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빛 속삭임 3
32
긴 항해가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타냐는 스테판의 흉터에 대해 다시 물어보았다. 이번에는 바실리, 세르게이와 함께 갑판 위에 있었다. 남자들은 바라에서 카르디니아까지 가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고 설명했다. 남쪽의 아드리아해, 동쪽의 흑해 그리고 북쪽의 발틱해로부터 거의 똑같은 거리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들이 북쪽으로 항해한 오직 한 가지 이유는, 흑해로 들어서는 부분에서 날뛰는 변덕스런 터키 사람들이나 지중해의 해적 때문에 항해가 지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럽에 대해 전혀 모르는 타냐는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프로이센 해안의 단히치(폴란드 북부의 항구도시) 항구에 배를 댔다는 보고를 들었고, 육지로 카르디니아에 도착할 때까지는 날씨에 따라 2주 혹은 3주가 걸릴 거라고 했다. 그녀는 따스한 날씨를 좋아했으나 10월 말의 북쪽 바다는 그녀가 경험한 어떤 날씨보다도 더 차가웠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해안은 흥미로웠다. 배가 물품을 공급받기 위해 정박했을 때는, 외국의 항구를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정박했을 때는, 부드러운 해변이 단조로울 정도로 드넓게 펼쳐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는 그리 단조롭지도 매끄럽지도 못했다.
타냐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두 명의 백작과 남작에게 예절을 배우거나 바실리의 악마 같은 농담을 참아야 했다. 자꾸 떠오르는 스테판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도 신경을 써야 했다.
스테판의 상처에 대해 입을 열어도, 바실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듣게 될 내용이 그리 좋지 않으리라는 경고를 하듯 주의 깊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르게이는 이번에도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왕가의 가족들이 매년 여러 주일을 보내던 북쪽 숲으로 사냥을 갔죠. 샌도르, 스테판, 그의 동생 피터, 그리고 열다섯 명의 수행원들과 말입니다. 계정은 봄이었어요. 그해 겨울은 특히 혹독했기 때문에 인근 마을로부터 늑대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들어왔죠. 혼자 캠프에서 나가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불과 열 살이었던 피터는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스테판이 그의 비명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달려간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타냐가 중얼거렸으나 갑판 위로 부는 바람 때문에 세르게이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바실리와 다른 경호원들도 있었죠. 그러나 동생을 구하기 위해 늑대 사이로 뛰어드는 스테판을 막기에는 너무 떨어져 있었어요. 그는 발로 차고 칼을 휘둘렀죠. 그는 늑대들을 피터에게서 떼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우리가 총을 쏠 수 있을 만한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스테판은 이미 늑대 네 마리를 죽였어요. 한 마리가 그의 얼굴을 향해 달러들었고, 또 한 마리는 그의 다리를 누르고서 할퀴고...., 또 할퀴었답니다."
"제발. 세르게이."
바실리의 외침소리를 들은 타냐는 깜짝 놀랐다.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모두 늘어놓다니."
세르세이는 하얗게 질린 타냐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공주. 다시는 그런 일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타냐는 그를 안심시키면서, 그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려고 노력했다.
"물어본 사람이 나잖아요, 그렇죠?"
"이제 다 알았소?"
바실리에 물음에 타냐는 한숨을 쉬었다.
"스테판의 흉터를 문제 삼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처음 스테판을 보았을 때, 난 그 타오르는 눈동자가 매우 색달라, 정말 악마를 만난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 악마에게 흉터가 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나 알았다고요. 그리고 알았을 때는......."
"혐오감?"
그런 끔찍한 상상을 하는 바실리를 보자 타냐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 바실리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것 같아요. 난 고통이 뭔지 잘 알아요."
바실리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주, 우린 당신이 그의 손길을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언제죠?"
"술집에서. 샌도르가 새겨놓은 표시에 대해 당신에게 물어볼 때요. 그가 당신 주의를 끌기 이해 얼굴을 잡았을 때, 당신은 획 뿌리치더군요."
"그건 보호 본능이죠. 이 바보 같으니!"
하지만 바실리는 그리 화난 것 같지 않았다.
"만약 그가 손을 댔다면 얼굴에 칠한 회색 분이 망가지게 되니까요. 아무도 내 얼굴을 만지지 못하도록 했거든요. 그리고 스테판이 날 화나게 만든 거 오직 당신처럼 행동했을 때예요."
바실리는 그녀가 한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모욕을 퍼부어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타냐의 마지막 말을 이해한 세르게이는 자신의 왕을 위해 변명을 했다.
"늑대 때문에 상처를 더 많이 받은 건 스테판의 얼굴이 아니라 감정이랍니다. 그는 아직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동생이 죽었으니까요. 그 고통이 때때로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곤 하죠."
세르게이의 심오한 말을 들은 타냐와 바실리는 경탄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타냐는 잠시 화도 잊었다. 바실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다음 정색을 하고 타냐를 응시했다. 스테판의 눈길보다도 덜 위협적이었다.
"보호 본능?"
그가 다그쳤다.
"그런 무시무시한 변장으로 보호를 하려들었단 말이오? 당신은 정말로 치근대는 남자들을 피한 거요?"
라자르가 다가오면서 타냐 뒤쪽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조심하게, 바실리. 그렇지 않다면 첫날밤 침대 시트를 보기도 전에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모른단 말일세."
타냐는 라자르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렸으나, 배의 반대편 갑판에 있던 스테판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선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해안을 가리키거나 바람에 휘날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놀림을 타냐는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꽤나 긴 편이어서 여행 중에 잘라내야만 했다. 그는 가장자리에 모피가 달리고 단추 대신 밸트로 여민 이상하게 생긴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스테판에게는 잘 어울렸다.
뒤에서. 바실 리가 라자르를 다그쳤다.
"그녀가 한 말을 들은 건가?"
"물론. 그녀는 우리조차 속아 넘어간 무시무시한 변장으로 자신의 순결을 지켰다는 사실을 암시한 거야."
"라자르. 그들이 말하길 동전 몇 푼이면 그녀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어."
그 말을 들은 타냐는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고는 몸을 획 돌려 바실리를 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죠?"
"술집에 온 단골손님들."
"그들이 타냐 돕스를 살 수 있다고 하던가요?"
"그렇소...., 아니. 그들은 댄서를 살 수 있다고 말했소. 스테판은 당신이 댄서라고 우리에게 확인시켰소."
맙소사, 에이프릴이 발을 다치는 바람에 모두 수치를 덮어쓰게 되다니. 차라리 웃는 게 낫지. 사실 웃긴 이야기였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맞는 말이에요. 댄서야 동전 몇 푼이면 살 수 있죠.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에요. 물론 돕스는 예외지만. 그는 자기 지붕 아래서 절대로 간음을 허락하지 않았고, 만약 들키면 당장 해고당했죠. 댄서의 춤으로 벌어들이는 돈과는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럼 당신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내가 어떻게요? 나도 그녀가 스커트를 들추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녀?"
"에이프릴!"
타냐의 분노가 극도에 달했다.
"댄서 이름이에요. 그날은 발을 다쳐서 못 나온 거예요. 난 열세 살인가 열네 살 이후에 무대에 올라가 본 적이 없어요. 가만 내가 몇 살인가요?"
"맙소사."
바실 리가 신음소리를 냈다.
"공주, 6월이 지났기 때문에 스물 살입니다. 6월 1일이 공주의 생일이랍니다."
세르게이가 대답했다.
"6월 1일이라고요? 그럼 마지막으로 춤을 춘 건 열 네 살이군요. 단골손님 몇몇이 도망간 댄서 대신 무대에 오른 여자가 나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 때 그만두었어요. 돕스는 내가 그런 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여자들을 고용해서 나더러 춤을 가르치라고 했어요. 지난 6년 동안 내가 한 건 그게 다에요. 여자들을 훈련시키고 필요한 일을 하는 것 말이죠."
그런 다음 그녀는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내 말을 모두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창녀들이야 거짓말에 명수들이잖아요. 그렇죠?"
이번에는 그런 자극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바실리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타냐......,."
"그만."
그녀가 씩씩거렸다.
"타냐. 제발........,."
"감히 그런 말을! 당신이 내민 손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아직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니까."
"난 스테판을 존경하오!"
바실 리가 열을 올렸다.
"난 그가 못된 여자와 결혼하도록 강요받는 게 견딜 수 없었소.
"좋아요. 하지만 나에 대해 다른 것을 묻지 말아요. 지금은 아니에요."
"스테판도 알아야 해요."
라자르가 차분하게 말했다.
타냐는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갑판만 눈에 들어 올 뿐, 스테판은 더 이상 거기 없었다. 선실로 들어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스테판은 갑판 위에 있는 자신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이런, 그를 본 지도 한참 되었다.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타냐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감정의 동요가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맙소사, 자존심이란 끔찍한 것이다. 비록 녹슬기는 했지만 가슴 한구석에 자존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타냐는 라자르를 흘깃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 말을 스테판에게 전한다고 해도 난 부인할 거예요."
"농담이겠죠?"
"진심이에요."
"하지만 왜?"
"그가 날 원해야만 하기 때문이에요."
"그는 이미 당신을 원합니다."
라자르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타냐가 고개를 저었다.
"스테판이 날 원한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날 머리하지 않았을 거예요."
"스테판에게 그렇게 하지 마시오. 타냐. 그는 죄의식을 잘 견뎌내지 못한단 말이오.
바실 리가 부탁했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살짝 돌린 타냐는 처음으로 바실리의 밝은 미소를 보았다.
"그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요. 화가 났을 뿐이죠. 당신도 스스로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하지만 난 상관 안 해요. 자. 그럼 내가 당신들의 여왕이 되어볼까요?"
"예."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소원을 존중해줘요."
"하지만 그는 이미 우리의 왕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이기도 하죠."
라자르가 말했다.
"그래서요? 당신이 말해도 내가 부인할 거라고 했죠. 그렇다면 스테판이 나에게 화를 내도록 내버러둬요."
그들이 입에서 너무나 바보스럽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타냐는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33
다음날 배가 단히치에 닿았을 때, 타냐는 스테판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가 와서 적절한 옷을 골라주길 원했으나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드레스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스테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무슨 옷을 골라 입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짙은 에메랄드빛 스커트와 블라우스 칼라의 레이스만 보이는 짧은 상의를 입기로 결정했다. 사샤는 위에 걸쳐 입는 외투도 두 벌이나 마련해주었다. 하나는 길고 두꺼운 망토로 진주 빛이 도는 회색 천에 가장자리와 모자 주변에 짙은 회색 모피가 달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넓은 칼라 부분과 가장자리에 밤색 담비털이 달려 있었는데 남자용 코트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그 옷은 무릎 부분부터 트임이 들어 있었는데, 사샤는 천 종류와 색깔 이 지금 스테판이 입고 있는 옷과 똑같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회색 망토를 골랐다.
스테판은 긴장한 것 같았다.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지만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 타냐를 훑어보는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보통 때보다 엷은 색깔이었다. 그를 화나게 할 만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 터이나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여행이 너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소."
완전히 뻣뻣하게 굳은 자세, 타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거나, 아니면..., 맙소사, 그녀의 소망과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어제 말했던 내용을 전한 건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곧장 달려와 펄펄 뛰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빌어먹을, 타냐는 그의 상태가 어떤지 모른다. 동료들의 얘기로 미루어본다면, 스테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었다.
하긴 여행 중에 보여준 그의 무관심으로 보아 짐작이 가능했다. 배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도 이 지경인데, 그 넓은 땅덩어리에서 결혼을 한 다음에는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그도 그들이 결혼한다는 전제 조건하에서의 일이었다. 어쩌면 약혼을 파기할 방법을 궁리 중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왕이니까.
타냐가 지금 주려고 계획한 미소는 그리 눈부시지 않으나, 말투는 친근했다.
"여행은 꽤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매력적인 친구 분들이 날 재미있게 해주었으니까 당연하죠."
스테판은 그녀가 빈정대는지 어쩌는지 정확하게 몰랐으므로 대답하기 전에 약간 망설였다.
"장점이 많은 친구들이오. 타냐. 하지만 매력적이라니?"
"나도 물론 그런 사실을 깨닫고 매우 놀랐어요. 라자르와 세르게이가 좋아요. 그리고 사샤도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
"바실리를 잊었군."
"당신 사촌에 대해서 참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예요. 심지어 그가 불쾌하게 굴더라도 말이죠. 아니, 난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아주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당신도 바실리한테서 나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타냐는 다시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어리둥절해하는 그의 표정에 대한 만족의 미소였다.
"내가 알아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요? 글쎄요. 놀라지 말아요. 바실 리가 그렇게 털어놓은 건 겨우 어제의 일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그를 참아내려고 노력하겠다는 것뿐이에요. 폐하."
스테판은 그 호칭을 듣더니 깜짝 놀랐다.
"그래서 믿게 된 거요?"
"천만에요, 난 그들이 속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믿게 되었소?"
"사실은 사샤 때문이에요. 그는 자연스럽게 설명을 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군요. 그는 당신과 나, 카르디니아 그리고 결혼에 대해 계속 말해주었어요."
그런 다음 타냐는 강렬한 시선으로 스테판을 응시했다.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바실 리가 왕이라고 말한 거죠?"
스테판은 문을 열어준다는 구실로 몸을 돌렸으나 그 질문이 혼란스럽게 만든 게 분명했다. 타냐의 눈길을 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때 당신은 말썽꾸러기였소. 바실 리가 신랑이라고 말하면 문제를 덜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소."
타냐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왜죠?"
"그가 여자들을 희롱하려고 마음먹기도 전에 여자들은 바실리 주변으로 몰려들었으니까. 만약 그가 시도하면 당신이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소."
타냐는 코웃음을 쳤다.
"만약 그렇게 믿었다면, 당신은 속을 거예요."
마침내 흘깃 쳐다본 스테판의 눈빛은 속은 사람이 바로 그녀라고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그가 일부러 자신을 혐오하도록 행동했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챈 거요? 나는 단지 당신이 우리를 따라오도록 그런 거짓말을 시켰지만, 바실리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소. 나와 결혼해야만 하는 당신이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요."
"정말 자상하군요. 그런데 당신이나 바실리나 그의 외모에 너무 많은 점수를 주는군요.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말이죠. 그리고 아마 그건 정신없는 여자들에게나 문제가 될 거예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만 보고 사랑에 빠질 만큼 바보 같지 않답니다. 그래요, 바실리는 놀라우리만큼 잘생겼어요. 그건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너무 거만해서 하나님 다음으로 잘난 사람처럼 굴죠. 그가 날 위해 일부러 불쾌한 태도를 취했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스테판은 그녀의 말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 역시 바실리만큼이나 거만하고 잘난 척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리라.
타냐는 자신이 바보가 아니길, 스테판을 향해 사랑에 빠지는 그런 바보가 아니길 희망했다. 그러나 타냐는, 총을 구하는 순간 쏘아버리겠다고 생각할 만큼 화가 났던 남자에게 굴복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 감정은 흐려지지 않았다. 그를 원했다. 결혼을 원할 만큼, 그의 모든 결점을 눈감아줄 만큼.
그러나 자신의 사랑과 상관없이 스테판도 자신을 사랑해야만 했다.
타냐가 자신의 인생을 한 남자의 손에 기꺼이 쥐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 대해 알아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스테판이 깊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타냐가 물었다.
"그런 방법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왜 나에게 사살대로, 당신이 카르디니아의 새 왕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모든 것을 의심했소. 그때 그런 말을 했다면 당신의 계속되는 의심을 정당화시키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을 거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물론, 당신은 한 번도 내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누가 내 남편이 될 건가는 한 번도 문제 삼지 않았잖아요. 난 그를 원하지 않았어요."
타냐는 눈살을 찌푸렸다.
스테판은 그녀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대꾸했다.
"당신에겐 나보다도 더 선택권이 없소."
"오, 맞아요. 바실 리가 나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런 말을 했으면 어땠을까요? 새 왕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나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라면서요? 하지만 스테판, 생각해 보았는데요, 당신의 권력은 누구보다도 막강해요.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와 결혼할 만큼 말이죠. 그렇다면 당신이 원치 않는 결혼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당신은 파혼할 수 있고............"
"난 아버지 뜻을 존중하오."
스테판은 간단히 잘라 말했다. 갑자기 화가 솟구치는 듯 눈동자가 타올랐다.
"샌도르는 당신이 왕비 자리에 앉길 바란다오. 따라서 당신은 그 빌어먹을 왕비 자리에 앉아야만 하오! 그리고 내 의무를 이행하지 말라는 식으로 다시 말을 꺼내지 마시오. 타냐. 아무것도 그것을 막지 못하오. 이해하겠소? 아무것도 말이오!"
비록 스테판이 소리를 질러대기는 했어요, 약속과도 같은 그의 말을 타냐의 기분을 놀라우리만치 근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절대 약혼을 파기하지 않을 것이다. 타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테판은 타냐의 마음을 몰랐고,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알리려고 들지 않았다. 그에게 불확실한 기분을 계속 안겨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르디니아에 도착하기 전에 침대 속으로 그다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든 쪽은 바로 타냐였다.
34
"왜 그렇게 굳어 있나요. 스테판?"
타냐는 그들이 기다리던 마차에 앉자마자 물었다.
스테판은 그녀의 팔을 잡고 선실에서 나와 배에서 내리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그의 입을 열어 속마음을 알아내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심지어 분노라도 끄집어낼 작정이었다. 다행히 거기에 그녀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라자르와 세르게이는 가방을 싣고 다른 마차로 따라왔다. 바실리는 그녀를 미국에서 데려오기 위해 새로 구입한 배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카르디니아는 해군이 없는 내륙 국가였기 때문에 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복장 때문인가요?"
타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스테판에게 계속 물었다.
"그래서 좀 더 왕처럼, 명령자처럼 행동하는 건가요?"
대답이 없었다.
"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미시시피 강에서는 너무 눈에 뜨이는 옷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타냐?"
스테판은 아직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를 약 올리려 했다가 되레 당하는 기분이었다.
"오, 별거 아니에요. 이제야 당신이 미국에 있을 때 왜 두 번째 트렁크를 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걸 입었다간 너무 눈에 뜨였을 거예요. 그렇죠?"
사실 군복 모양의 검은색 옷을 입은 스테판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윤기가 흐르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 속으로 바지 단을 팽팽하게 집어넣은 다리의 근육이 더욱 돋보였다. 목에서 허리까지 은회색 끈과 장식 단추가 달린, 벨벳으로 만든 상의는 마치 튜닉(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입던, 가운 비슷한 겉옷)처럼 보였다. 허리부터 아래까지 트임 솔기로 처리하여 역시 끈으로 장식해놓았다. 허리에는 굵은 은 벨트가, 역시 은으로 만든 칼집에는 멋진 장식용 칼이 꽂혀 있었다. 담비털로 가장다리를 두른 벨벳코트를 망토처럼 어깨에 걸치고 보석이 박힌 은 체인으로 고정시켰다. 제일 위로는 라자르가 쿡스마라고 보르는 둥근 담비털 모자를 썼다.
스테판은 자극적인 질문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내 옷이 이상하다고 말하기 전에 창밖을 한번 내다보시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스테판의 말이 옳았다. 이곳은 외국이었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차려 입고 다녔다.
타냐는 이곳이 프로이센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때 폴란드 왕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폴란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오래된 항구 단치히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폴란드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어깨에서 팔꿈치까지는 넓고 그 아래부터 팔목까지는 좁은 형태의 소매가 달린 긴 코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소매는 본래의 팔 길이보다 훨씬 길게 내려왔는데, 사람들은 코트를 걸치고 소매를 옆으로 늘어뜨리거나 어깨 뒤로 넘겨놓았다. 군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는 목 뒤에 묶어놓았다. 모자나 보닛의 모양도 달라서, 대부분 납작했고 가끔씩 높고 이상하게 생긴 것도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타냐는 그의 옷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스테판, 나는 이번 여행에서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주 친한 친구가 된 기분이에요."
타냐의 의도를 알 리가 없는 스테판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좋아, 그녀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라자르는 터키 제국이 카르디니아로 쳐들어왔을 때, 용감하게 싸우던 자신의 선조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내 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주지 않았어요. 당신 아버지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나요?"
"우리는 터키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소. 야나체크 가문 사람들은 항상 다른 민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소. 적을 쳐부순 다음에 말이오. 바로니 가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소."
"라자르는 당신 나라의 수상인 막시밀리안 다네프가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아니까 그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을 몇 달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혈 참사에 대해서는 당신이 말해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마침내 스테판은 놀란 표정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아직도 왜 자신이 멀리 보내지게 되었는지 모른단 말이오? 바실 리가 당신에게 말을 해주었어야....."
"난 그에게 묻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내 남편이 될 사람이니 물어볼 수 있잖아요."
스테판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그 사실을 받아들인단 말이오?"
타냐는 무관심한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하기 나름이죠."
"무슨?"
"당신에게 달렸단 뜻이에요."
"어떻게?"
그가 다그쳤다. 갑자기 변한 강렬한 시선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오, 나도 모르죠. 당신이 결혼을 원한다는 사실을 나에게 확신시키려고 노력할 수 있을 거예요.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거나, 날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으로요."
미친 듯이 화가 난 스테판의 표정 앞에서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익살맞은 목소리 대신 진지하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으나 '결혼을 원한다'라는 말은 우스꽝스럽게 끝을 맺었다. 스테판은 지금 그녀가 자신을 웃기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타냐는 사과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재빨리 그를 훔쳐 본 그녀는 숨이 막힐 뻔했다. 스테판의 눈동자는 살이 있는 석탄처럼 이글거렸다. 타냐는 그를 너무나 화나게 만들었다. 이제 곧 키스로 잡아먹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단순한 가능성만으로도 욕망이 자신의 내부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단지 감정을 좀 깨우치기 위해 그를 자극하려 했을 뿐인데, 이렇게 자제력을 잃다니! 이건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나타났고, 타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쉽게 그녀의 손을 벗어나 제멋대로 흘러가 버렸다.
"대답을 원하오, 공주?"
스테판의 목소리는 너무 낮고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몸이 떨렸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분노가 느껴졌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분노의 끈이 끊어져버릴 것이다. 벌건 대낮에, 움직이는 마차에서 사랑을 나누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하지만 이 순간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녀는 고집스레 탁을 치켜들었다.
"그래요."
"나와 결혼하면 당신은 여왕이 되는 거요. 그건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우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족스런 이유가 되어줄 거요."
타냐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타냐는 기대 수준을 재조정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마침내 그녀는 한숨을 쉬고서 창밖을 응시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공주가 된다는 사실은 좋아요. 이런 근사한 옷들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다음 약간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혈 참사에 대해 말해줄 건가요?"
"내가?"
그녀는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스테판을 보았다.
"그래요, 당신이 해줘요. 만약 다른 이유가 없다면요. 당신도 내가 알아야 할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타냐는 악마를 연상시키는 스테판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 뿜어 나오는 열기가 조금 사그라졌을 때 그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35
"그건 유리 스템볼로프의 사형 집행으로 시작했소. 그는 아주 권세있는 남작의 큰아들이었고, 자신이 법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자요. 그는 정절에 의심이 가는 자신의 정부를 죽였소. 화도 내지 않고 침착하게, 그리고 어리석게도 다섯 명의 목격자들 앞에서 말이오. 그가 남작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당신의 아버지인 레오스 왕 앞에 불려갔고 재판을 받아사형이 집행되었소. 다른 방법이 없었든 거요. 그러나 유리의 아버지인 자노스 스템볼로프는 아들의 죄를 믿지 않았소. 죽은 여자는 당신 오빠의 첫 번째 정부이기도 했소."
"정부를 가질 만큼 나이 든 오빠가 있었나요? 그때 난 아기였을 텐데요."
놀란 타냐가 물었다.
"그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태어나지도 않았소."
스테판이 설명했다.
"물론 뱃속에 있긴 했지. 그리고 당신에게는 세 명의 오빠들이 있었소. 큰아들인 왕세자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소."
그녀가 느낀 건 놀라움이 아니라 공포였다.
"열여섯에 정부를 버리다니!"
"자신의 지위를 위해 어린아이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도 많았소. 궁정에서는 누굴 이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말이오. 그러니 열여섯 살의 소년은 마음대로 조종하기에 최고의 목표물이 되었을 거요."
"당신도 그런 파렴치한 여자들을 많이 거느렸겠군요."
타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한 무리 여자들이 스테판을 둘러싸고 무엇인가를 바라면서 그를 희롱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타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그의 미소는 여자들의 계략이 들어맞든 아니든, 그 모든 상황을 즐겼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었다.
"그럼 죽은 여자가 내 큰오빠의 정부였단 말이죠. 그렇다면 자노스는 왜 자신의 아들이 결백하다고 믿은 거죠?"
"그는 유리가 그럼 범죄를 저지를 능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오. 그는 다른 사람, 특히 당신 오빠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했던 거요. 자노스는 변심한 정부에 대한 질투 때문에 당신 오빠가 그녀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나서 범죄 장면을 목격한 자들을 매수했소. 그는 또 레오스 왕이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를 추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한 거라고 주장했소."
"유리가 결백했을 가능성이 있나요?"
"아니, 목격자들 중 한 명은 주교였소. 또 다른 사람은 유리의 하인이었소. 오직 분노한 아버지만이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소. 게다가 당신 오빠는 살인이 있던 날,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밝힐 수 있었소."
"그런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죠?"
"자노스가 당신 오빠를 죽였소."
"어떻게요?"
"그건 문제가 도지 않소. 타냐. 그 정도만 알고 있는 게......"
"어떻게요?"
스테판은 그녀를 한동안 응시했다. 흉터가 실룩거렸다. 타냐는 다시 다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므로 자세히 안다고 해도 더 나빠질 건 없었다. 가족 전부가 죽음을 당했다. 이건 알려진 사실이며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기억할 수 없는 가족들, 마치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녀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건 추억의 부재를 향한 슬픔일 것이다.
타냐는 스테판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가 화를 낼까봐 주저한다면, 그러지 말아요. 그들은 나와 피로 이어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20년 동안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소, 난 아직도 당신이 해준 말 이외에는 전혀 몰라요. 그리고 지금까지 얘기로는 야나체크 가문 사람들 뿐 아니라 스템볼로프 사람들-유리를 제외하곤-에게도 동정이 가요."
"그렇다면 말해주겠소. 공주. 아무 죄도 없는 당신 오빠는 어느 날 밤 침대에서 끌려 나갔소. 자노스는 그들 안뜰 벽에 매놓고, 그 빌어먹을 가문 사람들이, 심지어 자노스의 여덟 살짜리 손자도, 그를 향해 총을 쏘았소. 그의 시신은 궁전 바깥 길가에서 발견되었소.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글귀를 피로 적어놓은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자노스를 집어넣을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했소. 그의 며느리 중 하나가 파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이야기해버리기 전까지 말이오."
"자노스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면 좋겠어요!"
파리하던 타냐의 빰에 핏기가 돌아왔다.
"스템볼로프 가문에 대한 당신의 연민이 사라진 모양이군."
"물론이죠."
그녀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음, 불행하게도 그는 그 자리에서 총을 맞지 않았소. 그는 신문을 받고 교수형을 언도 받았소.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다음날, 레오스의 하나 남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그들의 두 아이들이 살던 집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소. 이번에 남겨진 글귀의 뜻은 명백했소. '모든 야나체크 사람들은 죽음을 맞으리라' 라고 말이오."
"그런 방자한 복수극을, 그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죠?"
"그럴 필요가 없었소. 그들 중 두 명은 죽음을 당했소 나머지는 왕과 유혈 참사를 벌인 거요. 자노스의 둘째 아들, 다섯 명의 손자들, 동생 두명 그리고 세 명의 조카들이 남아 있었소. 자노스는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복수를 해달라는 말을 남겼소. 그건 레오스 자신에게 위혐이 된 거요. 다섯 명의 나이 든 남자들이 체포를 거부하다가 죽음을 당했소. 그 당시 열여덟 살이 되지 않은 손자들과 하나 남은 조카는 추방당했소."
"당신은 여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요. 며느리는요?"
"두 명의 스템볼로프 아내들은 카르디니에서 추방되었소. 그 중 하나는 당신 언니를 욕조에서 익사시킨 혐의를 받았소."
"내게 언니가 있었나요?"
타냐는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둘째였는데 열네 살이었소. 그러나 모든 스템볼로프 사람들을 추방하는 것으로도 유혈을 막지 못했소. 자노스의 가장 큰 손자인 이온 스템볼로프는 이미 사망한 증조부의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이자 레오스의 사촌을 죽이려고 시도했소."
"왜 그를?"
"아냐체크의 이름을 가졌으니까."
스테판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는 살아남았나요?"
"아니오. 하지만 한 달 뒤 그를 찾아 죽이는 데 성공했소. 이번에는 자노스의 딸 집이었는데, 그녀는 도시를 떠나기 전에 발각되었소. 그런 다음 당신이 태어나기 2주일 전쯤 당신의 두 오빠도 총을 맞고 죽었소. 그 때문에 당신 어머니는 조산을 하게 된 거요. 당신은 작았지만 다행히 건강하게 태어났고 그러나 당신 어머니는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했소. 당신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을 잃어버린 거요.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약혼을 하게 되었소. 자신도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을 감지한 레오스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거요. 당신이 태어나고 세 달이 되었을 때, 당신 어머니는, 건강한 여자라면 쉽게 회복될 수 있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소."
"내 아버지는요?"
"레오스는 저녁식사를 하다가 등 뒤에서 찌른 칼에 죽었소. 암살자는 부엌에서 일하다가 마침내 식탁에서 음식을 나르게 된 작자였소. 물론 도망은 못 갔지. 그 역시 그걸 알고 있었고, 자백을 받아보니 그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었는데, 왕을 죽인 대가로 받은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했다는 거요."
"스템볼로프가 자신을 고용했다고 자백했나요?"
"공주, 스템볼로프는 한 사람이 아니오. 그들은 야타체크 가문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았고 그 사내를 고용한 사실도 비밀에 부치지 않았소. 그는 자노스의 막내 손자 이반의 바로 아래인 두 여자의 이름을 댔고, 그들이 살해 대가로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고 했소. 그들이 함께 저지른 일이오. 야나체크 가문의 마지막 사람이 카르디니아에 남아 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바로니 가문에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거요."
"그래서 날 먼 곳으로 보낸 건가요?"
"당장은 아니었소. 당신을 죽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대신 당신 유모가 죽었소. 내 아버지는 비밀리에 당신을 내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당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토밀로바 남작부인뿐이었소. 내 아버지는 또한 스템볼로프 가문 사람들의 머리에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소."
"아이들까지도요?"
"그들도 아이들까지 모두 죽였소. 당신의 가장 어린 오빠는 여섯 살이었소. 당신 유모가 대신 충에 맞았을 때 당신은 태어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았소. 그건 유혈 참사였소. 타냐. 어느 한 가문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비극 말이오. 그들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거요. 우리는 그들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까지 당신을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없었소. 그들에겐 더 이상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았소.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흩어졌기 때문에 마지막 한 사람을 찾는 데에도 몇 년이 걸렸다오. 싸움 없이 붙잡아서 반역죄로 처단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끝까지 완강하게 버텼다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반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소. 배를 타고 탈출했는데 너무 빨리 항구에서 떠나는 바람에 배를 조종할 승무원을 데려가지 못했소. 그의 배는 흑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했고 샌도르의 부하들이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갔지만 이반을 발견하지는 못했소."
"분명히 그가 마지막 인물인가요?"
"스템볼로프 가문은 단순히 당신 가문만의 적이 아니오. 카르디니아의 왕을 암살한 그들은 왕가의 적이 된 거요. 20명으로 구성된 남자들이 그들을 잡는 특수 임무를 받고 떠났소. 그들에게 실수란 없소. 20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임무는 완수되었소."
"하지만 어린아이는 눈에 띄지 않잖아요. 누가 그들을 스템볼로프라고 알아볼 수 있겠어요?"
스테판은 그녀는 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은 지적이오. 귀여운 타냐."
애정이 담긴 호칭을 들은 타냐의 뺨이 붉어졌지만, 스테판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스템볼로프 가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아주 닮았소. 그들의 아주 독특한 특징인데, 남다 있는 손자들도 거의 비슷한 색의 피부와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났소. 자랐을 때는 자노스의 아들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모습이었소. 샌도르의 부하들 중 다섯 명은 개인적으로 스템볼로프 사람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소."
타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마음을 휘젓는 불안을 부인했다.
"그 모든 죽음이, 한 남자가 자신의 아들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생긴 일이군요. 유리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진짜 성격을 숨겨왔던 게 틀림없어요.
"사람이란 다 그런 거요."
"그래요? 모르겠어요. 난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스테판은 타냐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내밀었으나 마차가 멈추어 서자 곧 거두어들였다. 얼른 고개를 돌려 눈가를 닦아내던 타냐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 건가요?"
"마을 외곽에 있는 내 집이오. 나머지 여행에 필요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 여기서 지내게 될 거요."
다시 손을 내밀었으나, 이번에는 마차에서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집이 있다고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봄에 단치히를 통과할 때만 임시로 사용하는 거요/."
타냐는 놀랍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하룻밤 머물기 위해 몇 달 동안을? 맙소사, 스테판, 당신의 낭비벽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는 심각한 표정의 타냐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타냐. 비용은 그리 많이 들지 않소."
그녀는 2층짜리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시겠죠!"
"그리고 뒤에 남겨놓은 수행원들을 위해서도 이 정도는 필요하오."
"오, 그래요? 그렇겠죠. 여기서 카르디니아까지 가는 데 두어 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니까요."
스테판은 눈살을 찌푸린 채 타냐의 팔꿈치를 잡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비용은 대수롭지 않은 거요. 그리고 수행원들은 여기서 날 기다려야만 하오. 내가...."
문이 활짝 열리더니,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가 팔을 내밀어 스테판의 목을 휘감고 입술을 맞추었다. 타냐는 이 '수행원'이 여기서 그를 기다린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36
그곳에 서서 본 거라곤 다른 여자가 자신의 약혼자에게 키스하는 장면뿐이었다. 방금 전 들은 가족들의 참상으로 가뜩이나 우울하던 타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스테판에게 점수를 준다면, 열렬한 여자의 키스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얼른 끝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타냐의 견지에서 볼 때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만약 그녀가 거기 없었더라면 스테판도 키스에 더욱 이끌렸으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스테판은 자신의 목에 감긴 붉은 머리 여자의 팔을 떼내려는 성의 없는 노력을 보였다.
마침내 기적적으로 그 임무를 마쳤을 때-그 여자는 정말로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감정 어린 설명을 퍼붓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빠요. 스테판.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시다니.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믿지 못하실 거예요. 게다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당신 아버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식이 오는 즉시 한 시간 이내로 알 수 있도록 사람을 보냈어요. 안달하는 그 남자가 주의를 배회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샌도르는 분명 우리보다 훨씬 당신을 걱정하실 테고 한시라고 빨리 당신의 귀환에 대해 듣고 싶으실 거예요."
"그럼 내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단 말이오?"
"다른 소식은 듣지 못했어요."
그녀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스테판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여자를 보자, 타냐는 다시 몸이 굳었다.
분명 그가 돌아와서 너무 기쁘다는 뜻을 강력히 내비치려는 듯했다. 타냐는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비록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 칼은 배에서 가져온 것으로 식사 때 사용하는 조그만 칼에 불과했다. 사샤가 없애버린 장화 대신에 칼을 보관할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으나, 오래된 버릇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보호하길 원했다.
붉은 머리 여자를 물러서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거 아주 괜찮은 방법이었다. 물론, 그 다음에는 스테판과의 일이 남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질투를 보여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질투였다. 스테판과 키스하는 다른 여자의 눈을 후벼파고 싶다는 이런 기분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판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카르파티아를 타고 항해하기 전, 그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했으나 다가올 그들의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사실대로 말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게다가 타냐는 마음속으로 스테판이 자기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려면, 타냐는 자신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버려야 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스테판은 그녀를 원한다고 인정했으나 또한 그만큼 그녀를 미워했다. 게다가 그녀를 원하던 마음은 일시적인 감정이라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다. 흥미를 가졌던 때는 단 한 차례뿐, 그것도 타냐가 그를 거절했기 때문에 느낀 신기함, 아니면 도전하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스테판은 그녀와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냈고, 그 분노는 항상 명백하게 드러났다. 만약 의무가 아니라면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바실리는 스테판에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으나 타냐는 그녀를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또한 스테판이 정부를 포기할 의향이 없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하겠는가? 타냐와는 억지 결혼을 하는 것이며, 지금 여기 서 있는 여자는 그가 직접 선택한 여자였다.
스테판이 다시 달라붙은 여자를 떼낸 건 그나마 행운이었다. 만약 타냐가 다시 그들의 키스 장면을 보았더라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스테판은 대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타냐를 향해 돌려세웠다. 녹색 눈동자가 푸른색을 만나는 순간, 타냐는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스테판의 정부는 타냐에게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주는 만족도 스테판의 표정을 보고 여지없이 깨졌다.
정부와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즐겁다는 뜻을 조금도 감추려들지 않았다. 타냐는 명백하게 드러난 그의 즐거움이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 때문임을 깨닫지 못했다.
"타티아나 공주, 알리샤를 소개하겠소. 알리샤는 궁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신을 만나고 싶어했소. 당신이 여왕이 되었을 때 시녀가 되고 싶어서 말이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돼, 타냐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기분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스테판은 질투로 타냐의 눈동자가 황록색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타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알았다는 투로 고개만 끄덕였다.
타냐의 신분이 정확하게 드러난 지금, 알리샤는 마지못해 절을 했다.
어쨌거나 타냐는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공주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거기 서 계시는 줄 몰랐어요."
알리샤는 놀라는 척했다.
거짓말. 그녀는 분명히 창문을 통해 그들이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붉은 머리 여자가 한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으나 그 말을 부정하는 대신 스테판을 흘깃보면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적어도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했다. 스테판은 알리샤에게서 손을 떼고 눈살을 찌푸렸다.
타냐는 스테판이 신중하게 행동하길 원했다. 적어도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그는 타냐가 알리샤를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타냐가 그의 정부를 시녀로 곁에 두리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의 애첩을? 만약 그게 카르디니아의 관습이라면 타냐는 단치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스테판은 타냐가 화난 만큼이나 수치스러웠다. 그는 얌전히 행동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알리샤를 이곳에 남겨놓았다.
이곳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강요당한 결혼 때문에 알리샤를 포기할 의도가 없었고, 비록 결혼을 하더라도 그건 이름뿐인 결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변장을 지운 타티아나를 보았을 때 다가온 감정은 전혀 계산에 없던 종류였다. 타냐가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에 대단한 즐거움을 느꼈고, 처음 본 순간 욕망을 느꼈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감정은 그녀에게 쏠려버렸다.
지금 스테판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다. 타냐는 스테판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르고 그를 놀려댔다. 그녀 없이 살 수 없다고,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말할까?
스테판이 마음의 안정을 느꼈던 때는 배에서 타냐를 멀리했을 때뿐이었다. 그녀가 가까이 있으면 분노인지 욕망인지 모를 열정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감정을 조절할 힘이 없었다. 분노, 욕망, 질투, 사랑........., 타냐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그런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미친 듯이? 맙소사, 그는 정말로 멍청한 사내였다.
37
그날 저녁은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시련이었다. 적어도 스테판에게는 그랬다. 그는 알리샤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고,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알리샤는 지금까지 보아온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첩이 되어 있었으나, 스테판은 그녀에 대해 아무런 욕구도 느낄 수 없었다.
타냐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런 기분 정도는 바뀔게 분명했다. 그러나 알리샤는 스테판이 고민하는 동안 그저 앉아 기다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알리샤가 타냐를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하는 동안 스테판은 불안한 마음으로 마루 위를 걸어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단둘이 있는 두 여자, 다행히도 지금은 지니고 있지 않지만 한 여자는 버릇처럼 칼을 휘둘렀고 다른 여자는 스테판을 아직도 자신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알게 될 만한 일은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기분,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심지어 알리샤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 샌도르의 부하조차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전할 편지를 준비해둔 스테판은 한층 더 화가 났다. 그 전령은 스테판의 도착을 보자마자 샌도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공주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고 카르디니아로 달려간 게 틀림없었다.
타냐에 대해 어떻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대로? 그 절반만?
샌도르는 타냐의 불행한 성장 과정에 대해 자신을 탓할 것이다. 스테판은 자신에 대해서도 반쯤 자책하고 있었다. 공주와 함께 한 사람만 딸려 보냈어도........., 단 한 명밖에 없는 보호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도 못하다니....., 아니, 스테판은 자신의 아버지게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타냐가 신분에 맞게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에 격분할 것이다. 그녀의 성장에 대해 알리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거짓말 한번 한 적 없는 스테판이 단지 여자 때문에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니, 그건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분명, 오늘은 조그만 일로도 짜증이 솟구치는 그런 날이었다. 바다 위에서 몇 주일을 보냈기 때문일 거라면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니, 타냐의 영향력은 그의 예상보다 더 컸다. 게다라 선실에서, 마치 안에서 보인 타냐의 행동은 이상했다. 더 이상 그들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부터 태도가 조금 변할 거라고 예상했으나, 그런 이상한 말을 끄집어내다니. 그렇게 철저하게 변할 수가.
만약 오늘밤 바실 리가 스테판 대신 알리샤를 마치 자신의 정부처럼 데리고 잔다면 타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를 위해서? 바실리는 타냐의 감정을 보호해주고 싶어 할까? 그리고 알리샤는 내키지 않지만 그대로 따라주는 척할까?
그러나 타냐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알리샤와 스테판의 키스를 목격했다.
스테판은 그녀를 보았다. 라자르와 세르게이 사이에 앉아 가끔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즐기는 모습은 예정에 본 적이 없었다. 화내지 않는 모습, 필요 이상으로 그녀에게서 오래 떨어져 지낸 것은 아닐까? 아니, 그는 아직도 타냐와 가까이 있으면, 원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타냐는 라자르와 세르게이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에 그에게 많은 것을 묻던 그녀가 저녁에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자주 스테판이 있는 쪽을 흘끔거리며 미소를 지었을 뿐이며, 그는 영문을 모른 채 이를 앙다물었다.
스테판은 영문을 모르지만 타냐는 잘 알고 있었다. 스테판의 머리 위로 식탁 위의 모든 접시를 내려치고 싶은데 꾹꾹 참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오후에 보여준 그 여자의 뻔뻔스러움을 믿을 수 없었다. 타냐가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붉은 머리가 물었다.
"스테판이 공주님에게 결혼은 오직 이름뿐이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아뇨, 아마도 깜박 잊고 말하지 않았나보죠."
"오. 불쌍하신 분."
알리샤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은 두려웠을 거예요. 글쎄요. 하지만 제가 공주님을 안심시켜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쁘군요. 그리고 당신은 저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그가 공주님과 결혼하겠다고 나타났을 때 공주님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잘 알아요. 그런 흉터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죠."
"무슨 흉터요?"
알리샤가 억지웃음과 더불어 갑자기 할 말을 잃자, 타냐는 고소했다.
"그건 농담이 아니에요. 공주님."
"나도 그래요."
"그의 흉터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타냐는 돌아서서 창문으로 걸어가 아무 말 없이 바깥은 내다보았다.
뒤에서 알리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붉은 머리가 비웃듯이 말하더니 이내 친절한 말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공주님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할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시지 마세요. 제가 있는 동안에는 말이죠. 그리고 외로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스테판은 공주님이 얼마나 많은 애인을 두든, 스캔들만 일으키지 않으면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그런 점에서 도와드릴 수 있어요."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만약 타냐가 다가올 결혼을 두려워했다면 순진하게도 알리갸에게 무슨 말이든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판은 타냐에게 애인이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화를 냈던가. 만약 새로운 애인을 찾는다면 그는 더욱 분노할 거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타냐로선, 알리샤가 지금 커다란 문젯거리의 기초를 닦고 있는 걸로 보였다.
타냐는 알리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창문을 등졌기 때문에 녹색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분노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싸늘한 목소리의 의미는 명확했다.
"난 원래 신중한 사람은 못 되지만, 지금은 당신의 친절한 도움에 대해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게 더 낫겠네요."
알리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제 말을 들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공주님. 만약 스테판에게 한마디라도 한다면 후회하시게 되겠죠."
"그런가요? 당신은 왕에게 그렇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도 잘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알리샤는 코를 쳐들고 방에서 획 나갔다. 타냐는 창문을 향해 돌아서서 50까지, 그런 다음 백까지 세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침내 주먹을 펴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만큼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타냐는 그 여자를 죽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스테판에게 의혹을 남겨둘 작정이었다. 스테판은 타냐를 찾아낼지조차 의심했기 때문에 알리샤를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부러 정부를 가까운 곳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식당으로 걸어 들어간 타냐는 거기에 앉아 있는 알리샤를 쏘아보면서 스테판 옆에 앉았다.
붉은 머리 여자는 매우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건너편에 앉은 바실리의 말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고, 타냐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타냐는 스테판에게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모른 척하면서, 그녀의 반응에 관심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보였다. 타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존심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것.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차라리 스테판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를 때가 더 쉬웠다.
38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스테판의 기분도 가라앉았다. 음식을 조금 먹은 대신 와인을 잔뜩 들이켰기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은 특정한 상황을 다룰 때 다른 반응을 보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타냐는 그에게 자주 화를 냈고 심지어 그의 친구들에게도 그랬으나,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경계를 늦추는 법이 없었다. 알리샤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그들이 함께 있을 때 어떤 특정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같았다. 두 여자는 서로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반감이 심할 텐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친한 친구처럼 행동했다.
다시 한번, 스테판은 그런 상황에서 무관심하게 행동하는 타냐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알리샤의 세련됨과 우아함에 기가 질려 그럴 수도 있었다. 타냐는 자라온 환경 때문에 궁정 의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저녁식사를 위해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알리샤가 하얀 실크드레스와 보석으로 멋지게 차려 입고 나오는 동안에도 타냐는 도착했을 때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나타났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기분이 들거나 신경이 거슬린 적이 없었다. 알리샤는 마치 전리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석들을 휘감고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끌곤 했다. 오늘도 목에는 세 줄짜리 긴 진주 목걸이를 걸고, 귀에는 다이아몬드 귀고리, 그리고 하나도 아닌 네 개씩이나 되는 반지를 끼고 나타났는데, 하나하나 모두 엄청난 가격이 나가는 보석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타냐 앞에서 그것들을 과시했다.
오늘밤 알리샤의 버릇들이 스테판의 화를 북돋았다. 경쟁 상대를 대하는 알리샤의 전형적인 행동을 보고 화가 났을 뿐 아니라, 미래의 신부는 지위에 맞는 물건 하나 없는데 정부에게는 자신이 준 보석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타냐는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을까?
이 도시를 떠나기 전, 그러니까 오늘밤에 할 수 있는 일이 적어도 한가지는 있었다. 보석상 주인을 침대에서 끌어내는 한이 있어도 카르디니아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신부를 궁정의 누구보다도 더 화려하게 치장하리라.
그러나 겁 없이 마셔댄 보드카 때문에 재빨리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알리샤에 대한 결정을 미루고 싶었고, 그녀와 단둘이 남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그 시간부터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알리샤가 옆에서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알리샤와의 대면을 지연시킬 논리적인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것을 생각하기에도 너무 취한 상태였다.
게다가 타냐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만약 그녀가 알리샤에 대해 말한다면, 기꺼이 그의 정부를 멀리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타냐에게는 전혀 달라질 게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스테판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정부의 결심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 미국에 가기 전 알리샤와 함께 썼던 방이 아닌 사샤가 준비해놓은 침실로 들어갔으나 그녀는 거기까지 따라 들어왔다. 또한 스테판이 취했다는 사실도 잘 알았고, 그녀가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기억이 없는데, 알리샤."
그녀는 웃어넘기려고 노력했다.
"그럴 필요가 있나요? 지난 2년 동안 늘 당신 방에서 지냈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의 부름이 필요한가요?"
물론 맞는 말이었다. 취해 있는 스테판에게, 알리샤는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켰다.
스테판은 단지 타냐의 몸만 원하는 게 아니었다. 뭔지 모르지만 더 많은 게 있었다. 하지만 2년이나 지속된 알리샤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알리샤.......,."
"자아. 스테판. 침대로 오세요."
스테판이 나가라고 말하기 전에, 알리샤는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오늘밤에 술이 과하시더군요. 절 필요로 하시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편안하게 눕히도록 해줘요."
스테판이 침대로 다가가자 그녀는 시트를 젖혔고, 동시에 그녀의 벗은 몸이 그래도 드러났다. 그가 알리샤의 몸을 특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내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술을 마시면 더욱 여자를 탐하면서 이성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런 스테판을 받아들이는 것은 질색이었으나 오늘밤은 완전히 예외였다. 그녀의 미래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알리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테판이 변했음을 느꼈다. 그 빌어먹을 공주를 보는 순간, 스테판이 그녀와의 결혼이나 부부로서의 생활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여인은 스테판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
만약 모른다면, 정확히 알려주어야 했다. 그녀는 왕의 정부였다. 2년 동안 스테판을 참아냈고, 샌도르가 죽거나 그의 아들에게 양위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왔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지금, 스테판의 결혼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테판은 그냥 서서 바라볼 뿐, 곁에 앉거나 누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알리샤는 공포를 느꼈다. 먼저 말을 걸거나 행동을 보여야 했다. 만약 그가 공주와 사랑에 빠진 거라면..
그녀는 재빨리 스테판 앞에 앉았다.
"바보 같은 남자."
알리샤는 그의 겉옷을 벗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요. 오늘밤에 나를 원치 않을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가 않아요. 그토록 오랫동안 떨어져서 지냈잖아요. 하지만 난 기다릴 수 있어요. 게다가 당신을 향한 그 여자의 행동을 보았으니, 당신을 탓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상대방에게 술을 들이켜게 만들더군요."
스테판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은 정신이 있었다.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만큼 취한 것도 아니었다. 기나긴 금욕 생활을 한 후였으므로 하룻밤 내내 만족할 때까지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알리샤는 침대를 잘못 찾아든 여자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타냐에 대한 그녀의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무슨 행동을 말하는 거요?"
"왜요. 저녁식사 시간에 당신을 완전히 외면하더군요. 그리고 라자르에게 다정하게 굴었잖아요. 당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말이죠."
알리샤의 말이 주는 암시는 날카로운 칼로 베는 것처럼 아팠다. 그가 피를 흘리지 않는 이유는 라자르의 충성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남자를 향한 타냐의 다정함을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스테판이 표정이 굳었다.
"내 생각으론, 오늘밤 공주가 그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우리가 도착했을 때 당신이 날 지나치게 다정한 모습으로 반겼기 때문이오. 그녀는 내 약혼녀요, 알리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소!"
알리샤를 공포로 몰아넣은 건 '자신이 누구인지'라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난 그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서 너무 기뻤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부주의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거예요. 스테판. 난 자신 있게 말할수 있어요."
알리샤는 그를 달래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알리샤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심지어 스테판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의 셔츠를 벗겨냈다. 대답을 들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리던 그는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스테판이 다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아니냔 말이오?"
알리샤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바지에 손을 댔다.
"미안해요. 스테판. 오늘 오후에 그녀와 이야기를 했어요."
알리샤가 입을 다물자, 스테판은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다그쳤다.
"그런데?"
"당신에게 정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자신을 방해하지 않아서 기쁘다고요."
스테판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빌어먹을, 그녀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단 말이오?"
"그리고 더 있어요."
알리샤는 깜짝 놀랐다. 화가 나 방 안을 서성거리기 전에 그의 바지를 벗길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녀가 스테판을 사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훌륭한 애인이었다.
스테판은 획 돌아섰다.
"또 다른 건?"
"스테판, 당신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스테판이 얼굴을 확 찌푸리자, 알리샤는 자신의 계략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신을 참을 수 없다고........., 그러니까 당신의.............,."
알리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의 왼쪽 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흉터가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열기로 인해 얼굴이 검게 변했다. 알리샤는 재미있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스테판의 얼굴은 놀라우리만큼 잘생겼다. 그녀 자신이 흉터에 대해 그토록 심한 혐오감을 가진 것은 정말 유감이었으나 흉터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 사내를 차지할 기회도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알리샤는 안심하고 공주를 비난할 수 있었다.
"그녀는 허영심이 강한 여자일 뿐이에요. 스테판. 그럼 당신은 뭘 기대했나요?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과 어떤 남자라고 그녀를 원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충분해!"
스테판은 그 말이 그토록 고통스러우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두려워 한 대로 타냐는 그의 흉터를 싫어했다. 타냐가 그의 눈빛 때문에 흉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녀가 계속 그를 거부한 것도 그 증거였다. 또한 그의 키스를 받아들인 이유는 처음 생각한 대로 그녀가 창녀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영심이라니? 아니다, 그건 알리샤의 짐작에 불과했다. 타냐만큼 허영심 없고 자부심 강한 여자는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스테판은 알리샤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의 차가운 가슴이 그의 맨가슴이 닿았고 곧 이어 팔로 휘감았다.
"잠시 동안 그녀에 대해 잊어버리도록 도와드릴게요. 스테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 거예요."
맞다, 스테판은 여자가 필요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알리샤가 어떤 식으로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39
타냐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랜 항해에도 출렁이는 느낌이 없는 게 도리어 이상했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때문만도 아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고 조그만 소리에도 눈이 번쩍 뜨였다.
누군가가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을 때, 화들짝 깬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깨닫지 못했다. 방 안을 데우기 위해 지펴놓은 벽난로의 불길도 이제 재만 남았으므로 방 안에 남은 빛이라곤 없었다. 따라서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천천히 열리는 문을 보지 못했다. 단지 기름칠이 잘 된 경첩에서 나는 조그만이 소리만 들렸을 뿐.
잠시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를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삐걱하는 소리가, 아주 명확한 그 소리가 침대 주변 마룻바닥에서 들려왔다.
타냐는 눈을 떴다. 경계심이 들지 않았던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겁이 덜컥 났다. 술집에서 늘 그랬고 심지어 배 안에서도 버리지 않았던 버릇대로 베개 아래 숨겨놓은 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손가락에 칼이 닿자마자, 베개가 얼굴을 내리눌렀다.
끔찍한 순간, 타냐는 자신이 질식해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살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얼굴을 베개로 눌렀고, 타냐는 정말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칼을 손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공포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슴에 고통이 느껴질 때에야 행동을 개시했다.
두꺼운 모포 아래 갇힌 몸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고, 칼을 든 손은 베개에 눌려 있었다. 자유로운 것은 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가 이는 힘껏 베개를 누르고 있었다. 베개를 잡아 빼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은 칼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옮겨 쥐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칼은 베개 옆쪽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칼을 쥐고 있는 손을 펼 수가 없었다. 칼날을 힘껏 끌어당겨 돌리고 뒤흔들었으나 잡고 있는 힘이 너무 강했다. 시간이 없었다.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갔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방법만 남아 있었다.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자신의 손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칼날을 위로 향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야 얼굴을 짓누르던 베개가 옆으로 밀쳐졌다. 정신이 들만큼 충분히 공기를 들어마신 그녀는 공격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찌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 그림자는 그녀에게 날카로운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로 물러섰다.
베개의 압력이 약해지자, 타냐는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기 전에 재빨리 침대 옆으로 몸을 굴렸다. 고통스러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그녀는 담요에 말인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은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비명을 질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공격자가 무엇을 하는지 볼 수 없는 지금, 심지어 공격자 자체를 볼 수 없는 지금 비명을 지르는 게 옳은 방법 같았다. 그러나 질식할 뻔한 그녀에게 비명소리도 그리 쉽게 나와 주지 않았다. 세 번의 시도 끝에 타냐는 마침내 꽤 커다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문이 획 열렸다. 구원자가 도착한 게 아니라 공격자가 나간 것이다.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스테판이었고 램프를 든 세르게이가 바로 그 다음에 도착했다. 타냐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램프 불빛에 의지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서 떨어질 때 항상 그렇게 비명을 지르곤 하오?"
혐오스럽다는 투의 목소리, 타냐는 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스테판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녀가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아뇨, 날 죽이려는 사림이 나타났을 때를 위해 비명을 아껴두는 편이에요."
타냐는 조롱하듯 대답하고 그를 무시한 채, 다른 램프에 불을 붙이는 세르게이를 보았다.
"만약 서두른다면 그들이 집 밖에서 나가기 전에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타냐는 마룻바닥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말입니까, 공주?"
그녀는 아직도 숨이 고르지 못했다. '물론'이라고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커다란 한숨처럼 나왔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두 남자는 행동을 개시했다.
타냐는 두 번째로 혼자 남았다. 그러나 스테판의 눈에서 번쩍이는 광채를 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가상의 공격자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얼마나 화나게 만들었는지 깨닫자 몸이 움찔했다. 만약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분노는 아마 그녀를 향해 폭발할 것이다.
타냐는 한숨을 내쉬며 담요에서 몸을 빼냈다. 그녀는 테이블에 칼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놀랍게도 다친 곳은 없었으나 눌린 팔목과 새끼손가락이 쓰라렸다. 눌린 바람에 코도 아팠고 가슴은 마치 터졌다가 겨우 다시 붙여놓은 기분이었다. 아마 며칠 동안은 아플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참으면 그만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녀를 죽일 만큼 미워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자연스럽게, 스템볼로프 가문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재빨리 다른 가능성들을 짚어보았다. 여행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범인이 그들 중 하나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선실에서 끌어내 바다로 던져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카르디니아 사람들이었다. 물론 카르디니아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선, 샌도르이 부하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기다렸고, 누군가가 또 기다릴 수 있었다.
그 가설은 논리적이었으나 동기가 없었다. 스테판과의 결혼을 원치 않는 사람, 스테판의 적일까? 하지만 그가 결혼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면, 결혼을 원하지 않는 스테판에게, 그녀를 죽이는 게 충성으로 평가될 수도.........., 아니, 그녀는 스테판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와의 결혼은 스테판의 의무였고, 의무란 그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
만약 그의 적도 아니고 타냐 자신도 적이 없다면, 생각해낼 수 있는 해답은 하나..., 스테판과 결혼하고 싶지만 타냐와의 약혼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여자?
여자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퍼뜩 스치자마자, 누가 공격을 했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에게는 적이 있었다. 너무나 새로운 적이라 처음에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알리샤!
만약 타냐 앞에서 스테판에게 고의로 키스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할 만큼 위협을 느꼈다면? 알리샤는 스테판의 관심이 타냐에게 돌아갈 것 같아 너무나 걱정했고 경쟁 상대를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타냐가 반격을 시작하자마자 왜 공격자가 포기를 했는지도 명확했다.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라면 타냐를 움켜잡았거나 강한 힘으로 칼을 빼앗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리샤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랐던 것이다. 타냐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알리샤는 자신에게 싸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신중하게 그곳에서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복도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자는 척하는 범인을 찾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여자 같으니! 감히 생명을, 단지 애인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생명을 빼앗으려 들다니! 만약 자신이 죽었다면 스테판은 알리샤와 결혼을 할까? 그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타냐는 칼을 들고 열린 문으로 향했다. 눈동자가 알리샤의 방문으로 향했다. 거의 다가갈 무렵, 스테판이 길을 가로막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소. 공주. 그리고 모든 문들이 잠겨 있소."
그는 창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타냐는 묻지 않았다. 물론 발견될 리 없었다. 이 남자는 타냐가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고 믿지 않았다.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 걸까?
타냐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 무엇을 가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거요?"
그의 시선이 칼로 향했다. 타냐는 칼을 꽉 붙잡았으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무척 침착했다.
"이 사건을 혼자 처리하려 해요. 당신이 하지 않으니까요."
"그 칼을 내려놓고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오."
스테판은 조용히 말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목소리는 더욱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악몽이 아니에요."
스테판은 더욱 화를 났다.
"좋소. 침입자가 있었다고 칩시다. 비록 우리가 집 안의 모든 방을 샅샅이......., 살폈지만 아직도 근처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고.......,."
"당신은 믿지 않아요."
"당신 방은 계단 바로 옆에 있소.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다면 저 길로 갔을 거요. 다른 방은 모두 사용 중이니까."
"물론이죠."
스테판은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으나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다 끝났소."
그가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말했다.
"안전하게 문을 잠그고 눈을 붙이든지......., 아니면 내가 여기서 잠을 잘 수도 있소."
"좋은 대로하세요. 방은 넓으니까요. 하지만 난 먼저 당신의 애첩을 잘게 토막 쳐야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타냐가 한 발짝 떼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거기에 서시오! 지금 내가 정확히 들은 거요? 알리샤가 당신을 해치려 했다고?"
속을 뒤집어놓는 분노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스테판,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난 알아요. 그녀는 내가 소리를 지를 때 이 방에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전에 여기서.........,."
"둘 다 불가능한 일이오."
그는 날카롭게 말을 낚아챘다. 눈동자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비명을 지를 때 그녀는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이 한밤중에? 그는 절반밖에 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상의는 벗었고 바지조차 제대로 입고 있지 않았다. 급하게 꿰어 입은 것 같았다. 알리샤와 함께 있었다?
타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알리샤가 무죄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단지 스테판이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생각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타냐는 그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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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향해 칼을 내지르던 타냐 자신도 스테판 못지 않게 놀랐고, 즉시 후회했다. 칼은 벽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뭔가 던질 게 필요했다. 자신이 아픈 만큼 그에게 상처를 입혀야 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칼은 던지지 말았어야 했다.
스테판의 놀라움을 펄펄 끓는 분노로 바뀌었다. 악마 같은 눈동자는 그저 타오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이글거렸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타냐가 어설프게 말했다.
"난 제대로 칼 쓰는 법을 배우지 않았으니, 당신은 위험하지 않아요."
대답이 없었다.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긴장 때문인지, 그녀 역시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난 죽을 위험에 빠져 있는데, 당신은 다른 여자랑 뒹굴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문을 닫고 타냐를 향해 다가왔다. 타냐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돌아서서 달렸다.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손이 그녀를 멈추어 세웠다. 다른 손 하나가 어깨를 잡고 획 돌려세웠다.
"당신은 살해될 뻔한 게 아니오. 그리고 난 다른 여자와 뒹군 게 아니오."
불길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거짓말!"
"내가 거절했소. 만약 창녀를 고른다면, 내가 원하는 여자를 골라야 하니까."
덮여온 입술은 타냐가 바로 '창녀'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순간 그가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분노와 알코올은 위험스런 조화였다. 비록 이런 상황을 원했을지 몰라도, 그녀는 지금 빠져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타냐는 갑자기 이유를 깨달았다.
타냐는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분노를 표현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었을까? 바보처럼 행동하기 전에 다시 생각했어야 했다. 스테판은 자신의 분노를 받아들이는 정부에게 익숙해 있었다. 바실리도 그렇게 말했다.
문득 스쳐 지나간 그의 말, 스테판은 타냐를 원했기 때문에 알리샤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알리샤에게 가지 않았다. 그녀가 바로 복도 건너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신 분노를 불러일으킨 여자에게 왔다.
타냐는 몸부림을 멈추었다. 그러나 스테판의 입술에 완전히 복종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분노의 배출구로써 원하는 스테판을 원하는 걸까? 만약 이런 난폭한 포옹이 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렇다면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오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분노가 아닌 욕구로 그녀를 원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
스테판은 타냐가 칼을 내지르자 격분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죽이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자 화를 냈다. 그를 진정시키면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그를 아마도 알리샤에게 돌아가 버릴 것이다.
결정권은 그녀에게 없었다. 감정은 이미 최고조에 달했고, 흥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스테판 바로니를 사랑하느냐고.
긍정의 대답이 나올 것 같아 두려웠으나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원하는 건 분명했다. 심지어 분노를 삭이기 위함일지라도 그가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여자에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타냐는 자신의 대답을 들었다. 비록 야만적일지라도 그를 받아들이리라, 그러나 이런 식으로 되지는 말아야 했다.
스테판은 천천히, 거칠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행동했다.
한 가지 잊은 게 있어, 타냐는 예견된 즐거움으로 몸을 떨면서 생각했다. 스테판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녀는 벌써 키스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테판은 천천히, 일부러 침대를 향해 그녀를 몰아갔다. 다리가 침대에 닿자, 타냐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몸이 매트리스에 눕혀질 때에는 놀라지 않았다. 입술이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다급함을 알려줄 수 없었다. 그는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분출하고 싶은 욕망은 점점 높아갔다.
그녀가 매트리스에 눕혀지기 전에 잠옷 뒤쪽이 올라갔고, 눈치 채지 못하는 새에 앞에 달린 레이스 끈이 풀렸다. 하얀 리넨천이 그녀의 얼굴 위로 벗겨지는 동안 잠시 입술이 자유로워졌으나 그의 입술은 이내 돌아왔다. 분노와 더불어 그의 열기가 전해졌다. 가슴과 복부를 누르는 묵직한 무게가 주는 감각이 좋았다.
스테판의 혀가 그녀의 입술에서 나른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동안 손은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모든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똑같았다. 그녀의 감각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속도는 고통스러우리만치 빨라졌다.
스테판은 그녀의 팔을, 얼굴을 어루만지며 처음에는 광포하게 나중에는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 스테판이 빨리 어떤 행동을 취해주지 않는다면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키스를 멈춰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흥분 상태에 놓아둔 채 나가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타냐는 긴장을 풀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부림, 몸을 둥글게 말며 그의 엉덩이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스테판이 그녀의 몸 앞으로 들어왔다.
스테판은 타냐가 자신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으며 도리어 반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행동했고 그 점에서 알코올의 힘이 고맙게 느껴졌다.
분노는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욕망이 그 위를 덮쳤다. 갑자기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녀의 몸 앞으로 들어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깊숙이 들어갔다.
즐거움이 그의 분노를 완전히 씻어 내렸다. 분노가 사라지자 정신이 들면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몸 안에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 나지 않았다.
죄의식이 밀려오면서 기운이 사그라졌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따스한 곳, 갑자기 모든 것과 분리된 절묘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분노 때문에 타냐를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욕망이 타오르기 쉬운 배 안에서 그녀를 멀리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단단히 휘감았다. 절정에 오른 타냐의 맥박이 느껴지고 놀라운 감동과 함께 자극을 가해왔다. 야만적인 환희로 불을 붙이고 욕망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돌진, 다시 돌진, 폭발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기 힘들었다.
타냐는 그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침내 스테판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자, 그녀는 오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스테판은 그녀의 어깨 위에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에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 소리는 거세었고, 숨결은 그녀의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헤쳐놓았다. 타냐는 한 손으로 스테판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어루만졌다. 가까이 있는 스테판, 그것만으로 좋았다. 타냐는 그가 움직이는 걸 원치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서 떨어져 나가는 게 싫었다.
"당신을 아프게 했소?"
처녀막이 사라지는 고통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작았다.
"아뇨, 왜 그런 걸 묻죠?"
"타냐, 내가..........., 당신을?"
"음, 물론 조금 아팠어요. 아주 잠깐 동안."
잠시 동안? 맙소사, 그녀를 때린 걸까?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멍든 자국은 없었다. 지금 보이지 않는다면, 그럼 내일은? 알리샤는 항상 자신의 몸에 멍이 들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가 타냐의 몸에..........
스테판이 옆으로 굴러 내려와 바지를 입을 때, 타냐는 속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가 문으로 향했다. 이런 식일까? 타냐는 의심했다. 자신이 창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서?
바실리는 만약 스테판이 그녀가 처녀라는 사실을 안다면 몹시 격분할 거라고 했으나, 그는 화내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첫날밤까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순결을 빼앗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 괜찮아요. 스테판."
타냐가 단어마다 힘을 주며 말했다.
"괜찮은 것 이상이에요. 당신은 이제 내가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거예요."
그는 문 앞에서 돌아섰다. 눈동자가 번득거렸다.
"당신은 이런 일에 익숙한가보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요. 공주. 맹세하오."
타냐는 닫힌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다시는 사랑을 나누지 않겠다는 뜻인가? 마지막 말이 뇌리를 스쳤다. 맙소사, 그는 아직도 그녀를 창녀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너무 화가 나 있던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녀가 처녀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타냐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녀가 순결했다는 증거는 이제 사라졌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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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엇으로 보이죠?"
"피인데요."
"그게 아니고요."
타냐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시트에 찢어진 부분 말이에요."
세르게이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침대 옆으로 갔다. 타냐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지난밤 자신이 살해당할 뻔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끌어들인 것을 후회했다. 만약 세르게이와 스테판이 자신을 믿어주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냐가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시트가 찢긴 바로 옆에 처녀를 상징하는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찢긴 자국을 보자마자 그녀는 스테판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곧장 세르게이의 방으로 향했다.
지난밤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그녀의 말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다시 스테판을 설득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타냐는 스테판이 시트에 묻은 피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결정 내렸다. 따라서 그에게 말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타냐가 자신의 순결을 기꺼이 주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만큼 그가 화난 상태였다면 그에게 말하거나 증거를 보일 필요조차 없었다.
세르게이는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칼에 찢긴 자국입니다. 공주. 스테판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지 말아요. 그는 내가 그 구멍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난 당신들 중 적어도 한 명이 날 믿어주고 조치를 취해주길 원했어요. 난 악몽을 꾼 게 아니에요.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었고 난 칼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죠. 그러나 너무 느렸어요. 베개가 날 질식시키려 했죠. 난 마침내 칼로 공격자의 팔을 찌르고....."
"그렇다면 시트에 묻은 것은 그의 피입니까?"
"아뇨."
타냐는 이를 악물려 대답했다.
"말했듯이 그가 베개를 놓치는 순간, 나는 즉시 옆으로 굴러 침대에서 내려왔어요. 그러나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내가 침대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아요. 날 칼로 찌르려는 것 같았어요. 만약 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시도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공주께서 상처를?"
타냐는 그가 붉은 얼룩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길 원했다.
"아뇨, 아니에요."
"그렇다면 저것은 누구의 피인가요?"
"내 거예요. 난."
대답하며, 이제 그가 그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우리가 집을 조사하고 난 다음에 스테판이 왔었군요."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또한 스테판이 세르게이에게 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부인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그래요."
"당신이 처녀라는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내던가요?"
머리가 이 정도로 빨리 돌아간단 말인가?
"그는 눈치 채지 못했어요. 처음부터 너무 화가 난 상태였거든요."
세르게이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지금 그를 데려올게요. 그는 이것을 보아야만......."
"안 돼요. 오늘밤에도 그렇게 화난 스테판을 다룰 자신이 없어요. 고맙지만, 난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안 해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시겠어요? 단지 누군가가 날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만 믿어주면 돼요."
"믿습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나에게 말해준 사람들 말고 또 다른 적은 없나요?"
"지금 생각나는 바로는 한 사람도 없어요. 그들은 모두 죽었으니까요."
"나와 스테판의 결혼을 막기 위해 날 죽이려는 사람은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공주의 약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다, 심지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아기 때 사라졌으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다고 믿죠."
"잘됐군요."
세르게이는 타냐의 말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스템볼로프 사람들이 숨어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렇게 알려지도록 내버려두는 게 낫거든요. 샌도르가 직접 당신을 보기 전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좋아요. 우리는 누가 범인인지, 심지어 왜 그랬는지도 알아낼 수 없겠군요. 그렇다면 나에게 대답해줘요. 그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날 질식시켜 죽이려고 했어요. 처음부터 날 찌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증거를 안 남기려고 그랬을지도 모르죠."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잠자다가 그냥 숨진 것처럼 보이도록......"
"난 건강해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요. 그런 방법을 사용하면, 추적당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도망갈 수 있다는 뜻이군요. 다들 멍청하니까.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녀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공주를 죽이는 게 급선무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에도 칼을 사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군요."
"대단한 행운이었죠. 스테판에게도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암살자에 대해서는요."
타냐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요. 당신이 그를 설득해줘요. 난 못하니까요."
다음 순간 타냐는 위협적일 만큼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생각 말아요. 세르게이, 그는 나와 사랑을 나누고 내가 창녀라고 생각하면서 나갔어요. 그리고 내가 처녀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말해보았자 믿지 않을 거예요. 내가 일부러 상처를 내서 피를 저기에 묻혀놓았다고 생각할 거예요."
덤덤한 그녀의 말투를 들은 세르게이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화를 낼 때면.........,."
"그를 위해 변명할 생각은 아니겠죠?"
"스테판은 오늘밤에 술이 과했습니다."
"오늘은 문을 잠가야겠어요. 자러 가기 전에 어떻게 좀 처리해줄 수 있겠어요?"
타냐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몸을 돌렸다.
"물론입니다. 방문 밖에서 자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보면 스테판은 다른........"
"스테판을 죽여 버리고 싶어요!"
42
타냐가 집 바깥에 나왔을 때 처음 눈치챈 사실은, 짐을 마차에 싣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이나 이미 말에 오른 스무 명의 호위병이 아니었다. 세 명의 호위병에게 둘러싸인 채 선두 마차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스테판도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알아차린 것은 알리샤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스테판이 자신의 정부를 바로 옆에 데리고 여행하지 않을 만큼 신중해야겠다고 결정했다고 해도, 너무 늦었다는 게 타냐의 결론이었다.
"늦었군."
스테판이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니까요. 금방 일어나서 나올 수는 없잖아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스테판은 조롱하는 그녀의 말투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는지 손을 들어 주변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녀는 세르게이를 쳐다보았다. 움찔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말대로 스테판에게 알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무슨 뜻이오?"
스테판은 두 사람만 남자마자 다그쳤다.
"알게 되실 거예요. 폐하. 짐작해보세요."
그녀는 도움을 받지 않고 마차에 오르려고 했다. 스테판이 그녀를 잡아 돌려세웠다.
"당신이 세르게이에게 한 말을 왜 나에게 해주지 않았소?"
그 때문에 이렇게 으르렁거리는 걸까?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잖아요."
"그는 설득하면서, 나는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안 하다니."
"내가 말했듯이, 당신은 전혀 믿으려고....."
"타냐, 당신은 내 책임 하에 있소! 만약 내가 당신 말을 의심했다면, 당신은 내가 믿을 때까지 말을 하고 또 해야 하오. 이처럼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심을 하지 말았어야 해요."
그녀가 비꼬았다.
"나도 동의하오. 만약 지난밤 내가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난 당신 말을 믿었을 거요. 당신이 필요할 때에 술에 취해 있었던 점은 미안하게 되었소."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난밤 그는 그녀를 범했다. 그녀에게 자신을 원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타냐의 반응에서 어떠한 욕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맞다, 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신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스테판. 술을 마신 탓에 날 의심하는 것보다 더 큰 손상을 입혔으니까요. 알코올과 분노의 도움을 받았겠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당신은 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갔어요.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를걸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예요. 그렇죠? 만약 당신이 알아차린다면 용서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타냐는 다시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깨가 잡혔고, 스테판은 흠칫 놀라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만약 수수께끼 같은 말로 회피할 생각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오. 나는 지금 당장 당신에게 설명을 들어야 하오."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요?"
"다시 내 무릎 위에 올려놓을 거요."
자극적인 경고 탓에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다면 난 당신에게 또 칼을 내던질지 몰라요."
스테판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내주었다.
"좋소. 타냐. 마차에 타시오. 당신은 우릴 너무 기다리게 만들었소."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에요. 당신과 그 암살자 때문이죠."
그녀가 쏘아붙였다.
마차 안으로 너무 힘차게 들어간 타냐는 반대편 문에 가서 부딪힐 뻔했다. 스테판은 바로 뒤따라 올라와 건너편 시트에 앉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요. 타냐, 더 이상 나에게 원하는 게 있소?"
빌어먹을, 지금 그는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는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 없어요!"
타냐는 울음이 터지기 전에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다음 타냐는 뭔가 묵직한 게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당신을 위한 거요."
보석으로 덮인 조그만 상자였다. 그것들? 타냐는 뚜껑을 열었다. 수많은 다이아몬드, 진주, 에메랄드를 박은 목걸이, 반지, 팔지, 술집을 백게 사고도 남을 만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타냐는 보석들이 지닌 의미를 깨달았다. 스테판은 왕답게 지난밤에 대한 보상을 한 것이다. 창녀들이란 화대를 받아야 하니까.
너무나 화가 나서 상자를 창밖으로 던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비로 사용하면 되겠군요."
스테판이 재빨리 상자를 낚아채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내가 돈 버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지는 않을 테죠."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스테판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했다. 술집에서 일하던 때를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혼 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건 당신이 얼마나 악마 같은 사내인지 깨닫기 전의 일이죠."
그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이글거렸다.
"지난밤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당신이 싫건 좋건 간에 당신은 나와 결혼해서 함께 살아야 할 거요."
"내가요?"
타냐는 조롱하려는 뜻이 아니었으나 그는 그렇게 알아들은 게 틀림없었다.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테판은 그녀를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장식이 망가지는 것도 상관없이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서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아찔한 안도감이 사지로 흘러내리며 달콤한 쾌락의 물결을 이루었다. 스테판은 다시 그녀의 몸에 손을 댔고, 다시 키스를 했다. 그의 맹세가 깨졌다. 그것만으로 스테판의 모든 행위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냐는 이번 키스가 기술적으로 계산된 거라는, 그녀의 저항을 녹이고 그에게 매달리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심지어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의 행동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입술과 귓불을 잘근거리던 스테판의 입술이 목을 따라 내려왔다. 그러나 타냐는 그가 더 이상 나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떠들썩한 자신의 감각들을 가라앉히면서 한없는 실망을 달래야 했다.
마침내 스테판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도 피하지 않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더 부드럽게 보였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그의 팔에 기대 있고 오른팔로 그의 목을 감은 자세였다.
타냐가 새치름하게 물었다.
"당신이 맹세에 문제가 생겼나요?"
"약간 화가 났을 뿐이오."
"지옥에나 가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스테판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말을 수정하도록 해주시오. 내 자제력은 완벽하오."
"나에게 키스하고 싶었어요?"
그의 미소가 돌아왔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요?"
"당신의 맹세가........."
"그건 이것과 아무런 상관 없소."
상관이 없다고?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스테판, 당신이 나에게 약속한 게 정확히 뭐죠?"
만약 표정이 지시하는 바가 맞는다면, 그건 스테판에게 반가운 주제가 아니었다.
"내가 꽤 구체적으로 말했다고 기억하는데."
"나의 기억을 되살려줘요."
"다시는 화가 난 상태에서 당신을 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그렇다면 상대는 누가 되는 건가요?"
"다른 출구를 찾아야만 할 거요."
"알리샤?"
미소 짓는 스테판을 보면서 그렇게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그의 기분은 좋아진 듯했으나 그녀의 기분은 그렇게 못했다.
"당신은 알리샤에 대해 질투하지 않는군, 그렇지 않소?"
"눈곱만큼도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나저나 그녀는 어디에 있죠?"
"카르디니아로 가고 있을 거요, 아마도 그녀는 아침 일찍 떠났소."
"난 그녀가 우리와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테판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흉터가 꿈틀거렸다.
타냐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함께 가고 싶었던 거요? 그랬으면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어도 못했을거요."
무슨 뜻이지? 그녀는 속이 상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이 그녀에게 한 말이오. 그렇지 않소?"
타냐는 숨이 찰 만큼 화가 났다.
"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건 그녀가 나에게 한 말과 아주 비슷하군요. 그녀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날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그녀는 뻔뻔스럽게도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해 지레짐작을 했어요. 그 암캐가 나에 대해 또 무슨 거짓말을 한 거죠?"
스테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타냐가 가끔씩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기괴한 이야기를 하고 했고, 알리샤는 그가 아는 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알리샤가 한 말들은 이미 생각하고 있던 내용들이었다.
지난밤 스테판이 알리샤에게 풀려난 다음 술을 마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타냐가 비명을 지를 때 자신이 알리샤와 함께 있었다고 한말- 사실 알리샤는 30분 정도 먼저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이 스스로에 대한 고통을 가중시켰다. 분명 그 말은 효과가 없었다. 타냐는 자신이 위험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며 분노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알리샤에 대한 타냐의 비난도 완전히 믿기 힘들었다. 알리샤는 마음이 좁고 심술궂긴 해도 살인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스테판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타냐에게 노골적으로 물었다.
"만약 그녀가 곁에 있는 게 싫다면, 당신은 내 흉터에도 불구하고 날 받아들일 준비를 하겠소?"
"또 그 흉터 이야기예요? 당신과 알리샤는 정말 똑같군요. 두 사람은 모두 그 빌어먹을 흉터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스테판은 그녀가 자신의 질문을 교묘하게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한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갑자기 타냐를 본래의 자리에 다시 앉혔다.
"당신은 내 손길을 좋아하지 않을 거요. 타냐. 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당신은 일단 키스를 받으면 상대방이 누구든 개의치 않소. 그 사실은 우리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소, 그렇지 않소?"
"그래요."
타냐는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의 조롱은 사실이었다.
43
"내가 키스를 해도 좋은가요?"
180센티미터나 되는 바실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라고 말했소?"
타냐는 얼굴을 붉혔으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사흘이나 나흘이면 카르디니아에 도착한다고 했다. 단치히를 떠난 이래 스테판은 일부러 그녀를 외면했다. 카르파티아에서처럼 완전히 못 본 척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런 정도였다.
스테판은 그녀와 같은 마차에 타지 않고 세르게이나 라자르, 아니면 두 사람을 모두 그녀에게 보내 동행하도록 했고 자신은 바깥에서 바실리와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갔다. 창문을 통해 그의 모습이 언뜻 언뜻 비칠 뿐이었다.
음식을 구하고 밤을 보내기 위해 마을이나 거대한 영지에 멈추었을 때에도 스테판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한번은 야외에서 캠프를 쳤다. 타냐는 스테판이 어디에서 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치히를 떠난 이후, 문명사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울이 점령한 들판은 황량하고 메말랐다. 가물에 콩 나듯, 집이나 농장이 간혹 스쳐 지나갔고 마을을 보기란 더 힘들었다. 가끔씩 나타나는 성들이 타냐의 관심을 끌었으나 그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끔씩 구름이나 안개가 그들을 완전히 감쌌을 때에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타냐는 아직도 맑은 날을 보지 못했다. 가끔 비가 내리고 어제는 쌀쌀한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렸다. 날씨만으로도 기분이 우울한데 스테판의 일까지 겹쳤으므로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타냐는 그들이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을 때 어린애 같은 대답을 한 사실 대해 후회했다. 항상 화를 참지 못한 게 문제였다. 이번에는 질투로 인해 스테판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도 스테판이 자신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일단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 상대가 누구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의 마지막 조롱은 생각할 때마다 신경이 거슬렸다. 처음에는 저항을 하다가 이내 수그러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건 모욕이었다. 타냐가 누구와 잠자리를 함께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은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다른 남자에게 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이 맞는 걸까? 타냐는 다른 남자의 키스를 원치 않았다. 지금 주변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었으나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스테판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 중의 하나가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면, 정말로 열렬한 키스를 한다면...........
타냐는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테판이 주장한 대로 그녀가 바람둥이고 변덕스러운지 알고 싶었다. 그 임무를 이해 적격인 상대가 바실리였다. 그는 자신이 선택된 것을 좋아할지 모른다. 그녀가 순결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부터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원래 창녀가 아니더라도 그런 기질일 있는지 알아내는 임무를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바실리는 또한 지금까지 보아온 남자 중에 가장 잘생겼다. 타냐는 자신을 거칠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총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면, 다음에는 스테판 앞에서 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참이었다. 어쨌거나 카르디니아에 도착하기 전에 결판을 내야했다.
스테판은 그녀가 자신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했으나 이런 식으로는 함께 살 생각이 없었다. 스테판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카르디니아에 도착하여 온 세상이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기 전에 떠날 결심이었다.
타냐는 바실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의심할 수 없는 심각한 말투로 자신의 요구에 대하 말했다.
"나와 키스해도 괜찮냐고 물었어요."
"솔직히, 괜찮지 않소."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서 한 시간 전에 만들어놓은 캠프로 눈길을 돌려 스테판은 찾았다.
타냐는 그의 생각을 짐작했다.
"그는 세르게이와 함께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에 갔어요. 라자르가 그러더군ㅇ."
바실리의 가늘어진 눈동자가 타냐에게 돌아왔다.
"만약 그가 근처에 없다면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요? 그의 질투를 자극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었소?"
"아니에요. 날 위한 거예요. 스테판은 누가 나에게 키스를 해도 난 똑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고 말했거든요. 정말로 그런지 알압고 싶어요."
"농담하지 마시오!"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들려요?"
"스테판의 말은 진심이 아닐 거요.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그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소. 그리고 그가 그렇게........."
"단치히를 떠나기 전에 정확히 그렇게 말했어요."
바실리는 말묵이 막혔다.
"다른 남자들에게 키스해달라고 돌아다니지는 않을 테죠, 공주."
바실리의 말을 듣고, 타냐는 얼굴을 붉혔다.
"만약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면 그럴 리가 없죠. 하지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자아, 그렇게 해줄 건가요?"
"아니, 그럴 수 없소."
바실 리가 무뚝뚝하게, 마침표를 찍듯 대꾸했다.
"어째서요?"
"만약 스테판이 알면 알 죽이려고 들 거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어쨌거나 그런 실험에는 응할 수 없소."
타냐가 놀랐다. 그가 도와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죠."
그녀는 몸을 돌렸다. 바실 리가 손을 내밀어 팔을 잡았다. 정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비교를 할 만한 경험을 몇 번은 가지고 있을 것 아니오. 몇 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남자에게 키스를 받았을 거요. 당신 기억을 되살려보시오."
"그렇게도 해봤어요. 도둑키스를 당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재빨리 칼을 꺼냈기 때문에 무척 짧게 끝나버렸죠."
바실 리가 포기했다.
"오, 알겠소."
바실리는 딱 5초 동안 입술을 갖다 댔다. 바실 리가 뒤로 물러났을 때 타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내가 말하는 의미의 키스가 무엇인지 잘 알 거예요. 이건 아니에요."
바실리는 화가 몹시 난다는 듯 얼굴을 붉히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캠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죠?"
타냐가 물었다.
"만약 제대로 하려면 스테판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하오.
바실리는 고개를 돌려 의심스럽다는 듯,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에게 말하지 않을 거요?"
"만약 하더라도,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거예요."
바실리는 안심이 되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지는 야외에서 캠프를 칠 때 그녀가 잠을 자는 마차 옆이었다. 지금은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잘 때에는 양쪽 문 앞에서 적어도 네 명의 수행원이 잠을 잤다. 시중을 드는 시녀 두 명과 밤새 마차를 지키는 호위병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유럽에 도착할 때까지는 공주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나 이번 여행에서는 공주 대접을 받았다. 그녀의 지시를 받기 위해 하인들이 주변에 상주했다.
바실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걸음을 멈추고 타냐는 끌어당겼다. 머뭇거리면서 시작한 키스였으나, 그는 곧 빠져들고 말았다. 타냐 역시 열심히 반응을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기운을 빼고 감각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바실리는 그 방면으로 스테판 못지 않은 전문가였다.
5분쯤 지나고 그녀가 바실리의 어깨를 톡톡 쳤을 때 실험은 끝났다.
바실리는 타냐를 놓아주고 뒤로 물러서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불길이 일었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대답을 얻었소?"
그녀가 빙긋 웃었다.
"네."
"어떻소?"
"정말로 알고 싶은 거요?"
활짝 웃는 그녀의 표정은 그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바실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 당신은 항상 내 자존심을 건드린다오."
44
타냐는 지난밤 안절부절못한 채 스테판이 캠프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추측컨대 그와 세르게이는 부근에 퍼진 소식을 수집하고, 아침에 통과할 마을에서 그들이 먹을 식사와 가져갈 점심식사를 준비시키기 위해 앞서서 갔을 것이다.
라자르는 그녀에게 이곳에는 산적과 무법자들이 많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외진데다 지형이 험해서, 주변 국가들마저 외면하는 지역이라고 했다.
불행히도 카르디니아로 이어지는 북쪽 길이 바로 이 지역을 가로질렀다. 반나절이면 지나갈 수 있는 거리였다. 사람들은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며 타냐를 안심시켰다. 또한 길고 고된 여행길을 떠날 무렵 그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들도 위험하다고 했다. 곰이나 살쾡이 늑대들이 숲 속을 배회했고 가끔씩 경계를 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혼자 바깥을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받고 또 받았다. 그러나 타냐는 그런 말들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지난밤 스테판이 캠프로 돌아왔을 때 타냐는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밀어냈다. 아침이 되어 캠프를 철수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시도했으나 그는 너무 바쁘다고 했다.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또 피곤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다음 순가,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경고가 떠올랐다. 또한 그녀가 미시시피 강으로 뛰어들었을 때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만으로 스테판이 얼마나 격분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질문으로 그의 주의를 끌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실종 사건 같은 건.
물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너무 가까워도 곤란하지만, '실종'된 마차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대답을 하지 말아야 했다. 또한 스테판이 잔뜩 화를 낼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그 악마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또한 화날 때 그녀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스테판의 약속을 시험해볼 의도는 조금은 있었으나 그건 그저 약간의 양념 정도일 뿐,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저녁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늦은 오후, 그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 마을에서 멈추었을 때를 택했다.
타냐는 다름 사람들이 음식을 거의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고기가 든 두꺼운 빵과 버터를 먹고, 다시 떠날 준비를 위해 시녀들이 주변을 치우기 시작하자마자 마차 뒤로 슬쩍 빠져 나가 사람들 눈을 피해 숲 속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발견'되었을 때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스테판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아니다, 그건 그녀가 받은 경고를 모두 무시하기에 적당한 핑곗거리가 아니었다. 단지 스테판이 자신을 본체만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할까?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랬다고, 그와 결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자신을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찾아내야 했다. 잠이 들었다는 대답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사람들이 길 떠날 채비를 마칠 만한 시간이 흘렀다. 타냐가 이미 마차에 탔다고 생각하고 그냥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곧 웃어버렸다. 그들은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들이 아닌데다가 항상 누군가가 그녀의 마차에 동승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타냐는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겠다고 결정했다.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보다는 몸을 가리기에 더 적당한 곳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헛간 같은 곳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한때 농장으로 사용되다가 버려진 폐가였다. 하지만 지붕과 벽은 아직 남아 있어서 잠시 '잠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타냐가 미처 못한 생각은 누군가가 이미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집으로 간 타냐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조랑말 세 마리였다. 남자 세 명의 무너질 듯한 벽에 기대 있었다. 그녀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남자가 다가와 길을 막았다.
"잠시......"
손 하나가 타냐의 입을 틀어막더니 허리에 팔을 감아 들어 올렸다. 허리를 붙잡은 남자는 이미 재갈까지 준비해둔 상태였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타냐는 허벅지에 매놓은 칼은 뽑아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여자가 아니면 어떻게 해?"
"분명해."
한 남자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가까이 갔을 때 봤어. 숙녀는 이 여자뿐이었어."
"그렇다면 그녀가 뭣 하러 여기까지 와. 이렇게 멀리까지 혼자 들어 올 리가 없다고."
"여기서 이 여자가 뭘 했든 상관없어. 돈만 쉽게 받으면 되는 거야."
"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파벨."
누군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어째서....."
"그녀를 잘 봐. 죽이기 전에 내가 지키고 있을 거야. 그건 라츠코의 결정이야. 아직은 돈을 얼마나 받게 될지 잘 몰라. 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
"우린 추격을 받게 돼."
파벨이 지적했다.
"어쨌거나 추격을 받게 될걸."
다른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우린 항상 추격을 받는데, 달라질 게 뭐가 있지? 그리고 아무도 우릴 찾아내지 못해."
타냐는 자신의 목숨이 지금 당장 위험에 처한 것인지 아니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타냐가 이해할 수 없는 슬라브족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들과 함께 가게 되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꽁꽁 묶여 조그만 조랑말 위에 올려지고 그녀 뒤로 제일 작은 사내가 올라탔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조랑말이 작아서겠지.
왜 유괴를 당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이 사내들이 단치히에서 자신을 죽이려던 누군가와 한패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즉시 죽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희망이 맞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 이 지역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가무잡잡한 피부, 키가 다르다는 것만 빼고는 모두 똑같았다. 한 명은 타냐만 했고, 다른 한 명은 그녀보다 조금 더 컸으며 세 번째 사내는 꽤 컸다. 지금까지 보온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을 타는 데 좀 더 적합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바지와 종아리를 덮은 부츠, 안쪽에 털이 든 짧은 양털 상의를 걸치고, 천으로 된 허리띠를 둘렀다. 밝은 색깔 스카프를 목에 매고 털모자를 썼다. 무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어딘가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남쪽으로,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곧장 달렸다. 마치 악마라도 뒤쫓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저녁이 다 되어서 도착한 외딴 농장이었다. 거기에서 지친 말을 버리고 튼튼한 놈으로 갈아탔다. 그들은 길을 피하고 숲과 언덕으로만 갔다. 심지어 음식을 먹기 위해 멈추지도 않았다. 각기 손에 든 빵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밤새 달려 다음날 정도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높은 산맥에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형적인 마을과 똑같았다. 타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그만 조랑말들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타냐는 완전히 지쳤다. 너무 피곤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조차 되지 않았고, 집안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 느낀 온기가 반갑기만 했다.
통나무집처럼 커다란 방 하나로 된 집이었다. 타냐는 자유로운 몸이 되자마자 방 한가운데에 있는 화로로 다가갔다. 조잡한 가구들과 생활용품들로 방 안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한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무엇인가 먹고 있었다. 몸집이 커다란 중년사내, 거친 표정으로 보아 살아온 인생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납치해온 사내들이 긴 설명을 늘어놓았으나 타냐는 그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저기 놓여 있는 간이침대들을 보면서 만약 자신이 그 중 한 개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은 화롯가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코트를 입었음에도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이런 겨울에 익숙지 않은데다 산 위로 올라갈수록 기운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침묵을 눈치 챈 타냐가 테이블 쪽을 흘끔 보니 세 남자는 가고 나이든 남자만 거기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냐는 자신의 행운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다.
"당신도 영어를 할 것 같지는 않군요."
"영어라......, 4개국어는 아주 잘 할 수 있어. 세 개는 그저 그렇게 하고 영어는 그저 그른 축이지."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타냐는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았으나 그가 안다는 일곱 개 말 가운데 두 가지가 들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당신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
"없다고요?"
"만약 내 부하들이 루비와 아름다운 유리를 구별할 줄 알았다면 당신은 여기에 오지 않아도 좋았지."
그는 테이블에 놓인 목걸이를 집어 들어 타냐에게 보여주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을 죽이는 대가로 받은 거야. 이게 진짜라면 당신은 죽었겠지."
공포에 질리기 전에 명백히 알려주다니, 그는 괜찮은 남자였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가요? 누군가 날 죽이는 대가로 당신 부하들에게 그 목걸이를 주었다는 뜻인가요?"
"정확하군."
"그리고 그 목걸이는 진짜 루비로 만든 게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신은 날 죽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바로 그거요."
"암살범이 누군지 말해줄 수 있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우린 이름 따윈 몰라."
타냐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은?"
"내 부하들은 당신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버렸어. 여기까지 오기 위해 튼튼한 동물들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파벨은 당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살려두면 문제가 생길 거라면서. 그는 귀족들은 모두 증오하니까. 당신 일행은 당신 몸값을 지불할까?"
그는 말을 마치고 킬킬거렸다.
"아마 그럴 거예요. 나도 장담은 못하지만요. 얼마를 원하는지 한번 말해보고 결과를 지켜보지 그래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 방법이 마음에 드는군. 아가씨."
그는 화로 위에 놓인 냄비를 가리켰다.
"먹고 쉬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오래 걸리지 않는가고요?"
"당신 일행이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전혀 먼 곳이 아니지. 그들이 금을 많이 가져오길 기대하라고. 아가씨. 그렇지 안으면 우린 그들을 모두 죽여야만 하니까."
그는 결국 타냐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45
스테판은 천천히 라츠코의 마을로 들어가고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에는 한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7년 전, 새 정부가 싸움을 벌이고 그녀의 아버지 집으로 도망쳤을 때였다. 라츠코가 그녀의 아버지였다. 스테판은 너무 시시한 일이라 무엇 때문인지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말씨름에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녀와 화해를 하러 왔다. 아리나는 뒤따라 온 그를 보며 즐거워했으나 그녀의 구혼자는 아리나를 되찾아 가는 조건으로 결투를 제안했다. 그건 귀찮은 일이었다. 스테판은 그런 귀찮은 일을 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결투에서 이겼다. 얄궂게고 아리나와의 애정은 그 다음날로 끝나버렸다.
라츠코는 집 바깥으로 나와 그를 맞이했다. 스테판은 라츠코의 미소가 지닌 의미를 기억해냈다. 교활한 약탈자는 그의 성질 사나운 딸을 다시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게 7년 전이었다. 그는 딸을 주는 조건으로 스테판에게 50루블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왔나, 스테판?"
사내 두 명의 라츠코와 문 앞에서 합류했다. 스테판은 그들 중 하나인 파벨을, 지난번처럼 호전적인 표정을 짓고 서 있는 그를 보자 불쾌감이 몰려왔다. 마을의 나머지 사람들도 다가와 조용히 스테판을 에워쌌다. 비록 그들이 지닌 무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스테판은 산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잘 알았다.
스테판은 라츠코를 바라보며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내 것을 훔쳤다고 생각하는데."
"자네 거라고? 이런, 그들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던걸."
라츠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스테판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얼마?"
"오백."
"알았어."
"그리고 나와 결토를 해야 해."
파벨이 커다랗게 말했다.
"좋아."
라츠코의 표정으로 보아 그런 도전을 예상하지 못한 개 분명했다. 심지어 그는 막으려고 들었다.
"예전에 경험했잖아. 파벨.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지난번에 그는 맨손으로 널 죽일 뻔했어."
"내 실수는 마지막에 칼을 꺼내지 않았다는 거요."
파벨이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이번에는 칼을 사용할 테니까."
나이 든 사내는 신음소리와 함께 스테판을 돌아보았다.
"유감이 남았나보군. 그는 자네 때문에 아리나가 자신에게 냉담했다고 생각한다네. 비록 그 애는 지금 오스트리아 어떤 공작하고 살고 있지만 말이야. 그러나 여기서 결정권은 나에게 있어. 싸움은 안 돼."
라츠코는 스테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경오, 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테판은 결투를 원했다.
"난 이미 받아들였어. 라츠코, 지금 당장 할 거야."
"스테판!"
라자르가 뒤에서 불렀으나 스테판은 말에서 내리면서 조용히 하라는 눈짓만 보냈다.
바실리는 그냥 물러설 자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운데 한 명이 싸우겠네. 자네는 이런 변덕스런 위험에 뛰어 들어서는 안 되네."
"결정은 내가 해. 타냐를 되돌려 받은 다음에 그녀가 살이 있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해."
바실리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테판은 약혼녀와 마주하기 전에 그의 분노와 공포를 소비할 만한 곳이 필요했다. 24시간 동안 그런 부글거리는 감정을 참아냈던 것만 해야 기적이었다.
"음, 하늘이 그녀를 지켜주는군."
바실리는 놀리듯이 말했다.
"어서 하게. 그래서 화를 모두 풀어버리게나.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을 벌일 때는 생각을 신중하게 하게. 스테판. 이건 진심일세."
스테판은 칼과 갑옷을 벗으면서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는 단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라츠코는 자신의 것을 빌려주었다. 파벨은 자신의 칼을 꺼냈다. 경험에 의하면 이 사내한테서 공정한 결투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때 파벨의 지저분한 계략은 스테판의 분노를 있는 대로 자극했고 스테판은 파벨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꺽은 다음 팔 위쪽을 칼로 찔렀다.
그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눈 채 노려보며 공격 기회를 엿보았다. 둘다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나, 아무도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상대방을 찔러야겠다는 거친 감정뿐이었다.
파벨은 증오와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숲 속에서 타냐를 찾지 못했을 때, 남동생의 죽음을 떠올린 스테판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말 세 마리의 발굽을 발견하자마자 그 감정은 무서운 분노로 뒤바뀌었다. 만약 그녀를 납치해간 범인을 잡는다면, 스테판에게서 자비를 기대하기란 힘든 상황이었다. 아직 파벨이 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게 파벨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마침내 파벨이 껑충 뛰어오르는 척했다. 속임수, 다음 순간 그는 스테판을 넘어뜨리기 위해 발쪽으로 몸을 날렸다. 스테판은 넘어졌으나 곧 몸을 굴렸다. 칼이 땅바닥에 박혔다. 그는 파벨의 손을 발로 차면서 다시 일어났으나 파벨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파벨은 다시 스테판을 넘어뜨리려고 했으나 스테판은 물러서지 않았고, 그들은 서로의 팔목을 잡았다. 서로의 칼날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이 문제였다. 키가 크고 근육질인 두 사람의 힘은 우위를 가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테판이 조금 더 유리했다.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스테판의 칼날이 파벨의 어깨를 찔렀다. 그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스테판은 단도를 거둬들였다. 더 이상은 필요 없었다. 고통은 파벨의 힘을 모두 빨아들였고,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자네가 이겼어."
라츠코는 스테판에게 말하면서 공식적으로 결투가 끝났음을 알렸다.
"만약 그가 또다시 자네에게 도전한다면, 내가 그를 죽여버릴 거야."
스테판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스테판이 알고 싶은 건 그게 전부였다.
라츠코는 엄지손가락으로 집을 가리켰다.
"저 안에서 자고 있어. 하지만 친구, 내 부하들은 우연히 그녀를 만났을 뿐이야. 난 일 때문에 그들은 바르샤바로 보냈어. 누군가가 그들에게 접근해서 저 여자를 죽이라고 매수한 모양이야. 다행히도 내 부하들은 내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거든, 더욱 다행인 사실은 대가로 받은 보석들이 루비가 아닌 유리였다는 거야."
"그래서 나에게 되팔려고 그랬군."
나이 든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가 그녀를 데리고 뭘 할 수 있겠나? 같이 살기에도 난 너무 늙었잖아."
"그녀를 차지하기엔 너무 탐욕스럽지."
"맞아. 하지만 오늘밤은 여기에서 머물러도 좋네. 휴식과............"
라츠코가 빙그레 웃었다.
"라츠코, 우린 지금 떠날 거야. 하지만 고맙군."
집 안으로 들어간 스테판은 자고 있는 타냐를 보았다. 그가 거기에 있는 것도, 앞으로 그녀가 치러야 할 고통도 모르는 체 말이다. 세상 모르고 자는 모습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다. 스테판은 타냐가 자신이 빠졌던 위험에 대해 아는지 궁금했다. 만약 유리가 아닌 진짜 보석을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암살자였다면, 그녀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스테판은 타냐를 깨우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안고 나와서 잠시 세르게이에게 안겨주었다가 말에 올라탄 다음 다시 자신이 받아들였다.
"오. 안녕하세요. 스테판."
타냐가 눈을 다시 감으면서 스테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라츠코를 만났어요? 괜찮은 사내에요. 하지만 그에게 돈을 너무 많이 준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별로 많지 않은 액수요. 만약 그가 제대로 알았다면, 더 엄청난 액수를 불렀을 것이고 난 고스란히 그 돈을 주었을 거요.
"엄청난 액수?"
그녀는 하품을 했다. 일이 다 끝났음을 깨달은 그녀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스테판은 억울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기운을 빼도록 도와준 당신 친구 파벨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거요. 지금 난 당신을 때려주기엔 너무 피곤하니 말이오."
그녀가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날 때리고 싶은 거죠?"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싫어요. 난......"
"나중에!"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당신이라고요. 바보 같은 남자."
타냐가 투덜거렸다.
"당신 고집을 선전하려고? 난 집에 갈 때까지 당신을 이렇게 묶은 채로 내버려둘 거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테판은 마차에 타자마자 그녀를 풀어주었고, 스테판 왕의 방문을 영광이라고 침을 튀기는 남작의 영지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남작은 자신의 화려한 침실까지 스테판에게 양보했다.
타냐는 그와 같은 방을 사용했다. 오후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던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입씨름이 시작되었을 때를 대비해 열심히 답변을 준비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스테판은 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다음 커다란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6
타냐는 아주 편안한 팔걸이 의자에서 밤을 보냈으나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목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눈을 뜨자 스테판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냐는 흠칫 놀랐다. 지난 이틀 동안 얼마나 속을 부글거리며 기다려왔을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해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스테판은 그녀의 몸을 의자에서 들어 올려 거칠게 흔들었다.
"그 지역에 늑대가 얼마나 들끓는지 들었을 텐데!"
스테판은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 그리고 곰과......"
"늑대가 얼마나 빨리 당신 몸을 찢어놓을 수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요?"
스테판의 두 번째 고함을 듣자 그녀는 이해가 되었다.
맙소사, 타냐는 그의 남동생에 대해 잊고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타냐가 없어졌을 때 스테판의 뇌리에 스친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미안해요. 스테판."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당신이 날 못 본척하기에, 그저 주의를 끌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틀렸다는 말을 하려고 했죠. 다른 남자와 키스했는데 아무 느낌도 없었어요. 누구와 키스를 하느냐는 내게 중요한 문제였다고요."
비록 우회적인 방법이었지만 타냐가 그를 원한다는 말을 스테판에게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불안에 가려졌던 그의 분노가 흥분으로 바뀌었다. 이미 손은 타냐의 어깨를 쥐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맞추었다.
타냐는 그 이유를 잘 알았다. 물론, 분노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것은 경솔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타냐는 싸움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녀 자신의 분노도 지난밤 자는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키스가 어떻게 두 사람의 기분을 가라앉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의 불을 당길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즐거움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혀가 뒤엉켰다. 타냐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그를 도왔다. 스커트는 이미 발 아래로 떨어졌다. 벌거벗은 몸이 드러났으나 스테판은 그리 놀라지 안았다.
조금씩 침대로 먼저 다가간 사람은 타냐였다. 입술이 맞닿은 채 두 사람의 몸이 침대 위로 올라가도록 유도한 사람도 그녀였다.
갑자기 그가 정신을 차리거나 자신의 약속을 기억해내면 어떡할까.
타냐는 열기가 식지 않도록 미친 듯이 서둘렀다. 스테판이 그녀처럼 옷을 모두 벗고 났을 때야, 마음이 놓였다. 이내 광포하고 떠들썩한 감각속으로 빠져들었다.
타냐는 그의 손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집중했다. 쾌락이 두 사람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관통했다.
스테판은 더 이상 키스를 하지 않고 타냐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타냐는 그가 화난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타냐가 외쳤다.
"너무해요. 스테판. 여기서 멈추지 말아요."
스테판은 분통을 터뜨리는 타냐를 보며 크게 웃었다.
"왜?"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혀로 핥아주었다.
"내가 당신과 사랑을 나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스테판은 말을 하면서 계속 그녀의 입술을 잘근거렸다.
"다시 생각해봐, 예쁜 아가씨. 당신은 내 거요. 당신 아버지의 축복속에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말이지."
스테판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완전히 내 소유인 여자는 오직 당신뿐이오. 정신없이 당신을 범하진 않소. 내가 약속했잖소."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타냐는 '내 것'과 '완전한 소유'라는 몇 개의 중요 단어가 주는 놀랄 만한 즐거움에 압도당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끌어당겨 입술을 찾았다. 약을 올리듯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스테판은 깊숙이 울리는 쾌락에 몸을 맡기고 신음소리를 내뱉었고, 타냐는 만족스럽게 가쁜 숨을 내쉬었다. 타냐는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스테판은 그녀를 바싹 끌어안으며 자신의 열기로 그녀를 가득 채웠다. 전과는 다르게 그는 천천히 움직였다. 감각을 자극하며, 일부러 경이로움을 연장시키듯, 마침내 몸 속 깊숙이 파고 들었다.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의 느낌과는 달랐다. 하지만 부둥켜안은 채 영원히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아침이 밝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뺨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스테판의 입술을 느끼며,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이 들어 있는 질문을 들으면서 타냐는 조금 놀랐다.
"누구와 키스했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말이오?"
"바실리."
타냐는 대답을 하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즉시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덧붙였다.
"그는 원치 않았어요. 계속 거절하다가, 내가 만약 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다고 말하니까 들어준 거예요."
스테판은 팔꿈치에 의지하여 상체를 일어키더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키스를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당신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아내려고요."
"그 대답을 위해 지난 경험을 더듬어볼 수는 없었소?"
타냐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당신을 실망스키고 싶지 않지만, 스테판. 내 경험은 당신 생각만큼 대단하거나 다양하지 않아요."
"고마운 일이군."
타냐는 숨이 막히려고 했다.
"경험은 없어요. 이것은 순수한 본능일 뿐이죠."
"당신을 모욕하려는 게 아니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여기에 머무를 수 있나요?"
스테판은 웃으면서 그녀를 단단히 안은 채 몸을 굴렸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스테판의 가슴에 묻혀 있었다.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버지가 우리의 도착을 너무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우리가 도착할 때를 이미 알고 있고 만약 늦으면......."
"걱정을 하시겠죠? 알겠어요."
타냐는 한숨을 쉬었다.
스테판은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더니 옷을 입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타냐는 옷을 입기 전에 네 번의 키스를 더 받았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떠날 준비를 마쳤을 때, 타냐는 기분 좋게 슬쩍 물었다.
"어떻게 파벨이 날 데려간 줄 알았죠?"
"별거 아니오."
스테판이 대답했다. 그러나 타냐의 턱을 잡아 올리며 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타냐, 다시는 그런 경고를 무시하면 안 되오."
"그렇다면 다시는 날 못 본 척하지 말아요. 스테판, 난 화가 나면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단 말이에요."
"맙소사, 둘 다 그러지 맙시다."
47
카르디니아의 수도는 그들이 지나온 단치히나 바르샤바와 그리 다르지 않은 도시였다. 타냐는 어째서 자신이 동화에 나오는 성과 장미꽃이 만발한 길을 연상했는지 모른다. 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착할 때쯤 내린 눈은 앞으로 살아갈 그곳을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도시를 둘러싼 벽은 낡고 부스러져 더 이상 본래의 임부인 방어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나, 마치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기분을 안겨주었다.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크고 우아한 집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데도 있었으나, 모두 유럽의 다른 곳에서 보았던 집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상업이 번창한 지역이었다. 크고 작은 가계들, 시장, 행상, 심지어 도매점이 있고 공원과 카페, 교회도 보였다. 눈이 한쪽으로 치워진 길은 마차와 썰매들로 붐볐다. 그에 비해 눈이 치워지지 않은 길은 한가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카다란 청동 동상이 서 있었고, 길가로는 겨울이 되이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왕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광장으로 형성되었다. 탑이 솟구친 성은 아니었지만 무척 거대했다. 3층 높이로, 왕궁 앞에는 공무를 보는 관사들이 있고 옆쪽으로 더 많은 방들이 즐비했다. 광장 뒤쪽으로 병영이 있고 길게 이어진 네 개의 건물 가운데로 정원과 뜰이 있었다.
타냐는 며칠 동안 조그만 마을이나 귀족들의 영지만 보다가 도시를 보니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사로잡은 것은 장엄하고 화려한 왕궁의 자태였다. 현관도 어마어마했다. 건물 전체 높이와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문에는 무장한 경호원들이 늘어서 있었고 홀에는 더 많은 숫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넓은 대리석 복도에는 금색 액자에 넣은 초상화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어디를 가도 모든 게 눈부셨다. 정말 이런 곳에서 산다는 말인가? 만약 그녀의 방으로 안내되는 거라면, 오, 맙소사. 그건 다음 블록 제일 끝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타냐는 스테판의 방 근처에 위치한 그녀의 방으로 안내되지 않았다. 스테판은 즉시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타냐는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테판은 왕이었으나 타냐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스테판으로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타냐가 지금까지 살아온 20년의 세월 동안 왕의 지위를 지킨 사람이었다. 그녀가 만나야 할 사람은 '진짜'왕이었다.
라자르와 다른 사람들이 귀가 닳도록 의식과 예법에 대해 가르쳐주었지만 아직 완전히 몸에 밴 상태가 아니었다.
타냐는 왕의 침실 바깥의 대기실에 앉아 있던 수상에게 한 발을 뒤로 빼며 절을 했다.
그는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스테판, 어째서 돌아오셨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스테판은 웃음을 터뜨리며 나이 든 남자를 포옹했다.
"만약 샌도르께서 보내신 부하가 단치히에서 기다렸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즉시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거요. 그래서 난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부하를? 샌도르는 어떤 사람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린 전갈이 오길 기다렸죠."
"그렇다면......"
스테판은 타냐를 흠끔 보았다.
"암살자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가보군. 알리샤는 그가 샌도르의 부하라고 말했는데."
"암살?"
막스가 외쳤다.
그러나 타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끼어 들었다.
"만약 당신이 그 붉은 머리 여자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가겠다면 나도 함께 가겠어요."
"알리샤가 카르디니아에 도착했는지조차 난 모르오. 어쨌거나 사람을 보내 물어봐야겠군."
타냐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다네프는 그렇지 못했다.
"암살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되물었다.
"우리가 유럽에 도착한 다음, 누군가가 두 번씩이나 공주의 목숨을 누렸소."
스테판은 혀를 차며 덧붙였다.
"그런 일이 다 생기다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샌도르께는 말씀드리지 마십시오. 건강이 좋아지긴 했지만 다시 나빠질까봐 걱정입니다."
"많이 좋아지셨소?"
스테판이 물었다.
"네. 하지만 아버님께서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막스가 빙그레 웃었다.
"가능은 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겁니다. 양위는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좋아지긴 했어도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랍니다. 하지만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편히 쉬신다면 몇 년 정도는 더 사실 수 있다고 합니다. 자, 그럼 이제 더 이상 소개가 필요없는 당신의 약혼녀를 환영해드리고 싶군요."
막스는 타냐를 향해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어머님을 아주 많이 닮으셨습니다. 타티아나 공주님. 야나체크의 독특한 머리카락 색깔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타냐는 왜 갑자기 눈물이 솟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부모님과 아기였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인 모양이었다. 이 사람은 스테판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리라. 어쩌면 오랫동안 돌아올 수 없었던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 때문이지도 모른다.
눈물을 보자마자 스테판은 그녀를 끌어안고서 수상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 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막스. 너무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럴 뿐이오. 당신은 내가 얼마나 참고 견뎌야 했는지 믿지 못할......."
순간 스테판은 옆구리를 찌르는 타냐의 주먹을 느낄 수 있었다.
"봤소?"
"당신은 너무 거만해요.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절반도 이해 못할걸요. 난 당신이......"
"얌전히, 타냐,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내 무릎 위에 당장 올려놓을 거요."
"그럴 수 없을걸요."
"이런이런."
막스가 웃었다. 둘 다 정말로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두 분이 얼마나 정다운지 샌도르께서 보신다면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그는 타냐를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린 걱정을 했답니다. 스테판이......."
"그 정도면 충분해요, 막스."
타냐는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밀인가요? 당신이 날 데려오는 임무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말해주려는 것 같은데요? 만약 그랬다면 난 미국에서 썩고 있을 거예요. 내가 멍청하지 않다고 늘 말했죠, 스테판? 하지만 당신은 항상 잊어버려요."
타냐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아버지를 뵈러 갑시다."
"만약 그가 당신과 다르다면요. 그렇다면 정말 뵙고 싶어요."
"그만 토라지시오. 공주는 우아하게 양보를 하는 법이오."
"하지만 술집 여급은 급소를 찌르죠."
스테판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타냐의 얼굴오 그랬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그들이 서로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말에 좀처러 귀를 기울이지 않던 스테판의 변한 모습을 보자 막시밀리안을 즐거웠다. 샌도르 역시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스테판이 공주를 받아들이지 않을까봐 무척 염려했으나 지금의 모습은 그 이상이었다.
"그러지 마시오. 아직까지는 모른단 말이오."
스테판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막시밀리안은 놀란 표정으로 갑자기 심각해진 그들을 바라보았다.
"막스, 우리가 여기에 왔다고 말해주시오. 그냥 걸어 들어가서 아버지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소."
막스는 우물거리기는 했으나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 편치 못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스테판이 샌도르에게 타냐의 황량하고 우울했던 성장 과정을 요약하여 보고했다. 옆에서 듣던 타냐는 특히 더 불편했다. 스테판이 하는 말을 들어면서 심한 고통을 느낀 타냐는 아이리스의 즐거웠던 기억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샌도르는 눈에 뛸 만큼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날 미워했겠구나."
"왜요? 전 당신을 알지도 모했는걸요."
"내가 너를 토밀로바 부인에게 보낸 사람이니까. 토밀로바 부인은 네 어머니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단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라도 널 지켜줄 사람이었어. 그렇지만 그녀가 널 그렇게 농부의 손에 맡기고 죽어버릴 줄은 생각조차 못했지."
타냐는 돕스가 농부라 불리자 의아했다. 그가 농부라니? 하지만 그녀는 곧 미소를 지으며 샌도르를 안심시켰다.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해보았자 아무 소용없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해 나름대로 만족해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거든요. 응석받이 공주가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이죠. 그런 생활은 저를 강하게, 스테판의 분노와도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들었어요."
샌도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나체크가의 딸다운 말이군. 그들의 말솜씨는 정말 능란했지. 네가 이해해준다니 고맙다. 넌 정말 멋진 여왕이 될 거다."
"언제죠?"
타냐와 스테판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다음주면 너무 빠른가? 사실 우리가 기다려온 세월을 생각한다면 준비도 몇 달은 해야 할 텐데."
불과 일 주일 후에 결혼식을? 타냐는 상관없었다. 샌도르는 이런 일이 있기를 몇 년 동안 기다렸겠지만, 그녀는 스테판을 차지하기 위해 몇 백 년을 기다려온 기분이었다.
48
결혼식 전날.
타냐는 그 동안 스테판을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만나도 아주 잠깐 동안뿐이었다.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다음 궁정 사람들과 주요 귀족들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할 외국 대사와 고관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그녀가 모습을 드러낼 특별행사에 입을 드레스들을 만들어야 했다.
또한 막시밀리안은 경호원을 데리고 와서 그녀의 생명을 노렸던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물어보았다. 타냐는 침대 옆으로 굴리면서 몸소 재현해 보이고 그들이 더 이상 물어볼 만한 것들이 없을 때까지 설명해 주었다. 아직도 위험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노린다는 사실은 끔찍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런 다음 매일매일 가정교사가 나타나서 그녀의 사간을 잡아먹었다.
맙소사, 그녀가 배워야 할 과목들은 엄청났다. 카르디니아의 역사, 그녀 조상들의 역사, 품행, 외교정책, 외교적인 수완, 심지어 언어도 배웠다. 영어가 지난 40년 동안 궁정에서 가르쳐온 여섯 개의 공식 언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타냐가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현재 떠도는 스캔들에 대해 알려주고 잡담을 나누는 임무를 맡은 여자도 있었다.
그 주일부터 면접도 시작되었다. 그녀는 침실에서 시중드는 시녀들을 골라야 했다. 타냐가 여왕이 되었을 때 그녀를 가까이 모시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여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스테판의 숙모이기도 한, 바실리의 어머니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타냐는 며칠 사이에 그녀와 친하게 되었는데 오만한 바실리와는 딴판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타냐를 붙잡아 놓는 바람에, 스테판을 그리워하거나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할 시간마저 없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생각해보던 타냐는, 비록 스테판과 그녀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카르디니아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과거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게 아님을 깨달았다.
타냐는 스테판을 원했고, 스테판 역시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테판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단지 밤을 함께 보내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만 가지고 충분치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했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매번 들먹거리는 그녀에 대한 모욕들은 무슨 뜻일까? 앞으로도 그런 말들을 견디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까?
스테판은 그녀의 사랑에 대해 모른다. 물론, 그녀는 스테판을 고통스러우리만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타냐는 스테판에게 할 말과 질문들을 정확하게 결정하기 전에 이미 복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개인 경호원이 한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암살 가능성 때문에 열두 명의 경호원이 배치되어 3교대로 일했다. 방문 바깥에 서 있다가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고 미리 약속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방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타냐는 스테판의 방으로 가다가 자신의 보좌관과 함께 걸어오는 막시밀리안 다네프를 만났다.
"휴식을 취하셔야죠."
"네, 알아요. 하지만........"
"스테판을 찾고 계신다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십니다. 돌아온 다음부터 무척 바쁘게 일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거든요."
타냐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실망한 표정을 보였는지, 막시밀리안이 한마디 덧붙였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뇨. 난........., 그래요."
타냐가 옆에 선 보좌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막스는 그에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그녀의 경호원도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수상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당신은 스테판이 왜 내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지 알고 있나요?"
타냐는 간단하게 물었다.
"얼굴을?"
"그는 내가 예뻐 보이지 않을 때 더 나를 좋아했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막시말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 공주를 데려오라고 했을 때 반대한 이유와 같을 겁니다."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인가요?"
"공주님이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는 공주님이 무척 아름다울 거라고 예상하고 떠났습니다. 만약 처음에 그가 공주님을 다른 모습으로 보았다면, 오히려 마음이 놓였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막시밀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의 흉터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또 그 흉터 이야긴가요?"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사람들이 그런 암시를 많이 주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게 내 얼굴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있죠. 스테판은 흉터가 생긴 다음부터 아름다운 여자들을 멀리했답니다.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죠. 실제도 몇 몇 여자들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요. 아마도 그 때문에 쓰린 경험이 있었나봅니다. 그가 공주님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이유는 다른 허영심 많은 여자들처럼 공주님도 그의 흉터를 보고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타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가 겪은 문제들, 스테판의 적대감이 모두 자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알리샤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스테판의 친구들도 흉터가 싫지 않느냐고 물었다. 심지어 스테판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흉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맙소사,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테판이 흉터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코웃음을 치거나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타냐는 그런 식으로 스테판을 보지 않았을 뿐더러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어야 했다.
"스테판에게 내가 바보가 아니라고 계속 말해야 하는 건가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아는 줄 알았는데."
막시밀리안이 웃었다.
"도착하신 그날, 공주님은 다른 여자와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스테판은 그 사실을 알고 무척 마음이 놓였을 겁니다."
"스테판은 몰라요. 오늘밤 자기 전에 내 방으로 와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게요."
"그가 아직도......"
"스테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알고 싶은 것도 바로 그거예요."
타냐가 방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을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타냐가 잠들었다면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는지 아주 작은 소리로 노크를 했다. 예전에는 노크도 없이 방문을 홱 열어젖혔으나 그녀의 왕은 요즈음 꽤 사려 깊은 인물로 변모했다.
타냐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문을 닫는 스테판은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날 유혹하려고 초대한 거요?"
타냐는 웃음을 터뜨리며 벽난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결혼 첫날밤 입도록 되어 있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오늘밤에 사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깊이 파이고 몸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얇은 옷이었다. 사실 소매 부분을 거의 투명하다 시피 했다.
"유혹하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하지만 아니에요. 우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뜻이오?"
그는 앞으로 다가서며 다그치더니,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서 타냐를 내려다보았다.
"확신?"
"나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오."
그의 호전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확신해요. 하지만 그 전에 알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만약 이 결혼이 의무가 아니라면, 만약 당신 아버지의 소원 때문이 아니라면, 그래도 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싶어요?"
"그렇소!"
거침없는 대답을 들은 타냐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왜 하를 내는 거죠?"
"결혼식 전날 밤 신부가 신랑을 만나자고 하는 것은 대부분 파혼을 원하기 때문이오."
타냐의 눈동자에 따스한 기운이 떠올랐다.
"약간의 확신이 필요해서 그랬다고는 생각 안 해요?"
"당신이?"
"몇 가지 의심나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와의 결혼을 원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어요. 게다가 나와 당신은 서로 잘 타협하지 못할거라고......."
"사람은 마음이 바뀔 수도 있소."
"당신은 나의 아름다움을 싫어해요. 그 사실을 오늘까지는 이해를 못했죠."
스테판의 몸이 굳었다.
"이해라니, 무엇을?"
그녀는 질문을 무지하고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보통의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죠? 같이 자고, 아기를 낳고..........."
스테판은 재빨리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타냐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키스를 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키스는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그런 다음에도 그는 그녀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냐는 그의 가슴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나요, 스테판 바로니? 당신의 얼굴 때문만이 아니에요. 내가 당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당신이 못생기지 않았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했어요. 당신의 급한 성질도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괜찮았어요. 그건.."
"그만!"
타냐는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당신은 날 못 믿는군요. 그렇죠? 미안해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는 문제에 대해 경솔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개인적으로, 난 처음부터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몰랐어요. 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매력적인 눈동자를 보느라고 흉터가 있는 줄도 몰랐죠. 그리고 내가 고통을 받았듯이 여기에도 고통에 시달린 남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연민을 느꼈을 뿐이에요."
타냐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용감하게 손을 뻗어 그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내가 당신을 볼 때 흉터는 보이지 않았어요. 나에게 열정이 뭔지 보여준 잘새긴 검은 악마가 보일 뿐이에요. 다른 어떤 남자도 당신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해요. 스테판, 만약 그 흉터가 거슬렸다면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테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냐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의 지저분한 과거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격만 맞으면 어느 남자든 상관없는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왕국을 전부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스테판은 완고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고백의 밤이에요. 당신은 더 커다란 것을 원하는 군요. 내가 당신과 함께 단치히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처녀였어요. 당신은 그날 밤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내 순결을 훔친 게 아니에요. 내가 준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믿을 때까지 내가 이 말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네가 처녀를 몰라볼 거라고 생각하오? 그건 불가능하오. 타냐."
스테판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내뱉었다.
"물론, 그렇겠죠. 난 몇 년 동안 창녀로 지냈으니까요."
스테판은 그녀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그만두시오. 당신 과거에 대해 난 그 무엇도 상관하지 않소. 난 당신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당신은 이제 내 것이고 나는........... 그것만이 문제될 뿐이오."
타냐는 그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무엇 때문에 멈춘 걸까? 그 빌어먹을 흉터 때문에? 이렇게 말했는데도 확신을 갖지 못하는 걸까? 물론, 그렇겠지. 그녀가 돈 때문에 그에게 왔다고 생각하는 한은 말이다. 타냐는 자존심 때문에 그에게 침대 시트를 보여주지 못했고, 세르게이에게 대신 말해달라는 부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증명해야만 했다.
과거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맙소사, 타냐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스테판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라면, 스테판은 이미 그녀를 사랑했다. 틀림없었다.
타냐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몸을 묻고 키스를 하기 위해 먼저 고개를 끌어당겼다. 너무나 행복해서 그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스테판이 그녀의 몸을 세게 안았을 때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러나 곧 그는 키스를 멈추고 타냐를 세게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가슴에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몸이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오늘밤에는 당신과 자지 않을 거요. 타냐. 이번에 만족을 느끼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텐데, 예식을 앞둔 당신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
"스테판!"
스테판은 그녀의 턱을 들고 가볍게 입술을 맞춘 다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에."
그런 약속을 받은 그녀가 어떻게 더 입씨름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49
타냐의 웨딩드레스는 조그만 진주들이 박힌 하얀 공단과 은실과 하얀레이스의 화려한 조화였다. 무척이나 긴 그 드레스는 시중드는 사람의 도움 없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정교하고 복잡했다. 샌도르는 자신의 아들에게 그녀를 인도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피곤해야만 했다. 지난밤 스테판이 나간 뒤, 해결하지 못한 욕망과 기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뒤척거렸다. 지금은 피곤을 느끼기에 너무나 흥분한 상태였다. 동이 트자마자 결혼 준비를 해주기 위해 여자들이 도착했고, 그들은 아침 내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마지막 다이아몬드 핀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자리를 잡자마자 사람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타냐는 그들이 자신들의 솜씨에 위압당한 까닭만은 아니라는 것을 한참 만에 깨달았다.
타냐는 방 안으로 들어선 알리샤에 향해 몸을 돌렸다.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방문 앞에 선 보초병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리샤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그녀의 보초병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혹은 전 애인이 이제 곧 아내가 될 신부에게 축하의 말을 하는 게 관례란 말인가?
타냐는 시녀들을 물리쳤다. 이야깃거리가 되어서는 안 됐다.
단둘이 남게 되자, 그녀는 알리샤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만약 다시 한 번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다면, 타냐는 정말 진저리를 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리샤는 새치름한 미소와 폭탄 선언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조더 드러냈다.
"어젯밤 스테판이 어디에서 잤는지 알아요?"
타냐는 순간 의심이 들었으나 재빨리 떨쳐버렸다. 그녀는 알리샤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하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알고 있죠."
알리샤는 일말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 타냐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거나 스테판이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선언할 수 없었다. 사실 알리샤는 스테판이 지난밤을 어디에서 보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자신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만약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서 왔다면, 알리샤, 지금 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신의 첫 번째 전략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붉은 머리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스테판과의 결혼을 거절한 다면, 그는 의무 때문에 하는 이 결혼에서 벗어날 핑계가 생기는 거예요. 그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당신은 자존심도 없나요?"
"물론. 자존심이 있죠. 하지만......"
타냐는 알리샤의 루비 목걸이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건 거의........... 아니. 라츠코가 타냐를 죽이는 대가로 받았다며 보여주었던 목걸이와 똑같았다. 이것을 보고 만든 목걸이가 분명했다.
분노가 솟구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시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졌다. 바로 그녀 앞에 서 있다니, 하지만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타냐는 가만히 칼을 있는 곳으로 손을 뻗치다가 이젠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단장을 위해 찾아온 여자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치워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화장대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칼을 꺼내들었다. 그런 다음 알리샤를 향해 돌아서서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갔다.
"넌 항상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네 자신도 잘 알 거야. 스테판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나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 그는 날 사랑해. 알리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지.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타냐는 알리샤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한 거 아닌가?"
알리샤의 얼굴이 타냐의 웨딩드레스만큼이나 하얗게 변했다. 푸른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했다.
"그만...... 제발!"
"이유를 말해봐."
타냐가 씩씩거렸다.
"우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그에게 2년이나 투자했는데, 그가 왕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그렇게 되자 날 버렸어요. 그래요, 난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눈치 챘어요. 내가 당신을 통해 상처를 입히고자 한 사람은 바로 스테판이에요. 하지만 진정하고 다시 생각하니까 덜컥 겁이 났어요. 하나님께 맹세하지만 난 살인자가 아니에요. 난 그저 화가 나서......... 타티아나, 만약 내가 정말로 당신이 죽길 원했다면 진짜 루비를 사용했을 거예요."
그 설명이 사실일지 모르지마 타냐의 용서를 구하기엔 부족했다.
"스테판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단 말이야?"
알리샤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오. 하나님. 제발 그에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절 죽여버릴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해요. 왕실에 대한 어떠한 위협도 반역으로 간주되니까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스테판에게까지 갈 것도 없어. 난 아직 네 목을 베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않았으니까."
타냐가 칼을 더 깊이 들이밀었다.
알리샤가 눈을 크게 떴다.
"맹세할게요. 타티아나, 내 생명을 걸고서요.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을 거예요. 이 나라를 떠나겠어요. 난.........."
"그래."
타냐가 성급하게 말을 잘랐다.
"내가 왜 이렇게 터무니없이 관대한지는 모르겠지만 네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하지만 막시밀리안 다네프에게는 모두 알려두겠어. 내 목숨을 다시 노린다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자, 어서 나가라. 알리샤. 이 나라를 떠나."
문이 닫힌 뒤, 타냐는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킨 여자를 그저 목에 찰과상만 입힌 채 풀어준 게 바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도 암살범을 찾고 있는 막시밀리안의 비밀경호원들에게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냥 시간을 허비하도록.........
"당신은 적을 아주 잘 다루는군. 야나체크. 어쩌면 내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막시밀리안 다네프에게 전갈을 남길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은 데. 내 행동의 대가를 다른 사람이 치른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니까."
몸을 획 돌린 타냐는 거실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상들에 대한 내용과 함께 자노스 스템볼로프와 그 가족들의 조그만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스테판의 말이 맞았다. 가무잡잡한 피부, 금발머리와 푸른 눈동자, 이 남자는 젊은 자노스의 화신이었다. 그의 총은 정확하게 타냐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이반 스템볼로프?"
그녀가 넘겨짚었다.
"아주 영리하군, 공주."
그는 놀리듯이 꾸벅 인사를 했다.
"배가 침몰했는데 어떻게 살아났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냉혈의 살인자 같은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정도로 뛰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난 헤엄을 잘 치지."
"바라들 헤엄쳐서 건넜다는 말인가요?"
"난 난파선에서 떨어졌어. 나의 유일한 희망은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자살 행위예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기회가 도리어 날 살려주었지. 난 다음날 기적적으로 터키 선박에 발견되어 구조됐고....., 기적이지. 내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라는 하나님의 뜻이야."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 그의 행동은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그녀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내부에는 그녀에 대한 증오가 가득할지 몰라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날 쏜다면, 내 경호원들이 즉시 달려올 거예요. 당신은 도망칠 수 없어요. 당신도 죽게 돼요."
"난 죽고 싶지 않지만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 자아, 문에서 떨어지시지. 공주."
타냐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 역시 조끔씩 다가왔다. 아마도 도망갈 시간을 조금이라고 벌고자 문을 잠그려는 생각일 것이다.
타냐는 그의 주의를 흩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죠?"
"저기에 있는 창문으로."
그는 거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이 틀 때쯤 해서 오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빌어먹을 시녀들이 너무 일찍 왔어. 커튼 뒤에 숨어 있느라 혼났지."
"아침 내내 여기서 기다렸다는 말인가요?"
"내 인내심이야 대단하니까. 공주.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20년을 기다렸잖아?"
타냐는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른 때에 비해 그다지 겁도 나지 않았다.
"그건 인내심이라고 부를 수 없어요. 광신이라고 해야 맞겠죠."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문으로 손을 내밀려 킬킬거렸다.
"걸쇠에 손을 대면 소리를 지를 거예요."
타냐가 쏘아붙이자, 그는 잠시 주저했다.
"그건 별로 현명한 생각이 아닌걸. 공주."
"어쨌거나 당신은 날 죽일 테죠. 기왕이면 나도 당신을 함께 데려가야 하지 않겠어요?"
타냐는 어깨를 으쓱했다.
"먼저 살려달라고 빌어보면 어떨까? 조금 전 당신의 조그만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괜찮은데."
"절대로 그런 소리를 듣지는 못할 거예요. 그런데 당신에게 칼이 있군요."
타냐는 그의 허리에 있는 단도를 보았다.
"나에게도 칼이 있어요. 정정당당하게 나와 겨루어보면 어때요? 칼이 총보다는 조용하기도 할 테고."
이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싸움을? 그 칼로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려고?"
타냐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렇다면 단치히에서 밤에 공격한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물론 나지. 당신과 함께 바로니가 들어오길 거기에서 몇 달 동안이나 기다렸어."
"하지만 나를 데리고 오는 줄 어떻게 알았죠?"
"만약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결국에는 당신을 다시 데리고 올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한번 정정당당히 싸워볼 거예요?"
그녀는 그를 자극했다.
"이건 당신 가족들이 시작한 거야."
"유리 스템볼로프는 살인을 했어요. 내 아버지는 정당한 벌을 내렸을 뿐이에요. 그런데 당신네 가족들은 모두 유리처럼 변해버린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총을 허리춤에 집어 놓고 단검을 빼들었다. 마침내 타냐는 자신의 심장이 마구 뛰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반 스템볼로프와 싸우게 될 것이다. 그는 남자였다. 비록 타냐가 칼 쓰는 법을 안다고 해도 남자와 직접 맞대결을 벌여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 알리샤의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타냐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문이 확 열리더니 스테판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간, 모든 게 빠르게 움직였다. 스테판은 손에 들고 있던 바지로-아마 타냐에게 배운 수법일 것이다-이반의 얼굴을 때렸다. 경호원들이 곧바로 들이닥쳤지만 스테판이 더 빨랐다. 스테판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이반의 허리띠에서 총을 뽑아 주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냐는 이반의 몸뚱이를 들고 나가는 경호원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에야 몸이 떨려왔다. 한 사내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인식한 것보다 더 두려웠던 상황이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괜찬소? 다친 데는?"
타냐는 어느새 자신이 스테판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날랐다.
"난 괜찮아요. 정말로요."
하지만 그녀의 몸은 심하게 떨렸다. 스테판은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아주었다.
"그 악마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단 말이오?"
스테판이 물었다.
"창문."
"타냐, 다 끝났소. 이제 당신에겐 적이 없소. 만약 당신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 그들을 죽일 거요. 당신이 다치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않겠소."
"나도 알아요."
타냐는 마음이 약간 진정되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들어온 거죠?"
타냐가 스테판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결혼 예복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사사가 무슨 옷을 꺼낸 줄 아시오? 바로 이것이었소!"
"잘못 골랐나요?"
타냐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룩이 져 있었소, 타냐."
"오, 그래서 기분이 나빴던 거로군요. 하지만...."
그는 바지를 그녀의 얼굴에 들이밀면서 소리를 질렀다.
"피로 말이오!"
타냐는 혀를 찼다.
"사샤가 제대로 보지 못했나보군요. 어떻게 그것을 못 볼 수 있었을까요?"
"못 본 게 아니오. 나에게 알려주었소."
그런 다음 그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은 그게 누구의 피인지 물어보지 않았소. 타냐."
"당신의 피인가요?"
"아니오."
"그럼, 당신이 파벨과 싸울 때......"
"아니오, 난 단치히에 도착한 이후로 그 바지를 한 번도 입지 않았소."
"오!"
타냐는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난 건가요? 당신은 그런 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당신이 날 만났을 때 처녀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만약 처녀였다면 문제가 된단 말이오!"
언성이 높아지자 타냐는 한 발 물러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당신이 나에게 설명해야 해요. 스테판. 당신은 내가 정숙한 여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소! 그리고 당신은 그런 내 실수를 한 번도 고쳐주려고 하지 않았단 말이오."
"아니에요.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날 아침에 당신에게 말했어요. 당신과 함께 즐겼던 그런 경험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놀리는 것처럼 말했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이오?"
타냐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결혼식 날이었다. 예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입씨름을 벌일 참인가?
"스테판,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건가요? 내가 처녀였다는 사실을 몰라서 화가 났어요?"
"그도 그렇지만....."
스테판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나 자신에게 화가 났소."
타냐가 빙그레 웃었다.
"놀라운 일은 계속 일어날 거예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화가 났소."
"이미 알고 있었어요."
"타냐, 당신이 내게 반응을 보일 때마다 난 당신이 창녀였기 때문에, 남자 없이 너무 오래 지내서 그렇다고 생각했소. 그리고 그때마다 화가 치솟았소. 날 만나기 전에 당신을 탐했던 남자들에게 질투가 났소. 당신은 그런 나를 그냥 내버려두었소. 그저 비꼬는 말로 자극이나 했지 한 번도 자신을 방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소.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인정까지 했소. 당신은......."
"그건, 당신이 내게 모욕적인 말을 했을 때만 그랬어요."
타냐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당신은 내가 처녀라고 말했을 때 그저 놀리는 투였다고 말했어요. 그럼 아니라고 말했을 때도 같은 말투였다고 생각하지 못했나요?"
"너무 화가 난 상태였소. 하지만 당신이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어떻게요? 당신에게 날 허락하지 않고서 어떻게 순결을 증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작 내가 그렇게 했을 때조차 아무것도 증명이 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나요?"
스테판은 얼굴을 붉혔다.
"난 당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소. 심지어 지난밤 당신이 진지하게 말했을 때조차 난 그걸 무시했소."
"아뇨, 그렇지 않아요."
타냐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는 그에게 다가서도 안전할 것 같았다.
타냐는 손을 뻗어 그의 흉터를 만져보았다.
"어제 당신이 한 말은 모든 것을 덮어주었어요. 스테판. 당신은 내 과거가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날 사랑한다고 말했죠. 당신은 날 사랑해요, 그렇죠?"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는 게 불가능할 만큼."
타냐가 그의 눈동자에 남이 있는 의혹을 눈치챌 무렵, 스테판이 말을 이었다.
"정말로 내 흉터가 거슬리지 않소?"
"물론, 거슬려요. 너무나 기괴하게 생겼거든요."
타냐가 그의 흉터에 키스를 했다.
스테판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곧 당신의 놀리는 말투에 익숙해질 거요."
"그래야겠죠?"
"만약 당신이 내 못생긴 얼굴을 참아낼 수 있다면, 또한 나의 급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해줄 수 있다면....."
"난 당신의 급한 성격이 좋아졌어요."
스테판은 웃음을 터뜨렸으나 그녀는 말을 이었다.
"스테판, 절대로 난 어떤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죠.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할 권리를 남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이에요. 그런 내가 당신과 기꺼이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거에요."
"날 사랑한다는?"
"그래요, 이 바보 같은 남자."
환한 미소가 떠오른 스테판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였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제 결혼식을 올려야 하오, 타냐, 만약 화가 풀렸다면 말이오."
"무슨 화 말이에요? 폐하, 교회에 못 가고 있는 건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타냐가 활짝 웃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내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