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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내 사랑 알렉산드라(Something Wonderful) 3

Bollnow 2024. 3. 7. 06:20

19 귀향

사각으로 낮게 팬 목 부분과 넓은 소맷자락 끝에 진주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파란 지르콘이 박힌 청색 새틴 드레스를 입고 층계를 내려오는 알렉산드라는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팬로즈는 지금까지 알렉산드라와 함께 살아오면서 수천 번도 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지만, 토니와 결혼하기 위해 거대한 고딕 양식의 교회로 향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오늘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허리까지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알렉산드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이 목을 안으며 포옹했다. 필버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조심하세요. 웨딩드레스를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해요.“

그는 지금까지 늘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훈계했다. 알렉산드라는 그의 애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두 명의 늙은 하인과 몬티 아저씨가 그녀의 가족 전부였다. 어머니는 모샴에 있는 집을 팔고 장기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알렉스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메리 엘렌과 그녀의 남편은 첫 아기의 출산을 며칠 앞두고 있는 상태라 역시 런던으로 올 수 없었다. 다행히 멜라니는 얼마 전에 임신 사실을 알았지만 아직 배가 나온 정도는 아니라 알렉스의 들러리가 될 수 있었다.

준비됐니, 알렉스?”

몬티 아저씨가 그녀에게 팔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알렉산드라의 치맛자락 밟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노부인이 몬티 아저씨의 허연 머리끝에서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신발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며 훈계했다. 지난 사흘 동안 노부인은 몬테규 경에게 결혼식장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얼마나 연설을 해놨는지 이제 그는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몬테규 경.”

노부인이 엄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혹시 오늘 아침에 포도주 마셨어요?”

원 천만에요!”

몬티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포도주라뇨? 절대로 그런 적 없습니다.”

사실 그는 아침 내내 마데이라를 마셨으면서 무고한 비난을 받는 공처가처럼 숨죽여 말했다.

그럼 됐고요. 제가 한 말 명심하세요. 알렉산드라를 제단까지 에스코트해 준 다음에 우리 자리로 돌아오셔야 해요.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식이 끝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있어야 해요. 아시겠어요? 일어나서 나갈 때가 되면 제가 신호를 보내겠어요. 우리가 나갈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앉아 있을 거예요. 똑똑히 알아들었어요?”

전 바보가 아니에요, 부인. 이래 보여도 영국의 기사였어요.”

한 치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노부인은 팬로즈가 건네주는 기다란 은회색 장갑을 끼면서 다짐을 두었다.

지난 일요일처럼 그런 망측한 행동을 한 번만 더 했다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노부인은 마차를 타면서도 계속 연설을 했다.

예배중에 꾸벅꾸벅 졸고 그것도 모자라 그렇게 큰소리로 코까지 골다니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몬티 아저씨는 마차에 오르면서 곤혹스러운 눈으로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도대체 네가 어떻게 이 괴상한 노파와 한집에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미소로 답했다. 불그레한 아저씨의 뺨은 그가 이미 마데이라를 반병 넘게 마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미래의 남편을 향해 가는 마차에 기대앉아 그녀는 창밖으로 런던 거리의 풍경과 소리를 감상했다. 멜라니는 안토니의 들러리 역을 맡은 로드릭 카스테어즈와 함께 그녀가 탄 마차의 앞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신부를 수행하는 두 대의 마차 앞뒤로 수많은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르단과 결혼식을 올리던 날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또 흥분했던가. 십 오 개월 전 조르단과 결혼하기 위해 그 조용한 응접실의 복도를 걸어갈 때 얼마나 다리가 떨렸으며 또 심장은 얼마나 터질 뜻이 뛰었던가.

그러나 이제 한 시간 후면 삼천여 명의 귀족들 앞에서 토니와 결혼식을 올릴 그녀는 그저 차분하기만 했다. 조금도 두렵지도 흥분되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서둘러 불순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뭣 때문에 이렇게 늦는 거요?”

조르단은 <송골매>호의 선장이 쓰라고 준 마차의 마부에게 물었다. 어퍼 브룩 가의 그의 집을 향해 그를 태우고 가는 마차는 짜증날 정도로 느리기만 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아마 저기 교회에 무슨 행사가 있나 봅니다.”

조르단은 다시 시간을 가늠해 보려고 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여섯 개나 되는 황금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도 감사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가 1년 이상을 시계라는 사치품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1년 삼 개월을 결핍 속에서 살아온 그는 앞으로는 무엇이든 당연하게 받아들이자 않을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까를 생각하니 한 시간 전에 런던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를 즐겁게 해줬던 런던의 풍경과 소리가 의식 속에서 차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할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신다. 조르단은 <송골매>호의 선장에게 그 소식을 들었다. 선장은 몇 달 전 잡지에서 할머니가 이번 시즌 동안 런던에 머물러 계실 계획이란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그의 집이 아니라 런던에 있는 할머니의 집에 계셨으면 좋으련만. 그래야 아무 예고 없이 할머니를 바로 만나 놀라게 하는 일없이 미리 전갈을 보낼 수 있을테니. 토니가 만약 런던에 있다면 틀림없이 어퍼 브룩 가에 있는 집이 이제는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있을 것이다.

조르단은 몇 번이나 토니가 그의 귀향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공작 작위는 물론 영지를 빼앗길 것이므로. 또한 그의 살해 음모에 토니가 연루되어 있으리란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믿을 만한 증거를 얻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려야 했다.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토니에 대한 의심을 깨끗이 씻어 낼 수 없었다.

부두에서 습격을 받던 날 밤, <제미, 놈은 우리에게 그놈을 배에 태우라는 것이 아니라 죽여 달라고 돈을 준거야>라고 말하던 건달의 말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르단은 일단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로 했다. 어쩌면 아내의 부정에 화가 난 그랭거필드의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 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자기를 죽이려 했는지 알아 낼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귀향의 기쁨을 흠뻑 누리고 싶다.

그는 잠시 후 어퍼 브룩 가에 도착할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집으로 들어가 히긴스와 악수한 후 할머니와 포옹하고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해 안도하고 감사하며 할머니와 늙은 집사가 흘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또한 호손 영지를 운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 토니에게 감사하며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토니가 그의 복잡한 사업을 엉망으로 망쳐 놓았다 하더라고 --그는 분명히 토니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고마워하리라.

그 다음에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알렉산드라를 만나고 싶었다.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는 모든 일들 중에 유일하게 그를 염려스럽게 하는 것은 자기의 어린 <미망인>과의 만남이었다. 어린애처럼 헌신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던 그녀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아주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갈대처럼 가날펐다. 이제 어쩌면 해골처럼 깡말랐는지 모른다. 자기와의 만남 이후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 그녀가 변했으리란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변해도 그렇게 많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그녀는 보다 성숙한 여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남편과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그는 그녀를 런던으로 데리고와 손수 사교계에 데뷔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런던에 그리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일 년여 이상의 세월을 낭비했다. 그러나 그 세월은 자기의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는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또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항상 무엇을 원해 왔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얄팍하고 공허한 계약으로 이어가는 결혼 생활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진정한 결혼 생활을 원했다. 알렉산드라가 주고자 했던 사랑, 그에게 생존을 위해 투쟁하게 만들었던 그런 사랑을 원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그녀를 즐겁게 해주며 타락한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었다. 신뢰란 사랑에서 나오는 걸까? 남자란 자기아내가 언제 누구와 함께 있든 변하지 않고 자기에게만 충실하다고 믿어야 하는 걸까? 조르단은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는 신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그 두 가지를 모두다 잘 알고 있으며, 그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자원했었다. 그는 기꺼이 그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조르단은 그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커다란 청록색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는 얼굴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꽤 귀엽기는 하지만 그렇게 예쁘지 않은 얼굴. 그럴 웃게 만드는 얼굴.

알렉산드라는 1년 동안은 슬픔에만 젖어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육 개월 동안은 할머니에게 귀족사회의 규율을 배우며 보냈을 것이다. 그녀가 세련되어 가는걸 보고 싶다는 자신의 소원을 할머니가 들어 줬다고 가정해 볼 때 알렉산드라는 이번 가을 시즌에 사교계에 데뷔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알렉산드라가 너무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슬픔에 젖어 모샴에 있는 자신의 낡은 집으로 돌아가 은둔해 살고 있거나 혹은 너무도 심한 슬픔 끝에 정신을 잃어버렸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마차가 어퍼 브룩 가 3번지에 멈췄다. 조르단은 마차에서 황급히 내려 잠시 집 앞 계단에 서서 우아한 모습의 3층짜리 석조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친숙하면서도 아주 낯설어 보였다.

그는 문고리를 들어 올렸다 놓으며 히긴스가 문을 열고 놀라 환성을 지르며 자기에게 달려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웬 낯선 얼굴이 문을 열어 주며 두꺼운 안경 너머로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조르단이 놀라 물었다.

그 질문은 제가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필버트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팬로즈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건방지게 말했다.

나는 조르단 타운센드요.”

조르단은 낯선 하인에게 토니가 아닌 자기가 호손 공작임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를 무시한 채 대리석으로 된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히긴스를 이곳으로 보내 주시오

히긴스는 외출 중입니다.”

히긴스나 램지를 통해 할머니에게 자기의 갑작스러운 도착을 알리려던 조르단은 인상을 찌푸렸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그는 현관 오른쪽의 커다란 살롱과 왼쪽에 있는 조그만 살롱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꽃이 가득하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래층은 온통 흰색 장미 바구니로 가득 찼다.

이따 무슨 파티가 있나?”

.”

귀향 파티가 되겠군.”

조르단은 웃으며 말했다.

안주인은 어디 계신가?”

교회에 계십니다.”

필버트는 큰 키에 새카맣게 탄 신사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러면 주인은?”

조르단은 토니를 의미하며 물었다.

역시 교회에 계십니다.”

틀림없이 나의 불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러 갔겠군.”

조르단이 농담을 던졌다.

그는 토니가 틀림없이 자기가 부리던 수석 시종 마티슨을 그대로 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티슨은 있는가?”

있습니다.”

필버트는 자기가 마치 집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가며 어깨너머로 명령을 내리는 미지의 사나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티슨을 곧 내게 보내시오. 난 황금 스위트에 가 있겠소. 그 사람에게 내가 당장 목욕과 면도를 원한다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옷도 갈아입고 싶어 하고. 아직 내 것이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토니의 것도 좋고 아니면 그 사람 거든지 뭐든지 좋다고 전하시오.”

조르단은 분명히 토니가 썼을 주인 침실을 지나 손님용 황금 스위트의 문을 열었다. 그리 화려하게 꾸며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본 방 가운데 가장 호화로운 방으로 보였다. <송골매> 호의 선장이 빌려 준 맞지도 않은 윗도리를 벗어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그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셔츠를 벗어 윗도리 위에 던져 놓고 막 바지를 벗을 참이었다. 그때 마티슨이 검은 연미복 자락을 펄럭이며 성난 펭귄처럼 뛰어 들어왔다.

저 손님이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 세상에!”

마티슨은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하느님, 공작님! , 하느님!”

조르단이 싱긋 웃었다. 이것은 그가 상상했던 귀향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내가 돌아온 데 대해 우리 모두 전능하신 분에게 고마워해야겠지, 마티슨.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으면 좋겠네.”

알았습니다, 공작님. 당장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얼마나 즐거운지....... , 세상에 이 일을!”

마티슨은 복도를 건너 주인용 침실로 들어갔다가 토니의 셔츠와 조르단이 입던 승마바지와 부츠를 황급히 들고 나왔다. 조르단은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마티슨이 당황해하자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난주에 옷장 뒤에서 우연히 이것들을 발견했죠.”

마티슨은 숨을 헐떡였다.

서두르세요. 서두르셔야 합니다. 교회로!”

그는 숨을 헐떡이며 두서없는 말을 했다.

결혼.”

결혼? 그래서 모두들 교회에 갔군.”

조르단은 마티슨이 준 바지를 옆에 두고 목욕을 하려 했다.

누가 결혼하는데?”

안토니 님이요.”

마티슨이 셔츠를 펴서 물리적으로 조르단의 팔을 소매에 넣으려 애쓰며 목멘 소리를 했다.

조르단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누구하고 결혼하는데?”

공작님의 부인하구요!”

잠시, 조르단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만약 안토니가 결혼한다면 호손 공작으로서 혼인 서약에 서명을 하고 약혼자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서약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중혼이라구요!”

마티슨이 숨을 헐떡였다.

조르단은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리로 나가 마차를 잡아.”

조르단은 명령을 내리면서 곧 셔츠를 낚아채 입었다.

몇 시에 어디서 결혼하기로 되어 있지?”

이십 분 후에 성 바오로 교회에서요.”

조르단은 한 노부인이 막 타려는 마차를 뺏어 타고 노부인의 성난 고함소리를 뒤로하며 마부에게 성 바오로 교회로 가자고 지시했다.

만약 나를 십 오 분내로 그곳에 데려다 준다면 당신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주겠소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곳에 무슨 결혼식이 있는지 오전 내내 길이 이만저만 혼잡하지 않았어요.”

그 다음 몇 분 동안 조르단의 마음속에서 수십 가지 생각과 감정이 나타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서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마차 행렬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이 엄청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가끔 토니가 누군가를 설득해 그녀와 결혼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않았다. 토니도 조르단만큼이나 여자에게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으며 더구나 남편과 아내가 다 제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현대식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또한 알렉산드라가 언젠가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그러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아직 자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아직 자기만을 사랑하고 있을 줄로 알았는데.......

그러나 그의 귀환과 관련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면서도 토니가 잘못된 명예 의식 때문에 자기의 가엾은 아내와 의무적으로 결혼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성 바오로 교회의 뾰족 지붕이 눈에 보이자 조르단은 도대체 토니가 무엇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대답은 금방 나왔다. 동정 때문이었을 거다. 자기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 크고 사랑스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던 자그만 체격의 맹랑한 소녀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동정심.

연민 때문에 이런 큰일이 벌어졌다. 교회에 들어가는 대로 결혼식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든 그것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렉산드라와 토니는 공개적으로 중혼을 하게 되는 셈이다. 가엾은 알렉산드라에게서 두 번이나 신랑을 빼앗아 가는 격이 된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한번 그녀의 평화를 깨뜨려야 하는 게 가슴 아팠다.

성 바오로 교회 앞에서 마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조르단은 마차에서 뛰어 내려 제발 결혼식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길 빌며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교회의 육중한 오크 나무문을 열고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조르단은 우뚝 멈춰 섰다. 속에서 갖가지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다른 묘안이 없었다. 그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날카로운 대포소리처럼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선 교회당에 울려 퍼졌다.

교회당의 거의 정면까지 가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지금부터 자기가 연출할 상황을 생각하며 잠시 기다렸다. 바로 그때, 한때는 자기의 가족이었으며 친구였고 친지였던 화려한 옷차림의 하객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대열 한가운데 서서 조르단은 사람들이 자기의 죽음을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의 죽음을 슬퍼했더라면 이 교회에서 지금부터 자기가 펼쳐 보이려는 드라마틱한 코미디의 우스꽝스런 역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온몸으로 차가운 분노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신도석 둘째줄 사이에 서서 그는 꼼짝 않고 팔짱을 낀 채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양쪽에 앉아 있던 하객들이 그를 알아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객들의 수군거림은 산불처럼 삽시간에 전 예배당으로 퍼졌다. 알렉산드라는 뒤쪽에서 술렁이는 소리를 듣고 불안한 눈으로 안토니를 쳐다보았다. 그는 대주교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신랑 신부의 결혼에 반대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지금 말씀을 하십시오.”

한순간 침묵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그 선언에 늘 뒤따르는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롱기 섞인 그윽한 바리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 있습니다.”

토니가 고개를 들렸다. 대주교가 숨을 죽였다. 알렉산드라와 삼천여 명의 하객들이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단에서 멜라니 캠던의 장미 부케가 떨어지고 로디 카스테어즈가 활짝 웃었다. 알렉산드라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정신이 나갔는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이유로 이 결혼을 반대하십니까?”

대주교가 물었다.

신부는 이미 결혼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조르단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저하고 말입니다.”

그 친숙하고 그윽한 목소리는 꿈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알렉산드라는 충격으로 온몸을 떨었다. 배신과 기만에 대한 모든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두려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조르단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 남자답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렉산드라는 주저앉고 말았다. 조르단은 단정한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가만히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사랑하는 그의 얼굴을 만져 보고 그가 정말 살아 돌아왔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알렉산드라의 손길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미소가 포근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조르단의 눈이 그녀에게 나타난 변화를 알아보았다. 다음 순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조르단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날카롭게 토니를 노려보았다.

신도석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호손 노부인은 오른손으로 목을 누르며 꼼짝 않고 조르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극적인 침묵의 순간에 오직 몬티 아저씨만이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몰래 마신 마데이라 때문에 조르단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결혼식중에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대한 노부인의 설교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신참자에게 훈계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몬테규 경은 복도에 버티고 서있는 침입자를 향해 외쳤다.

이보게, 자리에 앉아! 그리고 대주교님이 나가실 때까지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그렇지 않았다간 나중에 노부인께 혼나!”

마법에 걸린 듯이 얼이 빠져 있던 사람들이 그의 말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대주교는 더 이상 결혼식을 진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퇴장해 버렸다. 토니는 알렉산드라의 떨리는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갔다.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조르단이 비켜섰다. 노부인이 조르단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롱한 가운데 몬티 아저씨는 결혼식이 끝난 걸로 알고 노부인의 사전 설교에 따라 노부인에게 팔을 내밀고 신랑 신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당당하게 노부인을 인도하며 놀란 눈으로 숨죽이고 자기들을 따라오는 하객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배당 밖으로 나오자 몬티 아저씨는 알렉산드라에게 소리 나게 키스를 하고 토니의 손을 덥석 잡고 다독거렸다. 순간 조르단의 엄한 목소리가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보 같으니, 결혼식은 끝장났어요! 나이값을 하시오. 내 아내나 집으로 데리고 가요.”

조르단은 할머니의 팔을 잡고 기다리고 있는 마차 쪽으로 갔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토니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덮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간신문에 나의 기적적인 귀향에 관한 기사가 나올 거야. 신문을 읽으면 알고 싶은 것은 알게 되겠지. 어퍼 브룩 가에 있는 내 집에서 만나자.”

알렉산드라와 토니가 얼어붙은 듯이 서 있자 몬티 아저씨가 나서서 토니에게 말했다.

호손, 마차를 잡을 길이 없네. 마차가 보이지 않아. 우리와 함께 가세.

한손으로는 안토니를 다른 한 손으로는 알렉산드라를 잡고 그는 그들을 강제로 토니의 마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조르단은 노부인의 마차로 할머니를 인도하며 기절할 듯이 놀라는 마부에게 명령을 내리고 할머니 옆에 앉았다.

조르단.”

할머니는 마침내 기쁨의 눈물이 맺힌 눈으로 조르단을 쳐다보았다.

정말 네가 살아 돌아온 거야?”

조르단은 할머니의 어깨를 안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 할머님.”

전에 없는 애정을 드러내며 노부인은 새카맣게 탄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내리고 명령조로 물었다.

호손, 어디에 있었어! 우린 네가 죽은 줄 알았어! 가엾은 알렉산드라는 상심해서 거의 쓰러질 뻔했고, 또 안토니는......”

거짓말 마세요.”

조르단이 차갑게 말했다.

방금 나를 보고 토니는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상심한> 나의 아내는 빛나는 신부였구요.”

조르단은 제단에서 자기를 돌아보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잠시 그는 자기가 결혼식장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혹은 마티슨이 토니의 신부를 잘못 알았던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었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잊을 수 없는 청록색 눈을 들어 자기를 볼 때까지. 그때, 바로 그때 조르단은 그녀가 바로 알렉산드라란 걸 확실히 알았으며, 바로 그 순간 토니가 동정심이나 자비심 때문에 그녀와 결혼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제단에 있는 매혹적인 미녀는 어떤 남자에게나 연민이 아니라 색정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았다.

전 직계 가족이 죽으면 관습적으로 상 기간이 1년은 되는 걸로 알고 있었어요.”

물론 그렇지. 우리도 그렇게 했고 말고!”

노부인이 변명조로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4월까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고, 알렉산드라도 그 후에 데뷔했지. 그리고 나는.....”

그러면 상심한 내 아내는 상 기간 동안 어디서 살았어요?”

호손에서, 안토니와 나와 함께, 당연히.”

당연히 전 토니가 제 작위와 땅과 돈을 소유하게 된 데 만족하지 않고 제 아내까지 소유하려 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노부인은 창백해지면서 지금 당장 그의 눈에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의 지금 기분으로 봐서 알렉산드라가 너무 인기 있어서 결혼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해 봤자 문제만 더 크게 만들 뿐 아무 소용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네가 잘못 알고 있어, 호손. 알렉산드라는 ..... ”

알렉산드라는 분명히 호손 공작부인 자리를 좋아했겠죠. 그래서 그 자리를 영원히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택했구요. 현재의 호손 공작과 결혼한다는.”

그녀는......”

교활한 기회주의자라구요?”

그는 구역질이 올라오고 화가 나서 날카롭게 말했다.

그가 캄캄한 감옥에서 행여 알렉산드라가 혼자 외롭게 살면서 슬픔과 절망에 허덕이지 않을까 염려하며 며칠 밤을 지새우고 있을 동안 토니와 알렉산드라는 그의 돈으로 맘껏 즐기고 때가 되자 결혼까지 하기로 했다고 단정 지었다.

노부인은 조르단의 굳은 얼굴을 보고 이해를 구해봤자 소요 없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조르단, 이 모든 것이 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만해. 지금 네겐 설명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그동안 네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설명을 듣고 싶구나.”

조르단은 그동안 겪은 일을 그중 최악의 것들은 빼놓고 대충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충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러니컬한 현실에 화가 났다. 그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안 토니는 그의 작위와 영지와 돈을 갈취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아내까지 차지하려 했다.

그들 뒤로 호손 공작이라는 황금 문장을 단 마차 안에서 알렉산드라는 몬티 아저씨 옆에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갖가지 생각이 들끓었다. 조르단이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있다. 다만 예전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뿐. 그는 자기가 결혼한 가엾은 어린애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고의적으로 사라졌다가 자기 사촌이 중혼을 하려는 걸 알고 돌아온 걸까? 그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와 기뻤던 마음이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할 리는 없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혼란스러운 마음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갑자기 가차 없이 잔인한 생각들이 잇달아 떠올랐다. 그녀가 지금 돌아왔다고 기뻐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를 동정하고 경멸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우롱했다. 그녀가 알고 있고 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조르단 타운센드는 방종하고 불성실하고, 인정머리 없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라는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총동원해 그를 욕했다. 그러나 어퍼 브룩 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그녀의 분노는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화를 내는 데는 정신적인 에너지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멍한 마음은 충격으로 거의 마비되어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토니가 자리에서 움직였다. 순간 그녀는 조르단의 출현으로 앞날이 극적으로 바뀐 사람이 자기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니, .......죄송해요. 당신 어머님께서 차라리 당신 동생과 함께 집에 계셨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조르단의 귀향에 분명히 충격 받으셨을 거예요.”

놀랍게도 토니가 싱긋 웃었다.

호손 공작이란 자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신나는 자리가 아니었소. 몇 주 전에 내가 말했듯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것을 즐길 시간이 없으면 좋을 것도 없어요. 그건 그렇고 방금 생각해 보니 운명의 여신이 당신에겐 큰 축복을 내린 것 같소.”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는 그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걸 생각해 봐요

그는 놀랍게도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조르단이 돌아왔소. 그런데 그의 아내는 이제 영국에서 제일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 있다구! 솔직히 말해 봐요. 당신은 그런 것을 꿈꾸어 오지 않았소?”

그가 원치 않던 자그맣고 불쌍해 보이기만 하던 여자가 이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조르단이 얼마나 놀랄지 알렉산드라는 씁쓸한 기분으로 생각해 보았다.

전 그 사람과 결혼 생활을 계속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겠어요.”

토니가 이내 웃음을 그쳤다.

진심이 아니겠지. 이혼에는 얼마나 많은 추문이 따라다니는지 알아요?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지만 이혼을 했다간 당신은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되고 말거요

상관없어요.”

그는 그녀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알렉스, 날 걱정해 줘서 고맙소. 하지만 날 위해 이혼을 생각할 필요는 없소. 그렇지도 않지만 설령 우리가 서로 죽도록 사랑한다 해도 그건 중요치 않을 거요. 당신은 조르단의 아내요. 아무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순 업소.”

그 사람이 그걸 바꾸고 싶어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아니, 내 분명히 장담하지만 그는 당장 나를 불러 만족할 만한 설명을 요구할 거요. 교회에서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던 그 눈 못 봤소?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알렉산드라의 겁먹은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만약 호크가 결투를 신청한다면 나는 펜싱을 선택해서 당신을 내 대리인으로 보낼 셈이오. 그가 당신을 쉽게 이기진 못할 테고, 당신은 나보다 그를 이길 확률이 높지.”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토니와 결혼하려 했다 해도 조르단이 신경 쓰지 않을 거란 반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박을 위해선 명료하고 이성적인 사고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저 멍하기만 했다.

토니, 제가 먼저 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앞으로 가족간의 평화를 위해 이것은 전적으로 혼자만의 결정이며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그 사람도 알아야 해요.”

토니는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알렉스, 내 말 들어 봐요. 당신은 지금 충격을 받았소. 이번 주 아니면 이번 달 안에 당신이 당장 조르단의 품에 안겨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과 이혼한다는 건

원한을 너무 오래 간직하는 거요!“

그 사람은 전혀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한 번도 절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요.”

토니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실룩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남자와 남자들의 자존심을 잘 몰라. 또 조르단이 당신을 그냥 버리려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조르단을 잘 몰라서 그런 거요. 그는....”

갑자기 토니의 눈이 웃음으로 반짝이면서 그는 쿠션에 기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조르단은 장난감도 같이 가지고 놀지 않으려던 사람이오. 한 번도 도전을 그냥 넘긴 적이 없었어!”

몬티 아저씨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코트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술병을 꺼내 한 모금 삼켰다.

이런 상환에선 술이라도 마셔야지.”

바로 그때 마차가 조르단이 탄 마차에 뒤이어 집 앞에 도착하는 바람에 그들은 더 이상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부축하는 조르단의 눈을 살짝 피해 알렉산드라는 토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뒤를 따라 조르단이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에 알렉산드라는 서서히 정신이 들며 온몸으로 충격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불과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조르단의 구두 발자국 소리에 등줄기가 서늘해 졌다. 조르단의 넓은 어깨와 큰 키가 햇빛을 막으며 그녀 앞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말 그가 살아 돌아왔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깨어날 수 있는 악몽이 아니다.

그들은 우르르 응접실로 몰려들어갔다. 자신의 앞날을 위협하는 그의 존재와 결투가 불가피할지 모른다는 토니의 말이 점점 실감나면서 알렉산드라는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재빨리 의자를 둘러보며 각 자리의 심리적 이점과 단점을 가늠해 보았다. 그녀는 중립적인 위치를 택해 소파보다 벽난로 앞에 서로 마주 놓인 두 개의 위 의자 가운데 한곳에 앉는 편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노부인도 중립적인 자리에 앉기로 했는지 역시 위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윙 의자에서 오른쪽으로 벽난로를 마주하고 있는 소파만 남았다. 다른 대안이 없는 토니는 소파에 앉았으며 술이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하는 기대와 알렉산드라에게 심리적인 도움이 될 요량으로 응접실로 따라 들어온 몬티 아저씨가 그 옆에 앉았다. 조르단은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 벽난로 덮개 위에 팔을 올려놓고 차가운 침묵 속에 일행을 바라보았다.

노부인이 지난 십 오 개월 동안 조르단이 어디서 어떻게 있었던가 간단히 설명하는 동안 필버트가 샴페인 쟁반을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긴장된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충직한 하인은 곧바로 알렉산드라 쪽으로 쟁반을 가지고 가 샴페인을 다섯 잔 따랐다.

 

노부인이 말을 끝내자 필버트는 맨 먼저 알렉산드라에게 샴페인을 권하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영원히 함께 하길 빕니다.”

필버트가 나머지 잔에 샴페인을 더 부어 조르단을 포함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잔을 권하는 것을 보며 알렉산드라는 공포가 더해갈수록 갑자기 발작적인 웃음이 나오려 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몬티 아저씨까지도 감히 무용지물로 끝나 버린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창고에서 꺼내 온 귀한 샴페인을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조르단을 제외하고.

응접실에 감도는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는 반짝이는 크리스털 잔을 들어 넘치는 거품을 들여다보더니 샴페인을 한 모금 길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고 조소 띤 얼굴로 토니를 쳐다보고 차갑게 말했다.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슬퍼하면서도 내가 아끼던 포도주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사양하지 않았다니 반가운 소식이로군.”

노부인이 움찔했다. 알렉산드라는 뻣뻣해졌다. 그러나 토니는 그의 신랄한 비난을 빙긋 웃으며 받아들였다.

새 병을 딸 때마다 형을 위해 건배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줘, 호크.”

알렉산드라는 눈을 내리뜨고 살짝 벽난로 앞에 서 있는 조르단의 모습을 훔쳐보며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토니가 자기의 작위와 돈과 영지와 아내를 <찬탈>한데 별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자기의 포도주 창고에 손을 댔다고 화를 낸다. 그러나 조르단의 다음 말은 자신의 영지에 관심 없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우쳐 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 호손은 어떻게 관리했지?”

그는 약 한 시간 동안 열 한 개의 영지와 수많은 투자 사업과 사유 재산과 심지어 관리인들의 건강까지 토니에게 자세히 심문하듯이 캐물어 보았다.

조르단이 입을 열 때마다 그의 그윽한 목소리는 알렉산드라의 아픈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가끔 몰래 그를 훔쳐보다가 걱정 때문에 금방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근육질의 긴 다리를 강조해 주는 몸에 꼭 끼는 승마바지에 목이 드러나는 흰 셔츠를 입고 있는 조르단 타운센드는 아주 편안해 보이면서도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후광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미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남성적이고 또 키가 큰 줄은 몰랐다. 그는 많이 야위었다. 그러나 탈출하던 중에 검게 탄 얼굴은 하얀 피부의 다른 귀족들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팔을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에 서 있는 그는 유령처럼 보였다. 갑자기 그녀의 인생에 다시 나타나 그녀의 행복을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위험하고 사악한 유령. 그녀는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만큼 비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리란 생각은 들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오랜 긴장 속에 알렉산드라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단호한 결심 속에 그녀는 마침내 조르단이 그녀의 문제를 제가할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르단은 토니와 영지 관리 이야기가 끝나자 다른 투자 사업으로 화제를 돌렸다. 알렉산드라는 점점 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투자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국내 동향에 관한 질문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라는 두려운 동시에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르단이 화제를 국내 동향에서 시시껄렁한 가십으로 옮겨 지난 봄 포드햄 경마 대회의 결과를 물을 때쯤에 그녀의 당황스러움은 분노로 바뀌었다.

분명히 그는 그녀보다 웨드글리 경의 두 살짜리 노새나 마크햄 경의 망아지 소식이 더 궁금한 것 같았다. 조르단 타운센드가 자기를 성가신 책임거리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모욕적인 사실이 생각났다.

아주 시시한 것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방안에는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알렉산드라는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됐음을 직감했다. 조르단이 그녀를 단둘이 만나고 싶다고 부탁하겠지 기대하는 순간 벽난로에 기대고 서 있던 조르단이 몸을 세우면서 이제 쉬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신중하게 가만히 있으라는 경고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알렉산드라는 하루를 아니, 단 한 시간도 더 이 긴장의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침착하고 사무적이려고 애쓰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공작님.”

조르단은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토니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고 난 뒤 나중에 단둘이서 이야기하지.”

그녀의 존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알렉산드라는 고의적이고도 도발적인 모욕에 온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쉽게 조정할 수 있고 또 쉽게 사랑에 빠지던 소녀가 아니라 완전히 성숙한 성인이다. 분통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그녀는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마크햄 경의 망아지만큼은 공작님의 귀중한 시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겠지요. 저는 그 문제를 지금 당장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르단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알렉산드라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숨이 콱 막혔다.

단둘이 이야기하겠다고 했잖아!”

그녀는 조르단의 얼굴에서 불같이 화가 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막 입을 열기도 전에 노부인이 황급히 일어나며 몬티 아저씨와 토니에게 방을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불길하게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살롱 문이 닫혔다. 십 오 개월만에 처음으로 알렉산드라는 조르단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곁눈으로 그가 테이블 쪽으로 가 샴페인을 한잔 더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 기회를 이용해 그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그녀는 어떻게 조르단 타운센드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가 순진하게 매료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성숙한 성인의 눈으로 보니 그의 강인하고 굴곡이 심한 얼굴에서 부드러움이나 상냥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를 미켈란젤로의 데이비드 상에 비유할 수 있었을까?

부드러운 아름다움 대신에 조르단 타운센드의 검게 탄 얼굴은 고귀함을 느끼게 했으며 강인한 턱선과 오똑한 코는 권위를, 또 단호한 턱은 냉정한 결단력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그의 눈에 어린 차가운 냉소와 조소가 담긴 말투에 겁이 났다. 예전에는 그의 회색 눈이 여름철 비온 뒤의 하늘처럼 부드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의 눈은 이해심이나 상냥함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도 없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다. 그가 아찔하리만큼 잘생겼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수 어리고 공격적이며 육감적인 남자를 매력적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그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최선의 방법을 찾아 열심히 생각하면서 알렉산드라는 자기의 잔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테이블로 가 샴페인을 한잔 더 따랐다. 그리고 앉을 것인지 설 것이지 결정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의 큰 키에 위협당하지 않도록 서 있기로 결심했다.

조르단은 벽난로 가에서 샴페인 잔을 입으로 가지고 가며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토니를 사랑하게 되어 그와 결혼하고 싶었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게 이유라면 그녀답게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호손 공작이든 간에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고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만약 그게 이유라면 그녀는 부드럽게,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연극을 해가면서 나를 달래려고 애쓸 것이다. 우선 그녀는 내가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약간 기다릴 것이다. 사실 지금 그녀는 그렇게 하고 있다.

조르단은 샴페인 잔을 비워 벽난로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날 기다리게 하지 마.”

알렉산드라가 깜짝 놀라며 그의 날카로운 말투에 겁먹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숙하고 냉정한 자세로 이제 더 이상 그의 걱정거리나 책임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해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조르단이 속으로 자기를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알고 얼마나 상처받았으며 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난봉꾼의 죽음을 슬퍼함으로써 얼마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지 드러낼 만한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 한 가지 곤란한 점은 조르단이 이혼 요구에 이성적으로 대응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정반대로 반응할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그는 그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청색의 새틴 웨딩드레스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가 몇 가지 제안을 하지. 당신이 나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고 말하려고 한다면 지금 입고 있는 그 드레스는 좀 모순되는군. 옷을 갈아입을 정도의 염치는 있었어야지. 그러나 어쨌든 아주 아름다운 옷이긴 하군.”

그는 갑자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내 돈으로 그걸 샀어?”

아니오. 그건.....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 드레스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해두지. 그런데 당신의 그 태도는 또 뭐야? 하긴 다른 남자의 신부가 되겠다고 했던 사람이 내가 돌아왔다고 해서 당장 기뻐서 내 품으로 달려와 안긴다거나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순 없겠지. 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내 d용서를 받기 위해선 뭔가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아?”

당신의 무엇을 받는다구요?”

알렉산드라는 하가 나서 두려움도 잊고 폭발했다.

왜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른다는 말로 시작하지 그래?”

그는 화를 내는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 잔인하게 나왔다.

게다가 눈물이라도 한두 방울 흘리면서 당신이 내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고 울었는지 또 내 영혼을 위해 기도를 ........”

그것은 사실이었다.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그만하세요! 그 따위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당신 같은 건방진 위선자에게 용서를 받는 일은 더더구나 바라지 않아요.”

어리석기 짝이 없군. 이런 때는 상대를 모욕할 게 아니라 고상하게 눈물이나 흘리면서 부드럽게 나와야지. 더구나, 내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게 당연히 당신의 첫 번째 관심사가 되어야지. 좋은 가문 출신으로 공작부인이 되고 싶은 여자들은 언제나 남편감이 될 만한 공작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하려고 애쓰지. 그래, 그 옷도 갈아입을 수 없고 또 눈물도 흘리 수 없다고 쳐. 그렇다고 나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는 말도 못해? 나를 그리워하긴 했지, 그렇지?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내 장담하지. 나를 너무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래서 토니와 결혼하기로 했을 거야. 왜냐하면 토니는 어...... 나와 닮았으니까. 그렇지, 그게 아니야?”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알렉산드라가 외쳤다.

그는 대답 대신에 그녀에게로 다가와 불길한 먹구름처럼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하루 이틀 후에 당신을 어떻게 할건지 말해주지.”

알렉산드라는 분하고 원통했다. 조르단 타운센드는 그녀를 한 번도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부정한 아내에게 화난 남편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에겐 그럴 권리도 이유도 전혀 없다!

저는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재도구 나부랭이가 아니에요. 당신이 저를 한점의 가구처럼 처리할 순 없을 거예요!”

할 수 없다고? 한 번 두고 봐!”

알렉산드라는 이성을 잃은 그의 화를 가라앉히고 그의 상처받은 자아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는 열심히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논리를 찾았다. 그들의 관계에서 무고하게 상처받은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아주 위험한 상태다. 알렉산드라는 이성적으로 조르단을 대하기로 했다.

당신이 화났다는 건 알겠어요.”

관찰력 한 번 대단하시군.”

빈정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라는 계속 이성적인 말투로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당신과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겠어요.”

계속해 보시지.”

그는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도발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눈빛은 정반대였다.

알렉산드라는 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봤자......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당신은 제 말을 듣지 않으려 할 거예요. 분노는 정신의 등불을 끄고.”

알렉산드라가 인용하는 잉거솔의 말은 조르단의 허를 찌르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부처에서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성구를 인용하던 매혹적인 곱슬머리 소녀를 기억나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기억은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옛날의 그 소녀가 아니었다. 그 대신 교활한 기회주의자가 되었다. 정말 토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기를 원했다면 지금쯤 그렇게 말했을 것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히 호손 공작부인이라는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녀의 문제가 있다. 그녀는 방금 다른 남자와 결혼할 뻔한 장면을 목격당한 마당에 그의 품에 안기며 그의 귀환을 기뻐하는 척할 수도 없다. 또 화해를 위한 몇 가지 있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지도 않고 그를 무조건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위엄과 명예를 가지고 귀족들과 계속 교류하기 위해선 현 호손 공작의 아내로 남아 있을 필요가 있다.

그녀는 지난 십오 개월 동안 야심가로 변했다. 그리고 아름다워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어깨 너머로 넘실거리는 검은머리가 윤기 흐르는 투명한 피부와 청록색 눈 그리고 부드러운 장미빛 입술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너무나 매혹적이다. 보통 미인의 전형이라고 간주되는 창백한 금발과 비교해 볼 때 알렉산드라는 확실히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가 교활한 기회주의자라는걸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난 눈과 꼿꼿이 쳐들고 있는 고개에서 죄책감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화를 내며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알렉산드라는 분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면서 그가 방을 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가 문간에서 멈췄다. 그녀는 자동적으로 긴장했다.

내일 이 집으로 돌아오겠어. 그 동안 당신이 지켜야 할 지시 사항이 있어. 어디를 가든 절대 토니와 함께 다니지 마.”

그의 말투로 보아 만약 명령을 거역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어떤 형태의 보복이 따를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잠시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이 집밖으로 나가선 안 돼. 내 말 확실히 이해했어?”

놀란 가슴을 누르고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세 가지 언어를 아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요, 공작님. 그중 하나가 바로 영어예요.”

나를 놀리는 거야?”

그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더 이상 도발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물러서고 싶지도 않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비이성적으로 날뛰는 아이를 다루는 어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비이성적인 기분인 한 더 이상 당신과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알렉산드라!”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시험해 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제 갈 데까지 다 갔어. 지금 내 <비이성적인 기분>으로는 지금 당장 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당신이 앞으로 일주일 동안 앉지도 못할 정도로 십 분간 펑펑 두들겨 패고 싶어.”

아이처럼 볼기짝을 두들겨 패겠다는 위협에 힘겹게 낸 용기가 사르르 사라지며 1년 반 전 그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굴욕감에 두 볼이 빨갛게 물들고 두 눈엔 분노의 눈물이 괴었다.

조르단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그 정도면 정신 차렸겠지 생각하고 그녀에게 목례조차 하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1년 전만 해도 그녀는 상류 사회의 매너에 대해 전혀 몰랐다. 조르단이 목례하지 않아도, 또 그녀의 손에 키스하지 않아도, 그게 모욕하는 것인 줄 몰랐다. 더구나 그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응접실 한가운데 혼자 서서 그녀는 자기를 무시했던 과거 그의 행동이며 오늘 보여 준 행동들을 하나하나 분한 마음으로 새겨 보았다.

알렉산드라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살롱을 나와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하녀를 물리치고 아무렇게나 웨딩드레스를 벗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오다니! 그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나빴다. 더 거만하고 더 독선적이고 더 비인간적이었다. 그런데 자기는 그와 결혼했다. 결혼! 속에서 비명이 나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세상사가 간단하고 쉬운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교회로 갔다. 그런데 세 시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알렉산드라는 양팔로 배를 껴안고 소파에 앉아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영들을 지워 버리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로즈미드의 정원에서 조르단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기의 모습. <당신은 미켈란젤로의 데이비드처럼 아름다워요!> 그리고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사랑의 행위를 할 때는 그의 팔에서 황홀해 거의 기절할 뻔했으며, 그가 얼마나 강인하고 똑똑하고 멋진지 모른다고 속삭이지 않았던가!

, 맙소사!”

잊어버리고 있던 또 한 가지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알렉스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조르단, 런던 최고의 난봉꾼에게 분명히 당신은 여자를 잘 모를 거라고 말했었다. 그때 그는 웃었지. 너무도 당연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괴물 같은 인간을 위해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눈물을 닦았다. 원통하게도 이미 그를 위해 몇 양동이도 넘는 눈물을 흘렸다.

몇 주 전 토니가 한 말이 그녀의 상처를 건드렸다.

조르단은 당신이 불쌍해서 결혼한 거요. 그는 당신을 아내로 생각하고 살 의사도 계획도 없었소.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대로 당신을 데번에 데려다 두고 자기는 애인과의 관계를 계속할 작정이었지.... 그는 결혼한 뒤에도 그 애인을 만났소. 그리고 그녀에게 당신과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고 말했어요........”

누군가 조용히 방문을 두드렸다. 알렉산드라는 너무도 비참한 생각에 몰두해 있는 나머지 멜라니가 방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것도 몰랐다.

알렉스?”

알렉산드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멜라니는 눈물로 얼룩진 알렉산드라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그녀 옆으로 갔다.

, 세상에!”

멜라니는 알렉산드라 앞에 꿇어앉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고 있어? 조르단이 어떻게 했어? 너에게 화를 내며 때리기라고 했니?”

알렉산드라는 눈물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눈물 덩어리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멜라니의 남편은 조르단과 가장 절친한 친구라는 걸 알렉산드라는 알고 있었다. 이제 멜라니는 누구 편을 들지 모른다. 알렉산드라는 멜라니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 쥐었다.

알렉스! 제발 말해봐! 난 네 친구야, 언제나.”

그녀는 알렉산드라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렇게 속으로 삭이고만 있으면 안 돼.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얀 게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아.”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맹목적으로 조르단을 사랑한 바보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수치스러웠던가는 말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가 더듬거리며 호크와의 굴욕적인 관계를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는 동안 멜라니는 알렉스의 심정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멜라니는 간혹 조르단에 대한 알렉산드라의 순진한 사랑에 감동하며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호크가 그녀를 데번에 내팽겨쳐 둘 계획이었다는 대목에 와서는 웃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어떻게 해서 실종되었던가를 설명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이야기를 다 들은 멜라니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독거렸다.

모두 다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니?”

있어.”

알렉산드라가 조용히 말했다.

이혼할 거야!”

? 진심이 아니겠지!”

알렉산드라는 진심이었다.

이혼은 안돼, 알렉스. 그랬다간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될 거야.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는 내 남편도 아마 너와 만나지 못하게 할 거야. 그렇게 했다간 넌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외면당할 거야.”

그게 차라리 그 사람과 결혼해 데번 어딘가에 처박혀 사는 것보다 나을 거야.”

지금은 그렇게 생각될지 몰라. 하지만 어떤 경우든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치 않아. 이혼을 하려면 네 남편이 동의를 해야 하는 데 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아. 이혼을 하려면 호크가 동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당한 근거가 있어야 해.”

네가 들어왔을 때 난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 난 벌써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의 동의가 전혀 필요 없을지도 몰라. 첫째, 나는 이 결혼을 상황에 밀려 강제로 했어. 둘째, 결혼식에서 그는 나를 사랑하고 명예롭게 하겠다고 서약했어. 하지만 그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어. 이것만으로도 그가 동의를 하건 말건 이혼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겠어? 더구나 나는 그 사람이 왜 이혼을 거절할지 이유를 모르겠어.”

알렉산드라는 화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나와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어.”

글쎄, 그렇다고 그 사람이 모든 사람들 앞에 네가 그 사람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공표하게 놔둘까?”

그 사람도 잘 생각해 보면 날 놓아주는 게 훨씬 편하단 걸 알게 될 거야.”

멜라니가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사람이 너를 놓아 줄 것 같지 않아. 오늘 교회에서 그 사람이 안토니 경을 쳐다보는 눈빛을 봤어. 그것은 편한 눈길이 아니라 성난 눈이었어.”

그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나쁜 사람이야.”

알렉산드라는 조금 전 아래층에서 그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화냈다.

그 사람이 안토니나 나에게 화낼 이유가 어디 있어?”

이유가 없다고!”

멜라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없어? 넌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방금도 말했지만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나하고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너하고 결혼하길 원한다는 뜻은 아니지. 어쨌든 그런 이야긴 중요치 않아. 이혼은 말도 안돼. 다른 해결책이 있을 거야. 마침 내 남편이 오늘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왔어. 존에게 충고해 달라고 해야겠어. 그 사람은 아주 현명하니까.”

그러다 멜라니는 고개를 떨구었다.

불행하게도 그 사람은 호크를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틀림없이 호크 편을 들거야. 하지만 이혼은 절대 안돼. 무슨 다른 수가 있을 거야.”

멜라니는 이마를 찌푸려 가면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은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일 거야.”

멜라니는 살짝 연민의 미소를 띠고 말했다.

영국에서 소문난 멋쟁이 여자 수십 명이 조르단의 꽁무니를 따라다녔지. 그러나 조르단은 그들과 이따금 같이 놀아나긴 했지만 감정적인 교류를 한다는 느낌은 한 번도 주지 않았어. 이제 그 사람이 돌아왔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네가 그 사람의 품에 안길 줄로 알거야. 특히 네가 처음 런던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그에게 현혹되어 있었던가를 고려한다면 말이야.”

알렉산드라는 멜라니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어렵게 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생각은 못했어. 그런데 네 말이 전적으로 옳아.”

그럼, 내 말이 옳고말고. 그런데 말이야.”

멜라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만약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면 재미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해결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너를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되면 넌 자존심도 지킬 수 있고 또 남편도 지킬 수 있잖아.”

알렉산드라는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멜라니, 우선 난 그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 사람에겐 심장이 없으니까, 둘째, 그 사람에게 심장이 있다고 해도 나한테는 예외일 거야. 셋째......”

멜라니는 웃으면서 알렉산드라의 팔을 잡고 그녀를 소파에서 일으켜 거울 앞에 세웠다.

그건 옛날 이야기지, 알렉스. 거울을 봐. 지금 저기 거울 속에서 너를 보고 있는 여자는 런던을 그 발아래 두고 군림하고 있어! 남자들은 너를 두고 싸움을 벌이고 있어.”

알렉산드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아닌 멜라니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들이 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것도 잠깐은 재미있는 일일지 모르지.”

멋있잖아! 호손이 아마 그 사실을 알면 놀랄 거야.”

알렉산드라의 눈이 잠깐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다가 이내 시들해졌다.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아니야, 틀림없이 놀랄 거야! 이걸 한 번 생각해 봐. 호손은 평생 처음으로 경쟁을 하게 되었어. 그것도 그의 아내를 두고 하는 경쟁!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난봉꾼이 자기 아내를 달래기 위해 애쓰는 것을 구경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해 보라구.”

그렇게 되지 않을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도 않지만 내게 그럴 능력이 있다 해도 난 하고 싶지 않아.”

? 왜 해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왜냐면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지 않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내게 가까이 오는 것도 싫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차를 주문하기 위해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이야.”

멜라니는 장갑과 소지품을 챙겨 들고 알렉산드라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넌 지금 너무 놀라고 지쳐서 판단력이 흐려졌어. 모든 일은 내게 맡겨 둬.”

그녀가 방을 반쯤 나갔을 때 알렉산드라는 멜라니가 구체적인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서둘러 나가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멜라니?”

로디를 만나러.”

멜라니가 문간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로디를 통하면 네가 이제는 조르단이 알고 있는 순진한 촌닭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에게 가장 빨리 알릴 수 있을 거야. 로디도 분명히 그렇게 하고 싶어 할걸.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일이라면 신명 나서 앞장서는 사람이니까.”

멜라니, 가만히 있어봐!”

알렉산드라는 피곤하단 듯이 외쳤다.

그럼 나와 의논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

좋아.”

멜라니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방을 나갔다.

알렉산드라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계가 열 시를 알렸다. 아래층 메인 홀에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오는 소리와 함께 시계 소리에 놀라 깨어난 알렉산드라는 침실에서 나오는 불빛에 눈이 부셨다. 놀랍게도 그녀는 보통 저녁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에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래층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문 여닫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지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기억이 났다.

호크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한시바삐 그를 만나 그와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을 것이다.

호크는 이럴 줄 알고 미리 피한 것이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갔다. 아마 그 때문에 그는 물밀 듯이 몰려올 손님들을 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상대하라고 내버려두고 노부인의 집으로 피신했을 것이다.

그녀는 조르단은 틀림없이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 헛소문

조르단이 침대에서 편안하게 자고 있으리라는 알렉산드라의 생각은 틀렸다. 그는 침대에 있지도 않았으며 편안하지도 못했다.

노부인 저택의 바로크 양식 응접실에 아무렇게나 다리를 쭉 펴고 앉아 그는 귀향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세 명의 친구와 로디 카스테어즈를 만나고 있었다. 로디는 알렉산드라의 탈선행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카스테어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조르단은 약간 분하다거나 짜증스럽다거나 몹시 화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하얗게 질렸다. 자기 아내가 슬픔으로 정신이 나갔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동안 그녀는 런던을 누비며 놀아나고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라는 스캔들 속에 십여 차례 이상이나 남자들과 놀아났다. 그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동안 <알렉스>는 그레섬 그린 경마 대회에 출전했으며 메이베리 경가 모의 펜싱 시합을 했다. 그때 그녀는 몸에 꼭 붙는 남자용 펜싱 바지를 입어 펜싱으로 유명한 메이베리 경의 넋을 빼놓아 시합에서 이겼다고 한다. 그리고 박람회 구경을 가고 사우스비 교구 신부와 밀회를 즐겼다고 한다. 그 신부는 나이가 일흔은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카스테어즈의 말이 사실이라면 토니는 그녀와 결혼하게 해달라는 청혼을 육십여 번도 더 받았다. 그리고 거절당한 구혼자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놓고 싸우다가 나중에 그들 중 한 명인 마브리는 그녀를 납치하려 했었다. 그리고 세벌리라는 젊은 녀석은 <알렉스를 위한 오드>라는 시를 발표해 그녀를 칭송했으며 늙은 영감 딜벡은 새로 접목에 성공한 장미의 이름을 <영광스런 알렉스>라고 지었다.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기대앉아 조르단은 브랜디 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카스테어즈의 말을 들었다. 그는 짐짓 아내의 불장난을 재미있게 듣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

그의 친구 세 명은 그가 그런 반응을 보여 주길 기대하리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귀족들은 자기가 마음대로 행동하는 한 자기 아내나 남편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행동해도 괜찮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만약 누군가의 아내의 불장난이 허용치를 넘으려 하면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려주게 되어 있다. 조르단은 혹시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오늘밤 카스테어즈의 입을 더 열심히 막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만약 카스테어즈가 오늘밤 그의 친구들과 동시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이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르단에게 그는 짜증나는 가십만 옮기고 다니는 먼 친척일 뿐이었다. 그러나 방에 있는 다른 세 명은 그와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몇 번이나 카스테어즈에게 알렉산드라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고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자고 말하기 했지만 표정으로 보아 카스테어즈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조르단은 도대체 카스테어즈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급히 자기를 찾아왔을까 그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런던의 귀족은 모두 다 조르단이 여자를 그저 잠자리나 따스하게 해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예쁘장한 얼굴이나 풍만한 몸매에 이성을 잃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매혹적인 검은머리의 시골 처녀에게 마음을 뺏긴 걸 안다면, 그것도 그녀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하기 훨씬 이전에 그랬다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아마 놀랄 것이다.

조르단이 카스테어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속을 부글부글 태우고 있다는 걸 안다면 이 자리에 있는 남자 네 명 모두 다 기절초풍할 것이다. 그는 알렉산드라를 마음대로 놔둔 토니와 그녀를 통제하지 못한 할머니에게 화가 났다. 그녀가 호손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그녀를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미래는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그녀의 불장난이나 바람기가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조르단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그들이 그녀를 <알렉스>라고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모두들 그녀를 알렉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런던의 귀족 모두, 특히 남자들이 그녀와 절친한 관계에 있는 것 같았다.

조르단은 하인이 문간에서 서성대는 것을 보고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저어 손님들의 술잔에 술을 더 붓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카스테어즈가 숨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잠시 중단할 때를 기다렸다가 조르단은 거짓말을 했다.

카스테어즈, 실례해도 되겠나. 사업상 이 친구들과 긴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로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크, 돌아와서 정말 반갑네. 하지만 토니는 안됐어. 그도 위스턴이나 그레셤, 피츠, 모레스비 그리고 다른 수십 명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스에게 열중해 있었는데.....”

자네도 거기에 포함되나?”

조르단이 쌀쌀하게 물었다.

로디의 눈썹이 올라갔다.

물론이지.”

로디가 나가자 조르단의 다른 두 친구인 해싱턴과 페어팩스도 미안하다며 난처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해싱턴 경은 이틀 연속 열리는 여앙배 승마 대회 이야기를 꺼냈다. 전통적으로 런던의 귀족들은 이 대회에 직접 참가하거나 아니면 관람해 왔다.

호크, 이번 9월 여왕배 승마 대회에 그 검은 종마를 타고 출전할 작정인가?”

그럴까 하네.”

조르단은 카스테어즈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연중 가장 중요한 승마 대회에서 말을 타는 즐거움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사탄>을 타고 출전한다면 내 자네한테 돈을 걸지.”

자네는 출전하지 않나?”

조르단은 아무 의미 없이 물어 보았다.

당연히 출전하지. 하지만 자네가 그 검은 <사탄>을 타고 출전하면 내 자신이 아니라 자네에게 돈을 걸겠네. 지금까지 <사탄>만큼 빨리 달리는 말을 본 적이 없어.”

조르단이 어리둥절해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탄>은 이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세 살밖에 안 되는 성질 고약한 말이었다.

그 검은 말이 달리는 걸 자네가 봤나?”

그럼! 자네 부인이 그걸 타고......”

불쾌하단 듯이 조르단의 턱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해싱턴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 <사탄>을 아주 잘 다뤘고 또 절대 심하게 굴지 않았어, 호크.”

조르단의 반응을 보고 페어팩스가 끼어 들었다.

자네 부인은 확실히 기가 넘치는 것 같아, 호크.”

해싱턴 경은 조르단의 어깨를 치면서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페어팩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가 넘친다> 바로 그거야. 고삐를 조금만 당겨 주게. 그러면 양처럼 순해질 걸세.”

맞아, 양처럼 순해질 거야!”

해싱턴 경이 맞장구쳤다.

승마 전문가이며 상습 도박꾼인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오자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양처럼 순해진다?”

해싱턴 경이 친구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뇌었다.

호크가 고삐를 조금만 당기면?”

페어팩스가 싱긋 웃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먼저 그녀의 이빨에 물리고 말걸. 그녀의 기를 꺾으려면 아마 두 다리를 묶어 둬야 할걸세. 호크가 길들이려고 하면 아마 그녀가 저항할걸. 그녀는 보통 여자들보다 기가 세. 그리고 자존심도 더 강하구.”

해싱턴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자네는 여자들에 대한 호크의 특별한 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군. 몇 주 후면 그녀가 그의 소매에 자기 리본을 묶어주고 그를 응원하게 될 걸. 윌슨과 페어차일드는 벌써 거기에 내기를 걸었네. 화이트 클럽의 내기 장부에 호크가 그녀의 리본을 달게 된다는데 승산을 건 사람이 벌써 4 1 로 많다네.”

그렇지 않아. 그녀가 런던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해 봐. 조르단에게 얼마나 빠져 있었나. 그녀가 그 때문에 처음 몇 주 동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걸 벌써 잊어버렸나? 오늘 아침 호크가 교회로 걸어 들어온 이후 사람들은 모두 다 그렇게들 이야기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난 그녀가 절대 그때 일을 잊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 나는 호크의 아내와 친하게 지냈어. 그런데 그 여자는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야. 그 자존심 때문에 쉽게 호크의 품에 안기지 않을 거야. 내 말이 틀림없어.”

해싱턴은 재미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여왕배 승마 대회 때 그녀가 호크에게 리본을 묶어 준다는 데 천 파운드를 걸겠네.”

좋았어.”

페어팩스는 즉각 찬성했다. 두 사람은 도박이나 하면서 편히 쉴 곳을 찾아 남성 전용 클럽인 화이트 클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클럽 내기 장부에 기입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그것을 친구에 대한 예우에서 두 사람만이 하는 내기였다.

페어팩스와 해싱턴이 나가자 조르단은 테이블로 가 술잔을 채웠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선 조심스럽게 숨기고 있던 분노를 가장 절친한 친구인 존 캠던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조르단은 조소하며 말했다.

자네도 역시 알렉산드라의 행실을 내게 사적으로 조용히 이야기해 주고 싶어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캠던 경은 큰소리로 웃었다.

아니야. 좀 전에 카스테어즈가 자네 부인이 하이드 공원에서 승마를 했고 메이베리 경과 펜싱을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분명히 <멜라니>라는 이름을 들었을 걸세. 그리고 두 번 다 멜라니가 자네 부인을 응원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테구.”

조르단이 술을 한모금 삼켰다.

그래서?”

그 멜라니가 내 아내야,”

입으로 술잔을 가져가던 조르단의 손이 딱 멈췄다.

?”

난 결혼했어.”

그래? ?”

캠던 경이 싱긋 웃었다.

내 자신도 어쩔 수 없어서.”

그렇다면 좀 늦었지만 축하해야겠군.”

그는 조롱하듯이 말하며 술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좋은 집안 출신답게 곧 자신의 태도를 사과했다.

내가 무례했다면 용서하게, . 지금으로선 내게 결혼은 그리 축하할 만한 일이 못 돼서 그러네. 자네 아내 멜라니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전에 만난 적 있어?”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지!”

존은 웃으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자네가 런던을 떠난 직후에 데뷔를 했지. 다행히도 말이야. 아마 자네가 그녀를 봤더라면 그녀에게 혹했을 걸세. 그랬더라면 이제 자네가 돌아왔으니 내가 자네를 불러내 결투를 신청했을 걸세.”

자네의 명성도 내 명성보다 그리 나을 것 없을 텐데.”

자네와는 비교가 안 되지.”

존은 친구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농담을 했다.

내가 어떤 매력적인 여자에게 관심 있는 눈길을 보내면 그녀의 엄마가 당장 그녀에게 샤프롱을 한 명 더 붙였지.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하면 여자들의 어머니는 당장 공포와 희망에 휩싸였었지. 물론 내겐 공작의 작위가 없으니까. 어머니들이 걱정을 하기도 하고 희망을 가지기도 하는 건 그 때문이었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덕성 높은 순진한 여자를 유혹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걸로 기억해.”

조르단은 자리에 앉아 술잔을 노려보았다.

그랬었지. 그러나 내 아내와 자네 아내가 친구가 될 정도로 공통점이 많다면 아마 두 사람은 비슷할 걸로 짐작되네. 그렇다면 자넨 평생 고문 속에 살아야 할 걸세.”

왜 그렇지?”

조르단이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왜냐하면 아내가 매일 머릿속에 무얼 집어넣는지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걸 알고 나면 아마 놀라서 기절초풍할 걸세. 오늘 오후에 멜라니가 아기를 가졌다고 하더군. 난 벌써부터 그녀가 아기를 낳자마자 아기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돼.”

건망증이 심해?”

조르단은 친한 친구의 아내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존은 눈썹을 치켜 뜨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거야. 그렇지 않다면 오늘 내가 스코틀랜드에서 돌아 왔을 때 아직 만나보진 못했지만 어떻게 내 가장 절친한 친구의 아내와 자기가 몇 가지 복잡한 일을 꾸민다는 말을 하는 걸 잊어버릴 수 있겠나?”

조르단의 기분을 밝게 해주려는 자신의 노력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존은 잠시 주저하다가 심각하게 말했다.

자네 아내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

몇 가지 생각이 있는데 모두 다 괜찮은 생각 같아. 그녀의 목을 부러뜨리든지 경비를 따라 붙이든지, 아니면 내일 당장 데번으로 보내 사람들과 격리시키든지.”

, 호크. 그렇게 해선 안돼. 오늘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그랬다간 사람들이.... ”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아.”

그러나 그것이 진심이 아님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조르단은 자기가 아내도 하나 통제할 줄 모르는 바보라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걸 생각하니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어쩜 그녀는 정말 기가 센지 몰라. 멜라니가 그녀를 잘 알고 있고 또 그녀를 아주 좋아해.”

캠던 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일 저녁 괜찮으면 화이트 클럽으로 나와. 내가 아버지가 되는 축하주를 살테니까.”

나가도록 하지.”

조르단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캠던이 나간 뒤 조르단은 멍하니 벽난로를 바라보며 알렉산드라가 도대체 몇 명의 남자를 침대로 데리고 갔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 오후 응접실에 둘이만 남게 되었을 때 그는 그녀의 눈빛이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는 걸 보았다. 예전에 그를 쳐다보던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은 솔직하고 믿음이 깃든 눈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두 눈은 차가운 적개심으로 흐려 있었다.

오늘 알렉산드라가 자기를 왜 그렇게 적개심 어린 눈으로 보았을까 이유를 생각하노라니 온몸으로 분노가 퍼졌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게 유감이었을까? 순진하고 귀엽기만 하던 소녀가 이제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화가 났다! 그 매혹적인 소녀가 이제 차갑고 계산적이고 아름다운..... 악녀로 변했다!

그는 잠시 이혼을 생각해 보았지만 곧 지워 버렸다. 추문이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이혼을 하려면 몇 년이 걸린다. 게다가 그는 후계자를 원했다. 타운센드 가의 남자들은 단명의 저주를 받은 것 같았다. 알렉산드라가 비록 품행이 단정치 못했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낳은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가 아닌 자기의 아이란 걸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격리된 상태에서.

의자에 기대앉아 조르단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화를 삭였다. 마침내 화를 가라앉히고 보니, 자기가 소문만 듣고 알렉산드라를 비난하고 그녀의 앞날을 결정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소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 정도는 주어야 마땅한 것이다.

 

오늘밤 카스테어즈에게 들은 이야기를 내일 그녀를 만나 물어 보고 부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겠다. 어리석게 거짓말 할 작정이 아니라면 그녀는 부인할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 만약 그녀가 정말 교활한 기회주의자이거나 방탕한 바람둥이라면 당연히 가혹한 방법으로 그녀를 길들여야 할 것이다.

그녀는 나의 의지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그렇게 만들겠다. 조르단은 그 어느 쪽이든 그녀를 착하고 충실한 아내로 처신하게 만들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21. 금지된 입술

알렉산드라는 침실 밖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분주한 발자국 소리와 각자 임무를 수행하면서 숨 죽여 이야기하는 하인들의 소리에 잠을 깼다. 그녀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몸을 굴려 시계를 보았다. 아직 아홉 시도 안됐다. 시즌중이면 주인이 새벽녘에야 외출에서 돌아와 잠들었다가 열 한 시쯤 일어난다는 관행을 감안할 때 하인들이 돌아다니긴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아마 곧 들이닥칠 주인의 귀가를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알렉산드라는 초인종을 눌러 하녀를 부르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 밖의 분주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침이면 늘 하는 일상적인 일을 되풀이했다.

짧은 소매가 달린 예쁘장한 라벤더 색 아침 드레스를 입고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는 주인 침실을 향해 가던 하인 네 명과 하마터면 부딪힐 뻔하며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런던 최고급 양복점과 제화점의 이름이 들어간 상자를 한아름씩 안고 있었다.

아래층 로비에서 문고리를 흔드는 소리와 뒤이어 현관문이 열리며 그윽하고 교양 있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아침은 어제 저녁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호크를 만나겠다는 희망으로 틀림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렉산드라와 노부인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의 수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수는 아니었으며 더구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왔던 건 아니었다.

알렉산드라는 호기심에 발코니로 나가 아래층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팬로즈가 아닌 히긴스가 문을 열며 알렉산드라는 작위만 알고 있는 신사 세 명을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방금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신사 두 명이 적당한 살롱으로 안내해 줄 때까지 점잖게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 주변에는 깔끔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하인들이 흥분을 자제하는 얼굴로 분주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히긴스가 마지막 손님을 서재로 통하는 홀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알렉산드라는 깨끗한 린네르를 한아름 안고 바쁘게 지나가는 하녀 한 명을 불러 세웠다.

루시?”

하녀가 곧 인사를 올렸다.

, 부인?”

왜 하인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돌아다니지?”

하녀는 그녀를 쳐다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호손 공작님이 드디어 집으로 오셨어요!”

알렉산드라는 난간을 붙들며 놀란 눈으로 현관을 보았다.

그분이 벌써 오셨다고?”

, 마님.”

알렉산드라는 놀란 눈으로 아래층 마루를 보았다. 때마침 조르단이 살롱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정색 양복바지와 자연스럽게 목 단추를 연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와 같이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섭정 왕자 조지였다. 그는 조르단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왕족답게 복수형으로 위엄 있게 말하고 있었다.

호손, 자네가 없는 동안 우리는 어두운 나날을 보냈네. 우리는 앞으로 자네가 좀 더 몸조심하기를 바라네. 자제 집안은 너무 비극적인 사고를 많이 겪었어. 앞으로는 조심하길 바라네. 또한 우리는 자네가 직위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도록 후손을 생산하는 일에도 신경써 주길 바라네.”

조르단은 왕자의 말에 그저 싱긋 웃기만 하다가 뭐라고 들리지 않는 말을 했다. 그러자 왕자가 고개를 뒤로 제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와자는 조르단의 어깨를 치면서 예고 없이 이렇게 아침 일찍 들러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히긴스가 로비 문을 열러 주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알렉산드라는 영국의 섭정 왕자를 바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서 볼 수 있고 또 조르단이 그 섭정자를 친한 친구 대하듯이 대하는 걸 보고 잠시 충격을 받았다.

로비에 집사만 남고 모두 사라지자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침착하려고 애썼다. 섭정 왕자와의 외경스러운 만남은 고이 접어 두고 이제부터 부딪힐 조르단과의 대면에 신경 써야 한다.

안녕, 히긴스.”

알렉산드라는 로비로 들어서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팬로즈와 필버트는 어디로 갔죠?”

그녀는 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공작님께서 오늘 아침에 도착하셔서 그들을 주방으로 보냈습니다. 공작님은 그들이.... .... 이곳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고..... .... 그들을, 그러니까.....”

그분이 그들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단 말이죠? 그래서 주방으로 추방했어요?”

.”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 그분께 말씀드렸어요? 팬로즈와 필버트는 내 친..... ”

그녀는 그들을 친구라고 묘사하려다가 자제했다..

내 하인이라구요?”

, 말씀드렸죠.”

알렉산드라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분통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그 나이 많은 하인 두 명이 섭정 왕자를 모신다거나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방문객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리란 건 확실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도 호크와 싸울 게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집안일에 일조할 만한 곳이 아니라 주방으로 추방한 것은 모욕적인 일이며 아주 불공평하고 몰인정한 처사다. 알렉산드라는 호크가 일부러 자기에게 복수하느라고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죄송하지만 공작님에게 제가 오늘 좀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세요.”

알렉산드라는 히긴스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로요.”

공작님께서도 부인을 오후 한 시 삼십 분에 서재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렉산드라는 홀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그를 만나려면 아직 세 시간 십오 분을 기다려야 했다. 세 시간 십 오 분 후면 그에게 자기는 잘못 결혼한 것이며 이제 그 잘못을 시정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그 동안 노부인과 토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렉스.”

알렉산드라가 할머니의 방문을 노크하려는 순간 홀 저편에서 토니가 불렀다.

오늘 아침은 기분이 어때요?”

토니는 그녀 쪽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오빠를 대하듯 애정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어제 오후부터 밤새도록 잤어요. 당신은요?”

난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소. 아직 신문 못 봤소?”

그는 그녀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저으며 신문을 보았다. 그것은 조르단의 납치와 탈출 그리고 몇 번이나 자기 목숨을 걸고 동료 포로인 미국인을 구한 용감한 업적에 관한 기사 일색이었다.

노부인의 침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두 명의 하인이 어깨에 무거운 트렁크를 지고 나왔다. 할머니는 방 한가운데 서서 트렁크에 짐을 챙기고 있는 세 명의 하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잘잤니, 얘들아.”

노부인은 토니와 알렉산드라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왜 짐을 싸세요?”

알렉산드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토니와 난 내 집으로 갈 거야.”

그녀는 알렉산드라가 그것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는 듯이 말했다.

어제, 네 남편이 돌아왔으니 내가 샤프롱으로 따라다닐 필요는 없잖아.”

네 남편이라는 말에 알렉산드라의 위장이 뒤틀리며 속에서 비명이 나왔다.

노부인은 알렉산드라가 갑자기 긴장하는 걸 재빨리 알아차렸다.

알렉스, 어린 나이에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았구나, 특히 어제 있었던 일까지 해서. 이 집은 지금 소문에 휩싸여 있어. 그러나 사람들의 호기심은 곧 사라질 거야. 하루 이틀 후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살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보통 때처럼 활동하고 움직이는 거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안토니가 죽은 줄로 알았던 사촌형에 대한 의무감에서 너와 결혼하려 했다가 이제 그 사촌이 돌아와서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알렉산드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렇게 될 거야.”

노부인은 약간 으시대며 말했다.

 

어제 내가 쉬고 있는 동안 나를 찾아온 친구들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지. 더구나 안토니는 작년에 샐리 팬스워드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었기 때문에 안토니가 의무감에서 너와 결혼하려 했다는 말을 상당히 신빙성 있게 들리게 해주지. 내 친구들이 곧 내 말을 퍼뜨릴 거고, 소문이란 게 늘 그랬듯이 아마 삽시간에 그 말이 퍼져 나갈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실 수 있어요?”

노부인이 눈썹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내가 부탁한 대로 소문을 옮기지 않으면 내 친구들은 많은 것을 잃게 되기 때문이지. 난 친구들 사이에 상당히 영향력이 있거든.”

토니가 웃었다.

할머님은 양심도 없으신가 봐요?”

맞았어. 알렉산드라, 왜 아직도 미심쩍은 얼굴을 하는 거야?”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할머님의 계획은 우리 모두가 당장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가정하신 것 같은데요, 할머님의 손자께서.....”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을 그의 이름이나 작위 , 또 남편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제 제게 이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했어요. 저로서는 전혀 따르고 싶지 않은 지시지만요.”

노부인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르단이 잘못 생각한 거야. 그렇게 했다간 사람들이 모두 네가 토니와 결혼하려 한 걸 부끄러워해서 그런다고 생각할 거야. 더구나 그건 너와 네 남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도 의미하고, 아마 조르단이 그런 지시를 내렸을 땐 문제를 심각히 고려해 보지 않고 그랬을 게다. 우리는 모두 하루 이틀 후에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해. 그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네가 널 대신해 그에게 얘기하마.”

아닙니다, 할머님. 그러지 마세요. 저도 이젠 성인이에요. 저 대신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 사람이 제게 명령을 내리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그 사람은 그럴 권리가 없어요.”

노부인은 그녀의 당돌한 말에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은 아내의 행동을 통제할 법적 권리가 있어. 그리고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앞으로 네가 네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몇 가지 충고를 좀 해도 괜찮겠니?”

노부인은 번번이 조르단을 알렉산드라의 남편이라고 불렀다. 알렉스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정중하게 말했다.

, 말씀하세요.”

좋아. 어제 네가 당장 그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며 화를 내는 건 이해할 만했어. 하지만 너는 그를 도발했고 그건 아주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어. 넌 나만큼 그를 몰라. 조르단은 화가 나면 가혹해. 그리고 어제 네가 안토니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데 대해 벌써 상당히 화가 나 있었어.”

알렉산드라는 노부인이 조르단의 편을 드는 데 화가 났고 상처를 받았다.

그는 어제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무례했어요. 그리고 만약 제 행동이 할머님을 무시하는 거라면 죄송해요. 하지만 전 그 사람과의 결혼이 행복한 척할 수는 없어요. 할머님은 아마 그 사람이 저나 우리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벌써 잊으신 것 같군요. 그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했으며, 그의 성격은....... 결함투성이예요!”

뜻밖에 노부인은 빙긋 웃었다.

알렉스, 난 너를 미워할 수 없구나. 넌 내게 손녀딸과 마찬가지야.”

알렉산드라의 어깨를 안으며 노부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여자들에 대한 조르단의 태도를 결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네가 그의 버릇을 고쳐 놔. 하지만 알렉스, 이 말을 기억해라. 개심한 난봉꾼이 최고의 남편이 된다는 말을.”

난봉꾼을 개심시킬 수 있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전 그 사람과 계속 결혼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렇겠지. 지금으로서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미 그와 결혼한 이상 어쩔 수 없어. 내 솔직히 고백하마. 나는 네가 그를 네 발꿈치에 무릎 꿇게 하는걸 보고 싶어.”

알렉산드라는 노부인이 토니나 멜라니와 똑같은 말을 하는데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혹시...... ”

넌 반드시 할 수 있어. 알렉산드라, 너는 그렇게 하고 말거야. 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넌 자존심도 있고 패기도 있고 또 용기도 있어.”

알렉산드라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노부인이 먼저 토니에게 말했다.

안토니, 틀림없이 호손이 네가 왜 알렉산드라와 결혼하려고 했는지 설명을 요구할 게다. 그럴 때 네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우리 모두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니?”

이미 늦으셨어요, 할머님. 오늘 아침 여덟 시에 저를 서재에 불러 벌써 물어 봤어요.”

노부인이 처음으로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냥 <손쉬운> 방법이어서 그랬다고 말하지 그랬냐. 그 설명이 가장 적절할 텐데, 아니면 그냥 변덕이 나서 그랬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런던 제일의 남편감들이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를 놓고 싸우고 또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우는 등 워낙 귀찮게 굴어서 그녀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노부인의 손이 목으로 올라갔다.

설마!”

정말입니다.”

왜 그랬어?”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어쨌든 며칠 내로 알게 될 테니까요.”

나중에 말했으면 더 좋았을걸!”

하지만 그렇게 만족스럽진 못했을 겁니다.”

안토니가 농담을 했다. 알렉산드라는 그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다정스러울 수 없었다.

왜냐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의 반응을 볼 수 없었을 테니까요.”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알렉산드라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호크다운 행동이었지. 그는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요. 그는 바람기보다는 침착한 것으로 더 소문났으니까.”

그만하면 됐다, 안토니.”

노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인종을 눌러 하녀를 불렀다.

 

알렉산드라와 토니도 일어났다.

오늘 아침에 펜싱 시합할 수 있겠소?”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르단과 만나는 시간까지 펜싱이야말로 시간 보내기에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열두 시 삼십 분이 조금 못 된 시각에 히긴스가 조르단의 서재에 나타나 보우 가에 있는 신사가 보낸 쪽지를 전해 주었다. 그 쪽지에는 보낸 사람의 몸이 불편해서 비밀 호의를 내일로 연기하고 싶다고 씌어 있었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와의 면담을 앞당길 작정으로 히긴스를 쳐다보았다.

안주인은 어디에 있지, 히긴스?”

무도회장에서 안토니 경과 펜싱을 하고 있습니다.”

조르단은 삼층에 있는 커다란 무도회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루에서 우아하고 능숙한 솜씨로 검을 겨누는 두 명의 투사는 그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조르단은 벽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두 사람이 경기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의 시선은 날씬한 히프와 긴 다리의 우아한 선이 드러나는 남성용 펜싱복 차림의 알렉산드라에게 고정되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자기가 생각했듯이 그냥 펜싱에 재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유연한

동작과 날쌘 솜씨를 지닌 훌륭한 검술가였다.

그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이제 그만 하자고 고함질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손을 뒤로 해 얼굴 가리개를 벗고 웃으면서 머리를 한 번 세게 흔들었다. 검은 긴 머리가 폭포처럼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토니, 동작이 점점 둔해지고 있어요.”

알렉산드라는 토니를 놀리며 웃는 얼굴로 가슴 가리개를 벗어 벽에 걸었다. 안토니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자 그녀가 어깨 너머로 안토니를 보고 미소 지었다. 갑자기 조르단의 눈에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숲 속의 빈터에서 매혹적인 곱슬머리 소녀의 모습. 그리고 꽃들 사이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품에는 강아지를 안고 사랑을 듬뿍 담은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소녀.

조르단은 아련한 향수와 함께 숲 속의 그 소녀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는 상실감을 느꼈다.

마침내 토니가 그를 발견했다.

호크, 형도 내가 나이가 먹어 동작이 느려졌다고 생각해?”

저편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지 않길 바란다. 나이야 내가 너보다 더 많으니까.”

조르단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알렉산드라를 향해 말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빨리 나서, 당신과의 면담시간을 좀 앞당겨 지금 만나고 싶군.”

어제 보여 주었던 차가운 적개심에 비해 오늘 그이 말투는 한결 정중하고 사무적이었다. 안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워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입고 있는 바지를 보았다. 그녀는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그를 만나는 것은 불리하리라고 생각했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그와 협상할 중대한 문제를 놔두고 별 것 아닌 문제로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알렉산드라는 쌀쌀하면서도 정중하게 고개를 까닥여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 그녀는 그를 따라 아래층 서재로 내려가면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으로 한 번 더 연습해 보았다.

조르단은 이중문을 닫고 커다란 오크 나무 책상 앞에 반원형으로 놓인 의자 중 하나에 알렉산드라가 앉기를 기다렸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책상 가장자리에 히프를 걸치고 앉아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앞뒤로 흔들리는 그의 다리는 너무도 가까워 그녀와 닿을 정도였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침묵을 깨고 마침내 조르단이 조용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번의 <시작>을 했어. 그 처음은 약 1년 반전에 우리 할머님의 댁에서였고, 또 하나는 어제 바로 이 집에서였어. 상황 때문에 그 두 번의 시작은 모두 좋지 않았지만, 오늘이 우리 관계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시작이야. 앞으로 몇 분 후에 나는 우리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할 거야. 그렇게 하기 위해선 먼저 이것에 대한 당신의 설명을 들어보고 싶어.”

그는 손을 뒤로 해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조용히 그녀에게 내밀었다.

알렉산드라는 호기심에 종이를 받아 들여다보다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조르단은 종이 위에 십여 가지의 <의문스러운 행동>을 적어 놓았다. 그 중에는 여러 사람과의 펜싱 시합을 비롯해 하이드 공원에서의 승마, 윌튼으로 그녀를 유인하려고 했던 마블리 경의 계획 그리고 결코 죄라고 할 수 없는 몇 가지 행동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목록화 되고 보니 그 별 것 아닌 행동들이 마치 거창한 기소문처럼 보였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의 화난 표정을 무시하고 말했다.

우리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결정하기 전에 당신에게 이 목록에 있는 행동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어.”

알렉산드라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별 일을 다 상상해 봤지만 그가 자기의 행실을 이렇게 비난하고 나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행실과 비교하면 그녀의 행동은 갓난아기의 그것처럼 깨끗하기 짝이 없었다.

혐오스럽고, 위선적이고, 거만한 사람 같으니!”

그녀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으로 분노를 자제하면서 턱을 높이 쳐들고 그의 수수께끼 같은 눈을 쏘아보며 목록에 적힌 과장된 사실을 과감히 시인했다.

모두 다 사실이예요. 이 목록에 있는 의미 없고, 무해하고, 무독한 모든 행위를 다 저질렀어요.”

조르단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유혹적인 미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성난 보석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그녀의 가슴은 분을 참느라 오르락내리락했다. 조르단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그녀의 용기와 솔직함에 감동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 저를 비난할 목록을 만들고 제 미래에 대한 최후통첩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녀는 화를 벌컥 내며 미처 그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와!”

조르단이 명령했다.

돌아올 게요. 십 분만 기다려 주세요.”

조르단은 그녀가 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꽝 닫고 나간 문을 쳐다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렉산드라가 목록을 보고 그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정말 자기가 없는 동안 그녀가 그런 일만 하고 다녔을까 반응을 보고 싶었다는 것 이외에는 사실 그 목록을 보여 주고 뭘 얻으려고 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또 알 필요가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직접 물어 볼 수 없는 한 가지 의문, 즉 그가 없는 동안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책상에 놓인 서류 더미에서 조르단은 운송 계약서를 집어 들고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멍하니 읽기 시작했다.

목록 작성은 정말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 결론은 몇 분 후 알렉산드라가 잠깐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라는 대답도 듣기 전에 서재로 들어와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내팽개치는 순간 확실해졌다.

조르단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책상 위의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읽고 있던 계약서를 옆으로 밀어 놓고 그는 턱으로 조금 전에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를 가리키고 그녀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오직 열여섯 개의 단어만 씌어 있었다. 여덟 명의 이름이었다. 모두 과거 그의 정부들의 이름이었다. 목록을 접으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심쩍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그는 약이 오를 정도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한군데가 잘못됐어. 그리고 몇 가지 빠진 것도 있구.”

알렉산드라는 그의 눈가에 웃음기가 어리는 것을 보고 발끈해서 말했다.

잘못됐다구요?”

마리아 윈드롭의 마리안은 아이가 아니라 와이로 쓰지.

충고해 주셔서 고맙군요. 당신이 그녀에게 주었다는 그 목걸이와 어울릴 수 있도록 다음에 제가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팔지라도 선물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반드시 카드에 이름을 정확하게 쓰도록 하죠.”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완연했다. 그녀는 발끈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당신의 죄를 인정하셨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 제가 말씀드리죠.”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알렉산드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전 혼인 무효 판결을 받겠어요.”

조르단의 얼굴에 아무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아둔한 학생과 말도 안 되는 수사학 문제를 토론하는 인내심 강한 교사처럼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혼인 무효? 어떻게 그런 판결을 얻어 낼 작정인지 설명할 수 있어?”

그의 얄밉도록 침착한 태도에 알렉산드라는 그의 정강이라고 한 대 걷어차고 싶었다.

제가 직접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무슨 법적 근거로 그러는지는 저를 대신해 이 문제를 다루게 될 사람을 통해 알아보시면 되겠죠.”

 

그런 사람들을 변호사라고 부르지. 당신이 만나 볼 수 있도록 변호사 몇 명을 추천해 줄까? 내가 고용하고 있는 변호사들이 있으니까.”

자신의 지성을 모욕하는 그이 말에 그녀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 년 전에 제가 당신에게 그렇게 바보처럼 보였나요?”

그녀는 목이 메어 큰소리로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당신 변호사에게 제 일을 봐달라고 부탁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였어요?”

한꺼번에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조르단의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첫째, 그녀는 상당한 용기와 대범함을 보여 주었지만 이제 눈물을 흘리려 한다. 둘째, 용감하고 순진하던 소녀가 이제는 상당한 미모와 패기를 갖춘 여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반항기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기질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이 년 전에 그랬듯이 지금 그는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보다 더욱 간절히, 훨씬 간절히.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난 그저 당신이 알지도 못하고 또 틀림없이 실력도 없을 변호사를 찾아가 곤란을 당하거나 또 전적으로 소용없는 사람을 겪게 될까 봐 도와주려던 것 뿐이야.”

소용없지 않을 거예요!”

소용없을 거야. 결혼은 한 거니까. 당신은 잊었어?”

옷을 다 벗고 누워 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하던 그날 밤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알렉산드라는 더욱 약이 올랐다.

아직 노망나지 않았어요.”

조르단의 눈가에 웃음기가 비치는 것을 보고 그녀는 얄밉도록 침착한 그를 흔들어 놓을 작정으로 자기가 어떻게 혼인 무효 판결을 받으려는지 설명했다.

우리의 결혼은 제가 제 자유 의지로 당신과 결혼을 선택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무효예요!”

호크는 놀라기는커녕 점점 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변호사에게 했다간 변호사가 배를 잡고 웃겠군. 신부가 원하지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결혼이 무효가 될 수 있다면 귀족들 대부분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셈이겠군.”

전 원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에요. 전 결혼하도록 강요당하고 유인 받고 또 유혹당했다구요!”

그렇다면 변호사를 구해서 그렇게 말해. 하지만 그 사람이 기절할지 모르니까 방향염이나 준비해 가라구.”

알렉산드라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십 오 분 동안 그녀는 가슴에 품고 있던 원망과 분노를 그에게 다 퍼부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만족할 만한 반응은 하나도 얻어 내지 못했다. 갑자기 희망과 증오를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무하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가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 느낌도 없는 낯선 사람.

결혼 무효 판결을 받을 수 없다면 이혼을 하겠어요.”

조르단은 서로에 대해 <가족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토니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턱이 굳어졌다.

 

내 동의가 없으면 이혼할 수 없어. 그러니 토니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라구.”

토니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자 조르단은 오히려 약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아내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토니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한결 기분이 좋아져 화를 푼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지나쳤다면 용서해. 하지만 난 당신이 결혼 무효를 원한다는 말에 놀랐어.”

이 세상에 당신에게 저항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신 것도 당연하시겠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결혼 무효를 원한다는 거야? 그냥 내게 저항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전 결혼 무효 판결을 원해요.”

알렉산드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나를 싫어할 만큼 나를 잘 알지 못해.”

잘 알고 말고요! 잘 아니까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 사랑.”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 말에 그녀는 분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말은 악명 높은 바람둥이나 하는 말이다.

나를 함부로 <내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에게서 자유로워지겠어요. 그리고 저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어요. .... 전 모샴으로 가서 거기서 조그만 집을 한 채 사겠어요.”

그러면 그 집을 살 돈이 있어? 당신은 돈이 없잖아.”

하지만..... 우리가 결혼했을 때 저를 위해 꽤 많은 돈을 보냈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내가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는 한 당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지.”

모든 걸 당신 편하도록 처리하시는군요.“

알렉산드라는 경멸조로 말했다.

조르단은 거의 벙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처음부터 그녀는 그를 웃게 만드는지, 또 어째서 그녀의 기를 꺾어놓고 그녀를 소유하며 꼼짝못하게 만들지 않는지 이상해하며 그는 그녀의 폭퐁같은 파란 눈과 붉게 충혈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많이 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여자보다도 그에게 어울렸다.

합법성 이야기를 하고 보니 나도 모르게 이 년 가까이 요구하지 않았던 남편으로서의 합법적인 몇 가지 권리가 생각나는군.”

그는 그녀를 꽉 잡아 허벅지 사이에 끌어당겼다.

점잖지 못하게.”

알렉스는 겁에 질려 정신없이 고함질렀다.

전 아직 법적으로 당신 사촌과 약혼한 사이예요.”

그가 껄껄 웃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얘기군.”

제게 키스하지 마세요!”

알렉산드라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떼밀려 뒤로 물러서서 성난 얼굴로 경고했다.

유감이군.”

그는 부드럽게 말하면서 그녀를 가슴 쪽으로 바짝 당기며 그녀의 양손을 가슴 사이에 가두고 그녀의 등 뒤로 팔을 돌렸다.

난 내가 아직 당신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볼 작정이었는데.”

시간 낭비 마세요!”

그의 키스가 그녀의 심장과 몸을 뜨겁게 만들어 놓았을 때 그에게 빠져 있다고 얼마나 노골적으로 말했던가를 생각하니 너무 수치스러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 동안 알렉산드라가 들은 소문으로는 조르단 타운센드의 키스는 영국 여자 절반을 뜨겁게 달구어 놓을 수 있다고 했다.

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였어요. 그러나 이제 저도 성숙한 성인이예요. 그리고 당신만큼 솜씨 좋은 다른 남자들의 키스도 받았다구요! 아니 당신보다 솜씨가 훨씬 좋았어요!”

조르단은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강제로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몇 명이나 됐지?”

그의 턱이 긴장으로 떨렸다.

수십 명! 아니 수백 명!”

그렇다면 이제 나를 뜨겁게 만드는 법도 배웠겠군.”

알렉산드라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조르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는 벌을 주듯이 거칠게 키스했다. 그것은 토니의 부드러운 키스나, 가끔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해도 좋을지 알아보려는 몇몇 남자들에게 도둑맞듯이 당한 키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의 키스는 거칠긴 했지만 그녀에게 키스로 답하라고 설득하고 조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금방이라도 부드럽고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말없는 약속을 이해했으며 그의 입술이 자기의 입술을 탐닉하며 같이 키스할 것을 종용하는 동안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몸을 떨었다.

뒤에서 놀라 헐떡이는 소리를 듣고 조르단은 알렉산드라를 잡은 손에 힘을 늦추었다. 알렉산드라가 뒤돌아보려 하자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옆에 세웠다. 히긴스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캠던 경을 포함해 신사 세 명을 서재로 안내하던 참이었다.

히긴스를 따라오던 신사 세 명도 모두 놀라 멈춰섰다.

...... 죄송합니다!”

알렉산드라가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히긴스는 침착성을 잃고 안절부절못했다.

공작님께서 백작님이 도착하시면....... ”

십 오 분내로 자네들을 만나겠네.”

조르단은 세 명의 친구에게 말했다.

서재를 나가기 전 남자들의 얼굴에 스치던 웃음기를 놓치지 않았던 알렉산드라는 수치심에서 화가 났다.

우리가 앞으로 십오 분 동안 키스하려고 그러는줄 알겠군요! 그 정도면 만족하셨기를 바라요. 당신은......."

만족했다구?”

그는 웃으며 한때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순진하게 자기를 찬미하듯 바라보던 소녀가 육감적이고 고혹적인 여자로 변신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 소녀의 곱슬머리는 사라지고 없다. 그녀의 눈에 담겨 있던 찬미도 사라지고 없다. 그가 결혼했던 순진한 말괄량이는 가고 없다. 그 대신 성품을 알 수 없는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다. 그는 그녀를 길들이고 예전에 그녀가 그랬듯이 자기에게 반응하게 만들고 싶었다.

만족했냐구? 겨우 키스를 허락한 정도를 가지로?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흘 전에 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했어요. 그런데 좀 전에 그 사람들이 당신이 내게 키스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냐구요?”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보일까?”

조르단은 미소 지으며 아이러니컬하게 말했다.

당신의 결혼을 중지시키려고 내가 교회로 뛰어 들어가는 그 재미있는 장면까지 이미 목격한 사람들이.”

그녀는 처음으로 그 장면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또 그가 얼마나 난처했을까 생각이 났다. 그러자 슬그머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계속 웃어 보시지.”

그녀가 웃음을 참으려는 것을 알고 그가 말했다.

재미있기도 하겠군.”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말했다.

하지만 제단에서 얼굴을 돌려 내가 거기 서 있는 모습을 쳐다보던 당신 얼굴도 볼 만하던데, 마치 유령을 본 듯한 얼굴이더군.”

아주 잠깐 동안 그녀는 무한히 소중한 사람을 보듯이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성난 신처럼 보이더군요.”

그녀는 갑자기 그가 발하는 자석 같은 매력에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스꽝스러웠겠지.”

잠시 미운 마음이 가시면서 알렉산드라는 자신을 조소할 만한 여유를 가진 조르단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가 다시 자기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던 가슴 아릴 만큼 잘생긴 그때 그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와 장난치며 숲 속 빈터에서 모의 시합을 하던 그 사람. 시간이 지나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그의 최면을 거는 듯한 회색 눈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멍한 기분에서 깨어나며 마침내 그가 정말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돌아왔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도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그가 계속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며 그의 단단한 가슴 쪽으로 그녀를 끌어안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안돼요! ....... ”

그의 굶주린 듯한 야성적인 키스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알렉산드라의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와 죽었다고 믿었던 남편의 건강한 팔에 다시 안겨 있다는 반가움에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조르단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받쳐들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애무했다. 그의 또 다른 한손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안고 있었다.

그의 따스한 입술과 점점 밀착해 오는 단단한 몸, 가슴 아리게도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친숙했다. 그녀는 꿈속에서 수천 번도 더 그것을 그리워했었다. 불장난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가 키스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꼭 한 번 금지된 그의 입술과 그의 손과 그의 몸을 허락하자. 그러나 그의 애무에 반응을 보이지는 말자.

조르단은 그녀의 입에서 입술을 떼어 뺨에 따스한 키스를 했다.

키스해 줘.”

그의 숨소리에 그녀의 신경 마디마디가 짜릿해졌다.

키스해 줘.”

그는 그녀의 뺨과 목과 귀에 이르는 민감한 곡선에 계속 키스하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고개를 들어 자기의 눈을 보게 한 뒤 놀리듯이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어?”

알렉스는 지난 십 오 개월 동안 자기 입술에 키스한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그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뇨.”

그녀가 떨며 말했다.

그가 다시 긴 키스를 시작했다.

키스해 줘. 공주.”

그는 그녀의 눈과 뺨과 귀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큼 아름다운지 알고 싶어.”

그 역시 몇 번 안 되는 키스를 추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알렉산드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말없이 절망의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맞이하며 손으로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조르단은 그녀에게 강렬하게 키스해 왔다. 그이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키스에 항복해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순간 그의 혀가 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욕망과 혼돈과 갈망의 폭풍 속에서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손이 그녀의 허리 아래쪽을 잡아 더욱 가까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자기도 모르게 녹아내리는 몸을 그의 딱딱한 몸에 밀착시켰다. 그녀가 몸을 밀착시키자 조르단은 몸서리를 치며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받쳐들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민감한 젖꼭지를 만졌다. 그 동안에 그의 혀는 더욱 강렬하게 그리고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알렉산드라는 금지된 갈망으로 거의 실신할 정도였다. 끝없는 키스와 부드럽게 등과 가슴을 애무해 주는 따스한 그의 손길과 더욱 밀착해 오는 그의 다리와 허벅지에 알렉산드라는 마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열정으로 그의 키스에 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의 수줍음은 간데 없고 그에게 더욱 세게 매달리고 싶다는 욕망과- 그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라고 믿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조르단은 자기 품에 안긴 여자가 예전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키스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굶주린 그의 육체에 치명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을 찾자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으며 그녀의 혀를 입안 깊숙이 빨아 당겼다. 카펫 위에 그녀를 눕히고 거기 그 자리에서 그녀를 가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조르단은 간신히 그녀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며 길게 한숨을 내뱉았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확실히 알렉산드라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키스를 상당히 많이 익힌 것 같았다.

욕망의 안개 속에서 천천히 빠져 나오면서 알렉산드라는 최면을 거는 듯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안개 낀 듯한 열정의 검은색에서 서서히 평상시와 똑같은 수수께끼 같은 은회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현실감을 되찾아 갔다. 그녀의 손은 아직 그의 목을 안고 있었다. 손가락 밑으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아직 뜨거웠다. <나를 불태워 줘> 그는 그렇게 유혹하고 있었다.

자기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자 그녀는 자랑스러움과 만족감에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조르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만족해하는 듯한 미소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푸른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턱이 굳어지면서 그는 팔을 내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칭찬할 만하군. 내가 없는 동안 많이 배웠군.”

알렉산드라는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이 다시 발동했다는 걸 느꼈다.

이년 전 그는 그녀를 순진하고 불쌍한 골치덩어리로 생각했었다. 그녀는 짐짓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이년 전에 당신은 제가 너무 순진하다고 불평하셨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그렇지 않다고 불평하시는군요. 어떻게 하면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조르단은 그녀를 순진하게 생각했다는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면 기쁘게 만들 수 있는지 오늘 밤 화이트 클럽에서 돌아온 뒤 침대 속에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그 동안 몇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게 있어. 첫째 혼인 무효 선언은 있을 수 없어. 이혼도 마찬가지이고. 둘째, 더 이상 모의시합도, 지금 입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바지 차림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도, 공원에서 승마하는 일도 또 나 이외의 다른 남자와 돌아다니는 일도 있어서는 안 돼. 알겠어? 나 이외는 어떤 남자와도 같이 다녀선 안 된단 말이야.”

알렉산드라는 불같이 화를 냈다.

도대체 당신이 뭐예요!”

화를 내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이년 동안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람들과 떼어놓으려 한다. 틀림없이 아직도 그녀를 데번에 처박아 둘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난 내가 누군지 알아, 알렉산드라. 그러나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어. 더 이상은.”

모르시는 게 당연하겠죠. 당신은 조그만 일이라도 당신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말 잘 듣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렇죠?”

그 비슷했어.”

전 그런 여자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만들겠어.”

그렇겐 안될 거예요, 공작님.”

알렉산드라는 그에게 인사하지 않고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내 이름은 조르단이야.”

알렉산드라는 걸음을 멈추고 반쯤 몸을 돌렸다. 예전에는 그가 자기 이름을 불러 달라고 부탁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잘 알고 있어요, 공작님.”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두고 몸을 돌려 문간으로 갔다. 그의 노려보는 시선에 어깨에 구멍이 날 것 같은 걸 느끼며 그녀는 제발 후들거리는 다리가 긴장 때문에 주저앉지나 말아 주기를 기도했다.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불길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렉산드라!”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

내 명령을 어기는 실수를 범하기 전에 잘 생각해봐. 내 틀림없이 장담하지만 그랬다간 반드시 후회할 거야.”

그의 딱딱한 목소리에 놀라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녀는 당당히 고개를 쳐들었다.

말씀 다 하셨어요?”

그래. 나가면 히긴스를 들여보내.”

집사 이야기가 나오자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데리고 온 하인들의 처지가 생각나 몸을 돌려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다.

다음번에 또 제가 당신을 모욕했다는 착각에서 제게 복수하고 싶다면 제발 제 하인들은 그 대상에서 빼주세요. 오늘 아침 당신이 주방으로 추방시킨 그 점잖은 두 노인은 제겐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들이세요. 팬로즈는 제게 낚시와 수영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필버트는 제게 인형의 집을 만들어주고 또 뗏목을 만들어 젓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당신이 그들에게 심하게 하고 또 모욕을 주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

히긴스에게 당신이 원하는 곳에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배치하라고 말해. 다만 정면 홀만 제외하고.”

그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가 문을 다고 나가자 조르단은 눈썹을 세우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즉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뒀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의 규칙을 따를 것이다. 여자에게서 그것도 특히나 한때 자기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던 어린 여자에게 명령을 거역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몇 분전에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거의 억제하기 힘든 육체적 욕구는 놀랍기도 하거니와 짜증스럽고 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비록 이년 정도 금욕 생활을 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고 치더라고.

알렉산드라는 절대로 그가 꿈꾸어 왔던 고분고분한 아내는 되지 못할 것이다 . 하지만 그녀의 드센 기질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결코 따분하지 않을 것이며 또 거짓말쟁이거나 겁쟁이가 아닐 것이다. 삼십 분전만 하더라고 그녀는 그에게 정부들의 명단을 제시했으며 또 지난 이년 동안 그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솔직하게 시인했다. 알렉산드라는 그를 화나게 하는 동시에 웃게 만들고 또 성적충동을 일으킨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절대 따분하지 않을 것이다.

조르단은 책상에서 펜을 집어 들어 손가락 사이에 넣고 멍하니 돌리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화가 났을 때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파란 눈동자 하며 핑크 빛으로 물드는 뺨이며.

그녀가 제대로 처신하기만 한다면 호손 공작부인으로서 혜택을 마음껏 누리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녀가 처신만 제대로 한다면.

히긴스가 존 캠던을 데리고 문간에 나타났다.

아내와 만족할 만한 진전을 보았나 보지?”

존이 웃으며 물었다.

앞으로 잘 처신할 걸세.”

조르단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 화이트 클럽에 나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겠군.?”

좋지.”

조르단이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광산 회사와의 합작건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22. 반항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서재에서 나오자 곧바로 정면 홀로 가서 히긴스에게 팬로즈와 필버트를 주방에서 불러 두 사람을 조찬실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홀을 지나갔다.

환한 노란색으로 장식된 조찬실은 늘 그녀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문을 닫자마자 그녀의 얼굴에서 하인들을 의식해 일부러 지었던 미소가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차던 걸음이 갑자기 힘이 빠졌다. 그녀는 천천히 창 쪽으로 걸어가 말없이 정원을 내다보고 서있었다. 마치 거인부대와 한바탕 물리적인 전쟁을 치르고 난 기분이었다. 그것도 패전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현실을 직시하노라니 수치심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육체적으로 그녀는 이년 전과 마찬가지로 조르단 타운센드에게 면역되어 있지 못했다. 그의 분노는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와 키스는 이길 수가 없었다. 달콤하면서 거친 그의 키스는 그녀의 육체와 영혼과 심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지난 이년 동안 익힌 약삭빠른 세상살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 그에 대해 알게 된 온갖 비리에도 불구하고, 열 일곱 살 풋내기 소녀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르단 타운센드는 그녀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그 미소는 여전히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 키스는 그녀의 고집을 꺾었다. 알렉산드라는 차가운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교회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절대로 조르단에게 어떤 사랑의 감정도 느끼지 않으리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 미소와 키스와 애무에 그녀의 확신은 무너졌다. 조르단 앞에만 서면 그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약했다.

, 하느님!”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악마의 도움으로 여자들에게 이런 마술을 걸까?

또 그를 웃게 만들 때마다 뭔가 희귀한 것을 성취했다고 뿌듯해지는 것은 또 무엇인가? 왜 아직도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그를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또 그의 눈에 자리 잡고 있는 냉소의 응어리를 녹일 수 있다는 이 어리석고 순진한 느낌과 싸워야 하는가? 아마 틀림없이 그는 모든 여자들에게 이런 느낌을 갖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경험 많고 또 약삭빠른 여자들이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속을 다 내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왜냐면 그와 결혼한 것이 아니니까. 오늘밤 조르단은 키스 이상의 것을 계획하고 있다.

오늘밤 침대에서 어떻게 당신이 나를 기쁘게 해줄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오늘밤..... 침대에서...... 그녀는 여인숙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그날 밤 생각에 벌써 온몸이 뜨거워지는 자신에게 화를 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밤은 물론이고 언제라도 절대로 그를 침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가 감히 그녀의 인생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아 그녀의 침대로 올라올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가? 더구나 이제는 다른 신사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녀에게 구애의 몸짓조차 보이지 않고 말이다. 알렉산드라는 화가 나서 조르단이 한 번도 자기에게 구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오늘밤 그는 런던에 있는 수십 명의 여자들 침대 중에 하나를 선택해 열정을 발산할 수 있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수십 명의 여자들이 줄을 서서 그가 사랑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지 않은가. 그는 어젯밤에도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애인 집에 갔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밤 내 침대로 오기 전에 아마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고 올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구역질이 났다.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도망갈 방법을 찾기라고 하는 것처럼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성과 평정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그녀는 또 다시 엄청난 감정적인 충격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평화를 원했다. 앞으로는 차분하고 현실적으로 살고 싶었다.

막상 런던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새로 사귄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이 앞섰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서 평화와 평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온 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질투심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제 멜라니와 이야기하다가 문득 생각난 모샴이 한층 더 매력적인 장소로 부각되며 그곳만이 그녀를 기다리는 지상낙원이라고 되는 것처럼 마음의 지평선 저 너머로 아련히 떠올랐다.

그러나 예전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 멍하니 운명의 여신이 도와 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지금까지 운명은 한 번도 그녀 편이 아니었다. 운명은 그녀를 도와주기는커녕 바람둥이 남자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를 다시 그녀에게로 데려와 아직도 자기를 원하지 않는 남자, 바람둥이일 뿐만 아니라 건방지고 몰인정하고 독재적이기까지 한 남자에게 순순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여자란 가재도구나 다름없는 존재란 걸 그녀는 알게 되었다. 특히 귀족 사회에선, 귀족의 혈통을 이어나갈 후계자를 얻을 목적에서 남자들에 의해 혈통 좋은 암말처럼 선택되고, 후계자를 생산한 다음엔 은퇴했다.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그렇게 무기력한 귀족 출신의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자신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집 그리고 늙은 하인 두 명까지 열 네 살 때부터 꽤 잘 돌봐 오지 않았던가.

이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간다면 예전보다 훨씬 더 잘 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아이들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마을 사람들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이 년 정도 마을을 떠나 살다 돌아온 그녀를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다 해도 지금처럼 변덕스런 운명과 건방지고 독재적인 한 남자에게 일생을 맡기고 사느니 차라리 그들이 용서해 줄 때까지 추방자로서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그 방향을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방향을 정하는 건 간단했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길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인생의 애인으로 살면 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터무니없이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남편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리고 돈도 필요했다.

사실 돈 문제가 더 걱정스러웠다.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지난번에 토니가 준 분기별 용돈밖에 없었다. 그 돈만으로는 집을 빌리고 겨울을 날 땔감을 사거나 필버트와 팬로즈가 채소밭을 가꾸기 시작할 때까지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의 열 배는 더 필요했다. 그렇다고 할머니와 토니가 준 보석을 팔 수는 없었다 그것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같은 것으로 사실 그녀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귀중품은 외할아버지가 남겨 준 시계였다. 알렉산드라는 가슴 아프지만 그것을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경험으로 보건대 시간은 항상 조르단 편이었으며 그녀에게는 불리했다. 충분한 시간과 거리만 주어지면 조르단은 그의 품안에서 그녀를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보니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알렉산드라는 아침이면 토니와 펜싱 시합을 한 뒤 늘 차를 마시던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미리 준비된 쟁반에서 차를 따르고 있는데 두 명의 충직한 늙은 하인들이 들어왔다.

알렉스 아가씨, 이번에는 상당히 어렵겠군요.”

필버트는 아무 형식도 없이 아무 서두도 없이 다짜고짜 말하며 심한 근시로 그녀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 애썼다. 그는 얼마전 알렉산드라가 사준 안경을 쓰고 있어 예전보다는 훨씬 더 잘 볼 수 있었다. 걱정 때문에 손을 꼬면서 그는 모샴에서 <가족>으로 함께 살 때 늘 그랬듯이 테이블의 알렉산드라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팬로즈는 필버트 옆에 앉으며 필버트의 말을 잘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제 두 분만 계실 때 공작이 하시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팬로즈에게 이야기했죠. 아가씨의 남편은 인정도 눈물도 없는 남자예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순 없죠.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지금껏 자신을 돌봐 주었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또 친구처럼 지내온 두 노인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에게는 거짓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 약간의 장애를 겪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적으로도 장애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그녀가 아무리 애써도 속일 수 없었던 예리했던 과거의 그들로 돌아가 있었다.

난 모샴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모샴!”

팬로즈는 모샴이라는 말이 <천국> 이라는 말이라도 되듯이 감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 그런데 가진 돈이라곤 지난번 받아서 쓰고 남은 용돈뿐이예요.”

필버트가 말했다.

알렉스 아가씨, 아가씨는 늘 돈이 부족했었죠. 아가씨의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그만두세요. 죽은 사람을 욕하는 건 좋지 않아요.”

팬로즈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가 호손의 목숨을 구해 준 게 잘못인 것 같아요. 그 사람을 공격하던 강도를 쏘는 대신에 그 사람을 쐈어야 했는데.”

필버트가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그리고 그 후에 그자의 심장을 도려내야 했어요. 그래서 그 흡혈귀가 이렇게 살아 돌아와 아가씨를 계속 괴롭히지 않게 말이예요.”

두 노인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에 알렉산드라는 오싹하기도 했지만 우습기도 했다. 그녀는 곧 냉정을 되찾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팬로즈에게 더 이상 반대할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침대 옆 서랍에 외할아버지의 금시계가 있어요. 그걸 본드 가로 가지고 가서 돈을 가장 많이 주겠다는 보석상에게 팔아 오도록 해요.”

팬로즈는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려다 고집스러운 그녀의 조그만 턱을 보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렇게 해줘요, 팬로즈.”

팬로즈가 나가자 필버트가 푸른 정맥이 드러난 손으로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알렉산드라의 손을 잡았다.

팬로즈와 제게 지난 이십 년 동안 모아 둔 돈이 좀 있어요. 많지는 않고 둘이 합치면 모두 십 칠 파운드 이 실링 정도는 돼요.”

안돼요. 절대로 그건 안돼요. 그 돈은 두 분의.....”

조찬실로 히긴스가 당당하게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필버트가 재빨리 일어섰다.

히긴스는 우리가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죠.”

그는 알렉산드라가 마시던 찻잔 옆에 있는 노란색 냅킨을 들고 떨어지지도 않은 빵 부스러기를 열심히 닦는 척했다. 로드릭 카스테어즈 경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려고 조찬실로 들어오던 히긴스는 아마 그 장면을 보고 만족했을 것이다.

잠시 후 로디가 들어와 테이블에 앉으며 필버트에게 고상한 고갯짓으로 차를 따르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간밤에 호크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를 채 반도 끝내기 전에 알렉산드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용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비난했다.

내 이야기를 고해바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래요?”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알렉스.”

로디는 차에 우유를 부으면서 말했다.

난 당신이 이번 시즌의 여왕이었다는 것을 호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찾아간 것뿐이오. 그래서 당신이 처음 런던에 왔을 때 그 사람 때문에 완전히 바보 취급을 받았었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지만은 못하도록 말이오. 호크는 틀림없이 그 사실을 알게 될거요. 어젯밤에 멜라니가 와서 그렇게 하라고 제안하더군.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는데. 그래서 당장 호크에게 달려갔었소.”

그녀의 얼어붙은 표정을 무시하고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또한 그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표정이 어떻게 되나 보고 싶기도 했소. 방금 설명했다시피 그게 제일 큰 이유는 아니었지만. 사실..... ”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젯밤 그를 만나기 위해 마운트 가로 쪼르르 달려간 것은 정말 내 인생 최초의 고상한 행동이었소. 그건 곧 내가 냐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오. 그 점에 대해선 당신이 원망스러워요.”

제가요?”

 

알렉산드라는 너무 불쾌하고 혼돈스러워 현기증이 났다.

당신이 왜 나약해졌다는 거죠?”

고상함. 당신이 그 크고 아름다운 눈으로 쳐다볼 때면 나는 종종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내 자신보다 당신이 나를 더 훌륭하고 좋은 사람으로 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젯밤 나는 갑자기 뭔가 훌륭하고 좋은 일을 하고 싶어졌소. 그래서 당신의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고상한 의도로 서둘러 호크를 찾아갔던 거요.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참 혐오스러운 짓을 했군.”

그가 자기 자신이 너무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바람에 알렉산드라는 웃음이 나와 찻잔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의 고상한 노력은 소용이 없었던 것 같소. 한 시간 이상을 떠들었지만 호크가 내 말에 주의를 기울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소.”

당신 말에 주의를 기울였어요. 오늘 아침에 제게 탈선행위 목록을 만들어 와서는 제게 그것을 시인하거나 아니면 부인하라고 하더군요.”

반가움에 로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랬어요, 정말? 어젯밤에는 그 사람이 화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상대가 호크이고 보니 장담할 수가 있어야지. 그럼 당신은 그 목록을 시인했소 아니면 부인했소?”

너무 긴장되고 너무 걱정스러워 알렉산드라는 잠시도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용서를 구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의 조그만 안락 의자 쪽으로 걸어가 노란색 쿠션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시인했죠.”

로디는 의자를 돌려 그녀의 옆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부부 사이에 꼭 꿀과 장미만 있는 건 아니겠죠?”

알렉산드라가 멍하니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로디는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런던 사교계는 벌써부터 당신이 호크의 전설적인 매력에 다시 무릎을 꿇을지 아닐지 내기를 하고 있어요. 현재로선 당신이 여왕배 승마 대회 날까지 그에게 굴복하리라는 데 승산을 거는 사람이 41로 더 많아요.”

알렉산드라는 몸을 홱 돌려 성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구요?”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분해서 숨을 헐떡였다.

그게 무슨 얘기예요?”

내기를 건단 말이오. 승산은 당신이 여왕배 승마 대회에서 그를 응원하는 뜻으로 그의 팔에 당신 리본을 묶어 주리란 사람이 41로 많아요.”

알렉산드라는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한 런던 사람들이 그렇게 혐오스러워질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두고 내기를 해요?”

당연하죠. 해마다 여왕배 승마 대회 때면 여자들이 모자에서 리본을 풀어 행운과 격려의 뜻으로 사랑하는 남자의 팔에 직접 리본을 묶어주는 전통이 있어요. 그건 공개적으로 사랑을 표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중의 하나죠. 우리 귀족들은 그 전통을 장려해요. 왜냐면 누가 누구의 리본을 맸다는 이야기가 곧 닥치는 긴 겨울 한철 동안 심심치 않은 소문과 추측을 낳게 해주거든요. 현재로선 당신이 호크의 팔에 리본을 묶어 준다는 데 승산이 41로 높아요.”

알렉산드라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로디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디에다 걸었어요?”

아직 걸지 않았어요. 그래서 화이트 클럽에 들리기 전에 이곳에 와서 먼저 분위기부터 파악하고 싶었소.”

로디는 냅킨으로 고상하게 입을 닦고는 일어서서 그녀의 손에 키스를 하고 도전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97일 승마대회에서 당신의 리본을 남편에게 묶어 주어 애정을 과시할 작정인가요?”

물론 아니죠!”

만인이 조금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다 아는 남자를 두고 만인이 보는 가운데 그런 가관을 연출한다는 생각에 알렉산드라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정말이죠? 천 파운드를 잃고 싶지 않소.”

그런 걱정 마세요.”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로디가 반쯤 방을 나가고 있는데 알렉산드라는 앉아 있던 의자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벌떡 일어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는 놀란 눈으로 서있는 로디 쪽으로 걸어갔다.

로디, 당신은 멋져요! 아주 똑똑해요! 만약 제게 남편이 없다면 당신에게 프로포즈하고 싶어요!”

로디는 그녀의 애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발, 제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

그녀는 애교를 부렸다.

그게 뭔데요?”

알렉산드라는 운명의 여신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딜레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저를 위해 내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놀라서 잠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로디의 얼굴이 곧 알겠다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다 돈을 잃으면 그 돈을 만회할 수 있겠소?”

잃을 수 없어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냥 저는 승마 대회에 나가 제 리본을 호크의 팔에 묶어 주지만 않으면 내기에서 이긴다는 뜻 아니에요?”

맞았소.”

알렉산드라는 흥분을 가눌 길 없어 로디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로디, 제발 저를 위해 그렇게 해주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제게는 더 절실한 일이에요.”

로디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는 새삼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아마 짐작했겠지만 당신 남편과 나 사이에는 잃어버릴 사랑이란 게 없소.”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미소를 짓자 그는 그녀의 순진함에 과장된 한숨을 지어 보였다.

만약 당신 남편이 계속 죽어 있고, 또 토니가 남자 후계자 없이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가, 혹은 내 후계자가, 차기 호손 공작이 될 것이오. 당신도 토니의 동생 버티를 봐서 알겠지만 그는 거의 이십 년 동안 사경을 헤매는 병약자요. 출산 때 뭐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것 같소만.”

로디가 그렇게 승계 서열이 높은 줄 몰랐던 알렉산드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당신이 우리와..... 그러니까 타운센드 가와 친척이라는 건 알았어요. 하지만 팔 촌이나 십 촌쯤 되는 먼 친척으로 알았어요.”

맞아요. 하지만 조르단과 토니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타운센드 가의 나머지 사람들은 아들은 없고 딸만 그것도 몇 명밖에 얻지 못했소. 우리 집안 남자들은 수명이 짧은 것 같소. 후계자 생산도 그렇게 활발하지 못하고. 남자들이 시도를 적게 해서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닐 텐데 말이오.”

너무 근친 결혼만 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알렉산드라는 노골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언급하는 로디의 말에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들었다.

콜리 견도 마찬가지잖아요. 귀족들이 다른 가문과 결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대가 끓어지고 말 거예요.”

로디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쓸데없는 짓! 당신은 놀라지 않은 척하지만 날 속일 순 없소. 계속 연습을 더해요. 사업 이야기로 돌아가서 돈은 얼마나 걸 참이오?”

알렉산드라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너무 욕심을 내서 마침내 자기에게도 미소를 보내고 있는 행운의 여신을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천 파운드.”

그녀가 말을 하려는데 로디 뒤에 서있던 필버트가 갑자기 큰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의미 있게 <에헴>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알렉산드라는 필버트를 쳐다보고 그리고 로디를 보면서 재빨리 고쳐 말했다.

이천 십 칠 파운드.”

필버트가 다시 소리를 냈다.

알렉산드라는 순순히 다시 수정했다.

이천 십 칠 파운드 이 실링이오.”

바보가 아닌 로디는 천천히 몸을 돌려 하인에게 알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알렉산드라는 몇 주 전 로디에게 자기가 어릴 때부터 그들이 돌봐 주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었다.

이름이 뭐요?”

로디는 고상한 웃음을 지으며 필버트에게 물어 보았다.

필버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십 칠 파운드 이 실링의 주인인가 보지?”

, 저와 팬로즈입니다.”

그런데 팬로즈는 누구지?”

부 집사입니다.”

필버트는 곧 자기도 모르게 성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아니 부 집사였습니다. 공작님께서 오늘 아침 돌아오셔서 강등시키기 전까지 말입니다.”

로디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찾으며 알렉산드라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늘밤 린드워디 무도회에는 못 나오시겠죠?”

알렉산드라는 아주 잠깐 주저하다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제 남편은 벌써 선약이 있다고 하니 무도회에 못 나갈 이유가 없죠.”

믿을 수 없지만 기적적으로 앞으로 십 년간은 모샴에서 편안하게 먹고 살 충분한 돈이 생기게 되었다. 난생 처음 그녀는 독립과 자유를 맛보았다. 그것은 달콤하고 신성한 맛이었다. 포도주보다 더 어찔어찔했다. 그것은 그녀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쁨으로 눈을 반짝였다.

로디, 아직도 저와 펜싱 해보시고 싶은 생각이 있으시다면 내일 아침이 아주 좋겠다고 생각해요. 구경시키고 싶은 분 있으시면 누구라도 초청하세요. 온 세상을 다 초청해도 좋아요.

처음으로 로디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너그럽기로 소문난 토니도 당신 마음대로 행동하게 하면서도 당신이 다른 사람과 펜싱하는 것만은 금했소. 그건 안 될 것 같소. 당신 남편이 그 소리를 들었다간 아마 화를 낼 거요.”

죄송해요, 로디. 당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내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당신 걱정을 하는 거요. 난 아무렇지도 않소. 호크가 나를 물러 내지는 않을 거요. 우리 두 사람 다 성질을 못참아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결투를 할만큼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는 틀림없이 조용히 내 얼굴을 문질러 놓을 기회를 찾을 거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그런 일쯤은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으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멋진 옷 아래는 우람한 근육이 숨어 있소.”

그는 기사처럼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오늘밤 린드워디의 무도회장에서 만납시다.”

로디가 나가자 알렉산드라는 하늘을 쳐다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하느님에게, 운명에게 그리고 장식된 천장에 감사했다. 문제의 반은 로디가 돈줄을 제시한 것으로 해결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반도 해결할 묘안이 생각났다. 지난 이틀 동안 관찰해 본 결과 조르단 타운센드는 아내를 포함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또 그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자나 여자 혹은 하인들이 자신의 명령에 반항하는 걸 참지 못했다.

그러므로 반항이야말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열쇠였다. 당장 그에게 반항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평화를 깨고 그의 독선을 비웃어 주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의 인생에서 그녀를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공작님께선 아가씨가 내기하시는 거나 오늘밤 외출하시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필버트가 걱정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그분이 아가씨께 외출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기를 걱정하는 노인을 포옹했다.

내가 내기한 사실을 그 사람은 절대 모를 거예요. 그리고 만약 내가 돌아다니는 게 싫다면 나를 모샴으로 돌려보내면 되잖아요! 아니면 이혼을 해주던가!”

그녀는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활기차게 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앞으로 두 달 후면 모샴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돈 많은 여자가 되어 조르단 타운센드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다. 한 가지 더 즐거운 사실은 자신의 머리를 이용해 돈을 번다는 점이었다. 조르단은 그 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것이다. 조르단은 서재 문간에서 방문객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다가 그녀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알렉산드라의 목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목소리. 엉덩이도 아주 예쁘게 흔들었다. 아주 도발적으로.

오후 내내 알렉산드라를 흥분시킨 자신감은 화장대 앞에 서있는 동안 도를 더해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벽난로 위의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반전에 조르단이 그녀의 방과 붙어 있는 주인 침실로 와 하인에게 오늘밤 화이트 클럽에 가겠다고 한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십 오 분전에 그는 나갔다.

화이트 클럽은 린드워디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조르단이 아래층에서 머뭇거릴 경우나 무도회장으로 가는 길에 그를 만날 위험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그가 목적지까지 도착할 충분한 시간을 줬다가 출발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쯤 조르단이 틀림없이 클럽에 도착했으리라고 믿고 알렉산드라는 노부인이 그녀를 위해 고용한 중년의 프랑스인 하녀를 향해 돌아섰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마리?”

그녀는 명랑하게 물어 보았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할 말을 잃어버릴 겁니다, 마님.”

마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될까 겁나는군요.

알렉산드라는 신난다는 듯 웃으면서 거울에 비친 숨 막힐 정도로 화려한 레몬 색 시폰 가운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단아한 모자가 화려한 드레스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녀를 나이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이게 했다.

알렉산드라는 조그만 구슬 핸드백을 집어 들며 명랑하게 말했다.

마리, 날 기다리지 마세요. 친구 집에서 밤새우고 올 테니까요.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조르단 타운센드에게 다시 사랑을 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밤만은 그것을 막을 만한 계획이 있었다.

 

영국 제일의 개인 사교 클럽인 화이트 클럽은 이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실내에 들어선 순간 조르단은 뭔가 미묘하게 달라진 게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다른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남자들이 편안하게 카드놀이를 할 수 있는 나지막한 테이블 주위에는 여전히 편안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성경이 감리교인들에게 신성하게 여겨지듯이 화이트 클럽의 단골손님들에게 신성한 장부로 여겨지는 도박 장부도 여전히 예전의 그곳에 놓여 있었다. 조르단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평상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내기 장부 주변에 모여 있는 걸 보았다.

호크!”

누군가가 외쳤다. 내기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고 그에게 다가왔다.

호크, 돌아와서 반갑네.”

헐리 경이 조르단의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호크, 다시 만나서 반갑네.”

친구와 친지들이 가까이 모여들면서 모두들 열렬히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지나치리만큼 열렬한 환영이었다.

한잔하게나, 조르단.”

존 캠던이 심각하게 말하며 옆으로 지나가던 종업원에게서 마데이라 잔을 받아 조르단의 손에 쥐어 주었다.

캠던의 이상한 태도에 조르단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마데이라를 종업원에게 돌려주었다.

위스키로 갖다 줘.”

그는 간단히 말하고는 내기 장부 쪽으로 걸어갔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무슨 내기를 하나? 아직도 돼지 경주에 내기를 거는 건 아니겠지?”

여섯 명의 남자가 갑자기 반원을 그려 그를 막아서며 내기 장부를 덮고 동시에 말했다.

날씨에 내기 걸기도 하고. 우리는........ 고생 많이 했지?...... 이야기 좀 해줘....... 안토니 경은 어떻게 지내는가?....... 노부인도 잘 계신가?”

내가 장부를 보지 못하게 인간 장벽을 쌓아 봤자 소용없다는 뜻으로 조르단 몰래 존 캠던이 고개를 저었다. 조르단의 길을 막으려던 남자들이 어색하게 옆으로 비켜섰다.

우리 할머님은 잘 계시네, 헐리.”

조르단은 남자들을 지나 장부 쪽으로 갔다.

그리고 토니도.”

조르단은 손으로 의자 등을 잡고 몸을 약간 앞으로 숙여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나간 신문철을 뒤져보듯이 장부를 뒤로 넘겨 그 동안에 어떤 내기가 있었던가 들여다보았다. 며칠에 다음 눈보라가 예상된다는 내기에서부터 바스콤의 첫아기 몸무게가 얼마일까에 이르기까지 온갖 내기가 다 있었다.

팔 개월 전에 손튼 경은 자기 친구 스탠리 경이 이 개월 후인 1220일에 복통으로 병석에 눕게 될 거라는데 천 파운드를 걸었다. 1219일 손튼은 스탠리가 한자리에서 사과 스무개를 먹을 수 없을 거라는데 백 파운드를 걸었다. 그 내기에서 스탠리가 이겼다. 그러나 그 다음날 스탠리는 손튼에게 천 파운드를 잃었다. 조르단은 친구들을 보며 껄껄 웃었다.

스탠리가 아직도 그렇게 많이 먹는가 보군.”

예전 같으면 조르단의 말에 친구들이 다른 재미있는 내기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예전에 조르단이 했던 무모한 내기를 재미있게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여섯 명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단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고 다시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카드놀이를 하던 신사들이 게임을 중단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클럽 전체에 긴장이 감돌았다. 잠시 후 조르단은 클럽이 갑자기 왜 이상한 분위기가 됐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5월과 6월 내내 내기 장부는 몇 페이지에 걸쳐 알렉산드라가 결국 누구를 결혼 상대자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르단은 화가 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고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여왕배 경마 대회 날 알렉산드라가 그녀의 리본을 그의 팔에 묶어 줄지에 대한 내기를 보았다.

대부분 그가 이긴다는 데 승산을 걸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장부에 기입된 명단을 훑어보았다. 장부 밑부분에 그가 패할 것이라는 데 승산을 건 소수의 이름이 나왔다. 조르단은 그중 카스테어즈가 바로 그날 아침에 천 파운드를 건 것을 주의깊게 보았다. 녀석답군!

그 다음에 나온 사람도 그가 패할 것이란 데 승산을 걸고 있었다. 아주 특이하게 이천 십칠 파운드 이 실링이란 금액이 카스테어즈를 보증인으로 내세워......

조르단이 불같이 성난 얼굴로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 오늘밤 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이제 막 생각났어.”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내기장부를 둘러싸고 있던 여섯 명의 친구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카스테어즈를 찾으러 갔을 거야.”

존 캠던이 심각하게 말했다. 모두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집으로!”

조르단은 마차에 뛰어오르며 마부에게 명령했다. 어퍼 브룩가 3번지로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조르단은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방종하게 제멋대로 날뛰는 아내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따끔한 맛을 보여 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여자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알렉산드라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 그녀를 무릎에 엎어놓고 더 이상 아파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펑펑 두들겨 패는 것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공공연하게 자기에게 반항하는 유치한 행동에 대해 그보다 더 적당한 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녀를 침대에 던지고 하느님이 의도한 대로 그녀를 이용해야지!

그때 기분으론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뛰어오르려는데 히긴스가 알렉산드라는 집에 없다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르단은 더이상 화가 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특별히 집에 있으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그녀가 자기에게 반항하며 외출했다는 소리는 그의 피를 끓게 했다.

그녀의 하녀를 데리고 와.”

조르단의 차가운 목소리에 히긴스는 주눅이 들어 뒷걸음치다가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오 분 후인 열시 삼십 분 조르단은 린드워디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린드워디의 집사는 알렉산드라의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호손 공작부인 입장입니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무시하고 지금까지 입었던 그 어떤 옷보다 대담한 옷차림으로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오늘밤 아주 대담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계단을 반쯤 내려와 무도회장을 돌아보며 로디나 멜라니 아니면 노부인을 찾았다. 먼저 나이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노부인이 눈에 띄었다. 알렉산드라는 노부인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알렉산드라는 할머니의 뺨에 키스를 하며 명랑하게 말했다.

기분이 아주 좋은 것 같구나.”

노부인은 알렉산드라의 장갑 낀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호손이 오늘 아침 내 충고를 받아들여 너에게 외출을 하지말라던 어리석은 금족령을 풀었다니 정말 기쁘구나.”

알렉산드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주 우아하게 무릎을 살짝 굽혀 할머니께 인사를 한 다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니에요, 할머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 맞습니다.”

!”

알렉산드라는 조르단과의 싸움에서 노부인이 누구의 편을 들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반항기 어린 행동에 노부인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여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사실 지금 기분 같아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녀의 기를 꺾어 놓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후 멜라니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올 때까지는.

, 알렉스,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어!”

그녀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노부인이 바로 옆에 서있다는 것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네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면 내 남편은 물론이고 어느 남편이라도 네 목을 비틀어 놓겠다는 걸 말릴 사람이 없을 거야! 네가 너무 심했어. 그건 웃고 넘길 일이 아니야! 그렇게 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알렉산드라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늘 침착하던 친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걸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화이트 클럽의 내기 장부에 로디를 시켜 네 이름으로 내기를 건 것 말이야!”

내 이름으로.......”

알렉산드라는 믿을 수 없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어머나, 세상에! 그럴 리가 없어!”

내기는 무슨 내기?”

노부인이 물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그랬어! 그리고 이 무도회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

어머나 세상에!”

무슨 내기?”

노부인이 재촉했다.

노부인의 질문에 답을 하기에 너무도 떨리고 화가 난 알렉산드라는 멜라니에게 대답을 맡기고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로디를 찾아 나섰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비우호적인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로디를 발견하고 눈에 살기를 띠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 알렉산드라.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로디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어떻게 그 내기 장부에 제 이름을 쓸 수 있냐구요!”

그녀를 만나고 두 번째로 로드릭 카스테어즈는 잠시 자제력을 잃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대로 했을 뿐이오. 당신은 사람들에게 절대로 호크의 발아래 무릎 꿇지 않겠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잖소. 그래서 나는 당신의 생각을 만인에게 알리기 위해 당신의 이름을 제일 눈에 잘 띄는 곳에 적었지. 그게 쉬운 일인지 아오?”

그는 계속 화를 내며 말했다.

화이트 클럽은 규칙상 회원들만 내기를 하기로 되어 있소. 그래서 내가 먼저 내 이름을 적고 당신을 보증한다고.......”

난 당신이 나를 대신해서 내 이름이 아니라 당신 이름으로 내기를 해주길 원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부탁을 한 거잖아요!”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조용하고 비밀스럽고 서면화 되지 않은 신사의 내기를요!”

로디도 화가 나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조용하고 비밀스럽고 서면화되지 않은 내기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이오?”

돈요!”

알렉산드라는 비참했다.

로디의 입이 쩍 벌어졌다.

?”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돈이 필요해 그 내기를 한 거라구?”

그럼요! 그 외에 또 무슨 이유로 내기를 해요?”

그녀가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무슨 별종이라고 되는 것처럼 로디는 그녀를 쳐다보며 설명했다.

사람들이 내기를 하는 것은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요. 당신은 유럽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과 결혼했소. 그런데 왜 돈이 필요해?”

논리적이긴 했지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알렉산드라는 의도를 털어놓아야 했다.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비난해서 미안해요.”

로디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옆으로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샴페인 두 잔을 받아 그중 한 잔을 알렉산드라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후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모르고 물었다.

혹시 제가 내기를 걸었다는 걸 호크가 알고 있을까요?”

예민한 로디가 주의를 둘러보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위를 쳐다보았다.

그런 것 같소.”

그는 손으로 위를 가리켜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때맞추어 린드워디의 집사 목소리가 들렸다.

호손 공작 입장이오!”

사람들 사이에 충격과 기대감이 들끓었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위로 올렸다. 까만 옷을 입은 큰 키의 조르단이 위엄 있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큰 키의 조르단이 위엄 있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은 알렉산드라가 서 있는 자리에서 2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르단이 계단을 거의 다 내려오자 무도회장에 모여 있던 거대한 인파가 일시에 밀어닥치며 고막이 터질 듯한 인사말이 터져 나왔다.

조르단은 다른 사람보다 키가 머리 반만큼은 더 컸다.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사람들 속에서 알렉산드라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얼른 샴페인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로디에게 건네주었다. 로디는 그의 잔까지 그녀에게 주었다.

내 것도 마셔요. 필요할 것 같소.”

알렉산드라는 도망갈 구멍을 찾는 여우처럼 주변을 돌아보았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아무 생각 없이 로디의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 오른쪽에 있는 노부인의 눈과 마주쳤다. 노부인은 그녀에게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고개를 돌려 멜라니에게 재빨리 뭐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멜라니가 조르단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알렉산드라와 로디가 있는 쪽으로 왔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님께서 하고많은 날 중에 굳이 오늘 밤 네 인생 최초로 방종하게 굴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그리고 호손이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그밖에 다른 말씀은?”

알렉산드라는 다짐이 필요했다.

있었어. 할머님은 나더러 네 옆에 풀처럼 바짝 붙어 다니며 오늘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네 곁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 맙소사! 난 할머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실 줄 알았어!”

로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호크가 아직 내기 건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녀는 조르단이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면 어느 쪽으로 갈까 가늠해 보고 반대쪽으로 가려고 조르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저를 발견하면........”

그때 조르단의 오른쪽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하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재빨리 움직이며 벽을 따라 알렉산드라와 멜라니와 로디 그리고 다시 알렉산드라를 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조르단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사람들에게 벗어나는 대로 곧 찾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발견한 것 같군.”

로디가 농담했다.

조르단에게서 눈을 돌려 알렉산드라는 주변을 돌아보며 그의 눈에 띄지 않을 때까지 몸을 숨길만 한 안전한 곳을 찾았다. 누구에게도 숨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숨을 만한 안전한 곳. 마침내 그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칠백여 명에 이르는 손님들 무리로 걸어가 그들과 섞여 조르단이 찾지 못하게 하는 길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들 틈으로 들어갈까요?”

로디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사람들 무리에 섞이자는 제안을 했다.

알렉산드라는 다소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람들 틈에 섞인다는 생각은 잠시 후 전면이 거울로 된 벽을 따라 서 있던 모스비 부부와 노스 경 옆을 지나갈 때 씁쓸하게 끝나고 말았다. 모스비 부인이 알렉산드라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내기에 관한 얘기 들었어요,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가 얼어붙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장난이었어요.”

노부인의 지시에 따라 알렉산드라 곁에 바짝 붙어 있던 멜라니가 말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알렉산드라를 보면서 노스 경이 딱딱하게 말했다.

호크가 그걸 장난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소.”

나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소.”

모스비 경이 말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팔을 잡고 짤막하게 목례를 한 뒤 노스 경과 함께 사라졌다.

내가 못할 짓을 했군!”

로디가 그들의 등에 대고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후회와 분노와 아이러니가 섞인 눈으로 얼어붙어 있는 알렉산드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화이트 클럽에 당신 이름으로 내기를 건 내가 큰 실수를 했소. 당연히 몇몇 고리타분한 남자들이 우리의 내기에 이맛살을 찌푸릴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당신 남편에게 반항하는 것이 모든 남편들을 화나게 만들 줄은 미처 몰랐소.”

알렉산드라의 귀에는 그의 이야기가 들리지도 않았다.

로디, 당신이 옆에 계셔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은 키가 커서...... ”

제가 옆에 없으면 눈에 덜 띈다는 거요?”

알렉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라져 드리죠.”

감사합니다.”

당신이 처함 곤경에 일부 책임 있는 사람으로 사라져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려야죠.”

그는 간단히 목례를 한 뒤 알렉산드라와 멜라니가 있는 곳에서 반대쪽 사람들 틈으로 걸어갔다.

오 분 뒤, 알렉산드라는 무도회장 쪽으로 등으로 돌리고 서서 걱정스럽게 멜라니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보이니?”

아니. 계단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난 지금 나가야겠어.”

알렉산드라는 멜라니의 뺨에 짤막하게 키스를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난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마. 내일 만나.”

만날 수 없어.”

멜라니가 우울하게 말했다.

남편이 런던 공기가 내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를 시골로 데리고 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할 계획인가 봐.”

눈앞에 닥친 시련을 멜라니라는 믿음직한 친구 없이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알렉산드라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편지 쓸게.”

알렉산드라는 멜라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염려하며 약속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치맛자락을 잡고 계단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 뒤에서 멜라니가 이름을 불렀지만 무도회장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멜라니의 목소리는 묻혀 버리고 알렉산드라는 종종 걸음으로 황급히 벽 쪽으로 가까이 갔다.

그녀는 가는 길에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때 어디선가 나온 손이 알렉산드라의 이마를 잡으며 그녀를 돌려 세웠다. 그녀는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조르단이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 있는 손님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녀 등 뒤로 벽에 높이 손을 짚고 조르단은 몸으로 그녀를 막았다. 그의 그런 모습은 언뜻 보면 여자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편안한 신사처럼 보였다.

알렉산드라.”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이 집에는 지금 사백여 명의 남자들이 있소. 그들은 대부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당신을 끌어내 집으로 데리고 가 혼줄을 내주어 자기 아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믿고 있지. 그리고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구.”

놀랍게도 그는 거기에서 말을 멈추고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샴페인 잔을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계산된 제스처였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공개적으로 내기를 걸고 또 내 명령을 어기고 오늘밤 이곳에 나타난 행위는 모두가 보는데서 보복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지만, 두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겠어. 잘 들어.”

알렉산드라의 가슴은 수치스럽게도 겁에 질려 놀란 새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놀란 모습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는 그녀에게 첫 번째 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 안은 지금 당장 나하고 이곳을 나가는 거야. 조용히 고분고분 따라오든 아니면 발로 차고 비명을 지르든 어떻게 하든 나하곤 상관없어. 어떻게 해서든 만약 우리가 지금 나가면 이 무도회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내가 왜 당신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는지 알게 될 거야.”

그가 말을 중단하자 알렉산드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번째 안은요?”

당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당신과 함께 저 무도회장 플로어로 걸어가 춤을 추는 거야. 그렇게 하면 우리 둘 다 그 내기를 그냥 한갓 장난쯤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집에 도착하는 대로 당신을 처리하겠어, 알겠어?”

그의 마지막 말은 반드시 물리적 보복이 뒤따르리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그들의 출발을 연기할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이든 동의하고 싶었다.

복잡한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식으로 그녀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걸 보면 조르단이 자기를 상당히 사려 깊게 대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창피당하지 않게 해준다고 해서 집에 돌아가면 물리적 보복이 뒤따르리란 걸 약속하고 있는 마당에 마냥 고마워할 수만은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의지를 총동원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고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춤추는 쪽을 택하겠어요.”

조르단은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팔을 내밀었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조르단이 옆으로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알렉산드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위엄 있게 조르단의 팔짱을 끼고 놀란 사람들 틈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던 한 쌍의 부부가 옆으로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엘리자베스 그랭거필드와 얼굴이 마주치자 알렉산드라는 더 이상 자제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조르단의 과거 애인과 마주친 충격에 알렉산드라는 거의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조르단과 엘리자베스는 아주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공작님.”

엘리자베스는 손을 내밀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소.”

조르단은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누군가에게 배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겨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댄스 플로어에 도착해 조르단이 그녀의 허리를 잡으려하자 그녀는 몸을 빼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갈까?”

그가 쌀쌀하게 물어보았다. 주변에서 춤추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기 시작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들이 플로어에서 걸어 나가는 순간 육백여 명의 호기심 어린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알렉산드라는 마지못해 그의 검은색 재킷 소매 위에 팔을 얹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와의 계약을 아주 혐오한다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조르단은 그녀를 양팔에 안고 왈츠를 추고 있는 형형색색의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조금이라도 매너나 행동에 대해 배운게 있다면 그 순교자 같은 표정은 걷어치우고 명랑한 얼굴을 보이려고 노력해!”

조르단이 숨죽여 말했다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그의 뺨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당신이 어떻게 감히 제게 매너와 예법을 강의할 수 있죠. 방금 자기 아내가 있는데서 애인과 노닥거린 사람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했겠어? 그녀를 쓸어 없애야 했겠어? 그녀가 바로 우리가 지나는 길 앞에 서있었잖아!”

대화에 저를 끼워 줄 수도 있었죠.”

알렉산드라는 너무 화가나 정말 그렇게 했더라면 더욱 당황했으리란 것도 잊고 말대꾸를 했다.

호손 공작과 그의 아내가 주고받는 적의에 찬 대화가 무도회 장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엿들으려다가 춤을 추면서 서로 부딪혔으며, 악사들은 그들을 좀 더 잘 보려고 옆으로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화에 당신을 끼워 줘?”

조르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는.......”

그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말을 끝맺어 주었다.

그 여자는 당신과 한 침대에서 잤었죠?”

당신은 내게 매너를 강의할 입장이 아닐텐데. 여러모로 보건데 지난 몇 달 동안 당신의 행동은 내 아내로서 전혀 맞지가 않았어!”

제 행동요? 똑똑히 들어두세요. 만약 제가 당신의 아내에 걸맞도록 행동했더라면 제 앞을 지나간 모든 남자들을 다 유혹해야 했을 거예요.”

그녀의 고함소리에 조르단은 너무 놀라 잠시 무례한 행동을 하는 그녀를 뒤흔들어 놓고 싶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질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오히려 화가 누그러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춤추던 사람 절반이 그들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플로어에서 내려갔다. 나머지 절반은 춤을 추면서 노골적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르단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날 보고 웃어!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단 말이야.”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그녀는 이성을 잃고 계속 화를 내면서도 태도를 약간 부드럽게 했다.

전 아직 당신 사촌과 약혼한 몸이에요!”

그녀의 변명이 너무 황당하고 예상치 못한 것이라 조르단은 웃음이 나왔다.

당신의 윤리는 아주 독특하군, 내 사랑. 당신은 지금 나와 결혼한 몸이기도 하잖아.”

감히 나를 내 사랑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 지금 안토니의 입장도 좀 생각하는 아량을 베풀어 보세요. 제가 당장 당신 품에 안겼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토니가 얼마나 난처할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사촌에 대한 배려를 그렇게 못해요?”

나로선 어려운 도덕적 딜레마로군.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선 전적으로 나 자신만을 배려해야겠어.”

나쁜 사람!”

조르단은 도발적인 레몬 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성난 얼굴의 미인을 내려다보았다. 청록색 눈과 장미꽃잎 같은 입술이 절묘하게 대비를 이루는 알렉산드라의 얼굴은 섬세하면서도 또렷해 보였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에 할머니의 정원에서 노란색 옷을 입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매혹적이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 소녀는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언젠가는 제게 뭔가 근사한 일이 생길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겨울이면 눈 냄새와 함께 그런 느낌이 들고 여름이면 시퍼런 빛을 내며 번뜩이는 천둥과 번개소리를 들으며 그런 느낌을 가져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만물이 푸르고 까맣게 되살아나는 봄철이 되면 그 느낌이 더울 강렬해지죠.......”

알렉산드라는 뭔가 근사한 일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것은 나흘간의 결혼과 그 뒤를 이어 십오 개월에 걸친 미망인 시절, 그것도 그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살았던 인생에 대한 수많은 왜곡된 정보와 함께 산 시절뿐이었다.

갑자기 분노가 사라졌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쳐다보노라니 그녀를 집에 데리고 가 펑펑 두들겨 패주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 같았다.

말해봐.”

조르단은 부드럽게 물었다.

아직도 흙냄새가 향수냄새처럼 생각돼?”

뭐라구요?”

알렉산드라가 약간 누그러진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 그거요?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연민을 느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서둘러 덧붙여 말했다.

이제 저도 어른이 됐어요.”

그런 것 같군.”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도 차츰 화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심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그에게 대항해 내기를 걸고 또 그가 자기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데리고 온 이 댄스 플로어에서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만이 죄 없이 상처받은 쪽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로 눈을 들었다.

휴전?”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나갈 때 까지만요.”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회색 눈도 미소 지었다.

내가 당신에게 사준 강아지는 어떻게 됐지?”

그는 더욱 크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헨리는 호손에 있어요. , 그리고 당신이 틀렸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때 그 소년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어요. 헨리는 순종이에요.”

? 발이 찻잔만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밥그릇만해요.”

조르단이 웃었다. 그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댄스 플로어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음악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호기심에서 올라갔던 외눈안경이 내려오고 무도회장은 이야기소리로 떠들썩했다. 춤이 끝나자 조르단은 그녀의 팔을 잡고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출발은 그의 귀가를 환영한다고 친구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지연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라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그의 옆에 서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조르단 옆에 서있는 것이 토니 옆에 서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처럼 보이려 애쓰면서.

그러나 그녀는 토니를 대하듯 조르단을 대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토니를 대할 때 공작이라는 직위에 맞게 정중하게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나 지금 호크를 대하듯이 거의 숭배심에 가까운 존경심을 표하진 않았다. 요란하게 보석치장을 한 여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우아한 신사들이 점잖게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하는 것을 보면서 알렉산드라는 토니는 그저 공작 작위의 보유자에 불과했지만 조르단은 바로 작위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호손 공작으로 운명 지어졌다.

그의 옆에 서있는 동안 그녀는 일단 돈이 생기면 그를 조정하여 모샴으로 돌아가겠다고 자기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 한 게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귀족들과 사귀면서 그녀는 조르단을 다른 귀족과 똑같이 그저 세련되고 까다롭고 도회지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남자들과 이야기하는 조르단을 보고 있노라니 그의 세련되고 도회지적인 겉모습아래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르단이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아주 정중하게 그러나 강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곧장 집으로 가겠다고 약속하면 지금 나가도 좋아. 그렇게 하면 당신은 당신대로 저녁을 보내고 나는 나대로 저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십 오 분 후에 따라가겠어.”

그의 사려 깊은 제스처가 놀랍기도 하고 또 자기의 계획을 보다 쉽게 이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하여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조르단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약속해, 알렉산드라.”

곧장 집으로 간다고 약속할게요.”

그녀는 안도감에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조르단은 무도회장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먼저 가도 좋다고 제안한 것은 그녀의 말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이제 그녀를 복종시키기 위해 자기가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가를 똑똑히 보여 줬으니 감히 그녀가 다시는 반항할 수 없다고 믿어서였다. 그는 친구와 친지들에게 다시 관심을 돌리며 그녀가 집 말고 또 어디 갈 곳이 있겠는가 생각했다. 아무도, 심지어 그의 할머니도 그녀를 피신시켜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알렉산드라가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조르단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나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녀가 남편과 순조롭게 헤어지는 것에 속아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호크가 집에 가서 그녀를 혼내줄 작정이로군.”

오길피 경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틀림없이 오늘밤 내로 그녀를 혼내줄 거야. 그뿐만 아니라 호크는 여왕배 승마대회에서도 틀림없이 그녀의 리본을 달게 될 거야.”

틀림없어요.”

빌로비 경이 동의했다.

의심할 여지없죠!”

칼래튼 경이 거들었다.

칼래튼 부인이 계단을 올라가는 알렉산드라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모두가 틀리기를 바라요. 호손은 모든 영국 여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어요. 이제 알렉산드라가 그에게 상처를 줄 차례예요!”

빌로비 경의 수줍은 젊은 아내가 턱을 높이 들고 칼래튼 부인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리본을 묶어 주길 바라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그녀가 호크에게 리본을 묶어 준다는데 백 파운드를 걸었단 말이야.”

두 여자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신사들을 쳐다보았다.

빌로비의 아내가 핸드백에서 백 파운드를 꺼내며 말했다.

그 반대에 백 파운드를 걸겠어요.”

나도요!”

칼래튼 부인이 말했다.

알렉산드라가 마차에 오를 때쯤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없이 내기에 참가했으며 승산은 251로 조르단의 승리로 기울어져 있었다. 젊은 여자들만이 알렉산드라가 <저항할 수 없는> 호손 공작에게 저항하는 최초의 여자가 되어 주길 희망했다.

 

 

 

23. 사랑의 마법이여, 풀리지 않기를

어퍼 브룩 가를 따라 줄지어선 대저택 위로 달빛이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마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3번지 현관 자물통에 열쇠를 끼웠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그녀는 홀을 들여다보았다. 원하던 대로 히긴스를 비롯한 하인들 모두가 잠자리에 들고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갔다. 혹시 기다리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하녀가 기다리는 게 아닐까 염려하며 잠깐 침실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문을 열어 확인해 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발꿈치를 들고 계단으로 올라가 복도 제일 끝 오른쪽에 있는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오래 전에 가정교사가 쓰던 방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계획이 성공한 데 미소를 지으며 장갑을 벗어 조그만 서랍장 위로 던졌다. 곧장 집으로 가겠다는 조르단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밤 무슨 벌을 계획하고 있는진 모르지만 조르단이 벌을 주려고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그녀는 그 방에 없을 것이다.

조르단이 얼마나 화를 낼까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오늘밤 남편을 피할 길이 없었다.

팬로즈가 외할아버지의 시계를 팔아 돈을 얼마나 받아 올지 모르겠지만 그 돈을 가지고 내일 아침 조르단이 집을 나가는 대로 두 명의 충실한 하인을 데리고 런던을 떠날 작정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드레스를 벗고 침구류도 없는 좁은 침대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눈을 감았다. 피로와 혼란 속에서 오늘밤 조르단의 행동을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심하게 화를 낼 수 있으며, 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망신시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철저히 자신을 억제할 수 있을까?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은 그녀가 그의 집에서 그를 피해 숨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한때는 그이 뒤를 따라 죽으려고 생각했건만 이제 그녀는 그를 피하고 있다.

조르단이 무도회장을 막 나가려는 데 캠던 경이 도착했다. 멜라니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조르단이 알렉산드라와 마차를 함께 타고 갈 생각으로 한 시간 전에 마차를 미리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캠던 경은 그에게 집에까지 태워 주겠다고 자청했다. 곧 캠던의 마차가 3번지에 도착했고 조르단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알렉산드라를 생각하느라 집 앞길 맞은편 어둠 속에 마차가 한 대 서있었지만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부는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딘지 낯익은 데가 있었다. 위기를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둘째 계단에서 몸을 돌려 존 캠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했다. 순간 깡마른 마부의 시커먼 형체가 그를 향해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르단은 재빨리 몸을 숙였다. 총알이 그의 바로 왼쪽에 떨어졌다. 놀란 캠던이 맞은편에 있던 저격범을 곧 추격해 갔으나 그는 벌써 브룩 가로 들어오는 화려한 마차들 사이로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에드워드 포키스는 시계를 보았다. 그는 문제가 확대되는 걸 원치 않는 귀족 고객을 위해 미묘한 범죄를 전문으로 다루는 수사관이었다. 거의 새벽 한 시가 가까웠다. 그는 어제 두 차례에 걸친 살인미수와 그 배후자가 누군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호손 공작과 마주앉아 있었다.

한잠 자고 아침에 아내를 데리고 호손으로 떠날 작정이오. 암살범이 도망가기에는 시골보다 복잡한 도로가 있는 런던이 훨씬 수월하겠지. 만약 내 생명만 위태롭다면 굳이 런던을 떠나지 않겠소. 하지만 내 사촌이 배후에 있다면 그는 분명 내 후계자가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을 거요. 그러므로 내 아내도 역시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오.”

포키스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손 영지에서라면 저희 요원들이 마을 주변을 배회하는 낯선 인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감시도 훨씬 수월하구요.”

당신의 주된 임무는 내 아내를 보호하는 것이오. 일단 호손에 간 뒤 누가 숨어서 이 일을 조정하고 있나 잘 생각해 보겠소. 내일 우리가 탄 마차를 수행하도록 요원 네 명을 배치하시오. 수행원을 포함해 모두 열두 명이 가게 될 거요.”

오늘밤 공작님을 쏜 사람이 사촌동생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좀 전에 그가 오늘밤 화이트 클럽에도, 린드워디 무도회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르단은 피곤하다는 듯이 경직된 목덜미 근육을 주물렀다.

그자는 내 사촌동생이 아니었소. 내 사촌동생보다 훨씬 체격이 작았으니까. 더구나 앞에도 말했지만 꼭 내 사촌동생이 배후에 있다고 볼 수도 없소.”

오늘아침 늙은 그랭거필드 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그는 혹시 그가 살인을 청부한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알렉산드라를 처음 만나던 날 있었던 첫 번째 습격은 결투로 그랭거필드에게 상처를 준 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살인의 가장 보편적인 동기로는 복수를 위한 것과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 두 가지가 있죠. 공작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덕을 많이 볼 사람은 공작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예전보다 지금은 덕볼 게 더 많죠.”

조르단은 그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알렉산드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알렉산드라? 오늘밤 자기를 쏘려 했던 저격범이 왠지 낯익고 가냘펐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자는 여자일 수도 있다.

뭔가 중요한 생각이 나셨습니까?”

수사관은 조르단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물었다.

아니오.”

조르단은 잘라 말하고 벌떡 일어났다. 알렉산드라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결혼에서 자유로워지고 말 거예요.”

포키스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혹시 오늘밤 공작님을 쏘려했던 사람이 작년 봄에 모샴에서 공작님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아닐까요? 그때 공작님은 그가 아주 체격이 작다고 하셨잖습니까?”

조르단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좀 전에도 말했지만 오늘밤 그 작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소.”

포키스가 나가자 조르단은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자기가 어떤 미치광이 살인마의 표적이라는 사실이 피곤하고 분하고 짜증났다. 그는 꾸벅꾸벅 조는 하인을 가서 자라고 보내고 천천히 셔츠를 벗었다. 알렉산드라가 옆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키스로 그녀를 깨울 걸 생각하니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의 방과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드레스룸을 지나 어두컴컴한 침실로 들어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새틴 침대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으로 달려와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삼십 분 뒤 호손 가의 전 하인이 졸리운 눈으로 응접실에 일렬로 서서 그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알렉산드라의 충복인 팬로즈는 없었다. 그 역시 아리송하게 행방불명이었다.

철저한 조사 끝에 조르단은 알렉산드라가 집 앞 계단은 올라가 열쇠로 문을 여는 걸 마부가 분명히 보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마부를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좋아.”

그는 서른 한 명의 하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하인이라고 알고 있는 안경 낀 노인만이 걱정스럽고 성난 얼굴로 머뭇거렸다.

조르단은 테이블로 가 병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술을 따르고 경멸스런 눈으로 필버트를 보며 술을 한 병 더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두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앉아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알렉산드라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없다고 해서 오늘밤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뒤집어씌울 수도 없었다.

무도회장에서 곧장 집으로 가겠다고 약속할 때 활짝 미소 짓던 걸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는 분명히 마부에게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게 하고, 다른 곳으로 간 게 분명했다. 무도회장에서 나오기 전에 분명히 애인에게 자기를 따라와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오늘밤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위협한 걸 생각하면 그녀의 행동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할머니 댁에 가 있는지 모른다. 조르단은 차츰 진정해 가며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술병을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그는 뚱한 얼굴의 하인을 보고 명령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하인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소? 당신의 여주인 말이오.”

노인은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 아가씨는.......”

조르단이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를 그 지위에 맞게 부르시오. 그녀는 호손 공작부인이오!”

그래서 아주 잘됐군요!”

노인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조르단은 갑자기 생전 처음으로 하인이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에 어이가 없어 화를 내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지요.”

필버트는 테이블에 병을 꽝 내려놓으며 말했다.

호손 공작부인이라는 자리는 아가씨를 가슴 아프게만 했어요! 공작님은 아가씨의 아버지만큼 나빠요. 아니 더 나빠요! 아가씨의 아버지는 아가씨를 가슴 아프게만 했어요. 하지만 공작님은 아가씨를 가슴 아프게 할 뿐 아니라 아가씨의 기까지 꺾으려 하고 있어요!”

필버트가 돌아 나가려 하자 조르단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이리로 오시오!”

필버트는 그이 말대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양주먹을 불끈 쥐고 알렉산드라를 만나는 날부터 그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남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가 아가씨에게 불리한 소리를 하리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큰 오산이예요!”

조르단은 이 건방진 하인을 당장 보따리 싸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싶었다. 그는 성질을 꾹꾹 참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여주인에 대한 내 태도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을 하는 게 현명할 거요.”

조인은 아직 뚱한 얼굴이다.

지금 기분 같아선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내 눈에 띈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고 싶소.”

노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어렵게 침을 삼켰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위협만으로는 필버트의 입을 열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천하의 호손 공작이 손수 술을 따라 비천한 하인에게 사나이 대 사나이를 대하는 목소리로 술을 권했다. 다른 귀족들이 보았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 내가 당신의 여주인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데 난 그럴 생각 없었소. 그러니 한잔 마시고 어떻게 해서 내가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인지 말해 주시오. 그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소?”

필버트는 의심쩍은 눈으로 공작의 얼굴과 그가 내민 술잔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술잔을 잡았다.

한잔하는 동안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조르단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아가씨의 아버지는 이 세상 최악의 건달이었어요.”

필버트의 말에 공작은 모욕감을 느끼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필버트는 천천히 술을 한 모금 꿀꺽 넘기더니, 노골적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이게 무슨 술입니까?”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술이오.”

다른 사람들은 절대 좋아하지 않겠군요. 맛이 아주 형편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소. , 그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소?”

혹시 맥주 있으세요?”

없는 것 같은데.”

위스키는요?”

있소. 저기 캐비닛에 있으니 마음대로 드시오.”

마지못해 하는 노인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데 여섯 잔의 위스키와 두 시간이 필요했다. 필버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조르단은 셔츠 단추를 반쯤 열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가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육칠 주쯤 지났을 때 멋진 마차 한 대가 집 앞에 서더니 아름다운 숙녀 한 분과 예쁘장한 금발 소녀 하나가 내렸어요. 알렉스아가씨가 문을 열어 줄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숙녀는 사실 숙녀도 아니었어요. 아주 뻔뻔스럽게 자기가 로렌스의 아내였으며 그 소녀는 자기 딸이라고 하더군요.”

조르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중 결혼을 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두 명의 로렌스 부인이 싸우는 걸 보셨어야 하는데, 하지만 알렉스 아가씨는 화내지 않았어요. 아가씨는 그냥 가만히 금발 소녀를 쳐다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참 예쁘구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금발 소녀는 콧대만 세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소녀가 알렉스 아가씨가 목에 걸고 있던 하트 모양의 양철 목걸이를 보았지요. 그건 아가씨의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아가씨는 그걸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셨죠. 그리고 그걸 늘 목에 걸고 만져 보면서 혹시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셨죠. 금발 소녀가 알렉스아가씨에게 그 목걸이를 아버지가 사주었느냐고 물었어요. 알렉스 아가씨가 그렇다고 하자 소녀는 자기 목에 걸고 있던 금목걸이를 꺼내 보여 주었어요. 그 끝에는 하트모양의 금으로 된 로켓이 달려 있었어요. 금발 소녀는 <아빠가 내게는 금목걸이를 사주셨어. 그런데 네 것은 낡은 양철 목걸이야.>라고 했지요. 저는 그녀를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어요.”

필버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저는 제 방으로 가서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답니다.”

조르단은 전에 없이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그 다음날 아침 알렉스아가씨는 언제나처럼 아침 식사하러 내려와서 언제나처럼 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목걸이를 선물받고 처음으로 목에 그 목걸이를 걸지 않았어요. 그리고 다시는 그 목걸이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그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조르단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작님은 늘 아가씨의 가슴을 아프게만 만들었어요. 이제 팬로즈와 제가 나서서 일을 수습할 작정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조르단은 비틀거리며 술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필버트가 빈 잔을 내밀자 조르단은 순순히 그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아가씨는 공작님이 죽었다고 믿고 눈물로 살았어요. 그때를 잊을 수 없어요. 어느 날 공작님의 시골 별장에서 그린 공작님의 초상화 앞에 서있는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매일 그 초상화 앞에서 몇 시간씩 보내곤 했었죠. 아가씨는 공작님을 가리키면서 눈물을 참으며 내게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저 초상화를 좀 보세요, 필버트. 그분은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

필버트는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밥맛없다는 듯 코를 훌쩍거렸다. 그것은 그가 조르단의 외모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어쨌든 알렉산드라가 자기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놀라운 소식에 상당히 마음이 풀어진 조르단은 자기 외모에 대한 노인의 과소평가를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계속해 보시오.”

필버트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아가씨는 공작님과 사랑에 빠졌어요. 하지만 런던으로 와서 공작님이 아가씨와 한집에서 살지 않으려 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공작님이 그냥 연민에서 아가씨와 결혼하셨던 것두요. 그리고 아가씨 아버지가 아가씨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데번에 처박아 두려고 했던 것도 말입니다.”

그녀가 데번에 대해 안단 말이오?”

조르단이 깜짝 놀랐다.

다 알고 있어요. 공작님의 멋쟁이 친구 분들이 공작님을 그리워하는 아가씨를 뒤에서 비웃는 바람에 안토니 경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죠. 공작님이 애인에게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또 그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소문을 냈기 때문에 공작님이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두들 다 알고 있었어요. 공작님은 그걸 정략결혼이라고 하셨다고 하더군요. 공작님은 아가씨를 수치스럽게 만들었고 또 다시 울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이제 다시는 아가씨에게 상처를 줄 수 없을 거예요. 이제 아가씨는 공작님이 거짓말쟁이 바람둥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필버트는 여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위엄 있게 말했다.

아가씨에게도 말했지만 공작님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씨는 공작님을 발견하던 그날 밤 공작님이 살해되도록 그냥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노인은 그렇게 독한 술을 많이 마시고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방을 나갔다.

한동안 멍하니 빈 잔을 바라보고 있던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의 태도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그 이유를 차츰 알 것 같았다. 필버트의 간략하지만 웅변적인 설명대로 가냘픈 알렉산드라가 호손에 있는 자기 초상화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알렉산드라가 상심한 가슴을 안고 런던으로 오는 모습과 그가 생각 없이 장난으로 한 농담을 사람들에게 소문내고 다닌 조소 어린 엘리제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동안 후회와 안도감이 밀려왔다. 알렉산드라는 그를 사랑했었다. 그가 간직하고 있었던 자기를 사랑하던 매혹적인 순진한 소녀의 모습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행히도 그녀에게 상처를 안겨 줬지만 그것은 회복될 수 없는 상처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 설명을 믿어 주리라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의 경계심을 풀고 다시 그를 사랑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울 전략을 짜는 동안 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아침 아홉 시경, 알렉산드라가 노부인 댁에 들리지 않았다는 하인의 전갈을 받고 조르단은 초조해지지 시작했다. 그로부터 삼십 분 뒤 노부인이 직접 그의 서재로 찾아와, 알렉산드라가 도망간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고압적이고 눈치 없고 양식이 부족한 위인이라고 몰아세웠다.

알렉산드라는 간밤에 입었던 드레스를 다시 입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다음 발꿈치를 들어 바깥 동정을 살펴본 뒤 재빨리 복도를 지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만약 조르단이 지난 이틀간의 오전 시간표대로 움직인다면 지금쯤 틀림없이 서재에서 사람들과 사업을 의논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필버트와 팬로즈를 데리고 남몰래 이 집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옷장으로 가 옷장 문을 열었다. 여행복 한 벌만 제외하고 옷장 안이 텅 비어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화장대 위에 있던 향수병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방을 잘못 찾아왔나 생각하며 방을 돌아보는데 문이 열리며 하녀가 들어오다가 비명을 질렀다.

알렉산드라가 말릴 틈도 없이 하녀는 발코니로 달려갔다.

마님이 돌아오셨어요!”

그녀는 발코니 너머로 히긴스에게 외쳤다.

조르단과 마주치지 않고 도망갈 궁리를 하던 알렉산드라는 더럭 겁이 났다. 사실 남편과 마주칠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마리!”

그녀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벌써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는 하녀를 불렀다.

공작님은 어디에 계시지?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어.”

서재에 계십니다.”

조르단은 책이 빽빽이 꽂힌 서재를 우리에 갖힌 사자처럼 왔다갔다하며 알렉산드라가 어디서 밤을 보냈건 간에 무사히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면서, 혹시 그녀가 다치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다.

알렉산드라는 자기와 마주치는 순간 호크가 벼락같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저를 보고 싶으시겠죠?”

조르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표정이 반가움과 안도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그는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알렉산드라는 한숨 푹 자고 난 신선한 얼굴로 자기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다시는 당신의 약속을 믿지 않겠어!”

알렉산드라는 겁이 나서 뒷걸음질 치고싶은 것을 참았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공작님. 집으로 바로 와서 곧장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의 긴장한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거짓말하지마.”

전 가정교사 방에서 잤어요. 꼭 제 방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잖아요.”

조르단은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정반대로 그녀를 껴안고 그녀의 독창적인 반항에 웃음을 터뜨리고도 싶었다. 그가 아래층에서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그녀는 위층에서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그는 화난 얼굴로 말했다.

당신 항상 이런 식이었어?”

이런 식이라뇨?“

알렉산드라는 그의 기분을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평화를 깨뜨리는 것.”

그게 무슨 뜻이죠?”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지.”

그는 그녀쪽으로 다가왔다. 알렉산드라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지난 열두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나는 화이트 클럽에 모여있는 내 친구들에게서 무례하게 등을 돌리고 나왔어. 그리고 댄스 플로어에서 사람들이 보는 데서 싸움을 했어. 또 나보다 술을 더 잘 마시는 하인에게 질책을 당했어.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할머님께 일장 훈계를 들었어. 할머님은 난생처음 이성을 잃고 고함에 가깝게 언성을 높이셨어!”

알렉산드라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당신 혹시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당히 질서 정연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 그러나 당신을 만난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

그의 연설은 히긴스가 노크와 동시에 서재로 뛰어 들어와 중단되고 말았다.

공작님! 경관이 공작님이나 공작부인을 개인적으로 꼭 만나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꼼짝 말고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경고하는 뜻으로 말없이 알렉산드라를 한 번 노려본 뒤 조르단은 급히 서재를 나갔다. 이 분 뒤 그는 우습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하다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왔다.

뭐가....... 뭐가 잘못됐나요?”

그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아 그녀는 대담하게 물어 보았다.

별로. 당신에게는 전형적인 하루 일과로 흔히 있을 수 있는 평범하고 작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지.”

무슨 사건요?”

알렉산드라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르단이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하려 한다는 걸 의식하고 물었다.

당신의 충실한 늙은 집사님께서 방금 경관의 보호 아래 우리 집으로 오셨어.”

팬로즈?”

그래 그 사람이야.”

그런데..... 그가 어떻게 했는데요?”

어떻게 해? 어제 본드 가에 가서 내 시계를 팔려다가 현장에서 잡혔지.”

조르단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알렉산드라의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금시계와 금줄이 매달려 있었다.

중혼에다 절도에다 도박이라.”

조르단은 아이러니컬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지? 강탈?”

그건 당신 시계가 아니에요.”

알렉산드라는 자유를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발 돌려주세요. 그건 제 거예요.”

조르단은 놀랍다는 듯이 눈썹을 한군데로 모아 세우며 손을 내밀었다.

난 당신이 그걸 내게 선물로 준 걸로 알았는데.”

당신은 거짓 행위로 그걸 받았어요.”

알렉산드라는 화를 내며 시계를 잡으려 했다.

저의 외할아버지는 고상하고..... 온화하고..... 애정 있는 점잖은 분이었어요. 그분의 시계는 그런 사람에게 가야 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알겠어.”

조르단이 조용히 말했다. 갑자기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며 그녀의 내민 손바닥 위에 시계를 놓았다.

고마워요.”

알렉산드라는 그 시계를 돌려받자 그에게 상처를 준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는 심장이 없으니까 아마 자아에 상처를 입었겠지......

팬로즈는 어디에 있어요? 제가 경관에게 설명해야겠어요.”

만약 내 명령대로 했다면 자기 방에 있을 거야.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을 생각하면서 말이야.”

차가운 가슴에 권위적인 남편이 경관에게 가엾은 팬로즈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으리라고 믿고 있던 알렉산드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만 했어요? 그냥 자기 방에 가서 반성하라구요?”

내가 어떻게 장인 같은 사람을 지하 감옥에 가두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

오늘아침 조르단의 이상한 태도에 알렉산드라는 완전히 얼이 빠져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전 당신이 그럴 수 있고 또 그랬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당신이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지, 알렉산드라.”

그는 분명히 온화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분명히 그 점을 시정하도록 할거야, 우선.......”

그는 하인들이 그녀의 것을 포함해 몇 개의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한 시간 내로 호손으로 떠나면서부터 시작할거야.”

알렉산드라는 몸을 돌려 그녀의 트렁크를 보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반항으로 불타고 있었다.

전 가지 않겠어요.”

내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면 당신도 함께 가겠다고 동의할 것으로 생각해. 그러나 먼저 왜 팬로즈가 나의, 아니 당신 외할아버지의 시계를 팔려고 했는지 알고 싶어.”

알렉산드라는 주저했다. 그리고 침묵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당신은 분명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조르단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왜 돈이 필요했을까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 첫째는 당신이 내게 반항하는 보다 큰 내기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 그건 내가 분명히 안 된다고 했었지. 따라서 솔직히 난 당신이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지 않아.”

그는 자기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리라고 가정하는데 알렉산드라가 화낸 표정을 짓자 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당신이 또 내기를 하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금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어. 난 다만 당신이 다시 내게 반항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지.”

갑자기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정다워 그녀는 그에게 미소로 답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갑자기 돈이 필요한 이유가 이틀 전 당신이 내게 말한 대로 내게서 떠나 혼자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정말 그래?”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이해심으로 넘쳐 있어 알렉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그렇다면 내가 당신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그건 당신의 도박 성향에도 부합할 거야. 말해도 돼?”

그는 정중히 물으면서 그녀에게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

알렉산드라가 의자에 앉자 그는 책상에 기대섰다.

"당신에게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돈을 주겠어, 만약 세 달 후에도 내곁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아주 간단해. 앞으로 세 달 동안 당신은 아주 고분고분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해 줘야 해. 그 동안 난...... 어떻게 말할까,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서 당신이 내 곁을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들어 볼 테니까. 만약 내가 그렇게 못하면, 당신은 세 달 뒤에 떠나도 좋아. 간단해.”

안돼요!”

알렉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조르단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유인하고 유혹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사랑스런> 아내가 되어 달라는 그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은밀한 은유에 그녀의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빨개졌다.

<마법>에 걸릴까 봐 두려워?”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내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지? 당신을 내 곁에 묶어 두는 데 한 재산을 걸겠다는데. 분명히 당신은 내기에서 질까 봐 걱정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주저할 이유가 없지.”

..... 몇 가지 생각해볼 일도 있고......”

그녀는 너무 떨려 말문이 막혔다.

아 그래, 남편으로서 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다 보면 당신에게 아기를 임신시킬 수도 있다 이거지, 그래?”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가능성에 실망과 두려움이 더해지면서 알렉산드라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빨개진 얼굴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생기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더구나 우리의 내기는 당신이 아무 저항 없이 나를 당신 침대에 받아 준다는 조건아래 발효되는 거야. 달리 말하자면 만약 당신이 고함을 지른다거나 나를 거부한다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당신이 지는 거야.”

미쳤군요.”

알렉산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결혼 생활을 끝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것 같군. 세 달이면 너무 짧아. 지금 생각해 보니 여섯 달이 적당할 것 같아.”

세 달이면 충분하고도 남아요.!”

좋았어. 그러면 세 달로 하지. 세 달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 그 대가로, 얼마로 할까...... , 오십만 파운드쯤으로 할까?”

알렉산드라는 떨리는 손을 꽉 쥐고 뒤로 숨겼다. 기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면서 아찔했다. 오십만 파운드.... 오십만 파운드.... 그렇게 큰 돈을!

단지 그를 받아 준다는 대가로.

그녀에게 돈을 줌으로써 그는 돈을 지불해 처리하는 다른 정부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취급하려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조르단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만약 내기에서 진다면 그 돈을 좀 늦었지만 내 목숨을 구해 준 대가라고 생각해.”

그 말에 자존심이 회복되면서 알렉산드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상당히 변칙적인 조항이에요.

우리의 결혼자체가 여러모로 상당히 변칙적이었지. 자 그럼, 우리의 내기를 문서로 작성할까 아니면 약속을 지킨다고 서로 믿어 보기로 할까?”

믿는다구요!”

알렉산드라가 조소했다.

당신 입으로 당신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는 침대에서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녀를 믿으라고 말했었다. 또 사랑은 믿음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면서 그도 그들의 대화를 기억해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르단은 중요한 결정을 하려는 사람처럼 주저했다. 그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난 당신을 믿어.”

그 말 세 마디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자기를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을 못 본 척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부드럽게 나올 때면 이상하게도 적개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남편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은 냉정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의 내기를 고려해 보겠어요.”

그렇게 해.”

하인들이 그들의 트렁크를 들고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그의 눈은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이 분이면 충분할까?”

그는 서재 밖 분주한 복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라구요!”

우린 한 시간 내로 호손으로 떠날 거야.”

하지만..... ”

알렉산드라, 당신에겐 대안이 없어.”

조르단은 조용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이미 자기 것이라고 믿고 있는 승리를 자축하고 싶었다.

알렉산드라는 화가 나면서도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디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 집안은 자손이 흔치 않아요......

그럼 좋아요.”

그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로디의 그 다음 말이 생각났다. 시도를 적게 해서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얼굴이 빨개졌군.”

조르단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라도 얼굴이 빨개질 거예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세 달 동안 음..... ..... ”

내 품에서 벌거벗고 지낼 걸 생각하면?”

그녀는 바위라도 뚫을 듯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감수해야 할 위험을 생각해 보라구. 만약 내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당신의 육체, 아니 아름다움에 노예가 된다면? 그런데 당신은 내 돈과 합법적인 후계자를 데리고 내 곁을 떠난다면?“

당신은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눈꼽만치도 믿지 않잖아요.”

알렉산드라가 화를 냈다.

아니야.”

알렉산드라는 자신만만하게 싱긋 웃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조르단은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해다.

합의를 하기 전엔 나갈 수 없어. 내기를 할까, 아니면 세 달 후에 내 곁을 떠난다 해도 보상금 한푼 못 받도록 당신을 강제로, 필요하다면 호위병을 붙여서 호손으로 데리고 갈까?”

내기를 하기로 하죠.”

그럼 모든 조건에 합의하는 거지?”

싫지만요, 공작님.”

그녀는 차갑게 말하고 그에게서 팔을 뺀 다음 방을 나가려 했다.

조르단

그가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알렉산드라가 돌아보았다.

뭐라구요?”

내 이름은 조르단이야,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그는 경고조로 과장해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기한 지 오 분도 안돼 내기에 지는 일이 없도록 좀 조심해. 당신은 아주 고분고분한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어. 당신에게 내 이름을 부르라고 명령하겠어.”

그녀는 죽일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예쁘게 까닥이며 말했다.

원하신다면요.”

그녀가 아무 호칭으로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벌써 방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조르단은 곧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 비록 마지못해하기는 하지만 -- 아내와 함께 전원에서 보낼 만족스런 시간들을 생각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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