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위험한 유혹 1

Bollnow 2024. 3. 8. 05:49

위험한 유혹

Sidney Sheldon

 

위험의 시작

 

런던의 일기는 항상 짙은 안개가 하늘가 대지를 뒤덮고 있으며 언제 그 안개 대신 비가 내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국 신사가 단장처럼 항상 우산을 소지하고 다니는 모습을 연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지만 날씨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외국인 여행자들이 자주 골탕을 먹는 것도 이러 이유에서이다. 공연스레 잔뜩 멋을 부리며 모처럼의 외국 여행을 자랑하려다간 비 대문에 기분까지 망치기 쉽다. 한마디로 런던방문 시에는 비를 대비해서 반듯이 우산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때마침 미국의 대그룹 가운데 단연 지명도가 높을 뿐 아니라 국외의 여러 나라에 지점을 개설해 놓고 활발하게 운영을 하고 있는 메인 그룹의 총수인 리차드 메인의 런던 여행이 있었다. 리차드 메인의 이번 여행은 무척 중요한 회의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사업 계획의 일부였다. 하지만 막상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와 함께 동행 하는 메인 부인인 저스틴은 벌써부터 기분이 들떠 있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를 이해하는 리차드는 사업상의 여행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저스틴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감정을 쉽게 변화시키진 않지만 리차드를 사랑할 때만을 언제나 달랐다. 때문에 메인 부부는 언제나 행복했고 그런 사실을 주위 사람들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사업은 물론 가정은 생활 역시 만점인 부부였다.

"여보, 비가 그친 것 같아요."

"그렇군."

로스엔젤레스가 아닌 런던에서의 메인 부부 모습은 또 다른 조화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이 가는 길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런던 여행도 낙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런던은 낯선 곳으로 그들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뿐이다.

"저스틴."

"?"

리차드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당신? 뭐 잘못됐나요?"

"아니, 정반대야."

"네에?"

저스틴은 수수께끼에 걸려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런던에 와서 보니까 기막히게 더욱 아름다운데!"

"!"

저스틴은 짧은 탄성과 함께 전혀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리차드, 혹시 런던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이사?"

"."

"우리가?"

"그럼 누구겠어요."

"런던으로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메인 부부의 평범한 대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다.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고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언제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이 있었다.

"난 생각 없어."

"왜요?"

"털옷이 너무 가벼워서 싫거든."

"그건 그렇네요. 정말."

리차드의 의견에 이번에는 저스틴이 즉석에서 동의했다. 메인 부부는 늘 이런 식이었다. 느낌도 똑 같았을 뿐 아니라 부부만의 시간에서도 최고의 기쁨을 느끼는 것마저 서로 일치했다. 그들만큼 어울리는 한 쌍은 드문 것이다.

항상 원기 왕성한 리차드와 매력 넘치는 저스틴의 침실은 그래서 항상 기쁨으로 가득 찼다. 집을 설계할 때 방음 장치를 특별히 주문했어야 될 정도로 저스틴은 충분한 만족을 얻었다. 절정에 도달하는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그들 부부가 누리는 가장 극적인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지독해서 처절하게 보일 정도였다.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했고 그녀는 마치 셔츠를 흠씬 적셔 놓은 정열의 화신과도 같았다.

"..."

리차드는 문득 속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때 저스틴이 리차드의 생각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가 말이에요, 여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면 굉장히 멋지게 보일 텐데요, 안 그래요?"

"때아니 무슨 가죽옷?"

"아니에요"

"어째서?"

"그 자리는 이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임자가 있기 때문이죠. 설마 그걸 모르셨던 건 아니겠죠?"

", 그럴 수도 있겠군!"

"?"

"저스틴 당신은 로스앤젤레스의 여왕이니 왕관을 두 개 씩 쓸 수야 없겠지."

저스틴은 실제로 대학 시절, 퀸에 뽑혀 왕관을 머리에 얹는 영예를 안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왕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여왕이죠."

비는 그쳤지만 거리에는 여기저기 물이 고여 있었고 대기는 눅눅했다 목적지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걷기로 했다. 런던의 시가지를 걸어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멋진 추억거리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여보, 걸음을 좀 더 빨리 하지 않으면 약속 시간에 늦을 수도 있겠어."

비로소 저스틴은 이야기를 이번 여행의 목적인 사업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사업이야기를 카지노에서 한다는 거 말예요."

이번 여행은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었다. 런던까지 여행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유명한 카지노 클럽에서 회의를 한다는 것은 더 더욱 이상했다. 도박장 같은 장소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사업에 관한 일 때문에 모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회의 시간에 패트릭을 만나지 못했어. 그 사람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켄싱턴 클럽에서 지내니 큰일이야."

켄싱턴 클럽은 런던에서 카지노로 유명한 장소였으며 외국인들도 도박을 하기 위해서 여행 도중에도 반드시 찾곤 하는 장소였다.

", 좋은 생각이 있어요."

"당신한테?"

"당신, 상담이 끝난 다음에 우리도 도박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어차피 회의 장소도 도박장이니까요."

"당신한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짐작했지."

리차드의 저스틴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이 정도였다.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만보아도 벌써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예견에 놀라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그럴 때 그녀가 웃는 모습은 어떤 여자의 미소보다 리차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러 가지의 독특한 매력 중 저스틴의 미소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에 속했다.

 

켄싱턴 클럽은 이미 손님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대규모 유홍업소들이 흔히들 그렇지만 이 클럽의 웨이트리스들은 뛰어난 미인들이었다. 영국의 팔등신 미인들은 모두 이 클럽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치하고 선정적인 노출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들은 매력 만점이었다. 짧은 스커트 그리고 그 아래로 죽 뻗은 두 다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젖가슴을 정도 이상으로로 노출시키지도 않았다. 웨이트리스들이 아예 젖꼭지를 드러내고 있는 광경은 싸구려 술집이 아니더라도 흔히 연상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상이 아닌 사실이다. 아예 알몸을 알몸인 채 서비스하는 유홍업소가 버젓이 도시 한복판에서 운영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리차드와 저스틴은 정확히 약속 시간을 지켰다. 그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 클럽의 총지배인이며 리차드와 친분이 두터운 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는 미국에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과도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다.

"리차드!"

"조지!"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활짝 웃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차드."

"반갑습니다."

조지는 이어서 저스틴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저스틴."

조지는 눈부신 듯 그녀를 바라보며 탄사를 늘어놓았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말도 당신 앞에서는 부끄럽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죽을 지경입니다."

조지는 계속해서 리차드와 저스틴에게 말했다.

"지금 내 방에서 해스머그 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중요한 일인 것 같더군요. 보통 때도 이맘 면 수백 파운드를 잃기 마련이죠."

장소가 도박장이기 때문에 대화중에는 거의 언제나 그런 이야기가 섞이기 마련이다. 이제 리차드가 사업상 해스버그 씨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잠시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미국이 아닌 런던이며 특히 번잡스러운 카지노 클럽이다. 그곳에 저스틴을 혼자 두어야 했다. 만일 저스틴이 혼자 남겨 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도박장의 분위기는 원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저스틴 같이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여자는 나비 떼를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꽃이나 다름이 없었다. 벌떼조차 그 향기 넘치는 꽃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리차드는 계속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를 지켜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중요한 상담을 우선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저스틴은 침착한 성격을 지녔으며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이성과 자성이 절묘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서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셔야죠, 여보?"

"그 동안 당신이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야."

"좋아요."

"나중에 봐."

잠시 동안 헤어져 있어야 되는 아쉬움의 표현으로 리차드와 저스틴은 가볍게 포옹했다.

하지만 이때는 리차드도 저스틴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닥쳐오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분이 좋지 않은 범죄자들은 때와 장소를 구별 않고 사건을 저질렀다. 또 이런 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는 존재하기 마련이며 호시탐탐 범죄의 기회만을 노린다. 특히 카지노 클럽에서는 더욱 많으며 더구나 저스틴 같은 미인은 눈에 띄는 대상이 되기 쉬었다.

"조지, 저스틴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리차드.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리차드는 해스버그를 만나기 위해 총지배인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이때부터 저스틴은 낯선 공간에 리차드 없이 남겨지게 되었다.

"옷을 받아 드릴까요. 저스틴?"

". 고마워요."

"어떻습니까, 저스틴?"

"?"

"리차드를 기다리시는 동안 룰렛 게임 한 판 하시는 것 말입니다."

저스틴은 리차드에게 도박의 뜻을 비추였었지만 혼자서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떤 것이든 그녀는 남편과 같이 있을 때나 함께 움직일 때에만 의욕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에요. 조지."

"싫으십니까?"

"싫다기 보다는... 그냥 구경이나 하겠어요."

"그러실래요? , 가시죠."

조지는 저스틴을 카지노로 안내했다.

 

 

사라진 남작

 

클럽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긴장된 표정으로 룰렛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 판에는 돈을 걸고 참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뒤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게임을 진행시키고 있는 딜러는 금발 머리가 단정해 보인는 젊은 백인 청년이었다. 이런 장소에 와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저스틴은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손님 여러분, 돈을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다고 생각되는 번호에 돈을 걸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특별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도박판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데스타브 남작이었다. 그가 작위를 어떻게 받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 그를 남작이라고 불렀다. 인상이 부드럽거나 자상해 보이지 않는, 어떻게 보면 무서운 느낌을 주는 중년의 신사였다.

"당신은 천재적인 도박사야. 다음 번에도 오는 거겠지."

남작은 옆에 앉은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말했다. 말투로 보아 런던뿐만 아니라 세계의 도시를 섭렵하며 도박을 벌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스틴은 조지와 함께 뒤쪽에 서서 조용히 구경했다. 주변에 여자들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저스틴의 모습은 역시 눈에 띄었다.

"이제 됐습니다. 더 걸지 말아 주십시오."

젊은 백인 딜러는 능숙한 솜씨로 룰렛 게임을 진행했다. 돈을 걸어 놓은 사람들이 긴장하는 가운데 회전판이 돌아갔고 이윽고 당첨 숫자가 정해졌다.

"흑색 17번입니다."

그때 저스틴은 남작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작의 번호가 흑색 17번임을 알았다. 그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 따셨군요."

놀라는 그녀 모습은 순진한 소녀와 같았다.

"우연이지요."

방금 돈을 딴 남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마디로 잘라 말하며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크게 변하는 것을 저스틴은 분명히 보았다.

"아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이 행운을 가져다 준 게 분명합니다."

남작은 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저스틴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의 시선에는 놀라움이 가득했으며 한시도 저스틴의 모습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고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표정은 기적의 순간을 본 사람과도 같았다. 아니면 굉장히 놀랍고 기뿐 일을 순식간에 당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단순한 경이로움이 아니라 매우 뜻깊은 무엇인가를 느낀 모습이었다.

", 저는..."

남작의 긴장된 표정과 강열한 눈빛이 저스틴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금방 그가 팔을 뻗쳐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위기감조차 느껴졌다.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곁에서 지켜보던 조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는 남작 같은 도박군의 유혹으로부터 저스틴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소개해 드릴까요?"

"이쪽은 데스타브 남작, 그리고 메인 부인입니다"

조지는 저스틴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가 저스틴을 소개했을 때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도박꾼이 재빨리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저스틴을 이미 알고 있고 있는 듯 보였드며 그의 눈빛에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는 이 의문의 남자는 어떤 수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저스틴은 순식간에 남작과 그 남자, 즉 수상쩍은 두 남자 사이에 서게 되고 말았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저스틴은 그들에게서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조지를 통해 소개된 저스틴도 스스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스틴 메인이에요."

그러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남자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메인 부인."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남작이 자신을 소개한 저스틴의 손등에 답례로 정중하게 키스하는 광경을 재빨리 노려보았다. 저스틴은 소개한 조지까지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럼 즐겁게 지내세요. 부인."

"고마워요. 조지."

조지가 인사를 하고 물러가자 남작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재빨리 저스틴이 앉도록 권했다.

", 자리에 앉으시죠."

", 아니에요."

"어서 앉으세요. 단순히 농담으로 부인께 자리를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전 여기서 그냥 구경만 하겠어요."

저스틴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들밖에 없고 그나마 믿을 수 있던 조지조차 가버렸다. 이럴 때에는 평소 침착했던 저스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행운을 가져왔다고 말하면 자꾸 자리를 권하는 남작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강렬한 눈빛과 굳은 표정 등은 저스틴에겐 모두 이질적인 것들이었다. 남작은 저스틴을 보는 순가 어떤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남작의 계획은 다른 어떤 사람도 눈치 챌 수 없었다. 물론 저스틴은 더 더욱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입장은 어른들에 의해 강제로 위험한 장소에 끌려온 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 저스틴은 더욱 불안하게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남작."

마치 시비를 거는 사람처럼 말을 한 것은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였다.

"설마 혼자서만 차지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요?"

남작은 그의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 점은 걱정할 게 없어요. 오늘 저녁에 딴 돈을 모두 입금시켜 놓겠소."

"젠장, 돈 이야기가 아니요."

"그럼?"

"그 아름다운 여자 말이야."

갑자기 저속해진 그의 말에 저스틴은 감짝 놀랐다. 그 남자가 그녀를 직업여성쯤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알았소."

남작은 서둘러 그 남자에게 저스틴을 소개했다.

"소개해 드리겠소. 용서하시오. 이쪽은 저스틴 메인 부인, 그리고 닐 완슨 씨요."

저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앞에서 떠벌이던 남자는 닐 완슨이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저스틴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나 좋지 않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부인."

닐 완슨은 짐짓 예의를 갖추려는 듯 보였다.

"안녕하세요?"

항상 예의를 잃지 않는 저스틴은 자신의 불쾌해진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더욱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손님 여러분."

젊은 딜러는 마치 남작과 닐 완슨이 저스틴에게 접근하도록 기다려 주었다는 듯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게임을 진행시켰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돈을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딜러의 말을 신호로 남작은 본격적인 접근을 시작했다. 그는 거의 강제로 앉혀진 저스틴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선 뒤 그럴듯하게 물었다.

"몇 번에 거시겠습니까?"

"남작님."

저스틴은 또다시 당황했다.

"전 구경만 하겠어요."

"어서요. 부인."

당장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것은 여자로써 너무 경솔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더 더욱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남작은 저스틴을 처음 보는 순간 이미 그런 점들을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강요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저스틴의 성격까지도 간파했을 것이 분명했다. 저스틴의 감수성은 경우에 따라 아직도 처녀 시절과 비슷한 민감함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행운의 여신처럼 칭찬했던 남작의 말을 떠올린 것이 바로 그런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것은 저스틴의 호기심이랄 수도 있었다. 왠지 두렵고 기분이 나쁘면서도 한 구석에서는 호기심이 조금씩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서요. 부인. 이 기막힌 행운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딜러의 시선이 잠깐 남작의 표정에 머무는 듯하더니 이내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누구나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저스틴은 더 했다. 남작의 적극적인 권유는 강요나 다름없는 것이며 미묘하게도 그의 태도는 그녀로 하여금 이미 호기심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위험한 장난인 줄 알면서도 한번 해 보고 싶은 아이 같은 모험심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남작님, 정말이에요."

젊은 딜러의 시선은 다시 남작의 표정에서 이번에는 저스틴의 표정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의심하거나 다른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딜러는 흔히 고개들의 표정에서 그 기분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게임을 진행시키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작님, 기다리고 있습니다."

딜러가 재촉했다. 그런 분위기는 저스틴에게 정신적인 부담감을 다시 주어 어떤 식으로든 그의 부탁을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그녀를 몰고 갔다.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저스틴은 앞으로 전진 할 수박에 없다.

"그냥 생각나시는 번호 하나만 부르시면 됩니다."

 

저스틴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되자 생각나는 번호 하나 정도라면 불러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

생각해 보던 저스틴은 어렵지 않게 숫자를 결정했다.

"4번이요'"

"좋습니다. 부인."

남작은 그녀를 행운의 여신으로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선택한 4번에 굉장한 액수의 칩을 선뜻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던 닐 완슨이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남작, 요즘 석유가 많이 나오는 모양이군요."

자신이 선택한 번호에 남작이 상당히 많이 거는 것을 본 저스틴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시켜서 어절 수 없이 했던 일이지만 만일 잃게 된다면 원망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잃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번호가 당첨되기를 은근히 바라며 보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더 걸지 말아 주십시오."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저스틴 자신도 당첨될까하는 불안에서 벗어날 여유도 없이 놀라서,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남작이 예감이 적중했던 것이다. 작은 돌은 이상하게도 저스틴이 선택한 4번에서 딱 멈추었다.

"흑색 4번입니다."

딜러의 발표에 모두 탄성을 질렀다. 곁에서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일이 저스틴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으며 마치 무엇에 홀린 기분처럼 걱정했던 일이 잘 풀렸는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저스틴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착각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게 된다. 저스틴은 자신에게 정말 행운이 따라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작은 감동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카우보이모자의 날 완슨은 더욱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떻습니까, 부인."

저스틴은 닐 완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탁하고 싶군요."

"?"

"우리 정유 회사의 석유 탐사 중역으로 와 주세요."

"어머!"

경솔한 여자 같으면 이번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겠지만 저스틴은 아니다. 솔깃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럴 때 어떻게 말해야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건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에요. 완슨 씨."

그때 룰렛 게임이 벌어지는 주위에는 어느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저스틴도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신통력이라도 발휘한 기분이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부인. 그게 아닙니다. 당신이야 말로 행운을 몰고 와 준 여신입니다."

남작은 경건한 목소리로 극찬한 다음 이번에는 저스틴의 손을 끌어다 여신께 예의를 드리는 모습으로 손등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렇지 않아요, 남작님."

저스틴은 자신의 당황하는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저 깊은 마음 한 구석에는 남작의 극찬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4번을 정확히 맞춘 것을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그때 사람들 뒤쪽으로 한 남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그 남자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콧수염이 있는 모자 쓴 사내는 그들이 있는 곳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가 살피는 것이 누구인진, 모르지마 눈빛으로 보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저스틴은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녀는 의문의 사내가 이들을 주의 깊게 살핀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손님 여러분, 돈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돈을 걸어주세요.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방금 저스틴의 손등에 엄숙한 모습으로 입을 맞춘 남작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 보다 말고 모자를 쓴 콧수엄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 역시 자신을 발견한 남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딜러는 룰렛 게임을 진행시키는 데 신경을 쓰느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딜러 특유의 눈치로 남작과 의문의 모자 쓴 콧수염의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특별한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상황으로 모아 저스틴이 보이지 않는 어떤 음모에 걸려든 것만은 확실했다.

"한 번 더 하실까요?"

남작은 저스틴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지금까지 땄던 것과 가지고 있던 칩을 몽땅 모으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더욱 깜짝 놀랐다.

"전부 다 말인가요?"

저스틴은 어느덧 남작의 제안에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느 사이에 그녀도 자신의 행운을 무언중에 믿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만 남작의 엄청난 배짱에 마음이 불안해질 뿐이었다. 남작은 약간은 초조한 빛이지만 아까보다는 더 확실하게 대답했다.

"물론 전부 다요."

"네에?"

"그렇습니다. 3만 파운드를 한 번에 걸겠습니다."

저스틴도 소심한 여자는 아니었다. 미국의 대기업인 메인 그룹 총수의 아내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결정할 줄 아는 통이 큰 대담한 여자였다. 여성적이고 알뜰한 것과 이런 문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였다.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스틴의 그런 걱정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어서 남작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 수도 있겠죠."

"그런데 어떻게..."

"부인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어떤 위험도 내가 책임질 뿐, 부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남작의 말은 의심되는 부분이 전혀 없었고 사실이었다. 그가 원해서 저스틴은 남작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었다. 일이 잘 안되다고 해도 책임은 남작한테 있다. 주위에는 그 일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증인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어떻습니까, 부인? 행운을 한 번 더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남작에 이어 딜러까지 저스틴을 재촉했다.

"부인, 번호를 불러 주시죠, 그래야 시작합니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딜러의 재촉은 저스틴이 마음을 생각하고 정리할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는 3만 파운드의 거금을 말 한마디에 결정하는 커다란 모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로써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를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룰렛 게임이나 구경하겠다고 생각했던 바로 전까지도 그랬다. 잠깐 생각을 해 본 저스틴은 떠오르는 번호를 조심스럽게 말했다.

"15번에 걸겠어요."

그녀의 말은 적중률이 높은 예언으로 통했다. 남작은 2만 파운드를 보태서 주위의 모든 사람까지 그 번호에 돈을 걸었다. 게임을 하는 당사자들은 물론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일시에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더 걸지 말아 주십시오."

딜러의 시작 선언과 함께 분위기는 더욱 긴장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판돈이 과연 어느 번호에 떨어질 것인가. 이번에도 저스틴의 예언이 맞을 것인가에 모든 사람의 긴장된 마음이 한껏 고조되었다. 그때 뜻밖에도

"난 이만 가야겠습니다."

하고 남작이 말을 했다. 하지만 저스틴은 긴장된 마음에 이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

"? 가시겠다구요?"

그녀는 남작이 의문의 콧수염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다음 갑자기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보다 남작과 그 남자와의 관계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남작은 그 남자가 나타남으로 해서 그 장소에 더 머무를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남작은 누가 보아도 의심할 정도로 서두는 모습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따게 되면 내 칩을 보관해 주십시오."

"하지만, 남작님.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그러는 사이에 회전판은 판돈이 많이 걸린 게임의 당첨번호를 이미 결정해 놓았다.

"흑색의 15번입니다."

순간 일제히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스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곁에 있는 남작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다 중도에서 말끝을 흐렸다.

"남작님 이번에도 이겼어..."

"남작님?"

저스틴은 급히 주위를 살폈지만 남작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저스틴에게 딜러가 말을 걸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인, 모두 1백만 파운드입니다."

광장한 액수였다. 아니 그보다도 엄청난 돈이었다. 하지만 저스틴은 그 돈이 남작의 돈이기 때문에 더욱 당황해하며 계속 남작을 찾으려 했다.

"남작님!"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남작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실례합니다."

저스틴은 곁에서 구경하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 혹시 남작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아세요?"

여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엉뚱하게 대답했다.

"남작이요?"

""

"여기서 그 행운의 사나이를 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데스타브 남작님 말이에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저스틴은 더 물어도 원하는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인?"

딜러가 그녀를 부르며 산더미처럼 쌓인 칩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부인의 칩입니다."

"아녜요. 그건 데스타브 남작님의 칩이에요."

"그렇다고 테이블 위에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저스틴은 입장이 매우 난처해지고 말았다. 적은 액수라도 남의 것이라면 마땅히 그 사람에게 되돌아가야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1백만 파운드나 되는,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사람의 돈이 자신에게 맡겨진 셈이어서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 옆에서 몽땅 돈을 잃은 닐 완슨이 넌지시 저스틴에게 말했다.

"부인께서 사양하시면 그 칩을 제가 갖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남의 돈이었고 더구나 남작이 보관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기 때문에 더 더욱 중요했다. 그 돈은 무사히 주인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책임이 저스틴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는 넉살스러운 닐 완슨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그 칩은 제 것이 아니에요, 아시겠지만."

그때 딜러가 최선의 방법을 그녀에게 제시했다.

"부인,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떨지 모르겠군요."

"?"

"전 여기서 일하고 있는 딜러입니다."

"."

"제가 이 칩을 출납 창구에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고마워요."

달리 어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저스틴이 가지고 있을 수는 더욱 없었다. 카지노의 직원인 딜러를 믿고 일임시켜 보관하는 것 외에는 더 뾰족한 다른 방법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해 저스틴은 더욱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카지노의 출납 창구에서 나중에 데스타브 남작의 찾아가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에 숨겨진 음모나 함정이 있는 줄 저스틴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스틴은 이미 남작과 얽힌 음모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이것이 굉장히 위험한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제아무리 부자인 남작이라 해도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쉽게 남에게 맡길 수 없으므로 모종의 음모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저스틴은 카지노 클럽에 처음 와서 당황해 있는 그녀를 남작이 행운을 갖고 온다는 등의 말로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바람에 상황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었다. 평소 저스틴의 통찰력 같으면 충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작과 딜러

 

테스타브 남작이 별안간 사라진 것은 또 다른 문제들을 끌어들였다. 저스틴은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작이 맡긴 돈 때문에 리차드까지 개입시켜야 했다. 카지노의 총지배인인 조지도 남작의 실종에 대해 아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상담을 끝낸 리차드와 만났을 때 저스틴은 그동안 있었던 사실부터 알렸다.

"뭐라구?"

리차드도 처음에는 믿기 어렵다는 듯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몰랐어요. 난 그냥 구경이나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구경이 아니겠지."

"?"

"당신 나에게 말했었잖아, 도박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그거야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던 거죠."

"그나저나 그 남작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알았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구경이나 하려고 했는데 조지가 소개하는 바람에 알게 되었어요."

"조지가 잘 아는 사람인가?"

"그런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카지노에 단골인 것도 같고요."

"그럼 조지한테 가 봅시다."

"그러는 것이 좋겠어요."

두 사람이 찾아갔을 때 조지는 자기 방에 있었다.

"상담은 잘 끝났나요. 리차드?"

"덕분에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

조지는 적지 않게 놀라며 메인 부부를 바라보았다.

"어떤 문제입니까?"

그는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곳에서 어떤 문제도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좋습니다, 저스틴."

"아까 리차드가 상담하는 동안 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혼자..."

저스틴은 그 일을 간략하고 명확히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거야 우선 남작을 찾는 게 중요하겠죠."

"빨리 찾아서 돈을 돌려주면 좋겠어요."

"남작이 보관을 부탁했단 말이죠?"

"그랬어요."

"보관해 주겠다고 하셨나요?"

"그렇게 말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이상한 일이군요. 그런 많은 돈을 데스타브 남작이 단념했을 리가 없는데..."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요?"

"글쎄요..."

데스타브 남작이 의문의 남자를 발견하면서 당황하는 모습을 저스틴이 발견했다면 문제는 아마 쉽게 추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데스타브 남작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종적을 감춘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남작을 찾아볼 테니까."

조지는 인터폰을 통해 카지노의 각 부서에 데스타브 남작의 행적을 찾았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남작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메인 부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데스타브 남작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군요. 카지노에서 떠난 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저스틴은 리차드의 표정을 재빨리 살폈다. 이제서야 그녀는 왠지 자신이 어떤 문제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복잡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한편 조지의 입장에서는 그 돈을 저스틴에게 일단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와 리차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또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지, 우리는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습니다. 두 시간만 있으면 비행기가 떠나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리차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돈을 남작이 부인께 부탁한 만큼 우선 보관하시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제가요?"

"."

"그렇지만 우린 두 시간 후 여길 떠나는데 어떡하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보통 크기인 여행용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고마워요. 브릭스."

브릭스가 나간 다음 조지는 가방을 열었다. 그 속에는 달러가 지폐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조지?"

"그 칩을 우선 달러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2백만 달러."

현금으로 2백만 달러가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돈의 단위보다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새삼스럽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주인이 없으면 돈을 경찰 당국에 맡기면 됩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잘 알고 있죠."

"구태여 일을 어렵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그리고 잔액은 통상 클럽측이 갖는다는 것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조지의 말은 그 돈을 저스틴이 맡아달라는 뜻이다. 경찰에 맡길 경우 여러 종류의 절차를 밟아야 한고 따라서 거기에 따르는 부담을 피하려는 것이다. 리차드는 조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여보, 이 돈을 클럽에 맡겨놓고 가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어. 뒤에 남작이 와서 찾아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난 잘 모르겠어요."

저스틴의 입장에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남작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그 사람은 내게 돈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요."

마음이 여린 그녀는 이미 데스타브 남작의 입장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마땅히 돈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쉬운 부탁이 아니지."

리차드 역시 저스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ㄱ까지 반대할 사람은 아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라고 하면 따르는 것이 그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한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만일 그 돈을 보관하고 있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에 보험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조지가 말했다. 그쯤 되면 저스틴과 리차드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저스틴은 이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보."

그녀는 리차드를 향해 부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많은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곤란한 문제란 건 알아요. 그렇지만 그분은 나를 믿고 있었어요. 그러니 아무래도..."

"우리가 보관하자는 말이군."

"그래야 될 것 같아요."

"할 수 없군."

"고마워요. 여보."

"고맙긴."

저스틴의 결정에 대해 조지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객의 많은 돈을 보관해야 하는 일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저스틴과 리차드는 아직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한 문제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딜러는 무엇인가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테스타브 남작의 호텔 방에 들어섰다. 남작은 느긋하게 앉아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나?"

"계획대로 됐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달러로 바꾼 돈을 그 여자가 보관하게 된 거죠."

"다행이군. 액수는 2백만 달러 맞지?"

". 그런데..."

딜러는 불만을 털어놓을 때가 된 듯이 데스타브 남작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그렇습니다."

"뭔지 말해 봐."

남작이라는 귀족의 작위에도 불구하고 데스타브의 외모나 눈초리에는 언제나 사나운 기운이 감돌았다. 결코 선량한 느낌이나 귀족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여자 말인데요."

딜러의 불만이 무엇인지 남작은 금방 집어냈다.

"저스틴 메인 말인가?"

"."

"그래서?"

"그런 여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겁니까?

남작은 대답 대신 더욱 느긋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전부터 친하게 알고 지냈던 사람도 아니잖습니까?"

딜러의 불만에 대해 남작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마치 저스틴에 대해 머리 끝에서 발 끝가지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경험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무슨 경험요?"

"그 동안 겪어 본 경험 말야. 더구나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자네도 보았겠지만 클럽에 하그렌드 경감이 갑자기 나타났잖아."

"그 사람이 왔었어요?"

딜러는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불쑥 나타나지 않았겠나. 그러니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거야."

"그 사람이 언제나 문제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카지노에 불쑥 나타나 데스타브 남작과 시선이 마주쳤던 수염이 난 사내, 그는 다름 아니 하그렌드 경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런던 경시청 소속의 노련한 수사관이었던 것이다. , 경감을 보고 도망칠 만큼 남작은 어떤 범죄의 용의자로 경찰의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가 용의자가 아니라면 돈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룰렛 게임의 딜러가 남작과 공모자라고 볼 때 사간의 전모는 더욱 확실해진다. 룰렛 게임에서의 딜러는 자기가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조작을 할 수도 있었다. 결국 저스틴에게 행운이 따른 것이 아니라 딜러의 조작이었던 셈이 된다. 그 다음은 간단했다. 데스타브 남작과 딜러의 조작에 의해 게임은 결정되고 그 희생자로 저스틴이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저스틴을 끌어들여야 되었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남작의 말에도 불구하고 딜러는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메인 부인은 그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

"그녀는 자기 돈이 아니니까 잃어 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따라서 최선의 방법으로 그녀는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지."

딜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내가 그곳으로 갈 때까지 메인 부인은 그 돈을 안전하게 보관할 걸세. 그런데 무슨 걱정인가?"

"꼭 그렇게 될까요?"

"난 확신하네."

남작의 표정에서는 의심하는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말처럼 경험이 풍부한 그는 저스틴과 리차드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넨 아직 사람을 볼 줄 모르는군. 그녀는 내가 그곳에 가서 연락만 하면 기꺼이 돈을 돌려주는 양심적인 사람이야."

딜러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남작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남작의 장담처럼 저스틴은 돈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원래의 임자에게 되돌려 줄만큼 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돈이 2백만 달러이든 아니든 액수와 상관없이 저스틴은 양심을 지킬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와 같이 선량한 양심이 범죄에 이용당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전부터 그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딜러는 여전히 저스틴을 의심하는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모르지. 전에는 만났던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요."

"자넨 모르겠지만 난 그런 류의 여자를 상대해 본 경험이 풍부하다네. 그건 틀림없어."

딜러가 데스타브 남작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소문에 의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특히 남자그이 문란한 여성 편력에 대해 상당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박판에서 군림하는 것처럼 여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히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대한 여성들 가운데 그이 정체를 완전히 파악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데스타브 남작은 베일에 싸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지만..."

딜러는 끝가지 안심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하시는 것과 반대일 수도 있을 겁니다."

"반대?"

"그렇죠."

"물론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데스타브 남작은 다른 사람에 비해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건 어떤 종류의 범법자라도 반듯이 갖추어야 할 사항이다. 모든 종류의 범법자들은 전문가의 분석이 별도로 필요 없을 정도로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데스타브 남작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상대를 한 번 보면 금방 알아차렸다. , 자신이 이용해도 좋은 상대인가 판단하는 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계속되는 딜러의 의심을 일축하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항공사 부탁합니다."

남작과 딜러의 관계는 현재로서는 그들이 저스틴에게 강제로 떠맡긴 2백만 달러를 노리는 함 패임을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그들은 대체로 그렇듯이 겉으로는 함께 일하면서도 서로 다른 속셈을 가졌을 수도 있다. 딜러도 역시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시킬 수가 없었다.

"우린 언제 떠납니까?"

딜러의 질문에 데스타브 남작은 빙그레 웃었다. 웃을 때에도 그의 모습은 험상궂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만큼 묘하게 일그러졌다.

"우리가 떠나는 게 아니지."

"?"

"나만 떠나는 거야."

"그럴 수가..."

딜러의 얼굴이 실망과 분노의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번거롭게 자네까지 미국으로 날아갈 필요가..."

딜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따졌다.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모든 범죄자들이 그렇듯 서로가 상대방의 약점을 완벽하게 쥐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도 딜러가 만약 입을 열면 데스타브 남작의 입장은 삽시간에 변할 테고, 마찬가지로 데스타브 남작의 태도 여하에 따라 딜러의 입장이 궁지에 몰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작은 태연했다.

"좋아"

"?"

"그렇다면 자네가 미국으로 날아가게."

"그 다음에는요?"

"메인 부인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겠지. 번거롭게 두 사람이 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래, 자네가 그렇게 하겠나?"

딜러의 얼굴에 약간 당황하는 빛이 나타났다. 당연히 딜러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메인 부인은 그 돈을 남작 당신 것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야."

"?"

"자네는 나를 믿고 기다려야 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렇지만..."

"공연한 소리 자꾸 지껄이지 말고, 애당초 약속한 그대로만 해. 오늘부터 일주일 후에 알카불고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데스타브 남작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항공사 좀 빨리 부탁해요."

그는 리차드와 저스틴을 다라 미국으로 날아갈 결심이다. 모두가 계획된 것이다. 딜러가 자구만 의심스러워하는 것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는 미지수지만 현재로서는 모든 계획이 뜻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 개입된 사실에 대해서는 남작은 잠시 잊고 있었다.

 

 

뒤바뀐 거금

 

리차드와 저스틴은 문제의 돈이 든 가방을 들고 정확한 시간에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국외 여행이나 출장이 흔하지 않았던 저스틴은 이번 여정이 굉장히 길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벌써 아늑한 집과 좋은 사람, 시고니 그리고 사랑스러운 애견 프리웨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할 정도였다. 만일 그들이 데스타브 남작 역시 거의 같은 시간에 미국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문제의 2백만 달러를 달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의 내막을 전혀 모르는 메인 부부는 처음부터 남작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주인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리차드는 그 문제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런던의 안개와 작별하고 이제는 로스앤젤레스의 매연을 맡게 되는군."

"상관없어요."

비행기가 창공을 나는 동안 그들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관없다니, 무슨 뜻이야?"

리차드는 지도에 그려진 그림처럼 멀리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모습에 시선의 모습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가잖아요?"

"그렇지."

"집에만 가면 돼요. 그 동안 집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당신은 어땠어요?"

"나도 물론 그렇지. 시고니도 보고 싶고."

"그리고 프리웨이두요."

"물론이지. 하지만 당신이 더한 것 같군."

"정말이에요. 아마 한 달쯤 집을 떠나 있어야 된다면 난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럴 때는 꼭 소녀처럼 보이는군."

"어머, 내가요?"

"그럼 누구겠어"

두 사람은 마주보며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목소리가 언제나 명쾌한 저스틴은 다른 승객에게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행 여행도 끝나고 드디어 집에 도착했을 때 저스틴의 모습은 정말 성숙한 소녀처럼 보였다. 마치 꿈에도 그리던 고향의 정든 집에 돌아온 모습이었다.

", 즐거운 우리 집! 앞으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만 자야지!"

언제나 그렇듯이 시고니가 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고니느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 한 식구나 다름이 없었다. 때에 따라선 주인 내외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받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메인 부부와 그들의 저택에 대해서 갖는 시고니의 애정은 세상의 어떤 애정보다 깊고 소중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메인 씨, 메인 부인."

"잘 있었어요, 시고니?"

"그럼요. 저야 집에서 편안하게 지냈죠. 두 분 다 몹시 피곤하시죠?"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고니는 아직 정정했다. 무엇보다도 주인 내외를 대하는 예의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리 좀 피곤해요. 시고니."

저스틴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지금 당장 침대에 들어가서 쉬고 싶을 만큼."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가져오신 짐은 어떻게 할까요?"

", 말해둘 게 있어요."

"?"

"거기에 있는 그 가방 속에 저스틴이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은 거금이 들어 있어요."

"?"

거금이라는 말에 시고니는 약간 의아해했다.

"2백만 달러예요."

"저런! 그럼 정말 큰돈이군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오늘밤에는 그냥 여기에 두고 내일 아침에 금고에 갖다놓도록 하세요."

시고니는 평소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사람이므로 2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에 호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돈을 누가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는지 보다는 문득 한번 보고 싶어졌다.

"저어, 메인 씨!"

"뭐죠, 시고니?"

"그렇게 많은 액수의 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한번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상대가 시고니라면 그 이상의 부탁도 들어 줄 수 있는 리차드가 그런 시고니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시고니, 이건 선물이에요."

저스틴은 시고니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고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값보다는 그가 좋아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물건을 선물로 준비하였다.

"고맙습니다. 메인 부인."

저스틴은 또 한 가지 마음의 선물을 준비했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여행을 갔다 올 때는 언제나 이렇게 마음을 기울였다.

"프리웨이, 이건 너에게 줄 선물이다."

곁에서 꼬리를 흔들던 프리웨이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작게 몇 번을 짖었다. 프리웨이 역시 시고니와 함께 메인 부부의 가족 가운데 하나였다. 리차드, 저스틴, 시고니, 프리웨이, 네 명이 한 가족인 셈이다.

"여보."

한쪽에 있던 리차드가 보채듯 저스틴을 불렀다.

"?"

"우린 빨리 침실로 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요"

"그런데 어떤 것을 침실로 가져가야 하나?"

"저 가방요."

저스틴은 시고니가 막 뚜껑을 열고 있는 돈 가방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그 돈 가방은 침실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입문은 물론 모든 창문까지 경보 장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천재지변이 없는 한 집안은 안전하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곁에 두어야 안심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였다. 돈 가방을 열고 들여다 본 시고니는 약간 황당해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애매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저한테 농담을 하신 거군요."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발라볼 때 시고니는 더욱 어이가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이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은 장난감 돈인데요?"

이번에도 메인 부부는 시고니의 말과 당황해 하는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저스틴은 마치 농담하듯 말을 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시고니."

"?"

"그건 카지노에서 장난이나 하는 돈이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메인 부인."

"?"

저스틴은 그제서야 시고니의 당황한 표정을 보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돈이 아니라구요."

"네에?"

이번에는 리차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일이 심상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호텔을 짓고도 남을 액수지만 가짜인 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고니? 그럴 리가..."

시고니는 다가온 그녀에게 가방 안의 돈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걸 좀 보세요."

"어머나!"

저스틴은 깜짝 놀라며 다급하게 남편을 불렀다.

"리차드!"

시고니가 의아해 하는 리차드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말했다.

"장난감 돈입니다. 메인 씨."

"그럴 리가!"

리차드 역시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무척 놀랐다. 가방 속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것은 한 눈에 보아도 장난감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런던에서 보았을 대는 분명히 진짜 지폐였던 것이 감쪽같이 한 눈에 보아도 장난감 돈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고니보다 저스틴과 리차드가 더 놀랍고 당황해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다.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런던에서 집으로 가져올 때가지 누구한테 보였거나 맡긴 적도 없었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가방이 가짜 지폐가 든 가방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또한 이 문제로 인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여보?"

"글쎄..."

옆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시고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에는 이런 가짜 돈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그래요, 시고니."

"그럼요."

리차드와 저스틴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메인 부부는 한동안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한편 문제의 인물인 데스타브 남작도 같은 시간 미국에 있었다. 그는 메인 부부의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직 저스틴을 완전히 믿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돈이 장난감으로 변한 것도 모르고 있었고 다만 저스틴이 보관한 가방에 2백만 달러가 들어 있으며, 런던에서 무사히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사실에 흡족하게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많은 여자들이 도박장에 자주 나타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요즘에는 전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돈뿐이었므로 여자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미뤄둔 지 오래였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술과 도박, 여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이번 계획을 세우면서부터는 예외였다. 도박장 주위를 배회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많은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면 멋진 남자와 한번 멋있게 즐기려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돈을 탐내는 여자들이 아니었다. 돈은 남부럽지 않게 가지고 있는 부유한 여자들이다. 돈보다는 남자를 원했고, 더 늙기 전에 마음껏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연령층보다는 나이 많은 사내와 즐기면서 여유로움을 좋아하는 20대의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들도 있었다. 그러나 데스타브 남작은 도박 전에는 절대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도박꾼들 중에는 그와 정반대인 사내들도 있긴 하다. 도박을 시작하기 전에, 아니면 도박을 하는 도중, 다시 말해 끗발이 서지 않을 때에는 재빨리 장소를 옮겨 여자와 섹스를 즐긴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런던의 컨싱턴 클럽에서 데스타브 남작과 함께 룰렛 게임을 했던 닐 완슨의 경우는 앞에서의 예 중에서 후자에 속했다. 그는 도박 전 꼭 여성과 섹스를 해야만 행운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마다 그가 섹스 파트너를 정하는 취향은 언제나 독특했다. 이때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미인이나 글래머의 아가씨는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분이 낮은 하녀나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인들을 상대하였다. 그런 여자들은 대개 굉장히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복종했고 몇 닢의 동전 때문에 그냥 몸을 제공할 뿐이라서 어떤 감정 표현이나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하며 사내가 끝낼 때까지 기다려 준 다음 속옷을 챙겨 입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 중에도 예외가 있어서 닐 완슨은 당황시켰던 적도 있었다. 다른 때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어느 순간 깜짝 놀랐다. 뜻밖에도 그 여자는 무서울 정도로 반응하며 파고 들어왔다. 이런 날은 닐 완슨은 마치 올가미에 걸려든 기분이었고 그날은 도박판에 나가지 않았다. 도박을 섹스와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그는 이런 상대를 만난 날은 도박판에서도 만만했던 상대에게 의외로 돈을 물려 크게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마치 여자에게 휘말렸던 것처럼.

 

메인 부부의 저택에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오가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시고니는 벨소리가 계속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아직까지 자고 있는 메인 부부를 방해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메인 씨 댁입니다."

상대방의 음성에는 전혀 예의다 들어 있지 않았다.

"메인 부인 좀 부탁합니다."

시고니는 거기서 이미 불쾌한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바꿔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집에 안 계신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메인 부인과 언제 통화할 수 있는 겁니까?"

"메인 부부께서는 어젯밤 런던에서 늦게 도착하셨기 때문에 주무시는 중입니다."

"아직도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스틴이 아직 자고 있다는 시고니의 설명에 상대방은 더욱 불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어나시면 데스타브 남작이 로스앤젤레스에 와서 전화했었다고 전해 주시오."

이제는 목소리가 아예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시고니는 치미는 감정을 재빨리 억제시키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이든 상대방은 저스틴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제가..."

"그럴 필요 없소."

"?"

"내가 다시 전화하겠소."

남작은 마치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명령하는 투로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전화할 테니까. 그때는 곡 통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

남작은 시고니에게 달리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딱 끊어 버렸다. 시고니는 어이없이 잠시 전화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역시 참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젠 남작이라는 귀족도 존경할 만한 인물은 못 되는 것 같군!"

시고니는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위로했다.

한편, 같은 시간 호텔에 있던 데스타브 남작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에게는 한 시간이 급했다. 가급적이면 빨리 2백만 달러를 찾아서 다른 데로 떠나야 된다. 한가하게 호텔에 머물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제 늦게 런던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정오가 되도록 자고 있으며 전화도 바꾸어 줄 수 없다는 말에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그의 심기가 끓어올랐다. 남작은 심리적으로 쫓기는 이유는 하그렌드 경감 때문이었다. 경감이 런던의 켄싱턴 클럽에 있었던 광경을 목격한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남작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클럽을 빠져 나오면서 돈을 저스틴에게 맡기게 되었고 지금은 신속하게 움직여 미국까지 도망쳐 왔지만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하그렌드 경감과 남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쫓고 쫓기는 사이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무사한 것은 경감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감은 남작을 체포하기 위한 증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남작은 닥쳐온 고비를 매번 그만의 탁월한 솜씨로 해결했다. 이렇게 자신은 한 시간이 초조하고 급한 상황인데 돈을 보관한 저스틴이 아직까지 편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남작은 먹기 위해 주문했던 아이스크림도 먹지 못했고 그뿐이 아니라 피우고 있던 담배까지도 아이스크림에 콱 처박아 버렸다. 앞에 어떤 물건이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즉시 달려가 권총으로 협박해서라도 돈을 빼앗아 오고 싶었다. 남작은 필요하다면 저스틴이나 그녀의 남편가지도 쏘아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2백만 달러의 거금도 중요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 나타나서 방해할지 모르는 하그렌드 경감이었다.

그가 만일 미국까지 추적해 온다면 큰일이었다. 이번에 그에게 붙잡힐 경우 남은 평생을 감옥에 들어가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남작이 이번에 벌인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단번에 현금 보관자로 저스틴을 선택한 남작이 범죄적인 안목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2백만 달러를 무사히 되돌려 받고 하그렌드의 수사망에서 벗어나도 남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범죄 행각을 계속 확장시켜 나아갈 것이다. 남작은 런던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대도시를 두루 돌아다니며 필요하다고 느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도박판에 끼어드는 사람이었다.

 

 

걸려든 함정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저스틴과 리차드가 알고 있는 현금이 가짜 돈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한 가지였다. 그 외에 얽혀진 어떤 사건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굉장히 심각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자신과 연관되지 않았을 경우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저스틴은 돈의 보관을 일방적으로 부탁 받았고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미국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그 돈이 중간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며 아울러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심각한 범죄가 일어났다 해도 그것은 수사 당국의 일인 것이고 본인들이 떳떳한 이상 초조해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차드와 저스틴은 정오가 지나도록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것은 오후 두 시가 지나서였다.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리차드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여보, 당신 왜 그랬어?"

"?"

저스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밤새도록 뒤척였잖아."

"제가요?"

"그럼 누구 다른 사람이 내 곁에서 잤었나?"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지금?"

부부의 침실이 간밤에는 오랜만에 아주 조용했었다. 여행의 피로 때문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가벼운 키스와 포옹만 하고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잠들기 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습관 때문인지 밤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뒤척이며 계속 상대의 몸으로 파고 들었고 무심결에 상대의 몸을 매만졌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리차드와 저스틴은 똑같이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런지 모르겠군요."

"그래?"

"난 잘 잤어요."

"당신이..."

"그럼요. 밤새도록 뒤척인 사람은 당신이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밤새도록 잘 잤다면서."

"어머, 당신 그렇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예요?"

그쯤 되면 언제나 양보하는 쪽은 리차드였다. 사실 리차드는 저스틴과 다투거나 다른 뜻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설령 밤새도록 뒤척였다고 해도 그것이 부부를 다투게 할 문제는 아니었다. 리차드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당신 알겠어?"

"?"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군. 어제 저녁에 런던에서 여우를 사냥하는 꿈을 꾸었어."

"런던에서 여우 사냥을 해요?"

"그렇다니까."

"런던 시내에서 말예요?"

"시내는 아니었어,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리차드는 그 꿈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고 저스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흥미 있게 듣고 있었다. 그곳은 드넓은 평원 같기도 했고 산 속의 공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었다. 잔디밭이 까마득히 펼쳐져 있고 저쪽에는 수목림이 보였다. 어떤 나무들이 그곳에 있는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알 수가 없었다. 앞에선 사냥개 십여 마리 정도가 요란하게 짖어 대며 뛰어 가고 있었고 그 뒤에 말을 타고 있는 다섯 명의 귀족이 사냥개의 뒤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리차드도 중간쯤에 끼어 있었다. 몰이꾼으로 동원된 하인들은 십여 명이 넘어 보였고 그들의 손엔 무엇인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숲에서 동물들을 쫓아낼 때에 상용하는 것들이었다. 물이꾼들과 사냥개들이 동물을 평지로 몰아내며 귀족들은 총으로 쏘아서 잡았다.

"오늘은 어떤 동물을 잡을 계획입니까?"

리차드는 바로 곁에 있는 귀족에게 물었다.

"오늘은 여우를 잡을 것이오."

"그런데 혹시..., 이 사냥이 허가된 것입니까?"

꿈에서도 리차드는 밀렵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우리의 사유림이요."

"그렇군요."

리차드는 안심하며 그 사냥에 참가했다. 앞쪽에서는 계속해서 개들이 짖어댔고 중간부터는 드디어 몰이꾼들이 동원되었다. 사냥이 계속되는 동안 리차드는 거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멋지게 한 마리 잡고 싶었다. 사격 실력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윽고 수목림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차드는 긴장하며 총을 힘주어 잡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래서요?"

거기까지 말을 했을 대 저스틴이 끼어들었다.

"여우를 잡았어요?"

"더 들어 봐."

리차드는 그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목림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몰이꾼들이 소리쳤다.

"여우다!"

그와 함께 사냥개들은 더욱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고 귀족들도 모두 긴장했다.

"넓은 곳으로 몰아라! 어서! 빨리 몰아!"

귀족의 명령에 몰이꾼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수목림 사이에서 뛰어나오는 여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우는 한 마리뿐이었다. 다섯 자루의 엽총과 몰이꾼, 사냥개 등에 비해 여우는 오직 혼자서 쫓기고 있는 셈이다.

"저기 있다."

리차드의 곁을 달리던 귀족이 소리치며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엽총을 들어 올렸다. 리차드는 잠깐 망설였다. 그 여우는 그 귀족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리차드는 마음을 바꾸었다. 나머지 귀족들도 일제히 엽총을 들어 올렸기 때문에 리차드는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하는 생각과 함께 총을 들어 올렸다. 여우는 몰이꾼과 사냥개에 쫓겨 사냥꾼들이 있는 곳을 행해 도망쳐 오는 중이었다. 잔디밭이지만 길게 자란 풀들이 숲을 이루고 잇기 때문에 몸집이 작은 여우는 교묘하게 피해 다녔다. 좀처럼 몸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아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저기 있다."

한 귀족이 낮게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산야를 뒤흔들었지만 여우는 맞지 않았다. 바로 그때 리차드의 시선이 번쩍 빛났다. 여우가 바로 그가 겨눈 총구 정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방아쇠부터 당기지 않았다. 우선 충분히 겨냥한 후에 숨을 죽였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는 호흡을 멈추어야 되고 이어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당겨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리차드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길 때였다. 돌연 다른 쪽에서 먼저 탕 하는 요란한 총성이 올렸다.

"어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당신은 못 잡았겠군요?"

그때 시고니가 밖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리차드는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저스틴은 리차드가 잡지 못한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시고니는 메인 부부의 생활 습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푹 자고 난 리차드와 저스틴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오후까지 주무셨어요?"

그가 들어오자 리차드의 첫 마디는 역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오전이든 오후든 상관없이 우선 커피부터 한 잔 마시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시고니"

", 준비되어 있습니다."

", 커피!"

무엇보다도 저스틴이 반가운 탄성을 올렸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한다.

아마 리차드와 저스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일 것이다. 시고니는 준비해 온 커피를 잔에 따르며 아침에 걸려왔던 전화의 내용을 전해 주었다.

"메인 부인, 아침나절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나한테요?"

"."

"누구라고 하던가요?"

"데스타브 남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아아."

저스틴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요?"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를 하겠답니다."

저스틴이 리차드 쪽을 바라볼 대 시고니가 덧붙였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면 이쪽에서 전화를 걸겠다고 했는데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중요한 일 같았는데."

시고니는 리차드에게 먼저 커피를 권했다. 데스타브 남작의 태도가 아직 불쾌하게 느껴지는 그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시고니."

"천만에요."

시고니는 저스틴에게 커피를 주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리차드는 시고니가 끓여 주는 커피 맛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다. 어디서는 그만큼 향기롭고 맛좋은 커피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시고니의 커피에 대한 그의 예찬이었다. 시고니가 준비하는 모든 음식에는 무엇보다 끓이고 준비하는 정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고니가 나가자 저스틴은 새삼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데스타브 남작의 2백만 달러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자세한 과정은 경찰의 몫이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직접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죠?"

"글쎄,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어."

"우리하고는 사실상 상관없는 문제예요. 분명히 누군가 중간에서 바꿔치기 했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게 누굴까요?"

"적은 돈이 아닌 만큼 경찰에서 철저하게 조사하겠지."

"런던경시청에서요?"

"그럴 거야, 아마."

저스틴은 자신에게 부탁을 남기며 총총히 사라져버린 데스타브 남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직 그가 무엇대문에 그런 식으로 사라졌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의 돈이 장난감 돈으로 바뀐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돈 가방을 가지고 미국으로 온 건 우리잖아요."

"건드리지도 않았잖아."

"물론이죠. 그렇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만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을까요? 생각 좀 해보세요. 그 뛰어난 추리력으로."

"추리력을 말한다면 당신이 좀 생각해 보세요."

"그러지 말아요, 리차드. 당신이 좀 생각해 보세요."

저스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차드 역시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표현은 안 했지만 이번 일이 잘못되면 골치 아픈 문제로 비약될 수도 있다는 점을 그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조지한테 전화로 물어봐야겠어."

"당신은 그 돈이 런던에서 바뀐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그럴까요?... 하긴 비행기에 탑승한 다음에는 아무도 그 가방을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렇지. 켄싱턴 클럽을 떠난 다음부터는 우리가 계속 그 가방을 지켜봤으니까."

저스틴은 리차드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가방은 런던에서 바뀐 게 분명한 듯했다. 두 사람이 켄싱턴 클럽을 떠날 때는 종업원이 가방을 들어다 주었다. 또한 클럽 안에서 잠시 가방이 있었던 동안에라도 누군가 노린다면 얼마든지 가방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방이 조지의 방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정도는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여보, 런던의 지역 번호가 어떻게 되지?"

그런 문제에서 리차드는 저스틴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 외에도 리차드가 해야 되는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잠깐요... 그래요, 생각나요. 런던 지역번호는 0114421예요."

"0114421... 틀림없어?"

그때 저스틴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여보, 당신 설마 조지를 의미하는 건 아니겠죠?"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면 조지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인물이긴 했다. 그는 켄싱턴 클럽의 총지배인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아닐 거야"

"그렇겠죠."

"돈을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 우습게 아는데 뭣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안 그래?"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당신이 그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2백만 달러 정도면 충분히 탐낼 수 있는 양이다. 시고니의 말대로 호텔을 짓고도 남을 만한 액수인 것이다.

"어쨌든 그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리차드는 번호를 다 돌린 다음 전화기를 귀에 대고 기다렸다. 벨이 울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 받아요?"

"안 받아."

"그 사람이 자리를 비울 때도 있나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좀 지나서 다시 걸어 봐야겠어."

"그나저나 내일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뭐라고 해야 하죠?"

"어쩔 수 없지."

"사실대로 말해요?"

"그래야지. 따지고 보면 그 사람한테도 책임이 있어.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이렇게 큰돈을 맡기다니 말야."

"날 믿어야겠지요."

"당신을 어디에서 봤다고?"

"그거야 간단하죠."

"뭐가?"

"적어도 난, 저스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차드 메인의 아내니까요. 안 그래요?"

"그런데 여보, 생각해보면 의문점이 없는 것도 아냐, 마치 무슨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함정요?"

"그렇잖아."

"어째서죠?"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한테 돈을 맡기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아무래도 이상해. 뭔가 떳떳하지 못한 사람일수도 있어."

"남작의 작위까지 받은 사람인데 설마 그럴까요."

리차드는 데스타브 남작의 의심하고 있는 듯했지만 저스틴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남작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가 만일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로 저스틴은 함정에 걸려 있는 줄도 모르고 데스타브 남작을 믿고 있었다.

 

 

두 얼굴의 사내

 

또 다른 의문의 사건이 발생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시간이 갈수록 저스틴의 마음은 불안했다. 리차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지만 그녀는 돈을 건네받은 당사자였기 때문에 리차드와는 또 달랐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데스타브 남작이 사실을 이해해준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노력해서 진짜 돈의 행방을 추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남작이 오해를 할 경우에는 해결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직관적인 판단이나 대내외적인 지명도로 미루어 메인 그룹의 총수 부부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데스타브 남작이 문제를 삼는다면 메인 그룹의 명예에까지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그들이 2백만 달러를 탐낼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데스타브 남작이 이해하기만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저스틴과 리차드가 이미 함저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가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가짜 돈으로 바뀐 가방을 그들이 가져온 것부터가 바로 함정의 시작이었다. 저스틴은 리차드와 함께 아무도 모르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속도로 함정에 걸려들었으므로 그만큼 빠져나가기도 힘들 것이다.

이날 오후 메인 부부는 시내의 야외 식당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여보, 어떻게 됐어요."

저스틴이 물었을 대 리차드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아 그녀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연락은 됐어."

"그런데요?"

"그 친구 지금 스코틀랜드에 가 있다고 하는군."

"조지가요?"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에 대해 저스틴과 리차드는 곰곰이 생각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업무에 바쁜 조지가 휴가철도 아닌 이대에 휴가를 떠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였다.

"낚시를 갔다는데."

"낚시요?"

그것도 이상했다. 휴가를 이용한 낚시 여행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외딴 곳으로 가버리면 외부와의 연락을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건네준 2백만 달러가 가짜 돈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와 때를 같이해서 조지는 낚시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요?"

저스틴은 조지의 낚시나 휴가 여행보다 문제의 가짜 돈에 관한 것이 더 궁금했다.

"연어 네 마리를 잡고 독감에 걸렸다는군."

"여보?"

"?"

"지금 우리한테 궁금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그 돈에 대해서 그가 뭐래요?"

"그도 돈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더군."

"그래요?"

"알아보겠다고 했어."

저스틴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와 리차드가 현재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사람은 조지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모르고 있다면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내일 오전이면 데스타브 남작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그가 미국까지 온 것은 그 돈을 찾아가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 분명하므로 그는 반드시 전화를 할 것이다.

"이젠 어떡하죠?"

"조지가 알아보고 즉시 연락해 주기로 했어."

그때 저스틴에게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가능성의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녀로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전혀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입장에서는 전혀 미지수였다.

"여보!"

저스틴은 그 이야기를 리차드에게 말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 조지에 대해 잘 아시죠?"

"갑자기 무슨..."

"이건 그냥 가정한 것이니 언짢게 듣지 말아요. 혹시 그 사람도 관련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조지?"

"."

"그럴 리가 없어."

즉시 반대하던 리차드도 이내 고개를 갸웃하더니 저스틴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는 항상 어떤 문제에서나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

"알아요.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니까요."

"좋아. 그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 보아야 될 문제 같으니까."

그때 저스틴의 시선이 갑자기 한 곳에서 멈추었다. 무심코 주변을 살펴보던 눈길에 놀라운 목표물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

리차드도 저스틴의 모습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

저스티은 그곳에 시선을 계속 두면서 낮게 속삭였다.

"어떤 남자?"

"그날 그 카지노에 나타났던 사람이에요."

그녀의 기억은 정확했다. 그날 그녀가 분명히 보았던 수염을 기른 사내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컨싱턴 클럽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저스틴은 그가 바로 런던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데스타브 남작이 그 사람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은 더욱 모르고 있었다.

"마치 옛날에 모았던 영화에나 나오는 사람같이 보이는데."

그것이 하그렌드 경감에 대한 리차드의 첫인상이었다. 그는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에 구식 양복과 모자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옛날 사람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에요. 여보, 무슨 일일까요?"

"글쎄..."

리차드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로 경계하는 빛은 아니었다. 실제적인 면을 아직 알 순 없지만 하그렌드 경감의 모습에는 적개심이나 도전적인 느낌 같은 것들이 엿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그렌드 경감이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메인 부부, 그 중에서도 저스틴 메인임이 분명했다. 경감은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정면으로 접근해 왔다. 용기가 있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인 듯했다.

"용서하십시오."

경감은 메인 부부의 테이블 곁으로 바싹 다가서며 저스틴을 향해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다. 저스틴보다 리차드가 재빨리 경감의 태도를 살폈다. 이때 리차드는 상대방의 겉모습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경감의 외모는 사실상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혹시 얼마 전 런던에 있는 켄싱턴 클럽 카지노에서 룰렛 게임을 하셨던 그 부인 아니십니까?"

저스틴은 한 가지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 . 그랬어요. 그때는 운이 좋았었나 봐요. 그렇죠?"

리차드는 계속해서 하그렌드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 일을 운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인."

"글쎄요."

"그 게임에서 다른 사람 대신 게임을 하셨던 부인 맞죠."

경감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수사관이라는 작업의식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제가 게임을 직접 한 건 아니에요. 물론 아시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리차드가 끼어들었다.

"그 일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미스터..."

경감은 상대방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 하그렌드라고 합니다. 메인 씨 맞죠?"

"."

리차드는 그가 지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 의아한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경감은 자신의 신분을 시원스럽게 밝혔다.

"나이젤 하그렌드, 브레시티 아메리칸 무역회사의 사장으로 있습니다."

이때 리차드의 눈빛이 재빠르게 변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감은 계속해서 정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메인 씨.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누가 어디서 어떤 행운을 차지한다고 해도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는 잠시 멈추고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뒤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해도 호기심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이때 리차드는 이미 마음을 결정한 듯했다. 방금 전 하그렌드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는 이미 하그렌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신분을 의심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상대방이 런던 경시청에서 파견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웨이터, 여기 계산서 줘요."

그 말은 흥미 없으니 그만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저스틴은 상대가 룰렛 게임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스스로 변명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이건 간에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그 게임을 여러 사람이 보았어요. 본 사람들은 그 돈이 나의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거예요."

"물론 그렇죠."

하그렌드 경감은 우선 저스틴의 말을 인정했다. 자신도 그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경감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후의 진행된 과정이었다.

"그때 별안간 남작이 사라진 거군요. 부인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그렇지 않습니까?"

이때 리차드는 상당히 불쾌했다. 신분을 위장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 나타나 지난 일을 가지고 은근히 캐묻는 것이 불쾌했던 것이다. 그럴 때 리차드는 참을성이 많지 않은 편에 속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군요."

"."

경감도 이미 리차드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표정에서 알아차렸다.

"하그렌드 씨, 비록 호기심 때문이라고 하지만 모든 일에는 그 한계가 있습니다. 잘 아실 줄 알지만."

"물론이죠. 그렇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하그렌드 경감은 난처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 벌릴 수는 없었다.

"한 가지만 더 부인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

리차드는 불쾌하여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대답할 필요를 느끼시지 않으시면 안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저스틴은 경감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남작과 다시 만나서 돈을 돌려줄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리차드가 대신하였다. 상대방이 한 번만 더 귀찮게 질문을 하면 그대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암시였다.

"하그렌드 씨, 당신네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소."

"무슨 말씀이죠. 메인 씨?"

"우리는 그런 문제에 철저하다는 걸 알아두시오."

남의 돈을 마부로 챙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남작이 사라진 이상 그 돈의 임자는 저스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하그렌드. 경감의 질문을 그런 의도로 이해한 리차드는 처음보다 훨씬 더 불쾌했다.

"돈이 문제입니다. 돈 말입니다."

경감은 그럴듯하게 너스레를 계속 떨었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은 법이죠."

그때 경감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회중시계에서 소리가 울렸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얼른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값이 나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국 신사들이 필수품처럼 지니고 다니는 회중 시계였다.

"리틀 벨이라는 겁니다."

그는 갑자기 서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약 먹을 시간이 됐군요. 말라리아에 걸렸죠. 인도에 우연한 일로 갔다가 그만 걸렸지 뭡니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대로 매우 즐거웠습니다."

이때에도 저스틴은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 만나뵙게 되어서 반가웠어요. 하그렌드 씨."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부인. 그리고 메인 씨."

하그렌드 경감은 인사를 마친 다음 총총히 사라졌다. 뒤어 남은 리차드와 저스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리차드는 아직 불쾌하다는 표정이고 저스틴은 어리둥절해 있는 것이 역력했다. 저스틴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런던의 켄싱턴 클럽에서부터 시작 된 꿈이다. 2백만 달러, 데스타브 남작, 바뀐 가짜 돈, 하그레드 등등...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사라지 하그렌드라는 사람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데스타브 남작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조지나 기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인물이 보낸 사람으로 현재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타났던 것일까. 하그렌드라는 사람은 예의는 바르지만 분명 무엇인가 감추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의 행동에선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더 들었다. 그의 목적은 룰렛 게임이나 돈을 우연히 따는 것이 아니고 저스틴이 남작을 다시 만나서 그 돈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에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이 문제가 중요한지, 그렇다면 과연 그는 누구인지 하는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2백만 달러의 현금이 이미 가짜 돈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는 심각해졌다. 누구인지 몰라도 분명히 돈을 바꿔 가로 챈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스틴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리차드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당신도 그래요?"

"처음부터 당신이 시작한 일이니까. 안 그래?"

"여보!"

저스틴은 볼멘소리로 말을 했다.

"처음에 그랬지만 나중에는 아니었잖아요."

"뭐가?"

"그 돈 가방을 나 혼자 가져온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있어요."

"그래?"

"우리는 부부예요. 내 일이 당신 일이고, 당신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그야 물론이지."

"그렇다면 여보, 남의 일처럼 이야기해도 되는 거예요?"

"난 그런 적 없어."

"정말요?"

"그건 그렇고, 난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어."

"?"

저스틴의 두 눈에 커졌다. 우연히 빠진 문제 때문에 그녀는 확실히 고민에 쌓여 있었다.

"조금 전에 왔던 하그렌드라는 사람 말야.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어."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그 사람이 우리한테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그날 밤 컨싱턴 클럽에서 사업 이야기를 했다는 것 알고 있지?"

"그럼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가 브레시티 아메리칸 무역회사의 사장으로 앉게 되었는데 저 자가 나타나 자기가 사장이라고 우기는군."

"정말이에요?"

"내 말도 거짓말처럼 들려?"

"그게 아니구요. 그렇다면... 그가 우릴 속인 것이 확실하군요."

"맞았어."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겠지.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지네요.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그만 일어날까?"

"."

야외 식당을 나오는 저스틴의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런던에 갔던 일을 후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이미 보이지 않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남편인 리차드도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리차드와 저스틴, 둘을 노리는 음모가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저스틴은 자신의 신분을 속여가며 접근했던 하그렌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내임이 분명했다. 브레시티 아메리칸 무역회사의 사장을 사칭한 것부터 그렇다. 그럼 그는 누구이고 무슨 이유로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심야의 침입자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메인 부부의 입장은 시시각각 위험을 맞이하고 있었다. 메인 부부가 야외식당을 출발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다.

"여보."

저스틴은 조금 전에 만났던 의무의 남자인 하그렌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하그렌드라는 사람 말이에요, 아무래도 이상하게 느껴져요."

"..."

리차드는 핸들을 잡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애썼다.

"그 사람이 로스앤젤레스에 왜 왔을까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을 테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리차드."

"그럼 당신은?"

"난 그가 미국에 왔다가 여기서 우연히 우리를 만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의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

"글쎄요...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막연히 그런 느김이 들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들은 각자 하그렌드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부가 똑같이 하그렌드의 진짜 신분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의 신분을 알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쉽게 풀릴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런던에서 파견된 경시청의 경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저스틴도 리차드도 그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그렌드가 메인 부부에게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수밖에 없는 데도 물론 이유가 있다. 겉보기에는 옛날 영화에나 출연하면 어울릴 것 같은 그였지만 런던 경시청에서는 손꼽히는 수사관이다. 그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과 리차드에게 접근했다. 경험을 통한 그이 판단은 어떤 확증이 잡힐 때가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 무엇 때문에 신분을 속였을까요?"

"내가 그 자리에 취임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겠지."

"만일 알았다면?"

"물론 도 다른 직함을 생각해냈을 거야."

리차드는 자동차를 비교적 한가로운 도로이지만 일정하고 안전한 속도로 운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집으로 가는 길의 도로라면 리차드는 눈을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그러나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이들 부부는 드라이브를 하는 사람들처럼 차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 있게 운전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우연히 여기에 나타난 것 같지 않아."

"같은 생각이에요. 그 돈과 관련된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맞아."

"그런데 어떻게, ?"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이제 와서 말해야 소용없지만 일이 아주 묘하게 꼬여 들었어."

"당신이 상담할 때 같이 있을 걸 그랬어요, 다른 때처럼 그런 적도 많이 있었잖아요."

"그래..."

말끝을 흐리며 무심코 백미러를 보던 리차드는 문득 뒤 따라오는 차 한 대를 발견했다. 그는 의아해 하며 차의 백미러에서 룸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상황이 똑같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검정색의 자동차 한 대가 약간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하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직감적으로 리차드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뒤쪽의 자동차는 분명히 그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은 수없이 가졌던 리차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미행당하고 있었다.

"하그렌드 그 사람은 우연히 여기에 오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지."

"뭔가요?"

"아까부터 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자동차가 있는데, 그 차도 우연히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냐."

"네에?"

저스틴은 깜짝 놀랐다.

"우리를 미행하고 있어."

"어쩌죠?"

"침착해."

"그렇지만 미행당한 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잖아요."

"그래도 할 수 없지, 그건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어떡하죠?"

리차드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자가 미행한다는 것은 저스틴의 말처럼 기분 나쁜 일이다. 그러나 우선 기분보다 중요한 것은 저 자동차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다. 방법은 두 가지이다. 가장 무난한 방법은 따돌리는 것이고 아니면 교묘하게 붙잡아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뒷차는 점점 속도를 내며 거리를 좁혀 왔다. 운전석에 앉은 상대를 식별하기에는 약간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던 리차드는 행동을 정하고 갑자기 차의 속도를 올렸다.

"꽉 잡아."

리차드는 저스틴을 향해 소리쳤다. 뒤따르던 자동차도 지지 않으려고 속도를 높이며 추적해 왔다. 이때부터 리차드는 점점 치열한 추격전을 벌였다 미행자의 솜씨도 만만치 않았다. 가끔씩 왕래하던 다른 자동차들은 때 아닌 추격전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위험을 피했다.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리차드는 중앙선을 넘어 앞서서 달리는 차를 계속 추월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차 역시 만만치 않게 따라붙으며 필사적으로 쫓고 쫓았다. 자동차는 한쪽으로 언덕이 있는 위험한 길을 통과하기도 했으며 그럴 때마다 쫓아오는 자동차는 리차드의 차를 맹렬히 몰아 붙였지만 리차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추적전이 계속되는 동안 리차드와 저스틴은 뒤쫓아 오는 자동차를 누가 몰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스틴이 상대방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친 것은 추적전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된 다음이었다.

"어머!"

그녀는 놀라며 소리쳤다.

"왜 그래?"

"그 사람이에요!"

"누구?"

"그때 보았던 그 사람이요."

크게 놀란 저스티은 두서없이 상대방을 설명하였다.

"무슨 소리야?"

리차드는 운전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몰았다.

"있잖아요, 런던에서..."

리차드가 다그치듯 물었다.

"역시 켄싱턴의 카지노에서 본 사람이야?"

"맞아요."

그녀의 대답과 함께 리차드는 어떻게 하든 추적자를 따돌려야 된다고 결심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백만 달러 때문에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스틴은 그녀대로 더욱 불안에 사로잡혔다. 다만 리차드가 아직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모습에서 힘을 얻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 혹시 하그렌드나 남작의 부하가 아닐까요?"

"아니면 독자적으로 나섰다고 해도 상관없지!"

리차드는 조금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 그 정도는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은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저스틴에게 굉장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로의 폭이 좁아진데다가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자칫하면 길가의 시설물과 충돌하기 쉬운 지역에서 리차드는 굉장한 위기를 만났다. 가속이 붙은 상태여서 블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는데, 저 앞쪽에 거대한 트럭이 나타나 길을 가로지르려 했다. 저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소리를 냈고 리차드 역시 마지막 각오를 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트럭의 앞부분이 막 도로의 진입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리차드의 자동차는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쫓아오던 자동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은 후 정지해서 트럭이 통과할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스틴이 놀라서 소리치게 한 미행자의 이름은 닐 완슨이었다. 카지노에서 카우보이모자를 썼던 것처럼 지금도 검정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은 쉽게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겨우 따돌렸군!"

"당신 정말 굉장해요, 여보!"

저스틴은 탄복하며 리차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면 그녀 역시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그건 그렇고, 분명히 카지노에서 보았던 사람이야?"

"틀림없어요. 바로 내 곁에 있었는 걸요. 그리고 참, 또 있어요."

"뭐가?"

"나중에 남작이 따 놓은 칩을 놓고 어쩔 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대 그러면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했어요. 어쩐지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어요."

"당연하지."

"?"

"좋은 사람이라면 런던에서 미국까지 그 돈을 찾아서 달려오는 짓은 안할 테니까."

"맞아요. 그럼 벌써 두 명의 적이 생겼군요."

"데스타브 남작은?"

"그는 돈 임자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그도 좋은 사람 같이 느껴지지 않는군,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무슨 뜻이에요, 당신?"

"내 생각에 그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데스타브 남작요?"

"맞아."

"그나저나..."

저스틴은 문득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행을 하면 언제나 좋은 친구를 만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죠?"

리차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리차드가 런던으로 떠나기 전 저스틴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무색한지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느덧 낮동안의 일기가 변한 것은 초저녁이 지나면서 부터였다. 느닷없이 먹구름이 밤하늘을 뒤덮고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이번에는 천둥번개까지 거세게 내리쳤다. 날씨의 갑작스런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다. 초저녁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났으므로 기상대의 예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그 비를 예측하지 못했다.

"날씨가 이상해요."

"비가 오려나 봅니다."

저스틴과 시고니가 초저녁에 주고받았던 말이다. 리차드도 시고니와 같은 의견을 가졌었다.

"아무래도 한밤중에 굉장히 퍼부을 모양이군."

저스틴의 아이 같은 말에 리차드와 시고니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을 뿐이다. 집안에서는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허리케인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적어도 몇 시간 정도는 버틸 만큼 견고한 건물이다. 해일이 아니고서는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을 만한 집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스틴은 웬지 마음이 불안했다.

"당신 왜 그래, 겁나?"

리차드는 저스틴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왜요?"

"겁에 질린 표정 같아 보이는군, 정말이야!"

"날씨 탓일 거예요."

"당신은 만년 소녀야. 그만 올라가서 잡시다."

"그래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럴 때 저스틴에게 가장 필요한 안식처가 있다면 바로 둘만의 장소인 침실일 것이다. 리차드와 함께 있을 때 저스틴은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기분에 잠겼다. 그때 시고니가 거피를 준비해 가지고 거실로 들어왔다.

"커피 드세요."

"고마워요, 시고니."

메인 부부는 동시에 합창하듯 시고니에게 말했다.

"천만예요."

"피곤할 텐데 그만 가서 자도록 해요, 시고니."

"그러세요."

시고니는 나이 탓인지 밤잠이 별로 없었다. 메인 부부가 잘 대에도 그는 가끔 밤중에 일어나 정원이나 집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경보 장치는 완벽했지만 그것만을 믿고 안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 편안히 주무세요. 메인 씨. 메인 부인."

시고니는 밤 인사를 하고 별채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갔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층에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그 때가 밤 열 시가 조금 안될 무렵이었다. 낮에 있었던 두 가지 심상치 않은 일 때문에 시고니를 포함한 세 사람은 거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어떻게 될까요?"

저스틴은 침실에 들어건 다음에도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저스틴, 여긴 침실이야. 여기서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어?"

"걱정돼서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하그렌드와 그 사람 말이에요. 이제 생각이 났어요. 그 사람 이름은 닐 완슨이었어요."

"닐 완슨?"

"혹시 들어본 이름 인가요?"

"글쎄... 지금으로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군."

"그 사람 클럽에서 볼 때도 좀 이상했어요. 남작하고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았어요."

"이번 문제에 서로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그만 침실로 들어갑시다."

메인 부부의 애정이 두텁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리차드가, 어떤 때에는 저스틴이 상대를 재촉했다. 리차드도 그럴 때에는 소년처럼 보채었다. 그는 빨리 침대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했다. 저스틴은 다른 때와 달리 오늘은 생각이 계속 다른 곳을 향해 달렸다. 하그렌드와 닐 완슨, 데스타브 남작 등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고 잠깐씩 룰렛 게임의 젊은 딜러와 조지의 모습도 겹쳐 떠올랐다.

"당신 정말 안 잘 거야?"

리차드가 보채고 저스틴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깜깜한 유리창 밖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시간 아래층 거실에선 작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침실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둠을 뚫고 두 명의 시커먼 그림자가 잠입한 것이다. 각자 복면을 하고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듯 익숙하게 거실에 들어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2층 침실에서는 리차드의 성화에 못이긴 저스틴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기다리는 리차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리차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당겨 그녀를 가슴에 꼭 껴안아 주었다. 리차드는 그녀를 껴안자마자 두 손을 등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렸다. 저스틴이 미처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두 손으로 탄력 있는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럴 때 저스틴은 어떤 식으로도 시간을 끌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저스틴 역시 두 손을 이용해서 망설임도 없이 리차드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어느 때 보다 두 사람의 결합이 빨리 이루어졌다. 같은 시간 아래층 거실에 침입한 두 명의 복면 고한은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저스틴이 사랑하는 남편을 완전히 정복하고 동시에 그녀와 그가 환희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리차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잠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왜요?"

지금 막 절정을 향해 가던 저스틴은 어이없다는 듯이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어."

"어디서요?"

"거실 쪽인 것 같애."

"설마..."

"정말이야. 무슨 소리가 들렸어."

그때 아래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저스틴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리차드와 저스틴은 달아올랐던 몸이 굳어지며 갑자기 어떤 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누가 들어왔나 봐!"

리차드는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가운과 속옷을 입었고 저스틴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도 분명히 알아들은 소리에 저스틴은 벌써 긴장이 되고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려가 봐야겠어."

"괜찮겠어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렇지만..."

리차드는 터스틴을 자기 뒤에 따라오게 하고 자신은 앞에 서서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계단 위쪽의 난간에서 침입한 괴한을 확인한 그들은 더욱 긴장을 했다. 거실에서는 두 명의 괴한이 어둠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때 리차드는 겁내지 않고 대처했다. 그는 우선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러 거실의 불을 켰다. 갑자기 거실이 밝아지자 두 명의 괴한은 기겁을 하며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야행성 동물처럼 어둠 속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다가 갑자기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자 뜻밖의 일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복면을 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날렵해 보이는 젊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몸집이 뚱뚱한 사람이었다. 리차드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당황하거나 도망을 치면 침입자들을 기민하게 움직이며 위협을 줄 것이다. 리차드는 그렇게 방관 내지 동조해 주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침입 목적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같은 위험에는 이미 익숙해 있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지금까지 메인 그룹을 경영해 오면서 수없이 많은 위험을 겪어 왔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위험쯤은 서슴지 않고 맞설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선 저스틴의 안전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면서 저스틴에게 침착하게 말을 하였다.

"여보. 당신은 침실에 가서 경찰에 신고하도록 해요."

"?"

"어서!"

"그럼 당신은..."

"난 상관없어."

"나도 당신 옆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저스틴은 사실사 위급한 상황에선 나약한 여자일 뿐이지만 마음은 반대였다. 남편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두 명이다. 저스틴은 상황이 다급해지자 최소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흐트려 놓아야 리차드가 나머지 사람과 싸우기 때문에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리차드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빨리 경찰에 신고한다면 경찰이 곧 달려 올 것이다. 그 동안만 시간을 끌면 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두 명의 침입자로 하여금 얕보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의연한 태도로 견제하고 있었다.

저스틴 역시 남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냥 그 자리에 겁에 질려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경찰에 전화를 걸기 위해 재빨리 침실로 되돌아갔고 리차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리무중

 

두 명의 침입자와 리차드와의 대치는 긴장 속에서 숨 막히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때 불리한 것은 리차드 쪽이었다. 옳지 못한 행동을 발각당한 침입자들은 어떤 위험도 가리지 않고 덤빌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니, 그보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들은 살인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것이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리차드라도 안심할 순 없었다. 불의의 습격은 언제나 치명적인 결과로 남기 마련이었다. 이윽고 아래층까지 내려온 리차드는 두 명의 상대로 격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침입자들이 리차드를 발견했지만 그를 해치려는 마음을 같고 있지 않다는 것을 리차드가 분명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리차드의 입장은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곳은 그의 집이며 두 복면 괴한은 침입자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리차드의 집에 침입했을 것이며 그 목적을 밝혀내기 위해, 최소한 신고 받은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리차드는 버텨야만 했다. 수없이 불리한 입장에서 싸워 본 경험이 있는 리차드는 두 명 중에서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 누구인지 날카롭게 살폈다. 어떤 경우라도 누구나 허점을 있기 마련이었다. 리차드는 몸이 날렵하고 강인하게 느껴지는 젊은 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몸집이 둔해 보이는 괴한에게 선제 공격을 가할 경우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공격이 뒤에서 덮쳐 올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음 순간 리차드는 둘 가운데에서 강해 보이는 복면한 사람을 향해 몸을 날리며 필사의 일격을 가했다. 제아무리 강한 상대도 일단 한 대를 맞자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또 다른 복면한 자가 리차드를 향해 공격해 왔지만 리차드는 가볍게 몸을 틀어 옆으로 비키며 공격을 피했다. 이때부터 두 복면과 리차드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리차드는 상대의 강한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지만 재빨리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주먹이 이미 그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경찰에 두 복면강도를 신고한 저스틴이 리차드에게 돌아 왔을 때에 리차드는 어쩔 수없이 열세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저스틴도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당장 달려 내려가 리차드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마음과 다리 발걸음이 좀처럼 계단에서 떨어져주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계단을 밟으며 거의 내려오는 순간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하였다. 리차드가 수세에 몰리다 극적으로 상대를 깔고 앉아 주먹을 쳐드는 순간 별안간 싸우는 세 사람 사이에서 총성이 울렸다.

"리차드."

저스틴이 부르짖으며 리차드를 보았을 대 그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두 명의 괴한은 서둘러 문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쓰러진 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아!"

저스틴은 외마디 비명 소리를 내면서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듯 허물어지고 있었다. 리차드를 쓰러뜨리고 뛰쳐나간 두 명의 괴한은 이미 세 워 놓았던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시동을 걸고는 급히 차를 출발시켜 정원을 지나 정문을 지나 정문 밖에서 급회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막 차를 회전시켜 전진하려는 순간 두 대의 경찰 순찰차가 두 명의 괴한이 탄 차의 앞뒤를 가로막으며 달려왔다. 자연히 괴한이 타고 있던 차는 앞뒤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좋아. 꼼짝 마라!"

순찰차에서 내린 경찰관은 곧장 권총을 겨누며 크게 소리쳤다.

"차에서 내려! , 머리에 얹고!"

두 명의 괴한은 꼼짝없이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당했다.

"수고하십니다. 여러분."

두 명의 복면 주에서 한 명이 여유 있게 차문을 열고 앞으로 나섰다. 두 명의 괴한 중에 몸집이 큰 그는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서슴없이 벗었다. 정체가 드러난 괴한은 다름 아닌 하그렌드였다. 출동한 경찰들이 그의 신분을 알 리가 없었다. 또 한 명의 복면을 쓴 강도 역시 정체를 드러냈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현직 영국 경찰인 하그렌드 경감과 한밤에 복면을 하고 메인 부부의 집에 침입한 또 다른 괴한은 뜻밖에도 컨싱턴 클럽 카지노의 젊은 딜러였다. 전에는 분명 데스타브 남작과 같은 패거리였는데 이번에는 남작을 추적하는 하그렌드 경감과 한 패가 되어 복면강도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밤중 쏟아지는 비와 천둥 번개 속에서도 때 아닌 총소리를 알아들은 시고니는 즉시 달려왔다. 그는 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총소리를 듣곤 소스라치게 놀라 별채에서 뛰어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껏 메인 부부의 집에서 한밤중에 총성이 올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고니는 달려가 쓰러져 있는 리차드를 부축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괴변입니까! 메인 씨,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요."

리차드는 다행히 심각한 상처를 입진 않았다. 조금 전에 발사된 총은 공포탄인 듯했다. 복면의 괴한들, 즉 하그렌드 경감과 딜러는 리차드를 해치고 싶은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리차드가 느꼈던 이해 못 할 분위기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문제의 돈 가방이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경보기를 끊었습니다."

그대 리차드는 계단 밑에 쓰러져 있는 저스틴을 발견했다. 자신의 아픔도 잊은 채 달려가서는 저스틴을 흔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스틴!"

애견 프리웨이도 놀란 듯이 곁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저스틴에겐 상처가 없었다. 저스틴은 순간적으로 기절해서 혼절 상태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부시시 깨어난 저스틴은 별안간 들린 총소리와 동시에 움직이지 않은 채 쓰러져 있는 리차드를 보고 그가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저스틴, 내가 부축해 주지! 이층으로 갑시다."

"..., 아니에요."

순간적이지만 의식불명 상태에서 회복된 그녀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 괜찮아요?"

"그런 것 같아."

이들을 지켜보는 시고니는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들 부부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인 부인,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시고니."

"걱정했어요."

"고마워요."

리차드는 깨어나긴 했지만 저스틴의 상태를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여보, 아무래도 침실로 가서 쉬는 게 좋겠어, 당신은 충격이 컸을 거야."

"아니에요, 리차드."

"정말 괜찮겠어?"

"아직은 이층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아요."

의식이 회복되고 리차드가 무사한 것을 알았으니 시고니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 이곳이 좋았다. 그녀는 혼나자 떨어져 있기보다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 저스틴. 그럼 우선 거실로 갑시다."

"그게 좋겠어요."

리차드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거실의 소파에 데려다 앉힌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저스틴에게 그녀가 쓰러진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총소리를 듣는 순간 계단에서 미끄러졌어요. 난 당신한테 큰일이 생긴 줄 알고..."

"아스피린을 가져오겠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시고니는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신적으로 충격 받은 저스틴에겐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죠?"

"나도 모르겠어."

"그 사람들 누구에요?"

"복면을 했으니 알 수 없지."

아스피린을 가져오겠다던 시고니는 아직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짐작도 안 되세요?'

"복면을 해서 제대로 볼 수가 있어야지. 그들이 가방을 들고 갔어."

"그 가방을?"

리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스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방 속에 가짜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진짜 돈이 들어 있는 줄 알고 훔쳐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고니는 아직도 아스피린을 가지러 가지 않고 있었다.

"여보, 혹시 하그렌드나 닐 완슨이 아닐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

"우리 집 내부를 샅샅이 알고 갔으니 아마 또 올 거야."

리차드와 저스틴의 대화는 시고니를 계속 붙들어 두고 있었다. 범인들이 또 오리라는 리차드의 장담에 그는 이미 대책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 때에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함께 있던 세 사람은 일제히 마주보았다. 이윽고 리차드가 전화기를 들었다. 급한 문제가 아니면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십니까.?"

세 사람은 사건이 터지기 전에 저스틴이 경찰에 신고했었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메인 씨."

"!"

리차드는 비로소 그 일을 기억해 내었다.

"방금 댁에서 도망치려는 괴한 둘을 체포했습니다."

", 그래요?"

"지금 댁으로 데리고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메인 씨?"

순찰차의 경찰관은 본부의 있는 교환을 통해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이죠. 지금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리차드는 아직도 그들 곁에 서 있는 시고니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도 아스피린을 가지러 가지 않고 있었다.

"시고니, 아스피린은 어떻게 된 겁니까?"

시고니는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느라 잊어버린 채 있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지금 갑니다, 메인 씨."

그는 급히 뛰어가서 아스피린과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저스틴에게로 돌아왔다.

"여기 있어요, 메인 부인. 그런데 누구였습니까?"

"?"

"방금 전화한 사람말이에요."

시고니는 메인 부부의 집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한 치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에도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위험이 뒤따른다 해도 기꺼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이에요."

"아아."

시고니의 얼굴에 금방 안도의 표정이 나타났다. 경찰이라면 안심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금 우리 집에서 도망친 두 명의 범인들을 체포했다고 하는군요."

"잘 됐군요, 메인 씨 어떤 자들인지 한번 봐야겠어요."

그 마음은 메인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리차드도 저스틴도 그들이 대체 누군지 빨리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이 메인 저택에 침입한 목적에 대해서도 당장 알고 싶었다.

얼마 자나지 않아 현관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저스틴과 시고니는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어 줘요, 시고니."

"경찰입니까?"

"그럴 거예요."

"메인 씨를 공격했던 그 나쁜 자들도 함께 입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시고니는 얼굴 가득히 분노의 표정을 나타냈다. 그로서는 리차드와 저스틴을 다치게 한 범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집 담을 넘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 자들이 틀림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메인 씨."

시고니는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행동으로 보아 범인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두 명의 경찰관이 두 명의 사내를 인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메인 씨."

"천만예요, 수고가 많습니다."

이때 리차드는 물론 저스틴과 시고니도 경찰관과 함께 들어온 두 사내를 쏘는 듯이 쳐다보았다. 한 명은 젊은 청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사내였다.

"이 자들이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려는 것을 저희가 직전에 체포했습니다."

경찰관은 그들이 가지고 도망치던 가방을 들어 보이며 계속 얘기했다.

"이 가방도 있었는데 메인 씨 가방이 맞습니까?"

그때 두 명의 범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약간 옆으로 비껴 돌아서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쉽게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때 한 경찰관이 뚱뚱한 사람과 젊은 사람의 얼굴을 메인 부부가 볼 수 있도록 돌려세우며 물었다.

"이들이 누군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메인 씨?"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가장 놀란 것은 저스틴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차드는 두 명의 범인 가운데 한 명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리차드는 먼저 몸집이 뚱뚱하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를 가리켰다. 그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야외 식당에서 보았고 거짓말까지 했었으므로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하그렌드..."

그는 함께 있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저스틴을 향해 넌지시 물어 보았다.

"저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요, 당신?"

그에게 지적받은 젊은 청년은 몹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룰렛 게임 대에 테이블에서 딜러를 보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리차드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저 삶이 딜러였단 말이오?"

"틀림없어요."

"도박을 하시려고 런던에서 꽤 멀리까지 오셨군!"

리차드의 이런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남의 집에 복면을 하고 침입했다가 붙잡혔는데도 두 사람은 조금도 위축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떳떳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한 태도들이었다. 범인들의 모습에서는 경찰에 의해 체포당한 초조함이나 낭패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 하그렌드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오른손을 웃옷의 안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 중지!"

그의 곁에 있던 경찰관이 재빨리 총을 겨누며 체포당한 범인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알려주려 하였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어. 만일 변호사를 선임 할 수 없을 때 당신은 국선 변호사를 통해서 자신의..."

듣고 있던 하그렌드가 재빨리 중지시켰다. 실은 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것 봐요. 그럴 거 없어요, 경관."

하지만 두 명의 경찰관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하그렌드의 당당한 태도에 얼굴 가득히 의아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피의자의 권리를 알려 줄 필요는 없소."

모두의 얼굴에 더욱 의아한 표정이 나타났다. 하그렌드는 여유 있게 다시 말을 계속했다.

"난 지금 무기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오. 내가 가진 증명서를 꺼내려 할 뿐이요. 당신네 미국 경찰들은 이것을 신분증이라고 하죠."

여유만만한 하그렌드의 태도에 모두는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런 당당한 태도는 방금 체포당한 어떤 범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윽고 하그렌드는 자신의 증명서를 꺼내 펼쳐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큰 실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는 리차드와 저스틴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해 보였다. 저스틴과 리차드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제시한 것은 확실한 증명서였다.

"제 신분을 소개해 드리겠소."

딜러를 제외한 두 명의 경찰관과 모두는 일제히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내 이름은 나이젤 하그렌드이며, 런던 경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수사과 경감입니다."

그에게 이목을 집중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영국의 경찰이 가지고 다니는 증명서에 대해서라면 리차드와 저스틴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경찰이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애써 이해한다 하더라도 함께 복면을 하고 가방을 훔쳐서 달아나려했던 카지노의 딜러와는 또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것도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데스타브 남작에 대한 수수께끼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하그렌드에 대한 의혹은 풀렸다. 닐 완슨의 정체가 아직 묘현한 상황에서 다시 젊은 딜러가 등장해 문제가 한층 심각해지기 시작했지만, 그에 대한 의혹도 금방 풀리게 되었다. 경감은 계속해서 함께 붙잡힌 딜러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로만 경사입니다."

저스틴이 특히 놀란 상황에서 딜러는, 아니 로만 경사는 자신의 증명서를 꺼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사관들이 어느 나라나 관계없이 수사를 위해 필요하다면 신분을 위장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필이면 그가 저스틴이 잠깐 머문 도박장에서 딜러로 활동을 했으며 왜 이 미국까지 건너와 가방을 훔치려 했느냐는 것이다. 리차드와 시고니 역시 굉장히 놀랐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2백만 달러의 현금이 감쪽같이 장난감 지폐로 둔갑했고 런던경시청의 경찰관 신분증 정도는 전문가들이라면 쉽게 위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찰관을 사칭한 범인들이 도처에서 떳떳하게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즐비하며, 그보다 몇 배 더 정교하고 중요한 서류도 위조되어 범죄로 이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그렌드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저지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스틴은 런던의 컨싱턴 카지노 클럽에서의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데스타브 남작의 실종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그렌드 경감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는 성급히 도망친 것이다. 또한 하그렌드의 신분이 밝혀짐에 따라 데스타브 남작이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히 밝혀진 셈이다. 거금을 두고 도망칠 정도라면 그는 아마 중대한 죄를 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메인 부부의 자동차를 추격했던 닐 완슨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는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그들 부부를 쫓아 왔던 것일까. 그도 역시 런던경시청의 수사관일 수도 있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딜러, 즉 로만 경사에 대한 의문점이었다. 분명히 하그렌드 경감의 조수라고 신분을 밝히긴 했지만 그에 대한 메인 부부의 의문이 확실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사건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수의 정체

 

두 복면 괴한의 침입에 대한 의문은 그것으로 풀렸다. 하그렌드와 로만을 체포했던 경찰들은 돌아가고 메인 부부의 집에 침입한 두 명이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남았다. 저스틴보다 리차드가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것은 영국 경찰과 마국 경찰의 차이점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경찰의 인기가 놓은 나라가 영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시고니는 한 차례 소동을 겪은 사람들을 위새 커피를 끓여 가지고 들어왔다. 이젠 그도 안심했기 때문에 표정이 한결 밝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그렌드 경감은 시고니에게 점잖게 사례를 표시했다.

"고마워요, 시고니."

그때 경감이 이색적인 제의를 함으로서 리차드와 저스틴의 눈길을 끌었다. 시민들에게 항상 친절을 베푸는 것이 몸에 밴 경감이 커피를 직접 타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제가 타 드릴까요, 부인?"

저스틴은 약간 당황해 하긴 했지만 이내 승낙했다.

"."

리차드는 아직도 조금 전의 일들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한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처음부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 상황이 궁금했다.

"경감님."

리차드는 티스푼을 잡고 있는 하그렌드 경감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러실 겁니다. 메인 씨."

"경감님께서 우리한테 설명을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그렌드 경감의 표정은 그런 질문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러웠다. 오랜 동안의 수사관 경력에서 얻어진 경험 같았다.

"그런 질문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잠시나마 저희 때문에 불쾌했던 점을 메인 부인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굉장히 여유가 있었다. 저스틴의 커피 잔을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에는 티스푼을 잡은 채 그녀의 식성을 물었다.

"부인, 프림과 설탕을 커피에 타십니까?"

"."

"몇 스푼이죠?"

"한 스푼씩이요."

경감은 커피 잔에 설탕과 프림을 각각 한 스푼씩 타면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인께선 정신적인 충격이 크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래요."

마치 상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앞질러서 말하는 경감에게 저스틴은 할 말을 잃었다. 경감의 조수로 소개된 로만 경사는 함께 있으면서도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급자가 이야기를 채 끝내기도 전에 앞에 나설 수도 없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일부러 침묵을 지키는 모습이 완연했다.

"경감님, 어서 말씀해 주시죠. 우리 부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특히 내 아내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메인 씨?"

하그렌드는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역시 의구심을 품은 채 마주 응시했다. 이윽고 리차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감님께서는 이 돈 가방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지요."

"모두 다 말입니까?"

"?"

"간단히 말씀드려서 이 가방은 우리가 런던에서 가져왔던 그 가방이 아닙니다."

"네에?"

이때는 경감과 경사가 동시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그렇기 때문에 이 가방을 내 집에서 가져가려 하신 것이겠지요."

"메인 씨,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시겠습니다.?"

경감은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스틴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니까..."

리차드는 재빨리 그 부분에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가 보기에 경감과 경사는 돈 가방이 뒤바뀐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경감님,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는 게 좋겠군요."

"?"

경감은 의아한 표정으로 비로소 저스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에서부터 이번 문제에 말려든 것은 바로 저스틴이었다. 물론 경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유독 저스틴의 행운의 여신이 되었고 우연하게도 그녀가 부르는 번호는 모두가 당첨이 되었으며, 그때 경감이 나타나자 데스타브 남작은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지 않았던가. 남작은 경감이 나타난 것과 관련해서 어떤 음모를 감추기 위해 도망친 것이 확실해 보였다. 룰렛 게임은 같이 했으며 미국가지 저스틴을 쫓아와 미행을 하다 실패한 닐 완슨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분명한 것은 그가 리차드와 저스틴의 집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해 자동차로 추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뒤얽힌 이번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는 도대체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아는 것만이 이 혼란스러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정확히 가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은 자신과 로만 경사가 왜 미국까지 왔으며 또 메인 부부의 집에 잠입한 이유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영국에서 데스타브 남작을 만나지 못하셨죠?"

"."

저스틴은 대답했고 리차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작 역시 당신들에게 아직 연락이 없었습니까?"

"런던에서요?"

리차드는 재빨리 그녀의 눈길을 주시했다. 저스틴은 금방 리차드의 눈길을 이해했다. 즉 데스타브 남작이 로스앤젤레스까지 와서 전화한 사실을 아직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스틴은 리차드의 암시대로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결국 그런 문제 때문에 내가 먼저 이 사건에 뛰어든 겁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리차드는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질문했다.

"물론이죠. 아실 지 모르겠지만 수사상 일선에서 뛰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기 마련이죠."

"네에"

"짐작은 갑니다."

저스틴과 리차드가 차례로 긍정하자 경감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먼저 뛰어든 것은 파문을 일으켜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결론에 대해서 저스틴과 리차드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묘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경감님."

"무슨 뜻이죠. 메인 씨?"

하그렌드 경감은 갑자기 표정이 굳혔다. 하그렌드 경감은 다시 리차드의 커피 잔에 커피를 부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남작이 그 돈을 가져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동안 남작을 의심했던 것이 아닌가요?"

"?"

경감의 뜻하지 않은 말에 리차드와 저스틴은 놀라며 무엇인가 들킨 것을 감추려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경감이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뒤바뀐 돈 가방에 대해 저스틴이 말하려는 것은 리차드가 멈추게 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데스타브 남작을 의심하고 있었다. 넌지시 돈을 맡겨놓고 그들 모르게 돈을 빼돌린 다음 다시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도박자에서 종적을 감춘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작이 나쁜 마음을 먹거나 원래 나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경감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미 거기까지 추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메인 부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경감은 노련한 수사관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쯤 되면 메인 부부는 돈 가방에 대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경감님."

"말씀하시죠. 메인 씨. ,... 그런데 설탕과 프림은 타서 드십니까?"

여유 있게 리차드의 커피 기호를 묻는 경감의 태도에 리차드는 저스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슥한 후 대답했다.

". 두 스푼씩 탑니다."

"알겠습니다."

경감은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차례로 넣으면서 천천히 저었다.

"그 돈 가방에 대해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스틴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돈이..."

경감은 갑자기 리차드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메인 씨."

"네에?"

"그 문제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리차드는 옛날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은 하그렌드 경감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기업 경영이나 기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도 나름대로 충분한 경함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찰의 수사에 대해서도 그 동안 경험했던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스워 보이는 런던 경시청의 하그렌드 경감은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상당히 앞서서 파악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리차드는 그 시점에서 대화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 데스타브 남작이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미리 알았으면 좋을 뻔했군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로만 경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일종의 세탁업을 하고 있죠."

"세탁업?"

저스틴의 재빠른 질문에 경사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스틴은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즉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하그렌드 경감은 데스타브 남작의 실체에 대해 그 동안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사의 말이 맞습니다. 그는 더러운 돈을 만지죠."

리차드와 저스틴은 다시 한 번 마주 보았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돈을 해외로 밀반출하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랬군요. 남작이라는 귀족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올바른 사람이라면..."

"물론 올바른 사람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죠."

"그렇다면 남작이라는 작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스틴은 경감의 대답을 기다리며 카지노에서 보았던 데스타브 남작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있었지만 어딘가 섬찟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 작위는 지금으로서는 문제가 아니죠."

"?"

"다시 말해서 그는 국가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때 저스틴이 갑자기 다른 의문점을 제시했다.

"그렇다면요, 경사님."

그녀는 로만 경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때 딜러였던 것은 어떻게 된 건가요?"

"저 말씀이십니까. 부인?"

로만 경사는 이미 그 질문을 예상했었다.

"."

"그 문제는 경감님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저야 경감님이 명령에 따랐을 뿐이죠."

"그렇습니다. 우선 두 분께 그 일부터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데스타브 남작 때문에 무척 고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하그렌드 경감은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소위 돈세탁으로 막대한 달러를 국외로 유출시키는 혐의로 데스타브 남작은 벌써부터 주목해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 범인이 데스타브 남작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확한 증거였다. 그런데 그것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증거도 없이 용의자를 체포할 수는 없었으며 남작처럼 돈과 관련된 범죄는 일반적인 범법과 달리 애매한 점이 많았다. 자칫 국가의 경제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루기도 까다로웠다. 경시청의 고위 당국자 회의에서는 그 문제가 벌써부터 중요한 안건으로 다루어져 오고 있었다. 런던 경시청에서 수십 년 동안 민완 수사관으로 일해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나이젤 하그렌드 경감에게 수사 책임자의 임무를 맡긴 것은 얼마 전 최고급 간부회의 때의 일이다. 이미 이 사건으로 여러 명의 수사 책임자가 교체 되었고 동원된 수사관 연 인원만 해도 상당수에 달했다. 급기야 낭젤 하그렌드 경감이 수사 책임자로 결정된 것이다. 경시청의 담당 국장은 결정된 직후 하그렌드를 집무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국장님?"

언제나 옛날식 양복 차림에다 덥수룩한 수여, 좀 모자라는 듯한 하그렌드의 인상은 외모와 상관없이 미국 영화의 콜롬보 반장을 연상케 했다. 언젠나 허름한 바바리코트의 콜롬보에 비해 옛날식이지만 양복 차림인 것이 다르다면 다른 차이점이다.

"자네한테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네, 하그렌드."

"그렇습니까?"

하그렌드는 어떤 일에도 크게 놀라는 성격이 아니었다. 노려한 수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운 임무가 부여됐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당신도 알고 있겠지, 데스타브 남작에 대해서?"

"?"

하그렌드는 알아들었으면서도 다시 물었다. 그는 가끔 어떤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되묻곤 했다.

"그자가 귀족 신분을 앞세워 벌써부터 벌이고 있는 행동은 이미 국가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돈 세탁 말씀이군요? 우리 경시청에서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어쨋든 좋아."

원래 국장은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목석이라 통할 만큼 항상 사무적이고 철저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가 내가 무엇 때문에 자네를 보자고 했는지도 알겠군. 안 그런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국장님께서 말씀해 주셔야죠."

국장은 다시 한 번 하그렌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윽고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하그렌드 경감."

", 국장님."

"자네는 이 시간부터 데스타브 남작을 미행한다."

"미행입니까?"

하그렌드는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아직 그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잡지 못했으니까 체포할 수는 없어, 알겠지?"

". 제가 미행해서 증거를 확보하던가 현장을 덮쳐야 되겠군요."

"맞았네. 그런 다음 체포하면 끝나는 거야. 참고로 말해 두겠는데, 그자는 주로 유명한 클럽의 카지노에 나타나서 도박을 즐기는 편이지."

"시내에 잇는 켄싱턴 클럽 같은 곳이어야 하겠군요?"

"그곳에도 가끔 나타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네."

"알겠습니다. 국장님."

"한 가지 더 있네."

"?"

"그는 필요하면 외국을 원정을 가기도 하네."

"굉장하군요."

"한 번에 수백만 달러씩 움켜쥐기도 한다더군."

"그걸 모두 국외로 빼돌린다면 혹시 스위스 은행을 통해서가 아닐까요."

"그런 사실들을 알아내는 게 자네가 할 일이야. 하그렌드 경감."

"알겠습니다."

"잘해 보게."

", 그럼 가보겠습니다."

국장실을 나온 하그렌드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가슴에 새겼다. 데스타브 남작에 대해선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여러 곳의 도박장에서는 그를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함부로 대하질 못했고 남작은 그것을 미끼로 어렵지 않게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하그렌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치밀하고 지능적인 젊은 수사관을 조수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수사의 진척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가 선택한 사람은 젊은 경사인 로만이었다. 로만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는 정보는 없었지만 그런 대로 쓸 만하다는 평판이 나있었다. 하그렌드 국장실을 나온 즉시 로만 경사를 불렀다. 이런 문제는 신속하게 처리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감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로만은 갑자기 흥미가 당기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가 미행해야 되는 사람은 누굽니까?"

"데스타브 남작이야."

"그래요?"

그 순간 로만의 시선에 무엇인가 재빨리 스치는 것이 있었지만 하그렌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국장께서 나를 특별히 선택한 만큼 우리는 성과를 올려야 해. 알겠나?"

"당연히 그래야죠, 경감님."

"좋아."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오늘 당장."

"좋습니다."

"자네 자신 있지?"

"명령만 내려 주시면 어김없이 처리하겠습니다."

"됐어."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는 그렇게 해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3의 사나이

 

"그 후 나는 조수인 로만 경사를 데스타브 남작 측으로 아무도 모르게 접근시켰죠."

하그렌드의 설명에는 전혀 하자가 없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하그렌드의 치밀한 계획에 은근히 감탄해 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 경사 역시 수긍이라도 하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하그렌드는 그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내 조수가 남작과 친구가 되는 데 성공하기를 바랐습니다."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카지노에서 남작이 돈을 딸 수 있도록 도와준 겁니다."

"그럼 그 게임은 딜러인 당신이, 아니 로만 경사가 조작한 것이였군요?"

"로만 아서입니다. 부인."

로만은 자신의 정확한 이름을 저스틴에게 알려주었다.

"네 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남작이 돈을 따도록 해주었습니다."

저스틴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어 시원해 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데스타브 백작이 그녀를 행운의 여신이라며 감탄해 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으며 번호를 정하면 그 번호에 어김없이 당첨금이 붙던 상황은 그녀로서는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자신을 행운의 여신이라고 칭송하는 사람 앞에서 화낼 여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셈이다.

"어쩐지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요. 안 그래요 여보."

저스틴은 어색해진 자신의 입장을 위로 받고 싶다는 듯이 라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입니다, 경감님."

리차드는 조금 전부터 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뭐죠, 메인 씨?"

"조지도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습니까?"

"컨싱턴 클럽의 조지 베네딕 말인가요, 메인 씨?"

"."

"그도 물론 협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경찰에 말인가요?"

"물론이죠."

리차드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표정을 지었다. 조지와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번의 예기치 못했던 사건 때문에 은근히 조지를 의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파운드를 달러로 환전해 준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클럽의 총지배인이다. 따라서 원한다면 그 안에서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직책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가 남작이 아닌 경찰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리차드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2백만 달러를 준 다음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했던 겁니다."

로만 경사의 표정은 하그렌드 경감과 비교가 되었다. 다른 생각이 의중에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미묘한 움직임을 아무도 눈치 채진 못했다.

"그랬는데 그 돈을 제가 가지고 왔군요?"

저스틴은 그 동안의 궁금증이 상당히 풀린 표정이었다.

", 그렇습니다."

경감은 계속해서 저스틴이 남작의 계획에 걸려들게 된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 남작은 선량한 외국인을 이용한 겁니다. , 오해하지 마세요, 그 방면에서는 남작이 전문가이니까요. 부인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다 해도 그자한테는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자신만이 바보처럼 당했다고 생각했던 저스틴은 경감의 위로하는 듯한 부연 설명에 한결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사실 그럴 수박에 없었다. 경감의 설명으로 사건은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었다. 다만 로만 경사 한 사람만이 그들 중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철저하게 위장하기 위해 로만이 데스타브 남작과 한 팀으로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2백만 달러에 대한 배분 다툼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데스타브 남작은 로만에게 앞으로 정확히 일주일 후, 알카불고에서 만나 그의 몫을 배분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런 사실까지는 하그렌드 경감도 여러 가지의 정황으로 볼 때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의 이야기가 오고간 다음 리차드는 같은 내용의 논의는 더 이상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저스틴 쪽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일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리차드는 하그렌드의 말을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저스틴에게 직접 물었다.

"여보, 그렇지 않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저스틴 역시 리차드의 진의를 이미 알아차렸다. 그녀 생각으로 리차드는 아마 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의견을 동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리차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요, 여보. 안 그래?"

"맞아요."

메인 부부의 이야기에 두 사람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경감님,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어요."

"어떤 문제입니까. 부인?"

"돈이요."

"?"

"그 돈은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세요."

"그 돈?"

"무슨..."

"모르고 계셨어요?"

"돈이라면..."

경감은 얼른 대답하지 못한 채 곁에 있는 경사를 바라보았다. 경사도 역시 마주 바라볼 뿐이었다. 리차드와 저스틴은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의 변화를 잠시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유심히 살폈다. 저스틴과 리차드는 가방 속에 들어 있다 바뀐 2백만 달러의 행방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이번 사건에는 또 한 사람의 의문의 사나이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왜 메인 부부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필사적으로 추적해야 했는지, 그가 무엇 대문에 그런 짓을 저질러야 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몰랐다. 카우보이 모자의 닐 완슨, 그만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그가 런던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쫓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가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패거리가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데스타브 남작과 내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만 하그렌드, 로만, 메인 부부도 모르는 의문의 인물로 나타난 셈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현재로선 저스틴과 리차드 뿐이었다. 메인 부부와 하그렌드, 로만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닐 완슨은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한적한 도로에 세워진 자동차 안에 혼자 있었다. 그는 자동차 안에서 전화를 통해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그가 단독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그렇지 않아, 제이 제이."

그는 통화하는 상대방을 제이 제이라고 불렀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엿들을 사람도 엿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닐 완슨은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재수가 없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니까!"

닐 완슨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화가 치미는 모습이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상황이고 보면 상대방의 추궁에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 도대체 뭘 알아냈다는 거야, 거기서?"

"내가 알아낸 건 자동차 번호뿐이야. 그리고 이름은 메인이구. 그것뿐이야."

"그걸 가지고 뭘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다는 거지? 경찰에 의뢰해서 차번호를 추적이라도 할 셈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닐 완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도 할 만큼은 했어."

"?"

"자동차 등록소에 가서 알아본 거야, 경찰이 아니구."

"그랬더니?"

"등록이 안 되어 있었어."

"뭐야?"

리차드는 그 동안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겪어 왔다. 수없이 많은 경쟁 상대자들, 돈을 노리는 악당들 등등. 그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의 집에 설치된 경보 장치가 최첨단 시설로 갖추어진 이유만 봐도 그의 집이 얼마나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창문 하나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그의 집은 단단한 벼랑위의 요새와도 같았다. 자동차 역시 닐 완슨이 알아본 것과 같다. 그의 차는 등록 사업소에 특별히 부탁해서 기록장에는 올리지 않고 있었다. 자동차 번호를 추적한 자들에 의해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겪었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매우 특별한 조치를 강구했던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게 조치한 이후 자동차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없었고 번호를 가지고서도 리차드에 대해 어떤 사실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봐, ."

제이 제이로 불리는 상대는 몹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닐 완슨을 불렀다.

"왜 그래."

"자네도 메인 그룹을 알고 있잖아?"

"물론 들었지. 미국에서는 손꼽히는 그룹이라고."

"말도 안 돼."

"뭐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혀 소재 파악이 안 된다는 말이야?"

"내가 바보라고 생각해? 나도 다 알아봤다구."

"뭘 알아봤다는 거야?"

"회사에 연락해 봤지. 메인 그룹에 말이야."

"그랬더니?"

"주소도 안 가르쳐 줘."

"뭐야"

당연했다. 메인 그룹에서는 외부 전화에 대한 경계망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메인 그룹의 총수인 리차드 메인을 찾는 전화가 오면 가장 신속하게 조회를 한다. 상대를 알게 되면 단 몇 초안에 이미 상대방의 모든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필요한 경우 경찰의 컴퓨터 기록과도 연결이 가능할 정도였지만, 그보다 대개는 자체에서 보관 중인 자료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다. 닐 완슨이 실패했던 것과 같이 리차드의 인적 사항은 일체 공개될 수가 없었다. 그 적용 대상자는 리차드 메인과 저스틴 메인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그룹의 핵심 간부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한 닐 완슨은 제이 제이에게 마지막 카드를 내놓았다.

"이봐, 제이 제이."

"뭐야?"

"자네 벌써 잊었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무슨..."

닐 완슨의 말투를 통해 상대는 어떤 심상치 않은 기미를 알아차리며 말끝을 흐렸다.

"자네 그 동안 나한테 신세를 많이 졌어, 안 그래?"

"그거야, 내가..."

"잔말 말고 당장 알아 봐."

"알았네."

"시간 없어!"

"지금 당장이야, 어렵지."

"그럼?"

"앞으로 두 시간의 여유를 주면 어떻게 해 볼께."

"알았어. 실수하면 안 돼!"

"그래."

"좋아, 그대 다시 전화할 테니 명심해!"

닐 완슨은 계속 상대를 거칠게 굴었다. 그에게는 이번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는 리차드보다 저스틴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리차드보다 저스틴을 놀린다는 것을 확실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하그렌드 경감과 로만 경사가 메인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다. 전날 밤 그들의 이야기했던 사건 전모는 사건을 정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2백만 달러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는 아직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여보, 어쨌든 이젠 이 문제에서 손을 떼도록 합시다."

간밤 잠자리에 들기 전 리차드는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싶어요, 여보. 그렇지만..."

저스틴은 마음을 온전히 결정짓지 못한 태도였다.

"그렇지만?"

"간단히 말해서 결과를 보고 싶어요."

"어째서?"

"내가 처음부터 관련된 문제였으니까요."

"그 남작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했잖아. 당신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어?"

"다른 문제는 상관없어요. 이번만큼은 내가..."

"알았어."

리차드는 체념하듯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양보하는 사람은 언제나 리차드였다.

"당신 역시 못 말리겠군."

"내가 누군데 그러세요?"

"누구냐고?"

"."

"누구긴 누구?"

"리차드 메인의 부인이에요. 모두 당신을 닮아서 그런 거라고요."

리차드는 어이없이 하면서도 더 이상 이의를 제시하진 않았다. 이튿날 아치부터 방문객을 맞은 리차드는 탐탁하진 않았지만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안녕하십니까, 메인 부인, 그리고 메인 씨."

"좀 앉으시죠."

"고맙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은 후 하그렌드 경감이 먼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두 분께 죄송스럽습니다. 어제 여러 가지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또다시 방문한 것은 어려운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로만 경사는 경감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쳐자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스틴은 하그렌드의 표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가 과연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가 궁금했다.

"메인 부인."

경감은 곧장 저스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영국 정부는 데스타브 남작을 체포하고 돈을 회수할 수 있도록 부인이 도와주시면 대단히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거죠?'

"데스타브 남작은 돈을 받기 위해 연락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메인 부인께서..."

곁에 있던 리차드가 재빨리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만 두세요."

어젯밤 저스틴이 요구할 때는 일단 체념했던 그도 이번에는 태도를 바꾸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저스틴이 직접 뛰어들어 데스타브 남작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경감의 요구는 리차드가 생각했던 범위 이상의 심각한 문제였다. 필요할 경우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줄 수는 있다.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경우라면 어떤 위험이 다를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범인의 체포 과정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리차드는 제스틴을 그런 위험에 빠드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하그렌드 경감은 리차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변호를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메인 씨. 우선 제 얘기부터 들어보신 다음에 말씀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차드는 전혀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경감의 다음 말이 어떤 것인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권투 지망생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에게 선수를 스카웃하려는 코치는 말한다. 권투는 때리고 맞는 것만이 아니다. 하지만 권투를 잘하기 위해서는 때리는 일 이외에도 맞는 일도 필요하다. 리차드가 생각하기에 하그렌드가 저스틴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 하는 모든 말은 권투 지망생을 끌어들이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는 경감을 향해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다.

"더 들어볼 필요는 없어요."

"?"

"무슨 얘긴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하그렌드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메인 씨. 내가 부인께 드리려는 부탁에 대해서 말입니까?"

"물론이죠."

"?"

"적어도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저스틴이 그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리차드의 예측은 정확했고 그것은 상식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저스틴이 데스타브 남작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그를 체포할 방법이 없다. 다른 경우라면 용인해 줄 수도 있지만 그 일 만큼은 리차드로서는 반대하고 싶었다.

"역시 정확히 보셨구요, 메인 씨 놀랍습니다."

경감은 그렇게 말한 다음 표정을 바꾸며 정색했다.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후 메인 부부를 바라보며 그는 간곡하게 말했다.

"메인 씨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실 줄 믿습니다만, 남작을 체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싫어하실 줄 알면서도 염치를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인 씨, 메인 부인. 부탁을 들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로만 경사도 경감이 이어 간곡하게 부탁했다. 리차드와 저스틴이 잠깐 침묵을 지키며 마주보는 사이에 하그렌드가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메인 씨, 분명하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뭘 말입니까?"

"부인의 신변에 대해서는 우리 영국 경찰의 명예를 걸고 안전하게 책임질 수 있다고 약속드립니다."

"경감님."

리차드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협조해 드리기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시다면..."

"만일, 생각해 봅시다. 저스틴과 남작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 말입니다."

", 메인 씨."

"그렇다면 당연히 일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

저스틴은 조용히 앉아 들으면서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있었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리차드는 그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작은 아마도 저스틴이 돈을 가지고 나올 줄 알고 있을 겁니다."

"네에."

경감의 얼굴에 갑자기 난처해하는 빛이 나타났다. 리차드는 자신의 생각을 이어서 정리했다.

"따라서 저스틴은 돈을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 점이 리차드가 저스틴을 걱정해서 협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였다. 그것은 정확한 분석이다. 데스타브 남작이 가방 속의 돈이 바뀐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였다. 돈을 갖지 않고서 남작을 만날 수는 없다. 경감이 아니라 경시청의 청장이 부탁해 온다고 해도 리차드의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이 따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수 있었다. 남작은 돈의 보관을 부탁했고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은 저스틴이다. 그녀가 돈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국 오해가 생겨 어떤 일이 발생될지 예측할 수 없다. 돈 문제에 대해선 경감도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죠?"

"메인 씨가 부인의 안전을 걱정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경찰도 우리의 명예를 걸고 신변을 책임지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점을 양지하시고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리차드의 강경한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건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천만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

"문제는 가방 속에서 바뀐 가짜 돈입니다. 그 돈이 없다면 저스틴은 절대로 남작을 만날 수 없습니다."

리차드의 계속되는 강경한 반대에 하그렌드 경감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 떠났던 리차드의 런던 여행은 결국 이렇게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발생시켰다. 행운의 여신이라는 듣기만 해도 굉장했던 저스틴에 한 잠깐 동안이 찬사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아직 이들은 저스틴을 다라 런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카우보이모자를 쓴 닐 완슨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제이 제이 라는 미지의 인물에게 저스틴에 관한 신분을 알아보도록 압력을 넣을 정도로 무엇인가 목적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저스틴의 행방에 대해 그토록 궁금해 하는 것일까!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