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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지망(Full circle) 2

Bollnow 2024. 3. 8. 06:54

5

사라는 자기를 안고 있는 스티브의 양팔의 감촉을 의식하면서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머리를 쳐든 그의 동작으로 현실로 돌아온 사라는, 천천히 그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졌다. 지금까지 줄곧 사랑해 온 이 사람. 이 사랑을 숨기기 위해서 증오와 노여움과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이대로 언제까지나 두 사람만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이혼해 주기를 원해?”

그가 조용히 물었다.

사라는 모든 환상에서 깨어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과 전혀 다름없는 난제가 여전히 자기 앞에 놓여 있다. 폴에 대해 어쩌면 이렇듯 몹쓸 짓을 저질러 버렸단 말인가. 이젠 그와의 결혼 이야기는 잊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사라가 고통스러운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 때문에 모두 엉망진창이 돼버렸어요.”

우리는 공범이야.”

스티브는 사라의 몸에 입술을 갖다 대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 어른이 됐군 그래. 나에게 돌아와 줘, 사라.”

말이 목구멍에 걸리는 듯했다.

이런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스티브. 전에도 그랬잖아요.”

이 이상의 것은 둘이서 쌓아 올리면 되지. 5년 전엔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지.”

지금도 간격은 여전해요.”

나이 차는 같지만, 당신 쪽이 많이 성숙해졌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 사라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비트의 얘기도, 그 밖의 어느 누구의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아. 시발점으로 돌아가서 함께 새로운 스타트를 끊기로 하지.”

그렇게 쉽게 결말을 지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사라가 반론을 폈다.

스티브, 난 말이죠....”

그만!”

그는 일어나서 사라에게 등을 돌리고 옷을 집어 들었다.

과거의 일은 묻어 버리면 돼.”

엘자의 일도?”

그래. 모두.”

일어서서 벨트를 매고는 셔츠에 팔을 끼기 시작했다.

당신은 캐버노우로 돌아올 거니까 짐을 챙기지.”

발밑에 떨어져 있는 로브를 몸에 걸치면서, 사라는 손발이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 돌아간다고도 돌아가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독재적이시군요!”

돌아올 게 뻔해. 꽤 친정 생각이 깊었으니까.”

그는 야유하는 듯한 미소를 띠고 사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좀 더 충분한 증거를 보여 줄까?”

당신은 언제나 욕망만 생각하고 있군요.”

사라는 씁쓸하게 말했다.

욕망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있어.”

침대가로 돌아온 스티브는 사라를 끌어당겨서 정열적인 입맞춤을 했다. 그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각오가 보기 좋게 스러져 버리는 것을 느끼고 사라는 망연해졌다. 어째서 그를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일까.

육체적인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만이 결혼은 아니잖아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뿐인지 어떤지는 둘이서 연구하기로 하지.”

사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그가 말했다.

, 짐을 챙기지.”

오늘 밤은 안 돼요.”

애원하듯이 말했다.

폴을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당신이 폴을 만날 필요는 없어. 설명은 내가 할 테니까.”

싫어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아프도록 양팔을 붙잡혔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일일이 명령받는 게 이젠 진저리가 나요!”

폴을 만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말을 듣지 않으면 방에 가두어 버릴 거야!”

그럴 심산으로 나를 데려갈 작정이라면, 분명히 거절하겠어요!”

그를 흘겨보던 사라는 갑자기 노여움이 식어 가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었다.

당신과 만나지만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는 되지 않았어. 우리는 닮은꼴 부부야, 사라. 체념하는 거야.”

당신은 이미 체념했나요?”

잿빛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사랑이야 어떻든, 내겐 당신이 필요하단 말이야.”

침대 속에서만 말이죠.”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사라는 계속했다.

알고 있어요. 내게도 반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 하지만 내가 직접 폴에게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안 돼.”

사라에게서 손을 떼고 그는 창밖을 응시했다.

, 짐을 챙기기로 하지.”

나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과거의 실패에서 무엇 하나 배우지 못했다니. 모든 점에서 두 사람은 잘 맞지 않았다. 스티브가 사라에게 느끼는 감정을 애정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사라의 감정 또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애정이란 존경과 신뢰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두 사람에겐 그것이 없었다. 이제부터 함께 그것을 쌓아나갈 수 있을까.

로비의 프런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티브는 사라의 슈트케이스 두 개를 손에 들고 현관을 나오자,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주차시켜 놓았던 차의 트렁크에 짐을 던져 넣었다. 사라를 차 안으로 밀어넣다시피 하고 도어를 닫는 스티브의 태도는, 길을 잃었던 애완동물을 찾아낸 주인을 방불케 했다.

두 사람은 아무말 없이 캐버노우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사라는 주위의 밝고 활기찬 세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나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티브를 따라 전에 함께 거처하던 곳에 한발 들여놓자, 사라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안 돼요, 스티브.”

절망적으로 말했다.

다시 만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된걸요.”

그래서 어쨌단 말이지?”

그는 도어를 닫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사라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들여다보았다.

이제 와서 또 마음이 변했다 해도 이젠 이미 늦어 버린 거야. 이젠 나도 뒤로 물러설 순 없지. 한잔해야겠군.”

축하, 아니면 장송?”

아일랜드 사람에겐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겠지.”

우린 아일랜드인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우린 결혼한 것이고, 헤어질 마음이 없단 말이야.”

그는 슈트케이스를 들고 침실로 향하면서 말했다.

내겐 라이를 한 잔 줘.”

사라는 무엇이든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워커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넓고 아름다운 방안을 돌아보니, 수많은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의 밸런스를 잡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요령인 것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각오가 돼 있으니까 전처럼 흔들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사라는 폴에게 전화해서, 다음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그는 이미 바의 구석에 앉아서 우울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는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과하는 것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군요. 미안해요, .”

사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을 실망시켜 버렸군요. 당신의 기대를 만족시킬 자신이 없다고 언젠가 말했죠.”

당신을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녀석이 나쁜 거지. 쉐라톤 호에서 내리던 전날 밤에, 그는 절대로 당신을 놓아줄 수 없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뉴욕에 가게된 것을 기회로 당신에게 압력을 가한 거야.”

사라는 아연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간 거예요?”

그는 몸을 꼿꼿이했다.

갈 수밖에 별수가 없었지. 그건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게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게다가 나를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설마 스티브 같은 사내한테 되돌아갈 만큼 멍청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그렇다고 해야겠지.”

사라의 도톰한 입술과 아름다운 머릿결을 바라보면서, 그는 억지로 인정했다.

당신이 어느 정도 그에게 미련이 있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지.”

, 알고 있어요.”

그래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군요.”

스티브의 팔에 안겨서 잠들어 있는 동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날이 새고 눈부신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비로소 사라는 번민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런던으로 돌아가시면, 아버님께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사표를 내러 갈 수는 없으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궁리하고 있는 참이야.”

그가 비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당신의 부모님께는 어떻게 할 작정이지?”

벌써 편지를 썼어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젠 도저히 이해해 주시지 않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스티브와의 결혼을 반대하셨으니까.”

당신은 변했어.”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2, 3일 사이에 그가 바꿔 버린 거야!”

정복자 앞에 굴복한 패배자인 걸요!”

사라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변한 게 아니에요. 비로소 생각이 분명해진 것뿐이죠. 지금까지는 사실에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있었던 거지요.”

당신이 진실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좀 더 행복해 보일 텐데. 그에게 억지로 끌려들어가 있는 건 아닐 테지?”

사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감금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난 틀림없이 이렇게 혼자서 여기에 왔어요.”

그렇지만 이 일을 그는 모르겠지?”

, 몰라요.”

사라는 무의식중에 손목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그를 두려워하고 있군 그래!”

갑자기 납득이 간 것처럼 폴이 말했다.

그의 허가 없이 나를 만나러 온 것이 탄로나지나 않을까 해서 겁을 먹고 있는 거지? 대체 스티브는 어떤 인간이지?”

매력 만점인 인간이죠,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굉장히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그는 내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하진 않아요. 그런 짓을 할 타입이 아닌걸요.”

그렇다면 어떤 타입이지? 어째서 스티브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 거야?”

사라를 한참 쳐다보더니 폴은 느닷없이 얼굴을 붉혔다.

설마 그 일만으로...”

어째서 그 일만으론 안 된다는 거죠?”

당신답지 않은 얘길 하는군. 남자라면 결혼의 그 면만을 중요시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나는 여자니까 다르다고 하시는 거예요?”

사라는 씁쓸하게 말했다.

당신은 틀렸어요. 결국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예요.”

그런 건 믿을 수 없어.”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사라는 잠자코 글래스를 만지작거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바보같은 말을 해서 미안해요. 물론 당신의 말이 옳아요. 하지만 나는 단념할 수 없는 거예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 이걸로 수업은 끝이에요.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나와 스티브의 문제니까.”

그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

쇼핑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왔죠.”

사라는 의자를 뒤로 밀고 부자연스럽게 일어섰다.

이젠 가야겠어요. 전송하지 마세요. 여기서 헤어지는 편이 좋아요.”

차마 헤어지기 어려운 듯 다시 한번 폴을 쳐다보았다.

건강하세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참고 간신히 밖으로 나왔다.

 

사라가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고 난 지 열흘 만에 회답이 왔다. 아침 식사 때 스티브의 눈길을 느끼면서 봉투를 뜯었다.

뭐라고 썼지?”

다 읽고 난 편지를 가만히 내려놓는 사라를 향해서 물었다.

, 읽고 싶으면 보세요.”

애써 가볍게 말했다.

별로 읽고 싶지는 않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듣고 싶군.”

무어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지 망설이면서, 사라는 우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정신이 돌아 버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잠시 동안 사라를 지켜보다가, 스티브는 농담을 하듯 말했다.

당신 자신도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나?”

사라는 그의 잿빛 눈동자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후회하고 있지는 않겠지?”

뭔가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

뭐라고 말할 수 없어, 옛날처럼 간단하게 감정을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침대 속에선 언제나 행복해 보이는데.”

사라는 우울해서 재치있는 대답이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밤의 정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다시 그의 말에 의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애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안겨 있을 때뿐이었다. 언제 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길 것인가.

오늘의 일정은?”

사라가 물었다.

열 시 반에 부장들하고의 회의와, 그 뒤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질 수 없는 오찬회가 있어.”

괜찮아요.”

사라가 서둘러 말했다.

난 루이스하고 같이 식사하기로 했어요.”

그거 잘 됐군.”

그는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저녁은 어디서 할까?”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귀에 익은 질문이다. 플로리다의 상류 사회를 위한 고급 레스토랑을 차례로 찾는 것이 두 사람의 습관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래층에서 요리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었지만, 사라는 웨이터가 퉁탕거리고 출입하는 속에서 식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개조할 때, 제대로 식사 준비를 할 수 있는 주방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호텔 조리실에서 어떤 식사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음식만들기를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별로 고마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반드시 가사일에 매일매일 신경을 쓰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요리쯤은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치일까.

사라?”

스티브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사라에게 물었다.

저녁을 어디서 할 거냐구...”

미안해요,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미소 지으며 어깨를 추슬렀다.

아무데라도 괜찮아요. 당신이 정하세요, 전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요.”

스티브는 식당을 나서려는 사라를 잡아서 무릎에 앉혔다. 수염을 금방 깎고 난 그의 남자다운 체취가 사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사라는 로브의 깃 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가슴털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이 불타는 것을 보고, 사라는 압도적인 우월감을 맛보았다. 이렇게 그의 정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한,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회의는 몇 시라고 했죠?”

사라가 속삭였다.

몇 시간이나 뒤의 얘기야.”

스티브는 사라가 멍청해질 만큼 정성스레 입맞춤을 하더니 사라를 끌어안은 채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지각한 루이스는 핑계를 주워 대며 사라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나타났다.

차의 상태가 어쩐지 이상해서 할 수 없이 좀 봐 달라고 했는데, 어디가 나쁜지 모르겠다나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계속했다.

수리하러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로브의 차를 빌고 싶지만, 오토매틱이 아니어서 난 운전할 수 없거든요. 렌트카를 비는 방법도 있지만...”

걸어 다니는 방법도 있죠.”

사라가 장난스레 말했다.

양쪽 발을 서로 엇갈리게 하고 앞으로 나가면...”

알았어요, 용서 없군요.”

루이스가 웃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두서없는 얘기의 꽃을 피우면서 점심을 들었다.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지껄여대는 루이스의 말투가 이상하게도 오히려 사라를 침착하게 해주었다. 캐버노우로 옮긴 이래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이번이 세 번째다. 두 사람의 연령 차 같은 것에 루이스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친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디저트를 끝낼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루이스는 개인적인 일로 화제를 옮겼다.

그 뒤 어때요? 그는 여전히 호텔놀이에 열중하고 있어요?”

그에겐 호텔업은 게임이 아닌걸요. 생사가 걸린 큰 문제인 것 같아요.”

막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그랬겠지만...”

루이스가 말했다.

지금의 캐버노우는 이제 막 기름을 친 정밀 기계처럼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아직 스티브가 그처럼 총지휘관 역할을 전담할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듣는 걸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얘기해 봤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너무 어려서 남편 조종법을 몰랐던 게죠.”

웃으면서 사라가 말했다.

전혀 경험이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무렵이 비하면 조금은 영리해졌을지도 몰라요.”

필요하면, 인간은 모두 영리해지는 거예요. 남자는 말이죠, 여자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체면을 중시하죠. 스티브는 자기가 없으면 호텔이 망해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당신도 그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거예요.”

그런 권리는 5년 전에 이미 끝나 버렸는지도 모르죠.”

어쩌면 그렇게 센스가 둔할까! 처음부터 곧이곧대로 그에게 생활양식을 바꾸라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좀 더 능숙한 술책을 강구하는 거죠. 당신 같은 미인에게 걸리면 어떤 남자라도 하자는 대로 하겠죠?”

그렇다면 좋으련만, 하고 사라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5년 전에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걸. 당신이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글쎄요, 5년 전의 나는 자신의 불평불만에 정신을 빼앗겨서 남의 일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로브의 덕택이었죠.”

잠시 사이를 두더니 루이스는 계속했다.

스티브에게 두 번째의 신혼여행을 가자고 하면 좋을 텐데.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두 사람만 얼마 동안 갔다 오세요. 그에게 이야기를 해볼 방도가 없을까? 그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거예요.”

사라는 자신이 없는 듯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해보기는 하겠지만...”

 

사라가 샤워를 하고 있는데, 여섯 시쯤에 스티브가 돌아왔다. 글래스를 한 손에 들고 침실 입구에 서 있는 그의 앞에 하얀 로브를 걸치고 타월을 머리에 두른 사라가 욕실에서 나왔다.

당신은 무엇을 입어도 아름답군.”

글래스를 옆에 놓고서 그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리로 와.”

사라는 그가 말하는 대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 걸려서 머리에 쓴 타월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라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입술을 갖다 대는 그의 몸에 기대면서 그녀는 속삭였다.

머리가 헝클어져요.”

머리가 헝클어져도 당신은 멋져.”

그는 또 한 번 키스를 하고 나서 사라를 놓아주었다.

오늘밤엔 한껏 모양을 내라구. 타폰 스프링스로 드라이브하고, 카슨 부부하고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어. 트라비스와 바바라를 기억하고 있어?”

사라는 금방 생각이 났다. 느낌이 좋은 부부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상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예전의 우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 우의를 돈독히 하기에는 약간 시기상조가 아닐까요?”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그의 잿빛 눈이 금세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번에도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단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만 바바라하고 함께 있으면 항상 거북했던 생각이 나서 그래요.”

당신이 부자연스러운 인간이었으니까 별수 없지.”

사정없는 그의 말이 사라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바바라가 몇 명이 나타난대도, 당신은 대항할 수 있게 됐단 말이오. 바바라보다 훨씬 아름다운 데다가, 나이도 여덟 살이나 아래란 말이야. 그리고, 언제까지나 사람들을 피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아?”

그는 다시 글래스를 집어 들었다.

사라는 옆방으로 가는 그를 뒤따라가 도어의 손잡이에 기대서서 조용히 물었다.

스티브, 내게서 젊음도 아름다움도 다 없어질 땐 어떻게 되죠?”

그는 발코니의 도어로 걸어가서 황혼이 깃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만으로는 그의 표정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선글래스를 끼지.”

야유하는 듯한 대답을 했다.

너무 오래 살아서 나이를 의식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그동안의 5년이라는 세월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에요. 결국은 도로 아미타불이네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때하고 지금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어. 우리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인간들이야.”

하지만 환경도 생활방식도 똑같은 걸요.”

이미 시작한 말이므로,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 됐다.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예전 그대로의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안정감이 있어서 좋을지는 몰라도, 하지만 그것으로 잘될까요?”

꼼짝도 않고 서 있던 스티브의 몸이 굳어졌다.

돌아온 지 2주일도 채 못 되어 벌써 무료해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무료한 게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말이 나온 바에야 아예 모든 걸 분명하게 말해야겠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우리의 결혼을 성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외부의 압력이 없는 곳으로 가서 얼마 동안 둘만이 지내는 거예요.”

말하자면 캐버노우의 방해가 없는 곳으로 가자는 말이로군?”

그런 셈이죠. 이대로라면 옛날과 다름없을 거예요.”

당신의 그런 점이 마음에 안 들어.”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었다.

, 물론 마음에 들지 않겠지요.”

사라는 여기서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말을 계속했다.

우리들 사이에 욕망 이외의 감정이 있는지 어떤지, 함께 찾아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그건 건 아주 무리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잔 말이지... 두 번째의 신혼여행이라도 가자는 말인가?”

스텐드의 희미한 불빛이 그의 굳어진 턱의 선을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캐버노우를 팔아 버리고 당신에게 전심전력을 해야 마음에 드시겠군!”

전심전력을 하란 말이 아니에요. 호텔에 기울이는 마음을 내게 조금만 나누어 달라는 말이랍니다.”

사라의 목소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스티브, 우리들은 늘 껍데기만을 보아 온 거예요.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서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진지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

아니오, 그냥 단순히 서로 말만 하고 있을 뿐이죠. 전에도 그랬어요.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오늘 밤 바바라 부부하고 같이 간다 해도, 나와 바바라가 잠자코 듣고 있는 동안 당신과 트라비스는 호텔이나 부동산 얘기만 할 것 아니에요.”

스티브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비어 버린 글래스를 쳐다보았다. 냉랭한 표정이었다.

바바라가 어떤 사람인지 연구해 보면 되지 않아, 뜻밖에 당신과 마음이 맞을지도 모르지.”

사라는 벌컥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체하시는 거죠? 바바라의 일 따윈 내겐 아무래도 좋아요!”

그러나 내게 관해서는 진지하단 말씀이군 그래?”

그의 말투가 변했다.

나의 진정한 생각을 알고 싶은 거지?”

사라는 목이 죄어드는 듯했다.

현재의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요. 지금 이대로의 생활은 계속할 수 없어요. 캐버노우를 얼마 동안 지배인에게 맡겨 놔도 괜찮지 않아요?”

그럴 테지. 하지만 당신은 알지 못해.”

무엇을?”

내가 이 일을 좋아서 하고 있다는 사실말이지, 나는 이 사업에서 만족감을 얻고 있어.”

그래요!”

스티브의 말이 가슴에 아프게 와 박히는 것을 느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데려왔죠? 폴에게서 나를 빼앗을 수 있는지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스티브는 표정 없이 사라를 바라보았다.

, 이제 슬슬 옷이나 갈아입지, 타폰까지는 꽤 거리가 머니까.”

혼자서 가시죠.”

사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여기 남아서 짐을 싸겠어요.”

좋을 대로 하시지.”

그는 무관심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밤엔 어느 항공편이든 좌석이 많이 있을 테니까.”

사라가 망연히 의자에 웅크리고 있는 곳에 그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왔다. 엷은 갈색의 양복과 짙은 갈색 셔츠가,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라에겐 눈도 주지 않고 아무말도 없이 나가 버렸다.

사라는 오랫동안 도어를 바라보며 스티브가 가버렸다는 것을 간신히 알아차릴 때까지 앉아 있었다. 굳어진 팔다리를 죽 펴고는 머리를 만져 보았다. 거의 말라서 브러시를 해야겠는데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아까는 당장 짐을 싸가지고 떠날 작정이었지만, 노여움이 가시고 보니, 자기의 진정한 마음을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스티브하고의 생활이 어렵다 해도, 사라로서는 두 번 다시 그 없이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처럼 간단하게 사라와의 이별을 납득해 버리는 따위의 남자를 사랑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자존심도 본능도 무시하고 그녀를 여기에 남도록 한 것은 사랑이었음이 틀림없다. 스티브가 한 발짝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전면적으로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것은 사라인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보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열 시 가까이 되자, 사라는 커피를 따라 가지고 발코니로 나갔다. 밝은 불빛이 비치는 풀밭에서 두 사나이가 무어라고 외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기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일까, 하고 생각하며 사라도 손을 흔들었다. 캐버노우처럼 장기 투숙객들이 많은 곳에서는 사라의 존재가 호텔 종업원들뿐 아니라 손님들 사이에서 화제거리가 되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 여기서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스티브를 위해서도, 무엇인가 열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도어가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듣고 사라는 가슴이 덜컹했다. 방안을 돌아다보니, 스티브의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방안 한구석에 꼼짝도 않고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사라가 모습을 보였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만 지그시 시선을 한곳에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떠날 작정이 아니었나?”

, 그럴 생각이었지만,”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면서 말했다.

함부로 집을 뛰쳐나가는 것은 어른답지 않은 경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타폰 스프링스에는 가지 않았어요?”

반쯤 가다가 트라비스에게 전화를 걸고 되돌아왔지. 한 시간 가량, 아래 바에서 괴로움을 술로 달래며 생각을 하고 있었지.”

어떤 결론에 도달했어요?”

한 가지만은.”

사라의 손에서 커피잔을 빼앗아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놓았다. 그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엄격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억세게 사라를 끌어안자 머리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아직 당신을 놓아줄 생각은 없어. 당신이 말한 것처럼 해봅시다. 돌핀 호를 타고 둘이서만 떠나는 거야. 한 달이 지나면 그때 다시 얘기해 보기로 하지.”

무슨 말인가 하려는 사라의 입술에 스티브가 손가락을 대었다.

말은 필요 없어, 당신의 희망대로 했으니까 말이야.”

희망대로 된 것일까. 사라는 갑자기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의 장래에 한 달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는 데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6

이틀 후에 두 사람은 낫소를 향해서 출범했다. 돌핀 호는 길이가 12미터쯤 되며, 필요에 따라서는 혼자서도 조종할 수 있는 두 개의 마스트가 있는 범선이었다. 침대와 접었다 폈다 하는 테이블이 달린 커다란 중앙의 선실 외에, 뱃머리 가까이에 침대가 붙은 조그만 선실이 있었다. 흔해 빠진 폭이 넓은 창 대신에 선체에 이어진 전통적인 둥근 현창이 멋을 더하고 있었다. 디젤 엔진은 항구를 출입할 때와 긴급할 때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돛대에 의존하는 것이 스티브 식이었다.

처음의 2, 3일은 아주 날씨가 좋고 파도도 잔잔했으므로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스티브는 낮에는 때때로 사라에게 삿대를 맡겨 주었지만, 밤에는 반드시 자기가 망을 보묘, 저녁때 몇 시간 동안 눈을 붙이는 것으로 수면을 대신하고 있었다.

사니벨 섬과 캐티버 섬에 정박하자, 사라는 은빛 모랫벌에 나가서 파도와 함께 밀려드는 많은 조개껍데기를 들고 오지 못할 정도로 주워 모으면서 걸었다.

그러나 예쁜 것만 두세 개 남기고는 다시 바다에 갖다 놓으라는 스티브의 말에, 사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투정을 부렸다.

당신이란 분은 낭만이란 조금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는 수집은 적당히 하지 않으면 재가 가득 차 버리고 만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이플즈는 무성한 열대식물 가운데 뚫린 질서 있고 정돈된 거리였다. 또한 해변가에 찰랑이는 물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스킨다이빙을 하는 것은 5년 만이었기 때문에 요령을 생각해 내느라고 좀 주춤거렸다.

즐거웠던 5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스티브와 함께 바다 밑으로 잠수하는 스릴을 맛보았다. 그와 같이 보냈던 그 짧은 여름과 가을의 일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스티브 덕분에 수많은 즐거운 경험을 맛볼 수가 있었는데. 그러나 스티브는 사라의 시야를 넓히는 것과 동시에 좁게도 했다. 그가 일을 쉬고 좀 더 오래 사라와 시간을 보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이플즈에서 사흘을 지낸 후 정오가 지나서 키 제도에 도착하자, 몇 시간을 한가롭게 주위를 떠돌고서 마라손에 정박했다. 사라는 바히어혼다의 넓디넓은 해안에 감탄하고, 세븐 마일 브리지의 길이에 놀랐다. 43개의 다리가 대서양에 면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는 것을 스티브가 가르쳐 주었다.

마라손은 좀 지나치게 질서 정연한 느낌의 거리였지만, 바하마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식료품을 보급하는 장소로서는 최적지였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해변가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조용한 돌핀 호로 돌아오니 사라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쐬면서 두 사람은 갑판에 서서 거리의 불빛을 바라다보았다. 스티브는 사라의 옆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사라는 기쁨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이 항해를 시작한 이래로 두 사람은 훨씬 친밀해졌기 때문이다. 스티브조차도 그 변화를 깨닫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일은 몇 시에 떠나죠?”

사라가 물었다.

준비가 되는 대로지.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날씨가 앞으로 이틀은 이대로 계속된다니까, 나빠지기 전에 낫소에 도착할 거야.”

이제 나도 꽤 익숙해졌으니까 불침번을 시켜 주세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풍향계만 설치해 놓으면, 때때로 와서 살펴보기만 하면 되지.”

그렇지만 잠잘 시간이 없잖아요. 제게 맡기고 조금만 잠을 자면 좋잖아요. 조작하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까-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릴게요.”

그는 수상하다는 얼굴로 사라를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내 수면에 신경을 쓰지? 낫소에서 약 일주일가량 정박할 때 실컷 자지, .”

신경을 쓰는 게 아니고, 다만 손님 취급을 받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전에는 전혀 믿을 수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규칙을 잘 지키고 있어요.”

그건 그렇군. 당신의 기억이 확실한 데는 깜짝 놀랄 지경이라니까.”

사라가 미소 지었다.

영국에서 딩기(작은 배, 경주용 소형 요트)를 좀 타본 일이 있거든요. 물론 이 배하고는 틀리지만, 연습은 됐어요.”

일기만 좋다면야.”

그가 덧붙였다.

그래도 지난번 쉐라톤 호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으면서.”

예전처럼 겁쟁이는 아니에요.”

사라가 서둘러 변명을 했다.

이젠 제대로 자제할 수도 있구요, 게다가 당신이 감시의 눈을 빛내고 있으니 내가 실수를 할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연기를 뿜어 대면서 스티브가 말했다.

배라는 건 아주 까다로운 물건이란 말이야. , 혼자 외톨이가 된 것 같아서 그러나?”

아니에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핀을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렇다면 질투하고 있는 것은 캐버노우뿐이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수 없지요.”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든 내가 호텔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해 주셨으면

안 돼.”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왜요, 어째서죠?”

당치않아서야. 인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지. 한 달이 지난 뒤에 하자고 했잖아?”

사라가 바다에 던져진 담배가 뱅글뱅글 돌면서 수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스티브는 선실 쪽으로 향했다.

이제 자겠소. 당신은?”

사라는 의기소침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따사로운 감정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 한 달 동안에 대체 얼마만큼 도움이 될 것인가. 항해가 끝나서 돌아가는 두 사람에겐 역시 똑같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리라.

점심 식사를 하고는 곧 출발해서 북동으로 향했다. 파도치는 모양이 멕시코만하고는 꽤 달라졌다. 바다에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조심하기로 하고 사라는 뱃멀미에 잘 듣는 정제를 두 알 먹었다. 바닷바람이 꽤 서늘해졌으므로 스웨터가 필요했다. 갑판에 나올 때는 반드시 구명 조끼를 입기로 했다. 둘 중의 어느 한쪽이 떨어졌을 경우, 남은 사람이 방향을 전환해서 되돌아오는 데 수분은 걸릴 것이므로, 구명조끼 없이는 너무 늦어지는 것이다.

파도의 높이와는 관계없이, 하늘은 하루 종일 파랗게 개어 있었다. 스티브는 휴식하고 싶을 때만 자동 조타 장치를 사용하고, 스스로 키를 잡는 것을 즐겼다.

만약에 캐버노우가 그의 제 1의 애인이라면, 돌핀 호는 제 2의 애인이라고 할 만하다. 사라는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갑판에 양발을 디디고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폭풍우가 휘몰아치지 않는 한, 사라도 어느 정도 바다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대자연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어젯밤에 말한 것처럼 훌륭히 컨트롤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의심스러웠다. 배짱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스티브는 도착 예정 시각을 다음다음날 열 한 시로 정했다. 일단 낫소에 정박하고, 거기에서 주위의 섬이며 산호초를 탐험하러 가기로 했다. 이 착상은 사라의 의견이었으나, 행선지며 일정은 스티브가 결정 지었으므로, 무인도에라도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라의 의견은 무시당했다. 낫소는 인기 있는 관광지니까 사라의 마음에 들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낫소에 친구라도 있는 것일까. 친구들하고의 교제에서 그를 떼어 놓고 싶었기 때문에 여행을 떠난 것인데.

사라는 몹시 흔들리는 주방에서 고생고생하며 저녁을 준비했다. 스티브는 그녀가 만든 닭고기의 와인 조림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으로,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도 재차 청해서 사라를 기쁘게 했다.

굉장한 요리 솜씬데.”

나머지에 손을 대면서 스티브가 칭찬했다.

아주 맛있어!”

약간 와인이 많이 들어갔지만 괜찮죠?”

웃으면서 사라가 고백했다.

배가 하도 흔들려서, 병을 든 손이 그만

콤파스를 보는 눈이 흐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사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물어 봤다.

어젯저녁에 부탁한 거 생각해 보셨어요?”

어젯저녁에 무슨 부탁을 했었지?”

기억하고 계시죠, 불침번을 하고 싶다고 말했던 거?” 그에게 거절당하기 전에 재빨리 계속했다. “부탁해요, 스티브.”

얼마 동안 사라를 지켜보더니 이윽고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별나게 열심히군. 하지만 내가 하겠다니까. 당신은 편하게 잠이나 자면 되잖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끝냈다.

알았어. 그토록 하고 싶다면 열 두 시부터 세 시까지 당신에게 맡기지.”

고마워요.”

캐버노우의 경영에 관해서도 이 정도로 간단히 꺾여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는 아직 거기까지는 사라를 신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 시 조금 지나 사라가 뜨거운 음료를 가지고 갑판으로 올라가니까, 맑게 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손을 뻗치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바다에 나오면 별의 수가 많아지는 것 같네요.”

승강구에 기대서서 사라가 말했다.

공기가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는 앞에 있는 콤파스에서 눈을 떼고, 광대한 밤하늘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최고의 삶이로군!”

그래요.”

사라는 조용히 말했다.

한가롭게 평생을 항해나 하며 보낼 수 없는 게 애석하군.”

그렇게 좋으면 계획을 세워서 때때로 항해하면 좋잖아요?”

스티브는 사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것이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나?”

사라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보았다.

, 어느 정도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돌핀 호는 원양 항해를 할 수 있는 배인데도 이렇게 원거리 여행에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인 거죠? 보통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겐 무리일지 몰라도, 당신에겐 2, 3개월씩 휴가를 얻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잖아요.”

당신도 이런 생활을 좋아한단 말이오?”

. 2, 3일 동안 아주 즐거웠어요.”

날씨가 좋으니까 그런 말을 하지만, 날씨가 나빠지면 당장에 마음이 변할걸.”

스티브는 한 손으로 키를 잡으면서 빈 컵을 사라에게 건네주었다.

오늘밤에 불침번을 하려면 한 시간쯤 잠을 자고 오지. 나는 점검을 끝낸 다음에 아래로 내려갈 테니까.”

주방으로 내려간 사라는 정성을 들여 씻은 컵을 닦으면서 우울해지기 시작하는 자신을 격려했다. 한 달쯤 이 생활을 계속한다면, 스티브는 사라의 심경을 이해해 줄는지도 모른다. 보통때는 캐버노우에 붙잡혀 있던 그의 관심이, 이번에는 돌핀 호로 옮겨져 버린 것일까. 그렇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이 정도로 계속만 된다면 사라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선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사라는 깊은 잠에 빠졌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스티브의 손을 어깨에 느끼고 눈을 떴다.

열 두 시 20분이 지났어.”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그는 벽을 붙들고 있었다.

물결은 꽤 높지만, 청우계엔 변함이 없어.”

비틀거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선 사라를 향해서 스티브는 물었다.

정말 해볼 작정이야?”

, 해볼 생각이에요. 이제 와서 약속을 취소하는 건 비겁해요.”

취소하지는 않아. 항로 밖에 있으니까, 반시간마다 수평선을 달리는 것만 잘 지켜보면 충분할 거야. 항해일지와 회중전등을 놓아둔 곳은 아까 설명했었지. 구명 로프를 쓸 것을 잊지 않도록.”

걱정 마세요.”

잠이 완전히 깬 것을 느끼자 일을 하고 싶었다.

당신은 누워 계세요. 세 시에 점검을 끝내면 깨우러 올게요.”

그럼 부탁해.”

사라가 로커에서 구명조끼를 꺼내고 있는 동안에 스티브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사라의 반대편 침대로 기어들었다. 사라가 안전벨트를 허리에 매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 불을 껐다.

밖에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사라의 머리카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우선 제일 먼저 안전 벨트의 버클을 마스트의 매듭에 끼웠다. 이것으로 조타실 안에서의 행동은 자유롭지만 조타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일지하고 회중전등은 스티브가 말한 장소에 놓여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사라에게 맡겨 준 모양이었지만, 사라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신용을 얻어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넘어지지 않도록 발을 조심하면서 검은 지평선이 잘 보이는 곳까지 가서 360도 전부를 천천히 주사(走査)했다. 아무 문제없음. 다음은 좌현, 우현, 그리고 선미의 항해등의 검사, 이것도 모두 호조다. 회중전등으로 눈금을 비춰 보고 나서 일지에 속도, 거리, 콤파스의 표시 도수를 기입하고, 시간은 영 시 30분이라고 써넣었다.

간단히 끝났다. 다음 점검 시간까지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 아래로 가서 자명종 시계를 조종해 놓고 30분가량 잘 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항로에 가까운 동안은 갑판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이 스티브의 주의였다. 혼자서 돛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와 물결 소리를 들으면서 서 있는 것은, 고통이기는커녕 시원하고 경쾌한 경험이었다.

악명 높은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구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라는 호기심이 끓어오를 뿐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주인에게 끌려갈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스티브의 농담 섞인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사라는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의심쩍은 실종에 대해서, 어느 날엔가 그 누군가가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별들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스티브는 안심하고 잠들만큼 사라를 신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드러누운 채로 사라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부부라고는 하지만, 사라는 이 남자를 대체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두 사람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스티브가 사라를 놓아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가 사라에게 욕망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사라는 5년 전에 그것을 짓밟아 버렸다. 그것을 또다시 되살리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항해가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동기가 되지 못할 경우에, 역시 이혼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캐버노우에서의 2주일 동안의 사뭇 똑같이 반복되던 생활은 사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스티브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사라가 이혼으로 발을 내디딜 만큼의 용기가 있을 것인가. 그는 결혼만 한다면 내용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욕망이 고갈된 뒤에는 놓아줄 의사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욕망이 없다면, 이야기가 얼마나 간단하게 될 것인가.

조타륜 옆에 기대서서 멍하니 물결을 바라보고 있던 사라는 갑자기 자세를 바로 했다. 저쪽에서 무엇인가가 번쩍 빛난 것 같았다. 아니면 과민 탓이었을까.

발돋움해서 다시 보려고 했지만, 구명 로프 때문에 오히려 끌려갔다. 만약에 다른 선박의 불빛이라 해도 거리가 멀어서 위험성은 없었지만, 확인하고 일지에 기입해서 스티브에게 자신의 기민함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무의식중에 안전 벨트에서 구멍 로프를 벗기고 발돋움하니, 불과 1, 2초 동안이었으나 또다시 빛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선체가 큰 물결에 부딪치자, 사라는 비틀거렸다. 다급하게 양팔을 휘저었지만, 경사가 너무 급해서 몸이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손이 강철 선에 닿자, 필사적으로 양손으로 매달렸다. 몸무게 때문에 강철선이 부드러운 손바닥에 파고드는 아픔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양발이 다시 바닥에 닿을 때까지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간신히 안간힘을 써서 조타실로 비틀거리고 들어오자마자, 사라는 털썩 계단 옆에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하마터면 바다고 빨려들 뻔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바보짓을 했단 말인가, 구명 로프의 중요성을 몇 번씩이나 스티브에게 들었는데도. 아래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잠들어 있는 모양이다. 스티브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 반면 만약에 사라가 바다에라도 떨어졌더라면 구원받을 길이 없었으리라.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하지 말자고 굳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또다시 구명 로프에 끼우고 있으려니까, 손가락에 난 상처가 아프기 시작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아픔을 느꼈다. 무엇이든 그럴싸한 핑계를 대지 않는 한, 스티브를 속여 넘길 수는 없다.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에 감았다. 이제 두 시간 사이에 명안을 생각해 내야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손이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다행히 출혈은 멎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아픔을 참기로 했다. 수평선 가까이를 항해하는 선박이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두 시 15분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 일도 없이 세 시가 되어서, 사라는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나서 아래로 스티브를 깨우러 갔다. 손의 상처를 보이지 않게 잘 움직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의 눈에 띌 테니 그럴싸한 거짓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백해진 사라를 향해서 야유하는 듯한 표정을 짓곤 스티브는 아무 말도 없이 위로 올라갔다.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아스피린을 먹은 뒤, 사라는 옷을 입은 채로 털썩 침대에 쓰러졌다. 일지를 정확히 기입한 위에 정돈도 해놓았으니, 나머지는 어떻게 하든 그의 자유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손가락 밑이 퉁퉁 부어 있었다. 모처럼 아물 것 같던 상처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다시 입을 벌릴 것 같았지만, 이럭저럭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스티브를 불렀다. 어떠한 설명을 해도 도저히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손을 감추고 있었는데, 그만 스티브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조금 긁혔을 뿐인 걸요.”

사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곧 화제를 바꾸었다.

도착 예정 시각에는 변동이 없겠죠?”

바람만 이런 식으로 계속 불면, 예정보다 두세 시간이나 빨리 도착할 것 같소.”

스티브는 사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식사가 끝나면 그 상처를 보여 줘. 몹시 아파 보이는군.”

거역하면 더욱 의심을 살 것이 틀림없다. 사라는 먼저 식사를 끝내고,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할 물을 길어 올렸다. 스티브가 상처에 대해 잊어버릴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식기를 주방에 갖다 놓고는 뒤의 선실을 가리켰다.

이리로 와서 그 손을 보여 줘.”

사라가 억지로 붕대를 풀자, 그는 손끝을 잡고 손을 벌리게 했다. 너무나 아픈 나머지 사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의 눈이 준엄하게 사라를 지켜보았다.

대체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지?”

아까 말했잖아요,

사실대로 말해. 이건 다만 조금 긁힌 상처가 아니야. 어떻게 된 거야?”

무표정하게 설명을 하는 사라를 쳐다보는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쩌면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지!”

사라의 손가락을 아플 정도로 꽉 잡은 채 고함을 쳤다.

만약에 바다에 떨어졌더라면 발견됐을 리가 없었지! 이것으로 잘 알았어. 당신은 아직도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말이오.”

스티브

사라가 애원했다.

단순한 실수였던 거예요.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게요.”

당신한텐 두 번 다시 무엇을 맡길 생각은 없어.”

로커에서 끄집어낸 구급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던지듯이 놓았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나?”

어젯밤엔 움직일 수 있었지만, 오늘 아침엔 아파서 안 돼요.”

아파도 괜찮으니까 움직여 봐!”

고통을 참고 하라는 대로 하자, 손목부터 손끝까지 전체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그것으로 만족한 스티브는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나서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낫소에 도착하면 의사에게 보이기로 하지. 오늘 밤 다시 한번 붕대를 갈아 줄게.”

구급상자를 치우고 있는 스티브를 향해서 사라가 머뭇머뭇 말했다.

확실히 전 바보였어요. 그렇지만 자꾸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무슨 소용이 있죠?”

그는 지그시 사라를 보고 나서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 잠잘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그만 깜빡 잠이 들어 버렸어. 정신이 들어 배를 돌리는 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몰라. 당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증명하기 위해서 제발 불침번을 시켜 달라기에 허락했더니, 당신은 옛날 그대로야. 여전히 무책임해. 결국 알맹인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지 않은가 말이야!”

사라는 아프지 않은 쪽 손을 꼭 잡았다.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그런 가혹한 말을 들어야 할 까닭은 없어요.”

한 번뿐이 아니야. 도로 아미타불이라고 요전에 당신이 말했잖아? 그대로야. 예전의 우리로 되돌아온 것뿐이야. 당신이 결말을 짓겠다고 할 때 찬성했으면 좋았을걸 그랬어.”

격렬한 고통이 분노로 변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되돌아가서 결말을 내요!”

스티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목적지까지 갈 거야.”

만약에 이대로 가겠다면, 지금까지의 조건대로라면 싫어요. 두 번 다시 내 옆에 얼씬도 마세요.”

스티브는 천천히 비꼬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아, 좋아, 허니. 그 손을 물에 적시지 않도록.”

갑판으로 올라가는 그를 눈으로 전송하고 나서, 사라는 가까운 의자에 떨리는 몸을 기댔다. 단 한가지, 간단한 규칙을 깨뜨렸기 때문에 이런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사라는 잘 헤아리고 있었다. 스티브의 말대로, 사라는 변한 것이 없다. 두 사람 모두 예전 그대로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할 가능성은 없을 것같이 생각됐다.

 

7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라는 낫소에 대단히 마음이 끌렸다. 경쾌하게 달리는 마차며 천막으로 덮인 옥외 레스토랑과, 최신의 미제 승용차나 근대적인 건물은 대조적이었다. 두 사람은 차를 빌어 연안을 드라이브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해안을 감상했다. 야자수와 열대식물로 둘러싸인 대부호의 저택을 몇 채씩이나 지나치고 난 뒤에, 스티브는 일부러 사라를 허술한 거리의 뒷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바하마 제도의 수도인 낫소의 화려한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황무지는 확실히 쓸쓸한 경개였다.

내륙은 개발해 봐도 돈벌이가 안 되니까, 이 뉴브로비덴스 섬의 인구는 해안지역에 집중돼 있지. 여기 있는 동안에 카지노에 가보기로 하지, 가장 활기에 찬 곳이니까.”

사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스티브가 세우는 일정에는 무언으로 따라가는 것이 제일 간단했다. 이틀 전 낫소에 도착한 앨, 두 사람은 휴전 상태에 있었다. 얼마나 계속될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사라는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티브는 사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뱃머리에 가까운 선실로 옮겨서 밤을 보내게 됐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잠 못 이루고 고생한 것은 오히려 사라 쪽이었다.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팔의 감촉을 안타깝게 생각해 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봐도 맞은편 침대에 누워 있는 스티브의 모습을 발견하던 기쁨은 이제는 맛볼 수 없었다. 한마디만 하면 그를 다시 찾을 수도 있었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서 일시적으로 욕구를 만족시켜 보았자, 어차피 길게 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네 시가 넘어 배로 돌아왔다. 스티브가 식사는 나중에 하자고 했으므로, 사라는 홍차를 따라서 갑판으로 가지고 올라가서 그의 옆에 앉았다. 남들 눈에는, 다망한 크리스마스시기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롭게 겨울 휴가를 즐기고 있는 평범하고 행복한 부부처럼 비쳤을지도 알 수 없다. 가까이 정박하고 있는 선박 중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커플이 또 있을까?

내일은 하루 종일 배를 띄우기로 하지.”

스티브는 의자에 기대앉아 머리 뒤로 양팔을 깍지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신이 좀 더 여기 있고 싶다면 다르지만.”

사라는 어깨를 추슬렀다.

전 아무래도 좋아요.”

나도 그래. 전에도 왔던 일이 있으니까.”

그는 별안간 일어났다.

산책하고 오겠어.”

선창에서 사라져 가는 스티브의 모습을 사라는 우울한 기분으로 전송했다. 그는 사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도 석 주일이나 남아 있는데. 차라리 내 쪽에서 결말을 지어 버릴까? 아직 여행자 수표도 남아 있고, 비행기 티켓은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다. 한 시간이면 마이애미에 도착할 수 있고, 거기서 런던으로 직행하면 그날 안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셈이지만, 적어도 이 비참한 혼란 상태에서 탈출할 수는 있다. 어차피 스티브는 사라가 무슨 일을 하든 관심이 없으니까.

막연한 계획이 사라의 마음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내일의 뱃놀이를 거절하면, 스티브는 필경 또 거리 쪽으로 가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 사이에 택시를 부둣가까지 오게 하면 된다. 도망치고 싶지는 않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고, 앞으로 석 주일 동안이나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은 지긋지긋하다. 어차피 세인트피터즈버그에 도착하는 대로 헤어지게 될 것은 분명하니까.

스티브는 여섯 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하얀 디너 재킷에 약식 정장풍의 검은 슬랙스로 갈아입고 나와서 사라를 놀라게 했다. 그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사라는 알지 못했다. 특별한 회합이 없는 한, 세인트피터즈버그의 사교계는 퍽 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늘밤은 특별한 곳으로 갈 거야.”

그 이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검은 드레스를 입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으니까.”

사라는 긴 드레스를 두 벌 가지고 왔다. 하나는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심플한 검은 옷이고, 또 하나는 아주 귀여운 푸른색 코튼으로 된 것이었다. 사라는 일부러 푸른 옷을 골라 입고 엷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뒤로 묶고 핀을 꽂았다.

귀엽군 그래.”

스티브가 냉랭한 눈초리로 말했다.

검은 옷으로 갈아입어, 10분 있다가 출발할 테니까.”

사라는 옴짝달싹도 않고 말했다.

이걸로 안 된다면, 난 안 갈 거예요. 당신의 액세서리처럼 취급하지 마세요!”

오늘밤은 싫든좋든 어른 행세를 해야 되겠어! 필요하다면 내가 도와서라도 갈아입히겠어!”

그는 진지했다.

이 기회에 그 푸른 옷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을 열여섯 살의 조그만 아가씨로밖에 안 볼 테니까!”

나를 열여섯 살의 어린애로밖에 취급해 주지 않으면서. 아주 잘 어울리지 않아요?”

사라가 되받았다.

이대로는 나를 사람들 앞에 내보일 수 없다면 혼자 다녀오세요.”

스티브는 사라를 흘겨보고 나서 씁쓸한 듯이 말했다.

여자를 상대로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내는 어떻게 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심정을 알 것 같군!”

그는 한 손으로 사라의 팔을 잡아 선실로 밀어 넣고, 또 한쪽 손으로는 옷장을 열어 문제의 검은 드레스를 끄집어내서 침대 위에 내팽개쳤다.

알았어요.”

당장에라도 푸른 드레스를 벗길 것 같은 그 얼굴을 보고, 사라는 마침내 단념했다.

알았다니까요, 스티브!”

그는 손을 놓아주었지만 눈초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리고 화장도 좀 더 제대로 고쳐.”

또다시 혼자가 된 사라는 핀을 빼고 얼굴 둘레에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렸다. 그에 대한 저항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자신의 어린애 같은 성질을 여실히 폭로하는 결과만 되어 버린 것이다. 좀 더 어른스럽게 되라고 자기 자시에게 타이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10분이라고 스티브는 말했지만, 7분으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서 나타난 사라를 스티브는 흘기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씬하고 탄력 있는 사라의 자태와, 볕에 그을린 양어깨에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고도 그의 표정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한결 나아졌군.”

그가 중얼거렸다.

, 가지.”

두 사람은 출발했다. 사라는 카지노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착한 곳은 아름다운 개인 저택이었다. 우아한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회원카드를 보여 주도록 정중하게 요청받았기 때문에, 사라는 그때서야 비로소 이곳이 카지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나, 참을 수 없을 만큼 혼잡하지는 않았다. 게임 테이블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의 옷차림을 본 사라는,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던 자신의 옷차림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런던에서 거의 한 달치에 가까운 월급을 털어서 산 검은 드레스조차도, 주위의 호화스러운 의상에는 당해 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스티브의 비꼬는 눈초리가 자신의 심중을 읽고 있으리라는 것을 눈치 채고 사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처음부터 어디로 간다고 말해 주지도 않고.

두 사람은 우선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그리고 도박장 안을 좀 더 한가로이 관찰하기로 했다. 룰렛에서 한 번 이긴 스티브는 다음에는 내리 두 번이나 졌다. 사라는 게임에는 참가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세 종류 중 슈만드펠이 제일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사라가 앞 사람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니까, 게임을 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상대방의 7에 대해서 그 여자가 뽑아낸 카드가 8이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환성이 울린 순간이었다.

옆에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던 스티브가 빈자리로 미끄러져 드는 것을 보고 사라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불렀다.

방코.”

검은머리의 여자는 흠칫 놀라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사라가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까, 그 여자는 새빨갛게 매니큐어를 한 손끝으로, 한 장 뽑아낸 카드를 엎어놓은 채 스티브에게 돌리고 자기 앞에도 한 장 놓았다. 또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자, 스티브는 두 장의 카드를 집어 들고 무표정하게 쳐다보더니 아래로 내려놓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선이 보여 준 두 장은 스페이드의 10과 다이아의 6이었기 때문에 주위가 술렁거렸다. 스티브가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의 카드를 뒤집어서 하트의 킹하고 스페이드의 5를 내놓았다. 선의 6점에 대해서 5점이라는 뜻이다.

오늘밤은 영 재수가 없군.”

그가 말했다.

까짓 것 배짱으로 한 장 더 달랄 걸 그랬나?”

그 여자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라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정신없이 밀어붙이고 사람들의 눈도 아랑곳없이 출구를 향해서 마구 달렸다. 정면 현관에서 택시를 불러 달래서 곧 부두에 도착했다.

운전사를 기다리게 해놓고 돌핀 호에 뛰어들었다. 마이애미행의 항공편이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어떻게 해서라도 오늘 밤 안으로 출발하고 싶었다. 스티브는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여자하고 함께 남으면 되는 거야!

지퍼가 잘 내려가지 않아서 사라는 찢어 버리듯이 해서 간신히 드레스를 벗어 선실 한구석으로 팽개쳐 버렸다. 마직 슬랙스와 셔츠를 몸에 걸치고, 슈트케이스에 주위의 물건들을 마구 쑤셔 넣었다. 캐버노우에 남겨 놓고 온 옷들은 내팽개쳐 두면 된다. 여기서, 이 돌핀 호에서, 그리고 스티브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선결 문제다.

슈트케이스를 손에 들고 층계를 올라가는데, 누군가가 선착장에서 갑판으로 내린 무게로 배가 기우뚱하는 것을 느끼고 사라는 숨을 들이마셨다. 출구가 막혀 버려서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꼿꼿이 굳히고 서 있는 사라를 지켜보는 스티브의 눈이 노여움에 불타고 있었다.

대단히 무릴 하시고 빨리 돌아오셨군요!”

스티브가 무슨 말을 할 사이도 없이 사라는 화가 치밀어서 내뱉듯이 말했다.

막 즐거운 게임이 시작된 순간이었을 텐데요?”

택시는 돌려보냈어. 당신은 아무데도 못 가.”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죠!”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가 보시지. 여전히 제멋대로 생각하는 조급한 성격이군. 엘자가 카지노에 있을 줄은 나도 전혀 생각지 못했어.”

그래도 낫소에 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아니, 그것도 몰랐어. 브라질 사람과 함께 리오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니까. 당신이 그렇게 서둘러 나갔기 때문에 그녀는 상대를 놓쳐 버렸어. 나 따윈 비교할 수도 없는 큰부자라던데.”

그렇담, 그건 아주 쇼크였겠네요.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해선 도박으로 벌 수밖에 도리가 없군요!”

사라는 슈트케이스를 꼭 잡았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죠, 스티브. 바하마로 가자고 우긴 건 당신이에요, 난 키 제도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는데도.”

무엇이나 곧 싫증을 내는 주제에, 만족이라니.”

그가 말했다.

나를 믿을 수 없으면 마음대로 하시지. 하지만 아무데도 못 가!”

사라의 손에서 슈트케이스를 나꿔채자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저녁을 아직 안 했지? 베이 거리까지 나가면 아직 열려 있는 레스토랑이 있을 거야.”

배는 안 고파요. 그리고 당신하고 식사를 할 정도라면 굶어죽는 게 훨씬 좋아요!”

엘자의 침착하고 우아한 태도, 가늘고 기다란 손끝, 그리고 테이블 너머로 스티브와 주고받던 눈길이 사라의 눈에 아롱거렸다.

카지노로 돌아가서 그녀를 쫓아가시지 그래요? 아무데라도 좋으니까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시고 나를 내버려두세요!”

스티브의 눈이 노여움으로 불타올랐다.

농담이 아니야.”

검은 나비넥타이를 풀면서 그가 말했다.

자기 아내가 버젓이 있는데 다른 남자의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닐 필요는 없겠지?”

 

다음날이 되자 스티브는, 산호초 옆에서 스킨다이빙을 하기 위해서 돌핀 호를 바다로 밀어냈다. 사라는 다이빙 같은 것을 즐길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지만, 그가 같이 가자고도 하지 않았다.

사라는 혼자서 조그마한 섬에 도착하자 하얀 모래톱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았다. 오늘 아침에는 둘 다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어젯밤 스티브에게 그런 식으로 취급받았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

사라가 별로 저항을 계속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떳떳하지 못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무리 스티브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고 해도 결국 최후에는 그의 애무에 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와 같이 있는 한 어떻게 해도 억제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스티브는 엘자가 애인과 같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을 알고는 재회를 시도했던 모양이다. 그녀 편이 스티브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흠칫 놀라던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와 가벼운 대답이 사라의 귀에도 들려왔었다.

나도 5의 경우엔 언제나 또 한 장 뽑긴 하지만 위험성은 충분히 있죠.”

그야말로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였다.

사라가 스티브를 떠난 뒤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계속되었는지 사라는 알고 싶었다. 엘자가 리오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어젯밤에 스티브가 말했으나, 그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일년 가량 동거생활이 계속된 뒤의 일이었을까.

사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생각하고 속을 태워 보았자 별 수 없는 일이다. 사라에게 있어서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한 것이다.

두 사람이 세 시쯤 선착장에 돌아오자 전갈이 와 있었다. 스티브는 무표정하게 읽고 나서 종이 쪽지를 반바지의 포켓 속에 쑤셔 넣었다.

오늘 밤 저녁 식사에 초대됐어. 친구의 친구야. 그 검은 옷은 찢어져 버렸으니까, 무엇이든 입을 옷이 필요하겠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쇼핑이나 가지.”

당신 혼자서 가시지 않겠어요?”

그의 대답은 알고 있었지만 하여튼 물어 보았다.

안 돼. 우리가 와 있다는 걸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일부러 초대해 주었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갈 필요가 있어.”

누구의 친구인가 하는 것쯤은 내게도 알려 줄 수 있겠지요?”

스코트 토렌트요. 가끔 쉐라톤 호로 여기에 잘 오지. , 빨리 쇼핑을 끝내야지.”

그런 일쯤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사라가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을 부끄럽게 하는 일은 안 할 테니까요.”

한순간 부드러워졌던 것처럼 보였던 그의 표정이 다시 본래의 준엄함을 되찾았다.

그러길 바라겠어.”

사라는 베이 거리에서 적당한 가게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퀘어 네크 라인에 소매가 없는, 짙은 곤색의 호화스러운 드레스를 골랐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금액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지불하고, 점원의 권유에 따라 몇 집 앞의 구두 가게에 들렀다. 은빛 키드 가죽으로 된 뒷굽이 가느다란 샌들을 고르고, 다음에는 보석상으로 갔다.

오늘 밤 만나기로 되어 있는 다른 여자들에게 지지 않는 옷차림을 하게 하는 것이 스티브의 의도라면, 고가의 물건을 사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은목걸이와 세트로 된 팔찌를 샀다. 3천 불이나 되었다. 돌핀 호로 보내 주면 주인이 지불할 테니까, 라고 말하고 부두의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예약을 하지 않은 손님을 받아 주는 미장원을 찾느라고 약간 시간이 걸렸으므로 저녁때 약속인 것이 다행이었다. 미장원을 나올 무렵에는 따뜻한 열대의 밤이 다가와, 청록색의 하늘이 어렴풋이 황혼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택시로 돌핀 호에 돌아오자, 스티브는 선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게 빗어 올린 금발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 위에 놓여 있는 포장지로 싼 꾸러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당신 거지? 좋은 취미군.”

사라는 맥이 빠져서 꾸러미를 들어올렸다.

내일 아침에 돌려주면 돼요.”

갑자기 사라 뒤로 돌아간 스티브가 너무나 세찬 기세로 사라를 붙들고 반회전시켰기 때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꾸러미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안색이 창백했다.

돌려줄 수 있으면 돌려줘 봐!”

내 팔에 멍이 들면 당신 친구들이 뭐라고 할까요?”

사라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당신의 프라이드를 위해서 산 것뿐이에요. 그러니 오늘 밤이 지나면 그 뒤엔 좋도록 하세요, 당신의 돈이니까.”

그의 눈은 노여움으로 이글거렸지만, 그는 억지로 그것을 억눌렀다.

당신을 아프게 할 마음은 없어.”

목소리를 바꾸어 계속했다.

어째서 그렇게 거역을 하지? 제발 부탁이니, 좀 더 도리를 헤아린 사람답게 행동해 줄 순 없어?”

난 노력하고 있어요. 진정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스티브. 하지만 당신이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는 한 이렇게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어요.”

입술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이라면 또 당신을 증오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요. 이젠 마지막까지 와 있는 거예요.”

스티브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어젯밤은 어땠는데밤새도록 나를 미워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테지.”

그의 말이 사라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라는 어깨를 으쓱 치켜 올리고는 모른 체하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외출할 준비를 하고 올께요.”

두 사람이 초대받은 집은, 호텔이나 관광지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의 커다란 저택이었다. 댄스를 할 수 있는 널따란 테라스가 있고, 뒤쪽에는 풀이 보였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손님이 와 있는 것은 의외였지만, 사라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50명 정도의 손님 가운데 섞여 버리면 눈에 뜨이지 않아서 좋다.

저택의 주인 부부를 비롯해서 거의 모두가 중년 이상의 연배였다. 남자들 중에서는 스티브가 제일 젊은 편이었기 때문에 온통 보석으로 장식한 백발의 귀부인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사라도 두세 번 춤을 추었다. 자기의 할아버지만큼이나 나이가 든 노신사가 끈질기게 추근거리고 따라붙는 것을 보면, 낫소의 사교계에 처음 얼굴을 내미는 신참자는 처음에는 모두 이처럼 취급받는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도망갈 것을 찾고 있는 사라의 눈에 유리로 된 도어의 바로 안쪽에 서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중키의 라틴계이 듯싶은 얼굴 모습으로, 검게 물결치는 머리의 관자놀이께에 약간의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사라는 수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그 사나이에게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묘하게 날카로운 눈길이 따갑도록 온몸을 찌르는 것 같다. 다가온 그 남자는 흰 디너 재킷 아래에 진홍의 커머번드(턱시도를 입을 때 조끼 대신 두름)를 감고 있었으며, 탄탄하게 꽉 짜인 체격이었다.

추실까요?”

사라의 옆으로 오자 다른 말은 모두 빼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권했다.

실례합니다.”

하고 사라의 동반자에게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면서, 주저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의 팔을 잡아 테라스로 끌어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사나이의 얼굴은 각이 져 보였지만, 매우 매력적이었다. 남성적인 입가, 밝게 반짝이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허리에 돌려진 그의 손의 감촉이 사라를 동요시켰다.

엔리코 페로치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낫소에서 만난 기억이 없는데.”

우린 휴가로 와 있기 때문에.”

사라가 대답했다.

사라 마스터스입니다.”

그렇군요!”

그는 갑자기 호기심이 솟아오르는 듯이 말했다.

주인께서도 같이?”

가까이에 있을 텐데요.”

사라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당신 성함을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우리 주인의 친구 분이신지요?”

아니, 한 번 봤을 뿐이죠.”

그럼, 어떻게

어떻게 그의 부인이 당신 같은 미인이란 것을 알고 있는가, 라고 물으시는 거죠?”

매력적인 입술이 미소로 벌어졌다.

나는 그런 일에 정통하답니다. 당신은 영국분이시군요.”

,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이탈리아분이신가요?”

알아맞히기가 힘드실까?”

성함은 이탈리아분 같지만

자신없는 사라의 말을 듣고 그가 웃었다.

날카로운 관찰력이오. 어머니가 레바논과 프랑스의 혼혈이고, 아버지는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나는 잡종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언제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이탈리아의 피거든.”

사라의 의사는 전연 무시하고 그는 더한층 가까이 사라를 끌어당겼다.

당신은 멋지고 아름답소. 그런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그럼 뭔가 새로운 찬사는 없을까?”

사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무엇이든 생각해 주시겠죠, 시뇨레.”

엔리코라고 불러 주시오. 나는 당신을 시뇨라 마스터스라고 부를 생각은 없소. 그런데 식사는?”

아직이에요.”

그의 매력에 글려서 저도 모르게 눈을 빛냈다.

, 배고파 보여요?”

아주 맛있게 보이오. 애석하지만 여기서 당신을 잡아먹을 순 없으니까, 오늘 밤은 단념할 수밖에 없군.”

함께 테라스를 나와 실내로 들어오면서 사라는 위험이 몸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가볍게 바람이나 피울 상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몇 살쯤 됐을까? 40? 45? 아니 좀 더 위인지도 모른다. 그의 주위에는 어디랄 것 없이 위험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다. 지배권을 잡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혼잡한 방안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는 사라의 손을 잡아 자기의 팔에 올려놓게 하자, 사라는 그의 노련한 동작에 어쩔 줄 몰랐다. 스티브가 식사를 하기 위해서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여자의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검은 머리를 본 순간, 사라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파티에 온 이유를 처음으로 알았다.

몸을 꼿꼿이 굳힌 사라의 눈의 방향을 더듬은 엔리코가 스티브드의 뒷모습을 눈치챘다.

주인양반도 다른 분들과 함께 식사하시기로 한 모양이오. 우리도 괜찮겠죠?”

, 괜찮아요.”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예전부터의 친군데요.”

그래요?”

사라의 마음속을 꿰뚫어본 것 같은 말투였다.

주인양반은 언제나 당신에게 과거의 정사를 털어놓소?”

본심을 눈치 채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라는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우정에 의한 관계도 있죠.”

동성 간에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남녀 사이에선 무리지요. 어느 편인가가 반드시 유혹에 지거든.”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늘어놓은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웃저고리를 입은 웨이터들이 여러 가지 요리를 접시에 담느라고 바빴다. 엔리코는 사라의 팔꿈치에 손을 댄 채로, 일부러 스티브와 엘자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공평한 교환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들은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사라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엘자의 동행-큰 부자라는 소문의 사나이-이 이 엔리코 페로치인 것이다! 사라는 스티브와 엘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억지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마, 우연이군요!”

엘자는 아주 침착했다. 사라는 그녀가 언제나 무표정했던 것을 생각해 냈다.

우연이 아닌 것 같군요.”

엘자가 맞받았다.

엔리코는 아주 눈이 빠르거든요. 그런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사라?”

조금 나이를 먹었죠.”

그건 서로 마찬가지죠. 세인트피터즈버그에서 두 분이서 항해해 오셨다면서요. 굉장히 힘드셨겠네요?”

어마, 전 그저 함께 타고 온 것뿐인 걸요.”

일부로 스티브 쪽은 보지 않도록 하며 엔리코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저는 도저히 자격을 갖춘 선원은 못 될 것 같아요. 모처럼 한번 도와줄까 했더니, 바다로 굴러 떨어질 뻔했거든요. , 보세요.”

가느다란 반창고를 붙인 손바닥을 펴보였다.

노력한 결과가 이 꼴이에요.”

엔리코는 사라의 손을 들어 올리자 남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입술을 댔다.

이런 아름다운 손으로 사내들의 일을 하다니, 언어도단이군. 상처가 남지 않으면 좋으련만.”

나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요, 라고 사라는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주 작은 상처인 데다 이젠 거의 나았어요. 게다가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안 할 작정이니까요.”

그 얘길 들으니 안심이군.”

스티브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라하고 엘자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놓으면 우리가 음식을 나르기로 하지.”

좋은 생각이군요.”

엘자가 찬성했다.

그럼 갑시다, 사라.”

사라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일 각오를 했다.

엔리코가 사라의 손을 놓고 말했다.

올페가 가지고 있는 아주 고급 샴페인을 터뜨리게 해야지.”

파티의 주최자에게서 받은 특권을 이용해서 그는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바로 옆에 긴의자와 테이블, 두 개의 의자가 있었기 때문에, 엘자는 걸어가서 거기에 자리 잡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황금빛 드레스는 몸에 찰싹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곱게 볕에 그을린 어깨, 미끈한 목덜미에 이어지는 아름다운 얼굴, 짧게 커트한 검은 머리, 적어도 30은 되었을 텐데도, 그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두 사람이 오려면 한 5분은 걸릴 거예요.”

엘자가 밝은 초록빛 눈동자를 사라에게로 돌렸다.

스티브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시 만난 지 아직 석 주일이 될까말까 한다면서요?”

사라는 몸이 굳어졌다.

그밖에 어떤 얘길 들었죠?”

무엇에 대해서?”

아무 얘기나.”

엘자는 어깨를 추슬렀다.

스티브에게서 듣지 않아도, 이번에도 또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첫눈에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은 옛날부터 제멋대로 해석하는 게 장기였죠.”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네요. 아까 우리를 보고 질투의 화신처럼 됐죠? 스티브가 다른 여자하고 말만 해도 최악의 상상을 한다니까.”

내게 의심받을 만한 짓을 그는 무엇 하나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엘자가 우울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5년 전에는 분명히 당신이 안달할 만한 원인이 있었죠. 게다가 내가 일부러 신경이 쓰이게끔 만든 것도 사실이에요.”

사라는 눈을 감고, 고통이 몸을 뚫고 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 마침내 사실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요.”

엘자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비극의 여왕을 연출하는 건 그만둬요. 5년이나 전의 얘기예요. 과거의 일로 묻어 버리면 되잖아. 당신만 그럴 의사가 있다면 말이죠. 난 스티브와 여기서 서로 만나기로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젯밤엔 생각도 안 했는데 만나게 돼서 깜짝 놀랐던 거예요.”

의자의 손잡이를 붙들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사라가 말했다.

그렇지만 스티브를 이 파티에 오도록 한 건 당신이죠? 그를 만나고 싶어서죠!”

만약에 우리들이 전과 같은 관계를 원하고 있다면 이런 파티를 택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그냥 스티브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냥 만나서 얘길 하고-옛날 얘기의 꽃을 피우고 싶었을 뿐인 걸요.”

그리고 나중에 또 어디론가 가서 만날 약속을 할 생각이었죠!”

천만에!”

빨간 입술이 벌어졌다.

내가 리코를 만나기 전에 무엇을 했든 간에 그것은 내 자유이며, 또한 리코하고 헤어진 뒤에도 무슨 짓을 하든 그것 역시 나의 자유이지만, 그하고 있는 한 절대로 바람 피우는 건 용서받지 못해요. 그러니까, 당신의 소중한 서방님은 지금의 상태론 안전해요. 그런데 리코를 이용해서 스티브를 질투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그건 그만두는 게 좋을걸요. 비트하고는 달라서 리코는 구두 약속만으로 만족하고 물러설 남자가 아니니까.”

사라는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언제나 경쟁 상대에게 그렇게 경고해요?”

아니오. 분멸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만 충고하죠. 그의 이탈리아식 매력은 압도적이지만, 정신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 같은 몸짓을 보이기만 하면 단숨에 빠져 버릴 우려가 있어요. 그렇게 되는 것을 몇 번이나 봐 왔거든요.”

그런데도 아직 같이 있군요.”

, 내가 만족하고 있는 동안은 함께 있을 생각이에요. 불만스러워지기 시작하면 떠나죠.”

스티브에게서 떠날 때처럼 말이죠.”

엘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스티브와 헤어졌을 때의 얘기가 듣고 싶어요?”

, 듣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네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 계속됐는가 하는 것뿐이에요.”

기묘한 표정이 엘자의 얼굴을 스쳤다.

스티브에게서 들었을 텐데?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본래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갔다.

리코들이 돌아왔어요. 복잡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표정을 하면 안 돼요.”

엔리코는 사라와 엘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요리접시를 내밀었다. 사라는 될 수 있는대로 경쾌하게 모두의 얘기에 끼어들려고 애썼다. 다행스럽게도 웨이터가 샴페인과 글래스 네 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모두의 주의가 그쪽으로 향했다 코르크를 빼고 맑은 액체가 글래스에 부어질 무렵, 사라는 겨우 침착을 되찾았다.

영국의 아름다운 장미에게 건배!”

엔리코가 글래스를 높이 들었다.

내일은 내게로 오시오, 두 달 동안 집을 빌었으니까. 수상 스키는 좋아해요?”

별로 잘 하지 못해요.”

사라가 대답했다.

아주 오래 전에 해보았을 뿐이에요.”

당장에 되살아나도록 내가 코치하지.”

엔리코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스티브는 표정 없이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지 어떨지는, 전적으로 사라에게 맡길 생각인 모양이다. 엘자가 한 말을 생각하면, 사라는 또다시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스티브가 엘자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주 고소한 생각이 들었다.

사라는 우아하게 미소를 머금고 엔리코를 향해 명랑하게 말했다.

기대하겠어요.”

 

8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파티를 뒤로 하고 나왔지만, 스티브는 차를 운전하면서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 돌핀 호의 선착장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포켓에 손을 찌른 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부부라기보다는 차라리 타인 같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선실에 들어서자 그는 재킷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먼저 자지.”

글래스에 마실 것을 따르면서 어깨 너머로 말했다.

난 아직 졸리지 않으니까.”

찬바람이 이는 것 같은 스티브의 넓은 등을 보고 있노라니 사라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던 복잡한 정감의 물결이 단숨에 끓어올랐다. 달려가서 그의 양팔에 와락 안기고 싶다는 충동과 저 밉살스런 인간을 실컷 괴롭혀 주고 싶다는 생각이 서로 엉클어졌지만, 결국 후자가 더 강했다.

여기에 앉아서 엘자 생각을 한다, 이 말씀이신가요?”

야유조로 내뱉었다.

하지만 생각만 간절할 뿐, 손을 내밀 수 없으니 안됐군요. 그녀는 누구를 따라가는 편이 자기에게 이로운가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 말이 옳을지 모르지.”

스티브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글래스 속의 음료를 절반쯤 단숨에 마시고 나더니, 뒤돌아서서 사라에게로 냉정한 시선을 던졌다.

말하는 김에 해두지만, 당신도 이젠 슬슬 무엇이 제일 이로울지 생각해 놓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건 어떤 뜻이죠?”

페로치에게 상관 않는 편이 당신의 몸을 위해서 좋을 거라는 뜻이지.”

사라의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와 엘자의 어느 쪽이 더 걱정이죠?”

그는 냉랭한 웃음을 떠올렸다.

엘자는 어느 쪽으로 넘어져도 손해는 없어.”

그렇다면 제 일을 걱정해 주시는군요. 인사를 드려야 하겠네요.”

그녀석하고 상관하지 말라고 내가 명령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 이젠 당신에겐 아무말도 하지 않기로 했어. 앞으론 자기가 자신의 일을 결정하지. 단지 한마디 해두겠는데, 진퇴양난의 지경에 떨어져도 나는 구해 줄 수 없어.”

그의 말과 표정 어딘가에 혹시 부드러움이 엿보이지 않을까 해서 사라는 오랫동안 그의 준엄한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간신히 입을 연 사라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떨리고 있었다.

나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군요.”

그래.”

그가 인정했다.

이미 단념해 버렸어.”

남은 음료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금주말에 여기를 떠나 세인트피터즈버그로 돌아가기로 하지, 5년의 별거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했던 내게 책임이 있으니까 당신이 이혼 수속을 하기 쉽도록 도와주지.”

사라는 얼음 위에 발을 딛고 선 듯이 온몸이 시려 왔다. 당장에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스티브가 지친 듯이 말했다.

, 그만 자지, 사라. 이젠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어.”

사라는 그를 남겨 놓고 방을 나왔다. 마침내 종말이 왔다는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을 깊숙이 느끼면서 도어를 닫았다.

 

엔리코의 주택은, 데라포드 포인트를 지나 8킬로쯤 이어지는 바닷가의 고급 주택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호화스런 저택 내부는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사진처럼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새하얀 웃저고리를 입은 5명의 낫소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처리되고 있었다. 이 근방 주택의 필수 조건인 테라스와 잔디가 있는데다, 해안과의 사이에는 손질이 잘 돼 있는 정원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사라의 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조형적이고 지나치게 정연해 보였다. 이 주변의 자산가들은 개성을 나타내는 대신에 이웃과의 경쟁의식에만 온통 사로잡혀 있을 뿐인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엔리코가 이 호화스러운 환경을 특별히 중요시하고 있는 기색은 없었다. 그가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재산이 가져다주는 권력 그 자체인 듯싶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밝은 테라스에서 점심을 드는 동안, 사라는 살짝살짝 그를 훔쳐보면서, 그는 어떤 방법으로 생계를 세우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봤다. 보통 수법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저 매력 속에 스며 있는 냉혹함을 보면 그는 별로 양심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어느 편이든간에 사라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에 관한 일 따위는 너무 자세히 알지 않는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엘자는 손님을 접대하는 솜씨가 대단히 능숙했다. 그녀가 지휘를 하고 있는 한 만사가 아무일 없이 매끄럽게 진행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엔리코를 대하는 태도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감정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굳이 애정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고 해도, 엔리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따사로운 정다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엘자라 할지라도 어떤 만족을 위해 싫은 남자의 애인이 될 리는 없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점심 식사 후, 풀 가장자리의 의자에서 휴식하고 있는 동안, 사라는 엘자와 담소하고 있는 스티브를 보고 무심결에 솟구치는 질투심을 삭이느라고 애를 썼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질투해 본대도 별수 없는 것을…………. 스티브가 더 이상 사라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어젯밤에 분명해졌다. 이미 때는 지나간 것이다. 사라가 제멋대로 굴지만 않았던들 이런 절망적인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세인트피터즈버그에 남아서 좀 더 노력했으면 좋았을 것을. 스티브는 두 사람을 위해서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를 잠시 뒤로 물려주었는데, 사라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엔리코는 자기의 애인이 옛날 애인하고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어도 그다지 신경을 쓰는 기색은 없었다. 엘자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리 두 사람이 옛이야기에 열중한대도 이야기만으로 끝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니까.

바다로 나가서 내 손에 몸을 맡길 마음이 있소, 사라?”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배 준비는 돼 있으니까, 나머지는 옷을 갈아입는 일 뿐이야.”

우리들만?”

조금 당황해서 우물거리면서 물었다.

엘자는 수상 스키를 안 하나요?”

엘자는 목욕할 때 외에는 물이라면 질색이거든. 여기에 남아서 댁의 주인양반의 상대를 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런데, 당신 수영복은?”

만약에 잊고 왔다고 말한다면 그는 당장에 사라에게 알맞은 사이즈의 수영복을 갖고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거절하는 것도 도리어 어색한 일이니 따라갈 수밖에 별 수 없을 것 같다. 덤으로 끼어든 것 같은 기분으로 여기에 오도마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한결 나을지도 모른다.

사라가 풀 뒤에 있는 탈의실에서 하얀 비키니로 갈아입고 나오니까, 엔리코가 정원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소로(小路)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남자다운 넓은 가슴, 잘 단련된 근육이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엔리코의 뜨거운 눈길을 온몸에 따갑도록 느낀 사라는, 두 사람 쪽을 바라보고 있는 스티브가 강제로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햇다. 그러나 이제는 참견을 안 할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 이상, 사라는 자기 자신이 알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사다리 끝에는 보트와 보트 담당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히 만든 낮은 스타트 대부터 용이하게 미끄러져 나오지 못하는 사라를 보고, 웃으면서 엔리코가 초보부터 가르쳐 주었다. 어디서 어떻게 하면 곧바로 설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어서, 요령이 다시 생각나는 데 따라 사라는 점점 이 스포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보트로부터 팽팽히 당겨진 가느다란 줄을 붙잡고 엔리코와 어깨를 나란히 초록빛 수면을 미끄러져 나가는 쾌감이, 처음의 공포심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엔리코의 스키 솜씨가 너무나 멋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무엇을 해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타입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가 어떠한 인간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채로 사라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인가.

운동에 지쳐서 해변으로 돌아오자, 사라는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아아, 멋진 기분이야! 당신 덕분에 요령이 생각났어요!”

기본이 든든했던 것은 주인양반 덕이지.”

엔리코도 모래 위에 앉아서, 아까까지 보트를 운전하고 있던 남자가 모터를 점검하고 있는 것을 바라다보았다.

최근에 주인양반하고 재결합하셨다던데, 내가 보기엔 당신네들, 그렇게 친밀하게 보이지 않는구만.”

, 별로 좋지 못해요.”

가슴에 날카로운 아픔을 느끼면서 사라는 대답했다. 그것은 사라가 제일 싫어하는 화제였지만, 엘자가 어젯밤에 실마리를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잠자코 있을 수도 없었다. 스티브는 이미 결혼 파탄의 경위를 엘자에게 털어놓았을 테지. 엘자가 엔리코와의 관계를 청산해 버리고 돌아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게 확실하다. 분명히 엔리코 쪽이 자산가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스티브에게 미련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재산만이 전부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잘못 생각했었죠. 함께 산다는 것이 무리였어요.”

사라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도 동감이오. 그렇다면 왜 아직도 헤어지지 않지?”

스티브가 세인트피터즈버그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헤어지자고 하는 바람에제 물건이 아직 모두 그곳에 내팽개쳐진 채이니까요.”

당신 물건이라니, 입을 것? 여기서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저녁 식사의 메뉴라도 의논하고 있는 것 같은 가벼운 태도로 그가 말했다.

낫소에 남지, 귀여운 사람이여. 부자연스럽지 않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보장하지.”

깜짝 놀란 사라는 간신히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신의 애인이 되라는 말씀이세요?”

엔리코는 새하얀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말하자면, 그런 얘기지.”

엘자는 어떻게 되죠?”

그 얘긴 별개요.”

사라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을 갖고 싶다, 그것뿐이야. 낫소에는 앞으로 한 달 가량 있을 예정이니까, 당신을 아파트에 두고 내가 만나러 가기로 하지. 엘자하고는 상관없어. 나중에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수당을 들려서 영국으로 보내줄 테니까.”

사라는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 앉아서

이런 엉뚱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예요, 시뇨레 페로치!”

차디차게 내뱉다시피 말했다.

그러자 노골적으로 야유가 섞인 웃음을 머금고 그가 입을 열었다.

, 그것은 금시 초문이군. 값이 붙어 있지 않은 물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 당신의 값이 비쌀 것은 각오했던 바요.”

이어 서둘러 일어서려는 사라를 제지하려 하지도 않고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덧붙였다.

남자의 욕망의 목표가 됐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 상해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건 취급을 받았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빠졌죠.”

사라는 화가 치밀어 생각나는 대로 소리 질렀다.

엘자 같은 여자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하지. 엘자 같은 여성은 드물거든.”

그는 일어서서 발에서 모래를 털어냈다.

침착하시지.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 달려들려고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틀렸다면 정직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적이 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사라는 열화가 차차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엔리코로서는 어째서 사라가 그렇게까지 펄펄 화를 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유혹을 했다가 거부당한 것뿐인데, 자기로서는 거절당한 데 놀라기는 했으나 욕망의 대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사라를 언제까지나 구질구질하게 생각할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을 적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요.”

사라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한 말은 잊어버리고 친구가 되기로 하지. , 집으로 돌아갑시다.”

정원의 한가운데쯤 가서, 사라는 아까부터 입속에서 뱅뱅 돌고 있던 말을 결심하고 꺼냈다.

아까 엘자 같은 여성은 드물다고 말씀하셨죠, 그건 어떤 의미죠?”

그가 미소했다.

진정으로 성실한 여인은 아주 보기 드물다, 라는 뜻이오.”

성실이라고요!”

엘자는 절대로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녀를- 사랑하고 계세요?”

엔리코는 밝은 웃음을 보였다.

나와 당신과는 사랑의 관념이 전연 틀릴지도 모르지-엘자의 관념하고도 틀릴 수 있지. 다만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하거든.”

사라는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만약에 엘자가 헤어지고 싶어한다면, 헤어져 줄 생각이예요?”

당연하지. 마음이 떠난 여자를 붙들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여인에게 속박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말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옆을 보고 있는 사라의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고 나서 엔리코가 말했다.

당신이 없어지면 엘자가 플로리다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군? 글쎄, 그건 어떨지.”

당신이 스티브보다 부자이기 때문에?”

그는 소리를 내서 웃엇다.

그것도 이유의 하나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나처럼 엘자는 앞으로 전진하는 타입이거든. 되돌아서진 않는단 말이야. 어젯밤에 당신 남편과의 짧은 로맨스를 말해 주더군. 당신네들이 이번에도 먼저와 같은 벽에 부딪치고 있는 것 같아서 안됐다고 그러더군.”

사라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짧은 로맨스라니, 데체 어느 정도의 길이였을까?”

글쎄, 그녀에게 직접 물어 보시지.”

사라는 물어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한 달, 두 달, 6개월몇 달이든 같은 것이다.

테라스에 도착하니, 스티브가 풀에서 즐거운 듯 해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단단한 육체가 칼날처럼 수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엘자는 무표정하게 먼저와 같은 간이침대에 기대로 스티브의 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말했다.

어때요, 즐거웠어요?”

좋은 연습이 됐소.”

엔리코가 대답했다.

풀에서 소금기를 뺄까, 아니면 샤워를 하는 게 좋을까? 엘자가 안내할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허물없이 일어섰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세요.”

집으로 향하는데, 엔리코가 풀 속에 뛰어드는 물소리가 들렸다. 스티브하고 둘이서 어떤 얘기를 할 작정일까. 사라가 해변가에 있는 동안에, 스티브는 엘자의 빨간 입술에 키스를 하였을까. 그녀를 끌어안고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을까.

사라가 청록색의 타일을 붙인 아름다운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니까 엘자가 옆의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러 기다리실 필요는 없었는데.”

딱딱한 투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엘자는 담배를 재떨이 속에 비벼 끄고 나서 조망이 좋은 창가에 있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초록빛 눈동자가 기묘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대체 무슨 얘기를?”

사라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물었다.

당신에 관한 얘기예요. 그런데 리코가 당신을 유혹했죠?”

붉은 입술에 엷은 미소가 번져갔다.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다만 조금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어째서죠?”

좋아요, 그럼 내 멋대로 상상할 테니까. 하지만 당신은 동의하지 않았던 모양이죠?”

물론이죠. 그런 일은 당신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서죠.”

사라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렇죠. 한 남자도 힘에 겨운데 두 남자씩이나, 그건 도저히 무리죠.”

엘자는 동정 어린 눈으로 사라를 마주보았다.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예전대로군요. 트로이의 헬린이 미모 하나로 네 척의 배를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외모가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속이 텅텅 비었다면 오래 가지 못해요. 언제나 자기의 일만 생각하고, 스티브는 항상 뒷전이었던 게 아니에요?”

사라는 점잖게 말했다.

나의 결혼 생활을 당신하고 의논하는 것은 사양하겠어요. 우선, 우리 생활을 당신이 파괴했잖아요!”

천만의 말씀. 파괴한 것은 당신 자신이죠. 나는 우연히 스티브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뿐이죠.”

그리고 보수를 받은 거죠!”

엘자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나는 보수 따위를 바라고 남을 위로하지는 않아요. 거기다가 스티브는 특별이었어요.”

그를 사랑했다고라도 하실 작정이에요?”

, 사랑했어요. 그러나 그런 기분은 그때뿐이었지요.”

엘자의 웃음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주 열중했었죠. 그런데 스티브에게 걷어 채였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라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혼란했다.

그렇지만 내가 떠난 뒤에도 줄곧 함께 지내지 않았어요?”

스티브가 그렇게 말했어요?”

확실히 말한 것은 아니지만그는 그때 일은 한마디도 해주지 않거든요.”

사라는 자존심도 팽개쳐 버리고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엘자를 보았다.

당신과 스티브의 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고 엔리코에게 말했다면서요?”

그래요. 플로리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 보았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고 아주 분명하게 스티브가 말했기 때문에 당신이 떠난 다음날, 나도 떠나 버렸죠.”

사라를 보고 어깨를 들먹였다.

내가 원인이 돼서 당신하고 스티브 사이에 분쟁이 생겼으니, 그는 그 일이 생각나는 게 싫었던가보죠. 그때 이래 카지노에서 마주칠 때까지 한 번도 못 만났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낫소로 가자고 야단이었거든요.”

당신 마음에 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죠. 플로리다에서는 심심해서 혼났죠?”

그렇지 않아요. 그대로 있으면 또다시 5년 전의 반복이 될 것 같아서, 두 사람만이 얼마 동안 지내 보면 어떻게든 해결책이 나타나리라 생각했어요.”

사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해봤자 소용없지만

나 같은 여자에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엘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어떤 여자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어요. 나는 훨씬 옛날에 내 자신의 인생을 매듭지었지요. 그것보다도, 당신의 인생을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자기 자신에게 물어 봤으면스티브를 사랑하고 있어요?”

모르겠어요.”

사라는 곤혹해서 말했다.

아주 싫다고 생각될 때도 있는 걸요!”

그것은 좋은 징조예요.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눈도 돌리지 않고 열정에 빠져 있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스티브의 정열은 이미 무관심으로 변해 버린 걸요.”

설마, 당신이 리코하고 스키를 타고 있는 동안, 그는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요. 당신이 또 바보짓을 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당신이 돈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지만, 리코는 무엇이든 손에 넣겠다고 일단 작정하면 아무리 비싸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당신은 그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태연해요? 조금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아요?”

내게는 영향이 없어요. 속박하지 않고, 감정에까지 미치지도 않고, 아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대신에 리코는 내게 충분한 호강을 시켜 주거든요. 어느 편이든 싫증이 나면 간단히 헤어질 수 있어요. 이 주변에는 대용품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물론 나이를 먹는 데 따라 비싼 값은 바라지 못하게 되지만.”

엘자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게 놀랄 건 없어요. 나는 말이죠, 스무 살 때 자기의 장점을 이용해서 인생을 유쾌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지요. 스위스의 은행에 잔뜩 모아 두었으니까 노후의 걱정은 없겠다

만약에 그때 스티브가 당신에게 제발 남아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라는 조용히 물어 보았다.

남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정열에 사로잡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까지 빠져들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죠. 지금 새삼스럽게 그런 억측을 해보아도 별 수 없잖아요. 두 사람이 찾으러 오기 전에 밖으로 나갑시다.”

사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일부러 이런 얘기를 해주었어요?”

스티브를 위해서죠.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에요.”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의 생각을 말하라면, 스티브는 당신에겐 분에 넘치는 상대예요.”

하지만 스티브는 이미 내 것이 아닌 걸요.”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괴로웠다.

당신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이상은 그렇겠죠. 그를 되찾기 위해서 스티브가 내세우는 조건을 받아들일지 어떨지,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죠. 우리가 얘기를 나누었다는 건 말하지 말아요. 그가 과거를 잊어버리자고 하면, 그냥 잊어버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스티브는 평생 내가 비트하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어떤 완벽한 증거가 없는 한, 지금에 와서 결백을 증명하는 건 어렵겠죠. 당신이 옛날이건 지금이건 딴 사람에게 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그가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리코와 당신 사이에 해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지레 짐작하고 그가 리코에게 한방 먹이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리코는 공명정대한 수단으로 싸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고-화가 치밀어 한번 돌아서면 여간해서는 원한을 풀지 않는 타입이니까.”

테라스에 나와 보니, 스티브는 옷을 갈아 입고 태연히 앉아 있었다. 리코하고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기색은 전혀 없었다.

, 이젠 돌아갈 시간이군.”

엔리코는 억지로 말리지도 않았다. 바닷가에서 걷어채고 나서는, 사라들에게 대한 흥미를 싹 잃어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사라를 지켜보는 그의 눈이 일순 헤어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어쩌면 카지노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엘자가 가볍게 말했다.

우린 거의 매일 밤 가거든요.”

그런 기회는 없을 것 같소.”

스티브가 대답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범할 예정이니까요.”

하필이면 이런 때에?”

엔리코가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청우계(晴雨計)가 내려가기 시작했더군. 어쩌면 폭풍우가 될지도 알 수 없는데. 하지만, 바다의 노련한 경험자 앞에서 쓸데없이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겠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라는 마음먹고 물었다.

정말 내일 아침에 떠나요? 금주 내내 여기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스티브의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초리가 사라 쪽으로 향했다.

이젠 한가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지. 빨리 세인트피터즈버그에 돌아가야 그만큼 빨리 당신의 집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 아니야.”

내 집은 여기예요, 당신 곁에 있게 해줘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다시 한번 새 출발 해요, 하고 그에게 말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9

밤사이에 세차게 불던 바람이 군데군데 구름을 날라다 놓았지만, 그 구름 사이의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르렀기 때문에 아직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스티브는 혼자서 기상대의 예보를 듣고 있었다. 사라는 묵묵히 그를 따라 출범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오전 중 선실에서 잡일을 끝내고, 세탁을 하고 점심을 만들었다. 스티브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부는 데 따라 돌핀 호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일기가 차츰 악화할 것이 틀림없을 것 같다. 왜 굳이 이런 날에 출발하기로 하였던 것일까. 사라가 비참한 생각을 하든말든 자기로서는 흥미가 없다는 것을 사라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나 스티브가 그처럼 심술궂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사라하고 한시바삐 헤어지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리라.

오후가 되자 바람은 다시 폭풍우로 변할 징조를 보였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갑판에 올라간 사라는, 거대한 파도의 움직임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 강풍이 불어 젖히는 속에서, 스티브는 삼각돛과 비상용 돛에 의지하여 운행하고 있었다. 타륜(舵輪)을 잡은 그의 머리가 젖어 있었다.

밀어닥치는 파도가 사라의 얼굴에 차가운 물보라를 뒤집어씌워, 사라는 물이 선실로 들어가지 않게 황급히 승강구의 문을 닫고 자기의 안전벨트를 고정시켰다. 조타실의 테 가장자리를 잡고 뱃머리 앞에 산같이 부풀어 오르는 짙푸른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사라를 스티브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더 심해지나요?”

파도와 바람 소리에 지워지지 않도록 사라는 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럴 테지.”

저쪽을 향한 채로 스티브가 소리쳐 대답했다.

아래 내려가 있는 편이 좋을걸.”

흔들리는 것도, 파도 소리도 확실히 아래쪽이 조금은 덜했지만, 사라는 그의 말에 반발심이 일어났다.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가슴이 격심하게 울렁거려 옴을 느끼면서 무리하게 30분가량이나 갑판 위에 남았다. 뱃멀미를 멈추는 약의 효력도 약해지고 발밑이 불안정했지만, 져서는 안 된다고 이를 꽉 깨물고 견뎠다. 스티브는 두세 번 사라 쪽을 보았지만 그대로 조타에 전념하고 피로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음료를 만들어 올 생각으로 간신히 아래로 내려온 사라는, 스티브가 집어먹을 수 있게 크래커와 치즈도 준비했다. 주방에 있는 동안에 세찬 스콜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선실의 지붕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사라의 이마는 땀에 젖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급경사하는 바닥을 필사적으로 밟고 나갔다.

승강구에서 목만 내밀고 뜨거운 커피를 스티브에게 건네 주었다. 그의 얼굴도, 검은 방수 코트도 흠뻑 젖어 있었다. 빗줄기는 아까보다는 좀 약해졌지만, 멎을 것 같은 기색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잿빛 하늘은 더욱 어두워질 뿐이며,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 될 것 같다.

여기는 어딜까?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육지에서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베리 제도와 안드로스 섬은 지났을 것이고, 비미니 제도의 남쪽에 있는 캐트케이즈를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브는 사라가 지적할 것도 없이 이 항해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대자연 속에서 악조건에 도전하는 것에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자동 조타 장치로 바꾸고 아래에서 쉬면 좋을 텐데, 지칠 대로 지칠 때까지 버틸 작정인 모양이다.

사라가 빈 커피잔을 그에게서 받아들려고 했을 때, 우연히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았다. 갑자기 사라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의 손에 매달려서 죽을 때까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데, 두 사람의 행복을 또다시 깨뜨리고 말았다. 스스로 좀 더 노력만 했다면, 그의 애정을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가 있었을 텐데.

 

날이 샐 무렵이 되자 간밤의 비바람은 그제서야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겨우 아래로 내려온 스티브의 눈은 붉게 충혈됐고, 수염 때문에 턱은 거뭇거뭇해 보였다. 이미 잠이 깨서 옷까지 갈아입고 앉아 있는 사라를 보자, 부츠를 벗어서 로커 안에 던져 넣었다.

이젠 괜찮아. 오늘은 좋은 날씨가 될 거야.”

먹을 것을 만들게요.”

사라가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먼저야.”

두꺼운 스웨터를 벗어 침대 위에 던져 놓고는,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사라의 창백한 얼굴과 윤기 없는 머리칼을 바라보며 스티브가 말했다.

어젯밤의 악천후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싶은 거지? 아니면 좀 더 있다가 들려줄 생각이야?”

그만!”

사라가 애원했다.

당신 탓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하다니, 드문 일이군. 그렇지만 어떻든 이젠 너무 늦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줘.”

나를 신용하고 배를 맡겨도 괜찮을까요?”

또다시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조타 장치는 조정이 끝난 거고, 갯벌에선 몇 킬로나 떨어져 있고, 게다가 날이 밝았으니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으면 될 뿐이야.”

스티브

저쪽으로 돌아서려는 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무 늦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잿빛 눈에 뚜렷이 피로의 기색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서로 너무 지나치게 기대를 걸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난 어느 쪽이든 괜찮아. , 이만 자야겠어.”

선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기적이 일어날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장래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티브가 없는 장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월요일 저녁에 세인트피터즈버그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짙은 회색의 하늘이었다. 차로 캐버노우로 향하는 도중, 사라는 앞으로 3주일만 있으면 크리스마스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 무렵에는 이미 영국에서 자리 잡고 있을 테지. 앞으로의 일을 결정지을 때까지는 양친의 집으로 돌아가 있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전보를 쳐서 이렇게 된 경위를 알려 두어야겠다. 두 분이 무척 실망하실 걸 생각하니, 얼굴을 마주하고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오늘 밤의 비행기 표를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힘든 항해가 겨우 끝난 바로 뒤에 다시 또 비행기를 타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룻밤쯤 한가롭게 편안한 침대에서 자고 난 뒤 떠나기로 하자.

 

저녁의 러시아워로 혼잡한 도로를 스티브는 묵묵히 앞만 보며 운전했다. 셔츠의 깃에 스칠 만큼 그의 머리칼이 자라 있는 것을 사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언제나 사라가 쓰다듬고 애무했던 머리칼인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대로 무감동한 상태로 있게 해주십사고 사라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는 피네라스만 도로의 매표소에 다가가자 포켓에 손을 넣었으나 잔돈이 없었다.

잔돈 갖고 있어?”

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사라에게 물었다.

사라가 15센트짜리 동전을 건네 주자, 그는 차의 속도를 줄여 창문을 열고 바스켓 속에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이전에는 스피드를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잘 적중시키는지 그 솜씨를 사라에게 보이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만약에 실패를 하면 차를 세우고 도어를 열고는 떨어진 잔돈을 찾아 바스켓이 있는 곳까지 되돌아가서 다시 넣는 동안, 뒷차들이 경적을 계속 울려대는 것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보스러운 게임이었지만, 그는 한 번밖에 표적을 잘못 맞힌 적이 없었다. 지금의 스티브가 그런 게임에 열중할 심경이 못되는 것은 순전히 사라의 탓인 것이다.

()을 건너면서 이곳을 지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내일은 직접 공항으로 갈 테니까, 스티브에게 전송을 받을 필요도 없다. 호텔에서 작별을 고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 어디 딴데 투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갑자기 사라가 말했다.

크로스윈즈에라도 갈 작정이오? 영국에 돌아가면 켄튼을 만나겠지?”

아뇨.,이젠 만나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버림받았던 사실 따윈 잊어버리고 용서해줄 거야. 켄튼은 그런 사람이니까.”

켄튼을 버렸던 게 아니에요. 다만 내가 유혹에 빠졌던 것뿐이죠.”

스티브가 웃었다.

그라면 그런 바보 같은 얘기라도 믿을 수 있을 거야!”

사라는 침착하게 말했다.

플로리다를 떠나기 전에 만났을 때, 켄튼은 믿고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만났던 것을 몰랐죠?”

이젠 아무래도 좋아. 당신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서투르거든.”

지금 사실을 말했잖아요.”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뒤에, 나를 공격하기 위해서 말한 것뿐이야. 어서 어른스러워지라구!”

캐버노우에 도착하자, 사라는 마실 것도 거부한 채 샤워를 하고, 스티브는 글래스를 한 손에 들고 밀려 있는 우편물에 눈을 돌렸다.

비좁은 돌핀 호에서와는 달리, 한가하게 뜨거운 샤워를 하는 것은 아주 상쾌했다. 머리를 감고 잘 헹구고 나서 타월로 싸감았다. 그런 다음 로브를 걸치고 벨트를 매고는, 손님용 침실로 들어가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치는 볕에 그을린 자기의 얼굴이 살이 빠져 각이 진 듯 보였다. 눈 아래에 기미가 끼고, 단 한 달 동안에 부쩍 나이가 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직도 어른답지 못하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얘기란 말이냐?

무엇이든 입을 옷을 찾으러 큰 침실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됐다. 먼젓번에 사서 아직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았던 빨간 벨벳의 카프탄을 끄집어냈다. 영국에 남겨놓고 온 신변의 물품들을 전부 보내 달라고 하지 않길 잘 했다. 어차피 오래는 있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중에 입을 슈트 이외의 옷들을 몽땅 침대 위에 펼쳐 놓고 짐을 꾸릴 준비를 했다.

거실에 나가니까, 스티브는 서류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라의 모습을 보자, 순간 입언저리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열 시 10분에 떠나는 뉴욕 행 비행기 표를 샀어. 라가디어 공항에 닿으면 헬리콥터로 케네디 공항으로 날아서, 네 시 15분발 팬암기를 타면 돼.”

사라는 아무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수고하셨군요.”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을 뿐이오. 당신이 떠나기 전에 표는 보내 주겠다는군.”

서류를 아래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뭘 마실까?”

또 장송(葬送)?”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마지막 마르그리트를 마시겠어요.”

그는 2인분을 만들어서 글래스 하나를 사라에게 건네주고, 나머지 하나를 자기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입가에 거만한 미소를 떠올리고 말했다.

장수와 행복을 위해서 건배!”

사라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천천히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에 보이는 무겁게 흐린 밤하늘, 비가 난간에 맞고 튀고 있다. 거기서부터 앞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에어 컨디셔너가 따뜻한 공기를 실내에 보내 주고 있다.

일곱 시 반이다. 내일 이맘때면 대서양 위를 날고 있겠지. 처음으로 혼자서 영국으로 돌아가던 때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옆에 앉아서 말을 걸어온 남성을 몹시 냉담하게 대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온 세상의 남성 전부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과거를 잊어버리고 신선한 출발을 해야지.

리젠시에 여덟 시 예약을 했어.”

방의 반대편에서 그가 말했다.

옷을 갈아 입고 오겠어. 예쁘게 차려입은 당신 앞에서 이 꼴은 실례가 되니까.”

침몰하는 군함과 같은 심정이에요.”

사라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냉랭했다.

동감이야. 이왕이면 화려하게 끝맺음하기로 하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글래스를 놓고서 방을 나갔다. 실버그레이의 양복에 하얀 셔츠를 입고 돌아온 그의 모습을 보고 사라는 등줄기가 짜릿해졌다. 저 압도적인 매력을 수돗물을 잠그듯이 간단하게 없애 버리는 방법은 없단 말인가.

여덟 시 10분 전이 되었기 때문에 둘이서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갔다. 단둘이서만 방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과, 타인들 가운데서 연극을 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과 어느 쪽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사라가 출발하면 온 호텔 안의 고십이 될 테지만,

그때까지는 두 사람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지배인에게 정중히 안내받아서 댄스 플로어의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호텔 안의 레스토랑에 예고 없이 스티브가 나타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고급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딴 손님 속에 섞여서 점검을 하고 다니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캐버노우 안에 있는 세 개의 레스토랑 중에서 제일 아늑하고 고급인 것이 리젠시다. 4인조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에 따라서, 이미 몇 쌍의 남녀가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다. 이 고상한 분위기가 눈이 높은 손님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 있는 엘리자비산은 가족 취향의 레스토랑이며, 에크셀시오는 이른 아침부터 심야까지 간단한 식사를 내놓아서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주위의 분위기에 만족한 스티브는 메뉴에 눈을 돌렸다. 사라는 에스칼고를 거절하고 우선 파테를 주문했다. 전혀 식욕이 없었지만 겨우 홍송어로 정했다. 이것이라면 맛이 담백하니까 어떻게든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브가 주문한 식사는 언제나와 같이 그의 왕성한 식욕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들은 감정만으로 인생이 좌우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사라가 요리를 앞에 놓고도 시큰둥해 있기만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는 어떻게 할까?”

웨이터가 접시를 가져간 다음에 물었다.

사라는 가슴의 통증을 숨기기 위해서 단호한 투로 말했다.

마시겠어요. 그리고 브랜디도.”

그는 커피와 브랜디를 2인분 주문하고서 엽연초에 불을 붙였다. 사라는 그의 일거일동에 눈을 모으며 그의 영상을 머릿속에 새겨 놓으려고 했다. 그는 잠시 후면 추억만 남겨 놓고 사라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릴 사람인 것이다. 그의 입술, 목소리, 웃음소리, 미소가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가 없는 5년간도 그토록 길었는데, 이번에는 한평생을 그이 없이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저의 변호사에겐 뭐라고 할까요?”

상처를 나이프로 쑤셔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물었다.

그는 냉정하게 사라를 지켜보며 연기를 뿜어냈다.

최소한으로 좋겠지. 내 변호사를 시켜 상세한 것은 알려 줄 테니까. 시간은 좀 걸릴지 모르지만 문제는 없을 거야. 영국의 이혼 수속하고는 다소 틀리겠지만, 당신에게 손해는 안 가게 하지.”

떨지 않으려고 사라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요구했던 이혼인데도 불구하고, 그만둬! 하고 외치고 싶었다.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어쩌면 저토록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돈 얘기라면, 전 동전 한닢 받지 않겠어요. 정말이에요, 스티브!”

법률상 나의 의무로서

법률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옆 테이블의 손님이 돌아다보는 것을 보고 사라는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한테선 검불 하나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이 제정신이 들 때까지 보관시킬 수밖에 도리가 없겠군.”

죽어도 안 받겠어요!”

마음대로 하지.”

스티브는 정말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겠다고 그랬잖아?”

“<어른답게> 당신에게 돌아온 것이 나의 평생의 실수였어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던 거예요. 당신이 앤하고 빌을 찾아왔을 그때 만나지만 않았던들

나도 후회하고 있다니까.”

그가 내리누르는 듯한 투로 말했다.

어쨌든 결혼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오. 그렇지만 이번 일까지 내 탓으로 하는 건 곤란한데. 당신도 충분히 알고 난 뒤에 시작한 일 아닌가.”

무어라고 반박할 말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 참에 커피와 브랜디가 날라져 왔다.

글래스를 단숨에 비운 사라는, 목이 타는 듯한 액체에 자극받아 눈시울이 확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하는 꼴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정신없이 의자를 밀어젖히고 일어섰다.

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라도 떨어지는 편이 좋을 거야.”

라고 내뱉고는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침실에서 짐을 꾸리고 있으려니까, 문소리가 들렸다. 스티브가 침실 입구에서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와서, 사라의 양 어깨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지옥에 떨어지라구? 다시 한번 말해 봐, 그냥 안 둘 테니까!”

스티브가 격노해서 외쳤다.

잘도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군 그래

사라의 뺨이 눈물에 젖어 있는 걸 비로소 알아본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망설였다.

지그시 사라의 눈을 지켜보는 그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아, 사라!”

낮은 신음소리를 내자 거칠게 사라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머리칼 속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가지 마, 사랑하고 있어. 알겠어?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사라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고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다만 정신없이 그의 뜨겁고 격한 입맞춤에 응하고, 그가 인도하는 데 따라 짐으로 어질러진 침대에 드러누웠다. 묻고 싶은 일이 태산 같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안겨서 사랑받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냉혹하고 무관심한 그가 사라져 감에 따라서 되돌아와 준 예전 그대로의 정열적인 스티브야말로 사라의 남편- 사라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커피를 타주는 것을 지켜보는 사라의 마음은 행복감으로 터질 것 같았다.

제가 꿈을 꾸고 있다면 깨우지 마세요.”

웃으면서 사라의 머리에 손을 얹은 그의 눈동자는 애정으로 가득했다.

, 이젠 그만 자고 일어나 얘기를 해야 할 참이야. 지금부턴 활짝 열어젖힌 솔직한 결혼 생활을 합시다. 심술궂은 야유는 이젠 질색이야. 내일 당신이 출발한다고 생각만 해도 몸을 에는 듯이 괴로웠어. 나의 고통의 백분지일이라도 좋으니 당신에게도 맛보이고 싶었던 거야.”

사라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이혼 얘기는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진심이었지.”

괴로운 미소를 떠올리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내주가 되면 마중 갈 생각으로, 벌써 비행기의 예약도 잡아 두었지. 바보스럽고 케케묵은 방법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의 자존심을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져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남자의 자존심이란 아주 소중한 것이군요. 하지만 한 가지만 꼭 들어줘야 할 얘기가 있어요, 스티브. 나하고 비트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 여보, 그런 표정 하지 말고 믿어 주세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 녀석의 아파트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있는데.”

그가 빌려주겠다던 책을 받으러 약 10분 정도 들렀던 것뿐이에요.”

사라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물론 비트는 나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잘 빠져나왔죠.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비트를 이용하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어요. 당신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게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효력이 지나쳐서 버림받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사라는 그의 소매에 살며시 손을 댔다.

스티브, 부탁이니까 믿어 줘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폴과도 친구였을 뿐이에요.”

지그시 사라를 지켜보고 있던 그의 눈이 차츰 부드러워졌다.

믿고말고. 그 얘기를 듣길 잘했어. 아내에게만 충실하라고 기대하고 남자는 불성실하다면 불공평하다고 생각은 되지만

그렇지만 남자의 경우는 얘기가 틀린다고 하시는 거죠?”

그 이론에 좀 더 반론하고 싶었지만 참고 입을 다물었다.

당신, 엘자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 일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괴로워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대답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애정이라곤 한조각도 없었지. 서로의 충동적 요구가 맞았을 뿐이야.”

당신은 결혼과 어린 아내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을 때니까요.”

사라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성이지.”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우연히 그녀 앞에 출현했던 것인데,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그녀의 유혹에 말려든 내 행동에 대해서 지금 새삼스럽게 변명할 생각은 없어. 당신이 떠난 뒤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려고 한번 만났지만, 그녀도 그 다음날 플로리다를 떠나 버렸어.”

엘지가 털어놓고 얘기해 준 사실들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올라왔지만, 사라는 참았다. 지금 새삼스럽게 스티브에게 그런 얘기들을 늘어놓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런 옛날 일이 하마터면 우리의 행복을 파괴할 뻔했군요.”

대화를 계속 거부해 왔던 내가 나빴지. 그것이 하나의 불씨가 되어 차례차례로 딴 문제를 만들어 냈으니까 말이야.”

스티브는 양손으로 사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캐버노우의 일이지만

제 얘기를 먼저 들어요.”

사라가 애원했다.

제가 바보였어요. 캐버노우에 질투를 했으니. 하지만 앞으론 다를 거예요.”

그래, 집을 사기로 하지. 바닷가의 주택이 좋겠지. 이곳을 장기 계약하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거든.”

스티브, 그건 안 돼요.”

사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 계셔야죠.”

그럴 필욘 없어,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연락하면 되니까. 당신의 말대로, 내가 없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잖아. 좋은 지배인이 있는 덕이지. 당신과 결혼하고 일곱 주일 동안 집을 비웠을 때도 지금의 지배인이 있었다면, 돌아와서 그처럼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되었지. 그것도 서로 사이가 벌어진 원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시잖아요.”

사라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어른들에겐 안성맞춤이지. 그렇지만 어린애를 키우는 데는 적당한 장소라곤 말할 수 없어.”

활짝 밝아진 사라의 표정을 보고 스티브는 미소 지었다.

나는 벌써 서른여섯이야, 사라. 더 이상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면 애들이 십대가 될 무렵이면 그만 늙어 버리고 말아.”

“5년간

사라의 목소리가 우수를 띠었다.

“5년 동안이나 헛되이 세월을 보냈군요.”

지나가 버린 일은 할 수 없지. 지금부터 열심히 보충을 하기로 하지.”

그는 살며시 사라를 끌어안고서 그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로 입술을 대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둘이서 멋진 크리스마스를 맞기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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