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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시간에 서서 1

Bollnow 2024. 3. 7. 05:56

영원의 시간에 서서

S. O. L. Lagerlof

 

1부 선조의 도움

 

잉그마르손 집안

 

빛나는 태양이 내리 쬐이는 어느 여름날 아침, 한 농부가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었다. 풀잎에 고인 이슬이 반짝이고 대기는 형용할 수 없이 가볍게 온누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싱그러운 아침 바람, 쟁기를 짊어진 말도 즐거운지 신나게 밭 위를 달려 농부도 거의 뛰다시피 뒤를 따라야 했다. 쟁기로 파헤쳐진 검고 기름진 흙은 습기를 머금고 있어 곧바로 귀리를 심어도 되었으므로 농부의 마음은 매우 흡족해졌다.

'모든 게 잘되어 가는데도 내 마음은 왜 늘 우울하단 말인가?'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햇빛과 맑은 날씨, 좋은 땅이 있는데 무얼 더 바라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골짜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슨 평원과 같은 초록과 노랑 빛의 밀밭이 아득히 펼쳐있고, 알맞게 베어낸 클로버의 목초지가 잇닿아있으며, 한창 꽃이 만발한 감자밭과 아마밭에는 수많은 흰나비가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풍경이 바로 마을의 전부인 셈이다. 펼쳐진 풍경의 한복판에는 잿빛 창고와 붉은색 집들로 이루어진 농장 건물이 한폭 풍경화의 완성을 위한양 우뚝우뚝 서 있었다. 그중 한 주택가에는 가지가 축축 늘어진 배나무 두 그루가 높이 솟아 있고, 문전에는 한 쌍의 자작나무가 싱그럽게 서 있었다.

풀로 덮인 뜰에는 잘 쌓인 장작더미가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창고 뒤에는 겨울을 위해 말리고 있는 건초더미가 여기저기 큼직하게 쌓여 있었다. 이 농장 건물은 밭이 전부 내려다보이도록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여러 개의 돛단배가 넓은 바다 위에 두둥실 떠있는 것처럼 매우 근사하게 보였다.

'그래, 정말이지 나는 더 이상 비길 데 없는 농장을 상속받았어.'

밭을 갈다가 농부는 저편의 집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훌륭한 집에다 많은 창고, 튼튼한 말과 소, 또한 온순하며 일 잘하는 하인에다 나 역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망할 염려는 없고, 결국 두려워하는 건 가난이 아니란 말야'

농부는 상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열심히 밭을 갈았다.

'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젠장, 그런데 왜 이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지 모르겠군.'

젊은 농부는 머리를 흔들었다.

'방금만 해도 무척 행복한 기분이었는데.... 그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따랐어. 건초를 장만하면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 일을 시작했고, 놀리던 땅을 일구기 시작하면 사람들도 골짜기마다 쟁기질을 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말야. 두 시간이 넘도록 내가 밭을 가는데도 아무도 따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도 잉그마르손 집안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농장 일을 잘 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건초만 해도 그래. 과거의 아버지 때보다 넉넉히 준비할 수 있지. 아버지가 농장을 가로질러 파놓은, 잡초를 막기 위한 고랑도 그냥 두진 않아 물론 아버지도 농토로 넓히려고 불을 지르겠다고는 했었어. 하지만 사람들도 나라고 해서 숲을 잘못 관리한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이따금 많은 일들이 견딜 수 없이 나를 괴롭혀.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 사람들은 그분들이 교구를 다스려 주길 진심으로 원했어. 잉그마르손 집안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떻게해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목사를 임명하고 교회에 하인을 두는 것부터 학교는 어떤 장소에서 세울 것이며 도랑은 언제 만들 것인가를 전부 그분들이 결정하셨어. 하지만 누구도 나에게는 의논하려고 들질 않아. 어떠한 일에든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단 말야. 어쨌든 우습긴 하지만 지금 같은 괴로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어. 돌아오는 가을엔 극도로 악화될 것만 같은 나의 상황을 생각하면 웬만한 일은 견딜 수 있지. 만약에 내가 마음먹은 대로 어떤 일을 해버린다면, 일요일 날 교회에서 만날 목사님이나 판사님은 내 손조차 잡아주려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바라는 교회 집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지금의 빈민 위원직을 그만둬야 할 테지'

쟁기를 따라 밭고랑 사이를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무엇엔가 골몰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홀로 앉아 있거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곤 풀쩍대며 벌레를 잡아먹는 까마귀뿐인 곳이라면 누군가 귓전에 속삭여 주기라도 하듯 절로 생각이 풀리겠지만, 그런데 극히 드물게도 이날만은 쉽게 명중한 생각이 떠올라 그는 기쁨으로 힘이 솟구쳤다. 누구도 자신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길 바라고 있지 않다는 것과더불어 자기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옛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만일지금도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다면 이 문제를 의논할 수 있을 텐데.... !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길만 있다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재미있어 하며 중얼거렸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내가 각고 끝에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치자. 위대한 잉그마르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살아계실 때 언제나 그랬듯이 검정 소나 얼룩소는 한 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을테구. 그렇지만 많은 붉은 소와 목초지, 넓은 밭과 여러 개의 헛간이 딸려 있는 거대한 농장 주인이 돼 있겠지. 그래 내가 그 집안으로 들어간다면....'

농부는 고랑 한가운데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향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하늘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이나 즐거웠다. 한순간 천국에 있을 늙은 아버지에게로 불쑥 끌어올려지는 듯하기도 했다.

내가 거실로 들어가니 많은 농부들이 벽에 붙여진 의자에 앉아 있다. 모두 눈썹이 하얗고 노랑 머리에 아랫입술이 두텁다. 한결같이 아버지와 비슷한 게 마치 완두콩 알들이 닮은 것과 같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으므로 나는 들어서지 못한 채 부끄러워 문밖에서 쭈삣거린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아, 어서 오너라."

테이블 상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곤 벌떡 일어서서 내 앞으로 다가온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여기엔 제가 모르는 분들이 많겠군요."

"그렇다. 그러나 모두 친척이지. 잉그마르 농장에 살던 사람들이야. 저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이교시대의 아주 먼 조상이란다."

"저어, 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에 잠겨 옆방으로 가야 할지 어떨지를 궁리하는 듯싶더니 주방으로 들어간다. 난로 옆엔 아버지가 앉고 나는 작두대에 걸터앉는다.

"아버지는 여기서도 좋은 땅을 소유하셨군요."

"좋은 편이지. 집의 일은 요즘 어떠냐?"

"모든 게 순조로와요. 작년에 1톤의 건초로 12크로네의 수입을 올렸어요."

"그래? 잉그마르, 날 놀리러 왔느냐?"

"하지만 저는 많은 어려운 일들로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만큼이나 현명했다고 말하면서도 조금도 저의 일은 보살펴 주지 않아요."

"너는 마을의 참사회원이 아니냐?"

"저는 학무위원회에도 교구위원회에도 나가지 않아요. 마을의 참사위원은 물론 아니구요."

"마을 사람에게 무슨 좋잖은 일을 저질렀기에 그러냐."

"타인에게 지도할 사람은 우선 자신의 일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나는 아버지가 깊은 생각에 잠겨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잠시 후 아버지는 "잉그마르야, 이젠 네게도 아내가 있어야겠구나. 사랑스럽고 얌전한 처녀와 혼례를 치러야 하겠어"라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저는 바로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농사꾼 중엔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도 저에게 딸을 내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답니다."

"도대체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느냐. 잉그마르, 너의 상황을 차근차근하게 얘기해 보아라"

아버지가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건네온다.

"실은 4년 전, 제가 아버지의 농장을 물려받던 해에 베리스코그의 브리타에게 구혼을 했었지요."

"가만, 우리 일족이 베리스코그에도 살았던가?"

그는 지상에서의 일들은 아득히 잊고 있는 듯하다.

"우리 일족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브리타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걸 아버지도 기억하시겠죠?"

"그래, 그렇지. 그러나 네가 우리 집안사람과 결혼을 했었으면우리의 관례 관습을 잘 아는 부인을 얻었을 게다."

", 아버지, 하지만 저는 그러구 싶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버지와 나는 잠시 말을 멈춘다. 이윽고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그 처녀는 물론 아름다웠겠지?"

"그렇습니다. 검은 머리에 분홍빛 얼굴, 맑고 깊은 눈을 가진 아가씨였지요. 게다가 아주 영리해서 어머니도 매우 기뻐하시기에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랬지만 불행하게도 그 아가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어린것이 좋고 좋지 않고가 어디 있어."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그녀에게 억지로 결혼하도록 했으니까요."

"억지로 승낙시켰다는 걸 너는 어찌 알았느냐.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아, 사실 그 처녀는 너와 같은 부자 남편을 얻게 된 게 즐거웠을 게다."

"아닙니다. 기뻐하는 기색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어쨌든 약혼식이 거행되고 결혼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몸이 몹시 쇠약해 있었으므로 브리타는 잉그마르 농장에 와서 어머니를 거들었지요."

"잉그마르야, 그런데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단 말이냐?"

나를 격려하듯 아버지가 묻는다.

"그런데 그해에 암소는 병이 나고 감자를 비롯한 모든 농작물은 흉작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결국 결혼식을 1년 뒤로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약혼은 이미 했겠다. 결혼식 같은 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던 거지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조금 잘못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일족 중에서 선택했다면 일이 잘 풀렸을 텐데."

"그렇겠지요. 아무튼 브리타가 결혼식 연기를 원치 않고 있음을 알긴 했지만 그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은행 돈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고, 게다가 봄에는 장례식도 있었으니까요."

"기다리기로 한 것은 네가 잘한 일이다."

"그래도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브리타가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우리들의 아이를 낳고 싶진 않으리라 생각되었으니까요."

"수입이 있을지 없을지를 먼저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하는 거다."

"브리타는 날이 갈수록 우울해졌어요. 브리타가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집이 그리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브리타는 고향과 부모 생각이 간절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차차 우리들과 익숙해지면 머지않아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동안 브리타 문제를 갖고 혼자서만 끙끙 앓다가 마침내 어머니께 여쭈었지요. 브리타가 왜 그렇게 눈매가 날카롭고 안색이 좋지 않은가고요. 어머니는 그녀가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 후엔 다시 좋아질 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결혼식을 미룬 것이 못마땅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그녀에게 직접 묻는다는 것이 웬지 두려웠어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제가 결혼하는 해엔 집을빨간 페인트로 새로 칠해야 한다는 것도 영 자신이 없었답니다. 기운이 없었어요. 그때 저는 내년엔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요."

농부는 걸음을 옮기며 정말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줄곧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분명하고 진실되게 모든 상황을 말하지 않으면 안 돼. 아버지는 내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고 또 지나갔는데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브리타가 계속 슬퍼한다면 차라리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곤 했지요.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5월 초 어느 날 밤, 브리타가 없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들은 밤이 새도록 찾았지만 아침에야 한 하녀에게 발견되었어요."

"망할 것! 그래 죽었단 말이야?"

"죽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대답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아챈다.

"아이를 낳았더냐?"

", 그런데 아이는 이미 목이 졸려 죽은 채 브리타 옆에 뉘어져 있더군요."

"정신이 나갔던 게야."

"아닙니다. 자신도 잘 알고 한 짓이랍니다."

내가 설명을 계속한다.

"만일 결혼식을 올렸다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아뭏든 제가 무리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앙갚음을 한 셈이죠. 브리타는 저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답니다. 결혼 전에 아이를 낳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 거지요."

"너는 너의 아이를 기뻐했더냐, 잉그마르야?"

"그렇습니다."

"안 됐구나. 좋지 않은 계집과 사귄 게 잘못이다. 여자는 물론 감옥살이를 했겠구나."

"3년 형입니다."

"그래, 그 일들이 누구도 네게 딸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더란 말이냐?"

", 저도 새로운 여자를 얻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교구에 네 직위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냐?"

"모두들 브리타에 대한 제 태도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처럼 사리에 밝았다면 브리타와 얘기를 해서 무엇을 괴로워하는가를 알아냈을 거라고들 합니다."

"아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좋고 나쁜 여자를 쉽사리 구분하지 못한다."

"아닙니다, 아버지. 브리타는 나쁘지 않아요. 단지 오만할 뿐이지요."

"결국 같은 얘기다."

"사람들은 제가 브리타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아이가 죽어서 태어난 것처럼 꾸몄어야 했다고들 하던데요."

"여자가 왜 벌을 받아선 안 된다는 거지?"

"모두 한결같은 의견이에요. 아버지라면 분명히 그녀를 처음 찾아낸 하녀에게 조심하도록 하여 뭇사람들 귀에 그 사실이 새어들어 가지 않도록 했을 거라는 생각이지요."

"그렇다면 넌 브리타와 결혼을 할 수 있었겠냐?"

"천만에요. 그럴 까닭이 없겠지요. 빠른 시일 안에 그녀를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파혼했을 거예요. 브리타가 우리 집에선 늘 불행해 할 것이니 말입니다."

"옳은 생각이구나. 노인이 가지는 분별력을 너 같은 젊은이에게 바란다는 건은 어려운 일이지."

"마을 사람들은 제가 브리타에게 지독하게 했다고들 그럽니다."

"브리타 쪽이 나빴던 게다. 진실한 남자에게 되레 모욕을 줬어."

"아니에요. 제가 일방적이었죠."

"그 점이 브리타에겐 행운이었음을 깨달았어야지."

"그렇지만 브리타가 형무소로 간 것은 제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아버지?"

"내 생각엔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것 같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느릿느릿 얘기를 계속한다.

"브리타가 오는 가을에 출감하면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요?"

아버지는 잠시 동안 나를 건너다본다.

"태도를 취하다니, 결혼 말이냐?"

"그게 제 도리인 것 같거든요."

아버지의 눈길이 다시금 나를 주시한다.

"브리타를 사랑하냐?"

"아닙니다. 저의 사랑은 그녀로 인해 이미 상실됐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는다.

"아버지 저는 한 인간을, 누군가의 삶을 수렁에 빠지도록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침묵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제가 브리타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곳은 법정이었지요. 너무나도 온순해져서 아이 얘기만 하던 브리타! 저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불리한 증언도 없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만 있다는 겁니다. 법정 안은 사람들의 눈물로 가득했지요. 판사님도 감동해서 그녀에게 3년 이상은 선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녀의 입장으론 가을에 출감하면 부모를 만나는 일이 가장 괴로울 거예요. 고향 사람들도 그녀를 환영해 주지 않을 테고, 일가 사람들은 집안의 수치라는 생각으로 그녀를 괴롭히겠지요. 바깥출입을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교회에도 물론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이 없다.

"저도 그녀와 결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전통 있는 가문의 사내로서 집안의 종들조차 업신여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 못 되지요. 물론 어머니도 그러실 테구요.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는 집안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없겠지요."

"...."

"재판 때도 저는 브리타를 어떻게든 도우려고 했어요. 여자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억지로 오게 했던 내가 잘못이라고 판사님께 얘기했습니다. 또한 그녀가 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준다면 언제든 결혼할 생각이라고, 그녀가 저지른 죄는 아무렇지 않다고도 했어요. 가벼운 처벌을 바란다고 간절히 부탁하면서 말입니다. 그녀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내용을 보니 저에 대한 두드러진 감정표시는 전혀 없더군요. 그러니 제 입장에선 이미 뱉아버린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앉아 있을 뿐이다.

"사내로서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바도 있겠지만, 우리들 잉그마르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하긴 만일에 예수님이 살인자의 편을 드신다면 누구도 좋아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은 하지만요."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아버지, 사람을 괴롭히고도 구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편하게 지냈고, 그녀가 출감하는 마당에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급기야 눈물이 쏟아질 판이다.

"저는 아직 젊고, 그녀와 결혼할 경우 좋지 않은 일도 있겠지요. 안 그래도 사람들은 제가 일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앞으로는 더욱 그렇겠지요."

그래도 나는 아버지에게서 동조의 말을 한마디도 끌어내지 못한다.

"가끔 저는 다른 농장은 모두 주인이 바뀌었는데 우리 잉그마르는 어떻게 계속 눌러있을 수 있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건 우리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생을 살아가려고 했던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잉그마르는 인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단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그때 얼굴을 들며 아버지가 말한다.

"몹시 어려운 일이구나. 들어가서 다른 잉그마르손들과 의논을 해봐야겠다."

아버지가 거실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부엌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몇 시간쯤 그렇게 앉아 있던 나는 드디어 방을 가로질러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끈기 있게 기다려라, 잉그마르. 이건 쉽지 않은 문제다."

방안을 둘러보니 늙은 농부들이 생각에 잠겨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별도리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농부는 빙글거리며 쟁기를 따라갔다. 점점 쟁기는 느려지고 말들은 매우 지쳐 보였다. 그는 고랑 끝에 닿자 쟁기를 놓고 아주 진지한 기분이 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저절로 기막힌 생각이 떠오르다니. 3년 동안 꼬박 찾아도 찾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발견되다니.이건 분명 하나님의 뜻일 게야'

그는 이 일이 기필코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 금방 주저앉을 듯 가슴이 아팠다.

'주여! 도와주소서'

그때 밭을 가로지른 꾸불꾸불한 길을 한 노인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깨에는 자루가 긴 페인트 솔을 짊어졌고 모자에서 발끝까지 온통 붉은 페인트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사방을 둘러보며 칠이 필요한 농가를 찾고 있었으나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자그마한 언덕과 골짜기에 서 있는 잉그마르손 농장을 발견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외쳤다.

'저것 좀 보아. 까맣게 되어 버린 세월의 흔적을 거의 백 년은 칠을 하지 않았겠어. 곡물 창고엔 처음부터 페인트 칠을 하지 않았군. 내가 아무리 빨리 한다 해도 가을까지는 걸리겠어'

잠시 후 노인은 밭을 갈고 있는 한 농부를 보았다.

'좋아, 이곳의 주변 일을 모두 아는 이 마을의 농부 같은데 저 농가 일을 물으면 자세히 얘기해줄 거야.'

그는 길을 가로질러 밭으로 들어가 잉그마르에게로 다가가 이 근처에 칠을 할 만한 집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잉그마르는 깜짝 놀라 유령이라도 만난 듯 멍하게 노인을 쳐다보았다.

'! 이 사람은 분명 칠쟁이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금방 넋을 읽을 듯하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잉그마르님, 집이 너무 낡아서 새로 칠을 해야겠는데요." 라고 얘기하면, 아버지는 늘상 "잉그마르가 결혼하는 해에 칠할 생각이지" 하고 대답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 순간에 칠쟁이가 나타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노인이 그 말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는 동안에도 잉그마르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너무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비로소 그 사람들이 답변을 주는 것인가. 그리구 올해 나한테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전갈인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집에 칠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에 젖어서 밭갈이를 계속했다.

'아버지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것도 어려운 문제만은 아닐 게야'

2주일후, 잉그마르손은 마구를 손질하고 있었다. 일하는 품이 기분이 몹시 언짢고 귀찮은 듯했다.

'내가 예수라면....'

그는 마구를 한두 번 반복해 손질했다.

'내가 예수라면 말야, 결심이 섰을 때 곧바로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을 거야. 이토록 오래 고뇌를 주고 온갖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록은 하지 않아. 마차를 칠하고 마구를 씻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밭갈이가 끝나는 대로 곧장 진행했을 테지'

길 쪽에서 수레바퀴 소리가 나자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의 마차인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베리스코그에서 상원의원님이 오셨어요."

부랴부랴 새 장작에 불이 붙여지고 커피 가는 밀이 돌기 시작했다.

상원의원의 마차가 뜰안으로 들어섰으나, 그는 내리지 않고 마차 안에 그대로 앉은 채 말했다.

"아닐세, 안으로 들어가진 않겠네. 자네와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 왔네. 곧 교구 회의에 나가 봐야 하거든."

"어머니가 지금 새로 커피를 끓이시는데요."

"고맙네, 그러나 늦게 갈 순 없다네."

"무척 오랫만에 오셨는데 좀 들어가시지요."

잉그마르는 끈기 있게 권했다. 이때 잉그마르의 어머니가 문 앞에 나와서 불평하듯 말했다.

"설마, 커피 한잔도 들지 않고 가신다는 건 아니겠지요?"

잉그마르가 마차의 무릎걸이 단추를 풀자 의원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르타 부인이 몸소 나오셔서 명령하시는 데야...."

상원의원은 뛰어난 용모에 키가 훤칠하고 의젓한 사람이었다. 잉그마르나 그의 어머니처럼 맵시 없는 몸짓이나 나른하게 풀린 듯한 표정의, 어느 면으로나 소박해 보이는 사람들과는 다른 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 있는 잉그마르 가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어 뛰어난 자신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잉그마르를 닮고 싶어 하며, 또한 잉그마르의 일원이나 된 듯 행동하려 했다. 그는 언제나 잉그마르 편에서 딸을 대했고, 이렇게 반가운 대접을 받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가벼웠다.

마르타가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나오자 그는 용건을 꺼냈다.

"내 생각엔"

그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서두를 꺼냈다.

"브리타의 처리 문제를 댁에서도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의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이 가볍게 떨리며 차 스푼이 쟁반 위에서 작은 소리로 달그락거렸다.

"...."

"그 앨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것 같군요."

그가 말을 맺자 역시 무거운 침묵이 대답처럼 들어섰다. 상원의원은 자기의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겨졌다.

"표는 이미 사 두었지요."

"저어, 일단 집에 들르겠지요?"

"아닐세. 돌아오면 뭘 하겠나."

잉그마르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앉아 있는 게 마치 반은 잠듯 듯했다.

"옷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르타가 대신 물었다.

"모두 준비했답니다. 가방에 챙겨서, 읍에 나가면 늘 들르던 레브벨리의 여관에 맡겨놨지요."

"부인께선 마중을 나가시겠죠?"

"아마 나가지 않을 겁니다. 가고 싶어 하겠지만 나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구 생각하니까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여관에 표와 돈이 모두 맡겨져 있으니까 브리타에게 필요한 건 전부 준비된 거죠. 잉그마르가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 브리타로 인해 마음이 무겁지 않을 테니까요."

마르타도 역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머리에 쓴 스카프가 한편으로 흘러내렸는데도 똑바로 앉아 앞치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잉그마르, 자네는 새장가를 가는 게 좋을 게야."

두 모자는 계속 말이 없었다.

"부인께서 이 큰 집을 혼자 돌보신다는 건 무리일 듯싶은데.... 잉그마르, 자네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려야 하네."

상원의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들이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 눈치를 살폈다.

"저와 집사람 역시 모든 일이 새로이 시작되길 바라지요."

그는 분명하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는 동안 잉그마르의 마음은 너무도 가벼워졌다.

'브리타는 미국으로 가려 한다. 이제 결혼은 필요없다. 뼈대 있는 가문에 살인자를 주부로 두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잉그마르는 계속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이런 생각을 내색할 수는 없지'

그러나 결국 무슨 말인가를 하지 않으면 입장이 곤란해지리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상원의원은 조용히 상대방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는 사고방식이 완고한 사람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꽤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브리타는 벌을 받은 거예요. 이젠 우리 차례지요."

드디어 마르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원의원이 자기들의 애로점을 해결해 준 대가로, 만일의 경우 잉그마르 집안에 어떤 사례를 요구한다면 선뜻 응하겠다는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잉그마르는 어머니의 말을 달리 받아들였다.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꿈틀 놀랐다.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고하면 아버지는? ....'

잉그마르는 초조했다.

-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네가 브리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워도 하나님이 그런 너를 벌하지 않고 못 본 체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무서운 일이다. 잉그마르손아, 만일 브리타의 아버지가 네게 돈을 얻어내기 위해 브리타를 버려가면서까지 네 호의를 사려고 해도 너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줄곧 나를 지켜보고 계신 게 확실해. 나의 비열함 - 브리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려던 - 을 깨우쳐 주기 위해 브리타의 아버지를 내게 보내신 거야. 아버지는 분명 내가 지금까지 브리타가 그렇게 떠나는 걸 원치 않았음을 알고 계셨던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에 약간의 브랜디를 떨어뜨리고 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 여기까지 와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그는 상원의원의 찻잔에 자기의 잔을 살짝 부딪쳤다.

브리타가 출감하는 날 아침, 잉그마르는 자작나무 주변에서 부산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우선 발판을 만들고, 두 그루의 나무 끝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아치 모양을 만들었다.

"무얼 할 생각이냐?"

"그냥 이런 모양을 해 두면 새로운 기분으로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정오가 되자 사람들은 일손을 놓았다. 머슴들은 점심을 먹고서 안마당으로 나가 풀섶에 누워 낮잠을 즐겼다. 잉그마르도 거실 옆방의 넓은 침대에서 낮잠을 잤다. 오직 한 사람 마르타만 널찍한 방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대문이 슬며시 열리며 장대에 광주리 두 개를 멘 노파가 들어섰다. 인사를 하고 난 노파는 문 옆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으며 광주리 뚜껑을 열었다. 한쪽엔 러스크 비스켓과 포도를넣은 단빵이, 다른 한쪽엔 향료를 넣은 빵이 담겨 있었다. 마르타는 곧 노파 앞으로 가서 값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 같으면 한사코 돈을 쓰지 않는 그녀도 단 것을 커피에 적셔 먹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자를 고르며 그녀는 노파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흔히 그렇듯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많은 사람을 대하는 이 노파도 여간 수다스러운 게 아니었다.

"카이자, 당신은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모두들 믿고 의논하겠지?"

", 그렇지요. 전 많은 얘기를 듣지요. 하지만 만약의 경우 제가 그런 것들을 멋대로 지껄였다간 머리채가 휘둘리는 망신살이 숱하게 생길 거예요."

"그랬군. 어쩐지 어떤 때는 지나치게 입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니만."

노파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인지 선뜻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용서하시기를!"

노파는 눈물이 글썽해지며 말했다.

"베리스코그에서 상원의원님의 마나님과 얘기를 나누고 곧장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아니, 상원의원님의 마나님과 얘기를 하고 이리로 곧장?"

마르타는 '상원의원의 마니님'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잉그마르는 바깥문 열리는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아무도 들어온 것 같진 않은데 문이 열린 채 삐그덕거렸다. 누군가가 열어 두었는지 저절로 튕겨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잠결에 일어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때 바깥방에서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기 좀 해보게, 카이자. 잉그마르가 브리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애초에 부모가 억지로 떠맡긴 때문이라고 말들 하더군요."

노파도 교묘히 피하며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카이자. 내가 묻는 거니까 굳이 돌려서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할멈이 무슨 소릴 해도 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 말라구"

"그럼 먼저 이 얘기부터 하지요. 언제나 베리스코그에 가보면 브리타는 늘 우울해 보였답니다. 한번은 브리타와 제가 부엌에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훌륭한 신랑을 얻게 되었구료, 브리타'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브리타는 제가 놀리기라도 했다는 듯 저를 쳐다보더군요. 그리구는 제게 다가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카이자할머니, 훌륭하다구요, ?' 하지 않겠어요. 그 말투는 마치 잉그마르 도련님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면서 아무리 바라보아도 좋은 구석을 찾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어요. 저는 평소에 잉그마르 집안의 모든 분들을 참으로 존경했답니다. 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 그만 저도 모르게 빙긋이 웃고 말았어요. 그런 저를 한참 바라보던 브리타가 다시 그러잖겠어요. '훌륭하다구요, ?' 그러구는 휙 돌아서더니 목이 찢어질 듯 울어제끼며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 가버리더군요. 그래도 저는 그 집을 나서며 속으로 생각했지요. '모든 일이 잘될 거야. 잉그마르 집안은 늘 모든 일이 잘 되니까' 하구요. 만일 잉그마르손이 제 딸에게 청혼을 해왔다면 저는 딸이 얼른 승낙하기 전에는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을 거예요."

잉그마르는 침대에 누운 채 오고 가는 말들을 전부 들을 수가 있었다.

'어머닌 일부러 저러셔. 내일 내가 읍에 나가는 것이 브리타를 집으로 데려오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게지. 나를 그러지도 못할 만큼 비겁한 놈이라곤 생각지 못하시니까'

"그다음에 제가 브리타를 만난 것은 그 애가 댁으로 오고 난 뒤였답니다. 마침 댁엔 손님이 꽉 차서 이 댁이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를 물어볼 경황이 없었는데, 제가 숲속을 지나는 걸 보고 브리타가 따라오며 '카이자 할머니! 요즘 베리스코그에 가 본 일이 있으세요?'하고 묻지 않겠어요. '엊그제께 들렸지'하고 제가 대답했지요. '어머! 엊그저께요? 저는 집에 안 가본 게 몇 년은 된 것 같아요.' 하더군요. 그 말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무척 난감했어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참을성이 없어져서 제가 무슨 소리라도 할라치면 금세 울어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집에 다녀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고 말하자, '아뇨,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하고 대답하더군요. '그러지말구 한번 다녀와요. 지금 거긴 참으로 아름답다우. 풀숲엔 빨간 진달래가 자욱하고 숲엔 딸기며 뭐며 한창이지' 하니까,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벌써 진달래가 폈어요?' 합디다. '늘 듣는 얘기지만 잉그마르 집안사람들은 함께 살기가 말할 수 없이 좋다던데. 모두 곧은 사람들이구'라고 했더니 브리타는 ', 그래요. 그 분네들 하는 식으론요' 하잖겠어요. '언제나 공평하고 올바르고 마을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지' 하고 내가 덧붙이니까, '하지만 억지로 아내를 맞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진 않던 데요'하고 비꼬듯 말하는 거예요. 내가 다시 '게다가 모두들 매우 영리하구'하며 우기니까 '유식한 건 자기들뿐인 줄 알더군요.' 하며 여전하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우?'하고 물었더니, '꼭 필요한 말 이외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요.' 하더군요. 이젠 가야겠구나 생각하는데 마침 화제가 결혼식은 어디서 올릴 예정인가, 시댁이냐, 친정에서냐 하는 데로 옮겨지게 되었지요. '여기서 하게 될거예요, 방이 많으니까'하고 말하길래, 저는 식을 오래 미루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요. '한 달 안으로 식을 올릴 거예요.' 하고 브리타는 말하더군요. 그런데 브리타와 헤어지기 전에 문득 잉그마르 집안에 흉년이 든 생각이 떠올라 예정대로 식을 올릴 수 없지 않을까를 넌지시 물었지요. 그랬더니 '만일 그렇게 되면 저는 강물에 뛰어들어야 할 거예요.'하고 대답하지 않겠어요? 한 달쯤 지나 저는 결혼이 연기 되었다는 말을 듣구 일이 무사할 것 같지 않은 걱정이 곧 베리스코그로 달려가 브리타의 어머니와 얘기를 했답니다. '잉그마르 농장에선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있어요', 그랬더니 브리타의 어머니는 '우린 무슨 일이든 그분들이 하는 일엔 마음이 놓여요. 딸아이에게 모두 극진하게 대해 주어서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이지요' 하더군요"

'어머니는 저토록 번거로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잉그마르는 생각했다.

'이 농장에선 브리타를 데리러 갈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까짓 자작나무 아치를 보구 저토록 갈피를 잡지 못하시다니 그저 재미 삼아 해봤던 걸 가지구.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말야'

"제가 브리타를 마지막 봤던 것은"

카이자는 계속했다.

"깊어진 겨울, 한 차례 폭설이 쏟아진 후였어요. 저는 무척 걷기가 힘든 숲속의 쓸쓸한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눈 속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을 하나 발견했어요. 브리타였지요. '아니 이런 델 혼자서 나왔수?' ', 산책하러 나왔어요.' 저는 가만히 서서 브리타를 바라보았지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한참 후에 브리타가 말하더군요. '이 근처 어디에 험한 산이 없을까 찾고 있었어요' '아이고,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릴 작정이군.' 가슴이 몹시 뜁디다. 내가 보기에도 브리타는 삶을 지탱하는 데 넌더리가 난 듯했어요. 그러구 있을 때 브리타는 '높고 험한 산이 있으면 정말 전 거기서 뛰어내릴 거예요' 하더군요. '그런 소릴 하다니 부끄럽지 않수? 다들 매우 잘해준다던데' '제가 몹시 나쁜 계집이죠, 카이자 할머니?' '그런 것 같구먼' '꼭 무슨 무서운 일을 저지를 것 같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그런 소릴 함부로 하면 못 써요. 너무 어처구니없고 쓸데없는 생각이야.' 제가 나무랐지요. '저는 말에요, 잉그마르 사람들과 함께 살고부터 모든 게 악순환이에요' 브리타는 매우 무서운 눈초리로 다가왔어요. '그 앙갚음으로 줄곧 어떻게 하면 잉그마르 집안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한답니다.'하며 소리치더군요. '못써요! 그분들은 좋은 사람들이야, 브리타' '그분들이 하려는 일은 모두 나를 욕되게 하는 거예요' '그분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봤수?' 내가 물었지요. 그랬더니 점점 한다는 소리가 '뭣 때문에 그런 소릴 해요? 저는 단지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뿐이에요. 농장에 불을 지를 생각도 해봤어요. 그이가 무척 소중히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암소에 독물이라고 먹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암소들은 모두 눈언저리가 허연 것이 늙어서 흉하기 짝이 없는데 잉그마르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소와 친척이라도 되는 듯해요.'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라우' '저는 그이에게 무슨 일이든 저지르지 않고는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에요' '아가씨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구 있어요. 지금 하려는 일들이 자신을 평생동안 괴롭게 따라다닐 거라는 것도' 그러자 브리타는 갑자기 오열을 터뜨리더군요. 그러더니 잠시 후, 불쑥 솟구친 나쁜 생각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며 무척 온순하게 말하겠지요, 함께 집으로 돌아와선 헤어지며 제가 비밀만 지켜 준다면 분별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더군요."

노파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저는 누구한테든 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이렇게 훌륭한 댁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그때 마침 마굿간 위의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마르타는 갑자기 노파의 말을 가로막았다.

"카이자 할멈, 할멈은 브리타와 잉그마르가 다시 원만한 상태로 돌아갈 것 같은가?"

"예에?"

노파는 화들짝 놀라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니, 만일에 브리타가 미국에 가지 않게 된다면 잉그마르와 함께 살 것 같은가 말일세."

"어떻게....? 제 생각엔 그럴 리가 없을 것 같군요."

"그럼 할멈은 그 아이가 잉그마르에게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할 거란 말인가?"

"길게 얘기하면 뭣합니까?"

잉그마르는 양다리를 흔들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네 차례다, 잉그마르'

그는 생각했다.

'이쯤 되면 내일이라도 집을 떠나야 할 게야'

그는 침대 모서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어째서 어머니는, 브리타가 나를 여전히 좋아하지 않고 있으며 내가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그는 마치 머릿속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구둣발로 침대 옆구리를 연거푸 툭툭 쳤다.

'아무튼 다시 한번 시도해 보는 거야'

그는 결심을 굳혔다.

'우리 잉그마르는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해보는 인간들이지. 내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불안감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킨 여자를 방관한다는 것은 남자다운 처사가 아냐.'

그는 자신이 심각할 만큼 완벽하게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모질게 먹으려고 애썼다.

'만일 내 집에서 브리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난 인간 쓰레기에 불과해'

그는 마지막으로 침대 윗기둥을 탕 치며 슬슬 일을 시작해 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틀림없이 아버지가 나를 읍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 카이자 할머니를 이리로 보내신 거야.'

읍에 도착한 잉그마르는 웅장한 형무소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형무소는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주위의 풍경에는 아랑곳없이 쇠약한 노인처럼 비틀거리며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인 채 몸뚱이를 끌다시피 걸어갔다. 이날은 여느 때의 얼룩진 농부 옷은 벗어버리고 검은 나사 양복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셔츠는 이미 구겨져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담담해 보였으나 걱정으로 자꾸만 마음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자갈이 깔린 형무소 안마당에 들어섰을 때, 당직 수위가 보였다. 그는 오늘이 브리타 에릭손이라는 여자의 석방 날이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글쎄요, 어떤 여자 한사람이 오늘 나오게 되어 있긴 합니다만...."

"갓난아이를 죽인 죄로 들어간 여잔데요."

", , 그렇지요. 틀림없이 오늘 나가는 사람입니다."

잉그마르는 나무 밑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잠시도 형무소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개중에는 아마 재수 없이 저 속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는 생각했다.

'바보 같은 말이지만 어쩌면 저 속에 있는 사람 중엔 밖에 있는 나보다 괴로움이 훨씬 덜한 사람도 많을 거야. 어쨌든 아버지는 형무소로부터 아내를 데려가도록 나를 여기로 보내신 거야. 하지만 아들인 내가 그 생각을 기뻐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군. 그보다는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기 위한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영광의 문을 지나오는 신부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을 테지. 그리고 꽃가마를 타고 뒤엔 긴 결혼식 행렬을 이루며 교회에 가는 편이, 더불어 신부는 잘 차려 입은 신랑 옆에 앉아 다소곳이 미소짓는 편이 좋았을거구.'

문이 몇 번인가 열렸다. 고해신부가 나오고, 형무소장의 부인이 나오더니 다음에는 시내에 나가려는 몇 사람의 교도관들이 나왔다. 마지막에 브리타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마음에 심한 동요를 느꼈다.

', 브리타!'

그는 아래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음이 진정되자 그는 눈을 들었다. 그때 브리타는 문밖의 디딤돌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머리에 덮어쓰는 쇼올을 뒤로 내려뜨리고 맑고 또렷한 눈으로 주위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형무소는 지대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한눈에 거리와 펼쳐진 숲 저편의 고향 산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별안간 그녀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돌층계 위에 주저 앉았다. 잉그마르가 앉아 있는 곳까지 그녀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갔으나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고 있는 그녀 앞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울지마, 브리타!"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아니!"

하고 그녀가 나직이 소리쳤다. 브리타는 자신이 남편에게 한 행동이 일시에 가슴을 찔러오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을 텐데'

다음 순간 그녀는 기쁨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는 자기가 온 것을 그녀가 이토록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봐, 브리타. 정말 나를 기다렸소?"

"당신께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어요."

잉그마르는 몸을 뒤로 제끼고 아주 차갑게 말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걸렸겠지만 이곳엔 그다지 오래 있을 필요가 없소."

"그래요. 여긴 언제든 있어서 좋을 곳은 못 돼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레브벨리의 여관에서 잤지"

거리로 나서며 그가 말했다.

"제 트렁크가 있는 곳이네요."

"거기서 나도 봤소. 마차 뒤에 매달기엔 너무 크니까 그냥 맡겨두었다가 나중에 누굴 시켜 가져오도록 합시다."

브리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잉그마르가 그녀를 집에 데려갈 생각을 은근히 비친 최초의 의사표시였다.

"오늘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아버지께서는 당신 역시 제가 미국으로 가길 원한다고 그러셨던데요."

"나는 당신이 어떻게 하든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 나와 함께 집으로 가길 원할지 어떨지를 확신할 수 없었거든."

그녀는 그가 자기와 함께 가 주길 원한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또다시 강요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썩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잉그마르 농장에서 지기와 같은 인간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닌 것이다. 순간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 말해. 미국으로 가겠다고, 그것만이 죗값을 치르는 길이라고. 어서 그렇게 말하라구.'

그녀의 내부로부터 무엇인가가 재촉했다. 그러나 이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주춤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아무래도 미국으로 건너갈 만한 의지가 없어요. 다들 그곳에선 일이 여간 고된 게 아니래요.'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닌 딴사람이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

"모두들 마찬가지더군."

잉그마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다부지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그날 아침 형무소의 신부에게 말한 일들을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회에 나가 선량하게 살겠읍니다."

그러자 자기 자신에 대한 짜증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어떻게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어쨌든 입을 떼려던 순간 그녀는 만일 잉그마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뿌리치게 된다면 그야말로 은혜를 모르는 가장 천한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윽고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섰다.

"이렇게 소란스럽고 많은 사람을 보면 현기증이 나서...."

그녀는 말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쥔 채 걸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마치 사랑하는 사이 같군.'

잉그마르는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는지'

레브벨리에 도착하여 말이 충분히 쉬자, 잉그마르는 그녀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다면 곧 출발해서 그날 안에 몇 군데의 여관을 가볍게 통과해 버리자고 말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야. 고맙다는 인사부터 하고 어서 말해야 해'

그녀는 그가 자기를 데리러 왔는지, 어떤지를 가르쳐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에 잉그마르는 헛간에서 마차를 끌어내고 있었다. 마차는 칠을 새로한 데다가 좌석에는 새 덮개가 덮여있고 흙받이는 번쩍번쩍 광이 났다. 한쪽에는 약간 시들어 보이는 조그맣게 묶인 들꽃다발이 있었다. 그 꽃을 발견한 브리타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마구간으로 돌아갔던 잉그마르는 말에 마구를 얹어 몰고 나왔다. 그때 그녀는 말 목덜미의 굴레 사이에도 같은 꽃다발이 묶여 있음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그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를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볼 것이고, 그토록 큰 사랑을 베푸는데 이해조차 못 해준다고 안타까와 할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은 묵묵히 말을 달렸다. 이윽고 그녀는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집안 일들을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잉그마르에게 그 질문 하나하나는 두려워하던 피곤한 사람들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누구는 무척 놀라겠지, 누구는 아마 비웃을 게구 하며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저 '', 혹은 '아니'만 되풀이했다. 브리타는 몇 번이나 되돌아가자고 부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를 원하는 게 아니야.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 이이는 그저 자비심에서 이럴 뿐이야.'

그녀는 곧 질문을 그만두었다. 그들은 침묵한 채몇 마일을 쉬지 않고 달렸다. 첫 역참에 닿으니 여관에서 따뜻한 커피와 비스켓을 차려 내왔다. 그리고 쟁반 위에는 많은 꽃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전날 잉그마르가 지나오면서 시켜 놓은 것임을 알았다.

'이것도 역시 측은한 마음과 친절만으로 취한 행동일까? 이이는 어제는 행복했었을까? 그런데 오늘 출감하는 나를 보면서부터 우울해진 것일까? 내일이 되면 오늘의 모든 일을 잊고 아마 상태가 다시 좋아질 거야'

비탄과 후회가 브리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마을의 교회가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을 때 시간은 10시쯤 되어 있었다. 교회로 이어지는 한길을 달려가니 마침 종이 울리고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일요일이었군요."

브리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깍지를 끼며 소리쳤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볼 생각을 하니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교회에 가고 싶어요."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말했다. 그가 자기와 함께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엔 차오르는 신앙심과 감사만이 온통 가득했던 것이다.

잉그마르는 호기심에 찬 사람들의 눈초리와 수다스런 입방아에 정면으로 맞설 자신이 없어, 도대체 브리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만간에 겪어야 할 일이지.'

그는 생각을 고쳤다.

'뒤로 미룬들 마음이 편치 않긴 마찬가지야.'

그는 교회의 안마당으로 마차를 몰았다. 기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잔디나 돌담 위에 모여 앉아 몰려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 잉그마르와 브리타가 나타나자 옆 사람을 팔꿈치로 쿡쿡 찌르곤 수군덕거리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잉그마르는 브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깍지를 낀 채 주위의 일엔 무신경한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으나 잉그마르는 너무도 또렷이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 뒤로 우 몰려왔다. 그들이 몰려들고 구경하는 것이 잉그마르에겐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지도 몰랐다. 잉그마르와 자기의 아이를 목 졸라 죽인 장본인이 함께 하나님의 집에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들 하는군. 견딜 수가 없겠어. 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브리타."

"그렇게 해요."

그녀는 오직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닌 것이다.

마구를 끄르고 말에게 먹이를 주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많은 시선이 잉그마르에게 쏠렸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건네오는 사람은 없었다. 잉그마르가 교회로 들어섰을 때, 이미 자리는 정돈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예배를 시작하는 찬송가를 불렀다. 좌석 사이를 지나면서 그는 부인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훑어보았다. 긴 걸상은 한군데만 빼놓고 모두 꽉 차 있었다. 잉그마르는 그것이 먼저 들어와 있던 브리타임을 알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와 자리를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잉그마르는 그녀 옆으로 가서 앉았다. 브리타는 움찔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그때까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던 브리타도 비로소 자기 혼자만이 비어 있는 걸상에 앉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마음 깊이 차 있던 신앙심이 어두운 절망감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이곳에 온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눈물이 그냥 쏟아질 것만 같아 그녀는 얼른 낡은 성격책을 펼쳐 들었다. 눈물에 가려 한 귀절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쉬지 않고 책장을 넘겨 갔다. 그런데 문득 밝은 무엇이 눈에 띄었다. 책장 사이에 끼워져있던 붉은색 하트가 달린 책 끼움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잉그마르 쪽으로 살며시 밀어 보냈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그 위를 덮으며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책 끼움은 마룻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될까.'

브리타의 성격 책 위로 몇 방울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잉그마르는 부랴부랴 마구를 얹었고 브리타도그것을 거들었다. 신도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브리타와 잉그마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의 무리에 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참회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쓰라리고 슬픈 마음의 브리타 앞에 드디어 잉그마르 농장이 나타났다. 그것은 낯설도록 밝고 붉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잉그마르가 결혼하는 해에 집을 새로 칠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결혼식이 미루어졌던 것은 그 무렵 잉그마르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제는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도 그들의 결혼문제가 이번엔 곤란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농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오시는데요!"

한 농부가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마르타는 무거운 눈까풀을 어렵게 들어 올리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냥들 앉아 있어요! 아무도 식탁에서 일어날 필요가 없어"

명령하듯 말을 마친 마르타는 느릿느릿 방윽 가로질러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제일 좋은 옷에 비단 쇼올을 걸치고 비단 스카프를 쓴 품이 평소보다 권위 있게 보였다. 말이 섰을 때 마르타는이미 문간에 나와 섰다. 잉그마르는 곧장 뛰어내려 아직 엉거주춤 앉아 있는 브리타 곁으로 돌아가서 마차 무릎 덮개를 풀어 주었다.

"안 내릴 거요?"

브리타는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오지 말 것을...."

그녀의 말끝이 흐느낌 속에 묻혀 버렸다.

"어서 내려요, 브리타"

잉그마르가 안타깝게 말했다.

"저를 돌려보내 주세요, 저는 이곳에 올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그녀의 말엔 일리가 있었으나, 잉그마르는 손을 무릎 덮개에 걸친 채 묵묵히 내려서길 기다렸다.

"뭐라는 게냐?"

마르타가 문 앞에서 물어왔다. 브리타의 말이 울음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에게 올 자격이 없다는군요."

"울기는 왜 우는 게야?"

마르타가 퉁명스레 말했다.

"전 정말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에요."

브리타는 손으로 터질 듯한 가슴을 눌렸다.

"뭐라구?"

"구제받지 못할 죄인이랍니다."

잉그마르가 되풀이했다.

그의 차갑고 무정한 말투를 들으며 브리타의 가슴에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만일 저이가 아직도 나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면 저렇게 내가 한 말들을 어머니 앞에 반복하진 않을 거야'

"어서 내려오질 않고 뭐하는 게야?"

그때 마르타가 소리쳤다.

"잉그마르를 불행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 브리타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불행해질 가능성이 많지."

마르타가 말했다.

"보내 주어라, 잉그마르.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나가겠다. 제가 낳은 애를 죽인 여자와는 한 지붕 밑에서 하룻밤이라도 같이 자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보내 주세요, 제발...."

브리타가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잉그마르는 마땅찮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말머리를 돌리더니 마차에 뛰어올랐다. 이런 일엔 진저리가 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거리에 나서자 그들은 교회에서 돌아오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맞부딪혔다. 초조해진 잉그마르는 느닷없이 방향을 바꿔 숲속의 오솔길로 마차를 몰았다. 막 방향을 바꾸는데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우체부가 그에게로 온 편지를 들고서 있었다. 그는 편지를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계속하여 마차를 몰았다.

한길에서 꽤 멀어졌을 즈음에 잉그마르는 속력을 늦추고 편지를 꺼내 들었다. 브리타가 그의 무릎을 잡으며 말했다.

"읽지 마세요."

"왜 그러지?"

"읽을 필요 없어요. 별거 아네요."

"브리타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가 보낸 편지거든요."

"그렇다면 편지 내용을 당신이 말해 봐요."

"아녜요. 말할 수가 없어요."

잉그마르는 브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된 채 눈은 놀란 듯 커다랗게 열려 있었다.

"아무튼, 읽어 봐야겠어."

잉그마르는 겉봉을 뜯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요, 잉그마르"

그녀가 애원했다.

"제발, 제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 읽도록 하세요."

브리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편지를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브리타는 손으로 편지를 가렸다.

"잉그마르, 제 말을 들어줘요, ? 고해신부가 제게 그 편지를 쓰게 한 거예요. 내가 미국행 배를 탈 때까지 부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렇게 일찍 배달되다니, 아직 읽을 권리가 당신에겐 없어요. 제가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잉그마르."

잉그마르는 브리타를 노려보고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차분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으려는 것이었다. 브리타는 몹시 흥분하여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 편지에 쓰인 것은 고해신부가 쓰라는 대로 적은 것뿐이라니깐요. 전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잉그마르

잉그마르는 눈을 들어 가만히 브리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형무소에서 그녀는 겸손의 미덕을 배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존심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도 겸손은 아니었다. 편지 내용을 되새기던 잉그마르는 별안간 참기 어려운 듯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편지를 구겨 쥐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야."

그는 브리타 곁에 바짝 다가가서 그녀를 억세게 움겨잡았다.

"나를 사랑한다구, 편지에 그렇게 썼다구?"

음성은 지나치게 거칠고 눈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브리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편지에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썼단 말이지?"

잉그마르가 거칠게 다시 물었다.

""

브리타는 가냘프게 대꾸했다.

잉그마르는 잔뜩 이그러진 얼굴로 브리타를 난폭하게 흔들어대고는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어쩌면 그런 거짓말까지!"

그는 냉소를 띠며 메마른 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을 다아...."

"하나님은 아실 거예요.저는 밤낮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어요."

그녀는 침착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야?"

"물론 미국이죠."

"뭐라구? 빌어먹을!"

잉그마르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비틀비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곤 털썩 주저앉아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브리타가 달려가 그의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잉그마르, 나의 잉그마르!"

그녀는 묘한 기쁨에 젖어 사랑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런데두 당신은 아직도 나를 미워한단 말이지."

"그래요."

잉그마르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저에게도 얘기할 기회를 좀 주세요. 당신이 3년 전에 법정에서 한 말들을 기억하세요?"

"기억하고 있소."

"당신에 대한 저의 생각이 달라진다면 저와 결혼하겠다던...."

"그래, 그래"

"그때부터 전 당신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누구도 저를 그토록 사랑해 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하물며 온갖 몹쓸 짓을 다했던 제가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날의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 훌륭해 보였어요. 다시 없는 어진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이분이야말로 평생을 같이할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솟구치는 당신에 대한 애정이 뻔뻔스럽게도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다하게 했지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데리러 와주리라는 바램이 점차 흐려지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쳤지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 왜 편지를 쓰지 않았소?"

"썼지요"

"용서해 달라던? 썩 내키지 않는 듯이 쓴 편지 말인가?"

"그럼 무슨 말을 써야 했나요?"

"다른 게 있잖소."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제가"

"하마터면 나는 정말 안 올 뻔했어."

"하지만 잉그마르, 제가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당신에게 사랑의 편지를 쓸 수 있었겠어요. 출감되기 전날에 쓴 편지는 고해신부가 그렇게 써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죠. 제가 떠날 때까진 절대 부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말에요."

"나는 당신을 때릴 수도 있소."

잉그마르는 브리타의 손을 찰싹 치면서 말했다.

"얼마든지요, 잉그마르."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고뇌의 그림자 뒤에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고요하게 깃들어 있었다.

"이런 당신을 그냥 보낼 뻔하다니!"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한때는 나도 당신을 증오했었소."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지요."

"당신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기뻤지."

"그래요, 아버지의 편지에도 당신이 좋아하더라고 적혀있었어요."

"나는 웬지 어머니께 당신을 데려오게 해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소."

"그럼요, 잉그마르 그건 당연해요."

"당신 일로 나는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어. 당신에 대한 내 처사가 나빴다고 모두들 경시했으니까"

"지금은 당신께서 해야 할 행동을 하신 거예요. 나를 때렸으니까요."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견딜 수 없었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소."

브리타는 잠자코 들고 있었다.

"지난 몇 주일간 괴로웠던 일을 모두 생각하면...."

그는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당신을 보내 보릴 뻔한 것을 생각하면!"

"하지만, 잉그마르.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았지요?"

"그래, 조금도"

"형무소를 나서면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까지도 줄곧?"

"한순간도! 당신과 함께 집으로 가면서는 줄곧 울화가 치밀고 있었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그 마음이 변했나요?"

"이 편지를 보구부터"

"저는 당신의 사랑이 완전히 식어 버린 걸 알았기 때문에 제 사랑이 싹튼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잉그마르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우습죠. 잉그마르."

"우리가 교회에서 살짝 도망쳐 나오던 꼬락서니며, 잉그마르 농장에서 받은 아주 근사했던 환영식을 생각하구 있었지."

"그래, 웃음이 나와요?"

"웃지 못할 건 또 뭐야. 어쨌든 우린 이제 부평초처럼 떠돌이 신세가 될 것 같군. 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

"웃는 것까진 좋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잉그마르. 그건 안 돼요"

"그럴 수 있어. 이제 나는 당신 이외엔 아무것도 개의치 않을 테니까!"

브리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런 그녀와는 상관없이 잉그마르는, 몇 번이나 자기를 생각했으며, 얼마나 자기를 그리워했는가를 브리타에게 말하도록 했다.

그는 점차 자장가를 듣는 어린아이와 같이 조용해져 갔다. 브리타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그가 만일 자기를 데려간다면 자신의 죄가 얼마나 더 무거워지는가를 얘기할 작정이었으나 뜻밖의 그의 태도에 주눅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잉그마르와 그의 어머니, 또는 자기를 맞이할 그 누구 앞에서든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해질 것인가를 얘기하려고 했으나 그런 말은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잉그마르가 무척 다정하게 말을 건네왔다.

"그런데 나한테 뭐 할 말 없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브리타는 잉그마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아직도 그 생각이야?"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그가 말했다.

"한시도 빼놓지 않고 그 생각뿐이에요."

"그럼 모든 것이 원상태로군"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을 얘기해 봐요. 이제 우린 하나니까"

잉그마르는 브라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궁지에 몰린 노루 새끼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브리타는 줄곧 이어온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했고, 그러자 차츰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마음이 후련한가?"

그녀가 이야기를 마치자 잉그마르가 말했다.

"마치 가슴에서 큰 짐을 들어낸 것 같아요."

"둘이서 함께 그걸 받들고 있기 때문이지. 이제 다신 떠날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저두 얼마나 떠나기 싫었는지 몰라요."

",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잉그마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에요. 전 두려워요."

"어머니는 그렇게 무서운 분이 아냐."

잉그마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토록 뉘우쳤다면 그것으로 된 거야."

"아녜요, 잉그마르. 저때문에 어머니를 나가시게 할 순 없어요. 역시 미국으로 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하구 싶었던 얘기가 있어."

잉그마르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요. 우릴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도와주는 사람?"

브리타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나의 아버지지. 아버지가 모든 일이 잘 되도록 돌봐줄 거야."

그때 누군가 숲속의 길을 걸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얼핏 누군지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건 분명 카아지였다.

"안녕하세요?"

잉그마르와 브리타가 인사를 하자 노파는 가까이 다가와서 두 사람의 손을 잡아 쥐었다.

"이런! 이런 곳에 있다니. 농장 사람들이 모두들 찾느라고 야단인데, 교회에서도 두 사람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만나보지도 못했었잖우. 그래서 농장으로 가 브리타에게 인사나 하려구 했는데 가보니까 목사님밖에 안 계시더군. 목사님은 또 집안에 대고 큰소리로 마나님을 부르고 있어 인사할 겨를이 없었지. 그런데 마나님이 나오시자 목사님은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마르타 마나님, 이제 마나님은 얼마든지 아들을 자랑하실 수 있게 됐습니다. 역시 뼈대 있는 집안은 다르다는 걸 똑똑히 알았어요. 그러니 우리들은 이제 잉그마르를 위대한 잉그마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쇼올의 끈을 매시면서 가만히 서 계시던 마나님이 이윽고 물으시니까, '잉그마르가 브리타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시면서, '그러니까 마르타 마나님, 잉그마르는 그 일로 해서 지금부터 평생 동안 존경을 받을 겁니다.' 하고 설명하시더군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마나님이 말씀하시니까, 목사님은 '나는 두 사람이 교회에 와 앉아 있는 것만을 보고도 그만 더 이상 집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설교해 왔던 어떠한 가르침보다 잉그마르의 행동이 훨씬 훌륭한 가르침이었으니까요. 잉그마르는 우리 모두가 명예로 삼을 인물입니다. 잉그마르의 옛날 아버님께서 그러셨듯이 말입니다.'하면 칭찬이 대단합디다. 목사님께서 대단한 기별을 가지고 오셨더라며 마르타 마나님은 은근히 기뻐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아직 잉그마르가 돌아오지 않았느랴고 물으시니까, 마나님은 그렇다면서 '집에는 없어요. 베리스코그에서 자고 올는지도 모르지요'하고 얼버무리시더군요."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요?"

잉그마르가 소리쳤다.

"그러믄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구 우리가 두 분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동안에 마나님은 연신 사람을 시켜서 두 분을 찾으셨어요."

카이자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잉그마르에겐 이제 그녀가 하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잉그마르의 생각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거실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잉그마르의 옛 조상들과 함께 앉아 있다.

"어서 오너라, 위대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아"

아버지는 몸소 내 앞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아버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게다. 그러고 나면 다른 일들은 자연히 풀릴 게야."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께서 늘상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잘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건 대수로운 게 아니다. 우리들 잉그마르가 해야 할 일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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