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지망(Full circle) 1
이혼 지망(Full circle)
Kay Thorpe
1장
덴버와 세인트피터즈버그를 잇는 하이웨이로 들어선 사라는 5년 전으로 생각을 달렸다.
냉방이 잘 된 차의 창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도, 강한 햇빛도 옛날 그대로다. 파랗게 펼쳐진 만(灣)과 저쪽에 가로놓인 갠디 브리지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 이끌려서 미지(未知)의 땅으로 오게 된 것은 열 여덟 살 때였다.
이른봄에 도착해서 겨울에 떠나 버렸던 플로리다. 겨우 9개월에 불과했던 스티브와의 결혼 생활. 공허감이 가슴을 메운다.
“근심스러워 보이는군.”
옆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크로스윈즈에 도착하면 그에게서 무슨 전갈이 와 있겠지.”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사라는 하는 수 없이 말을 하고 말았다.
“전갈이 있을 리 없죠, 내가 온다는 사실을 스티브는 모르는걸요.”
혼잡한 하이웨이를 달리는 중이 아니라면, 아연해진 폴은 차를 길옆에 정차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럼 당신은 이번 여행에 대해서 그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편지로 쓸 수 있는 사연이 아니라서…”
사라는 변명하듯 대답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문제 아니겠어요.”
“설마 망설여지는 건 아니겠지?”
그의 그윽한 눈빛에 사라는 그만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물론 전 이혼할 작정이에요. 훨씬 더 전에 했어야 했죠. 스티브 쪽에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에요. 원상복귀(原狀復歸)할 수가 없다는 것은 잘 알텐데.”
“나이 차가 많아서?”
“나이 차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스티브는 지금 몇 살이지?”
“서른여섯.”
일부러 세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2년쯤은 별로 큰 차도 아닌 걸요. 그때 내 나이가 20대만 됐어도 어떻게든 잘 되었을 텐데, 워낙 철없는 열여덟이었으니까….”
“그건 스티브도 알고 있었잖아.”
“그야 그이 나름대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너무나 철없는 내 행동거지에 금방 정나미가 떨어진 거예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대했었는데, 제가 뜻대로 되어 주질 않았거든요.”
“그래서 당신을 내쫓았군.”
“그게 아니고, 내 편에서 헤어지자고 하니까 그가 허락한 거예요. 아빠도 엄마도 처음부터 이 결혼을 반대하셨지만, 결국 제가 결혼에 실패하고 맥없이 돌아가자 아주 잘 대해 주셨어요.”
폴은 참을성 있게 미소 지었다.
“풀이 죽어 돌아갔다니, 당신답지 않은 소릴 하는군. 옛날엔 그랬다 치고, 지금은 어엿한 스물네 살의 어른인걸. 그처럼 신중하신 우리 아버님조차도 당신처럼 냉정한 여성도 드물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임스 켄튼 씨가 지금의 자기의 심중을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사라는 생각했다.
냉정하기는커녕 완전히 침착성을 상실하고 있는데, 무감각까지는 바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왜 좀 더 침착한 태도로 이혼 준비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두 번 다시 스티브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본심이었다. 폴의 출장에 따라오지 않을 걸 그랬다 싶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더라도, 사무적으로 이혼 수속을 시작할 방법은 있었으니까. 스티브가 이의를 내세울 리는 없을 게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를 만나고 싶지 않더라도 얼굴도 보지 않고 수속을 할 수는 없다. 5년 동안 그는 변했을까. 그와의 인연을 영원히 끊어 버리기 전에 그것이 알고 싶었다.
폴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그에 대한 자기의 마음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에는 이미 한번 실망을 맛보았는데, 여기서 또 모험을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 같다.
그러나 결혼은 도박과 마찬가지다. 기쁨과 함께 괴로움도 각오하고 있는 자만이 성공하는 것이다. 사라와 폴은 음악, 문학, 오락, 게다가 일에 관해서까지 취미가 일치하고 있었다. 그는 사라에게 있어 지극히 매력적인 존재였다.
약 6개월 전, 부친을 닮아 미남자인 폴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중역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회장 뒤에 앉아 있던 사라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폴은 그날 밤 사라를 식사에 초대하고, 그때부터 진지한 교제가 시작되었다. 제임스 켄튼은 자기의 외아들과 비서와의 관계를 묵인하고 있었다. 사라가 결혼에 실패한 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밝혔기 때문에 그는 고용주로서 최초의 면접 때부터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사라는 채용될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켄튼 호텔 그룹은 대서양 양안(兩岸)에 체인을 갖고 있는 번성한 업체로서, 유능한 인재만을 고용한다는 방침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라의 비서로서의 능력은 불충분하진 않았으나, 스티브하고 캐버노우 호텔에서 보낸 수개월 동안 자연히 익힌 일 외에는 호텔업에 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었다.
폴과 스티브가 같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전혀 우연이었다. 상이한 점이라면, 캐버노우는 개인의 소유물로, 여간한 일이 없는 한 호텔 체인이 팔아넘길 우려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매물로 내놓았을 경우에는, 지금 크로스윈즈 호텔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는 켄튼사가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캐버노우는 이 지역 일대에서도 굴지의 일류 호텔이었으니까.
사라는 플로리다에 도착하자마자 호화스런 캐버노우 호텔의 맨 꼭대기에 있는 신방을 보았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호화롭다고 하더라도 한평생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크로스윈즈를 획득하기 위한 교섭을 시작할 절호의 기회를 잡아 사라와 함께 다녀오겠다는 폴의 말에 그의 아버지도 찬성했다. 둘이서 함께 처리하고 오는 것이 좋겠고, 한 1, 2주 동안이라면 임시 고용한 비서로서도 일을 볼 수 있으며, 어차피 조만간 새로운 비서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고 시침을 뚝 떼고 천연스런 얼굴로 말했다.
“호텔에서 스티브에게 전화를 해서 만날 약속을 하지.”
침착을 되찾은 폴이 말했다.
“내일이 좋겠지. 오늘은 이미 늦었고, 여덟 시엔 레신튼하고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거든. 이런 얘기는 낮에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감정적으로 되지 않을 테니까. 당신도 이 문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네.”
스티브가 말썽을 부릴 리는 없을 거라고 사라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5년 동안이나 이혼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어딘가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성공할 확률도 없는 두 번째의 결혼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티브가 과거 5년 동안 깨끗한 독신 생활을 해왔을 리는 없지만, 사라와의 실패 직후에 다른 여자와 살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렇게 간단하게 사라를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긴 별거 생활 끝에 지금 새삼스럽게 이혼 제안에 반발할 것인가?
불필요한 염려일지도 모른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이 제의에 그는 반색을 하며 달려들 게 틀림없다. 이 문제를 혼자서 해결할 자신이 없는 사라로서는 폴이 함께 와준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센트럴 애비뉴의 양쪽에는 모텔, 가솔린 스탠드, 레스토랑, 그밖에 번화한 점포가 이어지고, 2, 3미터마다 늘어선 요란한 네온사인이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망망한 멕시코만 연안 일대에는 크고 작은 각양 각색의 호텔과 모텔이 즐비하고, 따뜻한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며 열대식물이 하얀 모래밭에 테두리를 두른 듯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크로스윈즈 호텔은 흰 벽에 초록빛 지붕을 한 6층 건물로서, 로비의 장식이며 분위기는 평범했다. 폴의 이름을 듣자마자 지배인은 곧장 3층의 어느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사라는 분위기가 좋은 방에 만족하며 발코니로 나가 바다 경치를 내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일광욕이나 수영이나 쇼핑을 한 뒤에, 자주 이렇게 하고 스티브의 귀가를 기다렸었지.
호텔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만 있었다면 길고 더운 여름날들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스티브는 언제나 사라의 신경질이 폭발하기 직전에 나타나곤 했다.
양친의 과잉보호에다 자기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진 사라는 제멋대로 자라났다. 처음에는 스티브도 말괄량이 길들이는 일에도, 사라의 노여움이 그의 품 안에서 정열로 바뀔 때까지 달콤한 말을 계속 속삭여 대는 일에도 별로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감에 따라 그것이 분노로 변하고, 마침내 그는 사라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엘자는 사라와는 정반대였다. 세상 물정에 익숙하고 세련되어 있었으며, 남자와 대등하게 처신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사라가 지난날 짧은 결혼 생활을 보낸 그 방에서 스티브의 애인으로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사라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이유는, 갑작스레 나타나서 스티브의 독신 생활의 내막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도움이 될 리는 없었다. 차라리 엘자가 거기에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처리될 것이지만.
노크 소리를 들은 사라는 방안으로 돌아와서 도어를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폴은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로 사라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물었다.
“전화는 걸었겠지?”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틈이 없었거든요. 지금 걸 게요.”
침대에 걸터앉아서, 전화에 손을 뻗어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직통 전화번호를 돌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부재중이군요. 교환대에 걸 수밖에 없네요.”
사라는 캐버노우의 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냈다. 이번엔 교환수가 나와 정중한 대답을 했다.
“마스타스 씨는 외출중입니다만, 무슨 전할 말씀이라도?”
전화로 전달할 수 없는 내용의 용건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크로스윈즈에서 미세스 마스터스가 전화를 했다고 전해 주세요. 들어오시는 대로 연락 주시면 좋겠다고요.”
하여튼 이것으로 잠시나마 난처함을 모면했다는 생각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놓았다.
폴이 기묘한 표정으로 사라를 쳐다보았다.
“그런 전갈을 받으면 그치는 놀라 자빠지겠지.”
“달리 할 말이 없었거든요.”
사라가 곤혹스런 몸짓을 해보였다.
“하긴 그렇지. 그 사람하고 직접 얘기할 수 없었으니까 할 수 없지. 그가 전화를 걸어오면 뭐라고 말할 참이지?”
“전화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사라는 냉정하게 말했다.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고, 나머지는 그의 상상에 맡길 작정이에요. 어째서 내가 왔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5년이나 지났으니까, 달리 이유가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폴은 먼저 편지부터 보내 놓았으면 이렇게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고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를 끌어안아, 사라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겹쳤다.
“사랑해. 이 문제가 매듭지어지는 대로 우리들의 계획도 세울 수가 있을 거야.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이 딴 사내의 것이라니,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알고 있어요.”
사라는 저도 모르게 핸섬한 그의 얼굴에 손을 뻗쳐 이마로 내려온 금발을 쓸어 올렸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폴. 문제를 처리하는 솜씨가 서툴러서 미안해요.”
생긋 웃으며 농담으로 긴장을 풀려고 했다.
“이혼은 처음이라 이러는 거예요. 이다음부터는 이력이 붙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그는 싫은 얼굴을 했다.
“나는 스티브하고는 다를 뿐만 아니라, 당신도 열 여덟 살의 어린애가 아니잖아. 우리들의 결혼은 성공할 게 틀림없어.”
폴하고라면 행복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네 살이라는 연령 차는 딱 좋다. 그는 정신적으로 안정된 성격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인격자다. 스티브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 사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티브는 과거의 남자다. 옛날의 잘못을 파헤치려고 온 것은 아니다. 지금 소중한 것은 미래다, 폴과의 미래….
폴은 또다시 사라를 끌어안자, 이번에는 정열을 기울여 입맞춤을 했다. 사라는 그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지만, 그녀의 너무나 열의가 없는 반응을 느낀 폴은 씁쓸하게 웃었다.
“앞으로 당신에게 스티브하고의 결혼에 관한 것을 깨끗이 잊게 해줄게. 또다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무서운 거지? 난 결코 당신을 상처입히는 짓은 하지 않아요. 믿어 줘.”
“믿고말고요.”
사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이에요, 폴. 이 문제가 깨끗이 마무리되면, 사물을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난 그때까지 기다릴 거요.”
그는 사라의 뺨을 쓰다듬고는 몸을 떼었다.
“저녁 식사 전에 이 근처를 돌아보고 싶은데, 당신도 가지 않겠어?”
“전 실례하겠어요. 짐이나 풀고 한가롭게 목욕이나 할까 해서요. 그리고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르니까요.”
“하긴 그렇기도 하군.”
폴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여기 남아서 전화를 받을까? 나라면 분명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아니오, 제 나름대로 해볼게요.”
그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감사해요. 사무적으로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혼자가 되니까 사라는 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계획하기는 쉽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혼이란,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패배를 최종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뒤로 물러설 수도 없지만, 아무리 봐도 이 이야기는 난항을 거듭할 것 같다.
간신히 짐을 다 풀었을 무렵에는 어둠이 깔려서 창으로 내다보이는 멕시코만 연안 일대는 불빛들로 휘황찬란했다. 욕조에 더운물을 채우고 좋아하는 향을 떨어뜨리고, 사라는 그 방향(芳香) 속으로 살며시 잠겨 들어갔다.
사업 이야기는 대충 낮에 끝난 셈이지만, 오늘 밤 한가롭게 한때를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적었다. 이 호텔의 값을 정하기 전에, 켄튼사는 언제나와 같이 몇 명의 전문가를 보내서 미리 조사를 시켰으나, 최종적으로 계약서를 쓰기 전에 폴이 소유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되어 있다.
상담이 끝난 뒤 혹시 시간이 있으면 두 사람만이 바닷가로 나가서 달밤의 산책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영국을 떠날 때의 차디찬 11월의 가을비를 떠올렸다.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사라를 퍼뜩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침착을 되찾고 욕조 옆의 수화기를 들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사라?”
예전이나 다름없는 낮고도 남성적인 목소리였다.
“정말 당신이야?”
사라는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나서 대답했다.
“네에, 스티브. 저예요, 안녕하셨어요?”
“간신히 재기한 참이오. 그런데 당신은?”
“아주 건강해요.”
또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 자신의 창백한 얼굴이 반대편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쳤다.
“한번 만나고 싶어요, 스티브.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당신이 일부러 세인트피터즈버그까지 온 것을 보면 심각한 얘기 같군.”
“내일 오전 중은 어떻죠?”
“안 되겠는데.”
그가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밤으로 하지. 당신이 캐버노우로 오는 게 좋겠군. 한 시간 후에 차를 보내겠소.”
“오늘밤엔 갈 수 없어요.”
사라가 재빨리 말했다.
“내일 아침이 형편이 나쁘다면…”
“한 시간 뒷면 차가 도착할 거야. 그렇게 긴급한 이야기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듣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약속은 취소해 버리지.”
사라가 쓰디쓰게 말했다.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스티브. 예나 다름없는 폭군이에요.”
“아아, 변하지 않았지.”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당신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군.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지, 예전처럼. 한 시간 뒤야, 사라.”
수화기를 내려놓는 사라의 손이 떨렸다. 이 5년간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가 따뜻하고 상냥하게 맞아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다 하다니. 스티브 같은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너그럽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외고집이 되는 것이다. 사라가 만나려는 이유를 짐작했다 해도, 스티브는 일부러 모른 체할 모양이다. 5년의 별거 생활 뒤에 의논할 일이라면 이혼 이야기밖에 없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욕조에서 나온 사라는 타월을 집어 들어 몸을 닦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몸은 날씬한 데다 촉촉하게 젖은 탄력 있는 살결이 싱싱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얼굴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의 동그스름한 얼굴에 약간 광대뼈가 나왔으며, 이마에서 금발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스티브에게 어떠한 인상을 주든, 지금의 사라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사라가 예정을 변경하는 데 대하여 폴은 마음 내켜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그에게 우선 당신 혼자만을 만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
간신히 체념하고 말했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로 차를 보낼 거라면 그도 타고 오면 좋으련만.”
“내 쪽에서 먼저 만나 달라고 했으니까, 그가 장소와 시각을 정했어도 할말은 없어요.”
사라는 마음에도 없는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대답했다.
“바로 돌아오겠어요. 그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당신까지 끌어낼 필요는 없으니까. 제가 돌아오기 전에 식사가 끝나고 로비에서 기다려 주시지 않겠어요?”
화장대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있던 사라는 가운의 벨트를 고쳐 매면서 일어섰다.
“이제 15분 후면 차가 올 테니까 옷을 갈아입어야지.”
“바깥양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폴의 입에서 가시 돋친 말이 처음으로 튀어나왔다.
“당신은 훌륭한 하나의 인격체요. 어떠한 이유로든 그에게 모욕당해선 안 돼. 갑자기 서류를 내미는 대신, 일부러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는 친절한 당신에게 그는 감사해야 할 테니까.”
혼자가 된 사라는, 짧은 하늘빛 여름 옷을 입고, 팔에는 은으로 된 팔찌를 끼고, 굽이 높은 하얀 샌들을 신었다. 밖은 따뜻했으나, 가볍고 날아갈 듯한 흰 스토울을 어깨에 둘렀다.
호텔 입구에는 벌써 차라 대기하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운전사의 얼굴은 낯설었지만, 사라는 차체가 낮으면서도 긴 시보레 뒷좌석에 앉았다. 5년 동안에 캐버노우의 종업원도 꽤 많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스티브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했지만, 기대에 어긋난 자에게는 인정사정없이 대하는 것에 예사였다. 그런 점에서도 그는 별로 변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세인트피터즈버그 해안의 남단 가까이에 우뚝 솟아 있는 캐버노우 호텔에 다가온 차는 정면 현관을 지나서 옆문 입구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려 맨 꼭대기 층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에 탄 사라는, 5년 전의 자기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폴과 함께 올 것을, 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스티브가 무엇을 하든, 또 무슨 말을 하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겉으로만이라도 좋으니 침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7층 복도 저쪽에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문짝이 장벽처럼 사라의 눈에 비쳤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섬세하게 장식이 된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도어가 열리고, 안쪽에 스티브가 우뚝 서서 사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탄탄한 체격, 스포티한 바지에 몸에 꼭 붙는 셔츠 차림으로, 단추를 풀어헤친 사이로 검은 가슴털이 내다보였다. 입가와 눈가에 조금 주름이 잡힌 것처럼 보이는 것 외에는 5년 전에 그녀가 사랑하고 미워한 스티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라를 지켜보는 태연스런 잿빛 눈동자도 분명히 예전 그대로였다.
“들어와. 오랜간만이군.”
그들이 살던 곳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객실에는, 이 해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도어의 바로 안쪽과 하얀 긴의자 옆에 보이는 꽃꽂이는 어느 여성의 솜씨일까? 이곳에서 보낸 9개월을 생각하자, 사라는 가슴이 아파 왔다.
“뭘 마실 테야?”
뒤로 돌아 사라의 어깨에서 스토울을 벗기면서 스티브가 물었다.
사라는 목덜미가 빳빳해지는 것 같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진토닉을 부탁해요.”
“마르그리트가 아니던가?”
“싫어졌어요.”
사라는 그에게서 떨어져 창가에 있는 의자에 다가가, 서늘한 밤바람에 몸을 내맡겼다. 사라에게 등을 돌리고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늘씬한 몸매였다. 팔심이 센 그는 온몸을 뒤트는 사라를 장난삼아 껴안는 짓궂은 장난을 하곤 했다. 사라는 그의 양팔의 생생한 감촉을 잊어버리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욕망은 5년이 지나도 퇴조되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스티브는 유유히 사라에게로 다가와서 마실 것을 손수 건네주고, 자기의 컵을 손에 들고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다갈색 눈을 한 금발은 당신 말고는 본 일이 없어.”
비꼬는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빛깔의 조화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는걸.”
사라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얼마만큼 잊을 수 없는 존재였는가를 지금에서야 간신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일거일동에 묻혀 있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날은 서로 애타게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던 것이다. 달리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서는 잘 되어 나갈 리가 없다. 정반대의 사람끼리는 서로 끌어당기기는 할지 모르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것은 역시 공통점이 있는 자들끼리인 것이다.
“플로리다엔 혼자 왔소?”
얼마 동안 침묵이 계속 된 뒤에 그가 물었다.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의 고용주하고 같이 왔어요.”
지금 당장은 자세한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켄튼 호텔에서 크로스윈즈의 매수건을 결말 지으려 온 거예요.”
“그 이야긴 들었소. 회장 자신이 온 건가?”
“아니오, 회장의 아들이에요. 오늘 밤 현재의 소유주인 레신튼하고 만날 약속이었는데, 당신이 불러냈기 때문에 나는 여기로 오게 된 거죠.”
“당신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잘 해결될 거요.”
사라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덟 시에 저녁 식사를 보내라고 말해 놓았으니, 이제 30분 정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오. 급한 이야기라니, 무슨 얘긴지 말해보지.”
허(虛)를 찔린 사라는 가까스로 그의 강철 같은 잿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혼했으면 해요, 스티브.”
조용히 앉아서 사라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방안에 꽉 차 있던 긴장감이 더한층 고조된 것같이 느껴졌다. “왜?”
마침내 입을 연 그를, 사라는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런 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짐작이 갈 텐데요?”
“짐작은 가지만, 당신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듣고 싶군.”
사라는 어깨를 추슬렀다.
“재혼하려구요.”
“아아, 그렇군.”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컵으로 눈길을 떨구더니, 단숨에 들이켜고는 두 잔째를 따르려고 일어섰다.
“상대는 누구지?”
“폴이란 사람이에요, 폴 켄튼말이에요.”
“우선 축하해.”
비꼬는 말투고 계속했다.
“하지만 신혼여행은 아직 이르지 않을까?”
사라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우리는 사업 때문에 와 있는 거예요. 개인적인 일로 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 기회를 이용해서 당신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일석이조라는 뜻이군 그래?”
그는 사라 쪽으로 돌아서서 바 스탠드에 기대섰다. 셔츠의 깃에 살짝 닿을까말까 할 정도 길이의 검은머리가 뒤에 있는 거울에 비쳐졌다. 사라가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던 저 윤기 있는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의 자유예요, 스티브.”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조수처럼 밀려드는 추억에 목구멍이 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변호사에게 맡겨도 되겠지만 내가 직접 와서 설명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죠.”
“고맙군.”
그는 쌀쌀하게 말했다.
“당신의 온정에 감사하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깨끗하게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폴이 그랬어요.”
“아주 훌륭한 남성인가보군.”
“네에, 훌륭한 사람이죠. 당신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엔 별로 익숙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당신에 대한 내 태도만을 보고 나의 대인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그만둬.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게 내 탓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 탓이었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어서 이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사라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그의 턱이 경련으로 일그러졌다.
“많이 컸군, 사라- 적어도 표면만은. 그런데 속내용은 어떨까. 켄튼이 고생하면 불쌍하거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사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건 대체 무슨 뜻이죠?”
“별다른 뜻은 없어. 다만 열여덟 살 때의 당신의 정신 상태는 실로 불안정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야.”
“저하고 결혼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사라가 씁쓸하게 말하자, 그의 입가가 약간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 그 순진함과 아름다움의 그늘에 숨겨져 있던 미숙함을, 나는 보고도 못 본 체했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결혼만 하면 당신이 어른이 되리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고.”
그는 갑자기 초조해져서 말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모두 쓸데없는 일이야.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사랑을 하는 일 자체에 정신이 없었을 뿐이지.”
“그리고 당신은, 사랑을 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는 일에 정신이 없었죠….”
“그랬을지도 모르지. 당신을 보면 어떤 남자라도 유혹을 느꼈을 거야-젊고 아름답고 순진한 데다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육체의 소유자였으니까.”
천천히 사라를 바라보고 말했다.
“예전에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더 성숙해졌는걸. 당신의 몸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사나이를 다루는 법을 충분히 터득한 자신 만만한 태도거든-침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말이지!”
팔걸이를 꼭 붙잡고 앉아 있던 사라의 손가락의 관절이 새하얗게 됐다.
“옛날부터 당신은 갖다 붙이는 데 선수였죠. 여기까지 와서 당신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생각했던 내가 정말 바보였어요!”
그렇게 말을 해버리고 저려 오는 손발에 억지로 힘을 주며 일어섰다.
“준비해 주신 만찬은 사양하겠습니다. 차라리 굶어죽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만약에 다른 사람들처럼 진지하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마음이 있으시면 연락해 주세요, 이번 주 내내 크로스윈즈에 있을 테니까요. 그것이 싫다면 정식 서류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시면 될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 같은 태도라니,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오?”
그가 물었다.
“5년만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나를 놀라게 해놓고, 그러고는 마치 댄스 파트너를 갈아치우듯 가벼운 말투로 이혼 얘기를 꺼내면,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스티브는 고개를 흔들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황송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는 안 될걸. 이혼해 주길 원한다면 그 이유를 천천히 시간을 내서 내게 설명해야 하겠지.”
약간 노기가 가신 듯한 얼굴로 사라는 그를 보았다.
“이제까지의 5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라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렇지만, 적어도 당신은 그동안에 어른이 됐어. 이젠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라.”
“착각했던 건 우리의 결혼이었죠.”
사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엔 틀림없어요. 폴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아주 비슷한 점이 많아요.”
“그렇다면 왜 함께 오지 않았지?”
“아까 말했잖아요. 레신튼 씨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라고.”
“연기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레신튼은 아무데로도 도망가지 않아.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폴은 사업 제일주의자인가?”
“저의 폴이라고 하지 마세요!”
사라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괜찮지 뭘 그래. 폴은 당신의 것 아니야? 그렇지만, 언젠가 당신은 남편을 독점할 수 없으면 싫다고 했었는데.”
“남편을 다른 여성과 공유하는 건 용서할 수 없지만 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요.”
“그건 최근에 몸에 익힌 생각 같군. 내가 일에 바빴을 땐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는데.”
“바쁠 때는 누구에게 맡겼으면 좋았을 거예요.”
“남에게 맡기는 건 딱 질색이거든. 이름뿐인 사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 호텔을 운영하는 게 내가 원하는 바라구.”
“엘자는 당신의 사업 제일주의를 잘 이해해 주었겠군요.”
사라는 방안을 둘러보고 나서 노골적으로 꽃꽂이 위에 눈길을 멈추었다.
“그녀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죠?”
그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엘자가 여기 있다고 생각했군 그래? 어쩐지 아무런 소식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고 생각했지. 여전히 소심하고 의심이 많군 그래.”
“의심받을 일을 하는 당신이 나쁜 거예요. 엘자와 5년 동안이나 계속될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죠. 그녀에게도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현재 당신의 애인 역을 하고 있는 건 누구죠?”
스티브는 오랫동안 사라를 쳐다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적어도 당신은 대단히 상상력이 풍부해졌군. 하지만 만약에 내가 애인을 둔다면- 이곳에 살게 하지는 않지.”
“참, 깜빡 잊고 있었군요, 캐버노우는 일류 호텔이라는 걸. 종업원에게 허락되지 않는 특권을 사장이 남용할 수는 없겠죠.”
그의 눈에 번득이는 위험신호를 무시하고 사라는 계속했다.
“모두 위선자투성이에요. 이 호텔에 부부랍시고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진짜는 절반도 안 될걸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일일이 결혼 증명서를 보이라고 할까?”
화가 난 투로 말했다.
“나를 해치우기 위해서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건 그만둬. 당신이 아주 훌륭해졌다고 막 생각하기 시작한 참인데….”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저녁 식사가 온 모양이군.”
“이젠 가겠어요.”
“아니, 천천히 하고 가지.”
그는 나가려고 하는 사라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당신이 좋아했던 캐버노우 스페셜을 주문해 놓았지. 롭스터야. 기억하고 있겠지?”
웨이터 중의 한 사람은 음식을 늘어놓은, 히터가 달린 왜건을 밀고, 또 한 사람은 방안에 있는 테이블 위에 새하얀 테이블클로드를 씌웠다. 지금 입씨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라는 입술을 깨물고 스티브의 야유섞인 눈길을 받고 있었다.
“네에,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의 기호도 많이 바뀐 걸요. 당신이 모르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는 어깨를 추슬렀다.
“그럼 뭐 다른 것이라도…”
“아니오, 괜찮아요.”
왜건 담당의 웨이터가 뒤를 돌아보자, 사라는 서둘러 대답했다.
“롭스터를 먹겠어요.”
스티브가 다가와서, 사라가 낮은 테이블에 놓은 컵을 집어 들었다.
“엘리자베드를 마시고 싶지 않아?”
사라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 무렵 유행했던 칵테일 마르그리트의 이름을 잘못 불렀던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모두가 와아하고 웃어서 몹시 부끄러웠었지만, 그들은 달리 사라에게 악의가 있어서 웃은 것은 아니었다. 사라가 너무 젊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는 스티브가 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융화해 있었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경험을 쌓지도 못한 채 이 플로리다를 떠나가 버린 것이었다.
“지금 만들어 줄게.”
그가 경쾌하게 말했다.
스티브가 칵테일을 만들고, 웨이터들이 식탁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사라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웨이터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사라는 나이가 약간 지긋한 웨이터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상대방도 사라가 누군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주방으로 돌아가면 당장에 소문이 나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다. 아니, 벌써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환수가 몇 시간 전에 이미 사라가 찾아온 것을 알고 있으며, 소문을 퍼뜨리기엔 교환대만큼 편리한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손이 어색하던 차에 사라는, 스티브가 건네 준 컵에 구원받은 것처럼 입을 댔다. 그 향기가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사라를 아주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그가 지그시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예전의 추억이 솟아올랐지만, 간신히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트리플섹을 사가야지. 저쪽에선 웬만해선 손에 넣기 힘들어서요.”
“그 외에도 손에 넣기 힘든 것은 얼마든지 있지-햇빛도 그렇지? 일광욕을 하고 돌아가지.”
“지금 영국은 겨울인 걸요.”
변명을 했다.
“볕에 그을려도 곧 하얗게 될 거예요. 아시면서…”
“영국엔 꽤 적조했군. 간혹 갔다 해도 기껏해야 2, 3일밖에 머무르지 않았으니까.”
사라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최근에 오셨나요?”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최근이 아니지. 약 일년 반쯤 되었을 거야. 당신 아버님을 만났었지. 얘기를 듣지 못했소?”
사라는 양미간을 모았다.
“집으로 오셨었어요?”
“아니, 내가 투숙하고 있던 런던의 호텔에서 만났지. 그때, 당신이 런던에 있다는 얘긴 못 들었어.”
“그 무렵엔 다른 곳에 있었어요. 런던에 온 것은 1년 전이에요.”
사라는 뭔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곧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아빠가 당신을 만나러 가셨죠?”
“당신이 아까 말한 것과 같은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지. 단 이유는 달랐지만 말이야.”
“그런 일을 할 권리는 없는데.”
“하지만 아버님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어. 당신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거지.”
“하지만 당신은 동의하지 않았군요.”
“사람을 사이에 넣고 한 이야기였으니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던 두 사람은 일을 끝내고 나가는 웨이터들의 뒷모습에 눈길을 보내며 입을 다물었다.
도어가 닫히자 사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제게 연락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이 절대로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고 말씀하시더군. 나는 당신의 일생을 망쳐 버린 미운 녀석이라고 말이야.”
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 무렵엔 아직 켄튼을 알지 못했었단 말이군?”
“그래요.”
“언제 만났지?”
“약 반년 전이죠, 회장에게 고용되고 나서니까요.”
사라는 스티브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폴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어요. 저는 이제 흥분하기 쉬운 십대가 아니니까요.”
“십대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 앞의 말은 어떻지?”
그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식사를 할까, 그 컵을 갖고 오지. 와인은 롭스터를 먹을 때 마시고.”
서로가 감정적인 화제는 가능하면 피하느라고 애쓰는데도 왠지 어색한 식사였다. 사라가 앉아 있는 곳에서는 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바깥 경치가 내다보였다. 은빛 물거품을 밀어내고 있는 어두운 바다가, 휘황한 불빛을 자랑하며 커다란 배가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것이 보인다. 저녁 식사도 하고 춤도 출 수 있는 관광선인가 보다.
언제였던가, 스티브와 함께 타보고 싶다고 말하자, 마음이 안 내킨다고 거절당한 일이 생각났다. 그것도 두 사람의 사이가 식기 시작하는 실마리가 됐다.
“예전엔 자주 발코니에서 식사를 했죠.”
“11월엔 밖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지, 시원하다 못해 추웠으니까.”
사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플로리다의 주민들이 춥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여기는 가장 추울 때라도 15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 걸요.”
“25도의 온도에 익숙한 사람에겐 15도는 서늘하게 느껴지지. 모든 일은 비교하는 데 달린 거야. 항상 내가 그렇게 말했지 않아?”
“당신은 꽤 많은 말을 했었죠.”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
그는 테이블 너머로 사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신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
사라는 거의 손도 안 댄 접시를 슬쩍 밀어내려고 했다. 그 어색한 행동 때문에 테이블보가 밀려 지금 막 찰랑찰랑하게 부어 놓은 와인 글래스가 기울어지면서 사라의 무릎으로 왈칵 쏟아졌다.
“흰 것이어서 다행이군.”
황급히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사라를 보고 스티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전에 내 무릎에 붉은 와인을 쏟아 부었었지.”
“전 워낙 둔하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서 옛날 일들에 대해 일일이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침착성을 읽어버리면 실수를 저지르는 버릇이 있지.”
스티브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하고 일어섰다.
“저쪽에 가서 말리고 오지. 침실이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도어 뒤에 로브가 걸려 있을 테니까.”
시라가 그의 눈을 쳐다보자,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신과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싸늘하게 식어 버린 사이니까.”
“걱정 따윈 하지 않아요.”
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 드레스를 클리닝부로 보내면 모두들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없지. 에어 컨디셔너를 온풍으로 바꿔서 당신이 말리면 되잖아? 난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사라는 달리 별다른 방법이 없어 결국 그가 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드레스의 앞면 전체가 흠뻑 젖었으므로 별 수 없었다. 스티브의 침실은 아주 남성적이었다. 곤색을 주로 하여 군데군데 황금색을 섞고, 장식 같은 것은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아까 한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하고는 전혀 인연이 먼 방이었다.
흰 타월지의 로브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남성용 콜로뉴의 향기. 너무 길어서 허리띠를 매서 될 수 있는 대로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게 했다. 슬립까지도 젖어서 드레스와 같이 옷걸이에 걸어서 의자 뒤에 걸고, 온풍 스위치를 틀었다.
옷장 속에 스티브의 양복이 질서 있게 한 줄로 줄지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가 끼워진 서랍 속에는 와이셔츠며 언더웨어가 꽉 차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지난날 사라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장을 가득히 채울 사이도 없이 사라는 떠나 버렸다. 텅 빈 장속에는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날 사라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을 만큼.
2
5년 전의 어느 아침의 일이었다. 앤 레이너의 거실에 있던 사라는 앤의 남편인 빌을 따라 들어온 남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스티브는 미국에서 온 친구야. 이쪽은 사라 워터포드, 이웃에 살고 있죠.”
앤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
미소 짓는 그를 보자 사라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여어, 빌이 <미운 오리새끼>라고 한 것은 당신 얘기는 아니겠죠!”
사라는 밝게 웃고는 빌 쪽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빌은 제가 이를 교정하고 있던 열두 살 때의 일을 잘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렵엔 아주 친절했단 말이에요.”
“지금도 친절히 해줄 수 있지.”
빌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라만 좋다면 말이야.”
우스워 못 참겠다는 듯이 앤이 밝은 표정으로 놀려댔다.
“그런 말을 해놓고, 만약에 사라가 정말로 달려들면 도망칠 게 뻔하면서.”
그는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나를 너무 깔보지 않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세 사람의 주고받는 대화를 재미있게 듣고 있던 스티브가 사라 쪽을 보며 물었다.
“언제나 이런 투인가요?”
“그래요. 영국에선 신뢰와 애정을 이런 식으로 나타내죠.”
“당신은 어린데도 독설가(毒舌家)로군요.”
그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두 달 전에 이미 성년이 됐는걸요.”
사라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몇 살이죠?”
빌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하고는 상관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사라. 어린 여자애 하나쯤은 통째로 삼켜 버릴 수 있는 실력가니까 말이야.”
“잘 됐군요. 좋은 상대를 찾아 드리죠.”
사라는 스티브의 잿빛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금발의 아가씨와 갈색 머리의 아가씨 중 어느 쪽이 좋으세요?”
“현재는 금발 쪽에 끌리는데.”
그는 대리석의 벽난로에 한쪽 팔을 짚고 미소를 지었다.
“말솜씨가 굉장하군.”
“연습을 했기 때문이죠. 달리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사라는 말했다.
스티브 마스터스 같은 남자가 사라의 세계에 나타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나이는 30세 가량일까? 아주 섹시해 보였다. 흥미진진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순수한 미국인. 어렸을 때의 소꿉동무인 사내아이들과는 달리 스티브는 세상일에 아주 능숙한 어른같이 보였다.
“미국 어디에서 오셨어요?”
사라가 물었다.
“남부, 아니면 북부?”
“남부요- 플로리다 주의 세인트피터즈버그. 나는 절반만 미국인이죠, 어머니가 영국인이니까. 이 근처의 루이스립 출신이죠.”
“런던의 아주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군요.”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추슬렀다.
“미국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바로 옆이나 다름없지, 이렇게 작은 섬이니까 말이오.”
“하지만 역사가 오랜 섬이에요.”
“그건 확실해. 수세식 설비가 고색 창연하더군.”
앤이 빙그레 웃었다.
“하수도가 또 막혀 버렸거든. 빌이 집에 없어서 스티브가 반나절이나 걸려서 고쳐 주었어.”
“그런 경험은 아마 장래에 필요할 거예요.”
사라가 말했다.
“만약에 필요가 있으면 당신에게 알리지.”
그는 미소를 띠고 사라를 바라보았다.
“어디에 근무하고 있지요?”
“조그만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떤 일?”
“비서.”
사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건실한 일이지만 따분해요.”
“근무처를 바꾸면 되잖소.”
“생각중이에요. 1년 내내 그 일만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은 취직자리가 많겠죠? 어디든 좋은 일자리를 구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아, 그렇게 하죠. 마침 프런트 보좌역을 구하고 있던 참이거든요. 어디, 해볼 용의가 있어요?”
“스티브는 호텔 경영자야.”
사라가 물어 보기도 전에 앤이 끼어들었다.
“스티브, 사라를 유혹하지 마세요.”
“유혹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소.”
사라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스티브는 미소 지었다.
“오늘 밤 앤과 빌을 식사에 초대했는데, 당신도 함께 오지 않겠소? 만약 다른 약속이 없다면…”
“약속 같은 건 없어요.”
그렇게 대답해 놓고 사라는 너무 선뜻 그의 말에 응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얼른 덧붙였다.
“집에서 머리나 감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죠, 뭐.”
“맞았어.”
그는 앤 쪽을 보았다.
“이제 네 사람이 됐으니 친구에게 전화를 걸 필요가 없게 됐군.”
“그렇군요.”
앤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스티브의 상대로 누군가 사라 이외의 다른 여자를 초대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돌아오는 시간이 꽤 늦어질 거야. 너의 엄마가 걱정하실 걸.”
“우리 엄마는 지금도 내가 아홉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하셔.”
사라는 맥이 빠지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아직도 나를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가서 안심하실 수 있게 설명하면 어떨까?”
스티브가 아주 간단한 일처럼 말했다.
사라는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해서 손해날 건 없잖소.”
그는 등을 펴고 사라가 앉아 있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가지.”
“너하고 아주 잘 어울리겠어, 사라.”
빌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킥킥 웃어댔다.
“체념하고 항복하지 그래.”
사라는 잠시 뚫어지게 스티브를 쳐다보더니 자기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에 맡겼다.
“미국서 온 손님을 만나면 엄마가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야.”
숨이 찬 듯이 말했다.
“아빠도요.”
텅 빈 옷장이 또다시 사라의 시야에 들어왔다. 닫혀진 도어에 기대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사라의 양친이 스티브에 대해서 비상한 호기심을 나타냈던 것을 보면, 이 큰 키의 미국인이 모두의 생활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서로 질세라 입씨름을 하고 있는 스티브와 사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아주 불안해 보였다. 그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양친은 처음부터 말했다. 나이가 많다, 배경이 너무 다르다, 사라의 세계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졌다는 둥….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던 것이 아니라, 사라가 그에 비해서 너무 어렸던 것이다.
네 사람은 최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갔다. 예전에는 지하실이었던 낡은 방을 개조해서 객실로 만들어, 댄스도 할 수 있고 플로어 쇼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식사는 훌륭했으나 사라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사라는 생일 축하 파티에 입었던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깃에서부터 옷자락 끝까지 아름답게 그려진 젊고 아름다운 몸의 곡선에서 스티브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사라는 자신감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사라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은 눈초리로, 때때로 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온몸에 받고 있는 사라에게 질투를 느낄 앤은 아니니, 스티브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사라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멋진 흥분에 쌓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행중인 스티브가 얼마 안 있어 이곳을 떠나갈 것을 생각한다면, 앤이 조마조마해 할 필요는 없을 텐데도.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자고 사라는 생각했다. 앞으로의 일은 생각지 말고 이 남자와 함께 현재의 일만은 즐기자.
“즐거워?”
쇼가 끝난 뒤에 사라하고 춤을 추면서 스티브가 속삭였다.
“당신의 온몸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군.”
사라는 주위의 커플들처럼 그의 목에 양팔을 감으면서 그를 쳐다보고 미소 지었다. 허리에 가볍게 놓인 그의 손을 느끼면서 물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시겠어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그의 잿빛 눈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아요?”
“여기에 있는 여성 중에서 당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잖아? 어느 남자나 나를 선망의 눈으로 보고 있어.”
“아부를 잘 하시는군요. 하지만 추켜세워지는 건 아주 좋아해요.”
아까 마신 샴페인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진 사라는 들뜬 기분으로 계속 지껄여 댔다.
“당신의 칭찬도, 당신도, 당신하고 춤추는 것도 모두 아주 좋아요. 하지만 왜 이렇게 떨어져서 춰야 하죠? 좀 더 다가서면 안 돼요?”
“지금의 당신의 무드를 보면,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게 제일 안전해.”
사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건 재미없어요.”
사라는 그의 손을 잡아서 자기 등에 꼭 붙이고 다시 또 그의 목덜미에 양팔을 감았다.
“자, 이렇게 하는 게 훨씬 좋잖아요?”
그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사라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허니, 너무 들뜨면 후회하게 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멋지지 않아요? 누구나 평생에 한번은 후회할 만한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는 웃으면서 세차게 사라를 끌어당겨 손끝으로 가볍게 등을 어루만졌다.
“누군가 당신의 엉덩이를 두들겨 줘야 하겠군. 다른 사람들 눈만 없다면 내가 그 역할을 담당하겠지만.”
“아이 무서워라.”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그렇지만 전 이젠 엉덩이를 맞을 만큼 어리지는 않은데요.”
스티브는 사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사라의 잿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떠돌고 있었다.
'사라, 너는 마녀야-아름답고 제멋대로이고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마녀란 말이야! 남자가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너에게 빠져드는 것을 재미가 나서 지켜보고 있단 말이야!'
그의 팔에 안겨 있는 기쁨을 마음속 깊이 만끽하면서 사라는 꿈꾸듯이 그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만 열중해 주신다면 만족이에요, 스티브. 정말 저를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신음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
“뭐죠?”
아주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대답했다.
“이젠 장난을 그만두지 않으면 춤추는 것을 중지할 거야.”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를 쳐다보며 사라는 순진해 보이게 입술을 오므렸다.
“그런 입술을 하는 게 아니야. 키스하고 싶어지잖아.”
키스해 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댄스홀 한가운데선 안 되겠지,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모두 쳐다볼 테니까.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앤과 그의 어깨 너머로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사라는 약간 긴장했다.
“우리는 감시받고 있는 거예요.”
기분이 나빠진 사라는 투정을 했다.
“앤은 당신을 믿지 않는 모양이죠, 스티브?”
“당신을 근심하고 있는 거야. 무리도 아니지.”
사라의 관자놀이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스티브는 사라를 바짝 끌어안았다.
“당신이 좀 더 어른스럽다면 대하기도 쉽고 이런 장난삼아 하는 짓도 못하게 할 텐데.”
“장난이 아니에요, 스티브!”
흥분으로 사라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런 기분은 평생 처음인 걸요.”
잠시 후에 그는 입을 열었다.
“거기다가 기분파이기도 하군. 방금 만난 사내에게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아이, 괜찮아요.”
샴페인 때문에 사리분별이 없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우린 조금 전에 만난 게 아니라 벌써 몇 시간이나 됐는걸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난 가슴이 두근거렸는데요.”
그는 사라의 오똑 솟은 조그만 코 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자아, 당신을 안전지대로 돌려보내 주지, 적어도 지금은 말이야.”
테이블로 돌아온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본 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빌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즐겁게 놀고 왔나, 자네들?”
아직 서른셋밖에 안 됐는데도, 빌은 연장자인 양 물었다.
“이렇게 모두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아주 좋군.”
“자네도 가끔 해보는 것도 괜찮지.”
라고 말하며 스티브가 앤을 향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 함께 도망갈까?”
“오늘밤은 그만두겠어요.”
앤이 대답했다.
“하지만 댄스라면 기꺼이 응하죠.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까.”
의자에 앉은 사라는, 스티브의 팔에 안겨 춤추고 있는 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천하태평인 빌도 사라의 눈초리를 알아차렸다.
“어이, 사라! 흥분하면 안 돼. 그는 네 상대가 아니야.”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빌 쪽으로 돌아앉으며 힐문했다.
“겨우 12년 정도를 가지고 그러는 거예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꽤 큰 차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잠자코 있어요!”
깜짝 놀라는 그의 표정을 보고 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빌. 말을 함부로 해서…”
“괜찮아. 내 충고를 듣고 싶지 않다면.”
빌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추슬렀다.
“그는 뺑소니 솜씨가 민첩한 걸로 유명하거든. 너하고 깊은 관계를 맺기 전에 도망가 버릴 게 확실해.”
“그하고는 어디서 만났어요?”
빌의 의견을 무시하고 물었다.
“여기서, 아니면 미국에서?”
“우리들이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했을 때 만났지. 세인트피터즈버그에 가서, 캐버노우에서 2, 3일 묵었었지-그게 스티브의 호텔이었어. 어느 날 밤, 바에서 우연히 만나 다음날은 그의 방에서 만찬을 했었지. 그는 영국 사람을 좋아해. 자기의 반쪽은 영국인이니까. 그의 유머는, 영국풍과 미국풍 반반씩이지.”
“어째서 그가 뺑소니 솜씨가 빠르다는 거지요?”
“성격이야. 뺑소니 솜씨가 능숙하기 때문에 저 나이까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나 같은 보통 남자는 대개 도망칠 곳을 잃어버리거든.”
사라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앤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와 만난 건 그때뿐이에요?”
“다음해, 뉴욕에서 또 우연히 그를 만났지. 이번엔 우리가 식사에 초대했지.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서로 크리스마스카드도 보내고 하며 죽 교제를 계속하고 있지. 물론 그는 앤에게 끌려서 꽤 끈기 있게 쫓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앤은 내 쪽이 안전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재미도 없고 돈도 없지만 안전하다고 말이야.”
“어마, 빌!”
사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샴페인이 남아 있어요?”
빈 잔을 내밀며 물었다.
“어차피 스티브가 한턱 내는 거니까, 마시는 김에 한 병 주문하지.”
마지막 한 방울을 잔에 따르며 빌이 말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사라는 아주 들떠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빌과 앤을 뒷좌석에 밀어넣고 자기는 운전석에 앉은 스티브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스티브는 신중하게 운전했다. 네 사람 중 술이 안 취한 사람은 샴페인을 한 잔만 마신 스티브뿐이었다. 레이너가(家) 현관 앞에 차를 댄 스티브는 뜰을 가로질러 사라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사라의 양친의 침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미소 지었다.
“열다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취급받고 있군!”
사라는 불만스럽게 외쳤다.
“그런 말을 하면 정말 열다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들려요.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사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하시는 거야, 외동딸이니까.”
사라는 태도를 고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라는 3월의 차가운 달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는 그의 떡 벌어진 어깨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저를 응석받이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응석받이 아가씨.”
그가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제멋대로 살아온 모양이군. 누군가가 당신에게 기강을 세워 줄 필요가 있어.”
“그래서 무엇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거죠?”
그의 눈을 쳐다본 사라의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쳤다.
“당신이 기강을 세워 줄 거예요, 스티브?”
그는 망설이는 듯 기묘한 표정으로 얼마 동안 사라를 지켜보다가, 밝은 색의 금발로 둘러싸인 것 같은 사라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듯이 하고 말했다.
“내일 하루밖에 시간이 없어.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 기다리고 있거든.”
“런던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파리야.”
“함께 데려가 줘요.”
샴페인의 힘을 빌어 겁 없이 말했다.
“저, 아직 파리를 못 봤거든요.”
그는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건 굉장한 착안이군!”
“그러면 데리고 가 주시겠어요?”
“굉장한 착안이라고 말했을 뿐이야.”
그는 손끝으로 사라의 뺨에서 코로, 그리고 입가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입맞춤은 처음에는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볍게 사라의 입술을 간질이더니, 점점 격해지다가 이윽고 사라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사라는 그의 양팔에 꼭 안겨서 포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영원히 계속되면 좋겠다고 바라던 입맞춤이 끝나자 사라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따뜻하고 억센 팔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의 팔에 매달려 힘찬 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랑해요.”
그 말을 듣더니 그의 움직임이 딱 멈추어 버렸다. 이윽고 그는 살며시 사라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런 말을 하면 못 써. 와인 탓이야, 게다가 수면부족일 테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제가 싫은 거죠?”
이젠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상관 않고 계속했다.
“내가 싫어요, 스티브?”
“좋아해.”
가볍게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뜻과는 전연 다른지 몰라도, 아주 좋아해.”
그는 사라에게서 몸을 떼고, 더 이상 깊이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자아, 들어가라니까!”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죠?”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하자, 스티브는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무쪼록 좋은 꿈을 꾸시도록, 귀여운 사라.”
기쁨이 온몸을 맴돌아 달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사라는 앞으로 몸을 내밀고 발끝으로 서서 스티브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 꿈을 꿀 거예요. 온밤 내내…”
다음날 오후 늦게야 사라는 간신히 스티브를 만날 수 있었다. 방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찬바람을 부는 것도 관계치 않고 강변도로로 산책을 나갔는데, 문득 저쪽을 보니, 스티브가 어젯밤과 같은 검은 빛이 도는 오버코트를 입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흐린 날씨 탓인지 볕에 그을린 피부가 약간 파르스름하게 보였다.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한 일요일 오후였다.
“당신 어머님이 여길 찾아보라고 말씀하시더군. 마음에 드는 산책길인 모양이지?”
“여기라면 혼자가 될 수 있거든요.”
옆으로 다가온 스티브의 존재에 신경이 몹시 쓰였지만 그 쪽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혼자 있고 싶어?”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니까 지금 말해 버리겠어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계속했다.
“어젯밤엔 어리석은 짓을 해서 미안해요. 마시지도 못하는 샴페인을 마셔서 흥분했던 거예요.”
“나도 흥분했지만, 샴페인 탓만은 아니었지.”
그렇게 말하고 스티브는 걸음을 멈추더니, 사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자기 쪽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정말 샴페인 탓만이었나, 사라를 흥분시킨 것이?”
잠시 동안 생각하고 나서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일이 없으니까요.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 당신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금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막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일 아침에 떠나. 그렇지만 일주일 후엔 돌아오겠어. 그러면 둘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많은 얘기를 하며 서로 좀 더 자세히 알고 난 뒤에, 그때 또 당신의 생각을 듣기로 하지. 괜찮겠지?”
“네, 좋아요!”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사라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정말 돌아와 주시는 거죠?”
그의 입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당신이 돌아오지 말라고 한 대도 꼭 돌아올 거야.”
만난 지 꼭 한 달 뒤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정중한 정식 결혼식은 외동딸을 위해 워터포드 부부가 특별히 계획한 것이었다. 사라를 위해서 두 사람은 시종 미소를 띠었지만 그 미소는 딱딱했고, 마음속의 공허감은 어떻게도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출발 직전이 되어서야, 사라는 처음으로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런던의 호텔에서 일박하고 나서, 다음날 아침엔 서인도 제도로 가서 발바도스에서 플로리다에 있는 두 사람의 새 집으로 직행할 예정이었다. 스티브는 사라의 양친을 가을에 플로리다로 초대하기로 했지만, 그것은 아직 몇 개월이나 뒤의 일이었다. 18년 동안을 보낸 내 집을 떠나는 택시 안에서 사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아, 기운을 내요, 마스터스 부인.”
사라의 집과 전송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스티브가 상냥하게 말했다. 사라의 손을 잡고, 2주일 전에 보내 준 커다란 다이아 반지와 나란히 낀, 굵은 황금의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으로 당신은 나의 사람이 됐으니까, 눈물을 씻고 웃는 얼굴을 보여 줘. 혹시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사라는 그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 황급히 대답했다.
“미스 워터포드에서 마스터스 부인으로 변한 것에 아직 익숙지 못한 것뿐이에요.”
“결혼을 했다는 실감이 아직 안 날 테지.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그는 사라의 손을 꼭 잡고, 뺨을 붉히고 있는 사라를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지금의 사라가 나하고 파리로 도망가자고 졸라대던 아가씨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걸.”
“어차피 데리고 가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졸라 댄 거예요.”
뒷좌석과 운전석 사이에 칸막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사라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되고 싶어요, 스티브.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낮게 웃었다.
“실망할 리가 없지, 우리 꼬마 마녀!”
호텔에는 가운데 문이 있는 두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지 하룻밤을 위해서는 너무나 호화스러운 것 같았지만 스티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먼저 목욕을 하고 식사가 나오는 것을 준비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라는 그 사이에 입을 옷을 골랐다. 신혼여행용으로 입고 온 노란 모직 슈트는 정리해 두기로 했다. 내일은 간편한 차림을 하기로 하자, 긴 여행이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옷차림이 좋을 거라고 그가 말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간편한 차림이 좋을는지는 모르지만 로맨틱한 기분이 없어져 버린다.
로브를 걸친 그가 맨발로 욕실에서 나왔다.
“당신 차례요.”
갈아입을 옷을 손에 들고 조심조심 옆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사라를 그가 팔을 뻗어 끌어당겼다. 사라는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상냥함과 이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곧 익숙해질 거야. 난 당신이 오늘 아침 결혼했을 때와 같은 남자야.”
사라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손을 놓았다.
“자아, 어서 준비하고 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아름다운 아내를 자랑하고 싶단 말이야.”
그날 밤 사라는 부드럽게 물결치듯 몸에 감기는 호박색(琥珀色) 드레스를 입고, 핸드백과 세트로 황금빛 키드로 된 샌들을 신었다. 뒤를 대모(玳瑁) 빗핀을 꽂은 머리카락이 날아갈 듯이 가볍게 물결치며 양쪽 어깨로 흘러내렸다. 두 사람은 레스토랑 안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스티브의 탄탄하고 매력적인 몸매를 사라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남편- 아직 귀에는 익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멋진 이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영원히 맺어진 사이인 것이다.
“즐거워?”
춤을 추면서 그가 물었다.
사라는 웃었다.
“처음 춤을 추었을 때도 당신은 그렇게 물었어요, 똑같은 말투로 말이에요.”
“아니야, 틀려.”
그는 조용히 부정했다.
“그때는 우리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몰랐었지. 5주일 전에 영국에 왔을 때는 결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결혼해서 부부 동반으로 미국에 돌아가니, 모두들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를 복 많은 녀석이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어. 남자들은 모두 부러워할 테고, 여자들은….”
사라로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이 그의 눈에 떠올랐다.
“생각이 다르겠지.”
희미한 불안이 사라의 가슴 한구석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미지의 나라, 그리고 미지의 사람들. 스티브에게는 고향이지만 사라에게는 이국땅인 것이다. 아무쪼록 모두 호감을 가지고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스티브의 아내로서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라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스티브는 사라의 표정이 갑자기 변한 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모두 당신에게 사랑을 느낄 게 틀림없어.”
“당신처럼?”
“나는 다르지.”
사라는 스티브에게 꼭 안겼다.
“당신은 나의 것이란 말이야.”
사라의 머리에 뺨을 대고 있는 스티브의 손이 등에 따뜻하게 느껴졌다.
“슬슬 가봐야 될 시간이야.”
그가 속삭였다.
사라는 잠자코 있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얼마 있으면 이름뿐 아니라 완전히 스티브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받기를 절실히 바라면서도, 한편 어느 정도 겁을 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전혀 경험이 없는 사라가 어떻게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수주일 동안 억제하고 있던 그의 정열을 숙맥인 내가 잘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러나 스티브가 전혀 그러한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사라는 곧 알았다. 그가 바라고 있었던 것은, 그의 애정 표현에 대해서 사라가 순순히 따뜻하게 응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더한층 달콤하고 부드러운 애무로 사라를 감싸주었다. 희열에 잠긴 사라의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는 만족감이 넘쳐흘렀다.
발바도스는 꿈의 섬이었다. 사라는 한번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신혼여행의 제 1주째는 새로 싹튼 기쁨과 행복감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손을 잡고 모래밭에 드러눕거나 수상 스키를 즐기는 스티브의 볕에 탄 근육질의 몸매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사라는 흐뭇해했다. 밤이 되어 둘이서 방으로 돌아와, 그의 격렬한 애무에 몸을 맡기는 것도 기뻤다.
사라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과 같지 않은 스티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옷을 갈아입고 바닷가로 나온 사라는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여자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스티브를 발견했다. 상대방의 뛰어난 미모에 반해서 아주 신이 난 듯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본 것이다. 휴가를 얻어 뉴욕에서 온 모델로, 이름은 겔 스토운웨이라고 그가 소개해 주었다.
돈 많은 보이프렌드를 찾아낼 생각이겠지,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사라가 스티브의 아내라고 듣고 난 상대방의 눈에, 일순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나중에 스티브가 잠시 일어난 사이에, 겔은 이 근처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남성을 함락시킨 사라를 부러워했다. 사라가 현실의 아내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 따위는 겔은 무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후 바닷가로 나갈 때마다 겔이 따라붙었다. 방해가 되어도 말 한마디하지 않는 스티브에 대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라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쁜 사람이에요.”
어느 날 밤, 식사를 하러 갈 준비를 하면서 사라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계속 혼자서 떠들어대잖아요.”
“요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 말이오. 우연히도 내가 좋아하는 화제였거든.”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도 들었다면 무언가 유익한 지식을 얻었으리라고 생각해. 겔은 그 방면엔 아주 훤하더군.”
“그럴 테지요!”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사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마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
무어라고 가벼운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흥분되어서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질투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겠죠?”
그는 미소를 띠고 고개를 저었다.
“단지 요트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오.”
“굉장한 미인하고 말이죠.”
스티브는 사라에게 다가가서 양어깨를 잡고 화장대 거울 쪽으로 향하게 했다. 사라가 입고 있는 하얀 슬립은 그을린 그의 살결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립스틱과 아이섀도우만으로 엷게 화장을 한 얼굴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갈색 눈동자와 허니블론드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어떤 미인도 당신을 따를 수는 없어.”
사라의 어깨로부터 곡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온 그의 손이 허리에서 멈추더니, 그는 무릎을 구부려 사라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이 섬에서 당신이 제일 아름답단 말이야.”
“하지만 스티브.”
사라는 열심히 말했다.
“겔은 당신을 함락시키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녀의 짝사랑일 뿐이지.”
그렇게 속삭이더니 사라를 돌려세워서 양팔로 끌어안고 그는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식사는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
완전히 말라 버린 슬립을 입고 침대 끝에 걸터앉은 사라는 드레스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소한 옛날 일이 이상할 만큼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카리브해에서 보낸 2주일 동안, 사라는 스티브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몸에 익혔다. 그런 것이 신혼여행의 목적인 것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세상에는 완벽한 인간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기인 것이다. 남성의 권리에 대한 스티브의 편견은 다른 남자들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행동이므로, 너그럽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 여자가 같은 견해를 가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티브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명적인 파국을 의미했다.
현관의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침실 안까지 전달돼 왔다. 아마 식사의 뒤치다꺼리를 하러 온 웨이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조용히 노크를 하고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드레스에 손을 뻗었을 때, 옆방에서 새어나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높아진 것 같았다. 뒤로 손을 돌려서 파스너를 채우고 있던 사라의 귀에 도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곧 갈게요.”
하고 대답을 하자, 돌연 도어가 열렸다. 몹시 야유적인 표정으로 서 있는 스티브와 그 뒤에 서 있는 폴을 보자, 사라는 긴장으로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스티브는 미국 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듯 말했다.
“꼬리를 잡힌 모양이오, 허니.”
“지옥에나 떨어지면 좋을걸!”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서 외쳤지만, 스티브의 어깨 너머로 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폴, 저어…”
“설명할 필요는 없어.”
그는 사라의 스커트 앞에 진 커다란 얼굴에 눈길을 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을 오해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란 말이오, 달링.”
그는 사라 뒤에서 더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는 에어 컨디셔너를 손가락질했다.
“냉풍으로 돌리면 어때? 마치 오븐처럼 뜨겁군 그래.”
사라는 드레스의 파스너를 재빨리 채우고는 손을 뒤로 돌려서, 이것 보라는 듯이 최고의 온도의 스위치를 눌렀다.
“지옥의 악마에겐 열풍이 안성맞춤이에요.”
다가오는 사라를 보고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스티브에게 사라는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폴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레신톤이 일찍 가버렸기 때문에 마중 오기로 한 거야.”
“잘했어요, 한시바삐 여길 나가고 싶어요!”
“아직 아무 것도 결말이 나지 않은걸.”
스티브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얘기의 결말 따윈 필요 없어요.”
사라가 내뱉듯이 말했다.
“당신의 협력 없이도 결말을 지을 수 있으니까요!”
“네 협력 없이는 일이 잘 해결되지 않을 텐데.”
그는 양손을 포킷에 집어넣고 서 있었다.
“당신의… 친구도 동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이 옳아.”
폴은 하는 수 없이 인정했다.
“그의 협력 없이는 일이 어렵게 되지.”
스티브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변한 것을 느끼고 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의 계획에 하나하나 방해를 할 작정이군요?”
“내가 그런 일을 할 것 같은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할 만한 짓이지. 당신은 어떤 일이든지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옛날이라면 몰라도…”
그가 어깨를 추슬렀다.
“나도 이젠 많이 달라졌지.”
사라와 폴을 번갈아 보고 있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해졌다.
“주말에 요트를 탈 예정이오. 당신들도 와 준다면, 그때 함께 의논하기로 하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적당치 않은 장소와 시간 같은데…”
그의 차디찬 눈길을 보고 사라는 거기까지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 언제 이야기를 할 것인가는 내게 맡겨 줘. 목요일 오후 세 시요. 차를 보내지.”
폴이 물었다.
“요트의 행선지는?”
“그때의 형편에 따라 정하겠지만, 아마 키웨스트가 될 거요. 그리고, 쉐라톤 호는 범선이 아니라 길이가 18미터나 되는 동력선이라서 다른 손님도 있고 승무원도 있으니까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요.”
“당신의 배요?”
“친구에게서 빌었소. 내 것은 좀 작은 범선이거든. 다른 질문은?”
“이야기를 분명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오.”
폴은 침착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말했다.
“알았소, 참가하죠. 그 밖의 장소에서 만날 수 없다면 할 수 없지.”
폴은 사라의 손을 꼭 잡았다.
“자아, 가지.”
“돌아가는 김에 도어를 닫고 가시오.”
스티브는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크로스윈즈에 도착했다. 폴이 조용히 물었다.
“사라,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내 방으로 오겠소, 아니면 당신 방이 좋겠소?”
“라운지는 안 될까요? 침실에서의 아웅다웅은 하룻밤에 한 번으로 족하니까.”
사라가 농담처럼 말했다.
“하여튼 얘기가 하고 싶단 말이오.”
“더 이상 할말이 없어요. 스티브가 한 말 들었죠? 자기가 편한 대로 일을 처리할 작정인 거예요. 옛날부터 그런 식이었어요.”
폴은 사라의 팔을 잡고 라운지로 들어가 구석에 있는 2인용 의자로 사라를 인도했다.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묻자, 사라는 머리를 저었다.
“피곤해요. 제대로 누워 본 것이 며칠 전이었는지 몰라요.”
런던을 떠난 것이 어제인지 오늘인지 그것조차 똑똑히 생각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죠.”
사라는 한숨을 쉬었다.
“내일은 계속 사업으로 바쁠 거야.”
주저하면서 폴이 물었다.
“사라, 오늘밤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라니요?”
사라가 되물었다.
“드레스를 벗어서 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경위를 알고 싶단 말이야.”
사라가 가볍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절 믿고 계셨던 게 아니군요?”
“아아, 믿고 있지.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스티브란 말이야.”
“오늘밤에 한해서는 그건 억울한 누명이군요. 내가 멍청이처럼 와인을 엎질러 버린 거예요.”
“당신은 평상시 그런 실수를 한 일이 없는데.”
분명히 폴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실수를 한 일은 없었다. 스티브 때문인 것이다. 그 때문에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침착지 못했던 소녀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 침실 안에 있었던 동안 되살아난 수많은 기억… 묻혀져 있던 과거가 되살아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꼭 이혼할 거예요, 폴.”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사라는 단언했다.
“스티브는 혼자서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끝이 깨끗하지 못한 남자로군. 만일에 당신이 일방적으로 수속을 시작한다면, 그는 정말 이의를 제기할 작정일까?”
“일부러 시험해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어떻게든 손해는 보지 않을 테니까요.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 건 나란 말이에요. 별거중일지라도 아내가 어디엔가 있다는 게 그에겐 편리한 게죠, 뭐.”
“사라,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신답지 않아.”
폴은 의기 소침해서 말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
억지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미안해요, 폴. 오늘은 너무나 여러 가지 일이 많았거든요. 내일이 되면, 세상일이 훨씬 다르게 보일 거예요.”
“그렇다면 좋으련만.”
그는 열의가 없는 대답을 했다.
“내일 내가 레신튼과의 회합에 나가 있을 동안 당신은 뭘 하고 지낼 거요?”
“될 수 있는 한, 캐버노우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생각이에요.”
더 이상 진지하게 이야기를 계속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라는 일어섰다.
“이젠 자겠어요.”
사라의 방 앞에서 두 사람은 별로 열의가 없는 키스를 하고 헤어졌다. 방안에 들어와서 핸드백을 가까이에 있는 의자 위로 던져 놓는 순간, 사라는 스토울을 그 호텔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내버려두어도 되겠지. 가지러 갈 생각 따윈 털끝만큼도 없다. 그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스티브하고 단둘이 된다는 것은 이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그의 손에 의해 다시 파헤쳐지는 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3
폴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나가 버렸다. 사라는 번화가로 쇼핑을 갈까 하고 생각했지만, 별로 사고 싶은 것도 없었으며, 너무 덥고 습도가 높아서, 해안으로 가서 독서를 하기로 했다. 하얀 비키니와 세트로 된 재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해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간이침대는 아주 편했고, 책은 좀 따분해서, 아직 어제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사라는 잠이 오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비몽사몽간을 헤매던 사라는 갑자기 피부에 한기가 느껴져 눈을 떴다. 선글라스를 낀 스티브가 커다란 황색 비치 파라솔의 각도를 조절하면서 사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맣게 될 뻔했잖아. 상식이라는 걸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군.”
“그런 것 같네요.”
사라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신은 두 사람 분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하고 싶은 거죠? 누가 캐버노우의 일을 보고 있죠?”
“내가 없어도 얼마 동안은 괜찮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사라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혼여행 때와 같은 비키닌 아니겠지?”
“알맹이 인간도 그때하고는 아주 다른 걸요.”
“그럴까?”
그는 등뒤에 가지고 있던 접는 의자를 폈다.
“함께 앉아도 괜찮겠지?”
“억지 춘향이군요.”
앉아 버린 그를 향해서 냉랭한 말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용건이죠?”
“스토울을 돌려주러 왔지. 프런트에 물어 보니까 당신이 이쪽으로 갔다고 하더군. 수많은 손님의 출입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놈이 보고 있던 것은 당신뿐이었는지?”
“그 따위 일엔 관심 없어요.”
시시각각으로 긴장감이 높아져서 사라는 당장에라도 소리지를 것 같았다. 스티브가 헝겊으로 된 캐쥬얼 슈즈를 신은 발을 아주 친근한 태도로 사라의 의자 끝에 걸쳐놓는 것을 보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무의식적인 행동 같아도 그의 일거일동은 모두 계산을 한 뒤의 행동인 것이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스토울을 가져다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나를 위해서 이렇게 주저앉아 세상일을 이야기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젠 이걸로 끝내죠.”
“아니, 얘기를 하지.”
갑자기 냉랭한 어조가 됐다.
“마침 좋은 기회잖아.”
사라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지금도 이렇게 서로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우린 서로 이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사라가 말했다.
“확실히 그런 면도 있었지. 그렇지만 나는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켄튼은 어젯밤 진정이었나?”
느닷없는 스티브의 말에 뜻을 몰라 사라는 눈을 깜박거렸다.
“진정이라니, 무슨 얘기죠?”
“당신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느냐 하는 말이야.”
“물론 완전히 믿어 주었어요.”
“티끌만큼도 의심을 갖지 않았단 말이지?”
“그래요, 당신이 열심히 의혹의 씨를 뿌렸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사라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스티브는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그런 사내하고 결혼할 생각은 아닐 테지?”
“생각뿐이 아니라 실제로 할 예정인 걸요.”
그를 힐긋 보았으나 그는 무표정했다.
“그런 사내라니, 대체 무슨 의미죠?”
“지나치게 선량하다는 의미지. 비인간적이란 말이야.”
“당신은 인간적이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는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고말고. 그럭저럭이긴 하지만 말이야. 분명히 상황은 좀 틀리지만, 켄튼은 당신이 딴 사내에게 안겨 있는 현장을 본 건 아니니까.”
사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 얘기의 리바이벌인가요? 이미 설명은 했을 텐데?”
“아아, 들었지- 복수가 목적이었다지. 거기다가 고르고 골라서 비트 브렌트였단 말씀이었지?”
“그는 바로 손이 닿는 곳에 있었으니까.”
“그렇고말고! 내가 30분 이상 집을 비울 때마다 그녀석이 나타나서 당신을 위로해 주곤 했겠다.”
“당신이 좀 더 나를 위해 주었으면, 달리 위로해 줄 사람 따윈 필요 없었겠죠.”
사라는 그의 발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양다리를 구부리고 나서 의자에 고쳐 앉았다.
“당신은 언제나 바쁘고, 사방에서 인기였으니까요.”
“보통 회사에 근무하는 남편들보다, 내가 훨씬 당신을 위해 주는 시간이 많았을 텐데.”
“당신이 때때로 옆에 있어 주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죠.”
“전혀라고?”
야유 섞인 어조로 반문했다.
“그토록 기계적으로 당신을 안은 기억은 없는데.”
되살아나려는 기억을 쫓아내며 사라는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럴 테지. 우리가 순조로왔던 것은 침실 안에서 만이었으니까- 특히 당신이 다소 요령을 알고 나서부터는.”
“당신 같은 베테랑에게 지도를 받았으니까 당연할 테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추슬렀다.
“당신은 아주 유망한 학생이었지.”
“하지만 엘자에게는 아무 것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을 테죠, 그녀는 베테랑이었으니까!”
그의 눈은 선글라스 때문에 보이지 않았으나, 턱이 경련을 일으켰다.
“적당히 목소릴 작게 하면 어때? 아니면 바다에 처넣어 머릴 식혀 줄까?”
“해보시지 그래요!”
그렇게 말한 순간 사라는 아차 싶었다. 반항한다고 순순히 물러설 스티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재빨리 일어나더니 선글라스를 의자 위에 던져 놓고 사라를 양팔로 들어 안았다.
“내려 줘요!”
저항해 봐야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모두 보고 있다구요!”
모래톱의 파도가 밀려드는 곳으로 향한 스티브는, 물이 무릎까지 닿는 곳까지 걸어가자 사라를 던져 버리고는 등을 돌려 태연하게 해변 쪽으로 되돌아갔다. 거품 속에서 간신히 떠오른 사라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해변과 반대 쪽으로 향했다. 적당한 데까지 가서 크롤로 헤엄쳐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연습 부족 탓인지 이내 지쳐 버렸다. 해번을 보니, 약 백 미터쯤 온 것을 알았다. 스티브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 사라가 되돌아오는 것을 유유히 기다리고 있었다.
해변으로 올라온 사라에게 주위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의자에서 타월을 집어 몸을 닦는 사라를 보고 그가 물었다.
“이젠 좀 냉정해졌나?”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지극히 냉정했었죠.”
감정을 억제하면서 대답했다.
“먼저 이야기하자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온 해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큰 소리로 이야기하자고는 하지 않았는데.”
“난 큰 소리는 내지 않았어요!”
“설령 큰 목소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영국 사투리는 귀가 따갑거든.”
“그게 제 탓이란 말이에요?”
타월로 머리카락을 닦으면서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슬랙스도 구두도 모두 망가져 버렸으면 시원하겠어요!”
“그런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모래투성이가 돼 버린 젖은 슬랙스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가 말했다.
더 이상 제대로 대화를 계속할 자신이 없어 사라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에게 당할 것이 뻔했다. 타월로 몸을 다 닦고 나서, 비치 파라솔의 각도를 고쳐 햇볕이 잘 쬐게 해놓고 의자 위에 드러누웠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참을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늘 여기에 오신 거죠, 스티브? 스토울 같은 건 아무 때 가져와도 좋았을 텐데.”
그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후련해졌어요?”
“그래.”
그는 일어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젖은 구두에서 모래를 털어냈다.
“요전에 말한 대로 목요일 세시야. 별로 부담은 느끼지 않고 와도 좋을 거야, 마음에 드는 친구들일 테니까.”
“모두 몇 명쯤 오죠?”
“승무원 세 명과 그밖에 초대한 여섯 명- 남녀 세 사람씩. 아주 좋은 밸런스지? 그럼 또.”
그는 인사하는 시늉을 하고는 가버렸다.
사업의 성과에 만족한 폴이 점심 식사에 알맞게 돌아왔다.
“만사 오케이야. 크로스윈즈가 마침내 켄튼 호텔이 되는 거요. 새로운 이미지에 맞게 무언가 새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당신도 하나 생각해 줘요.”
폴은 거기서 말을 끊더니 이상한 듯이 사라를 바라보았다.
“대단히 얌전하군. 오전중에 무얼 하고 있었지?”
“조용한 아침을 보냈어요.”
사라가 말했다.
“오후의 예정은?”
“당신에게 달렸지. 함께 어디로 가볼까?”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디즈니월드에 가지 않겠어요?”
사라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폴이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겠지?”
“아니, 진정이에요.”
이 우울한 기분을 풀어 버리기엔 안성마춤인 곳이다.
“아주 멋진 곳이니까, 틀림없이 당신 마음에도 들 거예요, 폴.”
“미안하지만 난 별론데.”
그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로 가고 싶다면 데려다 주지.”
사라는 더욱더 우울해졌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안 돼요, 꿈의 세계엔 순수한 마음으로 뛰어드는 게 아니면. 스티브는...”
사라는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 둘 다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스티브는 데려다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지?”
폴은 어색한 투로 물었다.
“그는 즐겼나?”
“글쎄, 어땠는지...”
사라는 일어서면서 대답했다.
“자, 가요, 폴. 여기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 봤자 할 일도 없잖아요.”
로비로 내려가자 폴은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프런트로 관광 안내서를 가지러 갔다. 사라는 기다리고 있는 동안 호텔의 매장이라도 둘러보려고 천천히 걷다가, 반대편에서 윈도우를 들여다보고 있던 손님하고 하마터면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
“미안해요.”
사라가 사과했다.
“천만에요.”
그 사람은 사라를 보고 생긋 웃었다.
“아까는 굉장했어요. 그분은 화가 불같이 났더군요.”
바로 옆에까지 와 있던 폴이 이 이야기를 듣고 사라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지? 오늘 아침에 스티브가 여기에 왔었나?”
“네.”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젯밤에 그의 호텔에 두고 온 스토울을 가지고 왔어요.”
“내일 건네 줘도 됐을 텐데.”
“그렇군요.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게죠.”
“아니, 그는 모두 계산하고 찾아온 것이 틀림없어.”
폴은 사라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계속했다.
“아까 저 여자가 하던 말을 자세히 듣고 싶군.”
“스티브하고 싸운 거예요. 화가 치민 나를, 그가 바다에 던졌어요.”
“그런 일을 할 권리가 그에겐 없을 텐데.”
“자기로선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직 그의 아내이니까요.”
“이름뿐인 부부잖아. 게다가 얼마 안 있으면 해결이 될 테고.”
폴이 사라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둘렀다.
“배에서 그가 당신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기만 하면, 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사라는 마침내 결심하고 말했다.
“폴, 스티브에게 전화를 해서, 내일의 뱃놀이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전해 주지 않을래요?”
폴은 사라 쪽으로 돌아섰다.
“이유는?”
핑계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스티브 옆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별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색한 입장이 되는 게 싫어요.”
폴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망설이면서 말했다.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사라. 나도 구태여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스티브가 뒤로 물러설 리도 없을 거야. 당신이 먼저 이혼 이야기를 시작했으니까 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지금 와서 거절하면 또 심술을 부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군요.”
후회할 것이 뻔했지만 일단 굽히고 들어가기로 하고, 사라는 한숨을 쉬었다.
약속한 대로 정각 세 시에 나타난 차는 두 사람을 태우고 세인트피터즈버그의 번화가를 빠져나가 해변가인 마리나에 도착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유려한 유선형의 선체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떠 있는 광경은 황홀하고도 멋이 있었다. 쉐라톤 호는 주위의 선박 중에선 제일 크고, 댄스장으로도 쓸 수 있을 만큼 널따란 뒷갑판에는 빛깔도 선명한 줄무늬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폴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굉장한 배로군. 저것을 주말여행에 빌려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굉장한 친구가 틀림없군요.”
사라도 동의하였으나, 스티브가 모습을 나타내자 몸이 굳어졌다.
“여어.”
그가 허물없이 말을 걸어왔다.
“들어들 가지,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는 대로 출발할 테니까.”
“우리가 일등이에요?”
“아니, 그렇진 않아. 먼저 아래로 가겠어, 아니면 다른 친구들이 올 때까지 여기서 한잔하겠나?”
“아래로 가죠. 그런데 선실은 몇 개나 있죠?”
“세 개. 한 팀에 하나씩 돌아가지는 않으니까, 당신은 웬디하고 한방일 거야.”
그는 앞장서서 갑판에서 층계를 내려가자, 해도선반 앞에 서 있는 사나이를 마이크 라트란드 선장이라고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내부의 설비는 극히 호화로웠다. 중앙부의 객실에는 가죽으로 된 소파와 바가 있고, 두툼한 황백색의 융단에 짙은 갈색의 커튼이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리실과 승무원실이 선수(船首)에, 그리고 손님용 선실과 샤워룸 두 개와 세면소는 선미에 있었다.
세 개의 선실 중 하나에는 이미 사람이 들어 있었다. 스티브가 도어를 열자, 열려진 슈트케이스의 내용물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정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빨간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소개가 끝나자, 웬디는 복잡한 표정으로 사라 쪽을 바라보았다.
25-26세쯤 됐을까, 사라처럼 불만인 모양이었다. 사라와 폴만 오지 않았다면 스티브와 선실을 함께 쓸 수 있었을 테니까. 두 여자를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하다니, 어쩌면 스티브는 이토록 잔인할까!
“당신은 위쪽을 쓰면 되겠지.”
그가 사라에게 말했다. 그리고 폴을 향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의 선실은 바로 앞이오.”
위에 남겨진 두 사람은 얼마 동안 잠자코 있었으나 웬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티브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면서요?”
사라의 머릿속엔 스티브를 마음껏 걷어차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웬디하고 어떤 관계를 맺든 그건 그의 자유겠지만, 사라를 그녀의 선실에 밀어 넣고 두 사람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것일까. 어떤 목적으로 그가 모두를 이 주말 여행에 초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자기 앞에 그의 애인을 들이댈 줄은 사라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건 우리끼리의 문제니까, 당신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라는 의식적으로 몸을 꼿꼿이 하고 말했다.
웬디는 약간 뺨을 붉혔다.
“아무래도 좋잖아요?”
“난 그렇지 않아요.”
두 사람 모두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암만해도 자꾸 마음에 걸려 참을 수 없게 된 사라는 마침내 웬디에게 물었다.
“스티브가 자유의 몸이 되면 결혼할 작정이세요?”
웬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직 생각해 본 일 없어요. 승선했을 때 처음으로 당신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깜짝 놀랐겠군요.”
“네, 네 사람만의 여행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또 한쌍의 분들은 어떤 관계죠?”
“어엿한 부부지.”
도어가 있는 곳에서 스티브가 대답했다.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눈초리였다.
“당신들도 일단락이 됐으면 뭔가 마시지 않겠어? 나머지 두 사람도 곧 올 테니까.”
갑판으로 올라가자, 폴이 사라의 손을 잡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말했다.
“이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군 그래. 당신의 말을 듣는 것이 좋았을 뻔했어.”
씁쓸한 말투였다.
“이미 늦었는걸요.”
사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하며 간신히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되겠죠.”
“하지만 난 참을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어. 스티브에게 한방 먹여 주고 싶어서 근질근질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폴은 이를 악물었다.
“사람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건 마치 장난감 취급을 하는 거나 다를 바 없잖아.”
“내게 자랑삼아 보여 주고 싶은 거예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고 폴에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에게 도전하지 않도록 잘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폭력사태가 발생할 경우, 폴이 나이는 젊지만 힘이 좋은 스티브에게 이길 확률은 적다.
“내가 그이 없이도 살아가고 있듯이, 그도 나 없이 얼마든지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일을 어마어마하게 벌여 놓지 않고서도 가능할 텐데.”
“그건 간단한 수법으로는 효과가 적다고 생각했겠죠.”
사라는 폴을 쳐다보고 미소 지으면서 스티브가 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발돋움을 하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에게 질 순 없잖아요!”
“사라, 이건 게임이 아니란 말이야.”
폴이 딱딱한 투로 말했다.
“나를 복수의 도구로 쓰는 건 이제 그만둬 줘.”
“미안해요.”
사라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불과 2, 3일이야. 어떻게 되겠지.”
폴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좋으련만. 배가 항구를 떠나기 전부터 이런 식이라면 앞일은 뻔할 것 같다.
잠시 후에 나머지 한 쌍의 손님이 도착했다- 루이스 부룩과 로브 부룩. 스티브와 비슷한 연배로, 지금까지 사라가 만난 미국인에게 공통된 붙임성이 있어 보이는 느낌의 부부였다. 예정에 없이 폴과 사라가 참석하게 된 경위를 두 사람은 사전에 이미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너무 젊어서 깜짝 놀랐어요.”
루이스가 갑판에서 찬 것을 마시면서 말했다. 부두를 떠난 배가 바다를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아기 같은 신부였었겠군요.”
“그랬었지.”
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그는 컵을 건네주면서 사라를 일부러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매력이 넘치는 어린 새색시였지. 마력으로 나를 사로잡았거든.”
“별다른 마력도 아니었죠, 뭐.”
사라가 맞받았다.
“이젠 요술 지팡이도 부러져 버렸어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루이스가 말했다.
“서로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니 훌륭하군요.”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은데요.”
사라의 의자에 손을 얹고 폴이 말했다.
“우리가 느닷없이 나타나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폴이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갑자기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스티브가 침묵을 깨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것으로 당신의 입장은 잘 알았소. 그런데 로브, 자네는 뭘 마시겠나?”
폴은 간신히 딱딱한 자세를 풀었지만, 여전히 불쾌해 하고 있는 것을 사라는 잘 알 수 있었다. 아무쪼록 스티브하고 별일이 없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던 사라는 그가 옆에 앉아서 마실 것을 입에 대는 것을 보고야 겨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날 밤 만찬은 놀랄 만큼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승무원 중의 한 사람이 조리한 식사는, 메뉴는 간단했지만 스테이크도 신선한 샐러드도 식후의 파이도 아주 훌륭했다.
“모두 냉동식품이에요.”
루이스가 말했다.
“한번 조리실에 가보세요. 필요한 건 모조리 구비되어 있으니까!”
사라가 미소 지었다.
“이 배에 전에도 타신 적이 있나 보죠?”
“네, 스코트가 집을 비우는 동안은 언제나 스티브가 쓸 수 있게 돼 있거든요. 스코트는 지금 사업상 밀라노에 가 있어서 내달 초하루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만날 수도 없을 것 같군요.”
마호가니의 테이블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는 스티브의 눈길을 피하면서 사라가 말했다.
“네, 폴이 16일까지는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크로스윈즈를 손에 넣었다면서요?”
로브가 끼어들었다.
“옛날엔 아주 번창한 호텔이었죠.”
“켄튼사가 운영하는 한, 다시 옛날처럼 번창할 겁니다.”
폴이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켄튼사는 확실히 일류지.”
뜻밖에 스티브가 찬의를 나타냈다.
“가격 여하에 따라서 캐버노우도 인수할 수 있지요. ”
“그럴 테지요.”
스티브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만약에 판다 해도 체인에는 안 팔겠소.”
“개인이 경영하는 호텔 같은 건 앞이 뻔할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캐버노우는 달라요. 당신네들에게 없는 것을 제공하고, 그리고 이윤도 올리고 있소.”
“말하자면?”
“개성이지. 체인 호텔은 경영의 필요상 모두 틀에 박혀 버렸거든.”
스티브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계속할 마음이 없는 듯 사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커피를 좀 더 들겠어?”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젠 그만.”
“갑판으로 나가죠, 따뜻한 밤이네요.”
웬디가 제안했다.
“그래요, 나갑시다.”
루이스도 일어났다.
갑판에는 상쾌하고 부드러운 미풍이 불고 있었다. 밝은 선미의 뒤쪽으로 은빛으로 빛나는 어두운 바다가 끝없이 정적에 싸여 펼쳐져 있었다. 스티브는 음악을 틀고 마실 것을 갑판으로 가져오게 했다. 웬디가 양손을 벌려 댄스를 청하자, 그는 허물없는 태도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난간에 기대서서 물결이 선미로 하얀 거품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라의 옆으로 폴이 다가왔다. 감상적인 음악이 가슴에 젖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사라는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별거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당신에게 아직 얘기하지 않은 게 있어요, 이해해 주실는지 알 수 없어서... 플로리다를 떠나기 전날 밤, 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스티브가 보았던 거예요.”
달빛 사이로 폴의 엄숙한 표정이 보였다.
“무슨 까닭으로... 다른 남자하고?”
“키스하고 있었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파티가 한창이었거든요. 일부러 스티브의 눈에 띄도록 계획한 거예요.”
“왜?”
“복수하기 위해서요.”
그날 밤을 상기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비트의 어깨 너머로 문가에 서 있는 스티브의 표정을 본 순간의 일을....
“스티브가 바람이 났었죠.”
낮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복수하기 위해서, 그가 누구보다도 제일 싫어했던 남자를 상대로 골랐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한두 번의 키스 정도로 스티브와 엘자의 관계하고 비교되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죠.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서 아주 깊은 관계를 맺을 걸 그랬어요.”
“그만둬.”
폴이 엄격하게 말했다.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사라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은 나를 믿어 주시는군요. 스티브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영국으로 돌아왔었군?”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큰 싸움을 한 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는 그 엘자를 애인이라고 인정했었나?”
“부정하진 않았죠. 그랬을 게 틀림없어요. 엘자는 스티브 같은 남자와 단지 친구로서 만족할 타입이 아닌 걸요.”
“미인이었겠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에 스티브가 보기 좋게 걸려든 거죠, 나하고 충동적으로 결혼한 것을 줄곧 후회하고 있었으니까요.”
사라는 난간에서 몸을 떼었다.
“우리 춤춰요, 폴.”
그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
“그에게 지기 싫어서?”
“아니, 그냥 추고 싶어요.”
그의 눈길을 피하면서 말했다.
두 사람의 춤추는 모습을 웬디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스티브는 무표정했다.
웬디의 허리에 가볍게 놓여 있는 그의 손을 보고, 사라는 전에 그와 춤을 추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단지 웬디가 분별없는 순진한 열 여덟 살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는 점만이 달랐다. 폴의 양팔에 안긴 사라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이렇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데도 스티브처럼 사라의 마음을 흔들어 대는 힘이 전혀 없는 것이다.
한밤중이 조금 지나서 일동은 선실로 돌아왔다. 하룻밤 내내 항해해서 다음날 낮쯤 키웨스테 닿아,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보낼 예정이었다. 사라는 미국의 최남단에 있는 이 군도에 와본 일이 없었지만, 스티브와 그의 걸프렌드와 함께 구경한다고 생각하니, 아름다운 경치의 매력도 반감되는 것 같았다. 하여튼 한시 바삐 이 항해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사라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좁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치고 있었다. 묵묵히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 웬디를 보고 사라는 오히려 동정심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스티브의 아내와 한방을 쓰는 것이 싫었다면, 그녀는 이 항해를 거절했으면 됐을 것이다. 아니면 이제까지 스티브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단 말인가. 엘자하고는 다른 타입의 여성인 것 같았다. 만약에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경험이라면, 스티브는 정말 파렴치한이다. 웬디 같은 순진한 아가씨말고도 엘자 같은 여자들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을 텐데. 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사라는 가슴을 찔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혼을 바라고 있었던 쪽은 어쩌면 그였는지도 모른다.
사라는 숨이 막힐 것 같아 걸치고 있던 시트를 걷어차고 일어나 앉았다. 웬디의 깊고 규칙적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라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얇은 면으로 된 로브를 걸쳤다. 어둠 속에서 슬리퍼를 찾는 것도 성가셔서 맨발로 선실을 나섰다.
엔진의 규칙적인 소리와 선체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릴 뿐, 사방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키가 있는 곳에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마 자동 조타 장치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리라. 불침번이 있다면 뱃머리 쪽에 서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선미의 난간 쪽으로 갔다.
시원한 밤바람에 뺨을 식히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선실의 통기 구멍은 막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시간에 혼자서 나오다니 무모하군.”
바로 뒤에서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가 한번 흔들리면 바다로 내동댕이쳐질 텐데.”
“설마!”
사라는 몸을 꼿꼿이 했다.
“당신이 갑판에 나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알고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군.”
옆으로 와 난간에 기대선 그의 어깨가 사라의 머리칼을 스쳤다. 움직이면 그의 몸에 닿을 것 같아 사라는 꼼짝 않고 같은 곳에 서 있었다.
“당신 뒤를 따라왔지. 갑판으로 나올 걸 알고 당신이 선실을 나올 때까지 기다렸었지.”
“어떻게 알았죠?”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돌핀 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 당신은 언제나 밤중에 갑판에 나와 있었잖아.
선실에선 숨이 막힐 것 같다고 말했지.”
“그 배, 아직도 갖고 있어요?”
“다른 배지만, 같은 이름을 붙였어.”
사라는 가시 돋친 웃음소리를 냈다.
“나처럼 그 배도 길지 못했군요. 웬디는 얼마나 지속될까 모르겠군요.”
“웬디는 달라.”
“그럴 테지요!”
“한 달 전에 만난 사람이야.”
“우리도 한 달밖에 교제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결혼했잖아.”
“달리 나를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는 사라의 양어깨를 거칠게 붙잡자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턱의 근육이 굳어지고 눈이 노여움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재빨리 당신을 손에 넣고는 어디로 줄행랑을 쳤을 거야. 처음 만났던 그날 밤에는 내 말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들을 작정이었으면서!”
“샴페인을 너무 마셔서 머리가 돌아 버린 탓이죠. 당신의 말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샴페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손을 내밀면 떨어질 상태였는걸.”
그가 말하는 대로였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신사적으로 행동하기로 하셨다, 그 말씀이죠? 대단히 감사하군요!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린 지금 생각하니, 그때 하룻밤을 당신의 놀이 상대가 되었던 편이 훨씬 좋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은, 당신의 의심 많고 꽁한 성격 탓이야.”
사라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어깨뼈를 짓눌렀다.
“내가 여자란 여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침대로 끌어들일 거라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확고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죠. 신혼여행 동안조차도, 당신은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요. 그 모델이 쫓아다니니까, 눈꼬리가 축 늘어졌었잖아요!”
“정력이 남아돌았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그는 눈을 번들번들 빛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직도 모르는 것 같군. 물론 나는 그 모델에게 마음이 있었지. 다른 여자에게도 마음이 있었어. 매력적이고 시간이 남아도는 여자를 보고 마음이 끌리는 건 남자로서는 당연한 거야!”
사라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여자는 다르단 말씀이죠!”
“그렇지- 다르지. 나는 여자하고 관계를 맺어도 단순한 만족감을 얻을 뿐 깊이 빠지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여자는 애정과 섹스의 구별을 하지 못한단 말이야.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이야.”
사라는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씩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자 가슴을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 5년 전, 사라에게 진심으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참을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왜 그가 그토록 미쳐 버렸는지를 처음으로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행차 뒤의 나팔처럼 때는 늦어 버린 것이다.
“스티브!”
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트하고 나 사이엔, 당신이 본 그 키스 이외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믿어 주실 것 같지 않군요.”
그는 잠시 동안 사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믿을 수가 없지. 나와 엘자의 관계가 당신의 상상과 다르다는 것을 당신이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비트는 키스만으로 만족할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노여움과 고통이 사라의 몸을 꿰뚫었다.
“당신은 그런 타입에 정통했었죠!”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입술이 거세게 사라의 입술에 겹쳐 왔다. 그의 양손이 사라를 꽉 끌어안아서 꼼짝도 못하게 했다. 거역하려는 의지는 잠시 후 추억의 물결에 밀려나고, 저도 모르게 그에게 응하고 말았다. 그 옛날 몸을 불태웠던 그 정열을 찾아서 사라는 그의 팔 안에서 관능의 물결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스티브....”
간신히 몸을 뗀 그를 향해 속삭였다.
“언제나 안기면 그렇게 내 이름을 불렀었지.”
그가 심술궂게 말했다.
“아직 나를 잊지 못하겠지, 사라?”
“당신 같은 사람은 이제 진저리가 나요.”
간신히 정신을 차려 부정했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옛날의 그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잘 키워 열매를 맺을 사이도 없이 둘이서 망가뜨려 버린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정열을 또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의 팔을 뿌리치고 곧장 갑판을 뛰어 달아나는 사라를 스티브는 무언으로 전송했다.
4
키 제도는 생각했던 대로 아름다웠다. 본토에서부터 이어진 하이웨이가 청록색의 바다에 떠 있는 산호초로 된 섬들을 목걸이의 알처럼 끼워 놓고 있다. 이어진 29개의 섬들 중에서 최서남단에 있으며 한쪽에 멕시코만, 그리고 반대쪽에 대서양을 끼고 있는 것이 키웨스트다. 수많은 작가며 예술가며 낚시 애호가의 집합 장소처럼 되어 있었다.
점심 전에 입항한 쉐라톤 호를 뒤로 하고 일행은 상륙했다. 사라는 될 수 있는 대로 스티브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폴과 함께 행동했다. 스티브에 대한 웬디의 친숙한 태도를 보고 사라는 불쾌했으나, 결혼에 실패한 자기가 웬디에게 화를 내는 것은 우습다는 생각이 드었다.
일행은 생선 요리로 유명한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며 점심을 먹었다. 그 뒤 남자들은 쉐라톤 호의 모터 보트를 타고 낚시를 가고, 여자들은 일광욕이나 수영을 하기 위해서 가까운 해변가에 남았다.
스티브가 없어진 뒤의 웬디는 딴사람처럼 말수가 적고 얌전하더니, 이윽고 조개껍데기를 주우러 사라져 버렸다.
“좀 색다른 사람 같죠?”
뒤에 남은 루이스가 말했다.
“스티브가 좋아하는 타입 같지는 않은데.”
그러다가 사라를 보고 흠칫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그의 부인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군요.”
“괜찮아요.”
사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가세를 고치며 바다 저쪽의 산호초 부근에 떠 있는 배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자유롭게 되면 폴하고 결혼할 생각이세요?”
루이스가 물었다.
“글쎄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본심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유롭게 되면... 공허한 울림을 주는 말이다. 그렇지만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는 장래의 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침착하고 얌전하게 가정 생활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돼요....”
가볍게 농담처럼 덧붙였다.
“결혼 생활이라는 게 반드시 그렇게 딱딱한 것만은 아니지요.”
루이스는 모랫바닥에 엎드려서 등을 태우면서 말했다.
“로브와 내 생활은 그야말로 지극히 평온해요. 절정도 없지만 낭떠러지도 없는 그런 식이에요. 당신은 스티브하고 꼭 닮았어요-기분파거든.”
사라는 몸이 굳어졌다.
“스티브하고 나는 닮은 데가 전혀 없어요. 그게 잘 되어 나갈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인걸요.”
루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까요. 내가 보기에는 폴보다는 스티브 쪽이 더 공통점이 많은 것 같은데요. 폴은 지나치게 친절해서, 만약에 결혼한다면 당신에게 꼼짝도 못할 거예요.”
“단지 어제 만났을 뿐인데 어떻게 내 일을 그렇게 잘 알지요?”
사라의 목소리가 약간 날카롭게 들렸다.
“그레타 가르보 같은 빼어난 미모는 못 타고났지만 그 대신 난 사람들의 성격을 잘 파악하는 능력을 타고났어요.”
사라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하지만 당신의 관찰 결과는 틀렸다고 생각해요. 스티브는 나를 지배할 생각밖에 하지 않거든요.”
“그땐 틀림없이 당신에게 그것이 필요했던 거예요. 지배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그토록 열중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때 일을 당신이 자세히 알 리가 없죠.”
“스티브가 약간 얘기해 주었어요. 화내지 말아요, 사라. 나 이외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약을 올렸던 얘기 들었겠군요?”
“일시적으로 흥분한 당신의 약점을 이용한 자기가 나빴다고, 지금까지도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다른 태도로 나올 것이지!”
“당신네들은 둘 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는 게 서투르군요.”
“얘기가 딴 길로 샌 것 같네요.”
사라는 루이스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새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아직 서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사라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켜 버리고 차갑게 말했다.
“그는 아직 내게 조금은 마음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 당신은 어떻죠?”
루이스가 물었다.
“여자는 틀리대요.”
“그렇게 틀리지 않아요. 어젯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사라는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어젯밤이라니요?”
“당신들이 갑판에 있을 때 말이에요.”
루이스가 일어나서 팔에서 모래를 떨어냈다.
“아니, 엿들은 건 아니에요. 꽤 떨어져 있었고, 당신들은 보고는 바로 선실로 돌아갔으니까요.”
“다른 사람도 갑판에 나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어마, 당신에게만 신선한 공기를 마실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루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선실의 통기 구멍이 이상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루이스. 물론 당신이 갑판에 나와서 안될 이유는 없죠.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그냥 갑판에 남아 있었다면, 스티브하고의 논쟁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문제가 있다면 지금 해결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친구로서 헤어질 수 있으니까요.”
“친구라구요?”
“그럼요. 지금 유해하고 있어요. 앞으로 폴하고 둘이서 스티브네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말이에요.”
사라는 루이스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굉장한 험담가로군요.”
“겉보기만이죠.”
얼마 동안 잠자코 있던 루이스가 조용히 물었다.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은 없어요?”
“그런 일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가령 내게 그럴 마음이 있다 해도, 그이 쪽에서 그럴 생각이 없는 걸요.”
“알 수 없지요. 무슨 이유로 그가 지금까지 이혼 얘기를 안 꺼내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렇지만... 그의 말에 의하면, 내가 또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우선 어른이 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나요.”
“하지만 당신은 그 얘기를 믿지 않았겠지요?”
“당연하지요. 내가 배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꽤 득을 봤을 테니까요. 달라붙는 여자에게 '달링, 애석하지만 당신하고 결혼할 수는 없소. 사실은 내겐 아내가 있으니까!' 라고 말해서 떨쳐냈겠죠. 그런데 웬디에겐 또 뭐라고 할지 모르겠군요.”
“내 의견을 듣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질투심을 발산하고 싶을 뿐인 거예요?”
루이스는 사라 쪽을 보고 미소 지었다.
“웬디에게 질투가 나서 못 참겠다는 것을 인정하면 어때요? 스티브도 폴을 질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이가 폴을 질투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요.”
사라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웬디를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루이스?”
“전에 한 번 만난 일이 있을 뿐이에요. 스티브가 그녀하고 만나게 된 건 겨우 2, 3주 전인 걸요.”
루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쓸데없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저 두 사람은 아직 깊은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라가 조소하듯이 웃어댔다.
“설마 스티브가...”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면 못 써요.”
“당신은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가 쉽게 속마음을 내보이는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같이 사는 아내만이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아프거나 의기소침해 있을 때의 남편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보이는 수가 있으니까.”
루이스는 바다 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네요.”
산호초 사이를 누비며 돌아오는 배를 보고, 루이스는 혼자 일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웬디를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되면 좋으련만. 해가 지는 광경을 못 보면 애석하니까.”
“그렇게 진귀한 광경인가요?”
웃으면서 루이스가 대답했다.
“진귀하다기보다, 빌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심정이 되는 경치예요. 실제로 보면 납득이 가리라고 생각해요.”
배가 해변에 다가왔을 무렵에는 웬디도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위해 수확물을 잔뜩 싣고 온 세 사람 중에서 폴만이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커다란 타펄(멕시코만 산의 큰 물고기)을 낚으러 갈 시간이 없어서 애석했어.”
스티브가 말했다.
뱃전으로 몸을 내밀고, 승선하는 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스티브를 보고, 사라는 될 수 있으면 그의 손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될 것이 싫어서 그에게 손을 맡겼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그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저도 모르게 옆을 향하고 눈길을 피했다.
두 개밖에 없는 쉐라톤 호의 샤워룸을 차례로 여섯 사람이 쓰고 간신히 옷을 갈아 입었을 때는, 저녁 해가 수평선이 있는 곳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매일 이 시간에는 온 섬 사람들이 서해안에 모여서 일몰을 바라보는 것이 관습인 모양이다. 주홍빛으로 빛나는 저녁 해가 수평선으로 들어가자, 하늘에는 주홍빛과 핑크, 황금빛, 엷은 보랏빛 무늬로 가득 찼다. 서쪽 하늘 전체가 아름답게 빛나는 광경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곳의 습관에 따라서,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아주 멋있었어요!”
선실로 돌아오면서 사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갑자기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더니 일대가 소나기가 퍼붓는 것처럼 매미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였다.
“매일 이런 진경을 볼 수 있다니, 저들이 부럽군요!”
“그네들은 달리 아무런 낙도 없을 테니까.”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폴의 말에 모두가 웃어댔지만, 평상시에는 유심히 보지 않던 자연 현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던 사라는 웃을 기분이 되지 않았다. 감정이 둔한 폴의 태도를 보고, 사라는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은 전날의 찬란한 일몰은 상상할 수도 없는 잿빛의 흐린 하늘이었다.
“청우계가 여전히 내려가 있군.”
아침 식사 때 스티브가 모두에게 말했다.
“카리브해에서 비가 오기 전에 도망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아이, 애석해라. 레카 선창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루이스가 맥이 빠진 듯이 말했다.
“요전에 구경했잖아.”
로브가 조용히 타일렀다.
“겨우 멀리서 보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또다시 오면 되죠. 언젠가 키 제도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보내고 싶어요.”
그녀는 갑자기 열띤 어조로 계속했다.
“다른 섬에는 가본 일이 없잖아요. 하이웨이를 따라 죽 드라이브하다가 마지막에 케웨스트로 갑시다.”
“좋지.”
로브가 기분좋게 대답했다.
“평온한 생활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찬성한다구.”
두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겐 아랑곳없이 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있는 스티브 쪽을 본 사라는, 그의 눈이 비아냥거리는 빛을 띠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면서, 쉐라톤 호는 여덟 시가 조금 지나서 항구를 떠났다.
파고(波高)가 점점 높아지는데도 스티브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으니까 폭풍이 밀어닥치기 전에 잘 빠져나갈 수 있겠지, 하고 사라는 생각했다.
언젠가 돌핀 호가 갑자기 스콜을 만났을 때, 사라는 놀란 나머지 아주 낭패해 버려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으므로, 스티브가 혼자서 뚫고 나가야 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때의 사라의 정신 상태를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이래로 사라는 바다에 나올 때마다 내심의 공포를 교묘히 감추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천둥소리를 들으면 손발이 떨리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웬디의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고, 사라는 더욱 마음이 우울해졌다. 항해의 지식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하는 것은, 신혼여행 때 스티브에게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던 그 모델하고 너무나 흡사했다. 그의 관심을 끌기만 하면 주위의 모든 것을 쫓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똑같은 태도를 취해 왔다는 것을 사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는 다행히도 폭풍우를 잘 빠져나와서, 저녁에는 바람도 자고 파도도 잔잔한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웬디보다도 먼저 준비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사라는 혼자서 객실을 나가자, 먼저 와 있던 스티브하고 딱 마주치고 말았다.
“잘 어울리는군.”
사라가 입은 베이지색의 실크 옷에 눈을 주고는, 부탁하지도 않은 마르그리트를 만들어 사라에게 건넸다.
사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결말짓기로 작정했다.
“이 향해의 목적을 아직도 난 알 수 없어요. 설명해 주세요.”
“그래?”그의 표정은 야유적이었다.
“우선 서로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어째서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과는 같은데요.”
“그렇지만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어.”
컵을 손에 들고 벽에 기대서서 스티브가 말했다.
“켄튼은 당신에겐 맞지 않아, 사라. 나도 맞지 않았지만 말이야.”
물론 사라도 알고 있었지만, 스티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난 그이하고 결혼할 거예요.”
사라는 담담히 말했다.
“말려도 소용없어요.”
“말리지는 못한다 해도 방해할 수는 있지.”
“어째서죠?”
“아까 말했잖아, 그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구?”
사라는 벌컥 화가 치밀었다.
“내버려두세요.”
“내버려 둘 수는 없어. 타고난 환경에서 당신을 끌어내 새로운 관념을 심어 주려고 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애가 둘쯤 있는 좋은 엄마가 돼 있었을 거야.”
“결혼도 안 하고?”
“보라니까, 당장에 그런 소릴 한단 말이야.”
그는 엄격한 투로 말했다.
“당신은 내게서 그러한 야유적인 사고방식을 배워 버렸단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를 독설가라고 불렀잖아요.”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지. 인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인생을 풍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재빨리 나의 인생 교육에 착수했던 거군요. 내가 어떤 방식의 생을 영위하든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간단히 동의할 수는 없어.”
“그밖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을 텐데요.”
사라는 어깨를 추슬렀다.
“당신의 협력 없이도 처리할 수 있으니까 상관 마세요. 당신이 이토록 내 일에 간섭하는 걸 웬디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웬디에겐 상관없는 일이지.”
“그녀와 결혼할 의사 따윈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난 아내가 있다는 걸 숨긴 기억은 없단 말이야.”
“내가 이혼하고 싶어한다는 얘긴 하신 거죠?”
“그렇다고 내게 바로 재혼을 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건 아니지. 결혼은 한 번만으로 충분해.”
로브와 폴이 잇따라 들어왔기 때문에, 대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폴의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사라는 이 경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쉐라톤 호에 승선한 이래 마음이 심란해 참을 수 없어하는 폴이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스티브는 어떤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간 5년을 다시 되풀이할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폴은 겨우 사라와 단둘이 될 수 있었다. 함께 갑판으로 나가서,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조타실 그늘에 섰다.
“금요일 밤하고는 큰 차이가 있군요.”
어둠 속에서 넘실거리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사라가 말했다.
“이번 주말은 비참한 결말로 끝날 것 같군요.”
“주말 그 자체가 비참했지.”
폴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스티브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당신은 분명히 흥분하고 있었는데?”
사실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사라는 조용히 말했다.
“이혼엔 동의하지 않겠다는군요.”
“그랬었군.”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이유는?”
“당신하고 난 잘 될 것 같지 않다나요.”
폴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댔다.
“자기 일은 어디다 제쳐놓고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군! 그리고 수년 동안 내팽개쳐 두더니, 갑자기 흥미진진한 태도로 나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말이야.”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흥미는 나타내고 있었죠. 아버지에게 두세 번 연락도 하고...”
“그런 건 단지 제스처일 뿐이야.”
그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러면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군.”
“안 돼요!”
자시도 모르게 그렇게 외쳐 버렸다. 사라는 폴의 태도가 변해 버린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자신이 없어요. 법정에 서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생활을 공개하다니...”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첫째, 상대가 동거를 거부한 경우엔...”
“엄밀하게 말해서 동거를 거부한 것은 나였어요. 게다가 정식으로 별거 수속도 하지 않았으니.”
오랜 침묵이 계속됐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야?”
마침내 그가 물었다.
“설득할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웬디의 도움을 받을까?”
사라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그녀는 상관없어요. 스티브는 재혼할 의사 따윈 없는 것 같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장난삼아 우리를 방해할 작정이군. 당신을 놓쳐 버린 대신에, 다른 누구에게도 당신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심산이란 말이야!”
“그럴지도 몰라요.”
“그런 게 틀림없어.”
폴은 사라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사라, 그에게 지면 안 돼! 웬만한 일로는 이길 수 없겠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거기서 문득 말을 끊고 그는 사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하고 있지?”
그의 바로 옆에 서 있으면서도, 사라는 아무런 감동도 떨림도 느끼지 못했다. 따뜻함과 친근감 이상의 감정은 아무리해도 생기지 않는다. 결혼을 하는 데 단지 그것만으로써 충분할까. 폴이 사라에 대해서 안고 있는 욕망에는, 스티브에게는 넘치는 그 정열이 결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폴의 힘으로, 스티브가 사라의 마음속에 쌓아올린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간신히 대답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단 말이오.”
폴은 맥이 빠져서 말했다.
“머리가 혼란해져서, 무엇이 사랑인지도 알 수 없게 됐어요.”
사라가 슬픈 듯이 말했다.
그가 조용히 계속했다.
“섹스는 사랑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란 말이야, 사라. 대단히 중요한 일부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내가 끌린 것은 당신의 아름다움이었어. 하지만 내가 지금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당신 그 자체란 말이오.”
“어쩌면, 폴!”
사라는 그의 정직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감정이 확실치 않은 것에 괴로움을 느꼈다.
“내게 그런 가치가 있을까요? 당신에게 환멸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위험성은 없어. 내게 와주기만 한다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자신이 있다구.”
폴은 허리를 구부리고 가볍게 사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당신은 나를 믿고 있기만 하면 돼. 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요. 나중에 나도 스티브에게 말해 볼 테니까.”
아마 쓸데없는 일일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라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에 폴이 스티브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면 우유부단한 사라에게 결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은 플로리다 특유의 아름다운 푸른 하늘과 밝은 햇빛이 되돌아왔다. 폴과 스티브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아침 식사 때는 알아낼 기회가 없었다. 우선 사라 자신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어떤지조차도 잘 알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감각이 아주 마비되어 버린 모양이다.
정오 조금 지나서 세인트피터즈 버그에 도착하자, 폴에게 전보가 와 있었다.
“뉴욕에서 문제가 생겼다는군.”
그가 전보를 읽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가서 처리할 수밖에 별수 없지.”
“세 시쯤에 탄파를 떠나는 비행기가 있을 텐데.”
로브가 말했다.
“시간에 댈 수 있을 것 같은데.”
“공석이 있는지 전화로 물어 보죠.”
스티브가 어드바이스했다.
“일요일은 만원일 때가 많으니까.”
그는 사라 쪽을 보고 물었다.
“당신은 여기 남겠소?”
사라가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을 끌고 간대도 별 수 없지. 그것보다 크로스윈즈의 개장 관계로 올 사람들을 맞아 주지 않겠어? 일이 잘 해결되면 2, 3일 내로 돌아올게.”
“하여튼 공항까지 전송할게요.”
사라는 폴의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준비하는 동안에 제가 전화로 좌석을 예약해 놓을게요.”
두 사람은 모두에게 바쁘게 작별을 고하고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길에 서서 차가 떠나는 것을 전송하는 스티브의 모습이 사라의 눈에 들어왔다.
별로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은 크로스윈즈에 도착했다. 폴은 뉴욕의 일로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문제의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일부러 중역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걸 보면 꽤 큰 사건인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사라는 곧 비행기 좌석을 예약했다.
“나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하길 잘했어요. 빈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요.”
사라는 옆방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좀 더 시간이 늦은 비행기로 했으면 좋았을걸. 이 비행기편의 시각에 댈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내가 가방을 챙길 테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으세요. 준비가 다 되면 아래로 내려가서 차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미안하군.”
그는 짙은 베이지색 양복에 맞춰서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골라 그것을 손에 들고 욕실로 사라졌다.
차 안에서 운전수가 들으면 안 되겠기에,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공항에 닿았다. 2, 3일 지나 폴이 돌아온 후 천천히 의논하면 되겠지. 혼자 있노라면 자기의 생각도 어떤 형태로든 확고하게 결정되겠지.
사라는 폴의 핸섬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멋질 뿐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출발 시각이 임박했으므로, 호화스러운 공항의 설비며 실내장식을 한가롭게 구경할 겨를도 없이, 티켓을 받아 에스컬레이터로 로비에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면세점이며 텔레비전이 즐비한 복도를 지나서 간신히 버스를 타고 게이트에 도착했다. 수하물의 검사를 끝내자, 벌써 탑승이 시작됐다. 폴은 황망히 사라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는, 작별 인사로 손을 흔들면서 게이트 안으로 사라져 갔다.
조금 전에 둘이 지났던 길을 혼자서 돌아오면서 사라는 공허감에 사로잡혔다. 이제부터 무엇을 하고 지내면 좋을까. 크로스윈즈를 인수하러 오는 사람들의 치다꺼리를 하라고 폴은 말했지만, 이미 본사에서 지령을 받고 파견되어 오는 베테랑들이 사라의 도움을 필요로 할 리가 없다. 사라는 형식상 본사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지, 오히려 모두가 짐스러워하는 존재인 것이다. 가능한 한 멀리서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밖으로 나오자, 운전수가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시보레 옆에서 사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25-26세 가량이며, 캐버노우의 네임이 든 캡을 뒤로 비스듬히 쓰고 차에 기대서 있는 모습은, 운전수라는 직책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태도였다. 사라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는 자세를 고치고 차에 도어를 열었다. 진홍의 슬랙스를 입은 사라의 늘씬한 다리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앞에 타시지 않겠습니까? 뒷좌석보다 시원합니다.”
“아니, 뒤가 좋아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고 뒷좌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운전수는 거절당했어도 별로 신경을 쓰는 기색도 없이 운전석에 앉아, 어깨 너머로 담뱃갑을 내밀었다.
“담배를 피우시죠?”
“나는 안 피워요.”
그리고 사라는 분명히 덧붙였다.
“당신도 피우지 마세요, 냉방에 방해가 되니까.”
“알았습니다.”
그는 순순히 담배를 포킷에 쑤셔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백 미러에 비치는 그의 대담한 검은 눈동자가 자기 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사라는 그것을 피하듯이 고쳐 앉았다. 이 사내는 캐버로우에 투숙하고 있는 여자 손님 전부를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일까.
캐버노우에는 손님의 편의를 위해서, 몇 대의 특별 손님 전용차를 언제나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반드시 유복한 손님만이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매년 캐버노우에서 2주 동안 머무르기 위해서 절약에 절약을 해서 캐롤라이나에서 찾아오는 어느 노부인도 언제나 투숙 기간 중 운전수가 딸린 차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처럼 매해 찾아오는 사람이 호텔에서는 귀빈이라고 마스터스 씨가 말해 주었어요.”
하고 어느 날 그 부인이 사라에게 털어놓았다.
“그토록 친절하고 관대한 주인을 가진 당신은 정말 행복하겠군요.”
하고 말하기도 했다. 사라는 생긋 웃으며 별의미도 없는 대답을 한 채로 가볍게 흘려 버렸는데, 그것은 아직 신혼 생활에 매려돼 있던 초여름의 일이었다.
“주인님이 급한 일이 생겨서 애석하시겠군요.”
운전수가 말을 걸어왔다.
“혼자서 지금부터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볕에 탄 억센 목덜미께를 사라는 잠자코 뒤에서 바라보았다. 캐버노우의 종업원인데도 사라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신원을 밝힐까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잠자코 있으면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이 남자가 지겹게 추근거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검은 고수머리와 네임플레이트로 보아서는 이탈리아계인 듯, 여자가 혼자 다니는 것을 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성질인 모양이다.
“그 사람은 주인이 아니에요. 내 주인은 세인트피터즈버그에 계세요.”
“그렇습니까?”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여기 살고 계십니까?”
“네, 그래요.”
의도적으로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당신의 사장이에요.”
무언으로 이 충격적인 사실을 소화시킨 운전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두 주일 가량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이 일을 하게 되어서 그만 몰라뵈었습니다....”
“최근의 소문을 들을 짬이 없었다는 얘기군요. 괜찮아요, 이젠 알았죠?”
“네, 사모님.”
사죄하기는 했지만 호기심을 숨길 수는 없는지 또 말을 이었다.
“영국분이라는 걸 알았으면 당장에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 젊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그만...”
외모는 젊어 보여도 사라의 마음속은 늙어 버린 건지 활기가 없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로, 뒤의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크로스윈즈에 돌아오자 사라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방에 틀어박혀서 밤을 보낼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폴이 일곱 시경에 도착할 테니까,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을 기다려서 받고 나서, 어딘가 조용한 레스토랑으로 식사하러 가야겠다. 혼자서 생각을 할 필요도 있고 하니.... 문제는 간단하다. 폴하고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결정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확실히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된다.
폴에게서 일곱 시 좀 지나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잡음이 섞여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뉴욕은 비나 눈이 내리겠다는 예보가 있다고 한다. 잘 되면 월요일 밤까지는 결말이 날 것 같으니, 그 뒤 곧 떠나면 밤중에는 세인트피터즈버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것같이 들렸다.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지친 것일까. 뉴욕에 있는 동안 내내 그가 회의 때문에 바쁠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따라갔으면 좋았을 걸, 하고 사라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혼자 남은 것은 큰 실수인 것 같았다.
결국 사라는 조용한 쪽보다는 북적거리고 시끌시끌한 쪽을 택해 꽤 널따란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메뉴는 평범했으나, 별로 배가 고프지 않던 사라에겐 아무렇든 상관없었다. 혼란한 머리로 곧바로 방으로 돌아갈 기분도 나지 않아, 돌아올 때 탔던 택시 운전수에게 세미놀과 타일런을 지나서 빙 돌아서 크로스윈즈로 향하도록 부탁했다.
멀리 돌아온 것은 시간만 보냈을 뿐, 별로 기분이 좋아진 것도 없었다. 사라는 열 시 전에 호텔로 돌아와, 열쇠를 받아들고 엘리베이터로 3층에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위에 핸드백과 열쇠를 던졌다. 열려 있던 발코니의 도어를 닫을 생각으로 미풍에 흔들리는 커튼 쪽으로 걸어가다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던 스티브가 일어서지도 않고 목을 기웃하고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늦었군. 여덟 시 반부터 기다렸지.”
간신히 냉정을 되찾고 사라가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죠?”
“프런트 담당이 들여보내 주었지.”
“그럴 권리는 없을 텐데요!”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당신의 남편이라고 내 신분을 밝히고 열심히 부탁했지.”
“이건 제 방이에요. 폴이 알면 뭐라고 하겠어요?”
평온함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대체 무슨 용건이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지 않소. 여기라면 방해를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지.”
“천만에.”
주먹을 꽉 쥔 사라의 몸이 꼿꼿이 굳어졌다.
“나가 주세요, 스티브. 지금 당장!”
“당신이 뭐라고 해도,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을 텐데요. 요전날 밤에 해야 할 말은 모두 해버렸잖아요.”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다더 소중한 쪽에 정신을 빼앗겼었지.”
그는 사라의 굳어진 표정을 야유 섞인 눈길로 지켜보았다.
“부정해도 소용없어. 당신도 욕망엔 어쩔 수 없었잖아.”
“화학반응을 나타냈을 뿐이에요.”
사라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는 옛날부터 그것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하고 결혼한 거죠?”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험악해진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당신하고 둘이서 멋진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했던 거야. 만약에 나의 애정이 불완전했었다면, 당신의 노력으로 좀 더 깊은 애정으로 바꿔 줄 수도 있었잖아.”
“물론 모든 방법을 동원했었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요.”
느닷없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때 아기를 낳는 것을 찬성해 주기만 했어도요.”
“당신은 그때 아기를 기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어.”
“당신은 내가 그토록 소망하던 아기를 부정할 만큼 제멋대로였던 거예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어린애는 좀 더 나중에 가져도 좋다고 생각했었지. 2, 3년 동안 둘이서만 지내고 싶어 했던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그리고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안 낳기를 잘했어, 곧 싫증이 났을 게 분명하니까 말이야. 애석한 일이었지만, 당신은 결혼 생활을 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언제나 남편의 권리를 남용했죠. 당신은 일년 내내 나를 당신 뜻대로 하게 했으니까요.”
“내 뜻대로 했었다구? 억지로 했던 일은 절대 없었어. 때로는 별로 내키지 않는 당신에게 권유한 일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섹스를 강요할 권리를 하늘에서 받았다고 생각한 거죠?”
“강요하는 것과 권유하는 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어. 권유받는 편이 훨씬 멋진 만족감을 가져오거든. 게다가 이런 것은 일방통행은 아니거든. 만약에 당신 쪽에서 권유했다면, 틀림없이 나는 어린양처럼 얌전히 따라갔을 거야.”
그는 말을 멈추더니 잠시 후 의미 깊게 덧붙였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 부디 안심하시길.”
“어째서지? 아직도 서투른 게로군.”
사라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게임은 이제 그만두는 게 어때요? 아무런 쓸모도 없어요.”
“나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자 팔짱을 끼고 손잡이에 기대섰다.
“자, 말해 보시지. 지금까지 가슴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것을 모두 털어놓는 게 어때?”
“잘난 체는 그만해요!”
사라는 화가 치밀었다.
“옛날부터 당신의 장기였죠.”
“그렇다면 그 대신에 어떻게 해주었으면 속이 후련했겠어? 엉덩이라도 두들겨 주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나, 두들겨 주고 싶었던 적은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은 모조리 해온 주제에 그것만 못했다니 우습군요.”
“그런 식으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당신을 어른으로 만들어서- 어엿한 한 사람의 여인으로 대하려고 했었지.”
“엘자를 여인으로 취급한 것처럼 말이죠?”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자의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녀도 비트도 이미 과거지사야.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재니까.”
“내게 있어서 지금 중요한 것은 이혼뿐이에요.”
“켄튼하고 결혼하기 위해서인가?”
“그래요.”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그래요, 그래요!”
사라가 외쳤다.
“거짓말 마. 그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당신보다는 그가 내게는 훨씬 잘 어울려요. 일이나 취미 등, 모든 면에 걸쳐서 말이에요.”
사라는 의미깊게 덧붙였다.
“우린 서로 믿고 있어요.”
스티브가 비꼬았다.
“그 메뉴라면 가장 무미 건조한 생활을 맛볼 수 있을 뿐이지.”
“최고로 행복한 생활을 맛볼 작정이에요.”
“어떻게 되든 당신의 자유지만, 2, 3주만 지나면 심심풀이 싸움이 시작될 게 분명해.”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 같은 고집불통에겐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사라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분명해지겠죠.”
“두번째로 이혼할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눈이 뜨인다, 이 말씀이군. 그렇게 되면 이혼이 습관이 되어 버릴 텐데.”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둬요.”
사라가 냉랭하게 말했다.
“서로 신경만 긁고 있을 뿐이에요. 앞으로 내가 어떤 생활을 하든 당신과는 상관없어요. 우리의 결혼 생활은 5년 전에 끝났으니까.”
“시작도 안 된 것이 끝날 리가 없지. 당신은 꿈의 세계에 있었을 뿐이야. 그때 갔던 디즈니월드가 당신에겐 가장 잘 어울렸던 거야.”
“남편에게 지나치게 기대를 걸었던 내가 비현실적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신의 머릿속에 쌓아 올렸던 동화 속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뿐이야.”
사라가 가시 돋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내 꿈은 길지 못했어요. 백마를 탄 왕자님이 눈깜짝할 사이에 보기 흉한 비열한(卑劣漢)으로 변해 버린 걸요!”
그렇게 말을 내뱉어 버리고 방안으로 돌아가려는 사라의 어깨를 스티브가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사라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야릇한 감각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관능을 들쑤셨다. 체념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사라의 가냘픈 목소리를 듣자, 그의 몸에 예전과 같은 정열이 솟아올랐다.
사라는 마구 겹쳐 오는 그의 입술을 느끼자 전신의 관능이 되살아났다. 찰싹 달라붙어 그의 목덜미에 양팔을 감고는 부드러운 입술을 맡겼다.
파스너를 여는 스티브의 손이 불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드레스가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자,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던 5년의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라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전과 같이 그의 억센 팔에 안겨서 그의 입술을 살갗에 느끼며 욕망에 떠는 순간을....
그가 사라를 안아 침대로 옮기는 동안, 사라는 눈을 감고 현재의 기쁨과 과거의 추억만을 생각하려고 했다. 내일 이 행동을 후회하게 된대도 상관없다. 그리운 그의 몸무게, 잊을 수 없는 행복감,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한숨 섞인 속삭임이 사라의 몸과 마음을 정열로 채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