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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문 1

Bollnow 2024. 3. 7. 11:28

욕망의 문

노경실

 

1. 차차 흐려져 밤부터 비 내리고...

 

바람이 분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쥔다. 손바닥에 닿는 목덜미의 따스함에 한참을 그대로 있는다. 대신 우산을 들고 있는 손이 시리다. 4월의 바람과 비는 2월처럼 기분 좋게 차갑거나 9월의 그것마냥 부드럽지 않다. 그 심술과 변덕을 감히 누가 따를까.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철길 건널목 간수가 기차가 온다는 신호에 맞추어 그의 초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간수의 손에는 붉은 깃발이 들려 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간수는 언제나 흰 깃발을 흔든다. 그리고 지금처럼 밤에는 랜턴을. 나는 기차가 오고 있는 쪽을 유심히 쳐다본다. 이 밤에 무슨 특별한 기차가 오는 걸까. 그러나 시선은 다시 건널목 간수의 깃발로 향한다. 깃발의 붉은 색은 마치 핏자국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말라 퇴색한 기운이다.

저만치서 기차의 불빛이 보인다. 커다란 헤드라이트를 두 개 단 기차가 느릿느릿 오며 거대한 괴곤충의 모습만큼이나 음침한 소리를 거침없이 뿜어댄다. 어둠 속이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는 기차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저 간수는 왜 말라버린 핏빛 깃발을 들고 나왔을까. 신경 쓰지 말자. 깃발이 어떤 색이든 기차는 오고 있지 않은가.

어둠 속의 기차는 깃발을 들고 있는 늙은 간수와 같이 세월을 보낸 듯하다. 허기사 경의선과 교외선이 주종인 철로이니 지나가는 기차들의 모습이 늘 후줄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일명 비둘기호.

그러나 기차는 다 늙어빠진 수탉의 형상이다. 그런 기차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건널목의 두 간수 중 저 늙은 사람을 떠올리곤 한다. 저 간수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늙은 수탉 같은 기차의 형상인 듯하고. 기차는 일부러 어둠을 골라 산책을 하듯 천천히 온다. 간수는 요령껏 건너가라고 내게 손짓을 한다. 그러나 나는 제자리를 지킨다.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다. 말라붙은 핏빛 깃발은 어둠 속에서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알고 싶다. 간수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의 눈길을 피해 아무렇게나 고개를 돌린 곳이 초소다. 두 평 정도 되는 초소에는 백열등이 켜져 있고 그 불빛 사이사이로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흐르는 푸르스름한 빛이 담배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창문도 없이 출입문 하나만 숨구멍처럼 달랑 있는 작은 시멘트 초소는 어둠의 애무를 부끄러움 없이 받아들이는 듯하다. 건너편을 보니 버스와 택시들이 행여 기차가 끌려갈까 뒤꽁지의 붉은빛을 빗물에 흠씬 젖어 있는 아스팔트 위에 뿌리며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그래도 아스팔트의 빗물은 붉은빛을 한 점도 남김없이 핥아 마시려고 온몸을 비비 트는 피에 굶주린 짐승의 얼굴을 한다.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차들도 텅 빈 채로 질주하는 것 같다. 기차는 조금씩 앞으로 오고 있다. 두 개의 헤드라이트 불빛은 어둠 속에 두 개의 허허로운 공간을 만들며 조심스레 또 다른 암흑 속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빛과 어둠을 바라보며 그 어디에도 마땅히 나의 호흡을 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것은 흩부리는 빗발이 빛과 어둠 양쪽에서 똑같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우산을 더욱 꼭 쥐고 잔기침을 서너 번 할 때 기차가 횡음과 함께 짧은 폭풍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순간 간수가 흔드는 붉은 깃발이 핏빛 물결이 되어 출렁거린다. 놀람은 잠시뿐. 그 핏빛 물결이 나를 송두리째 삼키려 덤벼든다는 것을 알고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너무 늦다. 이미 핏빛 물결은 내 몸을 휘감고 나는 숨이 막혀 허우적거린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수십 마리의 검은 돼지 떼들이 어디선가 쏟아져 나온다.

검은 무리는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서로 물고 뜯으며 괴성을 질러 댄다. 질기고 두터운 살가죽이 찢겨지듯 갈라지며 피가 물처럼 흐르는 살점들이 후들후들 떨어지고 심지어는 뼈마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배 속으로 들어간다. 소름이 끼친다. 자기 살마저 뜯어 먹으려는 탐욕은 나에게까지 이빨을 들이민다. 검은 돼지 떼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든다. 살점이 너덜거리는 검은 무리의 입에서 구토가 날 정도로 피비린내가 나고 마치 악마가 괴로워할 땐 저런 소리들을 내겠구나 하고 생각이 드는 괴성이 끊이지 않는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된 추악한 무리가 바로 내 앞에서 악마의 신음 소리를 내고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입을 벌린다. 피비린내. 추악한 갈구(渴求)의 괴성. , 안 돼! 나는 힘껏 두 팔을 내저으며 소리친다. 성민아, 도와줘!

 

유경(有慶)은 몸서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을 닦으며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이 시간에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자신의 비명 소리를 듣고 와 주었으면 하고 잠시 이불 속에서 기다렸다. 그만큼 꿈은 두려움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만큼 유경을 옥죄었다.

이런 악몽에 시달리는 게 벌써 며칠째인가. 게다가 유경은 그때마다 윤성민의 이름을 부른다. 아니 그를 애타게 찾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점이 유경일 당황하게 한다. 분명 그 부분도 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늘 꿈의 바깥 쪽에서 부끄러움을 넘어선 수치스러움이 유경을 괴롭힌다. 유경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으며 머리를 거칠게 저었다.

'그는 내가 찾아야 할 사람이 아니야. 그의 손길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에서 움직이고 있어. 그의 손은 나 같은 여자의 언저리가 아닌 광명한 곳에서 발가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움직일 손이지. 그와 나는 이미 멀어져 있어. 그런데 그의 무엇이 나의 꿈까지 지배하는 결까. 분명 그에게서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악몽의 한가운데에서 그를 찾을까. 그는 그런 악몽 속에서 만날 사람이 아니야. 그는 찬란한 빛의 세계를 순례하기에도 바쁜 사람이지. 그는 빛의 순례자야. 그의 뒤를 따라간다는 건 그의 그림자를 흉하게 만드는 꼴이야.'

유경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시계를 봤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 후부터 생긴 버릇이다. 7시가 조금 넘었다. 시계는 꿈과 현실을 확연히 구분해 준다. 유경은 시계를 볼 때마다 지금은 꿈이 아니라는 안심을 한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시침, 분침, 초침. 그리고 세상은 아직 종말이 아니라는 듯 쉴새 없이 복음을 전하는 소리. 당신이 날 찾고 있다는 건 꿈꾸고 있지 않다는 거야, 라고 시계는 유경에게 말하는 듯했다. 시계, 특히 그 질서정연한 숫자들로부터는 과거도 미래도 상상해 내기 힘들다. 숫자의 힘이 현실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면서도 미래를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숫자의 다른 얼굴, 즉 무력(無力) 이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2

신문사의 대리석 계단을 오르면서 유경은 무력감을 느꼈다. 과감히 그 짐승 떼들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다니. 유경은 3층에 있는 손정태의 사무실에 들어서면서까지 그 생각을 하느라 자기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유경이 입구에 선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손정태가 옆에 와 어깨를 가볍게 쳤다. 순간 유경은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왼손을 가슴에 대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는 버릇은 여전하군. 이리 와. 우리 주간님이랑 인사나 가볍게 하지. 그런데 무슨 생각하느라고 내가 그렇게 애타게 손짓을 하는 데도 몰랐어? 신문사가 하도 으리으리해서 그래? 하하하... 이건 외형에 불과할 뿐이야. 언론재벌, 언론재벌 하는데 진짜 재벌의 위력은 이런 건물에 있는게 아니라구. 그래도 내 파트는 여성잡지라"

손정태는 나이에 맞지 않게 머리카락이 온통 은빛인 한 중년 남자를 향해 손을 번쩍 들며 큰소리로 불러 세웠다. 그제서야 유경은 신문사 소속인 잡지부(雜紙部) 내부를 휘둘러 보았다. 어린이 잡지부터 문학지, 주간지, 세 종의 여성 월간지, 주간 스포츠지, 미술 전문지, 음악 전문지 등 마치 잡지 전문 공장 같은 내부는 사람 수보다 더 많은 컴퓨터와 책상으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나 지금 바빠. 다음 달 특별 인터뷰 콘택 때문에 중간 다리를 놔 준 모처(某處)에 있는 사람 좀 만나야 해."

은빛 머리는 옷걸이에서 바바리를 꺼내 얌전히 걸치며 물었다. 그러자 손정태는 유경의 손을 잡고 그 앞으로 재빨리 갔다.

"다음 달부터 '()을 창조하는 남성'이란 꼭지의 고정난을 맡은 작가, 김유경씹니다. 오늘 왔기에 주간님이랑 인사라도 나누려고 말입니다. 유경이, 인사해. 우리 주간님이셔."

어쩔 수 없이 유경은 은빛 머리에게 꾸벅 절을 했다. 그러자 은빛 머리도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 그래요. . 손기자가 알아서 사람을 택했으니 난 별말 할 게 없고. 죄송합니다만 오늘 선약이 있어서 ... 그럼, 잘 부탁합니다. 이봐, 손기자. 잠깐 이리 와봐."

은빛 머리는 두 개의 출입문 중 유경이가 들어왔던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손정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크게 말해 유경에게까지 똑똑히 들렸다.

"이봐. 미인은 아니지만 상당히 관능미가 있는 여잔데 점심 가지고 되겠어? 아깝다. 저런 여자가 글쟁이라니. 핫핫핫... 잘 해봐. 자넨 저 여자한테 취재감이 안되나? 핫핫핫... "

유경은 그 소리를 들으며 팔짱을 끼고 손정태를 살폈다. 그러나 손정태는 유경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손정태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주간님. 저는 뭐든지 푹 익은 게 좋습니다. 김치도 말입니다. 팍 하니 신게 좋고 과일도 익다 못해 단물이 주르르 흘러 보기만 해도 입 안에 물이 고이는 게 좋단 말입니다. 아무 데나 한 입 베어도 꿀물이 쭉쭉 나오는 그런 것 말입니다. 이런 면에선 주간님이 저보다 한 수 아랠 걸요? 하하하...그럼 어서 다녀 오십시오."

유경은 고개를 돌렸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제부터 내려앉은 잿빛 구름이 걷히지 않아 오늘도 비가 한바탕 올 듯했다.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자."

손정태는 어느새 서류를 챙겨 들고 또 유경의 손을 잡았다. 순간 유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뿌리치고는 앞장섰다.

"? 아까 내가 그런 얘길 해서 그래? 이런 쫀쫀하긴. 아직도 넌 선비냐? 그러니까 글을 써도 맨날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만 하지. 민중의 언어를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투쟁, 투쟁만 민중의 언어인 줄 알아? 웃기지 말라고 해. 진짜 민중의 언어는 음담패설이라고. 알아?"

손정태는 유경의 뒤에 대고 악을 쓰듯 내뱉았다. 그래도 유경은 대꾸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너 까불지 마! 아직도 네가 도도하게 굴면 내가 네 발 앞에 엎드려 울 줄 알아? 그 시절은 다 지났어!"

손정태는 유경의 손을 억세게 잡아끌고 지하 주차장 쪽으로 갔다. 하는 수 없이 유경은 손정태가 하는 대로 있었다. 유경은 손정태를 잘 안다. 손정태는 자신이 없을 때나 뭔가 하소연하고자 할 때 악을 쓰고 말을 함부로 한다. 그러다가 그것도 안 되면 아이처럼 운다. 손정태는 유경 앞에서 여러 번 울었다.

손정태의 차는 검은 중형차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지만 유경의 냉담에 맥이 빠져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다. 유경은 그런 손정태를 자세히 뜯어 보았다.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여성지 캐리어우먼의 기자인 손정태는 학교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진회색 바탕에 군청색과 자주색의 체크 무늬가 은은히 깔린 춘추복과 하얀 와이셔츠, 푸른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넥타이를 보니 손정태가 다른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두 사람은 전공은 달랐지만 서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연구반'의 맴버로서 그는 입이 무척 걸고 구질구질한 자취생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장발의 풍채로 캠퍼스에 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던 러시아 문학도였다.

"다 왔어. 안 내릴 거야?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안전벨트를 풀며 손정태가 풀 죽은 목소리를 했다. 신문사의 지하 주차장에서 나왔기에 어두컴컴한 출발을 했는데 종착지도 지하라 유경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손정태는 엘리베이터 걸에게 43층을 부탁했다. 손만 대도 바스라질 듯 속살이 다 보이고, 얇디얇은 제복을 입은 아가씨는 웃는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 사람처럼 웃음으로 화석화(化石化)된 듯했다.

엘리베이터가 일층으로 올라오는 순간 유경은 아찔한 기분이 들어 잠시 손으로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지하에서는 몰랐었는데 출입구를 제외한 모든 면이 유리로 되어 몸의 중심을 조금이라도 잡지 못하면 밖으로 튕겨 나갈 것 같기 때문이다.

"성민씨는?"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3

손정태가 나직이 물었다. 말할 때마다 입 안에서 향수 같은 냄새가 나는 그는 유경과 윤성민(尹星民)의 관계를 잘 안다.

팔 년 전 윤성민과 손정태가 만났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손정태가 군 입대를 하기 이 주 전쯤이던가.

'유경아. 우리 약혼하자! 약속해 줘. 그리고 내가 제대한 후 결혼하자.'

그는 아스라히 도서관 불빛이 보이는 학교 앞 이층 카페에서 유경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니 울었다. 유경은 그의 손안에서 더 힘있게 그를 잡았다.

'약혼? 결혼? 할 수 있지.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성민씨는...'

유경은 말을 맺지 못하고 그의 눈물을 또 하나의 손으로 닦아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해?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손정태는 검지 손가락으로 유경의 이마에 길게 선을 그어 내렸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웃음의 화석인 아가씨는 부러진 바늘처럼 목을 숙였다.

두 사람이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이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자리 잡은 곳은 앙뜨와네뜨 양식(洋食)홀로 이미 손정태가 예약을 해둔 자리였다.

비운의 왕비인 앙뜨와네뜨의 이름을 딴 넓디넓은 홀에는 그녀의 비극보다는 짧은 영화(榮華)만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듯한 사람들이 성찬을 즐기고 있었다.

홀 앞쪽에 무대가 있는데 저녁마다 공연이 있고 낮에는 그 아래 편에서 다섯 명의 악단이 음악을 연주한다고 손정태가 말했다. 마침 그들은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중에서 '코키의 노래'(Cockey's Song)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바탕 거친 사월 비가 올 듯한 오후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유경은 손정태에게 아무거나 주문하라고 하고는 담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경의 첫 담배다.

'꿈 때문이야. 그 악몽 때문이지.'

유경은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손정태는 유경을 뚫어지게 지켜 보기만 했다. 그의 눈길은 유경의 겉옷을 하나하나 벗겨 나가고 속옷마저 조심스레 끌러 내리는 듯 뜨거웠다. 유경은 손정태의 그런 눈길에 소름이 끼쳐 묻고 싶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거지? 손정태의 아방궁 정도 되나?"

유경은 손정태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침 뱉듯 내뿜었다. 그러나 손정태는 눈만 껌뻑거릴 뿐 꼼짝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임페리얼 호텔이야. 네가 이 자리에서 그 자식을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너와 자리를 함께 하고 싶었어. 그래서 왔지."

그 자식이라니 하고 유경이 물으려 할 때 손정태가 주문한 수프가 나왔다. 유경은 수프 그릇을 밀어 놓고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정태는 고개를 절레 흔들더니 수프를 마셨다. 유경은 궁금했지만 잠시 미뤄 두었다. 아니 모른 척하는 게 편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경아. 그래서 네 얼굴이 그 모양이구나. 난 책임 못 진다. 쓰러져도 나 없는 자리에서 쓰러지라구. 난 남의 여자에게는 관심 두기 싫으니까. 그러고도 살아 있는 네가 신기하구나. 도대체 성민씨는 이런 너를 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못한 예수처럼 내려다보고 있기만 하는 거야? 젠장! 한 인간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눈만 뜨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소리치겠지! 웃기는군. 한 인간은 곧 하나의 우주야, 하나의 이 주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건 전 우주의 질서를 영원히 완성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구."

유경은 짜증이 났다.

'이 남자는 내 얼굴만 보면 윤성민을 들먹인다. 걸어가는 길이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을 어떻게 동시에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김유경이다. 김유경에게서 왜 윤성민을 찾으려 할까?'

유경은 손정태에게 뭐라 하려다 그만두고 담배재를 터는데 식사가 나왔다. 붉은 포도주가 곁들여진 이름을 알 수 없는 양식이었다. 유경은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순대국밥과 소주 반병을 놓고 '이 벌레만도 아니 지렁이만도 아니 구데기만도 아니 악마만도 못한 인간에게 오늘의 양식을 주셔서 참으로 엄청나게 감사합니다. 이 버러지 같은 인간이 밥값이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쭈쏘써!' 라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익살을 떨던 그가 시킨 음식의 이름을 자신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유경은 결국 웃고 말았다.

"음식 앞에 두고 숟갈로 뜨기 전에 웃는 건 불경죄야. 세 가지 면에서 불경을 저지르는 거지. 하나는 음식의 신에게, 또 하나는 네 자신의 식욕의 신에게, 나머지 하나는 손정태의 정성의 신에게 말이야. 알기나 해? 먹자. 먹어야 할 거 아냐? 제발 너한테 신경 쓰지 않게 해 줘라. 내 한 몸도 지탱하기 힘들다구."

손정태는 유경의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어주었다. 아침부터 내내 빈 속이지만 유경은 전혀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유경의 손에 들려 있는 나이프의 한 면이 거울처럼 유경의 얼굴을 되돌려 보내 주었다.

나이프. 손정태는 유경에게 결혼 신청을 한 다음 날 성민을 만났다. 성민은 당시 잠시 공부하기 싫다고 휴학을 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정태는 유경과 윤성민 사이에 나그네처럼 들어섰다가 지금까지 좋든 싫든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 나그네는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성민과 얘기 도중 칼을 들이댔었다.

'당신 같은 남자는 유경이에게 아무 소용이 었어. 당신은 지금 병자나 마찬가지야. 스스로 호흡도 못 하는 자가 유경에게 무슨 생명을 불어 넣어줄 수 있다는거야? 제발 유경이를 자유롭게 놔 줘!'

이 얘기는 손정태가 군에 간 일 년 뒤 유경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써 있었다. 자신은 윤성민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유경을 사랑하기 위해 고백하는 거라고 덧붙였다. 유경은 그제서야 손정태의 무모한 짓을 알았다. 그러나 윤성민은 유경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까지 손정태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로는 손정태라는 남자나 칼 사건이나 아무 흥밋거리도 얘깃거리도 되지 않기에 잊고 있었다고 했다.

유경은 그때 손정태가 윤성민에게 들이민 나이프의 모양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억지로 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씹는 것조차 짜증이 나 우물우물하다 그대로 삼켜 버리고는 포도주를 단숨에 마셨다. 순간 심한 어지러움에 유경은 그릇을 밀어내고 손으로 이마를 집고 쓰러질 듯 고개를 숙였다.

"유경아. 우린 이제 삼십이다, 삼십! 더구나 너는 명색이 글쟁이인데 그럴듯한 작품집 하나는 남겨 놓고 죽든 말든 해야 할 거 아냐?"

손정태는 어느 틈에 유경의 옆자리로 아예 그릇까지 옮겨 놓고 앉았다. 그리고는 슬며시 유경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예전부터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군에 입대하는 날도 그랬다. 서울역에 유경과 친구들이 환송을 하러 나갔다. 악수하고, 행가래를 치고, 노래하고, 박수를 보내며 모든 환송식을 거창하게 마치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개찰구로 갔다. 그의 등 뒤로 친구들이 또 한 번의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손정태가 갑자기 홱하니 돌아서서 친구들 앞으로 뛰어왔다. 누가 이유를 물을 사이도 없이 그는 다른 친구들 틈에 서 있는 유경을 끌어내 으스러질 듯 안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휘파람 소리가 울리며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어떤 친구들은 손정태의 호기에 감격까지 했다. 이 일로 인해 한때 친구들 간에는 유경이 손정태의 약혼자로 통했고, 몇몇 남학생들은 손정태를 위해 유경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귀찮게 따라다니곤 했 었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4

유경은 손정태의 손을 어깨에서 끌어 내리고 잡지 얘기를 꺼냈다. 식사를 마친 손정태는 포도주를 마시고 서류 봉투에서 캐리어우먼 4월호 한 권과 사진 한 장, 메모지를 꺼냈다.

"어째 너는 우리 잡지를 한 번도 보지 않은 거야? 참 뻔뻔하군. 그러면서 내가 말하니까 선뜻 이 일을 하겠다고 했어? 진정한 프로의식을 갖고 있는 캐리어우먼이라면 우리 잡지가 필수서적인데 말이야. , 여길 보라구."

손정태는 우리 잡지라고 당당히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고 연구반 동료들에게 밤새도록 므이시낀 공작의 영혼과 두 여성, 나스따냐 필립뽀브냐와 아글라야의 사랑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던 그가 캐리어우먼에 대해 갖는 자긍심에 유경은 그의 넥타이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이 부분 있지? 육 개월간 이 여류작가의 에세이를 연재했는데 반응이 형편없는 거야. 독자투고를 받아보면 차라리 의식 있고 생을 멋있게 사는 남성을 소개하는 난으로 바꿔달라고 야단들이야. 젠장! 의식 없이 사는 놈들이 어딨어. 이 나라엔 다 식물인간들만 산단 말이야? 그래서 에세이를 빼는 대신 매달 원고 40매 분량과 사진 서너 장 박아서 내보내기로 했어. 타이틀은 너도 알다시피 생을 창조해 가는 남성이라고 뽑았지. 우선 유경이가 처음 만날 남성은 ... 그러니까 식물인간이 아닌 의식있는 남자는 바로 이 남자지. 어때 쌩쌩해 보여? 의식이 너무 있어 미쳐 날뛸 것 같지? 허긴 맨날 가슴앓이가 어떻고, 바람이 가슴을 쑤시고 하는 같잖은 수필보담이야 백배는 낫지. 원고료도 괜찮으니까 잘 해봐. 네가 등단한 이후 직장 다니지 않고 이 넓디넓은 사회를 떠난 지 벌써 몇 년째냐? 그래서 내가 특별히 신경을 쓴 거라구. 너에겐 모든 인간이 소재거리잖아. 이 인간 저 인간 만나서 폭 좀 넓히라구, 알았어? , 이 남자 알지?"

손정태는 대학노트 크기만 한 코팅된 사진을 유경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경은 어지러움증이 가시질 않아 건성으로 보고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런! 모른다구? 정말 무통도사(無通道士)시군, 그래서야 무슨 글쟁이라구. 나야 이미 걸레가 된 몸이지만 너는 도선생(도스토예프스키)의 수제자잖아. 하하하... 유경아. 잘 봐라. 이 사람이 바로 독자들이 제일 먼저 다뤄 달라고 하는 의식 있는 양반이지. 어때? 잘 생겼지. 젠장! 같은 남잔데 이 자식은 그럴듯하게 빠졌단 말이야. 이런 노래 들어 봤어? 그대의 영혼에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덮어 주오, 따뜻하게. 그대의 영혼에 눈물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적셔 주오, 넘치도록. 그대의 영혼에 노래가 있다면 그것으로 나를 잠들게 하오, 영원토록. ! 이건 시()지 유행가가 아니라구. 도선생의 백치를 단 몇 귀절로 압축시켜 놓은 것 같지? 그건 그렇고, 유경아. 내가 오늘 왜 여기까지 왔는 줄 알아? 이번 토요일 밤에 이 친구가 여기서 라이브 콘서트를 하거든. 그런데 인터뷰를 요청하니까 콘서트가 끝난 다음에 바로 하자는 거야. 콘서트는 금요일이랑 토요일 이틀인데 마지막 날로 잡더라구. 시간은 여덟 시에 시작하니까 넉넉잡고 열 시에서 열한 시 사이일 거야. 한밤에 임페리얼 호텔에서 여류 작가와 인기 가수와의 데이트라? 정말 질투 나는 얘긴데."

손정태는 유경이 남긴 음식까지 게걸스럽게 먹으며 쉬지 않고 말했다. 유경은 그의 왕성한 식욕을 보고 있자니 자꾸 떠오르는 윤성민의 파리한 얼굴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는 지금 서울에 없다. 독일에 있는 어느 신학대학원 유학을 위해 준비한다고 강원도의 한 기도원에 가 있다. 그는 금식기도를 하며 아직도 확실히 굳혀지지 않은 길에 대해 응답을 듣겠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뱃속을 비우다 못해 내장까지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손정태의 식사가 끝나자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마시자 뜨거운 기운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는지 유경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유경은 빠른 탬포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유경은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손정태는 유경을 가만두지 않았다.

"유경아. 이 작자는 신인이지만 보통 연예인들과는 달라. 석사 출신 가수라는 점, 자작곡만 부르며 자타공인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점, 사생활이 깨끗한 유부남이며 소문난 거만꾼이라는 점, 그러나 여자들이 홀딱 반하게 가장 인간적인 면을 잡아내서 글을 쓰라는 거야. 네 비위에 맞는 인물은 아니지만 매달 가지각색의 사람으로 바뀌니까 이번 일만 눈 딱 감고 하라구. 사진은 우리 사진부 정차장이 찍을 거니까 토요일 아침에 정 차장이 너한테 전화한다고 했어. 이일 핑계로 유경일 정기적으로 만나게 돼서 유감인데. 그러나 워낙 독자들의 변덕이 심해서 이 난()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어. 유경아, 담배 좀 작작 펴라."

손정태는 유경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면서도 말은 그렇게 했다. 유경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고는 가수의 사진을 봤다. '강현섭.' 손정태의 호들갑에 비해 가수 강현섭의 얼굴은 평범했다. 다만 쌍꺼풀 지지 않은 날카로운 눈매는 차가움을 넘어서 어떤 잔인한 기운이 감돌기까지 했지만 이상한 매력에 유경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강현섭의 얼굴을 크고 투박한 손이 덮어 버렸다. 손정태는 사진을 덮었던 손으로 유경의 손을 잡았다.

"유경아."

그는 두렁두렁한 눈길로 유경을 짓누르듯 쳐다보았다. 유경은 손정태의 손을 그의 무릎으로 옮겨 주고는 서류 봉투에 사진과 메모지를 담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까 손정태가 했던 식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그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며 재빨리 말했다.

"정태야. 빨리 결혼해. 너는 보호자가 필요해."

유경은 도망치듯 임페리얼 호텔에서 나왔다. 웬일인지 손정태는 유경을 잡지 않았다. 유경은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하늘을 봤다. 비가 오려는지 검은 옷을 입은 구름이 땅으로 바짝 내려앉았다.

'카페 카사블랑카'

유경은 이 간판을 볼 때마다 테러를 연상한다.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의 항구도시라는 단순한 의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님이 없는 오후의 카사블랑카는 마약중독자의 꿈처럼 흐느적거린다.

"오셨어요? 수진이 언니는 방송국에 가고 없어요. 이번 연말에 할 드라마 때문에 회의가 있어 늦게 온대요."

카사블랑카의 종업원인 희옥이 텅 빈 카페에서 탁자 가득 스포츠 신문을 펼쳐 놓고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옥은 작년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첫 직장이 카페 카사블랑카이며, 목표는 카페 운영이다.

유경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거리에선 세상이란 것이 영 낯설고 순간순간 지겹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창을 통해 보면 그 밖의 세계는 동화처럼 따뜻하고 그림처럼 아름답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5

"커피 드릴게요."

희옥이 커피를 끓이려고 가스 레인지를 켜는 소리가 몇 초 안되었지만 흘러나오는 유행가와 조화를 잘 이룬다고 생각하며 유경은 담배를 꺼냈다. 창 밖의 남산이 마()의 산처럼 어두웠다. 카사블랑카는 케이블카를 운행하는 남산 삭도(索道)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일부러 오는 손님들도 있지만 대부분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려고 들르는 곳이다. 진수진이 작가로 일하고 있는 방송국 사람들이 가끔씩 들러 술을 마시기도 한다.

"비 올 것 같지 않아요? 오늘 비 올 확률이 칠십 퍼센트래요."

희옥이 커피를 내려놓고 유경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을 붙였다. 유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칠십 퍼센트일 때 비가 온다면 그 칠십은 기적의 숫자일까. 유경은 창문에 칠십이란 숫자를 눈으로 그려봤다.

"요새 새로 쓰는 소설 있어요? 문학지에 실린 언니 소설 읽었어요. 수진이 언니가 읽어보라고 사다 줬거든요. 끝까지 읽긴 읽었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소설이라고 그렇게 다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고등학교 때 읽은 김홍신이라는 작가의 인간시장이라는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고 읽었는데 ... 유경이 언니도 재밌는 소설을 써봐요. 그럼 드라마도 되고, 영화로도 되고, 돈도 벌고, 유명해지잖아요. 요새는 요, 저부터도 쉽고 재밌는 소설을 좋아해요. 연애편지 하나 못 쓰면서 이런 말하는 내가 건방진 건가? 그런데 그 소설, 열쇠 구멍 속의 광인(狂人)이라는 소설 말이에요. 거기 나오는 세 여자 중 진짜 미친 사람은 누구죠? 그거 실화에요?"

유경은 희옥이 그 소설을 다 읽었다는 말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열쇠 구멍 속의 광인이란 중편소설은 작년 봄, 조간신문에 실린 살인 사건 기사에서 힌트를 얻어 쓴 글이다.

인천에 사는 두 여자가 정신질환자인 여동생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큰 언니는 30살의 유부녀, 작은 언니는 28살로 결혼 날짜를 잡은 상태, 그리고 막내는 23살로 집에 감금된 상태의 정신질환자. 그런데 큰 언니가 남편이 출장간 틈을 타 동생과 짜고 막내를 죽인 뒤 집 안에 시체를 숨겨 두었다가 발각됐다. 막내가 살해된 이유는 언니의 결혼방해죄. 기사는 사회면에 간단하게 실렸으나 유경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었다.

'결혼은 의식(儀式)이다. 이 의식은 눈물을 원하지 않으며 통곡을 미워한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손짓해 불러 그들과 축복의 인사를 나누려 하고 문 두드리는 사람을 내쫓지 않는다. 그만큼 결혼의 의식은 축제의 성격을 띤다. 그렇다. 결혼은 축제고 축제란 기쁨의 제사(祭祀). 제사에는 신과 제사장과 제물이 있어야 한다. 살인사건의 세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혼 의식이라는 축제에 꽃 대신 핏방울을 흩뿌렸고, 춤 대신 몸부림으로 땅을 흔들었으며, 웃음과 노래 대신 비명과 애곡(哀哭)으로 제단을 적셨다. 이 결혼의 신이 누구이건대 피의 제물을 원했으며, 제사장은 신과 어떤 교접을 했기에 제물의 피를 뿌렸고, 제물은 왜 자신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냈을까. 과연 누가 신이며 누가 제물일까.

감금! 막내는 감금된 상태고 두 여자는 축제의 의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여자가 신이며 제사장이고 감금된 자는 제물이다. 그렇지만 감금됐다 해서 꼭 제물일 수 있을까. 이 시대는 신과 제물을 구별하기 힘들다.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신은 감금된 상태인지도 모른다. 감금된 신? 그런 신은 무얼까. 종교와 물질일 수 있다. 종교라 함은 인간의 모든 약점 중 공포라는 약점을 최대로 이용하는 종말론이며, 물질이라 함은 실락원(失樂園)에서 말하는 9개급 악마 중 최하의 왕이다. 종말론과 물질. 이것은 신과 제사장을 의미한다.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은밀히 교접해 온 관계가 아닌가.

둘의 관계는 겉으로는 순결한 신부와 믿음직한 신랑과의 결혼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어둠 속에서만 서로 애무하고, 혼돈 속에서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불륜이다. 이들은 제물의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제물을 상상하지도 못하고 꿈조차 꾸지 못한다. 자유로운 제물. 혼돈의 신과 제사장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제물도 혼란스러워야 한다. 혼란의 제물. 결국 혼란의 제물은 감금당한다. 혼돈의 창살 안에서 혼란의 제물은 살아남기 위해 혼돈의 신과 제사장에게 거짓 입맞춤을 한다. 그러나 그 입맞춤은 죽음의 입맞춤이다. 누가 죽을지 모른다. 이제껏 혼돈의 신과 제사장과 혼란의 제물이 전쟁을 했을 때 누군가 승리를 해서 종결된 적이 없이 잠시 막을 내리곤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싸움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우리들 자신도 모른다. 각자 자신이 신인지 제사장인지 제물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그리고는 끝도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열쇠 구멍 속의 광인은 유경의 이런 생각에서 나온 또 다른 양상의 전쟁에 관해서 쓴 소설이다. 마침 계간 문학지에서 중편 원고 청탁이 왔기에 보냈다. 소설은 봄호에 나왔다. 진수진이 유경의 소설이 실린 잡지를 산 건 순전히 매스컴 탓이다. 유경의 대학 은사이기도 한 평론가 B교수의 평이 우연히도 유경이가 살인사건 기사를 봤던 신문에 커다랗게 실렸었다.

'유경아. 너 그러다가 진짜 유명 작가되면 나 같은 방송쟁이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겠구나. 나쁜 기집애! 그런 일이 있으면 내게 책 한 권 주는 건 고사하고 읽어보라고 통보 정도는 해줘야 하잖아. 카사블랑카 커피가 이젠 지겨워졌어? 너 오늘 밤에 잔말 말고 카사블랑카로 와. 내가 한턱 낼게. 평론가 B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네 작품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 난 네가 너의 아버지랑 같이 부도가 난 게 아닌가 했었는데 아니었어. 넌 마치 너의 아버지 인생이 부도나길 기다렸다가 네 날개를 펼친 것 같아. 어쨌든 좋겠다. 나 같은 방송쟁이는 십 년을 써갈겨도 남는 게 없으니 ... 오늘 꼭 나와라.'

그러나 유경은 그날 밤, 카사블랑카에 가지 않았다. 진수진의 말 중 아버지의 부도와 자신의 날개에 대한 말들이 유경을 집 안에 감금시켰기 때문이다.

"유경이 언니. 나는요, 소설 쓰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면서요,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뭣하러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어요. 눈이 오면 눈이 오니까 신나고 비가 오면 비가 오니까 즐겁고.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되나요? 여기 가끔 오는 작가 선생님들을 보면 이상해요. 다 이름있는 분들 같은데 그러면 글쓸 게 많이 있을 테고 돈도 많이 벌 텐데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나, 술을 구멍 난 독에 붓듯 들이 마시지 않나. 뭐가 모자라서 그러죠? 다 배가 불러서 그럴 거예요. 나는요, 나중에 카페 차리면 글쓴다는 사람은 아무리 매상 많이 올려줘도 받지 않을 거예요. 귀찮아요. 말들이 너무 많아요.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웬 말이 그렇게 많죠? 언니는 그러지 않아서 좋아요. 우리 수진이 언니도 그렇구요. 그런데 수진이 언니가 요새 좀 이상해요. 글을 예전처럼 많이 쓰지 않구요, 툭하면 욕을 해요. 씨팔 놈의 세상 이러면서요. 어머머 ... 미안해요. 저는 이런 욕 할 줄 몰라요. 그리고 언니도 그런 욕을 옛날엔 하지 않았어요. 요즘에 그런다는 거죠. 술에 취해서 집에 못 가고 여기서 잔 적이 여러 번이에요. 왜 그런지 알 수 없어요."

유경은 희옥의 얘기를 들으며 진수진의 말을 떠올렸다. 나 같은 방송쟁이는 십 년을 써 갈겨도 남는 게 없으니 ... 진수진은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를 초조하게 하는 건 무얼까.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6

진수진은 38살의 미혼녀인 방송작가다. 잡지사에서 일하다 드라마공모에 당선된 게 인연이 되어 시여 년째 일을 하는 그녀는 다른 전문직 미혼 여성들처럼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진수진의 카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항상 열려 있다. 카사블랑카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미스 오픈이라고 한다.

'미스 오픈씨. 서울의 모든 문이 사랑의 배신자처럼 제 몸뚱이를 꼭꼭 옥죄이고 있어도 그대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기에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합니다. 핫핫핫.'

지난 추석, 오전에 유경보다 먼저 와 술을 마시고 있던 시인 R씨가 한 말이다. 유경도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미스 오픈씨. 왜 그대의 육과 영혼의 문은 항상 잠겨져 있습니까? 서울의 모든 문이 창녀처럼 손짓을 하고 있을 때도 왜 당신은 문을 열지 않습니까? 오늘 밤. 달도 유난히 밝을 텐데 이제는 미스 오픈씨의 문이 열리도록 카사블랑카여. 너는 문을 닫아라. 핫핫핫...'

유경은 시인의 취한 목소리와 그 소리에 답례하듯 시인의 잔에 술을 붓던 진수진의 모습을 생각하며 커피를 마셨다.

"유경이 언니. 수진이 언니랑 얘기 좀 해봐요. 우리 언니랑 제일 친하잖아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을 거예요. 혹시, 남자 문제가 아닐까요? 아니야. 수진이 언니는 남자를 싫어해요. 특히 언니를 좋아하는 낌새가 있으면 바퀴벌레 보듯 해요. 유경이 언니. 혹시 그런 성격은 병이 아닐까요? 어머? 드디어 비가 오네. 우산 가지고 왔어요? 오늘 장사 공치겠네. 드라이브족이나 왕창 와라!"

희옥인 횡하니 일어서며 안에 있는 화분들을 밖으로 내다 놓기 시작했다. 유경은 확률 칠십 퍼센트의 기적을 생각하며 희옥과 같이 사월 봄비 속에 화분을 바쳤다. 다섯 시도 되지 않았는데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차들을 보며 유경은 연남동의 철로를 떠올렸다.

'지금쯤 그 철로에도 빗물이 스며들고, 오고 가는 기차의 몸뚱이에도 빗물이 파고들겠지. 그런데도 늙은 간수는 세상을 향해 흰 깃발을 흔들까?'

"언니! 빨리 들어오세요. 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요. 아이, 추워라. 겨울이 다시 올려나. 괜히 난로를 치웠네. 빨리 들어 오세요. 바람까지 부니까 더 춥네요."

희옥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유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머! 그새 다 젖었네. 이 수건으로 닦으세요, 춥죠? 뜨거운 커피 한 잔 더 드릴게요. , 날도 그런데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어야지."

유경은 몸의 물기를 닦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비 때문에 뿌옇게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보느라 애썼다. 그때 희옥이 노래 테이프를 갈아 끼웠다. 황량한 바람보다는 싸늘한 비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남자 가수의 노래가 흘렀다.

남자 가수? 그래 하며 유경은 손정태에게서 받은 봉투에서 강현섭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코팅된 탓인지 밝지 않은 카페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처럼 보였다. '강현섭'. 가수의 이름 석 자는 그가 입고 있는 스카이블루 빛깔의 남방셔츠에 예리하게 칼로 새긴 듯했다.

그의 두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계약자와 깰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양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유경은 카알 메닝거의 말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사람에겐 세 가지 욕망이 있다. 하나는 죽이고 싶은 욕망, 또 하나는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망, 나머지는 죽고 싶은 욕망이다.' 그렇다면 강현섭의 눈은 무슨 욕망으로 사진 속에서조차 저토록 차가운가. 차가움은 죽음이다.

유경이 아직도 빗물이 등을 감싸는 한기(寒氣)에 가볍게 몸을 떨 때 희옥이 새로 끓인 커피를 두 잔 들고 와 앞 의자에 풀썩 앉았다.

"어머머! 언니, 이 사람 강현섭 아니에요? 어머나... 내가 이 사람 얼마나 좋아한다구요. 이리 줘봐요."

희옥은 유경의 손에서 사진을 나꿔채 제 얼굴에 바짝 대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언니. 지금 나오는 노래가 바로 이 사람이 부르는 노래예요. 제목이 뭔지 모르죠? 허긴, 책만 읽는 언니가 알겠어요. 이별의 찬가라는 노랜데요, 첫판이 나온 지 두 달밖에 안 됐어요. 제 친구들 중엔 이 사람 팬클럽에 가입한 애들도 있어요. 나도 하려고 했는데 수진이 언니한테 말했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었어요. 하나라도 제대로 하라는 거예요. 나보고 카사블랑카 귀신이 되라는 건지... ! 언니도 이 사람 팬이에요? 그러고 보니 강현섭이 유명하긴 유명한가 봐요. 소설가가 사진을 들고 다닐 정도니 말이에요. 하지만 이 사람은 텔레비전에나 라디오에는 절대 출연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사람 얼굴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런 가수보고 뭐라고 하던데 ... 언니, 혹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언더 그라운더라고 하지."

유경은 희옥에게 짤막한 대답을 해주고 이별의 찬가에 귀를 기울였다. 강현섭은 자작곡을 하는 사람이니 특히 노래의 가사를 들으면 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차가움이 밤마다 나를 깨어 있게 했소. 슬픔이었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을 수 있었소. 이것은 이별의 찬가.

당신의 돌아섬이 나를 빗속에 서 있게 했소. 아픔이었지만 나는 빗물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소, 이것은 이별의 찬가.

당신은 나에게 달콤한 아픔. 쓰라린 기쁨. 찬란한 슬픔...'

유경은 강현섭의 노래와 다른 유행가 사이에서 차별화를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강현섭의 구두(口頭) 선전원처럼 아니 강현섭이라는 병명의 환자처럼 희옥은 떠들었다. 처음에는 강현섭의 예찬론을, 그다음엔 그의 시시콜콜한 스케줄을. 그런데 갑자기 다음 단계에 와선 희옥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7

"그런데 이 사람 유부남이에요. 그래서 어떤 아이는요, 이 사람이 부인이랑 이혼하라는 주문을 하루에 백 번도 넘게 외웠댔어요. 하지만 며칠 만에 포기하고 말았어요. 스포츠신문에 난 기사 때문이죠. 이사람이 부인이랑 아들이랑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거든요. 웬일로 신문엔 얼굴을 내밀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신문에 뭐라고 실렸는지 알아요? 강현섭이 연예가에서 가장 사생활이 깨끗하고 가정도 화목하대나요! 이 사람 참 한심한 것 같아요. 그런 기사가 나가면 여성팬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인기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탠데 ... 텔레비전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을 바엔 끝까지 신문이고, 잡지고 조용히 있는게 좋지 않아요?"

희옥인 앞으로 고꾸라질 듯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치고 유경을 노려보며 말했다. 유경인 그 모습을 보며 이혼의 주문을 날마다 외운 사람이 바로 너지 하고 묻고 싶었다.

"? 손님 오네."

유경도 희옥을 따라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빗물 때문에 더욱 새까맣게 보이는 중형차에서 초록색 점퍼를 입은 키가 큰 이십 대 남자와 하얀 바바리에 구두며 그외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온통 하얀색인 또래의 여자가 급히 들어 왔다.

"어서 오세요."

희옥은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눈()의 여왕 같은 여자를 살피며 주방으로 갔다. 두 남녀가 서로 손수건으로 빗물을 닦아 주며 카페가 자기들의 밀실인 양 몸짓을 나누는 걸 보며 유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문받은 위스키를 따르던 희옥이 문 앞까지 나왔다. 유경은 카사블랑카에서 무얼 마시던 값을 지불할 수 없다. 진수진이 큰 소리로 유경과 희옥에게 선포를 했기 때문이다.

'희옥아. 김유경이라는 사람에게선 담배값조차 받으면 안 된다. 만약 준다고 받으면 넌 카사블랑카 인연 끊기는 줄 알아라. 나는 지금 대문호(大文豪)가 될 사람에게 투자를 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그리고 유경이 너도 여기서 지폐 보이는 짓 할려면 아예 발 끊고, 알았어? 나는 대문호의 작품 주인공으로 발탁될지도 모르는 나 자신에게 투자를 하고 있단 말이야.'

진수진이 힘주어 말했던 투자란 단어를 생각하며 유경이 막 문을 열려는데 희옥이 잡았다.

"언니. 그 사진 나 주면 안 돼요? 물론 사면 되는데요, 저 아래 숭의여중까지 내려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없잖아요."

희옥은 자기가 왜 그 사진을 원하는지 설명하려 했다. 유경은 말을 막으며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주었다. 그러자 희옥인 사진에 입을 맞추며 좋아했다.

"언니. 우산 없죠? 내가 저 윗 가게에서 사 올게요."

"괜찮아. 그럼 수고하고 수진이 언니한테 안부 전해줘. 안녕."

유경인 남산 삭도 위쪽으로 뛰었다. 빗방울이 굵어진데다가 바람까지 불어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웨터가 무겁게 느껴졌다. 비닐우산은 값이 오른 것 외에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썼는데도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그 짧은 거리를 뛰어오는 동안 유경은 함빡 젖고 말았다. 유경은 닫힌 대문 앞에서 잠시 몸을 떨었다. 부도로 망한 집이라 변변한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유경의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철저히 문단속을 명령했었다. 그렇다고 대문이 그녀의 비호를 받는 건 아니다. 대문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본래 초록색인 듯한 철문은 그 칠이 다 벗겨지고 그 자리에 시커먼 녹이 슬어 아직 운 좋게 남아 있는 초록색은 철조각에 핀 이끼처럼 보인다. 유경이 열쇠를 꺼내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동차 경적을 요란히 울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소박맞은 신부처럼 하얀 고급 승용차가 빗속에 있고, 운전석에 앉은 선그라스를 낀 중년 여자가 손짓했다.

유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누구라는 걸 알고 천천히 다가갔다. 윤성민의 어머니인 권서진이다. 윤성민은 평소 남들 앞에서 가신의 어머니를 권여사로 칭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렇게 부른다.

유경이 운전석 쪽으로 오자 권여사는 손가락으로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권여사는 유경이 차에 오르자 선그라스를 벗었다.

"역시 나는 도박의 운이 대단히 있는 사람이야. 유경이네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언제 올 줄 알아야지. 그래서 내기를 했지. 한 시간 안에 널 만날거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엉터리다 하고 말이야."

권여사는 말을 하며 재빠른 눈길로 유경을 훑었다. 유경은 빗물과 권여사의 눈길이 범벅이 되어 자기의 몸 구석구석을 핥고 다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오늘따라 권여사의 머리결이 더 노래 보여 유경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권여사는 뭔가 초조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안되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지. 그러니까 나중에 결혼했을 때 권여사와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조심해. 하하하...'

어디선가 윤성민이 숨어서 진여사의 노란 염색머리를 보고 웃는 듯해 유경은 몇 번 고개를 돌렸다.

"시간 괜찮지?"

권여사는 애초에 유경의 대답은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하자마자 차를 몰았다. 유경은 뭐라 말을 하려다 참았다.

'윤성민의 어머니가 이곳까지 왔다는 건 내게 들을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야. 원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게 권여사가 좀 더 솔직하고, 자세히 얘기할 수 있게 만드는 거야.'

두 사람은 서초동에 있는 권여사 오피스텔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대해 윤성민에게서 들은 바가 있지만 오기는 처음이다. 서초동의 밤은 다른 곳보다 일찍 그리고 화려하게 오는 듯했다. 오피스텔의 네온사인도 다른 것에 비해 만만치 않았다.

권여사는 제복의 두 경비원에게 깍듯한 존대어로 인사를 나누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껏 멋을 낸 이십 대 초반의 아가씨 네 명이 떠들며 나왔다.

"권여사님. 굿 이브닝!"

", 안녕하세요. 그런데 미스 송은 안 보이네요."

권여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오픈 버튼을 누른 채 물었다.

"쏭이요? 쏭쏭 할 일이 있다구 아침 일찍 사우나 하고 사라졌어요."

"권여사님. 우리 봤어요. 파라오 레스토랑에서 아드님이랑 데이트 하는 것 말이에요. 우리들에게 소개 좀 시켜줘요. 키도 늘씬한 데다가 너무너무 근사하던데요. 안 그렇니, 얘들아? 권여사님, 아드님 직업이 뭐예요? 이 동네서 사업하나요?"

"! 사업가 같지는 않더라. 꼭 선생님같더라. 너는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니?"

"아가씨들 미안합니다. 그 애는 내 외아들인데 임자 있는 몸이에요. 바로 이 작가분이죠. 잘들 보세요. 사랑의 도박을 할 상대가 되는지는 알아서 판단해요."

권여사는 오픈 버튼에서 손을 땠다.

"김샜네!"

네 여자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운차게 소리를 질렀다. 유경은 점점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네 여자에게 고개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8

권여사의 사무실은 12층이다. 공유면적을 제외해도 30명이 넘는 사무실 사용자는 권여사 혼자다. 유경은 그동안 성민에게서 들어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권여사의 사치와 일본 물건 집착증을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뱉았다. 모든 사무 집기는 말할 것도 없고 책상 한쪽에 놓인 티슈까지 토막난 뱀의 형상처럼 일어가 박혀 있다.

"커피 줄까?"

권여사는 어느새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유경은 조금 전까지 권여사가 입고 있던 옷이 어떤 건지 생각나진 않았지만 초록색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화사한 연노란 빛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자줏빛 가죽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권여사는 커피잔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진주목걸이의 알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만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유경은 진주알들이 자기 목구멍을 조금씩 막는 듯해 구토증이 일었다.

"내가 이곳에 유경일 데리고 온 건 앞으로 내가 하는 말에 뭐랄까 ... 일종의 이해를 원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내 말을 들어 주는 유경이 태도의 진지성을 위해서지. 기분 나쁘게는 생각 마, ?"

권여사가 다른 사람들과는 존대말을 나누면서 자기에게는 마치 어린애 다루듯 말하는 심중을 유경은 헤아리기 힘들었다.

"우리 성민이가 어느 기도원에 있지? 그리고 언제 온다고 했지? 그래! 내가 미리 얘기하는데 나는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야. 따지거나 머리 굴리는 것도 말이야. 예스면 예스고, 노면 노 아니야? 안 그래? 붉은 콩을 앞에 두고 검정 귀신과 붉은 귀신이 있다 해서 붉다하나 검기도 하고, 검다 하나 붉기도 해서 이 콩은 검붉은 콩이라 하거나 붉검은 콩이라 해야 합니다 하고 귀신들 비위를 맞추려는 짓은 정말 귀신놀음이 아닐까? 난 지금 가게로 가야 해. 성민이한테서 들었겠지. 내가 물장사 한다고. 나는 시간이 돈인 사람이야. 그래. 내 얘기가 너무 길어서 내가 질문한 걸 잊은 건 아니지 모르겠네. 다른 건 필요 없고 어느 기도원인지만 가르쳐 줘."

쉰 살의 나이에 맞지 않게 피부가 팽팽하며, 어깨도 구부정하지 않은데다 연노란빛 정장과 도도한 말씨 탓에 진여사는 별일이 없는 이상 앞으로 몇십 년 더 일할 수 있을 건강을 가졌다. 유경은 권여사의 노란 머리카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이제 윤성민씨에 관해선 아는 게 없는 사람이에요. 이젠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없고 그 사람 자체를 생각하기도 싫어요.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끊어졌어요. 그리고 무례한 줄 알면서도 말씀드리겠어요. 어머니께서 지금 하셔야 할 일은 성민씨의 행방을 찾는 일이 아니라 서울로 돌아올 그를 위해 준비하시는 거예요."

유경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자리를 잡았고 무수한 네온 불빛들을 뚫고 비는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닐우산을 권여사 차에 두고 내린 걸 알았다.

권여사는 아무 말 않고 유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유경이 문을 열며 인사하자 권여사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았다.

"모든 게 너 때문이야. 성민이와 나는 우여곡절 끝에 한집에 살게 됐어. 그런데 바로 너 때문에 그 애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거라구. 그 애는 지금 병을 앓고 있어. 너한테 옮은 전염병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그 애는 누구에게도 감염될 아이가 아니야. 네가 시작을 했으니까 끝도 네가 책임지란 말이야. 난 이제 쉰이 넘은 나이야. 이제부터라도 내 아들과 사람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야. 나보고 그 애를 위해 준비하라구? 뭘 할까? 다 팔아서 사면이 크리스탈로 된 교회라도 하나 지어줄까? 주기도문을 외워 그 애를 기쁘게 해줄까? 아니면 가게를 처분하고 집에 틀어박혀 그 애에게 식사를 꼬박꼬박 차려준다고 맹세라도 할까?"

권여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껏 도도한 매처럼 유경이를 움켜 쥐려고 손톱을 내세우던 그녀는 순식간에 매 앞에서 공포를 이기지 못해 떠는 병아리가 되었다.

"나는 십 년 동안 눈물을 삼키며 성민이가 보고 싶어도 참아 왔어. 그런데 너는 내가 밤마다 혓바닥을 눈물로 적실 때 그 애를 차지한 거야. 그리고는 병까지 옮겨 놓고 이제 와서 나한테 떠맡겨? 그 애는 내 뱃속에서 생명을 얻었고, 자랐으며,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우리 모자 사이의 탯줄은 끊어질 수 없는 거야. 그런데 네가 그 탯줄 사이에 기생충처럼 끼어든거지. 그 애한테 들었어. 너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대단하시군. 넌 책임도 못 질 일을 왜 벌여 놓은 거야? 하늘로 들어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면 아예 문까지 일러주든지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지옥의 길이라도 가르쳐 줘야 했어. 성민이는 천국은 알아도 지옥은 모르는 아이야.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유경은 대꾸하지 않고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지금은 누가 방주(方舟)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유경은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피아 모텔, 나이스 터키 바쓰, 투나잇 룸싸롱, 할러데이 모텔, 북해도 일식집, 파라오 레스토랑, 마드리드 룸싸롱, 장미 여관, 앙카라 모텔, 긴자 가라오께, 환타지아 가라오께, 붉은 장미 카페, 시실리아 카페, 만리장성 중식집, 현해탄 일식집, 미시시피 모텔사우나, 그리고 오피스텔 바로 앞의 작은 가게인 충북슈퍼의 간판까지 빗물에 줄줄 녹아 흘러내려 길바닥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건물 앞과 골목마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자가용들은 구약시대의 대홍수의 심판 때 나뭇잎과 함께 물 위에 떠 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그 시체들 사이사이를 바삐 누비고 다니는 여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네온사인 불빛에 실명(失明)을 하고, 그들의 귀는 밤마다 나타나서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잘 길들여져 다른 외침이 들려올 때는 습관적으로 청각을 상실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9

'이것은 광란이다. 모두 미쳤어. 소돔과 고모라가 불의 심판을 받기 훨씬 전 인간은 이미 타락의 절정을 이루었지. 최초의 심판이 홍수였다면 최후의 심판은 불일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 주었어. 인간은 물과 불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과연 누가 물과 불을 가진 자일까.'

유경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몇 발자국 떼기 무섭게 빗물이 유경을 급습했다. 유경은 얼떨결에 뒤로 물러서며 물의 심판을 구약시대 속에 묻어 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들려왔다. 다음 순간 빗물 때문인지 짙은 화장이 번져 얼굴이 흉하게 된 여자가 어깨에 메는 작은 가방과 하이힐을 손에 든 채 오피스텔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유경이 뒤로 더 물러설 때 이번엔 남자가 재크나이프를 들고 뒤쫓아 왔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오피스텔 로비에는 두 경비원만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여자가 들어 오는 바람에 엉거주춤 일어났고, 남자가 쫓아왔을 때는 팔을 내저으며 어, 어 하고 얼어 붙은 듯 서 있기만 했다. 유경 역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가방과 구두를 떨어뜨린 여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한쪽 벽에 바짝 기댄 채 두 손을 움켜 쥐고 부르르 떨었다. 여자는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았다. 빨간 원피스는 뒤에 달린 지퍼가 끝까지 올려지지 않아 한 쪽 어깨가 드러났고, 물을 들인 아주 짧은 머리는 빗물에 젖어 살갗에 들러붙은 속옷처럼 되어 있었다.

남자는 젖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여자 앞으로 갔다. 술에 몹시 취한 남자의 입에선 쉬지 않고 욕설이 쏟아졌다. 그것은 마치 남자가 그동안 먹고 마신 술과 음식이 뱃속에서 썩은 채로 있다가 견디지 못하고 꾸역꾸역 나오는 구토물 같았다.

남자는 칼을 어깨 위쯤에 든 채 여자 앞에 바짝 섰다. 그제서야 두 경비원이 남자 뒤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여자는 겁에 질린 나머지 도와달라는 말도 못 하고 떨기만 했다.

"돈 준다고 했잖아. 이리 와, ? 내가 보여 줬잖아. , !"

남자는 양복 저고리에서 갈색 지갑을 꺼냈다. 그 바람에 칼을 저고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보라구. 현금으로 이게 얼마냐? 한 오십은 될거다. 그리고 백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가... 몇 장이냐? 에이 귀찮아. 그다음 아메리카 익스프레스 카드, 이건 또 뭐야? 그래, 운전 면허증... "

남자는 지갑에서 비틀거리며 하나씩 꺼내 보였다. 그래도 여자는 고개를 도리짓했다. 그때였다. 사십이 넘은 경비원들이었지만 날렵하게 뒤에서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술에 만취된 탓인지 그 자리에 꺼지듯 쓰러졌다.

순간 남자가 들고 있던 지갑과 지폐, 수표, 카드 등이 떨어지며 바닥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한 경비원은 남자를 붙잡았고, 다른 경비원이 어이구 이 돈들 하며 주워댔다.

유경은 큰 숨을 내쉬며 여자에게 빨간 구두를 집어 주고 원피스의 지퍼를 올려 준 다음 어깨에 가방을 걸쳐 주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구두를 신고 유경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경비원들이 정신을 잃은 남자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여자는 안심한 듯 현관문 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X같은 새끼야! 너 같은 자식이랑 있을 바엔 내가 똥통 속에 빠져 죽겠다. 씨팔놈의 세상!"

여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유경은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화장이 번진데다 짙은 파운데이션이 얼룩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여자는 늙은 마녀를 상상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유경은 여자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상상하며 뒤돌아섰다. 그러자 여자의 목소리가 횡한 오피스텔 로비를 울렸다.

"언니! 나랑 술 한잔해요. 내가 살게요."

 

두 사람은 오피스텔 지하에 있는 카페로 갔다. 둥근 테이블이 다섯 개 있는데 다행히 하나가 비어 있었다.

쓰러질 듯 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여자는 화장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담배와 맥주 세 병, 오징어를 시켰다. 빠른 속도로 담배 한 개피를 다 피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언니, 고마웠어요. 아까 그 새끼가 어떤 새낀 줄 알아요?"

여자는 유경에게 한 잔 따라 주고 나서부터는 자작하며 술과 담배를 쉬지 않고 번갈아 마시고 피우고 했다. 여자는 유경에겐 아무 관심도 없고 오직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 새낀 변태예요, 변태! 난 소피아 모텔에 있거든요. 그래서 그 새끼를 알아요. 나랑 같이 있는 진주가 받아 본 적이 있거든요. 그 애도 아무것도 모르고 지배인이 가라니까 간 거죠. 그런데 진주가 그날 밤새 내내 시달리고는 사흘이나 일을 못 했어요. 어떻게 하는 줄 알아요? 여자를 발가벗겨서 손발을 묶은 다음 물을 가득 채운 탕에 집어넣어요. 자기는 넥타이조차 풀지 않고서 하는 짓이죠. 그리고는 어디서 구해오는지 수십 마리의 병아리를 가방에서 한 마리씩 꺼내요. 그런 다음 병아리를 산 채로 재크 나이프로 목을 잘라요."

유경은 여자의 말을 믿을 수 었었다. 여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 떨며 본 공포영화를 기억해 내듯 눈을 감고 말을 계속했다.

 

차차 흐려진 밤부터 비 내리고- 10

"그리고는 얼굴만 물 밖으로 나와 있는 진주의 눈앞에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병아리의 자그마한 머리를 떨어뜨려요. 진주는 비명을 지르죠. 그러면 남자는 웃으면서 기분이 좋다고 해요. 더 크게 비명을 지르라고 하죠. 더 크게, 더 크게 하면서 잠시 병아리 목을 자르는 짓을 그만두고 지갑을 꺼내 돈이랑 수표를 보여줘요. 비명이 커질 때마다 돈이나 수표를 한 장씩 목욕탕 거울 앞에 쌓아 나가요. 그런데 비명을 지르지 않고 울거나 살려 달라고 하면 돈에 불을 붙여요. 수표에도 붙이고요. 아까 그 자식은 국회의원 아들이라는데 꼭 그 짓을 한대요. 여자 몸에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말예요. 턱주가리에 수염이 난 걸 보면 불구같지는 않은데. 내가 이 바닥에 몇 년 있었지만 저런 놈은 처음이에요. 물론 우리들을 귀찮게 구는 놈들도 있어요. 혁대로 우리들의 맨 살을 때리거나 자기를 때려 달라는 웃기는 놈도 있죠.

또 어떤 늙은 영감은 구역질나게 우리보고 엄마, 엄마 하면서 안기는 놈도 있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신사예요. 별의별 놈들이 다 있거든요. 하지만 직업이니 참고 하죠. 겉으로는 멀쩡하고 한 자리씩 하는 놈들이 더 그래요. 아까 그 새끼도 마찬가지예요. 그놈은 병아리들 목을 잘라 머리는 탕 안에 집어 던지구요, 머리 없는 몸뚱이를 손으로 쥐어짜듯 해서 피를 남김없이 탕 안에 있는 진주의 얼굴에 뿌려요.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병아리의 피가 진주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눈 속으로 들어가고 해요. 그러다 진주는 기절했죠. 그런데 더 징그러운 건 깨어 보니까 알몸뚱이인 진주를 양복 입은 그놈이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보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놈 얼굴과 손, 옷은 온통 피투성이고요. 그 바람에 진주는 두 번이나 기절을 할 뻔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렸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라도 제대로 받자 하고 말이에요. 놈은 진주한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는 지갑에 있는 돈이랑 수표를 다 털어 주고 나갔대요. 어디선가 옷을 갈아 입고 피를 씻어 내고 신사 행세를 하겠죠.

진주는 저놈한테 당하고 나서 물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고 해요. 그래서 사흘간 세수도 못 하고 이도 닦지 못했어요. 그러나 목돈은 만졌죠. 웃기는 건요, 지배인 놈이 진주가 사흘이나 빠졌는데도 야단치기는 커녕 오피스텔로 과일 바구니 들고 위문 공연하러 왔대요. 그러니 그 놈이 한번 왔다 가면 소피아에 생기는게 굉장한가 보죠? 그 일이 있은 지 오늘이 딱 보름째 되는 날인데, 내가 어떻게 보름째라는 걸 기억하냐면 진주가 목돈이 생겼다고 보름 후에 오피스텔을 옮긴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낮에 진주의 새 오피스텔 구경을 하고 소피아에 오니까 지배인이 너 오늘 운 좋다면서 509호실로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갔죠. 그 자식은 침대에 양복 차림으로 앉은 채 술을 마시고 있더라구요. 벌써 하나 비우고 두 병째였어요. 놈은 웃으며 나보고 옷을 벗으라고 했어요. 벗었어요. 목욕탕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갔죠. 그런데 탕 안에 더운물이 그득 받아져 있지 뭐예요, 순간 저는 바로 그놈이구나 했어요. 보통 남자들은 그 짓거리는 안 하거든요. 지 애인이나 마누라들한테는 할망정 말이에요. 그래서 잠깐 지배인에게 볼일이 있다면서 원피스를 입었어요. 그런데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제대로 지퍼를 올리지도 못하고 가방을 막 드는 순간 놈이 달려든 거예요. 나는 죽자고 뛰었죠."

여자는 지금 뛰고 있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난 소피아에서 일 못 할 거예요. 지배인이 화낼 건 당연하죠. 국회의원 아들 녀석 비위를 못 맞췄으니. 게다가 요즘은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새파란 년들이 줄 섰거든요. 지배인은 올 들어서 내가 늙었다고 은근히 구박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새끼를 나랑 진주한테 붙였죠. 우린 그래봐야 스물여섯밖에 안됐는데..."

여자는 스물여섯이라 말하며 쓸쓸한 얼굴을 했다. 고개까지 숙였다. 유경은 누가 이 여자에게 스물여섯의 나이가 슬픈 때라고 가 쳐 주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갈 데는 쎄고 쌨어요. 나 오라는 데 많아요. 내가 강남에선 시세 없지만 그래도 다리 하나만 건너가면 따봉이라구요. 따봉! 우리 건배합시다!"

유경은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잔을 부딪쳤다. 건배의 소리가 무척 우울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 새끼 분명 뽕 하는 놈일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 그럴 수 있어요. 이 동네 뽕환자들 많다구요. 나도 몇 번이나 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니올시다 했죠. 웬줄 알아요? 뽕 때문에 인생 조지는 연놈들을 신물 나게 봤거든요. 내 인생은 나의 것!"

유경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겠다는 여자를 할 수 없이 혼자 놔두고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신기하게도 비는 깨끗이 그쳤다. 두 시간 전만 해도 서초동 전체가 환락의 정액과 썩은 내 나도록 묵은 구토물을 쏟아내며 빗물과 함께 심판을 예고하는 듯했었다. 그러나 비가 그침과 함께 거리는 심판을 비웃듯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흔들리고 있다.

유경은 불이 꺼진 권여사의 사무실을 올려다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가로등 뒤에서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림자는 유경을 천천히 따라왔다. 그림자는 키 큰 윤성민처럼 길었다.

'성민아.'

그러나 유경은 뒤돌아보지 못하고 성민의 이름을 아주 작게 불렀다. 뒤를 돌아보면 그나마 그림자마저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경은 오랫만에 불러 보는 성민의 이름을 거리에 흩뿌렸다.

거리는 겨울을 말끔히 씻어낸 비 탓으로 가슴 속까지 상쾌했고 때맞춰 부는 밤바람의 촉촉함에 유경은 마냥 걷고 싶었다. 이대로 걸어서 성민이 있는 강원도까지 가고 싶었다. 그러나 유경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우뚝 멈춰 서 몸을 떨었다.

'지금은 악몽을 꾸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를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가려고 했을까? , 혹시 나는 지금 악몽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유경은 자신이 며칠째 계속되는 악몽 속에 있는 듯해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가로등, 뒷꽁지마다 붉은 빛을 흘리며 지나는 차들, 핏물의 홍수. 순간 유경은 머리를 감싸고 그 자리에 쓰러지며 소리를 질렀다.

"성민아, 도와줘!"

 

 

2. 5월의 우울한 입맞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명증(耳鳴症)처럼 잠을 깨우는 바람에 유경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유경아, 나 좀 봐라, ?"

순간 유경은 움찔했다.

'누가 나를 부를까? 지금은 아침인 듯한데. 이 시간에는 집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누가 나를 부를까? 아직도 꿈속인가?'

그때 누군가 이불을 잡아끄는 바람에 유경은 놀라며 일어났다. 눈이 시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서성거리기도 하고, 누워 있는 모습이 뿌옇게 들어 왔다. 그 가운데에 유난히 하얀 옷을 걸친 사람 서넛이 자기 앞으로 천천히 오고 있는 것이 보이자 유경은 몸을 움츠렸다.

'악몽은 아닌가 보다. 분명 검은 돼지떼들은 아니야. 그런데 여긴 어딜까?'

유경이 두려움에 어찌할 바 모르는데 그제서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경아, 나야. 내가 보이니?"

권여사였다. 유경이 권여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려는데 젊은 의사가 그녀를 불렀다. 의사 옆에는 두 간호사가 날개처럼 붙어 있었다.

"김유경씨. 기분이 어때요?"

갓 삼십이 될까말까 한 의사는 턱이 푸른 빛을 띨 정도로 깨끗이 면도를 한 얼굴이다. 두 간호사 중 코끝이 뭉툭한 간호사가 표정 없는 얼굴로 유경의 입 안에 체온계를 집어넣었다.

"수고하십니다. 이 아이에게 혹시 무슨 병이 있는건가요?"

권여사는 의사에게 공손히 절하며 물었다. 유경도 의사의 대답이 궁금해 체온계를 문 채 고개를 돌렸다. 순간 의사와 유경의 눈이 잠깐 마주쳤으나 의사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이상 없습니다. 피곤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유경씨. 요즘 신경쓰는 일이 많은가요?"

유경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퇴원할 때 약국에서 약을 받아 가시고 푹 쉬어요. 그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김 간호사. 주사 놔요."

유경이 주사를 맞고 옷을 추스리고 나니 권여사가 보이지 않았다. 유경인 다시 누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덟 침대 위에 A의대 부속 강남병원이란 글씨가 낙인처럼 찍힌 연푸른 색의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사람 셋과 평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 다섯이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데 여중생 정도부터 노인까지 층이 다양했다. 병의 상태도 가지가지인 만큼 환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각각이었다. 어떤 환자 주위에는 사슬을 두르듯 사람들이 둘러서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마치 임종예배를 드리는 듯했다.

유경인 그런 모습을 보며 일 년 전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 갔던 응급실을 떠올렸다. 응급실이란 소생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이 있는 곳이란 생각에 일곱 명의 환자들이 애처롭게 여겨졌다.

출입문 위에 걸려 있는 시계가 거진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경은 날이 더 밝기 전 병원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권여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누워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어떻게 권여사가 보호자로 제 옆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권여사가 들어오길 기다리다가 반대편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 나무 십자가를 발견했다.

십자가 위에 윤성민의 얼굴이 겹쳐지자 유경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자 어젯밤에 윤성민을 부르며 쓰러졌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필압(筆壓)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이 지워진 노트처럼 아득했다.

유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 가방을 찾았다. 가방은 침대 머리맡 모서리에 걸려 있었다. 유경은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더 창백해지고 볼이 패였다. 하나로 묶은 긴 퍼머 머리는 흐트러져 핏기 없는 얼굴의 초라함에 한몫 단단히 했다. 유경은 머리를 다시 묶은 뒤 립스틱으로 입술을 칠하고 다시 한번 거울을 봤다.

유경은 거울 속의 제 얼굴에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켰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건강하자 하고 다짐하며 구두를 신었다. 어제 내내 물기에 시달리다 밤새 응급실에 있었던 탓인지 구두는 조금 뻑뻑했지만 따뜻한 기운을 발바닥 가득 전해 주었다. 유경이 막 응급실 출입문 쪽으로 가려는데 권여사가 들어왔다.

"벌써 가려고? 병실을 구해서 며칠 푹 쉬게 해주려고 했는데. 정 그렇다면 퇴원 수속을 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권여사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경은 권여사의 빠른 구둣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줄의 맨 끝 침대에 누운 집안의 가장인 듯한 남자가 생명이 위독한지 부인과 두 어린 딸이 통곡을 터뜨리는 바람에 유경은 응급실에서 나와 원무과로 갔다.

수속을 마치고 약을 받아 병원 뜰로 나오자 유경은 현기증을 느꼈다. 봄비는 한번 내릴 때마다 따뜻한 기운을 더한다고 한다. 게다가 햇빛은 며칠 사이 더 따뜻해졌다.

"오늘이 며칠이죠?"

유경은 오랜 투병생활을 마치고 퇴원하는 환자처럼 손으로 아침햇살을 가리며 물었다. 권여사는 유경의 얼굴이 너무 파리하다고 생각하며 사월의 마지막 목요일인 이십팔 일이라고 했다.

"내 차 타고 가지. 집까지 바래다 줄테니."

"고맙지만 혼자 가고 싶어요. 여기가 어디죠? 그리고 어떻게 어머님이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요?"

"여기는 서초동이고, 어제 밤에 너랑 실갱일 하다가 정신없이 나오는 바람에 사무실에 서류를 두고 와서 그걸 가지러 오다가 본거야. 다행히 네가 환한 가로등 밑에 쓰러져서 발견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 그럼 먼저 갈테니 조심해서 가라. 의사가 그러는데 빈혈이 심하대. 너 그런 식으로 몸관리하다가는 언제 어디서 세상 하직할지도 모른대. , 너의 부모님께 연락을 안했는데 무척 걱정하시겠구나."

유경은 권여사의 차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햇살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2

유경은 집에 오자마자 다락으로 올라갔다. 권여사가 농담처럼 한 말이 웬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요즘 악몽 때문에 밥맛이 떨어지더니 즉각 반응이 온 거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잘 먹고 잘 쉬라고? 마치 돼지에게 하는 설교 같군.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은 딱 하나 있어. 윤성민과 관계된 모든 걸 없애는 거야. 이것은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행해지는 기억말소 정도로는 무기력해. 아예 윤성민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려야 돼. 그러므로 나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래. 그 두 자매도 결혼의 축제를 위해 피뿌림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는가. 무슨 의식이든 제물이 필요하다. 나의 의식에는 윤성민의 모든 걸 제물로 한다. 속히 하자. 자꾸 미루는 건 의식의 경건성을 흐리게 한다.'

유경은 앉은뱅이 책상의 세 서랍을 하나씩 꺼냈다. 서랍을 그득 채우고 있는 윤성민의 편지 속에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을 끼워 넣었다. 유경은 사진을 만질 때는 마치 허공 속에서 두 손을 내젓는 듯했다. 편지를 차곡차곡 쌓아 끈으로 묶었다. 의외로 일은 간단했다. 그만큼 유경은 윤성민의 모든 것을 한 곳에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윤성민에 대한 유경의 애정의 깊이를 말해주면서 한편으로는 언제고 한꺼번에 깨끗하게 쓸어낼 수 있을 냉랭함도 깃들어 있음이다.

유경은 머리 위에서 달랑거리는 백열등을 끄기 위해 손을 뻗치다 묶여 지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순간 유경은 아, 하고 삭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묶여지지 않은 편지를 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또, 그 편지를 읽음으로 인해 윤성민에 대한 기억상실의 의식을 온전히 치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함 때문이다.

유경은 책상에 엎드려 편지를 펼쳤다. 오선지 위에 파란 볼펜으로 쓴 편지는 습기 때문에 번져 있어 마치 천재 작곡가가 거리에 선 채 그린 악보처럼 읽기 어려웠다. 유경은 편지 끝에 날짜가 없었지만 대략 칠팔 년 전에 받은 것이리라 짐작했다.

[유경아. 휴학한 지 벌써 석 달째. 오늘도 나는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새벽을 맞는다. 나는 토요일마다 너를 만나면서도 그 전에 네가 받아볼 수 있도록 편지를 써야 한다는 이상한 아니, 낭만적인 압박감에 시달린단다. 그러나 이 시달림은 대단한 기쁨으로 변하곤 하지.

어제 어머니를 만났단다. 어머니는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어. 그리고 또 돈을 주셨어. 나는 돈이 많단다. 그러나 그 돈은 약을 써도 가라앉지 않는 가려움증처럼 나를 괴롭힌단다.

어머니는 긁으면 피가 날 수밖에 없는 병을 내게 남겨두고는 자신은 남매의 새어머니로서 자리를 잡은 모양이야. 어머니는 그 자리에 더욱 완벽한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거지. 이해하라고 몇번씩 말씀하시는데 이해가 강요에 의해서 되는 거라면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반복의 학습이 아닐까?

이런! 유경이에게 보내는 戀愛(윤성민은 연애를 늘 한자로 썼다.) 편지에 즐겁지 않은 우리 가정사를 늘어놓기만 했구나. 나는 왜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 이번엔 내 이야기를 들어줄래?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작곡이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돼. 그렇다고 이것이 나의 길이요 하고 당당히 말할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입원하란 말을 하시더구나.

그 말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써 볼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유경아. 나는 이 웃음의 끝에 점을 세 개 찍지 않고 마침표를 찍으련다. 나는 정말 아픔을 즐기고 싶어.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이 말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아픔을 즐길 수 있는 건 자유로운 자만이 즉, 신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유경아. 신에 관한 얘기는 그만하고 다시 아픔으로 돌아갈까. 내가 아픔을 즐긴다 해서 아픔을 내 안에 가둬둔다는 뜻은 아니란다. 나는 내 자신이나 그 누구나 감금이란 형벌의 고통을 겪는 걸 원치 않거든.

감금이란 말을 하니 떠오르는 게 있구나. 엊그제 버스 안에서 누렇게 뜬 얼굴로 이마에 선 핏줄이 방금이라도 터져 피가 흐를 것처럼 악을 쓰며 전도하던 남자가 생각나. 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에 가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중이었어. 그날 내가 들었던 음악이 무언지 아니? 내가 좋아하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과 소품 몇 곡이었지. 나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과 4번을 비교분석하며 슈만과 클라라까지 브람스에 연결시키고 있다가 청년의 출현에 잠시 그에게 골몰했단다. 역시 이런 얘기는 편지로 해야 맛이 나는구나. 전화란 무지(無知)한 사람들의 장난감 같아. 그럼 그 청년의 얘기를 전해줄께. 본대로, 들은 대로 거짓 없는 증인이 될께.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돈입니까? 돈이 무엇입니까?'

청년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지. 그리고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능숙하게 라이터를 켜더니 돈에 불을 붙였어. 그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놀라움과 한숨 소리. 그 이상한 분위기를 넌 상상할 수 있겠니? 그 전까지는 예수에 미친 아까운 젊은 인생 정도로만 여기고 비웃음과 동정을 보내며 빨리 사라져 주길 바라던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지.

그건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청년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아니면 돈이 불에 타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사람들은 집단 착란에 빠진 양 그다음부터는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 아니, 다른 곳에 시선을 둔다는 건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날,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로 나는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단다. 이 일로 나는 나란 사람이 종교에 대해 감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단다. 웃기는 얘기냐?

그 청년은 하루에도 수십 장의 지폐를 불태울 거야. 내가 유경이에게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그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라이터를 켜고 돈에 불을 붙이겠지. 그는 돈을 악마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러니한 건 그가 그 많은 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선 그 역시 그만큼의 돈을 필요로 한다는 거지. 그가 강탈을 하지 않는 이상 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선 일을 해야만 될거야. , 돈을 벌어야 할 수 있다는 거지. 이 역시 돈의 두 속성 중 하나인 악마의 속삭임에 빠진 거라고 생각해.

그는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어 가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만원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가슴에 공포의 불을 붙이고, 머리에 두려움의 재를 뿌리는 정신질환을 앓는 폭력배며, 허튼 마술을 사용하는 치사한 폭도이기도 하지.

청년은 무감각한 손을 가졌는지 돈이 재가 될 때까지 들고 있다가 불탄 돈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미련없이 주먹을 쥐었어. 어찌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단다. 그는 곧 주먹을 펴더니 입으로 큰 숨을 내쉬었어. 회색 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며 어깨 위로 떨어졌고 곧, 청년의 애절한 소리가 꼬리를 이었어.

'보셨습니까? 돈이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돈은 재입니다. 재는 돈입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은 무엇일까요? 학벌입니까? 여러분!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다녔던 사람입니다. , 보십시오!'

청년은 라이터를 집어넣었던 주머니에서 학생증을 꺼냈어. 그러자 대머리에다 쌍꺼풀진 큰 눈의 중년 남자가 상기된 얼굴로 내가 확인할 거야. 씨발! 별 도깨비 같은 녀석이 시끄럽게 하네 하며 청년 앞으로 갔지. 모두들 그 중년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말만 기다렸어. 중년 남자는 검문하듯 학생증을 살폈고, 청년은 그 남자를 보며 귀여운 아이에게 하듯 빙그레 웃었어. 나도 중년 남자가 얼른 입을 때기만 바랬지. 조금 있으려니 남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학생증을 높이 들고 흔들며 신문 파는 아이처럼 말했어. 서울대학교요, 서울대학교!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3

우스운 일이야. 사람들은 또 다른 놀라움으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분명 쳐다본 게 아니라 바라본 것이었어. 중년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제자리로 돌아왔지. 그러자 몇몇 사람이 남자에게 달라붙었어. 기적을 보고 온 사람에게 기적을 얘기해 달라고 요구하는 얼굴로 말이야. 그런데 청년이 또 말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어.

'여러분! 학벌이 주인이라구요? 천만에요! 그렇다면 노예인 내가 어떻게 주인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주인으로 생각하는 돈을 태웠습니다. 이제는 이 학벌에 침을 뱉을 수 있습니다.'

청년은 코팅된 학생증에 침을 뱉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어. 모두들 자기가 내릴 곳을 잊은 듯한 사람들은 청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따라다녔어. 버스 안의 사람들은 하나의 목적을 가진 듯 그를 지켜본 거지. 그런데 청년은 우리를 실망시켰단다. 그는 침뱉아 내던진 학생증을 줍지 않았어. 대신 소리를 지르며 두 발로 번갈아 학생증을 밟아댔어.

'예수의 피! 예수의 피! 예수의 피! ... '

그는 피를 외쳤어. 피를 외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아. 그의 이마에 불끈 솟아 오른 핏줄이 정말 터지는 것 같아 나는 침을 꿀꺽 삼켰어. 사람들은 피를 외치며 펄떡펄떡 뛰는 청년에게 배신감을 느꼈는지 청년보다 더 크게 소리를 쳤어. 끌어내려라!

흘낏흘낏 백미러로 구경하던 운전사도 사태를 짐작했는지 버스를 길 한편에 세웠지. 그 곳은 남산 시립도서관을 한 정거장 앞에 둔 해방촌이었어. 버스가 멈추었는데 청년은 피를 외치는 걸 그치지 않았어. 그는 확실히 예수보다 피를 더 사랑하고, 예수보다 피를 크게 증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었어.

그는 운전사와 몇몇 남자들에게 끌리어 자기가 침 뱉아 버린 학생증처럼 내동댕이쳐졌단다. 그때 한 남자가 창문을 열고 청년을 향해 손짓을 했어. 이봐! 여기 라이터가 있는데 자네 몸에 불 좀 붙여 볼까? 혹시 자네가 타지 않는다면 내가 평생 자네의 하인이 되지. 헛헛헛... , ? 너 드라큐라냐? 헛헛헛... 순간 버스가 움직였어. 조금전까지 두려움과 놀라움에 목소리조차 높이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다문 입이 터진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었지. 신기한 건 그 청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두들 종교학자요, 정신치료사요, 심리학자요, 사회학자요, 범법학자로 변했다는 거지.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데 청년은 발을 구르며 소리쳤어. 예수는 사라지고 피만 들렸지. 나는 청년의 더러워진 학생증을 주워 창밖으로 던져 주었어. 학생증이 있어야만 주인론도 펼 수 있고, 밖으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이것은 결코 그를 비소(誹笑)하거나, 그의 행동에 대해 동정을 보내는 게 아니란다. 나는 그청년이 피를 외치고 내동댕이쳐지는 일을 반복하면서 참 주인의 의미를 알 뿐만 아니라 헛된 것에 노예된 자들에게 참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란다.

내가 이런 생각으로 학생증을 던지자 청년은 피를 외치면서 달렸지. 그는 피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짜 주인이 누군지 가르쳐 주지는 못한 거야. 자격 미달의 전도사지. 어쨌든 그는 학생증을 다시 손에 넣었단다.

유경아. 이건 농담이 아닌데 다시 그를 만나고 싶어. 그가 말하는 주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그가 나에게 답해 줄 수 있을까. 그 역시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주인이 아닌 것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하고 있어. , 피가 그의 주인이 아닐까? 나는 나에게 주인이 없다는 게 기쁘단다. 주인이 있다는 건 속박을 의미하고, 속박은 감금이며, 감금은 자유 박탈이니 말이다.

유경아.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인간일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스스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속박된 인간이기에 자유를 공기처럼 원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얼까? 담보물이 있다면 그 자유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유경아. 그 청년에 대한 담보물은 피가 아닐까? ! 아주 오래전 제사장들은 그들이 두른 겉옷에 피를 묻히고, 발아래 피를 낭자하게 흘렸다고 하지. 백성들과 신 사이에 서서 죄의 용서를 바랄 때, 서원을 할 때, 충성을 나타낼 때, 기쁨에 넘칠 때 피 없이는 그 일들을 감당해내지 못했지.

청년은 무엇 때문에 피를 외쳤을까? 그는 돈에 불을 붙일 만큼 무모한 용기도 있고, 멸시와 비웃음만이 보상인 외침을 내지를 만큼 맹목의 정신도 있는 그가 왜 스스로 피를 흘리지는 못하고 소리질러 외치기만 했을까?

유경아. 나는 번번이 戀愛 편지 쓰는데 실패하고 마는구나. 그래도 내 편지가 즐겁다는 자그마한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키가 더 커지는 느낌이다. 나는 자꾸자꾸 커지고 싶다. 그래서 너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니고 싶어. 그래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들려주고, 가고 싶은 곳만 데리고 다니고 싶단다.

엄지공주 이야기 아니? 나는 가끔 네 연인이기보다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든단다. 내가 아비면 너는 물론 내 귀여운 딸일 테지. 그럼 내 편지를 읽은 너를 만날 수 있는 토요일을 기다리며 ...

유경은 편지 위에 엎드렸다. 아무리 애써도 윤성민을 잊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유경은 서글펐다. 이 편지를 썼던 윤성민은 예언처럼 자기의 주인을 찾아 강원도로 갔다. 떠날 때 그는 버스 안의 청년처럼 피에 대해 말했었다.

유경은 묶어 놓은 편지들을 바라보았다. 성민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유경은 눈을 감았다. 그를 생각하면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떠오르다가는 갑자기 붉다 못해 검은 기가 도는 피가 그 빛을 덮치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같은 식으로 괴롭히는 핏빛 환상에 유경은 몸을 떨었다. 그런데 무언가 유경의 가슴 속 깊이 파고 드는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서늘한 새벽공기 같으면서도 뒤를 따라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집요했다. 유경은 잠시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감자 유경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강현섭의 눈이다."

 

사월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은 따뜻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유경은 캐리어우먼의 정 차장과 만나기로 한 임페리얼 호텔로 갔다. 엘리베이터가 43층에 멎을 때 시계를 보니 거의 열 시가 되고 있었다.

"김유경씬가요?"

서른 후반의 정 차장은 손정태가 보여 준 사진보다 더 말랐다는 말로 유경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이런 콘서트에 신물이 나서 유경씰 끝날 즈음에 오라고 한 겁니다. 혹 저 때문에 보고 싶은 걸 못 봤다 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콘서트는 끝났는데 강현섭이 이십 분 후에 45층에 있는 엘리자베드 홀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오늘 마침 그 홀이 여덟 시 이후부터 비어 있어서 사진도 찍기 좋고 인터뷰하기도 안성맞춤이라고 하더군요. 가수가 우리들에게 이런 배려를 해주기는 처음일걸요. 하하하... 그럼 갈까요?"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4

앙뜨와네뜨보다 훨씬 넓은 홀이 텅 비어 있는데다 바로크식의 장식 탓에 두 사람이 마주 앉은 모습은 마치 중세시대 궁궐 안에서 한담을 나누는 귀족들 같았다.

"손 기자와 결혼하실 겁니까?"

정 차장의 느닷없는 질문에 유경은 웃음이 나왔다. 손정태가 정 차장에게 자기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가 손 기자와 결혼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 사람이 저와 결혼하는 게 문제일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할 그런 미련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누구보다 손 기자가 더 잘 알거든요."

"하하하...유경씨는 글보다는 말로 하는 장사를 했으면 더 성공할 사람 같군요."

"사기꾼이 되라는 말인가요?"

"사기꾼? 하하하... 제가 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담배 한 대 권해도 되겠죠?"

정 차장이 유경에게 담배 불을 붙여줄 때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엘리자베드홀을 울렸다. 유경은 담배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눈에 강현섭을 다섯 남자들 틈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작은 고추가 맵긴 매워. 서른이 넘은 신인인 주제에 두 달만에 라이브를 하지 않나, 레코드가 오만 장을 돌파하지 않나... 유경씨 잘해요. 저런 친구일수록 자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정 차장은 유경의 스웨터를 잡아당기며 앉혔다. 강현섭이 네 남자들에게 뭐라 말하고는 혼자 왔다.

일 미터 칠십을 넘을 것 같은 키. 평생 자신의 육체에 살이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듯한 날카로운 얼굴. 헐렁한 청바지. 하얀 남방 셔츠. 그리고 잔인한 눈매. 여자의 입술을 빨아 주기보다는 여자의 입속에서 안락함을 느낄 얇으면서도 큰 입술.'

유경은 마치 눈을 감고 걷듯 천천히 오는 강현섭을 재빨리 스케치해 보았다. 강현섭이 가까이 오자 유경은 윤성민과 정반대의 인간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샤워를 하고 급히 오느라 아직도 물기가 있는 머리는 음성민이 침례(浸禮)를 받고 물 속에서 나오던 기쁨에 젖은 얼굴과 대조를 이루었다.

"죄송합니다. 몇몇 극성팬들이 있어서 때놓느라 시간이 늦었습니다."

유경은 강현섭의 말소리가 노래 부를 때와는 영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를 부를 때의 음성은 상당히 가라앉았고, 굵었다. 그러나 말소리는 경쾌하며 끝이 분명했다. 그의 음성은 유난히 끝부분에서 딱딱 끊어지는 느낌이라 의식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 차장의 소개로 유경과 강현섭은 인사를 하고 마주 앉았다.

"유경씨. 그럼 자연스럽게 대화해요. 나는 사진을 찍을 테니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아요."

유경은 준비한 질문을 하기 위해 메모노트를 펼치고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하하하... 저에게 지금 질문을 하시려고 합니까? 우선 제 얘기를 다 듣고 묻든 말든 하십시오."

강현섭은 담배를 꺼내며 크게 웃어 제쳤다. 유경은 인터뷰는 처음이라 으레 그러는 줄 알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현섭은 정 차장이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담배를 서너 모금 연거푸 빨았다. 유경은 그런 강현섭을 찬찬히 뜯어 보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김유경씨는 소설가니까 제 얘기를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겠군요. 다행입니다. 오늘 같은 날 신출내기 기자가 나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저는 캐리어우먼 유월 호가 발행될 즈음에 이 생활을 끝낼 작정입니다."

강현섭의 말에 유경은 그저 돌아가는 녹음기만 보고 있는데 정 차장이 끼어들었다.

"뭐라구요? 그럼 은퇴를 한다는 겁니까?"

정 차장은 어지간히 놀란 얼굴이었다. 유경은 정 차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단한 명성의 가수도 아니고 오랫동안 연예계 생활을 한 적도 없는 사람이 은퇴한다는 게 뭐 그리 놀라운 걸까 하는 생각에 역겨움이 들었다.

"은퇴요? 나는 그런 식의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세상은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죠. 그래요. 그럼 은퇴라고 합시다. 은퇴합니다. 그렇게 쓰세요."

강현섭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왜 월간지 같은 데다 이런 특종감을 말하는 거죠? 하다못해 요란 뻑적지근한 스포츠신문이 더 낫지 않습니까? 월간지는 효력이 약한데 ..."

인터뷰는 유경이 아니라 정 차장이 하고 있었다. 유경은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려 하는데 강현섭이 그 와중에 재빨리 라이터를 켰다.

"사실대로 얘기하죠. 캐리어우먼 주간님이 제 친구의 큰 형님입니다. 그쪽으로 스카웃돼서 간 지 석 달짼데 별 특종감 기사를 잡지 못했다고 언젠가 말씀한 적이 있죠. 그래서 이왕이면 캐리어우먼에 첫 발표를 터뜨리자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 역시 요란하게 이런 일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고요. 두 분 다 제 계획을 미리 소문내면 할 수 없죠."

"은퇴의 이유가 뭡니까?"

정 차장은 아예 의자에 앉았다.

"이유요? 싫습니다. 아니 싫증이 났습니다. 나란 사람은 본시 싫증을 금방 느껴 한 가지 일에 오랜 투자를 하지 못하거든요. , 됐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할 얘기는 다 끝났습니다. 김유...경씨라 했죠? 이제 얘기하십시오. 그러나 제 생각에 더할 얘기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유경씬 인내심이 많은 분 같군요. 소설을 쓴다니 말입니다. 핫핫핫... "

강현섭이 담배를 끄고, 정 차장은 열심히 사진을 찍는데 유경은 짐을 챙겨 벌떡 일어섰다.

"저도 할 얘기가 없어요. 바빠서 먼저 가죠. 그럼 은퇴 이후의 생활에 행운이 있길 바랍니다. 정 차장님 먼저 갑니다."

유경은 손을 흔들며 출입문 쪽으로 뛰듯 걸었다.

"? 김유경씨! 김유경씨!"

정 차장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유경이 쪽으로 뛰어가려다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김유경씨! 딱 한 마디만 할게요!"

정 차장이 진지한 말투로 소리치자 유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순간 눈부신 빛이 허공에서 터졌다.

"하하하... 유경씨. 이젠 가셔도 좋습니다. 원고 멋지게 쓰십시오!"

유경은 왜 자신을 찍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대로 홀을 빠져 나왔다.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5

"정 차장님. 멋있는 분 같군요. 제가 술 한잔 사고 싶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도 일어서겠습니다"

강현섭은 담배를 셔츠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혹시 ... 우리 주간님은 이 일을 아십니까?"

정 차장도 카메라에서 렌즈를 빼고 가방에 하나씩 챙겼다.

"모릅니다. 알면 화를 내겠죠. 제가 가수를 하겠다니까 이리저리 뛰면서 많은 다리를 놔줬거든요. 한마디로 그 나이에 뚜쟁이 노릇 하느라 힘들었을 겁니다. , 그만하죠, 저는 긴 얘기 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요. 술자리가 아니면 말입니다. , 아까 그 소설가 선생 사진 나오면 제게 한 장 주십시오. 술은 얼마든지 살테니까요."

두 사람은 나란히 문 쪽으로 걸었다.

"아니. 미인들이 주위에 빨래처럼 널렸을텐데 저렇게 깡마르고 우울하게 생긴 여자 사진은 뭣하려고 하십니까?"

"저는 널려 있는 빨래엔 관심없어요. 다만 제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소설가의 인상이 제격인 듯 해서요."

"핫핫핫... 정말 나중에 술 한잔 합시다. 강현섭씨 같은 연예인은 정말 처음 봅니다."

"처음 보다뇨? 동물원 구경한 지 오래된 모양이군요."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중히 악수를 하면서도 갑자기 가까워진 사람들처럼 말끝이 반말투로 되었다.

 

유경은 이제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웠다. 오월 첫날인 일요일 아침에도 유경은 반복되는 악몽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몇 번 더 악몽을 꾼다면 나는 꿈꾸다가 죽을지도 몰라. 꿈꾸는 자의 죽음이지만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검은 돼지떼들에게 물어뜯겨 죽다니!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의 최후도 그렇게까지 추하지는 않을거야. 그런데 윤성민을 부르며 꿈이 끝난다는 건 무어란 말인가? 나는 찢겨지고 산산조각이 돼서야 그를 찾는다는 말인가? 그럼 그는 고작 쓰레기 같은 자를 구원하는 자인가. 그럴 리 없다. 그는 빛을 갈망하는 사람인데 어찌 찢겨진 자를 구원하겠는가. 저 높은 곳의 빛을 흠모하여 자신의 모든 걸 버린 자다. 그것은 꿈이다. 꿈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

유경은 대충 차리고 집을 나섰다. 일곱 시가 조금 넘었다.

연남동. 이곳에 이사 온 지 일 년이 지났다. 아파트촌에 살다 온 식구 중 이곳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은 오직 유경이뿐이다. 유경의 어머니인 최례옥은 번듯한 빌라들 속에서 죄수처럼 꿇어앉은 집 때문에, 아버지인 김만우는 문산에서 끊겨진 철로를 한 시간마다 오가는 기차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내쉰다. 다만 남동생만이 애착도 한숨도 없이 지낸다.

최례옥은 몰락한 사업가의 아내여서인지 과거의 영화를 오징어 씹듯 물고 늘어진다. 그녀의 한탄의 독()이 흐르는 듯한 이빨 사이에 김만우까지 송두리째 끼어 들어간다. 그것은 어떤 병의 증세처럼 반복되고 있다.

김만우는 실수로 사고를 낸 운전사마냥 환자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내가 죽어야 하는 건데, 내가 죽었어야 하는 건데 하며 기도하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환자는 기세가 더 바짝 오른다. 저승사자가 할 일 없어서 당신 같은 양반을 데리고 간답디까!

그러면 김만우는 죽음을 미래의 일로 말하지 않고 오늘의 계획으로 털어 놓는다. 내가 죽을께, 죽어 버릴께. 환자는 항상 이 부분이 되어야만 안정을 한다. 김만우의 자살 계획은 환자에게 마약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 김만우는 재빨리 환자의 얼굴을 살피며 상세히 그 계획을 설명한다. 내가 아무도 없을 때 죽을께. 당신이 식당 문 닫고 오기 훨씬 전에 죽어 있을께. 깨끗하게 죽을께. 옷도 다 갈아입고 죽을께. 죽을께.

'불쌍한 아버지.'

유경은 중얼거리며 철길 건널목 앞에 섰다. 기차가 지나는 걸 즐긴다. 그 굉음, 그 바람, 그 깃발, 그 랜턴의 불빛. 그러나 유경은 아직 집 앞을 지나는 기차를 타보지 못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모래내 시장이고, 그 시장 건너편에 가좌역이 있다. 그런데도 가좌역에서 기차에 오른 적이었다. 최례옥이 하는 식당에 오고 가면서도 역사(驛舍)를 향해 애착만 갖는다.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차단기가 내려왔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 오는 듯해 유경은 매번 신기함에 빠지며 윤성민의 손 같다는 당혹감도 느낀다.

'그는 내 앞을 막고 있어. 그가 있는 이상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없지. 내가 그를 뛰어넘든지 그가 부러지든지 둘 중의 한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러지지 않을 거야. 그의 신이 허락하지 않을테니. 그렇다고 그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 뛰어넘기에는 그다음 세계를 예측하기가 너무 혼란스러워.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는가.,

유경이 이런 생각을 할 때 중년의 간수가 나왔다. 그의 손에는 흰깃발이 심판자의 권위처럼 들려 있었다.

'저들은 깃발을 흔들기 위해 기차가 땅을 애무하는 소리를 기다린다. 땅이 몸이 달아 거친 숨소리를 낼 즈음이면 그들은 흰 깃발을 들고 세상으로 나온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깃발을 흔든다. 깃발은 세상에서 흔들린다. 나도 세상에서 흔들 수 있는 깃발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나도 기차처럼 땅을 애무하는 그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하는가?'

기차가 오고 있었다. 깃발이 흔들려지고 굉음은 변함없이 땅 구석구석을 훑었다. 기차는 늘 사람들의 얼굴이 창()을 대신한다. 유경은 빠르게 지나가는 얼굴들 속에서 윤성민을 찾았다. 문산으로 가는 기차임을 알면서도.

기차가 건널목을 지나자 차단기는 올라가고, 간수는 조금 전까지 심판관처럼 흔들던 깃발을 휴지마냥 손에 감고 초소로 들어갔다. 모든 것은 다 제자리로 돌아간 듯 조용했다. 유경은 새벽녘의 꿈을 날려 보내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때 반대편에서 군청색 오리털 파카를 입은 김만우가 조신조신 걸어오고 있었다.

김만우는 우연의 일치인지 사업이 실패한 이후 이상스레 추위를 탄다. 작년에도 오월이 다 끝나갈 무렵에야 내복을 허물 벗듯하고는 섭섭한 듯 내려다 볼 정도로 추위를 탔다. 사업실패가 그를 떨게 한 건지 아니면 자꾸 땅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포자기가 스스로 냉기를 만들어내는 건지 김만우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김만우는 땅을 보며 유경이 쪽으로 걸어 왔다. 그 걸음은 허공 속에서 걸으며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발을 딛는 듯했다. 유경은 아버지 하고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소리에 놀라 발을 헛디뎌 천길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김만우는 유경을 그냥 지나쳤다.

'어둡고 두터운 허물 속에 있는 아버지이지만 일부러 피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부모가 자식의 냄새와 그림자를 모를까. 아버지는 반대편에서 이미 내 그림자를 보았고 그림자의 냄새를 맡았을 거야. 그래서 한꺼풀의 허물을 더 만들고 그 속에 깊숙히 숨어서 지나친거야.'

유경은 김만우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유난히 작게 보였다. 허물을 다 벗기고 나면 남는 건 육신이 아니라 한 줌 영혼 덩어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김만우는 지금 빈 집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식당에서 해장국과 감자탕을 고개를 숙이고 손님들 앞에 날랐다. 그 숙인 고개 위로 김만우의 환자인 최례옥의 혀 차는 소리가 심심찮게 쏟아진다.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6

김만우가 지나친 자리에 봄바람이 한바탕 불고 지났다. 이제 김만우는 허물을 한꺼풀 벗어도 좋을 바람이다. 유경은 바람에 고마움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십 분 정도 걸어 가면 모래내 다리를 지나 가좌역사(譯舍)가 있다. 오늘도 역사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지고 원색의 스포츠신문이 지친 음부처럼 널려져 있는 긴 의자에 앉았거나 매점 앞에서 군것질하고 있다. 역사 안의 풍경은 마치 문 하나를 넘어서면 시간이 정체된 듯한 느낌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었건, 현 시국 얘기로 눈을 번뜩이건 육십 년대 이전의 사람들로 보인다. 그만큼 가좌역사는 세상과 조화없이 그대로다.

유경은 안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가좌역의 방문을 마치고 팔차선의 넓은 길을 건넜다. 그것은 건넌다기보다는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이다. 좌판부터 시작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점들과 가게들 이루어진 모래내시장은 언제나 유경을 흥분시킨다. 기차가 늙은 수탉의 형상이라면 모래내시장은 수 천의 말들이 무리지어 벌판에서 아무런 방해없이 마음껏 서로를 애무하고 뛰노는 광경이다.

'미친년! 맨날 그런 허잡스런 생각이나 해야 글이 써지냐? 그렇다면 글쟁이들은 다 몰아서 공개재판을 시켜야 해. 인공(人共) 때 인민재판하듯 말이야. 그런 배부른 소리들이나 하고 밥을 먹으려고 하니 그때 같았으면 다 즉결처형감이지. , 세상이 어떤 것들을 위해서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너도 정신차려. 글 써서 성공한 놈들이 있다면 내 눈에 장을 지져도 좋아. 차라리 그때가 좋았지. 일하는 놈만 먹어라 하는 세상말이야!'

최례옥의 입에선 언제부터인가 욕이 떨어지지 않았고 툭 하면 그때를 들먹였다. 최례옥은 그때가 가장 공평했고 만족했던 시절로 추억하며, 무엇보다도 실패나 부도가 없는 세상이라며 다시 그날이 오길 소망하기까지 했다. 최례옥이 그때를 입에 달기 시작한 건 김만우가 추위를 탈 때와 거의 일치한다.

최례옥은 육 개월 전에 모래내시장에서 식당을 차렸다. 월급 한푼 나가는 게 아까워 사람을 쓰지 않고 유경의 결혼한 여동생, 미경과 김만우가 교대로 일을 하게 했다. 유경에게 처음부터 일 시키기를 포기한 최례옥은 그래서인지 그녀에게 더욱 심한 욕설을 퍼붓는다.

유경이 모래내시장의 군마운운 했을 때도 최례옥은 그녀뿐 아니라 모든 글쟁이를 싸잡아 교수형 시켰었다.

최례옥은 유경을 보기만 하면 글쟁이들을 교수대에 올려 보내고, 마음대로 주리를 틀고, 피를 낸다. 최례옥은 그럼으로써 사형집행인의 즐거움을 만끽하곤 한다. 그러나 유경은 어떤 유명작가라도 변명해주거나 탄원할 수 없다. 유경이 하는 일이라곤 최례옥의 표현대로 까작까작하는 손놀림으로 야채를 다듬거나 밥을 축내는 일뿐이니 자격이 없는 셈이다.

유경이 식당에 들어서니 최례옥과 미경이 새벽 손님을 치른 뒤끝을 마무리하고 아침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밥을 먹는 식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아귀들이 서로 많이 먹으려고 아우성치다 흘리고, 토악질하고, 나중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무섭도록 어지러워진 난장판 같다. 특히 감자탕에서 나온 숱한 돼지 뼈다귀들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인다.

김만우 가족의 세끼 식사는 간판 없는 이곳에서 해결된다. 김만우의 사업 부도로 연남동의 기차길 변에 있는 방 두 칸짜리 허름한 한옥을 월세로 얻었다. 연남동에 살고 있는 미경이가 집을 구했었다.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다락이 있는 방은 유경과 최례옥이 쓰고, 길가에 창문이 나 있는 건넌방은 김만우와 훈이가 사용한다. 김만우의 사업 실패는 부부생활까지 몰락시킨 셈이다.

하지만 최례옥은 일을 시작했다. 십 오평짜리 설렁탕집을 해장국과 감자탕집으로 바꿨다. 탁자와 의자는 몇 년을 청소하지 않고 지내 온 듯 구질구질하고 영 볼품이었다.

'미친년! 지금 우리가 잔치하냐? 적어도 이런데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래야 맘 편히 수저라도 놀린단 말이야. 더구나 새벽 손님들이 대부분인데 누가 눈 또랑또랑 뜨고 탁자 먼지 찾기라도 한단 말이야? 미친년! 잔머리나 굴리는 글쟁이들은 다 공개재판을 시켜야 해!'

유경이 청결과 손님 비위에 대해 말했을 때 최례옥은 의연히 응수했었다. 최례옥의 음식 솜씨는 썩 좋지는 않았지만 장사는 그럭저럭 됐다. 또 최례옥은 시장 사람들과도 쉽게 사귀었다.

'그 최씨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어제 새벽에 왔을 때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 내가 비록 시장판에서 이 꼴을 하고 있지만 나를 모래 내의 최례옥으로 본 게 아니라 강남의 최례옥으로 본거야. 그 사람이 뭐라고 한 줄 알아? 최여사님은 절대 이런 일 할 사람 같지 않다는 거야. 때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얼마 있지 않아 마나님, 싸모님, 여사님 소리 들으며 살 사람이래. 호호호 ... 그럼 그렇지! 내가 아무리 여기서 구정물 뒤집어 쓰고 돼지 뼈다귀에 묻혀 살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구. 나는 변한 게 없어. 다만 환경이 변한거지 나는 아니란 말이야. 누구도 날 무시 못하지. 아암! 나를 모래내의 최례옥으로 본다면 그 인간이 모래내 족속밖에 안된다는거지!'

검은 장화를 신은 최례옥은 유경이 온 줄도 모르고 설거지를 했다. 유경이 바닥의 뼈다귀를 발로 밀어 내고 깨끗이 치워진 탁자에 앉자 미경이 눈을 찡긋했다. 미경인 유경이보다 두 살 아래지만 먼저 결혼하여 국민학교 3학년인 송이의 어엿한 학부모다.

", 언니한테 부탁할 게 있어. 이번 어린이날 전날이 송이 소풍날이야. 작년에도 언니가 데리고 가줬으니 이번에도 부탁해. 아시다시피 나는 식당 일을 해야 하잖아. 내가 김밥 맛있게 싸줄께."

미경인 뼈다귀를 쓸어 모으며 말했다. 미경인 어렸을 적부터 활달한 성격으로 유경이로 하여금 맏딸로서의 의무를 잊게 해주었다. 물론 미경이 의식적으로 그런건 아니었지만 외모뿐 아니라 성격까지 최례옥을 빼어 닮은 적극적인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유경이 미경에게 콤플렉스를 느끼지는 않는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사람들 틈에서 오래 있지 못하는 유경에게 미경의 적극성은 많은 편안함과 자유를 부여했다. 손님이 오면 유경은 으레 밖으로 나가고 미경이가 접대를 도우며 말상대가 되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런 미경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을 했다. 미경인 결혼의 때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변했다. 그러나 유경은 무엇을 위해 기다린 적이 없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홍보실에 근무하다 등단한 뒤에 글 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정하고 퇴직을 했다. 그때만 해도 김만우의 사업은 튼튼했기에 가족 누구도 놀라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유경인 미경이보다 작은 키에 몸에는 살이 오른 적이 없다. 김만우 쪽에 가까운 외양은 선이 굵다. 이런 얼굴에 누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볼의 패임은 누런 얼굴빛과 어울려 마치 가난한데다가 무능한 독신 작가의 그림자처럼 보이고 게다가 언제나 피곤한 듯 십리나 안으로 들어간 눈은 금방이라도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질 듯하다. 미경의 고운 선이 결혼 후 굵어지고 단단한 인상을 준다면 유경의 선은 병든 나무의 가지들처럼 허약하다.

유경의 허약은 글 쓸 때도 나타난다. 원고지에 얼굴을 들이밀면 낱말보다 먼저 달려드는 돼지 뼈다귀들로 몸서리를 친 적이 허다하다. 꿈이 아니다. 식당 안에 수 백 마리의 검은 돼지떼들이 서로 물어 뜯고 피를 흘리며 잡아 먹고 잡아 먹히며 그 속에 자신도 나뒹굴어져 있는 환상으로 심한 헛구역질을 한 적도 있다. 기차가 유경에게 여유를 준다면, 국밥집은 유경도 모르는 사이에 살을 뜯기고, 피를 빨아 먹히며, 나중에는 내장까지 악마의 식성을 닮은 무리들에게 씹혀지는 악몽을 현실로 느끼게 한다.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7

유경을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최례옥의 욕설이다. 최례옥은 예전과는 다른 언어로 유경을 어지럽힌다. 욕은 끈질긴 아교처럼 유경의 몸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미친년! 누가 아래고 누가 윈 줄 모르겠네. 이런 건 소설로 안 쓰냐? 있을 때 지원 없이 공부시켜 놓고 놀것 다 놀게 해줬더니 기껏 조카 소풍이나 따라다니냐? 미친년! 이년아, 그때 같았으면 너희 같은 것들은 다 반동이야, 반동!"

김만우가 허물을 한 겹씩 쓰기 시작했다면 최례옥은 그나마 있는 자존심의 껍질조차 남기지 않고 벗어 던지는 사람이다. 유경은 최례옥의 파르르 떠는 입술을 보며 김만우를 떠올렸다.

'그런데 왜 어머니에게선 한 줌 영혼조차 보이지 않는 걸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실패 때 자신의 영혼을 버렸는지도 몰라. 거추장스러웠을 거야. 영혼이란 양심을 형제로 하지 않는가.'

식당을 하려고 할 때 최례옥의 입술은 지금보다 더 떨렸었다. 돈이 부족해서 미경이 예물을 팔라고 했을 때 최례옥은 덜덜 떠는 입술로 난데없이 유경을 노려보았다.

"네 년! 똑똑한 체하는 년! 네가 나를 아예 사람 구실 못하고 살게 하려고 작정했지! 미친년! 네 년이 다 꾸민 일이지? 순진한 미경일 꼬드겨서 내 패물을 내놓으라고 시켰지? 이렇게 된 게 내 잘못이야? 시장판에 나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네 애비야! 갖고 가! 다 갖고 가라구! 하지만 너 이거 하나는 알고 있어. 이젠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난 다 줬어. 난 이제 아무것도 없다구. 난 짐승이나 마찬가지야. 머리나 굴리는 네년이 뭘 알겠어. 그래, 난 짐승이다. 어흐응... "

최례옥은 외마디 울음소리를 내더니 방바닥에 쓰러져 통곡했다. 최례옥은 남편이 부도가 날 때도 품고 있던 패물을 내놓으며 그나마 갖고 있던 체면과 희망을 송두리째 팔아먹는다고 생각했다.

"미친년. 네 팔자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졌구나. 미친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한순간에 우리 모녀가 인생이 변하여 시장판에서 이 짓을 하고 있다니! 안 그렇니. 미경아?"

설거지를 마친 최례옥은 상자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며 말했다.

", 엄마두. 이젠 그런 소리 듣기 싫어요. 되던 일도 틀어지겠네. 엄마, 하루를 살더라도 맘 편히 삽시다.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술 맛이 납디까?"

미경이 돼지 뼈다귀를 담은 검은 비닐 봉투를 묶으며 최례옥을 쏘아보았다. 최례옥은 시장생활에 적응할수록 그 적응력은 어떤 병을 유발시키는지 식당에 나오자마자 소주를 마시고 일을 시작한다. 새벽 첫 술잔은 밤까지 이어진다. 그래도 최례옥은 취하지 않는다.

유경은 그 병이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치료법이 있다면 자기의 심장을 도려내는 수술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미경이 상대가 되어 위로도 하고 모든 푸념을 다 받아주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 다들 잘났어, 잘났다구! 네가 한() 서방 등쌀에 그러는 것 같은데 그래도 부모한테 이러는 게 아니야. 서방? 말라비틀어진 서방. 눈이 있으면서도 못 봤냐? 서방이고 남방이고 그까짓 것 돈만 있으면 총각무처럼 다발로 엮을 수 있어. 알기나 해!"

단돈 오천 원을 주고 시장 안 개장수 부인한테 한 최례옥의 짧은 퍼머 머리는 진한 화장을 한 얼굴과 어울려 한눈에도 환자임을 알 수 있다. 최례옥은 자신이 여느 국밥집 여자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술에 점점 절어 가는 검은 얼굴 위에 그보다 더 검게 돋아난 기미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한다.

최례옥은 일본의 가부키 배우의 화장법과 흡사하게 얼굴에 흰 분을 바른다. 그리고 검은 아이 펜슬로 눈썹을 짙게 그리고 입술은 시뻘건 핏빛 립스틱으로 칠한다. 그래서 최례옥의 술잔은 언제나 뻘건 핏빛 자국이 남아 있다.

'어떠냐, 소설가 양반? 내가 죽을 때 이 정도 피는 토하고 죽겠지? 그럼 너는 소설 써라, ? 우리 어머니의 피는 쌔빨갛다라고 말이야, 하하하...'

보름 전 최례옥이 술에 취해 한 말이다. 최례옥의 병은 그 말에서 증세를 짚을 수 있다. 병이 깊어 갈수록 언어도 매우 거칠고 뒤죽박죽이다. 겨우 일 년 사이에 최례옥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병이 들었다. 최례옥은 자신을 동물이라고 말하고 과거의 생활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애를 쓰는 만큼 땅에 대한 감각을 잃는다.

유경은 탁자에 밥을 차리며 생각했다.

'가난해졌다는 게 사람을 저토록 아프게 할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빈자(貧者)들의 얼굴에는 모두 기미가 끼고, 그들의 입에선 욕이 숨소리와 함께 쏟아지며, 욕을 쏟은 목줄기로 술이 물처럼 흘러 들어간단 말인가?'

유경이 밥을 한 술 떠 넣을 때 미경이 몸을 홱 돌렸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 나랑 이젠 아무 인연도 없는 김()가 네 집에 와서 뼈 빠지게 일한 대가가 고작 이것 뿐이유? 어쩜 뼉다귀 같은 말만 골라서 저리도 잘하실까? 제발 조용히 지냅시다, 조용히!"

미경은 뼈다귀를 담아 묶어 놓은 비닐 봉투를 발로 힘껏 차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경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미경이 독기품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할 때 최례옥은 술병을 든 채 뒤로 움찔 물러섰다. 차라리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독기를 품는다면 적어도 구박은 받지 않을 텐데라고 유경은 생각했다.

"네 아버지가 사람 여럿 망쳐 놨어. 부모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하던 아이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최례옥은 주방에서 고의적으로 벌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유경을 보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유경은 대꾸없이 김치를 씹었다.

"미친년! 내가 살다살다 너같이 차가운 년은 처음 본다!"

최례옥은 유경의 옆 탁자에서 술을 마셨다. 최례옥이 처음 술을 마실 때 유경은 투명하고 작은 잔에 천천히 떨어지는 맑은 술을, 술잔을 든 최례옥의 떨리는 손을, 술처럼 출렁이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미경인 달려 들어 술잔을 내동댕이치고는 최례옥을 안고 울었다. 최례옥도 울었다. 최례옥은 마시려는 술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술처럼 맑지는 않았으나 술보다 진하고 독했다. 독한 눈물을 흘린 최례옥은 술을 마신 만큼 울었다. 눈물을 빈 술병에 쏟았다.

"저 놈의 술! 당사자인 아버지는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 어째 엄마가 알콜중독자가 되려고 그래요? 아예 아버지의 입에 술을 퍼부어요!"

언제 봤는지 주방에서 미경이 고개를 내밀고 고함을 쳤다. 유경은 수저를 놓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미경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최례옥은 또 술을 따랐다. 미경은 제 가슴을 서너번 쳤다.

"엄마. 엄마의 남편이고, 우리들의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정신차려요. 엄마, 나 같은 사람도 살잖아요."

좋게 말하면 보스 기질이고 달리 얘기하면 사기꾼 근성이 몸에 배어 있는 미경의 남편, 한동수. 미경이 대학 일 학년 때 비디오 영화 제작업을 한다는 그를 만났고 그 해에 임신을 했다. 미경은 최례옥이 기절을 하는 와중 속에 자퇴를 했다. 미경의 외동딸, 송이가 이 학년 생활을 시작할 즈음 김만우의 사업이 실패했다. 그런데 미경은 한동수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집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정리해 회생할 가망도 없는 김만우에게 주었었다.

'언니. 그러나 나는 내 몸을 팔아서라도 복수하고 싶어. 친정을 도우려고 한 일이 아니야. 단순히 그이에 대한 복수심이야. 차라리 이 일로 그이가 나한테 이혼을 요구했으면 좋겠어.'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8

미경이 유경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송이 아빠, 한동수는 미경이보다 열두 살이 많다. 그는 많은 나이만큼 거짓말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있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딸과 전처는 부산에 살고 있다. 그가 바른대로 말한 것은 돈뿐이었다.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두 집 살림을 넉넉히 하고 비디오 제작사업에 호기있게 투자할 정도의 돈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런 그에게 어린 미경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의 아기를 임신한 채 웨딩드레스를 입은 대가는 통속소설에 나오는 것만큼 비참했다. 그렇지만 미경의 결혼생활은 평탄했다. 미경은 그가 부산으로 가끔 가는 것을 모른 척했다. 대신 그녀는 한동수의 돈을 바닥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증권, 부동산, 사치.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경이 아무렇게나 던진 돈은 눈덩이처럼 굴러 다녀 오히려 미경일 괴롭혔다.

이러던 굿이 벌어진 미경의 복수극에 대해 한동수는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다. 집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자 그는 정치광고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붙어 요즘 바삐 다니고 있다. 그는 영원한 쇼맨으로 살 거라고 미경인 짐작했다.

하지만 한동수는 미경일 사랑한다. 제멋대로 재산을 처분하고도 큰 소리로 이혼을 요구하는 미경을 사랑한다고 했다.

'저는 말입니다. 세상이 코딱지만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송이 엄마는 저보다 어린데도 하늘처럼 보입니다. 핫핫핫... 제가 지은 죄가 많지만 사랑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형, 제발 송이 엄마 좀 달래 주십시오.'

한동수의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흐르는 돈은 홀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홀아버지의 지원도 끝났다.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허세를 잘 알고 있으므로 여섯 누나들에게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다. 미경인 잘된 일이라고 좋아했지만 한동수는 법정투쟁을 하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다녔고 제 누나들을 차례로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으로도 협박으로도 될 수 있다는 걸 알자 그는 깨끗이 포기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미경은 한동수에게 모정을 품고 그의 뒷바라지를 했다. 미경이 한동수에게 영원한 쇼맨이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가 아들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미친 세상이야. 나는 타락한 인생이 됐어. 세상은 미쳤고 나는 타락했고! 잘됐어. 서로 알아 보지 못할 것 아냐? 나는 사람들이 무서워. 나는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구. 나는 너희들도 싫어. 무섭다구!"

최례옥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최례옥의 탄식 속에 눈물이 섞이지 않는 적이 없다. 물끄러미 술잔을 쳐다 보며 최례옥의 푸념을 되새기던 유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물을 뒤집어쓰고 나를 그냥 지나친 아버지와 벌거숭이가 되도록 껍질을 벗어 던지는 어머니가 어떻게 세상을 피하려는 생각은 같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서로 알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 세상을 피해야 한다고 하지만 용기가 없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자신들을 부끄러워 하는지도 모른다.'

유경은 먹다 남은 밥그릇에 가족에 대한 부끄러움을 남기고 식당에서 나왔다. 일요일 아침이라 모래내시장은 평상시보다 덜 붐볐다. 유경은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유경아."

예배당의 맨 뒷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던 유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윤성민의 목소리였다. 유경은 눈을 떴다. 죽은 나자로가 다시 살아났을 때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핼쑥하다 못해 창백한 얼굴은 안스러울 정도로 말랐지만 환히 웃고 있어 마치 죽음을 넘어선 승리자의 자태 같았다. 유경은 전과 다른 느낌을 그에게서 받았다. 윤성민이 기도원에 가기 전에는 어설픈 신앙의 논리로 온통 자신을 합리와 시키는 힘없는 전도자처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광장에서나 광야에서나 자신 있게 소리칠 수 있는 당당한 얼굴이다. 두 사람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말조차 나누지 않았다.

"성민아."

예배가 끝나자마자 성민이 자기의 손을 잡고 무작정 걷는 바람에 유경은 당황했다. 그러나 성민은 대꾸없이 걷기만 했다. 윤성민은 신촌과 동교동 사이에 있는 교회에서 길을 건너 홍익대 쪽으로 갔다. 그제서야 유경은 말없이 그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조이 커피 타운' 윤성민이 그곳으로 가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부터 출입했던 커피전문점으로 그 동안 주인이 한번도 바뀌지 않은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곳이다.

"! 나는 두 사람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느라 이젠 안 오는 줄 알았지."

조이의 주인이며 화가이기도 한 홍 선생이 반색을 했다. 홍 선생은 두 사람이 십 년이 다 되도록 사귀고 있는 것에 대해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보내는 사람이다. 찬사라 함은 요즘처럼 모진 세상에 사랑을 오래 한다는 것, 비난이란 빨리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 선생님. 헨델의 메시아를 부탁합니다. 커피 두 잔에 배가 고프니까 빵은 곱배기로 주세요."

유경은 성민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토록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필요한 말 외에는 병자처럼 입을 열지 않던 윤성민이었다.

"윤성민씨. 내가 그동안 본 윤성민이 아닌데. 아니 얼굴이 왜 그 지경이지? 포로 수용소를 방금 탈출한 사람처럼 얼굴이 말이 아닌데. 어디 아팠었나? 유경씨도 그렇고. 요즘 두 사람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하하하... 맞습니다. 저는 방금 악마의 수용소에 포로로 있다가 탈출했습니다. 제 탈출은 완벽한 성공을 했고, 저는 다시는 포로 생활을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 참주인을 만났거든요."

"참주인? 어디 취직이라도 했어?"

". 취직했습니다.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았어요."

"유경씨는?"

홍 선생의 말에 성민은 유경일 쳐다 보았다. 그때 메시아가 뜨거운 커피와 겉이 보기 좋게 구워진 빵과 같이 나왔다.

'이 여자는 한없이 타락할 수도 있고 또는 한없이 성스러울 수도 있는 너무도 이중적인 여자다. 이 여자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 곁에 있으면 창녀나 악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한다면 이 여자는 천사조차 질투할 아름다운 여자가 될거다. 이 여자는 나와 있어야 한다. 아니 내가 이 여자 곁에 있어야 한다.'

성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물론 유경이도 저와 함께 일해야죠. 제 주인이 유경이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제가 목숨을 내놓는 충성을 바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거든요."

순간 유경이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 사람은 또 다른 병을 앓고 있다. 팔 년 전 폐결핵으로 육신의 질병을 앓았는데 이젠 그의 영혼이 앓고 있는 셈이다. 이 병은 감염될 수 있다. 그 속도는 빠르다. 나는 싫다. 차라리 돼지떼들에게 뜯어 먹히는 것이 나으리라.'

유경은 커피를 마시며 성민의 핏기 없는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민도 유경을 애정 넘치는 눈으로 보며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유경아. 유학가지 않기로 했어. 한국에서 목회자가 될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 기도하는 동안 절실히 깨달았어. 내 옆에 있어 줘. 아니 나는 너를 놓치면 안돼. 어쩜 그것은 나보다 너를 위해서일거야."

유경은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는 순간 성민에 대한 증오심이 일었다. 담배 한 개비와 같이 그를 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성민에게서 과감히 떠나질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 윤성민, 너는 무엇이냐? 너의 정제는 무엇인가? 나는 너로 인해 점점 신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어. 너로 인해 말이야. 그런데 너는 마치 신과 사십 일 동안 밀회를 즐기고 온 신부(新婦)처럼 즐거움에 몸을 떨고 있구나. 너는 승리했고 나는 패배했어. 패배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 곁에 있다는 것이겠지? 나는 네 손이 신을 대리한 손이라도 잡히는 순간까지 도망칠거야. 결코 얌전히 앉아 처분만을 기다리지는 않을거야.'

 

5월의 우울한 입맞춤 - 9

두 사람의 커피잔이 비고, 유경이 담배를 끄자 성민은 일어섰다.

"가자, 유경아. 너에게 선물할 게 있어."

성민은 유경을 데리고 홍익대 캠퍼스 안으로 들어 갔다. 일요일 이었지만 축제를 앞둔 탓인지 학생들로 붐볐다. 성민은 노천극장으로 갔다, 유경은 성민이 하는 대로 정문 쪽이 바라보이는 맨 위 계단에 앉았다. 뒤에는 플라타너스들이 주욱 둘러 서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쓰러졌다면서? 권여사, 아니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성민의 말에 유경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오랜만에 웃는 유경이다.

"어머니? 대단한 변화구나. 어머니를 용서한 거야? 아니면 세상을 용서한 거야? 그것도 아니면 악마를 용서한 거야?"

유경은 얼굴 가득 조소를 품고 물었다. 그러나 성민은 수줍은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나를 용서한 거지."

"네가 네 자신을? 감히 네게 그런 권력이 있단 말이야?"

"그건 권력이 아니라 은혜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 자신을 용서한 거야. 아이러니한 일이지. 용서를 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으니. 유경아. 나는 이런 말을 하면 네가 축하해줄 줄 알았단다."

성민은 유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쏟아지는 오월의 빛이 잔혹하게 느껴질 만큼 성민은 수척해 보였다. 유경은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아파왔다.

"축하해. 축하해. 성민아 그렇지만 우선 네 몸을 회복시켜야 하지 않겠니?"

"회복! 참 좋은 말이구나. 그래. 나는 오랜 질병을 않다가 깨끗하게 회복된 기분이야. 아니 이건 체험이야. 유경아. 너는 나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니? 그렇다면 나처럼 회복의 기쁨을 경험했겠구나?"

"그만! 나는 그 문제에 관해선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햇빛이 너무 따가우니 자리를 옮겼으면 해."

유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하구나. 토요일 서울로 오면서 창을 부수는 듯한 햇빛을 보며 네 생각을 했어. 네게 입을 맞출 때 하늘을 보겠다고. 나는 더 이상 이 세계를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더듬지는 않을거야. 그래서 이곳에 온 거지. , 네게 선물을 하고 싶어."

성민은 잠시 얼굴을 숙였다. 그는 바랜 청바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언가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다. 유경은 그의 얼굴을 만져 주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신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 때는 순진하고 겁 많은 소년처럼 보인다.

"유경아. 우리 이번 가을에 결혼하자."

윤성민은 불쑥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리고는 유경의 입술을 세차게 빨기 시작했다. 윤성민의 포옹은 상당히 길었다. 유경은 놀라움에 잠시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유경은 순간 아 하는 작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입맞춤을 멈춘 윤성민은 유경의 손을 꼭 잡은 채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그 표정에는 하늘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역력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 성민아, 두려워. 네가 오기 전까지는 너를 피하려고 했어. 그런데 지금은... "

"유경아. 네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 그러나 내가 지금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니?"

"그런 말이 아니야. 나는 숨이 막혀. 너는 정말 더 이상 나와 함께 있기에는 범인(凡人)들이 알고 있는 세상을 넘어 선 것 같아. 마치 커다란 비밀을 혼자서만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 그런데 그 비밀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고통을 받는 화()의 근원으로 생각이 되곤 해. 나는 싫어.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아. 제발 성민아. 나를 너의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면 그 전에 나를 네 올가미에서 풀어 줘. 먼저 나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고 그다음 혼례식을 올리는 게 순서가 아닐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네게 갇혀 있는 느낌에 너를 죽이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어. 성민아, 과연 내가 살인을 할 수 있을까?"

유경은 방금 따뜻한 목을 조르고 난 사람처럼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유경아. ,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구나. 나는 하나님에게 잡힌 바 됨으로 자유를 찾았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안을 누리는 행복한 신부로 너를 생각했단다. 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유경아. 사람은 각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귀한 존재야. 누가 누구를 구속한단 말이니?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 건 하나님과 악마뿐이야. 그러나 악마의 음모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구속하겠니? 하지만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너를 내 안에 가두고 싶어. 언젠가 내가 엄지공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나는 지금도 가끔 너를 생각할 때마다 엄지공주가 된 너를 상상한단다. 폭군처럼! 폭군처럼 너를 가두고 내가 믿는 신에게 절을 하게 만들고 싶어.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원하시듯. 나도 너의 자유로운 결정을 바란단다. 그런데 이미 나는 네가 무엇을 결정할지 알지.

그리고 나의 결정도 내려진거고.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해. 내가 원하고 네가 원하는 일이야. , 눈을 똑바로 뜨고 봐. 내가 네게 입맞춤했을 때 저 나무들의 잎사귀들이 손뼉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니? 바람이 잠시 멈추었어. 파란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어. 그런데 더 이상 무슨 증명이 필요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길 원하니?"

윤성민은 두번째 포옹도 갑작스레 했다. 유경은 눈을 갑은 채 그에게 입술을 맡겼다. 성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무와 바람과 햇빛에 저주를 보내고 고함을 지를 것 같기 때문이다.

유경은 성민의 혀를 저도 모르게 세차게 빨았다. 멀리서 남녀의 재잘거림과 휘파람소리가 나뭇잎들의 박수소리처럼 유경의 귀를 간지럽혔다.

 

성민과 헤어진 유경은 카사블랑카로 갔다. 한 테이블만 남기고 자리는 다 차 있었다. 희옥이 하소연을 했다.

"언니. 잘 왔어요. 상계동에 좀 가봐요.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아프대요. 목소리가 영 이상해요. 누구에게도 어디 있다고 말하지 말랬는데 언니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번에 언니가 다녀간 날도 그렇고 계속해서 술만 마셨어요. 방송국에서 점잖게 생긴 아저씨들 세 사람이 왔었는데 그 사람들한테 욕을 하고 삿대질까지 했어요."

유경은 곧 카페에서 나왔다. 다른 일보다 우선 진수진에게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진수진은 자신이 독신녀이고 방송일을 하기에 의식적으로도 자신을 흐트러뜨린 법이 없는 여자다. 그런 진수진이 희옥이 전한 대로 변하고 있다면 분명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판단이 섰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명동 쪽으로 내려 가던 유경은 그만 베르사이유 호텔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까만 승용차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리고 있었다. 강현섭이었다. 강현섭은 주차 관리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며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유경은 그와 마주치기 싫어 되도록 멀리 떨어져 가느라 늘어선 조그만 옷가게에 바짝 붙어 걸었다.

"소설가 선생!"

유경이 옷가게 쇼윈도로 보니 강현섭이 어느새 선그라스를 끼고 손을 흔들었다. 유경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 쇼윈도에 비친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재빨리 뛰었다.

'은퇴? 당신 같은 쇼맨이 무대를 떠나서 무슨 일을 하며 살려고? 난 쇼맨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미경의 남편, 한동수처럼 늘 바쁘겠지. 늘 큰소릴 치고, 늘 웃고, 말이 많고, 그만큼 마음도 공허한 사람들.'

유경은 단숨에 지하도로 내려 왔다. 우스웠다. 자신이 왜 그를 피해 뛰었는지 부끄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지하철에 오르며 진수진에 대한 염려로 강현섭을 까맣게 잊었다.

 

 

3.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진수진은 유경을 그리 반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언니, 많이 아파?"

유경은 수진의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나쁜 년. 희옥이 그년은 입이 싸단 말이야. 커피 줄까?"

수진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 그녀의 몸매는 중세시대의 그림에 나오는 여신들처럼 희고 풍성하다.

유경은 그녀가 커피를 끓일 동안 오랜만에 들른 수진의 집안을 살폈다. 찬찬히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던 유경은 웬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며칠 내로 이사할 사람처럼 그녀의 살림들은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정리 정돈은 다시는 풀지 않을 것처럼 너무도 차분한 상태였다.

"이리 와. 너도 오고 했으니 오월의 바람 냄새 좀 맡아 볼까?"

수진은 커피 두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유경은 그녀의 짧은 머리칼 밑으로 밧줄처럼 목에 걸려 있는 가죽 목걸이 끈을 보며 뒤따라갔다.

"문을 열어 봐. 나는 아직은 문을 열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유경은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수진의 아파트는 25층의 맨 위층이다. 유경은 언제나처럼, 아득한 현기증에 감히 밑을 내려다보지 못했다.

"겁쟁이! 너 같은 겁쟁이가 무슨 글을 쓴다고 해! 저 밑은 우리들의 자궁(子宮)이자 우리들이 다시 돌아갈 메트라란 말이야. 메트라가 무슨 뜻인 줄 알아? 히브리어로 자궁, 모체라는 뜻이지. 그런데 자궁이란 건 참 이상하단 말이야.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나를 유혹하거든.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마음이 급해 종종걸음을 치다시피 한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나는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풀려 난 사람처럼 밖으로 뛰어가, 그러면 그 자궁은 썩은 시체를 탐하는 악마의 주둥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저 자궁이 나를 유혹하는 순간 그대로 뛰어내리자 하고 말이야. 사람들은 그걸 추락이라고 말하지.

어리석은 인간들!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회귀야! 회귀란 말이 거북하다면 제이의 출산을 위한 잉태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니? 마치 마녀를 보듯 하는구나. 그래. 마녀를 보는 눈은 중세나 지금이나 똑같지. 마녀에게 동정을 준 기록은 한 귀절도 없으니까. 마녀를 보는 눈빛에는 화형(火刑)의 불길과 능지처참의 칼날이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지. 더구나 마녀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묵인된 살인의 축제지. 그러나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마녀는 아니야. 그럼 나는 성() 처녀일까?"

수진은 눈을 감고 몸을 흔들며 말을 했다. 그 모습은 오월 오후의 햇살에 목욕을 하는 사람처럼 출렁거렸다. 유경은 그녀의 잠옷 사이로 보이는 검고 탄탄히 생긴 젖꼭지를 흘낏 보며 물었다.

"제이의 잉태법은 자궁으로의 복귀밖엔 없을까? 사랑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그리고 언니의 자궁론은 너무 어설퍼. 그건 도피 행각이지 결코 복귀가 아니야."

유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진이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렸다. 유경은 뒤로 물러섰다. 결코 의도적이라거나 실수로 잔을 떨어뜨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 수진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병의 증세다.

"유경이, . 비겁한 줄만 알았더니 순진한 어린애구나. 하하하 ... 우리들의 자궁 외에 다른 걸로 잉태를 꿈꾸다니 불결한 생각이야. 아니야, 아니야. 그건 네가 동물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 어린아이라는 뜻인지도 모르지. 어린아이는 그 몸속에 오염되지 않은 동물성을 지니고 있거든. 나는 어린이와 발정(發情)을 숨기지 못하는 고양이의 웃음은 같은 소리라고 생각해. 난 또 그런 믿음을 내 생활 속에 어설프지만 고통 속에서 그리며 산 적도 있지. 짧은 일 년이었지만!"

수진은 무엇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려는 듯 제 머리를 두 손 으로 움켜잡고 몇 번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거칠게 머리를 들었다. 젖가슴 밑까지 내려오는 긴 가죽 목걸이에 걸린 얼굴만 있는 나무 고양이가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 듯 흔들렸다.

"작년 삼월이었어. 방송일 때문에 야외촬영 현장에서 새벽 두 시쯤 아파트에 들어섰지. 차를 주차 시키고 막 자동차 열쇠를 잠그려는데 한쪽 구석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 그러나 그건 울음이 아니었어. 광란의 몸부림이었지. 고양이 한 마리가 저 밑에 개나리를 잔뜩 심어 놓은 곳을 오가며 울고 있었어. 처음에 나는 그 괴기한 울음소리에 진저리를 쳤어. 발정(發情)! 그래. 나는 그 고양이가 발정으로 괴로워한다는 걸 조금 후에 알았어. 나는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지. 운전석 문을 내리고 고양이 울음을 들었어. 어둠속에서 고양이의 애처로운 눈빛이 보이긴 했지만 그 빛엔 관심이 없었지. 나는 소리에만 빠졌거든. 신기했어. 이 도시의, 그리고 아파트 한복판에서, 콘크리트 냄새 속에서 발정을 할 수 있는 고양이가 신비롭게 생각되었어.

그런데 신비롭다고 느끼자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귀여운 아기의 울음으로 들리지 않겠니? ... 너는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지. 그건 웃음보다 더 짜릿한 즐거움이야, 아기. 불현듯 아기를 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아니, 아기를 잉태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었어. 겁쟁이 작가 선생! 아기를 잉태한 적도 없는 네 뱃속에서 무슨 글이 나올지 스스로 회한에 빠져 본 적은 없어? 엉터리! 나는 아기를 잉태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지.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건 그 순간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몸이 생각나지 뭐니. , 나도 모르게 스커트를 걷어 올렸지. 나는 처음으로 자위행위라는 것을 했단다. 나는 정말 몇 년 만에 내 몸에서 스스로의 즐거움을 발견했어. 느꼈지! 나도 잉태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나는 엄청난 오르가슴을 느꼈단다.

이 엉터리야! 왜 얼굴이 붉어지는 거야? 나를 비웃는 거야? 그래! 그 오르가슴은 오래가지 못했어. 무언가 나를 비웃는 게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게 무언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엄청난 조롱을 받고 있었을 거야, 잉태란 축복받은 여인들의 훈장이거든.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때는 내 자신이 그 여인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줄 알았던 거야. 그러나 나의 오르가슴이 가라앉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멈췄을 때 나의 즐거움도 사라졌어.

나는 그 이후부터 잉태를 위해 아침이면 눈을 뜨고 밤에는 옷을 벗었지. 그런데 말이야."

수진은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유경은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언니. 술 마실래?"

그러나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받질 않아. 술도 담배도 다 싫어. ! 입 다물고 내 얘기나 들어 봐. 언젠가 내가 얘기했지, 난 네게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이야. 지금도 나는 너에게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거야. 알기나 해?"

수진은 눈을 감고 얼굴을 천정으로 향했다. 유경은 그녀의 뚱뚱한 몸집이 오늘은 웬지 하얀 애드벌룬처럼 느껴져 자신이 그 애 드벌룬과 함께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축복받은 여인이 아니었지. 정말 대단한 환상을 꾼 셈이야. 유경아, 넌 사랑이 뭔지 아니? 알면 가르쳐 줄래?"

갑자기 수진은 소파에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유경이 앞에 바짝 다가앉아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유경의 하얀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부여잡았다. 유경의 가느다란 다리가 나뭇가지처럼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가르쳐 줘!"

유경은 수진의 얼굴에서 공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공포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으로 인해 침몰당하는 고통받는 영혼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진의 영혼 자체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즉, 자신이 극()을 쓰고, 연출까지 하는 처음과 종말이 뚜렷한 한 편의 비극(悲劇)이었다.

"언니. 사랑을 말하기 위해선 먼저 그리움을... "

"시끄러워! 그리움, 아픔, 눈물, 고통, 고독, 이별, 설레임, 그리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느니 하는 말들? 다 개 X이다! 그딴 얘기 들으려고 네 앞에 무릎을 꿇었는 줄 알아?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수진은 벌떡 일어섰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오직 잉태하고 싶은 생각에 옷을 벗기 시작했지. 그런데 자궁이 말라버린 여자처럼 아니, 애초에 내 몸속에 자궁이란 존재하지 않는 여자처럼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했어. 생각해 봤지. 사랑! 그래, 나에게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일까 하고 말이야, 그러나 그건 아니었어. 다만 내가 그토록 잉태를 원하는 건 내 속에 잉태할 수 있는 자궁이 없음에 대한 열등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나를 몰아붙인 거였어. 거세당한 여자지. 그럼 나의 자궁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취해야 할 방법은 무얼까? 다시 태어나는거야. 네 식으로 얘기해 볼까? 거듭나는 거지. 나는 거듭날거야. 거듭나서 풍요의 여신처럼 끊임없이 잉태 와 출산을 할 거야. , ! 혼자 있고 싶어. 다 귀찮아."

수진은 유경의 발목을 잡았던 손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유경이 신발을 신으려 하는데 수진이 불렀다.

"유경아. 이젠 이걸 네가 갖고 있어. 발정난 고양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잉태, 출산, 자궁, 거듭남, 회복, 이건 나의 유언이라구. 하하하..."

수진은 유경을 떠밀다시피 하고는 문을 세차게 닫았다. 밖으로 나온 유경은 자동차가 주차한 곳에서 수진이 사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왜 진수진은 이곳에서 저 위를 올려보는 법은 모를까? 진수진의 눈은 늘 이 아래에 고정되어 있는 셈이지. 그런 눈으로 보는 이 땅은 당연히 그녀의 자궁이자 천국이지. 그렇다면...'

유경은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수진이 그랬던 것처럼 유경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아직 손에 들고 있는 수진의 고양이 얼굴의 목걸이에서 우울한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수진은 문을 열지 않았다. 유경은 할 수 없이 종이에 몇 자 적어 우유를 넣을 수 있도록 된 현관문의 구멍 속에 던졌다.

"언니. 언니가 거듭나기 위해 갈 곳은 언니 자신 속이지 땅 밑이 아니야."

 

유경이 송이와 소풍을 다녀온 날 밤. 대학 선배인 성진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잡지사의 문화부 차장 자리에 관한 일이었다. 성진우는 경영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문단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삼십 대 후반의 전업 작가다. 유경이 등단한 이후 대학 선배며 같은 소설가라는 이유로 꾸준히 관심을 보내는 말수가 적은 남자다.

"집이 어려워졌다면서 놀고 있을거야? 밥값은 해야지. 이력서 작성해서 내일 오전 열 시까지 퇴계로에 있는 Q호텔 커피숍으로 나와. 내일이 어린이날이라고 텔레비전에 빠져 있으면 안돼."

성진우의 전화를 받은 유경은 마음이 가뿐했다. 그렇잖아도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삼십의 나이에다 작품집 한 권 내지 않은 처지에 작가라는 명함을 들고 자리를 구할 용기가 없었다. 유경은 피곤했지만 이력서 용지를 사 들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훈이 안방에서 나왔다.

"큰누나."

훈은 마당에 서 있는 유경을 쳐다볼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유경은 훈의 얼굴에서 어떤 불길한 일을 짐작했으나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상계동에 있는 S병원으로 가 봐."

유경은 마루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유경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물었다.

"죽었지? 그렇지?"

훈은 아무 대답 없이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유경은 이력서 용지를 거칠게 구기며 건넌방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죽었지!"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3

유경이 택시를 타고 S병원 영안실로 가니 희옥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입구에 앉아 있었다.

"언니!"

희옥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유경의 품에 안겼다. 흑백사진으로 뽑은 수진의 영정만이 영안실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향은 꺼져 영안실이 이젠 죽음과도 상관없고 죽음조차도 머물기 싫어하는 허공으로 보였다. 유경은 향을 피우고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옆에 앉은 희옥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간간이 울음을 터뜨렸다.

"오늘 낮에 병원에서 카페로 전화가 왔댔어요. 정신이 없어서 가게문도 제대로 닫지도 못하고 왔어요. 전 보지는 못했는데요, 아까 수진이 언니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한테 들었는데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벌써 수진이 언니가 자기 배를 칼로 찌른 상태였대요. 그래서 떨어질 때 피가 비 내리듯 했대요. 그건 그 아저씨도 못 봤는데 학교 갔다 오던 국민학생들이 보고 얘기해준 거래요.

아이들 셋이 수진이 언니를 봤는데 그중 3학년짜리 여자아이는 너무 놀라서 경기를 일으켰대요. 그래서 그 아이도 지금 이 병원에 있어요. 난 시간이 없어서 가질 못했죠. 경비원 아저씨가 다녀왔는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이네요. 아이가 울다가 자고 또 혼수상태에 빠지곤 한대요. 아이는 응급실에 있는데 뇌를 사진 찍을 거래요.

그런데 그 애 엄마가 아이가 그럴 때마다 마귀 같은 년이 우리 애 죽인다면서 소리소리 질러서 응급실이 난리가 났대요. , 그런데 수진이 언니는 정말 아무도 없어요? 경찰이 언니 집을 뒤졌는데 연락처가 하나도 없대요, 그나마 카페로 전화온 건 수진이 언니가 그 경비 아저씨한테 가게 성냥을 주면서 부인이랑 시내 나오면 꼭 들르라고 해서 적어 둔 전화번호래요. 제가 연락을 한 곳은요, 유경이 언니랑 방송국이에요. 경찰에서도 방송국에 전화했어요. ! 이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요. 아무리 언니가 죽었지만 사람들이 알면 별로 좋을 일이 아니니까요. 언니가 자살할 때 옷을 하나도 입고 있지 않았대요. 그러니 그 국민학생 여자애가 혼수상태에 빠질 만도 하죠.

더구나 칼로 배를 찔러 피를 흘리며 떨어졌으니까요. 전요, 언니가 두 달 전부터 술만 마시고 욕을 해댈 때 이상하다는 감은 잡았어요. 하지만... 자살은 꿈도 못 꿨어요. 언니는 연말 특집까지 준비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정말 비밀 중에 비밀인 데요. 언니가 가끔 술에 취해 가게에서 잔 날이 있었어요. 저도 알건 아는데요... 남자랑 잔 것 같은...유경이 언니 미안해요. 저는 언니가 유서도 없이 자살을 해서 혹시 원인을 아는 데 보탬이 되려고 얘기하는 것뿐이니까요. 지금 언니 시체는 경찰인가 뭔가가 조사를 한대요. 자살이 아닐 수도 있대요. 언니가 돈이 있는 독신녀고 발가벗고 땅에 떨어진 게 이상하대요. 요즘 흔한 성폭행을 당하고 강도들이 자살로 보이기 위해 시체를 밖으로 던질 수도 있대요. 그런데 경비원 아저씨 말로는요, 대낮에 어떤 바보 같은 강도가 시체를 던지겠냐고 하더라구요. 제 생각에도 자살 같아요. 왜냐면요, 증거가 있거든요. 아직 아파트엔 못 가봤지만요, 경비 아저씨 말로는 집에 살림이 거의 없대요. 그나마 있는 것은 이사 갈 것처럼 꼭꼭 쌌대요.

만약 강도가 들었다면 그런 일을 했겠어요? 경찰도 참 한심해요. 그런데 큰일이에요. 방송국에 전화는 했어도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이 될까요? 그리고 내가 여기 있어야 하나요? 무서워 죽겠어요. 정말 무서워요. 이상하게 수진이 언니 얼굴이 무서워 보여요. 사진도 쳐다보기 싫어요. 무서워요!"

희옥은 퉁퉁 부은 눈으로 유경을 잡아매고는 집에 전화를 한다며 나갔다. 유경은 한쪽 벽에 기대앉아 수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고양이 얼굴의 목걸이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사진은 아닌 듯했다.

진수진은 유서 없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유경의 머릿속에 수진이 제 입으로 유언이라고 한 말이 고양이 얼굴 위에 환히 떠올랐다. 발정 난 고양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잉태, 출산, 자궁, 거듭남, 회복. 그러다 유경은 자신에게 놀랐다.

'희옥의 얼굴은 눈물과 슬픔으로 물들었고, 한편 두려움으로 떨기까지 하는데 왜 나는 이리 무감각할까? 이미 그녀의 죽음을 예견해서일까? 수진의 영혼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죽었기에 거듭남의 의식을 치르고 있을 수도 있다. 자기 몸 속에는 자궁이 없다는 그녀의 영혼에 풍요의 여신과 같은 자궁이 생겨 지금쯤 엄청난 출산을 위한 잉태에 들어갔는지도 모르는 일. 그녀가 출산할 것은 무얼까? 수진은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어 온 듯하다. 특히 죽기 일 년사이에. 그러나 한번도 그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를 잉태에 대한 열등감으로 몰았고 불임(不妊)이라는 죄의식을 느끼게 한걸까? 결혼을 거부하면서 출산을 원했던 수진. 그것은 사랑이라는 정자(情子)도 없이 잉태를 꿈꾸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왜 배를 찌른 다음 추락했을까? 자궁이 없다는 텅 빈 육신을 저주해서? 그럼, 벌거숭이로 몸을 내던진 것은? 자궁으로의 회귀를 위한 의식이란 말인가?'

영안실로 돌아온 희옥이 또 수진의 죽음에 대해 얘기를 하자 유경은 손을 내저었다.

"희옥아, 나 지금 조용히 있고 싶거든. 집에 갔다가 내일 올래? 아니면 가게에 가보든지. 여기 걱정은 말고."

유경의 말에 희옥은 빨개진 눈으로 웃었다.

"그럴가요? 그럼 나는 가게로 갔다가 집에서 잘게요. 그리고 내일 새벽에 일찍 올게요."

희옥인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영안실에서 나갔다.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4

유경은 추위에 몸을 바짝 움츠리며 눈을 떴다. 허나 잠이 깬 것은 그보다 대단스런 소란 때문이었다. 두꺼운 마분지로 된 듯한 병풍식 칸막이 너머에 또 하나의 영정이 올려진 것이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

부인인 듯한 사십 대의 여자는 넋을 잃고 영정 앞에 두 다리를 쭉 펼친 채 눈물도 없이 앉아 있는데 여중생으로 보이는 두 딸은 서로 껴안고 아버지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유경은 몸을 추스르고 싸늘한 기운을 보이는 향로에 향을 피우고 밖으로 나왔다. 밖이 오히려 따뜻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영안실의 위치가 가장 그늘지고 어두운 구석에 있는 탓에 냉기가 심한 것이다. 유경은 영안실과 병원 본관 사이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았다. 뜨거운 커피로 천천히 몸을 녹이며 다시 영안실로 갔다.

그러나 가장이 죽은 집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북적대고 있었다. 마치 죽은 가장의 생일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어느새 마련한 음식과 술이 영안실의 향냄새를 비웃는 듯했다. 유경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영안실 앞 벤치에 앉아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부산 어딘가에 그녀의 부모가 있는데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그때 검은 중형차 두 대와 진회색 중형차가 동시에 들어왔다. 영안실 옆에는 어느 정도 공간이 있어 차를 주차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결같이 검은 옷을 입은 남녀가 차에서 우르르 쏟아졌다. 모두 열다섯 명으로 최대한 자동차의 수를 줄이려고 일부러 세 대의 차에 꼭꼭 껴 앉아 온 듯했다. 그들은 위엄있는 사제단들처럼 침묵을 하고는 영안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경은 그들이 방송국 사람임을 알았다. 그나마 수진의 죽음을 알고 있는 쪽은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텅 빈 영안실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자 영안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에서 노인이 나왔다.

노인은 밖에서 영안실 암을 기웃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노인은 오십대의 키가 큰 여자와 금테 안경을 쓴 남자와 같이 나왔다. 유경이 귀를 기울여 보니 세 사람은 진수진의 장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장(火葬), 유족, 비용, 장례식, 대략 이런 단어들이 주를 이루었다.

유경은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에서 나왔다.

수진이 잉태나, 거듭남이니 하는 복잡한 이유와 벌거숭이인 채로 자기 배를 칼로 찌르고 추락이라는 끔찍한 자살을 했지만 그것으로 그녀가 완벽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려고 하니 성진우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물론 이력서는 작성하지 않았다. 유경은 근처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이력서 용지를 산 다음 시간보다 일찍 Q호텔 커피숍으로 향했다.

유경이 커피를 마시고 어렴풋이 자기의 행적을 더듬어 이력서를 작성하고 검토할 때 성진우가 나타났다.

"30분 후에 문화부 담당 부장이 올 거야. 그 잡지사가 이 근처에 있거든. 내가 생각해 보니까 유경씨가 적격이야. 대기업 홍보실에서 큰일, 작은 일 다 치러봤고 등단경력까지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서른이라는 나이가 부장과 팀웍을 이루기 딱 좋지. 서른이라... 결혼은? 아냐.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유경씨 작품집은 언제쯤 볼 수 있지? 간간이 문예지에선 읽곤 하지. , 부장이란 사람이 내고향 친구야. 그 친구가 제발 진득한 사람 좀 구해달라고 신신부탁을 했어. 물론 사람은 구하려면 얼마든지 있는데 구해서 좀 쓸만하게 키우면 철새처럼 모이 따라 날아간다는 거지. 진득하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진지하고 듬직하다는 거야.

그런데 유경씬 너무 말라서 듬직한 맛이 없는데. 하하하... 미안. 내가 왜 이렇게 떠드는 줄 알아? 지금 유경씨 얼굴이 너무 피곤해 보이고 어두워. 지금도 봐. 전혀 웃음기가 었는 무덤 같은 얼굴. 그래도 무덤에는 파릇파릇 풀이라도 돋고 간간이 바람이라도 불지. 유경씨 얼굴은 무덤의 그 푸른 빛도 바람도 없는 듯해. 왜 그래? 설마... , 내가 오늘 왜 이럴까? 그 친구 오면 난 혼자서 남산이나 올라가야겠어. 금촌 구석에 있다가 가끔 서울에 오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져."

성진우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유경의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입술은 수진에 대한 생각으로 하얗게 말라붙었고 얼굴도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성진우 역시 몸에 맞지 않는 농을 하는 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히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후에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대단한 분들이시군. 아니, 도시 한복판 호텔 커피숍에서 오전부터 대작(對酌)이 아니라 대() 수면이라! 신선이 따로 없군."

문화부 담당 부장은 성진우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가진 남자다. 큰 키에 말쑥한 신사복 차림. 기름기는 흐르지 않지만 매끄러운 흰 얼굴. 얄팍한 입술. 몸 전체에 전형적인 도시 남자의 풍모가 흘렀다.

성진우는 두 사람을 선보는 남녀처럼 소개시켜 주고는 일어섰다,

"어디 가는 거야? 난 젊은 여자와 단둘이 있으면 협심증이 생긴단 말이야."

나창호 부장은 어린아이처럼 성진우의 잠바 끝을 잡았다.

"해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남산을 둘러 보고 싶어서 그래. 창호야. 인재를 발굴하는 일만 해도 난 벅찼다고. 시간이 없어. 다시 들어가서 작품 써야 해. 계약한 장편소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이 일 끝나면 우리 후배랑 같이 술 한잔 진하게 마시자. 실은 처가댁에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해서 서울에 온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전화로 일 끝냈지."

"알았다. 가라 가. 그대신 협심증 도지면 난 물귀신 작전 쓸거니까 알아서 하시라고. 작품 잘 써라. 그리고 끝나고 나면 우리 잡지에 연재소설 하나 해 주고."

"! 너 말 잘했다."

성진우는 급히 돌아섰다.

"이번엔 유경씨 소설을 연재해 봐. 이 후배가 대단하다구. 알았지. 위에서 별말 없으면 추진해 봐. 어때? 유경씨, 할 수 있지? 프로에게는 변명이 없는 법이야."

성진우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5

"진우야. 그만 사라져라. 난 지금 면접보러 왔지 연재소설 건으로 작가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염려마. 짜식, 웃기네. 단 육 개월도 우리 책을 정기구독한 적 없는 주제에. 성진우, 네가 이 년 치 정기구독 독자가 되면 내가 그 부탁을 재고해 보지. 하하하... "

성진우는 나창호의 말에 주먹을 한 번 내밀고는 호텔에서 나갔다. 나창호는 성진우가 없자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의 잡지는 시사월간지지만 문화부는 그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치나 경제 파트 못지않게... "

유경은 사람을 채용할 때 으레 꺼내는 말을 알고 있기에 지루함을 느꼈다. 유경의 눈은 나창호에게 향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머릿속으로는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그러나 떠오르는게 없었다. 나창호의 입은 쉬지 않고 실룩거렸다. 그는 마치 전쟁터에 내보낼 용사를 뽑는 사람처럼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유경은 마음 속으로 거절을 했다. 유경, 자신도 구입해 읽지 않는 잡지에다가 전문적인 문예면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기껏 연예가나 문화가의 고십 기사를 취재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유경은 웬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럼, 다음 월요일부터 나오시죠?"

"아니요, 그만두겠습니다. 그리고 전 피곤해서 좀 더 있다가 가려고 하니 먼저 가시겠어요?"

유경이 생각과는 다른 이유를 붙여 거절하자 나창호는 영 좋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유경은 피곤하기도 했지만 실은 커피숍의 한 면이 유리창으로 되어서 길거리를 환히 보여 주고 있기에 더 있고 싶었다. 유경은 새로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백지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성진우의 말이 빙빙 거렸다.

'그래. 장편 소설을 쓰자. 다시 글 속에 나를 가두어 두자.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내 자신을 방치해 왔어. 그 결과, 그 소득이 무어란 말인가. 병약해진 내 육신? 악몽?'

순간 유경은 자신의 중얼거림에 스스로 놀랐다.

'신기한 일이다.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아까부터 떠오르려고 했던 생각이 이거였구나. 그래, 윤성민을 다시 만나고 난 후부터 악몽을 꾸지 않았어. 그런데 왜 나는 악몽에서 해방된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까? 마치 구원받은 자처럼 당연히 기쁨을 누렸어야 하는데. 오만인가? 아니면 지금의 모든 상황들이 현실로 연장되고 있는 악몽이라는 걸까? 누군가 그랬지. 악마의 힘은 매우 현실적인 힘이라고. 그렇다면 악몽의 상황은 가장 현실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때였다.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도심의 한복판에 대소란이 일어난 듯 고함소리가 유리창을 흔들었다.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두 줄로 힘차게, 그러나 천천히 걷고 있었다. 맨 앞에 선 삼십 대 후반의 남자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인데 몇몇 이십 대 여자를 빼고는 거의 사십 중반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손으로 만지면 피가 주르르 흘러내릴 듯한 핏빛 띠를 가슴에 두르고 있는데 그 띠에는 갖가지 구호가 흰 글씨로 함성처럼 박혀 있었다.

"예수님이 오신다. 휴거!"

"속히 구원을 받아라. 휴거!"

종말론자들의 행렬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대부분 누렇게 뜨고 무표정했으나 무심한 얼굴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나타냈다. 불쌍한 인간들아, 어서 휴거를 준비하라는 호소가 아니라 이 썩고 더러운 짐승 새끼들아, 불의 구덩이에서 살아 남을 준비나 하라는 투의 고함과 표정을 거리에 쏟아 부었다.

유경은 저들이 정녕 휴거의 구름을 탈 수 있는 자들인가 하고 생각했다. 유경은 그들이 거리 가득 불의 심판을 내던지고 간 자리에서 불의 씨를 찾았다. 수진이가 그 자리에 서서 불의 씨를 배에 품고 출산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확하니 유경의 눈 앞에 비춰졌다. 유경은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아니야!"

유경은 재빨리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카페 카사블랑카의 전화번호가 아득했다. 엉덩이를 간신히 덮은 까만 스커트의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하고나서야 유경은 번호를 기억해 냈다.

", 유경이 언니세요? 전 희옥이 친군데요, 희옥이한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희옥이는요, 지금 병원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가게를 보고 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유경은 수화기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왜 자신이 전화를 했는지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왜 나는 수진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확인을 하는걸까?'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6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유경은 그 괴로움이 더했다. 신문팔이 소년이 강제로 떠맡긴 석간신문에서 그녀의 기사를 읽었다.

사회면의 왼쪽에 '미혼 여류방송작가 의문의 변사체'란 제목의 기사는 그야말로 여성 주간지의 기사를 방불케 했다.

'38살의 독신녀 방송작가가 자기 아파트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배를 찔린 채 추락해 사망했다. 목격자는 세 명의 국민학교 학생인데 한 여자아이는 심한 충격으로 아직 병원에 있고 두 남자아이들도 당시 상황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나마 세 차례의 증언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25, 그녀의 배란다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는데 두 번째에는 하얀 웃옷을 입은 남자를 봤다고 하고 그들의 부모와 같이 한 세번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경찰은 진수진이 카페를 운영하며 술을 자주 마시고 개방적인 인간관계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던 점으로 보아 치정으로 원한 관계에 얽힌 살인사건으로 추측. 그리고 그녀의 집안의 정리된 상태로 보아 애정관계로 집을 옮기려다 그전에 변을 당한 것으로 본다. 문제는 두 어린이의 목격 당시의 정확한 증언인데 사건 해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본다.'

유경은 신문을 의자 밑으로 내던졌다.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어차피 수진의 자살을 이해할 세상은 아니야. 그녀는 분명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혼자 품고 있었어. 그래서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한거지. 그녀는 자궁의 비밀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잉태와 출산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던 거지. 불임이라고 했지. 그녀는 이 시대의 모든 불임의 자궁을, 어느 생명도 잉태치 못하는 자궁의 슬픔을 위해 대신 피를 흘린 거야. 이 시대에 누가 진정한 잉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양이의 발정만도 못한 욕정으로 아무 곳에나 쏟아내는 정액이 무슨 잉태의 씨가 된단 말인가? 수진은 한 번도 순결한 정액을 받아 보지 못한 거야. 그녀의 것은 불임의 자궁이 아니었어. 그녀의 자궁속으로 들어가는 세상이 오염되고 악취를 풍기며 썩은 거였지. 불쌍한 수진 언니!'

 

집으로 돌아온 유경은 다락방 책상 앞에 앉아 새 노트를 한 권 꺼냈다. 유경은 아까부터 떠올랐던 말을 큰 글씨로 썼다.

'메트라, 메트라, 메트라'

그다음 수진과 관계된 모든 걸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카사블랑카, 카페, 방송국, 방송작가, , 욕설, 남산, 25층 아파트, 희고 풍성한 몸, , , , 자살, 추락, 잉태, 자궁, 출산, 남자, 정액, 고양이, 어린아이, , 살림살이, 독신녀, 미스 오픈, 희옥이, 투자...한 장을 넘길 때 전화가 왔다.

"소설가 선생!"

강현섭이었다. 그는 바로 유경의 집 앞에서 카폰으로 전화를 한다며 잠깐 나와 달라고 했다. 유경은 어이가 없어 이유도 묻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검은 중형차 속에서 나오는 강현섭은 여왕을 맞으러 나온 영주(領主)처럼 정중했다. 까만 양복의 강현섭은 청바지를 입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라 유경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 차에 타시죠."

강현섭은 머뭇거리는 유경을 재촉했다. 유경은 할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지금 무얼 하다가 나왔죠?"

"잠자다가 나왔어요."

"하하하... 소설가 선생은 자면서 글을 쓰나 보죠?"

강현섭이 자기의 손을 가리키며 웃는 바람에 유경은 그제서야 볼펜을 손에 쥐고 있음 을 알았다.

"소설가들은 모두 거짓말의 천재라는데 예외도 있는 법이군요. 어쨌든 저 때문에 작업이 방해되었으니 제가 벌충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유경은 놀라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강현섭은 계속 차를 몰았다.

"딱 두 번 마주쳤지만 아, 오늘까지 세 번째군요. 소설가 선생은 늘 청바지 차림입니다. 그러나 멋있습니다. 그리고 제 기사는 잘 썼습니까? 이 달 말에 유월 호가 나온다면서요? 저는 요즘 무대에 일체 서지 않습니다. 방송엔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으니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죠. , 소설가 선생. 명동에선 왜 도망갔죠?"

강현섭은 싱긋 웃었다. 유경은 그의 웃음에 쌀쌀하게 답했다.

"제 이름은 김유경이에요. 그리고 도망간 게 아니라 피했어요. 왜냐구요? 나는 쇼맨이 생리에 맞지 않아요."

"하하하... 김유경씨. 제가 쇼맨이라고요?"

강현섭은 크게 웃고 나서는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입까지 꽉 다물었다.

 

강현섭은 장충체육관 건너편에 있는 술집 앞에 차를 세웠다. 유경은 로이코스라는 술집 간판을 몇 번 입안에서 되뇌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기억되는데 뚜렷이 그려지는 것은 없었다.

로이코스의 간판과 입구는 고대 그리스풍으로 화려하면서도 깨끗한 흰색으로 만들어져 고급 술집이라는 인상이 확연했다. 강현섭은 유경을 로이코스 안으로 안내했다.

백 평이 더 되는 홀은 겉과는 달리 현대적이며 단순한 인테리어와 밝은 조명으로 상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홀에는 이상하리만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유경씨. 여기 앉으시죠."

강현섭이 카운터 앞 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끌어내 주었다. 나무 조각으로 짠 바닥 위의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흰색이었다. 유경이 의자에 앉자 강현섭은 주방 쪽으로 갔다. 그러자 주방 안에서 여러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약속이나 한 듯 홀 구석에 있는 문이 열리며 흰 와이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은 깔끔한 남자 다섯이 나왔다.

유경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왜 왔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볼펜만 달랑 들고 나온 형편이다. 유경은 마침 충무로 기획실에 있는 친구가 생각나 전화기 앞으로 갔다. 수화기를 들려 하는데 주방에서 나온 강현섭이 유경의 손을 잡았다.

",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금이 다섯 시 이십 분입니다. 앞으로 정각 여섯 시에 축제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우리 잠시 산책 좀 할까요?"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7

강현섭은 무조건 제멋대로였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국립극장 쪽으로 걸었다. 유경은 살짝 웃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와 청바지에 하얀 셔츠, 운동화의 여자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지는 국립극장 뜰에는 바람만이 한가히 불고 있었다. 강현섭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저 혼자 본관 계단에 걸터 앉았다. 유경은 할 수 없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강현섭은 유경에게 담배를 권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담배를 다 필 때까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유경이 일어서려 하자 강현섭이 억지로 앉혔다.

"그것이 유경씨의 칼입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유경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간 강현섭은 유경의 손에서 볼펜을 뺏아 힘껏 던졌다. 유경은 어처구니 없는 그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강현섭의 뺨을 세차게 치고 말았다. 유경이 새하얘진 얼굴로 그를 찌를 듯이 노려 보자 강현섭은 천천히 자기의 뺨을 만졌다.

"오호... 유경씨의 손도 칼인가 보죠?"

유경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유경은 강현섭의 품에 밧줄로 묶이듯 꼭 안기고 말았다. 유경은 그의 눈길을 피했다. 저 잔인한 눈길. 유경은 숨을 멈추고 보는 듯한 그의 눈길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자 술집 간판, 로이코스의 신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로이코스의 눈,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 님프... 유경의 기억은 여기서 멈추었다.

"가죠. 축제의 시간입니다. 손님들이 기다릴 겁니다."

강현섭은 조금도 어색함 없이 유경을 감았던 팔을 풀고 말했다.

"축제요? 저는 빠지겠어요. 옷차림도 그렇고..."

유경은 강현섭에게 약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겨우 옷을 핑계로 대다니.

"옷이요? 아니에요. 좋아요. 유경씨의 그 차림이 아마 축제에서 가장 최고일겁니다. 유경씨답지 않은 말은 듣기 싫어요."

두 사람은 국립극장을 올라왔을 때처럼 역시 말없이 내려 갔다.

로이코스 가까이 왔을 때 유경은 발을 멈췄다. 그새 문 앞에 고급승용차가 열 대 정도 장승처럼 세워져 있었다.

"손님들이 먼저 오셨군요. 가죠."

강현섭이 문을 열자 음악이 잔잔히 흐르며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가 다섯 번이나 연거푸 들렸다.

"축하합니다. 사장님!"

유경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은퇴를 한다더니 술집을 운영한다는 말인가. 홀 안에는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선 채 박수를 치고 강현섭은 그들에게 차례로 다가가 인사했다.

그러는 동안 유경은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 강현섭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강현섭은 마치 입는 옷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듯했다. 로이코스의 강현섭은 너무도 정중해 손짓 하나하나조차 정갈해 보였다.

유경은 그런 강현섭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심히 한쪽 벽을 쳐다 보았다. 순간 유경은 심장이 굳어질 듯한 놀라움에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하얀 벽에 황금빛 조명을 받고 걸려 있는 가로세로 일 점 오 미터 크기의 흑백 사진 속의 얼굴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화를 참고 있는 듯한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현상할 때 의도적인 명암을 주었는지 몹시 마른 얼굴에 검은 그림자와 밝은 부분이 거대한 계곡의 굴곡처럼 드리워진 모습.

유경은 사진 속 가신의 얼굴이 한 밤에 달빛을 받고 있는 계곡처럼 느껴졌다. 만약 조금 더 사진에 취한다면 보는 사람이 누구나 그 계곡에 자신이 있다는 착각에 빠질 듯했다.

유경은 강현섭의 엉뚱한 발상에 화가 나기보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것은 작가라는 직업의식이 아니라 한 남자에 대한 다가섬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테이블에 나눠 앉았다. 가벼운 고전음악이 흐르며 웨이터들이 바삐 움직였다.

"유경씨. 죄송합니다."

강현섭은 손수 위스키와 갖가지 과일을 예쁘게 썰어 담은 접시를 들고 왔다.

"이젠 아셨어요? 오늘이 로이코스 개업식이죠. 아주 절친한 분들에게만 알렸답니다. 캐리어우먼 주간님에겐 일부러 안전했어요. 그분은 다 좋은데 방송을 하도 잘하셔서. 제가 유경씨와 대화를 많이 못 나누더라도 화내지 마세요. 다만 이 자리에 유경씨가 있어 주면 더 좋을 듯해 강제로 모신겁니다. , 저 사진 맘에 들어요? 현상에서 확대까지 꽤 힘든 여정이었죠. 하하하..."

강현섭은 위스키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유경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좋은 자리에 부인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강현섭은 잔을 든 채 유경을 쳐다보았다.

"제가 왜 이 가게 이름을 로이코스라고 한지 알아요? 원래 정한 이름이 있었죠. 뭔지 아십니까? 지옥입니다. 왜 웃죠? 정말입니다. 아무 뜻 없습니다. 그런데 저 사진을 현상하는 날 바꿨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드리죠. 잠시만요."

강현섭은 유경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만지며 일어섰다. 유경은 강현섭이 두고 간 담배를 피우며 다시 한 번 사진을 보았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홀을 흔들었다.

"이봐. 사기꾼의 천재. 아니, 천재 사기꾼. 이것은 또 몇 달이나 가는 거야. 폐업식할 때도 축제를 열건가? 하하하... "

유경이 돌아보니 두 여자와 같이 자리를 한 강현섭 또래의 남자였다. 그는 아직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동준이. 이번엔 오래 할 수 있도록 자네가 빌어 주게. 난 자네 기도를 담보로 이 장사를 한거니까. , 여러분. 로이코스를 위해 건배합시다"

강현섭이 맥주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모두들 로이코스를 외쳤다. 유경이 무료함에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쳤다. 유경은 일곱 시가 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유경은 자기에게 한껏 조소를 보내는 중년 여인의 얼굴을 넋을 잃은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뭐야? 저 잘난 카사노바에게 걸려든 거야? 아니면 먼저 꼬리를 친 거야? 대단한 능력이시군. 저 사내에겐 뭘 가르쳐 주려고? 역시 세상은 좁고 좁아. 설마 여기서 나를 만날 줄은 몰랐겠지. 부인과 애새끼까지 달린 저 바람둥이가 골치 아프게 너 같은 글쟁이를 유혹 할 리는 없지. 대단해, 대단해."

유경은 겨우 테이블을 의지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8

"어머니? 이 창부 같은 것! 네 혀는 수십 개냐?"

권여사는 이를 바득 부딪치며 작게 말했다.

"아니, 두 분이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이때 강현섭이 유쾌한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들어섰다. 그러자 권여사는 표정을 바꾸며 환히 웃었다.

"아니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러나 구면은 아니죠. 내가 이 젊은 소설가의 글을 읽었거든요. 그래서 사진으로 얼굴을 익힌 터죠. 그런데 두 분이 아주 다정해 보입니다. 애인?"

"하하하... 권여사님. 질투하지 마세요. 제 마지막 애인입니다. 마지막이니까 축복이나 실컷 해 주십시요. , 두 분 다 앉으세요. 작가와 팬의 만남이라? 아주 지적인 만남이군요. 유경씨와 저는 남자와 여자라는 꽤 동물적인 만남인데 말입니다. 그럼 우리들의 만남을 축복합시다. 건배!"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강현섭을 따라 잔을 들고 부딪쳤다.

"강 사장님. 두 분이 만난 지 오래 되나요? 두 분의 사랑은 어느 술과 그 빛깔이 가장 닮았죠?"

"권여사님께서 제가 다른 여자와 있을 땐 이런 관심을 보여 준 적이 없었는데 뜻밖이군요. 사실대로 얘기하죠."

유경은 강현섭의 말에 권여사의 오해가 조금이나마 풀리리라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만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의 색깔은 어떤 술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핏빛 색입니다. 글쎄 유경씨나 나나 피 색깔이 같지 뭡니까? 하하하... "

강현섭은 뒤로 고개를 제치며 크게 웃었고, 권여사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으나 유경은 다시 일어섰다.

"앉으세요. 내가 당신을 희롱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염려마요. 권여사님은 제 친구이자 어머님 같으신 분이에요."

강현섭은 유경의 손을 억세게 잡으며 의자에 앉혔다. 유경은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 같으신 분이라고? 그렇다면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있을 순 없어. 지금 이 상황은 누구보다도 강현섭, 당신에게 상처가 커요.'

그러나 권여사가 먼저 일어났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두 분의 사랑에 축복이... "

권여사는 말을 맺지 못하고 다른 테이블로 갔다. 그러자 강현섭은 유경의 옆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미안해요. 결코 의도적은 아니었어요. 제가 얘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든 순간적인 착상으로 합니다."

"순간적인? 그렇다면 나에 대한 당신의 제스처도?"

"제스처라고요? 계속 나를 쇼맨으로 보고 있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저 사람들 앞에서 발표라도 할까요?"

강현섭은 벌떡 일어섰다. 유경은 머리를 저었다. 이상한 상황으로 자꾸 굴러가는 바퀴를 멈출 수 없음에 당황했다.

"여러분! 제 마지막 애인을 소개합니다. 김유경씨입니다. 혹시 다른 남자와 다른 웃음을 주고 받는 장면이 목격되면 즉시 제게 연락주십시오! 하하하... 여러분. 이 웃음은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강현섭은 두 손을 높이 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어떤 이는 샴페인을 터뜨렸다. 유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그대로 뛰었다.

"유경씨!"

강현섭이 불렀다. 그러나 유경은 멈추지 않았다. 거리는 이미 어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정신었이 걷던 유경은 숨을 돌리려 거리에 화단처럼 놓여진 돌 위에 앉았다. 유경이 큰 숨을 내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돌아보니 강현섭과 왔던 국립 극장 맞은편 자리였다. 유경은 어지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성민아..."

유경은 고통스런 목소리로 성민을 불렀다.

'나는 왜 어려울 때마다 그를 찾는 걸까? ,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우습게도 강현섭의 사진을 보는 순간부터 그에게 빠져 들었다. 내 자신을 속일 수 없다. 그래서 화가 나는거다. 마치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들킨 사람처럼. 강현섭은 나의 감추지 못하는 눈길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있게 그들에게 선포했다. 그러면서도 이 지경에 감히 성민을 찾다니! 그럼 강현섭과의 만남은 악몽이란 말인가!'

유경은 머리가 몹시 아팠다. 담배라도 피우면 조금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권여사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오는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유경은 부끄러움에 그대로 어둠 속에 파묻혀 버리고 싶었다. 너무도 쉽게 강현섭의 마음 한 구석을 넘보고 있으면서 뻔뻔스러운 얼굴로 권여사에게 변명한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변명을 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리라. 유경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을 때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유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강현섭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유경에게 담배를 권하며 옆에 앉았다. 유경은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담배를 빨아들였다.

"유경씨. 나를 모독하지 말아요. 당신의 그 도도한 눈으로 나를 가위질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유경이 뭐라 말을 하려는데 그의 손이 입을 막았다.

"다 듣기 싫어요. 당신의 그 혀! 그 입술! 그것들은 칼날 외에는 아무 구실도 못 하는 겁니까?"

강협섭은 유경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유경은 피우던 담배를 차도에 힘껏 던졌다. 그리고 자기의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을 때내려 했다. 그러자 강현섭은 유경의 입을 자기의 입술로 막았다. 그것은 막았다기보다는 유경의 입술 안으로 거칠게 들어오는 순간의 열풍이었다. 그의 혀는 뜨거운 열을 내며 유경의 입 안을 조금씩 달구었다.

유경은 눈을 감았다.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뿐 아니라 살갗을 덮히고, 뼈를 달구며, 피를 뜨겁게 하고 결국 심장까지 녹여 버리는 듯했으나 유경은 그 뜨거움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 성민을 입술을 받아들였던 몸이 이제 또 다른 남자의 육체의 맛을 깊이 느낀다고 생각하니 유경은 괴로웠다. 유경은 부르르 떨었다. 곧이어 심한 어지러움에 유경은 정신을 잃고 강현섭의 품에 잠들 듯 쓰러지고 말았다.

 

"당신의 육체는 영혼을 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듯하군요."

머리가 쪼개질 듯한 아픔으로 뒤척이던 유경은 천천히 일어났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저만치서 고급스런 하얀 조개 등 하나가 빛을 자랑하고, 낯선 탁자, 소파, 거울, 가구가 그 빛에 벌거벗은 여인처럼 놓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유경은 자기를 감싸고 있는 얇은 이불을 걷어제치며 물었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강현섭은 대답 대신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왔다.

"술 좀 마셔요. 이렇게 약한 몸으로 창조자가 되신다구?"

그는 얼음처럼 차갑고 창백한 유경의 얼굴을 안스러워하며 손으로 만져 주었다. 유경은 어느새 그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경은 주위를 살피다 호텔임을 알자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유경씨답지 않게 초조하게 굴지 마요."

강현섭은 날카롭게 말을 뱉고 유경에게 위스키 한 잔을 건네 주었다. 유경은 그가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들이킨 후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이 상대하는 여자들처럼 이런 곳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에요."

순간 강현섭은 유경을 침대에 거칠게 쓰러뜨렸다. 유경은 너무 놀라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운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현섭은 유경의 싸늘한 얼굴에 제 얼굴을 댔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게 당신 화법이요? 뭡니까? 열등감? 취미? 아니면 나란 인간이 우습게 보여서? 차가운 여자. 그러나 당신속에 엄청난 화력의 불덩이가 있다는 걸 알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만은 속일 수 없을 겁니다. 그 불의 비밀을 알고 싶어요. 당신이란 여자. 겉은 뱀같이 차갑고 냉소적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라도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지. 그러나 당신과 함께 하고 나면 재로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불길에서 벗어나질 못할 거요."

유경은 눈을 감았다. 강현섭은 그녀를 바짝 안았다.

"그래요. 나는 포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내 주위만 본 사람들은 내가 상당한 윤리주의잔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더러운 놈이오. 나는 지저분한 놈이란 말이오. 내 이 더러운 입술로 당신의 거룩한 혀를 빨아 주리다. 하하하... 그럼 당신의 거룩함이 내 더러움을 씻어 주겠지. 아니야. 내 더러움이 당신의 거룩함을 혼탁하게 할 수도 있어. 그래도 좋아요?"

그는 유경의 입술을 마구 짓눌렀다. 어느새 유경의 혀가 그의 입안에서 가맥질을 시작했다. 유경은 자신의 혀가 스스로 강현섭의 입안을 헤집고 다니자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졌다. 그 맑아짐은 알 수 없는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유경을 밀어 넣었다. 유경은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메트라라는 단어를 감은 눈으로 허공에 썼다.

'나는 지금 잉태될 수 있는 몸짓을 하고 있는 걸까? 진수진. 그녀도 나처럼 자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쾌락을 느꼈을까? 그녀는 메트라를 향해 추락했다. 그녀의 추락은 쾌락을 동반했을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내 속에서 또 다른 내가 막 출산을 하려고 애쓰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 잉태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출산을 하는걸까. 나는 무엇을 낳으려고?'

유경은 강현섭의 손가락들이 그가 연주하는 기타줄을 튕기듯 자기 몸의 껍질을 벗기자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말들을 유경의 핏속에 퍼부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유경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 내렸다. 유경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속삭임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 비명은 어떤 기쁨의 환희보다 울림이 컸고, 엄청난 몸부림이었다. 유경은 한바탕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자신의 몸 속에서 이제껏 숨어 있던 또 하나의 김유경이 결국 출산을 하고 있었다. 유경은 함빡 젖은 가슴 속에 강현섭의 머리를 묻었다.

강현섭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맡긴 채 긴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9

"당신은 누구에게도 정복당할 수 없는 여자이면서 또한 누구도 정복할 수 없을거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황녀로 만들겠소. 당신의 손에 금빛 홀을 쥐어 줄거요."

유경은 언젠가 흔들고 싶다고 생각한 하얀 깃발을 금빛 홀로 바꾸어 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하얀 깃발도, 금빛 홀도 아닌 핏빛 깃발이었다. 유경은 무서움에 강현섭의 머리에 얼굴을 부벼댔다.

"현섭씨."

유경이 처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자 강현섭은 고개를 들었다. 유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길을 바라는 아이 같았다. 그러나 잠시뿐. 그는 유경의 마른 뺨을 쓸어 내리며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죠? 메트라란 말을 아니 자궁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강현섭은 유경의 따뜻한 배에 수없이 입을 맞추고 얼굴을 파묻은 채 대답했다.

"유경씨, 어린아이 같은 말이기도 하지만 내겐 어머니가 계세요. 그래서인지 나는 자궁보다 어머니란 말에 더 애착을 느끼죠.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유경은 수진의 죽음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시작의 지점을 알 수 없고, 근원의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강현섭과의 만남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경은 강현섭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매만지며 반대편에 걸린 화장대의 거울을 쳐다보았다.

벌거벗은 한 여자가 희미한 불빛 속에서 유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외투처럼 어깨 아래까지 덮고 있는 긴 머리카락. 어둠 속에서 더욱 창백해 보이는 얼굴. 그 싸늘함 속에서 사물을 하나하나 분해할 듯 긴장되어 있는 쌍꺼풀지지 않은 크고 긴 눈. 오만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코, 몸 전체에서 오직 단 한 군데, 풍요로워 보이고 넉넉해 보이는 붉은 입술. 군살이 하나도 었을 정도로 말랐지만 매끄러운 굴곡으로 누군가 안아 주지 않으면 스스로 제 몸을 학대할 듯 한 몸매.

유경은 머리를 흔들었다.

'저 모습이 내가 출산한 나란 말인가? 이제사 내 속의 내가 태어났을까? 그렇다면 그동안 저 여자는 너무도 오랫동안 자궁 속에서 어둠과 벗하고 있었겠구나. 저 여자는 아름답다. 나라도 저 여자를 안아 주고 싶다. 저 여자의 입술을 한없이 빨아 주고 싶다. 저 여자의 벌거벗은 몸을 손으로, 입술로 쓸어 주고 싶다. 저 여자는 무슨 방법으로 나를 이토록 흥분시킬까? 그렇다. 바로 강현섭이다. 저 여자는 강현섭으로 인해 자궁을 열고 나와 세상의 벗이 되었고 제 아름다움을 찾았다. 만일 벌거벗은 저 여자가 성민과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저 여자의 몸뚱이는 성녀(聖女)의 상()이거나 초라한 영혼덩어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저 여자는 강현섭으로 인해 빛나고 있다. 강현섭은 창녀라도 능히 황녀로 만들 수 있고 비천한 계집의 치맛자락도 숙녀의 손수건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바로 내가 출산한 나이며, 내 속에서 이제껏 때를 기다리며 잉태된 내가 아닌가.'

유경은 가벼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강현섭의 머리를 끌어 제 가슴에 바짝 안았다. 그녀는 그의 귀에 대고 뜨거운 숨결을 퍼부었다.

"현섭씨. 지금 당신이 안고 있는 여자가 바로 김유경인가요? 당신은 지금 황녀를 안고 계신건가요?"

강현섭은 그녀의 젖가슴을 입술로 짖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는 벌거벗은 당신을 창녀로 생각하오. 그러나 나의 창녀는 이 세상의 모든 황녀들이 무릎을 꿇고 부러워하는 여자죠. , 귀여운 나의 창녀. 당신의 자궁 속엔 잉태할 수 없는 거짓 자궁을 가진 황녀들의 모든 질투와 질시가 가득 차 있어요. 난 느낄 수 있어요."

두 사람은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움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유경은 자신의 허물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즐거움에 신음을 내질렀다. 처음으로 자유로워지고 한 오라기 거짓도 없이 느껴지는 자신에 대해 놀랍기까지 했다.

유경은 신비로움과 희열을 온전히 씻어내지 못한 채 강현섭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때는 이미 하얀 커튼의 올 사이사이로 새벽의 공기가 밀려 오고 있었다. 유경은 깊은 잠의 한가운데에서 성민을 만났다.

성민은 옛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얀 옷을 입고 맨발이었다. 그러나 그의 옷이 하얗다는 것을 안건 묻어 있는 붉은 피 때문이었다. 피는 어디서 흐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맨발을 적셨다.

성민의 얼굴은 핏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유경은 그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고 이마에 손을 댔다. 순간 그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매우 거칠게 유경의 손을 밀쳐냈다. 하마터면 유경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유경은 다시 그를 살폈다. 그제서야 유경은 그의 가슴에서 피가 흐름을 알았다. 유경은 용기를 내어 피가 묻어 있는 그의 가슴 쪽에 손을 뻗쳤다. 유경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으려 할 때였다. 제발! 제발 가 줘! 지금이 아니야! 네 손의 가시를 빼고 나를 안아 줘! 성민을 고함을 치며 제 몸을 끌어 안고 뒹굴었다. 유경은 그의 말에 놀라 자신의 손을 살폈다.

손바닥뿐 아니라 온 몸 전체에 보기에도 진저리가 쳐지는 날카로운 빛을 뿜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유경은 흉칙한 자신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이건 내가 아니야! 성민아, 나는 어디 있는거야? 성민아, 아니야. 내가 아니야! 유경은 가시가 나 있는 두 손으로 제 몸을 마구 찔러댔다. 피가 흘렀다. 유경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유경의 온 몸에서 붉디 붉은 피가 분 수처럼 솟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성민의 옷과 맨발을 적시고 있는 피가 멈추었다. 뿐만 아니라 물이 증발되듯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성민의 얼굴에 조금씩 홍조가 돌았다. 유경은 제 몸을 찌르는 것도 지쳐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자 이번엔 성민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경을 안아 일으키려 했다. 유경은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성민아, 안돼! 성민아, 제발, 성민아!

유경은 비명을 지르고 일어나자마자 두 손과 몸을 살폈다. 벌거벗은 몸은 마치 뱀처럼 매끄러웠다. 유경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를 찾았다.

담배는 강현섭의 머리맡에 있었다. 강현섭은 언제 깼는지 누운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불을 붙인 담배를 유경의 입에 물려 주었다. 유경은 부끄러움에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유경의 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성민? 맞아요? 성민이라고 했죠? 혹시 윤성민씨가 아닙니까?"

유경은 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경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강현섭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때지 않았다. 유경은 그의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가 악마가 아니라면 내가 악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악마라면 나는 무엇인가? 악마의 노예?'

유경이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자 강현섭이 입을 열었다.

"제가 권여사님을 어머니처럼 생각한다고 했죠? 그만큼 나는 그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그분의 사생활과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강현섭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경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티셔츠만 걸친 채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았다,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로이코스에서 당신과 권여사님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팽팽한 눈길을 보낸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권여사님의 분노에 찬 눈길과 내게 보내는 불안한 몸짓. 그때만 해도 감히 윤성민씨와 관계된 일이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비명을 듣는 순간 언젠가 권여사님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내 아들 애인이 소설가지요. 말라깽이인데 꽤나 도도해서 내가 오히려 시집살이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성민이에겐 하나님과 맞먹는 신이죠 하면서 쓸쓸하게 웃던 얼굴까지 생생하게 생각났어요. , 하필 그라니! 하필 윤성민이라니! 하필 김유경이라니!"

강현섭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유경은 커튼을 조각낼 듯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온몸에 받은 채 있었다.

"로이코스! 하하하...역시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로이코스의 신화를 이미 나의 신화로 예견하고 있었다니! 윤성민! 멋있는 남자입니다. 당신이 사랑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남자죠. 그리고 김유경! 역시 그 남자가 차지할 만한 가치의 여자죠. 그럼 나는 무업니까? 도도한 소설가 선생! 창조자 어른! 대답해 보시죠. 이 강현섭은 당신의 자궁 속에서 웅크린 채 때를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요? 왜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분명 나와 권여사와의 사이를 설명했는데, ? , 아니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는 어느 여자를 가슴에 품어도 수치를 느낀 적은 없었오. 그런데 난 지금 너무 부끄러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요. 나는 윤성민씨가 지금 어느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

강현섭은 머리를 감싸고 흔들었다. 유경은 더 이상 이 고통 속에 있기 힘들었다. 더구나 지금이 아침인 것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잠깐 눈에 스친 거울 속의 여자가 자기를 향해 냉소를 보내는 듯해 일부러 거울을 피했다. 유경은 옷을 입으려 일어났다. 그러자 강현섭이 다가와 그녀의 티셔츠를 난폭하게 벗겼다.

두 사람은 다시 벗은 몸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경의 눈이 물기로 넘치려 했다. 강현섭은 그녀를 으스러질 만큼 힘있게 안더니 아이를 안 듯 번쩍 들어 올렸다. 그는 유경을 안고 목욕탕으로 갔다. 유경을 내려 놓은 그는 샤워기를 틀었다. 더운 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 우리 거룩한 의식을 행합시다. 하하하... , 이리 와요. 내가 먼저 당신을 씻으리다. 당신의 남자, 당신의 사랑, 당신의 어제, 그제, 당신의 꿈, 당신의 악몽을 말이오, , 다 씻어 내버려요. 나는 윤성민씨를 잘 압니다. 그와 있는 당신의 모습이 충분히 상상이 되죠.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석고상! 열리지 않는 자궁!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 안 됩니다. 나는 당신을 숨쉬지 못하게 춤추지도 못하게 덮고 있는 석고를 다 부수어 버릴거요! !"

강현섭은 샤워기를 손에 들고 유경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손으로 씻어 주었다. 유경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긴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소리 없는 울음에 눈물만 물처럼 흘러 강현섭은 알아채지 못했다. 유경은 혼란스러웠다.

'이건 거룩한 세례가 아니야. 오히려 악마의 외투를 한 겹씩 입는 죽음의 의식이야. 그러나...그러나, 나는 강현섭을 보내기도 싫고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기도 싫다. 싫다. 이 남자로 인해 나는 마음껏 출산하고 싶다. 그래. 강현섭의 말이 옳아. 나는 이제껏 윤성민이 쉬지 않고 부어 대는 석고물을 그대로 받아들였어. 그는 내게 단 한번도 창작의 조각칼을 대지 않았지. 김유경. 잊지 않았지? 거울 속의 그 여자를 말이야. 바로 그 여자는 너야. 너는 아름다운 여자야.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강현섭을 통해서만 나오는 거야.'

이렇게 생각이 들자 유경은 울음을 그치고 그의 손에서 샤워기를 뺏었다. 강현섭은 흡족한 얼굴로 눈을 갑은 채 유경에게 몸을 맡겼다. 유경은 샤워기를 그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넓은 이마, 고집이 세게 보이는 귀, 감아도 매서워 보이는 눈, 그 눈만큼이나 날카로워 보이는 코,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꽉 다물어지는 단단한 입술. 유경은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하나하나 매만지며 그의 얼굴을 씻기고 그의 몸을 쓸어 내렸다. 강현섭의 입뿐 아니라 몸 전체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유경의 손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유경의 손에서 샤워기를 뺐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거꾸로 누운 샤워기가 분수처럼 물을 뿜어댔다. 두 사람은 물살을 받아가며 또 다시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메트라로 떠나는 사람들 - 10

권여사는 로이코스에 다녀온 뒤부터 무엇 하나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다 잃었다는 생각에 분노보다는 초라함이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결국 권여사는 성민을 서초동으로 불러냈다. 권여사는 성민에게 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파라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연회색 양복을 깔끔하게 입은 성민은 수프가 나오자 기도부터 했다. 오랫만에 모자가 함께 자리하는 식탁에서 혼자 눈을 감는 성민을 권여사는 못마땅하게 바라보더니 기도가 끝나자마자 쏘아붙였다.

"네 기도 속에는 식사비를 지불하는 에미에 대한 감사도 들어 있냐?"

그러나 성민은 싱긋 웃기만 했다. 권여사는 그만 다음 말을 잊고 말았다. 다른 때 같으면 권여사님이라고 지칭하는 비웃는 말투를 쏟아 부었다. 그런데 성민이 아무 대꾸나 힐난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자 권여사도 웃었다. 권여사는 식사가 끝나고 커피가 나오자 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유경이와는 어쩔 셈이냐?"

권여사는 성민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성민은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을 얼굴에 그렸다.

"올 가을에 결혼하려고 해요."

"가을? 좋아. 그러면 유경이는 어떤 사람의 신부지?"

"어떤 사람이라뇨? 바로 윤성민의 신부죠."

"그래? 그럼 신랑 윤성민의 직함은 무엇이고?"

"어머니..."

성민은 커피잔을 내려 놓으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머니. 무슨 문제가 있는거죠? 나의 직함이 어찌됐건 유경이와의 결혼과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리고 어머니는 애초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이신데, ?"

성민은 권여사에게서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이 나오리라 짐작했다. 권여사가 흥분하거나 초조해 하는 일은 언제나 작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권여사는 큰 일을 만났을 때는 오히려 대담해진다.

"현섭이를 최근에 만난 적이 있냐?"

"? 강현섭이요? 왜 그 형 이야기를 꺼내시죠?"

"그래. 그 잘난 형이 유경이를 낚았어. 왜 그렇게 얼굴이 창백해지니? 내가 언젠가 얘기했지. 유경이는 창녀의 기질이 있는 애라고, 보면 모르니? 넌 모르겠지. 그 애의 얼굴을 봐. 겉으로는 온갖 교양과 도도함이 드러나지만 그 가면 속에는 악마한테서나 받았을 창녀의 얼굴을 한 아이라구! 내가 봐서는 강현섭이 아니라 유경이가 먼저 유혹을 한거야. 썩어질 것! 너를 그 힘든 길로 떠밀어 놓고는 자기는 다른 남자에게 추파나 던지고 감히 내게 큰소리를 쳐? 로이코스는 완전히 유경이의 성이 됐어. 왜 얼굴이 창백해지냐? 나는 겉으론 그랬지만 내심 너희 두 사람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어. 다만 유경이가 너와 함께 그 길을 간다는 게 영 불안했지만 네가 너무도 그아이를 사랑하기에 안심했단다. 그런데 그 여우 같은 계집이..."

"어머니! 왜 그런 말들을 제게 하시는거죠? 제가 어떻게 할까요? 유경이와 헤어질까요? 아니면 강현섭에게 결투라도 신청할까요? 무엇보다도 유경이는 그렇게 윤리관이 희박한 여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강현섭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세요? 그의 가정생활은 여고생까지 알 정도로 청결해요. 깨끗하단 말입니다. 두 사람을 모독하지 마세요. 설사 두 사람이 밀실에 함께 있다 해도 저는 그 두 사람 중 누구도 의심할 수 없어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의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의심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왜 제 얼굴이 창백해졌냐구요? 어머니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에요. 저런 생각을 하는 어머니에게 제가 너무도 오랫동안 무관심했다는 자책감과 감히 두 사람을 모독하는 말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져서였어요. 어머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두 사람도 사랑하지만 어머니도 사랑해요. 제게 용기를 주세요."

성민은 권여사의 두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권여사는 냉정하게 물리쳤다.

"내가 이 얘기는 정말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네가 오히려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니 해야겠구나. 나와 같은 오피스텔에 들어 있는 아이가 봤다구 숨이 자서 전해 주더라. 로이코스 근처에 있는 몬트리올 호텔에서 두 사람이... "

그러나 권여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성민은 탁자를 힘껏 내리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두 잔의 커피가 탁자 위에 홍건히 쏟아졌다. 권여사는 놀라 두려운 얼굴로 성민의 몸짓 하나하나를 살폈다. 성민은 달려온 웨이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느라 입술을 깨물고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성민의 감은 눈 밑으로 눈물이 스며 나왔다. 권여사는 웨이터가 갖다 준 수건으로 치마를 적신 커피를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길은 성민을 떠나지 않았다. 권여사는 후회가 되었다.

'이토록 착한 아들에게 내가 왜 말을 했을까. 성민의 귀에 스스로 들려 오는 말 외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유경이는 강현섭과 사랑을 나누고 있겠지. 성민아 내가 볼 때 그 여자는 강현섭과 있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단다. 너는 그 여자를 네 품에 안으려고 하지만 그 여자는 스스로 강현섭 품으로 달려가지. 왜 네가 그 여자의 구세주가 되려고 하느냔 말이다.'

성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깍지 낀 손에 머리를 대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권여사는 성민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차가워진 얼굴에서 간간이 따뜻함이 느껴졌다. 눈물이었다. 아들의 눈물을 느끼자 권여사는 화가 치밀었다.

"성민아."

권여사는 나직히 성민을 불렀다. 성민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권여사는 가슴이 탁 막히는 듯했다. 성민은 젖은 눈이었지만 맑은 웃음을 띠고 권여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이 일로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만날겁니다. 물론 유경이와도 그렇죠. 그럼 저 먼저 갈게요. 혼자 나가고 싶어요."

권여사는 할 수 없이 성민을 먼저 보냈다. 혼자 남은 권여사는 조금씩 불안감에 휩싸였다. 성민이 로이코스에 갈 것 같기 때문이었다. 권여사는 이 일로 자신과 강현섭의 거래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계산까지 겹쳐 초조함에 결국 전화기 앞으로 갔다.

그러나 궐 여사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답지 않은 소심함에 짜증이 났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자신의 가게 쪽으로 차를 몰았다. 자꾸 성민의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그것은 결코 억지웃음도, 자기를 위장하는 가면도, 허세도 아니었다. 깊은 신뢰와 지순한 사랑에서 나오는 확고한 자기 승리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들수록 권여사는 유경이와 강현섭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져 갔다.

'내 아들을 뺏아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 어려운 길을 홀로 가게 만들어. 절대 그럴 수 없어. 게다가 내 일까지 방해하려고 해?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올 정도군. 비쩍 마른 계집 하나가 우리 모자를 어지럽게 만들어?'

권여사는 그러면서도 성민처럼 여유있는 웃음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유경에게 커다란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 바람에 입술만 일그러질 뿐이었다.

파라오에서 나온 성민은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그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뜰 한쪽의 조용하고 그늘진 벤치에 앉았다. 그는 온몸에서 피가 다 쏟아져버린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창백한 얼굴로 다가올 생이었다. 그때 교회 지붕 위의 십자가 뒤에 창백한 낯빛의 낯선 남자가 자기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힐난을 퍼부었다.

'네 성기를 잘라 버려. 네 성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맑은 물뿐이야. 그 물은 병균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맑단 말이야. 가여운 것. 차라리 쥐떼들에게 던져 줘라. 네 발기할 수 없는 성기는 어떤 신도 원치 않을거야. 네 성기에서 나오는 맑은 물의 정액엔 생명이 잉태 될 수 없는 죽은 정액이지. , 뭐가 필요한가? 칼을 줄까? 칼에도 종류가 있지. 너에겐 무딘 칼이 좋을 것 같아. 네 성기를 잘라낼 때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야. 왜 그렇게 떨고 있지? 너는 모든 걸 하나님에게 바친 몸이 아닌가? 영광을 위해 스스로 잘라냄을 한다면 네 머리엔 면류관이 쓰여질탠데. 이런! 눈물까지 흘리고 있군. 가여운 남자여! 여자란 하나야. 김유경은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어. 모든 여자의 얼굴은 하나란 말이야. 네 성기를 잘라내면 그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지.'

낯선 남자는 십자가 뒤에서 나와 지붕을 타고 날렵하게 벤치 건너편으로 내려왔다. 남자의 얼굴은 너무도 창백하여 성민은 소름이 끼쳤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 오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성민은 남자를 바로 보지 못했다. 그것은 햇빛을 등 뒤로 받은 남자의 얼굴에서 냉기가 무섭게 흐르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지. 오호라, 너도 그 얘기는 알겠군. 그러나 내 얘기는 조금 다르지. 왜냐하면 나는 너를 그 여인으로 생각하거든. 너에겐 음악이라는 남편 외에 유경이라는 남편도 있지. 그리고 욕심 많은 너는 그 외에도 여러 남편을 두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남편이 예수가 아닌가? , 얼굴을 돌리지마. 부끄러운 얘기는 아니니까. 그런데 자네의 성기는 하나뿐인데 그나마 그 성기는 자네의 눈 밖에 벗어난 존재이고. 잘 됐어. 빨리 그 일을 추진시키라고. 자네의 성기에 만족할 남편은 예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유경이는 현명한 여자라 이 모든 비밀을 안 지 오래 전이지. 더 이상 네 성기에 대한 얘기는 비밀이 아니야.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여자는 이미 나와 하나가 됐지. 우리는 육체를 주고 받을 때 영혼까지 나눴거든. 조금 힘이 들었지만. 왜냐구?

그녀의 영혼이 내 영혼을 애무할 때 너의 재취가 풍기는 바람에 구역질이 날 뻔했거든. 잠깐만 더 들어보라구. 난 네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어. 어찌했건 나는 그때 구토를 참고 자네의 영혼을 다 들이마셨지. 그녀의 영혼 속에 손톱만큼이라도 윤성민의 잔재가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였지. 그런 다음 나는 그녀의 영혼 속에 한번도 남에게 비춰보이지 않은 나의 영혼을 불어넣어 주었어. 정말 신비로운 작업이었고, 새로운 호흡법이었어. 그녀는 대단히 만족해했지. 이봐, 윤성민. 그런데 문제가 있어. 내 영혼의 절반을 자리잡고 있는 너 때문이야. 그래서 괴롭단 말이야. 그녀를 볼 때마다 네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에 겹쳐지지. 그녀의 육체를 더듬고 있노라면 네 놈의 성기가 잡히니..., 여기 칼이 있어. 받으라구. 네 스스로 성기를 잘라내!'

남자는 성민을 향해 녹슬고 날이 빠진 칼을 던졌다. 성민은 치욕감에 떨며 고개를 드는 순간 허공을 가르며 오는 칼을 보았다. 성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칼은 성민의 심장을 꿰뚫었다. 성민은 가슴에 꽂힌 칼을 빼지도 못한 채 가슴을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그런데 유경을 부르는 입에서 붉은 피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 고통으로 유경을 찾을 때 남자가 앞에 와 우뚝 섰다. 남자는 성민의 가슴을 차가운 발로 짓이겼다. 성민은 감겨지는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강현섭씨가 아니오?"

성민은 몇 마디 더 하려 했으나 다시 밀려드는 아픔에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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