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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문 2

Bollnow 2024. 3. 7. 11:31

4. 문밖의 낯선 영혼들

 

폐병이 재발한 성민이 입원한 병원에서 나온 권여사는 로이코스로 차를 몰았다.

'더러운 것들. 대낮에 거리에서 수치스러움도 모르고 교미를 하는 개 같은 종자들!'

권여사는 아랫입술을 이빨로 지긋이 깨물었다. 성민의 친구이기도 한 담당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금식기도요? 그리고 몸을 회복하기도 전에 철야기도를 하러 다녔단 말입니까? 어머님. 그것도 죄입니다. 성민이가 신학의 길로 방향을 바꿨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었지만 도대체 누가 원한다고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는거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저 친구가 그런 것 아니에요? 몇 달 정도 요양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데 결혼은? 친구에게 들은 얘기로는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하던데 오지 않나요? 궁금해요. 성민이가 사랑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말이에요.'

권여사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어렵게 참았다. 운전을 하기도 힘들었다. 윤성민이 겨우 정신을 차린 창백한 얼굴로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유경이었다. 그러나 권여사는 질투보다는 아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남편은 지방 공무원이었고 자신은 서울에서 커다란 한식당을 운영하던 권여사는 손님이었던 남자와 몇 번 만났다는 이유로 남편의 아기를 임신한 채 이혼당했다. 물론 임신을 말했다면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거다. 그러나 권여사는 죄책감에 견디지 못해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것으로 형벌을 치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권여사는 아들과 같이 살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 했고 재혼을 전제로 새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권여사는 성민을 언니에게 맡긴 채 남자의 두 아이를 애써 사랑하며 새 생활에 전념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밖의 일을 좋아하는 권여사이기에 부부싸움이 잦게 된 것이다.

결국 권여사는 혼자 살겠다는 맹세를 스스로에게 하고 성민을 제 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품안으로 들어 온 아들은 허약한 육신과 그 육신을 종처럼 부리는 신앙으로 더 이상 자기의 소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권여사를 더욱 쓸쓸하게 한 건 유경이란 존재였다. 성민에게 유경이는 어머니였다. 옆에서 지켜보는 권여사는 성민에게 있어 하나님과 유경이가 혼동되고, 자신이 유경이의 그늘에 가려진 듯해 열등감마저 느꼈다.

그렇지만 권여사는 아들에 대한 속죄의 심정으로 유경을 받아 들이려 했다. 이러던 차에 일어난 요즘 일에 권여사는 배신감으로 두 사람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또 미운 만큼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동정심이 솟구쳤다.

몇 번씩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자신을 다스리며 로이코스에 왔으나 강현섭은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은 저녁에 오실 겁니다. 가끔 전화를 하시니 급한 일이면 메모를 남겨 주세요. 전해드리겠습니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뒤로 바짝 넘긴 호리호리한 웨이터의 말에 권여사는 가슴이 울컥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현기증까지 났다. 성민에게 뭐라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권여사는 웨이터가 따라 준 오렌지 쥬스를 벽에 걸린 유경의 사진을 향해 컵째 내던졌다.

 

그 시간 유경은 손정태의 사무실 근처에서 그를 만나고 있었다. 유경은 캐리어우먼 일을 하지 않기로 그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손정태는 전혀 놀라거나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 바람에 유경은 미안한 마음이 더해 화제를 돌리려는데 손정태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먼저 나왔다.

"유경아. 변명을 대 봐."

그의 말에 유경은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대답없이 담배를 물었다. 순간 손정태는 유경의 입에서 담배를 뺏아 반으로 잘라 버렸다.

"변명을 대 보라구. 소리도 내지 않고 냄새도 풍기지 않으며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웃기지 마! 우리 주간님한테 들었어. 그 자식이랑 보통 사이가 아니라며? ! 난 멍청이라서 널 건드리지 않은 줄 알아? 내겐 항상 성민씨의 존재가 신과 함께 느껴져서 이제껏 참아 왔단 말이야. 그런데 그놈이 성민씨가 누릴 기쁨을 대신 차지하고 있어? 말해 봐. 사실이 아니면 나한테 욕이라도 하란 말이야!"

손정태는 자신이 왜 이 일에 분노를 느껴야 하는지 뚜렷한 이유도 모르는 채 그만 유경의 뺨을 때렸다.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유경을 한참 바라보더니 그녀의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는 유경의 손을 힘있게 쥐었다. 웬일인지 유경은 그대로 있었다.

"유경아. 성민씨를 왜 괴롭히는거냐? 강현섭을 정말 사랑하는 거야?"

유경은 대답없이 담배를 짓이겨 끄더니 아무 말 없이 출입구 쪽으로 걸어 갔다. 놀라며 이유를 묻는 손정태를 유경은 살짝 밀며 웃음을 띠었다.

"정태야. 고마워. 넌 나보다도 더 성민씨를 사랑하는구나. 다음에 만나자."

유경이 로이코스에 오니 계산대에 있는 남자 종업원이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주었다.

"김 선생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전화번호를 알려 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사장님한테서 몇 번씩 전화왔었어요. 김 선생님 오셨냐구요. 전화하시겠어요?"

종업원은 수화기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유경은 그대로 나왔다. 메모지에 적힌 전화번호가 어디를 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몬트리을 호텔 지하 오락실이다. 강현섭을 따라 간 적이 있다. 유경은 잠시 망설이다 오락실로 갔다.

밤보다는 덜하지만 자욱한 담배 연기와 쉴 새 없이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남자,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마찬가지다. 강현섭은 한꺼번에 두 대의 기계를 잡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전쟁을 치르는 사람처럼 열중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미 그의 승리가 보장된양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재미와 희열 외에는 그 어느 감정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무적의 전사(戰士)였다.

유경이 옆에 앉자 그는 기계에서 물러섰다. 그는 어제 밤 유경과 헤어진 이후 계속 기계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자리 밑에는 담배재와 꽁초가 수북했고 그의 얼굴도 수척했다.

"유경씨도 한 게임 하시죠? 그리고 나갑시다."

그는 유경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입을 맞추려다 세수도 하지 않은 자신임을 알고 그만두었다. 대신 그녀의 손등을 서너 차례 입술로 눌렀다.

"전 스카이 라운지에 가 있겠어요. 끝나면 오세요."

"스카이 라운지? 너무 높아서 현기증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입니다. 저는 지금 상당히 피곤하거든요. 제가 방을 잡아 놨으니 먼저 가 계세요. 곧 갈게요. 열쇠는 프론트에서 찾아요. 당신 이름으로 예약했어요."

호텔방에 들어온 유경이 창문 커튼을 젖히는데 강현섭이 문을 두드렸다.

"왜 빨리 오셨죠? 게임은?"

그는 대답 대신 옷을 훌훌 벗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폭포수처럼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유경은 창가에 서서 로이코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꼭 그리스 로마 신화를 뒤져 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할 때 강현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욕조 안에 있었다.

"유경씨. , 나를 지켜봐 줘요. 난 여자가 보는 앞에서 씻는걸 좋아하죠. 이상한 쾌감이 생기거든요."

 

문밖의 낯선 영혼들 - 2

"부인 앞에선 쾌감이 사라지나요?"

"부인? 우리 두 사람 대화에서 드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군요. 이혼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 별거 중이에요. 아들과 함께 강화도 친정 집에서 살고 있죠. 이혼하지 않기 위해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 일부러 우리 가족의 무사 안녕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를 했었죠. 더 솔직히 얘기할가요. 나는 이혼하지 않기 위해 당신을 만나고 있어요. 당신은 나의 파멸을 막아 주는 구세주죠. 하지만 나의 안전을 위해 당신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진 말아요."

"그럼 이혼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여자와의 동침은 합법적이고 묵인될 수 있는 행윈가요?"

"유경씨. 내가 말하는 이혼이란 비단 아내와의 끊어짐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아내를 사랑해서 이혼을 두려워하는 줄 알아요? , 이제 그만 이리 들어와요. 물속에서 남자와 얘기를 해 본 적이 있어요? 옷을 벗어요. 들어와요. 내 앞에서 옷을 벗어요. 내가 모시러 갈까요?"

유경은 고개를 저었다. 유경은 그가 보는 앞에서 치마를 내리고 블라우스 단추를 끌렀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에서 이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가장 관능적인 몸짓을 하고 싶었다. 유경의 그런 몸짓에 강현섭은 즐거운 얼굴로 가끔씩 탄성을 질렀다.

"당신은 훌륭한 여자요. 몸과 정신이 거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어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몸과 정신이 각각인데 말이오. , 이리 들어와요."

강현섭은 물 속에서 두 팔을 벌렸다. 유경은 마치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물을 거쳐 그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한바탕 격렬한 포옹을 나누고서야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늘 창백하던 유경의 뺨이 오랜만에 홍조를 띠자 현섭은 기쁜 나머지 그녀의 얼굴에 간간이 입을 맞추었다.

"당신 몸에도 피가 흐른다는 게 놀라울 정돈데요? 하하하... "

유경은 그에게 물을 튀기며 같이 웃었다.

"현섭씨. 그렇다면 제가 떠날 때는 언제쯤이죠? 나는 만나고 떠나는 일에는 서투른 여자니 그 때를 확실하게 알려 줘요."

유경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찰랑거렸다.

"떠나다니? 당신은 나의 노예인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이오? 히브리 노예들은 평생 충성을 하겠다는 서약으로 문설주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죠. 나는 그것보다 훨씬 완벽하게 당신의 자궁 속에 내 인을 쳤단 말이요. 아니, 각인이란 표현이 더 좋겠군요. 당신은 앞으로 누구의 정액을 받든 나의 종자만을 잉태할거요. 하하하..."

강현섭은 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유경은 소름이 끼치는 듯했으나 그가 아이처럼 다가와 가슴을 더듬으며 입을 맞추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뒤로 물러서자 유경은 젖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쓸어 모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지구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모든 걸 갖고 있는 남자죠.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게 없어요."

"그게 무어죠?"

"사랑이에요. 당신은 여자는 물론 가정도, 자신의 인생도, 신도, 또는 악마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죠. 그런 당신을 생각하면 가끔씩 공포가 밀려와요.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당신에게 다가가는 내 자신은 더 끔찍한 사람 같아요. 아마 우리 두 사람은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루시퍼의 피를 받은 인간들인지도 모르죠."

"루시퍼라? 모든 천사 중에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천사! 정말 적당한 비유를 했군요. 나는 당신을 볼 적마다 아니 가슴에 안을 때마다 악마의 아내를 범하는 즐거움을 누리죠.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해요. 그렇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알게 되어 당하는 고통이 그 즐거움보다 몇 배나 커요. 작품은 잘 돼 가고 있나요.?"

"작품이라기보다 요즘 나의 일기라고 말하는게 좋겠군요. 당신 때문에 모든 걸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죠. 그래서인지 잘 되고 있어요. 다만 당신이 이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그때 나는 당신에게 이혼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져요."

"유경씨. 나를 사랑하나요?"

강현섭은 유경을 녹일 듯 뜨거운 눈빛을 퍼부으며 물었다. 그러나 유경의 입가엔 냉소가 스몄다.

"사랑이요? 사랑은 단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 외의 것은 다 사랑의 아류에 속하는거죠. 사랑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놀음이죠. 당신은 유난히 도박을 좋아하던데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다니 우습군요."

"사랑은 단 하나라고요? 그럼 나하고는 도박을 하고 있다는 셈이오? 그 하나의 사랑은 지금 어디서 외롭게 울거나 앓고 있겠군요."

강현섭은 주저하며 물었다. 유경은 눈을 감고 대답했다. 유경, 자신도 입에서 나오는 말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악마의 지시에 따라 혀만 움직이는 듯했다.

"그래요, 김유경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여자라는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악마와 천사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시험하고 싶어요. 당신을 내 도박의 상대로 삼는게 아니라 나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고 있어요. 나는 당신과 처음 관계를 한 날 껍데기의 내가 아닌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어요. 너무도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그 여자는 내가 보아도 범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어요. 한참 후에 그 여자가 바로 나임을 알았죠. 윤성민의 세계 안에선 한 번도 느끼지도 발견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이상하게도 당신과 함께 할 때는 신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죠. 그러나 그 여자의 아름다움은 다분히 악마적이라 나는 그 여자가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 생각했어요.

그럼 또 다른 나는, 즉 윤성민과 함께 있을 때 나타나는 여자는 천사일까요? 그러나 그 천사는 너무 무력해요. 그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흙빛이라 살아 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어요. 그 여자의 몸은 버려진 마른 나뭇가지며, 그 여자의 영혼은 쓸쓸해요. 하지만 당신의 여자의 영혼은 늘 춤추길 원해요. 그 여자의 얼굴엔 핏기가 돌고 입술은 항상 붉죠. 가슴은 젖이 흐르는 여인처럼 부풀어 있고 자궁 속에선 잉태의 요동이 쉬지 않아요. 하지만 윤성민의 여자의 자궁은 썩은 태처럼 냄새가 나고, 어둠 속에서 혼자 슬피 우는 가슴 같아요. 영혼은 말라 비틀어진 형상이라 신에게서 외면당하여 문밖에서 떠도는 낯선 그림자일 뿐이죠. 제 얘기가 조금 길어도 괜찮을까요? 제가 아는 언니가 서른 여덟의 나이에 자살을 했어요. 이유는 자궁으로의 회귀죠.

그러나 처음엔 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신을 만나고 나서 언니가 말한 추락의 의미를 알았죠. 왜 언니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언니는 어찌 보면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포를 느껴요. 그 공포를 파고들면 당신도 자살할지 모른다는 예감이죠. 왜 웃죠? 당신이 내게 그런 웃음을 짓기는 처음이네요. 마치 상대의 말을 애써 부정하려는 소심한 사람처럼 입가에 냉기가 도는군요. 그런데 나는 자살할지도 모르는 당신 앞에서 내 자신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어요. 여기에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없죠. 지금이라도 뻔뻔스런 내게서 당신이 뒤돌아설 수 있어요. 어차피 제 도박은 결론에 다다른 듯해요. 저는 성민씨 여자의 영혼보다 강현섭의 여자의 영혼을 많이 닮았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어요. 나는 그동안 무기력감에 눌려 창백한 얼굴로 악몽에 시달렸지요.

그러다가 당신을 만나고서부터 생기를 얻었어요. 내 자신 속에서 자라난 생기가 아니라 당신에게서 받아 마신 새로운 기운이에요. 내 영혼은 당신의 기운을 그동안 무척이나 기다린 듯 무섭게 빨아들였어요. 그런데 그 기운이 퍼진 내 영혼이 고작 하는 일이라곤 도박이에요. , 도박이라니!"

 

문밖의 낯선 영혼들 - 3

유경은 두 손으로 물을 퍼 거칠게 제 얼굴에 쏟았다. 강현섭은 침통한 얼굴로 유경을 지켜 보았다. 홍조가 사라진 유경의 얼굴이 시리도록 하얗게 되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강현섭은 저도 모르게 윤성민이 떠올랐다.

언제나 조용한 미소가 몸 전체에 흐르며 학을 연상시키는 마르고 큰 키. 폐병의 후유증으로 늘 병색이 있는 얼굴. 커다랗지만 천박하지 않은 입술. 유럽 중세 수도사들의 의복이 어울릴 것 같은 늘 조심스럽고 단정한 몸짓과 말소리.

'저 여자를 성민에게 맡긴다는건 형벌이다. 성민은 저 여자가 아니고도 구원할 여자는 많다. 만약 성민이 저 여자를 품는다면 그것은 저 여자의 악몽만을 껴안는 것과 같다. 저 여자를 아는 자는 오직 나다. 그러나 나는 내 세계와 이혼할 수 없는 겁쟁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만 저 여자와 헤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순 없다. 그건 내가 지키려는 모든 걸 다 잃는 파산선고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잃는 것이라 해야 무엇인가? 내가 가진건 또 무엇이고! 만약 그가 윤성민만 아니었다면 나는 저 여자를 위해 인간이 만든 율법을 별 고통없이 깨뜨릴 수 있다. 그것은 저 여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나는 저 여자의 힘을 빌어 하루하루를 유지하고 있고 저 여자는 제 말대로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둘 다 미쳤든지 아니면 악마의 주술에 걸려든 가련한 인간들이다.

강현섭은 그녀에게 다가가 깊은 입맞춤을 했다. 유경은 그의 뜨거운 혀를 빨아들이며 눈물을 흘렸다.

"현섭씨. 분명히 알았어요. 나의 영혼은 열려지지 않는 문밖에서 홀로 헤매고 다니고 있음을. 그러니 나를 도와주세요."

"좋아요. 그러나 나는 로이코스의 불행이 내 것으로 될 예감이 들어요. 모든 사랑을 아류로 몰아 붙이는 단 하나의 사랑이란 윤성민을 말하는 거요? 말해 봐요! 그는 인간의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걸 알기나 해요? 당신에게 신이란 존재는 하나님 하나로 충분해요. 그 외의 것은 그야말로 다 신을 빙자한 아류란 말이오. 운성민, 그도 신의 아류요! 그만 그에게서 나와요. 당신이 그의 숨결을 받고 사는 한 당신의 얼굴엔 영원히 생기가 돌지 않고 당신의 자궁은 출산의 기쁨을 맛보지 못할거요. 나의 여왕이며 나의 노예인 당신의 얼굴은 언제나 홍조가 돌고 당신의 태에는 무수한 생명이 잉태될 수 있는 권리가 있소. , 이리 와요."

유경은 물 속에서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입으로 확인했다.

성민은 권여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지방으로 요양을 가지 않았다. 권여사는 몇 번이고 유경에게 연락을 하려 했으나 성민의 반대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성민은 이층 자기 방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책을 읽거나 기도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권여사는 하루 세 번씩 성민의 약을 챙겨 주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주치의가 오도록 조치를 취했다. 성민은 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손님이 성민의 집을 방문했다. 손정태였다. 손정태의 몸에서 독한 술냄새가 확하고 풍기는 바람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오랜만이군요."

본래 대화할 때 가지치기를 잘하고 상대에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는 성민이라 그가 왜 왔으며, 어떻게 집을 찾았는지 묻지도 않고 커피를 준비했다.

"별로 취하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마요. 얼굴이 안 좋은데 다시 재발이라도 된 겁니까? , 커피를 끓이시려구요? 좋죠. 술 깨는 데는 최고죠. 진하게 타 주시오."

손정태는 취중에도 그의 그런 태도가 거북해 두 손을 만져가며 말했다. 성민은 조심스레 커피를 가져 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노을이 그림을 그리듯 이층 거실을 물들였다.

"손정태씨는 건강해 보입니다."

자신을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성민의 표정이나 태도가 너무도 조용해 손정태는 술기운이 아니더라도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윤성민에게 알려야 한다. 저런 사람일수록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면 화가 크게 미친다. 자신이 무슨 성자처럼 고고하게 구는 사람들이란 본시 심약하고, 한번 폭발하면 그 불길이 그칠 줄 모르는 법. 그래, 나는 유경이 말대로 윤성민을 더 사랑하는지도 모르지. 저 창백한 얼굴, 마른 몸, 온 몸에서 풍기는 쓸쓸한 기운. 이제와서 유경이가 저 가련한 남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다니! 똑똑하다고 하는 여자들은 칼의 사용법을 모른다. 제가 아는 지식에 빠져 아무 데나 칼을 휘둘러 살인을 하기 일쑤지. 그런데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는가. 혹 충격으로 피를 토하는건 아닐까? , 내가 왜 이리 초조해할까. 내가 뭣하러 이 자리에 와 있는건가.

나는 엄연한 타인이 아닌가. 누구를 위해 윤성민 앞에서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고 있는건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지금 나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사람은 윤성민도 유경이도 아니다. 바로 강현섭이다. 그가 유경이를 안 지 얼마나 된다고 그녀의 모든 걸 독점하고 있는가 말이다. 십여 년을 함께 한 윤성민은 물론 나 역시 그녀의 문밖에서 서성일 뿐인데 그런 부초 같은 인생이 무얼 책임질 수 있다고 유경을 소유하고 있는걸까. 유경이가 칼을 들이댈 곳은 성민이 아니라 강현섭이다. 그는 술장사도 얼마 못 가서 문을 닫고 또 다시 시작하는 일의 취향에 맞는 여자를 택할 것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짐작하는 일이 아닌가.'

손정태는 커피를 마시며 윤성민을 살폈다. 오랜만에 나타난 자신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매일 집에서 대하는 사람처럼 차를 마시는 윤성민을 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정태는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유경씨와는 어쩔 셈입니까?"

손정태로선 최대의 용기와 조심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윤성민은 창밖을 쳐다보며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참으로 먼 길을 왔군요. 그렇다면 그 노정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의무가 제게 있겠죠? 이번 가을에 결혼합니다."

"그 결혼에 문제는 없습니까?"

"손정태씨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짐작은 짐작일 뿐. 문제는 제 건강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저는 피곤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습니다."

성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일어섰다. 순간 손정태는 화가 치밀어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위선자! 난 당신 마음을 다 알고 있어! 유경에 대한 분노와 배반감으로 심장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고, 그 잘난 폐에는 허망의 구멍이 숭숭 뚫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야.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무엇이 부끄러워 이 수도원 같은 집에서 침묵을 지키고 유경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당신의 구원 방법은 늘 이런 식으로 유경의 숨통을 조였단 말이야? 차라리 유경이를 풀어 줘. 왜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게 당신의 구원이라는 형벌의 감옥 속에 가두고 있는 거야? 누굴 위해 기도하는 거야? 누굴 위해 무릎을 꿇고? 대답해!"

손정태는 뒤돌아 서 있는 성민을 난폭하게 제 앞으로 끌었다. 성민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정태를 노려보았다. 손정태는 그만 멈칫 물러섰다. 성민은 현관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문밖의 낯선 영혼들 - 4

"그만, 그만 가시오. 당신은 내게 십 년 전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한 것으로 충분해요. 그런데 지금은 더 무서운 흉기로 내 가슴을 찌르고 있소. 유경이와 나, 우리 두 사람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당신의 고함, 분노가 내게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고 우습기 짝이 없단 말이오. 유경이가 어지럽혀 놓은 문제는 내가 치울거고 내가 혼란스럽게 한 일은 유경이가 처리할거요. 다시는 우리 두 사람의 문제에 분을 품지 말고 먼 길을 애써 달려오지 마시오. 내 말은 부탁이 아니라 약속이오!"

성민은 말을 하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손정태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육신이 사라진 영혼이 무언가의 도움을 받고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제기랄, 이 위선자야! 네 벌거벗은 영혼에 육신부터 입혀 놓고 유경이 앞에 나타나라. ! 저 영혼이라는 꼴 좀 보게. 우습기 짝이 없군. 비쩍 말라 비틀어져서 개들도 그냥 지나칠 판이군. 유경이는 현명한 여자야. 이미 네가 그런 놈이란 걸 간파했으니 말이야. 백치가 따로 없군. 어이, 므이쉬낀 공작 나으리!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보지. 그럼 알아, 유경이가 한달음에 올지. 그럼, 유경이는 뭐야? 나 스따시야 필립뽀브나? 아니면 아글라야? 정말 웃기는 세상이군. 모두들 수용소에서 탈출한 무리들이 감히 선택의 권리를 갖고 있다니 말이야. 너희들이 갈 곳은 딱 한 군데뿐이지. 수용소에서 나왔으니 수용소로 가야지. 아암! 어이, 므이쉬낀 공작! 제기랄, 이건 내가 마치 로고진이 된 기분이잖아. 아무렴 어때. 그래! 난 더 이상 고매한 두 인간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겠어. 대신 유경이에게 계속 그 따위 사기꾼의 술수 같은 구원을 가지고 속박을 한다면 제이의 칼로 네 심장을 도려내 주지!"

손정태는 성민이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고함을 질러댔다. 제 방으로 들어 온 성민은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분명 유경이와 함께 당신의 뜰에서 당신의 은총의 빛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영혼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유경이를 잃는다면 제 신앙을 잃는 것입니다. 저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성민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 환상을 보게 되었다. 하나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여자의 옷은 다 찢어지고 머리는 길게 늘어져 엉켰는데 스스로 어지럽게 만든 듯했다. 여자는 신을 신지 않았고 맨발에서는 상처로 피와 고름이 배어 나왔다. 여자의 얼굴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고 하얗게 말라 붙은 입술로 뭐라 말을 했으나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남자 쪽에서 보면 여자는 분명 문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는 버림받은 불쌍한 영혼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형상도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남자의 머리에는 보기에도 으시시한 가시로 엮은 관이 쓰여져 있어서 쉼 없이 피가 흘러 얼굴뿐 아니라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고, 역시 신을 신지 않은 두 발은 가시판을 디디고 있었다. 옷은 낡은 마조각을 이어 만든 탓인지 방금 무덤에서 나온 듯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은 여자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남자의 핏빛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여유와 온유함이 흘렀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남자는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승리하여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인 반면에 여자는 쫓겨난 자의 원망과 서러움이 가득찬 표정이었다.

남자는 문을 열어 여자에게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수치를 당하는 사람처럼 뒤돌아섰다.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이곳으로 오시오! 그러나 여자는 점점 뒤로 물러섰다. 오시오, 이곳으로! 그의 외침이 커질수록 여자는 멀어졌다.

남자는 할 수 없이 문턱을 넘어 여자 쪽으로 갔다. 그러자 여자가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오면 나는 죽어요. 제발, 그만 오세요! 당신이 그곳에 있을 때 나는 안전하고 평안해요. 당신은 그곳에, 나는 이곳에 있을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평안을 지켜 주는 거예요. 그래도 남자는 계속 발걸음을 땠다. 순간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여자는 밑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추락하였다.

남자는 차마 그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위에서 내려다 본 채 애타게 여자를 찾았다. 밑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당신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가셔도 됩니다. 어서 오세요. 그러나 남자는 내려가지 못했다. 남자는 자기의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기만 했다. 그가 가슴을 칠 때마다 여자의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남자는 그제서야 가시관을 내어치고 마대자루 옷을 벗어 던진 벌거벗은 몸으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내려가도 밑이 보이지도 닿지도 않았다. 남자는 다만 그 밑의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순간 성민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끔찍한 일이다. 결국 남자는 아래 세계의 공포에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린걸 후회하는구나. 바로 내 꼴이 아닌가. 윤성민,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건가? 한 여자를 네 신앙으로 생각한다면서 너의 구원의 방법은 무엇을 담보로 두기 원하기에 제 자리에 선 채 유경일 기다리고만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손정태의 말처럼 위선이다.'

그러나 윤성민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머리를 감싸 쥐고 침대에 엎드렸다.

 

눈치 빠른 권여사가 성민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권여사는 가게의 계약연기 건도 있고 해서 결국 강현섭을 만났다. 권여사가 로이 코스에 들어서니 점심시간 후라 한산했다. 커피를 마시는 몇몇 데이트족의 테이블 외에는 안개꽃 한가운데에 장미 한 송이씩을 꽂은 하얗고 긴 꽃병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권여사님. 이리 오시죠."

권여사는 강현섭이 안내하는 자리로 가려다 그만 움찔했다. 바로 유경의 사진이 걸려 있는 자리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저 사진에 얼룩이 있어서 더 좋아 보여요. 마치 여자가 울고 있는 듯한 뭐랄까... 성모 마리아의 눈물? 아니면 창녀의 애처로움?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 가게는 앞으로도 계속하실건가요?"

강현섭의 말에 권여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여자 혼자서 술집을 운영하기 벅차다고 요즘 들어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장사를 생각해 보지 않은건 아니지만 이젠 장사라면 신물이 날 정도다. 집과 오피스텔을 처리해 가게때문에 강현섭에게 진 빚을 모두 갚고 작은 집에서라도 성민과 단란히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더구나 신학의 길로 들어선 성민이 생각을 하면 권여사는 웬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에 떳떳하지 못함을 느끼기조차 한다.

"사실은 가게를 내놓으려고 해요. 강 선생이 발이 넓으니 처분 좀 해 줘요. 그리고 가게와 오피스텔이 팔리는 대로 강 선생에게 빌린 돈은 다 갚죠."

"그래요? 뜻밖이군요. 그렇게 해보죠. 다른 계획은 없습니까?"

"아니오. 쉬고 싶어요. 다른 여자들 오십 나이가 나한테는 칠십 노파로 느껴져 힘들어요. 게다가 우리 성민이가 하는 일이..."

권여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러는게 아닌데. 좀 더 마지막 순간까지 뻣뻣하게 나가야 하는데. 저 인간 입에서 스스로 유경이나 성민이 얘기가 나오도록 해야 하는건데 하며 권여사는 입을 꽉 다물었다.

 

문밖의 낯선 영혼들 - 5

", 성민이는 잘 있어요? 안 본지도 오래됐군요. 신학공부가 힘든가 보죠?"

권여사는 강현섭의 말에 뺨을 갈겨 주고 싶었으나 참고 미소를 지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다 말해 버리자 하는 심정이었다.

"그래요. 신학 공부에다가 폐병까지 재발돼서 가시밭길을 걷고 있죠. 더구나 그 가시밭길에 불을 지피는 유경이까지 있어서 그 애 폐가 요즘 악마들의 놀이터로 변하고 있어요. 어디 훌륭한 명의나 굿 잘하는 무당 없어요? 가시밭길이 아름다운 꽃길이 되고 악마 같은 유경이의 폐가 가시밭이 되게 하는 신통력 지닌 마술사 없어요? 당신들은 내 아들을 너무도 참혹하게 짓밟고 있어요. 특히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은 엄연한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인데..."

권여사는 눈물이 나오려고 해 얼굴을 들었다.

"권여사님. 세상에는 이해 못 할 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유경이와 저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켜 주고 있는 이상의 관계는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습니다. 저도 나중에서야 유경이가 성민의 여자라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유경이는 성민이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습니까? 성민이 때문에 유경이가 숨 막혀 고통받는 걸 짐작이나 했는지요? 유경이에게는 신이 둘이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신과 성민이라는 신이지요. 나는 유경이가 나를 어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고, 또 유경이가 성민이에게서 온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를 완벽하게 사랑해 주고 붙들어 줄 수 있는 남자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권여사님, 나는 얼마 못 가 유경이로부터 등돌림을 당하겠죠. 나중에 울 사람은 바로 나이고, 보고 싶어 가슴을 칠 사람도 납니다. 유경이가 성민일 배신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그녀가 성민이로부터 보이지 않게 받은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도 성민이와 여러 번 만났고 대화를 했기에 성민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신이 되어 신의 사랑으로 유경이를 안으려 하고, 신의 목소리로 유경이에게 말하며, 신의 손으로 유경일 잡아끌고 있습니다. 저는 유경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스러움에 차라리 유경일 죽이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유경이는 가엾게도 성민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제 가슴에 깊이 묻어 놓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도 그녀는 성민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민이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낸답니다. 유경이가 지금 저와의 관계 때문에 기쁨에 넘쳐 있는 줄 아십니까?

천만에요. 유경이는 오히려 저로 인해 고통의 무게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민이에게 그대로 보낸다면 유경이는 미치고 맙니다. 유경이는 남자에게서 사람의 사랑을 원하지 거룩한 신의 은총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유경이는 내가 아무리 막아도 제 스스로 성민이에게 갈겁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한 길인데도 말입니다."

강현섭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 반짝임은 생기가 도는 기운이 아니라 힘없는 자의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권여사는 그의 눈에서 초조한 분위기를 느꼈으나 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기에 그런 줄 알았다.

"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에요? 나는 당신이 숱한 여자들과 육체관계를 맺어 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게다가 당신은 역마살 낀 사람처럼 한 가지 일을 몇 달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면서도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입맛에 맞는 여자를 고른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이 술집을 연다고 했을 적에 주위 사람들이 내기까지 했어요. 당신이 이 일을 몇 달이나 할까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이번엔 어느 여자를 끼고 나타날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기까지 했죠. 당신의 그런 지저분한 생활에 진저리가 난 나머지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 부인과는 과연 언제쯤 헤어질까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과연 재주가 많고 똑똑한 남자에요. 하는 일마다 실패라는걸 모르니. 많은 돈 때문에 그런가요? 아니면 뛰어난 사기꾼이라서? 더구나 유경이 같은 애를 낚았으니 그 실력은 알아 줄 만하군요!

당신 같은 떠돌이 인생이 감히 유경이를 범하고 성민이에게 고통을 줄 자격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 성민이를 한 번 만나봐요. 그 아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야위어 가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란 말이에요!"

권여사는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강현섭은 권여사가 나가자 담배를 꺼냈다. 그는 담배를 다 피울 동안 유경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그는 재떨이에 내던졌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강현섭은 음성민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신호대기라 잠시 멈추었을 때 창 밖을 보던 강현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캐리어우먼 6월호 매진 육박!'

제법 큰 책방의 창문에 붙어 있는 호화스런 캐리어우먼의 광고지에 실린 톱 기사 중 하나 때문이었다.

'신인 가수, 강현섭. 돌연 은퇴! 그는 왜 스타의 길을 포기했는가?'

그래도 잡지가 나오기 전까지 별탈 없게 해 준 친구의 형인 잡지사 주간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부터 당분간은 시끄럽겠군.'

강현섭이 이런 생각을 할 때 뒤에서 요란한 경적 소리가 들렸다.

그가 윤성민의 집 앞에 적당한 주차 자리를 물색하는데 이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키가 큰 남자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강현섭은 차에서 내리며 그가 윤성민임을 알았다.

"성민아, 오랜만이구나. 어머님 말씀대로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산책하고 오니?"

강현섭과 윤성민은 서로 안 지 얼마되지 않지만 가볍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사이다. 그것은 순전히 강현섭의 적극적인 성격 탓이다.

"하하하... 나는 너랑 마주 서면 항상 열등감을 느낀단 말이야. 네 큰 키가 그 원인이지. 나의 신체발육에도 신의 축복이 있길!"

강현섭은 애써 농담을 하는데 윤성민의 굳은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그는 강현섭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대문쪽으로 걸어 갔다.

"성민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지는 않겠지. 커피 한 잔 주겠니?"

강현섭이 뒤따라 가며 묻자 성민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현섭이 형. 얘기가 길어지겠죠. 그렇다면 집보다는 저 뒷산이 좋겠군요. 약수터도 있어요."

성민은 현섭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현섭은 고개를 절레 흔들고는 따라갔다.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곳에 동네 사람들이 통상 풀산이라 부르는 작은 산이 있다. 그만큼 이 산에는 풀이 많다. 오후라 그런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성민은 숨이 가쁜지 도중에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 쉬었다. 현섭이 자주 손을 내밀어 부축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성민은 거절했다.

"후우... 이 산을 풀산이라고 하죠. 형은 처음이죠?"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운동복 차림으로 오는건데 말이야. 그런데 나는 풀 이름을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네가 건강해지면 이 산에서 너와 내기를 하고 싶구나. 누가 빨리 올라가나든지 아니면 누가 풀 이름을 많이 아나 하는 것 말이야. 어때, 근사한 내기지?"

 

문밖의 낯선 영혼들 - 6

그러나 성민은 침묵으로 답하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얼마를 오르더니 성민은 왼편으로 꺾어 들어갔다. 약수터였다. 할머니 셋과 같은 연배로 보이는 할아버지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들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흰 운동화를 신었는데 물을 받는 중이었다. 아마 동네의 노인학교 친구들로 보였다.

"할머님. 물 한 잔 먹겠습니다."

성민은 염치좋게 끼어 들어 조롱박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현섭도 마셨다. 물을 마신 성민은 조금 생기를 찾았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산을 올랐다. 산꼭대기에 오르자 성민은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섭도 성민과 한팔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성민이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몇 모금 빨다 그만두었다.

"형이 가장 높이 올라간 곳이 어디죠?"

난데없는 성민의 물음에 현섭은 머뭇거렸다.

"여객기가 가장 높이 날 수 있는 지점밖에는 안되겠죠. 그럼 가장 어디죠?"

밑바닥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면 그곳은 또 어디죠?"

"성민아, 산에 왔다고 선문답하는거야?"

"아니요! 가장 인간적인 질문을 드린 거예요. 그러니 솔직하게 답하세요. 형은 내게 답할 의무가 있어요. 형이 경험한 바닥을 얘기해보란 말이에요."

성민은 그러면서도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묻었다. 현섭은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듯해 참고 대답했다.

"성민아. 왜 유경이와 나와의 관계를 바닥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런 오만함이 도대체 무슨 생각에 근거를 둔 거야?"

"오만함이요? 아닙니다. 형은 마치 미개척지에 한 손엔 총을 들고, 다른 손엔 소금을 들고 겁탈하는 침략자들과도 같은 방법으로 유경이를 농락하고 있어요. 그 미개척지의 주민도 사람이기에 양면성을 갖고 있죠. 그들과 동거할 수도 있고 아니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겠죠. 용기 있는 자는 싸우겠고, 누군가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자는 동거를 하겠죠. 유경이가 바로 후자입니다. 유경이는 자신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형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는 여자입니다. 형은 물론 그걸 알고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형은 유경이를 그 미개척지에서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두어야 했어요. 왜 그녀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형의 세계를 구경시켜 주고 형의 고통을 지워 주고 있습니까? 형은 분명 유경이 스스로도 발견못한 또 다른 유경이를 끌어내어 주었겠죠. 나는 그 점이 두렵습니다. 다시 유경이가 제게 온다 해도 그 치료를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이제라도 유경이를 그만 괴롭히세요."

강현섭은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비겁한 놈! 차라리 네가 솔직하게 내게 도움을 청하길 바랬어. 유경이는 바로 너의 그런 점에 숨막혀 한다구! 늘 겸손한 척하고, 온유를 명함처럼 내미는 놈! 나는 유경이와 결혼할 수 없어. 게다가 나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기 전까지는 유경이와 나와의 관계는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의 노래처럼 손가락질당하겠지. 하지만 너는 안돼. 너는 유경이의 영혼을 말라 죽일 놈이야. 네 영혼이 살찔 때마다 유경이는 점점 말라가겠지.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래도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유경이의 얼굴을 볼 적마다 네 놈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었지. 그러나 이제 다 과거의 감정이 됐어. 아주 순식간에! 내가 멍청하지 않은 이상 다시는 너를 생각하지도 네 얼굴을 떠올리지도 않을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유경이와 너를 관련지어서 생각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군. 진심으로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유경일 사랑한다면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 유경이의 세계를 네가 포용할 수 없고, 유경이 역시 너의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모르냐? 이번엔 네가 내게 답해 봐. 왜 유경이를 신의 이름으로 가두어 두는 거야?"

성민은 그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들었다.

"그건 신의 짝지음도 악마의 명령도 아닌 나, 윤성민의 선택입니다."

"신에게 받은 확신도 없이? 네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냐?"

".... 결국 이런 얘기를 하게 만드는군요. 유경이는 제 여자입니다."

현섭은 성민이 단호히 말하는 모습이 소년의 어리광 같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누가 누굴 감히 소유할 수 있다는 거야? 너란 인간도 신 외에는 그 어느 사람에게도 소유당하기 싫어 단 위에 서길 바라면서 왜 유경이를 신의 이름으로 구속하는 거지? 차라리 사랑한다고 얘기하지 그러냐?"

성민은 가슴이 답답했다. 사랑이라는 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옥죄이는 듯했다. 성민은 더 이상 현섭과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성민은 먼저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택가를 천천히 걸었다.

'왜 사랑이라는 말을 듣거나 생각할 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까? 그래. 현섭의 말이 옳다. 나는 그에게 지저분하게 긴 말들을 늘어 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유경이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런데 왜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뒤로 숨겨두고 길고 지리하게 설명했을까, 나는 유경이를 사랑하지 않는걸까. 마치 불쌍한 창녀를 구원한다는 생각에 그녀를 잡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럼 나에게 유경이, 아니 여자란 무엇인가? 어느 교회의 뜰에서 들었던 악마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여자란 다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내가 유경이에게 연연해하는 까닭은 한 여자는 한 얼굴만을 갖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그녀만을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 그렇다! 예수는 바로 이 사실을 터득한 인간이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도 십자가에 오를 수 있었던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성민이는 머릿속이 상쾌해지고 걸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힘껏 뻗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돌리는 곳마다 유경의 얼굴로 어지러울 정도였고 그로 인해 가슴의 통증까지 심해지는 듯했었다. 성민은 걸음을 빨리 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기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유경이가 다시 내게 온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모든 여인을 얻었다고. 그러나 그녀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나는 모든 여인을 잃었다고 생각하진 않겠다. 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모든 여자를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하겠다. 유경아. 나는 지금 정말 기쁘다. 물론 네가 내게 온다면 나는 춤까지 추겠지만 이 정도로도 나는 가슴이 시원하다. 내가 왜 손정태나 현섭이 형에게 날카로운 혀로 대했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유경아. 사랑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다. 다만 너를 기다리겠다. 기다리겠다.'

윤성민은 창백한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유경은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강현섭을 만나는 일 외에는 온종일 다락에서 보냈다. 이런 생활을 시작한 처음 며칠 동안은 최례옥에게서 인민재판의 설교가 장마처럼 쏟아졌었다.

 

문밖의 낯선 영혼들 - 7

"온 식구가 다 생활전선에 나섰는데 소설을 쓴다구? 어이구, 속 터져. 세상이 한 번 더 뒤집혀지지 않나! 그래서 네가 인민재판에서 즉결 처형을 받는다면 제일 큰 소리로 옳소 하고 외칠 거다. 미친년! 아버지는 실업자에 병들어 겨우 식당에서 밥그릇이나 나르고, 에미는 기생처럼 이천 원짜리 국밥에 손님 비위나 맞추고, 결혼한 미경이까지 열 일 제치고 뛰는데 글이 써지냐? 도대체 네가 믿는다는 하나님은 뭐 하시는 양반이야? 너 같은 정신병자들한데 벼락은 치지 않고 도대체 어디서 낮잠이나 자고 있는거야, ? 며칠 전 시장판에 여편네들이 때거리로 몰려와서 예수가 온대나 세상이 해까닥한대나 하고 나발을 불고 다니더라. 글쎄. 내 말이 바로 그거랑 똑같아. 예수고, 부처고, 빨갱이고 뭐고 간에 뭐든지 하나는 와서 세상을 훽 바꿔 놓는거란 말이야. 알아? 미친년. 그렇게 다락에서 도 닦고 너 혼자 성인군자 되면 맘 편하냐? 아이고 답답해라. 뭐든지 아무거나 하나 왔으면 속이 시원하겠네.

세상에 하도 벼락 맞을 인간들이 많아서 감당을 못해 안 오는 거야, 뭐야? 나도 그 여편네들이나 따라다닐까 보다.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 살 것 아니야! 내 신세가 결국 모래내 시장판에서 주저앉을 거라면 지옥 불이건 수소폭탄이건 떨어져서 차라리 난리가 나는 게 낫지. 미친년! 저 얼굴하고... 거기서 네 송장 치우게 하려고 그래? 아이고 답답해라. 누가 나를 알아주나. 이러다가 콱 죽어버리면 그건 다 네 책임이야. 알았어? 내가 유서라도 쓰고 죽으면 모든 이유는 너한테 있다고 할거야. ! 그러면 작가고 뭐고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겠지. 아이고, 답답해라. 정 올 게 없다면 비라도 와장창 쏟아졌으면 좋겠네."

밤마다 최례옥은 다락문을 화들짝 열고 하루종일 쌓인 피로와 분을 유경에게 퍼부었다. 그러나 유경은 그런 최례옥을 다행스런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내게 욕을 하고, 긴 사설을 늘어놓는다는 건 삶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거다. 어머니. 더 많은 욕을 하시고, 더 긴 사설을 제게 들려주세요. 그럴수록 나는 안심이 돼요.'

최례옥은 며칠 동안 유경을 괴롭히더니 제풀에 지쳤는지 조용해졌다. 밤에 돌아오면 다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잠에 들었다. 다만 이불 속에서 잠꼬대처럼 미친년, 미친년, 아이고 답답해라, 뭐가 안 오나 빨리 왔으면 좋겠네 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유경에게는 들리지 않기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 다락문을 열고 방 안을 살피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만우는 최례옥과 달랐다. 그는 유경이가 종일 글을 쓰자 퍽 달가워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아침 일찍 식당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심스레 다락문을 두드렸다. 유경이 다락에서 내려오자 김만우는 멋쩍어하며 아랫목을 가리켰다. 유경은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 유경아.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장사꾼 집안에서 문사(文士)가 나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런데 널 위해 해줄 게 없으니 그만큼 미안하기도 하구나. 대신 다락에 형광등을 달아 줄께. 오랜 시간 백열등 밑에서 글을 쓰면 눈이 나빠지거든. 내 형편으로는 최대의 선물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라. 넌 똑똑한 아이니까 나중에 좋은 집필실을 갖게 될 거야. 우리 집안도 일으키고. 아암, 나는 믿는다. 유경이 너를... "

유경인 김만우의 말에 잠시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짊어진 기분이었다. 다른 아버지들 같으면 내가 곧 일어서면 또는 내가 얼마 있지 않아 성공하면 하는 말로 자식들 앞에서 재기의 과시를 하거나, 현재의 상황을 애써 미화시키려 했을거다. 그러나 김만우는 앞으로의 일에 아무런 희망을 품지 않을 뿐더러 가족들이 바라는 사회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결혼하여 부인과 딸, 두 아들을 고스란히 남긴 채 월남한 김만우. 그 이후 남한에서 김만우의 모든 일과 생각은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만나는 수단이 되었다. 열다섯 살 연하인 최례옥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으나 그의 심장은 늘 북쪽으로 향해 뛰었다. 그는 법조계의 진출을 원했으나 고향에 가는 제일 빠른 방법은 돈이라 판단했고 그 판단에 따라 사업으로 바꾸었다.

사업은 몇 번의 일어섬과 쓰러짐을 통해 중소기업이지만 단단히 굳어졌다. 그때는 젊었기에 사업이 어려울 때는 일어설 것을 확신했고, 일어섰을 때는 고향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쓰러짐은 칠십이 다 돼가는 김만우를 다시는 걷지 못할 앉은뱅이로 만들었다. 김만우는 물질의 여신에게 조롱당했고, 고향은 자기를 비난한다는 모멸감과 죄책감에 스스로 두 다리를 쪼그라뜨리고 허리를 부러뜨렸다.

'나의 짐보따리다. 나는 통일을 갈망한 적도 없고, 통일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양쪽 고위 인사들이 검은 승용차를 타고 남과 북을 오가도 아무 동요없이 원고를 쓰고 서점을 다녔으며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내게 아버지의 고향은 유리창 하나 없는 한증탕처럼 숨 막힌다. 더구나 북에 두고 온 세 형제를 나와 미경이, 훈의 얼굴에서 찾는 듯한 눈길을 느낄 때마다 그 고향은 어둡고 밑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무슨 일로 나를 부른걸까. 내 다락방에 불을 밝혀 주기 위해서? 아버지 성격으로 그런 일로 나와 마주 앉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없는 사이에 일하실 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형광등을 달기 전에 통보했다. 그다음의 이야기가 분명 있을 거다.'

유경은 김만우를 유심히 살폈다. 전형적인 이북 남자의 모습인 김만우는 말 그대로 기골이 장대한 타입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한 번 가라앉으면 엄청나게 왜소해 보이고 측은하기까지 하다. 바로 지금 김만우의 모습이 그렇다. 유경이는 애써 웃으며 김만우의 손을 잡았다. 그 손에는 힘이 없었다. 만약 김만우가 자살을 한다면 약을 입 안에 털어 넣을 힘조차 없어 실패로 끝날 듯한 손이다.

"아버지. 제게 무슨 할 말씀이 있어요?"

김만우는 유경이의 눈을 피하며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리고는 연회색 봄 잠바 안주머니에서 누런 편지봉투를 꺼냈다. 유경은 웬지 가슴이 덜컹했다. 평소에 최례옥 앞에서 자살을 자기보호 방법으로 들고 나오는 김만우이기에 유서는 아닐까 해서였다. 김만우는 누런 봉투에서 회색 빛깔의 인지가 찍힌 종이를 꺼냈다. 유경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유경아. 이게 뭔지 알지?"

김만우는 보물지도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종이를 유경 앞에 바싹 밀었다.

"호적초본이네요?"

"그래. 너에게 부탁이 있단다."

유경은 어지러이 쓰여진 한자를 하나씩 눈으로 읽었다. 그러나 유경은 김만우가 시를 외듯 벽을 보고 하는 말에 글자를 따라가야 했다.

"서기 천구백육십 년, 유월 이십팔 일, 김만우 취적신고(就籍申告)에 의하여 [원적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115번지(原籍 平安南道 江西郡 德興里)] 본 호적을 편제(編製). 김덕후(김덕후는 김만우의 아버지를 말한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115번지에서 출생. 임명순과 혼인. 서기 천구백이십칠 년 팔월 이십 일 신고. 서기 천구백사십 년 삼월 오일 전 호주 사망으로 인하여 호주 상속. 미수복지구(未修複地區) 거주. (), 임명순은... "

 

문밖의 낯선 영혼들 - 8

유경은 호적초본지에서 눈을 땠다. 김만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기 때문이다. 김만우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종이에 있는 글씨를 하나하나 외워 내려갔다. 유경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유경은 더 참지 못하고 김만우를 불렀다.

"아버지..."

김만우는 혼자서 고향 생각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눈물을 훔쳤다.

", 미안하다. 유경아, 정말 네게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다. 내가 너에게 남길 건 이것밖에 없단다. 분명 이 나라가 통일은 될 거야. 그러나 누가 정권을 잡고 누가 대통령이 될지 난 관심도 없단다. 너의 엄마 말처럼 인민재판이 성행하는 때가 될지 아니면 훈이 말대로 민중의 시대가 될지 그도 저도 아닌 왕조시대가 될지 그런 건 내겐 하등 관계가 없단다. 그저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고향에 가고, 부모형제를 만나고 싶단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지. 이 얘기를 누구에게 해야 눈을 편히 감을까 하고 말이다. 훈이를 생각했지만 나는 웬지 그 녀석이 맘에 들지 않는구나. 유경아, 내 얘기가 다 끝나기 전까지 그냥 듣고만 있어 다오."

훈에 대해 유경이 뭐라 하려 하자 김만우는 손을 내저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유경은 김만우에게 죄송함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훈이는 너와는 심성이 틀린 놈이야. 나는 가끔 그 녀석의 몸속에 정말 내 피가 섞여 있나 하고 의심한 적이 있단다. 그 녀석이 결정적으로 변한 건 대학을 들어가고서부터야. 그 녀석이 알고 있는 건 모두 선 지식이지. 난 그래서 그 녀석이 싫고 또 한 이유는 핏줄이 뭔지 모르는 놈이라는 거지. 핏줄보다는 조직을 더 아끼는 일본인들 같지. 넌 모르겠냐? 해서 너를 택한 거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통일이 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건 뻔한 일. 그러니 나 죽은 다음에 통일이 되면 내 고향에 가서 이 사람들을 다 찾아보거라. 그리고 나는 화장(火葬)한 후 뼛가루를 내 고향 집 마당에 뿌려 줘라. 바람에 날려 간다 해도 고향 바람이니 괜찮고 땅에 묻혀 둔다면 고향 땅이니 더 좋지 않겠니? 너는 내 대신 이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김만우는 주머니에서 이번엔 꼬깃꼬깃 접힌 시험지 한 장을 꺼냈다. 유경의 마음에 불안이 일었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끝냈구나. 늘 하시던 말씀대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시는 걸까? 그럼 지금 이런 얘기를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다는건 또 뭔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무슨 말로 아버지의 결심을 막아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건 하나도 없다. 통일 외에는 그 무엇도 허망하다.'

유경은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종이를 구겨 버렸다.

"유경아. 구청에서 얼마든지 뗄 수 있는 종이짝이지만 내가 네게 주는 거니 함부로 다루지 마라. , 이걸 보렴."

김만우는 다른 시험지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얼마나 오래된 종이인지 시험지는 고서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책처럼 누렇게 바랬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써 글씨조차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네 할아버지가 김자, 덕자, 후자고 할머니가 임자, 명자, 순자다. 그리고 김만석, 김만현, 김만덕은 내 남동생들이고 김정실은 여동생이란다. 네 고모가 되지. 그리고 덕흥리 11번지에 가면 박성옥이라고 있는데 지금 살아 있다면 예순둘일 거다. 아마 정확할 거야. 이 사람은 내가 이북에서 결혼한 여자란다. 너에게는 큰 엄마뻘이지. 이 사람에게서 김연실이라는 딸과 김웅기, 김웅태라는 두 아들을 봤지. 다 살아 있을 거야. 네 언니, 오빠란다. 네게 큰 엄마가 되는 박성옥은 이북 여자답게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지. 성격도 괄괄해서 이 사람이 있는 자리는 꼭 웃음바다가 터지곤 했단다. 네 언니가 되는 연실이는 나를 닮아 조용한 성격인데 노래를 잘했지. 그래서 대보름 때마다 열리는 동네 노래자랑에서 일, 이등은 꼭 해서 상을 탔어. 일전에 이북에서 공연단이 왔을 적에 명단을 알아 보았었는데 네 언니는 없더구나."

어느새 김만우는 자연스럽게 네 언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김만우가 오래전부터 남한에서 본 세 아이들을 이북의 자식과 연결 지어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연실이라는 제 언니와 웅기, 웅태 오빠를 꼭 만나게 되길 원해요. 아버지가 저 같은 철부지를 맏이로 삼으신 바람에 맏딸 노릇 하기가 힘들거든요. 부모님께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아버지 염려마세요."

유경이 자신도 무엇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김만우에게서 받은 호적초본과 아직도 강서에서 살고 있을지 모를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곱게 접었다.

"유경아. 그럼 올라가서 글 써라. 너만 믿는다."

"아버지."

유경은 일어서는 김만우를 원망하는 말투로 불렀다. 그러나 김만우는 대답 없이 방을 나갔다. 김만우의 말에 갑자기 가슴 속에 무거운 짐을 얹은 듯한 기분이 된 유경은 한동안 방문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시 문이 열리며 김만우가 들어왔다.

"유경아. 네 엄마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엄마 성격 알지? 만약 이 일을 알게 되면 네 엄마는 내가 네게 준 그것 말고도 구청까지 가서 내 호적 자체를 다 없앤다고 할 사람이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 속에 숨겨 두고 조용히 지내 왔는데 이제 와서 네 엄마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단다. 혹시나 나중에 네가 강서에 가서 네 큰엄마를 만나게 돼도 네 엄마에겐 끝까지 비밀로 해야 한다. 알았냐? 이러는 내가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네 엄마가 무서워. 뱀이나 살쾡이를 본 적이 있냐? 아니면 늑대를? 없지. 네 시대는 어떤 맹수라도 갇혀 있는 종이 맹수만 보고 자랐으니 호랑이보다 돈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겠지. 어쨌거나 그런 맹수나 뱀 따위를 보게 되었는데 그 놈은 날 못 봤다고 하자. 그럴 때 제일 안전한 피신책이 뭔지 아냐? 그 놈들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피해 가는 거야. 굳이 그 놈들을 잡겠다고 나선다는 게 어리석은 짓이고, 눈에 띄면서 도망치는 것도 바보짓이지.

바로 내가 네 엄마를 대하는 심정이 이런 거란다. 이해할 수 있겠냐? 건드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비밀로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날 화장시켜 줘야 한다. 네 엄마가 반대할까 봐 내가 미리 알려 놓을께. 유경아, 내가 지금 한 부탁들은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인 사람이 그 마지막을 지켜봐 주는 사람에게 하는 간절한 부탁이다."

김만우는 이젠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사람처럼 냉정한 얼굴을 하고 횅하니 나갔다.

 

문밖의 낯선 영혼들 - 9

다락으로 올라온 유경은 도무지 글이 되지 않아 모래내 시장에라도 가보려고 방에서 나왔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자기 것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김만우의 까만 구두가 보였다. 피에르 가르댕. 구두 속의 인쇄체 영어가 선명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피에로 가르뎅이라고 써 있다. 김만우는 연남동에 오기 전엔 외제 상표가 붙은 물건들을 입고, 걸치고, 차고, 두르고 해야만 했다. 외제 상표가 최례옥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최례옥의 자존심은 모래내 시장에서도 조금도 꺾일 줄 몰랐다.

최례옥은 이번 구정(舊正) 전날 밤. 어느 때보다 일찍 집에 왔었다. 마침 안방에서 유경과 훈이는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있었고, 김만우는 건넌방에 누워 있었다. 사업 실패 이전까지만 해도 김만우는 김만우대로 윗사람, 잘난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다니고 최례옥은 청하지도 앉은 방문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소란이 싫어 항상 무슨 때만 되면 세 아이는 영화관으로 피신을 가거나 볼링장을 돌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남동 집에 누워 있는 김만우는 찾아갈 곳이 다 끊기고, 최례옥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아무나 와도 좋다고 소리를 지른다 해도 고개조차 내미는 사람이 없다. 유경은 그래도 사람을 기다렸다. 눈은 바둑알을 따라 움직였지만 조그만 소리에도 괜스레 가슴을 설레곤 했다. 그것은 김만우가 부하 직원이나 친구들이 변함없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찾아오면 필시 생명수를 마신 사람처럼 용기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개선장군처럼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최례옥 외에는 누구의 그림자도 마당에 드리워지지 않았다.

"아버지 안방으로 오시라고 해! 미친년! 꺼억. 이 년아 너 같은 건 인공 때 다 즉결처형감이야. 훈아, 아버지 모시고 와! 오늘이 무슨 날인 줄 너희들이 알기나 해? 아이고 속 쓰려라... 설날 이브라는 것도 몰라? 무식한 것들. 이런 매국자들! 이게 뭔지 알아? 선물이야, 선물!"

최례옥은 까만 비닐 봉투를 허공에 흔들었다. 유경은 급히 바둑판을 치웠다. 훈이 안방에서 나갔기에 김만우와 같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최례옥이 몇 번이나 똑같은 고함을 질러대도 잠잠했다. 유경이 건넌방에 가보니 훈은 없고 김만우는 얼굴만 내놓은 채 누워 있었다.

"아버지..."

유경이 재차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유경은 누워 있는 김만우가 아주 작게 보인다고 생각하며 옆에 앉았다. 돌아누운 김만우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바짝 앉는 순간 유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김만우를 부르는 세번째 목소리는 유경의 입 안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김만우는 막 임종한 듯 창백했으며, 그 임종은 길고 긴 병의 여정을 끝낸 사람처럼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게다가 그의 숨소리가 유경의 귀에 들려 오지 않았다. 안방에서 최례옥이 김만우를 찾는 고함으로 집안을 뒤흔들어 놓는데도 김만우가 덮고 있는 이불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경은 이불을 살짝 내렸다. 그제서야 김만우는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을 떴다.

그때 최례옥이 건넌방으로 왔다. 그녀는 술기운 도는 붉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여보, 꺼억... 일어나요! , 여기 삐에르 가르뎅이 왔어요. 당신 설마 삐에르 가르뎅을 잊지는 않았겠죠. , 봐요! 꺼억... "

최례옥은 비닐봉투 안에서 검은 구두 한 켤레를 꺼내고 봉투는 아무렇게 날려 버렸다. 김만우의 구두였다.

"피 아이 이 알 오? (o)라니? (e)인데 오라고 박혀 있네. 젠장! 삐에르가 모래내에 와서 개판이 됐네. 꺼억...그러니까 삐에르나 나나 물을 잘 만나야 하는 거야. 당장 이놈의 구두쟁이를 고발을 하든지 해야지. 분명 피 아이 이 알 이인데 꺼억... 오라니! 가만있어 봐라. 그다음은... 씨 에이 알 디 아이 엔! 확실해, 확실하다구! 빨리 일어나요. 삐에른지 삐에론지 나도 헷갈리지만 가르뎅인 것만은 꺼억...확실하다구요. 뭐든지 성()만 확실하면 그러니까 근본만 확실하면 되는거라구요! 아이고 속 쓰려라, ..."

최례옥은 구두를 방바닥에 내려 놓고는 이불 속에서 가늘게 눈을 뜨고 눈꺼풀을 몹시 떨고 있는 김만우를 억지로 끌어내 앉혔다.

"아니, 이 양반이 어디서 뭘 얻어 먹고 왔기에 꺼억... 나한테 반항이야, 반항은!"

김만우는 최례옥의 얼굴을 흘낏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겨우 들릴 듯한 소리로 말했다.

"당신 또 한잔했어?"

그러자 최례옥은 두 발을 쭉 뻗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검은 구두로 술 마시는 시늉을 했다.

"흐흐흐... 처음엔 한 잔을 마셨더니 우리 식당 앞에 있는 개장수네 개새끼들이 꺼억... 집단으로 짓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미친년! 내가 헛말 하는 줄 알아! ? 고상한 말을 쓰지 않아서 그래? 니 년 같은 글쟁이들은 개새끼들이라고 하지 않고 개양반님들이라고 하냐?"

난데없는 최례옥의 공격에 유경은 다락으로 가려 했으나 김만우를 혼자 두고 나간다는 게 영 불안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 두 잔을 마셨죠. 꺼억... 술맛이 억수로 좋았지. 그런데 환장할 일이 벌어지지 않겠수. 얼굴 들어요. 날 보란 말이에요, 내 얼굴 똑바로 쳐다보고 얘길 들어요! ! 글쎄 두 잔째 술이 목구멍으로 딱 넘어가고 나자 이번엔 모래내 개란 개들은 다 짖어대는 거야. 좋다! 그럼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고 아예 병째 목구멍에 쏟아부었더니 킥킥...온 세상이 조용하더란 말씀이에요. 꺼억. 그 바람에 나는 오늘 아주아주 귀한 진리를 깨달았죠. 아하, 이 세상을 잠들게 하려면 술은 병째로! 내가 앞으로 약 먹는 인간들을 사람 취급하면 내가 바로 개야, ! 회충약, 두통약, 생리통약, 멀미약, 꺼억! 간장약, 폐병약, 심장약, 위장병약, 치질약, 무좀약, 비듬약, 간질약. 잘 나간다, ! , 여보. 사랑하는 늙은 여보! 이걸 신어 봐요. 이게 바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삐에르 가르뎅이죠."

최례옥은 김만우의 무릎을 덮고 있는 이불을 훽하니 걷어치웠다. 그래도 김만우는 고개를 숙인 채 꼼짝하지 않았다.

", 신어요. 우리가 망했다고 자존심까지 망한 줄 아슈? 뭐해요, 신어요!"

최례옥은 구두를 김만우 얼굴에 던질 듯 위협했다. 하지만 김만우의 고개는 내려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신어요! 당신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다 미친년놈들만 이 집에 붙어 사는군. ! 안 신어요? 제기랄!"

최례옥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갔다. 유경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얼른 김만우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많이 편찮으세요? 아버지. 구두를 신어 주세요. 어머니가 불쌍해요. 저러다가 꼭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무섭기도 해요. 아버지 신으세요."

유경은 간절히 말했다. 김만우가 유경을 보며 뭐라 말을 하려는데 최례옥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순간 유경은 너무 놀라 김만우의 오른팔을 꼭 잡았다.

 

문밖의 낯선 영혼들 - 10

"어머니, 왜 그러세요?"

"여보... "

부엌칼을 들고 선 최례옥을 보고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신어요! 또 죽는다는 말을 하려고 하죠! 이젠 그 말도 듣기 싫어요. 애비 구실도, 남편 구실도 못 하는 주제가 감히 자살을 한다구! ! 자살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 적어도 나 같은 위인이나 하는 거야. 내가 자살을 하고 나면 그때 알 거야. 우리 마누라가 자살을 할 줄 아는 대단한 여자였다고 말이야, 꺼억... 빨리 신어요. 안 신겠다면 둘 다 갈라놓을 거야. 저 놈의 삐에르 가르뎅이랑 그걸 사 들고 한걸음에 달려온 내 발이랑 말이야."

최례옥은 칼을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술기운이 사라지는지 얼굴은 붉은빛이 사라지고 검은빛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신겨 드릴께요."

유경인 재빨리 김만우의 발에 구두를 신겼다. 그러자 최례옥의 고함이 유경이의 등을 내리쳤다.

"미친년! 뭐야? 네가 뭔데 우리 부부 사이에 끼어드는 거야? 이 즉결 처분감이 까불고 있네! 넌 뭐야? 네가 뭔데 내 남편 발에 구두를 신겨?"

최례옥은 칼을 유경이에게 겨누고는 다가왔다. 김만우가 벌떡 일어섰다. 유경은 너무 놀라 두 손을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최례옥을 진정시키는 방법이 무언지 잘 알고 있기에 유경은 빌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할께요. 시키세요. 뭘 할까요? 어머니 진정하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유경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최례옥의 눈빛은 유경에게 겨눈 칼만큼 시퍼렇게 빛났다.

"미친년! 난 다 알고 있어. 네 아버지가 나보다 널 더 좋아한단 걸 알고 있단 말이야. 두 인간들을 다 죽여버릴 거야!"

그러나 최례옥의 얼굴은 칼을 잡고 위협하는 사람답지 않게 공포에 질려 있었다. 유경은 최례옥의 말에 정신이 아득했다,

'어쩌다 어머니가 저 지경이 되셨나. 물질의 빈곤이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마음대로 갉아 먹고 부패시키고 벌레가 들끓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질이 그토록 엄청난 권력이 있단 말인가. ... 정말 무서운 일이다. 끔찍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머니의 나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순전히 나의 무능 탓인 줄 알았는데...'

유경이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떨고 있을 때였다. 일어선 김만우가 최례옥의 뺨을 무지할 정도의 힘으로 서너 차례 때렸다. 김만우로서는 몸 속의 모든 기운을 뽑아내는 듯한 힘이었다. 최례옥이 칼을 떨어뜨리며 풀썩 쓰러졌다.

신기하게도 칼은 떨어지며 비닐 장판 위에 비스듬히 꽂혀 섰고, 최례옥은 그 칼에 잘려 나간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쓰러져 눈을 감았다.

김만우는 최례옥을 후려친 제 손을 보더니 최례옥을 끌어안았다. 유경인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 찬물과 수건을 갖고 왔다. 유경이 수건을 물에 적셔 주자 김만우는 그것으로 최례옥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유경아. 넌 건너가거라. 나 혼자 할 수 있으니. 어서."

유경은 김만우의 마음을 안다. 십오 년 연하의 아내와 살지만 그는 최례옥을 여동생으로 느끼기보다 누나나 어머니로서 다가갈 때가 더 많았다. 그 점은 유경이도 철이 들면서 자주 발견하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김만우는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농담처럼 나의 누나여, 나의 어머니여 하고 최례옥을 불렀다. 그러나 그 어머니나 누나란 호칭은 모성애나 포근함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최례옥의 불같고 남편을 아들 대하듯하는 데서 나온 억압감이나 두려움이었다.

유경은 운동화를 신으며 그때 일이 생생히 떠올라 식당에 가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최례옥과 얼굴을 마주치기 싫었다. 그다음 날, 최례옥은 삐에르 가르뎅 구두는 기억했지만 자신이 칼을 들고 김만우와 유경일 몰아 붙인 일은 하나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구두를 사 온 자신을 부녀가 구박했다며 김만우를 하루 종일 괴롭혔고, 눈앞에 없는 유경을 쉬지 않고 사형대에 올리고 내리곤 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일체 아무 얘기도 최례옥에게 하지 않았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러자고 의논을 하거나 말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침묵 속에 이루어진 거다.

다행히 최례옥은 그날 이후 아무리 술에 취해도 같은 일을 반복하진 않았고, 그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또 그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오늘 유경의 머릿속에 정월. 전날의 일이 영화필름처럼 깨끗하게 돌아갔다. 매일 보는 김만우의 구두인데 이상스레 상표가 눈에 띄었다. 유경은 일부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머니가 술김에 그러신 거야. 그런데도 그 일을 자꾸 생각한다는 건 옳지 않아. 그렇다면 원래 생각했던 대로 나는 지금 식당으로 가야 해. 밥도 먹고. 아버지, 어머니. 사랑해요.'

유경은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식당엔 손님이 없었다. 최례옥은 문 쪽 바로 앞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미경은 김치를 담고 있었다.

"언니. 밥 먹어야지. 이 김치랑 먹어 봐. 아주 맛있게 담았어."

미경은 고추물이 벌겋게 든 손으로 김치 한 조각을 유경이 앞에 내밀었다. 시장하던 차라 유경은 달게 먹었다.

"소설은 잘 돼가? 빨리 끝내고 우리 송이랑 좀 놀아 줘. 허긴 그 애도 학원을 두 군데나 다니니 언니만큼이나 바쁘지."

유경은 탁자에 밥을 차리고 앉았다.

"어머니. 식사하셨어요?"

"미친년! 인사 한번 참 빠르다. 아버진 집에 계셔? ! 두 부녀가 사이좋게 지냈겠군! 술이 최고야! 내 애인은 술이야. 술보다 더 달콤한 남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 내가 이 식당을 통째로 내주고 몸 바치고 마음 바친다. 나와 봐!"

최례옥은 술잔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술이 넘쳐흘렀다. 유경은 한 바탕 소리를 지르려다 국 참았다. 최례옥과 서로 언쟁을 하게 되다 보면 미경이 그날 일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유경은 오늘 이 소리를 들으려고 그 글씨가 눈에 띄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밥을 한 술 입에 넣으려는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몇 달만인가. 왜 어머니가 또 저런 말을 할까? 지금은 그때처럼 심하게 취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진저리가 쳐지는 말이다.'

유경은 밥을 먹지 못하고 물끄러미 최례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축제에서 외톨이가 된 사람처럼 혼자 술을 따르고, 마시고 했다. 유경은 그런 최례옥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서 미움이 비집고 나와 가라앉히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미경이가 끼어들었다.

 

아직도 연애를 꿈꾸시다니. 나보다 낫네 -11

"! 우리 엄마 멋쟁이시다. 아직도 연애를 꿈꾸시다니. 나보다 훨씬 낫네. 나는 이미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건 돼지 뼈다귀들이랑 함께 쓸어 버린 지 오랜데 말이유. 엄마, 내가 근사한 데이트 상대 하나 소개해 줄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가 믿지는 장사 같애. 왜 그런 줄 알아요? 엄마는 멋을 알거든. 그런데 의외로 멋을 아는 사람이 적더라구. 안 그래, 언니?"

미경은 유경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유경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최례옥은 미경의 말에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병째 들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네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너라면 이름만 들어도 입을 해 벌렸지. 난 다 알어! 네 아버지가 왜 그런지 다 안단 말이야. 징그러워라.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미경아. 한 바퀴 횡 돌고 올 테니 가게 잘 봐라."

최례옥은 볼일이 있는지 술을 남겨 둔 채 일어섰다.

"엄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젠 인민재판도 시시해졌어요? 언니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잖아요. 더구나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북에서 혼자 월남하여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 자식인데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경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최례옥이 흥분한다고 생각하며 버무린 김치를 그릇에 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최례옥이 막 나가고 난 뒤였다. 유경이 전화를 받았다. 빨간색 전화기는 손땟자국과 칼로 긁어야 떨어질 듯한 먼지 더덕으로 국밥집에 그럴싸하게 어울려 보였다.

"여보세요?"

유경이 몇 번씩이나 부르는데도 상대 쪽에선 침묵을 지키다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래, 언니? 잘못 걸려 왔나 보지?"

그냥 제자리로 오는 유경에게 미경이 물었다. 그런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유경이 또 받았다. 그러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전화는 끊겼다.

"무척 심심한 사람인가 봐. 대낮도 되기 전에 국밥집으로 장난을 하다니..."

유경은 괜스레 자신이 멋적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순간 또 전화가 왔다.

"미경아, 네가 받아 볼래?"

유경의 말에 김치를 담고 난 뒷정리를 하고 있던 미경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머, 당신이에요? 아까도 당신이 전화했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 말 하지 않았죠? 언니가 받았었는데... ? 뭐라구요? 어디라구요? 지금요? 안돼요. 조금 있으면 점심 손님들 몰려와요. 급한 일이면 당신이 이리 오세요? ? 뭐라구요? 신촌이라구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알았어요. 독수리 다방이라고 했죠? 지금 곧 갈께요."

전화를 끊고 난 미경인 그대로 선 채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니? 송이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니?"

유경의 물음에 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가게 좀 부탁해. 나 빨리 다녀올께요. 그리고, 엄마한테는 아무 얘기하지 마."

미경인 앞치마를 재빠르게 벗어 버리더니 금고에서 집히는 대로 돈을 꺼내 들고 그대로 뛰어나갔다.

 

대학생들로 붐비는 다방 한 구석에 앉은 한동수는 초췌한 얼굴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미경은 그의 가라앉은 모습을 처음 보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동수는 미경이 앞에 앉았는데도 말없이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송이 아빠..."

미경은 부부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흐르거나 남편을 설득할 때는 송이 아빠라고 부른다. 그래도 한동수는 담배만 빨아댔다. 미경은 다시 송이 아빠라고 부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난 이제 끝이야. 끝이라구."

한동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짓이겼다. 미경은 그의 말이 어떤 상황을 뜻하는 건지 모르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동수가 저 밑으로 처절히 가라앉기를 바래왔던 미경이다. 미경은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송이 아빠, 무슨 얘기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얘기하세요."

"실은 그동안 광고회사에 다닌 게 아니라 친구 녀석이 하는 비디오 제작소에 나갔었어. 사실은 음란비디오를...그런데 경찰이 덮쳤어. 물론 나야 옛날 하던 실력이 있어 그저 섭외 하고 다녔지만 분명 경찰이 나도 잡아들일 거라구. 왜냐면 여자들을 중간에서 내가 구해주는 역활을 했거든. 씨발! 돈 좀 만지나 했더니... 아하, 그런 얼굴 하지 마. 여자들은 건드리지도 않았어. 나는 그저 돈벌 생각으로 딴전은 전혀 피우지 않았다구! 큰일 났어. 집에도 들어갈 수 없어. 혹 오늘 어디서 이상한 전화 온 거나 집에 수상한 놈들이 서성거리는 거 못 봤어?"

한동수는 자신이 정보 스파이 노릇을 하다 쫓겨 다니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는 듯했다. 말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쉴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길과 손가락을 초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도망자의 형색이었다. 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에게 어떤 두려움을 주어서 당분간 자중하고 기가 조금은 꺾이게 할까. 아니면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용기를 줘야 하나. 마흔이 넘은 나이다. 이 남자의 가슴 속에 있는 건 패기가 아니라 무지에서 나오는 방향을 못 잡는 힘이야. 안돼. 이제라도 이 남자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야 해. 나는 괜찮아. 우리, 송이를 위해서 이 남자는 희생을 해야 해. 아니, 그것은 희생도 아니지. 이제껏 우리 모녀를 괴롭혀 온 대가야. 대가치고는 너무 가볍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치러야 한다. 이번 일은 어쩜 기회인지도 몰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지 누가 아는가. 송이 아빠,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껏 살아 온 날처럼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미경은 또 담배를 꺼내는 한동수를 말리며 그의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송이 아빠. 그렇잖아도 아침에 당신 찾는 전화가 여러 번 왔었고 처음 보는 남자들이 당신 친구라며 몰려왔기에 이상하다 하고 감을 잡긴 잡았었어요. 하지만 이 지경까진 상상도 못했죠. 그런데 일이 결국 이렇게 된 걸 어떡해요. 당신은 우리 가족이 함께 잘 살자고 한 일인데... 제가 지금 식당으로 들어갈 테니 삼십 분 후에 전화주세요. 당신이 잠시라도 맘 놓고 있을 곳을 가르쳐 드릴께요. 수첩이 식당에 있거든요. 그리고 전 빨리 들어갈께요. 당신을 찾아 다닌다면 나도 미행당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우선 이 돈을 갖고 있어요. 엄마도 모르게 가지고 나온 돈이에요. 아직 아침 장사밖에 하지 않아서 돈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가르쳐 준 곳에 가면 식당으로도 전화하지 마세요. 일체 집안 식구들에게는 비밀로 할 테니까요. 대신 제가 당신에게 전화 드릴께요. 알았죠?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당신도 빨리 여기서 나가서 서울역으로 가세요. 그곳이 강원도니까 일단 중앙선 표를 끊어 놓고 전화하세요. 그럼 몸조심 하세요. 송이에겐 아빠가 회사 때문에 지방으로 전근 갔다고 얘기할께요."

 

이러던 차에 네가 쫓기는 신세가 된다고?-12

미경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막힘 없이 얘기를 했다. 마치 자기가 짧은 이야기 하나를 새로 만들어낸 듯한 기분이었다. 미경인 지갑에 서 있는 돈을 다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세 종류의 지폐가 뒤섞인 이십 만원도 채 안되는 돈이었다.

"빨리 넣어요."

미경이 일어서며 말하자 한동수는 황급히 양복 안주머니에 돈을 쓸어 담았다. 그런데 그만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바닥으로 날아가듯 떨어졌다. 그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하늘로 향한 채 돈을 주웠다.

그 모습을 서서 지켜보던 미경은 한숨을 쉬며 다방에서 나왔다. 이제껏 주위에서 애들만 아니었으면 벌써 끝장났을거라는 말을 하며 결혼생활을 피곤하게 유지하고 있는 부부 들 을 볼 적마다 마음 속 한편으로 경멸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그런 심정이 되고 보니 한동수의 돈을 줍는 모습보다 자신이 더 초라해 보여 화가 나기까지 했다.

미경인 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그런데 점점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한동수의 쇼맨 생활도 이제 막을 내리는건가? 한동수. 무너질 바엔 차라리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무너져라.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조차 역겨운 사람이다. 한동수, 미안하지만 나는 네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네가 정말 나와 송이를 사랑한다면 두다리로 종횡무진 다니며 쇼맨으로 살기보다는 두 다리를 잃어도 좋으니 한 순간이라도 진실한 남편, 진실한 아빠가 되길 원했다. 그런 변화를 내가 시켜 보려고 했었지. 그러나 되질 않았어. 너는 무슨 일만 있으면 나를 사랑한다는 말로 옭아매 놓고는 너의 자유를 마음껏 즐겼지. 나는 거의 포기상태였다. 이제 완전히 나를 포기하고 주저앉으려는데 드디어 때가 된거야. 한동수. 한번 숨어 살아 봐라. 쫓기는 자의 심정이 어떤지 알고, 나를 생각해 보라. 나는 그 동안 쫓겨 다니는 사람처럼 살아 왔다. 지금도 그렇고. 왜 그런지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늘 그런 상태였다. 그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모래내 식당에서 엄마를 도와 일을 하며 조금씩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또 집 한 채 달랑 남겨 놓고 부동산과 돈을 다 모아 아버지에게 드렸을 때는 너를 배반했다는 즐거움까지 맛보았지. 그러나 나는 불안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던 차에 네가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됐다고?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웃음이 나을까. 늘 큰소리만 치고 언제나 어깨에 힘을 주고 말소리에는 여유가 철철 흐르는 네가 다 끝이야, 끝 하고 말하다니. 우습다. 한동수. 강원도 양구 골짜기에서 푹 쉬어라. 네가 잠시 나와 송이에게서 떨어져 있게 됐다는 건 어쩜 우리 두 사람에게는 휴가인지도 몰라. 송이와 단둘이 휴가를 즐겨야지.'

미경은 환한 얼굴로 식당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빨리 오는구나. 송이 아빠는 아무 일 없는거니?"

유경은 내심 초조감으로 기다리다 미경이 밝은 얼굴로 들어오자 저도 웃음을 띠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송이 아빠 잠시 강원도에 있는 성당에서 도 좀 닦을거야. 왜 그런 얼굴을 해? 정말이야. 이유는..."

미경이 상황을 설명하고 자기 심정까지 털어 놓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을께. 송이 아빠일거야."

미경은 수첩도 보지 않고 한동수에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불러 주었다. 유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일어섰다. 집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식당에서 나왔다.

모래내시장 앞에 있는 육교를 올라 중간쯤 왔을 때 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아랫층은 한식집이고, 카페는 이층인데 카페의 창문이 육교 높이와 비슷했다. 해바라기라는 간판이 창 위에 걸려 있었다. 간판에 그려진 해바라기는 뿌리 없이 꽃만 있는 탓인지 시커멓게 말라 비틀어져 있고, 빨간 페인트로 쓴 글자는 마치 해바라기가 버림받은 여자를 상징하는 꽃인 듯했다.

그러나 유경은 오히려 그 촌스러움과 어설픔이 마음에 들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텅 빈데다가 조명까지 어두우니 파산 직전에 놓인 흉가처림 보였다. 유경은 창 밖으로 바로 육교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와 담배를 주문했다.

물이 흐르듯 육교를 오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며 사람들의 가지가지 모양의 발걸음을 쳐다보던 그녀는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한 걸인의 아랫도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하반신을 두껍고 시커먼 고무가 감싸고 있는데 그 안을 들추면 텅 비어 횡한 바람이 얼굴을 할퀴듯 쓸어내릴 것 같았다. 걸인의 몸은 간신히 엉덩이 부분까지만 있는 상태였다.

걸인은 때가 끼어 새까맣게 된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놓고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유경인 조금 전 육교를 건널때 말라버린 해바라기를 보느라 걸인의 비어 있는 하체를 보지 못한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초여름인데도 두터운 솜잠바를 등에 걸친 걸인의 바구니는 가난한 집의 쌀뒤주처럼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저 걸인을 육교 위까지 데려다 놓은 사람은 누굴까 하고 유경은 생각했다. 그러자 언젠가 친구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불구자 걸인들을 아침에 데려다 주고 저녁에 데리고 가는 전문직인 아르바이트꾼들이 있대.'

유경은 진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걸인은 비어 있는 하체로 두 다리가 붙어 있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일꾼이자, 그들에게 또 다른 자비를 베푸는 적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인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 모습은 천차만별이었다. 이미 육교 계단을 중간쯤 올라왔을 때부터 죄지은 사람 마냥 주춤거리다가 막상 걸인 앞에서는 재빨리 움직이는 날렵한 발. 저편 끝쪽에서 기운차게 오다가 걸인을 보는 순간 갈등하는 마음처럼 머뭇거리다 동전을 던지기 위해 멈춰 서는 수줍은 발. 해바라기 간판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걸인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쳐 가는 유경과 같은 발. 사색하느라 느릿느릿 움직거리는 무심한 발. 앞만 보고 씩씩하게 걷다가 다시 돌아서서 눈에 스친 걸인을 찾아 되돌아서는 경쾌한 발. 미향(美香)이라도 풍기듯 교양 넘치는 걸음으로 오다 걸인을 보는 순간 화들짝거리며 비껴서 가는 악취 나는 발. 유경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잊은 채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발의 여러 모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어느 낯익은 발에 그만 탁자에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것은 학()이 걷듯 긴 다리로 천천히 육교 반대편에서 오고 있었다.

윤성민이었다. 유경은 그가 왜 지금 이 시간에 모래내시장의 육교를 건너 오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놀라움에 지켜보았다. 성민은 옆구리에 책 한 권을 낀 채 천천히 걸어 오다 걸인을 보고 발을 멈추었다.

성민은 잠시 걸인을 내려 보더니 그 앞에 바짝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걸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잠바 속에 감추어진 걸인의 어깨를 만졌다. 그러자 걸인이 얼굴만 삐죽 들었다. 걸인의 얼굴과 그의 얼굴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성민은 한 눈에도 병자임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마른데다 창백했고, 걸인 역시 몸이 좋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증세는 얼굴과 옷 밖으로 드러난 목과 두 손이 검붉은 색으로 부어 오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경은 성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다시 병을 않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육체가 조금씩 아니 저 얼굴을 보니-13

'그러면 나는 성민이가 병을 앓고 있는 동안 이유야 어쨌건 강현섭과 쾌락을 즐기고 있었던 셈이구나. 그의 육체가 조금씩 아니 저 얼굴을 보니 무척 빠른 속도로 병이 진행된 듯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의 육신이 결핵균에 의해 허물어져 가는 걸 마치 내 영혼이 쾌락의 바이러스에 의해 좀먹는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 지겹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혀 왔는데 또 쓸데없는 논리를 펴고 있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 그런데 왜 성민이나 성민이 어머니는 내게 알리지 않았을까. 이제껏 성민이 아플 때마다 나는 그들의 연락을 받고 뛰어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절? 그래, 그건 내가 바라던 거다. 그런데 왜 나는 갑자기 초조해질까. 성민의 육신에 대한 동정? 아직도 그를 사랑해서? 그를 떠난다는 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거라서? 아니다. 아무것도 해답이 아니다. 그러면 김유경. 너는 무엇 때문에 초조해하는가?

너는 스스로 그에게서 나오려고 했고 또 나왔다고 생각했기에 강현섭의 품으로 주저없이 파고들었다. 강현섭은 오라고 손짓만 했는데 너는 뛰어갔다. 네가 빨리 뛰면 뛸수록 성민의 육신은 빠르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부정하지 마라. 너는 그의 지체(脂體) 중에 하나일 따름이다. 네가 그를 떠나면 그는 지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에 불과하지만 너는 모든 것을 잃는다.'

유경은 담배 필터를 질끈 씹으며 생각하다 머리를 흔들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이 진행되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지겹다. 정말 지겹다. 나는 김유경이란 이름을 가진 자유로운 한 인간이다. 왜 나는 그에게 구속되려고 하는가. 그는 이미 나에게서 어떤 구속도 원하지 않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자유인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에게 속하나 벗어나 이토록 초라한가. 정말 나는 그의 지체에 불과한가?'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유경의 마음을 잠식하는 것은 그에 대한 미움 뿐이었다. 유경은 솟아오르는 미움을 다스리지 못한 채 다시 창밖을 보았다.

성민이 걸인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걸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가라는 뜻으로 손짓을 하고 다시 엎드렸다. 그러나 성민은 다시 걸인을 흔들었다. 걸인은 말하기도 힘든지 짜증을 내며 성민에게 조금 전과 같은 의미로 턱을 움직였다. 성민은 걸인에게 세번째 시도를 했다. 이번 시도는 걸인의 더럽고 부어 오른 두 손을 잡는 것이었다. 유경은 성민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 냈다. 그가 걸인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선 걸인을 감동시키겠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만 다 무시하고 걸인에게 무한정의 사랑과 긍휼을 베풀테고, 그런 다음 자기는 낮아지고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결국 자신을 높이는 일을 진행시키면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어진 목동처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약한 자를 돌봐 주는 사랑의 전도자로 변신하고 말이야. 어디 보자. 하체가 없는 자는 그의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성민에게 손이 잡힌 걸인은 힘들게 얼굴을 들고 허리를 일으켜 비스듬히 앉았다. 성민은 환히 웃으며 한 손으로는 걸인의 손을, 또 한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유경은 마음속으로 걸인에게 소리쳤다.

'하체가 없는 사람이여. 당신은 눈을 감지 말아요. 그것은 거짓입니다. 어떤 복음도 당신의 빼앗긴 두 다리를 돌려주지 못합니다. 당신이 저 남자와 같이 기도를 한다면 당신의 영혼도 두 다리처럼 빼앗기고 맙니다. 제발!'

그러나 걸인은 눈을 감았다. 걸인은 단잠을 자듯 평안한 얼굴을 했다. 유경은 저도 모르게 탁자 한 쪽 모서리를 힘주어 쥐었다.

잠시 후, 성민이 눈을 뜨고 또 걸인에게 뭐라 했다. 그러자 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성민이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걸인의 손에 쥐어 주고 일어서자 그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성민을 지켜보았다. 성민은 다시 한번 그의 손을 잡고 몇 마디 하고는 뒤돌아서 느릿느릿 걸었다. 걸인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더니 바닥에 납작히 엎드렸다. 유경은 그가 다시 고개를 들면 이미 두 눈이 시력을 잃고 원망의 통곡을 터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카페에서 나왔다.

그녀가 밖에 나오니 성민은 마지막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땅 속을 파고 들어가는 듯 숙여져 있고 그만큼 어두웠다. 유경은 다가가 그 앞에 우뚝 섰다. 성민은 그녀를 보자 반가움에 웃음만 띤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손을 내밀어 유경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유경은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성민의 놀라움이 겹친 창백한 얼굴에 유경은 잠시 머뭇했으나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였다.

"위선자! 복음을 전하는 네 얼굴은 왜 항상 우울해 있는거야? 저런 사람들에게 갖은 말로 천국과 소망과 또 배고프지 않은 것과 춥지 않은 것에 대해 가르쳐 주면서 네 얼굴은 왜 언제나 지쳐 있는 거야? 육신이 병약해서? 그건 핑계야. 왜 저들과 같이 즐거워하지 못하지? 그건 교만이야! 네 손! 그 손으로 저런 사람들을 만지지 마. 더 이상 저 사람들의 체온을 뺏아가는 짓을 하지 말란 말이야. 네가 던지는 몇 푼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체온이라는걸 알기나 해? 부자 나으리의 배 부른 입에서 나오는 복음은 똥과 꿀을 번갈아 오가는 파리들의 입에서도 나올 수 있는 구토물이고, 추위를 모르는 따뜻한 등에서 흐르는 사랑은 제가 토한 곳에 눕는 돼지들의 분비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차라리 네 폐가 건강하다고 소리치고 다니는 게 어떨까?"

유경은 거리에 선 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성민은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 서 있는 곳이 바로 가좌역사 앞임을 알고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자꾸 눈물이 흘러 몇 번씩 멈춰 서곤 했다-14

"유경아. 실은 오랫만에 집 밖으로 나온 거야. 나오기 전에 너의 집에 전화를 하니 아무도 받지 않았어. 그래서 식당으로 무조건 왔지. 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네 소식을 듣고 싶어서. 그랬더니 조금 전 집으로 갔다고 동생이 말해 주길래 너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어. 난 지금 너의 말에 대해 내 입장을 설명하기도, 너를 이해시키기 위한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아.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기차역임을 알았기 때문이야. 유경아. 너와 기차를 타고 싶은데 시간을 내줄 수 있니?"

성민의 말에 유경은 먼저 냉소로 답했다.

"보아하니 네가 폐만 앓고 있는게 아니구나. 나는 병균을 이기지 못하고 병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질색이야. 무슨 뜻인지 아니? 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싫어.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냐구? 나는 이상한 질병에 걸렸어. 네가 고통을 받고 있으면 나는 즐거움을 보약처럼 마시고, 네가 즐거움에 빠지면 나는 악몽을 밤의 날 수만큼이나 꾸어대는 병이지. 치료약도 없고 치료해 줄 의사도 었는 한심한 병을 앓고 있단 말이야. 제발 다시는 나를 찾지 마. 너는 나와 구두(口頭)로 약속한 결혼을 들고 나오겠지만 내가 이제껏 한 많은 약속들 중에서 처음으로 후회를 한 약속이야. 나를 자유롭게 놓아 줘. 나는 누구에게도 묶이고 싶지 않아. 특히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너 같은 사람에게는 더..."

유경은 성민의 얼굴에 독설을 퍼붓고는 돌아서 빠른 걸음을 했다. 성민은 충격을 받았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유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나마 두 눈이 물기로 반짝여 유경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나무의 무수한 잎처럼 보였다.

 

유경은 모래내 다리를 건너고 철길 건널목 앞에 와서야 걸음을 멈추고 긴 심호흡을 했다. 자꾸 성민의 창백한 얼굴이 발을 잡아다니고 등을 돌리게 하는 듯해 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기차가 지나려는지 차단기가 내려와 있고 간수가 흰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기차는 문산행이었다. 건너편에는 장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탄 젊은 여자와 두 어린 남매에게 양쪽 손을 잡힌 삼십 대의 주부, 허름한 회색 사파리를 입은 노인이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유경은 노인을 보자 김만우가 생각났다.

'. 아까 성민이가 전화했을 때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지. 아버지가 계실 텐데 ... 식당에서 나오면 집이고, 집에서 나오면 식당 밖엔 갈 곳이 없는 아버지인데. 깊이 잠이 드신 걸까. ? 깊은 잠?'

순간 유경은 사방에서 물밀듯 몰려오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쳤다.

',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버지는 고향에 가야 한다는 희망 때문이라도 자살을 하진 않아.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 하지만 아까 내게 얘기한 것으로 봐서는 모든 희망을 다 잃어버리신 분 같기도 하고... 갑자기 다락에 형광등을 달아 준다는 약속을 하시고...'

유경은 어서 기차가 지나가길 바랬다. 그러나 오늘 따라 기차는 더디게 오고 있었다. 늙은 수탉은 오후의 산책을 마음껏 즐기는지 목을 길게 내빼고 좌우를 살폈다. 늙은 수탉이 여유를 부리면 부릴수록 유경의 가슴은 조금씩 팽창되어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버지. 안돼요. 왜 아버지의 고향을 강서로만 한정시키고 왜 이북의 세남매의 핏줄만 그리워하는 거예요. 우리들은 그럼 뭐죠? 어머니와 우리 세 남매는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한 이웃에 지나지 않았나요? 아버지. 이웃이라도 좋아요. 아버지의 죽음이 자연사(自然死)라면 조용히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아버지가 먼 곳으로 터를 옮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때가 되면 아버지가 다시 우리들 곁으로 올 수 있고 아니면 언제 어디서고 우연히 만날 수 있다고 자위할 거예요. 그러나 자살이라면 우리는 다 쓰러질지 몰라요. 특히 어머니가 걱정돼요.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대상이 우리들이 아니라 아버지일 때 어머니는 강해지신단 말이에요.'

늙은 수탉은 이런 생각으로 애를 태우는 유경을 비웃는지 막상 그녀 앞을 지날 때는 갑자기 흙먼지를 일으키기라도 할 듯 고성을 질러대며 무서운 날개짓을 했다. 유경은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휘감는 바람에 잠시 멈춰 서야만 했다.

집에 온 유경은 열쇠를 따지 않고 일부러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김만우의 기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경은 처음 열고 들어가는 문처럼 몇 번 헛 손질을 하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김만우의 검은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는 걸 보자 유경은 차마 건넌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락방으로 올라간 유경은 천정부터 살폈다. 육십 촉짜리 백열등 대신 형광등이 달려 있었다. 순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최례옥의 얼굴이 켜지지 않은 형광등 아래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녀는 눈물도 없는 마른 얼굴로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넋마저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힘이 없었다. 유경은 형광등을 때내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천정이 낮아 주춤거리는 짧은 순간, 퍼뜩 스치는 생각에 다시 앉았다.

 

'저건 빛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구별되는 인공(人工)의 빛이 아니라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없이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되는 고향의 빛이다. 아버지의 빛이다.'

유경은 다락에서 내려왔다. 방안에 선 유경은 집안에 흐르는 싸늘한 적막감에 부르르 떨었다. 모래내에서, 철길에서 그리고 다락방에서 생각하던 죽음이 바로 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죽은 자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죽은 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발을 주소서. 그리고 죽은 자가 아버지라도 놀라지 않을 심장을 주소서. 죽은 자와 말을 나눌 수 있는 혀를 주소서."

유경은 두 손을 힘껏 모아 쥐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건넌방 앞에 선 유경은 다시 한번 더 기도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서 싸늘한 기운이 몰려나왔다. 게다가 적막에도 무게가 있는지 그 기운이 머리 위에서부터 누르는 바람에 유경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김만우는 언제나처럼 옆으로 웅크리고 이불을 턱까지 올려 쓴 채 누워 있었다. 유경은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갔다.

"아버지... "

유경은 서너 차례 김만우를 부르며 이불을 살며시 어깨까지 내렸다. 일 년 사이에 몰라 볼 정도로 마르고 쭈글쭈글해진 누런 얼굴과 목을 유경은 손으로 조금씩 쓸어내렸다.

", 유경이냐?"

유경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김만우는 눈꺼풀을 몹시 떨었다. 그는 누운 채 유경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눈은 뜨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귀찮아서 그냥...모른 체하고... "

"아버지..."

유경은 큰 숨을 내쉬며 다시 김만우 곁으로 다가갔다.

"글 써라. 밝아졌으니..."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겨우 말했다. 말하기 무척 힘들어 했고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사람처럼 눈꺼풀도 떨지 않았다.

", 아버지. 고마워요. "

유경은 억지로 한마디 뱉고는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자꾸 눈물이 흘러 몇 번씩 멈춰 서곤 했다.

 

죽음에서 어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걸까-15

'수진이나 아버지는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죽음에 대해 두려움보다 애착을 그리도 품을 수 있을까. 죽음에서 어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걸까. 아니면 황홀한 유혹이 있는 걸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악몽 때문에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죽음을 갈망하다니. 그건 죽고 싶은 욕망이기보다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망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있다면-자살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그 냄새를 맡지 못하거나 유혹을 깊이 당하지 않았을 뿐일 거다- 인간이란 불쌍한 존재다. 하나의 붉은 심장 속에 두 가지 갈망이 있다니! 무엇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수진이나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따라야 할 걸 알아냈단 말인가. 그것은 용기인가 아니면 현명해서인가. 인간은 누구나 살고 싶은, 아니 죽고 싶지 않은 갈망으로 사는 게 무언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이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삶 저편의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죽음을 은근히 기다리고, 용기가 없기에 죽임을 당하고 싶어 하는 거다. 죽음은 어떤 옷을 입고 유혹을 할까. 자궁이라는 옷을?

아니면 고향이라는 망토를? 그 옷에서는 어떤 체취가 풍기고 그 망토에서는 어떤 냄새가 흘러 나올까. 그 옷과 망토는 화려한 의상일까. 그리고 그 체취와 냄새는 향기로울까. ... 나도 그 의상을 입고 싶고 그 냄새를 맡고 싶다. 그러나 두렵다. 죽음의 유혹에 빠진 자는 누구라도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다. 마치 죽음에게 전부를 바치고 전부를 맹세한 자들처럼. 무엇을 바치고 맹세했을까. ! 그래, 피라고 말하자, 죽음은 피를 원한다. 수진이는 엄청난 피를 흘렸다고 한다. 아버지도 피를 쏟을 건가. 무언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죽음의 옷은 피로 채색되고. 죽음의 냄새는 피의 향기를 뿜는다. 그 피의 비밀은 무얼까? 그게 자궁과 고향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 오히려 복잡해지는구나. 피가 자궁과 고향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들이 피를 원하는 걸까. 자궁과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나도 그 신비를 맛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나 역시 죽음에게 피를 바치고 피를 맹세해야 하는가? 그런데 죽음은 나에겐 무슨 옷으로 나타날까.

자궁과 고향? 아니다. 나는 그 어디에도 내 피를 맹세하고 싶지는 않다. 재미있는 일이다. 죽음이 나에게는 유혹의 옷을 입히지 못하다니! 그러나 자만하지 말자. 이제껏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낸 자가 없지 않은가.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때가 되면 죽음은 내게 맞는 의상을 입고 배우처럼 나타나겠지. 그러나 나는 속지 않으리라. 거짓 의상에 속지 않으리라.'

얼마나 걸었을까. 몹시 목이 마르다고 생각한 유경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산대교 중간쯤이었다. 유경은 서쪽을 향해 걸었다. 난지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상스레 향기로웠다.

'죽음은 두렵지만 그 향기는 아름다울 수도 있지. 그래서 수진이나 아버지나 죽음이라는 마약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향기를 뿜는 죽음이라. 과연 영민한 존재다. 그 존재는 사람들을 그 향기로 마비시키고 서서히 자기 것으로 만들겠지. 슬픈 일은 어떤 위대한 사상가도, 선한 자도 그 향기를 거절하지 못한거야. 그럼 나도 그 향기에 취하겠구나. 서러운 존재! 두 존재는 언제부터 연인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취함을 당하고 취하게 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생명이라는 존재는 너무도 미약하다. 그는 두 연인 사이에 감히 끼어들지도 못하는구나.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두 존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어리석은 존재!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필요한 것에 아부 잘한다는걸 모르다니. 생명이란 죽음처럼 쇼를 부릴 줄도 모르고, 죽음처럼 강렬하지도 않으며, 죽음처럼 향기로운 냄새나 매력적인 의상으로 꾸밀 줄도 모르는 버림받은 존재!'

유경은 다리를 벗어나자 택시를 잡았다.

로이코스 건너편에 내려 전화하니 웨이터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잖아도 김 선생님에게서 전화오면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유경은 아차 했다. 요즈음 강현섭은 잠시 가벼운 도피 중이다. 잡지에 그의 은퇴 기사가 나가자마자 여기저기서 달려들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는 051로 시작되었다. 유경이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번호를 눌렀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함께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호텔 오락실임을 알았다. 잠시 후 강현섭이 나타났다.

"유경씨. 같이 못 와서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올라갈 겁니다. 건강은요? 아하, 나는 이렇게 모든걸 털어 버리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유경씨는 글을 쓰느라 고생 많이 하겠네요. 유경씨. 내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줄까요? 역작을 쓰는 방법 말이오. 나처럼 하면 됩니다. 다 털어 버려요. 하기 전이나 하는 도중이나 다 털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됩니다.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유경씨, 내 말을 듣고 있는 겁니까. 아하, 공중전화군요. 기계가 돈 먹는 소리는 어디나 똑같군요, 똑같아! 유경씨, 내가 좀 취했습니다. 글쎄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어제 미국으로 갔다지 뭡니까! 나한테 세 달간의 유예기간을 준답니다. 그 사람 법을 전공했다고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이죠, ! 누굴 위한 법이냐? 나는 감히 그 말에 답할 수 있습니다. 법이란 법을 아는 자를 위한 것이 법이다. 하하하... 말이 됩니까? 유경씨. 이해해 주세요. 유경씨, 유경씨 ... "

유경은 전화를 끊었다.

'결국 나도 도박을 시작하는구나'라는 생각에 그와 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공중 전화박스에서 나온 유경은 무심코 남산을 보게 되었다. 카사블랑카가 떠올랐다. 수진이 죽은 이후 한 번도 찾지 않았었다. 그녀는 카사블랑카로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강현섭에 대한 생각으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세 달의 유예기간이라고? 그가 부인과 이혼을 한다면 결국 나와도 헤어지겠지. 나는 잘 안다. 그는 나를 사랑하기에 붙잡는 게 아니다. 자기의 세계가 무너질까 나를 담보로 삼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이혼이란 그의 무너짐이다. 부인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그는 단지 자기 세계를 결벽증 환자처럼 아니 편집광처럼 붙잡고 있다. 결과 그의 세 달은 나의 세 달이다. 오직 세 달! 나는 그 세 달에 도박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강현섭에게 도박을 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걸까. 좀 더 솔직해지자. 김유경, 너는 성민이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를 잡고 있다. 임시 출구로 그를 이용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성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구를 만드는 이유는 무언가. 그만큼 그의 존재가 무거운가, 아니면 두려운가. 진정한 도 망자는 다른 구멍을 만들지도 생각지도 않는다. 그저 달리기만 한다.

그런데 구멍을 만들고 도망친다는건 연결의 끈을 만드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성민은 그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유경, 네가 얼마나 겁이 많고 몸을 사리는 여자라는걸 알기에 너의 지금 도피가 잠시 동안의 놈이라고 생각할거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만 더 솔직해 보자. 너는 지금의 놀이를 즐기고 있는건 아닌지. 성민의 구멍에서 나와 강현섭의 구멍으로. 그리고 다시 현섭의 구멍에서 성민의 구멍으로. 너는 그 반복되는 도망과 도망을 게임처럼 즐기고 있다. 현섭의 도박은 네 게임에 비하면 너무 시시하다. 그는 단지 돈을 털어내고 있지만 너는 네 영혼은 물론 두 사람의 영혼까지 털어내어 파는 지능범이다. 앞으로 너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구멍을 넘나들며 그들의 영혼을 경매에 붙일건가. 그때쯤 되면 네 영혼은 악마에게도 외면당할 만큼 추한 껍데기만 남아 있겠지! 그러고 보니 너는 네 영혼의 종말까지 훤히 아는 선견이 있구나.

 

순간, 심호흡을 하는 가슴 속에 한기가 - 16

그렇다면 김유경, 이제 여기서 그만 온전한 도피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강현섭처럼 말이야. 무엇 때문에 빙빙 맴도는거지? 그는 작은 자라 기껏 돈을 날리고 지상에서 지상으로 도피를 하지만 너는 큰 자가 아닌가. 김유경, 네가 왜 큰 자인가 하면 너는 신을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강현섭과 다른 점은 그리고 성민과 닮은 점은 신을 두려워 한다는거야. 물론 강현섭에게도 신이 있지. 하지만 그의 신은 인간을 두려워하는 무기력한 신이지. 그것은 무얼까? 아직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그의 신은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해. 언젠가는 알겠지.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건 네가 그의 신에게 엎드려지지는 않을까 하는거야. 아직 큰소리는 치지 말길! 네가 비록 그의 육신에만 안긴다고 해도 그것이 시초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유경은 자문(自問)으로 시작한 생각이 나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심문당하는 것처럼 되어 어지러웠다. 그러다 그만 카사블랑카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친 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카사블랑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식당이 문을 열었다.

식당은 거의 남자 손님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간판을 보니 기사 식당으로 바뀌었다. 유경은 쓸쓸한 마음으로 남산을 내려왔다. 비가 오려는지 검은 구름들이 낮게 드리워져 머리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유경은 문득 희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비 올 확률이 칠십 프로래요... 지금 희옥이는 소원대로 카페를 차렸을까. 그때에도 비가 왔었지. 칠십 퍼센트의 확률로 비가 온다면 나머지 삼십이란 숫자는 비가 내리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요, 불필요한 꼬리란 말인가. 나의 강현섭에 대한 도박은 몇 퍼센트의 확률일까. 이미 모든 새 결정났는 데도 나는 꼬리처럼 붙은 삼십 퍼센트만 보고 있는건 아닐까. 그 삼십 퍼센트는 정말 아무런 기적도 바랄 수 없는 꼬리일까... '

유경은 버스를 타기 전 신문을 샀다. 그녀의 눈에 소수점이 찍히지 않은 숫자가 선명히 들어 왔다.

'내일 비 올 확률, 구십 퍼센트.'

유경은 나머지 십 퍼센트를 생각하며 연남동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리니 거진 일곱 시가 되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김만우의 구두가 아까와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동안 먼지만이 그를 방문하고 간 듯 앞코가 흐릿했다. 유경은 건넌방문을 열었다.

"아버지, 저 다녀왔어요."

예상대로 김만우는 대답이 없었다. 유경은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나온 그를 얼핏 보고는 다락으로 올라갔다. 김만우가 누워 있는 모습에서는 언제나 죽음의 형상이 나타나 있어 가끔 피하는 적도 있는 유경이다.

형광등을 켰다. 그동안 숨어 살던 모든 것이 환히 드러나는 듯 밝았다. 심지어는 원고지의 이백 개의 칸들이 저마다 독방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수용소로 보였다.

'글을 쓴다는 건 마치 대 수용소의 독방마다 글자라는 죄수를 하나씩 수감하는 기분이구나. 갇힌 글자들, 갇힌 언어들, 갇힌 사고, 갇힌 사랑, 갇힌 진실, 갇힌 눈물, 갇힌 웃음, 갇힌 생명, 갇힌 죽음, 갇힌 소생, 갇힌 나, 갇힌 너, 결국 독방이 아닌 거대한 방에 집회를 하듯 모여 갇혀 버린 우리들.'

유경은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고는 소설을 써내려 갔다. 늘 그렇듯이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작업이라 두 시간 정도 지나면 발이 저리다. 유경은 펜을 놓고 두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순간, 커다란 심호흡을 하는 가슴 속에 한기가 가득 찼다. 유경은 몸을 떨었다.

재빨리 다락에서 내려왔다. 안방에는 무거운 적막함이 자기 집인 양 자리 잡고 있고, 그 적막 속에는 평소에 죽음을 깊이 생각한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축제의 요란함이 가득 차 있었다. 영혼을 스스로 경매에 붙인 자가 있을 때 그 축제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만큼 적막은 무겁다.

유경은 문이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건넌방 문을 열었다. 그곳 역시 안방과 다름 없이 낯선 기운들로 그득했다. 유경은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내쫓고 김만우에게 달려 들었다. 살해자처럼 난폭하게 김만우를 흔들었다. 그러나 김만우는 이미 낯선 손님들을 따라 집을 나간 뒤였다.

"아버지이... "

유경은 김만우를 부둥켜 안고 아버지라고 수십 번 고함을 지르더니 그의 차가운 육신과 겹쳐지듯 쓰러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경은 이가 부딪히는 추위에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유경은 자신이 잠시 동안 정신을 잃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린 여자 아이들이 커다란 인형을 안듯 김만우의 체온이 식은 몸뚱이를 안았다.

벽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훨씬 넘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훈이는 늘 학교 도서관에서 열한 시에 출발한다. 그리고 최례옥은 열한 시가 넘어서야 온다. 유경은 식당으로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한 시간 더 일찍 안다 하여 무슨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경은 김만우를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하지만 김만우가 택한 죽음의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유경은 몹시 추위를 탔다. 그녀는 김만우 옆에 바짝 다가앉아 두 발을 이불속에 넣었다. 김만우의 다리와 마주쳤다.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비스듬히 누웠다. 찬찬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유경은 가슴이 섬뜩했다. 낮에 본 김만우와 지금의 김만우는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과 턱의 짧은 수염이 그 새 쇠어져 하얗게 변하고 길이도 길어졌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그때 서서히 숨이 끊어지고 있었구나. 아버지가 내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밝은 빛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글을 계속 쓰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사족이다. 진정 끝맺음으로 하신 말씀은 평양, 강서다. 강서는 여기서 얼마나 멀까? 기차를 타야겠지. 비행기도 탈 수 있지만 너무 빨리 가는 건 싫다. 설레임이란 원래 시간이 걸려야 하는 법. 가좌 역사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면 문산을 거쳐 황해도 땅을 지나 평안남도로 들어서고 평양에서 잠시 쉬었다가 강서로 가겠지. 그러나 기차가 평양에서 신의주쪽으로 곧장 가게 된다면 나는 평양에서 내려 강서행 버스를 타야겠구나. 그 다음 물어물어 덕흥면으로 가서 사람을 아니 내 가족을 찾는 거야. 연실이 언니는 마흔이 넘었을 텐데 지금도 노래를 잘할까. 두 오빠는 아버지를 닮아 첫눈에 알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선물을 준비해야겠구나. 큰 어머니에게는 고운 분홍빛 한복을, 연실이 언니에게는 남색 치마에 분홍 저고리를, 두 오빠에게는 보라색 바지저고리와 남색 마고자를. 신기한 일이다. 나에게도 언니와 오빠가 있다니. 그런데 ... 그 사람들이 나를 외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유야 어찌했건 단신으로 월남한 아버지를 미워해 내게 그 분노와 서러움을 쏟지 않을까. 그래도 참아야 한다. 돌을 던지면 맞고, 물을 뿌리면 삼키고, 욕을 하면 귀에 담고, 손가락질하면 받아들이고, 발로 차면 뒹굴어야 한다. 내가 아버지 대신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미모도 그대로요, 몸매도 그대로요, - 17

아니 죄의 대가이기도 하다.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갈망하는 통일에 대해 무관심할 뿐더러 늘 조소를 보내지 않았는가. 경의선 기차가 지날 때마다 나 개인의 사색에 빠져 기차의 굉음, 기차가 일으키는 바람소리, 간수의 흰 깃발과 붉은 랜턴을 즐기기만 했다. 그래, 나는 그들이 하는 대로 다 받아들여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그들은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갈거다. 나는 남한의 여자, 김유경 이전에 평양, 강서의 김만우의 딸이기 때문이다. 묵묵히 모든 수모를 참고 난 나를 그들은 따뜻한 방에 앉히겠지. 그 온돌의 온기만큼이나 아버지를 서서히 용서하고, 나를 사랑하겠지.'

유경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에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김만우와 나란히 손을 잡고 경의선 기차에 앉아 북으로의 여행을 했다.

처음 보는 마을의 시내, 시내를 부르는 강, 강가까지 내려와 노는 작은 산, 큰 산, 그 산에서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나무들, 나무들의 심부름으로 밑으로 내려와 마을 소식을 귀담아 듣는 조약돌, 차돌, 하얀 돌, 회색 돌, 검정 돌, 작은 바위들,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는 흙과 모래, 흙에 콩을 심는 할머니, 할머니 곁에서 잠시 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 빨래를 이고 가다 노부부에게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 마주친 아주머니에게 길을 비켜 주는 밀짚모자의 아저씨, 논에서 김을 매는 그을린 얼굴의 젊은이, 참을 가지고 잰 걸음으로 오는 누런 적삼 저고리의 아가씨, 빈집에서 공깃놀이를 하는 여자아이, 그 아이에게 장난삼아 새총을 겨누는 남자아이, 마루에 누워 손가락을 빨며 잠에 드는 갓난아기, 아기의 얼굴에 먼지라도 떨어질까 꿋꿋이 서 있는 초가지붕, 지붕 밑에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금 간 창문, 창문 위로 집안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굴뚝,

언제나 굴뚝을 사모하여 쳐다보는 듯한 작은 항아리 자매들, 가끔씩 오는 그 자매들을 늘 풍족한 마음으로 받아 주는 우물, 우물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빨랫줄에 널어진 빨래들, 시집올 때부터 입고 있는 엄마의 꿰맨 색바랜 분홍 치마, 엉덩이에 자식들의 숫자만큼 천 조각이 대어진 아버지의 바지, 엄마 몰래 아끼는 공단을 잘라 만들어 눈물부터 닦았던 복실이의 보라색 손수건, 널어진 빨래 중에 제일 새것으로 보이는 남동생, 복동이의 속옷, 대대로 물려 받아 실밥이 국수발처럼 늘어진 아가의 기저귀, 그 옆 땅바닥에 잔잔한 발 위에 곱게 펴진 할아버지 담뱃잎,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 그 고무신에 심술을 부리는 진흙길, 진흙길을 꾸짖는 신작로, 신작로를 놀리는 오솔길, 오솔길 옆에 누워 낮잠 자는 주인을 지키는 낡은 자전거, 자전거에게 도시 소식을 전하며 가는 작은 자동차, 자동차에게 산골 바람을 날리며 따라오는 트럭, 트럭의 먼지 묻은 엉덩이를 보고 웃는 수레, 빨간 고추와 검정 숯을 엮어 매단 어느 집 앞에 손님들처럼 늘어선 함지박들,

그 주위를 맴돌며 뛰노는 바둑강아지, 누렁 강아지, 흰 강아지, 젖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어미 개, 미류나무에 묶여 강아지들에게 휘파람을 부는 누렁 송아지들, 송아지들을 놔둔 채 일을 나간 어미와 아비 소의 땀 흘리는 뒷모습, 흙탕물 속에서 공주와 왕자 놀이를 하는 오리들, 물가에서 오리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병아리들, 그런 병아리들을 야단치러 급히 달려오는 엄마 닭, 하늘의 푸르름보다 땅의 붉고 누런 얼굴을 더 사모하는 논, 사이좋은 흥부네 자식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밭, 뜨겁지도 눈부시지도 않은 해, 해를 숨겨 놓지 않는 하늘, 하늘을 갈라 놓지 않는 구름, 그 구름을 보고 같이 가자고 한달음에 달려 오는 씩씩한 바람, 바람을 놓아 주지 않으려는 사랑에 빠진 열일곱 살 연실이의 치마, 펄럭이는 노랑 치마, 펄럭이는 노랑 치마를 보고 흔들리는 기차에서 일어서 창밖으로 손을 저으며 연실이를 부르는 김만우, 뒤로 도망치는 연실이,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그를 잡아당기는 유경이, 그러나 거칠게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내리는 그, 차마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멀어지는 김만우를 향해 울부짖는 유경이,

피투성이가 된 김만우를 보고 멀리멀리 도망가는 연실이, 아무리 애원해도 멈추지 않는 기차,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 기차, 살려줘요! 아버지, 돌아오세요! 무서움에 떨며 도망가는 연실이의 검고 큰 눈, 그 눈을 향해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김만우의 핏발 선 눈, 이젠 보이지도 않는 김만우에게 독한 원망을 날려 보내는 유경의 서러운 눈, 조금 전까지 보이던 북의 모든 평화가 갑자기 암흑세계로 변하고 적막이 감돈다. 유경은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소리친다, 아버지, 돌아오세요!

유경은 진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며칠 걸리는 기차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땀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을 때 최례옥의 고함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다들 뭐하는 거야? 짐이 많아서 좀 들고 가 달라고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도 아무도 받질 않고 뭐하는 거야? 늘어져 잠들이나 퍼 자는 거야? 미친년! 집에 있으면서 에미가 왔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아? 꺼억. 넌 사형감이야. ? ! 웃기지 마라. 세상만 헤까닥하면 너 같은 연놈들은 제 일 호로 처형식을 거행하게 해 주지. , 취한다. 내가 술 때문에 살지. 술아술아술아술아술아, 하하하... 술 없었으면 이 몸은 벌써 염라대왕 앞에서 눈물 찍찍 싸고 있었겠지. 이 세상 연 놈들아, 모두 들어라! , 최례옥은 꺼억. 아직 죽지 않았다. 미모도 그대로요, 몸매도 그대로요, 교양도 그대로요, 인기도 꺽! 그대로요, 다 그대로다. 다만 한 가지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괄세하면 세상 바뀌는 날에 모두 모가지를 댕강댕강 날려 보낼거야. 아니, 그런데. 미스 정. 김만우 사장님은 어디 가셨지? 꺼억! 중역 회의 하러 가셨나? 아니면 바이어 대접하러 요리집에 가셨나? 그것도 아니면 사우나탕에 땀 빼러? 그럼 도대체 어디 계신 거야? , 미스 정. 오늘로 사표 써! 꺼억, 세상 잘도 돌아간다. 나 하나 없어져도 이놈의 세상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그래, 차라리 내가 없어지자. 그러면 되는 거지 뭐. 세상이 꼼짝하지 않는다면 내가 돌아버리면 되는 거야. , 간단한 일이지. 나와! 다 나와서 이 최례옥이 죽는 걸 보란 말이야!"

최례옥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울고, 소리쳤고, 유경은 김만우 옆에 멍하니 앉아 빗소리와 함께 듣고만 있었다.

"!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지. 누구 좋으라고. 담판을 지어 놓고나 죽든 살든 해야지. 김 사장님, 나와 보시죠!"

최례옥은 몸에서 흐르는 물기를 닦지도 않은 채 건넌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허이고야! 꼴 보기 좋네. 부녀가 이제껏 한 방에 나란히 있었네. 그래. 나는 시장판에서 꺼억, 작부처럼 술을 팔고 덤으로 자존심까지 팔고 있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아랫목에 누워서 방바닥이나 덮히고, 딸년이라는 것은 지 아비 품에 안겨 있어! 잘 돼가는 집안이다. 뭐야, 너는? 에미가 왔으면 발딱 일어나야 할 것 아니냐!"

넋 나간 사람처럼 있던 유경은 최례옥의 코 앞에 바짝 섰다. 그녀는 최례옥을 이빨로 질겅 씹을 듯 노려보았다. 최례옥은 순간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나가요! 당장 나가요! 지금 여기가 어떤 자린데 그따위 소리를 해요. 당장 나가요!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술 냄새를 풍기고 그것도 모자라 짐승 같은 말을 해요?"

유경이는 그제서야 죽음을 뼛속 깊이 느낀 사람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 그럼 ... 아니야. 말해 봐. 너 지금 나한테 협박하고 있는 거지? 아버질 깨워! 그만 일어나시라고 해!"

최례옥은 유경을 난폭하게 밀치고 김만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김만우를 덮고 있는 이불을 양파 껍질 벗기듯 들춰내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마구 비벼댔다.

"여보, 여보, 안돼요, 안돼!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 몹쓸 여편네는 용서해 주고 가야 하잖아요. 여보, 용서해 줘요! 날 용서해주란 말이에요!"

최례옥은 용서해 달라는 말을 수없이 내질렀다. 비처럼 내리는 그녀의 눈물은 김만우를 다시 살려낼 듯 뜨거웠다.

 

용서해 주세요, 이 탐욕의 여자를... - 18

유경은 최례옥만치나 크게 울고 싶었지만 깊이 참고 마루로 나왔다. 언제 왔는지 훈이 머리를 감싸쥔 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건장한 훈이의 어깨가 폭우에 어울리는 천둥만큼이나 흔들렸다.

"훈아, 아버지는 혼자 가셨어 ...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고향은 우리들과는 아무 상관도 었는 곳인가 봐,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우리들 같아. 우리는 아버지를 짝사랑한 셈이지. 아버지의 마음은 늘 그 고향에 있는데 말이야. 서글픈 사랑처럼. 훈아,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무척 사랑하셨어. 그래서 오늘 낮에는 내게 부탁까지 하셨단다. 네게 꼭 전해 달라고 말이야. 일이 다 수습되면 자세한 얘길 해 줄께. 지금은 들어가지 마. 두 분만이 함께 있도록 해드려야지. 연남동에 이사온 후로 두 분은 한 번도 같은 방에서 잠을 잔 적이 없으시잖아. 오늘 밤, 우리가 그런 기회를 마련해 드려야지. 왜 우리는 이전까지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머니가 아무리 우겨도 두 분이 한방을 쓰시게 했어야 하는데 ... 오늘 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 방에서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고 그래서 화해도 하시게 해드리자. 훈아, 비가 너무 심하게 오는 것 같지 않니?

아버지는 꽤 운이 없어. 몇십 년 만에 고향 가는 길인데, 그렇지? 난 아까 꿈을 꾸었어. 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강서로 가는 꿈이었단다. 비도 오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어. 그래서 기차는 잘 달렸지. , 아버지는 고향을 찾으실 수 있을까? 연실이, 웅기, 웅태 그리고 박정옥. 낯선 이름들이지?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질투가 날 정도로 사랑하시지. 갑자기 할 일이 많아진 것 같구나. 송이네는 내일 알리자. 비가 이렇게 오고, 송이 아빠도 서울에 없잖니. 비란 이상한 존재라서 조그만 슬픔을 커다란 통곡으로 바뀌게 하거든. 훈아, 부탁이 있는데 힘들겠지만 친척 어른과 아버지의 친구분들에게 전화를 해. 난 다락방에 올라가 있을께. 아버지가 나에게 빛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어. 그러고 보니 나만 유산을 받은 것 같아 미안하구나.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와 똑같이 나눌 거야. 기대해도 좋을 빛이야."

유경이 말을 하는 중간중간에 최례옥의 말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그러나 고장 난 테이프가 돌아가는 양 반복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훈은 최례옥에 대한 미움으로 속으로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비아냥거렸다.

'용서해 주세요, 이 더러운 여자를. 용서해 주세요. 이 어리석은 여자를. 용서해 주세요, 이 사악한 여자를. 용서해 주세요, 이 탐욕의 여자를...'

유경은 훈이가 전화번호를 찾아가며 열심히 다이얼을 돌릴 때 다락방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땅에는 빛이, 하늘에는 빛의 주관자가. 인간에게 당장 필요한 건 주관자가 아니라 빛이다. 예수는 말했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그럼 나는 말한다. 눈 있는 자는 보라고! 그런데 그 눈이 말한다. 빛을 달라고, 눈은 독자적일 수 없다. 그것은 관계를 뜻한다. 빛도 마찬가지다. 빛은 무엇과 제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까. 빛은 어디서 정액을 받아 마실까. 그 정액은 잉태를 시킬 수 있는 살아 있는 것일까. 그 잉태는 출산까지 할 능력이 있을까. 아버지는 내게 어떤 출산을 바라고 빛을 주셨을까.'

아침이 와도 굵어진 빗발 때문에 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 또 김만우의 죽음이 다량의 수면제와 술을 섞어 마신 것으로 밝혀져 유경의 가족들은 모두 살인을 한 사람들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죽음 앞에서 무슨 할 얘기가 있는지 그동안 전화 한 통 없던 사람들이 흰 봉투를 들고 몰려 왔다. 그러나 상주인 훈과 미경만이 문상객들을 접대하고 최례옥과 유경인 죄인인 양 그들과 눈인사만 나누고 집 옆에 있는 복덕방으로 갔다. 복덕방 장씨 영감은 함경도 사람으로 김만우와 같은 이북 출신이라고 서로 말 없이도 통하는 사이였다.

"이 친구 고향 가는 길이 왜 이리도 험한가...비도 보통 비가 아니에요. 밤샐 손님들이 적겠군요, 그래도 아주머니가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음식이라도 마련해야죠. 너무 상심 말고 애들 생각해서 마음 단단히 잡숴요."

".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시장 사람들이 와서 알아서 다 하고 있어요. 이따 아저씨도 저의 집에 오셔서 술 한잔하세요."

"허어... 난 이북에 같이 갈 동무 하나 생겼다고 내심 좋아했었는데. 그런데 그 친구 양반, 하도 말이 없어서 어려웠었어요.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말을 자주 했었죠. 내가 고향가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는 길입니다. 그 전에는 돈으로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우선 돈부터 잡질 못하는데 어느 세월에 고향을 가겠어요. 나는 누구보다도 빨리 고향에 갈 겁니다. 죽으면 되거든요. , 그러지 않겠어요. 난 그래도 그 양반이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면 저런 생각을 하나 하는 정도로만 여겼죠. 설마, 이렇게 될 줄은... "

장씨는 김만우의 서러움이 자신의 서러움처럼 생각되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까지 서러움에 흐느끼는 듯했다. 안채에 딸린 복덕방의 지붕은 양철로 되어 있어 빗소리가 폭포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장씨의 울음이 거대한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느껴졌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나도 참고 있는데요. 우리 애들 아버진 내가 죽였어요. 내가 죽인 거라구요. 들어가 계세요. 혹시 방 보러 오는 손님들 있으면 알려 드릴께요. 어서요."

최례옥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울음을 참고 장씨를 안채로 떠밀었다. 장씨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고향 가진 놈이 죄인이에요. 죄가 많은 인간들이라 고향이 있는 거예요. 나나 그 친구나 죄인이죠.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평생 젊은 날부터 이때까지 고향 때문에 잠 한번 편히 자질 못한단 말입니까..."

"유경아."

장씨가 들어가자 침묵을 깨고 최례옥이 유경을 불렀다. 유경은 적이 놀라워했다. 최례옥은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한 번도 자기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늘 욕으로 유경이를 지칭했고, 욕으로 그녀를 사형대에 올려놓았던 최례옥이다.

", 어머니."

"너 허튼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라. 글쓴다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 남들보다 몇 배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 난 미경이도 훈이도 하나 걱정되지 않아. 그러나 네가 아버지 성미를 닮은 데다 글까지 쓰니 이젠 나보다 네가 더 걱정이 돼. 알았지? 지금 우리가 똘똘 뭉치지 않으면 진짜 거덜나는 인생된다. 나는 그래도 어느 만큼 인생을 살아서 안단다. 슬픔은 항상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법이야, 그러니까 딴 생각말고 글 열심히 쓰고 동생들에게 용기를 줘야 해. 그리고 자신 없어서 미리 말하는데 이 에미가 혹 앞으로 약해지더라도 지금처럼 입다물고 있지 말고 막 야단쳐라, ? 그러나 난 애들 앞에선 절대 울지 않을거야. 네 앞에서도 말이야. 난 그날 네 아버지랑 얘길 많이 했어. 정말 오랫만에 단둘이서만 말이야. 아버지는 나를 용서해 주셨어. 난 복이 많은 여잔가 봐. 용서를 쉽게 받았으니 말이야. 너도 이 다음에 신랑을 만나면 네 아버지처럼 잘못은 그 자리에서 싹 잊어버리는 사람을 골라. 알았지? ,

 

네 혀는 피가 없이 허연 살로만 만들어졌니-19

그런데 송이 아빠는 도대체 어디 박혀 있는 거냐? 넌 알고 있지. 혹 무슨 사고라도 저지른 거지? 그러니까 장인 양반이 돌아가셨는데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지! 네 아버지가 자식 복은 있어도 사위 복은 없나 봐. 맏사위 절도 못 받고, 작은 사위는 소식도 깜깜이고. 게다가 며느리 수발도 못 받아 보고. 난 이렇게 죽지 않을 거란다. 난 네 신랑, 송이신랑, 며느리한테 받을 만한 호강은 다 받아 보고 죽은 거야. 그래서 네 아버지한테 가서 실컷 자랑할 거란다. 유경아, 그런데 이 에미가 술이 너무 마시고 싶은데 어쩌지. 아이고,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네. 여보..."

최례옥은 노란 천으로 덮힌 책상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유경은 며칠 사이에 더 거뭇해진 최례옥의 얼굴을 닦아 주는 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애써 피하려고 눈을 밖으로 돌렸다. 그때였다.

"유경아...."

윤성민이었다. 훈이가 연락을 했지만 유경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성민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 내리는걸 억제할 수 없었다. 우산을 들고 있지만 비가 워낙 심해 온 몸이 젖은 성민은 말없이 유경에게 손짓했다. 유경은 뛰어나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성민의 젖은 앞가슴을 제 눈물로 다시 적셨다. 성민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유경을 안고 그녀의 젖은 긴 머리카락과 등을 쉴새 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유경아. 아버님은 긴 수고와 슬픔의 여정을 마치고 세상 짐을 훌훌 털어 버리고 고향으로 가신거야. 아버님은 모든 질곡에서 해방되어 오히려 웃고 계실 텐데 왜 우리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울음으로 그 해방을 욕되게 하는 걸까, 유경아. 아버님은 지금 해방의 기쁨으로 춤을 추고 계실지 몰라. 이 땅에 남은 우리들이 같이 춤을 추지는 못할망정 곡()소리는 그쳐야 하지 않겠니? 집으로 가자. 아버님께 인사는 드려야지. 어머님. 저희 먼저 들어갈까요?"

성민이 빗소리를 이길 만큼 큰 소리로 물었으나 최례옥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장대처럼 쏟아지며 천둥을 울리는 비를 오히려 고맙게 여겼다. 마음놓고 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례는 다음 날 치러졌다. 마침 날이 활짝 개고 초여름 더위가 성큼 다가온 날씨라 벽제 공원묘지의 가파른 길을 오르는데 모두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날 이후 날은 빠른 속도로 뜨거워졌다. 그러나 유경의 가족은 입은 점점 굳어지는데 발들은 빨라졌다. 최례옥은 술을 끊고 식당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손님이 늘어 옆 가방 전문 가게를 사 넓혔고 종업원도 두 명이나 고용했다. 그러나 최례옥은 송이가 재롱을 피울 때 외에는 웃는 법이 결코 없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은 절대 웃지 않기로 맹세한 듯했다.

이젠 제법 깔끔하고 상호도 그럴듯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식당 일에 감이 잡힌 미경은 의외로 형사나 경찰, 그 누구에게도 시달리지 않았다. 신촌에서 한동수를 만난 이후로 신문을 매일 살피지만 그 사건은 기사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동수를 서울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언니. 나는 진정으로 온전한 가정생활을 이루기 위해선 우선 그가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송이 아빠랑 떨어져 있는 게 괴롭지만 앞으로의 날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거든, 지금 송이 아빠는 영세까지 받고 많이 변했대. 신부님이 됐다고 하실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래서 지금은 즐거워. 한 가지 그이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할 적만 빼놓고 말이야."

그녀는 유경에게 정말 편안한 얼굴로 말했었다. 그러나 훈의 얼굴은 그녀와 달랐다. 미친 듯이 공부만 파고드는 훈이는 가족과 한 자리를 할 적만큼은 희극배우처럼 떠들어댔다. 유경은 훈의 의식적으로 쏟아 놓는 말과 몸짓이 역겨워 몇 번 다툰 적이 있었다.

"훈아. 아무도 네 연기에 속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니? 이젠 그만 해주었으면 해. 누굴 위해 매일 연기를 하는 거니?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공연을 하는 이유가 뭐야? 그것은 쇼도 아닌 잠꼬대에 불과해."

"큰누나. 내 공연은 장기공연은 안 될 테니까 염려 마. 단지 내가 불안해서 그러는 거야. 누나는 내 성격을 알잖아. 누구를 위해 억지로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 매일 밤 내가 어머니 대신 술을 마실까?"

그러나 훈의 공연은 지속되고 있다. 그의 마음을 알게 된 유경은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훈에게 김만우로부터 받은 호적초본과 이북에서 만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훈의 학교 앞 카페에서였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이자 모든 게 압축된 유언이야. 급하셨는지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지 못하고 나에게 대신 부탁하셨어. 꼭 네게 전해달라고 말이야.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다고 반복해서 말씀 하셨지."

유경은 훈에게 김만우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었다. 김만우의 훈에 대한 진단이 정확하더라도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아니, 정확한 진단이라면 마땅히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작은 신념까지 포함된 유경의 계획이다.

"누나, 아버지의 뜻은 알 수 있어. 그런데 이들을 찾아서 어쩌라는 거야. 호적초본을 새로 작성하라는 건가? 그들과 우리는 아무 상관 없어. 이런 복잡한 끈을 자꾸 엮어서 뭘 어쩌자는 거지? 왜 기성세대들은 지저분하게 얽히고 설켜서 엉망진창이 되어 일을 하지? 누나, 나는 이걸 받을 수 없어. 아니, 받기 싫어.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비겁했어."

"훈아! 네 혀는 피가 없이 허연 살로만 만들어졌니?"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옷을 훌훌 벗어 던져 -20

"큰누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이유를 말하려는 것뿐이야. 왜 아버지가 비겁한 줄 알아? 나도 언젠가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어.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를 했어. 아버지는 우리에게 있어 가족도 타인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로 사셨어.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향수 차원을 넘어 병적이었어. 그 병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야. 왜 어머니가 큰누나를 미워했는지 알아? 큰누나가 우리 세 형제 중 이북에 있는 아버지의 자식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어머니는 파산한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 더 깊게 고향에 빠져든 배신자인 아버지를 미워했고, 그 배신자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큰누나를 씹고 또 씹어 아버지에 대한 분을 삭인 거라구. 아버지?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우리 분단 민족이 낳은 여러 가지 기형아 중 하나라고 생각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향수는 인간이 자궁으로 돌아가고픈 의식과 같다고 말이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남한 땅의 처녀의 몸에 제 피와 살을 섞고 그 피와 살을 닮은 세 아이를 낳았어.

그렇다면 아버지는 때를 맞춰 적절히 포기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 욕심이 많았어. 그리고 비겁했지. 남한 땅에 쏟은 피와 땀으로 잉태되어 출산한 아이들을 향수라는 이름을 내세워 버려두었으니 말이야.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건 불효일 수 있어. 하지만 부탁을 거절하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에 말한 것뿐이니 너무 화내지 마. 이 사람들을 만나 내가 김만우와 남한에서 결혼한 최례옥이오, 내가 김만우가 남한에서 낳은 아들이오, 딸이오라고 선전을 하란 만이야? 난 할 수 없어. 아버지가 우리들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서글퍼. 큰누나, 다시는 이런 일로 나를 괴롭히지 마."

"훈아. 대단한 발전을 했구나. 아버지의 심리를 그렇게 자세히 파악하는데 네 똑똑한 머리로 별 고생도 하지 않았겠지. 그래, 다시는 네게 구차한 부탁을 하진 않겠어. 다만 언젠가,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나 네 마음이 움직이면 말해 주기 바래. 정말 우리는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통일을 위해 구호조차 부르짖지 못하는 겁쟁이들이 생전 보지도 못한 또 다른 가족 때문에 다투다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그 이후 유경과 훈은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냈다. 아버지의 고향으로 인해 분열이 생긴 셈이다. 그러나 유경은 그녀대로 제일을 열심히 해나갔다. 서울에 와서도 한동안 유경일 만나지 못한 강현섭이 집으로 찾아 오기 전까지는 소설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김만우의 죽음으로 가까와진 성민과의 관계도 그의 병이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만큼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적어도 강현섭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유경씨. 걱정했던 것보다는 많이 수척하지는 않군요. 글이 잘되는가 보죠?"

"그래요. 이젠 어머니도 연남동과 모래내 생활에 깊이 젖어 든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그 점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있어요. 소설도 거의 틀이 잡히고... 생각보다 다 잘되고 있어 걱정이 될 정도죠. 현섭씨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창밖으로 오 미터가 넘는 인공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오전의 커피숍 탓인지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아 유경은 마음이 편했다.

"나요? 하하하... 털어 내는 재미에 삽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유경 씨가 이 재미를 모른다는 게 섭섭하지만. 이젠 남들이 말하는 파산의 고통을 겪어 보고 싶어요. 도박을 하여 십 원 하나 남기지 않고 털리는 건 아깝지가 않습니다. 술에 취해 대로에서 방뇨를 하듯 시원합니다. 당신처럼 항상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은 아무리 도박을 많이 해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아침부터 이런 얘기는 그만합시다. 유경 씨. 나는 당신과 있으면. 밀실로 들어가고 싶어요. , 우리들의 밀실로 가요."

이미 룸 열쇠를 주머니에 넣어 둔 그는 유경의 손을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유경은 룸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아버님 생각을 하나요?"

그는 마주 앉아 술을 따르며 유경에게 물었다. 유경은 뭐라 대답하려다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 왼편에 삼 센티 정도의 칼에 베인 자국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커피숍에서는 나란히 앉아 밖을 쳐다보느라 보지 못했었다. 상처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피가 스며 나올 듯 주위에 붉은 기운이 길게 번져 있었다.

유경은 그 상처를 보며 언젠가 강현섭에게 묻고 싶었던 게 떠올랐다. 그와 몇 번의 관계를 가졌을 적에 그의 몸 여러 곳에 얼굴에 난 상처 크기만 한 자국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경은 묻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에 전혀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새로운 상처군요. 무슨 일이라도?"

유경의 말에 강현섭은 상처가 난 얼굴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별거 아니에요. 나는 자해를 가끔 해요. 보여줄까요? 아하, 그동안 당신은 감시자처럼 내 몸뚱이를 살폈군요. 작가의 눈길인가요, 아니면 사랑하는 여자의 시선인가요?"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유경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강현섭은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보세요. 뭐가 두려워요? 이미 우리는 서로의 자궁 깊숙이까지 자유로이 왕래한 사람들이잖아요. 당신은 자신에 대해 좀 더 솔직해져야 해요. 당신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노예가 된 사람 같아요."

유경은 그의 벗은 몸을 나무를 보듯 쳐다보았다. 유월의 나무처럼 무성한 그의 검은 머리, 그 나무 밑에 앉아 복수의 계획을 되새기는 듯한 날카로운 선()의 얼굴. 백양나무처럼 희고 곧은 가슴과 허리. 느티나무 뿌리처럼 강인하게 땅 속으로 뻗어 내린 군살이 없는 두 다리. 그는 하나의 나무였다. 그러나 그 나무 속에 피의 계획을 꾸미는 얼굴 하나가 있어 웬지 나무 전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기운으로 말미암아 강현섭이라는 나무에는 새가 되돌아 가고, 바람도 지나쳐 가며, 비나 눈에게도 외면당하고, 어린아이들마저 두려움에 뛰어갈 듯했다.

 

현섭씨,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 21

"보이죠? 양쪽 뒷 어깨 바로 밑의 칼자국. 두 젖가슴 밑의 칼자국. , 이건 거의 사라지고 있군요. 새로운 작품을 선사해야겠어요. 다음은 양쪽 허벅지 안의 칼자국. 이곳에 상처를 낼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기억이 돼요. 이것도 이젠 희미하게 되었군요. 다음은 종아리 뒷 쪽에. 겁이 많았는지 옷 밖으로 나온 부분에는 칼을 긋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어제 밤에 처음으로 드러난 살갗에 칼을 댔죠. 하하하... 그러나 나는 흡혈귀가 아니니까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는 항상 두 개씩 상처를 내죠. 그런데 이번엔 하나밖에 못했어요. 나머지 하나는 유경씨의 얼굴에? 그러나 유경씨의 얼굴은 너무 말라 오히려 칼이 부러지겠군요. 자꾸 창백해지는 유경씨를 보니 이상하게 즐거운데요. 마치 상처를 낼 때처럼 말입니다. 칼은 새것이 좋아요. 침을 살짝 바르면 더 잘 나가죠. 그런 다음 한 손으로 상처를 낼 부위를 팽팽하게 만듭니다. 고통의 증가를 위해서죠.

다음 아주 천천히 칼을 그어 내립니다. 아주 천천히 해야 합니다. 고통은 배로 됩니다. 처음엔 피가 스며 나오듯 칼로 그은 주변을 빨갛게 물들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때가 지나고 나면 피는 상처 크기에 따라 작은 샘물도 되고, 큰 샘물도 되어 솟습니다. 거울을 통해 보거나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편하게 앉아 피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지켜봅니다. 그 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입니다. 최상품의 자유를 피로 산 셈이죠. 유경씨는 피로 자유를 샀다는 걸 글로만 읽었죠. 자유를 얻기 위해 피를 치른다는 것도 얘기로만 들었겠죠. 자유가 피보다 귀하다는 걸 머리로만 알죠. 그러나 유경씨도 나처럼 해 봐요. 진정한 자유가 피처럼 붉고, 피처럼 진하며, 피처럼 아름답고, 피처럼 선명함을 살갗을 뚫고 뼈를 지나 혈관 속속들이 느낀 겁니다. 그건 전율이죠. 다만 문제는 그 전율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무서운 일은 그때부터 일어나게 되죠.

자유는 더 큰 걸 교환조건으로 원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피보다 더 큰 보상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죠? 바로 내가 이 지경까지 온 듯해요. 유경씨, 말해 봐요. 세상 어디에 피보다 귀한 보상품이 있는지 말입니다."

현섭은 말을 마치자 유경일 일으켰다. 유경은 그의 얼굴의 붉은 상처를 다시 한번 보고는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 붉은 깃발이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금세 벨 수 없이 많게 모여들었다. 깃발을 든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저희끼리 움직였다. 깃발이 흔들릴 때마다 뜨거운 기운이 몸속을 파고들어 유경은 뒤로 물러섰다.

"유경씨. 아기처럼 조용히 있어요. 당신 몸을 칼자국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 줄께요."

강현섭은 뜨거운 입김을 유경에게 흩뿌리며 그녀의 옷을 차례차례 벗겨 나갔다. 눈을 감은 유경은 모든 것을 귀로 감지했다. 옷이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그의 숨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유경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는 벌거벗은 몸뚱이가 된 유경의 손을 잡고 침대로 갔다. 유경은 계속 눈을 감은 채 그를 따라 조심스레 걸었다. 유경을 침대에 눕힌 강현섭은 그녀를 담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만 여러 번 했다.

"유경씨. 오늘은 이렇게 나란히 눕고 싶어요. 그리고 머리가 아프도록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벌써 부부처럼 가까워졌나 봅니다. 벌거벗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두 사람은 손으로 서로의 몸을 덮혀 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경은 그의 상처 난 얼굴을 만졌다.

"언제 자해의 충동을 느끼죠?"

"그래요. 자해는 거의 충동적이죠. 도박으로 돈을 날릴 때마다 나는 그 쾌감을 더하기 위해 칼을 듭니다. 도박은 완전한 즐거움이 못 되요. 하면 할수록 끌려다니게 되어 나중엔 짜증까지 생기죠."

"당신이 원하는 즐거움이란 무어죠? 또 이 세상에 완벽한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두 가지 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즐거움이란 완전한 공포를 의미하기도 하죠. 그런데 나는 용기가 없어 알면서도 감행하지 못해요. 완전한 공포란 살인이나 자살이라고 생각하죠.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요? 나는 매일 한 사람씩 죽입니다. 놀라지 마요. 물론 머릿속으로만 그렇죠. 나는 매번 살인 행위에 갖가지 방법을 연구합니다. 어떤 때는 영화에 나오는 살인을 해보는 적도 있고, 스스로 생각해 낸 방법으로도 사람을 죽이죠. 그러나 정말하고 싶은 살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보는 겁니다. 하나님이란 신도 살인을 즐겼더군요. 불로 태워 죽이고, 물에 잠겨 죽이고, 돌에 깔리거나 맞아 죽게 하고, 살가죽을 벗겨 죽이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살인을 하기도 하고 또는 중간자를 내세워 죽임을 강행했죠.

그가 얼마나 살인에 흥미있어 하는지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외아들을 죽이잖아요. 최초의 살인자, 그것은 카인이 아니라 신입니다. 그는 이미 아담과 이브를 죽였잖습니까. 그 죽은 몸에서 나온 자식들이 결국 할 일이 뭐이겠습니까. 살인입니다. 살인!"

강현섭은 유경의 귀에 사랑을 속삭이듯 살인이란 말을 나즉히 그러나 힘있게 중얼거렸다. 유경은 그때 현관문밖에 여러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에 그들의 모습이 물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몹시 흔들리며 나타났다.

"유경씨, 왜 그래요?"

"살인보다 더 완전한 공포는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게 아닐까요? 당신은 필경 그런 공포를 맛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에게 그런 행운을 가져다줄 사람이 올 텐데요."

유경은 다시 누우며 그의 상처 난 얼굴에 제 뺨을 대며 속삭였다.

"현섭씨.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5. ()과 흑()

 

병이 회복된 성민은 곧 북아현동에 있는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집과 거리가 너무 멀어 권여사와 다투게 되었다.

"나는 가게랑 오피스텔까지 다 처분했을 땐 그저 집에서 쉬려고 했지. 하지만 하루 이틀 바깥 생활한 것도 아닌데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다시 장사를 할까 하고 구상 중이었단다. 물론 성직자가 되려는 너 때문에 술집은 아니야. 그런데 나보고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가자고? 나는 강남에서 터를 잡은 사람이야. 그쪽에서 새로 개척해 나가긴 싫다. 내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기나 하니? 가려면 너 혼자 가. 그리고 그 동네에 살면 너 때문에 나는 숨 막혀 못 살 거야. 그래, 아들을 위해서 그만한 희생도 못 하냐고 묻고 싶을 거야. 나란 여자는 나 하나 살기 위해 어린 너를 때어 놓기도 하고 네가 컸을 때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협박할 정도로 냉정한 인간인 줄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라. 에미 자격이 없어 네가 그 길을 택했을 때 아무 소리 못 했지만 나는 지금도 너에 대해 불만 투성이야."

권여사는 성민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성민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머니. 제가 드릴 말씀은 ... , 아닙니다. 그럼 저 혼자 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제 약속을 잊지 마세요. 늘 그랬던 것처럼 저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그치지 않을 겁니다. 제 어머니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는 불쌍한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 나 말고도 불쌍한 여자들은 지천으로 깔려 있어. 너는 손이 두 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많은 여자들을 구제해 주겠니? 하다 못해 창녀 같은 유경이 하나 건져 내지 못하면서!"

권여사는 성민의 손을 무섭게 밀쳐냈다. 성민은 권여사의 말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밖으로 나왔다. 성민은 풀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통 푸르름으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듯한 산속으로 들어간 성민은 그늘진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감았다. 두 여자의 얼굴이 선명히 나타났다. 권여사와 유경이었다. 두 사람 다 사랑하는 여자인데 모두 성민에게 비수를 던지는 모습이었다. 성민은 괴로움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주여. 두 사람 모두 제 여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겁니까? 어머니는 곧 저를 이해하시고 응원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경이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녀의 육체는 제가 형이라 부르던 사람에게 침범당했고, 그녀의 영혼은 쾌락의 악마에게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바보처럼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마치 유경이가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구경을 하듯 말입니다. 제가 택한 길은 결코 악의 길도 아니고, ()에 어긋나는 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유경이는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겁니까? 제가 틀렸습니까? 서는 한 번도 이 길에 대해 후회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밖에서 후회의 한숨소리가 들리고 나에게 수치감을 주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유경이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단지 제가 가는 길이 그녀에게 고통이 된다면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는 게 옳습니까? 그녀는 제가 육신은 벗어 버리고 영혼만 있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그녀에게 증명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녀의 눈이 올바로 뜨이고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만 해야 합니까? 저도 그녀를 안고 싶습니다. 그녀의 육체를 마음껏 탐하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유경이를 만났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마른 몸보다 병약한 영혼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데 제가 어떻게 그녀를 안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불쌍한 여자들, 고통 속에 빠져 두 가지의 인성(人性)중 악의 종자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여자들 중의 하나인 유경이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사랑이 그녀로부터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제가 아무리 당신의 말씀을 쉬지 않고 전하고 사람들에게 위로의 언행을 한다 해도 그녀가 제외된다면 저는 고통에 빠져 헤매일 겁니다. 제가 유경이를 원하는 게 욕심입니까?

, 두렵습니다. 당신의 응답이 두렵습니다. 만약 유경이와 제가 하나 되는 것이 당신 뜻이 아니라면 저는 물러서야 하는지요? 물러서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뜻을 거스리는 건지요? 제발,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저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속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제발, 그 전에 제게 응답해 주십시오."

눈물로 나무도, 하늘도, 흙도, 산 아래 아파트도 잘 보이지 않는 성민은 가지고 온 성경을 펼쳤다. 그는 눈물을 씻고 소리 내어 천천히 읽었다. 처음에는 울음으로 흔들리고 젖어 있던 목소리가 한 귀절씩 내려갈 때마다 또렷해지고 유월의 나뭇잎들처럼 싱그러워졌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辛苦),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인()같이 품고 도장(圖章)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陰府) 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俺沒)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家産)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성민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성경을 덮었다. 성민 은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며 크고 작은 풀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풀들아. 내가 또 이곳에 온다면 유경이와 같이 올 거란다. 그래서 아까 그 자리에서 읽은 귀절을 함께 노래하듯 너희들에게 들려줄께. 만약, 내가 유경이와 같이 오지 않고 혼자 온다면 그때는 너희들이 나의 수의(壽衣)가 되어 주고, 나의 무덤이 되어다오. 그러나 확신한다. 나는 유경이와 하나가 될 거란다. 너희들의 푸른 얼굴만치나 내 마음이 즐겁단다."

 

()과 흑() - 2

유경은 본래 구상했던 소설의 줄거리에 수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강현섭의 영향 탓이다. 그의 도박, 자해, 이혼에 대한 개념, 사랑법, 무엇 하나 종결짓지 않는 성격, 살인에 대한 욕구. 이런 익숙치 않은 언어와 뜻밖의 체험들이 그녀의 호기심을 부단히 자극했기 때문이다. 유경은 메모 노트에 그에 관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적어 내려 갔다.

'먼지가 뿌옇게 덮여 있는 식은 커피. 수 천 갈래의 부리만 있고 밑둥조차 보이지 않는 나무. 눅눅한 기운이 서려 있는 담배의 짙은 진(). 희박한 산소로 고통받고 있는 실험용기 안의 흰쥐. 변태(變態)! 질퍽거리는 진흙의 구렁. 먼지를 잔뜩 빨아들여 윙 소리만 나는 진공청소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시계의 바늘. 흩어지고 찢기어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개미 군대. 갑자기 몸을 뒤틀며 거품을 쏟아내는 간질병 환자의 괴성. 푸르스름한 담흑색의 가면을 쓰고 밤을 기다리는 독신남. 변태! 밑부분이 뭉그러지거나 움푹하게 빠져 허물어진 축대. 갱도 천정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차고 섬뜩한 물방울과 그 소리. 바짝 죄여서 안으로 오그라진 창백한 심장. 갑작스런 소나기로 물이 찬 하천가의 루핑으로 만든 집. 그 안에서 살려달라고 손을 흔드는 늙고 앞을 보지 못하는 노파, 그 노파의 때 절은 저고리의 동정, 그 동정 안에서 삶의 주름을 쉼없이 짜고 있는 비틀어진 기다란 목, 그 목에 걸린 검은 빛이 도는 누런 금목걸이, 그 목걸이를 핥는 하천의 범람. 변태!'

유경은 결국 그에게서 변태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이제껏 썼던 소설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다. 그녀는 완성하지 않은 소설 원고를 봉투에 담아 책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다락에서 내려왔다.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랫만에 무릎 위에 멈추는 짧고 하늘거리는 시폰으로 된 까만 치마를 입고 등판과 앞가슴 쪽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나 양팔은 한 겹이라 살이 훤히 비치는 칼라가 없는 블라우스를 입었다. 그리고 까만 하이힐을 신었다. 그녀는 연남동에 오고 나서는 좀처럼 거울도 보지 않고 치마도 즐겨 입지 않았다. 유경은 구두를 신은 채 마루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마치 강현섭과 있을 때 거울 속에 나타난 여자가 한껏 멋을 낸 듯 유경의 모습은 관능적이었다. 유경은 그 여자에게 활짝 웃음을 보냈다. 거울 속의 여자도 웃었다. 그 웃음을 얼굴에 담은 채 대문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윤성민이었다.

"유경아. 지금 북아현동에 왔어. 방을 하나 구했거든. 저녁쯤에 만날 수 있겠니?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할께."

유경은 성민이 설명하지 않아도 왜 그가 북아현동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인() 침을 받았구나, 좋아. 여덟 시쯤이 어떨까? 아현전철역 입구에 있는 하얀 오층짜리 건물 이층에 브람스라는 카페가 있어, 거기서 만나자. 그럼, 안녕."

전화를 끊고 난 유경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입고 있는 검은 옷처럼 갑자기 우울해져 느릿느릿 걸었다. 조그만 식품점 앞을 지나다 멈춰 섰다. 유경은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현섭씨가 웬일로 로이코스에 있죠?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요. 장소를 말해 줘요."

로이코스의 문을 열고 한 발 내딛던 유경이는 그만 고꾸라질 뻔했다. 홀 안은 칠흙처럼 어두웠다. 다만 유경의 사진이 걸려 있는 쪽의 천정 등 하나만 켜져 있고 그 자리에서 강현섭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현섭이 대형 사진처럼 보였다. 로이코스에는 손님은커녕 단 한 명의 종업원도 없었다. 패배한 왕국의 늙은 왕처럼 강현섭 혼자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 앉은 유경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담배를 꺼냈다. 강현섭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는 잠시 라이터불을 끄지 않았다.

"유경씨, 이것도 빛이라 할 수 있나요?"

"어두움은 그렇게 말하겠죠."

"명답이군요. 그럼 밝음은 뭐라고 할까요?"

"내가 밝음이라면 두 종류의 말 중 하나를 내뱉었겠죠. 하나는 너는 나의 종자(種子). 또 하나는 초라하고 쓰러질 것아, 차라리 어둠의 노예나 되라 하고 말이에요. 상황에 따라 선택이 되겠죠."

"오호! 그것도 명답이군요. 과연 현명하신 작가 선생님이시군요. 그런데 내가 이 라이터의 불빛이라면 어떻게 말하겠어요? 내 생각으로는 후자를 택하실 것 같군요."

강현섭은 라이터를 탁자 위에 팽개치며 말했다.

"유경씨. 대답을 하지 않는군요. , 그런데 오늘 의상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강현섭을 유혹하시려고? 하하하 ... 마치 로이코스 신화에 나오는 님프 같기도 하고 검은 벌 같기도 하군요. 로이코스의 얘기를 알아요?"

강현섭은 탁자 위로 유경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신화를 시작했다.

"로이코스라는 이름의 귀족 청년이 하루는 집 앞을 걷다가 우연히도 막 쓰러지려는 참나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무나 풀에도 사랑을 쏟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급히 하인들을 불러 버팀목을 대게 해주었습니다. 그 일로 생명을 건진 건 참나무만은 아니었죠. 참나무 근처에서 낮잠을 자던 어여쁜 님프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요. 님프는 그의 착한 마음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 너무도 고마와 로이코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생명을 구했습니다. 보답하고 싶습니다. 생명을 구해 준 당신이 원한다면 그 어떤 걸 드려도 아깝기는커녕 기쁠 겁니다. , 주저마시고 제게 요구하세요. 로이코스는 용기를 내어 기도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님프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님프는 선선히 승낙했습니다.

 

()과 흑() - 3

첫 만남에서 정작 먼저 사랑에 빠진 쪽은 님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님프가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자고 했습니다. 로이코스님.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 주세요. 오직 저만을 사랑해 주실 수 있죠? 그리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때는 항상 검은 벌이 와서 알려 줄 거예요. 님프는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부터 로이코스와 님프는 검은 벌을 사이에 두고 깊은 사랑에 빠져 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님프는 로이코스를 만나기 위해 검은 벌에게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늘 그런 식으로 두 연인은 만났으니까요. 검은 빛깔의 귀여운 벌은 신나서 빨리 날았습니다. 마침 로이코스는 정원에서 친구와 체스를 두고 있었습니다. 검은 벌이 가만히 지켜 보니 로이코스는 형편없이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로이코스는 초조한 얼굴을 했습니다. 검은 벌은 잠시 생각했죠. 지금 로이코스에게 님프의 약속을 전하면 저 분의 기분이 훨씬 나아지고 체스도 이기게 될지 몰라.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검은 벌은 로이코스에게 바짝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로이코스님. 님프께서 약속을 하셨어요. 나오시라고요. 그러나 잔뜩 긴장하여 체스에 빠진 로이코스의 귀에 검은 벌이 속삭이는 말은 윙윙거리는 예사 벌들의 날개짓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그래서 로이코스는 화를 내며 손으로 난폭하게 검은 벌을 쫓았습니다. 그만 검은 벌의 한쪽 날개가 부러졌습니다. 로이코스가 왜 그랬는지 모르는 검은 벌은 슬피 울며 님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님프는 상처를 입고 돌아온 검은 벌에게서 자세한 얘기를 듣자 분노에 몸을 떨었습니다. 서로 변함없이 사랑하자고 약속했는데 ... 님프의 분노는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도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님프는 사랑하는 자에게서 배반당한 게 너무도 억울해 로이코스의 시력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로이코스는 슬피 울며 검은 벌과 님프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영영 빛을 볼 수도 없게 되었답니다. 유경씨. 제 얘기가 너무 길었죠? 작가들은 예언하기를 좋아하더군요. 로이코스의 잃어버린 시력에 대해 예언을 해보시죠. 나는 당신을 만나고 나서 이 짧고 평범한 신화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보는 순간 실로 오랫만에 나의 운명을 공전(公轉)하고픈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잊고 있던 작은 신화가 생각났죠. 처음에는 한 번의 실수로 시력과 사랑을 잃어버린 로이코스의 운명처럼 내가 저 여자로 인해 같은 신화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던 중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것이 나와 연관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참나무를 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이코스의 운명 때문에 참나무가 쓰러진 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일이란 나무가 인간을 중심으로 살고 죽는 거지 인간이 나무를 위해 살고 죽는 건. 아니잖습니까? 강현섭이란 인간이 바로 그 나무입니다. 자기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쓰러지기도 하고 버팀목에 받혀지기도 하고, 그래서 죽기도 하고 살 수도 있고!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온순한 양처럼, 타인의 운명을 위해 - , 내게 타인이란 나 이외의 모두를 말합니다. 그중 가장 고약한 타인은 부모와 아내죠 수십 번씩 살다가 죽다가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부터 나는 타인을 중심으로 돌던 내 운명의 공전(公轉)을 자전(自轉)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과감한 시도였죠. 나의 고약한 타인 중 한 사람인 아버지는 자신의 외아들을 배신자라고 하며 극심히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늘 처음을 무너뜨리기가 어려울 뿐이지 한번 일을 저지르고 나면 용기도 생기고 나중에는 용기 따위도 필요 없이 무감각하게 처음보다 더 과한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앞길을 막고 늘어진 즐비한 주검을 보고 처음에는 떨기만 하다가 막상 하나의 주검을 밝고 지나 가고 나면 그다음의 주검들은 징검다리처럼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끔찍하고 혼란스런 전쟁터에서 자고, 일어나고, 걷고, 먹고, 울고 한 사람들이 전쟁 후에 악몽에 시달리기보다는 더 잘 자고, 멀리 걷고, 많이 먹고, 덜 우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타인과의 전쟁이 막상 끝나자 나는 더 멀리 다니고 많은 것을 탐닉했습니다. 돈이 많으니 부족할 게 없었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움직이는 로이코스 같은 귀족으로 변한 겁니다. 로이코스는 아무 힘이 없는 자입니다. 귀족이었기 때문에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참나무를 살렸습니다. 그는 하인 없이는 나무는커녕 풀 앞에서조차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입니다. 로이코스가 된 나에게 돈이란 아주 힘세고 충성스런 하인이었습니다. 나에겐 어리석은 하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아내입니다.

아내와 그 밖의 내게 고개 숙인 사람들은 모두들 총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은 나보다 나의 하인이 더 힘이 세고 나무를 살릴 수 있는 것도 하인이라는 걸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혼인한 모든 사람들은 내 앞에서 버젓이 나의 하인과 간음했습니다. 그들의 용서할 수 없는 통정(通情)! 그래도 나는 이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짓거리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배신감을 삭일 수 있는 방법으로 도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도박을 하면서도 그들이 동침을 요구해 오면 관을 뒤엎더라도 응했습니다. 하지만 깊이 빠져들어 가자 검은 벌을 쫓아낸 로이코스처림 나는 나의 혼인자들에게 거칠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박의 가장 장점이자 단점이 바로 그거죠. 도박할 땐 어떤 사람이건 무슨 일이건 다 잊게 해준다는 것 말입니다. 나는 도박이나 게임이라면 뭐든지 다 좋아합니다. 짐승은 도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도박은 지저분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저분한 배설 행위 놀이인지도 모릅니다. 얘기한 적 있죠. 다 털어 내면 시원하다고! 그래요. 나는 도박에서 배설의 쾌감을 느낍니다. , 얘기가 이상하게 헛도네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까요. 목이 마르군요."

강현섭은 주방의 불을 켜고 들어가 술을 꺼내 왔다. 유경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강현섭의 얘기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져서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현섭은 마지막 공판장에 선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유경씨, 나는 당신을 중심으로 나의 어지러운 생활을 정리하고 도박처럼 모든 걸 잊고 당신을 중심에 놓고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나란 인간 자체가 도박인데 어떡합니까, 게다가 나는 아내와의 이혼을 내 삶과의 이혼으로 생각하기에 신중하게, 최대한 판이 깨지지 않는 쪽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타인으로 생각한 지 오래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전으로 바뀐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기에 그녀는 고통을 밥처럼 매일 씹고 삼켜야 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녀는 율법에 얽매어 이혼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옆에서 볼 때 바보스럽기 짝이 없고 한편으로는 안아 주고 싶을 만큼 가련하기도 하죠.

그러나 내 눈에는 그녀가 바보처럼 보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일부러 타인처럼 굴었습니다. 처음에는 심하게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거부반응을 하던 그녀가 차차 나에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친정이 있는 강화도에 있기도 하고 이번처럼 미국으로 간 겁니다. 그런 데다 나는 어젯밤에 이 로이코스를 털어 버렸습니다. 시원합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과 흑() - 4

강현섭은 위스키를 연거푸 세 잔이나 마셨다.

"부인을 무척 사랑하는군요."

"사랑이 아니라 한집안 식구 같은 느낌입니다. 아내는 미국으로 간다며 덧붙여 말했어요. 나를 위해 기도한다나요. 미친 짓입니다. 그녀는 날마다 현명한 신에게 어리석은 기도를 올립니다. 나를 위한 기도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왜 그녀는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요. 내가 신이라도 바보 같은 그녀에게 지혜를 줄 겁니다. 어리석은 여자여, 그를 위해 울지 말고 너를 위해 가슴을 치고, 옷을 찢으며, 머리카락을 엉켜 놓으라고 명령할 겁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울 이유가 무엇이며, 신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할 까닭은 또 무업니까? 당신 앞에서 아내 얘기를 자꾸 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개운한 기분입니다. 고해를 하는 기분이거든요. 오늘 밤은 아파트를 털어낼 겁니다. 내 몸뚱이까지 그리고 붙여 주겠다고 나서는 자만 있다면, 그가 인간의 영혼을 양식으로 삼는 악마라도 영혼까지 내놓고 도박을 하고 싶습니다. 유경씨, 계속 나를 지켜 봐줘요. 나의 파산을! 나는 당신에게 좋은 소재(素材)일 거요. 그러나 이 소재를 좋은 작품으로 쓰기 위해선 유경씨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당신이 정말 나를 한 남자로 사랑해 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유경씨는 실험실의 흰쥐를 관찰하듯 나를 살피기에 급급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쉽게 이혼을 결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건 아닙니다. 투정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당신을 만나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현섭은 시계를 보고 유경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유경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으로는 도박의 즐거움을 설명하고 이혼에 대해 서슴없이 말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는 초조함의 그늘이 짙고 넓게 깔려 있었다.

"현섭씨. 종교적인 이유로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린 사람이라도 그들은 온전히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신과 같이 되려는 생각도, 신을 닮으려는 부단한 노력도 결국 욕심이니까요. 왜냐면 불가능한 걸 꿈꾸기 때문이죠. 신과 같이 되려면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안 하잖아요, 또 무지하고 순진한 촌부라도 밭의 콩잎을 자식의 손처럼 바라보는 것도 욕심이죠. 풍요와 자족(自足)을 바라는 마음은 결국 축적과 소유의 투쟁으로 잡초처럼 질기고 빠르게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바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은 탐욕이죠. 당신은 탐욕자예요. 다만 그 탐욕이 무엇에 대해 갈증과 허기가 진 건지 알 수 없군요. 그리고 당신의 초조한 눈은..."

", 그만하세요."

현섭은 수치가 드러난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손을 내저었다.

"유경씨. 그렇다면 나의 당신에 대한 감정도 탐욕일까요?"

유경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서로에게 동물의 냄새를 맡았기에 마음껏 탐욕을 부렸죠. 그 탐욕에 그럴듯한 핑계를 붙이기도 하면서, 그러나 탐욕은 결코 사랑이 아니에요. 나는 당신을 만나면서 한편,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이란 남자는 사랑으로 아파 본 경험도 없고 그 괴로움 속에 빠진 흔적도 없어요. 사랑받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사랑의 필요성은 아예 느껴 본 적도 없는, 살았다 하나 생명이 없는 인형과 같은 사람이죠. 건전지를 연결시켜 주면 웃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인형처럼 당신은 도박이라는 건전지를 충전시키고는 모든 걸 잊으려 애쓰고 자신의 탐욕을 노래와 웃음, 춤으로 위장시키고 있어요. 그 위장술은 너무도 완벽하여 당신은 마치 진리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죠. 그리고 그 하늘로부터 받은 날카로운 눈매와 차가운 얼굴로 인해 당신이 나타내는 모든 언어와 행위가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어요. 나도 처음에는 착시현상으로 하마터면 사랑이라는 펫말로 우리 두사람의 관계를 정당화이고 스스로는 기쁨에 대단한 에너지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그렇다고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유경이 말이 끝나자 강현섭은 두 팔을 위로 뻗치며 홀 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 나의 위대한 스승이며, 무시무시한 감시자여! 소름이 끼칩니다. 무서운 여자! 뱀의 혀로 몸뚱이 구석구석을 핥아냄을 당한 기분입니다. 하하하...역시 나의 눈은 정확했어요. 나는 당신을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공허합니다. 당신의 그 화려한 말들이 나에게 지금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 해 아래 모든 것이 헛것뿐이로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남자군요. 게다가 겁쟁이구! 당신이 헛것이라고 느끼는 해 아래의 세상을 정오의 빛 아래에서 깨달았다는 겁니까? 아니면 참회의 눈물이라도 흘리며 자신을 애통해하다가 알았다는 겁니까? 거짓말투성이! 당신은 정신과 영혼이 마비되어 버린 사람이에요. 모든 것을 몸으로 느끼고, 받아치고 하는 어설픈 시인의 감성이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과 같은 사람이죠. 당신이 헛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그 세 치 혀로 얼마나 자신을 질타해 봤어요? 맛난 것과 달콤한 것에 길들여진 혀로 고통의 눈물을 얼마나 맛보았나요? 줄이 풀린 미친개처럼 아무거나 물고 늘어지는 혀, 아무 데나 머리를 들이대고 핥는 그 혀로 기다려도 소용 없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혀와, 참아도 무엇 하나 이뤄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참고 있는 혀를 핥아 봤나요? 당신의 혀에서는 썩은 내와 변태의 괴성만이 들릴 뿐이에요. 그런데 나는 ... 그 혀를 아직도 내 입 안에 넣고 싶고, 마음껏 빨고 싶어요. , 용서하세요. 요 며칠 사이 당신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던 걸 말했을 뿐이에요. 두려워요. 변태라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이 겹친 애정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면 안되는데 말입니다. 우리 두 사람 중 하나는 소경이 아니어야 하고, 귀가 열린 자라 해야 하는데. 만약 우리가 계속 만난다면 두 사람 모두 파멸하고 말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그 길로 들어섰어요. 당신의 하인들을 다 내보내고 나면 참나무는커녕 풀잎 하나 받쳐 주지 못하잖아요? 그럼 다시는 검은 벌도 어여쁜 님프도 만날 수 없어요. 지금이라도 돌아올 수 없나요?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있어요. 당신의 새로운 하인도 될 수 있어요."

유경은 제 손으로 술을 따라 마셨다. 평소에 술을 하지 않는 그녀가 독한 위스키를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물을 들이키듯 했다. 유경의 얼굴은 첫잔 술이 내장을 채 훑기도 전에 붉은빛을 띠었다. 현섭은 그런 유경의 얼굴에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유경의 옆자리로 옮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현섭은 쉬지 않고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에 인을 치듯 속삭였다. 그는 뒤에 단추가 달린 유경의 블라우스를 벗기고 그녀의 목과 어깨, , 앞가슴을 입술과 손으로 애무했다.

유경은 현섭을 가볍게 밀어냈다. 의자에서 일어난 유경은 제 손으로 옷을 벗었다. 바로 자신의 대형 사진 앞에서 천정의 작은 등의 빛을 받고 천천히 옷을 벗는 유경의 손짓, 현섭을 삼킬 듯 보며 잠시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눈길, 홀 안에 파문처럼 퍼지는 옷 벗는 소리. 현섭은 팔짱을 끼고 나체의 유경을 한참이나 지켜본 후 그녀 앞에 섰다.

 

()과 흑() - 5

"사랑해, 사랑해 ... 나의 여자... "

현섭은 유경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속삭이며 자신도 셔츠의 단추를 풀려 했다. 그때 유경이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현섭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유경은 눈을 감고 더듬으며 그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현섭은 두 사람의 벗은 옷이 바닥에 자연스레 만들어 놓은 침상에 누웠다. 유경은 온 몸에서 뜨거운 습기가 물처럼 흐르는 그의 위에 엎드렸다. 현섭이 차가운 용모를 타고났다면 유경은 권여사의 말대로 요염한 창녀의 기질을 다분히 몸에 지니고 있는 여자다.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 이후 유경은 현섭과 관계를 가질 때마다 성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고, 그 순간만은 여왕처럼 현섭을 노리개로 삼고 싶었다. 현섭 역시 그런 그녀가 좋았다. 그는 자신의 몸 위에서 황홀한 몸짓과 신음소리를 내는 유경을 재촉했다. 더 황홀한 몸짓을, 더 크고 더 화려한 소리 아니 비명을 지르길, 유경은 그를 강간하고 있다는 기분에 쾌락의 즐거움이 고조에 달했다.

"누구와도, 무엇과도 당신을 바꾸지 않을 거야!"

한바탕 진저리를 치고난후 유경은 그의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 얼굴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현섭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땀에 홍건히 젖은 어깨를 이로 물었다. 순간 유경의 비명소리가 천정이 무너지듯 터졌다.

", 이 비명소리!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는 이번엔 그녀의 젖가슴을 물었다. 유경은 두 번째 비명을 터뜨렸으나 그를 막지는 않았다.

"유경씨. 더 크게 비명을 질러요! 비명을! 이제 내가 당신을 범할 거요."

현섭은 그녀의 온몸을 물었다. 그때마다 유경은 홀 안을 뒤흔드는 즐거움과 아픔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급기야 현섭은 유경의 비명소리에 사정했다. 유경의 젖은 몸 위에 엎딘 현섭은 그녀의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유경씨. 이제 당신과 성민씨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죠?"

순간 얼굴빛이 차갑게 변한 유경은 그를 떠밀고 일어났다.

"현섭씨. 샤워해요."

현섭은 더 이상 말 못 하고 화장실에 딸린 샤워실로 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씻겨 주었다.

"현섭씨. 먼저 나가세요."

두 사람의 대화는 갑자기 짧아졌다. 현섭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가자 유경은 한꺼풀 껍질을 벗겨내려는 듯 샤워기 밑에서 떠날 줄 몰랐다. 몸 여기저기에 현섭의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즐거웠다. 현섭의 말에 자신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후회되었다. 옷을 입은 유경은 물에 젖은 거울 앞에 섰다. 빨리 정리하고 나가 현섭을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빗으려 했다. 거울속에 여자가 있었다. 현섭과 있을 때마다 거울에 나타나는 여자다. 그러나 오늘은 웬지 낯설고 보기 흉했다. 유경은 거울 속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때 현섭이 샤워실 문을 열었다. 술잔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 난감한 표정이었다. 유경은 그의 목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러나 제가 잘못했어요. 미신처럼 그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내가 바보예요. 잠깐 기다리세요. 머리 빗고 갈께요."

유경은 문을 닫고 재빨리 거울 앞으로 갔다. 여자를 놓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대로 있었다. 유경은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누구지? 왜 나의 모습을 하고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그것도 강현섭과 같이 있을 때에만!"

유경은 여자의 검은 눈에 시선을 모았다. 여자의 눈은 비웃음으로 출렁거렸다. 유경은 거울에 이마가 닿을 듯 붙어섰다.

"너는 누구의 명령으로 날 따라다니는 거야? 말을 해! 네 입술은 크고 붉어 유혹의 숨소리가 나올 것 같구나."

유경의 다그침에 여자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여자는 거울을 쩍쩍 갈라놓으려는 듯 크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어리석은 여자의 입에선 과연 어리석은 잠언만이 쏟아지는군. 김유경. 너는 네 비밀을 모르고 있어. 네 안에 또 다른 두 명의 김유경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는 네가 들여마시는 썩은 내를 견디다 못해 어디론가 도망쳤지. 너를 무척 원망하더구나. 그러나 나는 너에게 무한히 감사해하지. 네가 강현섭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네 생명 끊어질 때까지 기쁨이 뭔지도 모르고 키가 자라지 않는 사람처럼 됐을거야. 진정으로 나는 네게 고마워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건 너보다 내가 더 강현섭을 원한다는 거야, 놀라긴. 애초에 내가 네 안에 없었다면 너는 강현섭에게 마음조차 쓰지 않았고, 강현섭 역시 너를 그냥 지나쳤을걸! 너는 돌아서 네 자리로 가길 바란다. 이제부터 그를 상대할 여자는 나야. 나는 할 일이 많아. 그에게 이혼을 권하고, 도박을 더욱 강하게 조장시키고, 보다 커다란 자해를 부추기고, 살인의 쾌락을 일깨워 주고, 마지막에는 강현섭의 파산과 파멸을 그의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여 줄거야. 너는 이 일을 할 수 없어. 이것은 용기가 있어야 하고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단 말이야. 네가 할 일은 따로 있어. 성민에게 가 봐. 분명 너에게서 도망친 김유경은 지금쯤 성민의 품에서 위로받고 있을 거야. 조금 더 지체하다가는 너는 김유경에게 성민이도 빼앗기게 돼. 나를 원망하지 마. 단호히 말하는데 너는 강현섭의 여자가 아니야. 그의 여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악마의 피를 받은 자야 해. 아까 보니 네 몸이 그럴싸한 자국으로 꽃이 핀 듯하더구나. 악마의 꽃! 악마의 꽃에는 열매가 없지. 대신 그 꽃의 부리에서 독한 액이 나와 네 몸을 짓무르게 하고 썩게 만들 거야. 악마의 균은 네 영혼까지 침범하여 사막에 내동댕이치겠지. 시체만 골라 먹는 짐승조차 구토할 만큼 부패시켜서 말이야. , 문을 열고 나가. 현섭에게 작별 인사를 해. 분명 그가 너의 손을 잡겠지만 결정은 너에게 달려 있어. 네가 뒤로 한 발자국만 물러선다면 그는 더 이상 너를 잡지 않을 거야. 그는 지금 파산지경이거든. 파산을 눈 앞에 둔 사람이란 누구나 그렇듯이 용기가 바짝 말라버리지."

여자는 유경에게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유경도 여자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녀의 손끝은 바닥을 향했다.

"사라져! 나는 네가 나의 적인 줄도 모르고 너를 보고 싶어 했고 너를 흉내 내려고 했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네가 내 안에서 나왔다고? 그럴듯한 얘기지만 속지 않는다. 너는 저 아래 지옥에서도 제일 밑바닥에서 나온 사악한 것! 강현섭을 구제시키는 척하면서 파멸의 문으로 몰고가는 악의 심부름꾼! 악의 것은 악에게로, 강현섭의 것은 강현섭에게로. 그럼, 너를 본래의 네 자리로 보내 주지."

유경은 있는 힘을 다해 거울을 내리쳤다. 거울 조각보다 핏방울이 먼저 유경의 눈에 들어왔다.

 

()과 흑() - 6

유경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늦게 브람스에 들어섰다. 성민은 그녀의 오른쪽 손등에서부터 팔목까지 감긴 흰 붕대를 보고 적이 놀라는 얼굴을 했다.

"성민아. 이 상처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줘. 그리고 ... 김유경이는 잘 있어? 지금 네 품에 안고 있는 건 아니야?"

성민은 물음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하며 유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경은 성민의 그런 모습이 우스워 큰 소리로 웃었다.

"네가 알게 뭐야, 하나님의 품에 안겨 영광송(榮光頌)만 부르느라 목이 쉬고, 세상을 쓰레기로만 여겨 빗자루질하느라 팔이 아프고, 뱃속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허기를 모르는 생수와 만나를 집어넣느라 목구멍이 부어 있는 신앙의 돼지!"

성민의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모욕을 참느라 꼭 다문 입술은 핏기를 잃었다.

"돼지! 신앙의 돼지! 그럼 나는 뭐야? 돼지의 밥? 돼지의 마누라? 웃기는군. 윤성민. 결혼하자구? 그래. 참 훌륭한 생각이야. 돼지와 창녀의 결혼? 악마도 즐거워하는 잔치가 되고, 네 하나님도 축복하는 의식이 될 거야."

그녀는 강현섭과 헤어지기 전까지 술을 마셔서 말할 때마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고 말소리도 비비 틀어졌다. 성민은 더 참지 못하고 유경을 일으켰다.

"가자, 유경아. 이젠 더 이상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후우 ... 드디어 윤성민의 반란이 시작된 건가? 그래, 가자. 네가 갈 곳은 햇빛 찬란한 곳일텐데 내가 무얼 두려워하겠니? , 떠나자. 사람들아, 신앙의 돼지의 뒤를 따르는 창녀를 보라!"

까페 브람스가 술렁거렸다. 사람들은 유경의 옷차림과 술에 취해 가누지 못하는 몸, 꼬여드는 말투로 그녀를 정말 창녀로 생각했다. 성민은 그녀를 꿰어차듯 안고는 힘들게 북아현동 집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윤성민의 자취방에 누울 때까지 끊임없이 성민을 모욕했고 두 차례 구토를 했다. 성민은 그녀를 방에 뉘인 다음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고 한쪽 팔 부분이 찢겨진 검은 블라우스를 벗겨 내고 제 셔츠로 갈아입혔다. 검은 블라우스는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지저분했다. 성민은 유경의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얼굴이 너무 차갑다고 느낀 성민은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이마에 얹어 주었다. 그는 수건의 온기가 가실만 하면 같은 일을 반복했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다 되고 있었다. 성민은 잠시 망설였다. 연남동 집에 연락한 다음 유경을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잠이 든 유경을 깨우지 못했다. 성민은 방문 쪽에 서서 왔다갔다 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며칠 사이 교회와 이사 문제로 약을 제 때 찾아 먹지 못한 탓도 있지만 유경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더구나 유경이 가끔씩 알아 듣기 힘든 말로 잠꼬대를 할 때마다 이상하게 그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건 유치한 질투에서 나오는 울렁거림이다. 나의 폐는 건재하다. 나의 폐는 천사라도 하나님의 승낙 없이는 건드릴 수 없다. 내가 질투를 하다니! 그것은 유경이를 모욕하는 거다. 유경이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토록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음을 보내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서로 하나가 될 것을 맹세한 사이다. 우리의 맹세는 아직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사랑을 능욕할 수 없다. 유경이의 강현섭에 대한 마음은 사랑이 아니다. 탐닉이다. 유경이는 강현섭의 육체 외에는 그에게서 원하는 게 없다. 문제는 유경이가 앞으로 계속 마약 환자처럼 육체를 찾아 다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게 하는 이 못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유경의 머리맡에 앉아 기도하다 깜빡 잠이 들었던 성민은 유경의 물을 찾는 소리에 놀라며 눈을 떴다. 성민이 떠다 준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과 작은 옷장, 아무렇게나 겹겹이 쌓인 많은 책들, 낯선 방. 단지 성민이만이 그녀의 눈에 평안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몸은 괜찮아? 헛소리를 심하게 하던데... "

유경은 지난 밤 일이 기억나진 않았지만 가위에 눌린 듯 꿈속에서 물처럼 흐르는 피 때문에 공포에 내내 떤 것은 생각이 났다.

"성민아, 미안해. 머리가 아파. 우리 나가서 잠시만 걷자."

"걸을 수 있겠니?"

"아직은 너보다 든든한 폐를 갖고 있으니 염려 마."

유경은 성민의 잠바를 걸치고 천천히 걸었다. 주택가라 사방은 조용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밤바람이 유경의 횡한 속을 세척하듯 부드럽게 불었다. 유경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 성민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지?"

"새벽 두 시야. 집에 전화해야지?"

"아니! 너와 얘기하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너와 밤을 보내는 것 같은데?"

"그래. 귀한 시 간이지."

"내가 많이 취했나 봐. 강현섭씨와 마셨어. 팔은 내 실수로 다친 거고."

"현섭이 형은 잘 있니? 어머니에게 들었는데 도박에 깊이 빠졌다고 그쪽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던데."

"소문?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지. 그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파산시키고 싶어 해. 감당할 용기도 없으면서. 그러고 보니 너는 두 여자에게서 현섭씨의 소식을 전해 듣는구나."

"유경아, 그 사람의 파산작업에 네가 받은 역할이 뭐지? 설마 그의 파산을 돕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어. 도움을 받고 있는 쪽이 오히려 나인. 것 같아. 나는 그를 통해 많은 걸 알게 됐어. 어둠이 빛보다 강렬하다는 것. 악이 선보다 뜨겁다는 것. 비명이 찬양보다 화려하다는 것. 헝클어짐이 정숙보다 아름답다는 것. 눈물이 웃음보다 싱싱하다는 것. 밤이 아침보다 눈부시다는 것. 육체가 영혼보다 감동적이라는 것!"

"유경아, 그만해! 나를 괴롭히는 네 언행은 모든 것이 고의적이야. 내 뼈를 마르게 하고 심장을 터뜨리려는 의도가 무어지?"

"너를 볼 때마다 노예가 생각나, 신에게 서원(誓願)을 하기 전까지 너는 혈색 좋은 자유인이었어. 그러나 지금은 비굴한 노예처럼 보여. 네 생명을 주관하고 있는 주인 앞에서 먹이를 사모하여 빙빙 도는 개처럼 말이야."

"그럼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한 강현섭에겐 왜 질타를 보내지 않지?"

성민은 아차했다.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한 제 혀를 무섭도록 나무랬다. 유경은 걸음을 멈췄다. 성민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서렸다.

"노예! 누가 누구에게 악마라 지칭한다는 거야? 스스로 선()의 사람이라고, 천사의 반열에 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야? 네가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성경의 행간행간마다 악마가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니?"

성민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 행간마다에 숨어 있는 악마들이 성경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시도하는 일이 바로 너처럼 스스로를 선의 자식이라고 믿게 하고, 자신과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악의 자식이란 칭호를 부여하게 하는 일이지."

"유경아. 너의 마음은 전쟁터 같구나."

"전쟁은 이미 끝났지."

"승자는? 그리고 패자가 받아야 할 형번은?"

"승자도 패자도 없어. 모두 죽은 싸움이니까. 스스로 죽은 자도 있고, 죽임을 당한 자도 있고. 죽인 자도 죽고, 살고 싶은 자도 죽는 전쟁이지."

 

()과 흑() - 7

"그렇지만 너는 지금 무언가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않니?"

"내 속에서 아무도 나를 주관하는 자가 없기에 혼란스러워. 선택할 힘도 없고."

"유경아. 그럼 나를 따라와. 나에 대한 멸시와 비아냥을 그치고 그만 나에게 오기 바란다. 힘들다면 내가 네게 갈테니 나를 받아 주든지."

", 그런 식의 말은 지긋지긋해. 말은 육체보다 경박해. 그만 너의 방으로 가자. 피곤해."

성민은 안타끼움에 유경의 팔을 잡았다.

"유경아. 약속해 줘. 네 몸은 나의 몸만 알고 있도록 해준다고. 그리고 네 영혼은 나의 영혼에만 반사된다고 말이야. 네 눈, , , , , , , 구석구석 나의 영토라고 말해 줘. 오늘은 내게 있어 많은 의미가 있는 날이야. 너를 그냥 보낼 수 없단다."

성민은 그녀를 어느 건물의 벽으로 밀어붙이고 간절히 말했다. 그러나 유경은 그를 밀쳐냈다.

"유경아. 난 너와 나란히 하나님 앞에 서서 축복받고 싶어. 제발 나를 그만 괴롭히렴."

성민은 다시 유경을 벽에 바짝 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울음에 가까웠다.

"성민아. 그 분이 정해준 배필이 바로 나란 말이지? 대단한 상상력을 지닌 사기꾼이구나. 아니면 자신이 음탕한 여인의 구세주라고 믿는 현대판 호세아이든지."

순간 성민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유경의 목을 두 손으로 조였다. 유경은 놀라 그를 밀쳐 내려고 했지만 무서운 얼굴로 목을 죄는 그의 힘은 아주 컸다.

"유경아. 너는 차라리 죽는 게 좋아. 네 육신에 피가 흐르는 한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과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네 스스로를 진흙탕에 빠뜨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너는 죽어야 해. 왜 나를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가는 거니? 그래서 네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너는 나의 소중한 여자야. 나중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나의 아내란 말이야. 그런데 그 악마 같은 놈의 혀에 쓰러지다니... "

성민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진해질수록 유경의 목을 조르고 있는 손의 힘이 약해졌다. 처음엔 두려움으로 버둥대던 유경은 잠시 후에는 눈을 감고 죽임을 당하기만 기다렸다. 유경의 목에서 손을 푼 성민은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은 땅으로 떨어지지만 울부짖음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깊은 기침을 몇 번 한 유경은 비틀거리며 성민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심한 현기증으로 성민의 발 앞에 풀썩 쓰러지며 구토를 했다. 그러나 지난 밤 모든 것을 다 토해낸 유경이라 시큼한 물만 쏟아냈다.

"성민아. 나는 요즈음 죽임을 당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속에서 무언가 다 빠져 버려 육체라는 껍질만 남은 것 같아. 그 육체는 부끄러움을 몰라."

유경은 겨우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유경은 어둠 속인 데도 수치심에 성민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성민은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유경이 뺨에 부볐다. 유경은 차마 그를 떨쳐내지 않았다. 그녀의 뺨을 적시는 그의 눈물이 따뜻한데다 실로 얼마 만에 그의 넓은 품에 안기는 건지 그 날을 헤아리기 힘들 만큼 오랜만의 포옹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해 주면서 성민의 방으로 돌아왔다. 성민은 불을 켜자마자 유경을 억지로 자리에 눕혔다.

"유경아. 아무 생각하지 말고 편안히 자. 내가 지켜줄께. 꿈도 꾸지 마."

성민은 유경의 가슴을 도닥거려 주었다. 유경은 성민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예전에 그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해 냈다. '엄지 공주이야기 아니? 나는 가끔 네 연인이기보다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든단다. 내가 아비면 너는 내 귀여운 딸일 테지.'

"유경아, 눈을 감고 내 말만 따라 다녀 봐. 그럼 쉽게 잠이 들 거야. 너는 너무 지쳐 있어. 그러나 편안히 하룻밤 잔다면 회복될 거야."

유경은 사실 낮에 현섭과 있었던 일, 거울을 깨뜨리는 바람에 피를 몹시 흘리고 술을 많이 마셔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될 정도로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게다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아직도 그의 이빨자국이 붉게 남아 있는 몸으로 성민의 순결한 잠자리에 든다고 생각하니 수치감에 차라리 깊은 잠에 빠지고 싶을 뿐이었다. 유경은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성민은 불을 끄고 대신 말문을 열었다. 유경은 그의 말을 천천히 따라갔다. 추위에 떨다 따뜻한 방에 누워 몸을 녹이는 사람처럼 한 걸음씩 따뜻한 꿈속으로 들어 갔다.

"유경아,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혼인 잔치에 함께 서 있을 걸 알았지.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을 하지 않아도 생명까지 나누며 영원토록 함께 지낼 것도 알았지. 유경아, 우리는 육신이 결합되기 이전에 이미 결혼(結魂)한 부부이지. 유경아.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맛있는 양식으로 생각하는 것같아. 만족을 모르는 식욕으로 우리를 먹고 또 먹고, 되새김질을 하고... 그러다가 희롱을 하기도 하고. 그런데도 나는 너무 오랫동안 너를 홀로 두었어. 내가 이겨 나갈 수 있었기에 너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단다. 미안하구나. 정말 너에게 어떻게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너에게 용서해 달라는 뜻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단지 너의 잠을 편하게 하는 일밖에는. 유경아, 깊이 잠들어라. 아침에 일어날 땐 모든 고통과 눈물을 깨끗이 씻어 버린 평안한 얼굴로 나와 마주 앉기를 바란단다."

성민의 이야기는 마드리갈처림 조용히 울려 퍼졌다. 유경은 어느새 나즉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유경이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어두웠다. 더듬거리며 불을 켜니 새벽 다섯 시였다. 책상 위에 하얀 물병이 있고 두 개의 투명한 물컵이 신랑 신부 인형처럼 붙어 서 있었다. 유경은 물을 마시고 기지개를 키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신문지 반절만 한 크기의 흰 종이를 보게 되었다.

[유경아. 새벽기도를 마치고 여섯 시쯤에 올께. 혹 그 전에 깨어나게 되면 날 기다려 주기 바란다. 아침식사와 커피를 나누고 싶어. 성민이가].

유경은 성민이 단지 이 말을 하기 위해 사용한 종이치고는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종이의 머리맡에 얌전히 누워 있는 까만 만년필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이 그녀에게 무언가 글을 원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경은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책들이 책상 위에도 수십 권이나 되었다. 유경은 만년필을 들었으나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유경은 창문을 열었다. 새벽은 이미 멀리 사라진 듯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밖을 살폈다. 그제서야 성민의 방이 건물 옥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민은 점점 하늘과 가까워지고, 나는 점점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유경은 잠시 우울해졌다.

유경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밤에 자기를 도닥거려 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성민에게 참회하고픈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 흑() - 8

[성민아. 너의 눈물, 너의 서러움, 너의 진실, 농축된 진실, 모두 아름답다. 나는 이제껏 무지하게 보내 왔다. 헛것에 신들려 있었다. 이제사 눈을 뜬 것 같다. 그전에는 귀로만 듣더니 이제사 눈으로 본다. 다시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리라. 단단한 자신이 생긴다. 다만 아쉬운 건 죄악을 거친 후에 알았다는 거다. 죄악! 어찌 인간은 이리 어리석은가. 정도(正道)를 감으로써는 선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스스로 죄악의 구렁에 한번, 두번... 거듭 나뒹군 후에야 진실에 눈뜨고 진실에 무릎을 꿇다니. - 이건. 순전히 왜! 인간을 사악하게 만든 신의 잘못이다. 그의 장난은 지나치다. 마치 인간을 도박물로 삼은 듯도 하다.

그동안 장님처럼 지낸 나는 죽었다. 윤성민!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그에게 나의 생을 헌신하며 살고 싶다. 그가 원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을 억제하는 것이라도 따르겠다. 그가 싫어하는 것이 나의 웃음을 눈물로 바꾼다 해도!

강현섭! ... 누구에게도 잘못을 돌릴 수 없다. 모든 과오는 내게 있다. 숨이 끊어질 정도로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십 개월간 어미 뱃속에서 자기의 주장 없이 기다리는 태아처럼 나도 다시 자궁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 있으면서 성민의 진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그를 믿으며 나를 출산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세상일이 그립고, 자궁 속이 답답하여도 참아야 한다. 두 남자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자비를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민에게는 자비의 증거로 결혼을 약속받고, 강현섭에게는 자비의 대가로 나와의 이혼을 약속받는다.

기쁘다! 눈을 막고 있던 비늘이 떨어져 나간 듯 모든 것이 처음 보는 신비로운 세상이다. 그리하여 이제 문밖으로 나가면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가 절뚝발이건, 소경이건, 귀머거리이건, 온몸에 부스럼 난 자이건, 입이 더러운 자이건, 썩은 내가 나는 자이건, 벙어리이건, 허리가 굽은 자이건, 팔이 잘려나간 자이건, 땅을 기는 자이건! 축복의 인사를 나누리라.

성민아, 김유경은 윤성민을 사랑한다.]

유경은 성민의 방에서 나왔다. 옥상에서 보니 교회의 십자탑이 여러 개 보였다. 그중 한 곳에서 피곤한 육신을 끌고 아침이 이토록 기도를 하고 있을 성민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유경은 옷을 갈아 입었다. 책상 위에 있는 탁상시계가 여섯 시를 향해 질주하듯 보였다. 유경은 여섯 시경에 그가 온다고 했지만 밖으로 나왔다. 몇 자 적은 것으로 자신이 함께 하지 않아도 그는 아침 식사와 커피를 즐거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유경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모래내시장으로 발걸음을 했다. 식당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빈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문밖에 서 있는 유경에게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홀은 미경과 중년 부인인 종업원 한 사람이 분주히 뛰는데 미경은 밥값 계산까지 맡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방 안은 보지 않아도 최례옥과 역시 중년의 종업원 둘이 정신없이 국을 퍼내고 설거지하는 모습이 유경의 눈에 선했다.

미경의 생각으로 상호를 '송이네 외할머니집'이라 하여 초록색 바탕에 송이네는 노란 색으로, 외할머니집은 하얀 색으로 도드라지게 만든 아크릴 간판을 달아서인지 식당은 제법 그럴싸하게 보인다. 손님들은 수색, 화전, 문산 등에서 새벽 첫차를 타고 물건을 싣고 오는 사람들과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간판 따위에 신경을 쓰진 않지만 그래도 유경은 간판을 보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유경은 계산대의 일이라도 도울 양으로 금고가 있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미경과 눈이 마주쳐 웃음을 보냈다. 미경인 함박웃음을 지으며 턱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유경은 미경의 얼굴이 오늘따라 상당히 밝아 보인다고 느끼며 몸을 일으켜 주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동수가 보였다. 그는 길고 까만 장화를 신고 앞치마를 두르고 자줏빛의 커다란 함지박 두 개를 앞에 두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최례옥의 얼굴은 그 때문인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다시 자리에 앉은 유경은 가슴 속이 자꾸 뜨거워짐을 억제할 수 없었다. 마치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응답받은 듯해 콧등이 시큰했다. 유경은 기쁜 마음으로 식당이 한산해질 때까지 계산일을 봤다.

", 이젠 우리도 밥먹어야지."

종업원들이 두 테이블에 밥을 차렸다. 때맞추어 빨간 책가방을 맨 송이가 들어왔다. 유경은 오랜만에 보는 송이의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추었다.

"웬일이냐? 유경이 네가 식당에서 노동을 하다니? 그나저나 훈이까지 있었으면 마치 내 환갑잔치 하는 기분이 들었겠어. 한 서방. 뭐해? 배고플 텐데 어서 식사하게나. 아줌마들도 앉아요."

최례옥은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유경은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으나 최례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장화 차림에 앞치마를 벗고는 송이와 미경 사이에 앉아 밥을 먹는 한동수를 자주 쳐다보며 말했다.

"송이 아빠도 여기서 같이 일하기로 했어. 어제 밤에 서울에 왔거든. 피곤할 테니 쉬라고 해도 새벽같이 나왔지 뭐냐. 나도 송이 아빠에게 정당하게 임금을 치를 거야. 그렇지 않았다가는 입만 열면 노동자 운운하며 떠드는 훈이한테 몰매 맞을라. 하하하 ... 아니, 그런데 네 손이 그게 뭐냐? 교통사고라도 난 거냐? 쯧쯧쯧. 너는 손이 생명인 사람인데 보험도 들지 않은 손을 어쩌자구. 그러고 보니 네나 나나 손으로 벌어 먹고사는 건 매일반이구나, 매일반이야. 그건 그렇고, 너 요새 툭하면 밖에서 잠자고 오는 버릇 좀 고쳐라. 송이 아빠랑 송이가 있어서 더 길게 말하지 않겠지만 너무 하지 않냐? 가뜩이나 아버지도 계시지 않아 집에 오면 썰렁하기 짝이 없는데, 훈이도 매일 열두 시 땡이지, 너는 아예 오지도 않지. 에미가 몹쓸병에 걸려 말라죽을 지경이야. 아이고, 한 서방. 미안하네. 아침부터 김빠진 소주 소리나 해서 말이야. 한 서방. 우리 잘 해보자구. 장인 양반이 한이 맺혀 돌아가셨는데 이젠 두 눈 편히 감으실 거야. 자네가 와서 말이야! 어이구, 기분 좋다. 미경아, 쏘주 딱 한 잔만 마시자, ?"

최례옥은 술 마시는 시늉을 했다.

"엄마두. 송이가 흉봐요."

미경이 눈을 흘기자 최례옥은 바로 앞에 앉은 송이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안 돼요. 우리 선생님이 술 마시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 못된데요. 그래서 아빠가 술 마시면 못 마시게 하라고 하셨어요."

"? 하이고, 그 선생님은 별 걸 다 가르치시네. 너의 선생님 여자지? 그럼 그렇지! 만약 남자였다면... "

"엄마! 그만해요."

미경인 아까보다 큰 소리로 막았다. 그러자 한동수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어제 밤에 장모님께는 대략 말씀을 드리긴 드렸지만 한 번 더 말하죠. 처형도 있고 하니... 허튼 생각, 허튼 꿈 꾸지 않고 장모님과 송이 엄마와 함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장인 어른께 사죄하고, 송이 엄마에게 용서받고, 그리고 제 자신을 스스로 벌주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거든요. 처형도 많이 도와줘요. 워낙 저란 인간이 기질이 그렇다 보니 쉽게 흔들릴 수도 있어서..."

한동수는 숟가락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식당 안에 침묵이 흘렀다. 미경과 최례옥은 약속이나 한 듯 앞치마로 눈물을 닦아 냈다.

"송이 아빠. 고마워요. 지금 우리 집 분위기에 송이 아빠는 마치 구세주처럼 생각되요. 나나 훈이나 도움은커녕 짐이 되고 있는 존재들인데. 송이 아빠와 송이 엄마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어지러웠을 거에요. 그러니 늘 우리들 옆에 있어 주세요. 송이를 위해서도 그래요."

 

()과 흑() - 9

유경은 한동수의 손을 잡고 얘기하고 싶을 만큼 그에게 고마워했다. 다시 식사는 시끌법적하게 진행되었다. 송이가 학교에 가고 최례옥도 물품구입 때문에 나갔다. 부엌에서 한동수가 설거지를 하고 두 종업원이 홀을 청소하는 동안 유경과 미경은 계산대에 의자를 끌어다 나란히 앉았다.

"언니, 궁금하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를 지켜보니 안 되겠더라구. 통 말도 안 하고 웃지도 않고 게다가 지겹게 듣던 욕도 안 하니까 불안하더라구. 또 송이 아빠도 너무 안됐고. 그래서 신부님께 모든 걸 사실대로 송이 아빠에게 얘기해달라고 하고 허락된다면 서울로 보내 주십사 했지. 그랬더니 다음 날 올라온거야. 어제 밤에 대단했댔어. 언니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데, 글쎄, 송이 아빠 좀 봐. 식당에 오자마자 엄마한테 큰절을 하고는 울고불고 했다니까. 용서해달라고. 그 바람에 있던 손님들 다 나가고 엄마랑 송이 아빠랑 대성통곡을 하는데 마치 누가 크게 우나, 누가 더 서러움이 많은가, 누가 더 눈물이 많은가 하고 내기를 하는 것 같더라구. 한참 울고 난 뒤에 엄마가 송이 아빠 손을 잡고 말했지. 한 서방, 우리 성공해서 다시 한번 잘살아 보자구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송이 아빠도 큰 소릴 치더라구. 장모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 그동안 길들여진 혀와 인생 경험으로 단단해진 이 두 팔로 장인어른과 장모님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훈이가 왔는데 이번엔 훈이랑 송이 아빠랑 술을 마셨어. 가만 보니까 훈이도 사람 많이 됐더라구. 그 전엔 송이 아빠를 얼마나 무시했댔어. 그래도 송이 아빠 나타나니까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송이더라구. 다시는 아빠 먼 데 가지 마 하고 우는 바람에 제이의 눈물바다가 됐지 뭐야. 내가 어제 밤에 곰곰히 생각했는데 언니도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서 안정되게 살았으면 해. 언니. 요새 왜 성민이 오빠는 통 보이지 않아? 싸웠어? 싸우지 마. 싸우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구. 성질 나빠지고, 혈압 오르고, 일할 맛 안 생기고, 짜증 나고, 다른 사람한테까지 신경질 부리고 하는 것밖에 더 있어? 성민이 오빠도 불쌍한 사람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부모 사랑 못 받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키워지고 그러다가 십 년만에 다시 만난 엄마랑 사이도 그렇고. 또 몸까지 망가졌으니...언니, 성민이 오빠한테 잘해 줘. 그 오빠를 볼 때마다 친오빠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우리 부부를 봐. 지지고 볶고 해도 잘 살잖아. 언니네야 교양 있고 두 사람 다 배울 만큼 배운데다 욕심도 없는 사람들인데 얼마나 잘 살겠어. 엄마가 언니한테 직접 말을 안 해 서 그렇지 나랑 둘이 있을 때 언니를 얼마나 생각하는 줄 알아? 또 요새는 웬일인지 자꾸 언니 결혼문제를 꺼내는 거야. 듣기 싫을 정도로 말이야. 올 겨울쯤에 결혼해. 아니면 내년 봄에 하든지. 그래서 언니는 안정된 몸과 마음으로 글 열심히 쓰고, 성민이 오빠도, 호호호. 이러다가 언니 결혼하고 나서도 형부라고 하지 않고 성민이 오빠라고 부르겠네."

유경은 미경의 말을 들으며 성민이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사진처럼 떠올렸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나와 남동생 같기도 한 사진이다.

"염려마, 미경아, 그렇잖아도 많이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럼 수고해. 나도 일해야지."

유경은 일어섰다. 주방으로 가 설거지를 하는 한동수를 불렀다. 그는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유경이 쪽으로 왔다. 앞치마가 온통 물에 젖어 겉옷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처형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요. 다시는 나한테 고맙다니 미안하다니 하는 말하면 식당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허허허... 어서 들어가요. 올해가 가기 전에 처형 사진이 큼직하게 박힌 소설책이나 나왔으면 좋겠네요."

유경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

'아버지. 마치 좋은 일들이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가 가시고 나자 제 때를 만난 듯 몰려 나오니 기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에요. 그러나 아버지도 기쁘시죠? 그렇죠?'

유경은 철로변을 따라 길게 쳐진 철망 안쪽에 빼곡히 자란 개나리의 가지 하나를 잡아다녔다. 그러자 뿌리째 뽑히듯 개나리나무 한 그루가 당겨져 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 가족이란 바로 이런 거군요. 그런데 저는 늘 나란 존재를 철저히 분리시켜 왔었어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끝 갈 데도 없어요. 그러고 나니 탕자처럼 돌아온 기분이에요. , 저 하늘에 아버지가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제게 답해 주세요.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이에요. 아버지, 사랑해요.'

유경은 잡았던 개나리 가지를 놓고 하늘을 올려봤다. 물론 하늘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설사 소리가 난다 해도 쉴새 없이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으로 땅의 귀를 가진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유경은 자신이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했다고 비식 웃으며 얼굴을 돌렸다. 그때 뭉쳐져 있는 듯한 구름들이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그 빈 자리에서 오전 햇살이 샘물처럼 조용히 쏟아졌다. 유경은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가리며 다시 걸었다.

단 며칠 사이에 아파트를 털어버린 현섭은 로이코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로이코스는 아직 열흘 동안은 현섭의 소유물이다. 그는 어젯밤부터 오전 내내 도박을 하느라 충혈된 눈으로 술병을 높이 들었다.

"나의 마지막 구세주시여! 나의 최초의 연인이여! 나의 변함없는 친구여! 나의 충성스런 노예여! 이제 나와 함께 먼 길을 떠나자. 아주아주 먼 길을. 그 길은 나도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나라로 가는 길이니라. 그러나 때가 되지 않았지. 아직 나에게는 버릴 것이 너무 많아!"

그는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냈다. 그리고는 다시 앉았다. 편지였다. 그는 사납게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읽으려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전화기를 들었다.

"김유경씨요? 당신에게 보여 줄 게 있어요. 단 십 분 내로 로이코스에 오십시오. 단 십 분 내요! 일 분이라도 늦으면 나를 경멸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당신을 응징하겠소. 아하, 그렇다고 겁먹지 말아요.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니까 말이요. 이 도도한 여자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현섭은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술을 마셨다.

", 밤이여 어서 오라. 낮에는 판에 끼어들지 못하는 겁쟁이 강현섭을 위해 밤이여 속히 오너라. 그러면 마음껏 너를 애무해 주리라. 공짜로 말이야!"

소리를 지르며 무대에 선 사람처럼 손짓을 하던 현섭은 탁자 위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술병이 넘어지며 편지뿐 아니라 현섭의 옷소매를 흥건히 적셨다. 그러나 현섭은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알고 글을 쓰다 달려온 유경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그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며칠 밤을 새며 도박을 하느라 지친 현섭이 쉽게 깨지 않을 듯했다. 유경은 탁자에서 술에 젖은 편지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편지를 걷어내 옆 의자에 걸쳐 놓았다. 그리고 탁자의 술도 닦았다. 급히 오느라 책 한 권 들고 나오지 않은 유경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갑을 주워 담배를 피웠다. 헝클어진 머리를 양팔에 파묻듯 하고는 잠든 현섭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분노가 치밀었다.

 

()과 흑() - 10

'무엇이 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밤마다 도박장을 찾아다니게 하는가? 내가 처음 강현섭을 만을 때만 해도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할 줄 알아 그만큼 절제하고 살았다. 사진기 앞에서 아내와 아들과 다정하게 포즈를 잡을 줄도 알아 어느 정도는 밤을 견뎌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저 사람의 혼이 악마에게 놀아난 건가. 악마의 짓이 아니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저 남자의 옆에 있으면서 무얼 했는가. 성민의 말대로 파산 작업을 부채질한 셈인가. 그러한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이제 와 비겁하게 그에게서 떠난다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계속 저 사람 옆에 있을 수는 없다. 저 남자는 부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악에게서 떠나는 최선의 방법이다. , 내가 저 남자 옆에서 고작 한 일이라곤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게 그의 눈을 흐리게 한 것과 그른 것을 그르다고 생각지 못하게 그의 영혼을 마비시킨 것별이다. 나는 이대로 저 사람에게서 떠날 수 없다. 만약 그대로 떠난다면 평생 나의 비겁함으로 괴로움에 짓눌려 살지 모른다. 이것은 여러 사람을 망치는 일이다. 성민은 내가 없다 해도 능히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저 남자는 그렇지 못하다. 부인과 결합할 때까지라도 곁에 있어 줘야 한다. 저 남자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당연히 치르어야 할 대가다. 대가...'

그러다 유경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요즈음 유경은 글을 쓰느라 밤을 자주 새워 피곤하긴 현섭과 마찬가지였다. 유경이 잠에 든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얼굴에 축축한 기운이 닿는 바람에 유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왔군요. 그래요, 당신은 와야 해요. 어디에 있던 내게 와야 해요. 그것도 아주 즉시 말입니다. , 그런데 왜 내가, 유경씨를 오라 했지... 아하, 편지였지. ? 그런데 편지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는 탁자를 거칠게 두 손으로 몰아쳤다. 마룻바닥에 술병과 술잔, 재떨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술병과 술잔이 깨지는 소리에 유경은 몸을 움추렸다.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는 손의 상처가 쿡 쑤시는 듯했다. 현섭은 깨진 술병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유경에게 가까이 와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유경은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의자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하하 ... 도도한 김유경씨도 겁을 먹다니! 나는 단지 당신의 마음이 유리처럼 투명하다는 걸 말해 주려고 했을 뿐인데."

현섭은 술병 조각을 바닥에 내던지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유경은 재빨리 옆 의자에 걸쳐 놓았던 편지를 들었다. 편지는 물기를 머금은 채 축축했다.

"당신이 찾는 편지예요?"

유경은 현섭에게 편지를 건네 주었다. 현섭은 잃어버렸던 귀중품을 다시 찾은 사람처럼 재빨리 받았다.

", 그래요. 바로 이 편지예요. 이 편지에는 독()이 그득 발라져 있어요. 이 편지를 읽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해야 되죠. 일명 죽음의 편지랍니다. , 이제부터 내가 이 죽음의 편지를 읽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편지가 물투성이지? 오호, 술이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이 편지가 술에 취했군. 그럼 그렇지. 술에 젖은 죽음의 편지라? 말 되지, 유경씨. 내가 읽을 때 술에 빠지든지, 독에 빠지든지 아니면 죽음에 취하든지 아무거나 하나만 선택하십시오. 당신에겐 선택의 권리가 있거든요."

현섭은 자리에 앉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유경은 눈을 감고 담배를 피우며 그의 목소리를 쫓아갔다.

[늘 나에게 불안을 무상(無償)으로 주는 당신에게.]

"하하하... 거짓말쟁이! 내가 너에게 불안을 무상으로 주었다고? 바보 같은 여자. 나는 네 눈물과 고통을 내 불안과 맞바꾸었단 말이야."

[미국에 도착하니 고모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낯선 얼굴뿐이라 처음에는 서러움이 온 몸에 감돌았으나 시간이 지나니까 오히려 그 점이 더 편안하더군요. 한국에선 늘 남의 이목 때문에 문밖에 나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웠거든요.]

"거짓말! 그게 아니라 강현섭의 마누라라는 꼬리표가 싫었겠지."

[푸르뫼는 잘 있어요.]

"이거 봐요. 고의적으로 내 아들, 푸르뫼에 관한 얘기는 이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어요. 아직 우리는 이혼하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있어요. 겉으로는 온유의 상징처럼 생글생글 웃고 순종의 표본처럼 예, 예 하면서 푸르뫼에 관해서 단 한 마디로 끝맺는 교활한 여자! 결국 나와 푸르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라는 걸 암시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 개월을 약속하고 미국에 왔지만 해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어요. 이혼하겠어요. 이혼 수속을 하기 위해 일주일 안으로 한국에 가겠어요. 일이 지연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날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에요.]

"들었죠, 유경씨. 나는 그토록 이혼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나의 파산과 때를 같이 하고 있잖습니까!"

[그럼,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수연 씀.]

"하나님의 은총? 파산이 은총이란 말인가요. , 세 달이 일주일로 감해졌어요."

현섭은 편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일주일, , 일주일이라니!"

현섭은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꿇어 앉아 무릎으로 기어 유경이 발 앞에 멈췄다. 유경은 그를 일으키려 했다.

"유경씨, 나를 그냥 놔둬요. 대신 대답해 줘요. 나는 어떡해야 하나요?"

현섭은 꿇어앉은 채 유경의 치마에 거칠게 얼굴을 파묻었다. 그 바람에 치마가 위로 올라가자 그는 유경의 허벅지를 파고들며 혀로 핥았다. 순간 유경은 그와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다. 하지만 곧 매섭게 자기를 질책했다.

'김유경. 그건 악이다. (evil)이란 생(live)을 거꾸로 쓴 것처럼 생을 역류한다. 생을 역류한다는 건 생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말이다. 내가 이 남자와 또 관계를 맺는다면, 생의 질서를 깨뜨리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다른 점이 무언가. 더구나 수치스런 몸뚱이지만 이 몸뚱일 귀히 여기는 자가 있지 않은가. 그는 이 남자처럼 육욕의 혀로 핥아가는 뱀이 아니다. 자기의 양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어린 양을 돌보는 순진한 목동이다.'

유경은 성민의 얼굴을 떠올리며 크게 심호흡했다.

'여기서 또 무너지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 그리고 어떠한 자비의 신에게서도 용서받지 못한다. ,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그러나 현섭의 불처럼 뜨거워진 혀는 그녀의 음부로 향했다. 유경은 현섭의 머리를 두 손으로 안았다.

"현섭씨. 안돼요. 우리 이젠 반복하지 말아요, 제발!"

유경이 하소연하듯 말하자 현섭은 얼굴을 들었다. 아직도 충혈이 풀리지 않은 두 눈은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는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성민이 그 자식 때문이죠?"

"아니에요. 바로 나예요!"

유경은 그를 밀쳐내며 치마를 내렸다. 현섭은 바닥의 유리 조각을 구둣발로 세차게 구석으로 차버렸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그를 상관짓지 마세요. 그는 이런 자리에 불려 오지도 않지만 감히 우리들이 부를 수 없는 사람이에요."

"오호라, 결국 그를 사랑하고 그래서 그에게 돌아간다 그 말씀이군요?"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로 갈 뿐이에요."

"제 자리? 갈수록 묘한 말만 하시는군! 그럼 이제 바람과 함께 사라지듯 나를 떠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신 셈이군요?"

현섭은 의자에 앉으며 재빨리 유경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잡힌 채 말했다.

 

()과 흑() - 11

"왜 선전포고라고 생각하죠?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 내린 결론인데요."

"전쟁을 끝낸다고? 나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당신은 갈 수 없어요. 나랑 싸워서 누가 이기든 지든 결판을 내야 해요."

"당신은 지금 나와의 문제가 아니라 이혼에 대해 더 걱정하셔야 해요. 부인이 오면 용서를 빌어요. 기회를 달라고 하세요."

"유경씨. 그러나 나는 아내를 붙들기에는 이제 가진 게 하나도 없어요."

"당신이 있잖아요. 강현섭이라는 남자가!"

"강현섭? 하하하 ...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악마에게 팔렸지요. 도박에 져서 손가락 하나 남기지 않고 몽땅 악마에게 털렸답니다."

"그럼,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누구에요?"

"바로 강현섭의 혼()입니다. 악마란 놈은 영악한 듯하면서도 자기에게 찬사를 보내는 사람 앞에선 침을 질질 흘리거든요. 내 몸뚱이를 넘겨줄 때 나는 악마를 찬양했죠. , 하늘에 계신 자보다 큰 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땅과 바다와 산과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하늘을 만드신 이보다 능력 많으신 이여, 그 큰 권능을 찬송할지어다. 나의 생명을 만들고 나의 죽음도 주관하시는 이여, 나를 받으소서. 받으소서! 하하하 ... 그때 나는 내 영혼을 쏙 빼놓았죠. 그런데 그 악마란 놈은 게걸대고 좋아하기만 하더군요."

"제게는 그 말이 거꾸로 들립니다. 당신은 착각하고 있어요. 내 앞에 있는 강현섭은 영혼이 빠져 나가 껍질만 있는, 생명이 있다 하나 죽은 육체뿐이에요. 그 육체마저 강탈당하기 전에 부인과 결합하세요. 그것은 당신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걸 뜻하잖아요."

"나쁜 여자! 왜 나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요? 겨우 이제서야 나의 실체를 알았기에 도망가려는 거요? 당신처럼 도도하고 잘난 여자가 이제야 나를 알았소? 거짓말! 당신은 이미 나를 알았지. 그런데도 옆에 있다가 나의 파산이 빛처럼 환히 보이니 가신다고?"

", 당신이 그렇게 말하리라 짐작했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다만 당신의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부인과의 화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화해하세요. 부인이 원하는 건 당신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에요. 찢기고, 병들고, 피에 젖고, 외로움에 떠는 그래서 절뚝이며 돌아오는 영혼이에요. 바로 당신 같은 영혼이죠! 당신은 그저 돌아가기만 하면 돼요. 문도 열려 있고, 방마다 불도 켜져 있어요. 식지 않은 음식이 차려져 있고 새 옷과 새 구두가 준비되어 있죠. 아내는 문밖에서 바람의 조롱소리를 참아내며 그림자라도 찾으려 애쓰고, 아이는 눈을 부비며 기다리며, 마당의 개까지도 온갖 소리들 중에 제 주인의 눈물소리를 가려내느라 자기의 귀를 학대하고 있어요. 일주일 안으로 부인이 온다고 했죠. 당신이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할 대상은 바로 부인이에요. 사랑하잖아요. 당신의 부인과 아이를."

"당신은 철부지 소녀처럼 꿈만 꾸고 있군요. 그것은 서양의 그림책에 나오는 책에서나 이루어질 이야기.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조금 더 있으면 나는 악마를 만나러 가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현섭은 일어나 유경에게 다가 왔다. 현섭은 재빨리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위에 엎드렸다. 유경이 뺨을 치려 하자 그는 웃으며 얼굴을 그녀에게 댔다.

"때리시요. 악마의 손보다 매서운가 비교 좀 해봅시다. , 때려요."

유경은 차마 때리지 못하고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현섭보다 더 이글거리는 욕망이 뱃속에서 포화상태가 되어 넘치려 하는 자신의 몸뚱이가 더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요. 개처럼 해요. 나는 개입니다. !"

유경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현섭은 천천히 침을 닦더니 힘을 아끼지 않고 그녀의 뺨을 서너 차례 때렸다. 그만 유경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현섭은 옆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의 빨개진 얼굴에 입을 맞추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가끔씩 당신을 죽이는 상상도 해봤었지. 하하하..."

현섭은 정신을 잃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려 갔다.

차에서 내린 유경은 수치심과 분노에 땅조차 내려다보기 힘들어 눈을 감았다.

"유경씨. 용서해요. 나는 그래야만 당신이 내 여자라는 걸 확인하게 되죠. 그럼, 또 만나요."

유경을 집까지 바래다준 현섭은 그녀에게 태연히 긴 포옹을 했다. 유경은 죽은 사람처럼 그대로 있었다.

"사랑해요. 죽음까지 같이 할거요!"

현섭은 의미심장한. 말을 유경의 귀에 총소리처럼 울려 놓고 차에 올랐다. 유경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다락에 올라가고 싶었지만 발을 옮길 기운마저 없었다. 마치 포악한 짐승들에게 번갈아 추행을 당한 것 같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몸 속에서 열이 올라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가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게다가 그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악몽이 다시 유경을 괴롭혔다.

바람이 분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쥔다. 손바닥에 닿는 목의 따뜻함에 한참을 그대로 있는다. 그때 기차가 온다. 간수가 붉은 깃발을 흔든다. 깃발은 핏빛 물결이 되어 출렁거린다. 놀람은 잠시뿐. 그 핏빛 물결이 나를 송두리째 삼키려 덤벼든다는 걸 알고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너무 늦다. 이미 핏빛 물결은 내 몸을 휘감고 나는 숨이 막혀 허우적거린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수십 마리의 검은 돼지 떼들이 어디선가 쏟아져 나온다. 검은 무리는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서로 물고 뜯으며 괴성을 질러댄다. 질기고 두터운 살가죽이 찢겨지듯 갈라지며 피가 물처럼 흐르는 살점들이 후들후들 떨어지고 심지어는 뼈마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소름이 끼친다. 자기 살마저 뜯어 먹으려는 탐욕은 나에게까지 이빨을 들이민다. 검은 돼지 떼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든다. 살점이 너덜거리는 검은 무리의 입에서 구토가 날 정도로 피비린내가 나고 마치 악마가 괴로워할 땐 저런 소리들을 내겠구나 하고 생각이 드는 괴성이 끊이지 않는다. 피로 범벅이 된 추악한 무리가 바로 내 앞에서 악마의 신음 소리를 내고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입을 벌린다. 피비린내. 추악한 갈구의 괴성. , 안돼! 나는 있는 힘껏 두 팔을 내저으며 소리친다. 성민이, 도와줘! 그런데 누군가 나의 입을 막는다. 강현섭이다. 성민이 뛰어오고 있다. 강현섭은 나를 잡아 끌고 뒤로 도망친다. 피를 밟고 도망친다. 성민이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와 강현섭이 밟고 지나간 짐승의 피의 자리가 흰 눈처럼 된다. 그러나 그가 뛰어오는 것보다 강현섭이 도망치는 걸음이 더 빠르다. 그럴수록 성민과 점점 멀어진다. 안된다. 그와 멀어지면 죽음과 가까와진다. 강현섭은 성민이 보는 앞에서 나의 옷을 벗긴다. 성민아, 도와줘!

 

()과 흑() - 12

유경이 팔을 저으며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유경아, 빨리 병원에 가자. 열이 보통이 아니야."

최례옥은 걱정스런 얼굴로 유경의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유경은 일어나려다 어지러움증에 다시 누웠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어요? 죄송해요. 어머니를 전혀 돕지도 못하면서..."

"누가 너보고 지금 그런 걱정하랬어? 미경이랑 한 서방이 아마 백 사람 몫은 할걸.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글이나 써. 그나저나 집에 비상약도 없는데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몸살 같기도 하고... "

"어머니 괜찮아요. 푹 자고 나면 개운할 거예요. 훈이는 아직 안 왔어요?"

"훈이? 너희들은 참 재밌는 애들이야. 네가 안 들어 오는 날은 훈이가 그렇게 묻고, 훈이가 안 들어 온 날은 네가 또 그렇게 묻고, 어쨌거나 나는 훈이가 말로만 그러지 데모하는 애들 틈에 끼지 않아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나는 훈이한테 바라는 게 하나도 없어. 그저 데모 안 하고 학교 잘 다니다가, 학교도 장학금 안 받고 다녀도 좋아. 그저 학교 잘 다니다가 좋은데 취직이나 해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뿐이지. 아버지도 계시지 않고 집에 남자라곤 훈이 하난데 만약 데모해서 잡혀가고 앞날이 컴컴해 봐라. 나는 뭘 믿고 살겠냐? 안 그래?"

"...그러나 그 소망이 결코 소박한 게 아네요. 제일 어려운 주문인지도 몰라요.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살기는 쉬워도 이 도시 속에서 정도를 걸으며 산다는 건 산속 외딴 곳에서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죠. 눈만 뜨면 온통 유혹의 난장판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건가. 우리 애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없어. 네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서 다닐 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은 못 돼도 대통령 며느리감 정도로는 생각하고 기대를 걸었지. 그런데 그 우라질 신춘인지 입춘인지 하고 나더니 완전히 딴 사람이 됐잖니? 어이고, , 미안하구나.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니 이해해 줘라. 그리고 미경이도 그렇잖니. 학교 잘 다니다가 유부남에다가 영감처럼 나이도 많고, 사기꾼 같은 놈이랑 결혼한다고 애까지 배고 학교를 때려 치운 거 말이야. 내가 이 생각만 하면 혈압이 오르고 한 서방을 사람취급도 하고 싶지 않지만 송이랑 미경이를 생각해서 내가 한 서방, 한 서방 하면서 비위를 맞추는 거라구. 그렇잖아도 오늘 미경이가 자초지종을 얘기해 줘서 들었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이 됐으니 다행이지. 그리고 훈이는 어떻니? 데모를 하지 않아서 내가 가만두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자존심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구. , 내 정신 좀 봐. 아픈 너한테 말이 너무 길었구나.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 그래도 이 얘기는 꼭 해야겠어. 너랑 얘기할 시간도 없는데 잘 됐다. 내가 하는 얘기 건성으로 듣지 마. 성민이랑은 어떻게 할 거야? 남의 귀한 아들 총각 귀신으로 만들 거야? 세상에 성민이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니? 유경아, 올해 안에 결혼해라.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작가는 결혼하면 글 못 쓴다는 법은 없잖아. 송이가 낼모레면 중학생이 될 판인데 어떡할려구 그래? 대답 좀 해봐라. 앞으로 아버지 산소 갈 때마다 큰 사위 없이 작은 사위 절만 받게 하실 거야? 그것도 불효다, 불효. 그리고 이번 일요일 그러니까 낼모레구나. 아버지 산소에 갈 거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약 먹고 일어나, 알았냐? 난 갈 생각도 못 했는데 한 서방이 하루라도 빨리 다녀오지 않으면 맘이 불편해 밥도 제대로 못 먹겠다고 해서 날을 잡았어. 성민이도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해, 내가 염려가 되서 하는 말인데 너, 만약 성민이 배반하면 벌 받는다, !"

유경이는 차라리 벌이라도 받으면 편하겠다고 생각하며 잠에 빠졌다. 최례옥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떠들었다.

"유경아, 어디 한번 이 에미한데 솔직히 얘기해 볼래? 내가 몇 번씩이나 묻고 싶었는데 그 놈의 자존심 때문에 참았지만...... 에미로서 묻는 건데 답 좀 해라. 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무슨 유언이라도 하시지 않았니? 솔직히 말해 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그것도 에미 소원을 안 들어 줄거니? 분명히 아버지가 네게 한 말이 있지? 너의 아버지처럼 꼼꼼한 양반이 아무 말도 남기시지 않았다는 건 믿어지지 않아. 혹시 나한테 꼭 전해달라는 뭐 그런 말씀도 없으셨었냐? 유경아, 없다면 없다고 대답하고, 있으면 에미 속태우지 말고 속 시원히 얘기해라. 유경아, 유경아, 쯧쯧쯧. 이게 도대체 뉘 집 딸인데 해골이 다 됐어. 아이고... 자라, . 그 대신 이 말만은 들어라. 너 만약 앞으로 유명한 소설가 안되면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즉결처형당할 줄 알아! 적어도 밖에 나가 내가 소설가, 김유경의 친정 어미요 했을 때 애 어른 할것없이 존경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게 해야 해!"

최례옥은 깊이 잠든 유경의 얼굴을 거친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일요일 아침, 날은 화창했다. 유경의 가족은 마치 산행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내가 자네 덕을 톡톡히 보네, 그려. 봉고는 또 언제 빌려서 우릴 이렇게 편하게 모시다니, 벽제까지 가려면 택시 두 대에 차비도 꽤 나가는데 고맙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유경은 헬쓱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옆집에서 빌린 봉고차 한 대에 기뻐하고 감사해하는 최례옥의 모습이 기뻤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떠났는데도 벽제행 도로는 붐볐다. 오랜만에 음식을 싸 들고 나선다는 게 가족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우리가 나중에 헤어져 산다 해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모이겠지? 너의 아버지 산소에서 말이야. 너의 아버지 옆에 내 묘도 있으니 나중에 자주 와라."

갑자기 최례옥은 쓸쓸한 얼굴을 했다.

"엄마. 그러지 마요. 한 서방 운전 못 해요. 우리 기분 좋게 갑시다. 그래야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 아니에요."

"그래, 그래. 난 언제나 감정이 풍부해서 탈이야. 아마 유경이가 내 영향을 받아서 글을 쓰게 됐나 봐. 안 그렇니, 유경아?"

미경의 말에 최례옥은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 어머니는 다분히 작가 기질이 있어요. 만약 어머니가 글을 쓰셨다면 정말 훌륭한 작가가 되셨을 거예요."

"하이고, 유경이 너 많이 달라졌다. 아부할 줄도 알고.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가끔 있어. 그래서 널 보면 마치 내가 작가 같아 흐뭇해."

"엄마두! 그래서 맨날 언니를 즉결처분시키고 그랬어요?"

미경은 최례옥과 유경을 번갈아 보며 눈을 찡긋했다.

"애는. 내가 왜 그랬겠냐? 다 너의 언니 잘되라고 그랬지."

"한 번만 더 잘 되라고 했다가는 언니 시집도 못 가고 사형장 이슬로 사라질 뻔했겠어요."

", 성민이는 오늘 왜 안 왔니? 장차 사위될 사람이 말이다. 언제고 만나면 혼을 내줘야겠구나."

최례옥은 유경을 흘겨보았다. 그녀의 눈은 정말 섭섭해하는 기운이 그득했다.

"장모님. 아직도 모르세요? 성민씨 전도사로 부임했잖습니까? 사위 될 사람만 나무라실 게 아니라 장모님 될 분도...허허허..."

어색한 분위기를 한동수가 적절히 풀어 주었다.

 

()과 흑() - 13

"아니, 그런데 너는 왜 얘길 하지 않았니? 나쁜 것!"

유경은 뭐라 하려다 그만두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벽제가 가까와질수록 녹음은 진했다. 송이는 쉬지 않고 새처럼 이 사람 저 사람 품에 안기며 떠들어댔고, 훈이는 송이와 얘기할 때 외에는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최례옥과 미경이, 한동수는 집안 얘기, 식당 얘기를 하다가 보기 좋은 나무가 보이면 나무 얘기를 하고 아이들이 떼를 지어 지나가면 아이들 얘기를 하느라 시종 쉬지 않았다.

"검문소를 지났으니 이젠 다 왔네요."

유경은 무심히 들리는 한동수의 말에 산 위를 바라보았다. 마치 김만우가 자신의 무덤 위에 앉아 있다가 손짓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듯했다. '아버지!' 하고 속으로 외쳤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버지는 여기 계시지 않아. 아버지는 이북으로 가셨지. 우리들을 까맣게 잊고 고향땅에서 박정옥이라는 부인과 연실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나들이를 떠났을 거야. 그곳도 이때쯤은 산이 푸르고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겠지. 우리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빈 무덤을 찾아가는 거야. 영원히 한 남자만을 짝사랑하는 여인처럼. 빈 무덤인줄도 모르고 절을 하고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표시하는 바보 같은 여인처럼. 그래도 아버지를 사랑해요.'

김만우의 무덤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오르고 나면 땀으로 함빡 젖을 정도로 가파르고 위험한 길이다. 그래도 이곳저곳 발 디딜 틈 없이 무덤은 빼곡하다. 유경의 가족이 중간쯤 올라 땀을 식히고 음료수를 마시는데 아래에서 장례 행렬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만 가자!"

최례옥은 벌떡 일어서며 앞장섰다.

"할머니. 다리 아파요. 쪼금만 더 있다가 가요!"

"시끄러워! 예의 없이 절도 하기 전에 다리를 쉬게 하고 목을 축여?"

최례옥은 송이를 무섭게 나무랐다. 송이는 금새 눈시울이 붉어져 제 엄마 품에 안겼다.

"송이야, 할머니가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니까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러신 거야.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무척 사랑하셨거든.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알았지?"

"엄마랑 아빠처럼 사랑했어요?"

"그럼, 그럼. 호호호..."

미경과 송이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앞서가는 최례옥을 따랐다.

"장모님, 숨차요. 같이 갑시다."

한동수가 일부러 힘든 목소리를 냈지만 최례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파란 풀이 듬성듬성 덮고 있는 산소는 소년의 까까머리처럼 보였다. 돗자리를 펴고 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 놓자마자 최례옥은 비석을 쓸어 내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경도 울었다. 송이는 제 엄마가 울자 덩달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동수와 훈이는 뭔가 나즈막하게 얘기를 나누었고 유경은 뒤돌아 앉아 힘들게 올라오고 있는 장례 행렬을 바라보았다.

최례옥은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리워 우는 어린 소녀처럼 김만우를 소리소리 지르며 불렀다. 그녀는 삼십 분 정도 뱃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는 듯한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조금 진정했다.

"미안하네, 한 서방, 내가 너무 서러워 절도 하기 전에..."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유경은 훈을 불렀다.

"훈아. 아직도 아버지의 부탁에 대한 네 생각이 변하지 않았니?"

"큰누나. 날 괴롭히지 마. 나는 아까 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

"얘기해. 그러나 너는 누구도 미워할 순 없어. 너나 나나 아버지 세대로부터 공짜로 물려받은 게 너무 많아."

"과연 그럴까? 어쨌거나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내가 가졌던 생각을 말할께. 나는 빈 무덤에 절을 하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차라리 악마에게 절을 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

"훈아!"

그러나 유경은 더 이상 훈과 말을 나누지 않았다. 땀이 등을 축축이 적시는 한낮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훈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보다 차라리 악마에게 절을 한다는 말에 강현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한 유경은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다시 나왔다. 두 시를 조금 남긴 시간이었다. 그녀는 성민이 가르쳐 준 약도를 들고 북아현동에 있는 소망교회로 갔다. 붉은 벽돌의 교회의 정문 옆에 있는 돌판에 '주후 1968년 창립'이라고 써 있었다. 그러나 다시 글자를 파야 될 만큼 읽기 힘들었다. 예배당 안에는 몇몇 사람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강대상 오른쪽에 있는 텅 빈 찬양대 자리에 젊은이들 여럿이 모여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합창하고 있으며, 세 중년 부인이 흩어져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누굴 찾으세요?"

어리고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던 유경은 뒤돌아보았다. 작은 키의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오후 예배는 몇 시에 시작되죠?"

"세 신데요. 그러니까... 삼십 분 후면 시작해요. 예배드리고 가세요. 저쪽에 앉으세요."

"고맙습니다만 저를 그냥 혼자 놔두시겠어요?"

"?..., ..."

여자는 당황해하며 예배당 밖으로 나갔다. 유경은 오른쪽 가장 끝자리의 구석에 앉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성민은 보이지 않았다. 청년 하나가 앞에 나와 찬송가를 계속 불렀다. 사람들은 행진하는 병사처럼 그를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유경은 시계를 봤다. 세 시가 다 되었다. 그때 윤성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전형적인 목회자 타입의 남자가 강대상이 있는 쪽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배는 나이 든 목사가 인도했다. 그는 설교는 새로 부임한 윤성민 전도사가 설교하니 많은 은혜를 받으라고 했다. 실은 그래서 유경이 온 거다. 그의 첫 설교의 자리에 동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새로 온 전도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경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윤성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성민은 아직도 약을 먹고 있는 상태에다 혼자 자취를 하느라 창백함을 벗어나지 못해 설교를 제대로 해낼지 유경은 걱정이 되었다. 성민의 설교 제목은 '두 가지의 법()'이었다. 키가 크고 헬쓱한 얼굴에 군청색 양복을 입은 성민은 수도원에서 오랜 고행을 마치고 방금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조용한 말소리는 폭포가 내리치듯 힘이 가해졌고, 창백하고 싸늘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에는 충만한 기쁨이 서렸다.

"그럼 오늘 설교의 결론을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로마서 칠장 십오 절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과 흑() - 14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예배가 끝났지만 유경은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요즈음의 자신의 괴로움을 성민의 설교를 통해 뼈저리게 절감하며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을 때 누군가 유경의 옆에 앉았다.

"유경아. 네가 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정말 고맙다. 어젯밤에 성민이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첫 설교를 하는 날이니 와달라고. 그리고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말이야. 그래서 유경이도 오냐고 했더니 그저 웃기만 하지 뭐냐. , 나가자. 성민이를 만나고, 맛있는 식사를 해야지. 유경아, 정말 고맙다."

평상시와 달리 수수한 옷차림을 한 권여사는 그만큼 푸근하게 유경을 대했다.

"어머니, 오늘 성민씨 설교 은혜스러웠어요. 제 눈 좀 보세요, 빨갛죠?"

유경은 살짝 웃으며 손으로 눈을 가리켰다.

"그래. 나도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를 할까 해. 네 생각은 어떠니?"

"어머니. 그런 질문을 하시면 전 너무 송구스러워요. 그러나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어요. 성민씨를 도와주세요. 어머니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요. 그 첫 번째 일이 북아현동으로 이사 오시는 거예요."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했지. 그래. 그 대신 너도 성민이 옆에서 뭐든지 함께 해주길 바란다. 성민이는 내 아들이기 전에 네 남자야. 알겠니?"

두 사람이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교인들과 인사를 마친 성민이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유경아."

성민은 두 사람을 부르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권여사는 의자에 앉아 있고 유경이 그에게 다가갔다.

"유경아, 고마워."

"성민아. 축하해."

권여사는 서로 마주 서 깊은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세 사람은 교회에서 나와 권여사의 차를 타고 강남으로 갔다. 권여사가 집에서 손수 요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린 성민은 잠시 풀산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희는 조금 후에 들어갈께요."

성민의 말에 권여사는 흔쾌히 응했다. 성민은 유경의 손을 잡고 풀 산쪽으로 가까이 걸었다.

"유경아, 나는 저 산의 풀들과 나무들에게 약속했어. 너와 함께 산속에 서 아가서(雅歌書) 팔 장을 노래하겠다고 말이야. 아주 밝은 날, 눈이 부셔 하늘이 하얗게 보이는 날에!"

성민은 유경의 손을 꼭 잡고 꿈을 꾸듯 말했다. 유경은 그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민아, 부탁이 있어. 강현섭씨를 위해 기도해 줘. 그의 부인이 미국에서 이혼 문제로 온다고 하는데 이혼이 아닌 결합이 되도록.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아직 그와 정리가 되지 않았어.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해 값을 치르라면 어떤 거라도 달게 치르겠으니 그가 바로 섰으면 해. 이번 일의 모든 근원은 두 가지 신을 섬기려고 한 내게 있어. 악의 악한 비밀의 맛을 보려고 했던 나에게!"

"유경아, 약속할께. 그러나 앞으로 그런 식으로 너를 네가 정죄하지마. 누구도 자신을 심판할 수 없지.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 사악한 존재이거든. 어찌 보면 너와 현섭이 형은 자신을 속이지 못한 순수한 사람들이야. 다만 그 순수한 마음을 악마가 엿본 건지도 모르지. 그냥 생각해 봤던 거니까 내 말을 마음에 두지는마. 들어 가자, 어머님이 준비해 주신 밥을 먹고 싶어. 우리 어머님이 밥을 했다는 건 대단한 헌신이거든."

풀산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여름 저녁노을이 곱게 내려앉았다.

성민은 북아현동으로 이사하겠다는 권여사와 유경과의 새로운 결합, 이제는 결코 방황치 않을 신앙의 길 등으로 그의 몸은 영혼과 더불어 생기를 찾았다. 그러나 유경은 강현섭이 차라리 완전한 파산을 하든지 아니면 부인과 결합을 하여 돌아서든지 하기 전에는 스스로 평안을 찾아서도 안 되고 누릴 자격도 없다는 강박관념으로 전보다 더 복잡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를 찾아가기에는 무서움이 앞서서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유경은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몇 번씩 로이코스의 전화번호를 눌렀으나 신호가 떨어지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리곤 했다. 그러나 현섭은 불안감도 초조함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는 도박으로 이젠 잠잘 곳도 없이 다 날려 버리고 오전 늦게 로이코스로 돌아왔다. 이제 로이코스에서 술을 마실 기회도 나흘이면 사라진다. 부인이 온다는 날도 내일로 일 주일이 채워지는 모든 것이 마지막인 듯한 날이었다. 현섭은 몇 병 남지 않은 양주를 바닥내다 유경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애절하게 말했다.

"유경씨, 딱 한 번입니다. 그리곤 당신이 만나자 해도 절대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오십시오."

전화를 끊은 현섭은 주방에서 제일 날카로운 빛이 나는 과도를 찾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칼을 들고 미소를 지은 채 하염없이 만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큰소리로 괴성을 지르며 홀 안에 있는 창고로 갔다.

"아하, 왜 내가 진작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하하..."

현섭은 창고 구석에서 공기총을 꺼냈다. 한때 그는 사냥을 즐긴 적이 있어 총을 세 자루 구입했었다. 엽총은 사냥 기간이 아니라 파출소에 보관상태고, 공기총 두 자루가 창고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날만 기다리듯 현섭의 눈에 금방 띄었다.

"오호! 비록 공기총이지만 여섯 발 장전 리벌버지."

현섭은 총구에 입을 맞추고는 개스를 주입시켰다. 그는 여인의 몸을 어루만지듯 하며 두 자루 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남은 총알은 곽째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거면 충분해. 충분해! , 세상은 열두 발의 총알로 충분하다!"

현섭은 홀로 나와 총을 안고 춤을 추며 충분하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그러다 목이 말라 탁자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는 탁자 위에 칼과 두 자루의 총을 나란히 올려놓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가끔씩 칼과 총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유경이 문을 열고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물이 스미듯 몰려 오는 초조감에 홀을 미친 듯 돌고 돌았다.

"우하하하... 내가 죽는 날 세상도 죽는다. 내가 죽기 전에는 세상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세상을 죽이기 위해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현섭씨."

 

()과 흑() - 15

그는 유경이 온 줄도 모르고 홀 안을 돌며 춤을 추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우뚝 섰다.

"오호, 왔군요. 나의 영원한 신부, 사랑이여! 그러나 의식을 위해서 당신은 이 자리에 앉아 있어요."

현섭은 유경을 자신의 탁자에서 대각선상 맨 끝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앉았다. 두 사람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경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현섭이 벌떡 일어났다. 순간 유경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가 칼을 높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섭씨!"

"일어나지 마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신의 목이 바닥에 공처럼 구르게 될 거요."

유경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그를 응시했다.

', 주여,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성민이에게는 순결한 신부가 아닌 더럽혀진 몸의 신부가 되었고, 현섭씨에게는 그의 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이를 갈던 악마를 부추겨 결국 악마가 저 사람을 주장하게끔 하였습니다. 저의 죄가 너무도 큽니다. 어떤 형벌이건 당연한 마음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으니 현섭씨를 당신의 기억 속에서 지우지 마소서.'

현섭은 천천히 유경의 사진 앞으로 갔다. 그는 사진에 칼을 들이댔다.

"나의 사랑하는 유경씨. 당신은 나의 여자이기에 선택권이 있습니다. , 우리는 이제 함께 떠나야 합니다. 악마를 만날지 하나님을 만날지 모르지만 그곳엔 고통이 없답니다. 나는 당신마저 털리고 싶지는 않아요. 영원히 내가 소유할 거요. 고통이 멈추고 우리는 하나가 되고! 그 방법은 같이 죽는 겁니다. 왜 떨고 있습니까! 당신이 믿는 신이 죽음이란 모든 눈물을 씻고 생명의 강을 건너는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 빨리 선택하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경의 사진 한 쪽을 잔인하게 그어댔다. 유경의 왼쪽 얼굴 부분이 찢어져 아래로 주욱 늘어졌다. 유경은 자기의 심장이 칼에 찢겨 너덜거리는 듯해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댔다. 심장이 한번 크게 울렁거리더니 그대로 얼어 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현섭은 한쪽이 횅하니 비어 있는 곳에 손을 집어넣고 물을 젖듯했다.

", 피의 강이여! 이 피를 보시오. 당신의 피는 눈부신 빛이군요. , 우리 이렇게 죽음의 의식을 행할까요?"

현섭은 칼을 유경에게 향하고 물었다. 유경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경은 그가 너무도 불쌍해 현섭을 안고 울고 싶었다. 현섭은 이번엔 총을 들었다.

", 보시오. 이 공기총도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죠."

그는 홀 중앙에 있는 커다란 고목나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목나무 쪽으로 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시요! 관통했오. 이 정도면 당신의 가슴을 뚫고, 뼈를 뚫고, 심장도 꿰뚫을 것이요!"

현섭이 나무 쪽으로 오는 바람에 그와 가까워진 유경은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유경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잖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특히 당신의 사랑은 악마처럼 뜨거운 것! , 선택하시오!"

현섭은 두 발을 계속 유경의 사진 오른쪽에 쏘았다. 로이코스가 무너질 듯 소리가 컸다. 사진에 두 개의 구멍이 생겼으나 유경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 칼이요, 총이요? 무엇으로 당신의 죽음을 도와 드릴까요?"

현섭은 몇 발자국 다가왔다. 유경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 선택해요! 지금 두 자루의 총에 열 발의 총알이 남았어요. 우리 두 사람이 죽기에는 너무 많은 총알이죠. 총알은 딱 두 알이면 충분해요. 그렇다면 나머지 여덟 발은 어떡해야 하나... 옳지. 난 당신에게 불만이 있었오. 바로 당신의 그 도도함! 심지어는 나와 발가벗고 뒹굴 때도 나를 지배하려 했지. 그래서 가끔 당신이 미운 적이 있었지.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 미움을 깨끗이 씻어 냅시다. 아하, 이것은 예정에 없던 프로그램이군. , 당신이 이 납조각 따위에 얼마나 우습게 무너지나 봅시다. 게임을 시작합시다!"

위험이 바로 가까이 있음을 알고 유경은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담대해졌다.

"좋아요. 쏴요. 그런데 겨우 총알이 열 발이에요? 그것 뿐이에요? 겨우!"

'저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총알을 다 쓰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결정을 한 유경은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 우리는 같이 죽어야 한다고 했죠. 그럼 먼저 당신의 심장에 총을 쏘면 어떨까요? 나는 늘 당신의 심장도 붉은색일까 궁금했었어요. 총 하나는 나를 줘요. 우리, 서로의 심장에 서로 죽음의 불을 당겨 줍시다. 내게도 총을 줘요!"

유경이 자신을 짓밟듯 비웃으며 다가 오자 현섭은 바닥에 총을 쏘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오지 마! 나는 먼저 너의 피를 보고 싶어! 물러서! 나는 아직 아니야! 내가 너의 마지막 호흡까지 지켜 준 다음 그 후가 나야."

그러나 유경은 그의 앞으로 아주 천천히 다가섰다.

"그래요? 당신은 육체를 이미 악마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두려워 말아요. 당신은 이젠 죽지 않아요. 당신의 육체는 악마가 잘 보관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기 전에는 악마의 소유물이라도 빼앗을 수 없거든요. , 내게 총을 줘요! 이 겁쟁이!"

총소리가 연거푸 두 번 울렸다. 유경이는 재빨리 계산을 했다. 처음 두 발까지 모두 네 발을 쏜거다. 그럼 사진을 향해 쏜 것까지 해서 모두 여섯 발을 쏘았으니 아직 여섯 발이 남은 것이다. 한 자루의 총이 바닥나자 다른 총을 든 현섭의 얼굴은 이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총에 맞아 고통으로 울부짖는 듯한 짐승의 얼굴이었다. 유경은 바짝 긴장을 하고 계속 걸었다. 그러다 그만 탁자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

"그대로 있어! 좋아, 아주 좋은 자네야. 머리카락 하나 움직이지 마."

현섭은 엎드린 유경의 등에 총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이 흔들렸다. 유경은 엎드린 채 하소연했다.

"현섭씨, 좋아요,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나라면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딱 한 번만이에요."

"거짓말! 너처럼 도도한 여자는 틈만 나면 머리를 굴리지. 그래서 나는 널 만나기 전까진 창녀들만 품었었지. 그러나 결국 너도 창녀야. 왜냐구? 나를 통해 잉태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네 자궁을 내게 활짝 열어 주었지."

그러나 유경은 수치를 느낄 여유도, 자신을 변명할 시간도 없었다.

"현섭씨. 어려운 부탁이 아니에요. 옷을 다 벗고 죽게 해줘요. 내 몸을 뚫고 나가는 총알을 보고 싶어요. 내 벗은 몸을 적시는 피를 쳐다보며 죽고 싶어요. 어때요, 그럴듯하잖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현섭은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몸을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좋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벗어."

 

()과 흑() - 16

그는 유경이 쓰러진 곳에서 오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탁자 위에 앉았다. 유경은 그의 주문대로 아주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우선 단추가 많이 달린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마지막 단추가 풀어지고 하얀 속치마의 윗부분이 드러나자 현섭은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기 위해 주머니에서 라이터도 꺼냈다. 유경이 보니 언젠가 라이터의 불빛에 대해 말할 때 사용했던 라이터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출입문을 두드렸다. 순간 현섭은 탁자에서 재빨리 내려왔다. 유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를 재촉했다.

"빨리 총을 쏴요. 우리의 의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어 마땅해요. 어서요! 이젠 더 이상 겁쟁이 노릇은 그만 해요!"

유경은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현섭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더니 문을 향해 방아쇠를 정신없이 쏘았다. 유경은 숫자를 셌다. 모두 네 발을 쏘았다. 그러자 밖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경은 탈진상태가 되어 쓰러질 것 같았으나 애써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보세요, 총을 쏘니까 도망가잖아요. , 다시 옷을 벗을께요."

현섭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유경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유경은 치마를 발밑으로 벗어 내렸다. 현섭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붙이려 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유경은 재빨리 치마와 블라우스를 함께 집어 들고 현섭을 불렀다.

"현섭씨, 라이터 불이 너무 아름다워요. 불을 최대한 크게 만들어 봐요. 십자 표시가 있는 쪽으로 조절기를 옮겨요."

현섭은 그녀의 말대로 조절기를 십자 표시가 있는 곳까지 바짝 밀어 놓은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순간 유경은 블라우스와 치마를 현섭의 얼굴을 감싸듯 던졌고, 라이터가 꺼졌다. 현섭이 얼굴을 씌운 옷을 걷어 내려 할 때 유경은 재빨리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지만 쉽게 가지 못했다. 유경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현섭이 남은 두 발의 총을 급히 봤는데 그 중 한발이 유경의 허벅지의 바깥 부분을 일 센티 정도의 깊이로 관통했다.

현섭은 총알이 없는 두 자루의 총을 번갈아 허공에 쏘았다. 소리만 요란히 울렸다. 그러자 그는 총을 내팽개치고 쓰러진 유경의 옆에 꿇어 앉았다. 그는 유경일 흔들었다.

"유경씨! 죽으면 안 돼요!"

현섭은 유경 위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유경인 잠시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꼼짝할 수 없었다. 만약 자기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면 죽이지 못했다는 열등감으로 이번엔 칼의 공포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리를 다쳐서 될 수도 없다. 유경은 허벅지의 아픔이 심해지고 다리 밑까지 적시는 따뜻한 피가 그칠 것 같지 않아 더럭 겁이 났다.

', 감히 죄값을 스스로 원해서 치르겠다고 한 내 교만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피를 흘리다 죽어 가는 걸까?'

유경은 눈을 감고 울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섭은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피를 만지고, 제 몸에 칠하고, 또 혀로 맛을 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유경이 다른 방법을 생각할 때였다. 출입문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경은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앞이 희미했으나 경찰관 셋과 한 여자가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유경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더니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여보!"

강현섭의 아내는 그의 정신적인 혼란의 모습을 보자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그러나 강현섭은 온통 피에 젖은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무서워! 무서워!"

그는 공포에 질린 어린애처럼 울부짖었다. 그는 도망치다 벽에 막 다르게 되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채 빌었다. 경찰관 둘이 달려가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나머지 한 사람은 유경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감식반원과 앰블런스를 신청했다.

"아주머니, 혹시 이 아가씨 압니까? 속치마만 입은 채 총에 맞은 걸 보니 폭행 당하지 않으려다 당한 것 같은데요."

"글쎄요... 남편은 항상 창녀만을 상대했죠."

이수연은 쓸쓸히 말했다.

"그쪽 여자는 아닌데요. 우리는 이제 여자 속치마만 봐도 압니다. 그나저나 이 가게가 계속 휴업상태였지만 강 사장이 저 지경까지 될 줄은... "

유경을 지혈시키며 경찰관이 말끝을 흐렸다.

"가만있어 봐. 이 찢어진 사진을 자세히 보니까 그 아가씨랑 많이 닮았는데. 밑에 이름이 있어, 김유경? 창녀가 아닌 건 확실해. 이런 고급 술집에 창녀 사진을 걸어 놓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강 사장님. 정신 차려요. 우릴 모르겠어요?"

강현섭의 손에 수갑을 채운 한 경찰관이 애기 다루듯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그러나 현섭은 쓰러진 유경을 바라본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수연이 다가와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현섭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그러나 경찰관이 막았다.

"위험해요, 지금 남편의 상태로는 손이 묶여 있다 해도 몸의 모든 부분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 뭐라고요? , 이럴수가... "

이수연은 현섭을 만지지도 못하고 바라본 채 울음을 터뜨렸다. 때맞추어 사이렌 소리가 요란히 울리더니 낯선 사람들이 강현섭의 완전한 파멸을 증명하려는 듯 몰려들어 왔다. 들것에 실려 나가던 유경은 피에 젖은 묶여진 짐승이 몸부림을 치며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바람에 무서움으로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짐승! 저 짐승의 피가 내 속에 있어서 그래요, 살려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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