군요. 33백 미터나 되는 고지에서 그런 식으로 기분전환을 하려 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디어도어, 댄스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디스는 오랜 친구 사이에서만 통하는 허물없는 투로 말했다. "20살 때의 당신은 왼발이 두 개인 것 같았어요. 아직도 잊지 않았어요. 대학의 축제에서는 언제나 당신과 맞닥뜨리곤 했었지요. 학위도 함께 땄지요, 우리는."

"아주 옛날 얘기지." 디어도어가 담담하게 동의했다. "새로운 세대가 점점 자라나고 있어. 여기 있는 미첼 박사나 저기 있는 두 사람처럼."

다른 테이블에서 후안 프리에트와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 젊은 연구실 조수들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때에 따라서는 우리를 앞지르기도 하지." 마지막 말은 모두 들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가시는 없었다.

그 말을 받아 브레이크가 약간 머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거죠."

"그 운을 재빨리 포착한 거지."

연장자는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아마 자네는 아직 미혼이지?"

브레이크가 순간 자기 쪽을 흘끗 쳐다보자 도나는 숨을 죽였다.

"했었죠, 한 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에게 채였죠."

"이 일에 따라다니는 괴로움이야. 내 아내도 내게 그랬지. 처음부터 당신과 결혼했어야 했는데, 아디스. 우리는 좀 더 공통점이 많잖아."

"결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아디스는 그렇게 말하며 기묘한 표정을 담은 눈초리로 브레이크를 보았다. "꽤나 상처를 받았겠군요."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지난 일이죠. 이제 슬슬 도망갈 길을 마련해야겠네요, 돌아갈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이렇게 말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건 별로 익살스런 말은 아닌 셈이죠!"

밖으로 나오자 잃어버린 도시의 전설 그대로 산상에서부터 짙은 안개가 내려덮이고 있었다. 해가 지자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다. 도나는 어색한 자리를 피해 숙소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일행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7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재닌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즐거웠어요?"

도나가 문을 닫자 약간 무례한 태도로 물었다.

"."

달리 덧붙여 말할 것이 없기에 방을 가로질러 로커 위의 여행 가방을 내려 침대 위에 놓고 리마에서의 첫날밤에 입었던 크림색 린네르 드레스를 꺼냈다. 구김살이 져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어요?" 생각난 듯 덧붙였다. "결국 그레엄이 공중 촬영을 하는데 함께 갔었죠."

상대방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아마 잉칸타에 도착하려면 고생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어디나 자연 그대로라서 하늘에서는 현장을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그러나 그레엄은 필름을 현상해 보면 제대로 촬영이 되어 있을 거래요. 역시 전문가답더군요."

"그럴 테죠." 도나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러니까 여기 와 있겠죠."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었다. 욕실에 가져가 수증기로 구김을 펼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는다는걸 알고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제 누군가가 말하더군요." 재닌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요."

"브레이크와?"

도나 입에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상대방의 쏘아보는 시선을 느끼자 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우리는 동료인 동시에 오랜 친구죠."

그러나 난 그의 아내예요! 도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안 됐지만 그는 계획을 바꾼 것 같더군요. 그가 레밍턴 박사에게 모두 다 함께 가자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순간, 재닌의 표정에는 험악함이 감돌았다.

"아마 당신이 잘못 들었겠죠."

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나는 청결한 내의와 함께 드레스를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 브레이크와 재닌이 함께 밤을 지내든 말든 신경쓰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참담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4

후안 프리에트가 저녁 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고 여겨 모두를 인솔한 곳은 시내의 근대적인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곳이었다. 일행은 두 개의 테이블을 잇대어 앉았다.

"골고루 모였군."

후안이 평했다. 확실히 남녀노소가 뒤섞여 다채로웠다. 주위에 달리 이런 그룹은 눈에 띄지 않았다. 도나는 재닌의 맞은편에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재닌이나 브레이크의 표정에서 의견충돌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도나는 재닌의 태도에 놀랐다.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나는 과연 저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그레엄도 내내 말이 없었다. 도나가 넌지시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는 피로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고도의 악조건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사람도 있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만일 브레이크가 눈치 채면 즉각 교체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레엄 본인의 일은 별도로 하고 내게는 이 사람이 필요하다. 브레이크가 주는 심리적인 중압감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인간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자기 본위일까! 도나는 자신의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식사는 훌륭했지만 그녀는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빨리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지껄이고 있는 재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유능함과 깊은 전문 지식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지나친 자신감은 눈에 거슬렸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브레이크는 재닌의 높은 콧대를 꺾어놓을 수 있겠지만, 그는 도나가 본 바로는 굳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2년 사이에 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가정할 수도 있었다.

연구실 조수중의 한 사람이 댄스를 신청해 오자 도나는 마음이 놓였다. 25살의 마이클 바라트는 그녀가 이제까지 만난 중에서 가장 연구에 열성적인 젊은이이었다. 플로어로 나가자, 그는 그녀의 아버지 얘기를 존경해 마지않는 태도로 입에 올렸다.

"미첼 교수는 언제나 그분을 잉카 문명의 권위자라고 말씀하시죠. 저도 몇 번 그분의 강연을 들었어요. 그분의 따님이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겠죠?"

", 각별히 다정한 분이셨으니까요."

"아버님의 뒤를 이을 마음은 없으신가요?"

이런 류의 질문을 많이 받았었기 때문에 대답은 기계적으로 나왔다.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머리를 닮지 못해서요."

"하지만 적어도 분야는 같죠."

그는 미소 짓더니, 콧등에 내려온 투박한 테의 안경을 밀어 올렸다. "현장에 도착하면 당신은 무척 바빠질 거예요."

언제? 도대체 언제 현장에 도착할 것인지, 그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이클과 함께 도나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레엄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숙소로 돌아가야겠어."

파리한 안색의 그가 말했다.

"바래다 드릴까요?"

도나의 호의를 그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당신은 계속 남아 있는게 좋을 것 같소. 피로해져서 먼저 돌아갔다고 전해 줘요."

그녀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고 그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대수롭지 않으니까. 후안의 말로는 며칠씩 이런 기분이 계속되는 사람도 있지만 갑자기 좋아지는 수도 있다더군. 당신은 이렇지 않으니 다행이오."

"바래다 드리지 않아도 정말 괜찮겠어요?"

"정말로 괜찮다니까."

목소리는 낮았고 미소는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 남편이 오해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녀는 다소 신중하게 물었다. "당신, 내가 이혼하기를 바라지 않나요?"

"억지로 해결되는건 원치 않아. 서로 납득하고 순리대로 처리하는 게 기분이 좋을 테니까."

"그가 지금은 비록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아직" 애써 미소 지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택시 타는 데까지라도 바래다 드릴게요."

도나는 반대를 무릅쓰고 택시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가 차에 타자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돌아서며, 함께 돌아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레엄은 꽤 지친 표정이었다. 브레이크는 레스토랑의 입구에 나와 있었다.

"방금 당신을 찾으러 나온 길이오. 어찌 된 거요?"

속여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나는 일단 시도해 봤다.

"그레엄이 몸이 불편해서요. 낮에 먹은게 안 좋았나 봐요. 바래다주려고 했지만 사양하는 바람에"

"꽤나 생각해 주는군." 브레이크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까지 좋아지지 않으면 그와 교대할 사람을 찾아야겠군. 앞으로 가는 곳은 의사를 부르기엔 너무 어려운 곳이니까."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는 거죠?" 그녀는 신랄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를 쫓아낼 구실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브레이크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어찌 되건 당신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겠소?"

그들이 들어가자 재닌이 쏘아보았다. 댄스 플로어 근처를 지나면서 도나는 갑자기 뭔가 기상천외한 짓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같이 춤춰요." 다른 커플이 앞을 가로막자, 그녀는 브레이크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죠?"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플로어로 데리고 나가서 몸이 닿을락말락할 정도까지 끌어당겼다.

"이 정도면 되겠소?" 조롱하듯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좀 더 친밀한 게 어떻겠소?"

그녀가 잠자코 있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는 게 좋을 걸, 곧바로 당신에게 그 대가가 되돌아갈 테니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아니, 알고 있소. 당신은 재닌에게 보이려 하는 거야."

"그녀와 잤나요?"

"잤어." 아주 조용히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여러 번. 이것으로 호기심은 만족됐소?"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쇼크로 도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상대방이 굳이 감추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상을 알고 싶지 않으면 묻지 않는게 좋을걸. 설마 내가 2년 동안이나 여자 없이 지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

"두 주일 동안 여자 없이 지냈다고 해도 믿지 않아요!" 자포자기에 가까운 말투였다. "어쨌든 그녀라면 당신 말을 잘 들었겠군요."

"당신이 나를 버리고 난 뒤의 일이야." 도나에게 대놓고 조소하며 말했다. "다른 것은 어떤지 모르지만, 육체적인 면에서 당신은 성숙했어. 그것이 어느 정돈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브레이크, 그만 해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해요?"

그의 험악한 표정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당신을 원하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줄곧 당신을 원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전에도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궁합이 잘 맞았잖아. 아직도 틀림없이 그러리라 생각하는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겨서 자기의 몸을 더욱 의식하게끔 했다. "전원이 모두 독방을 갖지 못하는게 유감이오. 그러면 하룻밤 마음껏 즐길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것에 신경을 쓰나요?" 힐난하듯 말했다. "어쩌면 재닌도 당신의 특혜를 받고 싶어할지도 모르죠."

도나의 허리에 감은 팔에 도나가 아픔을 느낄 정도로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는 재닌과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소. 이건 원래 브링크맨 박사의 발굴단이니까."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녀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 내가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권리가 없듯이 그녀도 역시 내 생활에 간섭할 권리가 없으니까."

도나는 재닌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브레이크는 얼음처럼 차고 냉혹하고 비정했다. 그것이 누구의 탓인가? 양심의 소리가 작게 물었다. 일찍이 한번 사람에게서 배신당한 그가 그런 비뚤어진 생각을 갖게 된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도나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가를 비로소 생각해 봤다. 아버지가 아니라 그에게 위로를 받고자 했더라면 두 사람은 아직도 결혼생활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생활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때 자신이 친정으로 돌아감으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 자기 세계를 만들고 굳힐 수 있어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들이 테이블로 돌아가니, 재닌은 디어도어 뉴볼드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무시했다. 브레이크는 자리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직 더 남있고 싶은 사람들은 좋을대로 하세요. 계산은 이미 끝냈어요."

누구도 계속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줄지어 돌아가는 동료들의 뒤를 따라 도나는 아디스 레밍턴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 연상의 여인은 뭔가를 간파한 듯한 눈길을 보냈다.

"대답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디스는 말했다. "당신과 브레이크 미첼은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죠?"

도나는 태연한 체하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그렇게 보였어요?"

"당신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느낌이 약간." 아디스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별로 유쾌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더군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죠."

"괜찮아요, 자세한 내막이 알고 싶어 물은 건 아니니까요." 아디스는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 미드 박사에게는 조심해야 해요. 그녀는 이미 그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알게되면 당신을 이 팀에서 쫓아낼 거예요."

하지만 브레이크가 나를 이곳에 두고 싶어 하니까 그것은 용이하지 않을 거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기미를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흥미진진하다. 쫓겨나는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그럴 틈은 없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다.

"잉칸타에 도착할 때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불쌍한 존 브링크맨 박사처럼 당신이 넘어져 발목뼈라도 부러지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이제부터 통과할 곳은 넘어지기 쉬운 곳이죠."

아디스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의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도나와 재닌, 두 여자는 돌아가는 택시 속에서 브레이크를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다리를 도나의 다리에 밀착시켰다. 어쩌면 그는 재닌에게도 이와 똑같은 짓을 하고 혼자 이 상황을 즐기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택시를 내리기 전에 재닌이 그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그 역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도나는 앞장서서 숙소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디스 레밍턴의 눈길을 의식하고 될수록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모두들 지쳐 있어서인지 일찌감치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레엄과 같은 방을 쓰는 디어도어에게 그의 상태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잠을 자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운이 좋으면 아침에는 그도 제 페이스를 찾게 될 것이다. 침대를 정리하는 동안, 재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나는 굳이 침묵을 깰 마음은 없었다. 이 고고학자와 앞으로 몇 주간이나 같은 텐트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달리 어찌해 볼 수도 없다는걸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도나는 어느 새 잠이 들었고, 얼마 후에 눈을 떠보니 재닌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도나가 눈을 뜨게 된 것은 문이 조심스럽게 닫히는 소리 때문이었다.

브레이크와 재닌이 귓속말을 주고받던 것이 생각나자, 그녀가 어디 갔는지 짐작이 갔다. 역시 밀회인 것이다. 순간, 질투심과 노여움에 몸을 떨며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 봐야지. 사실인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불은 아직 위층에도 아래층에도 켜져 있었지만 숙소 안은 조용했다. 도나는 가운의 앞을 여미며 방을 나가, 조각이 되어 있는 난간 너머로 텅빈 홀을 내려다보면서 한단 한단 층계를 내려갔다. 홀에도 살롱에도 아무도 없었다. 복도의 끝은 식당이고, 막다른 곳은 작은 안마당으로 통해 있었다. 그 옆의 문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방의 입구였다. 자신이 잘못 안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도나가 어정쩡하게 서 있으려니, 그 방의 문이 열리고 브레이크가 나왔다.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나를 찾고 있는 거요?"

"아뇨!"

심한 혼란에 빠져서 도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저녁식사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쩔쩔매어 덧붙였다.

"이층에 있었는데도?" 의심쩍다는 투였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이층에까지 들렸을 리는 없는데."

"뭘 하고 계세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한 발짝 방 안으로 뒷걸음질 치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홀린 듯 따라들어가 보니, 그곳은 서재와 조그만 도서실을 합쳐놓은 것 같은 방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듯했다.

"만족했소?" 브레이크가 놀리듯 물었다.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본 물음이었다. "뭣하면 셔터의 뒤쪽도 들여다보겠소?"

"분명 무슨 소리가 났었는데." 그녀는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잘못 들었나 봐요. 이제 침실로 돌아가겠어요."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물은 건 당신이오." 그가 재빨리 방문을 닫아버려 그녀는 갇혀 버렸다.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이야."

사진과 서류들이 널려 있는 커다란 책상을 가리켰다.

"공중 촬영한 사진을 검토하고 있었소. 좋은 사진에서는 얻는 것이 많지. 지상에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여주니까."

"사진의 가치를 아시는군요. 그럼 그레엄의 실력을 인정하시는 거죠?"

"부정한 적은 없잖소.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꽤 잘 찍었는데. 이미 여러 가지를 알아냈소. 먼저 갔던 발굴단이 작성한 윤곽은 불완전하다는 것."

손가락으로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이 산 속에 그늘이 보이지? 층계가 있다는 증거야. 아직 폐허로 묻혀 있을 가능성이 확실해졌어. 그것은 또 생각했던 것보다 유적이 크다는 뜻이야. 전설에 의하면 군사 요새일지도 모르지만, 발굴을 시작하면 몇 가지 중요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 케추아 인디오를 동원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차를 두고 갈 곳은 꽤 큰 인디오 부락이거든."

"나도 알고 있어요."

도나는 야릇한 기분으로 바로 옆에 있는 단단한 근육질의 몸과 어깨에 놓여진 손의 무게를 느꼈다.

"거기까진 얼마나 걸리죠?"

"부락까지? 잘하면 하루로 족해.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그 다음은 그때그때 타개해 나가는 수밖에. 편한 계획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

"재닌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말할 거요?" 브레이크는 신음하듯 낮게 말했다. "그녀와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그녀와는 단순한 동료일 뿐이라니까."

"그녀도 그렇게 알고 있나요?"

"그러리라고 생각해."

도나가 나가려 하자, 어깨 위에 놓여진 그의 손에 힘이 들어 꼼짝 못하게 했다.

"돌아가긴 아직 일러! 그래서 내려온 거요, 그녀와 내가 함께 있는 걸 확인하려고?"

"그녀가 방을 나갔어요." 얼굴을 돌린 채 도나는 말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던 거예요. 그뿐이에요."

"질투 때문이 아니고?" 조롱기 섞인 힐문이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갔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나? 이번에는 당신이 없어져 그녀 쪽에서 궁금해 하고 있겠군."

"아무튼 전 이제 돌아가겠어요."

도나가 또 한 번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하자, 어깨 위에 놓여져 있던 손이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브레이크, 제발 놓아줘요!"

"그렇게는 못하겠는걸. 당신은 지금부터 보상을 해줘야겠소, 도나. 당신은 자진해서 찾아왔잖소."

저항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힘껏 눌러 머리를 고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순간, 그녀는 흠칫 놀라 반응을 했다. 가벼운 떨림이 몸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을 빼앗기보다 그녀가 원하고 있는 걸 눈치 채고 그녀의 의지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더듬어 입을 열게 했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잡아당겼을 뿐인데도 가운의 앞이 벌어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가슴을 감싸자 그녀는 몸을 떨었다. 도나도 온몸을 흔드는 감정에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도나는 카펫 위에 가볍게 쓰러졌다. 이미 도나에게는 저항의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일찍이 누렸던 완전한 충족의 기억만을 뚜렷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어떻게 나는 2년 전에 이것을 버릴 수 있었을까? 그의 손의 감촉에 전신을 떨며 그녀는 의아해 했다. 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해주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목구멍 깊숙이에서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든 브레이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애써 욕구를 억제하고 있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게 수중에 안 들어올 때의 기분이 어떻소?" 잔인한 어조로 물었다. "말해 봐, 어떤 느낌인지."

"브레이크, 그만 해요!" 목이 아팠다. 목소리 그 자체가 고통에 차 있었다. "너무해요, 이런 짓!"

"너무해? 당신도 내게 이렇게 했잖소!"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어요."

"아니, 더 심했지. 당신은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 버렸어. 6개월, 당신이 허락해 준 것은 그뿐이었어."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다. "이래도 당신은 아직 나를 어떤 지경으로 몰아붙였는지 모를 거야! 사랑했어, 당신을. 이 비정한 사람!"

"미안해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받고자 하는 형태로는. 그는 내 마음과 영혼을 동시에 갈구했었다내가 준 것은 육체뿐이었다. 그것도 한정된 기간 동안만.

"이건 전초전에 지나지 않아."

천천히 몸을 떼고 조롱하듯 그녀의 날씬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나중 일은 생각하지 말고 당신을 안아버리라는 유혹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어. 유혹에 지지 않으려는 것은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야. 당신에게는 우선 괴로움을 맛보게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는 안 될걸요. 두번 다시" 그가 일어서자 그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두번 다시 이런 술수에 넘어가진 않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몸을 구부려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한손으로 흐트러진 매무시를 고쳐 주었다.

"당신 방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거요. 누군가가 찾으러 오기 전에."

"재닌 미드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그녀는 아마 진상을 환히 알고 있을걸요."

도나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하든 그건 당신 자유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소. 어찌 되건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건 받게 될 거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내가 만약 이 쿠스코에서 팀으로부터 이탈한다면?"

"당신은 잉칸타 발굴에 참여했었다는 명예를 버릴 수 있다는 말이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러지 못해, 도나. 당신은 자신의 실력을 몹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브레이크!"

어조는 격했고, 푸른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알고 있소." 그는 조소를 지어 그녀의 분노를 비웃었다. "그렇지만 내가 당신에게 하고자 하는 걸 당신도 싫어하진 않지?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건 그 감정뿐이야. 이만 돌아가 줘, 나는 여기를 정리해야 하니까."

방을 나온 도나는 복도의 벽에 기대어 잠시 동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를 정말 싫어한다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를 다시 만나 일깨워진 감정은 2년 전, 그때보다 훨씬 복잡했다. 2년 전에 나는 그에게 아픔과 고뇌를 맛보게 했다. 지금 그가 내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맛보게 하려 한다 해서 그를 비난하는게 과연 옳은가?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자, 재닌이 가면 같은 얼굴을 하고 일어났다.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브레이크와의 관계를 그녀에게 알려주는데 이보다 더 적당한 기회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나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브레이크와의 결혼과 별거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와 나만의 문제인 것이다.

"잠깐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왔어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재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건방진 말투로군! 그럴 마음만 먹으면 당신쯤은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어요."

"그럴 수는 없을걸요." 도나는 가운을 벗고 시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미첼 교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한은."

"그와 함께 있었나요?"

"말했잖아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신의 말투가 도발적이라고 느껴졌지만, 도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워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좀 자야겠어요."

그날 밤은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단속적으로 얕은 수면을 취하다가 7시쯤 눈을 뜨니, 숙면을 취하지 못한건 자신뿐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재닌의 침대가 비어있고, 시트커버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어젯밤의 언쟁을 떠올리자 부끄러워졌다. 변명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더 부드러운 표현을 쓸 수 있었을 것이었다. 도나가 한 말은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충분했다. 아침식사 전에 살롱에 내려갔을 때도 재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레엄은 이미 내려와 있었다. 꽤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도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는 현기증도 안 나고 두통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후안의 말처럼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그다지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레엄은 덧붙였다. "브레이크는 모두들 조용히 휴식을 취해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소."

"그와 만났어요?"

태연한 투로 말하기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재닌과 함께 내가 어제 촬영한 사진을 검토하고 있소. 검토는 그들에게 일임했소. 보충할 것은 다 설명해 줬고." 그레엄은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젯밤에는 물어볼 겨를이 없었는데어땠소, 마추픽추는?"

"그저 그렇더군요, 관광객만 많고. 적어도 잉칸타는 그렇게 될 염려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도로를 만들려면 너무나 돈이 많이 들 테니까요, 그 부근의 지형이 당신이 찍은 사진에 나타난 그대로라면."

"당신도 사진을 보았소?" 그는 의아해 하는 투로 물었다. "언제?"

"어제요, 저녁식사 후에 돌아와서."

그때 아디스가 방으로 들어서자, 도나는 마음이 놓여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일 이맘때면 출발하겠네요."

"드디어 그렇게 되었군요." 아디스는 맞장구를 쳤다.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전원이 아침 식탁에 둘러앉은 후에야 브레이크와 재닌이 들어왔다. 도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두 사람의 눈길을 피했다. 식사 후, 남자들은 귀중한 장비를 석 대의 랜드로버에 싣는 작업을 감독하러 갔다. 도나는 자기 침실로 돌아와 모든 짐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방수 캔버스로 된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데 재닌이 들어왔다.

"나중에 브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 거예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당신은 내게 좀 더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에 그와 의견의 일치를 봤어요."

"당신의 능력은 인정해요." 도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일에까지 개입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어쨌든 당신은 내 사생활을 간섭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그렇다 해도 특히 어젯밤과 같은 건방진 말투는 용서할 수 없어요."

"내 말투가 그랬나요?"

"딴전부리지 말아요. 브레이크 미첼 같은 남자가 당신처럼 대수롭지 않은 여자를 상대하리라고 생각해요? 그도 당신 아버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죠. 애초에 당신이 이 팀에 낄 수 있었던 것은 그분 덕택이죠. 존 브링크맨은 부친의 후광에 약하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이제 그분 일은 다른 사람들이 맡아서 해낼 수 있어요."

"그 속에 당신도 끼어 있다는 말이군요?"

"왜요,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는 그분이 하다 만 데서부터 시작해요, 브레이크 역시도. 잘돼가고 있어요."

"다행이군요."

브레이크가 어제의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한 것을 알고 싶었지만 물어볼 마음은 나지 않았다. 그가 같은 수법을 쓸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이었다. 잉칸타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고. 그렇게 나를 원한다면 기회가 생겼을 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털어버리기로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끝내고 재닌은 또다시 나갔다. 가방 플랩에 달린 가죽 벨트 중 하나가 말을 듣지 않아 애를 먹으면서, 자기가 꼭 잉칸타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런 일에서 빠져나가는 간단한 방법은 짐을 꾸려 오후의 비행기 편으로 리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레엄에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을 말하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은 없는 것이었다.

 

5

모두 5시에 일어났다. 난방이 되지 않는 침실에서 떨면서 도나는 코듀로이의 바지와 순면 셔츠로 갈아입었다. 재닌은 조용했다. 일행은 대기하고 있는 석 대의 랜드로버에 나누어서 탔다. 브레이크와 재닌과 후안 프리에트는 선두 차에 탔고, 도나는 그레엄과 마이클 바라트와 함께 두 번째 차에 탔다. 마지막 차에는 아디스와 디어도어 뉴볼드와 또 한 사람의 연구 조수인 필립 하디가 탔다. 두 사람의 연구 조수는 2, 3주간 발굴 작업을 거든 뒤 되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만약 상황이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그때 그들과 함께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도나는 다소 시니컬하게 자신을 타일렀다. 쿠스코에서 카마초의 마을까지 안타 가도를 달려가다 옆길로 빠져 친체로로 향했다. 제대로 닦인 도로는 거기서 끝났다. 친체로의 교회에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벽화를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있었으므로 시장을 산책했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되었다. 거기에서 4백 미터쯤 더 올라가자 그레엄은 몸을 움직이는게 힘겨운 듯했다. 브레이크가 한두 번 그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보는 것을 눈치 채자 도나는 걱정이 되었다.

"내 걱정은 그만둬요." 도나가 걱정스러워하자 그는 중얼거렸다. "문제없으니까."

웃으려 했지만 괴로워 그럴 수 없는 것 같았다.

"잉칸타로 출발하기 전에 모두가 건강진단을 받을 걸 그랬나 봐요." 마이클 바라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잉란타에 도착해서 병이 나면 큰일이니까."

"어디서든 병이 나면 큰일이지." 그레엄이 짧게 대꾸했다. "날 좀 내버려 둬요, 두 사람 다!"

이유를 알고 있으므로 도나는 그 가시 돋친 어조를 무시했지만, 마이클은 언짢아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는 잠자코 있었다. 길은 멀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협곡으로 들어가자 평화스러운 풍경이 전개되었다. 언덕의 사면은 그 전체가 옥수수 밭으로 되어 있었다. 전방에는 언제나 눈에 덮여있는 안데스의 봉우리가 양광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도로는 예상대로 엉망이었다. 석 대의 차는 될 수 있는 대로 같은 간격을 유지하도록 신경을 써서 달렸다. 겨우 그날의 목적지에 닿았을 때는 일몰 무렵이 가까와서였다. 마을 주민들은 우호적이었으며 일행에게 빈 오두막을 제공했다.

그들은 이 지방에서 캘 수 있는 야생 감자를 분유와 계란과 교환해주었다. 아이들은 이 지구상의 어떤 곳의 아이들과도 똑같아 호기심을 보이며 포터블 곤로로 식사 준비 하는걸 입을 헤벌린 채 바라보았다. 일행은 의자가 없는 방바닥에 모여앉아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페루식으로 요리된 닭은 강렬한 피멘토우의 향기가 났지만 맛이 대단히 좋아 식욕을 돋구었다. 앞으로는 통조림과 팩에 든 식료품으로 조리된 것을 먹게 될 거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석 대의 랜드로버로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양은 한도가 있으므로 정기적으로 물자의 보급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헬리콥터로 말이지?"

그녀가 자기의 생각을 말하자 아디스 레밍턴이 맞장구를 쳤다. 그레엄은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흙벽에 힘없이 기대어 앉은 그를 보자 도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가 일어나서 나가자 잠시 후 따라나갔다. 그는 아노락의 주머니에 양손을 깊숙이 찌르고 서 있었다. 어떠냐고 묻는 도나의 말에 그는 괜찮다고 하며 고집을 부렸다.

"숨이 약간 찰뿐이라니까."

"아무것도 안 드시더군요."

그녀는 주저하며 말했다. "아마" "컨디션이 좋을때도 닭요리는 즐기지 않지만, 오늘 밤엔 특히 내키지 않아서."

얼굴을 살짝 도나 쪽으로 돌렸다. 어둠 속이라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요, 당신과 당신 남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의 귀에도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딴전부리지 말아요, 도나. 아직도 그에게 미련이 있는 게 아니오?" 그레엄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 말이 없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요?"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없소."

정직해지자고 다짐하며 도나는 어깨를 추슬렀다.

"그 사람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내 마음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게는 손이 닿지 않는 당신 내부의 뭔가를 그는 뒤흔들고 있는 거요." 그레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는 끝난 것 같소. 그렇게 생각되지 않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사실을 자신에게 인식시키는 말투였다.

"안 돼요!" 도나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레엄, 내겐 당신이 필요해요."

"무엇 때문에? 당신 자신의 본능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도나. 난 그렇게 관대하지 않은걸. 당신은 이미 나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한 거라구."

도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슬픈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몹시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일로."

"브레이크 때문이지. 나 때문에 그런 건 결코 아닐 거요. 우리 사이는 이미 종말이 온 거란 말이오."

"친구도 될 수 없나요?" 도나가 용기를 내어 묻자,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원수가 되는 건 아니잖소, 당신이 우려하는 게 그 일이라면. 서로 제각기 해야 할 일이 있소. 사업은 어디까지나 사업이니까."

오두막으로 돌아가다가,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말했다. "괜찮아. 나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어떤 의미로도. 당신 자신의 심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나 전념하도록 해요."

말로야 간단하지, 하고 뒤따라가며 도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브레이크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한방에 아홉 사람이 자게 되었으므로, 한 사람 몫의 공간은 아주 협소했다. 신발과 방한복을 벗었을 뿐, 모두 옷을 입은채 침낭 속에 들었다. 재닌은 잽싸게 브레이크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도나는 그것을 알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리 브레이크라 할지라도 이 좁은 방에서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레엄은 디어도어와 마이클 사이에 누웠다. 그와 도나 사이의 균열을 눈치챈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다. 도나는 가슴 한쪽이 비어버린 듯 허전했다. 더없이 다정한 그레엄이라는 남성을 나는 잃었다. 그것도 브레이크 때문에. 브레이크는 지금은 이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걸 거부하고 있지만, 일단 일이 끝나 귀국하면, 그때는 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 수 없었다.

도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겨우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방문이 달려 있지 않은 입구로 눈길을 돌리니 새벽하늘이 보였다. 누구도 몸을 뒤치지 않았다. 단잠에 빠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닿는 아침의 냉기에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려 도나는 일어나기로 했다. 그녀는 살짝 침낭에서 빠져나와 가벼운 부츠를 신었다. 마을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대지 위에 있었다. 그 맞은편은 수목이 무성한 경사면이었다. 동쪽으로부터 검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배경으로 안데스 산맥이 이제 겨우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광경이었다. 도나는 바위에 걸터앉아서 주위의 풍경이 서서히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을 지켜보며 햇살이 비치기를 기다렸다. 문명 세계는 이곳에서 백만 킬로도 더 떨어진 먼 곳에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바위를 차는 부츠 소리에 그녀는 현실로 되돌아오게 됐다. 뒤돌아보니 브레이크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당신이 오두막에서 나가는 소리를 들었소. 1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궁금해서 찾아 나왔지. 그런데 춥지 않소?"

"아뇨."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일출을 기다리고 있어요."

"해가 뜨려면 아직 30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요. 그러니 안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텐데."

"싫어요!" 그녀는 악문 이 사이로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혼자 있게 해주세요. 내 일은 당신 책임은 아니니까요."

"고집부리지 마." 그의 목소리도 지극히 냉담했다. "들것에 실려서 돌아가고 싶어?"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는 냉기 속에서 떨지 않으려고 양 무릎을 가슴에 끌어당기고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모르시겠어요? 당신이 가까이 오는걸 원치 않는다구요."

"그것 참 운이 없군, 만약 그것이 정말이라면."

재빠른 동작으로 그는 몸을 굽히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노여움이 그의 손을 통해 찌릿찌릿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가자면 가!"

그녀가 어찌나 세게 그의 손을 뿌리쳤던지 두 사람 다 놀랐다.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도나는 반사적으로 사면을 가로질러 달렸다. 밤 사이에 비가 온 게 틀림없었다. 발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순간, 그녀는 바위가 수직으로 깎아지른 곳에 있었다. 공포를 느낀 도나는 양손으로 필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 했다. 바닥이 단단한 데를 골라 디디며 아래로 내려온 브레이크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브레이크는 힘차게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워 바닥이 단단한 데로 끌어올린 뒤 처음의 바위 위로 밀어올렸다. 그는 거칠게 숨을 쉬더니 난폭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이런 바보!" 내뱉듯이 말했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거요?"

"지면이 건조했더라면 미끄러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도나도 그에 못지않게 숨이 찼다. "건기(乾期)라서 비가 왔으리라고는"

"건기라 해서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어린애에게 설명하는 듯한 어조였다. "많이 오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갈 작정이었소?"

"당신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지요." 금세 기운을 차리자 내뱉듯 쏘아붙였다. "만약 내가 다쳤더라면 당신의 책임이었을 거예요!"

더 이상 말하기 전에 그는 강압적으로 거칠게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의 팔이 무릎을 스치는가 싶더니 자신의 몸이 지면에서 들어올려지는 것을 도나는 느꼈다. 사정없이 입이 막혀 있었으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브레이크는 그녀를 안고 가까운 헛간으로 들어가 마른 옥수숫대 위에 내려놓고는 문을 발로 차서 닫아 버렸다. 창이 없었으므로 어둡고 답답했다. 먼지가 일어 재채기가 나오려 했지만 브레이크가 다시 키스를 하는 바람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체중에 눌려서 몸이 점점 더 옥수숫대의 더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허리의 벨트에 닿자 몸 전체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옥수숫대의 더미 위에서 바르작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저항을 그만두고 귀를 기울였다.

"브레이크." 절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 쥐가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 말에 그는 동작을 그쳤다. 도나는 그가 몸을 굳힌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때 바스락 소리가 났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도나는 안데스의 쥐를 본 적은 없지만 오싹해져서 필사적으로 그의 소매에 매달렸다.

"이곳에서 나가게 해줘요! 부탁해요, 브레이크. 이곳에서 나가게 해줘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야."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만일 쥐가 아니라 마을 사람이면 어떻게 하죠?" 그녀는 낮은 소리로 대들었다. "그들에게 이런 장면을 들켜도 괜찮단 말이에요?"

그는 낮게 웃었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우리가 옥수숫대 속에 누워있는걸 알 수는 없지. 그러나 이번에는 당신 말에 따르기로 하지,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

그가 몸을 돌려 일어나자 도나도 따라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흐트러진 매무새를 고쳤다. 브레이크는 이곳에서 나를 안을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나를 놀리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가 당신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앞으로는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을 열자, 그 목소리의 어조는 그의 기분을 정직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나만 바라고 있는 일이 아니잖아?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면서."

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다시 한번 그의 따뜻하고 강인한 팔에 안기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그가 눈치 채게 되면 큰일이다. 그의 목적은 복수일 뿐이니까. 그들이 밖으로 나오니, 태양이 완전히 떠올라 주위의 풍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마을 사람들도 활동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몇 사람인가는 대원들이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른 아침의 조깅이었나?"

디어도어 뉴볼드가 들어오는 두 사람에게 살며시 물었다. 깨어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는 다리를 침낭 속에 넣은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따라나가 볼까 생각했지만 나이가 있고 보니 도무지 엄두가 안 나서. 해돋이는 어땠소?"

"멋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벌써 아침 일을 시작하는 것 같던데요. 우리도 대원들을 깨우는게 좋지 않을까요?"

도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공허한 눈에 핼쑥한 얼굴을 한 그레엄은 무리하지 말아 달라는 도나의 부탁을 무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출발 준비를 했다. 결국 그를 제지시킨 것은 브레이크였다.

"안 됐지만, 당신은 차와 함께 돌아가 좀 더 몸의 적응력을 기르도록 하시오. 적응이 되면, 약 일 주일 후에 첫 번째 물자 보급이 있을테니, 그때 그 차로 다시 오도록 해요."

"잉칸타에 도착하면 문제없어요." 그레엄은 항의했다. “그곳은 이곳보다 지대가 낮으니까."

"36백 미터나 되는 고지를 30킬로나 도보로 넘은 뒤에 말이오?" 브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 중에서 제일 튼튼한 사람일지라도 꽤 지칠 거요.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요. 일 주일쯤 쉬고 나면 좋아질지도 모르잖소."

"좋아지지 않는다면?"

브레이크는 뻔한 얘기가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때 다시 생각해서 어떻게 해보도록 하겠소."

일단 브레이크가 말을 꺼낸 이상은 물고 늘어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레엄은 그 이상 반대하지 않고 돌아서더니 자신의 장비를 기다리고 있는 랜드로버로 운반했다. 도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일이 이렇게 돼서 마음이 아파요. 내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그가 보인 미소에는 기묘한 체념의 빛이 서려 있었다.

"아무도 도와줄 수는 없지. 사실 브레이크의 판단이 옳아. 나는 이곳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녀는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당신들이 마추픽추에 갔던 날 아침,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니 돌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하더군."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걱정 마, 생명에는 관계없으니. 하지만 너무 무리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소. 아무래도 심장이 부담을 느끼나 봐. 이 상태로는 평지라면 아무런 지장없이 해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무리라고 하더군."

"어째서 더 빨리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속삭였다. "어째서요, 그레엄?"

"쉽사리 단념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이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 처음에는 다소 도움이 되더니, 이제는 듣지 않는 것 같소. 나는 돌아오지 않을 거요, 도나. 귀국하기 전에 나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해놓고 갈 거요."

그는 주저하면서 그녀의 어깨너머로 브레이크와 다른 사람들이 케추아의 라마에 실을 짐을 바삐 고르고 있는 쪽을 흘끗 쳐다봤다.

"그렇지만 이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줘요."

"그러죠."

그레엄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목 언저리에 죄책감이 뭉쳐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레엄, 나와 같이 가요. 다시 생각해 보는 거죠?"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니까. 당신은 브레이크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소."

"아녜요!" 강한 부정은 상대방보다도 그녀 자신에게로 향해진 것이었다. "경멸하고 있어요!"

"당신은 오히려 그를 버렸던 자신을 경멸하는 거요.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히 그를 납득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럴 마음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그는 갑자기 몸을 굽히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것은 우리의 추억을 위해서요. 우리가 헤어지게 된 건 당신 탓만은 아니야."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차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운전사가 기어를 넣자 미소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일을 거들기 위해 모든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도나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브레이크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정이 담긴 위로의 말을 걸어 준 사람은 아디스였다.

"돌아올 거예요, 쉰만큼 원기 왕성해져서. 우선 저 고개를 넘어서 6백 미터쯤 올라갈 것을 생각해 봐요. 아무리 체력이 좋다해도 힘들 거예요!"

8시에, 일행은 무거운 장비를 케추아의 라마 등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것으로 출발 준비를 마쳤다. 바위투성이인 산길을 따라 대원들이 줄줄이 줄지어 마을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어지간히 괴상한 몰골일 것이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또다시 이곳을 보게되는 것은 8주 후거나 더 뒤가 될 것이다. 항상 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장거리 무선이 있는게 마음 든든했다. 이런 지형속에 고립되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비교적 가벼운 병일지라도 의사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사람이 죽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걸 생각하자 도나는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6

점심식사는 표고 약 36백 미터의 푸나라고 하는 초원에서 하게 되었다. 지면에서는 억세고 노란 풀이 자라고 있었다. 잔설의 가장자리에서 북서로 이삼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늘에서는 으스스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선 방한복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산소가 희박해서 숨쉬기가 괴로웠다. 의식적으로 애써서 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산악 지대에서 자란 인디오들은 폐활량이 커서 똑같이 행동했는데도 끄떡없었다. 아디스도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사실을 완강히 부정했다.

"내 심장은 건장한 수소처럼 튼튼해요." 식사를 하기 위해 일행이 계곡 언저리에서 발을 멈추자 그녀는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여행에 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죠."

"전원을 헬리콥터로 목적지까지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뻔한 대답이 돌아오리란 것을 알면서 도나는 물어보았다.

"식량과 장비까지 포함해서 말인가요? 그러려면 20번 이상은 왕복해야 할걸요. 고생스럽긴 하지만 걸어서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경험일 거예요. 옛날 잉카인들이 다녔던 길을 따라 잉칸타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먼저 왔다간 발굴단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면요."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디스의 말을 듣고 브레이크가 말참견을 했다. "그들은 아마추어나 다름이 없죠. 현장이나 망쳐놓지 않았어야 할 텐데."

그러고는 도나를 돌아보았다. "기분은?"

"괜찮아요. 계속할 수 있어요."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팀 전원을 베이스로 되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당신을 돌려보낼 생각은 없소." 목소리의 톤에 변화는 없었다. "어떤가 해서 물어봤을 뿐이오. 10분 후에는 출발할 거요. 될 수 있는 한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고 싶거든."

"당신들 두 사람은 결혼해야 될 것 같아요."

그가 자리를 뜨자 아디스가 말했다. 아디스는 도나의 놀란 표정을 온화한 미소를 띠고 바라봤다.

"아니, 화해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 같군요." 도나가 동요을 진정시키는 데는 몇 초가 걸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겨우 그렇게 물었다.

"저번에 마추픽추에서 그가 한번 결혼한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죠. 기억을 더듬어야 했지만, 2년 전, 그가 당신 아버지와 함께 영국에서 일을 한 후 돌아왔을 때의 기사를 실은 잡지에서 언뜻 본 것 같았어요. 그랬는데, 요 며칠 동안에 당신들의 행동을 보며 확신을 얻게 되었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말아요, 그런 것을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어떤 연유로 별거를 하게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건 당신들의 문제고 해결 역시 당신들 두 사람이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어려운 일이겠죠. 그는 성미가 까다로우니까."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도나는 조용히 말했다. "적어도 지금 같지는."

도나의 눈길은 마이클과 필립과 함께 앉아 있는 재닌에게로 향하고 있는 장신의 모습을 따라갔다.

"리마에서 예기치 않게 재회했기 때문에 서로 충격이 컸어요. 지금도 얼떨떨해요."

"시간이 걸리겠죠." 아디스는 맞장구를 쳤다. "미드 박사도 도움은 되지 않을 테고. 그녀가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죠?"

".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도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눈은 빛을 잃었다.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하죠. 이곳에서부터는 내리막길이니까 훨씬 수월할 테죠."

오후가 되자 상황은 매우 좋아졌다. 4시가 되자 모든 여정의 30킬로미터 중에서 l9킬로미터를 지나와 좁은 골짜기 사이에 야영지를 정했다. 그곳에는 아직 큰 돌이 깔린 길이 무성한 잡초 밑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하나하나의 돌이 시멘트도 사용하지 않고 잘 맞춰져 평평하고 단단한 표면을 이루고 있었다. 도나는 거기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된 길일까요?" 캠프파이어 너머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것은 또 다른 조사단을 짜서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요." 브레이크가 대답했다. "어쩌면 쿠스코에서부터 시작된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해요, 그 사실을 뒷받침할 그 무엇을 찾아낸다는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잉칸타는 이곳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길은 낮은 지대를 관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길의 대부분이 현존하는 것으로 가정해도 사실을 확인하는데 몇 년은 걸릴테니까"

"잉카라쿠타의 길을 기억하세요?" 재닌이 참견을 했다. "그것은 볼리비아의 언덕길을 지키는 요새와 망루(望樓)를 잇고 있던데요. 우리는 그 길을 이틀에 걸쳐 탐사했었죠."

그녀는 브레이크에게 야릇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뭐니 뭐니 해도 그것은 값진 6주간이었어요."

"옳은 말이오."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말투로 보아서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지. 지금 하고 있는 얘기와는 관계가 없는 거야. 그렇지 않아?"

순간 재닌의 얼굴이 확 붉어지자 도나는 숨을 죽였다. 사람을 무안 주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 지금 경우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의식적인 것이었다. 재닌에게도 저토록 심하게 나오니 나에게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당연한 일처럼 나를 농락하고는 인정사정없이 팀에서 잘라버릴 것이다. 놀랍게도 재닌은 난처한 기색에서 재빨리 회복했지만 흘긋 도나를 쳐다본 눈길로 미루어 무안당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진상을 알게 된다면 좀 더 그런 일을 받아들이기 쉽겠다, 하고 도나는 생각했지만 그 얘기를 이쪽에서 먼저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아디스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밤이 되자 냉기가 돌았지만 바람막이가 있었으므로 침낭만으로도 충분했다. 케추아 인디오들은 기온의 변화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보다 짐승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재닌에게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잠자리를 잡았다. 내일 이맘때쯤에는 잉칸타에서 제대로 된 캠프를 치고 있을 것이다. 여자 세 명은 한 텐트에 기거하기로 되어 있다. 완충역으로 아디스 레밍턴이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브레이크를 생각하니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긴긴 밤이 지나고 6시 반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상하자, 도나는 브레이크의 눈길을 피했다. 이쪽의 마음을 환히 꿰뚫어볼 것 같아 두려웠다. 어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자기가 이혼을 전혀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브레이크는 다시 한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요전에 그가 한 말로 미루어 보면 그건 의심스럽다. 나는 그에게 너무도 깊은 상처를 준 것이다.

한 시간쯤 걸은 뒤, 그들은 물줄기는 가늘지만 빠르게 흐르는 개울가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자 밀생한 잡초로 덮인 고대의 도로 흔적을 발견했다. 겨우 일행이 유적이 보이는 곳까지 더듬어갔을 때도 안데스 식물에 눈이 혼란해져, 누군가가 그것이 틀림없다고 단언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었다.

잉칸타는 방어(防禦)에 적합한 험한 지형 속에 세워져 있었다. 개울에서 시의 성벽으로 이어지는 작은 돌투성이의 오솔길을 더듬어가자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의 잔해가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건물의 형태가 뚜렷했다. 최초의 그룹은 조그만 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브레이크는 노동자가 살던 곳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낮은 평지 위에는 좀 더 큰집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돌마루의 잔해도 있었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 보니 벽의 일부가 허물어져 있었다. 그 근처의 다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건물의 벽이었다. 일부는 아직도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얕은 벽감(壁龕)이 있었다. 그 오른쪽의 닳아빠진 돌층계가 붙어 있는 단 위에 큰 판석이 놓여 있었다. 길이는 l80센티쯤으로, 네 귀에는 깊게 홈이 파여 있었다.

"산 제물을 바치기 위한 대()." 브레이크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홈은 산 제물의 손발을 고정시키는데 사용됐던 것일 테지."

"살아 있는 인간을?"

상상하고는 몸서리를 치며 도나가 물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 동물도 흔히 사용되었으니까." 흘끗 그녀를 뒤돌아보며 냉소적으로 눈을 치떴다. "겁내는 것이 너무 빠르군. 이제 발굴이 시작되면 더 끔찍한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해골은 전에도 본 적이 있어요." 그녀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저번 발굴 때는 산 제물을 바쳤던 동굴의 물을 빼냈으니까요. 나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심장을 도려내게 하는 쪽보다는 익사하는 쪽을 택하겠어요!"

가까이에 아무도 없자 그가 살짝 비웃음을 띠고 대꾸했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만 제물로 바쳤어. 그 점에서 당신은 자격이 없지. 안심해도 된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야 그렇죠, 당신이 빼앗았으니까요."

도나는 발끈해서 대들었다.

"그러나 그건 당신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주고 나서의 일이었지." 시선이 도나의 손에 못박혔다. "지금 보니 반지를 끼고 있지 않군."

"헤어지고 나서는 쭉 끼지 않았어요." 도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싫었기 때문이죠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회색 눈이 기묘한 빛을 띠었다.

"법적으로는 당신은 아직 결혼한 몸이야. 어째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거지? 행동을 구속받는 게 싫어서겠지."

심술궂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랐다.

"당신은 전혀 행동에 구속받지 않는 것 같더군요! 재닌 미드와 관계 가진 걸 스스로 인정했잖아요. 당신이 잊고 싶어 하는 약속에 나는 아직도 구속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몇 사람이지?" 도나의 말은 무시하고 오히려 역으로 추궁해 왔다. "지난 2년 동안 몇 명의 남자와 잔 거요?"

"말해도 믿지 않겠죠."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신경쓸 것 없잖아요, 브레이크. 피차 간섭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꼭 말하게 할 거야." 그 목소리에는 협박의 기색이 노골적으로 깃들여 있었다. "언젠가는."

브레이크는 되돌아서서 제단의 돌층계를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다음날부터는 일 이외의 것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매일 아침 오솔길을 따라 유적까지 왕복하는데 20분은 족히 걸렸다. 신진대사 기능이 고도에 익숙해짐에 따라 점차 피로감은 덜어졌지만. 아침식사는 찬 것을 먹었다. 누구 한 사람 일부러 조리 장소까지 내려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브레이크의 명령으로 화기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주위 풀이 타기 쉽게 바싹 말라있었기 때문이다. 케추아은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헝클어진 관목을 헤치고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유적을 드러내는 등의 힘든 일에서는 유감없이 그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해야 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옛 기물(器物)이 속속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는 아직 쓸 수 있는 상태의 것도 있었다. 토기는 끝마무리가 훌륭하고,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채색이 되어 있었다. 사원 일곽에서는 몇 개의 순금의 소상(小像)이 발굴되어 큰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도나가 그림그리기를 끝내고 치수의 기록이 끝나자, 발굴품은 페루 정부를 대표하는 후안 프리에트의 손에 맡겨졌다. 장차 전시를 목적으로 할 때만 국외로의 반출이 허락될 것이다. 지하 매장실을 찾아낸 것은 첫째 주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디스와 디어도어가 몇 시간이나 참을성 있게 일하여 몇 세기나 잠자온, 놀랄 만큼 보존 상태가 좋은 열 몇구의 유골을 조사했다. 매장실의 규모와 위치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귀인의 묘 같았다. 몇 갠가의 두개골은 기묘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었다. 지배 계급의 특징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머리통을 묶고 있었던 탓이라고 아디스는 말했다.

"당시에는 뇌수술도 할 수 있는 외과의사가 있었죠." 어느 날 밤, 저녁 식탁에서 아디스는 말했다. "절개 흔적이 역력한 두개골이 몇 개나 발견됐어요. 잉카의 외과의사가 칼로 뼈를 자르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어요, 잘 드는 칼만으로요. 그들은 금속 세공에 있어서도 단연 으뜸이었죠."

불 주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디스는 맞은편에 앉은 도나에게도 잘 들리도록 소리를 높였다.

"전두엽 백질 절제 수술의 흔적이 있는 두개골의 상세도가 필요해요. 할 수 있겠어요?"

"해보죠." 훗날을 위해서도 자신없는 마음을 누르고 도나는 말했다. "자료도 많이 모아졌으니."

"유적 전체의 배치도는 어찌 되었소?" 후안과의 토론을 중단하고 브레이크가 물었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그때그때 발굴 상황을 스케치해 놓는 것은 매우 중요하오."

"알고 있어요." 도나는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보실 의향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좋아요."

"지금은 말고."

도나는 일어섰다. "뭣하면 가져오죠."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브레이크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내가 텐트에 가서 보겠소."

재닌의 시선을 등뒤에 느끼면서 도나는 그와 나란히 걸어갔다. 아디스의 존재에 힘입어 요 며칠간 재닌하고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브레이크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서로 잘 협조하여 일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좋든 싫든 이곳에서는 누구나가 협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자 셋이서 함께 쓰고 있는 텐트 안은 조촐했지만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세 개의 공기 매트리스는 T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각자의 물건은 제각기의 비닐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도나는 무릎을 꿇고 스케치용 도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두 권의 스케치북 중 큰 것을 꺼내 일어서려고 상반신을 꺾었다.

"그대로 있어." 브레이크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 곁의 매트리스 위에 앉아 스케치북을 집어들었다. "어디 좀 볼까?"

"처음 것은 전체의 배치도예요." 그녀는 설명했다. "그 뒤는 발굴 순서대로의 부분도지요. 이것은 사원에서, 다음 것은"

도나는 페이지를 넘기려고 손을 뻗었을 때, 팔이 그의 가슴에 닿자 흠칫 놀라 숨을 죽였다.

"매장실. 이것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사진이 필요해요. 쿠스코에서 무슨 연락이 있었나요?"

"모레 이맘때쯤에는 사진작가가 올 거요. 그러나 그레엄이 아니야. 그는 영국으로 돌아갔어."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놀라지 않소?"

"." 그녀는 인정했다.

"그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었소?"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였다. "쇼크였겠는데. 어째서 함께 가지 않았소?"

"어째서냐고요? 일이 있기 때문이죠." 그녀는 말막음을 해야 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해야만 되는가를 깨닫자 그만두었다.

"일이 있기 때문이죠."

"그 말은 이미 했잖소." 목소리가 너무나 조용해서 오히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쿠스코에서 한 말을 잊었으리라 생각하는 거요?"

도나는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런 환경에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죠. 그렇지 않아요?"

"그럴까?"

그는 스케치북이 지면으로 미끄러 떨어지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녀를 끌어안고 강제로 반응을 불러일으키려는 듯한 키스를 했다. 가슴을 더듬는 손길은 아플 정도로 난폭했지만, 그 아픔은 더욱더 도나의 관능을 자극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에게 매달렸다. 옛날처럼 몸과 몸을 밀착시켜 꽉 끌어안은 채 있고 싶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확 몸을 뒤로 뺐다.

"안 돼요, 브레이크!"

목소리가 떨렸다. 순간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끌어안을 듯싶더니, 애써 자신을 절제했다.

"당신의 말대로요. 이곳은 적당치 않아."

매달려 있는 램프의 어둑한 불빛을 받고 있는 그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소. 객관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문명 사회로 돌아가게 될 때까지는. 당신을 안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가 일어났지만 도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브레이크가 텐트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스케치북을 집어 정성스레 제자리에 다시 넣었다. 만약 브레이크가 진심으로 말했다면 두 번 다시 이런 형태로는 나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편이 좋다는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간절히 그를 원하는 상태로 어떻게 앞으로 남은 7주간을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예정대로 이틀 후에 헬리콥터는 약속된 사진작가 라몬 데터를 데리고 왔다. 라몬은 40대 전반의 남자로 스페인계였다.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그 검은 눈동자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에 도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걱정스런 나날이 되었다.

용모는 꽤 매력적이었지만 인간적인 매력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맡은 일에나 열중하며 나를 좀 내버려 둬준다면 좋으련만.

브레이크는 새로 온 사진작가의 적극적인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만약 알고 있다 해도 무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발굴 작업에 완전히 몰두하여 이 잃어버린 도시의 과거에 대한 탐구에 여념이 없었다. 텐트에서의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필요한 일 외에는 도나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를 느끼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내색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도나가 맡은 일도 흥미진진했지만 그녀는 일에 열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잉칸타에는 왠지 그녀를 불안에 떨게하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이따금 한밤중에 일어나서는 밖에 나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꿈결에 주변 일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은 지각변동이죠." 그녀가 그것을 화제 삼자 아디스가 말했다. "나도 느꼈어요. 걱정할 것 없어요, 이런 데서는 흔한 현상이니까."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계속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날이 감에 따라 이 협곡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져만 갔다. 그러나 뚜렷한 근거도 없는 막연한 공포를 다른 사람이 인정할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상상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질책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을 떨어버릴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오후, 문득 개울 아래쪽을 조금 더듬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은, 라몬 데터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것이 지겨워서이기도 했지만 혼자 좀 생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일 주일 후면 마이클과 필립은 헬리콥터로 돌아간다. 그때 그들과 함께 돌아가야 할지 어떨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일 주일 전이었다면 물론 답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흥미를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브레이크 탓이었다. 그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토기 조각을 붙여서 그 원형을 제도해 내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단 말인가. 밤이 되자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의 곁에 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귀국하면 그는 그녀가 바랐던 이혼 수속에 착수할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그러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을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오솔길이 꺾여 눈에서 사라지고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러 있었다. 캠프쪽을 흘끗 돌아보고 말도 없이 슬그머니 빠져나온데 대한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일요일은 휴일로 정해져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빠져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재닌뿐이었다. 즉각 그 일을 브레이크에게 알릴게 틀림없다. 마음대로 하라지 뭐어차피 그는 쫓아오지 않을 테니까.

도나는 가능하다면 그가 쫓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에게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꼬불꼬불한 내리막길을 10분쯤 더 가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산 쪽으로 오른쪽은 계곡 쪽으로 나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편리하리라는 단순한 이유로 도나는 산 쪽으로 난 길을 택했다. 이제 몸은 완전히 이곳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걷는 것이 기분 좋았다. 얼마쯤 걸어가니 또다시 길이 갈라졌다.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흥미 있어 하면서 도나는 또다시 왼쪽 길을 택했다. 잉카 제국의 사람들이 사용한 이래,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기묘한, 거의 공포에 가까운 심정이 되었다.

이윽고 정연히 줄지어 쌓여 있는 돌더미와 만나자 오솔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곳은 와쿠아신전인 것이었다. 당시 서민들의 성소(聖所). 여기에 바쳐졌던 산 제물은 아마도 인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들의 노여움을 진정시켜 곡물의 풍요와 병의 회복을 기원했던 곳이었다. 개울이 가까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길로 좀 더 가면 다른 통로를 통해 잉칸타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쪽이 다분히 가까운 길일 것이다. 그럴 듯한 생각이야,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양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만큼 적도와 가까우면 일몰 시간이 짧았다. 일단 태양이 기울면 눈깜짝할 사이에 암흑이 되는 것이다.

40분 후, 그녀는 또 다른 전혀 낯선 협곡을 내려다보면서 자기의 생각이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스웨터를 입었다. 일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나가는 비였지만 속살까지 흠뻑 젖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추위에 떨면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오랜 시간 정신없이 걸은 후, 그녀는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어둠 속에 메아리치는 그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짐승일까? 공포에 떨면서 도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아직 그렇게 가까이까지 접근해 온 것은 아니지만 동물의 울음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양손을 메가폰 삼아 입에 대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여기예요!"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고 또다시 그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놓였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도나를 부르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남자의 목소리였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전에 회중전등의 불빛이 먼저 보였다. 얼굴에 비쳐진 불빛 속에서 도나는 이가 딱닥 마주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우선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선결 문제야." 브레이크는 그녀에게 손도 대보려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조금 앞에 동굴이 있는데, 걸을 수 있겠어?"

그 동굴까지의 수백 미터는 그녀가 지금까지 걸은 중에서 가장 먼 길이었다. 동굴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금세 쓰러질 것만 같았다. 몇 분도 안 되어 그는 입구에다 모닥불을 피웠다. 좁은 공간이라 움직이기에는 불편했지만 서서히 퍼지는 온기가 고마웠다.

"젖은 옷을 벗어." 브레이크는 퉁명스럽게 명령하고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비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만일에 대비하여 단열 시트를 두 장 가져왔소."

"이런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어리석은 짓을 해서 미안해요." 도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오셨나요?"

"당신이 없어진 것을 알자 남자들이 조를 짜서 찾아 나섰어. 내가 이 길로 오게 된 건 우연일 뿐이야. 일몰 직전에 와쿠아에서 당신 발자국을 찾아냈지."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째서지, 도나? 어째서 아무에게 말하지 않고 나온 거야? 정신이 돌기라도 했어?"

"재닌이 보고 있었어요." 도나가 대꾸했다. "그녀가 말하지 않던가요?"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어조는 더없이 냉랭했다. "말했잖아, 젖은 옷을 벗으라구. 나도 그렇게 하겠어. 시트는 몸을 감싸기에 충분한 크기야. 보기에는 좁아 보이지만 한기는 막아줄 거요. 모닥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하고 옷을 바위 위에 널어놓으면 아침까지는 충분히 마르겠지. 달리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밤새 이곳에 있나요?"

말하고 나서 그것이 어리석은 말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브레이크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그는 땔감을 긁어모으러 나가더니, 도나가 전라에 가까운 몸에 시트를 감고 있을 때야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도 옷을 벗고 남아 있는 시트로 몸을 감싸고 무릎을 끌어안고 그녀의 바로 곁에 앉았다.

"배고프지 않소?"

잠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물었다.

"초콜릿밖에 없지만, 당분은 기운 나게 하니까 먹어둬요. 포트에 커피도 있지만, 좀 더 추워졌을 때를 위해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소."

"준비성이 있군요."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두워지기 전에 캠프로 돌아갔을까요?"

"분별이 있다면."

"당신은 되돌아가지 않았어요."

"나는 발자국을 발견했으니까."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너무나 화가 나서, 해가 지기 전에 당신을 찾아냈다면 반쯤 죽여 놓았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밝은 동안만 그러셨나요?"

"사람을 찾다가 어두워질 때까지 찾지 못하면 마음이 달라지게 마련이지. 무엇보다도 정말 찾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되니까. 당신을 찾았을 무렵엔 기분이 좀 가라앉은 뒤였소."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어른거리는 빛 속에서 브레이크는 얼굴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이목구비의 음영이 뚜렷했다.

"당신이 느낀 것은 노여움이 아니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노여움이 아니듯이. 이곳에 있는 동안은 당신을 내버려두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소.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어, 도나. 내게 싸움을 걸어 그것을 길게 끌고 가려고 들진 말아 줘."

그가 손을 뻗어오자, 도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 잡혔다. 그녀의 입술에 와 닿은 그의 입술은 차가웠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시트를 벗겨 바닥에 깔고 그녀를 뉘고 그 위에 자신의 시트를 덮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에 꽉 안기자 도나는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정열에 휩쓸려 신음했다. 그의 키스도 서서히 강도를 더해갔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입술을 떨며 키스를 되돌리자, 비로소 그의 입술은 목덜미를 더듬고 가슴께로 향했다. 그의 애무를 받자 도나는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7

아침 햇살이 바위틈으로 비쳐들자 도나가 먼저 눈을 떴다. 모닥불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아, 불씨가 남아 있었다. 브레이크의 가슴에 안겨 있으니 몸도 마음도 훈훈했다.

어제의 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정말로 누구를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2년 전에 브레이크에게서 느꼈던 것은 이 욱신거리는 맹목적인 감정 앞에서는 퇴색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제는 절대로 그를 단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도나는 전날 밤의 쾌락을 생각하면서 브레이크의 꽉 다문 입술에 살짝 손을 대어봤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가 눈을 떠서 자기를 쳐다봐 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자, 기억이 되돌아올 때까지의 몇 초 간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 회색 눈동자에 온기와 다정함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녀로서는 감지할 수 없는 강철처럼 불투명한 빛으로 변해 버렸다.

"옷이 말랐는지 봐야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바위에 널어놓은 옷에 손을 댔다.

"셔츠는 마른 것 같군. 바지가 눅눅한 것은 참을 수밖에 없겠어. 당신 스웨터는 아직 덜 말랐어. 해가 뜰 때까지 내 방한복을 입고 있도록 해."

도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차가워지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얼어붙어 있었다.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단지, 이런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젯밤의 일은 그녀가 꾼 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세요." 그녀는 가냘프게 속삭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한 행동은 하지 말아 줘요."

그는 그녀를 돌아봤지만, 돌같은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어젯밤은 어젯밤이고, 오늘 아침은 오늘 아침이오. 이혼을 원한 것은 당신이야. 그렇지 않아? 원하는 대로 해줄 거야. 이제 당신에게서 받고 싶은 것은 모두 받았어, 받아야 될 것은 모두 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진 않겠어. 남자에게 그 정도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여자는 그렇게 흔하지 않아. 한 번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으니까. 최근"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관계없는 얘기야. 어쨌든 옷이나 입어."

도나는 일어났지만 어깨에서 시트가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브레이크,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전과는 달라요. 조금은 어른이 되었어요."

"그리고 더 현명해졌고?"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당신이 내게서 느끼는 것은 단순한 욕망뿐이야. 쭉 그랬었지. 날 사랑하지는 않아, 날 알고 있지도 않고. 단지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만났던 어떤 남자보다도 당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남자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만은 아닐 거야. 계속 찾아봐, 운이 좋으면 그런 남자를 또 만나게 될 테니. 한정된 기간 동안만이겠지만!"

"사람도 아니야!"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맞는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구지?"

표정도 바꾸지 않고 도나에게 셔츠와 바지를 던져주자 자기도 옷을 입기 시작했다.

"커피 마실 새도 없었는걸. 아직도 약간은 따뜻하겠지. 대원들이 찾아나서기 전에 캠프로 돌아가야 해. 이제 20분쯤 있으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질 거야."

도나는 애써 몸을 움직여 감각이 없어진 손으로 단추를 끼우고 지퍼를 잠갔다. 그의 모든 것이 계산된 행동이었다는데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자존심의 밑뿌리까지 브레이크가 짓밟아버린 것이었다. 이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기력을 다하여 최후의 간청을 시도했다.

"당신은 내게 한번 기회를 줘 볼 생각은 없나요?"

"경우에 따라서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소의 위안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실을 말하면 나는 당신을 갖고 싶어. 실제로 지금 당장 다시 한번 당신을 안고 싶어."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런 것은 내가 계속 치뤄야 할 대가야. 커피 마시겠소?"

커피를 마실 기분이 아니라고 해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억지로 미지근한 액체를 마시면서,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얼기시작한 얼음은 결코 제거시킬 수 없으리란 걸 느꼈다.

그들이 캠프로 돌아온 뒤, 변명과 책임 추궁으로 오전중의 반이 허비되었다. 모두가 떠들썩하고 있는 동안 재닌은 혼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태가 앞으로 몇 주간이나 계속될 것인가를 생각하자 도나는 견딜 수 없었다. 분별이 있다면 최초의 기회를 잡아 돌아가는 거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테니까그레엄의 경우처럼. 그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도나는 영국으로 돌아가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이 일에서 도망친다면 그녀는 결코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밤 텐트에서 단둘이 되는 기회를 기다려 재닌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했다.

"단순한 흥미의 문제지만, 브레이크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요. 뭔가 흑심을 품고 있으면 체념하는게 좋아요. 남자와 하룻밤 같이 지냈다 해서 그것으로 그를 속박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니까."

도면을 골라내고 있는 도나 쪽을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놀라지 않는군요."

"사실을 말하자면 놀라울 게 없어요." 도나는 빈정거리는 투가 되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가 결혼했다는 건 이미 옛날에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부인과의 사이가 나쁜게 아닌가요?"

"그래요. 그러나 그렇다 해서 당신에게 유리해지는 것도 아니죠. 만약 그가 재혼한다고 해도 당신같은 여자가 그 상대는 아닐 테니까요."

이번에는 도나가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당신은 목적을 위해서는 몸도 내던질 타입이니까요." 호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어젯밤, 당신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 떼지는 말아요. 나는 믿지 않으니까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아요. 브레이크를 비난할 수는 없어요.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는 없으니까."

재닌의 비난에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자기가 그를 도발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와의 일에 관해 다른 여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그에게는 여자를 보는 눈이 전혀 없다는 말같이 들리는군요. 여자라면 아무라도 좋아한다는 뜻인가요?"

재닌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다지 다른 여자의 용모를 헐뜯을 필요를 느끼지는 않아요. , 브레이크는 특히 금발에 약해요."

"그건 확실한 것 같군요."

다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할 사실을 들이대어 기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꾹 참았다.

"다소 참고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브레이크 미첼이 자기주장이 뚜렷한 남자라는 것은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어요.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 당신이나 나에게 영향을 받을 사람은 아니죠."

"아마도 당신에게서는!"

재닌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어쨌든 알고 있으니 됐어요."

아디스 레밍턴이 텐트 안으로 들어오자 뒤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봐요.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이곳은 숨이 막혀요."

"그 세 사람에 달려있는 건데."

재닌이 나가 버리자, 아디스는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도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도나는 일단 부정하고, 잠시 상대방의 시선을 받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대수로운 일은 아니에요. 브레이크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더군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했나요?"

"."

"왜요?"

"이미 나는 그에게 있어서 의미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도나는 감상적이 되려는 것을 억제했다.

"브레이크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혼을 바라고 있어요."

"그의 대변인은 아니지만,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도 이혼을 원치 않는 것 같고요. 요 며칠 사이 그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보아왔어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당신이 그를 바라보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거든요. 전에 당신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당신과 브레이크 사이의 일이니까요. 다만 나는 완전히 단념하기 전에 당신들의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 기회는 이제 없어요." 도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담담하게 말했다. "믿어 주세요, 아디스. 이제 기회는 사라졌어요."

 

보름밤이었다. 1시 반쯤 눈을 뜨자, 도나는 전에 시달렸던 일이 있는 불안한 생각이 갑자기 강하게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좁은 텐트 안에 있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져 살그머니 손을 뻗어 옷과 신발을 챙겨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가볍게 몸을 떨며, 자신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파자마 위에 방한복을 입고 양말과 부츠를 신었다. 주위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나 고독감은 느낄 수 없었다.

순수한 본능에 이끌려 그녀는 언덕길을 급히 올라갔다. 달빛에 비친 폐허는 무서워 보이게 마련일 텐데도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공포는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중앙 광장의 한가운데에 서서 도나는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대지 그 자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도 그 환상의 극히 일부를 조각낸 데 지나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을 되풀이하려고 따라왔다면 미안하게 되었는데." 가시 돋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난 거야, 도나."

뒤돌아보니, 브레이크가 사원의 반원형(半圓形) 입구의 유구(遺口) 밑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상대방에 맞춰 그 목소리의 어조가 굳어졌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좋으실 대로 생각하세요."

그는 험악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자세히 쳐다봤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떨리고, 그의 이목구비가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도나는 땅울림 소리를 듣기 전에 몸으로 먼저 느끼고, 발밑의 지면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주위의 곳곳에서 기분 나쁜 굉음이 일었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바로 옆에서 느닷없이 땅이 갈라지더니, 균열이 광장 가득히 퍼져나가면서 사원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굴러 떨어지는 기와나 부서지는 바위 소리에 지워져 들리지 않았다. 사원 입구와 브레이크는 자욱한 모래먼지와 함께 바위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땅의 흔들림이 멎자 갑자기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고요가 믿어지지 않아 도나는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퍼뜩 정신이 들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브레이크! 사원의 입구가 있던 곳에는 기와 조각과 자갈이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브레이크의 팔뿐이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폭 30센티 정도의 땅이 갈라진 틈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브레이크는 기와 조각 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도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 엄지손가락으로 맥을 짚어봤다. 살아는 있었지만 맥은 약하고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기와 조각을 치우려고 했지만 여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부러진 뼈는 이어 맞추면 되겠지만 두부의 손상이 위험하다. 일각을 다투어 도움을 청해야지! 서둘러 방한복을 벗어 그것을 베개처럼 만들어 브레이크의 머리 밑에 받쳐 주었다. 그러고 나서 정신없이 캠프를 향해 달렸다. 무너진 바위로 길이 막혀 돌아가는데 30분 이상이나 걸렸다. 몇 번이나 넘어져서 양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이 있었다.

캠프도 대소동이었다. 텐트가 쓰러지고 몇 사람인가가 부상을 당했다. 아디스가 맨 처음 도나를 발견했다.

"어디 갔었어요? 반 시간 동안 당신과 브레이크를 찾고 있었어요!" 놀라움과 안도감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유적 위에 있었어요. 브레이크는 아직 위에 있어요.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했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아디스. 곧 가봐야 해요!"

"진정해요!" 디어도어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이곳에도 부상자가 났지만, 다행히 모두 경상이오. 마이클과 후안과 필립을 불러 넷이서 그를 데려옵시다. 의식은 있나요?"

"내가 내려올 때는 없었어요."

"그럼 들것 대용이 될 수 있는 것을 찾아봐야겠군. 이미 쿠스코와는 무선으로 연락을 취했소. 그곳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는 진원지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소."

아디스가 두꺼운 스웨터를 찾아와 도나에게 입혔다.

"잠깐 앉도록 해요, 아마도 쇼크 상태니까."

"이제 가봐야 해요. 그가 있는 곳은 나만이 알고 있으니까." 손발이 어쩔 수도 없이 떨렸다.

"남자들에게 그가 있는 곳을 설명해 주면 돼요." 아디스는 상냥했지만 단호한 태도였다. "또다시 부상자가 나오면 그야말로 큰일이에요."

마음은 그것을 거부했지만 그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가슴터질 듯 괴로웠다.

구조대가 돌아왔을 때는 날이 밝기 시작하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살아 있었지만 완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도나는 자신이 과도하게 감정적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완전히 밝아지면 곧 헬리콥터가 오기로 되어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재닌도 굴러 떨어진 바위에 무릎을 크게 다쳤다. 헬리콥터가 도착하자 그녀는 당연한 것처럼 브레이크와 함께 올라타서 붕대를 감은 그의 머리를 자기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헬리콥터가 또다시 뜨는 것을 지켜보면서 도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재닌이 아니라 자기가 저 안에 앉아 그의 다친 머리를 무릎에 안고 가야만 하는 건데. 그러나 브레이크 자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얼마나 암시적인 말인가!

부상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실려 가자 디어도어는 캠프를 정리하고 우선 쿠스코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쿠스코로 돌아가 피해 입은 장비를 보충하고 또다시 찾아올 계획이었다. 잃은 것도 많지만 이곳 유적에는 아직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도나는 본대(本隊)와 행동을 함께 했다. 브레이크가 무사히 진료소에 도착한 것은 곧 무선으로 알게 되었지만, 계속해서 며칠간이나 증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이었다. 혼수상태가 몇 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도나는 알고 있었다. 그 기막히게 강인한 정신과 육체가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지진이 있은 후, 네 번째 맞는 밤에 일행은 쿠스코에 도착해 전에 머물렀던 숙소에 들었다. 그곳에 먼저 도착해 원기를 되찾은 부상자들에게서, 브레이크가 그날 아침 리마의 사립진료소로 이송되어 이 나라 최고 전문의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재닌은 함께 가지 않았다.

"나는 잉칸타로 돌아가겠어요!" 저녁 식탁에서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회복을 비는 것밖에 브레이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만약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와 함께 있어줘야 하는 거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혼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채 살롱에 앉아 있으려니까 아디스가 찾아왔다.

"잉칸타는 관심 밖인 것 같아 보이는군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거죠?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 당신 한 사람쯤 없어도 상관없어요."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발굴에 대한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가냘픈 어깨를 움츠리고 슬픈 듯 다정한 눈을 바라보았다. "귀국해서 모든 것을 잊으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본인은 모른다 해도 당신에게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남편이 있잖아요."

도나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막듯이 고개를 흔들며 얘기를 계속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계가 없어요. 당신은 아직 그와 결혼하고 있는 몸인데, 어째서 그의 곁으로 가지 않는 거죠?"

도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서서히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끼면서 아디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마이클이나 필립과 함께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때쯤에는 그의 곁에 도착하게 될 거예요. '사랑은 산도 움직인다'고 하는데, 그것에 비하면 남자를 삶의 세계로 이끌어오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지요. 당신은 능히 할 수 있어요."

", 할 수 있어요." 도나는 충동적으로 몸을 내밀고 주름진 뺨에 키스했다. "고마와요. 내게는 누군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사람이 필요했었어요. 짐을 챙기겠어요."

"조심해요. 앞으론 쓸쓸해지겠네요."

재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도나가 잉칸타로 돌아가지 않는 데는 찬성했다.

"당신의 실력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에요." 그녀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달리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없어지면 언제까지나 발굴에 몰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이제 브레이크도 없어졌으니 귀국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신경이 피로해졌다고 하면 도중에서 그만두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겠죠. , 다른 일자리를 얻는 데도 지장은 없을 거예요."

도나는 비로소 며칠 동안의 이 고고학자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에게 있어서 브레이크가 유일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브레이크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그다지 깊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브레이크가 의식을 회복하고도 계속 자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문제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리마에 도착하자 도나는 공항에서 두 사람의 동행자와 헤어져, 택시를 잡아타고 진료소로 달렸다. 흰옷을 입고 접수부에 앉아 있던 사람은 유창한 영어로 도나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빠른 스페인 어였으므로 알아들을 수 없어 적지 않은 불안을 안은 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브레이크를 못 본지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된다.

호출에 응해서 나타난 의사가 후안 프리에트를 생각케 했으므로 약간 마음이 놓였다.

"미첼 교수가 결혼하신 줄은 몰랐는데요." 그는 약간 놀란 듯 그는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부인이 오셨으니까, 증상은 틀림없이 좋은 방향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나요?"

"가끔 어떤 자극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해요. 이제 앞으로 2, 3일간이 고비가 될 거예요.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함께 가시죠, 안내할 테니까."

브레이크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점적(點滴)을 받으면서 독방에 누워 있었다. 바류고 의사가 얘기를 걸었을 때만 눈꺼풀에 약간의 반응을 보였다.

"해보세요." 의사가 재촉했다. "당신의 음성이 가장 귀에 익었을 것입니다. 손을 잡고 온기를 느끼게 해주세요. 겉보기는 혼수상태지만 감각은 정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나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자 햇볕에 탄 손을 잡았다. "브레이크!" 도나는 속삭였다. "브레이크, 저예요, 도나예요. 눈을 뜨세요! 이제 당신은 실컷 주무셨어요."

입을 다물고 베개에 묻힌 굴곡 뚜렷한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이윽고 속수무책인 듯이 의사를 보았다. "안 되는군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의사는 다른 쪽의 손목을 잡고 맥을 보고 있었다. "반응이 있었어요, 확실히. 희미하긴 하지만 뭔가가 의식에 도달하고 있어요. 다시 한번 해보세요, 부인. 되풀이해서 몇 번이고. 인내만이 보람을 가져올 것입니다."

의사는 도나를 두고 나갔다. 그 긴 오후 내내 그녀는 끊임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을 얘기했는지 나중에 가서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두 번, 눈꺼풀 밑에서 안구가 움직인 것처럼 보였고, 한번은 입술이 움직인 것을 확인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6시가 되어 간호사가 오자, 도나는 피로에 지쳐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유감이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어요. 잠시 나갔다 오겠어요. 가까운 곳에 호텔을 찾아야 하니까요."

"방은 이 진료소에 준비되어 있어요."

예기치 않았던 답이었다. "바류고 의사의 지십니다. 준비가 되면 식사를 가져오겠어요."

도나가 주저하며 침대를 힐끗 보자, 간호사는 생긋 웃고 고개를 저었다. "부군께서는 도망치지 않으세요. 혼자 두는 게 아니니까 가서 쉬세요."

그녀가 준비된 방에서 식사를 끝내자, 바류고 의사가 찾아와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는 말했다. "내일, 모레 또 그 다음날, 이런 식으로 몇 번이고 해야 됩니다, 그가 의식을 되찾게 될 때까지. 그가 의식을 되찾지 못할 이유는 육체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은 정신력에 달려 있어요. 부군께서는 정신력이 강한 분이시죠?"

", 아주 강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약간 주저하며 신중히 물었다. "완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지요? 말하자면 의식은 회복되어도 어딘가 장애가 남을 가능성은?"

의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진실을 말해 주었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뇌는 여전히 미지의 분얍니다. 희망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같은 얼굴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며 그는 일어섰다.

"당신은 좀 자야 되겠어요. 약한 수면제를 가져왔어요. 내일은 잘될지도 모르죠. 숙면을 취하고 기운을 내주세요."

다음날도 잘되지 않았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도나는 깨어 있는 동안은 거의 브레이크 곁에서 지내며 반응이 없는 귀에 갖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윽고 뚫기 어려운 장벽이 겨우 허물어진 것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도나는 그와 갓 결혼했을 때의, 결국 침대에서 화해했던 언쟁의 추억을 얘기하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갑자기 눈이 떠지고, 회색 눈동자가 자기 쪽으로 향해진 것을 깨닫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해졌다.

"당신이 금붕어처럼 보여."

그의 중얼거림은 너무도 약했으므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충격과 기쁨으로 울며 웃으며 도나는 호출 벨을 눌렀다.

"당신은 사고를 당했어요. 그러나 이젠 괜찮아요. 말하지 마세요, 브레이크. 바류고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는."

브레이크는 미간을 모으고 얼굴을 찡그렸다.

"바류고? 바류고라니, 누군데?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말하지 마세요, 제발! 그가 곧 이리 올 거예요. 아아, 브레이크. 너무나 걱정했어요!"

미간의 주름이 펴지자 믿기 어려운 다정함이 그의 눈에 넘쳤다. 힘에 겨운 듯 한 손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들어 올렸다가 곧 힘없이 떨어뜨렸다.

"여보, 울지 마. 곧 기운을 차릴 수 있을 테니까. 신혼 중에 이게 무슨 꼴이람! 마지막 기억은 결혼식 때까지야. 우리는 어디까지 갔더랬나?"

 

8

바류고 의사가 병실로 달려왔을 때, 도나는 아직 망연한 상태에 있었다. 동공이나 언어장애의 유무가 검사되는 동안 도나는 달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괜찮아요.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스페인 의사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완전한 회복입니다. 두 분께 축하를 드리겠어요."

브레이크는 혼란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느 병원이지?"

도나가 대답하기 전에 바류고가 말했다.

"병원은 아니에요. 당신은 린덴 재단 보호하에 알구에더스 클리닉에 있어요. 리마 최고의 진료소죠."

"리마?" 점점 더 혼란해지는 듯했다.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브레이크, 괜찮아요. 이제 내가 설명하겠어요."

도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의사 쪽을 흘끗 보았다.

"잠깐, 괜찮으시겠어요?"

당황하고 있는 환자를 간호사에게 맡기고 그들은 복도로 나왔다.

"뭔가 잘 안 된 것 같은데요. 과거의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난 것이 아닌 것 같군요."

"2년 반 정도의 기억이 빠져버린 거예요."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도나는 말했다. "신혼여행 중에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결혼식 때라고."

"좀 드문 예지만 전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 기억은 대뇌에 있었던 것 같군요. 부군의 경우는 거기에 압력이 가해진 거죠. 예를 들면 전기의 단락(短絡)현상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기억의 일부가 타버린 거죠."

"자연히 회복되겠죠?"

"그것도 예측은 불가능해요, 회복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갖가지 상념이 도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우선 첫째로, 브레이크는 우리가 갓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일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자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물론 그에게 얘기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전부를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녀가 그 2년 반 동안의 일에 대해 입 다물고 있는다면 그와 새로이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 인생을 사는 셈이 되지만. 잃을 것을 생각하면 용서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병실로 돌아가자, 브레이크는 베개를 의지하고 일어나 앉아 있었다.

"조리 있게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어. 도나, 무슨 일이 일어났었어? 어떻게 해서 내가 이곳에 왔지? 우린 오늘 아침에 결혼했지, 그렇지? 꿈은 아닐 테지?"

"꿈이 아니에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단지, 우리가 결혼한 것은 오늘 아침이 아니라 1년 반 전이에요."

쇼크로 그의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바류고 의사가 곁에 있는 것을 감사했다.

"미안해요, 여보. 아무래도 이상 더 잘 말할 수가 없군요. 당신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1주일 이상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어요. 그리고 깨어나 보니, 당신은 결혼한 날 이후의 일은 전부 잊어버린 거예요."

"2년 반이나! 믿을 수 없어!"

"그러나 사실이에요. 이걸 보세요. 이것을 보면 납득하실 거예요."

바류고 의사는 곁에 있던 그날의 신문을 집어서 브레이크에게 보였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보자 브레이크는 이마에 주름을 지으면서 베개에 기댔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를 알아야만 되겠군." 잠시 후 겨우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당장. 우리는 리마에서 뭘 하고 있었지?"

"그보다도 우선 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말해야 하는 게 주저되어 도나는 의사에게 호소했다.

"휴식은 이 일 주일 동안으로 충분했어! 지금 곧 얘기해 줘, 도나, 무엇이든지!"

바류고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얘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회색 눈동자와 눈길이 마주치자 도나는 긴장이 되어 숨을 죽였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자기의 마음에 달렸고, 지금 곧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실을 알려줘 그에게 환멸을 안겨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을 해서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과거 수주간의 추억이 그녀를 유혹했다. 천천히 주의깊게 그녀는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산속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잉칸타라는 곳에서.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서 당신은 기와더미에 깔려 버렸어요."

공허한 시선에 반응은 없었다. "발굴? 후원자는?"

"린덴 제단. 이곳도 그 재단의 것이지요. 당신은 발굴단 단장이었어요."

"우리 외에 누가 더 있었지?"

나중에 탄로나면 더 좋지 않을 것 같아 재닌까지 포함해서 멤버의 이름을 댔다. 여전히 반응은 없었지만 그가 진료소를 나가 현장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미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결심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이 페루에서 떠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드디어 그가 물었다. "어떻게 당신이 나와 함께 발굴단에 참가했었지?"

"도면의 제작 담당이었죠. 고고학의 도면 제작법 과정을 밟았지요."

"전에 당신이 그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생각나. 그러나 나는나는"

혼란에 빠진 듯 머리를 흔들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나는 결혼 후 생각이 바뀐 것 같은걸." 그러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닌지?"

도나도 미소 지었다. "서로 타협한 거예요, 아기가 생길 때까지는 함께 일하기로."

"아기?"

뭔가가 마음속에서 번뜩이는 듯했지만, 그것도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건 그렇겠군, 나는아기를 원했으니까."

"지금 당장에라도 가질 수 있어요." 도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언제라도 당신이 좋을 때에. 이제 잉칸타의 발굴에서 빠졌으니까 난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이번에는 눈의 표정이 뚜렷이 변했다.

"내가 신혼 초야의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그러나 욕구불만이 되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어."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정말로? 아직 그럴까?"

"지금까지보다 더."

퇴각해야 할 시기는 이미 놓쳤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얼굴을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천천히 키스를 했다. 그의 반응을 느끼고, 이것으로 괜찮다는 안도감을 얻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무척, 브레이크!" 그녀는 속삭였다. "당신이 눈을 뜨기를 어떤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시죠?"

그의 입술은 다정하고, 눈은 그녀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 주일 내내 이곳에 앉아 있었던 거요?"

아아, 이걸 어쩐다? 그녀는 생각해 봤다. 또 다른 함정이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 해도 그녀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간호사 중의 누군가가 한마디만 하면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줄곧 곁에 있지 않았던 이유를 어떻게 변명하면 좋단 말인가?

"정확히 말하면 사흘간이죠." 한순간 주저하고 나서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부상한 다른 대원들과 함께 헬리콥터로 잉칸타에서 옮겨졌어요. 나는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쿠스코로 돌아갔다가 비행기편으로 이곳에 왔어요."

"줄곧 곁에 있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았소?"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은 명확했다.

"물론 함께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헬리콥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부상자뿐이었어요. 가능한 한 급히 달려왔어요."

"그건 알고 있소."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항의를 입막음했다. "당신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오. 혼이 났으리라 생각해. 누구 죽은 사람이라도 있는지?"

"없어요. 나는 당신과 영영 헤어지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토록"

그녀는 말을 끊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브레이크, 돌아가요, 여행할 수 있을 만큼 원기를 회복하면 즉시.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지금 집은 어디 있는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당신 아버님의 일은 이미 끝났을 텐데. 그대로 영국에 살고 계신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도나는 긴장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몇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 잉칸타 행이 결정될 때까지 당신은 하버드에 있었어요."

"그럼 당신은 나와 함께 미국에서 온 거로군." 브레이크는 만족한 듯했다. "아버님의 일은 아주 유감이군. 여러 가지 의미로 멋진 분이셨어. 그분에게서 당신을 뺏기 위해 무척 고생을 했었지. 어떤 아버지라도 딸에 관해서는 그렇겠지만."

하지만 그 무렵에는 그런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었죠, 하고 도나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당장에라도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도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했다. "당신이라면 박물관에서 곧 받아들여 줄 거예요."

그가 대답하기까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 아버님의 후임은 이미 결정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자리는 좀처럼 찾기 어려워."

"한 달 전쯤까지는 그대로 비어 있었어요, 클라이브 니덤이 대행하고 있었지만, 그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예요."

조급해진 마음을 누르려고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요, 브레이크, 나를 위해서. 우리의 아기는 우리 나라에서 낳고 싶어요."

그의 웃음은 희미했지만 진실된 것이었다.

"조금 서두르는 것 같아! 나는 먼저 내 아내에 대해 알 필요가 있어."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고, 죽음의 심연에서부터 소생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정열이 담긴 키스를 했다.

"조금 쉬는 게 좋겠어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질문할까 봐 겁이 나서 그녀는 말했다. 그가 반대하기 전에 벨을 눌렀다.

"얘기할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어요."

"나중에 다 얘기해 줘야 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왈칵 피로가 밀려온 듯, 그의 눈이 갑자기 흐리멍덩해졌다. 그는 중얼거렸다.

"절대로 내 곁에서 떠나지 말아 줘. 나는 당신이 필요해."

그가 마침내 건강한 수면으로 이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도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이 사람은 2년 전에도 나를 필요로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었단 말인가? 지금 알게된 것을 그때 알았었다면! 그때로 돌아가 자기가 준 상처를 없앨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 또다시 이런 짓을 하면서 자기는 그 상처를 점점 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말해 달라고 이 사람은 말했다. 2년 반 동안의 일을 어떻게 꾸며 들려줘야 한단 말인가?

탄로가 날 만한 것은 무수히 많았다. 진상을 안다면 브레이크는 두번 다시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하고 그가 어떻게 나오든 그 결과를 달게 받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새로이 출발할 마음을 가져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고 전처럼 모든 것을 골치아프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도대체 언제가 되면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분별이 몸에 밸 것인가?

바류고 의사가 들어오자,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와서 고민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와버린 것이다.

"잠드신 것 같군요. 좋습니다."

의사는 축 늘어진 손목을 잡고 맥을 짚으면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맥도 정상입니다. 잠에서 깨면 좀 더 기운이 날 거예요."

침대 너머로 도나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이런 것을 물어서 어떨까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이 기억의 결락(缺落)을 가져올 만한 감정적인 원인이 부군에게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그 순간, 진실 그대로를 말하고 싶은 충동이 치받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눈을 뜨고 뭐든지 정직하게 털어놓아 달라고 말한다면? 아니, 그럴 수 없어. 그런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어!

"별로 이렇다 하게 생각되는 점은 없어요." 아지랭이가 낀 듯한 푸른 눈을 쳐다보면서 그녀는 말했다. "물론 부부 사이의 의견충돌 같은 건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어떤 부부에게나 있는 일 아닌가요?"

"그야 그렇죠."

그가 완전히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은 명확했지만,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주무시도록 해드리세요. 그 동안에 점심을 끝내고 부군께 들려드릴 얘깃거리를 준비하는게 좋지 않겠어요? 기억에서 빠져버린 기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실 테니까요. 두 분은 많은 얘깃거리를 가지고 계시겠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해보죠. 그가 눈을 뜰 때까지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되나요?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요."

"안 돼요. 그건 좋지 않아요. 당신은 영양을 섭취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미첼 박사에게는 누군가가 붙어있을 테고, 그리고 증상이 다시 나빠질 리는 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도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음식을 먹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꽉 막혔다. 방으로 돌아오자 창가에 서서 정원을 산책하는 환자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레이크의 사랑뿐이었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전에 먼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와 브레이크와의 관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바류고 의사에게서 퇴원 허가가 나기까지엔 사흘이 걸렸다. 그 사흘 동안에 도나는 스스로 만들어낸 허위의 망에 점점 더 어쩔 수 없이 얽혀 들어갔다. 특히 아슬아슬했던 것은, 그녀가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것을 브레이크가 지적했을 때였다. 그녀가 지진 뒤의 혼란을 구실삼아 변명하자, 다행히 그는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런 일은 있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들은 마음의 유대가 착실히 깊어져 갔다. 육체적인 욕구불만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영향을 주고 있었지만, 그 문제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런 기회가 찾아온 것은 런던으로의 출발을 이틀 남기고 시내 호텔에 묵었을 때였다. 6층의, 그 호화로운 호텔 방에서는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한 멋진 시내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이 풍경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을 틈이 없어."

웨이터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도나의 허리에 팔을 감으면서 브레이크가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신혼여행이야. 배가 고프진 않소?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먹도록 할까?"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당신뿐이에요." 그녀는 속삭였다. "침대에 데려가 줘요, 브레이크."

그러고 나서의 이틀간, 두 사람은 먹을 것에는 거의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커튼을 친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그들은 되풀이해서 사랑을 나누었다. 아무래도 먹지 않으면 안 될 때에만 먹고, 헐렁한 가운을 걸친 채 입구까지 식사를 날라다 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나에게 그 기간은 일찍이 쉽게 던져 버렸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다시 배우게 해준 시간이었다. 브레이크는 사랑의 기교뿐만 아니라 그 분위기도 가르쳐 주었다. 정열과 다정함, 대담함, 유머까지도. 사랑에 웃는 것은 사랑을 웃는 것이 아니다. 나눠갖는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당신은 멋있어. 아아, 정말 멋지다니까!" 독점하듯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그는 말했다. "어떻게 나는 이런 일을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당신은 꿈이야, 꿈 그 자체야, 도나."

그러나 결국은 깨지 않으면 안 될 꿈이었다. 그 최후의 아침, 일찍 일어난 그가 말했다.

"그토록 당신이 영국에 가고 싶다면 가기로 하지. 새로운 남자의 새로운 시작인 셈이니까. 런던에서 전화해 하버드의 일은 누군가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그 대신 당신에게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배워야만 되겠는걸."

이때가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도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키스로 그의 입을 막으면서, 이제 두세 시간만 지나면, 하고 우격다짐으로 자신을 설득했다. 그리고 또다시 격렬하게 맺어진 뒤, 그들은 늦잠을 잤다.

아침식사를 부탁하여 먹고 나서 옷을 갈아입자 10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룸서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로, 마이애미를 경유하여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 좌석을 예약했다. 결단의 시기를 앞에 놓고 변명의 구실을 찾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우선 이 여행을 끝내고 살 곳을 결정하고 나서 얘기하자. 어떤 식으로 얘기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둘이서 나누어 가진 이 이틀간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브레이크는 나의 심정을 알아줄 것이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얘기했더라면 이 꿈같은 이틀간은 없었을 것이다. 방을 나서기 전에 브레이크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계산서는 이미 프론트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지불을 끝내는 동안 도나는 곁에 서서 멍하니 로비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자가 누군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야 도나는 비로소 흠칫 놀랐다.

재닌이었다. 갑자기 세계가 정지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9

재닌이 가까이 왔을 때 브레이크는 뒤돌아봤지만 그의 눈은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

", 갑시다.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 브레이크는 도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브레이크?" 예전의 동료는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브레이크, 나예요, 재닌. 도대체 어찌 된 거죠?"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도나의 겨드랑이 밑의 손이 긴장했다. "실례이지만, 무슨 얘긴지?"

"이쪽은 미드 박사예요." 도나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잉칸타 발굴에 함께 갔던 분. 이미 현장으로 되돌아간 줄 알았는데요."

"수속이 늦어져서요. 주말에 출발할 예정이에요."

시선은 브레이크에게 못박힌 채였다.

"당신이 퇴원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진료소 사람들이 당신의 건강상태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아 내 눈으로 확인하러 왔어요."

그녀는 도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구실이었나요?"

"내가 이 리마에 있는데, 어째서 내 아내가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된단 말이오?" 매우 이상하다는 듯 브레이크가 물었다.

"당신 부인이라구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재닌은 당황하며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나요?"

"무슨 소리요. 발굴 작업 때 함께 있었다면 우리가 부부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재닌은 일그러진 웃음을 보였다.

"함께 있었던 건 틀림없지만 그런 사실은 전혀 몰랐어요."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뜨고 도나를 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도나는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치고 전신에 패배감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애써 정신을 차려 호소하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브레이크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

그는 오랫동안 찬찬히 도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더니, 뭔가 잘못된 것을 눈치 챘는지 시선이 서서히 미묘하게 경직되어 갔다. "그러는 게 좋겠군." 겨우 그는 말했다.

"이제 이만 실례하겠어요, 미드 박사."

"잠깐 기다려요." 재닌은 그렇게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기억력에 무슨 이상이 생겼나요, 브레이크?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상태가 된 건가요?"

"그렇소, 내 기억에 이상이 생겼소." 여전히 엄한 표정으로 도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발굴에 관해서도 기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고에 대해서도 전혀 기억이 없소. 유감스럽게도 당신에 관해서도."

재닌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떠나면서 도나는 그녀에게 동정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타인처럼 곁을 걸어갈 뿐, 그녀의 몸에 접촉하거나 한번 흘끗 쳐다보는 일조차 없었다.

오전 중이었으므로 바는 투숙객만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었다. 그는 어두컴컴한 코너에 자리를 잡아 이쪽으로 향하려던 웨이터를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 들어볼까. 무슨 얘기든 다 해줘, 도나. 그것도 사실대로!"

사실대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인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되는 어려운 일을 앞에 두고 도나는 감각이 마비된 듯 그를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들여마시고 그녀는 마침내 뜻을 정한 듯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와의 사이에 금이 가게 된 경위, 교통사고와 잃어버린 아기, 아버지의 딸에 대한 집착, 그리고 별거, 더 나아가서는 잉칸타 발굴단에 참가하게 된 경위로부터 그레엄의 일, 재닌 미드의 일, 브레이크가 재닌에게 취한 태도, 동굴에서의 하룻밤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주저하고 때로는 호소하듯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했다.

브레이크는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이따금 불신감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잠자코 듣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고뇌에 찬 고백을 끝내도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껏 나를 속여온 것이군. 반지에 대한 것, 켐브리지의 아파트, 아기 등등."

감정이 없는 낯선 미지의 남자와 같았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다는 거요, 도나. 말 좀 해보라니까."

"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절망하며 말했다. "말로는."

"48시간 동안 당신이 내게 해준 것 같은 행동으로도." 그는 잔인하게 대꾸했다. "꽤나 즐겁게 해주었지만,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일 뿐이야.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런대로 그럭저럭 지속되는 결혼은 얼마든지 있어."

새로운 기대감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느끼면서 도나는 그를 쳐다봤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함께 있을 것이란 말인가요?"

"그렇다기보다는대개의 남자가 어떤 희생도 마다않을 성적 만족에 등을 돌릴 이유는 없겠지. 다른 일은"

일부러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아 주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좀 더 두고 봅시다."

시계를 보았다. "우선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해."

도나는 그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직도 영국으로 갈 생각인가요?"

"당신이 가고 싶었던 곳은 그곳이었잖소." 입술이 빈정거리듯 일그러졌다. "앞으로 내가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피하려면 그곳이 안성맞춤이겠군. 새로운 출발이라고 당신은 말했지.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곳 이외에 달리 적합한 장소가 또 있겠어?"

"브레이크!" 그녀는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내게 호통을 치든, 때려 주든, 아무렇게나 해도 좋아요단지 그런 태도로 대하는 것만은 그만둬 주세요! 불과 두 시간 전에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사랑한 것은 2년 반 전의 당신이오." 그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현재는 당신을 안고 싶지 않아. 쇼크가 사라지면 다른 의미에서 당신을 찾게 되겠지만."

"하지만 내가 싫다고 하면?"

"곧 그럴 마음이 생길 거요,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할 테니까."

몸을 굽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 눈에서 애원의 빛을 보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을 속이는 일은 그만둬, 도나. 나는 속지 않아. 별로 대단한 불만도 갖고 있지 않아. 또 몇 갠가의 환상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메우는 방법도 알고 있으니까."

로비에 자닌의 모습은 없었다. 부탁한 택시는 이미 가버리고 없었지만, 곧 다른 차가 달려왔다. 호텔에서 멀어지면서, 도나는 또다시 이 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인가 하고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잉카의 땅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행운도 가져다 지 않았던 것이다.

 

런던에는 아침 8시 반에 도착했다.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포근하고 맑은 날씨가 얼마간 기분을 가볍게 해줬다. 햇볕 속에 있으려니까 나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브레이크와 함께 이곳에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닌가. 도나가 자신의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건 몇 주만이었다. 현관 매트에 우편물이 쌓여 있었다. 브레이크가 그것을 주워서 가까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운 내 집이군." 빈정거리듯 그가 말했다. "우선은 창을 모두 열어 이 곰팡이 냄새를 가시게 해야겠는걸. 커피는 있나?"

"아마 있을 거예요." 주방으로 가면서 그녀는 어깨너머로 말했다. "침실은 안쪽이고 화장실은 그 옆이에요. 편히 쉬세요."

"걱정 말아요, 그럴 작정이니까. 준비가 되면 커피는 침실로 가져다 줘. 수면부족이라 좀 자야겠는걸."

커피를 끓여가지고 가니, 그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가방은 아직 그대로 바닥에 내던져져 있었다.

도나는 더블 침대에서 금빛과 흰빛의 체크무늬 커버를 벗겼다. 도나는 쟁반을 내려놓고 붙박이장에서 시트와 커버를 꺼냈다. 그녀가 침대 정리를 끝냈을 무렵, 샤워의 소리가 그쳤다. 곧 허리에 타월만을 감은 그가 나타났다. 머리는 젖어 있고, 붕대는 제거되어 있었다. 상처는 순조롭게 낫고 있었다. 어떤 변화를 기대하여 도나는 회색 눈을 살폈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피로가 감정을 뒤덮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피로를 느꼈다. 브레이크는 침대 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당신도 자겠소?"

도나가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나자 그가 물었다.

"쇼핑하고 오겠어요."

"쇼핑은 나중에 해도 되잖소."

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자연스레 타월을 풀고 침대에 눕더니 시트를 허리께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빈정거리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쇼크는 차차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잖아. 이리 와, 도나. 우리 사이에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해도, 아직 한 가지만은 남아 있으니까."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서 있으려니까, 브레이크는 일어나서 다가와 힘찬 팔로 그녀를 안아 올리더니 침대로 데려갔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셔츠 단추를 풀고 벨트의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이러지 마세요. 내가 어떤 잘못을 했건간에 창녀같은 취급만은 받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창녀 취급할 생각은 없소. 당신은 내 아내야. 게다가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소. 내가 싫다면 늦기 전에 그렇다고 말해줘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면서 한손을 그녀의 가슴에 대어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최대한으로 활용해야지. 찬성하는 거지?"

"아뇨, 아니에요!"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녀는 괴로움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알고 있어."

몸을 구부리고 입술을 포갰다.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뜻과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브레이크를 원하면서, 열에 들뜬 듯 그의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 그 이상 그녀의 반대에 부딪치는 일도 없이 그는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의 입가와 눈에는 뚜렷이 빈정거리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속삭이며, 그의 미소띤 얼굴이 더욱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계속 그렇게 말하는군. 언젠가는 다시 나를 납득시키는 날도 있을지 모르지. 그때까지 난 정말이라고 믿고 만족하고 있겠소."

그가 자기 몸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것을 느끼면서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이 있든없든 나는 이 사람이 필요해.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언젠가는 이 사람도 알아주겠지,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까지는 서로의 필요에 양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물관 관장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브레이크의 관장 취임은 마치 순풍에 돛을 단 듯 빨리 이루어졌고 생활은 서서히 안정되어 갔다. 그는 하버드로부터 자기가 쓰던 책과 물건을 찾아오고, 표면상으로는 만족해하는 듯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세상의 여느 부부들처럼 대화를 하고, 회합이나 사교적인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연극이나 음악회에도 갔다. , 친밀한 행위를 할 때만은 명확히 뭔가가 결여되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브레이크는 정열적이고 관대하고 그녀의 요구를 거부하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리마 호텔에서의 다정함은 과거의 것이었다.

도나는 언젠가는 그것이 돌아오리라고 자신에게 타일렀지만, 별로 가능성이 없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의 다정함을 말살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자기들이 생활을 함께 해나간다 해도 두 번 다시 전같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잃은 것은 너무나 컸다.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어 그녀는 그레엄과 연락을 취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다른 일로 외국에 나가고 없었다. 그가 귀국한 것은 8월이었는데, 그때 마침 그들은 파티를 계획하고 있었다. 어떤 기획을 끝낸 것을 자축하기 위해 박물관 직원과 동료 몇 사람을 초대한 것이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입구에 나타난 그레엄을 보고 도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오늘 오후에 돌아왔소. 전화 서비스에 당신의 전갈이 있길래" 그녀의 어깨너머로 거실을 흘끗 보았다. "파티라도 열고 있는 모양인데?"

", " 그녀는 체념한 듯 한 발짝 물러섰다. "들어오세요, 그레엄. 그간에 밀린 얘기도 많은데, 이런 곳에서는 좀"

그녀가 현관문을 닫았을 때, 브레이크가 포도주 병을 들고 다른 방에서 나왔다. "또 하나 있던 코르크 마개뽑기는 어디에" 손님을 보자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뜻밖인데. 오랜만이오. 햇볕에 그을어 아주 건강해 보이는데."

"두 달쯤 이스라엘에 있다 왔기 때문이죠." 그레엄은 애써 동요를 감추려 하고 있었지만 잘되지 않는 듯했다.

"그럼 두 분은 다시 화해하신 거군요? 축하합니다."

"고맙소." 브레이크의 어조는 냉담했다. ", 이리 와서 한잔 하세요, 사양하지 말고."

그레엄이 사양하려고 입을 열려고 하자 얼른 덧붙였다.

"짧은 기간이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같은 팀에 있었잖소. 고산병(高山病)을 앓더니 곧 회복한 것 같군. 운이 나쁘면 후유증이 남는 수도 있다던데."

그레엄은 약간 어리벙벙하고 불쾌한 듯했지만, 도나를 보더니 곧 마음을 돌렸다. "아주 건강해요, 덕분에."

소개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려 그레엄과 마주앉아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는 파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려 죄송해요." 소파에 앉은 그의 곁에 자리를 잡으면서 도나는 말했다. "이런 모임이라면 일 얘기만 하게 되기 쉽죠. 이스라엘에서의 일은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테루엔 고대의 유적이 몇 층이나 포개져 묻혀 있다면서요?"

말을 중단하고 그녀는 확인하듯 상대를 보았다.

"아까 브레이크에게 말한 것은 사실인가요? 그레엄, 정말로 후유증은 없나요?"

"별로. 의사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던데. 그보다도 당신은 어때요, 도나? 행복하오?"

"물론이죠. 그렇게 안 보여요?"

"여전히 멋있어. 그러나 뭔가 달라진 것 같아,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부터 3개월의 나이를 먹었죠. 1월이면 24살이 돼요! 생각해 보세요거의 4반세기예요!"

"알고 있소. 당신은 너무나 애쓰고 있는 것 같군. 정원의 꽃을 이것도 저것도 다 예쁘다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도나?"

그녀의 어색한 표정이 슬픈 미소를 띤 얼굴로 변했다.

"여전히 모든 걸 꿰뚫어 보시는군요."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못되는데."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브레이크 때문이오?"

", 하지만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할 계제는 못돼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죠." 허세를 부리며 명랑한 어조를 말했다. "나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밖에요."

"알겠소. 잘 기억해 둬요, 친구가 필요하게 되면 언제든지 달려올 테니까."

", 기억하고 있겠어요."

그 순간, 마음속에 아픔을 느꼈다. 그레엄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신 얘기를 해줘요. 다음 계획은?"

"아직 정하지 않았소. 크리스마스까지 해야 할 작은 일이 두 개 있는데, 여전히 같은 일이오. 그런데"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오늘 오후 히드로 공항에서 누굴 만났는지 알겠소?"

도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바로 미드 박사였소."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오는 길이든가요, 가는 길이든가요?"

"오는 길이던데. 수주일 전에 잉칸타 발굴을 끝내고 후안 프리에트와 리마에서 목록 작성을 하고 있었던 것 같소. 박물관에서 발굴품의 전시를 하겠다고 하던데, 자세한 것은 브레이크가 알고 있겠지. 그들도 브레이크가 있으니까 든든할 테지."

"그럴 테죠."

언제나처럼 도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재닌이 영국에 왔다면 일 때문에라도 이미 브레이크와 만났을 것이다. 어째서 브레이크는 내게는 잠자코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 일을 비밀로 하는 것일까? 해답은 명확하다, 재닌 때문이다.

그날 밤, 나머지 시간을 그녀는 그레엄을 상대로 보내며 다른 손님의 접대는 내팽개쳤다. 그들의 시중을 드는 것은 브레이크에게 맡겼다. 그레엄을 포함하여 마지막 손님까지 물러가자, 뒷처리를 하고 있는 도나 곁으로 브레이크가 다가왔다.

"내일 아침에 해요, 너무 늦었으니까."

"지금 하고 싶어요."

얼굴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는 강철같은 손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오늘밤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어. 이 이상 나를 화나게 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알겠어? 그렇지 않으면 그 증거가 보고 싶은 거요?"

"알았어요.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엔 참견하지 말라, 이 말씀이군요!"

브레이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뜻이지?"

그는 아직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도나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개수대에 기대섰다.

"어째서 전람회에 대한 얘기를 안 하셨나요?"

브레이크는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 뒤가 켕기는 일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어. 누가 알려줬지?"

"그레엄이죠. 오늘 오후 히드로 공항에서 재닌을 만났다는 군요. 재닌은 기억하고 계시겠죠?"

"그랬었군." 자조하듯 말했다. "사랑스러운 아내의 질투라 이건가! 감동적인데."

"내가 질투한다 해서 뭐가 나쁜가요? 오늘 밤 내가 그레엄하고만 얘기를 나누었다 해서 화가 나 있는 당신 역시 나와 마찬가지 아닌가요?"

"당신은 손님을 내팽개쳐 두었어. 그래서 화가 난거야. 미드 박사는 페루 정부를 대신해서 전시품 보관에 관해 우리와 절충하고 있을 뿐이야. 황금으로 된 유물이 상당히 많으니까."

"어째서 재닌인가요? 어째서 후안 프리에트 본인이면 안 돼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저쪽 담당관을 구워삶았다 해서 내가 상관할 이유가 어디 있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 그건 그래요! 대단한 여자죠.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죠미인이고, 머리가 좋고재능은 더 말할나위 없다고! 과연 다른 여자의 남편에 추파를 던지는 일에 관해서는. 정말로 당신이란 사람은"

브레이크는 양손으로 도나의 어깨를 거머쥐고는 오랫동안 격렬하게 흔들어 댔다. 이윽고 그가 멈추자, 그녀는 머리칼을 얼굴에 내려뜨린 채 아랫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돌렸다. 상처를 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력이 잘 어울리는군."

자제심을 되찾자 갈라진 목소리로 쥐어짜듯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폭력행사도 불사할 건가요?"

"내가 그러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간 큰 잘못이야."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는 멀어져 가면서 주먹을 쥔 팔을 축 늘어뜨렸다.

"당신은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어. 그걸 알고나 있어?"

"당신이 내게 하고 있는 정도는 아니죠."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어요. 함께 잠자고, 사랑도 하죠만약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로 맞지 않아요. 이쯤에서 끝내는게 어떨까요, 브레이크?"

"그건 내가 결정할 거야, 그렇게 하고 싶어지면. 헤어지는 경우에는 당신이 나가 줘."

"내 아파트예요. 어째서 내가 나가야 하나요?"

"기억력에 장애가 있는 것은 당신 쪽이야. 집세를 내고 있는 것은 나야. 잊었소?"

"브레이크!" 목소리는 낮고, 눈은 딴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나요,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당신을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달리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당신의 나에 대한 감정의 깊이야. 당신의 말처럼 진정으로 날 사랑한다면, 나 같으면 정직하게 행동했을 거야."

"만약 그렇게 했다면? 옛날에 내가 당신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것을 덮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기억이 없었으니까 가능성은 있었지. 그런데 당신은 그럴 기회를 주지도 않았어."

"그럼, 지금 한번 더 내게 그럴 기회를 주세요. 그 이틀간의 내 행동이, 감정까지도 연극이었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특히 자기기만에는 능란하다고나 할까. 나는 자겠소. 당신은 좋을 대로 해요."

신혼여행이 언젠가는 끝나듯이, 이런 생활도 곧 끝날 것이라고, 도나는 스산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10

어느 날 오후, 브레이크가 아직 박물관에 있을 때, 재닌이 처음 집으로 찾아왔다.

"이제부터 몇 주 동안은 종종 만나 뵙게 되겠네요. 옛정을 되살려두는 것도 좋을 것같이 생각되어서요."

커피를 마시면서 붙임성 있게 말했다.

"영국에서의 전람회 기간 중 내가 모든 일을 맡게 됐어요. 이미 다음 개최지는 버밍검으로 결정되었어요. 흥미진진한 해가 될 것 같아요."

"몹시 지루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요."

도나가 이렇게 말하자, 재닌은 차가운 녹색 눈동자에 짓궂은 빛을 띠며 그녀를 살짝 흘겨보았다.

"개최지에 달려있죠. 다른 곳도 브레이크나 다른 스탭들처럼 협조적이라면 문제는 없죠. 오픈 때 올 건가요?"

"그러고 싶어요."

날짜와 시간을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온 잉칸타에서는 꽤 고생했죠?"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래도 그럭저럭 해냈죠."

뭔가 얘기할 게 있는 듯 말을 끊었다.

"깨끗이 인정하겠는데, 당신에게는 처음부터 한방 먹은 셈이에요. 하지만 브레이크가 기억을 잃은 뒤, 연극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잘못이죠. 내가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다 해도 누군가가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럴까요?" 도나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브레이크가 가보라고 해서 왔나요?"

"아뇨,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재닌은 짧게 웃었다. "아시죠? 남자란 여자들이 모이면 뭐든지 다 얘기하는 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래도 당신들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군요, 그렇죠?"

도나는 뜨끔했다. "그가 말하던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말투에서 느낀 거죠. 별로 놀랄 일은 아니지 않아요?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분전환이에요."

"어떤 식의? 각자 바람이라도 피우라는 건가요?"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건 아니에요. 가벼운 외도로 오히려 사이가 좋아진 부부들도 많은걸요."

재닌은 갑자기 짜증스러운 듯한 몸짓을 했다.

"나는 이곳에 토론을 하러 온 건 아니에요. 믿든 안 믿든 그건 당신 자유지만, 힘이 되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왜죠? 당신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옛날 애인을 도와주나요?"

"아무래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재닌은 재미있어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지진이 있기 전에 얘기했던 모양이군! 나쁜 사람 같으니라구!"

강압적인 태도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좋아요, 솔직하게 얘기하겠어요. 나는 당신 남편이 탐나요. 그럴 수만 있다면 빼앗고 싶어요. 나는 그와 일도 같이 할 수 있지만, 당신은 무리죠."

상대방의 너무나 건방진 태도가 믿어지지 않아 도나는 아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을 싫어해요."

"내가 말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에요. 나는 남자에게 목매달려 사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의 구속을 받을 여자도 아니에요. 브레이크는 당신이 없는 편이 행복할 거예요."

재닌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어섰다.

"잘 생각해 봐요. 배웅할 필요는 없어요, 문 정도는 나 혼자서도 찾을 수 있으니까."

재닌이 나가는 동안 도나는 꼼짝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다. 긴 안목으로 보면, 브레이크에겐 내가 없는 편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비참해질 리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브레이크는 벌써 일주일 동안이나 내 곁에 오지 않는다. 이제 무엇에 매달리면 좋단 말인가?

그날 저녁, 만찬에 초대받은 사실이 생각난 것은 5시가 지나서였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안 가겠다고 할까 했으나, 그냥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것보다 그러는게 더 번거롭게 생각되었다.

6시 반쯤 브레이크가 귀가했을 때, 그녀는 샤워하고 있었다. 타월지의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들어가자,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숙인 채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마사지하고 있었다.

"피로할 뿐이야."

그녀의 걱정스런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준비는 끝냈소?"

"."

옆을 지나쳐 서랍을 열어 새 내의를 꺼내면서, 재닌이 찾아왔었다고 얘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얘기를 했다 해서 이쪽의 입장이 변하는 건 아니다.

"서두르는게 좋겠어요. 애슐리까지 40분 내지 45분은 족히 걸릴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내가 포트맨 부부에게 당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전화할까요?"

"피로할 뿐이야.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야. 증거가 필요하다면 이쪽으로 와요."

응하고 싶은 그의 권유였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내가 즉시 응할 줄 아시나 보죠?"

그는 소리 없이 뒤에 와 있다가 그녀의 몸을 돌려 세워 키스했다. 양손이 가운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약간 난폭하게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가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는 동안에 몸의 방향을 바꾸었다.

"당신 말이 맞아, 시간이 없어. 그만두지."

비겁한 남자. 자극된 욕망이 그녀를 안타깝게 했다.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하지만 무시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 브레이크의 차림에 맞춰, 그녀는 검정색 빌로도 치마에 흰 실크 블라우스를 입었다. 노여움은 사라진 것 같았지만 드라이브 하는 동안 그는 줄곧 잠자코 있었다. 한두 번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보았지만 물어도 어차피 퉁명스런 대답밖에 돌아올 것 같지 않아 모른 체했다.

알렉 포트맨은 그녀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교외의 깨끗하고 오래된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이런 곳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메리 포트맨이 진심으로 기쁨을 표하면서 그녀를 맞이하고, 브레이크에게도 똑같이 환영의 뜻을 표했다.

"결혼식 때는 뉴질랜드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없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고, 돌아와 보니 당신들은 이미 별거하고 있더군."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시 화해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도나는 누군가가 돌봐줘야 해.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자립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니까."

도나의 표정을 보고 장난스럽게 쿡쿡 웃었다.

", 이리로 와서 뭘 좀 마셔요. 손님들에게 소개할게. 아마 당신네가 제일 늦게 온 손님일 거야."

초대 손님은 그들 외에 네 쌍이 있었다. 도나는 곧 옆사람과 친해져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았다. 식탁 너머에, 지적인 중년 여성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는 브레이크 쪽은 일부러 보지 않도록 애썼다. 두 사람 다 경쟁하듯 브레이크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있었다. 만약 자기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남자와 진실한 결혼을 했었더라면 이렇게 질투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손님 중에 박사 학위를 가진 남성이 또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의학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에 거실에서 얘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아내와 나는 일 주일간의 휴가를 얻어 포트맨 씨 댁에 머물고 있어요. 작년, 그들의 차가 내 진료소 앞에서 고장난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지요. 차를 수리하는 동안 우리 집에 유숙하고 나서부터 교제가 시작된 겁니다. 당신은 이 댁 주인과 오랜 친구 사이인 모양이죠?"

"어려서부터니까요. 메리 아줌마라고 부르며 자랐어요."

"커서 결혼할 때까지 그랬겠군요?" 그는 미소 지었다. "주인께서는 꽤 우수한 분이신 것 같아요. 그의 저서 <태양의 백성>을 읽었습니다. 당신 내조의 공도 컸겠죠?"

"아뇨, 그이 혼자 한 일이에요." 그러고 나서 도나는 침착하게 덧붙였다. "그 무렵에는 별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 그랬군요."

그는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결혼생활에는 서로의 양보가 필요하답니다. 재결합에 성공한 커플의 얘기를 듣는 것은 기쁜 일이죠. 그만큼 유대가 깊어져요." 저쪽에서 다른 부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브레이크를 보며 말을 끊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부군의 이마에 난 상처는 어떻게 해서 생긴 건가요? 뭔가 무거운 것에 맞았던 것같이 보이는데요."

"맞아요."

그녀는 사실 그대로를 설명했다.

"3개월 전이라" 그는 사려깊게 중얼거렸다. "두통은 전혀 없나요?"

"있다 해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왜요?"

"식사하는 도중 불쾌감이 느껴지는지 이따금 손을 그곳으로 가져가곤 하던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부인께선 뭔가 짚이는 일이 없나요?"

도나는 오랫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저녁때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겨우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피로할 뿐이라고만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돌아갈 때까지 도나는 남몰래 브레이크를 살펴보았지만 이상이 있는 듯한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도나는 의사의 충고가 마음에 걸려 귀가 도중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두통은 나았나요?"

"무슨 두통?"

"저녁때 외출하기 전에, 욕실에서 나오니까 관자놀이를 누르고 계셨잖아요."

"아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오, 순간적인 것이지. 오늘밤은 즐거웠어."

"알고 있었어요."

도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실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생각했던 대로 그는 발끈 반응했다.

"또다시 질투심을 발휘할 거라면 차에서 내려 줘. 뭐든 자기 혼자만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야."

"누구와 나누어 가져야 하나요?" 도나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재닌하구요?"

차가 길가의 자갈을 튀기며 급정거했다. 입을 한일자로 다문 채 브레이크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내려! 이제 지쳤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려 그의 눈앞에서 문을 힘껏 닫았다. 차가 움직이기도 전에 어깨를 펴고 걷기 시작했다. 태도와는 정반대로 기분은 강풍에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구역질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자동차 문이 또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가슴의 고동은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다가오는 발소리에도 고집스럽게 뒤돌아보지 않았다. 브레이크는 인내의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었으므로 입가가 하얗게 되어 있었다. 도나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힘껏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 차안으로 집어던지듯 밀어 태우더니 차의 시동을 걸었다.

도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내리라고 한 것은 당신이에요."

"알고 있어."

노여움은 여전히 격렬히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손의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핸들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입 닥쳐!"

차가 밤의 어둠을 뚫고 맹렬히 달리는 동안, 그녀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없었다. 단지,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살수는 없다는 둔한 자각만이 있었다. 격정이 식어감에 따라 브레이크는 속도를 떨어뜨렸지만 그래도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12시 반이 조금 지났을 무렵 집에 도착했다. 그가 차를 차고에 넣는 동안 도나는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언제고 가까운 시일 안에 당신은 나로 하여금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게 하고야 말 거야." 열쇠를 드레싱 테이블 위에 던지고 호주머니의 내용물을 꺼내며 그가 말했다.

"뭘 원하는 거요?"

"믿음이요."

거울을 향한 채 손에 쥐고 있는 머리빗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는 응했다. 짧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당신이 내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오?"

"그것과 이것과는 다르죠."

"모르겠는걸, 어째선지."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나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손에서 힘이 빠져 쥐고 있던 머리빗을 내려놓고 거울 속의 그를 쳐다봤다.

"어쩌면, 처음부터 당신이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인정해 주었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돼지가 하늘을 날았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디너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소매에서 커프스 버튼을 거칠게 잡아 뺐다.

"날 좀 내버려 둬, 도나. 쓸데없는 말 좀 하지 말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호된 말을 그녀는 애써 삼켰다. 화를 내봤자 소용이 없다.

좋아요, 내버려두죠. 당신 따위는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호텔로 가면 되지. 아침이 되면 곧 나가버릴 거야. 그 결심은 침대에 들어가서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녀는 브레이크와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걸 뼈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렇게 간단히 체념할 수 있다면, 브레이크에 대한 내 사랑은 어떤 것이었단 말인가. 지금도 육체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육체적인 관계뿐이라면 어째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단 말인가?

그녀가 뒤척거리며 방향을 바꾸어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숨소리로 미루어 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잠옷 바지만 입고 있었다. 며칠 밤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몇 개월 만엔가 잠옷을 입고 있었다. 움직이면 얇은 천이 다리에 휘감겼다. 가는 스트랩을 밀어내려 가슴을 드러내고 근육질의 등에 밀착시켜 팔을 그의 허리로 미끄러뜨리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내지 말아요, 브레이크.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요!"

당장에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마치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입을 열었지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잠을 자요, 도나. 이럴 때가 아니야."

"그렇다면 그럴 때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녀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에게도 안 좋아요, 이러는 것은. 나를 안아줘요, 브레이크.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그래도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나를 안아 줘요, 안아 줘!"

그는 그녀가 손목을 잡자 거칠게 옆으로 밀어내면서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녀를 베개에 밀어붙이는 손길은 거칠었고, 얼굴은 일찍이 보지 못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을 안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어떤 남잔지 알고 있잖소. 안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니까! 이젠 불가능해. 1주일 동안 안고 싶어도 안을 수가 없었어. 알았으면 빨리 자도록 해, 날 괴롭히지 말고!"

도나는 공포에 휩싸여 그를 향해 누워 있었다. 그의 말 속에 담겨진 침울한 노여움의 그늘진 고뇌를 바라보면서 잡힌 손목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어떤 남자라 할지라도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굴욕적인 것이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가요?" 그녀는 어색하게 속삭였다. "일 주일쯤은 대수로운 기간이 아니에요." "내게 있어서는 전생애와 다름없어."

똑바로 누워 천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물론 확실하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겠소?"

"." 도나는 가만히 누워 신중하게 말했다. "일 주일간, 당신은 나를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요. 어쩌면"

"어쩌면이고 뭐고가 없어."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리고 이 얘기는 더 이상 계속하고 싶지 않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거역했다. 필사적으로 가능성을 찾으면서 또다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브레이크, 그 두통에 관해선데 그것이 이것과 뭔가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순간, 그는 방 안이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웃었다.

"새로운 발견인걸! 두통은 결과야. 원인이 아니고."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지 않고는 뭐라고 말할 수 없죠. 오늘 밤 포트맨 씨 댁에서 만났던 닥터 노리 의견으로는, 당신은 검사를 한번 받아볼 필요가 있다는군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을 했던 거요?"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상처를 보고 어떻게 된거냐고 묻더군요. 당신이 아픈 듯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누구에겐가 진찰을 받아보는게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러고는 급히 덧붙였다. "기억상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한 일치고는 아주 훌륭해!"

침묵이 길어졌다.

"어때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머리에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소. 사정이 이러니 당신을 붙잡아둘 이유도 없어진 셈이지. 이것으로 끝내고 싶다면 내가 나가도록 하지."

"안 돼요!" 그 말을 강조하듯 재빨리 한쪽 팔꿈치를 짚고 일어섰다. "정말로 내가 그러리라 생각하는 거예요?"

"동정 따위는 질색이야." 조소하듯 말했다. "당신에 관해서는 너무도 환히 알고 있어, 도나.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만족 없이는 살 수 없어."

"육체적 만족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잠시 후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것을 당신에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그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겨우 대답하는 목소리에서도 감정의 동요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끝내도록 합시다. 괜찮겠지?"

단지 그의 품에 안겨 있기만 해도 좋다. 얼마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그녀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을 파탄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다면 한 발짝 한 발짝 주의깊게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생활일지라도 그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브레이크를 위해서 그를 설득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한다. 남성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부스럼에 손을 대는 것 같은 신중함이 그 이후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전람회는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루어 매스컴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도나는 처음으로 그 전모를 대하고, 지진 후에 이루어진 발굴 양에 놀랐다. 도나 자신이 작성한 유적지 조감도도 비교를 위해서 지진 후의 그것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어째서 다시 한번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하고 도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치 몇 주간의 정신적인 고통이 그러한 야심을 깡그리 빼앗아 버린 것 같았다.

재닌은 자신이 전람회의 주최자라는 인상을 누구에게나 주는데 성공했다. 브레이크는 자기의 권위가 부당하게 침해당하고 있는데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도나가 안타깝게 여길 정도로까지 재닌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개최 첫째 주 주말에 축하 파티가 열렸다. 벌써부터 재닌은 재단의 설득에 나서서, 잉칸타에서 발견된 제기(祭器)에 씌어 있던 <광명의 도시> 발굴 조사의 후원을 얻어내려 하고 있었다. 브레이크도 협력자로서 참가하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그 일에 확답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가 간다면 자기도 동행하리라고 도나는 마음속으로 작정하고 있었다. 설령 단순한 보호자로서일지라도 재닌에게 그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한 여자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도나가 그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그를 그녀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는데, 그녀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는 때로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조차 피하려 했다.

재닌은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여러 사람과 전시회에 대해서 얘기하며 사뭇 다정한 사이인 것처럼 그와 팔을 끼고 있었다. 도나는 그녀의 행동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자기와 얘기하고 있는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파티는 이런 전람회의 축하 파티가 흔히 그러하듯 단조롭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잔을 든 채 이 그룹 저 그룹으로 돌아다니며 그럴 듯한 말들을 서로 나누었다. 도나는 관장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전원이 다 즐길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그날 밤의 예정에 따라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한 8시 반쯤, 그녀는 비로소 브레이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재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운데 견딜 수 없었다.

복도 맨 끝, 브레이크의 사무실은 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문이 조금 열려있고, 안에서 두 사람이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도 해보지 않고 도나는 문을 확 열어젖히고 스위치에 손을 뻗어 불을 켰다.

책상 곁에서 두 사람이 떨어져 서는 게 보였다. 브레이크의 표정은 판별하기가 힘들었다. 당당하지 못한 것만은 확실했다. 재닌은 그와는 정반대로 승리라도 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행범으로 잡힌 셈이군!"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가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대신 말해 드리죠." 도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군요! 계속해요, 두 분다.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브레이크."

그러고는 그들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11

브레이크가 아파트로 돌아오기까지는 한 시간 이상 걸렸다. 도나는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었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브레이크는 텔레비전을 끄고 양손을 주머니에 깊이 찌르고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그녀는 몸을 꼿꼿이 한 채 그를 쳐다봤다.

"묻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예요. 재닌하고는 가능했나요?"

한참을 기다린 듯이 생각되었다. 그의 눈을 쳐다보니, 그녀는 그의 내면의 갈등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겨우 입을 열어, 얘기해 버리는게 낫겠다 싶은 듯 냉담하게 말했다. ", 됐어. 당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확인하고 싶었어."

"그래요?" 아무런 감정도 솟아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이상 우리 결혼생활을 계속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런 것 같군." 그는 동의했다. "정말 무의미해."

그러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우선 나는 호텔로 옮기겠어."

도나는 그 결정에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재닌과 계획을 짠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 재닌은 내가 빼앗아버린 남자로서의 능력을 그에게 다시 불어 넣어준 것이다. 그 이유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문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돌아올 것은 아니다. 이번이야말로 완전한 종말인 것이다.

브레이크가 거실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크 슈트에서 수에드의 재킷으로 바꿔 입고, 머리카락은 얇은 스웨터를 입은 뒤 빗질을 하지 않은 듯 헝클어져 있었다.

도나는 말하고 있는 그의 입가를 쳐다보며, 뜨거운 입술의 감촉과 뭔가 속삭였던 낱말들을 떠올렸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고 매달리며 가지 말라고 애원하라고 했지만, 그녀의 자존심이 굳세게 가로막았다.

"듣고 있는 거요?" 무뚝뚝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나머지 짐은 다음에 가지러 오겠다고 말했어. 물론 이 집의 임대료는 내가 계속 지불하겠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잠자코 나가줘요, 브레이크."

그래도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한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결심을 굳혀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겨우 도나는 긴장된 몸을 일으켜 세워 텔레비전을 다시 켰다.

이제 곧 견디기 힘든 아픔이 느껴지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적어도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녀는 그런 상태에 오래 매달려 있고 싶었다.

다음날 오후, 브레이크가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음성은 긴장된 딱딱한 것이었다. 정식으로 수속을 밟아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인사도 없이 대뜸 말했다.

내일 11시에 변호사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으니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도나는 차분하게 동의하고, 아파트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듣고서 침착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도나는 밤사이에 가혹할 정도의 괴로운 투쟁을 치렀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사랑은 마음속 깊이 가둬야 하는 것이다.

이튿날, 그가 왔을 때도 그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대의 눈가나 입가의 초조한 빛을 눈치 채고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볼 수 있었다.

변호사는 5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이혼 소송에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몇 가지 여쭤 보겠는데요." 인사가 끝나자 그가 말했다.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되는지요?"

도나가 대답했다.

"11월 중순이면 만 3년이 돼요."

"이거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갑자기 희끗희끗한 눈썹을 찌푸렸다. "약간 골치 아프게 될 것 같은데요. 아시다시피 이혼 신청이 정식으로 수리되려면 결혼생활이 만 3년을 경과하지 않으면 안 돼요."

대답한 것은 역시 도나였다. 브레이크는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것처럼 보였다.

"몰랐어요그런 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변호사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최근에 와서는 그런 대로 이혼은 용이해졌지만, 이 원칙만은 여전히 적용되고 있답니다. 예외는 극단적인 경우에만 한정되는데, 실제로 육체적으로 폭력을 당했다든지 하는 경우죠. 두 분은 이런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겠지요?"

"."

브레이크가 무슨 얘기든 좋으니까 뭐라고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도나는 야위고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을 계속 쳐다봤다.

"그런 문제는 없어요. 우리는 단지 합의 이혼을 바라고 있을 뿐이에요."

"서로에게 환멸을 느껴 헤어지려고 하는 거로군요?" 변호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를 규명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죠. 쌍방에 이의가 없다면 4주일 내로 가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최종 판결은 그로부터 6주 후가 되는데, 아무리 빨라도 1월 말이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태연을 가장하면서 브레이크가 일어섰다. "11월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묘하게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으면서 변호사 사무실을 나선 도나는 밖으로 나오자 힘없이 말했다.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군요."

"두 달쯤 기다리는 건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잖아."

그는 앞서 층계를 걸어내려 가면서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우리 두 사람 다 곤경에 빠지고 만 거야."

"그 말에 숨은 의미가 뭐죠, 브레이크?" 도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때까지 당신은 호텔에 묵으며 재닌의 위로를 받으면 되잖아요. 하지만 난"

그는 느닷없이 멈춰서더니 좁은 층계에서 몸을 홱 돌려 험악한 표정으로 도나와 마주섰다.

"재닌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마!"

그보다 두 계단 위에 서 있던 도나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에 파란 눈을 반짝이며 대들었다.

"그건 무리한 요구예요. 아내인 내가 못한 일을 그녀는 해냈잖아요. 당신은 그녀에게 감사해야 할걸요!"

""

그는 갑자기 말끝을 흐리더니 한쪽 손을 이마에 갖다댔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도나는 그의 몸이 흔들리는 것은 느끼고 깜짝 놀라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달려가 무너져 내리려는 그를 부축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검은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여 몸이 쓰러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받치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왔다.

"구급차를 불러줘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그 뒤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병원으로 옮겨져 침대에 뉘어졌을 때도 브레이크는 여전히 의식불명이었다. 한참을 기다렸다고 생각될 무렵, 드디어 가운 차림의 의사가 나왔다.

"머릿속에는 응혈이 생겨서 그것이 뇌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의사는 신뢰감을 느끼게 하는 어조로 솔직하게 말했다. "즉각 외과로 돌렸어요. 기다리고 싶으시다면 3층에 대기실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커피를 부탁해 보내 드리죠."

기다리고 싶으시다면! 야생마 몇 필을 동원한다 해도 나를 끌고 가지는 못할걸. 대기실은 푹신푹신한 의자와 컬러텔레비전 수상기가 갖추어져 있으며,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도나는 자리에 앉아 켜지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서히 쇼크상태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창가에 놓여 있는 전화기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박물관 사람들은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연락해 줘야지.

신호가 가자, 클라이브 니덤이 나왔다. 그는 자기 일처럼 걱정했다. 결과가 나오면 다시 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고 도나는 자리에 앉았다. 친절한 간호사가 가져다 준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 재닌이 나타났다.

"클라이브에게서 들었어요. 만사를 제쳐놓고 와봐야만 될 것 같아서 달려왔어요."

그녀가 수선스럽게 말했다. 도나는 주눅이 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깨끗한 차림을 하고 있는 상대에 비해 자기는 형편없는 모습이었지만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나요?" 이렇게 물은 도나는 회색이 도는 초록색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대답할 필요는 없겠죠, 적어도 당신에겐."

"아니에요, 있어요." 도나의 말투는 분명하고도 단호했다. "만약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가 이번 일로 어떤 상태가 된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상대방의 얼굴에 애매한 표정이 스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그의 뇌에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던가요?"

"아뇨." 도나는 부정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어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당신의 진심을 알고 싶어요."

"결과가 나온 후에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재닌은 또다시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이 걱정할 건 없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이에요, . 알고 계시겠지만 난 그를 사랑해요. 그뿐 아니라 그를 위해 싸울 결심이에요."

재닌이 대답할 말을 찾느라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시 기묘한 표정을 짓고 깍지낀 손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더니, 무언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을 별로 좋아한 적이 없지만, 그 강한 인내심에는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군요. 이틀 전에 그가 당신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 일도 관계가 없나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도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 이틀간을 그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나 하는 것을 일부러 내게 설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재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가 나와 함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고 알고 있어요."

도나는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요즈음 내가 브레이크와 만난 것은 저번에 당신이 당신 눈으로 확인했을 때뿐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게 그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재닌은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만듯 입술을 깨물었다. 도나는 재닌의 냉랭한 얼굴 뒤에 감춰진 속마음을 읽어보려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뒤, 그는 한 시간 이상이나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 때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해요. 그는 나를 내팽개쳤으니까요." 재닌의 어조는 씁쓸했다.

"당신 마음이 다소 느긋해질 얘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난 이틀 동안에 난 상당히 자신감을 잃었어요. 뻔한 것 같아요, 그 사람."

"이번에 눈을 뜨면 또 다른 남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만약'이라는 말을 빼고 도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나요?"

곧 정직한 답이 돌아왔다. "아뇨, 못해요. 내가 원하는 남자는 1년 전의 브레이크예요."

재닌은 잠시 후 일어나더니 단호한 태도로 치마의 주름을 폈다. "이제 슬슬 가봐야 될 것 같군요.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줘요."

도나는 그녀가 문에 이를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름을 불러 상대가 뒤돌아보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자조하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쨌거나 내가 졌어요. 행운을 빌어요."

문이 닫히자 도나는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심정으로 빌었다행운 이상의 것이 필요해, 또 하나의 기적이 내게는 필요해. 시간은 천천히 지나갔다. 이따금 간호사와 의사들이 나왔지만 곧 다른 데로 가버렸다. 마침내 담당 의사가 나왔을 때는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담담하게 맞을 수 있었다. 브레이크의 수술은 성공이고 장애가 될만한 증상은 없다고 그 외과의는 말했다. 또 그는 사실 장애 여부는 그가 마취에서 깨어나 봐야만 알 수 있는데, 그때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니까 만약 그의 곁에 있고 싶으면 그래도 상관없다고 덧붙여 말했다.

브레이크는 같은 층의 독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점적을 받으며 누워있는 그를 보자 몇 개월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야, 하고 반응이 없는 얼굴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그만 두자. 만약 그것으로 최후가 된다 해도 다시 한번 이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한 시도를 해봐야 한다.

그는 거의 한 시간쯤 후에 눈을 떴다.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나는 그의 이름을 살짝 불러, 심장이 멎는 듯한 심정으로 안도하고 감사하며 그의 의식이 되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자기 쪽으로 향해진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다시 병원에 들어오게 됐군요." 그녀는 말했다. "이번에는 영국이지만."

"알고 있소."

그의 목소리는 놀랄 정도로 담담하고 또렷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통증을 느꼈고, 층계에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 당신이 부축해 준 것도 기억하고 있소."

회색 눈동자를 그녀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듯 천천히 말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 우리 결혼, 별거, 잉칸타의 일윤곽은 약간 희미하지만 핵은 뚜렷해."

"다행이에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로써 당신은 좀 더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군요. 잃어버렸던 2년간의 일이 말끔히 되살아났으니까요."

"나는 직장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 우리의 일이 문제지. 우리는 두 번이나 결혼했었지."

"그러나 두 번 다 실패였죠."

그의 부정하는 눈빛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어요, 브레이크. 당신이 나를 안지 못한 이유는 당신 의식의 밑바닥에서 나를 안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죠. 누구에게 문제가 있나 하는 것을 재닌이 증명해 주었어요."

"재닌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았어." 빈정거리듯 말했다. "자포자기해서 나 혼자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것 뿐이야. 그녀와의 일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거야. 그것을 다시 재연시킬 마음은 조금도 없어."

도나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저번에 당신은"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알고 있어. 집 나갈 구실이 필요했었어. 남편 노릇이 불가능한 것을 당신 탓으로 돌림으로써 어느 정도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지. 당신 곁을 떠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었던 거요."

"그런데 지금은요?" 말을 억지로 짜내듯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직도 그런가요?"

그가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잖소. 마취가 아직 완전히 깨지 않아서 머리가 욱신거려!"

다시 입을 다물자 잠시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많이 있어, 도나. 어쨌든 시간을 좀 줘."

"좋으실 대로 하세요."

불안한 마음으로 일어섰지만 그에게 키스를 한다거나 가까이 가려 하진 않았다.

"내일 다시 올까요?"

그는 잠시 주저했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혼자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기억은 돌아왔지만 아직 혼란스러워."

"좋아요." 태연스런 목소리를 내려니 힘겨웠다. "전화하겠어요. 그럴 마음이 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겠죠?"

"언제든지." 미소에는 빈정거리는 빛이 엿보였다. "그렇지만 기대하지는 말아요."

 

다음날부터 도나는 로봇처럼 매일 반복된 생활을 했다. 브레이크의 상태를 묻기 위해 병원으로 전화를 거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보람이 되었다.

"미첼 박사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는 중입니다."

전화를 걸 때마다 간호사는 약간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그 때문에 브레이크가 병원 사람들에게 아내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뭐라고 말했을까가 신경이 쓰였다. 사실대로가 아닐 것은 분명하다.

낮 동안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외출했지만, 쇼윈도를 들여다보거나 관광객들과 섞여 거리를 서성거리다 돌아올 뿐이었다. 밤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지만 쓸데없는 생각에 젖지않기 위해 브레이크의 책을 갖다 공부를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대비하여 지식을 쌓아둘 작정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일도 결혼 대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디스 레밍턴이 그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드디어 병원에서 브레이크가 퇴원해도 좋다고 알려왔지만,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가벼운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누군가가 갈아입을 옷을 갖다 주지 않으면 안 되고, 병원에서 호텔로 직행시킬 수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져, 일단은 그를 만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행동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병원으로 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브레이크는 간호사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녀의 곁을 지나치면서 얼음같이 찬 시선을 보냈다. 이유는 명확했다.

"저 간호사는 제가 일부러 당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가져온 옷가방을 열면서 도나는 슬픈 듯이 말했다. "억울하군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잖아." 브레이크는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핀잔주듯 말하고는 그녀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내가 아파트로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달리 갈 데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소파는 침대 대신이 될 만큼 커요."

"그건 그래."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회색 눈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당신 차로 왔소?"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아 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옷을 다 꺼내고 일어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나요?"

"인사는 다 끝냈소. 한 달 후에 검사를 받으러 오면 돼요.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는군."

양호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기들 사이에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그녀는 병실을 나왔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도나는 식사 준비를 대충 끝내놓고 나갔다. 수프를 데우고 피자를 오븐에 넣고 나서 커피를 마시다가 도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침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브레이크, 말 좀 하세요!" 그녀는 호소했다. "언제까지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무시할 작정은 아냐. 적당한 때를 기다릴 뿐이지."

"브레이크, 분명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죠?"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어깨를 움츠리고 가벼운 어조로 계속했다. "신경과 의사와 두 번 꽤 오래 얘기를 나누었는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몇 가지 알게 되었어. 그 정도일 뿐, 상황은 전과 별달리 변하지 않았어."

입가가 일그러졌다.

"동기를 이해함으로써 문제의 반은 해결된 셈이지. 하지만 정신이 항상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가 터득한 것은 사실과 타협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체념은 맨 나중에 취할 방도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야기해 봐요, 브레이크. 나도 이해하고 싶어요."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완전히 식어버린 커피를 스푼으로 저으면서 컵에다 눈길을 떨군 채 입을 열었다.

"내 경우 기억 장해는 심적인 요인에서 온 것 같대. 결혼식 당일까지로 기억이 퇴행 현상을 보인 것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상실해버린 것 같아. 리마의 진료소에서 당신이 과실이 있었던 2년 반 동안의 일을 솔직히 내게 얘기해 줬더라면, 그때 이미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새로운 출발을 할 수도 있었다구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머리를 들고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도나, 지금도 그때도 당신은 결코 바보가 아니야. 당신도 그때 나와의 새 출발을 원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그렇지 않아?"

"그때 내 거짓말은 쇼크 탓이었어요. 난 어떻게든 당신을 내게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어요. 잉칸타에서 당신이 나를 찾아 나왔던 그 밤의 일을 생각하면, 내가 왜 자포자기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를 납득시키는데 여념이 없어 목소리까지 떨렸다.

"그때까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그 이후부터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누구든 갑자기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에 놓이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감정에 따르게 마련이잖겠어요?"

그의 표정에는 어딘가 슬픈 빛이 있었다. "동굴에서 지낸 밤의 일도 기억하고 있고, 그 다음날 아침 당신에게 내가 한 말도 기억하고 있소. 잔인했던 것은 인정해."

"그 순간의 당신 행동을 난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죠. 당신은 내게 불신감을 가진 채 3개월간 생활을 같이 했지만 나를 안는 데는 변함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또 갑작스럽게?"

"전문의가 말하길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있었다는군."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무리하고 있었지. 만약 당신에 대한 내 매력이 단지 성적인 것뿐이었다면, 그것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 증명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집을 나가지 않았어요." 도나는 말했다. "나가버린 것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건 어째서였나요?"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견딜 수 없어진 거야. 당신은 이혼에도 별로 반대하지 않았지."

"내게도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지적했다. "그 무렵에는 틀림없이 당신은 재닌과 다시 가까워지려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말을 끊고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같은 말만 자꾸 되풀이해 봤자 그럴 듯한 해결책은 발견되지 않아요. 나는 자신의 마음을 속일 생각은 없어요. 솔직하게 나타내고 싶어요."

브레이크의 눈에는 아직도 빈정거리는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말이죠."

그녀는 일어서자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커피 테이블을 밀어내고 양손을 가볍게 그의 어깨 위에 얹고 오른쪽 이마에 붙어 있는 반창고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도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목소리에 자신의 진정을 담고서 말했다.

"브레이크, 만약 당신이 육체적으로 사랑해 주지 못할 경우, 그런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행동하진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나는 위선자가 되니까요. 그러나 다시 당신을 잃게 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참을 수 있어요."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곧 알게 되겠지." 그는 말했다. "가능한 한 당신 말을 믿도록 노력하겠어."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이후, 그날은 별다른 일없이 지나갔다. 기나긴 하루였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 일과 전람회의 성공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재닌은 이미 유물의 이송 준비를 끝내고 버밍검의 집에 가버렸다. 재닌이 아직 그렇게 멀지않은 장래로 예정하고 있는 제 2차 발굴 때에 브레이크를 설득해 참가시키려고 하는 것을 도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는 일은 삼가했다.

자기들의 결혼을 새출발시키는 게 어떤 발굴 작업보다도 중요했다. 쓸데없는 질투나 반감에 신경 쓰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약간 어색해졌지만, 브레이크가 곧 자기는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거라고 도나는 자신을 납득시켰다. 언젠가는 또다시 그와 침대에 같이 잘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새로운 시트와 커버를 꺼내온 뒤, 그들은 마치 오누이처럼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브레이크와의 사이에 두 개의 문이 닫혀지자, 도나는 더블 침대의 한가운데에 몸을 뉘고 그의 곁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여러 가지 일이 끝없이 뇌리를 어지럽혔음에도 불구하고 도나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잉칸타로 돌아가 또다시 지진을 체험하고 굴러 떨어진 돌에 브레이크가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자신도 뭔가 무거운 것에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떠보니, 자기를 누르고 있는 것은 브레이크였다. 그의 입술이 온몸을 미친 듯이 더듬고 있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 저도 모르게 매끄럽고 건장한 몸을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면서 무서운 폭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윽고 그 폭풍은 두 사람을 동시에 휩쓸었다. 도취의 사슬을 끊은 것은 조용히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전신을 떨며 웃는 브레이크의 웃음소리였다.

"아아, 이럴 수가!" 그는 헐떡였다. "당신은 모르겠지. 이 심정을!"

"알아요, 알고말고요!"

기쁨과 안도를 온몸으로 발산시키며 도나도 웃었다. "브레이크, 사랑하고 있어요.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요!"

"알고 있소. 나도 사랑하고 있어."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서 키스했지만, 그 입술이 너무도 다정하여 그녀에게는 그 메시지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난 어두운 곳에 있었어. 그러나 이젠 끝났어. 마침내 빛을 찾았어."

"어떻게?"

키스에 응하면서 그녀는 물었다.

"어떻게요, 브레이크? 뭣이"

"눈을 뜨자 당신을 안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 없었어. 자고 있든 깨어있든 당신은 최고의 여자야!"

"잠깐요!" 상대의 기분에 맞춰 일부러 감정 상한 듯 항의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도나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듯 잡았다.

"나에겐 당신뿐이에요."

"그것도 알고 있소, 지금은." 브레이크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은 당신과 견줄 만한 여자는 달리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오, 어떤 의미로든. 우리에게는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많아. 도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그녀는 천천히 유혹하듯 미소 지었다.

"지금, 여기서부터죠."

그녀는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