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파괴자 2
제6장 임 따라가는 길
1
그날 밤 꿈에 강한섭은 또 목쉰 노랫소리와 함성을 들었다. 깊은 겨울, 한밤중이었다. 밖에는 차가운 삭풍이 불고 있었다. 골목을 달려오는 바람에 루핑 조각이 펄럭거리고 전선줄이 잉잉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강한섭은 선잠을 잤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머리맡이 어수선했다. 그래서 그런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 않게 목쉰 여공들의 노랫소리, 함성, 울음소리.... 그리고 미싱이 돌아가는 소리가 드르륵 드르륵 들리곤 했다.
"아저씨, 우리는 싸울 거예요."
어떤 소녀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투쟁이 신문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우린 싸워요!"
소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갑자기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회사가 깡패들을 동원했어요."
그것은 유미자의 앳된 목소리였다. 경찰이 조합원들을 마구 잡아 가고 있었다.
"유미자는 죽었어요."
갑자기 아내의 퉁명스러운 소리가 강한섭의 귓전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 창문이 겨우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강한섭은 머리맡을 더듬어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치 않은 잠결에 유미자를 만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미자는 죽은 지 오래였고 남해방직 사태도 이미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관련된 여공들은 모조리 구속되거나 해고되었다. 남해방직은 다시 정상적인 조업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너구리를 잡는 거예요?"
강한섭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두어 모금 빨았을 때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들어오며 종알거렸다. 강한섭은 침대에 누운 채 아내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몸에 해롭다는 식전 담배 그만 피우고 일찍 일어났으면 운동할 준비나 좀 하세요."
"담배나 마저 피우구...."
강한섭은 아내의 잔소리가 또 시작된다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몰랐으나 결혼을 한 뒤에는 아내의 목소리가 꽤나 앙칼지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술도 그만 마시고요."
"아침부터 왠 바가지야?"
"당신 요즈음 술에 절어서 산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술 사줬어?"
"이이가!"
그의 아내가 하얗게 눈을 흘기며 시트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강한섭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당신 몸에서 항상 술 냄새가 나요. 그게 얼마나 역겨운지 알고 있기나 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강한섭은 침대에서 일어나 추리닝을 주섬주섬 걸쳐 입기 시작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고 있느니 서둘러 옷 입고 운동이나 하러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속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게 술 마시다가 탈 날 거야."
그의 아내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 그래?"
"멀쩡한 처녀 데려왔으면 호강을 시키지는 못하고 맨날 술에 절어 사니 무슨 재미가 있어야죠."
"그래도 아침 운동은 늘 함께 하잖아?"
강한섭은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운동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아내와 결혼한 지 벌써 6개월이 되었으나 아침 운동은 항상 즐겁게 하는 편이었다.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아내와 함께 골목으로 나오자 동쪽 하늘이 붉으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겨울 해가 떠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한섭은 추리닝의 깃을 바짝 올려세웠다. 날씨가 제법 차가웠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지고 손이 시렸다.
"고대 정문까지 뛸까?"
강한섭은 하얀 추리닝을 입은 아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좋아요."
아내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테니스 선수로 활동을 했었다. 국가대표에 선발되지는 못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은행에 취업이 되었고, 은행에서 선수로 활동을 하다가 강한섭을 만났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아내는 몸매가 균형이 잡혀 있고 테니스공처럼 팽팽한 탄력을 갖고 있었다. 안암동 주택가를 빠져나와 안암로로 나서자 차량이 드문드문 보였다. 새벽인데도 노선버스는 학생들과 일터로 나가는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강한섭은 아내와 보폭을 맞추며 고려대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에 카터가 당선된 이후 한국에도 조깅 붐이 선풍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이 조깅을 하는 것은 그의 아내의 닥달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운동을 하지 않는 강한섭에게 조깅만은 한사코 시켰는데 그것이 습관이 되자 강한섭도 아침이면 으레 조깅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영혼 마차가 뭐예요?"
강한섭이 안암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아내가 불쑥 물었다.
"영혼 마차?"
"어젯밤 취해서 시황이 어쩌니 영혼 마차가 어쩌니 하고 횡설수설 하던데요?"
"횡설수설?"
강한섭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왜요?"
"하늘 같은 남편에게 무슨 말투가 그래?"
"피!"
그의 아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남편 알기를 개밥의 도토리처럼 알다간 혼나!"
"맨날 술에 절어 사는 남편이 어디 남편이에요?"
"어허! 술에 절어 살다니!"
강한섭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영혼 마차가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기나 하세요."
"영혼 마차는 시황의 영혼이 타고 다닌다는 마차야."
"시황이 누군데요?"
"중국 최초의 황제지."
"진의 시황?"
"응."
그러자 그의 아내가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왜 웃어?"
"당신이 어젯밤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시황이 영혼 마차를 타고 서울에 왔대요."
"그랬나?"
강한섭은 공허하게 웃었다. 강한섭이 요즈음에 중국 진나라의 시황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왜 웃어요?"
"실은 요즈음 영혼 마차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써 보려고 그래."
"소설이요?"
"응."
"왜 갑자기 소설예요?"
"신문은 사실을 보도하는 데 한계가 있어."
강한섭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문이 보도하지 못하는 걸 소설은 어떻게 표현해요?"
"일단 써 놓으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발표할 수 있을 거야."
"아직도 계엄사가 검열을 하나요? 대통령이 민주화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구속된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모두 석방되었잖아요?"
"12.12 사태가 심상치 않아."
"참모총장 연행사건이요?"
"응."
"참모총장도 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잖아요. 대통령 재가도 받았구....."
"실은 그게 대통령이 재가하기 전에 연행되었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군의 반란이야."
"반란?"
"엄격하게 따지면 정권 탈취를 위한 내란이지."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침묵을 강요당할 거야."
강한섭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시계가 불량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절대 권력자가 쓰러진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대권을 쟁취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막후에서 활발한 공작을 벌이고 있는 군부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대 정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붉은 해가 본관 건물 위로 솟아올랐다. 강한섭은 아내와 함께 정문으로 들어가 간단한 체조를 했다. 강한섭이 아내 채은숙과 결혼한 뒤 매일 되풀이하는 아침 운동이었다. 그의 아내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으나 강한섭이 고려대를 졸업한 탓에 고려대를 찾아와 아침 운동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상이었다. 부마사태가 터져 고려대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그것이 10.26으로 이어져 계엄이 선포되는 바람에 육중한 탱크와 군대가 캠퍼스에 주둔했을 때 외에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운동을 했었다. 교정은 조용했다. 강한섭은 아내와 함께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안암로로 나왔다. 안암로도 이제는 차량으로 메꾸어져 있었다. 노선버스들이 자욱하게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고 정류장마다 학생들이 빽빽했다. 강한섭은 천천히 뛰었다. 사람들이 한가하게 아침 운동을 하는 그들 부부를 아니꼽다는 듯이 힐끔거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공연히 뒷덜미가 근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처음부터 노동자로 태어났던 것이 아녜요."
다시 유미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후벼 팠다. 유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음이 섞여 있었다. 강한섭이 유미자를 처음 만난 것은 인천에 있는 남해방직이 격렬한 노동쟁의에 휘말려 있을 때였다. 그때도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어서 정치인과 학생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숨을 죽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유신체재를 부정하거나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영장도 없이 체포되거나 구속되었다. 신문은 매일 같이 구속자 명단을 보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긴급조치에 위반된다는 보도지침이 내리자 중지되고 말았다. 국민들은 누가, 어떻게 얼마나 구속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유미자는 남해방직의 여공이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을 전전하다가 인천의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그곳이 남해방직이었다. 남해방직은 여공들만 해도 2천 명이 넘는 공장이었다. 일찍부터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었으나 조합 간부들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통치권 차원에서 법률적으로 유보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노동자들은 그러한 실정을 용인하지 않았다. 남해방직의 여공들은 조합원들의 권익을 등한시하는 노동조합 집행부에 반기를 들었다. 조합 집행부와 회사 쪽에서 그 사실을 알고 여공들을 회유하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대의원 총회에서 조합 집행부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조합 집행부를 구성했다. 새로운 집행부는 전투적인 집행부였다. 그들은 회사가 집행부를 인정하기도 전에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회사는 새 집행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새 집행부는 즉각 단체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단체행동권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새 집행부는 단체행동권 금지 조항을 철폐하라는 요구를 내 세웠다. 그것은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정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정치 행위로 간주하여 강력한 대응을 하기로 했다. 게다가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시위와 집회까지 금지하고 있었다. 경찰이 남해방직에 투입되었다. 경찰은 대부분이 나이 어린 여공들인 남해방직 여공들을 경찰봉으로 두들겨 패서 해산시켰다. 여공들은 돌멩이를 집어 던지며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화가 난 경찰은 여공들의 머리채를 더욱 난폭하게 잡아끌고 발길질을 해댔다. 여공들은 경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오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경찰은 벌떼 같이 달려들었다. 여공들은 연행당하지 않기 위하여 상의를 모두 벗고 공장 마당에 인간 사슬을 만들고 드러누웠다. 경찰이 일순 주춤했다. 여공들은 상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기자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달려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공들은 비장한 각오로 투쟁을 하는 것이었으나 기자들에게는 취재대상일 뿐이었다. 물론 신문에는 한 줄의 기사로도 보도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보도하고 보도하지 않는 것은 데스크의 문제지 취재기자의 문제는 아니었다. 강한섭도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달려가 카메라의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다. 여공들은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여공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를 토하듯이 절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한섭은 갑자기 목이 메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이 새끼들 뭐하는 거야?"
"카메라 뺏어!"
그때 성난 고함소리와 함께 경찰이 우르르 달려오며 사정없이 경찰봉을 휘둘렀다. 강한섭은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재빨리 카메라를 가슴 속에 품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의 몽둥이가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억!"
강한섭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여공들이 오물을 뿌린 공장 바닥으로 뒹굴었다.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깨의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누군가 구둣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강한섭은 재빨리 일어나서 공장 바깥으로 튀었다. 공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복을 입은 경찰은 상의를 벗은 여공들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강제로 끌어내어 닭장차에 싣고 있었다. 울부짖고 몸부림치는 여공들을 경찰은 마구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개새끼들!"
강한섭은 경찰에게서 멀리 떨어지자 침을 칵 뱉았다. 옷에서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잡아라!"
"저 년이 튄다!"
그때 경찰의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상의를 입지 않은 여공 하나가 그가 있는 쪽으로 총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잡아!"
경찰 하나가 계속 악을 써댔다.
"놔둬!"
"왜 잡아?"
"너는 누이동생도 없냐?"
경찰들이 여공을 잡기 위해 우르르 몰려오자 구경꾼들과 기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경찰들이 주춤했다. 강한섭은 그 틈에 재빨리 잠바를 벗어 여공에게 뒤집어씌워 주었다. 여공이 상의를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보기에 민망했다.
"어서 달아나!"
"고마워요."
여공이 생긋 웃었다. 티 하나 없는 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어서 뛰어!"
강한섭이 다시 재촉을 하자 여공이 재빨리 골목으로 달려갔다. 구경꾼들과 기자들은 경찰의 앞을 가로막고 노동자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 청춘
강한섭도 기자의 신분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노래를 불렀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공이 강한섭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였다. 그 여공의 이름이 유미자였다. 강한섭은 어수선한 정국 때문에 남해방직의 노동쟁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인천에서 어린 여공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을 사진까지 찍었으면서도 보도를 하지 못해 늘 가슴이 묵직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몇 번 전화를 드렸는데 안 계시대요."
유미자는 신문사의 편집국까지 찾아왔다.
"어? 어떻게 왔어?"
"잠바를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그래?"
강한섭은 쓴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유미자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왜 웃어요?"
유미자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물었다.
"나갈까?"
강한섭은 유미자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유미자를 데리고 신문사를 나왔다. 아직 퇴근할 시간은 되지 않았으나 기사 마감 시간은 이미 지났고 당직도 걸리지 않은 날이었다.
"시간이 좀 이르지만 저녁 먹을래?"
"맛있는 거 사 주실래요?"
"맛있는 게 뭔데?"
"탕수육 같은 거요."
"왜 그렇게 비싼 것을 먹으려고 그러지?"
강한섭은 유미자가 귀여웠다. 일부러 농담을 했다.
"아저씨가 내 가슴을 봤잖아요?"
"뭐?"
강한섭은 어이가 없었다.
"공짜로 보셨으니 그 값을 내셔야죠."
유미자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강한섭은 유미자의 풋사과처럼 작은 가슴을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유미자는 확실히 대찬 데가 있는 아가씨였다.
"그럼 내야지."
강한섭은 졸래졸래 따라오는 유미자를 근처의 중국집으로 인도했다.
"실은 탕수육 처음 먹어요."
"응?"
"가난해서 탕수육을 처음 먹는다고요."
유미자가 얼굴을 새침하게 꾸미며 뽀얀 불빛 아래서 자세히 보자 유미자는 스무 살이 겨우 넘어 보였으나 가난한 삶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많이 먹어."
"동정하는 거 아니죠?"
"아냐."
강한섭은 도리질을 했다. 유미자의 말에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그날 고생하지 않았어?"
"아저씨 덕분에 고생은 안 했어요."
유미자가 천천히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고량주를 시켜서 자작으로 두 잔을 따라 마셨다.
"그날 저 흉했죠?"
"뭐가?"
"멀쩡한 처녀가 옷을 벗고 가슴을 드러냈잖아요?"
"글쎄...."
강한섭은 난처하여 고개를 외로 꼬았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솔직히 말하라고 하면 할께. 그날 아가씨들은 모두 예뻤어. 특히 미자는...."
유미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한섭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공들이 일시에 상의를 모두 벗은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때 묻지 않은 가슴들은 햇과일처럼 풋풋해 보였었다. 유미자는 그 뒤로도 틈틈이 강한섭을 찾아오곤 했었다. 강한섭은 유미자로부터 70년대 노동현장의 열악한 현실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강한섭이 노동현장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러한 실정을 속속들이 보도하지 못하는 기자로서의 양심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2
회사에 출근하자 사의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강한섭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사의 분위기가 꺼림칙했으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데스크에서 별다른 지시가 없는 것을 보면 간밤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강한섭은 데스크에서 별다른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지난 밤 야간근무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대충 살펴보았다. 아침에 특별한 기삿거리가 없으면 지난 밤의 야간근무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취합하여 석간에 내보내는 것이다. 야간근무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는 특별히 주의를 끌만한 것이 없었다. 교통사고 1건, 살인사건 2건, 화재사건 1건이 고작이었다. 강한섭은 기사 원고를 이기석 차장에게 넘겼다.
"이게 전부야?"
이 차장이 원고를 대충 훑어보며 말했다.
"예."
"세상이 어수선해도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쓰레기들이 있군. 쯧쯧...."
이 차장이 혀를 찼다. 강한섭은 대꾸하지 않고 사회면에 연재하는 '79년의 10대 사건'이라는 시리즈물의 3회분 원고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사들이 연례행사로 다루는 시리즈물의 하나였다.
"데스크가 어두운데?"
옆자리의 최병준 기자가 강한섭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최병준은 강한섭과 입사 동기였다.
"글쎄 말이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낸들 어떻게 알겠어? 세상이 하도 뒤죽박죽이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합수부에서 또 일 저지른 거 아니야?"
"모르겠어."
강한섭은 고개를 흔들었다. 합수부가 며칠 전인 12월 12일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 구속한 이후 세간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합수부 바람이 매서운 모양이야. 장군들이 무더기로 예편되고 있어."
"대통령이 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거짓인가?"
"대통령이야 군부의 내막을 알 길이 있나."
강한섭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사주의 조카인 임홍길 부장이 데스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경찰서들이나 한 바퀴 돌아봐. 요즈음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잖아?"
임 부장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신문사 사회부 부장이라는 직책이 버거워 보였다.
"예."
강한섭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최병준도 따라 일어섰다. 임 부장이 경찰서라도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건을 취재해 오라는 뜻이 아니었다. 시국이 물 밑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보도를 할 수 없는 신문 기자들의 자괴감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회사를 나오자 날씨가 우중충했다. 눈발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사회부에 배정된 취재차를 끌고 가까운 곳에 있는 남대문경찰서를 비롯해 종로경찰서, 동대문 경찰서, 성북경찰서에 이르자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별일 없는 모양인데?"
최병준 기자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경찰서의 강력계와 교통계를 모조리 뒤졌으나 특별히 기삿거리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꽁꽁 얼어붙었어."
강한섭이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최병준 기자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임 부장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나?"
"보안사 요원들 때문이겠지."
"그 작자들은 무엇 때문에 신문사에 상주하고 있는 거야?"
"보도통제를 하기 위해서지 뭐하러 상주하겠어?."
"제기랄! 박통 때는 긴급조치로 기자들을 꼼짝 못 하게 하더니 지금은 보안사가 언론을 통제하는군."
"....."
"언론 정책을 보안사의 준위가 주무른다며?"
"준위?"
"준위면 계급이 어떻게 되는 거야?"
"상사 위지."
"그러면 하사관이 이 나라 언론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인가?"
"그래."
최병준이 빙긋이 웃었다.
"하사관이 어떻게 언론을 알아?"
"낸들 알겠나."
최병준이 낄낄대고 웃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12시가 지나 있었다. 강한섭은 최병준과 함께 편집국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근처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기분이 우울했다. 신군부는 대학에서는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언론사와 중앙청에는 그대로 병력을 남겨 두고 있었다. 아직도 계엄이 선포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3
오후가 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회사에서 5시쯤 퇴근했다. 정승화 총장의 연행, 수도 경비사령관 장태원 소장,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 소장, 3군 사령관 이건영 중장,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의 구속과 12월 14일의 전면 개각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치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사회부는 기묘할 정도로 한가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얼어붙은 70년대를 회고하는 것이 사회부의 일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되었고 구속되었던 사람들도 석방되었다. 12월17일에 권한대행의 딱지를 떼고 대통령에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은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겠다고 약속하여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군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민주화가 실현된다는 사실만 기뻐하고 있었다. 정치권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야당의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여당 아닌 여당인 공화당은 새로운 정치 상황 아래서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모두들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군부의 동태를 살피고 미구에 불길한 일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그 예감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강한섭은 불안하기만 했다. 경제는 불황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이 몰고 온 충격이 유류파동 못지않은 불경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퇴근하면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강한섭을 술집으로 이끌었고, 강한섭은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강한섭이 보안사에 근무한다는 한경호라는 사내의 부인을 만난 것은 해가 바뀐 1월 초의 일이었다. 그날 강한섭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 은숙이 낯선 여자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현관에서 눈을 털고 거실로 올라섰다. 낯선 방문자, 아내보다 나이가 7, 8세 더 많은 여자가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며 목례를 했다. 강한섭은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옆집에 이사 온 분이에요."
아내가 여자를 강한섭에게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가 새삼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목덜미가 유난히 뽀얗게 흰 여자였다.
"반갑습니다."
강한섭도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인사를 두 번씩이나 주고받는 것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그의 아내가 웃음을 깨물며 물었다.
"했어."
"그럼 우리들끼리 얘기하고 놀께 들어가 쉬세요."
"응."
강한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집 사람이니 시간이 늦었어도 상관이 없을 터였다.
"어서요!"
그의 아내가 다시 웃으며 재촉을 했다.
"말씀들 나누십시요."
강한섭은 아내의 웃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문득 며칠 전에 옆집에 세워져 있던 찦차가 생각났고 그렇다면 여자가 그 집으로 이사를 온 모양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전체적인 인상이 기묘할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아래는 미디 계열의 베이지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으나 위에는 털실로 짠 밤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강한섭은 코트를 벗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며칠 전에 펼쳐 놓은 원고지가 그대로 있었다. 아직 한 줄도 메꾸지 않은 원고지였다.
강한섭은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볼펜을 잡고 원고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제는 소설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며칠 동안 원고지 앞에서 끙끙댔으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간간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원고지에 '영혼 마차'라고 썼다. 그가 쓰려는 소설의 제목인 셈이었다.
초막밖에는 여전히 하얀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사흘째 계속되는 장마였다. 진나라 제일의 도공 소진은 작업을 하다가 말고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았다. 빗발이 골짜기를 하얗게 물들이며 소진의 공방인 초막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소진은 넋을 잃은 듯이 한참동안이나 빗발이 세차게 뿌리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라리 석달 열흘 동안 비가 쏟아져 이놈의 더러운 세상이 몽땅 떠내려가기나 하지.... )
소진은 밖을 내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하얗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병사들의 막사가 드문드문 보였다. 번을 서는 병사들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창을 들고 막사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들!)
병사들을 노려보는 소진의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파랗게 뿜어졌다. 여기는 중국 섬서성. 때는 시황 35년(BC 212년 : 약 2200년 전)의 일이었다. 진의 시황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아방궁을 짓고, 자신을 비판하는 유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분서갱유를 일으키는 등 ^극악한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것뿐 아니라 여산에 자신의 능을 만드는 막대한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미 자신에게 반대하는 유생 460명을 진의 도읍 함양에서 생매장하여 그 원혼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소진이 만들고 있는 영혼 마차는 시황이 죽은 뒤에 그의 영혼이 타고 다닐 마차였다. 시황은 즉위 28년에 제2차 동방순행을 하면서 서시라는 방사(:술사)에게 동남동녀 3천 명을 인솔하고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지시했으나 서시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해 달아나고 시황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중국의 관습에 의해 자신이 타고 다닐 마차를 만들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물론 그 마차는 청동과 황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영혼 마차는 시황의 능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시황의 능은 즉위 원년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시황제의 능과 병마용이 모두 셋이나 되었다. 병마용들은 진시황 능의 부장갱으로 흙으로 빚었어도 진시황의 능을 지키는 숙위군들이었다. 용갱 하나에 약 8천의 병사가 들어가는데 그 병사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기 위해 산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뿌릴 예정이었다. 권력자를 위해 백성들은 목숨까지 속절없이 바쳐야 했다. 소진은 그러한 시황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다. 시황의 영혼이 마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일 뿐이었다.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추악한 탐욕이 불멸할 뿐이었다. 소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2천 년이 지난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릴 것이다.
문 열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고 화장품 냄새가 연하게 풍겨 왔다. 강한섭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아내가 화사한 잠옷 차림으로 등 뒤에 와 서 있었다.
"갔어?"
강한섭은 아내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흰 눈이 사락사락 내리고 있었다.
"네."
그의 아내가 강한섭을 등 뒤에서 안고 가슴으로 눌렀다. 강한섭은 볼펜을 책상 위에 놓았다. 소설은 첫 장면을 무난하게 시작했으나 시간이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사방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몇 시나 되었어?"
"열한 시 조금 넘었어요."
"벌써?"
강한섭은 아내를 향해 회전의자를 돌렸다.
"네."
그의 아내가 강한섭의 무릎 위에 앉았다. 강한섭은 두 팔로 아내를 안고 회전의자를 돌려 창밖을 향했다. 아내의 몸에서 자스민 꽃향기가 풍겼다.
"향수 뿌렸어?"
"네."
"샀어?"
"옆집 여자가 주었어요. 예쁘죠?"
"뭐가?"
"아까 그 여자요."
"응."
강한섭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으나 살결이 희고 몸매가 풍만했다. 게다가 아내보다 나이가 일고여덟 살에서 열 살쯤 위로 보였다. 여인으로서 완숙한 육체가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나보다 더 예뻐요?"
"아니."
강한섭은 그때서야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그럼!"
"아이 좋아!"
그의 아내가 허리를 비틀며 신음소리에 가까운 비음을 냈다. 강한섭은 아내의 둔부를 가볍게 애무했다.
"소설 시작했어요?"
"응."
"내가 한번 읽어 볼께요."
그의 아내가 책상 위의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아내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언뜻 깊은 밤 신혼의 아내와 함께 깨어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눈 내리는 창밖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때렸다. 그는 아내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댔다.
4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강한섭은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창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일까. 불을 껐는데도 방안에 흰빛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내의 잠든 얼굴이 지극히 평화스럽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풍파를 전혀 겪지 않은 얼굴, 스물여섯 해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불행을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아내의 삶은 참으로 순탄하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앞으로의 삶이 계속 순탄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얹었다가 떼었다.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왕 잠이 오지 않을 바에야 소설이나 계속 쓰리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품속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강한섭은 잠옷 차림으로 서재로 들어가 스탠드를 켰다. 원고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볼펜을 잡고 소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아침에도 을씨년스럽게 불어대고 있었다. 길고 무더운 여름이 선들바람과 함께 가버리고 가을이 시작되는가 싶었는데 벌써 춥디 추운 겨울이 닥치고 있었다. 11월이었다. 동트기 전의 새벽 5시. 포크레인 기사 한광표는 밤새도록 계속되는 바람소리에 선잠을 자다가 억지로
눈을 떴다. 연탄불이 꺼졌는지 방안에 썰렁한 냉기가 돌고 있었다. 한광표는 거의 습관적으로 캐시미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바람소리에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야산의 잡목숲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찌 들으면 지옥의 악귀들이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면서 울부짖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참 기이한 일이야."
그는 이불 속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여름 가을 두 계절 동안이나 빨지 않은 이불이 눅눅했다. 게다가 퀴퀴하게 곰팡이 피는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코에 익숙한 냄새였기 때문에 그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지금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아침부터 공사장에 나가서 포크레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과 며칠째 계속되는 이상한 꿈이었다.
(내가 몸이 허약해진 거야. )
그는 간밤의 꿈을 생각하면서 몸을 뒤척거렸다. 방안에 냉기가 돌았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는데도 몸에서 오한이 일어났다. 감기라도 걸린 것일까.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혼자 사는 몸에 감기, 특히 몸살 따위가 찾아들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저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한광표는 이불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선반 위에 있는 조그만 마차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어둠 때문에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네 필의 말이 끌고 있는 이상한 마차가 꺼림칙했다. 그것은 한광표가 닷새 전 공사장에서 발굴한 것이었다. 발굴했다기보다는 포크레인의 삽에 퍼 올려진 것이지만 흙을 털어내자 황금빛과 청동빛이 찬란한 사두마차였다.
(별 게 다 나오는군. )
한광표는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뒤부터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매일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잠자리가 어수선했다. 환청인지 착각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잠이 들면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아우성 소리와 함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물건이야!)
한광표는 그것을 버리기로 했다. 한광표가 이불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날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한광표는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석유곤로로 라면을 끓여 먹고 집을 나섰다. 점심은 공사장 함바에서 먹으면 되는 까닭에 아침은 으레 라면으로 때우는 한광표였다.
날씨는 차디찼다. 한광표는 입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길바닥은 빙판이었다. 한광표가 공사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날이 훤히 밝았다. 한광표는 시멘트 봉지에 싼 마차를 농수로 비탈에 버렸다. 그만해도 변두리인 개울뚝은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전혀 없었다. 한광표는 비로소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공사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원고를 쓰다 말고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눈은 그쳤으나 사방이 흰빛으로 가득하고 사위가 물기에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강한섭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비로소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오늘 중으로 도입부를 모두 마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골목을 여자는 걸음을 재게 놀리며 걷고 있었다. 음산한 날씨였다.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떨어지고 어둠이 만또자락을 펄럭이듯이 골목 끝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2월이라고는 해도 바람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여자는 허름한 털 스웨터의 앞섶을 바짝 여몄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여자는 몸을 한 차례 떨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골목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마치 악마가 으르렁거리듯이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골목에 있는 휴지조각을 쓸고 다닐 뿐 골목은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여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저만치 골목 끝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존재일 것만 같았다. 여자는 골목 끝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사방이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따금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불어오는 바람소리 외에는 골목이 땅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여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바람이 유난히 음산한 것이나 골목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 자신의 몸이 허약해진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면 눈에 헛것이 보이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며칠째 계속되어 온 현상이었다. 몸이 더욱 약해진 탓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골목 끝에 공포스러운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어쭙잖은 생각인 것이다.
여자는 다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걸음을 떼어놓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걸음을 떼어놓으면 떼어놓을수록 이상한 공포심으로 머리끝이 곧추서고 가슴이 뛰었다. 여자는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은 언제나 오가던 길로 아침이나 지금이나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골목의 중간쯤에 서 있는 전봇대라던가 쓰레기통, 골목에 쌓여 있는 더러운 연탄재, 음식 찌꺼기 .... 그런 것들이 변함없이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이 나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야. )
여자는 입언저리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지어 먹고 잠자리에 들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월급날이 아직도 사흘이나 남았으므로 반찬은 신 김치 쪽뿐이었다. 그러나 밥을 따뜻하게 지어 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니까 그것도 달디달게 먹을 수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장순덕, 32세의 이혼녀였다. 5년 전에 결혼을 했으나 남편이 바람을 피워 혼자 살고 있었다. 남편은 건설현장의 철근공이었으나 술만 마시면 주사가 심했다. 결혼한 지 불과 3개월도 못 되어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더니 1년이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매일 같이 손찌검을 해댔다. 그녀는 허구헌날 남편에게 맞아서 눈이 퉁퉁 부어 살다가 불과 6개월 전에야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혼을 한 뒤에도 틈틈이 찾아와 우격다짐으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손찌검을 했다. 게다가 용돈까지 뺏아 가고는 했다. 그녀는 이미 이혼을 한 남편이 그러한 짓을 되풀이해도 묵묵히 참고 지낼 뿐이었다. 배운 것이 없는 데다 그녀의 남편 말을 빌리면 바보천치인 그녀는 처녀가 아닌 몸으로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는 사실을 가장 큰 죄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한 탓에 비록 남편과 이혼을 했어도 남편의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을 편집적으로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여자는 골목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골목 끝을 향하여 걸음을 떼놓기가 어쩐지 두려웠다. 그 길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 골목 끝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옥의 악귀들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골목 끝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욱 격렬하게 뛰고 공포가 극심해 졌다. 여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여자는 다시 골목 끝을 노려보았다. 골목 끝에서 피에 굶주린 늑대가 우는 것 같은 개 짖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여자는 더 이상 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무엇인가 자신의 머리를 나꿔채서 골목 끝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재빨리 자신의 뒷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뒷머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골목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봐, 이봐.’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이 늪에 모일 것인지 날짜를 정하고 그날 누구의 일이 끝나는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진 골목엔 인적은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 와, 먼 길로 돌아가지 말구 지름길로 가.’
어둠이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무서워해? 보라구,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그다음엔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얼어버릴 정도로 차가운 웃음소리였다. 여자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목이 그토록 무서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한편으로는 공연히 무서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여자는 다시 골목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인가 그곳에서 강한 흡인력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골목 끝에서 집까지는 불과 1킬로미터, 느린 걸음으로도 10분 거리인 것이다. 골목을 지나면 집들이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벌판을 가로지르고 경운기가 겨우 다닐 정도의 농수로 뚝길이 마을까지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여름 한 철 젊은 남녀들이 심심찮게 찾아와 짐승들처럼 엉겨붙기는 했으나 수상스러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분명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미세한 먼지처럼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골목길을 피해 큰길로 집으로 가면 20여 분이나 더 돌아가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매사를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을 변변히 받지 않은 탓에 언제나 육감으로 매사를 판단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여자는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만치 골목 끝에서 또 다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차갑게 그녀의 귓전을 후비고 있었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이리 오지 않으면 네년을 찢어 죽일 거야.’
여자는 공포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여자는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골목 끝에는 분명하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때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는 계속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뛰듯이 빠르게 걸었다. 오늘따라 골목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골목을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소리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도 사라지고 있었다. 여자는 골목을 완전히 벗어나자 비로소 안도의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큰길이었다. 번화가는 아니었으나 도로변으로 군데군데 상점이 있어서 불빛이 밝았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에는 간간이 헤트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쁜 호흡이 진정되자 비로소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
여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골목을 무수히 오갔으나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니 골목에서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그런 일을 겪은 일이 없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
여자는 며칠 전 농수로에서 주운 이상한 마차가 생각났다. 그 마차는 시멘트 종이에 싸여 있었으나 청동과 황금빛이 찬란했다. 물론 황금이 진짜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모양이 특이하고 별다른 장식품을 갖고 있지 않은 여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집의 찬장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이상한 공포심을 느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공연히 이러지. )
여자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큰길로 돌아가면 집이 너무 멀었다. 게다가 차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할퀴고 있었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있었다. 바람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진 차도 건너편 황량한 벌판에서 미친 듯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무섭기는 이 길도 마찬가지야!)
여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공연히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뱃속에서는 아까부터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여자는 골목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골목은 어둠이 먹빛으로 짙게 깔려 검은 상포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걷듯이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제는 공포가 극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옥의 무저갱으로 향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자는 골목 끝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어디선가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개들의 울음소리가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개들이 짖는 소리가 음산한 울림을 가지고 골목을 울리고 있었다.
문득 개들이 짖는 소리가 뚝 끊겼다. 여자는 앞만 보고 내쳐 걸었다. 여자는 이미 골목 끝까지 도착해 있었다. 눈을 들어 벌판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도 벌판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자는 농수로 뚝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밑이 캄캄하여 걸음을 떼어놓기가 수월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수 없이 오간 길이었다. 짐작으로도 집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여자는 농수로 뚝길의 중간쯤에 이르렀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농수로의 뚝길에서 무엇인가 납짝 엎드려 있던 물체가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가 그것을 사람이라고 알아차린 순간 여자는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머리끝이 쭈뼛해 왔다.
(아!)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여자가 위험을 예감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갑자기 뒤통수로 서늘한 기분이 덮쳐 오면서 누군가 그녀를 뒤에서 안듯이 하고 거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읍!)
여자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입이 틀어 막혀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으나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이러면 안 돼!)
여자는 머리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빨리 빨리 해치워!"
그러자 어둠을 찢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사내들은 하나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내들이 자신에게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히고 목이 조여졌다. 여자는 숨이 막혀 왔다. 어둠 속이지만 굵은 팔뚝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숨을 쉬기가 답답했다. 무서움이나 공포 따위보다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팔뚝을 떼어내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여자의 목을 감고 있는 팔뚝은 더욱 억세게 그녀의 목을 조일 뿐이었다.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팔꿈치를 뒤로 힘껏 뻗었다. 그러자 팔꿈치가 시큰하면서 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팔꿈치에 강하게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목에 감겨 있던 팔뚝이 힘없이 풀어졌다.
"어!"
사내들의 어처구니없어하는 소리가 여자의 귓전을 울렸다. 여자는 그때서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강타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의 검은 그림자가 무슨 장승처럼 보였다. 여자는 어둠 속으로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튄다!"
"잡아!"
등 뒤에서 사내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여자는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냅다 뛰었다. 등 뒤에서 사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듯이 요란하게 들렸다. 여자는 겁이 덜컥 났다. 숨을 헐떡거리며 달렸으나 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윽!"
다음 순간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농수로로 나뒹굴었다. 누군가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서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여자는 둔부와 어깻죽지가 으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사내 하나가 엎어질 듯이 여자의 몸 위로 쓰러지며 뺨을 세차게 후려쳤던 것이다.
"이게 어디서 튀고 있어?"
여자는 뺨이 얼얼했다. 그러나 사내는 순식간에 여자의 입에 헝겊 조각을 쑤셔 넣고 팔을 묶어 버렸다. 그리고는 여자의 아랫배를 구둣발로 힘껏 밟았다.
(헉!)
여자는 아랫배가 터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 자식들아,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
누군가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이런 계집 하나도 못 다뤄서 앞으로 어떻게 큰일을 하겠다는 거야?"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처음이라도 그렇지 이따위로 일을 하면 은팔찌밖에 더 차겠어? 병신 같은 새끼들!"
사내가 침을 칵 뱉았다. 여자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두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자 이제 알아서들 해봐. 너희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처리해! 가르쳐준 대로 못 하는 놈은 죽을 줄 알아!"
두목인 듯한 사내의 음산한 목소리였다.
"예!"
사내들이 깍듯한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을 했다. 여자는 문득 자신이 언젠가 3류 영화관에서 본 홍콩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콩 영화가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두목인 듯한 사내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예!"
사내들이 염라대왕을 대하듯이 공손히 대답을 했다.
"시작해!"
"예!"
두목인 듯한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 하나가 여자의 치마를 허리로 걷어 올렸다.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로소 사내들이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입이 틀어 막히고 손이 묶여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을 칠 수는 없었으나 온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강한섭은 볼펜을 놓고 손으로 눈을 비볐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눈이 몹시 피로했다. 의외로 소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깥은 새벽이 오고 있는 것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손수 커피를 끓여 마시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을 꼬박 세워야 할 것 같았다.
장군이 퇴근했을 때 거실의 소파에는 부인이 앉아서 무엇인가 열심히 닦고 있었다. 장군은 모자를 벗으며 부인이 닦고 있는 것을 곁눈으로 살폈다.
"그게 뭐야?"
"마차예요."
부인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골동품인가?"
장군은 웃으며 부인의 앞에 앉았다.
"그래 보이죠?"
부인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중년을 넘었으나 처녀 때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엔 주름을 감추려는 듯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샀어?"
장군은 부인이 닦고 있는 마차를 자세히 살폈다. 마차는 청동색과 황금색이었는데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든 마차인데 마부의 복식은 조선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것이었다.
"고물 장사에게 샀어요."
"고물장사?"
"당신이 그림도 못 사게 하고 장식품도 못 사게 하니 이런 거나 사서 진열해야죠."
부인의 말투엔 가벼운 불만이 묻어 있었다. 그는 부인이 다른 장교 부인들처럼 몰려다니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해 왔었다. 부인들끼리 몰려다니며 그림을 산다거나 복부인 노릇을 하는 것은 장군의 부인으로서는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거실에 장식장에 진열된 양주병도 부인이 모두 고물상에게서 사다가 진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에?"
"헐값예요."
"헐값?"
"2만 원이요."
"2만 원이 헐값인가?"
"당신도 이제 이만한 장식품은 집에 있어야 해요. 남들은 몇십만 원씩 주고 도자기도 사는데....."
부인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장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부인의 말마따나 2만 원을 주고 샀다면 좀 비싸긴 해도 낭비를 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고물장사는 이게 어디서 났대?"
장군은 화제를 바꾸었다.
"어떤 남자한테 샀대요."
"상당히 정교해 보이는데?"
"그래요. 이 물건이 진품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려면 몇 달은 걸렸을 거예요. 좀 불길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불길해?"
"이걸 판 남자의 부인이 강도들에게 집단으로 겁탈을 당하고 살해되었대요. 얼마 전에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여자를 강간한 뒤에 죽인 사건이요. 범인들이 살인과 강간을 연습 삼아 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되었었죠."
"그래.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
장군은 새삼스럽게 사두마차를 살피며 낯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장군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안방으로 들어가 군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부인이 장군을 따라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날 밤 장군은 수많은 말들이 벌판을 달려오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기치 창검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전쟁의 꿈이었다. 그러나 탱크와 포를 앞세운 현대전이 아니라 창과 칼로 싸우는 아득한 고대의 전쟁이었다. 그는 거기서도 수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이었다. 그의 호령 하나로 수십만 대군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처럼 청룡언월도를 들고 말 위에서 호령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제왕이 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제왕이 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전쟁은 참혹했다. 무수한 사람들의 피가 뿌려지고 비명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피는 강을 이루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그러나 그는 제왕이 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뽀얀 흙먼지가 불듯이 피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권력의 뿌리는 피를 마시고 성장한다는 어디선가 읽은 책 생각이 났다. 권력을 쟁취하는데 피를 뿌리지 않고 가능한 일이겠는가.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자신에 대한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날이 훤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쓰기를 멈추었다. 장군과 영혼 마차의 상관관계를 정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으나 영혼 마차를 인간의 권력욕을 상징하는 장치로 설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한광표의 죽음과 장순덕의 죽음은 지나치게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허지만 작품을 완성한 뒤에 기회를 보아 검토를 하면서 삭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제7장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
1
한경호는 창밖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날씨는 포근했다. 간밤에 함박눈이 내렸으나 날씨가 따뜻해 길바닥에 쌓인 눈이 녹고 지붕에서는 처마 끝으로 낙숫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햇살도 눈이 부시게 밝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비서실장을 통해 내려온 사령관의 명령은 전혀 상식 밖의 것이었다. 그는 그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사령관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뒤 전격적으로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연행 구속하여 군부뿐 아니라 정계까지도 발칵 뒤집어놓고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이제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란 상명하복의 집단이었다.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대로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10.26에 관련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부하들은 명령에 복종한 죄로 모조리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한경호는 자신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에 몰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한경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사령관의 명령은 어렵거나 이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령관의 명령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한경호는 사령관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낡은 타이프라이터의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979년은 연초부터 정국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1978년 5월 18일 제2대 통일 주체 대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공화당 총재인 박정희는 7월6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단독출마하여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정권 제2기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체육관 선거라는 비아냥거림이 널리 퍼지면서 긴급조치로 강력한 독재정치를 실현하는 박정희에 대해 국민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국민들은 박정희의 체육관 선거에 침묵의 저항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해 12월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신민당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여당인 공화당은 의석수에서는 앞섰어도 득표율에서 뒤져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79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화당은 이러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이효상 당 의장서리가 낸 사표를 수리하고 박준규 정책의장을 당 의장서리로 임명했다. 박준규 당 의장서리는 박정희 총재의 재가를 받아 사무총장에 신형식, 원내총무에 현오봉, 대변인에 오유방 의원을 임명하여 국회 개원에 앞서 야당과의 대화에 나섰다. 신민당은 당권파인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이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며 여당과의 대화를 시도했으나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선명론을 내세워 독재정권과 싸워야 한다고 당권파를 몰아세웠다. 상도동계의 강경론은 재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말 없는 다수인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1.1%의 승리를 수권의 국민적 명령이라고 신년 벽두부터 신민당의 당권파와 공화당을 공격했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당이 제10대 국회의장 후보로 유정회 소속의 백두진 의원을 내세우자 김영삼 의원을 비롯한 비당권파는 격렬한 반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백두진 의원이 김영삼, 이민우, 정해영 의원 등 신민당 소속 의원 17명이 퇴장한 가운데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나 그것은 79년의 파란을 예고한 전주곡이었을 뿐이었다. 신민당의 양대 계보인 상도동계와 이철승계는 백두진 파동으로 한차례 접전을 벌인 뒤 5월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지구당 개편대회에 들어가 격렬한 당권 싸움을 시작했다. 김영삼 의원은 74년에 총재로 선출되어 야당의 개헌 서명운동을 이끌어 지식인들과 청장년층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각목대회에서 당권을 빼앗겨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이철승 대표와 김영삼 전 총재는 4월 3일 광주 지구당개편대회에서부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철승 대표는 기자회견과 대표 치사를 통해 '중도통합론은 참여하의 개혁이며 국회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투쟁을 벌이자는 것이며, 투쟁을 위한 투쟁이나 당내 일부 인사들이 백두진 파동 때 퇴장한 것은 해당 행위'라고 비당권파를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 전 총재는 기자회견과 축사를 통해 '백두진 파동 때 당 지도부가 보인 것은 여당에 끌려가는 행태'라고 반격한 뒤 '야당다운 야당을 만들어 민주회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철승 대표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신민당은 5월 2일 김재광 의원, 5월9일 신도환 의원이 당수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당권 투쟁의 막을 올렸다. 이어 비당권파의 7인 전권위원들인 박일, 황락주, 김옥선, 최형우, 박용만, 이필선, 유한열 의원 등은 5월 13일 김영삼 전 총재를 만장일치로 신민당 총재 후보로 추대했다.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대학생들과 노동자들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들은 중도통합론보다 선명론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신민당은 최고회의와 정무회의를 잇달아 열어 전당대회일을 5월 30일과 5월 31일 이틀 동안으로 결정하고 단일지도체제로의 당헌 개정안까지 마련했다.
이철승 대표는 5월 21일 당수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조윤형은 5월 24일, 김영삼 전 총재는 5월 25일 각각 출마를 선언하였다. 신민당의 정헌주 전당대회 의장은 5월 25일 전당대회 소집공고를 내고 74개 지구당 대의원 370명, 정무회의 선출 대의원 100명, 중앙상무위원 370명 등 모두 757명의 대의원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 5월 26일엔 박영록, 5월 29일엔 이기택 의원도 각각 당수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전당대회를 앞두고 조윤형, 박영록, 김재광 의원은 출마를 사퇴하고 김영삼 전 총재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전 총재는 당권 투쟁에서 당권파뿐 아니라 중앙정보부로부터도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 정보부와 공화당은 김영삼 전 총재의 당선을 막기 위해 모든 공작을 동원하고 있었다. 김영삼 전 총재의 상도동계는 김동영, 황락주, 박권흠, 문부식 의원 등 4인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보부의 치열한 공작으로 도무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이거 원 정보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정치사찰만 일삼고 있으니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놈들이 사찰을 한 것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야?"
"대의원들에게 돈을 뿌리고 있대!"
"이런 상황에서 총재 출마를 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겠어!"
정보부의 공작이 어찌나 치열한지 황락주, 박권흠, 문부식 의원은 '우리의 상황은 밑바닥까지 쪼개진 상태여서 승산이 전혀 없다'고 김영삼에게 총재 출마를 만류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놈들이 죽기 살기로 방해 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통령의 결재가 떨어진 눈치입니다."
"이번엔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원들은 다투어 김영삼 전 총재에게 출마를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나의 목표는 박정권을 타도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누가 회복하는가? 이 싸움이 진다고 안 하고 이긴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우리가 독재정권을 쓰러뜨린다는 희망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정치를 그만두고 말겠다."
김영삼 전 총재는 상도동계의 중진 의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전국의 가톨릭 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3.1절 기념 구국선언문이 경찰에 의해 압수되고 탈취되는가 하면 경동교회의 크리스찬 아카데미 관계자들이 반정부, 반국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구속되고, 서대문 교도소에서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학생들이 교도관들과 충돌, 교도관들로부터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나 시국이 살얼음판 같았다. 게다가 가톨릭의 안동교구에서는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인 오원춘이 실종되어 당국과 가톨릭이 정면 대결을 벌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기독교협의회와 교수협의회는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 한국의 인권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이러한 국내의 반독재 투쟁 상황과 맞물려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철승 대표는 최고위원인 이충환, 고흥문, 유치송 의원의 지지를 얻어 범당권파를 결성했다. 김영삼 전 총재는 조윤형, 박영록, 김재광 의원의 지지를 받아 비당권파 연합을 결성했다. 신민당의 최대 파벌인 이들은 백중세의 세력으로 맞붙어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들의 당권 경쟁은 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조차 향방을 점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가열되어 갔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전당대회 하루 전인 5월 29일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국집 아서원에서 열릴 김영삼 후보의 단합대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는 김재규의 공작자금을 받은 신민당의 국회의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기 바로 전에 일본에 갔다가 일본에서 납치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뒤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78년 12월 대통령 취임식 날 형집행정지로 출감했었다. 형집행정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 행위는 할 수 없었으나 신민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윤형, 박영록, 김재광 의원이 김영삼 전 총재를 지지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김대중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당국은 그 정보를 입수하자 즉각 대책회의를 열었다. 김영삼 전 총재가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에겐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책회의엔 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 경찰까지 참석했다.경찰은 대책회의에서 김대중을 강제로 연금을 해서라도 아서원의 단합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을 또 연금하자는 얘기요?"
중앙정보부의 김재규 부장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는 차지철과 함께 앉아서 대책회의를 여는 것조차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김영삼이가 신민당 당권을 장악하면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가 공작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당선은 불가능하오."
"만약의 경우 당선이라도 되면 각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공연히 김대중이를 연금했다가 신민당의 중도파까지 자극할 필요 없소."
그러나 경찰의 상부 조직이나 마찬가지인 중앙정보부의 김재규 부장은 조직과 자금으로 신민당 대의원들을 포섭해 놓았으므로 공연히 연금을 해서 중도파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 부장 말이 맞아. 각하께서는 카터의 인권정책으로 골치를 앓고 있어. 김대중이를 연금했다가 미국 대사의 항의라도 받으면 곤란해."
차지철 경호실장도 김재규의 의견에 동조했다. 경찰 당국자는 장관들조차 굽실대는 경호실장이 연금에 반대하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하여 5월 29일 저녁 김대중은 경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아서원에 도착해 대의원들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했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특유의 단문형 연설로 수많은 유권자들을 사로잡은 바 있는 김대중은 아서원에 도착하자 김영삼 동지를 지지하는 것은 선명 야당을 지지하는 것이고 이철승 대표를 지지하는 것은 여당을 지지하는 것이라며 김영삼 전 총재의 선명론에 불을 질렀다. 5월 30일 마침내 신민당 전당대회는 새로운 전당대회 의장에 정운갑 의원을 선출하고 곧바로 총재 선출에 들어갔다. 그러나 1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대표가 292표, 김영삼 전 총재가 267표, 이기택 의원이 92표, 신도환 의원이 87표, 김옥선 의원이 11표, 무효 2표로 재석 대의원 751명의 과반수인 376표에 모두 미달하여 2차 투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민당 전당대회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당대회는 내외신 기자들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아 신민당의 마포 당사에는 이른 아침부터 국민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고 있었다. 특히 재야와 대학생들, 노동자들은 김영삼과 이철승의 대결을 독재와 반독재의 투쟁이라고까지 규정했다.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으로 재야로부터 강한 불신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74년도에 개헌 서명운동을 이끌었던 김영삼 전 총재는 재야인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반독재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2차 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신민당의 총재 후보들은 숨가쁜 계파연합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신도환 의원은 총재 후보를 사퇴하고 이철승 대표 지지를 선언했고 김영삼 전 총재와 이기택 후보는 2층 창가에서 장시간의 밀담 끝에 이기택 후보가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게 되었다. 오후 7시, 2차 투표 개표 결과 김영삼 전 총재가 378표, 이철승 대표가 367표, 이기택 4표, 신도환 2표로 김영삼 전 총재가 재석 대의원 과반수에서 불과 2표, 이철승 대표보다는 11표를 더 얻어 신민당 총재에 당선됨으로써 79년의 대파란을 예고하게 되었다.
김영삼 후보의 총재 당선은 민주회복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신민당의 당권 경쟁이 막바지로 치달리고 있을 때부터 은근하게 김영삼 총재를 기자들이 지원했고, 재야의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인, 대학교수, 문화 예술인들은 보이지 않게 자금과 조직에서 열세인 김영삼 총재를 지원했다. 총재 투표가 실시되던 5월 30일 신민당의 마포 당사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몰려들어 '김영삼!''김영삼!'을 연호하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열의가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증거하였다. 이들은 제1차 투표가 끝난 뒤 2차 투표를 앞두고 숨가쁜 막후협상이 벌어지고 있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김영삼 후보 쪽에 성원을 보냈다. 특히 김영삼 후보가 이기택 후보와 제휴 협상을 하느라고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이 당사의 창가에 비치자 이들은 '김영삼!''김영삼!''이기택!''이기택!'하고 뜨거운 함성을 질렀다. 4.19세대인 이기택은 창밖의 함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 함성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영삼 총재는 6월 1일 이민우, 박영록, 조윤형, 이기택을 부총재로 임명하고 사무총장에 박한상, 원내총무에 황락주, 대변인에 박권흠 의원을 임명했다. 특히 인권수호위원장에 고재청, 개헌특별위원장에 이충환 의원을 임명하여 초반부터 박정희 정권과 강경한 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 아울러 무소속 의원 7명을 영입하여 신민당 의석을 61석에서 68석으로 늘렸다. 이들 무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대여 강경 투쟁을 원하는 의원들로 김영삼 총재가 당선되자 비로소 신민당에 입당한 것이었다.
한경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허공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불과 7개월 전의 신민당 5월 30일 전당대회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김영삼 총재의 당선은 김대중의 아서원 연설 때문도 아니고 이기택 후보의 지지 선언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독재정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말 없는 침묵의 저항이 만든 결과였다.
2
한경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79년을 격동의 시대로 이끈 것은 정치적인 사건뿐이 아니었다.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도 자세히 살피면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역사였다. 79년은 1월 2일 경상남도 남해에서 버스가 바다로 추락, 승객 7명이 숨지는 등 신정 연휴 동안 사고와 화재로 70여 명이 숨져 벽두부터 우울하게 시작되었다. 3월엔 율산그룹 회장 신선호가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4월엔 강원도 정선의 함백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광부 26명이 숨지는 등 사건 사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6월엔 강원도 삼척에서 버스가 트럭과 정면충돌 130미터 절벽으로 굴러 안내양과 승객 24명이 숨졌고 부산에서는 20대 여인 알몸 토막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는가 하면 울산에서는 어린이 4명이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문이 잠기는 바람에 질식하여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7월엔 제헌절을 맞이하여 시인 양성우를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자 86명이 석방되기도 했다. 79년 8월은 폭우와 태풍으로 시작되었다. 8월 2일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려 7명이 숨지고 가옥 200여 채가 침수되었다. 5일에는 집중호우가 강원, 충청, 전북지방까지 이어져 71명이 사망하고 300억 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17일에는 태풍 어빙이 영남지방을 강타하여 13명이 사망하고 45억 원의 재산 피해를 가져왔다. 8월 24일과 25일엔 태풍 주디가 남부지방을 강타해 135명이 사망하고 30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고 동해로 물러갔다. 그러나 그해 8월의 가장 큰 태풍은 역시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이었다.
태양은 아침부터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8월 초의 폭염은 아스팔트 바닥을 {뜨겁게 달구고 더위로 부풀어 오른 공기는 숨이 턱턱 막혔다. 정국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재야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김영삼 총재는 7월에 열린 102회 임시국회에서 대정부질문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7월 19일 정부 여당 연석회의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김영삼 총재의 대정부질문을 경계했다. 그러나 20일에 열린 신민당의 의원총회는 '김영삼 총재는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회복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며 김영삼 총재 발언을 신민당 모든 의원들은 단결해서 뒷받침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야당 총재의 원내 발언에 위압적 경고와 원칙에 벗어난 간섭을 자행한 정부 여당의 일련의 작태는 의회 민주정치를 부정하는 비민주적 폭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20일 개회식이 끝나자 유정회와 공화당은 김영삼 총재의 발언이 유신체제를 비판할 경우 제명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앞에 앉은 의원들에게 야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월 23일 내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김영삼 총재는 대정부질문의 형태를 빌어 대표연설을 시작했다. 김영삼 총재는 박정권이라는 강경한 표현 대신 박정희 대통령과 1인 체재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진실로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조속한 시일 안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제의했다. 김영삼 총재는 또 역사는 분명히 새로운 민주시대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위적인 총화가 아니라 자발적인 국민적 단합을 위해 역사의 진로를 민주회복으로 바꿀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당 의원들의 야유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의 인권실태를 상세하게 거론하면서 양심범의 즉각적인 석방, 언론의 자유, 사법권의 독립 보장, 공평한 분배, 긴급조치 해제를 촉구했다.
백두진 국회의장은 두 번씩이나 김영삼 총재에게 경고를 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화당과 유정회도 더 이상 김영삼 총재의 대표연설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여야의 대립은 25일 신민당이 헌법개정특위 구성 결의안을 국회 사무처에 접수하고 법사위원회에 상정할 것을 요구하여 비롯되었다. 여당은 이를 거부했고 야당은 이를 빌미로 신민당의 기관지인 민주 전선을 들고 가두 판매에 나섰다. 이 민주 전선에는 김영삼 총재의 국회 대표연설이 실려 있었다. 검찰은 신민당이 민주 전선의 가두 판매에 나서자 전격적으로 문부식 주간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여야의 중진 의원들은 이때 비로소 정국 기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막연한 예감이었으나 중진 의원들은 파국을 막기 위해 중진회담을 개최하여 난국을 타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8월 9일 YH무역 여공 사건이 터짐으로써 사태는 다시 파국을 향하여 걷잡을 수 없이 치달리게 되었다. 8월 9일 아침 상도동 김영삼 총재의 자택에는 재야의 이문영 교수, 문동환 목사, 시인 고은이 찾아왔다.
"총재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면목동에 YH무역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 회사가 오늘 아침 마침내 문을 닫고 여공들을 기숙사에서 쫓아냈습니다. 여공들은 그동안 끈질기게 폐업철회를 요구해 왔지만 기업주는 막무가내로 폐업을 했습니다. 여공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을 찾아와 호소하려고 하니까 호소를 들어보고 당국에 해결책을 촉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3인의 재야 인사들은 김영삼 총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여공들의 처지가 몹시 어렵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입니까?"
"처음엔 가발을 수출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가발 수요가 떨어지자 마구잡이로 여공들을 감원하고 해고하는 등 여러 가지 인권 침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이 어린 여공들이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데 우리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 또 우리 집과 당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므로 찾아오면 선처하겠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그 자리에서 박권흠 대변인에게 당사에 먼저 나가 여공들의 호소를 들은 다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김영삼 총재는 그때까지도 여공들의 당사 방문이 단순한 호소 차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영삼 총재는 10시에 마포 당사에 도착했다. 김영삼 총재가 도착했을 때 YH 여공들은 이미 4층 강당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김영삼 총재는 총재단 회의에 이문영 교수 일행의 요구를 간략하게 보고하고 수해 대책을 논의한 뒤 여공 대표 5명을 총재실로 불렀다.
"YH무역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여공들은 김영삼 총재를 대면하자 울음부터 터뜨렸다. 김영삼 총재 같은 거물 정치인이 자신들과 같은 하찮은 여공들을 만나 주자 감격했던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 사는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일을 할 수 없지요?"
"장용호 회장이 막대한 돈을 미국으로 빼돌려 공장운영이 어렵게 되자 공장을 폐쇄하고 8월 6일 해고수당과 퇴직금을 은행에 예치시킨 후 8월 8일 식당과 기숙사 폐쇄령을 내렸어요."
"그럼 임금은 받을 수 있겠군요?"
"총재님. 임금이 문제가 아니예요. 기업이 안 된다고 문을 닫으면 우리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요? 그리고 이런 일은 전국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전국의 노동자들을 기업이 안 된다고 마구잡이로 해고하고 공장을 폐업하게 되면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갈 곳이 없습니까?"
"네."
여공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기업하는 사람들이 공장을 마구 폐쇄할 수 없도록 해주세요. 우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기업도 수지타산이 맞아야 할 것 아니오?"
"기업이 잘될 때는 잔업, 연장근로, 철야까지 마구 시키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외국으로 빼돌린 뒤에 기업이 안 된다고 폐업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알았소."
"우리는 마지막으로 신민당에 찾아와 호소하기로 결정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 교수님에게 부탁하게 되었어요. 저희들을 받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 대표들의 호소를 들은 뒤 4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이미 여공들 180여 명이 모여 앉아 농성을 하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가 들어서자 여공들은 박수로 맞이했다.
"여러분들이 우리 신민당을 찾아와 고맙습니다. 우리 신민당은 여러분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정부에 강력하게 촉구하겠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들에게 다짐했다. 박한상 사무총장은 홍성철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여공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홍성철 장관은 노동청장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노동청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다는 소식은 신민당 출입 기자들을 통해 일제히 각 방송국과 신문사로 타전되었고 방송국과 신문사는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는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긴급뉴스로 보도했다. 여공들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경찰은 즉각 신민당의 마포 당사를 에워쌌다. 여공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은 정부 여당을 바짝 긴장시켰다. 여공들에게 점심으로 빵과 우유가 지급되었다. 여공들은 자신들의 투쟁 방향에 대해 회의에 들어갔고 여당은 YH무역의 사장 박연원을 내세워 여공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박연원 사장은 두 번에 걸친 설득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락조차 해오지 않았다.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라는 말이냐?"
"배고파서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여공들은 신민당 당사에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정부와 여당은 신민당을 향해 여공들을 당사에서 내보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신민당은 8월 10일 총재단, 당 3역, 국회 보사위 소속 의원들과 연석회의를 열고 보사위의 즉각 소집과 당내에 사회노동문제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박권흠 대변인은 정부 여당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불구하고 정부 측에서는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보건사회부 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니 직무 유기로 규탄한다. 근로자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야당을 찾아와 스스로의 생존권을 지키려 한 사태는 정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이다. 이에 우리 신민당은 장용호 회장을 즉각 소환해서 재산을 도피시킨 배후를 밝힐 것, YH무역의 현 근로자들을 한 사람도 해고시키지 말고 공장을 가동시킬 것, 마포 당사 주변에 배치된 경찰 병력을 철수시킬 것, YH 노조의 집단행동에 대해 일체 불문에 붙이고 근로자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여야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총무회담을 열었다. 야당은 보사위 소집을 요구했으나 여당은 이를 거부했다. 홍성철 보사부 장관은 여공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고 근로자 전원에게 취직을 알선하겠다고 야당 총무에게 답변했다. 8월 10일 오후 5시. 이순구 서울 시경국장은 박한상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여공들을 무조건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 박한상 사무총장은 갈 곳도 없는 여공들을 어디로 내보내느냐고 항의하고 경찰이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여공들은 저녁 무렵부터 사복경찰이 배치되기 시작하자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자들을 통해 경찰이 강제로 여공들을 해산시키려 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어오자 여공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공들은 애국가, 노농의 노래 등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노조 총회와 노조 간부회의가 잇달아 열리고, 울음 속에 경찰이 강제로 투입될 경우 4층에서 뛰어내려 집단 자살하겠다는 성명서가 발표되는가 하면 자살조와 투신조를 편성하는 등 여공들은 죽음으로 항쟁하겠다는 결의문이 낭독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여공들은 위문품으로 들어온 콜라병과 사이다병을 들고 창가에 매달렸다. 이에 당황한 신민당은 김영삼 총재가 강당에 들어가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하고 여공들을 진정시켰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신민당 당사 앞에는 경찰 외에도 시민과 노동자들, 대학생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어 나이 어린 여공들의 처절한 투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부 노동자들은 당사 안에 있는 여공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으나 경찰의 위압적인 태도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시민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대학생들은 침묵 속에서 여공들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들의 취재 경쟁도 치열했다. 야당과 재야의 민주화 투쟁은 비록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민주화 세력을 지원했다. 특히 신문의 논조는 언제나 야당과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황락주 원내총무는 이순구 시경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동경찰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순구 시경국장은 경찰을 출동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당원들에게 지시하고 당사 앞에 나가 경찰을 철수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철수하지 않았다. 김영삼 총재는 당사 주변을 서성거리던 마포경찰서 김준기 서장, 마포경찰서 정보1과 황용하 과장을 발견하자 더욱 큰 소리로 질책했다.
"너희들이 정말 저 나이 어린 여공들을 창문에서 뛰어내리게 할 참이야?"
김영삼 총재는 두 사람의 뺨을 때렸다. 그러자 경찰이 우르르 달려들었고 신민당의 청년 당원들도 총재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과 치고받는 몸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가 야당 총재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야당 총재가 경찰을 폭행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8월 11일 새벽 1시 58분. 이순구 시경국장은 갑자기 여공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박한상 사무총장에게 통고했다. 경찰은 이미 여공들의 강제해산 작전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작전명은 '101'작전이었다. 그리고 2분 뒤인 새벽 2시 자동차의 크랙숀 소리가 두 번 울리자 '101작전'이 개시되었다. 조명용 소방차 2대가 대낮처럼 서치라이트를 밝히고 고가사다리차 3대 물탱크차 2대가 동원된 가운데 1천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신민당 당사로 일제히 뛰어 들어갔다. 2층 총재실에는 박한상 사무총장이 이순구 시경국장과 통화를 끝낸 후 대책을 숙의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건장한 체구의 사복들이 벽돌과 쇠파이프로 양쪽 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와 김영삼 총재 등 국회의원 16명과 기자 등 30여 명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면서 당사 밖으로 몰아냈다. 신민당의 청년 당원들은 사복 경찰이 몰려 들어오자 재떨이를 집어 던지며 저항했고 경찰은 벽돌과 쇠파이프로 이들을 진압했다. 신민당 총재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경찰은 닥치는 대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총재실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김영삼 총재를 제외한 모든 국회의원들이 주먹질을 당했고 황락주, 김형광, 박한상 의원 등이 집중적으로 몰매를 맞았다.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의원은
"저 놈이 박권흠이다!"
"악질이다!"
"저 새끼 죽여!"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든 사복 경찰에게 구둣발로 짓밟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기자면 다냐?"
"이 새끼는 악질적인 기자야!"
기자들도 예외 없이 집단 구타를 당했다. 카메라가 박살이 나고 필림이 짓밟혔다. 4층의 여공들은 갑자기 사복경찰이 들이닥치자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었다. 그녀들은 자정이 넘자 경찰이 강제해산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교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사복경찰은 4층에 들어서자 여공들의 투신을 막기 위해 열려 있는 창문을 겹겹이 에워쌌다. 여공들은 그때서야 잠에서 깨어나 사이다병과 콜라병을 깨어 들고 울부짖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잇달아 기동경찰이 방패와 쇠파이프를 들고 뛰어 들어와 여공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하여 기동경찰 버스에 태웠다. 일부 여공들은 울부짖으며 창문으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뜨리고 뛰어내리려 했으나 경찰들의 장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일부 여공들이 깨진 유리 조각과 사이다병으로 동맥을 절단하여 자살을 기도했는데 스물한 살의 여공 김경숙이 왼쪽 팔목의 동맥절단과 원인불명의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서 발견되어 녹십자 병원으로 옮겼으나 새벽 2시 30분쯤 절명했다. 당사 밖으로 끌려 나온 여공들은 기동경찰 버스에 실려 마포, 청량리, 성북, 성동, 동대문 경찰서 등에 분산 수용되었다. 그러나 여공들은 버스 안에서도 울부짖으며 창문을 부수고 연행되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경찰은 새벽 2시 30분 여공들의 해산이 완료되자 인근의 건재상을 동원하여 신민당 당사의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청소부 30명을 백차로 싣고 와 당사를 깨끗이 청소했다. YH 여공들의 강제해산은 여야 관계를 더욱 냉각시켰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노사문제를 정략적으로 유도했다고 신민당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신민당은 무참하게 유린되어 가는 민권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며 신민당의 현 상태를 초비상상태로 규정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다시 YH 사건 뒤에는 도시산업선교회와 불순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신민당은 구자춘 내무장관과 이순구 시경국장의 구속을 요구했다. 유정회는 정재호 대변인의 이름으로 7개 항의 공개질의서를 신민당에 보냈다. 그것은 8.11 YH 사태는 단순한 노사분규를 신민당에서 부채질하여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 총재가 농성 여공들에게 계급투쟁의식을 불어 넣은 것은 김 총재의 외신회견에서 말한 해방정당의 논리가 아닌가, 신민당 당사를 농성장으로 제공하면서 재야의 이모, 문모, 고모와 사전 논의한 진의를 밝히라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노동쟁의를 부추키는 불순세력이 있으니 정부는 이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밝히라고 촉구했다. 신민당은 정부와 여당이 도시산업선교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가톨릭농민회 등을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불순세력으로 지목하자 진상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은 8월 22일 일부 종교를 빙자한 노동쟁의 주동 인사들이 투쟁방식이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용공적이라는 산업계 종교계의 시정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사에 착수했다. 이 조사는 청와대 사정반이 직접 참여하여 재야와 종교계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한 달간의 조사가 끝나자 이들 단체나 관련 인사들이 용공적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으나 불법적인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정부는 이를 단호하게 처리할 것이므로 차후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총재는 8월 27일 8.11 사태에 대한 종합보고서 형태의 백서를 발표했다. 정부와 경찰은 이 보고서를 압수하기 위해 수색영장까지 발부받았으나 신민당의 거부로 실패했다. 김영삼 총재는 백서에서 '8.11 사태는 단순한 피습사건이 아니라 민주정치를 파괴하고 근로대중을 학대하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 폭거'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신민당은 8월 28일 마포 당사 앞에서 김경숙양 추도식을 올렸다. 이에 앞서 신민당은 의원총회를 열고 농성 해제를 결정하고 2단계 투쟁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민당은 8.11 폭거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할 것이며 그 행위가 민족과 역사 앞에 단죄되는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의원총회를 마친 후 신민당은 김경숙양 추도식에 들어갔다. 추도식에는 김영삼 총재를 비롯 소속 의원과 당원, 그리고 재야인사, 여공 등 2백여 명이 참석했다. 추도식이 거행된 신민당 마포 당사 주변에는 경찰 2천여 명이 출입을 통제했다. 추도위원회 고문에 추대된 윤보선, 김대중, 김수환 추기경, 김관석 목사를 비롯한 재야 종교계 인사들은 경찰의 방해로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관우, 김철, 안필수, 김정례 등은 방해를 무릅쓰고 추도식에 참석하여 80년대 노동운동의 불을 지핀 김경숙양의 영혼을 위로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팔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벌써 5시 32분이 되어 있었다. 부대의 막사 앞에는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있었다. 한경호는 타이핑한 원고를 서류 봉투에 담고 부대를 나섰다. 거리는 조용했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도 없이 거리는 잿빛과 회색으로 우중충했다. 검은 색 찦차의 차창으로 흐르는 서울의 야경을 우두커니 내다보면서 한경호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3
저녁을 마치자 한경호는 아내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았다. 12월 22일 크리스마스이브를 이틀 앞두고 있었으나 TV프로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12.12 사태로 방송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무척 춥겠어요."
그의 아내 정란이 어깨를 기대 오며 나직하게 말했다.아내의 머리숱에서 비누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연말이니까...."
한경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내의 머리숱에서 풍기는 비누 냄새는 어쩐지 싸구려 화장품처럼 역겨움이 느껴졌다.
"목욕했나?"
"네."
정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경호는 팔을 뻗어 아내의 어깨에 감았다. 아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근처에 목욕탕이 있나?"
"대광고등학교 쪽에도 있고 신설동, 보문동에도 있어요."
"벌써 동네 구경을 다한 모양이군."
"심심해서 옆집 여자하고 시장에도 가보고 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그랬어요."
"뭐하는 여자야?"
"가정주부예요."
"남편은 뭐한데?"
"기자예요."
"기자?"
"중원일보 기자래요. 아직 아이들이 없어요. 그래도 여자는 얌전해요...."
한경호는 이사를 오던 날 집 앞에서 구경을 하던 젊은 여자가 그 여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여자였다. 그러나 운동을 했는지 몸이 팽팽하게 탄력이 넘쳤다. 어쩌면 아내보다 젊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아내보다 7, 8년 연하로 보였다.
"이웃이니까 가깝게 지내도 괜찮겠죠?"
"여자들 끼리야 가깝게 지내야지. 그러나 내 직업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
"옆집에도 비밀을 지켜야 해요?"
정란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국가 기밀을 다루니까 어쩔 수 없어."
한경호는 냉랭하게 말했다. 옆집 사내의 직업이 신문기자라면 더욱 자신의 근무처를 밝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그래요?"
"군인이라고 그래."
"장교?"
"응."
"장교도 아니면서 어떻게 장교라고 그래요?"
정란의 얼굴에 다시 불만이 묻어 났다.한경호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정란의 그런 불만은 한경호 자신도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군대에 지원 입대하여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10년째 퇴직했었다. 그러나 2년이 채 못 되어 복직했는데 이번엔 군인이 아닌 문관으로서였다. 한경호는 때때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장교로 부임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으로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쓸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선임하사라고 그럴래?"
한경호의 말투가 날카롭게 변했다.
"누가 그런대요?"
정란이 움찔했으나 곧이어 또다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한경호는 정란의 말투에 대꾸하지 않고 우두커니 TV 화면을 응시했다. TV 화면은 연말특집으로 70년대의 국내 10대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그때 현관에서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정란이 재빨리 현관으로 뛰어 나가는 것을 응시하며 한경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시간에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TV 화면에 대연각 화재 모습이 잡히자 화면으로 시선을 못박았다.
"여보."
정란이 화사하게 웃으며 한경호를 불렀다. 정란의 옆에는 신문기자의 옆집 여자가 수줍은 듯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 남편예요."
정란이 한경호를 옆집 여자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옆집 여자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한경호는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옆집에 사는 채은숙예요."
"한경호라고 합니다."
"공연히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남편이 신문사에서 돌아오지 않아 차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하고 왔어요."
채은숙이 밝게 웃었다.
"예."
한경호는 어색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들어가 쉬세요.우리끼리 얘기나 하게...."
정란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럴까?"
한경호는 즐겁게 지내시라고 채은숙에게 인사를 한 뒤 서재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채은숙의 방문은 돌연한 것이었으나 싫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이 찾아 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채은숙의 인상도 마음에 들었다. 채은숙의 맑은 인상이 아내의 욕구불만에 찬 얼굴과 비교되었다. 채은숙의 얼굴에 비교하면 아내의 얼굴은 탐욕과 부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한경호는 책상 위에 있는 타이프 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낮에 사무실에서 하던 작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정국은 YH 사건을 기폭제로 파국을 향하여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 8.11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신민당 의원들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을 때 신민당의 비주류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인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이 총재단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므로써 정국은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윤형, 김한수, 조연하, 김옥선, 황명수, 심봉섭, 김태룡, 김형중, 신경설, 김덕룡, 정일형 등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어 정당원 자격이 없고 따라서 이들이 추천한 대의원 25명은 대의원 자격이 없는 무자격 대의원이므로 김영삼 총재는 과반수에서 2표를 더 얻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신민당은 즉각 당기위원회를 열어 이들을 제명했다. 신민당의 당권투쟁은 정국과 맞물려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윤형 부총재는 가처분 신청의 제출은 배후세력이 개입하여 저지른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명백한 증거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정권과 결탁하여 가처분 신청을 제출하게 한 사꾸라 세력이 신민당에 있다고 비주류를 겨냥하여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비주류의 이철승, 신도환, 고흥문, 이충환, 유치송 의원 등 전 최고위원들은 동지를 모함하고 있다고 주류측을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 총재는 8월30일 기자회견을 열어 '가처분 신청은 야당을 말살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음모에 단호하게 항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서울 민사지법 합의 16부(부장판사. 판사)는 9월 8일 '총재선출 무효확인 등 본안소송 확정 판결 시까지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집무 집행을, 이민우, 박영록, 조윤형, 이기택은 부총재의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서 재판부는 전당대회 의장인 정운갑을 총재직무대행자로 선임했다. 매스컴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신민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재야는 법원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법원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것이라고 강력한 비난을 가했다. 신민당은 큰 충격 속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법원 판결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민주회복 투쟁을 더욱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은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주류와 비주류에 제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주류 측은 이를 거부했다. 중도파 의원들뿐 아니라 비주류 의원들 일부도 참석하지 않아 수습위 구성은 처음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은 9월 19일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는 신민당 소속의 김영삼 의원의 발언을 앞으로는 신민당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의견으로 본다'면서 김영삼 의원, 김영삼씨로 호칭을 바꾸었다. 신민당 주류는 9월 25일 당원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영삼 총재 수호 전국 당원대회'를 열고' 김영삼 총재가 유일한 신민당의 법통이며 관선 대행은 반당의 표본'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신민당은 김영삼 총재지지 서명 작업에 들어가 9월 26일 신민당 의원 42명의 명단과 통일당 의원 3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비서명 의원은 25명뿐이었다. 비주류와 여당은 씁쓸했으나 신민당의 주류는 원내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지 회견기사가 보도되면서 여당에 의한 김영삼 총재 제명론이 일어나 정국은 다시 파국을 향해 가파른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부에 대한 김총재의 거리낌 없는 투쟁으로 체포의 위험에 처해 있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는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국민을 탄압하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국민들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지난 8월의 가처분 결정은 김총재로부터 신민당 총재의 권한을 대부분 박탈했으며 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사법부에 대한 비난을 금지하고 노동자 및 농민들을 조직화하려는 반정부 인사들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국의 고위 관리들은 김총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여당인 공화당의 박준규 당 의장 서리는 김총재 체포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는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개입을 유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비상 수단을 사용하게 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김영삼씨는 자고 일어나면 더욱 강경한 혁명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속당할 위험에 있어도 김총재는 계속 입을 다물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6월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언급 '카터는 방한을 하여 박대통령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카터는 박대통령의 위신을 세워 줌으로써 박대통령이 반대 세력을 말살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는 박대통령에게 강력한 탄압정책을 쓰도록 해줄 것이라는 사실 카터에게 방한하지 말 것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카터의 방한을 생각하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김총재를 구속하자니 그를 대중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냥 두자니 정부에 대한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비판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총재는 '미국의 대사관은 그들의 시야와 접촉을 확대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대사관이 방대한 인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접촉의 범위가 그렇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주 테헤란 대사관이 국무성에 팔레비 정권의 취약성을 경고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란은 미국의 가장 중대한 외교적 나는 미국 대사관이 이곳에서 똑같은 전철을 밟지 말기를 바란다.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박대통령에게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억지 이론이다. 미국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3만 명의 지상군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국내 문제에 대한 개입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한국의 제일 야당인 신민당은 국회에서 3분의 1 미만인 67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78년 12월의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보다 더 많은 득표를 했다. 김총재는 '나는 지금도 북한과 대응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언론 집회의 자유, 자유 선거를 통한 우리의 정부를 선택할 자유라고 확신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보다 많은 민주주의, 보다 개방적인 제도와 더불어서만 한국은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영삼 총재의 회견 내용은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여당 측은 뉴욕타임즈의 회견 내용이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몰아붙였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백두진, 박준규, 태완선, 김종필, 이효상 등 수뇌부 회담을 열어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지 회견기사를 문제 삼기로 하고 5개 질의서를 보내는 한편 정기국회에서 추궁하기로 하였다. 특히 유정회는 국가모독죄로 김영삼 총재를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성은 9월 18일 성명을 내고 한국 정부는 김영삼 총재를 구속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김영삼 총재에게는 충동적인 발언으로 정부를 자극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 총재를 구속하는 대신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징계 사유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보와 국리민복을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로 되어 있었다. 국회에 징계동의안을 제출한 공화당과 유정회는 9월 29일 당무회의에서 징계와는 다소 멀기는 했지만 이들의 징계를 제명으로 결정했다.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는 회의 도중 신라 호텔에 가서 태완선 유정회 의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과 회동, 청와대의 제명 결정을 통보받았다. 신민당은 가처분 결정으로 주류와 비주류의 당권투쟁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10월 2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김 총재 제명저지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 총재의 제명을 위해 10인 전략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정치가 화약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 같은 양상으로 치닫자 우려하는 여당 의원들도 나타났다. 박찬종 의원은 공화당과 유정회의 합동대책회의에서 야당 총재의 제명은 정치적으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완선 유정회 의장이 그를 옆방으로 불렀다.
"나도 박 의원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청와대 법률 담당 보좌관이 국회법 규정에 따라 징계가 가능하다고 각하께 보고했소. 각하가 싸인한 보고서가 지금 내 주머니에 있으니 아무 말도 마시오."
박찬종 의원은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 의원총회에서 '여당은 나의 정치적 신념을 철회하라는 게 제명의 근본적 이유'라고 말한 뒤 '공화당 정권이 비록 나를 감옥에 보내는데 성공할지는 모르나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확고한 신념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4일 이른 아침부터 신민당 의원들은 비상대책회의와 의원총회를 잇달아 열고 실력 저지를 다짐하고 국회로 출발했다. 오전 9시50분,국회 본회의장의 문이 열리자마자 신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들어가 단상을 점거했다. 백두진 국회의장은 오전 10시 30분, 11시, 12시 세 차례에 걸쳐 의장석에 접근을 시도하여 여야 의원 간에 밀고 밀치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오후 1시 20분, 백두진 국회의장이 네 번째 회의장에 들어와 단상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들은 다시 격돌을 벌였다. 그 와중에 국회 경위들에게 둘러싸인 백두진 의장은 구두로 손을 들어 '김영삼 의원의 징계동의안이 발의되어 법사위원회에 회부합니다.'하고 선언했다. 백두진 의장의 변칙 사회로 징계동의안이 법사위에 회부되자 법사위는 야당 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법사위를 열어 40초 만에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서상린 법사위원장은 '징계안에 대한 제안설명은 유인물로 대체한다'하고 이의를 물은 다음 재빨리 제명 가결을 선포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신민당 의원들과 여당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밀고 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야당 의원들은 징계안이 본회의장에서 통과될 것을 대비 본회의장으로 돌아와 단상을 점거했다.
백 의장은 오후 3시 55분, 국회법 제141조에 의거하여 경호권을 발동했다. 이에 따라 새벽부터 국회의사당 지하실에서 대기하던 300여 명의 국회 경찰이 여당 의원 의총 회장으로 이용되는 146호실의 통로를 막고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만 입장시켰다. 백 의장은 여당 의원들이 모두 입장을 마친 오후 4시 5분, 본회의 속개를 선언하고 국회법 제118조에 따라 비공개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4시 8분, 무기명 비밀투표를 시작해 오후 4시 20분에 개표까지 모두 끝냈다. 결과는 여당의원 159명 중 159명 전원이 찬성하여 제명이 가결되었다. 신민당 의원들은 여당이 본회의장까지 이동하여 변칙제명을 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달려갔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열린 신민당 의원총회에서 비통한 목소리로 고별인사를 했다.
"공화당 정권이 총선에서 1.1%를 이긴 야당의 총재를 국회에서 추방한 것은 민주주의를 추방한 것이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기필코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명 전에 의총에서 나와 운명을 같이 한다고 결의했지만 민주주의의 보루인 의회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싸워 주십시요."
김영삼 총재는 고별사를 남기고 25년 동안 몸담았던 국회를 떠났다. 이날 한국의 모든 신문은 국회를 떠나는 김영삼 총재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사진을 싣고 정부 여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제8장 영혼의 파괴자들
1
최종열의 소설은 거기서 끝이 나 있었다. 미경은 원고를 모두 읽자 최종열이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이 다시 궁금해 졌다. 소설은 두 가정이 등장하고 있었으나 두 가정의 얘기를 통해 80년대 정치 상황을 분석해 보려는 것 같았다.
(허지만 이런 정도의 소설 때문에 행방불명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한 일이군.)
미경은 소파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은 이제 7, 80년대와 전혀 달라져 있었다. 군사정권이 퇴진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통령은 12.12 사태를 쿠데타적 사건이라 규정했고 12.12 사태의 피해자들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검찰에 고발했으나 검찰은 12.12 사태가 하극상에 의한 반란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한 뒤 기소유예 처분을 했던 것이다. 검찰의 처분은 사법적 판단이라는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2.12 사태나 그 후의 일 때문에 민간인들이 기관에 구속되거나 살해당할 위협은 전혀 없었다.
(나머지 원고를 찾아서 읽어 봐야 돼. )
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목포에 내려가서 최종열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최종열과 불륜의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미경을 주저하게 했다. 최종열만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로 그의 벌거벗은 육체와 그와 관계를 맺던 일이
생각나곤 했다. 물론 최종열이 미경의 정부는 아니었다. 미경은 한 번도 그를 정부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최종열도 미경을 정부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미경의 정부라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내 양윤석이었다. 최종열은 미경의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창녀인가?)
미경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씁쓸하게 웃었다. 남자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직업 여자들을 만나 관계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관계를 할 수 있는 곳도 수없이 많았다. 술집이 아니라도 일부 이발소, 사우나탕, 안마시술소도 쉽사리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욕망을 배설할 수 있는 장소였다. 남자들은 약간의 돈만 있으면 여자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윤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오래전부터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를 통해 남자들을 불나비처럼 찾아다녔다. 최근엔 남자 호스트들을 고용한 여성 전용 술집이 생겨 충격을 주더니 그곳을 이용하는 여자들이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아연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을 퇴폐 유흥업소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부 유흥업소를 통해서만 여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의 신세대들은 오렌지족, 야타족, 나타족 등 신조어까지 만들어 가며 욕망을 배설하고 있었다. 성의 개방 풍조는 그것이 지나쳐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경은 저녁을 지어 먹고 TV 앞에 앉았다. 양윤석은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TV는 9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미경은 9시 뉴스를 잠시 시청하다가 샤워를 하고 침실에 들어가 누웠다. 양윤석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미경은 이튿날 회사에 출근하여 근무를 했다. 양윤석이 다니는 은행에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그가 외박을 하면서 전화를 걸어주지 않은 이상 자신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양윤석은 당직이 걸렸거나 동료들과 어울려 포커를 하러 갔을 것이었다. 미경은 회사에서 늦게 퇴근을 했다. 경기도 강화군의 특산품인 화문석 상가를 취재하고 아파트로 돌아오자 그는 이미 집에 있었다.
"늦었군."
양윤석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취재를 갔다가 오느라고 늦었어."
미경은 집에서 입는 일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어디?"
"강화도."
"저녁은 어떻게 했어?"
"아직 안 먹었어."
미경은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벌써 8시 30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장하겠네?"
미경이 양윤석을 보고 물었다.
"조금."
"금방 할께."
"자기도 안 먹었나?"
"응."
"그럼 외식을 할까?"
"그냥 집에서 해."
"그러던지."
그가 소파에 있는 신문을 펴들었다. 미경은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밥은 아침에 지어 놓은 것이 있었고 찌개만 끓이면 되었다. 소소한 밑반찬은 백화점에서 산 것이 그대로 있어서 충분했다.
"된장찌개 끓일까?"
"그래."
그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경은 냄비에 물을 붓고 된장을 풀었다. 야채로는 호박, 고기는 조갯살, 그리고 두부를 숭숭 썰어서 넣었다.
"술 한잔 할래?"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그가 기척도 없이 등 뒤로 다가와서 미경을 안았다. 미경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술?"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하지."
"느닷없이 왠 술일까?"
미경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가 술을 같이 하자고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그의 손은 미경의 둔부를 슬금슬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알면서 그래."
그가 하체를 미경의 둔부에 바짝 밀착시켰다. 미경은 허리를 틀며 웃음을 깨물었다.
"좋아."
"그럼 내가 사 올께."
"응."
그가 미경의 목덜미에 축축한 입술을 얹었다가 떼고 밖으로 나갔다. 미경은 싱크대 앞에서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가슴에서 무엇인가 둔중하게 울린 기분이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벌써 그와 살을 섞고 동거한 지도 1년이 가까워 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장난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하는 회의가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그놈들만 아니었으면 나도 재혼을 했겠지.... )
미경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재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사창가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했고 어찌되었거나 몸을 팔던 여자였다. 그런 몸으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게다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도 풀어야 했다. 남편의 죽음뿐 아니라 미경을 사창가에 팔아넘긴 사내들도 추적해야 했다. 미경은 그 사내들만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사내들로 인해 미경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미경은 아직도 죽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다. 미경이 남편에 대한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절절한 것이었다. 미경이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미경은 대학생이 된 뒤의 첫 방학이라 친구들과 어울려 고향과 정 반대쪽에 있는 서해안의 대천 해수욕장으로 놀러 갔다. 집에서는 여자들끼리 해수욕장에 가는 것을 반대했으나 미경은 허락을 받지 않고 집을 떠났다. 이틀 동안은 해변에 텐트를 치고 지냈고 사흘째 되던 날부터 소나기가 쏟아지자 가까스로 민박집을 얻어 이틀을 지냈다. 미경의 친구들은 비가 쏟아져 해수욕을 할 수 없게 되자 호텔에 가서 춤을 추기로 했다. 미경도 대천까지 와서 방구석에 처량하게 앉아 있기는 싫었다. 미경과 친구들은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남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미경의 친구들과 합석을 요구했고 미경과 미경의 친구들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었다. 미경과 미경의 친구들은 그곳 나이트클럽에서 남자들과 함께 자정이 될 때까지 춤을 추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때까지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남자들의 제안에 의해 그녀들은 남자들의 텐트로 몰려갔다. 남자들은 귀한 손님들이 왔다면서 술과 음식을 꺼냈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미경은 새벽 3시쯤 남자들의 텐트에서 나왔다. 술을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빗발이 약해져 있었다. 미경은 남자들이 바래다주겠다는 것을 사양하고 민박집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걸음이 비틀거렸다. 미경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미경의 친구들은 남자들과 계속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미경은 비틀대며 걸었다. 공연히 술을 마셨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경은 백사장을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백사장은 군데군데 텐트가 쳐져 있었으나 대개 불이 꺼져 있었다. 미경은 백사장에서 검푸른 바다를 쳐다보았다. 빗발이 시원했다. 파도는 검은빛으로 달려와 모래톱을 핥고 있었다. 미경은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술이 몹시 취해 다리가 비틀거렸다.
"아가씨 취했구만."
그때 어둠 속에서 낯선 사내들이 미경에게 다가왔다. 미경은 머리를 흔들었다.
"누구세요?"
"누군지는 알아서 뭘해?"
사내 하나가 미경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미경은 깜짝 놀라 사내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다.
"아쭈!"
사내 하나가 갑자기 넓은 손바닥으로 미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경은 사내의 손을 뿌리치려고 사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또 한 사내가 달려들어 미경의 팔을 뒤로 꺾었다.
"빨리해!"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미경의 머리에 옷가지를 덮어 씌웠다. 미경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사내들은 빠르게 미경을 어깨에 둘러메고 풀숲으로 달려갔다.
(이 일을 어떻게 해.... ?)
미경은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때 사내들이 미경을 풀숲에 내려놓았다. 사내들이 미경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미경은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러나 미경은 안간힘을 쓰면서 반항했다.
사내들이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었으나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이년이!"
"잠자코 있어 이년아!"
사내들이 미경의 뺨을 후려쳤다. 미경은 뺨이 얼얼했다. 사내들은 미경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양쪽 어깨를 찍어 누르고 다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미경은 울면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내들은 미경이 입고 있던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고 치맛자락을 허리로 걷어 올렸다. 미경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이년이 칼맛을 봐야겠어?"
그때 사내 하나가 날이 시퍼런 과도 하나를 미경의 눈앞에 들이댔다. 미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때? 이걸로 면상을 그어줘?"
미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잠자코 있어. 알았어? 반항해 봤자 험한 꼴만 될 테니까.... 잠자코 있는 것이 너를 위해서도 좋아!"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들이 칼을 들고 있어 겁이 덜컥 났다.
"입을 틀어막아!"
사내 하나가 짧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재빨리 미경의 입에 헝겊 조각으로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이어서 미경의 손을 나이롱 줄로 묶었다. 미경은 두 눈을 감았다. 사방은 캄캄하게 어두웠고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미경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사내들은 미경의 아랫도리에 걸쳐져 있는 속옷까지 벗기고 미경의 몸 위로 올라왔다. 미경은 울기 시작했다. 사내의 하체가 미경의 아랫도리의 은밀한 곳을 압박해 오려는 순간이었다.
(아!)
미경은 비감했다. 그때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야?"
"경찰이야!"
"씨팔!"
"튀어!"
미경을 겁탈하려던 사내들이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후닥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는 한참동안이나 요란하게 들려오다가 그쳤다.
"괜찮아요?"
그때 젊은 사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울렸다. 미경이 눈을 뜨자 어둠 속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불량배들은 달아났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낮은 저음이었다. 미경은 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런.... 입이 막혔군요."
사내가 그때서야 미경의 입에 물린 재갈을 꺼내고 손을 풀어주었다. 미경은 재빨리 스커트를 주워 입었다.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아랫도리가 사내에게 자세히 보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미경은 사내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별말씀을요. 이만하기를 다행입니다."
사내가 미경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 날밤 그 사내의 보호를 받으며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 사내가 기타를 들고 찾아왔다. 미경은 어젯밤의 일이 부끄러웠으나 사내를 따라나섰다. 다행히 날씨가 맑게 개어 있었다. 사내는 해수욕장 근처의 바위 언덕으로 미경을 데리고 가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사내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인 대천으로 내려온 대학생이었다.
나는 아주 불행한 소년입니다.
나의 얘기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불만에 가득 차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거짓말과 농담들, 아버지는 여전히 내 얘기를 무시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나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몸을 의지할만한, 겨우 잠잘 수 있는 곳을 찾아 도시의 빈민가로 갔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조그만 일자리라도 얻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오직 7번가의 창녀들만이 유혹의 손짓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나는 권투선수 겸 청부폭력배가 되었습니다.
도시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기 위해 고향으로 가기 위해 복서가 되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사내는 그 무렵에 한창 유행하던 사이먼과 가펑클의 '복서'라는 노래를 번역해서 불러 주기도 했다. 사내는 기타를 잘 쳤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미경이 복서라는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김석호였다. 미경이 그 사내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의 일이었다. 미경이 마지막 여름방학을 해수욕장에 보내기 위해 대천에 갔을 때 김석호도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김석호는 대학에 재학 중이면서 학생운동을 하여 강제 입영이 되었던 것이다. 미경은 그해 여름부터 김석호와 부쩍 가까워졌다. 해수욕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김석호를 계속해서 만났고 김석호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김석호를 만나면 공연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거야.... )
미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경과 김석호는 만나기 시작한 지 6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연애 기간이 길기는 했으나 학생운동을 하던 남편이 졸업하자 곧 바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정신없이 바쁘게 되었고 혼수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미경도 제약회사 홍보부에 취업을 했다. 자연스럽게 결혼이 늦어진 것이다. 남편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미경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납치되어 사창가로 전락하지 않았더라면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복수할 거야!)
남편의 얼굴과 자신이 지옥 같은 사창가에서 보낸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자 미경은 얼굴이 차가워졌다. 복수란 단어는 이미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날을 갈고 있었다. 재혼은 포기했다. 과거를 숨기고 결혼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재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오로지 복수에 대한 일념만 가득 차 있었다. 다만 미경이 아직까지 정체불명의 사내들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방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양윤석이 돌아온 것은 미경이 저녁을 식탁에 차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미경은 양윤석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마셨다.
"샤워 같이 할까?"
저녁을 마치자 양윤석이 물었다.
"좋지."
미경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술 때문일까. 미경의 내부에서 갑자기 쎈스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쎈스란 뭘까?"
욕실에서 양윤석이 미경을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욕망이겠지."
"욕망?"
"종족 번식에 대한 욕망, 폭력에 대한 욕망...."
"아니야. 쎈스가 반드시 욕망은 아니야."
"그럼 뭐야?"
"사랑이야."
"웃기네!"
미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너는 욕망 때문에 쎈스를 하니?"
"그럼 무엇 때문에 쎈스를 해?"
미경이 가볍게 둔부를 흔들었다. 그러자 양윤석이 미경의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기분 좋아."
미경은 허리를 뒤로 젖히고 양윤석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양윤석은 두 손으로 미경의 둔부를 받치고 있었다. 미경은 둔부에 양윤석의 손길을 느끼며 가볍게 둔부를 흔들었다. 양윤석의 하체가 그녀의 구석 깊이 침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욕망이야?"
양윤석이 미경의 허리를 바짝 조이며 물었다.
"그럼 욕망이 아니고 무어야?"
"이건 사랑이야."
양윤석이 미경을 타이루 벽으로 밀어붙였다. 미경은 눈을 감고 전신으로 퍼지는 관능적인 쾌락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양윤석과의 쎈스가 욕망이든지 사랑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경은 양윤석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순간만큼은 철저하게 쾌락에 몰두하고 싶었다.
2
양윤석이 후드득 몸을 떨며 곤두박질을 쳤다. 미경은 재빨리 양윤석의 땀에 젖은 몸뚱이를 받아 안으며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바짝 조였다. 양윤석은 언제나 그렇듯이 몸을 두, 세 차례 부르르 떨고는 미경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어땠어?"
양윤석이 땀에 젖은 얼굴을 미경의 가슴에 비비며 물었다. 미경은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어."
미경은 가볍게 양윤석의 등을 두드렸다.
"내가 노동을 한 건가?"
양윤석의 말에 미경은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그런다던데.... 부인과 쎈스가 끝나면 아 오늘도 체력봉사를 했구나 하는 거야."
"그럼 여자들은?"
"계를 탓다고 그런대."
"쎈스가?"
"응."
"어째서?"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되면 남자들은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고 술 마시고 이래저래 쎈스를 등한시하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여자는 오히려 성욕이 더욱 왕성해진대. 그래서 남자들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여자들의 욕구를 거절하는데 모처럼 쎈스를 하게 되면 여자 쪽에선 마치 계를 탄 것 같다는 거지."
"그럼 그만치 즐겁다는 얘기야?"
"계를 타는 것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야. 목돈을 타기 위해 계를 부을 때는 희망이 컸는데 막상 곗돈을 타고 보니 여기 저기 찢어발기고 남은 돈이 없게 되지. 쎈스도 그와 마찬가지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쎈스를 했는데 까무러칠만치 좋은 것도 없구 밍밍하니까 실망이 컸다는 얘기야."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가?"
"그럼 모든 부부가 항상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생각해?"
"그런 건 아니야."
"무거워."
미경은 양윤석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쎈스에 열중해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으나 일단 쎈스가 끝나면 기이하게 남자들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한 번 더 할까?"
양윤석이 그녀의 젖무덤을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
"자신 있어?"
미경은 양윤석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공연히 곗돈 탔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래."
양윤석이 웃음을 깨물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겨우 두 번에?"
"하긴...."
"첫 번째는 너무 싱거웠어. 우리가 무슨 포르노 배우라구 욕실에 서서 쎈스를 해?"
"그래서 재미없었어?"
"너무 빨리 끝났어."
"그럼 두 번째는?"
"달콤했지."
미경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세 번은 안 될 거야."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어때?"
"좋아."
미경은 살갑게 웃었다. 그러나 미경과 양윤석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인 노력을 했는데도 세 번째는 간신히 이루어졌다. 미경과 양윤석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서 축 늘어져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잤다.
이튿날은 날이 청량하게 맑았다. 하늘은 높고 바람결은 시원했다. 미경은 날씨만큼 몸이 가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을 했다. 이따금 최종열의 원고 때문에 신경이 쓰였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최종열이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나머지 원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나갔다. 미경이 목포에 다녀온 지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나자 날씨는 겨울로 접어들었다. 미경은 매일 매일을 평범하게 보냈다. 아파트에서 회사로, 회사에서 아파트로 오고 가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되었다. 양윤석과의 동거도 계속되었다. 양윤석의 성격이 특별히 모난 성격이 아니어서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애인처럼, 그리고 결혼한 부부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쎈스라는 매개가 그들을 끈끈하게 엮어주고 있었다. 미경이 양윤석을 처음 만난 것은 의정부에 있을 때였다. 양윤석은 그 무렵 부인과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혼자 살고 있었다. 미경이 일하는 다방에 저녁이면 매일 같이 찾아와 한참동안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경에게 명함 한 장을 주고 갔다.
한성은행 의정부지점 대리 양윤석
전화번호와 함께 명함에 새겨진 글자였다. 양윤석은 그동안 한성은행 의정부지점에 근무하고 있었으나 서울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양윤석은 서울에 오면 꼭 한번 찾아오라고 미경에게 당부했고 미경은 성형수술을 마치자 양윤석과 만나 동거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짐승처럼 살고 있는 거야.... )
미경은 양윤석과 쎈스를 하다가도 침실에 붙어 있는 커다란 거울을 향하여 중얼거리곤 했다. 그 거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남녀가 짐승처럼 교미를 하고 있었다. 남자나 여자나 입까지 벌리고 누가 더 크게 신음소리를 내는 시합이라도 벌이듯이 정신없이 헐떡대고 있었다. 영락없는 두 마리의 짐승이었다. 방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은 뱀처럼 엉켜 있었다. 때때로 체위가 바뀌기도 했고 뒤에서 뒤로 달라붙거나 옆으로 누워서 달라붙어 있을 때도 있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짐승들이 교미를 하는 자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야릇한 자세, 소위 식스 나인 자세로 엉켜 있는 모습이 거울에 비치기도 했다. 미경은 그럴 때마다 허공에서 낯선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암암하게 들려오는 듯한 환청에 몸을 떨었다.
미경이 최종열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2월 초순의 일이었다. 미경은 연말특집에 실릴 기사를 끝내고 사무실에 앉아서 한가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미경은 양윤석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로에 가서 연극이나 한 편 보러 가자고 할 참이었는데 석간신문이 배달되었다. 미경은 무심결에 신문을 펼쳐 정치면부터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
미경의 시선이 사회면에 이르렀을 때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사회면 하단에 최종열의 변사 기사가 짧게 실려 있었다.
11일 오전 9시15분쯤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야산 소나무 숲에서 작가 최종열씨(37. 전남 목포시)가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목 졸려 숨져 있는 것을 주민 김태수씨(26. 태안읍 황계리)가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숨진 최씨는 두 손이 나이롱 줄에 묶여 있었으며 입에 여자의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복부를 난자당한 채 부라우스로 목이 졸려 있었다. 현장 주변에는 최씨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 외투, 지갑 등이 떨어져 있었다. 경찰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최씨의 입에 속옷을 집어넣고 목을 조른 것이 여자의 옷인 점을 미루어 치정에 얽힌 살인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미경은 그 신문기사를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신문기사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행방불명이 된 최종열이 살해당한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살해당한 방법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최종열이란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것이 도저히 실감이 되지 않았다.
(최종열의 죽음은 치정이 아니야. )
미경은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무겁게 한숨을 내뱉았다. 그러나 신문기사만으로는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사건 현장에 가서 최종열이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뜻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경은 착잡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최종열의 죽음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었다.
미경은 회사에서 퇴근을 한 뒤에 인근 찻집에 들어가 앉았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찻집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미경은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최종열이 살해당한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종열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당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80년대의 무단통치가 끝난 것은 분명했으나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세력이나 그 시대의 잔여 세력들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 사람들이 부활한다더니 정말 그런가?)
미경은 최근의 정치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우울해 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수많은 기득권층이 도태되거나 매장을 당한 뒤 현 사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개혁이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는가 하면 개혁이 주춤한 틈을 타서 우익 보수 진영이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최종열의 죽음은 결코 이러한 사회 현상과 무관할 수 없었다.
(일단 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해. )
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경은 커피를 마신 뒤 찻집에서 나와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서 카메라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최종열의 죽음을 취재하려면 기자 패스와 카메라가 필요했던 것이다. 회사에는 후배 기자인 박순옥이 혼자 앉아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미경은 캐비넷에서 카메라를 꺼내 가지고 필림을 확인한 뒤 회사를 나왔다. 미경은 먼저 회사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 들어가 칼국수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웠다. 경기도 화성은 수원 옆에 있었다. 미경은 화성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었으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잇달아 터지는 바람에 화성의 위치는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미경은 시청역에서 전철을 탔다. 수원까지는 버스를 타야 했으나 국도가 밀리고 차를 갖고 있지 않은 미경은 전철이 가장 빠르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수원행 전철은 토요일인데도 그다지 혼잡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40분 남짓 걸렸다. 화성군 태안읍은 수원에서 오산으로 택시를 타고 15분쯤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태안읍 병점리에서 내리자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미경은 사람들에게 물어 태안지서를 먼저 찾아갔다. 태안지서는 아직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최종열 살인사건은 뜻밖에 화성경찰서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건 현장을 가봐도 되나요?"
미경은 지서를 지키고 있는 차석에게 물었다.
"그럼요."
차석이 선선하게 대꾸했다. 차석은 눈이 크고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현장이 어디쯤 되요?"
"여기서 가까운데..... 큰길을 건너면 야산이 하나 보일 겁니다. 석재공장 바로 뒤에요. 그 산 중턱에 있습니다."
"높은가요?"
"높지 않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도 올라가서 노니까요. 잠깐 기다리십시오. 우리 의경에게 안내해 드리라고 할테니까...."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미경은 차석의 제안을 사양했다. 공연히 의경이 따라붙어 이것저것 간섭을 하게 될 것 같아 미리 차단해 버리자는 속셈이었다. 그러자 차석이 빙그레 웃었다.
"안됩니다."
"네?"
"여기는 화성입니다. 여자분 혼자서 야산에 올라가게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예요?"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아직두요?"
"살인마를 검거하지 못했으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요."
미경은 도리없이 차석이 따라 붙인 의경의 안내를 받으며 진안리 야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 야산은 이미 경찰이 샅샅이 수색을 하고 증거물을 모조리 수집해 간 뒤여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껏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경찰이 '수사 중 접근금지'라는 종이를 매달아 놓은 붉은 나이롱 줄 뿐이었다.
"수사는 진척이 있나요?"
미경은 을씨년스러운 사건 현장에서 사진을 몇 커트 찍고 의경에게 물었다.
"전 모릅니다."
"시체를 봤어요?"
"예."
"시체가 어땠어요?"
""글쎄요. 죽은 지 오래된 시체라는 것밖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래돼요? 시체가 부패했었나요?"
"겨울이라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지 오래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의대생예요?"
"어, 어떻게 아시죠?"
의경이 놀란 눈으로 미경을 쳐다보았다.
"시체의 부패 정도를 보고 죽은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문가라고 봐야죠."
미경은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의경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경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최종열의 시체가 죽은 지 오래된 것이라면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이미 살해되었다고 생각했다.
"시체는 어떻게 되었어요?"
"부검을 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습니다."
"가족들은 왔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시체가 참혹했나요?"
"예."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최종열이 참혹하게 죽은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이 야릇했다. 미경은 아직도 최종열을 자신의 몸속 깊숙이 받아들이며 쾌락에 몸을 떨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체취는 잊었으나 그 느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죽은 것이다.
(내가 죽은 사람을 두고 쎈스를 생각하다니.... )
미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산은 소나무만 여기저기 듬성듬성 서 있을 뿐 키 작은 잡목과 나뭇잎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기는 살인사건이 여러 번 일어난 곳입니다."
미경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의경이 입을 열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요?"
"예. 바로 이 근처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지요."
"그 사건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나요?"
"두 건은 해결했구 나머지는 오리무중입니다. 이 산 저 너머에서 여중생이 살해되었는데 그 사건과 저쪽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어디예요?"
"바로 저기입니다."
의경이 손으로 가리키는 장소는 최종열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30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자만 살해한다면서요?"
미경은 여자가 살해된 곳을 쳐다보며 의경에게 물었다.
"그건 헛소문입니다."
"왜요?"
"여러 사람이 살인마에게 살해되다 보니까 이상한 소문이 많이 떠돌아 다닙니다."
"저기서 살해된 여자는 어떤 여자예요?"
"스물아홉 살 먹은 여자라고 합니다. 딸이 셋인데 비 오는 날 밤에 저쪽 큰길에서 우산을 두 개 들고 남편을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끌려 와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해되었어요?"
"대개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비슷합니다. 여자의 옷으로 목을 조르고 솔가지로 덮어 두었었죠."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종열이 하필이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까지 와서 살해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경은 의경과 헤어져 화성경찰서로 찾아갔다. 화성경찰서는 강력계가 최종열 살인사건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성경찰서 강력계에서도 뚜렷한 소득은 얻을 수가 없었다. 형사들은 최종열이 연고가 없는 화성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탐문 수사를 벌이고 있었고 최종열은 화성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살해된 뒤에 화성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최종열이 사망한 시간이 이미 2주일 이상이나 되어 최종열이 화성에서 살해되었다면 사람의 왕래가 잦은 화성의 야산에서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화성은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이유로 형사들이 자주 인근 야산을 수색했다는 것이다. 최종열은 유류품도 없었다. 최종열이 사건 현장에 남긴 유류품이라고는 주민등록증이 들어있는 지갑 하나 뿐이었다. 미경이 그 지갑을 좀 볼 수 있는지 문의하자 강력계 주임은 사건을 수사 중이라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경은 강력계 주임과 헤어져 화성경찰서를 나왔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3
열차는 남쪽을 향해 쉬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미경은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차창으로 지나가는 농촌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날은 눈이라도 내리려는지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최종열의 시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마치고 그의 여동생이 있는 진주로 내려가 있었다. 최종열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부모는 없고 진주에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최종열의 누이동생은 목포가 고향이었으나 진주로 시집을 갔던 것이다.
(사는 게 뭔지.... )
미경은 차창을 향해 나지막하게 한숨을 토했다. 불과 1년여 전에 목포 유달산에서 최종열에게 겁탈을 당하듯이 관계를 맺은 일이며 서울에서 애정없이 관계를 맺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왔다. 그런데 그 최종열이 죽은 것이다. 미경은 최종열의 죽은 모습을 제대로 그려볼 수가 없었다. 최종열은 목이 졸리고 복부를 칼로 난자당했다고 했으나 어느 쪽이 사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경찰도 마찬가지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통보가 와야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최종열의 입에 물린 재갈도 미경의 기분을 개운하지 못하게 했다. 최종열의 입에 물린 재갈은 뜻밖에 삼각형의 여자 속옷이었다. 미경이 진주에 내려가기로 한 것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어떤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미경은 이미 백 주간에게 최종열의 소설 원고 일부를 입수한 경위를 보고했었고 백 주간도 그의 행방불명에 난감해하고 있던 처지였다. 최종열의 죽음이 신문에 보도되자 백 주간은 미경에게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
최종열의 죽음을 추적하라고 취재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백 주간이 최종열의 죽음이 보도된 신문을 월요일 아침에야 보았기 때문에 그 지시는 월요일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 기자!"
열차가 수원에 정차했을 때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시집을 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인 김영길이 통로로 들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어머!"
미경은 반색을 했다. 김영길을 미경이 인터뷰한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어디 취재라도 가는 거요?"
김영길이 미경의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김영길은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네."
미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어디 가세요?"
"친구가 죽어서 장례에 갑니다."
"어딘데요?"
"진주요."
"어머!"
미경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왜 놀라는 거요?"
"저도 진주에 가요."
"그래요? 진주까지 심심해서 어떻게 가나 걱정을 했는데 동행이 생겨서 잘되었군."
"친구분과 아주 절친했나 보죠? 장례식에 참석하러 진주까지 가시게...."
"안 기자도 이름은 알 걸.... 그 친구가 그래도 명색이 작가니까."
"누군데요?"
"최종열. 한때 신문사에도 있었어요."
"어머!"
김영길의 말에 미경은 다시 한번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왜 놀라요?"
"저도 그분 장례식에 가요."
"그럼 안 기자도 최종열을 알고 있었소?"
이번에 놀란 것은 김영길이었다. 그때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철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네. 우리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어떤 소설인데요?"
"10. 26과 12.12, 그리고 5.18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다룰 예정이었어요."
"그럼 그 소설이었군."
김영길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소설이라니요?"
"최종열이 굉장한 소설을 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소. 대작이라거나 문제작이라는 의미의 굉장한 소설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폭로할 예정이었다는 거요."
미경은 김영길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최종열을 만났을 때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들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최종열 선생님이 죽은 것도 그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미경은 비로소 전신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최종열 선생님이 쓴 소설의 원고를 일부 봤는데 특별히 문제 될 만한 곳이 없던데요?"
"그렇지 않을 거요. 전반부에서는 문제 될 곳이 없는지 모르지만 후반부는 대단한 폭로가 있다고 하오."
"그런데 그 나머지 원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최종열을 죽인 사람들도 그 원고를 찾고 있는 것 같소. 최종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집이 수색을 당하고 조사를 받았다고 하오."
"그럼 현 정부에서 그 일을 하고 있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김영길의 말에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최종열의 죽음에 현 정부가 관련되어 있다면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 정부가 그런 일에 개입할 까닭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종열 선생님은 원고를 숨겼다는 말이 있는데 어디에 숨겼을까요?"
"글쎄.... 일단 최종열과 가까운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오."
열차가 진주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 지고 있을 때였다. 최종열의 시신은 진주 시내의 한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미경은 김영길과 함께 영안실에 가서 분향을 했다. 최종열이 의문사를 당해서인지 영안실은 문상객도 없이 쓸쓸했다. 미경은 김영길과 함께 영안실 한쪽 구석에서 저녁을 먹었다. 상가에서 서둘러 준비한 음식이었다. 영안실에서는 최종열의 누이동생과 그녀의 남편이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최종열의 누이동생은 그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름은 최종미였다. 그녀의 남편은 진주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밤이 점점 깊어 갔다. 미경은 이따금 최종미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은 최종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종미는 끝내 미경에게 접근해 오지 않았다. 미경은 자정이 되자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관에 투숙했다. 영안실에서 밤을 새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눈발이 희끗희끗 날렸다. 장례식 날이었다. 미경은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병원 영안실로 갔다. 영안실 앞에는 이미 흰색의 영구차가 도착해 있었다. 영구차가 간단한 발인식을 마치고 장지로 출발한 것은 아침 10시가 되어서였다. 영구차에는 최종열의 누이가 다니는 성당의 신도들인 듯한 사람들이 기도서와 성가 책을 들고 한 무리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최종열도 가톨릭 신도로 영세명이 세례자 요한이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었고 김영길은 지난 새벽에 돌아갔는지 문상객들 틈에 없었다.
"안 기자님이죠?"
최종미가 미경의 옆자리에 와서 앉은 것은 영구차가 진주 시내를 벗어났을 때였다. 미경은 차창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었다. 성당의 신도들은 나지막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네."
미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갑자기 변을 당해서 상심이 크시겠어요."
미경은 의례적인 말투로 최종미를 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최종미가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최종미는 얼굴이 오종종한 여자였다.
"오빠에게 얘기를 들었어요."
"제 얘기를요?"
"네. 두 달쯤 전의 일이었어요. 오빠가 갑자기 진주에 왔어요."
최종미가 주위를 살핀 뒤에 낮게 속삭였다.
"무슨?"
미경은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최종열이 누이동생에게까지 자신의 얘기를 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오빠가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알고 계시죠?"
"네."
"그런데 오빠는 소설을 쓰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기자님에게 주라면서 서류 봉투를 하나 맡겼어요. 전 대단치 않은 것인 줄 알고 병원에 그냥 두었었어요. 그런데 오빠가 행방불명이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 집안을 샅샅이 뒤졌어요."
"도둑이요?"
"네."
최종미가 낮게 대답했다. 최종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무엇을 훔쳐 갔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훔쳐 가지 않았어요."
"그럼?"
미경은 의혹이 담긴 눈길로 최종미를 쳐다보았다.
"도둑은 무엇인가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전 나중에야 도둑이 오빠가 맡긴 서류 봉투를 찾으려고 침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서류 봉투엔 오빠가 쓴 소설 원고가 들어있었으니까요."
"그럼 그 원고를 지금도 가지고 계세요?"
"네. 그 원고를 병원에 두기를 잘했던 것 같아요. 하마터면 그 원고를 도둑맞을 뻔했으니까요."
최종미가 다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미경도 덩달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종미는 무엇인가 두려워 하고 있었다. 미경도 공연히 주위 사람들이 의심스러워졌다.
"지금 제가 원고를 가지고 왔어요. 다행히 버스엔 수상스러운 사람이 없으니까 받아서 감추세요."
최종미가 가슴 속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어 미경에게 건네주었다. 미경은 재빨리 서류 봉투를 받아 코트 안주머니에 챙겼다.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마침내 최종열의 원고를 찾았다는 생각에 최종열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였다.
영구차가 장지에 이른 것은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눈발은 그때까지 그치지 않고 흩날리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이미 파놓은 묘혈로 최종열의 관을 운구해 갔다. 신도들은 관이 안치되고 흙이 덮이기 시작하자 가톨릭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례식 때나 상가에서 부르는 위령성가였다.
오늘 이 세상 떠난 이 영혼 보소서
주님을 믿고 살아온 그 보람 주소서
주님의 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주님의 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미경은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최종열의 하관식은 가톨릭의 예절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으나 미경은 어쩐지 비인간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하느님이 몸소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리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으리라 고통도 없으리라
그것은 이질적이면서도 비감한 풍경이었다. 미경은 가톨릭 신도들이 '고통도 없으리라'라는 제목의 가톨릭 성가 3절을 부를 때야 비로소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노래는 장례식의 슬픈 풍경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장례가 끝나자 진주에서 상행선 열차에 올라탔다.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눈은 그쳤으나 날씨는 여전히 흐린 잿빛이었다. 게다가 해가 짧은 겨울이라 열차가 진주역 구내를 빠져나갈 무렵엔 이미 해가 기울어 사방이 어둑어둑해 지고 있었다.
4
차창으로는 캄캄한 어둠이 칠흑의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미경은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심신이 몹시 피로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 최종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누이동생으로부터 소설 원고의 일부를 넘겨받은 것은 잘된 일이었으나 미행자가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미경은 최종열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사실에 비로소 몸이 떨렸다. 미경이 미행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열차가 마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경은 누군가 자신을 자꾸 힐끔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고 앞을 쏘아보았다. 미경이 앉아 있는 좌석에서 앞으로 세 번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너무나 낯이 익었다. 미경은 그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사내는 미경의 아파트 주위에서 자주 보던 사내였다. 그는 하릴없이 미경의 아파트 광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지하철역에서, 택시 정류장에서 둘둘 말은 신문을 들고 먼 곳을 쳐다보고 있기 일쑤였다. 미경이 그 사내를 기억하는 것은 눈빛 때문이었다. 그 사내는 우연인 척하면서 무심한 눈빛으로 미경을 살폈으나 미경은 그 사내와 눈빛이 마주쳤을 때 마치 시골길에서 뱀을 만난 듯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옷차림은 허름했다. 낡은 청바지에 짧은 머리, 그리고 가죽 잠바를 자주 입었다.
(저 사내는 나를 미행하고 있는 거야....)
미경은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서 그 사내를 따돌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
미경은 범죄영화와 첩보영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영화에는 스파이를 미행하는 방법이나 추적자를 따돌리는 방법이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이고 영화의 주인공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미행자를 따돌리는 것이 결코 영화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미행자에게 계속 미행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경은 좌석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승강대로 걸어갔다. 사내는 힐끗 미경을 살폈으나 승강대로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미경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내는 신문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미경은 30분마다 승강대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곧잘 승강대에서 뛰어내리고는 했으나 미경은 도저히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던지 열차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경은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열차에서 뛰어내릴 기회를 노렸다. 미경이 열차에서 뛰어내린 것은 열차가 삼랑진 못미처의 조그만 간이역에서 서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열차의 차내 방송이 삼랑진에서 10분간 연착을 하겠다는 방송을 두 번 되풀이 했을 때 미경은 섬광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열차는 면지역 간이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간이역을 지나고 있기 때문인지 서행을 하고 있었다. 승강대에서 사내를 살피자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미경은 승강대에서 심호흡을 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힘껏 뛰어내렸다.
"윽!"
그러자 발바닥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다리가 시큰했다. 미경은 열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데굴데굴 굴렀다. 다행히 다친 곳은 전혀 없었고 엎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찧지도 않았다. 열차는 이미 삼랑진을 향해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미경은 다친 곳이 없자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서둘러 뛰었다. 삼랑진까지는 금방이었다. 사내는 삼랑진에 도착하기 전에 미경이 뛰어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내 국도가 나왔다. 미경은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다행히 용달차가 지나가다가 미경을 태워주었다. 미경이 삼랑진역에 도착하자 열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미경은 대합실 구석에서 주위의 동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사내는 개찰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승객들의 등을 마구 밀치며 헐레벌떡 개찰구로 나오고 있었다. 벌써 미경이 열차에서 뛰어내린 것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삼랑진역 대합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허둥지둥 역광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미경은 사내가 나가자 표를 새로 끊어서 플랫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열차에 올라타지는 않고 개찰이 끝날 때까지 사내가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열차에 올라탔다. 비로소 미행자를 따돌린 것이다. 미경은 흡족했다. 차창에 기대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것이 시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자 전신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은 코트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는 테이프로 밀봉되어 있었다.
한경호는 비서실장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비서실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한경호의 전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경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수고했어. 사령관께서 흡족해하시더군."
비서실장이 책상에서 일어났다. 한경호는 빳빳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앉지."
"괜찮습니다."
"앉아!"
비서실장이 명령조로 말하고 먼저 응접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경호는 그때서야 비서실장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사령관께서 자네의 정치적 식견을 높이 사고 있어. 자네 같은 인재가 일개 문관으로 있다는 게 몹시 아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시더군."
"....."
"각하께서 왜 79년의 정치 상황을 분석하라고 하신 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짐작은 하고 있겠지?"
"어렴풋이는 하고 있습니다."
"좋아. 자네는 우리 각하를 어떻게 보고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 ?"
"통치자의 재목으로 어떤가?"
"통치자?"
한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통치자란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네 정도의 정치적 식견이면 구시대의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이끌기에는 함량 미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
"우리 군부는 3김씨 모두를 경원하고 있어. 담배 피우겠나?"
비서실장이 한경호에게 담뱃갑을 불쑥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한경호는 비서실장의 담배를 받아서 입에 물었다. 비서실장이 군복 윗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영도자가 필요해."
"예."
"떠오르는 영도자란 제목의 신문 사설을 만들게. 초안이면 될 거야. 살을 붙이는 것은 신문사 논설위원들이 할 테니까. 5.16 혁명 이념이나 강령 같은 것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지."
"예."
"앞으로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네는 우리 편이야. 각하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기를 바라네. 그렇게만 하면 자네의 앞길도 문관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한경호는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나가 보게."
"예."
한경호는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미경은 길게 하품을 했다. 소설은 한경호가 신군부의 실세들과 연결되는 부분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미경은 차창을 내다보았다. 열차가 동대구역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미경은 원고를 봉투에 담아서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대구역에 도착하면 열차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미경이 다시 열차에 탄 것을 미행자가 눈치챈다면 미행자 역시 어떻게 하던지 다시 열차에 올라탈 것이 분명했다 가능한 미행자의 예상을 앞질러야 했다. 이내 열차가 동대구역의 플랫트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미경은 승강대에 매달려서 플랫트홈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미경의 예상대로였다. 사내는 벌써 플랫트홈에서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혼자가 아닌 듯이 그의 주위에 파커와 잠바를 걸친 사람들이 셋이나 되었다. 미경은 열차가 플랫트홈에 도착하자 반대편으로 내렸다. 반대편 플랫트홈 옆의 선로에는 마침 화물열차가 한대 서 있었다. 미경은 화물열차 뒤에 숨었다. 사내들은 열차에 탄 뒤에 열차를 샅샅이 뒤질 것이다. 미경은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밤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열차는 3분 남짓 정차하고는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면서 플랫트홈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미경은 재빨리 뛰어가 열차에 올라탔다.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사내들은 플랫트홈에서 수군대고 있었다.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였다. 미경은 승객들 틈에 섞여 내리면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행히 수상스러운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미경은 서울역 지하철 통로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대합실을 통해 서울역 광장으로 나가면 사내들에게 발각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지하철이 다닐 시간이 아니므로 사내들이 지하철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을 염려는 없었다. 미경은 지하철의 문이 열리는 5시 40분까지 지하철 입구 앞에서 기다렸다. 피로와 졸음이 쏟아져 왔으나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아파트에 돌아가면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었다. 5시 40분이 되자 지하철 입구의 문이 열렸다. 미경은 표를 사 가지고 역 구내로 들어가 지하철을 기다렸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 마시자 이내 열차가 왔다. 열차는 새벽이라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미경은 이촌동 지하철역에 내려서는
아파트까지 걸었다. 이촌동 지하철역에서 미경의 아파트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이내 아파트 광장이 나타났다. 미경은 저만치 경비실의 불빛이 보이자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빨리 아파트에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미경은 경비실을 향하여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아파트의 경비는 경비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미경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지친 걸음으로 걸어갔다.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미경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때 누군가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미경은 등허리로 식은땀이 쫙 하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누군가 수도로 미경의 오른쪽 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미경은 목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몸을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헉!"
그러나 다음 순간 무쇠 같은 주먹이 미경의 아랫배를 내지르자 미경은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아랫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쌍년!"
누군가 미경의 등을 구둣발로 밟으며 거칠게 내뱉았다. 미경은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사내가 미경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내질렀다. 미경은 젖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정신이 아물아물해져 왔다. 그러나 사내들은 미경을 진흙을 밟듯이 마구 짓이겨댔다.
"그만해!"
누군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예!"
사내가 절도 있는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했다. 미경은 그 소리를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미경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함부로 주무르고 있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내들이 미경의 몸을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들은 무엇인가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미경의 몸을 젖가슴이며 스커트 속까지 가리지 않고 함부로 손을 집어넣어 뒤지고 있었다. 미경은 통증보다 수치스러움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없습니다!"
사내가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놔둬!"
현관 쪽에서 다른 사내가 지시했다. 그러자 미경의 코트와 몸을 샅샅이 뒤지던 사내가 미경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냅다 내지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개새끼들!)
미경은 엉금엉금 기면서 이를 갈았다. 사내들이 출입구 쪽으로 나가자 부르릉 하는 차 소리가 들렸다. 미경은 출입구 쪽을 간신히 쳐다보았다. 낡은 슈퍼살롱 한 대가 출입구 앞을 떠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었다.
제9장 그 겨울의 장미 넝쿨
1
미경은 아파트 거실에 대자로 누웠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들에게 얻어맞고 짓밟혀 온몸으로 격렬한 통증이 오고 있었다. 미경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양윤석이 침실에서 자고 있을지도 몰라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봉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길 잘했지.... )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뺏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져간 사람은 대학생이었다. 미경은 동대구역에서 사내들을 따돌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었다. 사내들은 필사적으로 미경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경을 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뺏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사내들이 미경을 죽이려고 했으면 그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미경이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미경을 죽여서라도 그것을 뺏으려고 할 것이나 그 점을 확신할 수 없어 미경을 미행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경은 사내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미행하려고 한 사실에 최종열의 소설이 심상치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종열의 소설은 단순하게 70년대 말과 80년대의 어두운 정치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경은 사내들이 아파트 앞이나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아파트로 가져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감출 방법을 골똘히 궁리했다. 그때 미경의 앞자리에서 컴퓨터 잡지를 읽는 청년이 보였다.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학생 같았다.
"학생예요?"
미경은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청년이 책을 덮으며 미경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예."
"집에 컴퓨터 있어요?"
"예."
청년은 느닷없이 묘령의 여인이 말을 건네자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떤 기종?"
"386입니다."
"컴퓨터 잘 다뤄요?"
미경은 청년을 향해 눈웃음을 뿌렸다. 청년은 금세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다룬다기보다 그냥 좀 다룹니다."
"컴퓨터 통신도 해요?"
"예."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요?"
"무슨 부탁인데요?"
"전 중원일보 자매지인 늘푸른여성의 기자예요. 이름은 안미숙이고요. 중요한 소설 원고를 하나 갖고 있는데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뺏으려고 해요. 서울에 도착해서 컴퓨터 통신으로 좀 보내줄 수 있겠어요?"
"어떤 소설인데요?"
청년이 불안한 표정으로 미경을 살폈다.
"나도 아직 어떤 소설인지 몰라요."
"디스크에 담았나요?"
"아녜요. 육필로 쓴 것이니까 워드를 쳐서 보내야 해요."
"해보죠."
청년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미경은 청년에게 어느 학교에 다니고, 이름이 무엇이고, 집이 어디인지 상세하게 물은 뒤 미경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청년은 S 대학교 전자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컴퓨터를 전문가 못지않게 잘 다룬다는 것이었다. 미경은 청년과 열차에서 맥주를 마시며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청년은 얼굴에 취기가 오르자 비로소 미경에게 누님이라고 불러도 좋으냐고 물었다. 미경은 누님이라고 부르면 근사하게 술을 한잔 사겠다고 대답했다. 청년은 기분이 흡족하여 수원에서 내렸다. 미경도 기분이 상쾌하여 열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잠을 잤던 것이다. 미경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결리고 쑤셔서 움직이기가 힘이 들었으나 침실로 가까이 가서 문을 살그머니 열어 보았다. 양윤석은 돌아와 있지 않았다. 미경은 침실 문을 닫고 거실에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 부러진 곳이 없었으므로 샤워를 하고 한숨 잘 생각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사내들에게 얻어맞은 것이나 피로도 어느 정도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에 알몸을 비치자 여기저기 푸르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깨끗했다.
"개새끼들!"
미경은 욕실의 거울을 노려보며 욕설을 뱉았다. 푸른 멍은 왼쪽 젖가슴 유두 밑에도 있었다. 가슴을 호되게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미경은 욕조에 온수를 틀고 들어가 몸을 눕혔다. 욕조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나른한 졸음이 쏟아져 왔다. 미경은 욕조에 누워 30분쯤 잠을 잤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으나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미경이 잠을 깬 것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저 안 기자님 댁이죠?"
"그런데요?"
미경은 전화의 목소리를 식별하기 위해 바짝 집중했다. 새벽부터 누가 전화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박태호입니다."
"아."
미경은 짧게 탄성을 내뱉았다. 열차에서 만난 대학생이었다.
"벌써 제 목소리를 잊으셨습니까?"
"아녜요. 욕조에서 깜박 잠이 들었었어요."
"욕조에서요?"
박태호의 목소리가 묘한 여운을 풍겼다. 박태호는 미경의 알몸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그런데 새벽부터 왠 일이죠?"
"컴퓨터 켜 보세요. 지금 전송했으니까요."
"지금이요?"
""예."
"좋아요."
미경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틀었다. 잠은 이미 말짱하게 달아나 있었다.
한경호는 책상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날씨가 차가웠다. 그러나 한경호의 책상에서 보이는 하늘은 별빛이 유난히 밝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정치권은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발 빠른 행보를 하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 총재에 복귀하여 당무를 장악했고 김대중은 연금상태에서 풀려나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도 박찬종 의원 등 소장 의원들에 의해 정풍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나 공화당을 장악하여 대권 포석에 나서 있었다. 정치는 바야흐로 3김 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12. 12의 주역들은 반대파 군부의 숙정에 나서 수많은 장군들이 일시에 예편되어 새로운 권력 분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군부는 한경호의 사령관을 새 시대의 영도자로 떠받들고 있었다. 국민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군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우리 사령관이 이 나라를 지배하면 나도 중요한 몫을 할 수 있을 거야.... )
한경호는 눈을 부릅뜨고 생각했다. 신군부를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대령급 영관 장교들과 소장급 몇몇 장성들이었다. 그들은 수도권의 중요한 보직에 있었기 때문에 늘 사령관을 싸고 돌았다. 한경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자신이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신군부의 중요 인물이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설레어지고 있었다. 한경호가 사령관의 비서실장을 만난 것은 문학 잡지 장편소설 공모에 준당선된 소설 때문이었다. 한경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문학 수업에 심취해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지로는 마땅히 취직할 직장도 없었는데 그럴 바에야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하면 직장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먼 친척의 권유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경호는 하사관이 된 뒤에 틈틈이 소설 습작을 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습작은 제대로 문학 공부가 되지 않아 한경호는 거의 10년 만에 문학 잡지에서 지령 100호 기념으로 공모한 장편소설 공모에 가까스로 턱걸이하듯 준당선 되었던 것이다. 일종의 가작 입선이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격동의 계절'이었다. 대통령이 북한이 내려보낸 공작원에 의해 암살되고 정치권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소령을 주축으로 한 영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소설은 정보부의 지시로 겨우 51회가 잡지에 연재되었다가 중단되었다. 한경호는 정보부로, 보안사령부로 불려 다니며 혹독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한경호를 조사한 장교가 비서실장이었다. 한경호는 당시 보안사령부의 조사관이었던 비서실장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고 오히려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10. 26이 터진 뒤 한경호를 강원도에서 서울로 불러올린 것도 비서실장이었다.
"그때 그 소설 있지?"
비서실장은 한경호가 보안사령부에 도착하여 인사를 하자 느닷없이 그런 질문부터 했다.
"소설이라니요?"
한경호는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비서실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것이다.
"그 소설 말이야."
"어떤?"
"쿠데타 다룬 소설 말이야."
"쿠데타요?"
"이 친구 왜 이래 답답해? 자네가 쓴 그 소설 말이야!"
비서실장이 약간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한경호는 그때서야 비서실장이 자신의 소설을 말하는 것이라고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 소설 사건이 아직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내 정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제 또다시 보안사령부의 조사를 받게 되면 아내는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예."
한경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 발표한 일 있어?"
"없습니다. 곧 발표할 예정입니다."
"안돼!"
비서실장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출판사와 교섭 중에 있습니다. 이사를 와야 하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한경호는 아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발표하지 마.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원고가 무얼로 되어 있어? 육필로 썼나 타이프로 쳤나?"
"타이프로 쳤습니다."
"좋아. 그거 지금 가지고 오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발표하지마. 사본도 만들지 말구. 자네는 그런 소설을 쓴 일이 없는 걸로 해야 돼!"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알려고 하지 마."
비서실장이 차갑게 내뱉았다.
"알겠습니다."
한경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비서실장이 자신의 소설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알 수 없었으나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날 한경호는 비서실장에게 소설을 갖다가 주었고 비서실장은 누런 행정 봉투를 하나 한경호에게 주었다. 봉투는 묵직했다. 사무실을 나와 봉투를 들여다보자 그 봉투엔 뜻밖에 한경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액수의 큰돈이 들어있었다.
박태호가 보낸 파일의 내용은 거기서 일단 끝이나 있었다. 그 대신 메모 하나가 모니터에 떠올라 미경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누님 만족하세요? 졸려서 이만 할께요. 누님도 한숨 주무세요. 오후에 다시 하는 것이 어떨까요?
미경은 박태호가 보낸 소설을 디스크에 복사한 뒤 컴퓨터 통신으로 박태호에게 답장을 보냈다.
수고했어. 혹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가능한 소설을 잘 감추어둬. 나중에 근사하게 한잔 살께.
미경은 컴퓨터를 끄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2
박태호로부터 컴퓨터 파일이 다시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미경은 양윤석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최종열의 소설에 대한 것은 양윤석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최종열의 소설을 양윤석이 알게 되면 비밀이 새어 나갈 염려도 있었고 양윤석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미경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알몸에 걸치고 서재로 나가 컴퓨터를 켰다. 벌써 시간이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새벽에 미경을 미행하던 사내들에게 맞은 멍자국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저녁때까지 내쳐 잤기 때문에 불면으로 인한 피로도 사라지고 없었다.
(쎈스가 피로를 풀어준 것인가?)
미경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집중했다. 저녁에 돌아온 양윤석과의 쎈스가 미경을 흡족하게 했다. 미경은 쎈스 뒤의 나른한 포만감에 젖어 양윤석의 팔베개를 하고 잠을 자고 싶기도 했으나 최종열의 소설을 빨리 읽어야 했다. 박태호는 컴퓨터의 전문가라서 통신이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아내 채은숙이 가늘게 코를 골며 잠이 들자 비로소 침실에서 빠져 나왔다. 아내가 잠이 든 틈에 빠져나오는 것이 아내에게 미안했으나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내는 쎈스 뒤의 만족감에 젖어 입까지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을 읽다가 말고 얼굴에 흥건한 미소를 띄웠다. 최종열의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쎈스 뒤에 잠이 든 채은숙의 모습이 어쩐지 자신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한섭은 침실을 나오기에 앞서 아내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아내는 방이 더운 탓인지 캐시미론 이불을 반쯤 걷어차고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 아내는 스팀이 들어오는 집안에서는 언제나 반소매만 입었다. 밤에는 쎈스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발가벗고 잠을 잤다. 아내는 지금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어서 붉은 스탠드 불빛에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강한섭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나신도 아름다웠다. 그런 아내와의 다함 없는 사랑과 쎈스가 결혼이며 삶이라는 생각을 하자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한섭은 서재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밖은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이따금 바람이 창을 흔들어댔으나 방으로 스며들지는 않았다. 강한섭은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손으로 원고를 쓰기가 힘이 들어 중고 타이프라이터 하나를 샀던 것이다.
장군은 거실의 장식장에 신주처럼 모셔져 있는 사두마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두마차는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도대체 아내는 저토록 신기한 물건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사두마차를 보고 있으면 자신도 알 수 없는 웅지가 솟아오르곤 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상한 꿈도 꾸게 되었다. 장군은 아내가 사두마차를 집에 들여놓던 날부터 신비한 꿈을 꾸었다. 처음엔 수많은 말이 벌판을 달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시작되었으나 얼마 후부터는 그런 환청이 없어지고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 꿈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단순하게 왕의 꿈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꿈이기도 했으나 장군은 점점 그 꿈이 즐거워졌다. 한번은 머리에 쓴 삿갓을 벗는 꿈을 꾸었는데 아내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 장군이 아침에 일어나 그 얘기를 하자 아내도 깜짝 놀라 점쟁이를 찾아가 봐야 하겠다고 말했다. 장군은 허허 웃고 말았다. 아내는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가곤 했는데 장군은 처음엔 반대했으나 아내의 히스테리가 심해지자 그만두고 말았다. 아내가 그런 방법으로나마 군인 아내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이 왕이 되는 꿈이래요."
저녁에 관사로 퇴근하자 아내가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속삭였다.
"왕?"
장군은 어이가 없어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이놈의 여편네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 성이 뭐예요?"
"성이라니?"
"성도 몰라요? 김씨 이씨 하는 성이지 뭐예요? 내가 이렇게 꽉 맥힌 사람과 평생을 살았으니....."
아내가 혀를 찼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군은 모자를 벗고 소파에 앉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당신 성이 전씨 아녜요?"
"그래서?'
"당신 성에서 삿갓을 벗겨 봐요."
"삿갓을 벗겨?"
장군은 역정이 났다.
"당신 성이 온전할 전자 전씨니까 사람 인자 모양의 삿갓을 벗겨 봐요. 뭐가 되나."
장군은 그때서야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사람 인자를 떼어버리면 임금 왕 자가 되는 것이다. 점쟁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절묘한 꿈풀이라고 생각했다. 그 점쟁이는 만만치 않은 학식도 있는 모양으로 대통령과 저명한 정치인들도 단골이라고 했다. 10. 26이 일어나기 전에 차지철에게 '차사복변'이라는 점쾌를 내기도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차사복변이라는 것은 차지철이 죽고 정변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차가 뒤집혀 자신이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엉뚱하게 운전기사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10. 26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내가 그 유명한 점쟁이에게서 점쾌를 받아 왔으므로 전혀 엉터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명한 세상에 왕이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군인인 것이다. 정치인이라면 선거로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군인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는 정권을 잡을 수가 없다. 장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도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인 허 대령으로부터 들은 말이 이명처럼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각하. 이제는 각하께서 나서야 하실 때입니다."
허 대령이 장군을 삼청동에 있는 요정으로 안내한 것은 날이 저물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대통령의 시해로 어수선했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된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으나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서다니?"
장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허 대령을 쳐다보았다. 요정에는 보안사령부의 핵심 멤버인 작전국장, 인사국장, 정보국장 등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정치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대통령 국장이 끝나면 곧 자리가 잡히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국장이 끝나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통령을 새로 선출해야 합니다. 지금은 권한대행이 계시지만 3개월 이내에는 새로 선출해야 합니다. 통일주체대의원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면 권한대행이 당선되겠지만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헌법을 개정하게 되면 3김씨가 유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동정치의 대가인 야당의 양 김씨와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물러나야 합니다."
"그들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이야."
"각하. 국민들의 지지란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장군은 그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양김씨는 이 나라를 이끌고 가기에는 함량 부족입니다. 김종필 총재도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이 나라를 이끌 수가 없다는 평가가 군부 안에 팽배합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새로운 영도자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영도자?"
"각하께서 이 나라를 영도해 주십시요."
허 대령이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뭐야?"
장군은 깜짝 놀라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동석한 국장들이 모두 자신의 수하였으나 허 대령의 말은 사석에서의 발언이라고 해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장들은 그들끼리 논의가 있었는지 허 대령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고 어지러운 이 시국에 이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계시는 영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각하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국장들이 일제히 허 대령의 말을 받쳐 주었다.
"혁명을 하자는 겐가?"
"저희는 혁명이라기보다 개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개혁?"
"마침 저희가 좋은 책을 하나 찾았습니다."
"책이라니?"
"보안사 문관이 쓴 책인데 우리의 지침이 될만한 책입니다."
"그래?"
"여러 부를 복사까지 했으니 각하께서도 한번 꼼꼼히 읽어 보십시요. 읽으신 뒤엔 반드시 태워 없애야 합니다."
"알았어."
장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강한 지도력을 보이고 애경사를 빠지지 않고 챙겼기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다. 오늘 부하들이 그를 술집으로 초대하여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은 모두 그 신망 때문일 터였다.
"이 소설을 쓴 문관은 정치적 식견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울공작'이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서울공작?"
"워(WAR:전쟁) 게임 같은 것입니다."
"워 게임?"
"개혁의 게임입니다. 우리는 비상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음."
장군은 무겁게 신음을 삼켰다. 비서실장의 말은 표현이 완곡하긴 했으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울공작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병력을 동원하는 공작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장군은 안방에 들어가 군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내는 처가에 가고 집에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2층에서 놀고 있었다. 장군은 2층에 올라가 아이들을 살핀 뒤 다시 내려와 거실에서 허 대령이 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너 앞집 2층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한섭은 저 집에도 아직 자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집은 보안사에 다니는 한경호의 집이었다. 그러나 한경호의 계급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한경호는 한 번도 자신의 계급을 말한 일도 없고 부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한섭은 한경호 부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한경호의 부인은 기묘하게 요염했다.
3
한경호는 큰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경적음에 얼굴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깊어서인지 찻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있었다. 날씨는 차가웠다. 그래서인지 찻소리조차 얼어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한겨울이었다. 며칠째 살을 에일 듯한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경호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방안은 따뜻했으나 바깥의 추위가 방안에 있는 한경호까지 춥게 만들고 있었다. 한경호는 주방으로 가서 손수 커피를 끓여 마신 뒤 다시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한경호가 안암동에 2층 집을 마련한 것은 비서실장이 준 돈 때문이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경복궁 바로 옆에 있는 보안사령부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양어깨에 두 개의 별을 달고 있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사령관실 창으로 어두운 바깥 하늘을 내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럼 떠나겠습니다!"
허삼수 대령이 팔을 들어 시계를 보고 사령관에게 말했다.
"좋아. 실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라!"
전두환 사령관이 긴장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재빨리 거수경례를 하고 사령관실을 나갔다. 전두환 사령관은 비로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탓인지 손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허화평 들어왔다.
"각하. 준비가 되었습니다!"
허화평 대령은 전두환 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30경비단의 상황은 어떤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장세동 대령의 보고입니다."
"김진영이도 같이 있나?"
"예. 김 대령도 같이 있습니다."
"누구누구 도착했대?"
"차주헌, 유학성, 황영시 중장, 노태우, 박준병 소장,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준장 등입니다."
"모두 왔군."
전두환 사령관이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각하!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허 대령은 전두환 사령관을 재촉했다. 삼청동 공관에 가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것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벌써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이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한남동 공관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두환 사령관은 망설이고 있었다.
"연희동은 어떤가?"
"각하!"
"연희동 상황이 보고가 없나?"
"아닙니다. 연희동엔 우국일 참모장이 잘하고 있습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원 수도경비사령관, 계엄사 치안감 김진기 준장이 이미 도착해서 받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 우리도 간다. 허 대령은 사령부에 남아서 긴급 연락을 맡도록 하라!"
장군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예."
허 대령이 안도하는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부관!"
"예!"
부관실에서 수행부관 손삼수 중위가 뛰어 들어왔다. 전두환 사령관은 권총을 허리에 찼다.
"수사국장이 대기하고 있나?"
"예."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손삼수 중위가 재빨리 앞장을 섰다. 사령부 앞에는 이미 성판을 단 찦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령관 수행부관 손삼수 중위가 앞에 타고 전두환 사령관은 뒤에 탔다. 보안사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은 또 다른 짚차에 탔다.
"삼청동 공관으로!"
허 대령이 운전병에게 지시했다.
"예."
운전병이 대답했다. 사령관의 짚차가 부르릉 시동을 걸고 사령부 앞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다녀오십시요. 각하!"
허 대령은 전두환 장군이 탄 짚차를 향해 재빨리 거수경례를 붙였다. 전두환 장군이 탄 짚차의 뒤를 이학봉 중령의 짚차가 바짝 따르고 경호용의 보안사 병력 1개소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추럭에 탑승하여 전두환 장군의 차를 따르고 있었다. 손삼수 중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손 중위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전두환 장군의 모습을 백미러로 살피면서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의 거사는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결행의 순간이 닥치자 두려워지고 있었다. 물론 이번의 거사는 자신과 같은 위관급 장교의 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거사는 보안사 영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하나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모의한 것이었다. 완전한 쿠데타였다. 실패하면 거사를 모의한 장교들뿐 아니라 가담한 하급 장교들까지 군사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하기야 실패하면 우리 모두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손 중위는 장군을 이해했다. 그러나 모질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내 짚차가 삼청동 공관에 도착했다. 이학봉 중령은 장군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장군을 제지하지 않았다. 경호실 병력이 있었으나 대통령 경호실도 보안사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내 짚차가 총리 공관 현관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대통령은 권한대행의 딱지를 떼었으면서도 청와대에 입주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이 짚차에서 내려 공관으로 들어갔다. 이 중령과 손 중위는 장군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공관 정문에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나 장군을 제지하지 않았다. 총리 공관의 경비병들은 이미 보안사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요!"
장군은 최광수 비서실장의 영접을 받았다.
"대통령 각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군은 최 비서실장의 안내로 이 중령과 함께 접견실로 들어갔다. 손 중위는 비서실에 그대로 남았다.
"각하!"
장군은 접견실로 들어가자 부동자세로 대통령에게 경례를 했다. 대통령의 눈빛이 무장을 한 장군과 이 중령의 모습을 힐끗 살피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일이오?"
"각하의 재가를 받을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령관이 나에게 직접 재가를 받는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사령관은 나에게 직접 재가를 받을 수 없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엄사령관이나 국방부 장관을 거쳐 재가를 받아야 할 것이오."
최규하 대통령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각하! 시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사령관의 재가 보고를 받을 수 없소."
"각하. 이는 계엄사령관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무슨 소리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동수사본부는 정승화 장군을 연행하여 조사하려고 합니다. 각하께서 재가해 주셔야 합니다."
"뭐요?"
대통령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합수부에서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장군! 그것이 하극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 누구도 조사를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장관에게 먼저 보고하시오!"
"각하!"
"나는 장관의 정식 요구가 있기 전에는 재가할 수 없소."
최 대통령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각하. 그럼 수사국장인 이 중령의 보고를 들어 보십시요!"
장군의 말에 최 대통령이 이 중령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중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서류를 꺼냈다. 최 대통령은 합수부에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하려는 이유라도 들어보려는지 이 중령을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로 허삼수 대령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 중령이 수사 보고를 마치고 비서실로 잠깐 나왔을 때였다.
"각하께서는 어디 계시나?"
허삼수 대령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대통령 각하와 단독대좌를 하고 계십니다."
"그럼 아직도 재가를 받지 못했나?"
"예. 대통령 각하가 너무 완고하십니다. 그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연행은 했는데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있었어."
"총격전이요?"
"자네가 수사분실로 빨리 오게."
"알겠습니다!"
이 중령은 얼굴이 창백해져 전화를 끊었다.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면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중령은 손 중위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 각하께서 찾으면 수사분실로 갔다고 말씀드려라, 하고는 짚차가 있는 공관 앞으로 달려갔다. 손 중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보안사령부에서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각하는 어디에 계시나?"
"대통령 각하를 만나고 계십니다."
"손 중위! 사령관 각하께 서둘러 전화를 받으시라고 해라!"
허 대령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실장님. 사령관 각하는 대통령 각하를 만나고 계십니다. 보고 중인데 어떻게 전화를 받으시라고 합니까?"
"이봐 손 중위! 이건 급한 일이야! 쪽지를 들여보내서라도 전화를 받으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손 중위는 허 대령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대통령 비서관에게 전두환 사령관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서관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쪽지를 써서 접견실로 들여보냈다.
"무슨 일이야?"
이내 전두환 장군이 화난 표정으로 접견실에서 나왔다.
"실장님 전화입니다."
전두환 장군이 전화를 받았다. 장군은 허 대령의 전화를 받으면서 점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알았어, 곧 갈 테니까 동요하지 말아, 하고 지시한 뒤 접견실로 들어갔다. 전두환 장군은 10분쯤 지나서야 접견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거사가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4
이에 앞서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12월 12일 6시 35분에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 도착했다. 그들은 행정용 봉투에 신문지를 집어넣고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재가한 서류처럼 위장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총리 공관으로 갔으나 재가는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보안사 요원들과 함께 2대의 슈퍼살롱에 나누어 타고 공관에 도착했고 합수부에 배속된 33 헌병대 1개 중대 60명의 병력은 완전무장을 하고 마이크로버스에 나누어 타고 이들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헌병 백차에 탄 3명의 장교가 지휘하고 있었다. 육군 헌병감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33 헌병대장), 육군본부 헌병 대장 이종민 중령이었다. 이들은 공관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것이다. 이종민 중령은 공관 경비병들의 직속 상관이었다. 허삼수 대령은 총장 공관으로 출발하기 바로 전에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이다. 총장 각하 계시나?"
"계십니다."
"총장 각하께 급하게 보고할 일이 있어서 공관으로 가야겠다."
"각하께서는 7시에 외출 약속이 있으십니다."
"급한 일이다!"
"몇 시에 오실 것입니까?"
"7시에 간다."
"될 수 있으면 7시 전에 오십시요."
"좋다. 공관 경비 초소에 미리 연락해 놓아!"
"알겠습니다."
이재천 소령은 전화를 끊고 공관촌 정문 초소를 전화로 불렀다.
"조금 후에 보안사 정보처장이 보고하러 오면 들여보내라."
이재천 소령은 공관촌 정문 초소 경비병에게 지시했다. 공관촌에는 국방부 장관, 외무부 장관, 합참의장, 해병대 사령관, 해군 참모총장, 육군 참모총장의 공관이 몰려 있었다. 공관촌의 외곽 경비와 입구 초소는 해병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초소에는 3명의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이재천 소령으로부터 정보처장을 들여보내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허삼수 대령 일행이 도착하자 신분을 확인한 뒤 그대로 들여보냈다.
33 헌병대는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10분쯤 지나서 공관촌 입구에 도착했다. 정문 경비병이 백차를 세우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백차에 탄 사람들이 장교라는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거수경례를 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비병이 초소의 지휘관인 헌병 선임하사를 돌아본 뒤에 물었다.
"육군 참모총장 공관 경비 병력이다. 교대하러 왔다."
"몇 명입니까?"
"58분의 3이야!"
58분의 3이라는 것은 사병 58명과 장교 3명이라는 뜻이었다. 경비병은 다시 초소 쪽을 쳐다보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허락을 받지 않은 병력을 통과시킬 수는 없었으나 헌병 백차를 탄 장교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임하사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장교들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한 뒤 경비병과 같은 질문을 했다.
"총장 공관 경비 병력이다."
"병력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계엄 상황이다. 총장 공관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저는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확인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십시요."
선임하사는 전화를 걸기 위해 초소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때 마이크로버스에서 완전무장한 헌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손들어!"
"손들어!"
"움직이면 사살한다!"
헌병들은 번개처럼 마이크로버스에서 쏟아져 나와 경비병들을 에워싸고 총을 겨누었다. 경비병들은 깜짝 놀라 손을 번쩍 들었다. 선임하사는 경비대 본부에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다가 헌병들에게 무장을 해제당하고 묶였다. 헌병 지휘관들은 공관촌 정문 초소에 헌병 9명을 배치했다.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참모총장 공관 정문에 도착하여 당번병 김영진 병장의 영접을 받았다. 김영진 병장은 이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성환옥 대령과 이종민 헌병대장은 보안사 수사관 2명과 함께 참모총장 공관 정문에서 내려 경비대 초소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이 중령이 들어오자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움직이지 마!"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보안사 수사관 2명은 권총으로 경비병들을 위협하여 M16 소총을 빼앗았다. 경비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직속 상관이 괜찮다는 눈빛을 하자 잠자코 무장해제를 당했다.
"조용히 명령에 움직여!"
"자 이제 내무반으로 들어가!"
보안사 수사관들은 경비병들을 초소에 딸린 내무반으로 강제로 몰아넣었다. 내무반에는 근무대기조 병사들이 남아 있었으나 보안사 수사관들은 그들까지 내무반에 엎드리도록 지시하고 M16으로 감시했다. 보안사 수사관 2명은 허 대령과 우 대령의 뒤를 따라 공관으로 들어갔다가 그 옆의 부관실로 들어갔다. 보안사 수사관 2명은 슈퍼살롱 뒤 트렁크를 열고 M16 소총을 꺼내어 현관을 향해 엎드린 채 사격 자세를 취했다. 저녁 7시 5분이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공관 2층에서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때 부관 이재천 소령이 인터폰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이야?"
"각하. 보안사 정보처장과 육본 범죄수사단장이 급한 보고가 있다고 찾아 왔습니다."
"밤에 무슨 보고야? 내가 지금 내려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해."
"예."
정승화 참모총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보안사의 정보처장이 왔다는 말에 정 총장은 기분이 나빴다. 보안사 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이래 월권하는 일이 잦아서 정 총장은 비밀리에 전두환 소장을 동해사령부로 좌천시키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각하!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허 대령과 우 대령은 정 총장이 2층에서 내려오자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그렇군."
정 총장은 가볍게 대꾸했다.
"어디 외출하십니까?"
"처남이 장군 진급이 확정되었네. 그래서 집사람과 장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길일세."
"총장님. 이번 진급에 저도 포함되는 줄 알았는데 빠졌더군요. 섭섭합니다. 총장님."
우 대령은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랬지. 진급심사가 있을 때마다 모두 진급시키지 못해 나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정 총장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으나 속마음은 이들의 돌연한 방문이 탐탁치 않았다.
"그래. 무슨 보고야?"
정 총장은 입을 다물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허 대령을 향해 물었다. 허 대령이 비로소 자세를 바로 했다.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았다는 제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총장님의 진술을 받아야 합니다."
허 대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야?"
정 총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총장님. 증거도 있습니다."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전두환이야?"
"죄송합니다."
"김재규가 그렇게 증언했어?"
"저는 자세히 모릅니다. 상부로부터 총장님의 진술을 녹음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총장님. 협조해 주십시요."
"이런 나쁜 놈들! 좋아! 녹음기를 가져 왔나?"
정 총장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녹음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 분실까지 가셔야 하겠습니다. 육본 범죄수사단장이 함께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뭐?"
정 총장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비로소 허 대령과 우 대령이 자신을 연행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화를 벌컥 냈다.
"가시죠?"
"전두환이가 이따위 지시를 내렸지?"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입니다!"
허 대령과 우 대령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나도 모르게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
"총장님. 이러지 마십시요."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했다면 나에게 전화라도 했을 거야!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이따위 조사에 응하지 않겠어!"
정 총장은 부관 이재천 소령을 소리쳐 불렀다. 이재천 소령이 부관실에서 후닥닥 뛰어나왔다.
"각하!"
이재천 소령이 놀라서 정 총장을 쳐다보았다.
"총리 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 걸어!"
"예!"
이재천 소령이 당황하여 부관실로 뛰어갔다. 이재천 소령은 어쩐지 사태가 여의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관실로 들어가자마자 경비 전화를 잡았다. 그러자 부관실에 들어와 있던 보안사 수사관들이 이재천 소령을 가로막았다. 총장 경호 장교 김인선 대위는 수사관들이 이재천 소령을 가로막자 권총을 뽑았다. 그러나 보안사 수사관들이 더욱 빠르게 권총을 뽑아서 김인선 대위를 쏘았다. 김인선 대위는 얼굴에 수발의 총을 맞고 나뒹굴었다. 이재천 소령은 전화를 걸려다 말고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공관 현관에 엎드려 있던 보안사 수사관 2명이 일제히 공관을 향해 총을 쏘았다. 공관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장님. 이제는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응접실에 있던 허 대령과 우 대령은 부관실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마자 정총장의 팔짱을 끼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총장님!"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상부의 지시입니다!"
"총소리가 났잖아?"
"총장님께서 이러고 있으니까 총소리가 난 것입니다.!"
"사격을 중지시켜! 사격중지!"
정 총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때 응접실 밖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이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유리창을 깨고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갑시다!"
그 사내는 총구를 정 총장의 얼굴에 바짝 겨누었다. 정 총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 사내는 마치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의 야전 점퍼 같은 감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넌 누구야?"
"알 것 없어! 가자고 하면 빨리 따라나설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사내가 M16 소총의 총구로 정 총장을 위협했다. 그 바람에 정 총장의 안경이 총구에 밀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정 총장은 응접실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얼굴에 썼다.
"가자!"
정 총장은 대통령이 연행을 지시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낙심한 얼굴로 사내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정 총장은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현관 앞에는 어느 사이에 검은색의 슈퍼살롱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에게 떠밀려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보안사 영관장교 둘이 양쪽으로 올라타서 정 총장의 팔짱을 끼었다. 앞 좌석에는 허삼수 대령이 앉았다. 정 총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공관에는 낯선 병사들만 잔뜩 몰려와 서성거리고 있을 뿐 공관 경비병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5
한경호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군과 보안사 영관 장교들이 자신의 소설과 비슷한 방법으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뿌듯했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반란이고 쿠데타였다. 그 중심에는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고급 장교들이 있었으나 세부계획이나 다름이 없는 시나리오 역할은 자신의 소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았다.
장군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령부로 돌아왔다. 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가 끝내 떨어지지 않아 얼굴이 흙빛이었다. 벌써 허삼수 대령은 참모총장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해 놓은 상태였다. 대통령의 재가만 받았으면 아무 염려가 없는 일이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참모총장을 연행하면서 총격전까지 벌여 서울 시내 일원이 비상 상태로 돌입해 있었다. 공관촌은 이미 해병대 병력이 출동해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 김정호 중장은 7시 20분에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그는 총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철렁했다. 총소리는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의 공관이 있는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즉각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고 부관에게 해군본부에 기동타격대 출동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무장을 했다. 공관촌의 외곽 경비를 해병대 사령부가 맡고 있기 때문에 불미한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이 지휘 책임을 져야 했다. 한남동 공관촌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은 해병대 소속이었다. 그는 공관촌을 순시하다가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국방부 장관 공관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총성은 칠흑의 어둠에 묻혀 있는 공관촌을 뒤흔들며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황 소령은 소스라쳐 놀랐다.
"총소리입니다!"
병사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M16인가?"
"예. M16입니다!"
"비상이다! 기동타격대에 비상을 걸어라!"
황인주 소령은 국방부 장관 위병 초소의 경비 전화로 기동타격대를 소집했다. 기동타격대는 외곽을 경비하는 해병대 병력 비상시에 대비 1개분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는 즉각 경비대 사령부로 뛰어갔다. 황 소령은 탄약고에 보관 중인 실탄 박스를 뜯고 기동타격대 조장에게 대원들에게 분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육군 참모총장 공관 관리 장교인 반일부 준위가 헐레벌떡 상황실로 뛰어 들어왔다.
"반 준위 아니오?"
황 소령이 놀라서 반 준위를 쳐다보았다.
"큰일 났습니다! 총장 공관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뭐요?"
"괴한들이 총장 공관에 침입했습니다!"
"괴한들이 얼마나 되오?"
"모릅니다!"
황 소령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즉시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한 뒤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반 준위를 데리고 밖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경비대 내무실 막사를 돌아가기도 전에 일단의 헌병대 병사들과 마주쳤다.
"뭐야?"
황 소령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왜 여기로 몰려와? 공관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여기서 꾸물대고 있으면 어떻게 해?"
반 준위는 헌병대가 공관 경비병으로 착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헌병대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황 소령과 반 준위를 M16 개머리판으로 마구 내려찍고 군홧발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뭐야?"
"너희들 누구야?"
황 소령과 반 준위는 얼떨결에 개머리판에 얻어맞고 발길질에 차이며 신음소리처럼 내뱉았다.
"입 닥쳐 이 새끼야!"
"이 새끼들 밟아 버려!"
그러자 헌병대 지휘관들이 욕설을 섞어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포를 쏘며 무장을 해제한 뒤 무수히 구타를 했다. 황 소령과 반 준위는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황 소령은 그로 인해 뒷머리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반 준위는 정신을 잃었다. 특히 반 준위는 손톱이 빠질 정도로 얻어맞고 쓰러졌으나 헌병대 병사들은 계속해서 옆구리에 총을 겨누고 무수히 밟아댔다. 해병대 경비병들 중 교대 대기 중이던 병사들은 헌병대 병사들에게 제압당하여 경비대 대장실로 끌려 들어가 소등을 한 상태에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아군이 아군을 구타하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김인선 대위는 엉덩이와 눈두덩, 대퇴부에 심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재천 소령은 오른쪽 옆구리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간을 스치고 지나가 뱃속에 박혔는데 출혈이 심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해병 경비대 병사들은 그 시간 실탄을 분배받고 있었다. 그때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병사들이 들이닥쳐 황 소령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대장님이 잡혔다!"
"수상한 놈들이 대장님을 끌고 간다."
해병대 경비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막사 주위로 산개하여 막사를 포위했다. 일부 병사들은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해병대 사령관 공관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김정호 중장은 출동 준비를 끝내고 공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육군 헌병 복장을 한 괴한들이 경비대 막사를 점거했습니다!"
병사들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경비대장은 어디 있나?"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포로가 되었다는 말인가?"
"예!"
"괴한들이 침입한 곳은 경비대 막사뿐인가?"
"육군 참모총장 공관도 침입한 것 같습니다!"
김정호 중장은 낮게 신음을 토했다. 그는 10. 26으로 정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북한이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괴한들은 얼마나 되는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무기는 무엇인가?"
"M16입니다!"
"좋다! 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 누구든지 보이면 수하를 하고 수하에 응하지 않으면 무조건 사살하라!"
"옛!"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을 했다. 그들은 3성 장군인 해병대 사령관이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하자 용기가 솟아났다. 재빨리 전투 대오를 갖추는 것과 동시에 김 중장을 4명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호위를 했다. 그들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도 불의의 기습을 당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사령관을 호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김정호 중장은 정문부터 탈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문 상황을 파악한 뒤 특공대를 편성해 진격시켰다. 해병 특공대는 김 중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배수구를 따라 낮은 포복으로 정문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정문 10미터 전방까지 접근한 뒤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정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공관촌에 또다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성은 어둠을 산산이 찢어버릴 듯이 요란했다.
"손들어!"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다!"
"모두 엎드려!"
공관촌 정문을 점거한 보안사 헌병들은 해병 경비대의 일제 사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보안사 헌병들은 이 총격전에서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중상을 당했다. 6명은 해병대의 포로가 되었다. 공관촌 정문을 쉽사리 장악한 해병대는 경비병 3명을 풀어 주고 정문을 바리케이드로 폐쇄했다. 김정호 중장은 중상을 입은 보안사 대위를 심문했다. 그는 뜻밖에 합동수사본부 요원이었다.
"누구의 지시로 이러한 짓을 했는가?"
"33 헌병 대장 최석립 중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목적이 무엇인가?"
"육군 참모총장의 연행입니다."
"계엄사령관을 합수부에서 연행한단 말인가?"
"예."
김정호 중장은 어이가 없었다. 계엄이 선포되어있는 상황에서 사령관을 연행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게다가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그를 연행한다는 것은 명백한 반란 행위에 해당된다.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경비대 막사를 탈환하라! 반항하는 자는 사살하라!"
김정호 중장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막사 탈환 명령을 내렸다. 전투 명령이었다.
"예!"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 막사를 향해 달려갔다. 곧이어 막사를 향하여 총을 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때 육군본부 헌병 기동타격대와 국방부 50 헌병대가 공관촌 정문에 도착했다.
"어떤 부대도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정문으로 들여보내지 마라! 그래도 진입을 시도하는 부대가 있으면 사살하라!"
김정호 중장은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해병대 병사들은 헌병 기동타격대와 50 헌병대에 신속하게 위협 사격을 가했다. 기동타격대와 50 헌병대는 해병대의 일제 사격이 개시되자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해병대 병사들은 경비대 막사를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다. 해병대 경비병들을 억류하고 있던 33 헌병대는 당황했다. 사태는 급변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총소리가 밤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완전한 전투 상황이었다.
"대장님. 사격을 중지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적이 아닌 국군입니다."
헌병 지휘관인 대위가 황인주 소령에게 비로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황 소령은 기가 막혔다.
"이렇게 총격전이 계속되면 쌍방이 모두 죽습니다."
"닥쳐! 이 새끼야!"
"부탁합니다. 우리도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하고 함께 나가서 사격을 중지시켜 주십시오."
"너와 함께 나가면 내 부하들에게 총알받이가 돼! 나가도 나 혼자 나갈 테니까 넌 여기서 기다려!"
황 소령은 헌병 대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외쳤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총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요란했다. 황 소령은 손을 들고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어둠 속에서 병사들이 수하를 했다.
"나다! 너희들 대장이다!"
"경비 대장님이십니까?"
"그렇다! 너희들 있는 데로 갈 테니까 쏘지 마라!"
"알겠습니다."
황 소령은 총성이 그치자 재빨리 해병대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김정호 중장이 전투복 차림으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각하!"
황 소령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그의 목소리가 격정으로 떨렸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합수부 측 병력입니다! 육군 참모총장님을 연행해 갔습니다!"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는가?"
"예!"
"좋다! 경비대 병사들을 귀관이 지휘하라!"
"옛!"
황 소령은 다시 거수경례를 했다. 개머리판에 얻어맞은 뒷머리에서는 끈적거리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해병대 사령관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벌써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황 소령이 병사들의 무장을 확인하고 있을 때 참모총장 공관 쪽에서 미니버스 한 대가 헤트라이트를 켜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산개하라!"
황 소령은 재빨리 병사들을 도로 양쪽으로 배치했다. 병사들은 황 소령의 명령을 받자 신속하게 도로 양쪽으로 흩어져 엎드렸다.
"수하에 불응하면 무조건 사살하라!"
국방부 장관 공관 앞은 금세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버스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수하하라!"
황 소령의 지시에 병사 둘이 M16을 겨누고 도로로 나갔다.
"정지!"
미니버스가 정지했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수하에 불응하면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다!"
병사는 긴장하여 버스 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명령에 따르겠다!"
버스 안에서 응답이 왔다. 그들은 사태가 여의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무장을 해제한다! 반항하면 사살하겠다!"
황 소령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재빨리 .버스로 올라가 무장을 해제했다. 버스에는 보안사 요원 3명과 육군 헌병 24명이 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전두환 장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한사코 참모총장의 연행을 재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국방부 장관의 요청이 있어야만 재가를 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특전사령관은 어떻게 되었어?"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이었다.
"총장 공관에 일이 터졌다는 보고를 받고 부대로 급히 돌아갔습니다."
"수경사령관은?"
수경사령관은 장태원 소장이었다.
"사령부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쯤 수경사와 특전사에 비상이 걸려 있을 것입니다!"
"어떤 놈이 연락을 했어?"
"육군 헌병대에서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비상 연락이 왔습니다."
"그걸 막았어야지!"
장군이 짜증을 냈다. 그는 초조한 듯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상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5. 16이 일어났을 때를 잠시 생각했다. 그때도 혁명군의 상황은 지금처럼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군이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에 아군끼리의 충돌을 우려하는 장군들의 우유부단함으로 혁명이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육군 대위였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혁명군을 지지하는 생도들의 시위를 유도하기까지 했었다.
"특전사에 병력이 동원되겠나?"
"여단장들이나 부대장들이 모두 우리 측에 가담해 있습니다."
"수경사는?"
"수경사도 병력을 동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좋아. 9사단장에게 예정대로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키도록 연락하고 장태원이나 정병주가 우리를 진압하려고 하면 체포하거나 사살하라!"
"알겠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경사나 특전사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라!"
"예."
그때 부관이 상기된 얼굴로 사령관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전군에 비상령이 내렸습니다."
"누가 내렸어?"
"육본입니다!"
"작전명은?"
"진도개 하나입니다."
"명령 내용은 뭐야?"
"각 부대 지휘관은 즉시 귀대하여 병력을 장악하고 육본으로 지급으로 보고하라는 내용입니다."
"참모차장의 명령이군!"
장군은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각 검문소에도 긴급지시가 내려와 있습니다."
"무슨 내용이야?"
"육군 참모총장의 행방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라는 것과 일제 슈퍼살롱의 검문을 철저히 하라는 것입니다!"
"알았어!"
장군은 사납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육군본부에서 전군에 비상 명령이 하달된 것은 윤성민 참모차장에 의해서였다. 윤 참모차장은 공관에서 정승화 참모총장 부인 신유경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 무슨 일입니까?"
"차장님 비상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총격전이 일어났어요! 총장님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었어요!"
"납치라구요?"
윤 참모차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을 괴한들이 납치해 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네! 빨리 손을 써 주셔야겠어요!"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차장님.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여기는 지금 피바다예요! 이재천 소령과 김인선 대위가 죽어 가고 있어요!"
신유경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윤 참모차장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괴한들이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몰라요! 빨리 조치를 취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윤 참모차장은 전화를 끊자 곧바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권총을 찼다. 그리고 그는 부관을 대동하고 헌병감실로 달려갔다. 공관에서 헌병감실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책임 지휘관인 헌병감 김진기 준장이 자리에 없었다. 당직 근무 장교가 있었으나 그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 참모차장은 헌병감실을 나와 육본 벙커로 달려갔다. 그는 당직 장교에게 육본 참모들의 비상소집을 지시했다. 전군에는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이내 육본 벙커로 비상 연락을 받은 장군과 영관 장교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 장군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참모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윤 참모차장은 전방부대에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혹시나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계엄사령관을 납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미연합사령부에도 같은 전통을 때렸다. 그러나 전방부대와 한미연합사는 북한군의 동태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해왔다.
(그렇다면 내부 소행이야!)
윤 참모차장은 목이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으나 장관은 이미 피신해 버린 뒤였다. 윤 참모차장은 이제 자신이 총 책임자가 되어 육군을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어깨에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며 전군에 '진도개 하나'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전군 비상! 각 부대 지휘관은 즉시 귀대하여 병력을 장악하고 육본 상황실로 보고하라!"
이 비상 경계령은 신촌의 요정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헌병감 김준기 준장과 수경사령관 장태원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에게도 하달되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부대로 귀대하기 위해 짚차에 타자 즉시 무전으로 사령부 상황실에 비상 대기하고 있는 김기택 준장을 호출했다.
"총장 공관에 무슨 일이 있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총장님은 어떻게 되셨나?"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해병대 병력이 공관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놈들이 일을 저지른 거야?"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우선 APC(장갑차) 한 대와 기동타격대를 총장 공관으로 출동시켜! 무조건 밀고 들어가서 총장님을 구출하도록 하라! 알았나?"
"옛!"
"우물쭈물하면 놈들에게 당하니까 장갑차로 먼저 밀고 들어가!"
"옛"
장태원 사령관은 김기택 준장에게 즉시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했다. 장태원 사령관이 필동의 수경사에 도착한 것은 밤 8시가 약간 지났을 때였다. 상황실엔 김기택 참모장과 김진선 상황실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기동타격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누가 지휘하고 있어?"
"신윤희 중령입니다!"
신윤희 중령은 헌병단 부단장이었다.
"총장 공관 상황은 파악되었나?"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30 단장과 33 단장은 어디 있어?"
수경사 30단 단장은 장세동 대령이었고 33단 단장은 김진영 대령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두환 보안사 사령관의 휘하에 들어가 있었다.
"무전을 때렸는데도 응답이 없습니다."
"이 자식들 또 어디 몰려가서 술 퍼먹고 있는 거 아니야?"
장태원 사령관은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을 빨리 찾으라고 지시한 뒤 수경사 지하 상황실로 내려갔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헌병 1개소대와 전차 1대, APC 1대, 사이카 2대, 앰블런스 1대를 총장 공관으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수경사 전 병력에 실탄을 지급하고 완전무장을 시키라고 지시한 뒤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다. 정보참모 박웅 대령과 전속부관 천연우 대위가 수행했다. 장충체육관을 지나 한남동 길목인 약수동으로 꺽어들자 거리는 차량과 행인들로 잔뜩 메워져 있었다. 한남동 공관촌에서 잇달아 일어난 총성에 민간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장군님 참모차장님이 찾으십니다!"
윤성민 참모차장이 다급하게 무전을 친 것은 장태원 사령관의 차가 약수동을 넘고 있을 때였다. 장태원 사령관은 천 대위로부터 무전기를 넘겨 받았다.
"차장님. 접니다!"
"장 장군이오?"
"예. 장태원입니다."
"도대체 지금 어디 있소? 총장 공관이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소!"
"그래서 총장 공관으로 가고 있습니다. 자세한 상황을 몰라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장세동이와 우경윤이 총장을 납치해 갔소."
"장세동이도 가담했습니까?"
장태원 사령관은 분노로 얼굴이 벌개졌다. 장세동은 수경사 휘하의 30 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휘하 참모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세동 대령은 이날 정승화 참모총장의 연행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윤 참모차장이 허삼수 대령을 잘못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렇소!"
"보안사 짓이 분명합니다!"
"그런 것 같소. 빨리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를 장악하시오."
그러나 장태원 사령관의 차는 이미 한남동 공관촌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공관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공관촌 입구 주변은 수도권 일대의 각 부대에서 출동한 병력으로 어수선했다. 이따금 요란하게 M16 소총 소리가 들려와 긴장감을 높이고 있었다. 위협 사격을 하고 있는 병력은 해병대 병력이었고 긴급 출동한 병력은 경계를 하기 위해 고가도로 밑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수경사 병력은 어디 있나? 누가 출동했어?"
"제가 나와 있습니다!"
신윤희 중령이 고가도로 밑에서 뛰어 나와 장태원 사령관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야! 너 왜 이러고 있어? 내가 공격하라고 지시했잖아?"
장태원 사령관은 신윤희 중령을 다그쳤다.
"해병대가 공관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사격이 심해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장갑차로 밀어 버려!"
그때 해군 헌병감 박종곤 중령이 기동타격대 병력을 끌고 달려왔다.
"수고하십니다."
"당신은 뭐야?"
"해군 헌병감입니다."
"당신들 저들과 한 패거리야?"
"공관의 해병 경비대로부터 급보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릅니다."
박종곤 중령이 낭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공관촌 입구는 각 부대의 병력이 몰려들어 혼잡하기 짝이 없었다.
"장군님!"
그때 육본의 본부사령 황근영 준장이 육군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장태원 사령관을 찾아왔다.
"황 장군! 나는 참모차장의 명령을 받고 들어가야 하오. 이 현장은 당신이 지휘하시오!"
장태원 사령관은 황근영 준장에게 현장 지휘를 맡겼다.
"신 준령!"
"예!"
"나는 부대로 돌아갈 테니 무조건 APC로 밀고 들어가 공관을 장악해!"
신윤희 중령에게는 재차 진압 명령을 내렸다.
"예."
장태원 사령관이 수경사 사령부로 돌아오자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은 그때까지도 귀대해 있지 않았다.
"이 자식들 어디 갔어? 비상인데도 왜 나타나지 않아?"
"경복궁 30단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곳에 유학성, 황영시, 차주헌 장군과 노태우, 박준병, 백운택 장군, 그리고 공수 여단장들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김기택 참모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야?"
장태원 사령관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중장급 장군들과 소장급 장군들, 그리고 준장들과 영관 장교들이 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한 것은 쿠데타 음모가 분명했다. 특히 자신의 부하들인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이 쿠데타에 가담한 것은 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30단에 전화 걸어!"
장태원 사령관은 얼굴이 벌개져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아 참모들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장 장군 나 황영시요."
그러나 황영시 중장이 먼저 전화를 받았다.
"장군님.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장 장군. 이리 와서 얘기합시다."
"선배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선배님도 참모총장을 연행하는데 가담했습니까? 선배님께서 정 총장이 1군 사령관이던 시절에 선배님들이 참모총장을 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놓고 이제와서 총부리를 들이댑니까?"
장태원 사령관은 펄펄 뛰었다. 황영시 중장은 장태원 사령관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유학성 중장을 바꾸어 주었다.
"나 유학성이오?"
"장군님이 거기는 왠일이십니까?"
"장 장군. 이리로 오시오. 사태는 우리 쪽으로 기울었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해 놓고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니 장군님도 반란군에 가담했습니까?"
장태원 사령관은 전화기에 유학성 중장이 나오자 더욱 흥분했다.
"이것 봐요. 이건 반란이 아니라 우리의 충정에서 나온 거요. 대통령을 시해한 역모에 가담한 총장을 체포한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총장을 원상 복귀 시키십시오. 어디서 행동을 그렇게 합니까? 탱크로 밀고 가서 쑥밭을 만들어 버릴 테니 그런 줄 아시오!"
장태원 사령관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자 유학성 장군은 다시 황영시 중장을 바꾸었다.
"장 장군. 흥분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흥분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당신들 모조리 체포할 테니 그런 줄 아시오!"
황영시 장군은 장태원 사령관이 부대를 출동시켜 체포하겠다고 하자 차주헌 장군을 바꾸었다. 차주헌 장군은 장태원 사령관이 한때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장군이었다. 그에게 함부로 말을 하기가 난처하여 장태원 사령관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육본에서는 부대장들의 소재 파악을 해나가다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육본에서는 참모총장을 연행한 것은 명백한 반란 행위로 규정하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육본은 헬리콥터와 장갑차를 동원해서라도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하기 위해 삼청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최광수 비서실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때 전두환 장군을 만나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이 유고인 상태에서 군통수권을 갖고 있는 최규하 대통령과 연결이 되지 않아 육본 수뇌부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육본이 병력을 동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합동수사본부 쪽도 병력 동원을 서둘렀다. 서울이 반란군과 진압군의 전투로 피바다가 될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번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비로소 타이프 치는 것을 멈추고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주택가의 겨울 아침이 서서히 밝아 오면서 골목에 행인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경호는 서재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아직도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옷을 벗고 아내의 옆에 누웠다. 침실은 커텐을 쳤기 때문에 어둠스레했다. 한경호는 눈을 감았다. 혼곤하게 잠을 자고 있던 아내 정란이 잠결에 몸을 뒤척거리며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한경호는 정란을 향해 돌아누우며 귀를 기울였다.
"남편이....눈....치....챌....거야.. 보는 바에 의하면 비적 떼와 다름없다. 그 부대장이 .."
한경호는 눈을 뜨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내의 잠꼬대로도 그녀가 부정한 여자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었다.
(죽일 년!)
한경호는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분노를 느끼며 아내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